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무의 슬픔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series : 서무의 슬픔2015. 3. 19. 21:15
우여곡절 끝에 어느새 13편까지 온 서무의 슬픔 시리즈.
12편에서 특별감사로 단단히 고생을 한 우리의 말단 직장인이자 고지식한 단추눈 청년 다닐 베르닌. 그는 반드시 금요일 휴가를 내야만 한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매우 피곤한 목요일이다. 아직 주말이 되려면 하루가 더 남아 있다. 고생바가지 베르닌과 남을 잘 부려먹지만 예쁘니까 다 용서되는 왕재수의 이야기로 조금이라도 힘을 내시길~~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신년 특별감사를 마친 후 베르닌은 심신도 지친데다 왕재수가 전설의 서무를 찾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떻게든 금요일 휴가를 내고 싶어 안달이다. 과연 무시무시한 스페호프는 그의 휴가원을 통과시켜 줄 것인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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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3
서무의 슬픔
-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베르닌은 금요일에 왕재수가 바냐 투레츠키의 암시장에 가지 못하도록 보르쉬와 생선찜과 사과파이를 준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월요일까지 따뜻했던 날씨가 돌변해 화요일부터 다시 눈보라가 몰아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매주 수요일마다 다른 도시에서 식료품을 싣고 들어오던 트럭들이 폭설 때문에 강 너머에서 막혀버렸다. 갑작스러운 추위로 주민들이 텃밭에서 재배해 팔던 야채도 모조리 얼어버렸기 때문에 그 흔한 비트나 양파 한 알 구할 수가 없었다.
생선 가게에 갔더니 트럭이 안 와서 꽁꽁 얼어붙은 동태 토막 몇 개와 게 다리 몇 개만 남아 있었는데 상태가 좋지 않았다. 왕재수는 원래부터 입맛이 까다로운데다 특히 생선의 경우 선도를 따졌고 조금이라도 비린내가 나면 안 먹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생선찜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동네 빵집은 ‘기술적인 문제’로 일주일간 휴무라는 쪽지를 내걸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나마도 흑빵과 샌드위치 등속은 다른 매점에서도 팔고 있었지만 사과파이나 케익을 파는 곳에 가려면 강을 건너야 했다. 즉, 보르쉬와 생선찜과 사과파이는 모두 불가능했다.
만두라도 빚어볼까 했지만 정육점에도 고기가 없었다. 양고기만 남아 있었는데 베르닌은 이제껏 왕재수가 양고기를 먹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기껏 힘들여 만두 빚고 쪄놨는데 양고기 싫다면서 안 먹으면 말짱 도루묵일 테니까.
베르닌은 목요일 내내 사무실에 앉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먹을 것으로 붙들어놓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어쨌든 왕재수가 투레츠키에게 가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투레츠키가 그에게 잘 대해주긴 했지만 건달이나 다름없었고 왕재수에게 집적대는 태도도 심상치 않았다. 왕재수야 아저씨들과 아무데서나 응응을 즐기는 놈인데 자기가 왜 이렇게 과민반응하나 싶기도 했지만 투레츠키만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코즐로프에게 가서 얘길 할까 싶었지만 그는 바이올린 깡패와는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왕재수가 암시장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여기저기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금요일 휴가는 결재를 받은 상태였다. 감시분석부장은 감사 때 베르닌이 엄청나게 고생을 한데다 하마터면 선배들의 잘못을 모두 뒤집어쓸 뻔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그의 휴가원을 반려하지 못했다. 오후에 직원들의 근태에 대해 관심이 지대한 스페호프가 직접 베르닌을 호출하는 불상사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 자네 왜 갑자기 휴가를 냈나? 그것도 금요일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
“ 예? 저... 그게... ”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무가 금요일에 휴가를 내다니! 서무가 지켜야 할 첫 번째 미덕은 월요일과 금요일에 가급적 휴가를 내지 않는 것이야! 어디서 언제 외부 자료 요구가 들어올지 모르고... ”
“ 아, 저... 그때 강 건너다 빠졌을 때 제가 좀 다쳐서... 온천에 좀 가려고... ”
베르닌은 어버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 그러자 스페호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 다치다니! 언제 말인가! 아니, 혹시 그때? 불여우 암살하려고 강에 밀어 넣다가... 그때 자네도 빠졌단 말인가? 많이 다쳤었나? ”
“ 어... 그렇지는 않은데요. 얼음 사이에 끼어서... ”
“ 그랬군! 당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며 그 반동분자를 처치하려다 부상을 당했었던 거군! 그런 몸으로도 일주일 넘게 감사를 받으며 야근을 했구먼. 자네야말로 진정 우리 공산당과 소비에트의 모범청년이었어. 그 망할 불여우를 죽이려다 낭패를 봤군. 쯧쯧, 얼음 사이에 끼어서 다쳤다면 뼛속까지 한기가 스몄을 텐데 온천에 가야지. 암, 온천에 가야 하고말고. 그런데 온천에 가려면 요양 허가증이 있어야 할 텐데 그건 받았나? ”
“ 어, 저... 아직 못 받았습니다만... ”
“ 아니, 허가증도 없이 어떻게 온천에 가려고 했나! 잠깐 기다려보게! ”
스페호프는 총무부서에 전화를 해서 요양소 허가증에 대해 몇 마디 물었다. 그러더니 호통을 한번 치고, 잠시 후 다시 누그러진 목소리로 몇 마디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
“ 흠, 자네 차례는 아직 멀었더군. 하지만 당을 위해 그렇게 노력하다 부상을 당한 건데 당연히 특별 이용권을 내줘야지!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박 3일 이용권을 내주라고 했네. 총무부에 가서 받아가게. 요양소가 어디 있는지는 알지? ”
“ 아, 예! 감사합니다! ”
“ 온천에 푹 담그고 마사지도 받고 반드시 나아서 오게! 몸을 잘 관리해야 하네, 그래야 조만간 그 불여우를 제대로 처치할 수 있지. 참, 이용권은 2인용일세. 그 불여우를 데려가는 것도 좋겠군! ”
“ 예? 아니, 왜 걔를... ”
“ 그래야 그 녀석이 자네를 더 신뢰하게 될 것 아닌가! 온천도 같이 하고 친한 척하면서 돌봐주란 말일세. 아침에도 하고 저녁에도 하고 밤에도 해주는 건 기본이지. 그래야 조만간 더더욱 손쉽게... ”
“ 어... 예... ”
베르닌은 살짝 얼이 빠져서 국장실을 나왔다. 휴가를 허락받았을 뿐만 아니라 선배들에게만 차례가 돌아가는 특별 요양소 이용권까지 얻다니 꿈만 같았다. 검은 숲 깊은 곳에 있는 온천 요양소는 가브릴로프 주민들에게는 최고의 휴양지였고 다른 도시 노멘클라투라들도 찾아오는 곳이었다. 특히 이런 한겨울에는 이용권 구하는 것이 더욱 하늘의 별 따기였다.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재수와 코즐로프에게 온천 이용권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왕재수가 투레츠키에게 가지 않을 것이고 그는 굳이 왕재수를 돌봐주지 않고도 3일 연휴를 즐길 수 있다! 한 마디로 일석이조였다!
그는 총무부에 가서 이용권을 수령했고 쌓인 일을 그대로 미뤄둔 채 정시에 퇴근했다. 곧장 극장으로 차를 몰고 갔다. 극장은 계속된 폭설과 수도관 파열 때문에 주말까지 모든 공연이 취소된 상태였다. 하지만 왕재수는 계속 출근하고 있었다. 파이프 수리 중인 지하실과 기관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수리공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화요일부터는 공연이 올라갈 수 있게 해놓으라고 불벼락을 내리고 있었다. 야단을 치다가 이따금 기침도 했다. 안색이 안 좋아보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왕재수의 팔을 잡아끌고 1층으로 올라왔다.
“ 왜 그래! 공사하는 거 봐야 된단 말이야! ”
“ 지하실 공기도 안 좋고 습하고 추운데 거기 얼마나 있었던 거야! ”
“ 한 시부터. ”
“ 미쳤냐! 너 폐렴 두 번이나 걸렸었잖아! 도지면 어쩌려고 그래. 그리고 네가 기술자도 아니면서 옆에서 본다고 뭐가 해결돼? 윗사람이 닦달하면 잘 되던 것도 더 안 된단 말이야. 그냥 기술자들한테 맡기고 넌 집에 가! 공연도 어차피 다 취소되고 발레단 애들도 하나도 안 나왔구만 너 혼자 뭐하는 거야! ”
“ 발레단 애들 나왔었어! 점심때까지 3층 연습실에서 내가 연습시키고 돌려보냈단 말이야. 그리고 나는 무용수가 아니라 감독이잖아. 극장이 이 꼬라지가 됐는데 당연히 남아서 지켜봐야지! 가뜩이나 애들 수준도 별로인데 시설까지 이 모양이니... 걸핏하면 파이프 터지고 물 새고. 난방도 안 되고. 이러니 관객들이 외면하지. 아, 머리 아파. 속상해. ”
“ 뭘 관객들이 외면해. 요즘 맨날 매진이던데! ”
“ 그건 내 이름값 때문이지 진짜 공연 보러 오는 게 아니란 말이야. 공연도 엉망, 극장도 엉망... ”
“ 너 여기 관객들 수준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냐? 우린 여태 이 정도 공연들도 잘만 봤는데. ”
“ 좋은 거 보여주면 관객 수준은 올라가게 돼 있단 말이야! 욱, 콜록콜록... ”
왕재수가 심하게 기침을 했다. 베르닌은 어쩐지 속이 상했고 답답해졌다.
“ 야, 너 오늘 뭐 먹었어! 점심 먹었어, 안 먹었어? ”
“ 먹었어, 극장 카페에서. ”
“ 뭐 먹었는지 대! ”
“ 게살 샐러드, 요구르트... ”
“ 아침엔! ”
“ 사과... ”
“ 사과 몇 개? ”
“ 한 개... ”
“ 그게 전부야? 간식은! 간식 안 먹었어? ”
“ 간식 먹을 시간이 어디 있어! 애들 연습시키느라 정신없었어. 아직도 점프하다 자빠지는 놈들이 태반이라고. 그리고 인부들이 하도 게으름피우고 보드카 마시면서 딴 짓을 해대서 옆에서 감시해야 했단 말이야. ”
“ 너 이리 와. 안되겠어. ”
베르닌은 왕재수를 질질 끌고 가서 차에 태웠다. 곧장 항아리 닭고기 식당으로 향했다. 2인분을 주문했다. 싫어하는 왕재수에게 억지로 항아리를 들이밀고 살코기를 포크로 푹 찍어서 손에 쥐어주었다.
“ 먹어! 이거 다 먹기 전까지는 집에 못 가. ”
“ 아, 진짜 싫어! 월요일에도 발렌티나 누나랑 오느라고 먹기 싫은 거 억지로 먹었단 말이야! ”
“ 국물까지 다 닦아먹기 전까진 못 일어날 줄 알아라. ”
“ 하지만... ”
“ 먹으라고 했다. 안 먹으면 감독실하고 너네 집 침실에 고양이 풀어서 바퀴벌레랑 곱등이 물어오게 할 거야. ”
“ 악마. 살인자... ”
왕재수는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저항도 못하고 포크에 꽂혀 있는 살코기를 먹었다. 베르닌이 흑빵에 국물을 잔뜩 묻혀서 건네주자 멍하게 그것도 먹었다. 고양이와 바퀴벌레와 곱등이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닭다리를 밀어주자 처량한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봤다.
“ 기름... 껍질 벗기고 먹으면 안 돼? ”
“ 안 돼. 껍질 다 먹어! ”
“ 나 기름기 많으면 속 울렁거려서 못 먹어. 진짜야. 거짓말 아냐, 제발 바퀴벌레는 안 돼... 어헝... ”
“ 그럼 기름덩어리만 떼어내. 두께 5밀리 이상만. ”
“ 너 이상해졌어. 밥 먹는 것도 막 간섭하고. 5밀리는 또 뭐야... ”
왕재수는 포크와 나이프로 노란 기름덩어리를 제거한 후 껍질이 붙어 있는 닭다리를 발라 먹고 나머지 살코기와 감자와 당근을 건져 먹었다. 이미 자기 몫을 다 해치운 베르닌은 왕재수가 제대로 먹는지 안 먹는지 감시했다. 건더기는 다 먹었지만 국물이 절반 이상 남아 있었다.
“ 마셔. ”
“ 지방질... 나트륨... ”
“ 고양이 풀 거야. ”
왕재수는 베르닌을 노려보더니 조그만 항아리를 기울여 국물을 조로록 마셨다. 매우 기분 나쁜 표정이었지만 뺨에는 발갛게 혈색이 돌아왔고 눈도 다시 반짝거렸다.
“ 너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월요일엔 발렌티나 누나가 반가워서 그 방에 들어갔던 거야! 이런 느끼한 거 안 사줘도 된단 말이야! ”
“ 누가 뭐래. 하여튼 너 아직 다 안 나은 거 같아. 온천에나 가. ”
“ 온천? 여기 온천 있어? 하긴 시골이니까. ”
“ 야, 자꾸 시골 타령 하지 마! 우리 가브릴로프 온천은 연방에서도 유명하단 말이야! 온천이 몸에 얼마나 좋은데! ”
“ 나도 알아! 나 온천 진짜 좋아해. 무용수들 온천이랑 마사지 사족 못 써. 예전엔 우리 아저씨들이랑 카를로비 바리에 온천하러 다녔단 말이야. ”
“ 여기도 고위층이랑 공무원만 가는 요양소 있어. 나 이번에 이용권 생겼는데 내일부터 일요일까지야. 너 거기나 다녀와. 바이올린 깡패랑 같이 가면 되겠네. ”
“ 아. 로만이랑 가면 진짜 좋겠다. 근데 로만은 여동생이 결혼한대서 못가. 그 집 대가족이라 뭔가 다들 모여서 잔치하고.. 만두 빚는대. ”
“ 쳇, 옛날 사람... 또 모여앉아서 만두 예쁘게 빚는 여자 타령하겠군. ”
“ 나 온천 가고 싶은데... 꼭 내일 가야 하는 거야? 다음 주는 안 돼? ”
“ 이용권 기간이 있어서 내일부터 일요일까지야. ”
“ 그럼 안 되겠네... 그냥 너 가. 난 내일 바냐한테나 가보지 뭐. 내일 좋은 거 들어온다고 했는데. ”
“ 앗, 안 돼! 너 그냥 나랑 가자. 온천... ”
“ 나야 상관없지만... 넌 금요일에 출근하잖아. ”
“ 휴가 얻어서 괜찮아. 그럼 짐 다 챙겨놔. 내일 아침 7시에 출발하게. ”
“ 어... 그렇게 빨리? 12시쯤 가면 안 돼? 바냐한테 들렀다가... ”
“ 안 돼! 눈 와서 길도 막히고 힘들어. 아침에 가야 물이 좋지! ”
“ 하긴 그렇겠다. 알았어. 신난다! ”
* * *
금요일 아침 7시에 베르닌은 왕재수를 데리고 온천 요양소로 떠났다. 요양소는 드넓은 검은 숲 지대에서도 북쪽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베르닌의 걱정과는 달리 요양소 가는 길은 눈이 많이 녹아서 그렇게 운전이 힘들지는 않았다. 아마 노멘클라투라 계층이 많이 이용하는 요양소라 일찌감치 제설작업을 해서 그런 것 같았다. 오히려 구시가지보다 제설이 잘 된 길도 있었다.
요양소에 도착하니 9시였다. 로비는 벽에 모자이크 장식도 되어 있고 조각상들도 많아서 제법 호화스러웠다. 총까지 차고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제복 차림의 경비원도 하나 있었다. 비록 문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긴 했지만. 카운터로 갔더니 주근깨투성이의 빨간 머리 여직원 하나가 껌을 씹으며 앉아서 잡지를 읽고 있었다. 베르닌이 바로 앞까지 갔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몇 분 기다리다가 베르닌은 헛기침을 했다.
“ 저, 요양소 예약한 사람인데요. 오늘 오전부터 일요일까지... ”
“ 아직 접수 시간 안 됐어요. 기다려요. ”
“ 언제부터인데요? ”
“ 10시요! ”
“ 눈 때문에 서둘러서 일찍 왔는걸요. 바깥도 춥고. 지금 자리에 계시는데 접수만 해주시면 안 되나요. ”
“ 안 돼요! 10시부터 시작이라고요. 누가 빨리 오래요? 그냥 거기 앉아서 기다려요! ”
“ 저... 이 로비는 너무 추운걸요. 같이 온 친구가 폐렴에 걸린 적이 있어서 추운 데 오래 있으면 안 돼요. 열쇠만 주시면 방에 들어가 있을게요. ”
“ 그거야 당신들 사정이죠! 난 10시부터 근무라고요. 기다려요! ”
베르닌은 화가 나서 항의를 하려고 했다. 그때 로비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있던 왕재수가 다가와서 물었다.
“ 왜? 접수 지금 안 되는 거야? ”
“ 응. 10시부터래. ”
“ 지금 해주시면 안돼요? 여기 너무 추워요. ”
여자는 짜증을 왈칵 내려고 했지만 왕재수를 보더니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말을 더듬었다.
“ 아... 어, 원래는 안 되는데... 로비가 춥죠. 음... 이름이 어떻게 되죠? ”
“ 야, 네 이름으로 예약한 거 아냐? ”
“ 다닐 베르닌이요. ”
“ 베르닌. 아, 보안위원회. 흥! 그렇군요. 당신 젊군요, 아직 여기 올 순번이 아닌 것 같은데. 흠... 그리고 당신은요? ”
베르닌은 여자의 말투가 자신과 왕재수를 대할 때 180도 다를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감탄했다.
“ 야스민이요. 미하일 야스민. ”
“ 야스민, 야스민... 앗, 당신! 맞아,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았어! 어머나! 백조의 호수...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어머! 어쩐지 오늘 꿈자리가 좋더라니! 우와, 당신 실물이 더 멋있네요! 사인 좀 해주세요! ”
왕재수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사인을 해 주었다. 여자는 완전히 무장 해제되어 황홀감에 잠긴 눈빛으로 어디선가 카메라를 찾아내더니 사진을 같이 찍자고 통사정을 했다. 왕재수가 승낙하자 여자는 베르닌에게 카메라를 들이밀며 빨리 찍으라고 명령했다. 베르닌은 슬슬 짜증이 치밀었지만 사진을 찍어 주었다. 여자는 뛸 듯이 좋아했고 묻지도 않았는데 술술 떠들었다.
“ 전 류바예요. 짜증내서 미안해요. 원래 오늘부터 일요일까지 저쪽 군부대에서 장교들이 여기로 신년 단합대회를 하러 오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남자친구가 1대대장 운전병이라서 같이 오면 밤에 데이트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무슨 장군이 특별 시찰을 나온다고 해서 다 취소된 거예요. 불쌍한 알릭. 주말만 고대하고 있었을 텐데.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홧김에 주말 근무는 바꿔버렸어요. 장교들 예약이 취소돼서 오늘 손님이 아무도 안 올 줄 알았거든요. 내일부터는 마르파 아줌마가 있을 거예요. 제가 얘기해 놓을게요, 잘 챙겨주라고. 세상에, 이렇게 유명한 분이 오시다니. 그것도 이렇게 미남일 줄이야! ”
베르닌은 너무나도 지루해서 빨리 열쇠나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싸가지 없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여자의 말은 중간에 끊는 법이 없었다. 류바가 떠드는 걸 다 들어준 후 그녀가 청하는 대로 사인도 한 장 더 해주었다. 류바가 친구들에게 전화해 자랑할 거라고 하자 왕재수는 베르닌이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환한 미소와 부드러운 눈빛을 동시에 발산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쉿, 제가 여기 와 있는 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면 안 될까요? 저는 여기 쉬러 온 거라서요. ”
“ 어머나, 물론이죠! 그래요, 좋아요... 저만 간직할게요! 아아, 어쩜 좋아. 난 남자친구가 있는데... 당신 너무 멋있어요. 잠깐만요, 열쇠 드릴게요. 어차피 장교들도 예약 취소했고 주말엔 두 분이랑 노인네들 몇 명밖에 손님 없으니까 좋은 방으로 드릴게요. 음, 그래... 5층으로... 장교들한테도 안 내주고 살짝 남겨뒀던 방인데... 여기 열쇠요. 식당은 1층에 있고요, 식사 시간은 8시, 12시, 6시예요. 어머, 근데 일찍 나오느라 아침도 못 먹었겠군요. 카페로 가시면 간단한 스낵이 있어요. 손님 없다고 아줌마 놀고 있을 텐데 제가 전화해 드릴게요. 온천은 저쪽... ”
류바는 시설 설명을 아주 친절하게 늘어놓았다. 심지어 카운터도 비워놓고 둘을 방까지 안내해 주기까지 했다. 베르닌은 이제껏 그렇게 좋은 방에 묵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널찍한데다 윤이 나는 나무 마루가 깔려 있었고 침대 아래에는 푹신한 카펫이 놓여 있었다. 심지어 거실까지 딸려 있었다! 요양소는 제국 시절 귀족의 별장이었기에 벽에도 모자이크 장식이 되어 있었고 그림도 많이 걸려 있었다. 화장대와 옷장, 콘솔도 있었다. 외국인들이나 묵는 고급 호텔처럼 보였다. 양쪽에 하나씩 놓여 있는 침대도 상당히 폭이 넓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베르닌과는 달리 왕재수는 가방을 바닥에 집어던지더니 근사한 가죽소파에 주저앉아 다리를 쭉 펴며 투덜댔다.
“ 망할 놈의 레닌. 저거 부수면 너네 국장이 나 잡아가겠지? ”
눈을 돌려보니 책상 위에 레닌 석고 흉상이 있었다. 베르닌은 고개를 저었다.
“ 괜히 그런 짓 하지 마. 가뜩이나 국장이 너 싫어하는데. ”
왕재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무리 봐도 레닌이 맘에 안 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또 들떠서 소리쳤다.
“ 우리 빨리 뭐 좀 먹고 온천 하러 가자! ”
* * *
베르닌은 입사 이래 처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너무나도 편안하고 즐겁게 휴양을 즐겼다. 과연 특권층 위주로 돌아가는 요양소라 그런지 시설도 좋았고 온천수는 따뜻하고 매끌매끌했다. 검은 숲에는 다른 온천 지대도 있었고 노천 온천도 몇 군데 있었지만 이곳은 급이 틀렸다. 온천에 몸을 담가본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날 지경이었다. 기껏해야 항상 피로에 절어 늦게 귀가한 후 녹물 냄새 나는 수돗물로 샤워를 하고 잠들 뿐이었으니까.
뜨끈뜨끈한 온천에 들어가 사지를 쭉 늘어뜨리자 온몸이 노곤해지면서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야근과 감사로 인해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왕재수는 과연 무용수 출신이라 온천에 많이 다녀본 듯했다. 온천에 좀 들어가 있더니 어딘가로 마사지를 받으러 간다며 사라졌다. 한 시간 쯤 후 다시 나타나서 베르닌을 잡아끌었다.
“ 야, 여기 마사지랑 스파 괜찮아. 가서 좀 받아. ”
“ 내가 노인네냐, 마사지를 받게. ”
“ 넌 좀 받아야 돼. 맨날 책상 앞에 앉아 있기만 하잖아. 척추도 휘었고 어깨도 구부정하고... 전신 마사지 좀 받아. 잘해주더라. ”
베르닌은 내키지 않았지만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마사지사가 여자라서 1차로 기절초풍했고 아주머니가 몸 여기저기를 꾹꾹 누를 때마다 너무 아파서 2차로 크나큰 고통을 겪었다. 비명을 질러대자 마사지사가 투덜댔다.
“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엄살이야! 가만히 있어! 많이도 뭉쳤네. ”
“ 아... 으악! 아악! 너무 아파요! ”
“ 여기 뭉쳐서 그런 거야! 운동 부족이구만. 나이는 젊은데 몸은 벌써 40대는 된 것 같네! 어휴, 척추도 휘었어! 쭉쭉 좀 펴 봐! ”
“ 으아악! ”
공포의 마사지가 끝난 후 베르닌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걸어 나왔다. 왕재수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공용 풀 맞은편의 의자에 앉아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베르닌은 원망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 너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 뼈가 다 부러지는 것 같았어! ”
“ 시원하고 좋잖아. 근육도 다 풀리고. ”
“ 나랑 너랑 같냐! 넌 몸 쓰는 직업이고 난 사무직인데! ”
“ 그러니까 더더욱 받아야지. 난 척 보면 알아. 너 지금 심각해. 이제부터 운동해야 돼. 마사지도 꼬박꼬박 받고. 안 그러면 신체 나이는 40대로 전락한다고! 나중에 디스크도 생기고 관절도 안 좋아질 거야. ”
베르닌은 마사지사의 말이 생각나서 뜨끔했다.
“ 어쨌든... 기껏 온천해서 풀렸는데 마사지 때문에 삭신이 쑤시잖아. ”
왕재수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우유를 한 팩 건네주었다.
“ 어, 웬일로 네가 나 먹을 걸 챙겨놨냐! ”
“ 내가 왜! 우유 사러 갔더니 카페 아줌마가 나 예쁘다고 두 개 준 거야! ”
“ 하긴 그랬겠지. ”
베르닌은 팩을 뜯어서 우유를 마셨다. 목욕 후 마시는 차가운 우유가 꿀맛이었다. 시원하고 고소하고 달콤했다.
왕재수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요양소 뒤뜰로 나가더니 팔짝팔짝 뛰고 잠깐 발레 스텝까지 밟았다. 그 해맑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베르닌은 저 싸가지 없는 녀석이 틱틱대지만 않고 매일 저러고만 있으면 자신도 한결 편해질 텐데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좀 춥긴 했지만 하늘도 파랬고 햇살도 쨍해서 좋은 날씨였다. 왕재수는 숲으로 산책을 하러 가고 베르닌은 방에 올라가서 쉬기로 했다.
“ 너 아무리 늦어도 5시까지는 들어와야 돼. 여긴 숲속이라 금방 캄캄해지니까. 저녁도 6시에 먹어야 하고. ”
“ 알았어. ”
“ 야, 잠깐! 스웨터 바람으로 나가면 어떡하냐! 패딩 입어! ”
“ 나 패딩 없잖아! 그놈의 패딩 타령! ”
“ 안 돼! 패딩 입어! ”
베르닌은 왕재수를 끌고 자기 방으로 갔다. 이럴 줄 알고 챙겨온 여분의 패딩 재킷을 억지로 입히고 머리에 모자를 씌우고서야 놔주었다. 왕재수는 매우 툴툴거리면서 방을 나갔다. 혹시나 나가다가 패딩을 벗어 버릴까봐 베르닌은 산책로 입구까지 쫓아가서 감시했다. 왕재수가 매우 짜증을 냈다.
“ 어휴, KGB 앞잡이! 감시꾼! ”
“ 그거 벗기만 해. 고양이 불러다가 방에 풀고 바퀴벌레를... ”
“ 악마. 살인자! ”
* * *
베르닌은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갓 세탁해 볕에 잘 말려서 보송보송한 시트 위에 몸을 던지고 따뜻한 담요를 덮었다. 창문 사이로 부드러운 햇빛이 스며들어왔다. 평일에 온천욕을 한 후 오후 햇살을 받으며 푹신하고 깨끗한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잘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는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운 채 이 평온한 여유를 천천히 즐겨보려고 했지만 1분도 안 되어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두어 시간 후 베르닌은 상쾌한 기분으로 깨어났다. 보통 낮잠을 자고 나면 느껴지는 두통조차도 없었다. 몸이 살짝 쑤시기는 했지만 오히려 개운한 느낌이었다. 인생은 살만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심지어 특별 이용권을 내주게 한 스페호프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방 안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베르닌은 램프 스위치를 켰고 시계를 보았다. 5시 반이 다 되어 있었다. 그는 퍼뜩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옆 침대는 오전과 마찬가지로 비어 있었고 시트도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왕재수가 들어온 기색이 없었다. 산책하고 와서 카페에 갔나 싶어 내려가 보았다. 하지만 카페에도 식당에도, 체력 단련실에도, 마사지실에도 왕재수는 없었다. 카운터로 내려가서 류바에게 혹시 왕재수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느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 아뇨, 아까 산책하러 나간 후에 안 들어왔어요. 안 그래도 얼굴 보고 퇴근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 오늘 밤에 기차 타고 모스크바 놀러 가기로 했거든요. ”
“ 안 들어왔다고요? 캄캄해지는데... ”
걱정이 된 베르닌은 패딩을 입고 손전등을 챙긴 후 밖으로 나가 보았다. 이미 해는 진 후였고 어스름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아주 맑은 날씨였는데...
“ 길 잃은 거 아니야? 큰일이네. 도시에서 온 애라 숲에서 날 저물면 길 못 찾을 텐데. ”
스멀거리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베르닌은 숲으로 가보았다. 아직은 푸르스름한 빛이 깔려 있었지만 곧 캄캄해질 게 뻔했다. 침엽수들과 자작나무들 사이로 좁은 산책로가 이어져 있었지만 인적은 없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점점 어두워져서 손전등을 켰다. 15분쯤 걸어서 꽤 안쪽으로 들어왔는데도 왕재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문득 겁이 났다.
“ 발이라도 헛디뎠나? 여기 웅덩이도 많은데 빠진 건 아니겠지? 아니면 안으로 들어가다가 완전히 길 잃은 걸지도 몰라. 북쪽으로 가면 개간도 덜 돼서 엄청 험한데... 큰일났네. 같이 갈 걸... ”
베르닌은 자신을 탓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깟 낮잠 두어 시간 자 보겠다고 가뜩이나 도시에서 온데다 깊은 숲이라면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를 혼자 내보내다니 자신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갈라진 얼음 사이로 풍덩 빠져서 물속으로 가라앉던 왕재수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등줄기가 서늘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어떡하지... 어떡해, 무슨 일 생겼으면 어쩌지... 나 때문이야. 어떡하지... ”
눈물을 글썽이며 베르닌은 손전등을 켜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왕재수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정신없이 뛰었다.
“ 야! 너 어디 있는 거야! 내 말 들려? 나야, 다닐! 들리면 소리 좀 쳐봐! ”
눈송이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습한 바람이 점점 차가워졌다. 아무래도 다시 눈보라가 몰아칠 모양이었다. 공포에 질린 베르닌은 그제서야 요양소로 돌아가 수색 인력을 요청할 생각이 들었다. 그때 멀리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니이일! ”
분명히 자신의 이름이었다. 왕재수의 목소리였다. 베르닌은 환청인가 의심했지만 목청껏 왕재수를 부르자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이 들려왔다. 베르닌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잠시 후 그의 시야에 왕재수가 들어왔다. 왕재수는 커다란 그루터기 위에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두 팔로 무릎을 꼭 껴안고 덜덜 떨고 있었다. 다행히 패딩은 입고 있었다. 모자까지 그대로 눌러쓰고 있었다. 베르닌은 안도와 함께 긴장이 탁 풀리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냅다 소리를 질렀다.
“ 야! 너 왜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만들어! 거기서 뭐하는 거야, 안 들어오고!! 지금 몇 신줄 알아? 해도 다 졌잖아! 왜 내 말 안 듣고! 길 잃은 줄 알았잖아! ”
“ 다닐... 흐흑... ”
“ 어... 왜 그래, 왜 울어? 너... 다친 거야? 그래서 못 일어나고 앉아 있는 거야? 응? ”
“ 어... 흐흑... 다닐... 엉엉... ”
왕재수는 고개를 들어서 그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뭔가에 소스라치게 놀란 듯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엉엉 울었다. 어스름 속에서도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는 게 보였다. 얼마나 몸을 떠는지 베르닌조차 몸이 떨려올 지경이었다.
“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어떻게 된 거야! 다친 거냐고! ”
“ 어흑... 아... 으어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베르닌은 공포와 함께 걱정이 치솟아서 급하게 왕재수 곁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2미터쯤 앞으로 왔을 때 왕재수가 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 안 돼! 가까이 오지 마! 그냥 거기 있어! ”
“ 왜 그러는 거야! 대체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왜 말을 못해! 너 혹시... ”
순간 온갖 나쁜 종류의 일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바냐 투레츠키의 얼굴이라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 그 자식, 그 나쁜 자식이 그런 거야? 여기 왔었어? 투레츠키, 그 자식이 나쁜 짓 한 거냐고! 겁내지 말고 말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
흐느껴 울던 왕재수가 그 와중에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 바냐는 왜... 무슨 소리야... 어헝... 앗,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잖아! 아악, 안 돼! 아악! ”
왕재수가 다급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일어서지도 못하고 두 손을 뻗어 마구 흔들며 베르닌에게 저리 가라고 난리를 쳤다. 그 와중에 몸이 크게 휘청했지만 악착같이 그루터기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베르닌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왕재수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려고 했다.
“ 다닐, 안 돼! 큰일 나! 거기... 으윽, 으.... 무서운 거... 악! ”
“ 뭐야,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거야! 대체 뭐냐고! ”
“ 배, 뱀..... ”
왕재수는 힘겹게 그 단어를 내뱉더니 하얗게 질려서 두 손으로 다시 얼굴을 가렸다. 금방이라도 기절해 뒤로 넘어질 것 같았다. 베르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루터기 바로 아래에 울긋불긋하고 기다란 뭔가가 보였다. 손전등을 비춰보자 얼룩덜룩하고 커다란 뱀이 도사리고 있었다. 베르닌도 순간 깜짝 놀랐지만 전등을 샅샅이 비춰도 뱀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왕재수가 비명을 지르며 베르닌을 떠미는 시늉을 했다.
“ 안 돼, 오지 마... 물어... 뱀이 물어... 너 물려... 으흑... 안 돼애애! ”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는 왕재수를 무시하고 베르닌은 손전등을 바짝 들이댔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 야, 진정해. 괜찮아. 이거 뱀 아니야. ”
“ 뭐가 아니야... 뱀인데... 거기 그렇게 딱 똬리 틀고 앉아서 나 막 째려보면서... 조금만 움직이면 물려고... 으흑... ”
“ 이거 뱀이 허물 벗어놓고 간 거야. 진짜 뱀 아니야. 괜찮아. ”
“ 아니야, 뱀 맞아! 막 기다랗고 미끈미끈하고 징그럽고... 흐아악! ”
반신반의하며 그루터기 아래를 힐끗 쳐다 본 왕재수는 손전등 불빛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뱀의 형체를 보고 끔찍하게 비명을 질렀다.
“ 아니라니까! 너 수업 시간에 안 배웠냐? 뱀 허물 벗잖아. 허물 뭔지 몰라? 껍질. 이거 그거라고! 그리고 지금 이렇게 추운데 뱀이 어떻게 나오니. 뱀은 겨울잠 잔단 말이야. 그루터기 밑에 허물 벗어놓고 간 거네.
베르닌은 근처에 뒹굴고 있는 나뭇가지를 주웠고 그것으로 뱀 허물을 집어서 멀리멀리 안 보이는 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왕재수는 베르닌이 나뭇가지로 껍질을 건드리는 순간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숨이 넘어가는 듯한 신음을 내뱉었고 그대로 기절해서 그루터기 뒤로 굴러 떨어졌다. 허물을 처리한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에게 갔다. 다행히 눈 더미 위로 떨어져서 다치지는 않았다. 베르닌이 어깨를 감싸서 일으키자 왕재수는 뱀이라도 와서 공격한 줄 알았는지 비명을 지르며 거세게 몸부림쳤다.
“ 으아악!!! ”
“ 야, 정신 차려! 나야. 이제 그거 없어. 내가 치워버렸어. ”
“ 뱀 갔어? ”
“ 뱀 아니라니까! 껍질이라고 몇 번을 말해! 어휴, 이 바보 멍충이. 어떻게 살아 있는 뱀하고 그냥 껍데기도 구분 못 하냐! ”
“ 정말 뱀 아니었어? 정말 껍질이었어? ”
“ 그래! ”
“ 왜... 왜 여기 껍질 벗고 간 건데... 어헝... 뱀은 왜 그러는 건데! 이해가 안 돼... 뱀 싫어... 징그러워... 미워... 흐흑... 시골... ”
“ 뱀이 무슨 죄야! 뱀은 원래 숲에 살면서 때가 되면 껍데기 벗고 때가 되면 겨울잠 자러 가는 짐승이라고! 왜 애꿎은 뱀을 모함하냐! ”
“ 뱀은... 뱀은... 너무 징그럽고... 우욱... ”
왕재수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다시 흐느껴 울었다. 너무 놀라고 얼이 빠져서 그런 것 같았다. 얼굴은 하얗고 입술은 파랬다.
“ 흐흑... 나 진짜 뱀인 줄 알았어... 산책 마치고 막 돌아오고 있었는데... 그루터기에 걸려 넘어질 뻔 했는데 딱 보니까 눈앞에 뱀이 있잖아. 너무 무서웠어... 꼼짝도 못하고... ”
“ 옆으로 돌아서 왔으면 됐잖아. ”
“ 아니야... 옛날에 본 영화에서 독사가... 막 똬리 틀고 혀를 날름날름 하면서 째려보고 있다가 사람이 살짝 움직이니까 전광석화처럼 휘리릭 달려들어서 송곳니로 확 물었어... 그 사람 독 퍼져서 그 자리에서 막 소리 지르다 죽었어... 으흑... 뱀... 너무 무서워. 징그러워... 낼름낼름... ”
“ 하긴 너 도시에서 왔으니까 뱀 제대로 본 적 없었겠구나. 바보야, 아까 그거 독사도 아니야. 하나도 안 위험한 뱀인데. 벌목공들은 막 목에 걸고 다니고 먹이도 주고 그래. 보면 재수 좋다고. ”
“ 뱀이 어떻게 재수가 좋아... 무서워... ”
“ 저 뱀이 나오면 나무가 잘 자라고 홍수도 안 난대. 행운이래. 그러니까 너도 올해 재수 좋을 거야. ”
베르닌은 조금이라도 왕재수를 진정시키려고 잽싸게 덧붙였다.
“ 뱀 봤으니까 올해 레닌그라드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너 새해 운 좋아지라고 뱀이 껍질 놔두고 간 건데 왜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야. ”
“ 그런 거야? 정말 나 시골에서 나갈 수 있어? 그러라고 뱀이 두고 간 거야? ”
“ 그렇다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 캄캄해졌잖아. 눈도 오고. 빨리 가서 저녁 먹자. ”
“ 으응... ”
왕재수가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났다. 하지만 너무 놀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추운데 너무 오랫동안 그루터기 위에 웅크리고 있어서 그런 건지 무릎이 풀리면서 다시 주저앉았다. 눈발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할 수 없이 왕재수의 앞으로 가서 등을 들이댔다.
“ 야, 업혀. 가자. ”
“ 싫어... 나 일어날 수 있어. 내가 걸어갈 거야. ”
“ 지금 못 일어나잖아. 여기 얼마나 그러고 있었어? ”
“ 모르겠어... 해 지기 전부터... ”
“ 에휴... 두 시간은 그러고 있었던 거네. 몸이 얼어서 그런 거야. 일단 업혀. 가다가 괜찮아지면 걸어가. ”
왕재수는 두어 번 일어나보려다가 포기하고 베르닌의 등에 찰싹 업혔다. 평소와는 달리 몸이 아주 뻣뻣했다.
“ 진짜 놀랐나보구나. 참 이해가 안 된다니까. 귀신도 안 무서워하면서 왜 벌레랑 뱀 같은 건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
“ 몰라. 보기만 하면 몸이 안 움직여. 너무 무서워. 으흑... 시골... ”
“ 네가 자꾸 시골 타령하니까 자꾸 그런 게 나타나는 거야! ”
“ 아까는 나 재수 좋으라고, 시골에서 빠져나가라고 뱀이 껍질 두고 갔다더니 왜 지금은 반대로 말해? ”
“ 어휴... 너 재수 좋으라고 뱀이 껍질 두고 간 거 맞아! 네가 맨날 시골 싫고 무섭고 운운하니까 뱀도 지겨웠겠지! 그래서 이거 보고 빨리 그 잘난 레닌그라드인지 나발인지로 꺼지라고 두고 간 거야! ”
“ 둘러대는 것도 되게 못해. 책상물림... ”
“ 시끄러워! 배고파 죽겠네. 빨리 걸어갈 거니까 꽉 잡고 있어. ”
“ 나 안 무거워? ”
“ 안 무거워! 콩알만한 게 삐쩍 말랐잖아! 뭐가 무거워! 그때 아프고 나서 뼈만 남았잖아! ”
“ 이렇게 큰 콩알이 어딨어! 나 지난 주랑 이번 주에 열심히 운동해서 다시 살 좀 찌운 건데... 로만이 좋아하는 만큼은 아직 아니지만 엉덩이도 탱글탱글하게... ”
“ 제발 그쪽 얘기는 하지 말자! ”
* * *
숲을 거의 빠져나왔을 때 왕재수가 이제 걸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베르닌은 그를 내려주었다. 왕재수는 아직 좀 비틀거렸지만 팔을 잡아주자 점점 정상으로 돌아왔다. 막상 진정되자 부끄러웠는지 베르닌에게 머뭇거리며 뱀 껍질 얘기는 보고서에 쓰지 말라고 했다.
“ 웬일이냐 너? 지금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
“ 아니, 그게... 그런 것까지 쓸 거야? 이 KGB 앞잡이... ”
“ 부탁하면서 자꾸 욕할 거야? 그럼 써야지. 자세하게... 울었다는 거랑 나한테 업혀 온 것도 쓸 거야! 국장이 되게 좋아하겠다. ”
“ 안 돼... 쓰지 마. 그런 얘기 새어나가면 극장 애들 나 무시하고 말 안 듣는단 말이야. 간신히 말 좀 통하게 됐는데. 제발... ”
“ 넌 극장에서 체면 세우는 게 제일 중요하냐? ”
“ 체면 때문이 아니야! 극장이 총체적으로 엉망이라고 했잖아. 그나마 지금 할 수 있는 건 애들 실력 조금이라도 올려놓는 건데 난 걔들보다 나이도 어리고 딴 데서 온데다 심지어 낙하산이라면서 처음에 엄청 말 안 들었단 말이야. 그나마 내가 천재라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난 바지감독으로 전락했을 거라고! 내가 왜 로만이랑 사귀는 거 극장에서 티 안 내는데... 그러니까 뱀 껍질 얘기 하지 마, 응? ”
왕재수가 그렇게 정색을 하면서 얘기하는 게 거의 처음이었으므로 베르닌은 조금 놀랐고 감명을 받았다.
“ 어, 알았어. 얘기 안 할게. 근데 그거랑 바이올린 아저씨랑 사귀는 거 티 안 내는 건 무슨 관곈데? ”
“ 나 여태껏 극장에서는 한 번도 누구 사귄 적 없었단 말이야. 윗사람한테 특혜 받는다고 오해받을까봐. 근데 심지어 감독 돼서 예술가랑 사귀면 그 사람한테 특혜 준다고 반대로 오해받을 거 아냐. 나도 그렇게 되는 거 싫고 로만도 괜히 오해받으면 싫단 말이야. ”
“ 엥. 너 그런 생각도 할 줄 아는구나. 난 또 맨날 그 아저씨랑 응응응 하는 데 정신 팔려서 그런 상식적인 생각은 하지도 않는 줄 알았지. ”
“ 그건 상식이 아니고 내가 싫어서 그런 거야! 제일 싫어, 상식 어쩌고 하는 거. 공산당 독재 국가에서 상식이 어딨냐, 전부 지배를 위한 세뇌... ”
“ 밀고! 체포! 고문! ”
“ 압... ”
왕재수는 입을 다물었다. 요양소에 돌아오자 이미 7시가 다 되어 있었다. 류바는 코트를 입고 가방을 든 채 현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재수를 보더니 달려와서 두 팔로 와락 포옹하고 뺨에 뽀뽀를 했다.
“ 아유, 5분만 더 기다리고 가려고 했어요. 기차 놓칠까봐. 수색대라도 보내야 하나 싶었네요. 길 잃었던 거예요? ”
“ 어... 조금이요. ”
“ 잘 쉬다가 가세요! 다음에 또 와요. 미리 예약만 해주면 제가 계속 있으면서 잘 챙겨줄게요. 그럼 다음에 봐요! ”
류바가 차를 몰고 떠난 후 베르닌은 왕재수와 함께 식당으로 갔다.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은 지나 있었지만 류바가 부탁해 놓은 덕에 요리사가 뜨끈뜨끈한 버섯 수프와 쇠고기 커틀릿을 준비해 주었다. 커틀릿은 좀 기름진 편이었지만 아주 맛있었다. 추위에 떨고 뱀 껍질에 놀랐던 왕재수도 정신없이 마지막 한 점까지 흡입했다.
저녁을 먹은 후 베르닌은 소화를 좀 시킬까 하고 운동실로 내려가 역시 온천을 하러 온 할아버지들과 탁구를 좀 쳤다. 왕재수는 스트레칭을 하고 근력 운동을 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눈 깜짝하지도 않고 푸시업과 스쿼트를 연속으로 몇십 개 해내는 데 1차로 놀라고 그 야윈 애가 들어 올리는 아령의 무게에 2차로 놀랐다. 저런 녀석이 뱀 껍질을 보고 마비되고 바퀴벌레를 보고 기절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왕재수가 ‘오늘은 피곤하니까 이 정도로 몸만 살짝 풀고 들어가서 자야겠어’라고 했을 때 3차로 놀랐다. 그게 몸만 살짝 푼 거라니!!!
베르닌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왕재수는 이미 곯아떨어져 있었다. 거실에서 잘까 하다가 어차피 침대도 따로 떨어져 있고 왕재수가 아플 때 자기 집에 와서 잔 적도 있으므로 뭐 어떠냐 싶기도 했다. 침대로 기어들어가자 분명 낮잠을 잤는데도 금세 졸음이 쏟아졌다. 베르닌은 불을 끄고 1분 만에 잠이 들었다. 온천은 참 좋다고 생각하면서... 내일도 종일 온천을 오락가락하면서 쉬고 맛있는 걸 먹으며 또 쉴 생각을 하니 잠결에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 * *
새벽에 베르닌은 탕 하는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잠시 후 창 너머로 어디선가 불꽃이 반짝 일더니 다시 한 번 탕 소리가 들렸다. 놀란 베르닌은 후다닥 램프를 켰다. 제일 먼저 옆 침대를 보았다. 비어 있을까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다행히 비어 있지 않았다. 왕재수도 소리를 들은 듯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아 있었다. 멍하게 베르닌을 쳐다보면서 웅얼거렸다.
“ 이게 무슨 소리야? ”
“ 총 소리 같아. ”
“ 사냥하는 거야? 숲이잖아... ”
“ 아니야, 지금 사냥철 아니야. 나가봐야겠어. 너 여기 꼼짝 말고 있어. ”
“ 어딜 가려고? 왜 나가! ”
“ 총 소리 났잖아. 무슨 일인지 가봐야지. ”
“ 네가 왜... ”
“ 나 보안요원... 공무원... ”
“ 가지 마. 뭔지 모르지만... 가지 마. ”
왕재수가 아직도 잠이 덜 깬 채 중얼거렸다. 베르닌이 일어나서 옷을 입자 뭔가 심각한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무릎으로 기어와서 소매를 잡고 늘어졌다.
“ 너 총 없잖아. 가지 마. 여기 있어. ”
“ 아니야, 가봐야 돼. 여기 지금 노인 몇 명밖에 없잖아. ”
“ 경비 아저씨 있었어... ”
“ 경비원은 1층에 있었잖아. 우리 층에는 없단 말이야. 아무 일 아닐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좀 보고 올게. 문 잠그고 있어. ”
“ 아무 일 아니라면서 왜 문 잠그고 있으라 해. ”
“ 그래야 네가 공연히 무서워하지 않지! ”
“ 나는 네가 안 갔으면 좋겠어. ”
“ 그냥 복도로 나가서 살짝 보고만 올게. ”
“ 그치만 진짜 총 소리였으면 어떻게 하려고... ”
“ 괜찮아. 여기 골프채도 있네. 이거 들고 갔다 올게. ”
“ 아니야, 그러는 거 아니야. 가면 안 돼. ”
왕재수가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매달렸다. 감겨 있는 눈을 보니 아직도 비몽사몽인 것 같았다. 왕재수는 원래 새벽에 깨우면 절대 못 일어나는 타입이었다. 그 사이에 환청인지는 모르지만 바깥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나고 발소리도 나는 것 같아서 마음이 급해진 베르닌은 램프 불을 끄고 왕재수를 도로 침대로 밀어 눕히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 너 지금 꿈꾸는 거야. 아무 데도 안 가. 빨리 자라... ”
“ 어... 아니야. 너 가지 마. 그때도 내 말 안 들어서 강에 빠져놓고... ”
“ 응, 안 가. 너 꿈꾸는 거야. 얼른 자. ”
왕재수가 도로 잠드는 것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골프채를 휘어잡고 살며시 나갔다. 문을 닫은 후 복도로 살금살금 발걸음을 내디뎠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벽에 달린 작은 램프만 깜박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잘못 들었든지 아니면 밀렵꾼이 숲에서 사냥을 하는 소리였던 게 분명했다. 혹시나 해서 그는 직각으로 방향을 꺾어 다른 쪽 복도 끝까지 가보았다. 비어 있었다. 다른 객실 문도 모두 닫혀 있었다. 다행이다 싶어서 그는 몸을 돌렸다.
그때 그는 희미하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왼쪽 목덜미 쪽으로 차디찬 바람이 불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 바람이라니... 대체 어디서... ”
그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복도 왼쪽에는 창문들이 있었다. 그리고 창문 하나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간밤에 내린 눈이 창틀에 쌓여 있었다. 그리고 거기 손자국과 발자국이 움푹 패여 있었다. 흠칫 놀라 복도 바닥을 찬찬히 살폈다. 발자국이 이어지고 있었다. 눈 녹은 물이 고여 있었다. 잠시 베르닌은 그게 자기 발자국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슬리퍼는 바짝 말라 있었다.
‘ 누가 바깥에서 들어온 거야... 창문을 넘어 왔어. 하지만 누가! ’
그때 복도 저편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아아악! ”
그 목소리는 낯익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숲에서 들었던 끔찍하고 다급한 비명 소리였다. 베르닌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화들짝 놀랐고 발을 구르며 복도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 미셴카! 미하일! ”
목청이 터져라 왕재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베르닌은 미친 듯이 뛰었다. 방문을 밀어붙였다. 잠겨 있었다. 분명히 그는 문을 잠근 적이 없었다. 왕재수는 그때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 야! 내 말 들려? 대답해! 미하일! 미하일!!!! ”
대답이 없었다. 적막뿐이었다. 베르닌은 발을 굴렀다. 십 미터 쯤 뒤로 물러났다. 전속력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방문을 들이받았다. 문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열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들이받았다. 쾅 하고 문이 열렸다. 그는 옆으로 고꾸라지며 쿠당탕 넘어졌다. 하지만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베르닌은 정신없이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손을 휘저어 스위치를 찾으려고 애쓰면서 그는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 미하일! 미하이이일! ”
손에 스위치가 닿았다. 막 스위치를 찰칵 하고 올리려고 했을 때 등 뒤에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서는 순간 뭔가 무거운 것이 머리를 내리쳤다. 베르닌은 비틀거렸지만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고함을 지르려고 했을 때 다시 머리에 둔중한 타격이 느껴졌다. 그는 입을 벌렸고 숨을 몰아쉬었고 한 발짝 나아갔다. 그리고 암흑이 내리덮였다.
FIN
2015.3.2 ~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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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는 14편에서..
특권층이 이용하는 요양소는 실제로 소련 시절에 많았다. 인민이 이용하는 요양소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용권을 받아서 요양소에 가는데, 이렇게 온천과 스파가 있는 곳도 있고 치료를 받는 곳도 있다. 당시 특권계층(노멘클라투라), 당 간부, 고위층 등이 이용하는 요양소는 물론 더 호화스러웠다.
베르닌과 왕재수가 간 온천도 아주 호화스러운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준급 시설은 갖춘 곳이다. 이 13편을 쓸 때 카를로비 바리의 온천에 갔던 것을 좀 떠올리면서 썼다. 물론 같지는 않지만. 블로그 내에서 '카를로비 바리'로 검색하면 그 동네 포스팅들을 많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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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 등으로 식료품 공급이 중단되고 품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나도 옛날에 러시아에 있을 때 겪은 일이다. 그땐 뭣때문인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동네 전체에서 양파를 구할 수가 없었다. 평소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양파가 막상 구할 수 없게 되자 왜 이렇게 쓸 데가 많은지... 모든 음식에 양파가 들어가는 거였다!!! 그래서 엄청 고생하고, 엄청 비싸게 주고 양파를 샀는데 나중에 다시 제 가격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소련 시절엔 원래 식료품이나 물자가 더 귀했고 줄 서서 구매를 해야 했으니 더 피곤했을 듯하다. 물론 이것도 지역차가 있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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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인 문제'(쩨흐니체스까야 쁘라블레마, 또는 쩨흐니체스까야 쁘리치나)로 휴무라는 문구는 러시아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문구이다. 보통 예고 없이 문을 닫거나 뭔가가 작동이 안되거나 담당자가 없을때 써먹는 만능 문구임.. (이 문구 너무너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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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바가 처음에 10시부터 접수니까 안된다고 꼬장부리는 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러시아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인데 소련 시절엔 공산주의/사회주의 체제라 더욱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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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서무 에피소드들은 한 편 당 완결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번 13편은 좀 다르게 끝냈다. 그러니 뒷이야기는 14편을 봐야 한다. 그 이야기는 다음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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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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