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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0. 25. 04:58

레닌그라드 아이 about writing2024. 10. 25. 04:58

 

 

 

며칠 전 발췌했던 <밤, 레닌그라드>의 후반부 일부. 미샤가 레닌그라드, 자신의 도시에 대해, 여름과 겨울에 대해, 극장과  파트너, 친구 혹은 애인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글쓰기 자체에 대해, 페테르부르크에 대해, 그리고 또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다기보다는 썼다. 이 글은 손으로 쓴 글이었다. 손이 머리보다 먼저 움직이는 글. 

 

 

다닐로프는 이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극장 행정감독(나는 이 글들에서 당시의 키로프 극장을 실제와는 약간 다르게 재구성했고 운영진도 바꾸었다). 말썽꾸러기 미샤 때문에 항상 골치아파하는 사람이다(동시에 많이 아끼긴 하지만) 지나는 종종 등장했던 미샤의 발레 파트너이자 좋은 친구. 안드레이는 트로이의 본명이다. 트로이에 대해서는 예전에 여러번 발췌했다. 발췌문은 접어둔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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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 성당의 열주 사이사이에 까마귀와 갈매기가 숨어 있다. 비둘기들은 공원 한가운데 분수 앞으로 모여든다. 분수 앞 벤치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아이스크림 콘 부스러기나 흑빵 귀퉁이를 던져주는 아이들과 봉지를 뜯어 모이를 수북하게 부어주는 노파들이 있다. 도처에 비둘기들이 가득하다. 참새들도 끼어든다.

 

 

벤치에 앉아 책을 읽을 때면 분수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튀면서 햇살이 반사된다. 돔 크니기의 날개 달린 거대한 지붕, 네프스키 대로를 지나가는 트롤리버스들, 바다를 뒤집어놓은 듯한 새파란 하늘이 물보라와 무지개 사이로 어른거린다.

 

 

이런 날씨에는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글자들은 산란하는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분수를 한 바퀴 돌고 한때 사원이었던 박물관 건물의 거대한 기둥들을 따라 대각선으로 걷는다. 숲속을 걷듯. 이쪽은 볕이 들지 않고 훨씬 습하고 어둡다. 까마귀가 날아가지도 않고 석조 기둥 아래 앉아 검은 깃털을 다듬는다. 갈매기는 좀 더 부산하다. 다가가면 곧장 회색 반점이 박힌 하얀 날개를 홱 펴고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운하를 지나 네바 강으로 향할 것이다. 강물 위 저 멀리까지 나아가면 날개를 수평으로 편 채 거의 움직이지도 않는 척하며 조용히 활강할 것이다.

 

 

여름에는 모든 것이 빛과 색채들 뒤로 숨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밤도 없다. 부드러운 보랏빛 석양과 엷은 진홍빛 여명뿐. 그 두 개는 사실 하나의 빛, 하나의 하늘에 붙여진 다른 이름들일 뿐이다. 그 빛들이 네바 강과 운하들을 비추고 도시를 공중으로 부양시킨다.

 

 

. 습기. 안개. 바람. 그리고 겨울이 온다. 길고 무겁고 조용하게. 빛은 아주 짧게 머문다. 얼음 위로 눈이 쌓이고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리는 햇살이 투명하고 차갑게 번쩍였다 사라진다. 운 좋은 날이면 우리에게 주어진 낮의 전부, 통틀어 하루 네 시간 동안 파란 하늘과 칼날 같은 햇살 아래 꽁꽁 얼고 온통 지저분해진 포석을 밟으며 운하를 따라 산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건 정말로 드문 행복이다. 기나긴 겨울 동안 그런 날은 거의 오지 않는다. 여름과 빛, 겨울과 어둠. 우리의 도시는 너무나 극단적이라 포용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크류코프 운하와 니콜스키 사원은 온통 푸르고 하얗다. 우리의 소중하고 소중한 극장처럼. 창백한 에메랄드 청록색 극장과 정연하게 매달려 있는 램프들. 여름이면 오페라 가수들은 연습실 창문을 열고 노래를 부르고 나는 동료들과 함께 옥상으로 올라가 춤을 추곤 했다.

 

 

극장에 들어갔을 때 나는 사도바야 거리의 좁은 공동 아파트에서 동료들과 함께 살았다. 일 년 후 지나와 나는 극장에서 십 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를 받았다. 다닐로프는 나를 따로 불러서 당에서는 우리의 결혼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만면에 미소를 띤 채.

 

 

3년 후 지나가 결혼해서 바실리예프스키 섬으로 떠난 후에도 나는 계속 이곳에 머물렀다. 볼쇼이에 이적했던 일 년 동안에도 집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집은 주소지일 뿐, 나는 도처에서 살았다.

 

 

한때 내가 가장 많은 밤을 보낸 곳은 안드레이의 조그만 아파트였다. 제르진스키 거리, 그러나 우리는 옛날 이름인 고로호바야를 선호했다. 한쪽에는 황금빛 해군성 첨탑이, 다른 한쪽에는 모이카 운하, 새빨갛게 칠해진 아름다운 교각과 사도바야 거리가 이어지는 곳. 걸어가도 극장까지는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운하를 따라 걸어가면 금세 도착해버린다. 그게 아쉬워서 운하 대신 뒷골목들을 빙글빙글 돌면서 한껏 시간을 늘리곤 했다.

 

 

밤에, 극장을 나와서 모이카 운하 대신 삭막한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를 따라 안드레이의 집까지 걸어오는 길이면 종종 나는 쇠락에 대해 생각한다. 어둠 속에서 건물들은 온통 그림자처럼 검은색으로 휩싸여 있고 보이지 않는 건너편에서 운하가 흘러간다. 소리는 없다. 그 고요한 어둠 속에서 나는 검은 물을 흘려보내는 무한하고 평행한 파이프를 떠올린다. 그럴 때면 깊고 조용한 공포 속에서 포석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한다. 세찬 비가 내리거나 눈보라가 칠 때면 달릴 수 없다. 버스를 타기 때문이다. 창 너머로 불빛이 거의 보이지 않는 거대하고 무관심한 건물들이 스쳐 지나갈 때면 두려워서 고개를 돌리거나 마주 앉은 승객과 차장 아주머니를 바라본다. 버스는 5분 만에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를 지나친다. 그러면 곧 웅장한 이삭 성당이 나타나고 조명 속에서 번쩍이는 묵중한 황금빛 돔과 청동 천사상들이 그 은밀한 공포를 한 꺼풀 덮어준다. 나는 빛 속으로 도피한다. 버스에서 내리면 쫓기듯 빠르게 안드레이의 아파트까지 달려간다. 그럴 때면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는다.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한 번에 두 개씩, 세 개씩 층계를 뛰어오른다. 마음먹는다면 절반쯤은 한 번에 뛰어오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몸이 재산인 무용수이니 꾹 참는다. 그 자제심이 공포를 앞선다. 마침내 계단을 모두 올라오면 숨을 고르고 고개를 뒤로 젖힌다. 어깨와 허리를 펴고 익숙한 냄새를 들이마신다. 오래된 아파트에 배어 있는 발효되기 직전의 양파 껍질 냄새, 눅눅해진 먼지, 뜨뜻하고 들큰한 수프 냄새, 사람들의 흔적들. 나는 잠잠해지고 한없이 부드러워진다. 나는 안드레이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열쇠가 없더라도 문을 열 수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안드레이가 자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나는 그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문을 열고 소리 없이 발끝으로 선 채 천천히 들어간다. 발레리나들도 나의 스텝에 놀랄 것이다. 안드레이가 자고 있지 않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그가 식탁 앞에 앉아 책을 읽으며 강의 준비를 하거나 뭔가를 쓰고 있으면 더욱. 그는 첨탑처럼 키가 커서 머리 위로 셔츠를 뒤집어쓸 때면 팔이 끝없이 뻗어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나를 위해 창가에 있던 소파를 치웠다. 나는 창틀을 붙잡고 스트레칭을 하기도 하고 작은 동작들을 연습하기도 한다. 이따금 어깨 너머로 식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안드레이가 보이면 기분이 조금 더 좋아지고 몸이 더욱 가벼워지면서 살짝 뛰어오르기만 해도 오랫동안 하늘에 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뛰지는 않는다. 안드레이의 거실은 좁고 바닥과 천장 모두 낡았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텅 비었고 동시에 온전하게 꽉 차 있다. 빛이고 어둠이다. 실체 없는 그림자이다. 모든 것이 번쩍이는 투명한 섬광 속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돌아온다. 거대하고 무관심하고 부드럽게. 숨을 수 없다. 하지만 드러나지도 않는다. 밤도 없고 낮도 없다. 무거운 물결들로 가득한 네바 강과 검게 내려온 하늘을 구분할 수도 없다. 나는 춤을 추고 뛰어오르고 공중을 돌고 두 팔을 날개처럼 퍼덕이며 계속해서 움직인다. 계속해서 돌아온다. 떠날 수 없다. 우리는 등록과 말소를 이해하지 못한다.

 

 

 

 

 

 

 

...

 

 

사진은 캡션에 있는대로 @paveldemichev 나도 카잔 성당이나 모이카, 발샤야 모르스카야 운하와 그외 미샤가 이야기하는 여러 곳들 사진을 많이 찍었지만 이 노트북에는 별로 없네. 그리고 이분 사진이 근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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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췌한 미샤의 독백 중 한밤중과 파이프,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와 쇠락에 대한 부분에 대해 다샤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었다. 이 글 전문을 보여드린 건 다샤님 뿐이었다. 우리는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인물들과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 얘기했었다. 쓴다는 것은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우리는 쓰는 행위를 통해 각자가 하나의 별로 존재하게 된다는 얘기를, 오글거리는 로맨틱한 기분에서가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얘기했었다. 그래서 이 글을 다시 들춰볼 때면 마음이 저릿하다. 그리고 저 파이프와 쇠락에 대해-비록 그 부분이 사실은 오래전부터 나의 마음 속에 있었던 내밀한 이야기였고 그래서 나도 미샤를 통해 저 말을 내뱉었을 때 괴로웠지만- 실제로는 나보다도 더욱 진지하고 괴롭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다샤님의 마음을 떠올리면 고통스럽고 깊은 미안함이 든다. 다샤님은 종종 '미샤가 어딘가 조금이라도 손상되고 쇠락한다는 생각을 하면 견디기가 힘들어요' 라고 했었다. 나와는 좀더 다른 방식으로 느끼셨고 나는 그 순간에도 그 마음을 상당 부분 이해하거나 상상할 수 있었지만 차마 더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
Posted by liontamer
2024. 10. 20. 04:36

커피와 차 about writing2024. 10. 20. 04:36

 

 

 

나는 이 글을 2020년 초부터 4월까지 썼다. 그때 나는 매우 바쁘게 일하고 있었고 몇년 간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19년에 아주 짧은 단편을 썼고(그건 알리사가 화자로 등장하는 '핀란드 우하' 라는 글로 여기에도 전문을 올린 적이 있다), 이후 아주 집중해서 이 글을 썼다. 내게 있어 모든 글쓰기는 내밀한 그 무엇이지만 이 글은 특히 더 그랬다. 예전에 이 글을 쓰는 동안 이 폴더에 가끔 메모를 발췌한 적이 있다. 

 

 

단편의 제목은 '밤, 레닌그라드' (Ночь, Ленинград) 였다. 시간적 배경은 1981년 9월. 정치범으로 체포되었다가 수용소에서 약물쇼크를 일으키고 사경을 헤매다 가석방되어 지방 소도시 가브릴로프로 유배 결정된 미샤가 호송 과정에서 레닌그라드에 24시간 동안 들르게 되는 이야기인데, 이 사람을 비롯한 이 글들의 우주에서 처음으로 미샤가 1인칭으로 이야기하며 그것도 내밀한 독백들과 환상을 뒤섞고 또 뒤섞는다. 아마 이후에도 나는 이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게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썼었다. 이 글에서 미샤는 환각과 꿈, 기억, 마음과 감각의 미로에 빠져 있는데 실질적인 플롯의 축은 이 사람이 레닌그라드의 자기 아파트로 돌아와 오랜 애인이자 주치의인 유라와 재회하고 돌봄을 받고 계속해서 이게 꿈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다. 

 

 

아래 발췌한 내용은 전반부. 미샤가 레닌그라드로 호송되는 차 안과 휴게소 식당에서 옛날을 잠깐 회상한다. 미샤의 아버지는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인텔리겐치야였다가 정부의 우주정책에 반하는 농담 때문에 체포되어 미샤가 어릴때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는 미샤를 데리고 본격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글을 쓰기 시작할 때(더 오래전에 썼던 짧은 단편 두엇은 제외하고) 바로 그 농담과 죽은 아버지로 시작했었다. 미샤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이 가브릴로프 이야기의 패러디 픽션인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도 몇 번 나온다. 특히 파인애플에 대해서. 그리고 가장 최근에 쓴 단편 <4월의 로켓>에서 미샤는 마냐와의 대화 도중 자기 아버지와 수용소에 대해 언급한다. 그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다. 

 

 

여행을 와서 새 글을 시작하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에게 있어 여행은 글을 쓰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다.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보고 느끼고, 혹은 쉬면서 쌓는 시기이다. 그날그날의 순간과 행위들을 '기록'하는 시기이지 무언가를 '창작'할 수 있는 시기는 아니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항상 바란다. 

 

 

이 글을 발췌하게 된 건 이번 여행에서 내가 생각지 않게 커피를 마시고 있기 때문이다. 커피와 차.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쓰는 것도 읽는 것도, 기억하는 것도 사실은 언제나 다른 무언가들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층들 사이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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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계속해서 흔들렸고 그건 구름 위를 나는 느낌이 아니라 여름 궁전으로 향하는 작은 배를 타고 있는 기분이었어. 잠시 난 몸을 일으켜 보려 했어. 물살이 튀어 창문을 때리고 갈매기들이 잿빛 날개를 펼치고 솟구쳐 날아가는 걸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어, 모범적인 호송 요원이 내 몸에 안전벨트를 채워놨거든. 벨트를 풀어보려고 했는데 몸을 움직이자 현기증도 났고 어차피 창문은 온통 검게 칠해져서 아무것도 안 보일 테니 헛수고란 생각이 들었어.

 

 

어느 순간 차가 멈추었어. 도착한 건 아니었어, 그저 휴게소였을 뿐이야. 요원이 내 벨트를 풀어주고는 먼저 나갔어. 문을 닫지도 않고. 내가 도망치면 어쩔 셈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사실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도 없었지. 끝도 없이 뻗어 있는 도로 한가운데 그 휴게소 하나만 섬처럼 떠 있었으니까. 게다가 알고보니 뒷자리에 요원 두 명이 더 있었어. 차에서 내리니 문 앞에는 운전기사가 서 있었어. 정장을 차려입고 그럴싸한 권총을 차고 있었어. 장시간 운전을 하면서 그런 옷차림에 총까지 차고 있으면 걸리적거리지 않는지 궁금했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니 도살자의 차를 운전하던 놈들도 모두 똑같은 모습이었어.

 

 

허름한 휴게소 식당에서 요원들은 교대로 식사를 했어. 기사는 나에게 살구 주스와 너무 익어서 푹 퍼진 메밀죽, 초콜릿 푸딩이 담긴 쟁반을 가져다줬어. 친절도 하시지. 난 주스만 조금 마셨어. 역겹도록 달았고 걸쭉했어. 하긴 난 살구 주스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 엄마는 내가 아빠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했어. 아빠는 살구와 복숭아를 싫어했고 커피에는 우유와 설탕을 넣었고 차는 마시지 않았어.

 

 

엄마와 처음 만났을 때 아빠는 뜨거운 차가 담긴 양철 컵을 건네줬다고 했어. 조그맣게 착착 접힌 갱지 주머니를 찢어서 설탕을 부어줬다고, ‘이건 지금 먹으면 탈이 날 거야라면서 비스킷은 주지 않았다고 했어. 봉쇄 시절이었고 엄마는 며칠 동안 굶은 상태였지. 아빠는 전방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하려고 시내 병원으로 가던 길이었어. 엄마는 너무 굶주리고 아파서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고, 아빠의 이름조차 묻지 않고 양철 컵을 꼭 쥔 채 차를 정신없이 마셨지. 나중에는 갱지 주머니를 펼쳐 거기 묻어 있던 설탕 알갱이도 모조리 핥아먹었어. 그러고 나서야 엄마는 정신이 들었고, 차를 다 마셔버려서 미안하다고 말했어. 아빠는 웃지도 않고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지. 괜찮아, 난 차를 마시지 않거든. 안 좋아해. 난 커피를 좋아해.

 

 

그래서 엄마는 그게 정말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대. 나중에, 한참 후에야 아빠가 커피만큼 차도 좋아한다는 걸, 차에는 꿀보다는 설탕 넣는 걸 더 좋아하고 레몬이 있을 땐 두 개씩 넣는다는 걸 알았다고 했지. 하지만 아빠는 엄마랑 있을 땐 차 대신 커피를 마셨다고 했어. 봉쇄가 끝난 후에도, 렌필름 윗분들과의 인맥 덕에 물건들을 많이 얻어온 후에도, 줄을 조금 덜 섰을 때에도, 다른 집보다는 먹을 것들이 더 있었을 때도. 집에 찻잎이 가득 든 깡통이 두 개나 있었을 때도. 엄마가 그냥 차 마시지 그래, 사실은 좋아하잖아. 전쟁도 끝났는데라고 했을 때 아빠는 또다시, 웃지도 않고 아주 진지하게 차는 당신 거, 커피는 내 거. 그럼 모든 게 완벽하니까 그걸로 좋은 거야라고 대답했어.

 

 

난 아빠랑 같이 차를 마셔본 적이 없어. 커피도. 난 너무 어렸으니까. 아빠는 나에게 우유와 주스를 줬고 아이스크림을 사줬고 얇게 자른 흰빵에 연유를 발라줬지. 내가 많이 아플 때면 밀수를 하던 방송국 동료를 구슬려서 파인애플 통조림을 가져왔어. 미제였어. 그건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가장 시원하고 가장 달콤했지. 열이 금세 내리곤 했어. 내가 파인애플을 한 조각 먹고 깡통에서 따라낸 설탕물을 마시면 아빠는 내 이마를 닦아주면서 이제 땀이 났네, 다 나았구나라고 말하곤 했지. ‘아빠도 파인애플 먹어라고 하면 아빠는 웃으면서 아빠는 파인애플 안 좋아해. 엄마는 좋아하니까 가서 같이 먹으렴하고 대답했지.

 

 

이제 알아, 아빠는 살구와 복숭아는 정말로 좋아하지 않았어. 알레르기가 있었으니까. 차는 사실은 좋아했지만 엄마를 위한 장난으로 남겨두었어. 우리 아빤 그런 사람이었던 거야, 농담을 진짜 삶으로 만들었어. 사랑하는 여자를 매번 웃겨주고 싶다는 이유로 차 마시는 걸 포기했어. 정작 자기는 웃지도 않으면서 농담을 했지. 그런데 파인애플은 모르겠어, 엄마도 물어본 적이 없고 나도 물어본 적이 없어.

 

 

아빠가 가버린 후 엄마는 커피를 마셨고 차는 친구들과 있을 때만 마셨어. 내가 살구 주스가 담긴 컵을 밀어내면 야단치지 않고 아빠 닮아서 그렇구나라고 말했지. 초콜릿이 씌워진 에스키모 아이스크림을 고를 때도, 보르쉬를 마지막까지 흑빵으로 닦아 먹을 때도. 아빠 닮아서 그렇구나. 난 너무나도 궁금해, 아빠는 나에게도 그렇게 말했을까? 차는 네 거, 커피는 내 거. 그럼 모든 게 완벽하니까 그걸로 좋은 거야.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아. 차가 훨씬 좋아. 설탕도 넣지 않아. 레몬도 넣지 않아. 아플 때만 두 개 넣지. 뜨거운 차. 양철 컵. 레몬. 살구 주스. 파인애플 통조림. 하지만 아빠는 끝내 모르겠지. 내가 차를 어떻게 마시는지. 내가 아빠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처럼. 영원히.

 

 

 

 

 

 

 

 

 

...

 

 

봉쇄 시절은 2차 대전 때, 독일의 레닌그라드 봉쇄 시기. 미샤의 부모님은 위에서 미샤가 회상한 것처럼 그 시기에 처음 만났다. 아버지인 세르게이는 군사작전본부에서 일했고 어머니인 율리야는 아직 어린 소녀였다. 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따로 쓰고 싶었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다 ㅜㅜ

 

 

... 맨 위 사진은 후라칸커피 인스타에서. @huracancoffee 좀 심플한 사진을 올려보고 싶었는데 여기 원두 봉지가 좀 나와 있네 ㅎㅎ 아래 사진은 @_tyutyu_nai 두 사진 모두 너무 세련된지라 저 당시 소련 사람들이 마셨던 커피와는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그냥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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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역시 올해 초에 마친 90년대 단편 <4월의 로켓> 중에서 발췌. 후반부의 이야기이다. 마냐는 미샤를 자기 방에 데려와 따뜻한 허브차를 끓여준 후 배가 고파서 빵에 마가린을 발라서 먹는다. 바똔은 러시아식 흰빵, 바게트랑 조금 비슷한데 그만큼 맛있지는 않다. 더 크고 두툼하다. 흘롑은 흑빵. 그러다가 마냐는 미샤에게도 빵을 한 조각 주면서 어떤 부체르브로드 샌드위치를 좋아하는지 궁금해 한다. 
 
 
제냐, 겐카는 모두 이 90년대 이야기의 주요 인물인 게냐(본명 예브게니)의 애칭. 리디야는 게냐의 옛 여자친구. 애칭은 리다. 전에 ‘구름 속의 뼈’ 중편 발췌문에 몇 번 등장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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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가 다시 기침을 조금 했어요. 나는 그에게 라마를 바른 바똔을 한 조각 건네주면서 말했어요.
 
 
“ 뭘 좀 먹으면 나을 거예요. ”
 
 
그는 빵을 받아서 먹었어요. 잼은 올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라마를 발라준 빵을 먹고 내가 끓여준 차를 마시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어요. 미샤는 빵을 손으로 잘라서 차랑 번갈아 가며 한 입씩 먹었어요. 툴라 비스킷은 먹는 척만 했었는데 마가린 바른 빵은 곧잘 먹네요. 예의를 차리는 건지 정말 입에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신사적인 건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것 아니겠어요?
 
 
“ 그래요, 맛있네요. 이건 당신 말대로 흘롑보다는 바똔에 더 어울리겠어요. 더 부드러우니까요. 바똔도 정말 오랜만에 먹어요. ”
 
“ 그럼 아침엔 뭘 먹어요? ”
 
“ 그냥 부체르브로드랑 차 한 잔 정도. ”
 
“ 부체르브로드에는 뭘 얹어 먹나요? 난 항상 그런 게 궁금하더라고요. 사람들이 빵에 뭘 얹어서 먹는지. 수프는 뭘 좋아하는지. 커피에는 크림을 넣는지 안 넣는지. 홍차에는 설탕을 몇 숟가락 넣는지. 잼은 딸기랑 사과랑 나무열매 중에 뭐가 좋은지. 나는 정통파예요, 부체르브로드는 역시 햄이랑 오이가 제일 맛있거든요. 그리고 흘롑보다는 바똔이 더 좋아요. 어릴 때부터 흘롑의 그 시큼한 맛이 싫었거든요. 엄마한테 맨날 혼났어요. 입만 고급이라고, 흰 빵 타령한다고. ”
 
“ 난 흘롑이 더 좋던데. 하긴 어릴 때부터 세뇌돼서 그런 건지도 몰라요. 선생님이 바똔이랑 버터는 먹지 말라고, 홍차에 설탕도 넣지 말라고 했거든요. 무용수는 살이 찌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곧이곧대로 맨 흑빵에 치즈만 얹고 버터랑 잼은 안 바르고 차에도 아무것도 안 넣어 마셨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 친구들이랑 동료 무용수들은 버터에 설탕에 케이크까지 먹을 건 전부 다 먹고 있더라고요. 근데 난 습관이 돼서 지금도 아침엔 흑빵에 치즈랑 사과만 얹어서 대충 먹어요. 누가 해주거나 사 먹을 땐 연어 올린 게 좋지만. 난 게으르거든요, 늦게 일어나니까 아침은 잘 안 먹을 때도 많고. ”
 
“ 난 발레리나들만 다이어트하는 줄 알았는데. 그럼 제냐도 그렇게 먹어요? 그 키에 그렇게만 먹고 어떻게 버틴담, 젊은 남자애가. ”
 
“ 우리 때나 그랬지 요즘 애들은 안 그런 것 같아요. 우리 무용수들도 보니까 이것저것 다 먹어요. 겐카는 시리얼을 더 좋아하더라고요. 아마 걔는 라마도 좋아할 거예요. ”
 
 
나는 미샤와 제냐가 함께 장을 보는 모습을 상상했어요. 제냐는 라마와 시리얼, 우유랑 초콜릿, 스메타나와 콜라, 햄과 다진고기, 달걀과 잼, 감자, 양파, 당근, 절인 오이, 깡통 연유 뭐 그런 걸 사겠지요, 나처럼. 그 옆에서 미샤가 흘롑과 사과랑 치즈를 담고 훈제연어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려고 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요. 이 사람이 헐어빠지고 접은 자국이 가득한 슈퍼마켓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거든요. 제냐는 그런 봉지에 우유랑 시리얼 같은 걸 담아서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몇 번 봐서 괜찮은데. 하긴 제냐는 스물도 안 됐을 무렵부터 봤고 이 사람처럼 우아하고 부티 나는 타입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제냐는 내가 주는 담배를 받아서 피운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차는 리디야가 왔을 때랑 미샤가 왔을 때 두 번 끓여다 줬지만 예의상 조금 마셨지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라마 바른 바똔은 먹겠지요, 하지만 내가 발라주는 건 받아먹지 않을 거예요. 그럴 일이 아예 없을 테니까요.
 
 
미샤는 빵을 아주 천천히 먹었어요. 그 한 조각을 꼭 빵 한 덩어리를 먹듯이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었지요. 하지만 보기 싫게 깨작거리는 건 아니었어요. 그건 꼭 아까 그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말보로 한 갑 전체처럼 피운 거랑 비슷했어요. 그러자 나는 다시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어요. 말보로는 다 피웠지만 사르바르가 잊고 간 터키산 담배가 침대 귀퉁이에 놓여 있었어요. 담배를 한 개비 꺼내자 미샤가 다시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어요. 역시 한 방에 불꽃이 확 일었어요.

 
 
 
 
.......
 
 
 
 


마냐가 발라주는 ‘라마’는 저 당시 엄청나게 인기 많았던 마가린. 너도나도 저것을 빵에 발라 먹었다. 나랑 쥬인도 매일매일 바똔에 저 라마를 발라 잼을 척척 얹어서 먹으며 좋아했다 :) 이 발췌문 앞에 저 라마에 대한 대화가 따로 나온다. 그래서 이 단편을 마치고 제목을 정할 때 ‘라마’를 제목에 넣을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말보로, 허브차, 라마’ 뭐 이런 식으로. 이 단편에서 중요한 소재 세 가지라서. 근데 이런 명사 열거는 블로그 메모나 잡문 제목으로는 좋지만 이 단편 제목으론 딱히 마음에 안 들어서 4월의 로켓으로 정했다. (이 제목도 100% 맘에 드는 건 아니어서 나중에 고칠지도 모른다)
 
 
부체르브로드는 흔히 말하는 오픈 샌드위치인데 소련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러시아에서 많이 먹는다. 마냐의 말대로 가장 기본은 햄이나 칼바사와 오이 조합이고 미샤가 먹고 싶어하는 연어 올린 건 조금 고급 조합. 사과랑 치즈는 자주 먹는 조합은 아니다만 무용수 출신인 미샤가 좋아한다. 예전에 썼던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 미샤의 코믹 버전인 왕재수가 이걸 먹곤 함. 흑빵에 올린 게 제일 클래식이다만 버터에 연어알 듬뿍 올려주는 건 바똔에 올리는 게 더 어울린다. 이것도 좀 호화스러운 버전. 극장에 가면 카페에서 샴페인과 이 연어알 부체르브로드를 판다. 뭐 요즘이야 원체 먹을 게 풍요로우니 이런 게 호화스럽고 그렇지도 않다만. (물론 제일 호화스러운 건 캐비어 얹은 것)
 
 

 

 
 
이게 햄 오이 부체르브로드.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 단추 베르닌이 좋아했다. 좋아한 나머지 모스크바 에피소드에서는 KGB 비밀요원 일류샤가 만들어준 햄 오이 샌드위치도 아무 의심없이 덥석 받아먹는다. 
 
 

 
 
이게 연어 얹은 부체르브로드. 근데 좀 촌스럽고 소련이나 90년대 러시아 느낌 나는 부체르브로드 사진 찾아서 올리려 했는데 구글링하니까 요즘 나오는 이쁘고 맛있는 이미지들이 판을 치네 ㅎㅎㅎ 그나마 햄 오이 부체르브로드는 좀 촌스러운 걸 찾아서 올린 건데. 맨 위 사진은 오늘 조식에서 내가 먹은 것. 흰빵, 흑빵. 미니 사과. 치즈, 잼, 스메타나 다 가져와서 찍었는데 이 글에서 마냐랑 미샤가 보통 먹는 거랑은 역시 안 비슷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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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24. 10. 7. 04:49

마냐와 마리야 루스타모브나 사이 about writing2024. 10. 7. 04:49

 







내가 가장 최근에 썼던-그리고 완성했던- 글은 올해 1월 중순에 마친 <4월의 로켓>이라는 단편이다. 단편치고는 좀 길고 중편이라기엔 짧은데, 이 글은 그전까지 썼던 게냐와 미샤의 1990년대 페테르부르크 3부작의 남매 같은 소설이다. 왜 남매 같은 소설이냐고 한다면, 이 글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게냐가 아니라 그의 이웃인 마냐이기 때문에. 그리고 마냐는 게냐가 1인칭 화자로 등장했던 3부작의 마지막 중편인 <구름 속의 뼈> 후반부에 아주 잠깐 등장했던 인물이지만 나름대로 그 소설의 주제와 이미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었기 때문에. 앞의 3부작에서는 미샤가 마사지사 루키얀이나 무용수이자 연인인 게냐의 눈으로 묘사될 뿐 직접적으로 앞에 나서지 않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마냐와 딱 둘이서 등장해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에.


 
이 소설은 아주 즐겁고 쉽게 썼다. 종반부를 쓸 때 너무 바쁘고 가정사와 회사 일 등 여러 가지로 힘들어서 기력이 좀 모자라긴 했지만. 쓰는 즐거움이 큰 소설이었다. 이 글을 마친 후 집안일도, 회사 일도 더욱 힘들어지고 머릿속이 산란해져서 집중이 되지 않았고 새로운 글 자체를 시작할 수 없어 무척 우울하고 속상했다. 뭔가를 쓰고 있다는 것과 쓰지 않고 있다는 것 사이에는 크나큰 간극이 있다. 이것은 잘 써지는지, 재미있는지 아닌지와는 또 다른 얘기다. 본질적으로 쓰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읽는 인간, 이야기하는 인간, 행동하는 인간 이전에 쓰는 인간인 것 같다. 그래서 뭔가를 쓰고 있지 않을 때는 충만함이 사라지고 텅 비고 어딘가 불행하다. 이건 기본적으로 소설에 대한 얘기로, 에세이나 잡문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여행을 나와 있고 잠시 일에서 떨어져 있으니 다시 뭔가 쓸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새로운 뭔가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쓰다가 중단해둔 글도 두엇 있고 쓰고 싶었던 글도 있지만 아직 손과 가슴에 와닿는 것이 없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래 발췌한 에피소드는 이 소설의 초반. 동거하는 포주 사르바르에게 두들겨맞고 기분을 잡친 채 아파트 옥상에 담배를 피우러 올라왔던 마냐는 옥상에서 춤을 추고 있는 미샤를 발견한다. 일년 전쯤 미샤가 게냐에게 들렀을 때 마냐가 그를 발견하고 ‘저 사람 누구야, 너무 멋있어. 섹스 사말룟이야, 로켓이야!’라고 외치고 할머니 풍의 허브차를 끓여준 적이 있다. 이 도입부에서도 마냐는 그의 이름이 기억 안나서 로켓, 섹스 사말룟(사말룟은 비행기란 뜻이다)이라고 부르고 있다. 특히 로켓. 이 이야기는 로켓과 불꽃놀이, 담배와 차,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글에 언급되는 ‘제냐’는 게냐의 다른 애칭이다. 바냐는 게냐의 동생으로 사이가 좋지 않다. 마냐와는 이따금 자는 관계. 예전에 이 소설 중간중간을 조금씩 발췌했던 적이 있다. 바냐에 대한 언급, 그리고 이 파트 이후 중반부에서 함께 말보로 담배를 피우는 마냐와 미샤에 대한 이야기 등등.
 


마냐는 마리야의 애칭이다. 마리야 루스타모브나는 이름과 부칭을 함께 부르는 것이다. (루스탐의 딸 마리야) 보통은 존대를 할 때 부칭을 쓴다.


 
사진 출처는 캡션에 적혀 있듯 pavel demichev. 사실 이 발췌문과 딱 들어맞는 사진은 아니다만(마냐는 외진 곳에 살고 있으므로 옥상에 올라간들 저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지는 않을테니) 그래도 마음에 들어서 올려본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주머니에 들어 있는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여전히 숨을 죽인 채 문가에 서 있었어요. 로켓은 난간에 기댄 채 어두컴컴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어요. 아까보다 더 차갑고 센 바람이 불어왔고 로켓이 다시 기침을 했어요. 추워서 그럴지도 몰라요. 재킷도 없이 긴 소매 셔츠만 걸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하얀 날개처럼 보였던 거겠죠. 그때 로켓이 움직였어요. 다시 춤을 추려나 했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잠깐 허리를 굽히는가 싶더니 난간 위로 훌쩍 올라가는 거예요! 난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질렀어요. 그 사람이 뛰어내리려는 줄 알았거든요. 나도 모르게 옥상을 가로질러 난간 쪽으로 달려갔어요. ‘여보세요!’인지 ‘잠깐만요!’인지 하여튼 뭐라고 외치면서 두 팔을 쭉 뻗어서 로켓을 와락 붙들었어요. 너무 다급하게 낚아챈 나머지 한 손으로는 그 사람 셔츠 자락을 잡았지만 다른 손은 허리 아래, 아니, 엉덩이인가 허벅지 어딘가를 움켜쥐었던 것 같아요. 아니에요, 맹세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요! 어떻게든 떨어지지 않게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거든요. 우리 아파트는 이래 봬도 10층 건물이에요. 옥상에서 떨어지면 즉사라고요. 사실 벌써 몇 명이나 떨어져 죽었어요. 마약 하다가 떨어진 놈도 있고 자살한 계집애도 있고. 사르바르 말로는 총 맞아 죽은 놈도 하나 있었대요.
 


로켓이 어찌나 빠르게 몸을 홱 틀면서 뒤를 돌아보았는지 내가 쥐고 있던 옷자락이 뜯어질 뻔했어요. 정말 깜짝 놀란 표정이었어요. 아 맙소사, 그때 난 깨달았어요. 이 사람 그냥 난간에 걸터앉아 바깥 구경을 하려던 거였나 봐요! 내가 바보처럼 굴었던 거예요. 게다가, 게다가 난 아직도 그 사람 옷이랑 허리 아래, 아니, 엉덩이인가 허벅지인가 하여튼 몸 어딘가를 손가락이 부러져라 꽉 움켜쥐고 있었거든요. 로켓도 한동안 뻣뻣해진 채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어요. 눈이 동그래진 걸 보니 정말 놀랐던 것 같아요. 근데 나도 놀라고 창피해서 정신이 없었어요. 바보, 얼간이, 천치! 안 그래도 제냐가 얘길 했을 거잖아요. 자길 덮치려고 안달이 난 여자가 불쑥 나타나 엉덩이를 움켜잡고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할 거예요! 아, 그러고 보니 아직도 내 손이 거기에! 난 급하게 손을 떼면서 변명했어요.


 
“ 아, 아.... 미안해요, 떨어지는 줄 알고... ”
 


로켓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아니, 이 민망한 상황에서 내가 그렇게 말을 했으면 뭐라고 대꾸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괜찮다고 하거나, 성을 내거나. 하여튼 반응을 해줘야죠. 근데 그 사람은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아까처럼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래도 동그래졌던 눈이 원래대로 돌아온 걸 보니 놀랐던 건 가라앉은 듯했어요. 대신 한 대 맞은 것처럼 얼굴이 확 굳어졌다가 금세 가면을 씌워놓은 듯 무표정해졌어요. 차라리 계속 눈이 동그래진 채였으면 좋았을걸. 아니면 화를 내면 나았을 텐데. 난 너무 창피해서 마구 횡설수설했어요.
 


“ 그러니까, 담배 피우러 나왔는데. 있잖아요, 그 난간 위험하거든요. 금도 가고... 바람 불어서,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정말 무슨 일 나는 줄 알고, 지난주에도 601호 류샤가 거기서 떨어져... ”


 
갑자기 로켓이 웃었어요. 멍해져 있다가 뒤늦게 정신이 든 것 같았어요. 아니, 정신을 차린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나였겠죠. 그 사람이 웃으니까 정말 눈이 부셨거든요! 말문이 탁 막히더니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어요. 그제야 내가 그 사람이랑 거의 가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손만 뗐을 뿐 몸은 꼼짝달싹 못 하고 그대로 굳어져 있었던 거예요. 급하게 뒤로 물러섰을 때 로켓이 말했어요.
 


“ 고마워요, 마리야 루스타모브나. ”


 
세상에,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잖아! 딱 한 번 봤는데. 그런데 어떻게 내 부칭까지 알고 있는 걸까요? 내가 말했었나? 그랬을지도 모르죠, 하여튼 그때 난 완전히 만취한 여자처럼 굴었거든요. 게다가... 이렇게도 정중하다니. 레닌그라드에 올라온 이래 부칭까지 불려본 적이 처음인 것 같아요. 난 그냥 마냐인데. 마리야나 마샤라고도 안 해요. 다들 마냐라고 해요. 아빠만 날 만카라고 불렀죠. 이렇게 깍듯하게 마리야 루스타모브나라고 하다니. 난 당황하면서도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이게 뭔가요. 왜 이러는 거죠? 난 급하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바보처럼 실실 웃으면서 말했어요.
 



“ 그냥 마냐라고 불러요. ”


“ 아, 맞아. 그때도 그렇게 얘기했는데 잊었네요. ”


 
로켓이 눈을 감았다 뜨더니 다시 살짝 웃었어요. 그러자 그 사람 이름이 퍼뜩 생각났어요.
 



“ 미샤. 맞죠? 날 기억하고 있었네요? ”


“ 기억하죠. 차도 같이 마셨는데. ”



 
그리고 툴라 비스킷. 아껴뒀던 과자도 들고 갔었죠. 사실 그때 미샤는 차만 마시고 과자는 먹지 않았어요. 그건 기억나요. 딱 한 입, 그것도 귀퉁이만 잘라서 먹었죠.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마리야 루스타모브나라니, 세상에. 제냐가 정말 입이 무거운 녀석이란 게 증명됐네요. 내가 뭐하는 여자인지 전혀 말을 안 했나 봐요. 물론 언제 어디서든 해주고 싶다고 한 것도, 섹스 사말룟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던 것도 전해주지 않았던 게 분명해요! 망할 샌님 같으니. 그래도 지금 봐서는 차라리 다행이에요. 미샤가 날 어엿한 숙녀처럼 대우해주고 있으니까요. 부칭까지 챙겨 불러주고. 꼬박꼬박 존대를 하고. 어째선지 사내놈들이고 계집년들이고 날 보면 초면에도 무조건 반말을 하는데 말이에요. 내가 구르는 바닥이 그래서 만나는 인간들도 다 비슷비슷한 것들이라 그렇겠지만요. 아, 하긴 제냐도 나한테 말을 놓지 않아요. 대신 마냐라고 부르죠. 걔는 내 부칭 따윈 관심도 없을 거예요, 들었어도 잊어버렸겠죠. 제냐는 좀 냉정하다고 해야 하나, 주변에 무심한 타입인 것 같아요. 바냐는 안 그런데. 기분 좋을 땐 립스틱도 가져다주고 손톱만한 미니어처 향수도 갖다주면서 ‘마냐, 아줌마도 돈 벌려면 가꿔야지. 좀 찍어 바르면 지금보다는 예뻐 보이겠지’ 하고 농을 걸곤 해요. 못돼먹은 애송이지만 세심한 구석이 있죠. 바냐 생각을 하자 갑자기 위장이 콕콕 찌르는 듯 쑤셨어요. 망나니 자식들이 잘해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니까요.
 




미샤는 아직도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어요. 몸만 뒤로 틀고 있을 뿐 다리는 난간 아래에, 허공에 나가 있었어요. 어쩐지 뒷목덜미가 오싹한 느낌이 들었어요. 류샤 때문이에요, 601호 그 계집애. 바로 여기쯤에서 떨어졌을 테니까요. 이쪽 난간이 좀 낮거든요. 이라 아줌마는 걔가 스스로 뛰어내렸다고 했어요. 구두를 벗어놓은 걸로 봐서 누가 민 것 같지는 않다고. 이유는 아무도 몰라요. 빚을 졌는지 남자한테 버림받은 건지 뭐였는지. 걔는 마약 같은 건 안 했는데. 심지어 사내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본 적이 없었어요. 하긴 걔는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애였으니까 내가 못 본 게 많겠지요. 학교 선생이었는데, 멀쩡한 직장에 다니던 아가씨였는데. 나랑은 대놓고 말을 섞진 않았지만 그래도 마주치면 인사는 꼬박꼬박 했었는데. 치마를 입은 여자애가 구두를 벗고 난간 위로 올라가려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아마 기어 올라가야 했을 거예요. 류샤는 나보다도 키가 작았으니까요. 미샤는 구름처럼 훌쩍 올라갔는데. 그러자 또다시 목덜미 솜털이 곤두서고 온몸이 떨려와서 난 그 사람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어요.
 




“ 그만 내려와요. 바람이 많이 불어요. ”


“ 여기가 시원하고 좋은데. 탁 트여 있고. ”


“ 안 내려오면 나도 올라갈 거예요. ”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걱정이 됐기 때문일 거예요. 아까 춤추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어요. 여전히 그 사람이 뛰어내리거나 헛디뎌 떨어질 것 같아서, 아니, 그보다는, 우스운 소리지만,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어요. 춤출 때 꼭 그런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옥상 바깥으로 휙 날아가는 것도 전혀 이상해 보일 것 같지 않았어요. 심지어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지도 않았어요. 로켓처럼 위로 계속해서 솟구쳐 올라가거나 새처럼 허공에 팔랑팔랑 떠 있을 것만 같았어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런 건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면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거잖아요.
 



미샤가 손을 내밀어 내 팔목을 꽉 잡으면서 말했어요.



 
“ 혼자 올라오긴 힘들걸요. 잡아줄게요. ”


 
미샤는 무슨 인형이나 강아지를 안아 올리듯이 날 난간 위로 올려주었어요. 아주 힘이 셌어요. 오른손만으로 날 끌어올렸거든요. 왼손은 내 허리에 살짝 댔을 뿐이었어요. 그리고 손이 정말 따뜻했어요. 한순간에 나는 난간 위에 앉아 있었어요. 이 위에 올라와 본 적은 처음이었어요. 사실 난간 근처에는 잘 가지도 않아요. 고소공포증까지는 아니더라도 높은 곳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데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머리가 엉망이 되거든요. 대신 벽에 기대어 앉는 건 좋아하지요.
 



바람은 잠잠해져 있었어요. 난간 윗면은 생각보다 폭이 넓어서 걸터앉기 편했어요. 하지만 발밑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적응이 되지 않았어요. 그나마 어두컴컴해서 아래가 거의 내려다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무섭지는 않았어요. 아마 미샤가 여전히 내 팔을 꽉 잡고 있어서일지도 몰라요. 미샤는 내 곁에 바짝 붙어 앉아서 정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 남자가 사실은 완전히 미친놈이라서 나랑 같이 뛰어내리려 하거나, 혹은 날 확 떠밀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에 사로잡혔어요. 잘생기고 섹시하다고 해서, 목소리가 근사하다고 해서, 손이 따뜻하다고 해서 믿을만한 남자라는 뜻은 아니지요. 자고 싶은 거랑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건 다르니까요. 나는 원체 산전수전을 다 겪었단 말이에요.
 
 
 


...







이 뒤로는 마냐가 자기가 겪은 ‘산전수전’에 대해 언급하는 얘기가 나오는데 발췌가 길어지기도 하고 약간 19금이라 여기서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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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아래 발췌한 이야기는 21년 겨울에 마무리했던 단편 <눈의 여왕>의 도입부 몇 페이지이다. 나는 21년부터 22년까지 90년대 후반의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나의 오랜 주인공인 미샤가 등장하는 세 편의 소설을 썼다. 아주 짧은 단편 <판탄카의 루키얀>, <눈의 여왕>, 그리고 세 편 중에서는 가장 길고 심리적으로 복잡한 중편 <구름 속의 뼈>였다. <판탄카의 루키얀>은 97년 10월의 어느 비가 많이 오는 날, 후자의 두 편은 그로부터 한 달 뒤, 역시 비와 눈이 오는 날의 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었다. 이후 나는 작년 가을부터 올 초까지 이 97년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하는 단편 <4월의 로켓>을 하나 더 썼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단편은 앞의 세 편보다 몇 달 전인 4월에 일어난 이야기를 다뤘다. 
 


 
이 90년대 시리즈에서 미샤는 단독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대신 새로운 심리적 화자들 뒤로 빠져 있고 좀 다른 식으로 존재했다. 소설들은 소련 시절의 키로프-90년대 현재의 마린스키 극장 마사지사인 루키얀, 미샤의 발레단 수석무용수이자 그와 미묘한 관계를 맺고 있는 청년 게냐(덜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제냐라고 불린다), 그리고 게냐가 사는 허름한 아파트의 이웃이자 창녀인 마냐의 시점에서 전개되었다. 중간의 <눈의 여왕>과 <구름 속의 뼈>는 쌍둥이 같은 소설이고 아주 긴밀하게 뒤얽혀 있으며 시간 차도 이틀 밖에 나지 않는다(후자가 더 먼저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다른 단편들도 느슨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인물과 이야기들도 서로 다른 식으로 조응한다. 
 
 


<눈의 여왕>과 <구름 속의 뼈>를 이끌고 가는 실질적 주인공은 20대 초반의 남자 무용수 게냐 카르사비예프이다. 그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몇년 춤추다가 고전발레와 그 조직 내의 한계에 부딪치고 새롭고 유의미한 무언가를 찾아서 미샤의 발레단으로 이적했다. 이 90년대는 이미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 붕괴가 일어난 이후이며 7~80년대에 무수한 억압과 고통을 겪었던 미샤는 이제 자신의 발레단을 꾸렸고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둔 상태이다. 이 소설들은 미샤의 성공이나 고군분투나 실질적인 극장과 예술 자체를 다루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 시리즈는 관계와 감정에 대한 이야기들이었고 아직은 미숙하고 그만큼 열렬하면서도 조금은 결벽적이고 또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게냐의 고민을 다뤘다. 앞의 3편에서 드러나지 않던 미샤의 속내에 대해서는 마냐의 시선으로 전개된 <4월의 로켓>에서 조금씩 언급되었다. 
 


 
발췌한 에피소드는 <눈의 여왕>을 시작하는 이야기였다. 이 글은 내게 많은 의미가 있었지만 시작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게냐를 차에 태워서 공항으로 이어지는 모스크바 대로로 보냈다. 그리고 좋은 차, 괜찮은 차, 너무나도 소련다운 낡은 차, 아주 근사한 차에 대한 이야기들로 소설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미샤 정도로 잘 나가는 예술가이자 셀레브리티라면 당시 자본주의가 범람하던 혼란스러운 페테르부르크에서 반드시 몰아야 할 것처럼 보이는 허세 넘치는 메르세데스로 시작해서 그때만 해도 상당히 괜찮은 차로 평가받았던 도요타, 미샤의 친구이자 화가인 키라가 몰고 다니는 낡은 소련 시절 자동차 지굴리, 그리고 미샤보다도 훨씬 선배 예술가가 몰았던 빈티지 포르셰. 하지만 중요한 건 물론 차 자체가 아니라 다른 것들이고 게냐도 차들을 빗대어 다른 이야기를 한다. 
 


 
사진 속 차는 바로 지굴리 :) 구글링해서 찾았는데 너무나도 내 기억 속의 옛 지굴리와 비슷한 느낌이라 올려봄. 주변 풍경마저도 찰떡. 이 지굴리는 미샤의 본편을 패러디한 외전 서무의 슬픔 시리즈(동명의 별도 폴더 참고)에서 주인공 단추청년 베르닌이 굴리는 낡은 차종이기도 하다(그나마도 후반부 에피소드에선 눈보라에 미끄러져 나무 들이받고 박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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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크바 대로로 나왔을 때 게냐는 속도를 더 올렸다. 그는 이 차를 끌고 나오는 것이 좀 부담스러웠지만 지나이다를 데리러 공항에 가겠다고 하자 미샤가 불쑥 그럼 내 차 가져가라고 말한데다 그날따라 다른 차를 구할 수도 없었다. 업무용 차량은 무대 디자이너를 비롯해 이미 세 명이나 줄을 서 있었고 그가 가장 마음 편하게 빌리곤 했던 키라의 지굴리는 정비소에 들어가 있었다. 미샤에게는 차가 두 대 있었으니 그중 하나를 써야 한다면 그나마도 상대적으로 검소한 도요타 SUV 쪽이 나았지만, 봉기 광장과 아니치코프 다리 쪽에서 화보 촬영이 있다면서 미샤가 그 차를 타고 가 버렸다. 게냐는 어떻게든 차를 바꿔보려고 미샤에게 보그 촬영이잖아요. 그럼 있어 보이는 차를 몰고 가요. 도요타는 내가 가져갈 테니까라고 말해 보았다. 미샤는 다 찌그러지고 유리창이 두 개쯤 깨진 지굴리 정도는 돼야 그런 촬영장에 갈 때 있어 보이는거라고 대꾸했고 보그 따위보다는 여왕님이 훨씬 중요하니 잔말 말고 큰 차를 가져가라고 했다. 그리고는 어차피 난 운전도 안 하잖아라는 말과 함께 회오리처럼 아래층으로 사라져버렸다.

 

 

 

 적어도 마지막 말만큼은 맞았다. 미샤는 운전대를 잡는 일이 드물었다. 언젠가 안나는 그가 감독님이고 높으신 분이기 때문에 기사가 운전해주는 고급 차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미샤는 운전 솜씨가 형편없었다. 교통 신호를 부지기수로 위반했고 차선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과속에 대한 감각도 아예 없었다. 세상에는 절대로 운전대를 맡길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 있는 법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라면 발레단 스태프들과 무용수들뿐만 아니라 주변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에 웬만하면 누구든 자원해서 운전을 해줬고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미샤를 뒷좌석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미샤가 직접 차를 끌고 나갔던 것은 몇 주 전에 길에서 주워서 잠시 돌봤던 고양이를 키라에게 데려다주러 갔을 때였다. 다른 경우였다면 게냐가 대신 갔을 테지만 그 망할 놈의 고양이는 그를 너무 싫어해서 보기만 하면 하악질을 하며 위협을 해댔다. 게냐도 고양이라면 질색이었던데다 그 녀석이 덤벼들어서 두 번이나 피를 봤기 때문에 집이든 차 안이든 같은 공간에 있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미샤가 고양이와 인간 양측의 평화를 위해나선 것이었다. 미샤는 어찌어찌 키라가 사는 동네까지는 무사히 도착했지만 역시나 주차를 하다가 사이드미러를 날려 먹었다. 키라에게 귀가 닳도록 잔소리를 듣자 그래도 면허증은 있는데. 당과 국가가 발급해준 거니까 어쨌든 자격은 있는 거 아냐라고 투덜거렸다가 본전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미샤가 이렇게 불평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보통은 자신의 운전 실력이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오히려 게냐가 보기에는 하기 싫은 운전을 남이 해주니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미샤는 차 자체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자기 차 종류도 제대로 외지 못해서 보통은 까만 거’, ‘파란 거라고 불렀고 그나마 좀 더 세심할 때는 큰 차일본 차로 구분했다. 게냐는 최상위 기종의 메르세데스 벤츠를 까맣고 큰 차라고 부르는 건 미샤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미샤는 그 차를 자기가 고른 것도 아니었다. 절친한 사업가인 안톤 트리포노프가 이제 이놈은 지겨워졌고 애초부터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작년에 미샤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겨우 석 달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니 새 차나 다름없었고 유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벼락부자 비즈니스맨의 취향대로 오디오부터 시트까지 최고급으로 내장되어 있었다. 벼락부자 비즈니스맨이라는 건 미샤가 트리포노프를 부르는 별명이었는데, 상대방은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듣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부자라는 걸 알아줘서 고맙지 뭐야라고 대꾸하며 싱글거리곤 했다.

 

 

 

 트리포노프는 이따금 미샤나 지나이다와 식사를 하곤 했는데 한번은 게냐도 초대를 받아서 그의 호화스러운 별장에 간 적이 있었다. 미샤와 트리포노프는 벼락부자니 마피아니 하는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게냐가 샴페인을 두어 잔 마셨을 때 지나이다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저런 농담은 저 바보만 할 수 있는 거야. 넌 엄두도 내지 마. 저 사람하고 눈도 마주치지 마라고 심각하게 경고했다. 이후 게냐는 트리포노프가 진짜마피아이며 예전에 도심의 어느 고급 호텔에서 일어났던 총격전의 배후로 거론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트리포노프가 마피아라는 사실에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어차피 모든 노브이 루스키는 마피아였으니까. 지나가 그를 어린애 취급한다는 것에 조금 기분이 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미샤에게는 어쩐지 화가 났다. 아마 그래서 이 메르세데스를 끌고 나오는 데에 더 거부감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게냐는 트리포노프가 미샤에게 이 차를 얼마에 넘겨준 것인지 전혀 몰랐다. 아마 공짜로 줬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혹은 기부 따위의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거의 상징적인 금액만, 그것도 서류상으로만 주고받았을지도 모른다. 트리포노프는 발레단에도 공식적으로 후원을 여러 번 했다. 자기는 혁신적이고 세련된 젊은 기업가니까 마린스키나 볼쇼이를 후원하는 것은 촌스럽고 미샤의 발레단 쪽이 훨씬 쿨하다고 했다. 트리포노프는 실험영화제를 개최하는가 하면 현대 미술 갤러리를 두 개나 운영했으니 그 모든 행동에는 충분히 일관성이 있었다. 그가 미샤를 숭배한다는 것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옛날부터 팬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게냐는 트리포노프의 일관성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고 그가 미샤를 쳐다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딱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트리포노프의 눈빛에는 아주 기분 나쁜 뭔가가 있었다. 그 불쾌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그는 마침내 미샤에게 차를 인수한 데 들어간 비용이나 절차에 대해 조목조목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그 트리포노프 말인데하고 입을 열었을 때는 그 궁금증이 너무나 유치하게 느껴졌고 자기도 모르게 차에 대한 질문 대신 팔라스 호텔, 그 사람 짓이라면서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미샤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고 아니. 그건 다른 놈들이지. 트리포노프는 나쁜 놈이지만 도살자는 아니야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마치 게냐의 마음속 깊은 곳을 꿰뚫기라도 한 듯 불쑥 덧붙였다. ‘사람을 재수 없게 쳐다보기는 하지. 모든 것에 값을 매기니까

 

 

 

 게냐는 미샤와 오랜 시간 대화를 주고받는 적이 거의 없었고 논쟁을 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 그는 이따금 미샤의 유머 감각에 적응이 되지 않았고 때로는 은근히 화가 치밀 때도 있었지만 대놓고 받아치거나 곧이곧대로 무슨 소리인지 알아먹기 어렵군요라든지 내 생각은 다른데요라고 말한 적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미샤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게냐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든 마음속의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성적으로는 토론과 말싸움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두 가지 모두 피로감을 유발한다는 점에서는 별다를 게 없었고 차라리 침묵하는 쪽이 편했다. 예외란 춤에 대한 주제뿐이었다. 지나이다는 그가 미샤와 신작 리허설 도중 자신의 솔로 파트에 대해 언쟁을 벌이는 것을 보고 족히 10분 동안 웃고 또 웃었다. 짜증이 난 미샤가 넌 왜 웃는데!’ 하고 소리치자 지나는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어서. 아사예프가 너 때문에 리허설 집어치웠던 거 생각 안 나? 그 착한 스탄카에게도 바락바락 우기고. 옛날에 못되게 군 거 이제 벌 받는 거야. 아주 잘하고 있어, 겐카하고 웃어댔다. 게냐는 키로프에서도 전설로 남아버린 미샤의 건방지고 무례한 태도를 자신의 조심스러운 반발과 동일시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가 너무 즐거워했고 미샤조차도 그런가? 할 말이 없네라고 대답한 후 그의 의견을 대폭 수용해줬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춤에 대한 얘기였고 이 경우와는 완전히 달랐다. 노브이 루스키와 갱, 고급 차.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침묵을 깰 가치도 없었다. 그저 하잘것없는 생각들일 뿐이었다. 그래서 게냐는 자신이 미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값을 매기며 쳐다보는 장사꾼과 도살자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라고 대꾸했을 때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그리고 미샤가 별로 없지. 자기 손에 피를 묻히느냐 남이 해주기를 기다리느냐의 차이 정도. 그런데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인간들은 언제나 있었어. 옛날에도. 지금도. 그러니까 트리포노프가 특별히 나쁜 놈은 아니야. 대놓고 값을 매기는 게 차라리 솔직하지. 당의 이름으로 순결한 척하면서 위선 떠는 것보다는이라고 대답했을 때는 더 놀랐다. 그 내용 때문도 아니었고 미샤가 그의 공격적인 질문에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심지어 아주 진지하게 답변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미샤가 평소와는 달리 천천히 대답했고 중간중간에는 생각에 잠겨 말을 끊었으며 두 눈에 고통스럽고 격렬한 불꽃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게냐는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고 어떻게 해야 이 대화를 중단할 수 있을지 마음이 산란해졌다. 다행히 그날은 목요일이었고 미샤에게 마사지를 해주러 온 루키얀이 도착했기 때문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끝났다.

 

 

 

 차라리 미샤가 새 차를 샀으면 좋았을 것이다. 미샤는 트리포노프가 차를 넘겨주기 전부터 큰 차를 한 대 사야겠다고 말하곤 했다. 발레단 스튜디오와 사무실이 시내에서 떨어져 있으니 업무용 밴으로는 모자란다는 것이다. 맞는 얘기였다. 이전에도 미샤에게는 도요타 외에도 차가 한 대 더 있었다. 그것도 아주 멋진 빈티지 포르셰였다. 운전도 못 하면서 왜 그런 스포츠카를 샀느냐고 묻자 자선 행사라서 어쩔 수 없었어라고 대꾸했다. 아주 존경하는 프랑스 안무가 세자르 모렐의 사망 1주기를 맞아 에이즈 기금 마련 자선 경매가 열렸을 때 옛정과 일종의 상징적 제스처로 그 차를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모렐은 오래전 미샤를 뮤즈로 삼아 지금까지도 그의 최고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을 세 개나 안무해줬고 미샤가 조국과 당에 대한 반역죄명으로 수감되었을 때 구명을 위해 모스크바까지 날아왔던 인물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상징은 상징일 뿐이어서 미샤는 결국 도요타와 포르셰 모두 발레단 스태프와 무용수들, 지인들이 자기 차처럼 끌고 다니도록 내버려 두었고 본인은 키라의 지굴리를 얻어타고 다녔다. 포르셰에 대해서는 모두가 근사하다며 부러워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 차를 타고 다닌 적도 거의 없었고 예쁘기만 하지 짐도 별로 안 들어가고 사람도 많이 못 태우고 아무 짝에 쓸모가 없으니 빨리 처분하고 큰 차로 바꿔야겠다라고 투덜거리곤 했다. 그래도 모렐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는지 항상 세자르도 용서해 줄 거야란 말을 덧붙였다.

 

 

 

 그 포르셰는 게냐도 종종 잘 끌고 다녔었다. 사기꾼이자 장사치인 안톤 트리포노프와는 달리 세자르 모렐은 진짜 거장이었고 게냐 역시 그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샤는 트리포노프로부터 큰 차를 인수하면서 마에스트로 세자르를 배신하고 그 포르셰를 정말로 처분해버렸다. 그것도 팔아치운 게 아니라 파리의 모렐 재단에서 운영하는 극장 박물관에 기증했다. 게냐는 미샤의 재정 상태에 대해 정확히 알지도 못했고 애초부터 경제 개념도 탁월한 편은 아니었지만, 빈티지 포르셰를 샀다가 기증할 정도라면 굳이 트리포노프 같은 인간이 쓰던 차를 건네받지 않더라도 충분히 새 메르세데스를 살만한 능력이 있을 거란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한때 뉴욕에서 미샤의 에이전트로 활동했다가 지금은 발레단 운영국장으로 아예 페테르부르크에 자리를 잡아버린 폴 갈런드는 미샤가 가만히 있어도 금은보화가 들어오는 행운의 별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미샤는 행운의 별이 아니고 붉은 별이겠지하고 특유의 담담하고 명확한 어조로 대꾸했지만 미국인인 갈런드에겐 통하지 않을 농담이었다. 곁에 있던 다른 스태프들만 배를 부여잡고 웃어댔을 뿐이었다.

 

 

 

 하긴 주변 사람들도 마에스트로가 남긴 포르셰를 모는 것을 즐기면서도 제각각의 논리로 미샤에게 제대로 된 좋은 차를 타야 한다고 강권하긴 했다. 갈런드는 감독님 체면도 있고 전략적으로 볼 때 더 나으니까’, 발레단 마사지스트는 몸을 챙겨야죠. 의사도 그러라고 했고’, 지나는 좋은 차를 사면 거기서라도 좀 자겠지’, 그리고 키라는 큰 차를 사서 날 좀 태워주는 게 어때. 내 지굴리 폐차시키고 싶은데 너 때문에 계속 굴려야 하잖아라고 마지막 못을 박았다. 그런데 트리포노프가 넘겨준 진짜 좋은 차로 바꾼 후에도 미샤는 걸핏하면 키라의 지굴리에 올라탔고 자기 차 두 대도 여전히 발레단 사람들에게 내줬으므로 변한 건 거의 없었다. 게냐는 이럴 거라면 장식용으로나마 포르셰를 그냥 놔두는 게 나았으리라고 생각했다. 결국 트리포노프보다는 모렐이 그의 마음을 덜 불편하게 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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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별은, 소련과 공산당, 혁명 뭐 이런 것들의 상징이라... 소련 시절엔 여기저기서 장식으로도 많이 쓰였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야 전부 미샤 농담에 웃지만 미국인인 갈런드야 당연히 ??? 할 수밖에.



 
모스크바 대로는 모스크바에 있는 게 아니라 페테르부르크에 있다. 이 대로를 타고 쭉 올라가면 모스크바 방향이므로 그렇게 불린다.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역 이름은 '모스콥스키 역'이다. 반대로 모스크바에는 '레닌그라드스키 역'이 있다) 모스크바 대로를 타고 가다가 꺾으면 페테르부르크의 풀코보 공항이 나온다. 
 



 
중간에 언급되는 고양이는 첫 단편 <판탄카의 루키얀>에서 미샤가 웅덩이에서 건져온 새끼고양이 슬론이다. 노브이 루스키(신흥 러시아인)와 마피아에 대해서라면, 아마도 소련 붕괴로부터 2000년대 초까지 러시아를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라 들어본 분들도 많을 것 같다. 노브이 루스키는 소련과 공산주의 붕괴 후 몰려들어온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속에서 범죄와 결탁해 급격하게 부를 축적한 비즈니스맨들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물론 러시아식 마피아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팔라스 호텔의 모델은 네프스키 팔라스 호텔이다. 이 호텔은 지금도 있긴 한데, 예전에는 고급호텔이었고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90년대 중후반에 실제로 마피아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저 호텔 앞을 지나갈때면 몸을 움츠리곤 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게냐는 여러 모로 미샤와는 많이 다르다. 어떤 면에서는 결벽적이고 훨씬 폐쇄적이며 자기 고뇌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아주 오래전, 미샤보다 이 인물을 먼저 구상했었는데 시간이 지난 후 글을 시작했을 때 나의 주인공은 미샤가 되었고 게냐를 되살려내는 데는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 90년대 시리즈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로 가보세요. 먼저 이 에피소드가 포함된 <눈의 여왕> 전편은 아래. 비번이 있는데 궁금하신 분은 더 아래 링크의 <구름 속의 뼈> 마지막 파트인 pt 5로 가시면 비번을 보실 수 있습니다. 

moonage daydream :: 눈의 여왕 Снежная Королева (01) (tistory.com)

눈의 여왕 Снежная Королева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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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여왕>과 쌍둥이처럼 연결되어 있는 소설 <구름 속의 뼈>는 여기. 파트1~2는 공개, 파트 2 끝부분에 나머지 파트 비번이 들어 있다. 
moonage daydream :: 구름 속의 뼈 (Part 1) (tistory.com)

구름 속의 뼈 (Part 1)

이 글은 작년 한 해 동안 조금씩, 꾸준히 썼다. 약 100페이지 가량이고 호흡도 조금은 더 긴 편이라 단편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아서 그냥 중편이라고 부르고 있다. 제목은 '구름 속의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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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탄카의 루키얀 링크는 아래. 비번은 fontanka
 
moonage daydream :: 판탄카의 루키얀 (tistory.com)

판탄카의 루키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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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어제 레트니 사드의 새들과 고양이 사진 올리고 나니 문득 떠올라서 일년여 전 썼던 중편의 후반부에서 발췌해보는 짧은 에피소드. 갈매기, 고양이, 판탄카 강변의 집, 그리고 미샤와 게냐가 나온다. 계속 미샤의 집에 머무르다가 한 달만에 자신의 원룸에 돌아온 게냐가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를 듣고 예전 기억을 떠올린다. 이 중편은 게냐가 바실리예프스키 섬 바닷가에 있는 어느 호텔 카페에서 옛 여자친구인 리다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해 바닷가에 있는 그녀의 친정 아파트, 바실리예프스키 섬 중심가에 있는 미샤의 발레단 스튜디오, 네바 강변, 그리고 도심에서 좀 떨어진 공장지대에 있는 옛 코무날카 아파트에 있는 그의 원룸을 시간적 순서대로 가로질러 간다. 이 허름한 아파트는 가장 최근 썼던 단편인 마냐와 미샤의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아파트 옥상과 마냐의 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맨 위 사진은 판탄카 강변 풍경. 판탄카는 상당히 길게 뻗어 있기 때문에 한쪽으로 가면 레트니 사드가 나오고 다른 쪽으로 가면 트로이츠키 사원이 나온다. 미샤의 집은 트로이츠키 사원과 가까운 쪽 강변에 있다. 

 


 
 

 
 

 
 
발췌문은 아래 접어둔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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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반쯤 남은 차를 싱크대에 버렸다. 젖은 운동화를 대충 헝겊으로 물기만 닦아내고 라디에이터에 올려놓고 있는데 뭔가가 바깥에서 창문을 철썩철썩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꼭 거대한 새가 젖은 날개를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우리 집은 운하에서 좀 떨어져 있어서 그런 일이 없었지만 미샤의 집은 판탄카 강변에 있어서 종종 새들이 창문 유리를 쪼아대곤 했다. 미샤가 테라스나 창턱에 나가 빵조각을 던져주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 짓은 청소부 아주머니들만 힘들게 하는 거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어느 날은 그런 가사도우미 중 하나인 카챠가 침실 창문을 너무 깨끗하게 닦아놓은 나머지 멍청한 갈매기 한 마리가 전속력으로 유리를 들이받아서 날개가 부러졌다. 미샤는 갈매기의 날개에 부목을 대고 테이핑을 해주었고 우하 수프에서 연어 두어 조각을 건져내 먹인 후 수의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엑스레이를 찍어보더니 죽지는 않겠지만 뼈가 부서져서 다시는 날 수 없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접골도 깁스도 소용없다고 했다. 미샤는 몹시 침울해했다. 함께 갔던 키라가 새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돌봐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 들러보니 상처는 아물어 있었다. 날개가 안쪽으로 구부러져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키라가 전화를 걸어서 갈매기가 운하를 가로질러 날아갔다고 알려주었다. 미샤는 뛸 듯이 좋아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새에게 소용없는 먹이를 주고 웅덩이에 빠진 새끼고양이를 건져왔다.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돌봐주기에는 너무나 바빠서 집에 붙어 있지도 못하면서, 자기 몸 하나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결국 고양이를 데려간 것도 키라였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그건 나 때문이었지만. 내가 고양이를 견뎌내지 못했으니까.

 

 

 내가 키라에게 그 갈매기가 진짜 날아갔는지 물었을 때 그녀는 망설였다. 그런 구부러진 날개로는 결코 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 갈매기는 죽었을 것이다. 운하 옆길의 딱딱한 포석 위로 추락했거나, 아니면 키라가 키우는 고양이들에게 물려 죽었을 것이다. 키라는 갈매기가 정말로 날아갔다고, 나에게 세상에는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다고 대꾸했다. 하지만 진짜 대답은 그녀의 망설임 속에 들어 있었다. 아마 미샤도 알았을 것이다. 해부학에 대해서, 뼈와 근육에 대해서라면 잘 알았으니까, 따로 강의도 듣고 공부도 했으니까. 그러면서 믿는 척했을 것이다. 믿고 싶었을 테니까.

 

 

 나는 미샤가 아니었고 새들에게 빵부스러기를 던져주는 버릇도 없었다. 다친 새나 고양이를 주워오지도 않았다. 새가 부딪혀 떨어졌다면 그걸 치울 일이 골치 아플 뿐이었다. 모른 척하고 놔두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철썩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났기 때문에 별수 없이 창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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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페테르고프 바닷가에서 찍었던 갈매기. 
 
 

 

 
 


 

판탄카 사진 한 장 더. 백야 시즌이었는데 빛이 번져서 흐릿하게 나왔다. 판탄카는 네바 강과도 이어져 있고 네바 강은 바다와도 연결되어 있어 갈매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키라는 미샤의 동년배 친구로 화가이다. 미샤가 80년대초 가브릴로프에 유배되었을 때 우정을 쌓아서 나중에는 아예 레닌그라드-페테르부르크로 거주지까지 옮겼다. 발췌문에서 키라가 데려갔다는 고양이는 이 90년대 이야기의 첫 단편인 <판탄카의 루키얀>에 등장하는 새끼고양이 슬론이다. 비에 흠뻑 젖어 죽어가는 놈을 미샤가 건져와서 살려주었는데 고양이를 싫어하는 게냐 때문에 키라가 데려가 키우게 되었다. 
 



 
<판탄카의 루키얀>은 아래 링크에서 읽을 수 있다. 그 이야기의 배경은 1997년 10월이다. 위에 발췌한 이야기보다 한달쯤 전. 화자는 마린스키 극장 마사지사 루키얀. 다른 글보다 짧고 가볍다. 비번은 fontanka 
 
moonage daydream :: 판탄카의 루키얀 (tistory.com)

판탄카의 루키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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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탄카 강변 사진 한 장 더. 이건 늦은 오후에 찍었던 것. 
 


 
위 발췌문이 포함된 중편 <구름 속의 뼈>는 전문을 모두 올려놓았다. 파트 1~2는 공개, 3~5에는 비번을 걸어두었다. 비번은 파트 2 끝에 적혀 있음. 발췌문은 마지막 파트에서 가져왔다. 이 중편 링크는 여기. 
 
moonage daydream :: 구름 속의 뼈 (Part 1) (tistory.com)

구름 속의 뼈 (Part 1)

이 글은 작년 한 해 동안 조금씩, 꾸준히 썼다. 약 100페이지 가량이고 호흡도 조금은 더 긴 편이라 단편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아서 그냥 중편이라고 부르고 있다. 제목은 '구름 속의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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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24. 3. 2. 22:22

올림픽 곰돌이와 장미 컵, 허브차 about writing2024. 3. 2. 22:22

 
 


 

1월에 마친 마냐와 미샤의 단편에는 <4월의 로켓>이란 제목을 붙였다. 후반부에서 마냐는 미샤를 자기 방으로 데려가서 따뜻한 차를 끓여준다. 마냐의 허브 차는 그 전에 썼던 중편 <구름 속의 뼈>에서도 등장했다. 마냐는 그 글에서 아주 잠깐 등장하지만 소설의 이미지와 골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나는 염색한 머리와 담배. 배지가 주렁주렁 달린 가죽재킷과 (게냐와 리다의 표현대로라면) 할머니 같은 허브 차와 툴라 비스킷의 마냐를 데리고 와서 이 단편을 썼다. 
 

 
올림픽 곰돌이는 1980년 소련 올림픽 마스코트였던 곰돌이 미슈카이다. 맨 위 사진에도 있음. 장미 컵 사진도 구글링해서 아래 하나. 마냐가 가지고 있는 곰돌이 컵과 장미 컵은 사진 속의 컵들보다 더 낡았을 것이다. 이 글은 1997년 4월을 배경으로 하므로 곰돌이 컵은 그 당시로 봐도 좀 오래된 컵임. 미슈카는 러시아에서 곰을 귀엽게 이르는 별명인데 사람 이름인 미하일의 애칭에서 변형된 거라서 사실 이 이야기의 주요 인물인 미샤랑 이름도 같음. 미슈카 컵으로 차 마시는 미샤 :)
 

 
제냐는 이전에 썼던 90년대 이야기들의 주인공으로 미샤의 발레단에서 춤추는 주역 무용수이다. 본명은 예브게니. 친한 사이에서는 게냐라고 부른다. 바냐는 게냐의 동생. 탄카는 마냐랑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여인. 사르바르는 포주 깡패이자 마냐의 애인. 마지막에 잠깐 언급되는 크랍은 마냐의 옛 남자로 역시 포주 깡패. 쿠쟈 영감은 마냐의 어린 시절 옆집에 살았던 영감이다. 마냐는 아빠를 위해 보드카를 꾸러 그 집에 자주 갔다. 
 

 


발췌문은 아래 접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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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는 내가 입술을 닦아내는 동안 베란다 쪽으로 가서 창문을 조금 열었어요. 그럴 만도 했어요. 방에 습기가 가득 차 있었거든요. 아침까지 비가 오는 바람에 빨래를 방 안에 잔뜩 널어두었으니까요. 그러자 건조대에 속옷들을 주렁주렁 널어둔 게 부끄러웠어요. 아 빌어먹을, 언제부터 사내들 앞에서 그런 거 신경 썼다고. 보여줄 거 안 보여줄 거 다 내놓고 별의별 더러운 짓을 다 하는데. 난 침대에 내던졌던 숄을 집어 들어 건조대 위에 급하게 덮어씌우고는 행주로 식탁에 엎질러진 콜라 자국을 박박 닦았어요. 그리고는 전기 포트에 물을 올리고 찬장에서 찻잎이 든 깡통을 꺼냈어요.

 

 

혹시 커피가 더 좋아요? 커피도 있는데. ”

 

차가 더 좋아요. 지난번 그 차도 맛있었어요. ”

 

 

물이 끓는 동안 나는 법랑 주전자에 찻잎을 가득 넣었어요. 예쁜 찻잔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냐가 찻잔도 좀 갖다줬다면 좋았을걸. 받침 접시가 딸려 있던 찻잔이 두 개 있긴 했는데 사르바르가 저번에 깨부쉈어요. 그나마 깨끗한 거라곤 노랑 빨강 장미가 그려진 컵하고 그 옛날 올림픽 곰돌이가 그려진 컵밖에 없었어요. 탄카가 전에 일하던 공장에서 여러 개 받았던 거라고 하나 주고 갔었죠. 그래도 장미가 좀 더 예쁘긴 한데 남자한테 꽃무늬 컵을 주는 것도 낯간지러워서 그냥 곰돌이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미 컵은 이도 좀 빠졌거든요.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컵인데.

 

 

미샤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대신 내 곁으로 와서 찻잎 우리는 걸 구경했어요. 차 종류도 물어보고 잎을 얼마나 넣어야 잘 우러나는지도 궁금해했어요. 차를 좋아하긴 하지만 맛있게 우리는 방법을 잘 모른다면서. 나는 이반 차이와 민트, 캐모마일과 들장미 열매, 계피와 생강, 말린 레몬이랑 오렌지껍질을 섞는다고 말해줬어요. 미샤는 감탄했어요, 직접 그걸 다 말려서 만든 거냐고 물었어요. 눈을 반짝거리는 모습이 꼭 어린 시절의 내 동생 페쟈 같았어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것도요. 그렇게나 우아하고 신사적인 남자가 순식간에 어린애로 바뀐 것 같았어요. 나는 아니라고, 이런 건 다 시장에 가면 판다고, 키오스크에서도 팔 거라고 해줬어요. 난 사도바야랑 블라지미르스키 시장의 좌판에서 몇 봉지씩 골라서 산다고.

 

 

그냥 입맛에 맞게 찻잎을 섞으면 되는 거예요. 이런 걸 직접 다 따서 말려서 만들려면 타이가 숲속에 살아야 할걸요. ”

 

그건 그렇겠네요. ”

 

 

진하게 우려진 차를 가득 따르고 꿀을 한 숟가락 크게 떠서 녹여주자 미샤는 소파로 가는 대신 컵을 쥐고 그 자리에서 한 모금 마셨어요. 그 사람이 뜨거운 차를 살짝 입김으로 식혀가며 마시는 걸 보니 다시 페쟈 생각이 났어요. 꿀과 민트와 계피, 이반 차이 냄새가 부드럽게 퍼졌어요. 내 컵에도 차를 따르고 꿀을 녹이고 있는데 미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어요.

 

 

옛날에 수도원에서 신부님이 약초랑 꽃을 따서 말리는 걸 봤는데. 들를 때마다 그걸로 차를 끓여주셨어요. 이 차랑 맛이 비슷했어요. ”

 

이건 아플 때 마시는 건데. 몸이 따뜻해지거든요. 기침에 좋아요. 두 잔 마시고 푹 자고 나면 기침이 가라앉을 거예요. ”

 

그래서 그 신부님도 꼭 두 잔씩 줬나. ”

 

고향이 어디예요? 그런 수도원은 시골에나 가야 있는데. 아무리 봐도 시골 사람 같진 않은걸요. ”

 

, 맞아요. 레닌그라드 토박이예요. 그래도 옛날에 한 2년 가까이 다른 데 살았어요. 조그만 도시였는데 시골이랑 비슷했어요. 거기 수도원에 자주 갔지요. ”

 

 

 

교회에서는 사내들끼리 놀아나면 유황불 어쩌고 천벌 어쩌고 할 텐데. 내가 몸 팔아 돈 버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할 텐데. 어쨌든 나는 여자고 이건 남자한테 서비스를 하는 거니까요, 성경에도 창녀가 나와요. 구약에도 나오고 신약에도 나오죠. 그래도 그런 여자들이 심한 벌을 받거나 하는 얘기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치만 소돔인가 고모라에서는 욕정에 불타는 남자들이 네 딸년 따윈 필요 없어, 방금 들어간 그 잘생긴 사내놈을 내놓으란 말이야. 우리가 그놈을 따먹을 거야뭐 비슷한 요구를 하는 얘기가 나와요. 그놈들에게 천사들이 불을 놨는지 소금을 뿌렸는지 하여튼 싸그리 멸망을 시켜버렸던 것 같아요. 교회도 안 다니면서 어떻게 이런 걸 다 아느냐고요? 바냐가 얘기해줬거든요. 제냐를 욕하면서. 근데 우스운 건 그 망나니 녀석도 교회 같은 건 안 다닌다는 거예요. 그냥 제냐를 욕하고 싶었을 뿐이죠. 그리고 제냐와 그런 사이라는 이 남자를. 아마도 그 수도원 신부는 이 사람이 그런 취향이란 걸 전혀 몰랐겠지요. 그러니까 이런 차를 두 잔씩 우려줬겠죠. 아니, 알았을지도 몰라요. 나도 다 알면서 차를 끓여주는 거니까요. 이 사람이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차를 한 모금씩 마시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어요. 그 길고 예쁜 손가락들로 우스꽝스러운 저 곰돌이 컵을 아까 말보로를 쥐었던 것처럼 소중하게 감싸고 있는 것도, 그리고 이제 기침을 하지 않는 것도 다 좋았어요.

 

 

 

미슈카, 교회 다녀요? ”

 

아뇨. ”

 

근데 어떻게 그땐 수도원에 드나들었어요? ”

 

그때는 수도원이 아니었어요, 종교박물관이었죠. 아직 브레즈네프 때였거든요. 그래도 신부님이 관리인으로 있었어요. 거긴 정말 좋았어요. 그 차도. 그걸 마시면 정말 몸이 따뜻해지고 잠이 잘 왔어요. ”

 

그럼 오늘 밤에도 그렇겠네요. 맛이 비슷하다면서요. ”

 

그럴 것 같아요. 이 차는 정말 맛있네요. ”

 

 

 

어쩐지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어요. 그 사람이 정말로 내 차를 맛있게 마셔줘서. 몸이 따뜻해지고 잠이 잘 올 것 같다고 해서. 그러면 아까처럼 한밤중에 이렇게도 얇은 셔츠 차림으로 옥상에 나가 혼자 춤을 추지는 않겠지요. 그 난간에도 올라가지 않을 거예요. 정말 그럴 거예요. 그럴 땐 차라리 제냐를 깨우면 더 좋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생각할수록 너무 바보 같은 소리인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어요. 내가 뭐라고. , 그러고 보니 류샤에게도 차를 두 잔 끓여줬다면 좋았을걸.

 

 

나도 차를 한 모금 마셨어요. 맛이 아주 좋았어. 꿀도 딱 알맞게 들어갔고요. 그래요, 난 요리 따윈 엉망이지만 차만큼은 잘 우려요. 카잔에 살 때부터 그랬죠. 쿠쟈 영감이 차를 좋아했거든요. 그 영감은 직접 약초랑 꽃을 말리고 그루지야인가 어디에서 가져온 찻잎이랑 섞어서 가득 채운 주머니들을 집안 여기저기에 잔뜩 매달아뒀어요. 내가 보드카를 꾸러 가면 보통은 온몸을 더듬으며 수작을 걸었지만 신경통이 도져서 그런 짓거리를 하기 힘들 때면 차를 우리라고 시켰거든요. 얼마나 잔소리를 많이 늘어놨는지. 하여튼 그 영감 때문에 차 우리는 법은 지금도 잘 알아요. 그러고 보니 세상에 백 프로 나쁜 놈은 없나 보네요. 어쩌면 그 크랍 놈도 좋은 점이 하나쯤은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사르바르가 이따금 품에 나를 꼭 부둥켜안고는 키스를 해주면서 삼 년만 더 굴러서 한밑천 모으면 그때는 우리 같이 애새끼도 하나쯤 낳아보자고 하는 것처럼. 바냐가 미니어처 향수를 가져다주고 내 가슴에 콧잔등을 비벼대며 아무리 봐도 절벽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다고, 자기가 사업에 성공하면 실리콘을 잔뜩 넣어서 수술을 시켜주겠다고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사실 이것보다 더 촌스러운 빨강노랑 장미 컵 사진을 찾고 싶었는데 저 당시 러시아에서 그렇게 흔하던 그 촌스러운 컵 사진이 은근히 찾기 어려워서 그냥 이 정도로 올려봄. (너무 멀끔한데...)
 
 
미샤가 말하는 '수도원과 신부님'은 80년대 초 유배되었던 가브릴로프의 수도원과 그곳의 관리인이었던 예고르 신부이다. 가브릴로프 본편의 패러디 외전인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이 수도원과 신부님이 두어번 등장했었다. (이 수도원은 원래 본편에서 중요한 장소였는데 막상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서무 시리즈에 먼저 나옴 ㅜㅜ) 서무 시리즈에서도 신부님이 미샤와 단추 베르닌에게 따뜻한 차를 우려준다. 
 
 
.. 마냐가 맨 처음 등장했던 <구름 속의 뼈>의 짧은 씬은 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여기. 
 
moonage daydream :: 마냐와 허브 차, 로켓, 아리나 프로호로브나를 위한 숄 (tistory.com)

 

마냐와 허브 차, 로켓, 아리나 프로호로브나를 위한 숄

역시 작년 말에 끝낸 중편의 일부 발췌. 마지막 파트의 초입부이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게냐는 엘리베이터가 고장나서 계단으로 자기 방까지 걸어올라가고 이웃 여자 마냐와 마주친다. 제냐

tvey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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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24. 2. 11. 21:44

말보로 2, 텔레빅 대신 보그 + about writing2024. 2. 11. 21:44

 
 
 
지난번에 발췌했던 말보로 파트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조금 더 올려본다. 단편의 퇴고는 지난주까지 다 마쳤고 지금은 새 글을 쓰고 싶어서 이것저것 생각해보는 중이다. 마냐는 옥상에서 미샤와 함께 담배를 피우고 불쑥 질문을 한다. 
 
 
이 이야기는 1997년 4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샤는 이제 자기 발레단을 운영하고 있고 국내외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게냐는 마린스키에서 몇년 춤추다 미샤의 발레단으로 이적해서 주역 무용수를 맡고 있다. 나는 게냐를 주인공으로 이 97년을 다룬 단편과 중편을 썼다. 이 90년대 이야기는 그전까지 70~80년대의 미샤를 다뤘던 것과는 쓰는 방식이나 감각이 상당히 달랐다. 
 
 

이 에피소드는 지난번 발췌문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얘기라 중간 문단을 겹쳐두었다. 앞부분은 아래 링크에. 제냐(게냐), 리디야, 바냐가 누구인지도 앞부분에 적어두었다. 

 
 
 
moonage daydream :: 마지막 말보로, 제목 + (tistory.com)

마지막 말보로, 제목 +

2주 전에 마친 글을 퇴고 중인데 당초 생각했던 것만큼 많이 손을 보고 있지는 않다. 발췌한 파트는 글의 중반부. 새벽에 옥상에서 마주친 마냐가 미샤와 함께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다. 이 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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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나는 그가 제냐의 방에 있었을 거라고, 창문을 열어서 찬바람이 들어오면 제냐가 깰까 봐 신경이 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냐와 내 방은 거의 완전히 똑같거든요.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원룸 끝에 아주 좁은 베란다로 나가는 창문이 달려있어서 창을 열면 그대로 바람이 들어와요. 우리 층이랑 걔네 층은 주인이 같으니까요. 방 다섯 개짜리 코무날카 두 개를 조각조각 쪼개서 세를 놨는데 당연히 화장실과 샤워부스가 딸린 쪽이 더 비싸죠. 나는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샤워부스가 딸린 방에 살고 있어요. 차를 권하러 들렀을 때 보니 제냐네 방도 나랑 똑같았어요. 훨씬 더 썰렁하긴 했지만요. 아무래도 사내애가 사는 곳이고 제냐는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침대도 내 것보다 작았어요. 제냐는 그렇게도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데. 그 방에는 소파도 없었어요. 의자 몇 개랑 식탁만 있었죠. 아마 제냐는 그 좁은 침대에서 그 금발머리 리디야를 꼭 끌어안고 자곤 했겠죠. 어쩌면 이 사람도. 하지만 성인 남자 둘이 그 좁은 침대에서 자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마 제냐 몸 위에 반쯤은 올라탄 채 자야 할 거예요. 그러니까, 이 둘이 바냐 말대로 정말 그런 사이라면. 그러자 나는 정말로 궁금했던 질문을 불쑥 내뱉고 말았어요.

 

 

바냐가 그랬어요, 당신이 제냐 애인이라고. 정말이에요? ”

 

바냐가 누구예요? ”

 

제냐 동생. 본 적 없어요? ”

 

동생이 있는 건 알아요. ”

 

 

 

그는 화를 낼 수도 있었고 모른 척할 수도 있었어요. 사실 화를 내는 쪽이 더 그럴싸하죠. 스트레이트라면 꼭지가 돌 거고 진짜로 그런취향이라면 들키지 않기 위해 더욱 화를 낼 테니까. 바냐는 그런 게 유행이라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건 그저 영화나 방송, 잡지랑 신문에서나 뻔뻔하게 떠드는 거죠. 아니면 내가 호객하러 가는 거리 한켠에 있는 그쪽 구역애들이나 가능한 거죠. 이렇게 번듯한 남자들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아요.

 

 

미샤는 여전히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는 담배를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가 도로 내려놓으면서 말을 이었어요.

 

 

글쎄요. 애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좋아하죠. ”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했어요. 지하철에서 나오는 안내방송처럼, 1 더하기 12라고 아주 명백한 사실을 읽어주는 것처럼. 반쯤은 짐작했고 믿고 있었으면서도 가슴 한가운데를 바늘 같은 걸로 콱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 사람은 나랑 절대 안 자 줄 거야라는 생각에 아주 잠깐 울고 싶었어요. 아니, 아니에요. 나는 자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어요. 내가 그랬잖아요, 직업이 그렇다고 해서 그걸 정말로 밝히는 여자는 아니라고. 그런 건 아닌데 좀 울고 싶어진 건 맞아요. 솔직히 말하면요, 이 남자가 그런 쪽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와 잘 것 같지는 않았어요. 이 짓거리로 십 년 동안 밥벌이를 해왔다면 그런 것 정도는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실망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요. 맞아요, 난 실망하거나 속상한 게 아니었어요. 하지만 가슴이 뜨끔거리며 철렁한 느낌은 남아 있었어요. 그러다 또 궁금해서 물었어요.

 

 

나는이죠? 제냐는 당신을 안 좋아해요? ”

 

,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난 옛날부터 사람들 마음 같은 건 전혀 모르는 놈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

 

그럼 물어보면 되잖아요. ”

 

그런가. ”

 

 

 

미샤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어요. 이번에는 상당히 길게 빨아들였고 연기도 멋지게 뿜어냈어요. 마치 그 사람이 몸 전체로 담배를 피우는 것 같았어요. 연기를 뿜어내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볍게 떠는 느낌이었지요. 그러면서 그 사람이 눈으로 웃었는데 그 한 모금으로 말보로 한 갑을 다 피운 것처럼 행복해 보였어요. 1초도 안 돼서 다시 기침을 하기 시작했지만요. 이번 기침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어요. 나는 그의 손에서 담배를 다시 빼앗아서 바닥과 벽 사이에 비벼서 껐어요. 그리고는 그 사람이 또 아까워하는 눈으로 쳐다볼까 봐 선수를 쳤어요.

 

 

이제 됐어요. 말보로는 당신한테 안 맞는 거예요. ”

 

안 맞는 것치곤 너무 좋은데. ”

 

마지막으로 담배 피운 게 언제예요? ”

 

“ 3년쯤 됐나? , 아니다. 작년 가을. 그건 별로였어요. ”

 

왜요? 그때도 감기에 걸렸나요? ”

 

사진 찍으려고 피운 거라서. 그런 사진을 찍을 때는 멋있는 척하라고 하거든요. ”

 

 

 

그래요, 생각났어요. 바냐가 잡지들이랑 영화에 대해서도 말해줬네요. 나는 이 사람이 조명 아래에서 값비싼 명품 옷을 걸치고 외제 담배를 피우며 멋있는 사진들을 찍는 모습을 상상했어요. 텔레빅이나 리자 같은 촌스러운 잡지 말고, 코스모폴리탄이나 보그 뭐 그런, 뉴라가 훔쳐 와서 같이 돌려봤던 그 번쩍번쩍 광이 나는 잡지 말이에요. 우리는 그 잡지에서 떠드는 소리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여튼 거기 나오는 옷들이랑 화장품은 전부 다 참 근사했어요. 사진마다 가격표가 붙어 있는데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싸서 그저 웃음이 나올 정도였지만요. 그 비싼 것들을 걸친 화보 속의 여자들은 쭉쭉빵빵했고 남자들은 섹시했죠. 그런 남자가 이 옥상에 올라와 말보로를 제대로 피우지도 못하고 기침을 하고 있다니 우스웠어요.

 

 

 

 

 

 
 
 
 
 
...
 
 
 
 

 
 
 
 

'텔레빅'은 당시 페테르부르크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일정표와 연예 소식을 수록하고 있던 주간지였다. 나와 쥬인은 매주마다 슈퍼나 가판대에서 이 텔레빅(표기법 대신 진짜 발음대로 하자면 쩰레빅)을 사서 줄을 쳐가며 주중의 영화와 재밌는 방송을 체크했다. 소련 붕괴 후 몇년 되지 않았던 시기였고 온갖 외설적인 방송들이 둑이 터진듯 흘러나오던 시기였다. 그 당시엔 인터넷도 거의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으니 텔레비전과 온갖 이상한 방송이야말로 우리의 노어 실력을 함양하는데 크게 한몫 하는 놈들이었다(...라고 쓰지만 그저 우리는 재미있고 말초적인 뭔가를 보며 빈둥거리고 싶었을 뿐) 이 텔레빅에는 내가 좋아하던 가수의 사진과 가십도 자주 실렸다. 싸구려 잡지였고 지질은 아주아주 안 좋았다. 이미지를 검색해보니 몇개 안 뜬다. 위의 이미지는 그나마 하나 건진 것. '리자'는 엘르나 엘르걸, 보그 등을 따라서 만든 러시아 여성잡지인데 역시나 촌스러웠다. 리자는 사본 적이 없다만. 하여튼 텔레빅과 리자는 나에게 저 90년대 후반을 연상시키는 것들이다. 

 
 

말보로에 대해서라면. 난 흡연을 하지 않는다만 하여튼 이 글에는 몇가지 소재가 나오는데 말보로도 그 중 하나라 여러번 반복해 쓰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아 담배 좀 피울 줄 알면 좋았겠군' 하는 생각도 좀 들었다 ㅎㅎ (실지로는 미샤처럼 담배 못 피우는 인간) 저 당시에는 러시아 경제가 워낙 안 좋았고 자본주의의 폭풍과 범죄와 폭등하는 물가로 다들 난리였던 시기였다. 러시아에 연수나 유학을 갈 때면 선배들에게서 알음알음 노하우를 듣곤 했는데 각박한 이 동네에서 인간관계의 기름칠을 위해서라면 뇌물이 필수라는 것, 그 뇌물이란 굳이 현금일 필요도 없으며 3개를 명심하라는 것이었다. 그 3개는 담배, 초콜릿, 스타킹이었다. 나는 스타킹을 몇 팩 챙겨갔지만 숫기가 없어서 그것을 활용해보지는 못했고(결국 내가 줄창 신었다. 추워서 내복 대용으로), 초콜릿은 기숙사 수위 아주머니에게 써봤다(무시무시하던 아주머니가 천사처럼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가장 잘 통하는 건 담배, 특히 말보로였다. 그래서 무역회사 다니는 남자 선배들이나 아저씨들은 면세에서 말보로나 양담배를 사가곤 했다. 그러니 말보로를 턱 건네준 마냐는 정말 미샤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 정작 미샤는 사실 체질적으로도 그렇고, 수용소 이후에는 더욱 담배를 못 피우게 되었다만, 하여튼 그래도 호시탐탐 담배 피우고 싶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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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24. 1. 28. 17:01

마지막 말보로, 제목 + about writing2024. 1. 28. 17:01

 

 

 

 

2주 전에 마친 글을 퇴고 중인데 당초 생각했던 것만큼 많이 손을 보고 있지는 않다. 발췌한 파트는 글의 중반부. 새벽에 옥상에서 마주친 마냐가 미샤와 함께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다.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냐의 1인칭으로 전개된다.

 

 

발췌한 파트에 등장한 이름 몇 개는 모두 마냐, 미샤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사르바르는 마냐의 깡패 기둥서방. 제냐는 이전에 계속 썼던 이 90년대 페테르부르크 이야기의 주인공인 게냐. 본명은 예브게니이고 제냐가 가장 흔한 애칭이다. 본인은 스스로도 그렇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는 제냐보다는 게냐라고 불리는 편을 선호한다. 그래서 마냐는 당연히 그를 제냐라고 부른다. 마냐와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바냐는 게냐의 남동생. 리디야는 게냐의 옛 여자친구이다. 일년 전쯤 마쳤던 단편 <구름 속의 뼈>에서 '리다'라는 애칭으로 등장했었다. 그 이야기는 여러 차례 일부를 발췌했었고 전문도 올려두었다(암호가 걸려 있긴 한데 읽다보면 나옴) 이 이야기는 그 <구름 속의 뼈>보다 6~7개월 쯤 전인 97년 4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글은 접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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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어요. 수명이 다 됐는지 불이 잘 켜지지 않았어요. 핏핏거리며 파란 불꽃이 잠깐 번쩍이다 꺼져버렸어요. 미샤가 내 손에서 라이터를 받아들더니 한 번에 켜서 담배에 불을 붙여줬어요. 나는 라이터를 잘 켜는 남자를 좋아해요. 그런 남자들은 가스렌지에도 불을 잘 붙이죠. 보답으로 나는 그에게 한 대 피우라고 권했어요. 아, 좋아요, 좋아. 사실 그 사람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어요. 틀림없이 멋질 테니까요. 하잘것없는 놈들은 담배를 피워도 추접스러워 보이지만 잘생긴 남자들은 안 그래요. 그야말로 섹시하죠.

 

 

 미샤는 고맙다고 하면서 담배를 받아들었어요. 사르바르나 손님들에게 하듯 내 담배로 불을 붙여주고 싶었지만 어쩐지 쑥스러워서 그냥 라이터를 건네주었죠. 그는 이번에도 불을 한방에 붙였어요.

 

 

 우리는 난간 벽에 기대앉아 담배를 피웠어요. 시멘트 바닥을 깔고 앉은 채 등에 벽이 닿자 두려움이 가셨어요. 이제 떨어질 일이 없을 테니까요. 코끝에는 아직도 화약 냄새가 약간 남아 있었지만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자 온몸을 어루만지는 듯한 특유의 그 알싸한 독기가 스며들면서 말보로 냄새로 바뀌었어요. 그러고 보니 이것도 바냐가 가져다준 거네요. 이제 말보로는 다 피우고 없어요. 그러자 미샤에게 내 마지막 말보로 한 대를 건네줬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아깝다기보다는 뿌듯했어요. 두 번째 모금을 더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뱉으면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틈타 나는 미샤를 훔쳐보았어요. 역시 기대 이상으로 멋졌어요. 담배를 끼운 손가락도 길고 근사했고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뿜어내는 모습은 꼭 프랑스 영화배우 같았어요. 아니, 정말 영화배우인가? 바냐가 영화 어쩌고 하는 말도 해줬던 것 같은데. 아 맙소사, 모든 게 뒤죽박죽이에요. 그 애송이가 하는 얘길 좀 잘 들어둘걸.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생각해서 무시했었거든요. 그러자 또 위장이 콕콕 쑤셨어요.

 

 

 그런데 미샤는 두 모금밖에 피우지 못했어요. 기침을 심하게 했거든요. 세 번째로 빨아들였을 때 목에 걸린 듯 괴로워했어요. 프랑스 영화배우처럼 피운다는 말은 취소예요. 아까웠는지 담배를 버리지는 못하고 그대로 한 손에 쥔 채 한 손으로는 입을 막고 한참 기침을 했어요. 나는 모르는 척하고 계속 담배를 피웠지만 좀처럼 기침이 멎지 않자 그 사람 등을 가볍게 쓸어주면서 손에서 담배를 빼앗았어요. 

 

 

 “ 바보같이. 담배 피울 줄 모르면서. ”

 

 

 미샤는 기침을 하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어요. 하긴 말보로가 독하긴 하죠. 난 아직 반쯤 남아 있는 내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어요. 가뜩이나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빨다가 기침을 하는 사람에게 내 연기를 마시게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아 맞다! 남자들은 이런 꼴 보여주는 거 엄청 싫어하는데. 그것도 여자 앞에서는. 괜히 담배를 줬나 봐요. 아앗, 그러고 보니 담배 못 피운다고 확인 사살까지 해버렸네요. 정말 난 왜 이 모양인지...

 

 

 간신히 기침이 멎었을 때 미샤가 숨을 몰아쉬고는 바닥에 구겨서 버린 내 꽁초를 바라보며 아쉬워했어요.

 

 

 “ 다 안 피웠는데. 나 때문에. ”

 

 “ 그깟 말보로. ”

 

 “ 말보로가 그깟인가? ”

 

 

 미샤는 잔기침을 하면서도 웃었어요. 내 손에는 아직 담배가 한 개비 더 쥐어져 있었어요. 미샤가 세 번도 못 피우고 실패한 그 마지막 말보로. 나는 두근대는 가슴으로 한번 시도해보기로 했어요. 자기가 피우던 담배를 내가 입술로 가져가 마저 피워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건 이 남자가 신호를 받아주는 거죠. 그러면 난 가만히 그의 손등을 쓰다듬을 거고 곧 더 아래로 손을 가져갈 거예요. 보통은 그렇게 하지요. 말을 하기 쑥스러워하는 남자들이 있거든요. 제대로 된 유혹을 받고 싶어 하는 남자들도 있고요. 대부분은 곧장 흥정을 하고 지퍼를 내리지만요.

 

 

 미샤는 내가 자기 담배를 마저 피우게 내버려 두지 않았어요. 한 손을 뻗어 담배를 낚아챘거든요. 하지만 못돼먹게 거절한 건 아니었어요. 부드럽게 말했지요.

 

 

 “ 감기에 옮을 거예요. ”

 

 “ 정말 감기예요? 못 피우는 게 아니고? ”

 

 “ 잘 못 피워요. 그래도 기침만 안 나오면 한두 개비는 괜찮은데. ”

 

 

 신호가 통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조금 실망했지만 거짓말 같지는 않았어요. 아까부터 계속 기침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춤을 출 때부터. 그 춤을 본 게 벌써 한참 전의 일 같았어요. 꿈이었을지도 몰라요. 미샤는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기침을 했어요. 그렇군요,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가슴이 쿵쿵 울리는 기침이었거든요. 문득 걱정이 됐어요.

 

 

 “ 감기 걸렸으면서 왜 한밤중에 나온 거예요? 옷도 이렇게 얇게 입고. ”

 

 “ 좀 답답했거든요. 바람 쐬고 싶었어요. ”

 

 

 하긴 그래요, 나도 사르바르 때문에 빡치고 가슴이 너무 갑갑해서 올라온 거니까요. 창문을 열 수도 있었을 텐데. 문득 나는 그가 제냐의 방에 있었을 거라고, 창문을 열어서 찬바람이 들어오면 제냐가 깰까 봐 신경이 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냐와 내 방은 거의 완전히 똑같거든요.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원룸 끝에 아주 좁은 베란다로 나가는 창문이 달려있어서 창을 열면 그대로 바람이 들어와요. 우리 층이랑 걔네 층은 주인이 같으니까요. 방 다섯 개짜리 코무날카 두 개를 조각조각 쪼개서 세를 놨는데 당연히 화장실과 샤워부스가 딸린 쪽이 더 비싸죠. 나는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샤워부스가 딸린 방에 살고 있어요. 차를 권하러 들렀을 때 보니 제냐네 방도 나랑 똑같았어요. 훨씬 더 썰렁하긴 했지만요. 아무래도 사내애가 사는 곳이고 제냐는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침대도 내 것보다 작았어요. 제냐는 그렇게도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데. 그 방에는 소파도 없었어요. 의자 몇 개랑 식탁만 있었죠. 아마 제냐는 그 좁은 침대에서 그 금발머리 리디야를 꼭 끌어안고 자곤 했겠죠. 

 

 

 

 

 

 

 

 

 

..

 

 

 

 

 

말보로에 대한 얘기는 그 뒤에도 좀 이어진다. 

 

 

 

나는 이 단편을 상당히 즐겁게 썼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표현이다만. 어쨌든 작년 여름까지 썼던 코스챠와 알리사의 이야기인 <프티치예 말라코>보다는 이 글을 쓰기가 더 수월했고 쓰는 재미도 더 있었다. 아마 전자가 겉으로는 더 가벼워보이지만 사실은 무거운 편이었고 당시 여러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산란했기 때문에. 그리고 후자는 인물들 자체에 대한 접근이 더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훨씬 편한 화법을 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제를 붙여두었는데 아직 퇴고를 다 마치지 않았고 제목도 최종 결정은 하지 않았다. 쓰는 내내 <마냐와 미샤>라고 불렀고 이따금 짧게는 그냥 <마냐>라고 불렀다. <구름 속의 뼈>를 쓰는 내내 <게냐와 리다> 혹은 그냥 <리다>라고 불렀던 것처럼. 제목을 그냥 다 이렇게 붙여버리면 좀 편할 것 같은데. 제목 짓는 게 제일 어려움. 이 단편 제목을 그냥 쉽게 <말보로, 허브차, 라마> 비슷하게 붙여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그러지는 않을 것 같다. 

 

 

 

 

 

 

 

 

 

사진은 지난 가을, 바르샤바의 어느 이름 모를 언덕의 공원. 발췌한 글과는 장소도 시간도 낮과 밤도 완전히 다르지만. 하여튼, 이때 이 공원의 나무 그늘에 앉아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자두를 먹었다. 말보로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구름과자 연기가 피어올랐다. 위에 발췌한 파트는 처음부터 상세하게 구상해둔 장면이긴 했지만, 여행에서 돌아와 시간이 흐른 후 이 부분을 쓰는 동안 저 공원 생각이 조금 났었다. 

 

 

 

 

 

 

 

아마 이 때와 바람은 비슷하게 싸늘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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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24. 1. 14. 21:45

글을 마치고 about writing2024. 1. 14. 21:45

 







지난 10월에 시작했던 단편의 초고를 막 끝냈다. 마지막 문단은 주말에 다시 손을 봐야 할 것 같다. 그 문단은 기력이 소진돼서 간신히 썼기 때문에 마음에 차지 않는다. 일단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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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10월에 시작한 단편은 주말마다 꾸준히 조금씩 쓰고 있다. 너무 힘들 때는 몇 줄 못쓰고 지나갈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간밤에는 집중해서 두페이지 이상 썼다. 예전같으면 하루에 10페이지, 20페이지 쓸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하루에 1페이지만 써도 괜찮은 상태이다. 아무래도 집중력과 체력도 예전같지 않고, 또 나이를 먹을수록 신경쓸 일이 많아지고 일에 치어 살다 보니 정말 쉽지 않다. 그래도 주말에는 가급적 나다니지 않고 최소한 하루에 한페이지 이상은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게으르지만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는 부지런하다고 해야 하나(하지만 총체적으로는 역시 게으르다 ㅎㅎ) 

 

 

 

이 단편은 1997년 4월 페테르부르크 변두리의 낡은 아파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화자인 마냐는 매춘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여인으로 일년 전쯤 아파트 이웃인 게냐를 찾아왔던 미샤를 보고 홀랑 반했던 적이 있다. 이 글은 4월의 어느날 밤 옥상에 담배피우러 올라갔던 마냐가 미샤와 다시 마주치는 이야기이다. 별로 복잡하지 않은 플롯이지만 그렇다고 쓰는 것이 단순하지는 않다. 

 

 

 

 

 

 

 

 

제냐는 게냐의 좀더 흔한 애칭. 바냐는 게냐의 두살 아래 남동생이다. 게냐의 본명은 예브게니, 바냐의 본명은 이반이다. 게냐는 마린스키에 입단한 후 독립해서 이 아파트에서 원룸 스튜디오를 얻어 살고 있다. 형제는 사이가 별로 안 좋다. 리디야는 게냐가 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로 작년에 썼던 중편 <구름 속의 뼈>에서 여주인공으로 나왔었다(나중에 게냐를 차버리고 부자 노브이 루스키 비즈니스맨이랑 결혼했다) 발췌문에서 언급되는 '로켓'은 마냐가 미샤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 붙여준 별명 중 하나. 게냐는 왕자님, 미샤는 로켓 + 섹스 사말룟이라 부른다.

 

 

 

아래 접어둔 발췌문은 마냐가 제냐(즉 게냐)와 바냐 형제, 그리고 게냐의 여친이었던 리디야에 대해 이야기하는 파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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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내가 바냐랑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니까. 철저히 비즈니스죠. 바냐는 화대를 제대로 줬으니까요. 뭐 한두 번은 안 줬지만, 파나소닉 스테레오를 가져다줬으니까 괜찮아요. 바냐는 대가리에 피도 안 말랐던 시절부터 바실리 섬이랑 사도바야랑 모스콥스키 역 주변을 돌면서 복사판 비디오테이프랑 음악 테이프, 가짜 소니 워크맨이랑 중국산 머리핀 따위를 팔았어요. 분명 나한테 준 파나소닉도 가짜겠지만 바냐가 상표랑 지렁이 그림 같은 일본말이 적힌 설명서를 보여주면서 이건 진짜라고 얼마나 으스댔는지 그냥 믿어주기로 했어요. 지금은 뭔가 다른 비즈니스를 한다고 했는데 굳이 물어보고 싶진 않았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사도바야에 영업을 하러 가면 종종 스콜피언스나 디페쉬 모드 짝퉁 CD들에 손바닥보다도 작은 게임기를 좌판에 깔아놓고 있는 바냐랑 마주치곤 했었는데 요즘은 그 자리에서 본 적이 없으니 아마 다른 사업을 한다는 말이 맞을 거예요. 마약만 아니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그쪽일 것만 같아요. 요새 젊은 애들은 다들 그쪽으로 빠지거든요. 어쩌다 봤던 바냐 주변 녀석들도 딱 그런 놈들인 것 같았어요. 제냐는 자기 동생이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 걸 아는지 모르겠어요. 하긴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긴 하네요. 제냐는 벌써 몇 년째 윗집에 사니까 오가면서 자주 마주치긴 했지만 원체 자기 얘기라고는 하는 적이 없어요. 정말 하늘과 땅처럼 다른 형제라니까요. 제냐에 대해 내가 아는 거라곤 바냐랑 집주인에게서 들은 게 전부인 것 같아요. 제냐가 처음 이사 왔을 때 잘생긴 남자애니까 궁금해서 수위 아줌마네 집에 초콜릿을 들고 가서 물어봤거든요, 이라 아줌마는 키로프 무용수래. 월세 밀릴 일은 없겠지라고 했어요. 춤추는 애면 클럽이나 극장이나 그게 그거겠지 싶긴 했지만 제냐는 깎아놓은 듯 준수해서 나는 인사를 할 때마다 왕자님이라고 불러주었어요. 제냐는 낯간지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복도나 계단에서 마주쳤을 때 내가 말을 걸면 아예 씹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코앞에서 여자를 무시할 만큼 뻔뻔하거나 무례한 성격은 아니었어요.

 

 

 

 그 불여우 같은 금발 계집애가 들렀다 갔던 다음날엔가 바냐가 왔어요. 제냐네 문에 귀를 바짝 대고 있는 걸 발견했죠. 좀도둑인 줄 알고 사르바르를 부를까 하고 있는데 이 녀석이 날 보더니 자기가 제냐 동생이라면서 엄청 잘빠진 금발 미인 못 봤냐고 묻더라고요. 보긴 봤는데 점심때 제냐랑 같이 나갔다고 했더니 지저분한 욕지거리를 쏟아냈어요. 그러더니 나한테 얼마야? 한번 하자라고 들이댔어요. 아니, 난 그때는 안 했어요. 척 봐도 아직 학교도 졸업 안 한 꼬맹이였거든요. 나이가 덜 찬 게 문제가 아니고 돈이 없을 게 뻔하니까요. 몇 달쯤 후에 바냐가 다시 나타났는데 그때는 아파트 현관에서 제냐와 다투고 있었어요. 제냐가 언성을 높이는 건 그때 처음 봤어요. 뭣 때문에 싸우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제냐는 굉장히 화가 나 있었어요. 그때 그 금발 계집애가 현관으로 내려왔어요. 아 맞아, 이름이 리디야였어요. 게냐는 리도츠카라고 불렀던 것 같아요. 리디야가 어머, 안녕. 오랜만이네, 바냐하면서 뺨에 뽀뽀를 해주자 바냐는 목덜미까지 시뻘개졌어요. 제냐는 골치 아픈 애새끼랑 빨리 떨어지고 싶었는지 여친의 팔짱을 끼고 안뜰을 가로질러 나가버렸어요. 바냐는 부루퉁해져서 돌부리를 툭툭 걷어차다가 나랑 눈이 마주쳤어요. 그리고는 또 말했죠. ‘한번 해, 나 돈 있어라고요. 그때 왜 내가 해줬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마 꼬마가 좀 불쌍해 보여서 그랬는지도 몰라요. 그래도 흥정부터 먼저 하고 달러를 받아냈지요. 공짜로 해주는 건 예외 중의 예외에요. 그러니까 내가 제냐한테 한 번쯤은 공짜로 해줄 수 있다고 한 건 정말 엄청난 호의였다고요. 로켓이야 뭐 내가 몸이 달아서 절로 하고 싶었던 거니까 완전히 다른 얘기고요. 어쨌든 제냐는 나한테 한 번도 오지 않았어요. 하긴 제냐 같은 애라면 굳이 창녀를 찾아가지 않아도 여자들이 넘쳐나겠죠. 바냐는 경험은 별로 없는 녀석이었지만 엄청 잘난 척 센 척했죠. 원래 볼품없는 남자들이 꼭 그래요. 하여튼 그때부터 바냐는 이따금 들르곤 했어요. 제냐한테는 말 안 했어요. 뭐하러.

 

 

 

 

 

 

 

 

 

...

 

 

 

 

 

사진들은 마냐랑 게냐가 사는 아파트가 있는 동네 근처라고 설정한 곳. 아브보드느이 운하와 엘리자로프스카야 지하철역 근방이다. 이 근처에는 임페리얼 포슬린(로모노소프 도자기) 공장과 헌책시장이 있다. 2016년 12월에 도자기 공장의 샵에 구경갔을 때 찍었던 사진들. 주변이 매우 황량하다. 이 글의 배경이 되는 97년에는 더 그랬을 것이다. 게냐는 여기 있는 자기 원룸과 도심의 판탄카 운하변에 있는 미샤의 집을 오가며 살고 있다. (물론 미샤네 집은 아름다운 옛날 건물 + 내부 리노베이션이 되어 있는데다 기다란 판탄카 운하 중에서도 특히 풍광이 근사한 쪽에 있어서 이쪽 동네와는 하늘과 땅 차이)

 

 

게냐와 동생 바냐, 그리고 마냐에 대한 이야기는 전에 올렸던 중편 <구름 속의 뼈> 파트 4, 5에 나온다. 1~3은 게냐와 리디야(리다)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편의 링크는 여기. 파트3~5는 암호를 걸어두었다. (파트 2 끝에 나옴)

 

moonage daydream :: 구름 속의 뼈 (Part 1) (tistory.com)

 

구름 속의 뼈 (Part 1)

이 글은 작년 한 해 동안 조금씩, 꾸준히 썼다. 약 100페이지 가량이고 호흡도 조금은 더 긴 편이라 단편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아서 그냥 중편이라고 부르고 있다. 제목은 '구름 속의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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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냐랑 마냐네 동네 사진 몇 장 더 올리고 마무리. 이때가 날씨가 워낙 안 좋기도 했지만... 역시 우중충 ㅠㅠ 이때는 아이폰 6s를 쓰던 시절. 

 

 

 

 

 

 

 

 

 

 

 

 

 

 

지난번에 발췌했던 이 글의 다른 파트는 여기

 

moonage daydream :: 쓰는 중 : 옥상의 마냐, 춤추는 로켓 (tistory.com)

 

쓰는 중 : 옥상의 마냐, 춤추는 로켓

여름에 알리사와 코스챠의 단편을 마친 후 좀 가벼운 소품을 쓰고 싶었는데 출근 지하철 안에서 간단한 이야기가 하나 떠올랐다. 여행을 다녀온 후 쓰기 시작했는데 몇 페이지 쓰다가 문체를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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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23. 11. 4. 22:37

쓰는 중 : 옥상의 마냐, 춤추는 로켓 about writing2023. 11. 4. 22:37

 

 

 

 

 

 

 

 

여름에 알리사와 코스챠의 단편을 마친 후 좀 가벼운 소품을 쓰고 싶었는데 출근 지하철 안에서 간단한 이야기가 하나 떠올랐다. 여행을 다녀온 후 쓰기 시작했는데 몇 페이지 쓰다가 문체를 바꾸느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서 아직 진도는 많이 나가지 못했다. 플롯 자체는 다 짜 놓았는데 조금 두툼하게 갈지 아니면 얇고 투명하게 갈지 확정은 하지 않았다. 양쪽 모두 가능한 이야기라서. 

 

 

 

 

 

배경은 1997년 4월, 페테르부르크. 작년에 썼던 중편인 <구름 속의 뼈>에서 주인공 게냐가 따로 나와 살고 있는 아브보드느이 운하와 엘리자로프스카야 지하철역 근처의 허름한 아파트이다. 이 단편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구름 속의 뼈>에서 아주 잠깐 등장했던 게냐의 이웃 주민인 마냐이다. 마냐가 등장했던 씬은 예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게냐에게 찾아온 미샤를 보고 한눈에 반해서 섹스 사말룟, 로켓 운운하며 호들갑을 떨었던 여인이다. 링크는 여기.

 

moonage daydream :: 마냐와 허브 차, 로켓, 아리나 프로호로브나를 위한 숄 (tistory.com)

 

마냐와 허브 차, 로켓, 아리나 프로호로브나를 위한 숄

역시 작년 말에 끝낸 중편의 일부 발췌. 마지막 파트의 초입부이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게냐는 엘리베이터가 고장나서 계단으로 자기 방까지 걸어올라가고 이웃 여자 마냐와 마주친다. 제냐

tveye.tistory.com

 

 

 

 

 

 

이 글은  <구름 속의 뼈>보다 몇달 전인 봄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발췌문에 언급되는 사르바르는 마냐의 기둥서방이자 깡패. 사밀, 바키르는 사르바르와 같은 패거리들. 제냐는 예브게니의 일반적 애칭이다. 즉, 이 이야기에서는 게냐. 게냐는 이 아파트에 이미 몇년 동안 살고 있는 터라 마냐와도 안면이 있다. 바냐는 게냐의 남동생이다. 그리고 로켓, 혹은 섹스 사말룟으로 지칭되는 인물은 미샤이다. 마냐가 이 사람을 섹스 사말룟이나 로켓이라 부르는 이유는 예전에 발췌한 <구름 속의 뼈>의 에피소드에... 

 

 

 

 

앞부분에 있어 좀 생략되긴 했지만 깡패 사르바르와 한바탕 싸운 마냐는 새벽에 담배 피우러 옥상에 올라간다. 그리고 로켓을 발견한다. 이야기는 아래 접어둠. 아주 약간의 비속어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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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망할 놈의 사르바르 깡패놈이 손바닥을 펴지도 않고 주먹을 휘둘러 가지고 윗입술이 퉁퉁 붓고 아랫입술이 터졌어요. 그나마 이빨은 멀쩡해서 다행이지요. 근데 아까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지금은 왼쪽 송곳니 아래가 선뜩선뜩해요, 혀로 슬며시 밀어보니 뿌리가 좀 흔들리는 것 같아요.

 

 

 

 

 사르바르는 내가 피범벅된 입술을 휴지로 문대면서 어쩔 거야, 이 씹새끼야! 성형해주든지 며칠은 수금 포기하셔!’라고 악을 쓰자 중얼중얼 욕설을 주워섬기다 갑작스럽게 풀이 팍 죽어서 나가버렸어요. 취해서 그런 거예요, 정말 그놈의 술이 웬수지. 내가 그 깡패놈을 변호하는 건 아니에요, 그치만 사르바르는 제정신일 땐 절대로 면상을 후려갈기는 적은 없어요. 홀딱 벗고 호객을 할 수는 없으니 상판대기는 최소한 멀끔하게 유지하게 놔둬야 한다는 것쯤은 잘 아니까. 분명히 사밀이나 바키르, 아니면 그 윗대가리한테 제대로 갈굼 당하고 빡쳐서 술을 퍼마셨던 거예요. 자기 형님들 앞에선 설설 기면서 꼬봉들과 기집년들 앞에서만 잘난 척 주름잡고 삥뜯고. 근데 뭐 그건 사밀과 바키르도 똑같을 게 뻔해요. 이놈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지 다 비슷비슷하거든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여드름쟁이 바냐도 마찬가지니까요. 문득 나는 제냐를 떠올렸어요. 왕자님처럼 번듯한 척 하지만 그 녀석도 당연히 학교나 극장에서 기합을 받았겠지요. 사내자식들이 모이면 어딜 가나 군대나 깡패 소굴이 되니까요. 하지만 제냐가 군기를 잡히는 것을 상상하자 모든 사내놈들이 앞뒤가 볼록 튀어나온 하얀 타이츠를 입고서 삿대질을 하는 광경이 떠오르며 갑자기 웃음이 나왔어요. 바냐는 타이츠 입은 사내놈들은 모두 호모 새끼인데다 징그럽기 짝이 없다고 얼마나 욕을 했는지 몰라요.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굳이 그런 간지러운 꼴을 보러 심지어 돈까지 들여가며 극장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요. 그치만 제냐가 타이츠를 입은 모습은 좀 보고 싶었어요. 어쨌든 준수한 녀석이니까요. 제냐는 다리가 어찌나 늘씬한지 청바지를 입고 지나갈 때면 나도 모르게 앞뒤를 훑어보게 되지요.

 

 

 

 

 

 하지만 그런 제냐조차 이 로켓에게는 비교가 되지 않았어요. 바냐는 로켓이 아주 더러운 놈이라고, 타이츠 입은 놈들과 한패인데다 심지어 입었을 때보다 벗었을 때가 더 많았다고 떠들어댔지만 난 그 애송이 자식 말은 한마디도 믿지 않아요. 믿고 싶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는 거예요. 특히, 눈앞에 그 멋쟁이가 발사 직전의 로켓처럼 온몸을 오므렸다 길게 뻗으며 쭉쭉 늘어나고 있을 때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두 눈이 가스렌지에 당겨놓은 불꽃처럼 새파랗게 활활 타며 반짝거릴 때는. 분명 그 사람을 오후 햇살 속에서 봤을 때는 새까만 눈이었는데, 너무 까맣고 예뻐서 한밤중 같다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 어둠 속에서는 새파랗게 보였어요. 까만 불, 파란 불 어느 쪽이든 너무 근사해서 머리가 어지러웠어요. 그 사람은 춤을 추고 있었어요. 어찌나 높이 뛰어오르는지 바닥에 발이 닿지도 않는 것 같았어요. 공중에서 저렇게 빙그르르 돌 수 있다니, 난 어릴 때 아빠랑 페쟈, 안카랑 같이 서커스를 보러 간 적이 있어요. 공중그네 타던 여자랑 남자가 저렇게 곡예를 했었죠. 하지만 이건 걔들과는 차원이 달라요. 그는, 뭐랄까, 온몸에 불이 확 붙어서 어둠 속으로 높이, 아주 높이 떠올라 계속 날아가는 것 같았어요. 두 팔은 날개처럼 보였고 다리는 허공을 가르는 물살 같았어요. 분명히 날고 있었지만 새나 나비처럼 보이지도 않았어요. 어쩌면 아빠가 바이코누르에서 장난감 로켓을 사왔던 건 바로 이런 광경을 봤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그 사람이 어둠 속에서 머리를 뒤로 젖힌 채 두 팔을 뒤로 하고 팽이처럼 돌았을 때, 멈추지도 않고 또다시 휙 뛰어올랐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고 목구멍으로 뭔가가 차오르고 이상하게 코가 아프면서 눈가가 뜨거워졌어요. 저게 춤이구나,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이제껏 춤이라는 걸 제대로 본 적이 없었어요. 디스코텍이야 자주 갔었지만 그거랑은 완전히 달랐어요. 이런 게 춤이라면 제냐에게 표를 달라고 해볼 걸 그랬나 봐요.

 

 

 

 

 

 나는 완전히 홀린 채 로켓이 춤추는 모습을 구경했어요. 숨어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저 옥상 문 입구에 꼼짝 않고 서 있었을 뿐이에요. 옥상에는 로켓과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새벽 두 시였고 4월이었지만 아직 한밤중에는 추워서 술을 퍼마시고 놀아나거나 마약을 찌르는 애송이들이 활약하기엔 좀 이른 시기였으니까요. 로켓은 내가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이 뛰어오를 때마다 얼마나 높이, 멀리 올라가는지 자칫 난간을 넘어가 떨어질까 봐 심장이 두근거리고 무서웠어요. 하지만 그게 너무 멋져서 붙잡거나 말릴 마음이 나지 않았어요. , 뛰어오르기만 한 건 아니에요, 내려올 때면 팔과 다리를 비스듬하게 틀면서 천천히, 아주 부드럽게 돌았어요. 움직일 때마다 소매와 옷자락이 하얀 날개처럼 펄럭였어요. 어쩌면 옥상 구석에 딱 하나 달려 있는 가로등 램프와 옆 건물의 창문들에서 반사된 불빛 때문인지도 몰라요. 달빛이라면 더 좋았겠지만 저녁에도 비가 왔고 하늘이 흐려서 달 같은 건 보이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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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몇년 전 페테르부르크 317주년 기념으로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가 모이카 운하변의 켐핀스키 호텔 옥상에서 찍은 것. 예전에 그 영상 클립을 올린 적이 있다. 아래에 다시 올려본다. 물론 마냐네 아파트는 이렇게 도심의 아름다운 운하변이 아니라 변두리의 공장지대에 있고 시간적 배경도 4월 한밤중이라 어두컴컴하고 훨씬 황량했겠지만 :) 미샤가 옥상에서 추는 춤도 이런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글만 있으면 좀 심심하니까 (어쨌든 멋있는) 슈클랴로프 사진이랑 영상을 같이 올려봄. 

 

 

 

 

 

 

 

 

 

 

 

 

 

 

 

 

 

저때 슈클랴로프님 사진 한 장 더. 영상도 사진도 다 멋진데 이분도 수염에 대한 로망이 있는지 이렇게 면도를 안 하고 춤을 추셔서 조금 슬펐던 기억이 난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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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23. 10. 9. 20:48

이름이 다른 프티치예 말라코들 about writing2023. 10. 9. 20:48

 
 
 
 

바르샤바에서 프티치예 말라코 초콜릿을 두 종 가져왔다. 하나는 폴란드 수퍼마켓 체인인 비에드론카에서 발견한 폴란드 초콜릿 회사 Wedel의 유서깊은 '프타치예 믈레즈코' 한 상자, 다른 하나는 영원한 휴가님이 빌니우스에서 사다주신 리투아니아산 '파욱쉬치우 피에나스' 한 상자였다. 둘 다 프티치예 말라코(새의 우유)를 자국어로 표현한 것인데, 사실은 폴란드산이 오리지널이다. 소련에서 폴란드 것을 따라서 만들었으니까. 아마도 리투아니아는 당시 같은 소련 권역이었으니 블라디보스톡과 모스크바를 따라서 만든 게 아닌가 싶지만 아닐지도... '진짜 초콜릿'과는 좀 다른 초콜릿 코팅 안에 젤라틴과 수플레를 섞은 듯 말랑말랑하고 그렇다고 탄력은 또 없는 마시맬로 약간 비슷한 질감의 달착지근한 우유맛 하얀 필링이 들어 있다. 러시아에 가면 이따금 여기서 파생된 케익을 먹었다. 이 초콜릿 자체는 자주 먹지는 않았는데 직접 사먹은 적은 없고 누가 주면 먹었다. 러시아 쪽 초콜릿이 다 그렇듯 많이 달아서 한 입에 여러개 먹을 수는 없고 차에 곁들여 딱 1알이나 2알까지가 적당하다. 이번에 바르샤바 갔을 때 폴란드 오리지널을 사서 먹어봐야지 했는데 마침 수퍼에서 발견해서 '바닐라맛', '시트러스맛' 등을 모두 저버리고 가장 오리지널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되는 '크림맛'을 골랐다. 그냥 우유맛이다. 리투아니아 쪽 초콜릿이 러시아 쪽 맛과 흡사했다. 폴란드 초콜릿은 더 연하고 부드러웠다. 
 
 
 
영원한 휴가님이 지난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기념해 보내주신 소포에 이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먹다가 문득 글 하나를 구상했고(엄밀히 말하자면 글을 구상한 게 아니라 제목을), 올해 여름까지 그 단편을 썼다. 제목은 당연하게도 프티치예 말라코였다. 아래 그 글의 전반부 일부를 발췌한다. 20년 동안 짝사랑해온 여자와 재회해 옛날 생각을 하는 코스챠와 이 초콜릿에 대한 에피소드가 들어 있다. 초콜릿 얘기는 소설 내에서 두어번 더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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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 수프와 커피가 나왔다. 커피는 새까맣고 진했다. 코스챠는 맥주나 보드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커피를 마시면 가뜩이나 두근거리는 심장이 더 세게 뛸 것 같아서. 알리사는 그에게 냅킨을 건네주며 ‘흘릴 테니까’라고 빙긋 웃었다. 이제 그런 칠칠치 못하던 시절은 지나갔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실은 지금도 음식을 잘 흘리는 편이라 코스챠는 순순히 냅킨을 받아들었다. 수프는 묽었지만 의외로 맛은 나쁘지 않았다. 하긴 알리사와 함께 먹는 거라면 뭐든, 보드카도 없이 돼지비계만 맨입에 먹어도 맛있을 것 같았다.
 
 
“ 알랴, 블린 나왔어. 잘라줄까? ”
 
“ 팔라친키. ”
 
“ 그게 뭐야? ”
 
“ 여기서는 팔라친키라고 해. 블린이 아니라. ”
 
“ 역시 체코슬로바키아어 다 아는구나. ”
 
“ 그게 다야. 그렇게 치면 폴란드어도 아는걸. 너한테 배웠잖아. ”
 
“ 내가 뭘 가르쳐줬지? 나도 이제 한 마디도 안 나오는데. ”
 
“ 프타치예 믈레즈코(ptasie mleczko). ”
 
“ 아, 그건 우리 말이랑 똑같잖아. ”
 
“ 아니야, 네가 다르다고 했어. 맛이 다르면 단어도 다른 거라고. 그때 엄청 화냈잖아. 프타치예 믈레즈코랑 프티치예 말라코(птичье молоко) 완전 다르다고, 이름이랑 레시피 베껴봤자 라고, 폴란드 게 더 맛있다고. ”
 
“ 아, 그랬나. 그랬지. 근데 너한테 화낸 건 아니었어. 그 뺀질대는 놈 때문에 빡친 거였지. 블라디보스톡 자랑하면서 엄청 뻐기고, 그깟 초콜릿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
 
“ 그걸 블라디보스톡에서 온 애가 줬었나? 난 기억도 안 나. 나한테 화낸 건 당연히 아니었겠지. 넌 나한테 한 번도 화 안 냈잖아. ”
 
 
 
코스챠는 커피를 쏟을 뻔했다. 알리사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웃었기 때문에, ‘넌 나한테 한 번도 화 안 냈잖아’라는 그 말투가 너무나 다정했기 때문에. 어떻게 알리사 같은 여자에게 화를 낼 수 있다는 말인가. 제정신을 가진 남자라면 그녀 앞에선 넋이 나가는 게 당연하다. 그 블라디보스톡 바람둥이도 그랬다, 그녀를 보자마자 홀딱 빠져서 갖은 수작을 다 부렸다. 서클에 찾아와서 악쇼노프니 부닌이니 헤밍웨이니 엄청 아는 척을 했지만 실상은 책과는 담을 쌓았고 입 발린 말만 할 줄 아는 놈이었다. 그때는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고 모임 초기였던 터라 갈랴와 료카가 결혼하기도 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보통 트로이네 집에서 모이곤 했다. 그 녀석의 엄마가 없을 때만 골라서. 그 블라디보스톡 망나니는 그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어엿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잔뜩 뻐기곤 했다. 번지르르한 선원 복장을 갖춰 입고 광이 번쩍거리는 구두를 신고 나타났다. 심지어 선원도 아니었다. 본인 말로는 무역 화물을 관리하는 책임자라고 했지만 코스챠는 그것도 믿어지지 않았다. 하여튼 여자들은 선원 스타일로 쫙 빼입고 온갖 무역용어를 지껄이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이지만, 아폴론처럼 금발 곱슬머리를 바짝 붙여 자르고 어딘지 나른한 푸른 눈의 미남자인 그 자식에게 한동안 매료되어 있었고 그놈이 아무리 헛소리를 지껄여도 그냥 웃기만 했다.
 
 
두번째로 왔을 때 그 인간이 알리사에게 초콜릿을 주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만 구할 수 있는 거라고, 완전 신상이라고. 정말 맛있는 거라고. 프티치예 말라코라는 이름이라고, 비밀 생산 중인데 앞으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쫙 깔릴 거라고. 멋진 여자에겐 비밀 신상 초콜릿이 잘 어울린다고. 완전 청산유수로 지껄여댔다. 그때 코스챠는 취해 있었고 어째선지 욱해서 버럭 화를 냈다. 신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거 폴란드에 가면 지천에 깔렸는데! 이름도 완전 베낀 거잖아! 프타치예 믈레즈코잖아! 분명히 그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똑같은 걸 가지고 어디서 유세하냐고 성질을 냈던 것 같은데 알리사는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코스챠는 그 바람둥이 자식과 치고받고 싸울 뻔했지만 이런 일에 익숙한 트로이가 잽싸게 그를 끌어다 재웠기 때문에 일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깨어났을 때는 모두 가버리고 없었다. 그는 반쯤 울고 싶은 심정으로 트로이에게 ‘알랴가 그놈이랑 나간 거야?’라고 물어봤다. 트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알랴가 바보냐, 그런 허세에 쩐 놈이랑 나가게. 근데 나쟈는 걸려들었어. 둘이 페테르고프에 갔거든. 코스챠는 나쟈가 누구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마 스베타가 데려온 애였던 것 같았다. 알리사가 그놈과 어울리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기쁠 뿐이었다. 테이블 위에 그 블라디보스톡 공장에서 나온 프티치예 말라코 초콜릿 상자가 그대로 놓여 있어서 더욱 기뻤다. 알리사가 ‘너네 어머니한테 드려, 초콜릿 좋아하시잖아’하고 놓고 갔다는 말에 숙취가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는 일터에서 돌아온 트로이 어머니와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면서 그 가증스러운 프티치예 말라코를 몇 알 먹기까지 했다. 마음속으로는 ‘흥, 역시 폴란드 거 베낀 거잖아. 이름이라도 좀 바꾸든가’라고 투덜대면서.
 
 

 
 
...
 
 
 
 
오늘 차에 곁들여 먹으려고 개봉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산 이름이 다르고 맛도 좀 다른 프티치예 말라코들 사진 몇 장. 앞의 티타임 사진에도 두어 장 들어 있다. 
 
 
 
 

 
 
 
왼편이 리투아니아, 오른편에 폴란드. 폴란드 건 요즘 분위기로 좀 귀엽게 포장을 바꾼것 같다. 리투아니아 초코는 비닐포장이 되어 있어 뿌옇게 나왔다. 저걸 벗기고 찍었어야 했는데 흐흑. 
 
 
 

 
 
 
앞 포스팅에도 적었지만 색깔과 크기가 다르다. 앞의 연한 갈색 캐러멜 같은 게 폴란드, 뒤의 까만 녀석이 리투아니아. 
 
 
 

 
 
 
 

 
 
 
 

 
 
 
 

 
 
 
 

 
 
 
 

 
 
 
 

 
 
 

그런데 이렇게 개봉해버린 이상 공기가 들어가면 아무리 냉동실에 넣어두어도 맛이 변할 것 같아서, 리투아니아 초콜릿은 락앤락 용기에 차곡차곡 넣고 상자의 포장만 잘 오려내어 안쪽을 덮어두었다. 폴란드 거랑 리투아니아 거 다 먹으려면 일년은 걸릴 것 같음. 

 
 
 
..
 
 
위에 발췌한 <프티치예 말라코> 전문 링크는 아래. 
 
 
 
 
moonage daydream :: 프티치예 말라코 01 (코스챠와 알리사의 이야기) (tistory.com)

프티치예 말라코 01 (코스챠와 알리사의 이야기)

한달 쯤 전 마친 단편 를 올려본다. 배경은 1981년 9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이다. (아직 소련 시절이었고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기 전이다) 주인공은 초중고 동기인 코스챠와 알리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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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쯤 전 마친 단편 <프티치예 말라코> 를 올려본다. 배경은 1981년 9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이다. (아직 소련 시절이었고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기 전이다)

 

 

 

주인공은 초중고 동기인 코스챠와 알리사이다. 이 둘은 내가 오랫동안 써온 미샤의 70~90년대 우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미샤와 트로이의 문학 서클 친구들이다. 알리사는 이 폴더에 올렸던 트로이의 이야기나 별도 단편 '핀란드 우하'에 등장한 적이 여러번 있고 코스챠도 단편 '새해 전야'나 다른 발췌문에 이따금 등장했었다. 알리사는 외교관이던 아버지를 따라서 어린 시절을 암스테르담과 런던에서 보내다 열두살 무렵 다시 소련으로 돌아와 레닌그라드의 학교에 들어가는데 거기서 트로이와 코스챠를 만난다. 코스챠는 알리사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알리사는 그런 그의 마음을 받아준 적이 없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잘나가는 공산당 노멘클라투라 집안의 파벨이란 남자와 결혼했다가 곧 이혼하고 런던의 주영 소련대사관으로 떠나버린다. 트로이는 알리사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이 글의 시간적 배경인 1981년 9월은 이들의 친구인 미샤가 파리에서 조국과 당에 대한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가석방되어 가브릴로프로 유배되었던 시기이다. 이 정도라면 이 단편의 사전 배경으로는 충분하다. 

 

 

 

제목의 프티치예 말라코는 '새의 우유'라는 뜻인데 우유맛 필링이 채워진 러시아 초콜릿 캔디이다. 역시 비슷한 필링이 가득 든 동명의 케익도 있다. 이 초콜릿은 원래는 폴란드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동일한 뜻의 '프타치예 믈레즈코'라고 불렸는데,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에서 60년대에 파일럿으로 생산했다가 70년대가 되었을 때는 모스크바의 '붉은 10월' 초콜릿 회사에서 대량생산을 하면서 소련 사람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코스칙, 알랴는 코스챠와 알리사의 애칭. 안드류샤는 트로이의 본명인 안드레이의 애칭이다. 이 사람은 자기 본명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어릴 때 이후로는 자기 성인 트로이츠키에서 따온 트로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이 단편은 20년 전 추억도 다루고 있어서 트로이가 이따금 안드류샤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고리, 갈랴, 료카, 스베타, 타냐는 모두 이들의 문학 서클 동기이다. 예전에 올렸던 단편 '새해 전야'에도 나왔었다. 로미오는 미샤의 별명이다. 발레학교 다니던 소년 시절부터 이 문학 서클에 드나들었던 터라 형님누나들인 이들이 미샤를 귀엽게 여겨 불렀던 별명 중 하나. (원체 로미오 역을 잘 춰서. 그외 왕자님, 아기, 귀염둥이, 꼬맹이 등등 여러가지가 있다) 특히 알리사가 여러가지 이유로 미샤의 이름을 부르기 어려울 때 쓰는 별명이다. 

 

 

 

단편은 그리 길지는 않지만 어쨌든 두 파트로 나누어서 올려본다. 내용은 접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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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티치예 말라코

Птичье Молоко

 
 
 
 
 
 
 
 
 
 

 

더보기

 

 

 
 
 

19819, 프라하

 

 

 

 

코스챠는 언제 어디서든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20년 전 운동장 구석의 오래된 은행나무와 낙엽 더미 뒤에 숨어서 울고 있는 알리사를 봤을 때도 첫눈에 그 전학생이구나!’ 하고 알아차린 것처럼. 하늘색 리본에 물방울무늬의 연노랑 원피스, 광택이 도는 버클이 달린 파란 구두까지 누가 봐도 외제 일색으로 쫙 빼입은 여자애를 그냥 지나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양키 액센트에 러시아어도 제대로 못 한다는 소문이 정말인가보다 싶었다. 얼마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소문은 절반만 진짜였다. 알리사는 러시아어를 제대로 할 줄 알았다. 특히 문법은 동급생들보다도 더 정확했다. 꼭 어른처럼 문장을 만들었고 선생님들과도 길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푸쉬킨 뿐만 아니라 레르몬토프와 페트까지도 줄줄 외웠다. 막상 아이들끼리 통하는 단어들, 특히 장난치며 놀 때 쓰는 말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경자음 발음과 액센트도 좀 이상했다. 하지만 코스챠가 양키라는 단어를 쓰자 알리사는 발칵 화를 내며 양키는 미국인이기 때문에 자기 액센트와는 다르다고 정정해주었다. 미국에는 가본 적이 없다고,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는 다르다고. 자기는 런던에서 왔으니까 양키가 아니라고. 그러다 흥분해 말문이 막히면 코스챠가 단 한마디도 알아먹을 수 없는 외국어를 와르르 쏟아냈는데, 아마 그것이 영국 영어인 모양이었다. 코스챠는 그저 입을 벌린 채 경탄하며 그녀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고 알리사는 그런 그의 바보 같은 표정에 한풀 꺾여 웃어버렸다. 아니,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코스챠는 상관없었다. 알리사는 웃을 때도 예뻤고 울 때도 예뻤으니까. 몇 년 전 여름 캠프에 갔을 때 넋을 놓고 봤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림책이 생각났다. 당시에는 아직 안드류샤로 통했던 트로이는 그게 영국 작가가 쓴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니까 딱 맞았다. 런던에서 온 아이. 이름마저 똑같은데다 그림책 속의 앨리스처럼 예쁘고 똑똑하고 당찬 애였으니까. 게다가 울음보가 터졌다 하면 앨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주위를 온통 눈물바다로 만들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코스챠는 하늘색 리본과 연노랑 원피스, 파란 구두의 알리사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림책의 앨리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알리사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촬영장에 나타났다. 촬영은 구시가지 광장의 시계탑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전날까지 계속된 악천후와 프라하 당국의 고집 때문에 야외 촬영을 반나절 만에 몰아서 해치워야 하는 상황에 몰린 감독 라주모프는 완전히 저기압이라 걸핏하면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고 시나리오 작가는 그 옆에서 부루퉁하게 시비를 걸었다. 주연 배우 올가 골란츠카야는 툭하면 앞으로 굴러가며 촬영을 방해하는 마차 바퀴와 감독의 꾸지람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이따위 저질 영화는 그만두겠다고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울부짖었다. 코스챠는 지저분하게 쌓여 있는 상자들과 부품 어딘가가 맛이 가서 계속 깜박거리는 2번 조명과 카메라 삼각대, 아무렇게나 뒤엉킨 케이블들 사이를 요리조리 누비며 마차 바퀴 뒤에 받쳐둘 쇳조각을 찾아오라고 소품담당자를 독촉하고 촬영감독에게 조명을 고쳐야 한다고 소리치고 골란츠카야에게 손수건과 물을 가져다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기는 분명 총무부에서 행정 지원을 하는 업무로 입사했는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쯤 되면 최소한 조감독 감투는 달아줘야 하는 게 아닌지 아주 정당한 의구심이 들었다. 애초부터 이고리의 마수에 넘어온 게 잘못이었다. 게다가 그 녀석은 라주모프에게 만능 황금손 코스칙이라는 가증스러운 칭찬과 함께 코스챠를 적극 추천해 놓고는 정작 자기는 무슨 영화제 출품작을 편집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이번 체코 로케에는 쏙 빠져버렸다. 그래서 만능 황금손 코스칙은 벌써 나흘째 프라하와 브르노를 오가며 아주아주 유명한 바로 그 올레그 라주모프감독의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엄청난 성질머리에 시달리며 현장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시 비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골란츠카야는 내 머리! 내 메이크업!’하고 비명을 질러댔고 라주모프는 아니, 이제 안돼! 비 와도 그냥 가야 돼! 열두 시까지 광장을 비워주기로 했단 말이야!’ 하고 표트르 대제처럼 외쳐댔다. 다 좋다, 계속 찍는 쪽이라면 대환영이다. 비 좀 맞는다고 큰일나는 것도 아니고, 최소한 정오가 지나면 이 난리법석에서 잠시라도 탈출할 수 있을 테니까. 조감독은 어디론가 도망쳤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고 코스챠는 이러다 운 나쁘게 라주모프의 눈에 탁 띄어서 촬영 연장 승인을 받아와, 만능 코스칙!’하는 명령이라도 받을까봐 마차 바퀴 뒤에 숨어서 쇳조각을 고정시키느라 여념이 없는 척했다. 바퀴는 굴대에 딱 한 개만 붙어 있었고 마차는 없었다. 생각지 않은 브르노와 카를로비 바리 로케가 추가된 바람에 제작비가 모자라서 마차를 세팅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경리부장의 선언에 라주모프는 반쯤 발작을 일으켰고 코스챠는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프라하 쪽 촬영소 창고를 뒤져 바퀴 하나와 반쪽짜리 문짝이 붙어 있는 굴대를 조달해왔다. 카메라로 아래만 비추면 되지 않느냐고 우기면서. 불벼락을 맞을 줄 알았지만 감독은 의외로 현실과 타협했고 코스챠에게 좋은 아이디어라고 칭찬하기까지 했다. 하여튼 그것까지는 뿌듯했지만 굴대는 낡아서 금이 가 있었고 바퀴는 하나만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균형이 맞지 않아서 자꾸만 나사가 풀리며 앞으로 굴러가곤 했다.

 

 

 

그때 코스챠는 알리사를 보았다. 굴대 안쪽으로 못을 하나 박고 바퀴 아래 쇳조각을 억지로 밀어 넣던 중이었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여자를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바큇살 사이로 물안개가 아른거렸으니까.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스챠는 꿈에서 알리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원래 꿈을 꾸지 않았다. 옛날에 갈랴의 아파트에서 술을 마시다가 코스챠가 자기는 꿈을 꾸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알리사는 꿈 안 꾸는 사람은 없어. 기억 못 하는 거지라고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모자란 인간 취급당한 기분에 코스챠가 시무룩해지자 알리사는 좀 당황한 듯 나쁜 거 아니야. 잠을 푹 잔다는 뜻이지. 좋은 거야라고 덧붙였다. 그 말이 맞는 것 같긴 했다. 그는 베개든 어디든 머리만 닿으면 단잠을 자니까. 어쨌든 잠을 자면서도 꿈을 꿔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 시계탑 아래에서 그것도 두 눈을 뜬 채 심지어 마차 바퀴를 고정시키고 있는 중에 알리사 꿈을 꾼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간밤에 스태프들과 함께 마셨던 흑맥주와 보드카 때문에 헛것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편이 더 그럴싸했다.

 

 

 

갑작스럽게 천둥이 치면서 번개가 번쩍거렸고 그녀가 소스라치며 우산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코스챠는 자기가 꿈을 꾸는 것도, 숙취로 헛것을 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알리사는 언제나 뇌우를 무서워했다. 어릴 때는 울었고 커서도 천둥소리가 들려오면 놀란 토끼처럼 펄쩍 뛰거나 옆 사람의 팔에 매달렸다. 그때부터 코스챠는 비 오는 레닌그라드를 사랑하게 되었다.

 

 

 

코스챠는 손등으로 두 눈을 문질렀다. 이제 그녀를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쩌면 거짓말처럼 갑자기 비가 그쳐 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알리사는 버클 허리띠가 달린 베이지색 코트를 걸치고 있었고 긴 머리를 한쪽으로 느슨하게 묶어 늘어뜨린 채 우산에서 물기를 떨어내고 있었다. 코스챠가 막 소리쳐 그녀를 부르려고 했을 때 감독이 시작 사인을 보냈고 그사이 머리를 매만진 골란츠카야가 언제 히스테리를 일으켰느냐는 듯 우아한 귀족 아가씨 연기를 시작했다. 촬영기사 하나가 코스챠에게 턱짓을 해댔다. 카메라가 마차 바퀴와 광장의 돌바닥을 클로즈업해야 하는 순간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코스챠는 잽싸게 일어나 조명팀 쪽으로 이동했다. 알리사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촬영 앵글 때문에 그쪽 방향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부디 골란츠카야와 상대역인 필란트로프가 잘 해내기를, 라주모프의 완벽주의가 발동하지 않기를 빌면서 코스챠는 필사적으로 알리사에게 손을 흔들어댔다. 그녀가 왜 왔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자기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녀는 이쪽을 보지 않았다. 어떤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키가 훤칠하고 짧게 깎은 금발에 양복을 차려입은 멋진 남자였다. 남자는 웃으며 알리사의 팔짱을 끼었다. 애인인가 보구나. 남편인지도 몰라. 코스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다시금 그 얼어붙을 듯한 영하 25도의 마르스 광장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벌써 7년 전인데. 그때 알리사는 하얀 레이스들이 가득한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이고리가 카메라를 내려놓을 때마다 덜덜 떨며 맨어깨 위로 짧은 모피 숄을 두르곤 했다. 파벨과 포즈를 취할 때면 갈랴가 그 모피 숄을 잽싸게 낚아채 카메라 앵글로부터 치웠다. 그때 코스챠는 한겨울에 결혼 날짜를 잡아서 신부에게 저런 얇은 드레스를 입히는 남자라면 당 간부든 잘나가는 노멘클라투라든 상관없이 개자식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때 그들이 어디로 신혼여행을 갔는지 코스챠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피로연에서 술을 퍼마셨던 것만 생각났다. 하지만 알리사는 파벨과 헤어졌는데. 그사이에 다시 결혼을 한 건지도 모른다. 비록 친구들에게 그녀가 아무런 연락도 해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예쁘고 똑똑하니까. 외국에서 살다 왔고 영국식 영어를 하니까. 개자식을 차버린 후 다시 외국으로 훌쩍 떠나버렸고 코스챠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단한 일들을 하니까. 금발에 양복을 입은 남자는 외국인처럼 보였다. 외국인과 결혼을 했구나.

 

 

 

고개를 들었을 때 알리사가 그의 앞에 와 있었다. 금발의 외국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알리사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했지만 코스챠는 아무 말도 못했다. 눈이 커진 채 얼간이처럼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웃었고 그녀가 포옹을 했을 때에야 딸꾹질을 하며 알랴, 정말 너야?’ 하고 되풀이하며 물었을 뿐이었다. 알리사는 바보 코스칙, 그럼 나지 누구야하며 웃었고 차갑고 매끄러운 뺨을 마주 대며 소리 내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코스챠는 알리사에게서 그 익숙한 마법 물약 냄새를 맡았다. 복숭아와 라일락, 아이스크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만 모아서 달여낸 물약. 앨리스의 물약.

 

 

 

*   *   *

 

 

 

골란츠카야와 필란트로프가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줬기 때문인지, 마차 바퀴가 제대로 고정된 덕인지, 그것도 아니면 일정과 제작비의 압박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라주모프는 일사천리로 달렸다. 코스챠는 내내 긴장했고 발을 굴러댔고 무릎을 떨었다. 다시 비가 올까 봐. 촬영이 지연될까 봐. 그녀가 가버릴까 봐. 아주 중요하고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공항으로 떠났을까 봐. 그 금발 외국인 남자와 데이트를 하러 가버릴까 봐.

 

 

 

촬영은 정오에 끝났다. 코스챠는 안절부절못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주역 배우인 필란트로프에게 거울을 빌려달라고까지 했다. 다행히 필란트로프는 호인이었기 때문에 선선히 손거울을 꺼내주었다. 분장사만 짜증을 냈을 뿐이었다. 하긴 거울을 보지 않는 편이 나았을 뻔했다. 재킷은 마구 구겨져 있었고 전날 밤의 굴라쉬인지 흑맥주인지 하여튼 거무죽죽한 얼룩마저 튀어 있었다. 비 때문에 가뜩이나 곱슬거리는 머리는 완전히 까치집이 되어 있었다. 코스챠는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면도라도 했어야 되는데. 지금이라도 할까? 필란트로프한테는 면도칼도 있을 텐데. 아니야, 그 사이에 알랴가 가버릴지도 몰라. 바쁜 애니까. 벌써 두 시간이나 기다렸잖아.

 

 

 

알리사는 카페 슬라비아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코스챠는 그곳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어디인지는 알았다. 강변 근처였다. 전차를 타기에는 골목을 돌아서 한참 나가야 했고 그렇다고 걸어가려니 알리사가 가버릴까 봐 조바심이 났다. 그때 하느님이든 레닌이든 우주의 섭리든 하여튼 도움이 임했다. 라주모프와 시나리오 작가 불라노바가 국립극장에 간다는 것이었다. 국립극장이면 슬라비아 맞은편이었다. 그는 잽싸게 그 차에 올라탔다. 우주의 섭리가 다시 한번 작용하여 라주모프는 그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고 브르노에서 찍은 사흘 치 분량이 몽땅 쓰레기라는 둥, 배경을 카를로비 바리로 바꿔서 다시 찍어야 하니 자정까지 대사를 다 고쳐오라는 둥 불라노바와 무시무시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코스챠는 자기가 시나리오 작가가 아니라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라도 만능 코스칙이 모종의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논리로 극장 미팅에 끌려갈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차에서 내렸을 때도 라주모프는 여전히 불라노바와 논쟁을 벌이느라 바빴고 코스챠는 그 사이에 슬라비아 쪽으로 직진했다.

 

 

카페는 담배 연기로 자욱했고 손님들로 붐볐다. 점심시간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코스챠는 프라하에 몇 번 왔었지만 카페에 들어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선술집이나 숙소에서 맥주, 돼지족발, , 크네들리키와 양파 수프 따위를 먹은 게 전부였다. 여자랑 데이트를 하러 온 것도 아니니까. 이제 학생도 아니고 청춘도 다 지났으니까. 문득 코스챠는 알리사와 단둘이 카페나 레스토랑에 갔던 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학 식당에서 한두 번. 아니, 그때도 항상 트로이가 함께 있었다. 알리사의 단짝은 그가 아니라 트로이였으니까. 그가 얼마나 트로이의 자리를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알리사는 트로이의 집에는 아주 편하게 드나들었고 책도 같이 읽었고 심지어 대학 전공까지 똑같이 선택했다. 코스챠는 노력했다. 둘을 졸졸 따라다니며 도서관을 드나들기도 하고, 아무리 사전에서 단어를 찾아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영어 소설을 읽고 더듬더듬 번역도 해보았다. 둘을 따라서 영문학과에 진학해보려고 했지만 그는 외국어에는 별 재능이 없었고 오히려 뭔가를 만지고 고치고 조달해오는 데에만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결국 알리사가 트로이와 팔짱을 끼고 네바 강변의 국립대 언어학부로 등교하는 동안 그는 공과대학에 다녔다. 대신 갈랴의 아파트에서 매주 열리는 문학 모임에는 꼬박꼬박 갔다. 모임에는 외국 문학 전공자나 풋내기 시인, 작가들이 많이 왔다. 코스챠처럼 공대에 다니는 애는 별로 없었다. 엔지니어의 손과 문학청년의 가슴이라고 갈랴가 추어주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코스챠는 양심이 좀 찔렸다. , 그가 문학을 좋아하긴 했다. 특히 사미즈다트는 더욱. 하지만 뭔가를 쓰거나 지어내는 데는 한 톨도 재능이 없었다. 그가 <서클>에 꼬박꼬박 갔던 건 오로지 알리사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클을 만든 건 알리사와 트로이, 갈랴였으니까. 하지만 알리사가 떠나버린 후에도 그가 계속해서 서클에 남았던 이유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갈랴의 말이 아주 조금은 맞았을지도 모른다. 엔지니어의 손과 문학청년의 가슴.

 

 

알리사는 창가 맨 안쪽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반쯤 타들어 간 담배를 끼운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코스챠는 멋모르던 사춘기 시절 이후엔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고 흡연하는 여자들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키스할 때 담배 맛이 나면 흥이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여자들과 데이트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알리사가 책장을 넘기며 거의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떼었을 때, 하얀 연기를 안개처럼 포르르 내뿜었을 때 코스챠는 현기증이 났고 담배를 피우는 여자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여자라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았다.

 

 

코스챠가 사람들을 헤치고 테이블 앞까지 다가왔을 때 알리사는 담배를 찻잔 모서리에 비벼 껐고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코스챠는 잠시 숨이 멎는 듯했다. 그는 알리사를 마지막으로 봤던 게 언제인지 떠올려보려고 했다. 그렇게까지 오래전은 아니었다. 재작년 새해에 그녀는 갈랴의 집에 왔었다.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때도 그녀는 너무나 바빴고 겨우 두어 시간밖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나마도 트로이가 그녀를 데려온 거였다. 레닌그라드에는 사흘밖에 있을 수 없다고, 그것도 나머지 이틀은 꼬박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새해에도 사람을 톱니바퀴처럼 갈아대며 혹사시키는 직장 따윈 그만둬버리리라고 이고리가 버럭 화를 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고리는 그녀에게도 렌 필름에 들어오라고 꼬드겼던 것 같다. 문학 전공이잖아, 시나리오를 써, 아니면 제작부장 같은 것도 괜찮을 거야 운운. 그때 코스챠는 알리사 정도 미인에게는 적어도 주역 배우 제안은 해야지 시나리오 작가에 제작부장 나부랭이를 늘어놓는 건 모독이라고 생각했었다. 알리사는 트로이와 갈랴 곁에 앉아 있었고 스베타에게는 프랑스 잡지들을 여러 권 건네주면서 무슨 패션 얘기를 나눴다. 언제나 코스챠의 짝사랑을 애석하게 여겼던 갈랴가 그와 자리를 바꿔주었지만, 그때쯤 그는 이미 술에 떡이 되어 있었고 알리사와는 제대로 이야기조차 나누지 못했다. 알랴가 너무 늦게 왔어, 이게 다 트로이 그 자식 때문이야. 알랴가 온다고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그러면 안 마셨을 거 아니야. 뒤늦게 술에서 깬 코스챠는 갈랴의 품에 머리를 처박고 서럽게 푸념을 해댔지만 이미 알리사는 가버린 후였다.

 

 

 

하긴 그는 어린 시절 이후로는 알리사와 단둘이 앉아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었다. 카페와 레스토랑에 갔던 적이 없는 것처럼. 항상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갈랴나 타냐, 스베타가 이따금 그를 도와주려고 슬며시 자리를 비워주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말을 더듬거리거나 실없는 소리를 하거나 취해버리곤 했다. 알리사 곁에 있으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20년이나 지났는데. 그는 더 이상 어린애도 아니고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이도 아닌데.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해서 아이들을 한둘씩 키우고 있는데. 다른 여자들 앞에서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연애를 안 해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알리사 앞에서는 언제나 20년 전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버리곤 했다. 바보 코스칙.

 

 

 

 

 

*    *    *

 

 

 

 

 

알리사는 우아하고 세련된 태도로 주문을 했다. 라주모프는 이 장면을 찍어야 해. 기껏해야 블린과 버섯 수프, 커피 두 잔을 시키는 것뿐인데 마치 나타샤 로스토바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섞어놓은 것처럼 멋졌다. 코스챠가 넋을 놓고 바라보자 알리사는 다시 웃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

 

체코슬로바키아어도 할 줄 아는구나. ”

 

겨우 주문만 하는 정도인걸. 너도 폴란드어 할 줄 알잖아. ”

 

다 까먹었어. 할머니 돌아가신 후엔 바르샤바 안 갔으니까. ”

 

그래도 들으면 이해할 거야. 말이란 건 그런 거니까. ”

 

기억하는구나, 나랑 폴란드. ”

 

그럼. 폴란드 촌뜨기라고 비챠가 놀려서 싸웠잖아. 반성문 엄청 쓰고. ”

 

아 맞아. 반성문 쓰는 거 네가 도와줬는데. 맞춤법도 고쳐주고. 안 그랬으면 벌점 더 받았을 거야. 아무도 안 도와줬는데 너만 남아서 도와줬어. ”

 

너 그건 까먹었구나? 네가 나한테 도와주면 초콜릿 준다고 했었는데. 폴란드 초콜릿 기가 막히게 맛있다고. ”

 

 

 

코스챠는 얼굴을 붉혔다. 물론 기억했다. 하지만 알리사가 그런 하찮은 일을 기억할 줄은 몰랐다. 비챠가 폴란드 촌뜨기라고 놀렸던 건 맞았다. 하지만 알리사는 그 앞부분은 듣지 못했다. 바보 코스칙, 거지 같은 폴란드 초코로 양키 계집애를 꼬시려 한대요. 비챠는 그가 초콜릿을 나눠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던 거였다. ‘안돼, 알랴한테 줘야 돼. 알랴만 줄 거야라고 그가 초콜릿 상자를 품속에 쑤셔 넣으며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덩치가 좋았던 비챠는 그를 때려눕히고 초콜릿 상자를 강탈하려 했고 코스챠는 박치기와 물어뜯기로 반격했다. 둘 다 벌을 받긴 했지만 코스챠 쪽이 더 손해를 봤다. 학교에 초콜릿을 가져왔다고 선생님이 그걸 압수해 버렸기 때문이다. 훌쩍거리며 울자 그때는 아직 안드류샤였던 트로이가 위로해준답시고 선생님 분명 자기가 먹으려고 뺏아간 거야. 초콜릿 좀 가져온 게 뭐가 잘못이냐따위의 말을 늘어놓았다. 불행하게 선생님은 아직 교실에서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을 들어버렸고 트로이도 함께 반성문을 써야 했다. 트로이는 작문을 잘했으므로 금세 반성문을 다 썼지만 코스챠는 고전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더 그랬다. 그때 그가 알리사에게 부탁했다. 폴란드 초코 줄게, 엄청 맛있어. 나 좀 도와줘, 알랴. 그녀가 왜 남아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분명 트로이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둘은 단짝이었으니까.

 

 

 

출장 온 거야? ”

 

. 근데 오후에 떠나야 해. 렌필름에서 촬영 왔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 네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와봤어. 트로이가 말해줬거든, 너 이고리 마수에 걸렸다고. 프라하랑 부다페스트 갔다고. ”

 

, 그래... 그 녀석은 너랑 자주 통화하니까. ”

 

누구, 트로이? 전화는 무슨. 난 갈랴하고밖에 전화 안 해, 그나마도 두어 달에 한 번쯤. 전화번호가 자주 바뀌거든. 너하고도 안 하잖아. ”

 

 

 

어쩐지 코스챠는 기분이 나아졌다. 알리사가 갈랴하고만 전화를 해서. 트로이와도 통화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화번호가 왜 자주 바뀌는지 물어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정도는 그도 알았다.

 

 

 

근데 어떻게 얘기를 들은 거야? 전화도 안 했다면서. ”

 

나 그저께 레닌그라드 갔었거든. 학교에 들렀었어. 서류 뗄 게 있어서. 거기서 트로이 잠깐 봤어. 걔 말고는 아무도 못 만났어, 출장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

 

그래도 내 얘기 물어봐 줬네. ”

 

그럼, 친구들 어떻게 지내는지는 꼭 물어보지. 스베타, 타냐, , 료카, 이고리... ”

 

 

 

알리사는 갑자기 뭔가가 목에 걸린 듯 입을 다물었다. 코스챠는 자기도 목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건 이름일 거야. 왕자님. 로미오. 그들에겐 언제나 귀여운 꼬맹이. 미샤가 파리에서 체포되고 조국과 당의 반역자라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뜬 이래, 그 여름 내내 그들은 공포와 불안, 막막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고리는 영화계 인사들에게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오랫동안 미샤를 숭배해왔던 라주모프 외에는 모두가 모른 척했다. 하긴 키로프에서도 쉬쉬하며 납작 엎드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머지 친구들에게는 그런 인맥도 정보도 없었다. 그저 슬퍼하고 걱정하고 기도를 했을 뿐이었다. 신앙 따위 없었지만 모두가 신자가 되었다. 철저한 무신론자인 트로이만 빼놓고. 정작 가장 걱정하고 괴로워했던 것도 그 녀석이었지만. 여름 동안 트로이는 체중이 10킬로 가까이 빠졌고 폭음을 했다. 예전에는 코스챠가 취하면 트로이가 돌봐줬지만 이제는 정반대가 되었다. 찌는 듯 무더웠던 어느 날 밤 코스챠는 만취해서 모이카 운하에 무릎까지 빠져 있던 트로이를 간신히 끌어냈다. 백야가 거의 끝나서, 이제 밤이면 어둑어둑해져서 정말 다행이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린 덕에 운하에서 노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왜냐하면 트로이 그 멍청한 자식의 손에는 구겨진 르 피가로가 그대로 쥐어져 있었으니까. 그들의 꼬맹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로미오가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무슨 꼭두각시 인형처럼 온몸을 늘어뜨린 채 어디론가 옮겨지고 있는 그 무서운 사진이 아주 정면으로 나와 있었으니까. 코스챠는 스베타에게서 연락을 받아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사진을 실제로 보니 온몸이 떨려왔다. 트로이가 어떻게 그 신문을 구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건 그날 아침에 나온 신문이었으니까. 아마 학교에서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 녀석은 외국어학부에 있으니까. 코스챠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신문을 꼬챙이처럼 기다랗게 돌돌 말아 운하 난간 아래 굴러다니던 술병 안으로 쑤셔 넣고는 병을 물속으로 던져버렸다. ‘이 미친놈, 잡혀가려고 아주 작정을 했네하며 트로이를 걷어차고 따귀를 철썩철썩 때려 깨웠다. 그때 코스챠는 트로이가 우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어릴 적 입학식에서 만난 이래 단 한 번도 그 꺽다리가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버섯 수프와 커피가 나왔다. 커피는 새까맣고 진했다. 코스챠는 맥주나 보드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커피를 마시면 가뜩이나 두근거리는 심장이 더 세게 뛸 것 같아서. 알리사는 그에게 냅킨을 건네주며 흘릴 테니까라고 빙긋 웃었다. 이제 그런 칠칠치 못하던 시절은 지나갔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실은 지금도 음식을 잘 흘리는 편이라 코스챠는 순순히 냅킨을 받아들었다. 수프는 묽었지만 의외로 맛은 나쁘지 않았다. 하긴 알리사와 함께 먹는 거라면 뭐든, 보드카도 없이 돼지비계만 맨입에 먹어도 맛있을 것 같았다.

 

 

알랴, 블린 나왔어. 잘라줄까? ”

 

팔라친키. ”

 

그게 뭐야? ”

 

여기서는 팔라친키라고 해. 블린이 아니라. ”

 

역시 체코슬로바키아어 다 아는구나. ”

 

그게 다야. 그렇게 치면 폴란드어도 아는걸. 너한테 배웠잖아. ”

 

내가 뭘 가르쳐줬지? 나도 이제 한 마디도 안 나오는데. ”

 

프타치예 믈레즈코(ptasie mleczko). ”

 

, 그건 우리 말이랑 똑같잖아. ”

 

아니야, 네가 다르다고 했어. 맛이 다르면 단어도 다른 거라고. 그때 엄청 화냈잖아. 프타치예 믈레즈코랑 프티치예 말라코(птичье молоко) 완전 다르다고, 이름이랑 레시피 베껴봤자 라고, 폴란드 게 더 맛있다고. ”

 

, 그랬나. 그랬지. 근데 너한테 화낸 건 아니었어. 그 뺀질대는 놈 때문에 빡친 거였지. 블라디보스톡 자랑하면서 엄청 뻐기고, 그깟 초콜릿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

 

그걸 블라디보스톡에서 온 애가 줬었나? 난 기억도 안 나. 나한테 화낸 건 당연히 아니었겠지. 넌 나한테 한 번도 화 안 냈잖아. ”

 

 

 

코스챠는 커피를 쏟을 뻔했다. 알리사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웃었기 때문에, ‘넌 나한테 한 번도 화 안 냈잖아라는 그 말투가 너무나 다정했기 때문에. 어떻게 알리사 같은 여자에게 화를 낼 수 있다는 말인가. 제정신을 가진 남자라면 그녀 앞에선 넋이 나가는 게 당연하다. 그 블라디보스톡 바람둥이도 그랬다, 그녀를 보자마자 홀딱 빠져서 갖은 수작을 다 부렸다. 서클에 찾아와서 악쇼노프니 부닌이니 헤밍웨이니 엄청 아는 척을 했지만 실상은 책과는 담을 쌓았고 입 발린 말만 할 줄 아는 놈이었다. 그때는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고 모임 초기였던 터라 갈랴와 료카가 결혼하기도 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보통 트로이네 집에서 모이곤 했다. 그 녀석의 엄마가 없을 때만 골라서. 그 블라디보스톡 망나니는 그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어엿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잔뜩 뻐기곤 했다. 번지르르한 선원 복장을 갖춰 입고 광이 번쩍거리는 구두를 신고 나타났다. 심지어 선원도 아니었다. 본인 말로는 무역 화물을 관리하는 책임자라고 했지만 코스챠는 그것도 믿어지지 않았다. 하여튼 여자들은 선원 스타일로 쫙 빼입고 온갖 무역용어를 지껄이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이지만, 아폴론처럼 금발 곱슬머리를 바짝 붙여 자르고 어딘지 나른한 푸른 눈의 미남자인 그 자식에게 한동안 매료되어 있었고 그놈이 아무리 헛소리를 지껄여도 그냥 웃기만 했다.

 

 

두번째로 왔을 때 그 인간이 알리사에게 초콜릿을 주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만 구할 수 있는 거라고, 완전 신상이라고. 정말 맛있는 거라고. 프티치예 말라코라는 이름이라고, 비밀 생산 중인데 앞으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쫙 깔릴 거라고. 멋진 여자에겐 비밀 신상 초콜릿이 잘 어울린다고. 완전 청산유수로 지껄여댔다. 그때 코스챠는 취해 있었고 어째선지 욱해서 버럭 화를 냈다. 신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거 폴란드에 가면 지천에 깔렸는데! 이름도 완전 베낀 거잖아! 프타치예 믈레즈코잖아! 분명히 그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똑같은 걸 가지고 어디서 유세하냐고 성질을 냈던 것 같은데 알리사는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코스챠는 그 바람둥이 자식과 치고받고 싸울 뻔했지만 이런 일에 익숙한 트로이가 잽싸게 그를 끌어다 재웠기 때문에 일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깨어났을 때는 모두 가버리고 없었다. 그는 반쯤 울고 싶은 심정으로 트로이에게 알랴가 그놈이랑 나간 거야?’라고 물어봤다. 트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알랴가 바보냐, 그런 허세에 쩐 놈이랑 나가게. 근데 나쟈는 걸려들었어. 둘이 페테르고프에 갔거든. 코스챠는 나쟈가 누구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마 스베타가 데려온 애였던 것 같았다. 알리사가 그놈과 어울리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기쁠 뿐이었다. 테이블 위에 그 블라디보스톡 공장에서 나온 프티치예 말라코 초콜릿 상자가 그대로 놓여 있어서 더욱 기뻤다. 알리사가 너네 어머니한테 드려, 초콜릿 좋아하시잖아하고 놓고 갔다는 말에 숙취가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는 일터에서 돌아온 트로이 어머니와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면서 그 가증스러운 프티치예 말라코를 몇 알 먹기까지 했다. 마음속으로는 , 역시 폴란드 거 베낀 거잖아. 이름이라도 좀 바꾸든가라고 투덜대면서.

 

 

 

알리사는 여전히 그를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코스챠는 가슴이 뛰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커피는 한 모금도 안 마셨는데. 그는 결국 블린, 아니 팔라친키를 흘렸고 재킷에 버터 얼룩을 추가로 묻히고 말았다. 그래도 냅킨이 있어 다행이었다. 알랴는 뭐든지 다 알아, 내가 흘릴 거라는 것도, 냅킨이 필요하다는 것도. 그러자 코스챠는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쩌면 알리사가 내내 나직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천천히 말하고 갈색 눈동자가 벨벳처럼 부드럽고 따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전의 그녀는 항상 빠르게 말했는데, 정확하게, 따박따박, 낭랑하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그 누구도 그녀를 말싸움으로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갈색 눈은 미러볼처럼 반짝거렸는데. 그녀의 아몬드 모양 갈색 눈동자 위로 검은색 속눈썹이 커튼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코스챠는 그녀의 속눈썹이 원래는 연한 갈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스카라나 뭐 그런 것을 칠했을 것이다. 알리사는 언제나 화장을 멋지게 했고 유행의 최첨단을 달렸으니까. 그는 알리사의 연한 갈색 속눈썹도, 새까맣고 기다란 속눈썹도 모두 좋았다. 미러볼과 벨벳 어느 쪽이든 좋았다. 처음으로 코스챠는 알리사의 미간과 눈가에 투명한 실처럼 그어진 가느다란 잔주름을 보았다. 가슴 한구석을 꽉 쥐어짜는 느낌이 들었다. 아 젠장, 알랴, 너 많이 지친 거구나.

 

 

 

알랴, 출장 끝나면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 ”

 

그럼 어디로 가겠어. ”

 

계속 런던에 있을 거야? ”

 

 

알리사는 대답을 망설였다. 간의 가느다란 선이 조금 더 깊어졌다. 코스챠는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했다. 내가 뭐라고. 갈랴가 그랬는데, 알랴가 무엇을 하든 걔 선택이니까 한마디도 하지 말라고. 우리는 친구니까 다 이해해 줘야 하는 거라고. 아무리 어리숙한 코스칙이라 해도 알았다. 런던에 있는 대사관이라고. 대사관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한다고 해도 그냥 대사관에서 일하는 거라고. 트로이는 당연히 알았겠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나중에 이고리가 술에 취했을 때 원래 그 제안은 네가 먼저 받았던 거잖아. 알랴는 그때 그 망할 자식이랑 결혼하려던 참이었으니까. 하여튼 네가 안 가서 다행이다. 마타하리는 아무나 하냐라고 지껄이며 트로이의 등짝을 두들기고 연달아 보드카를 권하다 코스챠 쪽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이고리도 알고 있는 거였다. 아마 타냐와 스베타도 알았을 것이다. 친구들은 거의 다 알았다. 그러면서도 코스챠 앞에서는 부득부득 입을 다물고 쉬쉬했다. 마치 그가 어린애라도 되는 것처럼. 가혹한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되면 돌이킬 수 없이 상처받고 밤새 사탕 뺏긴 아기처럼 울어대는 순진무구한 바보처럼 다뤘다. 뭐 틀린 건 아니었다. 그는 정말 그런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코스챠는 그녀가 떠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대사관으로 간다고 했을 때, 그게 말 그대로의 대사관이 아니라는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냥 알았다. 사실은 그 몇 년 전에 트로이와 알리사가 지도교수에게서 받은 제안에 대해 속닥거리는 것도 들은 적이 있었다. 둘은 코스챠가 들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설령 들어도 이해할 거라 여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뭐 거의 항상 만취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그 애들에게 있어 코스챠는 귀여운 동생 같은 존재였으니까. 분명 동갑내기인데도 항상 막내 취급했다. 어쨌든 코스챠는 언제나 그 둘 곁에 있었고 취기에 젖은 채로도 들을 건 다 들었다. 때로는 다른 애들이 듣지 못하는 것도. 그리고 알리사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옳다고 생각했다. 그 망할 개자식, 파벨과 결혼한 것만 빼고. 하지만 그건 알리사가 결정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역시나 망할 개자식인 그녀의 아버지가 정한 거였으니까. 런던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아버지가 뒤에서 움직인 건지, 아니면 그녀 자신이 결정한 것인지조차 모르니까. 어느 쪽이든 그가 판단할 자격은 없으니까. 다른 놈들이었다면, 심지어 그게 트로이였다 해도 그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욕을 했을 것이다. 어차피 금방 용서해주고 받아들였을 테지만, 친구니까 다 이해해 주긴 했겠지만 그래도 판단을 하긴 했을 것이다. 알리사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알리사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움직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은 팔라친키를 한입에 밀어 넣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코스챠의 빈 접시를 힐끗 보더니 다시 웃었다.

 

 

너 배고팠구나, 코스칙. 뭐 좀 더 먹을래? ”

 

아니. 난 세 장이나 먹었잖아. 네가 너무 조금 먹었지. 케이크라도 먹을래? 메도빅 같은 거 있지 않을까? 너 좋아하잖아, 그거. ”

 

벌써 먹었어, 너 오기 전에. 그럼 우리 나가서 산책할래? 나 아직 한 시간쯤은 있어. ”

 

 

 

겨우 한 시간이라니. 코스챠는 급속도로 슬퍼지고 우울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촬영 따위 내팽개치고 광장에서 그냥 달려 나왔어야 했는데. 너무 마음이 급해져서 코스챠는 후다닥 일어서다가 커피잔을 팔꿈치로 쳐서 깨뜨릴 뻔했다.

 

 

 

 
(02로 계속)
 

 

 

 

 

 

 

 

...

 

 

 

 
 
 
 

 

 

 

이 글은  작년 말에 영원한 휴가님께서 보내주셨던 소포에 들어있던 리투아니아 초콜릿을 먹다가 떠올랐다. 제목도 거기서 가져왔다. 옛날 소련 시절 같은 문화권으로 엮여 있었기 때문에 이 동네에도 프티치예 말라코가 있었나 보다. 이름은 더 어려워서 파욱쉬치우 피에나스 라고 부른다고... (리투아니아어는 발음도 더 어려운 느낌...) 사진 속 초콜릿들 중 프티치예 말라코는 저 토끼 그려진 놈이었고 둥근 건 술 들어있는 초코, 노란건 과일잼 같은 게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제목 짓는 게 제일 어려운데 이 단편은 시작할 때부터 아예 프티치예 말라코였다. 영원한 휴가님께 참 감사하다. 

 

 

'프타치예 믈레즈코'라며 버럭 화내기도 하고 비챠로부터 폴란드 촌뜨기라고 놀림받는 코스챠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폴란드계라서 폴란드 초코를 어릴때부터 먹어봤고 바르샤바에도 여러번 가봤던 적이 있다. 그러고보면 알리사만 외국물 먹은 애는 아니었던 것이지만, 폴란드는 철의 장막의 일원으로 간주되었으니 어쨌든 알리사와는 많이 다른 경우이다. 

 

 

맨 위 사진은 2016년 프라하, 지금은 문을 닫고 없는 레테조바 거리의 카페 에벨 앞 테이블. 사실은 알리사와 코스챠가 재회해 식사를 하는 카페 슬라비아의 사진을 올렸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그 카페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사진이 없어서 그냥 이 사진을 올려본다. 담배꽁초도 있고... 

 

 

중간에 코스챠가 언급하는 나타샤 로스토바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여주인공 이름이다. (트로이의 본명인 안드레이는 그의 부모님이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 안드레이 공작에서 따온 건데 정작 본인은 그 소설도, 톨스토이도, 주인공도 좋아하지 않아서 자기 이름을 트로이로 바꿔버림)

 

다음 파트는 내일 올려보겠다. 전문 공개는 내키지 않아서 파트 2는 암호를 걸어두려고 한다. 파트 2를 읽으실 분은 milk를 입력해보세요. 

 

 

... (추가) 다음 파트는 여기

 

moonage daydream :: 프티치예 말라코 02 (코스챠와 알리사의 이야기) (tistory.com)

 

프티치예 말라코 02 (코스챠와 알리사의 이야기)

 

tveye.tistory.com

 

:
Posted by liontamer
2023. 8. 13. 16:50

호밀 포대와 포슬포슬 비스킷 about writing2023. 8. 13. 16:50

 

 

 

 

한달 쯤 전에 마친 알리사와 코스챠의 단편 후반부의 작은 에피소드를 발췌해 본다. 아직 새 글을 구상하지는 못했다. 

 

 

'프티치예 말라코'라는 제목의 이 단편은 1981년 가을 프라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주인공인 코스챠의 회상 속에서 오랜 옛날의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코스챠, 알리사, 트로이는 모두 초등~고등학교 동창이고 후자의 둘은 대학도 같이 갔다. 알리사는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어린 시절을 암스테르담과 런던에서 보내다 열한두 살 무렵 아버지의 복귀 때문에 레닌그라드의 일반 학교로 전학을 오고 코스챠와 트로이랑 한 반이 되었다. 이야기는 소설 속의 현재인 1981년과 20여년 전인 어린 시절, 그리고 그 중간을 오간다. 트로이는 어린 시절에는 아직 안드레이 라는 본명을 쓰고 있어서 코스챠의 회상에서는 종종 안드류샤(안드레이의 애칭)로 등장한다. 발췌한 에피소드는 알리사가 전학와서 아직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던 초창기의 이야기이다. 알랴, 코스칙은 각각 알리사와 코스챠의 애칭이다. 

 

 

날씨가 더우니 눈오는 날 이야기로...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더보기

 

 

 

 

 포대를 발견한 건 코스챠였다. 알리사가 전학온지 두어 달 후였고 눈이 많이 내렸던 날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모두 운동장에 모여 눈싸움을 하며 놀았다. 코스챠는 눈뭉치를 엄청 빨리, 무지 많이 만들었고 매사에 그를 폴란드 촌뜨기라고 놀려댔던 골목대장 비챠에게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눈투성이가 되어 부아가 치민 비챠는 집채만한 눈덩이를 양손으로 쳐들고 탱크처럼 돌진해왔다. 코스챠는 비챠의 약을 올리다가 충돌 직전에 잽싸게 옆으로 피했다. 그는 언제나 맨땅보다는 눈밭과 진흙탕 웅덩이에서 더 날쌨다. 복수에 실패한 비챠는 화가 나서 팔을 윙윙 돌리며 눈덩이를 홱 내팽개쳤는데 하필 그때 도서실에서 책을 빌리느라 늦게 나왔던 알리사가 옆을 지나가다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 세례를 받았다. 꼭 만화나 코미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순식간에 머리와 얼굴, 온몸에 눈을 하얗게 뒤집어썼고 아이들이 눈사람이다, 눈사람!’ 하고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알리사는 하나도 즐겁지 않은 것 같았다. 바르르 떨더니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일은 흔하지 않았다. 여자애들도 눈싸움을 많이 했으니까. 눈 같은 건 맞아도 별로 아프지 않으니까. 그냥 다 같이 노는 중이었으니까. 아이들은 모두 당황했고 평소 알리사를 양키 계집애라고 놀렸던 비챠도 선생님이 올까 봐 무서웠는지 뻣뻣하게 굳었다. 코스챠도 어쩔 줄을 몰랐다. 자기가 피하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비챠에게 눈뭉치를 던지지 않았다면 괜찮았을 텐데. 알랴는 눈을 본 적이 없나 봐, 눈싸움 같은 건 안 해봤나 봐. 런던에서 와서 그런가 봐.

 

 

 그때 안드류샤, 그러니까 트로이가 알리사의 곁으로 가서 머리와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주고는 자기 목도리를 풀어서 칭칭 둘러주었다. 그 자식은 평소에는 굼뜨기 이를 바 없는 주제에 이럴 때는 잘도 나섰다. 트로이가 알리사를 달래주는 동안 아이들은 괜히 선생님에게 들켜 혼이 날까봐 뿔뿔이 흩어졌다. 비챠도 당연히 도망갔다. 코스챠는 뻘쭘하게 남아 있다가 눈더미 사이에서 거뭇거뭇하고 납작한 뭔가를 발견했다. 잡아당겨 보니 커다란 포대가 딸려 나왔다. 붉은 글씨로 <호밀 50킬로>라고 적혀 있었다. 포대는 비어 있었고 아주 튼튼했다. 한마디로 횡재였다. 코스챠는 포대를 질질 끌고 알리사에게 가서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알랴, 울지 마. 내가 썰매 태워줄게.

 

 

 그날 그들은 셋이서 호밀 포대를 타고 실컷 놀았다. 코스챠와 트로이가 돌아가며 포대 썰매를 끌어주었다. 알리사는 당연히 눈을 본 적이 있다고, 런던에도 눈이 온다고 말했다. 눈싸움 같은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거니까 싫다고 자못 새침하게 말했지만 포대 썰매는 사족을 못 썼다. 나중에는 포대를 셋이서 뒤집어쓰고 눈더미 위를 떼굴떼굴 굴러 내려가는 놀이도 했다. 그러다 안드류샤-트로이는 안경다리를 날려 먹었고 코스챠는 감기에 걸렸고 알리사는 장갑 한 짝을 잃어버렸다. 코스챠는 주도면밀하게 포대를 전나무 뒤에 숨겨놓았다. 다음날 가보니 포대는 사라지고 없었지만 별로 실망하지는 않았다. 방과 후에 알리사가 그와 트로이를 자기네 집으로 초대해서 같이 차를 마시고 꾸덕꾸덕한 크림과 잼을 바른 포슬포슬한 비스킷을 먹었기 때문이다. 차에는 우유를 넣었다. 런던에서는 이렇게 먹는다고 했다. 코스챠는 빵부스러기를 흘리고 잼을 잔뜩 묻혔다. 알리사는 바보 코스칙 다 흘리네, 애기처럼’  하면서 손수건으로 그의 입을 닦아주었다. 트로이는 알리사의 책들을 넘겨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

 

 
 
사진은 옛날 소련 시절 눈오는 날 노는 아이들 모습들. 코스챠와 트로이, 알리사 삼총사는 이미 열두 살이 다 되어갈 무렵이라 사진의 아이들보다는 좀 더 컸을 것 같다. 
 
 
 

 

 

 

 

 

 

 

 

 

 

 

 

 

:
Posted by liontamer
2023. 7. 23. 21:56

잠시 - 글을 마친 직후 about writing2023. 7. 23. 21:56

 

 

 

 

연초에 구상해 3월에 시작했던 코스챠와 알리사의 단편을 막 끝냈다. 마지막 페이지들은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만 썼고, 아직 숨고르기도 되지 않았다. 퇴고는 주말까지 미룬다. 

 

 

 

제목은 프티치예 말라코 (Птичье Молоко), 사진 속의 초콜릿이다. 우유맛 필링이 들어 있는 초콜릿 캔디. 폴란드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소련으로 넘어와 지금까지도 많이 먹는 초콜릿이다. 이런 초코 캔디도 있고 케익도 있다. 단어의 뜻은 '새의 우유'  이 글은 연초에 영원한 휴가님께서 보내주셨던 초콜릿에서 시작되었다.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
Posted by liontamer

 

 

 

 

알리사와 코스챠의 이야기는 이제 후반부에 접어들었고 조금 집중을 한다면 내일, 혹은 다음 주말까지는 다 쓸 수 있을 것 같다. 집중력이 문제다만. 이 단편은 1981년 가을의 프라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초반부에 코스챠는 구시가지 광장의 시계탑 아래에서 영화 촬영 일을 하다가 알리사와 재회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예전에 썼던 트로이와 미샤의 레닌그라드 장편과 맞물리는데, 코스챠도 그 소설에서 엑스트라급 조연으로 처음 등장했었고 이 단편에서도 등장인물이나 몇몇 기억들을 공유한다.

 

 

단편은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서 시작되지만 발췌문에서 코스챠는 오래 전 레닌그라드의 춥디추운 마르스 광장을 떠올린다. 레닌그라드-현재의 페테르부르크에서 신랑신부들은 결혼을 하고 나면 여기저기 기념촬영을 하러 가는데 마르스 광장에 가서 헌화를 하는 것도 일상적인 절차였다. 마르스 광장은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에서 레트니 사드와 판탄카로 가는 길에 있다. 널따랗고 썰렁하다. 그리고 희생된 병사와 넋을 위한 영원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봉쇄를 겪은 도시이므로 그런 의미가 좀더 각별하다(그러나 지금 푸틴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내가 다시 페테르부르크에 가더라도 그 광장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 같다)

 

 

 

이 단편에서 코스챠는 얼어붙은 마르스 광장과 알리사의 결혼식에 대해 떠올린다. 그리고 아래 추가로 접어둔 오래 전 장편의 발췌문에서는 트로이가 그 현장에서 알리사의 결혼을 바라보고, 또 미샤 때문에 괴로워한다. 어떻게 보면 지금 쓰는 글은 사람들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이 글을 시작했을 때 나는 첫사랑에 대해 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전부만은 아니었다. 마치 아래 추가로 첨부한 10년 전의 장편이 재능과 욕망에 대한 글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그게 전부만은 아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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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챠 - 198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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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스챠는 손등으로 두 눈을 문질렀다. 이제 그녀를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쩌면 거짓말처럼 갑자기 비가 그쳐 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알리사는 버클 허리띠가 달린 베이지색 코트를 걸치고 있었고 긴 머리를 한쪽으로 느슨하게 묶어 늘어뜨린 채 우산에서 물기를 떨어내고 있었다. 코스챠가 막 소리쳐 그녀를 부르려고 했을 때 감독이 시작 사인을 보냈고 그사이 머리를 매만진 골란츠카야가 언제 히스테리를 일으켰느냐는 듯 우아한 귀족 아가씨 연기를 시작했다. 촬영기사 하나가 코스챠에게 턱짓을 해댔다. 카메라가 마차 바퀴와 광장의 돌바닥을 클로즈업해야 하는 순간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코스챠는 잽싸게 일어나 조명팀 쪽으로 이동했다. 알리사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촬영 앵글 때문에 그쪽 방향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부디 골란츠카야와 상대역인 필란트로프가 잘 해내기를, 라주모프의 완벽주의가 발동하지 않기를 빌면서 코스챠는 필사적으로 알리사에게 손을 흔들어댔다. 그녀가 왜 왔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자기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녀는 이쪽을 보지 않았다. 어떤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키가 훤칠하고 짧게 깎은 금발에 양복을 차려입은 멋진 남자였다. 남자는 웃으며 알리사의 팔짱을 끼었다. 애인인가 보구나. 남편인지도 몰라. 코스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다시금 그 얼어붙을 듯한 영하 25도의 마르스 광장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벌써 7년 전인데. 그때 알리사는 하얀 레이스들이 가득한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이고리가 카메라를 내려놓을 때마다 덜덜 떨며 맨어깨 위로 짧은 모피 숄을 두르곤 했다. 파벨과 포즈를 취할 때면 갈랴가 그 모피 숄을 잽싸게 낚아채 카메라 앵글로부터 치웠다. 그때 코스챠는 한겨울에 결혼 날짜를 잡아서 신부에게 저런 얇은 드레스를 입히는 남자라면 당 간부든 잘나가는 노멘클라투라든 상관없이 개자식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때 그들이 어디로 신혼여행을 갔는지 코스챠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피로연에서 술을 퍼마셨던 것만 생각났다. 하지만 알리사는 파벨과 헤어졌는데. 그사이에 다시 결혼을 한 건지도 모른다. 비록 친구들에게 그녀가 아무런 연락도 해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예쁘고 똑똑하니까. 외국에서 살다 왔고 영국식 영어를 하니까. 개자식을 차버린 후 다시 외국으로 훌쩍 떠나버렸고 코스챠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단한 일들을 하니까. 금발에 양복을 입은 남자는 외국인처럼 보였다. 외국인과 결혼을 했구나.

 

 

 고개를 들었을 때 알리사가 그의 앞에 와 있었다. 금발의 외국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알리사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했지만 코스챠는 아무 말도 못했다. 눈이 커진 채 얼간이처럼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웃었고 그녀가 포옹을 했을 때에야 딸꾹질을 하며 알랴, 정말 너야?’ 하고 되풀이하며 물었을 뿐이었다. 알리사는 바보 코스칙, 그럼 나지 누구야하며 웃었고 차갑고 매끄러운 뺨을 마주 대며 소리 내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맨 위 사진은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 2016년 9월에 찍었다. 단편에서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데 사진은 너무 쨍하게 잘 나온 것 같지만... 귀찮아서 그냥 제일 먼저 찾은 사진을 올려봄. 

 

 

 

 

 

 

 

 

눈 덮인 마르스 광장 풍경. 2015년 2월에 찍었다. 소설에 나오는대로 영하 25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이때도 엄청 춥긴 했다. 아래 발췌글은 위의 이야기로부터 7년 전, 1974년 1월이다. 레닌그라드의 마르스 광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알리사는 정치인 아버지가 연결시켜준 고위당원의 아들 파벨과 결혼식을 올리고 친구들이 기념촬영과 피로연을 위해 함께 모여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트로이라서 코스챠는 딱 한번 슬쩍 등장할 뿐이다. 트로이는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석사 학위를 딴 직후, 미샤는 키로프에 입단해 막 스타무용수로 뜨고 있던 참이다. 아직 둘의 관계가 시작되기 전. 그러니 코스챠는 몰랐겠지만 그 마르스 광장에는 짝사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자기 하나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트로이 - 197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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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에 알리사와 파벨이 결혼했을 때 미샤도 왔다. 그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샤는 다닐로프와의 약속과 리허설을 모두 취소하고 왔다. 미샤가 발레학교 시절부터 리허설에 절대 빠지는 적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알리사조차 차가운 태도를 취하는 것을 잊고 완벽한 화장이 망가질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그를 포옹했다.

 

 

 시청에서 절차를 마치고 촬영을 거의 끝낸 후 마르스 광장에서 신랑 신부가 헌화를 하고 있을 때 미샤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 런던에 가버린 줄 알았어. ”

 

 “ , 가지 않기로 했어. 학교에 남을 거야. ”

 

 “ 축하해야 하는 건가? ”

 

 “ 내가 런던에 가서 뭐해, 이렇게 둔해 터졌는데 첩보원 노릇을 할 것도 아니고. ”

 

 “ 둔하지는 않아. 첩보원이 되기엔 눈에 띄지만. ”

 

 “ 내가 눈에 띈다고? 그런 말은 너한테서 처음 들어. ”

 

 “ 교회 종탑만하잖아. 보안요원이나 첩보원들은 그냥 회색이야. ”

 

 

 

 미샤는 웃고 있었다. 파란 하늘에 해가 나와 있었지만 영하 25도의 날씨였고 사각형의 검은 모피 모자와 진홍색 울 스카프 사이로 드러난 하얀 얼굴에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길게 뒤엉킨 까만 속눈썹에 미세한 얼음 결정이 서려 있었다. 추워서 눈물이 고인 모양이었다. 트로이도 콧속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드레스를 입은 알리사가 어떻게 이 추위를 견디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샤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검은 코트를 입고 모피를 덧댄 날렵한 부츠를 신은 채 얼어붙은 광장 바닥 위에서 쉬지도 않고 발을 구르며 뛰고 있었다. 발을 따뜻하게 하려고 그러는 건지 춤 동작을 연습하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두터운 겨울 코트와 모자와 부츠로 무장하고서도 그는 고양이처럼 가볍게 뛰었다.

 

 

 

 “ 그냥 가버렸으면 진짜 열받았을 거야. 우리 아직 저번 책 다 안 끝냈어. ”

 

 “ 어차피 너도 바빠서 시간이 안 되잖아. ”

 

 “ , 너하고 읽을 시간은 항상 있어. ”

 

 

 

 트로이는 그렇게 가볍게 던지는 부드러운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지 미샤가 알기나 할까 하고 의문했다. 그의 모든 결심이 한 순간에 무너져 달아나고 있었다. 로미오를 보는 눈. 알리사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는 미샤를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키릴과 만나지도 않았고 더 이상 그 비밀 서클의 다른 남자들과 하룻밤의 관계를 맺지도 않았다. 상점에서 만난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일주일째 되는 날 잠자리를 가졌다. 연말부터는 핀란드어과 강사인 톨랴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순전히 학교 동료들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톨랴에게는 별로 관심도 없었고 매력조차 느끼지 못했지만 바로 어제까지도 그는 그녀에게 청혼해버릴까 하고 자포자기해 고민했다. 알리사가 옳았다. 그는 자기 삶을 살아야 했다. 예쁘장하고 온순한 동료 아가씨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했다. 어머니의 건강 등 그리 설득력 없는 이유를 꾸며대어 런던 제안을 거절했지만 스베들로프는 별로 실망하지도 않고 3월 즈음 해외 지부 개편이 있을 테니 그때까지 생각해보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는 미샤의 생생하고 밝게 빛나는 검은 눈을 보았다. 그 눈이 앞에 있는 한 그는 결코 런던으로 가지 못할 것이다. 톨랴를 버리게 될 것이다. 다시 키릴을 만나게 될 것이다. 지하에 숨어 있는 이사악들을 찾아 더러운 짓을 하고 다니게 될 것이다.

 

 

 “ 여자가 생겨서 좀 바빠졌어. 강의도 처음 맡아서 압박이 심해. ”

 

 

 미샤는 별로 실망한 기색도 없이 무릎을 굽히며 자기 손등에 손을 얹는 포즈를 취했다. 모피 모자가 이마 위로 가볍게 미끄러져 내려왔다.

 

 

 “ 그럼 알리사처럼 결혼해. 리허설 한 번 더 빠지고 올게. ”

 

 “ 친구들 결혼할 때마다 그렇게 빠지고 오면 극장에서 미움받고 쫓겨난다. ”

 

 “ 미움이야 벌써 받고 있으니 상관없어. ”

 

 

 미샤는 보이지 않는 검을 거꾸로 들어 가슴을 찌르는 시늉을 하며 돌바닥 위에서 머리를 젖히고 한 바퀴 돌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어디서든 무대 위에서처럼 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랑신부를 촬영하고 있던 이고리가 카메라를 틀어 회전하고 있는 미샤를 찍었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타냐에게 건네주고 달려와 뒤에서 미샤의 허리를 안고 번쩍 들어올렸다. 딴에는 무대에서 본 동작을 흉내내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이고리는 트로이만큼이나 뻣뻣했기 때문에 서커스 광대처럼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되었다. 료카와 코스챠가 배를 잡고 웃었다.

 

 

 “ 그게 뭐야, 아가씨를 그렇게 안아줘 봐라. 기겁을 하고 도망치겠다. ”

 

 

 모피 코트 때문에 곰처럼 보이는 이고리는 개의치 않고 타이츠를 입은 왕자처럼 당당한 표정으로 미샤를 30센티미터 가량 들어올려 두 바퀴 돌렸다. 긴 코트가 망토처럼 펄럭였다.

 

 

 “ 임마, 너 제대로 먹고 다니기는 하냐? 스베타만큼도 안 나가겠다. ”

 

 “ 체중 때문이 아냐, 내가 들려준 거지. ”

 

 

 이고리의 나무토막 같은 팔에서 빠져나온 미샤가 허리와 옆구리를 문지르며 대꾸했다.

 

 

 “ 가장 기초적인 거라고. ”

 

 “ 난 공중에 번쩍 들리는 건 여자애들만 배우는 건 줄 알았어. ”

 

 “ 학교 다닐 때 밤중에 룸메이트들이랑 연습했거든. 기숙사 방에는 여자애들이 없으니까 돌아가면서 했었지. ”

 

 “ 그럼 여자들 역도 다 출 줄 알아? ”

 

 “ 그렇게 어렵지 않아. ”

 

 

 미샤는 모자를 벗어 부채처럼 한 손에 쥐더니 발끝을 세워 이고리 주위를 돌았다. 사진을 찍고 있던 타냐가 그 광경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달려왔다.

 

 

 “ 키트리잖아! 크류코바랑 역을 바꾸기라도 했어? ”

 

 “ 니나만큼 잘 출 자신 있는데. ”

 

 

 미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벗어나 바깥 공기를 쐬러 나온 데다 친구들과 함께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는 코트를 벗어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돈키호테 여주인공 춤을 보여주었다. 그 딱딱한 바닥 위에서 부츠를 신고도 제대로 된 푸에테까지 췄다. 그가 키트리처럼 긴 다리를 들어 허공을 채찍처럼 차며 회전하는 동안 알리사와 파벨마저도 주위로 모여들어 1부터 32까지 소리내어 열광적으로 숫자를 셌다. 목에 두른 진홍색 스카프가 발레리나 스커트처럼 활짝 펼쳐지며 빙글빙글 돌았다. 서른두 번을 그 자리에서 돌고 나자 미샤는 훅 하고 숨을 길게 내쉬더니 고개를 숙여 알리사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 결혼식 춤이야, 이거. ”

 

 “ 고마워. ”

 

 

 알리사는 그를 껴안고 뺨과 입술에 키스를 했다. 파벨이 좀 당황한 듯 어색하게 박수를 쳤다. 이고리가 다시 미샤를 끌어당겨 위로 들어올리는 시도를 했다. 미샤는 이고리의 목과 어깨를 한 팔로 단단하게 감더니 한쪽 무릎을 그의 배에 대고 다른 쪽 다리를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미샤가 재미있는 포즈를 취할 때마다 타냐가 작품과 배역 이름을 외쳤다. 다들 셔터를 누르고 웃음을 터뜨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트로이는 친구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문득 알리사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까봐 겁이 나서 고개를 돌렸다. 그도 이고리처럼 아무런 사심 없이 미샤를 만지고 싶었다. 친구처럼, 형제처럼. 끌어당기고 안아 올리고 빙 돌리고 싶었다. 뒤엉켜 나부끼는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훑어 내리고 싶었다. 풀어진 스카프 사이로 드러난 목에 뺨을 대고 두 손을 그 애의 벨트 아래로 가져가고 싶었다.

 

 

 트로이는 뒷걸음질쳐 조용히 광장을 빠져나갔다. 그날 그는 늦은 밤까지 톨랴의 침실에 틀어박혀 술을 마셨다. 톨랴는 참을성 있게 그의 곁에 앉아 그 마음 약한 남자가 청혼할 용기를 끌어모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다음날 새벽에 깨어나 말도 없이 떠나버렸고 톨랴는 처음으로 영문학과 동료들이 수군거리던 말도 안 되는 루머에 대해 생각했다. 차라리 그 어처구니없는 얘기가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그게 멀쩡한 남자에게 버림받는 것보다는 덜 속상한 일이었으니까.

 

 

 

 

 

 

 

 

 

 

 

 

 

 

 

 

마르스 광장 한 컷 더. 여기도 날씨 좋을 땐 푸릇푸릇하고 괜찮은데 이때는 정말 우중충하고 추웠다. 하지만 알리사가 결혼했던 날도 딱 이런 날씨... 해만 좀 쨍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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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엄마와의 프라하 여행을 가기 전에 코스챠와 알리사에 대한 이 글을 다 쓰고 싶었지만 과중한 업무와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들 때문에 결국은 후반부의 정서적 클라이막스를 다 해소하지 못한 채 비행기를 타러 갔다. 돌아와서도 제대로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내내 더욱 과중해진 업무에 시달리느라 한 줄, 한 단어도 못 썼다. 오늘은 차를 마신 후 다시 써볼까 하고 파일을 열었는데 몇주 동안 내버려둔 탓에 처음부터 다시 쭉 읽고 머리와 손을 동시에 정돈해야 했다. 아마 오늘 밤부터는 좀더 이어서 쓸 수 있을 것 같다. 

 

 

발췌한 파트는 조금 앞부분, 알리사와 코스챠가 카페에서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코스챠는 알리사에게 프라하에는 출장을 온 거냐고 묻고, 이야기는 좀 다른 식으로 이어진다. 스베타, 타냐, 이고리, 갈랴, 료카, 트로이, 미샤 모두 이들의 문학 서클 멤버들이고 절친한 친구 사이다. 라주모프는 레닌그라드 출신의 유명한 영화감독(물론 허구의 인물이다)으로 오랫동안 미샤를 데리고 영화를 찍고 싶어했던 사람이다. 이 글에서는 코스챠가 이 사람 밑에서 영화 촬영을 돕고 있다. 이 글의 시간적 배경은 1981년 가을이고, 코스챠의 회상은 그보다 조금 전인 여름 말미에 대한 것이다. 

 

 

이 글은 깃털처럼 가볍게 쓰고 싶었지만 막상 쓰기 시작하니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코스챠 혼자만 나오는 글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시간적 배경이 미샤가 파리에서 체포되었던 1981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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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온 거야? ”

 

. 근데 오후에 떠나야 해. 렌필름에서 촬영 왔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 네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와봤어. 트로이가 말해줬거든, 너 이고리 마수에 걸렸다고. 프라하랑 부다페스트 갔다고. ”

 

, 그래... 그 녀석은 너랑 자주 통화하니까. ”

 

누구, 트로이? 전화는 무슨. 난 갈랴하고밖에 전화 안 해, 그나마도 두어 달에 한 번쯤. 전화번호가 자주 바뀌거든. 너하고도 안 하잖아. ”

 

 

 

어쩐지 코스챠는 기분이 나아졌다. 알리사가 갈랴하고만 전화를 해서. 트로이와도 통화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화번호가 왜 자주 바뀌는지 물어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정도는 그도 알았다.

 

 

 

근데 어떻게 얘기를 들은 거야? 전화도 안 했다면서. ”

 

나 그저께 레닌그라드 갔었거든. 학교에 들렀었어. 서류 뗄 게 있어서. 거기서 트로이 잠깐 봤어. 걔 말고는 아무도 못 만났어, 출장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

 

그래도 내 얘기 물어봐 줬네. ”

 

그럼, 친구들 어떻게 지내는지는 꼭 물어보지. 스베타, 타냐, , 료카, 이고리... ”

 

 

 

알리사는 갑자기 뭔가가 목에 걸린 듯 입을 다물었다. 코스챠는 자기도 목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건 이름일 거야. 왕자님. 로미오. 그들에겐 언제나 귀여운 꼬맹이. 미샤가 파리에서 체포되고 조국과 당의 반역자라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뜬 이래, 그 여름 내내 그들은 공포와 불안, 막막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고리는 영화계 인사들에게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오랫동안 미샤를 숭배해왔던 라주모프 외에는 모두가 모른 척했다. 하긴 키로프에서도 쉬쉬하며 납작 엎드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머지 친구들에게는 그런 인맥도 정보도 없었다. 그저 슬퍼하고 걱정하고 기도를 했을 뿐이었다. 신앙 따위 없었지만 모두가 신자가 되었다. 철저한 무신론자인 트로이만 빼놓고. 정작 가장 걱정하고 괴로워했던 것도 그 녀석이었지만. 여름 동안 트로이는 체중이 10킬로 가까이 빠졌고 폭음을 했다. 예전에는 코스챠가 취하면 트로이가 돌봐줬지만 이제는 정반대가 되었다. 찌는 듯 무더웠던 어느 날 밤 코스챠는 만취해서 모이카 운하에 무릎까지 빠져 있던 트로이를 간신히 끌어냈다. 백야가 거의 끝나서, 이제 밤이면 어둑어둑해져서 정말 다행이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린 덕에 운하에서 노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왜냐하면 트로이 그 멍청한 자식의 손에는 구겨진 르 피가로가 그대로 쥐어져 있었으니까. 그들의 꼬맹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로미오가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무슨 꼭두각시 인형처럼 온몸을 늘어뜨린 채 어디론가 옮겨지고 있는 그 무서운 사진이 아주 정면으로 나와 있었으니까. 코스챠는 스베타에게서 연락을 받아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사진을 실제로 보니 온몸이 떨려왔다. 트로이가 어떻게 그 신문을 구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건 그날 아침에 나온 신문이었으니까. 아마 학교에서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 녀석은 외국어학부에 있으니까. 코스챠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신문을 꼬챙이처럼 기다랗게 돌돌 말아 운하 난간 아래 굴러다니던 술병 안으로 쑤셔 넣고는 병을 물속으로 던져버렸다. ‘이 미친놈, 잡혀가려고 아주 작정을 했네하며 트로이를 걷어차고 따귀를 철썩철썩 때려 깨웠다. 그때 코스챠는 트로이가 우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어릴 적 입학식에서 만난 이래 단 한 번도 그 꺽다리가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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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세 장은 모두 모이카 운하. 맨 위는 2017년 10월, 아래 이 두 장은 19년 7월 밤에 찍었다. 

 

 

로미오는 알리사와 코스챠를 비롯한 이 문학서클 친구들이 미샤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이들은 미샤를 10대 중후반이던 발레학교 시절부터 알았기 때문에 로미오, 왕자님, 귀염둥이 등 온갖 애칭으로 부르는데 특히 로미오라는 별명은 여러가지 이유로 알리사가 많이 쓴다. 

 

 

르 피가로에 실린 피 흘리는 무시무시한 사진은 미샤가 수용소에 끌려가 모종의 정신교화를 받다가 약물 쇼크를 일으켜 혼수상태에 빠진 후 모스크바 클리닉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찍힌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예전에 썼던 수용소 이야기에 수록되어 있다. 시간적 배경은 이 단편과 동일하다. 그 이야기 후반부에도 미샤의 친구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건 모스크바의 무용계 동료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이었고 코스챠나 알리사, 트로이 등 레닌그라드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는 쓴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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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23. 6. 17. 18:35

구름 속의 뼈 (Part 5 : Final) 2023. 6. 17.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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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중순부터 쓰기 시작한 이 단편은 이제 후반부로 접어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오늘까지 다 쓰고 싶었지만 신경쓸 일이 많아서 정서적 클라이막스에서 멈춰있다. 아마 여행을 다녀와서 이어 쓰게 될 것 같다. 시간적 배경은 1981년 9월, 공간적 배경은 프라하이다. 주인공 코스챠는 영화촬영 현장에서 일하느라 프라하 로케를 왔다가 어린 시절부터 짝사랑했던 알리사와 재회하게 된다. 아래 한 문단 발췌해 접어둔다.

 

 

 

사미즈다트는 지하 자가출판 문학. 소련 시절엔 원체 검열이 횡행해서 저런 사미즈다트가 인기였다. 코스챠는 예전 글들에서 비중 있는 인물들로 등장했던 트로이와 알리사의 초중등학교 동기이고 그들이 만든 문학서클 멤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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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는 담배 연기로 자욱했고 손님들로 붐볐다. 점심시간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코스챠는 프라하에 몇 번 왔었지만 카페에 들어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선술집이나 숙소에서 맥주, 돼지족발, , 크네들리키와 양파 수프 따위를 먹은 게 전부였다. 여자랑 데이트를 하러 온 것도 아니니까. 이제 학생도 아니고 청춘도 다 지났으니까. 문득 코스챠는 알리사와 단둘이 카페나 레스토랑에 갔던 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학 식당에서 한두 번. 아니, 그때도 항상 트로이가 함께 있었다. 알리사의 단짝은 그가 아니라 트로이였으니까. 그가 얼마나 트로이의 자리를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알리사는 트로이의 집에는 아주 편하게 드나들었고 책도 같이 읽었고 심지어 대학 전공까지 똑같이 선택했다. 코스챠는 노력했다. 둘을 졸졸 따라다니며 도서관을 드나들기도 하고, 아무리 사전에서 단어를 찾아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영어 소설을 읽고 더듬더듬 번역도 해보았다. 둘을 따라서 영문학과에 진학해보려고 했지만 그는 외국어에는 별 재능이 없었고 오히려 뭔가를 만지고 고치고 조달해오는 데에만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결국 알리사가 트로이와 팔짱을 끼고 네바 강변의 국립대 언어학부로 등교하는 동안 그는 공과대학에 다녔다. 대신 갈랴의 아파트에서 매주 열리는 문학 모임에는 꼬박꼬박 갔다. 모임에는 외국 문학 전공자나 풋내기 시인, 작가들이 많이 왔다. 코스챠처럼 공대에 다니는 애는 별로 없었다. 엔지니어의 손과 문학청년의 가슴이라고 갈랴가 추어주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코스챠는 양심이 좀 찔렸다. , 그가 문학을 좋아하긴 했다. 특히 사미즈다트는 더욱. 하지만 뭔가를 쓰거나 지어내는 데는 한 톨도 재능이 없었다. 그가 <서클>에 꼬박꼬박 갔던 건 오로지 알리사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클을 만든 건 알리사와 트로이, 갈랴였으니까. 하지만 알리사가 떠나버린 후에도 그가 계속해서 서클에 남았던 이유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갈랴의 말이 아주 조금은 맞았을지도 모른다. 엔지니어의 손과 문학청년의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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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한 문단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코스챠와 알리사가 만나는 카페는 블타바 강변에 있는 유명한 카페 슬라비아이다. 릴케가 드나들었고 이후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도 자주 드나들었다는 유서깊은 곳인데, 정작 나는 그곳을 딱히 매력적으로 느껴본적이 없어 사진 한장 없어 이 포스팅에는 대신 약간 스타일이 비슷한 카를로비 바리의 카페 엘리펀트 사진 두 장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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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의 뼈 (Part 2)  (5) 2023.05.06
:
Posted by liontamer
2023. 5. 13. 17:52

구름 속의 뼈 (Part 4) 2023. 5. 13. 17:52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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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5. 7. 15:52

구름 속의 뼈 (Part 3) 2023. 5. 7. 15:52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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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5. 6. 17:33

구름 속의 뼈 (Part 2) about writing2023. 5. 6. 17:33

 

 

 

 

 

전날에 이어 파트 2까지 전문을 그대로 올려본다. 프리발티스카야 호텔 2층 카페에서 게냐는 옛 여자친구 리다와 재회하고 둘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리다와 게냐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이름들에 대해. 러시아 이름은 이름 + 부칭 + 성으로 이루어진다. 중간의 부칭은 아버지 이름에 남성/여성 어미를 붙인다. 손윗사람이나 예의를 차려야 하는 경우 이름과 부칭을 함께 부른다. 리다의 남편 아르다노프의 풀 네임은 드미트리 에두아르도비치 아르다노프, 미샤의 풀 네임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야스민이다. 게냐의 풀 네임은 거의 언급되는 일이 없지만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카르사비예프이다. 부칭만 보면 아버지 이름을 알 수 있다. 세 남자는 순서대로 에두아르드, 세르게이, 알렉산드르의 아들이다. 미샤는 사람들이 자기를 깍듯하게 부칭까지 붙여 부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웬만하면 그냥 미샤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편이다. 

 

 

 

중반부 게냐의 회상에서 등장하는 미샤의 별명 '미하일 파르포로비치'(Михаил Фарфорович)는 전의 발췌문에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피부가 좋다고 발레단 여자애들이 '도자기'란 뜻의 파르포르를 가져와서 부칭 대신 붙인 별명이다. 도자기의 아들 미하일, 의역하면 도자기 미하일님 혹은 도자기 인형 같은 미하일씨 정도... 

 

 

 

키노는 빅토르 최가 리드보컬로 활동했던 소련~러시아 락밴드, 무미 트롤도 당시 매우 인기 있었던 펑크락 밴드이다. (지금도 활동 중이다) 너바나는 뭐 모두가 너무 잘 아니까.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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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의 뼈

Кисти в Облаках

 
 
 
 
 

 

 

 

 

 
 
 
 
 
 

 

 
 
 

 

2. 

 

 

 

 

 

 

별다른 조제가 필요한 주문은 아니었지만 음료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어색한 시간이 길어졌다. 마치 첫 데이트처럼. 여자들과 만날 때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첫 만남보다 더 불편하고 어려운 순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 헤어진 지 3년이나 된 여자와 어떤 식으로 얼굴을 마주 보고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차인 입장에서는.

 

 

 

거의 몇 분 정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녀를 바라보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각도를 좀 틀어서 그녀의 왼쪽 귀와 목덜미와 어깨, 소파 왼쪽에 걸쳐진 모피코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무대용 시선 처리 기술이다. 이런 건 군무나 마임을 맡았던 신입 시절 유용하게 써먹곤 했다. 물론 누구에게나 통하는 건 아니었다. 동료 무용수들에겐 먹히지 않는다. 적어도 실생활에서는. 당연하지만 미샤도 마찬가지다. 다만 자기에게 그런 게 안 통한다는 티를 내지 않을 뿐이다. 그는 보통 상대가 술수를 부리면 아는 척도 모르는 척도 하지 않고 침착한 눈으로 가만히 지켜보는 부류에 속했다. 리다 같은 여자에게도 통하지 않는다. 리다는 자기 앞의 남자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혹은 뭔가를 감추거나 불편한 게 있는 게 아닌지, 또는 자기의 매력에 사로잡혔는지 아닌지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능력이 있었다. 아마 지금도 내가 자기를 쳐다보는 척하면서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저 자기도 지금 어색한 상황이라 그냥 나를 봐주고 있는 것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화를 냈을 것이다.

 

 

 

그거 디올이야? ”

 

 

갑작스럽게 리다가 물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나도 모르게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리다는 손을 뻗어 내 머플러 끝을 가볍게 만지며 질문을 되풀이했다.

 

 

 

디올 같은데. 라벨이 안 보이니까 헷갈리네. ”

 

나도 잘 몰라. 그냥 손에 잡히는 거 매고 나왔어. 바람 많이 불어서. ”

 

뒤집어서 둘렀잖아. ”

 

 

 

그녀는 거리낌 없이 내 머플러를 술술 풀어서 뒤집은 후 다시 매어 주었다. 스카프 귀퉁이를 톡톡 치며 디올 로고를 확인하더니 빙긋이 웃었다.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뒤집어놓으면 어떻게 해. 근데 이런 색깔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나? 이거 네가 산 거 아니구나? 그 사람 건가? ”

 

 

 

나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모른 척하며 기억을 더듬어 대꾸했다.

 

 

 

, 그래. 산 거 아냐. 지난번에 잡지 촬영했을 때 받았던 것 같아. 기념품으로. ”

 

, 그 엘르. 기억나네. 두 권이나 샀지. 스크랩도 했는데. 가지고 올 걸 그랬나? 사인이라도 받게. 근데 그 화보 보니까 넌 디올보단 아르마니가 더 잘 어울리더라. 그쪽 걸 받았으면 좋았을걸. ”

 

 

 

나는 그 촬영에서 걸쳤던 브랜드들이 뭔지 기억도 하지 못했다. 촬영장은 정말 어수선했다. 발레 화보 촬영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옷과 스카프와 신발, 모자 따위를 계속해서 바꿔가며 걸쳐야 했다. 목걸이와 시계도 있었던 것 같다.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한 아름씩 가져다주며 코디네이터가 브랜드명을 따발총처럼 주워섬겼고 사진사는 역시 귀가 따갑도록 빠르게 각종 주문을 쏟아놓았다. 심지어 미국인이라 영어를 잘 알아듣기도 어려웠고 촬영을 담당한 잡지 쪽 에디터가 통역을 해줬지만 그나마도 패션 업계용 억양과 특수용어들로 오염돼서 절반 이상은 소용이 없었다. 내가 고전하자 함께 촬영 중이었던 미샤가 몇 단어로 핵심만 전달해줬는데 차라리 그게 더 이해하기 쉬웠다.

 

 

 

어쨌든 머플러 덕에 어색했던 분위기가 좀 누그러졌고 나는 리다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일 년만이었고 이렇게 단둘이서 차분하게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리다는 많이 변해 있었다. 일단 머리 색이 바뀌었다. 원래 그녀는 나보다 훨씬 색이 밝고 윤기가 도는 금발이었고 그 제대로 된, 타고난 블론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헤어 스타일은 종종 바꾸더라도 염색을 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브루넷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거의 잉크처럼 검은색에 가까운 흑갈색이었다. 두세 가닥의 붉은색 블리치를 넣었는데 어딘지 인위적이어서 흑조 오딜 분장이 좀 떠올랐다. 막 미용실에서 나온 것처럼 말끔하고 칼로 자른 듯한 보브 컷이라 혹시 가발을 쓴 건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눈썹과 눈에는 짙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다. 은빛이 도는 짙은 갈색 스모키 메이크업과 빽빽하게 덧칠한 마스카라 때문이겠지만 눈이 평소보다 훨씬 크고 퀭해 보였다. 움푹 들어간 파란 눈이 거의 투명한 녹색으로 보였다. 꼭 물빛 렌즈를 덮어씌운 것 같았다. 리다는 결코 통통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말랐던 적도 없었다. 키가 크고 늘씬한 글래머 타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살이 빠져서 엘르 스튜디오에서 파트너로 촬영을 했던 여자 모델들이 떠오를 정도였다. 블러셔와 쉐이드 탓도 있겠지만 얼굴이 야위어서 뺨과 턱의 윤곽도 훨씬 날카로워져 있었다. 입술은 한창 유행인 다크 브라운 립스틱을 바르고 라인까지 꼼꼼하게 그려서 더욱 화보 모델 같았다. 흑백 체크무늬 니트 드레스는 헐거워서 목덜미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한쪽으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하긴 리다는 언제나 유행에 민감했으니 아마도 최신 잡지에 나온 스타일일 것이다.

 

 

 

그녀는 부쩍 나이 들어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한순간 좀 놀랐지만 그래도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아마 메이크업 때문일 것이다. 나는 조명과 메이크업의 효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관객들 앞에 서는 직업이니까. 나 같은 경우도 그 차이가 큰 편이라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냥 평범해 보여서 무대 위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리다는 무대에 올라가는 직업이 아닌데. 하긴 지금은 직업 같은 건 아예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그녀는 잠시 통역사로 일했었다. 거기서 남편을 만나기까지.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말도 안 하고. 꼭 처음 보는 것처럼. 저번에 극장에서도 봤으면서. ”

 

오랜만이라, 전이랑 달라 보여서. 머리 색깔도... ”

 

, 이거. 그이가 한번 해보라고 해서. 요즘은 흑발이 섹시해 보인다면서 부추기더라고. 근데 너무 새까만 건 싫어서 빨간 줄을 넣은 거야. 넌 맘에 안 드니? ”

 

아니, 잘 어울려. 그냥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

 

잘 어울리는 거랑 맘에 드는 건 다른 얘기 아닌가? ”

 

맘에 들면 위험한 거지. ”

 

 

 

리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우리 남편은 그런 거 신경 안 쓸 텐데. 내가 남자들한테 인기 있는 게 더 좋다고 했거든. 그건 그렇고 너는 근사해졌네. 전보다 더 멋있어졌어. 남자다워졌다고 해야 하나. 내 맘에 드는걸. 이것도 위험해? ”

 

글쎄. 넌 분별력 있으니까. ”

 

전부 다 내 쪽으로 돌리는구나. 네 맘에 들면 우리 남편 때문에 위험한 거고. 내 맘에 들면 그건 내 문제인 거고. , 그 사람이 질투한다는 말은 하기 힘든가 보지? ”

 

 

 

나는 리다가 왜 그런 식으로 대화를 몰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미샤와 내 관계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 그리 놀랍지 않았지만 과히 편안한 주제는 아니었다. 다행히 그때 주문했던 음료가 나왔다. 나는 페리에 병을 끌어당겨 마개를 따고 얼음이 든 유리잔에 탄산수를 부어서 리다에게 건네주었다. 라임 향은 거의 나지도 않았다. 리다는 거의 자동으로 고마워라고 대꾸하곤 잔을 건네받아 마셨다. 목이 말랐던 것 같았다. 그녀가 물을 마시는 동안 나는 찻잔에 각설탕을 한 개 넣고 레몬을 띄웠다. 바텐더가 티백을 너무 오래 담가놓았는지 찻물은 거의 커피처럼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좀 식어서 설탕도 잘 녹지 않았다. 대신 입술과 혀를 데지 않고도 빨리 마실 수 있었다. 연달아 길게 두 모금을 마시자 머리로 피가 확 몰리며 눈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을 설친데다 오전에는 스케줄이 꼬여서 차를 마실 짬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카페인보다는 알콜인 것 같지만.

 

 

 

찻잔을 내려놓으려는데 리다가 내 접시에 남아 있던 레몬 한 조각을 집어서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사탕을 먹듯 레몬을 씹더니 껍질을 뱉지도 않고 그대로 삼켰다. 보기만 해도 눈이 찔끔 감겼다. 나보다도 신 것을 못 먹는 애였는데. 이것도 새로운 유행인가 싶었지만 리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상하리만큼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임신했거든. 이런 거 다 할머니들 헛소린 줄 알았는데 진짜로 신 게 먹고 싶어지는 거 있지. 신기하지? ”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카페인이 조금 더 돌자 그제야 혀가 움직였다.

 

 

축하해. 전혀 몰랐네, 티가 안 나서. ”

 

아직은 티 별로 안 날 때야. 14주거든. ”

 

근데 왜 이렇게 야윈 거야? 잘 먹어야 하는 시기 아니야? ”

 

입덧이 어마어마했거든. 이젠 좀 나아졌어. 곧 뚱뚱해지겠지. ”

 

 

 

리다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가 박힌 결혼반지가 반짝거렸다. 보석을 분간하는 눈은 없지만 아마 카르티에일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결혼반지는 꼭 카르티에여야 해. 티파니는 별로야. 카르티에가 더 좋아라고 했으니까.

 

 

 

넌 어때? 일이야 잘되는 거 알고. 기사도 많이 나고 평도 좋더라. 올라갈 때마다 매진이고. 우리 그이는 지난번에 햄릿 보고 와서 정말 극찬하더라고. 네가 추면 한 번 더 보러 갈 거라고, 나한테도 꼭 같이 가자고 했는데 일정이 안 맞아서 못 갔네. 다음 공연은 언제니? ”

 

다음 달인데 그건 도쿄랑 암스테르담이고, 여기는 1월 마지막 주인데 신작이야. 내가 올라갈지는 잘 모르겠어. ”

 

당연히 너한테 주역을 주겠지. 그 사람이야 그러려고 널 마린스키에서 빼 온 걸 텐데. 심지어 도스토예프스키라며, 그 신작. 백치인가 악령인가 둘 중 하나지? 후기 장편들은 옛날부터 좀 헷갈리더라고. ”

 

 

 

리다는 조그맣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가 어디에서 이렇게 자세한 정보를 들은 건지 궁금했다. 아직 두 달 넘게 남은 공연이고 한참 준비 중이라 벽보도 광고도 전혀 나가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 이쪽 바닥에 관심이 많은 남편에게서 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여전히 나는 그녀가 내 공연에 대해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 낯설었다. 예전엔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문학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 게임, 키노와 무미 트롤, 너바나 따위의 팝과 락 음악에 대해서는 자주 얘기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니 푸쉬킨이니 셰익스피어니 하는 얘긴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차이코프스키나 나의 공연들에 대해 이것저것 묻지 않았던 것처럼. 문득 나도 그녀에게 일본 문학에 대해 자세히 물어본 적도, 그녀의 전공에 대해 관심을 깊게 가져본 적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사귀던 초기에 그녀는 내가 대학 생활이나 공부에 대해 물으면 뭐하러 그런 재미없는 얘길 하니. 어차피 넌 관심도 없잖아. 내가 일본어 인사만 몇 개 가르쳐줄게. 나중에 스타가 되면 도쿄에서 써먹을 수 있겠지라고 대꾸하곤 했었다. 마치 내 머릿속을 그대로 들여다본 양 리다가 말을 이었다.

 

 

 

다음 달에 도쿄 가는구나. 내가 가르쳐준 일본어 인사 기억해? ”

 

... 아리가토. 곤니치와. 스미마셍. ”

 

기특하네. 보람 있는걸. ”

 

 

 

나는 그녀에게 지난 2년 동안 일본에 투어를 세 번이나 다녀왔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저 서툰 인사들을 가르쳐준 건 갈런드와 통역사였다는 사실도. 리다가 알려줬던 단어들은 매 순간 한 귀로 들어와 다른 귀로 흘러나갔기 때문에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는 것도.

 

 

 

미국은? 거기는 안 가? ”

 

... 여름에 갔었어. 뉴욕하고 LA. ”

 

확실히 이적한 게 신의 한 수네. 마린스키에 있을 땐 못 갔잖아. ”

 

가긴 갔었지, 첫 시즌에. 그땐 군무였어. ”

 

, 그래. 기억나네. 네가 국제전화를 했었지. 시내에 구경 나간다고. 선물 뭐 갖고 싶냐고. ”

 

그랬나? ”

 

내가 화냈잖아. 미국물 먹으러 가서 자랑하는 거냐고. 쇼핑할 시간도 있는 거 보니까 일하러 간 게 아니라 완전 놀러 간 모양이라고, 좋겠다고. 멋진 몸매 자랑하면서 미국 여자나 꼬시라고. ”

 

난 왜 기억이 안 나지. ”

 

넌 내가 성질내는 거 싫어했으니까 기억에서 지운 모양이지.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그때 못되게 굴긴 했네. 꿈에 그리던 뉴욕에 갔는데 구경 좀 하면 뭐 어떻다고, 비싼 요금 내고 국제전화까지 해줬는데 내가 화만 냈으니까. 있지, 나 그날 쏠쏠한 아르바이트가 나왔대서 갔는데 면접에서 미끄러졌어. 근데 너는 미국에 공연하러 가고, 또 구경도 나간다고 하니까 열받았던 것 같아. 나는 기껏 통역 아르바이트에도 떨어졌는데 너는 뉴욕 공연에 올라가는 스타가 됐구나 싶어서. 이렇게 돌이켜보니까 진짜 유치했네. 네가 기억이 안 난다니까 다행이라 해야 하나. ”

 

 

 

기억이 났다. 그날 리다는 전화 너머로 거의 히스테리에 가깝게 짜증을 내며 울었다. 하지만 딱히 그것 때문에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국제전화라 어차피 금방 끊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미 전화를 걸기 전부터 기분이 최악인 상태여서 더 나빠질 것도 없었으니까. 리다는 내가 뉴욕 공연에 올라가는 스타가 됐다고 생각했다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건 마린스키의 뉴욕 투어였는데 나는 백조의 호수 1막에서 3인무를 추게 되어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이미 지그프리드를 두어 번 춘 적이 있었지만 해외 투어에서는 티켓 파워가 중요했기 때문에 톱스타들을 내세웠고 나 같은 풋내기에게는 당연히 주역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13인무는 상당히 괜찮은 배역이라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착 둘째 날 연습 도중에 뭔가가 감독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는 나를 군무로 돌려버렸다. 시내에 구경을 나갔던 건 군무진들에겐 별다른 인터뷰나 마스터클래스가 잡혀 있지 않아 시간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투어 내내 나는 군무를 췄고 마지막 날에는 무대에서 내려오다 발목을 조금 다쳤다. 부상은 별것 아니어서 며칠 만에 나았지만 돌아와서도 두 달 가까이 제대로 된 배역을 받지 못했다. 안나는 나에게 감독 면담을 해보든지 당시 뒤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던 나탈리야 이바노브나와 그 서클에 들어가 있는 선배들과 친하게 지내보라고 충고했지만 그런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리다에게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리다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내가 그녀의 대학 생활과 쏠쏠한 아르바이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싫어하진 않았어. 네가 화내는 데는 항상 이유가 있었으니까. ”

 

무슨 이유인지 알았던 적도 별로 없으면서. ”

 

몰랐던 건 내 잘못이지. ”

 

글쎄. 나도 말 안 해 줬으니까. ”

 

 

 

리다는 유리잔을 무심하게 빙글빙글 돌렸다. 얼음이 잔 안에서 부딪치며 달그락거렸다. 나는 반쯤 남아 있던 페리에를 그녀의 잔에 따라주고 식어버린 차를 마저 마셨다. 문득 이 자리가 너무나 불편해졌다. 옛날이야기를 주고받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전화를 걸어왔을 때 리다는 그저 잠깐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잠깐이면 된다고. 꼭 할 얘기가 있다고. 전화로는 하기 어렵다고. 내가 아는 리다는 이런 잡담을 하기 위해 사람을 불러내는 여자가 아니었다. 친구나 애인이라면 예외지만 자기 영역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오후 4시였다. 스튜디오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직하게 물었다.

 

 

리도츠카, 왜 만나자고 한 거야? ”

 

 

 

리다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빽빽하고 두꺼운 마스카라 사이로 투명한 푸른 눈을 천천히 깜박이면서. 무의식적으로 나는 코펠리아를 떠올렸다. 인형처럼 무감각한 눈빛, 무대 분장을 연상시키는 짙은 메이크업. 그 침묵의 주시가 계속되자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불편해졌고 그냥 그녀가 본론을 꺼내놓을 때까지 기다릴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아마 우리가 이렇게 서로 눈을 오래 마주치는 건 오직 키스할 때와 사랑을 나눌 때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대화를 많이 하는 커플이 아니었다. 아니, 대화의 총량은 그리 적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말하는 쪽은 대부분 리다였다. 말할 때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건 둘 다 서툴렀다. 리다는 맘먹으면 얼마든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얘기할 수 있었지만 너무 간지럽잖아. 미국 애들도 아니고하며 싫어했다. 미국을 동경하고 할리우드 영화라면 사족을 못 쓰면서도 그랬다.

 

 

한참 후에야 리다가 말했다.

 

 

넌 나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구나. 잘 지냈는지, 뭘 하며 사는지. 하나도. ”

 

미안해. ”

 

 

나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그렇게 말했다. 잘 지냈는지, 뭘 하고 사는지 물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임신했다고 말한 후에는 어쩐지 그 모든 것이 사족처럼 느껴졌다. 입덧을 하다 이제 나아졌다는 여자, 레몬을 생으로 씹어먹는 여자 앞에서 판에 박힌 안부 인사를 뒤늦게 늘어놓는 것이 쉽지 않았다. 패션과 스타일에 집착하던 여자가 남편의 한 마디에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블론드를 검은 머리로 바꿨다면 그건 그만큼 남편과 마음이 잘 맞는다는 뜻이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혹은, 정반대로 남편의 취향에 모든 것을 맞춰가며 아름다운 인형처럼 지낸다는 뜻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리다가 그런 식으로 살 수 있는 여자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 그러니까, 네가 당연히 잘 지낼 거라 생각해서. 그래 보이고. ”

 

, 내가 샤넬을 입어서? ”

 

샤넬이야? ”

 

 

내가 바보처럼 묻자 리다는 웃었고 그 샤넬로 추정되는 체크무늬 니트 드레스 밑단을 잡아당겨 폈다. 그리고는 내 찻잔 바닥에 반쯤 잠겨 있던 레몬 조각을 티스푼으로 떠내서 다시 입에 넣었다. 덜 녹은 설탕 알갱이가 레몬 껍질 위에 갈색 얼음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덜 시겠네, 다행이다라고 말할 뻔했지만 신 게 당긴다고 찻물에 푹 절여진 레몬을 꺼내 먹는 여자에게 어울리는 농담은 아닐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리다는 레몬을 천천히 씹었고 이번에는 껍질을 뱉었다. 그리고는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무대 위의 미소. 예전에 그녀는 이런 미소를 지을 줄 몰랐는데. 흑발 보브 컷과 샤넬 드레스와 카르티에 반지. 페리에와 레몬.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리다는 아나운서처럼, 아니, 능숙한 통역사처럼 명확하면서도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너 아직 미국 쪽 에이전트 없지? 우리 남편이 그쪽에 러시아 문화재단을 만들었어. 지금은 미술관이랑 화가 쪽만 후원하지만 진짜 관심은 공연 쪽이야. ‘아르다노프 아티스트란 브랜드로 화가 다섯 명, 무용수 다섯 명, 오페라 세 명, 피아니스트 두 명으로 진용을 짤 계획이지. 그이가 그래서 날 보낸 거야. 너랑 계약하고 싶어 해. ”

 

재단을 만들었다고? 미국에? ”

 

, 엄밀히 말하자면 기획사 같은 거지. 하지만 재단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아. 그쪽 동네에 먹히려면 기업 메세나랑 문화재단이 필수야. 우리 나라는 아직 그런 쪽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지만. 디마는 런던 물을 먹었으니까. 뉴욕에도 자주 가고. ”

 

 

나는 미국이나 영국의 사정은 정확히 몰랐지만 지금 바로 여기, 러시아에서 소위 문화재단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탈세. 이미지 세탁. 새로운 돈벌이. 이해되지 않는 건 딱 하나였다.

 

 

 

그런데 왜 나를? 별로 사업에 도움 될 것 같진 않은데. 더 잘나가는 무용수들 많잖아. 마린스키에도. ”

 

그 사람들이야 그냥 키로프이름 덕을 보는 거지, 사실 그 동네에서 진짜 스타는 요즘 볼쇼이나 키로프에서 투어 돌리는 애들이 아니라 망명 무용수들이야. 바리쉬니코프 뭐 그런 사람들. 근데 망명이나 자력으로 이미 자기 자리 꿰찬 사람들은 우리한테 별 소용없어. 1~2년 바짝 프로모션하고 여기저기 투어 돌려서 돈만 땡기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벌써 나이도 들 만큼 들었고. 디마는 그런 단발적 프로모터가 아니라 문화재단을 원해. 제대로 된 신진 예술가들을 처음부터 후원해서 진짜 러시아 예술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고 싶은 거야. 이건 장기 플랜이야. 그러니까 첫 단추가 정말 중요하지. ”

 

 

리다는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설명해나갔다. 마치 발레단의 문화마케팅과 홍보 전략을 설명하는 갈런드 같았다. 그러나 갈런드가 뉴욕 출신인데다 경영학과 마케팅을 복수 전공했고 이쪽 업계에서는 날고 기던 전문가라면 내 앞에 있는 리다는 졸업하고 반년도 안돼서 결혼했고 단발적인 일본어 통역 외엔 이 바닥에 대해 아무런 전문 지식이 없는 스물다섯 살짜리 아가씨였다. 하긴 나는 그녀의 결혼생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로 남편의 사업에 긴밀하게 참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문화재단과 무용수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그녀는 아주 그럴싸해 보였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리다가 너무나 강력한 탓인지 그녀의 매끄러운 설명은 마치 강의 노트를 달달 외운 모범생의 구술시험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잘 모르겠어. 왜 나야? ”

 

, 겐카. 왜 빼고 그래? 이 바닥에서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는 말 잊었어? 남편은 너를 높이 평가해. 조금만 밀어주면 미국에서 굉장히 잘 먹힐 거라던데. 사실 디마는 너의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를 굉장히 탐냈어. 전무후무하다나, 망명 안 했는데 그 정도로 유명하고 인정받는 사람은. 무대도 별로 안 올라가는데 상품성은 아직도 끝내준다면서. 근데 그 사람이야 뭐 벌써 옛날부터 미국에 자기 에이전트가 있으니까. 헐리우드에서 영화도 찍었고 상도 몇 개 받았잖아. 애초부터 톱스타시니까 우리가 키워줄 레벨은 아니지. 동업이라면 몰라도. 디마가 같이 하자고 제의도 했었대, 한칼에 거절했다고 투덜거리더라고. ”

 

 

리다의 무감각한 눈동자에 한순간 불길이 확 일었다 사라졌다. 아마 미샤가 그 훌륭한 사업 제안을 거절한 것이 내심 괘씸했던 모양이었다. 정작 그녀의 남편이 정말로 미샤에게 그런 제안을 했는지 의구심이 들긴 했다. 미샤는 해외의 유력한 후원자들도 많았고 미국과 유럽 쪽 에이전트 외에도 일본 쪽 에이전트가 따로 있었다. 약삭빠른 노브이 루스키 비즈니스맨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접근했을 리가 없었다. 하긴 미샤에게는 워낙 여러 가지 제안들이 쏟아지니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드미트리 에두아르도비치에게 제안 고맙다고 전해줘, 근데 난 지금 우리 발레단과 계약되어 있어. 해외 투어나 별도 초청 같은 것도 우리 운영국장을 통해서 하게 돼 있고. 프리랜서가 아니라서 어려울 거야. ”

 

의외네. ”

 

뭐가? ”

 

우리 그이 이름 아는구나. ”

 

전에 극장에서 인사했잖아. ”

 

부칭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네. 나 같으면 그러기 싫었을 텐데. ”

 

? 난 그 사람에 대해 아무 감정 없는데. 몇 번이나 마주쳤으니까 이름 정도는 기억하지. ”

 

 

 

리다는 나직하게 웃었다. 미간에 가느다란 세로 주름이 파이는 걸 보니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

 

 

 

너 생각보다 쿨하구나. 그럼 그냥 우리랑 같이 해. 네 계약은 지금 발레단과 연관된 쪽에만 유효한 거잖아. 너 뉴욕 갈 거라며. ABT랑 얘기 중이라면서. ”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

 

그런 것도 모르면서 이런 제안을 할까 봐? ”

 

아직 결정된 거 아냐. 아는 사람 거의 없고. 누구한테 들었어? 갈런드? ”

 

 

 

이마와 관자놀이로 피가 솟구치는 듯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갈런드는 수다쟁이긴 했지만 이런 일에 있어서는 정보를 누설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리다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단 둘뿐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샤였으니까. 내게 그 제안을 했던 장본인. 리다의 남편과 잘 아는 사이. 하지만 그가 아르다노프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쿵쿵 뛰면서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 문제에 있어 분명히 내게 결정권을 줬고 나는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지금 리다가 미샤의 이름을 댄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정확한 이유도 없이 화가 치밀었다. 그건 갈런드여야 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정보의 출처가 누구인지 물었다.

 

 

리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하고 낮게 웃었다.

 

 

너 웃긴다, 제네츠카. 이게 그렇게 정색하고 물어볼 일이야? 내가 무슨 스파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니면 너의 미하일 세르게예비치가 우리 그이한테 널 팔아넘기기라도 할까 봐 불안해서? 하긴 그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철저한 사업가니까. 가치 있는 건 금방 알아보니까. 낚아채는 것도 빠르고 처분하는 것도 빠르겠지. ”

 

 

나는 화가 나기보다는 머리가 멍멍했다. 무의식적으로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너무 힘을 줘서 잔에 금이 갈 뻔했다. 리다는 내 손에서 찻잔을 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갑작스럽게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이야, 바보. 흥분하긴. 하여튼 남자들이란. 자존심이 얼마나 센지. 당연히 너희 쪽은 아니지. 내가 그랬잖아, 우리 그이 뉴욕에 연줄 있다고. 문화재단 사무실도 그쪽에 냈는걸. ABT 관계자한테서 들은 거야. 그쪽에서도 네가 와주기를 엄청 기다리고 있다던데. 그래서 디마가 비서를 시켜서 너희 운영국장한테 연락했지. 그 미국인. 갈런드라고 했나? 그 인간 아주 여우 같더라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놓고 협의 같은 건 할 수 없고 너한테 얘기를 전해줄 수도 없다는 거야. 그 얘기 듣고는 그이가 얼마나 그 양키 욕을 하면서 김을 뿜었는지. 그래서 자기가 직접 너의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를 만나러 갔지. 뭐 아까 한 얘기가 다 농담은 아니었어, 그 사람도 당연히 비즈니스맨이지. 정치적인 건 웬만한 사업가들보다 한술 더 뜰걸. 그 자리에 그렇게 쉽게 올라갔을 리가 없잖아. 하여튼 우리 남편은 그 사람을 좋아하지. 디마는 그 사람한테, 그러니까 너의 보스한테 이 제안을 되풀이했어. 너의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도 그 양키랑 비슷하게 나왔대.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다고. 공연한 루머를 양산하지 말라고까지 했다던데. 그래도 우리 남편은 그 사람하고는 상당히 친분이 있으니까 톡 까놓고 좀 더 얘기를 할 수 있었지. 모든 게 확정되면, 그러니까 네가 ABT에 가게 되면 그때는 우리에게 우선권을 줄 수 있느냐고. 그 사람은 그런 결정의 주체는 너고 자기는 거기 아무런 구속력을 발휘하지 않는다고 했어. 그래서 디마가 날 보낸 거야. 어쨌든 너랑 나는, 한때 알았던 사이니까. ”

 

 

 

길게 얘기를 늘어놓은 리다가 숨이 차는 듯 잠시 입을 다물더니 바텐더를 불렀다. 페리에와 생수를 각각 한 병씩 더 주문했다. 바텐더는 심심했던 건지 아니면 슬며시 우리 얘기를 엿듣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리다가 손짓을 하자마자 달려왔고 기적적인 속도로 물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그녀는 마개를 열어서 내 앞으로 생수병을 밀어주고는 자기 페리에도 직접 따서 새 얼음 잔에 따랐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병을 집어 들고 물을 절반쯤 마셨다. 찬물이 들어가자 머리가 좀 식었고 그제야 리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마개를 따줬어야 했는데.

 

 

괜찮아. 일부러 그런 거 아닌 거 알아. 넌 항상 따줬으니까. 의자도 빼주고. 물도 따라주고. 매너 있는 남자라고 친구들한테 자랑했었지. ”

 

그랬어? ”

 

그랬어. ”

 

 

그녀는 탄산수가 든 잔을 입술로 가져갔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유리잔으로 입을 반쯤 가린 채 복화술 인형처럼 덧붙였다.

 

 

난 그런 기사도가 좋았어. 주변에 그런 남자들이 없었으니까. ”

 

나는, 배웠기 때문일 거야. 학교에서. 여자들이랑 춤을 춰야 하니까. 발레는 옛날 춤이니까. ”

 

, 그래. 옛날 것들만 있어서 답답하다고 했었지. ”

 

 

나는 리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그런 얘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했을지도 모른다. 극장에 있는 내내 그런 고민을 했으니까. 하지만 리다는 내 춤에 관심이 없었고 어차피 자기 전공이 아니니 이해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웬만하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피상적인 이야기들, 최소한의 대화가 이어질 수 있는 아주 현실적인 질문들, 리다가 궁금해하는 화제들, 그러니까 발레학교나 극장 구내식당의 식단이라든지, 단독 대기실을 받을 수 있는 급수라든지, 평소의 출연료와 해외 투어 출연료의 차이, 무대 의상 피팅, 발레리나들이 쓰는 분장용 화장품과 일반 화장품의 차이 뭐 그런 얘기들 뿐이었다. 춤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리다는 내 생각을 읽은 것 같았다. 가느다란 휘파람을 불며 말을 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네가 그랬거든. 완전히 새로운 걸 봤다고. 너무 대단했다고. 옛날 것들만 있어 답답했는데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다고. 그건 아직도 기억나. 넌 그런 말 안 하던 애였으니까. ”

 

언제? ”

 

메달 따왔을 때. 넌 콩쿠르랑 상에 대해선 거의 얘기하지 않았어. 온통 그 말만 했지. 완전히 다른 것. 새로운 것. 그 사람은 다르다고. 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어. 난 샴페인을 준비했었는데 넌 그거 입에 대기도 전에 이미 취해 있었지. ”

 

 

그녀는 그때 화를 냈던 것 같다. 아니, 화를 냈다기보다는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나 그때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우리 관계는 그 당시 이미 막바지로 치닫는 중이었고 리다는 걸핏하면 성을 내고 토라졌다. 그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돌아왔을 때 리다가 우리 집에 왔었던 것 같긴 했다. 아니, 리다네 집에 갔었는지도 모른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샴페인은 더더욱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난 알았어. 네가 떠날 거란 걸. ”

 

극장을? ”

 

나를. ”

 

떠난 쪽은 너였잖아. ”

 

뭐가 다르다고.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다는 제대로 된 논쟁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차였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몇 달 동안 아르다노프와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는 것, 그와 곧 결혼할 거란 얘기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화가 났던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너무 지쳐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배신당하고 걷어차인 남자답게 당연히 화가 났겠지만 무의식적으로 그 기억을 모두 지웠을지도 모른다. 그 시기를 떠올리면 회색 안개에 파묻혀 있는 기분이 들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대에 올라갔던 건 기억났다.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돌아오자 대우가 나아졌고 주역을 맡는 횟수도 늘어났다. 그때 데지레 왕자를 받았고 발란신 작품도 두 개나 더 췄다. 심지어 두어 달 후 감독은 나를 1 솔리스트로 승급시켜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순간들조차 군데군데 회색 안개로 가려져 있었다. 이따금 붉은색과 오렌지색 불꽃처럼 명멸하는 격렬한 감각들이 있었던 건 확실했지만 그건 극장과도, 그리고 리다와도 관련이 없었다.

 

 

 

나는 남은 물을 마저 마셨다. 리다의 제안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엄밀히 말하면 아르다노프의 제안을.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아직 미샤에게도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뉴욕에 대해서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했는데. 철저한 비밀로 하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있었는데 뜬금없는 아르다노프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며 계산을 했고 리다를 내게 보냈다는 것, 심지어 미샤와도 담판을 지으러 갔었다는 것, 정작 당사자인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우스웠고 자신이 하잘것없게 느껴졌다. 옆구리 어딘가를 둔하게 짓누르는 듯한 기분 나쁜 통증이 일었다. 아마 분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리다에 대해서는 아니었다. 리다는 아주 이성적이고 세련된 협상가처럼 굴었지만 그 낭랑한 장광설은 전혀 진짜 같지 않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유능한 커리어 우먼의 대사를 정교하게 흉내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그저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스몰렌카 운하 대신 호텔 카페에 가고 유럽 호텔에서 엽서를 부치는 것처럼. 그런 그녀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리다는 내가 웃자 조금 안심한 듯 자기도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는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겐카, 그쪽 활동은 우리한테 맡겨. 디마가 우리 소속 아티스트들 중에서도 최우선으로 밀어줄 거라고 했어. ”

 

내가 거절하면 아르다노프는 너한테 화를 낼까? ”

 

뭐 실망해서 화내긴 하겠지만 당연히 나한테는 아니지. 그이는 웬만하면 나한테 화내지 않아. 게다가 난 애까지 가졌잖아. 임신부에게 함부로 성질내면 안 되지. ”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거의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거절하고 싶은 거야? ”

 

. ”

 

디마가 계약금 얘기도 했는데. 들어보지 않을래? 분명히 지금 받는 것보다 좋은 조건일 거야. 네가 원한다면 내가 좀 더 올려달라고 해볼 수도 있어. 얼마인지 들어보고 결정하지 않을래? ”

 

아니. 괜찮아. 돈 문제는 아니니까. ”

 

 

 

그 순간 나는 리다가 울 것 같아서 겁이 났다. 그녀가 갑자기 너무 어린애처럼 보였기 때문에. 마스카라로 빽빽하게 채워진 속눈썹이 부르르 떨렸기 때문에. 아르다노프가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는 말이 거짓말 같아서. 그는 베르사체와 아디다스, 가죽 재킷과 메르세데스, 보석 박힌 선글라스와 롤렉스로 무장한 전형적인 노브이 루스키였고 그런 자들은 대부분 마피아였으니까. 아무리 세련되게 굴어도 본질적으로는 범죄자였고 그것도 상스러운 깡패였으니까. 그런 인간들에게 여자를 때리고 욕을 하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을 테니까.

 

 

나는... 아직 미국에 갈지 말지 결정을 안 했어. 가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간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춤추고 싶지는 않아. ”

 

그런 식이란 게 뭔데? ”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몰랐으니까.

 

 

대답은 리다가 했다.

 

 

그렇게 하면 그냥 돈 버는 일이 되어버리니까? 춤추는 게 아니고? ”

 

그럴지도. ”

 

바보. ”

 

 

그녀는 눈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며 웃었다. 이제 더 이상 어린애처럼 다급해 보이지 않았고 울 것 같지도 않았다. 애초에 왜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녀가 내 말을 받아들인 것 같아서, 그 불편한 제안을 계속하지는 않을 듯해서 마음이 놓였다.

 

 

 

나는 리다의 빈 잔에 남은 페리에를 모두 따라 주었다. 그녀는 물을 마시는 대신 차가운 유리잔을 뺨에 마주 대고 굴렸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니트 드레스는 종잇장처럼 얇아 보였고 심지어 반소매였지만 전혀 춥지 않은 것 같았다. 샤넬이라서. 아마 그렇게 말하겠지. 명품이니까 추울 이유가 없잖아. 우리는 독수리와 다이아몬드 문양을 짜 넣은 줄무늬의 두툼한 스웨터와 밑단을 접은 청바지를 입고 이곳에 드나들곤 했는데.

 

 

리다와 나는 어느 토요일 오후에 프리모르스카야 지하철역 뒤의 중고시장에 가서 그 스웨터를 샀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졌고 재킷을 새로 살 여유는 없었기 때문에. 문양은 완전히 똑같았다. 사이즈와 색깔만 달랐다. 리다는 연한 분홍색, 내 것은 선명한 보라색이었다. 리다는 색이 마음에 안 든다고 툴툴거렸지만 사이즈가 맞는 게 그것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때 탄 분홍색, 안 예쁜 분홍색이라 싫다고 했다. 여자라고 이런 색을 입어야 한다면 너무 불공평하다고 하도 투덜대서 나는 다른 색도 분명히 있었을 거라고, 다른 여자들이 먼저 집어간 것뿐이라고 말했다가 원망의 눈초리를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색깔도 너한테 잘 어울리고 예쁘다고 말했어야 하는 거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내 보라색 스웨터를 빼앗아 입었는데 방심할 때마다 둘둘 말아 올렸던 소매가 흘러 내려오는 바람에 끄트머리를 수프 접시와 찻잔에 몇 번이나 빠뜨렸다. 세탁을 해도 자국이 지워지지 않았지만 리다는 어차피 너도나도 이 옷 입으니까 얼룩이라도 있는 게 나아라고 종알거렸다. 그런 스타일의 스웨터는 정말 모두가 입고 다녔으니까. 심지어 나는 얼마 전 리허설 도중에 미샤조차도 그 독수리 무늬 스웨터를 껴입는 것을 보았다. 패션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니 분명 명품이겠거니 싶었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이라가 이건 어디 거예요?’ 라고 묻자 미샤는 전에 시장에서 산 거라고 했다. 갑자기 너무 추워졌을 때 프리모르스카야 시장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산 거라고. 따뜻해서 연습할 때 껴입기 좋다고. ‘근데 주변을 보니까 백만 명쯤은 똑같은 걸 입은 것 같더라고. 새로운 피오네르 유니폼인가하고 덧붙였다가 지나가 피오네르 해본 적도 없으면서라고 놀려댔다. 미샤의 그 스웨터는 리다와 내가 샀던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코발트 블루라서 색깔만 달랐을 뿐이었다. 백만 명이 입고 다니는 싸구려 유행 스웨터. 샤넬. 디올. 아르마니.

 

 

 

리다가 잔을 내려놓고는 핸드백에서 조그만 콤팩트를 꺼냈다. 거울로 얼굴 여기저기를 비춰보더니 냅킨 귀퉁이에 물을 적셔서 입술을 닦았다. 짙은 립스틱이라 제대로 지워지지 않아서 입술 주름 사이에 갈색 얼룩이 무늬처럼 남았다. 그녀는 립스틱을 새로 칠하는 대신 내게 연고를 달라고 했다. 나는 코트 주머니를 뒤져 연고를 꺼내주었다. 사귀기 시작하던 무렵 그녀는 내가 계집애처럼 그런 걸 가지고 다닌다며 놀렸지만 내가 우리 학교는 남자애들도 다 이거 써하며 무대에 올라가는 직업이라 두꺼운 메이크업을 했다가 지우는 것이 일상이고 손발도 걸핏하면 짓무르거나 긁히기 마련이라 여기저기 바를 수 있어 좋다고 설명을 해주자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소리 내어 웃으며 키스를 해주었다. 그 이후 그녀는 생각날 때마다 내게 연고를 건네받아 자기 입술에 바르곤 했다. 몇 개 갖다주겠다고 했지만 내 것을 바르는 게 좋다고 했다. 그녀의 파우치에는 언제나 키엘 립밤이 들어 있었지만 그저 장식용일 뿐이었다. 예전에 잘 사는 집안 친구가 해외여행을 다녀오면서 면세점에서 선물로 사다 줬는데 아까워서 바르지도 못하고 간직해 놨던 거라 너무 오래돼서 분명 상했을 게 뻔하다고 했었다. 어쨌든 무용수들이 쓰는 게 몸에는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할머니들의 약초처럼.

 

 

아직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구나. ”

 

춤은 계속 추니까. ”

 

, 그렇지. 무용수들은 다 쓴다고 했었지. 그 사람도 이거 써? ”

 

누구? ”

 

그 야스민 씨. ”

 

모르겠는데. 그런 건. ”

 

그 사람은 키엘을 쓸 거야, 아니면 아벤느. 외국물을 많이 먹었으니까. 옛날엔 프랑스 팬들이 그 사람 전용 향수도 따로 만들어줬다던데. 그래서 지금 겔랑 향수 모델을 하는 건가. 그때 백스테이지에서 보니까 그렇게 클래식한 타입은 아닌 것 같던데. 그래도 화보는 멋지더라. 미남이야, 그 사람. ”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는 곁눈으로 나를 살짝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고 손가락 끝에 연고를 조금 짜서 입술에 천천히 발랐다. 그녀는 내가 미샤에 대한 언급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도, 아마도. 물론 나는 미샤가 뭘 쓰는지 알았다. 그는 나와 똑같은 연고를 썼다. 이따금 키엘이나 아벤느 같은 것도 쓸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주머니나 가방 안쪽에 항상 그 연고를 넣고 다녔다. 나와 같은 학교를 나왔으니까. 나처럼 마린스키, 아니 키로프에서 데뷔했으니까. 그러나 나나 다른 애들만큼 연고를 자주 바르지는 않았다.

 

 

그는 거의 언제나 입술이 촉촉했다. 피부도. 특별 피부관리를 받지 않아도 그랬다. 그런 건 타고나는 거라고 분장사가 말했다. 발레단 여자애들은 가끔 그를 미하일 파르포로비치(Михаил Фарфорович)라고 불렀다. 자기들보다 더 피부가 하얗고 매끄럽다고 부러워했다. 주름도 없고 반점 따위도 없다고. 그 애들의 말이 맞았다. 웃을 때 눈가에 살짝 잡히는 가느다란 잔주름 외엔 나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도자기 같은 피부. 하지만 그에게는 흉터들이 있었다. 목덜미부터 가슴을 가로지르는 기다랗고 하얀 흉터, 오른쪽 허벅지에 가로로 그어진 역시 하얗고 가느다란 흉터. 그 두 개는 거의 쌍둥이처럼 보였는데 거의 피부색에 가까울 만큼 하얗게 바래 있어서 바짝 다가가서 보지 않으면 눈에 거의 띄지 않았다. 손목에도 그런 흔적이 여럿 있었다. 미샤는 그것들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고 굳이 가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얗고 눈에 띄지 않는, 그러니까 안전한 흉터들. 그러나 왼쪽 골반 바로 위에, 훨씬 크고 생생한 흉터가 하나 있는데 그것만은 눈에 띄는 것도, 누군가의 손이 닿는 것도 싫어했다. 탈색된 벽돌색과 잿빛이 뒤섞여 작은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돌출된 상처였다. 아마도 실밥을 잘못 뽑았거나 아물 때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레이저로 흔적을 제거하기에는 너무 큰 흉터였다. 나는 그 상처에 대해 미샤에게 묻지 않았다. 목덜미와 허벅지, 손목의 흔적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은 수용소에서 생긴 상처일 것이다. 나는 그에게 수용소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그 일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회상록이나 인터뷰는 읽었다. 당시 기사들도 몇 개 찾아 읽었다. 하지만 그 자신은 그때 일에 대해 입을 여는 적이 없었다. 발레학교 시절 한때 나의 지도 교사였던 울리얀 세레브랴코프는 미샤가 패셔너블한 수용소 훈장덕분에 서방에서 더 잘 먹히는 아이템이 됐다고 뼈 있는 농담을 했다. 하지만 세레브랴코프는 물론 그 흉터를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리다가 내게 연고를 돌려주었다. 냅킨 끝으로 손가락에 남은 끈적한 연고를 닦아내고 이제 김이 거의 다 빠졌을 페리에를 한 모금 마셨다. 립스틱 얼룩 위로 연고 자국이 남았다.

 

 

나중에 후회할지도 몰라, 제네츠카. 좋은 제안이었으니까. 너희 양키 국장도 얼만지 물어보기라도 하지 그랬냐고 할 거야. ”

 

글쎄. 그래도 상관없어. ”

 

, 예전에는 내 부탁 거절한 적 없었는데. ”

 

이런 얘기는 아니었으니까. ”

 

그래. ”

 

 

 

그녀는 잠시 손등으로 이마를 지그시 눌렀고 반쯤 잠긴 음성으로 나직하게 덧붙였다.

 

 

그래도 기분 좋아. ”

 

뭐가? ”

 

네가 거절해서. ”

 

어떻게 그래? ”

 

네가 얼마 줄 건지 물어봤다면 실망했을 거야. ”

 

전권 대표가 뭐 그 모양이야. ”

 

그러게. 우리 그이가 실망하겠지. 그치만 내가 실망하는 것보단 그이가 실망하는 게 나아. ”

 

 

 

그녀는 손바닥만 한 핸드백에 콤팩트를 집어넣고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립스틱이 지워져서인지 얼굴이 창백했다. 어쩌면 흑발 염색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머리 색은 어울리지 않았다.

 

 

 

리다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나는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했다. 바텐더는 엷은 금발을 짧게 깎고 턱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굳이 요청하지도 않은 영수증을 건네주면서 바텐더가 아는 척을 했다. 우리를 기억하고 있다고, 간만이라 반갑다고 했다. 그런데 아가씨는 머리 색을 바꿨네요, 처음엔 못 알아봤어요. 너무 오랜만이군요. 그간 외국에라도 다녀오셨나요? 그건 그렇고 두 분은 굉장히 성공하셨나 보군요. 부티가 나네요. 다음에도 자주 오세요. 나는 그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이 카페를 드나들던 동안 바텐더가 우리에게 말을 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마도 모피코트와 샤넬 드레스의 마법일지도 모른다.

 

 

 

리다는 잠시 후에 돌아왔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면서 이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끝났다는 생각에 안심했다. 불편하고 힘든 순간들은 다 지나갔다고. 그때 리다가 좀 휘청거렸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아 주었다. 리다는 미안, 좀 어지러워. 너무 오래 앉아 있었나 봐라고 중얼거리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는 공기처럼 가벼웠고 거의 텅 빈 인형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곧 그녀가 온몸의 무게를 실어 왔다. 내게 기댄 상태에서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숨을 헐떡거렸다. 나는 리다의 허리를 감싸서 부축해주었고 잠깐 소파에 다시 앉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밀폐된 공간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그런 거라고, 차라리 밖으로 나가서 찬 공기를 쐬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나는 리다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카페를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지만 리다는 갇히는 느낌이 답답하다며 그냥 계단으로 가자고 했다. 그녀를 부축하는 것은 물론 어렵지 않았다. 나는 무용수니까. 하지만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내내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가 임신했기 때문에. 그리고 하이힐을 신었기 때문에. 차라리 업거나 안아서 옮기는 쪽이 훨씬 편했겠지만 우리는 이제 그럴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나는 갑작스럽게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실제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기분일 뿐이었다. 리다는 파트너에게 자기 몸무게를 어떻게 실어야 하는지 아는 발레리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예전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으니까. 나는 아마도 한 손으로도 그녀를 들어 올릴 수 있을 테니까. 바질이 키트리를 들어 올리듯. 내가 아직 한 번도 춰보지 못한 배역. 한때 리다를 보며 키트리를 떠올렸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자신만만함, 반짝이는 눈동자와 또렷한 말투, 언제나 약간은 유혹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한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린스키 입단 초기에 나는 감독이 내게 바질을 준다면 리다를 생각하며 배역을 준비해야지하고 상상하곤 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첫 시즌에 돈키호테의 배역을 받았지만 그건 바질이 아니라 투우사였다. 물론 첫 시즌에 받은 역으로는 상당히 큰 배역이었고 추는 것도 즐거웠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바질을 추고 싶었고 리다의 반짝이는 눈을 볼 때면 키트리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결국 마린스키에서 바질을 춰보지 못했다. 지금 우리 발레단의 레퍼토리에는 돈키호테가 없다. 아니, 미샤가 말했지. 내년 가을에 올릴 거라고. 음악과 리브레토 모두 준비됐다고. 또 그런 말도 했었다. 마린스키에서는 자신에게 투우사를 주지 않았다고. 그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이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기억났다. 하지만 그 순간 그가 뉴욕에 대해 말했고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언제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내 팔 안의 리다는 이제 키트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은빛 모피코트와 샤넬 니트 드레스에 파묻힌 작은 인형 같았다. 조금 가쁜 숨결이 이따금 내 목덜미에 뜨겁게 와닿지 않았다면 더 그런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녀의 팔이나 몸에서는 별다른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모피 때문에 구름 속의 뼈를 붙잡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물론. 구름에도 뼈가 있지. 바지도 입는데 뼈라고 없겠어? 키라의 집에서 미샤가 그런 농담을 했을 때 모두가 웃었다. 맥락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나만 빼고. 내 소외감을 눈치챈 키라는 내게 마야코프스키 시집을 빌려주었다. 교과서에서 형식적으로 접했던 것 외엔 처음이었다. 키라의 성의를 무시하고 싶지 않아서 다 읽긴 했지만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 바지를 입은 구름역시 마찬가지였다. 하긴 나는 미샤나 키라와 문학적 취향이 딱 맞는 적이 별로 없었다. 아마 세대 차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름 속의 뼈라는 말은 계속해서 남았다. 나는 화려한 의상과 미모로 무장했지만 춤 실력이 형편없어 나무토막같이 느껴지는 발레리나들을 볼 때마다 미샤의 그 농담을 떠올리곤 했다. 아마도 미샤는 정반대의 상황을 빗대어 말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왜 모든 것이 미샤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리다와 함께 있는 이 상황을 회피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리다가 싫은 건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원망하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이 만남의 목적에 대해, 자기 남편의 제안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고 나자 고통스러울 만큼 불편하고 어색했던 마음도 거의 녹아버렸다. 내가 그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녀가 컨디션이 안 좋아 보였기 때문에 걱정이 될 뿐이었다.

 

 

 

나는 리다를 주차장에 데려다주려 했다. 당연히 차를 가져왔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잠깐이라도 바닷바람을 쐬고 싶다고 했다. 멀미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고. 그래서 나는 그녀와 함께 로비를 지나 현관으로 갔다. 해가 졌기 때문에 로비 바의 조명이 좀 더 밝아져 있었고 손님들도 늘어나 있었다. 독일 관광객들이 빛바랜 흰 티셔츠와 면바지 차림으로 코카콜라나 칵테일, 맥주 따위를 마시며 바 한쪽에 매달려 있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녀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능숙한 미소의 아가씨. 그녀는 아까와는 다른 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다. 여전히 페테르부르크 타임즈와 금칠 벗겨진 체인 달린 핸드백을 곁에 두고서. 하지만 이제 제대로 된 방향으로 신문을 들고 있었다. 조그만 커피잔 곁에 담뱃갑이 놓여 있었다. 아까의 미니스커트 대신 몸에 꼭 맞는 청바지를 입고 다리를 근사하게 꼰 채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나를 알아봤다는 듯 다시 미소를 띠었다. 무대 위의 미소. 문득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아까 그 파슈카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

 

 

 

 

맨 위 사진은 아스토리야 호텔 카페 로툰다. 게냐와 리다가 이야기를 나누는 프리발티스카야 호텔 카페에 비하면 너무 화사하고 고급스러운 곳이긴 하다만, 사진 찾기 귀찮아서 그냥 이걸로 올려본다. 2017년 10월에 찍은 사진. 

 

 

 

'바지를 입은 구름'은 블라지미르 마야코프스키의 유명한 장시이다. 미샤라는 인물을 축조하던 무렵 이 시의 몇몇 행과 이미지를 조금 반영시켰었다. 키라와 미샤는 나이도 거의 비슷하고 취향도 통하는 곳이 많은데, 게냐는 어쨌든 이들과 세대도 다르고 관심사도 좀 다르다. 

 

 

 

 

 

 

 

 

 

게냐와 리다, 미샤가 사입었던 스웨터에 대해. 90년대 러시아에서 엄청나게 유행했던 스웨터인데 노르딕 문양과 이것저것이 좀 짬뽕되어 있었다. 당연히 문양은 이것저것 달랐지만 스타일은 보통 이랬다. 정말이지 너도나도 입고 다녔다. 이들이 스웨터를 샀던 프리모르스카야 지하철역 시장은 실제로 나와 쥬인이 종종 들르던 곳이다. 헌옷, 살충제, 자질구레한 생필품 등을 파는 곳이었는데 나와 쥬인은 리다와 게냐처럼 저런 스웨터를 샀다. 너무 추웠기 때문이다. 내가 산 게 리다의 때탄 연한 분홍색 스웨터(ㅜㅜ), 그보다 먼저 샀던 쥬인은 보라색 스웨터였다. 문양은 달랐음. 내 마음이 리다의 마음... 하지만 너무 추운 동네였으므로 그 스웨터를 입고 또 입었다 :) 아래 사진 두 장 더. 대충 이런 스타일.

 

 

 

 

 

 

 

 

 

사진이 엄청 빛바래서 굉장히 옛날 같지만 이것도 90년대 사진이라고 한다. 쥬인과 내 스웨터가 딱 저런 스타일이었음. 

 

 

 

..

 

 

 

 

시간 날 때 파트 3~5도 올려보도록 하겠다. 파트 3부터는 암호를 걸어두려고 한다. 뒷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다음 파트들에는 cloud를 입력해보세요. 

:
Posted by liontamer
2023. 5. 5. 17:39

구름 속의 뼈 (Part 1) about writing2023. 5. 5. 17:39

 

 

 

 

이 글은 작년 한 해 동안 조금씩, 꾸준히 썼다. 약 100페이지 가량이고 호흡도 조금은 더 긴 편이라 단편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아서 그냥 중편이라고 부르고 있다. 제목은 '구름 속의 뼈'. 제목에 대해서는 이전에 이 writing 폴더의 어느 발췌글에서 몇 줄 써보기도 했다. 더 잘 맞는 다른 제목이 떠오른다면 바꿀 마음도 여전히 있다. 

 

 

 

소설은 1997년 11월,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은 젊은 무용수인 예브게니 카르사비예프, 애칭은 게냐. 그리고 그의 옛 여자친구이자 노브이 루스키(소련 붕괴 후 급속도로 부를 축적한 비즈니스맨-신흥 러시아인-을 가리키는 당시 신조어였다)와 결혼한 리디야(애칭은 리다, 리도츠카)이다. 그리고 소설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둘의 대화와 게냐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미샤. 이 셋의 이야기를 다룬다. 공간적으로는 페테르부르크 바실리예프스키 섬 변두리의 바닷가 쪽 동네인 프리모르스카야 지구의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에서 시작해 호텔 근처에 있는 아파트, 그리고 바실리예프스키 섬 중심가에 있는 미샤의 발레단 스튜디오, 네바 강변, 마지막으로는 아브보드느이 운하 근방에 있는 게냐의 원룸 아파트로 이동한다. 나는 지난 2년 동안 이 90년대 말을 다룬 글을 세 편 썼다. 시간적으로는 이 이야기가 중간에 위치하지만 쓴 건 가장 나중이었다. 전체적으로 이 세 편의 소설들은 촉망받는 젊은 무용수인 게냐가 자기 장래에 대해 고민하고 또 예술가로서든 애인으로서든 또는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측면에서든 미샤와의 관계에 대해 의문하고 헤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당시 시대와 사회적 배경이 스며든다. 그것은 내가 직접 겪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예전 글들과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묘사된다. 

 

 

 

이 중편은 총 5개의 파트로 이루어진다.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으나 쓰면서 자연스럽게 파트를 매기게 되었다. 대부분은 공간적 이동을 따른다. 1, 2만 빼고. 

 

 

 

일년 동안이나 느릿느릿 썼던 글이라 쓰는 도중에 파편들을 발췌한 적이 많다. 어쨌든 파트 1 전문을 올려본다. 초반에 언급되는 에브로파, 아스토리야, 네프스키 팔라스는 페테르부르크 중심가의 고급 호텔들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은 바실리예프스키 섬 외곽의 바닷가에 있는 4성 호텔이다. 나는 오래 전 그 호텔 근처의 기숙사에서 살았다. 리다와 게냐가 재회하는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의 2층 카페에도 이따금 가곤 했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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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의 뼈

Кисти в Облака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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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711, 프리발티스카야 호텔, 페테르부르크

 

 

 

문을 열고 로비로 들어가자 언제나처럼 비누와 세제, 수증기 냄새가 뒤섞인 후끈한 공기가 덮쳐왔다. 리다는 목욕탕에 온 것 같아서 좋다고 했다. 여기는 들어오면 따뜻하고 널찍하고 깨끗하고, 젠체하는 사람들도 없고. 에브로파나 아스토리야에선 이런 냄새가 안 나거든. 그러니까 여기가 제일 좋아. 그러면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곤 했다. 리다와 사귀던 시절엔 주머니 사정 때문에 그런 최고급 호텔에는 거의 발을 들여놓았던 적이 없었고 기껏해야 극장 행사 때문에 몇 차례 끌려갔던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후 미샤와 이따금 그 두 호텔 카페에 들르게 되면서 리다의 말이 절반쯤은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에브로파와 아스토리야는 이렇게 대놓고 사우나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로비는 항상 북적거리고 외국인들과 양복을 빼입은 비즈니스맨들과 번쩍거리는 베르사체 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노브이 루스키, 백금발로 염색하고 가짜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모피를 걸친 창녀들이 우아하게 오간다. 공기는 후끈하다기보다는 약간 서늘하고, 무겁게 깔리는 고급 향수 냄새와 하이힐이 매끄러운 바닥에 또각거리며 부딪치는 소리, 거의 한 덩어리로 뭉쳐져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으로 느껴지는 영어와 외국어들과 우리말과 전화벨 소리, 트렁크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온통 뒤엉킨다. 밝고 우아하고 동시에 돈 냄새가 넘쳐나서 어딘가 조금 천박하게 느껴진다. 미샤가 업무 미팅이나 인터뷰 장소를 다른 곳으로 잡으면 더 좋았겠지만 두 곳 모두 네프스키 한가운데와 이삭 광장 맞은편이라는 위치상의 엄청난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잘 모르고 또 이해하고 싶지 않은 어떤 비즈니스 전략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라면 갈런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설명해줄 준비가 되어 있을 테지만 나는 물론 그 자본주의 장광설에 자진해서 코를 처박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어느 날 딱 한 번, 미샤에게 미팅 약속이 아닐 때는 굳이 여기서 차를 마시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을 뿐이었다. 에브로파와 아스토리야는 이름값만큼 차 한 잔 값도 비쌌고 그렇다고 그만큼 맛이 훌륭한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미샤는 자기 정도 되는 사람이면 매일같이 최고급 호텔에서 차를 마시는 법이라고 당연한 답을 하는 대신 눈을 둥그렇게 떴고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한 번도 그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그러고 보니 그렇네, 집 앞 카페가 더 나은 것 같아, 몇 배는 싸고. 바깥으로 운하도 보이고. 그냥 습관이 돼서 그런가 봐. 옛날부터 자주 왔거든. 지나도 그렇고. 전엔 여기가 그렇게 비싸지 않았어. 국립대 다니는 애들도 자주 왔고라고 말했다. 그럴 때면 나는 그와 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시간과 인식의 거리를 깨닫고 내심 놀라곤 한다. 그건 공식적인 일의 영역과는 다른 층위의 거리이다. 스튜디오와 극장에서 그는 명확하게 리더이며 윗사람이다. 동시에 그런 위계와는 아무 상관 없이, 나와 같은 무용수다. 미샤가 무대에 올라가는 일이 별로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를 언제나 무용수라고 생각한다. 일상에서도 미샤는 딱히 어른처럼 구는 적이 없어서 내게는 그가 소위 옛날 사람이란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이따금 이런 말을 들을 때에야 비로소 아 그렇군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뭐 단어만 놓고 치자면 리다도 국립대 다니는 애들에 속했다. 그저 시대가 다를 뿐이다. 리다는 일부러 에브로파에 가서 편지를 부쳤다. 순전히 그곳의 호사스러운 레스토랑에 드나드는 같은 학부의 부잣집 여자애들에게 꿀리지 않으려고. 에브로파에서는 외국인 관광객과 비즈니스맨을 대상으로 달러를 갈취하기 위해 요금이 몇 배로 비싼 특송 우편센터를 차려놓고 있었는데 길만 건너면 우체국이 있었고 리다에겐 딱히 편지를 보낼만한 외국의 친척이나 지인이 없었으므로 이건 정말 바보짓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너 도쿄에 다녀온 적 있잖아. 그쪽 아는 사람 주소라도 줘라고 했고 결국 나는 도쿄문예회관과 발레 마스터클래스에서 딱 한 번 만났던 그쪽 안무가에게 새해 인사 엽서를 써야 했다.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은 당연히 에브로파나 아스토리야와는 다르다. 위치도 바실리 섬 외곽이고 가격도 더 저렴하다. 물론 창녀들은 많았다. 그건 어디나 마찬가지니까. 이쪽 투숙객들은 훨씬 실용적인 사람들이고 외국인들은 운동선수들이나 무슨 대회에 참석하는 단체 손님들, 패키지여행을 온 핀란드인들이나 독일인들이 대부분이다. 사업가들도 있겠지만 에브로파와 아스토리야, 네프스키 팔라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보다는 급수가 낮다. 혹은, 굳이 전략적으로 허세를 부리지 않아도 될 만한 사람들이다. 차림새도 한결 검소하다. 가끔은 아시아 쪽 관광객이나 사업가들도 보인다. 리다는 호텔 로비에서 동양인들을 발견하면 저 사람은 일본, 저 사람은 한국, 저 사람은 대만 쪽인 것 같아하고 정확하게 찍어냈다. 그리고는 어떻게든 곁에 가서 말을 걸어보곤 했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일본어를 전공하고 있었지만 거기 더해 한국어까지 열성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수교 이후 그쪽 전망이 밝다는 거였다. 발레학교에 일본과 한국에서 온 여자애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툭하면 놀러 오려고 해서 난감했다.

 

 

이른 오후였기 때문에 로비는 조용하고 한산했다. 리다의 말대로 이곳은 따뜻하고 널찍하다. 냄새도 다르다. 하지만 그러니까 제일 좋아에 해당되는 건 아니다. 그냥 괜찮은 4성 호텔이고 미샤의 말에 따르면 소련 올림픽 스타일의광활하고 어둑어둑하고 휑한 괴물이다. 하긴 70년대 말인지 80년대 초에 세워진 호텔이니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미샤는 이 호텔 개소식에도 참석했고(그의 표현대로라면 끌려갔고’), 요즘도 해외 방문객들이 여기 묵으면 종종 만나러 간다. 물론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우리 발레단 스튜디오가 바실리 섬에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 호텔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미샤야 첫인상과는 달리 양질의 잠자리나 식사를 따지는 사람은 아니니 이른바 고급호텔 수준에 들어맞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볼품없이 커서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이곳을 좋아했었다. 이렇게 과거형으로 기술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리다와 사귀던 시절에는 여기 오는 것이 특별했고 좋았다. 로비의 목욕탕 냄새와 리도츠카의 이세이 미야케 향수 냄새가 뒤섞이는 것도 좋았고 비록 방을 잡지는 않았지만 넓은 호텔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좋았다. 높은 바깥 계단을 따라 로비로 올라가면서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것도. 리다와 헤어진 후에는 웬만하면 이곳에 들르지 않았다. 두세 번 미샤를 픽업하러 갔을 뿐이었고 그때에도 로비에 들어가는 대신 밖에 주차를 하고 기다렸다.

 

 

 

어두컴컴한 로비 바에서 페테르부르크 타임즈를 뒤적이며 오렌지 주스인지 칵테일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음료를 마시고 있던 여자 하나가 내게 눈길을 던지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메이크업 스타일은 별로 창녀처럼 보이지 않았다. 립스틱 색도 연했고 마스카라도 칠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니스커트 아래로 뻗어 내린 두 다리는 스타킹도 없이 완전히 맨살이었고 영자 신문이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내 시선과 마주치자 여자는 다시 미소를 지었고 무릎 위에 놓여 있던 핸드백을 톡톡 쳤다. 금칠이 벗겨진 체인이 달린 가방은 완전히 열려 있었고 내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안에 들어 있던 빨간색과 금색으로 반짝이는 조그만 물건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미끄러져 내렸지만 쏟아지지는 않았다. 안쪽 버클에 걸린 모양이었다. 크기나 모양, 포장지의 재질을 보니 꼭 콘돔 같았다. 그때 여자가 얼굴을 붉히며 가방을 잡아채 버클을 잠갔고 세 번째로 미소를 던졌다. 거의 완벽한 미소였다. 순식간에 몇 배는 아름다워 보였고 완전히 진실하게 보였다.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순수하게 감정을 표시하는 여학생 같았다. 하지만 거기 넘어가기에는 나는 무대 위의 미소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장례라도 치르는 거니? 웃어! 얼굴을 다 열어! 푸른 눈이 유리하지. 애매한 색이면 별로지만. , 까만 눈은 언제나 먹고 들어가니까 괜찮아. 입술 한쪽이 말려 올라가지 않도록 조심해. 광대뼈 힘 빼고!  독설가인 옐레나 바실리예브나는 무대에서 제대로 웃지 못하면 다 헛수고라면서 항상 저 레퍼토리를 쏟아냈고 안나는 그 수업이 끝나면 콧잔등에 주름을 잡고 입술을 떨며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한번은 멋모르고 ? 네 눈은 까맣잖아. 까만 눈은 먹고 들어간다고 해주면 칭찬 아니야?’ 라고 물었다가 안나가 그게 어떻게 칭찬이냐고 왈칵 눈물을 쏟아서 당황한 적도 있었다. 나에게 푸른 눈이 유리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칭찬이지만 자기 같은 외국인 유학생에게 검은 눈 운운하는 건 차별적 발언이라는 거였다. 나는 안나에게 너만큼만 무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웃을 줄 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내가 자기를 달래려고 거짓말을 한다면서 더 심하게 토라졌다. 정말 진심이었는데. 리다에게 그 얘기를 하면서 뭐가 문제인지 묻자 그녀는 멍청이. 걔한테 이랬어야지. 네 눈은 정말 예쁘다고, 까만색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예쁘다고. 무대 위에서 웃는 거랑 진짜로 웃는 거 둘 다 제일 예쁘다고라고 말했다. 나는 리다에게 넌 걔를 모르니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거야. 걘 평상시엔 아예 안 웃는다고라고 대꾸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마 그녀가 옳으리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리다는 여자고, 나는 여자들의 마음을 잘 모르니까. 하긴 남자라고 다를 것도 없지만.

 

 

영자 신문을 거꾸로 든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미소는 까다로운 옐레나 바실리예브나조차도 합격점을 줄 만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호감을 느끼지 않았고 설령 마음에 든다 해도 창녀와 놀아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마 내가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선 것은 순전히 그 능숙한 미소에 대한 직업적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자는 눈꺼풀을 무겁게 깜박였고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곧 자신이 바보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를 지나쳐 2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나는 자기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안경을 끼고 정장을 차려입은 비즈니스맨 스타일의 중년 남자가 로비 바로 걸어가더니 스스럼없이 두 팔을 벌려 그 여자를 포옹했다. 여자는 반가워하며 파슈카!’ 하고 외쳤고 둘은 서로의 뺨과 입술에 친밀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나는 두 배로 바보가 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니까 창녀가 아니라 그냥 애인을 기다리는 평범한 여자였다. 내게 추파를 던진 것이 아니라 남자친구가 들어오지 않을까 하며 로비를 바라보고 있었고, 우연히 시선이 마주치자 그저 미소를 띠었던 것뿐이다. 자기 미모에 자신 있는 여자들이 흔히 그러듯. 핸드백에 들어 있던 건 빨간색과 금색으로 포장된 초콜릿 캔디였을 것이다. 아무리 창녀라 해도 콘돔을 그런 식으로 한주먹씩 핸드백에 마구 쑤셔 넣을 리가 없다. 거꾸로 들고 있던 페테르부르크 타임즈는, 그냥 허세를 부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국립대 기숙사 근처에 있는 호텔이고 외국인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니까. 똑똑하고 멋져 보이고 싶어서. 리다가 에브로파에 가서 엽서를 부치던 것처럼.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미소만은 잘 모르겠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여전히 그게 숙련된 창부의 미소인 것만 같았다.

 

 

 

 

*  *  *

 

 

 

 

 

리다는 먼저 와 있었다. 그녀는 약속에 늦는 건 여자의 특권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지냈던 3년 동안 리다는 대체로 시계처럼 정확했다. 오히려 늦거나 약속을 어긴 건 내 쪽이 몇 배는 많았다. 주로 수업이나 공연 스케줄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리다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그래도 내가 사과를 하면 받아주었고 뒤끝도 없었다. 오히려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 내가 늦기를 바랄 때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비밀을 가르쳐줄게, 겐카. 남자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거야말로 여자의 진정한 무기야이별을 통보하던 날 리다는 그렇게 말하고는 오랫동안 웃어댔다.

 

 

 

우리는 언제나 2층 카페에서 만났다. 로비 바보다는 이쪽이 더 아늑하고 한적했다. 홀 구석 창가에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빛이 들어와서 1층보다 훨씬 밝았고 소파도 크고 푹신했다. 별도의 디저트나 샌드위치 대신 커피나 차 한 잔만 시키는 정도라면 가격도 무난했다. 원한다면 칵테일이나 맥주를 마실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별로 없었고 바텐더도 손님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에 한참 앉아 있어도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가끔 근처의 조그만 식료품 가게에서 주전부리를 사 가곤 했다. 리다가 가장 좋아했던 건 트윅스 초코바와 조그만 노란색 봉지에 든 이상한 스낵이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과자는 감자칩처럼 생겼지만 튀겨서 기름기가 배어 나온다는 것과 짭짤한 것 빼고는 맛은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가격이 매우 싸다는 것 외의 이점은 없어 보였지만 리다는 그 정체불명의 과자를 가리켜 싸구려 칩시(чипсы)’라고 불렀고 쓸데없이 비싼 레이스(LAYS)의 훌륭한 대체물이라 했다. 마치 가짜 LSD처럼. 나는 리다의 표현대로 장기간의 세뇌 교육 때문에과자를 먹는 건 기피했지만 그녀와 트윅스를 반으로 나눠 먹는 건 좋아했다. 매대에 트윅스가 없을 때, 그러니까 운이 좋을 때는 내가 선호하는 피크닉 초코바를 고를 수도 있었다. 트윅스의 찐득한 캐러멜 시럽보다는 피크닉의 땅콩 쪽이 더 좋았다. 리다는 내게 그 와중에도 나이트를 고르느냐고 핀잔을 줬다. 나이트는 다크 초코잖아. 난 그냥 초코가 더 좋단 말이야. 다크로 눈속임한다고 뭐가 달라져? 어차피 초콜릿 먹는 거. 다이어트 콜라 시키는 거랑 똑같잖아.

 

 

옥에 티는 이 홀과 카페가 이따금 단체 손님들의 행사 장소로 쓰인다는 거였다. 그럴 때면 천을 씌운 테이블이 줄줄이 깔리고 하키나 축구 유니폼을 입은 운동선수들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오붓한 데이트는 완전히 물 건너간다. 리다는 어차피 여기서 섹스를 할 것도 아닌데 뭐 어때. 너보다 몸 좋은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게 싫은 거지?’ 라고 나를 놀려댔지만 사실 본인이야말로 사람 많은 걸 질색해서 2층에 올라올 때마다 케이터링 테이블이 깔려 있는지 아닌지부터 확인하곤 했었다.

 

 

 

맨 처음 리다와 함께 여기 왔을 때 나는 아직 학생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콩쿠르나 마스터클래스 참여 때문에 학교에서 단체로 투어를 간 적은 여러 번 있었고 물론 외국 경험도 있었지만, 호텔에 묵는다 해도 여럿이서 방 하나를 썼고 항상 우리를 양떼처럼 몰아대는 인솔자가 있었기 때문에 카페나 부대시설을 이용해본 적은 없었다. 그나마 묵었던 호텔도 집단 기숙사 같은 곳이 대부분이었다. 리다는 이미 대학생이었고 나보다 두 살 연상인데다 유행에 대한 여자애 특유의 세련된 감각이 있었다. 서너 번째 데이트 무렵 그녀는 스몰렌카 운하를 산책하다가 다짜고짜 나에게 호텔에 가자고 했고 내가 당황하자 방이라도 잡자고 할까 봐? 우리가 그럴 돈이 어딨니. 커피 한 잔만 마시러 가는 거야라고 대꾸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리다는 호텔 2층에도 카페가 있고 바텐더가 있으며 가죽 소파에 앉아 커피와 차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 시장이나 슈퍼마켓, 스톨로바야 카페보다는 더 비싸지만 그래도 맘먹으면 가끔은 들를 수 있을 정도의 가격대로 호텔이라는 공간과 그 분위기를 점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혹되어 있었고 나에게도 그 흥분과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어 했다. 물론 나는 금세 감염되었다. 열여덟 살도 되기 전이었고 극장에 들어가기도 전이었으니까, 그저 좁은 아파트에서 엄마와 동생과 부대끼며 살던 때였고 매일 트롤리버스를 타고 조드쳬고 로시 거리로 통학하며 언제나 죽어라고 춤을 췄지만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 모든 것이 아득했던 시기였으니까. 그러니 내가 프리발티스카야 호텔 2층 카페에 처음 들어섰을 때 완전히 새롭고 즐거운 세계, 어른들의 공간으로 들어온 기분이 든 건 어쩌면 당연하다. 리다는 나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편이었지만 집안 형편은 엇비슷했고 언제나 새로운 것, 멋진 것, 있어 보이는 것에 목말라 있었다. 나는 다른 곳에서 데이트하는 것도 좋았고 때로는 그냥 함께 강변을 걷거나 좁은 침실에 계속 같이 틀어박혀 있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리다는 언제나 그래도 호텔 카페가 제일 좋아라고 했다. 디스코텍이나 록클럽보다 호텔이 더 쿨하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리다에게 그건 내가 무대 위에 올라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바깥으로 나가면 우중충하고 습하고 어두운데다 진창이 가득한 거리와 끝없이 오르는 물가, 텅 빈 진열대와 좌판에 살충제를 놓고 파는 노파들과 불법 복사 테이프들과 매연뿐이지만, 높은 돌계단을 따라 올라와 로비의 무거운 문을 통과하면 후끈한 목욕탕 냄새와 함께 깨끗하고 광활한 공간이 펼쳐지고 마치 외국이나 다른 세계에 온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푹신하고 커다란 가죽 소파에 파묻혀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앉아 호텔 바텐더가 가져다주는 커피와 홍차를 마시며 별 뜻 없는 대화를 나누고 이따금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몸을 밀착시키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우리가 묵고 있는 방으로 올라가 사랑을 나눌 것만 같고, 그건 반드시 스위트룸이지 일반 노메르’(номер)는 아니며 다음날이면 메르세데스나 BMW가 우리와 트렁크를 풀코보 공항으로 실어다 줄 것이며, 우리는 아에로플로트가 아니라 에어프랑스나 델타 에어라인 같은 외국 비행기에 올라 비즈니스석으로 갈 것이다. (1등석까지는 차마 이르지 못했던 것을 보니 리다의 상상력에도 어느 정도 현실적 제동이 걸렸던 것 같다)

 

 

 

리다는 안쪽 창가에 앉아 있었다. 예전에 항상 앉던 자리였다. 리다는 우리 자리라고 불렀고 이따금 다른 손님이 거기 앉아 있으면 몹시 기분 상해했다. 다른 곳에 자리가 많아도, 창가의 다른 자리가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자리에 앉았던 손님이 일어나고 다시 그 자리로 옮겨갈 때까지는 계속 뾰로통해져 있었다. ‘주문 좀 외워봐, 저 사람들 빨리 가라고. 아니면 기도라도 해. 다음엔 너네 엄마 성상이라도 가져와 봐라고 내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내가 신앙이 독실한 건 너네 엄마잖아. 우리 엄마는 세례도 안 받았을걸이라고 대꾸하면 그래도 너희 엄마는 굉장히 독실하게 생기셨잖아, 이콘에 나오는 성모처럼 고상하시던데라고 농담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으며 우리 자리에 앉아 있는 애꿎은 손님들에게 레이저 광선 같은 따가운 눈빛을 쏘아댔다. 양쪽 엄마들의 신앙 덕인지 리다의 저주 어린 눈빛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금세 자리를 되찾곤 했다. 그 자리가 사각지대라 바텐더의 눈에 가장 띄지 않는 방향이긴 했다. 특히 창가를 향해 나란히 앉으면 리다는 내 어깨에 머리와 몸을 거의 완전히 기대곤 했기 때문에 소파에 푹 파묻혀서 더 그랬다.

 

 

 

리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창문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하지만 소파에 파묻혀 있지는 않았다. 꼭 무용수처럼 등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고 머리 색도 바꿨기 때문에 목과 어깨의 익숙한 실루엣이 아니었다면 처음에는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나는 천천히 그쪽으로 갔다. 리다는 기척을 느꼈을 테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갑작스럽게 종아리와 무릎에 희미한 경련이 이는 듯했다.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어디로 가 앉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름을 부르려니 목구멍이 꽉 달라붙는 것 같았다. 예전처럼 옆자리에 붙어 앉는 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데 맞은편 소파에는 그녀의 핸드백과 코트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리다가 결혼한 후에도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그건 모두 극장에서였다. 그만둔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으니 아마도 우연이었겠지만 그녀는 나의 마린스키 마지막 무대를 보러 왔었고 심지어 안내원을 통해 꽃도 전해주었다. 정작 사귈 때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리고 미샤의 발레단으로 이적한 후의 첫 공연과 갈라 무대에도 왔다. 그때는 남편과 함께 왔으므로 별다른 이야기를 나눌 일은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노브이 루스키 중에서도 언론 쪽에 발을 걸치고 있어 문화적 자기 포장을 할 줄 아는 세련된 부류에 속했고 미샤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심지어 공연 후원도 여러 차례 했기 때문에 우리 리셉션과 기자간담회에도 참석했다. 그를 내게 소개해 준 것도 리다가 아니라 미샤였다. 미샤는 나와 리다의 옛 관계를 몰랐다. 하지만 안다 해도 별로 신경 썼을 것 같지 않다. 미샤는 상대방의 사생활이나 과거에 대해 캐묻는 타입이 아니었다. 사실 질투나 집착이 뭔지 제대로 알기나 할까 싶다. 그런 사람이 그토록 격렬하고 폭발적인 작품들을 안무하고 정서적으로 도저히 눈을 돌릴 수 없는 무시무시한 인물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리다의 남편은 나와 그녀가 몇 년 동안 사귄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리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철저한 사업가였고 매사를 계산해서 합리적으로 판단했다. 아내의 철없던 여학생 시절 연애질에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나 정도의 풋내기는 자기 같은 거물 비즈니스맨에게는 경쟁 상대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던 건 작년 이맘때 무소르그스키 극장에서였다. 미샤의 푸쉬킨 연작 중 마지막 작품인스페이드의 여왕초연이었고 나는 게르만을 췄다. 그는 시장과 국회의원 두엇, 방송사 부사장과 함께 로열석에서 공연을 관람했고 커튼콜이 끝났을 때는 리다와 함께 백스테이지에 들러 미샤와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했다. 리다는 남편이 나를 비롯한 주역 무용수들과 사진을 찍는 동안 뒤로 물러서 있었고 내겐 의례적인 인사 외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한밤중에 불쑥 전화해서 잔뜩 취한 목소리로 너 그 역 잘 어울리더라. 여태 봤던 무대 중에 제일 좋았어. 마린스키 버린 보람이 있네, 좋겠어라고 말하고는 툭 끊어버렸을 뿐이었다. 뜬금없는 전화는 그렇다 치고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전에 그녀는 내 공연을 종종 보러 오곤 했지만 제대로 된 평을 해준 적이 없었고 내가 물어보면 자기는 전문가가 아니니 그런 걸 기대하지 말라고 했었다. 심지어 마음에 들었다거나 좋았다거나 별로였다는 얘기조차 거의 하지 않았는데. 그 이후 나는 리다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여전히 공연을 보러 왔지만 리다는 따라오지 않았다.

 

 

 

뭐라고 아는 척을 해야 할지 망설이며 서 있는데 리다가 이제 뜸을 들일만큼 들였다고 여겼는지 뒤를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안녕, 겐카. 오랜만이네. ”

 

안녕. ”

 

왜 그렇게 바보같이 서 있어? 앉아. ”

 

 

 

그녀는 맞은편 소파에 올려두었던 핸드백과 코트를 자기 옆의 빈자리로 옮겨서 나의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나는 테이블을 돌아서 그녀의 맞은편으로 갔다. 코트를 벗어 내려놓으면서 그냥 입고 있을 걸 그랬나 후회했다. 오래 앉아 있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내는 따뜻했고 리다는 반소매 니트 차림으로 맨팔을 내놓고 있었기 때문에 겉옷을 입고 있는 것도 너무 어색하게 보일 것 같았다. 그냥 머플러를 풀지 않는 것으로 절충했다. 막 앉으려는데 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내 어깨에 감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키스 안 해줄 거야? ”

 

남의 여자한테 그러면 안될 것 같은데. ”

 

피차 마찬가진데 뭐. ”

 

 

 

리다는 내 입술과 뺨에 힘차게 입을 맞췄고 나도 그녀에게 가볍게 키스를 했다. 딱 인사하는 정도로. 누구도 트집 잡을 수 없을 만큼 의례적인 키스. 그러자 숨쉬기가 좀 편안해졌고 나는 소파에 앉았다. 리다와 잠시 눈을 마주쳤지만 그녀의 얼굴이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메뉴판을 잡았다. 오랜만에 왔더니 가격과 메뉴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아직 안 시켰구나. 커피 마실 거지? ”

 

아니. 난 페리에. 라임으로. ”

 

탄산수 싫어했잖아. ”

 

탄산수는 싫어. 페리에는 좋지. ”

 

 

 

 

에비앙도 같이 시켜줄까?’ 하고 묻고 싶었지만 이제 그런 스스럼없이 짓궂은 농담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잠자코 라임 향 페리에와 홍차를 주문했다.

 

 

 

 

 

 

 

 

 

 

...

 

 

 

 

 

 

 

 

 

 

맨 위 사진과 바로 위 사진은 겨울과 초가을이라는 시간적 차이 때문에 확연하게 달라 보이지만, 둘 다 프리발티스카야 호텔 가는 길 정류장 근처이다. 아쉽게도 사진들은 90년대 말에 찍은 건 아니고 2010년~2012년에 내가 찍었다. 날씨 안 좋을 때 찍힌 사진은 사실 90년대 말과 큰 차이가 없게 느껴지긴 한다. 

 

 

 

 

 

 

 

 

2000년대 들어와서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은 파크 인 체인에서 인수해서 사진을 잘 보면 파크 인 로고가 보인다. 사진은 바닷가 쪽 뒤에서 찍었다. 왼편 아파트 단지 어딘가에 리다가 결혼 전까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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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