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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을 계속 손대지 못하고 서무 시리즈만 쓰고 있어서..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 본편 우주에 속한 글들을 다시 뒤적이고 있다. (안 그러면 미샤는 사라지고 왕재수만 남을 것 같아 ㅜㅜ)

 

발췌한 부분은 2년 전 완성한 레닌그라드 배경의 장편 전반부이다. 전에 몇 번 발췌한 적이 있는데, 레닌그라드 대학 강사 트로이와 소년 시절~ 키로프 시절의 미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아래 내용은 소설의 2부, 시간적 배경은 1974년 4월, 미샤의 키로프 극장 첫 시즌이다. 미샤는 18살이다. 전에 그의 키로프 데뷔에 대해 발췌한 적이 있다. (거기서는 해적의 알리를 췄고 이후 지젤의 알브레히트를 췄다) 

 

그때 그가 키로프 정상의 프리마 발레리나인 니나 크류코바의 낙점을 받아 그녀의 파트너로 주요 레퍼토리를 추게 되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시즌 후반부에서도 그녀와 함께 돈키호테의 주역을 추게 된다. 이건 그 첫 공연에 대한 얘기다. (엄밀히 말하면 공연 얘긴 별로 없지만)

 

물론 여기 언급되는 감독 게오르기 다닐로프, 미샤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 선배 무용수 울리얀 세레브랴코프, 그의 친구 레오니드 핀스키, 니나 크류코바 등 등장인물은 모두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몇 주 간의 연방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후 미샤는 폐렴에 걸렸다. 의사와 극장 동료들은 열악한 버스 투어와 궂은 날씨 때문이라고 했지만 트로이는 그게 흠뻑 젖은 채 운하의 바람을 맞으며 걸어왔기 때문이라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증세가 심각한 편이라 담당 의사는 그를 병원에 입원시켰고 며칠 동안은 가족을 제외하고는 면회도 시켜주지 않았다.

 

트로이는 걱정이 되어서 병원 근처를 맴돌았다. 사흘 째 되던 날에는 새로 온 간호사를 속여 형제라고 둘러대고 몰래 병실에 들어갔다. 그는 미샤에게 2인용 병실을 준 것에 놀랐다. 환자가 터져나가는 레닌그라드 병원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병실에는 다른 환자가 아예 없었다.

 

미샤는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환자복을 입고 초조한 얼굴로 병실 안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링거 줄이 바닥에 질질 끌려 다녔다. 트로이를 보자 잠깐 반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손을 흔들었을 뿐 다시 침대와 창문 사이를 도약이라도 하듯 큰 보폭으로 오갔다.

 

“ 누워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열이 장난 아닌 것 같네. ”

 

“ 오늘 공연이 있어. ”

 

“ 대역이 있을 거 아냐. ”

 

“ 세레브랴코프가 추는 꼴을 볼 수는 없어. ”

 

미샤의 눈에 잠깐 분노의 불이 확 일었다가 사라졌다. 트로이는 그게 누군지 몰랐지만 아마 사이가 좋지 않은 동료일 거라고 생각했다. 미샤는 자기 춤에 대해서는 겸양이란 것을 몰랐고 위계질서에 대한 개념 자체가 별로 없었다.

 

“ 지금 나가려던 참이었어. ”

 

“ 무슨 소리야, 거울이라도 좀 봐. 열 때문에 눈까지 빨개졌어. ”

 

“ 넌 의사가 아니잖아. ”

 

미샤는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며 짜증을 냈다. 평소의 차분한 태도는 사라지고 없었다. 자기처럼 건강하기 짝이 없는 젊은이가 어떻게 폐렴 따위에 걸려 병실에 갇혀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미샤는 짜증이 가신 목소리로 급하게 말했다.

 

“ 안드레이, 내과에 가서 아스케로프란 의사 좀 불러다 줘. ”

 

“ 그게 누구야? 너 담당의사는 그론스키란 사람 아니었어? ”

 

“ 그냥 아는 사람이야. 내 이름 얘기하고 좀 데려다 줘. ”

 

그래서 트로이는 2층으로 갔다. 복도 끝 방문에 유리 아스케로프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대기실에 환자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간호사가 다음 환자를 호명하러 나왔을 때 문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환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화가 난 의사가 그를 쫓아내기 직전에 트로이는 미샤의 이름과 와 달라는 부탁을 전했다.

 

의사는 열린 문 사이로 환자들을 힐끗 보더니 간호사를 불렀다.

 

마리야, 10분만 급한 환자를 보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해줘요. 그리고 저기 세묜 그리고리예비치한테는 피부터 뽑고 오라고 해요. ”

 

병실로 가면서 의사가 물었다.

 

“ 극장에서 왔어요? ”

 

“ 아뇨, 친구예요. ”

 

“ 친구가 있긴 있었군. ”

 

혼잣말이었기 때문에 트로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유리 아스케로프는 짙은 갈색 곱슬머리에 키는 작지만 운동선수처럼 다부진 체격의 30대 의사였는데 안경과 흰 가운 때문에 그렇게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스케로프가 들어오자마자 미샤는 인사도 하지 않고 대뜸 말했다.

 

“ 유라, 나갈 수 있게 도와줘. ”

 

“ 헛소리 하지 마. 그론스키가 날 죽이려고 할 걸. ”

 

“ 네 얘기 안 하면 되잖아. ”

 

“ 그저께 마로조프 비서가 데려다준 거 모르는 줄 알아? 난 모가지가 잘리고 싶진 않다고. 정 가고 싶으면 창문으로 나가. ”

 

창문은 왜? 복도로 나가면 되지. 나가는 건 문제가 아냐. 오늘 춤춰야 해. ”

 

“ 그래, 내일 관 속에 들어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시지. ”

 

아스케로프가 나가려는데 미샤가 앞을 막아서며 단어에 힘을 주어 뚝뚝 끊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 열만 좀 내려줘. 몇 시간만. ”

 

“ 그론스키가 처방해 준 거 있잖아. 그거 맞고 좀 자. ”

 

“ 자면 안 되니까 그렇지. 나가야 해. ”

 

아스케로프는 욕지거리를 하며 병실을 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돌아왔다. 가운 안에서 앰풀과 주사기를 꺼내면서도 계속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 침대에 좀 앉아. 정신 사납게 움직이지 말고. ”

 

미샤는 목적이 곧 달성되리라는 것을 알자 얌전하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스케로프는 미샤의 입에 체온계를 쑤셔 넣은 후 손등에서 링거 바늘을 뽑았다. 잠시 후 체온계를 빼내 숫자를 들여다 본 의사는 한숨을 쉬었다.

 

“ 미친놈. 이제 나도 모르겠다. ”

 

아스케로프가 정체 모를 주사를 놔주자 미샤는 눈에 띄게 표정이 풀렸다. 눈으로 웃기까지 했다.

 

“ 너무 좋아하지 마. 몇 시간 안 갈 테니까. 난 여기 없었던 거야. ”

 

“ 그래, 고마워. ”

 

복도에서 아스케로프가 트로이에게 조그만 유리병을 하나 주었다.

 

“ 따라가요. 다시 열이 올라가면 이거 마시게 해요. 안 그러면 골치 아파질 수도 있으니까. ”

 

“ 그냥 미샤한테 주는 게 낫지 않았어요? 아니면 주사랑 같이 주거나. ”

 

정신 나갔어요? 아까 놔준 거랑 이걸 같이 하면 정말 관을 치우게 될 텐데. 그렇다고 저 자식한테 주면 극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 마셔버릴 게 뻔한데. ”

 

“ 당신 생각보다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애에요. ”

 

“ 자기 관리? 웃기는 소리. ”

 

병실로 들어왔을 때 미샤는 벌써 옷을 갈아입은 후였다. 환자복은 베개와 시트 위로 뭉쳐 넣고 담요로 씌워두었지만 누가 봐도 사람이 없다는 게 훤히 보였다.

 

“ 넌 영화도 안 봤냐? 이렇게 허술한 위장은 처음 봐. ”

 

“ 어젠 모르던데. ”

 

“ 어제도 나갔었어? ”

 

“ 리허설이 있었어. ”

 

트로이는 포기하고 미샤를 따라 극장까지 갔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니나 크류코바를 아주 가까이에서 보았다. 동료들은 미샤가 입원했었다는 것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미샤가 최종 점검 때문에 무대에 올라가 있는 동안 트로이는 오케스트라 핏 바로 앞의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하지만 점차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관계자들이 와서 그를 몰아냈고 아무리 트로이가 사정을 꾸며내도 통하지 않았다. 미샤는 크류코바와 공연에 대해 얘기하러 분장실로 가버린 후였다. 그날따라 분장실 출입도 엄격하게 막혔다. 할 수 없이 그는 안면이 있는 안내원 노파를 찾아내 유리병을 맡기며 미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트로이는 미샤가 그 물약을 마셨는지 걱정이 되어 공연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필이면 돈키호테여서 4막까지 있는 공연이었다. 좌석은 완전히 매진이었고 미샤는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 줄 정신이 없었으므로 그는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3층 가장자리 칸막이 좌석 뒤에 서서 공연을 봐야 했다. 기억나는 거라곤 화려한 스페인 의상을 입은 니나 크류코바를 미샤가 한 손으로 들어올려 포즈를 취하던 것과 4막의 결혼식 장면에서 그가 무대를 빙글빙글 돌며 로켓처럼 날았을 때 관객들 모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쟁터의 군인들처럼 함성을 질러댄 것뿐이었다.

 

‘ 다행이야, 약을 마셨구나. ’

 

트로이는 커튼 콜이 계속되는 동안 칸막이를 나가 분장실 쪽으로 갔다. 그러나 분장실 앞도 이미 상기된 얼굴의 여자들로 꽉 차 있었다. 머리가 새하얀 안내원 노파가 꽃만 두고 썩 나가라며 그들을 꾸짖고 있었다. 그녀는 팬들 때문인지 트로이도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그는 계단 구석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서 한참 동안 기다렸다. 극성팬들도 모두 쫓겨나가고 다른 무용수들도 하나둘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오기 시작했지만 미샤는 나오지 않았다. 마침 같은 무대에 올라갔던 레오니드 핀스키가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트로이는 그에게 갔다. 사교성이 좋은 핀스키는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 공연 봤어요? 오늘 정말 대단했죠? ”

 

“ 그래요, 대단했어요. ”

 

건성으로 대답한 후 그는 핀스키에게 정말 궁금한 것을 물었다.

 

“ 미샤 봤어요? 크류코바와 함께 있나요? ”

 

“ 벌써 나갔을 텐데. 제가 가장 늦게 나왔을걸요. 니나는 오늘 남편이 오기로 되어 있고. ”

 

“ 분장실에 가서 봐줄 수 있어요? 계속 아팠거든요. ”

 

“ 괜찮다고 하던데요. 아까도 기침만 좀 하더라고요. ”

 

핀스키는 트로이가 지나치게 걱정이 많다고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순순히 미샤의 분장실로 갔다. 트로이도 안내원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따라 들어가다가 핀스키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었다.

 

미샤는 물약을 제때 마시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다 정신을 잃었는지 젖은 타월을 머리에 두르고 바지도 다 끌어올리지 못한 채 바닥에 모로 누워 있었다. 얼굴과 목, 드러난 상체 전체가 온통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감겨 있는 눈꺼풀만 하얗게 보였다.

 

“ 아, 이런. 너 정말 사람 놀라게 할 거야? 그냥 울리얀이 추게 내버려둘 것이지. ”

 

핀스키는 울상이 되어 욕을 하면서 자기 재킷을 벗어 동료의 몸을 덮었다. 그리고는 복도 밖으로 뛰어나가며 소리쳤다.

 

“ 안나 미하일로브나, 루키얀한테 빨리 와달라고 해 주세요! 게오르기 페트로비치도 계시면 좀 불러주세요! ”

 

트로이는 화장대 위에서 유리병을 발견했다. 뚜껑도 따지 않은 채였다. 그는 급하게 뚜껑을 열고 미샤의 입을 벌려 물약을 쏟아 넣었다. 별로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손놀림이 너무 둔했고 미샤는 기침을 하더니 약을 반 이상 뱉어내 버렸다.

 

다행히 그때 책임자인 게오르기 다닐로프가 극장 의료요원과 함께 분장실로 들이닥쳤다. 고집쟁이라느니 말썽꾸러기라느니 문제아라느니 하는 욕을 줄줄이 쏟아 부으면서도 사색이 되어 미샤를 자기 차로 데려갔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트로이는 다닐로프를 따라가서 병원 주소를 알려주었다.

 

“ 폐렴? 병원에서 빠져나온 거라니, 입원을 했었다니! 이 미친 녀석을 내가 기필코 잘라 버리고 말겠어! ”

 

물론 그건 다닐로프의 진심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정부 관료 못지않게 권위적이라고 소문난 데다 때 이른 요통으로 고생하고 있는 그 깐깐한 인물이 직접 미샤를 들쳐 업고 계단을 달려 내려갔을 리가 없었다. 어쨌든 그 문제아는 키로프가 지난 가을에 발굴한 최상급의 보물이었으니까.

 

 

트로이는 다닐로프의 차에 함께 타고 갔다. 순전히 병원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빈슈테인 거리까지 차를 몰고 가는 내내 다닐로프는 투어가 어떻고 알렉세이와 울리얀이 어떻고 하며 지껄이다가 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성깔이 보통이 아닌 애송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고 탄식했다. 트로이는 발레단의 모든 행정을 책임진 번듯한 고위직 신사가 그렇게 북받친 어조로 끝없이 푸념을 늘어놓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장광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트로이는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미샤의 불처럼 뜨거운 이마에 줄곧 손을 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아스케로프를 불러다주고 극장에 가도록 내버려둔 자기 때문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병원에서 해열 조치를 받은 후 미샤는 곧 정신을 차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트로이에게 공연을 봤느냐고 물었고 1막에서 스텝을 한번 실수했다고 투덜거렸다. 다닐로프의 존재는 완전히 무시했다. 마침내 안도의 한숨이 분노로 바뀐 다닐로프가 그에게 다음 시즌에도 충분히 출 수 있는 역인데 왜 미친 짓을 했느냐고 꾸짖었다. 아픈 건 징계 사유가 되지 않지만 그걸 숨기고 무대에 올라가서 공연을 망치는 건 완벽한 징계감이라고 소리를 높였다. 미샤는 열이 올라 토끼처럼 빨개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 망치지 않았잖아요. ”

 

물론 사실이긴 했지만 다닐로프는 그 대답 때문에 더욱 화가 났다.

 

“ 울리얀이 있잖아, 자네보다 열 배는 경험이 많은 친구가! 니나와도 수십 번은 더 췄어! ”

 

“ 당신의 그 공훈예술가는 도약을 못해요, 게오르기 페트로비치. ”

 

문외한인 트로이조차 미샤가 동료 무용수를 폄하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을 건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얘기가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대선배인 모양이었다. 트로이는 걱정이 되어서 미샤의 등을 세게 찔렀다.

 

“ 자네 징계야, 퇴원하자마자 내 사무실로 곧장 튀어와. ”

 

화가 난 다닐로프가 발을 쿵쿵 구르며 나간 후 트로이는 미샤를 책망했다.

 

“ 너 왜 그래, 감독한테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 ”

 

“ 세레브랴코프가 내 신발에 못을 숨겨 놨다고. 페름에선 집단농장 저수지에 밀어 넣었어. 그래서 지금 이 모양이 된 거야. ”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미샤는 주먹으로 매트리스를 두어 번 내리치며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 그런데 내가 그 자식한테 역을 내줘야겠어? 공훈예술가든 선배든 상관 안 해. 과거의 영광에 매달려 유유자적하는 놈이야, 역겨운 프로파간다 발레로 떴던 인간이라고. ”

 

분을 참을 수 없는지 미샤는 숨을 몰아쉬며 이를 딱딱 부딪쳤다.

 

못을 숨겨놓다니! 저수지에 밀어 넣어? 왜 그런 얘긴 감독한테 하지 않는 거야? ”

 

“ 그럼 진짜 얼간이가 되니까. 축구팀이나 군대와 똑같은 거야. ”

 

“ 둘 다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는 주제에 말은 잘 하는군. 다른 동료들은 몰라? ”

 

미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기침을 참아보려고 애썼다. 얼굴에 다시 열꽃이 확 올라왔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한 살의를 느꼈다. 농장 저수지에 밀어 넣었다니. 세균이 득실거릴 게 뻔한 그 더러운 저수지에. 폐렴으로 끝난 게 운이 좋은 건지도 몰랐다. 얼굴도 모르는 그 인간의 목을 부러뜨리고 싶었다. 뱃가죽에 식칼을 쑤셔 박고 싶었다.

 

트로이가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는 동안 미샤는 10분 가까이 멈추지도 않고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기침을 멈춰보려고 물을 반 컵 정도 마셨다가 다시 시트 위에 물을 왈칵 뱉어냈다. 트로이는 경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그를 뒤에서 껴안았다. 등과 가슴이 격심하게 들먹이고 있었다. 한참 후 기침을 멈추고 좀 안정된 후 미샤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러지 마. ”

 

“ 뭘? ”

 

“ 죽이러 가지 말라고. ”

 

“ 이젠 독심술이라도 하는 거야? ”

 

“ 그런 표정이라면 세 살짜리 애도 알아차릴걸. ”

 

미샤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뒤로 기댔다. 열에 들떠 입술이 부르터 있었다. 트로이는 그의 입술과 턱을 타고 흘러내린 물을 소매로 닦아주었다.

 

“ 신경 쓸 거 없어. 곧 지나갈 일이니까. ”

 

“ 그놈이 잘 나가는 선배라며. ”

 

“ 선배들이 아주 많아. ”

 

생각에 잠긴 얼굴로 미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열기로 흐려진 검은 눈에 파란 불꽃이 반짝였다.

 

“ 상관없어. 실력으로 보여주면 되는 거니까. ”

 

트로이는 웃기 시작했다. 그 침착하고 도도한 미샤 야스민이 대중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어린애처럼, 그것도 솔직하고 진지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트로이는 갑작스럽게 너무나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머리가 핑 돌았다. 병실이 아니었다면 미샤가 그렇게 아픈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포옹하며 사랑을 나눴을 것 같았다.

 

물론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만큼의 이성은 있었다. 미샤가 다시 열이 올라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당직을 서고 있던 아스케로프를 데리러 갔다. 아스케로프가 담당의사의 처방보다 좀 더 센 주사를 놔준 후에야 그는 기침을 멈추고 잠을 잘 수 있었다. 트로이는 다음날까지 병실에 남아 있었고 걱정에 빠진 율리야가 아들을 보러 왔을 때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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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편을 쓸 때 등장인물 이름 짓는 게 너무 피곤해서(사람이 너무 많이 나와서..) 가끔은 좋아하는 예술가 이름에서 따오기도 하고 마린스키 무용수들 이름에서 따오기도 했다. 울리얀 세레브랴코프는 화가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에서 따왔다.  세레브랴코프와 미샤의 악연은 꽤 오래 지속된다. 의사 유리 아스케로프의 성은 현재 마린스키 제1 솔리스트인 티무르 아스케로프에서 따왔다. 그냥 성만 따온 거라 아무 관계 없음. 

 

초반부에 아스케로프가 언급하는 '마로조프'는 레닌그라드 출신 고위 당 간부로 미샤의 후원자이다. 이 사람은 전에 가끔 언급된 소위 '크레믈린 아저씨'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와는 다른 인물이다(그리고 정치적인 라이벌이기도 하다)

 

..

 

중간에 트로이를 분장실로 안내해주는 레오니드 핀스키는 전에 올렸던 단편 illuminated wall의 화자이다. 그 글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385

 

서두에 언급한 미샤의 키로프 데뷔와 알리, 알브레히트에 대한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28 

 

이 글의 심리적 화자인 트로이와 미샤의 이야기들은 about writing 폴더에 몇 번 발췌한 적이 있다.

 

dance 폴더에서 돈키호테로 검색하면 이 발레에 대한 화보와 리뷰, 각종 동영상 클립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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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