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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이지만 별로 토요일 같지 않은 피곤한 하루였다.

 

'서무의 슬픔' 7편 올려본다. 이번 편은 작년 연말 내가 겪었던 일에서 소재를 그대로 따왔다. 뭐 이 시리즈야 매 에피소드마다 내 실생활에서 아이디어를 여기저기서 따오긴 한다만...

 

가엾은 노동 기계이자 잡일 담당에 집사 노예인 우리의 다닐 베르닌은 과연 블라지미르 스페호프의 드높은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보고서를 써낼 수 있을 것인가!!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연말이 닥쳐오고...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국장은 일년을 정리하여 모스크바 본부로부터 제대로 된 성과 인정을 받기 위해 직원들을 들들 볶기 시작하는데... 오고야 만 보고서의 시즌!!! 이는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총괄 서무에게는 가혹한 시기였으니...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이 시리즈의 배경은 1980년대 초반 소련의 지방 소도시이므로 스페호프가 자와 컴퍼스를 사용하고 베르닌이 등사를 하는 아날로그식 보고서 작성을 너무 비웃지 마시길..

 

*** 당년도 성과보고서니 익년도 업무계획서니 하는 것은 물론 소련 공공기관, 특히 이런 KGB에서는 이런 형태로 진행하지는 않을테고... 그냥 그렇게 넘어가자~ (사실은 베르닌이 아니고 작년 내 얘기, 흐흑... )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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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7 

 

 

서무의 슬픔

- 보고서의 악몽 -

 

 

 

 

 

11월말이 되자 스페호프 국장은 종일 바빴다. 자를 대고 줄을 긋고 작도기와 컴퍼스를 써서 원과 반원과 타원을 그리고 색연필과 파스텔을 동원, 다양한 색칠을 했다. 마침내 서무인 베르닌을 호출했다. 당년도 KGB 부서별 성과보고서 양식과 익년도 업무계획 양식이 하달되었다. 이후 국장은 전 직원을 강당에 집합시키고 연설을 시작했다.

 

“ 모스크바 본부에서 연초에 공지한 바 있어 전원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이 일은 매년 이맘 때 쯤이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연례행사라고 할 수 있네. 마치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과 가을에 땀을 흘려 곡식을 잘 가꾸고 추수하듯이 우리들도 잘 영근 성과물들을 이 보고서에 잘 담아야 하는 것이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여러분이 한 해 동안 사업을 추진하면서 피땀 흘려 노력한 내용들이 고스란히 이 보고서에 잘 담겨져야 한다는 말이네. 

그러나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작성을 위한 시간은 항상 부족하기만 한 법이야. 다만 이런 상황은 우리 지국뿐만 아니라 연방 전체 KGB가 비슷할 것일세. 따라서 짧은 시간에 좋은 보고서가 나오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네.  

오전 중 서무가 각 부서에 작성 양식을 배포할 예정이야. 먼저 작성일정을 꼼꼼하게 검토하고 계획을 짜게. 올해 성과보고서는 당장 시작하고, 내년 계획서는 부서별 검토회의 후 각각의 목표를 확정하겠네. 부서별로 나온 성과보고서와 업무계획서는 남은 20일 동안 각각 총 4회의 검토회의를 진행할 예정이야. 즉, 이 보고서들은 도합 8회의 검토를 거쳐 작성될 것이네. 다들 보고서 작성에 만전을 기하도록. 

그리고 서무는 일정표에 따라 매 일정마다 각 부서의 보고서들을 모두 취합하여 깨끗하게 편집 제본한 후 내게 제출하도록. 이상일세! ”

 

베르닌은 모든 양식을 부서별로 2매씩 등사하여 배부한 후 일정표를 게시했다. 직원들은 한숨을 쉬었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각 부서들은 국장 호출 전에 보고서 틀을 짜기 위해 사전 회의를 하느라 바빴지만 베르닌이 소속된 감시분석부만은 달랐다. 당연히 막내이자 서무인 베르닌에게 모든 일을 떠넘겼다. 늘 있는 일이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난감하기 그지없어 선배들에게 하소연을 했다.

 

“ 다른 건 제가 작성한다지만 각 담당자별 통계 자료까지는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야 자료 가공을 하고 분석을 해서 이 끔찍한 양식을 채워 넣을 수 있... ”

 

“ 통계? 원래 그런 건 서무가 관리하는 거잖아! ”

 

“ 아니, 그러니까... 예산과 집행 실적이야 제가 뽑아낼 수 있다지만 담당자별로 올해 작성한 보고서들이 있잖습니까. 감시 대상자 목록부터 시작해서 도청 실태, 체포율과 재판 수감 내역 증가율, 도청 증가로 인한 실제 범죄율 하락 내역 등등... 그건 선배님들 업무... ”

 

“ 그 자료들은 전부 찾아보면 있잖아! 서류철 다 뒤져보면 나오는 것들인데 뭘 우리한테 이거 내놔라 저거 내놔라야. ”

 

“ 하지만 그건 너무 맨땅에 헤딩하는 짓인걸요. 담당자들은 30분만 투자하면 다 나오는 자료들인데 제가 모든 것을 맡아서 하면 각각의 업무 추진 배경부터 시작해 모든 내용을 다 읽고 파악해야 하고 또 하나하나 과정을 추적해야 하니 도저히 일정에 맞출 수가 없어요. 심지어 제가 추출한 자료들이 맞는 것인지조차 모르고요. 각자 100만큼의 노력만 들이면 되는 일을 저 혼자 하게 되면 1억만큼의 노력이 소요될 텐데... 너무나 비효율적이잖아요. ”

 

“ 이런 당돌한 녀석을 봤나. 들어온 지 2년밖에 안된 풋내기가 벌써부터 선배들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서 우릴 가르치려 들어! 심지어 우리한테 자기가 할 일을 시켜먹으려고까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가 신참이던 시절에는 보고서는 당연하고 선배들 커피 심부름부터 시작해 그분들 집 앞 눈까지 다 치워주고 출퇴근까지 다 시켜줬단 말일세! 요즘 젊은 것들은 호강에 겨워서 원... 이런 좋은 회사가 어디 있다고. 급여 꼬박꼬박 잘 나와, 공무원이니 대접받아, 안정성 있어. 고맙게 다니면서 하라는 일이나 잘 할 것이지 벌써부터 선배들한테 대들고 게으름을 피우려고 해! ”

 

“ 게으름이라니요, 전 매일 야근한다고요. 주말에도 나오고... 그리고 집 청소하고 출퇴근시켜주는 거라면 저 벌써 몇 달째 하고 있는 거 모르세요? 그 왕재수... 차 우려주지 밥해주지 청소해주지 비위맞춰주지... ”

 

“ 아, 말 한번 잘했네. 그 불여우! 그건 경우가 아주 다르지. 우리가 모르는 줄 아나?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도 하고... 그건 자네가 그 꼬마한테 폭 빠져서 돌봐주는 거잖나! 심지어 당직실에서도 응응응을... ”

 

“ 아니에요! 그건 다 오해란 말입니다! 정말 아니에요! 그땐 귀신이... 고양이가, 쥐랑 바퀴벌레를... ”

 

아니긴 뭐가 아냐. 체육대회 때도 우리 애들이 그 불여우 짓뭉갰더니 자네가 울면서 그 자식 안아주던 거 다 봤어! 어휴 찝찝해라. 말세야 말세. 아무리 곱상하게 생겨도 그렇지 사내자식을 안고 뽀뽀하고 물고 빨고.. ”

 

“ 아아 억울해... 진짜 아니라고요. 저는 아니에요! 제발 걔랑 저를 이상하게 엮지 말아 주세요. 우리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요. 전 그냥 그 자식의 감시요원이자 운전기사이자 가정부... ”

 

“ 아닌 척 할 거 없어. 회사에서는 다 아는 일인데 이제 와서 뭘 그래. 하여튼 빨랑 보고서나 쓰란 말이야. 선배들한테 일 떠넘기고 그 불여우랑 놀아나려고 수작 부리지 말고! ”

 

얼이 빠진 베르닌이 뭐라고 항의를 하기도 전에 선배들은 휭 하고 자리를 떠 버렸다. 다들 구시가지에 맛있는 항아리 닭고기 식당이 생겼다고 일찍 점심을 먹으러 나가 버린 것이다.

 

점심 부대에 합류하려고 뛰쳐나가던 등록부서의 리자가 문득 그를 발견하고는 불쌍하다는 듯 다가왔다.

 

“ 다냐, 같이 가서 항아리 닭고기 먹어요. 거기 맛있대요. 기름기도 엄청 많고 국물도 뜨끈해서 먹고 나면 기력 회복된대요. 체육대회 때 걸린 감기 아직 다 안 나았잖아요. ”

 

“ 괜찮아요, 전 그냥 구내식당에서 먹을래요. ”

 

“ 구내식당은 맛도 없고 전에 사모바르에서 바퀴벌레도 나왔잖아요. 간만에 다들 회식하는 건데 같이 가요. ”

 

“ 항아리 닭고기 식당은 너무 멀더라고요. 다녀오면 점심시간이 다 끝날 거예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안 되겠어요. 빨리 대충 먹고 보고서 자료를 뒤져야 하거든요. ”

 

“ 아휴, 책상물림. 일벌레... 알았어요. ”

 

리자가 나가버린 후 베르닌은 혼자 구내식당에 내려가 지독하게 맛없는 메밀죽과 불어터진 소시지를 10분 만에 해치웠다. 그리고 사무실로 올라와 서류철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    *    *

 

 

보고서 제출 마감일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베르닌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성과보고서와 업무계획서 검토회의를 각각 3차례씩 진행했고 마지막 회의를 1회씩, 도합 2번을 앞두고 있었다. 감시분석부의 보고서는 일주일 전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마무리했고 다른 부서들의 보고서도 모두 취합하여 국장의 요구대로 깔끔하게 제본해 제출했지만 국장은 검토회의 때마다 계속 수정을 요구했고 베르닌은 다른 부서 서무들과 함께 밤을 새서 각 자료를 수정한 후 다시 제본을 했다. 그는 부서 서무일 뿐만 아니라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총괄 서무이기도 했기 때문에 결국 모든 마무리는 그의 몫이었다.

 

게다가 스페호프는 계속해서 그를 들들 볶았다.

 

“ 편집 좀 제대로 못 하나! 여기도 오타가 있군! 행간도 틀렸어! 이 표는 또 왜 이 모양인가! 색깔을 제대로 맞춰야 할 것 아닌가! ”

 

“ 아아, 국장님. 4차 검토회의에서 또 내용을 왕창 수정하실 게 뻔한데 지금 이렇게 하나하나 모양을 고쳐놓으면 무슨 소용이... ”

 

“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매 회의마다 각 버전마다 틀을 잘 맞춰야 할 것 아닌가! ”

 

“ 하지만 이건 저희 내부 검토용이고 본부 제출본도 아닌데... 어차피 편집하고 고칠 텐데... ”

 

시끄러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 모르나!

 

베르닌은 그 보기 좋은 떡을 만들기 위해 너무 고생을 해서 막상 떡을 먹기도 전에 체할 거라고 대들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는 매일 새벽까지 일하고 때로는 사무실에서 밤을 새며 보고서를 작성 편집했다. 근무 시간에는 원래 업무를 처리해야 했으므로 보고서 작업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토요일에도 혼자 출근해 밤을 새며 4차 검토회의용 성과보고서와 업무계획서 초안을 만들었다.

 

 

일요일 아침 8시에 그는 콧물을 줄줄 흘리며 눈보라를 그대로 맞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필 차도 고장났기 때문이다. 난방도 안 되는 사무실에서 한 시간 정도 눈을 붙인 게 전부인데다 계속 말라빠진 비스킷과 차가운 통조림 수프로 끼니를 때운 탓에 이미 몸이 얼어 있었던 베르닌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하 15도의 날씨에 눈보라를 맞고 돌아오느라 심한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간신히 집에 들어왔을 때 그는 젖은 옷을 미처 다 벗지도 못하고 소파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베르닌은 몇 시간 동안 끙끙 앓았다. 너무 추워서 몸이 덜덜 떨렸지만 옷을 갈아입거나 침실로 가서 이불을 뒤집어쓸 기력이 없었다. 열이 펄펄 끓었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온몸이 떨어져 나가는 듯 아팠다. 몽롱하게 잠이 들었다 깨어났다 반복했다. 살풋 정신을 잃을 때마다 눈앞에서 성과보고서와 업무계획서와 표와 예산과 통계 숫자들이 춤을 췄다. 스페호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1차, 2차, 3차, 4차 보고서와 계획서들을 그의 면전에 집어던지며 행정의 기본에 대해 설교를 해댔다.

 

마침내 그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가기로 했다. 목이 너무 말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파에서 내려와 몇 발짝 걷지도 않아 현기증으로 비틀거리다 카펫 위에 그대로 뻗어버렸다. 엉금엉금 기어가려고 했지만 몸이 철썩 달라붙는 것 같았고 머리가 빙빙 돌았다. 다시 기절한 것 같았다.

 

어렴풋하게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낯익은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조그맣게 이어졌다.

 

“ 아휴, 너 왜 복도 창문 다 열어놨어! 눈이 다 들이쳤잖아. 현관문도 열어놓고. 어디서 이렇게 바람이 들어오나 했네. ”

 

왕재수의 목소리였다. 그간 저 녀석에게 얼마나 시달렸으면 아픈데 꿈에서까지 나타나 바가지를 긁나 싶어서 베르닌은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 아아... 제발 이제 그만... 국장도 모자라 쟤까지 꿈에 나오다니... ”

 

“ 어, 너 뭐야. 운동해? 왜 바닥에 엎드려 있어? ”

 

“ 으으... 꿈인데도 어쩌면 저렇게 현실적인 대사를... ”

 

“ 야, 너 자는 거야? 술 취했어? ”

 

갑자기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베르닌은 괴로워하며 억지로 눈을 떴다. 눈앞에 까맣고 하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곧 그림자는 까만 머리에 하얀 스웨터를 입은 왕재수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 우욱, 이건 꿈이야. ”

 

“ 뭐가 꿈이야. 취했구나. 맨날 늦게 오고 집 안 오더니 일하느라 그런 게 아니고 술 퍼마시느라 그런 거였구나! ”

 

“ 아니야, 술 아니야... 나, 계속 야근. 눈 맞고... 나 불쌍... 우욱... ”

 

베르닌은 갑자기 속이 너무 울렁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쿨럭쿨럭 기침을 하다가 그만 토하고 말았다. 왕재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 으악, 너 지금 토하는 거야? ”

 

“ 보면 모르냐... 우웩... ”

 

“ 아이 참, 이게 뭐하는 거야! 아휴, 카펫에 왕창 토했네! ”

 

“ 상관 마, 내 카펫인데... 우애액... ”

 

한참 토하고 났더니 그래도 정신은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눈을 뜨자 왕재수가 그의 곁에 쪼그려 앉아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 하지 마, 정신 사나워... ”

 

“ 열 많이 나나봐, 얼굴이 벌개. ”

 

“ 그럴 수밖에 없잖아. 독감에 토하고... 아깐 추웠는데 지금은 너무 더워. ”

 

“ 대체 뭘 먹은 거야, 식중독이야? 아이 지저분해라, 토한 거 색깔이 빨갛고 초록색이고 얼룩덜룩해. 내 속도 다 울렁거리네. ”

 

“ 사흘 째 통조림 토마토 수프만 먹었단 말이야... 울렁거린다면서 왜 옆에 앉아서 그런 걸 보고 있냐... 빨랑 집에 가. 귀찮아. 좀 놔둬. 우욱... ”

 

베르닌은 다시 토했다. 왕재수가 몸서리를 치면서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구급상자에서 감기약이라도 꺼내달라고 할 걸 하는 후회가 막심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엎드린 채 베르닌은 다시 비몽사몽 상태로 빠져들었다. 왕재수가 왔던 꿈을 꾼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라면 아리따운 렐랴나 나타나지 왜 하필이면 왕재수인가 싶어 아픈 와중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때 입가에 축축한 수건이 와 닿았다.

 

“ 아 차가워! 이게 뭐야! ”

 

“ 가만히 좀 있어. 좀 닦게. 지저분하게 이게 뭐니, 토한 거 다 묻히고. ”

 

왕재수가 젖은 수건으로 그의 입과 턱을 슥슥 닦았다. 그리고는 다른 수건을 그의 이마에 대 주었다. 처음에는 아주 차갑게 느껴졌지만 점차 미지근해졌고 나빴던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그때 왕재수가 그의 부츠와 양말을 벗기면서 투덜댔다.

 

“ 너 눈 맞으면서 걸어왔구나! 그럼 들어오자마자 신발부터 벗었어야지. ”

 

“ 내버려둬! 카펫 내 거라 했잖아. 남이야 흙탕물로 더럽히든 토하든! ”

 

“ 카펫 얘기가 아니고! 독감 걸렸다면서 젖은 걸 신고 있으면 어떡해! 아휴, 코트도 안 벗고... 이러니까 열이 나지! 바보 멍청이. ”

 

“ 나 바보 멍청이 아니야. 너무 아파서 부츠랑 코트 벗을 기운이 없었단 말이야... ”

 

“ 그러면 병원에 가든가! ”

 

“ 일요일이잖아. 나 아침에 집에 왔단 말이야. ”

 

“ 아유 정말 꽉 막혀가지고! 그럼 나한테 전화라도 했으면 됐잖아! ”

 

“ 너한테 전화하면 뭐, 너처럼 게으른 녀석이 날 데리러 나왔겠냐? 운전도 못하는 게. ”

 

“ 나 운전 못하는 거 아니야! 서툰 거지! ”

 

“ 그게 그거잖아! 아, 자꾸 말 시키지 마. 또 울렁거려. 야, 뭐하는 거야! ”

 

“ 가만히 좀 있어! 어휴, 많이도 껴입었네. ”

 

베르닌은 저항하려고 했지만 손끝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서 왕재수가 코트와 스웨터와 셔츠와 바지와 내복을 벗기는 동안 투덜대기만 했다.

 

“ 추워! 내복은 그냥 놔둬! ”

 

“ 내복까지 다 젖었단 말이야! 너 진짜 저 눈 다 맞고 걸어왔구나. 로만도 눈 온다고 침대에서 진짜 나가기 싫어했는데. ”

 

“ 그냥 바이올린 아저씨랑 놀지 여긴 왜 온 거야... ”

 

“ 로만 오늘 저녁에 오페라 무대 있어서 연주하러 갔어. 근데 날씨 때문에 아무래도 오늘 관객들도 못 올 거 같아. 계속 이러면 극장에 전화해서 공연 취소시켜야지. 그럼 로만도 집으로 다시 오겠지 뭐. ”

 

“ 넌 좋겠다, 감독이니까 전부 네 맘대로 할 수 있고. 직원들 부려먹고 명령하고... 보고서도 쓰라고 하겠지. 계획서도 쓰라고 하고... 아아... ”

 

“ 웬 보고서. 우린 춤 잘 추고 노래 잘 하면 되는데. 그리고 나 직원들 안 부려먹어! ”

 

“ 뻥치지 마. 저번 행사 때 무용수랑 연주자들 들들 볶는 거 다 봤어. ”

 

“ 그건 부려먹는 게 아니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 하니까 바로잡아 준 거지! 난 감독이잖아! ”

 

“ 쳇, 우리 국장도 나한테 잔소리할 때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

 

“ 너네 국장은 나쁜 놈이고! ”

 

“ 뭐가! 너 하는 짓이랑 똑같은데. ”

 

“ 난 너 안 괴롭히잖아! ”

 

“ 네가 날 안 괴롭힌다고? 네가 제일 많이 괴롭혀... 그렇다 치자... 그럼 우리 국장은 나 괴롭히니까 나쁜 놈인 거야? ”

 

“ 그렇지! 툭하면 야근시키고 이상한 걸로 들들 볶잖아. 무슨 권총 규격이 어떻고 주차 표지판이 어떻고 심지어 내 방에 도청장치 설치하라고 하고. 달리기 못하면 자른다고 하고, 파티에도 못 가게 하고! 난 그런 짓 절대 안 해! ”

 

“ 하긴 넌 노는 거 좋아하는 날라리니까... ”

 

투닥대는 동안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새 내복과 잠옷을 입히는데 성공했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자 불쾌하고 축축한 느낌이 가시면서 몸이 약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 너 계속 울렁거려? ”

 

“ 어... 이제 좀 나아. 다 토했나봐. ”

 

“ 일어날 수 있어? ”

 

“ 응. ”

 

베르닌은 억지로 일어나려고 해 보았다. 그러나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왕재수가 어깨를 잡아 주었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 에이. 할 수 없지. 가만히 있어 봐. ”

 

베르닌이 움찔하기도 전에 왕재수가 뒤에서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두 팔을 불쑥 끼워 넣더니 그를 비스듬하게 일으켰다. 그리고는 한 팔을 빼서 허리를 휘감고는 거대한 감자 자루라도 옮기는 것처럼 베르닌을 질질 끌고 침실로 갔다.

 

“ 어... 야, 됐어. 내가 걸어갈게. 놔라... ”

 

“ 걸어가는 거 좋아하네. 가만히 있어, 힘 빼고. ”

 

“ 어떻게 가만히 있어. 나 무거운데... 너처럼 마른 애가... ”

 

“ 말 시키지 마, 으윽... ”

 

왕재수는 숨을 몰아쉬면서 베르닌을 침실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허리를 안고 번쩍 들어서 침대 위에 내려놓고 머리 아래로 베개를 들이밀어 주었다.

 

“ 헉헉... 야, 너 다이어트 좀 해. 아까 보니까 이건 근육 무게도 아니고 그냥 살이야. 5킬로는 빼야겠다. ”

 

내가 다이어트할 시간이 어디 있니, 맨날 야근하고 밤 새는데... 운동할 시간은 없고 책상 앞에 앉아 일만 하면서 잡히는 대로 먹으니까 그렇지. ”

 

“ 그러니까 너네 국장 나빠! 남자는 몸매가 중요한데 자꾸 일을 시키니까 너처럼 되는 거잖아! ”

 

“ 야, 너 지금 나 뚱뚱하다고 비웃는 거야? ”

 

“ 아니, 뚱뚱한 수준은 아직 아니지만. 그래도 위험 단계란 말이야. 저번에 파티 갔을 때보다 더 찐 거 같아. 뱃살도 잡히고. ”

 

“ 내버려 둬! 누구처럼 말라빠진 꼬마 좋아하는 변태 아저씨랑 사귈 것도 아닌데 뭐 어때! ”

 

“ 여자들도 늘씬하고 예쁜 남자 좋아하는데... 왜 여자들이 나한테 줄을 섰겠니. 아 지겹다... 어제도 렐랴가 나한테 목도리 떠다 줬어. 추우니까 폭 싸고 다니면서 자기 생각하라나. 근데 분홍색 꽈배기 무늬가 들어 있지 뭐야. 나 분홍색 싫어하는데... 뭐 나야 피부가 원체 하얗고 고우니 분홍색도 잘 받긴 하지만 그래도 싫은데. 수도관이나 싸매 놔야겠어. ”

 

뭐, 뭐라고? 렐랴가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떠준 목도리로 수도관을 싸매겠다고? 너 미쳤냐!

 

“ 여기도 겨울 춥던데? 싸놓지 않으면 수도관 얼잖아. ”

 

“ 그건 못 쓰는 수건으로 싸면 되잖아, 왜 렐랴의 마음이 담긴 목도리를... 넌 정말 호강에 북받친 놈이야! 이 동네 남자들은 렐랴가 만든 거라면 목도리는커녕 행주 쪼가리라도 품에 껴안고 설레서 잠도 못 잘 텐데! ”

 

“ 쳇, 그럼 너 주면 되잖아. 잠깐만 기다려. ”

 

왕재수가 방을 나갔다가 잠시 후 분홍색 꽈배기 무늬가 들어 있는 하얗고 폭신한 목도리를 가져왔다. 베르닌의 목에 둘러 주고는 이불을 덮어 주었다. 목도리는 따뜻했고 달착지근한 향내도 났다. 베르닌은 정신이 몽롱해졌다.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아... 렐랴가 뜬 거라 그런지 향기도 진짜 좋다. 달콤하고 기분 좋아. ”

 

“ 그거 내가 두르고 있었던 건데? 내 향기일 걸. 로만이 아침에 날 홀랑 벗겨 놓고 그 목도리만 둘러주고 역시 예쁘다고 감탄을... ”

 

악, 도로 가져가! 이상한 짓 한 거 싫어. ”

 

“ 두르고만 있었는데 이상한 짓이래... ”

 

“ 그래도 찜찜해! ”

 

“ 뭐야? 내가 찜찜해? 더러워? 나 되게 깨끗한데. 매일 샤워도 꼬박꼬박 하고 비누도 좋은 거 쓰고 바디 오일이랑 로션도 외제 쓰는데... 너무해. 태어나서 처음 들어봐, 찜찜하다니. 난 여태 예쁘다는 말만 들었는데... ”

 

왕재수는 부루퉁해지더니 목도리를 홱 벗겨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베르닌은 어쩐지 미안해져서 웅얼거렸다.

 

“ 아니, 그게 아니고... 너는 안 더러워. 깔끔해. 저기, 너는 예쁜 게 맞는데... 그냥 나는 남자애가 하고 있었던 건 좀 찜찜... ”

 

“ 알았어. ”

 

왕재수는 목도리를 도로 주워들었지만 베르닌에게 매어 주지는 않았다. 침대 한 구석에 던져 놓더니 커튼을 쳐 주었다. 그리고는 따뜻한 물이 담긴 컵과 알약을 두 알 주었다.

 

“ 이거 먹고 좀 자. 감기약이야. ”

 

“ 응, 고마워. ”

 

왕재수가 침실 문을 닫고 나간 후 베르닌은 약을 먹었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불편하게 잠이 들었다.

 

 

*    *    *

 

 

한 시간 쯤 후 베르닌은 너무 추워서 깨어났다. 방 안이 시베리아 같았다. 추워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창문이 열려 있나 했지만 문은 꼭 닫혀 있었고 커튼도 두텁게 쳐져 있었다. 심지어 나이트 테이블 위에는 김이 펄펄 나는 주전자도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너무 추웠다. 베르닌은 괴로워하며 이불을 하나 더 꺼내 덮으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갑자기 기침이 너무 심하게 나와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족히 5분 가까이 쉬지 않고 기침을 해댔다. 가슴이 너무 뻐근해서 죽을 것 같았다.

 

기침 때문에 괴로워서 두 손으로 늑골을 부여잡고 뒹굴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왕재수가 들어왔다.

 

“ 아유, 이게 웬 난리야. 이제 기침까지 하네. 가만히 좀 있어 봐. ”

 

등을 살살 쓸어준 후 왕재수가 입에 컵을 대 주었다. 따뜻한 물을 마시자 기침이 조금 가라앉았다.

 

“ 고마워, 쿨럭쿨럭... ”

 

“ 진짜 가지가지 한다. 허우대는 멀쩡해가지고 감기는 왜 이렇게 심하게 앓는 거야. ”

 

“ 너도 20일 연빵으로 야근하고 밤새고 계속 일만 해봐... ”

 

너네 국장 나빠. 내가 혼내줄 거야.

 

“ 제발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네가 혼내준다고 하면 무서워. 또 이상한 짓을 해서 날 곤경에 처하게 하려고. ”

 

“ 칫, 내가 하는 건 다 이상한 짓이래. 아까 찜찜하다고도 하고. ”

 

“ 콩알만 한 게 뒤끝까지 있어... 쿨럭쿨럭... 아 추워... 너무 추워. 지금 난방 되는 거 맞아? ”

 

“ 라디에이터 절절 끓는데... 내가 좀 전에 관리실 가서 온도 더 높여놔서 지금 완전 사우나 수준인데. 너 추워? ”

 

“ 응, 너무 추워. ”

 

왕재수는 그의 입에 체온계를 물리더니 잠시 후 눈금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 너 열이 너무 많이 나서 추운 거야. 아까 약 안 먹었어? ”

 

“ 먹었는데 기침하다 토했어. ”

 

“ 아유, 이마는 불덩어리 같은데 다른 데는 얼음장처럼 차갑네. 여기 감기 엄청 독하구나. 역시 시골이라 그런 거야. 싫다, 시골 감기... ”

 

“ 감기에 무슨 시골이 있고 도시가 있... 쿨룩쿨룩... 아, 추워... 미안한데 나 이불 좀 더 갖다 줄 수 있어? 저 장롱 안에... ”

 

“ 이불 다 꺼내온 거야. 아까 너 자면서 추워해서 있는 거 다 덮어줬어. 우리 집에서도 하나 가져온 건데. 그렇게 추워? ”

 

“ 시베리아 눈밭에서 홀랑 벗고 구르는 것 같아. ”

 

“ 시베리아 가본 적도 없으면서. ”

 

베르닌은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이불을 더 세게 끌어당겼다. 그러고 보니 이불을 네 겹으로 덮고 있었다. 그래도 오한이 가시지 않았다. 갑자기 왕재수가 셔츠를 벗더니 바지도 훌렁훌렁 벗었다. 양말도 벗고는 팬티 바람이 되었다. 베르닌은 혼비백산했다.

 

“ 어, 야! 너 왜 갑자기 옷을 벗어? 안 추워? ”

 

“ 시끄러워. ”

 

왕재수가 침대 위로 올라오더니 이불 속으로 불쑥 기어들어왔다. 베르닌이 너무 놀라 고함을 지르기도 전에 그의 곁에 모로 눕더니 두 팔로 어깨와 허리를 휘감고 껴안았다. 그리고는 온몸을 찰싹 붙여 왔다.

 

으, 으악! 이게 무슨 짓이야! 악! 너, 너... 나 이런 거 아니라고 분명히! ”

 

“ 어휴, 진짜 차갑네. 이러니까 춥지. 너 평소에 운동 좀 하고 몸에 좋은 것 좀 먹어. 신부님한테 가서 약초라도 처방받든가. 피 끓는 나이에 왜 이렇게 몸이 차갑니. 그러니까 감기도 독하게 걸리지. ”

 

“ 놔! 떨어지란 말이야! 나 이런 거 싫어해! 난 여자가 좋단 말이야. 사내랑 이런 거 안 해, 으아... 제발 바이올린 아저씨한테 가... 이 변태야, 아파서 꼼짝도 못하는 날 덮치고 싶니? 악! ”

 

“ 시끄러워, 덮치긴 뭘 덮쳐! 너 내 취향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너 몸이 너무 차갑잖아. 가만히 좀 있어. 금방 따뜻해질 거야. ”

 

“ 아니, 그러니까... 너 지금... ”

 

“ 그냥 가만히 있어. 좀 있으면 체온 올라갈 거야. 나 원래 몸이 뜨겁거든. 나 안고 있으면 금방 따뜻해진다고 아저씨들이 엄청 좋아했어. ”

 

“ 너 내 몸 녹여 주려는 거야? ”

 

“ 응. ”

 

“ 어... 그게... 안 그래도 되는데. 어... 따뜻하다.

 

“ 이제 덜 춥지? ”

 

“ 으응... ”

 

“ 원래는 응응응을 해야 금방 따셔지는데. 그거 안하니까 넌 완전히 따셔지려면 시간 좀 걸리겠다. 많이 추우면 얘기해, 해줄 수 있으니까 ”

 

“ 어, 아니야... 제발 그것만은. ”

 

“ 맘대로 해라, 네가 춥지 내가 춥니. 하여튼 재워줄 테니까 가만히 자. ”

 

베르닌은 꼼짝도 못하고 무거운 이불 속에서 왕재수에게 안겨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굉장히 불편하고 기분이 이상하고 찜찜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몸은 점점 따뜻해졌고 노곤노곤해졌다. 쿡쿡 쑤시던 사지도 점점 부드럽게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기침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두통도 좀 가시는 것 같았다. 왕재수는 진짜 따뜻했다. 사모바르를 껴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왕재수는 그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고 기다란 두 팔과 다리로 그의 몸을 찰싹 감은 채 달라붙어 있었다. 점점 몸이 따스해지면서 졸음이 밀려왔다. 옆눈으로 슬쩍 보니 왕재수는 심지어 이미 잠들어 있었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새근새근 잠든 걸 보니 기가 찼다.

 

“ 이게 뭐야, 내 몸 녹여주고 재워준다더니 자기가 자고 있네. 내 어깨에 침도 흘리고... 이렇게 자면 불편할 텐데. ”

 

베르닌은 왕재수의 머리를 살짝 들어 베개에 내려놓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포옹을 풀어야 했는데 왕재수가 워낙 찰싹 밀착해 있는데다 그 상태가 아주 따뜻하고 편안했기 때문에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몸이 후끈해지면서 꼭 온천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무슨 아로마 온천 같았다. 따끈따끈한데다 달착지근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 어 이거 진짜 맞네, 목도리에서 나던 냄새. 그거 렐랴 향수가 아니었네. ”

 

베르닌은 몽롱한 가운데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또 동시에 대체 왜 자기가 생각만 해도 찜찜하게 사내애한테 안겨 있는데 기분이 좋은지, 왜 왕재수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는 생각을 해도 더 이상 찜찜하지 않은지 의문하자 그게 또 찜찜해지려고 했지만 결국 어쨌든 기분이 좋다는 결론과 함께 잠이 들었다.

 

 

*    *    *

 

 

베르닌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머리도 아프고 콧물도 줄줄 흘렀지만 더 이상 춥지는 않았다. 기침도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방 안은 이제 뜨끈뜨끈했고 베르닌은 네 겹이나 겹쳐 덮고 있는 이불이 무거운데다 좀 답답해서 꼼지락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문득 생각나서 옆을 보았지만 비어 있었다. 베개에 왕재수가 쓰는 외제 샴푸 냄새와 그 달착지근한 향내가 배어 있었기 때문에 꿈은 아닌 것 같았다. 온몸이 오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스페호프나 사무실 선배들이 봤다면 또 무시무시한 헛소문이 퍼질 게 뻔했다. 여기가 그의 집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다섯 시가 다 되어 있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신 후 그는 기운을 끌어 모아 침대에서 내려섰다. 기분은 한결 나았지만 아직 어질어질했다. 그래도 싸들고 온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거실은 어두컴컴했고 텅 비어 있었다. 왕재수는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긴 공연 취소시킨다고 했으니까 지금쯤 바이올린 깡패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을 게 뻔했다.

 

불을 켠 후 그는 코트를 찾기 시작했다. 코트 주머니에 4차 검토용 성과보고서 초안 서류를 쑤셔 넣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까 왕재수가 코트부터 시작해 옷가지를 벗겨준 후 어디에 치워놨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카펫 위에도, 소파에도 없었다. 옷장에도 없었다. 아래층에 내려가서 물어봐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현관문을 열고 왕재수가 들어왔다. 찬바람이 휭하고 불어 들어오는 걸 보니 바깥은 더 추워진 것 같았다. 심지어 눈도 계속 내리는 모양이었다. 왕재수가 모자와 코트를 벗어 눈을 마구 털어냈기 때문이다. 털모자를 쓰고 있었는데도 머리가 젖어 있었다. 강아지처럼 머리를 부르르 흔들어 눈을 털어내고서야 왕재수가 그를 발견했다.

 

“ 너 일어났구나. 좀 괜찮아? ”

 

“ 어... 아까보다 훨씬 나아. 너 어디 갔다 왔어? ”

 

“ 아, 밖에. 엄청 춥다. 눈도 무지 많이 와. 진짜 여긴 시골이라니까. ”

 

“ 레닌그라드도 왕 춥고 눈 펑펑 오는 거 다 알아. 거기 날씨가 여기보다 훨씬 안 좋잖아! ”

 

“ 그래도 거긴 시골 아니잖아! ”

 

왕재수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거실로 가는 게 아니라 부엌으로 갔다. 또 뭘 먹고 싶어서 저러나 싶어 베르닌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쫓아갔다.

 

“ 야, 지금 너 먹을 거 없어. 나 며칠째 집에 못 들어왔었거든. 방금 일어나서 아무 것도 못해놨어. 밥도 지금 해야 돼. 한 시간은 있어야 될 거야. 그냥 소파에 앉아 있어, 차나 좀 우려 줄 테니까. ”

 

“ 뭔 소리야. 너 아프잖아. 너나 앉아. 먹을 거 줄 테니까. ”

 

“ 먹을 거라니? ”

 

왕재수가 카디건을 열어젖히더니 안에 품고 있었던 꾸러미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겹겹이 싼 보자기를 풀자 조그맣고 둥그런 항아리가 나타났다. 뚜껑을 열자 김이 포르르 올라왔고 왕재수는 만족한 듯 활짝 웃었다.

 

“ 아, 됐다. 안 식었다! 역시 난 몸이 뜨거워~! ”

 

“ 그게 뭐야? 웬 항아리? 어, 되게 맛있는 냄새 난다. ”

 

“ 웅. 그러냐? 다행이네. 입맛은 남아 있나보구나. 먹어. 뜨끈한 거 먹으면 훨씬 나아질 거야. ”

 

“ 이게 뭐야? ”

 

“ 항아리 닭고기. 오늘도 그 집 앞에 사람들 줄 서 있더라고. 아휴, 난 줄 서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이게 뭐 그렇게 맛있다고 다들 두 시간씩 줄을 서서 사먹는지. 눈도 펑펑 내리는데. 글쎄 줄 서서 들어갔더니 포장은 안 된다잖아. 부탁했더니 요리사 아줌마가 나 귀엽다고 몰래 한 그릇 싸줬어. ”

 

“ 항아리 닭고기... 어, 그거 구시가지에 생긴 그 식당 말이야? 너 거기까지 갔다 왔어? 거기 먼데... 너네 극장보다 더 멀잖아. 눈 오는데 어떻게... ”

 

“ 차 가지고 가려고 했는데 주차장에서 나오자마자 배나무에 들이박았어. 아 진짜 운전 너무 싫어. 그래서 그냥 걸어갔다 왔어. 눈 진짜 많이 와, 역시 시골... ”

 

“ 심지어 줄 서서 사왔단 말이야? 네 성깔에? 맙소사... 너 왜 그랬어. ”

 

“ 이게 감기에 엄청 좋대. 로만도 며칠 전에 감기기운 있었는데 지휘자 할아버지랑 같이 그 식당 가서 먹고 오더니 땀 흘리고 금방 나았다고 나보고도 먹으라고 억지로 데려갔었어. 생각나서 갔다 왔어. ”

 

“ 아... 진짜 고마워. 너 이렇게 착한데 그것도 모르고 난 맨날 너보고 왕재수라고... 흑... ”

 

“ 촌스럽게 왜 또 훌쩍거리는 거야. 빨랑 먹어. 식기 전에. ”

 

왕재수가 숟가락과 포크, 접시를 건네주었다. 베르닌은 조그만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닭다리와 살코기, 감자와 당근이 노란 기름기가 둥둥 떠 있는 진한 국물 사이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잘게 썬 푸르스름한 허브도 잔뜩 뿌려져 있었다.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자 몸이 금세 따뜻해졌다. 구수한 기름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부었던 편도선도 부드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닭고기도 푹 익어서 부들부들한 것이 저절로 뼈에서 떨어져 나왔다. 감자는 포근포근했고 당근마저 달착지근했다. 정신없이 고기를 발라먹고 국물을 흡입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혀를 차며 흑빵을 밀어주었다.

 

“ 좀 천천히 먹어. 얹히면 어쩌려고 저런담. 빵이랑 같이 먹어. ”

 

“ 진짜 맛있어. 나 계속 통조림이랑 비스킷만 먹었거든. 너무 맛있어서 눈물 날 거 같아. ”

 

“ 칫, 역시 넌 시골 사람이야. 기름이 그렇게 많은데 맛있니? 난 느끼해서 못 먹겠던데. 로만이 먹으라 해서 억지로 몇 숟갈 먹다가 도저히 안돼서 포기했더니 한 대 쥐어박더라고. ”

 

“ 그 아저씨 진짜 깡패야. 넌 원래 기름진 거 안 먹어서 그러는 건데 왜 쥐어박고 난리야. 너한테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

 

“ 그치! 그래도 그냥 가만히 있었어. 성감대를 콕콕 쥐어박는 재주가 있거든, 로만이... 그래서 밥 먹자마자 집으로 가서 침대로... ”

 

“ 제발 침대 얘긴 하지 말자. ”

 

정신없이 먹다가 베르닌은 문득 왕재수를 쳐다보았다.

 

“ 넌 안 먹어? ”

 

“ 느끼해서 싫어. ”

 

“ 그래도... 계속 내가 밥 안 챙겨줬는데 요즘 뭐 먹고 살았어? ”

 

“ 로만이 이것저것 먹여줬어. 아까도 요구르트랑 사과랑 먹었어. ”

 

“ 그건 밥이 아니잖아. ”

 

“ 괜찮아, 좀 있다 닭가슴살 구워놓은 거 먹을 거야. ”

 

“ 이거 닭다리라도 한 개 먹어. 국물 안 먹으면 덜 느끼할 거야. ”

 

“ 싫어. 1인분 밖에 안 되는데 너 다 먹어. 다 먹어야 약 먹고 낫지. ”

 

그래서 베르닌은 항아리 바닥에 고인 국물까지 흑빵으로 싹싹 닦아서 몽땅 해치웠다. 다 먹고 나자 몸이 후끈후끈해지면서 땀이 나고 어쩐지 아주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왕재수가 알약과 빨간색의 시럽을 주었다.

 

“ 자, 약 먹어. 이 시럽 먹으면 안 토할 거야. 무슨 위장 장애에 좋다나. 아까 의사 선생님 집에 들러서 받아왔어. ”

 

“ 그 할아버지? 오늘 쉬는 날일 텐데 집에까지 갔어? ”

 

“ 응, 근데 선생님이 환자 안 데리고 오고 나만 왔다고 짜증냈어. 너 증상 듣더니 뜨거운 거 먹이고 땀 빼면 나아질 거라고 하더라고. ”

 

베르닌은 알약을 먹고 시럽을 마셨다. 기분 탓인지 다 나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 일을 해보려는 생각이 들었다.

 

“ 너 혹시 아까 내 옷 치웠어? ”

 

“ 응. ”

 

“ 어디 있어? ”

 

“ 세탁실에. 다 젖어서. ”

 

“ 내 코트도? ”

 

“ 아니, 코트는 드라이해야 하잖아. 우리 집에 갖다놨어, 내 옷들 맡길 때 같이 맡기려고. ”

 

“ 아, 그랬구나. 나 그 코트 필요해. ”

 

“ 왜? 그거 드라이해야 돼. 엄청나게 젖었어. 얼룩도 많더라. ”

 

“ 그 안에 일할 거 들어 있어. 서류 싸들고 왔는데 오늘 밤까지 오타랑 내용 검토해서 내일 새벽에 사무실 가서 고쳐야 돼. 지금 성과보고서랑 업무계획서 만들고 있거든. 가지고 와야겠다. ”

 

“ 그럼 내가 갖다 줄게 그냥 있어. ”

 

왕재수가 잠시 후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코트를 들고 왔다. 베르닌은 코트를 받아 들고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심지어 안주머니를 탈탈 털어도 서류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해진 베르닌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 너 혹시 아까 코트 치울 때 주머니에 들어있던 서류 못 봤니? 한 100페이지 쯤 되는 거, 얇은 종이에 타이핑해서 둘둘 말아놓은 건데. ”

 

“ 어, 그 종이뭉치? ”

 

“ 응, 맞을 거야. 그거 어디에 있어? ”

 

“ 어... 그거... 저... ”

 

왕재수가 머뭇거렸다. 베르닌은 갑자기 겁이 더럭 나서 정색을 하며 다시 물었다.

 

“ 너 그거 봤지? 어디 놔뒀어? 빨리 말해봐. ”

 

“ 어... 있잖아. 너 그거 꼭 필요한 거야? 없으면 어떻게 돼? ”

 

“ 어떻게 되다니! 그거 없으면 나 내일 국장한테 목 졸려 죽을지도 몰라. 어디 있는지 빨리 말해줘! ”

 

“ 저기... 그거 있잖아. 난 그게 그렇게 중요한 종이인 줄 몰랐어. 저... 그거 아까 다 젖고 너무 더러워져서 그냥 버렸는데... ”

 

“ 뭐야? 버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서류를 왜 버려!! 너 지금 농담하는 거지? ”

 

“ 서류인 줄 몰랐어. 종이뭉치가 다 젖어서 너덜너덜하게 다 찢어지고 잉크 얼룩 투성이라서 그냥 쓰레기인 줄 알았어. 너 아까 토했잖아. 심지어 거기 떨어져서 진짜 더러워졌단 말이야. 그래서 아까 카펫 치우다가 걸레에 말아서 같이 갖다 버렸어... ”

 

“ 갖다 버려? 내 서류를?? 어디에!! 휴지통에? 저 휴지통? ”

 

“ 아니. 집 안 휴지통에 버리면 습기 차고 냄새날까봐 아파트 쓰레기 투입구에 버렸어. 저... 그 소각장... ”

 

뭐야? 아악!

 

베르닌은 정신이 혼미했다.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남의 중요한 서류를 손대다니! 내용도 안 보고 심지어 소각장에 밀어 넣을 수가 있냐고! 정신이 있는 거야? ”

 

“ 저기... 난 서류인 줄 몰랐다니까. 내가 그랬잖아, 우리는 춤만 잘 추고 노래만 잘 부르면 된다고... 서류는 잘 몰라. 일부러 그런 게 아냐. 진짜 몰랐어, 너무 더러워서... ”

 

왕재수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더듬거리면서 변명을 했다. 베르닌은 너무 화가 나서 정신이 몽롱했다. 충격으로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왕재수가 깜짝 놀라 그를 부축해주려고 했다. 베르닌은 울화가 치밀고 앞이 캄캄해서 분에 겨워 왕재수의 팔을 뿌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 저리 가! 아무 짝에 쓸모없는 바보 멍청이! 어떻게 서류랑 그냥 종이도 구분 못하고... 아아 난 이제 망했어! 끝장이야, 국장이 날 죽일 거야! 잘릴 거라고! ”

 

“ 어... 미안해. 진짜 화난 거야? 저기...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는데? 너네 국장한테 내가 가서 얘기할까? 너는 다 했는데 내가 버린 거라고 얘기할게. 그러면... ”

 

“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넌 조직 생활을 안 해 봐서 몰라! 맨날맨날 일등만 하고 천재 소리 듣고 대접받고 높은 자리만 꿰차며 살아서 이런 거 모른다고! 너 같은 게 서무의 슬픔을 어떻게 알아!

 

“ 미안... 화내지 마. 서무의 슬픔 잘 몰라서 미안... 나 천재라서 미안해... 저기, 그래도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마. 기침 도져... ”

 

왕재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르닌은 쿨럭쿨럭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뻐근하고 숨이 턱턱 막혔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왕재수가 아까처럼 등을 쓸어주려고 했지만 베르닌은 속이 상하고 화가 치밀어서 홱 떠밀었다. 생각보다 너무 세게 밀었는지 왕재수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콰당 소리가 났다. 화가 난 와중에도 조금 걱정이 돼서 일으켜줘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왕재수가 자기 혼자 일어나 앉았다. 코를 벌름거리고 입술을 실룩거리더니 금세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먹거렸다.

 

“ 너무해... 나는, 나는 정말 걱정돼서 그랬던 건데. 종이뭉치 너무 더러워서 그냥 놔두면 세균 옮을까봐 그런 건데. 더러운 거 놔두면 카펫에 나쁜 균 다 묻고 공기 중에도 떠다니고... 너 아프니까 깨끗하게 치우려고 한 건데. 흐흑... 막 화내고 소리 지르고 떠밀고... 때리려고... ”

 

“ 어... 야... 울지 마. 내가 너 때린 건 아니잖아. ”

 

“ 떠밀었어. 때리려고 주먹도 쥐고... 무서운 표정 짓고... 엉엉... 나 때리는 거 싫어. 감옥에서도 나쁜 아저씨들이 막 때렸어. 이상한 주사 놨어. 나 너무 아파서 맨날 울었어. 어헝... 근데 너도 때려. ”

 

“ 아니야... 진짜 아니야. 화난 건 맞지만 때리려고 그런 거 아니야. 떠민 것도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너무 열 받아서 나도 모르게... ”

 

“ 아까는 나 때릴 데 하나도 없다고 해놓고 막 밀어서 넘어뜨렸어. 종이 버렸다고 계속 소리 질러. 어헝... 나 천재라고 막 화내. 여기 시골... 주변에 아무도 없어. 쥐도 있고 바퀴벌레도 있어. 놀러갈 데도 없어. 흐흑... ”

 

왕재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훌쩍 울었다.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쳤는지 흑흑 흐느끼다 아예 목을 놓아 울었다. 베르닌은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을 몰랐다.

 

“ 야, 그만 울어. 내 서류 버려놓고 뭘 잘했다고 네가 울어... ”

 

“ 맨날 서류 얘기만 하고... 우리 극장 사람들도 내가 무슨 얘기하면 서류 때문에 안 된다 하고... 그깟 서류가 뭐라고 다들 난리야. 시커멓게 잉크 칠한 종이쪼가리밖에 더 돼? 엉엉... ”

 

왕재수가 소매로 눈과 코를 닦으면서 일어났다. 계속 흐느껴 울면서 현관으로 갔다. 문을 열면서 힐끗 돌아보았지만 이런 난감한 상황에 당황한 베르닌이 돌멩이처럼 굳어져 앉아 있자 더 심하게 울면서 나가버렸다.

 

 

*    *    *

 

 

베르닌은 한동안 멍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지금이라도 사무실에 가서 3차 검토회의 자료를 뒤져 다시 4차 회의 자료 초안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머리가 아프고 뒤죽박죽이라 자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식탁 의자에 걸쳐진 코트를 보자 더 우울해졌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거실로 갔다.

 

복잡한 머리를 정리할 겸 청소나 하려고 빗자루와 걸레를 가져왔다. 그런데 카펫이 아주 깨끗했다. 분명히 아까 눈 녹은 흙탕물과 토사물로 잔뜩 더럽혀놨는데 얼룩은커녕 먼지조차 없었다. 구석을 보니 대형 헤어드라이어가 한 개 뒹굴고 있었다. 옆에는 이상한 꼬부랑글씨 상표가 붙어 있는 세제통과 분무기, 심지어 방향제까지 있었다. 외제인 걸 보니 왕재수가 가져온 게 분명했다. 소파에 묻어 있던 흙탕물 자국도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 그랬구나... 나 자는 동안 카펫이랑 소파랑 다 청소했구나... 세균에 오염되면 더 악화될까봐... 벌레 지나간 자리는 더럽다고 밟지도 못하는 앤데 내가 토한 것도 다 치우고 드라이어로 말려놓기까지 했구나. ’

 

베르닌은 갑자기 너무너무 가책이 들었다.

 

‘ 그 철딱서니 없는 애가 나 아프다고 돌봐주고 침대에 뉘어주고 몸도 녹여줬는데... 기다리는 거 제일 싫어하는데 줄 서서 항아리 닭고기도 사다 주고 약도 받아다 줬는데 고마워하지도 않고 화만 냈구나. 소리 지르고 떠밀고 울리고... 나 진짜 나쁜 놈이었어. 그깟 서류가 뭐라고... 못된 국장 때문에 내가 정신이 나갔나봐. 사람이 중하지 서류가 중해? ’

 

가슴을 치며 자책하고 있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열렸다. 왕재수가 헉헉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커멓게 검댕으로 물들어 있었다. 옆구리에 거무죽죽한 종이뭉치를 끼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현관에 선 채 종이뭉치를 흔들면서 베르닌을 불렀다.

 

야, 찾았어! 이거 맞지? ”

 

“ 어... 어, 너 그거... ”

 

“ 맞나 안 맞나 봐봐! 으윽, 더 이상은 못하겠다. ”

 

베르닌은 왕재수의 손에서 종이뭉치를 받아들었다. 온통 시커멓게 얼룩져 있었다. 펼쳐보니 4차 검토회의용 성과보고서 초안 제목과 날짜, 그리고 현란하게 줄이 그어진 표가 보였다. 종이 여기저기에 지저분한 흙탕물과 토사물 얼룩이 가득했다. 귀퉁이는 젖어서 찢어져 있었고 너덜너덜했다.

 

“ 어, 맞아... 너 이거 어떻게 찾았어? 버렸다면서... ”

 

“ 쓰레기 소각장 갔다 왔어. 오늘 일요일이라서 아직 안 태웠더라고. 근데 다른 쓰레기가 너무 많아서 한참 찾았어. ”

 

“ 쓰레기 소각장... 거기 갔었단 말이야? 거기 진짜 크고 엄청 더러운데... 거기 들어가서 쓰레기 뒤진 거야? ”

 

“ 응. 그래도 한 시간 만에 찾았어. 일요일이라 다행이야. ”

 

“ 너처럼 깔끔 떠는 애가 쓰레기를 막 뒤지고... ”

 

“ 그럼 어떡해. 너 잘린다며. 국장한테 목 졸린다며. 서무의 슬픔이란 게 있다며. 이제 서류 찾아서 괜찮은 거야? 이제 목 안 졸려? 안 잘리는 거지? 서무의 슬픔 없는 거지? ”

 

어흑, 내가 잘못했어... 너는 왕재수가 아니야. 너는 왕 착한 애야, 흐흑... 미안해... ”

 

베르닌은 왕재수를 와락 끌어안으며 흐느껴 울었다. 왕재수는 몸서리를 치면서 그를 밀어냈다.

 

“ 야, 하지 마. 나 엄청 더러워. 세균 옮아. 너 아픈데. ”

 

“ 그깟 세균 좀 옮으면 어때, 흐흑... ”

 

“ 왜 울지? 기뻐해야 되는 거 아니야? 이제 이 서류 가지고 일할 거야? 또 밤새고 일해서 무슨 검토회의 자료인가 뭔가 만들어? 내일 국장하고 회의해? ”

 

아니야, 나 일 안 해! 이깟 서류가 다 뭐야! 에잇!

 

베르닌은 종이뭉치를 북 찢어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왕재수가 깜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너 뭐해! 중요한 서류라면서! ”

 

“ 이깟 서류 하나도 안 중요해! 시커멓게 잉크 칠한 종이쪼가리야! 자르려면 자르라지!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아! ”

 

“ 어... 난 왜 쓰레기장에서 저걸 뒤져왔니... ”

 

“ 미안해, 진짜 미안해. 너한테 화내고 소리 지르고 때릴 데 하나도 없는데 막 밀치고 무섭게 해서 미안해. 잘못했어. ”

 

“ 칫, 그래. 너 나한테 진짜 잘못한 거야. 내가 천재로 태어나고 싶어서 천재가 된 것도 아닌데 막 뭐라 하고. ”

 

“ 근데 너 역시 재수 없긴 해. ”

 

“ 괜찮아, 울 아저씨들이 난 예쁘니까 괜찮댔어. ”

 

베르닌은 왕재수가 검댕을 씻어내는 동안 오랜만에 가스 불을 올리고 수프를 끓였다. 왕재수가 좋아하는 생선 수프를 끓이고 싶었지만 냉장고에 들어 있는 게 별로 없어 그냥 양배추 수프를 끓였다. 냉동실에 있던 칠면조 고기를 탕탕 잘라내 굽고 감자 샐러드를 만들었다. 왕재수는 음식 투정을 하지 않고 정신없이 먹었다. 쓰레기를 뒤지느라 몹시 허기졌던 모양이었다. 차를 우려주자 무가당 초콜릿 캔디도, 사과파이도 없이 허겁지겁 마셨다. 혹시나 해서 렐랴가 선물했던 잼을 퍼주자 그것도 막 먹었다.

 

차를 다 마신 후 왕재수는 바이올린 깡패가 올 시간이 됐다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베르닌은 갈갈이 찢어진 서류를 잠시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았지만 곧 그것을 전부 쓸어서 버렸고 왕재수가 가져다 준 약을 먹은 후 곧장 침대로 기어들어가 깊은 단잠에 빠졌다.

 

 

*    *    *

 

 

월요일에 베르닌은 아주 일찍 일어나 새벽 출근을 했다. 3차 검토회의 자료를 뒤져가며 다시 4차 회의 초안을 만들었다. 회의에서 국장은 어떻게 된 게 마지막 검토회의 자료가 이렇게 허술할 수가 있느냐며 베르닌을 사정없이 질책하고 자르겠다고 협박을 늘어놓았다. 베르닌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국장은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다가 결국 시간도 없었고 어차피 마지막 손질을 할 사람도 총괄 서무인 베르닌 뿐이었으므로 포기하고 이틀 내에 모든 작업을 완료할 것을 지시했다.

 

베르닌은 다시 이틀 밤을 샜고 100페이지짜리 업무 성과보고서와 역시 100페이지짜리 업무 계획서 최종본을 완성했다. 국장은 표지 디자인과 쪽 번호 글씨체까지 하나하나 간섭한 후에야 인쇄를 허락했다. 각각 50부를 인쇄 제본했다. 최고급 용지를 썼다. 국장은 그 중 각 5부씩에 서명을 하고 가브릴로프 KGB 지국 직인을 찍은 후 특급 공문서라는 딱지를 달아 우체국에 속달 배송을 의뢰하게 했다. 기일을 맞춰 보고서를 제출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모스크바 본부의 심의와 연방 지국 평가, 그리고 포상뿐이라고 의기양양해 했다.

 

이틀 후 모스크바의 루뱐카 KGB 본부로부터 전보가 한 장 날아왔다. 벌써 심의가 끝나고 우수 지국 표창이 결정됐나보다 하고 스페호프 국장은 기쁨에 들떴다. 우편물 수합 담당이라 전보를 받아들고 온 베르닌에게 봉투를 뜯고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했다. 그래서 베르닌은 시키는 대로 했다.

 

 

“ 수신 :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지국장

 

귀 지국의 발전을 기원함.

귀 지국에서 제출한 성과보고서 및 업무계획서는 분량 초과로 심의 대상에서 제외, 즉각 폐기되었음을 통보함.

향후 동 보고서는 모스크바 표준 양식에 의거해 각각 5페이지 이내로 작성하고 임의의 양식 및 편집을 추가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고함.

 

모스크바 보안위원회 성과관리국장 ㅇㅇㅇ. “

 

 

스페호프 국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전보용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집어던졌고 베르닌에게 그만 나가보라고 명령했다. 그날 국장은 두통으로 조퇴했고 다음날 3일의 병가를 내서 모두에게 어린이날을 선사했다.

 

베르닌은 국장의 병가에 맞춰 자기도 처음으로 3일 휴가를 냈다. 이제야 피로를 풀고 실컷 쉬며 놀 생각에 들떴다. 그러나 그의 첫 휴가는 어이없이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눈보라를 맞으며 두 시간 동안 줄을 서서 항아리 닭고기를 사오고 세균이 득실거리는 쓰레기 소각장에서 서류를 찾느라 녹초가 되었던 왕재수가 뒤늦게 폐렴에 걸려서 사흘 동안 끙끙 앓았기 때문이다. 바이올린 깡패는 하필 무슨 연수 때문에 모스크바에 가 있었고 왕재수는 극장에 아픈 게 알려지면 무시당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우며 입원을 거부했다. 그래서 베르닌은 사흘 내내 왕재수의 곁에 붙어 앉아 베이비시터처럼 내내 간호를 해야 했다. 까탈스러운 왕재수를 간호하는 게 엄청나게 피곤해서 차라리 보고서를 한 번 더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베르닌은 꾹 참았다. 어쨌든 왕재수는 그에게 렐랴가 짜준 목도리를 줬고 그 목도리는 엄청나게 따뜻한데다 좋은 냄새도 났기 때문이다.

 

   

 

 

 

FIN

2014. 12. 12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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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재수가 베르닌을 위해 사다 준 항아리 닭고기는 전에 writing 폴더에 발췌한 본편 우주의 미샤와 트로이의 이야기에도 잠깐 등장한다. 거기서는 닭고기 수프라고 썼다. 그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83

 

 이 시리즈에서는 항아리 닭고기로 격상시키면서 내가 야채 등 건더기를 더 추가시켰는데, 원래는 예전에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식당에서 내 친구들이 가끔 사먹었던 조그만 단지에 든 닭고기 요리이다. 기름기 많은 수프 국물에 잠겨 있는 닭다리 요리로 심대하게 느끼하였으나 느끼한 거 잘 먹는 친구는 흑빵으로 싹싹 닦아가며 해치웠고 이거 먹으면 몸이 뜨끈해진다고 좋아했었다 :) 나야 베르닌보다는 왕재수의 식성에 가까운 편이라서 ㅋㅋ

 

** 연말에 보고서들 쓰느라 진짜 열받았었는데, 이 글은 3차와 4차 검토 사이에 쓴 거다. 여기선 4차 검토회의로 끝나는 걸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6차까지 갔다. 물론 업무계획서는 또 별도이니.. 하여튼 계속 회의하고 계속 고치고.. 삽질의 연속이었음 -_-

 

*** 이야기는 8편의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으로 이어진다~ 그건 아마도 주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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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