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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쉬고 돌아온 서무 시리즈.

이번 에피소드에도 이른바 우수한 단추인 드미트리 베르닌이 등장한다 :) 지난 32편에서 협박카드에 이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왕재수! 그리고 그를 찾아 헤매는 단추와 드미트리! 과연 이들은 왕재수를 찾아낼 수 있을지...

33편은 사건도 많고 분량도 꽤 길어서 어쩔 수 없이 1,2부로 나눠 올린다. 이번주는 먼저 1부.

 

사라진 왕자님 왕재수를 찾아 헤매는 명탐정 호위 기사 단추와 드미트리의 모험! 재미있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4월이 되자 왕재수의 신작 공연을 앞두고 협박편지가 이어지고, 급기야 정체불명의 협박범은 왕재수를 납치하는데... 과연 베르닌과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는 그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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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3

 

 

 

 

 

서무의 슬픔

-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 (1부) -

 

 

 

 

 

 

 

드미트리는 먼저 와 있었다. 초조하게 천사상 주위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는데 베르닌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 어휴, 너 안 와서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 ”

 

“ 미안해, 전화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어. ”

 

“ 어디에 전화해? ”

 

“ 미샤 비서. 이것저것 물어보느라고. 검은 숲에 가봐야 할 것 같아. ”

 

“ 검은 숲?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니. ”

 

“ 아 그렇지... 그게, 다차... 레베진스키, 사무국장... 수요일까지 휴가. 사진, 레코드... 사무실에 몰래 드나들고... ”

 

 

베르닌은 순간 머리가 멍해져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드미트리는 우왕좌왕하는 그를 탓하는 대신 참을성 있게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다닐, 너 진짜 여기저기 다녔나보구나. 일단 뭐 좀 먹어야겠다. 눈이 쑥 들어갔어. ”

 

아니야! 지금 뭐 먹을 시간 없어! 빨리 검은 숲에 가야 돼! 레베진스키한테 별장이 있다고 했어! 거기 미샤를 숨겨놨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 자식이 미샤를 감시하고 물건도 다 뒤지고 있었어. 나한테는 그런 얘기 하나도 없었는데... 수요일까지 휴가 냈다고 하잖아. 진짜 의심스럽단 말이야. 너도 빨리 와, 차 저쪽에 세워놨어. ”

 

“ 그래. 일단 차에 타자. 여기 사람들 많이 지나다니니까. ”

 

 

차를 탄 후 드미트리는 베르닌에게 극장에서 있었던 일을 조목조목 물었다. 대학 시절부터 이미 요원으로 활동해서 그런지 드미트리는 베르닌보다 훨씬 침착했고 논리적이었다. 드미트리의 차분한 말투 덕에 베르닌도 점차 흥분을 가라앉혔고 수위와 그리고리에게서 들은 이야기, 레베진스키의 수상한 소행과 사무실에서 발견한 왕재수의 사진, 레코드 목록, 레베진스키의 집에 갔던 이야기, 류다와의 통화로 알게 된 사실 등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할 수 있었다. 드미트리는 그의 말을 끊지 않고 중간 중간 ‘응’이라든지 ‘그랬구나’ 등 추임새만 넣으면서 끝까지 들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 그래서 지금 검은 숲 쪽으로 가고 있는 거야? ”

 

“ 응. 한 시간쯤 가야 돼. 넌 어떻게 됐어? 국장 만났어? ”

 

“ 응. 네 말대로 토요일인데도 나와 있더라. 나보고 왜 왔느냐고 물어서 오늘 극장이 쉬는데 혹시 내가 수행해야 할 업무가 따로 없는지 궁금해서 들렀다고 슬며시 떠봤어. 그자의 의중을 정확히 모르니 협박카드와 미하일이 납치됐다는 얘기는 일단 하지 않았는데 그게 옳은 판단이었던 것 같아. ”

 

“ 왜? 국장이 너도 의심하는 눈치였어? ”

 

내색하진 않았어. 그랬으면 나한테 레베진스키를 소개시켜주진 않았겠지. ”

 

“ 뭐? 레베진스키? 그자가 거기 있었단 말이야? 만났어? ”

 

“ 응, 내가 갔을 때 스페호프의 방에 있었어. 번듯하게 생긴 놈이더라. 그런데 무슨 얘기하는지는 못 들었어. 얘기 다 끝내고 나오려는 참이더라고. 그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가서 엿들었어야 했는데... 스페호프가 그자를 소개시켜주면서 조만간 새 감독이 될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역겨워서 죽는 줄 알았어. ”

 

“ 다른 얘긴 안 해? 미샤에 대해서... ”

 

“ 납치에 레베진스키가 연루되어 있는 것 같긴 했어. 국장이 레베진스키에게 날 소개해 주면서 필요한 게 있으면 내 도움을 받으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레베진스키가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다고, 이제 웬만한 건 다 끝냈다고 하는 거야. 그러더니 스페호프에게 수요일에 보자면서 나가더라고. 그때 나도 들었어, 수요일까지 휴가 냈다는 거. 당장이라도 쫓아나가고 싶었는데 스페호프가 날 붙잡아서 못 나갔어. ”

 

“ 그럼 국장이 너에게 이번 작전에 대해 얘기해준 거야? ”

 

“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니더라고. 나에게 어젯밤에 어디 있었느냐고 묻는 거야. 근데 눈초리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어제만큼 개방적인 분위기가 아니었어. 느낌이 어쩐지 이상해서 너희 집에 갔다는 얘긴 일단 안 하고 요원 숙소에서 여직원들과 파티하며 놀았다고 했어. 카체리나와 갈리나, 리자랑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알리바이가 되잖아. 국장의 의심을 사기 전에 선수를 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내가 해외 근무를 오래 하고 대도시 출신이라 여기 문화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혹시 여직원들이랑 밤에 파티하고 노는 게 KGB 요원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이냐고 물었어. 그러니까 스페호프가 웃는데 뭔가 긴장을 내려놓는 느낌이더라고. 그래서 얼른 금요일에 극장에서 미하일을 감시했던 내용을 간략하게 보고했어. 협박과 납치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주지 않을까 기대했거든. 내게 지시를 내려주면 더 좋은 거고. 근데 물 건너갔어. 그자가 마음을 바꿨어. ”

 

“ 그게 무슨 소리야? 첫날 너한테 지령을 줬다면서. 작전이 진행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고 그때 도우라 했다며. 레베진스키에게도 필요한 게 있으면 네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면서. ”

 

“ 그러게 말이야. 근데 국장이 그러는 거야. 불여우 감시하느라 수고했다고. 근데 공연은 어차피 제대로 올라가지 못할 거라고. 그래서 내가 도와줄 일 없느냐고 물었더니 괜찮대. 내 도움이 필요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됐다면서 사람이 많이 연루될수록 복잡해서 안 되겠다는 거야. 난 아주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조국과 당을 배반한 반동분자를 혼내주는 일에 열성적으로 동참하고 싶었는데 무척 아쉽다고 말했어. 역시 내가 연수요원에 지나지 않아서 능력이 모자란 게 문제인 것 같다고, 도움이 못 되어드린 것 같아 죄송하다고 말이야.

그랬더니 스페호프가 손을 내저으면서 그렇지 않다고, 오해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자기는 나를 믿는다고. 하지만 내가 루뱐카 본부에서 왔기 때문에 약간 우려가 된다는 거야. 모스크바는 아무래도 스비제르스키의 본거지니까 내가 열성적으로 여기서 작전에 참여했다가 공연히 그자의 의심을 사서 피해를 입을까 걱정도 되고, 또 만의 하나 그자가 내 뒤에 끄나풀을 붙였을 수도 있으니 내가 이번 작전에서 한 발짝 물러나 주는 것이 가브릴로프 KGB나 나나 양쪽 모두 낫겠다는 거야. ”

 

“ 완전 궤변이잖아. 그럴 거였으면 애초부터 너한테 지령을 주지 않았어야지! 혹시 국장이 꼬리를 밟았나? 너랑 내가 미셴카랑... ”

 

“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거야. 근데 나한테 레베진스키를 소개시켜 준 것도 그렇고, 극장 감시 업무에서 빼지도 않은 걸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아. 나보고 오늘은 쉬고 수요일까지 계속 극장에 가라고 하더라고. 그러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하나 했어. ”

 

“ 뭔데? ”

 

불여우 감시는 이제 안 해도 될 거라고. 아파서 입원할 예정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그냥 일요일에 극장에 가서 분위기만 파악하라고. ”

 

“ 아파서 입원... 그건 카드에 있었던 말인데. ”

 

 

베르닌은 곰곰 생각하느라 하마터면 신호를 무시하고 직진할 뻔 했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드미트리가 창 너머로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 나와서 레베진스키를 쫓아가려고 했는데 이미 사라진 후더라고. 그래서 갈리나에게 전화를 했어. ”

 

“ 갈리나? 아, 어제 같이 게임했다고 했지? 카체리나랑 리자랑... ”

 

 

베르닌은 ‘지면 뽀뽀하는 게임’이라고 말할 뻔 했다.

 

 

“ 응, 그 아가씨가 총무부서 소속이었던 게 떠오르더라고. 보드 게임하다가 땅과 집을 다 잃고는 괜찮다고, 가브릴로프 안전가옥들이 다 자기 손 안에 있다고 농담을 했어. ”

 

“ 아, 맞아. 갈리나가 그쪽 담당이야. 여기는 이렇다 할 범죄행위도 거의 없고 방첩 업무도 적은 편이라 안전가옥이 몇 개 없어서 그냥 총무부서에서 관리하거든. 그러다 작전이 생기면 현장요원들 쪽으로 넘어가지만. ”

 

“ 응, 그럴 것 같더라. 지방의 소규모 지부들은 그렇게 한다는 얘길 들었어. 스페호프가 납치 사건을 뒤에서 지휘하고 있다면 미하일을 그 안전가옥 중 한 곳에 숨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범인은 현장요원이거나 그쪽 경력이 있을 가능성이 커. 잠긴 문도 따고 들어오고 방울 달린 줄도 잘라버리고 수면제를 쓰고. 그래서 갈리나에게 전화해서 안전가옥들 중 최근에 활용하는 곳이 있느냐고 떠봤어. ”

 

“ 아... 난 그런 건 생각도 못했어. 그래... ”

 

“ 근데 갈리나는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고. 자기가 알기로는 지금 쓰는 곳은 없대. 열쇠는 따로 보관하고 있는데 받아가려면 자기한테 장부를 쓰고 가야 한다더라고. 요 며칠 동안 장부 적고 열쇠 요청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대. 더 물어보면 의심 살 것 같아서 일단 알았다 하고 끊었어. 총무부서에 가봤는데 캐비닛도 많고 다 잠겨 있어서 장부를 못 찾았어. 최소한 가옥들 위치라도 알아내면 도움이 될 것 같았는데. ”

 

아! 나 알아! 그러니까... 캐비닛 열쇠들 여분으로 더 있어. 기밀 자료실 열쇠 빼고는 내가 한 세트씩 가지고 있어, 총괄서무라서. 사무실 가면 있는데, 내 자리 서랍장에... ”

 

“ 어 정말? 잘됐다! 그러면 지금 다시 회사로 갈까? 안전가옥 리스트를 확보하면 훨씬 도움이 될 거야. ”

 

 

베르닌은 시계를 보았다.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우리 국장 보통 주말에도 늦게까지 있어. 8시 넘어서 가야 안전해. 그리고 지금 제일 의심스러운 건 레베진스키잖아. 일단 검은 숲의 그 별장으로 가보는 게 좋겠어. ”

 

“ 그래, 그러자. 아직 많이 가야 하니? ”

 

“ 저 다리 건너서 30분 정도만 가면 돼. ”

 

 

검은 숲으로 가는 동안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깔렸다. 드미트리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갱지로 싼 닭고기 꼬치를 꺼내서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 좀 먹어. 난 아까 너 기다리면서 하나 먹었어. 공원에서 산 거라 벌써 다 식긴 했지만... 너 오늘 먹은 거 없잖아. ”

 

“ 으, 으응. 고마워. ”

 

 

구운 닭고기는 차갑게 식어서 기름기와 소금기가 따로 돌았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입 안에 먹을 것을 넣자 침이 돌면서 문득 배가 무척 고파졌지만 납치된 왕재수를 생각하니 고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 닭고기 수프 끓여주려 했는데... ’

 

 

핸들을 붙잡은 채 한참동안 우물거리며 앉아 있자 목이 메어서 그런 줄 알고 드미트리가 물병을 열어 그의 입에 대 주었다. 베르닌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억지로 음식을 삼켰다. 드미트리가 한숨을 쉬었다.

 

 

“ 여기 갓길에 차 좀 대볼래? 운전 내가 할 테니까 너 좀 쉬어. ”

 

“ 아니야, 괜찮아. 너 길 모르잖아. ”

 

“ 네가 알려주면 되잖아. 어차피 이제 숲으로 접어들어서 한참 직진일 것 같은데. 너 지금 심신이 너무 지쳐 있어서 그래. 힘들어도 좀 먹고 기운을 차려야 돼. 그 별장에 정말 미하일이 갇혀 있다면...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미트리에게 운전대를 넘겨주고 옆에 앉았다. 닭꼬치를 꾸역꾸역 해치우고 물도 마셨다. 자꾸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왕재수를 찾아내고 말리라 다짐했다.

 

 

 

 

*    *    *

 

 

 

 

 

연못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낡은 별장들 사이에서 레베진스키의 흰색 별장은 금세 눈에 띄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별장 여러 군데에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레베진스키의 다차만은 어두컴컴했다. 연못가에서 샤실릭을 구우며 놀고 있는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차를 저만치 떨어진 데 세워놓고 숲길로 돌아서 가기로 했다.

 

 

수풀 사이로 몸을 숨기면서 천천히 걸어가던 드미트리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 가능하면 총 쓰지 말아야겠다. 사람들이 많아서... 애들도 있고. ”

 

“ 어, 으응... 그런데 범인이 무장하고 있으면 어쩌지. 레베진스키 하나라면 걱정 안 되는데... ”

 

“ 최악의 경우엔 쏴야지 뭐. 근데 미하일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 레베진스키는 이런 쪽 훈련 받은 사람 아니지? ”

 

“ 응, 전혀. 미샤처럼 무용수 출신이야. 40대고 류다 말로는 허리가 안 좋아서 은퇴했다고 했어. ”

 

“ 하긴, 아까 보니까 외모가 번듯하긴 해도 신체적으로 위협적인 것 같진 않았어. 그래도 다른 놈이 붙어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너 절대로 나한테서 떨어지면 안 돼. 일단 내가 앞장설게. ”

 

 

현장 경험이 전혀 없는 베르닌은 반대하지 않았다. 몇 달 동안 극장에서 왕재수를 지켜보면서 그는 어떤 일이든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드미트리는 그보다는 훨씬 경험도 많았고 능력도 뛰어났다. 별장 울타리를 뛰어넘자 심장이 두근거렸고 머리가 꽝꽝 울렸다. 불 꺼진 창문 너머에 왕재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흥분과 분노로 정신이 혼미했다. 그때 드미트리가 그를 창고 쪽으로 밀어붙이며 속삭였다.

 

 

“ 몸 숙여, 다냐. ”

 

 

베르닌이 어둠 속으로 몸을 숙였을 때 드미트리가 창문에 돌멩이를 집어던지고는 잽싸게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정적 속에서 딱 소리가 아주 크게 울렸다. 유리가 깨지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큰 소리였다. 그들은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이 켜지지도 않았고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레베진스키의 집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없을 수도 있었고 누군가가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을 수도 있었다.

 

 

5분을 기다린 후 드미트리가 턱짓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빠르게 뛰어갔다. 베르닌도 뒤를 따랐다. 문은 잠겨 있었다. 드미트리가 손잡이를 거세게 비틀며 문을 밀었다. 삐걱거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베르닌은 뒤로 물러났다가 전속력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문에 부딪쳤다. 어깨가 부서지는 것처럼 아팠지만 그 여파로 문이 쾅 소리와 함께 열렸고 그는 가속을 이기지 못해 쿠당탕 나뒹굴었다. 드미트리가 재빨리 그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리고는 차에서 챙겨온 플래시를 켜서 안쪽을 한 바퀴 비추면서 낮게 외쳤다.

 

 

“ 스위치 찾아서 불 켜! ”

 

 

이미 베르닌은 문 안쪽 벽을 훑으며 스위치를 찾고 있었다. 돌출된 스위치가 손바닥에 닿았다. 밀어 올리자 환하게 불이 들어왔고 순간 베르닌은 눈이 부셔서 뒷걸음질쳤다.

 

 

별장은 텅 비어 있었다. 샅샅이 뒤졌지만 식당과 거실, 침실 두 개 모두.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베르닌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여기 있어야 해... 분명히 레베진스키가... 그 인간이 레코드 목록을 적고 수요일까지 휴가를 내고... 미셴카의 방을 뒤졌어. 인형을 가져갔단 말이야... 아... 미셴카... ”

 

 

너무나 실망하고 괴로운 나머지 베르닌은 울부짖기 직전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어느 새 별장 밖으로 나가서 창고와 사우나까지 살펴보고 온 드미트리가 다가와 그를 달랬다.

 

 

“ 진정해, 다냐. ”

 

“ 미셴카, 엉엉... 벌써 밤인데... 아플 거야. 약 먹고 아프고... 먹지도 못하고 무서워하고 있을 거라고! 그 자식은 우리 집 아니면 잠도 못 자는데... 우리가 이렇게 허탕치고 있는 동안에도 걔는... ”

 

 

베르닌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전부 자기 잘못인 것 같았다.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치다가 문득 모스크바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 나 모스크바 갈 거야. 크레믈린... 거기 갈 거야. 스비제르스키한테 다 얘기할 거야. 그러면 그 사람이 해결해 줄 거야...그 사람이 미셴카는 자기 거라고 했으니까 분명히 찾아줄 거야. 구해줄 거라고! ”

 

“ 정신 좀 차려, 다닐! 네가 무슨 힘으로 그 높은 사람을 만나니. 연락처도 없으면서. 있어도 그 사람이 우리 같은 조무래기를 만나줄 것 같니? ”

 

“ 아니야! 만나줄 거야! 미셴카 얘길 하면 만나줄 거야! ”

 

이 멍청아, 그리고 나면! 그자가 힘을 써서 어찌어찌 미하일을 찾아준다 해도 그 다음은 어쩔 건데! 걔가 납치되도록 놔둔 너랑 나는 즉각 모가지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릴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리고 걜 찾아낸다 해도 일을 그렇게 공개적으로 벌려놓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건데? 제아무리 날고 기는 스비제르스키라 해도 미하일을 복권시키고 여기서 빼낼 수는 없어. 파리에서 왜 걜 잡아넣고 재판에 회부했는데, 그 사람이랑 벨스키 같은 걔 후원자들 옭아매려고 그런 거잖아. 다 정치꾼들 싸움이었다고. 그래서 스비제르스키도 걔가 유죄판결 받게 그냥 놔뒀단 말이야. 빼내서 여기로 보낸 것도 수 엄청 쓴 거야. 그러니까 무작정 그 사람 손을 빌려서 미하일을 찾아낸다 해도 그 사실을 스페호프가 알게 되면 더 꼭지가 돌아서 진짜로 걔한테 해코지를 할 수도 있단 말이야. 그냥 수요일 공연 못 올라가게 하고 애 잠깐 잡아놓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질 수도 있단 말이야. 넌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높으신 양반들이 할 일이 없어서 무용수 하나를 붙잡아다 고문하고 유배를 보냈겠니? 그렇게도 유명한 애를, 체포한 순간 국제적인 이목이 쏠릴 게 뻔한 애를? 다 자기들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야. 지금도 그럴 거고. 반년도 넘게 걜 감시하고 돌봤다면서 정말 아무 것도 몰랐구나... ”

 

 

베르닌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등을 돌렸다. 어렴풋이 그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 바보 멍충이... 그래놓고 파리에서 친구들 만나러 놀러갔다가 잡힌 거라고 하고... 진짜 지지리도 운 없는 자식... 왜 그런 인간들하고 얽혀서... 뭐가 우주 최강 꽃미남에 천재라서 좋다는 거야... 하나도 안 좋은 거잖아... 천재에 예뻐서 좋았던 거 하나도 없잖아. 이놈저놈들한테 이용만 당하고 나쁜 짓만 당하고... 바보... ’

 

 

드미트리는 그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훨씬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 미안해, 다닐. 네 마음 이해해. 넌 미하일이랑 그렇게 가까운데 당연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겠지. 우리 일단 내일까지 찾아보자. 범인이 그랬잖아, 공연 취소하면 수요일 지나고 미하일을 돌려보내 주겠다고. 스페호프가 배후에 있으니 해치지는 않을 거야. 안 그래도 공연 취소됐다고 하면 스비제르스키부터 벨스키까지 전부 의심스럽게 이쪽을 주시할 텐데 언제까지 미하일을 숨겨놓을 수도 없을 거고 아프다고 속일 수도 없을 테니까. 내일 밤까지 걜 못 찾으면 네가 국장한테 정식 보고서를 올려. 미하일이 없어졌다고. 그러면 스페호프가 걔가 입원해서 공연 취소됐다는 전문을 보내겠지. ”

 

“ 찾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찾을 거야. ”

 

“ 그래, 사무실로 가보자. 그 안전가옥 명단이랑 열쇠. 그거 찾으러 가자. ”

 

 

 

 

 

*    *    *

 

 

 

 

 

시내로 돌아오는 데는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신시가지로 진입하는 다리 쪽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이미 밤 9시가 넘어 있었기 때문에 스페호프는 퇴근하고 없었다. 수위가 있긴 했지만 베르닌이 원체 주말 출근을 밥 먹듯 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며 ‘또 일하러 나왔어?’ 하고 물었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드미트리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다. 서랍장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냈고 장부를 대조해 총무부서의 자산관리 서류가 들어 있는 캐비닛 열쇠를 찾아냈다. 총괄서무라는 사실이 이토록 기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캐비닛에는 안전가옥 열쇠가 없었다. 주소가 적힌 장부 뿐이었다. 아무래도 열쇠를 비밀 창고에 옮겨둔 것 같았다. 그래도 주소라도 있는 게 어디냐 싶어서 급하게 수첩에 안전가옥 주소들을 베껴 적었다. 혹시라도 현장요원들 중 작전에 투입된 사람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최근 현장요원 활동 명령서와 업무추진비 청구 내역을 뒤졌다. 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아내지 못했다. 하긴 스페호프는 그를 모스크바로 보냈을 때도 서류에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으니 왕재수 납치라는 작전을 문서화했을 리가 만무했다.

 

 

혹시나 해서 그는 물품 청구 내역서와 전표들도 뒤졌다. 그러다가 하얀 카드와 붉은 색지 구입 영수증을 찾아내고 환호했지만 다시 잘 보니 구입 일자가 작년 12월이었다. 신년 축하용으로 유관기관 관계자들에게 발송하기 위해 총무부서에서 100개들이 세트를 구입했던 것이었다. 실망하는 그와는 달리 드미트리는 희망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 100개를 다 보내지는 않았을 거잖아. 남은 카드와 색지를 범인이 쓴 거라면 물품 청구서를 적었을지도 몰라. 그러면 누가 연루되어 있는지 알 수도 있잖아. ”

 

“ 그게... 우리는 물품 청구서를 서무가 한꺼번에 적어. 문구용품 캐비닛은 총무부서에 있는데 원래 그 열쇠랑 장부를 잘 관리해야 하지만 총무부 담당자가 원체 고참에 철밥통이라 맨날 문을 다 열어놓고 다녀. 그래서 물건 떨어지면 저마다 거기 가서 한 움큼씩 집어오고... 그러다 국장이 점검하는 날이면 그 담당자가 부서별 서무들을 들들 볶아서 비어 있는 물건들을 할당하면서 물품 청구서를 다 적어내라고 난리야. 그러니까 카드랑 색지는 누구라도 가져갈 수 있어. 그 물건들 청구서 아마 나도 적은 적 있을 거야. 나는 막내 서무니까 제일 많이 할당받거든. 이거 봐, 이 캐비닛이야. 지금도 문 열려 있잖아. 여기 카드랑 색지도 많이 남아 있네. 같은 종류야. 찾아보면 내 캐비닛에도 몇 장 있을 걸. ”

 

그렇구나. 어쨌든 범인 중에 내부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건 더 명확해진 거네. 일단 안전가옥 리스트를 확보했으니 나가자. 오래 있다 의심 살라. ”

 

“ 나 원래 주말에 자주 나와서 늦게까지 일해. 요즘은 서무 업무도 엄청 밀려 있으니까 괜찮아. ”

 

“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으니까. 참, 무전기 있으면 챙겨가자. 아까도 네가 늦으니까 걱정되더라고. 무전기가 있으면 연락이 되니까 안전가옥 수색도 나눠서 할 수 있을 거야. ”

 

 

좋은 생각이었다. 무전기는 현장요원용 비품이었지만 다행히 특별관리 물품으로 분류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베르닌에게도 캐비닛 열쇠가 있었다. 무전기 두 개를 꺼내서 하나씩 나눠가졌다.

 

안전가옥은 모두 여섯 채였다. 하나는 구시가지에 있었고 둘은 신시가지, 나머지 셋은 시 외곽지대에 있었다. 베르닌은 당장이라도 여섯 채를 모두 돌아보고 싶었지만 신중한 드미트리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어두워졌어. 이 외곽지대는 전부 강변하고 숲에 있는 거 아니야? 아까 별장에서도 어두워서 움직이기가 힘들었어. 어둠 속에서 자칫 잘못하면 우리뿐 아니라 미하일도 위험해질 수 있어. 우리는 지원군이 없잖아. ”

 

“ 하지만... ”

 

“ 일단 오늘은 시내에 있는 곳 한두 군데만 가보는 게 좋겠어. 금방 자정이 될 거야. 아무래도 너희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짧은 시간 동안 미하일을 옮길 수 있고 또 회사하고도 가까우니까 지령받기도 쉬울 거고. ”

 

 

베르닌은 속이 바짝바짝 탔지만 드미트리의 말이 옳았다. 그는 책상물림이라 격투나 작전 수행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어둠 속이라면 더욱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미 밤 10시 반이었다. 그는 주소를 면밀하게 살폈고 집과 사무실에서 제일 가까운 마슬로프 거리의 안전가옥을 골라냈다. 제조공장들 뒤에 있어서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그들의 집에서 도보로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차로는 몇 분 만에 갈 수 있었다.

 

 

차를 세운 후 베르닌은 드미트리와 함께 그 집으로 올라갔다. 그곳 역시 불이 꺼져 있었다. 수위는커녕 다른 층에도 주거민이 없었다. 애초에 건설 노동자용 임시 숙소로 지었다가 몇 달 내에 철거를 앞두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지만 아주 뻑뻑했다. 드미트리가 고개를 저었다.

 

 

“ 여긴 아닌가봐. 한참 안 열어봤나본데... ”

 

 

드미트리의 우울한 예상이 맞았다. 집은 텅 비어 있었고 먼지가 풀풀 날렸다. 바퀴벌레가 득실거렸다. 전구들도 반은 깨져 있었다. 완전히 헛수고였다. 베르닌은 심호흡을 했고 어떻게든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했다.

 

 

“ 딤카, 우리 오늘 한군데만 더 가보자. ”

 

“ 그래, 아직 열두 시 안됐으니까. 신시가지에 하나 더 있지 않았니? ”

 

“ 아니, 안전가옥 말고. 오후에 내가 레베진스키 집에 갔었잖아. 근데 창밖에서 보기만 하고 들어가진 못했어. 근데 아무래도 그자가 걸려. 수요일까지 휴가 낸 것도 그렇고, 레코드 목록에, 사진 찍고 미샤의 사무실 뒤진 것들 하며, 그전에도 사과에 독도 발랐고 나한테 사무실 들어오라면서 국장의 접선책 노릇도 했었어. 그 집에 다시 가봤으면 좋겠어. ”

 

드미트리도 동의했다. 그래서 베르닌은 다시 구시가지로 차를 몰았다. 레베진스키의 집은 별장과 마찬가지로 캄캄했다. 불빛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레베진스키가 스페호프와 결탁한 상황이니 무작정 침입했다가 일이 꼬이면 더 문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둘은 창문으로 들어가는 대신 현관으로 갔다. 여차하면 국장의 지령을 받아서 온 것처럼 꾸밀 생각이었다. 초인종을 울려도 답이 없었다. 별장과는 달리 문이 아주 튼튼해서 체중으로 부딪쳐도 열기 힘들 것 같았다. 드미트리가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 분명히 챙겼는데. 아, 여기 있다. ”

 

 

작은 옷핀이었다. 드미트리는 핀을 반대로 구부려 일자로 편 후 그것을 열쇠 구멍에 쑤셔 넣었다.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계속 돌렸다. 잘 되지 않는 모양인지 한참 끙끙대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순간 숨을 멈췄다. 그리고는 왼쪽으로 두 번, 철컥, 찰카닥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레베진스키의 집은 상당히 넓었다. 복층에 방도 여러 개였고 거실도 아주 넓었다. 화장실도 두 개나 있었다. 이런 집들은 대부분 공동아파트로 분할됐을 텐데 역시 정치적으로 발 빠른 부모 덕에 호화롭고 넓은 집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잘 먹고 잘 살면서 왜 그렇게까지 감독 자리에 연연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레베진스키의 집도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침대 시트는 구겨져 있었고 부엌 싱크대에도 설거지거리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니 오전까지는 집에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베르닌은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왕재수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서 냄새까지 열심히 맡아 보았다. 왕재수의 향수 흔적이 남아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짙은 머스크 향이 가미된 파우더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호화롭고 부르주아 냄새가 났고 동시에 속물적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왕재수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힘이 쭉 빠진 채 배나무 거리로 돌아왔다.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요원 숙소로 돌아가는 대신 베르닌의 집에서 자기로 했다. 베르닌은 드미트리에게 자기 속옷과 잠옷을 한 벌씩 주었다. 정말로 쌍둥이 형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훨씬 좋을 거라고도.

 

 

둘은 간단하게 인스턴트 보르쉬를 데워먹은 후 물을 한 잔씩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베르닌은 왕재수 걱정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너무 피곤했는지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비둘기 시체와 머리 없는 도자기 인형, 빨간 스카프로 꽁꽁 묶여서 끌려가며 울부짖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왕재수를 보았고 아무리 손을 뻗어도 움직일 수가 없어 너무나도 괴로워하며 흐느껴 울었다.

 

 

 

 

*    *    *

 

 

 

 

베르닌은 8시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집안이 어두컴컴해서 처음에는 새벽인 줄 알았다. 창문으로 달려가 보니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르릉거리더니 번개가 번쩍거리고 천둥이 콰쾅 쳤다. 심장에 돌덩이가 달린 듯 무겁고 답답해졌다.

 

 

‘ 그 자식 비오는 거 싫어하는데. 애기 같은 녀석이니까 천둥 치면 무서워할지도 몰라. 안 그래도 잡혀가서 무서울 텐데...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 있는 걸까? ’

 

 

거실로 나가니 소파에서 잤던 드미트리도 막 부스스 일어난 참이었다. 그들은 집안을 샅샅이 살피고 왕재수의 집에도 올라가봤지만 새로 온 편지나 물건은 없었다. 둘은 급하게 씻은 후 잼을 대충 바른 빵과 커피로 3분 만에 아침을 먹었다. 남아 있는 다섯 개의 안전가옥을 위치에 따라 분류했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는 가까우니 괜찮았지만 문제는 외곽에 있는 세 군데였다. 하나는 공항 근처에 있었고 하나는 온천 요양소보다도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가까운 것이 수도원과 옛 교회 근방이었다. 게다가 숲 쪽으로 가는 길은 꽤 험했기 때문에 이렇게 비까지 많이 오는 날씨에는 함께 다섯 군데를 돌면 하루가 모자랄 게 분명했다.

 

 

“ 일단 시내에 있는 두 군데부터 같이 가보자. 운 나쁘게 둘 다 비어 있으면 나머지는 찢어지는 거야. ”

 

 

베르닌은 혼자서 수색하는 것이 불안했지만 일단 그러기로 했다. 아무래도 시내에 있을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스페호프는 왕재수와 관련된 일에 예산과 인력을 많이 투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외곽으로 나갈수록 비용 소모가 더 커지기 마련이니까.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베르닌은 일단 류드밀라에게 전화부터 했다. 왕재수가 몸이 안 좋아서 오늘 못 나가니까 무용수들은 따로 연습해야 할 거라고 말해주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베르닌은 류드밀라가 코즐로프에게 얘기할 거라는 생각에 더욱 근심이 되었다.

 

 

‘ 로만이 달려오기 전에 그 녀석을 꼭 찾아야 되는데... ’

 

 

그들은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뚫고 신시가지의 레스나야 거리 쪽에 있는 안전가옥에 가보았다. 간신히 잠긴 문을 뜯고 들어갔지만 역시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구시가지 시장 근처에 있는 두 번째 안전가옥으로 갔다. 창문 너머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둘은 흥분했다. 특히 베르닌은 왕재수를 구해낼 생각에 이성을 잃을 뻔했다. 심지어 문도 잠겨 있지 않았다. 드미트리가 손으로 밀자 현관문이 스르르 열렸다.

 

 

미하일! 미하일!

 

 

베르닌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뛰어 들어갔다. 고양이 한 마리가 후다닥 도망쳤다. 침실 안쪽에서 기척이 났다. 베르닌은 드미트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냅다 침실로 뛰어들었고 순간 뻣뻣하게 굳어졌다. 한참 뜨거운 사랑을 불태우고 있던 젊은 남녀가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를 응시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여자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꺅꺅 질러댔다.

 

 

“ 어, 어... 미안합니다. 저... 착각을... ”

 

으아악! 이 변태! 썩 나가지 못해!

 

 

베르닌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뛰쳐나왔다. 그 와중에도 화장실과 부엌까지 살펴본 드미트리가 혀를 찼다.

 

 

“ 없어. 여기도 아냐. 젠장. 저것들 가택 침입죄로 확 체포해버려야 되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문 따고 들어와서 놀아나고... KGB 안전가옥인데 관리 진짜 허술하네. ”

 

 

둘은 일단 시장 쪽으로 나와서 제일 처음 보이는 허름한 카페에 들어갔다. 비 때문에 너무 추웠다. 다시 겨울로 돌아간 것 같았다. 춥고 어지럽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뜨거운 차와 향신료를 넣은 양고기와 감자전을 시켜서 정신없이 먹었다. 먹고 나니 두통도 가시고 눈앞도 맑아졌다. 이 와중에도 먹어야 정신을 차릴 수 있다는 것이 서글프고 속상했다.

 

 

먹고 나서 베르닌은 지도를 펼쳤다. 수도원은 근처에 있었다. 온천 요양소는 한참 더 가야 했지만 어쨌든 숲 지대에 있었고 비슷한 방향이었다. 공항이 반대 방향이었다.

 

 

“ 내가 수도원이랑 온천 쪽을 갈 테니까 네가 공항 쪽으로 가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검은 숲 쪽은 내가 지리를 더 잘 아니까. ”

 

“ 응. 그런데 너 혼자서 괜찮을지 모르겠다... 비까지 오는데... 이렇게 하자. 아까처럼 무작정 뛰어들면 안 돼. 일단 안에 미하일이 있는지 살핀 후에 중간에 만나자. 여기서 공항까지는 너무 머니까 무전기가 안 될 거야. 지금이 12시 반이잖아. 음,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계산하면... 그래. 3시부터 1시간마다 무전을 치자. 구시가지에서 검은 숲까지는 그래도 무전이 될지도 모르니까 내가 공항에 갔다가 이쪽으로 돌아올게. 연결이 안 되면 아직까지 내가 여기 못 온 걸로 생각하면 되니까.

 

“ 그래. 근데 넌 공항까지 어떻게 가지... 차가 없잖아. ”

 

“ 극장 앞에 직행 버스 서지 않아? 나 여기 올 때 공항에서 그거 타고 왔어. 시내에서는 신시가지하고 구시가지 딱 한 군데씩만 정차하던데. 쭉 오니까 신시가지까지는 한 시간 만에 오더라. ”

 

“ 아, 맞아. 그거 공항 근처에서는 네 군데쯤 설 거야. 잠깐만... ”

 

 

베르닌은 지도를 다시 살폈고 안전가옥과 가장 가까운 정류장 이름을 적어주었다. 하지만 걱정이 앞섰다.

 

 

“ 비 많이 오는데... 그냥 같이 갈까? ”

 

“ 아니야, 내 걱정은 하지 마. 너도 두 군데 가려면 시간 없잖아. 비 와서 오늘은 진짜 금방 캄캄해질 거야. 그리고 저녁 되기 전까지 미하일을 찾아야 극장에도 소문이 크게 안 나지... ”

 

 

그래서 그들은 헤어졌다. 베르닌은 급하게 세 번째 안전가옥으로 차를 몰았다. 수도원을 지나치자 독사과를 먹고 쓰러졌던 왕재수를 위해 약초를 캐러 갔던 때가 생각났다. 자기도 모르게 성호를 그으면서 기도를 했다.

 

 

“ 하느님, 그때처럼 이번에도 도와주세요. 걔 성깔만 그렇지 진짜 착한 애예요. 꼭 찾을 수 있게 해주세요.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주세요. ”

 

 

세 번째 안전가옥은 낡은 별장이었다. 울타리가 허물어져 가는데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것을 보니 흐루쇼프 시절 이후 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 같았지만 일단은 가보았다.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그나마도 나무로 되어 있었고 삭아서 몇 번 세게 비틀자 문이 그냥 열렸다. 여기는 심지어 쥐까지 돌아다녔다. 거미줄이 빽빽하게 쳐져 있었다. 실망한 와중에도 왕재수가 여기 갇히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곧장 나와서 네 번째 안전가옥으로 향했다. 꽤 먼 곳이었다. 게다가 비가 갈수록 더 많이 와서 속력을 줄여야 했다. 온천 요양소를 지나자 숲이 더욱 울창해졌고 쓰러진 나무도 있어서 운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점점 남은 집이 줄어들자 초조해지면서 남은 두 채에도 왕재수가 없으면 어쩌지 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혹시 우리가 완전히 잘못 짚고 있는 건 아닐까? 안전가옥에 애를 가두려면 현장요원이 연루돼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국장이 투입할만한 사람은 필로모프랑 글리셰프 뿐인데. 글리셰프는 몸이 옛날 같지 않아서 올해 은퇴한다고 했는데... 그럼 필로모프인가... 걘 머리가 나빠서 그런 카드들이랑 인형 보낼 스타일이 아닌데. ’

 

 

네 번째 안전가옥은 통나무집이었다. 벌목공 숙소로 위장되어 있었다. 실지로 늦봄과 여름에는 벌목공들이 이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나마 이곳은 삼림국과의 공조를 통해 운영하는 곳이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입구의 잡초도 최근 베어낸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는 통나무집 측면으로 돌아갔다.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불빛은 새어나오지 않았다. 비 때문에 어두컴컴했지만 어쨌든 낮이니까 불을 꺼놨을 수도 있었다. 전날 밤 드미트리에게 배운 대로 돌멩이를 주워서 창문에 집어던졌다. 딱 소리와 함께 유리에 금이 갔다.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창문을 바깥에서 비틀어 열었다. 삐걱거리더니 반쯤 열렸다.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두컴컴해서 안쪽 깊은 곳은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가서 문을 밀었다. 그대로 열렸다. 관리 수준이 정말 엉망이라고 생각하며 베르닌은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가본 안전가옥 중 제일 깨끗했고 냄새도 별로 나지 않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페치카 난로에 완전히 마른 검은 재가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공항 부근의 안전가옥 뿐이었다.

 

 

베르닌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띵했고 목구멍에서 열기가 치솟았다. 너무나 무력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이제껏 왕재수가 스페호프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 그는 아무 것도 해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스페호프 뿐만이 아니었다. 오른쪽과 왼쪽 눈 색깔이 다른 남자, 벨벳처럼 부드럽고 섬뜩할 정도로 낮게 말하는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도 마찬가지였다. 스네고로드의 아르투르와 청년단원들이 그 애를 둘러싸고 폭언을 퍼부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과 국가와 ‘우리’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그 모든 폭력과 협박과 압력 앞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왕재수를 구해준 적이 없었다. 아마 그 누구도 그래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거기 저항하는 것은 더더욱. 그런데 왜 그 바보, 얼간이, 천치 같은 꼬마는 끊임없이 화를 내고 성깔을 부리며 대들 수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자기 무덤을 파면서도 계속해서 반항하는지, 그럴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 바보... 바퀴벌레만 봐도 울고불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녀석이... 뱀 껍질은 무섭고 총은 안 무서운 거야? 진짜 멍충이... ’

 

 

몇 분 동안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다가 베르닌은 시계를 보았다. 2시 30분이었다. 드미트리도 아마 마지막 안전가옥에 도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안전가옥에 왕재수가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    *    *

 

 

 

 

 

3시에 그는 무전기를 켜보았다. 하지만 잡음만 지직거렸을 뿐 드미트리의 신호를 잡아낼 수는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아직도 검은 숲을 빠져나오지 못했고 드미트리는 도시의 반대편 끝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뒤라면 그도 신시가지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무전이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닌은 아무리 생각해도 레베진스키에게서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안전가옥이 아니라 레베진스키의 뒤를 쫓아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집과 별장을 뒤졌고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 문제는 집이 아니고 레베진스키 자체야. ’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미 줄줄 외고 있는 협박카드의 문구들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풀이했다. 마지막 편지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호위 기사들에게 고함

입 다물고 있으면 왕자님은 무사할 거야.

모스크바에는 아프다고 통보해. 물론 공연은 취소야.

수요일이 지나면 곱게 돌려보내주지. 

추신. ‘곱게’는 물론 조건부야

 

 

아니, 내용보다도 그 필체가 계속해서 아른거렸다.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왼손으로 흘려 썼지만 지독한 악필도 아니었고 단어 하나하나도 명료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야무진 성격이 분명했다. 어디서 봤는지도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집도 사무실도 아니었다.

 

 

‘ 극장이야. 분명히 극장에서 봤어. ’

 

 

 

빗줄기는 좀처럼 가늘어지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은 진흙탕이 되어 있었다. 두 번이나 타이어가 파묻혀서 고생을 했다. 차가 엄청나게 덜컹거렸다. 왕재수가 옆에 있었다면 역시 시골이라느니, 고물차라느니, 운전이 험해서 허벅지 근육이 미워진다느니 하고 별의별 잔소리를 다 늘어놨을 게 뻔했다. 하지만 베르닌은 지금 그 잔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간신히 검은 숲을 빠져나와 다리를 건넜을 때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구시가지에 진입한 것이다. 아직 3시 반이었지만 혹시나 해서 무전기를 다시 켜보았다. 아무런 답이 없었다. 무전 연결이 안 되면 베르닌의 집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레닌 대로를 타면 신시가지로 갈 수 있었고 쵸르나야 거리로 빠지면 극장이었다. 그는 쵸르나야 거리 쪽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극장 앞에 차를 세우기는 했지만 막상 들어가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그를 보면 무용수들이 모여들어 우리 감독님이 많이 아픈 거냐, 수요일 공연 올리는 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냐, 혹시 또 누가 감독님에게 이상한 것이라도 먹인 거냐 운운 난리를 칠 게 뻔했다. 독사과 사건도 류드밀라와 코즐로프는 입을 다물었지만 왕재수가 그때 워낙 아팠기 때문인지 무용수들 사이에는 ‘KGB와 당에서 감독님을 독살하려고 했다더라’ 하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시계탑 화재도 수상하다는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무용수들은 그렇다 치고 코즐로프가 ‘우리 아기 어디가 아픈 거냐!’ 하고 그의 멱살을 잡으며 다그치는 것만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빗속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그는 현관의 수위에게 갔다. 다시 직원 주소록을 요구했다. 수위는 투덜댔다.

 

 

이럴 거면 어제 한꺼번에 볼 것이지. 매일 와서 주소록을 보자고 하니... ”

 

 

베르닌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필요한 주소를 옮겨 적었다. 그리고는 수위에게 물었다.

 

 

“ 사무국장 말인데요, 잔나 르이조바. 오늘 출근했나요? ”

 

“ 안 했어요! 휴가라고요. 화요일에 나올 겁니다. ”

 

 

그는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잔나 르이조바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신호만 울릴 뿐 아무도 받지 않았다. 감독실로 전화를 하자 류드밀라가 받았다.

 

“ 아이고, 다냐. 무용수 애들이 난리예요, 감독님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거냐고. 평소엔 아파도 안 아픈 척하고 웬만하면 늦게까지 남아 있는데 얼마나 아프면 못 나온 거냐고, 자기들이 지금 병원으로 가보겠다고 아우성이에요. 데니스가 애들 말리고는 있는데... 우리 미셴카 많이 아픈 거예요? 레프 사벨리예비치 병원에 있는 거예요? ”

 

“ 어, 아,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너무 과로해서 몸살 난 거예요. 무용수들한테 걱정하지 말고 연습하라 하세요. 어, 저... 미샤가 애들 오늘 제대로 연습 안하면 내일 가서 엄청 들들 볶을 거라고 했다고 전해주세요. 그, 근데 오케스트라도 나왔나요? ”

 

“ 아뇨. 오케스트라는 저녁에 나와요. ”

 

“ 지휘자랑 로만도요? ”

 

“ 네. 로만은 녹음 기술자랑 미팅 때문에 드라마 극장에 가 있어요. 그쪽 장비를 몇 개 빌리기로 했대요. ”

 

“ 저기, 사무국장 말인데요. ”

 

“ 잔나요? 왜요? ”

 

“ 그 사람도 휴가라면서요. 혹시 어디 간다는 얘긴 안 했나요? ”

 

“ 글쎄요, 그런 얘긴 없었는데. 콜랴가 휴가 냈으니까 둘이 별장에라도 갔겠죠. 아니면 바람 쐬러 나갔거나. ”

 

 

베르닌은 쏟아지는 비를 뚫고 포나르나야 거리에 있는 르이조바의 집을 찾아갔다. 막 아파트 근처에 차를 대고 있는데 찍찍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전기 너머로 드미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냐. 들려? ”

 

“ 아, 딤카! 응, 들려. 어떻게 됐어? ”

 

“ 그렇게 묻는 걸 보니 그쪽도 비어 있었던 모양이구나. ”

 

“ 그럼 너도? ”

 

“ 응. 그 집은 심지어 문짝도 다 떨어지고 창문도 깨져 있더라. 나 지금 버스에서 막 내렸어. 볼쇼이 대로 정류장. 너도 신시가지 들어온 거지? ”

 

“ 어, 아냐. 난 포나르나야 거리에 있어. 거기서 강만 건너면 금방이야. 구시가지행 21번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후에 내려서 10번지로 와. ”

 

“ 그게 어디야? ”

 

“ 잔나 르이조바라고, 극장 사무국장 집이야. 레베진스키와 친밀해. ”

 

“ 알았어. 저기 21번 온다. 끊자. ”

 

 

드미트리는 10분 만에 도착했다. 우산이 별 소용없었는지 전신이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같이 다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면서 미안해졌다. 베르닌은 안전가옥에 대한 추리가 빗나갔으니 이제 레베진스키를 추적하는 방법뿐이라고 말했고 드미트리도 동의했다.

 

 

“ 302호면 3층이겠네. 전화는 해봤니? ”

 

“ 응. 안 받더라고. ”

 

“ 흠...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은 못 들어가겠는데... ”

 

 

그때 아파트 현관에서 어떤 여자가 양 손에 보따리를 들고 나왔다. 동글동글한 체구에 눈이 반짝거리고 코를 찡긋거리는 것이 아주 호기심 많고 수다스러워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드미트리는 넉살좋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좀 들어드릴까요? ”

 

“ 아유, 그래주면 고맙지. 비까지 오는데. 조금만 가면 돼. 요 앞 여성회관에 감자랑 양파 갖다 놓으려고. 근데 젊은이는 처음 보네. 우리 아파트 사는 거 아니지? ”

 

“ 네. 사촌 누님을 만나러 왔는데 없는 것 같아서요. 아, 같은 건물에 사시니까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잔나 르이조바라고요, 저기 극장에서 일하는데요. ”

 

“ 아이고, 잔나한테 이렇게 번듯한 사촌이 있었다니! 그런데 어쩌나, 잔나는 아침에 남자친구랑 나갔는데. 내일 아침에나 돌아올 거야. ”

 

“ 아... 전화를 하고 오는 건데, 누님 놀래켜 드리려고 그냥 왔더니만... 그런데 남자친구라니요? 혹시 빨간 머리에 수염을 기른 뚱뚱한 남자인가요? ”

 

“ 에구, 무슨 소리야. 잔나가 얼마나 눈이 높은데. 자네 콜랴 본 적 없나? 벌써 몇 년째 둘이 사귀고 있는데 그러나. 금발에 코도 우뚝하고 옷도 잘 차려입고 그야말로 번듯하지. 근데 빨간 머리 뚱보는 또 누군가? 잔나가 콜랴 몰래 양다리라도 걸치나? ”

 

“ 아니에요. 예전에 누님을 쫓아다니던 남자인데 누님이 싫다고 했어요. 하도 오랜만에 와서... 그러면 콜랴와 같이 나가신 건가요? ”

 

“ 응, 아침에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더라고. 콜랴가 에스코트도 해주고. 둘이 엄청 기분 좋아 보였지. ”

 

근데 혹시 다른 사람은 안 왔나요? 그러니까, 검은 머리에 눈도 까맣고 굉장히 잘생긴 친군데요. 피부가 도자기 인형처럼 하얘요. 키는 이 정도. ”

 

“ 글쎄, 그런 사람은 못 봤는데... 아, 혹시 잔나네 극장에 새로 온 감독인지 뭔지 하는 젊은 애 말인가? 본 적은 없는데 잔나가 말해준 인상착의랑 비슷하네. 걔가 그렇게 반동분자에 콜랴를 중상모략해서 앞길을 막는다고 잔나가 화내던데. 자꾸 일을 벌이면서 극장 직원들을 들들 볶아서 힘들어 죽겠다면서. ”

 

“ 그러게요. 그 친구가 근데 어젠가 오늘 잔나에게 들를 것 같다는 얘길 들어서요. ”

 

“ 설마. 엄청 미남이라던데. 그런 애가 왔으면 눈에 안 띄었겠나. 여기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여자들이 많아서 잘생긴 남자가 하나라도 나타나면 다들 벌떼처럼 모이는걸. ”

 

“ 파티 끝나서 술에 절어서 왔으면 업혀왔겠죠 뭐. 요즘 애들 다 그렇잖아요. 그래도 감독이면 자기 윗사람이니까 잔나가 차로 데려다줬을 수도 있겠네요. ”

 

“ 그런가... 근데 잔나는 어제 안 들어왔어. 오늘 아침에 잠깐 들러서 옷만 갈아입고 나갔어. 내가 옆집이잖아. 잔나가 건망증 때문에 열쇠를 몇 번이나 잃어버렸거든. 그래서 요즘은 열쇠를 꼭 나한테 맡기고 가니까 다 알지. 차에도 콜랴 밖에 없는 것 같던데. ”

 

“ 그렇군요. 제가 잘못 알았나보네요. 아, 여기가 여성회관이군요. 보따리 이쪽에 놔드릴까요? ”

 

“ 그래그래. 고마워, 젊은이. 잔나를 못 보고 가서 어쩌누. ”

 

“ 괜찮아요. 다음 주에 또 올 테니까 그때 보죠 뭐. 누님한테 전해드릴 게 있었는데 그게 좀 아쉽네요. ”

 

“ 나 주고 가. 전해줄 테니까. ”

 

“ 그게 많이 무거워서요. 차에 놔뒀는데... 아주머님께 그런 폐를 끼칠 수야 없죠. ”

 

“ 그러면 내가 열쇠를 줄 테니 올려놓고 가지 그러나. 물건 올려놓고 우리 집 편지함에 열쇠 넣어두고 가면 되지. 난 301호니까. ”

 

 

뒤를 따라가며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던 베르닌은 드미트리의 수완에 감탄했다. 역시 엘리트 요원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미트리의 노력도 헛수고였다. 그들은 302호로 곧장 올라가서 드미트리가 얻어낸 열쇠로 문을 열었지만 르이조바의 집 역시 텅 비어 있었다. 혹시나 잠깐이라도 왕재수를 가둬놓지 않았을까 싶어 구석구석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왕재수는 연기처럼 사라졌고 레베진스키와 르이조바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닌은 너무나 절망해서 스페호프에게 뭐라고 보고를 해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기회에 공연을 당장 취소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선수를 치면 스페호프가 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왕재수가 있는 곳을 알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드미트리는 그게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동의하면서도 아직 저녁이 되지 않았으니 집에 가서 젖은 옷을 갈아입고 조금만 더 고민을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집으로 향했다.

 

 

 

 

*    *    *

 

 

 

 

 

젖은 머리가 헝클어져서 가르마가 불분명해지자 드미트리는 더욱 그와 쌍둥이처럼 보였다. 문득 베르닌은 왕재수가 가르마와 새치, 콧방울, 눈매와 걸음걸이 따위를 거론하던 게 생각났고 가슴이 찌릿했다.

 

 

‘ 내가 봐도 헷갈리는데 걘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봤을까. 바보... 그러면 뭐해, 쓸데없는 데만 똑똑하고. 그래봤자 나쁜 아저씨들한테 괴롭힘만 당하고... 공연 올리겠다고 아등바등 난리치다가 이렇게 잡혀가고. 아, 이 바보 멍충아, 대체 넌 어디 있는 거야... ’

 

 

버스를 타고 공항 부근까지 다녀오느라 고생을 해서 드미트리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젖어 있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온수 스위치를 올렸고 드미트리에게 빨리 씻으라고 했다. 이 와중에 감기까지 걸리면 큰일이었다. 드미트리가 옷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아가일 무늬 셔츠와 바지를 꺼내주었다.

 

 

드미트리가 씻는 동안 베르닌은 답답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집안을 돌아다녔다. 드미트리가 옷을 벗으면서 도로 꺼내놓은 협박카드들을 다시 읽어보았고 마지막 편지도 살펴보았다. 다시 봐도 그 필체는 낯익었다.

 

 

‘ 어디서 봤을까... 극장에서 본 것 같은데... ’

 

 

그는 멍하게 냉장고 쪽으로 갔다. 목이 말라서 맥주라도 한 모금 마시고 싶었지만 문득 범인이 또 다른 음료수에도 약을 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둘 다 비를 맞았으니 차라리 따끈한 차를 마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몸을 돌려 찬장 문을 열었다. 얼마 전에 보랴가 왕재수에게 아침마다 한잔씩 타 마시라고 만들어준 진한 과일청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유리병을 꺼냈는데 뚜껑에 메모가 붙어 있었다.

 

 

찻잔 데우기.

과일청 2큰술 넣기.

펄펄 끓인 물 부어서 젓기.

 

 

이게 뭔가 싶었지만 곧 생각이 났다. 왕재수가 이런 거 타 마시는 방법 모른다고 툴툴거리자 보랴가 ‘먼저 찻잔을 데우란 말이야. 그리고 과일청부터 크게 두 숟가락 넣고! 팔팔 끓인 물 부어서 잘 저어 마시면 돼. 정 모르겠으면 적어!’ 라고 엄하게 말했었다. 왕재수는 짜증을 내면서도 수첩을 찢어서 레시피를 적었고...

 

 

베르닌은 머리가 아찔했다. 네 번째 편지를 가져왔다. 뚜껑의 메모와 대조해보았다. 글씨는 달랐다. 하지만 뭔가가 가슴을 쿡쿡 찔렀다. 기억이 소용돌이쳤다. 극장에서... 그는 연습실에 있었다. 왕재수도 있었고 류드밀라와 레베진스키도 있었다. 그때 왕재수는 반주용 피아노가 조율이 안 맞는다며 화를 내고 있었다. 레베진스키는 왜 아무렇지도 않은 악기 트집을 잡느냐고 했고 류드밀라는 조율기사에게 연락하겠다고 했다. 왕재수는 류드밀라에게 음악은 아무 것도 모르지 않느냐고 짜증을 내더니 수첩에 ‘피아노, ㅇㅇ건반, 플랫, ㅇㅇ음, ㅇㅇ음’ 운운하는 용어들을 마구 써내려간 후 종이를 북 뜯어 그녀에게 쥐어주고는 이대로 읽어주라고 했다. 류드밀라는 왕재수의 음악적 천재성이 아니라 다른 것에 감탄했다.

 

 

“ 어머나, 미셴카! 왼손으로도 글씨 잘 쓰네요! 원래 왼손으로 쓰면 못 알아볼 지경인데 굉장히 또박또박... ”

 

“ 당연하잖아요, 난 천잰데. 균형 감각 키우려고 어릴 때부터 양손을 썼다고요. 그래도 글씨는 오른손으로 많이 써서 역시 왼손으로 쓰면 별로 안 예뻐요. ”

 

 

그때 왕재수는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강가에서 새들에게 먹이를 주다가 벌레에게 물려서 손등이 퉁퉁 부어올랐기 때문이다. 부기는 이틀이 지나서야 빠졌고 왕재수는 그동안 왼손만 쓰면서 시골은 역시 엉망이라고 계속 화를 냈었다.

 

 

피아노, 건반, 플랫. 조율.

 

 

호위 기사들에게 고함

입 다물고 있으면 왕자님은 무사할 거야.

모스크바에는 아프다고 통보해. 물론 공연은 취소야.

수요일이 지나면 곱게 돌려보내주지. 

추신. ‘곱게’는 물론 조건부야.

 

 

 

베르닌의 눈앞에 글씨들이 춤을 췄다가 사라졌다. 똑같았다. 동일인의 필체였다. 그건 왕재수의 글씨였다.

 

 

‘ 이건 걔가 쓴 거야... 하지만 대체 왜! 어떻게! ’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만일 왕재수가 마지막 편지를 썼다면 논리적으로 앞의 세 장도 마찬가지여야 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왕재수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는가. 자기 자신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고 죽은 새와 인형을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그토록 피땀 흘려 준비한 수요일 공연을 중단하다니.

 

 

‘ 인형은 그 녀석 사무실에 있었던 거였어. 오렌지 주스도 그 녀석 냉장고에는 언제나 있었어. 그 녀석처럼 민감한 입맛이라면 우유도 입 대는 순간 저지방 우유가 아니란 걸 알아차렸을 텐데 다 마셨어. 여섯 개의 음악에 대해서라면 자기가 선곡했으니까 물론 다 알고 있겠지. 파랑새, 왕자님, 호위 기사... 발레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보낸 카드. 발레에 대해 그 녀석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은 없어. ' 

 

 

등줄기가 오싹했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걔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말이 안 되잖아. 게다가... 걔가 비둘기를 죽인다고? 벌레만 봐도 무서워서 못 움직이는 애가, 새를 그렇게 좋아하는 애가... 아니야... ’

 

 

베르닌은 하마터면 샤워를 하고 있는 드미트리에게 뛰어 들어갈 뻔 했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었지만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바람이라도 쐴까 하고 창문을 열었지만 비가 너무 심하게 들이쳐서 도로 닫고는 복도로 나갔다. 멍하게 복도를 왕복했다. 점차 이성이 돌아왔다.

 

 

‘ 그래, 마지막 편지를 썼다고 해서 앞의 세 개도 걔가 썼다고 확신할 수는 없어. 미셴카는 우리가 쓰러졌을 때까지는 깨어 있었어. 그 마지막 편지는 범인이 걔를 협박해서 쓰게 만든 거야. 필체를 못 알아보게 하려고 왼손으로 쓰라고 했던 거야. 그럼 미셴카는 수면제를 먹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끌려간 후에 깨어나서 쓴 걸까... 후자라면 범인은 우리가 쓰러졌을 때 다시 왔다는 거고... 그때 우린 세 시간 정도 정신을 잃고 있었지. 미셴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편지를 쓰게 만들었다면, 그리고 그 편지를 들고 범인이 다시 우리 집에 왔다면 미셴카를 숨겨놓은 곳은 그렇게까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야 해. ’

 

 

생각에 잠겨 왔다갔다 하던 베르닌은 어느새 복도 끝 비상계단 앞에 와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왔지 싶어서 집 쪽으로 몸을 돌리다가 베르닌은 멈칫했다. 위쪽 계단 구석에 뭔가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 저게 뭐지? ’

 

 

베르닌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혀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라갔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물체를 급하게 집어든 순간 그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아, 이건! 목걸이! 그 자식 목걸이잖아!

 

 

그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그 목걸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자신이 레닌그라드의 의사 유리 아스케로프로부터 받아온 십자가 목걸이였으니까. 왕재수는 무대에 올라갔을 때와 독사과를 먹고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그 목걸이를 푼 적이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앞뒤로 뒤집어가며 찬찬히 살폈다. 잠금 고리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십자가는 발로 밟힌 듯 귀퉁이에 시커멓게 자국이 나 있었다.

 

 

‘ 미하일이 반항했던 거야. 몸부림치다가 줄이 끊어진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이걸 풀었을 리가 없어.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건데. 하지만 왜 목걸이가 여기 있는 걸까... ’

 

 

해답은 너무나 간단해서 베르닌은 현기증이 났다.

 

 

미셴카는 이 건물 안에 있는 거야! 범인은 멀리 가지 않았어! 그자는 처음부터 여기 숨어 있었어. 그러니까 우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었던 거야. 약을 탄 우유와 주스를 갖다놓고 우리가 미셴카의 집에 없을 때를 노려서 카드와 인형을 놓고 갔어. 우리가 주스를 마시고 정신을 잃었을 타이밍에 들어와 걜 끌고 갔지. 그자가 여기 잠복해 있었다면, 이 건물 안에 은신처가 있었던 거야. 그래! 그자는 미셴카를 거기로 데려간 거야! 엘리베이터는 이용하지 않았어, 주민의 눈에 띌까봐. 그래서 계단으로 간 거야. 위층 주민들은 계단을 이용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목걸이가 여기서 발견된 건, 6층에서 7층으로 가는 계단... 그건 그자의 은신처가 8층 아니면 9층에 있다는 얘기야! 7층에는 그 녀석 집하고 출판문화국장의 집뿐이고... 출판문화국장은 대가족이야. 그 집에는 애를 숨길 수가 없어. 8층과 9층에는 각각 3개의 가구가 있어... 분명히, 분명히 그 중 빈집이 있어. 지난번에 이사나간 집이 있었어. 내가 짐 옮기는 것도 도와줬어. 그러고 나서는 새로 이사 온 집이 없었어. 분명해! ’

 

 

베르닌은 당장 8층으로 달려 올라가려다 멈칫했다. 그는 맨몸이었다. 총도 무전기도 모두 집에 놔둔 채였다. 그리고 왕재수에게는 분명히 범인을 비롯해 감시자가 딸려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는 급하게 복도를 가로질러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막 씻고 나온 드미트리에게 급하게 자신의 추리를 설명했다. 왕재수의 목걸이를 보자 드미트리의 눈빛이 변했다.

 

 

“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다닐. 이런 천치 같으니...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가능성을 생각 못했어! 위층에 빈집이 있어? ”

 

“ 있어. 몇 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번 달에 이사나간 후에 안 들어왔어. 경비실에 가면 알 수 있을 거야! ”

 

“ 예비 열쇠도 얻을 수 있니? ”

 

“ 얻어낼 거야! 공무 수행에 필요하다고 할 거야! ”

 

 

베르닌은 너무나도 마음이 급했다. 경비실에서 열쇠를 얻어내느라 아옹다옹 하는 시간에 범인이 왕재수를 데리고 사라질까봐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드미트리에게 8층에 올라가 있으라고 했다.

 

 

“ 8층하고 9층 사이 계단 있잖아. 거기 잠복해 있어. 두 층을 다 볼 수 있으니까 혹시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무전 쳐. ”

 

 

드미트리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베르닌의 지시에 따랐다. 이 건물을 잘 아는 것은 베르닌이었고 왕재수의 목걸이를 찾아낸 것도, 추리를 해낸 것도 베르닌이니 거기 따르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즉시 권총과 무전기를 챙기더니 소리를 죽여 계단 쪽으로 올라갔다.

 

 

베르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경비실로 갔다. 8층과 9층에 비어 있는 방이 있는지 물었다. 수위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요 며칠 동안 왜 이렇게 그 방을 찾는 사람이 많담. 전화도 몇 번이나 오고. 지난번에도 꼭 이사 들어올 것처럼 찾아와서 실컷 방 구경하게 해주고... 장부에 적으려고 주택 관리국 허가증을 보여 달라고 했더니 그냥 가버린 놈이 있었는데. ”

 

“ 뭐라고요? 그게 누군지 모르세요? ”

 

“ 모르니까 내가 허가증을 보여 달라고 했지. 당신 또래 젊은 남자였어요. 금발머리에 안경 끼고 양복 입고. ”

 

“ 금발이면 레베진스키인데... 젊은 남자였다고요? 40대쯤 되지 않았어요? 미남이었나요? ”

 

 

“ 당신 또래였다니까 웬 40대! 미남은 무슨. 꼭 안경잡이 쥐새끼처럼 생겼던데. 덩치는 좋더군요. 거의 당신만할 걸요. ”

 

“ 그러면... 그 집은 지금 비어 있어요? ”

 

“ 당연히 비어 있지. 이 아파트 들어오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당신이나 7층의 그 반동분자처럼 당국에서 밀어 넣은 사람들이야 모르겠지만 일반인들한텐 여기가 모스크바 시내 아파트에 거주 등록하는 것만큼 어려운 곳이라고요! ”

 

“ 그게 몇 호인가요? ”

 

“ 몇 호였더라... 901호였던 것 같은데... 그렇지. 9층에선 제일 넓은 집. 그 반동분자 집하고 같은 구조였으니까. 욕실 두 개에... ”

 

“ 당장 거기 열쇠 줘요. 이건 공무예요. 당과 연방에 심대한 해악을 끼치는 범죄자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요! ”

 

 

수위가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열쇠들이 매달려 있었다.

 

 

“ 에, 그러니까...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9층이 노란색이었지. 그러면 여기... 에잉, 줄이 다 꼬였잖아. ”

 

 

베르닌은 주머니칼을 꺼내서 꾸러미 한가운데에 뒤엉켜 있는 줄을 싹둑싹둑 잘라버렸다. 수위가 아우성을 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이 뽑혀나가도록 901이란 숫자를 찾았다. 마침내 두 개의 노란색 열쇠가 달린 고리를 낚아챈 베르닌은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엘리베이터는 9층에 있었는데 아무리 버튼을 눌러대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다리다가 머리가 핑핑 돌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진 베르닌은 무작정 계단으로 내달았다.

 

 

 

 

 

to be continued ..

 

 

 

 

...

 

 

 

과연 단추의 예상대로 901호에 왕재수가 갇혀 있을 것인지!!! 그 결과는 다음주의 2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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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수가 체포된 경위에 대한 드미트리의 설명은 본편 우주에서 미샤가 수용소에 가게 된 주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뭐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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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