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1

« 2024/11 »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애초에 서무의 슬픔 시리즈를 쓰게 된 것은 본편이 잘 안 풀리는데다 회사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기 치유와 풍자를 위해 시작한 건데.. 요즘은 주객이 전도되어 이게 더 잘 써진다 -_- 그 이유는 회사에서 점점 더 피곤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튼, 내가 힘들수록 단추청년 베르닌을 들들 볶으며... (단추야 미안)

 

그러고보니 벌써 11편까지 왔네.. 11편은 9편과 10편을 읽어야 내용이 잘 이어진다. 베르닌과 왕재수가 9편에서 구출해서 10편에서 덜컥 돌봐주게 된 강아지 벨라가 계속 등장한다. 나 혼자 제일 예뻐야 직성이 풀리는 왕재수는 이놈의 멍멍이가 못마땅하기만 한데...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직장인인 베르닌은 역시나 스페호프 국장에게 시달리고 있으니...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강아지 한 마리를 떠맡게 된 베르닌... 강아지 뒷바라지 하랴 까다로운 왕재수 수발 들랴 여념이 없는데.. 가뜩이나 멍멍이를 귀찮아하는 왕재수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이 와중에 스페호프 국장은 서무들을 모두 호출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1

 

 

 

서무의 슬픔

-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목요일에 스페호프가 갑자기 부서별 서무들을 모두 호출했다. 요 며칠 동안 강아지 벨라 때문에 빨리 집에 들어가고 있었던 베르닌은 혹시 국장이 밀려 있는 일을 저버리고 꼬박꼬박 칼퇴근한 자신을 본보기로 혹독하게 비판하지 않을까 겁이 났다. 서무 몇 명이 국장실로 모여들자 스페호프는 그들에게 반듯하게 자를 대고 그어놓은 상자와 표 몇 개가 들어 있는 서류 양식을 나눠주면서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 신년이니 전 직원 대상으로 일대 일 면담을 진행하도록 하겠네. 양식은 총 세 가지일세. 하나는 올해 자신의 담당 업무계획. 하나는 자기 계발 계획. 마지막은 나와의 면담 후 그 결과를 정리하여 제출하는 양식이지. 이것은 전 직원이 작성해야 하네. 서무는 이 양식들을 모두 등사하여 직원들에게 배포하도록 하게. 처음 두 자료의 작성 기한은 내일 저녁 5시까지. 5시까지 서무는 부서원들에게서 이 두 자료를 수합해 부서별, 직원 이름별 순서대로 정렬하여 나에게 제출하게. 면담은 월요일부터 시작하겠네. 오전 주간회의를 마치고 오후 1시부터 시작될 예정이야. 여기 면담 순서표가 있네. 선임부서인 감시분석부가 제일 첫 타자일세. 에, 그러니까... 감시분석부 직원들은 알파벳 순서대로 하면... 이 부서에 A로 시작하는 성은 없으니까... 그렇군. 베르닌. ”

 

“ 네? 네!

 

오늘 저녁에는 벨라와 왕재수에게 뭘 먹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베르닌은 자기 이름을 듣고 화들짝 놀라 등을 꼿꼿하게 펴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스페호프는 혀를 끌끌 찼다.

 

“ 군대라도 되나,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른담. 자네가 1번일세. 월요일 1시. 올해의 업무 계획에 대해 2장 이내로 작성할 것이며 이에 덧붙여 자기 계발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도 1장 이상 작성하게. 자네 같은 경우에는 반드시 행정 역량 배양에 대한 중장기 로드맵이 간단하게나마 제시되어야 해. 알겠나? 그럼 이만 가보게. ”

 

 

베르닌은 세 장의 각각 다른 양식들을 가지고 나왔다. 평소에는 다른 서무들에게 양보했을 테지만 오늘은 빨리 집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동료들을 제치고 제일 먼저 자료를 등사했다. 잽싸게 달려가 부서원들에게 자료를 나눠주고 국장의 명령을 전달했다. 다들 한숨과 욕설을 내뱉었다.

 

 

“ 으아... 정말 이 국장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시무식에 그 회의도 모자라서... 어휴... ”

 

“ 작년 연말 내내 부서 성과보고서 쓰느라 그 난리를 쳐놓고... 그때 내년 계획서도 냈잖아. 개인별 계획서를 뭘 또 내래... 심지어 무슨 자기 계발... 집에 가야 자기 계발을 하지 맨날 사무실에 늦게까지 붙잡아놓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하냐고. ”

 

“ 끝나고 나서 결과보고 하라는 건 또 뭐야... 어휴, 이 양식들 좀 봐. 선 밖으로 삐져나가지 말라고 메모까지 붙여놨어. 글씨도 크게 써서 메울까봐 일일이 줄까지 그어놨네... ”

 

“ 주간회의 때도 숨 막혀 죽겠는데 일대 일 면담이라니... 보나마나 18세기 고어와 레닌의 일화를 인용하면서 설교하고 훈계하겠지... ”

 

“ 잠시라도 우리가 마음 편하게 쉬는 꼴을 못 보니 원... 월요일부터 그것도 우리 부서가 제일 먼저 시작이라니. 주말에 나와서 이거 작성하라는 거야 뭐야. ”

 

“ 알파벳 순서면 자네가 1번이구먼... 자네도 참 안됐네, 다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심지어 1번이라니 엄청 스트레스 받겠어. ”

 

저요? 전 대충 쓸 건데요. 잘 쓰나 못 쓰나 어차피 혼날 게 뻔한데요 뭐. ”

 

 

그러자 발따예프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자네 같은 책상물림이 그런 말을 하다니! 내 귀가 잘못됐나? 자네 혹시 요즘 연애하나? ”

 

“ 그건 또 무슨 소린가요? ”

 

“ 원래 연애를 하면 다른 일에 무뎌지지 않나. 일도 소홀히 하고. 안 그래도 요즘 칼퇴 하던데... 아, 하긴. 자네 그 불여우랑 사귄지 몇 달 됐지. 에이 찜찜해,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 요즘은 그 녀석이랑 더 많이 하게 됐나보군. 그래서 일찍 가고 일도 대충 하는 거로군. 다냐, 내 말 듣게. 아무리 예뻐도 그놈은 사내 녀석이야. 자네 앞날에 좋을 거 하나 없단 말이야. 국장이 감시하라고 붙여놓았으니 떨어져 있을 수도 없고... 그 자식이 워낙 불여우로 소문났으니 자네 나이에야 넘치는 혈기에 계집애보다 예쁘장한 놈이 엉겨들면 참기 힘든 것도 이해는 가네만... 제발 그 녀석하고 응응응을 즐기는 짓은 그만두게. 자네 어쩌려고 그러나, 장가도 가야 할 텐데. 어휴... ”

 

아아... 제발요! 전 그 자식하고 진짜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아악 진짜 미치겠네. 다 헛소문이라고요! ”

 

“ 우겨봤자... 다 아는 거... ”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왔다. 찬찬히 살펴보니 국장의 요구자료 양식은 정말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는 대충 아무렇게나 문장을 지어내 표 안에 쑤셔 넣었다. 업무 계획에는 작년에 세운 서무 중장기 계획과 왕재수 감시 스케줄을 휘갈겨 썼다. 자기 계발 계획은 타이프 능력 강화, 비품 장부 정리 능력 배양, 도청 장치 부착 기술 습득 따위를 향후 5개년 중장기계획으로 대충 만들었다. 어차피 아무리 잘 써도 스페호프는 화를 낼 게 뻔했다. 전 같았으면 머리를 짜내고 고민하고 주말에도 나와서 계획서를 창작했을 테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빨빨거리며 뛰노는 귀여운 벨라에 대한 그리움 90%와 폐렴 후유증으로 온종일 밥도 안 먹고 잠만 자려고 하는 왕재수에 대한 걱정 10% 뿐이었다.

 

 

5시가 되어 직원들이 우르르 퇴근했다. 베르닌은 책상 위에 서류를 흩어놓은 죄로 1시간 초과근무를 한 후(벌칙 기간이 아직도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다) 급하게 사무실을 나섰다.

 

 

 

*     *     *

 

 

 

베르닌은 비트 한 덩어리와 양배추 반 통, 쇠고기 약간, 시든 오렌지 한 알과 생강, 레몬 두 알, 강아지용 고무공을 사서 귀가했다. 열쇠로 현관문을 열기 전부터 그의 발소리를 알아들은 벨라가 투다다닥 하며 뛰어나와 문 앞에서 헥헥거리며 팔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벨라가 ‘왕! 왕왕!’ 짖으며 베르닌에게 풀쩍 뛰어 달려들었다. 딴에는 품까지 뛰어오르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베르닌은 컸고 벨라는 조그만 강아지였으므로 무릎 언저리까지 뛰어오른 게 전부였다.

 

 

“ 우리 벨라 집 잘 보고 있었어? 심심했지? ”

 

“ 알알알! 왕왕~! 멍멍! ”

 

“ 오오 그랬어~ 이제 오나 저제 오나 기다렸구나~ 배고팠구나~ 오빠가 밥 줄게~ ”

 

베르닌은 벨라를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벨라는 종이봉투에 들어 있는 쇠고기 냄새에 정신을 못 차렸다. 코로 들이받고는 자꾸 봉투를 찢으며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 쉿, 벨라! 안 돼! 이건 너 먹을 거 아니야! 네 건 어제 삶아놨어. 그거 사료에 섞어줄게 기다려! ”

 

“ 멍! 멍멍멍! ”

 

“ 이건 사람 먹는 거야. 저 싸가지 없는 오빠가 아프니까 수프 끓여주려고 사온 거야. 너는 사료랑 삶은 고기 먹자~ ”

 

“ 왕왕왕! ”

 

 

벨라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베르닌이 쇠고기를 꺼낸 후 종이봉투를 버리자 잽싸게 물고 달아나 봉투를 핥다가 발기발기 찢고 난리를 쳤다. 어찌나 시끄러웠는지 자다가 깬 왕재수가 침실에서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개! 조용히 좀 해! ”

 

“ 어, 너 깼구나. 좀 어때? ”

 

“ 개 좀 조용히 시키면 안 돼? 아아, 저놈은 정말 온종일 짖어... 귀가 먹을 지경이야. 한숨도 못 잤어... 우유배달부 지나가면 짖고... 신문 돌리는 소리에 또 짖고... 밖에서 애들 노는 소리 들리면 또 짖고... ”

 

“ 강아지는 밖에서 뛰어놀아야 하는데 집에 가둬놓으니 답답해서 그렇지... 네가 안 아팠으면 잠깐 산책이라도 시켜주라고 했을 텐데. ”

 

“ 나 산책할 기운도 없는데 무슨 놈의 똥개를 산책시켜. ”

 

“ 너 속은 괜찮아? 어제 많이 토했잖아. ”

 

“ 의사 선생님이 아침에 들렀다 가셨어. 생선 먹였다고 너 욕했어. ”

 

너 때문에 일부러 기름 안 쓰고 쪘는데 그래도 먹으면 안 되는 거였대? ”

 

“ 목도 붓고 열이 나니까 생선도 으깨서 줘야 했는데 통째로 줬다고... ”

 

“ 난리났구만. 어휴... 으깨고 짓이겨서 이유식 만들어 갖다 바쳐야겠네. ”

 

누가 해 달랬어? 나 저녁 안 먹을 거야. 어차피 입맛도 없어. 쳇. ”

 

“ 먹어야 나을 거 아니야. 어젯밤에도 열 올라서 끙끙 앓더니. ”

 

“ 내가 언제! ”

 

“ 수프는 괜찮대? ”

 

“ 응, 보르쉬 먹으래. 비타민이랑 단백질... ”

 

“ 알았어. 보르쉬 끓여줄게. 비트랑 고기 사왔어. 지금 육수 끓이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계속 누워 있으면 더 힘드니까 좀 일어나 있어. ”

 

“ 싫어. 똥개가 자꾸 엉긴단 말이야. ”

 

“ 그렇게 벨라가 싫으면 너네 집으로 가. ”

 

“ 나도 가고 싶어! 근데 그 바퀴벌레... 아아... ”

 

 

왕재수가 입술을 실룩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또 ‘시골’ 운운하며 한바탕 서러움을 표출할 기세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급하게 말을 돌렸다.

 

“ 아니면 바이올린 아저씨한테 가든지... 그러고 보니 그 인간 뭐냐! 네가 이렇게 아픈데. 입원까지 했었는데 왜 코빼기도 안 비추는 거야! 데리고 놀 땐 언제고 지금 아프니까 응응응 못 한다고 안 오는 거야? 나쁜 놈!

 

“ 로만 욕하지 마!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 ”

 

“ 왜! ”

 

“ 새해 들어서 너네 국장이 나 감시 강화할 거라고 했단 말이야. 꼬투리 잡히기만 하면 형량도 늘리고 진짜 감옥에 넣는댔어. 말 안 들으면 나랑 가까운 사람도 다 찾아내서 가만 안 둔댔어. 로만은 전과도 있어서 나랑 놀다 변태라고 잡혀가면 골치 아프단 말이야. 그래서 우리 집으로는 절대 오지 말라고 했어. 우리 집엔 도청 마이크 있잖아. 너네가 설치한 거... 우리가 응응응하는 소리 녹음되면... ”

 

“ 도청 마이크 있긴 한데... 그 도청 내용 듣고 정리해서 보고서 쓰는 거 내가 담당이야... 그런 거 안 쓰니까 걱정하지 마. 듣기도 싫어서 그런 소리 나오면 내가 다 지워버렸어. ”

 

“ 그래도... 국장이 전화해서 엄청 갈궜어. 나쁜 자식, 가만 안 둘 거야. ”

 

“ 국장이 너한테 전화했었어? 언제? ”

 

“ 물에 빠진 날 아침에... ”

 

“ 아, 시무식 했던 날. 근데 왜 전화를 했지? ”

 

“ 그 자식이 나보고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했는데 내가 안 갔거든. 새해니까 와서 서류도 갱신하고 자기한테 사상 재교육 받아야 된다나. 미쳤냐, 극장 일도 바빠 죽겠는데 그 멍청한 놈한테 가서 무슨 교육을 받아. 안 간다 했더니 열 받아서 전화하더니 막 협박하더라고. ”

 

“ 아... 너한테도 그랬구나... 올해 계획이랑 자기 계발 계획 얘기하려고 했나보다. 우리도 월요일부터 그거 할 거라서... ”

 

자기 계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난 이룰 거 다 이룬 몸이야. 전 세계 극장에서 날 다 아는데! 난 브레즈네프에 영국 여왕에 프랑스 대통령에 미국 상원의장도 만났어! 웬 거지발싸개 같은 철밥통 KGB 앞잡이가 나한테 자기 계발 운운 교육 운운이야! 하여튼 그 자식이 열 받아서 막 욕하고 별의별 개소리를 다 늘어놓더라고. 그러더니 두고 보라면서 끊잖아... ”

 

“ 그랬구나... ”

 

 

베르닌은 스페호프가 암살 운운했던 날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왕재수에게 그런 얘기까지 할 수는 없어 가만히 있었다.

 

 

“ 하여튼 너무 걱정하지 마. 그 깡패 얘긴 보고서에 한 번도 안 썼으니까. 거실로 좀 나와 있어. 육수 다 끓은 거 같으니까 수프도 금방 될 거야. ”

 

“ 싫어, 똥개가 자꾸 무릎에 올라오고 슬리퍼 물어뜯어. ”

 

“ 그렇게도 벨라가 싫으냐? 귀엽기만 한데... ”

 

“ 그냥 가만히 한쪽에 앉아 있으면 신경 안 쓰고 괜찮은데 자꾸 성가시게 하잖아. ”

 

“ 벨라는 강아지인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니! 그래도 너 예쁘다고 달라붙는 거잖아. 나한테는 그렇게 오지도 않아. 밥도 내가 주는데... ”

 

 

왕재수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더 투덜거리지 않고 일어나서 거실로 나왔다. 예쁘다고 해주면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게 분명했다.

 

 

베르닌이 보르쉬를 끓이고 레몬생강차를 만드는 동안 왕재수는 소파에 멍하게 앉아 있었다. 벨라가 투다다닥 하고 달려와 무릎에 뛰어오르려고 하자 마침 옆에 놓여 있던 잡지를 말아서 엉덩이를 탁 때리며 꾸짖었다.

 

개! 가만히 있어! 올라오지 마! ”

 

“ 끼이잉 끼이잉... ”

 

 

벨라가 한 번 더 뛰어올랐다. 왕재수가 다시 잡지로 엉덩이를 때렸다.

 

 

개! 혼날 줄 알아! ”

 

“ 이이잉... 낑... ”

 

“ 야, 벨라 때리지 마! ”

 

“ 오냐오냐하니까 더 이러는 거잖아! 버릇 들여야 할 거 아냐. 야, 개! 누가 그렇게 이빨 드러내래! ”

 

“ 벨라! 이름 있잖아, 벨라! 왜 개라고 하는 거야! ”

 

“ 개니까 개라고 하지! 그리고 이거 수놈이라 했잖아! 벨라가 뭐야! ”

 

“ 에휴, 말을 말자. 하여튼 벨라 때리지 마. 저거 봐, 벌써 기죽었네. 꼬리도 내리고 눈치만 보잖아. ”

 

“ 조용해져서 좀 낫네. ”

 

 

베르닌은 혀를 차며 부엌으로 돌아갔다. 뭉근하게 끓인 보르쉬를 그릇 두 개에 옮겨 담고 스메타나를 한 스푼씩 얹고 파슬리를 뿌렸다. 자신이 먹을 소시지를 데치고 왕재수를 위해 메밀죽을 조금 데웠다.

 

 

“ 야, 와서 밥 먹어. ”

 

 

왕재수가 식탁 앞에 와 앉았다. 보르쉬를 천천히 먹었다. 메밀죽도 두어 숟가락 먹었다. 먹는 데 한 나절은 걸리는 것 같았지만 베르닌은 어제 일을 생각하면서 재촉하지 않고 꾹 참았다. 왕재수가 수프를 절반도 못 먹고 숟가락을 놓았을 때도 심호흡을 하며 잔소리를 삼켰다.

 

벨라는 왕재수에게 혼났던 것도 금세 까먹은 듯 다시 식탁 아래로 와서 간절한 눈으로 베르닌을 올려다보며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어댔다. 베르닌이 소시지 조각을 조금 잘라 주자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왕재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마침 알맞게 달여진 레몬생강차를 한 잔 가져다주었다. 이번만큼은 꿀을 두 숟가락이나 듬뿍 넣었다.

 

 

“ 이거 마셔. ”

 

“ 다 봤어, 꿀 잔뜩 넣는 거. 안 먹어. 알잖아, 나 몸매 관리 때문에 차에 설탕이나 꿀 안 넣는 거! ”

 

“ 지금은 꿀 먹어야 돼. 그래야 목이랑 폐에도 좋고 기침도 가셔. 어차피 너 지금 너무 살 빠져서 단 거 먹어도 돼. 몸이 종잇장 같잖아. ”

 

“ 너 자꾸 나보고 말랐다 하는데 진짜 나 벗은 거 안 봐서 그런 거라니까! 나 몸은 날씬해도 필요한 데는 근육 다 붙어 있고 엉덩이가 얼마나 탱글탱글하고 근사한데... 허벅지는 두툼... ”

 

“ 아니야, 거울 좀 봐! 이제 진짜 말랐다니까! ”

 

 

왕재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거울을 보았다. 과연 무용수 출신답게 정말 유연했다. 몸을 완전히 옆으로 틀어서 이리저리 확인했다. 손을 뻗어 몸 여기저기를 샅샅이 만져보기까지 했다. 베르닌은 어쩐지 좀 민망해서 고개를 돌리고 벨라의 앞발을 만지며 놀아주었다.

 

마침내 왕재수가 식탁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레몬생강차에 꿀을 두 숟가락 더 들이붓더니 채 식지도 않은 뜨거운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다가 기침을 했다.

 

 

“ 천천히 마셔야지. 꿀 그렇게 많이 넣으면 독해서 기침 나온다고. ”

 

“ 기침 하지 말라고 꿀 먹으라며! 왜 많이 먹었더니 기침 나오는 거야... ”

 

“ 너무 달아서 독하니까 그렇지! ”

 

“ 정말 엉덩이가 납작해진 거 같아... 나 정말 심각해? 그렇게 말라 보여? ”

 

“ 나한테 그런 거 묻지 마... 바이올린 아저씬 작고 마를수록 좋아한다며! ”

 

“ 아니야... 로만이 날씬한 거 좋아하긴 하는데 엉덩이는 탱글탱글해야 좋다고 했어... 나처럼... 어떡하지. 어떻게 다시 돌려놓지... ”

 

“ 나 그런 거 몰라... 난 사내자식 엉덩이에 관심 없어! 그런 얘기 하기도 싫고 듣기도 싫어... ”

 

“ 빨리 나아서 다시 운동하고 몸 만들어야겠다... ”

 

“ 그러니까 잘 먹어야지. 앞으로 내가 주는 대로 다 먹어!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자신의 미모가 손상됐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꿀꺽꿀꺽 차를 마시고는 베르닌이 까준 오렌지도 반쪽 먹었다. 평소 같았으면 싱싱하지 않다느니 역시 시골이라 수입산 과일은 기대하면 안 된다느니 했을 텐데 말없이 오렌지를 씹으면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속눈썹에 벌써 눈물이 두어 방울 그렁거리고 있었다.

 

우는 왕재수만큼 피곤한 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급하게 설거지를 하러 갔다. 벨라가 투닥투닥 쫓아왔다가 더 이상 나올 게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고는 도로 왕재수 곁으로 갔다. 그러다가 아까 잡지로 맞은 것을 떠올렸는지 슬슬 뒷걸음질쳤고 몇 분쯤 후엔 그 사실을 또 잊은 듯 다시 왕재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왕재수는 오렌지를 먹다가 그 꼴을 보고는 혀를 찼다.

 

 

“ 저거 진짜 멍청한 똥개야... 지능이 낮은가봐. 하긴 그러니까 그 추위에 얼음 위에 올라앉아 있었겠지. ”

 

“ 의사 선생님이 쟤 아직 6개월도 안 됐다고 했어. 어려서 그런 거야. 크면 말귀 다 알아먹을 거야. 훈련도 받고... ”

 

“ 아니야, 될 놈은 애초부터 싹수가 보여. 저건 그냥 바보야. 나 발레학교 때도 그랬어. 안 될 애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돼. 그냥 그런 거라고. ”

 

“ 너 천재라고 자랑하냐? 너 같은 놈은 노력하는 일반인의 맘 따위 몰라. ”

 

“ 그런 거랑 좀 틀려! 나도 노력했어. 엄청나게 노력했단 말이야! 어깨 부서졌을 때도 무대 올라갔어! 근데 노력 가지고 안 되는 것도 있단 말이지. 우리 극장에도 그런 애들 있는데 골치 아파 죽겠어. ”

 

그래도 옆에서 잘 끌어주란 말야! 너 천재라고 다른 애들 무시하지 말고. ”

 

“ 끌어줘서 되는 놈이 있고 안 되는 놈이 있어. 바로 이런 놈. 똥개...

 

벨라 한번만 더 모욕하면 너네 집으로 내쫓을 거야.

 

“ 칫, 자기 집에서 벌레 안 나왔다고 유세하고... ”

 

 

왕재수는 일어나서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스트레칭도 하고 거실을 돌아다니며 걷기도 했다. 하지만 몇 분 후 어지러운 듯 소파로 가서 철푸덕 주저앉았다. 벨라가 머뭇머뭇 소파 아래로 다가갔지만 뛰어오르지는 않았다. 소파 위에 잡지가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재수는 다리를 길게 뻗더니 심심한 듯 노래를 흥얼거렸다. 베르닌은 잠깐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알아먹을 수 없는 말이었다.

 

 

“ 그건 또 어느 나라 말이야? ”

 

“ 바보. ”

 

“ 내가 왜 바보야. 나도 학교 다닐 때 우등생이었어. 난 대학도 나왔는데! ”

 

“ 데이빗 보위란 말이야. ”

 

“ 그게 누구야... ”

 

“ 칫, 모스크바에서 대학 나왔다더니. 내가 아는 모스크바 애들은 파티 가면 보위 노래 틀어놓고 나랑 같이 놀았는데. 책상물림... ”

 

“ 그거 양키들 노래지? 그런 거 들으면 KGB에서 경고 들어와. 누적되면 자아비판도 해야 되고 청년재판에도 회부... ”

 

양키 아니거든! 영국 사람이거든!

 

“ 하여튼... 근데 노래는 좋네. ”

 

“ 당연하지! 그리고 내가 부르니까. ”

 

 

베르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왕재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를 계속 불렀다. 생각보다 노래를 잘 했다. 춤을 출 때나 노래를 부를 땐 그렇게 싸가지 없는 애송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벨라가 꼬리를 치더니 살며시 소파 위로 올라가서 왕재수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왕재수는 무의식적으로 잡지를 집어 들고 내리치려고 했지만 벨라는 눈을 사르르 감으며 황홀하게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노래가 후렴의 절정부에 이르렀을 때는 왕재수의 무릎에 머리를 비비면서 ‘이이잉 끼이잉’ 하고 조그맣게 콧소리를 냈다. 왕재수가 노래를 멈추자 벨라가 무릎을 살짝 들이받으며 ‘으응 으응 멍멍!’ 하고 앙탈 부리는 소리까지 냈다. 다시 노래를 부르자 놀랍게도 조용해져서 가만히 있었다.

 

 

노래를 마친 후 왕재수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벨라를 내려다보았다.

 

 

“ 똥개 주제에 웃겨, 노래도 듣고. ”

 

“ 벨라가 그 노래 좋아하는 거 같아. ”

 

“ 누구보다 낫네, 노래도 들을 줄도 알고. ”

 

“ 이상하다, 며칠 전에 내가 샤워하면서 노래 불렀을 땐 막 잡아먹을 듯이 짖었는데... ”

 

 

베르닌은 고개를 갸웃했고 뜻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강아지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는 생각이 왈칵 들었다. 차라리 고양이가 낫다 싶었다. 그래도 검정고양이 미셴카는 밥 주면 보답한답시고 쥐와 참새, 곱등이라도 물어다주는데...

 

그래도 왕재수의 무릎에 머리를 들이대고 재롱을 부리는 벨라를 보니 서운함이 눈 녹듯 스러졌다. 왕재수는 벨라가 얌전해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자기 노래를 알아줘서 기분이 풀려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개!’ 하고 소리 지르거나 잡지로 때리지 않았다. 대신 소파에 누운 채 노래를 몇 곡 더 흥얼거렸다. 크게 부르고 싶어도 목이 아파서 못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식으로 부르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직하고 조그맣게 불렀다.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노래였다. 베르닌은 설거지를 했고 왕재수가 먼지 때문에 폐렴이 도질까봐 걱정이 되어 물걸레로 청소를 하면서 노래를 들었다. 굉장히 듣기 좋았다. 꼭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처럼 들렸다.

 

 

청소를 하고 다 마른 빨래를 개켜 정리한 후 벨라와 좀 놀아보려고 거실로 돌아왔더니 강아지는 왕재수의 허벅지를 베고 잠들어 있었다. 왕재수도 소파에 길게 뻗어서 쌕쌕거리며 자는 중이었다. 베르닌은 내키지 않았지만 왕재수를 깨웠다.

 

 

“ 야, 너 약 먹고 자야 돼. ”

 

“ 머...거써... ”

 

“ 언제! ”

 

“ 청소...하때... ”

 

“ 침대 가서 자! ”

 

“ ㅇㄱㅎㅇㄴ... ”

 

 

베르닌은 왕재수를 깨우는 것을 포기했다. 성가신 이 녀석을 소파에 놔두고 자기 침대를 되찾을까 했지만 패딩 입히고 강 건너게 하다가 물에 빠져서 아픈 거라고 생각하니 또 가책이 들었다. 그래서 세상모르고 잠든 왕재수를 침실까지 안고 가서 침대에 눕혀 주었다.

 

그 와중에 깨어난 벨라가 왕재수의 무릎에 매달려 안 떨어지는 것에 베르닌은 다시 한 번 배신감을 느꼈지만 자신은 누구처럼 예쁘지도 않고 달착지근한 향내를 풍기는 것도 아니고 노래를 잘 하는 것도 아니니 포기하고 한숨을 쉬며 소파로 가서 잠이 들었다.

 

 

 

*    *    *

 

 

 

금요일에 베르닌은 며칠 동안 밀린 일들을 해치웠다. 금주의 왕재수 도청 보고서를 정리했다. 다행히 이번 주에는 왕재수가 물에 빠지고 폐렴에 걸려서 바이올린 깡패와 응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의로 삭제할 내용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오후 3시부터 감시분석부 사무실을 돌면서 개인별 업무계획서와 자기계발 계획서를 걷었다. 선배들이 아우성을 쳤다. 아직 멀었다는 사람들도 있고 쓸데없는 일을 시킨 스페호프에 대한 성질을 베르닌에게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거 어떻게 하는 거지? 이렇게 하는 거 맞나?’ 하고 물어보는 경우와 ‘자네가 그냥 대충 좀 써줘!’ 라고 반쯤 명령하는 경우가 제일 많았다.

 

 

예전 같았으면 일일이 다 설명해주거나 선배들의 계획서를 전부 받아와 대신 써줬겠지만 베르닌은 빨리 퇴근해서 벨라와 놀고 싶었기 때문에 딱 잘라 말했다.

 

 

국장이 전 직원 대상으로 각각 올해의 업무 계획에 대해 2장 이내로 작성할 것이며 이에 덧붙여 자기 계발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도 1장 이상 작성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써주면 필체가 들통 나 안 됩니다. 5시까지 수합해서 책상에 올려놓으라고 했어요. 안 되면 안 된 대로 그냥 걷어갈 거예요!

 

 

다들 아우성이었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막내 녀석이 벌써부터 못된 버릇만 들어서 선배들을 협박한다, 본시 서무란 것은 부서원의 모든 자료를 작성해주는 법인데 이게 무슨 짓이냐 등등 원성이 빗발쳤다. 베르닌은 마음 한구석이 매우 불편했지만 그래도 안 된다고 맞섰다.

 

 

안됩니다! 전 5시에 자료 수합해 제출한 후 경찰서에도 가봐야 한다고요! 4시 55분에 와서 자료 다 걷을 거예요. 그때까지 안 되는 분들은 국장에게 가서 개별 보고하세요! ”

 

“ 저런 싸가지 없는 놈을 봤나... 불여우랑 놀아나기 시작하더니 못된 짓만 배웠네! 요즘 젊은 것들은 참... 말세야 말세! ”

 

 

베르닌은 괴로운 마음으로 자리에 돌아왔다. 그냥 전처럼 선배들의 보고서를 다 써줄까 망설였다. 가뜩이나 국장에게 들들 볶이는 것도 힘든데 앞으로 선배들마저 자신을 괴롭히고 왕따 시키면 어쩌나 하고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4시 55분에 그는 부서원들의 계획서들을 모두 수합할 수 있었다. 개발세발 써 갈긴 계획서들이 태반이었지만 어쨌든 미제출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선배들은 베르닌에게 눈을 부라렸지만 어쨌든 업무계획서와 자기계발 계획서를 모두 내던졌다.

 

베르닌은 부서원들 성의 알파벳 순서대로 자료를 정렬한 후 종이 서류철에 끼워서 ‘감시분석부’ 라고 쓰고 부서원들 명단과 번호표를 첨부해 국장실로 갔다. 스페호프는 자료를 보더니 서류철을 펼쳐서 내용물을 읽기 시작했다. 맨 앞에 있는 것은 알파벳 순서가 제일 앞인 베르닌 자신의 보고서였다. 막 스페호프가 트집을 잡으려는 태세를 갖추기 직전 베르닌은 잽싸게 선수를 쳤다.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그럼 저는 월요일 1시에 1번으로 면담에 응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경찰서에 가봐야 해서요. 주말 잘 보내십시오! ”

 

 

스페호프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놀라운 표정에는 여러 가지가 함축되어 있었다.

 

 

1. 베르닌이 정시에 퇴근한다.

2. 국장이 자료를 펼쳤는데 지적사항을 말하기도 전에 퇴근 인사를 한다.

3. 베르닌이 주말 인사를 한다 = 베르닌이 주말에 출근하지 않는다!

4. 베르닌이 국장의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서둘러 국장실을 나가버린다!!!!

 

 

스페호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베르닌이 며칠 전 그 반동분자 불여우를 강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던 사실을 떠올리고 꾹 참았다. 어쨌든 고지식한 녀석이니 자신의 지령을 잊을 리 없으며 종국에는 그 녀석이 자신의 뜻대로 불여우를 처치해 줄 거라고 위안했다.

 

 

 

*     *     *

 

 

 

베르닌은 경찰서에 들렀다. 혹시 벨라를 찾으러 온 사람이 없었는지, 혹은 신고된 건 없었는지 물었다. 담당 경찰관은 고개를 저었다.

 

 

“ 다른 동네에서 왔나 봐요. 주인 못 찾을 거예요. 그냥 키워요. 아니면 유기견 수용소에 넘기든가. ”

 

“ 제가 전단지도 만들어서 붙였는데요... 그래도 연락이 없나요? ”

 

“ 바람이 많이 불어서 전단지 같은 건 다 떨어졌을 거예요. ”

 

 

베르닌은 경찰서를 나왔다. 별로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벨라를 자기 식구로 맞이해서 예뻐해 주며 키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집에 돌아오니 거실 소파에 비스듬하게 기댄 왕재수가 무릎에 벨라를 앉혀놓고 털을 빗겨주면서 한 손으로는 등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심지어 애들 동요까지 불러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베르닌이 들어오자 화들짝 놀라며 언제 그랬냐는 듯 벨라를 무릎 아래로 밀어버리고는 시치미를 뗐다.

 

 

“ 어, 너 빨리 왔구나. 아휴, 들어오면 왔다고 말을 해야지. 도둑놈인줄 알았네! ”

 

“ 너 벨라랑 놀아 주는 거야? 털도 빗겨주고... ”

 

내가 왜! 벼룩 있을까봐 검사한 거야! 세균 옮길까봐! ”

 

“ 어, 벨라가 어제보다 털이 더 하얗네. 목욕시켰어? ”

 

“ 때 타서 꼬질꼬질한 게 걸레 같았잖아! ”

 

“ 어제까지 엉덩이 끌고 다니면서 바닥에 비비고 긁더니 지금은 안 그러네. 목욕시켜서 그런가? 나도 시켜줬었는데 계속 그러더니. ”

 

“ 넌 이 똥개 항문낭 안 짜줬잖아! ”

 

“ 그게 뭐야? ”

 

“ 있어! 개 엉덩이에 있는 작은 주머니 같은 거. 목욕시킬 때 그거 꼭 짜줘야 돼. 그거 짜면 냄새나는 물이 찍 나오거나 끈적한 게 나와. 꼬박꼬박 짜줘야 위생을 유지할 수 있고 개도 거기 안 가려워 해. ”

 

“ 어, 너 개 안 키워봤다면서 어떻게 그런 전문적인 지식을 알아? ”

 

볼쇼이에서 마리야 누나가 개 키웠다고 했잖아. 맨날 개 얘기만 했다니까! 내 앞에서 그거 짜는 것도 몇 번 보여줬어. 우윽... ”

 

“ 그래도 너 기특하다. 지저분한 거 싫어하면서 그런 것까지 해주고... 너 사실은 벨라 귀여워하는 거였구나! ”

 

아니야! 똥개를 내가 왜! 자꾸 카펫에 엉덩이 끌고 다니니까 지저분한 거 묻힐까봐 찝찝했단 말이야! 그래서 욕실 가서 짜줬더니 더러운 거 나와서 막 묻고... 할 수 없이 씻긴 거야! 아 정말 싫다... 똥개... ”

 

“ 근데 털도 빗겨주고... 귀 뒤쪽 털은 리본으로 묶어주기까지 했네. 어, 이 분홍색 리본... 렐랴가 준 버찌잼 병에 달려 있던 거... 수입 리본이랬는데. 엄청 고급... 벨라를 이렇게 예쁘게 치장까지 시켜주다니. ”

 

“ 털이 내려와서 개 눈을 찌르고 있었단 말이야! 치장은 무슨! 나 예쁘게 꾸밀 기력도 지금 없는데 똥개를 내가 왜!

 

“ 어, 벨라 먹을 고기 다 떨어졌는데 밥그릇에 삶은 고기가 있네, 그것도 곱게 찢어서 무슨 레스토랑 요리처럼 세팅했네. 물그릇에 부어 놓은 건 심지어 우유네! 집에 우유 없었는데. 네가 벨라 주려고 사온 거야? 고기도 삶고? ”

 

무슨 똥개한테 주려고 우유를 사니! 나 원래 저녁엔 보습하고 피부 관리하려고 우유로 세수하는 거 몰라? 몸도 좀 나아진 거 같아서 바람도 쐬고 산책도 하려고 나간 김에 가게 가서 우유 사온 거란 말이야! 나 먹고 나 세수할 우유 산 거야! 근데 좀 애매하게 남아서 버리느니 아까우니까 똥개 물그릇에 부어놓은 거라고! ”

 

“ 그럼 고기는... 고기도 너 먹으려고 산 거야? ”

 

아니야! 이거, 이거... 어제 네가 끓여놓은 보르쉬... 아까 배고파서 데워먹었는데 목이 아직 부어서 고기는 먹기 힘들었어. 버리려다 이것도 아까우니까 그냥 멍멍이한테 준 거야! 음식물 쓰레기 치우는 셈 치고! ”

 

“ 근데 물에 싹 씻어줬는데? 개가 비트랑 야채 냄새 싫어할까봐 고기에서 수프 국물 다 씻어준 거 아니야? ”

 

아니야! 보르쉬는 빨간색이니까... 그 안에 든 고기도 빨간색이라서 기껏 씻겨놨는데 개털에 빨간 물 들까봐 씻어준 거야! 나 저 멍멍이한테 관심 없어! ”

 

“ 그랬구나, 넌 벨라한테 관심 없는데 그냥 어쩌다 보니 고기도 남고 우유도 남아서 준 거구나. 근데 고기 씻어서 밥그릇에 세팅까지 했으면 벨라 먹으라고 주지 왜 식탁 위에 올려놓은 거야? ”

 

“ 쟤 오후에 간식 먹었단 말이야. 저녁은 우리 먹을 때 줘야지. 아무리 똥개라도 계속 먹일 수는 없잖아! 돼지처럼 되라고! ”

 

“ 간식? 무슨 간식? 나 그런 거 준비 안 해놨었는데? ”

 

 

베르닌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소파 구석에 놓여 있는 노란색의 봉지를 발견했다. 겉에 ‘개 비스킷’이라고 씌어 있었다.

 

 

“ 어... 개 비스킷... 네가 사온 거야? 벨라 주려고? 너 진짜 세심하구나, 난 개 비스킷 같은 거 있는 줄도 몰랐어. ”

 

아냐! 우유 계산하는데 지폐밖에 없었단 말이야. 계산원이 잔돈 없으니 거스름돈 못 준다고 해서 열 받아서 눈에 띄는 거 산 거야! 돈 맞추려고! ”

 

“ 우유보다 개 비스킷이 더 비쌀 거 같은데... ”

 

“ 하여튼! 자꾸 말 시키지 말고 저녁밥 만들어줘! 나 잘 먹어야 돼, 그래야 약도 먹고 운동도 하고 몸도 다시 만들어서 탱글탱글한 엉덩이도 되찾고 로만한테 예쁨 받는단 말이야! ”

 

 

베르닌은 비죽비죽 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부엌으로 갔다. 이틀 전 왕재수가 남겼던 생선을 잘게 토막 내 우하 수프를 끓였다. 보르쉬 끓이고 남았던 양배추를 한 장 한 장 떼어내 데쳤고 거기에 삶은 감자를 곱게 으깨서 곁들였다. 버터는 소화가 안 될까봐 제외하고 대신 설탕과 소금, 식초를 약간 뿌렸다. 그리고 왕재수에게 맞추느라 이유식 같은 음식만 먹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햄과 치즈를 얹은 흑빵을 두 조각 추가했다.

 

 

식탁에 앉기 전에 왕재수가 삶은 고기가 담겨 있는 밥그릇을 내려주었다. 벨라가 혀를 빼물고 헥헥헥 하며 득달같이 달려와 코와 주둥이를 들이밀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호통치며 그릇을 치웠다.

 

 

개! 누가 그러랬어! 기다려!

 

“ 끼이이이잉... 낑낑... 끼낑... 아응 아응... ”

 

기다려!

 

“ 끼웅.... ”

 

 

벨라는 하염없이 슬픈 눈으로 왕재수와 밥그릇을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왕재수가 베르닌과는 달리 절대 밥을 안 줄 것처럼 굴자 체념하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왕재수가 밥그릇을 내려놓자 또 미친 듯이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왕재수가 또 그릇을 치웠다.

 

 

“ 안 돼! 기다리라 했잖아! 먹어 해야 먹는 거랬잖아! ”

 

“ 끼이잉... 끼웅... ”

 

“ 야, 그냥 줘... 벨라 아직 애기란 말이야. 눈 앞에 고기가 있는데 얼마나 먹고 싶겠어. ”

 

“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똥개가 더 똥개 된단 말이야! 개! 기다려!

 

다시 밥그릇을 내려놓자 놀랍게도 벨라가 콧잔등을 실룩거리고 훌쩍거리면서도 주둥이를 들이밀지 않고 기다렸다. 왕재수가 흡족한 듯 말했다.

 

 

“ 됐다. 먹어! ”

 

 

벨라가 미친 듯이 고기를 흡입하는 동안 베르닌은 고개를 저으며 투덜댔다.

 

 

“ 너 이제 보니 우리 국장이랑 좀 비슷한 거 같아. 말 못하고 힘 약한 짐승을 괴롭히고, 막 명령하고... ”

 

“ 개랑 인간이랑 같냐! 개는 서열에 따라 행동하는 동물이야! 지금 이런 거 똑바로 안 해놓으면 머리 위로 기어오른단 말이야! 너는 이미 저놈보다 서열도 아래야! ”

 

“ 저렇게 귀엽고 조그만 강아지한테 서열 운운하다니! 말도 안 돼! ”

 

“ 저 책에 다 나와 있단 말이야! ”

 

“ 무슨 책? ”

 

“ 저거! 네가 빌려다 놓은 거. 개 기르는 법! ”

 

“ 너 그 책도 읽은 거야? 벨라한테 잘 해주려고? ”

 

아니야! 아프니까 계속 누워 있어야 되고 심심했단 말이야. 재밌는 책 보려면 우리 집에 가야 하는데 바퀴벌레 때문에 못 가니까 할 수 없이 저거 본 거야! 옆에 굴러다녀서! ”

 

“ 어 그래... 그랬겠지.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네. 내가 아침에 출근하면서 너네 집 들러서 살충제 쳐놓고 왔어. 아마 이제 바퀴벌레 다 죽고 없을 거야. 밥 먹고 나랑 같이 올라가보자. ”

 

“ 으으, 싫어. 살충제 먹고 바퀴가 나와서 죽어 있으면 어떡해... 그 까맣고 빤딱빤딱한 배를 뒤집고 다리를 까딱까딱하고 있으면... 나 그거 못 버린단 말이야. 윽... 입맛이 딱 떨어지네. 아 괴로워. ”

 

“ 내가 치워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밥이나 빨리 먹어. 너도 너네 집에서 자는 게 더 편하잖아. 벨라도 안 괴롭히고, 침대도 여기보다 훨씬 넓고 푹신하고... ”

 

 

그러나 이미 왕재수는 바퀴벌레 생각에 입맛이 딱 떨어진 것 같았다. 생선 수프를 조금 뜨다가 감자 퓨레를 한 숟갈 먹고, 양배추를 한 장 먹은 후 크게 한숨을 쉬더니 몸서리를 쳤다. 안색이 안 좋은데다 두 눈에 먹구름이 가득한 것이 보나마나 머릿속에서는 ‘시골...’이란 한 마디가 무한 반복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베르닌은 호통을 쳤다.

 

 

빨리 먹어! 엉덩이 탱글탱글해져야 한다며! 어제보다 더 납작해졌어! 바이올린 아저씨가 싫어할 거야! ”

 

“ 아아... 너도 로만도 다들 너무해. 시골... ”

 

 

왕재수는 그래도 수프와 퓨레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데친 양배추도 두어 장 더 집어 먹었다. 먹고 나니 뺨에 혈색도 돌아오고 눈빛도 훨씬 나아졌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집으로 갔다. 왕재수는 쭈뼛거리며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 야, 넌 귀신 나오는 당직실에도 잘만 들어가더니 왜 너네 집에 못 들어가고 이러는 거야! ”

 

“ 바퀴벌레... ”

 

“ 없어! 없다니까! 살충제 쳐서 있었던 것들도 다 죽었어! ”

 

“ 네가 먼저 가서 확인해줘, 제발. ”

 

 

그래서 베르닌은 왕재수를 현관에 세워놓고 자기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벨라가 꼬리를 치며 쪼르르 따라왔다. 그는 살충제를 제일 많이 뿌려놨던 부엌으로 먼저 갔다. 바닥에 바퀴벌레가 두 마리 죽어 있었다. 휴지로 싸서 버렸다. 거실과 침실, 그리고 옷장을 넣어놓는 방으로 가보았다. 바퀴벌레는 없었지만 곱등이로 추정되는 벌레가 한 마리 죽어 있었다. 그것도 휴지로 싸서 버렸다. 결벽증에 가까운 왕재수를 위해 벌레 시체 있던 곳과 살충제 뿌렸던 곳을 물걸레로 닦았다. 휴지로 싼 벌레 시체들을 모조리 태웠다.

 

 

“ 야, 다 치웠어. 이제 아무 것도 없어. 들어와도 돼. ”

 

“ 벌레 많았어? ”

 

“ 아니, 두어 마리 있었어. 조그만 거. 약 먹고 죽어서 다 태워 버렸으니까 이제 괜찮아. 얼른 들어와. 아침에 난방도 돌려놔서 따뜻해. ”

 

“ 으응... ”

 

 

왕재수가 머뭇머뭇 들어왔다. 하지만 부엌 쪽은 차마 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벨라는 신이 났다. 처음 들어와 보는 왕재수의 집은 베르닌의 집보다 더 넓었고 근사했기 때문이다. 부엌도 들어가 보고 욕실과 거실도 탐험했다. 소파에도 기어 올라갔다. 평소 같았으면 ‘개!’ 하고 소리쳤을 테지만 왕재수는 신경이 곤두선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다닐. ”

 

“ 왜? ”

 

“ 이상한 소리 안 들려? ”

 

“ 무슨 소리? ”

 

“ 이 소리... 득득득 하고 벽 긁는 소리... ”

 

“ 난 안 들리는데. ”

 

“ 아니야, 들려. 침실 쪽에서 나는 거 같아. 벽지 긁는 소리 있잖아, 벌레 소리야. 벽하고 벽지 사이를 기어 다니면서 긁는 소리란 말이야. 여기 제일 처음 왔을 때 저 소리 듣고 얼마나 소름끼쳤는지 알아? 나... 정말... ”

 

“ 에이, 너 예민해져서 환청 듣는 거야. 아무 소리도 안 들려. ”

 

“ 하지만... ”

 

 

그때였다. 벨라가 갑자기 ‘알알알알알!’ 하고 짖더니 침실로 득달같이 내달았다. 전광석화처럼 달려가 벽 쪽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 순간 베르닌도 뭔가 시커먼 얼룩 같은 것을 발견했다. 왕재수가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벨라가 투다다닥 하며 앞발을 들어 그것을 내리쳤다. 벽을 뿔뿔뿔 기어가던 바퀴벌레가 툭 떨어졌다. 벌레가 미처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벨라가 다시 앞발로 일격을 가했다. 그러더니 왼쪽 발로 몸통을 누르고 오른쪽 발로 마구 벌레를 내리쳐 다리를 하나하나 떼어내는 것이 아닌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던 왕재수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베르닌의 등 뒤에 숨어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벨라의 현란한 사냥 기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리 절반을 떼낸 후 벨라가 바퀴벌레를 입으로 가져가려고 했기 때문에 그제야 정신이 든 베르닌이 달려가 벌레를 휴지로 감싸 빼앗았다.

 

 

“ 그만, 벨라! 먹으면 안 돼! ”

 

“ 왈왈! ”

 

“ 이거 더러워, 먹으면 안 돼! ”

 

“ 알알알알! ”

 

 

장난감을 빼앗겨 서운하다는 듯 벨라가 짖어댔다. 베르닌은 급하게 벌레를 휴지로 싸서 태워버렸다. 돌아와 보니 왕재수가 물수건으로 벨라의 주둥이와 앞발을 닦아주고 있었다. 다 닦아준 후에는 품에 꼭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퍼부었다.

 

 

잘했어, 개야! 잘했다, 아 착하다! 기특하다! 너 살충견이구나! 개야, 진짜 장하다. 귀엽다, 우리 개!

 

“ 이름 있잖아. 벨라. ”

 

개야, 강아지야, 멍멍아, 잘했다! 우유에 고기 말아줄게!

 

 

왕재수는 바퀴벌레가 사라진 자기 침실에서 자겠다고 했다. 하지만 또 벌레가 나올까봐 무서우니 그날 하룻밤만 개를 놔두고 가면 안 되느냐고 부탁까지 했다. 베르닌은 벨라를 빌려주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 단잠을 잤다.

 

 

 

*    *    *

 

 

 

토요일에는 기온도 오르고 햇살도 따스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벨라를 데리고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스타브로프의 병원에 다녀온 왕재수가 원반 한 개를 들고 뒤늦게 합류했다.

 

 

“ 그건 뭐야? ”

 

“ 원반. 똥개 훈련시키게. ”

 

“ 똥개 아니야, 어제 벌레 잡는 거 봤잖아. 벨라 원래 사냥개인가봐. ”

 

“ 사냥개는 무슨, 체구도 작은데. 그냥 잡종이라니까. 하여튼 개니까 원반 던지면 물어오겠지 뭐. 야, 개! 물어와! ”

 

 

왕재수가 원반을 휙 던졌다. 그러나 벨라는 바퀴벌레에게 달려들던 순발력과 공격성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원반에는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왕재수에게 폴짝 뛰어올라 다시 뽀뽀를 퍼부었다.

 

 

“ 으윽, 이 똥개! 역시 멍청해! 원반 물어오라니까! ”

 

 

원반을 주워온 베르닌이 이번에는 자신이 던져보았다. 벨라는 원반이 날아가든 말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계속 왕재수 곁을 맴돌며 꼬리를 치고 재롱을 부렸다.

 

 

둘은 스무 번쯤 돌아가며 원반을 던지고 소리치며 벨라를 몰아댔지만 강아지는 결국 단 한 번도 원반을 물어오지 않았다. 지친 왕재수가 베르닌의 패딩 점퍼 소매를 붙잡으며 숨을 헐떡였다.

 

 

“ 똥개... 멍청이... 나 이제 집에 가고 싶어. 너무 힘들어, 저 멍청한 멍멍이 훈련시키다가 나 쓰러지겠어. ”

 

“ 웅... 벨라는 이런 쪽으로는 재능이 없나봐. 그래도 얼굴은 귀여우니까... ”

 

“ 귀엽긴 뭐가! 그냥 시골 멍멍이... 그래도 벌레는 잡을 줄 아니까 밥 축내기만 하는 건 아니니 참는다. ”

 

“ 벨라는 내가 키우는 데 네가 뭘 참아. ”

 

“ 어쨌든! 저게 자꾸 나한테 엉기잖아. ”

 

너 솔직히 말해, 벨라 귀엽지? 어젯밤에 침대 위에서 네 옆에 재워줬지? ”

 

아냐! 내가 왜 멍멍이를 침대 위에 재워! 거긴 나랑 로만이랑 꼭 껴안고 사랑을 불태우는 우리만의 공간... ”

 

“ 너 아침밥 먹으러 왔을 때 다 봤어, 머리카락에 개털 붙어 있었어. ”

 

아냐! 그럴 리가 없어!

 

“ 네 머리 새까맣잖아! 벨라 털은 하얘서 금방 눈에 띄는 걸. ”

 

“ 똥개... 또 나 잘 때 올라왔겠지. ”

 

 

 

둘은 벨라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왕재수는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원반 때문에 너무 흥분해서 기력을 소진했는지 자기 집까지 가지도 못하고 베르닌의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벨라는 그 즉시 왕재수의 품으로 파고들어 촉촉하게 젖은 콧등을 그의 뺨에 비벼댔다. 왕재수는 귀찮다고 투덜댔지만 강아지를 떠밀지는 않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베르닌은 혹시 국장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 정시퇴근하고 일은 잔뜩 쌓아놓고 왔으니 국장이 트집을 잡으려고 전화를 한 것 같았다. 떨리는 가슴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 여보세요... ”

 

다행히 국장은 아니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베르닌은 잠시 전화에 귀를 기울였고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지금 오시면 돼요. 여기 주소 아시죠? 네, 전단지에 있는 그 주소. ”

 

 

전화를 끊은 후 베르닌은 왕재수 쪽으로 돌아섰다.

 

 

야, 기적이야! 벨라 주인이 나타났어. 내가 붙인 전단지 봤대. 잃어버린 지 열흘 가까이 돼서 한참 찾아다녔대. ”

 

“ 그래서? ”

 

“ 지금 오라고 했어. 구시가지 쪽에서 전화했다니까 아마 20분 내로 올 거 같아. 정말 다행이다, 벨라야... 주인이 진짜 반가워하더라. ”

 

“ 주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요즘 사기꾼이 얼마나 많은데. ”

 

“ 아니야, 강아지 특징 얘기하는 거 보니까 딱 벨라야. ”

 

“ 전단지에 사진도 넣고 특징도 썼을 거 아냐. 그거 보고 누가 못 읽어. ”

 

“ 그런가... 그래도 진짜 주인 같았어. 엄청 흥분했더라고. 일단 와보면 알겠지. 우리 벨라, 주인 그리웠지? 아휴, 근데 너무 섭섭하네. 주인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어. 야, 너도 그렇지? 벨라랑 정들었잖아. ”

 

 

왕재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 내가 왜. 난 똥개 귀찮아. 빨리 치워버렸으면 좋겠네. ”

 

“ 넌 왜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니. 에휴, 하여튼 손님 오니까 집 좀 치워야겠다. 빗자루가 어디 갔더라... ”

 

 

 

베르닌은 열심히 집을 치웠다. 청소를 다 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달려 나가 문을 여니 30대의 갈색 머리 남자와 귀엽게 생긴 금발의 어린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는 기껏해야 예닐곱 살 밖에 안 돼 보였다.

 

 

“ 안녕하세요, 전화 드린 사람인데요... 개 잃어버린... ”

 

“ 아, 들어오세요. 전 다닐이라고 해요. ”

 

“ 예... 전 료샤라고 해요. 얘는 제 아들 레냐예요. 사실은 아들내미가 강아지 주인이에요. 엄청 예뻐했는데 며칠 전에 산책 나갔다가 잃어버려서 얼마나 울고불고 했는지... 강아지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

 

“ 그랬군요. 레냐, 많이 걱정했겠구나. 강아지 금방 데려올게요. 먼저 차 한 잔 하고 계세요. 레냐는 우유 줄게. ”

 

“ 초코우유 있어요? ”

 

“ 어쩌지, 초코우유는 없는데... ”

 

“ 그럼 그냥 우유 먹어줄게요! ”

 

 

베르닌은 료샤와 레냐를 거실 소파로 안내했다. 차 한 잔과 우유 한 컵을 가져다 준 후 벨라를 데리러 갔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벨라가 보이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고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도 없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벨라가 왕재수 뒤를 따라간 것 같았다. 전화를 했다. 왕재수가 받았다.

 

 

“ 야, 혹시 벨라 거기 있어? ”

 

“ 응. 나 따라왔어. ”

 

“ 좀 데려올래? 주인 왔어. ”

 

“ 사기꾼 아니야? ”

 

“ 아니야, 아빠랑 귀여운 남자애야. 벨라 데리고 지금 빨리 와. ”

 

“ 알았어. ”

 

 

잠시 후 왕재수가 들어왔다. 거실로 곧장 가더니 소파에 앉아 있는 료샤와 레냐를 꼭 범죄자를 훑듯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린 레냐가 먹다 남은 우유가 담긴 컵을 왕재수에게 내밀었다.

 

 

“ 우와, 진짜 잘생긴 형아다. 이거 마셔. ”

 

“ 어른한테 네가 먹던 거 주는 거 아니야, 레냐야. 죄송합니다. ”

 

 

료샤가 아들을 저지하며 사과했다. 왕재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아무리 봐도 벨라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왕재수를 쿡 찔렀다.

 

 

“ 야, 벨라는? ”

 

“ 가만 있어봐. 이 사람들이 진짜 주인인지 어떻게 알아! ”

 

“ 저, 개를 보면 알 것 같은데요... ”

 

“ 당신, 이름이 뭐죠? ”

 

“ 료샤요. ”

 

“ 개를 어디서 잃어버렸죠? ”

 

“ 어, 저... 어디였더라. 레냐, 어디서 잃어버렸니? ”

 

“ 놀이터. 우리 집 앞 놀이터. ”

 

“ 그 ‘우리 집’이 어딘데요! 주소 대봐요! ”

 

“ 아... 저는 레냐랑 같이 안 살아서요. 레냐는 엄마랑, 그러니까 제 전 마누라랑 사는데... 거기 주소가, 아 그렇지. 아브리코트 거리...

 

“ 주소 가지고 횡설수설하는 게 수상해. 거리 이름에 어째서 살구가 들어가는데! 그리고 애가 엄마랑 산다면 엄마랑 왔어야지 왜 당신이랑 같이 오는데! ”

 

“ 어... 그건요. 이라는, 그러니까 제 전 마누라, 애 엄마는 개를 너무 싫어해서... 그놈의 똥개 잃어버렸으니 잘됐다고 하는 마당이라... ”

 

“ 개의 인상착의를 말해봐요! ”

 

“ 하얀색이고요, 귀가 처졌고 주둥이가 짧고 눈이 까맣고... ”

 

“ 그런 거 말고! 그건 얘가 붙인 전단지 사진에 다 나와 있잖아요! 그 개만의 신체적 특징 말이야! 키, 몸무게, 다리 길이, 보폭, 달리기 기록, 털이 눕는 방향, 흉터나 얼룩 유무, 항문낭의 생김새!

 

 

베르닌은 기절초풍했다. 왕재수를 쿡 찔렀다.

 

 

“ 야, 너 뭐해! 그런 것까지 어떻게 다 알아! 지금 무슨 취조해? 우리 취조실에서도 그렇게는 안 해! ”

 

시끄러워! 주인이면 그 정도는 알아야지! 빨리 말해 봐요!

 

 

척 봐도 어리숙해 보이는 료샤는 당황하면서도 기억을 짜내려고 애썼다.

 

 

“ 어... 키는... 이만큼... 엄청 작으니까. 몸무게는 한 3킬로 되려나. 다리는 이 정도. 보폭까진 모르겠는데... 빨빨거리고 뛰어다니니까 이 정도? 그치, 레냐야? ”

 

“ 아빠, 보폭이 뭐야? ”

 

“ 아... 넘어가자. 달리기는, 시간 안 재봐서 모르겠는데 먹을 거 보면 엄청 빨라요. 털이 눕는 건 잘 모르겠네. 털이 어쨌든 복슬복슬해요. 흉터, 얼룩... 그건 모르겠는데... 항문낭은 다른 개들이랑 비슷하게 생겼... ”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걸 보니 당신 사기꾼이 분명해! 어린애까지 동원해서 거짓말을 하다니! 썩 꺼져!

 

 

왕재수가 서릿발처럼 차갑게 소리치더니 홱 돌아섰다. 료샤는 주눅이 들어서 더듬거렸다.

 

“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제가 키우는 개가 아니라서 그래요. 전 작은 개는 안 좋아해서, 특히 멍청한 개는 안 좋아해서요. 그러니까 전 크고 늠름한 장군 타입의, 족보 있는 셰퍼드를 키우는데...

 

“ 누가 셰퍼드 물어봤어요? 썩 나가요! ”

 

“ 아빠, 저 형아 왜 화내? 우리 뜨보록 왜 안 데려다줘? ”

 

“ 뜨보록? 그건 또 뭐야! ”

 

“ 강아지 이름이요... 흰색이라 레냐가 뜨보록이라고 지었어요. ”

 

흥, 뜨보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야, 이 사람들 완전 사기꾼이야! 내보내! ”

 

“ 너 왜 그러니... 주인 맞는 거 같은데. 일단 벨라 데리고 와봐. 얼굴 보면 알 거 아니야. 보여주지도 않고 무조건 우기면 어떻게 해... ”

 

뭘 데려와! 사기꾼한테 왜 개를 보여주니!

 

“ 저 사기꾼 아니에요. 뜨보록 찾으러 온 건데... 개를 주운 건 이 분 같은데 왜 당신이 이렇게 절 쥐 잡듯 추궁하는지 모르겠네요. ”

 

시끄러워요! 얜 순진해서 아무 말이나 다 믿는다고요! 사기꾼이 분명하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요! 안 그러면 신고할 테니까! ”

 

“ 으앙, 아빠... 이 형아 미워... 우리 뜨보록 자기가 키우려고 막 우리 쫓아내.. 앙앙... 뜨보록, 앙앙... ”

 

아 시끄러워, 울지 마! 난 애들 우는 게 제일 싫어! 빨리 집에 가!

 

엉엉, 뜨보록... 앙앙... 뜨보로오오옥!!!

 

 

그때였다. 현관문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킹킹, 헥헥, 헐떡헐떡, 그리고 투닥투닥 소리가 났다. 베르닌이 문을 열어주자 벨라가 우다다다 달려왔다.

 

 

알! 알알알알알알! 멍멍멍! 왕왕왕왕왕왕! 앙앙앙앙앙!

 

 

시끄럽게 우짖으며 벨라가 곧장 레냐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미친 듯이 머리를 처박고 비벼대고 레냐의 얼굴을 침 범벅이 되도록 핥았다.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었다.

 

 

뜨보록! 뜨보록! 으앙, 어디 갔었어! 앙앙! 뜨보록!!

 

 

베르닌은 료샤와 레냐, 벨라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누가 봐도 벨라가 뜨보록인 게 분명했다. 벨라는 레냐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낑낑거리고 있었다. 료샤가 손을 내밀자 마구 핥았지만 곧 다시 레냐에게로 돌아갔다. 베르닌과 왕재수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베르닌은 헛기침을 했다.

 

 

“ 그러니까, 얘 이름이 뜨보록이었군요. 전 하얀색이라 벨라라고 부르고 있었어요. 그래도 주인을 찾아서 다행이네요. ”

 

“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우리 애가 열흘 동안 얼마나 울고불고 개를 찾았는지... 진짜 다행이네요.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

 

“ 보답은요. 벨라가 주인을 찾았으니 그걸로 충분해요. 얼른 데리고 돌아가세요. 레냐야, 앞으로는 강아지 소홀히 하면 안 돼. 알았지? ”

 

“ 네! 고맙습니다! ”

 

 

베르닌은 레냐에게 왕재수 쪽을 가리켰다.

 

 

“ 저 형한테도 인사하렴. 저 형아가 뜨보록 구해 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굉장히 잘해줬단다. ”

 

싫어! 저 형아는 미워! 뜨보록 자기가 키우려고 막 우리 아빠한테 뭐라 했어! 막 안 주려고... ”

 

“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저 형아는 개 별로 안 좋아해. 그냥 주인 아닌 사람들이 뜨보록 데려가면 안 되니까 걱정해서 그런 거야. ”

 

그런 거야? 그럼 무지 고마워요.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료샤와 레냐의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휙 돌아서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벨라와 작별 인사를 했다. 벨라는 베르닌의 뺨에 코를 비벼대며 뽀뽀를 해주었지만 금방이라도 레냐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마침내 료샤와 레냐가 벨라, 아니 뜨보록을 안고 떠났다.

 

 

 

베르닌은 잠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며칠 동안 정들었던 벨라가 떠나니 무척 허전하고 서운했다. 하지만 그래도 벨라가 진짜 주인을 찾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자기가 키웠어도 사무실에 데려가지도 못하니 벨라는 외로웠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레냐가 개를 잃어버려서 얼마나 애가 탔을지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짠했다. 여러 모로 다행이었다.

 

 

잠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재수의 집으로 가보았다. 문이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감시요원이었으므로 열쇠를 꺼내 문을 땄다.

 

 

“ 야, 나야. 들어간다. ”

 

 

대답이 없었다. 혹시 바이올린 아저씨가 왔나 싶어 경계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은 비어 있었다. 침실로 가보니 왕재수가 몸을 웅크린 채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자나 싶었지만 잘 보니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 어... 야, 너 아파? 다시 아픈 거야? ”

 

가... 너네 집.

 

“ 목소리는 왜 그래... 폐렴 도진 거 아니야? ”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베르닌은 걱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왕재수의 어깨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왕재수가 소리 없이 흐느껴 울고 있었다.

 

 

“ 어... 너 많이 아프구나... 병원 갈래? ”

 

“ 아니야. 안 아파. 나 좀 놔둬. ”

 

“ 하지만... ”

 

가라니까!

 

“ 너 왜 그래... 혹시 벨라 때문에 그래? ”

 

아냐! 그깟 똥개 내가 뭐! 나쁜 똥개... 어떻게 그래! 거들떠도 안 보고... 윽... 으흑... 예쁘고 좋은 냄새 난다고 엉겨 붙을 땐 언제고... 윽... 끅... ”

 

 

왕재수가 서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심히 당황했다.

 

 

아니, 야... 너 지금 벨라한테 삐친 거야? 진짜 주인이 왔으니 당연하잖아. ”

 

“ 누가 뭐래! 어차피 잘됐어! 난 똥개 진짜 싫어. 세균덩어리... 멍청하고, 원반도 못 물어오고. 지저분... 시끄럽고. 으흑... 엉엉... 어엉... 멍멍이... ”

 

 

왕재수가 우는 동안 베르닌은 가만히 기다렸다. 마침내 제풀에 지친 왕재수가 울음을 그치자 머뭇거리며 물었다.

 

 

“ 사과파이 먹을래? ”

 

“ 줘. ”

 

“ 차도 마실래? ”

 

“ 설탕 타지 마. ”

 

“ 엉덩이 아직 납작한데... ”

 

“ 타... ”

 

 

그래서 베르닌은 뜨거운 차에 설탕을 두 숟가락 듬뿍 넣은 후 사과파이와 함께 왕재수에게 가져다주었다. 왕재수는 차를 마시고 사과파이를 한 판 해치운 후 베르닌에게 그만 가라고 했다. 그래서 베르닌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베르닌은 다시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벨라가 없으니 정시퇴근도 주말 휴일도 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토요일 밤인데도 불구하고 월요병이 엄습해 왔다. 게다가 월요일에는 국장과의 일대 일 면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숨만 푹푹 쉬다 불편하게 잠이 들었다.

 

 

 

 

 

 

FIN

- 2015.2.8 -

   

----

 

 

그렇게 벨라 이야기들이 끝난다 :)

스페호프가 요구하는 업무/자기계발 계획서는 모두 올 초 내가 실제로 겪은 일을 소재로 하고 있다 ㅠㅠ

 

..

 

눈치챈 분들도 있겠지만 벨라의 모델은 내 친구 료샤의 7살 아들 레냐가 키우는 잡종 똥개 뜨보록이다. 그래서 여기에도 등장시켰다 :) 원반 안 물어오는 것부터 멍청한 것, 그러나 얼굴 예쁜 것 등등... 뭐 개 종류는 좀 다르지만. 벨라의 외모는 10편에서 얘기했듯 내가 키웠던 강아지 토리에게서 따왔다. 실제의 뜨보록은 비글과 발바리를 섞은 것처럼 생겼다. 흰색이지만 귀와 눈가에 조그만 갈색 얼룩이 있다.

 

제목인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이란.. 레냐가 사는 동네인 '아브리코트' 거리의 아브리코트가 살구란 뜻이다. 이 이름의 유래는... 예전에 내가 지금 쓰는 가브릴로프와 미샤가 등장하는 본편 구상하면서 거리 이름 만들어 낼때 원어민인 료샤에게 미샤가 사는 거리인 '그루셰바야 거리' 이름이 어떠냐고 물어봤는데(그루샤는 노어로 서양배 란 뜻이다. 미샤가 사는 거리는 오래전 배나무가 우거졌던 곳이라 그렇다 ㅋㅋ) 그때 료샤가 막 웃으면서 이상하진 않지만 배나무 거리라니! 그냥 살구나무 거리가 어떠냐, 자긴 살구가 배보다 좋다..라고 했던 적이 있어서 여기 등장시킨 것이다.

 

어쨌든 료샤와 레냐 덕에 10~11편이 나왔으므로 보답(..인가 ㅋㅋ)의 뜻에서 막판에 둘을 등장시켰음. 작가로서의 양심에 따라 료샤에게 얘기해줬다. 자세한 내용들을 설명하긴 힘들어서 그냥 개와 너희 둘이 찬조출연한다고 했더니 료샤는 매우매우 좋아했음.. (이렇게 어리숙하게 나온 걸 알면 기절초풍할 거야 ㅠㅠ)

 

..

 

벌레 잡는 살충견 벨라 얘긴 전부 내가 키운 강아지 토리의 실화이다. 옛날에 살던 집이 지상 1층이고 낡아서 벌레가 무지 많았는데 토리가 진짜진짜 벌레를 잘 잡았다! 그래서 내가 살충견이라 부르며 이뻐했다.

왕재수가 벨라를 '개!', '강아지!' 하고 부르는 건 사실 내가 토리를 부르던 여러 애칭 중 하나이다. 말 안 들으면 '개!' 하고 혼내고 귀여울 땐 '개야~~~' 하고 이뻐해주고 '강아지야~' 라고도 불렀음 :) 닭살 돋지만... 개 한번 키워보라고요!! 그렇게 되나 안되나!! 엄청 이쁜 내 강아지 내 새끼... 그립다 토리야..

 

..

 

중간에 왕재수가 부르는 노래는 영국 가수 데이빗 보위의 노래들이다. 본편 우주에서도 미샤는 당시 소련에서는 금지되었던 서방 세계의 락 음악이나 영화들, 문학들을 좋아해서 지하출판이나 암시장, 비밀클럽 등등에서 그것들을 항상 입수하고 듣고 공유한다. 가끔은 영문이나 불문으로 된 텍스트들을 번역해 공유하기도 한다.

젠더와 성적 억압에 저항하는 인물, 그리고 기존 성적 질서에 이반하는 퀴어 캠프의 일원답게 미샤는 데이빗 보위를 좋아해서 본편 시리즈중에서도 보위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지나가듯 한번 넣은 적이 있다. 제목을 명기하진 않았지만 그때 그 애가 불렀던 건 보위의 the man who sold the world였다.

 

이 11편에서 왕재수가 베르닌과 벨라에게 불러주는 노래는 아마도 보위의 초창기 노래들, 그러니까 지기 스타더스트 이전이나 그 당시의 노래들인 space oddity나 life on mars, 아마도 the man who sold the world도 있었을 것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유튜브에서 데이빗 보위와 노래 제목으로 검색해보세요. 나도 아주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노래들이다 :) 더 맨 후 솔드 더 월드는 내가 arts 폴더에 너바나 커트 코베인 버전으로 영상도 올렸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250

 

..

 

왕재수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로만 코즐로프를 자신에게 못 오게 한 이유는 농담처럼 서술되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꽤 심각해질 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소련 시절 이성애에 반하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었고 걸리면 성도착으로 체포될 수 있었다. 수용소에 가기도 했다. 본편 우주에서야 좀 진지하게 이 문제를 언급하기도 한다만 이건 서무 시리즈니까 그냥 넘어가자..

 

..

 

시리즈는 12편의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로 이어진다. 벨라가 나왔던 에피소드들과는 느낌이 꽤 다른 얘기다. 어제 13편 완결하고 거기 이어지는 14편 쓰는 중. 이거 다 쓰고 나면 제발 본편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

 

그럼 12편에서... 댓글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

 

 

:
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