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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20 주방에서 커피 만들어요~ 7
  2. 2015.01.19 센세이션 2
  3. 2015.01.18 서무의 슬픔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10
  4. 2015.01.17 서무의 슬픔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8
  5. 2015.01.17 <서무의 슬픔>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6
  6. 2015.01.17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2
  7. 2015.01.14 스베틀라나 아바쿰의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화보 두 장
  8. 2015.01.13 가반스카야 거리 4
  9. 2015.01.11 월요병을 달래는 루지마토프, 로파트키나, 슈클랴로프 화보 몇 장 10
  10. 2015.01.09 페테르부르크, 빛나는 운하와 사원 쿠폴, 창문들
  11. 2015.01.08 찬란한 여름 궁전, 페테르고프 사진들 몇 장 2
  12. 2015.01.07 부활절 단편) Jewels 05, 파베르제 보석 달걀과 블린 이미지 몇 장 4
  13. 2015.01.07 보석을 흩뿌려놓은 듯한 네바 강 2
  14. 2015.01.06 부활절 단편) Jewels 04, 브루벨의 백조공주와 악마 그림, 보르쉬 사진 몇 장 8
  15. 2015.01.06 루돌프 누레예프 사망 22주기, 누레예프 화보 몇 장 2
  16. 2015.01.05 부활절 단편) Jewels 03, 부활절 케익과 과자, 달걀 사진 몇 개 4
  17. 2015.01.05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 풍경 2
  18. 2015.01.04 부활절 단편) Jewels 02, 슈클랴로프의 솔로르 사진 두 장 2
  19. 2015.01.04 부활절 단편) Jewels 01, 한밤중 반으로 갈라지는 페테르부르크 교각 사진 두어 장 2
  20. 2015.01.03 오래 전 글 : Illuminated Wall + 카잔 성당 분수와 궁전광장 사진들 2
  21. 2014.12.31 잠시, 2년 전 이맘때 쓰던 글 발췌 4
  22. 2014.12.30 백야의 석양에 잠긴 네바 강, 청동기마상, 궁전교각 8
  23. 2014.12.29 장미, 백야 6
  24. 2014.12.28 90년대 팝 뮤비 : 스파이스 걸스, 로비 윌리암스, 첨바왐바, 아쿠아, 그리고 너바나 4
  25. 2014.12.18 햇살 찬란한 여름 정원(레트니 사드) 8
2015. 1. 20. 16:46

주방에서 커피 만들어요~ russia2015. 1. 20. 16:46

 

 

상트 페테르부르크, 작년 7월.

판탄카 운하 따라 레트니 사드로 걸어가다가 발견한 건물.

벽에는 '여기 주방에서 커피 만들어요~' 라고 씌어 있다. 창문에도 '주방에서 만드는 커피' 라고 씌어 있음.

커피를 마시지 않아서 가보지는 않았는데 좀 궁금하다. 러시아 친구에게 한번 들어가보고 내부 사진 좀 보내달라 해볼까. 근데 커피를 주방에서 안 내리면 어디서 내리지?? 카운터 안쪽에 주방이 별도로 있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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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liontamer
2015. 1. 19. 22:02

센세이션 russia2015. 1. 19. 22:02

 

 

제목이 너무 거창한 건가 싶지만.. 진짜로 저 차에 그렇게 씌어 있다고요 :)

 

2014년 4월. 페테르부르크. 고로호바야 거리와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 교차로.

 

예전에 완성한 장편의 심리적 화자였던 트로이가 이 고로호바야 거리 어딘가의 아파트에 사는 걸로 설정해서 페테르부르크 오면 항상 이쪽 거리 쏘다녀봄. 그의 아파트가 소설에서 중요한 장소 중 하나여서.

* 트로이와 그 아파트가 나오는 부분도 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여기 : http://tveye.tistory.com/3382

 

:
Posted by liontamer

 

본격적인 시리즈는 이 1편부터 시작..

사실 이걸 제일 먼저 썼고 앞서 올린 에피소드 0은 전체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뒤늦게 끼워넣은 프리퀄..

뭐 독립적인 에피소드들이긴 하지만 어쨌든 등장인물 소개와 0편부터 순서대로 읽는 게 앞뒤 연결이 되긴 한다.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

 

 

서무의 슬픔

-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베르닌은 타자기 전원 차단을 잊고 갔다가 국장의 불시 보안점검에 걸려서 2주간 조기출근하게 되어 아침에 극장까지 태워다 줄 수 없게 됐다고 왕재수에게 통보했다. 왕재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 일찍 안 가면 어떻게 되는 거야? ”

 

“ 뭐가 어떻게 돼. ”

 

“ 일찍 안 가면 되잖아. ”

 

“ 상사의 명령인걸. ”

 

“ 일찍 안 가면 국장이 때려? ”

 

“ 때리진 않지. ”

 

“ 점심을 안 줘? ”

 

“ 우린 구내식당에서 각자 사먹어. ”

 

“ 월급이 안 나와? ”

 

“ 월급은 나라에서 주는 거잖아. ”

 

“ 근데 뭐하러 일찍 가? 가지 마. 그냥 평소대로 해. ”

 

“ 야, 너는 조직 생활을 안 해봐서 몰라!! ”

 

“ 왜 안 해. 나도 나라에서 주는 돈 받으며 극장에 나갔는데. 나는 천재 무용수라서 승급도 빨리 하고 훈장도 받고.. 내 맘대로 늦게 갔는데. ”

 

“ 분명 뒤에선 다 욕했을 거야! ”

 

욕하는 건 욕하는 거고. 아무도 안 때렸어. 점심도 주고 월급도 줬으니 장땡이지. ”

 

베르닌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어쩐지 왕재수의 말이 전부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조기출근 대신 왕재수를 극장까지 태워다 주고 커피도 한 잔 얻어 마신 후 평소와 같은 시각에 출근하였다. 국장은 하룻강아지 같은 초짜가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고 심히 분노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한 달 간 조기출근하게 되었다.

 

 

돌아온 베르닌은 화가 나서 왕재수에게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울부짖었다. 왕재수는 그의 폭발을 지켜본 후 침착하게 말했다.

 

“ 한 달이나 2주나 똑같은 거야. 일찍 가지 말고 계속 평소처럼 행동해. ”

 

“ 야, 그러면 1년간 조기출근하게 된다고! ”

 

“ 계속 버티면 포기할 거야. ”

 

“ 안 그래! 국장은 안 그래! 나쁜 사람이라서 안 그래! ”

 

“ 그러면 1시간 빨리 가는 대신 1시간 빨리 퇴근하렴. ”

 

“ 야, 넌 진짜 아무 것도 몰라! 그게 그렇게 되면 처벌이냐? 우리 국장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인간이야! 늦게 출근, 조기퇴근은 모든 직장인의 꿈이자 파라다이스라고! 그런 일이 나한테 일어날 리가 없잖아! 아아... 정말 못살겠어. 죽고 싶어. 국장 때문에 자살하고 싶단 말이야.. 너무 힘들어. 흐흑..”

 

베르닌이 쌓이고 쌓인 설움을 이기지 못해 엉엉 울자 왕재수가 흠칫 놀랐다.

 

“ 촌스럽게 왜 우는 거야. 차나 우려주고 그만 내려가! ”

 

베르닌은 훌쩍훌쩍 울면서 포트에 차를 우리고 찻잔을 세팅해 주었다. 왕재수가 좋아하는 대로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려놓고 무설탕 다크초콜릿 캔디도 두 개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계속 울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왕재수는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무설탕 다크초콜릿 캔디를 먹었다. 그러나 촌스럽지만 자기 말도 잘 듣고 어딘가 귀여운 스파이가 우는 것을 보니 왕재수는 어쩐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 감히 내 꼬봉을 울리다니! 국장, 가만 두지 않겠어! ’

 

 

*    *    *

 

 

다음날 저녁에 베르닌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왕재수의 방에 올라왔다. 너무 멍해져서 포트와 찻잔을 가지고 오는 것도 잊었다.

 

“ 국장이 면담하자고 불러서 되게 걱정하면서 갔거든. 근데 내일부터 한 시간 늦게 출근하고 한 시간 빨리 퇴근하래. 앞으로 계속 그러래. ”

 

“ 잘됐구나. ”

 

“ 잘된 걸까? 왜 그러는 걸까? ”

 

“ 나 빨리 차 우려 줘. 어제 그 초콜릿 캔디랑. 그거 맛있었어. ”

 

국장이 왜 그러는 걸까? 갑자기 그러는 게 수상해. 면담하면서 그 얘기하는데 날 이상한 눈으로 곁눈질하면서 한숨까지 쉬었어. 나 자르려는 거 아닐까? ”

 

“ 뭘 잘라. 늦잠 자고 빨리 퇴근하니 잘됐네. 내일부터 다시 나 태워다 줘. 홍차는 언제 줄 거야? 초콜릿 캔디 안 남았어? ”

 

“ 아무래도 국장이 나 자르려나봐.. 그간 밉보이긴 했지. 어떡하지? 뭐 먹고 살지? 큰일 났네.. 잘리고 싶지는 않아! 흐흑... ”

 

베르닌이 다시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자 왕재수는 매우 당황했다.

 

“ 너 왜 울어? 늦게 출근, 빨리 퇴근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

 

“ 흑흑... 그 무시무시한 사이코가 자비를 베풀 리가 없잖아. 분명히 속셈이 있는 거야. 나한테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야... 월급을 반으로 깎는다든지, 자른다든지, 고문실에 보낸다든지.. ”

 

“ 고문실에는 진짜 중요한 사람이나 가는 거야(나 같은 사람 -_-), 너 같은 바보는 안 가. ”

 

“ 고문실 무서워, 으앙... ”

 

“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늦게 출근, 빨리 퇴근하는 게 직장인의 꿈이자 파라다이스라며! 기껏 자기 생각해서 그렇게 만들어줬더니 왜 우는 거냐고!! ”

 

“ 만들어주다니? 네가? 뭘 만들어줘? ”

 

“ 내가 아침에 너희 국장한테 내 방으로 오라 했단 말이야. ”

 

“ 국장을 오라가라 하다니! 심지어 극장에 있는 네 사무실까지 오라 했다고! 국장이 왔단 말이야? ”

 

“ 그럼 제까짓 게 어떻게 안 와. 내가 부르는데. ”

 

베르닌은 잠시 존경이 가득한 눈으로 왕재수를 바라보았다. 스파이에게 존경받는 것 따윈 별로 바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왕재수는 조금 뿌듯해서 어깨를 으쓱했다.

 

“ 국장 왜 오라 했어? ”

 

“ 앞으로 너 조기출근 시키지 말라고. ”

 

“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잖아. 우리 국장은 타 기관에서 업무 협조를 구할 때도 폰트와 자간과 모든 형식을 맞춰 쉬프트 탭을 필수로 지정해서 수십 장의 공문을 보내지 않으면 안 들어준다고! 너 그런 거 모르잖아! ”

 

“ 그게 뭐야?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

 

“ 그럼 어떻게 한 거야? ”

 

“ 너는 지금 나를 위해 심대한 봉사를 수행하고 있으니 KGB 국장 따위의 잡무에 시달릴 시간이 없다고 알려줬어. ”

 

“ 그래, 심대한 봉사이긴 하지. 차도 우려주고 밥도 해주고.. 설거지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아침저녁으로 태워다 주고 ㅠㅠ 나는 노예야. ”

 

“ 그런 거 말고. 그건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니까 국장한테는 안 먹혀. ”

 

“ 그럼 뭐? ”

 

“ 밤마다 나랑 침대가 부서지도록 해주고 있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해줘야 하기 때문에 조기출근은커녕 늦게 출근해야 한다고 알려줬어. 그리고 가능하면 조기퇴근해서 저녁 먹기 전에 나랑 또 해야 한다고 했어.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근무 시간 줄여달라고 했어. ”

 

그게 무슨 소리야! 침대가 부서지도록 뭘 하는데? 저녁 먹기 전에 뭘 또 하고? 너하고 뭐를 해? ”

 

왕재수는 베르닌이 그냥 감탄사를 내지르는 줄 알았지만 계속해서 그 질문을 반복하는 것을 보고 순진한 스파이가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 침대가 부서지도록 섹스를 한다고. 아, 너는 그게 뭔지도 모르는 거구나. 책상물림이랬지. 그것은 우리 말로는 성교라는 것이야. 성교란 보통 남녀나 남남, 여여, 혹은 3인 이상의 이성, 혹은 동성이 번식이나 쾌락 추구를 목적으로 특정 부위 이상을 노출하여 결합하는 일종의 물리적 화학적 행위로, 해부학적으로는....

 

설명을 절반도 늘어놓기 전에 베르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서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베르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 지금 내가 너랑 그런, 그런... 응응응을 하는 관계라고 국장한테 말했다는 거야? 그것도 밤마다, 아침마다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저녁 먹기 전에 또!!! ”

 

“ 응. ”

 

“ 왜 그런 거짓부렁을 늘어놓는 거야!!!! ”

 

“ 어.. 나도 좀 무리수란 건 알지,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 아침에 하는 건 제아무리 나라도 좀 버거워. 근데 그 정도로는 얘기해놔야 국장이 네가 너무 많이 하느라 힘들겠구나 하고 근무 시간을 줄여줄 것 아니겠니. ”

 

“ 지금 그 얘길 하는 게 아니잖아!!! ”

 

“ 왜 화내? 국장이 납득했어. 나는 중요 인물이기 때문에 그 인간은 내가 원하는 건 다 맞춰줘야 하거든. 안 그러면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 아저씨들이 화나서 국장 네놈 모가지를 날릴 거라고 협박했더니 끄덕끄덕하면서 알았대. 앞으로 너한테 절대 잡무 안 시킬 거라고 했어. 1시간 늦게 출근, 1시간 조기퇴근시킬 거고 쉬프트 탭인지 뭔지 안 해도 되게 한댔어. 매일 허리가 빠지도록 봉사하다니 힘들겠다고 너 불쌍하다고까지 했는걸. 다 나 덕분이야. ”

 

아아악!

 

베르닌은 펄쩍펄쩍 뛰더니 얼굴이 빨개졌다가 파래졌다가 하얘졌다가 했고 어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엉엉 울었다. 왕재수는 대체 이 스파이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차도 마시고 싶고 초콜릿 캔디도 먹고 싶었기 때문에 스파이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베르닌은 진정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왕재수를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쟁반을 가져와서 차를 우려주고 다크초콜릿 캔디도 주었다. 왕재수가 차를 마시는 동안 베르닌은 계속 한숨을 쉬며 앉아 있었다.

 

“ 왜 한숨 쉬어? 다 잘됐잖아. 이제 국장이 괴롭히지도 않을 거고, 조기출근과 야근도 없을 거야. 직장인의 꿈이자 파라다이스가 이루어졌잖아. ”

 

“ 나는 네가 정말 싫어. ”

 

“ 왜 싫지? 내가 다 해결해줬는데. ”

 

“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 아침에 하다니... ”

 

아, 알았다. 너 내가 거짓말해서 화났구나. 해주지도 않으면서 국장한테 그렇게 말해서. 그래서 삐친 거구나! 괜찮아, 그런 건 지금부터 해도 돼. 앞으로 그렇게 해줄게. 음,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 아침에 하면 내가 좀 힘들 거 같은데. 나 아직 다 안 나았거든. 극장 가서 졸지도 몰라. 그러니까 우리 일단 밤에만 하고 아침에 늦잠 안자면 아침에도 하자. 나중에 내가 체력이 좀 회복되면 저녁에도 하고~ ”

 

 

베르닌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왕재수는 천천히 남은 차를 마시고 무가당 다크 초콜릿 캔디를 먹었다. 사실 스파이가 자기 취향은 아니었고 딱히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말 잘 듣고 불쌍하고 어딘지 귀여운 친구니까 못된 국장으로부터 구제해 주기 위해서는 그 정도 해줄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스파이는 차도 우려주고 집안일도 해주고 극장까지 태워주기도 하는 착한 애니까.

 

 

---------

 

 

에피소드 2는 당직실의 귀신 이야기. 그건 주중이나 주말에..

 

 

:
Posted by liontamer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0

 

 

 

서무의 슬픔

-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소비에트 연방 국가보안위원회 가브릴로프 지국장인 블라지미르 스페호프는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정확하게 1시간 동안 주간회의를 주재하곤 했다. 서무 업무를 맡고 있는 다닐 베르닌은 그의 모든 지적사항과 하달사항을 정확히 정리해 회의 종료 후 30분 내에 시내의 모든 KGB 요원들에게 전달해야만 했다.

 

스페호프 국장은 당의 명령을 최우선시하는 인물이었다. 원칙을 어기는 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누군가가 어떠한 사소한 일로 자기 눈 밖에 나는 경우, 그는 주간회의를 이용해 반드시 그 요원을 질책하고 미묘하게 모욕을 주었다. 이따금 자아비판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설교였다. 특히 보안위원회와 같은 공공기관의 행정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두세 시간을 연달아 강의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입사 2년차인 다닐 베르닌은 감시분석부서 소속이었고 행정직 중에서는 막내였기 때문에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전체 서무 업무를 맡고 있었다. 모스크바 법대 출신인데다 소싯적에는 똑똑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막상 KGB 밥을 먹게 되자 그는 스페호프 국장의 주요 타겟이 되었다. 업무 능력도 모자라고 행정의 기본이 도대체 되어 있지 않은 풋내기에 책상물림이라면서 들들 볶였다. 베르닌은 언제나 과로와 야근에 시달렸고 서무라는 미명 하에 온갖 잡일을 도맡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매우 억울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매일 전 직원의 근태기록부를 관리했고 소속부서와 기관 전체 업무추진비를 정산했으며 국장의 지시사항을 정리해 하달하고 처리내역을 꼬박꼬박 보고하는 한편 각 사무실들의 비품 현황을 관리했다. 매달 선배 직원들의 초과근무 내역과 현장 요원들의 비용 청구 현황을 정리 보고했으며 문서철들을 만들고 서고를 관리하고 각종 자료들을 수합했다. 모스크바 본부나 시 의회 등 외부 기관에서 날아오는 각종 요구 자료들을 작성해 국장의 확인을 받아 제출했고 그 외 무수한 행정 업무와 국장의 변덕에서 비롯된 가외업무들을 수행했다. 이 모든 것들은 서무 업무에 해당되었는데 베르닌은 입사 이래 2년 동안 대체 서무란 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품었고 마침내 귀에 붙이면 귀걸이, 코에 붙이면 코걸이 식으로 아무 거나 모두 ‘행정’이란 미명 하에 서무 업무가 되고 전부 자기 일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9월 첫째 주 주간회의도 처음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국장은 어마어마한 설교를 늘어놓았고 요원 몇 명을 질책했다. 운 좋게 질책과 자아비판을 피해 간 베르닌이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좋아하고 있는데 갑자기 국장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 그리고 업무분장 일부가 변경되었으니 서무는 회의가 끝나면 변경 내용을 반영해 분장표를 신규 작성하고 내게 결재를 받은 후 모스크바 본부로 속달 발송하도록. 변경 내역은 다음과 같네.

다음 주에 모스크바 본부에서 우리 쪽으로 이송되는 정치범이 있다는 건 다들 알고 있겠지. 무슨 발레인지 연극인지 하던 딴따라인데 아주 악질이야. 세상이 망하려는 징조임이 분명하다만, 이놈은 어마어마한 반동분자에 체제 전복 기도 혐의로 7년형을 받았는데 윗분들의 귀여움을 받아서 어떻게 잘 빠져나왔다더군. 그런 놈은 죽을 때까지 수용소에 처박아놓고 강제노동을 시켜야 정신을 차리는 건데 감옥에서 풀어준 것도 모자라 우리 시립극장 감독인지 나발인지 감투까지 안겨줬어!

하여튼 그 재수 없는 반동분자 애송이의 관리를 우리 기관이 맡게 되었으니 다들 그리 알도록. 그리고 자네! ”

 

수첩에 낙서를 하며 졸음을 쫓고 있던 베르닌은 국장이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 예? 아, 국장님. 예! ”

 

“ 그 자식 감시 업무를 자네에게 분장하기로 했네. 회의 끝나는 대로 내 방으로 오게. ”

 

“ 예? 뭐라고요! 반동분자... 체제 전복... 감독, 7년... 아니, 그러니까... 저보고 유배 죄수를 감시하라고요? 왜 제가? 저는... ”

 

“ 뭐라고 웅얼대는 거야! ”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저는 이미 맡은 업무가 있는데요. 서무에... ”

 

“ 서무는 당연히 하는 거고! 자네 감시분석부서 소속이잖아! 여태 능력 미달로 제대로 된 주무를 못 맡았으니 이번에 자네의 전문성 강화와 능력 배양을 위해 특별히 중요 업무를 맡겨주는 거야! 고맙게 생각하도록! 이만 회의를 마치겠네. 자넨 당장 내 방으로 튀어와! ”

 

 

*    *    *

 

 

베르닌은 항의를 해보려 했지만 물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업무 분장은 당연히 국장의 권리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베르닌은 모스크바 KGB 본부 수용소에서 이송되어 온다는 반동분자 정치범의 감시업무를 맡게 되었다. 스페호프는 애초부터 반체제주의자를 아주 싫어했는데 이번에 온다는 죄수는 특히 더 싫어하는 것 같았다.

 

“ 그 자식이 크레믈린에 줄이 있단 말이야! 그래서 특별히 잘 관리해달라고 압력이 들어오고 있단 말일세! 심지어 파리에서 도망치려다 잡혔다지! 그런 건 그 자리에서 사살해버렸어야 했는데! 수용소에서도 버릇 좀 고쳐주려고 아주 슬쩍 손만 댔는데 불여우 같은 애새끼가 죽는다고 엄살 피우면서 나뒹구니까 높은 분들이 그 즉시 고급 병원으로 옮겨주고 금이야 옥이야 보살핀 끝에 법정 판결도 무시하고 가석방을 시켜주고 우리 쪽으로 보낸 걸세! 모스크바 정치국에 계신 분들이 그 애새끼를 얼마나 감싸고도는지 그런 범죄자 나부랭이를 시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에 배정하고 잘 돌봐주라고 모스크바 본부 이름으로 공문까지 보냈지 뭔가!

하여튼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자네가 그 자식을 잘 감시하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서는 아침부터 밤까지 곁에 딱 붙어 있어야 해! 같은 아파트 이웃에 자네 방을 배정했으니 그놈이 오기 전까지 이사를 완료하게! 그놈 사무실과 아파트 구석구석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도록 했으니 매일같이 대화 내용을 전부 기록하고 보고하도록! 그리고 그놈이 무슨 수상한 행동을 할지 알 수가 없는데다 우리 시의 순진한 젊은이들에게 나쁜 물을 들일 수도 있으니 출퇴근, 식사 등등도 자네가 옆에서 모두 컨트롤하게! ”

 

베르닌은 미약하게 항의했다.

 

“ 저... 국장님. 그건 현장요원이 해야 할 일 같습니다만... 게다가 이사까지 하라니. 그리고 출퇴근과 식사를 제가 컨트롤하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설마 제가 옆에서 그걸 다 챙겨주란 말씀이신가요? ”

 

“ 당연하지 않나! 그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차로 극장 출퇴근을 책임지게! 집안에서도 무슨 음모를 꾸밀지 모르잖나! 게다가 그놈 소문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아나! 사생활이 지저분하다는 얘기가 파다해! 이놈저놈 무릎에 냉큼 올라앉지를 않나... 에이 찝찝해. 그놈이 집으로 이상한 인간들을 끌어들이지 않는지 감시해야 한다는 말이네! ”

 

“ 하지만... 그럼 제 사생활은요... ”

 

“ 뭐 사생활? 자네 지금 감히 사생활 운운하나? 자넨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야! KGB 요원이란 말일세! 당과 연방을 위해 충성하고 행정의 기본을 갈고닦아 훌륭한 소련 청년이 되어야 할 것 아닌가! 어디 그런 미제 자본주의자 같은 소릴 지껄이나! ”

 

 

9월 10일에 베르닌은 기차역으로 나갔다. 모스크바 본부 소속 KGB 요원들로부터 그 무시무시하고 위협적인 반동분자 테러범을 인계받기 위해서였다. 전날 그는 현장요원으로부터 두 시간 동안 사격 재교육을 받은 후 권총까지 한 자루 챙겼다. 체제 전복을 기도했다는 정치범이란 놈은 위험인물이 분명했으므로 여차하면 그 무서운 죄수를 제압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요원들이 나타났다. 베르닌에게 서류뭉치를 들이밀고 서명을 강요했다. 그리고는 로모 카메라로 사진을 한 방 쾅 찍은 후 반동분자 정치범 인계 절차가 완료되었다고 선언했다. 막 모스크바 요원들이 떠나려고 했기 때문에 어리둥절해진 베르닌이 물었다.

 

“ 잠깐만요. 무슨 절차가 완료됐다는 겁니까? 서명만 했지 정작 사람은 넘겨주지 않았잖아요. ”

 

“ 당신 옆에 있잖아요! 아까부터 거기 앉혀 놨구만. 빨랑 데려가요. 우리도 집에 가고 싶으니까. 기차 타고 종일 달려온 것도 피곤한데 도로 타고 가야 하니 어휴 피곤해... 하여튼 우린 갑니다! ”

 

베르닌은 어안이 벙벙했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렸지만 커다란 트렁크 위에 앉아 있는 사내아이 하나뿐이었다.

 

“ 얘, 미안한데 혹시 저 사람들이랑 같이 온 남자 못 봤니? 무시무시한 인상에 수갑 찬... ”

 

“ 수갑은 왜 차는데? ”

 

“ 응, 그러니까... 위험인물이라, 아니, 넌 몰라도 돼. 국가 기밀이거든. ”

 

“ 국가 기밀이라면서 나한테 막 물어봐도 돼? ”

 

“ 어, 원래는 안 되는데... 그 남자 놓치면 큰일나거든. 국가를 전복하려 들었던 죄수라서 꼭 찾아내야 돼. 그 사이에 도망갔으면 정말 큰일인데.. 기차역을 폭파할지도 몰라. 아아, 어쩌지... 난 행정직, 책상물림... 국장한테 전화해서 스나이퍼를 배치해달라고 해야 하나... ”

 

“ 기차역 폭파하면 사람 죽잖아. 왜 그런 짓을 하는데? ”

 

“ 그러니까 위험인물이지! 어휴, 내가 왜 너랑 이런 얘길 하고 있지.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찾아야 돼. 너 혹시 여기 공중전화 어디 있는지 아니? ”

 

“ 나 여기 사람 아니야. 모스크바에서 열네 시간 기차 타고 왔어. 어딜 봐서 내가 이런 촌 동네 주민처럼 보인다는 거야! 시골에 끌려온 것도 열받아죽겠는데 웬 단추눈 스파이까지 붙어서 귀찮게 구는 거야. ”

 

“ 뭐, 단추눈? 너 지금 나보고 하는 말이야? 조그만 게 버르장머리 없이 어른한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고 보니 보자마자 반말 까고! ”

 

“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눈도 딱 단추같이 생기고. 너 스파이 맞잖아, KGB 끄나풀! 나 끌고 가려고 온 놈! ”

 

“ 뭐? ”

 

베르닌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의 눈앞에는 아무리 잘 쳐줘봤자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을까말까 한 사내아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앉아 있었다. 가볍게 흐트러진 까만 머리칼에 하얀 얼굴, 긴 속눈썹에 반짝반짝 빛나는 까만 눈, 오똑 솟은 콧대와 그려놓은 듯한 입술이 어찌나 곱상한지 남장한 여자애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베르닌은 기절초풍했다.

 

“ 설마... 네가 그 정치범! 반동분자! 7년형! ”

 

“ 되게 듣기 싫은 소리다... ”

 

베르닌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뒤적거렸고 인적사항을 읽었다.

 

“ 이름 : 미하일 야스민. 레닌그라드 출신. 평소에는 미샤라고 불린다... ”

 

“ 맞긴 한데 너한테 별로 이름 불리고 싶지 않거든. ”

 

“ 어... 난 테러범이라길래 되게 무지막지하고 험악한 놈일 거라고... ”

 

“ 누가 테러범이야! 난 무지무지 잘 나가던 예술가야! 키로프와 볼쇼이 수석무용수에 엄청 끝내주는 안무가였다고! 세상에서 제일 춤 잘 추는 무용수! 재수 옴 붙어서 이상하게 꼬인 거야! 나 같은 천재는 원래 투기하는 놈들이 많단 말이야.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니 더 꼬인 거라고! 에잇... 빨랑 차나 끌고 와. 여기 추워. 웬 바람이 이렇게 부는지. 하루종일 기차 타고 오느라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 빨리 집으로 데려다 줘. 아, 내 팔자야. 이런 시골로 끌려오다니. ”

 

“ 어... 수갑은 왜 안 차고 있는 거야? ”

 

“ 너 내 말 못 들었어? 나 엄청 유명한 무용수였다니까! 수갑 함부로 채우면 손목에 무리가 오고 자국 생긴단 말이야! 이게 어떤 몸인데! 가뜩이나 감옥에서 괴롭혀서 많이 상했구만. 너 나한테 수갑 채울 생각 꿈에도 하지 마! 내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대면 크레믈린에 있는 우리 아저씨들한테 전화해서 너 혼내 주라 할 거야! ”

 

“ 어, 그러니까... 굳이 수갑 채울 생각은... 안 채워도 너 정도면 뭐... ”

 

베르닌은 안도감에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이 녀석은 외모나 말투, 호리호리하고 날씬한 몸매 어디를 봐도 육체적 위협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권총과 곤봉을 쓸 일은 전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꾸만 짜증이 치미는 건 견딜 수가 없었다.

 

“ 하여튼 가자. 난 다닐 베르닌이야. 널 담당할 보안위원회 요원이야.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어야 돼. 여기서 지켜야 할 것들 정리해놓은 서류 줄 테니까 다 읽고 꼭 지켜야 해! ”

 

“ 뭘 지켜. 나 여기 극장 감독 맡으라던데. 공연만 잘 올리고 애들만 잘 키우면 되지. 담당은 무슨 담당. KGB 스파이 꼴 보기 싫어. 집까지만 태워다주고 앞으로 얼씬도 하지 마! ”

 

시내로 들어오는 차 안에서 베르닌은 점점 부아가 치밀었고 이 애송이는 진짜 싸가지 없는 왕재수란 결론에 도달했다.

 

 

*    *    *

 

 

일주일이 지났을 때 베르닌은 미쳐버릴 지경이 되었다. 물밀 듯 쏟아지는 각종 서무 업무는 더욱 늘어났고 국장은 툭하면 그를 들들 볶았다. 그 와중에 유배수이자 정치범인 미샤인지 뭔지 하는 놈을 감시해야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최악이었다. 국장의 명령과 크레믈린 측의 각별한 관심 때문에 베르닌은 정말 아침부터 밤까지 그 놈을 감시해야 했다. 온종일 사무실에서 격무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도청 내용을 분석해야 했다. 극장에도 뻔질나게 드나들며 내부 동향을 파악하고 그 싸가지 없는 녀석이 어떤 식으로 극장을 운영하는지, 스태프들과 사무국 직원들, 무용수들 사이에서는 어떤 소문이 도는지 전부 파악해야 했다.

 

그나마 그건 분석 업무니까 그의 현업과 관계가 있다고 위안을 삼을 수도 있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아침저녁으로 그 녀석을 차에 태워 출퇴근시켜줘야 한다는 것과, 심지어 집에 돌아오면 저녁 식사까지 챙겨줘야 한다는 거였다. 맨 처음 국장은 저녁에도 그 놈을 감시해야 하니 식당에 가면 따라가서 함께 밥을 먹으라고 명령했지만 문제는 그 애송이가 식당 밥을 아주 싫어한다는 데 있었다.

 

“ 그냥 좀 먹어! 여기 고급 아파트에 딸린 식당이라서 밥 진짜 잘 나오는 데란 말야! 다른 데 구내식당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아? ”

 

“ 기름기가 너무 많단 말이야! 어휴, 역시 여긴 시골이야. 빵이든 고기든 샐러드든 아무데나 무조건 기름을 한 국자씩 들이붓잖아! 저 수프에도 돼지비계가 둥둥 떠 있어! 난 엄청 끝내주는 무용수 출신이잖아. 단백질과 비타민과 칼슘을 섭취하고 지방질은 제한하는 식사에 익숙해져 있어! 이런 건 못 먹어! ”

 

화가 난 베르닌은 국장에게 낱낱이 보고했다가 욕만 바가지로 먹었다.

 

“ 이 얼간아! 그런 것까지 나한테 얘기해야 되겠나! 밥을 해서 먹이면 될 거 아냐! 에잇 정말 어디서 그런 재수 없는 애새끼가 굴러 들어와서... 가뜩이나 정치국 의원들 품에서 놀아나던 불여우라 찝찝해 죽겠구만. ”

 

“ 국장님, 전 요리사도 아니고 가정부도 아닌걸요. 이미 격무에 시달리... ”

 

“ 시끄러워! 당장 나가! 요리사고 가정부고 다른 요원 투입할 예산도 없고 남는 인력도 없어! 자네가 다 해결해! ”

 

결국 베르닌은 그 재수 없는 녀석의 저녁 식사까지 챙겨주게 되었다. 그는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애송이에게 밥을 차려준 후에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야근을 하거나, 아예 집으로 일을 싸와서 밤늦게까지 해야 했다.

 

 

*    *    *

 

 

어느 날 아침 그는 거듭된 야근으로 너무 피곤하고 짜증이 나서 애송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야, 오늘은 못 태워다 줘! 너 혼자 가! ”

 

“ 나 혼자 못 가는데. ”

 

“ 왜 못 가! 너도 차 있잖아! 극장에서 준 거! 좋은 차잖아! ”

 

“ 나 운전 못해. ”

 

“ 뻥치지 마! 면허증 있잖아! 너 서류에서 다 봤어! ”

 

“ 면허는 땄지만 운전은 거의 안 해봤단 말야! 그리고 나 운전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팔 근육에 무리가 가서 별로야. 무용수는 팔 근육을 잘 관리해야 해. 잘못 쓰면 근육이 미워져. ”

 

“ 악! ”

 

베르닌은 간신히 참았다. 싸가지 없는 꼬마를 차로 극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날따라 차도 밀렸고 공사 때문에 길도 덜컹거렸다. 차에서 내리면서 반동분자가 투덜댔다.

 

“ 너무 운전이 험해. 허벅지 근육 다 뭉치는 줄 알았네. ”

 

주먹이 올라가는 것을 꾹 참고 베르닌은 사무실로 갔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허리가 휘도록 일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저녁이었다. 극장에 전화를 했더니 비서가 감독님은 머리가 아프다며 오후에 일찍 퇴근했다고 했다. 웬일로 데려다 달라고 호출을 안 했나 의아했지만 잘됐다 싶어 베르닌은 구내식당에서 샌드위치로 대충 저녁을 때운 후 집으로 돌아갔다.

 

막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받아보니 반동분자 애송이였다.

 

“ 왜! 나 오늘은 너 저녁 안 차려줄 거야! 시간도 벌써 지났고! ”

 

“ 나 차 좀 우려 줘. ”

 

“ 뭐야? ”

 

“ 홍차! 차 좀 우려 달라고! ”

 

“ 야,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 밥 해주는 것도 감지덕지지 무슨 차까지 우려달래! ”

 

“ 칫, 알았어. 되게 뻣뻣하게 구네. ”

 

전화를 끊은 후 베르닌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앉아 있었다. 절대 그 집에 가지도 말고 해주지도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보기가 삑삑 울렸다. 복도로 나가보니 반동분자 애송이의 집에서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베르닌은 다급하게 뛰어나가 꼬마의 집 현관문을 두들겼다.

 

“ 야! 문 열어! 불 난 거야? 빨리 열어! ”

 

문이 열리지 않자 베르닌은 덜컥 겁이 났다.

 

“ 어... 야! 너 괜찮아? 야! 대답 좀 해봐! ”

 

공포에 휩싸인 베르닌은 자기 방으로 뛰어올라가 열쇠꾸러미를 가져왔다. 정신이 없다 보니 어느 열쇠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 열쇠 저 열쇠 다 집어넣고 철컥철컥 돌리는 와중에도 반동분자 꼬마가 연기를 들이마시고 질식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 아아... 그냥 아까 가볼 걸. 같이 있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난 입사 때 특수훈련도 받았으니까 불 끌 수 있었을 텐데. 안 돼, 그 자식 재수 없긴 해도 이건 아니잖아. 제발... ”

 

마침내 문이 열렸다. 베르닌은 애송이의 이름을 부르며 정신없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연기는 부엌 쪽에서 나고 있었다. 뛰어 들어가니 가스렌지 위에서 주전자가 연기와 그을음을 내뿜고 있었다. 급하게 불을 껐다. 주전자 안에는 물이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불이 옮겨 붙은 곳은 없었다. 그러나 꼬마가 보이지 않았다.

 

“ 야! 너 어딨어! 내 말 들려? 야! ”

 

“ 나 여기 있어. ”

 

소리는 거실에서 들려왔다. 허겁지겁 달려가 보니 반동분자 꼬마가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는 티포트를 잡고 한 손으로는 찻잔을 쥐고 있었는데 포트 주둥이에서 시꺼먼 액체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 야, 너 멀쩡하잖아! 왜 문 안 열었어! ”

 

“ 손이 두 개 밖에 없는데 어떻게 나가서 문을 여니! 네가 나보고 차 우리라며! 그래서 차 우리고 있었단 말이야! ”

 

“ 뭐야! 부엌에서 그 난리가 난 것도 몰랐어? 불 날 뻔 했잖아! ”

 

“ 엄청 냄새 났어. 아랫집에서 요리 태운 거 아냐? ”

 

“ 주전자에서 물 따라냈으면 렌지 불을 껐어야지! ”

 

“ 나 물 처음 끓여봤단 말이야! ”

 

“ 어휴, 말을 말자. 야! 너 지금 뭐해! 계속 붓고 있으면 어떡해! 차가 다 쏟아지잖아! ”

 

“ 잘 안 우려져... 벌써 세 번이나 해봤는데 시꺼멓게만 나와... 마셔보면 엄청 쓴 맛만 나. 티백도 다 터지고 가루가 둥둥 떠. 아... 흑흑... ”

 

갑자기 반동분자 꼬마가 찻잔과 포트를 와락 엎지르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한숨을 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 싸구려 티백이야! 여기 매점에선 이런 거밖에 안 팔아! 찻잔도 되게 조잡하고 이도 나갔어. 티포트도 완전 두꺼운 사금파리야! 난 세상에서 제일 얇고 우아한 로모노소프 찻잔에만 마셨었는데. 다들 나한테 차 우려다 바치고 무가당 초콜릿도 주고 날 위해 티타임 해줬는데... 나 이런 거 해본 적 없단 말이야. 차도 영국산이랑 프랑스산이랑 스리랑카산 고급 잎차만 우려 줬는데 여긴 그런 거 없어. 툭하면 찢어지는 싸구려 티백... 안에 들어 있는 것도 찻잎도 아니고 무슨 화약가루 같은 최악의 싸구려... 아아, 시골... 아, 죽고 싶어. 못 참겠어. 아... 흑...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왜 내가... 돌아가고 싶어. 시골 싫어... ”

 

베르닌은 멍해졌다. 무슨 말인지 전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꼬마가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으며 정신적으로 매우 약해져서 폭발 직전이란 사실만은 이해했다.

 

“ 어, 그래... 네가 뭐 얼마나 잘못을 했겠냐. 기껏 춤이나 추던 애가... 서류 다 읽어봤는데 너 테러범도 아니고 진짜 나쁜 짓은 하나도 안 했더라. 그냥 외국에 투어 갔을 때 몇 번 놀러 나가고 금지 서적 읽고 나쁜 노래 듣고 그런 정도였는데 좀 심하게 벌 받았더라. 너 엄청 잘 나가던 애라며, 훈장도 받고 팬들도 많고... 그러다 갑자기 감옥 가고 고문도 받고 우리 동네로 와서 많이 힘들었겠지. 근데 어쩌겠냐, 그게 인생이지. 그러니까 힘내고 울지 마. 저기, 야... 내가 그래도 너보다 몇 살 더 먹었고 인생도 좀 더 알거든. 그니까 내가, 저기, 힘든 거 있으면 다 터놓고 얘기해. 내가 도와줄게. 야... ”

 

“ 흑... 차 좀 우려 줘. ”

 

“ 알았어. 우려 줄 테니까 울지 마. ”

 

베르닌은 행주를 가져와서 엎질러진 찻물을 모두 닦았다. 포트와 찻잔을 가져가 싱크대에서 헹궜다. 태워먹은 주전자를 깨끗이 씻은 후 가스렌지에 올려 물을 끓였다. 티포트에 뜨거운 물을 붓고 티백을 담근 후 몇 차례 들어 올렸다. 주머니 안에 가득 차 있는 분쇄 찻잎을 점핑시켜 차가 잘 우러나오게 했다. 그 사이에 뜨거운 물을 약간 부어 찻잔을 미리 데웠다. 잠시 후 그는 티백을 빼냈다. 찻잔에 차를 부었다. 설탕을 한 스푼 넣어 녹였다. 쟁반에 찻잔을 올려놓고 받침에는 잼을 조금 퍼서 세팅했다.

 

차를 가져다주자 반동분자가 눈물을 닦고는 찻잔을 들었다.

 

“ 어, 안 까맣다... 홍차 색깔이다. 붉은 기 도는 예쁜 갈색이네. 싸구려 티백인데 어떻게 이렇게 잘 우렸지? ”

 

“ 네가 티백을 너무 오래 담가놔서 그랬던 거야. ”

 

“ 으응. ”

 

꼬마는 차를 호로록 마셨다. 다 마신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베르닌은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그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또 울거나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까봐 걱정이 됐다. 예술가란 인간들은 종종 우울증에도 시달리고 그게 악화되면 심지어 자살할 수도 있다는 얘길 어디선가 주워 읽은 기억이 났다. 싸가지 없는 녀석이지만 그래도 안됐다는 생각에 좀 더 신경써주고 잘해줘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는데 꼬마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 이건 정말 아니야. ”

 

“ 어... 그래, 너 지금 상황이 별로 안 좋은 건 이해하는데... 그래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지 어쩌겠어. 그러니까 자꾸 우울해하지 말고 나쁜 생각 하지 말고 힘을 내. ”

 

“ 차에 설탕을 넣다니... 이건 정말 아니란 말이야. ”

 

“ 뭐? ”

 

“ 쳇, 뭐 여기 사람들은 전부 설탕 넣어 마시니까 그렇다 치자. 근데 넌 이제부터 알아둬. 난 몸매 관리 때문에 차에 설탕 안 넣으니까 감안하도록 해. 잼도 설탕 든 건 안 먹어. 그리고 세팅할 때 찻잔 손잡이는 왼쪽으로 해주면 좋겠어. 난 차 마실 때는 왼손잡이거든. 앞으로는 기억해줘. 그래도 설탕 빼곤 차는 나쁘지 않게 우린 것 같아. 저녁밥도 네가 해준 게 제일 나은 거 같고. 뭐 운전은 좀 험하지만 시골이라 길이 안 좋으니까 내가 이해해야겠지. 그럼 이제 가보렴. 피곤해서 좀 자야겠어. 설거지는 내일 와서 해줘. 잘 자렴. ”

 

 

베르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섰다.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 싸가지 없는 반동분자를 왕재수라고 부르기로 가슴깊이 맹세했다.

 

그는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며 뒤척이다 새벽에야 잠이 들었고 그 결과 늦잠을 자서 다음날 지각, 국장에게 엄청난 질책을 받고 하루종일 자아비판을 하게 되었다. 그러느라 근무 시간 내에 서무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늦게까지 야근을 했다.

 

돌아와서는 왕재수에게 설탕을 뺀 차를 우려서 찻잔 손잡이가 왼쪽으로 가도록 세팅을 해주었다. 설거지도 해 주었다. 국가의 녹을 받아먹으며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법이다.

 

  

 

 

FIN

- 2015. 1. 16, liontamer -

 

 

** 손잡이 왼쪽으로 돌려준 로모노소프 찻잔 : http://tveye.tistory.com/3430

 

 

:
Posted by liontamer

<서무의 슬픔 시리즈 등장인물 소개>

 

 

*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름과 직업, 나이는 본편과 동일하나 나머지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

 

 

+ 다닐 베르닌

 

애칭 : 다냐

나이 : 28세

이 시리즈의 주인공.

직업 : 소비에트 연방 국가보안위원회(KGB) 가브릴로프 지국 행정요원.

소속은 감시분석부서.

막내 직원이라는 이유로 회사 전체 서무 업무를 겸하고 있다.

 

어릴 땐 동네에서 신동 소리도 들었고 모범생이자 우등생이라 모스크바 소재 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해 극성스러운 동네 주민들에 의해 플래카드가 붙을 뻔하기도 했음. 그러나 책상물림인 탓인지 학업을 마친 후 모스크바에서 취업이 잘 안 돼서 고향으로 돌아와 KGB 행정요원으로 취직. 행정의 기본이 안 된 직원이라는 이유로 총책임자인 스페호프 국장에게 들들 볶이고 있음.

 

매일같이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주말 출근도 예사이다. 격무와 상사와 동료들에게 시달리느라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지경. 한 마디로 회사에 청춘을 바치고 있다. 이 와중에 시립극장 감독으로 새로 부임해 온 반동분자 왕재수에 대한 감시 업무를 덜컥 떠맡게 되는데...

 

장점 : 서류철하기, 타이핑, 운전, 요리, 차 우리기, 그 외 집안일

단점 : 행정의 기본이 안 되어 있음

약점 : 스페호프 국장. 왕재수. 당직실의 귀신. 바이올린 깡패.

좋아하는 것 : 정시퇴근, 꿀잠, 국장의 휴가

 

**

 

+ 왕재수

 

본명 : 미샤 야스민

나이 : 25세

본편의 주인공.

직업 : 가브릴로프 시립극장 예술감독.

전(ex) 키로프/볼쇼이 극장 수석무용수, 안무가, 연출가.

 

자칭 타칭 세계 최고의 무용수이자 천재 안무가, 우주 최고 꽃미남. 가는 곳마다 여자들이 줄을 선다. 소련 최고의 대도시 중 한곳인 레닌그라드 출신이며 수도인 모스크바에서도 무용수 생활을 했고 당시 일반 인민들은 꿈도 못 꾸는 서방 유럽과 미국 등 해외 투어를 밥 먹듯이 해본 코스모폴리탄. 재능과 미모를 겸비, 뛰어난 패션 센스에 영어와 불어마저 잘 구사함. 누가 봐도 차도남의 대명사. 특히 미모 덕에 매사가 잘 풀려온 편이다. 꼬이는 여자들이 많지만 슬프게도 아저씨들을 좋아하는 성향이라 크레믈린에 있는 고위 당 간부들을 후원자로 두고 있다.

 

무용수와 안무가, 연출가로 톱스타 노릇을 하며 잘 나가고 있었으나 파리에서 밤 문화를 즐기려고 놀러나갔다가 일이 꼬여서 전격 체포, 감옥에 갔다가 크레믈린의 후원자 아저씨들 덕에 풀려나 ‘시골’인 가브릴로프의 극장으로 좌천되어 데카브리스트처럼 유배수 신세가 된다. 시골 생활에 적응하긴 해야 하는데 만사가 짜증나고 이해가 안 되는 것투성이다. 그나마 집사(..라고 취급하고 있음)인 베르닌이 있어 좀 다행인 것 같기도 한데...

 

장점 : 미모. 무용계의 천재. 패션 센스. 두툼한 허벅지 근육. 크레믈린의 후원자 아저씨들.

단점 : 싸가지 없음.

약점 : 시골. 살림. 바퀴벌레. 쥐. 곱등이. 다이어트.

좋아하는 것 : 사과파이. 예쁘다고 칭찬받는 것. 키 큰 바이올린 아저씨. 집사.

 

**

 

+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타칭 : 국장

나이 : 43세

직업 : 소비에트 연방 국가보안위원회(KGB) 가브릴로프 지국장

 

행정의 기본을 중시하는 정통 공산당 출신 KGB 국장. 당의 슬로건을 실현하기 위해 그 한 몸 바치고 있는 국가 조직의 사나이. 직원들을 계도하는 데는 더더욱 그 한 몸 다 바침. 행정의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책상물림 막내 직원 베르닌 때문에 골치가 아픈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웬 불여우 같은 왕재수가 덜컥 내려와서 그놈을 관리하느라 머리가 셀 지경이다.

 

 

**

 

+ 로만 코즐로프

 

애칭 : 바이올린 아저씨.

나이 : 40세

직업 : 가브릴로프 시립극장 오케스트라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195센티미터의 키에 까칠한 성깔의 소유자, 시립 오케스트라를 좌지우지하는 인물이고 툭하면 성질을 부리며 주먹질을 해대지만 연하의 예쁜 애인에게는 살살 녹는다. KGB를 비롯 국가 권력에 대해 알레르기가 있다.

 

 

**

 

+ 렐랴

 

본명 : 릴리아나 비슈네바

나이 : 23세

직업 : 문예지 편집장

 

시에서 제일가는 미녀. 가문이면 가문, 미모면 미모, 살림이면 살림, 재치면 재치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다. 쿠키도 굽고 잼도 만들고 꿀도 채취할 줄 안다. 목도리도 잘 뜬다. 가브릴로프 남자들의 숭배를 한 몸에 받는 여인. 왕재수를 사모하여 이따금 베르닌을 사랑의 메신저로 이용하려고 한다.

 

**

 

+ 기타 : 베르닌의 직장 동료들, 모스크바에서 온 사람들, 당직실의 귀신 등등

 

 

  ** 추가 **

<서무의 슬픔 시리즈 목차>

 

* 에피소드가 올라갈 때마다 링크 업뎃 예정

* 완결되지 않은 시리즈라서 때때로 (주로 일 때문에 화딱지 날때) 한 편씩 추가로 쓸 때마다 목차도 추가 수정될 예정 :)

 

episode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http://tveye.tistory.com/3429

episode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http://tveye.tistory.com/3432

episode 2. 당직실의 귀신 http://tveye.tistory.com/3437

episode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http://tveye.tistory.com/3444

episode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http://tveye.tistory.com/3451

episode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http://tveye.tistory.com/3458

episode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http://tveye.tistory.com/3466

episode 7. 보고서의 악몽 http://tveye.tistory.com/3478

episode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http://tveye.tistory.com/3488

<번외 특별편> 등장인물 20문답

- 베르닌, 왕재수 : http://tveye.tistory.com/3492

- 스페호프, 코즐로프, 렐랴 : http://tveye.tistory.com/3493

episode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episode 10. 벨라 등장! http://tveye.tistory.com/3542

episode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http://tveye.tistory.com/3553

episode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http://tveye.tistory.com/3563

episode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http://tveye.tistory.com/3580

episode 14. 한밤중의 침입자 http://tveye.tistory.com/3599

episode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http://tveye.tistory.com/3615

episode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http://tveye.tistory.com/3635

episode 17. 운수 좋은 날 http://tveye.tistory.com/3661

episode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http://tveye.tistory.com/3678

episode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http://tveye.tistory.com/3692

<episode 19에 이어 : 발레 돈키호테 영상과 화보들>  http://tveye.tistory.com/3694

episode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http://tveye.tistory.com/3708

<episode 20에 이어 : 바질의 화려한 춤들> http://tveye.tistory.com/3711

episode 21. 스페호프의 복수 http://tveye.tistory.com/3726

episode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http://tveye.tistory.com/3742

episode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http://tveye.tistory.com/3766

episode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http://tveye.tistory.com/3785

episode 25. 천하일미 요리대회 (1부) http://tveye.tistory.com/3800

episode 25. 천하일미 요리대회 (2부) http://tveye.tistory.com/3813

episode 26. 베르닌의 옛 여인 http://tveye.tistory.com/3832

<번외 특별편 : 러시아 민담 패러디>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 http://tveye.tistory.com/3849

episode 27. 밀사 베르닌 http://tveye.tistory.com/3918

episode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http://tveye.tistory.com/3938

episode 29. 보랴의 생일 파티 http://tveye.tistory.com/3957

episode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http://tveye.tistory.com/3978

episode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 (1부) http://tveye.tistory.com/3994

episode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 (2부) http://tveye.tistory.com/4013

episode 32. 왕자님과 호위기사들 http://tveye.tistory.com/4033

episode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 (1부) http://tveye.tistory.com/4062

episode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 (2부) http://tveye.tistory.com/4079

episode 33-1. 도자기 인형 (디렉터스 컷) http://tveye.tistory.com/4098

episode 34. 딸기 아가씨들과 자선 바자회 http://tveye.tistory.com/4140

episode 35. 4월의 눈보라 http://tveye.tistory.com/4172

episode 36. 빨간 열매와 초특급 익스프레스 http://tveye.tistory.com/4189

 <번외 특별편> 돌아온 등장인물 20문답

- 리자,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4236

- 투레츠키, 보랴, 일류샤 : http://tveye.tistory.com/4251

episode 37. 뜻밖의 손님 http://tveye.tistory.com/4407

episode 38. 문어발과 이쑤시개 http://tveye.tistory.com/4543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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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시리즈를 올리기에 앞서...

 

 

이 시리즈는 내가 몇 년 동안 쓰고 있는 레닌그라드 우주와 미샤 야스민이란 인물에 대한 본편들에서 파생된 일종의 패러디 풍자물이다. 이 인물을 놓고 쓰고 있는 원래 글들은 about writing 폴더에 가끔 발췌한 적이 있다. 단편도 두 개 정도 올렸다.

 

전에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지금 쓰고 있는 글은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인 가브릴로프라는 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소도시이다)

 

주인공인 미샤는 탁월한 무용수이자 안무가로 당시 소련 최고의 극장인 키로프와 볼쇼이에서 톱스타 대접을 받았지만 반체제주의자라는 미명 하에 고초를 겪고 결국 별 볼일 없는 지방 소도시로 유배되어 그 도시의 시립극장 예술감독을 맡게 된다. 이 소설에서는 이 사람이 이 소도시와 극장에서 겪는 일들과 인간관계, 여기서 파생된 사건들을 다룬다. 지금 쓰는 중이고 겨우 1부 마쳤다. 이 글 시작하기가 힘들어서 준비를 위해 단편도 한두 개 쓰고 경장편, 장편, 외전도 썼다. 그 글들의 일부를 가끔 발췌한 적이 있다. 그건 about writing 폴더에..

 

어쨌든 이 인물의 성격도 그렇고 쓰는 글들도 그렇고 전부 뭔가 심각하기도 하고 진지하기도 해서 그런지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가끔은 좀 일탈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직장에서 업무와 인간관계에 시달리고 또 특유의 관료제 문화에도 시달리다 보니 어느 날부터 홧김에 내 새끼들을 데리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본편처럼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이야기가 아니고(그런 얘긴 너무 피곤하니 잠깐 미뤄두란 말이야!) 하루하루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항상 뭔가 잘 안 풀리는 사무직 청년의 생각 없이 웃기는 얘기를 한 편 두 편 쓰게 되었다.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주로 나의 10여 년 이상의 회사 생활에서 소재를 가져왔다만 뭐 이래저래 변형시키긴 했다. 가끔 회사에서 열 받는 일이 생기면 갖다 쓰기도 했지만... (에피소드 7의 보고서 악몽이라든지 -_-)

 

그래서 진지하고 우울하고 열정적인 나의 주인공 미샤는 자기 잘나고 예쁜 맛에 취해 사는 싸가지 없는 꼬마로 180도 바뀌었고, 본편에서 그를 감시하는 KGB 요원이자 일종의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역할을 부여받은 다닐 베르닌이란 인물이 이 패러디 풍자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물론 이 사람도 본편과는 180도 다르게 변형되어, 매일같이 격무에 시달리고 악질 상사와 동료들에게 들들 볶이는 불쌍한 서무 청년으로 등장한다.

 

시리즈는 옴니버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본적인 배경과 골자는 본편과 동일하다. 미샤가 문제를 일으켜 체포됐다가 소련의 지방 소도시인 가브릴로프라는 곳 시립극장에 부임해 온다는 것. 그리고 감시요원이 붙는다는 것. 여기까지는 같다. 이 시리즈에서 가브릴로프 KGB 말단 직원 베르닌은 바빠 죽을 지경인데도 단지 말단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감시하라는 가외업무를 떠맡게 된다. 그러나 레닌그라드에서 왔다는 이 자칭 타칭 천재 예술가라는 인물은 정말 한 대 패 주고 싶은 꼬마였으니...

 

원래는 짧은 콩트를 한 편 쓴 것으로 시작했는데, 본편이 잘 안 풀릴 때 아무 생각 없이 이따금 쓰다 보니 연말쯤 되자 8편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 두 주요 인물이 만나게 되는 배경이 필요해서 0편을 추가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총 9편인데 또 모르지... 일하다 화딱지나면 한 편 한 편 더 쓸지...

 

하여튼 그래서 ‘서무의 슬픔 시리즈’ 폴더를 새로 만들었다. 1주일에 한두 편씩 올려보겠다. 전적으로 도락을 위해 쓰는 소품이라 본편과는 별 관계가 없지만 가끔은 이러다 주객전도되는 거 아니야 하고 투덜댈 때도 있다.

 

이 시리즈 읽는 분들께... 여기 나오는 애들 원래는 이런 애들(..이라고 쓰고 바보라고 읽는다) 아닙니다~ 그리고 미샤는 왕재수가 아니에요. 이 사람은 작가가 너무나 사랑하는 본편 주인공... 믿어주세요 :)

 

** 사족

제목 '서무의 슬픔'은 19세기 러시아 극작가 그리보예도프의 '지혜의 슬픔'에서 빌려왔다 :) 내용은 아무 관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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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도 많고 머리도 아프고 힘든 아침이라, 조금이라도 에너지를 충전해 보고자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화보 두 장

둘다 Svetlana Avvakum이 찍은 사진.

이건 라 바야데르의 솔로르.

사진만 봐도 표정과 손끝에서 발산되는 풍부한 감정에 말려들 것 같다. (예뻐서인가 ㅠ)

저 의상은 정말 최고 :)

이 사람은 무대 화보 보면 손가락에 저렇게 밴드를 감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반지 감추는 건가 싶기도 하고...

 

 

역시 Svetlana Avvakum의 사진.

웨인 맥그리거의 infra 추는 중. 이 무대 좋았었다. 다시 보고 싶다.

스코릭과 춘 2인무는 약간 삐걱대는 느낌이었지만(춤을 못 춰서는 아니었다. 다만 슈클랴로프는 스코릭보다는 다른 파트너들과 더 케미스트리가 좋았다) 이 사람의 1인무는 가슴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핫팬츠 입고 나와서 좋았다는 건 덤... 이날 혼자 보러 가서 다행이다. 료샤와 같이 갔으면 또 엄청 놀려먹었을 것이다. 타이츠에 핫팬츠에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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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13. 21:19

가반스카야 거리 russia2015. 1. 13. 21:19

 

 

몇년 전 다시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잠깐 기숙사에 머무르며 몇 달 공부했던 때는 쉡첸코 거리에 살았다. 가반스카야 거리는 그곳과 연결된 이웃 거리이다. 자주 지나다녔었다,.

 

작년 여름에 갔을 때 떠나기 전날 쉡첸코와 가반스카야 거리, 말르이 대로 쪽을 산책했다. 뭐 딱히 향수가 짙어서라기보다는... 전에 쓴 글의 배경 중 하나가 이쪽이라서. 내 기억이 정확한지 확인하러 갔었다. 트롤리버스 타고 와서 이 가반스카야 거리에서 내린 후 쭈욱 걸었다. (http://tveye.tistory.com/3108)

 

내가 보통 올렸던 페테르부르크 사진들은 거의가 네프스키 대로나 네바 강, 마린스키 등등 관광지나 랜드마크, 문화예술 관련 동네들이었다. 뭐 가끔은 보통 골목이나 거리 사진도 올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런쪽 사진들은 적은 편이다.

 

그래서 가반스카야 울리짜(거리) 사진 그냥 몇 장. 주거지 쪽 거리는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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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루흐 루지마토프.

사진사는 이미지에 나와 있는대로 Marina Bakanova

연습실의 무용수 사진은 언제나 날 끌어당긴다.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사진사는 Mark Olich.

 

 

나의 월요병을 달래주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도 세 장.

백조의 호수.

오데트에게 와서 '잘못했어, 나 속은 거야, 너만을 사랑해~' 하고 애원하는 지그프리드 추는 중,

내가 오데트라면 절망해서 울다가도 저렇게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넙죽 엎드리는 지그프리드를 보고 용서해줘버릴지도 ㅠㅠ

(결론 : 지그프리드가 예쁘면 용서.. 하긴 지그프리드는 순진해서 속아넘어간 거고... 나야 못돼먹은 알브레히트와 솔로르도 얘처럼 이쁘기만 하면 좀 용서해주려고 하니 뭐...)

사진은 Svetlana Avvakum

 

.. 음, 근데 써놓고 보니 이거 1막인 것 같네.. 검은색 상의를 보니 오데트 만날 때인 것 같다. 3막에선 하얀 옷 입는데.. 뭐 갈라쇼 할땐 흑조 2인무 출때 검정색 상의 입기도 한다만..

근데 넌 왜 이렇게 애절한 표정인 거니..

(답 :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ㅠㅠ)

 

 

슈클랴로프 한 컷 더.

귀엽다~ 오딜이 되어 마구 속여넘기고 싶다!

 

 

마지막은 라 바야데르의 솔로르 추는 중.

사진사는 Alex Gouliayev.

 

.. 그러니까 솔로르는 나쁜 놈이지만 얘가 추면 용서해주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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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페테르부르크.

그리보예도프 운하.

햇살이 너무나 찬란해서 운하와 거리와 건물 모두 탈색된 것처럼 보였다. 이 도시는 언제 어느 순간이든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이 아름다운 도시는 그저 사랑할 수 밖에 없다.

(뭐 죽어라고 미워했던 사람들도 많이 있긴 하지만..)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피의 구세주 사원)의 황금 쿠폴.

하늘이 정말 저렇게 새파랬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내가 좋아하는 창문들 :)

 

 

 

마지막은 머물렀던 호텔 창 너머로 보이는 맞은편 건물 창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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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추우니 따뜻하고 찬란한 가을날 페테르고프 사진 여러 장.

 

페테르고프는 전에도 여러 번 올린 적 있다. 제정 러시아 시절 황제들의 여름 휴양지로 '여름 궁전'이라고도 불린다. 아름다운 분수와 궁전, 교회, 공원이 어우러져 정말 근사하다. 여기 사진들은 2013년 9월에 갔을 때 찍은 것들.

 

어제까지 올렸던 단편 Jewels의 1장(http://tveye.tistory.com/3390)에서 화자인 라라는 주인공 미샤가 자기를 데리고 여름 궁전에 가서 분수를 보여주고 아이스크림을 사줘서 하마터면 레닌그라드로 이사갈 뻔 했다고 말하는데 그 배경이 되는 여름 궁전이 바로 이곳이다. 아무리 봐도 모스크바보다 훨씬 근사하다!!

 

전에 올렸던 사진도 두세 장 섞일 수도 있다만. 기억 안 나니 그냥 올려본다. 태그의 페테르고프 나 뻬쩨르고프를 클릭하면 전에 올렸던 이 동네 사진들을 볼 수 있다.

 

이때는 며칠 후에 무슨 공연이 있다고 무대 설치하느라 궁전의 메인 분수들을 작동 안 시켜서 무척 속상했다. 그래서 사진을 봐도 좀 아쉽긴 하다. 분수 다 작동되면 진짜 멋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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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부터 올렸던 부활절 단편 Jewels. 마지막 장.

 

1~4장은 여기..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 : http://tveye.tistory.com/3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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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els

пасхальный рассказ

 

 

 

 

 

- 5 -

  

 

 

 

난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러 가지 못했다. 비카의 생일이라서 친구들과 수영장에 가서 논 후 비카 엄마가 만들어준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미샤의 춤을 보고 싶기는 했지만 아빠가 전화로 그 공연은 내년에 보는 게 좋겠다고 날 설득했다. 살인자가 나와서 그러는 거냐고 물었더니 아빠는 좀 놀란 눈치였지만 발레가 너무 심각해서 내가 보기엔 좀 이르다고 설명해줬다. 나도 미샤가 크리셴스카야와 추는 건 싫었기 때문에 다른 때처럼 조르지는 않았다.

 

대신 난 토요일에 극장에 갔다. 공연을 보러 간 건 아니었다. 금요일 저녁에 엄마가 보석 달걀을 발견하고 한바탕 난리가 났기 때문이다.

 

“ 너 이거 어디서 났어? ”

“ 어, 이거? 친구가 줬어. ”

“ 친구라니! 누가 이런 걸 줘! 너 이게 뭔지나 알아? ”

“ 알아, 부활절 계란이야. 진짜 계란은 아니지만 장식용으로 만든 거야. ”

 

엄마는 달걀과 상자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이제 내 말을 이해하고 달걀을 돌려주겠지 싶었지만 엄마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 라라, 솔직히 말해. 이거 어디서 났어? ”

“ 친구가 줬다니까. ”

“ 네 친구들 중에 이런 걸 줄 애들이 어디 있다고 그래. 이게 얼마나 고급품인지 아니? 이건 진짜 파베르제야. 그것도 오래된 거야. ”

“ 파베르제가 뭐야? ”

 

엄마는 한숨을 쉬더니 좀 누그러진 목소리로 내게 파베르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혁명 전에 살았던 보석세공사라고 했다. 그 사람이 만든 보석 달걀들이 너무 유명해서 달걀도 그렇게 불린다고 했다. 요즘도 후손들이 만든 달걀들이 나오긴 하지만 이건 정말 옛날 물건이고 박물관이나 외국 부자들의 집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거라고 했다.

 

“ 여기 박혀 있는 거 전부 진짜 보석이야, 라렌카. 에메랄드랑 사파이어야. 이것도 진짜 금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런 거 가지고 있으면 절도죄로 체포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 어디서 났어? ”

 

결국 난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엄마는 아빠와 마찬가지로 내가 거짓말한 것과 버스를 혼자 타고 간 것을 나무랐다. 그건 내가 잘못한 거니까 괜찮았다. 하지만 엄마가 낯선 남자의 집에 찾아갔다고 야단친 것만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미셴카는 ‘낯선 남자’가 아니야. 아빠랑 제일 친한 친구야. 나하고도 친해. 아냐하고도. ”

“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어린 여자애가 혼자 사는 남자 집에 찾아가면 안 돼! 그것도 하필 그런 사람한테. ”

“ 미샤가 어때서? 하필 그렇다는 게 무슨 뜻인데? ”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말이 잘못 나왔다고 했다. 내가 미샤와 너무 친하게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빠랑 같이 있을 때 만나는 건 좋지만 절대 집으로 찾아가면 안 된다고 했다.

 

“ 공연도 보면 안 돼? ”

“ 공연은 돼. 엄마가 허락해준 것들만. ”

“ 엄마는 왜 미샤를 그렇게 싫어해? 미샤는 착해. 내 말은 다 들어주고. 정말 좋은 사람이야. 엄마가 미샤랑 얘기를 안 해봐서 그래. ”

“ 미샤가 나쁘다는 게 아니야. 극장에 있는 사람이라서 그렇지. 나중에 크면 엄마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게 될 거야. ”

“ 볼쇼이에 있는 언니오빠들이 미샤를 질투해서? ”

“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니? ”

“ 알아. 너무 잘하면 질투해. 전에 나 혼자 사생대회 상 받았더니 나쟈랑 비카가 이틀 동안 말도 안 했어. ”

“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

 

엄마는 결국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달걀을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너무 속상하고 억울해서 울고 싶었지만 엄마에겐 눈물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꾹 참았다. 달걀보다도 엄마가 미샤를 싫어하는 게 더 슬펐다.

 

“ 계란 엄마한테 줘. 가서 돌려주고 올 테니까. ”

“ 내가 돌려주면 안 돼? ”

“ 그 집에 가면 안 된다고 했잖아. ”

“ 엄마가 가면 미샤를 혼낼 거잖아. 미샤는 그냥 내가 갖고 싶어 하니까 준 건데. 아무 잘못도 없는데. 그때도 많이 아파서 병원에도 갔었는데. 그럼 미셴카가 아파도 내버려둬야 하는 거야? ”

 

난 결국 울기 시작했다. 견딜 수가 없었다. 엄마는 평소에 내가 울면 야단을 치거나 그칠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곤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안아주면서 날 야단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아픈 친구를 돌봐주러 간 건 나쁜 일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반드시 엄마나 아빠와 같이 가야 한다고 했다. 미샤를 야단치지도 않을 거고 그냥 달걀만 돌려주고 올 거라고 했다. 난 엄마에게 미샤가 극장에 있을 거고 아빠와 새 작품을 연습하기로 해서 늦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엄마는 극장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날에 춤추던 곳이었는데 왜 그런지 이해가 잘 안 갔다. 나쟈는 엄마가 극장에 가면 아빠랑 좋아했던 시절이 떠올라서 속상하기 때문에 그럴 거라고 했다. 엄마가 좀 고민하는 눈치였기 때문에 재빨리 말했다.

 

“ 내일 아빠 만나면 돌려주라고 할게. 그럼 미셴카 집에 안 가도 되잖아. ”

 

난 보통 주말마다 아빠를 만나러 가니까 엄마는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값비싼 보석 달걀을 내 손에 들려 보낸다는 게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새아빠에게 나를 차로 극장 앞까지 데려다 주라고 했다. 어차피 새아빠는 오후에 시내에 나가야 했으므로 흔쾌히 승낙했다.

 

 

*   *   *

 

 

새아빠는 날 극장 앞에 내려주고 가버렸다. 원래 엄마는 아빠를 만나 달걀을 돌려줄 때까지 같이 있으라고 했지만 차 안에서 내가 혼자 가도 괜찮다고 말했다. 새아빠는 보석 달걀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또 우리 아빠와도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해줬다.

 

난 무거운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토요일이었지만 그 날은 낮 공연이 없어서 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 매표소 앞에 앉아 있던 안내원이 전부터 잘 아는 엘리자베타 할머니였다. 아빠 보러 왔다고 하자 할머니가 사무실에 전화를 하고는 좀 기다리라고 했다.

 

난 매표소 앞을 서성이며 기다렸다. 아침을 잔뜩 먹었는데도 이상하게 극장에 들어오면 배가 고팠다. 하긴 열두 시가 넘었으니까 점심 먹을 즈음이기도 했다. 10분 쯤 후에 카펫 깔린 계단을 따라 미샤가 내려왔다. 아빠는 감독님과 중요한 회의 중이라 대신 내려왔다고 했다.

 

“ 아빠 기다렸을 텐데, 실망한 거 아니지? 스탄카 나오려면 한 시간은 더 걸릴 거야. 점심 먹었어? ”

“ 안 먹었어. 미셴카는 먹었어? ”

“ 나도 안 먹었어. 난 일어난 지 얼마 안됐거든. 점심 먹으러 갈래? 스탄카는 회의하면서 먹는대. ”

 

당연히 좋았다. 미샤는 내게 뭘 먹고 싶은지 물었다. 마침 아침에 본 만화에서 체브라슈카가 블린을 먹는 장면이 나왔기 때문에 망설일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

 

“ 블린, 연유랑 꿀이랑. ”

“ 아, 맛있는 집 아는데. 네가 걸어가기는 좀 멀어. 차로 가도 괜찮아? ”

“ 응. ”

 

난 미샤를 따라 주차장으로 갔다. 미샤는 우리 아빠 집에 있을 때는 극장까지 같이 걸어오곤 했기 때문에 아마 전날 자기 집에서 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샤의 차는 새아빠나 아빠 차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그리고 산지 몇 년 된 것 같은데도 진짜 새것이었다. 이그나트 아저씨는 미샤의 차는 십 년이 넘어도 그렇게 새것처럼 반짝반짝할 거라고 했다. 워낙 운전하는 것도 싫어하고 차를 끌고 다니는 것도 싫어해서였다. 차를 싫어하는 남자라니 천연기념물이라고 놀려댔다.

 

“ 난 차를 싫어하는 게 아니야. 내가 운전하는 게 싫을 뿐이야. ”

“ 기사가 운전해 주면 좋겠다는 거야? 여기서 루뱐카 가까운 거 몰라? 그런 얘기 하면 부르주아라고 잡혀간다. ”

“ 그런 게 아냐. 신호 지키는 게 힘들단 말이야. 줄 맞추는 것도. ”

“ 그러면서 어떻게 발레를 하게 됐담. 넌 수석무용수라서 다행인 줄 알아. 안 봐도 뻔해. 군무 출 때 어땠을지. 줄도 못 맞추고 혼자 엇나가서 엄청 혼났겠지. ”

“ 군무 세웠으면 진짜 그랬을지도 몰라. 나 한 번도 안 춰봤거든. ”

“ 아참, 잊었네. 졸업하기도 전에 키로프에서 잠자는 미녀랑 호두까기 왕자 춘 앤데. 입단하자마자 솔리스트 달았지. 그쪽 감독도 알았던 거야, 군무에 넣었다가는 대재앙이 일어날 거란 걸. ”

 

난 미샤가 뭐든지 잘 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말이 이해가 안 갔고 나중에 아빠에게 물어보았다. 아빠는 무용수마다 어울리는 역이 있다고 했다.

 

“ 군무는 조화가 제일 중요한데 혼자 튀어버리면 안되잖아. 그건 주인공이나 솔리스트 몫이야. ”

“ 왕자님이라서 그런 거야? ”

“ 비슷해. ”

 

나중에 미샤와 아르바트 거리를 걸을 때 깨달았다. 아빠 말이 맞다는 걸. 미샤는 어디서나 튀었다. 무대가 아닌 곳에서도. 인파에 뒤섞여 있어도 금방 미샤가 어디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다.

 

미샤는 날 뒤에 앉히고는 안전벨트를 꼭 매라고 했다. 그리고는 조금만 가면 되니까 차가 흔들려도 참아달라고 했다. 그래놓고 정작 자기는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 내가 지적하자 잊어버렸다고 둘러댔다.

 

블린 가게는 좁은 골목 안에 숨어 있었다. 미샤는 근처에 차를 대고는 내가 내리는 걸 도와주면서 멀미 안 했느냐고 물어보았다. 자기 운전 실력이 엉망이란 걸 알기는 아는 모양이었다.

 

가게는 살짝 어두웠고 좁은 편이었지만 이미 사람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거의가 대학생 언니오빠들이었다. 자리가 없어서 줄을 서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미샤가 구석 창가 쪽에 딱 하나 남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해서 날 데리고 들어갔다.

 

블린은 무척 맛있었다. 난 연유와 꿀 얹은 걸 각각 한 장씩 먹고 아주 달콤한 크랜베리 주스를 마셨다. 미샤는 스메타나와 연어 알 올린 블린을 한 장 주문해서 내게 반을 잘라 주고 채친 닭가슴살과 양배추, 토마토가 섞인 샐러드를 먹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아무 것도 타지 않은 차를 마셨다.

 

“ 왜 그런 걸 먹어? 아침도 안 먹었다면서? ”

“ 어제 저녁에 이그나트가 자기 생일이라고 아이스크림이랑 케익을 잔뜩 먹여서. ”

“ 저녁에 먹은 건데 무슨 상관이야? ”

“ 단 걸 많이 먹었으니까 균형을 맞추는 거야. ”

“ 난 발레리나 못 될 것 같아. ”

“ 왜? ”

“ 너무 조금 먹어야 되고, 맛있는 건 하나도 못 먹고... ”

“ 아니야. 그건 사람들이 오해하는 거야. 무용수들 많이 먹어. 조금 먹으면 힘이 안 나서 춤 못 춰. 초콜릿도 가끔 먹어. ”

“ 미셴카는 초콜릿 안 좋아하잖아. ”

“ 나도 연습하다 힘들면 먹어. 당분 때문에 빨리 기운이 회복되거든. ”

 

초콜릿은 맛있어서 먹는 건데 밥 먹으러 갈 시간도 없이 빨리 힘을 내려고 먹는다니 생각만 해도 우울했고 미샤가 좀 불쌍했다. 그리고 엄마가 발레학교에 가지 말라고 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제 아픈 거 다 나았어? ”

“ 응. 그때 보르쉬 먹고 다 나았어. ”

 

내가 가져다 준 보르쉬 덕에 나았다니 무척 뿌듯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지 못한 게 새삼 아쉬워서 다음 주에는 무대에 안 올라오느냐고 물었다.

 

“ 아니, 다음 주엔 없어. 베를린에 가. ”

“ 놀러? ”

“ 공연 때문에. ”

“ 누구랑? 마리야 언니 무릎 다쳤다면서. ”

“ 아무도 안 가. 나 혼자. ”

“ 혼자 가서 어떻게 춰? ”

“ 그쪽 극장 사람들이랑 추는 거야. ”

“ 좋겠다, 미셴카는. 뉴욕도 가고 베를린도 가고. 파리랑 런던도 가봤잖아. 다른 데들도... ”

“ 라라가 크면 더 많이 갈 수 있을 거야. ”

“ 어떻게? 난 발레도 안 하는데. 외국에 어떻게 가? ”

“ 그때가 되면 외국에 가기 쉬워질 거야. ”

“ 나쟈네 언니가 그러는데 서기장님이 외국 가는 거 계속 막을 거랬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도장 안 찍어준대. 나가려면 당원이 돼야 한댔어. ”

“ 난 당원이 아닌걸. ”

“ 그래도 미셴카는 국회의원들하고 친하잖아. ”

“ 안 친해. ”

 

처음으로 미샤가 내 앞에서 화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화난 얼굴이었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미샤는 곧 사과했다.

 

“ 미안해. 너한테 화내면 안 되는데. ”

“ 왜 국회의원들을 안 좋아해? ”

“ 난 중요한 사람들은 안 좋아해. ”

 

그 말은 어쩐지 이해가 됐다. 나도 중요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난 내 몫의 블린을 다 먹은 후 미샤가 준 반쪽도 다 먹었다. 배는 불렀지만 너무 맛있어서 자꾸 먹고 싶었다. 그래서 손님이 그렇게 많은 모양이었다. 모스크바에 온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집을 알아냈느냐고 묻자 미샤가 웃었다.

 

“ 작년에 모스크바 대학 교수가 데려와 줘서 알았어. ”

“ 어떻게 교수님을 알아? ”

“ 아, 지나 남편이야. 그땐 결혼하기 전이었지만. 지금은 레닌그라드 대학에 있어. 5월에 세미나 때문에 온다고 했는데 그때도 여기서 보자고 하더라. 마르크는 블린 진짜 좋아하거든. ”

“ 어떻게 계속 친하게 지내? 지나 언니랑 결혼한 남자가 밉지 않아? ”

“ 왜 미워야 돼? ”

“ 나 같으면 미울 텐데... 그 아저씨가 지나를 뺏아 갔잖아. ”

“ 뺏다니. 내가 지나한테 마르크 소개시켜줬는걸. ”

“ 난 오빠가 지나 언니랑 결혼하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

“ 그랬구나. 아닌데. 지나랑은 좋은 친구였어, 지금도 그렇고. ”

 

어쩐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지나 말고 혹시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가슴이 뛰어서 도저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때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몇 명이 머뭇거리며 다가오더니 미샤에게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자주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난 그냥 주스를 마시면서 미샤가 사인을 해주는 걸 구경했다. 그러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른 테이블에 있던 언니오빠들도 우르르 몰려왔다. 백조의 호수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수요일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언니도 있었다. 어떤 오빠는 미샤가 이런 학생들 카페에 와서 점심을 먹을 줄 몰랐다며 깜짝 놀라기도 했다.

 

미샤는 별로 귀찮아하지도 않고 사인을 해 주었다. 몇 명이 사진 찍자고 했을 때도 친절하게 응해 주었다. 촬영이 끝났을 때 로미오와 줄리엣 봤다는 언니가 열렬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 볼쇼이에 계속 있을 거죠? 모스크바 떠나지 마세요. 약속해 주세요. ”

 

난 미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해 주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다. 어쩌면 그 언니보다도 더. 하지만 미샤는 그냥 웃었고 그 언니가 내민 손수건 위에도 마저 사인을 해 주었다. 가게를 나가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더 왔고 그 질문도 몇 번이나 더 나왔지만 미샤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   *   *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잠시 모스크바 강가를 산책했다. 미샤는 재킷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자꾸 사람들이 알아보고 다가와서 그런 것 같았다. 난 선글라스를 끼지 않은 미샤가 더 좋았지만 그래도 산책을 방해받는 것보다는 나았다.

 

날씨는 많이 따뜻해져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라일락이 필 거란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미샤는 나와 보폭을 맞춰서 천천히 걸었다. 그럴 땐 꼭 우리 아빠 같았다. 하지만 미샤는 우리 아빠보다 키도 크고 다리도 더 기니까 내 걸음에 맞춰주려면 더 천천히 걸어야 했다. 바람이 불어와 미샤의 검은 머리와 스카프가 부드럽게 펄럭거렸다. 스카프가 흰색이라 꼭 백조 날개처럼 보였다. 바람이 조금만 더 세게 불면 날개를 펼치고 공중으로 날아올라갈 것 같았다. 처음으로 난 미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무대처럼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미샤를 올려다보며 잔디밭을 걷다가 돌멩이에 걸려 삐끗할 뻔 했다. 다행히 미샤의 팔을 잡고 꼭 매달려서 넘어지지는 않았다.

 

“ 라루샤, 괜찮아? ”

“ 응. 돌멩이가 있었어. ”

 

난 미샤의 손목을 꼭 쥐고 있다가 소매 사이로 두툼하게 도드라진 붕대의 감촉을 느끼고 아플까봐 얼른 손을 놨다. 조금 긁혔다면서 왜 아직도 붕대를 풀지 않았는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미샤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라라, 가방에 든 건 뭐야? 아까부터 계속 메고 있네. ”

“ 아, 맞다! ”

 

난 까맣게 잊고 있었던 보석 달걀을 떠올리곤 등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상자를 꺼냈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엄마가 한 얘기를 전해 주었다. 상자를 돌려주면서 덧붙였다.

 

“ 엄마가 그러는데 여기 박힌 거 전부 진짜 보석이래. 미셴카가 몰라서 그랬을 거라고. 잘 간수해야 할 거래. 금고에 넣어놔야 한대. ”

 

미샤는 내게서 상자를 받았고 뚜껑을 열어 보석 달걀을 꺼냈다. 아주 잠깐 햇빛에 비춰보더니 망설이지도 않고 강물에 던져 버렸다. 달걀은 원반처럼 빙그르르 돌더니 바람을 타고 휙 날아갔다. 반짝반짝 빛나면서 수면 위를 날다가 물거품을 일으키며 가라앉았다. 난 강물에 뛰어들어서 계란을 건져 오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멀리 날아가서 헤엄쳐 갈 수도 없었고 잠수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미샤는 상자를 잔디밭 위에 내려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걷기 시작했다.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여전히 나와 걸음을 맞춰주고 있었다. 마침내 난 햇살이 자잘하게 부서지는 강물을 보면서 물었다.

 

“ 그래서 그런 거야? ”

“ 뭐가? ”

“ 밤에 보석처럼 보이는 거, 강물. 바닥에 진짜 보석이 가라앉아 있어서 그런 거야? 방금 그런 것처럼? 그래서 밤에 빛을 내는 거야? ”

“ 그럴지도. ”

“ 그럼 레닌그라드는? 백야는? 강이 전부 보석인 거야? ”

 

미샤는 소리 내어 웃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냥 내 손을 잡고 계속 강가를 따라 걷기만 했다. 난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원래 왕자님들은 그런 법이니까. 정말 궁금한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야 멋있어 보이니까 그런가보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중에 아빠에게 물어보면 된다. 아빠는 언제나 대답을 해주니까. 미샤의 말대로, 아빠 말은 언제나 맞으니까.

 

 

 

 

- FIN -

2014.4.20 -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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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부활절 단편이 끝난다.

 

파베르제 달걀들 이미지 몇 장.. 지금도 러시아 가면 파베르제 이름 달고 나오는 아름다운 달걀들이 많지만 옛날에 만든 오리지널들은 정말 박물관이나 부호, 수집가의 손에...

 

나스챠는 라라에게 '이거 진짜 옛날 파베르제야..'라고 하는데 진짜 오리지널인지, 후손들이 만든 값비싼 세공품인지는 이제 강에 가라앉아서 아마 끝까지 모를테지만 어쨌든 박혀 있는 것들이 전부 진짜 보석이니 귀중품인 건 맞다. 단편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 보석 달걀을 미샤에게 준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가학적 권력자이긴 해도 심미안은 뛰어난 사람이니 아마 그 달걀은 아주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래 이미지의 파베르제 달걀들 중에는 오리지널도 몇 점 있다.

 

 

 

 

 

 

 

 

 

그리고 보석 달걀보다 라라가 더 좋아하는 맛있는 블린 이미지도 하나.. 올리고 보니 미샤가 주문했던 연어알과 스메타나 얹은 블린이네 :) 어쨌든 부활절 단편이므로 달걀과 블린으로 끝난다.

 

 

 

:
Posted by liontamer
2015. 1. 7. 15:41

보석을 흩뿌려놓은 듯한 네바 강 russia2015. 1. 7. 15:41

 

 

요즘 writing 폴더에 올리고 있는 예전 단편과 관련해.. 4장에서 미샤가 라라에게 모스크바 강과 네바 강, 보석처럼 빛나는 강물과 백야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이 있는데(4장 : http://tveye.tistory.com/3394) 그 부분 쓸 때 이렇게 네바 강변을 산책하던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7월. 여름. 찬란한 네바 강.

 

길게 뻗어 있는 건물은 바로 에르미타주.

 

 

 

 

 

 

 

 

마지막 사진은 자정 즈음. 오른편에 보이는 건물은 쿤스트카메라.

 

** 그 단편 링크는 여기.. 마지막 5장은 오늘 저녁 올릴 예정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 : http://tveye.tistory.com/3394

 

:
Posted by liontamer

부활절 이야기 네번째 파트.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은 분량이 좀 길다.

 


* 이 글을 무단으로 전재, 배포, 복제, 인용하거나 퍼가지 말아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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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els

пасхальный рассказ

 

 

 

 

 

- 4 -

 

 

 

 

다음날 난 수업을 마치자마자 곧장 버스를 타고 미샤가 사는 동네로 갔다. 점심 때 마르가리타 아줌마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니 미샤가 이미 퇴원해서 집에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알면 야단칠 게 뻔했기 때문에 나쟈에게 걔네 집에서 숙제하고 노는 걸로 해달라고 말을 맞춰두었다. 아냐도 데려가고 싶었지만 동생은 아직 어려서 비밀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았고 같이 버스 타는 것도 불안해서 그냥 혼자 가기로 했다.

 

미샤의 집은 극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5분만 걸어내려 오면 바로 모스크바 강가였지만 녹지와 큰 울타리가 쳐진 건물들 때문에 버스에서 막 내려서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스베타 얘기로는 국회의원들과 당 간부들, 별 달린 장군들, 훈장 받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굉장한 동네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난 너무 감탄해서 미샤에게 어떻게 그렇게 좋은 동네에 아파트를 얻었느냐고 물어보았다. 미샤는 자기가 얻은 게 아니고 극장에서 구해 줬다고 했다.

 

“ 난 스탄카 집이 더 좋은데. 여긴 극장에서 너무 멀어. 걸어가면 한참 걸리는걸. ”

“ 그래서 우리 아빠 집에 와 있는 거야? ”

“ 응. 스탄카가 와 있어도 된다고 했어. 레닌그라드에서도 같이 있으니까 일하기 좋았어. ”

 

난 딱 한 번 미샤의 아파트에 올라가본 적이 있었다. 막 이사 와서 아빠가 짐 정리를 도와주러 갔을 때였다. 집이 엄청나게 넓었다. 우리 집이 몇 개나 들어갈 것 같았다. 한 층 전체가 그냥 집 하나였다. 레닌그라드에서 미샤가 지나와 같이 살던 아파트도 넓고 근사했었지만 그 집보다도 더 컸다. 미샤는 이삿짐 상자 몇 개를 한쪽에 그대로 쌓아놓은 채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땐 1월이었고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비행기가 뜨지 않았기 때문에 레닌그라드에서 올라오는 데 무척 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고급 아파트였지만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탓인지 난방이 다음날부터 된다고 해서 집안은 꽤 추웠다. 그래선지 미샤는 코트를 입고 스카프도 풀지 않은 채 소파에 길게 누워 자고 있었다. 얼마나 깊게 자는지 우리가 들어온 것도 몰랐다. 아빠는 미샤를 깨우는 대신 상자를 하나하나 열어 옷과 책들을 대충 정리해 주었다. 아빠는 우리가 잘 때도 절대로 깨우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랑 같이 살 때도 가끔 핀잔을 듣곤 했다. ‘당신이 라라를 늦잠꾸러기로 만들 거야!’ 라고. 하지만 아빠는 곤하게 자는 사람은 가만히 놔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나에게도 미샤를 깨우지 말고 책 정리를 도와주거나 한쪽에서 조용히 놀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미샤는 진짜 늦잠꾸러기였다. 공연 때문에 극장에서 늦게 돌아오는 탓도 있겠지만 웬만하면 9시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뜬 후에도 한동안은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했다. 주말에 미샤가 와 있는 날 아침이면 아빠는 나와 아냐에게 그를 깨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냐는 침실로 기어들어가 미샤를 깨워 놀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난 텔레비전 만화 볼륨을 열심히 낮추곤 했다.

 

그 날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가 아닌 남자에게 키스를 했다. 잠자는 미녀에서 왕자님이 오로라 공주에게 입 맞추듯이. 미샤는 내가 발끝을 들고 살금살금 소파 곁으로 다가갔을 때도, 목에 두르고 있는 스카프를 살짝 젖혔을 때도, 가슴에 머리를 기댔을 때도 깨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입술에 살짝 키스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땐 너무 긴장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마터면 어지러워서 뒤로 자빠질 뻔 했다.

 

나쟈와 비카는 그 얘길 듣고 완전히 흥분해서 느낌이 어땠느냐고 캐물었다. 난 솔직하게 대꾸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그냥 어지러웠다고, 미샤와 아빠에게 들킬까봐 너무 긴장돼서 정신이 없었다고. 그러자 언니가 있는 나쟈는 고개를 저으면서 내가 키스를 안 해봐서 그렇다고, 처음 해봐서 제대로 못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진짜 키스를 하면 남자가 꼭 안아주고 답례로 자기도 키스를 해준다고 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어쨌든 미샤는 너무 곤히 자느라 내가 키스한 것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내가 나쟈와 비카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부끄럽기도 했고 어쩐지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미샤는 입술이 부드러웠다. 꼭 아냐의 입술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그리고 좋은 냄새가 났다. 사실 레닌그라드에서 같이 보트를 탔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우리 엄마보다, 학교에서 제일 예쁜 타치야나 선생님보다 더 좋은 향기가 나.'  미샤는 향수를 쓰니까 아마도 그것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아빠의 집에서 막 씻고 나와서 우리와 놀아줬을 때도 희미하게 그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그냥 체취라는 걸 알았다. 아냐에게서 우유 냄새가 나고 우리 엄마에게서 희미한 파우더 냄새가 나는 것처럼.

 

미샤는 30분 후에야 깨어났고 키스는커녕 내가 와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빠가 짐을 정리하고 있는 걸 보고는 그냥 놔두라고 미안해하더니 나랑 아냐를 데려와 같이 저녁 먹자고 했다. 난 그때까지도 어지럽고 부끄러워서 피아노 뒤에 숨어 있었고 아빠가 불렀을 때에야 쭈뼛거리며 기어나갈 수 있었다. 미샤는 날 보더니 굉장히 반가워했고 코트 주머니에서 무척 귀여운 머리핀을 꺼내 주었다. 폭신하고 보드라운 은빛 솜털이 달려 있는 자작나무 핀이었다. 미샤에게는 언제나 예쁘고 근사한 물건들을 골라내는 재주가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부활절 달걀도 그렇게 잘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버스에서 내린 후 난 전에 봐 두었던 빵집 간판을 찾아냈고 조금 헤맨 끝에 공원 왼편의 작은 문을 통과해 미샤의 아파트를 간신히 찾아냈다. 수프가 든 보온병과 보자기에 싼 쿨리치를 양손에 들고 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수프는 놓고 올 걸 하고 후회했지만 아플 때는 뜨끈한 보르쉬를 먹어야 했다. 엄마는 나와 아냐가 아플 때 항상 그렇게 말했다. 그래야 비타민과 철분을 섭취할 수 있다고. 아침에 엄마 몰래 냄비에서 덜어내느라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겨우겨우 울타리들을 지나 아파트 건물 앞에 도착했지만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장애물과 부딪쳤다. 그 아파트는 1층 전체가 경비실로 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두 겹의 문으로 막혀 있었고 뒤편으로 나 있는 계단으로 가는 문도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지키고 있었다. 꼭 외국인들이 가는 호텔 같았다. 전에는 아빠랑 같이 왔었고 아빠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쓴 아저씨가 날 보더니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난 미샤의 이름과 아파트 호수를 댔고 아빠 친구라서 보러 왔으니 들여보내달라고 부탁했지만 아저씨는 안 된다고 했다.

 

“ 왜 안돼요? 1월에도 왔었는데. 우리 아빠 진짜 미샤 친구예요. 볼쇼이에서 안무해요. 우리 아빠도 유명해요, 스타니슬라프 일린이에요. 국영채널 방송에도 나왔어요. 내 이름은 라라예요. 미샤는 그저께도 우리 집에서 같이 저녁 먹었어요. 진짜예요. ”

 

경비 아저씨는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래도 안 된다고 했다. 옆에 있던 다른 아저씨도 거들었다.

 

“ 그래, 네 말이 맞다고 치자.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정 올라가고 싶으면 아빠와 같이 오든가. ”

“ 우리 아빤 지금 극장에 있단 말이에요! ”

“ 그런 말을 하는 여자들이 여기 얼마나 많이 오는지 아니? 꽃다발에 선물에 거짓말에... 이젠 이런 꼬마까지 와서 떼를 쓰니 참... ”

“ 난 꼬마가 아니에요! 학교 다녀요! 열 살도 넘었어요! 진짜예요, 미샤랑 정말 아는 사이예요. 미샤가 아프댔어요, 그래서 보르쉬 가지고 왔어요. 미샤는 아파도 참는단 말이에요, 저녁에는 밥도 잘 안 먹어요. 우리 엄마가 아프면 잘 먹어야 된다고 했는데. 그냥 놔두면 계속 아플 거예요. 제발 들여보내 주세요. ”

 

난 결국 답답하고 억울해서 엉엉 울어버렸다. 내가 울자 아저씨들은 굉장히 난처해했다. 무뚝뚝하던 아저씨가 날 달래주면서 보르쉬를 놓고 가면 자기가 미샤에게 전해주겠다고 했다.

 

“ 안돼요! 미셴카한테 안 주고 아저씨가 먹어버릴지 어떻게 알아요! ”

 

아저씨는 절대 안 먹을 테니 믿어달라고 했지만 난 악착같이 버텼다. 들여보내달라고 계속 떼를 쓰며 울었다. 아저씨들이 못 들어가게 하자 더럭 겁이 나고 걱정이 됐다. 이 아저씨들이 이렇게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해서 미샤가 진짜 많이 아픈데도 위에서 혼자 누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너무 슬퍼서 자꾸 눈물이 나왔다. 미샤는 자기 집이 너무 넓어서 싫다고 했고 아늑한 우리 아빠의 아파트가 훨씬 좋다고 했었는데.

 

내가 주저앉아서 계속 울자 안쪽 사무실에서 어떤 아줌마가 나왔다. 매부리코에 굉장히 무섭게 생긴 아줌마였다. 당장이라도 보온병과 케익을 빼앗아 바닥에 집어던지고 날 내쫓을 것 같아서 무서웠지만 그래도 계속 울면서 버텼다. 아줌마는 경비 아저씨들에게 자초지종을 듣더니 나에게 이름과 아빠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는 거짓말하면 가만 안 두겠다, 부모님과 학교에 얘기해서 혼쭐을 내주겠다고 협박하더니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 난 그 무서운 아줌마가 엄마에게 전화하는 줄 알고 겁에 질렸다. 하지만 잠시 후 아줌마가 나오더니 손수건으로 눈물과 콧물을 닦아 주었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아줌마는 내 손을 잡고 두 겹의 육중한 문을 열더니 엘리베이터로 데려다 주었다. 보온병과 쿨리치도 들어 주었다. 알고 보니 친절한 아줌마였다. 미샤의 집으로 직접 전화를 해서 나랑 아는 사이가 맞는지 물어봤다고 했다.

 

“ 미샤 집에 있어요? ”

“ 있으니까 전화를 받았지. ”

“ 안 아파요? ”

“ 모르겠는데, 목소리는 괜찮았어. ”

“ 왜 아저씨들이 지키면서 못 들어가게 해요? ”

“ 여기는 중요한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그래. 아무나 못 들어가. ”

“ 미샤는 중요한 사람이에요? ”

“ 글쎄, 여기 사니까 아마 그렇겠지. ”

“ 중요한 사람은 배 나온 아저씨들인데... 막 당에서 연설하고... ”

 

매부리코 아줌마가 웃었다.

 

“ 그러니? 그럼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구나. 모델처럼 날씬하니까. ”

“ 모델이 아니고 무용수예요. 볼쇼이에서 제일 잘 춰요. 외국에도 많이 갔어요. 상도 많이 받았어요. ”

“ 아줌마도 알아, 사인도 받았는걸. 표 받아서 공연도 봤어. ”

“ 미샤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고 좋은 사람이에요. ”

“ 그래, 좋은 사람 같긴 하더라. 그러니까 표도 줬지. ”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줌마는 7층을 눌러준 후 보온병과 쿨리치를 내게 돌려주었다. 난 주머니에서 장식 계란을 한 개 꺼내 아줌마에게 주었다. 아저씨들 것까지 주고 싶었지만 두 개밖에 안 가져왔고 하나는 미샤 몫이었다. 아줌마는 무척 좋아했고 나에게 잘 놀다 가라고 인사도 해줬다.

 

 

*    *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미샤가 복도에 나와 있었다. 내가 괜찮으냐고 묻기도 전에 먼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 라루츠카, 왜 이렇게 울었어? ”

“ 안 울었어. ”

“ 눈이 퉁퉁 부었는걸. ”

“ 아저씨들이 못 올라가게 해서. ”

“ 나한테 전화하지, 그럼 내려갔을 텐데. 비까지 맞고... 우산 없었어? ”

“ 버스 탈 때까진 비 안 왔어. ”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미샤는 수건을 가져와 내 얼굴과 머리를 닦아 주었다. 보르쉬가 든 보온병과 쿨리치는 뭐냐고 묻지도 않고 받아서 티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내 머리의 물기를 털어주기 바빴다.

 

“ 옷 갈아입어야겠다. 감기 걸릴 거야. 잠깐만 있어봐. ”

 

미샤는 현관에서 제일 가까운 쪽 방문을 열었다. 큰 거울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옷장이 여러 개 있었고 얇은 커튼으로 가려진 바퀴 달린 옷걸이도 보였다. 극장 의상실에서나 보던 거였다. 그는 옷장 서랍을 열어 안을 뒤지더니 티셔츠를 하나 꺼내서 내게 주었다.

 

“ 젖은 거 벗고 이거 잠깐만 입고 있어. 라디에이터에 널어놓으면 금방 마를 거야. ”

“ 이거 누구 옷이야? ”

“ 내 거야. 미안하네, 라라가 입을만한 옷이 없어서. 예쁘진 않지만 잠시만 입고 있어. ”

 

예쁜 옷보다 미샤가 입었던 옷이 천 배는 좋았지만 부끄러워서 그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아냐라면 서슴없이 말했을 텐데. 미샤는 날 침실로 데려다 주며 옷을 갈아입으라고 한 뒤 나갔다. 난 점퍼와 스웨터와 바지와 양말을 벗었다. 그래도 속옷은 젖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후 미샤가 준 티셔츠를 입었다. 물론 나한테는 엄청 컸다. 무릎 아래까지 펄럭이며 내려왔고 반소매 티셔츠였지만 소매 끝이 거의 팔목에 닿았다. 원래는 짙은 파란색이었던 것 같았지만 많이 빨아서 그런지 흐릿한 푸른색으로 물이 빠져 있었고 감촉이 보들보들했다. 잠옷은 아니고 연습할 때 입는 옷 같았다. 카펫 위에 선 채 잠시 두 팔로 어깨를 꼭 감싸고 티셔츠의 보드라운 감촉을 느껴 보았다. 세탁해서 개켜 두었던 옷이라 희미한 세제 냄새 밖에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미샤가 입었던 옷이라고 생각하니 행복했다.

 

침대 시트와 담요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아프니까 당연히 누워 있었을 줄 알았는데. 커튼이 젖혀져 있지 않아 스탠드 램프를 켰는데도 어두웠다. 나이트 테이블 위에는 장미 몇 송이가 꽂힌 꽃병과 책이 두어 권 놓여 있었다. 레닌그라드에 있을 때도 미샤의 집에는 언제나 꽃이 가득했다. 팬들이 매일같이 꽃다발을 가져다주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로 이사 온 후에는 우리 집에 올 때 자주 꽃을 가져왔고 극장 동료들에게도 꽃을 나눠주곤 했다. 그 중에서도 장미가 제일 많았다. 한겨울에도 장미를 잔뜩 받았다. 미샤가 장미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 사람들이 어디서 그렇게 꽃을 구하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난 맨발로 부드러운 카펫을 밟으며 잠깐 미샤의 침실을 구경했다. 엄마는 허락받지 않고 남의 침실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들쑤시면 안 된다고 했지만 분명히 미샤가 안에 들어가서 옷 갈아입으라고 했고 아무 것도 만지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화려하고 넓은 아파트에 비해 침실은 간소했다. 침대와 나이트 테이블, 램프와 꽃이 전부였다. 벽에 그림이 하나 걸려 있을 뿐이었다. 연필인지 목탄인지는 모르겠지만 휘갈겨 그린 스케치였다. 어두워서 무슨 그림인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 미샤가 날 불렀다.

 

“ 라루츠카, 옷 불편해? 다른 거 줄까? ”

“ 아니야, 좋아. 다 입었어. ”

 

난 급하게 옷 뭉치를 껴안고 침실에서 나왔다. 미샤는 내게서 젖은 옷들과 양말을 받아 거실 라디에이터에 널었다. 자리가 모자라자 침실 라디에이터에도 마저 널었다. 마침 잘됐다 싶어서 따라 들어가 물었다.

 

“ 저 그림은 뭐야? 그리다 만 거 같아. ”

“ 아, 스케치야. 브루벨이 날아가는 악마 구상할 때 그린 거래. ”

“ 정말? 진짜 브루벨 그림이야? 트레치야코프에 있는 거? ”

“ 응. 근데 날아가는 악마는 레닌그라드에 있어, 러시아 미술관에. ”

“ 어떻게 구했어? 미술관에 있어야 되는 거 아냐? ”

“ 스케치나 소품들은 별도로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대. 예전에 누가 선물해 줬어. 생일에. ”

“ 난 저 그림은 못 봤는데. 레닌그라드 갔을 때도 에르미타주만 갔었어. ”

“ 화집 보여줄까? ”

“ 응. ”

 

미샤는 서재로 가서 굉장히 크고 두꺼운 브루벨 화집을 꺼내왔다. 난 거실 소파에 앉아 화집을 넘겨보았다. 모르는 그림도 많았다. 미샤는 브루벨을 좋아해서 종종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가곤 했다. 난 풍경화와 화려한 초상화들이 더 좋았고 브루벨 그림은 어두워서 그런지 좀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미샤와 트레치야코프에 가면 그가 브루벨 전시실에 있는 동안 다른 방에 가 있곤 했다. 하지만 백조 공주는 좋았다. 환상적으로 예뻤다. 전에 미샤가 그 그림 앞에 서 있을 때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백조 공주가 미셴카랑 좀 닮았다고. 미샤는 남자니까 그런 말을 들으면 당연히 싫어할 것 같아서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지만, 화집을 펼쳐 보니 역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조 공주도 검은 머리였고 피부가 하얬다. 그리고 눈이 깊고 아름다웠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것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매처럼. 그러자 갑자기 좀 슬퍼져서 화집을 덮어버렸다.

 

그때 미샤가 내 발에 슬리퍼를 신기고는 목과 어깨에 폭이 넓고 보드라운 스카프를 둘러 주었다. 하얀 줄이 두 개 들어간 녹색 스카프였는데 무척 따뜻하고 예뻤다. 미샤에게는 멋진 스카프가 많았다. 직접 사기도 했지만 선물도 많이 받았다. 아빠는 미샤가 팬들에게서 받은 스카프가 굼 백화점에 있는 스카프들보다 더 많을 거라고 했다. 나중에 극장 박물관에 방을 하나 내줄테니 거기 그 예쁜 스카프들과 옷가지들을 전시하라고 농담도 했다. 내가 스카프를 만지면서 좋아하는 동안 미샤가 몸을 녹이라고 김이 올라오는 뜨거운 차를 한 잔 주었다.

 

“ 나 안 마실래. ”

“ 쓴 거 아니야, 설탕 넣었어. ”

 

그 말에 안심하고 차를 마셨다. 여전히 별로 달지는 않았다. 미샤는 차에 설탕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스카프를 두르고 차를 마시자 몸이 한결 따뜻해졌고 그제야 난 내가 여기 왜 왔는지 깨달았다. 도리어 미샤가 날 돌봐주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미안했다. 내가 찻잔을 내려놓고 한참동안 쳐다보자 미샤가 물었다.

 

“ 라라,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

“ 왜? ”

“ 비 맞고 여기까지 왔잖아. 울었고. ”

“ 안 울었어. 조금, 조금 눈물만 난 거야. ”

 

다시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아서 급하게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그리고는 미샤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이제 안 아파? ”

“ 누가 그래, 내가 아프다고. ”

“ 아빠가 새벽에 데리러 갔잖아. 어제 병원에 있었고. 내가 가려고 했는데 아빠가 안 된다고 했어. ”

“ 아, 그랬구나. 별 거 아니었는데. 스탄카도 안 와도 됐는데. ”

“ 부끄러워서? ”

“ 뭐가? ”

“ 아빠가 그러는데 미셴카는 아픈 걸 보여주는 게 부끄럽다고 했대. 그래서 나보고 오지 말라고 했어. ”

“ 내가 그랬대? ”

“ 아니야? ”

“ 글쎄, 스탄카가 그렇게 말했으면 그런 거겠지. ”

 

미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티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다. 안색이 좀 창백한 정도였다. 눈은 여전히 밤하늘처럼 까맸고 벨벳처럼 부드러웠다. 잠옷이나 가운을 입고 있지도 않았다. 나에게 준 옷과 비슷한 반소매 티셔츠와 물 빠진 청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왼쪽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을 뿐이었다.

 

“ 거기 다친 거야? ”

“ 어디? ”

“ 손목. ”

“ 아... ”

 

미샤는 흠칫 놀라면서 왼손을 등 뒤로 감췄다.

 

“ 아니야, 살짝 긁힌 것뿐이야. ”

“ 피났어? ”

“ 조금. ”

“ 보르쉬 먹어야 돼. ”

 

까맣게 잊고 있었던 수프 생각이 나서 난 벌떡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던 보온병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눈에 띄는 그릇을 찾아내 수프를 부었다. 아직도 김이 살짝 올라왔다. 뭔가 더 먹을 만한 게 없나 하고 냉장고와 찬장을 뒤졌지만 요리를 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거라곤 케피르와 주스, 흑빵과 오렌지 외에는 없었다. 할 수 없이 흑빵을 좀 잘라서 버터를 발랐다.

 

쟁반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미샤는 바를 잡고 다리를 길게 뻗고 있었다. 거실은 아주 넓었고 한쪽은 완전히 극장 연습실처럼 되어 있었다. 벽 한 면은 완전히 거울로 되어 있었고 기다란 바도 있었다. 구석에는 조그만 피아노도 있었다. 아빠는 안무가였고 거의 매일같이 무용수들과 저런 연습실에서 같이 일했지만 엄마 때문에 난 한 번도 그걸 구경해본 적이 없었다. 음악도 없고 의상도 갖춰 입지 않은 채 미샤가 연습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나중에는 바를 완전히 놓고서도 한쪽 발로 서서 반대쪽 다리를 뒤로 쭉 뻗은 채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런데도 넘어지지 않았다. 전혀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 비행기 같아, 미셴카. 한 바퀴 돌 수도 있어? ”

“ 도는 게 좋아? ”

“ 응. ”

 

그러자 미샤가 그 자세에서 천천히 도는 것을 보여주었다. 근사했다. 이제 비행기가 아니라 진짜 새처럼 보였다. 날개를 편 백조 같았다. 나도 해 보고 싶어서 한쪽 다리를 뒤로 들어보았지만 물론 도는 건커녕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내가 엉덩방아를 찧자 미샤가 와서 일으켜 주었다. 진짜 아팠지만 그보다는 창피했기 때문에 괜찮은 척 하며 미샤의 손을 잡아끌고 티 테이블 앞으로 데려왔다. 그는 긴 소매 셔츠로 갈아입은 후였다. 붕대가 보이지 않자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난 미샤에게 보르쉬와 쿨리치, 그리고 버터 바른 빵을 먹으라고 했다. 미샤는 무척 고마워했다. 무거운데 어떻게 들고 왔느냐고 하면서 그래서 우산을 못 가져왔느냐고 정확히 짚어내 날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고는 같이 먹자고 했다.

 

우리는 함께 수프와 흑빵과 케익을 먹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빵과 쿨리치는 나 혼자 먹었다. 미샤는 별로 배가 고프지 않은 것 같았다. 보르쉬는 맛있다고 했지만 많이 먹지는 않았다. 한 입 먹고 나서는 한참 있다가 다음 숟가락을 떴다. 그것도 나 때문에 억지로 먹는 것 같았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미 내 표정에 실망감이 드러났는지 미샤가 미안해하면서 저녁에 꼭 다 먹겠다고 약속했다.

 

“ 나 수요일에 공연 보러 가도 돼? ”

“ 로미오와 줄리엣은 나스챠의 리스트에 없었던 것 같은데. ”

“ 그치만 내용은 다 아는걸. 도서관에서 책도 빌려 읽었어. ”

“ 스탄카가 된다고 하면. ”

“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미셴카가 설득해줘. ”

“ 너희 아빠는 설득하기 힘들어. 도리어 내가 항상 넘어가는걸. ”

“ 어제 주사 맞았어? ”

“ 아니. 주사 맞을 만큼 아프지 않았어. ”

 

그럼 왜 아빠가 병원에 그렇게 오래 있어야 했느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미샤는 현관문에 달린 작은 거울로 바깥을 확인하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눈에 띄게 예쁜 여자가 들어왔다. 이미 4월이었지만 은회색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 화려한 빨간색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입술도 꽃잎처럼 빨갛게 칠하고 있었다. 짙은 밤색 머리칼은 반짝거리는 구슬이 박힌 핀으로 틀어 올리고 있었다. 새파란 눈이 꼭 고양이 같았다.

 

물론 난 그 여자를 금방 알아봤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화려한 옷차림과 짙은 화장 때문인지 무대 위에서 볼 때와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벨리나 크리셴스카야였다. 볼쇼이 발레리나였다. 엄마는 극장 쪽 친구들과 얘기할 때 크리셴스카야를 실력보다는 외모로 뜬 여자라면서 어찌어찌 제1 솔리스트는 됐지만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려면 더 노력해야 할 거라고 헐뜯은 적이 있었다. 아빠는 같이 일하는 무용수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런 혹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 년 전에는 그녀를 위해 짧은 춤을 고안해 무대에 올려준 적도 있었다. 난 미샤가 크리셴스카야와 춘 백조의 호수를 한 달 전에 봤다. 그녀는 화려한 외모 때문인지 오데트보다는 오딜에 훨씬 잘 어울렸다. 하긴 그때도 내 관심은 온통 미샤에게 쏠려 있긴 했지만.

 

“ 안녕하세요,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 ”

 

미샤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는 훨씬 나이가 많은 우리 아빠나 마르가리타 아줌마에게도 편하게 말을 놓곤 했기 때문에 크리셴스카야에게 그렇게 깍듯하게 대하는 게 낯설었다.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하긴 그녀는 미샤보다 나이도 몇 살 많았고 볼쇼이에서는 훨씬 선배니까 무용수들 사이에서는 그래야 할지도 몰랐다. 비록 미샤는 수석무용수였고 크리셴스카야는 아니었지만. 극장에서는 그런 것보다도 선후배 사이의 예의를 많이 따진다고 들었다. 미샤가 목도리와 코트를 받아 주려고 했지만 크리셴스카야는 고개를 저었다.

 

“ 됐어, 금방 나갈 거야. 수요일 로미오 그대로 가는 거야? ”

“ 바뀔 이유가 없잖아요. ”

“ 줄리엣 내가 추기로 했어. 마리야가 무릎 때문에 빠졌어. 너도 솔직하게 말해, 안 될 것 같으면 빠져. 그럼 이고리와 맞춰볼 테니까. ”

“ 왜 제가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시죠? 키로프에서도 로미오는 많이 췄는데. 저랑 다른 건 같이 춰 보셨잖아요. ”

“ 네가 별로라는 게 아냐. 너처럼 잘 나가는 애랑 호흡 안 맞는다고 얘기했다간 극장에서 쫓겨나라고. 내가 미쳤어, 그런 얘기 하게? ”

 

크리셴스카야는 휘파람을 불었고 잠깐 미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 뭐 멀쩡한 것 같네. 그래도 불안해. 테라스 파 드 두도 그렇고 피날레도 그렇다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려야 하잖아. ”

“ 어깨 부상은 작년에 다 나았는걸요. ”

“ 진짜 연기도 잘한다니까. 그 얘기 아닌 거 알잖아. ”

 

그녀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와 미샤의 왼쪽 팔을 잡아당겼다. 소매 위로 손목 부근을 가볍게 톡톡 건드렸다. 미샤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팔을 뒤로 빼냈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 누구한테 들었어요? ”

“ 지금 스탄카가 얘기했을까봐 배신감 느끼는 거야? 그 사람이야 절대 말 안하지. 정말 스탄카가 거기 와서 널 데려간 줄 알았어? 말이 안 되잖아. 그 사람이 거기가 어딘 줄 알고 찾아왔겠어. ”

“ 그럼... ”

 

난 미샤가 그렇게 창백해지는 걸 처음 봤다. 무대 조명을 그대로 얼굴에 받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시 보니 비가 그쳐서 창문 너머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인 것 같았다. 크리셴스카야는 낮게 웃었다. 연극배우처럼 멋지고 과장된 웃음이었다. 그 여자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게 없었지만 미샤와는 사이가 나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빨리 나가줬으면 싶었다. 우리 아빠 이름을 자꾸 말하는 것도 싫었다.

 

“ 왜, 게르만 알렉세예비치였을까봐? 그랬으면 네가 지금 여기 와 있겠어? 그 사람이 발견했으면 공연이고 뭐고 곧장 클리닉에 처박았겠지. 아예 어제 베를린에 데려갔을지 누가 알아. 그거 내 차였어. 문도 잠가 놨었는데 어떻게 땄는지 모르겠네. 게르만이 선물해 준 차였는데... 일부러 거기서 그런 거야? ”

“ 몰랐어요. 미안해요. ”

“ 됐어, 시트만 바꾸면 되니까. ”

“ 스탄카 말고 누구에게 또 얘기했어요? ”

“ 그게 그렇게 중요해? 감독이 알면 자르기라도 할까봐? 키로프에서 뺏아오려고 별의별 짓을 다 했는데 기껏 그런 바보짓 했다고 널 자르겠어? 그러다 자기가 잘리겠지.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 뭐 좋은 일이라고. ”

“ 미안해요,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 불편하게 만들어서. ”

“ 불편하게? 그런 짓을 해놓고 기껏 한다는 말이 그거 밖에 없어? 하긴 피곤하긴 했지. 집에 가고 싶었는데... 나한테 미안해 할 건 없어, 그런 꼴 전에 안 본 것도 아니고. 너도 어차피 맨 정신도 아니었을 테니까. 그렇게 술 못 마시는 줄은 몰랐어. 게르만에게서 듣긴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지. 그거 한 잔 먹이니까 그냥 가버리던데. ”

“ 저, 제가 선배님에게 실수라도 했어요? 그러니까, 그 집에서... ”

 

크리셴스카야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정말 고양이 같은 눈초리였다. 난 그 여자가 미샤를 할퀴거나 한 대 때릴 것 같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쟁반을 꼭 쥐고 여차하면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숨을 쉬었고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 너 어디까지 기억나? ”

“ 뭐가요? ”

“ 그거 마시고 나서. ”

 

미샤는 갑자기 생각난 듯 내 쪽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 나중에 얘기해요, 에벨리나. ”

“ 쟤 누구야? ”

“ 라라요. ”

“ 아, 스탄카 딸이구나. 닮았네. ”

 

크리셴스카야는 내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목소리를 약간 낮추었을 뿐이었지만 귓가에는 그대로 다 들렸다.

 

“ 크라베츠는 기억나? ”

“ 모르겠어요, 취해서. 그 자리에 같이 계셨던 거예요? ”

연기인지 진짜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니까. 마음대로 해. 기억 안 나는 편이 더 좋으면 그렇게 해 둬. 나도 그 쪽이 더 좋아. 그래야 수요일 무대도 더 편해. 내일 아침부터 맞춰보면 되겠지. 열 시까지 나올 수 있어? ”

“ 네. ”

“ 보르쉬 먹어, 철분이 많으니까. 너 나한테 빚졌어. 혈액형 같아서. ”

“ 고마워요. ”

“ 정말 고맙기는 해? 원망하는 건 아니고? 난 후회하는데. 그냥 놔뒀으면 좋았을걸. ”

 

크리셴스카야는 고개를 돌려 거실 쪽을 힐끗 훑어보았다. 날 본 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내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집 좋다더니 정말이네. 나한테는 차 밖에 안 줬는데. 금방 인민예술가 만들어주겠어. 그 사람 여기로 와? ”

“ 전 스탄카 집에서 자요. 극장에서 가까워서. ”

“ 반항은 적당히 해둬. 게르만은 성깔 부리는 애 좋아하긴 하지만 수틀리면 그저께보다 더 끔찍하게 굴 테니까. 아, 하긴 넌 기억 안 난다고 했지. 그냥 곱게 여기 머물러 있어. 주는 대로 받고 말도 잘 듣고. 공연히 다른 사람 집에 드나들지 마. 그 사람은 화나면 무슨 짓 할지 모르니까. ”

 

미샤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현관으로 나가서 문을 열면서 혼잣말처럼 가만히 물었다.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 ”

“ 뭐가? ”

“ 그 사람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

“ 진짜 웃긴다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양보라도 해 주려고? 그 사람이 그런 거 신경이나 쓸 것 같아? 전부 자기 뜻대로 하는데. ”

“ 그자는 도살자예요. 더러운 인간이라고요. ”

“ 말 좀 가려서 하시지. 여기 도청될 걸. 이렇게 좋은 아파트를 안겨주고 도청 마이크 하나 안 달아놨을 줄 알았어? 또 얼마나 혼이 나고 싶어서. 뉴욕에서 말 안 들었다고 그렇게 벌 받아 놓고서. ”

“ 전 기억 안 나요. ”

“ 그래, 그렇게 우겨. ”

 

크리셴스카야는 모피 목도리를 여미고 복도로 나가다가 생각난 듯 핸드백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 이거 네 거지? 차에서 나왔어. ”

“ 제 거 아니에요. ”

“ 아니긴. 게르만이 주는 거 봤는데. ”

 

그녀는 미샤에게 상자를 쥐어준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미샤는 문을 닫은 후 현관 구석에 상자를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욕실로 들어가서 문도 닫지 않고 세면대 수도꼭지 아래 머리를 들이밀더니 물을 틀었다.

 

“ 미셴카, 뭐해? ”

“ 세수해. ”

“ 세수하면서 머리도 감아? ”

“ 응. ”

 

난 미샤가 부러웠다. 나도 남자였다면 세수하면서 머리를 감을 수 있을 테고 엄마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될 텐데.

 

미샤가 욕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머리에 물을 맞고 있었기 때문에 난 안으로 들어가서 수도꼭지를 잠갔다. 물이 얼음장처럼 찼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 엄마가 찬물로 머리 감으면 폐렴 걸린댔어. ”

“ 어른은 안 그래. ”

“ 미셴카는 어른이 아니잖아. ”

“ 난 어른인데. ”

“ 어른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

“ 왜? ”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야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많이 기다릴 필요가 없지’ 라고 말해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어른이었다면 크리셴스카야가 그렇게 날 무시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렇게 쌀쌀맞은 태도로 미샤를 야단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샤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나왔을 때 난 두 팔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이제껏 내가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샤는 놀란 것 같았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아냐에게 그랬던 것처럼 몸을 굽혀 안아 주었다.

 

“ 라루츠카, 우는 거야? ”

 

그 말을 듣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 그전까지는 울고 있지 않았는데. 몸이 떨리면서 심하게 울음이 나왔다. 미샤는 날 좀 더 꼭 안아 주면서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는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내 머리를 쓸어준 적이 없었다. 그건 아냐 같은 어린애한테만 하던 거였는데. 하지만 전혀 화나지 않았다. 난 미샤에게 더욱 찰싹 달라붙어서 서럽게 울었다. 미샤는 한동안 가만히 날 안고 있다가 내가 좀 진정되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 라라, 에벨리나 때문에 놀라서 그래? ”

“ 그 여잔 왜 그래? 왜 미셴카한테 그렇게 무섭게 해? ”

“ 그냥 얘기만 한 거야. 에벨리나는 목소리가 커서 그래. ”

“ 아니야, 화냈어. 미워했어. 무서운 눈으로 쳐다봤어. ”

그렇지 않아. 좋은 사람이야. 그냥 내가 걱정이 돼서 그랬던 거야. ”

“ 왜? ”

“ 어... 내가 술 못 마시는데 마셔서... ”

“ 그 언니는 잘 마셔? ”

“ 그런가봐. ”

“ 그것 봐, 나쁜 여자야. 엄마가 그랬어, 술 많이 마시는 여잔 나쁘다고. ”

“ 술 많이 마시는 여자가 나쁘면 많이 마시는 남자도 나쁜 거야. ”

“ 왜 미셴카가 술 마셨다고 그 여자가 화내? ”

“ 음.... 수요일에 로미오와 줄리엣 같이 춰야 하는데 내가 아플까봐. 그럼 무대를 망치잖아. ”

“ 술 마셔서 아팠던 거였어? 그래서 우리 아빠가 병원 갔던 거야? ”

“ 응. ”

“ 다시는 술 마시지 마. ”

“ 알았어. ”

“ 그 여자랑 로미오와 줄리엣 안 췄으면 좋겠어. 마리야 언니랑 춰. ”

“ 마리야는 무릎 다쳐서 못 나온대. 에벨리나도 잘 추는데. ”

“ 여기 다시는 못 오게 해. ”

“ 라라가 싫다면 그렇게 할게. ”

 

미샤는 찬물로 머리를 감았는데도 무척 따뜻했다. 큰 라디에이터나 사모바르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운 게 창피해서 여전히 미샤의 품에 얼굴을 처박은 채 가만히 서 있다가 문득 궁금해진 게 있어서 불쑥 물었다.

 

“ 근데 도살자가 무슨 뜻이야? ”

“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

“ 아까 미셴카가 그랬잖아. 그 여자랑 얘기하다가. ”

“ 어... 미안해.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줘. ”

“ 왜? 그럼 엄마한테 물어볼 거야. 오빠가 그랬잖아, 못 하게 하면 더 하고 싶은 거라고. ”

“ 별로 좋은 말이 아니라서 그래. ”

“ 뭔데? ”

“ 살인자란 뜻이야. ”

“ 우와, 그런 악당을 알아? 그런 건 영화에 나오는 거잖아. ”

“ 맞아. 영화랑 발레에 나오는 거야. 로미오와 줄리엣에도 나오고... 그래서 그 얘기한 거야, 공연 때문에. 근데 나쁜 말이니까 라라는 쓰지 마. ”

“ 응. ”

 

궁금증도 풀렸고 눈물도 다 말랐기 때문에 난 미샤의 팔에서 빠져나와 오렌지를 가져왔다. 껍질을 벗겨서 반을 쪼개어 주자 미샤도 오렌지를 먹었다. 하지만 케익은 여전히 먹지 않았다. 주머니에 있던 장식 달걀을 꺼내주자 미샤는 예뻐서 먹기가 아깝다면서 꽃병 옆에 있던 조그만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만든 계란을 예쁘다고 해줘서 기분이 좋았다.

 

“ 그때 만들어준 이콘 계란 깨져버렸어. 아냐가 밟아서 부서졌어. ”

“ 원래 내가 많이 부쉈던 거라 그럴 거야. ”

“ 속상해, 정말 예뻤는데. ”

“ 다음에 또 만들어 줄게. ”

“ 그건 부활절에만 만드는 거야. ”

“ 그럼 내년 부활절에 만들어 주면 되지. ”

“ 내년에도 여기 있을 거야? 레닌그라드 안 돌아가고? ”

“ 글쎄. 그건 아직 모르겠어. ”

“ 모스크바에 계속 살아, 응? ”

 

미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마음을 바꿨다.

 

“ 미셴카가 레닌그라드로 돌아가면 나도 따라가야지. ”

“ 전에도 이사 온다 했다가 엄마한테 야단맞았다면서. ”

“ 아빠랑 갈 거야. ”

“ 라라는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는구나. ”

“ 딸은 원래 그런 거랬어. 그래서 엄마가 아들 없다고 섭섭하댔어. 오빤 아빠보다 엄마가 더 좋았어? ”

“ 우리 아빠는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어. ”

“ 병 걸리셨던 거야? ”

“ 잘 몰라. 어릴 때라서. 아무도 안 가르쳐줬어. ”

“ 많이 슬펐어? ”

“ 응. 나중에 알게 돼서 많이 슬펐어. ”

“ 신부님이 그러는데 사람은 죽고 나면 다시 살아난댔어. 예수님이 그렇게 해준대. 우리는 부활절 계란도 만들었고 쿨리치도 먹었으니까 분명히 그럴 거야. 그럼 나중에 미셴카도 아빠랑 만날 수 있을 거야. ”

“ 우리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난 아냐처럼 어렸는데. 아빠가 지금 보면 날 알아볼 수 있을까? ”

미셴카가 늙은이가 되어도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아빠들은 다 그런댔어. ”

“ 누가 그래? 신부님이? ”

“ 아니, 우리 아빠가. ”

“ 아, 스탄카가 한 말이면 믿을 수 있겠네. ”

“ 우리 아빠 말은 다 믿어? ”

“ 응. 스탄카 말은 웬만하면 다 맞아. ”

 

난 미샤가 아빠 칭찬을 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오렌지 껍질을 휴지통에 버리러 갔다가 현관 구석에 나뒹굴고 있는 상자를 발견하고 가져왔다. 미샤는 부엌으로 가서 남은 보르쉬를 뚜껑 달린 그릇에 붓고 있었다. 수첩을 뜯어서 ‘꼭 먹을 것’이라고 써 붙여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샤가 돌아오면 허락을 받고 열어보려 했지만 그 상자는 무척 예뻐서 나도 모르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조그만 구슬이 한 줄로 박혀 있는 자작나무 상자였는데 테두리는 금색과 은색으로 되어 있었다. 나비 모양의 잠금쇠도 달려 있었다. 잠금쇠를 비틀자 뚜껑이 저절로 열렸다. 깜짝 놀라서 도로 닫으려고 했지만 안을 보자 탄성이 나왔다.

 

“ 우와! ”

 

태어나서 그렇게 예쁜 물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미샤가 둘렀던 구슬 달린 팔찌도, 백조의 호수에서 오데트가 머리에 썼던 왕관도 그 정도로 찬란하고 화려하지는 않았다. 부활절 달걀이었다. 하지만 진짜 달걀은 아니었다. 매끄러운 도자기와 황금빛 금속으로 만들어진 장식품이었다. 휘황하게 반짝이는 녹색 구슬과 파란색 구슬들이 가느다란 황금색 그물 무늬를 따라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달걀 가운데에는 상자와 마찬가지로 아주 조그맣고 우아한 나비 모양 잠금쇠가 달려 있었고 옆으로 비틀자 부드럽게 열렸다. 속은 텅 비어 있었지만 붉은색 벨벳 안감이 들어가 있었다. 난 그렇게도 반짝반짝 빛나는 구슬을 본 적이 없었다. 진짜 보석처럼 밝고 찬란했다.

 

“ 미셴카, 이것 좀 봐! 부활절 계란이야. 너무 예뻐! ”

 

거실로 돌아온 미샤는 내가 치켜든 보석 달걀을 힐끗 쳐다봤지만 만져 보지는 않았다.

 

“ 꼭 진짜 보석 같아. 램프에 비추니까 더 반짝반짝 빛나. 세상에서 제일 예쁜 부활절 계란이야! ”

“ 그럼 가져갈래? ”

“ 나 빌려주는 거야? ”

“ 아니, 가져. 난 그런 달걀 별로 안 좋아해. 라라가 만든 게 더 좋아. ”

“ 정말? 가져도 돼? ”

 

난 기뻐서 펄쩍 뛰었다. 한참동안 계란을 만지작거리다가 구슬이 하나라도 빠질까봐 걱정이 돼서 상자 속에 도로 곱게 집어넣었다. 하지만 뚜껑을 닫지는 않았다. 무릎에 상자를 올려놓고 계속 달걀을 구경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자 미샤와 눈이 마주쳤다. 미샤는 내가 준 장식 계란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굴리면서 날 바라보더니 살짝 웃었다. 그 날 처음으로 웃는 거였다. 미샤가 웃자 해가 져서 어두컴컴해진 거실 전체에 전등을 켠 것 같았다.

 

그 때 또 초인종이 울렸다. 그 무서운 여자가 다시 왔나 싶어서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다행히 그건 아빠였다. 발레 공연이 없는 날이어서 그랬는지 일찍 끝난 모양이었다. 미샤가 괜찮은지 보러 온 것 같았다.

 

아빠는 날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여기 어떻게 왔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 버스 타고. ”

“ 너 혼자서 버스 타고 왔단 말이야? 길은 어떻게 찾았어? ”

“ 나 길 잘 찾아. 빵집 간판 외워놨어. ”

“ 엄마한테 얘기하고 온 거야? ”

“ ... 응. ”

“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

“ 잘못했어. 나쟈네 집에서 논다고 했어. ”

오고 싶었으면 아빠한테 얘길 했어야지. 그럼 아빠가 데리고 왔을 텐데. ”

“ 아니야, 아빤 안 데려왔을 거야. 병원에도 못 오게 했잖아. ”

 

아빠는 날 꾸짖으려고 했지만 미샤가 감싸주었다.

 

“ 그렇게 야단치지 마. 나 때문이니까. ”

“ 너한테 온 게 잘못이란 게 아냐. 말 안 하고 혼자서 버스 탄 게 문제지. 위험하잖아. ”

“ 라라는 어린애가 아냐. 다 컸는걸. 버스쯤은 아무 것도 아니야. ”

“ 모스크바는 레닌그라드가 아냐. 훨씬 복잡하고 위험해. 길도 더 넓고. 너 어렸을 때와는 다르다고. ”

“ 난 버스 안 탔는데. 걸어 다녔어. 사람도 너무 많고 떠밀리면 다리 다칠까봐. ”

“ 하긴. 나도 웬만하면 걸어 다녔지. 축구도 안 했고. ”

 

아빠가 옛날에 발레학교 다니던 추억을 떠올려서 천만다행이었다. 날 야단치려던 마음이 누그러졌기 때문이다. 아빠는 미샤의 커다란 티셔츠를 입고 스카프를 두른 날 보고 웃더니 옷이 말랐으면 갈아입으라고 했다. 라디에이터로 달려갔더니 옷은 이미 다 말라 있었다. 아직 안 말랐다고 해볼까 하다가 아빠가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솔직하게 부탁했다.

 

“ 미셴카, 나 이거 입고 가면 안 돼? ”

“ 입고 가. 근데 추울 텐데. 위에 걸칠 거 있는지 찾아볼게. ”

“ 괜찮아, 그냥 바지만 입어. 차 가져왔으니까. 양말도 신어야지. ”

 

아빠가 바지와 양말을 건네주며 내 스웨터와 점퍼를 뭉쳐서 옆구리에 꼈다. 그리고는 미샤 쪽을 보면서 엄하게 말했다.

 

“ 너도 겉옷 입어. 비 와서 추워졌으니까 두꺼운 거 입어. ”

“ 왜? 집은 따뜻한데. 난방 때문에 더워. ”

“ 우리랑 같이 나갈 거니까. 여기 혼자 있지 마. ”

“ 그런 식으로 말하면 혼자 있고 싶어지는 법이야. ”

“ 아니, 넌 혼자 있으면 안 돼. 옷 입어. 지금. ”

“ 명령하는 거야? 나한테? ”

 

난 미샤가 우리 아빠에게 그런 목소리로 말하는 걸 처음 들었다. 두 눈이 너무 새까매져서 커튼을 친 것 같았다. 미샤가 화낼까봐 무서워서 여차하면 또 울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빠가 부드럽게 말했다.

 

“ 아니. 부탁하는 거야. 넌 명령 같은 건 안 듣잖아. 누구 명령도. ”

 

미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옷장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짧은 재킷을 걸치고 나왔다. 아빠가 모자와 스카프도 챙기라고 하자 순순히 따랐다.

 

아파트를 나가기 전에 미샤는 부엌으로 갔다. 보르쉬가 담긴 그릇을 내가 가져왔던 보자기로 싸더니 보온병과 함께 가지고 나왔다. 그렇게 예쁜 옷을 입고 근사한 스카프를 두르고서 보자기로 싼 그릇을 들고 있는 미샤의 모습이 좀 우스웠지만 수프를 다 먹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 같아 뿌듯했다.

 

 

*   *   *

 

 

아빠는 날 먼저 데려다줘야 했다. 난 제발 엄마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아빠는 어차피 아파트 앞에 내려주고 갈 거니까 엄마랑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내가 혼날까봐 걱정되기보다는 가뜩이나 미샤를 싫어하는 엄마와 부딪치고 싶지 않은 것 같았지만 어쨌든 내겐 다행이었다.

 

미샤는 날 데려다주고 나서 극장에 내려달라고 했지만 아빠는 거절했다.

 

“ 수요일 거 에벨리나로 바뀌어서 연습해봐야 해. ”

“ 내일 열 시에 맞춰보기로 했잖아. ”

“ 어떻게 알았어? ”

“ 내가 연습실 사용 시간 바꿔달라고 콜랴한테 얘기했으니까. ”

“ 같이 맞춰보는 거 말고... 어제랑 오늘 계속 연습을 안 했어... ”

“ 극장에 안 간 것뿐이지 집에서는 계속 연습했잖아. 내가 널 몰라? 어제 병원 복도에서도... ”

“ 그건 다르잖아. ”

“ 어쨌든 오늘은 안 돼. 쉬어야 하니까. ”

“ 오늘도 하루 종일 쉬었어. ”

“ 오늘 먹은 거 말해봐. ”

“ 보르쉬. 쿨리치. 오렌지... ”

“ 쿨리치는 안 먹었잖아. 보르쉬도 두세 숟갈 먹다 말았겠지. ”

 

거울에 미샤의 놀란 얼굴이 비쳤다. 눈이 두 배로 커지고 공처럼 동그래져 있었다.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아무리 봐도 지나와 비슷하다니까. 내 주위 사람들은 왜 다 그렇지. ”

“ 그렇다는 게 무슨 뜻인데? ”

“ 감시꾼처럼. 쉬어라 먹어라 자라... ”

“ 필요할 때 쉬고 먹고 잔다면 그런 말 들을 이유가 없겠지. ”

“ 보르쉬는 다 먹을 거야. 라라가 가져다 줬고 맛있으니까. ”

“ 그래. 집에 가자마자 먹어. ”

“ 정말 극장에 안 내려줄 거야? 조금만 연습하고 가면 되잖아. 못 믿겠으면 같이 가든가. 옆에서 감시하면 되겠네. ”

“ 아니, 난 너 믿어. 네 말은 항상 믿어. ”

 

아빠는 핸들을 옆으로 돌려 강변도로로 접어들면서 조용히 말했다.

 

“ 그냥 오늘은 네가 쉬었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야. 우리 집에서. ”

 

미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난 안 믿는데. 한 번도 믿어본 적 없어. 나도, 내 춤도. ”

“ 그래. 그래서 그렇게 출 수 있는 걸지도 몰라. ”

 

난 아빠와 미샤가 춤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을 때쯤 걷잡을 수 없이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손발이 풀려 와서 잠시 꾸벅꾸벅 졸았다. 그 와중에 꿈까지 꾼 것 같았다. 그 못된 고양이처럼 생긴 크리셴스카야가 나타나 보르쉬와 쿨리치를 내놓으라고 날 다그치는 거였다. 안 그러면 목을 치겠다고 협박했다. 붉은 여왕처럼... 소리를 지르려고 했는데 그때 차가 다시 커브를 틀면서 어딘가에 부딪쳐 좀 덜컹거렸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뒤에서 미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모스크바는 정말 빙글빙글 돈다니까. 가도 가도 끝이 없어. 강에 뛰어들어 헤엄쳐가고 싶어. ”

“ 하긴 레닌그라드는 쭉 뻗은 길이 많지. 동네가 작아서 그렇지. ”

“ 여긴 너무 넓어. 복잡하고 지나치게 크고. 회색이고. 극장까지 걸어가지도 못하고. ”

“ 미안해, 미셰츠카. ”

“ 뭐가? ”

“ 볼쇼이로 데려와서. ”

“ 왜? 계약서에 사인한 건 난데.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거야. ”

“ 그자들이 그런 식으로 널 부를 줄 알았다면 모스크바로 오라고 하지 않았을 거야. 절대로. ”

 

그때 아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난 살짝 눈을 떴다. 하지만 차 안이 어두워서 그런지 아빠의 옆얼굴 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샤가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 그건 레닌그라드에서도 마찬가지였어. 그냥 그런 거라고. 일이잖아. ”

“ 아니, 그건 일이 아니야. 내가 잘못 말했던 거야. ”

“ 그래도 달라질 건 없어. 그러니까 이 얘긴 하지 말자. 안 그러면 정말 강에 뛰어들어서 헤엄쳐 갈 거야. ”

“ 여기 크레믈린 앞인 거 몰라? 뛰어들자마자 경비정에서 그물로 낚아 올릴 걸. ”

“ 그래서 모스크바는 별로라니까. ”

 

난 다시 꾸벅꾸벅 졸다가 아빠 말에 창밖을 힐끗 쳐다보았다. 크레믈린과 바실리 사원이 강 너머로 어른거리고 있었다. 우리 아빠는 크레믈린에서 열린 축제에 작품을 두 번이나 올렸다. 아빤 정말 대단했다. 미샤도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빠는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 직접 춤을 추는 쪽이 더 훌륭하다고 했다. 아빠도 미샤처럼 출 수 있었다면 춤을 그만 두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미샤가 작년에 크레믈린 축제 개막식에서 춤을 췄을 때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직접 꽃을 줬다. 다른 높은 사람들도 가까이 와서 칭찬을 했다. 그때 난 아빠 손을 잡고 무대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미샤에게는 다가갈 엄두도 못 냈다. 크레믈린보다는 극장이 훨씬 좋았다.

 

아빠가 부드럽게 말했다.

 

“ 수요일에 로미오 추고 나면 따로 같이 맞춰볼 거 있어. ”

“ 뭔데? 스파르타쿠스? ”

“ 아니. 그건 나랑 맞춰볼 필요 없지. 어차피 잘 출 테니까. ”

“ 그럼 뭐? 내가 못 출 것 같은 역이 뭔데? ”

“ 흥분하지 마. 우리 레퍼토리 중에 네가 못 출 역은 없으니까. ”

“ 노비코프도 안 주던데, 투우사. ”

“ 줄 거야, 시간 좀 지나면. 지금은 좀 참아. 벌써 웬만한 건 다 췄잖아, 넉 달도 안 됐는데. 지금 투우사까지 추면 우리 애들도 폭발할 걸. 정말 모스크바 강에 집어던질지도 몰라. ”

“ 놀랍지도 않아. 신입일 때 정말 그랬거든. 강은 아니고 저수지였지만. ”

“ 페름에서? ”

“ 어떻게 알아? ”

“ 지나에게서 들었어. 세레브랴코프가 그랬다면서. ”

“ 그랬지. 그때도 지나가 펄펄 뛰었어, 왜 두들겨 패주지 않았느냐고. ”

“ 왜 안 그랬어? 그땐 지금보다 훨씬 어렸잖아. 피가 거꾸로 솟았을 텐데. ”

“ 열 받긴 했는데 패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 ”

“ 왜, 물이 깊어서? 수영 잘하면서. ”

“ 물이 너무 더러워서 숨을 쉴 수가 없었어. 바닥도 진흙 뻘이라 한 번 빠지니까 나올 수도 없었고. 그래서 화낼 타이밍을 놓쳤어. ”

“ 하긴 저수지니까 더럽긴 했겠다. ”

 

아빠는 다시 한 번 핸들을 꺾었다. 이제 우리 동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 새 거 시작했어. 6월에 올리려고. 아까 노비코프하고도 잠깐 얘기했어. 긍정적이더라고. ”

“ 나보다 노비코프와 먼저 얘기했단 말이야? ”

“ 어젯밤에 구상했으니까 그렇지. 안무도 이제 짜야 돼. ”

“ 음악은? ”

“ 프로코피예프. 피아노협주곡. 2번. ”

“ 네 취향 아니잖아, 프로코피예프는. 그것도 2번? ”

“ 난 그렇지만 너한테는 잘 맞잖아. ”

“ 아... ”

“ 새로운 거야. 백야하고는 달라. ”

“ 조금 페트루슈카 같은 거야? ”

“ 아니. 그럼 새로운 게 아니잖아. 그건 작년에 벌써 췄는데. 잘 췄지. ”

“ 그것도 네 취향 아니었지. 나한테 맞춰준 거였는데. ”

“ 맞춰준 게 아니야.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거야. ”

“ 왜? ”

“ 너니까. 네가 그렇게 추는 걸 보고 싶었으니까. 그걸 출 수 있는 건 너 밖에 없었으니까. 그 프로코피예프도 마찬가지야. 완전히 새로운 동작들을 만들 거야. 나 혼자서는 어려워. 그러니까 도와줘. 페트루슈카 때처럼. 재미있을 거야. ”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문 쪽으로 몸을 틀었지만 거울에 옆얼굴이 비쳤다. 나는 불빛이 일렁이는 모스크바 강을 내다보고 있는 미샤의 눈가에 반짝이는 물기가 고여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미샤가 완전히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빠가 내 손을 살짝 토닥였다.

 

“ 라라, 겉옷 입어. 거의 다 왔잖아. ”

 

그래서 난 바로 앉아서 점퍼를 대충 걸쳤다. 미샤의 티셔츠만 입고 들어가면 엄마가 분명히 꼬치꼬치 캐물을 테니까. 그때 뒤에서 미샤가 낮게 노래하듯 말했다.

 

“ 강에 비친 불빛 좀 봐, 라루츠카. 보석 같아. ”

 

그래서 나도 고개를 돌려 창 너머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이미 멀어져 가는 바실리 사원의 알록달록한 지붕으로부터 모스크바 강의 검은 물 위로 환하고 예쁜 불빛들이 비춰져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자주 보던 풍경이었지만 미샤가 그렇게 말하자 정말 보석처럼 보였다.

 

“ 예쁘다. 레닌그라드 생각 나. 거기도 밤에 이랬는데. ”

“ 한밤중에 네바 강을 따라 걸으면 좋아. 강변을 걷다가 다리를 건너면 운하가 나와. ”

“ 그리보예도프 운하! 판탄카! 우리 같이 보트 탔어! 근데 갑자기 비 와서 머리가 다 젖었어. ”

“ 여름에는 안 그래. 비가 와도 금방 그치고 언제든 어디에든 빛이 있어. 한밤중에도 환해. 해가 없어도. 네바 강 위로 교회 종탑들이 길게 내려와, 천사상들도 반짝반짝 빛나. 백야가 되면 사방에서 보석들이 흩뿌려지는 것 같아. ”

“ 밝아도 보석이 잘 보여? ”

“ 가끔은. 아주 밝아야 빛을 볼 수 있어. ”

 

난 미샤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때 아빠가 차를 돌려 우리 집이 있는 골목 쪽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내릴 준비를 했다. 그리고 미샤의 눈가에 비쳤던 물방울은 모스크바 강물의 보석들이 반사된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미샤는 어른이고 남자인데다 왕자님이었으니까. 왕자님은 나나 아냐처럼 울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파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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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5장에서 끝난다. 그건 내일..

 

일린과 미샤가 언급하는 '백야'와 '페트루슈카'는 둘다 일린이 미샤를 위해 안무해준 작품이다. 전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단편 '백야'를 원작으로 주인공 청년과 나스첸카를 내세운 모던 발레로 일린은 76년에 키로프에 가서 게스트 안무가로 그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페트루슈카는 미하일 포킨의 원작 발레를 바탕으로 일린이 광대 페트루슈카의 비극적인 운명을 재구성한 10분짜리 모놀로그 발레이다. 일린은 76년에 미샤가 런던의 유력한 무용 페스티벌 경쟁 부문에 나가게 되자 그를 위해 그 작품을 안무했고 호평과 함께 미샤는 좋은 상을 받는다. 물론 저 두개의 발레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 내가 만들었음. 저 두 작품에 대한 얘기도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그 장편에 나온다.

 

에벨리나와 미샤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스비제르스키는 다른 글들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인물이다. KGB 출신이며 막강한 당 권력자로 소설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미샤에게는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다. 따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에벨리나는 오랫동안 스비제르스키의 정부였다.

 

미샤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드문 일인데, 사실 이 사람이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긴 하다. 이 사람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번 발췌해 보겠다.

 

좀 우울한 파트였기 때문에... 라라가 얘기하는 미하일 브루벨의 백조 공주 이미지로 기분 전환. 전에 두어번 올린 적 있지만..

 

 

 

라라는 미샤가 백조 공주를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맨처음 이 사람을 구상할 때 브루벨 그림에서 이미지를 좀 따오긴 했다. 그래서 그의 레닌그라드 친구 트로이는 맨 처음 10대의 미샤를 만났을 때 그가 그림에서 나온 것 같다고 생각하고 나중에는 브루벨 그림을 떠올린다. 이 사람이야 사내아이니까 백조 공주보다는 유명한 브루벨의 악마와 더 닮았다고 해줘야겠지만.. 사실은 라라 말대로 백조 공주와 더 닮았을 거라고 비밀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미하일 브루벨, 앉아 있는 악마

 

 

미하일 브루벨, 날아가는 악마

 

라라가 미샤의 침실에서 발견하는 스케치는 이 그림의 스케치이다. 물론 가상의 스케치임.. 이 날아가는 악마 그림은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미술관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그림 중 하나이다. 정말로 아름답다. 개인적으로 트레치야코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백조 공주였다면 러시아 미술관에서는 이 그림과 금발의 가브리엘 이콘, 그리고 레프 박스트의 SUPPER였다.

 

.. 그리고 라라가 가져가는 수프 보르쉬. 내가 끓였던 보르쉬 사진 두 장. 전에 쓴 적 있지만 스뵤클라(비트), 양배추, 쇠고기 등을 넣어 만드는 우크라이나 수프이다. 철분이 많아 빈혈에도 좋다. 아플 때 먹으면 몸이 따뜻해진다.

 

 

 

** 보석을 흩뿌려놓은 듯 찬란하게 빛나는 네바 강 사진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401

 

:
Posted by liontamer

 

1993년 1월 6일은 루돌프 누레예프가 사망한 날이다.

그를 기념하며 사진 몇 장 올려본다..

 

 

 

 

 

 

 

 

 

맨 아래 사진은 젊은이와 죽음. 이 동영상 클립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2389

 

안녕, 루딕. 우리에게 와 줘서 고마워요.

 

** 태그의 '루돌프 누레예프'를 클릭하면 전에 이 사람에 대해 올린 포스팅을 여러 개 볼 수 있다.

:
Posted by liontamer

 

어제 올린 1~2장에 이어 세번째.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부활절을 앞둔 토요일 밤. 일린의 집에 모인 극장 동료들과 라라, 아냐, 그리고 미샤가 부활절 케익과 과자를 먹고 달걀에 색칠을 한다.

 

서두에 언급되는 쿨리치는 러시아 정교의 부활절 케익, 그리고 파스하는 부활절에 먹는 과자이다. 글 끝나고 맨 아래에 이미지 몇 장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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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els

пасхальный рассказ

 

 

 

- 3 -

  

 

 

 

저녁은 정말 즐거웠다. 그날 밤은 오페라 공연이 올라가는 날이라 아빠와 절친한 발레단 동료들이 여러 명 왔다. 발레 교사인 마르가리타 아줌마와 이그나트 아저씨, 분장사인 알렉산드라 아줌마, 의상 담당자인 율렌카 언니도 왔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엄청나게 크고 멋진 부활절 쿨리치 케익을 만들어 왔고 알렉산드라 아줌마는 파스하 과자를 만들어 왔다. 그리고 율렌카와 이그나트 아저씨는 달걀을 잔뜩 삶아 왔다. 푸짐한 저녁을 먹은 후 다 같이 테이블에 둘러 앉아 달걀 장식을 했다.

 

사실 진짜 정교 신자는 별로 없었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만 독실한 신자였고 아빠와 나, 아냐는 셋 다 세례를 받긴 했지만 교회에 나가지는 않았다. 엄마는 학교에서 교회나 세례 얘기 하지 말라고 했다. 괜히 선생님들에게 책잡힐 짓을 하지 말라는 거였다. 그래서인지 엄마와 아빠랑 함께 살았을 때는 부활절 음식을 만들어 먹었던 기억도, 계란에 색칠을 하며 놀았던 기억도 없지만 그땐 나도 워낙 어렸으니 정확하지는 않다. 이렇게 부활절 전날 모여 같이 식사하고 계란 장식을 하기 시작한 건 2~3년 전부터였는데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아빠의 친구들은 전부 재미있는 사람들이었고 나와 아냐를 아주 귀여워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미샤도 있어서 백배는 더 좋았다.

 

미샤는 한 번도 부활절 파티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쿨리치와 파스하는 먹어봤지만 그것도 학교 다닐 때 친구가 가져다 줘서 한 입 먹은 게 전부라고 했다. 부활절 계란도 장식해본 적이 없다는 거였다.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 레닌그라드에선 이런 거 안 해? 혁명 도시라 안 하나? ”

“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난 안 해봤어. ”

“ 하긴 너야 직접 안 해도 주변에서 여자들이 가져다 줬겠지. ”

 

이그나트 아저씨가 농담을 했다. 이미 마르가리타 아줌마와 알렉산드라 아줌마, 율렌카 세 명이 미샤를 둘러싸고 계속해서 쿨리치와 차를 권하고 있는데다 아냐는 그의 무릎에 앉아 장식하던 계란을 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샤는 쿨리치를 딱 한 조각만 먹었기 때문에 모두의 공분을 샀다. 마르가리타 아줌마의 그 맛있는 쿨리치를 한 조각만 먹는다는 건 범죄라는 거였다. 모두 미샤가 원래 케익이나 초콜릿을 잘 먹지 않는데다 늦은 저녁에는 가능하면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짓궂은 이그나트 아저씨는 계속해서 놀려댔다.

 

“ 내가 너 같았으면 저 쿨리치 두 판은 해치웠을걸. 살찌는 체질도 아니면서 너무 엄격한 거 아냐? ”

“ 내 체질에 대해 뭘 안다고. ”

“ 내가 여태껏 봐온 무용수가 얼마나 많은데. 딱 보면 알아. 넌 웬만해서는 살 안 붙어. 은퇴해도 그럴걸. 스탄카랑 비슷한 타입이야. 그러니까 그냥 먹어. ”

스탄카가 얼마나 많이 먹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차에도 설탕이 아니라 잼을 가득 넣어 먹는다고! 보통 사람이 저렇게 먹으면 풍선처럼 부풀걸! ”

“ 극과 극이라니까. 누구는 차에 잼을 풀어먹고 누구는 설탕 한 톨도 안 넣으니. 라루샤, 어느 쪽이 더 좋아? 차에 아무 것도 안 넣은 거 마실 수 있어? ”

 

난 물론 설탕을 탄 차를 좋아했지만 이그나트 아저씨가 미샤를 놀리는 게 싫었기 때문에 고개를 쳐들고 쌀쌀맞게 대꾸했다.

 

“ 당연하죠. 차에 설탕이랑 잼 넣는 건 아기들이나 하는 건데. ”

“ 저렇게 단칼에 자기 아빠를 배신하다니. 역시 딸자식은 키워봐야 소용이 없어. 아무리 예뻐해도 잘생긴 오빠가 나타나면 대번에 그쪽으로 가버린다니까. ”

“ 나 그런 거 아니야! ”

“ 뭐가 아니야, 라라는 미셴카랑 결혼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

 

가슴이 철렁했는데 다행히 미샤가 귀퉁이를 부숴버린 달걀을 보여주면서 이그나트 아저씨의 입을 막았다.

 

“ 이거 어떻게 하지? 벌써 세 개째야. ”

“ 세 개째 먹었다고 하는 거라면 참 좋을 텐데. ”

“ 포기해, 이그나트. 쟤가 이 시간에 계란을 세 개나 먹으면 레닌이 관에서 벌떡 일어날 걸. 그건 그렇고 미샤는 정말 계란 장식 한 번도 안 해봤나봐. 그렇게 꽉 쥐니까 껍질이 부서져버리지. 이쪽으로 와서 라라한테 좀 배워. 우리 중에 라라가 제일 잘해. ”

 

내 옆에 있던 마르가리타 아줌마가 일어나더니 미샤와 자리를 바꿔 주었다. 미샤는 부서진 계란과 물감 묻힌 붓을 양손에 쥔 채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아냐가 다시 달려가 냉큼 무릎에 앉으려는 걸 아빠가 저지했다.

 

“ 아네츠카, 그렇게 무릎에 앉아 있으니까 미샤가 계란 색칠을 못하잖아. 너도 이제 다 컸는데 얼마나 무겁겠어. ”

난 아냐가 앉아 있어도 괜찮은데. 계란 색칠은 원래 할 줄 모르는 거고. ”

“ 안 돼. 그게 어떤 다리인데, 저리거나 뭉치면 내가 죄책감이 들 거라고. ”

 

아냐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 미셴카, 나 무거워? 다리 저려? ”

“ 아니, 하나도 안 무거워. 괜찮아. ”

“ 오래 앉아 있으면 무거워질 거야. 이리 와, 아네츠카. 어쩌면 이렇게 계란을 예쁘게 칠했니. 아줌마한테도 이렇게 예쁘게 칠하는 거 가르쳐줘. ”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아냐를 옆에 데려다 앉히며 살살 구슬렸다. 사실 알렉산드라 아줌마의 달걀이 최고였다. 분장사라 그런지 물감을 칠하고 반짝이 장식을 붙이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 사이에 미샤는 내가 장식한 달걀들을 구경했고 정말로 감탄했다.

 

“ 진짜 예쁘다. 이건 절대 못 먹겠는데. 이 빨간색은 물감 섞은 거야? ”

“ 응, 빨강이랑 이 분홍색이랑 흰색을 섞는 거야. 이렇게. ”

 

난 붓을 들고 계란에 덧칠을 하면서 시범을 보여 주었다. 미샤는 새 계란을 들고 따라서 해보았지만 또 껍질을 잘못 건드려서 귀퉁이를 부수고 말았다.

 

“ 그렇게 잡으면 안 돼. 살살 쥐어야지. 아니면 여기 이렇게 올려놓고 해. ”

“ 파트너들은 그렇게도 고이고이 잘 받쳐주면서 애꿎은 계란은 왜 이렇게 박살을 내는지 모르겠네. ”

 

율렌카마저 웃으면서 미샤를 놀렸다. 미샤는 다들 놀려대자 조금 부아가 치민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있었다. 제일 나이가 많은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미샤를 감싸주었다.

 

“ 안 해봤으니까 그렇지. 얜 무신론자잖아. 교회는 가본 적도 없는 앤데 잘 하는 게 이상하지. ”

“ 아, 알렉산드라 필리포브나. 저 세례 받았어요. ”

“ 그건 또 금시초문인데. 정교 신자였어? ”

“ 아니, 그냥 세례만 받은 거야. 학교 다닐 때 아는 사람이 데려갔었어. 무신론자인 건 맞아. ”

“ 그럼 세례는 왜 받았담. ”

“ 나중에 친구가 애를 낳으면 대부가 될 수 있다고 해서. ”

“ 조그만 게 그런 생각을 다 했단 말야? 학교 다닐 때였다면서. 이 친구도 웃긴 구석이 있단 말야. ”

“ 그런가? 난 진짜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래서 받은 거라고. 스탄카를 조금만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걸, 그럼 라라는 안 되더라도 아냐한테는 대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

“ 산수 좀 해봐라, 아네츠카 태어났을 때도 기껏해야 열너덧 살이었을 텐데 어떻게 대부가 됐겠어. ”

“ 아 그렇구나. 어쩐지 불공평한데. 속은 것 같아. 세례 무르고 싶어. ”

 

다들 웃었지만 난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샤가 스물한 살이라서 다행이었다. 나이가 더 많았거나 내가 더 어렸다면, 그리고 미샤가 아빠와 더 일찍 친해졌으면 정말 나나 아냐의 대부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친척이 아니더라도 대부와 결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진짜 큰일 날 뻔 했다. 내 속도 모르고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미샤가 나랑 아냐의 대부가 됐으면 정말 좋았을 거라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동안 미샤는 내가 계란을 칠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붓질을 하다가 미샤의 시선이 느껴지자 그때부터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아서 몇 번이나 색을 잘못 칠하고 구슬을 비뚤어지게 붙여버렸다.

 

“ 아, 오빠가 그렇게 쳐다봐서 망했어. ”

“ 왜 망했다고 해? ”

“ 색도 다 삐져나오고 구슬도 비뚤어졌잖아. ”

“ 그래? 난 이게 제일 예쁜데? 이제 어떻게 하는지 좀 알 것 같아. ”

 

미샤는 계란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아까 껍질을 부숴버린 계란이었다. 내가 깨끗한 새 계란을 건네주자 미샤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난 이걸로 할래. 그건 또 깰 것 같아. ”

“ 그건 다 부서졌잖아. ”

“ 괜찮아, 연습하는 거야. ”

“ 깨진 건 내가 먹으면 되는데. ”

“ 라루츠카, 계란 더 먹으면 자다가 배탈 날 지도 몰라. ”

 

아빠가 부드럽게 경고했다. 괜찮다고 우기고 싶었지만 사실 아빠 말이 맞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새 계란에 이번에는 노란색과 초록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계란 장식을 하면서 어른들은 극장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낮의 라 바야데르 얘기도 나왔다. 다들 미샤의 춤을 칭찬했다. 뉴욕에서 백조의 호수를 올려서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그 양키들이 우리의 제대로 된 라 바야데르를 봤다면 기절했을 거라고 쿡쿡 웃었다. 율렌카는 뉴욕 리셉션과 대사관 파티에서 누구누구를 만났느냐고 물었다. 미샤는 내가 잘 모르는 미국 사람들 이름을 몇 개 댔고 다들 그 높은 사람들을 만났느냐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난 뿌듯했다. 하긴 미샤는 브레즈네프 서기장을 만난 적도 여러 번 있었고 국회의원들과도 많이 알았다. 우리 아빠도 높은 의원님들 몇 명과 잘 아는 사이였지만 미샤만큼은 아니었다. 그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미샤가 우리 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고 지금도 내 옆에 앉아 부활절 계란 장식을 하고 있다는 것이 갑자기 생소하고 놀랍게만 여겨졌다. 왕자님을 곁에 앉히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미샤는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대사관 행사와 정치가들에 대해 더 물어보려고 했을 때 갑자기 휘파람을 불더니 테이블 위에 계란을 가볍게 내려놓았다.

 

“ 라라, 어떤지 봐줘. ”

“ 다 했어? ”

“ 응. ”

 

난 미샤의 달걀에 깜짝 놀랐다. 그런 부활절 달걀은 처음이었다. 원래 부활절 계란은 표면을 매끈하게 칠하고 무늬를 넣거나 장식을 붙이는 건데 미샤는 껍데기를 핀으로 찔러서 전체를 우툴두툴하게 만들었다. 아마 색칠을 하지 않았다면 그냥 껍데기가 부서져 금이 간 계란으로 보였을 테지만 미샤는 거기 멋진 그림을 그렸다. 이마에 보석을 달고 있는 금빛 머리의 천사였다. 계란이 작아서 얼굴과 어깨까지만 그렸고 날개도 없었지만 그래도 천사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깨지고 금간 껍질 덕에 그건 꼭 정교한 모자이크처럼 보였다. 스테인드글라스 같았다. 투명한 래커를 칠하면 더 그렇게 보일 것 같았다.

 

“ 우와, 미셴카. 이거 너무 예뻐. 이콘 같아. 나 주면 안 돼? ”

“ 맘에 들어? ”

“ 응, 진짜 좋아. 갖고 싶어. ”

“ 그럼 라라 가져. ”

 

난 뛸 듯이 기뻐서 계란을 조심스럽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아빠와 이그나트 아저씨, 아줌마들에게 자랑했다. 졸고 있던 아냐가 계란을 보더니 미샤에게 자기도 그려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사실 내 동생은 계란이 예뻐서라기보다는 나만 미샤에게서 선물을 받은 게 샘이 나서 그런 거였지만 미샤는 아냐를 달래면서 지금 그려주겠다고 했다. 미샤가 아까 깨진 계란을 한 개 더 끌어당겨 나머지 껍데기에 금을 내는 동안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이콘 그리는 걸 배웠느냐고 물었다.

 

“ 아니요, 배우지는 않았지만 레닌그라드에 친구가 있어요. 박물관에서 이콘을 복원해요. 옆에서 좀 봤어요. ”

 

난 이콘에는 관심도 없었고 그 전까지는 그 고리타분한 성화가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미샤의 달걀은 무척 예뻤기 때문에 박물관에 가서 이콘을 자세히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냐는 이콘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미샤를 재촉했다.

 

“ 나도, 나도 이콘. 나도 언니처럼 예쁜 계란. ”

“ 무신론자에 부활절 계란은 처음이라는 친구가 이렇게 근사한 걸 만들어 버리면 우린 어떻게 하라고. 나도 베껴봐야겠어. 아네츠카, 내가 만들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누구 게 더 예쁜지 말해줘. ”

 

이그나트 아저씨가 웃으면서 자기 계란도 핀으로 찔러 모자이크 무늬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들 맞장구쳤고 너도나도 계란 껍데기를 핀으로 가볍게 부쉈다. 나도 합류했는데 핀이 모자라서 손톱으로 금을 냈다. 모두 모자이크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에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율렌카가 달려갔다. 난 혹시라도 툴라에서 엄마가 전화했나 싶어 벌떡 일어났지만 그건 미샤에게 온 전화였다. 율렌카가 이름을 부르자 미샤가 손짓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 후 율렌카가 자리로 돌아왔다.

 

“ 왜 없다고 하랬어? 여기 있는 거 아는 것 같던데. 다시 한대. ”

“ 그때도 난 없는 거야. ”

“ 누군데 그래? ”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율렌카가 대답했다.

 

“ 바실리예프. ”

“ 어느 바실리예프? 한둘이어야지. ”

“ 의원님 비서. ”

“ 아, 빌어먹을. 게르만 스비제르스키 비서 말야? ”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어버린 이그나트 아저씨가 급하게 입을 막으며 나와 아냐 쪽을 보았다.

 

“ 미안, 욕하면 안 되는데. 아저씨가 잘못했으니 못 들은 걸로 해줘. ”

“ 또 욕하면 내쫓을 거야. ”

 

우리는 가만히 있었지만 아빠가 핀잔을 주었다. 아빠는 평소에는 아주 다정하고 상냥했지만 우리 앞에서 욕을 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그나트 아저씨를 더 야단치는 대신 아빠는 미샤에게 시선을 돌렸다.

 

“ 너 오늘 다른 일정 있었어? ”

“ 아니, 없었어. ”

“ 그런데 왜 의원실에서 전화가 와? 또 마음대로 파티에 안 간 거야? ”

“ 그런 거 없었어. ”

“ 애들 앞에서 거짓말하지 마. ”

 

아빠의 눈빛이 엄격해졌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표정이었다. 미샤도 아빠가 그렇게 쳐다보면 꼼짝도 못 했다. 눈을 돌리면서 미샤가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정말이야. 그런 거 없었어. 아까 극장에서 나올 때 갑자기 전화 왔던 거야. 별 것도 아니고. 문화국 간부들이 저녁 먹는다고 거기 오라고 해서 선약 때문에 안 된다고 했어. 그것뿐이야. ”

“ 그래, 거기 오는 사람들이 누구였는데? 포노마레바? ”

“ 아마도. ”

“ 그 여자 국장이잖아... 바실리예프가 전화한 걸 보니 그쪽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스비제르스키도 있는 거 아냐? ”

“ 몰라. 생각하기 싫어. 벌써 저녁 식사 시간도 다 지나갔는데. ”

“ 아까 얘기하지 그랬어. 잠깐이라도 얼굴 비추고 오는 게 나았을 텐데. ”

“ 싫어. 뉴욕에서도 실컷 팔려 다녔어. 이쪽이 천 배는 더 좋아. ”

 

아빠는 말없이 미샤를 잠깐 바라보았다. 잘못을 저지른 나와 아냐를 타이를 때와 눈빛이 똑같았다. 하지만 미샤는 고개를 돌려버렸고 아냐의 계란을 마저 색칠하기 시작했다. 이그나트 아저씨와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아무리 우리 나라가 무신론 국가라 해도 부활절 전날은 가족이랑 친구들과 보내는 날이지 높은 분들과 밥 먹는 날이 아니라고 열띠게 미샤의 편을 들어 주었다.

 

잠시 후 우리는 모두 모자이크 달걀을 완성했다. 아냐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심사를 맡긴 후 다들 조마조마하게 결정을 기다렸다. 난 아냐가 제일 좋아하는 분홍색과 보라색, 초록색을 섞어 알록달록하게 칠한 계란을 두 개나 만들어서 제일 앞으로 밀어준 후 간절하게 말했다.

 

“ 아누슈카, 이거 봐. 진짜 예쁘지, 그치? 언니 계란이 제일 예쁘지? ”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는 게 마냥 즐겁기만 한 아냐는 내 계란을 들어서 굴려보더니 신나게 귀퉁이를 부숴서 껍데기를 까버렸다. 내가 동생의 배신에 속상해서 토라지자 다들 웃기 시작했지만 아냐는 다른 계란들도 모두 부수기 시작했다. 일곱 살짜리 여자애에게 모자이크 계란이란 우툴두툴한 껍질을 벗기고 싶어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장난감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냐는 미샤가 준 달걀은 깨지 않았다. 배신감에 젖은 이그나트 아저씨가 아냐의 조그만 손을 잡고 하소연했다.

 

“ 아네츠카, 왜 이 계란은 가만 놔두는 거니? 아저씨가 그려준 계란보다 이게 더 예뻐서 그러니? ”

“ 안 돼, 이건. 미셴카가 준 거야. 언니랑 나랑 하나씩 가져야 돼. ”

 

아냐는 이그나트 아저씨가 혹시라도 계란을 뺏을까봐 소매 속으로 숨겼다. 미샤가 아냐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는 의기양양하게 웃자 이그나트 아저씨가 투덜댔다.

 

“ 이건 불공평해. 심사위원이 계란의 예술성이 아니라 참가자에 대한 사적 감정을 우선시했어. ”

“ 예술성은 무슨, 이건 그냥 껍질을 찌그러뜨려서 5분 만에 색칠한 달걀이라고. 그냥 소련 미술이야. 그러니까 아냐는 제대로 한 거야. 제일 먼저 눈에 띈 걸 고른 거지. ”

 

미샤가 고개를 쳐들며 노래하듯 말했다. 어른들 모두 웃었다. 때로 미샤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얘기를 하곤 했다.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율렌카가 일어나려고 했지만 아냐가 달려갔다. 아냐는 전화나 라디오라면 무조건 좋아했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엄마!’ 하고 소리친 걸 보니 그 애도 엄마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외할머니와 온천에 가느라 우리를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아냐는 잠깐 수화기를 들고 있다가 눈이 동그래지더니 금세 울먹이면서 아빠를 찾았다. 아빠가 얼른 달려가 아냐를 안아주면서 누구냐고 물었다.

 

“ 몰라, 미셴카를 찾아. 모르는 아저씨야. 목소리가 무서워. 미셴카 없다고 했더니 거짓말하면 잡혀간대. ”

 

아빠가 아냐를 달래면서 전화를 바꿔달라고 했을 때 미샤가 일어나서 그쪽으로 갔다. 수화기를 든 채 돌아서서 잠시 통화를 했다. 목소리가 낮아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미샤가 전화를 끊더니 창가로 갔다. 바깥을 내려다보더니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깜짝 놀랐다. 미샤가 욕을 하는 것도, 그리고 그걸 듣고도 아빠가 화를 내지 않는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울고 있는 아냐를 마르가리타 아줌마의 품에 내려놓고 창가로 갔다. 나도 따라갔다.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아파트 현관 앞에 차가 한 대 서 있을 뿐이었다. 크고 위압감 넘치는 차였다. 양복을 차려입은 덩치 큰 아저씨가 차에서 내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냥 느낌에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 집 창문을 올려다보며 층수를 세는 것처럼 보였다.

 

미샤가 커튼을 휙 쳤다. 그리고는 아빠가 입을 열기 전에 내 쪽을 보면서 사과하듯 말했다.

 

“ 미안, 라라. 좀 나갔다 올게. ”

“ 어디? 조금만 있으면 잠잘 시간인데. ”

“ 미안해. ”

 

미샤는 내 곁을 지나 욕실로 갔다. 손에 묻은 달걀 껍질 부스러기와 물감 자국을 깨끗하게 씻어낸 후 재킷을 걸쳤다. 아냐를 안고 있던 마르가리타 아줌마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 옷도 갈아입고 가. 셔츠에 물감 튀었어. 높은 사람들이라며. 아까 선물 받은 거 있잖아, 그 수트 멋지던데. ”

“ 버렸어. ”

“ 버리다니! 팬들이 준 선물 버린 적 없잖아. ”

“ 팬들이 준 거 아냐. ”

 

미샤는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았지만 아냐가 다시 울음보를 터뜨리며 무릎을 잡고 늘어지자 곰 인형을 안겨 주며 부드럽게 그 애를 달랬다.

 

“ 잠깐 나갔다 오는 거야, 체브라슈카랑 놀고 있어. ”

“ 나도 갈래, 또 나 자는 동안 언니만 극장 데려가려고! ”

 

극장에 갔던 걸 어떻게 알았나 싶어 가슴이 뜨끔했다. 아냐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자 아빠가 그 애를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 때 초인종이 울렸다.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문을 열자 아까 차에서 내렸던 아저씨가 서 있었다. 양복 차림이었지만 허리에 뭔가 까만 걸 차고 있었다. 무전기 같았지만 그냥 지갑일지도 몰랐다. 덩치도 크고 무섭게 생긴 아저씨였지만 알렉산드라 아줌마에게는 인사를 했고 정중하게 물었다.

 

“ 미하일 세르게예비치가 여기 계신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그 아저씨가 정말 싫어졌다. 미샤는 자기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을 아주 싫어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대꾸하기 전에 미샤가 내 손을 한 번 쥐고 흔든 후 현관으로 갔다.

 

미샤가 그 꼴 보기 싫은 아저씨와 나간 후 이그나트 아저씨가 한숨을 쉬며 투덜댔다.

 

“ 지나치게 유명한 것도 독이라니까. 뉴욕에서 돌아온지 얼마나 됐다고 이 시간에 차까지 보내서 애를 불러내나. 마리야 얘기론 거기서도 계속 여기저기 끌려 다녔다던데. 연습 시간도 두 시간 밖에 안 줬다더라고. 뉴욕 가서도 하루도 안돼서 무대에 올려놓고 좀 너무한 거 아냐? ”

“ 외교 행사로 가면 원래 좀 그래. 미국이니까 더 심했겠지. 쟨 많이 다녀봐서 익숙하긴 할 거야. ”

 

그때 아냐를 재우는 데 성공한 아빠가 나왔고 우리는 남은 계란들을 마저 장식했다. 쿨리치도 조금 더 먹었다. 이그나트 아저씨가 오리와 토끼에 대한 재미있는 노래를 가르쳐주었고 율렌카가 발레리나들이 쓰는 예쁜 머리띠를 줬지만 미샤가 없어서 그런지 아까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율렌카가 머리띠를 씌워주고 귀엽다며 사진을 찍어주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미샤가 썼던 깃털 터번이 더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란 장식을 다 한 후 어른들은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고 난 소파에 앉아 앨리스 그림책을 보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 갑자기 아빠가 내 허리에 팔을 넣고 안아 올렸기 때문에 깜짝 놀라 깼다.

 

“ 라라, 침대에 가서 자야지. 이러다 감기 걸린다. ”

“ 나 안 잤어. ”

“ 자야지. 아저씨랑 아줌마들도 다 갔어. ”

가다니? 미샤가 금방 돌아온다고 했는데. 그렇게 다 가버리면 어떻게 해. ”

“ 벌써 열두 시가 다 됐어. 잠잘 시간 한참 지났잖아. ”

“ 안 돼. 다 가버렸다면서. 미샤가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고 다 자고 있으면 섭섭할 거야. ”

“ 미샤는 오늘 못 올 거야. 그러니까 그만 자자. ”

“ 아니야, 온다고 했어. 미샤는 나한테 거짓말 안 해. ”

 

그래도 아빠가 자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난 결국 울고 말았다. 아냐처럼 굴고 싶지는 않았지만 너무 서운하고 속상했다. 엄마였다면 호통을 치고 혼냈겠지만 아빠는 손수건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면서 가만히 달랬다.

 

“ 라루샤, 계속 울 거야? ”

“ 아빠가 억지로 자라고 하니까 그렇지. ”

“ 지금 많이 졸리잖아. 이렇게 늦게까지 안 자고 있으면 감기 걸려. 다음 주말에 미샤랑 다차에 가려고 했는데 너 감기 걸리면 아냐만 데려가야 할지도 몰라. ”

“ 안 돼, 나도 데려가. ”

“ 그러니까 가서 자자. ”

“ 잘 거야. 미샤 오는 것만 보고. 나 그냥 가만히 앉아서 책 보고 있을게. 미샤 오면 문만 열어주고 금방 잘 거야. 진짜야. ”

“ 라라야, 미샤는 오늘 못 올 거야. ”

“ 왜? 온다고 했는데. ”

“ 아까 차 타고 갔잖아. 혼자서는 못 와. 차로 데려다 줘야 하는데 그 사람들도 밤에는 자야 하잖아.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올 거야. 자고 일어나면 와 있을 테니까 그만 자는 게 좋겠어. ”

 

아빠 말이 맞긴 했다. 결국 난 아빠 손을 잡고 침실로 가서 아냐 옆에 누웠다. 하지만 아빠가 이마에 키스를 해 주고 불을 껐을 때 아직도 미련이 가시지 않아 훌쩍거리면서 투정을 부렸다.

 

“ 아빠가 차로 데리고 오면 될 텐데. 아니면 미셴카가 자기 차로 갔으면 좋았을 걸. ”

“ 미샤는 운전하는 거 싫어하잖아. 운전도 얼마나 못하는데. 이렇게 캄캄한데 잘못하면 사고 나. ”

“ 그럼 그냥 있으라고 해. ”

“ 그래, 착하지. 이제 자. ”

 

그래서 난 아냐의 손을 꼭 잡고 일단 자기로 했다. 하지만 미샤가 돌아오면 금방 나갈 수 있도록 방문은 열어 두었다. 미샤는 밤에 오면 우리가 깰까봐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아빠가 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오곤 했다. 캄캄하면 미샤가 발을 헛디딜 수도 있으니까 아빠에게 거실 램프를 켜놓으라고 했다. 물론 아빠는 내 말대로 해주었다. 안심하고 난 곧 잠들었다.

 

 

*   *   *

 

 

새벽에 난 벨 소리를 듣고 깼다. 초인종 소리인 줄 알고 잠결에 정신없이 침대에서 내려오다 굴러 떨어질 뻔 했다. 하지만 그건 전화벨 소리였다. 간신히 잠에서 조금 깬 후 창밖을 보았다. 아직 어두컴컴했다. 혹시 미샤가 왔나 싶어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는데 아빠가 옷을 입고 있었다.

 

“ 아빠 뭐해? ”

“ 왜 일어났니? 아직 아침 안됐는데. 가서 더 자렴. ”

“ 미셴카 왔어? ”

“ 아니. ”

“ 왜 옷 입어? ”

“ 아빠 잠깐 나갔다 올게, 얼른 자. ”

어디 가는데? 이렇게 캄캄한데 나랑 아냐만 놔두고 어디 가? 나도 갈래. ”

“ 안 돼. ”

 

그때 아빠의 목소리가 너무 단호했기 때문에 난 더 이상 떼를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빠는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램프에 비친 얼굴이 하얗게 굳어져 있었다. 아빠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아서 더럭 겁이 났다.

 

“ 아빠 왜 그래? 어디 아파? ”

“ 아니야. 아빠 지금 빨리 나가야 해. 금방 올 테니까 자고 있어. ”

 

아빠는 급하게 현관으로 뛰어나가려다 내가 너무 놀라서 눈물을 꾹 참으며 서 있는 걸 보고 어깨를 토닥이며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 괜찮아, 라라. 미샤를 데리러 가는 거야. 아빠 보고 데려오라 했잖아. ”

“ 밤에는 못 온다면서. ”

“ 응, 그래서 아빠가 데리러 가는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자고 있어. ”

“ 그럼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

“ 밖에 추워서 안 돼. 아빠 지금 갈게. 안 그러면 미샤가 많이 기다려야 할 거야. ”

“ 그럼 빨리 다녀와. ”

 

아빠가 입 맞춰주는 것도 잊고 나가 버려서 좀 서운했지만 미샤가 빨리 올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잠이 좀 깼기 때문에 침실로 돌아가는 대신 소파에 앉아 앨리스 그림책을 다시 뒤적이며 아빠가 미샤를 데려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왜 그렇게 늦게 가는지 이해가 안 갔다. 미샤와 함께 있을 때는 너무 금방 가서 아쉬웠는데.

 

책을 세 번이나 본 후에는 미샤가 만들어준 이콘 달걀을 가지고 놀았다. 아냐에게 만들어준 계란도 의자 아래에서 찾아냈다. 아냐 건 이콘이 아니라 하얀 백조와 빨간 꽃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예뻤다. 둘 다 갖고 싶었지만 아냐를 놔두고 공연 보러 갔던 게 생각나서 계란을 동생의 과자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버텼지만 아빠와 미샤는 오지 않았고 결국 난 너무 졸려서 도로 아냐 곁으로 파고 들어가 잠들어 버렸다.

 

 

*   *   *

 

 

아빠는 아침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미샤도 마찬가지였다. 집은 텅 비어 있었고 색색으로 장식한 계란들만 가득했다. 간밤에 노느라 평소의 일요일보다 훨씬 늦게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자는 동안 아빠가 벌써 왔다가 나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빠는 극장에서 일했기 때문에 친구들 부모님과는 달리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나갈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미샤도 그랬고. 역시 안 자고 버텼어야 했는데...

 

잠시 후 아냐가 일어났다. 눈을 비비면서 제일 처음 한 말은 역시 미셴카가 왔느냐는 거였다. 그 다음에는 아빠를 찾았고 둘 다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또 울음보를 터뜨리려고 했다. 살살 달래서 식탁으로 데려갔다. 잔소리하는 엄마가 없으니까 아침에 케익을 먹자고 구슬리자 아냐는 금방 좋아했다.

 

우리는 단둘이 앉아 삶은 달걀과 쿨리치를 먹었다. 아냐는 우유를 마셨지만 난 차를 끓였다. 미샤처럼 설탕도 안 넣고 잼도 곁들이지 않고 마셔보았다. 하지만 너무 씁쓸하고 맛이 없어서 미샤가 어떻게 이런 차를 매일 마실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용수가 되는 건 너무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쿨리치를 먹으면서 아냐는 어제 공연에 대해 물었다. 이미 다 들통났기 때문에 숨기는 것도 미안해져서 동생이 물어보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미샤에게서 받은 초콜릿을 전부 꺼내 아냐에게 주었다. 아냐는 초콜릿 한 입, 우유 한 모금, 쿨리치 한 입을 번갈아 먹으면서 한결 기분이 좋아졌는지 방글방글 웃었고 미샤가 왕자님을 췄는지, 공주님과 결혼했는지 열심히 물었다.

 

“ 왕자님은 아니지만 귀족으로 나왔어. 막 호랑이도 잡아오고 코끼리 등에도 타고 그래! ”

“ 우와, 호랑이랑 코끼리 나와? ”

“ 호랑이는 가죽만 나오고, 이렇게 큰 코끼리 등에 예쁜 안장을 깔고 거기 미셴카가 타고 나와! ”

“ 진짜 코끼리? ”

“ 진짠 줄 알았는데 아빠가 아니래. 근데 진짜 코끼리 같아. ”

“ 미셴카가 코끼리 타고 와서 공주님이랑 결혼해? ”

“ 응. 근데 공주님이 못됐어. 좋은 공주님 아니야. ”

 

공주님이 솔로르의 사랑을 받는 무희를 질투해 죽인다는 얘길 해주자 아냐는 깜짝 놀랐지만 곧 공주 편을 들기 시작했다. 어린 아냐는 공주님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긴 나도 지젤 남자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냐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 나도 공주님 될 거야. 그래서 미셴카랑 결혼해야지. ”

 

안 그래도 차고 넘치는 발레리나와 팬들도 모자라 나보다 훨씬 귀엽게 생긴 동생까지 라이벌이 된다는 생각에 깜짝 놀라서 난 급하게 말했다.

 

“ 에이, 안되지. 넌 아기잖아. 미셴카는 스무 살도 넘었는데. ”

“ 내가 스무 살 돼서 미셴카랑 동갑 되면 결혼할래. ”

“ 너 아빠랑 결혼한댔잖아. 아빠한테 이를 거야. ”

“ 안 돼! 아빠한테 말하지 마. 아빠랑도 결혼할 건데. ”

 

아냐는 울상이 되어 잠깐 고민하더니 또 명쾌한 답을 내놨다.

 

“ 월 수 금은 아빠랑 결혼하고 화 목 토는 미셴카랑 결혼해야지. ”

“ 그럼 일요일은? ”

“ 일요일엔 바냐랑 결혼할 거야. ”

 

좋은 생각이었다. 솔로르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굳이 니키야가 죽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지만 또 곰곰 생각하니 아냐와 나눠서 미샤와 결혼하는 것도 싫었다. 아무리 내 동생이지만 질투날 것 같았다.

 

쿨리치를 두 조각 째 먹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나보다도 아냐가 먼저 뛰어나갔지만 아빠가 아니라 마르가리타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우리가 아침 못 먹고 있을까봐 왔다면서 보자기를 풀어 생선 수프가 가득 담긴 냄비와 샌드위치 접시를 꺼냈다. 그리고는 우리 식탁을 보고 기절초풍했다.

 

“ 너희 아침부터 케익 먹었니? 초콜릿까지! ”

“ 이거 아줌마가 만든 거잖아요, 너무 맛있어서 또 먹은 거예요. ”

“ 그래도 애들이 아침에 밥을 먹어야지... ”

“ 밥이 없었는걸요. 아빠도 없고. ”

“ 하긴 그랬겠네. 너희 아빠도 워낙 정신이 없어서... 좀 전에야 나한테 전화했더라. 빨리 알았으면 아까 왔을 텐데. 둘 다 배고팠겠구나. ”

“ 우리 아빠 어디 있어요? ”

“ 아빠가 말 안 해줬어? ”

“ 몰라요. 새벽에 나갔어요. 미셴카 데리러 간댔는데 아침에 안 왔어요. 전화도 안 해주고. 우리 아빠 봤어요? 극장 갔어요? 미셴카랑? ”

“ 아니, 스탄카는 병원에 있어. 극장에는 오후에나 갈 거야. ”

“ 병원? 아빠 아파요? ”

 

난 깜짝 놀라서 수프 그릇을 엎을 뻔 했다. 갑자기 새벽에 봤던 아빠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그릇을 똑바로 놔주면서 나와 아냐에게 아빠는 하나도 아프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럼 왜 병원에 있느냐고 캐묻자 아줌마는 미샤가 조금 아파서 아빠가 돌봐주러 갔다는 거였다. 미샤는 간밤까지 멀쩡했는데 어디가 아파서 새벽에 아빠가 그렇게 급하게 나간 거냐고 물었지만 아줌마도 잘 모른다고 했다. 아마 뉴욕 다녀온 여독 때문에 피곤해서 몸살이라도 났나보다고 했다. 낮의 무대에서 그렇게 날아다녔는데 몸살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미샤의 등과 어깨에 번져 있던 피멍이 떠올랐다.

 

난 급하게 의자에서 내려가서 옷을 입었다. 아줌마가 미샤는 금방 괜찮아질 테니까 가만히 앉아서 아침 먹으라고 달랬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미샤는 평소에 몸이 아파도 약도 안 먹고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가 종종 야단치곤 했다. 그런 사람이 병원에 있다니 진짜 많이 아픈 게 분명했다.

 

아줌마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아빠였다. 난 아줌마에게서 수화기를 빼앗았고 울음이 나오는 걸 꾹 참으며 아빠에게 어느 병원이냐고 물었다. 아빠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미샤가 많이 아픈 거냐고 묻자 아줌마랑 똑같은 대답을 했다.

 

“ 아니야, 조금 아픈 거야. 이제 괜찮아. ”

“ 나 병원에 갈래. ”

“ 안 와도 돼, 그냥 아냐랑 있어. 아빠가 조금 있다 집에 갈게. ”

“ 미샤가 아프다며. 아픈 사람은 옆에서 돌봐줘야 돼. 나 잘해. 전에 엄마가 아플 때도 간호해 줬어. 주스도 갖다 주고 안마도 해 줬어. 미셴카도 안마해 줘야 돼, 어제도 세료쟈 아저씨가 해 줬잖아. 어깨랑 등에 멍이 엄청 많았어. 나 같으면 울었을 거야. ”

“ 그래, 라루츠카는 간호를 잘 하지. 아빠도 알아. 근데 오늘은 안 오는 게 좋겠어. ”

“ 왜? 미샤가 그렇게 많이 아픈 거야? 아니면 다 나았어? 좀 있다 아빠랑 같이 올 거야? ”

“ 아니, 그렇게 많이 아픈 건 아닌데 그래도 조금은 여기 있어야 돼. ”

“ 내가 가면 왜 안 되는데? ”

“ 미샤는 아픈 걸 보여주는 게 부끄러운가봐. ”

“ 왜? ”

“ 남자들은 원래 그래. ”

“ 아빠한테는 괜찮아? ”

“ 아빠한테도 별로 안 보여주고 싶대. 그래서 아빠도 금방 갈 거야. ”

“ 아빠도 그래? 아프면 부끄러워? ”

“ 아니, 아빠는 안 그래. ”

“ 그럼 남자라서 그런 게 아니네. ”

“ 응, 라라 말이 맞네. 아닌가보다. ”

“ 난 알아. 미셴카는 왕자님이라서 그래. 왕자님들은 아픈 거 티 안 내. 그래야 공주님도 구해주고 신하들에게도 위엄 있게 보일 수 있어. ”

 

아빠는 잠시 아무 말도 안 했다. 병원 복도인지 수화기 너머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미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어 귀를 바짝 갖다 댔지만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윙윙거릴 뿐이었다. 마침내 아빠가 입을 열었다. 내 말이 맞다면서 아냐와 함께 조금만 놀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마르가리타 아줌마를 바꿔달라고 했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한참 동안 수화기에 귀를 대고 있었다. 그러다 달력을 힐끗 쳐다보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 수요일이 로미오와 줄리엣인데 올라갈 수 있을까? 안될 것 같으면 지금 노비코프에게 얘기해야 돼. 그래야 대역 준비 시키지. 그 날 서기국 의원들 공연 보러 온다고 했는데 좀 걱정이네. ”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줌마는 한숨을 쉬더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우리를 식탁에 똑바로 앉혀놓고 생선 수프를 다 먹는지 안 먹는지 감시했다. 난 미샤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아빠의 말이 생각나서 입을 다물었다. 미샤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아픈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싫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들어왔다. 잠을 설쳤는지 피곤해 보였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와 아냐에게 하루 종일 집을 비워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커다란 오렌지를 두 개나 가져다 줬다. 키오스크에서 파는 조그맣고 껍질이 우툴두툴하고 시들어빠진 오렌지가 아니라 진짜 크고 동그랗고 매끈한 오렌지였다. 아냐는 그 자리에서 단숨에 오렌지를 해치웠다.

 

“ 라루샤는 안 먹니? 간식 많이 먹었어? ”

“ 안 먹을래. ”

“ 굉장히 달던데. 아빠가 까줄 테니까 조금만 먹어봐. ”

“ 싫어. 그냥 놔둘 거야. ”

“ 아빠가 늦게 와서 토라진 거야? ”

“ 아니야. 놔뒀다가 미샤 오면 같이 먹을 거야. 미샤는 오렌지 좋아해. 초콜릿보다 오렌지가 더 좋댔어. ”

 

아빠는 웃었고 나에게 착하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오렌지는 미샤가 우리 먹으라고 준 거니까 다 먹어도 된다고 했다. 그 말에 좀 안심이 되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미샤가 어떤지 물어보았다. 마르가리타 아줌마가 공연 걱정하던데 못 올라가는 거냐고도 물었다.

 

“ 내일까지만 쉬면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공연도 올라갈 거야. ”

“ 그치만 전에 내가 감기 걸렸을 땐 일주일이나 학교 안 갔는걸. 선생님도 더 쉬라고 했었어. ”

“ 미샤는 어른이잖아. ”

“ 아니야, 어른은 아빠랑 이그나트 아저씨랑 마르가리타 아줌마 같은 사람들이야. 미샤는 오빠야. ”

“ 이그나트랑 미샤는 네 살밖에 차이 안 나는데 너무하네. 이그나트가 삐치겠는데. ”

“ 이그나트 아저씨는 수염 있잖아! ”

“ 수염이 없어야 오빠인 거야? ”

“ 응. 그리고 잘생겨야 돼. ”

“ 라루샤가 이그나트를 두 번 죽이는구나. ”

 

아빠는 소리 내어 웃더니 오렌지를 까주었다. 오렌지는 정말 맛있었다. 미샤가 준 거라서 더 그럴지도 몰랐다. 그래도 여전히 난 초콜릿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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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4장으로 이어진다. 그건 내일..

 

러시아 정교 신자들은 부활절이 되면 쿨리치라는 케익과 파스하라는 과자를 굽는다. 쿨리치는 동그란 케익, 파스하는 사다리꼴 모양의 과자이다. 파스하에는 보통 XB라는 글자를 새기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부활하셨네' 라는 문장의 약자이다. 이미지 몇 장... 좀 작지만..

 

 

 

일반적인 쿨리치는 이렇게 생겼다. 촌스럽지만.. 원래 러시아 음식 모양새가 좀 촌스럽다. 그게 매력임^^; 아래에 이콘 그림이 그려진 부활절 달걀들이 늘어서 있다. 이건 시판용 달걀.

 

 

쿨리치~

마트료슈카와 달걀과 함께. 보통 집에서 색칠하는 달걀은 붉은색을 비롯해 저렇게 알록달록 칠한다.

 

 

 

전통적으로는 부활절 달걀은 붉은색으로 칠한다.

 

 

 

파스하 과자. 왼편엔 XB, 정면엔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파스하 과자 사진 몇 개 더.

 

 

 

쿨리치와 파스하, 색칠 달걀 함께.

 

 

 

 

 

러시아 정교 부활절 달걀 사진 몇 개.. 이 달걀에도 그리스도 부활하셨네 라고 적혀 있음.

 

 

 

 

 

모양은 촌스럽지만 맛있는 쿨리치와 파스하 과자.. 그런데 한 조각밖에 안 먹는 미샤.. 이것은 정신 승리 ㅠㅠ

 

 

 

 

:
Posted by liontamer
2015. 1. 5. 19:45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 풍경 russia2015. 1. 5. 19:45

 

 

writing 폴더에 작년에 썼던 부활절 단편 Jewels를 5토막으로 끊어 올리고 있는데, 이 이야기가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생각난 김에 모스크바 사진 몇 장 올려본다.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 풍경. 2012년 9월에 갔을 때 찍은 사진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언제나 페테르부르크가 모스크바보다 더 아름답고 근사한 도시라고 생각하는데다 막상 모스크바에서는 별 감흥을 느껴본 적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모스크바 역시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작고 아름다운 페테르부르크와는 달리 진짜 대도시이다. 그리고 소련 시절 지어진 거대하고 끔찍하고 육중한 건축물들 때문인지 짓눌리는 듯한 느낌도 있다. (아마 그것 때문에 내가 모스크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아르바트 거리에 가면 느낌이 좀 다르다. 페테르부르크는 네프스키, 모스크바는 아르바트인 것이다. 물론 요즘의 아르바트는 옛날의 그 젊음과 혁신의 거리라기보다는 매우 상업적으로 변질된 곳이 됐다고들 하지만..(이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니.. 대학로, 홍대.. 전부 그렇게 돼버렸다)

 

어쨌든 아르바트 거리 사진들.

 

지금 올리고 있는 단편 Jewels의 두번째 챕터에서 주인공과 어린 화자 가족이 아르바트에 있는 그루지야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뭐 거리 풍경은 묘사되지 않지만..

 

그 단편 링크는 여기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393

 

 

 

 

 

 

 

 

 

 

 

 

 

 

 

:
Posted by liontamer

 

앞서 올린 첫번째 챕터(http://tveye.tistory.com/3390) 에 이어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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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els

пасхальный расска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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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부활절을 앞둔 주말이었다. 엄마는 목요일에 툴라의 외할머니 댁에 가면서 나와 아냐를 아빠에게 맡겼다. 좋은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뉴욕 공연에서 막 돌아온 미샤가 금요일 저녁에는 스케줄이 없다면서 아르바트에 새로 생긴 그루지야 레스토랑에 우리를 데려갔다. 나와 아냐는 맛있는 음식을 정신없이 먹으면서도 끊임없이 미샤에게 뉴욕 얘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아빠는 미샤가 아직 시차 적응도 안 됐고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다음날 공연 리허설을 했으니 좀 기다리라고 우리를 달랬지만 미샤는 먹는 것보다 우리와 얘기하는 게 더 좋다고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미샤는 뉴욕 관광 같은 건 하나도 못했다. 자유의 여신상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전부 못 가고 사흘 내내 극장과 리셉션 파티장과 호텔, 대사관 행사장만 돌았다면서 아쉬워했다. 아빠가 미샤의 접시에 음식을 얹어주면서 의아하게 물었다.

 

“ 마리야는 대사관엔 안 갔다던데. 어쩌다 거기까지 끌려갔어? ”

“ 스비제르스키가 자선 파티를 열었어. 백악관 관계자들을 불렀다나. 마리야는 행운이었지, 커튼 콜 때 무릎을 삐끗해서 호텔에 누워 있었거든. 안 그랬으면 같이 갔을 거야. 나도 그랬으면 좋았을 걸, 보드카나 들이부었으면 안 가도 됐을 텐데. ”

“ 그런 건 그냥 일이라고 생각하라고 했잖아. 농담이라도 그런 생각은 하지 마. 보드카 같은 소리. 한 모금만 마셔도 정신 못 차리는 주제에. ”

“ 어차피 내 방 미니바에는 물하고 우유 밖에 없었어. 알콜은 하나도 없더라고. 원래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마리야 방에 갔더니 냉장고에 듣도 보도 못한 술병들이 가득 차 있었어. ”

“ 너 술 못 마시는 거 알고 미국인들이 신경써준 건가? ”

“ 아니. 크라베츠가 손쓴 거야. 대사관 가기 전에 불러서 엄포를 놓더라고. 거기 가서도 샴페인이고 와인이고 손도 대지 말라고. ”

“ 왜? 스비제르스키도 아니고 크라베츠가? 그렇게 자상한 인간은 아닐 텐데. 극장에 대해선 관심도 없고. 백조랑 호두까기 구분도 못할걸. ”

“ 글쎄. 그 대단하신 정치가들 속셈을 어떻게 알겠어. 아마 백악관 양키들 앞에서 볼쇼이 무용수가 취해 흐느적거리는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겠지. ”

 

아빠가 미샤의 접시를 포크로 탁 때렸다. 미샤는 나와 아냐 쪽을 힐끗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우리 앞에서 술 얘기도 모자라 양키 운운하는 단어를 써서 그런 것 같았다. 잠시 미샤는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 생각난 듯 가방을 열더니 나와 아냐에게 선물을 주었다. 아냐는 굉장히 귀여운 곰 인형을 받자 꺅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애는 곰 인형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아냐가 인형을 안고 노래를 부르며 좋아하는 동안 미샤가 내게 크고 멋진 책을 한 권 주었다. 입체 그림책이었다. 근사한 그림들이 스프링처럼 튀어나와 좍 펼쳐졌다. 귀여운 여자애랑 토끼도 있고 도마뱀도 있고 과자와 티포트, 심지어 트럼프들도 있었다. 그렇게 호화스럽고 예쁜 책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너무 정신이 팔려서 아냐도 나도 고맙다는 인사조차 안 한 것 같았다. 미샤는 개의치 않았다. 우리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그날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시차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지 내내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는데 그렇게 웃는 걸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마침내 나는 그림에서 시선을 돌려 동화책의 내용을 읽어보려고 했다. 그리고 꼬불꼬불하고 생소한 글자들을 발견했다.

 

“ 이게 뭐야? 영어야? ”

“ 응. 뉴욕 서점에서 샀더니 우리말로 된 게 없었어. ”

“ 난 영어 모르는데. 아빠는 알아? ”

“ 아빠는 조금밖에 몰라. 미샤가 알 거야. 읽어달라고 해봐. ”

 

그러자 미샤가 책을 읽어주었다. 그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 맨 처음에 미샤는 우리말로 번역해서 읽어주었지만 나도 아냐도 생전 처음 보는 영어 그림책이 신기해서 영어로 읽어달라고 졸라댔다. 미샤는 아무도 우리 쪽을 보지 않는 것을 확인하더니 한 페이지씩 영어로 읽은 후 우리말로 번역해 가며 끝까지 책을 읽어주었다. 내용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어쨌든 그림책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아냐는 완전히 홀려서 꼼짝도 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입체 그림보다도 책의 내용이 더 재미있었다. 어쩌면 미샤가 읽어줬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미샤는 목소리도 좋았지만 연기도 잘했기 때문이다. 발레 무대에서야 대사가 없으니 그럴 기회가 없었지만 이따금 푸시킨 동화책이나 시를 읽어줄 때면 진짜 훌륭했다. 나는 아직도 미샤가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읽어주는 걸 몰래 녹음했던 테이프를 간직하고 있다. 하도 많이 들어서 절반쯤은 완전히 늘어져버렸지만. 그 앨리스 얘기도 붉은 여왕이 목을 치라고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리는 장면을 읽어줄 땐 소름이 오싹할 정도였다. 아빠조차도 휘파람을 불었다.

 

“ 미셴카, 그렇게 무서운 붉은 여왕은 태어나서 처음이야! 붉은 여왕이 아니라 이반 뇌제 아냐? ”

“ 너무한데, 나름대로 여자 목소리 내보려고 노력했다고. ”

“ 여왕 목소리 같았어! 진짜야! ”

 

아냐와 난 열띠게 편을 들어주면서 빨리 다음 장을 읽어달라고 아우성쳤다. 마침내 미샤가 책을 끝까지 다 읽어줬을 때 우리는 너무 아쉬워서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우리는 미샤가 평소처럼 아빠의 집으로 같이 가서 놀다가 자고 갈 거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그가 극장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아냐는 엉엉 울었다. 미샤는 아냐를 안아주면서 부드럽게 달랬다. 언니가 된다는 건 참 불공평했다. 나도 아냐처럼 어렸다면, 아니, 동생이었다면 저렇게 막무가내로 울 수 있었을 텐데. 그럼 미샤가 저렇게 번쩍 안아줬을 텐데.

 

아빠는 아냐에게 미샤가 내일 낮에 무대에 올라가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대신 저녁에 우리 집에 올 거고 같이 부활절 계란에 색칠을 하며 놀 거라고 했다. 우리는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연신 진짜냐고 물었고 미샤는 정말 올 거라고 약속했다. 안심한 아냐가 곰 인형을 다시 안고 깜박 잠들었을 때 미샤는 아빠에게 날 공연에 데리고 오라고 했다. 아빠는 잠깐 고민하는 눈치였다.

 

“ 그거 봐도 될까? ”

“ 왜, 지젤도 봤는데. 비슷하잖아. ”

“ 얘가 지젤을 보다니, 언제? 나스챠가 못 보게 했는데. ”

“ 작년에 키로프에서 내가 데려갔었어. ”

 

미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빠는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내 쪽을 보면서 앞으로 이런 일은 아빠에게도 알려줘야 한다고 했다. 미샤와 둘이 비밀을 만들면 아빠가 속상할 거라고 했다. 어쩐지 큰 잘못을 한 것 같아서 울기 직전이었지만 미샤가 편을 들어주었다.

 

“ 애들이라고 못 보는 게 어디 있어. 우리도 열 살 때 발레학교 들어갔잖아. 그때부터 극장 무대에도 올라갔는데. ”

“ 그건 호두까기나 엄지동자 같은 거였지. 라 바야데르는 아니잖아. ”

“ 난 그거 일곱 살 때 봤다고. 라라 나이 땐 키로프 레퍼토리는 전부 다 꿰고 다녔어. ”

“ 아, 누가 말렸겠어. 어마어마한 말썽꾸러기였겠지. 안 봐도 뻔해. 밤마다 기숙사 창문을 넘었겠지. ”

 

아빠는 웃더니 날 데리고 낮 공연에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미샤에게 연습실에 오래 있지 말고 빨리 들어가 자라고 했다.

 

 

*   *   *

 

 

토요일 낮에 아빠는 약속대로 날 극장에 데려가 주었다. 아냐가 친구 생일 파티에 가서 다행이었다. 만약 나 혼자 미샤의 공연을 보러 간다는 걸 알았다면 하루 종일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낮 공연이었는데도 좌석은 매진이었다. 아빠의 손을 잡고 위층 카페에 올라가다 꽃다발을 든 여자들이 안내원 할머니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는 할머니도 있었지만 인사를 할 수도 없었다. 주스를 마시면서 아빠에게 이유를 물어보았다.

 

“ 미샤 팬들이야. 꽃은 안내원들에게 맡겨야 되는데 자꾸 가지고 들어가려고 해서 그래. ”

“ 그 언니들은 극장에 안 와봐서 그런 거야? 가지고 들어가도 소용없잖아. 무대에 올라가서 줄 수도 없는데. ”

“ 오케스트라 핏 앞으로 와서 무대로 꽃을 던지는 여자들이 있어. ”

“ 우와, 거기까지 꽃을 던지려면 팔 힘이 세야겠네. 나도 해보고 싶어! ”

“ 라루샤, 그러면 안 되지. ”

“ 왜? 나도 미샤한테 꽃 주고 싶어. 무대로 못 올라가더라도 커튼 콜 때 얼굴 보면서 주고 싶단 말이야. ”

“ 연주자들 머리 위로 꽃이 떨어지잖아. 무례한 행동이야. 극장에서 그렇게 행동하면 안 돼.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중간에 미샤가 추고 나면 그 자리에서 꽃을 던지거든. 그건 무용수한테도 결례야. ”

“ 왜? 나 같으면 기분 좋을 텐데.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거잖아. ”

“ 발레는 나 혼자만 잘하고 칭찬받는다고 되는 게 아니야. 남자가 추고 나면 발레리나가 이어서 또 추잖아. 파트너에 대한 결례야. 그리고 바닥에 꽃이 떨어져 있으면 밟고 미끄러질 수도 있어서 위험해. 키로프에 있을 때도 그래서 미샤가 꽃을 다 줍고 들어가야 했어. ”

 

난 아빠의 말을 이해하긴 했지만 그래도 무대로 곧장 꽃을 던지는 게 굉장히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날 미샤가 춘 건 라 바야데르의 솔로르였다. 그 공연을 보았을 때에야 난 미샤가 지젤에 대해 했던 말을 이해했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며 무대의 배역은 누가 언제 어떻게 추느냐에 따라 언제나 다르다고.

 

라 바야데르는 여러 모로 지젤과 비슷했다. 사랑을 약속한 무희를 공주님과 약혼한다고 버려서 죽게 만드는 남자 주인공이 나왔다. 하지만 이쪽은 좀 더 무시무시해서 여주인공 니키야가 공주님과 칼부림을 하며 사랑싸움을 하고 급기야 꽃바구니에 숨겨진 뱀에 물려 죽어버렸다. 그런데도 남자 주인공 솔로르는 니키야를 구해주지도 않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공주님 손을 잡고 사랑을 속삭이기까지 했다. 마음 한 구석으로는 진짜 나쁜 놈이란 생각이 들었고 화가 나야 당연할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나중에 친구들은 내가 솔로르를 본 게 아니라 내내 미샤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거라고 했지만 그건 그렇지가 않았다. 그 세 시간짜리 공연 내내 난 무대 위에서 날아오르고 춤을 추고 때로는 사랑을 속삭이고 때로는 괴롭게 몸부림치는 솔로르를 보고 있었다. 그게 미샤라는 생각은 커튼 콜 전까지는 전혀 들지 않았다. 깃털 달린 터번과 보석처럼 빛나는 구슬이 박힌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 무대를 오가는 그 솔로르는 지그프리드 왕자님은 아니었지만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심지어 연적을 없애려고 했던 공주님의 심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상 속에서 온통 새하얀 유령들에게 휩싸여 사랑하던 여자의 영혼 앞에서 무릎을 꿇는 그 솔로르라면 용서해주고 싶었다.

 

이후 몇 년 동안 나는 다른 무용수가 솔로르를 춘 라 바야데르를 꽤 여러 번 보았다. 하지만 미샤의 그 공연만큼 날 사로잡았던 솔로르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공주의 살인을 정당화해주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솔로르, 그리고 어떻게든 용서해주고 싶은 솔로르도 다시는 보지 못했다.

 

공연을 마치고 무용수들이 인사를 하러 나왔을 때 결국 안내원 몰래 꽃을 반입하는 데 성공한 열성 팬들이 달려 나와 오케스트라 핏 너머로 꽃다발을 내던지고 정신없이 미샤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과 환성과 갈채를 보냈다. 놀랍게도 꽃다발들은 전혀 연주자들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았고 꽃잎이 흩날리지도 않았다. 나중에 백스테이지에 가서 미샤를 만났을 때 그 이유를 알았다. 꽃다발들 아래쪽에 예쁜 리본이나 스카프로 묶인 묵직한 상자가 달려 있었다. 상자 무게 덕에 휙 날아간 것 같았다. 상자 안의 내용물들은 각양각색이었는데 미샤는 힐끗 보더니 초콜릿 상자를 찾아내 내게 주었다. 까만 레이스 리본이 달린 화려한 상자를 보고 궁금해서 만져보려는데 아빠가 내 손을 잡아당기며 경고하는 말투로 이름을 불렀다.

 

“ 라라. ”

“ 잘못했어. 너무 예뻐서 궁금해서 그런 거야. 미셴카, 열어보면 안 돼? ”

“ 돼. 열어봐. ”

“ 아니, 라라는 안 보는 게 좋겠어. 그 초콜릿 먹고 잠깐 나가 있자. 미샤는 옷도 갈아입어야 하잖아. ”

“ 이럴 때면 영락없는 아저씨라니까. 늙고 있어, 스탄카. 보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 싶다는 걸 벌써 잊다니. ”

 

미샤가 악의 없는 태도로 아빠를 놀렸다. 둘은 말을 놓는 사이이긴 했지만 아빠는 미샤보다 열네 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미샤에게 아저씨 소리를 들은 아빠는 한숨을 쉬었지만 결국 내가 상자를 열도록 내버려 두었다. 뚜껑을 연 순간 난 아빠 말을 들을 걸 하고 후회했다. 안이 다 비치는 얇고 까만 레이스로 그물처럼 엮여 있는 엄청나게 야한 여자 속옷이 굴러 나왔기 때문이다. 너무 놀라서 난 상자를 떨어뜨렸고 아빠 뒤로 달려가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감췄다. 아빠는 날 야단치는 대신 웃어버렸지만 잠시 후 미샤를 꾸짖었다.

 

“ 애한테 이런 거 보여주지 마. ”

“ 뭐가 어때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거지. 라루츠카, 1막이랑 2막에서 니키야가 입었던 의상 생각 안나? 그거랑 비슷한 거야. ”

 

그 말에 용기를 얻은 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져서 그 예쁘고 야한 속옷을 집어 올려 샅샅이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근데 왜 이런 걸 주는 거야? 이건 여자 거잖아. 입을 수도 없는데. ”

“ 나야 당연히 못 입지. 그래도 가끔 이런 선물을 주는 사람들이 있어. ”

“ 왜? ”

“ 자기가 입은 걸 보여주고 싶지만 그게 어려우니까 옷만 주는 거야. ”

“ 오빠랑 결혼하고 싶어서? 그 공주님처럼? ”

“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 ”

“ 저런 거 선물해주는 여자들 하나하나랑 다 결혼하려면 참 힘들겠네. 자, 라루샤. 나가 있자. 그래야 미샤가 빨리 갈아입고 나올 수 있지. 분장도 지워야 하잖아. ”

사진 한 장만 찍으면 안 돼? 나쟈랑 비카가 꼭 미샤랑 찍은 사진 보여 달랬어. 분장하고 의상 입은 걸로... 지금까지 입었던 것 중에 이 옷이 제일 예쁘단 말이야. ”

“ 아, 라라는 푸른색을 좋아하는구나. 해적에서 입은 옷도 좋다고 했잖아. 이리 와, 같이 찍어. 스탄카가 찍어줄 거야. ”

“ 파란 옷도 예쁘지만 그 팔찌랑, 허리띠랑 깃털 터번이랑... 전부 예뻐. 진짜 보석 같아. ”

 

그러자 미샤가 팔찌를 풀어 내 손목에 채워 주었다. 내겐 너무 커서 두 번 돌려야 했다. 물론 그건 진짜 보석이 아니라 예쁜 구슬과 섬세하게 세공된 테두리가 달린 장신구였지만 그래도 난 너무 흥분해서 기절할 뻔 했다. 미샤는 터번도 풀어주려고 했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그 새하얀 깃털과 보석 구슬 박힌 터번을 두르고 있는 미샤가 너무 근사했기 때문이다. 미샤는 뒤에서 내 허리를 잡고 살짝 발레리나 같은 포즈를 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난 있는 힘껏 발끝으로 서서 버텼지만 아빠가 셔터를 누르고 나자 헉헉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부러지는 것 같았다. 엄마 아빠가 둘 다 무용수였는데 난 왜 이렇게 뻣뻣한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샤는 배운 적이 없어서 그런 거지 이만하면 꽤 유연하다고 칭찬해 주었다.

 

사진을 찍은 후 아빠는 내 손목에서 팔찌를 풀었다. 극장에 반납해야 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너무 갖고 싶었지만 무대 의상과 장신구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나오려고 했을 때 세료쟈 아저씨가 들어와 미샤에게 마사지를 해 주었다. 무용수들은 공연 후에 가끔 마사지를 받는 편이었으므로 별다른 일은 아니었지만 아빠는 얼굴을 찌푸렸다.

 

“ 어깨는 다 나은 줄 알았는데. 무대에서도 티 안 났는데 다시 아픈가? ”

“ 미셴카 어깨 아파? ”

“ 아니야, 내려가자. 너 초콜릿 자꾸 먹으면 저녁 못 먹는다. ”

 

걱정이 되어 문을 닫으면서 안을 다시 들여다보다 미샤가 상의를 벗는 것을 발견하고 부끄러워져서 딸꾹질이 나왔다. 장식이 많이 달려 있어서 그런지 세료쟈 아저씨가 벗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다가 미샤의 어깨와 등 위쪽에 피멍이 여러 개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굉장히 아팠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무용수는 너무 힘든 직업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발레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가 반대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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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3장의 부활절 파티로 이어진다. (http://tveye.tistory.com/3393)

물론 소련 시절에야 러시아 정교는 탄압을 받았고 교회들은 폐쇄되었지만 정교 신자들은 많이 남아 있었고 부활절 달걀이나 과자 만드는 풍습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얘기는 내일..

 

라 바야데르와 솔로르에 대한 이야기들은 dance 폴더에서 라 바야데르로 검색하면 여러 동영상과 리뷰, 사진 등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아쉬우니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의 솔로르 사진 한 장. 전에 올렸었지만..

 

 

 

 한 장으로는 아쉬우니.. 코끼리 타고 등장하시는 슈클랴로프 솔로르 사진 한 컷 더 :0

 

** 미샤가 키로프에서 췄던 라 바야데르에 대한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2195

 

** 미샤와 라라 자매, 일린이 아르바트의 그루지야 식당에서 밥을 먹는 장면이 있어서..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 풍경 사진들 : http://tveye.tistory.com/3398

 

 

:
Posted by liontamer

 

이 단편은 작년 4월에서 5월 초에 쓴 것으로 일종의 부활절 기념 픽션이었다. 구조적으로는 내가 몇 년 동안 손대고 있는 레닌그라드 우주의 주인공인 미샤의 연대기에 속해 있다. 원래 쓰려던 글을 시작하기 전에 머리도 정리하고 싶었고 마침 부활절 시즌이었기 때문에 좀 가벼운 느낌으로 쓴 소품이다. 화자도 열 살짜리 소녀이고 1인칭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더 그렇다.

 

배경은 1977년 4월, 소련 모스크바이다. 내 주인공 미샤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레닌그라드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지금 쓰는 글은 가상의 지방 소도시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쓴 글은 이 단편이 유일하다. 이 시리즈에서 미샤는 레닌그라드 발레학교를 졸업하고 키로프 극장에 들어가 스타가 되고 또 안무가로도 활동하게 되는데, 화려한 커리어를 이어가던 도중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게 1977년이다. 그가 볼쇼이로 옮겨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재작년 초에 완성한 장편에서 다룬 적이 있다(미샤의 친구인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그 장편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가상의 인물들이다. 미샤를 제외한 주요 인물로는 화자인 라라, 그리고 라라의 아빠이자 볼쇼이 극장 안무가이며 미샤의 절친한 친구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있다. 라라는 가끔 라루샤, 라루츠카 등의 애칭으로 불린다. 미샤는 일린을 스탄카라고 부른다. 미셴카 역시 미샤의 애칭이다. (러시아 이름은 이게 복잡.. ㅠㅠ)

 

그 외에 라라의 여동생인 일곱살짜리 아냐, 라라의 엄마이자 일린의 전처인 나스챠, 그리고 일린의 극장 동료들이 등장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에벨리나 크리셴스카야 역시 볼쇼이 무용수이다.

 

일린과 라라에 대한 이야기는 전에 한번 발췌한 적이 있다. 수용소에 수감된 미샤를 면회하러 간 일린의 이야기였는데 그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221

 

단편 제목은 발란신의 모던 발레인 Jewels 에서 따왔다. 그냥 '보석'이라고 할까 했는데 복수형의 s를 번역하기도 그렇고 리듬감도 참 껄끄럽다. 그래서 그냥 영어로 붙여놨다. 사실은 노어인 'Драгоценности'라고 붙이고 싶었지만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제목..^^;

 

단편은 총 5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에도 5토막으로 끊어서 올려본다. 오늘은 이야기가 좀 이어지는 1~2를 먼저 올려본다. 1~2에는 발레 작품 얘기도 좀 나온다.

 

어쨌든 열 살짜리 여자애의 시점으로 글을 전개하는 건 오랜만이라 재미있었다. 특히 짝사랑에 빠진 어린 여자애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 이 글을 무단으로 전재, 배포, 복제, 인용하거나 퍼가지 말아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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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els

пасхальный расска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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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강을 따라 걸으며 보석을 찾아내는 게 얼마나 쉬운지 아는가? 그런 일을 하기에는 밤이 좋지만 미샤는 낮도 상관없다고 했다. 아니, 낮이 더 좋다고 했다. 물론 그건 레닌그라드 얘기다. 그 동네는 이곳보다 훨씬 춥고 음습하지만 대신 소위 백야라는 게 있고 여름날 한낮의 빛살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밝고 투명하니까 미샤의 말이 맞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엄마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미샤를 싫어했고 레닌그라드 출신이라 쓸데없이 자존심이 센데다 콤소몰에도 안 나가는 문제 있는 성격이라고 헐뜯곤 했지만 사실 우리 엄마는 아빠와 친한 사람들이라면 모두 미워했으므로 그리 신빙성은 없었다.

 

엄마의 의견이란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아빠도 좋아했고 아빠가 일하는 근사하고 화려한 극장도, 그리고 아빠의 친구들도 모두 좋아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미샤를 제일 좋아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샤에게는 완전히 반해 있었지만 물론 엄마 아빠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내게 바보 같다고 했다. 엄마야 미샤를 워낙 싫어하니 그렇다 치지만 아빠는 매일같이 극장에서 미샤와 함께 일하는데다 집에서 같이 지내는 경우도 많았고 무엇보다도 아빠는 항상 내 편이니까 솔직하게 얘길 해야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걔들은 뭘 모른다. 아빠에게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법이다. 우리 아빠가 날 얼마나 사랑하고 예뻐하는데, 정작 귀여운 딸이 벌써부터 아빠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푹 빠져 있다는 걸 알면 상처받을 게 뻔하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당연한 거 아닌가? 겨우 열 살짜리 소녀라 해도 첫사랑은 첫사랑이다. 친구들에게는 얘기할 수 있지만 가족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인 것이다.

 

그건 1977년 봄이었다. 내게는 최고의 해였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건 변함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든다. 1월에 미샤가 볼쇼이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맨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난 너무 좋아서 기절할 뻔 했고 잠시 후에는 걱정이 되어 아빠를 붙잡고 늘어졌다.

 

“ 근데 거기서 어떻게 와? 공연 있을 때마다 비행기 타야 하는 거야? 기차로는 열 시간이나 걸리잖아. 작년에도 비행기 타러 간다고 빨리 가버려서 인사도 못 했는데. ”

“ 작년처럼 게스트로 공연 오는 게 아니라 아예 볼쇼이로 옮겨오는 거야. 적어도 일 년은 여기서 살 거야. ”

 

아빠는 미샤가 모스크바로 이사 올 거라고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내가 미샤를 만날 때마다 귀가 닳도록 모스크바 자랑을 한 게 드디어 효과를 본 것 같았다. 미샤는 내게 트레치야코프 미술관과 아르바트 거리는 좋지만 그래도 레닌그라드를 떠날 생각은 없다고 했었다. 오히려 나한테 아빠랑 같이 레닌그라드로 이사 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날 데리고 다니며 레닌그라드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었다. 운하를 누비는 작은 보트도 태워 주었고 분수가 나오는 궁전에도 데려갔다. 분수 궁전은 정말 끝내줬다. 게다가 사자 분수 앞에서 미샤가 사준 아이스크림은 더 끝내줬다. 하마터면 넘어갈 뻔 했지만 마침 소나기가 쏟아진 덕에 꿋꿋하게 계속 우길 수 있었다.

 

“ 그래도 모스크바가 더 좋아. 훨씬 크고 날씨도 더 좋아. 여기는 비가 너무 자주 와. 어제도 보트 타다 비 맞고. ”

“ 6월 되면 여기 날씨가 더 좋을 거야. 백야도 있는데. ”

“ 그러면 미셴카가 모스크바에 살면서 백야에만 여기 와 있으면 되잖아. ”

“ 그럼 공연 있을 때마다 열 시간씩 기차 타고 와야 하잖아. 연습은 어떻게 하고. ”

“ 키로프가 모스크바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 다 해결될 텐데. ”

“ 라루츠카, 레닌그라드는 싫어? ”

“ 별로야. ”

“ 날씨가 안 좋아서? ”

“ 모스크바는 빌딩도 더 크고 가게도 더 많고 나무도 훨씬 많아. ”

“ 여긴 천사도 많고 분수도 많은데, 운하도 있고 에르미타주도 있고. ”

“ 우리도 있어, 트레치야코프랑 푸시킨 미술관. ”

“ 여긴 새벽이면 다리도 반으로 갈라지는걸. 불빛이 반짝반짝하고 그 아래로 큰 배도 지나가. 곧장 바다로 나가고. ”

 

지금 같았으면 지형적 차이로 생겨난 조건을 내세우는 건 불공평하다고 항의했겠지만 그땐 어렸고 다리가 갈라지는 건 정말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난 곧 납득해버렸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후 다리가 갈라지고 배가 바다로 나가는 레닌그라드로 이사 가자고 졸라대서 엄마에게 눈물 쏙 빠지게 혼났다. 엄마는 어린애한테 공연히 바람을 넣었다고 미샤와 아빠를 싸잡아서 욕했다. 그때는 정말 짐을 싸서 아빠에게 가버릴까 했는데 전화를 했더니 아빠가 6월이면 모스크바로 돌아올 거라고 달래서 그만두었다.

 

아빠가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행복했다. 물론 엄마도 사랑하고 새아빠도 나름대로 자상하게 잘 대해주긴 하지만 그래도 난 어릴 때부터 항상 아빠가 제일 좋았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했을 때 난 다섯 살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잘못됐다는 건 이해했다. 그리고 여덟 살쯤 됐을 때는 그때 아무도 내게 누구와 살고 싶으냐고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가 났다. 아냐는 나보다 세 살이나 어렸으므로 그렇다 치고, 적어도 내게 물었다면 난 아빠를 골랐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항상 엄격했고 규칙을 강조했으며 거의 매일같이 야단을 쳤지만 아빠는 웬만하면 화를 내지 않았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눈을 보며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엄마와는 달리 날 극장에 데리고 갔다. 엄마도 한때는 발레리나였고 지금은 공연 잡지사에서 비서로 일했지만 웬만해서는 나나 아냐를 극장에 가지 못하게 했다. 그것 때문에 아빠와도 가끔 다퉜다. 우리가 너무 어려서 교육에 좋지 않다는 거였다.

 

심지어 엄마는 발레 공연을 보는 것도 탐탁찮게 생각했다. 아빠는 아냐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나는 이미 충분히 컸으니 괜찮다고 했다. 결국 아빠는 엄마와 타협을 했다. 발레 공연의 경우 반드시 아빠나 마르가리타 아줌마가 데리고 갈 것. 연습실에는 절대 데려가지 말 것. 엄마는 그것도 모자라 내가 갈 수 있는 공연 리스트를 만들어서 아빠에게 건네주었다. 맨 처음엔 호두까기 인형, 코펠리아, 잠자는 미녀 세 개 뿐이었다. 난 울면서 어떻게 백조의 호수도 없고 지젤도 없느냐고 난리를 쳤고 아빠는 며칠 동안 엄마를 설득한 끝에 백조의 호수와 곱사등이 망아지를 추가하는데 성공했다. 난 백조의 호수가 되면 해적과 지젤도 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지만 엄마는 그걸 보기엔 내가 너무 어리다고 딱 잘라 말했다.

 

내가 해적과 지젤을 본 건 아빠를 보러 처음 레닌그라드에 갔던 아홉 살 때였다. 그때 아빠는 키로프 극장의 초청을 받아 레닌그라드에서 신작을 안무하고 있었다. 사실 그 공연들을 보여준 건 아빠가 아니라 미샤였다. 내가 겨우 다섯 개 뿐인 리스트를 들먹이며 억울함을 호소하자 미샤는 진지하게 들어주었고 엄마가 그걸 못 보게 한 이유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 지젤은 남자 주인공이 여자를 배신해서 그래. 착한 사람이 아니라서. ”

“ 주인공이 악당이란 말이야? ”

“ 음, 꼭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이었던 거지. ”

“ 그럼 왕자님이 아닌 거네. ”

“ 왕자는 아니지만 백작이야. 비슷한 거야. ”

“ 어떻게 왕자님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할 수가 있어? ”

“ 왕자라고 다 착하고 멋있는 건 아니니까. ”

“ 안 그래. 왕자님은 착하고 멋있어야 해. ”

 

미샤는 웃더니 공연을 보면 이해가 될 거라고 했다. 지젤을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뛸 듯이 기뻐진 나는 해적에 대해서도 물었다.

 

“ 그럼 해적은 주인공들이 다 도둑놈들이라 엄마가 못 보게 하는 거야? ”

“ 아니. 그건 아닐 걸. ”

“ 그럼 엄마는 왜 그러는 거야? ”

“ 남자 주인공 중 하나가 옷을 벗고 나와서 그럴 거야. ”

“ 발가벗고? ”

“ 아니, 바지만 입고 나와서. ”

“ 그럼 수영장이랑 똑같은 거잖아. 근데 왜 수영장은 가도 되는데 극장은 안 되는 거야? ”

“ 글쎄. 그 두 개가 다르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 ”

“ 오빠도 그런 사람이야? ”

“ 모르겠네. 난 믿는 사람이 아니고 춤을 추는 사람이니까. ”

 

나는 미샤의 옆에 앉아서 지젤을 봤다. 1막 마지막 장면에서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휴식 시간 내내 울었다. 미샤는 날 달래주는 대신 눈물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 2막 보기 싫어? ”

“ 그 나쁜 남자 벌 받아? ”

“ 벌 받았으면 좋겠어? ”

“ 응. ”

“ 그래도 지젤이 구해주고 싶어 하면? ”

“ 왜 구해주고 싶어야 돼? 그 악당 때문에 죽었는데. ”

“ 지젤은 아직도 그 남자를 사랑하니까. 알브레히트는 악당이 아니고 주인공이야. 왕자 같은 거라니까. ”

“ 아니야, 왕자님은 그렇게 못되게 굴지 않아. 악당이야. ”

 

나는 두 번째 벨이 울릴 때까지도 버티다가 너무 궁금해서 결국 2막을 보러 들어갔다. 2막은 예쁘긴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그 못된 남자 주인공이 결국 벌도 안 받고 지젤 덕에 목숨을 구하는 게 이해가 안됐다. 나오면서 솔직하게 감상을 얘기하자 미샤는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

 

“ 다음에 한 번 더 보면 느낌이 달라질지도 몰라. 그러니까 또 봐. ”

“ 달라질 리가 없어.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

“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야. 누가 어떻게 추느냐에 따라서도 항상 달라. 같은 사람이 춰도 달라질 수 있어. ”

 

이틀 후 미샤는 내게 해적 공연 표를 주었다. 날 데려간 건 미샤가 아니라 지나였다. 미샤는 그 무대에서 춤을 추기로 되어 있었다. 지나가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궁금한 건 단 두 가지 뿐이었다. 누가 옷을 벗고 나오는가. 수영장과 무대는 다른가 같은가. 하지만 어쩐지 쑥스러워서 묻지는 못했다. 지나는 친절했지만 미샤처럼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실 질투도 좀 났다. 사람들이 다들 지나와 미샤가 사귄다고 했기 때문이다. 지나는 엄청나게 예뻤다. 그리고 미샤와 같은 집에서 살았다. 우리 아빠도 작품 준비 때문에 바빠지자 그 집에 들어가 살고 있긴 했지만 그것과는 다른 게 분명했다. 그 해 겨울에 지나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기뻤지만 미샤가 많이 슬퍼할 것 같아서 티는 내지 않았다. 속으로는 지나가 나쁜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거의 지젤의 남자 주인공만큼. 내가 지나였다면 절대 미샤와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남자를 두고 나이도 많고 얼굴도 못생긴데다 지루하게도 무슨 교수 노릇을 하는 아저씨와 결혼할 수 있단 말인가.

 

해적은 그 이후로도 여러 번 봤지만 지금도 난 그 발레의 내용을 정확히 모른다. 내 기억 속에 있는 거라곤 오로지 미샤가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랗고 예쁜 아라비아 스타일 바지를 펄럭이며 날아오르고 또 날아오르는 모습뿐이기 때문이다. 그 역을 출 때 미샤는 정말로 상의를 입지 않았다. 그리고 난 수영장과 무대가 왜 다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미샤에게는 얘기하지 않았다. 어쩐지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볼쇼이에서 미샤가 처음으로 해적 무대에 올라왔을 때 난 아빠를 졸라서 엄마 몰래 2층 발코니에서 그 공연을 보았다. 2막에서 미샤가 그 파란 옷을 입고 춤추기 시작했을 때 객석 군데군데가 시끌시끌해졌고 귀가 멀 정도로 큰 갈채와 브라보가 이어지는 동안 여자 몇 명이 홀 밖으로 실려 나갔다. 그런 광경은 난생 처음이었다. 아빠는 고개를 저으며 내게 말했다.

 

“ 엄마 말이 맞았어, 이건 안 되겠는데. 열 살짜리에겐 별로 안 좋아. ”

 

아빠는 내가 레닌그라드에서 이미 그 공연을 봤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모른 척 하며 정말 궁금한 걸 물었다.

 

“ 저 여자들은 왜 기절하는 거야? ”

“ 공연에 몰입하면 가끔 그럴 수도 있단다. ”

“ 난 알아. 미샤가 옷을 벗고 춤을 춰서 그래. ”

 

웬만하면 내 말을 모두 받아주는 아빠조차 그 때는 너무 충격을 받았는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날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후 내게 코트를 입혀주면서 아주 심각하게 물었다.

 

“ 라라, 너 남자친구 생겼니? ”

“ 비챠랑 료바가 자꾸 쫓아다녀. 그치만 꼴도 보기 싫어. ”

“ 왜? 둘 다 착하던데. ”

“ 걔들은 유치해. 남자친구 같은 거 안 만들 거야. ”

“ 그럼 좋아하는 선생님이나 오빠라도 생겼어? ”

“ 없어, 그런 거! 난 아빠랑 결혼할 거라고 했잖아! ”

 

아빠는 웃었지만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돌이켜보면 아빠는 그때부터 내 뜨거운 짝사랑을 눈치 챈 것 같았지만 날 놀리거나 아는 척 티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빠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 아빠라서가 아니라 정말 그랬다. 극장 동료들도 무용수들도 전부 다 그렇게 말했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아빠가 정말 상냥한 분이라면서 우리 엄마가 복에 겨워서 이혼한 거라고 투덜거렸다. 미샤는 남에 대한 말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어느 날인가 샴페인을 두어 잔 마시고 취했을 때 아빠가 침대로 데려다 주자 불쑥 이런 말을 했다.

 

“ 난 스탄카가 아니었으면 여기 안 왔을 텐데. ”

“ 그 스탄카는 날 얘기하는 거야? ”

“ 그럼 다른 스탄카가 있나? ”

“ 내일도 술을 먹여봐야겠어. 그럼 또 감동적인 말을 해줄지 모르니까. ”

“ 그게 감동적인 말이야? 난 지금 비난하는 거라고. 모스크바 따위로 날 데려오다니. ”

 

그때 난 아빠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미샤를 설득해 모스크바로 데려온 아빠가 자랑스러웠다. 극장 감독님과 다른 높은 분들이 옛날부터 미샤를 볼쇼이로 데리고 오려고 무진 노력을 했지만 전부 허사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미샤가 다른 사람들 말은 안 들어도 우리 아빠 말은 듣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아줌마가 좀 잘못 알고 있는 거였다. 미샤는 내 말도 아주 잘 들었다. 그리고 날 어린애로 취급하는 대신 친구처럼 대해줬다. 어리다고 무시한 적도 없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여워한 적도 없었다. 어른들은 그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 잘 모른다.

 

맨 처음 미샤를 만났을 때 그는 내 손등에 키스를 해 주었다. 그 날 그는 백조의 호수에서 지그프리드 왕자를 췄고 극장이 떠나갈 듯한 박수와 환호, 끝없이 반복되는 커튼 콜을 받았다. 공연 내내 난 넋을 놓고 무대를 보고 있었다. 아니, 지그프리드만 봤다. 아빠가 날 백스테이지로 데려가서 미샤를 소개시켜 주었을 때는 너무 멍해진데다 긴장해서 아무 말도 못했다. 인사도 못했다. 미샤는 말 그대로 꽃에 파묻혀 있었다. 두 팔로 안고 있는 것도 모자라 바닥에도 꽃다발이 잔뜩 놓여 있었다. 나를 보자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내 손등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리고는 제일 예쁘고 화려한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난 공주님이 나오는 그림책을 좋아해본 적도 없고 이제껏 발레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지만 그때 미샤는 정말로 왕자님 같았다. 반짝거리는 장식이 달린 하얀 의상도 그랬고 그림 속에서 나온 것처럼 근사한 외모도 그랬다. 무엇보다도 그 품위 있고 다정한 태도가 그랬다. 나중에 아빠는 내가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이름도 얘기하지 못한 채 ‘진짜 왕자님이에요?’ 라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재미있어 했다.

 

이후 난 미샤와 아주 친해졌지만 항상 마음속으로는 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화려한 무대 의상과 분장과 배역 없이도 미샤는 언제나 왕자님 같았다. 잉크처럼 검은 머리와 눈처럼 하얗고 깨끗한 피부가 놀랄 만큼 잘 어울렸다. 그리고 눈이 밤하늘처럼 새까맸다. 내 주위에는 그렇게 까맣고 예쁜 눈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볼쇼이에 몰려든 관객들은 미샤를 검은 눈의 야스민이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들은 천사라는 별명을 붙였다. 주변이나 잡지 등에서 그런 찬사를 들을 때마다 난 뿌듯했지만 한편으로는 미샤가 너무 인기가 많아지는 게 싫기도 했다. 또 지나 같은 여자친구가 생길까봐 걱정이었다. 어쨌든 난 미샤보다 열한 살이나 어렸기 때문이다.

 

언니가 있는 친구들은 내게 굳이 어른이 안 되더라도 열대여섯 살만 먹으면 남자들이 숙녀로 봐주는 것 같으니 몇 년만 잘 버티면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럼 최소한 5년은 더 기다려야 했는데 그동안 그 많은 발레리나들과 예쁜 여자들이 미샤를 내버려둘 것 같지가 않았다. 우리 아빠도 스물두 살 때 엄마와 결혼했는데 그 땐 두 분 다 볼쇼이에서 춤추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게다가 내 외모도 별로 예쁘지 않았다. 잿빛에 가까운 갈색 곱슬머리에 아빠처럼 아주 밝은 회색 눈이었는데 아무리 잘 봐줘도 예쁘다기보다는 약간 귀여운 정도였고 키도 동급생들보다 훨씬 작았다. 아빠나 엄마 둘 다 별로 키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건지도 몰랐다. 미샤는 우리 아빠보다 키도 컸고 몸매도 늘씬해서 같이 걸으면 내 머리가 그의 가슴 아래에 닿을까 말까했다. 어느 날은 너무 불안해서 미샤에게 솔직하게 고민을 토로한 적도 있었다.

 

“ 엄마랑 아빠 둘 다 작으면 나도 키가 작겠지? ”

“ 그럴 가능성이 있지. ”

“ 키 크는 수술이 있었으면 좋겠어. ”

“ 사춘기가 되면 지금보다 커질 거야. 아직 모르는 일이잖아. ”

“ 그래도 다른 애들보다 작으면 무시당할 거야. ”

“ 나도 친구들보다 작았어. ”

“ 지금은 크잖아. ”

“ 아니야. 지금도 나보다 큰 동료들이 많아. 키로프는 더 그랬어. 난 180이 안 되거든. ”

 

그 말은 의외였다. 내게 미샤는 언제나 고개를 쳐들어야 눈을 마주칠 수 있을 정도로 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정말? 우리 엄마는 남자가 발레 무용수로 성공하려면 180센티가 넘어야 한댔어. 안 그러면 왕자나 기사 역을 안 준다고. 우리 아빠도 그래서 춤 그만 두고 안무하는 거랬어. ”

“ 스탄카가 안무를 하는 건 춤보다 그쪽에 더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이야. ”

“ 엄마는 그렇게 말 안했는데. ”

“ 나스챠 말이 꼭 틀린 건 아냐. 위에서는 키 큰 애들한테 좋은 역을 주는 경우가 많거든. ”

“ 그럼 어떻게 그 역들을 다 얻었어? ”

“ 키 큰 애들보다 더 잘 춰서. ”

“ 노력하면 되는 거야? ”

“ 아주 많이. ”

 

지금은 그때 미샤가 진실을 전부 얘기해준 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세상에는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있으니까. 미샤가 아주 많이 노력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열심히 했다. 공연이 없어도 극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집에서도 연습했고 아빠의 아파트에 와 있을 때도 연습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아빠는 미샤가 타고난 무용수라고 했다. 그런 재능은 진짜 드물다고 했다. 무대 위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100미터 너머에 있던 사람들까지 몰려올 거라고 했다. 난 그 말을 믿었다. 세상에는 타고난 무용수란 게 있을 것이다. 타고난 왕자님이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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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 파트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391

 

** 미샤가 라라에게 다리 갈라지는 것을 내세워 레닌그라드로 오라고 꼬드기는 것과 관련해..

 

새벽이면 다리가 이렇게 갈라진다 :) 근사한 퀄리티를 보시면 알겠지만 내가 찍은 사진 아님. 웹에서 전에 얻었다.

 

 

.. 미샤가 라라를 데려간 분수 궁전은 여름 궁전인 페테르고프이다. russia 폴더에서 페테르고프나 뻬쩨르고프로 검색하면 그곳 풍경들을 볼 수 있다.

 

 ** 발레 지젤과 해적에 대한 애기들은 dance 폴더에서 지젤, 해적으로 검색하면 전에 올린 동영상이나 사진들, 공연 리뷰들이 꽤 있다.

그리고 지젤의 알브레히트에 대한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27

 

** 지젤과 해적은 미샤가 데뷔해서 췄던 주요 작품이기도 하다.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28

 

** 추가) 미샤가 라라를 데려갔던 분수 궁전 페테르고프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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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새해가 되었다. 올해는 2012년 여름에 구상해서 작년에 시작한 글을 반드시 끝내리라는 목표를 세웠다.

 

내가 이 글의 주인공을 제일 처음 떠올렸던 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90년대 후반이었으니까. 그때 나는 러시아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극장과 발레와 사람들, 예술가와 창작, 욕망과 재능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는 물론 나이도 어렸고 경험도 자료도 부족했다. 이후 나는 극장과 직접적 관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문화예술계에 속한 바닥에서 일하게 되었다. 매우 부족하지만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고, 또 사고의 지평도 넓어졌다.

 

내가 맨처음 이 사람을 떠올렸을 때 그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주인공은 따로 있었고 배경도 90년대였다. 미샤는 그 글의 조역이었고 일종의 안티 히어로,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존재였는데 아마도 그건 그때 내가 아직 어렸고 다분히 낭만적인 환상과 우울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미샤는 훨씬 예리하고 어둡고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인물, 정치적이고 지배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지금 내가 되살려낸 미샤는 당시의 그와는 많이 다르다. 본질적인 몇 가지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로 변형되었다.

 

어쨌든 당시 내게 있어 '발레 소설'(그땐 그렇게 가제를 붙였다)은 좀더 경험이 쌓였을 때 쓸 수 있는 미래의 소설이었다. 그래서 난 다른 글들을 썼고 이후 직장에 들어가고 삶에 짓눌리면서 서서히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다만 중간중간에 그 다른 글들에 삽입되는 에피소드 몇개에 미샤를 등장시켰을 뿐이었다.

 

그리고 2012년 여름에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전에 구상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여러 인물들을 모두 놓아둔 채 이 사람을 되살려냈다. 아마도 그때가 '그때'였던 것 같다. 그를 되살려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 이제 나는 그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 해 가을에 페테르부르크로 날아갔고 그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원래 구상했던 장편은 작년 10월에야 시작할 수 있었지만...

 

아래의 이야기는 오래 전에 썼던 글이다. 2002년. 미샤를 등장시켰던 세번째 단편이었다. 다른 글에 삽입되는 에피소드가 아니라 독립적인 단편으로는 처음이었다. 이때 이미 미샤는 내가 맨 처음 생각했던 인물과는 꽤 달라져 있었다. 그런데 이 당시 내가 이 글을 썼던 이유는 이 인물에 대한 갈망보다는 이미 다녀온지 오래되어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던 도시,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다.

 

그때는 통역대학원을 휴학한 상태였고 백수로 놀고 있었다. 지금 직장에 입사하기 한 달 전이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미래는 불투명했다. 다시 그곳에 갈 수 있을지조차 전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짧은 단편은 사실 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에 대한 나의 연서와 같았다.

 

단편의 제목은 앨런 긴스버그의 시 howl의 어느 구절에서 따왔다. 이 시는 어제 발췌했던 장편의 서두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된다.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백야의 레닌그라드(소련 시절 페테르부르크의 이름) 거리를 걷는 두 남자에 대한 얘기다. 둘은 키로프 극장(지금의 마린스키) 무용수이다. 화자는 두 남자 중 하나인 레오니드 핀스키이다. 애칭은 레냐.

 

이 단편은 이전에 내가 쓴 몇 편 안되는 미샤의 이야기들 중 가장 투명하고 부드러운 소설이었다. 왜냐하면 단편의 화자 자체가 선량하고 맑은 심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 순진한 화자의 필터링 속에서 미샤는 일종의 낭만적인 반항아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이 글을 쓸 때 나는 이미 미샤가 본질적으로는 좀 더 어둡고 뒤틀린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적 배경은 1975년 7월. 주인공인 미샤는 스무살이다. 키로프 극장 제1 솔리스트. 9월 시즌이 되면 수석무용수로 승급하게 될테지만 그건 이 단편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가상의 인물들이다. 지나이다는 미샤와 오랫동안 같이 무대에 올라간 파트너 발레리나. 다닐로프는 극장 행정감독, 아사예프는 예술감독이다. (이건 내가 소설 속 현실을 구축하기 위해 변형을 가한 것이다. 실제의 키로프 체계와는 다르다)

 

미샤의 본명은 미하일이다. 미샤는 애칭. 친한 사이인 레냐는 종종 미셴카라고도 부른다. (이건 더 친밀하게 부르는 애칭임)

 

십년도 더 전에 썼던 글이라 지금 다시 읽으면 조금 뒷목덜미가 따끔거리긴 하지만.. 어쨌든 올려본다. 초심으로 돌아가는 의미에서.

 

글은 약 13페이지 분량이라 짧다. 끝나고 나면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소 사진 몇 장.

 

** 이 글을 무단으로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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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minated wall

  

  

 

   

 

 

 

 

 

illuminating all the motionless world of Time between.. 

... Allen Ginsberg, Howl ...

     

 

1975년 7월, 레닌그라드

 

 

미샤와 마주친 곳은 카잔 성당의 분수 앞이었다.

 

이미 열 시를 훌쩍 넘긴 늦은 시간이었지만 7월 초의 레닌그라드는 백야의 도시였다. 주위는 여전히 부드러운 광채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홀로 네프스키 거리를 걷고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무대에서 내려와 동료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었지만 단원들의 반수 이상은 유럽으로 여름 투어를 떠나서 남아 있는 동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원래는 나도 투어에 끼어야 했지만 여름이 시작될 무렵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남게 되었다. 아쉬운 일이긴 했지만 레닌그라드의 여름보다 아름다운 여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아이스크림을 한손에 든 채 걸음을 옮기면서 가을 시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부상은 그리 심각한 편이 아니었고 디렉터인 아사예프는 ‘라 바야데르’의 안무를 새로 손보고 있었다. 리허설은 다음 주부터였는데 솔로르 역으로는 나와 미샤가 더블 캐스팅되어 있었다. 위에서는 미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지만 그 무렵 미샤 야스민은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까다로운 배역인 솔로르의 심리를 탁월하게 해석하는 무용수였기 때문에 그도 도리가 없었다. 나와 미샤의 스타일은 무척 달랐기 때문에 아사예프는 새로운 버전에서 솔로르를 이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셈이었다.

 

나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면서 판탄카를 거쳐 알렉산드린스키 공원 앞을 지났다. 여왕의 거대한 동상이 위압적인 표정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낮이나 이런 백야에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한겨울 저녁 발레학교 시절 공원으로 나왔다가 문득 이 동상을 올려다보면 그 푸르스름한 청동빛을 발산하는 자태에 오싹한 느낌이 들곤 했다.

 

다리가 조금 아팠기 때문에 나는 카잔 성당의 벤치에서 좀 쉬었다 가기로 했다. 예카테리나 여왕과 마찬가지로 한밤중의 카잔 성당은 어딘지 악마적인 위압감을 느끼게 했지만 다행히 지금은 7월이었고 밤은 낮처럼 환했다.

 

분수가 하얀 물보라를 뿜고 있었다. 나는 분수 쪽으로 다가가다가 미샤를 발견했다. 그는 물방울이 튀어 반쯤 젖어 있는 벤치 귀퉁이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이곳에서 미샤와 마주친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카잔 성당의 분수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고 그는 자주 그 벤치에 와서 책을 읽곤 했다. 주로 도스토예프스키나 푸시킨, 혹은 레르몬토프였는데 가끔은 구하기 힘든 영어 소설들이기도 했다. 그는 금지된 원서들을 구할 수 있는 지하 루트들을 잘 알고 있었다. 종종 그는 내게 락 음악 잡지나 갱지에 인쇄된 비트 작가들의 시집을 빌려주곤 했다. 내킬 때면 그 자리에서 번역해 읽어주기도 했다.

 

그렇다, 이곳에서 미샤와 마주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단 한 가지 사실만 제외한다면.

 

나는 벤치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 안녕, 미셴카. ”

“ 레냐. ”

 

미샤는 고개를 들더니 내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혼자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방해받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발레학교에서 바로 옆 침대를 썼으니까.

 

“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열 시에 출발한다고 그러지 않았어? 다닐로프가 극장 앞으로 오라고 했잖아. ”

“ 그건 다닐로프가 해결할 문제지. ”

 

미샤는 책장을 덮고 잠시 분수의 물줄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책표지를 힐끗 보았다. 안드레예프의 단편집이었다. 책갈피가 끼워져 있는 부분을 보지 않아도 그가 어느 곳을 읽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단편집에는 미샤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가 실려 있었다. ‘그는 다시는 지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라는 마지막 문장은 학창 시절의 미샤에게 있어서는 성서 구절과도 같았다. 졸업하기 일 년 전인가 우리는 연극학교 친구들의 발표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단편을 각색한 작품이 올라갔다. 미샤는 연출가였던 루벤의 청을 수락해 나레이션을 맡았는데 난 그가 그 까다로운 문장들을 푸시킨 시처럼 줄줄 외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 설마, 미하일. 농담이겠지? 다닐로프가 널 가만히 놔둘 것 같아? 잘못하면 새 시즌에 못 나가! ”

 

그건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나와는 달리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미샤가 이번 유럽 투어에서 제외된 것은 일종의 징계 조치였다. 지난 해 겨울에 우리는 베를린에 투어를 갔는데 미샤는 한밤중에 호텔을 몰래 빠져나가 락 가수들의 공연을 보러 갔던 것이다. 다닐로프는 펄펄 뛰었고 당과 극장의 명예를 운운하며 여름 투어를 보내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물론 그는 사죄하며 근신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키로프의 지도부에게 있어 미샤 야스민은 골치 아픈 무용수였다.

 

지금은 사정이 좀 나아졌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여름이나 가을이면 무용수들은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근교의 호화롭고 아름다운 별장으로 불려가곤 했다. 그런 별장의 소유주들은 (소유주라는 어휘에 어폐가 있다 해도 할 수 없다. 그들은 진짜 소유주들이었으니까. 그게 소비에트 시대의 진짜 러시아어라는 것이다) 거의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력한 정치가들과 당의 권력자들이었다. 그들은 종종 별장에서 파티를 열었고 키로프나 볼쇼이 등 유명 극장의 무용수들을 불러서 춤을 추게 하거나 오페라 가수들을 데려와 아리아를 부르게 했다.

 

그 날 미샤는 다닐로프의 인솔 아래 파트너인 지나이다 세도바와 함께 페테르고프의 별장에 가게 되어 있었다. 역시 당의 권력자인 별장 주인은 대단한 발레 애호가였기 때문에 측근들을 불러 파티를 열기로 했던 것이다. 1군에 속한 무용수들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투어를 떠나버렸고 나는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미샤가 빠져나갈 방법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지난 시즌에 미샤가 보여준 무대들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애호가인 주인은 특별히 그와 세도바의 이름을 거명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내 기억으로 그 때 페테르고프로 가게 되어 있던 무용수들은 미샤와 지나이다 세도바, 그리고 올가 베론스카야와 세르게이 카로빈스키였던 것 같다. 비록 후자의 둘은 확신하기가 어렵지만.

 

그런데 지금, 페테르고프로 향하는 차에 타고 있어야 할 미샤 야스민이 내 곁에 앉아 분수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태평스럽게 책을 읽으면서.

 

“ 못 나가게 하라지. ”

“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미셴카! 널 주시하고 있는 게 다닐로프 뿐만이 아니란 걸 몰라? ”

“ 그래, 저기도 하나 있군. ”

 

미샤가 손을 들어 성당 쪽을 가리켰다. 나는 무심코 성당의 거대한 기둥 쪽을 보았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복을 입은 대머리 남자가 기둥 뒤에 서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키로프 극장 무용수 정도 되면 감시 요원들 얼굴 한둘은 알고 있기 마련이다. 비교적 말썽 없이 지냈던 나 역시 외국 투어를 나갈 때마다 길거리에서 그런 얼굴을 발견하곤 했다. 하지만 대낮처럼 환한 네프스키 거리에서, 단독 감시 요원이라니! 언제 미샤는 그렇게 요주의 인물이 된 것일까?

 

차가운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다. 미샤는 흔히 말하는 편안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는 아니었다. 아마 그는 누구와도 그런 식의 우정을 나누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함께 발레학교를 다녔고 극장에서도 좋은 동료로 지내고 있었다. 키로프에 들어가고 처음 일 년 동안은 함께 아파트를 쓰기도 했다. 그 후 극장 측에서는 공동 아파트에서 미샤를 끌어내 지나이다와 함께 2인 단독 아파트에 살게 해 주었다. 극장 측은 젊은 무용수들이 가정을 이루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내게 류다를 붙여 준 것처럼. 류다와 나는 학창 시절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곧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지만 미샤와 지나이다는 사적으로는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다. 무대 위에서 그 둘이 보여준 듀엣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관객들이 환상을 품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따금 나는 지나이다가 그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어쨌든 그는 나의 친구였다. 극히 짧은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몇 명의 지인들과 먼 키예프 부근으로 추방당한 드라마 극장 배우가 스치고 지나갔다. 미샤에게도 그런 일이 생기게 될까? 그에게는 자기 몸을 보존할 만큼 충분한 공포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나는 질책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 것 같았다. 미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책을 옆에 끼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불쑥 물었다.

 

“ 다닐로프가 몇 시까지 기다려줄 것 같아? ”

 

나는 시계를 보았다. 열시 반이었다.

 

“ 최대한 30분? 극장에 전화를 해. 아니면 차라리 이쪽으로 차를 가지고 오라고 하는 편이 낫겠어. ”

“ 30분이면 걸어가도 충분해. ”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성당 기둥 쪽을 바라보았다. 대머리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      *      *

 

 

우리는 별 말 없이 카잔 성당을 나와 거리를 따라 걸었다. 그리보예도프 운하를 지나면서 미샤는 가판대에서 낡은 책을 한 권 샀다. 이번에는 푸시킨의 ‘루슬란과 류드밀라’였다.

 

채색 삽화가 들어가 있는 책장을 넘기면서 미샤가 입을 열었다.

 

“ 누굴 출래? ”

“ 뭐? ”

“ 이걸 안무한다면 누굴 추고 싶냐고. ”

 

나는 잠시 흥미진진한 그 서사시의 등장인물들을 떠올려 보았다. 수염을 기른 마법사 체르노모르, 혼인 잔치 때 마법사에게 납치된 아름답고 활기찬 왕녀 류드밀라. 아내를 찾아 떠나는 정의의 용사 루슬란, 루슬란이 마주치게 되는 황야의 거대한 머리, 루슬란을 돕는 노인, 마녀 나이나. 그리고 류드밀라의 구애자들이자 루슬란의 적 세 명, 루슬란과 싸우다 패해 물에 빠져 죽는 검은 기사 로그다이와 비겁하게 기회를 노리는 파를라프, 그리고 순결한 아가씨에게 반해 평온한 호반의 어부로 변하는 라트미르... 모두가 한 번쯤은 무대에서 재현해 볼만한 역이었다.

 

“ 당연히 루슬란이지. 주인공이잖아. ”

“ 난 루슬란에게 주역을 주지 않을 건데? ”

“ 그럼 누구? 류드밀라를 출 생각은 아닐 테고. ”

“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지만 난 로그다이를 출 거야. ”

“ 잘 어울리는데 그래. 막판에 물의 요정에게 끌려가는 걸로 끝나겠군. ”

“ 내 발레에는 네 명 밖에 안 나와. 루슬란, 로그다이, 파를라프, 라트미르. 그게 전부야. ”

“ 그리고 주인공은 로그다이고 말이지? ”

“ 그래. 주인공이 아니어도 루슬란을 춰주겠어? ”

 

내 머리 속에는 그 책의 중반부가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루슬란의 칼에 찔려 검은 강물로 떨어지는 로그다이, 깊은 물속으로부터 올라와 젊은 기사의 싸늘한 시체를 품에 안고 만족한 듯 웃으며 사라지는 물의 요정...

 

“ 그래, 물론이지. 네가 안무를 한다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

“ 조만간 할 거야. ”

“ 아사예프가 가만히 있을까? ”

“ 아마 극장 레퍼토리에 들어갈 수는 없을 거야. ”

 

생각에 잠긴 얼굴로 미샤가 말했다. 나는 그가 안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발레학교 시절에도 그는 종종 짧은 춤들을 고안하곤 했다. 극장에서도 역할의 해석을 놓고 아사예프와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다반사였다.

 

미샤는 운하를 지나 방향을 틀었다. 계속해서 루슬란과 로그다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나는 문득 우리가 궁전 광장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 미셴카! 이쪽으로 가면 안 되잖아, 저쪽으로 돌았어야지! ”

“ 저쪽? 저쪽에 뭐가 있다고. ”

“ 농담이 아니잖아, 극장으로 가려면 반대편으로 갔어야 하잖아. 이쪽은 에르미타주라구! ”

 

물론 내 얘기는 헛된 설명에 지나지 않았다. 미샤는 나와 마찬가지로 레닌그라드 토박이였고 누구보다도 도시 골목골목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 극장엔 안 가. ”

“ 다닐로프는? ”

“ 말했잖아. 그건 다닐로프의 문제야. ”

 

미샤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검은 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부드러운 에메랄드 청록색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지나 궁전 광장으로 걸어가면서 미샤가 말했다.

 

“ 그 돼지 같은 놈들 앞에서 춤을 추라고? 뭐가 좋아서? ”

 

가슴이 답답하게 당겨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사복 차림의 대머리 남자를 찾았다. 눈에는 띄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이 미샤에게 그런 고집을 부리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별장에 불려가 춤추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나름대로 발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무용수였다. 모두가 쉬쉬하고 있는 얘기긴 했지만 발레리나들과 밤을 보내기 위해 무용수들을 부르는 역겨운 나리님들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미샤는 그런 경우에 해당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문제는 다닐로프가 아니었다. 다닐로프나 아사예프 같은 지도부와 미샤의 마찰은 만성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미샤는 본능적으로 선을 그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내 말은, 불같은 성격의 다닐로프조차도 미샤를 극장에서 쫓아낼 생각까지는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 권력자들의 분노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내가 아는 미샤는 타협하지 않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순간 고집을 부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궁전 광장으로 접어들었다. 꼭대기에 천사상이 조각된 알렉산드르 기념 원주가 엷은 핑크색을 띤 하늘에 반사되어 어렴풋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관광객들과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광장을 거닐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미샤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 하루뿐이잖아. 네가 전에 그런 곳에 가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

“ 그래, 이제 그만둘 때가 됐어. 레냐, 그만둘 때가 됐다고. ”

 

미샤는 기념비를 둘러싼 울타리에 한 손을 대고서 여전히 나직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언성을 높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 우린 아직도 20년을 기다려야 할 거야. 어쩌면 20년이 지나고도 아무 것도 오지 않을지도 몰라. 페테르고프 별장의 주인들은 단지 그 이름만 바뀔 뿐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뱃속으로 그곳에 머무르면서 우릴 부를 거야. 당이 뭐가 어떻다는 거야, 우리에겐 아무 상관없는 얘기야. 다닐로프더러 별장에 가서 춤을 추라고 해. 이런 밤에는 그 자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

 

미샤는 엷은 핑크빛 띠가 드리워진 듯한 파르스름한 하늘을 가리켰다.

 

“ 흘러넘치는 빛이야, 레냐. 흘러넘치는 빛. ”

 

나는 그가 당에 대한 말을 내뱉은 순간부터 귀를 막고 아무 것도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에메랄드 청록색 에르미타주 궁전 기둥 너머로 대머리 남자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맙소사, 그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미샤가 더 이상 과격한 말을 내뱉지 않기를 빌었다. 그들이 나를 호출한다면 지금 들은 모든 이야기는 그를 시베리아까지는 아니더라도 민스크나 카프카즈 등지로 보내는 데는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심문 앞에서 침묵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공포에 질려 나는 미샤가 입을 다물어 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때 그가 말했다.

 

“ 흘러넘치는 빛이야, 레냐. 흘러넘치는 빛. ”

 

나는 그가 들어 올린 손끝을 보았다. 한밤의 여름 하늘이 부드러운 붉은 보랏빛과 푸른빛 광채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름의 레닌그라드 밤하늘이었다. 눈부신 빛으로 흘러넘치는 하늘.

 

미샤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두 권의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 손을 허리 뒤로 하고 한 손은 여전히 하늘을 향한 채, 기념비 원주 주위를 돌며 천천히 춤추기 시작했다.

 

광장을 거닐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미샤는 고개를 가볍게 젖히고 두 팔로 원을 그리며 춤추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에 그의 검은 머리칼이 비단 스카프처럼 나부꼈고 딱딱한 돌바닥을 스치는 두 발은 흰 섬광 같았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것이 무슨 작품에 나오는 춤인지 떠올리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춤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제 미샤는 그늘진 쪽으로 옮겨가 격렬한 스텝으로 도약하고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역광이 그의 젖혀진 목덜미와 가슴을 따라 기묘한 십자 모양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고 기념비 기둥 위의 천사상을 보았다. 한 손에 십자가를 든 천사상을.

 

로그다이. 나는 자기도 모르게 속삭였다. 로그다이.

 

사방에 빛이 있었다. 미샤는 광채를 발산하며 춤추고 있었다. 궁전 광장은 흘러넘치는 빛들로 가득했고 미샤는 두 손으로 보이지 않는 벽을 어루만지며 춤추는 것 같았다. 어둠의 장막을 두들기는 검은 기사처럼. 백야의 부드러운 빛으로 투명해진 어둠의 장막을.

 

나는 미샤가 보이지 않는 루슬란과 마지막 격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미샤가 홀로 춤추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눈앞에 있는 루슬란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었다. 홀린 눈으로 나는 보이지 않는 루슬란의 모든 동작과 스텝을 따라갔다. 마치 그 보이지 않는 기사의 춤이 내 온몸에 지도를 그리고 도장을 찍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로그다이의 최후가 왔다. 미샤는 가슴을 움켜쥐고 빙그르르 돌더니 뭔가에 거세게 떠밀린 듯 앞으로 넘어져 무릎을 꿇었다. 천사상의 손에 들린 십자가가 황금빛을 내쏘며 그의 어깨와 등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치 검은 강물에서 올라온 물의 요정이 싸늘한 두 팔을 벌려 죽은 기사의 몸을 뒤에서 안고 있는 것처럼.

 

갈채와 환호가 내게 정신을 차리게 했다. 몰려든 사람들이 원을 이룬 채 박수를 치고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무수한 극장의 무대들을 밟았지만 나는 그토록 경이에 찬 환호와 갈채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아주 작은 환호였고 작은 갈채였지만 그 한순간을 위해서라면 내가 지금껏 올라간 모든 무대와 지금껏 받아온 모든 꽃다발과 찬사를 아낌없이 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빛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미샤는 천천히 일어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타는 듯한 열기가 어린 시선이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책들을 집어 들었다.

 

“ 가자. ”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어디로? ”

블린이나 먹으러 가자. 센나야 광장 쪽에 카페가 하나 생겼는데 블린을 잘 만들어. ”

 

나는 에르미타주 궁전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사복 차림의 대머리 남자가 기둥 곁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역시 사복 차림의 키 큰 금발 머리 남자가 함께 있었다.

 

나는 미샤와 함께 궁전 광장을 나와 센나야 쪽으로 걸어갔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도 나는 두 남자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미샤의 옆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그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호출이 언제 있을까 하고 의문했다. 다닐로프에 대해, 심문에 대해, 내가 해야 할 대답에 대해 생각했다. 엷은 핑크빛을 띤 하늘에 대해, 투명해진 어둠의 장막에 대해, 십자가를 든 천사상에 대해 대답할 수 있을까? ‘흘러넘치는 빛이야, 레냐. 흘러넘치는 빛이야’ 라는 미샤의 말을 그들에게 옮길 수 있을까?

 

우리는 센나야 광장 뒤편에 있는 카페에 가서 블린을 먹었다. 미샤가 옳았다. 블린은 무척 맛있었다.

 

  

 

200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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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가 카잔 성당 분수 앞에서 읽고 있었던 소설은 레오니드 안드레예프의 단편 '비행'이다. 이 글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에 '러시아 일기'에서 쓴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98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언급했던 것과 같이 푸시킨의 유명한 서사시이다. 혹시 안 읽어보셨다면 정말 재미있으니 한번 읽어보셔도 후회 없을듯.

 

어제 올렸던 그 장편 후반부에서 나는 미샤가 저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안무해 키로프 극장 무대에 올리는 이야기를 삽입했다. 그건 일년 후인 1976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로그다이가 주인공이라는 미샤의 말과는 달리 실제 작품에서는 네 명의 남자가 균일한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 무대에서 미샤는 로그다이를 춘다. 그리고 루슬란은, 여기서 약속한대로 레냐에게 준다 :) 물론 이것은 가상의 작품으로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누가 좀 안무해 줬으면 좋겠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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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몇 장. 2012~2014년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 찍은 것들이다.

 

먼저 미샤의 비밀 장소인 카잔 성당 앞 분수. 네프스키 대로 한복판에 있다. 시민들의 휴식처. 명소이다. 맞은편에는 돔 크니기와 그리보예도프 운하가 있다. 물론 소련 시절 카잔 성당은 성당이 아니라 종교 박물관이었지만...

 

 

 

 

 

 

분수 앞에 이렇게 벤치들이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쉰다.

 

 

왼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돔 크니기.

 

이때가 7월 초. 소설의 배경과 같은 시즌. 다만 사진 찍은 건 이른 오후.

 

 

 

 

이 벤치가 미샤가 앉아 책 읽던 자리 :)

 

 

 

나무들 너머로 보면 이렇다. 왼쪽 벤치.

 

 

 

그리고 궁전광장. 예전에 여러 번 올렸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옛 겨울 궁전) 앞 광장이라 궁전광장이라 불린다. 가운데의 저 알렉산드르 기념 원주도 페테르부르크의 상징적 풍경. 미샤는 저 기념 원주 앞에서 춤을 춘다.

 

 

7월, 자정 직전의 하늘. 천사상.

 

미샤는 조금 더 이른 7월 초에 춤을 춘다. 그래서 하늘은 이것보다 훨씬 핑크빛 석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낮에는 이렇다.

 

 

 

궁전광장.

 

사실 저 돌바닥 위에서 춤추면 발이 꽤 아팠을 듯...

 

 

 

 

알렉산드르 기념 원주를 둘러싼 울타리. 엄밀히 말하면 저 울타리 앞에서 췄다.

 

 

 

 

 울타리 가장자리에 서 있는 가로등. 왼편으로 이삭 성당, 오른편으로 해군성 첨탑이 보인다.

 

..

 

그럼 이제 심기일전해서 다시 쓰던 글로 돌아가야지...

 

 

 

** 2015년 7월에 찍은 카잔 성당과 분수 사진들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4059

 

 

:
Posted by liontamer
2014. 12. 31. 23:07

잠시, 2년 전 이맘때 쓰던 글 발췌 about writing2014. 12. 31. 23:07

 

2014년도 한 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2년 전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아주 오래 전 만들어냈던 인물을 되살려냈다.

 

그 2년 전은 내게 상당히 혹독한 한 해였다.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아마도 그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은 그 당시 쓰던 글이었을 것이다. 그 글과 함께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올 수 있었다. 나는 그 글을 2012년 10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썼다. 아마 지금이라면 그런 식으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의 주인공을 되살려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 여러 편을 썼는데 그 글은 상당히 개인적이고 또 내밀한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그 글을 마친 후 '어쩌면 나중에 이 이야기들이 하나로 묶이게 된다면 이 글은 거기서 빼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네'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배경은 1970년대의 소련 레닌그라드. 나의 주인공인 미샤의 10대 후반부터 20대 초중반까지의 시기를 다뤘다. 심리적 화자는 레닌그라드 국립대 강사이자 미샤의 친구인 안드레이 트로이츠키, 애칭은 트로이였다. 소설은 약 7년 동안 주인공과 트로이, 극장, 그리고 그들의 주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꽤나 긴 이야기였지만 키워드는 언제나 명확했다. 그건 재능과 욕망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쨌든, 재작년 연말, 이맘때에 쓰던 부분 발췌해 본다. 소설의 후반부. 배경은 1976년 가을. 주인공 미샤는 스물 한살이다. 키로프 수석무용수로 승승장구하고 있던 무렵, 그리고 안무가로도 데뷔해 호평을 받기 시작한 시기. 그러나 부상과 다른 몇 가지 이유로 두어 달 휴가를 받았을 때이다.

 

후반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스탄카'는 미샤의 친구이자 볼쇼이 안무가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애칭이다. 일린은 전에 발췌했던 글의 화자로 등장한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3221)

세레브랴코프, 레냐, 지나 등 언급되는 인물들은 미샤의 극장 동료들이다. 물론 가상의 인물들이다. (저 레냐는 내 친구네 아들내미 레냐가 아님! 그 꼬맹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냈던 인물이었음 ㅎㅎ)

트로이가 등장하는 부분들은 이전에 이 writing 폴더에 몇번 발췌했던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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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밤중에 트로이는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담요 밖으로 나와 있던 맨 어깨에 선뜩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창문이 열려 있나 싶었지만 조금 정신이 들자 그 이유를 알았다. 옆이 비어 있었다. 미샤는 그와 함께 침대를 쓸 때는 항상 베개를 같이 베거나 그의 어깨와 가슴 사이에 머리를 대고 몸을 바짝 밀착시킨 채 잤다. 여름에는 좀 더웠지만 이런 계절에는 조그만 스토브를 켜놓은 것처럼 따뜻했다.

 

그는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어둠에 점차 익숙해진 눈을 옆으로 돌리자 미샤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벽에 기대지도 않고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턱을 무릎에 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두 눈이 밝은 회색과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창 너머에서 스며들어오는 빛 때문인지, 아니면 그 검은 눈 안쪽에서 발화한 불꽃 때문인지 모호했다. 그 애는 아무 말도 없이 방 안에 안개처럼 뭉쳐져 있는 어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쓸쓸하고 고통스럽고 두려움에 잠긴 눈빛으로.

 

트로이는 눈을 감았다. 못본 척 해주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애를 껴안고 키스를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미샤는 언제나 그의 곁에 누울 때면 순식간에 잠들곤 했다. 잠을 못 이루며 뒤척이는 일도, 중간에 깨어나는 일도 없었다. 이제 그가 고로호바야의 침실에서도 제대로 잠들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건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나쁜 꿈을 꾸고 잠깐 깨어난 것 뿐이다.

 

잠시 후 미샤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여전히 스토브처럼 따뜻한 온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트로이는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러자 미샤가 한 손을 뻗어 그의 손가락 끝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더 꽉 잡고 싶었지만 그를 깨울까봐 망설이는 것 같았다. 손가락 끝을 쥐고 있는 그 애의 손이 너무 뜨겁게 달아오르며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어서, 그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어서 트로이는 더 이상 자는 척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옆으로 돌아누우며 한 팔로 미샤를 끌어당겼다.

 

“ 아, 미안. 안드레이, 계속 자. ”

“ 악몽이라도 꿨어? ”

“ 그냥, 잠이 안 와서. 신경 쓰지 말고 자. ”

“ 이리 와, 재워줄 테니까. ”

“ 피곤하게 자던데. ”

“ 그래도 재워줄 수 있어. ”

 

미샤가 담요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트로이는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 위에 얹고 한 팔로 허리를 안았다. 가슴팍 위로 미샤의 귀와 뺨이 따스한 열기를 내뿜으며 와 닿았다. 미샤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귀를 댄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심장 소리를 세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스케로프가 쓰는 방법대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하지만 어둠이 걷힐 때까지 그 아이는 트로이의 심장 소리를 들었고 그대로 머물렀고 아마 잠든 적도 없었던 것 같았다.

 

 

...

 

 

트로이는 새벽에 잠시 깊은 잠에 빠졌고 자명종이 울렸을 때 퍼뜩 놀라 깨어났다. 그때 미샤는 거실 창가에 선 채 두 팔을 위로 쭉 뻗고 금방이라도 대기권을 빠져나갈 듯한 자세로 로켓처럼 몸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차갑고 희미한 아침 햇살 속에서 그 애의 몸은 끝없이 이어지는 광선처럼 길게 솟아올랐고 거기에는 그 어떤 뼈와 살도, 장애물과 가림막도 없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투명했고 한없이 길고 높이 뻗어 올랐고 형체 없이 빛났다. 그림자조차 없었다. 오로지 끝이 보이지 않는 선과 빛, 바람, 주변을 달아오르게 하는 열기 뿐이었다.

 

트로이는 오랫동안 침실 문가에 선 채 그 비밀스러운 변형의 순간을 응시했다. 한참 후 미샤는 바닥으로 내려왔고 두 다리를 반듯한 일자로 뻗으며 머리와 팔과 상체를 서서히 앞으로 굽혔다. 책장을 접듯 몸을 절반으로 접어 아랫배로부터 가슴과 어깨, 두 팔과 이마를 완벽하게 바닥에 밀착시켰다. 양옆으로 길게 펼쳐진 두 다리를 감싼 슬랙스의 얇은 천 위로 근육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솟아올랐다. 바닥에 엎드려 완전히 정지한 순간에도 그 육체 내부에서는 소용돌이치는 움직임이 끓어올라 흘러넘칠 듯 했다.

 

트로이는 등을 돌려 욕실로 갔다. 어쩐지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에 얼굴을 붉히며. 그가 나왔을 때 미샤는 부엌 식탁 위에 걸터앉아 뜨거운 차를 마시고 있었다. 트로이를 보더니 주전자에서 펄펄 끓는 커피를 한 잔 따라주기까지 했다. 알리사의 말이 맞았다. 그 애가 끓여준 커피는 갈랴의 집에서 마신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모이카 운하 뒤편에 있는 단골 카페에서 내주는 커피만큼 훌륭했다.

 

“ 너 이런 실력을 왜 이제야 발휘하는 거야? 5년 동안 한 번도 안 끓여줬잖아. ”

 

“ 냉동 옥수수로 여물 같은 걸 만들어 먹는 게 불쌍해서. ”

 

“ 먹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확신하다니. 맛은 나쁘지 않았는데. ”

 

“ 그냥 커피나 마셔. ”

 

“ 커피 잘 마시지도 않으면서 어디서 이렇게 만드는 걸 배웠어? ”

 

“ 우리 엄마. 아침에 진한 거 두 잔 마시지 않으면 절대 못 깨어나. ”

 

“ 아, 넌 어머니 닮은 거구나, 잠에서 빨리 못 깨는 거. ”

 

“ 생각 안 해봤는데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엄마도 아침엔 졸려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는 걸 마시고 싶어해. 그래서 내가 배웠어. 지금은 아리나 바실리예브나가 끓여주지만. ”

 

“ 아리나 바실리예브나가 누구야? ”

 

“ 엄마 아파트에 같이 사는 할머니. 봉쇄 때 가족 다 잃고 혼자야. 음식 솜씨가 형편없어. 커피도 별로야. 엄마가 나한테 집에 들르라고 하는 건 90퍼센트는 커피 때문이라고까지 하더라. ”

 

“ 네 어머니 취향이 나랑 똑같은가봐. 딱 좋은데. ”

 

“ 우리 엄마는 더 진하게 마셔. 설탕은 4분의 1 스푼만 넣고, 크림은 절대 안 넣어. 넌 절대 안 마실 걸. ”

 

“ 그래? 지금 건 어떻게 맞췄어? 레시피 있어? ”

 

“ 모르겠는데, 대충 끓여서.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마셨을 걸. 엄마가 아버지 생일이면 이렇게 만들어서 나한테 줬으니까. ”

 

“ 아... 너희 아버진 달콤한 걸 좋아하셨나 보다. 미식가셨어? ”

 

“ 글쎄. 난 커피는 별로 안 좋아해서. 엄마가 주면 마시는 척만 했어. 차가 더 좋아. ”

 

미샤는 찻잔을 내려놓은 후 냉장고에서 케피르를 꺼냈다. 팩을 뜯어 입에 대고 마시다가 등 뒤에서 트로이가 찬장 문을 열었을 때 경고하듯 말했다.

 

“ 그 빵, 어제처럼 버터 떡칠하려는 거지? 난 안 먹어. ”

 

“ 버터 없이 먹을 수는 없어, 벌써 굳었단 말야. 잼도 바를 거야. 잔뜩. 99퍼센트의 러시아 남자들이 버터와 잼이랑 같이 살아. 나머지 1퍼센트가 너 같은 불쌍한 무용수야. ”

 

“ 1퍼센트도 안 될걸. 레냐도 잼 없이는 차를 안 마셔. 스탄카도. ”

 

“ 일린? 차에 잼을 곁들여 마시는 사람치곤 굉장히 말랐던데. ”

 

“ 음, 나보다 두 배는 더 먹을 걸. 타고 난 거야. 아무리 먹어도 체중이 늘지 않아. 근육도 잘 안 붙고. ”

 

“ 그런 게 부러워? ”

 

“ 전혀. 스탄카는 너무 작아서 밀려났는걸. 볼쇼이나 키로프나 마찬가지야. 어느 정도 외모나 체형이 안 되면 제대로 된 역을 주지 않아. 군무 첫 줄에 제일 잘 빠진 애들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야. 스탄카 같은 무용수는 아무리 잘 춰도 캐릭터 댄스나 바리아시옹 정도 밖에 못 얻어. 그런 면에선 세레브랴코프 같은 인간이 유리하지. ”

 

“ 너도 못 얻는 역이 있어? ”

 

“ 나한테도 돈키호테 투우사 같은 건 안 줘. 그건 180센티미터 넘는 애들이 가져가. 아사예프는 185 정도를 선호해. ”

 

“ 넌 작지도 않잖아! 기껏 몇 센티미터 밖에 차이 안 나는데도 안 줘? ”

 

“ 발레만큼 편견과 전형으로 가득 찬 공연예술은 없어. 세레브랴코프나 레냐에게는 투우사를 주고 내게는 바질을 주는 거야. 틀에 박힌 이미지도 마찬가지야. 요즘도 아사예프는 로미오 출 때 내게 금발로 물들이라고 하지. 지나가 백조 출 때도. 우린 둘 다 말 안 듣지만. 니나마저도 키트리 출 때는 검은 머리로 바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아. ”

 

“ 난 네가 원하는 역은 다 가질 수 있는 줄 알았어. ”

 

“ 다 가질 수도 있겠지, 언젠가는. ”

 

미샤는 케피르 팩을 구겨 휴지통에 집어던지면서 돌아섰다. 검은 눈에 회색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 그때도 원할지는 모르겠지만. ”

 

버터와 잼을 바른 빵을 두 조각 먹고 주전자에서 커피를 한 잔 더 따라 마신 후 트로이는 미샤와 함께 집을 나갔다. 그는 학교로 강의를 하러 갔고 미샤는 러시아 미술관에 그림을 보러 간다면서 반대편 방향으로 갔다.

 

트로이는 그가 전날 주워섬긴 곳들을 모두 쏘다닐지 궁금했다. 돔 크니기. 피의 사원. 판탄카. 블라지미르 사원. 쿠즈네츠느이 시장. 스타로 칼린킨 다리... 네프스키 일대와 네바 강변과 핏줄처럼 뻗어나간 운하들 구석구석. 그리고 뒷골목들. 어둠과 습기가 덮쳐와 눈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물과 돌의 도시, 순찰 경찰들과 보안요원들의 눈조차 가로막는 안개가 차오르는 뒷골목들. 미샤는 10월이 다 가도록 극장과 연습실 대신 도시 곳곳을 쏘다녔고 단 한 번도 트로이에게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얘기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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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페테르부르크.

 

이날 마린스키에서 발레 돈키호테를 보았고, 공연이 끝난 후 마린스키에서부터 운하를 따라 이삭 성당까지, 그리고 다시 네바 강변까지 쭉 산책했다. 이후 에르미타주와 궁전광장을 가로질러 숙소가 있는 이삭 성당 앞까지 다시 돌아왔다.

 

밤 11시에서 12시 즈음. 백야. 석양에 잠긴 네바 강 풍경 몇 장.

 

위는 청동기마상.

 

 

 

 

네바 강 너머로 페테르부르크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쿤스트카메라 건물이 보인다.

 

 

 

궁전 다리. 드보르쪼브이 모스뜨.

 

 

 

역시 페테르부르크의 상징적 풍경. 두개의 빨간 등대.

 

 

 

궁전 다리 사진 한 장 더. 저 다리를 건너가면 바실리예프스키 섬이 나온다.

 

추워진데다 너무 바빠서 그런지 언제 저 곳을 거닐었나 싶다.. 다시 가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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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9. 20:37

장미, 백야 russia2014. 12. 29. 20:37

 

 

지난 7월. 밤.

백야. 페테르부르크, 이삭 성당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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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무도 토토가를 보니 90년대 추억이 떠올라서..

 

나는 가요보다는 팝과 락을 좋아했다. 그래서 mtv를 많이 봤다. 중학교 땐가 지구촌영상음악이라는 프로가 공중파에서 방영되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어 구해보기 힘들었던 팝 뮤비를 많이 보여줘서 좋았다. afkn도 꾸준히 봤다.

 

90년대 후반에 러시아에 가서는 언어를 빨리 익히겠다고 tv를 구입했으나 매일 제일 많이 보던 채널은 역시나 mtv였다..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뮤비를 많이 보던 시절일듯. 그래서 90년대 뮤비 중 제일 기억에 많이 남은 것도 1997~98년 즈음 나왔던 것들이다.

 

90년대 사춘기와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제일 좋아했던 가수는 조지 마이클과 데이빗 보위(나와는 물론 세대가 다른 분이지만)였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번 포스팅에서는 토토가 덕분에 갑자기 추억이 돋게 된 90년대 후반의 당시 분위기 물씬 나는 팝 뮤비 링크 몇 개 올려본다. 이 노래들이랑 뮤비 보면서 흥얼거리는 분들 90년대인 인증 :)

 

spice girls, 2 become 1

 

어제 s.e.s 보니까 이 사람들 생각나서. 고운 여자 보컬을 좋아해서 이 노래 좋아했다. 뮤비도 완전히 90년대 필!

 

결혼하기 전의 빅토리아 베컴도 있고 ㅎㅎ

 

 

 

 robbie wiilams, lazy days

 

빠질 수 없는 로비 윌리암스. 테이크 댓 시절엔 존재감도 별로 없었다만... 이 사람에게 폭 빠진 건 러시아에 있을 때 mtv 채널에서 보여주던 바로 이 뮤비 때문이었다. 노래도 좋고 보컬도 좋았다. 사실 이때 이 사람은 angel로 빅 히트를 했지만 난 이 노래를 더 좋아했다. 이 노래 아시는 분들은 로비 윌리암스 노래 좀 들어보신 분들 ㅎㅎ

 

 

 

chumbawamba, tubthumping

 

이 노래는 다들 '아, 이거 들어봤네~' 하실 듯. 국내 어떤 그룹이 샘플링도 했었던 것 같은데 긴가민가..

 

 

 

aqua, doctor jones

 

아마 아쿠아 노래는 바비 걸이 더 유명할테지만... b급 정서 충만한 웃기는 뮤비다. 캠프 필도 많이 난다. 스파이스 걸스 때도 얘기했지만 난 예쁜 목소리의 여자 보컬을 좋아해서 이 노래도 좋아했다(사람들이 웃기는 노래 좋아한다고 놀렸다 ㅋㅋ)

 

 

가벼운 노래들을 올렸지만.. 그래도 마지막은 nirvana, smells like teen spirit.

너바나를 빼놓고 90년대를 논할 수는 없다..

이 노래 말고 더 좋아하는 곡들도 있지만 그래도 상징적인 곡이니 마지막으로 올려본다. 그리운 코베인..

 

.. 생각난 김에 가끔 90년대 팝/락 뮤비 올려보겠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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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8. 21:25

햇살 찬란한 여름 정원(레트니 사드) russia2014. 12. 18. 21:25

 

 

너무 추우니까 여름 정원 사진 몇 장.

 

레트니 사드는 말 그대로 여름 정원이란 뜻이다.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이다. 녹음이 우거져 있고 대리석 조각상들이 여기저기 서 있다. 분수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지난 7월에 갔을 때 찍은 사진들.

 

 

이건 레트니 사드 안에 있는 카페 간판.

뜨거운 차와 커피, 아주 맛있는 조각케익.. 이라고 씌어 있다.

간판에 홀려 나도 들어가서 뜨거운 차와 조각케익을 먹었다. 그 얘긴 나중에 따로~

 

 

 

 

 

레트니 사드 그립다..

지금은 겨울이라 폐쇄 중.. 봄이 되어야 열고 10월이 되면 닫는다.

 

여름 정원도 있고 겨울 궁전도 있는 아름다운 페테르부르크... 올해는 두 번이나 갔었지만 다시 가고 싶다.. 하긴 겨울엔 날씨 때문에 괴롭긴 하지만..

 

태그의 레트니 사드를 클릭하면 전에 올렸던 이곳 사진들을 몇 장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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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