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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시리즈는 이 1편부터 시작..

사실 이걸 제일 먼저 썼고 앞서 올린 에피소드 0은 전체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뒤늦게 끼워넣은 프리퀄..

뭐 독립적인 에피소드들이긴 하지만 어쨌든 등장인물 소개와 0편부터 순서대로 읽는 게 앞뒤 연결이 되긴 한다.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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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

 

 

서무의 슬픔

-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베르닌은 타자기 전원 차단을 잊고 갔다가 국장의 불시 보안점검에 걸려서 2주간 조기출근하게 되어 아침에 극장까지 태워다 줄 수 없게 됐다고 왕재수에게 통보했다. 왕재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 일찍 안 가면 어떻게 되는 거야? ”

 

“ 뭐가 어떻게 돼. ”

 

“ 일찍 안 가면 되잖아. ”

 

“ 상사의 명령인걸. ”

 

“ 일찍 안 가면 국장이 때려? ”

 

“ 때리진 않지. ”

 

“ 점심을 안 줘? ”

 

“ 우린 구내식당에서 각자 사먹어. ”

 

“ 월급이 안 나와? ”

 

“ 월급은 나라에서 주는 거잖아. ”

 

“ 근데 뭐하러 일찍 가? 가지 마. 그냥 평소대로 해. ”

 

“ 야, 너는 조직 생활을 안 해봐서 몰라!! ”

 

“ 왜 안 해. 나도 나라에서 주는 돈 받으며 극장에 나갔는데. 나는 천재 무용수라서 승급도 빨리 하고 훈장도 받고.. 내 맘대로 늦게 갔는데. ”

 

“ 분명 뒤에선 다 욕했을 거야! ”

 

욕하는 건 욕하는 거고. 아무도 안 때렸어. 점심도 주고 월급도 줬으니 장땡이지. ”

 

베르닌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어쩐지 왕재수의 말이 전부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조기출근 대신 왕재수를 극장까지 태워다 주고 커피도 한 잔 얻어 마신 후 평소와 같은 시각에 출근하였다. 국장은 하룻강아지 같은 초짜가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고 심히 분노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한 달 간 조기출근하게 되었다.

 

 

돌아온 베르닌은 화가 나서 왕재수에게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울부짖었다. 왕재수는 그의 폭발을 지켜본 후 침착하게 말했다.

 

“ 한 달이나 2주나 똑같은 거야. 일찍 가지 말고 계속 평소처럼 행동해. ”

 

“ 야, 그러면 1년간 조기출근하게 된다고! ”

 

“ 계속 버티면 포기할 거야. ”

 

“ 안 그래! 국장은 안 그래! 나쁜 사람이라서 안 그래! ”

 

“ 그러면 1시간 빨리 가는 대신 1시간 빨리 퇴근하렴. ”

 

“ 야, 넌 진짜 아무 것도 몰라! 그게 그렇게 되면 처벌이냐? 우리 국장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인간이야! 늦게 출근, 조기퇴근은 모든 직장인의 꿈이자 파라다이스라고! 그런 일이 나한테 일어날 리가 없잖아! 아아... 정말 못살겠어. 죽고 싶어. 국장 때문에 자살하고 싶단 말이야.. 너무 힘들어. 흐흑..”

 

베르닌이 쌓이고 쌓인 설움을 이기지 못해 엉엉 울자 왕재수가 흠칫 놀랐다.

 

“ 촌스럽게 왜 우는 거야. 차나 우려주고 그만 내려가! ”

 

베르닌은 훌쩍훌쩍 울면서 포트에 차를 우리고 찻잔을 세팅해 주었다. 왕재수가 좋아하는 대로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려놓고 무설탕 다크초콜릿 캔디도 두 개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계속 울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왕재수는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무설탕 다크초콜릿 캔디를 먹었다. 그러나 촌스럽지만 자기 말도 잘 듣고 어딘가 귀여운 스파이가 우는 것을 보니 왕재수는 어쩐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 감히 내 꼬봉을 울리다니! 국장, 가만 두지 않겠어! ’

 

 

*    *    *

 

 

다음날 저녁에 베르닌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왕재수의 방에 올라왔다. 너무 멍해져서 포트와 찻잔을 가지고 오는 것도 잊었다.

 

“ 국장이 면담하자고 불러서 되게 걱정하면서 갔거든. 근데 내일부터 한 시간 늦게 출근하고 한 시간 빨리 퇴근하래. 앞으로 계속 그러래. ”

 

“ 잘됐구나. ”

 

“ 잘된 걸까? 왜 그러는 걸까? ”

 

“ 나 빨리 차 우려 줘. 어제 그 초콜릿 캔디랑. 그거 맛있었어. ”

 

국장이 왜 그러는 걸까? 갑자기 그러는 게 수상해. 면담하면서 그 얘기하는데 날 이상한 눈으로 곁눈질하면서 한숨까지 쉬었어. 나 자르려는 거 아닐까? ”

 

“ 뭘 잘라. 늦잠 자고 빨리 퇴근하니 잘됐네. 내일부터 다시 나 태워다 줘. 홍차는 언제 줄 거야? 초콜릿 캔디 안 남았어? ”

 

“ 아무래도 국장이 나 자르려나봐.. 그간 밉보이긴 했지. 어떡하지? 뭐 먹고 살지? 큰일 났네.. 잘리고 싶지는 않아! 흐흑... ”

 

베르닌이 다시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자 왕재수는 매우 당황했다.

 

“ 너 왜 울어? 늦게 출근, 빨리 퇴근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

 

“ 흑흑... 그 무시무시한 사이코가 자비를 베풀 리가 없잖아. 분명히 속셈이 있는 거야. 나한테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야... 월급을 반으로 깎는다든지, 자른다든지, 고문실에 보낸다든지.. ”

 

“ 고문실에는 진짜 중요한 사람이나 가는 거야(나 같은 사람 -_-), 너 같은 바보는 안 가. ”

 

“ 고문실 무서워, 으앙... ”

 

“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늦게 출근, 빨리 퇴근하는 게 직장인의 꿈이자 파라다이스라며! 기껏 자기 생각해서 그렇게 만들어줬더니 왜 우는 거냐고!! ”

 

“ 만들어주다니? 네가? 뭘 만들어줘? ”

 

“ 내가 아침에 너희 국장한테 내 방으로 오라 했단 말이야. ”

 

“ 국장을 오라가라 하다니! 심지어 극장에 있는 네 사무실까지 오라 했다고! 국장이 왔단 말이야? ”

 

“ 그럼 제까짓 게 어떻게 안 와. 내가 부르는데. ”

 

베르닌은 잠시 존경이 가득한 눈으로 왕재수를 바라보았다. 스파이에게 존경받는 것 따윈 별로 바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왕재수는 조금 뿌듯해서 어깨를 으쓱했다.

 

“ 국장 왜 오라 했어? ”

 

“ 앞으로 너 조기출근 시키지 말라고. ”

 

“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잖아. 우리 국장은 타 기관에서 업무 협조를 구할 때도 폰트와 자간과 모든 형식을 맞춰 쉬프트 탭을 필수로 지정해서 수십 장의 공문을 보내지 않으면 안 들어준다고! 너 그런 거 모르잖아! ”

 

“ 그게 뭐야?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

 

“ 그럼 어떻게 한 거야? ”

 

“ 너는 지금 나를 위해 심대한 봉사를 수행하고 있으니 KGB 국장 따위의 잡무에 시달릴 시간이 없다고 알려줬어. ”

 

“ 그래, 심대한 봉사이긴 하지. 차도 우려주고 밥도 해주고.. 설거지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아침저녁으로 태워다 주고 ㅠㅠ 나는 노예야. ”

 

“ 그런 거 말고. 그건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니까 국장한테는 안 먹혀. ”

 

“ 그럼 뭐? ”

 

“ 밤마다 나랑 침대가 부서지도록 해주고 있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해줘야 하기 때문에 조기출근은커녕 늦게 출근해야 한다고 알려줬어. 그리고 가능하면 조기퇴근해서 저녁 먹기 전에 나랑 또 해야 한다고 했어.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근무 시간 줄여달라고 했어. ”

 

그게 무슨 소리야! 침대가 부서지도록 뭘 하는데? 저녁 먹기 전에 뭘 또 하고? 너하고 뭐를 해? ”

 

왕재수는 베르닌이 그냥 감탄사를 내지르는 줄 알았지만 계속해서 그 질문을 반복하는 것을 보고 순진한 스파이가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 침대가 부서지도록 섹스를 한다고. 아, 너는 그게 뭔지도 모르는 거구나. 책상물림이랬지. 그것은 우리 말로는 성교라는 것이야. 성교란 보통 남녀나 남남, 여여, 혹은 3인 이상의 이성, 혹은 동성이 번식이나 쾌락 추구를 목적으로 특정 부위 이상을 노출하여 결합하는 일종의 물리적 화학적 행위로, 해부학적으로는....

 

설명을 절반도 늘어놓기 전에 베르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서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베르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 지금 내가 너랑 그런, 그런... 응응응을 하는 관계라고 국장한테 말했다는 거야? 그것도 밤마다, 아침마다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저녁 먹기 전에 또!!! ”

 

“ 응. ”

 

“ 왜 그런 거짓부렁을 늘어놓는 거야!!!! ”

 

“ 어.. 나도 좀 무리수란 건 알지,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 아침에 하는 건 제아무리 나라도 좀 버거워. 근데 그 정도로는 얘기해놔야 국장이 네가 너무 많이 하느라 힘들겠구나 하고 근무 시간을 줄여줄 것 아니겠니. ”

 

“ 지금 그 얘길 하는 게 아니잖아!!! ”

 

“ 왜 화내? 국장이 납득했어. 나는 중요 인물이기 때문에 그 인간은 내가 원하는 건 다 맞춰줘야 하거든. 안 그러면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 아저씨들이 화나서 국장 네놈 모가지를 날릴 거라고 협박했더니 끄덕끄덕하면서 알았대. 앞으로 너한테 절대 잡무 안 시킬 거라고 했어. 1시간 늦게 출근, 1시간 조기퇴근시킬 거고 쉬프트 탭인지 뭔지 안 해도 되게 한댔어. 매일 허리가 빠지도록 봉사하다니 힘들겠다고 너 불쌍하다고까지 했는걸. 다 나 덕분이야. ”

 

아아악!

 

베르닌은 펄쩍펄쩍 뛰더니 얼굴이 빨개졌다가 파래졌다가 하얘졌다가 했고 어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엉엉 울었다. 왕재수는 대체 이 스파이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차도 마시고 싶고 초콜릿 캔디도 먹고 싶었기 때문에 스파이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베르닌은 진정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왕재수를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쟁반을 가져와서 차를 우려주고 다크초콜릿 캔디도 주었다. 왕재수가 차를 마시는 동안 베르닌은 계속 한숨을 쉬며 앉아 있었다.

 

“ 왜 한숨 쉬어? 다 잘됐잖아. 이제 국장이 괴롭히지도 않을 거고, 조기출근과 야근도 없을 거야. 직장인의 꿈이자 파라다이스가 이루어졌잖아. ”

 

“ 나는 네가 정말 싫어. ”

 

“ 왜 싫지? 내가 다 해결해줬는데. ”

 

“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 아침에 하다니... ”

 

아, 알았다. 너 내가 거짓말해서 화났구나. 해주지도 않으면서 국장한테 그렇게 말해서. 그래서 삐친 거구나! 괜찮아, 그런 건 지금부터 해도 돼. 앞으로 그렇게 해줄게. 음,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 아침에 하면 내가 좀 힘들 거 같은데. 나 아직 다 안 나았거든. 극장 가서 졸지도 몰라. 그러니까 우리 일단 밤에만 하고 아침에 늦잠 안자면 아침에도 하자. 나중에 내가 체력이 좀 회복되면 저녁에도 하고~ ”

 

 

베르닌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왕재수는 천천히 남은 차를 마시고 무가당 다크 초콜릿 캔디를 먹었다. 사실 스파이가 자기 취향은 아니었고 딱히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말 잘 듣고 불쌍하고 어딘지 귀여운 친구니까 못된 국장으로부터 구제해 주기 위해서는 그 정도 해줄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스파이는 차도 우려주고 집안일도 해주고 극장까지 태워주기도 하는 착한 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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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2는 당직실의 귀신 이야기. 그건 주중이나 주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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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