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무의 슬픔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series : 서무의 슬픔2015. 4. 23. 19:55
이제 목요일이다. 이틀만 버티면 주말이다. 매우 힘든 일주일을 보내고 있다만. 월요일이 돌아오듯 서무 시리즈도 돌아와서 이제 18편이다. 쓰고 보니 많이도 썼네.
서무 시리즈도 재미로 쓰고는 있지만 회가 거듭되다보니 시리즈의 당연한 특성상 인물도 늘어나고 관계도 확장된다. 에피소드별로 내용이나 스타일, 무게, 문체, 장르 등등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특히 18편은 이전 에피소드들과는 성격이나 양태가 조금보다는 더 다른 편이다.
어쨌든 18편~ 많은 직장인들에게는 괴로움의 상징인 회식! 심지어 각자 회비를 걷는다... 당일 통보 회식!!! 총괄서무인 단추청년 베르닌은 물론 회비도 걷어야 하는 입장이다. 합동회식을 하기로 했는데 그나마 옆부서가 알렉산드라가 근무하는 대외교류부라서 다행인 건지 아닌건지...
(제목과 에피소드 도입부에 나오는 선술집 이름인 '메드베지'는 러시아어로 '곰'이란 뜻이다)
(사샤, 사셴카는 모두 알렉산드라의 애칭이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베르닌이 서무로 근무하는 감시분석부는 옆부서인 대외교류부와 합동회식을 하게 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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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8
서무의 슬픔
-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그 날도 베르닌은 자질구레한 일들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후 4시가 되었을 때 감시분석부장이 책상을 탁탁 두들겼다.
“ 자, 주목! 오늘은 모두 퇴근 후 메드베지로 집합. 부서 간 친목 도모를 위해 오늘 대외교류부와 공동 회식을 하기로 했네! 회비는 각 5루블. 5시 정각에 다 정리하고 나올 것. 개인 사정으로 빠지는 것은 용납되지 않네! 서무는 지금 회비를 걷을 것. 대외교류부 쪽은 그쪽 서무가 걷을 거고, 다닐 자네가 총괄이니까 전체 비용을 관리하게. 이상! ”
베르닌은 술자리를 딱히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부서 회식은 예외였다. 선배들은 계속 폭탄주를 권했고 ‘내가 젊었을 때는‘으로 시작되는 비슷비슷한 레퍼토리가 끝도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미 얼마 전 발따예프 등 세 명을 모시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출장을 가서 평생 마실 술을 다 먹고 온갖 고생을 했기 때문에 더욱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전 부서가 다 참석하는데 심지어 막내인 그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그는 극장에 전화를 했다. 왕재수에게 회식 때문에 오늘은 데리러 못 가고 저녁도 못 챙겨준다고 했다. 수화기 너머로 실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늘 블린 구워준다더니... ”
“ 내일 해줄게. ”
“ 알았어. ”
“ 야, 너 내가 안 챙겨준다고 저녁 굶으면 바퀴벌레 곱등이를... ”
왕재수는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 베르닌은 조금 걱정이 되어서 코즐로프에게 전화를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바이올린 깡패야 왕재수처럼 사무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오케스트라 연습실에 있을 테니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회비를 걷으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어서 왕재수에 대해서는 곧 잊어버렸다.
대외교류부 쪽 회비를 수령하기 위해 옆방으로 가보니 알렉산드라가 분주하게 책상 사이를 돌아다니며 돈을 걷고 있었다. 베르닌은 곧 되겠거니 하고 기다렸는데 마지막 책상에 앉아 있는 만년과장 아나톨리 타라카노프가 알렉산드라에게 짜증을 냈다.
“ 지금 돈 없다고 했잖아. 누가 매일 지갑을 가득 채우고 다니나? 그런 건 싱글 여직원이나 그런 거지,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허덕이는 남자가 월말에 무슨 돈이 있나! ”
“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그러면 어떻게 하나요. 전부 5루블씩 내라는데. ”
“ 일단 네가 내! 서무잖아! 나중에 줄 테니까! ”
“ 지난번 회식 때도 5루블 내드렸는데 갚지 않으셨잖아요. ”
“ 몰아서 주면 되잖아! 너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허참, 그깟 5루블에 선배를 아주 도둑놈 취급을 하는군! 이래서 여자애들이란. ”
“ 제가 여자란 것하고 회비하고 무슨 상관인가요? ”
“ 남자애들은 쪼잔하지 않거든! 네 선배님! 하고 제깍제깍 회비를 내준단 말이야! 남자들 사이에선 돈보다 의리거든! 어련히 알아서 줄까 하고 달라는 말도 안 해! ”
알렉산드라는 타라카노프를 빤히 노려보았다. 그녀가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자 타라카노프는 버럭 화를 냈다.
“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거야! 좀 빌려달라고 했잖아! ”
“ 저도 없어요, 5루블. 제 거 내고 나니 돈이 없거든요. ”
“ 혼자 사는 여자가 쓸 데가 어디 있다고 지갑에 10루블도 없어! 난 모르니까 다른 애들한테 빌려서 메꾸든지. ”
알렉산드라는 화가 잔뜩 난 것 같았지만 다행히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세묜 모브린이 주머니를 뒤지더니 5루블을 꺼내 주었다.
“ 자, 사셴카. 내가 빌려줄게.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천천히 갚으시죠. ”
“ 그렇지! 이래야지! 동기인데 이렇게 차이가 나서야! 역시 여자들이란. ”
알렉산드라는 돈을 봉투에 쑤셔 넣더니 고개를 홱 돌리고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복도로 따라 나갔다. 회비도 받아야 했지만 알렉산드라가 걱정이 되어서였다. 알렉산드라는 탕비실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아 버렸다. 베르닌은 바깥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알렉산드라가 나왔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베르닌을 보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아, 다냐. 맞아, 우리 쪽 회비 줘야 되는데. 너 보고 한꺼번에 관리하랬지. 그냥 내가 할까? 너 안 그래도 바쁘잖아. ”
“ 아니에요, 선배님. 저한테 주세요. 저희 부서 사람들이 더 많잖아요. ”
알렉산드라가 봉투를 건네주었다. 한숨을 폭 쉬었다.
“ 정말 싫다. 그것도 퇴근 한 시간 전에 갑자기 회식이라니... 오늘 원래 약속도 있었는데... ”
“ 어, 그럼 선배님 먼저 가시면 안 되나요? 선약이 있는 거잖아요. ”
“ 개인 사정으로 빠지는 거 용납 안 된다고 부장이 난리였어. ”
“ 하긴, 우리도 그랬어요. 그럼 얼굴만 가서 비추고 먼저 가시면... ”
“ 나 지난번 회식 때도 집안일 때문에 먼저 나갔다가 엄청 욕먹었거든. 오늘까지 그러면 정말 찍힐 거야. 안 그래도 우리 부서는 여직원 나 하나뿐이라서 걸핏하면 여자라서 그렇다고 욕먹거든. ”
“ 아, 그 부서는 그런 게 또 있군요. 이해가 안 되네. 여자인 거랑 무슨 상관이지? 아까 아나톨리 선배도 말도 안 되는 트집 잡더니. 우리 부서는 다 남자들뿐이라 그런 분위기인 줄 몰랐어요. 등록부서랑 현장부서엔 그래도 여직원들 많아서 좀 나을 텐데. 선배님, 그래도 1차만 하고 가실 수 있게 문가에 앉으세요. ”
“ 고마워, 다냐. 슬슬 정리하고 갈 준비하자. 제발 오늘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사람들 이상한 짓 좀 하지 말고. 난 회식이 제일 싫어. 국장 설교보다 더 싫어. ”
“ 어휴, 전 국장 설교가 세상에서 제일 싫은데... 회식은 그에 비하면 양반... ”
알렉산드라는 희미하게 웃더니 자기 부서로 돌아갔다. 베르닌도 회비 봉투와 함께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메드베지는 볼쇼이 대로와 배나무 거리 교차로 근처에 있는 선술집으로 KGB와 의회 직원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이름 그대로 홀 벽에는 곰 가죽이 하나 걸려 있었고 깔개도 있었다. 아무래도 KGB 쪽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보니 일반인 손님들은 꺼리는 곳이었다. 스페호프도 좋아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내심 국장이 회식에 끼겠다고 나타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모든 부서원들이 똑같은 마음이었는지, 스페호프가 시 의회 의장과 저녁 약속이 생겨서 다른 식당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대외교류부장과 감시분석부장은 학창 시절부터 동기 사이인데다 성격도 잘 맞아서 툭하면 의기투합하는 사이였다. 스페호프에 대해서야 KGB 내의 모든 간부들 및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뿌리 깊은 반감을 품고 있었지만 물론 국장의 카리스마에 대들만큼 배포가 크지는 않았다. 이제껏 블라지미르 스페호프에게 대들었던 유일한 인물은 바냐 투레츠키 뿐이었지만 그는 이미 퇴사해서 전설의 서무로 남았고 베르닌이 보기에 그 전설은 영영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두 부장은 오른팔로 여기는 부하 직원들을 하나씩 옆에 앉혀 놓고 모두에게 건배를 제의한 후 신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다른 직원들도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 파도타기를 하기 시작했다. 운 나쁘게도 베르닌은 출장을 다녀온 후 이상하게 친한 척하는 발따예프와 특별감사 때 그를 아주 힘들게 했던 두블린스키 사이에 앉아 있었다. 그는 원래 알렉산드라와 함께 문가에 앉을 생각이었다. 자신의 키와 체구로 가려주면 그녀가 눈에 띄지 않고 중간에 살짝 나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들어가자마자 발따예프에게 걸려들어서 질질 끌려갔고 문가에 앉으려던 알렉산드라도 대외교류부 직원들이 그래도 여자가 있어야 분위기가 산다고 떠들어대는 통에 중간 자리로 붙들려갔다.
베르닌은 한참동안 선배들 사이에 끼어서 술을 마시고 술을 따라주고 뻔한 레퍼토리를 듣고 때때로 술을 더 시키고 안주를 시키러 가는 등 정신이 없었다. 발따예프는 레닌그라드 출장 때 갔었던 마지막 선술집, 즉 목걸이와 그곳의 근사한 감자튀김에 대해 뻥을 10배는 섞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베르닌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일어나 혹시 술이 모자라지 않나 살핀다는 핑계로 다른 테이블 쪽을 돌았다.
그러다가 알렉산드라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나톨리 타라카노프가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었는데 같은 부서 직원들도 끼어서 웃고 있었기 때문에 얼핏 보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빈 술병을 치우러 가까이 가서 대화를 듣자 그렇게 기분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술이 들어가 얼굴이 불그스름해진 타라카노프가 알렉산드라를 집적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우리 사셴카는 언제 시집을 가려고 그러는지. 여자 나이 서른이면 볼 장 다 본 건데 참 걱정이네. 어리고 예쁜 여자애들이 득실대는데 어쩌려고 그러나. 좋은 값 쳐줄 때 갔어야 되는데. ”
“ 맞아, 사샤도 빨리 결혼해야 할 텐데. 남자들이 눈이 삐었나, 이만하면 동안이고 귀여운데 왜 남자가 안 생길까. 우리 회사쯤이면 직장 좋지, 안정적이지 괜찮은데. ”
그러자 타라카노프가 혀를 찼다.
“ 귀여우면 뭘 해, 하고 다니는 걸 좀 보게. 일단 얘는 입고 다니는 걸 고쳐야 돼. 맨날 스웨터에 바지에, 아니면 치마도 너무 통 넓은 거. 다리도 다 가리는 두꺼운 스타킹에, 그 투박한 단화는 또 뭔지. 가뜩이나 키도 작으니 신발도 뾰족구두를 신어야 조금이라도 늘씬해 보이고 다리도 예뻐 보일 판에 여학생도 아니고... 화장도 잘 안 하고. 그러니 남자들이 못 알아보지! ”
“ 제가 어떻게 하고 다니든 제 마음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
알렉산드라가 싸늘하게 말했다. 무척 화가 난 표정이었다. 하지만 타라카노프는 개의치 않았다. 즐겁게 말을 이었다.
“ 내가 말이야, 저번에 건강 검진하러 갔을 때 보니까 사셴카가 대기실에서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진짜 볼만하더라고. 밤에 같이 있으면 남자들이 은근히 좋아할 타입인데 그 좋은 걸 다 가리고 있으니 원. 애가 작아서 눈에 안 띄어서 그런 거지 좀 꾸며놓고 노출 좀 시켜놓으면 글래머라니까. ”
다른 남자 직원들이 맞장구를 쳤다.
“ 그래그래, 맞아! 알렉산드라가 은근히 몸매가 좋아. 지난번에 우리 행사 때문에 원피스를 입고 왔는데 다리도 예쁘고 볼륨도 있고 아주 눈이 즐겁더라고! 너 평소에도 그렇게 좀 입고 다녀. 그래야 딴 부서 어린 여자애들한테도 안 꿀리지. ”
“ 그러니까, 옷 좀 신경 쓰고 성격만 좀 고치라 이거지. 선배들한테 틱틱대고 까칠하게 굴고. 애교도 없고. 계집애가 좀 눈웃음도 치고 목소리도 상냥하게 내고 애교 좀 부리면 어련히 남자들이 잘해주려고! 우리한테도 좀 귀엽게 굴면 얼마나 우리가 잘 도와주겠어! ”
알렉산드라가 낮게 쏘아붙였다.
“ 저는 일하러 직장에 오는 거지 선배님들에게 애교 부리러 오는 게 아니에요. 제 일만 잘하면 되는 거죠! ”
“ 꼭 인기 없고 애인 없는 여자들이 저런다니까. 이봐, 사셴카. 난 정말 네가 여동생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귀여워서 그런다니까. 다 널 위해서 하는 충고니까 내 말 들어. 그래야 노처녀 신세에서도 탈출하고 선배들에게 귀염도 받지. 옷도 이런 거 입고 다니지 말고. 볼륨이 이렇게 빵빵한데 왜 가리고 다니냐는 거지. ”
타라카노프가 알렉산드라를 툭툭 쳤다. 미묘하게 가슴 언저리를 건드렸기 때문에 알렉산드라가 확 째려보았지만 아까 돈을 빌려주었던 모브린이 재빨리 술병을 들었다.
“ 어, 다들 술잔이 비었네요! 채워 드릴 테니 다 같이 건배하시죠. 사셴카가 알면 알수록 진짜 귀여운 앤 건 맞아요. 저희 동기라서 잘 알거든요. 우리 사셴카를 위해 건배! ”
모브린 덕에 분위기가 좀 나아지는가 싶었지만 건배를 한 후 타라카노프가 알렉산드라의 어깨를 다시 토닥거리며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 너 내 말 그냥 흘려듣지 마, 다 너 좋으라고 해주는 말이니까. 계집애가 그렇게 뻣뻣하게 굴면 승진도 못해. 봐봐, 너 동기들 다 승급했는데 너만 아직도 서무나 하고 있고 말야. 여자가 좀 나긋나긋한 맛도 있고 귀염 부릴 줄도 알아야지. 회식도 툭하면 빠지고 말이지. 사회생활 그렇게 하면 쓰겠어? 선배들하고 술도 가끔 마셔주고. 이거 봐, 한 잔 마시니까 얼굴도 빨개지고 훨씬 귀여워지잖아. 이래야 남자들이 잘해주지. 예쁜 척 좀 하고 다니란 말이야. ”
알렉산드라는 이를 악물고 꾹 참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타라카노프가 어깨를 껴안고 뺨을 비비며 한 손으로 허벅지를 움켜쥐었을 때는 참지 못했다. 베르닌이 이건 너무 심하다 싶어서 그 느물거리는 선배를 떼어놓으려고 다가갔을 때 알렉산드라가 두 손으로 타라카노프를 홱 떠밀었다.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 그만 좀 하라고요! 지저분하게 왜 이러는 거예요! 선배면 다야? 왜 성희롱이에요! ”
“ 아니, 얘가 왜 이래! 취했나, 감히 선배한테 소리 지르고 밀치고! 술자리에서 여자가 이 정도는 해줘야 술맛이 나지! 조직생활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너 남자랑 안 놀아봤어? 기껏 귀여워서 좀 툭툭 친 거 가지고! 이런 거 가지고 난리를 치면 애인이랑 잠자리는 어떻게 하나? ”
타라카노프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버럭 고함을 치더니 알렉산드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뺨에 얼굴을 마주 대며 등을 쓰다듬고 몸을 비벼댔다. 베르닌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뒤에서 타라카노프를 붙잡고 확 잡아당겼다.
“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왜 이러시나요. 많이 취하셨네요! ”
“ 뭐야, 너는! 에이, 재미없게! ”
타라카노프가 성을 내며 베르닌을 밀어내려고 했다. 물론 베르닌은 놓아주지 않았다. 타라카노프를 꽉 붙들고 있는데 알렉산드라가 벌떡 일어나더니 있는 힘껏 그의 뺨을 후려쳤다.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쳤다.
“ 당신 고발할 거야! 이 더러운 인간! 참을 만큼 참았어! 한두 번도 아니고 당신 같은 개자식은 쓴 맛을 봐야 돼! ”
“ 뭐야? 이 조그만 계집애가 대체 뭐라는 거야! 술자리 망쳐놓고 뭐? 개자식? 지금 선배한테 뭐라 했어! ”
타라카노프가 분통을 터뜨리며 솟구쳐 일어나려는 것을 베르닌이 두 팔로 꽉 끌어안고 막는 동안 동료 직원들과 대외교류부장이 주위로 다가왔다. 부장이 알렉산드라를 꾸짖었다.
“ 아니, 이게 웬 소란이야! 기분 좋게 회식하는 자리에서 왜 선배에게 막말을 하고 손찌검까지 하나! 하여튼 여자애가 성질이 더러워서... ”
알렉산드라는 부장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의자를 콰당탕 넘어뜨리고 테이블에 부딪치면서 홀을 나가버렸다. 타라카노프가 욕설을 퍼부었지만 돌아보지도 않았다. 알렉산드라가 나간 후 직원들이 삼삼오오 타라카노프 곁으로 다가왔다. 모브린이 베르닌에게 그만 놔주라면서 어깨를 툭 쳤다.
“ 안돼요, 아나톨리 표도로비치가 많이 취했어요. 알렉산드라 선배를 따라 나가서 또 싸움을 걸면 어떡해요. ”
“ 싸움은 무슨. 둘 다 그냥 취해서 그런 건데. 그러려니 하고 넘겨. 자고 나면 다 잊어버릴 거. 술자리가 그렇지 뭐. 빨리 놔드려. 덩치도 커가지고 그렇게 꽉 잡고 있으면 선배님 어깨에 멍들어. ”
“ 하지만... 알렉산드라 선배는 취하지 않았어요. 이건 아나톨리 표도로비치가 잘못... ”
“ 웬 과민반응이야.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에 잘못이 어디 있담. 자, 분위기가 좀 꿀꿀해졌네요. 잔이나 채우시죠. 아직 술도 많이 남았는데. ”
모브린이 술병을 들자 다들 그래그래 하며 자리로 돌아갔고 잔을 들었다. 타라카노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씩씩거리며 재수 없는 계집애니 못돼먹은 년이니 하고 욕을 하고 있었지만 부장이 ‘아나톨리 자네도 진정하고 한 잔 하지’ 라고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잔을 채워달라며 내밀었다. 발따예프가 베르닌을 불렀다.
“ 이봐, 다냐! 자넨 왜 남의 부서 일에 간섭하고 그러나! 빨리 자리로 돌아오란 말이야! 우리 안주 다 떨어졌으니까 오면서 칼바사 좀 더 시키고! ”
베르닌은 주방 쪽으로 가서 안주를 더 시켰다. 그리고는 슬쩍 밖으로 나가 보았다. 혹시나 알렉산드라가 있나 술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베르닌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고 걱정이 되었다. 알렉산드라는 항상 그에게 잘해주는 선배였다. 입사 초기에 아무 것도 몰라서 헤매고 툭하면 스페호프에게 불려가 행정의 기본에 대해 설교를 듣고 부서장에게 깨질 때도 알게 모르게 그의 업무를 도와주고 서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조곤조곤 알려줘서 항상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운이 나빠서 6년째 서무를 맡고 있는데다 남자들만 있는 대외교류부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것 같긴 했지만 타라카노프가 저런 식으로 못살게 군다는 건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베르닌은 버스 정류장으로 가볼까 했지만 그때 담배를 피우러 나왔던 두블린스키가 그를 발견하고는 등짝을 철썩 때렸다.
“ 야! 서무가 여기 나와 있으면 어떡하냐! 이제 1차 파장하는 분위기니까 가서 돈부터 내고! 2차는 알료누슈카 이바누슈카로 가기로 했으니까 빨랑 가서 자리 잡아놔! ”
그래서 베르닌은 결국 돈을 치른 후 2차를 갔고 거기서 폭탄주 몇 잔을 연속으로 마시고 또 무슨 게임에서 져서 특제 폭탄주를 한 사발 원 샷한 후 화장실에 가서 두 번 토하고 비틀거리며 자정이 넘어 귀가했다.
* * *
다음날 베르닌은 알람 소리에 끙끙거리며 깨어났다. 숙취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다. 술도 깨지 않았고 어지러워서 도저히 차를 가지고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왕재수의 집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답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텅 비어 있고 침실에도 잠잔 흔적이 없는 걸 보니 간밤에는 코즐로프의 아파트에서 잔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극장까지 못 태워다 준다는 얘기에 왕재수가 짜증을 냈을 테니까.
베르닌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붙잡고 간신히 출근했다. 심지어 검열국에 들러 스페호프가 시킨 사적인 자료 심부름까지 하고 가야 했다. 게다가 거기서 마주친 주브치크가 지난번 출장 얘기를 늘어놓으며 붙잡는 바람에 시간이 더 걸렸다. 그는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사무실에 도착했다.
막 자리에 와서 앉았는데 사무실이 시끌시끌했다. 부장이 자리를 비우긴 했지만 평소보다 훨씬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간간이 알렉산드라와 타라카노프의 이름이 들려왔기 때문에 결국 그는 옆자리의 콜로긴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 아, 너 늦게 와서 모르는구나. 대외교류부 지금 발칵 뒤집혔거든. 어제 회식 때 너 있었지? ”
“ 예, 제가 회비도 걷고 계산도 했잖아요. 2차 때 너무 마셔서 지금도 힘들어요. ”
“ 알렉산드라 그 계집애가 아주 보통내기가 아니더라고. 그 맹랑한 게 감사실에 아나톨리를 성희롱으로 찔렀어. 아예 진정서도 내고 인민재판 회부까지 요청했더라고.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 가지고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을 하니 허참 앞으로 회식이나 하겠나. 여직원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
베르닌은 대외교류부로 가보았다. 역시 시끌시끌했다. 알렉산드라는 보이지 않았다. 타라카노프는 부장과 면담 중이라고 했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모브린에게 물었다.
“ 저, 알렉산드라 선배는 어디 있나요? ”
“ 몰라. 등사실에 갔나. ”
“ 어떻게 되는 건가요? 감사실... 인민재판... ”
“ 재판은 무슨 재판이야. 그런 거 가지고 인민재판까지 가면 우리 KGB 체면이 뭐가 되라고. 사셴카가 어제 좀 예민해서 발끈했던 건데... 잘 달래면 풀어질 거야. 자네도 모른 척하고 있어. ”
그때 대외교류부장이 나왔다. 모브린에게 손짓을 하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 걔 어디 갔어? ”
“ 모르겠습니다. 20분 전쯤 서류 가지고 나갔는데. 등사하러 간 것 같네요. ”
“ 감사실에 또 가 있는 거 아냐? 자네가 점심이라도 먹으면서 얘기해서 취하시켜. 그래도 자네 동기잖아. 직원들 사기 띄워주려고 없는 돈에 회식도 한 건데 계집애가 웬 소란인지... ”
“ 너무 걱정 마시죠, 말씀대로 제가 잘 얘기해보겠습니다. 사샤가 어린애도 아니고 조직 생활 한두 해 한 것도 아닌데 얘기하면 알아듣겠죠. 오후에 부장님께 가보라고 하겠습니다. ”
“ 젠장, 이래서 여직원은 받는 게 아니야. 감시분석부처럼 남자들만 있어야 조용한데. 계집애가 항상 매사에 모나게 굴더니만. 골치 아파 죽겠네. ”
베르닌은 복도로 나갔다. 등사실로 가보았다. 비어 있었다. 탕비실에도 가보았지만 알렉산드라는 없었다. 건물 전체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감사실에 있나 싶어 슬며시 그 앞으로 가보았지만 문도 열려 있고 감사부장과 직원들은 일찍 점심을 먹으러 갔는지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너무 걱정이 되어서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 서무들의 안식처인 배추밭 쪽으로 가니 알렉산드라가 넓적한 돌멩이 위에 걸터앉아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검정고양이는 사료를 먹다가 베르닌을 보고는 초록색 눈을 가늘게 치켜뜨고 천천히 다가왔다. 베르닌은 호주머니를 뒤졌지만 줄 게 없었다.
“ 어, 미안. 미셴카. 오늘은 없는데.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 못 챙겼어. ”
“ 냐아옹... ”
고양이는 기대한 적도 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는 사뿐사뿐 걸어서 배추밭 너머로 사라졌다. 그는 머뭇거리며 알렉산드라의 곁으로 다가갔다. 알렉산드라는 얼굴이 창백했고 뺨이 쏙 들어가 있었다. 눈도 퉁퉁 부어 있었다. 한숨도 못 잔 것처럼 보였다.
“ 저, 선배님. ”
“ 안녕, 다냐. ”
“ 괜찮으세요? 어젠... ”
“ 괜찮아야지 어쩌겠어. ”
“ 얘기 들었어요. 감사실... ”
“ 감사부장이 나한테 쓸데없이 일 키우지 말래. 별 거 아닌 걸로 들쑤셔서 괜히 회사 소문만 안 좋게 나고 중견직원 앞길 막는다고. ”
“ 쓸데없이 일을 키우다니요? 어제 다들 봤는데. 아나톨리 표도로비치가 백번 잘못한 거잖아요. 가만히 있는 선배님을 집적대고 계속 나쁜 말도 하고. 그게 어떻게 선배님 탓인가요. ”
“ 그냥 술자리에서 남자들 취해서 하는 말에 예민하게 군다고, 나보고 그 사람한테 욕하고 손찌검까지 하지 않았냐면서 내 잘못도 크니까 그냥 넘어가라는 거야. ”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감사부장이 그런 말을 했다고요? ”
“ 감사부장. 우리 부장. 우리 부서 사람들 전부. ”
“ 말도 안 돼... ”
“ 증거도 없다고... ”
“ 증거가 없다니요? 거기 있었던 사람들이 몇 명인데. 선배님 부서랑 우리 부서 사람들이 다 봤잖아요. ”
“ 다들 모른 척할 거라서... ”
“ 저도 봤는데요. 처음부터 듣진 못했어도 아나톨리 표도로비치가 옷 얘기할 때부터 들었어요. 성희롱 발언하고 손도 댔잖아요. 선배님, 제가 증인 서드릴게요. ”
“ 고마워, 다냐. ”
알렉산드라는 갑자기 감정이 북받친 듯 흑 하더니 울기 시작했다. 조그만 어깨를 떨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엉엉 울었다. 베르닌은 당황했다. 어쩔 줄 몰랐다. 왕재수가 울어도 당황스러운 판에 여자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감이 안 잡혔다. 쭈뼛거리며 서 있다가 주머니에서 구겨진 손수건을 꺼내 알렉산드라에게 내밀었다.
“ 어... 저... 선배님... 저... ”
알렉산드라가 손수건을 받아서 눈과 코에 댔다.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려 했지만 자꾸 눈물이 나는 듯 계속 흑흑 흐느껴 울었다. 너무 서럽게 울어서 베르닌은 절로 속이 상했고 타라카노프의 멱살을 쥐고 끌어내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한참 울다가 알렉산드라는 간신히 진정했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는데 눈물콧물이 너무 많이 나와서 수건을 두 번이나 꾹꾹 짜야 했다.
“ 미안해, 다냐. 윽... 흑... 미안. 이러면 안 되는데. ”
“ 아니에요, 선배님. 속상할 땐 울어야 된댔어요. 괜찮아요. ”
“ 회사에서 울면 얕보여서 안 되는데... 안 그래도 맨날 여자라서 하찮게 보이는데. 엉엉... ”
알렉산드라는 서러움이 솟구치는지 다시 몸을 떨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그녀가 너무 안 돼 보여서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어제 타라카노프의 행동을 생각하니 오해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꾹 참았다.
“ 선배님, 안 그래요. 하찮게 안 보여요. 선배님이 일도 얼마나 잘하고 저한테도 얼마나 많이 가르쳐주셨는데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
“ 넌 착하니까 그렇지. 윗사람들은 안 그래. 선배들, 동료들도 마찬가지야. 알잖아, 우리 회사 군대문화에 남자 위주인 거. 국장부터... 여자 간부는 하나도 없고 공채도 여직원은 거의 없어. 이 사람들에게 여직원은 커피나 타고 등사나 하고 도장만 찍어주는 존재일 뿐이야. 난 공채로 들어왔는데, 우리 기수에서 성적도 제일 좋았는데 다른 남자애들에겐 처음부터 주요 업무 맡기고 나한테는 서무 하라는 거야. 그때도 왜 그러는지 물었더니 원래 서무는 여자가 하는 거라고 했어. 그러더니 작년에 남자 후배가 들어왔는데도 서무는 여자 업무라면서 그대로 6년째... 툭하면 차 끓이고 커피 타오라고 시키고... 내 동기들 세묜까지 다섯 명이나 되는데 걔들은 벌써 승급하고... 이해할 수가 없어서 부장에게 면담까지 했는데 내 업무가 서무라서 평가 점수를 잘 줄 수가 없다는 거야. 그러면 다른 업무를 맡게 해달라고 했더니 그것도 안 된대. 여자라서. ”
“ 어... 그래서 6년째 서무였단 말이에요? 전 선배님이 막내라서 그런 건 줄 알았어요, 후배가 안 들어와서. ”
“ 후배가 있어. 다른 지부에서 왔는데 3년차라 후배거든. 근데 남자라서 곧장 주무를 맡더라고. ”
“ 그랬구나... 너무한데요. ”
“ 그리고 부장들은 내가 예민하게 군다고 하지만 타라카노프는 어제만 그랬던 게 아니야. 6년 동안 내내 그랬어. 신입 직원 환영회할 때부터 옆에서 계속 술 권하고 러브 샷 하자고 하고 술 먹여달라고 하고... 그땐 나도 조직 생활도 처음이고 너무 당황해서 가만히 있었거든. 회식 때마다 항상 옆자리 앉아서 집적대고... 등사실이나 우편보관함 앞에서 마주치면 손으로 이렇게 벽을 짚고 못 빠져나가게 하고서 바짝 들이대고... 건드리고... 더러운 말도 얼마나 많이 했는데. 다른 남자 선배들도 그런 적 많아. 툭하면 여자가 이래야지 저래야지 하면서... 지나가면서 훑어보고 집적대고... 술자리 가면 옆에서 술 따라달라고 하고. 회식만 하면 타라카노프가 화장실 갈 때마다 따라와서 취한 척하면서 기대고 팔 두르고... 내가 작으니까 만만해보여서 더 그런 거야. ”
“ 뭐라고요? 어제 그게 처음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
“ 그러니까 이제 더는 못 참아. 부장들이 뭐라고 하든... 진정서는 취소 안 할 거고, 그 더러운 인간 인민재판에 회부해서 벌 받게 할 거야. ”
“ 선배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필요한 거 다 말씀해 주세요. 어제 제가 목격한 것만으로도 엄연히 성희롱에 해당돼요. 저 법학과 나왔잖아요. 일단 서류부터 작성할게요. ”
“ 고마워, 다냐. 일단 감사실 쪽에서 먼저 내부 절차를 밟아야 돼. 필요하면 얘기할게. 정말 고마워. 아무도 내 편 안 들어줬는데 너 밖에 없구나. ”
알렉산드라가 또 울먹거렸기 때문에 베르닌은 가슴이 아팠다. 정의감이 용솟음쳤다. 기필코 그녀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알렉산드라가 너무 초췌해 보였기 때문에 점심이라도 같이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다냐. 나 지금 입맛이 없어. 샌드위치 싸왔으니까 있다가 배고프면 먹을게. 너 얼른 가서 점심 먹어.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하던 대로 바퀴벌레 곱등이 협박을 써볼까 했지만 여자한테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그녀를 남겨두고 구내식당으로 갔다. 식당에서도 다들 그 얘기를 하려나 싶었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회식에 가지 않았던 부서들에서는 모르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잠자코 비계와 힘줄이 섞여 있는 커틀릿과 건더기가 두어 개 떠 있는 양배추 수프를 배식 받아서 먹기 시작했다. 커틀릿은 구내식당에서는 특식에 가까웠으므로 평소 같았으면 신나 하며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겠지만 어쩐지 입맛이 없었다. 숙취 때문인가 싶었다. 따뜻한 수프를 후루룩 마시자 속은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대충 점심을 먹은 후 그는 극장에 전화를 해 보았다. 왕재수 대신 비서인 류드밀라가 받았다.
“ 미샤는 단원들이랑 점심 먹으러 갔어요. ”
“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아침은 먹었나... 혹시 아세요? ”
“ 안 먹었어요. 아침에 제가 출근해서 보니까 감독실에서 자고 있더라고요. 피곤해 보여서 안 깨웠는데 11시에 부스스 일어나더니 저한테 화냈어요. 애들 연습시켜야 되는데 늦잠 자게 놔뒀다고. ”
“ 어... 어제 극장에서 잤단 말이에요? ”
“ 네. 요즘 바빠서 가끔 극장에서 주무세요. 그래서 제가 시설팀에 얘기해서 밤에 감독실 쪽만 난방 돌려 달라고 했어요. 좀 걱정이긴 하네요. 계속 저러면 몸이 남아나지 않겠어요. ”
“ 오늘 공연 있어요? 몇 시에 끝나요? ”
“ 있어요, 잠자는 미녀. 3막짜리니까 10시 반쯤 끝나겠네요. ”
전화를 끊고 나서 베르닌은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분명히 의사가 과로하지 말라고 했는데 매일 출근도 모자라 극장에서 자다니! 코즐로프 쪽을 들들 볶아볼까 고민하다가 점심시간이 다 끝나서 다시 일을 하러 갔다. 하지만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는 옛날에 공부했던 기억을 되살려 책상 아래 쌓아두었던 법전과 각종 판례집, 인민재판 사례집을 들춰보았고 전날 메드베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하나하나 정리했다. 타라카노프와 주변 사람들의 언행도 생각나는 대로 모두 기록했다. 진술의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주변 정황도 간략하게 묘사했고 대화도 시간 순서대로 기록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그는 대외교류부에 가보았다. 알렉산드라는 캐비닛들을 돌면서 서류철 작업 중이었다. 조그만 손을 놀려가며 두꺼운 서류뭉치들에 구멍을 뚫고 표지를 달고 노끈을 끼우고 있었다. 전부 다른 사람들이 담당하는 사업에 대한 서류들이었지만 모두 알렉산드라를 못 본 체 하고 있었다. 타라카노프는 자리에 버티고 앉아 손톱을 깎으면서 계속 입에 담을 수 없는 비속어를 지껄이고 있었는데,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지만 누가 들어도 알렉산드라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베르닌은 알렉산드라의 곁으로 갔고 서류철 끼우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자기가 정리한 자료들을 건네주었다.
“ 선배님, 저... 이거... 제가 정리해봤어요. 감사실에서 증거 자료 얘기하면 이거 제출하세요. 그리고 저 정말 증언해줄 수 있으니까 위에서 증인 요구하면 제 이름 얘기하세요. ”
“ 다냐... 고마워. 근데 너 이래도 되니. 괜히 너 휘말리게 하기 싫어. ”
“ 휘말리는 거 아니에요. 사실을 말하는 것뿐인데 뭐가 휘말리는 거예요. 힘을 내세요. ”
“ 고마워... ”
베르닌은 서류철 작업을 좀 더 도와주고 싶었지만 대외교류부 사람들이 계속 자기들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알렉산드라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는 야근을 한 후 10시 반에 맞춰서 극장 앞으로 갔다. 마침 커튼콜을 마치고 무용수들에게 한바탕 꾸지람을 늘어놓은 후 나오고 있는 왕재수를 복도에서 붙들었다.
“ 야! 너 어제 왜 극장에서 잤어! ”
“ 오늘 공연 때문에. ”
“ 이거 맨날 올리는 공연이잖아, 신작도 아닌데 왜! ”
“ 네가 어제 안 왔잖아. ”
“ 그렇다고 극장에서 자냐! 너 정말 죽을래? 앞으로 여기서 자면 고양이, 쥐, 바퀴벌레, 곱등이, 뱀 껍질 다 풀어놓을 거야! ”
“ 이 악마... 어젠 나 혼자 안 있었어. 로만이랑 있었어. ”
“ 그럼 그 집 가서 자야지 왜 여기서 자! 추운데! ”
“ 안 추워. 로만이랑 꼭 껴안고 있으면 얼마나 뜨끈뜨끈한데. 그리고 신작에 쓸 음악 때문에 둘이 할 얘기도 많았어. ”
“ 못살아... 하여튼 집에 가자! ”
“ 오늘은 로만한테 가서 잘 거야. ”
“ 어 그래? 정말이지? 여기서 자면 안 돼! 바이올린 아저씨한테 확인한다! ”
마침 그때 코즐로프가 다가왔다. 아파트에 데려가서 잘 거라고 확인을 해주었다. 베르닌은 괜시리 짜증이 나서 코즐로프에게도 화를 냈다.
“ 의사 선생님이 말하고 간 거 당신이 잘 챙긴다더니! 앞으로 이 자식 한번만 더 극장에서 자게 놔두면 당신 책임이에요! ”
“ 어휴, 이 망할 놈의 스파이 나부랭이. 알았으니까 빨랑 집에나 가! 네가 난리 안 쳐도 내가 어련히 알아서 챙길까! ”
“ 안 챙겼잖아요! 아무리 난방해 줘도 극장은 집이 아닌데... 소파도 불편하고... 그리고 당신 어쩌자고 감독실에서 쟤랑 놀아날 생각을 해요! 들키면 어쩌려고! 도청 장치 있는 거 알잖아요. 내가 담당자니 망정이지... ”
“ 야, 넌 우리가 같이 있으면 맨날 그 짓만 하는 줄 아냐? 우리 어젠 신작 얘기하느라 밤 샜어! 추우니까 그냥 꼭 안고 누워서 얘기했을 뿐이야! 넌 참... 얜 진짜 천잰데 네 녀석은 예술이랑은 담 쌓은 녀석이니 그런 건 모르고 맨날 놀아나는 생각만 하니... ”
“ 으윽, 누가 그런 생각을 해요! 그런 말은 이 녀석이 하니까 그러는 거지. 하여튼 알았어요. 너 내일은 어떻게 할 거야? 데리러 와 말아? ”
“ 데리러 와. 내일은 로만이 동기들 모임 있댔어. 내일 블린도 구워줘. ”
“ 블린을 나한테 맡겨놨냐! ”
“ 네가 어제 안 해줬잖아. 술 마시러 간다고... ”
“ 알았어. 극장에 남지 말고 지금 빨리 가! ”
그래서 왕재수는 코즐로프의 차를 타고 갔고 베르닌은 혼자서 집으로 돌아왔다. 알렉산드라 생각에 무거운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 * *
다음날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감사실에서 그를 호출했다. 들어갔더니 감사부장과 사내 고충처리 담당자 이그노리로프, 대외교류부장이 앉아 있었다. 감사부장이 그에게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 자네가 알렉산드라 크롤리코바의 증인을 자청했나? ”
“ 어, 그 성희롱 건이라면, 예. ”
“ 이 자료도 자네가 정리한 건가? ”
감사부장이 두툼한 종이뭉치를 홱 던졌다. 베르닌은 종이들을 넘겨보았다. 앞은 알렉산드라가 직접 작성한 서류였다. 진정서 양식에 맞춰서 기록되어 있었다. 지난 6년간 타라카노프가 그녀에게 지속적으로 가해온 폭언과 성희롱 발언, 근무지와 술자리에서 해온 추행에 대해서도 길게 적혀 있었다. 내용을 훑어보기만 해도 화가 났다.
“ 예, 뒤의 절반쯤은요. 수요일 밤에 메드베지에서 있었던 일을 시간 순서대로 기록했습니다. 뒤에 첨부한 것은 관련 법규와 판례들입니다. 물론 잘 아시겠지만... ”
“ 자네 혼자만 목격자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나? ”
“ 주장이 아니라 사실을 기술한 건데요. ”
“ 허참, 답답하기는... ”
감사부장이 나직하게 욕을 했다.
“ 자네 지금 뭐하자는 건가. 같은 남자끼리 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도 이해 못 하나? 얘기 들어보니까 그냥 가벼운 농담 좀 하고 취해서 가볍게 스친 정도였던데 알렉산드라가 노처녀 히스테리인지 아니면 생리라도 하고 있었는지 민감하게 반응해서 이렇게 된 거 아닌가. ”
“ 제가 거기 쓴 내용을 읽어 보셨을 텐데요. 가벼운 농담이 아니라 성희롱 발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취해서 가볍게 스친 게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인 추행이었고요. 알렉산드라 선배가 싫다는 의사를 밝혔는데도 얼굴을 비비고 껴안고 몸을 만졌다고요. 다른 분들은 아나톨리 표도로비치와 같은 부서라서 불편하니까 모른 척하고 있겠죠. 당장 부장님께서도 그 자리 계셨잖아요. 알렉산드라 선배의 얘기나 제 기록에 잘못된 게 어디 있나요? ”
베르닌은 대외교류부장 쪽을 보며 물었다. 부장은 발끈했다.
“ 뭣이? 아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애송이 주제에 왜 남의 부서 일에 이래라 저래라야! 너 예전부터 그 계집애랑 친하게 지낸 거 모르는 줄 알아? 둘이 무슨 그렇고 그런 사이라도 되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들이 꼭 조직 분위기를 흐린다니까! 아나톨리가 뭘 얼마나 집적댔다고.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정말 별 거 아니었어! 농담 조금 한 것 가지고. 어디서 건방지게... ”
베르닌은 기가 막혔다. 부장이라는 인간이 부하 직원을 대놓고 차별하는 것도 모자라 엄연한 가해자를 감싸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고충처리 담당자인 이그노리로프가 슬슬 달래듯 말했다.
“ 다닐, 자네가 아직 사회 경험이 별로 없어서 그러는 거야. 원래 회사에서는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일어나는 법이야. 지금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면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아나톨리가 몇 년째 승진 못하고 있는 거 알잖아. 3월에 승진 심사 있는데 이번엔 딱 아나톨리 차례란 말이야. 이 일이 커지면 승진은커녕 서류에도 줄 그어져서 앞으로도 힘들어져. 알렉산드라처럼 싱글에 젊은 여자애야 죽었다 깨나도 그런 거 이해 못한단 말이지. 처자식 딸린 40대 가장이 승진도 미끄러지고 주변에서 손가락질 받으면서 어떻게 버티란 말인가. ”
“ 처자식 딸린 40대 가장이면 애초부터 후배 여직원에게 부적절한 짓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 그러니까 지금 내가 얘기하잖아! 술자리였고 취해 있었다고. 알렉산드라 걔가 원래 좀 까칠하고 신경질적인 거 다 알고. ”
“ 아니에요, 알렉산드라 선배는 신경질적이지 않아요. 성실하고 상냥해요. 후배들에게도 얼마나 잘 해줬는데요. 그리고 선배님은 인사부서 소속에 직원 고충처리 담당자잖아요. 그러면 공정하게 사안을 판단해야지 왜 무조건 아나톨리 표도로비치의 편만 드시는 건가요? ”
“ 아니, 이 친구가 정말 건방지기 짝이 없군! 애초부터 알렉산드라 걔가 행실을 똑바로 하고 다녔으면 왜 그런 일이 있었겠나! 아나톨리에게 물어보니 걔가 자기 옆에 와서 앉고 술도 따라주고 애교도 부리고 하니까 자기도 술김에 조금 실수한 것 같다고 하던데!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나? 계집애가 끼를 부렸으니까 그런 거지! ”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옆에서 다 봤는데요! 절대 그렇지 않았어요. 알렉산드라가 옆에 가서 앉은 게 아니라 그쪽 부서 선배들이 억지로 끌어다 앉혔어요. 술도 따르라고 강요하고요. 알렉산드라 선배는 피해자인데 어째서 다들 선배에게 잘못이 있는 것처럼 몰아가나요? ”
감사부장이 헛기침을 했다.
“ 그래서, 자네 지금 여기 적은 게 전부 사실이라고 주장하겠다 이건가? ”
“ 주장이 아니라 사실을 기술한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 자네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국장님이 매일같이 책상물림에 답답한 녀석이라고 하던 이유가 있었어. 왜 이렇게 상황 파악을 못하나. 이게 그냥 알렉산드라와 아나톨리 두 사람의 문제로 끝날 줄 아나? 이 문제가 불거지면 그 자리에 있었던 부서장들도 곤란해져.
그뿐인가, 가뜩이나 요즘 모스크바 본부에서 연방 지부들에 대한 감사가 강화되고 있는데 여기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는 얘기가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나. 자네 지난달에 특별감사 받아봐서 알잖아. 그보다 더 심하게 탈탈 털 거란 말이야. 몇 명 옷 벗어야 될지도 몰라. 그냥 잘 무마하고 화해하고 넘어가면 될 일을 왜 크게 만든단 말인가. 요즘 우리 가브릴로프도 수도 쪽에서 못된 물이 들어온 애들이 많아서 가뜩이나 당과 KGB를 스탈린주의의 온상이 어쩌고 하며 공격하고 선동하는 일이 잦은데 말도 안 되는 성희롱 소문까지 퍼져보게. 회사 이름에 먹칠할 셈인가.
알렉산드라 걔도 그렇지. 이렇게 되면 누가 걜 데리고 일하려고 하겠나! 언제 또 히스테리 부리며 선배에게 누명 씌울지 모르는데. 자네라고 괜찮을 거 같나? 20년 된 선배 하나 매장시키는데 발 벗고 나선 건방진 막내라고 낙인찍히고... 자넨 알렉산드라와는 또 다르잖나. 학벌도 더 좋고 군필자에 요즘 그 반동분자 녀석 감시하는 중요 업무까지 맡아서 앞으로 국장이 키워주려고 하는 와중에 왜 이렇게 판을 뒤집으려고 하냔 말이야. 국장조차도 아직 진정서를 정식으로 수리하지 않았어, 당사자끼리 잘 화해시키라는 특명을 내렸단 말이야. 그런데 자네가 이렇게 눈치 없이 끼어들다니. 일단 국장이 이걸 수리하게 되면 정식 기록에 남게 되고 타라카노프를 인민재판에 세워야 한단 말이네. 회사와 당의 명예에도 크나큰... ”
“ 부장님, 회사와 당의 명예만 중요하고 알렉산드라 선배의 명예는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요? ”
“ 아니, 이 녀석이 그래도 말귀를 못 알아듣고... 에이, 답답해. 알았네! 일단 나가보게! 허참, 아무리 고지식하다 해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니까. 괜히 끗발도 없는 여직원 편들어주다 자네 앞길 막힐 거 생각도 해야지. 답답한 녀석 같으니... ”
베르닌은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며 감사실을 나왔다. 그런데 복도에서 세묜 모브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 자네 나 좀 봐. ”
“ 어, 웬일이신가요, 선배님. ”
“ 나랑 담배 한 대 필까? ”
“ 전 담배 안 피우는데요. ”
“ 하여튼, 잠깐 바람이라도 쐬자고. ”
베르닌은 내키지 않았지만 모브린을 따라 나갔다. 모브린은 건물 밖으로 나가서 배나무 아래 벤치에 앉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훅 내뿜었다. 그리고는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 자네 이제 3년차지? ”
“ 어, 예... 햇수로는. 들어온 지는 2년 좀 넘었고요. ”
“ 응, 그럼 아직 원칙주의가 남아 있을 때니까 이해해. 아직 20대고. 근데 이번 일 말이야. 증인을 자청했다고 들었는데 사실 자네가 나서지 않는 게 사셴카를 위해서도 훨씬 낫거든. 자네를 위해서도 그렇고. ”
“ 그건 어째서죠? ”
“ 사셴카가 내 동기라서 잘 아는데, 걘 좀 결벽증이거든. 그러니까 상사한테 잘 보이지도 못하고, 선배들에게도 틱틱거리는 편이야. 가뜩이나 우리 부서에선 유일한 여직원이라 나머지 부서원들과 비교가 안 될 수가 없는 상황이야. 신체 능력도 떨어지고 출장 같은 거 갈 때 방도 같이 못 쓰니까 여비도 더 들고. 단합대회 같은 거 갈 때도 1차만 하고 자꾸 빠지려고 해서 부장도 별로 안 좋아해. 근데 여기서 이렇게까지 문제를 일으키면 걘 정말 앞길 완전히 막힌단 말이야. 알지? 우리 동기 중에 걔만 승급 못한 거. 이번에 아나톨리 선배만 승진 심사 대상인 거 아니야. 사셴카도 마찬가지라고. 근데 이 난리를 쳐놨으니 당연히 승급은 안 될 거고... 앞으로도 안 될 거라고. 우린 공무원이잖아, 최소 20년은 다녀야 하는데 한순간의 화를 못 참아서 왜 긴 앞날을 망치냐고. ”
“ 아니에요, 한순간의 화가 아니었어요. 입사하고 지금까지 6년 동안 괴롭혔다고 했어요. ”
“ 자넨 여자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나? 아나톨리 선배 입장에선 생각 안 해? 그 선배는 원래 후배들에게 허물없이 대하는 타입이야.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라고. 취하면 좀 풀어지는 사람이라 그렇지, 솔직히 러시아 남자치고 술 먹고 목석같은 사람이 어디 있나. ”
“ 선배님은 알렉산드라와 동기인데 왜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편을 드시는 건가요? ”
“ 동기니까 그렇지! 이 바보야, 사셴카를 위해서 그러는 거라니까! ”
“ 아니에요, 알렉산드라 선배를 위한다면 도와주고 진실을 밝혀줘야죠. 동기가 이러고 있는 거 알면 알렉산드라 선배는 더 속상하겠네요. 이럴 거면 제가 동기 없이 혼자 들어온 게 다행이네요. ”
“ 자네 정말... 내가 솔직하게 말하는데, 사셴카는 그렇다 치고, 자네도 내년이면 승진 심사 대상에 들어갈 텐데 지금 윗분들에게 이렇게 찍히면 답 없어. 국장도 보고받고 엄청 화냈다고 했어. ”
“ 선배님, 말씀 마치셨으면 전 들어가겠어요. 금요일이라서 일이 엄청나게 밀려 있거든요. ”
베르닌은 혀를 차는 모브린을 남겨두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알렉산드라를 위해 증언을 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 * *
오후 늦게 스페호프가 그를 국장실로 호출했다. 또 배추밭 고양이 얘길 하려나 걱정이 되었다. 최근 고양이들이 발정기인지 밤마다 배추밭에 모여들어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게다가 이 구역의 지배자인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짝짓기를 독점하고 싶은 건지 다른 수놈들을 마구 할퀴고 잡아 뜯어서 매일같이 소란스러웠다. 베르닌은 고양이들의 짝짓기 장소를 옮겨줄 방안을 고심하며 국장실로 올라갔다.
스페호프는 그가 들어오자마자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본론으로 들어갔다.
“ 자네가 크롤리코바의 진정서에 첨부한 서류는 공적으로 접수할 수 없으니 그리 알게. 반려야. ”
“ 예? 어째서인가요? 양식에 맞게 작성했고 법규와 판례도 기재했는데요. 있었던 일만 기재했고 저의 주관적 판단은 완전히 배제했는걸요. ”
“ 자넨 당사자도 아니고, 그 부서 직원도 아니니까. 참견할 자격이 없단 말이네. 대체 정신이 있나 없나, 무마를 시켜도 모자랄 판에 눈치 없게 끼어들어서 일을 키우긴. 행정의 기본 중 하나는 연공서열을 존중하는 거야. 어디 감히 20년 된 선배를 밀고하려는 건가. 젊은 친구가 벌써부터 못된 짓만 배워가지고. 하여튼 인민재판은 없을 거야. 증언도 필요 없고. 마음 같아선 자네의 버릇없는 행동에 징계라도 내리고 싶지만 치기어린 마음에 돼먹지 않은 기사도를 발휘한 걸로 알고 이걸로 접겠네. 앞으로는 조심하게.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생각이란 걸 좀 하고. ”
“ 접다니요? 알렉산드라 선배가 진정서를 제출했고 인민재판을 요구했으니 당연히 절차에 따라 증인이 필요하고... ”
“ 재판은 없을 거야. 크롤리코바가 진정을 취소했으니까. 당사자끼리 화해했고 다 잘 끝났어. 공연히 자네가 설레발만 떨지 않았으면 더 깔끔했을 텐데. 하여튼 그렇게 알게. 자네 부서장에게도 다 마무리됐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뒀네. 앞으로는 조심하게. 쯧쯧, 요즘 좀 업무 역량이 나아지나 싶었더니만... 명심하게, 자네에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해도 모자란단 말이야. 서무 업무도 그렇고 그 불여우 감시도 그렇지. 며칠 전에도 검열국 쪽에서 별도 보고가 들어왔더군. 그 녀석이 준비하는 신작에 이념적 문제가 있다고 말이야. 심지어 검열국 직원들에게 폭언을 하고 성질까지 부렸다는데 어째서 그쪽 보고는 빼먹었나? ”
“ 그 충돌 건은 보고서에 요약해서 올렸는데요, 그리고 검열국 쪽 얘기는 과장된 거였고요. 그 신작은 무용수들에게 새로운 동작을 익히기 위해 만든 거라서 이념적인 내용은 전혀 없고 남녀가 밀고 당기며 연애하는 얘기더라고요. 제가 극장장과 발레마스터, 무용수들, 오케스트라 쪽 사람들에게도 확인해봤습니다. 이념적인 작품은 아니었어요. ”
“ 허, 그래? 그렇다 치지. 그래도 검열국 쪽 보고는 무시하면 안 돼. 그 불여우는 옛날부터 전적이 화려하니까. 작년에 뉴욕에서도 얼마나 당돌한 짓을 했는지 아나? 온갖 반체제적인 내용에 심지어 야하기 그지없는 것을 작품이라고 만들어서는, 검열요원에겐 그런 내용 싹 빼고 보여준 다음에 정작 무대에선 그런 지저분한 걸 췄단 말이지! 파리에서도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예술이니 뭐니 하며 우기고 말이야. 예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앞으로는 검열국 쪽 보고도 하나하나 다 챙기도록 하게. 그 자식은 정말 골칫거리야. 크레믈린에서 또 끼어들기 전에 빨리 없애버려야 할 텐데. 하여튼 그쪽은 자넬 믿네. 나중에 이 문제는 따로 얘기하도록 하세. 그만 들어가 보게. ”
베르닌은 알렉산드라와 타라카노프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스페호프의 심기가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그대로 국장실을 나왔다. 터덜터덜 내려오는데 등록부서 앞에 여직원들이 나와서 떠들고 있었다. 그 사이에 있던 리자와 마주쳤다.
“ 다냐, 또 국장실에 불려갔던 거예요? 또 혼났어요? ”
“ 아뇨. 일 때문에요. 근데 여긴 왜 다들 나와 있어요? ”
“ 아, 방금 인사부서에서 들었는데요, 알렉산드라 언니가 우리 부서로 온대요. 그런 얘기 없었는데 갑자기 발령이 나서 웬일인가 싶어요. 하여튼 우린 좋죠 뭐. 언니가 일도 잘하고 후배도 잘 챙겨주니까. 전 언니랑 친했거든요. ”
“ 뭐라고요? 등록부서로 발령? 언제요? ”
“ 월요일 자래요. 언니 방금 왔다 갔어요. 우리 부장님한테 인사도 하고. 짐도 벌써 옮겨놨어요. 인수인계는 월요일에 하기로 했고요. ”
베르닌은 얼떨떨해졌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는 대외교류부에 가 보았다. 타라카노프가 동료들과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가 베르닌을 발견하더니 증오 어린 시선을 던지며 입을 다물었다. 모브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돌렸다. 알렉산드라의 책상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배추밭으로 갔다. 알렉산드라가 거기 있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넓적한 돌멩이에 걸터앉아 있었다. 고양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사료 그릇은 비어 있고 물그릇에만 반쯤 물이 남아 있는 걸 보니 이미 밥을 먹고 간 것 같았다.
“ 선배님, 어떻게 된 거예요? 인사이동이라니. 그리고 감사실 진정 낸 것도 취소하셨다면서요. ”
“ 응. 다냐, 미안해. 나 도와주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미리 얘기라도 할 걸. 아까 너무 경황이 없어서. ”
“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국장이 그러던데요, 아나톨리 표도로비치랑 화해하셨다고. ”
“ 응. 그렇게 됐어. 그냥 그렇게 가기로 했어. ”
“ 그냥 그렇게라니요... 그럼 아나톨리 선배는 하나도 징계 안 받고... 어째서 선배님이 다른 부서로 가셔야 하는데요? 등록 부서는 선배님 전공하고 맞지도 않고... 원래 대외교류부 쪽 지원하셨잖아요. 그 부서는 지금 업무보다 더 단순 업무인데... 이건 좌천이나 마찬가지잖아요. ”
“ 차라리 그 부서가 나아. 여자애들도 많고. ”
“ 그렇지 않아요... 거긴 정말 스태프 부서인데... 선배님은 대외사업 쪽... ”
“ 어차피 대외교류부에서도 서무나 하고 있었는데 뭐. 걱정해줘서 고마워. ”
알렉산드라는 어제처럼 울지도 않았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표정은 무심했고 목소리도 건조했다. 베르닌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 정말 화해하신 거예요? 아니면 국장이 협박한 건가요? ”
“ 협박이라니. ”
“ 저 다 알아요! 아침에 감사실에서 불러서 갔는데 감사부장이랑 대외교류부장이랑 고충처리 담당자가 저한테 막 증언 서류 취소하라고 협박했어요. 좀 전에는 국장도... ”
“ 그랬구나. 미안해, 다냐. 내가 내 성질을 못 이겨서 소란피우고 너한테까지 피해 주고... 정말 미안해. 이제 해결된 거니까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고마웠어. ”
“ 해결된 거 아니잖아요! 선배님이 그냥 포기한 거잖아요, 눈감아주고... 위에서 협박해서... ”
“ 어쩔 수 없었어, 다냐. 국장이랑 감사부장이 인민재판해 봤자 나만 손해라고 하루종일 설득했거든. 재판해서 타라카노프 처벌해봤자 그 사람은 잠깐 징계만 먹은 후 승진할 거고 나는 이 동네도 아니고 저쪽 시베리아 쪽 지부로 전출시킬 거라고 했어. 회사 입장에선 20년 된 남자 중견직원이 더 필요하다는 거지. 그리고 국장 말이 맞아. 일 크게 만들었다가 나도 그렇고 괜히 너한테까지 불똥 튀잖아. 국장이 자기 방으로 나랑 타라카노프 불렀어. 그 작자가 나한테 사과했어. 거짓 사과지만 어쨌든... 그렇게 마무리된 거야. ”
“ 그게 어떻게 마무리예요. 협박인데... 선배님, 이렇게 물러나시면 안돼요. 그리고 잘못한 건 아나톨리 표도로비치인데 좌천시키려면 그 사람을 보내야지 왜 선배님을 등록부서로 보내요! 이건 보복성 인사... ”
“ 일이 이렇게 됐는데 한 부서에서 마주치며 얼굴 붉히는 것도 그러니까. 난 차라리 잘됐어. 등록부서에는 여자애들도 많으니 지저분하게 구는 놈들은 덜하겠지. 등록부장 말로는 거기 지금 서무는 나보다 후배 여자애니까 나한테는 다른 업무 줄 거래. ”
“ 하지만... ”
“ 다냐, 고마워. 나 위해서 나서준 거 안 잊을게. 그러니까 이제 이 얘긴 그만 하자. 주말 잘 보내. ”
알렉산드라는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배추밭을 떠나 사무실 쪽으로 가버렸다. 베르닌은 멍해져서 한동안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 * *
베르닌은 화가 나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타라카노프는 말할 것도 없고 국장을 비롯한 간부들과 대외교류부 직원들, 아니 회식 현장에 있었던 모든 동료들이 가증스러웠다.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가해자가 이토록 확실한 상황에서 결국은 피해자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심지어 더 하위 부서로 좌천까지 당하다니 정말 더러운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알렉산드라의 태도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했으면서, 그렇게 분노해서 감사실에 진정을 하고 인민재판을 요청했으면서 어째서 막판에 그렇게 쉽게 포기해버렸는지 이해가 안 갔다. 답답하고 속상했다.
그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다가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라 급하게 차를 몰고 극장으로 갔다. 왕재수가 모자도 쓰지 않고 주차장 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는 급하게 빵빵 하고 경적을 울렸다. 차에 올라탄 왕재수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 야! 추운데 왜 거기 앉아 있어! 감독실에서 기다렸어야지! 모자도 안 쓰고, 패딩도 안 입고 또 그 얇은 코트 입고! ”
“ 네가 금방 올 줄 알았지. 그리고 패딩은 안 돼! 오늘 외부에서 손님들도 왔었는데 패딩 입은 꼴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고! ”
“ 에잇, 정말 너란 놈은... ”
“ 왜 성질내. 늦게 와 놓고. 오늘 블린 구워주는 거야? ”
“ 아니, 나 오늘 블린 같은 거 구울 기력이 없어. 선택해. 냉동 펠메니 삶아주는 거랑, 요 앞 식당에서 먹고 들어가는 거. ”
“ 펠메니. ”
“ 엥? 너 그 식당 좋아했잖아. 닭가슴살이랑 샐러드... 딴 것들도 맛있던데. 집에 가면 진짜 그 냉동 펠메니 삶아주는 거 밖에 없어. ”
“ 집에서 밥 먹고 싶어. 계속 식당 밥 먹었더니 질려. ”
“ 펠메니도 공장에서 나온 거잖아. ”
“ 그래도 네가 삶는 게 더 낫단 말이야. ”
“ 말도 안 돼. 삶는 건 다 똑같지. ”
“ 너 귀찮아서 그러는 거야? ”
“ 귀찮아! 당연하잖아! 여태 그렇게 밥을 해다 바쳤는데 안 귀찮으면 그게 사람이냐? 오늘은 일도 많았고 피곤하다고. 내가 네 종도 아니고. ”
“ 언제는 연어랑 새우랑 채소랑 구워주더니... 생선가게에서 특별이용권 받았으니까 맛있는 거 해줄 거라고 뻥만 치고. 오늘은 펠메니 삶아주는 것도 싫다고... ”
“ 야, 어떻게 매일 네 비위를 맞추고 사냐!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다들 천재다 예쁘다 해주니까 팔자 늘어져가지고... 넌 보통 인민들이 얼마나 고생하며 사는지 하나도 몰라! ”
“ 왜 소리 질러. 난 사람들이 나한테 소리 지르는 거 너무 싫어. 펠메니 삶기 싫으면 관둬. 차려줄 필요 없어. 난 저녁 안 먹어도 돼. ”
“ 그 얘기가 아니잖아! 저녁은 또 왜 안 먹는데! ”
“ 네가 요리하기 싫다며. 보통 인민들이 고생한다며. 나도 별로 입맛 없어. 원래 저녁 꼬박꼬박 챙겨먹었던 것도 아닌데 뭐. 펠메니도 별로야. 공장제는 맛없어. 안 먹어. ”
“ 의사가 많이 먹어야 된다고 했잖아! 펠메니 싫으면 지금 내려. 저기 식당에서 먹고 가게. ”
“ 싫어. 식당 안 가. ”
왕재수는 그 말까지만 하고 입을 꽉 다물었다. 베르닌은 지치고 피곤해서 왕재수와 입씨름하기 싫었기 때문에 묵묵히 차를 몰았다. 하지만 강을 건너 배나무 거리로 접어들자 내심 기분이 좋지 않았고 슬그머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왕재수가 창밖만 바라보며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즐로프에게 애 끼니 잘 챙겨 먹여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던 게 생각나면서 가슴 한구석이 찔렸다.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가면서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야, 펠메니 삶아줄 테니까 먹어. ”
“ 됐어. 배 안 고파. ”
“ 뭘 배 안 고파, 아까 배에서 꼬로록 소리 나는 거 들었는데. ”
“ 물 마셔서 그래. 배 안 고파. ”
“ 미안해, 오늘 회사 일이 힘들어서 그랬어. 펠메니 삶는 건 안 어려워. 그러니까 저녁 먹자. 너 요즘 계속 과로하고 있잖아. ”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표정은 좀 풀린 것 같았다. 베르닌의 집으로 순순히 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베르닌이 냉동실에서 펠메니를 꺼내자 봉지를 뺏아서 도로 넣었다.
“ 됐어. 나 그냥 사과랑 요구르트 먹을래. ”
“ 그게 무슨 밥이야! ”
“ 배만 채우면 됐지. 물 끓이고 삶고 차리는 거 귀찮잖아. ”
“ 내가 하지 네가 하냐? ”
“ 너 힘들다며. ”
“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
“ 오늘은 너 진짜 기분 안 좋아 보이니까 그렇지. 국장이 또 자른다고 협박한 것처럼. 벌목공... ”
“ 아니야! 벌목공 운운 없었어! 공연히 또 사고 칠 생각하지 마! 그리고 나도 배고파. 먹어야겠어. ”
베르닌은 물을 끓이고 펠메니를 삶았다. 스메타나를 곁들여 접시에 담았는데 아무래도 뭔가 허전해서 양배추와 당근을 썰어 마요네즈에 버무려 샐러드도 만들고 오이와 고추피클도 좀 꺼냈다. 왕재수는 배 안 고프고 입맛 없다더니 정신없이 만두를 먹었다. 샐러드도 토끼라도 된 양 포크로 쓸어 담아 막 먹었다. 피클도 집어먹었다. 딱 보니 점심도 안 먹은 게 분명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잘 먹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자신은 영 입맛이 나지 않았다. 만두 몇 개만 스메타나에 찍어먹고 오이피클 두 개를 먹은 후 포크를 내려놓았다. 왕재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너 다 먹었어? ”
“ 응. ”
“ 왜 이렇게 조금 먹어? 어디 아파? ”
“ 아니, 입맛이 없어서 그래.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어. ”
“ 역시 스페호프 그 자식이 자른다고 했구나. 벌목공... ”
“ 아니라고! ”
왕재수가 다 먹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식탁을 치웠다. 차를 우려주고 무가당 초콜릿 캔디를 몇 알 건네주었다. 그러다가 베르닌은 답답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고 사흘 전의 회식부터 시작해 알렉산드라와 타라카노프, 자신의 증인 자청과 간부들의 협박, 알렉산드라의 좌천 등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원체 분하고 답답해서 그런지 봇물 터지듯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왕재수는 보통 그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하면 ‘아 지겨워!’ 하면서 중간에 끊고 나가버리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끊지도 않고 끼어들지도 않고 베르닌이 떠들게 내버려두었다. 그러면서 차도 마시고 초콜릿도 먹었다. 보나마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어쨌든 베르닌은 왕재수가 듣든 말든 말이라도 하면 좀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아서 전부 다 얘기했다.
마침내 베르닌이 이야기를 마치자 왕재수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물었다.
“ 그래서 화난 거야? ”
“ 그래. ”
“ 누구한테 화난 건데? ”
“ 전부! 타라카노프 그 개자식이랑... 국장, 감사부장. 이그노리로프. 대외교류부장. 그 부서 인간들 전부! 그리고, 그리고... 알렉산드라 선배도 너무 답답해. 끝까지 갔어야지! 고발해서 재판에 세웠어야지. 내가 그렇게 자료도 다 정리해주고 증인도 서주겠다고 했는데. 결국 손해만 보고... 알렉산드라도 바보 같아. 그리고는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평온한 표정으로 나한테 이제 이 얘기 하지 말자고... 여자들은 정말 모르겠어. ”
“ 너 다시는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 ”
“ 응? 뭐가? ”
“ 알렉산드라가 잘못한 것처럼 얘기하고 있잖아. ”
“ 아니야! 성희롱은 분명히 타라카노프가 잘못했어. 협박한 건 간부들 잘못이고. 근데 알렉산드라도 이해가 안 가니까 그렇지. 6년 동안 그랬다잖아. 그럼 맨 처음에 그 개자식이 그랬을 때 주변에 말했어야지. 그때 문제를 제기했어야지. 꾹꾹 참고 말 안 했기 때문에 다들 몇 년 동안 타라카노프가 그럴 땐 좋다고 가만있다가 왜 이제 와서 난리를 치냐고 하는 거라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당연히 문제를 제기했어야지. 심지어 자기가 피해자인데... ”
“ 그러니까! 너 그렇게 얘기하지 말라고! 왜 약자에게 잘못을 돌려! 알렉산드라는 약자잖아. 제일 비겁한 게 약자한테 잘못을 돌리는 짓이야. ”
왕재수가 정색을 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움찔했고 어쩐지 억울해서 항변했다.
“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왜 그랬던 걸까? 나 솔직히 이해가 안 가. 처음에야 놀라서 말 못했다지만 몇 년 동안 그랬다잖아. 진작 좀 대들지. ”
“ 너는 국장이 들들 볶고 괴롭힐 때 대들었어? ”
“ 어... 아니... ”
“ 똑같은 거야. 그것보다 더 심한 거라고. 그 여자 위치에서 저항하기가 쉬운 줄 알아? 세상에 더러운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권력이 뭐 별거냐? 나보다 조금이라도 위에 있고 조금이라도 힘세면 그게 다 권력이지. 그 여자가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심지어 너도 협박했다며. 그럼 그놈들이 알렉산드라 불러서 네 얘기도 했을 걸. 뻔하잖아. 고발 취소 안 하면 그 여자 좌천시키는 것도 모자라 너한테도 불이익 줄 거라고 협박했겠지. 걘 너한테 피해 주기 싫었을 거고. 그냥 그런 거야. ”
“ 아... 그래. 나보고 앞길 막힐 거라고 하긴 했지만... 그치만... ”
베르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너무나 속이 상했다.
“ 불쌍한 알렉산드라. 어떻게 하지. 나 그만두고 싶어. 뻔히 더러운 수작 벌어진 거 다 알면서 아무 것도 못하고...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
“ 뭘 어떻게 하니. 더러운 놈들 안 보고 살아야지. 내가 제일 잘나면 돼. ”
“ 야, 너야 천재니까 그런 말이 쉽게 나오지. 나나 알렉산드라는 너처럼 잘나지 않았잖아!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데? ”
“ 몰라! 그 방법을 알았으면 내가 지금 시골에 와 있겠니? ”
왕재수가 찻잔을 쨍 하고 내려놓더니 일어섰다.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까만 눈에 불꽃이 이글거렸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왕재수는 한 손으로 가슴을 탁 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그게 다 그런 거란 말이야. 나보다 센 놈이 짓밟을 때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비웃는 것밖에는 없어. 근데 그것도 때로는 안 되거든. 그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거야. ”
“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돼! 그건 자본주의 양키들이나 그러는 거야! 우리 선조들이 왜 혁명을 했는데. 잘못된 건 고치고 뒤집어야지! 약자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해야지! ”
왕재수는 가만히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검은 눈에 이글거리던 불꽃은 사라지고 없었다. 졸리고 지쳐 보였다.
“ 혁명으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혁명을 한 놈들이 결국은 다시 윗자리에 올라간다니까. 인간이란 게 원래 그래. 뭘 바라니? ”
베르닌은 말문이 막혔다.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그 순간 왕재수가 아플 때 크레믈린 아저씨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온천에서 했던 얘기도. 그는 입을 벌렸다 다물었고 다시 벌렸다. 그리고 목구멍을 철사로 쑤시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 너 그래서 그런 거야? ”
“ 뭐가? ”
“ 투레츠키. 가만히 있었던 거. ”
“ 웬 투레츠키. 너 정말 바냐한테 무슨 억하심정 있냐? 툭하면 걔 얘기야. ”
“ 알았어, 투레츠키는 아니라고 쳐. 하지만... 그 인간. 크레믈린에 있다는 그 아저씨. 너도 그랬던 거야? ”
“ 뭘 그랬다는 거야? 아 머리 아파. 졸려. ”
“ 타라카노프가 알렉산드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싫은데 못살게 굴고... ”
“ 몰라. 기억 안 나. 난 자러 갈 거야. ”
“ 나쁜 짓 하고 이상한 사진 찍었다고 했잖아. 그때 알릭 얘기하다가. 내가 그런 명령 받은 줄 알았다고. 크레믈린 아저씨도 그랬다고 했잖아. ”
“ 얜 대체 왜 이렇게 쓸데없는 소릴 다 기억하는 거야. 그거 다 헛소리야. 에이, 그때 온천 괜히 갔어. 피곤해 죽겠네. ”
“ 하지만... 너도... ”
베르닌은 다시금 솟구치는 분노를 느꼈다.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너는 우리 같은 일반인도 아니잖아. 천재잖아. 엄청 잘 나가는 애였잖아. 완전 스타였잖아. 외국에서도 다 알아줬다며. 근데 어떻게 그놈이 나쁜 짓하게 놔둘 수가 있어? 네가 싫으면 싫다고 했어야지 왜 그 사람 마음대로 하게 놔둬? 아무리 국회의원이라도 그렇지. 네가 대놓고 문제 제기했으면... ”
“ 이 바보 멍충아. 내가 천재면 뭐하고 잘 나가면 뭐해. 그 인간 한 마디면 그 자리에서 모가지 날아가는데. 그 사람이 손 하나만 까딱하면 다리 부러지고 근육 끊어질 거 뻔히 아는데, 다시는 춤 못 추게 될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싫다고 해! 아무도 내 편 안 들어줄 거 뻔한데 무슨 대놓고 문제를 제기해. 내가 무슨 고위직 집안 출신도 아니고. 그거 다 환상이야. 천재에 스타니까 내 말 먹힐 거라는 거. 내가 몇 번을 말해, 그랬으면 내가 시골에 와 있겠냐? ”
왕재수는 흥분한 말투로 빠르게 쏘아붙이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베르닌은 당황해서 가만히 있었다.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울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만 또렷하게 들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울지도 않았다. 빨개졌던 얼굴도 금세 정상으로 돌아왔다. 완전히 누그러진 목소리로 덧붙였을 뿐이었다.
“ 바보 멍충이. 그러니까 펠메니 남은 거 다 먹으란 말이야. 안 먹으면 너만 손해라고. ”
“ 삶은 지 한참 돼서 식었잖아. 다 불어터졌어. ”
“ 그건 네 팔자고. 하여튼 난 간다. 잘 자. ”
왕재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소파에 내팽개쳐진 왕재수의 코트와 가방을 발견하고 뒤따라갈까 하다가 그만뒀다. 어차피 왕재수는 토요일에도 출근하니까 아침에 태워다 주러 가면서 갖다 주면 될 것 같았다.
그는 싱크대 위에 올려두었던 남은 펠메니를 선 채로 모두 먹어치웠다. 양배추 샐러드도 먹었다. 설거지를 했다. 머릿속은 여전히 빙빙 돌았다. 그는 착잡한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FIN
- 2015. 3. 30 ~ 4.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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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편은 이렇게 끝난다. 좀 찝찝하긴 하지만 뭐 인생이 그런 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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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가 겪는 일들 중 일부는 내가 실제로 겪었던 일들에서 소재를 따왔다. 물론 조금씩 변형시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저 정도로 심각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니지만. 저런 일이 일어나는 곳은 상당히 많다.
알렉산드라에게 내가 여성 사무직 노동자로서 겪었던 일들이 좀 투영되어 있긴 하지만 물론 그녀는 허구의 인물이다. 스타일도 나랑은 좀 다르지만.. 하여튼 조금은 닮은 면도 있다. 하긴 그렇게 따지만 난 단추랑 제일 닮은 거잖아!! 단추가 겪은 일들을 생각하니 그렇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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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에서 왕재수가 정색을 하며 쏟아놓는 얘기들은 사실 본편에 더 가까운 얘기들이라.. 하여튼 서무 시리즈도 본편에서 태어난 거니까 뒤로 갈 수록 어쩔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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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호프가 왕재수의 뉴욕 공연에 대해 떠드는 내용은 본편과 맥이 닿아 있다. 뉴욕 공연은 '불새', 파리 공연은 '니진스키 트리뷰트'에 대한 얘기인데 본편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다. 뉴욕에서 올렸던 불새에 대한 짧은 언급과 초창기 리허설에 대한 미샤의 친구 일린의 회상 장면은 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한 적이 있다. 그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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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우울한 에피소드였기 때문에. 기분 전환용으로.
등장인물 이름들을 지을 때 가끔은 여기저기서 빌려오기도 하고(특히 무용수나 예술가들 이름에서 잘 따온다), 인물의 성격을 풍자하기 위해 특정 형용사나 명사에서 파생시키기도 한다. 러시아 성들 자체가 형용사나 명사에서 나온 것들이 많아서 그렇게 무리수는 아니다. 이번 편이 특히 그렇다.
먼저 알렉산드라를 집적대는 아나톨리 타라카노프. 타라칸은 노어로 바퀴벌레란 뜻이다.
알렉산드라의 성인 크롤리코바. 크롤릭은 산토끼란 뜻이다 (ㅎㅎ)
고충 처리 담당자인 이그노리로프. '무시하다'란 뜻의 이그노리로바찌 란 동사에서 따왔다.
발따예프에 대해서는 전에 얘기한 적 있다. '발따찌'(수다떨다)란 동사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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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서.. 주요 인물들 성 몇 개도.. 이 사람들 성이야 서무 시리즈 나오기 전에 본편 구상할 때 나온 거라서 위와 같이 웃긴 건 아니고...
우리의 주인공 단추청년 다닐 베르닌. '베르느이'란 형용사는 '성실한, 믿음직한, 충성스러운' 이란 뜻이다 :)
본편의 주인공이자 서무 시리즈의 왕재수인 미하일 야스민. 이 사람이야 십몇년 전에 처음 구상한 인물이라서.. 그의 성인 야스민은 다들 알겠지만 꽃 이름이다. 영어로는 재스민. 노어로는 야스민인데 뭐 이 사람 성격이나 외모가 재스민 꽃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렇다고 장미니 아이리스니 수선화니 이런 건 노어 이름이 좀 이상하기도 하고...
우크라이나 계열 성이 가끔 ~in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본편에서 미샤의 아버지 쪽 혈통에 백러시아/우크라이나 쪽 피가 섞여 있어서 이런 성을 가졌다. 러시아에서도 그렇게 흔한 성은 아니고 보통은 꽃 이름이다.
렐랴 비슈네바의 성인 비슈네바는 전에 얘기한 적 있지만 마린스키의 프리마 발레리나인 디아나 비슈네바에서 따왔다. 액센트가 뒤에 있으니 원래 발음은 디아나 비슈뇨바가 맞지만..
하여튼 렐랴의 성은 액센트가 앞에 있어서 비슈뇨바가 아니고 비슈네바이다.'비슈냐'가 버찌/체리란 뜻이고 '비슈네브이 사드'는 '벚나무동산'이란 뜻이다. 체호프의 유명한 희곡 제목 말이다. 우리나라엔 벚꽃동산으로 번역됐지만. 원래는 벚나무 정원에 더 가까울 듯. 그래서 본편과 서무 시리즈에서 렐랴가 간행하는 문예지 제목도 '비슈네브이 사드'이다. 자기 성을 따기도 했고 :)
그리고 이건 좀 웃기지만.. 로만 코즐로프. 코젤은 염소란 뜻이다 :) 열받으면 들이받는다~
.. 근데 위의 성들 다 실재하는 성이다. 진짜다!!
...
이야기는 19편으로 이어진다. 19편은 이렇게 우울하지 않아요~
.. 댓글은 저에게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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