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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 시리즈가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역시 길어지고 나니 본편과 혼재되면서 뒤로 갈수록 에피소드가 길어지기도 하고 때로 심각해지기도 한다. 분명히 맨처음에 음식투정하던 왕재수, 당직실 귀신 등장할 땐 독사과가 나올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뭐 이런 시리즈야 자체적으로 진화하는 법이니까 할 수 없다!

 

이번 22편은 지난 21편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얘기이다. 스페호프의 음모로 백설공주처럼 독사과를 먹고 쓰러진 왕재수... 원체 나쁜 약물을 쓴 탓에 왕재수의 상태는 좀처럼 좋아지지를 않고.. 마음 착한 단추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22편은 아픈 왕재수를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단추의 이야기이다 :)

 

이번 편은 분량이 꽤 긴 편이라 반토막으로 나눠서 올릴까 하다가 흐름이 끊길 것 같아 그냥 전체 다 올려본다. 재밌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수차례 방해공작과 음모 끝에 드디어 스페호프는 눈엣가시 같은 왕재수에게 독사과를 먹이는 데 성공하고.. 왕재수는 위독한 상태에 빠진다. 아픈 왕재수는 헛소리를 하며 괴로워하고 베르닌은 어떻게든 그를 낫게 해주고 싶어 노력한다...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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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2

 

 

서무의 슬픔

-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베르닌은 수요일 아침에 20분이나 지각을 했다. 병원에서 쪽잠을 자고 일찍 일어났지만 차마 왕재수를 놓고 나올 수가 없어 머뭇거리다가 의사에게 쫓겨나다시피 나왔기 때문이다. 초췌한 몰골로 사무실에 들어서는데 발따예프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 다닐, 국장이 찾으니까 빨리 올라가 봐! ”

 

“ 저를요? 왜요? ”

 

“ 나도 모르지! 9시 되기 전부터 자네 왔냐고 묻던데! 또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쯧쯧... ”

 

 

베르닌은 잠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페이퍼 나이프를 바라보았다. 가슴 속에 감추고 들어가서 국장을 확 찔러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울컥 치솟았지만 고개를 저으며 사무실을 나와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갔다.

 

 

스페호프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심지어 대중가요였다. 베르닌을 보더니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 오, 다닐. 어서 오게. 얘기 들었네. 자네 병원에 아침까지 있었다면서. 그 불여우 곁에 붙어서. 극장에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 ”

 

“ 예. ”

 

 

베르닌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왕재수에게 심폐소생을 해준데다 울고불고 병원에 연락하고 심지어 수혈까지 해주었으니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해고뿐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두렵지도 않았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드는 인간들과 일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자르려면 자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활짝 웃었다.

 

 

잘했네. 자네 정말 일취월장했군. 따로 지시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위장 전술을 펼치다니. 대충 전해 들었네. 자네가 그 녀석을 병원으로 데려갔다지. 인공호흡도 좀 해주고. 아주 놀란 척 했다고. 훌륭한 연기였네. 덕분에 우리 쪽에 대한 의심은 받지 않겠어. 자네 아무래도 현장요원으로 전직해야겠어. 행정의 기본도 안 되고 서무 업무도 실수투성이라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자넨 현장 체질이었던 거야. 그래서 문서 작성이 엉망이었던 게지. 그 녀석 감시를 시킨 보람이 있군. 그래, 그 녀석이 사과를 몇 개나 먹었던가? ”

 

“ 사과... 역시 사과였군요. ”

 

“ 그렇지. 사과 껍질에 발라놨다네. 그 녀석이 사과를 좋아한다는 얘길 들었거든. 자네가 보는 앞에서 먹던가? 내가 그걸 봤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고소했을까~!

 

“ 아닙니다. 제가 갔을 때는 이미 먹은 후였습니다. 한 알밖에 안 먹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약물 분량을 잘못 조절했는지 상태가 굉장히 심각했습니다. 숨도 못 쉬고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

 

“ 흠, 이상하군. 그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쉽게 죽어버리면, 그것도 이목이 집중되는 극장에서 죽었으면 우리도 골치 아파서 안 되는데. 그래서 일부러 조금만 쓴 건데 그럴 리가 없어. 하긴 레베진스키가 애송이를 혼내주고 싶은 의욕이 앞서서 사과 한 알에 왕창 발라놨을지도 모르겠군. 내가 그렇게 세 알에 고루고루 펴 바르라고 했건만! ”

 

“ 의사가 그러는데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수용소 후유증 때문에 조금만 독성 있는 걸 먹어도 쇼크 일으킨다고...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이번엔 너무 나갔던 것 같아요... 정말 죽을 뻔했다고... ”

 

“ 흥, 아쉽군. 이왕 쇼크 일으킨 거 그냥 해치웠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건 내 개인적인 희망이고, 자네 말이 일리가 있네. 냉정하게 생각하면 지금 그놈이 죽어버리면 안되지. 그러면 분명히 크레믈린에서 검시를 하라고 했을 거고, 약물이 검출됐으면 우리가 수세에 몰렸을 테니 그놈이 안 죽은 게 지금으로서는 낫네. 자네도 내 말 명심하게, 다닐. 나중에 정말로 그 녀석을 해치울 때는 증거가 남는 걸 쓰면 안 되네. 지난번 얼음물 수장 작전이 딱 좋았는데 다시 생각하니 아깝구먼. 하여튼 좋았어. 그놈이 많이 아픈가? ”

 

“ 예. 아직 의식이 없어요. 어젯밤에 잠깐 깨서 헛소리한 게 전부입니다. ”

 

뭐야? 의식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깨어나서 많이 아파해야지! 아파서 펄쩍펄쩍 뛰고 바닥을 나뒹굴어야 약을 먹인 보람이 있지! 실컷 아파야 제대로 버릇을 고쳐주는 건데! 그래, 언제쯤 깨어난다던가? ”

 

“ 저어... 잘 모르겠습니다. 아침에도 계속 혼수 상태였고. 의사 얘기론 고비는 넘겼으니 아마 오늘 중 정신이 돌아올 거라고는 하던데... 국장님, 걔 정말 많이 아팠던 게 분명해요. 정신 잃기 전에 아프다면서 얼마나 울고 몸부림쳤는데요. 이제 그만... ”

 

 

베르닌은 다시금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꾹 참았다. 다행히 흥에 겨운 스페호프는 그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하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옳지 옳지, 그랬어야지! 싸가지 없는 애송이 녀석 그래야 버릇을 좀 고쳐주지! 자네 지난주처럼 특별 근무를 지시하겠네. 그놈 곁에 딱 붙어 있게. 아예 그놈의 보호자로 병원에 등록하는 거야. 그놈은 서류상 우리 소관이니 KGB 요원이 보호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네. 게다가 자네는 그놈과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도 하는 사이니 구실도 있어. 그럼으로써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지. 첫째, 우리 쪽으로 쏠리는 의심을 없애는 것. 둘째, 그놈의 상태를 가장 먼저 파악할 수 있다는 것.

자네가 고생이 많네만 다 훌륭한 요원으로 커나가는 데 피가 되고 살이 된다고 생각하고 이만 가보게. 그놈이 퇴원할 때까지 자네의 서무 업무는 면제해 주겠네. 암, 지금 서무가 중요한 게 아니지. 괜찮은 현장요원 하나를 양성하고 있는 이 마당에! 어서 가게. 매일 오후 4시에 내게 보고를 하게. 직접 오기 어려운 상황일 때는 전화로 보고해도 좋네. 그럼 이상! ”

 

 

베르닌은 국장실을 나왔다. 분노가 들끓었지만 스페호프가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휴가를 내고 병원에 가버릴까 하고 고민하던 차였으니까.

 

 

 

*   *   *

 

 

 

 

베르닌은 곧장 병원으로 갔다. 스타브로프가 그를 발견하고 펄쩍 뛰었다.

 

 

“ 아니, 이 녀석은 등 떠밀어서 보내놨더니 왜 금방 돌아온 거야? 네 녀석 정말 사표라도 낸 거냐? ”

 

“ 아니오, 국장이 저보고 보호자 등록하고 옆에서 감시하랍니다. 다행히 절 의심하지는 않네요. 얘가 나을 때까지 여기 있으래요. 약을 사과 세 알에 고루고루 바르라고 했는데 한 알에 왕창 발라서 그런 것 같대요. ”

 

“ 어느 쪽이든 변할 건 없어! 그 자식은 인간 말종에 더러운 살인마야! 어린 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런 짓을 하나! ”

 

“ 국장은... 걔가 자기 인사말을 중간에 끊었다고 앙심을 품은 것 같아요. ”

 

“ 인사말 한 번만 더 끊었다가는 대량학살이라도 하겠군! ”

 

 

노의사는 부르르 떨며 화를 냈다. 베르닌은 스타브로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말대꾸를 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물었다.

 

 

“ 저, 선생님. 미샤는 정신이 들었나요? ”

 

“ 잠깐 깨긴 했는데 계속 헛소리만 하고 정신도 오락가락해서 도로 재웠어. 아마 오늘은 종일 그럴 거야. ”

 

“ 괜찮아지는 거죠? 그렇죠? ”

 

글쎄다, 부작용 때문에 약물을 전혀 못 쓰니... 그래도 어제 달여 준 약초가 좀 듣는 것 같으니 다행이긴 한데, 그나마 얼마 남지도 않았어. 그게 수도원 주변에만 자라는 건데 있다가 마누라에게 좀 캐 오라 해야겠어. ”

 

어, 제가 갔다 올게요. 저 여기서 근무하라고 지시받았어요. 시간 많아요. ”

 

“ 네 녀석은 약초 구분할 줄 모르잖아. ”

 

“ 가르쳐주시면 되잖아요. 저희 집에 식물도감 있는데 그거 가져오면... ”

 

“ 웬 식물도감 타령이냐, 책상물림이라더니 정말 그렇구나. 쯧쯧. 제냐, 이 녀석한테 흰머리천사날개풀 캐는 법 좀 알려줘라. 바구니랑 숟가락 갖다 주고. ”

 

 

아직 진료 시간 전이라 커피를 마시고 있던 예브게니가 약제실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접시와 바구니, 면장갑 한 켤레, 나무로 만든 숟가락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베르닌은 접시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식물을 주의 깊게 살폈다.

 

 

“ 이게 흰머리 어쩌고 하는 풀이에요? ”

 

흰머리천사날개풀이요. ”

 

“ 이름 진짜 어렵네요. ”

 

“ 이름 외워두는 게 찾기 편하실 거예요. 딱 그렇게 생겼거든요. 이거 보세요, 맨 위 끝부분은 흰색이고 동그랗게 고리 모양이잖아요. 여기 중간에 달린 두 장의 큰 풀잎이 날개예요. 얘들은 한데 모여 자라기는 하는데 키가 작고 지팡이 모양으로 처져 있어요. 그래서 다른 풀들 사이에 섞이면 잘 안 보여요. 그러니까 몸을 바짝 낮춰야 찾을 수 있어요. 큰 풀들이나 나무 주변에 바짝 붙어 자라거든요. 그리고 잎도 중요하지만 뿌리에 있는 진액이 해독 작용을 하니까 뿌리를 다치면 절대 안 돼요. 쇠붙이가 닿아도 안 되고요. 그래서 이 나무 숟가락을 드리는 거예요. 흙을 파내서 뿌리까지 조심해서 캐내야 돼요. ”

 

“ 어, 뭔가 어렵네요. 얼마나 캐야 돼요? ”

 

“ 많을수록 좋은데... 달이면 진짜 얼마 안 나오거든요. 이 바구니 꽉 채워도 세 컵 나올까 말까예요. 미샤한테는 지금 약을 못 쓰니까 이것밖에 못 주거든요. ”

 

“ 바구니 더 주세요. 많이 캐올 테니까. ”

 

“ 이 바구니 하나 채우는 것도 시간 오래 걸릴 거예요. ”

 

“ 그래도... 많이많이 캐올 거예요. 바구니 하나 더 줘요. 근데 아직 겨울인데 풀이 있을까요? ”

 

“ 원래 늦겨울부터 봄까지만 자라요. 그리고 수도원 뒤뜰이 다른 데보다 해도 잘 들고 따뜻하거든요. 그래서 요맘때는 거기서만 캘 수 있어요. 2월 중순부터 올라오니까 지금은 꽤 자랐을 거예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

 

 

베르닌은 곧장 숲으로 가려다가 잠깐 병실로 올라가보았다. 왕재수는 여전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쉭쉭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누워 있었다. 의식이 없으니 못 알아들을 게 뻔했지만 베르닌은 몸을 굽혀서 그의 귓가에 대고 조그맣게 말했다.

 

 

“ 미셴카, 내가 약초 캐올게. 그거 먹으면 안 아플 거래.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나 올 때까지 꼭 정신 차려야 돼! ”

 

 

 

베르닌은 차를 몰고 강변도로를 쭉 달렸다. 검은 숲에 있는 가브리엘 수도원으로 갔다. 혁명 이후 수도원은 종교 박물관이 되어 있었고 미사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신도들이 삼삼오오 찾아오곤 했다. 수도원은 가브릴로프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였지만 정교 신자가 아닌 베르닌은 어릴 때 외에는 이곳에 와본 적이 없었다.

 

차를 입구 쪽에 세워놓고 바구니 두 개에 풀 한 포기, 면장갑 한 켤레와 나무 숟가락 두 개를 든 채 한참 풀밭과 화단을 지나 걸어가자 수도원 건물들과 첨탑, 천사상이 나타났다. 뒤뜰이 어느 쪽인가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검정 옷을 입은 대머리 노인이 나타났다. 수도원의 책임자인 예고르 사제였다. 베르닌은 좀 움츠러들었지만 사제는 상냥한 어조로 그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 저, 신부님. 저는 다닐이라고 하는데요, 흰천사날개머리, 아니, 흰날개... 저... 하여튼 끝이 하얗고 고리가 달리고 날개모양 잎이 달린 약초를 캐러 왔어요. ”

 

“ 흰머리천사날개풀 얘기구먼. 그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자네가 어떻게 아나? ”

 

“ 레프 사벨리예비치, 그러니까 스타브로프 선생님이 보내셨어요. 굉장히 아픈 애가 있는데 약초가 많이 필요하대요. 달여서 먹여야 한다고. ”

 

“ 저런, 레부슈카가 보냈구먼. 작년에도 내가 좀 캐서 보냈는데 벌써 다 쓴 모양이군. 이리 오게. 며칠 전에 왔으면 미리 캐 놓은 게 남아 있었을 텐데 벌목공 애들이 뱀에 물려서 내가 다 써버렸지 뭔가. 근데 시내 쪽이면 뱀에 물린 것도 아닐 텐데. 레부슈카가 웬만하면 이거 안 써도 애들 다 고치는데. ”

 

“ 다른 약이 안 듣는대요. 그래서 이 약초가 많이 필요하대요. 그런데 신부님은 의사 선생님과 잘 아시나 봐요. 애칭으로 부르시고. ”

 

“ 그 영감탱이랑 어릴 때부터 이웃사촌이었거든. 근데 죽어도 신앙은 안 받아들인다니까. 영감쟁이가 성질은 더러워도 착해. 사람도 많이 살렸고. 자, 이쪽으로 오게. 도와주겠네. 그런데 웬 바구니를 그렇게 큰 걸 두 개나 가져왔나. ”

 

“ 애가 너무 아파서요. 정신도 못 차리고, 이것밖에 희망이 없어서요. 많이많이 가져가야 돼요, 흑... ”

 

 

사제는 베르닌의 등짝을 토닥토닥해주더니 뒤뜰로 그를 안내했다. 말이 뒤뜰이지 아주 넓은 풀밭이었다. 예브게니의 말대로 해가 잘 드는 곳이어서 마치 이곳에만 봄이 온 것 같았다. 심지어 꽃도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사제는 끙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히더니 어딘가를 가리켰다.

 

 

“ 저기 있구먼. 숟가락 좀 줘보게. 내가 하는 거 보고 배우게. ”

 

 

사제가 순식간에 풀을 여러 포기 캐냈다. 베르닌은 두 눈으로 보면서도 약초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우왕좌왕하자 사제가 말했다.

 

 

“ 자세를 낮춰야지. 자네는 키도 큰데 그렇게 뻣뻣하게 서서 어떻게 약초를 찾나. 이건 천사가 주고 간 풀이야! 하느님과 천사도 우리 앞에 몸을 낮추지 않나, 인간도 당연히 무릎을 꿇어야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거야!

 

 

베르닌은 종교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므로 그냥 ‘네네’ 하면서 무릎을 꿇고 몸을 낮췄다. 그러자 사제의 말대로 바닥에 모여 있는 흰색 고리 달린 풀들이 보였다. 나무 숟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흙을 파냈다. 검은 흙은 축축했고 다행히 얼어 있지도 않았다. 봄이 오고 있나 싶었다. 낑낑대며 간신히 풀 한 포기를 캐냈다. 사제가 칭찬했다.

 

 

“ 잘했네. 뿌리를 다치면 안 되거든. 자넨 여기서 캐게. 난 저쪽에서 캐고 있을 테니. 그 바구니 한 개는 나를 주고. ”

 

“ 어, 저... 신부님.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신부님 연세도 많으신데... 허리도 아프시잖아요. ”

 

“ 괜찮네. 사람이 많이 아프다는데 당연히 도와야지. 그리고 자네보다 내가 훨씬 빨리 캘 거야. 이맘때마다 이거 캐는 게 재미거든. 시작하세. ”

 

 

베르닌은 무릎을 꿇고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포기 캐는데 몇 분이나 걸렸다. 줄기를 끊어 먹기도 하고 아까운 뿌리를 뭉개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요령이 생겼다. 무릎과 허리가 뻐근했고 면장갑도 금세 닳았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한쪽을 다 캐고 나서 다른 쪽을 또 찾아보니 이제 하얀 고리가 달린 풀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열심히 흙을 파내고 뿌리째 채취했다. 그러다가 너무 열심히 팠는지, 아니면 힘 조절을 못해서인지 나무 숟가락이 툭 부러졌다. 손으로 좀 파다가 다행히 부러진 나뭇가지 한 개를 발견해서 그것으로 다시 파기 시작했다.

 

젖은 흙을 파내자 지렁이도 나오고 처음 보는 벌레들도 많이 나왔다. 살살 한쪽으로 치워가며 약초를 계속 캤다.

 

 

“ 어휴, 그 녀석이랑 같이 안 와서 천만다행이네. 이거 봤으면 또 호들갑떨고 울고불고 시골이 어쩌고 난리쳤을 거 아니야. ”

 

 

투덜대다가 갑자기 목구멍이 당기면서 눈물콧물이 찍 나왔다. 장갑이고 소맷자락이고 온통 흙투성이라 닦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훌쩍 하고 콧물을 들이마시면서 그는 계속 약초를 캤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기저기를 기어 다니며 약초를 캐고 있는데 사제가 다가와서 그를 불렀다.

 

 

“ 다닐, 그만 됐네. 바구니가 넘칠 지경이군. 나도 이쪽에 한 바구니 캐 놨으니 가져가면 될 거야. 추운데 갑자기 그렇게 땀을 흘리고 흙을 파면 감기 걸린다네. 이쪽으로 와서 뜨거운 거 한 잔 마시고 요기 좀 하고 가게. 점심때가 지났다네. ”

 

 

베르닌은 아직도 참나무 아래에 약초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더 캐고 싶었지만 사제의 말대로 바구니가 넘칠 지경이었기 때문에 무릎의 흙을 털고 일어났다.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사제는 그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픈 아이가 빨리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린 후 뜨겁게 데운 나무열매 음료에 꿀을 타서 허브 잎사귀를 띄워 한 잔 주었다. 쭉 마시자 차갑게 얼었던 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볶은 버섯과 으깬 감자로 속을 넣은 두툼한 블린과 비트 피클도 일품이었다. 베르닌은 허겁지겁 먹었다. 너무 맛있었다.

 

 

“ 신부님, 감사합니다. 약초도 캐주시고 점심까지 주시다니. ”

 

“ 뭘, 하느님의 종인데 당연한 걸 가지고. 바구니를 엎을 수도 있으니 이 상자에 담아 가게. 그리고 열매즙 한 병 넣었으니 아픈 애가 정신 좀 차리면 따끈하게 데워서 꿀 타서 먹이게나. 기력 보충에 도움이 될 거야. 레부슈카에게 안부 전해주고. 그럼 잘 가게. ”

 

 

베르닌은 흰머리천사날개풀을 가득 담은 상자와 나무열매즙 한 병을 들고 수도원을 나왔다. 차에 타기 전에 돌아서서 수도원 정문과 천사상을 향해. 순서도 헷갈리는 성호를 긋고 꾸벅 인사를 했다.

 

‘ 하느님 고마워요. 그 녀석이 빨리 낫게 해 주세요. 신부님 고마워요. 천사야 고마워. ’

 

 

 

*    *    *

 

 

 

 

상자에 가득 채워 온 약초를 보고 스타브로프는 처음으로 베르닌을 칭찬했다.

 

 

“ 잘했구나. 밤중까지 캐려나 싶었는데, 의외의 재주가 있군. ”

 

“ 저어, 신부님이 도와주셨어요. 선생님 동기라고 하시면서. ”

 

“ 그러면 그렇지, 예고르의 솜씨군. 오, 좋아. 열매즙도 챙겨줬네. 노인네가 그래도 쓸모는 있다니까. 그 친구 만났으면 점심도 얻어먹었겠군. ”

 

“ 네, 맛있었어요. 저 수도원에서 밥 처음 먹어봤는데 진짜 맛있었어요. 담백한 맛이라 미샤가 좋아할 것 같아요, 나중에 데려가야겠어요. ”

 

“ 걘 벌써 내가 데려갔었어. 예고르하고도 몇 번 봤고. 다들 네놈처럼 발랑 까진 무신론자 놈팽이는 아니라고! ”

 

“ 어, 근데 걔 무신론자랬는데. 그리고 선생님도 교회 안 가시잖아요. ”

 

“ 여기서 중요한 건 ‘무신론자’가 아니고 ‘발랑 까진 놈팽이’라는 것이야! ”

 

“ 억울해요. 발랑 까진 놈팽이란 말 처음 들어요. 전 책상물림인데.

 

“ KGB의 녹을 먹고 있으니 감수해! ”

 

 

베르닌은 의사와 마르가리타에게 약초를 맡기고 일단 집으로 갔다. 흙투성이가 된 옷을 벗고 깨끗하게 샤워를 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로만 코즐로프와 마주쳤다. 표정이 아주 좋지 않았다.

 

 

“ 어, 당신... 언제 왔어요? ”

 

“ 그 자식 어디 사냐! ”

 

“ 누구요? ”

 

스페호프! 죽여 버릴 거야! 모가지를 비틀어버릴 거야!

 

“ 어, 저... 안돼요. 그럼 당신 체포된단 말이에요. 미샤가 당신 잡혀갈까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

 

일이 이렇게 됐는데 잡혀가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내 그 살인마 새끼를!

 

 

코즐로프는 이를 갈면서 주먹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꽝 하고 쳤다.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으아, 당신 뭐해요! 연주자는 손이 생명이라면서! 분명히 미샤가 그랬는데... 왜 손을 망가뜨려요! ”

 

“ 그놈 면상을 짓이겨주고 싶은데 여기 없으니까! ”

 

“ 어디까지 들었어요? ”

 

“ 들을 만큼 다. 류다한테 얘기 듣고 아까 병원에도 갔었어. 노인네가 악착같이 숨기잖아, 보호자 아니라고 나 못 들어오게 하고! 날 의심하다니... 그렇다고 우리 사이를 털어놓기도 뭐하고... 젠장! ”

 

“ 아... 그렇구나. 그럼 걔 못 본 거예요? 하긴 지금은 들어가 봤자 애가 정신도 못 차리니 별 소용이 없으니... ”

 

당장 나도 들어갈 수 있게 하란 말이야! 네놈 같은 앞잡이는 보호자 등록하고 나는 이게 뭐야!

 

“ 어, 알겠어요. 내가 선생님한테 얘기할게요. 근데... 류다에게 들은 거면 지금 극장에 소문 다 퍼졌겠네요? ”

 

“ 안 퍼졌어. 내가 류다 입 막았어. 어제 애 실려 가자마자 류다가 우리 집에 왔었어. ”

 

“ 집에요? 전화도 아니고? ”

 

“ 류다가 바보냐, 그 여자가 극장에서 비서 노릇만 20년이야. 돌아가는 꼴 보니 당연히 도청될 거 같으니까 직접 온 거지. 나랑 걔랑 제일 친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나마 믿을만하다고 생각해서. 못 참겠다면서 성명서 내고 애들한테 다 알리자는 걸 간신히 막았다니까. ”

 

“ 어, 당신 진짜 의외네요. 국장 때려죽이니 마니 난리면서 어떻게 또 류다한테는 입 다물라고 했어요? ”

 

“ 성명서 내고 애들한테 알리면 뭐, 스페호프가 눈이나 깜짝하겠냐? 수사 담당하는 것도 네놈들이고 우리 귀염둥이도 유배 상태라서 네놈들 소관인데. 증거도 없고 도리어 애들만 찍혀서 서류에 빨간 줄 가고. 우리 아기도 무시 안 당하려고 그렇게 기를 쓰고 있는데 KGB 끄나풀한테 이런 짓이나 당한다는 거 극장 애들한테 알려지면 못 참지. 걔가 왜 악착같이 매일 기어 나오는데. 아픈 거 보여주기 싫어서 그런 거잖아. 하여튼 류다도 이해했어. 지금 극장에서 이거 아는 거 그 여자랑 나밖에 없어. ”

 

“ 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

 

“ 어, 그래? 목격자가 더 있었냐? ”

 

“ 아뇨, 그게 아니고요. 국장이 눈 깜짝하든 말든 나쁜 짓을 했으니까 공론화되는 게 맞다고요. 나는, 나는 보안서약을 해서 내부고발을 할 수가 없게 돼 있어요. 그리고 설령 고발을 한다 해도 내가 잘리면 국장이 걔한테 ‘진짜’ 감시요원을 붙일 테니까 위험하다고요. 하지만 극장에서 들고 일어나는 건 다르잖아요. 걘 당신네 감독이니까. 당신들은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고... 정의 실현을... ”

 

“ 휴, 이런 책상물림 같으니. 언제 철들래.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아냐?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의 따윈 없어. 힘센 놈들이 이기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 아기가 이렇게 됐지. ”

 

 

베르닌은 우울해졌다. 고개를 떨어뜨렸다가 코즐로프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 걔도 그런 식으로 얘기하던데. 그래서 당신이랑 사귀는 건가 보네요. 생각이 같아서... ”

 

“ 걔랑 나는 해결 방식이 다르지. 우리 귀염둥이는 나쁜 짓 당해도 그냥 나 몰라라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지만, 나는 그런 거 아니야! 나쁜 짓 당했으면 갚아야지! 공권력 따위 안 믿어. 내 손으로 그 더러운 놈 모가지를!

 

“ 으아, 제발 그만둬요. 당신 잡혀가면 쟤 정말 못 견딜 거라고요! 가뜩이나 아픈 애를 왜 더 괴롭히려고. ”

 

“ 안 잡혀가면 되지! 하여튼 그 자식 두고 봐! ”

 

 

베르닌은 코즐로프의 분노를 무마하기 위해 서둘러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의사에게 코즐로프가 왕재수와 가장 친한 사이라고 말해주고 옆에서 돌봐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의사는 툴툴댔다.

 

 

“ 어찌 된 게 이 놈의 꼬맹이가 사람 보는 눈이 없다니까. 그나마 친구라고 있는 녀석들이 한 놈은 앞잡이, 한 놈은 키다리 깡패.

 

“ 말은 바로 하셔야죠! 이 녀석은 앞잡이 맞지만 저는 어엿한 오케스트라 수석이고 예술가란 말입니다! ”

 

“ 그러면 뭐해! 걸핏하면 주먹질이나 하면서. 에이, 하여튼 따라오게. 애 조금 전에 깼으니까. ”

 

 

베르닌은 뛸 듯이 기뻤다.

 

 

“ 정말요? 그럼 이제 괜찮은 거예요? ”

 

“ 아직 헛소리를 하는데, 그래도 어제보다는 좀 나아. 그냥 얼굴만 잠깐 보고 나와, 호들갑 떨고 소리 지르지 말고. 애 놀라니까. ”

 

 

왕재수는 정말 눈을 뜨고 있었다. 마르가리타가 머리를 받치고 초록색 액체를 숟가락으로 떠먹이고 있었다. 흰머리천사날개풀을 달여서 만든 약초즙이 분명했다. 한 숟가락 받아먹을 때마다 왕재수가 굉장히 싫어했다.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끙끙거렸다.

 

 

“ 아이 써... ”

 

“ 그래도 다 삼켜야 안 아파. ”

 

“ 얼마나 남았어요? ”

 

“ 세 숟가락. ”

 

“ 한꺼번에... ”

 

“ 많으면 못 삼켜서 안 돼. ”

 

 

왕재수는 아주 괴로워하며 느릿느릿 약초즙을 받아먹었다. 베르닌은 대체 무슨 맛일까 싶어서 컵 가장자리에 묻은 즙을 슬쩍 손가락으로 찍어 핥아먹어 보았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썼다. 초콜릿이나 사탕 생각이 간절했다.

 

 

마침내 약초즙을 다 먹이는데 성공한 마르가리타는 베개를 고쳐주고 왕재수를 다시 뉘어주었다. 왕재수는 기침을 좀 하더니 금방 눈을 감았다. 잠든 줄 알고 베르닌과 코즐로프가 나가려는데 다시 눈을 뜨더니 그들 쪽을 보았다. 금세 얼굴이 펴졌다. 자기 쪽으로 오라고 턱짓을 했다. 코즐로프가 후다닥 달려가 왕재수의 손을 꼭 잡고 뺨에 뽀뽀를 했다.

 

 

우리 아기, 귀염둥이 내 강아지. 얼마나 아팠니. 이제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 ”

 

“ 손에 피 나. ”

 

“ 응? ”

 

“ 손 다쳤잖아! 손 다치면 안 되는데. 어휴... 맨날맨날... ”

 

 

코즐로프는 아까 엘리베이터 문을 치는 바람에 살갗이 벗겨진 손등을 내려다보더니 급하게 소매로 핏방울을 닦았다.

 

 

“ 아니야, 이거 밥 먹다가 토마토 소스 묻은 거야. 피 아니야. ”

 

“ 오늘 무슨 요일이야? ”

 

“ 수요일이야. ”

 

“ 나 극장 갈래. 오늘 공연... ”

 

“ 오늘 발레 공연 없어, 목요일하고 토요일에 있어. ”

 

“ 아니야, 있어! 나 오늘 무대 올라가는데. 오늘 로미오와 줄리엣이야! ”

 

“ 아가야, 우리 극장엔 로미오와 줄리엣 안 올리잖니. ”

 

“ 으응, 무슨 소리야. 나 벌써 몇 번이나 췄는데. 지나 어디 갔지? ”

 

 

코즐로프가 당황하고 있는데 마르가리타가 슬며시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어르고 달랬다.

 

 

“ 미셴카, 로만이 잘못 말한 거야. 오늘 수요일 아니야. 오늘은 너 무대 안 올라가니까 이제 자야지. ”

 

“ 아닌데, 나 오늘 올라가야 되는데. 내 어마어마한 춤 보려고 팬들 엄청 많이 올 텐데. ”

 

“ 그래그래, 근데 좀 자야 무대도 올라갈 수 있어. 약 먹었으니까 자자. ”

 

“ 풀 맛 나는 거, 너무 써, 너무 싫어. 맛없어. 흑... 파인애플... ”

 

 

횡설수설하다가 왕재수는 뜬금없이 파인애플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 파인애플. 엉엉... 파인애플 먹고 싶어. 파인애플... 아이 더워. 아이 써... 흑, 파인애플... ”

 

“ 그래그래, 자고 나서 파인애플 먹자. 지금은 자야 돼. 불 꺼줄게. ”

 

 

마르가리타가 급하게 불을 끄고 커튼을 쳤다. 캄캄해지자 왕재수가 조용해지더니 잠이 들었다.

 

 

병실에서 나온 코즐로프가 굉장히 속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손 다친 거 야단치길래 정신 든 줄 알았더니 아직 오락가락하는구나. ”

 

“ 의사 선생님이 오늘 하루종일 그럴 거랬어요.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어젠 진짜 장난 아니었거든요. 근데 갑자기 파인애플을 찾네... 쟤 원래 그거 좋아했어요? ”

 

“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냐. 쟤 밥이랑 간식 챙겨주는 건 너였잖아. ”

 

“ 사과 좋아하는 건 아는데... 과일은 다 잘 먹는데 파인애플은 한 번도 먹은 적 없거든요. ”

 

“ 먹기야 먹겠지. 우리 동네에 그런 부르주아 과일이 안 들어오니까 안 먹었겠지. 약 때문에 입맛이 쓰니까 그런가보다. 오렌지나 좀 사와야겠다. ”

 

“ 당신 극장 안 가도 돼요? 오늘 연주 없어요? ”

 

“ 있어. 있는데 안 갈 거야! 우리 아기가 이 모양인데! ”

 

“ 여긴 내가 있어줄 테니까 극장 가요. 쟤 저렇게 헛소리 하는 와중에도 당신 손 다친 건 알아보잖아요. 연주 빠졌다는 거 알면 화낼 거예요. ”

 

 

코즐로프는 한숨을 쉬었지만 그의 말이 맞다고 했다. 시계를 보더니 욕을 하면서 극장에 갔다. 베르닌은 딱히 할 일도 없고 왕재수가 자는 걸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마르가리타에게 갔다. 약초 손질하는 것을 도왔다. 흙을 살살 떨어내고 흐르는 물에 풀을 깨끗이 씻었다. 마르가리타는 절반은 채반에 받쳐 물기를 탈탈 털고 나머지 절반은 커다란 냄비에 넣고 물을 붓더니 약불로 달이기 시작했다.

 

 

“ 저, 마르가리타 이사예브나. 이 절반은 어떻게 하나요? ”

 

“ 그건 저쪽 창가에 펼쳐놔 주렴. 햇볕에 좀 말리게. 원래는 말려서 쓰는 게 더 약효가 좋은데 지금은 남은 게 별로 없어서... 급하니까 생으로 먼저 달여야지. 그대로 달이면 즙이 얼마 안 나온단다. ”

 

“ 이거 계속 먹이면 나아지는 거죠? ”

 

“ 음, 어젯밤보다는 아침이 나았고, 지금이 아침보다 좀 나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독소가 좀 빠지면 뭐라도 좀 먹여야 할 텐데. 열이 심해서 그런지 아침부터 계속 파인애플만 찾는구나. ”

 

“ 진짜 먹고 싶은가보네... 파인애플을 어디서 구하지... ”

 

그러게 말이야. 우리 동네에 파인애플이란 게 들어왔던 때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구나. 나도 옛날에 모스크바에 갔을 때 한 번 먹어본 게 전부니... ”

 

“ 과일 가게에 부탁하면 받아다 주지 않을까요? ”

 

“ 오렌지랑 레몬까지는 되는데 파인애플 같은 고급 과일은 안 될 거야. ”

 

“ 에이... 하여튼 입맛만 고급이야, 싸가지 없는 녀석. ”

 

 

베르닌은 투덜거리면서 병원을 나왔다. 밑져야 본전이니 과일 가게에나 가보자 싶어서. 아직 오후인데도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한참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파인애플은 없었다. 점원에게 물어보았다가 욕을 먹었다.

 

 

“ 뭐라고요? 파인애플? 웬 뚱딴지같은 소리람. 여기가 무슨 동남아예요? 강 얼음도 다 안 녹았는데 사과도 배도 아니고 웬 파인애플! 완전 부르주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

 

 

그래서 베르닌은 시들시들한 오렌지를 두 알 사서 돌아왔다. 다섯 시쯤 왕재수가 다시 깨어났다. 여전히 헛소리를 하다가 또 파인애플을 찾았다. 의사가 오렌지는 줘도 된다고 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열심히 껍질을 까고 오렌지를 짜서 즙을 냈다. 하지만 왕재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으응, 이거 아니야! 파인애플... 파인애플 먹고 싶어. ”

 

“ 나중에 갖다 줄게. 이거 먼저 먹어. 너 목마르잖아. ”

 

“ 흑, 파인애플 아니야... 이거 싫어. ”

 

 

입술에 컵을 대주고 오렌지즙을 흘려 넣자 왕재수가 반쯤 먹고 반쯤은 혀로 밀어내버렸다. 그리고는 베르닌을 꾸짖었다.

 

 

막 억지로 먹이고! 파인애플도 아닌데. 흑... 엄마... ”

 

“ 조금만 더 먹어봐. 그래야 기운을 차리지. 오렌지도 달고 시원해... ”

 

“ 엉엉, 시골... 파인애플 없어. 엄마... 아빠... ”

 

 

왕재수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훌쩍훌쩍 울면서 허공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다가 베르닌의 팔을 베고 잠이 들었다. 밤 아홉 시에도 한번 깨서 파인애플을 찾고 새벽 네 시에도 깨서 파인애플을 찾았다. 그럴 때마다 실망해서 울다가 열에 들떠서 잠들곤 했다. 베르닌은 안타까운 나머지 파인애플을 따러 가는 꿈을 계속 꿨다.

 

 

 

*   *   *

 

 

 

다음날이 되자 왕재수는 조금 나아졌다. 여전히 열이 나고 온몸에 힘이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잠시 일어나 앉고 미음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오후에는 코즐로프와 베르닌의 얼굴도 알아보았다. 베르닌을 보고 눈을 깜박이며 걱정했다.

 

 

“ 너 왜 여기 있어? 국장이 자르면 어떡하니. 벌목공... ”

 

“ 안 잘라. 너 괜찮아질 때까지 여기 있기로 했어. ”

 

“ 면도도 안 했네. 아 지저분해. ”

 

“ 이제 안 아프냐, 면도 안 한 것도 보이고! ”

 

“ 아파. 근데 엄청엄청 아프진 않아. ”

 

 

왕재수는 그러더니 코즐로프에게는 쌀쌀맞게 빨리 극장에 가라고 했다. 코즐로프는 굉장히 섭섭한 눈치였다.

 

 

“ 우리 아가야, 어쩌면 그러니. 이 녀석한테는 그렇게 친절하게 말해주고 왜 나한테는 눈길 한 번 안 주니. ”

 

“ 잡혀간단 말이야. 빨리 가. ”

 

“ 안 잡혀가. 걱정하지 마. ”

 

“ 당신한테도 사과 먹이면 어떡해. 흑... ”

 

 

왕재수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또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베르닌이 급하게 그를 달랬다.

 

 

“ 아니야, 안 그래. 국장이 로만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라. 걱정하지 마. ”

 

“ 사과 맛있었어. 예뻤어. 달았어. 시원했어. 독 있는 건 줄 몰랐어. 엉엉, 몰라서 먹은 거야. 진짜야. ”

 

“ 그래그래, 네 잘못 아니야. 우리 아기는 사과 좋아하잖아. 독 묻혀놓은 놈이 나쁜 거야. 네 잘못 하나도 아니야. ”

 

“ 더워. 목말라. 파인애플 먹고 싶어. ”

 

“ 지금 겨울이라 파인애플 파는 데가 없어. 배 깎아줄게 그거 먹자. 배도 달고 시원해. ”

 

“ 아니야, 배는 퍽퍽하고 파삭파삭해. 파인애플... ”

 

 

왕재수는 다시 파인애플 타령을 하면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베르닌이 배를 깎아서 한 조각 먹여주자 퍽퍽하고 떫다면서 뱉어버렸다. 두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스타브로프가 들어와서는 왕재수에게 다시 약초 달인 즙을 먹였다. 왕재수는 싫다고 발버둥치려다가 의사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고분고분하게 쓰디쓴 약초즙을 마셨다. 스타브로프는 미지근하게 적신 수건으로 왕재수의 이마를 닦아준 후 토닥토닥 재웠다.

 

 

“ 아직 열이 오르락내리락해서 그렇지. 그게 신경계 약물이라 정신 착란 증세가 좀 있어. 몸이 나아지면 착란도 가실 거다. 파인애플 타령하면서 헛소리하기 시작하면 열 오르는 거니까 그러면 나나 제냐를 불러. ”

 

“ 불쌍한 자식, 언제까지 이럴지. ”

 

먹고 싶은 걸 먹여주면 좀 나아질 텐데. 하고많은 것 중에 하필 파인애플인지. 안타깝구나. ”

 

 

의사가 혀를 차며 나갔다. 베르닌은 기필코 파인애플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코즐로프는 입술을 깨물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베르닌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고 휙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곰곰 생각하다가 병원을 나섰다. 차를 몰고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갔다. 출판문화국 옆 건물로 가서 비슈네브이 사드 편집실로 올라갔더니 깎아놓은 듯 잘생긴 남자 비서가 그를 맞아 주었다.

 

 

“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

 

“ 저는 다닐 베르닌인데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를 잠깐 볼 수 있을까요? ”

 

“ 음, 선약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어디에서 오셨나요? ”

 

“ 저어... 그러니까... 보안위원회... ”

 

 

비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검열국 쪽 공문은 벌써 다 처리했는데 또 무슨 문제가 있나요? ”

 

“ 아뇨, 그게 아니고요... 저,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 ”

 

 

그러자 비서는 알만하다는 듯 비웃는 표정을 띠었다.

 

 

“ 우리 편집장님에게 개인적으로 볼 일 있다고 찾아오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그냥 돌아가시죠. ”

 

“ 아니에요! 저... 저 데이트 신청하러 온 거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

 

“ 안드류샤!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

 

 

렐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렐렌카. 아무것도 아니에요. 또 추종자 하나가 찾아와서 귀찮게 굴어서요. ”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저예요! 다닐 베르닌!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1분만 시간 내주세요. 제발... 미샤 때문이에요. ”

 

다냐? 뭐라고요? 미샤?

 

 

렐랴가 문을 열더니 예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비서를 야단쳤다.

 

 

“ 왜 나 찾아온 손님을 못 들어오게 막고 있는 거야! 나한테 얘기도 안 해주고! 다냐는 나랑 잘 아는 사이인데. 앞으로 다냐 오면 곧장 들여보내!

 

 

베르닌은 잠시 의기양양하게 비서를 째려보고는 편집장실로 들어갔다. 렐랴의 사무실은 굉장히 예쁘고 아늑했다. 꽃향기가 떠돌았고 레이스 커튼에 결 좋은 나무 책장에 장식 달린 테이블에, 그야말로 여성적이고 우아한 방이었다. 티 테이블 위에는 사과와 오렌지, 초콜릿 캔디가 담겨 있는 예쁜 접시가 놓여 있었다. 과일 접시를 보니 희망이 솟았다.

 

렐랴는 그를 소파로 안내하며 상냥하게 물었다.

 

 

“ 차 마실래요, 다냐? ”

 

“ 어, 정말 감사한데요... 괜찮습니다. 시간이 없어서요. 저... ”

 

“ 미샤가 뭔가를 부탁했나요? 설마 제게 뭘 전해주라고? ”

 

 

렐랴가 기대에 찬 얼굴로 아름다운 회색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베르닌은 갑자기 미안해졌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 저, 그게 아니고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밖에는 도와주실 분이 없을 것 같아서요. 사실은 미샤가 많이 아프거든요. 그래서... ”

 

뭐라고요? 미샤가 아프다고요? 어머나, 어디가요? 아이 참... 불쌍한 미샤. 수용소에서 고생했다더니... 지금 어디 있는데요? 간호가 필요한가요? ”

 

 

렐랴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주섬주섬 스카프를 매더니 옷걸이에서 코트를 낚아챘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다. 당황한 베르닌은 더듬거렸다.

 

 

“ 어, 그게...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지금 면회는 안 되고요. 저, 그러니까... 파인애플... ”

 

“ 아니, 얼마나 아프면 면회도 안 된다는 건가요? 세상에... 불쌍한 미샤. 근데 뭐라고요? 파인애플? ”

 

“ 저어, 걔가 열이 많이 나서 그런지 자꾸 파인애플이 먹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과일 가게에 가도 파인애플이 없고, 지금 겨울이라 구할 데도 없다고 해서요.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당신은 우리 동네에서 요리도 제일 잘 하고 수입 식재료도 많이 쓰고 또 외국문학도 전공하셨고 집안도 좋으니까 파인애플도 구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 ”

 

“ 그랬군요. 고마워요, 다냐. 미샤가 아플 때 제일 먼저 나를 생각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음... 파인애플... 음... 어쩌죠? 아무리 생각해봐도 파인애플은 구할 데가 없는데. 내가 수입 식재료나 과일을 구해오는 루트가 있긴 한데 열대 과일은 취급을 안 해요. 내 요리에도 그쪽 과일들은 써본 적이 없거든요. 일단 모스크바에 있는 지인에게 한번 부탁해볼게요. 근데 아직 겨울이라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보통 모스크바에 있는 물건도 여기까지 받으려면 2~3일 걸리는데 지금은 아마 못 구할 거예요. 우리 연방 국가들 쪽이라면... 음, 중앙아시아 쪽에는 있으려나요? 아니지, 그쪽은 참외랑 수박이지... 아아, 어쩌면 좋죠. ”

 

 

렐랴가 속상해하다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비서에게 소리를 질렀다.

 

 

안드류샤, 모스크바에 전화 좀 넣어줘! 발레리야한테!

 

 

그리고는 잠시 후 전화가 연결되자 수화기를 꼭 붙들고 한동안 열띠게 대화를 나눴다. 베르닌은 제발 그 발레리야라는 모스크바 여인이 파인애플을 비행기로 특급 발송해줄 수 있다고 말해주기만을 빌었다. 그러나 잠시 후 렐랴가 전화를 끊더니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 파인애플은 안 된대요. 전에는 쿠바 쪽에서 들여왔는데 지금 그쪽에 무슨 병이 돌아서 검역 때문에 과일이 못 건너온대요. 어쩌죠, 다냐... 불쌍한 미샤, 다른 건 먹고 싶어 하는 거 없나요? 아참, 바나나 있어요. 바나나도 괜찮지 않을까요? 잠깐만요. ”

 

 

렐랴는 창가로 갔다. 바구니에서 바나나 한 송이를 꺼내고 냉장고에서 체리가 들어 있는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 미샤가 체리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이거 우리 별장에서 딴 거예요. 우리 벚나무는 양키들 체리처럼 열매가 달아요. 하나도 쓰지 않아요. 바나나도 어렵게 구한 거예요. 이거라도 가져가요, 다냐. ”

 

“ 고마워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이렇게 귀한 과일들을 챙겨주시다니. 정말 천사 같네요. 미샤도 고마워할 거예요. ”

 

“ 그런데 정말 내가 가서 간호해 주면 안 되나요? 여자의 손길이 필요할 것 같은데. ”

 

“ 의사 선생님이 지금은 안정해야 되니까 면회하면 안 된대요. 나아지면 말씀드릴게요. ”

 

“ 그래요, 다냐. 미샤가 아프다니 너무 속상해요. 바나나랑 체리 먹으면 나아질 거예요. 당신도 그 사람을 위해 파인애플 구하러 오고 착하네요. 혹시라도 발레리야가 파인애플 구하면 보내준다고 했으니까 들어오면 전화할게요. ”

 

 

렐랴는 예쁜 바구니에 바나나와 체리를 담아주고는 창가에 있는 커다란 유리병에서 아몬드 쿠키를 한줌 집어 손수건으로 싸주었다.

 

 

“ 다냐, 가면서 쿠키라도 먹어요. 왜 이렇게 뺨이 쏙 들어갔어요. 파인애플 구하러 다니느라 밥도 못 먹었나보네. 다음에 미샤 나으면 우리 집 놀러 와요, 맛있는 거 해 줄 테니까. 그럼 잘 가요. ”

 

 

베르닌은 바나나와 체리와 아몬드 쿠키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렐랴의 고운 마음씨에 가슴이 떨리도록 감동했다. 미모와 요리 솜씨와 비단결 같은 마음씨를 다 갖춘 보기 드문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까지 챙겨주며 쿠키를 싸주다니 정말 황홀할 지경이었다. 분명히 왕재수도 바나나와 체리를 보면 감동할 것이다. 바나나도 고급 과일 아닌가!

 

 

 

왕재수는 계속 자다 깨다 하고 있었다. 처음처럼 40도를 훨씬 넘는 고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열이 계속 났기 때문에 좀처럼 기운을 못 차렸다. 저녁이 되자 스타브로프는 왕재수를 깨우더니 엄격하게 말했다.

 

 

“ 이제 죽이랑 수프는 먹어도 되니까 먹어보자. ”

 

“ 싫어요. 입맛 없어요. 잘래요. ”

 

“ 먹어야 열도 내려가고 기운도 나는 거야! 먹은 게 없으니까 자꾸 자고 싶은 거다. 먹고 나아야 극장에도 나가지. ”

 

“ 파인애플 먹고 싶은데... ”

 

엄동설한에 파인애플이 어디 있다고 그러느냐! 자꾸 어리광부리고 파인애플 타령만 하면 약초즙을 한 냄비 먹일 테다!

 

“ 약초즙 싫어... 흑... ”

 

 

왕재수가 흠칫 놀라더니 구슬만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훌쩍훌쩍 울면서 의사가 주는 대로 묽은 오트밀을 한 숟가락씩 받아먹었다. 먹으면서도 계속 쓴 맛이 난다고 괴로워했다. 베르닌은 옆에서 살살 달랬다.

 

 

“ 야, 꾹 참고 다 먹어. 의사 선생님 말이 맞아. 먹어야 낫지. 다 먹으면 맛있는 거 줄게. ”

 

“ 파인애플? ”

 

“ 아니, 근데 파인애플보다 맛있는 거야. 그러니까 오트밀 다 먹어, 응? ”

 

 

왕재수는 꾸역꾸역 오트밀을 다 먹었다. 그래봤자 어린이용 접시에 담겨 있어 얼마 되지도 않았다. 의사가 베르닌에게 건더기 없이 맑은 국물만 우려낸 생선수프를 반 컵 건네주며 마저 먹이라고 말한 후 나가버렸다. 왕재수에게 음식 먹이는 것이 노의사에겐 크나큰 도전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왕재수는 냄새도 맡기 싫어했다. 베르닌이 살살 달랬다.

 

 

“ 이거 너 좋아하는 우하야. 생선 수프 좋아하잖아. 좀 먹어봐. 기름기도 하나도 없네. ”

 

“ 비린내 나. 엉엉... ”

 

“ 비린내 하나도 안 나. 내가 끓여주는 것도 잘 먹었잖아. 이건 마르가리타 이사예브나가 직접 만드신 거야. 진짜 맛있는 우하야. ”

 

“ 비린내 나고 쓰단 말이야. 흐흑... 파인애플... ”

 

“ 착하지, 코 막고 먹자. 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 먹어야 낫는다고. 이거 먹고 맛있는 거 먹자. ”

 

 

왕재수는 괴로워하면서도 손가락으로 코를 쥐고는 우하를 한 모금씩 꼴깍 삼켰다. 그래도 튜브로 주입하던 첫날이나 한 숟가락씩 힘들게 넘기던 둘째 날을 생각하면 많이 나아진 거였다. 간신히 반 컵을 다 먹은 왕재수가 헉헉거리면서 베르닌에게 파인애플을 내놓으라고 했다. 베르닌은 창가에 놔뒀던 바구니를 가져왔다. 바나나 껍질을 까 주었다.

 

“ 먹어, 바나나야. 렐랴가 줬어. 너 빨리 나으라고. ”

 

왕재수는 고개를 저었다.

 

“ 안 먹어. 바나나 싫어. ”

 

“ 좀 먹어봐. 파인애플보다 바나나가 더 달고 맛있어. 이것도 수입이야. 비싼 거잖아. ”

 

“ 바나나 텁텁해. 목말라. 싫어. ”

 

 

베르닌은 바나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고 부드럽고 정말 맛있었다. 일부러 더 맛있게 먹었다.

 

 

“ 으음, 맛있다. 진짜 달다. 먹어볼래? ”

 

“ 너 다 먹어. ”

 

“ 어휴. 그럼 체리 먹어. 너 체리 좋아한다며. 렐랴가 별장에서 딴 거래. 그때 버찌잼도 이걸로 만들었나봐. 그 잼도 진짜 맛있었어. ”

 

 

왕재수는 체리를 두 알쯤 먹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씨를 뱉더니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파인애플 아니잖아. 분명히, 분명히 비린내 나는 거 먹으면 파인애플 준다고 했는데. ”

 

“ 내가 언제! 파인애플만큼 맛있는 거 준다고 했지! ”

 

“ 파인애플 왜 없어? 흑... ”

 

제발 그만 좀 해라! 이 겨울에 파인애플을 어디서 구하니! 여기가 무슨 미국이냐? 가게에도 없고 렐랴도 못 구한다잖아! 귀한 바나나까지 챙겨줬는데 그냥 이걸로 안 되니? 아프다고 자꾸 어리광만 부릴래?

 

 

“ 어... 다닐... 나한테 화내... 소리 질러. 흑... 무서워... 엉엉... ”

 

 

왕재수가 부들부들 떨더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굉장히 서럽게 울었다. 당황한 베르닌이 다가가자 무서워하면서 몸을 홱 웅크렸다.

 

 

“ 엉엉, 다닐이 나한테 소리 질러. 안 그랬는데 막 화내. 흑, 이제 막 때리려고. 소리 지르고 때리고 가두려고. 엉엉, 무서워. 로만... 엉엉... 유라, 유라 어딨어. 엉엉... ”

 

 

왕재수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면서 목을 놓아 울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어쩔 줄을 몰랐다. 최대한 목소리를 상냥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

 

 

“ 아니야, 나 소리 안 질러. 화 안 내. 미안해, 네가 바나나 안 먹어서 그랬어. 안 그럴게. 울지 마. 안 무서워. 나 하나도 안 무서워. 아무도 안 때려, 가두는 사람 없어. 아이 참 어떡하지... ”

 

 

베르닌이 계속 달래자 왕재수가 이불 사이로 눈만 빼꼼 내밀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열이 나서 얼굴도 눈동자도 새빨갰다.

 

 

‘ 아 맞다, 파인애플 타령하면 열 올라서 헛소리하는 거랬지. 독약 때문에 착란증도 있다고. 화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가뜩이나 소리 지르면 싫어하는 앤데. ’

 

 

다행히 왕재수는 베르닌이 어르고 달래자 곧 진정되었다. 울음도 그쳤다. 하지만 바나나와 체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아, 내 목걸이!

 

“ 어, 그거... 그거 그저께 의사 선생님이 풀어놨어. 너 열 때문에 막 몸부림쳐서 잘못하면 다친다고. ”

 

“ 안 돼... 내 목걸이. 유라가 준 건데... 목걸이... ”

 

 

왕재수는 엄마 잃은 어린애처럼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급하게 침대 곁에 있는 간이 캐비닛을 열었다. 손수건에 잘 싸놓았던 목걸이를 꺼냈다. 왕재수에게 보여주었다.

 

 

“ 자, 이거 봐. 여기 있잖아. 걱정하지 마. ”

 

“ 목걸이... 이리 줘. 흑... ”

 

 

왕재수가 목걸이를 홱 낚아챘다. 손으로 꼭 쥐었다. 하지만 손아귀에 힘이 없어서 목걸이가 주르르 미끄러져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왕재수가 또 기절할 것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재빨리 목걸이를 주웠다. 옷자락에 슥슥 닦은 후 왕재수의 목에 걸어주었다. 지금은 몸부림치지는 않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목걸이를 걸어주자 왕재수는 눈에 띄게 얌전해졌다. 손으로 십자가를 문지르더니 ‘아이, 파인애플...‘ 하고 두어 번 중얼거리고는 한숨을 폭 쉬고 갑자기 베개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잠이 들었다.

 

 

 

*   *   *

 

 

 

 

왕재수가 잠든 후 베르닌은 병실을 나왔다. 굳은 결심을 하고 구시가지의 작가 공방들을 지나 허름한 건물로 갔다. 이미 8시가 다 되어 있었기 때문에 문이 닫혀 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계단에서 보랴와 마주쳤다. 지난번처럼 군복 조끼 차림에 험상궂은 몰골이었다. 베르닌은 청어 통조림이 없는데 어떡하지 하고 순간 움츠러들었지만 보랴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 어, 너 왔구나. ”

 

“ 어, 안녕하세요. 기억하는군요. ”

 

“ 같이 보드카 마셨잖아. 당연히 기억하지. 바냐 보러 왔냐? ”

 

“ 예... ”

 

“ 근데 예쁜이는 어디 가고 너 혼자 와. ”

 

“ 어, 저... 무슨 얘긴지... ”

 

“ 우리 예쁜이 있잖아. 미셴카. 너랑 친하잖아. ”

 

“ 헉... 그걸 어떻게 알아요? 바냐가 분명히 고객들의 개인 정보에는 관심 없다 했는데! ”

 

“ 그거야 바냐가 그런 거지! 너 걔랑 친한 거 아니야? 식당에도 같이 몇 번 왔잖아. ”

 

“ 엥, 무슨 식당이요? ”

 

“ 너 우리 식당에 가끔 밥 먹으러 오잖아. 예쁜이는 더 자주 오고. ”

 

“ 엥? 식당? 당신 식당에서 일해요? ”

 

“ 스베촉. 나 거기 주방에 있거든. 예쁜이가 내가 해주는 요리 맛있다고 자주 오지. 여긴 부업 뛰는 거고. ”

 

 

베르닌은 기억을 더듬었다. 왕재수와 가끔 가는 극장과 이콘 박물관 사이에 있는 그 식당 이름이 스베촉이었던 것 같았다.

 

 

“ 엇, 당신 그 식당 요리사예요? 거기 음식 맛있던데. ”

 

“ 흠흠, 내가 좀 요리를 잘 하지. 지난 일요일에도 걔가 자기네 극장에 점심 좀 맞춰 달라 해서 내가 힘 좀 썼지. ”

 

“ 아, 맞아... 공연 때문에 무용수들 점심 그 식당에서 주문했다고... 그렇구나. 되게 의외네. ”

 

“ 뭐가 의외야! 내가 요리 잘 하는 게 의외냐? ”

 

“ 어... 예. 근데 뭐... 하여튼 엄청 맛있더라고요. 그렇구나. 아, 그래서 걔한테 요리책도 준 거구나.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보랴는 그를 안으로 데려갔다. 투레츠키가 예의 그 새빨간 소파에 비스듬하게 드러누워 담배를 피우며 음정과 박자가 전혀 안 맞는 노래를 흥얼대고 있었다. 랄라랄라 하고 휘파람을 불다가 베르닌을 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 어이 친구!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감사는 잘 넘겼냐? 안 잘렸어? ”

 

“ 어, 응... 덕분에. ”

 

“ 그래? 역시 2번을 쓴 거야? 동료 팔아넘기기... ”

 

“ 아니. 다행히 감사관이랑 아는 사람이 있어서 도와줬어. 그래서 징계를 안 받았어. ”

 

아, 그건 0번이지. 근데 너는 딱 보니까 그런 줄 같은 건 없어보여서 말 안했던 건데 구르는 재주가 있었구나. 아쉽네, 차라리 그때 잘렸으면 나랑 동업하는 건데. 하여튼 어서 와. 술 한 잔 할래? ”

 

“ 어, 고마워. 근데 오늘은 물건 좀 구하려고... ”

 

“ 그래? 뭔데? 말만 해. 다 있어. 없으면 구해줄 수 있고. ”

 

 

베르닌은 심호흡을 했다. 정말 이곳만큼은 오고 싶지 않았다. 투레츠키를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남은 희망이라고는 여기뿐이었다.

 

 

“ 파인애플. ”

 

“ 파인애플? 먹는 파인애플 말이야? ”

 

“ 응. 혹시 있어? 그거 수입이잖아. 너 밀수품들 다루잖... ”

 

야, 말조심해! 밀수품이라니. 다 내가 괜찮은 애들에게서 괜찮은 루트로 구해 오는 건데. 같은 말이라도 그렇게 하냐! ”

 

“ 어, 미안... 하여튼 넌 외제 다루니까... 파인애플 있어? 그러니까... 아픈 애가 있어서 자꾸 파인애플을... ”

 

“ 에이, 됐어. 사정 얘기할 필요 없어. 내가 그랬잖아, 고객의 개인적 정보는 취급 안 한다고. 그러니까 파인애플이 필요하다는 거지? 음, 파인애플이라... 지금은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잠깐 기다려봐. 물건이 많으니까 어쩌면 있을지도 몰라. 좀 앉아라. 내가 찾아보고 올 테니까. 근데 파인애플은 좀 비싸. ”

 

“ 으응... 비싸겠지... 그래도 있으면 살 거야. ”

 

“ 알았어. 좀 기다려봐. ”

 

 

돈 문제를 확인한 후 투레츠키는 잡동사니들 사이를 여기저기 헤집고 다녔다. 뭔가 그만의 질서에 따라 물건들을 배열해 놓은 모양인지 기호와 숫자를 중얼중얼대며 한동안 계속 잡동사니를 뒤졌다. 그러더니 혀를 찼다.

 

 

“ 지금은 없구만. 급하게 필요한 거야? ”

 

“ 어, 구할 수 있는 거야? ”

 

“ 못 구하는 게 어딨냐. 돈만 있으면 다 구하지. ”

 

“ 그치만... 렐랴에게 물어보니 지금 쿠바에서 전염병이 돌아서 검역 때문에 과일이 못 들어온다고... 중앙아시아, 수박, 참외... ”

 

“ 야, 너 지금 나 무시하냐? 내가 누군데! 난 바냐 투레츠키라고! 내가 못 구하는 건 없어! 언제까지 필요해? ”

 

“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내일은 아무래도 안 되려나? ”

 

“ 글쎄다. 이건 멀리서 가져오는 거라. 내일은 어렵겠는데. 모레까지는 들어올 거야. ”

 

“ 저, 혹시라도 내일 늦게라도 들어오면 나한테 연락해줄 수 있어? 전화번호 적어줄게. ”

 

“ 그래. 알았어. 속달은 비용 더 붙는데. ”

 

“ 그래도 부탁 좀 할게. 진짜 너밖에 없어. 그거 구해줄 사람... 부탁이야. ”

 

“ 흠, 그래. 내 능력이라면 구할 수 있지. 걱정 마. 자, 이제 됐으니까 술 한 잔 하자! 참, 너 생각 좀 해봤냐? 그 왕꼴통 스페호프랑 일하는 거 때려치우고 나랑 동업. 짭짤하게 쳐준다니까. 재미없잖아, 공무원 노릇. 뭐하러 그 병신들 뒤치다꺼리 해주냐. 나라 위해 목숨 바칠 일 있냐. 그놈들 다 사기꾼인데. ”

 

 

베르닌은 평소 같았으면 ‘아니야! 나는 국가와 인민을 위해 일해! 사명 의식이 있어!’라고 반박했겠지만 왕재수가 이렇게 되고 나니 딱히 부정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 응, 네 말도 일리가 있는데... 그냥 난 적성에 안 맞는 거 같아. 책상물림이잖아. 그래도 생각해 줘서 고마워. 그럼 너만 믿고 갈게. ”

 

“ 에이, 나랑 동업하지. 그럼 파인애플쯤은 공짜로 구해줄 수 있는데. ”

 

 

투레츠키는 못내 아쉬워했지만 그것도 잠시, 베르닌이 문 쪽으로 걸어가자 다시 빨간 소파에 드러누워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건물을 나와서 차에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보랴가 그를 툭 쳤다.

 

 

“ 야, 그 아프다는 애 혹시 우리 예쁜이야? ”

 

“ 어... 네. ”

 

“ 어쩐지. 그래서 어제 안 왔구나. 원래 어제 우리 집 와서 블린 구워먹기로 했었는데. 많이 아프냐? ”

 

“ 열도 많이 나고 헛소리도 하고 그래요. ”

 

쯧쯧. 그랬구만. 열나면 기력이 떨어지니까 보양식을 좀 먹어야 할 텐데. ”

 

“ 제대로 못 먹어요. 아파서 그런지 전부 다 씁쓸하고 비린내 난다고... 억지로 죽이랑 수프 먹이고 있어요. ”

 

“ 불쌍한 것. 그 조그맣고 귀여운 것이 아프다니. 나 일요일에 공연도 봤는데. 걔가 표 줘서. 춤도 엄청 잘 추더구만. 완전 날아다니고. 너무 열심히 춰서 몸살났나보구나. 그래, 지금 병원에 있냐? ”

 

“ 네. 근데 지금 면회는 안 돼요. ”

 

“ 알았다. 빨리 나아야 할 텐데. 나중에 우리 식당에 밥 먹으러 와라. 너 오면 많이 퍼 줄게. ”

 

 

보랴와 헤어진 후 베르닌은 병원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왕재수는 더 이상 칭얼거리지 않고 깊게 잠들어 있었다. 그는 바나나와 체리, 아몬드 쿠키를 좀 집어먹고 보호자용 간이침대에 누워서 또 하느님에게 ‘제발 파인애플을 구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한 후 잠이 들었다.

 

 

 

*   *   *

 

 

 

다음날 아침에 베르닌은 잠깐 사무실에 들렀다. 전날도 정신이 없어 전화 보고를 깜박했기 때문이다. 스페호프는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 그래, 그놈은 어떤가? 벌써 다 나았나? ”

 

“ 아니오, 아직도 아픕니다. 헛소리도 하고요, 열도 안 떨어지고. 잘 먹지도 못하고요. ”

 

“ 아이고 고소해라. 극장에서도 우리를 의심하는 기색은 없더군. 역시 그때 자네의 연기가 한 몫 했던 거야. 건방진 녀석, 이제 버릇이 좀 들었겠지. 내일 그 망할 돈키호테인지 뭔지를 또 하던데, 어디 다시 한 번 올라가서 그 방정맞은 춤을 춰보라 하고 싶군. 하하하. ”

 

“ 그런데 레베진스키가 사과에 약물을 묻혀놨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이 휴가를 냈던 건가 보네요. ”

 

“ 그렇지. 알리바이가 필요하니까 미리 약을 묻혀놓고 곧장 휴가를 가라고 했지. 불여우를 빨리 해치워야 그 친구가 감독직을 맡을 텐데. 우리 KGB를 위해 많이 애쓴 친구니까 잘 돼야 할 텐데. ”

 

“ 예. 저는 그럼 다시 병원으로 가 보겠습니다. 제가 여기 와 있는 걸 알면 혹시라도 의심받을지 모르니. ”

 

“ 옳지. 그러게나. 아참 그렇지. 가는 길에 총무부에 가서 업무추진비를 좀 타 가게. ”

 

“ 예? 무슨 명목으로... ”

 

“ 어쨌든 그놈은 우리 소관 죄수니까, 입원까지 했으니 문병용 과일바구니라도 좀 사가란 말일세. 이것은 우리 가브릴로프 KGB에서 공식적으로 보내는 것일세. 국장인 내 이름으로 말이지. 여기 내가 카드도 쓰고 리본도 준비했네. 이것을 달아서 주란 말일세. 그래야 우리 KGB가 그놈을 잘 돌봐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고 행여 있을지도 모르는 크레믈린의 의심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지. 암, 기관장인 내가 이렇게 공적으로 쾌유 카드와 선물까지 보내는데! ”

 

 

베르닌은 잠시 스페호프를 빤히 쳐다보았다. 뱃속이 뒤틀려왔다. 당장이라도 의자를 휘두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는데 스페호프는 그것을 감탄의 시선으로 오해하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자네도 나중에 연륜이 쌓이면 이 정도는 할 수 있게 된다네. 자, 이 리본과 카드를 가져가게나. 총무부에는 내가 얘기해뒀네. 국장 명의라 좀 두둑하게 편성하라 했으니 받아가게. 남은 걸로는 저녁이라도 사먹게. 불여우 녀석 간호해주는 척 하느라 얼굴이 많이 상했군. 그럼 어서 들어가게. ”

 

 

베르닌은 리본과 카드를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총무부에 가서 업무추진비를 수령했다. 20루블이나 들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국장실에 달려가 스페호프의 면전에 돈을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다시 꾹 참고 병원을 나왔다. 투레츠키가 구해 주는 파인애플은 비싸게 먹힐 테니 그 값이나 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원으로 가려다가 너무 우울하기도 하고 극장 분위기가 어떤가 싶기도 해서 그는 차를 몰고 구시가지로 갔다. 가는 길에 잠깐 공원에 내려서 바람을 좀 쐬니 기분이 약간 나아지는 것 같았다. 여전히 추웠지만 그래도 바람이 약간 부드러워진 것을 보니 3월이 오긴 온 모양이었다.

 

벤치에 앉아 멍하게 스페호프의 카드와 리본을 뒤집으며 찢어버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그를 탁 쳤다.

 

 

“ 여기서 뭐하냐? ”

 

“ 어, 당신. 왜 극장에 안 들어가고... ”

 

“ 리허설은 오후부터라서. ”

 

 

코즐로프였다. 언제나처럼 말끔한 옷차림이었다. 베르닌은 그의 곁에 있는 커다란 개를 보고 깜짝 놀랐다.

 

 

“ 어, 당신 개 키워요? ”

 

“ 아, 우리 부모님 댁에서 키우는 놈인데 잠깐 데려왔어. ”

 

“ 몰랐어요, 당신 개 좋아하는 줄. 깔끔 떠는 성격이라 싫어할 거 같은데. ”

 

“ 별로 싫어하진 않는데 좋지도 않아. 개 털 빠지는 거 싫어. ”

 

“ 근데 왜 데리고 왔어요? 부모님이 여행이라도 가셨나요? ”

 

“ 어, 그게 말이지... 음, 우리 아기 때문에. ”

 

“ 엥, 미샤요? 왜요? ”

 

“ 그 녀석이 개를 좋아하는 거 같아서. 저번에 너랑 같이 주웠다는 그 멍멍이 말이야. 주인이 찾아가고 나서 어찌나 실망을 하는지. 전에도 갑자기 나보고 고향집에는 멍멍이 없느냐고 묻는 거야. 있다고 했더니 좋겠다면서, 멍멍이 귀엽다고, 벌레도 잡아주고 자기가 노래 불러주면 좋아하고 자기한테 재롱도 부린다면서. 멍멍이 있는 집 좋겠다는 거야. ”

 

“ 그랬구나. 벨라 가고 나서 막 울더니만. 쳇, 데리고 있을 때는 똥개라고 짜증내더니. ”

 

“ 그래서 우리 아기 기분 좀 전환될까 하고 부모님 댁에 가서 이놈 데리고 온 거지. 이름은 흘롑. 시커먼 색이라. ”

 

“ 어, 근데요... 그게... ”

 

 

베르닌은 개를 한 번 보고 코즐로프를 한 번 봤다. 한숨을 쉬었다.

 

 

“ 저 있잖아요, 그때 그 강아지, 벨라, 아니 뜨보록 걔는 엄청 작고 귀여웠거든요. 겨우 요만하고... 온통 하얀색에 털도 복슬복슬하고 눈도 동그랗고... 품에 쏙 들어오고 장난 아니게 재롱둥이였어요. 근데 이놈은 너무 크고 못생겼는데... ”

 

 

베르닌이 그렇게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흘롑은 사냥개와 농장견을 합쳐놓은 모양새의 잡종이었는데 덩치가 아주 컸고 털도 북슬북슬한데다 시커멓고 얼굴도 험상궂었다. 게다가 자기를 헐뜯는 것을 눈치 챘는지 베르닌 쪽을 노려보며 으르르르 하고 위협적으로 목을 울려댔다. 코즐로프는 흘롑의 목줄을 잡아당기며 엄하게 말했다.

 

 

안 돼.

 

“ 끼잉... ”

 

“ 어, 말은 잘 듣네요. ”

 

“ 내가 강아지 때부터 훈련시켰으니까. ”

 

“ 개 안 좋아한다면서요. ”

 

그건 그거고! 똥개 밥값은 시켜야 할 거 아냐! 내가 우리 부모님 농장 지키라고 사 드린 놈인데. 근데 정말 얘 안 귀엽냐? ”

 

“ 당신 눈엔 얘가 귀여워요? ”

 

“ 하긴... 좀 크긴 하지. 우리 아기는 안 좋아하려나. ”

 

 

베르닌은 어이가 없었다. 말이라고 하느냐고 하려다 갑자기 왕재수가 투레츠키는 못생겼다고 하고 보랴를 멋있다고 하던 게 떠올랐다.

 

 

“ 어, 음... 글쎄요. 귀여워할지도 모르겠네요. 근데 지금은 안 될 걸요. 걔 아프잖아요. 세균 옮을지도 모른다고 의사 선생님이 못 데리고 들어오게 할 거예요. 낫고 나면 모를까... ”

 

하긴 그렇지. 리허설 하는 동안 극장 뒤에 묶어놔야겠다. 근데 그건 뭐냐? ”

 

“ 아... 에잇! 나쁜 놈!!

 

 

베르닌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서 리본을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스페호프의 위선적인 행태에 대해 간단하게 말해 주었다. 코즐로프는 길길이 날뛰는 대신 가느다란 푸른 눈을 더욱 가느다랗게 뜨고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 그래, 그렇단 말이지. 우리 아기한테 독 묻은 사과 먹여놓고 보란 듯이 위문 선물이랑 카드를 보내겠단 말이지. ”

 

아뇨! 선물 안 사요! 카드도 안 줄 거예요! 내가 미쳤습니까! 이깟 놈의 카드! 에잇!

 

“ 뭐라고 썼는지나 좀 보자. ”

 

 

코즐로프가 베르닌의 손에서 리본과 카드를 빼앗았다.

 

 

수신 : 가브릴로프 시립극장 예술감독 미하일 야스민.

귀하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발신 :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지국장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흠. 재미없는 놈. 역시 얼간이야. ”

 

나쁜 인간이에요! 여태 나도 얼마나 들들 볶았는데... 서무랍시고 맨날 부려먹고 툭하면 불러다 설교하고... 다 찢어버릴 거야!

 

“ 놔둬. 가져가서 연구 좀 해 보게. 한방 먹여줄 거야. ”

 

 

코즐로프는 리본과 카드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시계를 보더니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래서 둘은 흘롑을 극장 뒤뜰에 묶어놓고 경비원에게 봐달라고 한 후 스베촉에 갔다. 본격적인 점심시간은 아직 아니었기 때문에 자리가 많았다. 주문을 하는데 보랴가 주방에서 나왔다.

 

 

“ 야, 너 왔구나. ”

 

“ 예. 지나가다 들렀어요. 여긴 로만. ”

 

알아. 지난번에 예쁜이가 소개시켜줬어. 로만하고는 벌써 술도 한 잔 같이 했지. 알고 보니 이 친구랑 나랑 초등학교 동기더라고. 귀염둥이 아프다며. 걱정 많겠네. ”

 

“ 뭘 좀 먹어야 할 텐데 그게 걱정이야. 못 먹으니까 자꾸 잠만 자려고 한다니까. ”

 

에그, 불쌍해라. 애기가 얼마나 아플꼬. 안 그래도 내가 어제 얘기 듣고 보양식 좀 만들어놨어. 있다가 싸 줄 테니까 가져다 좀 먹여. 그게 아플 때 진짜 좋은 거거든. 땀 한번 쭉 빼고 나면 금방 나아. 기력도 회복되고. ”

 

“ 그래, 고맙다. ”

 

 

점심을 먹으면서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보랴랑 아는 사이였다니. 심지어 초등학교 동기라고요? 근데 저 사람 미샤한테 집적대던데. 어째 그건 그냥 놔두나요? ”

 

“ 보랴가 귀여운 애를 좋아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사내애랑 놀아나는 취미는 없거든. 저 친구가 십대 때 사고 쳐서 아들을 낳았는데 걔가 아파서 일찍 죽었어. 근데 미셴카가 죽은 아들이랑 닮았대. 저 친구 생긴 걸 보면 죽은 애가 그렇게 예뻤을 리야 없겠지만. 하여튼 그래서 우리 귀염둥이를 엄청 예뻐해. ”

 

“ 아, 그런 거였구나. 난 또...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했던 자신을 마음속으로 꾸짖었다. 식사를 다 하고 계산을 하는데 보랴가 나왔다. 보자기로 꼭꼭 싼 보온병을 건네주었다.

 

 

“ 이거 가져가서 애기 먹여라. 뜨거울 때 먹어야 돼. 식으면 한번 데워서 주고. 이거 진짜 몸에 좋은 거야. 소화 잘 되는 밤이랑 몸 따뜻하게 해주는 생강이랑 약초랑 넣어서 닭고기랑 푹푹 고았어. 예쁜이는 기름기 많으면 안 먹으니까 기름도 다 걷어내고 맑은 국물만 한번 걸러서 건더기랑 섞은 거야. 푹 고아서 건더기도 거의 젤리 형태니까 살살 먹으면 돼. 소화 잘돼. 토하는 것도 잡아주고. 꼭 가져가서 먹여라. ”

 

“ 어, 고마워요, 보랴. 당신이 줬다고 하면 분명히 먹을 거예요. ”

 

“ 그래그래. 빨리 나아야 할 텐데. 애기 나으면 데리고 너희들 다 놀러와. 우리 집에서 놀자. ”

 

“ 고맙다, 보랴. 나중에 보자. ”

 

 

보랴는 코즐로프의 등을 탁 치고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베르닌은 보자기에 싼 보온병을 소중하게 들고 나왔다. 코즐로프는 리허설을 한 후 저녁에 들르겠다면서 극장으로 돌아갔다. 베르닌은 병원으로 갔다.

 

 

 

*    *    *

 

 

 

 

왕재수는 깨어 있었다. 전날보다는 좀 나아진 것 같았다. 아직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의 초점도 흐렸지만 그래도 베르닌을 보자 좋아했다.

 

 

“ 너 어디 갔었어? 하루 종일 없고. ”

 

“ 뭐가 하루 종일이니. 이제 열두시 반이네. 점심 먹어야지. ”

 

“ 안 먹어. 먹기 싫어. ”

 

“ 먹기 싫어도 먹어야 낫지. ”

 

“ 너무 쓰단 말이야. 맛없고 비리고... ”

 

“ 이거 봐. 아까 보랴 만났어. 보랴가 너 아프다니까 걱정하면서 이거 만들어줬어. 너 꼭 먹으래. 이거 먹으면 낫는대. 보양식이라서 소화도 잘되고 몸도 따뜻해지고 기력도 보충된대. 그러니까 좀 먹어보자. ”

 

“ 싫어, 안 먹어. 먹기 싫단 말이야. ”

 

“ 그래도 보랴가 너 먹으라고 만든 거잖니. 너 보랴 멋있다며. ”

 

“ 으응, 보랴 멋있어. 흑, 그래도 먹기 싫은데. ”

 

“ 보랴 성의를 봐서 한 숟가락만 먹어보자. ”

 

“ 으응... ”

 

 

베르닌은 의사에게 보온병의 내용물을 보여주고 먹여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후였다. 뚜껑을 열자 김이 펄펄 올라오는 게 아직도 뜨끈뜨끈했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릇에 반쯤 부었다. 으깬 밤과 생강편, 닭고기가 푹 익어서 숟가락만 대도 젤리처럼 몽글거리며 으깨졌고 맑은 국물은 투명할 지경이었다. 베르닌은 혹시라도 너무 뜨거울까봐 자기가 먼저 한 숟가락 먹어보았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다! 항아리 닭고기는 비교도 안 돼! 혀에서 그냥 녹는 거 같아. 와... 내가 떠줄게, 한번 먹어봐. ”

 

“ 맛있으면 너 다 먹어. ”

 

“ 무슨 소리야, 보랴가 너 먹으라고 만들었다잖아. 이 정도로 푹 고아서 만들려면 밤새 불에 얹어 놨을 텐데. 정성을 생각해야지. 아 해봐. ”

 

“ 힝... ”

 

 

왕재수는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베르닌이 숟가락을 내밀자 할 수 없이 받아먹었다. 두 번째 숟가락도 먹었다. 하지만 세 번째는 거부했다.

 

 

“ 이제 됐어. ”

 

“ 왜 그래, 더 먹어봐. 맛있는데. 진짜 정성들여 만든 건데. 보랴가 만들어 준 거잖아. ”

 

“ 먹기 싫어. 더워... ”

 

“ 먹고 땀 빼면 낫는 거래. ”

 

“ 더워. 달고 시원한 거 먹고 싶어. 파인애... ”

 

 

베르닌은 급하게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릇을 치웠다. 왕재수가 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하염없이 불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파인애플 타령을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재수는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 흑... 파인애플 없는데... 없는 거 알면서 자꾸 달라 해서 미안해. 엉엉... ”

 

“ 어, 너 정신 좀 들었구나. 파인애플 못 구하는 것도 알고. ”

 

“ 어떻게 구해, 여기 시골인데. 미안해. ”

 

“ 괜찮아. 아프니까 먹고 싶은 거야. 미안해, 못 구해다 줘서. 근데 내가 어디 부탁해놨거든. 내일은 파인애플 구해올 수 있을지도 몰라. ”

 

“ 정말? 근데 내일이면... 나 지금 너무 더워. 여기도 뜨겁고 머리도 아프고... 여기 너무 답답해. 머리부터 몸 안이 다 쪼개지는 것 같아.

 

 

왕재수가 이마와 가슴을 손으로 문지르면서 괴롭게 숨을 몰아쉬었다. 심호흡을 해보려고 애를 썼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등을 쓸어주고 손목을 문질러 주면서 호흡을 도와주었다. 왕재수는 많이 힘든지 얼굴을 찡그리며 눈물을 흘렸다.

 

 

“ 아이, 독사과나 먹이고. 진짜 나빠. 흑... 달고 시원한 거... 파인애플... ”

 

“ 조금만 참아. 내일 파인애플 줄게. 그때까지 보랴가 만들어준 거랑 약초즙이랑 먹자. ”

 

“ 약초즙 싫어. 너무 써서 토할 거 같아. ”

 

“ 그래도 그거 먹어서 너 좀 나은 거야. 처음엔 이렇게 말도 못하고 나 알아보지도 못했어. 약초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그 풀 내가 수도원 가서 캐온 거니까 써도 참고 먹어야 돼. ”

 

“ 네가 캐왔어? 어떻게? ”

 

“ 응, 나무 숟가락이랑 바구니랑 들고 가서 수도원 뒤뜰에서 신부님이랑 같이 캤어. 신부님도 너 빨리 나으라고 같이 캐주시고 기도도 해주셨어. 그러니까 약초즙 먹어. ”

 

“ 시골이라서 풀도 캐는구나. ”

 

 

왕재수는 아픈 것도 잠시 잊었는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때다 싶어서 베르닌은 닭고기 수프를 다시 한 숟가락 떴다.

 

 

“ 조금만 더 먹어. 먹을 땐 더워도 땀 흘리고 나면 시원해질 거야. 진짜야. 이렇게 뜨끈한 수프 먹고 땀 빼는 거 원래 우리 동네 민간요법이야. 이거 먹고 약초즙 먹고 한숨 자면 훨씬 나을 거야. ”

 

거짓말. 선생님도 그런 말 하면서 이상한 거 자꾸 먹였는데 계속 아픈데. ”

 

“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단 말이야. 어제보단 덜 아프잖아, 그치? 그저께보다는 더 많이 안 아프고. ”

 

“ 몰라. 그저께는 기억 안 나. 어제는 많이 아팠어. 지금도... ”

 

 

왕재수는 그래도 수프를 몇 숟가락 더 먹었다. 그릇의 절반쯤을 비웠다. 그리고는 고분고분하게 약초즙도 먹었다. 다 삼키고 나서는 물을 마셨다. 더운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숨을 헐떡거렸다.

 

 

“ 더워. 너무 더워. ”

 

“ 창문도 열어 놨는데... 밖은 추워. ”

 

“ 너무 더워. 아... 파인애플... 흑... ”

 

 

왕재수가 훌쩍거리며 다시 파인애플을 찾기 시작했다. 수프 때문인지 아니면 아파서 열이 오르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베르닌은 의사를 데리러 갔다. 스타브로프가 왔을 때 왕재수는 이불을 모두 차 내고 얼굴이 빨개진 채 쌕쌕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이따금 깜짝깜짝 놀라면서 ‘파인애플...‘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의사는 이불로 왕재수를 꽁꽁 싸주고는 몇 가지 검사를 했다.

 

 

“ 그래도 어제보다는 나아졌어. 헛소리도 덜 하고. 땀이 나면 한결 낫긴 할 텐데. 아직도 파인애플만 찾는구나. 그놈의 파인애플 하늘에서 좀 내려와 주면 좀 좋아. ”

 

“ 근데 정말 파인애플을 먹으면 나아질까요? ”

 

“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니까 도움이 되긴 하겠지. 감옥에 있을 때부터 하도 나쁜 일을 당해서 많이 놀란 것 같구나.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왕재수는 뜨거운 걸 먹었는데도 땀도 제대로 흘리지 않고 얼굴만 빨개진 채 계속 숨을 헐떡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자꾸 파인애플 타령을 할 땐 답답하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지만 오죽 아프면 그럴까 싶기도 하고 자기가 소속된 조직에서 위해를 끼쳤다는 사실에 가책도 느껴져서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간호사가 들어왔다.

 

 

“ 다냐, 전화 왔어요. ”

 

“ 네? 어디서요? ”

 

“ 무슨 투레츠키라고... ”

 

“ 엇, 잠깐만요! ”

 

 

베르닌은 급하게 뛰어나갔다.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 야, 물건 들어왔어. 가지러 와. ”

 

“ 어, 진짜? 지금 갈게! ”

 

 

그는 코트를 걸치는 것도 잊고 후다닥 달려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   *   *

 

 

 

 

투레츠키는 의기양양하게 그를 맞이했다.

 

 

“ 야, 내가 힘 좀 썼다. 원래 이틀이 기본인데 너랑 나랑 친구니까 속달로 해달라고 갈군 거야. ”

 

“ 고마워, 바냐. 진짜 고마워. 너 정말 대단하구나. 역시... 괜히 전설의 서무가 아니었어. ”

 

“ 내가 전설의 서무는 맞지만 서무랑 이건 차원이 다르지. 근데 속달 요금이 더 붙어. 나 외상 취급 안하는 거 알지? 원래는 무조건 선불 아니면 계약금 걸어야 되는데 넌 친구니까 내가 그냥 가져온 거야.

 

“ 고마워. 지금 돈 줄게. 얼마야? ”

 

“ 파인애플은 10루블, 운송비 10루블, 속달 추가요금 10루블. 30루블인데 넌 친구니까 5루블 깎아줄게. ”

 

 

엄청나게 비쌌지만 베르닌은 두말하지 않고 지갑을 꺼냈다. 스페호프가 준 20루블에 사비 5루블을 보탰다. 기관 업무추진비를 쓰는 것도 전혀 가책이 되지 않았다. 분명히 스페호프가 왕재수의 문병 과일바구니를 사라고 했다. 그리고 국장과 KGB가 왕재수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금고를 다 털어도 모자랐다. 투레츠키는 돈을 받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오우, 화끈한데. 너 의외로 돈 쓸 줄 아는구나. 여자냐? 좋아하는 여자가 먹고 싶어 하는 거구나. 그럼 돈이 문제가 아니지. ”

 

“ 아니, 그게 아니라 누가 아파서... ”

 

“ 됐어. 나도 참, 개인적인 거 안 물어보는 게 철칙인데 네가 너무 예상외로 돈을 척 내놔서 순간 궁금했네. 이리 와. 물건 줄 테니까. ”

 

 

베르닌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투레츠키를 따라 창가로 갔다. 투레츠키는 보따리 몇 개를 치우고는 커다란 종이 상자를 끌어당겼다. 베르닌도 파인애플을 실물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기대감이 증폭되었다. 파인애플은 큰 과일이니까 상자도 큰 것 같았다.

 

그때 투레츠키가 상자를 열고 손을 쑥 집어넣어 뭔가 부스럭부스럭하더니 조그만 깡통을 한 개 꺼냈다.

 

 

“ 자, 여기 있다. 힘들게 구했네. ”

 

 

베르닌은 두 눈을 의심했다.

 

 

이게 뭐야?

 

“ 뭐긴 뭐야, 파인애플이지. ”

 

아니야, 파인애플은, 파인애플은 과일이잖아! 아열대 과일. 커다랗고 삐죽삐죽하고 두꺼운 가시 같은 게 달려 있고 위에 이파리도 있고. 근데 이건, 이건 깡통이잖아!

 

“ 에이, 제대로 봐야지. 그냥 깡통이 아니잖아. ”

 

 

투레츠키가 베르닌의 눈앞에 깡통을 불쑥 들이밀었다. 삐죽삐죽하고 두꺼운 가시 같은 게 빽빽하게 달려 있고 이파리가 달린 파인애플 그림이 그려져 있고 노란색의 동그란 과육이 담긴 접시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베르닌은 멍해졌다.

 

 

“ 어, 이건, 이건 그냥 통조림이잖아!

 

“ 그럼 당연히 통조림이지, 너 설마 생과일을 가져올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제정신이냐? 잘못하면 다 썩어 문드러지라고. 통조림이 최고지. 그리고 이거 미제야! 미제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줄 아냐? 이거 봐, 영어로 씌어 있잖아. 파인애플. PINEAPPLE!

 

“ 하지만... 난 당연히 생과일일 거라고... 파인애플이라고 하면 당연히 과일이라고 생각하지 누가 통조림을... ”

 

“ 아이고 답답해라. 여기 오는 사람들은 전부 통조림 구해달라고 한다고. 그럼 애초부터 ‘생과일’이라든지 ‘통조림 아닌’ 파인애플이라고 했어야지. 내가 이거 구하려고 얼마나 그쪽 녀석을 갈구고... 친구인 너를 위해서 손해도 무릅쓰고 내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구해온 건데 너는 통조림이 어떻고 삐죽삐죽한 가시에 이파리가 어떻고 하면서! ”

 

“ 저... 바냐. 네가 나쁘다는 게 아니야. 고생해서 구해다 준 건 진짜 고마워. 근데... 아, 어떡하지. 밤이고 낮이고 파인애플 타령만 하면서 그렇게 괴로워하는데 통조림이라니... 파인애플 갖다 준다고 간신히 어르고 달래놨는데... 진짜 실망할 거야. 더 아프면 어떻게 하지... ”

 

 

베르닌은 망연자실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질어질했고 눈물이 났다. 투레츠키는 잠깐 당황한 듯했지만 곧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 에이, 뭘 그렇게 실망하고 그러냐.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통조림이 훨씬 더 맛있어. 그 여자도 분명히 이거 먹어보면 좋아할 거야. 가져가봐. ”

 

“ 하지만... ”

 

“ 그럼 안 가져갈 거니? 환불해줘? ”

 

“ 너 환불도 해주니? ”

 

“ 개봉 안 한 건 환불해줘. 난 정직한 상인이라고! 근데 운송비랑 속달비는 제하고 물건 값만 환불하는 거야. 원래 그래. 그러니까 10루블. 줄까? ”

 

 

멍해진 와중에도 베르닌은 15루블이나 떼이고 통조림조차 못 받는 건 너무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됐어, 그냥 통조림 가져갈래. 어휴... 너 완전 바가지야. 누가 통조림을 25루블이나 받아! ”

 

이게 소련 통조림이냐! 이건 미제야! 비행기 타고 온 거란 말이야! 심지어 위험을 무릅쓰고 지하로 거래해온 건데! 너 날 무시하고 심지어 악덕업자라고 누명까지 씌웠어. 나 이런 건 그냥 못 넘어가! 이 장사는 신뢰가 생명인데. ”

 

“ 화내지 마. 너무 비싸서 그런 거니까. 네 수완은 인정할게. ”

 

“ 그래! 난 수완이랑 신뢰 관계 두 개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하여튼 내 말 믿어. 통조림이 최고야! 잘 가라. 또 오고. 다음에 올 땐 보드카 가져와. 그럼 내가 좋은 거 줄게. ”

 

 

베르닌은 다시 여기 오면 성을 갈겠다는 다짐을 하며 문을 열고 나왔다.

 

 

 

*    *    *

 

 

 

 

힘이 쭉 빠진 채 병원으로 돌아오니 코즐로프가 우울한 얼굴로 복도에 앉아 있었다.

 

 

“ 어, 당신 극장 안 가요? 오늘 저녁 공연 있잖아요. 연주... ”

 

“ 이제 가려고. 잠깐 들렀어, 우리 아기 보려고. ”

 

“ 근데 왜 복도에 나와 있어요? ”

 

“ 막 잠들었거든. 어휴, 나 정말 못 참겠다. 애 아픈 거 더 이상 못 보겠어. 왜 계속 저 상태인 거냐. 멀쩡해진 것 같다가도 금방 또 헛소리하고. 열도 떨어질 듯 떨어질 듯하다가 도로 올라가고. 아까는 계속 속이 다 타는 것 같다고 하고... 파인애플만 입이 닳도록 찾고. 여기 노인네가 명의인 건 아는데,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는데 도대체 믿을 수가 없으니. 나아지고 있는 거면 헛소리도 없어져야지. 아무래도 그 망할 놈이 먹인 독약이 머리로 간 거 아닐까 싶다. 저러다 영영 제정신 안 돌아오면... ”

 

 

베르닌은 바이올린 깡패가 이를 악물고 손등으로 눈을 지그시 누르는 것에 좀 놀랐지만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괜찮아질 거예요. 당신은 걔 옆에 내내 붙어 있지 않았잖아요.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거 맞아요.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요, 쟤 감옥에 있을 때도 그 약물 맞았다고요. 근데 주사 그만 놓게 하고 해독약 같은 것도 안 줬더니 혼자서 나았다고 했어요. 그냥 시간이 좀 걸리는 것뿐이에요. 분명히 나을 거예요. 그러니까 괜히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부정 탄단 말이에요! 신부님이 기도도 해줬는데! ”

 

“ 신부고 나발이고 하느님도 없는데 무슨. ”

 

그래도, 하느님 없어도 기도는 좋은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랑 신부님이랑 렐랴랑 보랴랑... 전부 걱정해주고 있잖아요. 걔 걱정해주는 사람이 더 많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괜찮아질 거예요! 다시는 그런 나쁜 말 하지 말아요!

 

“ 좋겠다, 너는. 아직 젊어서. 아직 세상이 장밋빛이구나. ”

 

 

코즐로프는 한숨을 쉬더니 일어섰다.

 

 

“ 나 극장 간다. 공연 끝나고 다시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있어줘. 밤엔 너도 집에 가서 좀 쉬어라. 계속 병원에서 잤잖아. 그러다 몸살 난다. 그 간이침대 불편하던데. 덩치도 큰 녀석이. ”

 

“ 당신보단 내가 낫죠! 당신은 그 침대에 반도 안 들어가겠네요. ”

 

“ 다리를 반으로 접으니까 되긴 되더라고. 하여튼 갔다 오마. ”

 

 

코즐로프가 떠난 후 베르닌은 병실로 들어갔다. 왕재수는 마트료슈카처럼 이불로 꽁꽁 싸인 채 누워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빨갰다. 이마는 뜨거웠지만 보송보송했다.

 

 

‘ 왜 땀이 안 나는 걸까? 난 보랴가 만들어준 수프 한 숟가락만 먹어도 개운하고 땀나려고 하던데. 땀을 흘려서 바깥으로 열이 빠져나가야 좀 나아질 텐데 그게 안 되니까 자꾸 덥다고 하고 속이 뜨겁고 답답한 건가. 대체 무슨 약을 먹인 거야, 나쁜 놈들... ’

 

 

그때 왕재수가 꿈틀거리면서 눈을 떴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목걸이를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 목말라... 아... ”

 

 

베르닌은 급하게 물컵을 가져와 왕재수의 입에 대 주었다. 물을 조금 마신 후 왕재수가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몸을 조금 일으켰다.

 

 

“ 고마워. ”

 

“ 아직도 그렇게 아파? 땀 하나도 안 났어? ”

 

“ 응... 춤 좀 추면 땀도 나고 괜찮아질 텐데. ”

 

“ 안 돼, 걷지도 못하면서 무슨 춤이야. ”

 

“ 안에 뭐가 잔뜩 걸려 있는 것 같아. 자꾸 어지러워. 다닐, 나 자고 싶어. 자꾸 깨는 거 무서워. 처음엔 괜찮은데 이러다가 네가 막 세 명 네 명으로 보이기 시작할 거야. 그러면 막 더워지고 목마르고 아파. 그럼 파인애플 먹고 싶고... 하아...

 

 

왕재수가 숨을 몰아쉬었다. 베르닌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서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꺼냈다.

 

 

“ 저기, 있잖아... 겨울이라서 진짜 파인애플은 못 구했어. 미안해. 통조림이라도 먹을래? 이것도 맛있대. 미제래... 투레츠키가 구해준 거야. ”

 

아, 아! 파인애플!

 

 

왕재수가 탄성을 질렀다. 초점이 흐렸던 두 눈에 반짝 하고 광채가 돌았다.

 

 

파인애플이다! 아아! 진짜 파인애플이야!

 

“ 어... 저... 이거 통조림이야. 진짜 아니야... ”

 

아니야! 파인애플이야! 이거... 이거 맞아! 아, 맛있겠다! 아...

 

“ 으잉? 이게 맞아? 파인애플은 삐죽삐죽하고 두꺼운 가시 같은 게 나 있고 위에 이파리가 달려 있는... ”

 

통조림! 파인애플 통조림! 아플 때 먹는 거... 달고 시원한 거!

 

 

왕재수가 흥분해서 다시 아플까봐 걱정이 된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어, 그래. 그렇구나. 잠깐만 기다려. 파인애플 먹자. 내가 뚜껑 따가지고 올게. ”

 

 

탕비실에 가서 통조림 뚜껑을 따서 돌아왔을 때 왕재수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열에 들떠서 온통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독사과를 먹고 쓰러진 후 처음으로 표정이 밝아져 있었다.

 

베르닌은 접시에 통조림 파인애플 과육을 몇 개 꺼내 담았다. 동그랗고 납작하고 샛노란 과육을 한입 크기로 썰었다. 조그만 것 한 토막을 포크로 찍어서 왕재수의 입에 넣어 주었다. 왕재수는 오물오물 먹었다. 눈을 감고 행복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 아아... 파인애플. 달아, 시원해. ”

 

“ 맛있니? ”

 

“ 응. 맛있어. 진짜 달아! 아 시원해. 목말랐어. 파인애플 진짜 먹고 싶었어. 더 먹어도 돼? ”

 

“ 응, 더 줄게. ”

 

 

베르닌은 잘라놓은 파인애플을 먹여주었다. 천천히 조금씩 먹였다. 왕재수는 파인애플을 몇 조각 먹더니 국물 먹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 국물이라니? ”

 

“ 깡통에 있는 거. 통조림 국물. ”

 

“ 에, 그건 설탕물 아니야? ”

 

“ 으응, 파인애플 물이야. 먹고 싶어. ”

 

 

베르닌은 깡통을 기울여서 컵에 국물을 따랐다. 파인애플 과즙과 설탕이 섞여 있어 굉장히 달 것 같았다. 왕재수는 반 컵이나 마셨다. 마시고 나더니 너무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목을 울리는 소리를 냈다.

 

 

“ 아아... 살 것 같아. 시원해... 아... ”

 

다행이다... 근데 넌 단 거 안 먹잖아. 신기하다. 통조림이라 엄청 달 텐데 어떻게 이건 맛있어해? 난 네가 이거 안 먹을 줄 알았어. 진짜 파인애플만 입에 댈 줄 알았는데... ”

 

“ 아니야, 이거 맞아. 어릴 때 아프면 이거 먹었어. 아빠가 암시장에 가서 구해오셨어. 나 먹고 열 내리라고... 이거 먹으면 금방 나았어. 열도 내렸어. 아이 좋아, 아이 맛있어. ”

 

“ 그랬구나... 아기 때부터 먹었던 거라서 그렇게 찾았구나. 몰랐어. ”

 

“ 너도 먹어봐. 맛있어. ”

 

“ 너 있다가 더 먹어야지. ”

 

“ 아니야, 나 많이 먹었어. 맛있으니까 먹어봐. ”

 

“ 그래, 좀 있다 나도 먹을게. ”

 

“ 나 이제 나을 거 같아. 이제 안 더워. 아까만큼 안 아파. ”

 

“ 그래그래. 이제 나을 거야. ”

 

아이 땀 나. 아까만큼 덥지도 않은데 왜 땀이 나지?

 

아, 정말이네! 너 이마에 땀났어! 이제 열 내리려나봐! 파인애플 먹어서 그런가보다!

 

 

베르닌은 뛸 듯이 기뻤다. 손수건으로 왕재수의 이마와 콧등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왕재수는 가만히 있더니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누웠다. 베르닌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 이제 좀 자자. 자고 나면 훨씬 나아질 거야. 의사 선생님도 그랬어, 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진짜 다행이다. ”

 

“ 다닐, 고마워. ”

 

“ 통조림? 이거 투레츠키가 구해준 거야. ”

 

“ 너 바냐 싫어하잖아. 근데 통조림 구하러 가고... ”

 

“ 에이, 그게 뭐 어렵다고. ”

 

“ 풀도 캐오고... ”

 

“ 흰머리천사날개풀이래. 되게 재밌었어. 나중에 같이 캐러 가자. ”

 

“ 으응... 싫어. 손에 흙 묻잖아. ”

 

 

왕재수는 이미 눈꺼풀이 무거워진 것 같았다.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파인애플... 좋아. ”

 

“ 통조림인 줄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걸... ”

 

“ 아빠. 아빠 보고 싶어. ”

 

“ 그래, 얼른 낫자. 공연도 잘 했잖아. 그러니까 너 곧 레닌그라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아빠도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

 

“ 못 봐... 아빠 이제 못 봐. 나 어릴 때 돌아가셨어. ”

 

“ 아... 그랬구나. 미안해. ”

 

“ 아빠... 파인애플 맛있어. ”

 

 

왕재수는 조그맣게 웅얼거리더니 곧 잠이 들었다. 베르닌은 통조림 깡통을 접시로 잘 덮어 놓고는 의사에게 갔다.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스타브로프가 들어와서 왕재수의 체온과 맥을 재고 눈꺼풀과 혀, 목구멍, 피부 상태를 관찰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열이 내리고 있구나. 맥박도 훨씬 안정적이고. 푹 자고 나면 좋아질 거다. ”

 

“ 정말 파인애플 덕분인가요? ”

 

“ 허허, 깡통 파인애플로 사람이 나으면 세상에 불치병 환자는 하나도 없겠구나. 그러면 참 좋을 텐데. 하여튼 도움이 됐을 거다. 잘했다, 이 녀석아. 그래도 소싯적 신동이었다고 어디서 또 통조림은 구해왔구나. 이제 너도 집에 가서 좀 쉬어라. 얘는 마누라와 내가 봐줄 테니. ”

 

“ 아니에요, 선생님은 응급환자도 많고 바쁘시잖아요. 연세도 많으신데. 밤에 로만이 오기로 했어요. 저 여기 있을게요. ”

 

“ 그러면 옆 병실이 지금 비어 있으니 거기 누워서 좀 자거라. 간이침대 좁아서 새우잠만 자고 힘들었을 텐데. 저녁 시간 되면 깨워주마. ”

 

 

그래서 베르닌은 빈 침대에 몸을 눕혔다. 무거운 잠이 쏟아졌다. 왕재수가 독사과를 먹고 쓰러진 후 처음으로 그 역시 깊고 개운하게 푹 잤다. 자고 일어나서 의사의 사택으로 올라가 마르가리타가 차려준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저녁을 먹고 병실로 가보니 왕재수는 아직 자고 있었지만 숨소리도 한결 나았고 안색도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예브게니의 말로는 땀을 한바탕 쭉 흘리고 나서 열이 내렸다고 했다. 베르닌은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따뜻하게 적신 수건으로 왕재수의 얼굴과 몸을 닦아주고 환자복도 갈아입혀 주었다. 그는 왕재수가 다시 살이 빠진 것을 보고 속이 상했지만 퇴원하고 나서 맛있는 것을 잔뜩 먹이고 보랴에게도 데려가서 대접을 받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위안했다.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코즐로프가 왔다. 왕재수가 나아진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 베르닌이 보란 듯이 깡통을 내밀자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아니, 이거였단 말이야? 과일이 아니고? 통조림? ”

 

“ 이거였더라고요... 아기 때 아프면 이거 먹었대요. ”

 

으아... 이건 나도 구할 수 있는 거였는데! 으윽, 모스크바에 있는 내 친구 통조림 장사하는데... 아아, 내가 바보였어! 진작 부탁했으면 우리 아기가 빨리 먹고 나아졌을 텐데! ”

 

“ 통조림인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근데 당신 늦었네요. 공연이 그렇게 길었어요? ”

 

“ 아... 일이 좀 생겨서. 너 이제 들어가 봐라. 내가 있을 테니까. ”

 

“ 당신 내일도 극장 가야 되잖아요. 내일 돈키호테 다시 올린다고 들었는데. 그럼 오전에 드레스 리허설 있잖아요. ”

 

“ 드레스 리허설은 오늘 했어. 그때야 워낙 시간에 쫓기니까 당일 오전에 했던 거고. 오후에 가면 돼. 가서 좀 쉬어라. ”

 

 

그래서 베르닌은 집으로 돌아왔다. 깨끗하게 씻고 푹 잤다. 피로가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    *    *

 

 

 

 

다음날인 토요일에 그는 다시 병원에 갔다. 왕재수는 깨어 있었고 의사의 말대로 열도 내리고 몸이 훨씬 나아져서 이제 혼자서 걸어 다닐 수도 있었다. 베르닌을 보자 좋아했다. 코즐로프와 베르닌에게 통조림 파인애플을 먹어보라고 극구 권했다. 그래서 셋은 파인애플을 나눠먹었다. 꿀처럼 달았다. 베르닌은 그렇게 맛있는 통조림을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았다.

 

 

파인애플을 다 먹은 후 왕재수는 그들에게 극장에 가보라 했다. 베르닌에게도 가서 오후 돈키호테 공연을 꼭 보고 자기한테 얘기해 달라고 했다.

 

 

“ 내가 지휘해야 하는데. 애들한테 너무 미안해. 걔들 스네고로드에 끌려가서 눈 치우느라 초연 무대 서지도 못하고... 오늘 처음 무대 올라가는 건데 내가 이러고 있으니. ”

 

“ 괜찮아, 우리 귀염둥이 아픈 거 아는데 뭐. 애들이 병원 오겠다는 것도 내가 막았어. 빨리 낫는 게 더 중요해. 그래야 다시 극장에도 나가지. 하여튼 우리 갔다 올게. ”

 

 

베르닌은 코즐로프와 함께 극장에 갔다. 코즐로프는 연주 준비를 하러 가고 그는 류드밀라에게 갔다. 왕재수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자 류드밀라가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는 베르닌에게 차와 쿠키를 주면서 생각난 듯 말했다.

 

 

“ 참, 콜랴 있잖아요. ”

 

“ 콜랴가 누구에요? ”

 

“ 아참, 당신은 그 사람이랑 안 친하지. 레베진스키요. 우리 감독님만 그런 거 아니고 그 사람도 병가 냈어요. ”

 

“ 그 사람은 집에 일 있다고 휴가였잖아요. ”

 

 

베르닌은 ‘독사과, 알리바이, 끄나풀’이란 단어들을 간신히 입안으로 삼켰다.

 

 

“ 아, 그건 수요일까지였는데. 그저께 술 한 잔 하고 집에 가는데 좀도둑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뒤에서 누가 덮쳐서 뒤통수를 한 방 맞고 강에 빠졌대요. 맞은 건 심하지 않은데 강에 빠졌다 나와서 감기가 지독하게 들었다지 뭐예요. 하여튼 밤늦게 술 마시고 다니는 건 위험한 것 같아요. 당신도 조심해요, 야근 많이 한다면서. ”

 

“ 아, 그래요? 잘됐... 아니, 안됐네요. ”

 

 

짐작 가는 데가 있었던 베르닌은 비죽비죽 밀려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얼버무렸다. 그리고 오후 5시의 돈키호테 공연을 봤다. 무대에 올라가서 연기를 해봐서 그런지 공연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굉장히 재미있었다. 특히 돈키호테 연기를 하는 무용수를 집중해서 봤다. 확실히 자신의 어설픈 연기와 크게 차이가 났다. 다시 하면 이 부분은 이렇게 할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바질 역의 무용수는 열심히 추기는 했지만 역시 왕재수와는 하늘과 땅 차이란 생각도 들었다.

 

 

로비에서 그는 생각지 않게 리자와 마주쳤다.

 

 

“ 어머, 다냐! 역시 꽃돌이 감독님 때문에 온 거군요! ”

 

“ 어, 리자... 당신은 웬일이에요? ”

 

“ 우리 엄마가 발레 좋아하셔서요. 같이 공연 보러 왔어요. 엄마, 여기 우리 회사 다냐예요. ”

 

 

베르닌은 리자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리자는 방긋방긋 웃더니 손뼉을 딱 쳤다.

 

 

“ 아참, 다냐. 그 얘기 들었어요? ”

 

“ 무슨 얘기요? ”

 

“ 우리 국장이요! 오늘 병원에 입원했대요. 잘만 하면 월요일에도 안 나올지도 몰라요! ”

 

“ 엥? 국장이요? 왜요? 어디가 아프대요? ”

 

“ 있잖아요, 국장이 밤마다 집 근처를 산책한다나 봐요. 어제도 밤에 산책하고 있는데 갑자기 웬 집채만한 들개가 나타나서 국장한테 달려들었다지 뭐예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대요. 냅다 달려들어서 목줄기를 물어뜯으려는 걸 국장이 간신히 떼굴떼굴 굴러서 치명상은 안 입었는데요, 그래도 여기저기 물렸대요. 구르면서 다치기도 하고. 광견병 주사 맞고 다친 데 치료 중인데 타박상도 입었고 다리도 좀 삐었대요. 아유, 근데 난 그 얘기 들으니까 왜 이렇게 고소하지. ”

 

“ 들개... 집채만한... ”

 

“ 월요일에 국장 휴가였으면 좋겠어요. 엇, 우리 엄마가 빨리 오라고 하시네요. 우리 월요일에 봐요. 안녕! ”

 

 

베르닌은 주차장으로 갔다. 잠시 후 코즐로프가 나왔다. 연주복을 채 갈아입지도 않은 채였다. 그는 코즐로프를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강을 건너면서 베르닌이 입을 열었다.

 

 

“ 레베진스키 두들겨 맞고 강에 빠졌다면서요. ”

 

“ 그랬다더라. ”

 

“ 밤길 조심을 안 했네요. ”

 

“ 흥, 제깟 놈이 조심해봤자. ”

 

“ 근데 우리 국장은 개한테 물려서 입원했대요. ”

 

“ 아주 잘 됐구나. ”

 

“ 집채만한 개였대요. ”

 

“ 개도 악당을 알아본 모양이지. ”

 

“ 근데 어떻게 한 거예요? ”

 

“ 뭐가? ”

 

“ 레베진스키는 알겠는데, 국장 말이에요. 우리 국장 현장요원 출신이라 눈치 되게 빠른데. 개한테 ‘물어!’하고 소리 지르면 금방 눈치 채고 대응했을 텐데.

 

“ 우리 흘롑이 얼마나 똑똑한데. 그리고 소리 지르고 명령할 필요 하나도 없었지. 다 사전훈련을 시켜놔서. ”

 

“ 엥, 어떻게요? ”

 

위문 카드.

 

“ 예? ”

 

“ 그 개자식이 쓴 카드랑 리본 있잖아. 너한테 맡겼던 거. 그거 내가 가져갔잖아. ”

 

“ 아, 그거요? 근데 그걸로 어떻게... ”

 

“ 미련하긴. 그놈 냄새가 배어 있잖아. 우리 흘롑이 사냥개 출신이거든. 허수아비에 그거 붙여놓고 공격 훈련 시켰지. 아주 한 방에! ”

 

“ 흘롑은 참 좋은 개네요. ”

 

“ 그렇지! 훌륭한 멍멍이지. 우리 아기가 좋아해야 할 텐데. 잘 뜯어보면 귀엽고 앙증맞은 멍멍이거든.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끄덕했고 오랜만에 큰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벨라가 훨씬 귀여운 멍멍이라고 생각했다.

 

 

 

 

 

FIN

- 2015. 4. 17 ~ 4. 23 -

 

 

...

 

 

흰머리천사날개풀은 가상의 약초로 내가 붙인 이름이다 :)

물론 파인애플은 실재하는 거다~~

 

..

 

소련 시절 러시아 정교는 핍박을 받았고 수도원이나 정교 교회들은 모두 폐쇄되어 병원, 도서관, 보관소, 공장, 대부분은 박물관으로 변모했다. 여기 등장하는 예고르 사제는 본편에도 등장한다. 가브릴로프는 정교 전통이 깊은 도시라 사제님, 신부님이란 호칭으로 불리고 있지만 사실 이 수도원도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고 예고르 신부도 박물관 총괄 관리자이다. 가브릴로프 본편에서 이 수도원은 중요한 장소 중 하나로 등장한다.

 

예고르 사제가 단추에게 대접하는 감자 블린과 열매즙은 내가 지난 2월에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 징게르 카페에서 마슬레니짜 기간에 먹었던 맛있는 블린과 따뜻한 열매즙 음료에서 따왔다. 그건 나중에 따로 소개해보겠다.

 

..

 

'흘롑'은 흑빵이란 뜻의 러시아어이다 :)

뜨보록은 흰색이라 뜨보록. 흘롑은 검정개라 흘롑~

 

..

 

우리 나라도 옛날엔 바나나랑 파인애플이 엄청 고급 과일이었다. 지금이야 바나나가 흔해빠졌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때만 해도 바나나는 진짜 고급 과일이라 그거 하나 먹는 게 쉽지 않았다. 파인애플도 마찬가지...

이것은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 특히 추운 동네일 수록 더했다.

 

사실 이 에피소드 쓸 때 내가 떠올렸던 건 어릴 때 엄청 아팠을 때 먹었던 황도 백도 깐포도였다 :) 요즘 세대는 잘 모르실지도 ㅠㅠ

 

그런데 요즘 내가 위장이 너무 아파서 고생하다 보니 오늘은 집에 가다 황도라도 사다 먹어야 할 거 같다.. 아무래도 왕재수를 너무 괴롭혀서 벌받은 것 같다 ㅠㅠ

 

(드디어 사다 먹은 황도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748)

 

..

 

왕재수가 파인애플과 아빠를 결부시켜 생각하는 내용은 사실 본편 우주에서 미샤가 어린 시절 잃은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에서 좀 따왔다.

 

..

 

이야기는 23편으로 이어진다.

 

..

 

댓글은 저에게 정말 큰 힘이 된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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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