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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은 작년 4월에서 5월 초에 쓴 것으로 일종의 부활절 기념 픽션이었다. 구조적으로는 내가 몇 년 동안 손대고 있는 레닌그라드 우주의 주인공인 미샤의 연대기에 속해 있다. 원래 쓰려던 글을 시작하기 전에 머리도 정리하고 싶었고 마침 부활절 시즌이었기 때문에 좀 가벼운 느낌으로 쓴 소품이다. 화자도 열 살짜리 소녀이고 1인칭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더 그렇다.

 

배경은 1977년 4월, 소련 모스크바이다. 내 주인공 미샤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레닌그라드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지금 쓰는 글은 가상의 지방 소도시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쓴 글은 이 단편이 유일하다. 이 시리즈에서 미샤는 레닌그라드 발레학교를 졸업하고 키로프 극장에 들어가 스타가 되고 또 안무가로도 활동하게 되는데, 화려한 커리어를 이어가던 도중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게 1977년이다. 그가 볼쇼이로 옮겨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재작년 초에 완성한 장편에서 다룬 적이 있다(미샤의 친구인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그 장편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가상의 인물들이다. 미샤를 제외한 주요 인물로는 화자인 라라, 그리고 라라의 아빠이자 볼쇼이 극장 안무가이며 미샤의 절친한 친구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있다. 라라는 가끔 라루샤, 라루츠카 등의 애칭으로 불린다. 미샤는 일린을 스탄카라고 부른다. 미셴카 역시 미샤의 애칭이다. (러시아 이름은 이게 복잡.. ㅠㅠ)

 

그 외에 라라의 여동생인 일곱살짜리 아냐, 라라의 엄마이자 일린의 전처인 나스챠, 그리고 일린의 극장 동료들이 등장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에벨리나 크리셴스카야 역시 볼쇼이 무용수이다.

 

일린과 라라에 대한 이야기는 전에 한번 발췌한 적이 있다. 수용소에 수감된 미샤를 면회하러 간 일린의 이야기였는데 그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221

 

단편 제목은 발란신의 모던 발레인 Jewels 에서 따왔다. 그냥 '보석'이라고 할까 했는데 복수형의 s를 번역하기도 그렇고 리듬감도 참 껄끄럽다. 그래서 그냥 영어로 붙여놨다. 사실은 노어인 'Драгоценности'라고 붙이고 싶었지만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제목..^^;

 

단편은 총 5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에도 5토막으로 끊어서 올려본다. 오늘은 이야기가 좀 이어지는 1~2를 먼저 올려본다. 1~2에는 발레 작품 얘기도 좀 나온다.

 

어쨌든 열 살짜리 여자애의 시점으로 글을 전개하는 건 오랜만이라 재미있었다. 특히 짝사랑에 빠진 어린 여자애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 이 글을 무단으로 전재, 배포, 복제, 인용하거나 퍼가지 말아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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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els

пасхальный рассказ

 

 

 

 

 

- 1 -

  

 

 

 

모스크바 강을 따라 걸으며 보석을 찾아내는 게 얼마나 쉬운지 아는가? 그런 일을 하기에는 밤이 좋지만 미샤는 낮도 상관없다고 했다. 아니, 낮이 더 좋다고 했다. 물론 그건 레닌그라드 얘기다. 그 동네는 이곳보다 훨씬 춥고 음습하지만 대신 소위 백야라는 게 있고 여름날 한낮의 빛살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밝고 투명하니까 미샤의 말이 맞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엄마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미샤를 싫어했고 레닌그라드 출신이라 쓸데없이 자존심이 센데다 콤소몰에도 안 나가는 문제 있는 성격이라고 헐뜯곤 했지만 사실 우리 엄마는 아빠와 친한 사람들이라면 모두 미워했으므로 그리 신빙성은 없었다.

 

엄마의 의견이란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아빠도 좋아했고 아빠가 일하는 근사하고 화려한 극장도, 그리고 아빠의 친구들도 모두 좋아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미샤를 제일 좋아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샤에게는 완전히 반해 있었지만 물론 엄마 아빠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내게 바보 같다고 했다. 엄마야 미샤를 워낙 싫어하니 그렇다 치지만 아빠는 매일같이 극장에서 미샤와 함께 일하는데다 집에서 같이 지내는 경우도 많았고 무엇보다도 아빠는 항상 내 편이니까 솔직하게 얘길 해야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걔들은 뭘 모른다. 아빠에게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법이다. 우리 아빠가 날 얼마나 사랑하고 예뻐하는데, 정작 귀여운 딸이 벌써부터 아빠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푹 빠져 있다는 걸 알면 상처받을 게 뻔하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당연한 거 아닌가? 겨우 열 살짜리 소녀라 해도 첫사랑은 첫사랑이다. 친구들에게는 얘기할 수 있지만 가족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인 것이다.

 

그건 1977년 봄이었다. 내게는 최고의 해였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건 변함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든다. 1월에 미샤가 볼쇼이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맨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난 너무 좋아서 기절할 뻔 했고 잠시 후에는 걱정이 되어 아빠를 붙잡고 늘어졌다.

 

“ 근데 거기서 어떻게 와? 공연 있을 때마다 비행기 타야 하는 거야? 기차로는 열 시간이나 걸리잖아. 작년에도 비행기 타러 간다고 빨리 가버려서 인사도 못 했는데. ”

“ 작년처럼 게스트로 공연 오는 게 아니라 아예 볼쇼이로 옮겨오는 거야. 적어도 일 년은 여기서 살 거야. ”

 

아빠는 미샤가 모스크바로 이사 올 거라고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내가 미샤를 만날 때마다 귀가 닳도록 모스크바 자랑을 한 게 드디어 효과를 본 것 같았다. 미샤는 내게 트레치야코프 미술관과 아르바트 거리는 좋지만 그래도 레닌그라드를 떠날 생각은 없다고 했었다. 오히려 나한테 아빠랑 같이 레닌그라드로 이사 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날 데리고 다니며 레닌그라드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었다. 운하를 누비는 작은 보트도 태워 주었고 분수가 나오는 궁전에도 데려갔다. 분수 궁전은 정말 끝내줬다. 게다가 사자 분수 앞에서 미샤가 사준 아이스크림은 더 끝내줬다. 하마터면 넘어갈 뻔 했지만 마침 소나기가 쏟아진 덕에 꿋꿋하게 계속 우길 수 있었다.

 

“ 그래도 모스크바가 더 좋아. 훨씬 크고 날씨도 더 좋아. 여기는 비가 너무 자주 와. 어제도 보트 타다 비 맞고. ”

“ 6월 되면 여기 날씨가 더 좋을 거야. 백야도 있는데. ”

“ 그러면 미셴카가 모스크바에 살면서 백야에만 여기 와 있으면 되잖아. ”

“ 그럼 공연 있을 때마다 열 시간씩 기차 타고 와야 하잖아. 연습은 어떻게 하고. ”

“ 키로프가 모스크바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 다 해결될 텐데. ”

“ 라루츠카, 레닌그라드는 싫어? ”

“ 별로야. ”

“ 날씨가 안 좋아서? ”

“ 모스크바는 빌딩도 더 크고 가게도 더 많고 나무도 훨씬 많아. ”

“ 여긴 천사도 많고 분수도 많은데, 운하도 있고 에르미타주도 있고. ”

“ 우리도 있어, 트레치야코프랑 푸시킨 미술관. ”

“ 여긴 새벽이면 다리도 반으로 갈라지는걸. 불빛이 반짝반짝하고 그 아래로 큰 배도 지나가. 곧장 바다로 나가고. ”

 

지금 같았으면 지형적 차이로 생겨난 조건을 내세우는 건 불공평하다고 항의했겠지만 그땐 어렸고 다리가 갈라지는 건 정말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난 곧 납득해버렸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후 다리가 갈라지고 배가 바다로 나가는 레닌그라드로 이사 가자고 졸라대서 엄마에게 눈물 쏙 빠지게 혼났다. 엄마는 어린애한테 공연히 바람을 넣었다고 미샤와 아빠를 싸잡아서 욕했다. 그때는 정말 짐을 싸서 아빠에게 가버릴까 했는데 전화를 했더니 아빠가 6월이면 모스크바로 돌아올 거라고 달래서 그만두었다.

 

아빠가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행복했다. 물론 엄마도 사랑하고 새아빠도 나름대로 자상하게 잘 대해주긴 하지만 그래도 난 어릴 때부터 항상 아빠가 제일 좋았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했을 때 난 다섯 살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잘못됐다는 건 이해했다. 그리고 여덟 살쯤 됐을 때는 그때 아무도 내게 누구와 살고 싶으냐고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가 났다. 아냐는 나보다 세 살이나 어렸으므로 그렇다 치고, 적어도 내게 물었다면 난 아빠를 골랐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항상 엄격했고 규칙을 강조했으며 거의 매일같이 야단을 쳤지만 아빠는 웬만하면 화를 내지 않았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눈을 보며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엄마와는 달리 날 극장에 데리고 갔다. 엄마도 한때는 발레리나였고 지금은 공연 잡지사에서 비서로 일했지만 웬만해서는 나나 아냐를 극장에 가지 못하게 했다. 그것 때문에 아빠와도 가끔 다퉜다. 우리가 너무 어려서 교육에 좋지 않다는 거였다.

 

심지어 엄마는 발레 공연을 보는 것도 탐탁찮게 생각했다. 아빠는 아냐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나는 이미 충분히 컸으니 괜찮다고 했다. 결국 아빠는 엄마와 타협을 했다. 발레 공연의 경우 반드시 아빠나 마르가리타 아줌마가 데리고 갈 것. 연습실에는 절대 데려가지 말 것. 엄마는 그것도 모자라 내가 갈 수 있는 공연 리스트를 만들어서 아빠에게 건네주었다. 맨 처음엔 호두까기 인형, 코펠리아, 잠자는 미녀 세 개 뿐이었다. 난 울면서 어떻게 백조의 호수도 없고 지젤도 없느냐고 난리를 쳤고 아빠는 며칠 동안 엄마를 설득한 끝에 백조의 호수와 곱사등이 망아지를 추가하는데 성공했다. 난 백조의 호수가 되면 해적과 지젤도 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지만 엄마는 그걸 보기엔 내가 너무 어리다고 딱 잘라 말했다.

 

내가 해적과 지젤을 본 건 아빠를 보러 처음 레닌그라드에 갔던 아홉 살 때였다. 그때 아빠는 키로프 극장의 초청을 받아 레닌그라드에서 신작을 안무하고 있었다. 사실 그 공연들을 보여준 건 아빠가 아니라 미샤였다. 내가 겨우 다섯 개 뿐인 리스트를 들먹이며 억울함을 호소하자 미샤는 진지하게 들어주었고 엄마가 그걸 못 보게 한 이유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 지젤은 남자 주인공이 여자를 배신해서 그래. 착한 사람이 아니라서. ”

“ 주인공이 악당이란 말이야? ”

“ 음, 꼭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이었던 거지. ”

“ 그럼 왕자님이 아닌 거네. ”

“ 왕자는 아니지만 백작이야. 비슷한 거야. ”

“ 어떻게 왕자님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할 수가 있어? ”

“ 왕자라고 다 착하고 멋있는 건 아니니까. ”

“ 안 그래. 왕자님은 착하고 멋있어야 해. ”

 

미샤는 웃더니 공연을 보면 이해가 될 거라고 했다. 지젤을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뛸 듯이 기뻐진 나는 해적에 대해서도 물었다.

 

“ 그럼 해적은 주인공들이 다 도둑놈들이라 엄마가 못 보게 하는 거야? ”

“ 아니. 그건 아닐 걸. ”

“ 그럼 엄마는 왜 그러는 거야? ”

“ 남자 주인공 중 하나가 옷을 벗고 나와서 그럴 거야. ”

“ 발가벗고? ”

“ 아니, 바지만 입고 나와서. ”

“ 그럼 수영장이랑 똑같은 거잖아. 근데 왜 수영장은 가도 되는데 극장은 안 되는 거야? ”

“ 글쎄. 그 두 개가 다르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 ”

“ 오빠도 그런 사람이야? ”

“ 모르겠네. 난 믿는 사람이 아니고 춤을 추는 사람이니까. ”

 

나는 미샤의 옆에 앉아서 지젤을 봤다. 1막 마지막 장면에서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휴식 시간 내내 울었다. 미샤는 날 달래주는 대신 눈물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 2막 보기 싫어? ”

“ 그 나쁜 남자 벌 받아? ”

“ 벌 받았으면 좋겠어? ”

“ 응. ”

“ 그래도 지젤이 구해주고 싶어 하면? ”

“ 왜 구해주고 싶어야 돼? 그 악당 때문에 죽었는데. ”

“ 지젤은 아직도 그 남자를 사랑하니까. 알브레히트는 악당이 아니고 주인공이야. 왕자 같은 거라니까. ”

“ 아니야, 왕자님은 그렇게 못되게 굴지 않아. 악당이야. ”

 

나는 두 번째 벨이 울릴 때까지도 버티다가 너무 궁금해서 결국 2막을 보러 들어갔다. 2막은 예쁘긴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그 못된 남자 주인공이 결국 벌도 안 받고 지젤 덕에 목숨을 구하는 게 이해가 안됐다. 나오면서 솔직하게 감상을 얘기하자 미샤는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

 

“ 다음에 한 번 더 보면 느낌이 달라질지도 몰라. 그러니까 또 봐. ”

“ 달라질 리가 없어.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

“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야. 누가 어떻게 추느냐에 따라서도 항상 달라. 같은 사람이 춰도 달라질 수 있어. ”

 

이틀 후 미샤는 내게 해적 공연 표를 주었다. 날 데려간 건 미샤가 아니라 지나였다. 미샤는 그 무대에서 춤을 추기로 되어 있었다. 지나가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궁금한 건 단 두 가지 뿐이었다. 누가 옷을 벗고 나오는가. 수영장과 무대는 다른가 같은가. 하지만 어쩐지 쑥스러워서 묻지는 못했다. 지나는 친절했지만 미샤처럼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실 질투도 좀 났다. 사람들이 다들 지나와 미샤가 사귄다고 했기 때문이다. 지나는 엄청나게 예뻤다. 그리고 미샤와 같은 집에서 살았다. 우리 아빠도 작품 준비 때문에 바빠지자 그 집에 들어가 살고 있긴 했지만 그것과는 다른 게 분명했다. 그 해 겨울에 지나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기뻤지만 미샤가 많이 슬퍼할 것 같아서 티는 내지 않았다. 속으로는 지나가 나쁜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거의 지젤의 남자 주인공만큼. 내가 지나였다면 절대 미샤와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남자를 두고 나이도 많고 얼굴도 못생긴데다 지루하게도 무슨 교수 노릇을 하는 아저씨와 결혼할 수 있단 말인가.

 

해적은 그 이후로도 여러 번 봤지만 지금도 난 그 발레의 내용을 정확히 모른다. 내 기억 속에 있는 거라곤 오로지 미샤가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랗고 예쁜 아라비아 스타일 바지를 펄럭이며 날아오르고 또 날아오르는 모습뿐이기 때문이다. 그 역을 출 때 미샤는 정말로 상의를 입지 않았다. 그리고 난 수영장과 무대가 왜 다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미샤에게는 얘기하지 않았다. 어쩐지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볼쇼이에서 미샤가 처음으로 해적 무대에 올라왔을 때 난 아빠를 졸라서 엄마 몰래 2층 발코니에서 그 공연을 보았다. 2막에서 미샤가 그 파란 옷을 입고 춤추기 시작했을 때 객석 군데군데가 시끌시끌해졌고 귀가 멀 정도로 큰 갈채와 브라보가 이어지는 동안 여자 몇 명이 홀 밖으로 실려 나갔다. 그런 광경은 난생 처음이었다. 아빠는 고개를 저으며 내게 말했다.

 

“ 엄마 말이 맞았어, 이건 안 되겠는데. 열 살짜리에겐 별로 안 좋아. ”

 

아빠는 내가 레닌그라드에서 이미 그 공연을 봤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모른 척 하며 정말 궁금한 걸 물었다.

 

“ 저 여자들은 왜 기절하는 거야? ”

“ 공연에 몰입하면 가끔 그럴 수도 있단다. ”

“ 난 알아. 미샤가 옷을 벗고 춤을 춰서 그래. ”

 

웬만하면 내 말을 모두 받아주는 아빠조차 그 때는 너무 충격을 받았는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날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후 내게 코트를 입혀주면서 아주 심각하게 물었다.

 

“ 라라, 너 남자친구 생겼니? ”

“ 비챠랑 료바가 자꾸 쫓아다녀. 그치만 꼴도 보기 싫어. ”

“ 왜? 둘 다 착하던데. ”

“ 걔들은 유치해. 남자친구 같은 거 안 만들 거야. ”

“ 그럼 좋아하는 선생님이나 오빠라도 생겼어? ”

“ 없어, 그런 거! 난 아빠랑 결혼할 거라고 했잖아! ”

 

아빠는 웃었지만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돌이켜보면 아빠는 그때부터 내 뜨거운 짝사랑을 눈치 챈 것 같았지만 날 놀리거나 아는 척 티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빠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 아빠라서가 아니라 정말 그랬다. 극장 동료들도 무용수들도 전부 다 그렇게 말했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아빠가 정말 상냥한 분이라면서 우리 엄마가 복에 겨워서 이혼한 거라고 투덜거렸다. 미샤는 남에 대한 말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어느 날인가 샴페인을 두어 잔 마시고 취했을 때 아빠가 침대로 데려다 주자 불쑥 이런 말을 했다.

 

“ 난 스탄카가 아니었으면 여기 안 왔을 텐데. ”

“ 그 스탄카는 날 얘기하는 거야? ”

“ 그럼 다른 스탄카가 있나? ”

“ 내일도 술을 먹여봐야겠어. 그럼 또 감동적인 말을 해줄지 모르니까. ”

“ 그게 감동적인 말이야? 난 지금 비난하는 거라고. 모스크바 따위로 날 데려오다니. ”

 

그때 난 아빠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미샤를 설득해 모스크바로 데려온 아빠가 자랑스러웠다. 극장 감독님과 다른 높은 분들이 옛날부터 미샤를 볼쇼이로 데리고 오려고 무진 노력을 했지만 전부 허사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미샤가 다른 사람들 말은 안 들어도 우리 아빠 말은 듣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아줌마가 좀 잘못 알고 있는 거였다. 미샤는 내 말도 아주 잘 들었다. 그리고 날 어린애로 취급하는 대신 친구처럼 대해줬다. 어리다고 무시한 적도 없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여워한 적도 없었다. 어른들은 그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 잘 모른다.

 

맨 처음 미샤를 만났을 때 그는 내 손등에 키스를 해 주었다. 그 날 그는 백조의 호수에서 지그프리드 왕자를 췄고 극장이 떠나갈 듯한 박수와 환호, 끝없이 반복되는 커튼 콜을 받았다. 공연 내내 난 넋을 놓고 무대를 보고 있었다. 아니, 지그프리드만 봤다. 아빠가 날 백스테이지로 데려가서 미샤를 소개시켜 주었을 때는 너무 멍해진데다 긴장해서 아무 말도 못했다. 인사도 못했다. 미샤는 말 그대로 꽃에 파묻혀 있었다. 두 팔로 안고 있는 것도 모자라 바닥에도 꽃다발이 잔뜩 놓여 있었다. 나를 보자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내 손등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리고는 제일 예쁘고 화려한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난 공주님이 나오는 그림책을 좋아해본 적도 없고 이제껏 발레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지만 그때 미샤는 정말로 왕자님 같았다. 반짝거리는 장식이 달린 하얀 의상도 그랬고 그림 속에서 나온 것처럼 근사한 외모도 그랬다. 무엇보다도 그 품위 있고 다정한 태도가 그랬다. 나중에 아빠는 내가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이름도 얘기하지 못한 채 ‘진짜 왕자님이에요?’ 라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재미있어 했다.

 

이후 난 미샤와 아주 친해졌지만 항상 마음속으로는 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화려한 무대 의상과 분장과 배역 없이도 미샤는 언제나 왕자님 같았다. 잉크처럼 검은 머리와 눈처럼 하얗고 깨끗한 피부가 놀랄 만큼 잘 어울렸다. 그리고 눈이 밤하늘처럼 새까맸다. 내 주위에는 그렇게 까맣고 예쁜 눈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볼쇼이에 몰려든 관객들은 미샤를 검은 눈의 야스민이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들은 천사라는 별명을 붙였다. 주변이나 잡지 등에서 그런 찬사를 들을 때마다 난 뿌듯했지만 한편으로는 미샤가 너무 인기가 많아지는 게 싫기도 했다. 또 지나 같은 여자친구가 생길까봐 걱정이었다. 어쨌든 난 미샤보다 열한 살이나 어렸기 때문이다.

 

언니가 있는 친구들은 내게 굳이 어른이 안 되더라도 열대여섯 살만 먹으면 남자들이 숙녀로 봐주는 것 같으니 몇 년만 잘 버티면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럼 최소한 5년은 더 기다려야 했는데 그동안 그 많은 발레리나들과 예쁜 여자들이 미샤를 내버려둘 것 같지가 않았다. 우리 아빠도 스물두 살 때 엄마와 결혼했는데 그 땐 두 분 다 볼쇼이에서 춤추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게다가 내 외모도 별로 예쁘지 않았다. 잿빛에 가까운 갈색 곱슬머리에 아빠처럼 아주 밝은 회색 눈이었는데 아무리 잘 봐줘도 예쁘다기보다는 약간 귀여운 정도였고 키도 동급생들보다 훨씬 작았다. 아빠나 엄마 둘 다 별로 키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건지도 몰랐다. 미샤는 우리 아빠보다 키도 컸고 몸매도 늘씬해서 같이 걸으면 내 머리가 그의 가슴 아래에 닿을까 말까했다. 어느 날은 너무 불안해서 미샤에게 솔직하게 고민을 토로한 적도 있었다.

 

“ 엄마랑 아빠 둘 다 작으면 나도 키가 작겠지? ”

“ 그럴 가능성이 있지. ”

“ 키 크는 수술이 있었으면 좋겠어. ”

“ 사춘기가 되면 지금보다 커질 거야. 아직 모르는 일이잖아. ”

“ 그래도 다른 애들보다 작으면 무시당할 거야. ”

“ 나도 친구들보다 작았어. ”

“ 지금은 크잖아. ”

“ 아니야. 지금도 나보다 큰 동료들이 많아. 키로프는 더 그랬어. 난 180이 안 되거든. ”

 

그 말은 의외였다. 내게 미샤는 언제나 고개를 쳐들어야 눈을 마주칠 수 있을 정도로 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정말? 우리 엄마는 남자가 발레 무용수로 성공하려면 180센티가 넘어야 한댔어. 안 그러면 왕자나 기사 역을 안 준다고. 우리 아빠도 그래서 춤 그만 두고 안무하는 거랬어. ”

“ 스탄카가 안무를 하는 건 춤보다 그쪽에 더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이야. ”

“ 엄마는 그렇게 말 안했는데. ”

“ 나스챠 말이 꼭 틀린 건 아냐. 위에서는 키 큰 애들한테 좋은 역을 주는 경우가 많거든. ”

“ 그럼 어떻게 그 역들을 다 얻었어? ”

“ 키 큰 애들보다 더 잘 춰서. ”

“ 노력하면 되는 거야? ”

“ 아주 많이. ”

 

지금은 그때 미샤가 진실을 전부 얘기해준 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세상에는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있으니까. 미샤가 아주 많이 노력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열심히 했다. 공연이 없어도 극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집에서도 연습했고 아빠의 아파트에 와 있을 때도 연습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아빠는 미샤가 타고난 무용수라고 했다. 그런 재능은 진짜 드물다고 했다. 무대 위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100미터 너머에 있던 사람들까지 몰려올 거라고 했다. 난 그 말을 믿었다. 세상에는 타고난 무용수란 게 있을 것이다. 타고난 왕자님이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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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 파트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391

 

** 미샤가 라라에게 다리 갈라지는 것을 내세워 레닌그라드로 오라고 꼬드기는 것과 관련해..

 

새벽이면 다리가 이렇게 갈라진다 :) 근사한 퀄리티를 보시면 알겠지만 내가 찍은 사진 아님. 웹에서 전에 얻었다.

 

 

.. 미샤가 라라를 데려간 분수 궁전은 여름 궁전인 페테르고프이다. russia 폴더에서 페테르고프나 뻬쩨르고프로 검색하면 그곳 풍경들을 볼 수 있다.

 

 ** 발레 지젤과 해적에 대한 애기들은 dance 폴더에서 지젤, 해적으로 검색하면 전에 올린 동영상이나 사진들, 공연 리뷰들이 꽤 있다.

그리고 지젤의 알브레히트에 대한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27

 

** 지젤과 해적은 미샤가 데뷔해서 췄던 주요 작품이기도 하다.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28

 

** 추가) 미샤가 라라를 데려갔던 분수 궁전 페테르고프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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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