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2년 전 이맘때 쓰던 글 발췌 about writing2014. 12. 31. 23:07
2014년도 한 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2년 전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아주 오래 전 만들어냈던 인물을 되살려냈다.
그 2년 전은 내게 상당히 혹독한 한 해였다.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아마도 그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은 그 당시 쓰던 글이었을 것이다. 그 글과 함께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올 수 있었다. 나는 그 글을 2012년 10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썼다. 아마 지금이라면 그런 식으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의 주인공을 되살려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 여러 편을 썼는데 그 글은 상당히 개인적이고 또 내밀한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그 글을 마친 후 '어쩌면 나중에 이 이야기들이 하나로 묶이게 된다면 이 글은 거기서 빼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네'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배경은 1970년대의 소련 레닌그라드. 나의 주인공인 미샤의 10대 후반부터 20대 초중반까지의 시기를 다뤘다. 심리적 화자는 레닌그라드 국립대 강사이자 미샤의 친구인 안드레이 트로이츠키, 애칭은 트로이였다. 소설은 약 7년 동안 주인공과 트로이, 극장, 그리고 그들의 주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꽤나 긴 이야기였지만 키워드는 언제나 명확했다. 그건 재능과 욕망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쨌든, 재작년 연말, 이맘때에 쓰던 부분 발췌해 본다. 소설의 후반부. 배경은 1976년 가을. 주인공 미샤는 스물 한살이다. 키로프 수석무용수로 승승장구하고 있던 무렵, 그리고 안무가로도 데뷔해 호평을 받기 시작한 시기. 그러나 부상과 다른 몇 가지 이유로 두어 달 휴가를 받았을 때이다.
후반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스탄카'는 미샤의 친구이자 볼쇼이 안무가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애칭이다. 일린은 전에 발췌했던 글의 화자로 등장한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3221)
세레브랴코프, 레냐, 지나 등 언급되는 인물들은 미샤의 극장 동료들이다. 물론 가상의 인물들이다. (저 레냐는 내 친구네 아들내미 레냐가 아님! 그 꼬맹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냈던 인물이었음 ㅎㅎ)
트로이가 등장하는 부분들은 이전에 이 writing 폴더에 몇번 발췌했던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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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밤중에 트로이는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담요 밖으로 나와 있던 맨 어깨에 선뜩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창문이 열려 있나 싶었지만 조금 정신이 들자 그 이유를 알았다. 옆이 비어 있었다. 미샤는 그와 함께 침대를 쓸 때는 항상 베개를 같이 베거나 그의 어깨와 가슴 사이에 머리를 대고 몸을 바짝 밀착시킨 채 잤다. 여름에는 좀 더웠지만 이런 계절에는 조그만 스토브를 켜놓은 것처럼 따뜻했다.
그는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어둠에 점차 익숙해진 눈을 옆으로 돌리자 미샤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벽에 기대지도 않고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턱을 무릎에 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두 눈이 밝은 회색과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창 너머에서 스며들어오는 빛 때문인지, 아니면 그 검은 눈 안쪽에서 발화한 불꽃 때문인지 모호했다. 그 애는 아무 말도 없이 방 안에 안개처럼 뭉쳐져 있는 어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쓸쓸하고 고통스럽고 두려움에 잠긴 눈빛으로.
트로이는 눈을 감았다. 못본 척 해주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애를 껴안고 키스를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미샤는 언제나 그의 곁에 누울 때면 순식간에 잠들곤 했다. 잠을 못 이루며 뒤척이는 일도, 중간에 깨어나는 일도 없었다. 이제 그가 고로호바야의 침실에서도 제대로 잠들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건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나쁜 꿈을 꾸고 잠깐 깨어난 것 뿐이다.
잠시 후 미샤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여전히 스토브처럼 따뜻한 온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트로이는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러자 미샤가 한 손을 뻗어 그의 손가락 끝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더 꽉 잡고 싶었지만 그를 깨울까봐 망설이는 것 같았다. 손가락 끝을 쥐고 있는 그 애의 손이 너무 뜨겁게 달아오르며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어서, 그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어서 트로이는 더 이상 자는 척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옆으로 돌아누우며 한 팔로 미샤를 끌어당겼다.
“ 아, 미안. 안드레이, 계속 자. ”
“ 악몽이라도 꿨어? ”
“ 그냥, 잠이 안 와서. 신경 쓰지 말고 자. ”
“ 이리 와, 재워줄 테니까. ”
“ 피곤하게 자던데. ”
“ 그래도 재워줄 수 있어. ”
미샤가 담요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트로이는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 위에 얹고 한 팔로 허리를 안았다. 가슴팍 위로 미샤의 귀와 뺨이 따스한 열기를 내뿜으며 와 닿았다. 미샤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귀를 댄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심장 소리를 세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스케로프가 쓰는 방법대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하지만 어둠이 걷힐 때까지 그 아이는 트로이의 심장 소리를 들었고 그대로 머물렀고 아마 잠든 적도 없었던 것 같았다.
...
트로이는 새벽에 잠시 깊은 잠에 빠졌고 자명종이 울렸을 때 퍼뜩 놀라 깨어났다. 그때 미샤는 거실 창가에 선 채 두 팔을 위로 쭉 뻗고 금방이라도 대기권을 빠져나갈 듯한 자세로 로켓처럼 몸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차갑고 희미한 아침 햇살 속에서 그 애의 몸은 끝없이 이어지는 광선처럼 길게 솟아올랐고 거기에는 그 어떤 뼈와 살도, 장애물과 가림막도 없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투명했고 한없이 길고 높이 뻗어 올랐고 형체 없이 빛났다. 그림자조차 없었다. 오로지 끝이 보이지 않는 선과 빛, 바람, 주변을 달아오르게 하는 열기 뿐이었다.
트로이는 오랫동안 침실 문가에 선 채 그 비밀스러운 변형의 순간을 응시했다. 한참 후 미샤는 바닥으로 내려왔고 두 다리를 반듯한 일자로 뻗으며 머리와 팔과 상체를 서서히 앞으로 굽혔다. 책장을 접듯 몸을 절반으로 접어 아랫배로부터 가슴과 어깨, 두 팔과 이마를 완벽하게 바닥에 밀착시켰다. 양옆으로 길게 펼쳐진 두 다리를 감싼 슬랙스의 얇은 천 위로 근육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솟아올랐다. 바닥에 엎드려 완전히 정지한 순간에도 그 육체 내부에서는 소용돌이치는 움직임이 끓어올라 흘러넘칠 듯 했다.
트로이는 등을 돌려 욕실로 갔다. 어쩐지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에 얼굴을 붉히며. 그가 나왔을 때 미샤는 부엌 식탁 위에 걸터앉아 뜨거운 차를 마시고 있었다. 트로이를 보더니 주전자에서 펄펄 끓는 커피를 한 잔 따라주기까지 했다. 알리사의 말이 맞았다. 그 애가 끓여준 커피는 갈랴의 집에서 마신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모이카 운하 뒤편에 있는 단골 카페에서 내주는 커피만큼 훌륭했다.
“ 너 이런 실력을 왜 이제야 발휘하는 거야? 5년 동안 한 번도 안 끓여줬잖아. ”
“ 냉동 옥수수로 여물 같은 걸 만들어 먹는 게 불쌍해서. ”
“ 먹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확신하다니. 맛은 나쁘지 않았는데. ”
“ 그냥 커피나 마셔. ”
“ 커피 잘 마시지도 않으면서 어디서 이렇게 만드는 걸 배웠어? ”
“ 우리 엄마. 아침에 진한 거 두 잔 마시지 않으면 절대 못 깨어나. ”
“ 아, 넌 어머니 닮은 거구나, 잠에서 빨리 못 깨는 거. ”
“ 생각 안 해봤는데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엄마도 아침엔 졸려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는 걸 마시고 싶어해. 그래서 내가 배웠어. 지금은 아리나 바실리예브나가 끓여주지만. ”
“ 아리나 바실리예브나가 누구야? ”
“ 엄마 아파트에 같이 사는 할머니. 봉쇄 때 가족 다 잃고 혼자야. 음식 솜씨가 형편없어. 커피도 별로야. 엄마가 나한테 집에 들르라고 하는 건 90퍼센트는 커피 때문이라고까지 하더라. ”
“ 네 어머니 취향이 나랑 똑같은가봐. 딱 좋은데. ”
“ 우리 엄마는 더 진하게 마셔. 설탕은 4분의 1 스푼만 넣고, 크림은 절대 안 넣어. 넌 절대 안 마실 걸. ”
“ 그래? 지금 건 어떻게 맞췄어? 레시피 있어? ”
“ 모르겠는데, 대충 끓여서.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마셨을 걸. 엄마가 아버지 생일이면 이렇게 만들어서 나한테 줬으니까. ”
“ 아... 너희 아버진 달콤한 걸 좋아하셨나 보다. 미식가셨어? ”
“ 글쎄. 난 커피는 별로 안 좋아해서. 엄마가 주면 마시는 척만 했어. 차가 더 좋아. ”
미샤는 찻잔을 내려놓은 후 냉장고에서 케피르를 꺼냈다. 팩을 뜯어 입에 대고 마시다가 등 뒤에서 트로이가 찬장 문을 열었을 때 경고하듯 말했다.
“ 그 빵, 어제처럼 버터 떡칠하려는 거지? 난 안 먹어. ”
“ 버터 없이 먹을 수는 없어, 벌써 굳었단 말야. 잼도 바를 거야. 잔뜩. 99퍼센트의 러시아 남자들이 버터와 잼이랑 같이 살아. 나머지 1퍼센트가 너 같은 불쌍한 무용수야. ”
“ 1퍼센트도 안 될걸. 레냐도 잼 없이는 차를 안 마셔. 스탄카도. ”
“ 일린? 차에 잼을 곁들여 마시는 사람치곤 굉장히 말랐던데. ”
“ 음, 나보다 두 배는 더 먹을 걸. 타고 난 거야. 아무리 먹어도 체중이 늘지 않아. 근육도 잘 안 붙고. ”
“ 그런 게 부러워? ”
“ 전혀. 스탄카는 너무 작아서 밀려났는걸. 볼쇼이나 키로프나 마찬가지야. 어느 정도 외모나 체형이 안 되면 제대로 된 역을 주지 않아. 군무 첫 줄에 제일 잘 빠진 애들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야. 스탄카 같은 무용수는 아무리 잘 춰도 캐릭터 댄스나 바리아시옹 정도 밖에 못 얻어. 그런 면에선 세레브랴코프 같은 인간이 유리하지. ”
“ 너도 못 얻는 역이 있어? ”
“ 나한테도 돈키호테 투우사 같은 건 안 줘. 그건 180센티미터 넘는 애들이 가져가. 아사예프는 185 정도를 선호해. ”
“ 넌 작지도 않잖아! 기껏 몇 센티미터 밖에 차이 안 나는데도 안 줘? ”
“ 발레만큼 편견과 전형으로 가득 찬 공연예술은 없어. 세레브랴코프나 레냐에게는 투우사를 주고 내게는 바질을 주는 거야. 틀에 박힌 이미지도 마찬가지야. 요즘도 아사예프는 로미오 출 때 내게 금발로 물들이라고 하지. 지나가 백조 출 때도. 우린 둘 다 말 안 듣지만. 니나마저도 키트리 출 때는 검은 머리로 바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아. ”
“ 난 네가 원하는 역은 다 가질 수 있는 줄 알았어. ”
“ 다 가질 수도 있겠지, 언젠가는. ”
미샤는 케피르 팩을 구겨 휴지통에 집어던지면서 돌아섰다. 검은 눈에 회색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 그때도 원할지는 모르겠지만. ”
버터와 잼을 바른 빵을 두 조각 먹고 주전자에서 커피를 한 잔 더 따라 마신 후 트로이는 미샤와 함께 집을 나갔다. 그는 학교로 강의를 하러 갔고 미샤는 러시아 미술관에 그림을 보러 간다면서 반대편 방향으로 갔다.
트로이는 그가 전날 주워섬긴 곳들을 모두 쏘다닐지 궁금했다. 돔 크니기. 피의 사원. 판탄카. 블라지미르 사원. 쿠즈네츠느이 시장. 스타로 칼린킨 다리... 네프스키 일대와 네바 강변과 핏줄처럼 뻗어나간 운하들 구석구석. 그리고 뒷골목들. 어둠과 습기가 덮쳐와 눈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물과 돌의 도시, 순찰 경찰들과 보안요원들의 눈조차 가로막는 안개가 차오르는 뒷골목들. 미샤는 10월이 다 가도록 극장과 연습실 대신 도시 곳곳을 쏘다녔고 단 한 번도 트로이에게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얘기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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