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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 프라하에 머물렀던 동안 썼던 글이 있는데, 분량은 약 200페이지가 좀 안되는 경장편이었고 총 세 파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글을 쓰게 된 배경은 예전에 올렸던 카페 엘리펀트와 카를로비 바리에 대한 얘기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2022)

 

당시 프라하로 떠났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그 글을 시작하지 못했다. 그 글은 1년 반이 지난 지금에서야 쓰기 시작했다. 그곳, 프라하는 추웠고 어딘가 음습했고, 또 외로운 곳이었다. 그리고 추락과 변절, 깊이 스며든 어둠에 대해 생각하기 좋은 곳이었다. 어떤 면에서 러시아와 비슷했지만 그것과는 또 달랐다.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내가 그곳에서 수용소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만일 내가 그때 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다면, 혹은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내가 그 글을 썼을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어쩌면 썼을지도 모른다. 필요한 글이었으니까. 하지만 방식은 달랐을 것이다. 감정도 달랐을 것이다.

 

그 글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부는 수용소 간수, 2부는 주인공을 후원하던 어느 당 간부, 3부는 주인공의 친구를 심리적 화자로 내세우고 있었다. 1~2부는 3인칭 시점으로 썼고 3부는 1인칭으로 썼다. 대부분은 소설의 구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와 주인공 간의 심리적 거리 때문이기도 했다. 내겐 거의 언제나, 1인칭이 3인칭보다 쓰기에는 쉽다. 보통은 3인칭 시점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 글은 주로 카페 에벨에서 많이 썼다. 그리운 카페 에벨)

 

발췌한 부분은 3부의 도입부이다. 화자는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 일린이라는 인물로, 볼쇼이 극장 안무가이자 주인공인 미샤와는 절친한 친구이다. 이 도입부에서 화자인 일린은 죄수 면회실에 앉아 있다. 반체제 혐의로 체포된 후 정신교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약물 쇼크를 일으키고 모스크바 비밀 요양소로 이송된 친구를 면회하러 온 것이다. 물론 그 면회는 죄수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도, 화자의 의지도 아니다.

 

새 글 쓰다가 잠깐 구조를 정리하기 위해 작년에 썼던 이 글을 다시 뒤적였다. 잠시 그 때 생각이 나서 몇 문단 발췌해 본다.

 

처음 나오는 크냐제프 라는 인물은 보안위원회, 속칭 루뱐카, 그러니까 KGB 측에서 붙여준 담당 요원. 대화에서 언급되는 게오르기 이바노비치는 주인공을 후원하는 고위직 당 간부이자 2부의 심리적 화자이다. 그리고 라라는 일린의 딸이다. 라라가 미샤를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라고 부르는 건 이름과 부칭을 모두 붙이는 러시아식 존칭이다.

 

* 이 글을 무단으로 발췌, 인용, 전재, 배포하지 말아주세요 *

 

..

 

 

 크냐제프는 한동안 내게 주의사항을 늘어놓았다. 주로 면회 중 언급해서는 안 되는 내용들에 대한 경고였다. 내게 면회를 허가해준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 그는 특히 반체제적 발언이나 서방 국가를 찬양하는 언사를 엄금했다. 나처럼 정상적인 소비에트 시민에게 그렇게 죄질이 과중하고 사상이 불온한 정치범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라고 입에 발린 걱정을 늘어놓았다. 마침내 나는 가능한 한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말했다.

 

 “ 지나친 표현 아닌가요. 게오르기 이바노비치는 미샤가 곧 석방될 거라고 하시던데요. ”

 

 “ 아, 게오르기 이바노비치가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아마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아직 결재가 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때까지는 여전히 구금 상태고 연방에 위협을 가한 반체제 선동분자로 남아 있다고 해야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뭐 서류상으로는 그렇다 이겁니다. 우리는 명령과 규칙에 따를 뿐이죠, 잘 아실 테지만. 그러니 신중하게 얘길 나누시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 작품의 팬으로서 충고해 드리는 겁니다. 전 볼쇼이를 좋아해서. ”

 

 “ 왜, 아예 그 친구의 팬이라고 얘기하시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요. ”

 

 “ 아뇨, 절대 그런 말은 안 할 겁니다. 애초부터 그런 스타일의 무용수는 제 취향에 맞지 않아서요. 안무한 작품들도 표현이 좀 지나친 편이고. 설령 말이죠, 완벽한 가정입니다만, 제가 그 젊은 친구 춤을 조금 맘에 들어한 적이 있다 쳐도, 그 야하게 뒹굴어댔던 마지막 작품을 꽤 높이 평가한다 해도 전 절대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현명하신 분이니 무슨 뜻인지 잘 아시겠지요. ”

 

 “ 글쎄요, 전 머리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서. ”

 

 크냐제프는 소리도 내지 않고 웃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 면회 시간은 30분 드릴 겁니다. 꽤 긴 시간이죠. 감시자는 없을 겁니다. 게오르기 이바노비치가 보내신 분이니까요. ”

 

 문을 열고 방을 나가다가 문득 생각난 듯 크냐제프가 덧붙였다. 그 혐오스러운 인간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 아,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 꼭 30분을 다 채울 필요는 없어요. 그 친구 아직 그럴만한 상태가 아니라서. ”

 

 보안위원회 쪽 작자들은 모두 저렇게 밉살스러운 화법을 교육받는지 궁금했다. 아마 분명히 매뉴얼이 있을 것이다. 전에 미샤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루뱐카 심문관 매뉴얼처럼’ 이란 표현을 무심코 내뱉고는 곧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뗐다.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그’ 라는 수식어였지만 억지로 묻지는 않았다. 미샤는 하기 싫은 얘기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내 딸 라라는 전에 미샤에 대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는 시대를 잘못 탔어요. 십자가와 천사와 성인들, 악마와 용이 득실댈 때 태어났어야 했어’

 

 열네 살짜리 소녀치고는 꽤 예리한 말이었다. 평소에는 미샤나 미셴카라고 부르는 주제에 그때는 이름과 부칭을 제대로 갖춰 불렀고 자못 점잔을 빼며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자신이 벌써 5년 동안 그를 열렬히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전혀 모른다고 철석같이 믿는 모양이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그 애에게 ‘그럼 그 때 태어났으면 미샤가 무슨 일을 했을 것 같은데, 성 게오르기처럼 용이라도 잡아 죽일까?’ 하고 물었다. 라라는 발칵 화를 내면서 ‘아빠는 몇 년이나 그렇게 가깝게 지냈으면서 아직도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를 잘 모르는 거야? 절대 남의 피를 자기 손에 묻힐 사람이 아닌데. 그게 악마든 용이든 마찬가지야. 아마 사자한테 던져지거나 화살을 비 오듯 맞고 순교해 성자가 되겠죠.’ 라고 대꾸했다.

 

 처음으로 나는 딸이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내가 ‘그건 너무 끔찍한 상상인데. 게다가 미셴카는 무신론자야’ 라고 말하자 라라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그러니까 아빤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라고 대꾸하고는 자기 방으로 홱 들어가 버렸다.

 

 나중에 나는 미샤에게 라라의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미샤는 별로 충격을 받거나 기분 나빠하지도 않고 언제나처럼 낮고 조용한 어조로 대꾸했다.

 

 “ 종 치는 사람. ”

 

 “ 뭐? ”

 

 “ 종 치는 사람 쪽이 더 좋아. 난 교회 첨탑 좋아하거든, 종소리 듣는 것도. 사자한테 물어뜯기거나 화살 맞으면 진짜 아플 거야. 그런 건 별로야. ”

 

 “ 겨우 종지기가 될 거라고 하면 라라가 실망할 텐데. 장엄하거나 영웅적인 맛이 하나도 없잖아. ”

 

 “ 장엄하거나 영웅적인 건 벌써 무대에서 수도 없이 췄는걸. 세상은 그렇게 거창하고 드라마틱하지 않아. ”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주 평범한 사무실 소파에 홀로 앉아 면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미샤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현실은 거창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무대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끔찍할 수는 있었다. 적어도 미샤 자신에게는 그랬다. 아마 그때도 그는 자기 말을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

 

 

 

카페 에벨 사진 두 장 더.

 

 

 

지난 4월에 나는 일린의 회상에 등장하는 그의 딸 라라를 화자로 부활절 단편을 하나 쓴 적이 있다. 그 이야기에서 라라는 당시 볼쇼이에서 춤추기 위해 모스크바로 옮겨온 미샤를 짝사랑하는 열 살짜리 소녀로 등장한다. 70페이지 정도의 중편인데 나중에 시간 나면 올려보겠다.

 

** 추가 : 라라가 화자로 나오는 그 단편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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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