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4

« 2024/4 »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서무의 슬픔 28편은 27편 밀사 베르닌(http://tveye.tistory.com/3918)에서 곧장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27~28편은 일반적인 서무 에피소드들과는 성격이라든지 서술 방식이 좀 다른데 그래도 27편에는 유머를 많이 섞은 편이고(내 나름대로는 웃기게 쓴 거지만 안 웃겼을 수도...) 28편은 좀더 건조한 편이다. 사실 28편은 본편 우주에 훨씬 가까운 편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본편에서도 본격적인 이쪽 바닥 얘기를 쓴 적은 거의 없으므로 그냥 놀이터를 좀더 확장해서 놀았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하여튼 28편.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의 브루벨 그림 앞에서 눈 색깔 다른 남자와 마주친 후 겁에 질려 달아나던 베르닌은 해맑게 웃던 법학과 후배 일류샤와 마주친 후 정신을 잃고.. 과연 그의 운명은!!!

 

 

 

** 중간에 나오는 일류셰츠카 란 호칭 역시 일류샤와 마찬가지로 일리야의 애칭이다.

** 9밀리 마카로프는 27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소련제 권총이다.

** 루뱐카는 예전에 몇번 얘기했지만 KGB 본부에 대한 속칭이다.

** 삼보는 러시아 전통 무술이다. 유도랑 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스페호프 국장은 베르닌을 지하 5호실로 호출, 밀서를 전달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겨 모스크바로 급파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8

 

 

 

 

서무의 슬픔

-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 별장 -

 

 

 

 

 

 

베르닌은 서너 차례 정신이 들었다가 나갔다가를 반복했다. 몸이 계속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울렁거려서 토할 것 같았지만 머리가 너무 아파서 다시 정신을 잃었다. 아마 완전히 정신을 잃지는 않은 모양인지 어렴풋하게나마 밝은 빛살이 오른쪽 뺨과 관자놀이를 계속 찔러대는 듯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암흑이 내리덮였고 잠시 후 다시 밝아졌다. 몽롱한 상태에서도 베르닌은 거의 기계적으로 생각했다.

 

 

‘ 터널을 지나쳤나보다... ’

 

 

그때 팔과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뒤틀리는 듯이 아팠다. 아마 누군가가 그의 사지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버둥거리며 반항하려고 했지만 쾌활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 그냥 자는 게 나을 걸. 또 맞고 싶지는 않을 텐데. ”

 

 

이상하게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누군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속이 울렁거리면서 햄과 오이 샌드위치의 맛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굉장히 기분이 나빴고 버럭 화를 내고 싶어졌지만 곧 머리가 띵해지면서 깊고 무거운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치솟는 오기로 ‘자라고 한다고 잘 것 같냐!’ 하면서 마구 소리를 질러주고 싶었지만 물론 입을 열기도 전에 완전히 잠에 빠져버렸다.

 

 

 

*    *    *

 

 

 

 

베르닌은 엄청난 숙취를 느끼며 깨어났다.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깨질 것 같은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얻어맞았던 관자놀이가 쿡쿡 쑤셨지만 이 숙취는 맞아서 느껴지는 통증과는 또 달랐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입 안에는 솜을 물고 있는 것 같았고 손발은 축 처져 있었다.

 

 

잠시 베르닌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검은 숲의 온천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여자 친구를 찾아왔던 알릭이 오해로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을 때.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완전히 무기력해진 느낌도 아니었고 온몸이 축 처지는 느낌도 아니었다. 그냥 두들겨 맞아서 멍해졌을 뿐이었다.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차가운 공포가 스멀거렸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기억났다. 스페호프. 5호실. 비행기. 기숙사. 공동욕실. 부엌. 샌드위치. 빵집. 공원. 비둘기. 빵 봉지. 유모차를 끌고 온 여자. 미술관. 그림...

 

 

“ 그만 일어나지 그래. 깬지 10분은 넘었을 텐데. ”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매우 기분이 나빴지만 자기도 모르게 명령에 복종했다.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이 두 겹 세 겹으로 보였다. 보드카를 퍼마시고 취했을 때 같았다. 머릿속이 온통 뿌옇게 흐려져 있었고 두개골과 눈알, 콧구멍과 귓구멍까지 두터운 솜이 꽉꽉 들어차며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눈을 감고 있을 때는 그나마 나았는데 눈을 뜨자 진짜 토할 것 같았고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분명히 관자놀이 부근을 한 대 맞았을 뿐인데 왜 이렇게 괴로운지 알 수가 없었다. 숨이 턱턱 막혀서 절로 낮은 신음이 밀려나왔다.

 

 

미지의 남자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굉장히 안됐다는 듯한 말투로 친근하게 말했다.

 

 

“ 아, 너 이런 거 한 번도 안 맞아봤구나. 대충 몸무게 계산해서 쓴 건데 좀 셌나? 그분 말씀이 맞았군, 정말 초짜였어. 하긴 공항에서부터 따라갔는데도 전혀 모르던 거 보고 대충 눈치 채긴 했었어. 좋아, 내가 너그럽게 봐주지. 10분쯤 더 줄게. 근데 10분 지나면 진짜 깨울 거야. 별로 시간이 없거든. ”

 

 

베르닌은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지만 손은커녕 털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공항에서부터’라는 말이 귓가에 멍멍했지만 금세 머리가 무거워지면서 졸려왔기 때문에 아무래도 꿈인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10분인지 30분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얼마 후 베르닌은 다시 깨어났다. 이제는 두통도 한결 가시고 몸도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기운이 없을 뿐이었다. 눈을 뜨자 금색과 푸른색, 하얀색의 벽지가 보였다. 풍경화가 들어 있는 짙은 금색의 액자도 보였다. 예쁜 장식이 달린 화장대와 서랍장도 보였다. 놀랍도록 여성적이고 역겨울 정도로 부르주아적이며 반동적인 방이었다. 계속 꿈을 꾸고 있나 싶었는데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앞으로 의자 하나가 천천히 밀려왔다. 어떻게 의자가 혼자 움직여 왔을까, 유령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아직 꿈을 꾸는 걸까 하고 의문하고 있는데 호리호리한 남자 하나가 의자 뒤에서 나타났다. 짙은 금빛 곱슬머리에 살짝 들려 올라간 코, 주근깨가 흩뿌려진 얼굴의 젊은 남자였다. 베르닌은 입안으로 ‘일류샤’라고 중얼거렸지만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일류샤가 바짝 다가왔다. 손가락으로 그의 눈꺼풀을 벌려 보더니 손전등을 딸깍딸깍 하고 비춰보았다. 베르닌은 질끈 눈을 감았다. 너무나 눈이 부셨다. 일류샤는 만족한 듯 웃었다.

 

 

“ 깼군. 그래도 누구보단 낫네. 걘 진짜 약한 걸로 놔줘도 하루 종일 뻗어 있더라고. 나 처음 들어왔을 때 그거 모르고 걔한테 약 잘못 써서 게르만 알렉세예비치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몰라. 그렇게 화낼 거라면 애초부터 약을 놓지를 말 것이지. 나 같으면 그렇게 귀여워하는 애한테는 그런 짓 안할 텐데. 하긴 그러니까 내가 기껏 이런 일이나 하고 있겠지. ”

 

 

베르닌은 그가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망할 자식, 사기꾼, 폭행범, 개자식이라고 소리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꾹꾹 참았다. 무서웠다. 환한 미소와 쾌활한 표정을 내세워 그를 두들겨 패고 무슨 약물을 놓은 게 틀림없는 일류샤도 무서웠고 ‘그분’이라는 자도 무서웠다. 어렴풋이 미술관 전시실에서 마주친 남자가 생각났다. 그리고 자신의 임무도 생각났다. 공항에서부터 따라붙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밀서 전달은 실패한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냥 실패로 끝난 게 아니고 그가 붙잡혔다는 데 있었다.

 

‘ 국장이 그랬어, 위험한 임무라고. 그자들이 날 고문하게 된다면 난 모든 걸 발설하게 될 거라고. 그런데 난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이 자식은 그런 걸 모르겠지. 분명히 날 고문할 거야. 어쩌면 좋지... 무서워. ’

 

 

일류샤가 휘파람을 불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표트르 트뵤르도피로고프. 수학과. 어디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아마 너희 국장은 모스크바에서 손 뗀지 십년도 넘었을 거야. 딱 그때 수법이거든. 넌 까먹은 모양인데, 그 3동 말야. 거긴 대학원생들은 안 받아주거든. 누가 봐도 넌 학부생은 아니잖아. 그 방에 들어가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 그렇게 동안도 아니면서. 그리고 수학과라니. 거긴 인문계 기숙사야. 그러니까 너한테 그런 위장을 시켜서 그 방으로 보내면 안되는 거였지.

뭐 너도 문제야. 제대로 된 현장요원이라면 그때 알아차렸을 거야, 내가 법학과라고 했을 때. 뭔가 잘못됐다는 거 말야. 법대 애들 기숙사는 따로 있잖아. 나 진짜 너무 실망했어, 심지어 넌 법학과 나왔잖아. 그런데 전혀 날 의심하지 않았지. 스페호프가 왜 널 보냈을까? 심지어 난 그 순간 이게 뭔가 그자의 심오한 계략이 아닐까 의심하기까지 했다니까. 널 바람막이로 내세우고 다른 녀석을, 진짜 프로페셔널을 따로 보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아니면 네가 연기를 하고 있나 싶기도 했어. 또 이런 생각도 들었지. 애초부터 투서 따위는 없고 그냥 한바탕 쇼를 해서 게르만 알렉세예비치의 신경을 긁고 싶었던 걸까 하고. 순간 너무 헷갈려서 난 심지어 그분에게 전화를 하기까지 했어. 이런 내 의심을 그대로 보고하기까지 했다니까. 그러고 보면 나도 아직 멀었지.

그분이 그러더군. 스페호프는 한물 간 얼간이라서 그 정도까지 머리를 쓸 능력도 없다고. 그리고 넌 그냥 바보라고. 그러니까 그냥 따라가서 새한테 빵 던져주는 거나 보고 조용히 데려오라고 말이야. 나 솔직히 말해서 그래도 조금 의심했거든. 근데 역시 그분이 옳았어. 앞으로는 내 별 거 아닌 머리는 굴리지 않기로 했어. 그냥 그분이 말하는 대로 따를 거야. 그분은 사실 항상 옳지. 틀린 적이 없어. ”

 

 

베르닌은 일류샤가 연극 무대에서 독백을 하듯 계속해서 떠드는 동안 손과 발에 힘을 줘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나았다. 조금만 더 기운이 돌아오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딱딱한 1인용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워 있었는데 묶여 있지는 않았다. 곁눈질로 방 안을 둘러보니 문은 꽉 닫혀 있었지만 커튼이 젖혀진 창문이 있었다. 창밖을 보니 2층이나 3층쯤 되는 것 같았다. 방 안에 일류샤 외의 다른 사람은 없었다. 일류샤는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 거의 왕재수만큼 날씬했고 키는 더 작았다. 전화 부스 앞에서 주먹 한 방으로 자신을 기절시킨 것을 떠올려보면 분명 위협적인 기술을 연마한 현장요원일 테지만 저렇게 경계심 없이 계속 떠들고 있을 때 기습하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그는 저 밉살스러운 놈보다 키도 더 크고 체중도 월등할 테니까. 몸무게로 밀어붙여 쓰러뜨린 후 창문으로 뛰쳐나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 일류샤가 곁눈질로 그를 훑어보더니 동그란 갈색 눈에 살짝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면서 타이르듯 말했다.

 

 

“ 못써, 다닐. 그런 생각 하면. 창 밖에는 말이야, 아주 뾰족하게 깎아놓은 쇠말뚝이 잔뜩 박혀 있거든. 뛰어내리면 살아 있는 꼬치구이가 될 걸. 그리고 나 말인데, 삼보랑 유도 유단자야. 가뜩이나 몰골이 말이 아닌데 괜한데 힘쓰지 마. 나야 그냥 웃고 넘어가줄 수 있지만 그분은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시거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염둥이가 그러면 좀 재미있어하긴 하지. 그래도 눈물 쏙 빠지게 혼을 내주긴 하지만. 그러니까 그냥 얌전히 있어. 넌 별로 귀엽지도 않잖아. 그분이 화나시면 어쩌려고. 나도 그러면 뒷감당 못해. 그래도 학교 선배니까 좀 감싸주고 싶은데. 우리가 또 이런 건 끈끈하잖아. 모스크바! 법학과!

 

 

베르닌은 일류샤를 노려보았다. 입안까지 ‘법학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제 그런 사기는 집어치워!’ 라는 비명이 밀려나오는 것을 꾹꾹 참고 있는데 일류샤가 빙긋 웃었다.

 

 

“ 왜, 못 믿겠어? 나 법학과 맞아. 심지어 졸업 앨범까지 찾아봤는걸. 네 사진 있던데. 존경하는 다닐 베르닌 선배님. 성적도 좋았더라고. 그냥 모스크바에 남았으면 좋았을 텐데 왜 하필 그 촌구석으로 돌아가서. 하긴 넌 루뱐카 본부에서는 못 버텼을 것 같기도 하네. 너무 순진해서. 그래도 수도에 남았으면 좋았을걸. 그럼 내가 존경하는 선배를 두들겨 패고 주사를 놓지 않아도 됐을 거 아냐. 나랑 같이 일하고 있었을 텐데. ”

 

 

베르닌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루뱐카라고? 루뱐카에서 왔다고? 네가? ”

 

“ 아, 이제 말을 하는구나. 다행이야, 주사 때문에 벙어리라도 된 줄 알았네. 지금까지 그런 부작용은 없었지만 말이지. 그럼 내가 어디에서 왔겠니. 너랑 나는 말이야, 같은 기관 소속이라고. 나는 본부, 너는 시골 지국인 것만 다르지. 정말 못써, 다냐. 국가의 녹을 먹는 보안요원이 돼가지고 이런 배신행위나 저지르고 말이야. 그래도 넌 우리 학과 선배고 또 같은 밥그릇을 꿰차고 있으니까 내가 도와줄게. 있는 대로 다 털어놔. 그 봉투를 누가 줬는지, 내용이 뭔지, 누구를 옭아매려고 했던 건지. 그러면 곱게 돌려보내줄 수도 있을 거야. ”

 

 

베르닌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어제부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데다 얻어맞고 약물을 주입당하고 새파란 애송이에게 조롱과 협박을 당하다 보니 두려움과 함께 부아가 치밀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꼬마만큼은 죽도록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일류샤가 재킷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까맣고 반질반질한 권총을 꺼냈다. 아주 자연스럽게 총을 한 손으로 쥐더니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꼼지락거렸다. 베르닌은 숨이 턱에 닿았다.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일류샤는 윙크를 했다.

 

 

“ 아, 다냐. 이제 내 말이 먹히는 거야? 역시 총이 최고야. 그 다음은 칼. 주사는 즉각적인 효과가 안 나오더라고. 이거 낯익지 않아? 9밀리 마카로프. 네 주머니에서 나온 거지. 그래서 너희 국장이 얼간이라는 거야. 이건 일련번호가 있어. 본부에서 각 지부로 지급해준 현장요원용 무기라고. ‘난 가브릴로프 KGB에서 온 몸이오!’ 하고 선언하는 거랑 뭐가 달라. 근데 너 총 쏴본 적이나 있어? 넌 현장요원도 아니던데. 그냥 행정직이잖아. 아니면 스페호프가 요즘 자기 비밀요원으로 키우고 있는 거야? 아무리 봐도 총 잘 쏠 것 같지는 않아. 연수원에서도 사격 점수는 별로였던걸. 하지만 난 사정이 다르지. 난 쏠 줄 알아. 그것도 꽤 잘 쏘는 편이야. 그러니까 말해봐, 다닐. 솔직하게. 그 빵에 집어넣은 문서의 내용. 옭아매려는 대상. 지금. 나도 이제 농담할 기분이 아니거든. 조금 있으면 그분이 오실 거라서. 빨리 해치우는 게 서로 편하잖아. ”

 

 

일류샤가 권총을 들어 올리더니 찰칵 하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베르닌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총을 들이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베르닌은 관자놀이에 권총이 와 닿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었다. 총은 일류샤의 주머니 안에서 체온으로 데워져 있었을 텐데도 굉장히 차가웠다. 뱀이 와 닿는 느낌이었다. 비록 베르닌은 뱀을 만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그리고 뱀은 이렇게 딱딱하고 견고하지도 않겠지만. 이상하게도 검은 숲속 오솔길에서 왕재수가 뱀 껍질을 보고 그루터기로 기어 올라가 꼼짝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 그 자식도 이런 느낌이었던 건가봐... 뱀이랑 총이랑 같은 거였나 봐... 놀리지 말걸... ’

 

 

베르닌은 몸을 떨었다. 일류샤의 앳된 얼굴 너머로 언뜻언뜻 비치는 사악하고 차가운 표정과 조롱 섞인 말투가 무서웠다. 이 꼬마가 갑작스럽게 변덕을 부려 방아쇠를 당길지도 모른다는 비이성적인 공포가 덮쳐왔다. 두려움으로 손발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베르닌은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 난 진짜 아무 것도 몰라.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어. 내용은 전혀 몰라. ”

 

 

일류샤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미간에 주름이 잡히자 갑자기 앳된 느낌이 사라지면서 부쩍 나이 들어 보였다. 심지어 베르닌 자신보다 더. ‘정말 법학과 후배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KGB에서 될성부른 국립대생들에게 일찌감치 접근한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베르닌 자신은 재학 중에는 단 한 번도 그런 제안을 받아본 적이 없었지만. 그러니까 일류샤가 정말 법학과 학생일 수도 있었다. 역겹고 기분 나쁘지만 자신의 후배가 맞을지도 몰랐다. 물론 전혀 아닐 수도 있었다. 현장요원들은 온갖 훈련을 다 받는다고 들었다. 어쩌면 일류샤는 외모와는 달리 베테랑 요원일지도 몰랐다.

 

 

“ 아,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봉투가 있었던 건 인정하는 거네. 흑빵에 넣었지, 안 그래? 그 공원에서. 유모차 밀고 온 여자가 빵 봉지를 바꿔쳤지. 잡아뗄 필요 없어. 그 접선 현장은 내가 보고 있었거든. 사진도 찍었고. 보여줄까? ”

 

 

일류샤가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흐릿하긴 했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그가 사진에 나와 있었다. 벤치에 그와 유모차 밀고 온 여자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 사이에는 빵 봉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사진 속에서 그는 뻣뻣한 자세로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었다.

 

 

“ 여잔 그나마 너보다는 낫던데. 그래봤자 꼬리 다 남겼지만. 자, 다닐. 우린 다 알고 있어. 네가 어제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해서부터 지금까지 어디서 뭘 했는지. 너 요원 서약했잖아. 그럼 잘 알 텐데. 연방과 본부를 배신하는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 본부의 명령을 거부하면 안 된다는 것. 본부의 권위를 대변하는 요원의 심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것. ”

 

“ 그게 너야? 본부의 권위를 대변하는 요원이? ”

 

“ 왜, 날 못 믿어? ”

 

“ 믿으라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네가 루뱐카 소속 요원인지 아니면 적국의 스파이인지, 범법자인지 어떻게 알아. 넌 날 패서 기절시키고 이상한 약물까지 놨고 지금은 권총으로 위협하고 있잖아. 제대로 된 KGB 요원이라면 동료 요원에게 이런 식으로 폭행을 가하고 협박하지는 않아. 넌 내가 본부와 연방을 배신했다고 윽박질렀지만 난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요원 강령과 복무 지침에 나와 있어. 요원은 상부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고. 그리고 작전 수행 시 불필요한 정보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현장요원이 아니지만 공통 지침은 외고 있어. 난 지시에 복종했고 정보를 요구할 수 없었어. 정보 열람은 내 권한이 아니었어. 그래서 내용은 전혀 몰라. 그리고 난 너 안 믿어. 넌 KGB 요원이 아니야. ”

 

 

일류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눈썹은 여전히 치켜 올라간 채였다. 동그란 갈색 눈에 광채가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후 그는 쿡쿡 웃었다.

 

 

“ 어, 다닐. 나 지금 좀 감명 받았어. 그러니까 완전히 얼간이는 아니었구나. 손쓸 수 없는 책상물림이라고 생각했거든. 생각보다 말 잘하네. 겁먹은 것보다 열 받은 게 더 앞섰나보군. 그런데 말이야, 눈앞에 권총이 있을 땐 그런 건방진 얘긴 하는 게 아니야. 무려 모스크바 국립대 법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연방의 기둥인 KGB에 입사한 요원이 이렇게 자기 보호에 허술해서야.

그러니까 정보 열람은 네 권한이 아니라서 넌 충실하게 그 지침을 지켜서 봉투를 안 열어봤다는 거지. 상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고. 좋아, 믿어줄게. 그 상부라는 건 너희 국장이겠지. 너는 그 촌 동네 KGB 소속이니까. 그건 네가 불든 불지 않든 너무 당연한 얘기라서 말이야. 봉투에 든 걸 안 읽어봤다는 것도 좋아. 그랬다고 쳐. 그런데 이거 하나는 꽤 모욕적인 걸. 날 안 믿는다 이거지. 내가 본부 소속 요원이 아니라고. 확신해? ”

 

“ 나 네가 뭐하는 놈인지 몰라. 누가 보낸 놈인지도. 근데 KGB 요원은 아니야! 동료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요원이 어디 있어! 설령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이런 식으로 납치해서 이상한 방에 가둬놓고 심문하는 건 지침에 어긋나! ”

 

“ 그놈의 지침. 책상물림 맞군. 지겨워, 지침에 규정 타령. 법령은 더 그렇지. 하긴 그래서 내가 그 망할 놈의 법학을 때려치운 거지만. 이봐, 다닐. 나 네 후배 맞아. 절반만. 모스크바 국립대 법학과 다녔었지. 작년에 제적당했지만. 위에서는 졸업장을 받으라고 했지만 공부할 시간도 없고 너무 지루하더라고. 일이랑 병행하는 것도 귀찮았고. 그리고 KGB는... 음, 이렇게 말해두지. 명부에 정식으로 이름이 올라 있지는 않지만 임시요원으로 가끔 뛴다고. 아마 너 같은 책상물림은 여권과 요원증을 보여줘야 인정을 하겠지만 말이지. 미안하지만 그것까지는 안 되겠어. ”

 

그러니까 KGB 요원이 아닌 게 맞는 거네. 그럼 이건 불법이야. 당장 나 풀어줘. ”

 

 

베르닌은 자신이 왜 이렇게 당당하게 대들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마도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그리고 일류샤의 뻔뻔스러운 표정과 사악한 비웃음 섞인 말투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기 때문인 것 같았다. 자꾸만 법학과 후배라고 해서 더 화가 난 건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일류샤의 태도 어딘가에는 그에게 진짜 해는 끼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배어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분명 무서웠지만 이상하게도 완전히 무섭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건 베르닌 자신이 이제껏 ‘정말로’ 목숨의 위협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어느 정도로 위험한지 자각이 잘 안되기 때문인 건지도 몰랐다. 요원 연수 때 담당 교관은 그에게 사격이나 호신술도 별로지만 무엇보다도 현실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했었다. 현장요원이 아니라 행정직으로 간 게 다행이라고 했다.

 

 

일류샤가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소리가 났다. 베르닌은 놀라거나 소리를 지를 겨를도 없었다. 심지어 몸을 웅크리지도 못했다. 공포를 느낄 여유도 없었다. 그저 ‘아, 총을 쐈구나’ 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총성은 들리지 않았다. 관자놀이가 날아가지도 않았고 뇌수와 피가 터져 나오지도 않았다. 베르닌은 그대로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일류샤가 휘파람을 불며 웃음을 터뜨렸다.

 

 

“ 재미없어, 놀라지도 않고. 보통은 기절하거나 오줌 싸는데. 진짜 헷갈리게 만드네. 너무 얼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탄창 빼 놓은 거 알아차렸던 건지. 후자라면 생각보다 가능성 있을지도 몰라, 현장요원으로 전과하는 거. ”

 

 

물론 후자가 아니었다. 전자였다. 베르닌은 탄창이 없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심지어 9밀리 마카로프에 총알이 몇 발 들어가는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갑자기 베르닌은 뒤늦게 엄습한 공포로 전신이 부르르 떨려왔다. 속이 뒤틀리면서 토할 것 같았다.

 

 

‘ 저 개자식이 진짜로 방아쇠를 당겼어... 총알이 들어 있었다면 난 이미... ’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베르닌은 소스라쳤다. 일류샤는 테이블 쪽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베르닌을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 예상대로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

 

 

일류샤는 전화를 곧 끊었다. 그리고는 예의 그 해맑고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면서 베르닌에게 다가왔다. 권총은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군용 나이프를 꺼냈다. 예리한 칼날을 목에 슬며시 들이대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 다닐, 우리 장소 좀 옮길까? 이제 일어날 수 있는 거 알아. 걸을 수도 있겠지. 멀리 가지는 않을 거야. 그냥 방만 좀 옮기자고. 허튼 짓 하지 마. 아깐 장난친 거였지만 지금부터는 아니거든. ”

 

 

 

 

*    *    *

 

 

 

 

 

일류샤는 그를 개나 양을 모는 것처럼 끌고 갔다. 그렇다고 뒤에서 팔을 비틀어 붙잡거나 채찍질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옆에 바짝 붙어서 목에 칼날을 겨눈 채 복도로 나와 한발 한발 내딛게 했을 뿐이었다. 베르닌의 두 손은 묶여 있지 않았지만 그래봤자 별 소용도 없는 것이, 그 망할 자식이 무슨 약을 놨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무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릎도 후들거렸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목에 닿아 있는 칼 때문에 멈출 수도 없었다.

 

 

복도는 길게 뻗어 있었고 폭이 넓었다. 천정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바깥을 향해 나 있는 창문들에는 한결같이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꼭 박물관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베르닌은 다시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으로 돌아온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미술관에서 이렇게 사람을 가두고 폭행하고 심문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제국주의 시절의 귀족 별장일 가능성이 컸다. 얻어맞고 쓰러졌을 때 계속 몸이 흔들리던 느낌이 기억났다. 분명 차로 이동했을 것이다.

 

 

일류샤가 그의 어깨를 쿡 찌르더니 귓가에 대고 아주 낮고 조용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 벽에 붙어. 입 다물고. 한 마디라도 입 밖에 내면 찔러버릴 거야. ”

 

 

베르닌은 계속 침묵하고 있는 자신에게 왜 그런 쓸데없는 명령을 하느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물론 꾹 참았다. 그리고 일류샤가 시키는 대로 벽에 등을 기대고 바짝 붙었다. 일류샤도 그의 곁에 붙어 섰다. 대체 왜 그러나 했는데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오른쪽으로 구부러져 있는 복도 저편에서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니, 사람들이었다. 곡선의 복도와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스며들어오는 빛 때문에 기괴하게 늘어나고 왜곡되어 보이는 그림자 셋이 나타났다. 아주 잠깐 베르닌은 샴쌍둥이를 생각했다. 둘이 아니라 셋이었지만.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형체와 색채가 드러났다. 왜곡된 실루엣은 사라지고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 되었다. 그때 베르닌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마 일류샤가 나머지 한 손으로 그의 입을 꽉 틀어막지 않았다면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남자 세 명이었다. 둘은 회색 양복 차림이었는데 꼭 거인 운동선수들에게 몸에 맞지 않는 정장을 입혀 놓은 것 같았다. 얼굴은 아주 무표정한데다 아무런 특색이 없어서 돌아서면 잊어버릴 것 같았다. 꼭 쌍둥이처럼 비슷했다. 그나마 하나는 금발이었고 하나는 갈색 머리라서 구분이 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한가운데에 왕재수가 있었다. 베르닌은 언제 어디서라도 그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돌덩이 로봇처럼 밋밋한 얼굴의 두 회색 거인 사이에서 온통 하얗고 새까맣고 붉고 선명한 왕재수는 흰 눈 위에 뿌려진 핏자국처럼 눈에 띄었다.

 

 

하지만 베르닌을 소스라치게 하고 비명을 지르고 싶게 만든 것은 왕재수가 거기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왕재수는 두툼하고 새까만 천으로 두 눈이 가려진 채 두 남자에게 양쪽 팔을 붙들려 걷고 있었다. 심지어 자기 발로 걷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양쪽의 남자들에게 절반쯤 몸이 들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발이 바닥을 스쳤다가 허공에 떴다가를 반복하는 것을 보니 꼭 연습실에서 왕재수가 보여줬던 신작 안무 같았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 동작은 전혀 우아하지도 않았고 박자에 정확히 들어맞지도 않았다. 질질 끌려가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베르닌과 일류샤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베르닌은 눈알이 빠져라 왕재수 쪽을 응시했다. 아주 가까이에서 보자 심장이 철렁했다. 왕재수는 창백하게 질린 채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는데 짧고 불규칙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거구의 남자들에게 붙들려 있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몸놀림이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다. 베르닌은 현기증을 느끼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 약을 맞았나봐... 나처럼... ’

 

 

그들이 베르닌의 곁을 지나쳐 갔다. 회색 정장의 두 남자는 베르닌과 일류샤를 보고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류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베르닌을 벽에 밀어붙이고 입을 틀어막은 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왕재수가 넘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바닥에 쓰러진 건 아니었다. 두 남자에게 양쪽 팔이 꽉 붙들려 있었으니까. 그저 머리를 젖히면서 서커스 그네를 타는 것처럼 앞뒤로 크게 흔들렸을 뿐이었다. 휘청거리면서 왕재수가 아주 낮고 뭉개진 신음을 토해냈다. 몸을 앞으로 반쯤 접으며 무릎을 꼬았다. 베르닌은 반년이 넘도록 왕재수를 곁에서 돌봐줬기 때문에 그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토할 것 같은 모양이었다. 갈색 머리 남자가 짝패에게 눈짓을 하더니 왕재수의 팔을 놔주었다. 왕재수가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몹시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토했다. 두 손으로 가슴과 배를 감싼 채 몸을 꺾으면서 굉장히 힘들게 캑캑거렸다. 나오는 거라곤 타액에 가까운 액체뿐이었는데 그나마도 제대로 뱉어내지도 못했다. 구역질이 좀 가라앉은 후에도 왕재수는 바닥에 이마를 댄 채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갈색 머리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그의 허리를 안아서 일으켰다.

 

 

“ 가지가지 하는군. 이제 그만 일어나. 시간 없어. ”

 

 

왕재수가 몸부림쳤다. 발음을 반쯤 뭉개면서 목쉰 음성으로 소리쳤다.

 

 

“ 나 안 갈 거야! 안 가! ”

 

“ 안 가긴 왜 안 가. 정신 나간 거 아냐? 지금 가야 돼. 그래야 시간에 맞게 갈 수 있어. 너 좋으라고 가는 거잖아. ”

 

싫어, 안 가!

 

 

왕재수가 남자를 떠밀면서 옆으로 굴렀다. 두 손으로 안대를 잡아채 떼어 내려고 했다. 갈색 머리 남자가 잽싸게 왕재수의 팔을 낚아채더니 뒤로 세게 비틀었다. 왕재수가 낮게 비명을 질렀다. 금발 머리 남자가 가세했다. 뒤에서 왕재수를 마치 포옹을 하듯 두 팔로 휘감더니 꼼짝달싹 못하게 꽉 조였다. 왕재수가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면서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고 흐느꼈다. 베르닌은 속이 왈칵 뒤틀려왔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목에 닿아 있는 칼날과 입을 틀어막은 손도 잊고 그대로 몸을 솟구쳐 그 더러운 자들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일류샤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날쌨다. 순식간에 베르닌의 어깨와 허리를 낚아채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칼자루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너무 아파서 별이 번쩍했다. 일류샤는 베르닌의 몸 위에 올라타서 두 다리로 목과 어깨를 꽉 조이면서 다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아주 낮고 싸늘한 목소리로 귓가에 대고 말했다.

 

 

“ 움직이지 마. 개죽음 아니면 불구야. ”

 

 

베르닌은 몸부림치려고 했다. 하지만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류샤가 센 건지 아니면 약물 때문에 자신의 몸이 이상한 건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솟구쳐 튀어나가 저 망할 놈의 악당들에게서 왕재수를 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왕재수는 기운이 다 빠진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 버둥거리거나 안 가겠다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금발 머리 남자가 팔에서 힘을 풀자 한쪽으로 몸을 축 늘어뜨렸다. 너무 세게 조여서인지 아니면 약 기운 때문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절한 것 같았다. 갈색 머리 남자가 혀를 차면서 동료를 질책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 곱게 모셔가라고 했는데 너 때문에 징계 받겠어. ”

 

“ 내 잘못이 아니야. 포마가 공항에서 제멋대로 주사 놔서 그래. 그 자식 이제 모가지야. 얜 약물 쓰면 안 되는데. ”

 

“ 그놈 신참이라 뭘 몰라서 그랬을 거야. 하여튼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가자. 이 자식 진짜 골치 아프네. 클리닉까진 30분밖에 안 걸리는데 그 동안 정신 좀 차려야 할 텐데. ”

 

 

그러더니 갈색 머리 남자가 일류샤 쪽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했다.

 

 

“ 일류셰츠카, 우리 꼬맹이 친구. 지금 이건 눈감아줬으면 좋겠는데. 너도 봤잖아, 얘가 먼저 시작한 거. ”

 

 

일류샤가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 아니, 먼저 시작한 건 너희들이지. 애초부터 놔주지 말았어야지. 뻔한 수법이잖아. 아픈 척하면서 도망치려는 거. 무시하고 그냥 데려갔어야지. ”

 

“ 아픈 척한 건 아니야. 이 자식 여기 도착했을 때부터 계속 토했거든. 진짜 아팠어. 게르만 알렉세예비치가 의사도 호출했었어. 그러니까 보고는 하지 마. 곱게 모셔다주고 올게. ”

 

“ 지금 그렇게 떠드는 동안 벌써 2분이 더 지났어. ”

 

 

갈색 머리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몸을 돌려서 걸어갔다. 금발 남자가 왕재수를 들쳐 업었다. 이제 왕재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은 여전히 가려져 있었다. 베르닌은 일류샤에게 깔리고 입이 막힌 채 무력하게 그 악당들이 왕재수를 데리고 복도를 지나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분노와 공포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물이 나왔다. 그놈들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일류샤의 목을 비틀고 싶었다. 그때 일류샤가 그를 놔주었다. 하지만 칼을 치우지는 않았다. 여전히 목에 칼을 들이댄 채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일어나. ”

 

 

베르닌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호흡을 하고 또 했다. 여전히 어지러웠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몸에 남아 있는 힘을 전부 손과 무릎에 모으고 또 모았다. 기회는 단 한번 뿐이라고 생각했다. 온몸으로 태클하듯 덮쳐서 깔아뭉개고 칼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 일류샤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고개를 저었다.

 

 

“ 그러지 마, 다닐. 진짜로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게르만 알렉세예비치도 그러지 말라고 했어. 이제 그만 가지. 말 잘 들으면 오후 비행기 탈 수 있을 거야. ”

 

헛소리 하지 마... 나쁜 놈들... 다 더러운 놈들이야! 쟬 어디로 데려가는 건데! 아픈 애란 말이야! 가브릴로프에 있는 내내 아팠어. 입원을 몇 번이나 했는데... 근데 약을 놓고... 술도 못 마시는 앤데. 감옥에서 그렇게 괴롭힌 것도 모자라서 또 끌고 와서 주사 놓고 때리고 기절시키고... 지금도, 지금도 더러운 짓 시키려고 데려가는 거잖아! 다 죽여 버릴 거야!

 

 

일류샤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린애처럼 동그란 갈색 눈에 검은 그림자가 내리덮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별로 좋은 말이 아닌데. 입 다무는 게 좋아, 다닐. 누가 들으면 오해할 테니까. 그 더러운 짓 운운 말이야. 봉투를 열어봤다고 생각할 거야. ”

 

“ 봉투는 무슨 봉투! 쟤한테 들었어! 베를린에서 누가 온다면서! 그래서 쟤 협박했잖아! 그놈한테 가라고 했다고... 지금 거기 보내는 거잖아! 용서 못해, 나쁜 자식들... 고발할 거야! 의회에 가서...

 

 

베르닌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을 때 일류샤가 그의 팔을 꽉 잡고 옆으로 꺾었다. 아팠다. 정말 아팠다. 아까 바닥에 쓰러뜨려 조였을 때보다 더 아팠다. 삼보와 유도 유단자라는 말이 맞았다. 그것도 굉장한 실력자였다. 팔과 어깨가 빠져 달아나는 것 같았다. 등뼈까지 부서지는 듯 아팠다. 비명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든 일류샤의 손에서 칼이라도 빼앗아보려고 버둥거리고 있는데 낮고 우렁차면서도 벨벳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거 참 재미있군. 드라마 배우처럼 구는 건 저 녀석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좋은 구경을 했어. 볼만큼 봤으니 그만 놔줘도 좋아, 일리야. 이제 이 친구와 얘기를 좀 해야겠어. ”

 

 

일류샤가 그를 놔주었다. 등 뒤에 있는 남자를 향해 정중하게 경례를 했다. 장난기도 없고 허세도 없었다. 베르닌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미술관 전시실에서 마주쳤던 남자를 보았다. 어딘가 매를 닮은 거대한 남자. 오른쪽 눈은 푸른색이고 왼쪽 눈은 갈색인 남자.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수차례 봤던 얼굴이었다. 갑작스럽게 베르닌은 그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 게르만 스비제르스키. 맞아. 그 사람이야... ’

 

 

남자가 여전히 벨벳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흠, 그러니까 자네가 다닐 베르닌이군. 아주 좋아, 다닐. ”

 

 

베르닌은 대체 뭐가 좋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긴 스페호프의 호출로 5호실에 갔을 때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으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   *   *

 

 

 

 

 

베르닌은 왕재수의 이른바 크레믈린 아저씨를 실제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정치계의 거물이자 잔혹하기로 소문난 인물. 일반인들에게 그는 권력의 최중심부인 정치국 위원이자 서기장의 최측근이며 단 한 번도 낙마해본 적이 없는 사람, 그러니까 숙청과 권모술수를 능수능란하게 섞어서 구사하는 정치가였고 반면 문화예술 쪽 조예가 깊어 그쪽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는 교양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보안위원회에서 근무하는 베르닌은 물론 다른 사실도 알았다.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KGB 해외 스파이 출신인데다 베를린 지국을 총괄했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런던 지국도 뒤에서 조종했다고 했다. 이미 공식적으로는 KGB에서 발을 뺐지만 그래도 실세였다. 본부의 안드로포프 국장에 대해서도 약점을 쥐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숙청과 암살이 전문 분야라고도 했다.

 

 

베르닌은 아직도 작년 가을에 스페호프가 모스크바에 불려가서 스비제르스키에게 질책을 당한 후 돌아와 분노를 터뜨리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왕재수가 했던 말도 어렴풋하게 기억났다. ‘그건 말이지, 너네 국장이 크라베츠 라인이라서 그래.’ 그리고 바로 어제 스페호프가 했던 말도. ‘스비제르스키는 완전히 여우에 호랑이거든. 그 작자는 현장 요원 출신에 해외 스파이 지국 총괄에 우리 보안위원회를 십몇 년 동안 주무르며 가지고 놀았던 인간이니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몰라.’

 

 

그제서야 베르닌은 명료하게 깨달았다.

 

 

‘ 호랑이. 국장은 호랑이가 연루된 일은 매사에 조심하는 게 좋다고 했어. 그 봉투... 고위직과 연관되어 있다고 했지. 그건 저 사람이었어... 국장은 저 사람을 옭아매려고 했던 거야. 하느님 맙소사, 내가 미쳤지... 하고많은 인간들 중에 하필이면... 난 죽은 목숨이야. 어떡하지... ’

 

 

베르닌은 왕재수가 크레믈린 아저씨에 대해 얘기를 할 때도 단 한 번도 그를 피와 살을 지닌 현실적인 인간으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크레믈린 아저씨란 일종의 환상적인 존재였다.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사악한 마법사나 괴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 무시무시하고 사악한 인물이 그와 같은 방에 있었다.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베르닌은 당장이라도 그가 자신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두려워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가 어떤 인간인지 몰랐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전시실에서 그와 마주친 순간부터 베르닌은 이해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맨 처음 깨어났던 방보다 더 작고 간소한 방에 와 있었다. 방 안에는 스비제르스키와 일류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류샤는 베르닌을 밀어 넣은 후 문가에 서 있었다. 자신의 주인이 나타나자 일류샤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지금껏 보여주었던 여유롭고 건들거리는 태도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근위병처럼 꼿꼿한 정자세로 서 있었다. 손에는 권총을 들고 있었지만 베르닌의 9밀리 마카로프는 아니었다. 자기 총인 모양이었다. 그는 베르닌과 스비제르스키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교묘하게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스비제르스키가 일류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일류샤가 나갔다. 소리도 없이 문이 닫혔다. 이제 방 안에는 그와 베르닌만이 남았다.

 

 

“ 좀 앉지 그러나, 다리가 후들거리는 모양이군. 일리야는 다 좋은데 약물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지. ”

 

 

베르닌은 멍하게 서 있었다. 뱀 앞의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스비제르스키가 어깨를 으쓱했다.

 

 

“ 그럼 내가 먼저 앉지. ”

 

 

스비제르스키가 창문을 등지고 있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베르닌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맞은편에 있는 기다란 소파 귀퉁이에 앉았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 다닐 베르닌. 가브릴로프 출신. 모스크바 국립대 법학과. 군필. 가브릴로프 KGB 지부 행정요원. 감시분석부 소속. 주무는 행정 서무. 그리고 정치범 감시 및 도청 분석. 독신. O형. 28세. 전과 없음. 특이 병력 없음. 이 정도가 서류 앞장에 기재된 내용이겠지. 틀렸거나 빼먹은 게 있나? ”

 

 

베르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스비제르스키가 가볍게 혀를 찼다.

 

 

“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지금 자넬 심문하는 게 아니야. 사실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지. 난 그저 자네와 잠깐 얘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야. 뭐 별 것도 아닌 얘기지. 끝나면 오후 비행기 시간에 맞춰서 보내줄 수도 있겠지.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으니 안심부터 시켜주겠네. 지금 제일 궁금한 질문을 하나 해봐. 뭐든지 대답해줄테니. ”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맹수가 거짓말을 하든 진실을 말하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베르닌은 몸이 떨려왔다. ‘정말 보내주실 건가요?’ 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건 전혀 다른 질문이었다.

 

 

“ 미하일... 괜찮은 건가요? ”

 

 

스비제르스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매처럼 날카롭던 얼굴에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 아, 이건 생각 외로군. 자네 정말 우리 미셴카에게 푹 빠지기라도 했나? 그 녀석은 아니라고 잡아떼던데. 하긴 빠졌다 해도 뭐라고 하겠나. 안 그러는 게 이상한 일이지. 사람 미치게 만드는 꼬마니까. 그래, 다른 질문은 안하나? 이를테면, 정말 보내줄 거냐고 묻는다든지, 자넬 죽이지 않을 거냐고 묻는다든지. 자기 모가지가 달려 있는 와중에 그 녀석에 대해 묻다니, 재미있는 친구란 말이야. ”

 

“ 뭐든지 대답해 주시겠다고... ”

 

“ 아, 물론. 그게 지금 자네가 제일 궁금한 거라면. 걘 괜찮을 거야. 멍텅구리 하나가 쓸데없는 짓을 했지. 진정제를 놨거든. 난 분명히 눈만 가려서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오랜만에 보는 녀석이 그 꼴로 정신 못 차리고 나뒹구는 게 별로 즐겁지는 않더군. 그래도 약에서는 거의 다 깼어. 아마 2~30분 정도 지나면 멀쩡해질 거야. 이제 됐나? ”

 

“ 멀쩡하지 않았어요. 토하고 기절하고... 당신 부하들이 폭력을... ”

 

“ 아 그래, 곱게 데려가라고 했는데 손을 좀 댔더군. 그 얼간이들도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가뜩이나 몰골도 상한 녀석을 그렇게 흥분시키고 기절시키다니 말이지. 그 꼴을 보면 그 녀석 엄마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겠나. 밤이고 낮이고 눈물로 지새고 있었을 텐데 말이지. 감옥에 갔다 온 귀여운 아들 녀석이 얼굴에는 멍이 들고 약기운 때문에 휘청거리고 있으면 참 슬플 텐데. 아마 날 원망하겠지. 참 억울한 일이야. 그렇지 않나, 다닐? 난 정말 선의를 베풀었는데. 아픈 엄마를 만나게 해주려고 이동 금지령도 손봐서 그 녀석을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원망을 받는다면 이것 참 불공평하지 않나? ”

 

 

베르닌은 멍해졌다. 순간 두려움도 잊었다. 눈을 깜박이며 스비제르스키를 쳐다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어머니에게 보냈다고요? 그 외국인이 아니고? 베를린에서 왔다는 높은 사람이 아니고? ”

 

 

스비제르스키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베르닌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타이르는 듯 부드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 이것 참, 다닐. 자넨 현장요원이 되긴 글렀군. 스페호프가 가엾어지는데. 이런 고지식한 친구를 믿고 임무를 맡기다니. 하긴 그자는 원래부터 얼간이였지. 길 잃은 개를 구하려다 강에 빠진 걸 가지고 암살 시도라고 생각하지를 않나, 사과에 약물을 묻혀놓고는 그걸 자네에게 다 떠벌리지를 않나. 제일 등신 같은 짓은 그 시계탑 방화지. 그런데도 자넬 의심하지 않는단 말이야. 그게 그 작자가 얼간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자네가 굉장한 연기력을 보여줘서 그런 건지 좀 궁금했었지. 지금 보니 전자로군. ”

 

 

베르닌은 머리가 핑핑 돌았다. 갈색 눈과 푸른색 눈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역시 오싹했다. 왕재수가 왜 그에 대해 얘기하면서 몸을 떨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독사과... 시계탑... 그건 알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강에 빠진 건... 길 잃은 개... 전 아무에게도 그 얘길 안 했어요. 어떻게... ”

 

“ 아무에게도 얘길 안하긴. 의사 노인네에게도 얘기했고 그 마누라도 들었겠지. 개 주인을 찾는다고 전단도 붙였고. 뭐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해도 어차피 다 알게 되어 있다네. 나는 자네 국장처럼 얼간이가 아니고, 그깟 콩알만한 촌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 따위는 손바닥 보듯 알고 있으니까. 그 얼간이가 미셴카의 돈키호테를 망쳐보려고 별의별 우스꽝스러운 짓을 다 해댄 것도 알아. 그 녀석이 자넬 애지중지하는 것도 알지. 감사관에게서 구해준 것도. 시계탑에서 구해준 것도 알아. 자네가 그 하잘 것 없는 솜씨로 차려주는 저녁 얻어먹는 날이면 그 녀석이 기분 좋아서 웃는 것도 알지. 저녁밥에 연연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놈이 그러는 걸 보니 나조차도 좀 놀랍더군. 난 미셴카가 그 바이올리니스트란 자식과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 어차피 누가 안아주지 않으면 못 견디는 녀석이니까. 그런데 자넨 좀 궁금하더군. 하마터면 질투할 뻔 했다니까. 그 녀석한테 진짜 중요한 건 자는 놈이 아니고 얘기를 나누는 놈이거든. 그래서 겸사겸사 얼간이 스페호프에게 엿도 먹여볼 겸, 자네가 어떤 인간인지 확인도 할 겸 불러본 거야. 그 봉투는... 흠, 다닐. 충고 하나 하지. 이유 없는 친절을 베푸는 인간을 믿지 말게. 이번 일의 교훈으로 그거 하나만 깨달아도 족할 거야. 어차피 현장요원 그릇은 아니니까. ”

 

 

베르닌은 계속해서 뒤통수와 아랫배를 강타당하는 느낌이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 그건 일류샤에 대한 얘긴가요? ”

 

“ 일류샤. 그렇지. 우리 당돌한 일리야가 마음에 들었나? 괜찮은 꼬마지. 졸업을 해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난 그런 애들을 좋아해. 당차고 성깔 있는 놈들. 하긴 그런 축으로는 미셴카를 따라갈 놈이 없지만 걘 총질 따윈 못하니까 예외로 해두지. 아,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한다고 해야겠군. 총을 쥐어주고 가서 누굴 쏘라고 하면 거품을 물면서 바락바락 대들게 뻔하니까. 외국어야 잘하니까 그쪽으로 키워볼 생각도 해봤지만 그런 성질로는 전부 말아먹는 것도 모자라 대놓고 연방에 엿을 먹이려고 날뛰겠지. 우리 미셴카야 반동분자 아닌가. 게다가, 그런 재능을 가진 아이를 기껏 총질이나 시키고 스파이 짓이나 시킨다면 정말 끔찍한 낭비가 아니겠나. 뭐 귀가 닳도록 들었겠지만 백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재능이니까.

하여튼 일리야는 우리 미셰츠카와는 다르지. 일리야 같은 애는 믿어서는 안 돼. 진짜 천재는 관대한 법이지만 모든 걸 노력으로 얻어낸 애는 관대한 척할 뿐이거든. 자넨 아직 진짜 호의와 가면 속의 선의를 구분할 줄 모르더군. 아마 자네가 제대로 된 현장요원이었다면 일리야가 샌드위치를 줬을 때 그곳을 빠져나왔을 거야. 얼간이 스페호프에게 전화를 했겠지. 꼬리를 밟혔다고. ”

 

“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저는 현장요원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배워본 적도 없는 걸요. ”

 

 

베르닌은 문득 떠오른 그의 이름과 부칭을 열거하며 변명조로 대꾸했다. 스비제르스키는 쿡쿡 웃었다.

 

 

“ 그걸 다행으로 여기는 게 좋을 거야. 진짜 현장요원이었다면, 그리고 ‘진짜’ 밀서를 품고 왔다면 자넨 지금 여기 없을 테니까. 내가 그러지 않았나, 일리야가 괜찮은 놈이라고. 실력이 꽤 좋지. 그 빵집에 가기도 전에 벌써 두개골이 쪼개졌든지 내장이 산산조각난 채 모스크바 강물에 수장됐겠지. 하긴 그랬다면 미셴카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나에게 살인자니 도살자니 하면서 온갖 패악을 다 부렸겠군. 아는지 모르겠지만 다닐, 나는 그 녀석에겐 아주 너그러운 편이라서 말이야. 특히 그 자식이 울기 시작하면 그렇게 관대해질 수가 없어.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나, 그 예쁜 눈에 눈물을 주렁주렁 달고 성깔을 부리는데. 그러니까 자넨 운이 참 좋아, 다닐 베르닌. 책상물림 서무일 뿐이라서, 그리고 그 녀석이 애지중지하는 친구라서. 안 그랬다면 참 억울하게 죽을 뻔하지 않았나. 아무 짝에 쓸모없는 거짓 정보를 전해주다 목이 잘려 죽는다면 참 섭섭한 일이지. ”

 

 

베르닌은 현기증이 났다. 수십 가지 질문들이 동시에 머릿속에서 터져 나올 듯 뒤엉켰다. 그중에서도 제일 충격적이고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물었다.

 

 

쓸모없는 거짓 정보라고요? 저는 그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어요. 내용이 뭔지도 전혀 모릅니다. ‘진짜 밀서를 품고 왔다면’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제가 가짜 정보를 가져왔다는 건가요? 그럼 왜 절 이렇게 구금하고 있는 거죠? 그 봉투를 이미 입수하셨을 텐데... ”

 

“ 물론, 쓸모없는 거짓 정보이고말고. 그 얼간이 스페호프가 딱 혹할 만큼의 거짓 정보지. 역시 찰떡같이 걸려들더군. 그 봉투 말인데, 자넨 일리야가 그 여잘 쫓아가서 두들겨 패고 유모차와 아기도 강물에 던져 넣고 빵 봉지를 낚아채기라도 했을 거라고 믿나? 그 빵 봉지는 자네의 접선녀가 벌써 가져가서 제믈랴코프에게 바쳤다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 자네는 임무를 완수한 셈이야. 문서가 그자의 수중에 들어갔으니까. 난 손 하나 대지 않았어. 그냥 내버려뒀지. 그 내용이야 이미 알고 있다네. 자네 국장이 그 문서를 만들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 그거야 당연하지 않나, 내가 흘린 정보인데. 제믈랴코프고 자네 국장이고 아주 덥석 물더군. 하긴 둘 다 얼간이로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놈들이니까. ”

 

“ 당신이 흘린 정보라고요? 저... 제믈랴코프라면... 설마 비탈리 제믈랴코프 말씀이신가요? 외교부 차관... 국장이 문서를 전해주려고 했던 게 그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그 정보를 당신이 흘렸다고요?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

 

 

스비제르스키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천천히 웃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갑고 오싹한 미소였다. 텔레비전이나 신문 사진으로는 결코 분간할 수 없는 냉랭함이었다.

 

 

“ 음, 풋내기에게 강의를 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지만 오늘은 내 기분이 꽤 좋아서 말이야. 귀염둥이를 오랜만에 안아줬더니 참 관대해지는군. 그 녀석이 약에 취해 있지만 않았어도 더 관대해졌을 텐데. 취한 애를 데리고 노는 것도 재미있긴 하지만 오늘은 멀쩡한 상태로 보고 싶었거든. 하여튼 기분이 괜찮으니 자네에게 간단히 설명을 해주지.

베를린에서 고위관료가 온 건 사실이야. 레닌그라드에서 열리는 중요한 비밀회의 때문이지. 물론 여기서 베를린은 ‘동베를린’을 뜻하는 게 아니라네. 서독 쪽 외교관이고 펜타건과 화이트홀 양측에서 사주를 받고 있지. 한쪽은 돈으로 매수했고 한쪽은 미인으로 매수했지. 양키 진영에서도 대가 없는 우정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거든. 그자는 미인을 좋아해. 여자든 남자든 가리지 않아. 그자가 우리 미셴카를 예전부터 눈독들이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야. 알다시피 미셴카는 동맹국가 뿐만 아니라 적국들에서도 공연을 많이 했었으니까. 그자는 미셴카의 공연이라면 놓치지 않았어. 우리 쪽과 협상을 할 때 비밀 조건을 걸었던 적도 있지. 그때 귀염둥이가 무슨 이유인지 성질이 잔뜩 나서 안 가겠다고 패악을 부려서 결국 물 건너갔지만. 그리고 미셴카의 엄마가 아팠다는 것도 사실이지. 레닌그라드 시립병원에 3주 동안 입원해 있었어. 여기까지가 사실이라네. 그 녀석이 얘기해준 것도 그 정도였겠지. ”

 

“ 어떻게, 어떻게 아시는 거죠? 미하일이 제게 그런 얘길 했다는 걸...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것과 베를린 고위직... ”

 

“ 순진하긴. 자네 도청 분석 담당자 아닌가? 그 감독실에 자네들 도청장치만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다고 돌아가서 다른 마이크를 찾아내려고 너무 헛수고 말게. 자네 실력으로는 못 찾아낼 테니까. 물론 그쪽 기술자들도 마찬가지야. 원체 허술해서 말이지. 하여튼 놀랍다니까. 그 녀석 말이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얘긴 남에게 안하는데. 좋아하는 남자에게도, 제일 친한 친구들에게도 안했는데 자네에겐 술술 말하더군. ”

 

 

베르닌은 가슴을 철사로 죄는 것 같았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왕재수가 떠올랐다.

 

'우리 엄마 많이 아팠대. 한 달 가까이 병원에 계셨대. 나 전혀 몰랐어. 그놈이랑 놀아주면 엄마한테 하루 보내주겠다고 하잖아. 그래서 싫다고 했어. 다닐, 우리 엄마 계속 아프면 어떡하지? 나 그냥 간다고 할 걸 그랬나봐.'

 

 

자기도 모르게 베르닌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중얼거렸다.

 

 

“ 그건 비열한 짓이에요. 어머니를 미끼로 그런 짓을 강요하는 건... 사람에게 그렇게 나쁜 짓을 하다니... ”

 

나쁜 짓이라니, 국가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거지. 국가와 당이 개인에 우선하는 것 모르나? 그리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거기까지가 사실이라고 했지 않나. 제믈랴코프는 지금은 좌천된 크라베츠와 한통속이고 내 오랜 적이지. 얼간이 스페호프는 모스크바에 있을 때 크라베츠의 심복이었고. 그래서 제믈랴코프와 자네 국장 사이에는 하잘 것 없는 친분이 있다네. 어제 오후 스페호프는 이제껏 번번이 막혔던 나와 미셴카의 통화 내용을 입수하게 되었네. 본인은 자기들 도청 기술력의 향상 덕분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지. 내가 특별히 우리 쪽 회선을 열어준 거지. 그래서 그는 놀라운 정보를 얻게 되었지. 서독 고위관료가 레닌그라드에 온다. 내가 그자와 결탁해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미셴카를 그자의 방에 밀어 넣으려고 한다. 미셴카에게는 아픈 엄마를 미끼로 협박한다. 그래서 미셴카는 내가 보낸 요원들의 호위를 받아 당일 저녁 비행기로 레닌그라드에 도착할 예정이다. 엄마를 면회하고 병원에서 하루를 보낸다. 다음날 오후에 독일인이 레닌그라드에 도착하면 피곤하다는 이유로 비밀 별장으로 직행한다. 거기서 미셴카와 밀회를 즐긴 후 모종의 대가를 나에게 넘겨준다. 바로 이런 얘기라네.

뛸 듯이 기뻐진 스페호프는 잽싸게 이 모든 정보를 암호문으로 작성했지. 그리고 제믈랴코프의 측근에게 전화를 걸어 아주 간략한 정보를 먼저 알렸네. 도청되더라도 사전 정보가 없이는 해독하기 힘든 일상적인 안부 전화의 틀을 빌려서 말이야. 하지만 그런 전화로는 자세한 밀회 장소와 시간, 기타 내용들을 전할 수는 없었지. 게다가 증거도 없고 말이야. 그래서 스페호프는 암호문으로 작성된 밀서를 모스크바로 직접 보내기로 한 거야. 그 봉투에는 말일세, 다닐. 밀서와 초소형 녹음테이프가 들어 있었다네. 나와 미셴카의 대화 말일세. 자네는 그걸 운반한 전령이 된 거지. ”

 

 

베르닌은 욕지기가 끓어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스페호프에 대한 분노와 함께 자기 앞에 있는 남자에 대한 증오가 솟구쳤다. 너무 화가 나서 공포조차 잊었다. 그는 스비제르스키의 말을 끊고 쏘아붙였다.

 

 

그러니까, 일부러 그런 정보를 흘렸다는 거군요. 제믈랴코프를 속이려고. 그러면 미하일은 레닌그라드에 가지 않은 건가요? 그 독일인은 애초부터 모스크바에 와 있었던 거군요. 어젯밤에 이미 걜 그자에게 보내서 당신 목적을 달성하고 제믈랴코프에겐 물을 먹였다는 거군요. ”

 

“ 아, 다닐. 장족의 발전이군. 괜찮은 추리야. 사실 나도 그렇게 할까 잠깐 망설이기도 했었다네. 문제는 그자에게서 내가 얻어낼 만한 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거야. 뭐 있기야 있었지. 제믈랴코프 같은 조무래기들에게야 군침이 돌만한 것들이. 하지만 이 내가, 그것도 사랑스러운 미셴카안겨주면서까지 얻어내고 싶은 대가는 아니었다네. 자네 몰라서 그러는데 그 녀석은 꽤 비싸게 먹히는 품목이라서. 게다가 내가 꼬마를 제일 마지막으로 봤던 건 그 수용소 클리닉에서였지. 거의 아홉 달 전이야. 그렇게 오랜만에 보는 녀석을 내 품도 아니고 적국의 자본주의자의 품에 안겨줄 만큼 구미 당기는 대가는 별로 없어서. 그러니 내가 제믈랴코프에게 물을 먹인 건 맞지만 미하일을 그자에게 보냈다는 건 억울한 지적이야. 우리 귀염둥이는 그자와 만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안 만날 거야, 뭐 언젠가는 내가 그자에게 진짜로 보낼지도 모르지. 꼭 필요하다면.

자네 말대로 미셴카는 어제 모스크바로 왔지. 얼간이 제믈랴코프와 자네의 스페호프는 그 아이가 레닌그라드로 갔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하긴 레닌그라드로 날아가긴 갔다네, 내리자마자 모스크바행 비행기로 옮겨 탔을 뿐이지. ”

 

 

베르닌은 입을 뻐끔거렸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 그럼, 그럼 걘 어디로 갔던 건가요? 간밤에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어디에서 뭘 한 거죠? ”

 

“ 이런, 당연한 거 아닌가. 섭섭하군, 당연히 자기 주인에게 왔지. 그 녀석이 내 거라는 사실을 잊으면 곤란해. 미셴카는 어제부터 내내 나와 함께 있었다네. 조금 전에 루뱐카 비밀 클리닉을 향해 떠났지. 이틀 전에 그 녀석의 엄마를 거기로 옮겨놨거든. 내 명예를 위해 말하자면, 레닌그라드 시립병원보다 몇 배 나은 곳이야. 좋은 의사들을 붙여줬다네.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 많이 나아졌다고 하더군. 미셰츠카는 사랑하는 엄마를 면회하고 모자의 정을 나눈 후 오늘 밤에 자네들의 그 촌동네로 돌아갈 거야.

그러니 참 배은망덕한 꼬마가 아닌가. 자기에게 이런 혜택을 베풀어줬는데 그렇게 울고불고 발버둥을 치고 욕설을 퍼붓고 뻗대다니. 뭐 난 상관없어. 걘 그런 게 또 귀여우니까. 이제 정리가 좀 됐나? 날 향한 그 말도 안 되는 원망이 좀 가라앉았나? ”

 

“ 그럼... 국장에게 그런 정보를 노출한 이유는... 제믈랴코프에게 밀서와 녹음테이프를 전달하게 한 이유는 결국 그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였다는 건가요? ”

 

“ 함정까지야. 그저 그놈이 호시탐탐 나를 옭아매려고 했으니 내가 멍석을 깔아줘 본 거지. 자네가 전해준 밀서는 20분도 안돼서 그자의 손에 들어갔다네. 내용을 확인한 즉시 제믈랴코프는 레닌그라드에 미리 깔아둔 자기 조무래기들을 비밀별장으로 보냈지. 흠, 30분 전쯤 우리의 독일인께서 별장에 도착하셨겠군.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몇 시간 정도 사우나도 하고 눈도 붙일 겸 말이야. 그는 중요 인물이기 때문에 레닌그라드 KGB의 호위와 감시를 받고 있다네. 제믈랴코프도 나름대로 고위급이긴 하지만 그쪽 KGB의 도움 없이 외국 거물을 감시하고 사진을 찍을만한 능력은 없지. 그래서 그는 레닌그라드 KGB 지국에 밀서를 공유했다네. 그놈도 구르는 재주가 있으니 자기 사람을 심어놨거든. 자기 일파를 비롯해 날 옭아매기 위해 포섭하고 있던 의원들에게도 정보를 흘려놓고 오늘이 지나면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를 제대로 물 먹일 수 있을 거라고 큰소리치고 있었다네.

지금쯤 제믈랴코프는 아주 곤란하게 됐을 거야. 아무리 기다려도 미셴카가 오지 않으니. 그 시간에 미셴카는 루뱐카 클리닉에서 엄마를 면회하고 있을 거라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권을 제시하고 각종 서류를 작성해야 하지. 특히 걔처럼 집행유예 상태의 정치범이라면 더욱. 즉 지금 이 시간 그 녀석의 행방에 대해서는 모스크바 KGB 지국에 훤하게 정보가 남는 거야. 게다가 그는 내가 그 비밀별장에 올 거라고 장담했지만 나는 1시간 전에 크레믈린에서 열렸던 예산회의에 참석했거든. 몸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지 않나. 신망 높은 정치국 의원이자 KGB 현장요원 출신의 애국자를 이런 식으로 모함하고 옭아매다니, 게다가 향후 우리 쪽으로 돌아설 수도 있는 적국의 고위직을 이런 식으로 오해하고 의심하다니, 외교부 간부로서는 정말 어리석고 치명적인 짓이지. 생각하니 참 한심하군. ”

 

 

스비제르스키는 왼쪽 눈을 찡긋했다. 그러자 오른쪽 눈의 푸른색이 더욱 강렬해 보였다. 베르닌은 이제 놀랄 기운도 없었다. 갑자기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아까부터 전신에 감돌고 있던 차디찬 공포는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그 피로감과 역겨운 기분이 두려움을 뒤덮어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그는 어째서인지 퉁퉁 부어오른 혀를 힘겹게 꿈틀거리며 물었다.

 

 

“ 왜 제게 그런 얘기를 전부 해주시는 건가요? 저는 당신의 정적인 제믈랴코프와 한통속이라는 스페호프의 부하 직원인데요. ”

 

“ 아, 이제야 좀 무서워졌나? 알아서는 안 될 얘기를 들려줬으니 이제 자네 머리를 날려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

 

“ 그런 생각도 좀 듭니다만... ”

 

“ 날려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얼간이 스페호프에게 앞으로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의미에서. 하지만 그냥 두겠네. 자네는 스페호프에게 이런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고해바치지 않을 거야. 자넨 접선 임무를 완수했고 지령대로 모스크바 시내에서 몇 시간 동안 놀다가 비행기로 돌아간 거야. 일리야를 만난 적도 없고 나를 만난 적도 없지. 미하일을 본 적은 더더욱 없어. 일이 엉망이 된 건 자네 탓이 아니라 스페호프가 잘못된 정보에 들떠서 제믈랴코프를 들쑤셨기 때문이지. 자네가 입을 다물면 이 정도로 끝나면서 모든 게 순조로워지는 거야. ”

 

“ 제가 당신과 만난 얘기를 하면요? ”

 

“ 그 얼간이 스페호프에게? ”

 

“ 아뇨. 그게 아니라... 누구에게든... 저, 언론이나 그런 곳에... ”

 

하하, 자네 참 순진한 소리를 하는군. 우리 소련에 언론이란 게 있다고 생각하나? 여섯 살짜리 어린애도 다 아는 얘기를. 뭐 맘대로 해보게. 그런 시도를 하려는 즉시 내장이 다 파헤쳐진 채 즐라타야 강물에 둥둥 떠오르게 될 테니까. 뭐 그래도 죽이지는 않을 거야. 다른 이유가 하나 있어서. ”

 

“ 그게 뭐죠? ”

 

“ 귀염둥이가 자넬 애지중지하니까. 그 녀석이 울고불고 고함지르고 나뒹굴면서 패악 부리는 건 보기 싫거든. 작년까진 그런 걸 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이제 마음이 좀 바뀌었어. 자네는 말이야, 다닐 베르닌, 그 녀석에게 던져준 새해 선물 같은 거야. 한 번도 선물 같은 거 달라고 한 적이 없는 놈이거든. 뭘 안겨줘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지. 그러니까 모처럼 받아 안고 좋아하는 걸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꼬마가 자네에게 싫증내지 않기를 기도하게. 내 마음이 바뀌게 될 테니까. ”

 

“ 아니, 그게...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고... 저는 정말 미하일의... ”

 

베르닌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그 녀석의 뭐지? 친구? 나는 그 자식을 감시하라고 붙여 놓은 KGB인데... 친구라는 말을 쓸 수 있나? '

 

 

머릿속에 지난 몇 개월 동안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스페호프. 돈키호테. 독사과. 스네고로드. 시계탑 화재... 그러자 그는 몸이 떨렸고 혀가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 들었다.

'그 녀석도 자기를 괴롭히고 죽이려 드는 기관에 고용된 감시자를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스비제르스키가 코웃음을 쳤다.

 

 

“ 자네가 뭐든 상관없어. 그 녀석이 밥을 달라고 하면 밥을 주고 돌봐 달라 하면 돌봐주고, 재워 달라고 하면 재워주면 되는 거야. 자 달라고 하면 곱게 자 주고. 그게 전부야. 그럼 이제 돌아가게. ”

 

 

베르닌은 스비제르스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을 마주보자 여전히 몸이 오싹했다. 하지만 그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 왜 내버려 두신 거죠? ”

 

“ 뭘 말인가? ”

 

“ 미하일이요. 그렇게 아끼시면서 왜 체포돼서 고문을 받고 좌천되게 내버려 두신 건가요? 독사과도 화재도 다 알고 계시면서 왜 걔를 그런 위험에 처해 있도록 방치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제 말은... 당신은 뭐든지 다 할 수 있고... ”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어깨를 다시 한 번 으쓱했다. 베르닌은 그렇게 거대하고 운동선수처럼 견고한 체격을 가진 남자, 매와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남자가 그토록 우아하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마도 그건 그의 몸짓에 배어 있는 냉랭함 때문인 것 같았다. 오랜 기간의 현장요원 경험과 정치인 생활에서 터득한 태도일지도 몰랐다. 그는 딱 두 마디로만 대답했다.

 

 

“ 만사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거든. 차르라고 전부 자기 뜻대로 됐을 것 같나? ”

 

 

베르닌은 어쩐지 울컥해서 대들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    *    *

 

 

 

 

 

일류샤는 그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에는 9밀리 마카로프도 돌려주었다. 탄창도 다시 끼워져 있었다. 차 안에서 일류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공항에 도착하자 입을 열었다. 여전히 쾌활한 목소리였다. 심지어 존대어를 쓰기까지 했다.

 

 

“ 그럼 안녕히 가세요, 존경하는 선배님. 편안한 비행하시길. ”

 

 

베르닌은 말없이 일류샤를 노려보았다. 머리와 팔이 아직도 지끈거렸다. 일류샤는 웃음을 터뜨렸다.

 

 

“ 그냥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그래. ”

 

“ 이유 없는 친절을 베푸는 놈을 믿지 말라는 거? ”

 

“ 아, 그것도 일리가 있네. 내 얘긴 다른 거긴 하지만. 현장요원 기질은 없으니까 아예 손 떼라는 거. 그래도 꼭 이 바닥에 발 들여놓고 싶으면 호신술 좀 배우라는 거. 정말이지 내가 삼보라도 좀 가르쳐주고 싶은데. ”

 

넌 내가 지금까지 본 개자식들 중에 제일 개자식이야!

 

“ 그거 참 유감이네. 난 너 맘에 들었는데. 선배님인데다 난 못한 졸업까지 하고. 하여튼 잘 가. 외교관 검색대 쓸 수 있게 해놨어. 모처럼 받아온 권총 뺏기면 안 되잖아. 예쁜 미셰츠카에게 내 안부 좀 전해주고. 오늘은 걔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인사도 제대로 못했네. 아쉽게도 말이야. 일류샤가 섭섭해 한다고 말해주면 아마 알 거야. 그럼 이만. ”

 

 

베르닌은 공항으로 들어갔다. 외교관 검색대를 통과했다. 몸수색도 없었고 권총에 대한 지적도 없었다. 그는 4시 비행기를 탔고 무사히 가브릴로프로 돌아왔다.

 

 

 

그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스페호프는 금요일에 출근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9밀리 마카로프를 꺼내 가방에 쑤셔 넣었다. 입고 갔던 옷을 모조리 벗어서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후 보드카를 세 잔 마시고 사흘 동안 냉장고에 처박혀 있던 차디찬 닭고기 롤을 조금 먹었다. 그리고는 취기와 피로에 젖어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베르닌은 중간에 깨지도 않고 연속으로 열다섯 시간을 잤다. 자고 일어나니 관자놀이가 무척 아팠다. 처음에는 숙취 때문인가 했지만 잘 생각해보니 일류샤에게 얻어맞은 자리였다. 비틀렸던 팔도 어찌나 아픈지 제대로 들어 올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혹시나 해서 그는 왕재수의 집으로 가보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밀어보니 스르르 열렸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잠시 베르닌은 같은 비행기를 탔던 걸까 하고 의문했다. 하지만 어머니를 면회하고 왔을 테니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 야, 나야. 오늘 극장 안 갔나보네. 나 들어간다. ”

 

 

대답이 없었다.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무거웠다. 안쪽에서 클래식 음악이 들려왔다. 평소처럼 레코드를 틀어놨나 싶었지만 음악이 훨씬 생생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바이올린 연주 같다는 생각을 하며 거실로 들어갔더니 코즐로프가 와 있었다. 베르닌을 보더니 가볍게 눈짓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예술에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무슨 곡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연주는 근사하고 아름다웠다.

 

 

왕재수도 있었다. 코즐로프와 창가 사이에. 안색은 아직 창백했지만 그 외에는 그렇게 아파보이지는 않았다. 약 기운에서 다 풀려난 모양이었다. 그는 코즐로프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신작 안무인가 싶었지만 연습실에서 본 적이 없는 춤 같았다. 느리고 정밀하고 동시에 무게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베르닌은 단 한 번도 인간의 몸으로부터 그런 움직임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문득 베르닌은 창문을 열어주고 싶어졌다. 완벽하게 드리워져 있는 커튼을 모두 걷어내고 거실의 모든 창문들을 활짝 열어 젖혀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왕재수가 그 즉시 창 너머로 휙 날아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너머로는 추락, 혹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진공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멈춰 섰고 침묵한 채 음악을 들었다.

 

 

 

 

 

- FIN -

2015. 6. 30 ~ 7. 10

 

 

...

 

 

베르닌의 9밀리 마카로프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자면.

 

소련제 권총으로 정확히 말하면 9-18밀리 마카로프 권총이다. 소련 군대와 동맹 국가들에서 사용했다. 모양은 투박해서 딱 러시아 느낌이 난다. 이미지는 아래를 참조하시길. (구글링으로 가져옴)

 

 

 

..

 

눈 색깔 다른 남자이자 '본편에서 온 악당'인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에 대한 묘사는 모두 본편 우주에서 가져왔다. 이 사람은 본편 우주에서 꾸준히 등장하지만 사실 실제 등장 비중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비중과 관계 없이 미샤에게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인물이다. 인물의 성격 설정과 본편 준비를 위한 데이터 구축용 소품 몇편에서 이 사람과 미샤의 관계를 다룬 적이 있긴 한데 그건 말 그대로 데이터 구축용 소품이라 향후 본편을 공개하더라도 그냥 계속 바닥에 묻어둘듯.

 

어쨌든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미샤에게 품고 있는 다분히 뱀파이어적 욕망이나 둘의 뒤틀린 관계는 미샤의 수용소 이야기를 다뤘던 가브릴로프 본편의 프리퀄(about writing 폴더에서 일린의 시점으로 기술된 내용을 두어번 발췌한 적이 있다)과 단편 jewels에서 짤막하게 서술한 적이 있다. 이 사람과 미샤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유가 있을 때 이 본편들이나 데이터 구축 소품에서 조금 인용해 보기로 하겠다. (근데 언제...)

 

물론 이 사람은 가상의 인물이며 이 사람의 정치적 이력에 대한 기술도 모두 픽션이다. 다만 KGB 출신으로 베를린에서 활동했다는 배경은 캐릭터 설정 시 블라지미르 푸틴의 배경에서 좀 따왔다.

 

..

 

 

여기서 묘사한 소련 KGB 요원들의 활동이나 음모 따위는 모두 서무 시리즈를 위한 가상의 이야기들이다. 물론 몇몇 실제 정보나 자료를 반영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서무 에피소드로 놀아보려고 쓴 거라서.. '무슨 놈의 KGB 요원 활동이 이렇게 허술하냐! 흑빵에 봉투 넣는 건 뭐냐! 흰 비둘기 회색 비둘기가 뭐냔 말이냐~ 스페호프는 그래도 명색이 국장이란 놈이 왜 이렇게 멍청하며 고위직이라는 제믈랴코프란 놈은 왜 또 넘어갔냐!' 라고 하신다면... 이건 존 르 카레 소설이 아닙니다 :) 여기서 그런 걸 찾으시면 안됩니다! 이건 그냥 토끼가 스트레스 풀고 놀기 위해 쓰는 서무 시리즈라고요~

 

..

 

여기 등장하는 제믈랴코프, 크라베츠라는 정치인들은 모두 본편 우주에 등장한다. 비중은 거의 없지만 어쨌든 스비제르스키의 정적으로 미샤를 수용소에 처넣은데 크게 일조한 사람들이다. 본편에서 스페호프는 모스크바에 있을때 크라베츠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미샤를 처음부터 아주 싫어할 수밖에 없다. (물론 본편 스페호프는 이렇게 얼간이 같지는 않...)

 

 

..

 

 

하여튼 이번 편은 분위기나 서술 기조 때문에 본편 생각이 많이 났다. 후반부는 더욱. 본편으로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못 그러고 있으니 애꿎은 서무 시리즈가 점점 진지해지네.. 하지만 서무 29편은 좀더 아기자기한 분위기로 돌아온다 :)

 

..

 

댓글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