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4

« 2024/4 »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페테르부르크에서 어제 돌아와서 아직 시차 적응도 안되고 머리도 안 돌아간다. 다시 출근을 하니 참으로 피곤하고 괴로웠다. 아아, 진짜 돌아오기 싫었다.

 

자리 비운 동안 번외편으로 등장인물들의 20문답 인터뷰를 올렸었는데 다시 본 에피소드들로 돌아와서.

 

9편부터 11편까지는 한참 바쁘고 스트레스를 받던 1월말에서 2월 즈음에 쓴 것들이다. 오늘 너무 피곤한 몸으로 귀가하던 중 12편이나 13편 아이디어도 좀 떠올랐는데 좀 생각을 해봐야 할듯.

원래 휴가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면 곧장 본편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머리가 쿡쿡 쑤셔서 진지하게 집중하려면 아무래도 며칠 지나야 할 것 같다. 그러니 아마도 이 시리즈 한두 편을 더 쓴 후에나 본편으로 돌아갈 수 있을 듯.

 

에피소드 8이 새해 전야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9편부터는 연도가 1982년으로 바뀐다 :)

 

새해 휴가를 마치고 업무에 복귀한 우리의 단추 청년 다닐 베르닌. 그리고 언제나처럼 극장 감독직을 수행하면서도 시골 타령을 그치지 않는 왕재수, 단추의 감시 대상자이자 그의 주인어르신. 이들의 신년은 어떻게 시작될 것인가!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의 소도시, 지리적으로는 레닌그라드(지금 이름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동북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가브릴로프의 한겨울은 과연 어떨 것인가~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 이들은 새해를 맞이하게 되고... 가브릴로프 KGB 행정요원들은 지독한 휴가 후유증을 앓으며 업무에 복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스페호프 국장의 시무식과 설교였다. 그리고 가브릴로프에는 눈보라가 몰아쳐 오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9 

 

 

서무의 슬픔

- 눈보라와 패딩 코트 -

 

 

 

 

 

신년 휴가가 끝난 후 가브릴로프 KGB 직원들은 너도나도 ‘일하기 싫어’ 증후군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휴가 내내 늦잠자고 뒹구는 데 익숙해져서 도통 업무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보드카를 퍼마시고 기름진 음식을 진탕 먹고 놀았기 때문에 배탈이 나서 병가를 낸 직원도 다섯 명이나 나왔다. 이런 명절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는 인물이 딱 한 사람 있었으니 바로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국장이었다.

 

과연 스페호프는 행정의 귀감이자 모범 공산당원다웠다. 그는 신년 출근 첫날에도 정각 8시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건물 정문 쪽 진입로에 덜 녹은 눈이 약간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청소부들을 다그쳐 당장 치우게 했다. 약 30분 동안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내를 돌며 모든 것을 샅샅이 관찰했다. 그리고는 9시가 되자 3층부터 1층의 모든 사무실과 휴게실을 매와 같은 눈으로 순시했다.

 

10시에 시무식이 열렸다. 웬일로 국장의 연설은 20분 만에 끝났다. 다들 국장도 명절 후유증으로 피곤한가보다 하며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덧붙였다.

 

“ 10시 30분부터 주간회의를 진행하겠네. 다들 회의실로 직행하도록. 서무는 근태기록부를 지참하게. 이상! ”

 

베르닌은 근태기록부를 들고 주간회의에 갔다. 시무식은 빙산의 일각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직원들이 모두 둘러앉자 스페호프는 느닷없이 모두들 수첩을 덮으라고 한 후 올해 보안위원회가 나아가야 할 길과 직원들의 마음자세에 대해 한참 설교를 늘어놓았다. 시무식 연설의 자세한 버전이었다. 이후 그는 전 직원들에게 돌아가면서 올해의 다짐에 대해 한 마디씩 해보라고 강요했다. 자기 차례가 왔을 때 베르닌은 국장이 좋아할만한 문장을 기계적으로 주워섬겼다.

 

“ 저는 올해 행정의 기본을 잘 익혀 보안위원회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직원이 되겠습니다. ”

 

그렇지! 이제야 발전의 기미가 보이는군. 다들 잘 알고 있겠지, 다닐이 작년까지 얼마나 우매하고 답답한 책상물림이었는지. 기본 역량을 익히지 않으면 아무리 일을 해도 발전이란 것이 없단 말일세!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은 바로 행정 능력이며 이를 배양하기 위해서는 기초 중의 기초인 서무 업무를 잘 수행해야 하네! 물론 자네는 아직 멀었지. 그러나 자네가 이를 바탕으로 서서히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내가 특별히 배려하여 그 불여우의 감시 업무를 추가 분장해 줬던 것이야. 올해는 양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도록 하게. 그렇게 하여 자네의 능력이 일취월장하면 이제 더 중요한 업무를 추가로 맡기도록 하겠네. 자네의 건투를 비네! ”

 

베르닌은 국장의 연설을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올해 가외 업무를 또 맡기려고 하는구나!!

 

 

오글거리는 한 마디 시간이 끝난 후 스페호프는 베르닌에게 근태기록부를 펼치게 했다. 그리고 오전에 지각한 직원들을 하나하나 거명하며 기록부에 커다랗게 X 표시를 하게 했다.

 

“ 올해부터는 단 1분이라도 지각할 경우 일주일 간 1시간 조기출근일세. 오늘은 첫날이니 특별히 아량을 베풀어 3일 조기출근으로 해주지. 책상 위에 서류를 흩어놓거나 의자 아래에 잡동사니를 늘어놓을 경우에는 일주일 간 1시간 초과근무일세. 여기 해당되는 직원들은... ”

 

스페호프가 또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흙빛이 되어 신음했다. 대부분 둘 중 하나에는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주간회의를 시작했을 때 매우 저기압이었던 국장은 회의가 끝날 무렵이 되자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졌다. 가뜩이나 설교를 늘어놓고 아랫사람들을 들들 볶기 좋아하는 사람이 열흘 넘도록 신년 휴가 때문에 그 짓을 못했으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눈에 선했다. 회의를 통해 묵은 욕망을 마음껏 발산했으니 기분이 누그러질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의를 마치자 이미 점심시간이었다. 베르닌은 구내식당으로 터벅터벅 내려갔다. 선배들과 동료들이 날벼락 같은 조기출근, 초과근무 벌칙에 대해 떠드는 동안 그는 묵묵히 식판에 담긴 삶은 마카로니와 양배추 당근 샐러드, 소시지를 먹었다. 리자가 감탄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 다냐, 왜 화도 안 내요? 서류 흩어진 거랑 의자 아래 종이상자 놔둔 것 때문에 초과근무 도합 2주일 받았잖아요. 근데 꿋꿋하게 밥만 먹네요. 오늘따라 진짜 맛도 없는데. ”

 

“ 난 어차피 매일 야근하니까 초과근무 벌칙 받으나 안 받으나 똑같아요. 그리고 구내식당 밥이 언제 맛있었나요. 그냥 배 채우는 용도예요. 밥을 먹어야 힘이 나고 그래야 국장이 떠맡긴 산더미 같은 일을 할 수가 있죠. 안 먹으면 머리도 안 돌아가고 손도 안 움직이는걸요. ”

 

“ 어휴, 책상물림... ”

 

“ 책상물림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서무라서 그런 거라고요! 당신이 한번 서무 해 봐요! ”

 

“ 어머, 내가 왜요! 난 엄연히 등록부서 직원이라고요! 내 업무는 등록자들 서류에 도장 찍어주는 건데!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네. 그 사람 있잖아요, 꽃미남. 극장 감독님. 내일 등록 서류 갱신해야 하니까 사무실로 와달라고 해주세요. ”

 

“ 직접 전화하면 되잖아요. 담당자면서. ”

 

“ 당신들 같이 살잖아요! 게다가... 당신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

 

“ 아아... 그건 정말 오해라니까요! ”

 

“ 다냐, 내 앞에서까지 그렇게 잡아뗄 필요 없어요. 난 신세대잖아요. 이런 말 국장이 들으면 혼내겠지만 난 열린 마음의 소유자라고요. 사랑에 남녀 구분이 어디 있나요. 좋으면 그럴 수도 있지. 그 사람 엄청 예쁘니까 뭐 충분히 그럴 수 있겠죠. ”

 

우리 진짜 그런 사이 아니라고요!! 난 남자 안 좋아해요!! 걔랑 나는 진짜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 강력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

 

“ 아니라고요! ”

 

“ 아휴, 알았어요. 그럼 오히려 잘됐네. 다냐, 나 그 사람이랑 소개팅 좀 시켜줘요. 그 사람 진짜 꽃미남에 옷도 잘 입고 몸매도 끝내주고 목소리도 좋고, 저번에 체육대회 때 보니까 운동도 잘하고... ”

 

“ 꿈 깨요, 리자! 걘 여자한테 관심 없어요. ”

 

“ 저것 좀 봐. 결국 사귀는 거 맞네요. 아닌 척하다가 소개시켜달라니까 돌변하는 것 좀 봐. 흥. ”

 

리자는 툴툴거리며 식판을 들고 다른 쪽 자리로 가버렸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남은 양배추와 마카로니를 다 긁어먹고 일어섰다. 쌓여 있는 일을 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    *    *

 

 

베르닌은 원래 밤늦게까지 남아서 밀린 일을 하려던 계획이었지만 오후부터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눈 폭풍이었다. 초과근무 벌칙을 받은 직원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5시에 정시 퇴근을 해도 집에 가기 어려운 마당에 한 시간 늦게 나가면 도로는 꽉 막힐 게 뻔했고 그렇다고 눈보라를 뚫고 걸어가는 것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직원들은 제비뽑기를 했고 운 나쁘게 걸린 발따예프가 총대를 멨다. 국장실로 올라가서 눈보라가 너무 심하니 초과근무는 다음날부터 하면 안 되겠느냐고 처량하게 부탁했다. 국장은 고개를 저었다. 원칙은 원칙이니 걸린 사람들은 모두 6시에 퇴근하라고 했다.

 

벌칙을 받은 직원들이 6시에 우르르 몰려나간 후 베르닌은 더 남아 일을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전화가 울려댔다.

 

“ 예, 보안위원회 다닐 베르닌입니다. ”

 

“ 나 언제 데리러 올 거야? ”

 

베르닌은 대체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당당한지 이해가 안 됐지만 솟구치는 짜증을 꾹 누르며 대꾸했다.

 

“ 나 야근해. 너 오늘 그냥 바이올린 아저씨랑 같이 들어가는 게 어때? ”

 

“ 나도 그러고 싶은데 로만은 아파트 수도관이 다 터져서 지휘자 할아버지 집으로 피신했어. 그러니까 데리러 와. 안 그러면 나 극장에서 자야 되는데 오늘은 너무 추워. ”

 

“ 그냥 너도 지휘자 할아버지 집으로 가면 안 되냐... ”

 

“ 그 영감은 오라고 했는데, 거기 가면 난 분명 솟구치는 욕망을 견디지 못하고 로만이랑 뒹굴게 될 거라고. 할아버지 그거 보고 심장마비라도 오면 어떡하니. ”

 

“ 그래, 심장마비 오겠지. 상상도 못한 민망한 짓이니... 그것도 70살이 다 된 보수적인 노인이니... ”

 

“ 그게 아니고... 우리의 격렬한 응응을 구경하다 흥분해서 자칫 노인네 몸에 탈이라도... ”

 

“ 아아, 제발 그만해라... 모두가 너 같은 건 아니란 말이야. 데리러 갈 테니까 옷이나 따뜻하게 입고 있어. 밖에 진짜 추워. 무조건 털 달린 엄청 두꺼운 패딩 입어야 돼. 멋 부린답시고 평소처럼 아르마나인지 뭔지 그런 코트 입지 마! ”

 

“ 아르마니! 아르마나가 아니고. 어째 그렇게 학습이 안 되니. ”

 

“ 시끄러워! 패딩 입고 목도리 하고 모자 둘러쓰고 있어! 지금 갈 테니까! ”

 

 

베르닌은 차를 몰고 극장으로 갔다. 보안위원회 사무실과 그들의 아파트는 둘 다 신시가지에 있었지만 극장은 구시가지에 있었기 때문에 왕재수를 출퇴근시켜주기 위해서는 매일같이 강을 건너는 짓을 해야 했다. 눈보라가 살짝 잦아들어서 다행이었다. 베르닌은 훌륭한 운전 실력을 발휘해 꽉 막혀 있는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 1시간 만에 극장 앞에 다다랐다. 평소에는 20분이면 도착할 거리였지만 이 정도면 선방이었다.

 

감독실로 가보니 왕재수는 차이코프스키인지 모차르트인지 베르닌으로서는 구분도 잘 안 가는 클래식 음악을 시끄럽게 틀어놓고 한 손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이러 저리 몸을 꼬고 있었다. 베르닌은 좀 기다려 주려고 했지만 왕재수가 자기가 온 것도 모르고 계속 그 이상한 동작들을 늘어놓는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오디오를 꺼버렸다.

 

“ 야! 집에 가자! ”

 

“ 아휴, 이 무식한 인간! 너 때문에 망했어! 거의 다 됐는데! ”

 

“ 집에 데려다 달라며! ”

 

“ 신작 안무 중이었단 말이야. ”

 

“ 그렇게 이상하게 꼼지락거리는 게 작품이란 말이야? ”

 

“ 처음엔 원래 그렇게 보이는 거란 말이야. 에잇... ”

 

“ 그럼 계속해라. 난 간다. ”

 

“ 안 돼, 나 데려가. 여기 너무 추워. 오늘은 공연도 없고 극장 예산 승인이 아직 안 떨어졌다고 난방도 안 해주잖아. 그런 게 어디 있어... ”

 

“ 공연이야 사업 예산이니까 난방급탕비가 잡혀 있겠지만 공연 없을 때 쓰는 난방은 극장 운영 예산이니까 그건 기관 경상비 항목에 해당돼. 그러니까 시 의회 승인이 없으면 쓸 수 없는 돈이거든. 지금 의회 의원들 다들 크림으로 시찰 가서 이틀 후에나 돌아오니까 그때까진 공연 없으면 난방 안 될 거야. ”

 

 

베르닌은 왕재수가 예산에 대한 자신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재수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다.

 

 

“ 그러니까 시 의원들이 전부 놀러 나가서 극장 난방을 안 해준다는 거네! 나쁜 인간들!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 아저씨한테 이를 거야! ”

 

“ 너네 아저씨란 인간도 국회의원이잖아! 더 높은 사람... 가재는 게 편이니까 다 똑같다고. 세금으로 외유 가고... ”

 

“ 하긴, 우리 아저씨들이 나 데리고 여기저기 많이 다녔지. 비엔나에 베니스에 파리에... 알았어. 가자. ”

 

야! 왜 코트를 꺼내고 있는 거야! 패딩 입어!

 

“ 나 패딩 없어. 촌스러운 건 안 입어. 어차피 너 차로 갈 거잖아. ”

 

“ 내 차 지금 난방 안 된단 말이야. 밖에 얼마나 추운데! 폐렴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

 

“ 그러니까 이제 면역력이 생겼으니 괜찮다고! ”

 

 

베르닌은 경비실로 내려갔다. 거구의 경비원으로부터 여분의 패딩 코트를 빌려와서 왕재수에게 억지로 뒤집어씌웠다. 시커멓고 거대하고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패딩 코트에 왕재수가 경악을 했다.

 

아악, 이게 뭐야! 이런 끔찍한 물건을 몸에 걸칠 수는 없어! 이것은 패션 테러야!

 

베르닌은 아랑곳하지 않고 왕재수에게 패딩 코트를 입힌 후 지퍼를 올리고 단추를 채웠다. 코트에 달려 있는 거대한 털모자를 뒤집어씌웠다. 목도리를 잡아채 얼굴을 칭칭 감았다.

 

“ 그만 좀 해! 너무 두꺼워서 움직이기도 힘들어. 이 옷 나한테 너무 크단 말이야! 펭귄이 된 것 같아! 뒤뚱뒤뚱... ”

 

“ 나가봐라,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 테니까. ”

 

“ 어휴, 시어머니... ”

 

 

*    *    *

 

 

극장에서 나오자 눈보라가 몇 배로 강력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시동도 한참 만에 걸렸다. 왕재수는 차에 들어오자마자 털모자를 벗고 패딩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베르닌이 경고했다.

 

“ 좋은 말 할 때 그냥 입고 있어라. 차 난방 안 된다고 했다. ”

 

“ 숨 막힌단 말이야. 나 원래 몸도 뜨거운데... 난 피 끓는 젊은 남자라고! 너처럼 책상물림 노인네가 아니란 말이야! ”

 

“ 야! 나 너랑 세 살 차이밖에 안 나거든!! ”

 

“ 넌 내복 입잖아! 난 안 입어! ”

 

“ 내복 안 입는 게 자랑이냐? 우리 동네는 겨울에 엄청 춥단 말이야. 내복 안 입으면 감기 걸리고, 몸도 아프고 돈도 들어가고! ”

 

“ 그러니까 노인네 같다는 거지! ”

 

“ 툭하면 아픈 게 누군데! 오죽하면 맨 처음에 너 아파트 배정해 줄 때도 의사 선생 병원 옆에... ”

 

“ 야! 내가 원래 아팠냐! 내가 원래 얼마나 튼튼한 체질이었는데! 다 너네 KGB니 공산당이니 하는 놈들이 나 잡아다가 나쁜 짓해서 그렇게 된 거지! 아 생각하기도 싫어! 너희들 다 나쁜 놈들이야! 나 감옥에 넣고 막 아프게 고문하고 시골에 보내고! 생각해보니 너도 한 패! 스파이, 끄나풀, 앞잡이! 미워!

 

 

왕재수가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쳤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홱 고개를 돌렸다. 곰곰 떠올려보니 엄청나게 억울하고 화가 난 모양이었다. 특히 마지막의 ‘시골에 보내고란 구절에서는 눈물까지 왈칵 글썽거렸다. 베르닌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고 마음 한구석은 또 불편해져서 아무 말도 없이 차를 몰았다.

 

 

차는 빽빽한 눈보라를 뚫고 거북이걸음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베르닌의 차는 낡은데다 난방 장치도 고장 났기 때문에 틈새로 칼바람이 스며들어왔다. 왕재수는 재채기를 했지만 패딩 코트 단추를 채우지는 않았다. 바람이 더 세게 불어 들어오자 재채기를 연달아 세 번을 더 했다. 한번만 더 하면 주먹다짐을 해서라도 단추를 채워버려야겠다고 베르닌이 생각했을 때 갑자기 차가 푸쉬시 하는 소리를 내더니 우뚝 멈췄다. 시동이 꺼져버린 것이다.

 

“ 어, 왜 이러지? ”

 

베르닌은 다시 시동을 걸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푸르르푸르르 하는 소리만 나고 차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모자를 뒤집어쓰고 눈보라 속으로 나갔다. 덮개를 열어보았다. 플래쉬를 비춰가며 엔진과 부품을 살폈다. 곧 그는 별로 기쁘지 않은 결론에 도달했다.

 

 

운전석으로 돌아온 베르닌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토라져 있는 왕재수의 패딩 후드를 잡아당겼다.

 

“ 야, 모자 쓰고 단추 채워. 내려야 돼. ”

 

“ 쳇, 그래. 나 같은 반동분자는 차 태워주기도 아깝다 이거지. 알았어! 누가 이깟 후진 차 타고 싶대! 내리면 되잖아! ”

 

“ 엥,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 촌스러운 패딩도 못 벗게 하고... KGB 앞잡이라서 맨날 감시하고 보고서 쓰는 주제에 차 태워준다고 유세하고. 그러더니 또 내리래... ”

 

“ 내가 언제 유세했어! 내 차 후져서 난방 안 되니까 너 감기 걸릴까봐 그런 거잖아! 근데 내리긴 내려야 돼! 빨리 옷 입어! 너무 추워서 차 고장 났어. 엔진도 얼고 부품도 하나 터졌어. 지금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정비사도 못 불러. 그렇다고 안에 계속 앉아 있을 수도 없잖아, 난방도 안 되는데. 강만 건너면 버스 탈 수 있을 거야. 빨리 나가자. ”

 

뭐야? 엔진이 얼어? 차가 얼마나 후지면 엔진이 다 어니! 아아, 시골... ”

 

“ 나 저번 뉴스에서 레닌그라드에서 전차들 엔진 얼어서 줄줄이 멈춰선 거 봤어. 승객들 다 내려서 걸어가던데. ”

 

“ 그건 전차잖아! ”

 

“ 어쨌든! 레닌그라드도 엔진 얼잖아! 거기도 춥잖아! 툭하면 시골타령만 하지 말고 빨랑 패딩 단추 채우고 모자 써! 지금 눈보라 장난 아냐. 걸어가야 한단 말이야! ”

 

“ 에이, 극장에 남을걸. ”

 

 

왕재수는 단단히 삐친 것 같았지만 어쨌든 패딩 코트의 지퍼와 단추를 모두 채우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밖으로 나오자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한 치 앞도 안 보일 지경이었다.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부는지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뒤로 떠밀리는 기분이 들었다. 어린아이들이나 여자들이었다면 벌써 바람에 휩쓸려 날아갔을 것 같았다. 세찬 바람을 정면으로 맞자 심지어 왕재수도 두어 번 넘어질 뻔 했지만 베르닌이 붙잡아서 간신히 몸을 가눌 수 있었다.

 

“ 야, 너 안 되겠어. 내 팔짱 껴. ”

 

“ 싫어. 내가 왜 KGB 앞잡이 도움을 받니! 내 몸은 내가 건사... 으악! ”

 

때마침 몰아친 폭풍 탓에 왕재수는 입 안 가득 눈을 잔뜩 물고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베르닌은 혀를 차며 그를 일으켜 주었다.

 

“ 이거 봐. 맨날 다이어트하고 난리치더니 너 지금 벌 받는 거야. 너무 말라서 자꾸 바람에 휩쓸리는 거라고! ”

 

“ 아니야! 내가 하체 힘이 얼마나 좋은데! 두툼한 허벅지로 버티면 되는데 이 망할 놈의 패딩! 둔해 죽겠어! 이 옷 너무 크고 빵빵해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단 말야! 펭귄처럼 뒤뚱뒤뚱... 으악! ”

 

왕재수가 또 넘어졌다. 베르닌은 왕재수를 일으킨 후 억지로 팔짱을 꼈다. 왕재수는 툴툴댔지만 바람이 점점 거세지는데다 패딩 코트 때문에 혼자서는 제대로 걷기가 힘든 듯 결국 베르닌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뒤뚱뒤뚱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 다리까지 못 가겠다. 한참 돌아가야 하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와. 그냥 강 건너가자. ”

 

“ 강 잘 얼었어? ”

 

“ 응, 지금은 추우니까 꽝꽝 얼었지. 그래도 너 나한테 잘 붙어 있어. 방향에 따라서 살얼음인 쪽도 있거든. ”

 

“ 누구 무시하냐, 나도 레닌그라드에서 네바 강 얼면 잘 건너다녔거든! ”

 

“ 아항, 레닌그라드도 시골이구나! 겨울에 강도 얼고! ”

 

“ 아니야! 레닌그라드는 시골 아니야! 대도시야! 네바 강은 근사해! 여기 강이랑 달라! ”

 

“ 여기도 도시란 말이야! 너도 시립극장 감독... ”

 

 

그때 눈보라가 정면으로 소용돌이치듯 몰아쳐서 베르닌은 입을 꾹 다물고 왕재수를 꽉 붙든 채 얼어붙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수면 위로 눈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생각만큼 미끄럽지는 않았다. 발을 쿵쿵 굴러보니 왼쪽 얼음이 좀 약한 것 같아서 베르닌은 왕재수를 데리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힘겨웠다. 바람이 너무 세찬데다 딴딴한 눈발이 얼굴에 그대로 부딪쳐 와서 꼭 총알 세례를 받는 기분이었다. 눈물과 콧물이 줄줄 쏟아졌지만 흘러내릴 겨를도 없이 꽁꽁 얼어붙었다. 눈가와 콧구멍 속에서 작은 얼음 결정들이 빠지직 빠지직거렸다. 그나마 왕재수가 착 달라붙어 있어서 움직임은 둔해도 추위는 한결 덜했다. 왕재수도 처음에는 툴툴댔지만 이제 입을 꽉 다물고 베르닌의 팔을 꼭 낀 채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데 집중했다.

 

3분의 2쯤 건너왔을 때 베르닌은 희미한 울음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 처음에는 윙윙대는 바람소리를 착각했다고 생각했지만 잘 들어보니 가냘프게 킹킹대는 소리였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왼쪽 저편에서 작고 거무스름한 물체가 낑낑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조그만 강아지였다. 얼어붙은 수면 위로 쌓인 눈과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사방이 새하얬기 때문에 꼭 잉크 얼룩을 떨어뜨려 놓은 것처럼 보였다. 베르닌은 좀 더 자세히 보려고 왼쪽으로 다가갔다. 왕재수가 팔을 잡아당겼다.

 

“ 너 왜 그쪽으로 가? 거기 왼쪽이야. ”

 

“ 잠깐만. 저기 강아지 있어. 길 잃었나봐. 미끄러워서 못 나오고 갇힌 것 같아. 구해줘야겠어. ”

 

“ 그냥 놔둬, 그쪽 얼음 약하다며. 잘못 디디면 빠져! ”

 

“ 개를 저렇게 놔두고 어떻게 그냥 가. 두고 가면 얼어 죽을지도 몰라. ”

 

“ 공권력에 신고하면 되잖아! 그런 거 하라고 세금 내잖아! ”

 

“ 나 보안요원... 공무원... 강아지 구해줘야 돼. ”

 

“ 아 진짜 이 망할 놈의 KGB 나부랭이! 넌 책상물림이라며! 서무인지 뭔지라며! 건너가서 경찰이나 소방대원 부르라고! 강아지는 가벼우니까 저기 좀 놔둬도 괜찮아. 얼음 안 깨져. 너는 무거워서 그쪽으로 가면 얼음 깨진단 말이야! ”

 

“ 괜찮아, 저쪽은 수심 안 깊어. 좀 놔봐, 금방 가서 강아지 데려올게. ”

 

“ 안 돼! 가지 말라니까! ”

 

 

왕재수가 끈질기게 말렸다. 베르닌이 버럭 화를 냈다.

 

 

“ 야! 넌 피도 눈물도 없냐! 너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야? 아무리 천재에 얼굴이 예쁘면 뭐하냐! 동정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조그만 강아지 혼자 얼음 사이에 갇혀서 주인도 잃고 엄마도 잃고 저렇게 불쌍하게 울고 있잖아. 우리가 버리고 가면 얼마나 무섭고 슬프겠어! 강아지 구해줘야 돼! ”

 

“ 강아지랑 나랑 무슨 상관! 안 돼! 가지 마! 못 가! 너 빠지면 나 혼자 어떡하라고! 나 바람 불어서 여기 혼자 못 건너간단 말이야! ”

 

“ 야! 넌 내가 물에 빠지는 게 걱정이 아니라 너 혼자 강 못 건널까봐 걱정하는 거야? 이 왕재수! 왕 싸가지! 이거 놔! ”

 

“ 안 돼! 못 가! 안 돼! ”

 

 

왕재수가 악착같이 매달렸다. 두 팔로 베르닌의 허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 탓에 왕재수가 휘청거리는 틈을 타서 베르닌은 그를 홱 떠밀어 엉덩방아를 찧게 한 후 재빨리 강아지가 있는 쪽으로 갔다. 왕재수가 뒤에서 ‘안 돼!’ 하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무시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가냘프게 깨갱대고 있던 강아지가 희망의 눈빛을 반짝이며 베르닌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일어나지도 못하는 것을 보니 너무 추워서 이미 몸이 다 얼어버린 것 같았다. 베르닌은 저만치에서 팔을 뻗었지만 강아지가 꼼짝달싹 못하는 탓에 손끝조차 닿지 않았다.

 

“ 착하지, 강아지야. 잠깐만 기다려. 내가 구해줄게. 옳지. ”

 

베르닌은 발끝을 들고 살금살금 얼음 위를 디디며 걷기 시작했다. 몇 발짝만 더 가면 강아지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막 오른발을 내디디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지지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두리번거리는데 발밑의 얼음이 쫙 소리를 내며 와장창 깨졌다.

 

“ 엇, 얼음이... ”

 

아차 하는 순간 베르닌은 발을 헛디디고 깨진 얼음 사이로 휘청거리며 빠져버렸다. 버둥거리며 빠져나오려고 하는데 무릎인지 발목인지 어딘가가 얼음 사이에 걸려서 나올 수가 없었다. 허우적거리는데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다닐! 다니이이일!

 

 

베르닌은 왕재수가 그렇게 다급하게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을 처음 들었다. 아니, 곰곰 생각해보니 두 번째였다. 연말 호두까기 공연 끝나고 여자들에게 머리카락 뜯길 때...

 

그때 왕재수가 그의 팔목을 덥석 붙잡았다. 얼음 위에 엎드린 채 죽을힘을 다해 그를 끌어당겼다.

 

“ 잠깐만 기다려! 내가 꺼내줄게! 야압! ”

 

“ 어... 저기... 야, 잘못하면 너도 빠져. 조심해! ”

 

“ 아 무거워... 이 망할 놈의 패딩... ”

 

“ 괜찮아, 놔줘. 내가 혼자 나올 수 있어... ”

 

“ 어떻게 혼자 나와... 얼음 사이에 끼었잖아! 둔탱이! 덩치는 커가지고... 가만히 있어, 꺼내줄 테니까! ”

 

“ 그러니까... 네가 날 어떻게 꺼내, 난 너보다 크... 으악! ”

 

 

베르닌은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왕재수가 베르닌이 끼어 있던 얼음을 한쪽 발로 두들겨 부수면서 동시에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 그를 홱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무슨 투포환처럼 붕 날아서 단단한 얼음 위로 내팽개쳐졌다.

 

잠시 베르닌은 멍하게 누워 있었다. 돌덩이처럼 딱딱한 얼음에 뒤통수를 그대로 부딪쳐서 머리가 아프고 어질어질했다. 눈앞은 온통 하얗고 두터운 눈보라 안개로 빽빽하게 가로막혀 있었다. 몇 초 동안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베르닌은 비명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몸을 홱 틀었다. 그를 끌어내고 숨을 고르던 왕재수가 세찬 폭풍 때문에 주르르 미끄러지더니 깨진 얼음 사이로 철퍽 빠져버린 것이다.

 

앗, 야! 조심해! 앗!

 

베르닌은 급하게 팔을 뻗었지만 왕재수가 워낙 갑작스럽게 빠졌기 때문에 미처 붙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둘의 몸무게가 홱 쏠렸기 때문인지 아까보다 얼음이 더 와장창 깨져서 왕재수는 베르닌처럼 얼음 사이에 낀 것도 아니고 물속으로 풍덩 빠져버리고 말았다. 왕재수는 어푸어푸 하면서 금세 수면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하지만 헤엄쳐 나오지는 못하고 계속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자꾸만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 헉, 너 수영 못해? ”

 

“ 패딩... 못 움직... 꼬르륵...

 

베르닌은 물속으로 뛰어들어 왕재수를 건져내려다가 자기 몸무게 때문에 얼음이 더 깨져버리면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급하게 목도리를 벗었다. 목도리는 이미 눈과 물 때문에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목도리 끝을 잡고 왕재수 쪽으로 휙 던지며 소리쳤다.

 

야! 이거 잡아! 끌어당길 테니까 꽉 잡아!

 

다행히 왕재수가 목도리를 붙잡았다. 베르닌은 낑낑거리며 목도리를 잡아당겼다. 패딩 사이사이로 물이 들어가서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꼭 열기구처럼 거대하고 동그랗게 변한 왕재수가 반쯤 둥둥 떠올라서 끌려왔다.

 

간신히 안전한 얼음 위로 왕재수를 끌어올렸을 때는 베르닌도 녹초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추위와 피로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흠뻑 젖은 왕재수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대로 뻗어버렸기 때문이다.

 

“ 너 괜찮아? 내 말 들려? ”

 

왕재수가 대답이 없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더럭 겁이 났다. 얼핏 보니 숨도 안 쉬는 것 같았다. 가슴을 누르자 물을 주르륵 토해내고 또 주르륵 토했다. 인공호흡을 해줘야 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부르르 떨더니 기침을 하면서 코를 훌쩍거렸다.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다. 축축하게 젖은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랬다.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괜찮아? 야, 말 좀 해봐... 너 말 못해? 응?

 

흐.... 추.... 추ㅇ....

 

춥다는 말 같긴 했지만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왕재수가 덜덜 떨더니 기절했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의 부츠와 흠뻑 젖은 바지를 벗겨냈다. 패딩 코트도 벗길까 하다가 눈보라가 너무 심해서 일단 놔뒀다. 그리고 자신의 패딩과 카디건과 스웨터와 내복 면 셔츠를 벗었다. 너무 추워서 도로 스웨터를 입은 후 면 셔츠로 왕재수의 얼굴과 목과 다리와 발의 물기를 급하게 닦아주었다.

 

“ 이 바보... 내가 빠진 데는 수심 얕았단 말이야. 가만 있었으면 나 혼자 올라왔을 텐데 호들갑떨다가 빠지고 그러니... 내 부츠 방수 장화야, 네가 촌스럽다고 한 내 바지도 방수복이라서 난 하나도 안 젖었단 말이야... 바보 멍청이. 어련히 내가 잘 알아서 나올까봐... 이것 좀 봐. 멋 부린다고 방수도 안 되는 스웨이드 부츠 신어서 다 젖었잖아... 어휴, 내복도 안 입고... 동상 걸리면 어떡할 거야... 야, 정신 좀 차려봐. 지금 자면 안 돼. 이렇게 추운데 잠들면 너 진짜 큰일 나... 어휴, 이 왕재수 같으니... 이걸 어떡하지... ”

 

베르닌은 횡설수설하며 그나마 물기를 닦아낸 왕재수의 다리와 발을 자기 카디건으로 감쌌다. 왕재수는 죽은 듯이 늘어져 있었다. 베르닌의 헛소리를 야단치지도 않고 툴툴대지도 않고 시골 운운하며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베르닌은 그 마지막 이유 때문에 더더욱 겁이 났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시골이라 얼음이 깨진다는 둥 촌스럽다는 둥 판에 박힌 레퍼토리를 줄줄 늘어놓고도 남았을 텐데. 베르닌은 왕재수의 속눈썹과 코, 입술 주위에 빽빽하게 달라붙어 있는 얼음 결정들을 손으로 훑어 떼 냈다. 그리고는 그를 들쳐 업고 정신없이 눈보라를 헤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얼음이 깨질까봐 무서웠지만 이따금 발을 굴러서 두께를 확인해가며 계속 뛰었다.

 

마침내 강기슭에 도착했을 때 베르닌은 왕재수를 잠깐 내려놓고 숨을 쉬는지 확인해 보았다. 숨은 쉬고 있었다. 콧김이 얼어붙고 있는 걸 보니 그건 확실했다.

 

“ 조금만 참아, 여기만 올라가면 돼. 너 내 말 들려? 자면 안 돼! ”

 

아무래도 왕재수는 그의 말을 듣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저체온증으로 크게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왕재수를 들쳐 업고 정신없이 도로 쪽으로 기어 올라갔다. 버스나 택시가 눈보라를 뚫고 나타나주기를 빌면서.

 

 

*    *    *

 

 

버스는 오지 않았다. 택시도 마찬가지였다. 절망한 베르닌은 도로변을 따라 무작정 뛰었다. 문을 연 건물이 있으면 달려 들어가려고 했지만 워낙 대로변인데다 그쪽에 있는 건물들은 전부 회사들이라 직원들은 모두 퇴근했고 문은 꽉 닫혀 있었다. 병원은 집 근처에 있었다. 눈이 오지 않아도 20분 이상 가야 하는 거리였다.

 

베르닌이 점차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을 때 갑자기 희뿌연 눈보라 속에서 헤드라이트가 번쩍이더니 빵빵 하는 소리가 들리고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창문이 살짝 열리더니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다냐! 길바닥에서 대체 뭘 하는 거예요! 빨리 타요!

 

리자였다. 세상에 하느님이든 레닌의 가호든 뭔가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급하게 왕재수를 뒷좌석에 밀어 넣고 자기도 올라탔다. 문을 닫자마자 리자가 차를 출발시켰다.

 

 

“ 고마워요! 당신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 ”

 

“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차는 어쨌어요? ”

 

“ 엔진이 얼어서 멈췄어요. ”

 

“ 아... 하긴... 아까 표도르 차도 그랬어요. 그래서 내 차 타고 전부 항아리 닭고기 식당 가서 저녁 먹었어요. 데려다 주고 나도 집에 가는 길이에요. 근데 저 사람 누구에요? 왜 이렇게 젖었어요? ”

 

“ 어... 왕재수... 아니, 미샤요. 강 건너오다가 얼음이 깨져서 빠졌어요... 미안한데 수건 같은 거 있어요? ”

 

“ 어머낫, 그 꽃돌이 감독님! 어쩌면 좋아! 여기 손수건 있어요. 너무 많이 젖어서 손수건 가지고는 안 되겠네. 잠깐만요... ”

 

 

리자는 손수건을 꺼내주고는 두르고 있던 숄까지 던져주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패딩과 스웨터와 셔츠를 서둘러 벗기고 숄로 몸의 물기를 모두 닦아냈다. 그리고는 자기 스웨터를 벗어서 입혀 주었다. 리자가 혀를 차며 자기 코트를 건네주었다.

 

 

“ 다냐, 당신 감기 걸려요... 위에 아무 것도 안 입고. 이거라도 걸쳐요. ”

 

어... 난 괜찮아요. 내 패딩 다시 입으면 돼요. 이거 그럼 얘한테 좀 걸쳐놓을게요. 그래도 돼요? 나중에 빨아다 줄게요. 숄이랑...

 

“ 그런 걱정 하지 마요. 안 빨아줘도 돼요. 꽃돌이 감독님 몸에 닿았던 거라고 하고 암시장에 팔아야지! ”

 

“ 헉... 그런 짓하면 안돼요! 우린 공무원인데! ”

 

“ 아휴, 농담이잖아요! 책상물림... ”

 

 

베르닌은 왕재수의 몸을 리자의 코트로 감싸준 후 다리와 발에 남아 있는 물기를 마저 닦았다. 그리고 동상에 걸리지 않도록 아직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발을 손으로 계속 문질러 주었다.

 

 

리자는 알고 보니 운전 솜씨가 아주 훌륭했다. 도장 찍는 일만 할 줄 아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왕재수를 위해 그들을 자기 집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스타브로프의 병원까지 데려다 주었다. 베르닌이 뒷좌석을 적셔놔서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그런 생각 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베르닌이 흠뻑 젖은 왕재수의 옷가지들을 주워 모으려고 하자 그냥 놔두라고 했다.

 

“ 내가 내일 사무실로 가져다줄게요. 빨리 의사 선생님한테 데리고 가기나 해요. 그 패딩만 가져가면 되겠네요. 패딩은 금방 마를 테니까 나올 때 입혀주면 될 거예요. ”

 

“ 어... 하지만 당신은 스무 살밖에 안된 미혼녀... 외간 남자가 입었던 옷가지를 놔두고 가기가... ”

 

“ 아휴, 진짜 고지식하다니까... 아, 당신 질투하는 거군요! 사랑하는 꽃돌이 감독님이 입었던 옷을 내가 만지는 게 싫은 거죠? 당신 너무해요, 미남을 수중에 넣은 것도 모자라서 옷도 내주기 싫어요? 나 이 옷들 말려서 꼭 껴안고 잘 거예요! ”

 

“ 저, 리자... 나랑 얘는 진짜 그런 관계가 아니고... ”

 

“ 아유, 됐어요. 다 봤는데 이제 와서 뭘 그런 변명을... 사랑하는 그이가 어떻게 될까봐 걱정돼서 아주 두 눈이 쏟아질 것 같던데... 나 당신 눈 그렇게 커진 거 처음 봤어요, 다냐. 단추 같았는데 아깐 아니더라고요. 하여튼 빨리 의사 선생님한테 가 봐요. 내일 봐요~! ”

 

 

베르닌은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지만 왕재수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데다 이를 딱딱 부딪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내렸다. 한 팔에는 왕재수에게서 벗겨낸 패딩 코트를 끼고 등에는 왕재수를 들쳐 업고 급하게 병원으로 들어갔다.

 

 

*    *    *

 

 

병원에서는 곧 왕재수의 몸을 녹여주고 응급처치를 해주었다. 한숨 돌리고 나자 정의감에 불타는 늙은 의사 스타브로프는 베르닌을 매섭게 혼냈다.

 

 

이 얼간이 같은 놈아!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이 추위, 이 눈보라에 미쳤다고 애를 데리고 강을 건너! 이 망할 KGB 스파이 놈아! 이거 스페호프가 명령한 거지! 애 빠뜨려 죽이라는 지령 받고 한 짓이지!! ”

 

“ 아니에요, 선생님! 엔진이 얼어서 그랬어요. 다리까지 가는 게 너무 멀었다고요. 저 강은 겨울마다 다들 잘 건너다니잖아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빠졌단 말이에요. ”

 

“ 네놈은 KGB 스파이니까 빠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냐! 멀쩡하잖아! ”

 

“ 아아, 선생님. 저도 사람인데 왜 저한테는 야단만 치고 이 녀석 편만 들어주시는 거예요... 설마 선생님마저 예쁜 애들만 좋아하시는 건가요? 제 눈 단추 같아서 차별하시는 거예요? 의사가 그래도 되는 거냐고요... ”

 

“ 아니 이게 웬 헛소리야. 예쁜 건 뭐고 단추는 또 뭐람. 얘는 네놈들이 고문해서 여기저기 아프잖아!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항상 조심해서 곱게 다뤄줘야지! 어디 눈보라를 맞히고 강을 건너고 물에 빠뜨려! 전에는 보드카 먹여서 인사불성을 만들더니! 이게 다 네놈과 스페호프의 음모가 분명해! ”

 

“ 진짜 아니에요. 아아 억울해... ”

 

“ 시끄러워! ”

 

 

베르닌은 너무 억울했지만 그래도 왕재수가 몸이 녹아서 한결 나아진데다 안색도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 마음이 좀 놓였다. 그래서 의사에게 혼날까봐 무서운 마음을 억누르고 쭈뼛쭈뼛 물어보았다.

 

 

“ 저... 얜 이제 괜찮은 건가요? 깨어나면 집에 데리고 가면 되나요? ”

 

“ 몸 녹여줘서 동상 위험은 없는데 기관지에 물이 들어가서 염증 생길 수도 있으니까 일단 입원이야! 그렇게 알고 네 녀석은 돌아가! ”

 

“ 일어난 거 보고 갈게요... ”

 

“ 마음대로 해. 한번만 더 이런 일 생기면 가만 안 둬! ”

 

 

베르닌은 늙은 의사에게 ‘혹시 선생님도 이 녀석의 우리 아저씨 명단에 들어가 계세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두들겨 맞을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의사가 나간 후 베르닌은 30분 정도 왕재수의 곁에 앉아 있었다. 왕재수는 열이 나는지 얼굴이 빨개져서 쌕쌕거리며 자다가 퍼뜩 눈을 떴다.

 

“ 아, 너 일어났구나! 좀 괜찮아? ”

 

“ ... 시골 싫어... 물에 빠지고... ”

 

“ 이제 괜찮아. 병원이야. 좀 자고 나면 나아질 거야. ”

 

“ 패딩... ”

 

“ 어... 미안해 ㅠㅠ 난 너 추울까봐 그 패딩 빌려온 건데. 그거 때문에 네가 물에서 못 나올 줄 몰랐어. 미안... ”

 

“ ... 패딩... ”

 

“ 미안하다고 했잖아. 왜 자꾸 패딩 타령이야. 안 그래도 나 벌써 의사 선생님한테 엄청 혼났어 ㅠㅠ ”

 

“ ... 패딩, 내 패딩 줘... ”

 

“ 싫다고 계속 뭐라 하더니 왜 자꾸 패딩을 달래... 얘가 정말 왜 이러지? 혹시 머리가 잘못 된 건 아니겠지... 의사 선생님 불러와야 하나... ”

 

“ ... 으으... 패딩! 패딩 가져와! ”

 

 

베르닌은 왕재수가 열이 나서 헛소리를 하는 것 같아 더럭 겁이 났다. 흥분하면 더 해로울 것 같아서 일단 병실 한쪽에 던져두었던 패딩 코트를 들고 왔다. 방수 재질이라 겉은 거의 말라 있었지만 여전히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고 안쪽으로 물을 먹었는지 꽤 무거웠다. 패딩을 껴안고 왕재수의 눈앞에 들이댔다.

 

“ 자, 여기 가져왔어. 봤지? 이제 안심하고 자라. ”

 

“ ... 주머니... ”

 

“ 주머니는 또 왜! ”

 

“ 안쪽... 주머니... ”

 

 

베르닌은 왕재수의 머리가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 걱정하면서 패딩 코트를 뒤집었다. 안쪽에 정말 주머니가 있었다. 지퍼가 채워져 있었는데 이상하게 주머니가 불룩했다.

 

 

“ 어? 안에 뭐가 들었나? ”

 

 

베르닌은 지퍼를 열어보았다. 주머니 안에 거무스름하고 조그만 강아지가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엇! 강아지! 아까 그 강아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강아지였다. 베르닌은 급하게 강아지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놀랍게도 강아지의 털은 별로 젖지도 않았고 몸은 따뜻했다. 손으로 감싸주자 강아지가 콧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낑낑댔다.

 

 

“ 아... 어떻게 강아지가 이 안에 있지? 네가 구한 거야? 언제? ”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강아지를 보더니 안심했는지 도로 잠든 것 같았다. 베르닌은 멍해졌다.

 

 

‘ 그랬구나. 얘가 나 꺼내주고 나서 강아지를 구한 거구나. 강아지 구해서 추울까봐 안주머니에 넣고 지퍼도 채워줬구나. 그러다 얼음 깨져서 빠진 건가보다... ’

 

 

안주머니는 방수천으로 되어 있었고 왕재수가 지퍼를 채워놓았던 덕분에 물이 스며들지 않았기 때문에 강아지는 멀쩡했다. 사실 그와 왕재수보다도 더 멀쩡한 것 같았다.

 

 

베르닌은 의사에게 강아지를 데리고 갔다. 노의사는 여기가 동물병원인줄 아느냐고 투덜댔지만 화난 기색은 아니었고 강아지를 정성껏 진찰해 주었다. 다행히 강아지는 놀라고 지치고 허기졌을 뿐 다친 곳은 없었다. 우유를 데워주자 할짝할짝 핥아먹고는 사르르 잠이 들었다. 강아지 구하려다 물에 빠진 거였다고 설명하자 노의사 스타브로프도 눈에 띄게 누그러졌고 베르닌에게 저녁 안 먹었으면 사택에 가서 수프라도 한 그릇 먹고 가라고 했다.

 

베르닌은 강아지를 데리고 스타브로프의 집으로 갔다. 의사의 아내인 마르가리타가 맛있는 생선수프와 샌드위치를 차려줘서 든든하게 먹었다. 병실로 내려와 보니 왕재수는 깊게 잠들어 있었다. 바깥을 보니 눈보라는 이제 그쳐 있었다. 그래서 베르닌은 집으로 돌아갔고 강아지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눈보라에 시달리고 물에 빠지고 왕재수를 업고 뛰느라 너무 피곤해서 깊게 자는 바람에 베르닌은 다음날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해 늦게 일어나 지각, 국장에게 귀가 닳도록 설교를 듣고 1주일 동안 조기출근하게 되었다. 그래도 좋은 일은 하나 있었다. 점심시간에 리자가 왕재수에게 먹이라고 뜨끈뜨끈한 항아리 닭고기를 사다 준 것이다. 물론 왕재수는 느끼하다고 안 먹을 게 뻔했다. 베르닌은 매우 행복했다. 항아리 닭고기는 참 맛있었다.

 

 

 

FIN

- 2015. 1. 29 -

 

 

-------

 

 

몰아치는 눈보라와 꽁꽁 얼어붙은 강 위를 걸어 건너는 건 전부 내가 페테르부르크에 살 때 실제로 겪었던 일들이다. 다행히 나는 강물에 빠지진 않았지만...

 

물론 엔진이 얼어 차가 멈춘 것도 마찬가지인데, 내 경우는 전차였다. 영하 30도로 내려간 날 낡은 전차가 중간에 멈춰버렸고 승객들은 아무런 환불도 받지 못한 채 내려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정류장에서 다음 차를 기다렸지만, 너무너무 추워서 도저히 기다릴 엄두가 안 났기 때문에 나와 친구는 기숙사까지 걸어서 돌아갔다. 그러다 중간에 버스가 와서 탔던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무지무지 추웠었다.

 

이번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페테르부르크도 추운 곳이라 겨울이 되면 네바 강이 꽁꽁 얼어서 그 위로 사람들이 걸어다닌다. 예전에는 썰매도 탔었다. 이 도시는 바다도 얼어붙는다. 그 얘기는 전에 Petersburg diary 폴더에 '얼어붙은 바다 위에서' 란 제목으로 올린 적 있다. 궁금하신 분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716

 

네바 강에 가면 '얼음 위로 걸어다니지 마시오!'라는 표지판이 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참 꿋꿋하게 그 위로 잘도 걸어가닌다. 나도 옛날에 새해 즈음 친구랑 네바 강 걸어서 건넜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온통 새하얗게 얼어붙은 네바 강의 빙원 너머로 불덩어리처럼 새빨갛게 이글거리는 태양이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내 인생에서 가장 환상적인 장면 중 하나다.

 

하여튼 얼어붙은 강 위를 건너는 건 위험하다! 베르닌과 왕재수처럼 풍덩 빠질 수도 있으니 다들 주의하세요!!

 

가브릴로프야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소도시이지만, 그래도 이 9편의 배경 사진 몇 장을 따로 올렸다.

왕재수의 고향이자 출신 도시인 레닌그라드, 현재 이름 페테르부르크의 얼어붙은 네바 강과 그 위를 건너는 사람들, 그리고 깨진 얼음 사진.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25

 

생각해보니 얼어붙은 강 위를 건너는 사람들 사진은 며칠 전 페테르부르크에 있을 때도 올렸다. 그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08

 

.. 여기 등장하는 노의사 레프 스타브로프는 본편에도 등장한다. 나름대로 중요 인물이다 :)

 

이야기는 10편으로 이어진다. 그건 주말이나 다음주 초에...

 

 

:
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