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 토요일 밤 : 쉬었음, 필기체 해독불가, 남자가 되고 싶다 fragments2026. 10. 10. 22:12

쉬면서 보낸 하루. 오늘까지 매우 아픈 날이어서 거의 녹은 치즈 모드였다. 늦게 잠들고 아침 일찍 (아파서) 깼을 때 빈속에 먹어도 비교적 나은 타이레놀을 두 알 먹고 다시 잤다. 그리고는 낮과 저녁에 덱시부프로펜. 그런데 잠자리에 들때쯤 또 약효가 떨어질 것만 같음. 여름부터는 컨디션이 좋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던 것 같다. 병원에도 너무 많이 가고. 테이블에 쌓여있는 약봉지도 엄청 많음.
일린의 어머니가 엽서를 보내주셨다. 무려 일리야 레핀 그림이 인쇄된 엽서. 레핀을 좋아하시는구나... 그러면 나는 브루벨 엽서를 보내드려야 하나. 그런데 필기체로 쓰셔서 해독이 어렵다 흐흑... 80%밖에 해독 못함. 문장 하나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음. 무슨 단어인지도 모르겠고... 동사인지 명사인지도 모르겠고 전치사 k만 알아보겠음. 어쩌면 덴마크의 지명이나 고유명사를 적어놓으신 건지도 몰라. 일린에게 털어놓았더니 너무 웃어서 공연히 말했다 싶음. 일린이 '나도 러시아어 필기체 못 읽어. 엄마는 나한테는 러시아어로 이런 거 써주시지도 않아. 꼭 필요할 땐 인쇄체로 써주셔' 라고 말함. 아니, 해프 바이킹 해프 러시안인 아들내미도 저모양인데 어머님, 왜 이리 저를 과대평가하신 거에요 ㅋㅋ 하여튼 생각지 않은 엽서에 감동. 답장을 보내드려야 할 것 같은데, 내가 인쇄체로 적어서 보내드리면 실망하시려나 ㅎㅎㅎ 근데 나 그래도 러시아어 전공했는데 필기체도 못 읽는다는 사실에 갑자기 현타가 좀 온다. 하긴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에도, 러시아에 있을 때도 난 항상 인쇄체를 썼어 ㅎㅎㅎ
에릭도 오늘 전화를 해왔다. 아픈 건 좀 나아졌느냐고 물어서 감기는 거의 다 나았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석증이 도진 건 아니지만 아직도 잔어지럼증도 조금씩 있고 심지어 지금 붉은 군대의 여파로 매우 괴롭다고 말해주었다. 에릭이 '난 정말 평생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거 하나는 정말 싫을 거 같다, 꼬박꼬박 출혈...'이라고 말해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백배는 더 싫을 거다'라고 대꾸해주었다. 정말이지 얘랑 나랑 바뀌어서 태어났으면 좋았을거 같음. 난 키 크고 덩치 크고 힘이 엄청 센 남자가 되고 싶단 말이야... 얼마나 좋을까, 크고 힘센 남자로 사는 건... 흐흑... 내가 코펜하겐에서 그렇게 아파서 골골거렸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무거운 트렁크를 상단 라커에 꾸역꾸역 넣으려다 담이 더 심해졌기 때문이란 말이다.
코펜하겐에 도착해서 뻗었던 첫날 저녁에 숙소 리셉션의 그 싸가지없었던 애송이를 실컷 욕해준 후 에릭이 나한테 트렁크 무게를 물어봤었다. 내가 '20킬로...'라고 대꾸하자 한동안 정적 ㅋㅋ 그러다 황급히 '그래그래 너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20킬로 트렁크를 번쩍 들어서 라커에 넣을 수 있겠냐... 나한테 전화를 했어야지!'라고 둘러댐. 나 다 봤어, 네 표정. 그 황당해하는 표정... 흐흐흑... 하지만 20킬로짜리 28인치 트렁크를 잠깐 들어올리거나 끌고 가는 거랑 번쩍 들어서 라커 안에 깊숙하게 집어넣는 건 얘기가 완전히 다르단 말이야... 190에 100킬로 넘는 네가 뭘 알아 엉엉... 내가 삐치는 기색을 보이자 에릭이 급하게 '당연하지 너는 안되지. 손목이 젓가락같은데 저 트렁크 들다가 다 뿐질러졌겠다'라고 헛소리... 손목이 아니라 어깨가 나갔다고, 어깨랑 등이랑... 갑자기 다시 어깨가 쑤셔오는 느낌이 드네. 잠시 후 자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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