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무의 슬픔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series : 서무의 슬픔2015. 4. 10. 12:46
일주일의 중간. 수요일이다. 이번주는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다.
그래도 서무 시리즈 16편 올려본다.
지난 15편에서 베르닌은 갑작스럽게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 출장에 가라는 명령을 받고 울며 겨자먹기로 준비를 했다. 16편은 거기서 곧장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드디어 베르닌이 촌동네 가브릴로프를 벗어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소련 최고의 대도시로 향한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짐꾼이었다 ㅠㅠ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르닌은 고참들의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 출장에 끼게 되고... 계획에 없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출장을 가게 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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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6
서무의 슬픔
-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자명종이 울렸을 때 베르닌은 제발 꿈이기를 빌었다. 하지만 야속한 시계는 계속 울어댔고 그는 할 수 없이 낑낑대며 눈을 떴다. 연이은 야근과 주말 출근으로 피로가 가시지 않아 정신없이 꿈을 꾸며 자던 중인데다 평일보다 1시간 30분이나 일찍 깨어났기 때문에 정말 죽을 맛이었다. 한겨울에 새벽 5시 반 기상이라니 너무나도 끔찍했다.
잠시 그는 따뜻한 이불 속에 누운 채 무겁게 감겨오는 눈꺼풀과 싸우며 10분만 더 자면 안 될까 하고 매우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머릿속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출장과 지역별 공산당원 교육 정책, 발따예프와 바라노프스키, 주브치크가 줄줄이 떠올랐고 그는 몸서리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주브치크와 발따예프와 바라노프스키를 집 앞으로 줄줄이 데리러 가야 했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주브치크의 집 앞에는 6시 30분까지 가기로 되어 있었다. 전날 베르닌은 용기를 내어 KGB 건물이나 의회 건물 앞에서 다함께 모여서 출발하는 것은 어떠냐고 제의했지만 셋 모두 정색을 하며 ‘그렇게 이른 시각부터 차를 몰고 오거나 버스를 타고 올 수는 없다, 원래 그런 건 막내가 차로 집에서부터 공항까지 모시는 거다!’ 하고 그에게 훈계를 해대서 결국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그는 끙끙대며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맨발로 바닥을 밟자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급하게 슬리퍼를 신고는 졸려서 눈도 반밖에 못 뜬 채 비틀거리며 욕실로 갔다. 양치질을 하는 동안에도 꾸벅꾸벅 조느라 하마터면 칫솔에 입천장을 찔릴 뻔 했다. 너무너무 귀찮았지만 몸이 욱신욱신 쑤셔 와서 할 수 없이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자 그나마 약간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샤워로 정신을 차린 것도 잠시일 뿐, 물기를 닦아내자 다시금 소름이 돋으면서 어서 빨리 이불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새 속옷을 주워 입고 얼굴에 대충 싸구려 스킨을 찍어 바르려다 마침 왕재수가 온천 요양소에서 여분으로 챙겨왔다며 줬던 남자 화장품 파우치가 눈에 띄었다. 대도시에 출장을 가는데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도 해야 하니 조금이라도 좋은 거 바르고 외모를 단장해보자 싶어 파우치를 열었다.
그런데 스킨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스킨처럼 보이는 물병이 세 개나 됐다. 그리고 로션 같은 것도 두 개나 있었다. 쫀득한 질감의 생크림 같은 것도 있고 심지어 조그만 향수 스프레이까지 있었다. 뭘 어떻게 발라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온천을 하고 나온 왕재수가 얼굴에 이것저것 톡톡 두들겨 바를 때 주의 깊게 지켜볼 걸 후회가 됐지만 별 수 없었다. 그냥 액체가 든 병 중 하나 찍어서 발랐다. 그랬더니 피부가 엄청나게 따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급하게 가까이 있는 로션으로 추정되는 물질을 마구 발랐더니 통증이 좀 가셨다. 그래서 이왕 고급 화장품으로 단장하는 김에 다 바르자 싶어 크림도 발랐다. 그랬더니 얼굴이 하얘지고 미끌미끌해서 굉장히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오랜만에 모스크바에 가니까 이 정도는 해줘야 된다는 생각에 휴지로 닦아내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는 옷을 입은 후 정신을 차려보려고 진하게 우린 차를 마시고 버터와 잼을 잔뜩 바른 흑빵을 두 조각 먹었다. 차를 마시자 몸이 따뜻해졌고 달콤한 잼 덕분에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빵을 한 조각 더 먹고 싶었지만 시계를 보니 이미 6시가 다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코트를 걸치고 가방을 든 채 집을 나섰다. 추웠기 때문에 패딩 점퍼를 입고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원고 발표도 해야 하고 다른 기관들에서 온 우수 공산당원들이 득실거릴 테니 가브릴로프 KGB의 명예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그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아파트 현관문 안쪽에 왕재수가 서 있었다. 평소처럼 근사한 코트를 걸치고 있었지만 밑단 아래로 파자마 바지가 보이는데다 머리도 까치집처럼 헝클어져 있는 것을 보니 침대에서 막 기어 나온 것 같았다. 심지어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왕재수가 일어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던 베르닌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왕재수가 그를 보더니 손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 어, 너 여기서 뭐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야? ”
“ 너 지금 출장 가는 거야? 비행기 타러 가? ”
“ 비행기는 좀 있다 타고... 같이 가는 사람들 데리러 가야 돼. ”
“ 레닌그라드에 며칠 있어? 계속 그 사람들이랑 같이 있어야 돼? ”
“ 어, 아마도... 고참 선배에 간부들이라 시중들어야 할 것 같아. ”
“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
“ 부탁? 뭔데? ”
“ 저... ”
왕재수가 머뭇거렸다. 입을 떼기가 어려운 듯 한참 망설이다가 코트 주머니에서 얄팍한 봉투를 하나 꺼냈다.
“ 이것 좀 전해줄 수 있어? ”
“ 어... 편지야? 어머니한테 드리는 거야? ”
“ 아니야. 우리 엄마한테는 못 쓴다고 했잖아. 저... 아니, 됐어. 공연히 불편해지고 문제만 생길 거야. 잊어버려. ”
왕재수가 봉투를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으려고 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손을 뻗어 봉투를 낚아챘다.
“ 줘, 전해줄 테니까. 누구한테 주면 되는데? 근데 너무 멀면 못 전해줄지도 몰라. 레닌그라드에 있는 사람인 거지? ”
“ 안 멀어. 도심이야, 네프스키랑 가까운 쪽이거든. 근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냥 없었던 걸로 하자. ”
“ 뭘 없었던 걸로 해. 새벽부터 일어나서 나 기다리고 있었잖아. 중요한 것 같은데. 어디에 있는 누구한테 줘야 하는지만 말해줘. 전화번호 같은 거 있으면 더 좋고. ”
“ 전화번호는 몰라. 나 원래 그런 번호 잘 못 외우거든. 체포됐을 때 수첩이고 뭐고 다 뺏겨서 엄마 번호밖에 기억 안나. ”
“ 그럼 어떻게 찾아? ”
“ 주소는 알아. ”
“ 어... 너 혹시 이거 무슨 비밀문서 같은 거야? ”
“ 비밀문서면 못 전해줘? ”
“ 나 공무원이잖아. 그것도 KGB... ”
“ 하긴 그래. 내가 미쳤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 그냥 잊어버려. ”
“ 아냐. 주소 줘. 네가 보내는 비밀문서라고 해봤자 극장이랑 아르마나 얘기밖에 더 있겠냐. ”
“ 고마워. ”
왕재수는 다시 머뭇거리더니 베르닌의 곁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귀에 대고 소곤소곤 주소를 말해 주었다. 베르닌은 귀가 너무 간지러웠기 때문에 몸을 움츠렸다.
“ 야,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나 못 외운단 말이야. 가뜩이나 레닌그라드는 지리도 모르는데. 나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니까 걱정 마! ”
“ 그래도... 수색당하면 어떡해. ”
“ 야, 나한테 수색 권한이 있는데! ”
“ 그런가... ”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레닌그라드 지도를 꺼내달라고 하더니 거기에 표시를 해주었다. 정말 네프스키 대로 근처였다. 이름도 써 주었다.
“ 어, 병원이네? 유리 아스케로프. 이 사람은 누구야? ”
“ 거기 의사야. 내 주치의. ”
“ 주치의? 너 그런 것도 있냐? ”
“ 바보. 무용수들은 부상당하는 일이 많아서 전담 의사가 필요하단 말이야. 특히 나처럼 스타는 더더욱. ”
“ 알았어. 근데 너 어디 또 아픈 데 있어? ”
“ 자꾸 물어볼 거면 그냥 없었던 걸로 하자. ”
“ 아냐. 전해 줄게. 뭐 받아와야 돼? ”
“ 아니. 그냥 주기만 하면 돼. 고마워. ”
베르닌은 가방을 열고 안주머니에 봉투를 넣은 후 지퍼를 채웠다. 그리고 문득 생각나서 왕재수에게 폭풍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 야, 너 누가 맨발로 나오래! 엄청 추운데. 그 코트 별로 두텁지도 않은데 파자마 위에 입어봤자! 그리고 나 없는 동안은 꼭 바이올린 아저씨 집 가서 자! 밥도 꼬박꼬박 먹고! 제대로 먹었나 안 먹었나 나중에 확인해서 삼시세끼 안 챙겨먹었으면 너네 집이랑 극장 사무실에 바퀴벌레랑 곱등이 풀 거야. 그리고 온천 갔을 때 내가 준 그 패딩! 이번 주 춥댔어.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가는 날은 무조건 패딩 입어. 안 그러면 뱀 껍질 주워올 거야! 그리고... ”
“ 악마, 살인자! 바퀴벌레도 모자라서 뱀 껍질은 정말 너무해! 패딩 입으면 되잖아! 근데 너 얼굴에 뭐 바른 거야? 왜 이렇게 희끄무레하지? ”
“ 어, 이거... 그때 온천에서 네가 준 화장품... 크림... ”
“ 아휴, 바보... 이거 나이트 크림인데... 마사지 팩이라고! 자기 전에 바르는 건데... ”
“ 어, 아침저녁으로 바르는 게 다른 거야? ”
“ 으으... 가만히 있어봐. 꼭 무대 분장한 것 같네. ”
왕재수는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베르닌의 얼굴을 살살 닦아냈다. 그리고는 반대편 주머니에서 무슨 조그만 분무기 같은 걸 꺼내더니 얼굴에 대고 칙칙 뿌려주었다. 향기도 좋고 촉촉했다.
“ 됐다. 잘 다녀와. 난 이제 잘래. 너무 졸려. ”
“ 그래. 밥 잘 챙겨먹고 있어. ”
왕재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베르닌은 자신도 도로 집으로 들어가 자고 싶었지만 한숨을 쉬며 주차장으로 갔다.
* * *
출장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베르닌은 비행기 안에서 워크숍 원고를 준비하려고 했지만 발따예프와 주브치크와 바라노프스키가 계속해서 모스크바에서 어떻게 해야 잘 놀 수 있을 것인가를 주제로 심도 깊은 수다를 떨었고 중간중간 베르닌을 쿡쿡 찌르며 적극적인 대화 참여를 요구했다. 한번은 베르닌도 답답해서 하소연을 했다.
“ 저, 30분만이라도 절 가만히 내버려두시면 안 될까요? 오늘 지역별 발표가 있잖아요. 선배님들께서 저보고 발표하라 하셨는데 저는 전혀 모르는 내용이기 때문에 지금 공부를 해서 원고를 적어야 해요. 내리면 곧장 버스로 이동해야 하고 워크숍 장소로 가야 하는데...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
“ 무슨 그런 발표를 신경 쓰나! 그런 거 준비해오는 팀 아무도 없어! 그 일정표를 곧이곧대로 믿다니, 이 친구 정말 책상물림이군. 표트르 자네 말이 딱 맞아. 어휴, 가이드나 제대로 할지 원. ”
“ 하지만.. 분명히 지역별로 10분씩 주제 발표를 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레닌과 스탈린,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경제 모델에 따른 우리 시의 공산당원 교육 정책에 대해... ”
“ 10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가면 맨 처음에 모스크바 의회 쪽에서 고위급 인사 하나가 와서 인사말 하고, 그러면 사회자가 지역별로 하나씩 자기 소개 시키고... ”
“ 자기 소개요? 그럼 기관 소개도 같이 해야 하겠네요. 어쩌지, 자기 소개는 준비 안 했는데... ”
“ 어이구, 이 멍충이... 그냥 이름하고 소속만 말하면 돼. 이백 명 넘는 사람들이 모이는데 어느 세월에 줄줄이 자기 소개에 기관 소개를 늘어놓나. 주제 발표고 뭐고 그건 다 그냥 일정표에만 있는 거야. A로 시작하는 동네 두어 군데만 대표로 발표하고 나면 사회자가 시간 관계상 이만 끝내고 나머지는 자료집으로 대체한다고 할 거라고! ”
“ 어, 그래요? 그럼 다행인데... 자료집이면 더더욱 원고가 있어야 하잖아요. 전 그냥 메모해서 읽을 용도로 생각했는데 책자에 들어가는 거면 원고를 써야 하고 그러니까... ”
“ 으윽, 정말 답답한 녀석일세! 표트르, 왜 하필 이런 놈을 데려온 거야! 책자는 벌써 다 나왔다고! 가면 나눠 줄 거야! 시간표하고 참여 기관명하고 다른 잡동사니들 적혀 있는 프로그램 책자 줄 거라고! ”
“ 하지만 그러면 자료집으로 대체한다는 얘긴... ”
“ 그건 그냥 하는 말이고! 으윽, 혈압 올라. 표트르, 이 친구 사무실에서도 이러나? 어지간히 선배들 괴롭히겠군. ”
“ 너무 우리 다냐에게 뭐라 하지 말게. 아직 젊어서 그러니까. 우리 회사 막내라서 고참들이 좀 오냐오냐 해줘서 그렇지. 요즘 애들은 다 이런다네. 다냐만 그런 게 아냐. 우리 젊었을 때는 어땠나. 척하면 착! 선배들 말씀은 하늘이었지. 그땐 직장도 참 인간적이었는데 이젠 갈수록 젊은 애들은 자기만 알고 선배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그렇다고 일을 잘 하는 것도 아니니... 내참, 회사 얘기니 밖에 가서 이런 말 남부끄러워서 할 수도 없고. 하지만 의회나 검열본부는 우리랑 한솥밥 먹는 사이니까 그나마 이런 얘기라도 하는 거야. 그쪽은 사정이 어떤가? ”
“ 말도 말게. KGB가 그러는데 우리라고 안 그러겠나! 그나마도 자네 쪽은 스페호프 국장이 워낙 꼬장꼬장하고 원칙을 수호하는 사람이니 좀 나을 걸세. 우리는 이번에 온 의장이 또 얼마나 젊은 애들을 끼고 도는지 아나? 간부들과 20년 이상 된 직원들은 마주치기만 하면 호통치고 박살내는 게 기본인데 젊은 애들만 보면 싱글싱글 웃고 농담 따먹기도 하고 밥도 얼마나 잘 사주는지. 그게 바로 직원들 길들이기지! 낙하산으로 내려와서 아주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비상하다니까! 원칙과 정의를 수호하는 간부들과 고참들은 껄끄러우니까 제거 대상이고 멋모르는 어린놈들만 자기편으로 포섭하는 거지! ”
“ 어쩌면 그렇게 우리 검열국과 똑같나! 우리는 아예 젊은 것들이 자기들끼리 서클을 만들더니 모여서 한다는 게 매일같이 선배들 욕하고 어떻게 하면 일을 덜 할까, 어떻게 하면 야근을 안 하고 선배들 뒷바라지 안 하고 튈까 이런 궁리만 한다네! ”
세 남자가 침을 튀기며 젊은 직원들을 욕하는 동안 베르닌은 기회다 싶어 열심히 원고를 썼다. 자료집으로 대체할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은 들었다. 바라노프스키를 비롯한 저 셋은 철밥통들이니 이런 일에 워낙 경험이 많을 테니까. 하지만 출장 결과보고서를 쓰게 되어 있으니 분명 스페호프의 패턴 상 그에게 주제 발표 원고를 첨부하라고 명령할 게 뻔했다. 한참 원고를 쓰고 있는데 비행기가 착륙을 했다.
공항에 도착한 후부터 베르닌은 선배들의 짐꾼이 되었다. 양 손으로는 바라노프스키와 주브치크의 트렁크를 끌고 왼쪽 어깨에는 자신의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는 발따예프의 가방을 둘러멨다. 그러자 자꾸 왼쪽에서 가방이 줄줄 흘러내려서 아주 불편했다. 무거운 것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세 남자는 발걸음도 가볍게 앞장서면서 빨리빨리 오라고 타박을 했다.
짐이 너무 무거운데다 시내까지 들어가는 교통편이 별로 좋지 않았으므로 베르닌은 택시를 타려고 했다. 하지만 발따예프가 정색을 했다.
“ 자네 미쳤나? 출장비도 조금밖에 안 나오는데 택시라니! ”
“ 공항에서 워크숍 행사장까지 이동하는 교통비는 주최측에서 지급해주는 것으로 되어 있던데요? 택시비 기준으로 책정되어 있었어요. 공항에서 시내가 상당히 멉니다. 짐도 많고... 버스에는 사람이 많아요. ”
“ 허참, 요즘 젊은 것들은 정말 배가 불렀다니까. 전쟁을 안 겪어봐서 그래. 우리 식비도 공무원 여비 규정에 맞춰서 엄청 조금 주잖아! 여기까지 와서 그래 술 한 잔 하고 모스크바 맛집은 가봐야 할 것 아닌가! 크레믈린도 구경하고! 그러려면 다른 비용을 아껴야지! ”
“ 어... 저... 술 마시고 맛집 가고 관광하는 건 사적인 거니까 출장비가 아니라 사비로 하는 거 아닌가요? 전 그렇게 생각했는데. ”
“ 아아, 표트르. 저 녀석 입 좀 틀어막게. 저거 완전 고문관이로구만. ”
별 수 없이 베르닌은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러 갔다. 승객들이 무척 많았다. 가방 4개를 들고 버스를 타려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게다가 베르닌은 이번 출장의 총무였으므로 4인의 차비까지 계산해서 내야 했다. 차비를 꺼내다 가방을 우르르 떨어뜨려 차장의 눈치를 받았다. 차장은 심지어 베르닌에게 짐을 4개나 가지고 있으니 가방 요금을 추가로 받아야 한다고 했다.
“ 저, 제 건 하나뿐입니다. 저쪽에 있는 저 세 분의 가방들이고요, 제가 한꺼번에 들고 있는 것뿐이에요. 추가 요금은 억울하죠. 1인당 가방 하나는 허용되잖아요. ”
“ 그럼 자기 짐은 자기가 들어야지 왜 당신이 혼자 들고 있는 건데! ”
“ 그게... 다들 나이 드신 선배들이라 짐을 운반하기가 버겁다 하셔서 젊은 제가 짐꾼 노릇을 하고 있는 거라서요. ”
“ 아니, 오늘 왜 이렇게 짐꾼들이 많아. 아침부터 꼭 이렇게 서너 명이 같이 타는데 젊은 애 하나가 짐을 다 들고 있고, 추가 요금 내라고 하면 판에 박은 듯 똑같이 얘기한다니까! 진짠지 거짓말인지. ”
“ 진짭니다. 어... 그럼 그 사람들도 다 저희처럼 워크숍 참가자들인가 보네요. 각 지역에서 다 온다고 했거든요... ”
“ 아니, 그놈의 워크숍 한번만 더 했다가는 처녀총각들 어깨 다 내려앉고 허리도 부서지겠네! 가방이 한두 개도 아니고! 자기 아들딸이면 이렇게 했겠나! 인간들이 양심머리가 있어야지! ”
나이 지긋한 뚱뚱보 아주머니 차장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화를 냈다. 베르닌은 차장이 자기편을 들어줘서 고마웠지만 행여 발따예프 일행이 그 말을 들을까봐 겁이 나서 횡설수설 얼버무렸다.
“ 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젊어 고생은 사서 고생... 막내, 서무... ”
“ 어이구, 헛소리하는 것까지 똑같네. ”
차장은 혀를 차며 다른 승객들 쪽으로 갔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버스는 빙글빙글 이어지는 원형의 도로를 달려 시내로 진입했다. 몇 년 만에 모스크바 시내가 보이자 베르닌은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찡해지면서 감상적인 기분에 젖었다. 그러나 그 순간 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던 바라노프스키가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듯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 다닐! 이쪽으로 와서 설명을 좀 해줘야지 뭐하나! 이제 크레믈린인가? ”
“ 어, 아니요. 크레믈린은 완전 도심에 있어서 한참 가야 해요. 이 버스는 그쪽으로는 가지도 않고요. 내려서 갈아타야 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먼저 워크숍 행사장에 가야 해서 방향이 다른데요... ”
“ 그럼 저건 뭔가? 볼쇼이 극장인가? ”
“ 볼쇼이도 크레믈린이랑 그쪽 동네 근처에 있어서요... 지금 보시는 건 그냥 동네 극장 같은데요... ”
“ 아, 그럼 여기가 아르바트 거리인가? 거리도 넓고 화려하구먼. 역시 모스크바야. 우리 가브릴로프와는 비교가 안 되는군. ”
“ 저, 겐나디 안드레예비치. 아르바트도 도심에 있어서요... 여기는 아직 외곽 쪽입니다. 그냥 거주지 쪽이에요. 이 버스는 아르바트 쪽으로도 안 갑니다... ”
“ 아니, 자넨 무슨 일을 이 따위로 하나! 어차피 버스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거, 당연히 크레믈린, 아르바트 따위는 보면서 가야지! 그런 루트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어야 할 거 아닌가! 심지어 갈아타라고 하지를 않나! ”
“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시내 들어가는 버스는 이거 하나밖에 없거든요. 그리고 저희는 행사 시작 시간에 맞춰서 가야 하니 중간에 시내 구경할 틈이 없어요. 처음에 명단 등록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관광은 오늘 저녁이나 내일... ”
“ 저녁이라니! 겨울이라 해도 금방 지는데 저녁 되면 어떻게 구경을 하나! 알겠네! 일단 행사장에 가서 명단 등록만 하고 나오는 거야! 곧장 크레믈린으로 먼저 가고, 그 다음엔 볼쇼이 극장 앞에 가서 사진 한 방 박고, 그리고는 아르바트, 그리고 참새 언덕으로... ”
베르닌은 버스를 멈추고 바라노프스키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 내쫓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예, 알겠습니다. 일단 명단 등록부터 하시지요. 두 정거장 후에 내려서 갈아타야 합니다. ”
발따예프 일행이 우르르 내린 후 베르닌이 혼자 낑낑대며 가방들을 들고 내리는데 뚱뚱한 차장 아주머니가 옆으로 와서 도와주었다. 그리고는 베르닌의 등짝을 툭툭 두들겨 주었다.
“ 총각, 고생하네. 어휴, 군대 간 우리 아들 생각나서 미치겠네. 저런 인간들 비위 다 맞춰줄 필요 없어! 우리가 왜 혁명을 했는데! 저 작자들이 어디서 부르주아 행세야! ”
“ 저... 감사합니다. 근데 혁명을 해도 높은 사람은 끝까지 높은 사람, 서무는 끝까지 서무... ”
“ 에이그... 밥이나 잘 챙겨먹고 다녀. ”
* * *
행사장은 각 지역에서 온 우수 공산당원들로 우글거렸다. 주최측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구내식당에서 먹은 후 베르닌은 명단 등록을 하면서 자료집과 숙소 열쇠를 받았지만 그 사실을 선배들에게 얘기해야 할지 망설였다. 열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워크숍이고 나발이고 대번에 숙소로 직행해서 짐을 푼 후 관광을 나가자고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쇠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는데 이럴 때만 매의 눈을 자랑하는 발따예프가 잽싸게 다가왔다.
“ 오, 방 열쇠를 받았구먼. 그럼 이제 숙소로 가지! ”
“ 저, 선배님. 근데 최소한 개회식 마치고 지역별 소개는 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돌아가면서 소개한다는데 우리 쪽만 빠지면 모양새가 좀... ”
“ 으으, 답답해! 우린 피곤해 죽겠단 말이야! 자네도 우리 나이 돼 보라고! 새벽부터 일어나 비행기 타고 왔지, 심지어 무거운 짐 들고 만원버스 탔지, 뼈마디가 시려 죽을 지경이네! ”
“ 하지만 최소한 지역별 소개 때는 자리를 지켜야죠, 그것까지 빠지면 지적당할 거고 그럼 우리 가브릴로프 체면이 뭐가 되나요. ”
발따예프와 베르닌이 티격태격하자 주브치크가 재판관처럼 근엄하게 말했다.
“ 뭘 그런 걸 가지고 골치를 썩여. 아직 시작하려면 20분 남았군. 다닐! 자네가 지금 우리를 숙소까지 데려다주는 거야! 우린 호텔에 짐 풀고 눈 좀 붙이고 있을 테니 자네가 우리 대표로 참석하게! 딱 우리 지역 소개까지만 끝내고 숙소로 오는 거야! 그리고 크레믈린으로 직행하는 거지! ”
베르닌은 저항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숙소는 행사장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였다. 그는 다시 가방 4개를 둘러메고 질질 끌며 호텔로 향했다. 그러나 짐을 풀기가 무섭게 셋은 또다시 방이 너무 좁다느니, 시설이 낡았다느니 하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베르닌은 급하게 자기 가방에서 볶은 땅콩과 청어 통조림, 보드카 한 병을 꺼내서 선배들 앞에 갖다 바쳤다.
“ 이거라도 드시면서 조금만 쉬고 계세요. 저는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
“ 쯔쯔, 노티 나게 웬 땅콩이야. 젊은 사람이... 하여튼 보드카는 잘 챙겨왔구먼. 유일하게 오늘 잘 한 일이네. 지금 1시니까 아무리 늦어도 2시까지 돌아오게! ”
“ 예. ”
베르닌은 잠시라도 그들과 떨어질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급하게 행사장으로 돌아갔다. 놀랍게도 아까 그렇게 득시글대던 사람들이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지역별 기관 소개와 자기 소개가 시작되었다. 마이크를 잡고 인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베르닌 또래의 남녀였다. 한 지역에서 두 명 이상 인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다들 ‘저희 ㅇㅇㅇ시에서는 모모 기관, 모모 협회에서 아무개와 아무개, 또 아무개가 참여하였습니다만 제가 대표로 인사드립니다’ 로 급하게 인사를 마치고 들어갔다.
베르닌이 유심히 보니 대표로 인사드린다고 말하고 들어간 사람들의 옆자리는 모두 텅 비어 있었다. 바로 자신처럼! 어느 동네나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조금 안심하고 베르닌도 앞사람들처럼 ‘저희 가브릴로프 시에서 온 참가자는 시 의회 홍보부장 겐나디 바라노프스키, 검열국 선전부장 비탈리 주브치크, KGB 감시분석 차장 표트르 발따예프, 그리고 같은 부서의 저, 다닐 베르닌 총 4명입니다. 대표로 인사드립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라고 인사를 후다닥 마치고 들어왔다. 잘 보니 아무도 인사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심지어 얼굴도 쳐다보지 않았다.
소개의 시간이 끝나자마자 지역별 주제 발표가 시작되었다. 베르닌은 혹시나 해서 조바심을 내며 주제 발표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라노프스키의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아르한겔스크 대표가 레닌과 스탈린,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경제 모델에 따른 공산당원 교육 정책에 대해 5분쯤 발표하고 나자 사회자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앞으로 나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다들 아르한겔스크 대표에게 박수 보내주시죠. 훌륭한 발표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홀을 둘러보니 연방 각 지역에서 여기까지 오시느라 다들 많이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개회식과 자기 소개가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니 나머지 지역들에서 준비해온 내용은 자료집으로 대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30분 휴식하겠습니다. 휴식 후에는 조별 토론을 진행하겠습니다. ”
조별 토론이란 각 지역별로 팀을 짜서 우수 공산당원의 필수 자세와 미션을 주제로 토의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오전에 모여서 지역별로 결과를 발표한 후 모스크바 세션은 마무리된다는 거였다. 지역별로 이곳저곳에 흩어져서 자유롭게 토론하라는 지시였다. 분명 어느 팀도 행사장에 남지 않을 게 뻔했다. 토론은 더욱더 마찬가지였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시계를 보니 2시 5분 전이었기 때문에 그는 숙소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나 몰라라 하고 모스크바 강변으로 나가 혼자 돌아다니고 싶었다. 이제 겨우 출장 첫날이라니 정말 막막했다.
* * *
베르닌은 하루종일 모스크바 시내를 돌아다니며 선배들의 관광 가이드 노릇을 하고 저녁까지 먹이러 갔다. 다행히 코즐로프가 추천해준 식당은 아저씨들 입맛에 딱 맞는 곳이었다. 베르닌은 보드카를 들이 밀었던 이후 두 번째로 칭찬을 받았다. 셋은 미친 듯이 음식을 흡입했다. 베르닌은 도통 입맛이 없어 모래를 씹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야 좀 쉬려나 싶었지만 신이 난 발따예프 일행은 모스크바 야경을 보러 나가자고 난리였고 베르닌은 그들을 데리고 강변으로 갔다. 야경이야 근사했지만 칼바람이 불어와서 30분 후에는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이제야 좀 발 뻗고 쉬려나 했지만 물론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베르닌과 발따예프의 방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모두가 알아주는 주당이었다. 베르닌은 계속 술시중을 들고 안주를 마련해야 했다. 베르닌이 대충 나흘 치를 계산해 챙겨온 보드카와 맥주는 그날 밤 몇 시간 만에 모두 동이 났다. 그나마 알렉산드라의 충고대로 술과 안주를 챙겨왔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눈치 없는 놈, 책상물림 운운하며 또 엄청나게 깨질 뻔했다.
마침내 잠자리에 들었을 때 베르닌은 너무 힘들어서 토할 것 같았다. 아니, 실지로 새벽 4시에 깨서 화장실로 달려가 토했다. 원인은 밤늦게까지 선배들과 마신 보드카와 맥주, 싸구려 와인 때문이었다. 그는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종일 짐꾼이자 가이드로 너무 혹사당한데다 세 가지 술을 섞어먹다 보니 그만 속이 뒤집어지고 만 것이다. 선배들은 그에게 조직 생활을 잘 하려면 술을 잘 마셔야 한다며 계속해서 술을 권했다. 바라노프스키는 보드카에 맥주와 와인을 섞어서 폭탄주를 제조했고 베르닌에게 원 샷을 강요했다. 그러니 멀쩡할 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같은 방을 쓰는 발따예프는 토하지도 않고 트럭 경적을 울리듯 코를 골며 잘만 자고 있었다.
실컷 토한 후 베르닌은 현기증에 휩싸여 뒤늦게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나 발따예프가 6시에 일어나 그를 깨우며 배고파 죽겠다고 못살게 굴었다. 베르닌은 너무 괴로워서 끙끙대며 저항했다.
“ 선배님... 제발, 저 새벽에 토해서 너무 힘들어요. 한 시간만 더 잘게요. ”
“ 젊은 놈이 왜 이렇게 술이 약해! 숙취는 뭘 먹어야 낫는 거야! ”
“ 선배님, 조금만 기다리셨다가 식당 내려가서 조식 드세요... ”
“ 조식은 7시 반부터잖아! 난 지금 배고파 죽겠는데! 옆방에서도 벌써 깼어. 비탈리랑 겐나디도 배고프다고 먹을 거 찾는다고! 자네가 총무잖아! 아침에 먹을거리를 준비해놨어야지! ”
하는 수 없이 베르닌은 억지로 일어났다. 그 사이에 주브치크와 바라노프스키도 배고파 죽겠다며 불쑥 들어왔다. 베르닌은 가방을 탈탈 털어서 슬라이스 치즈 한 봉지와 흑빵 한 덩어리, 간밤에 먹고 남은 햄 반 토막, 딸기잼과 사과 한 알을 찾아냈다. 신문지 위에 우르르 쏟았다.
“ 저, 이거라도 들고 계세요. 전 한 시간만 더... ”
“ 아니, 이 녀석이! 어디 선배들한테 신문지를 내밀어! 이렇게 주면 어떻게 먹으란 말이야! 우리가 무슨 찌꺼기 처리반이야? 먹을 수 있는 걸로 만들어 놓으란 말야! ”
베르닌은 순간 심오한 살의를 느꼈다. 그리고 이 인간들에 비하면 왕재수의 투정은 아주 귀여운 수준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심지어 왕재수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음식 투정은 해대지만 바퀴벌레 곱등이로 협박하면 요즘은 항아리 닭고기도 먹고, 평소에도 보르쉬 한 그릇, 생선 한 토막만 준비해주면 되고 사과파이만 물려주면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가! 그리고 왕재수는 자주 먹지도 않고 많이 먹지도 않는다! 이 인간들처럼 걸신들린 듯 한 시간에 한 번씩 먹을 것 타령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왕재수는 술도 못 마시니 이 또한 훌륭했다!
그는 졸음과 숙취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어쨌든 비행기에서 챙겨온 플라스틱 나이프로 흑빵을 썰었다. 그나마도 세 조각이 나와서 다행이었다. 빵에 딸기잼을 바른 후 치즈를 한 장씩 얹고 그 위에 햄을 썰어 올렸다. 사과를 얇게 썰어서 햄 위에 또 얹었다. 부체르브로드 샌드위치가 완성되자 발따예프가 고맙다는 말도 없이 제일 큰 샌드위치를 덥석 집어 입안으로 우겨넣었다. 나머지 둘도 급하게 먹기 시작했다. 베르닌에게는 먹어보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음료수를 챙겨놓지 않았다고 타박을 했을 뿐이었다.
아침부터 샌드위치를 급조하느라 잠이 달아난 베르닌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피로를 달랬다. 생각해보니 워크숍에서는 지역별로 어제의 토의 결과를 발표하게 되어 있었다. 될 대로 돼 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가브릴로프를 호명하면 벌떡 일어나서 ‘저희는 모스크바 구경을 하고 술을 퍼마시느라 팀별 토론을 생략했습니다’ 라고 고백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호기 있게 결심한 것과는 달리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을 때도, 워크숍 홀로 이동했을 때도 계속 ‘근데 우리만 토론을 안 한 거면 어떡하지...’하고 걱정이 돼서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숙취가 심해서 그는 따뜻한 차 한 잔밖에 입에 댈 수가 없었다. 텅 빈 속과 지끈거리는 머리로 그는 워크숍 홀로 갔다. 선배들은 물론 따라오지 않았다. 아침을 먹자 이제 배가 불러서 졸려온다, 레닌그라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니 자기들처럼 연배가 있는 사람들은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방에서 좀 쉬고 있을 테니 너 혼자 가서 마무리하고 오라고 했다. 대환영이었다!
역시 홀에 모인 사람들도 전날 앞에 나와서 인사를 했던 젊은이들뿐이었다. 다들 눈이 퀭했고 뺨이 쑥 들어가 있었다. 영원히 운 없는 아르한겔스크 대표가 전날 토론 결과를 5분 동안 발표한 후 사회자가 역시나 여독도 안 풀렸을 테고 또 오후에 레닌그라드로 이동해야 하니 나머지는 자료집으로 대체하겠다고 한 후 모스크바 일정 종료를 선언했다. 가브릴로프가 A로 시작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리고 레닌그라드행 비행기 시간에 맞춰 오후 3시에 홀 앞에서 공항 가는 버스를 제공하겠다는 예기치 않은 발표에 베르닌은 정말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움을 느꼈다. 사회자를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물론 레닌그라드에서도 모스크바와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심지어 더 심했다. 레닌그라드는 구경거리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베르닌이 모스크바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레닌그라드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다는 거였다. 선배들을 데리고 이곳저곳 찾아다니기는 했지만 툭하면 길을 잃어서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그나마도 왕재수가 지도에 표시해준 곳들 덕에 큰 위기들은 모면했다.
사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추천한 식당에 대해서만은 크나큰 두려움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야채와 닭가슴살, 기름기는 전혀 없는 요리만 가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건 기우였다. 운하 뒷골목에서 길을 잃어 헤맨 후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선배들은 왕재수가 추천한 맛집에 들어가자마자 금세 얼굴이 풀리며 헤헤 웃기 시작했다. 웨이트리스가 너무나도 예쁜 여자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친절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요리는 정통 러시아식이었고 충분히 기름지고 달콤한 메뉴도 많았다. 맛도 괜찮았고 가격 또한 비싸지 않았다. 그리고 이웃 테이블들에 앉아 있는 손님들도 모두 어찌나 맵시가 뛰어나고 외모가 아름다운지 발따예프와 주브치크, 바라노프스키는 연신 입에 음식을 쑤셔 넣으면서도 멍하게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느라 베르닌을 구박하는 것도 잊었다. 그래서 베르닌은 출장을 온 후 처음으로 식사다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나오면서 보니 벽에 키로프 극장과 드라마 극장 유명인들의 사진과 사인이 든 액자들이 걸려 있었는데 제일 가운데에 왕재수의 사진도 있었다. 극장 쪽 사람들이 찾는 맛집인 것 같았다. 그래서 손님들이 다들 스타일이 좋은 게 분명했다. 다음에 간 식당과 카페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맛있는 음식과 예쁜 점원, 스타일 좋은 손님들의 3박자가 고루 갖춰져 있었다.
식사는 그렇게 해결을 했지만 관광은 역시 너무 힘들었다. 왕재수의 추천 리스트에는 어쩐지 빠져 있었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선배들을 데려갔으나 그들은 그림과 조각상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박물관이 너무 커서 어지럽다는 둥, 다리가 아프다는 둥 불만만 늘어놓았다. 궁전광장과 이삭 성당 앞에서는 사진만 한 장씩 찍은 후 다들 배고프다고 밥을 먹으러 가자고 난리였다. 고스치니 드보르에 쇼핑을 하러 갔더니 물건 값이 비싸다며 시골에서 왔다고 바가지 씌우는 거냐고 마구 화를 내서 점원과 싸움이 붙을 뻔한 것을 베르닌이 간신히 말렸다.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쪽으로 걸어가며 베르닌이 ‘이곳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사형 선고를 받고 갇혀 있었던 곳입니다’ 등등 열심히 역사적 사실을 설명해주었으나 셋은 물론 도스토예프스키고 19세기 문학이고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일제히 다리 건너 사원의 반짝이는 금빛 첨탑을 배경으로 늘어선 후 베르닌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난리를 쳤고 사진을 찍자 휙 돌아서며 그만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고 했다.
“ 저, 요새 안으로는 안 들어가실 건가요? 저 안에 볼만한 게 많은데... ”
“ 뭐하러 봐! 사진 찍었으면 됐지! ”
“ 저 안에 옛날 감옥도 있고 홍수 때 잠겼던 표시도 있고... ”
“ 옛날 감옥은 우리 가브릴로프에도 있는데 뭐하러! ”
“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갇혔던... ”
“ 도스토예프스키고 나발이고 그놈이 밥 먹여주나! ”
워크숍 참석은 모스크바와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금요일에는 레닌그라드 시 의회와 KGB 지부 견학이 잡혀 있었다. 셋 다 가기 싫어했지만 이것만은 빠질 수가 없었다. 레닌그라드 측에서 고위 간부들이 참석하게 되어 있는데다 바라노프스키는 의회 쪽이었고 발따예프와 베르닌은 당연히 KGB 쪽에 참석을 해야 했다. 검열국은 양쪽 모두 해당이 되었으므로 주브치크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죽상이 되어 견학을 하러 갔다. 가서는 간부들의 인사말을 듣고 시설 내부를 한 바퀴 돌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베르닌은 레닌그라드 KGB도 자신들처럼 관료제가 기승을 부리는지 궁금했고 스파이 양성으로 이름난 곳이니 특별 노하우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지만 물론 질문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견학을 모두 마친 후에는 의회 구내식당에서 집단으로 점심을 먹었다. 발따예프가 조그맣게 투덜댔다.
“ 경비 아끼려고 구내식당에서 먹이다니! 이런 거나 먹으려고 이 먼 곳까지 날아온 줄 아나... 이런 걸로 절약한 돈은 우리에게 일비로 더 줘야지! 맛도 형편없어! ”
“ 어, 선배님. 전 맛있는데요. 우리 구내식당보다 훨씬 나은데요? 우리는 소시지도 두 개밖에 안주는데 여기는 세 개예요! 그리고 메밀죽에 버터도 얹어주는데요. ”
“ 시끄러워, 누가 출장까지 와서 메밀죽 먹고 앉아 있냐! ”
그리고 밤마다 술판이 벌어졌다. 보드카. 맥주. 싸구려 와인. 각종 안주들. 폭탄주. 끝없이 반복되는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야~’의 향연. 금요일 밤이 되자 베르닌은 그들의 레퍼토리를 줄줄 욀 지경이 되었다. 이미 사흘 연속 새벽에 토하고 숙취로 시달리던 터라 금요일 밤에는 베르닌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소리쳤다.
“ 선배님들, 전 먼저 자겠어요! 잠이 너무 모자랍니다! 안주는 여기 모두 준비해 놨고요, 술도 여기 있습니다. 술이 모자라면 이제 사비로 구입해야 합니다, 내일 점심 저녁 식사비를 제외하곤 이제 경비를 다 써서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
“ 아니, 저 놈이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 선배들이 술을 마시면 당연히 옆에서 술도 따라주고 얘기도 나누고 해야지!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들인데! ”
“ 예, 그건 그런데요 제가 너무 졸려서... 오늘도 못 자면 아무래도 내일 선배님들을 모시고 다닐 수 없을 것 같다고요... ”
“ 자기는 어디서 잔다는 거야! 이 방에서 술 먹을 건데! 우리 오늘 끝까지 가려고... ”
“ 괜찮습니다. 전 잘 수 있어요! ”
선배들의 따가운 시선과 욕설을 뒤로 하고 베르닌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담요로 몸을 둘둘 말고 휴지조각을 뭉쳐서 귓구멍에 꽉꽉 틀어막았다. 손수건으로 안대를 만들까 생각하는 순간 이미 깊은 잠에 빠졌다.
며칠 동안 쌓인 피로와 숙취로 베르닌은 코를 골며 이따금 발길질까지 해대며 잤다. 새벽에 퍼뜩 너무 목이 말라 깨어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주브치크와 바라노프스키, 발따예프가 너나 할 것 없이 고주망태가 되어 카펫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선배들을 하나하나 부축하거나 업어서 침대에 눕혀주거나 최소한 이불이라도 덮어줬을 테지만 이미 질릴 대로 질린 베르닌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몰라. 난 아무 것도 못 본 거야. 꿈이야! ’
그래서 그는 물만 한 모금 꿀꺽 마시고 도로 침대로 기어들어가 이불을 칭칭 감고 다시 잠들었다. 약 두어 시간 동안 그는 매우 복잡한 꿈을 꾸었다. 족히 4~5가지는 됐는데 그 모든 꿈은 저 꼴 보기 싫은 진상 선배들을 네바 강에 떠밀어버리는 것으로 동일하게 끝났다. 막 마지막 꿈에서 발따예프를 강물에 거꾸로 처넣고 있는데 알람이 울렸고 그는 괴로워하며 꼼지락거리다가 문득 너무나도 행복한 생각이 들었다.
‘ 오늘이 마지막 날이구나! 오늘 저녁에 돌아가는구나! ’
선배들은 아직도 곯아떨어진 채 바닥에 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진상들에게 나흘 넘게 시달리며 학습한 결과 눈에 보일 때만 잘하면 된다는 만고의 진리를 뒤늦게 깨달은 베르닌은 자기 이불과 옆 침대의 이불을 모두 끌어내려 그들의 몸 위에 아무렇게나 덮어 주었다. 그리고 샤워를 하러 갔다.
* * *
토요일은 워크숍이나 견학 일정이 없었다. 저녁 6시에 호텔 앞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되어 있었다. 베르닌은 선배들을 데리고 다시 가이드 노릇을 하며 시내를 돌아다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배들은 연일 술을 퍼마시고 진탕 논 후유증으로 다들 상태가 시들시들했다. 그리고 찍을 만한 곳에서는 사진을 다 찍었다는 생각에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 것 같았다. 그저 낮부터 어딘가에 처박혀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보였다.
그래서 베르닌은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사실은 왕재수가 알려준 마지막 방법이었다. 차 안에서 지도에 표시를 해주다가 왕재수가 웃음기도 없이 이렇게 말했었다.
“ 빗, 물병, 이제 목걸이야. ”
“ 엥, 그게 무슨 소리야? ”
“ 그런 거 있잖아. 옛날 얘기. 마귀할멈한테 잡혀간 남자가 거기 하녀랑 둘이 도망가는 거. 마귀할멈이 쫓아오니까 빗 던지고 물병 던지고 목걸이 던지잖아. ”
“ 어... 기억난다. 빗 던지니까 가시나무숲 생기고, 물병 던지니까 호수 생기고. 그래도 쫓아오니까... ”
“ 그래, 목걸이 던지니까 불이 나서 마귀할멈 거기 타 죽잖아. ”
“ 근데 그거 목걸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
“ 어쨌든! 뭔들 무슨 상관이야! 불만 나고 마귀할멈만 퇴치하면 되지! 하여튼 여기 식당이 빗, 여기 전망대가 물병, 그리고 여기가 목걸이라고! ”
왕재수의 비유가 유치한 건지 아니면 예술적 감성인 건지 베르닌은 지금도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레닌그라드 출장에서 왕재수의 충고가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 ‘목걸이’를 들이대기로 했다.
“ 선배님들. 많이 피곤하시죠? 공항 가려면 아직 네 시간이나 남았는데 이제 슬슬 앉아서 한 잔 하시며 쉬시면 어떨지. ”
“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근데 문제는 우리가 이제 돈이 별로 없어. 총무란 놈이 재정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주머니도 가벼운데 어딜 가서 네 시간 동안 즐겁게 술을 마신담. 가뜩이나 여긴 대도시인양 거들먹거리면서 우리한테 바가지 씌우는 놈들밖에 없는데. ”
“ 저, 제가 좋은 곳을 한 군데 알아놨거든요. 여기서 별로 멀지도 않고요, 보드카가 반값이랍니다. 물을 타지도 않고요. ”
“ 엥, 그런 데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곳이 다 있지? ”
“ 쉿... 이건 비밀입니다. 다 방법이 있다는 군요. 하지만 비밀이 새어나가면 연수를 온 우수 공산당원들이 너도나도 몰려들기 때문에 저희만 살짝 가야 합니다. 남들에게 얘기해서도 안 되고요. ”
“ 물론이지! 미쳤다고 우리가 이 좋은 정보를 남들과 공유하나? 어서 가세! 빨리 안내하게! ”
그래서 베르닌은 선배들을 데리고 왕재수의 ‘목걸이’로 갔다. 그곳은 그리보예도프 운하 뒷골목의 낡은 건물 지층에 있는 선술집이었다. 분위기는 어두컴컴했지만 촌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여기저기 밀수품들이 가득했고 외국 음악들이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아마도 바냐 투레츠키 같은 인물이 운영하는 곳 같았는데 레닌그라드답게 취향은 훨씬 세련된 것 같았다. 그 건달 투레츠키에게도 거리낌 없이 드나들던 왕재수니 이곳도 단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카운터 뒤로 가면 밀수품을 암거래하는 창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발따예프 일행은 그런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긴 눈치 챈다 해도 지금은 반값 보드카가 훨씬 중요했다. 메뉴를 보니 정말 반값이었다. 베르닌은 선배들을 앉혀 놓은 후 잽싸게 카운터로 갔다. 남은 경비를 탈탈 털어서 보드카와 맥주와 크바스, 짭짤해서 조금만 먹어도 안주거리로 충분한 칼바사와 오이피클, 그리고 소금에 절인 돼지비계를 주문했다. 그리고는 왕재수가 적어준 마법의 주문인 ‘그런데 정말 눈이 예쁘고 피부가 고우시네요’ 란 문장을 억지로 주워섬겼다. 그러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50대의 뚱보 아주머니는 매우 기뻐했고 ‘어머나, 총각. 보는 눈이 있네. 내가 왕년엔 레닌그라드 남자들을 얼마나 울렸는지...’ 라면서 요리사에게 감자튀김을 서비스로 주라고 지시했다!!
안주가 산더미처럼 쌓인 접시와 술병들이 좍 나타나자 발따예프와 바라노프스키, 주브치크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고 굉장히 기뻐했다. 베르닌의 어깨를 툭툭 쳤다.
“ 잘했네, 잘했어! 자네 며칠 동안 죽을 쒔지만 마지막으로 만회하는군! 어서 앉게! 공항 갈 때까지 여기서 퍼마시자고! ”
“ 저, 선배님. 저는 숙취 때문에 한 모금만 더 마시면 토할 거예요. 그러면 선배님들 입맛도 떨어지고... 가뜩이나 아까운 술인데 선배님들 더 드세요. 저는 요 근처에 아는 사람이 살아서요, 온 김에 잠시 얼굴만 보고 돌아오겠습니다. 버스가 6시에 출발하니 늦어도 5시 반까지는 여기로 오겠습니다. ”
의외로 선배들은 야단을 치거나 저지하지 않았다. 베르닌이 빠지면 1인당 돌아가는 술의 양이 늘어난다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 같았다. 그리고 다들 감자튀김이 쌓여 있는 접시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왕재수가 이 ‘목걸이’를 추천해주면서 ‘거기 감자튀김 보면 아무도 불평 못해’ 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베르닌이 감자튀김은 얼마냐고 묻자 왕재수가 그 마법의 문구를 가르쳐줬다. 그 감자튀김은 정말 근사했다. 두툼한 막대 모양 튀김들이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었다. 황금빛으로 윤이 돌았고 겉은 바삭바삭했고 속은 촉촉하고 포실포실했다. 거기에 스메타나와 꿀, 마늘을 섞은 소스가 큼직한 접시에 잔뜩 담겨 있었는데 소스만 먹어도 맛있을 것 같았다. 베르닌은 감자튀김을 두어 개 집어먹은 후 그 자리에 철퍽 주저앉아 튀김만 흡입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그 선술집을 나왔다.
* * *
베르닌은 버스를 타고 네프스키 대로를 따라 몇 정거장 가다가 내렸다. 인접한 골목으로 꺾어져 조금 걷자 시립병원 건물이 보였다. 접수계로 가니 서류를 달라고 했다. 베르닌이 여권과 임시등록 서류를 건네주자 접수원이 장부에 적었다.
“ 어디가 아파서 오셨나요? ”
“ 어... 저... 저는 내과에 좀... 저... ”
“ 서류 보니 외지에서 오셨군요. 그럼 원래 진료 받던 의사는 없겠네요. ”
“ 아니, 그게요. 저는 진찰을 받으려는 게 아니라 누굴 좀 만나야 해서... 그러니까 의사인데... 내과... ”
“ 오늘 토요일이라 내과든 외과든 한 분씩밖에 없어요. 독감 철이라 환자도 많아서 좀 기다려야 할 거고요. ”
베르닌은 난감했다. 토요일이란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그럴 줄 알았으면 금요일에 빠져나왔어야 했다. 어쨌든 물어나 보자 싶었다.
“ 저, 전 유리 아스케로프라는 의사 선생님을 찾아왔는데요. ”
“ 아, 유라. 오늘 당직이에요. 진료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근데 어디가 아프신 거죠? 독감인가요? ”
“ 어, 예. 아마도... ”
친절한 접수원은 알아볼 수 없는 글씨를 휘갈긴 서류 두 장을 떼어주더니 그에게 2층 내과로 가라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베르닌은 2층으로 올라갔다.
대기실에는 정말 환자가 많았다. 간호사 하나가 그를 보더니 서류 한 장을 빼앗아서 가지고 들어갔다. 베르닌은 환자들 사이에 끼어 앉아 차례를 기다리며 꾸벅꾸벅 졸았다. 무척 피곤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감자튀김이나 몇 개 더 먹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한 시간 쯤 후 간호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 베르닌! 다닐 베르닌! 들어오세요! ”
진료실로 들어가자 피로에 절어 퀭한 얼굴의 의사가 구겨진 하얀 가운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40대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꼭 의대생이나 인턴처럼 잠이 모자라 보였다. 어쩌면 면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갈색 곱슬머리가 마구 헝클어져 있는데다 안경은 왼쪽 다리가 구부러져 비스듬하게 걸려 있었다. 의사는 베르닌을 보더니 가까이 오라고 했다. 그리고 외모와는 달리 의외로 상냥한 말투로 물었다.
“ 다닐. 어디가 안 좋은가요? ”
“ 어, 저... 그러니까 저는... ”
“ 흠, 목소리가 많이 쉬었는데. 숨결 섞이는 걸 보니 기관지도 문제가 있고. 청진기 좀 대 봅시다. 얼굴도 벌건 게 열도 나는 것 같군. 마리야, 환자 체온 좀 측정해 줘요! ”
베르닌이 미처 뭐라 말하기도 전에 간호사가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체온계를 쑤셔 넣었다. 잠시 후 기계적으로 숫자를 뇌어 주었다.
“ 선생님, 38도네요. ”
“ 음... ”
의사가 청진기를 대 보았다. 숨을 이렇게 쉬어라 저렇게 쉬어라 지시를 좀 하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베르닌의 맥을 짚어 보았다. 눈꺼풀에 등을 비춰보았고 입을 벌려서 혓바닥의 상태와 목구멍을 관찰했다. 그러더니 침대에 누워보라고 했다. 얼떨결에 베르닌이 눕자 배와 가슴, 등을 샅샅이 만져보고 눌러보았다.
“ 으윽, 아파요! ”
“ 거긴 원래 누르면 아픈 데니까 엄살 부리지 말고. 여기도 아파요? ”
“ 으악, 거긴 더 아파요! ”
“ 음. 원래 위염과 역류성 식도염이 있었나요? ”
“ 어, 그게... 조금이요. ”
“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최근 신체적으로 아주 고생했거나 스트레스가 심했던 게 틀림없어. 여기 장 부분도 딱딱하게 뭉쳐져 있다고요. 폐 소리를 들어보니 독감은 아닌 것 같은데, 무리해서 후두염이 왔군요. 그래서 열이 나는 거야. 게다가 맥이 많이 약해요. 당신 나이에, 이전에 앓았던 질병도 없다면 이건 꽤 심각하다고요. ”
“ 심각하다니요? 제가 혹시 무슨 병에라도... 저도 모르는 심각한 병에... ”
“ 직장에서 많이 힘든 일을 하나보죠? 당신 몸 상태를 보니 육체노동은 아니고 사무직인데. 정신적 스트레스가 엄청난 모양이군요. ”
“ 앗, 선생님. 정말 명의인가 보네요! 저 맞아요, 사무직인데요. 서무. 막내... 이번에 윗분들 모시고 출장.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매일 밤새고 술 먹고 가이드, 워크숍에 안 들어오고... ”
베르닌은 서럽기도 하고 자신의 고생을 알아주는 의사가 고맙고 반가워서 횡설수설 떠들기 시작했다. 의사는 잠시 그의 하소연을 듣고 있다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탁 쳤다.
“ 일단 후두염 약을 사흘 치 처방해줄 테니 밥 먹고 30분 후에 먹어요. 규칙적으로 먹고, 많이 자고, 손을 깨끗하게 씻고! 그리고 가급적 야근은 하지 말고 회사의 모든 일을 내가 다 처리해야 한다는 망상은 버려요! ”
“ 아니, 근데 야근을 안 할 수도 없고요... 저는 서무라서 회사의 모든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위치... ”
“ 무슨 서무가 부서장도 아니고 대표도 아닌데 회사의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담! 당신이 펑크를 내도 그건 하잘것없는 펑크에 불과해요. 맡은 업무의 중요도 자체가 다르다고요! 그러니까 내가 모든 짐을 져야 한다는 의무감 따윈 버려요! 그래야 심신이 건강해지지! ”
“ 어... 국가의 녹을 먹는 시립병원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얘기해도 되나요? 우린 모두 소련 시민... 모두가 평등하고 서로에 대해 책임이 있는... ”
“ 헛소리 집어치워요. 웬 고리타분한 이념 교육이람! 내가 무슨 공산당원도 아니고 계도 위원도 아닌데! 난 의사니까 사람 건강에 대해서만 얘기하면 됐지! 일만 실컷 하다 아프면 누가 책임져 줄 것 같아요? 당신 몸 당신이 챙겨야지! 선배들이고 나발이고 그냥 길거리에 내버리고 당신 하고 싶은 거 하다 돌아가요! ”
“ 어... 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논리... ”
“ 그리고 운동 좀 하고. 최소한 하루에 30분은 움직여요! 피부 상태를 보니 기름진 음식 좋아하고 최근 술도 많이 먹었군. 단백질 섭취를 늘리고 지방질과 당분은 좀 줄이는 게 좋겠군요. 토요일만 아니면 피도 뽑고 전체 검진을 해봤으면 좋겠는데... 집으로 돌아가면 근처 병원 가서 꼭 검진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 ”
“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
“ 아픈 데가 더 있나요? ”
베르닌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봉투를 꺼냈다.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한 바퀴 둘러봤다. 간호사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봉투를 의사에게 내밀었다.
“ 저, 제가 사실 부탁을 받아서요. 이거 전해주라고. ”
“ 누구한테 부탁을 받았다는 거죠? 이게 뭔가요? ”
의사는 봉투를 받는 대신 갑작스럽게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베르닌을 노려보았다.
“ 이게 무슨 수작이지? 당신 혹시 KGB 아냐? 이 더러운 앞잡이... 또 무슨 음모를 꾸미려고! ”
“ 어... 그게요... KGB... 아닌 건 아닌데. 그게 아니라, 제가 가브릴로프에서 왔는데, 거기 왕재수, 아니 야스민이란 애가 있는데, 제가 여기 출장 온다니까 전해달라고 부탁을... ”
“ 누구라고요? ”
“ 미하일 야스민. 당신이 주치의라고... ”
의사가 그의 손에서 봉투를 낚아챘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봉투를 찢었다. 내용물을 꺼내려다 베르닌을 힐끗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서서 창가로 갔다. 베르닌은 헛기침을 했다.
“ 저,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
“ 잠깐 거기 있어요. ”
그래서 베르닌은 어색함을 무릅쓰고 남아 있었다. 그때 코즐로프와 나눴던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아프다고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극장에도 왔다 가고, 애 진찰하면서 바이올린 아저씨는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전에 강에 빠졌을 때도 그 선생님이 나 엄청 야단쳤는데. 국장한테 꼬투리 잡힐까봐 그 좋아하는 바이올린 아저씨도 안 보려고 하는 애가 공연히 이런 위험한 걸 부탁했을 리가 없어. 주치의라고 했지. 많이 아픈 거야... 나 때문이야. 강에 빠져서 더 악화됐나봐. 전부 나 때문이야... ’
왕재수가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의료 차트가 분명했다. 가브릴로프의 담당 노의사 스타브로프는 매달 왕재수의 정기 검진 결과를 KGB와 모스크바 본부에 제출하고 있었지만 베르닌은 그게 아주 기본적인 차트일 뿐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스페호프가 전에 노의사를 욕하면서 ‘그 늙은 여우가 수작을 부린다니까. 크레믈린 의원님들에게만 진짜 정보를 빼돌리고 우리한테는 전부 숨기고 있어’ 라고 화를 냈기 때문이다. 노의사가 괜히 식사량을 늘리라는 둥, 일주일에 사흘만 출근하라는 둥 메모를 붙여놓고 간 게 아니었다. 게다가 고문도 받고 죽을 뻔 했던 게 불과 몇 개월 전이니 괜찮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자 베르닌은 자신이 그런 고문을 총지휘한 KGB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면서 온몸이 떨렸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막 베르닌이 ‘걔가 많이 아픈가요? 어떻게 해야 되나요? 약 좀 처방해 주세요. 낫게 해 줄 수 있는 거죠? 우린 시골이라 안 되지만 여긴 대도시고, 당신은 심지어 주치의니까 걔 이제 안 아프게 해 줄 수 있는 거 맞죠?’ 하고 하소연을 하려는데 의사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봉투를 가운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그 와중에 종이 한 장이 툭 하고 떨어져서 베르닌 쪽으로 굴러왔다. 베르닌은 오랫동안의 서무 생활로 몸에 밴 정리벽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웠다.
사진이었다. 사실, 베르닌도 잘 아는 사진이었다. 며칠 전 검은 숲의 온천에 갔을 때 그가 찍어준 사진이었으니까. 온천과 마사지로 신이 난 왕재수가 요양소 뒤뜰에서 팔짝팔짝 뛰고 있을 때 충동적으로 슬쩍 찍은 사진이었다. 현상한 사진을 건네주었을 때 왕재수는 ‘어휴! 누가 도촬하래! 완전 웃기게 나왔잖아. 이렇게 안 예쁘게 나온 사진 누가 보면 내 미모를 의심한단 말이야!’ 라고 투덜대면서 사진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 어, 난 이 사진 괜찮은데. 잘 나왔잖아. 빵끗빵끗 웃고 있고. ”
“ 야, 난 우주 최고 꽃미남에 세계 최고 무용수란 말이야. 지켜야 할 이미지란 게 있어! 카리스마 뭐 그런 거! 이렇게 바보같이 웃고 있는 거 팬들이 보기라도 하면 어쩌라고! ”
사진 속의 왕재수는 두 팔을 벌린 채 펄쩍 뛰어오르고 있었다. 얼굴 전체로 웃고 있었다. 눈밭에 비친 햇살 때문인지 아니면 웃느라 그런 건지 두 눈은 반달 모양으로 절반쯤 감겨 있었다. 필름을 현상했을 때 베르닌은 어쩐지 그 사진을 갖고 싶었지만 물론 그 바보 같은 생각을 무시하고 왕재수에게 사진을 가져다주었다.
의사는 무표정하게 베르닌이 건네준 사진을 받아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베르닌의 머릿속은 백지가 되었다. 기계적으로 그가 ‘그만 가볼게요’ 라고 말했을 때 의사가 입을 열었다.
“ 약 받아가고, 식후 30분 잊지 말고, 최소 다음 주만이라도 야근은 하지 말아요. ”
“ 어, 예... ”
베르닌이 뻣뻣해진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을 때 의사가 그를 불러 세웠다. 가운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목에서 뭔가를 풀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조그만 십자가가 달려 있는 목걸이였다. 체온 때문에 아직도 따스했다.
“ 이것 좀 전해줘요. ”
“ 어, 네... 뭐라고 해 줄 말이라도... ”
“ 살 빠졌으니까 고기 먹고, 많이 움직이고, 생각은 하지 말고, 많이 자라고 해줘요. ”
“ 어, 그게 전부인가요? ”
의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베르닌은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문을 닫으려고 돌아섰을 때 그는 의사가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사진을 집어 드는 것을 보았다. 유리 아스케로프, 시립병원 의사, 헝클어진 갈색 머리의 그 안경잡이 남자는 베르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기껏해야 170센티도 안 될 것 같았다. 널찍한 어깨는 앞으로 살짝 굽어 있었고 가운 소매 밖으로 빠져나온 손목에는 꼭 곰처럼 갈색 털이 무성했다. 베르닌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며 정확한 진단을 내렸던 의사의 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투박해 보였다. 의사는 사진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베르닌은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 * *
6시에 베르닌은 고주망태가 된 선배들을 버스에 태우고 공항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비행기는 전혀 지연되지 않고 7시 30분 정시에 이륙했다. 선술집에서 실컷 퍼마신 발따예프와 바라노프스키와 주브치크는 완전히 곯아떨어졌고 덕분에 베르닌도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가브릴로프 공항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였다. 베르닌은 공항 주차장 한구석에 세워두었던 자기 차를 도로 끌고 나왔다. 선배들을 태웠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발따예프는 그를 껴안았고 바라노프스키는 이렇게 재미있는 출장은 정말 처음이었다고 좋아했고 주브치크는 다음 주에 뒤풀이 겸 모여서 한 잔 하자고 소리쳤다. 베르닌은 네네 하고 대답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내가 미쳤냐!’ 하고 투덜댔다.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인간들이었다. 코즐로프가 스페호프에 대해 퍼부었던 욕설이 절로 떠올랐다. 밤길 조심해라, 등짝에....
마지막으로 발따예프를 내려준 후 베르닌은 집으로 향했다. 온몸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자정이 다 되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댔다. 토요일 밤이었기 때문에 주차장이 만원이라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야 했다. 그나마도 술과 안주들을 다 먹어 치운데다 선배들의 짐이 없어서 가방은 아주 가벼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베르닌은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쌓여 있는 설거지와 엉망으로 어질러놓고 나온 집, 그리고 며칠 간 쌓인 먼지와 냉기를 생각하며 좀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쓸쓸했다. 멀리 떠났다 돌아와 텅 빈 집에 들어서는 순간은 언제나 그랬다. 강아지 벨라, 아니 뜨보록이 떠올랐다. 투다다닥 하며 달려와 품으로 뛰어올라 준다면 쓸쓸한 마음은 가실 텐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베르닌은 문 앞에서 한참동안 열쇠를 찾느라 꿈지럭거렸다. 그때 문이 열렸다. 자기가 집을 비운 동안 주택관리국에서 크나큰 결단을 내려 아파트 현관문들을 모조리 자동문으로 바꿔준 건가 싶어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문은 수동으로 열린 것이었다. 왕재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 너 왔구나. ”
“ 어, 너 왜 여기 있어? ”
“ 집에 오랜만에 왔더니 먹을 게 없어서. 너네 집 찬장에서 수프랑 빵 꺼내 먹었어. ”
“ 어 그래. 잘했네. 근데 나 이전부터 궁금했는데... 너 우리 집에 어떻게 들어오는 거야? 난 너한테 열쇠 줬던 기억 없는데. 경비 아저씨한테 얻은 거야? ”
“ 열쇠가 무슨 필요. 너네 집 문 정도는 머리핀으로도 금방 따는데. ”
“ 뭐야? 정말이야? 여태 그럼 머리핀으로 우리 집 문을 땄단 말야? ”
“ 머리핀일 때도 있고 그냥 옷핀일 때도... ”
“ 야, 그건 불법이잖아! 남의 집 문을... ”
“ 너도 우리 집에 잘 드나들잖아! 열쇠도 있고! ”
“ 그건... 난 KGB! 너 감시요원이니까 당연히 너네 집 열쇠 있는 거지! 난 공무잖아! 근데 너는... ”
“ 공무로 문 따고 들어오는 게 더 나쁘지! ”
“ 대체 그런 짓은 어디서 배운 거야! 머리핀으로 문을 따는 거! ”
“ 문 따는 거 되게 쉬운데. 그런 걸 굳이 배우기까지 할 필요가... ”
“ 어휴, 말을 말자. ”
베르닌은 가방을 현관에 내던지고 코트를 벗었다. 안에 껴입은 양복 재킷과 셔츠를 벗고 있는데 왕재수가 혀를 찼다.
“ 너 몰골이 왜 이 모양이야. 얼굴 완전 팍 삭았네. 이 옷은 대체 며칠 동안 입고 다닌 거니. 가뜩이나 구식 양복인데 주름 때문에 더 구식으로 보여. 구두도 완전히 수명 다 됐네. 레닌그라드는 진창이 많아서 이런 구두 신고 다니면 안 되는데 그 얘기 해주는 걸 깜박했네. 어깨에 그 자국은 뭐야? 왜 이렇게 멍이 들었어? ”
“ 어, 이거... 선배들 짐가방 메고 다니느라... ”
“ 그런 걸 뭐하러 들어 주냐! 어디 강물에 집어던져 버리지. ”
“ 야, 너도 네 가방 나한테 막 들라고 하면서! ”
“ 그 쓸모없는 작자들하고 내가 같냐! 난 무용수잖아! 난 무거운 거 들면 근육이 미워지잖아! ”
“ 너 은퇴했잖아! ”
“ 그래도! 그리고 내가 뭐 얼마나 가방 들어 달라 했다고! 칫. ”
왕재수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소파로 갔다. 팔걸이에 올려놨던 우유팩을 집어 들어 길게 한 모금 마셨다. 그걸 보자 베르닌은 갑자기 목이 굉장히 말랐다.
“ 나 우유 좀 남겨주면 안 돼? ”
“ 촌스럽게 먹던 걸 달라고 하니. ”
“ 그치만 냉장고에 우유 그거 하나밖에 안 남아 있었단 말이야. ”
“ 그거 유통기한 한참 지나서 상해 있었어! 세수도 못할 지경이었다고. 버리고 새로 산 거란 말이야. 냉장고에 우유 있으니까 새 거 꺼내먹어! ”
“ 어, 그래? ”
베르닌은 냉장고 문을 열었고 깜짝 놀랐다. 안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한 달 째 쌓아두었던 유통기한 지난 먹거리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우유팩 네 개와 대용량 케피르 한 팩, 개봉하지 않은 스메타나 튜브 한 개, 치즈와 소시지, 햄, 사과, 요구르트, 감자 샐러드 한 팩, 달걀 6개, 오렌지 주스와 조그만 초콜릿 케익이 들어 있었다. 베르닌은 홀린 듯이 손을 뻗어 초콜릿 케익을 꺼냈다. 왕재수가 뒤에서 야단쳤다.
“ 뭐야, 우유 마신다며! 왜 그걸 꺼내니, 한밤중에! ”
“ 맛있겠다. 엄청 맛있겠다. 우유랑 먹으면 더 맛있겠다. 먹을래. ”
“ 야! 지금 먹으라고 사온 거 아니야! 밤중에 먹으면 너 더 살쪄! ”
“ 몰라몰라. 아 맛있겠다. 나 엄청 힘들었으니까 먹어도 돼! ”
베르닌은 내복 셔츠바람으로 소파에 철퍽 주저앉아 숟가락으로 초콜릿 케익을 퍼먹기 시작했다. 왕재수가 컵에 우유를 따라서 건네주었다.
“ 야, 넌 그냥 팩 째 마시더니 왜 내 건 컵에 따르는 거야! 설거지 생기게. ”
“ 네가 너무 걸신들린 듯이 먹으니까 체할까봐 그렇지! 좀 천천히 먹어. 누가 보면 사흘은 굶은 줄 알겠네. ”
“ 재수 없는 놈들 모시고 다니느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단 말이야. ”
왕재수는 ‘바보 멍충이’로 추정되는 단어를 종알거리면서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두 다리를 공중으로 쭉 뻗었다. 팔을 뻗기도 하고 다리를 교차하기도 하고 신기한 포즈들을 반복했다. 보통 그가 자기 전에 하는 스트레칭 동작들과는 좀 달라보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케익을 퍼먹다가 시선을 빼앗겼다.
“ 그거 뭐야? 춤추는 거야? ”
“ 이번 신작. 근데 애들이 움직임을 소화 못 해서 좀 쉽게 바꾸고 있어. ”
“ 그게 쉬운 거야? 다리 찢어지겠다. 저번에도 빅토르인지 뭔지가 막 비명 지르고... ”
“ 기본기가 없어서 그래. 연습 좀 더 하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애들이 너무 게을러. 자신감도 없고. 연습하면 될 만한 놈들도 그런다니까. ”
“ 너는 옛날에 못하는 동작 없었어? ”
“ 당연히 있었지. ”
“ 그런데 왜 애들을 그렇게 들들 볶아! ”
“ 난 연습해서 전부 해냈으니까! ”
연달아 서커스에나 나올 법한 동작을 빠르게 해낸 후 왕재수가 일어나 앉았다. 숨을 몰아쉬더니 베르닌의 손에서 컵을 빼앗아 남은 우유를 전부 마셔 버렸다.
“ 야, 먹던 거 달란다고 촌스럽다더니! ”
“ 아까워? ”
“ 그게 아니고... 참, 너 나 없는 동안 어디서 잤어? ”
“ 로만 집에서. ”
“ 또 일 많다고 극장에서 잔 거 아냐? ”
“ 이틀쯤은 그래야 했는데 로만이 하도 야단쳐서 그냥 계속 그 사람 집에 가서 잤어. ”
“ 밥은? 삼시세끼 다 먹었어? 또 풀 쪼가리에 사과 한 알, 토마토 수프 이런 거나 먹은 거 아냐? ”
“ 먹었어! 꼬박꼬박! 심지어 로만 때문에 그 항아리 닭고기도 두 번이나 먹었단 말이야! 너 로만한테 대체 뭐라고 한 거야! 로만도 너처럼 똑같이 협박하잖아! 바퀴벌레 곱등이... 우씨... ”
베르닌은 뿌듯했다. 코즐로프에게 비법을 가르쳐준 보람을 느꼈다. 왕재수는 계속 툴툴거리더니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 하여튼 난 이제 간다. 잘 쉬어. ”
“ 가긴 어딜 가. ”
“ 어딜 가다니? 집에 가야지. 잠잘 시간인데. ”
“ 너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있잖아. 그래서 우리 집 와 있었던 거 아냐? ”
“ 배고파서 왔다고 했잖아. 빵 먹으려고... ”
“ 그래서 우리 집 냉장고 가득 채워놓고... ”
“ 그래야 내일 너한테 밥 얻어먹지! ”
“ 이거 받아. ”
베르닌은 바닥에 내팽개쳤던 코트의 안주머니를 뒤져서 목걸이를 꺼냈다.
“ 그게 뭐야? ”
“ 오늘 갔었어. 편지 전해줬어. 그 사람이 너 주래. ”
베르닌은 왕재수의 손바닥 위에 십자가 목걸이를 놓아 주었다. 왕재수는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더니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베르닌은 급하게 말을 이었다.
“ 살 빠졌으니까 고기 먹고, 많이 움직이고, 생각은 하지 말고, 많이 자래. ”
“ 바보. 시골이니까 당연하잖아. ”
“ 내가 한 말 아냐, 그 사람이 전해 주라고 한 거야. ”
“ 옛날부터 그랬지. 똑같은 말만 하고. ”
왕재수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목걸이를 오른손으로 꼭 쥔 채 멍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가 옆에 베르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퍼뜩 놀라며 급하게 신발을 신었다.
“ 하여튼 고마워. 잘 자. ”
“ 잠깐만. ”
베르닌은 왕재수의 손에서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리고 뒤로 가서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왕재수는 베르닌이 잠금쇠를 채워주는 동안 가만히 있었다. 들릴락 말락 하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 무신론자인 거 뻔히 알면서. 촌스럽게. ”
“ 어차피 시골이니까 좀 촌스러워도 되잖아. ”
“ 그래. 시골... ”
왕재수는 잠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숨을 훅 들이마셨다. 딸꾹질을 하듯 잔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문을 밀고 나갔다. 돌아보지도 않고 가 버렸다.
베르닌은 소파로 돌아갔고 남은 초콜릿 케익을 전부 해치웠다. 달콤한 것을 먹고 나자 짭짤한 감자 샐러드도 먹고 싶었지만 꾹 참고 욕실로 갔다. 양치질을 두 번이나 하면서 감자 샐러드의 유혹을 뿌리쳤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자 출장 내내 쌓였던 피로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그는 침대로 직행했고 며칠 만에 꿈도 꾸지 않고 깊고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일요일이 남아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FIN
- 2015. 3. 18 ~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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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닌이 출장에서 겪은 일들은 좀 과장되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내가 직접 겪은 일들에서도 소재를 가져왔다. 나는 예전 업무 특성상 상사들을 모시고 해외 출장을 간 적이 여러 번 있는데 베르닌과 마찬가지로 살의를 느낀 적도 있긴 있... ㅠㅠ
..
짐꾼 노릇을 하며 고생한 베르닌... 어쨌든 모스크바 크레믈린의 성 바실리 사원 사진 두 장. 전에 올렸던 거지만.. 아름다운 사원이지만 물론 베르닌의 눈에 그런 건 들어오지 않는다 ㅠㅠ
그리고 레닌그라드..는 지금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이므로 러시아 폴더로 가면 그곳 사진들을 많이 볼 수 있음 :) 그래도 그냥 넘어가면 섭섭하니..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사진 두 장.
베르닌이 선배들을 세워놓고 사진 찍어준 곳. 대충 이런 배경으로 찍어줌.
이 다리를 건너가야 요새 안으로 들어가는데.. 물론 선배들은 다리 앞에서 사진만 한 방 찍고 즉시 돌아섬 ㅋㅋ
..
후반부에 등장하는 레닌그라드 병원 의사 유리 아스케로프는 본편 우주에도 등장한다. 레닌그라드 대학 강사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나오는 장편에 등장한다. 미샤는 소년 시절부터 그와 알아왔다. 미샤에게는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얼마 전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했던 미샤의 키로프 첫 시즌과 돈키호테에 대한 글에 이 사람이 잠깐 등장한다.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94
..
그럼 다음 이야기는 17편으로.. 그건 다음주에.
..
댓글은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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