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속의 뼈
Кисти в Облаках
2.
별다른 조제가 필요한 주문은 아니었지만 음료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어색한 시간이 길어졌다. 마치 첫 데이트처럼. 여자들과 만날 때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첫 만남보다 더 불편하고 어려운 순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 헤어진 지 3년이나 된 여자와 어떤 식으로 얼굴을 마주 보고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차인 입장에서는.
거의 몇 분 정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녀를 바라보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각도를 좀 틀어서 그녀의 왼쪽 귀와 목덜미와 어깨, 소파 왼쪽에 걸쳐진 모피코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무대용 시선 처리 기술이다. 이런 건 군무나 마임을 맡았던 신입 시절 유용하게 써먹곤 했다. 물론 누구에게나 통하는 건 아니었다. 동료 무용수들에겐 먹히지 않는다. 적어도 실생활에서는. 당연하지만 미샤도 마찬가지다. 다만 자기에게 그런 게 안 통한다는 티를 내지 않을 뿐이다. 그는 보통 상대가 술수를 부리면 아는 척도 모르는 척도 하지 않고 침착한 눈으로 가만히 지켜보는 부류에 속했다. 리다 같은 여자에게도 통하지 않는다. 리다는 자기 앞의 남자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혹은 뭔가를 감추거나 불편한 게 있는 게 아닌지, 또는 자기의 매력에 사로잡혔는지 아닌지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능력이 있었다. 아마 지금도 내가 자기를 쳐다보는 척하면서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저 자기도 지금 어색한 상황이라 그냥 나를 봐주고 있는 것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화를 냈을 것이다.
“ 그거 디올이야? ”
갑작스럽게 리다가 물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나도 모르게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리다는 손을 뻗어 내 머플러 끝을 가볍게 만지며 질문을 되풀이했다.
“ 디올 같은데. 라벨이 안 보이니까 헷갈리네. ”
“ 나도 잘 몰라. 그냥 손에 잡히는 거 매고 나왔어. 바람 많이 불어서. ”
“ 뒤집어서 둘렀잖아. ”
그녀는 거리낌 없이 내 머플러를 술술 풀어서 뒤집은 후 다시 매어 주었다. 스카프 귀퉁이를 톡톡 치며 디올 로고를 확인하더니 빙긋이 웃었다.
“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뒤집어놓으면 어떻게 해. 근데 이런 색깔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나? 이거 네가 산 거 아니구나? 그 사람 건가? ”
나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모른 척하며 기억을 더듬어 대꾸했다.
“ 아, 그래. 산 거 아냐. 지난번에 잡지 촬영했을 때 받았던 것 같아. 기념품으로. ”
“ 오, 그 엘르. 기억나네. 두 권이나 샀지. 스크랩도 했는데. 가지고 올 걸 그랬나? 사인이라도 받게. 근데 그 화보 보니까 넌 디올보단 아르마니가 더 잘 어울리더라. 그쪽 걸 받았으면 좋았을걸. ”
나는 그 촬영에서 걸쳤던 브랜드들이 뭔지 기억도 하지 못했다. 촬영장은 정말 어수선했다. 발레 화보 촬영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옷과 스카프와 신발, 모자 따위를 계속해서 바꿔가며 걸쳐야 했다. 목걸이와 시계도 있었던 것 같다.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한 아름씩 가져다주며 코디네이터가 브랜드명을 따발총처럼 주워섬겼고 사진사는 역시 귀가 따갑도록 빠르게 각종 주문을 쏟아놓았다. 심지어 미국인이라 영어를 잘 알아듣기도 어려웠고 촬영을 담당한 잡지 쪽 에디터가 통역을 해줬지만 그나마도 패션 업계용 억양과 특수용어들로 오염돼서 절반 이상은 소용이 없었다. 내가 고전하자 함께 촬영 중이었던 미샤가 몇 단어로 핵심만 전달해줬는데 차라리 그게 더 이해하기 쉬웠다.
어쨌든 머플러 덕에 어색했던 분위기가 좀 누그러졌고 나는 리다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일 년만이었고 이렇게 단둘이서 차분하게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리다는 많이 변해 있었다. 일단 머리 색이 바뀌었다. 원래 그녀는 나보다 훨씬 색이 밝고 윤기가 도는 금발이었고 그 ‘제대로 된, 타고난 블론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헤어 스타일은 종종 바꾸더라도 염색을 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브루넷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거의 잉크처럼 검은색에 가까운 흑갈색이었다. 두세 가닥의 붉은색 블리치를 넣었는데 어딘지 인위적이어서 흑조 오딜 분장이 좀 떠올랐다. 막 미용실에서 나온 것처럼 말끔하고 칼로 자른 듯한 보브 컷이라 혹시 가발을 쓴 건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눈썹과 눈에는 짙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다. 은빛이 도는 짙은 갈색 스모키 메이크업과 빽빽하게 덧칠한 마스카라 때문이겠지만 눈이 평소보다 훨씬 크고 퀭해 보였다. 움푹 들어간 파란 눈이 거의 투명한 녹색으로 보였다. 꼭 물빛 렌즈를 덮어씌운 것 같았다. 리다는 결코 통통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말랐던 적도 없었다. 키가 크고 늘씬한 글래머 타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살이 빠져서 엘르 스튜디오에서 파트너로 촬영을 했던 여자 모델들이 떠오를 정도였다. 블러셔와 쉐이드 탓도 있겠지만 얼굴이 야위어서 뺨과 턱의 윤곽도 훨씬 날카로워져 있었다. 입술은 한창 유행인 다크 브라운 립스틱을 바르고 라인까지 꼼꼼하게 그려서 더욱 화보 모델 같았다. 흑백 체크무늬 니트 드레스는 헐거워서 목덜미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한쪽으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하긴 리다는 언제나 유행에 민감했으니 아마도 최신 잡지에 나온 스타일일 것이다.
그녀는 부쩍 나이 들어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한순간 좀 놀랐지만 그래도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아마 메이크업 때문일 것이다. 나는 조명과 메이크업의 효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관객들 앞에 서는 직업이니까. 나 같은 경우도 그 차이가 큰 편이라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냥 평범해 보여서 무대 위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리다는 무대에 올라가는 직업이 아닌데. 하긴 지금은 직업 같은 건 아예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그녀는 잠시 통역사로 일했었다. 거기서 남편을 만나기까지.
“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말도 안 하고. 꼭 처음 보는 것처럼. 저번에 극장에서도 봤으면서. ”
“ 오랜만이라, 전이랑 달라 보여서. 머리 색깔도... ”
“ 아, 이거. 그이가 한번 해보라고 해서. 요즘은 흑발이 섹시해 보인다면서 부추기더라고. 근데 너무 새까만 건 싫어서 빨간 줄을 넣은 거야. 넌 맘에 안 드니? ”
“ 아니, 잘 어울려. 그냥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
“ 잘 어울리는 거랑 맘에 드는 건 다른 얘기 아닌가? ”
“ 맘에 들면 위험한 거지. ”
리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 우리 남편은 그런 거 신경 안 쓸 텐데. 내가 남자들한테 인기 있는 게 더 좋다고 했거든. 그건 그렇고 너는 근사해졌네. 전보다 더 멋있어졌어. 남자다워졌다고 해야 하나. 내 맘에 드는걸. 이것도 위험해? ”
“ 글쎄. 넌 분별력 있으니까. ”
“ 전부 다 내 쪽으로 돌리는구나. 네 맘에 들면 우리 남편 때문에 위험한 거고. 내 맘에 들면 그건 내 문제인 거고. 왜, 그 사람이 질투한다는 말은 하기 힘든가 보지? ”
나는 리다가 왜 그런 식으로 대화를 몰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미샤와 내 관계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 그리 놀랍지 않았지만 과히 편안한 주제는 아니었다. 다행히 그때 주문했던 음료가 나왔다. 나는 페리에 병을 끌어당겨 마개를 따고 얼음이 든 유리잔에 탄산수를 부어서 리다에게 건네주었다. 라임 향은 거의 나지도 않았다. 리다는 거의 자동으로 ‘고마워’라고 대꾸하곤 잔을 건네받아 마셨다. 목이 말랐던 것 같았다. 그녀가 물을 마시는 동안 나는 찻잔에 각설탕을 한 개 넣고 레몬을 띄웠다. 바텐더가 티백을 너무 오래 담가놓았는지 찻물은 거의 커피처럼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좀 식어서 설탕도 잘 녹지 않았다. 대신 입술과 혀를 데지 않고도 빨리 마실 수 있었다. 연달아 길게 두 모금을 마시자 머리로 피가 확 몰리며 눈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을 설친데다 오전에는 스케줄이 꼬여서 차를 마실 짬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카페인보다는 알콜인 것 같지만.
찻잔을 내려놓으려는데 리다가 내 접시에 남아 있던 레몬 한 조각을 집어서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사탕을 먹듯 레몬을 씹더니 껍질을 뱉지도 않고 그대로 삼켰다. 보기만 해도 눈이 찔끔 감겼다. 나보다도 신 것을 못 먹는 애였는데. 이것도 새로운 유행인가 싶었지만 리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상하리만큼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나 임신했거든. 이런 거 다 할머니들 헛소린 줄 알았는데 진짜로 신 게 먹고 싶어지는 거 있지. 신기하지? ”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카페인이 조금 더 돌자 그제야 혀가 움직였다.
“ 축하해. 전혀 몰랐네, 티가 안 나서. ”
“ 아직은 티 별로 안 날 때야. 14주거든. ”
“ 근데 왜 이렇게 야윈 거야? 잘 먹어야 하는 시기 아니야? ”
“ 입덧이 어마어마했거든. 이젠 좀 나아졌어. 곧 뚱뚱해지겠지. ”
리다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가 박힌 결혼반지가 반짝거렸다. 보석을 분간하는 눈은 없지만 아마 카르티에일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결혼반지는 꼭 카르티에여야 해. 티파니는 별로야. 카르티에가 더 좋아’ 라고 했으니까.
“ 넌 어때? 일이야 잘되는 거 알고. 기사도 많이 나고 평도 좋더라. 올라갈 때마다 매진이고. 우리 그이는 지난번에 햄릿 보고 와서 정말 극찬하더라고. 네가 추면 한 번 더 보러 갈 거라고, 나한테도 꼭 같이 가자고 했는데 일정이 안 맞아서 못 갔네. 다음 공연은 언제니? ”
“ 다음 달인데 그건 도쿄랑 암스테르담이고, 여기는 1월 마지막 주인데 신작이야. 내가 올라갈지는 잘 모르겠어. ”
“ 당연히 너한테 주역을 주겠지. 그 사람이야 그러려고 널 마린스키에서 빼 온 걸 텐데. 심지어 도스토예프스키라며, 그 신작. 백치인가 악령인가 둘 중 하나지? 후기 장편들은 옛날부터 좀 헷갈리더라고. ”
리다는 조그맣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가 어디에서 이렇게 자세한 정보를 들은 건지 궁금했다. 아직 두 달 넘게 남은 공연이고 한참 준비 중이라 벽보도 광고도 전혀 나가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 이쪽 바닥에 관심이 많은 남편에게서 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여전히 나는 그녀가 내 공연에 대해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 낯설었다. 예전엔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문학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 게임, 키노와 무미 트롤, 너바나 따위의 팝과 락 음악에 대해서는 자주 얘기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니 푸쉬킨이니 셰익스피어니 하는 얘긴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차이코프스키나 나의 공연들에 대해 이것저것 묻지 않았던 것처럼. 문득 나도 그녀에게 일본 문학에 대해 자세히 물어본 적도, 그녀의 전공에 대해 관심을 깊게 가져본 적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사귀던 초기에 그녀는 내가 ‘대학 생활’이나 ‘공부’에 대해 물으면 ‘뭐하러 그런 재미없는 얘길 하니. 어차피 넌 관심도 없잖아. 내가 일본어 인사만 몇 개 가르쳐줄게. 나중에 스타가 되면 도쿄에서 써먹을 수 있겠지’ 라고 대꾸하곤 했었다. 마치 내 머릿속을 그대로 들여다본 양 리다가 말을 이었다.
“ 다음 달에 도쿄 가는구나. 내가 가르쳐준 일본어 인사 기억해? ”
“ 음... 아리가토. 곤니치와. 스미마셍. ”
“ 기특하네. 보람 있는걸. ”
나는 그녀에게 지난 2년 동안 일본에 투어를 세 번이나 다녀왔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저 서툰 인사들을 가르쳐준 건 갈런드와 통역사였다는 사실도. 리다가 알려줬던 단어들은 매 순간 한 귀로 들어와 다른 귀로 흘러나갔기 때문에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는 것도.
“ 미국은? 거기는 안 가? ”
“ 아... 여름에 갔었어. 뉴욕하고 LA. ”
“ 확실히 이적한 게 신의 한 수네. 마린스키에 있을 땐 못 갔잖아. ”
“ 가긴 갔었지, 첫 시즌에. 그땐 군무였어. ”
“ 아, 그래. 기억나네. 네가 국제전화를 했었지. 시내에 구경 나간다고. 선물 뭐 갖고 싶냐고. ”
“ 그랬나? ”
“ 내가 화냈잖아. 미국물 먹으러 가서 자랑하는 거냐고. 쇼핑할 시간도 있는 거 보니까 일하러 간 게 아니라 완전 놀러 간 모양이라고, 좋겠다고. 멋진 몸매 자랑하면서 미국 여자나 꼬시라고. ”
“ 난 왜 기억이 안 나지. ”
“ 넌 내가 성질내는 거 싫어했으니까 기억에서 지운 모양이지.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그때 못되게 굴긴 했네. 꿈에 그리던 뉴욕에 갔는데 구경 좀 하면 뭐 어떻다고, 비싼 요금 내고 국제전화까지 해줬는데 내가 화만 냈으니까. 있지, 나 그날 쏠쏠한 아르바이트가 나왔대서 갔는데 면접에서 미끄러졌어. 근데 너는 미국에 공연하러 가고, 또 구경도 나간다고 하니까 열받았던 것 같아. 나는 기껏 통역 아르바이트에도 떨어졌는데 너는 뉴욕 공연에 올라가는 스타가 됐구나 싶어서. 이렇게 돌이켜보니까 진짜 유치했네. 네가 기억이 안 난다니까 다행이라 해야 하나. ”
기억이 났다. 그날 리다는 전화 너머로 거의 히스테리에 가깝게 짜증을 내며 울었다. 하지만 딱히 그것 때문에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국제전화라 어차피 금방 끊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미 전화를 걸기 전부터 기분이 최악인 상태여서 더 나빠질 것도 없었으니까. 리다는 내가 뉴욕 공연에 올라가는 스타가 됐다고 생각했다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건 마린스키의 뉴욕 투어였는데 나는 백조의 호수 1막에서 3인무를 추게 되어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이미 지그프리드를 두어 번 춘 적이 있었지만 해외 투어에서는 티켓 파워가 중요했기 때문에 톱스타들을 내세웠고 나 같은 풋내기에게는 당연히 주역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1막 3인무는 상당히 괜찮은 배역이라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착 둘째 날 연습 도중에 뭔가가 감독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는 나를 군무로 돌려버렸다. 시내에 구경을 나갔던 건 군무진들에겐 별다른 인터뷰나 마스터클래스가 잡혀 있지 않아 시간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투어 내내 나는 군무를 췄고 마지막 날에는 무대에서 내려오다 발목을 조금 다쳤다. 부상은 별것 아니어서 며칠 만에 나았지만 돌아와서도 두 달 가까이 제대로 된 배역을 받지 못했다. 안나는 나에게 감독 면담을 해보든지 당시 뒤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던 나탈리야 이바노브나와 그 서클에 들어가 있는 선배들과 친하게 지내보라고 충고했지만 그런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리다에게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리다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내가 그녀의 대학 생활과 쏠쏠한 아르바이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 싫어하진 않았어. 네가 화내는 데는 항상 이유가 있었으니까. ”
“ 무슨 이유인지 알았던 적도 별로 없으면서. ”
“ 몰랐던 건 내 잘못이지. ”
“ 글쎄. 나도 말 안 해 줬으니까. ”
리다는 유리잔을 무심하게 빙글빙글 돌렸다. 얼음이 잔 안에서 부딪치며 달그락거렸다. 나는 반쯤 남아 있던 페리에를 그녀의 잔에 따라주고 식어버린 차를 마저 마셨다. 문득 이 자리가 너무나 불편해졌다. 옛날이야기를 주고받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전화를 걸어왔을 때 리다는 그저 잠깐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잠깐이면 된다고. 꼭 할 얘기가 있다고. 전화로는 하기 어렵다고. 내가 아는 리다는 이런 잡담을 하기 위해 사람을 불러내는 여자가 아니었다. 친구나 애인이라면 예외지만 자기 영역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오후 4시였다. 스튜디오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직하게 물었다.
“ 리도츠카, 왜 만나자고 한 거야? ”
리다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빽빽하고 두꺼운 마스카라 사이로 투명한 푸른 눈을 천천히 깜박이면서. 무의식적으로 나는 코펠리아를 떠올렸다. 인형처럼 무감각한 눈빛, 무대 분장을 연상시키는 짙은 메이크업. 그 침묵의 주시가 계속되자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불편해졌고 그냥 그녀가 본론을 꺼내놓을 때까지 기다릴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아마 우리가 이렇게 서로 눈을 오래 마주치는 건 오직 키스할 때와 사랑을 나눌 때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대화를 많이 하는 커플이 아니었다. 아니, 대화의 총량은 그리 적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말하는 쪽은 대부분 리다였다. 말할 때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건 둘 다 서툴렀다. 리다는 맘먹으면 얼마든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얘기할 수 있었지만 ‘너무 간지럽잖아. 미국 애들도 아니고’ 하며 싫어했다. 미국을 동경하고 할리우드 영화라면 사족을 못 쓰면서도 그랬다.
한참 후에야 리다가 말했다.
“ 넌 나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구나. 잘 지냈는지, 뭘 하며 사는지. 하나도. ”
“ 미안해. ”
나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그렇게 말했다. 잘 지냈는지, 뭘 하고 사는지 물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임신했다고 말한 후에는 어쩐지 그 모든 것이 사족처럼 느껴졌다. 입덧을 하다 이제 나아졌다는 여자, 레몬을 생으로 씹어먹는 여자 앞에서 판에 박힌 안부 인사를 뒤늦게 늘어놓는 것이 쉽지 않았다. 패션과 스타일에 집착하던 여자가 남편의 한 마디에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블론드를 검은 머리로 바꿨다면 그건 그만큼 남편과 마음이 잘 맞는다는 뜻이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혹은, 정반대로 남편의 취향에 모든 것을 맞춰가며 아름다운 인형처럼 지낸다는 뜻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리다가 그런 식으로 살 수 있는 여자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 난, 그러니까, 네가 당연히 잘 지낼 거라 생각해서. 그래 보이고. ”
“ 왜, 내가 샤넬을 입어서? ”
“ 샤넬이야? ”
내가 바보처럼 묻자 리다는 웃었고 그 샤넬로 추정되는 체크무늬 니트 드레스 밑단을 잡아당겨 폈다. 그리고는 내 찻잔 바닥에 반쯤 잠겨 있던 레몬 조각을 티스푼으로 떠내서 다시 입에 넣었다. 덜 녹은 설탕 알갱이가 레몬 껍질 위에 갈색 얼음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덜 시겠네, 다행이다’ 라고 말할 뻔했지만 신 게 당긴다고 찻물에 푹 절여진 레몬을 꺼내 먹는 여자에게 어울리는 농담은 아닐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리다는 레몬을 천천히 씹었고 이번에는 껍질을 뱉었다. 그리고는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무대 위의 미소. 예전에 그녀는 이런 미소를 지을 줄 몰랐는데. 흑발 보브 컷과 샤넬 드레스와 카르티에 반지. 페리에와 레몬.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리다는 아나운서처럼, 아니, 능숙한 통역사처럼 명확하면서도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 너 아직 미국 쪽 에이전트 없지? 우리 남편이 그쪽에 러시아 문화재단을 만들었어. 지금은 미술관이랑 화가 쪽만 후원하지만 진짜 관심은 공연 쪽이야. ‘아르다노프 아티스트’란 브랜드로 화가 다섯 명, 무용수 다섯 명, 오페라 세 명, 피아니스트 두 명으로 진용을 짤 계획이지. 그이가 그래서 날 보낸 거야. 너랑 계약하고 싶어 해. ”
“ 재단을 만들었다고? 미국에? ”
“ 음, 엄밀히 말하자면 기획사 같은 거지. 하지만 재단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아. 그쪽 동네에 먹히려면 기업 메세나랑 문화재단이 필수야. 우리 나라는 아직 그런 쪽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지만. 디마는 런던 물을 먹었으니까. 뉴욕에도 자주 가고. ”
나는 미국이나 영국의 사정은 정확히 몰랐지만 지금 바로 여기, 러시아에서 소위 문화재단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탈세. 이미지 세탁. 새로운 돈벌이. 이해되지 않는 건 딱 하나였다.
“ 그런데 왜 나를? 별로 사업에 도움 될 것 같진 않은데. 더 잘나가는 무용수들 많잖아. 마린스키에도. ”
“ 그 사람들이야 그냥 ‘키로프’ 이름 덕을 보는 거지, 사실 그 동네에서 ‘진짜 스타’는 요즘 볼쇼이나 키로프에서 투어 돌리는 애들이 아니라 망명 무용수들이야. 바리쉬니코프 뭐 그런 사람들. 근데 망명이나 자력으로 이미 자기 자리 꿰찬 사람들은 우리한테 별 소용없어. 1~2년 바짝 프로모션하고 여기저기 투어 돌려서 돈만 땡기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벌써 나이도 들 만큼 들었고. 디마는 그런 단발적 프로모터가 아니라 ‘문화재단’을 원해. 제대로 된 신진 예술가들을 처음부터 후원해서 ‘진짜 러시아 예술’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고 싶은 거야. 이건 장기 플랜이야. 그러니까 첫 단추가 정말 중요하지. ”
리다는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설명해나갔다. 마치 발레단의 문화마케팅과 홍보 전략을 설명하는 갈런드 같았다. 그러나 갈런드가 뉴욕 출신인데다 경영학과 마케팅을 복수 전공했고 이쪽 업계에서는 날고 기던 전문가라면 내 앞에 있는 리다는 졸업하고 반년도 안돼서 결혼했고 단발적인 일본어 통역 외엔 이 바닥에 대해 아무런 전문 지식이 없는 스물다섯 살짜리 아가씨였다. 하긴 나는 그녀의 결혼생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로 남편의 사업에 긴밀하게 참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문화재단과 무용수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그녀는 아주 그럴싸해 보였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리다가 너무나 강력한 탓인지 그녀의 매끄러운 설명은 마치 강의 노트를 달달 외운 모범생의 구술시험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그래도 잘 모르겠어. 왜 나야? ”
“ 아, 겐카. 왜 빼고 그래? 이 바닥에서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는 말 잊었어? 남편은 너를 높이 평가해. 조금만 밀어주면 미국에서 굉장히 잘 먹힐 거라던데. 사실 디마는 너의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를 굉장히 탐냈어. 전무후무하다나, 망명 안 했는데 그 정도로 유명하고 인정받는 사람은. 무대도 별로 안 올라가는데 상품성은 아직도 끝내준다면서. 근데 그 사람이야 뭐 벌써 옛날부터 미국에 자기 에이전트가 있으니까. 헐리우드에서 영화도 찍었고 상도 몇 개 받았잖아. 애초부터 톱스타시니까 우리가 키워줄 레벨은 아니지. 동업이라면 몰라도. 디마가 같이 하자고 제의도 했었대, 한칼에 거절했다고 투덜거리더라고. ”
리다의 무감각한 눈동자에 한순간 불길이 확 일었다 사라졌다. 아마 미샤가 그 훌륭한 사업 제안을 거절한 것이 내심 괘씸했던 모양이었다. 정작 그녀의 남편이 정말로 미샤에게 그런 제안을 했는지 의구심이 들긴 했다. 미샤는 해외의 유력한 후원자들도 많았고 미국과 유럽 쪽 에이전트 외에도 일본 쪽 에이전트가 따로 있었다. 약삭빠른 노브이 루스키 비즈니스맨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접근했을 리가 없었다. 하긴 미샤에게는 워낙 여러 가지 제안들이 쏟아지니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 드미트리 에두아르도비치에게 제안 고맙다고 전해줘, 근데 난 지금 우리 발레단과 계약되어 있어. 해외 투어나 별도 초청 같은 것도 우리 운영국장을 통해서 하게 돼 있고. 프리랜서가 아니라서 어려울 거야. ”
“ 의외네. ”
“ 뭐가? ”
“ 우리 그이 이름 아는구나. ”
“ 전에 극장에서 인사했잖아. ”
“ 부칭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네. 나 같으면 그러기 싫었을 텐데. ”
“ 왜? 난 그 사람에 대해 아무 감정 없는데. 몇 번이나 마주쳤으니까 이름 정도는 기억하지. ”
리다는 나직하게 웃었다. 미간에 가느다란 세로 주름이 파이는 걸 보니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
“ 너 생각보다 쿨하구나. 그럼 그냥 우리랑 같이 해. 네 계약은 지금 발레단과 연관된 쪽에만 유효한 거잖아. 너 뉴욕 갈 거라며. ABT랑 얘기 중이라면서. ”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
“ 그런 것도 모르면서 이런 제안을 할까 봐? ”
“ 아직 결정된 거 아냐. 아는 사람 거의 없고. 누구한테 들었어? 갈런드? ”
이마와 관자놀이로 피가 솟구치는 듯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갈런드는 수다쟁이긴 했지만 이런 일에 있어서는 정보를 누설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리다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단 둘뿐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샤였으니까. 내게 그 제안을 했던 장본인. 리다의 남편과 잘 아는 사이. 하지만 그가 아르다노프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쿵쿵 뛰면서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 문제에 있어 분명히 내게 결정권을 줬고 나는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지금 리다가 미샤의 이름을 댄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정확한 이유도 없이 화가 치밀었다. 그건 갈런드여야 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정보의 출처가 누구인지 물었다.
리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하’하고 낮게 웃었다.
“ 너 웃긴다, 제네츠카. 이게 그렇게 정색하고 물어볼 일이야? 내가 무슨 스파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니면 너의 미하일 세르게예비치가 우리 그이한테 널 팔아넘기기라도 할까 봐 불안해서? 하긴 그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철저한 사업가니까. 가치 있는 건 금방 알아보니까. 낚아채는 것도 빠르고 처분하는 것도 빠르겠지. ”
나는 화가 나기보다는 머리가 멍멍했다. 무의식적으로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너무 힘을 줘서 잔에 금이 갈 뻔했다. 리다는 내 손에서 찻잔을 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갑작스럽게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 농담이야, 바보. 흥분하긴. 하여튼 남자들이란. 자존심이 얼마나 센지. 당연히 너희 쪽은 아니지. 내가 그랬잖아, 우리 그이 뉴욕에 연줄 있다고. 문화재단 사무실도 그쪽에 냈는걸. ABT 관계자한테서 들은 거야. 그쪽에서도 네가 와주기를 엄청 기다리고 있다던데. 그래서 디마가 비서를 시켜서 너희 운영국장한테 연락했지. 그 미국인. 갈런드라고 했나? 그 인간 아주 여우 같더라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놓고 협의 같은 건 할 수 없고 너한테 얘기를 전해줄 수도 없다는 거야. 그 얘기 듣고는 그이가 얼마나 그 양키 욕을 하면서 김을 뿜었는지. 그래서 자기가 직접 너의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를 만나러 갔지. 뭐 아까 한 얘기가 다 농담은 아니었어, 그 사람도 당연히 비즈니스맨이지. 정치적인 건 웬만한 사업가들보다 한술 더 뜰걸. 그 자리에 그렇게 쉽게 올라갔을 리가 없잖아. 하여튼 우리 남편은 그 사람을 좋아하지. 디마는 그 사람한테, 그러니까 너의 보스한테 이 제안을 되풀이했어. 너의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도 그 양키랑 비슷하게 나왔대.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다고. 공연한 루머를 양산하지 말라고까지 했다던데. 그래도 우리 남편은 그 사람하고는 상당히 친분이 있으니까 톡 까놓고 좀 더 얘기를 할 수 있었지. 모든 게 확정되면, 그러니까 네가 ABT에 가게 되면 그때는 우리에게 우선권을 줄 수 있느냐고. 그 사람은 그런 결정의 주체는 너고 자기는 거기 아무런 구속력을 발휘하지 않는다고 했어. 그래서 디마가 날 보낸 거야. 어쨌든 너랑 나는, 한때 알았던 사이니까. ”
길게 얘기를 늘어놓은 리다가 숨이 차는 듯 잠시 입을 다물더니 바텐더를 불렀다. 페리에와 생수를 각각 한 병씩 더 주문했다. 바텐더는 심심했던 건지 아니면 슬며시 우리 얘기를 엿듣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리다가 손짓을 하자마자 달려왔고 기적적인 속도로 물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그녀는 마개를 열어서 내 앞으로 생수병을 밀어주고는 자기 페리에도 직접 따서 새 얼음 잔에 따랐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병을 집어 들고 물을 절반쯤 마셨다. 찬물이 들어가자 머리가 좀 식었고 그제야 리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마개를 따줬어야 했는데.
“ 괜찮아. 일부러 그런 거 아닌 거 알아. 넌 항상 따줬으니까. 의자도 빼주고. 물도 따라주고. 매너 있는 남자라고 친구들한테 자랑했었지. ”
“ 그랬어? ”
“ 그랬어. ”
그녀는 탄산수가 든 잔을 입술로 가져갔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유리잔으로 입을 반쯤 가린 채 복화술 인형처럼 덧붙였다.
“ 난 그런 기사도가 좋았어. 주변에 그런 남자들이 없었으니까. ”
“ 나는, 배웠기 때문일 거야. 학교에서. 여자들이랑 춤을 춰야 하니까. 발레는 옛날 춤이니까. ”
“ 아, 그래. 옛날 것들만 있어서 답답하다고 했었지. ”
나는 리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그런 얘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했을지도 모른다. 극장에 있는 내내 그런 고민을 했으니까. 하지만 리다는 내 춤에 관심이 없었고 어차피 자기 전공이 아니니 이해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웬만하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피상적인 이야기들, 최소한의 대화가 이어질 수 있는 아주 현실적인 질문들, 리다가 궁금해하는 화제들, 그러니까 발레학교나 극장 구내식당의 식단이라든지, 단독 대기실을 받을 수 있는 급수라든지, 평소의 출연료와 해외 투어 출연료의 차이, 무대 의상 피팅, 발레리나들이 쓰는 분장용 화장품과 일반 화장품의 차이 뭐 그런 얘기들 뿐이었다. 춤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리다는 내 생각을 읽은 것 같았다. 가느다란 휘파람을 불며 말을 이었기 때문이다.
“ 그날 네가 그랬거든. 완전히 새로운 걸 봤다고. 너무 대단했다고. 옛날 것들만 있어 답답했는데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다고. 그건 아직도 기억나. 넌 그런 말 안 하던 애였으니까. ”
“ 언제? ”
“ 메달 따왔을 때. 넌 콩쿠르랑 상에 대해선 거의 얘기하지 않았어. 온통 그 말만 했지. 완전히 다른 것. 새로운 것. 그 사람은 다르다고. 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어. 난 샴페인을 준비했었는데 넌 그거 입에 대기도 전에 이미 취해 있었지. ”
그녀는 그때 화를 냈던 것 같다. 아니, 화를 냈다기보다는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나 그때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우리 관계는 그 당시 이미 막바지로 치닫는 중이었고 리다는 걸핏하면 성을 내고 토라졌다. 그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돌아왔을 때 리다가 우리 집에 왔었던 것 같긴 했다. 아니, 리다네 집에 갔었는지도 모른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샴페인은 더더욱 기억나지 않았다.
“ 그때 난 알았어. 네가 떠날 거란 걸. ”
“ 극장을? ”
“ 나를. ”
“ 떠난 쪽은 너였잖아. ”
“ 뭐가 다르다고.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다는 제대로 된 논쟁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차였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몇 달 동안 아르다노프와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는 것, 그와 곧 결혼할 거란 얘기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화가 났던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너무 지쳐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배신당하고 걷어차인 남자답게 당연히 화가 났겠지만 무의식적으로 그 기억을 모두 지웠을지도 모른다. 그 시기를 떠올리면 회색 안개에 파묻혀 있는 기분이 들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대에 올라갔던 건 기억났다.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돌아오자 대우가 나아졌고 주역을 맡는 횟수도 늘어났다. 그때 데지레 왕자를 받았고 발란신 작품도 두 개나 더 췄다. 심지어 두어 달 후 감독은 나를 1 솔리스트로 승급시켜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순간들조차 군데군데 회색 안개로 가려져 있었다. 이따금 붉은색과 오렌지색 불꽃처럼 명멸하는 격렬한 감각들이 있었던 건 확실했지만 그건 극장과도, 그리고 리다와도 관련이 없었다.
나는 남은 물을 마저 마셨다. 리다의 제안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엄밀히 말하면 아르다노프의 제안을.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아직 미샤에게도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뉴욕에 대해서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했는데. 철저한 비밀로 하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있었는데 뜬금없는 아르다노프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며 계산을 했고 리다를 내게 보냈다는 것, 심지어 미샤와도 담판을 지으러 갔었다는 것, 정작 당사자인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우스웠고 자신이 하잘것없게 느껴졌다. 옆구리 어딘가를 둔하게 짓누르는 듯한 기분 나쁜 통증이 일었다. 아마 분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리다에 대해서는 아니었다. 리다는 아주 이성적이고 세련된 협상가처럼 굴었지만 그 낭랑한 장광설은 전혀 진짜 같지 않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유능한 커리어 우먼의 대사를 정교하게 흉내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그저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스몰렌카 운하 대신 ‘호텔 카페’에 가고 유럽 호텔에서 엽서를 부치는 것처럼. 그런 그녀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리다는 내가 웃자 조금 안심한 듯 자기도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는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 겐카, 그쪽 활동은 우리한테 맡겨. 디마가 우리 소속 아티스트들 중에서도 최우선으로 밀어줄 거라고 했어. ”
“ 내가 거절하면 아르다노프는 너한테 화를 낼까? ”
“ 뭐 실망해서 화내긴 하겠지만 당연히 나한테는 아니지. 그이는 웬만하면 나한테 화내지 않아. 게다가 난 애까지 가졌잖아. 임신부에게 함부로 성질내면 안 되지. ”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거의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 거절하고 싶은 거야? ”
“ 응. ”
“ 디마가 계약금 얘기도 했는데. 들어보지 않을래? 분명히 지금 받는 것보다 좋은 조건일 거야. 네가 원한다면 내가 좀 더 올려달라고 해볼 수도 있어. 얼마인지 들어보고 결정하지 않을래? ”
“ 아니. 괜찮아. 돈 문제는 아니니까. ”
그 순간 나는 리다가 울 것 같아서 겁이 났다. 그녀가 갑자기 너무 어린애처럼 보였기 때문에. 마스카라로 빽빽하게 채워진 속눈썹이 부르르 떨렸기 때문에. 아르다노프가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는 말이 거짓말 같아서. 그는 베르사체와 아디다스, 가죽 재킷과 메르세데스, 보석 박힌 선글라스와 롤렉스로 무장한 전형적인 노브이 루스키였고 그런 자들은 대부분 마피아였으니까. 아무리 세련되게 굴어도 본질적으로는 범죄자였고 그것도 상스러운 깡패였으니까. 그런 인간들에게 여자를 때리고 욕을 하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을 테니까.
“ 나는... 아직 미국에 갈지 말지 결정을 안 했어. 가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간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춤추고 싶지는 않아. ”
“ 그런 식이란 게 뭔데? ”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몰랐으니까.
대답은 리다가 했다.
“ 그렇게 하면 그냥 돈 버는 일이 되어버리니까? 춤추는 게 아니고? ”
“ 그럴지도. ”
“ 바보. ”
그녀는 눈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며 웃었다. 이제 더 이상 어린애처럼 다급해 보이지 않았고 울 것 같지도 않았다. 애초에 왜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녀가 내 말을 받아들인 것 같아서, 그 불편한 제안을 계속하지는 않을 듯해서 마음이 놓였다.
나는 리다의 빈 잔에 남은 페리에를 모두 따라 주었다. 그녀는 물을 마시는 대신 차가운 유리잔을 뺨에 마주 대고 굴렸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니트 드레스는 종잇장처럼 얇아 보였고 심지어 반소매였지만 전혀 춥지 않은 것 같았다. 샤넬이라서. 아마 그렇게 말하겠지. 명품이니까 추울 이유가 없잖아. 우리는 독수리와 다이아몬드 문양을 짜 넣은 줄무늬의 두툼한 스웨터와 밑단을 접은 청바지를 입고 이곳에 드나들곤 했는데.
리다와 나는 어느 토요일 오후에 프리모르스카야 지하철역 뒤의 중고시장에 가서 그 스웨터를 샀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졌고 재킷을 새로 살 여유는 없었기 때문에. 문양은 완전히 똑같았다. 사이즈와 색깔만 달랐다. 리다는 연한 분홍색, 내 것은 선명한 보라색이었다. 리다는 색이 마음에 안 든다고 툴툴거렸지만 사이즈가 맞는 게 그것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때 탄 분홍색, 안 예쁜 분홍색이라 싫다고 했다. 여자라고 이런 색을 입어야 한다면 너무 불공평하다고 하도 투덜대서 나는 다른 색도 분명히 있었을 거라고, 다른 여자들이 먼저 집어간 것뿐이라고 말했다가 원망의 눈초리를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색깔도 너한테 잘 어울리고 예쁘다고 말했어야 하는 거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내 보라색 스웨터를 빼앗아 입었는데 방심할 때마다 둘둘 말아 올렸던 소매가 흘러 내려오는 바람에 끄트머리를 수프 접시와 찻잔에 몇 번이나 빠뜨렸다. 세탁을 해도 자국이 지워지지 않았지만 리다는 ‘어차피 너도나도 이 옷 입으니까 얼룩이라도 있는 게 나아’ 라고 종알거렸다. 그런 스타일의 스웨터는 정말 모두가 입고 다녔으니까. 심지어 나는 얼마 전 리허설 도중에 미샤조차도 그 독수리 무늬 스웨터를 껴입는 것을 보았다. 패션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니 분명 명품이겠거니 싶었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이라가 ‘이건 어디 거예요?’ 라고 묻자 미샤는 전에 시장에서 산 거라고 했다. 갑자기 너무 추워졌을 때 프리모르스카야 시장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산 거라고. 따뜻해서 연습할 때 껴입기 좋다고. ‘근데 주변을 보니까 백만 명쯤은 똑같은 걸 입은 것 같더라고. 새로운 피오네르 유니폼인가’ 하고 덧붙였다가 지나가 ‘피오네르 해본 적도 없으면서’ 라고 놀려댔다. 미샤의 그 스웨터는 리다와 내가 샀던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코발트 블루라서 색깔만 달랐을 뿐이었다. 백만 명이 입고 다니는 싸구려 유행 스웨터. 샤넬. 디올. 아르마니.
리다가 잔을 내려놓고는 핸드백에서 조그만 콤팩트를 꺼냈다. 거울로 얼굴 여기저기를 비춰보더니 냅킨 귀퉁이에 물을 적셔서 입술을 닦았다. 짙은 립스틱이라 제대로 지워지지 않아서 입술 주름 사이에 갈색 얼룩이 무늬처럼 남았다. 그녀는 립스틱을 새로 칠하는 대신 내게 연고를 달라고 했다. 나는 코트 주머니를 뒤져 연고를 꺼내주었다. 사귀기 시작하던 무렵 그녀는 내가 계집애처럼 그런 걸 가지고 다닌다며 놀렸지만 내가 ‘우리 학교는 남자애들도 다 이거 써’ 하며 무대에 올라가는 직업이라 두꺼운 메이크업을 했다가 지우는 것이 일상이고 손발도 걸핏하면 짓무르거나 긁히기 마련이라 여기저기 바를 수 있어 좋다고 설명을 해주자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소리 내어 웃으며 키스를 해주었다. 그 이후 그녀는 생각날 때마다 내게 연고를 건네받아 자기 입술에 바르곤 했다. 몇 개 갖다주겠다고 했지만 내 것을 바르는 게 좋다고 했다. 그녀의 파우치에는 언제나 키엘 립밤이 들어 있었지만 그저 장식용일 뿐이었다. 예전에 잘 사는 집안 친구가 해외여행을 다녀오면서 면세점에서 선물로 사다 줬는데 아까워서 바르지도 못하고 간직해 놨던 거라 너무 오래돼서 분명 상했을 게 뻔하다고 했었다. 어쨌든 무용수들이 쓰는 게 몸에는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할머니들의 약초처럼.
“ 아직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구나. ”
“ 춤은 계속 추니까. ”
“ 아, 그렇지. 무용수들은 다 쓴다고 했었지. 그 사람도 이거 써? ”
“ 누구? ”
“ 그 야스민 씨. ”
“ 모르겠는데. 그런 건. ”
“ 그 사람은 키엘을 쓸 거야, 아니면 아벤느. 외국물을 많이 먹었으니까. 옛날엔 프랑스 팬들이 그 사람 전용 향수도 따로 만들어줬다던데. 그래서 지금 겔랑 향수 모델을 하는 건가. 그때 백스테이지에서 보니까 그렇게 클래식한 타입은 아닌 것 같던데. 그래도 화보는 멋지더라. 미남이야, 그 사람. ”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는 곁눈으로 나를 살짝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고 손가락 끝에 연고를 조금 짜서 입술에 천천히 발랐다. 그녀는 내가 미샤에 대한 언급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도, 아마도. 물론 나는 미샤가 뭘 쓰는지 알았다. 그는 나와 똑같은 연고를 썼다. 이따금 키엘이나 아벤느 같은 것도 쓸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주머니나 가방 안쪽에 항상 그 연고를 넣고 다녔다. 나와 같은 학교를 나왔으니까. 나처럼 마린스키, 아니 키로프에서 데뷔했으니까. 그러나 나나 다른 애들만큼 연고를 자주 바르지는 않았다.
그는 거의 언제나 입술이 촉촉했다. 피부도. 특별 피부관리를 받지 않아도 그랬다. 그런 건 타고나는 거라고 분장사가 말했다. 발레단 여자애들은 가끔 그를 미하일 파르포로비치(Михаил Фарфорович)라고 불렀다. 자기들보다 더 피부가 하얗고 매끄럽다고 부러워했다. 주름도 없고 반점 따위도 없다고. 그 애들의 말이 맞았다. 웃을 때 눈가에 살짝 잡히는 가느다란 잔주름 외엔 나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도자기 같은 피부. 하지만 그에게는 흉터들이 있었다. 목덜미부터 가슴을 가로지르는 기다랗고 하얀 흉터, 오른쪽 허벅지에 가로로 그어진 역시 하얗고 가느다란 흉터. 그 두 개는 거의 쌍둥이처럼 보였는데 거의 피부색에 가까울 만큼 하얗게 바래 있어서 바짝 다가가서 보지 않으면 눈에 거의 띄지 않았다. 손목에도 그런 흔적이 여럿 있었다. 미샤는 그것들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고 굳이 가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얗고 눈에 띄지 않는, 그러니까 안전한 흉터들. 그러나 왼쪽 골반 바로 위에, 훨씬 크고 생생한 흉터가 하나 있는데 그것만은 눈에 띄는 것도, 누군가의 손이 닿는 것도 싫어했다. 탈색된 벽돌색과 잿빛이 뒤섞여 작은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돌출된 상처였다. 아마도 실밥을 잘못 뽑았거나 아물 때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레이저로 흔적을 제거하기에는 너무 큰 흉터였다. 나는 그 상처에 대해 미샤에게 묻지 않았다. 목덜미와 허벅지, 손목의 흔적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은 수용소에서 생긴 상처일 것이다. 나는 그에게 수용소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그 일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회상록이나 인터뷰는 읽었다. 당시 기사들도 몇 개 찾아 읽었다. 하지만 그 자신은 그때 일에 대해 입을 여는 적이 없었다. 발레학교 시절 한때 나의 지도 교사였던 울리얀 세레브랴코프는 미샤가 ‘패셔너블한 수용소 훈장’ 덕분에 서방에서 더 잘 먹히는 아이템이 됐다고 뼈 있는 농담을 했다. 하지만 세레브랴코프는 물론 그 흉터를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리다가 내게 연고를 돌려주었다. 냅킨 끝으로 손가락에 남은 끈적한 연고를 닦아내고 이제 김이 거의 다 빠졌을 페리에를 한 모금 마셨다. 립스틱 얼룩 위로 연고 자국이 남았다.
“ 나중에 후회할지도 몰라, 제네츠카. 좋은 제안이었으니까. 너희 양키 국장도 얼만지 물어보기라도 하지 그랬냐고 할 거야. ”
“ 글쎄. 그래도 상관없어. ”
“ 넌, 예전에는 내 부탁 거절한 적 없었는데. ”
“ 이런 얘기는 아니었으니까. ”
“ 그래. ”
그녀는 잠시 손등으로 이마를 지그시 눌렀고 반쯤 잠긴 음성으로 나직하게 덧붙였다.
“ 그래도 기분 좋아. ”
“ 뭐가? ”
“ 네가 거절해서. ”
“ 어떻게 그래? ”
“ 네가 얼마 줄 건지 물어봤다면 실망했을 거야. ”
“ 전권 대표가 뭐 그 모양이야. ”
“ 그러게. 우리 그이가 실망하겠지. 그치만 내가 실망하는 것보단 그이가 실망하는 게 나아. ”
그녀는 손바닥만 한 핸드백에 콤팩트를 집어넣고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립스틱이 지워져서인지 얼굴이 창백했다. 어쩌면 흑발 염색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머리 색은 어울리지 않았다.
리다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나는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했다. 바텐더는 엷은 금발을 짧게 깎고 턱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굳이 요청하지도 않은 영수증을 건네주면서 바텐더가 아는 척을 했다. 우리를 기억하고 있다고, 간만이라 반갑다고 했다. 그런데 아가씨는 머리 색을 바꿨네요, 처음엔 못 알아봤어요. 너무 오랜만이군요. 그간 외국에라도 다녀오셨나요? 그건 그렇고 두 분은 굉장히 성공하셨나 보군요. 부티가 나네요. 다음에도 자주 오세요. 나는 그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이 카페를 드나들던 동안 바텐더가 우리에게 말을 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마도 모피코트와 샤넬 드레스의 마법일지도 모른다.
리다는 잠시 후에 돌아왔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면서 이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끝났다는 생각에 안심했다. 불편하고 힘든 순간들은 다 지나갔다고. 그때 리다가 좀 휘청거렸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아 주었다. 리다는 ‘미안, 좀 어지러워. 너무 오래 앉아 있었나 봐’ 라고 중얼거리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는 공기처럼 가벼웠고 거의 텅 빈 인형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곧 그녀가 온몸의 무게를 실어 왔다. 내게 기댄 상태에서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숨을 헐떡거렸다. 나는 리다의 허리를 감싸서 부축해주었고 잠깐 소파에 다시 앉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밀폐된 공간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그런 거라고, 차라리 밖으로 나가서 찬 공기를 쐬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나는 리다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카페를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지만 리다는 갇히는 느낌이 답답하다며 그냥 계단으로 가자고 했다. 그녀를 부축하는 것은 물론 어렵지 않았다. 나는 무용수니까. 하지만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내내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가 임신했기 때문에. 그리고 하이힐을 신었기 때문에. 차라리 업거나 안아서 옮기는 쪽이 훨씬 편했겠지만 우리는 이제 그럴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나는 갑작스럽게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실제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기분일 뿐이었다. 리다는 파트너에게 자기 몸무게를 어떻게 실어야 하는지 아는 발레리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예전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으니까. 나는 아마도 한 손으로도 그녀를 들어 올릴 수 있을 테니까. 바질이 키트리를 들어 올리듯. 내가 아직 한 번도 춰보지 못한 배역. 한때 리다를 보며 키트리를 떠올렸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자신만만함, 반짝이는 눈동자와 또렷한 말투, 언제나 약간은 유혹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한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린스키 입단 초기에 나는 ‘감독이 내게 바질을 준다면 리다를 생각하며 배역을 준비해야지’ 하고 상상하곤 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첫 시즌에 돈키호테의 배역을 받았지만 그건 바질이 아니라 투우사였다. 물론 첫 시즌에 받은 역으로는 상당히 큰 배역이었고 추는 것도 즐거웠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바질을 추고 싶었고 리다의 반짝이는 눈을 볼 때면 키트리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결국 마린스키에서 바질을 춰보지 못했다. 지금 우리 발레단의 레퍼토리에는 돈키호테가 없다. 아니, 미샤가 말했지. 내년 가을에 올릴 거라고. 음악과 리브레토 모두 준비됐다고. 또 그런 말도 했었다. 마린스키에서는 자신에게 투우사를 주지 않았다고. 그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이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기억났다. 하지만 그 순간 그가 뉴욕에 대해 말했고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언제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내 팔 안의 리다는 이제 키트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은빛 모피코트와 샤넬 니트 드레스에 파묻힌 작은 인형 같았다. 조금 가쁜 숨결이 이따금 내 목덜미에 뜨겁게 와닿지 않았다면 더 그런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녀의 팔이나 몸에서는 별다른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모피 때문에 구름 속의 뼈를 붙잡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물론. 구름에도 뼈가 있지. 바지도 입는데 뼈라고 없겠어? 키라의 집에서 미샤가 그런 농담을 했을 때 모두가 웃었다. 맥락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나만 빼고. 내 소외감을 눈치챈 키라는 내게 마야코프스키 시집을 빌려주었다. 교과서에서 형식적으로 접했던 것 외엔 처음이었다. 키라의 성의를 무시하고 싶지 않아서 다 읽긴 했지만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 ‘바지를 입은 구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긴 나는 미샤나 키라와 문학적 취향이 딱 맞는 적이 별로 없었다. 아마 세대 차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름 속의 뼈라는 말은 계속해서 남았다. 나는 화려한 의상과 미모로 무장했지만 춤 실력이 형편없어 나무토막같이 느껴지는 발레리나들을 볼 때마다 미샤의 그 농담을 떠올리곤 했다. 아마도 미샤는 정반대의 상황을 빗대어 말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왜 모든 것이 미샤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리다와 함께 있는 이 상황을 회피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리다가 싫은 건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원망하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이 만남의 목적에 대해, 자기 남편의 제안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고 나자 고통스러울 만큼 불편하고 어색했던 마음도 거의 녹아버렸다. 내가 그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녀가 컨디션이 안 좋아 보였기 때문에 걱정이 될 뿐이었다.
나는 리다를 주차장에 데려다주려 했다. 당연히 차를 가져왔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잠깐이라도 바닷바람을 쐬고 싶다고 했다. 멀미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고. 그래서 나는 그녀와 함께 로비를 지나 현관으로 갔다. 해가 졌기 때문에 로비 바의 조명이 좀 더 밝아져 있었고 손님들도 늘어나 있었다. 독일 관광객들이 빛바랜 흰 티셔츠와 면바지 차림으로 코카콜라나 칵테일, 맥주 따위를 마시며 바 한쪽에 매달려 있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녀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능숙한 미소의 아가씨. 그녀는 아까와는 다른 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다. 여전히 페테르부르크 타임즈와 금칠 벗겨진 체인 달린 핸드백을 곁에 두고서. 하지만 이제 제대로 된 방향으로 신문을 들고 있었다. 조그만 커피잔 곁에 담뱃갑이 놓여 있었다. 아까의 미니스커트 대신 몸에 꼭 맞는 청바지를 입고 다리를 근사하게 꼰 채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나를 알아봤다는 듯 다시 미소를 띠었다. 무대 위의 미소. 문득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아까 그 파슈카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