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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긴 일주일이었다. 여러 가지로 힘들어서 녹초가 되었다.

스트레스와 피로를 달랠 겸 서무의 슬픔 5편 올려본다.

우리의 고지식한 책상물림 청년 다닐 베르닌은 과연 가고 싶은 파티에 갈 수 있을 것인가...

 

 

**  지금까지의 간단한 줄거리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는 나름대로 자기 입장에서는 베르닌을 도와주려고 애쓰는데... 별 도움은 안 되는 것 같고 베르닌의 일상은 고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날 베르닌은 소싯적에 짝사랑하던 아름다운 여인 나타샤가 파티에 온다는 소식을 입수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5편에 등장하는 모스크바 쪽 사람들은 모두 가상의 인물들이다. 마타 하리보다 예쁘다는 알렉산드라 피르멘스카야, 볼쇼이의 프리마 발레리나 마리야 아브라모바 등등 모두 실재하지 않음 :)

참고로 이 시리즈에서 종종 언급되는 '루뱐카'란 단어는 모스크바에 있는 국가보안위원회(KGB) 본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나라 안기부가 남산으로 호칭되었듯, KGB 본부도 모스크바의 루뱐카라는 동네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곤 했다. 무시무시한 곳이었고 불쌍한 미샤도 거기 끌려가서 고초를 좀 겪었지만 뭐 이 시리즈는 웃자고 쓰는 거라서 그런 심각한 얘긴 안 나온다 :)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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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5

 

 

 

서무의 슬픔

- 무도회에 간 베르닌 -

 

 

 

 

베르닌이 뭔가를 간절하게 원하는 적은 별로 없었다. 스페호프 국장 아래에서 일하는 서무의 특성상 매일 과중한 업무에 짓눌려 그럴만한 여유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저녁 시 의회 대강당에서 개최되는 파티만큼은 꼭 가고 싶었다. 모스크바 KGB 본부와 가브릴로프 시 의회가 무슨 협약을 체결한 기념으로 그쪽 보안위원회와 중앙의회 관계자들, 심지어 볼쇼이 극장 무용수와 가수들까지 30여명이 내려왔고 시에서는 대규모의 축하 파티를 열기로 한 것이다.

 

물론 베르닌은 평소 그런 파티에 가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보통은 윗사람들이 우글대는 탓에 아주 지루하고 우중충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온 KGB 쪽 사람들은 거의가 2~30대의 젊은 요원들이었다. 그리고 그가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던 시절 친하게 지냈던 동료들도 여러 명 있었다. 특히 대학 시절 잠깐 사귈 뻔 했던 금발 미녀 나타샤도 얼마 전 모스크바 본부 요원으로 특채되었고 이번 파티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가브릴로프 쪽 참석자들은 시 의회와 KGB 직원들, 그리고 극장 관계자들과 예술가들이었다.

 

파티는 금요일 저녁 8시부터였다. 정상적인 직장인이라면 당연히 아무런 어려움 없이 참석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심지어 극장도 일찌감치 이 날은 공연을 아예 비워버렸다. 의회나 보안위원회와는 관계가 없었지만 볼쇼이에서 온 예술가들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닐 베르닌은 정상적인 직장인에 해당되지 않았다. 1주일 내내 밤 10시까지 야근하고 있었고 그나마 못한 일들은 주말에 몰아서 해야 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도 초대장을 받았다.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모든 현장 요원과 행정 요원들이 파티 초청 대상이었다. 다들 아침부터 차려입고 난리였다. 모스크바에서 온 미녀 스파이 출신 여자 요원들이 어떻고, 볼쇼이 발레리나가 어떻고 하며 다들 가슴 설레 했다. 베르닌은 파티에 무척 가고 싶었기 때문에 그날 아침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국장실로 들어갔다.

 

근태기록부와 업무추진비 청구서, 공유지 배추 현안사항 검토 보고서 등 서류를 한 아름 내려놓으며 베르닌은 스페호프 국장의 눈치를 살폈다. 국장은 별로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휘파람을 불며 서류들을 휙휙 넘겼다. 저기압일 때는 서류 한 장 한 장, 단어 하나하나를 걸고넘어지며 그를 들들 볶기 때문이다. 국장은 별다른 트집도 없이 서류 전부에 사인을 해주었다. 아마 미녀 요원들이 참석하는 파티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분위기를 놓칠세라 베르닌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 저어, 국장님. 오늘 저녁 파티 말인데요... ”

 

“ 아, 우리 파티. 알렉산드라 피르멘스카야가 온다더군. 자네 그 여자 모를 거야. 런던에서 날리던 스파이였지. 마타 하리는 비교도 안될 만큼 미인이야. 그러고 보니 걜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3년 전이군. ”

 

“ 그렇군요. 친하셨나 보군요. 저, 제 동료들도 왔더라고요. 모스크바에 있을 때 친했던 사람들인데. 대학 동기도 오고... ”

 

“ 친구들은 자네처럼 한심한 수준이 아니었나보군, 루뱐카 본부에 채용된 걸 보니. ”

 

“ 꼭 그런 건 아니고요... 공부는 제가 더 잘했습니다만. 저, 그래서 말인데 저도 오늘 파티에 가려고 하는데... ”

 

“ 아, 자네도 가고 싶다... 그래, 물론이지. 자네도 우리 요원인데 당연히 갈 수 있지. 초청 명단에 들어 있다면... ”

 

“ 들어 있습니다. 제 이름도 들어 있거든요. ”

 

“ 그래, 그럼 가게나. ”

 

베르닌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렇게 쉽게 허락을 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최소 한 시간 이상의 설교를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 대신 일은 마무리하고 가야지. 심지어 금요일이니... 어디 보자, 지금 처리가 안 된 일들이 뭐더라. 음, 공유지 배추 문제는 현안사항 검토만 있고 해결 방안이 없군. 해결 방안을 최소한 5가지를 제시하고 보건의회와 보안위원회의 공유지 문제에 대한 중장기 로드맵도 첨부하게.

그리고 당직실 앞에 자꾸 도둑고양이가 벌레와 쥐를 물어다 놓던데 고양이 퇴치 방안에 대해서도 5가지 이상, 각각 소요예산안을 첨부하도록.

그리고 주차장의 안내 표지판은 페인트가 다 벗겨지고 기름때가 앉아서 참 꼴 보기 싫더군. 표지판의 때를 닦아놓든지 새것으로 교체해 놓게. 글씨 색깔도 파란색으로 해놨더니 눈에 잘 띄지 않고 금방 더러워지더군. 오렌지색으로 바꾸고.

그리고 요즘 직원들이 전화를 받을 때 안내 멘트가 천차만별이야. 모스크바 본부에서 쓰는 멘트를 조사해 전화 인사 매뉴얼을 다시 제작하여 전 직원들 자리에 붙여 놓게.

음, 그리고 이 업무추진비 청구서 말인데. 이번엔 그냥 넘어가겠네만 양식이 완전히 바뀌어야 하네. 서명 란과 영수증 붙이는 란의 크기도 조절해야 하고 자리도 서로 바뀌어야 보기 좋을 것 같군. 그리고 업무추진비는 10월 현재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월별 청구 예상 목록을 작성해서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보고하게.

에, 또... 그렇지. 그 망할 놈의 불여우가 있지. 그 자식 사무실의 도청장치를 새것으로 갈아야 해. 그 여우같은 것이 전화기와 액자 뒤에 붙어 있던 장치를 망가뜨렸더군. 감시 부서에 얘기해서 제일 성능 좋은 걸로, 특수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는 떼어내거나 교란시킬 수 없는 장치로 바꿔달라고 하게. 그건 반드시 오늘 중 교체해야 해. 아무래도 그 싸가지 없는 꼬마가 자꾸 크레믈린에 전화를 걸어서 날 모함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뭐 이 정도일세. 별로 많지는 않군. 오늘 중 전부 처리할 수 있겠지. 하나라도 안 되면 파티는 꿈도 꾸지 말게. 암, 안되지. 일이 남아 있는데 그것도 서무가 그걸 미뤄놓고 파티에 가다니.

 

베르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풀이 죽어 국장실을 나왔다.

 

 

*    *    *

 

 

8시가 되었을 때 사무실에 남아 있는 것은 베르닌 한 명뿐이었다. 그는 하루종일 허리가 휘도록 일했다. 공유지 배추 해결방안과 중장기 로드맵은 소설에 가까운 보고서를 만들어냈고 고양이 퇴치 방안에 대해서는 보건의회와 야생동물 보호협회에 들러 억지로 다섯 가지를 짜냈다. 20년째 버티고 있는 철밥통 고참이자 언제나 말만 많고 하는 일은 없는 발따예프가 어깨 너머로 보고서를 넘겨다보면서 충고했다.

 

“ 아니, 뭘 그런 걸 갖고 의회니 협회니 드나들고 그렇게 골치를 앓아?  1. 고양이를 때려죽인다. 2. 쥐약 섞은 생선을 놓는다. 3. 유년부, 소년부, 청년부, 일반부 대상으로 고양이 사냥 콩쿠르를 개최해 시상한다. 4. 고양이 서식지를 찾아내 불을 지른다. 5. 고양이가 올만한 길목에 끈끈이 덫을 놓는다.  3분만에 다 나오잖나. 예산만 계산하면 되겠구먼. ”

 

“ 그런 잔인한 방법은 안 되지요! 선배님 방법은 전부 고양이를 죽이는 거잖아요! ”

 

“ 아니, 그럼 고양이 퇴치 방안이면 고양이를 죽여야지! 그것들을 살려놓으려고 하니까 이렇게 낑낑거리고 있는 거 아냐! 허참, 미련하기는. ”

 

“ 고양이가 불쌍하잖아요! 특히 저 검은 고양이 미셴카... 맨날 여기 와서 밥도 얻어먹고... 귀엽고... ”

 

“ 귀여운 게 밥 먹여주나? 그리고 누가 진짜 죽이랬나? 보고서라는 건 그냥 보고서지, 누가 그걸 실행하는 적 있냐고. 자네가 그래서 국장한테 볶이는 거야. 워낙 고지식해야 말이지... 책상물림이니 원... 난 이만 가네. 예쁜 여자들 보러 파티에 가야지. 하는 꼴을 보니 자넨 오늘 파티는커녕 밤을 새겠군. ”

 

 

5시가 되어 모두 퇴근한 후 베르닌은 주차장으로 가서 안내 표지판을 물걸레로 닦기 시작했다. 찌든 때는 지워지지 않았다. 홧김에 그는 하얀 페인트통과 오렌지색 페인트 통을 가져왔다. 표지판을 온통 흰색으로 다시 칠했다. 그러나 그는 손재주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흰 페인트가 여기저기 뭉치고 말았다. 그리고 원래 있던 글씨를 흰 페인트가 다 덮어버렸기 때문에 반듯하게 다시 ‘주차장은 오른쪽입니다’라는 글씨를 오렌지색으로 써야 했는데 자를 대고서도 선 하나 똑바로 못 긋는 그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시간 동안 끙끙대다가 그는 괴로워하며 표지판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페인트 냄새를 너무 맡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말라빠진 샌드위치를 먹으며 그는 전화 인사 매뉴얼을 새로 만들었고 수십 장을 등사해 직원들 자리에 하나하나 붙여 놓았다. 업무추진비 정산 양식을 다시 만들었다. 그리고 10월 현재부터 익년 상반기까지의 월별 기관 업무추진비 집행 예상액을 산출하여 목록을 만든 후 이를 첨부하여 기본계획을 작성한 후 국장실 책상 위에 곱게 내려놓았다.

 

시계를 보니 이미 8시 반이었다. 아직 도청장치와 문제의 표지판이 남아 있었다. 표지판은 아무래도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주말에는 문을 여는 가게도 없으니 포기하고 월요일에 국장에게 제대로 깨지는 수밖에 없었다. 감시부서 직원들은 모두 파티에 가버렸기 때문에 그는 직접 장부를 작성한 후 물품보관실에 가서 최신식 도청장치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엔지니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쪽 지식은 별로 없었지만 어쨌든 장부 번호를 대조해 모스크바에서 직송된 초소형 도청장치 두 개를 찾아냈다. 둘 다 부착자의 지문 인식으로만 제거될 수 있다고 씌어 있었다. 설명서를 열심히 읽어보았지만 수화기를 해체해 내부에 마이크를 설치하는 것부터가 너무 어려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베르닌은 차를 몰고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의 극장으로 향했다. 그나마 극장 사람들도 모두 파티에 가서 다행이었다. 아무리 왕재수가 극장 직원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해도 어쨌든 자기네 감독의 사무실에 도청마이크를 설치하러 온 KGB 요원을 보고 기분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     *     *

 

 

극장은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청소부나 경비 요원조차 안 보였다. 그는 곧장 감독실로 갔다. 놀랍게도 사무실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망할 놈의 왕재수는 에너지 절감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이었다. 분명 잘 차려입고 파티에 가느라 정신이 팔려서 불 끄는 것도 잊었겠지 하고 투덜대면서 베르닌은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회의 테이블 위에 커다란 종이를 펼쳐놓고 이상한 기하학적 그림을 그리고 있던 왕재수가 고개를 들더니 반색을 했다.

 

“ 어, 오랜만이잖아! ”

 

“ 아... 어... 그래. ”

 

“ 이번 주는 바쁘다고 태워다주지도 않고... 맨날 늦게 온다고 밥도 안 해 주고. ”

 

“ 너 바이올린 아저씨 집에서 계속 잤잖아. ”

 

“ 네가 늦게 오니까 그렇지. 나도 밥은 먹어야 하잖아. ”

 

베르닌은 머뭇거렸다. 차마 왕재수가 보는 앞에서 도청장치를 설치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화제를 돌렸다.

 

“ 너 왜 남아 있어? 파티 안 가? ”

 

“ 무슨 파티? ”

 

“ 의회에서 여는 파티. 모스크바에서 다 왔잖아. 볼쇼이에서도 오고. 너네 쪽 사람들도 다 갔잖아. 난 당연히 너도 간 줄 알았지. ”

 

“ 아, 그거. 난 파티 안 좋아해. ”

 

“ 설마. 그런 데 엄청 많이 다녔을 거 같은데. ”

 

“ 어휴, 그런 파티가 얼마나 지겨운지 알아? 맨날맨날 이 의원님 저 의원님, 무슨 시장, 무슨 장관, 무슨 대사가 여는 파티가 어떻고... 가기 싫어도 맨날 불려가고. 가면 맨날 춤추라 하고 춤 안 추면 술 마시라 하고 예쁘다고 감탄하고. 여자애들은 자꾸 사귀자고 들이대면서 안아 달라 하고 아저씨들은 막 집적대고. 진짜 질색이야. ”

 

“ 그럼 너 오늘 그 파티 안 가? 볼쇼이에서 같이 췄던 여자도 왔던데? ”

 

“ 어, 마리야랑 에벨리나랑 왔다더라. 상관없어.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

 

“ 배부른 소리하고 있네. 그래도 가봐. 난 가고 싶어도 못 가는데. 대학 때 나랑 사귈 뻔 했던 나타샤도 오는데... 진짜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

 

“ 넌 왜 못 가? 의회랑 KGB에서 공동 주최하는 파티 아냐? ”

 

“ 일이 너무 많아서. 국장이 던져준 일을 다 끝내야 파티에 갈 수 있는데 아직 다 못했어. 못 갈 것 같아. 벌써 9시잖아... ”

 

“ 많이 남았어? ”

 

“ 어, 두어 가지... ”

 

“ 여긴 왜 왔어? ”

 

“ 어? 아... 어... 너네 혹시 남는 주차 표지판 없어? ”

 

도청장치를 주머니 속에 꼭꼭 밀어 넣으며 베르닌은 급한 대로 둘러댔다. 그리고 하얀 페인트와 오렌지 페인트의 비극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 으응, 그래서 네 바지에 그렇게 페인트가 튀어 있었구나. 우리도 남는 건 없을 텐데. 아, 저걸로 하면 되겠네. ”

 

왕재수는 사무실 한켠에 세워져 있는 ‘감독실’ 입간판을 끌고 왔다.

 

“ 그건 복도에 세워놓는 거 아냐? 왜 안에 넣어놨어? ”

 

“ 아휴, 닭살 돋아. 감독이 무슨 벼슬이야? 명패 붙어 있는 것도 모자라서 웬 입간판. 사람들 지나가다 걸려서 넘어지기나 하고. 치우라 하려고 했는데 다들 파티 가버려서 일단 여기다 넣어놨어. 이거 가져가. ”

 

“ 크기는 비슷한데... 감독실이라고 씌어 있잖아. ‘주차장은 오른쪽입니다’하고 화살표가 그려져 있어야 하는걸. 하얀색이랑 오렌지색이어야 하고. ”

 

“ 뭐가 어려워, 대충 칠하면 되지. 저쪽 작화실에 페인트 있어. 좀 들고 와, 무거우니까. 알지? 난 무거운 거 들면 근육 미워지잖아. ”

 

베르닌은 무거운 입간판을 들고 왕재수를 따라 작화실로 갔다. 왕재수는 페인트통과 붓을 꺼내더니 순식간에 간판을 흰색으로 다시 칠하고는 거대한 선풍기를 틀어 페인트를 말렸다.

 

“ ‘주차장은 오른쪽입니다’? 화살표도 오른쪽? ”

 

“ 응. ”

 

“ 어휴, 촌스러워... ”

 

왕재수는 붓에 오렌지색 페인트를 묻히더니 휘리릭 글씨를 쓰고 화살표를 그렸다. 찍어낸 듯이 반듯했다. 얼룩 하나 없었다.

 

“ 다 됐네. 마르면 가져가. ”

 

“ 어, 고마워. 너 대단하다. 간판업자가 그린 것 같아. ”

 

“ 너 어떻게 나한테 간판업자 운운할 수가 있어? 업자가 만들면 그냥 간판이지만 내가 손댄 거니까 이건 예술작품이라고!

 

“ 어, 그래... 넌 참 재수 없는데 그래도 능력은 좋은 거 같아. 고마워. ”

 

“ 이거 갖다놓으면 다 끝나는 거야? 그럼 너 파티 갈 수 있어? ”

 

“ 어... 아니. 하나 더 남긴 했어. ”

 

“ 뭔데? 말해봐, 도와줄 테니까. ”

 

“ 아니, 그게... ”

 

베르닌은 너무 찔려서 말을 더듬었다. 왕재수가 표지판까지 그려주며 도와줬는데 자기는 도청장치를 설치하러 왔다는 사실에 큰 가책을 느꼈다.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서다가 그만 주머니에서 도청장치들이 툭 떨어졌다. 호기심 많은 왕재수는 잽싸게 그것들을 주웠다.

 

“ 아니, 야... 그거... ”

 

“ 어, 이거 도청마이크! 너 이거 여기 달려고 온 거구나!

 

“ 아니야... 여기 달려고 한 거 아니야... ”

 

“ 뭐가 아니야. 전화기랑 액자 뒤에 달려고 온 거지? 나 도청하려고! ”

 

“ 저... 고의가 아니야. 나도 그런 거 하고 싶지 않았는데 국장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었어. 어... 진짜 미안해. ”

 

“ 칫, 난 또 나 혼자 저녁 안 먹고 있을까봐 온 줄 알았지. ”

 

“ 저녁 안 먹었어? ”

 

“ 그럼 어떻게 먹어. 너도 없고... ”

 

“ 바이올린 아저씨 있잖아. ”

 

“ 로만 그 파티에 끌려갔어. 끝날 때까지 연주해야 된대. ”

 

“ 그렇구나. 너는 삼시세끼 꼬박꼬박 챙겨먹어야 하는 앤데... 가뜩이나 남이 안 챙겨주면 먹지도 않고. 안 그래도 말랐는데 더 마르면 안 될 텐데. 저기, 내가 샌드위치라도 만들어다 줄까? ”

 

“ 됐어. 너 빨리 파티 가야 하잖아. ”

 

“ 아니야, 나 파티 못 가. 일도 남았고... ”

 

“ 뭐, 그 도청마이크? 설치해. ”

 

“ 어, 정말? 너 그런 거 싫어하잖아. ”

 

“ 상관없어. 지금 붙여놔. 너 국장한테 검사받고 나서 월요일에 도로 떼면 되니까. ”

 

“ 이거 네 맘대로 못 떼는 거야. 최신식이라서 설치자 지문 인식 없이는 제거 못해. ”

 

“ 아, 그래? 그럼 내가 붙이면 되겠네. 줘봐. ”

 

왕재수는 베르닌의 손에서 도청마이크를 낚아챘다. 자기 사무실로 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수화기를 해체하고 무슨 코일들을 잡아당기더니 거기 초소형 마이크를 연결하고는 다시 수화기를 조립했다. 그리고는 벽의 그림 액자를 들어내더니 나사못을 한 개 빼내고는 안쪽의 코일들에 남은 마이크를 연결했다.

 

“ 됐네. 너네 쪽에서 스위치 올리면 다 들릴 걸. 만족하냐? ”

 

“ 넌 어떻게 이런 걸 다 할 줄 알아? ”

 

“ 우리 모스크바 아저씨가 KGB 실세... 매일 침대에서 날 안고 만지작거리면서 이런 얘기를... ”

 

성질 더러운 바이올리니스트도 모자라 무시무시한 고위직 의원의 품에 안겨서 귀여움을 받고 있는 왕재수의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베르닌은 급하게 그의 입을 막으며 사과했다.

 

“ 어쨌든 미안하다. 나도 이런 짓 하게 될 줄 알았으면 이 직장에 안 들어왔을 텐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

 

너 그렇게 떠들 시간 있어? 파티 가고 싶다며. 이제 다 됐잖아. 빨리 가. ”

 

“ 아니... 어차피 못 가. ”

 

“ 왜? ”

 

“ 바지에 페인트도 잔뜩 묻었고... 셔츠도 다 구겨지고... 나 양복 이거 한 벌밖에 없거든. ”

 

“ 아휴, 촌스럽게 누가 파티에 양복을 입고 가니? 이 옷도 유행 지난 지 십 년은 된 것 같은데. 너 이거 고등학교 졸업식 때 샀던 거지? ”

 

“ 어, 어떻게 알았어? 그러고 보니 십 년 전이네. 그리고 파티에 온 거 국장이 보면 날 죽이려고 할 거야. ”

 

“ 왜? 하라는 일 다 했잖아. 표지판도 만들고 도청마이크도 붙이고. ”

 

“ 그래도 국장은 어떻게든 트집을 잡을 거야. 그 사람은 내가 자기 눈앞에서 즐겁게 노는 꼴 못 봐. ”

 

“ 그럼 국장이 널 못 알아보면 되는 거겠네. ”

 

“ 어떻게 날 못 알아봐. 같이 일하는데. 맨날 툭하면 자기 방으로 불러서 눈을 마주보며 설교를 늘어놓는데. ”

 

“ 변신하고 가면 되잖아. 어차피 이렇게 촌스러운 꼴로 파티 가면 재미도 없어. 이리 와봐. ”

 

왕재수는 베르닌을 소파에 앉혀놓더니 한쪽에 있는 캐비닛을 열었다. 베르닌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서류용 캐비닛이 아니라 옷장이었기 때문이다. 옷들이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 자신의 집에 있는 옷보다 훨씬 많은 것 같았다.

 

“ 너 왜 옷을 여기다 전부 놓고 다녀? ”

 

“ 전부는 무슨. 가끔 여기서 잘 때도 있으니까 그냥 몇 벌만 가져다 놓은 거야. 똑같은 거 다시 입기 싫잖아. ”

 

“ 이게 몇 벌 가져다 놓은 거라고!! 여자들도 이렇게 옷 많이 안 사겠다. ”

 

“ 내가 산 거 아니야. 다 선물 받은 거야. 나는 워낙 예쁘고 맵시가 좋으니까 외국 디자이너들도 막 자기들 신상이라면서 갖다 주고... 팬들도 갖다 바쳤거든. 아휴, 여긴 시골이라서 이제 예쁜 옷 갖다 주는 사람이 없어. ”

 

베르닌은 입을 딱 벌렸다. 역시 왕재수는 그와는 딴 세상에 사는 게 분명했다. 문득 그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 가끔 여기서 잔다고? 여기 소파에서? ”

 

“ 응. ”

 

“ 왜? ”

 

너 야근해서 나 안 태워다 줄 때랑 로만이 다른 일 때문에 못 재워줄 때. ”

 

“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집이 없는 것도 아닌데! ”

 

“ 캄캄할 때 혼자 강 건너서 집까지 걸어가는 거 싫단 말이야. 난 운전도 엉망이고. 전에도 차 몰고 가다가 배나무 들이받았어. ”

 

“ 그래서 여기서 잔단 말이야? 극장은 밤에 난방도 안 되는데! 너 그때 고문당한 거 다 낫지도 않았잖아! 툭하면 아프잖아. 그것도 저 소파에서? 너 다리 길어서 저 소파에 맞지도 않겠다! ”

 

“ 아유, 정말 왜 이렇게 잔소리야! 남이야 어디서 자든 말든! 나 원래 옛날부터 노숙도 잘 하고 아무데서나 잘 잤거든! ”

 

“ 노숙이라니!! 미쳤냐? ”

 

“ 공원에서 멋있는 아저씨들이랑 몰래몰래 성교를 하고서 여럿이 꼭 껴안고 낙엽 더미 속에서... ”

 

“ 헉, 그만해! ”

 

왕재수는 혀를 날름하더니 옷장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는 옷을 한 아름 안고 베르닌에게 다가와 명령했다.

 

“ 야, 옷 벗어. ”

 

“ 뭐? 왜!! 너, 너... 나 그런 거 아닌 거 알지? 그러니까 나는... ”

 

“ 옷 갈아입어야 파티에 가지! 벌써 9시 반 넘었잖아! 빨랑 갈아입어야 그 나타샤인가 뭔가도 보고 춤도 출 거 아니야. ”

 

“ 그래서 네 옷 입고 가라고? ”

 

“ 국장이 넌줄 몰라야 한다며. 여자한테도 잘 보이고. ”

 

“ 내가 네 옷을 어떻게 입냐? 난 180 넘는다고. 사이즈도 너보다 크고! ”

 

“ 괜찮아, 바지 길이는 맞을 거야. 넌 허리가 길고 난 다리가 길잖니. 그리고 이 옷들은 품이랑 허리가 좀 크게 나와서 어차피 나한테는 안 맞아. 버리려다가 아르마니라서 아까워서 놔뒀던 거거든. ”

 

“ 아르마니가 뭐야? ”

 

“ 있어, 그런 게. 좋은 거야. 빨랑 그 누더기 벗고 갈아입어. ”

 

그래서 베르닌은 옷을 갈아입었다. 청회색의 실크 셔츠와 짙은 색의 착 붙는 진을 입고 부드러운 가죽 느낌이 일품인 근사한 벨트를 맸다.

 

“ 답답해... 너무 꽉 끼어. ”

 

“ 끼는 게 아니고 딱 맞는 거야. 네가 여태 너무 헐렁한 옷만 입어버릇해서 그래. 남자는 핏이 잘 맞아야 멋있어 보인다고. ”

 

“ 하나도 안 편해. 셔츠도 너무 끼고 바지도 벨트 안 해도 될 거 같아. ”

 

“ 그 벨트는 멋으로 하는 거야! 셔츠는 지금이 딱 좋아. ”

 

“ 넥타이 할까? ”

 

“ 윽, 이 셔츠에 넥타이는 안 되지! 너 정말 패션하고는 담 쌓았구나. 이런 차림에는 이렇게 스카프를 매야 멋있는 거야. 그리고 이 재킷 입어. ”

 

재킷 길이가 너무 짧아... 이 지퍼는 뭐야? 주머니도 아닌 게 왜 달렸지? ”

 

“ 지퍼는 장식이야. ”

 

“ 이런 게 멋있는 거야? ”

 

“ 응, 훨씬 낫네. 근데 너 머리가 너무 엉망이야. ”

 

왕재수는 이상한 병을 꺼내서 손에 크림 같은 걸 쭉 짜내더니 그걸 베르닌의 머리털에 바르고 조물조물 만지작거리더니 가르마를 바꾸고 뒷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리고는 서랍에서 이상한 팔레트 같은 걸 꺼내더니 베르닌의 얼굴 여기저기에 붓질을 했다.

 

“ 으악, 뭐하는 거야? ”

 

“ 너 맨날 야근하느라 피부가 너무 안 좋아. 여기 잡티랑 뾰루지랑... 컨실러로 가려주는 거야. ”

 

“ 이런 건 여자들이나 하는 거잖아! ”

 

“ 괜찮아, 눈에 안 띄게 해줄게. 남자는 피부가 좋아야 먹고 들어간다고. 아, 이제 대충 됐다. 그래도 구제불능일 줄 알았는데 키가 있어서 꾸며놓으니 괜찮네. 야, 그렇게 어깨 구부정하게 하지 마. 머리 들고 어깨 펴고. 그렇지, 걸을 때도 정면을 보고 당당하게. 그래야 키랑 어깨가 돋보이고 멋있어 보이지. 훨씬 낫네. ”

 

“ 너무 어려워... ”

 

“ 처음에만 그런 거야. 다 됐으니까 빨리 가라. ”

 

“ 너 정말 안 가? ”

 

“ 난 안 가. 파티 싫어. 일하던 거 마저 할 거야. ”

 

“ 그게 일하는 거였어? 난 낙서하는 줄 알았네. ”

 

“ 진짜 무식하다니까, 예술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고. 신작 무대 동선 짜는 거야. 나 할 거 많아. 빨리 가. 잘 놀아라. 나타샤 잘 꼬셔. ”

 

“ 고마워. ”

 

베르닌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극장을 나섰다. 복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는 급하게 차를 몰고 시 의회 대강당으로 향했다.

 

 

*    *    *

 

 

강당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극장 오케스트라가 계속해서 대중적인 춤곡을 연주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잘 차려입은 남녀들이 모여 춤을 추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기도 하며 흥겨운 분위기였다. 베르닌은 쭈뼛거리며 슬며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모두에게 무시당하며 투명인간 취급받을 게 뻔했으므로 잽싸게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지나가 나타샤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자들이 하나둘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남자들도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저 남자 누구야? 모스크바에서 왔나? ”

 

“ 어머, 이 동네는 시골인 줄 알았는데 어쩜 저렇게 세련된 남자가 다 있지? 아르바트보다 물이 더 좋네. ”

 

어머, 저 남자 키도 크고 완전 스타일 좋아. 소개시켜 달라고 하고 싶다. ”

 

처음에 베르닌은 그게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 줄도 모르고 대체 어디에 그렇게 멋있는 남자가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때 하필 스페호프 국장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공유지 배추와 표지판과 업무추진비, 전화 매뉴얼과 도청마이크에 대해 설교를 늘어놓고 감히 파티에 올 엄두를 내다니 서무의 기본 자세가 안 됐다는 호통을 칠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베르닌이 몸을 움츠렸는데 놀랍게도 국장은 그를 그대로 지나쳐갔다. 표정을 보니 그를 전혀 못 알아본 것 같았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능력에 새삼 감탄했다.

 

그때 난생 처음 보는 미인이 그에게 다가와 춤을 청했다. 알고 보니 화제의 인물인 미녀 스파이 알렉산드라 피르멘스카야였다. 정말 예뻤지만 눈매가 좀 올라가서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는 나타샤와 렐랴가 더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물론 내색하지는 않았다. 피르멘스카야는 춤을 춘 후 투덜댔다.

 

당신 춤은 못 추는군요. 하긴 이 동네 사람이니... 스타일만 좋은 거였어. ”

 

“ 혹시 나타샤 아직 남아 있나요? ”

 

“ 나타샤? 아, 그 신참. 걔 알아요? ”

 

“ 동창이라서... ”

 

“ 저쪽에 있네요. 얘 나타샤! 멋쟁이가 널 찾는다! ”

 

피르멘스카야는 나타샤를 데려다 주고 다른 남자들 사이로 사라졌다. 베르닌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나타샤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미인이었다. 그러나 긴 금발을 늘어뜨리고 풍만한 가슴을 반쯤 드러낸 채 엉덩이를 흔들며 다가오는 나타샤를 보자 베르닌은 낯선 기분이 들었다.

 

“ 처음 뵈어요, 전 나타샤라고 해요. 모스크바 KGB 본부에서 왔죠. 당신은 혹시 극장 쪽? ”

 

“ 나타샤, 나야! 나 기억 안나? 같이 학부 다녔잖아. 다닐. 다닐 베르닌. ”

 

어머, 다냐? 어머나 세상에... 너 어쩌면 이렇게 변했니. 못 알아봤잖아. 어머어머, 너 정말 환골탈태했다! 이렇게 멋있는 남자인 줄 알았으면 그때 안 찼을 텐데... 그땐 너무 촌스럽고 눈도 단추 같다고 생각했거든. 내가 잘못 봤었던 거구나. 와, 진짜 멋있어졌다. 헤어스타일도 끝내준다. 어머, 혹시 이 재킷은 베르사체 아니야? ”

 

“ 아르마니래... ”

 

어머나, 해외 스파이로 빠져도 손에 대볼까 말까 하다던 그 아르마니! 게다가 이 스카프... 이건 에르메스잖아! 어머 세상에...

 

베르닌은 에르메스가 뭔지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타샤가 풍만한 가슴을 비벼대며 바짝 몸을 붙여왔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어쩐지 우울해져서 물었다.

 

“ 그때 내 고백 안 받아준 거, 공부하느라 시간 없다고 했었잖아. 그거 아니었던 거야? 내가 촌스러워서 그랬어? ”

 

아, 그때... 뭘 그런 걸 기억하고 그래. 옛날은 옛날이고 지금이 중요하지. ”

 

“ 내 눈 단추 같아서 그랬던 거야? ”

 

“ 지금은 아니야. 멋있어. 어쩜 피부도 이렇게 좋아졌니. 광이 나네. 너 모스크바 안 올라와? 지금 어디 살아? 너네 집에 커피 마시러 가도 돼? ”

 

“ 어... 나중에 시간 되면. 근데 저쪽에서 날 찾는 거 같아. 있다 다시 봐. ”

 

베르닌은 나타샤를 조심스럽게 밀어붙이고 다른 쪽으로 피했다. 너무나 울적했다. 왜 그런지 자신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테이블 쪽으로 가자 맛있는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각종 샌드위치와 꼬치구이, 훈제연어 샐러드와 과일즙과 사과파이, 초콜릿 케익 등 평소에는 실컷 먹기 힘든 요리가 가득했다. 꼬치를 한 개 해치우고 훈제연어를 몇 조각 우물우물 씹다가 베르닌은 문득 왕재수 생각이 났다.

 

‘ 그러고 보니 걔가 좋아하는 거네. 고기보다 생선을 더 좋아하던데. 저 사과파이. 바이올린 깡패 때문에 다이어트 한다더니 사과파이는 앉은 자리에서 한 판 다 먹었지. 단 거 안 먹는다고 우기더니만. ’

 

사과파이는 참 맛있었다. 울적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먹고 있는 동안에도 쉴 새 없이 여자들이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놀라운 것은 가브릴로프 KGB 직원들 중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거였다. 심지어 같은 사무실의 리자는 그를 모스크바에서 온 요원으로 착각하고 데이트를 신청하기까지 했다. 렐랴가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하긴 렐랴는 원체 눈썰미가 좋으니 그에게 왜 왕재수 옷을 훔쳐 입고 왔느냐고 화를 낼지도 몰랐다.

 

사과파이를 먹은 후 과일즙을 마시고 있는데 번쩍거리는 목걸이를 늘어뜨리고 붉은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자그마하고 날씬한 여자가 다가왔다. 심지어 베르닌조차도 그게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인민예술가이자 볼쇼이의 프리마 발레리나인 마리야 아브라모바였다. 텔레비전에도 많이 나왔고 왕재수와도 여러 번 같이 무대에 올라갔던 적이 있었다. 이미 40살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여전히 예뻤다. 그가 인사를 하자 아브라모바가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파티에서 마주친 여자들 중 그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역시 볼쇼이 발레리나라 콧대가 높은가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아브라모바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 당신 여기 KGB라면서요? ”

 

“ 아, 네. 혹시 도와드릴 일이라도? ”

 

“ 뺨 한 대만 때려줘도 돼요? ”

 

“ 어... 아니요... 안되는데요. 대체 왜 그러시죠? 제가 실수라도 했나요? ”

 

당신들이 미샤를 여기 못 오게 했잖아요!

 

“ 미샤가 누구지... 아, 왕재수... 아니, 야스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긴가요. 걔는 지금 바빠요. 신작 무대 동선을 그린대요. 파티도 엄청 싫어한다고... ”

 

“ 파티를 싫어해요? 걔가? 우리 귀염둥이 미셴카가? 핑계도 좀 댈만한 걸 대야지! 걔가 얼마나 잘 노는 앤데. 파티만 왔다 하면 순식간에 가운데로 뛰어나가 스테이지를 장악하고...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도 추고. 다들 몰려들어서 예쁘다고 칭찬해 주면 좋아하고. 걔 체포된 후에 우리 한 번도 못 봤어요. 당신들이 걔한테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로는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시외로 전화도 못하게 하고 도청이나 해대고... 우리가 걔 만나게 해달라고 신청서류를 얼마나 많이 넣었는지 알아요? 당신들이 전부 묵살했잖아요! 당국의 승인이 없어 안 된다고! 어제 간신히 걔랑 통화했어요. 그것도 무슨 선을 따서 몰래 전화하는 거라고 하던데요! 도청마이크가 하도 많이 숨겨져 있어서 그거 다 떼어 내느라 힘들었다고. 걔 어제 나랑 전화하면서 막 울었어요. 자기도 파티 가고 싶은데 못 가게 한다고. 나랑 에벨리나랑 볼쇼이 친구들이랑 다 보고 싶은데 얼굴도 못 본다고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내 가슴이 다 찢어졌단 말이에요! ”

 

“ 어... 왕재수는 파티 싫다고 했는데. 지루해서 안 가는 거랬는데. 당신이랑 에벨리나랑 하나도 안 친하다고... 나 보고 잘 놀고 오라고 했는데. ”

 

“ 안 친하다니! 우리가 얼마나 친했는데. 나랑은 파트너였다고요! 우리 집에서도 얼마나 많이 재워줬는데. 누나 누나 하면서 얼마나 잘 따랐는데! 어제도 ‘누나, 나 파티 가고 싶어. 누나 보고 싶어’ 하면서 어찌나 울던지. 양심이 좀 있어 봐요! 더러운 KGB 같으니! 애를 잡아가고 고문한 것도 모자라서 이런 촌구석에 처박아 놓고 친구가 와도 못 만나게 하고 파티에도 못 가게 하다니! 도청이나 해대고! 심지어 무슨 감시요원까지 붙였다면서요. 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출퇴근도 같이 하고 아예 집에 같이 살면서 먹는 것 자는 것까지 다 감시한다고... 그 더러운 감시요원이란 인간 마주치기만 하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 아니, 그게... 그 감시요원이란 사람도 아마 명령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걸 거예요. 그리고 그게 감시가 아니고... 왕재수, 아니 야스민을 가정부처럼 잘 보살펴 주는... ”

 

“ 역시 가재는 게 편이라고 역성드는 것 좀 봐! 진짜 한 대 때릴 거야! ”

 

아브라모바가 빨갛게 칠한 긴 손톱을 세우며 달려들려고 해서 베르닌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다행히 볼쇼이에서 온 일행이 그녀를 진정시키며 다른 쪽으로 데려갔다. 베르닌은 구석으로 몸을 피한 후 한숨을 쉬었다.

 

 

*     *    *

 

 

베르닌이 작은 보따리를 들고 문을 열었을 때 왕재수는 소파에 누워 음악을 듣고 있었다. 베르닌으로서는 처음 듣는 시끄러운 음악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가사인 걸 보니 암시장에서 구한 레코드인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베르닌을 보자 왕재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 어, 너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이제 겨우 열한 시밖에 안됐는데. ”

 

“ 끝나서 온 거야. ”

 

“ 끝나긴, 원래 지금이 제일 재밌을 땐데. 모스크바 애들 원래 새벽까지 노는데. ”

 

“ 파티 재미없다더니. ”

 

“ 그러니까, 나 말고, 노는 애들 말이야. 난 재미없어. 지루해. 근데 너 정말 왜 벌써 온 거야? 나타샤 못 만났어? ”

 

“ 만났어. ”

 

“ 어, 근데 안 통했어? 그럴 리가... 내가 꾸며줘서 안 통한 적 없는데. 심지어 아르마니인데... 그 여자 혹시 여자 좋아하는 거 아냐? ”

 

“ 좋아했어. 나보고 멋있다고 했어. 아르마니 좋대. ”

 

“ 역시 그렇지? 근데 왜 벌써 왔어? 보통 그러면 커피 마시러 집에 가자고 할 텐데. 그리고 나면 침대로... ”

 

“ 그런 분위기긴 했는데 내가 별로 안 내켰어. ”

 

“ 아, 나타샤가 못 본 사이에 역변한 거야? 아니면 이미 결혼해서? 애 엄마 된 거야? ”

 

“ 그냥. 너무 옛날 일이라 그런지 다시 보니까 예전 같지 않더라고. 생각보다 별로 안 좋아했었나봐. ”

 

“ 그럼 딴 여자들이랑 잘 해보지. 같이 놀자던 애들 없었어? 이렇게 하고 갔으면 있어야 되는데. ”

 

“ 있었어. 많았어. ”

 

근데 왜 그냥 온 거야! 바보... 멍석 깔아주면 못 놀고. 국장한테 들켰어? ”

 

“ 국장이 못 알아보더라. ”

 

“ 에이. 그럼 새벽까지 남았어야지. 하여튼 너도 참 재미없다. 하긴 그렇게 야근을 많이 했으니 피곤했겠구나. 아, 너 나 태워다 주려고 들른 거구나! 잘됐다! 집까지 태워줘. ”

 

베르닌은 말없이 주섬주섬 보따리를 풀었다. 갱지로 대충 덮어 놓은 종이접시 몇 개와 과일즙이 든 유리병을 꺼냈다.

 

“ 그게 뭐야? ”

 

“ 너 저녁도 안 먹었잖아. 좀 먹어. ”

 

“ 어, 이거 연어야? 어디서 났어? ”

 

“ 테이블에 많이 남아서 싸온 거야. ”

 

“ 아휴, 촌스럽게 파티 음식을 싸오고 그래. 진짜 창피하게. ”

 

“ 내가 창피하지 네가 창피하냐? 그냥 먹어. ”

 

왕재수는 좋아하면서 레몬을 쭉쭉 짜더니 훈제연어를 입 안으로 마구 밀어 넣었다. 정신없이 먹는 걸 보니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 야, 천천히 먹어. 목메잖아. 과일즙 마셔가면서 먹어. 아무도 안 뺏아먹으니까. ”

 

“ 이거 닭꼬치야? ”

 

“ 그래. 넌 양고기 안 좋아하잖아. 닭고기로 골라왔어. ”

 

“ 맛있다. 근데 식었어. ”

 

“ 데워다 줘? ”

 

“ 아니. 그냥 먹을래. 식어도 맛있어. ”

 

“ 도대체 마지막으로 뭘 먹은 게 언제야! 너 점심도 안 먹었지? ”

 

“ 오늘 바빴어. ”

 

“ 바쁘긴 뭐가 바빠. 하루종일 방에 처박혀서 우느라고 안 먹었겠지.

 

“ 뭐? ”

 

“ 아니야. 아무 것도. ”

 

“ 우와, 이거 사과파이야? ”

 

“ 그래. 맛있더라. ”

 

“ 나 이거 다 먹어도 돼? 너 안 먹어? ”

 

난 많이 먹고 왔어. 너 다 먹어. 좋아하잖아, 사과파이. 한 판은 껌이잖아. ”

 

“ 누가! 그 큰 걸 내가 어떻게 다 먹어! ”

 

“ 내숭 떠는 건 바이올린 아저씨 앞에서나 하셔. 사과파이 한 판 다 해치우는 거 전에 다 봤거든! ”

 

“ 에이... ”

 

왕재수는 입을 삐죽거리다가 사과파이를 집어서 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세 조각을 먹어치운 후 갑자기 근심스러운 눈망울로 그를 쳐다보았다.

 

“ 너 말하면 안 돼. ”

 

“ 뭘? ”

 

“ 로만한테. 나 사과파이 한 판 먹을 수 있는 거. ”

 

“ 다 큰 사내자식이 기껏 사과파이 한 판 먹는 게 뭐가 어때서! ”

 

“ 그래도... 로만은 나 그런 거 몰라... ”

 

“ 야, 너 그 못돼먹은 깡패한테 왜 그렇게 쩔쩔 매는 거야! 너처럼 성깔도 더럽고 재수 없는 녀석이 그 아저씨한테는 왜 그렇게 구는데! 어리고 예쁜 애 손아귀에 넣었으면 됐지 그 자식은 자기 분수도 모르고 왜 그렇게 난리야! ”

 

“ 네가 몰라서 그래. 로만이 침대에서 엄청 끝내주거든. 그래서 그 아저씨하고는 깨지기 싫단 말이야. ”

 

“ 에휴, 말을 말자. 너랑은 모든 얘기가 침대로 끝나니... ”

 

“ 원래 그런 거야. 파티도 그렇고. 바보, 기껏 차려 입혀서 보내놨더니 여자들이랑 놀지도 못하고 침대로 가지도 못하고 한 시간 만에 돌아오기나 하고. 아깝다. 파티... ”

 

“ 너 솔직히 말해. 파티 가고 싶었지? ”

 

“ 아니. 내가 왜? 지루하다고 했잖아. ”

 

“ 아브라모바가 그러는데 너 파티 가면 장난 아니게 놀았다던데? 스테이지를 장악하고 막 테이블 위로도 올라가고... ”

 

“ 에이, 그건 젊었을 때지. ”

 

“ 놀고 있네, 지금은 그럼 늙었냐? 스물다섯 밖에 안 된 게. ”

 

“ 너 그것도 로만한테 얘기하면 안 돼. 그 사람 나 스물두 살인 줄 알아. ”

 

“ 뭔 소리야. 너 취임식 때 극장장이 너 나이 다 얘기했잖아! ”

 

“ 그런가... 그럼 다 들킨 거네. 아, 망했다. 하여튼. 너네 파티는 뻔할 뻔자 재미도 없었을 거야. 시골 파티니까 음악도 되게 별로였을 거고. 그러니까 하나도 가고 싶지 않았어. ”

 

“ 아브라모바한테 누나 누나 하면서 찰싹 붙어서 스테이지를 장악하면서 춤추고 싶지 않았다는 거지? ”

 

“ 당연하지! ”

 

“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가서 추고 싶지도 않았던 거지? ”

 

“ 어... ”

 

“ 하긴 지금은 못 추겠구나. 스물다섯 살이나 먹어서. 늙어서. 테이블 위에 올라가면 헛디뎌서 떨어지겠네. ”

 

왕재수는 테이블을 힐끗 보더니 입술을 삐죽거렸다. 금세 사슴 같은 눈망울이 되었다. 베르닌은 종이접시와 유리병, 무대 동선이 그려진 종이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노래가 흘러나오는 오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 물론 이런 근본 없는 노래에 맞춰서는 못 추겠지. 클래식 아니면 너 못 추잖아. ”

 

“ 뭐가! 나 절대음감인데! 못 추는 음악 하나도 없어! 내가, 내가 이걸로 안무도 했었는데! ”

 

“ 말도 안 돼. 그래도 테이블 위에선 못 출걸. ”

 

왕재수가 발칵 화를 내더니 테이블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레코드가 다 돌아갈 때까지 족히 30분 가까이 미친 듯이 춤을 췄다. 베르닌은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열심히 구경했다.

 

“ 와, 너 진짜 잘 추는구나. 헛디디지도 않네. ”

 

“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잘 노는데! 이런 나를 못 가게 하다니. ”

 

“ 어딜 못 가게 해? ”

 

“ 아니야! ”

 

베르닌은 웃었고 춤춰서 덥고 목이 마르다는 왕재수에게 과일즙을 한 잔 더 따라주었다. 그리고 왕재수가 남은 사과파이를 다 먹어치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럭저럭 괜찮은 하루였다.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왕재수가 과도하게 춤을 춘 후유증으로 곯아떨어져서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들쳐 업고 올라가야 했던 것만 빼면. 역시 끝까지 속을 썩이는 놈이었다. 어쨌든 표지판을 그려준 걸 생각해서 베르닌은 그날만큼은 왕재수를 용서해주기로 했다.

 

 

 

- FIN -

201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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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나름대로 신데렐라 패러디로 쓴 거긴 한데..

신데렐라 : 베르닌

계모 : 스페호프

새언니 : 발따예프 외 동료들

요정대모 : 왕재수

왕자 : 나타샤(!)

 

하여튼 이야기는 6편의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으로 이어진다. 그건 다음주 중에..

 

왕재수가 사과파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가끔 언급했던 코즐로프와의 이야기에 나온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65

 

그리고 사과파이 사진 두어 개는 아래 링크..

http://tveye.tistory.com/3416
http://tveye.tistory.com/3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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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