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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 시리즈는 어쨌든 계속되고...

원래 14편까지만 쓰고 본편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몇가지 생각난 것도 있고, 머리를 정리할 것도 있어서 몇 편 더 쓰고 있다. 지금은 18편을 막 시작했는데 아마 18편까지 쓰면 잠깐 멈추고 다시 본편으로 들어갈 것 같다.

 

13~14편에서 베르닌이 온천 요양소에 가느라 답답한 사무실을 벗어나 있었다면 15편에서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부터 국장의 호출을 받는데...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왕재수와 함께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에 다녀온 후 베르닌은 쌓여 있는 업무에 매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부터 스페호프 국장이 그를 호출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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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5

 

 

 

서무의 슬픔

-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특별 감사와 금요일 휴가 때문에 미뤄놓았던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베르닌은 일주일 내내 야근을 하고 있었다. 주말 출근으로 매우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간신히 출근한 월요일 아침에 갑자기 스페호프가 그를 호출했다. 당장 국장실로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베르닌의 머릿속에 아직 흑표지와 노끈 작업을 해 놓지 않은 1982년도 문서 접수 대장과 외출부, 근태기록 장부 등등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양이 미셴카를 위해 배추밭에 몰래 가져다 놓은 물그릇과 사료 그릇, 책상 위에 쌓아놓고 퇴근했던 서류철들, 진흙 얼룩이 튄 주차 표지판 등등도 주루룩 떠올랐다.

 

국장이 호통 치면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괴로워하며 베르닌은 국장실로 터벅터벅 올라갔다. 가뜩이나 요 며칠 동안 업무 스트레스도 심한데다 온천에 다녀온 후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더 피곤했다.

 

국장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스페호프가 책상 앞에 앉아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눈을 번득이며 야단을 칠 거라고 생각했던 베르닌은 회의 테이블 앞에 국장을 비롯해 네 명의 남자들이 둘러앉아 있는 것에 살짝 놀랐다. 같은 부서의 철밥통 선배인 표트르 발따예프를 제외한 나머지 둘은 잘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나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뚱뚱한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기른 안경잡이 남자였다. 둘 다 발따예프와 비슷한 연령대인 4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이쪽으로 와서 앉게. 인사하지. 이 친구가 다닐 베르닌, 우리 막내 직원일세. 표트르와 같은 감시분석부 소속이지. 이쪽은 겐나디 바라노프스키. 우리 시 의회 홍보부장이고 여기는 비탈리 주브치크. 검열국 선전부장이야. ”

 

베르닌은 쭈뼛거리다 인사를 했다. 그러고 보니 대머리 뚱보인 바라노프스키는 지난번 체육대회 때 독수리팀 응원석에서 본 기억이 났다. 의장 근처에 앉아 있었던 것 같았다. 주브치크는 완전히 초면이었다. 발따예프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는데 베르닌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제껏 저 뺀질거리는 게으름뱅이 선배가 자신을 보며 웃었던 적이 없었는데...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스페호프가 만족한 얼굴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 그럼 이걸로 됐군. 넷이니 숙소 쓰기도 딱 맞고, 출장 명령과 보고도 다닐이 하면 되고. 경비 관리도 그렇고. 여러 모로 딱 들어맞아. 역시 표트르가 경험과 연륜이 있어서 이런 쪽은 해결책을 잘 생각해낸다니까. 뭐 별로 신경 쓸 건 없네, 다닐. 출발은 내일 아침이고 돌아오는 비행기는 토요일 저녁이야. 여기 도착하면 자정이 다 되겠군. 그래도 다음날은 일요일이니 참 좋은 일정이지. 아직 출장명령서가 올라가지 않았으니 당장 그것부터 처리하게. 그리고 회계부서에 경비도 요청하고. ”

 

“ 어, 저... 국장님. 전 대체 무슨 말씀인지... 출장이요? 내일 아침? 경비? 비행기라뇨? ”

 

“ 자네 표트르에게서 얘기 못 들었나? ”

 

“ 예? 무슨 얘기... ”

 

 

발따예프가 느물느물 웃었다.

 

 

“ 아, 그러고 보니 금요일에 얘기한다는 게 제가 너무 바빠서 깜박 잊었군요. 큰 문제는 없겠죠. 어차피 이 친구야 막내라서 며칠 자리 비워도 부서에 별 타격도 없고 티도 안 날 테니. ”

 

“ 국장님, 제가 출장을 가나요? ”

 

 

베르닌이 하도 얼빠진 표정으로 쳐다보자 성질 급한 스페호프가 혀를 찼다.

 

 

“ 허 참, 표트르 자네도 답답하군. 미리 얘기를 해줬어야지! 그래야 다닐이 이번 주 서무 업무를 미리 정리해놓을 거 아닌가! 뭐 됐네. 오늘 몰아서 하면 될 테니까. 내일부터 금요일까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 개최되네. 화, 수는 모스크바, 목요일은 레닌그라드야. 금요일에는 레닌그라드 시 의회와 KGB 지부 견학이 있고 토요일은 저녁 비행기 타기 전까지는 자유 시간일세. 우리 쪽에서는 표트르와 자네, 의회에서는 겐나디, 검열국에서는 비탈리가 참석하게 되었네. 영광인 줄 알게! ”

 

“ 어... 하지만 전 우수 공산당원으로 선정된 적이 없는데요. 보통 이런 연수는 중견 직원들이나 간부들이 가시는 거 아닌가요? 왜 제가... ”

 

그러니까 영광이지! 행정의 기본도 아직 덜 된 자네가 이 쟁쟁한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가다니! 자네 같은 책상물림에게 언제 그런 기회가 주어지겠나! 심지어 모스크바에! ”

 

저... 전 모스크바 대학을 나왔는데요. 모스크바에서 5년 넘게 살았는데... ”

 

“ 그렇지! 바로 그거야!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네가 모스크바 지리를 잘 안다는 것이지. 자네 물론 레닌그라드에도 가봤겠지? ”

 

“ 어, 레닌그라드요? 거긴 그냥 며칠 관광만... ”

 

“ 어쨌든 좋아. 잘된 일이야. 우리 지국에는 똑똑하고 유능한 애들은 많은데 의외로 모스크바 물을 먹은 사람은 드물어서. 표트르나 겐나디, 비탈리도 모스크바 다녀온 게 삼십 년 전 소년단원 시절이라 지금은 하나도 모르겠다더군. 그러니 자네가 선배들을 잘 보필하게. ”

 

“ 저,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전 이번 주에 할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그 연수 워크숍이란 건 작년에 다른 분이 가셨을 때 출장 경비를 정산해 드리느라 프로그램 책자를 본 적이 있는데, 저처럼 신참에게는 맞지 않는 내용들만 가득하던데요... ”

 

“ 아니, 다른 직원들은 읍소를 해서라도 연수를 가고 싶어 하는데 자넨 대체 뭔가! 특혜를 베풀어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어쨌든 이만 마치겠네. 등록부서와 총무부서에 가서 장부를 쓰고 비행기 티켓과 업무 추진용 전도금을 수령하게! 그리고 오늘 주간회의는 어김없이 10시 30분에 개최되니 시간 맞춰 올라오고. 이상일세! ”

 

 

*    *    *

 

 

 

베르닌은 얼떨떨해져서 내려왔다. 총무부서와 등록부서에 가야 하나 싶었지만 30분 후 주간회의가 시작될 예정이라 아무래도 시간이 빡빡할 것 같았다. 그는 출장이라면 근교 도시 밖에 가본 적이 없었다. 가장 최근의 출장이란 작년 9월에 왕재수를 인계받으러 기차역에 다녀온 것이었다. 그 몇 차례의 출장도 모두 업무와 관련된 당일치기였다.

 

이번 일은 고지식한 그로서도 찜찜했다. 무엇보다도 발따예프가 끼어 있다는 점이 그랬다. 발따예프는 20년 넘게 근무한 철밥통으로 엄청난 수다쟁이였고 가능한 한 모든 일을 미루고 남에게 떠넘기는데 도통한 인물이었다. 베르닌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항상 자기가 할 일을 슬쩍 떠넘겼고 바빠서 정신없을 때도 툭하면 말을 걸어서 쓸데없는 수다를 떨었다. 그 수다의 90퍼센트는 모두가 ‘내가 말이야’, 혹은 ‘나는...’으로 시작했다. 동료들 대부분은 발따예프가 ‘나’로 시작되는 수다를 떨기 시작하면 조용히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를 피할 궁리를 했다. 그 정도의 짬밥이 안 되는 베르닌으로서는 매일같이 그 지겨운 자기 타령을 들어줘야 했다. 항상 바쁜 그로서는 심히 귀찮고 짜증나고 방해되는 일이었다.

 

 

그때 알렉산드라가 엄청나게 두꺼운 서류철들을 한 아름 껴안고 낑낑거리며 복도를 지나쳐가는 게 보여서 베르닌은 얼른 다가가 서류철 대부분을 들어 주었다.

 

 

“ 고마워, 다냐. 헉헉... ”

 

“ 아니, 이렇게 무거운 걸 어떻게 혼자서 다 나르시는 거예요? 다른 부서원들은요? ”

 

“ 알면서 그러니. 원래 서류철들은 서무가 나르는 거잖아. 어휴, 아침부터 부장이 갑자기 작년 서류들을 찾아서... 뭐가 필요한지 말도 안 해주고 무조건 다 가져오라는 거야. ”

 

“ 정말 그 부서 분들도 너무하시네요. 선배님은 엄청 자그마하시잖아요! 힘도 약하고 손목도 건드리면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란데 이 무거운 서류철들을 혼자서 다 들고 오게 시키다니! 이럴 땐 자존심 세우지 마시고 옆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셔야죠! ”

 

“ 나 도와달라고 했었어. 서류철 너무 많으니까 조금만 같이 옮겨주면 안 되냐고. 근데 다들 모른 척하잖아. 게다가 아나톨리 선배가 들으란 듯이 서류철 그까짓 거 어차피 종이라서 별로 무겁지도 않고 양이 많으면 여러 차례 나눠서 들고 오면 되는데 뭘 유난 떠느냐고 역시 이래서 여자는 안 된다고 떠드는 거야. 너는 이런 거 몰라, 다냐.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 듣느니 차라리 내 손목이 부러지는 게 나아. ”

 

“ 아나톨리 선배 나빠요. 전에 사무실 이동할 때 자기 짐도 전부 후배들 시켜 나르게 해 놓고. 여자라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이건 그냥 근력 문제잖아요. 조금만 힘 합치면 금방 할 수 있는 건데... ”

 

 

베르닌은 사무실까지 서류철들을 날라 주었다. 알렉산드라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더니 아직 남아 있다며 다시 문서고로 향했다. 베르닌도 따라갔다.

 

 

“ 너 할 일 많을 텐데 여기서 이래도 되니? 많이 안 남았으니까 내가 살살 옮길게. ”

 

“ 아니에요, 곧 주간회의 올라가야 하니까 다른 일 하기도 애매해요. 근데 선배님 혹시 우수 당원 연수 워크숍 가보셨어요?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에서 하는 거? ”

 

“ 어휴, 그거 말도 마. 나 신입 때 딱 그거 걸려서 얼마나 고생했다고. ”

 

“ 아, 선배님도 신참 때 가신 거예요? 그럼 제가 잘못 생각했던 거네요. 전 거긴 중견 직원만 가는 건줄 알았는데... 갑자기 저보고 내일 그 연수에 가라는 거예요. 근데 왜 고생하셨어요? ”

 

“ 앗, 너 거기 따라가는 거야? 분명 발따예프 선배 짓이구나! 아유 그 사람 정말 밉상이다. 진짜 재수 없게 됐네. 너 따까리 시키려고 그러는 거야. 그거 보통 나이 많은 아저씨들 보내주는 거거든. 연차 좀 오래되면 순서대로 포상처럼 돌아오는 거야. 근데 모양새는 어쨌든 출장이라서, 명령서도 써야 하고 보고서도 좀 빡세게 써야 돼. 워크숍 결과보고서를 50페이지 쯤 써야 하거든. 그리고 경비 관리부터 시작해서 할 게 많은데 나이 많은 선배들은 뺀질뺀질해서 그런 거 진짜 안 하려고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온갖 잡일 시켜먹을 후배를 하나 붙이는 거라고. 그나마 멤버가 괜찮으면 좀 나은데... 발따예프 선배 말고 또 누구 있어? ”

 

“ 어... 의회 홍보부장하고 검열국 쪽 또 무슨 부장이요. ”

 

“ 어우, 정말 망했네. 심지어 간부들이야? 그럼 진짜 손 하나 까딱 안 할 텐데. 발따예프 선배는 술도 많이 마시잖아. 너 진짜 힘들겠다. 그나마 나 때는 페름 쪽이라서 크게 돌아다닐 일은 없었는데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라니... 관광부터 시작해서 전부 네가 다 시켜줘야 할 텐데. ”

 

“ 어, 그래서 국장이 잘됐다 한 건가? 저 모스크바 대학 나왔잖아요. ”

 

“ 아 맞다, 너 모스크바에서 공부했지. 아, 다냐... 넌 왜 이렇게 매사에 운이 없니. 너 완전 따까리에 가이드에 비서 되는 거야. 다녀와서도 정산부터 시작해서 결과보고서 작성에 주간회의 때 발표까지 해야 돼. ”

 

“ 아아, 그런 거였군요. 전 또 국장이 제가 고생한다고 특별대우라도 해 준 줄 알았어요. ”

 

“ 누가, 우리 국장이? 다냐, 너 아직도 너무 순진해. 하여튼 네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 지도 잘 챙기고. 분명히 그 사람들 워크숍엔 출석 체크만 하고 온종일 관광하고 술만 퍼마실 게 뻔해. 너보고 가이드 하라 하고 술 사오라 하고 밤새 자기들 자랑 늘어놓으며 술 마시겠지. 넌 그나마 모스크바는 좀 아니까 낫겠다. 난 그때 페름에 처음 갔는데 아저씨들이 나보고 가이드 못한다고 진짜 구박하는 거야. 레닌그라드도 알아? ”

 

“ 아뇨. 레닌그라드는 박물관하고 궁전 밖에 안 가봤어요... 큰일이네. 레닌그라드에서 사흘이나 있어야 되거든요. ”

 

“ 아참, 너 걔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너 동거남. 꽃돌이. 걔 레닌그라드에서 왔잖아. 미리미리 괜찮은 데랑 아저씨들 데리고 갈만한 데 다 물어봐, 그래야 가서 너 고생 안 해. ”

 

“ 어... 걘 제 동거남이 아니거든요! ”

 

“ 다냐, 나한테는 숨기지 않아도 된단다. 난 이해해. ”

 

“ 진짜 아니에요, 리자도 그러더니 선배님도... 아아... ”

 

 

 

*    *    *

 

 

 

알렉산드라의 말이 옳았다. 온종일 베르닌은 출장 준비 때문에 미친 듯이 바빴다. 발따예프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해 놓은 게 없었다. 베르닌은 비행기 표를 수령하고 전도금을 신청하러 총무부에 갔지만 서류 첨부가 하나도 안 돼 있어서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출장명령서 결재가 나지 않은 상황에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출장명령서를 작성하려니 출장자들의 인적 증빙 자료가 필요했다. 그는 발따예프와 바라노프스키, 주브치크와 자신의 여권 사본과 재직 증명서류를 모두 떼어왔고 출장명령서를 작성했다. 당일 내로 결재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전표를 여러 장 끊고 도장을 여기저기에서 받은 후 간신히 비행기 표와 얼마 안 되는 전도금을 수령했다. 비행기 표는 총 12장이나 됐다. 가브릴로프-모스크바, 모스크바-레닌그라드, 레닌그라드-가브릴로프 편도 티켓이 각 4장씩이었다.

 

 

연수 프로그램 주최측에 전화를 해서 명단을 확인했더니 자기 이름이 빠져 있어서 그것을 해결하는 데 또 한참 걸렸다. 그나마 리자가 임시 등록에 필요한 서류들을 챙겨주지 않았다면 진땀을 뺐을 것이다. 그리고는 한숨 돌리고 있는데 어리숙한 후배가 걱정이 됐는지 알렉산드라가 와서 현지 숙소 예약 상황도 꼭 확인하라고 조언을 해주고 갔다. 알렉산드라가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 했다. 모스크바는 방이 두 개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과 여권번호만 추가로 불러주면 됐지만 레닌그라드는 주최측의 실수인지 호텔 측의 착오인지 방이 아예 없었다. 통사정을 했지만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온 팀과 8인용 방을 같이 쓰는 수밖에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이 사실을 얘기하자 발따예프는 길길이 날뛰었다. 의회와 검열국 간부까지 같이 가는데 감히 8인용 방이라니, 그것도 다른 도시에서 온 사람들과 방을 같이 쓰라니 될 말이냐, 자기들이 무슨 피오네르나 콤소몰도 아닌데 말도 안 된다, 당장 해결하라고 호통을 치고 엄포를 놨다. 베르닌은 꼬박 한 시간 동안 주최측과 통화를 했고 읍소 끝에 간신히 원래 호텔 인근의 다른 숙소에 방을 두 개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알고 보니 워크숍 첫날에는 각 팀별로 주제 발표를 10분씩 하게 되어 있었다. 말이 10분이지 베르닌으로서는 전혀 모르는 주제였다. 레닌과 스탈린,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경제 모델에 따른 도시별 공산당원 교육 정책을 요약 발표하라는 거였다. 내용상 의회나 검열국 쪽에서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바라노프스키와 주브치크에게 전화를 했다. 자료 준비가 되어 있느냐, 누가 발표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둘 다 똑같은 대답을 했다. 그런 건 원래 막내가 준비해서 발표하는 거라고 했다. 베르닌이 그럼 밑자료라도 달라고 했지만 물론 묵살당했다.

 

괴로워하며 베르닌은 교육국과 선동본부, 시립도서관에 전화를 했다. 자료를 가지러 갈 시간이 없어서 또다시 읍소를 하며 한 시간 동안 전화로 설명을 듣고 간신히 밑자료를 정리했다. 아무래도 비행기 안에서 발표 원고를 써야 할 것 같았다.

 

 

출장 준비도 모자라 자리를 비우는 4일 동안의 서무 업무도 미리 정리해야 했다. 정신없이 일하다 퇴근 시간도 지나고 어느덧 6시가 되었을 때 알렉산드라가 베르닌에게 그냥 집에 가라고 충고했다.

 

 

“ 어, 하지만... 아직 할 게 너무 많아요. ”

 

“ 그냥 가. 너 없는 동안 내가 급한 건 막아줄게. 가서 가방도 챙겨야 하고 모스크바 지도랑 레닌그라드 지도도 다시 봐야 할 거 아냐. 새벽 비행기잖아. 그리고 오늘 들어가면서 가게 들러서 간식 좀 챙겨. 아저씨들 비행기랑 시내 들어가는 버스 안에서 먹을 거 없으면 너 막 구박할 거야. ”

 

“ 고마워요, 선배님... ”

 

“ 부디 무사히 다녀오기를 빌게. ”

 

 

그는 책상을 정리하고 출장에 필요한 서류들을 모두 챙겼다. 발따예프는 이미 5시가 되자마자 퇴근한 후였다. 나가려다 관성적으로 극장에 전화를 해보았다. 온천에 다녀온 후 지난 일주일 내내 베르닌과 마찬가지로 왕재수도 굉장히 바빠서 얼굴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금요일에 출근할 때 딱 한 번 태워다 줬을 뿐이었다. 극장 수리가 끝났기 때문에 발레 공연들이 연속으로 올라갔고 신작도 준비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코즐로프의 집에서 먹고 자는 것 같았다. 그날은 월요일이라 극장 휴일이었기 때문에 바이올린 깡패의 침대에서 나뒹굴고 있을 게 뻔했지만 어쨌든 혹시나 해서 전화를 걸었다.

 

 

의외로 왕재수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 어, 너 오늘 출근했어? 극장 쉬는 날이잖아. ”

 

“ 할 게 많아서. ”

 

그럼 오늘 바이올린 아저씨한테 가서 자는 거지? 나 이제 퇴근하려는데. ”

 

“ 아니, 나 오늘 집에 갈 거야. 데리러 와. ”

 

그래서 베르닌은 차에 시동을 걸었고 강을 건너 극장으로 향했다.

 

 

 

*     *    *

 

 

 

왕재수는 로비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안색도 표정도 좋지 않았다. 베르닌을 보자 그나마 표정이 좀 누그러졌다. 제일 처음 한 말은 오늘 저녁이 뭐냐는 거였다.

 

 

“ 어 글쎄... 나 계속 야근해서 집에 아무 것도 없는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들어가다 사가지 뭐. 눈 녹아서 생선 트럭 들어왔으니까 대구라도 사볼까? ”

 

그럼 줄 서야 되잖아. 집에 가서 만들려면 한참 걸리고. 그냥 먹고 가자. ”

 

“ 너 아무 데서나 안 먹잖아... ”

 

“ 저쪽 박물관 뒤에 먹을 만한 데 찾았어. 너 좋아하는 살랸카도 있던데. ”

 

 

그래서 베르닌은 왕재수와 함께 근처의 조그만 식당에 갔다. 예술가로 보이는 사람들로 꽉 차서 자리가 없는 것 같았지만 점원은 왕재수를 보자 반색을 했고 순식간에 마법처럼 창가 쪽 자리를 내주었다. 베르닌은 살랸카와 쇠고기 롤을 시켰다. 왕재수는 스메타나 소스에 재운 닭가슴살 구이와 버섯 샐러드를 주문했다. 그리고는 크랜베리 주스와 우유를 추가하더니 베르닌에게 뭘 마실 거냐고 물었다.

 

 

“ 어... 나는 탄산수. 근데 너 웬일이야? 평소보다 많이 시키네. 주스에 우유까지. 보통은 그냥 차 마셨잖아. ”

 

“ 단백질과 비타민이 필요해. ”

 

“ 그건 당연한 거긴 한데... 왜 갑자기? ”

 

“ 근력이 떨어졌어. 애들 동작 잡아주는데 팔이 좀 후들거리더라고. 오후 되면 막 졸리고. ”

 

“ 그래, 너 여태 너무 조금 먹었어.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다. ”

 

 

음식이 나왔다. 까탈스러운 왕재수가 고른 식당답게 굉장히 맛있었다. 베르닌은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정신없이 살랸카를 흡입했다. 고기조각과 칼바사 햄, 절인 오이채 등 가득 들어 있는 건더기를 순식간에 건져먹고 뜨끈뜨끈한 국물을 쭉 들이마셨다.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마침 그때 쇠고기 롤이 나왔다. 저렴한 가격에 비해 양도 많았다. 감자 팬케이크 위에 조그만 롤이 열 개나 쌓여 있었다. 그는 롤 두 개를 포크와 나이프로 집어 왕재수의 접시에 얹어 주었다.

 

 

“ 야, 이것도 먹어. 단백질이야. ”

 

“ 내가 돼지냐. 이걸 어떻게 다 먹어. ”

 

“ 네가 시킨 건 닭가슴살이잖아. 기름기도 좀 먹어야지! 바이올린 아저씨가 좋아하는 몸매 아직 안 된 것 같은데! ”

 

 

왕재수는 베르닌을 째려보더니 쇠고기 롤을 포크로 푹 쑤셔서 한 입에 그대로 우겨넣었다. 그때 스메타나를 끼얹은 닭가슴살 요리가 나왔다. 쇠고기 롤 못지않게 양이 많았다. 볶은 야채도 잔뜩 곁들여져 있었다. 왕재수는 고기를 3분의 1쯤 잘라서 베르닌의 접시에 탁 내려놓고 야채도 절반쯤 퍼 주었다. 베르닌은 이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항의하려다 냄새가 너무 좋아서 일단 먹었다. 엄청나게 맛있었다. 전혀 퍽퍽하지 않고 부드럽고 촉촉했다.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 왕재수는 샐러드까지 다 먹고 우유를 마시고 크랜베리 주스도 전부 마셨다. 왕재수가 이제껏 그렇게 많이 먹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어쩐지 성취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섭섭하기도 했다. 그래서 식당을 나오면서 묻기까지 했다.

 

 

“ 너 그동안 내 요리 솜씨가 형편없어서 잘 안 먹었던 거야? 난 그것도 모르고 네가 원래 조금씩 먹는 줄 알았네. ”

 

“ 옛날에 춤 출 땐 많이 먹었어. 지금은 운동량이 그때보다 적잖아. 뭐 여기 음식이야 시골이라 무조건 기름 들이부으니 좀 느끼하긴 하지만. ”

 

 

차에 타면서 왕재수가 덧붙였다.

 

 

“ 그래도 네가 만드는 건 나쁘지 않아. ”

 

“ 정말? 너 그냥 그렇게 말하는 거지! 나 삐칠까봐. ”

 

“ 네가 삐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멍충이. 맛없었으면 내가 계속 집에서 저녁 먹었겠냐! ”

 

“ 어... 나 조금 감동할 것 같아. ”

 

“ 뭘 감동해. 맛있다고는 안 했어! 맛없지는 않다고 한 거지! ”

 

“ 그게 그거 아니야? ”

 

아니야! 맛있는 건 맛있는 거고! 맛없지는 않은 건 그럭저럭 먹을만하다는 뜻이야! ”

 

“ 어, 그래... 그럼 저 식당은 맛있는 거고 내가 해주는 밥은 그럭저럭인 거구나... ”

 

“ 저 식당이라고 뭐 특별하니! 그냥 비슷해! 많이 먹은 건 의사 선생님이 그러라고 해서야! ”

 

“ 어, 너 설마 의사 선생님한테 어떻게 하면 바이올린 아저씨가 원하는 몸매를 만들 수 있냐고 물어본 거야? 엉덩이 탱글탱글... ”

 

“ 바보 멍충이. ”

 

 

베르닌은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낌새가 좋지 않아서 슬며시 물어보았다.

 

 

“ 너 극장에서 무슨 일 있어? ”

 

“ 있지. 매일! 애들이 너무 못해서... ”

 

“ 그런 거 말고. ”

 

“ 없어. ”

 

“ 그럼 아픈 거야? 의사 선생님은 왜 찾아갔는데? ”

 

“ 그건 정기검진이라 간 거고. 나 원래 매달 검진 받잖아. 너네 KGB에 차트도 내고. ”

 

“ 그럼 왜 그렇게 심기가 안 좋은데? 역시 시골이라... ”

 

“ 그래. 시골은 정말 싫어. ”

 

 

잠시 후 베르닌은 본론을 꺼냈다.

 

 

“ 나 내일 시외 출장 가거든. 갑자기 고참들 따까리 하라고 끼워 넣어서 오늘 그거 준비하느라 죽는 줄 알았어. 하여튼 토요일까지는 없으니까 너 저녁 못 챙겨준단 말이야. 내일 극장에도 못 데려다 줄 거야. 새벽 6시에 출발해서 사람들 픽업해서 공항으로 가야 돼. 그러니까 바이올린 아저씨한테 데려다 달라고 그래. 그 집에서 자는 게 차라리 낫겠네. ”

 

“ 어, 출장? 어디 가는데? ”

 

“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 ”

 

“ 아, 좋겠다. ”

 

“ 좋은 거 아니야. 고참들 시중들고 별의별 허드렛일 다 해야 되거든. 아, 너 혹시 레닌그라드에서 꼭 가야 하는 곳이나 맛집 알아? 엄청 나 갈구는 고참들을 모셔야 해서... ”

 

“ 그런 아저씨들은 박물관이나 극장 같은 건 싫어할 거 아냐. ”

 

“ 응, 안 좋아할 거 같아... ”

 

 

왕재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베르닌에게 지도를 달라고 했다. 베르닌이 가방에서 꼬깃꼬깃한 레닌그라드 지도를 꺼내자 십년 전 지도라고 타박을 하더니 몇몇 군데에 동그라미를 치고 이름을 적어 주었다.

 

 

“ 여기는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선술집... 여기는 예쁜 여자들이 많이 오는 레스토랑. 음, 인류학박물관은 신기한 게 많아서 아저씨들도 싫어하지 않더라고. 그리고 여기는 운하 유람 보트 타는 데... 근데 지금은 추우니까 운하 얼어서 보트는 안 다니겠구나. 그리고 여기는... ”

 

 

한참 설명을 해준 후 왕재수는 한숨을 쉬며 창밖을 다시 바라보았다. 눈망울이 서글퍼 보여서 베르닌은 어쩐지 미안해졌고 괜히 얘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저... 너 거기 가족들 있지 않아? 내가 편지라도 전해줄까? ”

 

“ 촌스럽게 웬 편지. ”

 

“ 그래도 여기서는 못 보내잖아. 보내도 국장이 검열하고. ”

 

“ 됐어. 우리 엄마 밖에 없는데 뭐. 엄마랑은 여기 올 때 전화했어. ”

 

“ 어머니가 걱정하실 거 아냐. ”

 

“ 엄마한테 편지 쓰면 뭐... 아무 말도 못하잖아. 시골 너무 싫고요, 바퀴벌레랑 곱등이 나오고요 이런 말 쓰면 엄마가 슬퍼할 거고! 그렇다고 시골 너무 좋아요.. 라고 하면 거짓말 하는 거 뻔히 다 아니까 엄마가 또 슬퍼한다고. 그냥 안 쓰고 안 보내는 게 제일 나아. ”

 

“ 어... ”

 

“ 그러니까 됐어. ”

 

 

베르닌은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가만히 차를 몰았다. 이따금 그는 자신이 KGB 요원이 된 것을 후회하곤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였다.

 

 

 

*   *   *

 

 

 

아파트 앞에 도착해서 차를 세우다가 베르닌은 건물 현관 앞에서 서성대고 있는 로만 코즐로프를 발견했다.

 

 

“ 어, 저 깡패... 아니, 바이올린 아저씨. 너 보러 왔나보다. ”

 

“ 에이 참, 오지 말라니까! ”

 

 

왕재수가 짜증을 냈다.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베르닌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 너 가서 로만한테 집에 가라고 해. ”

 

“ 엥? 여기까지 너 만나러 왔는데 왜? 너네 싸웠어? ”

 

“ 아니. 근데 여기로는 오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너네 국장이 협박했다고 했잖아. 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말을 안 들어... ”

 

“ 하지만... ”

 

“ 빨리 가서 말해. 바깥 춥단 말이야. 계속 저기서 기다렸을 텐데. 로만 감기 걸려. ”

 

 

베르닌은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 코즐로프가 그를 발견하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왜 너만 오냐, 극장에 전화했더니 같이 나갔다고 했는데. ”

 

“ 저... 집에 가래요. ”

 

“ 뭐야?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귀염둥이 아기는 어디 있어!

 

“ 당신 집에 갈 때까지 그냥 차에 있겠대요. ”

 

대체 왜! 너네 둘이 혹시 정말!

 

 

바이올린 깡패가 폭주할 징조가 보여서 베르닌은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 아니에요! 그런 거 절대 아니라고요! 그게 아니고, 당신 감시받는다고... 괜히 밀고 당할까봐 그런대요. ”

 

“ 감시꾼은 너잖아! ”

 

“ 아니에요. 난 그런 거 보고 안 한단 말이에요! 내가 보고서에 썼으면 벌써 당신 잡혀갔게요! ”

 

“ 하긴... 어휴, 저 고집쟁이! 그럼 우리 집에 계속 있지 아침에도 부득부득 의심받는다고 나가더니... 가뜩이나 극장 애새끼들 가르치랴 있는 레퍼토리 뜯어고치랴 신작 준비하랴 계속 과로하고 아프면서 왜 말을 안 듣는 거야! 한참 아파서 입원했을 때도 못 오게 하더니, 저번에는 무슨 멍멍이를 주워 와서 집에 있어야 한다고 하고! 똥개 주인 찾아준 다음에는 또 감시당하니까 오면 안 된다고 하니... ”

 

“ 우리 국장이 전화해서 협박했대요. 주변 사람 감시해서 의심스러우면 체포한다고... ”

 

망할 놈의 KGB! 나 그런 거 상관 안 해! 더러운 개자식!

 

“ 어... 목소리 좀 낮추시죠... 누가 들으면... ”

 

시끄러워!

 

 

코즐로프는 차로 갔다. 문을 벌컥 열고 왕재수를 끌어냈다.

 

 

“ 어휴, 집에 가라고 했잖아. ”

 

안 가! 갈 거면 너 데려갈 거고, 안 그러면 나도 너네 집 올라갈 거야! ”

 

“ 오늘은 당신 집 못 가. 나 오늘 집에서 할 게 많아서 온 거야. 내일 지휘자랑 무대감독이랑 미팅하기로 했는데 책을 좀 봐야 한단 말이야... ”

 

“ 지휘자면 오케스트라 쪽이잖아! 나랑 같이 준비하면 되겠네! ”

 

“ 하지만 스페호프가... 앞잡이들이... ”

 

그깟 KGB 나부랭이들이 뭐가 무서워!

 

“ 당신 잡혀간단 말이야. ”

 

“ 잡혀가면 뭐! 나 감옥 전에도 가봤어! 하나도 안 무서워! ”

 

아니야! 감옥 무서워! 안 돼!

 

 

왕재수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코즐로프의 가슴을 홱 떠밀었다. 코즐로프는 원체 큰 탓에 심하게 밀려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휘청거렸고 귀염둥이 비둘기의 예상치 않은 폭력 행사에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 너 뭐하는 거야! 주먹질이라도 할 셈이야? ”

 

“ 가라니까 안 가고... ”

 

 

왕재수가 다시 떠밀었다. 이번에는 코즐로프가 힘을 주고 버티면서 도리어 두 손으로 마주 밀었다. 반동 때문에 왕재수가 뒤로 밀려나다가 바닥에 철퍽 주저앉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울었다.

 

 

“ 가라니까 왜 안 가. 엉엉, 당신 감옥 가는 거 싫어. 잡아가는 거 싫어. 나랑 같이 있는 거 들통 나면 감옥 보낸다 했단 말이야. 어엉... 나도 같이 있고 싶은데. 혼자 자는 거 싫어. 꼭 안겨서 자고 싶은데 그러면 잡아간댔어. 어흑... 나 때문에 감옥 가는 거 싫어. ”

 

 

코즐로프가 왕재수를 부둥켜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어르고 달랬다.

 

 

“ 괜찮아, 괜찮아. 우리 귀염둥이 비둘기 내 강아지가 나 잡혀갈까봐 무서워서 그랬구나. 나 안 잡혀가. 아무나 감옥 보내는 거 아니야. ”

 

“ 모스크바에서도 사람 패서 감옥 갔었잖아, 엉엉... ”

 

“ 그땐 그냥 유치장에 몇 주 정도... ”

 

“ 국장이 내 주변 사람 잡아 가둘 거라 했단 말이야. 윗사람들 무서워서 나 직접 건드리지 못하니까... ”

 

“ 나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 아니거든! 그 족제비 같은 스페호프 따위 내가 한 손으로 잡아 비틀 수 있단 말이야! 하나도 겁 안 나! ”

 

“ 수갑 채우고 주사 놓는데 무슨 힘으로 잡아 비틀어! ”

 

 

코즐로프는 귀염둥이 아기를 껴안고 둥기둥기 달래보려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먹히지 않았다. 왕재수는 좀처럼 진정하지 않고 계속 울다가 코즐로프한테 빨리 가라고 삿대질을 하고 발로 차기까지 했다. 마침내 베르닌이 왕재수를 뒤에서 안고 끌어당겨서 코즐로프로부터 떼어놓았다.

 

 

“ 야, 좀 진정해. 사람들 관심 없다가도 네가 이렇게 소리 지르고 우는 거 보면 뭔가 싶어서 더 보고 일러바치겠다. ”

 

 

왕재수가 화들짝 놀라며 울음을 그쳤다. 훌쩍이면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그럼 어떻게 해. 어엉... 로만이 안 간다잖아. ”

 

“ 그러게. 당신도 고집만 부릴 게 아니네요. 우리 국장이 좀 사이코라서요. 한 번 이거다 싶으면 집착이 장난 아니거든요. 당신 이러는 거 눈치 채면 분명히 감옥 보낼 거예요. 그게 행정의 기본이라서. ”

 

보내라지! 그 자식 보고 밤길 조심하라 해라. 뒤통수를 부숴버리든가 등짝에 칼 꽂든가 해줄 테니!

 

“ 난 공무원에 보안요원이거든요! 내 앞에서 그런 말 하면 체포할 수도 있다고요! ”

 

“ 그럼 너부터... ”

 

“ 유치하게 이러지 좀 말아요. 아 피곤해. 나 내일 일찍 출장도 가야 되는데 집에도 못 들어가고 이게 뭐야. 이렇게 해요! 너! 넌 지금 너네 집으로 가! 그리고 당신! 당신은 우리 집으로 가요!

 

“ 엥, 그게 무슨 소리야! ”

 

“ 당신 알리바이가 뭔지도 모릅니까? 어차피 같은 건물이고 쟤랑 나는 위 아래층이니까 당신은 일단 우리 집으로 들어갔다가 2-30분 있다 쟤한테 가라고요! 그럼 행여 아파트 들어가는 거 목격돼도 나한테 왔다고 할 수 있잖아요! 나도 보고서 그렇게 쓰면 되고! ”

 

“ 하지만... 내가 왜 너한테 가냐. 우린 아무런 친분 관계가 없는데. 오히려 더 수상하지. ”

 

“ 어... 음. 당신 모스크바 음악원 나왔잖아요! 그쪽 오케스트라에도 있었고! 나도, 나도 모스크바 대학교 나왔고. 난 내일 모스크바 출장도 가야 하니 당신한테 그 동네 지리 좀 물어보려는 거죠! ”

 

“ 너 모스크바 출장 가냐? 그럼 우리 아기 밥은 누가 해주고 출퇴근은 누가 시켜 주냐! ”

 

“ 아휴, 그건 당신이 좀 해요! ”

 

“ 내가 해주는 밥보다 네가 해주는 게 더 맛있다잖아! 너한테 가서 보르쉬랑 생선찜 레시피 좀 받아 오랬는데. ”

 

“ 어, 정말요? 맛없지 않은 거지 맛있진 않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그 보르쉬 레시피는요... ”

 

다들 뭐하는 거야! 바보 멍충이!

 

 

왕재수가 왈칵 소리를 지르더니 베르닌의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 레시피는 무슨 레시피! 깡통에 든 거 데워주는 거잖아! ”

 

“ 아니야! 그러니까, 보통 땐 그렇지만 전에 너 폐렴 걸렸을 때, 그러니까 벨라 때문에 강에 빠졌을 때, 그때는 진짜 고기 사와서 육수도 내고 비트 썰어서 양배추랑 토마토 페이스트랑... ”

 

뭣이? 강에 빠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귀염둥이가 강에 빠져? 그래서 폐렴까지? 너 그냥 감기라고 했었잖아! ”

 

아, 시끄러워! 머리 아파! 이제 됐어! 나 집에 갈 거야! 당신, 당신은 얘네 집으로 가!

 

“ 어, 그, 그래. 그럼 30분 있다 너네 집으로 가면 되지? ”

 

“ 몰라! ”

 

 

왕재수는 푸르르 화를 내더니 혼자서 휙 들어가 버렸다. 코즐로프는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베르닌을 보고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 어쨌든 고맙다. KGB 앞잡이라고 욕했는데 도와줘서. ”

 

“ 도와주는 거 아니에요. 죄 없는 사람 잡혀가는 거 나도 싫어요. ”

 

“ 쟤가 너 부려먹고 틱틱대도 너무 미워하지 마라. 쟤 요즘 극장에서 힘들거든. 금요일엔 의사도 왔다 갔어. 과로한다고 야단치고. ”

 

“ 그랬구나... ”

 

“ 우리 아기가 성격이 좀 그렇다. 방금도 고맙다고도 안 하고. 네가 이해해라. 워낙 오냐오냐 떠받들려 산 애라 그래. ”

 

“ 알거든요! 쟨 좋아도 절대 좋다 안 해요! 방금도, 맛있으면서 맛없는 건 아니라고 하고... 어휴! 맛있다 해주면 어디 덧나나!

 

“ 맛있다던데. 네가 해주는 게 레닌그라드에서 엄마가 해주던 것만큼 맛있는데 국장이 맨날 잡일 시켜서 야근하느라 밥 얻어먹기 힘들다고 툴툴대던데. ”

 

“ 엥... 설마... ”

 

 

베르닌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궁금했지만 왕재수에게 물어본들 절대 대답을 안 해 줄 게 뻔했으므로 포기했다.

 

 

“ 그건 그렇고 너 정말 모스크바 출장 가냐? 이번엔 또 누구 뒤치다꺼리를 하려고 모스크바에 간담. ”

 

“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아저씨들 데리고 갈만한 데 없나요? ”

 

“ 너도 거기서 공부했다며! 뭘 나한테 물어! ”

 

“ 그거야 난 젊은이, 당신은 아저씨니까... 당신이 더 잘 알 것 같아서. ”

 

“ 나 모스크바에 있을 땐 너 또래였거든! ”

 

“ 어 그런가... 하여튼 얘기 좀 해줘요. 일단 올라가죠. 추운데. ”

 

 

 

*   *   *

 

 

 

 

코즐로프는 모스크바에서 돌아온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베르닌보다 더 도시 구석구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투덜거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후배를 부려먹는 아저씨들의 특성에 대해서도 꿰고 있었다. 베르닌은 혹시 이 인간도 오케스트라에서 후배들을 그렇게 갈구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지만 스페호프를 죽어라고 미워하고 툭하면 KGB와 공산당을 욕하는 걸 보면 그렇게 권위적인 성격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30분 정도 모스크바 뒷골목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 후 코즐로프는 왕재수에게 가보겠다며 일어섰다. 베르닌은 조금 걱정이 되어서 코즐로프에게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는 이 건물에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알리바이를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왕재수 돌보기 매뉴얼을 주워섬겼다.

 

 

“ 쟨 꼭 당신 집에서 재워야 돼요. 혼자 있으면 저녁도 안 먹어요. 내가 안 데려다 주면 여기로 오지도 않고 극장에서 잔대요. 그리고 밥은... 음, 아까 이콘 박물관 뒤에 있는 식당 갔는데 거기 맛있었어요. 쟤도 잘 먹더라고요. 어설프게 뭐 만들어주려고 하지 말고 그냥 거기 가서 같이 저녁 먹어요.

그리고 쟤 추운데도 멋 부린다고 아르마나인지 에르미인지 뭔지 하는 종잇장 같은 코트들만 입거든요. 모자도 별로 보온도 안 되고 모양만 좋은 것들만 득실득실해요. 근데 일기예보에서 이번 주에 한파 온다고 했으니까 아침에 꼭 패딩 입혀서 내보내요. 저 녀석은 패딩 입히면 아주 죽는 줄 안다니까요. 그럴 때는 바퀴벌레나 곱등이를 풀겠다고 협박하면 잘 먹혀요.

그리고 할 수 없이 집에서 해먹어야 할 때는 이것저것 고민하지 말고 생선 한 마리 사서 쪄주거나 닭가슴살 구워서 레몬이나 뿌려주면 잘 먹어요. 근데 기름을 쓰면 또 죽는 소리를 하니까 반드시 찌거나 오븐에 구워야 돼요. 근데 당신 부엌에 오븐 있어요? 난 없었는데 쟤가 자기 거 갖다 주더라고요. 오븐 없으면 그냥 찌는 게 나아요.

그리고 저번에 말했지만 까먹었을까봐... 쟤 밀크 초콜릿 안 먹어요, 무가당 초콜릿이어야 해요. 제일 안전한 건 사과파이... ”

 

 

코즐로프가 혀를 찼다.

 

 

“ 불쌍한 녀석. 우리 아기 잘 챙겨주는 건 좋은데 너 좀 불쌍하구나. ”

 

“ 뭐가요! 나 안 불쌍한데! ”

 

“ 창창한 나이에 애인을 품에 끼고 놀면서 그런 거 챙겨줘도 모자랄 판에... 연애나 제대로 하냐? 너 누구랑 자 본 거 얼마나 됐냐. ”

 

“ 뭐라고요? 왜 그런 걸 물어요! 그건 실례... ”

 

“ 에휴, 말 안 해도 뻔하지. 불쌍한 녀석... 우리 오케스트라에 괜찮은 여자애들 몇 명 있는데 소개라도 해주랴? 취향 말해봐라. ”

 

“ 어... 그럴 필요 없어요. ”

 

아, 그럼 사내애가 좋냐? 그쪽은 좀 구하기 힘든데. 우리 아기가 워낙 드문 애라서 그 정도 급은 당연히 없고... 우리 동네는 시골이라 괜찮으면서도 이쪽 취향인 사내애 구하는 건 계집애보다 백배쯤 어렵... ”

 

으악, 됐거든요! 첫째, 난 여자 좋아하고요! 둘째, 너무 바빠서 여자 사귈 시간이 정말 없어요! ”

 

“ 쯧쯧. 그건 다 핑계지. 우리 아기가 레닌그라드 있을 때 얼마나 바빴는지 넌 상상도 못할 거다. 그래도 문어발처럼 사내들을 거느리고... ”

 

“ 으윽... 별로 알고 싶지 않네요! 근데 당신은 툭하면 의심하고 질투하면서 걔가 레닌그라드에서 문어발 연애했던 건 괜찮아요? ”

 

“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지금 나만 보면 되는 거야! ”

 

 

베르닌은 코즐로프의 논리가 신기했지만 토를 달지는 않았다. 대신 아까부터 계속 마음에 걸리던 것을 물었다.

 

 

“ 금요일, 의사는 왜 왔던 거예요? 극장까지... ”

 

“ 남아서 일하다가 술 먹고 뻗어서. ”

 

“ 엥, 술이라뇨! 걔 술 입에 안 대는데. 마시면 곧장... ”

 

“ 걔 신작 때문에 요즘 자정 넘어서까지 남아 있어. 목마르다고 컵에 든 거 주스인 줄 알고 마셨는데 그게 누가 따라놓고 잊은 샴페인이었던 거지. 김빠진 거긴 한데, 한 컵 다 마시고 완전히 맛이 가서 드러눕더라니까. 그나마 내가 남아 있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그 추운 마룻바닥에 밤새 누워 있었을 거 아냐! 그러니 내가 여기까지 안 오게 됐냐. 언제 무슨 일 있을지 모르는데... ”

 

“ 그래서 당신이 의사 선생님 부른 거예요? ”

 

“ 전화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물어봤는데 노인네가 한밤중에 극장까지 와주더라고. 귀염둥이 깨워주고 돌봐준 것까진 좋았는데 애한테 얼마나 야단을 치는지! ”

 

“ 그럼 다른 데 아픈 건 없는 거예요? ”

 

“ 몰라. 환자의 사생활이라고 날 못 들어오게 하더라고. 야단치는 소리밖에 못 들었어. 예순도 한참 넘은 노인네한테 우리 불타는 사이니까 내가 보호자라고 말할 수도 없잖아. 나중에 보니까 ‘과로하지 말 것, 식사량 50% 늘릴 것, 일주일에 3~4일만 출근할 것’ 하고 아예 애 책상 앞에 잉크로 적어놓고 갔더라고! ”

 

 

베르닌은 점점 걱정이 되었다.

 

 

“ 근데 오늘도 극장 노는 날인데 출근하고... 같은 극장에 있으니까 당신이 좀 잘 챙겨요. ”

 

“ 극장에서는 우리 친한 척 안 해. 공연 끝나고도 안 가고 있으면 그땐 같이 있지만. 하여튼 내일부터는 그 세 가지 내가 감시할 테니 넌 걱정하지 말고 출장이나 잘 다녀와. ”

 

“ 알았어요. ”

 

 

 

코즐로프가 왕재수의 집으로 간 후 베르닌은 가방을 꾸렸다. 막상 자신의 짐은 별로 없는데 다음날 모스크바 워크숍에서 발표해야 하는 ‘레닌과 스탈린,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경제 모델에 따른 도시별 공산당원 교육 정책’ 때문에 챙겨온 자료들에 아저씨들 가이드를 위해 챙긴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지도, 관광책자, 알렉산드라의 충고대로 극장 가는 길에 식료품 가게에서 잔뜩 산 자질구레한 과자와 안주거리 때문에 가방은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왕재수와 코즐로프의 사랑싸움을 말리고 또 코즐로프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스트레스가 되살아났다. 특히 발따예프와 한 방을 쓰게 될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는 두어 시간 동안 가이드북을 읽고 코즐로프와 왕재수가 알려준 장소들을 표시했다. 그리고 공산당원 교육 정책에 대한 자료를 좀 읽다가 걷잡을 수 없이 졸려서 결국 잠자리에 들었다. 까무룩 잠이 들면서 그는 발따예프도 바라노프스키도 주브치크도 없이 자기 혼자 출장을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숨을 쉬었다.

 

 

 

 

 

 

FIN

- 2015. 3. 14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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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편에서 출장을 준비하느라 베르닌이 겪는 일들은 상당 부분 내가 예전에 겪었던 일들에서 따온 것이다. 상전들을 모시고 간 출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16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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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등장하는 발따예프란 인물은 노어의 ‘발따찌’란 동사에서 이름을 따왔다. 예전에 같이 노어 전공한 친구(쥬인)가 아이디어를 준 이름이다. 발따찌는 노어로 ‘수다 떨다’란 뜻의 동사이다 :) 서무 시리즈의 사무실 인물들이 가끔 그렇듯 이 사람도 예전에 나와 같이 일했던 실존인물들 두어 명을 조합했다. 누군지는 물론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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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수가 베르닌을 데려가는 작은 식당은 지난 2월 내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카페 두셰브나야 꾸흐냐를 조금 모델로 하고 있다. 특히 거기서 왕재수가 먹는 닭가슴살 요리 :)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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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단추청년 베르닌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출장기는 16편에서. 그건 다음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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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언제나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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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