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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에 일하다 화딱지나서 서무의 슬픔 1편을 장난치며 쓴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편이다!

 

30편은 이전에 올렸던 에피소드에 단추팬클럽 회원분들이 달아주신 외전 관련 댓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탄생했다 :) 제목을 보고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하여튼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어느새 왕재수의 신작 발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고, 그날 아침 스페호프는 베르닌을 국장실로 호출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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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0

 

 

 

 

서무의 슬픔

-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목요일 오전답게 베르닌은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과 더욱 무거운 머리로 출근해 책상 앞에 앉아 밀린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다음 주 수요일로 다가온 신작 발표 때문에 왕재수는 극장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고 있었고 베르닌은 그걸 옆에서 지켜보랴, 자정이 넘어가면 ‘제발 들어가서 잠 좀 자라!’하고 소리를 지르랴, 새벽 두 시에는 우격다짐으로 왕재수를 끌어내서 차에 처넣고 억지로 집으로 데려가 재우랴, 아침에는 또 왕재수를 극장에 데려다주고 출근하랴 정신이 쏙 빠졌고 정말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무용수들을 지도하느라 머리뿐만 아니라 몸까지 쓰고 있는 왕재수가 대체 어떻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그 망할 놈의 신작을 이유로 국장이 부여한 왕재수 감시 특근 때문에 그의 서무 업무는 쌓여만 갔다. 물론 스페호프도 베르닌에게 오전 근무만 한 후 극장에서 감시를 진행하라고 명령을 내린 만큼 다른 직원 하나에게 서무 업무를 분담해주기는 했지만 제대로 처리된 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아침마다 베르닌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일들과 엉망이라 다시 해야 하는 일들을 마주해야 했다.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지치고 화가 난 베르닌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빨리 수요일이 되어 왕재수의 신작이 무대에 올라가기만을 빌었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이중고도 한결 누그러질 테고 왕재수도 자기 몸을 좀 추스를 수 있을 테니까.

 

 

일찍 출근해서 밀려 있는 문서 접수 대장과 발송 대장을 작성하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전화로 그를 호출했다. 당장 국장실로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베르닌은 ‘내 팔자야’ 하고 중얼거리며 국장실로 갔다.

 

 

스페호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지난주의 밀서 사건 실패 때문에 내내 저기압이었고 직원들을 들들 볶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잔뜩 찌푸리고 있었던 미간도 펴져 있었고 안경도 똑바로 쓰고 있었으며 입가에는 미소까지 번져 있었다. 베르닌은 이것이 웬일인가 싶어서 국장을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문득 접견실로 통하는 옆문이 반쯤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국장님, 부르셨습니까. ”

 

“ 음, 어서 오게. 자네가 해줘야 할 일이 하나 있네. ”

 

“ 예? 혹시 서무 업무인가요? ”

 

“ 글쎄, 서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인사 관리 업무일세. 월요일 주간 회의에서 공지한 바 있지만 루뱐카 본부에서 우리 지국으로 행정 연수요원을 파견했네. 알다시피 본부에서 승진 요건을 채우기 위해서는 총 5개의 지국에서 돌아가면서 연수를 받아야 하는데 이번에는 우리 가브릴로프 지국 차례가 들어있더군. 연수 기간은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일세. 자네가 이 친구를 맡아 줘야겠어.

 

 

베르닌은 눈앞이 아득했다. 미약하게 항의했다.

 

 

“ 저, 국장님. 저는 지금 서무 업무도 굉장히 많이 밀려있고 아시다시피 야스민의 감시 업무가 매우 과중합니다. 그의 신작 공연이 다음 주 수요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 주는 주말도 반납하고 극장에 가야 하고 다음 주는 아예 사무실 출근도 못하고 내내 그의 곁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도저히 연수요원을 돌봐줄 여력이 없습니다만... ”

 

“ 나도 자네가 지금 바쁘다는 건 잘 아네. 물론 망할 놈의 그 불여우 감시가 제일 중요하지! 서무 업무는 지금처럼 스멜로프가 분담해 줄 테니 필수적인 것만 하면 되지만 그렇다고 무시해서도 안 되네! 연수요원에게 자네의 업무를 설명해 줘야 할 테니까.

다른 지국에서는 서무 업무를 등한시하지만 적어도 내가 이끄는 우리 가브릴로프 위원회에서만큼은 이것이 행정의 기본이야! 그러니 반드시 그에게도 내용을 잘 설명해줘야 하네. 여기서가 아니라면 그가 기본 중의 기본인 서무 업무에 대한 이해도를 쌓을 기회가 없게 될 테니.

그리고 감시 업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자네는 지금 우리 가브릴로프에서 가장 이념적으로 문제가 심각한 반동분자, 최악의 정치범을 감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 불여우를 감시하는 현장에 연수요원을 데려가는 거야. 도청분석도 같이 하게. 그럼으로써 우리 지국의 감시분석 업무에 대한 연수도 자동으로 끝나는 셈이지. ”

 

“ 어, 저... 하지만 말씀대로 이것은 인사 관리 업무인데 왜 제가... ”

 

 

베르닌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막내에 서무라는 이유로 매일같이 골치 아픈 일만 잔뜩 떠맡는 게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스페호프는 껄껄 웃었다.

 

 

“ 하하, 다닐. 나도 다른 사람 같았다면 인사부서에 맡겼을 걸세. 하지만 이 친구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 자네도 이 친구를 보면 내 말뜻을 알게 될 걸세. 들어오게, 드미트리. ”

 

 

접견실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리더니 젊은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자신 넘치는 발걸음이었다. 키도 훤칠했고 어깨도 널찍했다.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스페호프가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 인사하게, 드미트리. 이쪽이 다닐 베르닌일세. 일주일 동안 자네를 담당할 감시분석부 요원이자 우리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총괄서무라네. 다닐, 모스크바 본부에서 온 드미트리 베르닌일세. ”

 

 

베르닌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너무 놀라서 딸꾹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온 연수요원의 성이 자신과 똑같다는 것은 그럴 수도 있었다. 어차피 그의 성은 흔한 편이었으니까. 문제는 드미트리 베르닌의 외모가 그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부터 시작해 이목구비와 체격, 심지어 손의 모양까지 닮아 있었다. 물론 자세히 보면 눈매나 표정이 좀 달랐고 베르닌과는 달리 질 좋은 정장을 걸친 데다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말 많이 닮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드미트리 베르닌 역시 깜짝 놀란 듯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스페호프가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 내가 뭐라고 했나, 드미트리! 자네와 판박이라고 하지 않았나! 같이 있으니 꼭 형제 같구먼! 심지어 성까지 같지 않나! 자네 알고 있나, 다닐? 드미트리는 자네와 동갑일세. 7월에 태어났다는군. 자네도 그렇지 않나? ”

 

“ 아... 어, 예... 7월 5일... ”

 

“ 아쉽게도 드미트리는 7월 14일이더군. 그러니 다행히 출생의 비밀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네만. 서류를 보면 친척 관계는 아니던데. 신기하게 닮았단 말이야. 성도 같고... 그러니 이게 인연이 아니면 뭐겠나! 다닐, 이제 내가 왜 드미트리 담당 업무를 자네에게 맡겼는지 알겠지? 잘해보게. 여기 인사부서에서 짜 놓은 연수 일정표가 있네. 기관 전체 소개는 내가 이미 마쳤으니 각 부서를 데리고 돌게. 직원들 인사를 마치면 부서별 업무를 개괄해주고 자네의 서무 업무에 대해 설명해주게나. 밀려 있는 일이 많다고 했으니 일부는 같이 진행해도 상관없네. ”

 

“ 아니, 저... 그러면 오늘 오후에는 극장에 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

 

 

“ 무슨 소리인가! 당연히 극장에 가야지. 일정표를 잘 보게. 오후에는 감시분석 업무 연수일세. 드미트리와 함께 극장에 가서 그 불여우를 감시하게!

서류를 보면 알겠지만 드미트리는 대단한 엘리트 요원이야.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 법학과 출신으로 이미 학창시절에 레닌그라드 KGB에서 특채했지. 영어와 프랑스어에도 능통해서 졸업하자마자 런던과 파리에서 대사관에 근무하며 우리 첩보원들에게 보급품을 지원하고 각종 행정 업무를 도맡았네. 비록 행정요원이지만 해외 근무를 위해서 현장요원 연수도 받았고 사격솜씨와 삼보와 복싱, 유도도 수준급인데다 업무를 우수하게 수행해서 표창도 두 번이나 받았지. 파리에서는 유능한 이 친구를 놔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드미트리가 자진해서 국내 활동에 도움이 되고 싶어 했기 때문에 본부로 돌아와서 지금 연수 코스를 밟고 있는 걸세. 그러니 그 불여우 감시에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연수 보고서는 드미트리가 작성해 제출할 테니 자네는 신경 쓸 것 없네. 그럼 가보게. ”

 

 

 

 

*    *    *

 

 

 

 

 

베르닌은 드미트리와 함께 1층으로 내려왔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지만 어쨌든 국장의 명령대로 각 부서를 돌면서 본부에서 온 연수요원을 소개했다. 다들 둘이 닮았다며 깜짝 놀랐다.

 

 

등록부서로 들어가자 알렉산드라는 서류철을 떨어뜨렸고 리자는 후다닥 달려오더니 ‘어머나! 다냐, 쌍둥이였어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드미트리는 마치 무대 위의 왕재수를 연상시키는 듯한 자세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유감스럽게도 저희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습니다만 우연의 일치란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지요. 그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고 대꾸했다.

 

리자는 두 눈이 동그래진 채 드미트리와 베르닌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고 갑자기 뺨을 붉히더니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어머, 웬일이야! 얼굴만 닮았어, 다냐랑 완전 틀려!’하면서 책상들 사이로 달아났다.

 

 

소개를 모두 마친 후 베르닌은 드미트리를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기관 소개 책자를 꺼내서 각 부서들의 업무를 개괄해주었다.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지만 필기를 하지는 않았다. 베르닌이 가브릴로프 KGB에서만 쓰는 고유용어와 암호에 대해 설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슬며시 걱정이 된 베르닌이 충고했다.

 

 

“ 이건 우리 쪽에서만 쓰는 암호라 메모해 놓는 게 좋을 거야. 연수 보고서 써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

 

“ 흠, 별로 어렵지 않은데 메모까지 할 필요 있어? 다 외웠어. 그리고 굳이 외우지 않아도 본부의 메인 패턴과 동일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알파벳 순서만 바꿔서 대입하면 금방 풀릴 것 같아. 나 런던에서 스파이들 암호문 수신도 담당했거든. ”

 

“ 아, 그랬구나. 그러면 이제 대외교류부 쪽 업무... ”

 

“ 다닐, 나 아까 접견실에서 기다릴 때 이 책자 다 읽었거든. 대충 여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파악이 됐어.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난 기억력과 암기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거든. 여기는 조직이 별로 크지 않고 지역 소도시라 중요한 작전이나 임무가 거의 없잖아. 지금 너희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에서 가장 중요한 미션은 아까 국장이 얘기한대로 미하일 야스민 감시 건 하나 정도야. 어쨌든 진짜 중요한 인물이잖아. 그래서 내가 국장에게 직접 요청했어, 그 업무에 배정해달라고. 잘 부탁해. ”

 

“ 아, 어... 근데 걔 말인데, 야스민... 네가 생각하는 거랑 좀 다를 거야. 그렇게 무시무시한 인물이 아니라서... 정치범이라고 하기에도 좀 그래. 걘 그냥 딱 예술가야. 극장이랑 춤밖에 모르더라고. 수요일에 신작을 올리기로 되어 있어서 지금은 거기만 매달려 있어. ”

 

“ 야스민에 대해서는 나도 알아. 나 레닌그라드 출신이잖아. 내가 문화예술에도 조예가 깊거든. 그 친구 데뷔했을 때부터 무대 많이 봤어. 예전에 유럽 투어 왔을 때 파리랑 런던에서도 봤고. 런던 대사관에 있는 선배 요원 하나가 야스민이랑 친분이 있거든. 그때도 그 친구가 사고 칠 뻔한 거 그 누나가 수습해줬었어. 결국 파리에선 해결 안됐지만.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긴. 극장 들어가기 전부터 유명했었어, 비밀 서클 활동도 하고 하여튼 말썽꾸러기였지. 하여튼 되게 궁금했어. 극장엔 언제 가는 거야? ”

 

“ 오후에 갈 거야. 그럼 부서 업무는 파악했다고 했으니까 지금부터는 서무 업무에 대해 알려줄게. ”

 

“ 음... 그래. 근데 그 전에... 넌 원래 여기 출신이야? 나랑 너무 닮아서 깜짝 놀랐어. 국장 말로는 너 모스크바 국립대 법학과라면서. 전공도 나랑 똑같고. ”

 

“ 응. 여기서 태어났어. 모스크바에서는 공부만 했고. ”

 

“ 그렇구나. 그럼 해외 파견 경험은 없어? ”

 

“ 없어. 난 그냥 군대 갔다 왔다가 졸업하고 곧장 행정요원 시험 보고 여기로 발령받았어. ”

 

“ 음, 그건 나랑 다르구나. 그러면 외국어는? 난 영어랑 불어는 유창하고 독일어는 조금 하는 정도야. ”

 

“ 난 외국어는 모르는데... 독일어만 조금... 법학 공부할 때 약간... ”

 

“ 여기도 사격이나 호신술 시험 정기적으로 보니? ”

 

“ 아, 아니... 현장요원들은 보지만 나 같은 행정요원들은 해당 안 돼. 나 사실 총도 잘 못 쏴. ”

 

“ 흐음... 그건 좀 아쉽다. 행정직이라도 기본적인 건 갖추고 있어야 할 텐데. 내가 좀 가르쳐줄까? 나 총 잘 쏘거든. 9밀리 마카로프는 눈감고도 다뤄. ”

 

“ 아, 으응... 그래. 근데 오늘은 일이 너무 밀려 있으니까 나중에 시간 나면 알려줘.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좀 많거든. 너 서무 업무 해봤니? ”

 

“ 아니. 해외 지국이랑 본부에서는 서무는 진짜 말단 후배가 맡는 업무라서 나 같은 엘리트한테야 당연히 안 주지. 그래서 네가 서무라고 돼 있는 거 보고 좀 놀랐어. 너도 학벌도 좋고 들어온 지는 3년밖에 안됐어도 공채라서 너보다 직급 낮은 직원도 좀 있잖아. 근데 서무라니... ”

 

어, 그게... 우리 국장은 서무 업무가 행정의 기본이라고 생각해서... 문서 작성부터 각종 행정 절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 ”

 

“ 그래? 그렇게 중요한 업무란 말이야? 하긴 나도 안 해봤으니까... 그럼 지금 네 자리로 같이 가서 해보자. ”

 

 

베르닌은 대체 누가 누구에게 업무를 가르쳐주고 있는지 헷갈렸지만 어쨌든 드미트리를 데리고 자기 자리로 갔다. 약 한 시간 동안 베르닌은 서무의 주요 업무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드미트리는 입을 벌린 채 가만히 그의 설명을 들었다. 문서 수발과 각종 업무추진비 정산, 근태기록부와 초과근무, 외출부 기록에 이어 마침내 각종 자료 수합 업무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을 때 발따예프가 휘적휘적 다가와 베르닌의 책상에 종이 한 장을 철썩 하고 내려놓았다.

 

 

“ 이봐, 다닐. 이것 좀 처리하게. 최근 2년간의 절도범과 알콜 중독자 감시 대상자 명단과 처벌 내역을 오늘 5시까지 감사부에 제출하라는군. ”

 

“ 예, 5시요? 전 점심 식사 후에는 극장에 가야 하는데요. ”

 

“ 아주 자네 요즘 호강에 겨웠군! 그 불여우 감시 업무를 핑계로 오후마다 극장에서 놀고 있으니! 별 것도 아닌 자료잖아. 서류철 좀 뒤지면 다 나올 것을. ”

 

“ 어, 예. 일단 거기 놓고 가세요. 감사부에는 제가 전화해 볼게요. ”

 

 

발따예프가 자기 자리로 돌아간 후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 잠깐만 여기서 기다릴래? 급한 자료 제출 건이 있어서... 서류철을 좀 뒤져야 할 것 같아. 아, 그동안 네가 이 문서 접수 대장을 기입하고 시행문에 직인을 받아오면 되겠다. ”

 

“ 잠깐, 다닐. 절도범과 알콜 중독자에 대한 감시 업무는 네 담당이 아니잖아. 너는 서무하고 야스민 감시 담당이라며. ”

 

“ 응, 근데 자료 수합 업무가 있다고 했잖아... 내외부에서 자료 요구가 오면 그걸 만들어서 제출하는 것도 서무 업무야. ”

 

“ 아니지, 수합과 작성은 다른 의미잖아. 수합이라는 것은 각 업무 담당자가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주면 그걸 합쳐서 제출한다는 것이고, 작성은 네가 직접 만드는 거잖아.

 

“ 그게... 문자 하나하나의 뜻은 그렇지만 우리는 그냥 서무가 다 하게 되어 있어. 알다시피 다 선배들이고... ”

 

“ 흐음. ”

 

 

드미트리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베르닌은 감사부에 전화를 했고 자료 제출 기한을 연장할 수 없다는 냉혹한 답변을 받았다. 할 수 없이 문서고에 갔다. 먼지를 들이마시며 최근 2년간의 절도범과 알콜 중독자 관련 서류철을 찾아내 자리로 돌아왔는데 발따예프가 책 한 권과 종이를 한 장 움켜쥔 채 씩씩 거친 숨을 내뱉으며 쿵쾅쿵쾅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 어, 발따예프 선배 왜 저러지? 무슨 일 있나? 하여튼 이것 좀 같이 보자, 드미트리. 절도범과 알콜 중독자 관련 서류철이야. ”

 

“ 그럴 필요 없어, 다닐. 그건 발따예프가 처리할 거야. ”

 

“ 엥? 그게 무슨 소리야? ”

 

“ 아까 네가 부서 업무 소개해주면서 업무분장표 보여줬잖아. 그거 보니까 그 업무는 발따예프 담당이던데. 그거랑 규정집 보여줬어. 제9조 3항. 중대한 사유 없이 자신의 업무를 기피할 경우 그 직원은 징계에 처할 수 있다 는 규정 말이야. 그리고 너는 지금 일도 밀려 있고 연수요원인 나를 관리하고 있고 오후에는 가브릴로프 최대의 요주의 인물인 야스민 감시를 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다른 직원의 업무를 도맡아줄 수 없다고 말해줬어. 자료는 발따예프가 처리할 테니까 넌 신경 안 써도 돼. ”

 

 

베르닌은 눈을 깜박였다.

 

 

“ 어... 그래. 고, 고마워. 그런데 그게... 나도 규정은 아는데, 이게 선후배 관계라는 게 있어서... ”

 

“ 인간관계도 중요하지만 업무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담당자들이 일을 떠넘기면 안 되지! 그러면 조직의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이 문서 접수와 발송 대장도 그래. 이것도 업무 담당자들이 각각 처리하면 훨씬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데 서무가 한꺼번에 모아서 정리하고 무슨 일인지 하나하나 물어보면서 처리하고 있으니 일이 진전도 안 되고 야근만 하게 되지. 업무추진비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좋아, 다닐. 난 항상 어떤 업무를 맡게 되면 단계별로 주요 성과목표를 설정하거든. 알다시피 이번 가브릴로프 연수에서 너희 국장은 내게 두 가지의 목표를 부여했지. 하나는 ‘서무 업무 파악과 행정 능력 배양’, 다른 하나는 ‘정치범 야스민 감시를 통한 실무 전문성 강화’야. 야스민은 아직 못 만났으니까 오후로 미뤄야 할 거고. 전자에 대해서는 지금 세부 목표를 설정했어. ‘서무 업무의 효율성 제고’!!! 이제 점심시간이니 일단 오늘은 현황 파악만 하고 본격적인 개선 방안은 내일 수립하겠어. 그럼 우리 점심 먹자. 너희는 점심을 구내식당에서 먹니? ”

 

 

베르닌은 정신이 몽롱해져 왔지만 마지막 말은 제대로 알아들었다.

 

 

“ 으, 으응. 그러네, 벌써 열두 시구나. 구내식당 가자. 오늘 메뉴는 양배추 수프에 돼지비계 절임, 삶은 마카로니야. ”

 

“ 응, 역시 지역 특색이 반영됐구나. 아까 예산서 보니까 여기는 아무래도 소규모 지국이라 그런지 급량비 예산액이 적더라. 그러니 분명 구내식당 음식은 질이 나쁘고 맛도 없겠지. 나는 꼬박꼬박 운동을 하고 몸을 관리하기 때문에 영양 균형 잡힌 식사에 관심이 많아. 그래서 요리도 직접 하거든. 사실은 도시락을 싸왔는데 구내식당 음식보다는 훨씬 맛있을 거야. 괜찮으면 같이 먹을래? 2인분이야, 넉넉해. ”

 

“ 그, 그래. 근데 실내에선 먹을 데가 마땅치 않은데... 뒤뜰로 가면 괜찮을 거야. 이제 별로 안 추우니까. ”

 

 

베르닌은 드미트리와 함께 뒤뜰로 갔다. 배추밭 쪽으로 가서 예의 그 넓적한 돌멩이 위에 걸터앉았다. 배추밭이 어떻고 시골이 어떻고 하며 트집을 잡을까봐 불안했지만 의외로 드미트리는 빙긋 웃었다.

 

 

“ 여기 좋구나, 공기도 맑고 사람들도 안 오고. 저기는 텃밭 같은 건가보구나. 배추 키우면 잘 자라겠다. 물그릇이 있는 걸 보니 고양이한테 밥을 주나보네. ”

 

“ 으응... 매일 오는 놈이 하나 있어서... ”

 

“ 나도 파리에 있을 때 고양이 키웠거든. 새하얀 페르시아 고양이였는데 정말 귀여웠어. 난 고양이가 좋더라고. 도시락 좀 남겨서 줘야겠다. ”

 

 

베르닌은 드미트리가 배추밭도 알아보는데다 무엇보다도 고양이를 아끼는 모습에 감복했다. 잘난 척 하는 놈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자책했다.

 

 

‘ 알고 보면 좋은 앤데 내가 괜히 자격지심에 그랬네. 진짜 똑똑하기도 한 것 같아. 아까 했던 얘기도 사실 다 맞잖아. 결국 감사 자료도 발따예프가 처리하게 해줬고. 나도 얘한테 잘해줘야지. 얼굴도 닮았는데. ’

 

 

그때 드미트리가 꾸러미를 싸고 있던 신문지를 풀고는 네모반듯한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칸막이가 쳐져 있었고 각 칸막이마다 정갈해 보이는 음식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한입 크기로 자른 샌드위치들과 삶은 달걀, 훈제연어와 치즈, 오이와 토마토 샐러드, 예쁘게 자른 오렌지가 들어 있었다. 상자 옆에는 우유 한 팩과 탄산수 한 병이 놓여 있었다.

 

 

“ 먹어, 다닐. 이건 게살 샌드위치, 이건 칼바사 샌드위치야. 재료가 신선하니까 맛있을 거야. 훈제연어는 이 크림치즈랑 케이퍼 얹어서 같이 먹으면 잘 어울리더라. ”

 

 

베르닌은 샌드위치를 먹었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맛있었다.

 

 

“ 와, 맛있다. 이거 네가 만든 거야? 짜지도 않고 그렇다고 밋밋하지도 않은 게 진짜 신선하고 맛있어. 소스도 담백하고. ”

 

“ 응, 나 요리하는 거 좋아해. 파리에 있을 때는 요리 강습도 받았어. 대사관 요리사들이랑 친하게 지냈거든. 오이랑 토마토 샐러드도 먹어봐. 드레싱이 상큼할 거야. 레몬즙에 꿀을 섞고 견과를 가미했거든. ”

 

“ 진짜 맛있다. 완전 프로 요리사 같아. 너 대단하구나. 일하느라 바빴을 텐데 요리까지 이렇게! 나도 요리는 좀 하지만 그냥 매일매일 끼니 때우기 바빠서 이렇게 제대로 만들지는 못하는데. 샐러드도 너무 맛있어. 우와, 연어도 정말 맛있다. 재료도 신선하고 진짜 건강식이네. 이거 걔가 진짜 좋아하겠다. ”

 

“ 걔가 누구야? ”

 

“ 어? 아, 미셴카... 아니, 야스민. 걔가 엄청 까탈스럽거든. 기름기 있는 것도 안 먹고 단 것도 안 먹고 음식을 좀 가려. 건강식 타령만 하고. 밥 챙겨 먹이는 거 힘들어 죽겠다니까. ”

 

“ 그럴 만도 하겠다. 무용수 출신이잖아. 전에 무대 올라오는 거 보니까 춤추는 것도 그렇고 몸매도 그렇고 자기 관리가 장난 아닐 것 같긴 했어. 근데 야스민한테 네가 밥까지 챙겨줘야 돼? 극장 식당에서 먹으면 되지 않아? 아, 하긴. 수용소 후유증 때문에 아직 식이 조절해야 되겠구나. 그러면 요리사나 가정부 딸려주지 않아? 지난번에 크라스노야르스크 쪽 지부에 갔더니 거기 유배된 정치범 과학자한테는 가정부가 딸려 있던데. 너는 감시 요원이잖아. ”

 

“ 처음에 나도 국장한테 그렇게 건의했는데 예산도 없고 인력도 없으니까 나보고 다 하라는 거야... 나 진짜 별의별 거 다 해. 저녁밥 해먹이고 차도 우려주고 가끔 집 청소도 해주고 바퀴벌레도 잡아줘. 애가 벌레를 너무 무서워해서 손톱만한 바퀴벌레 나와도 호들갑 떨면서 울고불고 난리거든.

우리 동네 음식은 너무 기름져서 싫다고 하도 투정을 해서 고기는 맨날 닭가슴살 아니면 생선이고 그것도 기름 써서 구워야 맛있는데 하도 지방질 운운하고 찡찡대니까 쪄줘야 돼. 그리고 그 나이 먹도록 홍차 우리는 법도 모르는 거야! 맨날 남이 해줬다면서. 그래서 차도 우려 줘야 되고 또 달콤한 잼이나 과자는 안 먹으니 무가당 초콜릿 챙겨줘야 되고.

그뿐이냐. 걔 또 운전은 얼마나 서툰데. 몇 번이나 나무에 차 박았어. 운전 연습 좀 하라 해도 자기는 운전을 하면 팔 근육 미워진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출퇴근시켜준다니까. 우리 사무실은 신시가지라서 집에서도 가까운데 그 녀석 극장은 구시가지에 있으니까 아침에 강 건너서 그 녀석 내려주고 난 다시 신시가지로 돌아와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는 직장인이니까 5시에 끝나잖아. 물론 난 야근을 많이 하니까 더 늦게 끝나지만. 근데 극장은 공연 있으면 10시 넘어서 끝나고 그 녀석은 공연 끝나고도 남아서 일을 하니까 밤늦게 데리러 가야 한다고.

게다가 말도 얼마나 안 듣는데. 너도 서류 읽었나본데, 걔 수용소 후유증 때문에 과로해도 안 되고 끼니도 거르면 안 되거든. 고기 같은 거 많이 먹어야 되고. 근데 맨날 늦게까지 일하고 휴일에도 극장 나가. 귀찮고 바쁘다고 사과 한 알 우유 한 컵 이 따위라고. 아파서 병원에 데려다 놓으면 금세 도로 기어 나오고. 내 말은 듣지도 않아. 사고는 또 얼마나 잘 치는데. 툭하면 구르고 다치고 피나고. 폐렴도 두 번이나 걸렸으니까 따뜻하게 입으라 해도 영하 20도 날씨에도 무슨 패션이 어떻고 하면서 패딩을 안 입는 거야! 도대체 자기 몸을 아낄 줄을 모른다니까. 얼마나 골치 아픈데.

어휴, 이건 감시요원이 아니라 완전히 그 녀석 유모나 집사라고. 맨날 시골이라고 불평불만에 날 얼마나 들들 볶는지. 서무만으로도 벅찬데 그 녀석 감시 때문에 피곤하기도 하고 언제 어디서 그 녀석이 또 사고 칠까 봐 잠도 잘 안와. 아, 내 팔자야...

 

 

베르닌은 그간 쌓여 있었던 하소연을 쏟아놓은 후 한숨을 푹 쉬었다. 드미트리는 그의 폭발에 깜짝 놀란 듯했지만 중간 중간 고개를 끄덕였고 심지어 수첩을 꺼내더니 암호문 설명 때도 하지 않았던 필기를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서러움에 목이 멘 베르닌의 어깨를 토닥이며 플라스틱 컵에 우유를 따라주었다.

 

 

“ 좀 마셔. 그러다 체하겠다. 너 일이 진짜 많이 몰려 있었나 보다. 그 신작인가 뭔가 끝나면 너도 휴가라도 좀 내고 쉬어. ”

 

“ 고마워, 딤카. 너 참 좋은 녀석이구나. 근데 나는 휴가를 못 내. 국장이 싫어하거든, 서무가 휴가 내는 거. 서무는 한 기관의 기반이자 엄마 같은 거라서 함부로 휴가 내면 안 된대. ”

 

그런 게 어디 있냐. 기계도 이따금 기름칠도 해주고 정비를 해줘야 잘 돌아가는 건데 사람은 더 그렇지. 내가 그랬잖아, 효율성이 중요하다고. 미련하게 계속 움직이면서 소처럼 일한다고 조직이 발전하지는 않아. 너희 국장은 구세대적인 발상의 소유자라니까. 하여튼 너무 실망하지 마. 네 서무 업무에 들어가는 노력을 절반으로 줄이고 성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도출하면 되니까.

근데 야스민은 진짜 생각 외네. 레닌그라드에서도 그렇고 모스크바 있을 때도 엄청 톱스타였거든. 발레 모르는 사람들도 그 친구 이름은 다 알았어. 무대에서야 카리스마가 원체 대단했고, 평소에 방송이나 신문 인터뷰 나올 때도 굉장히 도도하고 시크한 타입이었거든. 인터뷰 할 때도 보니까 말도 잘하고 똑똑한 것 같더라고. 그때 파리랑 런던에 투어 왔을 때도 불어랑 영어로 직접 인터뷰한 적도 있어. 안무한 작품들도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편이고. 그래서 난 되게 교양 있고 조용하고 어른스럽고 차가운 스타일일 거라고 생각했어. ”

 

 

베르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딱 그 반대야!! 완전 여섯 살짜리 애기야!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나고 예쁜 놈이라고! 하루라도 예쁘다는 소리 안 들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아! 도도하고 시크하긴! 바퀴벌레 곱등이 쥐 보면 울고불고 매달리고... 뱀껍질 같은 거 맞닥뜨리면 움직이지도 못해. 업어줘야 된다고! 그리고 술도 한 방울도 못 마시는 게 툭하면 목마르다고 샴페인 홀랑 마시고 기절하고... 그럼 또 업어줘야 된단 말이야! 무서운 꿈 꾸면 애기처럼 울면서 찾아와서 재워달라고 하고. 으으... 도도하고 시크한 놈들 다 얼어 죽었네! ”

 

“ 아아, 진짜 충격이다... 나 나름대로 진짜 팬이었는데... 옛날에 키로프에서 팸플릿에 사인도 받은 적 있는데. ”

 

 

드미트리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베르닌은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 그래도 걔 나쁜 녀석은 아냐. 심성은 고와. 자기 몸은 안 챙겨도 데리고 있는 무용수들은 또 끔찍하게 챙겨. 바쁜데도 발레학교에 꼬박꼬박 가서 애들한테 춤도 가르쳐주고. 난 예술은 잘 모르지만 하여튼 천재는 천재인 것 같아. 극장도 예전엔 파리 날렸다는데 요즘은 공연마다 매진이야. 그러니까 정치범이라고 너무 선입견 갖지 마. ”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베르닌에게 음식을 더 권했다. 오렌지로 입가심을 한 후 드미트리는 남은 샌드위치에서 게살과 햄을 발라내고 연어조각도 모아서 물그릇 옆에 깔아놓은 신문지에 예쁘게 올려놓았다.

 

 

“ 고양이가 먹으러 오겠지? ”

 

“ 응, 오후에 올 거야. 완전 특식이네. 좋아하겠다. 나랑 알렉산드라는 소시지 쪼가리나 사료밖에 안 줬는데. ”

 

“ 알렉산드라가 누구야? ”

 

“ 아, 등록부서에 있는 선배. 굉장히 친절하고 착해. 나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많이 도와줬어. 아까 우리 보고 서류철 떨어뜨린 선배 있잖아. ”

 

“ 아, 흑백 스트라이프 블라우스 입고 갈색 곱슬머리에 눈 큰 아가씨. 너랑 사귀는 사이야? ”

 

“ 어, 아니야... ”

 

“ 그러면 내가 데이트 신청해도 되나? 귀엽던데. ”

 

“ 뭐? 인사밖에 안 해놓고... ”

 

“ 뭐 어때. 원래 그렇게 인사 한번 튼 다음에 데이트 시작하는 거지. 나 사실 여자들한테 인기 되게 많아. 데이트 신청 거절당한 적 한 번도 없어. 데이트 첫날 진도도 되게 잘 나가. ”

 

“ 아, 아니... 근데 알렉산드라는 남자친구가 있어... 사귄지 며칠 안 됐거든. 그러니까 저... 알렉산드라는 그냥 놔둬... ”

 

“ 흠, 아쉽네. 그러면 아까 우리 보고 쌍둥이 아니냐고 소리 지른 아가씨는? 금발 머리 있잖아, 걔도 되게 귀엽던데.

 

“ 뭐? 리자? 아, 아니... 리자는 많이 어려. 스무 살 막 넘었단 말이야. 철도 없고... ”

 

“ 스무 살이 뭐가 어리냐. 결혼도 많이 하는데. 애교도 많아 보이고 맘에 들더라. 알렉산드라가 안 되면 리자한테 오늘 데이트하자고 해볼까? 난 발랄한 애들이 또 좋더라고. ”

 

 

베르닌은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 저기... 여자들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물론 네 자유지만... 너는 일주일만 있다가 갈 거잖아. 예를 들어 리자가 너랑 데이트하고 호감이라도 가지면... 그랬다가 네가 일주일 만에 가버리면 리자는 뭐가 되냐. 여기는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가 아니야. 가브릴로프는 좀 보수적인 동네란 말이야. 여자한테 그런 식으로 굴면 나쁜 남자 취급받아. ”

 

“ 어휴, 너 되게 보수적이구나. 아니면 혹시 너 리자하고 좀 그런 관계야? ”

 

아니야! 우리는 그냥 동료 직원이야. 근데 나 리자랑 친하단 말이야. ”

 

“ 으응. ”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더니 눈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 더 없어? ”

 

“ 뭐가? ”

 

“ 너랑 특별히 친한 여직원들. 알렉산드라하고 리자 말고. ”

 

“ 어, 글쎄... 어, 없는데. ”

 

“ 응, 알았어. 그러면 그 둘 빼고 다른 여자들하고는 데이트해도 되지? ”

 

“ 아니, 그게... ”

 

“ 사실 아까 회계부서의 카체리나라는 아가씨가 나한테 관심을 보이더라고. 그래서 오늘 근무 끝나면 잠깐 보자고 했어. 근데 야스민 감시 때문에 늦게 끝나겠지? 오늘 공연 있니? ”

 

“ 있긴 한데 오늘은 발레가 아니고 오페라니까 너는 그냥 5시나 6시에 들어가도 될 거 같아. ”

 

“ 그럼 너는? ”

 

“ 난 걔가 극장에서 나올 때까지 옆에 있어야 돼. 그 녀석은 예술감독이랍시고 오페라도 끝까지 남아서 볼 때가 많아. ”

 

“ 음, 그러면 나도 같이 있을게. 극장에는 언제 가? ”

 

“ 1시 반쯤 가려고. 아까 하던 일 마무리만 좀 해 놓고. ”

 

“ 그래. 그럼 카체리나하고는 지금 차나 한 잔 마셔야겠다. 구내식당에 가면 있겠지? 1시 반에 주차장으로 갈게. ”

 

“ 으, 으응... ”

 

 

드미트리가 구내식당 쪽으로 내려간 후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분명 괜찮은 녀석 같은데 왜 이렇게 뒷골이 당겨오고 피곤한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피했지만 먹이도 주고 잘해주는 베르닌과 알렉산드라에게는 그래도 가까이 다가오는 편이었다. 기분 좋을 때는 살짝 쓸어줘도 가만히 있었다.

 

 

“ 미셴카, 이리 와. 오늘은 맛있는 거 있어. 너 좋아하는 생선도 있네. 얼른 먹어. ”

 

 

고양이가 다가오더니 발로 신문지를 툭툭 쳤다. 수염을 쫑긋거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홱 돌리고 옆으로 물러났다.

 

 

어, 왜 그러니? 맨날 게눈 감추듯 먹더니... 이거 맛있는 거야. 어서 먹어. ”

 

 

혹시 자신이 보고 있어서 그런가 싶어서 베르닌은 잠깐 자리를 피했다. 보통 그런 경우에는 5분쯤 있다 돌아와 보면 미셴카가 음식을 먹은 후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잠시 후 돌아왔더니 햄과 게살, 연어가 신문지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고 검정고양이 미셴카는 돌멩이 옆에 동그마니 앉아서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베르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네 녀석이 잘못했다!’ 하는 표정으로 보여서 베르닌은 이유 없는 가책이 느껴졌다. ‘어, 내가 뭘 잘못했지?’ 하며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되었다.

 

 

“ 미셴카, 왜 그러니? 배가 안 고프니? 다른 데서 맛있는 거 먹고 왔어? ”

 

야아옹!

 

 

뱃가죽도 홀쭉하고 분명히 배가 많이 고파 보이는데 왜 저러나 싶었다. 혹시나 싶어서 베르닌은 주머니를 뒤져서 소시지를 꺼냈다. 껍데기를 벗긴 후 조심스럽게 신문지 옆에 내려놓았다. 그랬더니 고양이가 갑자기 사뿐사뿐 다가왔다. 그리고는 소시지에서 조금 떨어진 쪽에 자리를 잡더니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베르닌이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척 하자 슬금슬금 소시지를 입에 물었다. 곁눈으로 보니 고양이는 배추밭으로 들어가자마자 순식간에 소시지를 먹어치우는 게 아닌가!

 

 

“ 엥, 저 녀석 뭐야. 배고팠던 거 맞잖아. 어휴... 불쌍한 녀석, 맨날 쓰레기나 뒤지고 싸구려 소시지나 받아먹어서 진짜 맛있는 걸 못 알아보는구나... 고양이가 어떻게 생선이랑 게살을 안 먹냐... ”

 

 

베르닌은 자리를 피해주면 미셴카가 와서 남은 연어와 게살을 먹지 않을까 싶어서 사무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문서 대장 정리를 끝내고 다시 뒤뜰로 와보니 신문지 위의 음식은 그대로 남아 있고 물그릇은 비어 있었다. 고양이라는 짐승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베르닌은 주차장으로 갔다.

 

 

 

 

*    *    *

 

 

 

 

 

극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베르닌은 드미트리에게 왕재수 감시 업무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 도청장치는 극장 감독실하고 분장실, 백스테이지에 하나씩 있어. 감독실 전화에도 붙어 있고. 물론 자택에도 있지. 녹음테이프는 내가 듣고 주요 내용을 요약 정리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국장에게 대면 보고를 해. 그런데 요즘은 오후부터는 내가 계속 옆에 붙어 있으니까 오전 녹음본만 들어도 돼. ”

 

“ 뭐라고? 도청 녹음테이프도 네가 듣고 기록하고 심지어 보고까지 한다고? 너 대체 몸이 몇 개냐. 그런 건 원래 엔지니어들이 하는 거잖아. ”

 

“ 너 자꾸 본부랑 해외 지국 생각만 하는데, 여기는 가브릴로프라고. 예산과 인력이 모자란다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도 녹음테이프 매일매일 정리하지는 못해. 몰아서 할 때도 좀 있어. 그래도 극장 내부에 정보원이 있으니까 중요한 내용을 놓치는 적은 없어. 정보원의 보고내용은 내가 받아서 정리하거든. ”

 

“ 그럼 나도 그 지루한 녹음테이프 듣고 보고서 써야 하는 거야? 으윽, 난 해외에 근무할 때도 도청실에서 당직 서는 게 제일 싫었는데... 너무 지겹잖아. 기계적이고... 창의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고. ”

 

“ 어... 넌 안 해도 돼. 사실 자격 요건이 안 돼. 도청이랑 녹음테이프 분석은 인가를 받은 요원만 할 수 있는데 너는 연수요원이라서 승인 떨어지는데 일주일 이상 걸릴 거야. 그냥 내가 할 테니까 이런 업무가 있다는 것만 파악하면 돼. ”

 

“ 다행이다. ”

 

 

베르닌 역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드미트리는 좋은 친구인 것 같았지만 어쨌든 표창을 받은 우수 직원인데다 왕재수를 요주의 정치범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도청 내용을 들었다가 왕재수의 단골 레퍼토리인 공산주의니 레닌이니 스탈린이니 운운하는 얘기라도 튀어나오면 낭패였다.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왕재수와 코즐로프가 딱 붙어서 사랑을 불태우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아무래도 왕재수에게 미리 경고를 해놔야 할 것 같았다.

 

 

드미트리는 감시 업무에 대해 궁금한 듯 이것저것 물었다. 베르닌은 대충 대답해주었다. 서무 업무에 대해서야 자세하게 설명해주었지만 유능한 드미트리가 너무 열을 내어 왕재수에 대한 감시를 시작하면 좋을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드미트리는 왕재수의 신작에 대해서도 꼬치꼬치 물었다.

 

 

“ 저, 나는 예술은 별로 아는 게 없어서... 고전 발레는 아니고... 뭔가 새로운 움직임을 추구하는 거래. 내용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이야기처럼 흘러가는 건 아닌가봐. 남녀가 만나서 좋아하고 헤어지고 뭐 그런 거랬어. 여기 무용수들이 너무 틀에 박혀 있으니까 춤도 재미있게 출 수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만들었대. 나도 그 정도밖에 모르겠어. 근데 연습하는 거 보니까 막 쿵쾅거리고 뛰고 들고 구르고 재미있어 보였어. 코믹하고. 그래서 무용수들이 연습하면서 자기들끼리 많이 웃더라고. 춤추다가 박수도 치고 고함도 지르고 떠들라고 시키기도 해. 근데 그게 다 작품의 요소래. 무슨 말인지 이해는 잘 안 가지만. ”

 

“ 어, 의외네. ”

 

“ 뭐가? ”

 

“ 야스민 말이야. 나 팬이었다고 했잖아. 그 사람이 안무한 건 다 봤거든. 작품 스타일 원래 안 그래. 움직임은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거 많이 쓰지만 주제나 분위기는 딱 러시아 정통 문학 느낌이거든. 엄청 드라마틱하고 무겁고 철학적이고. 결말도 주로 비극이거나 풍자야. 무대 위에서 막 장난치고 그러는 타입 아니거든. 놀랍네. 그 신작 되게 궁금하다. ”

 

“ 엥... 러시아 정통 문학... 드라마틱, 무겁고 철학적... 비극... 진짜 걔랑 안 어울린다... 너 혹시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는 거 아니야? ”

 

“ 착각이라니. 어떻게 야스민이랑 다른 사람을 착각하냐. 그렇게 유명한 스타를. ”

 

 

베르닌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아는 왕재수와 드미트리가 아는 야스민은 다른 인물 같았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으므로 똑똑한 드미트리에게 더 이상 무식쟁이 취급당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극장에 도착한 베르닌은 언제나처럼 감독실 쪽으로 가서 비서인 류드밀라를 찾았다.

 

 

“ 안녕하세요, 류다. ”

 

“ 어서 와요, 다냐. 아앗!

 

 

뒤따라온 드미트리를 보고 류드밀라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두 눈이 둥그레진 채 드미트리와 베르닌을 이리 보고 저리 보았다. 그리고는 회사 사람들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 쌍둥이예요? 아니면 형제? ”

 

“ 저, 아니에요. 그냥 좀 닮은 거예요. 이쪽은 드미트리예요. 모스크바에서 왔는데 업무 연수 때문에 같이 온 거예요. ”

 

“ 어머나, 정말 너무 닮았네! 세상에, 단추 눈이 두 명이야! 근데 이쪽은 되게 세련됐네. 모스크바에서 왔다고요? ”

 

“ 네. 저, 미하일은 연습실에 있나요? ”

 

“ 아뇨, 지금 검열국장이랑 접견실에서 얘기 중이에요. ”

 

“ 네? 검열국에서는 벌써 몇 번이나 왔다 갔잖아요. 왜 국장까지 직접 온 건데요? ”

 

“ 왜 그러겠어요! 다음 주가 공연이니까 재 뿌리려고 그런 거죠! 못된 인간들 같으니! ”

 

“ 또 싸우면 어떡하지... 그냥 검열요원도 아니고 국장이라면서요, 싸우면 안 될 텐데... ”

 

“ 그러게요. 당신이 좀 들어가 봐요. 분위기 봐서 감독님이 흥분하면 좀 말려요. ”

 

 

 

그래서 베르닌은 접견실로 갔다. 살며시 노크를 하고 들어가려는데 드미트리가 따라왔다.

 

 

“ 어, 저기... 너도 들어가려고? ”

 

“ 나 연수 보고서 써야 하잖아. 이거 감시 업무잖아. ”

 

“ 그, 그래... 근데 너랑 나랑 닮아서 자꾸 사람들이 놀라니까 내 뒤에 있어야 돼. 알았지? ”

 

“ 응. ”

 

 

접견실 문은 약간 열려 있었다.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는 걸 보니 역시나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하나마나한 노크를 한 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검열국장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떠들고 있었고 그 옆에는 베르닌도 낯이 익은 검열요원 하나가 수첩에 계속 뭔가를 적고 있었다. 왕재수는 의자도 아니고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찌푸린 미간과 꽉 다문 입술을 보니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누가 봐도 폭발 직전의 표정이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귀를 기울여보니 역시 검열국장은 신작의 이념성을 문제 삼고 있었다.

 

 

“ 그러니까 그게 문제란 말이오! 멀쩡한 음악을 왜 조각조각내고 중간에 휴지부를 넣는단 말이냐 이거야! 그건 쇼스타코비치잖소! 그것도 레닌그라드 심포니! 그 애국적인 음악을 잘라내고 마음대로 편집해서 쓰다니! 이것은 조국에 대한 모독이고 당에 대한 모욕이야! 크레믈린 의원들이 보러 오는 무대에서 그런 불충한 시도를 할 수는 없... ”

 

 

왕재수가 국장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심지어 반말로 쏘아붙였다.

 

 

“ 첫째. 의원들인지 뭔지 그 사람들은 당신 보러 오는 거 아니고 내 작품 보러 오는 거니까 신경 끄시지. 둘째. 쇼스타코비치에 대해서는 당신보다 내가 백배는 더 잘 알고. 셋째. 마음대로 편집한 게 아니라 작품의 흐름에 맞게 편집했어. 넷째. 이번 신작에는 총 6가지 음악을 쓰는데 그 중 쇼스타코비치는 5분밖에 안 들어가. 메인은 쇼팽이고. 당신 쇼팽이 누군지나 알아? 다섯째. 제일 바보 같은 짓이 뭔지 말해줄까? 내가 쓴 쇼스타코비치 심포니는 1번이야. 레닌그라드 심포니는 7번이고. 7번은 벌써 볼쇼이에 있을 때 다른 작품에 썼어! 무용이고 음악이고 담 쌓은 얼간이 주제에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

 

 

검열국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뭐가 어쩌고 어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내가 누군지 알아? 난 국장이야! 검열국 기관장이라고! ”

 

누군지 왜 몰라! 예술 탄압자! 일자무식! 얼간이 천치!

 

“ 이 자식이 감히 누구에게 얼간이라는 거야! ”

 

“ 아, 얼간이가 아니라 이거야? 그럼 대봐, 레닌그라드 심포니가 몇 번인지. 그거라도 맞추면 얼간이 천치에서 천치는 빼 줄게. 그리고 내가 쓴 여섯 가지 음악이 누구누구의 작품인지 대면 얼간이도 취소해줄게. 힌트라도 줄까? 다 유명한 음악가들이야. 쇼스타코비치 빼고는 모두 20세기 이전 사람들이고. 대봐. 레코드 다 압수해갔잖아. 저 얼간이 자식이 리허설 내내 들락거리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도 다 들었고. ”

 

 

검열국장이 멈칫했다. 1번과 7번 구분이 안 되는 것은 베르닌과 마찬가지인 데다 6명의 작곡가가 누구인지는 더욱 모르는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국장이 ‘쇼팽...’ 하고 중얼거리다가 흠칫하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 반동분자 녀석! 스페호프 국장 말이 다 맞았어! 불여우 같으니! 그런 반동적인 작태를 우리 극장 무대에 올릴 수는 없어!

 

네깟 게 뭔데! 공연은 정부와 시 의회에서 승인한 거야! 크레믈린 지역문화예산특위에서 편성해준 예산으로 하는 거고! 너 같은 얼간이들이 죽고 못 살면서 설설 기는 높으신 작자들이 해달라고 한 거라고! ”

 

감히 그 분들에게 높으신 ‘작자들’이란 표현을 쓰다니! 넌 이제 끝장났어! 그대로 다 보고할 거야! 그 잘난 공연이 아니라 네 모가지 걱정이나 해! ”

 

맘대로 해! 이제 좀 나가! 너 때문에 애들 연습을 못 시키고 있잖아! 바보 천치 개소리를 들었더니 귀가 다 썩는 것 같네. 어휴, 귀 좀 씻어야지 안 되겠어. 류다! 비누 좀 가져와요!

 

 

 

베르닌은 창가로 달려갔다. 왕재수의 입을 틀어막았다.

 

 

“ 야, 너 왜 그래! 국장님, 진정하세요. 이 녀석이 요즘 공연 준비 때문에 너무 과로를 해서 제정신이 아니에요. 음악 건은 다시 협의하시면... ”

 

“ 협의 같은 소리! 가만 두지 않겠어, 애송이 불여우 자식 같으니! ”

 

시끄러워, 이 천치야! 빨랑 나가!

 

 

왕재수가 베르닌의 손을 뿌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검열국장이 펄펄 뛰고 있는데 드미트리가 곁으로 다가가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노여움을 좀 가라앉히시지요. 검열국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모스크바 검열본부에서 이런 경우를 대비해 2주 전에 작성한 지침이 있습니다만. 괜찮으시면 제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며칠 전 모스크바에서 지역문화예산특위 조사관을 만난 적이 있어서요. ”

 

 

‘뭐 이런 놈이 있나’ 하고 더욱 화를 내려던 검열국장은 ‘모스크바’, ‘본부’, ‘지역문화예산특위’ 등의 단어를 듣자 좀 누그러지더니 드미트리와 함께 복도로 나갔다. 수행하던 검열요원도 따라 나갔다. 그 틈을 타서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물을 한 잔 건네주었다.

 

 

“ 야, 물 먹고 진정 좀 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열국장인데 그렇게 이성을 잃고 대들면 어떡하니. 가뜩이나 넌 요주의 인물인데. 그러다 또 감옥 갈 수도 있단 말이야. ”

 

보내라고 해!

 

“ 너 감옥 무서웠다면서. 때리고 주사 놓고 못살게 굴었다며. 그리고 너 감옥 가면 공연도 못 올리게 되잖아. 너만 바라보고 있는 무용수 애들 다 어쩌라고. 게다가 바이올린 아저씨는... ”

 

“ 저 바보 천치가 진짜 개소리만 하잖아... ”

 

“ 그게 하루 이틀이니. 여기 정치인들이랑 공공기관 사람들치고 예술 잘 알고 교양 있는 사람들 거의 없어. 심지어 검열국인데 뭘 바라니. 너 볼쇼이랑 키로프에서도 안무했었다며. 해외에서도 공연하고. 그때도 검열 다 받았을 거 아니야. ”

 

그래, 받았어! 그때도 하도 거지같은 짓을 많이 당해서 다 때려치우려고 했던 거란 말이야! 근데 저놈은 여태 만난 검열꾼 중에서도 최악으로 멍청하니까 더 열 받잖아!

 

 

왕재수는 생각할수록 분한 듯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평소에는 웬만하면 하지도 않던 욕지거리를 줄줄이 쏟아냈다. 그것도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놀라운 욕설들이라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 으아, 그만 좀 해. 무용수들이 와서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여자애들 기절초풍하겠다! ”

 

앗, 맞다... 리허설...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어. 애들 다 기다리고 있을 텐데! ”

 

 

왕재수가 퍼뜩 놀라더니 창가에서 뛰어내렸다. 당장 복도로 달려 나가려는 왕재수의 어깨를 잡아 세우며 베르닌이 엄격하게 물었다.

 

 

“ 너 점심 먹었어, 안 먹었어? ”

 

먹었어! 먹었어!

 

“ 두 번이나 그렇게 빨리 대답하는 걸 보니 수상해! 너 점심 안 먹었지? ”

 

“ 먹었어! ”

 

“ 언제, 어디서, 뭐 먹었는데! ”

 

“ 점심시간에, 차이카에서! 어, 저... 보르쉬랑 펠메니... ”

 

“ 뻥치지 마! 차이카에서 펠메니 안 팔잖아! 그리고 너 아르카지가 내주는 보르쉬 죽어도 안 먹잖아! ”

 

에이씨... 그래, 안 먹었다! 무대 의상이 도착했는데 색깔을 반대로 해서 왔잖아! 상의는 빨강, 하의는 하양이어야 되는데 거꾸로 오고... 그거 해결하고 먹으려고 했는데 그러고 나니까 저 얼간이들이 들이닥쳤단 말이야. ”

 

“ 그럼 지금 나랑 차이카 가. 가서 뭐든 먹어야 돼! ”

 

“ 안 돼, 애들 리허설 시켜야 돼. 벌써 한 시간 동안 티무르 보리소비치 혼자서 봐주고 있단 말이야. ”

 

“ 너 어차피 오늘도 늦게까지 애들 갈구면서 연습시킬 거잖아! 그러려면 뭐든 먹어야 돼! 가뜩이나 검열국장한테 소리 지르느라 그나마 남아 있던 칼로리도 다 소모됐겠다. ”

 

 

왕재수는 항의하려고 했지만 베르닌의 엄한 눈초리를 보고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차이카 갔다 올게. ”

 

“ 나랑 같이 가. ”

 

“ 너 지금 나 의심하냐! 간다 하고 안 갈까봐! ”

 

“ 아니야, 의심해서 그런 거! 너 혼자 보내놓으면 보나마나 요구르트 한 개 사과 한 개 사먹고 끝낼 게 뻔할 뻔자니까 그래! ”

 

“ 차이카에서 사과 안 팔아! 요구르트도 지금 가면 다 떨어지고 없단 말이야. 기껏해야 불어터진 마카로니랑 보르쉬 국물만 있겠지. 어휴... ”

 

“ 하여튼 같이 가! ”

 

 

그때 접견실로 드미트리가 들어오면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검열국장은 대충 해결했어. 예술 쪽에 대해서는 정말 하나도 모르더라고. 화가 났던 것도 충분히 이해해요, 미하일. 아참,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안녕하세요, 드미트리 베르닌입니다. ”

 

 

베르닌은 예의 휘둥그레진 눈과 ‘아앗!’과 ‘쌍둥이야?’를 기다렸다. 하지만 왕재수는 눈썹을 약간 치켜 올리며 드미트리가 내민 손을 무시한 채 딱딱한 어조로 물었을 뿐이었다.

 

 

“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

 

“ 어, 저... 모스크바에서 우리 사무실로 연수받으러 온 친구야. 저, 내가 담당하게 돼서 같이 왔어. 네 일에 방해는 안 될 테니까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

 

 

베르닌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드미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힘차게 손을 내밀었지만 왕재수는 금세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그러니까 KGB 나부랭이가 하나 더 온 거네! 꺼져!

 

 

베르닌은 당황했다. 왕재수의 성격을 잘 아니 놀라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예의를 차리고 있었던 드미트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드미트리가 환하게 웃으며 싹싹하게 말했다.

 

 

“ 제가 KGB 본부에서 온 건 맞지만 당신의 감시요원 자격으로 온 건 아니에요. 전 레닌그라드 출신이고 키로프 시절부터 당신 팬이었거든요. 당신이 나온 작품은 다 봤어요. 안무작들은 뉴욕에서 올렸던 것 빼고는 모두 초연으로 봤고요. 제일 첫 작품을 보러 갔던 날이 생각나네요. 루슬란과 류드밀라. 거기서 당신이 춘 로그다이는 정말 잊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청년 극장 무대에서 올렸던 브이소츠키와 마야코프스키 콜라주였어요. 그런 식으로 마야코프스키 시를 해체해서 춤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던 왕재수는 드미트리의 말에 잠깐 멈칫했다. 좀 놀란 것 같았다.

 

 

그건 연극대학 페스티벌 때 올린 소품이라서 아는 사람 별로 없는 건데... ”

 

“ 아까도 얘기했듯이, 팬이었답니다. 그래서 이번 신작도 굉장히 궁금해요. 검열국장 얘기는 너무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크레믈린 지역문화예산특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더군요. 더불어 게오르기 벨스키 의원의 특별 지시에 대해서도 상기시켜주었더니 납득하고 돌아갔습니다. 아마 이제 작품에 대해 트집을 잡지는 않을 겁니다. 음악이든 뭐든 전부요. ”

 

 

베르닌은 매우 감탄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손을 마주잡고 기뻐했다.

 

 

“ 우와, 엘리트 요원이란 건 알았지만 그래도 너 진짜 대단하구나, 드미트리. 그렇지 않아도 이번 신작 때문에 검열국에서 계속 얘 괴롭히고 있었는데. 해결이 돼서 다행이다. 이제 한시름 놨네, 그치? ”

 

 

왕재수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베르닌을 째려보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무조건 잘못했다!’란 표정을 짓고 있던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생각나는 눈초리였다. 어쩐지 억울해진 베르닌이 ‘너 왜 그러냐!’ 하고 물어보려는데 왕재수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 도와준 건 좋은데, 다시는 내 일에 끼어들지 마. 난 바빠서 이만. ”

 

 

드미트리는 왕재수의 무례한 태도에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굉장히 상냥하게 대꾸했다.

 

 

“ 주제넘게 나섰다면 미안합니다. 앞으로는 조심하죠. 실례가 안 된다면 리허설을 구경하고 싶습니다만. ”

 

외부인은 안 돼!

 

 

다시 왕재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드미트리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왕재수를 데리고 구석으로 갔다. 그리고는 화난 왕재수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 미안해, 내가 먼저 얘기해줬어야 하는데. 너 이런 거 싫어하는 거 알긴 아는데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본부에서 행정 연수 온 친구야. 레닌그라드 법대 나왔고 해외에서도 근무했대. 진짜 엘리트야. 네 팬인 것도 맞고 아는 것도 많더라. 아침부터 얘기해보니까 나쁜 애는 아니야. 착해. 내 서무 업무도 많이 도와줬고. 일주일 동안 내가 데리고 다녀야 해. 국장 명령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 저... 극장에도 와 있어야 하고... ”

 

“ 그러니까 내 감시 요원이 하나 더 생긴 게 맞는 거잖아. ”

 

 

왕재수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표정이 더욱 어두컴컴해졌기 때문에 베르닌은 가슴이 철렁했다.

 

 

“ 아, 으응... 저... 너무 화내지 마... 내가 잘 커버할게. 너 방해 안 하게 할게. 그냥 쟤가 네 팬이라서... 알고 보면 괜찮은 애야. 요리도 잘 하고 일도 잘해... 발따예프가 나한테 떠넘긴 일도 다 처리해줬어. 있지... 가뜩이나 감시받는 거 싫을 텐데 연수요원까지 와서 속상하겠지만... ”

 

“ 내가 저 재수 없는 녀석 내쫓으면 너 국장한테 혼나? ”

 

“ 어... 아마도... 국장 명령으로 데려온 거니까... ”

 

“ 너 잘려? 벌목공도 못하게 되는 거야? ”

 

“ 아, 아니야... 설마 그 정도까지야... 근데.. 저... 벌목공... 아... ”

 

“ 알았어, 그럼. 맘대로 하라고 해. ”

 

“ 어,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연습실에 같이 가도 되니? ”

 

“ 맘대로 하라고. ”

 

 

왕재수는 다시 ‘네가 잘못했다’ 표정을 지었지만 아까처럼 버럭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휙 돌아서더니 베르닌과 드미트리의 곁을 지나쳐 복도로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불편한 표정으로 서 있는 드미트리에게 갔다.

 

 

“ 대충 상황 얘기해서 납득했으니까 아까처럼 화내지는 않을 거야. 연습실 같이 들어가서 봐도 돼. 너무 기분 상해하지 마. 쟤 원래 그래. 자기 일 방해받는 거 굉장히 싫어해. 감시받는 것도 그렇고. ”

 

“ 나 기분 안 상했어. 미하일 입장에선 당연하잖아. 감시꾼이 하나 더 생긴 건데. 검열 때문에 그 고생을 하고 결국 수용소까지 갔으니 기분 나쁘겠지 뭐. 나 저 친구가 파리에서 체포됐을 때 그쪽 대사관에 있었거든. 거기 진짜 난리도 아니었어. 우리 대사관 앞에서 피켓 시위에 무슨 퍼포먼스에... 두 달 동안 진짜 매일매일 모여들었어. ”

 

“ 무슨 시위? 우리 대사관 앞에서? 프랑스 사람들이? ”

 

“ 아, 너 몰랐구나. 저 친구 파리에서 망명할 뻔 했잖아. 그거 실패해서 잡힌 거고. 인권 운동가들에 예술가들에 일반 시민들에 하여튼 엄청 많이 모였어. 수용소 수감됐다는 정보까지 새어나가서 더 난리였거든. 풀려날 때까지 계속 시위했어. 파리에서만 그런 거 아니야. 런던이랑 뉴욕에서도 그랬고. ”

 

“ 아... 그랬구나. 근데 쟨 망명하려던 거 아니라던데. 친구들 만나 놀려고 기어나갔다가 잡혔다고 억울해하던데... ”

 

“ 그게 그냥 친구들이 아니니까 그렇지. 국제적으로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에 자유주의자들에... 그 사람들이 저 친구를 몇 년 전부터 자기들 쪽으로 빼오고 싶어서 얼마나 애를 태웠는데. 뭐 미하일 입장에선 억울했을 거야. 망명하려고 했으면 벌써 몇 번은 그냥 빠져나가고도 남았거든. 이건 그냥 친구끼리니까 하는 말이니까 너 한 귀로 듣고 흘려라. 나 솔직히 그때 능력만 됐으면 쟤 빼돌려주고 싶었어. ”

 

뭐? 넌 엘리트 요원이잖아... 표창도 받았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단 말야? ”

 

“ 잡혀가면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아니까 그렇지. 너무 안타깝더라고. 팬이었다고 했잖아. 예술은 예술이고 정치는 정치지. 하여튼 죽거나 다시는 춤 못 추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풀려나서 다행이야. 여기 와 있는 걸 보니까 재능이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후원자들이 남아 있으니까 좀 버티면 언젠가는 복권되겠지. 근데 쟤 성질은 좀 죽여야겠더라... 아까처럼 검열국장에게 대들고 화내면 이로울 거 하나도 없는데... 전에는 곁에서 본 적이 없으니까 이런 스타일인줄은 몰랐어. ”

 

“ 아, 으응... 극장이랑 춤에 대해 간섭하는 거 제일 싫어해... 일단 연습실 가자. 너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보기만 해야 돼. 알았지? ”

 

“ 응. ”

 

 

 

베르닌은 드미트리와 함께 연습실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왕재수는 차이카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겠다던 약속은 헌신짝처럼 걷어찬 채 연습실에서 무용수들을 마구 굴리고 있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고 드미트리에게 귓속말을 했다.

 

 

“ 1층에 가면 차이카라고 카페 하나 있거든. 거기 가서 간단하게 먹을 만한 것 좀 사올래? 저 녀석 너무 바빠서 점심도 걸렀거든. 있다가 쉬는 시간에 좀 먹여야겠어. ”

 

“ 아, 아까 너희가 얘기하는 거 들었어. 내가 혹시나 해서 아까 도시락 바구니에서 초코바하고 닭가슴살 스틱 따로 빼놨거든. 무용수들은 연습하면 먹을 틈이 없으니까 손쉽게 당분과 단백질 보충할 수 있는 간식이 필요하대. 이 가방 안에 넣어놨으니까 좀 있다 주면 될 거야. ”

 

 

베르닌은 정말로 감탄했다.

 

 

“ 와, 너 진짜 대단하다. 근데 미하일은 초코바 안 먹어. 닭가슴살 스틱만 줘야겠다. ”

 

“ 다크 초콜릿 70%니까 아마 먹을 거야. 아까 화 많이 냈으니까 조금 달콤한 거 줘도 모르고 먹을 걸. ”

 

 

쉬는 시간에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초코바와 닭가슴살 스틱을 건네주었다. 왕재수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답답해진 베르닌이 꾸짖었다.

 

 

“ 너 왜 그래. 이거 몸에 좋은 거란 말이야. 초코바도 단 거 아니야. 아까 차이카도 안 갔잖아. ”

 

“ 안 먹어, 감시꾼이 주는 건. ”

 

“ 엥? 너 어떻게 알았어, 이거 드미트리가 챙겨줬는데. ”

 

“ 내가 바보냐! ”

 

 

베르닌은 논쟁을 포기했다. 할 수 없이 차이카에 다녀왔다. 역시 진열대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거라곤 싸구려 초콜릿으로 코팅된 딱딱한 비스킷뿐이었다. 비스킷과 우유를 사서 올라갔다.

 

 

“ 야, 이거라도 먹어. 초콜릿 싫으면 벗겨내고 먹든지. ”

 

 

왕재수는 말없이 비스킷을 먹었다. 설탕 맛만 나는 싸구려 초콜릿을 벗겨낼 생각도 하지 않고 부스러기를 흘리면서 전부 먹었다. 우유도 다 마셨다.

 

 

“ 너 엄청 배고팠구나. 그 비스킷 되게 달던데... 그냥 이 초코바랑 닭가슴살 스틱 먹지... 네 입맛엔 이게 훨씬 맞았을 텐데. ”

 

“ 우리 극장 카페에서 파는 거니까 매상 올려주려고 그런 거야! ”

 

“ 내 주머니 털어서 매상 올리냐! ”

 

“ 그래! KGB 주머니 좀 털면 안 되냐!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 힘든 놈이었다.

 

 

 

 

*   *   *

 

 

 

 

왕재수는 오페라 공연 쪽은 부감독에게 맡겨둔 채 9시까지 남아 있었다. 무용수들을 지도하는 건 8시쯤 끝냈지만 의욕에 찬 주역과 조역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남아서 연습을 계속했다. 왕재수는 그들에게 연습하는 건 좋은데 9시에는 들어가서 자라고 했다.

 

 

“ 우리 그냥 새벽까지 연습하면 안 되나요? 이제 감독님 얘기가 뭔지 알 것 같아요. 박자를 맞추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음악을 타면서 놀라는 거요. 그 느낌을 잊기 전에 계속 연습해보고 싶어요. ”

 

“ 한 번 놀 줄 알게 되면 계속 놀 수 있어. 이제 며칠 안 남았으니까 다들 컨디션 관리해야 돼. 안 그러면 당일에 몸살 나서 못 올라가. 밥 잘 챙겨먹고 잠도 잘 자야 돼. 그리고 오늘부터는 다들 술 마시지 마. 맥주 한 잔, 샴페인 한 모금도 안 돼. 연습 때 아무리 잘해도 무대 위에서 컨디션 별로면 다 소용없어. 나 아홉시에 다시 와서 문 잠글 거야. 그러니까 그 전에 들어가라. ”

 

 

왕재수는 연습실에서 나오더니 의상실과 소품실을 오가며 이것저것 확인을 하고 막판에는 결국 오페라 공연을 체크하러 백스테이지에도 들렀다. 드미트리는 베르닌과 함께 왕재수의 뒤를 따라다녔다. 이따금 수첩에 뭔가를 적기도 하고 왕재수에게 공연이나 준비 과정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왕재수는 드미트리의 질문을 모조리 무시했다. 너무 쌀쌀맞게 굴어서 베르닌이 다 민망할 정도였다.

 

 

마침내 9시가 되었다. 왕재수는 연습실로 갔고 아직 남아 있던 가릭과 데니스를 호통을 치며 내쫓았다. 복도에서 타마라를 발견하고는 여자 무용수에 대한 평소의 상냥함도 잊고 야단을 치려는데 타마라가 잽싸게 선수를 쳤다.

 

 

“ 전 아까 나왔어요. 실은 집에 갔다 온 거예요. ”

 

“ 집에 갔으면 쉬어야지 왜 다시 나와! ”

 

“ 오늘 식사도 제대로 안 하셨잖아요. 이거 가져가서 좀 드세요. 오늘 데니스 어머니가 오셨거든요. 맛있는 거 많이 해놓으셨는데 감독님 생각나서 조금 가져왔어요. 생선수프 좋아하시잖아요. ”

 

 

타마라가 둥그런 보온통과 조그만 꾸러미를 내밀었다.

 

 

“ 연어랑 농어로 끓인 우하예요, 맛있어요. 이건 양배추 파이예요. 같이 드시면 몸도 따뜻해지고 기력도 보충되고 좋아요. ”

 

 

왕재수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야단치는 대신 수프와 파이를 받았고 타마라에게 고맙다고 했다. 타마라는 왕재수를 꼭 껴안고 뺨에 뽀뽀를 했다.

 

 

“ 끼니 거르지 마세요, 미셴카. 우리 실력이 별로라서 많이 힘든 거 알아요. 그래도 진짜 열심히 해서 좋은 무대 보여줄 테니까 감독님도 자기 몸 잘 챙기세요. ”

 

“ 고맙긴 한데 너네 실력 이제 별로 아냐. 전에는 별로였지만 많이 나아졌어. 내가 가르쳤는데 아직까지 별로일 리가 없잖아! 하여튼 너 자꾸 나 껴안지 마! 네가 이러니까 다른 여자애들도 와서 다 껴안잖아! ”

 

우리 꽃미남 감독님 이럴 때나 껴안아보죠!

 

“ 저, 타마라... 저기 당신 남자친구... 데니스가 째려보고 있는데요... ”

 

 

베르닌이 나름대로는 농담을 섞어서 말했다. 타마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 괜찮아요. 이제 데니스가 와서 껴안아줄 거예요. ”

 

 

그러자 정말로 데니스가 와서 왕재수를 와락 껴안았다.

 

 

“ 벌써 한참 전부터 안아주고 싶었어요! 진짜 고마워서요! ”

 

“ 야! 아직 신작 발표 전이거든! 누가 보면 다 끝낸 줄 알겠네! ”

 

“ 나도, 나도! 나도 우리 감독님 안아줘야지! ”

 

 

가릭도 달려들더니 뒤에서 왕재수를 부둥켜안았다. 왕재수는 덩치 큰 두 무용수의 포옹에 붙들린 채 ‘뭐하는 거냐, 이 멍충이들아! 춤이나 좀 잘 춰보란 말이야!’ 하고 투덜댔지만 눈으로는 웃고 있었다.

 

 

어쩐지 뭉클해진 베르닌은 자기도 가서 왕재수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드미트리 쪽을 보았다. 드미트리는 한 손에는 수첩을 든 채 왕재수와 무용수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베르닌은 자신과 아주 닮은 그 까만 눈에서 그런 강렬한 시선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드미트리가 왜 그런 시선을 던지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 기분이 살짝 찝찝했다. 혹시 자기가 이제까지 그냥 넘어가줬던 왕재수의 문제 발언들을 하나하나 적어서 스페호프에게 보고하려는 건가 싶어서 걱정도 됐다.

 

 

‘ 아니야, 괜한 걱정이야. 쟨 좋은 앤데. 미하일의 팬이고 발레도 좋아하니까 관심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 ’

 

 

그때 드미트리가 베르닌을 보더니 빙긋 웃으며 여전히 싹싹한 음성으로 말했다.

 

 

“ 무용수들이 미하일을 잘 따르는구나. 하긴 레닌그라드에서도 후배들하고는 사이좋았다고 했어. 이제 오늘 일과는 다 끝난 건가? ”

 

“ 아, 으응... 이제 집에 갈 거야. 저 녀석이 남는다고 해도 협박해서 집에 데려갈 거야. 계속 과로하고 있거든. ”

 

“ 그럼 너는 미하일 데려다 주고 나서 너희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

 

“ 아, 나 같은 아파트에 있어. 국장이 감시 업무 맡기면서 나 이사시켰거든. 층만 다르고 같은 건물이야. 너는 어디에 있어? ”

 

“ 요원 숙소. ”

 

“ 아, 사무실 뒷길에 있는 거기... 그러면 내가 가면서 내려줄까? ”

 

“ 아니야, 괜찮아. 사실 끝나고 카체리나랑 요 앞에서 한 잔 하고 산책하기로 했거든. ”

 

“ 어, 그랬구나... 그럼 빨리 가봐. 내일 사무실에서 보자. ”

 

“ 그래, 다냐. 오늘 덕분에 많이 배웠다. 내일 아침에 봐. ”

 

 

 

드미트리는 왕재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먼저 나갔다. 왕재수는 인사를 받아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무용수들이 인사를 하고는 베르닌에게 달려와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으앗, 다닐! 난 저 사람이 당신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왜 뜬금없이 감독님에게 저렇게 존댓말을 쓰며 인사하지 하고 깜짝 놀랐어요! ”

 

“ 당신 쌍둥이였어요? 아니면 형제예요? ”

 

“ 아니에요, 그냥 좀 닮은 거예요. 모스크바에서 온 연수요원이에요. ”

 

“ 와, 진짜 똑같이 생겼다... 구분 못할 것 같아요! ”

 

“ 그러게, 목소리도 똑같아요! 그리고 키도 똑같고 체격까지! ”

 

“ 알고 보면 쌍둥이 아니에요? ”

 

“ 감독님은 안 놀라셨어요? 아까 그 사람이랑 다닐 진짜 똑같던데! ”

 

 

왕재수는 고개를 저으며 짜증을 냈다.

 

 

“ 다들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똑같긴 뭐가 똑같아. 완전 다른데. ”

 

“ 어, 그치만 얼굴부터 시작해서 진짜 닮았는데... ”

 

안 닮았어! 하나도 안 닮았다고! 이제 그만 들어가! ”

 

 

타마라와 데니스, 가릭은 ‘진짜 닮았는데’ 하고 중얼거리다가 또 왕재수를 와락 껴안고는 밤 인사를 한 후 우르르 복도를 달려 나갔다. 베르닌도 왕재수의 어깨에 재킷을 뒤집어씌우며 엄하게 말했다.

 

 

“ 너도 이제 가자! ”

 

“ 아, 나 조금만 더... ”

 

“ 너 아까 쟤들한테 뭐라고 했어. 며칠 안 남았으니까 컨디션 관리하라고 했잖아. 지금 아무리 잘해도 당일에 아프면 다 도루묵이라고. 너도 마찬가지야! ”

 

“ 어휴, 내가 한 말 이상하게 해석하지 말란 말이야! 공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

 

그래, 나 문외한이야. 그래도 나 세 번째 주역 맡았던 거 기억 안 나냐?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그때도 네가 나한테 똑같이 얘기했어. 쉬어야 된다고. 그러니까 너도 가서 쉬어야 돼. 오늘 먹은 것도 별로 없잖아. 타마라가 가져다 준 거 맛있겠네. 집에 가서 우하랑 양배추 파이 좀 먹고 자자. ”

 

“ 아휴, 너 갈수록 왜 이렇게 시어머니 노릇을 하냐... 알았어. 가자. ”

 

 

 

 

*   *   *

 

 

 

 

 

왕재수는 차를 타자마자 꾸벅꾸벅 졸았다. 하지만 다리를 건널 때쯤 되자 깨어났고 배가 많이 고팠는지 꾸러미를 풀어서 양배추 파이를 두 개 꺼냈다. 하나는 자기가 먹고 하나는 운전하는 베르닌의 입에 쑤셔 넣어 주었다.

 

 

“ 와, 이거 맛있네. 양배추도 많이 들어 있고 촉촉하고. 근데 아까 그 닭가슴살 스틱도 맛있었는데... 집에 가서 그것도 좀 먹어봐. 내가 챙겨왔어. ”

 

“ 싫어. 감시꾼 나부랭이가 가져온 거 먹기 싫어. ”

 

너무 그러지 마. 네 팬이잖아. 파리에도 있었대. 불어도 잘하고 영어도 잘 한대. 무용이랑 예술도 많이 알고. 그런 거 보면 너랑 잘 통할지도 몰라. ”

 

“ 그래봤자 KGB 끄나풀... 스파이! ”

 

“ 야, 나도 KGB인데... 너무 매도하지 마. ”

 

“ 넌 그 자식처럼 잘난 체 안하잖아. 바보니까. ”

 

“ 야! 너 자꾸 나한테 바보라 할래! 나도 법학 전공하고 나름대로 우등생이었단 말이야! 외국어랑 예술만 모르는 거지... ”

 

“ 하여튼 차라리 그게 낫단 말이야! 바보가 훨씬 나아. ”

 

“ 엥... 그건 또 무슨 논리람... 근데 너 진짜 드미트리 처음 봤을 때 안 놀랐어? ”

 

“ 왜 놀라? ”

 

“ 걔랑 나랑 많이 닮았잖아. 나도 진짜 놀랐는데, 꼭 거울 보는 것처럼. 아침에 걔 보고 나서 나 엄마한테 전화까지 해봤어. 혹시 레닌그라드에 나 모르는 사촌 있었냐고. 근데 아니더라고. 너무 신기하지 않아? 아무 관계도 아닌데 나랑 너무 똑같이 생겼어. ”

 

“ 똑같이 생기긴. 완전히 다른데. ”

 

“ 야, 당사자 눈에도 똑같아 보이는데 웬 고집이냐! 그건 네가 KGB를 너무 싫어하니까 그러는 거지! 아니면 옷차림이 달라서 그런가... 넌 패션인지 뭔지 중시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걔 양복 외제인 것 같더라고. 구두도 완전 반짝거리고. 나도 그렇게 잘 차려입으면 좀 나아보이려나... ”

 

“ 그래, 제발 좀 차려입어라. 오늘도 아가일 무늬 셔츠에 손목토시... 변함이 없네. 근데 옷차림이랑 상관없어. 너랑 걔랑 딱 보면 완전히 다른데 왜 자꾸 닮았다고 다들 난리인지 이해가 안 가. ”

 

“ 참 이상하네... 내가 보기엔 진짜 비슷한데. 어디가 달라? 다른 사람들은 걔랑 나랑 있는 거 보자마자 다 소리 지르고 쌍둥이 아니냐고 물었거든. 네 눈엔 뭐가 다른데? ”

 

“ 어휴, 그런 걸 어떻게 하나하나 말로 설명하니. 그냥 다른 거지. ”

 

“ 그래도... 얼굴이랑 키랑 체격이랑 목소리까지... ”

 

 

왕재수는 베르닌의 얼굴을 힐끗 훑어보더니 귀찮은 듯 중얼거렸다.

 

 

“ 머리 가르마도 너는 오른쪽으로 탔는데 걔는 왼쪽으로 탔고. 너는 관자놀이에 새치가 많은데 걔는 정수리에 몰려 있어. 그리고 너는 눈매가 살짝 처졌는데 걔는 안 처졌고 왼쪽 눈매는 오히려 살짝 위로 올라가 있어. 콧방울도 네가 더 넓고 걔는 약간 위로 올라붙었고. 웃을 때도 너는 양쪽 입가가 똑같이 실룩거리는데 걔는 왼쪽만 더 올라간단 말이야. 어깨도 걔가 좀 더 넓게 각진 편이고. 몸매랑 걸음걸이 보면 그 자식은 운동하는 놈이야. 체격은 비슷해도 너는 살이고 걔는 근육이라고. 걷는 것도 그 녀석이 좀 더 보폭도 넓고 팔도 많이 흔들어.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그 자식은 재수 없게 쳐다본단 말이야! 사람 훑어보는 게 무슨 그림이나 정육점 고기 감정하는 것 같았다고! 그런 자식 딱 보면 알아, 완전 앞잡이! 잘난 체하는 놈이란 말이야. 너랑 완전 달라. ”

 

 

베르닌은 멍해졌다. 머릿속으로 드미트리의 모습을 다시 그려보았다. 하지만 금세 뒤죽박죽이 되었고 뭐가 다른 건지 전혀 분간이 안 갔다.

 

 

“ 어... 그러냐? 난 모르겠는데... 근데 너 진짜 대단하다. 잠깐 쳐다본 거였잖아. 근데 그렇게 여러 가지를 구분했단 말이야? ”

 

“ 그걸 못 보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

 

“ 그런가... 근데 다른 사람들도 다 모르던데... 신기하네. 아, 넌 무용수라서 그런가보다. 안무도 하니까 관찰력이 뛰어난가봐. ”

 

“ 그런 건 안무 안 해도 다 보이는데... ”

 

“ 그래? 근데 난 옛날부터 워낙 평범하게 생겨서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구별하기 어렵다는 얘기 많이 들었거든. 넌 미남이니까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없겠다, ”

 

“ 내가 우주 최강 꽃미남이긴 하지. 어디 갖다놔도 눈에 띄고. 근데 난 너 알아보기 쉽던데. ”

 

“ 그래? ”

 

“ 응. 사람 많이 있어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

 

“ 어, 나 좀 감동할 거 같아... ”

 

제일 책상물림 같은 애 찾으면 되는 거잖아! 아니면 손목토시랑 아가일 무늬만 찾아도... ”

 

“ 어휴, 어쩐지... ”

 

 

 

도착한 후 베르닌은 왕재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우하와 양배추파이를 먹였다. 왕재수는 밤늦은 시각이라느니 나트륨 조절을 해야 한다느니 하는 얘기는 까맣게 잊은 듯 열심히 수프와 파이를 먹었다. 하지만 스트레칭을 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베르닌이 씻고 나오니 왕재수는 자기 집으로 올라가는 대신 소파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피곤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 어휴, 이 녀석... 씻지도 않고... 근데 이 자식 요즘 왜 자꾸 우리 집에서 잠드는 거야. 아휴 귀찮아... ”

 

 

위층까지 업어다주기가 너무 귀찮아진 베르닌은 할 수 없이 왕재수를 안아서 자기 침대로 데려가 뉘었다. 그리고는 ‘요즘 왜 자꾸 주객전도가 되는 걸까’ 하고 투덜대며 소파로 기어 올라가 허리를 꼬부리고 잠이 들었다.

 

 

 

 

 

 

 

- FIN -

2015. 8. 5 ~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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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채셨겠지만 이번 편은 단추팬클럽 분들이 말씀하신 단추 평행우주, 즉 '우수한 단추'에 대한 얘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는 평행우주의 분신으로 설정하는 대신 단추와 쌍둥이처럼 매우 닮은 드미트리 베르닌으로 바꿨다 :) 아이디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치즈홍차님, 가엾은 리자님, sylf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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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한 단추, 아니 드미트리가 왕재수의 레닌그라드와 해외 시절에 대해, 그리고 그의 작품에 대해 하는 이야기들은 거의가 본편 우주의 미샤에게 해당되는 얘기들이다. 파리 망명 실패와 수용소 체포의 뒷배경은 좀더 복잡하지만.. 어쨌든 체포당한 후 서방세계의 인권운동가들과 예술가들, 시민들이 그를 위해 구명 시위를 전개했다는 것은 본편과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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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가 지방 KGB 지국에 연수를 오고 다섯번 연수를 받아야 승진 요건을 채울 수 있다는 얘기들은 내가 이야기 전개를 위해 가상으로 설정한 것이다. 연수 제도야 있겠지만 자세한 사항은 나도 조사 안 해봤다 ㅎㅎ

 

 

...

 

 

왕재수의 신작에 대한 얘기는 지난번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가브릴로프 본편에서 미샤가 준비하는 신작과는 내용과 형식이 전혀 다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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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31편으로 이어지는데... 사실 아직 쓰고 있는 중이라서.. 헥헥... 과연 우수한 단추의 운명은~ 그는 왕재수의 호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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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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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