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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2.15 맑고 파란 겨울 낮의 페테르부르크, 2월 15일 사진 몇 장 4
  2. 2015.02.15 예약 포스팅 02 : 소련 아이스크림 광고 포스터 4
  3. 2015.02.15 오랜만에 겨울의 페테르부르크, 2월 14일 낮 8
  4. 2015.02.14 긴 여정 끝에 숙소 무사 도착 :) 2
  5. 2015.02.14 모스크바 공항에서 기다리는 중 4
  6. 2015.02.11 서무의 슬픔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26
  7. 2015.02.10 고스찌의 꿀케익 메도빅 8
  8. 2015.02.09 Happy Birthday, Vladimir! + 득남 축하 :) 7
  9. 2015.02.07 서무의 슬픔 #7. 보고서의 악몽 22
  10. 2015.02.06 발레의 여름, 그리보예도프 운하 지나가다가 4
  11. 2015.02.05 속상하니 슈클랴로프 사진이나 하나 더 올리자 2
  12. 2015.02.05 예쁜 사진들로 눈 정화 : 티포트, 소녀, 콘다우로바, 비슈네바, 슈클랴로프 4
  13. 2015.02.04 서무의 슬픔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21
  14. 2015.02.03 초록 머리, 검정 머리 2
  15. 2015.02.02 황금 독수리들
  16. 2015.02.01 발레 화보 : 로파트키나, 비슈네바, 슈클랴로프, 테료쉬키나, 콘다우로바
  17. 2015.01.31 서무의 슬픔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12
  18. 2015.01.28 모든 메뉴 40% 할인이래요 2
  19. 2015.01.27 서무의 슬픔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쿠키 사진 몇 개) 20
  20. 2015.01.25 빛바랜 페테르부르크 사진들 몇 장 2
  21. 2015.01.23 서무의 슬픔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13
  22. 2015.01.22 연말정산 패러디 드라마 : 토끼의 비극 (부제 : 쿠마와 유리지갑의 망령들) 16
  23. 2015.01.22 휙 지나가는 마차 2
  24. 2015.01.21 잘 보면 보인다 2
  25. 2015.01.20 서무의 슬픔 #2. 당직실의 귀신 10

 

 

어젠 하루종일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흐렸지만 오늘은 추운 대신 하늘이 쨍하고 파랬고 햇살이 눈부셨다. 러시아인들이 좋아하는 찬란한 겨울 날씨였다. 나도 좋아하는 날씨긴 한데... 어제 눈 맞으며 다닌데다 여독이 겹쳐서 감기 기운이 심해서 내가 배숙 만들어먹어야 할 신세가 되었음 ㅠㅠ

 

어쨌든 날씨가 너무 아까워서(아는 사람은 다 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이런 날씨 만나면 무조건 산책하러 가야 한다... 언제 또 흐려질지 모름) 마린스키 극장 쪽부터 모이카 운하 따라 쭉 걸어서 이삭 성당, 해군성 앞, 청동기마상, 네바 강변 쪽 산책. 료샤가 차를 가져와서 중간중간 좀 타긴 했다만... 고마워 친구야 ㅠㅠ

 

료샤랑 레냐랑 놀다가 난 잠깐 숙소에 들어왔다. 7시에 미하일로프스키 극장에서 라 바야데르 봐야 해서 옷도 갈아입고 겸사겸사. 감기 기운도 심하고 새벽에 몸이 안 좋아서 오늘은 계속계속 많이 먹고 꿀도 엄청 먹고 있음. 레냐가 나에게 빨간 머리에서 갈색 머리가 되었다고 좋아함(왜 좋아하지? ㅋㅋ) 료샤는 검은 머리로 돌아오라고 아우성..

 

여튼, 오늘의 사진 몇 장.

 

맨 위 사진은 마린스키 극장 근처의 레스토랑 '사드코'의 창문.

 

 

 

꽝꽝 얼어붙은 모이카 운하

 

 

네바 강변 따라 산책하다가...

페테르부르크의 상징물들이 다 모였다. 쿤스트카메라, 등대, 궁전교각,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 첨탑. 그리고 얼어붙은 네바 강. 그나마 가운데는 많이 녹았다.

 

 

그리고 역시 이 도시의 상징 중 하나. 청동사자상 :) 금방이라도 네바 강 너머로 돌진할 것 같네~

 

.. 그럼 난 이제 옷 갈아입고.. 뜨거운 국물 좀 먹고... 극장으로... 미하일로프스키 라 바야데르는 그저 그랬는데.. 꽃미남인 빅토르 레베제프의 솔로르를 건지기를 기원하며...

 

.. 예약 포스팅은 계속 아침 8시에 올라간다. 내일은 서무의 슬픔 시리즈 번외편 :)

 

:
Posted by liontamer

 

 

2월 15일. 예약 포스팅 02.

여행 가거나 출장으로 자리 비울 때 나의 예약 포스팅에 빠지지 않는 것. 바로 소련 시절 광고 포스터 :)

아이스크림 광고다. 위에는 영어로도 씌어 있다.

펭귄 그림 아래 씌어 있는 건 '아이스크림 사세요~'

그 아래는 '소련제 = 끝내줌!!'

 

:
Posted by liontamer

 

 

 

여기 시각으로 어젯밤 11시 좀 넘어 페테르부르크의 숙소 도착. 한국 시각으론 오늘 새벽.

피로가 너무 쌓여서 하루종일 몽롱했다. 기온은 영하 1도, 체감온도는 영하 6~7도 쯤. 내내 진눈깨비 흩날림.

 

오늘은 숙소 근처인 예술광장부터 시작해 그리보예도프 운하,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앞, 미하일로프스키 공원, 마르스 광장, 그리보예도프와 모이카 운하변, 궁전광장 쪽을 산책한 후 네프스키 대로를 따라 돌아옴.

 

너무 피곤해서 한시간 가량 자고 일어났다.

 

곧 미하일로프스키 극장에 토스카 보러 나간다. 직전에 오늘 산책 때 찍은 사진 몇 장만..

 

 

 

 

 

 

 

 

:
Posted by liontamer
2015. 2. 14. 05:23

긴 여정 끝에 숙소 무사 도착 :) russia2015. 2. 14. 05:23









잘 도착. 경유 때문에 너무 피곤하다. 짐 풀고 씻고 자야겠다. 겨울의 페테르부르크 소식은 내일!






근데 과일바구니 보니 배고프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
Posted by liontamer
2015. 2. 14. 01:16

모스크바 공항에서 기다리는 중 russia2015. 2. 14. 01:16





모스크바 공항에서 한시간 후 뜰 페테르부르크행 비행기 기다리는 중. 너무 졸리고 피곤 =.= 역시 경유는 힘들어.






기력 차리려고 식당에서 아주 진한 차 한잔과 시큼한 치즈크림 맛이 강한 메도빅 먹고 이제 게이트 앞에 와서 앉아 있음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에 창 너머로 찍은 아에로플롯 비행기


..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구나..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
Posted by liontamer

이번 주는 금요일에 잠시 여행을 떠나기 때문에, 수요일에 서무의 슬픔 시리즈 8편을 먼저 올려본다. 전에 writing 폴더에 따로 올렸던 부활절 단편 Jewels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기념일 픽션이다. 바로 새해 전야 :) 이 글을 쓴 시점도 12월 말이었다.  

 

러시아도 새해가 큰 명절이다. 노어로는 ‘노브이 고드’라고 하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는 ‘스 노브임 고돔’(С НОВЫМ ГОДОМ!)이다. 12월 31일 밤에는 전통적으로 가족들이나 친구들, 연인들끼리 모여 텔레비전으로 0시 종 치는 것을 보고 종 치는 순간 샴페인을 쨍 하고 부딪치며 ‘스 노브임 고돔~’을 외친다.  

 

아주 오래 전, 맨 처음 러시아에 가서 연수할 때 기숙사에서 새해를 맞았는데, 그때 유학생들끼리 모여서 저렇게 샴페인 따고 놀았다. 굉장히 재미있었고 아직도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 

 

그런데 우리의 단추 베르닌은 과연 어떻게 새해를 맞이할 것인가.. 새해엔 원래 애인이랑 샴페인도 따고 찐하게 키스도 해야 하는데... 해답은 이번 에피소드에~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하루하루 시간은 지나가고, 드디어 업무에 찌든 베르닌에게도 숨 쉴 틈이 생겼으니 그것은 바로 신년 휴가! 그러나 잠시라도 집사를 가만 놔두지 않는 주인어른 왕재수께서는 새해 전야에도 그를 호출하였으니...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러시아에서는 서양식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이 아니라 정교식인 1월 7일을 성탄절로 지낸다. 물론 소련 시절엔 정교 신앙에 대한 탄압이 있어 대놓고 즐기지는 않았겠지만. 호두까기 인형도 그래서 연말 메뉴이다. 마린스키(소련 시절 키로프)에서도 호두까기 인형 시즌이 되면 바가노바 발레학교 학생들이 무대에 오른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촌동네 시립극장 예술감독이 되어버려 모든 게 성에 안 차는 왕재수가 발레단을 다잡아가며 새해 전야에 호두까기 인형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 무대와 무용수들에 대해 왕재수가 하는 얘기는 본편의 미샤와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만.. 하여튼~ 본편의 미샤는 보통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

 

** 여기 등장하는 만두는 러시아식 만두인 '펠메니'이다. 펠메니에는 만두소라든지 피의 모양에 따라 종류가 여러 가지 있는데 공장 만두를 많이 먹긴 하지만 역시 직접 빚은 게 더 맛있긴 하다.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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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8 

 

 

 

서무의 슬픔

-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12월 31일이었고 가브릴로프 역시 여느 소련 도시와 다름없이 축제 분위기였다. 광장에는 거대한 트리가 세워졌고 너도나도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과 0시 종 울리는 걸 보면서 샴페인 잔을 부딪칠 생각에 들떴다.

 

몇 년 째 솔로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다닐 베르닌이 이 날을 고대했던 이유는 지극히 단순했다. 12일간의 신년 휴가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31일에 종무식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직행해서 밀린 잠을 자고 사흘쯤은 집에 콕 박혀서 뒹굴면서 텔레비전이나 보다가 심심해지면 즐라타야 강가에 얼음낚시나 가고 또 심심하면 썰매나 타러 가야지 하며 설렜다. 12일 동안 지긋지긋한 서류 업무도, 각종 서무의 잡일도 할 필요가 없고 끔찍한 스페호프 국장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자 훨훨 날아오를 것 같았다.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아무 생각 없이 빈둥거리며 실컷 놀아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종무식은 1시간가량 지속되었다. 대부분은 인사말 하기 좋아하는 스페호프 국장의 설교 때문이었다. 국장의 연설이 계속되자 직원들 태반은 설마 저 인간이 저녁까지 우리를 붙잡아 놓으려나 하고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스페호프는 가족들과 함께 흑해로 여행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고 11시에 연설을 마쳤다. 다들 신나게 강당을 뛰쳐나갔다. 총괄 서무라는 이유로 베르닌이 강당을 정리하고 있는데 국장이 곁으로 다가왔다.

 

“ 어,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 그래, 자네도 복 많이 받게. 신년에는 좀 빠릿빠릿한 직원이 되어 보게. 그리고 행정의 기본도 잘 연마해서 타의모범이 되길 바라네. ”

 

“ 예... ”

 

“ 참, 자네 휴가라고 주어진 일을 등한시하면 안 되네. ”

 

“ 예? 주어진 일이라뇨? 보고서들은 모두 마쳤고 사무실 달력들도 모두 바꿔놓았고 업무추진비 정산도 며칠 전 다 끝냈고 서류철들도 신년용으로 싹 바꿔서 제목도 다 써놓았고 주차장 전구 나간 것도 다 갈아놨고... ”

 

그런 거 말고! 자네 본연의 업무 말이야!

 

“ 제 본연의 업무는... 저, 서무 업무는 다 했는데... ”

 

“ 자네 감시분석부 소속 아닌가? 그 불여우!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휴가 동안에도 그놈 감시는 철저히 해야 해. 매일 그놈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혹시라도 수상한 짓을 하는 경우 당장 흑해로 장거리 전화를 하게. 내가 비행기를 타고라도 날아올 테니! 뭐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어차피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도 하는 사이니 휴가 때도 계속 같이 뒹굴 테고... 에이 찝찝해. 사내 녀석이랑... ”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새해 휴가라고요! 전 그 자식의 집사도 아니고 경호원도 아닙니다! 새해에도 그 자식 뒤치다꺼리를 하고 보고서까지 매일 쓰라니요... 제발 새해에는 업무분장을 좀 바꿔주시면 안됩니까? 저는 서무 업무만으로도 일이 넘쳐납니다. 거기에 부서 업무에 자료작성 업무까지... 그 와중에 걜 감시까지 해야 하니 퇴근해서도 쉴 시간이 전혀 없어요. 내년이면 저도 3년차가 되니 제발... 저도 더 이상 신입직원이 아니잖아요. 아니면 서무 업무라도 제외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

 

“ 이게 웬 헛소리람. 그건 모두 자네가 당연히 해야 할 업무야! 자네의 주무는 감시업무야! 감시부서에 소속되어 있으니 당연하지. 서무란 당연히 해야 하는 부수적인 업무에 불과해! 자네가 아직 기본이 부족해서 부업무에 매달려 쩔쩔 매는 것뿐이지! 그리고 내년 예산도 동결, 우리 정원도 동결이기 때문에 향후 일 년 간 공채 모집은 없을 예정이네. 그러니까 자네는 계속 막내 직원이고 당연히 서무는 계속 맡아야 해. 겨우 3년차가 된다고 벌써부터 군기가 빠져가지고... 10년 20년 다니고 있는 선배들을 생각해보게! 어디 그깟 3년 가지고 명함을 내밀어. 내 말 명심하게! 그 불여우에 대해서는 뒹굴고 놀지만 말고 제대로 된 보고서를 써 내도록! 그럼 난 이만 가네, 비행기 시간이 다가와서. ”

  

 

*    *    *

 

무척 화가 났지만 어쨌든 국장의 명령을 어길 만큼 배짱이 좋지는 못한 베르닌은 할 수 없이 저녁에 극장으로 갔다. 망할 놈의 왕재수는 하필 극장 예술감독이었던 탓에 일 년의 마지막 밤에도 공연을 지휘하고 있었다. 연말 단골메뉴인 호두까기 인형이었다. 극장은 가족들과 어린아이들로 미어터졌다. 게다가 송년 공연이랍시고 로비에는 커다랗고 화려한 트리가 세워지고 쿠키와 사탕들이 가득 담긴 접시들이 좍 늘어서 있어 어린애들의 꺅꺅거리는 소리와 과자를 잡아채다 싸우고 우는 소리가 어우러져 시장통 같았다.

 

공연 시작 30분 전에 백스테이지로 가보니 왕재수가 스태프들과 무용수들을 역시나 쥐 잡듯 잡고 있었다. 조명 감독을 들들 볶은 후 이번에는 무대 효과 담당자를 닦달했다.

 

“ 드라이아이스를 그쪽에서 투입하면 연기가 무용수들 얼굴을 다 가리잖아! 무슨 램프의 요정이냐? 이건 호두까기야. 눈송이 요정들이란 말이야! 안개는 많이 필요 없어! 대신 눈을 잘 뿌려야 할 거 아냐! 누가 그렇게 뿌리래! 무대 전체에서 이렇게 방사형으로 쏟아져야 관객석에서 볼 때 더 화려하고 예뻐 보이지!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많이 들이부으면 무용수 얼굴을 다 가리잖아! 으아, 정말 생각 좀 하면서 해! 기계적으로 드라이아이스 던져 넣고 스프레이로 눈 뿌려대지 말고!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려보란 말이야! 발레가 뭐야, 특히 호두까기! 첫째도 예뻐야 하고 둘째도 예뻐야 해! 아이들이 보고 ‘우와 환상적이다!’ 하고 감탄해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바로 그거야! 있다가 공연할 때도 그 방향으로 뿌려야 해. ”

 

간신히 합격한 무대 스태프가 식은땀을 닦으며 물러서기가 무섭게 왕재수는 이번에는 주역 무용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너! 왕자! 그게 왕자의 몸놀림이냐? 하나도 안 멋있잖아. 엉거주춤한 게 어디 새우잡이 어선에서 그물 치다 온 놈 같잖아! 누가 피루엣 하다가 그렇게 휘청거리래. 중심 못 잡아? 그리고 여자 똑바로 못 들어? 허리를 제대로 못 받쳐주니까 여자 다리가 처지잖아! ”

 

눈물 쏙 빠지게 혼나던 왕자 역의 빅토르가 자기 파트너 레나를 가리키며 미약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 저, 그게요... 얘가 요즘 실연당하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너무 많이 먹어서 잔뜩 쪘다고요. 가뜩이나 큰 앤데 이제 너무 무거워서 똑바로 들기가 힘들어요. 제 잘못이 아니에요. 얘가 다이어트를 안 해서... ”

 

베르닌이 봐도 여주인공 레나가 통통하고 키와 체격이 크긴 했다. 자존심이 상한 발레리나가 막 손톱을 세우고 덤벼들기 직전 왕재수가 빅토르의 뒤통수를 찰싹 내리쳤다.

 

시끄러워! 어디서 핑계야! 2인무는 무조건 사내놈 책임이야! 파트너가 40킬로든 100킬로든 상관없어, 사내놈이 잘 들어주고 돌려주면 되는 거야! 그깟 몸무게가 뭐가 중요해! 무대 위에서 여자 파트너는 무조건 공주야, 무조건 네가 푹 빠진 상대라고! 반하면 무슨 짓을 못해, 한 손으로도 들고 펄쩍펄쩍 뛰어야지! 한번만 더 여자 핑계 대봐, 확 잘라버릴 거야!

 

빅토르는 너무나 억울했는지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하소연했다.

 

“ 알겠어요, 감독님. 알겠는데요... 근데 진짜 감독님은 몰라서 그래요. 감독님은 천재라서 제일 좋은 극장에서 실력도 최고 좋은 여자들하고만 췄잖아요. 파트너들도 다 엄청 날씬하고 하늘하늘했잖아요. 쟤는 차원이 다르다고요. 최소 60킬로는 너끈히 넘겨요. 지금은 감독님보다도 더 나갈지도 몰라요... 저 너무 억울해요. 감독님도 쟤랑 춰보면 그런 말 안 나올 거라고요... 한번 들어 올릴 때마다 허리가 부러지는 것 같아요. ”

 

“ 미치겠네. 이 멍충이. 아, 이래서 시골은 답이 없다니까. 파트너 몸무게가 중요한 게 아니고 네 녀석이 못 춰서 그런 거라니까! 어휴... 이거 봐봐! ”

 

화가 나서 날뛰던 왕재수가 한두 번 몸을 풀더니 갑자기 레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다리를 쫙 편 레나의 허리를 가볍게 받치고 빙글빙글 돌았다. 베르닌은 그 유연하고 우아한 동작에 깜짝 놀랐다. 빅토르의 말대로 레나는 거의 왕재수만한 키에 체격은 더 튼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왕재수는 그 덩치 큰 레나를 한손으로도 받치고 펄쩍 뛰었다.

 

순식간에 두 눈이 하트로 가득 찬 레나를 내려놓고 왕재수가 빅토르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할 말이 없어진 빅토르는 쭈뼛거리며 사과를 했다.

 

“ 저... 제가 잘못했어요. 근데 진짜 잘 추시네요. 그냥 저 대신 무대 올라가시면 안 될까요. 레나도 그쪽이 더 좋을 것 같은데. ”

 

“ 이게 어디서 사보타지야! 송년 무대에서 왕자 추는 게 얼마나 영광인 줄 몰라? 나도 맘 같아선 갈아치우고 싶네! 내가 추든가. 어휴... ”

 

왕재수가 빅토르의 자세를 교정해주는 동안 베르닌은 뒤에서 스태프들과 다른 무용수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유심히 듣고 수첩에 적었다. 생각 외로 욕설이 아니라 감탄이었다. 알고 보니 지난 체육대회 이후 왕재수의 팬들이 많이 생긴 모양이었다. 남자들은 단순했기 때문에 왕재수가 신체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에 어쨌든 감독 자리를 그냥 꿰찬 건 아니라고 인정하기 시작했고 여자들은 그저 그의 미모를 흠모하고 또 흠모할 뿐이었다.

 

기적적으로 빅토르가 레나를 똑바로 들 수 있게 되자 왕재수는 이제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갔다. 박자가 어떻고 무용수 솔로가 어떻고 하며 기관총처럼 지시를 쏟아냈다. 지휘자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었고 단원들은 입을 벌린 채 괴로워했다. 그리고 성깔 더럽지만 어쨌든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인 코즐로프는 왕재수가 무슨 말을 해도 귀엽다는 듯 만면에 웃음을 띠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왕재수의 화살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로만! 마지막 왕자 솔로 때 그렇게 축축 늘어지게 연주할 거야? 꼭 장송곡 같잖아. 30% 정도 빠르게! ”

 

코즐로프는 혀끝까지 ‘아이구 우리 귀염둥이 비둘기야~ 30%고 50%고 네가 원한다면 전부 해 주마~’ 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동료들 시선 때문에 꾹 참고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겨우 모든 지시를 마치고 공연 시작 10분 전이 되자 왕재수가 한숨을 쉬며 복도로 나오더니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러더니 베르닌을 발견했다. 눈을 반짝 빛냈다.

 

“ 아, 너도 공연 보러 왔구나? 자리 어디야? ”

 

“ 어, 나 자리 없어. 표 살 시간이 없었거든. 난 그냥 너 감시...

 

“ 2층 로열박스에 자리 하나 남아. 거기 가서 봐. ”

 

“ 아니, 그렇게 안 해줘도... 그리고 거긴 엄청 좋은 자리... 우리 국장 같은 사람이나 앉는... ”

 

흥, 너네 국장이 발레가 뭔지 알기나 한대? 내가 감독이니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오늘 공연 괜찮을 거야. 우리 애들 전보단 훨씬 잘 추거든. ”

 

“ 아까 보니까 빅토르를 쥐 잡듯이... ”

 

“ 혼내야 실력이 늘지. 기본기가 너무 안 돼 있다니까. 여자 몸무게 타령이나 하고. 진짜 촌스러워. 자, 이 표 가져가. 끝나고 나 태워다 줄 거지? ”

 

내가 꼭 태워다 줘야 돼? 오늘 밤 바이올린 아저씨랑 같이 보낼 거 아냐? ”

 

“ 로만은 오케스트라 애들이랑 뒤풀이하고 열한 시 반에 오기로 했어. 그리고 나 끝나자마자 집으로 빨리 가야 돼. 아홉시에 끝나고 곧장 갈게 시동 걸어놔. 알았지? ”

 

“ 어. 알았어. ”

 

베르닌은 왕재수가 쥐어준 표를 들고 로열박스로 갔다. 2층 맨 앞 가운데의 아주 좋은 자리였다. 그는 발레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어쨌든 음악도 좋았고 무대도 예쁘고 화려해서 두 시간 가까이 재미있게 공연을 보았다. 눈송이 요정들이 나올 때 드라이아이스 안개도 적당했고 인공 눈도 방사형으로 예쁘게 뿌려졌다. 2막에서 빅토르는 레나를 잘 들어 올렸고 왕자 솔로를 출 때 음악도 빠르고 흥겨웠다. 이 정도면 까다로운 왕재수가 만족했으려나 싶었다.

 

 

*   *   *

   

왕재수는 평소 공연이 끝난 후에도 스태프들과 무용수들에게 그날의 코멘트를 하고 앞으로 고칠 사항을 지적하느라 늦게 내려오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정말 아홉시에 주차장으로 왔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은 공연을 보고 나온 관객들도 주차장으로 몰리는 때란 거였다. 왕재수를 발견한 여자 관객들이 꺅꺅 소리를 지르며 사인을 해달라고 몰려들었다.

 

“ 어머, 대박이야! 실물이 더 잘생겼어! ”

 

“ 아유, 진짜 꽃미남이네! 꺅! ”

 

“ 나 오빠 팬이에요! 옛날부터 좋아했어요! 왜 우리 무대엔 안 올라와요? 꺄아악, 결혼해 줘요! ”

 

“ 어머어머, 속눈썹이 나보다 더 길어! 피부에서 빛이 나! ”

 

왕재수는 처음에는 짜증을 꾹 눌러 참고 보통 렐랴에게 지어주곤 하던 영업용 미소와 함께 사인을 해주었다. 그러나 소문을 듣고 더 몰려온 여자들에게 둘러싸여서 급기야 머리카락도 뜯기고 기습 포옹과 키스 등 격렬한 스킨십을 당하기 시작하자 비명을 지르며 베르닌을 찾았다.

 

“ 다닐, 나 좀 구해줘! 제발 살려줘! ”

 

베르닌은 가만히 있으려고 했지만 왕재수가 너무 애절하게 그를 찾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차 문을 열고 나갔다. 보안위원회 신분증을 쳐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 KGB입니다! 다들 해산! 안 그러면 불법집회와 폭행죄로 체포할 겁니다! ”

 

사람들이 깜짝 놀라 홍해처럼 갈라졌다. 그 틈에 베르닌은 왕재수를 낚아채서 차로 데리고 갔다. 막 문을 닫는데 바깥에서 성이 난 여자들이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주로 예술가를 탄압하는 스탈린주의자니, 더러운 KGB 스파이니 하는 내용이었다. 베르닌은 무척 억울했지만 어쨌든 차를 출발시켰다.

 

“ 야, 너 괜찮아? ”

 

“ 헉헉... 잊고 있었어, 여자들 무서운 거. 죽는 줄 알았네. ”

 

왕재수가 사색이 된 얼굴로 거울을 보면서 까치집이 된 머리를 매만지고 구겨진 스카프와 코트를 바로잡았다. 손수건을 꺼내 얼굴 여기저기 찍혀 있는 립스틱 자국을 지웠다.

 

“ 야, 뒷목덜미에도 있어. ”

 

“ 으, 소름끼쳐. 정말 예쁜 것도 죄라니까. ”

 

“ 소름끼쳐? 나 같으면 은근히 기분 좋을 거 같은데. 다 네 팬들이고... 아까 보니까 예쁜 여자들도 많던데. ”

 

“ 예쁜 여자가 나한테 무슨 소용... 너 속도 좀 더 내면 안 돼? ”

 

“ 더 올리면 속도위반인데. ”

 

“ 나 빨리 가야 돼. 시간 없어. ”

 

“ 왜? 바이올린 아저씬 늦게 온다며. ”

 

“ 그래봤자 두 시간밖에 없는데... 아, 미치겠네. 너 나 좀 도와줘. ”

 

“ 뭘 도와줘? ”

 

“ 만두... ”

 

“ 웬 만두? 펠메니? ”

 

“ 응. 나 만두 만들어야 돼. ”

 

“ 아, 너 새해 음식 준비하는 거구나. 맞아, 우리 동네는 새해 되면 만두 먹어. 나도 어릴 때 31일에 온 가족이 모여서 만두 빚고 설날 되면 쪄서 먹고 수프에도 넣어 먹고... ”

 

“ 에잇, 망할 놈의 시골... 왜 하필이면 만두를 먹는 거야... 그냥 샌드위치나 먹으면 될 것을. 에잇... ”

 

“ 야, 너 지금 우리 동네 전통 무시해? 그 잘난 레닌그라드에서는 샌드위치 쪼가리나 먹나보지? ”

 

“ 아니, 우리도 가끔 만두 먹긴 했는데. 난 만들어먹은 적은 없단 말이야. 남들이 나한테 해다 바쳤지... 아, 왜 만두야. 아 머리 아파... ”

 

“ 그냥 사다 먹어. 요즘은 만드는 집 별로 없을 걸. 하긴 지금은 가게 문 다 닫았겠다. 우리 집 냉동실에 전에 사먹고 남은 거 반 봉지쯤 있는데 먹고 싶다면 줄게. ”

 

“ 공장에서 나온 만두는 안 돼. 아아... ”

 

“ 왜 이렇게 까다롭니. 전에는 그거 삶아줘도 잘만 먹더니. ”

 

“ 로만이... 너랑 비슷한 말을 하면서... 자기 어릴 때 온 가족이 모여앉아 만두 빚고... 텔레비전으로 0시 종 치는 거 보면서 샴페인 건배할 때 자기는 반죽 갖고 놀고... 종 치고 나면 엄마가 만두 쪄줬다고. 그때 너무 좋아서 자기는 어른 되면 꼭 만두를 잘 빚어주는 여자랑 결혼해야겠다고 다짐했다잖아.

 

“ 그 바이올린 아저씨 의외로 소박하네. 근데 그 인간은 여자 안 좋아하잖아. 결혼은 무슨. ”

 

“ 그게... 정체성을 자각하면서 여자랑 결혼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어졌는데 만두를 잘 빚어주는 파트너에 대한 깊은 로망은 남았대... ”

 

“ 젠장, 가부장주의 깡패 같으니. 만두를 잘 빚어야 한다고 하질 않나. 엄청 날씬하고 어린 애를 밝히지 않나. 진짜 재수 없네. ”

 

“ 너 지금 로만 헐뜯는 거야? ”

 

“ 그렇잖아! 깡패 아저씨 주제에. 그냥 내 냉동만두 가져가서 삶아줘. 네가 빚었다고 하면 되잖아. ”

 

“ 근데 로만이 엄청 눈썰미가 좋거든. 눈치도 빠르고. 공장 만두인 거 금방 알아챌 거야. 간신히 내 미모로 묶어놨는데 만두 못 빚는다고 버림받긴 싫단 말이야. ”

 

“ 그깟 만두 못 빚었다고 버릴 놈이라면 애초부터 헤어지는 게 낫지! ”

 

“ 싫어. 내가 그랬잖아, 로만이 잠자리가 진짜 끝내준다니까. 버림받기 싫단 말이야. 근데 나 요리 하나도 못하는 거 알잖아. 여태 남이 해준 것만 먹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니. 어제 요리책도 샀는데 아무리 봐도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 만두는 심지어 반죽도 해야 되고 소인지 뭔지도 만들어야 된다 하고... 제발 좀 도와줘. 안 그러면 나 정말 큰일이야. ”

 

왕재수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베르닌을 바라보면서 사슴 같은 눈망울을 깜박깜박했다. 속눈썹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 야, 울지 마! 알았어. 나도 만두 안 빚어봤지만... 하여튼 뭐 어렵겠냐. 그냥 밀가루 반죽해서 밀고 고기 간 거 넣으면 되겠지 뭐. 재료는 있어? ”

 

“ 응. 요리책에 나온 거 어제 다 사다 놨어. ”

 

“ 만두 빚는 것만 도와준다! 삶는 건 네가 해! ”

 

“ 삶으면 안 돼. 쪄야 된대.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지만. 찌는 것까지 도와줘. 응? ”

 

“ 싫어, 0시 종 치는 것까지 너랑 보고 싶진 않단 말이야. 그것도 그 바이올린 깡패까지 같이 있는 자리에서! ”

 

“ 0시 종 치기 전에 찌는 것까지 다 끝내면 되잖아. 제발 좀 도와줘. 너 요리 잘 하잖아. 여기서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네가 제일 잘 한단 말이야. ”

 

“ 흠흠... 내가 자취를 오래 해서 요리를 좀 하긴 하지. 그래, 그깟 만두 뭐가 어렵겠어. 해줄게! 해줄 테니까 제발 속눈썹 좀 그렇게 깜박거리지 마. 내 눈이 다 시큰거려. ”

 

“ 이상하다, 안 통하네... ”

 

“ 당연하지! 난 사내자식 수작에 안 넘어가! 그런 건 바이올린 아저씨한테나 하란 말이야! ”

 

“ 칫. ”

 

 

*    *    *

  

 

베르닌은 먼저 냉장고를 살폈다. 재료는 모두 있었다. 혹시나 해서 요리책을 펼쳐보고 순서를 훑었다.

 

“ 야, 너 반죽할래, 아니면 만두소 만들래? ”

 

“ 나 둘 다 할 줄 몰라. ”

 

“ 시간이 없으니까 동시에 해야 되는데. 너 칼질 할 줄 알아? ”

 

“ 아니, 못해. 사과도 못 깎아. 무용수는 함부로 칼 같은 거 손대면 안 돼. 흉터 생기면 큰일난단 말이야. ”

 

“ 어련하겠냐. 그럼 반죽해. 양파 썰고 고기소 만드는 건 내가 할 테니까. ”

 

“ 반죽 어떻게 해야 돼? ”

 

“ 거기 밀가루 두 컵 넣고, 물 넣어가면서 반죽하면 돼. ”

 

왕재수가 커다란 사발에 밀가루와 물을 부어 반죽을 하는 동안 베르닌은 현란한 칼솜씨를 발휘해 양파를 다지고 갈아놓은 고기의 핏물을 뺀 후 조금 더 곱게 다졌다. 막 양파와 고기를 섞고 있는데 왕재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 이거 반죽 맞아? 왜 자꾸 죽처럼 되지? ”

 

으악, 너 물 얼마나 넣은 거야!

 

“ 어... 이만큼... ”

 

왕재수가 바가지를 보여주었다. 족히 밀가루 양의 두 배는 될 것 같았다. 베르닌은 기절초풍했다. 사발은 밀가루 풀어놓은 물로 가득했다.

 

“ 이 바보야, 밀가루가 무슨 분유나 코코아인 줄 아니? 수프 끓일 것도 아닌데 물을 이렇게 많이 넣으면 어떡해! ”

 

“ 네가 밀가루 두 컵이라고만 하고 물은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말 안 해줬잖아... ”

 

“ 에휴... ”

 

베르닌은 사발을 밀어놓고 새 그릇에 다시 밀가루를 두 컵 쏟았다.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농도를 맞췄다. 손으로 조물조물 반죽을 했고 살짝 묽은 것 같아 밀가루를 약간 더 넣었다. 마침내 완벽한 반죽이 되었다. 왕재수는 감탄했다.

 

“ 우와, 반죽이다! 아이 신기해. ”

 

“ 시간 없으니까 빨리 만두피 만들어. 일단 내가 반죽 밀어줄게. ”

 

“ 어떻게 만들어야 돼? ”

 

“ 이렇게 조금씩 떼어서 동그랗게 만든 다음에 눌러서 얇게 펴는 거야. 만들고 있어. 만두소 완성하고 양념 좀 하게. ”

 

“ 응. 신난다. ”

 

베르닌은 열심히 고기와 양파를 섞고 소금과 후추를 뿌려 양념을 했다. 면보에 싸서 수분을 쫙 빼냈다. 대충 소를 완성한 후 만두피가 몇 개나 되는지 돌아봤다가 또 기절초풍했다.

 

“ 악, 만두피를 이렇게 다닥다닥 쌓으면 어떡해! "

 

“ 왜? 차곡차곡 쌓아놔야 순서대로 고기 넣기도 편하고... ”

 

“ 어휴... 다 달라붙어서 못 떼잖아... 밀가루도 중간 중간 뿌려줘야 안 달라붙는 건데... ”

 

“ 네가 말 안 해줬잖아... 밀가루는 반죽할 때 두 컵 넣으랬는데 지금은 또 중간 중간 뿌리래. 어려워. 어헝...

 

왕재수가 울먹거렸다. 야단맞은 것 때문이라기보다는 베르닌이 만두피들을 들어 올리자 모두 찰싹 달라붙어 있는데다 떼어내려고 하면 좍좍 찢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그런 것 같았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면서 만두피들을 도로 뭉쳐서 반죽 덩어리로 만들었다.

 

“ 울면 뭐하니, 다시 만들자. 나랑 같이 하면 빨리 할 수 있을 거야. ”

 

“ 으응... 흑흑... 만두 너무 어렵다. 로만은 왜 만두 빚는 파트너를 원하는 거야... 침대에서만 잘해주면 되지 어째서... ”

 

“ 그 아저씨 옛날 사람이라서 그래. 원래 우리 동네가 좀 보수적이거든. 현모양처 스타일 여자가 인기 많아. 렐랴가 왜 인기 많겠냐. 얼굴도 예쁘지만 살림도 잘하고 요리도 잘해서... ”

 

난 여자가 아니야! 사내잖아! 내가 왜 현모양처처럼 돼야 해. 얼굴 예쁘고 허벅지 두툼해서 밤일 잘하면 됐지 왜... 아아, 로만 너무해. ”

 

“ 종알대지 말고 빨랑 만두피나 만들어. 그 깡패 열한시 반에 온다며! ”

 

“ 압. ”

 

베르닌은 열심히 만두피를 만들었다. 왕재수도 열심히 만들었다. 만두피가 도로 달라붙을까봐 겁이 났는지 밀가루를 너무 많이 뿌려서 저지해야 했다.

 

“ 30개만 하자. 너네 둘이 먹을 거면 충분하겠지. ”

 

“ 로만은 덩치가 커서 많이 먹는데. 그리고 너도 먹어야지. ”

 

“ 난 너네랑 같이 안 있을 거라니까! ”

 

“ 그래도 같이 만들어놓고 너 안 먹으면 어떡해. 싸가서라도 먹어야지. 50개 만들자. ”

 

“ 조그만 게 손은 또 왜 그렇게 크담. 40개만 해, 그럼. ”

 

만두피를 다 만든 후 베르닌은 고기소가 담긴 그릇을 가져왔다.

 

“ 이제 만두 빚는 거야. 피를 이렇게 오목하게 해서 가운데 소를 넣고 이렇게 조물조물 돌려서 이렇게 뒤집으면 돼. ”

 

“ 응. 알았어. ”

 

어느새 열한 시가 다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베르닌은 재빠르게 만두를 빚어나갔다. 그러다가 불안해서 왕재수를 보니 역시나 엉망이었다. 만두 크기는 들쭉날쭉했고 반수 이상은 소를 너무 많이 넣어서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야, 잠깐! 이렇게 소를 많이 넣으면 어떡하니!

 

“ 많이 넣어야 맛있지. 만두피 너무 두꺼우면 싫단 말이야. ”

 

“ 그래도 이렇게 많이 넣으면 익힐 때 옆구리 다 터져! 속이 다 삐져나온단 말이야. 하나도 안 예쁘고 지저분해져. 윽, 여기 몇 개는 벌써 터졌네. ”

 

“ 안 돼, 만두 예뻐야 돼... 로만이 만두 예쁘게 빚는 여자가 좋다고... 아악, 정말 싫다. 난 공훈예술가... 세계 최고의 무용수... 우주 최고 꽃미남... 어째서 내가 만두 예쁘게 빚는 여자 따위에 맞춰줘야 하지... 악!

 

“ 시끄러워. 시간 없어. 잘못 만든 건 내가 땜질할 테니까 넌 가서 만두 찌기나 해. ”

 

“ 찌는 건 어떻게 하는 거야? 냄비에 물 넣어서 끓이다가 만두 넣어? ”

 

“ 으윽, 이 바보야. 그건 삶는 거고! ”

 

“ 그럼 기름 둘러서... ”

 

“ 그건 굽는 거야! ”

 

“ 하나도 모르겠어. 아, 머리 아파. ”

 

왕재수가 또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급하게 그의 손목을 붙잡고 같이 렌지 앞으로 갔다. 큰 냄비를 꺼내 물을 3분의 1쯤 채운 후 찜기를 올렸다.

 

“ 어, 그게 뭐야? ”

 

“ 찜기야. 이 위에 만두를 올려놓고 뚜껑을 닫고 끓이는 거야. 그러면 아래에 있는 물이 끓으면서 수증기가 올라와서 그 온도로 만두가 익는 거야. 이게 찜이야. 삶는 건 만두를 물에 직접 빠뜨리는 거고. ”

 

“ 아, 사우나 같은 거구나. ”

 

“ 응. 그래도 원리를 이해했구나. 기특하네. ”

 

칭찬을 받자 왕재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으로 눈을 반짝거리며 웃었다. 얼굴에 밀가루를 잔뜩 묻히고 있어 우스꽝스러웠지만 닦아줄 시간도 없었다. 베르닌은 자기가 빚은 만두에 왕재수가 빚은 것 중 옆구리가 안 터진 것까지 20개를 먼저 가져와서 찜기에 올린 후 뚜껑을 닫고 가스불을 켰다.

 

“ 자, 난 아까 옆구리 터진 거 땜빵할 테니까 넌 이제 부엌 좀 치우고 샴페인이랑 세팅하렴. 바이올린 아저씨 곧 오겠네. ”

 

“ 으응. 고마워. 너 진짜 대단해. 너 아니었으면 만두 실패했을 거야. ”

 

“ 아직 끝난 거 아니니까 일단 다 하고 보자. ”

 

왕재수는 후다닥 부엌을 치웠다. 베르닌은 터진 만두들의 속을 좀 덜어내고 다시 끝을 여며서 땜빵했다. 그 사이에 첫 번째 만두가 다 쪄졌다. 포크로 찔러보니 다 익은 것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거실에서 테이블을 세팅하고 있던 왕재수를 불렀다.

 

“ 야, 다 익었어. 맛 좀 봐. ”

 

왕재수가 우다다 달려왔다. 김이 펄펄 오르는 만두를 입안에 쏙 집어넣더니 잠시 후 뜨겁다고 비명을 지르며 도로 뱉었다. 후후 불어주자 다시 입에 넣고는 오물오물 씹더니 반색을 했다.

 

우와, 진짜 맛있다. 전에 먹던 거랑 달라. 하나도 안 느끼하고... ”

 

“ 수제 만두라서 그렇지. 기계로 만든 거랑 당연히 다르지. ”

 

“ 아, 그래서 로만이 만두 만들어 먹던 거 그리워했던 거구나. ”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포크로 만두를 한 개 찍어서 베르닌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베르닌은 자기가 만들었지만 진짜 맛있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만두를 찜기에 올려놓고 다시 불을 올렸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왕재수가 뛰어나가서 문을 열자 로만 코즐로프가 불쑥 들어왔다. 리본 달린 상자를 현관에 내려놓고는 왕재수를 와락 껴안고 입술과 뺨 여기저기에 찐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 우리 귀염둥이 비둘기~ 많이 기다렸지? 미안미안, 그래도 아직 열두시 안됐으니 다행이다. 늦을까봐 엑셀 막 밟았지. ”

 

“ 나 있잖아, 만두 빚었어. ”

 

왕재수가 급하게 말했다. 자랑하고 싶어 좀이 쑤시는 게 분명했다.

 

“ 만두? 네가? 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너 요리 못하잖아. ”

 

“ 배웠어! 내가 내가 반죽도 하고... 아니, 반죽은 아니고... 저기, 만두피 만들고, 고기 넣고 이렇게 이렇게 돌리고 뒤집어서 빚었어. 그리고 삶은 거 아니야. 물에 빠뜨린 거 아니고, 냄비에 이렇게 찜기 올려서 쪘어! ”

 

코즐로프는 밀가루가 잔뜩 묻어 있는 왕재수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뽀뽀를 퍼부었다.

 

“ 아유 그랬어? 우리 아기가 만두도 빚을 줄 알고 진짜 못하는 게 없네. 요 조막만한 예쁜 손으로 만두를 빚다니! 내가 어릴 때 만두 먹었던 얘기해 준 거 기억하고 있었구나. 기특하기도 하지. 아이고 예뻐라~ 내 강아지 내 귀염둥이~ 내가 밤에 침대 부서져라 안아줄게! ”

 

베르닌은 점점 닭살이 돋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헛기침을 하며 왕재수를 불렀다.

 

“ 흠흠... 야, 난 이만 가볼게. 가스불 10분 있다 꺼라. ”

 

아니, 네놈은! 이 망할 놈의 스파이 자식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코즐로프가 주먹을 불끈 쥐며 고함을 질렀다. 왕재수가 급하게 가로막았다.

 

“ 어, 화내지 마. 얘가 만두 빚는 거 도와줬어. 나한테 다 알려줬어. 있잖아, 다닐이 요리 진짜 잘해. 반죽도 다 해주고, 만두피 만드는 거랑 만두 빚는 거 다 알려줬어. 찌는 거랑 삶는 것도 알려주고. 얘 아니었으면 당신 올 때까지 만두 다 못 만들었을 거야. 진짜야. ”

 

뭐라고! 저 자식이랑 같이 만두를 빚었다고! 너 정말 정신이 있는 거야? 만두는 가족이랑 빚는 거야!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랑! 그러니까, 나랑 빚었어야지! 저놈이랑 만두를 만들다니! 너 진짜 저놈 좋아하는 거야? 전부터 수상쩍었어! 달리기도 져 주고! 크아아! 용서할 수 없어. 너 이놈의 스파이 새끼, 가만 안 둬!

 

코즐로프가 주먹을 휘두르자 왕재수가 기겁을 해서 그를 껴안았다.

 

“ 아이 참,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도와달라고 해서 해준 건데. 내가 몇 번을 말해, 난 키 크고 나이 많은 아저씨가 좋다고 했잖아. 쟨 내 취향 아니란 말이야. 눈도 단추 같고... ”

 

자꾸 단추 단추 하지 마! 나도 사내자식 관심 없는데!

 

베르닌은 투덜대며 현관 쪽으로 갔다.

 

“ 실컷 고생해서 만두 빚어줬더니만. 스파이에 단추에. 에잇. 난 간다. 하여튼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만두 잘 먹고. ”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코즐로프가 억센 손으로 그의 어깨를 휘어잡았다.

 

“ 뭡니까, 진짜 한 판 하고 싶어요? 경고해두는데 KGB 요원에게 주먹질을 하면 폭행죄에 공무 방해죄도 같이 걸릴 수 있... ”

 

“ 가긴 어딜 가. 곧 0시 종 칠 텐데. ”

 

“ 그러니까요! 난 집에 갈 겁니다! 맘 편하게 텔레비전 보면서 새해 맞으려고요! ”

 

“ 누가 새해를 청승맞게 혼자 맞냐! 갈 때 가더라도 종 치는 건 같이 보고 가! 건배도 하고! ”

 

“ 아니, 안 그래도 되거든요! 깡패 아저씨와 왕재수 비둘기 사이에 끼어서 건배 같은 거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

 

“ 나도 KGB 스파이 새끼랑 샴페인 쨍하고 싶지는 않거든! 그래도 0시 종은 0시 종이고 새해는 새해니까! 만두까지 빚어놓고 어떻게 그냥 가냐! 쟤 요리 못하는 거 다 아는데. 뻔할 뻔자 네가 다 만들었겠지. 그래놓고 그냥 가면 억울하지. ”

 

왕재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억울해했다.

 

“ 너무해, 로만... 나도 같이 만든 거 맞는데... 만두피도 만들고 안에 고기도 넣고... 저기 저 삐뚤어진 만두들은 내 건데...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요리 못한다고... 전부 다닐이 했다 그러고... 어헝... ”

 

코즐로프는 화들짝 놀라며 왕재수를 꼭 껴안고 뽀뽀를 하며 달랬다.

 

“ 그럼 그럼, 우리 귀염둥이 네가 다 한 거지. 저 스파이 새끼가 혼자 청승맞게 새해 맞을까봐 불쌍해서 그렇게 말한 거야. ”

 

“ 내가 다 한 거 아니야. 쟤가 반죽했어. 첨에 내가 물을 너무 많이 부어서 다시 해줬어. 만두피는 밀가루를 안 뿌려서 다 붙었는데 쟤가 다시 해주고... 저기, 만두소도 쟤가 만들고... 어헝, 거의 다 쟤가 한 거 맞아. 엉엉, 난 요리에 소질이 없나봐. 당신은 만두 잘 빚는 예쁜 애가 좋댔는데 난 예쁘기만 하고 만두 못 빚어. 나 이제 버림받아. 으앙... ”

 

왕재수가 엉엉 울자 베르닌은 머리가 아팠지만 코즐로프는 크게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그를 품에 꼭 껴안고 둥기둥기 달랬다.

 

“ 아유 그랬구나. 우리 귀염둥이가 나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만두 빚은 거구나. 만두 잘 빚었어. 처음 한 건데 이 정도로 한 거면 소질 엄청난 거야. 그리고 만두 못 빚어도 돼, 요리 하나도 못해도 돼. 이 정도로 예쁘면 딴 거 아무 것도 못 해도 다 용서되는 거야. 그깟 만두가 대수니? 너처럼 고운 애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도 돼. 내가 널 왜 버리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겠구만. 확 집어삼켜버리고 싶구만. 그러니까 그만 뚝~ ”

 

왕재수가 귀신같이 눈물을 뚝 그치고는 코즐로프에게 폭 안겨서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이제 정말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코즐로프가 다시 그를 붙잡았다.

 

“ 좋은 말로 할 때 앉아라. ”

 

“ 아니, 난 둘의 불꽃 튀기는 사랑을 방해하고 싶지 않... ”

 

“ 닥치고 종 칠 때 코르크나 제대로 따! ”

 

마침 그 때 텔레비전에서 크레믈린과 붉은 광장이 비춰지더니 시계가 뎅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에서도, 윗집 아랫집 옆집에서도 환호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베르닌은 엉겁결에 샴페인을 땄다. 펑 하고 코르크가 튀어나가며 샴페인 거품이 치솟았다. 코즐로프와 왕재수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 와! 새해다! ”

 

“ 새해 복 많이 받아! ”

 

“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스파이야! ”

 

“ 어...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너도... ”

 

셋은 샴페인이 가득 담긴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코즐로프와 왕재수가 입술이 떨어져라 키스를 하는 동안 베르닌은 샴페인을 쭉 들이키고 나서 부엌으로 갔다. 가스 불을 껐다. 두 번째 만두는 더욱 예쁘게 잘 익어 있었다. 접시에 만두를 담고 스메타나와 파슬리를 곁들인 후 쟁반에 담아 거실로 돌아왔다. 왕재수는 이제 코즐로프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이미 불꽃 튀는 애정행각이 시작되는 중이었다. 달아오른 코즐로프는 샴페인을 입 안 가득 머금더니 왕재수에게 키스를 하며 술을 먹여주었다. 둘의 입술이 밀착된 순간 베르닌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 안 돼! 그건 안 돼! ”

 

하지만 이미 늦었다. 멋모르고 키스에 취해서 샴페인을 받아 마신 왕재수는 곧 눈을 깜박거리더니 옆으로 픽 쓰러지고 말았다. 코즐로프가 깜짝 놀라 왕재수를 껴안으며 소리를 질렀다.

 

“ 헉, 너 왜 이러니! 괜찮아? 말 좀 해봐 아가야! 정신 차려!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안 된다고 했잖아요. 얘 술 못 마신단 말이에요. 전에도 보드카 들어 있는 쿠키 먹고 응급실 실려 갔는데... 사귀는 사이면서 그것도 몰라요! ”

 

“ 보드카 못 마신다고만 했지 샴페인 가지고도 맛 가는 줄은 몰랐지...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

 

“ 아뇨. 약한 술이니까 그냥 재우면 괜찮아질 거예요. 좀 안됐네. 나이도 많은 아저씨한테 잘 보이려고 만두 빚어보겠다고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보람도 없이... ”

 

“ 너 지금 나 비꼬는 거지! ”

 

“ 그럼 안 그러게 됐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당신 나이도 많고 내세울 것도 별로 없으면서 애를 손아귀에 넣고는 맨날 조련하고. 가뜩이나 마른 애를 놓고 어리고 날씬한 애가 좋다느니 허벅지가 두툼하니 살이 쪘니 하면서 다이어트하게 만들고... ”

 

뭐야? 우리 귀염둥이가 다이어트를 한단 말이야?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하는 조그만 인형 같은 것이 어딜 뺄 게 있다고... ”

 

“ 사과파이 한 판 다 먹을 수 있는데 당신한테 들키면 안 된다고 맨날 꾹꾹 참고... ”

 

사과파이 그깟 한 판 못 먹는 게 바보지! 우리 귀염둥이는 두 판 먹어도 예쁘기만 하겠구만... 어휴... ”

 

코즐로프는 한숨을 푹푹 쉬더니 왕재수를 소중하게 안아들고 침실로 갔다. 침대에 뉘어주고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에 뽀뽀를 해주고는 도로 거실로 나왔다. 베르닌은 어쩐지 혼란스러웠고 머리가 아파졌다.

 

“ 그럼 이제 난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죠. ”

 

“ 만두 먹고 가. ”

 

“ 싫어요. 무슨 만두까지. 그것도 당신하고. ”

 

“ 만두 쪄놓은 거 놔두면 다 불어. 맛도 없고. 많이도 쪘구만. ”

 

“ 그러게요. 쟤가 당신 많이 먹는다고... 나보고도 싸가라고 했는데 아까 정신이 없어서 다 쪄버렸네... ”

 

“ 그러니까 먹고 가라고. 만두는 원래 같이 먹는 거야. ”

 

갑자기 베르닌은 배가 고팠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래서 코즐로프와 함께 만두를 스메타나에 꼭꼭 찍어서 먹었다. 남은 샴페인도 나눠 마셨다. 다 먹은 후 베르닌이 일어서자 코즐로프는 더 붙잡지 않았다. 대신 현관에 내려놨던 리본 달린 상자를 풀더니 초콜릿을 한 움큼 꺼내서 쥐어 주었다.

 

“ 이런 거 안 줘도 돼요! ”

 

“ 몇 개 되지도 않아. 더 주고 싶어도 우리 아기 줘야 하니까 이것만 주는 거야. 가져가서 먹어라, 불쌍한 스파이야. ”

 

“ 내가 왜 불쌍해요! ”

 

“ 새해도 혼자 맞아야 하고. 스페호프한테 들들 볶이면서 살고. KGB 노릇이나 하며 살아야 하니 불쌍하지. ”

 

나 안 불쌍하거든요! 그리고 이 초콜릿 쟨 먹지도 않네요. 쟨 이렇게 달달한 밀크 초콜릿 안 먹어요. 무가당 다크 초콜릿만 먹는다고요. ”

 

“ 어 그런가... ”

 

“ 쟨 달달한 건 사과파이만 좋아해요. 앉은 자리에서 한 판 다 먹고... ”

 

“ 에잇, 그럼 사과파이 사오는 건데. ”

 

“ 창가에 한 판 있어요. 내가 오다가 샀어요. ”

 

“ 너 왜 나보다 쟤 식성을 더 잘 알아. 기분 나빠! ”

 

“ 난 가정부니까 그렇죠! 맨날 밥해주고 청소해주고... ”

 

하긴 그렇기도 하겠다. 불쌍한 놈... 그만 가서 자라. 새해 복 많이 받고. ”

 

나 안 불쌍하다고요!

 

베르닌은 코즐로프가 억지로 안겨 준 초콜릿 상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밀가루를 대충 씻어내고 초콜릿을 두어 개 집어먹은 후 잠자리에 들었다. 새해에는 제발 업무분장이 바뀌기를 빌면서.

   

 

 

 

FIN

2014. 12. 27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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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재수가 빅토르를 쥐잡듯 야단치는 장면은 좀 과장되긴 했지만.. 사실 페테르부르크 발레 전통은 남녀 듀엣, 특히 아다지오를 중시하며 여성 파트너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남성 파트너에게 있다.

본편의 미샤 역시 고전 발레의 엄격한 성적 구분과 보수적인 전통을 여러 가지로 허물어온 인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바가노바 발레학교에서 정통 트레이닝을 혹독하게 받았기 때문에 여성 파트너에 대한 기사도와 책임의식은 아주 강한 편이다. (그래서 본편 우주의 이야기들 속에서 미샤는 한번은 180이 다 되는 체격 좋은 발레리나와 백조의 호수를 추다가 이전에 다쳤던 어깨를 더 삐끗해 부상으로 고생하게 되지만, 사람들이 뚱뚱한 여자 들어올리다 다쳤다며 불쌍해할때마다 열심히 그녀를 변호하고 자기가 실수해서 그런거라고 답변한다)

 

** 새해 전야에 만두 빚는 풍습은 그냥 내가 웃자고 쓴 거다 :) 근데 러시아도 좋은 날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펠메니 만두 빚는 풍습이 있긴 있다.

 

** 만두 얘기가 나왔으니 펠메니 사진 몇 장 :) 전에 올렸던 사진들이지만.

 

 

 

요게 찌기 전~

 

 

이건 동대문 러시아 음식점 깔린까에서 먹었던 펠메니 :)

 

 

이건 페테르부르크 돔 끄니기 2층의 유명한 Singer 카페에서 먹었던 펠메니. 이제 돼지고기 알레르기 때문에 그림의 떡... 쇠고기 들어 있는 건 먹을 수 있으려나..

 

 

사진 하나 더~

 

몇년 전에 썼던 펠메니에 대한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231

 

 

** 이야기는 9편의 '눈보라와 패딩 코트'로 이어진다. 이건 아마도 돌아와서 올릴 듯. 그러나 중간에 심심하니 등장인물들의 번외 문답을 예약 포스팅으로 걸어놓고 가겠다~ 아마도 다음주 초,16일과 17일에 두 파트로 나눠서 올라갈 듯.. 커밍 쑨~ 단추와 왕재수의 20문답과 뭔가 허술한 인터뷰~

 

 

:
Posted by liontamer
2015. 2. 10. 16:11

고스찌의 꿀케익 메도빅 russia2015. 2. 10. 16:11

 

 

러시아나 프라하에 가면 내가 꼭 먹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꿀케익 메도빅. 체코에서는 메도브닉이라 부른다. 견과와 꿀이 가미되어 여러 겹 겹쳐 만드는 맛있는 케익이다. 이것은 정말 맛있다 :)

 

맨처음 이걸 먹은 건 오래 전 러시아에서 공부할 때였다. 그때 이걸 사먹었던 가게에서는 '묘도보예 삐로즈노예', 즉 꿀 조각케익이라고 해서 난 내내 '묘도보예'란 이름으로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러시아에선 '메도빅', 체코에서는 '메도브닉'이라고 불렀다. 재작년 프라하에 머물 때 그 동네 메도브닉 진짜 여러 종류 먹어봄 :) 근데 솔직히 말하자면.. 체코 메도브닉이 좀 더 맛있었다 ㅎㅎ '메드', '묘드'는 꿀이란 뜻이다.

 

여기는 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레스토랑/디저트 카페인 고스찌. 전에 몇번 포스팅한 적 있다. 음식도 괜찮지만 디저트 케익이 일품이다. 특히 이 메도브닉은 크림도 풍부하고 정말 맛있다!~

 

계속 잠도 모자라고 입맛도 없고 몸도 피곤해서 훌륭한 메도빅 사진 올려본다 :0

 

 

 

 

 

가게 안은 이렇게 생겼다.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 여긴 반지하 1층이고, 레스토랑은 2층에 있다.

 

 

진열장 안에 근사한 케익들이 가득가득!!

 

 

흔들리고 번졌지만.. 이런 글귀가 붙어 있다.

" 다이어트 따위에 낭비하기엔 인생은 너무 짧다! "

훌륭하다!!!

 

* 태그의 고스찌 를 클릭하면 이곳에 대한 이전 포스팅들을 볼 수 있다

* 태그의 메도브닉을 클릭하면 아마 전에 체코에서 시도했던 여러 메도브닉이 나올 듯

:
Posted by liontamer
2015. 2. 9. 21:01

Happy Birthday, Vladimir! + 득남 축하 :) dance2015. 2. 9. 21:01

 

 

2015년 2월 9일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의 30번째 생일이다.

 

생일 축하한다, 발로쟈!!

 

마냥 어려보였는데 벌써 30살이 되었구나. 외모는 아직도 로미오에 어울리는 동안이다만..

 

내가 맨 처음 이 사람을 무대에서 봤던 게 2006년 지젤 무대였다. 그때도 원래 예브게니 이반첸코가 알브레히트 역이라는 공지를 보고 갔던 건데 갑자기 이 사람으로 대체되어 막 실망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땐 이 사람도 진짜 풋풋하고 어렸는데 :)

 

앞으로도 오래오래 무대에 올라와 주기를. 부상 없이 건강하게, 한층 더 무용수로서도 배우로서도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너 이번 곱사등이 망아지 꼭 나와야 돼 ㅠ 배역 바뀌면 안돼 ㅠㅠ

조만간 귀여운 아기 탄생 소식도 들려올 것 같은데 가정 생활도 행복하길 :)

 

그래서 생일 기념 슈클랴로프 사진 몇 장 :)

 

 

 

 

사진은 Alex Gouliaev

 

 

역시 사진은 Alex Gouliaev. 파트너는 예카테리나 콘다우로바. 리허설 중.

 

 

사진사는 계속 Alex Gouliaev. 백조의 호수.

 

 

이 사진도 Alex Gouliaev. 곱사등이 망아지의 바보 이반.

 

 

이건 Mark Olich의 사진. 백조의 호수.

 

 

 

역시 이건 Mark Olich의 사진. 백조의 호수.

 

생일 축하해, 발로쟈 :)

 

** 저녁에 추가

마린스키 트윗 소식. 그저께 슈클랴로프와 쉬린키나 부부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고 한다 :) 이름은 알렉세이.

축하해요~

엄마도 아빠도 이쁘니 아기는 엄청나게 귀여울 듯!!

 

 

사진 출처는 vladimir shklyarov의 instagram.

이쁜 부부라니까..

다시 한번 축하!!

 

:
Posted by liontamer

토요일이지만 별로 토요일 같지 않은 피곤한 하루였다.

 

'서무의 슬픔' 7편 올려본다. 이번 편은 작년 연말 내가 겪었던 일에서 소재를 그대로 따왔다. 뭐 이 시리즈야 매 에피소드마다 내 실생활에서 아이디어를 여기저기서 따오긴 한다만...

 

가엾은 노동 기계이자 잡일 담당에 집사 노예인 우리의 다닐 베르닌은 과연 블라지미르 스페호프의 드높은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보고서를 써낼 수 있을 것인가!!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연말이 닥쳐오고...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국장은 일년을 정리하여 모스크바 본부로부터 제대로 된 성과 인정을 받기 위해 직원들을 들들 볶기 시작하는데... 오고야 만 보고서의 시즌!!! 이는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총괄 서무에게는 가혹한 시기였으니...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이 시리즈의 배경은 1980년대 초반 소련의 지방 소도시이므로 스페호프가 자와 컴퍼스를 사용하고 베르닌이 등사를 하는 아날로그식 보고서 작성을 너무 비웃지 마시길..

 

*** 당년도 성과보고서니 익년도 업무계획서니 하는 것은 물론 소련 공공기관, 특히 이런 KGB에서는 이런 형태로 진행하지는 않을테고... 그냥 그렇게 넘어가자~ (사실은 베르닌이 아니고 작년 내 얘기, 흐흑... )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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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7 

 

 

서무의 슬픔

- 보고서의 악몽 -

 

 

 

 

 

11월말이 되자 스페호프 국장은 종일 바빴다. 자를 대고 줄을 긋고 작도기와 컴퍼스를 써서 원과 반원과 타원을 그리고 색연필과 파스텔을 동원, 다양한 색칠을 했다. 마침내 서무인 베르닌을 호출했다. 당년도 KGB 부서별 성과보고서 양식과 익년도 업무계획 양식이 하달되었다. 이후 국장은 전 직원을 강당에 집합시키고 연설을 시작했다.

 

“ 모스크바 본부에서 연초에 공지한 바 있어 전원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이 일은 매년 이맘 때 쯤이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연례행사라고 할 수 있네. 마치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과 가을에 땀을 흘려 곡식을 잘 가꾸고 추수하듯이 우리들도 잘 영근 성과물들을 이 보고서에 잘 담아야 하는 것이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여러분이 한 해 동안 사업을 추진하면서 피땀 흘려 노력한 내용들이 고스란히 이 보고서에 잘 담겨져야 한다는 말이네. 

그러나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작성을 위한 시간은 항상 부족하기만 한 법이야. 다만 이런 상황은 우리 지국뿐만 아니라 연방 전체 KGB가 비슷할 것일세. 따라서 짧은 시간에 좋은 보고서가 나오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네.  

오전 중 서무가 각 부서에 작성 양식을 배포할 예정이야. 먼저 작성일정을 꼼꼼하게 검토하고 계획을 짜게. 올해 성과보고서는 당장 시작하고, 내년 계획서는 부서별 검토회의 후 각각의 목표를 확정하겠네. 부서별로 나온 성과보고서와 업무계획서는 남은 20일 동안 각각 총 4회의 검토회의를 진행할 예정이야. 즉, 이 보고서들은 도합 8회의 검토를 거쳐 작성될 것이네. 다들 보고서 작성에 만전을 기하도록. 

그리고 서무는 일정표에 따라 매 일정마다 각 부서의 보고서들을 모두 취합하여 깨끗하게 편집 제본한 후 내게 제출하도록. 이상일세! ”

 

베르닌은 모든 양식을 부서별로 2매씩 등사하여 배부한 후 일정표를 게시했다. 직원들은 한숨을 쉬었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각 부서들은 국장 호출 전에 보고서 틀을 짜기 위해 사전 회의를 하느라 바빴지만 베르닌이 소속된 감시분석부만은 달랐다. 당연히 막내이자 서무인 베르닌에게 모든 일을 떠넘겼다. 늘 있는 일이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난감하기 그지없어 선배들에게 하소연을 했다.

 

“ 다른 건 제가 작성한다지만 각 담당자별 통계 자료까지는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야 자료 가공을 하고 분석을 해서 이 끔찍한 양식을 채워 넣을 수 있... ”

 

“ 통계? 원래 그런 건 서무가 관리하는 거잖아! ”

 

“ 아니, 그러니까... 예산과 집행 실적이야 제가 뽑아낼 수 있다지만 담당자별로 올해 작성한 보고서들이 있잖습니까. 감시 대상자 목록부터 시작해서 도청 실태, 체포율과 재판 수감 내역 증가율, 도청 증가로 인한 실제 범죄율 하락 내역 등등... 그건 선배님들 업무... ”

 

“ 그 자료들은 전부 찾아보면 있잖아! 서류철 다 뒤져보면 나오는 것들인데 뭘 우리한테 이거 내놔라 저거 내놔라야. ”

 

“ 하지만 그건 너무 맨땅에 헤딩하는 짓인걸요. 담당자들은 30분만 투자하면 다 나오는 자료들인데 제가 모든 것을 맡아서 하면 각각의 업무 추진 배경부터 시작해 모든 내용을 다 읽고 파악해야 하고 또 하나하나 과정을 추적해야 하니 도저히 일정에 맞출 수가 없어요. 심지어 제가 추출한 자료들이 맞는 것인지조차 모르고요. 각자 100만큼의 노력만 들이면 되는 일을 저 혼자 하게 되면 1억만큼의 노력이 소요될 텐데... 너무나 비효율적이잖아요. ”

 

“ 이런 당돌한 녀석을 봤나. 들어온 지 2년밖에 안된 풋내기가 벌써부터 선배들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서 우릴 가르치려 들어! 심지어 우리한테 자기가 할 일을 시켜먹으려고까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가 신참이던 시절에는 보고서는 당연하고 선배들 커피 심부름부터 시작해 그분들 집 앞 눈까지 다 치워주고 출퇴근까지 다 시켜줬단 말일세! 요즘 젊은 것들은 호강에 겨워서 원... 이런 좋은 회사가 어디 있다고. 급여 꼬박꼬박 잘 나와, 공무원이니 대접받아, 안정성 있어. 고맙게 다니면서 하라는 일이나 잘 할 것이지 벌써부터 선배들한테 대들고 게으름을 피우려고 해! ”

 

“ 게으름이라니요, 전 매일 야근한다고요. 주말에도 나오고... 그리고 집 청소하고 출퇴근시켜주는 거라면 저 벌써 몇 달째 하고 있는 거 모르세요? 그 왕재수... 차 우려주지 밥해주지 청소해주지 비위맞춰주지... ”

 

“ 아, 말 한번 잘했네. 그 불여우! 그건 경우가 아주 다르지. 우리가 모르는 줄 아나?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도 하고... 그건 자네가 그 꼬마한테 폭 빠져서 돌봐주는 거잖나! 심지어 당직실에서도 응응응을... ”

 

“ 아니에요! 그건 다 오해란 말입니다! 정말 아니에요! 그땐 귀신이... 고양이가, 쥐랑 바퀴벌레를... ”

 

아니긴 뭐가 아냐. 체육대회 때도 우리 애들이 그 불여우 짓뭉갰더니 자네가 울면서 그 자식 안아주던 거 다 봤어! 어휴 찝찝해라. 말세야 말세. 아무리 곱상하게 생겨도 그렇지 사내자식을 안고 뽀뽀하고 물고 빨고.. ”

 

“ 아아 억울해... 진짜 아니라고요. 저는 아니에요! 제발 걔랑 저를 이상하게 엮지 말아 주세요. 우리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요. 전 그냥 그 자식의 감시요원이자 운전기사이자 가정부... ”

 

“ 아닌 척 할 거 없어. 회사에서는 다 아는 일인데 이제 와서 뭘 그래. 하여튼 빨랑 보고서나 쓰란 말이야. 선배들한테 일 떠넘기고 그 불여우랑 놀아나려고 수작 부리지 말고! ”

 

얼이 빠진 베르닌이 뭐라고 항의를 하기도 전에 선배들은 휭 하고 자리를 떠 버렸다. 다들 구시가지에 맛있는 항아리 닭고기 식당이 생겼다고 일찍 점심을 먹으러 나가 버린 것이다.

 

점심 부대에 합류하려고 뛰쳐나가던 등록부서의 리자가 문득 그를 발견하고는 불쌍하다는 듯 다가왔다.

 

“ 다냐, 같이 가서 항아리 닭고기 먹어요. 거기 맛있대요. 기름기도 엄청 많고 국물도 뜨끈해서 먹고 나면 기력 회복된대요. 체육대회 때 걸린 감기 아직 다 안 나았잖아요. ”

 

“ 괜찮아요, 전 그냥 구내식당에서 먹을래요. ”

 

“ 구내식당은 맛도 없고 전에 사모바르에서 바퀴벌레도 나왔잖아요. 간만에 다들 회식하는 건데 같이 가요. ”

 

“ 항아리 닭고기 식당은 너무 멀더라고요. 다녀오면 점심시간이 다 끝날 거예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안 되겠어요. 빨리 대충 먹고 보고서 자료를 뒤져야 하거든요. ”

 

“ 아휴, 책상물림. 일벌레... 알았어요. ”

 

리자가 나가버린 후 베르닌은 혼자 구내식당에 내려가 지독하게 맛없는 메밀죽과 불어터진 소시지를 10분 만에 해치웠다. 그리고 사무실로 올라와 서류철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    *    *

 

 

보고서 제출 마감일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베르닌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성과보고서와 업무계획서 검토회의를 각각 3차례씩 진행했고 마지막 회의를 1회씩, 도합 2번을 앞두고 있었다. 감시분석부의 보고서는 일주일 전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마무리했고 다른 부서들의 보고서도 모두 취합하여 국장의 요구대로 깔끔하게 제본해 제출했지만 국장은 검토회의 때마다 계속 수정을 요구했고 베르닌은 다른 부서 서무들과 함께 밤을 새서 각 자료를 수정한 후 다시 제본을 했다. 그는 부서 서무일 뿐만 아니라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총괄 서무이기도 했기 때문에 결국 모든 마무리는 그의 몫이었다.

 

게다가 스페호프는 계속해서 그를 들들 볶았다.

 

“ 편집 좀 제대로 못 하나! 여기도 오타가 있군! 행간도 틀렸어! 이 표는 또 왜 이 모양인가! 색깔을 제대로 맞춰야 할 것 아닌가! ”

 

“ 아아, 국장님. 4차 검토회의에서 또 내용을 왕창 수정하실 게 뻔한데 지금 이렇게 하나하나 모양을 고쳐놓으면 무슨 소용이... ”

 

“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매 회의마다 각 버전마다 틀을 잘 맞춰야 할 것 아닌가! ”

 

“ 하지만 이건 저희 내부 검토용이고 본부 제출본도 아닌데... 어차피 편집하고 고칠 텐데... ”

 

시끄러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 모르나!

 

베르닌은 그 보기 좋은 떡을 만들기 위해 너무 고생을 해서 막상 떡을 먹기도 전에 체할 거라고 대들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는 매일 새벽까지 일하고 때로는 사무실에서 밤을 새며 보고서를 작성 편집했다. 근무 시간에는 원래 업무를 처리해야 했으므로 보고서 작업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토요일에도 혼자 출근해 밤을 새며 4차 검토회의용 성과보고서와 업무계획서 초안을 만들었다.

 

 

일요일 아침 8시에 그는 콧물을 줄줄 흘리며 눈보라를 그대로 맞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필 차도 고장났기 때문이다. 난방도 안 되는 사무실에서 한 시간 정도 눈을 붙인 게 전부인데다 계속 말라빠진 비스킷과 차가운 통조림 수프로 끼니를 때운 탓에 이미 몸이 얼어 있었던 베르닌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하 15도의 날씨에 눈보라를 맞고 돌아오느라 심한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간신히 집에 들어왔을 때 그는 젖은 옷을 미처 다 벗지도 못하고 소파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베르닌은 몇 시간 동안 끙끙 앓았다. 너무 추워서 몸이 덜덜 떨렸지만 옷을 갈아입거나 침실로 가서 이불을 뒤집어쓸 기력이 없었다. 열이 펄펄 끓었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온몸이 떨어져 나가는 듯 아팠다. 몽롱하게 잠이 들었다 깨어났다 반복했다. 살풋 정신을 잃을 때마다 눈앞에서 성과보고서와 업무계획서와 표와 예산과 통계 숫자들이 춤을 췄다. 스페호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1차, 2차, 3차, 4차 보고서와 계획서들을 그의 면전에 집어던지며 행정의 기본에 대해 설교를 해댔다.

 

마침내 그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가기로 했다. 목이 너무 말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파에서 내려와 몇 발짝 걷지도 않아 현기증으로 비틀거리다 카펫 위에 그대로 뻗어버렸다. 엉금엉금 기어가려고 했지만 몸이 철썩 달라붙는 것 같았고 머리가 빙빙 돌았다. 다시 기절한 것 같았다.

 

어렴풋하게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낯익은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조그맣게 이어졌다.

 

“ 아휴, 너 왜 복도 창문 다 열어놨어! 눈이 다 들이쳤잖아. 현관문도 열어놓고. 어디서 이렇게 바람이 들어오나 했네. ”

 

왕재수의 목소리였다. 그간 저 녀석에게 얼마나 시달렸으면 아픈데 꿈에서까지 나타나 바가지를 긁나 싶어서 베르닌은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 아아... 제발 이제 그만... 국장도 모자라 쟤까지 꿈에 나오다니... ”

 

“ 어, 너 뭐야. 운동해? 왜 바닥에 엎드려 있어? ”

 

“ 으으... 꿈인데도 어쩌면 저렇게 현실적인 대사를... ”

 

“ 야, 너 자는 거야? 술 취했어? ”

 

갑자기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베르닌은 괴로워하며 억지로 눈을 떴다. 눈앞에 까맣고 하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곧 그림자는 까만 머리에 하얀 스웨터를 입은 왕재수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 우욱, 이건 꿈이야. ”

 

“ 뭐가 꿈이야. 취했구나. 맨날 늦게 오고 집 안 오더니 일하느라 그런 게 아니고 술 퍼마시느라 그런 거였구나! ”

 

“ 아니야, 술 아니야... 나, 계속 야근. 눈 맞고... 나 불쌍... 우욱... ”

 

베르닌은 갑자기 속이 너무 울렁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쿨럭쿨럭 기침을 하다가 그만 토하고 말았다. 왕재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 으악, 너 지금 토하는 거야? ”

 

“ 보면 모르냐... 우웩... ”

 

“ 아이 참, 이게 뭐하는 거야! 아휴, 카펫에 왕창 토했네! ”

 

“ 상관 마, 내 카펫인데... 우애액... ”

 

한참 토하고 났더니 그래도 정신은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눈을 뜨자 왕재수가 그의 곁에 쪼그려 앉아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 하지 마, 정신 사나워... ”

 

“ 열 많이 나나봐, 얼굴이 벌개. ”

 

“ 그럴 수밖에 없잖아. 독감에 토하고... 아깐 추웠는데 지금은 너무 더워. ”

 

“ 대체 뭘 먹은 거야, 식중독이야? 아이 지저분해라, 토한 거 색깔이 빨갛고 초록색이고 얼룩덜룩해. 내 속도 다 울렁거리네. ”

 

“ 사흘 째 통조림 토마토 수프만 먹었단 말이야... 울렁거린다면서 왜 옆에 앉아서 그런 걸 보고 있냐... 빨랑 집에 가. 귀찮아. 좀 놔둬. 우욱... ”

 

베르닌은 다시 토했다. 왕재수가 몸서리를 치면서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구급상자에서 감기약이라도 꺼내달라고 할 걸 하는 후회가 막심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엎드린 채 베르닌은 다시 비몽사몽 상태로 빠져들었다. 왕재수가 왔던 꿈을 꾼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라면 아리따운 렐랴나 나타나지 왜 하필이면 왕재수인가 싶어 아픈 와중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때 입가에 축축한 수건이 와 닿았다.

 

“ 아 차가워! 이게 뭐야! ”

 

“ 가만히 좀 있어. 좀 닦게. 지저분하게 이게 뭐니, 토한 거 다 묻히고. ”

 

왕재수가 젖은 수건으로 그의 입과 턱을 슥슥 닦았다. 그리고는 다른 수건을 그의 이마에 대 주었다. 처음에는 아주 차갑게 느껴졌지만 점차 미지근해졌고 나빴던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그때 왕재수가 그의 부츠와 양말을 벗기면서 투덜댔다.

 

“ 너 눈 맞으면서 걸어왔구나! 그럼 들어오자마자 신발부터 벗었어야지. ”

 

“ 내버려둬! 카펫 내 거라 했잖아. 남이야 흙탕물로 더럽히든 토하든! ”

 

“ 카펫 얘기가 아니고! 독감 걸렸다면서 젖은 걸 신고 있으면 어떡해! 아휴, 코트도 안 벗고... 이러니까 열이 나지! 바보 멍청이. ”

 

“ 나 바보 멍청이 아니야. 너무 아파서 부츠랑 코트 벗을 기운이 없었단 말이야... ”

 

“ 그러면 병원에 가든가! ”

 

“ 일요일이잖아. 나 아침에 집에 왔단 말이야. ”

 

“ 아유 정말 꽉 막혀가지고! 그럼 나한테 전화라도 했으면 됐잖아! ”

 

“ 너한테 전화하면 뭐, 너처럼 게으른 녀석이 날 데리러 나왔겠냐? 운전도 못하는 게. ”

 

“ 나 운전 못하는 거 아니야! 서툰 거지! ”

 

“ 그게 그거잖아! 아, 자꾸 말 시키지 마. 또 울렁거려. 야, 뭐하는 거야! ”

 

“ 가만히 좀 있어! 어휴, 많이도 껴입었네. ”

 

베르닌은 저항하려고 했지만 손끝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서 왕재수가 코트와 스웨터와 셔츠와 바지와 내복을 벗기는 동안 투덜대기만 했다.

 

“ 추워! 내복은 그냥 놔둬! ”

 

“ 내복까지 다 젖었단 말이야! 너 진짜 저 눈 다 맞고 걸어왔구나. 로만도 눈 온다고 침대에서 진짜 나가기 싫어했는데. ”

 

“ 그냥 바이올린 아저씨랑 놀지 여긴 왜 온 거야... ”

 

“ 로만 오늘 저녁에 오페라 무대 있어서 연주하러 갔어. 근데 날씨 때문에 아무래도 오늘 관객들도 못 올 거 같아. 계속 이러면 극장에 전화해서 공연 취소시켜야지. 그럼 로만도 집으로 다시 오겠지 뭐. ”

 

“ 넌 좋겠다, 감독이니까 전부 네 맘대로 할 수 있고. 직원들 부려먹고 명령하고... 보고서도 쓰라고 하겠지. 계획서도 쓰라고 하고... 아아... ”

 

“ 웬 보고서. 우린 춤 잘 추고 노래 잘 하면 되는데. 그리고 나 직원들 안 부려먹어! ”

 

“ 뻥치지 마. 저번 행사 때 무용수랑 연주자들 들들 볶는 거 다 봤어. ”

 

“ 그건 부려먹는 게 아니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 하니까 바로잡아 준 거지! 난 감독이잖아! ”

 

“ 쳇, 우리 국장도 나한테 잔소리할 때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

 

“ 너네 국장은 나쁜 놈이고! ”

 

“ 뭐가! 너 하는 짓이랑 똑같은데. ”

 

“ 난 너 안 괴롭히잖아! ”

 

“ 네가 날 안 괴롭힌다고? 네가 제일 많이 괴롭혀... 그렇다 치자... 그럼 우리 국장은 나 괴롭히니까 나쁜 놈인 거야? ”

 

“ 그렇지! 툭하면 야근시키고 이상한 걸로 들들 볶잖아. 무슨 권총 규격이 어떻고 주차 표지판이 어떻고 심지어 내 방에 도청장치 설치하라고 하고. 달리기 못하면 자른다고 하고, 파티에도 못 가게 하고! 난 그런 짓 절대 안 해! ”

 

“ 하긴 넌 노는 거 좋아하는 날라리니까... ”

 

투닥대는 동안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새 내복과 잠옷을 입히는데 성공했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자 불쾌하고 축축한 느낌이 가시면서 몸이 약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 너 계속 울렁거려? ”

 

“ 어... 이제 좀 나아. 다 토했나봐. ”

 

“ 일어날 수 있어? ”

 

“ 응. ”

 

베르닌은 억지로 일어나려고 해 보았다. 그러나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왕재수가 어깨를 잡아 주었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 에이. 할 수 없지. 가만히 있어 봐. ”

 

베르닌이 움찔하기도 전에 왕재수가 뒤에서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두 팔을 불쑥 끼워 넣더니 그를 비스듬하게 일으켰다. 그리고는 한 팔을 빼서 허리를 휘감고는 거대한 감자 자루라도 옮기는 것처럼 베르닌을 질질 끌고 침실로 갔다.

 

“ 어... 야, 됐어. 내가 걸어갈게. 놔라... ”

 

“ 걸어가는 거 좋아하네. 가만히 있어, 힘 빼고. ”

 

“ 어떻게 가만히 있어. 나 무거운데... 너처럼 마른 애가... ”

 

“ 말 시키지 마, 으윽... ”

 

왕재수는 숨을 몰아쉬면서 베르닌을 침실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허리를 안고 번쩍 들어서 침대 위에 내려놓고 머리 아래로 베개를 들이밀어 주었다.

 

“ 헉헉... 야, 너 다이어트 좀 해. 아까 보니까 이건 근육 무게도 아니고 그냥 살이야. 5킬로는 빼야겠다. ”

 

내가 다이어트할 시간이 어디 있니, 맨날 야근하고 밤 새는데... 운동할 시간은 없고 책상 앞에 앉아 일만 하면서 잡히는 대로 먹으니까 그렇지. ”

 

“ 그러니까 너네 국장 나빠! 남자는 몸매가 중요한데 자꾸 일을 시키니까 너처럼 되는 거잖아! ”

 

“ 야, 너 지금 나 뚱뚱하다고 비웃는 거야? ”

 

“ 아니, 뚱뚱한 수준은 아직 아니지만. 그래도 위험 단계란 말이야. 저번에 파티 갔을 때보다 더 찐 거 같아. 뱃살도 잡히고. ”

 

“ 내버려 둬! 누구처럼 말라빠진 꼬마 좋아하는 변태 아저씨랑 사귈 것도 아닌데 뭐 어때! ”

 

“ 여자들도 늘씬하고 예쁜 남자 좋아하는데... 왜 여자들이 나한테 줄을 섰겠니. 아 지겹다... 어제도 렐랴가 나한테 목도리 떠다 줬어. 추우니까 폭 싸고 다니면서 자기 생각하라나. 근데 분홍색 꽈배기 무늬가 들어 있지 뭐야. 나 분홍색 싫어하는데... 뭐 나야 피부가 원체 하얗고 고우니 분홍색도 잘 받긴 하지만 그래도 싫은데. 수도관이나 싸매 놔야겠어. ”

 

뭐, 뭐라고? 렐랴가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떠준 목도리로 수도관을 싸매겠다고? 너 미쳤냐!

 

“ 여기도 겨울 춥던데? 싸놓지 않으면 수도관 얼잖아. ”

 

“ 그건 못 쓰는 수건으로 싸면 되잖아, 왜 렐랴의 마음이 담긴 목도리를... 넌 정말 호강에 북받친 놈이야! 이 동네 남자들은 렐랴가 만든 거라면 목도리는커녕 행주 쪼가리라도 품에 껴안고 설레서 잠도 못 잘 텐데! ”

 

“ 쳇, 그럼 너 주면 되잖아. 잠깐만 기다려. ”

 

왕재수가 방을 나갔다가 잠시 후 분홍색 꽈배기 무늬가 들어 있는 하얗고 폭신한 목도리를 가져왔다. 베르닌의 목에 둘러 주고는 이불을 덮어 주었다. 목도리는 따뜻했고 달착지근한 향내도 났다. 베르닌은 정신이 몽롱해졌다.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아... 렐랴가 뜬 거라 그런지 향기도 진짜 좋다. 달콤하고 기분 좋아. ”

 

“ 그거 내가 두르고 있었던 건데? 내 향기일 걸. 로만이 아침에 날 홀랑 벗겨 놓고 그 목도리만 둘러주고 역시 예쁘다고 감탄을... ”

 

악, 도로 가져가! 이상한 짓 한 거 싫어. ”

 

“ 두르고만 있었는데 이상한 짓이래... ”

 

“ 그래도 찜찜해! ”

 

“ 뭐야? 내가 찜찜해? 더러워? 나 되게 깨끗한데. 매일 샤워도 꼬박꼬박 하고 비누도 좋은 거 쓰고 바디 오일이랑 로션도 외제 쓰는데... 너무해. 태어나서 처음 들어봐, 찜찜하다니. 난 여태 예쁘다는 말만 들었는데... ”

 

왕재수는 부루퉁해지더니 목도리를 홱 벗겨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베르닌은 어쩐지 미안해져서 웅얼거렸다.

 

“ 아니, 그게 아니고... 너는 안 더러워. 깔끔해. 저기, 너는 예쁜 게 맞는데... 그냥 나는 남자애가 하고 있었던 건 좀 찜찜... ”

 

“ 알았어. ”

 

왕재수는 목도리를 도로 주워들었지만 베르닌에게 매어 주지는 않았다. 침대 한 구석에 던져 놓더니 커튼을 쳐 주었다. 그리고는 따뜻한 물이 담긴 컵과 알약을 두 알 주었다.

 

“ 이거 먹고 좀 자. 감기약이야. ”

 

“ 응, 고마워. ”

 

왕재수가 침실 문을 닫고 나간 후 베르닌은 약을 먹었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불편하게 잠이 들었다.

 

 

*    *    *

 

 

한 시간 쯤 후 베르닌은 너무 추워서 깨어났다. 방 안이 시베리아 같았다. 추워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창문이 열려 있나 했지만 문은 꼭 닫혀 있었고 커튼도 두텁게 쳐져 있었다. 심지어 나이트 테이블 위에는 김이 펄펄 나는 주전자도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너무 추웠다. 베르닌은 괴로워하며 이불을 하나 더 꺼내 덮으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갑자기 기침이 너무 심하게 나와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족히 5분 가까이 쉬지 않고 기침을 해댔다. 가슴이 너무 뻐근해서 죽을 것 같았다.

 

기침 때문에 괴로워서 두 손으로 늑골을 부여잡고 뒹굴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왕재수가 들어왔다.

 

“ 아유, 이게 웬 난리야. 이제 기침까지 하네. 가만히 좀 있어 봐. ”

 

등을 살살 쓸어준 후 왕재수가 입에 컵을 대 주었다. 따뜻한 물을 마시자 기침이 조금 가라앉았다.

 

“ 고마워, 쿨럭쿨럭... ”

 

“ 진짜 가지가지 한다. 허우대는 멀쩡해가지고 감기는 왜 이렇게 심하게 앓는 거야. ”

 

“ 너도 20일 연빵으로 야근하고 밤새고 계속 일만 해봐... ”

 

너네 국장 나빠. 내가 혼내줄 거야.

 

“ 제발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네가 혼내준다고 하면 무서워. 또 이상한 짓을 해서 날 곤경에 처하게 하려고. ”

 

“ 칫, 내가 하는 건 다 이상한 짓이래. 아까 찜찜하다고도 하고. ”

 

“ 콩알만 한 게 뒤끝까지 있어... 쿨럭쿨럭... 아 추워... 너무 추워. 지금 난방 되는 거 맞아? ”

 

“ 라디에이터 절절 끓는데... 내가 좀 전에 관리실 가서 온도 더 높여놔서 지금 완전 사우나 수준인데. 너 추워? ”

 

“ 응, 너무 추워. ”

 

왕재수는 그의 입에 체온계를 물리더니 잠시 후 눈금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 너 열이 너무 많이 나서 추운 거야. 아까 약 안 먹었어? ”

 

“ 먹었는데 기침하다 토했어. ”

 

“ 아유, 이마는 불덩어리 같은데 다른 데는 얼음장처럼 차갑네. 여기 감기 엄청 독하구나. 역시 시골이라 그런 거야. 싫다, 시골 감기... ”

 

“ 감기에 무슨 시골이 있고 도시가 있... 쿨룩쿨룩... 아, 추워... 미안한데 나 이불 좀 더 갖다 줄 수 있어? 저 장롱 안에... ”

 

“ 이불 다 꺼내온 거야. 아까 너 자면서 추워해서 있는 거 다 덮어줬어. 우리 집에서도 하나 가져온 건데. 그렇게 추워? ”

 

“ 시베리아 눈밭에서 홀랑 벗고 구르는 것 같아. ”

 

“ 시베리아 가본 적도 없으면서. ”

 

베르닌은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이불을 더 세게 끌어당겼다. 그러고 보니 이불을 네 겹으로 덮고 있었다. 그래도 오한이 가시지 않았다. 갑자기 왕재수가 셔츠를 벗더니 바지도 훌렁훌렁 벗었다. 양말도 벗고는 팬티 바람이 되었다. 베르닌은 혼비백산했다.

 

“ 어, 야! 너 왜 갑자기 옷을 벗어? 안 추워? ”

 

“ 시끄러워. ”

 

왕재수가 침대 위로 올라오더니 이불 속으로 불쑥 기어들어왔다. 베르닌이 너무 놀라 고함을 지르기도 전에 그의 곁에 모로 눕더니 두 팔로 어깨와 허리를 휘감고 껴안았다. 그리고는 온몸을 찰싹 붙여 왔다.

 

으, 으악! 이게 무슨 짓이야! 악! 너, 너... 나 이런 거 아니라고 분명히! ”

 

“ 어휴, 진짜 차갑네. 이러니까 춥지. 너 평소에 운동 좀 하고 몸에 좋은 것 좀 먹어. 신부님한테 가서 약초라도 처방받든가. 피 끓는 나이에 왜 이렇게 몸이 차갑니. 그러니까 감기도 독하게 걸리지. ”

 

“ 놔! 떨어지란 말이야! 나 이런 거 싫어해! 난 여자가 좋단 말이야. 사내랑 이런 거 안 해, 으아... 제발 바이올린 아저씨한테 가... 이 변태야, 아파서 꼼짝도 못하는 날 덮치고 싶니? 악! ”

 

“ 시끄러워, 덮치긴 뭘 덮쳐! 너 내 취향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너 몸이 너무 차갑잖아. 가만히 좀 있어. 금방 따뜻해질 거야. ”

 

“ 아니, 그러니까... 너 지금... ”

 

“ 그냥 가만히 있어. 좀 있으면 체온 올라갈 거야. 나 원래 몸이 뜨겁거든. 나 안고 있으면 금방 따뜻해진다고 아저씨들이 엄청 좋아했어. ”

 

“ 너 내 몸 녹여 주려는 거야? ”

 

“ 응. ”

 

“ 어... 그게... 안 그래도 되는데. 어... 따뜻하다.

 

“ 이제 덜 춥지? ”

 

“ 으응... ”

 

“ 원래는 응응응을 해야 금방 따셔지는데. 그거 안하니까 넌 완전히 따셔지려면 시간 좀 걸리겠다. 많이 추우면 얘기해, 해줄 수 있으니까 ”

 

“ 어, 아니야... 제발 그것만은. ”

 

“ 맘대로 해라, 네가 춥지 내가 춥니. 하여튼 재워줄 테니까 가만히 자. ”

 

베르닌은 꼼짝도 못하고 무거운 이불 속에서 왕재수에게 안겨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굉장히 불편하고 기분이 이상하고 찜찜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몸은 점점 따뜻해졌고 노곤노곤해졌다. 쿡쿡 쑤시던 사지도 점점 부드럽게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기침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두통도 좀 가시는 것 같았다. 왕재수는 진짜 따뜻했다. 사모바르를 껴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왕재수는 그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고 기다란 두 팔과 다리로 그의 몸을 찰싹 감은 채 달라붙어 있었다. 점점 몸이 따스해지면서 졸음이 밀려왔다. 옆눈으로 슬쩍 보니 왕재수는 심지어 이미 잠들어 있었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새근새근 잠든 걸 보니 기가 찼다.

 

“ 이게 뭐야, 내 몸 녹여주고 재워준다더니 자기가 자고 있네. 내 어깨에 침도 흘리고... 이렇게 자면 불편할 텐데. ”

 

베르닌은 왕재수의 머리를 살짝 들어 베개에 내려놓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포옹을 풀어야 했는데 왕재수가 워낙 찰싹 밀착해 있는데다 그 상태가 아주 따뜻하고 편안했기 때문에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몸이 후끈해지면서 꼭 온천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무슨 아로마 온천 같았다. 따끈따끈한데다 달착지근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 어 이거 진짜 맞네, 목도리에서 나던 냄새. 그거 렐랴 향수가 아니었네. ”

 

베르닌은 몽롱한 가운데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또 동시에 대체 왜 자기가 생각만 해도 찜찜하게 사내애한테 안겨 있는데 기분이 좋은지, 왜 왕재수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는 생각을 해도 더 이상 찜찜하지 않은지 의문하자 그게 또 찜찜해지려고 했지만 결국 어쨌든 기분이 좋다는 결론과 함께 잠이 들었다.

 

 

*    *    *

 

 

베르닌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머리도 아프고 콧물도 줄줄 흘렀지만 더 이상 춥지는 않았다. 기침도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방 안은 이제 뜨끈뜨끈했고 베르닌은 네 겹이나 겹쳐 덮고 있는 이불이 무거운데다 좀 답답해서 꼼지락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문득 생각나서 옆을 보았지만 비어 있었다. 베개에 왕재수가 쓰는 외제 샴푸 냄새와 그 달착지근한 향내가 배어 있었기 때문에 꿈은 아닌 것 같았다. 온몸이 오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스페호프나 사무실 선배들이 봤다면 또 무시무시한 헛소문이 퍼질 게 뻔했다. 여기가 그의 집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다섯 시가 다 되어 있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신 후 그는 기운을 끌어 모아 침대에서 내려섰다. 기분은 한결 나았지만 아직 어질어질했다. 그래도 싸들고 온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거실은 어두컴컴했고 텅 비어 있었다. 왕재수는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긴 공연 취소시킨다고 했으니까 지금쯤 바이올린 깡패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을 게 뻔했다.

 

불을 켠 후 그는 코트를 찾기 시작했다. 코트 주머니에 4차 검토용 성과보고서 초안 서류를 쑤셔 넣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까 왕재수가 코트부터 시작해 옷가지를 벗겨준 후 어디에 치워놨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카펫 위에도, 소파에도 없었다. 옷장에도 없었다. 아래층에 내려가서 물어봐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현관문을 열고 왕재수가 들어왔다. 찬바람이 휭하고 불어 들어오는 걸 보니 바깥은 더 추워진 것 같았다. 심지어 눈도 계속 내리는 모양이었다. 왕재수가 모자와 코트를 벗어 눈을 마구 털어냈기 때문이다. 털모자를 쓰고 있었는데도 머리가 젖어 있었다. 강아지처럼 머리를 부르르 흔들어 눈을 털어내고서야 왕재수가 그를 발견했다.

 

“ 너 일어났구나. 좀 괜찮아? ”

 

“ 어... 아까보다 훨씬 나아. 너 어디 갔다 왔어? ”

 

“ 아, 밖에. 엄청 춥다. 눈도 무지 많이 와. 진짜 여긴 시골이라니까. ”

 

“ 레닌그라드도 왕 춥고 눈 펑펑 오는 거 다 알아. 거기 날씨가 여기보다 훨씬 안 좋잖아! ”

 

“ 그래도 거긴 시골 아니잖아! ”

 

왕재수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거실로 가는 게 아니라 부엌으로 갔다. 또 뭘 먹고 싶어서 저러나 싶어 베르닌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쫓아갔다.

 

“ 야, 지금 너 먹을 거 없어. 나 며칠째 집에 못 들어왔었거든. 방금 일어나서 아무 것도 못해놨어. 밥도 지금 해야 돼. 한 시간은 있어야 될 거야. 그냥 소파에 앉아 있어, 차나 좀 우려 줄 테니까. ”

 

“ 뭔 소리야. 너 아프잖아. 너나 앉아. 먹을 거 줄 테니까. ”

 

“ 먹을 거라니? ”

 

왕재수가 카디건을 열어젖히더니 안에 품고 있었던 꾸러미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겹겹이 싼 보자기를 풀자 조그맣고 둥그런 항아리가 나타났다. 뚜껑을 열자 김이 포르르 올라왔고 왕재수는 만족한 듯 활짝 웃었다.

 

“ 아, 됐다. 안 식었다! 역시 난 몸이 뜨거워~! ”

 

“ 그게 뭐야? 웬 항아리? 어, 되게 맛있는 냄새 난다. ”

 

“ 웅. 그러냐? 다행이네. 입맛은 남아 있나보구나. 먹어. 뜨끈한 거 먹으면 훨씬 나아질 거야. ”

 

“ 이게 뭐야? ”

 

“ 항아리 닭고기. 오늘도 그 집 앞에 사람들 줄 서 있더라고. 아휴, 난 줄 서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이게 뭐 그렇게 맛있다고 다들 두 시간씩 줄을 서서 사먹는지. 눈도 펑펑 내리는데. 글쎄 줄 서서 들어갔더니 포장은 안 된다잖아. 부탁했더니 요리사 아줌마가 나 귀엽다고 몰래 한 그릇 싸줬어. ”

 

“ 항아리 닭고기... 어, 그거 구시가지에 생긴 그 식당 말이야? 너 거기까지 갔다 왔어? 거기 먼데... 너네 극장보다 더 멀잖아. 눈 오는데 어떻게... ”

 

“ 차 가지고 가려고 했는데 주차장에서 나오자마자 배나무에 들이박았어. 아 진짜 운전 너무 싫어. 그래서 그냥 걸어갔다 왔어. 눈 진짜 많이 와, 역시 시골... ”

 

“ 심지어 줄 서서 사왔단 말이야? 네 성깔에? 맙소사... 너 왜 그랬어. ”

 

“ 이게 감기에 엄청 좋대. 로만도 며칠 전에 감기기운 있었는데 지휘자 할아버지랑 같이 그 식당 가서 먹고 오더니 땀 흘리고 금방 나았다고 나보고도 먹으라고 억지로 데려갔었어. 생각나서 갔다 왔어. ”

 

“ 아... 진짜 고마워. 너 이렇게 착한데 그것도 모르고 난 맨날 너보고 왕재수라고... 흑... ”

 

“ 촌스럽게 왜 또 훌쩍거리는 거야. 빨랑 먹어. 식기 전에. ”

 

왕재수가 숟가락과 포크, 접시를 건네주었다. 베르닌은 조그만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닭다리와 살코기, 감자와 당근이 노란 기름기가 둥둥 떠 있는 진한 국물 사이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잘게 썬 푸르스름한 허브도 잔뜩 뿌려져 있었다.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자 몸이 금세 따뜻해졌다. 구수한 기름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부었던 편도선도 부드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닭고기도 푹 익어서 부들부들한 것이 저절로 뼈에서 떨어져 나왔다. 감자는 포근포근했고 당근마저 달착지근했다. 정신없이 고기를 발라먹고 국물을 흡입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혀를 차며 흑빵을 밀어주었다.

 

“ 좀 천천히 먹어. 얹히면 어쩌려고 저런담. 빵이랑 같이 먹어. ”

 

“ 진짜 맛있어. 나 계속 통조림이랑 비스킷만 먹었거든. 너무 맛있어서 눈물 날 거 같아. ”

 

“ 칫, 역시 넌 시골 사람이야. 기름이 그렇게 많은데 맛있니? 난 느끼해서 못 먹겠던데. 로만이 먹으라 해서 억지로 몇 숟갈 먹다가 도저히 안돼서 포기했더니 한 대 쥐어박더라고. ”

 

“ 그 아저씨 진짜 깡패야. 넌 원래 기름진 거 안 먹어서 그러는 건데 왜 쥐어박고 난리야. 너한테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

 

“ 그치! 그래도 그냥 가만히 있었어. 성감대를 콕콕 쥐어박는 재주가 있거든, 로만이... 그래서 밥 먹자마자 집으로 가서 침대로... ”

 

“ 제발 침대 얘긴 하지 말자. ”

 

정신없이 먹다가 베르닌은 문득 왕재수를 쳐다보았다.

 

“ 넌 안 먹어? ”

 

“ 느끼해서 싫어. ”

 

“ 그래도... 계속 내가 밥 안 챙겨줬는데 요즘 뭐 먹고 살았어? ”

 

“ 로만이 이것저것 먹여줬어. 아까도 요구르트랑 사과랑 먹었어. ”

 

“ 그건 밥이 아니잖아. ”

 

“ 괜찮아, 좀 있다 닭가슴살 구워놓은 거 먹을 거야. ”

 

“ 이거 닭다리라도 한 개 먹어. 국물 안 먹으면 덜 느끼할 거야. ”

 

“ 싫어. 1인분 밖에 안 되는데 너 다 먹어. 다 먹어야 약 먹고 낫지. ”

 

그래서 베르닌은 항아리 바닥에 고인 국물까지 흑빵으로 싹싹 닦아서 몽땅 해치웠다. 다 먹고 나자 몸이 후끈후끈해지면서 땀이 나고 어쩐지 아주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왕재수가 알약과 빨간색의 시럽을 주었다.

 

“ 자, 약 먹어. 이 시럽 먹으면 안 토할 거야. 무슨 위장 장애에 좋다나. 아까 의사 선생님 집에 들러서 받아왔어. ”

 

“ 그 할아버지? 오늘 쉬는 날일 텐데 집에까지 갔어? ”

 

“ 응, 근데 선생님이 환자 안 데리고 오고 나만 왔다고 짜증냈어. 너 증상 듣더니 뜨거운 거 먹이고 땀 빼면 나아질 거라고 하더라고. ”

 

베르닌은 알약을 먹고 시럽을 마셨다. 기분 탓인지 다 나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 일을 해보려는 생각이 들었다.

 

“ 너 혹시 아까 내 옷 치웠어? ”

 

“ 응. ”

 

“ 어디 있어? ”

 

“ 세탁실에. 다 젖어서. ”

 

“ 내 코트도? ”

 

“ 아니, 코트는 드라이해야 하잖아. 우리 집에 갖다놨어, 내 옷들 맡길 때 같이 맡기려고. ”

 

“ 아, 그랬구나. 나 그 코트 필요해. ”

 

“ 왜? 그거 드라이해야 돼. 엄청나게 젖었어. 얼룩도 많더라. ”

 

“ 그 안에 일할 거 들어 있어. 서류 싸들고 왔는데 오늘 밤까지 오타랑 내용 검토해서 내일 새벽에 사무실 가서 고쳐야 돼. 지금 성과보고서랑 업무계획서 만들고 있거든. 가지고 와야겠다. ”

 

“ 그럼 내가 갖다 줄게 그냥 있어. ”

 

왕재수가 잠시 후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코트를 들고 왔다. 베르닌은 코트를 받아 들고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심지어 안주머니를 탈탈 털어도 서류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해진 베르닌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 너 혹시 아까 코트 치울 때 주머니에 들어있던 서류 못 봤니? 한 100페이지 쯤 되는 거, 얇은 종이에 타이핑해서 둘둘 말아놓은 건데. ”

 

“ 어, 그 종이뭉치? ”

 

“ 응, 맞을 거야. 그거 어디에 있어? ”

 

“ 어... 그거... 저... ”

 

왕재수가 머뭇거렸다. 베르닌은 갑자기 겁이 더럭 나서 정색을 하며 다시 물었다.

 

“ 너 그거 봤지? 어디 놔뒀어? 빨리 말해봐. ”

 

“ 어... 있잖아. 너 그거 꼭 필요한 거야? 없으면 어떻게 돼? ”

 

“ 어떻게 되다니! 그거 없으면 나 내일 국장한테 목 졸려 죽을지도 몰라. 어디 있는지 빨리 말해줘! ”

 

“ 저기... 그거 있잖아. 난 그게 그렇게 중요한 종이인 줄 몰랐어. 저... 그거 아까 다 젖고 너무 더러워져서 그냥 버렸는데... ”

 

“ 뭐야? 버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서류를 왜 버려!! 너 지금 농담하는 거지? ”

 

“ 서류인 줄 몰랐어. 종이뭉치가 다 젖어서 너덜너덜하게 다 찢어지고 잉크 얼룩 투성이라서 그냥 쓰레기인 줄 알았어. 너 아까 토했잖아. 심지어 거기 떨어져서 진짜 더러워졌단 말이야. 그래서 아까 카펫 치우다가 걸레에 말아서 같이 갖다 버렸어... ”

 

“ 갖다 버려? 내 서류를?? 어디에!! 휴지통에? 저 휴지통? ”

 

“ 아니. 집 안 휴지통에 버리면 습기 차고 냄새날까봐 아파트 쓰레기 투입구에 버렸어. 저... 그 소각장... ”

 

뭐야? 아악!

 

베르닌은 정신이 혼미했다.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남의 중요한 서류를 손대다니! 내용도 안 보고 심지어 소각장에 밀어 넣을 수가 있냐고! 정신이 있는 거야? ”

 

“ 저기... 난 서류인 줄 몰랐다니까. 내가 그랬잖아, 우리는 춤만 잘 추고 노래만 잘 부르면 된다고... 서류는 잘 몰라. 일부러 그런 게 아냐. 진짜 몰랐어, 너무 더러워서... ”

 

왕재수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더듬거리면서 변명을 했다. 베르닌은 너무 화가 나서 정신이 몽롱했다. 충격으로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왕재수가 깜짝 놀라 그를 부축해주려고 했다. 베르닌은 울화가 치밀고 앞이 캄캄해서 분에 겨워 왕재수의 팔을 뿌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 저리 가! 아무 짝에 쓸모없는 바보 멍청이! 어떻게 서류랑 그냥 종이도 구분 못하고... 아아 난 이제 망했어! 끝장이야, 국장이 날 죽일 거야! 잘릴 거라고! ”

 

“ 어... 미안해. 진짜 화난 거야? 저기...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는데? 너네 국장한테 내가 가서 얘기할까? 너는 다 했는데 내가 버린 거라고 얘기할게. 그러면... ”

 

“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넌 조직 생활을 안 해 봐서 몰라! 맨날맨날 일등만 하고 천재 소리 듣고 대접받고 높은 자리만 꿰차며 살아서 이런 거 모른다고! 너 같은 게 서무의 슬픔을 어떻게 알아!

 

“ 미안... 화내지 마. 서무의 슬픔 잘 몰라서 미안... 나 천재라서 미안해... 저기, 그래도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마. 기침 도져... ”

 

왕재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르닌은 쿨럭쿨럭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뻐근하고 숨이 턱턱 막혔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왕재수가 아까처럼 등을 쓸어주려고 했지만 베르닌은 속이 상하고 화가 치밀어서 홱 떠밀었다. 생각보다 너무 세게 밀었는지 왕재수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콰당 소리가 났다. 화가 난 와중에도 조금 걱정이 돼서 일으켜줘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왕재수가 자기 혼자 일어나 앉았다. 코를 벌름거리고 입술을 실룩거리더니 금세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먹거렸다.

 

“ 너무해... 나는, 나는 정말 걱정돼서 그랬던 건데. 종이뭉치 너무 더러워서 그냥 놔두면 세균 옮을까봐 그런 건데. 더러운 거 놔두면 카펫에 나쁜 균 다 묻고 공기 중에도 떠다니고... 너 아프니까 깨끗하게 치우려고 한 건데. 흐흑... 막 화내고 소리 지르고 떠밀고... 때리려고... ”

 

“ 어... 야... 울지 마. 내가 너 때린 건 아니잖아. ”

 

“ 떠밀었어. 때리려고 주먹도 쥐고... 무서운 표정 짓고... 엉엉... 나 때리는 거 싫어. 감옥에서도 나쁜 아저씨들이 막 때렸어. 이상한 주사 놨어. 나 너무 아파서 맨날 울었어. 어헝... 근데 너도 때려. ”

 

“ 아니야... 진짜 아니야. 화난 건 맞지만 때리려고 그런 거 아니야. 떠민 것도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너무 열 받아서 나도 모르게... ”

 

“ 아까는 나 때릴 데 하나도 없다고 해놓고 막 밀어서 넘어뜨렸어. 종이 버렸다고 계속 소리 질러. 어헝... 나 천재라고 막 화내. 여기 시골... 주변에 아무도 없어. 쥐도 있고 바퀴벌레도 있어. 놀러갈 데도 없어. 흐흑... ”

 

왕재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훌쩍 울었다.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쳤는지 흑흑 흐느끼다 아예 목을 놓아 울었다. 베르닌은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을 몰랐다.

 

“ 야, 그만 울어. 내 서류 버려놓고 뭘 잘했다고 네가 울어... ”

 

“ 맨날 서류 얘기만 하고... 우리 극장 사람들도 내가 무슨 얘기하면 서류 때문에 안 된다 하고... 그깟 서류가 뭐라고 다들 난리야. 시커멓게 잉크 칠한 종이쪼가리밖에 더 돼? 엉엉... ”

 

왕재수가 소매로 눈과 코를 닦으면서 일어났다. 계속 흐느껴 울면서 현관으로 갔다. 문을 열면서 힐끗 돌아보았지만 이런 난감한 상황에 당황한 베르닌이 돌멩이처럼 굳어져 앉아 있자 더 심하게 울면서 나가버렸다.

 

 

*    *    *

 

 

베르닌은 한동안 멍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지금이라도 사무실에 가서 3차 검토회의 자료를 뒤져 다시 4차 회의 자료 초안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머리가 아프고 뒤죽박죽이라 자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식탁 의자에 걸쳐진 코트를 보자 더 우울해졌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거실로 갔다.

 

복잡한 머리를 정리할 겸 청소나 하려고 빗자루와 걸레를 가져왔다. 그런데 카펫이 아주 깨끗했다. 분명히 아까 눈 녹은 흙탕물과 토사물로 잔뜩 더럽혀놨는데 얼룩은커녕 먼지조차 없었다. 구석을 보니 대형 헤어드라이어가 한 개 뒹굴고 있었다. 옆에는 이상한 꼬부랑글씨 상표가 붙어 있는 세제통과 분무기, 심지어 방향제까지 있었다. 외제인 걸 보니 왕재수가 가져온 게 분명했다. 소파에 묻어 있던 흙탕물 자국도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 그랬구나... 나 자는 동안 카펫이랑 소파랑 다 청소했구나... 세균에 오염되면 더 악화될까봐... 벌레 지나간 자리는 더럽다고 밟지도 못하는 앤데 내가 토한 것도 다 치우고 드라이어로 말려놓기까지 했구나. ’

 

베르닌은 갑자기 너무너무 가책이 들었다.

 

‘ 그 철딱서니 없는 애가 나 아프다고 돌봐주고 침대에 뉘어주고 몸도 녹여줬는데... 기다리는 거 제일 싫어하는데 줄 서서 항아리 닭고기도 사다 주고 약도 받아다 줬는데 고마워하지도 않고 화만 냈구나. 소리 지르고 떠밀고 울리고... 나 진짜 나쁜 놈이었어. 그깟 서류가 뭐라고... 못된 국장 때문에 내가 정신이 나갔나봐. 사람이 중하지 서류가 중해? ’

 

가슴을 치며 자책하고 있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열렸다. 왕재수가 헉헉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커멓게 검댕으로 물들어 있었다. 옆구리에 거무죽죽한 종이뭉치를 끼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현관에 선 채 종이뭉치를 흔들면서 베르닌을 불렀다.

 

야, 찾았어! 이거 맞지? ”

 

“ 어... 어, 너 그거... ”

 

“ 맞나 안 맞나 봐봐! 으윽, 더 이상은 못하겠다. ”

 

베르닌은 왕재수의 손에서 종이뭉치를 받아들었다. 온통 시커멓게 얼룩져 있었다. 펼쳐보니 4차 검토회의용 성과보고서 초안 제목과 날짜, 그리고 현란하게 줄이 그어진 표가 보였다. 종이 여기저기에 지저분한 흙탕물과 토사물 얼룩이 가득했다. 귀퉁이는 젖어서 찢어져 있었고 너덜너덜했다.

 

“ 어, 맞아... 너 이거 어떻게 찾았어? 버렸다면서... ”

 

“ 쓰레기 소각장 갔다 왔어. 오늘 일요일이라서 아직 안 태웠더라고. 근데 다른 쓰레기가 너무 많아서 한참 찾았어. ”

 

“ 쓰레기 소각장... 거기 갔었단 말이야? 거기 진짜 크고 엄청 더러운데... 거기 들어가서 쓰레기 뒤진 거야? ”

 

“ 응. 그래도 한 시간 만에 찾았어. 일요일이라 다행이야. ”

 

“ 너처럼 깔끔 떠는 애가 쓰레기를 막 뒤지고... ”

 

“ 그럼 어떡해. 너 잘린다며. 국장한테 목 졸린다며. 서무의 슬픔이란 게 있다며. 이제 서류 찾아서 괜찮은 거야? 이제 목 안 졸려? 안 잘리는 거지? 서무의 슬픔 없는 거지? ”

 

어흑, 내가 잘못했어... 너는 왕재수가 아니야. 너는 왕 착한 애야, 흐흑... 미안해... ”

 

베르닌은 왕재수를 와락 끌어안으며 흐느껴 울었다. 왕재수는 몸서리를 치면서 그를 밀어냈다.

 

“ 야, 하지 마. 나 엄청 더러워. 세균 옮아. 너 아픈데. ”

 

“ 그깟 세균 좀 옮으면 어때, 흐흑... ”

 

“ 왜 울지? 기뻐해야 되는 거 아니야? 이제 이 서류 가지고 일할 거야? 또 밤새고 일해서 무슨 검토회의 자료인가 뭔가 만들어? 내일 국장하고 회의해? ”

 

아니야, 나 일 안 해! 이깟 서류가 다 뭐야! 에잇!

 

베르닌은 종이뭉치를 북 찢어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왕재수가 깜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너 뭐해! 중요한 서류라면서! ”

 

“ 이깟 서류 하나도 안 중요해! 시커멓게 잉크 칠한 종이쪼가리야! 자르려면 자르라지!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아! ”

 

“ 어... 난 왜 쓰레기장에서 저걸 뒤져왔니... ”

 

“ 미안해, 진짜 미안해. 너한테 화내고 소리 지르고 때릴 데 하나도 없는데 막 밀치고 무섭게 해서 미안해. 잘못했어. ”

 

“ 칫, 그래. 너 나한테 진짜 잘못한 거야. 내가 천재로 태어나고 싶어서 천재가 된 것도 아닌데 막 뭐라 하고. ”

 

“ 근데 너 역시 재수 없긴 해. ”

 

“ 괜찮아, 울 아저씨들이 난 예쁘니까 괜찮댔어. ”

 

베르닌은 왕재수가 검댕을 씻어내는 동안 오랜만에 가스 불을 올리고 수프를 끓였다. 왕재수가 좋아하는 생선 수프를 끓이고 싶었지만 냉장고에 들어 있는 게 별로 없어 그냥 양배추 수프를 끓였다. 냉동실에 있던 칠면조 고기를 탕탕 잘라내 굽고 감자 샐러드를 만들었다. 왕재수는 음식 투정을 하지 않고 정신없이 먹었다. 쓰레기를 뒤지느라 몹시 허기졌던 모양이었다. 차를 우려주자 무가당 초콜릿 캔디도, 사과파이도 없이 허겁지겁 마셨다. 혹시나 해서 렐랴가 선물했던 잼을 퍼주자 그것도 막 먹었다.

 

차를 다 마신 후 왕재수는 바이올린 깡패가 올 시간이 됐다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베르닌은 갈갈이 찢어진 서류를 잠시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았지만 곧 그것을 전부 쓸어서 버렸고 왕재수가 가져다 준 약을 먹은 후 곧장 침대로 기어들어가 깊은 단잠에 빠졌다.

 

 

*    *    *

 

 

월요일에 베르닌은 아주 일찍 일어나 새벽 출근을 했다. 3차 검토회의 자료를 뒤져가며 다시 4차 회의 초안을 만들었다. 회의에서 국장은 어떻게 된 게 마지막 검토회의 자료가 이렇게 허술할 수가 있느냐며 베르닌을 사정없이 질책하고 자르겠다고 협박을 늘어놓았다. 베르닌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국장은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다가 결국 시간도 없었고 어차피 마지막 손질을 할 사람도 총괄 서무인 베르닌 뿐이었으므로 포기하고 이틀 내에 모든 작업을 완료할 것을 지시했다.

 

베르닌은 다시 이틀 밤을 샜고 100페이지짜리 업무 성과보고서와 역시 100페이지짜리 업무 계획서 최종본을 완성했다. 국장은 표지 디자인과 쪽 번호 글씨체까지 하나하나 간섭한 후에야 인쇄를 허락했다. 각각 50부를 인쇄 제본했다. 최고급 용지를 썼다. 국장은 그 중 각 5부씩에 서명을 하고 가브릴로프 KGB 지국 직인을 찍은 후 특급 공문서라는 딱지를 달아 우체국에 속달 배송을 의뢰하게 했다. 기일을 맞춰 보고서를 제출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모스크바 본부의 심의와 연방 지국 평가, 그리고 포상뿐이라고 의기양양해 했다.

 

이틀 후 모스크바의 루뱐카 KGB 본부로부터 전보가 한 장 날아왔다. 벌써 심의가 끝나고 우수 지국 표창이 결정됐나보다 하고 스페호프 국장은 기쁨에 들떴다. 우편물 수합 담당이라 전보를 받아들고 온 베르닌에게 봉투를 뜯고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했다. 그래서 베르닌은 시키는 대로 했다.

 

 

“ 수신 :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지국장

 

귀 지국의 발전을 기원함.

귀 지국에서 제출한 성과보고서 및 업무계획서는 분량 초과로 심의 대상에서 제외, 즉각 폐기되었음을 통보함.

향후 동 보고서는 모스크바 표준 양식에 의거해 각각 5페이지 이내로 작성하고 임의의 양식 및 편집을 추가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고함.

 

모스크바 보안위원회 성과관리국장 ㅇㅇㅇ. “

 

 

스페호프 국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전보용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집어던졌고 베르닌에게 그만 나가보라고 명령했다. 그날 국장은 두통으로 조퇴했고 다음날 3일의 병가를 내서 모두에게 어린이날을 선사했다.

 

베르닌은 국장의 병가에 맞춰 자기도 처음으로 3일 휴가를 냈다. 이제야 피로를 풀고 실컷 쉬며 놀 생각에 들떴다. 그러나 그의 첫 휴가는 어이없이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눈보라를 맞으며 두 시간 동안 줄을 서서 항아리 닭고기를 사오고 세균이 득실거리는 쓰레기 소각장에서 서류를 찾느라 녹초가 되었던 왕재수가 뒤늦게 폐렴에 걸려서 사흘 동안 끙끙 앓았기 때문이다. 바이올린 깡패는 하필 무슨 연수 때문에 모스크바에 가 있었고 왕재수는 극장에 아픈 게 알려지면 무시당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우며 입원을 거부했다. 그래서 베르닌은 사흘 내내 왕재수의 곁에 붙어 앉아 베이비시터처럼 내내 간호를 해야 했다. 까탈스러운 왕재수를 간호하는 게 엄청나게 피곤해서 차라리 보고서를 한 번 더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베르닌은 꾹 참았다. 어쨌든 왕재수는 그에게 렐랴가 짜준 목도리를 줬고 그 목도리는 엄청나게 따뜻한데다 좋은 냄새도 났기 때문이다.

 

   

 

 

 

FIN

2014. 12. 12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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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재수가 베르닌을 위해 사다 준 항아리 닭고기는 전에 writing 폴더에 발췌한 본편 우주의 미샤와 트로이의 이야기에도 잠깐 등장한다. 거기서는 닭고기 수프라고 썼다. 그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83

 

 이 시리즈에서는 항아리 닭고기로 격상시키면서 내가 야채 등 건더기를 더 추가시켰는데, 원래는 예전에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식당에서 내 친구들이 가끔 사먹었던 조그만 단지에 든 닭고기 요리이다. 기름기 많은 수프 국물에 잠겨 있는 닭다리 요리로 심대하게 느끼하였으나 느끼한 거 잘 먹는 친구는 흑빵으로 싹싹 닦아가며 해치웠고 이거 먹으면 몸이 뜨끈해진다고 좋아했었다 :) 나야 베르닌보다는 왕재수의 식성에 가까운 편이라서 ㅋㅋ

 

** 연말에 보고서들 쓰느라 진짜 열받았었는데, 이 글은 3차와 4차 검토 사이에 쓴 거다. 여기선 4차 검토회의로 끝나는 걸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6차까지 갔다. 물론 업무계획서는 또 별도이니.. 하여튼 계속 회의하고 계속 고치고.. 삽질의 연속이었음 -_-

 

*** 이야기는 8편의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으로 이어진다~ 그건 아마도 주중에..

 

:
Posted by liontamer

 

 

작년 7월. 페테르부르크.

그리보예도프 운하 지나가다가 찍은 미하일로프스키 극장 공연 안내 현수막. 7월 발레 공연에 대한 것이다.

'발레의 여름'

레퍼토리는 순서대로, 해적, 백조의 호수, 지젤, 돈키호테, 잠자는 미녀,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내가 갔을 때가 백조와 지젤 공연과 맞기는 했는데 이때 난 마린스키 공연들을 잔뜩 끊어놔서 저 공연들을 보지는 않았다. 그전에 로미오와 줄리엣, 라 바야데르만 봤었는데 미하일로프스키는 수퍼스타 주역들 외에는 사실 군무나 무대 규모, 전체적 퀄리티는 마린스키보다는 좀 떨어지는 편이다.

어쨌든 현수막이 예뻐서 찍어놨다.

 

그건 그렇고 다다음주 미하일로프스키 라 바야데르 캐스팅이 이제야 나왔다. 캐스팅 보고 끊을까 말까 하고 있었는데 빅토르 레베제프가 솔로르를 춘다고 한다. 무대가 궁금하던 무용수라 아침에 그거 한장 더 끊고 유리지갑 폭발의 길로 ㅠㅠ 미하일로프스키의 라 바야데르는 전에 사라파노프와 세미오노바 버전으로 봤는데 사라파노프 하나 건졌을 뿐이었지만... 이번엔 레베제프를 건지기를 빌며.. (예쁘장한 무용수니까 어쨌든 눈은 호강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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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사진 찍은 사람은 Tomas Kolisch

장미의 정령. 빅토리야 크라스노쿠츠카야와 함께.

나도 이 사람이 춘 장미의 정령 보고 싶다고요 ㅠㅠ 외모도 그렇고 도약도 좋은 무용수니 상당히 어울리는 배역일 듯 싶다. 사진으로 봐도 근사하고...

워싱턴 투어에서 크리스티나 샤프란과 춘 무대는 꽤 호평을 받았다. 장미의 정령 특유의 공기 같고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잘 포착한데다, 슈클랴로프의 우아한 팔동작이 근사했다는 평이었다. 나중에 원문 평들 스크랩해보겠다. 지금은 트윗과 브 콘탁테로만 갈무리해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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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계속 잠도 모자라고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마음의 위안을 위해 예쁜 것들 사진 몇 장.

갖고 싶어서 가끔 러시아 로모노소프 홈페이지에서 구경만 하는 티포트 :)

35,000루블. 환율 많이 떨어져서 예전보다는 훨씬 싸졌지만 그래도 56만원 정도네... 그림의 떡.

 

 

 

이건 상트 페테르부르크 가이드 페이스북에서 얻은 사진. 예쁜 러시아 소녀. 너무 귀엽다!!!

 

이제부터는 아름다운 무용수들 사진

 

 

예카테리나 콘다우로바

얼마 전 뉴욕 투어 가려고 마린스키 앞에서 공항 가는 버스 타러 걸어가는 중. 사진은 svetlana avvakum

정말 너무 멋지다. 다 갖췄다! 내가 좋아하는 거.. 예쁘고 빨간 머리에 키크고 늘씬하고 롱코트 잘 어울리심!!! 아아 미의 결정체!! 한번이라도 이렇게 되어보고 싶다!!!!

 

 

 

이번엔 아담한 디아나 비슈네바

지난 뉴욕 투어 때 게르기예프가 주최한 파티에서..

아름다우심~

 

 

비슈네바 한 컷 더.

사진사는 gene schiavone

 

 

전에 올렸던 뉴욕 투어 때 백조 리허설 사진 하나 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와 빅토리야 테료쉬키나

 

 

 

슈클랴로프와 테료쉬키나 하나 더. 포즈와 의상 보니 잠자는 미녀인 듯

잠자는 미녀는 안무 자체는 별로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젤 처음 본 고전발레라 애정이 있다 :)

 

 

둘이 하나 더. 차이코프스키 파 드 두

 

 

마지막은 전에 올렸던 건데... 내가 찍은 사진이다. 작년 여름, 마르그리트와 아르망 커튼 콜.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저 의상 진짜 잘 어울렸다. 오케스트라 핏 앞까지 뛰어나가 찍었음 ㅋㅋ 그의 미모는 정말 광채를 발했다.. (료샤에게 엄청 쿠사리당함 ㅠㅠ)

댄스 폴더에서 마르그리트와 아르망으로 검색하면 리뷰와 이때 찍은 사진들 있다

 

.. 무용수들이 많으니 이 포스팅은 댄스 폴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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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아직 주말이 되려면 꽤 남았고 심신은 피곤하고..

위안을 위해 서무의 슬픔 시리즈 6편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올린다.

이 시리즈 쓰는 건 업무 스트레스 풀기 좋긴 한데, 막상 본편 쓰기가 어렵네.. 지금 서무 11편 쓰고 있긴 한데, 이거 마치면 당분간 다시 본편에 매진해야겠다. 근데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자꾸 받으니 ㅠㅠ

어쨌든 새 에피소드가 추가될 때마다 이 폴더 두번째 포스팅인 '등장인물 소개와 시리즈 목차'에 목차 추가 수정하고 있다. 포스팅한 후에는 링크도 올리고..(http://tveye.tistory.com/3428)

쓰고 보니 시리즈 중 이번 에피소드가 제일 길다... 그래도 대화가 많아서 분량 자체가 많지는 않다.

 

** 지금까지의 간단한 줄거리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가브릴로프에 새로 부임해 온 시 의회 의장은 야심차게 체육대회를 제안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이번 편에 언급되는 가브릴로프 공공기관들, 그러니까 삼림국, 예산심의국, 출판문화국, 식품관리국 등등은 정확한 소련 시절 공공기관 명칭들이 아니고 내가 대충 만들어낸 것이다. 뭐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들이야 있었겠지만 어쨌든... ***

 

*** 새로 언급된 인물들 중 먀흐킨, 필로모프, 데니스는 본편에도 나온다 :) ***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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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6 

 

 

 

 

서무의 슬픔

-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전날 밤부터 베르닌은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기상이변이 일어나 눈보라가 몰아친다면 금상첨화였다. 마침 사흘 째 평년보다 기온도 낮았고 하늘도 우중충했으므로 그의 소망이 전혀 실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미 10월 하순에 접어들고 있었으니까.

 

그를 이토록 전전긍긍하게 만든 것은 바로 토요일로 예정된 가브릴로프 공공기관 종합 체육대회였다. 원래 가브릴로프 KGB와 시 의회는 매년 친선 체육대회를 열어왔다. 말이 체육대회지 사실은 축구 한 게임 뛴 후 잔디밭에 둘러앉아 너도나도 보드카를 퍼마시며 늘어지는 야유회였다. 그 축구라는 것도 평균 연령대 40세 이상의 배 나온 남자들이 슬렁슬렁 뛰며 공을 차대는 조기축구회 수준이었다. 매년 체육대회 예산은 여유 있게 잡혀 있었으므로 최소한의 모양을 갖추기 위해 축구경기를 하나 끼워 넣은 것이다.

 

입사 2년차인 베르닌은 작년 대회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경기에 나가면 이기든 지든 특별수당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출전은 고참들의 몫이었다. 심지어 스페호프 국장마저 출전했다. 나머지는 열심히 박수부대 노릇을 한 후 샤실릭을 구워먹고 밤중까지 보드카를 퍼마시며 놀았다. 그리 나쁜 기억은 아니었다. 신참이자 서무라는 이유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술심부름을 한 것 외에는. 작년 같은 체육대회라면 그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몇몇 직원들은 휴일에 대회를 한다고 툴툴댔지만 어차피 그는 격무 때문에 토요일에도 출근하는 처지였으므로 상관없었다.

 

문제는 얼마 전 군 출신의 시 의회 의장이 새로 부임하면서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공공기관 종합 체육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선언한 데 있었다. 정력적인 의장은 심지어 직접 공공기관들을 분류해 두 개의 팀을 구성하는 의욕까지 보였다. 팀 이름까지 지었다. 군대 출신답게 독수리 팀과 호랑이 팀이었다. 독수리 팀에는 주요 행정 기관들, 즉 가브릴로프 시 의회와 KGB, 예산심의국, 삼림관리국, 식품관리국 등이 포진되었다. 호랑이 팀은 언론과 문화 관련 기관들로 구성되었다. 교육국, 출판문화국, 검열국, 그리고 가브릴로프 극장과 민속 극장이었다. 의회 의장은 중립을 지키겠다면서 빠졌기 때문에 독수리 팀의 사령관은 KGB 국장인 스페호프가 맡게 되었고 호랑이 팀은 보나마나 질 게 뻔하다고 생각한 기관장들이 너도나도 독이 든 성배를 거부한 나머지 감투 쓰는 것을 좋아하는 가브릴로프 극장장 먀흐킨이 맡게 되었다.

 

완벽주의자이자 호승심으로 가득찬 독재자 스페호프는 체육대회 승리를 위한 특별 TF를 구성했다. 모든 잡무에서 빠져본 적이 없는 베르닌도 끌려 들어갔다. 사전 훈련을 위한 특별 예산을 편성했고 붉은색 상의와 흰색 하의로 이루어진 운동복과 운동화를 새로 구입했다. 각 기관들로부터 후보 선수 명단을 제출받은 후 면밀히 검토해 대표 팀을 꾸렸다. 독수리와 호랑이의 기량은 누가 봐도 압도적인 차이가 났다. 시 의회야 나이든 의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삼림관리국과 KGB가 있었다. 전자는 광대한 가브릴로프의 숲을 관리하고 벌목공들을 지휘하는 곳이라 힘 좋은 남자들이 많았다. KGB야 현장 요원들이 있으니 말이 필요 없었다. 문화니 예술이니 출판이니 하며 비실비실하기 짝이 없는 책상물림들과 계집애 같은 예술가들로 이루어진 호랑이 팀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애초부터 모든 종류의 문화예술을 경멸하는 스페호프는 이번 기회에 그 바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며 굉장한 의욕을 보였다.

 

“ 그 약골들을 밟아버려야 해! 이기는 건 당연한 거고, 단 한 경기에서도 패하면 가만 두지 않겠네! ”

 

스페호프는 세심하게 명단을 검토했다. 조기축구회 아저씨들은 단 한 명도 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각 기관에서 젊은 피들이 대거 수혈되었다. KGB에서는 몇몇 여직원들을 제외하고는 28세의 다닐 베르닌이 막내였다.

 

“ 에 또... 그렇지. 자네는 축구, 높이뛰기, 공굴리기, 농구, 100미터 달리기, 투포환, 이어달리기... 전 종목에 출전하도록. ”

 

“ 국장님, 저는 농구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요. ”

 

“ 상관없어. 180이 넘는 애들이 필요해. 우리 팀은 다 좋은데 의외로 키 큰 놈들이 별로 없단 말이야... 일단 들어가서 리바운드를 전담하도록. 필요하면 레이업 정도는 할 수 있겠지. ”

 

“ 그런데 리바운드가 뭔가요? ”

 

“ 농담하는 거겠지? ”

 

국장의 눈초리가 너무나 매서웠기 때문에 베르닌은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래서 급하게 허풍을 쳤다.

 

“ 아... 하하하, 농담이었습니다. 리바운드를 전담하겠습니다... 저... 그런데 축구는 좀 해봤지만 제가 달리기는 자신이 없어서요. ”

 

“ 자네 기초 체력 시험 기록 보니까 100미터를 11초대에 뛰던데? ”

 

“ 아니, 그건 입사 전이고요... 지금은 운동을 전혀 안 해서요. 매일 야근하느라 운동은커녕 산책할 시간조차... ”

 

“ 시끄러워! 필로모프 빼고는 자네 기록이 제일 좋아. 그 친구가 하필 맹장염에 걸릴 게 뭔지... 100미터 대표로 나가게. 그리고 이어달리기는 마지막 주자로 뛰는 거야. 축구는 원톱 스트라이커. 그리고 키가 크니 높이뛰기쯤은 껌이겠지. 어깨가 넓으니 투포환도 잘 할 거고. ”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어째서 제가 모든 경기에 다 나가야 하는 거죠? 저는 행정직이잖습니까... 현장 요원들도 많은데... ”

 

“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애들이 전부 골골거리지 뭔가. 글리셰프는 격투 연습하다가 팔을 삐었다지를 않나, 스포츠 만능이었던 콜랴는 하도 술을 많이 마셔댄 덕에 지방간 증세가 심해져서 요양소에 갔지. 에멜리얀은 이제 나이가 너무 많아서 뛰는 게 시원찮더군. ”

 

“ 국장님께서 가장 총애하시는 안드레이는... ”

 

“ 그 친구는 사격 전문이야. 스나이퍼라서 막상 이렇게 몸을 쓰고 뒹구는 일에는 맞지 않아. 그리고 언제 다들 이렇게 늙었는지... 필로모프를 빼면 제일 젊은 놈이 서른다섯이더군! 망할 필로모프 녀석은 대체 뭘 잘못 퍼먹고 맹장염이람. 힘 잘 쓰는 놈들은 삼림국에서 전부 채웠으니 자넨 날렵하게 뛰어다니며 우리 독수리 팀의 승리를 견인하게! 가장 젊은 친구니까 그 정도는 당연히 해내야지! 암, 그렇고말고!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란 말이 맞네. 정부의 슬로건을 지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행정의 기본이야. 이번 대회에서 그 약골 호랑이 팀을 이기지 못하면 전부 자네 책임으로 알겠네! ”

 

“ 아니,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저는 원래 수영 외에는 잘하는 운동이 없어서... 차라리 수영 선수로 뽑아주시면 안될까요? 종목을 추가해서... ”

 

“ 야외에서 하는 대회인데 웬 수영! ”

 

“ 그러니까... 즐라타야 강을 횡단한다든지... ”

 

“ 10월말에 강을 헤엄쳐 건너겠다고? 얼어 죽고 싶나? ”

 

“ 하지만... 축구에 달리기에 공굴리기, 높이뛰기에 리바운드에 심지어 투포환이라니... 자신이 별로 없습니다. ”

 

“ 젊은 놈이 왜 이렇게 패기가 없어! 그 따위 자세로 KGB 요원이라니, 덩치가 아깝군! 이런 글러먹은 책상물림 같으니. 군대를 보내야 하나. ”

 

“ 군대는 벌써 다녀왔는걸요... ”

 

“ 군대에도 다녀온 놈이 이렇게 나약한 소리를 지껄여? 설마 밤이고 낮이고 손에 잉크를 묻히며 기사나 써대는 놈들과 계집애처럼 타이츠나 입고 엉덩이를 살랑대는 무용수 녀석들도 못 이기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런 놈이라면 강에 빠져죽어야지! 전승무패가 목표일세! 한 경기라도 지면 각오하게. 그럴 리는 없겠지만 1백만분의 1로 대회에서 패하기라도 하면 자넨 모가지야!

 

“ 아니, 저는 행정직으로 시험을 보고 입사했는데 어째서... ”

 

“ 시끄럽네! 당장 나가서 축구 연습이나 하게! ”

 

스페호프는 심지어 대회 일주일 전부터는 출전 선수들에게서 업무도 모두 면제해 주었다. 베르닌조차도 서무 업무를 면제받았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만큼 국장이 승부욕에 불타고 있었으니 정말이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베르닌도 독수리 팀이 대회에서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상대 팀이 너무 약골이었으니까. 애초부터 의회 의장과 스페호프가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양 팀을 구성했고 경기 종목을 편성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국장의 말대로 전승무패할 자신은 없었다. 축구나 투포환, 공굴리기 따위야 삼림국 덩치들이 있으니 괜찮았지만 달리기 같은 건 어쩐지 무용수들이 다리가 기니까 더 잘할 것 같았다. 최소한 한 경기 정도는 내주게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사실 그가 국장의 말대로 책상물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스페호프에게 엄살을 부리기는 했지만 그는 운동신경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대학 시절에는 축구도 꽤 했다. 문제는 입사 후 2년 동안 너무나도 격무에 찌든 나머지 체중은 불어나고 몸이 둔해졌다는 데 있었다. 2년 동안 운동이라곤 해본 적이 없었다. 최근에는 뱃살이 슬며시 접히고 옆구리살이 만져질 정도였다. 격무와 야근으로 인한 야식, 수면 부족 때문에 만성 식도염과 위염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회 직전 일주일 동안 베르닌은 축구, 높이뛰기, 공굴리기, 농구, 100미터 달리기, 투포환, 이어달리기 연습에 너무 지쳐서 차라리 서무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특히 축구는 더 그랬다. 삼림국의 덩치 큰 녀석들은 힘은 좋았지만 단순무식해서 전략이란 걸 몰랐다. 베르닌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지만 원톱 스트라이커는커녕 공을 발끝에 대보지도 못했다. 승부욕 강한 불곰 같은 삼림국 대표들이 너도나도 골을 넣어 영웅이 되고 싶어 안달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후방 수비수로 밀려났다. 달리기는 아무리 뛰어도 옛날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탈진한 나머지 집에 가면 그대로 뻗어버렸다.

 

 

스페호프는 대회 이틀 전에 베르닌을 상대 팀의 연습장으로 급파했다. 두 팀 모두 비밀 유지를 위해 출전 선수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다. 마침 극장 앞 레닌 광장에서 호랑이 팀의 연습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국장은 베르닌에게 그쪽으로 가서 정보를 좀 긁어모아 오라고 했다.

 

“ 뻔히 제가 독수리 팀 쪽이란 걸 다 아는데 들어오게 할까요? ”

 

“ 아무도 자넬 위협적으로 생각 안 할 걸세! 누가 봐도 얼간이 책상물림이잖나! 바로 그것이 우리의 전략이지. 알고 보니 얼간이가 에이스였다! 삼형제 중 바보 이반인 것이지! ”

 

“ 별로 칭찬 같지 않은데요... ”

 

“ 시끄러워. 빨리 다녀와! 정 의심하면 그 불여우를 보러 왔다고 하게! 다 알지 않나, 자네와 그 불여우... 아침에 하고 점심에 하고 저녁에... ”

 

“ 국장님, 정말 그건 오해입니다. 저희는 진짜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요. 아아 억울해... ”

 

“ 썩 다녀오지 못해! ”

 

그래서 베르닌은 울며 겨자 먹기로 레닌 광장으로 향했다.

 

 

*   *   *

 

 

광장은 한산했다. 호랑이 팀이 축구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무 뒤에 숨어서 지켜보니 별로 위협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체격 조건도 훨씬 떨어지는데다 서로 공을 넣겠다고 아옹다옹하던 독수리 팀과는 정반대로 아무도 나서지 않아서 공이 자기 혼자 굴러가기 일쑤였다. 저 정도면 괜찮겠다 싶었다. 몰래 사진을 찍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어깨를 툭 쳤다.

 

“ 어, 너 여기서 뭐해? ”

 

베르닌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후다닥 카메라를 등 뒤로 감추었다. 옆을 보니 왕재수였다.

 

“ 아, 나... 그냥 지나가다 들렀어. 어, 그러니까... 너 밥은 먹었어? ”

 

“ 내 밥 챙겨주려고 들른 거야? ”

 

“ 어... ”

 

“ 며칠 동안 방치하더니만. 출퇴근도 안 시켜주고... 맨날 한밤중에 들어오느라 내 밥도 안 챙겨주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담. ”

 

“ 어... 알잖아, 나 서무인 거. 국장이 자꾸 괴롭혀서 바빴어. 너 그래서 요즘 끼니 거른 거야? 설마 또 극장 사무실에서 잤어? 그 바이올리니스트 깡패 또 어디 갔어? ”

 

“ 안 갔어. 이번 주는 계속 로만이 집에 와 줬어. 밥도 해주고 차도 우려주고 출퇴근도 시켜줬어. 근데 로만은 침대 기술만 좋지 음식 솜씨는 참 별로야. 차도 대충대충 우려주고 운전도 너보다 못해. 넌 언제 안 바빠지는 거야? ”

 

“ 체육대회 끝나면 좀 나아질 거 같아. ”

 

“ 왜? 너도 거기 나가? ”

 

“ 아, 아니! 난 책, 책상물림이라서 안 나가... 국장이 날 무시하잖니. ”

 

“ 으응...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데 이상하네. 나 같으면 너 쓸 텐데. ”

 

“ 고, 고맙구나. 근데 그게 무슨 뜻이야? 너희 팀 선수들은 네가 뽑아? ”

 

“ 아니, 극장장이 뽑긴 하는데... 자꾸 경기마다 우리 발레단 애들을 집어넣잖아. 다리 길고 체력 좋다고... 그래서 극장장이랑 한바탕 했어. ”

 

“ 왜? 그나마 너네 팀은 무용수들이 제일 낫지 않아? 나이도 젊고 체격도... 너네 맨날 왕자 추는 애, 데니스인지 뭔지 걘 키도 187인가 그렇고 엄청 딱 벌어지고... ”

 

“ 아휴, 정말 너도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운동할 때 쓰는 근육하고 춤 출 때 쓰는 근육은 다르단 말이야! 특히 축구 같은 거 잘못하면 다리 망가지고 근육이 미워져서 큰일 나. 이 와중에 무슨 축구니 농구니 달리기니 투포환까지... 가뜩이나 우리 애들은 춤도 못 춰서 연습 많이 시켜야 되는데 이 바쁜 시기에 어째서 체육대회인지 나발인지를 하는 거야... 무용수들은 그런 거 안 해봤단 말이야. 나도 축구는 하나도 몰라. ”

 

“ 아, 그렇구나... 무용수들은 허우대만 멀쩡하지 운동은 안 되는 거구나. ”

 

“ 우리 애들 못 나가게 하느라 극장장이랑 얼마나 싸웠는지 알아? 아유 머리 아파... 이게 무슨 스탈린 시절 복고주의람. 군기나 잡고 애들 다 불러 모아서 뺑뺑이 돌리고! 공연도 취소해버리고. 심지어 토요일이라니! 극장은 토요일에 관객이 제일 많은데! ”

 

“ 너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다시 잡혀가면 어떡하려고 그래. 또 감옥 가고 고문 받고 싶냐? 나니까 가만히 있는 거지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면 너 밀고 당한다. ”

 

왕재수는 퍼뜩 놀라며 주위를 살피고는 입을 다물었다.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베르닌은 주머니를 뒤져 갱지로 싸 놨던 사과파이 반 조각을 꺼내주었다.

 

“ 자, 먹어. 점심 때 선수들 특식으로 나온 디저트였는데 절반 남겨왔어. ”

 

“ 너는 선수 아니라면서 왜 특식을 받았어? ”

 

“ 어... 누가 안 먹는다면서 줬어. ”

 

다행히 왕재수는 사과파이에 정신이 팔려서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왕재수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파이를 먹는 동안 베르닌은 슬슬 정보를 캐냈다.

 

“ 그럼 무용수들은 거의 안 나오는 거네? 데니스도 안 나와? ”

 

“ 응. 내가 못 나가게 했어. 걔 당장 내일 백조의 호수 춰야 되는데 부상이라도 당하면 어쩌라고. ”

 

“ 그럼 다른 남자애들은 나와? ”

 

“ 아휴 너 진짜 발레랑 담 쌓았지! 발레에 남자들도 많이 나온단 말이야. 주인공만 추는 거 아니야. 솔리스트들도 있고 군무진도 있고... 전부 무대에 나와서 춤추고 연기해야 해. 다 못 나가게 했어. 드라마 하는 애들만 내보냈어. 오케스트라도 거의 못 나가. 악기 다루는데 손 다치면 끝장이잖아. ”

 

“ 그럼 호랑이 팀은 극장 쪽은 거의 안 나오는 거네. 출판문화국이랑 검열국이랑 교육국 정도네. ”

 

“ 응. 근데 출판국 애들은 다들 무슨 터널증후군인지 뭔지 때문에 손목을 잘 못 쓴대. 검열국 애들은 하도 서류 검열을 많이 해서 안경 벗으면 장님 수준이라고 걱정하더라고. 그나마 교육국 애들로 채운 거 같아. 극장장이 나한테 막 화냈어. 가뜩이나 차출할 애들 없는데 내가 고집 부려서 무용수들 못 나가게 한다고. 칫, 그깟 놈의 체육대회가 대수야? 마초 군국주의자들 같으니. 승부에 이기는 게 그렇게 중요해? 그러니까 맨날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 ”

 

“ 밀고... 고문... ”

 

“ 압... ”

 

왕재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정보를 술술 알려준 왕재수가 고맙기도 하고 어쩐지 귀엽기도 해서 베르닌은 다시 주머니를 뒤져 무가당 초콜릿 캔디를 건네주었다. 사탕을 먹으며 좋아하는 왕재수를 뒤로 하고 그는 사무실로 복귀했고 스페호프에게 호랑이 팀의 선수 구성안에 대해 보고했다. 스페호프는 매우 좋아했다.

 

“ 잘됐군! 아주 잘됐어! 데니스 보그다노프가 안 나온단 말이지? 그 팀에서는 그놈 하나만 경계했었는데... 어서 운동장으로 가서 연습을 계속하게! 특히 리바운드! 자네 농구는 형편없더군. 리바운드를 지배하는 자가 경기를 지배한단 말일세! 리바운드 1천개와 레이업 슛 2만개를 연습하게! ”

 

체육대회 전날 밤 베르닌은 과도한 연습으로 몸살이 나고 말았다. 팀의 에이스 노릇을 하며 전승무패를 견인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데 몸살이 나다니 정말 울고 싶었다. 호랑이 팀이 오합지졸이라 다행이긴 했지만 그래도 모든 종목에서 승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비나 우박, 눈보라가 몰아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    *    *

 

 

베르닌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체육대회 당일은 날씨가 아주 화창했다. 기온도 평년보다 높았다. 그리하여 다닐 베르닌은 실낱같이 남아 있던 신앙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다.

 

대회는 시립대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오른편은 빨간색과 흰색 의상의 독수리 팀 응원단이, 왼편은 검은색과 금색 의상의 호랑이 팀 응원단이 자리 잡았다. 주민들도 많이 보러 왔다. 장장 20분에 달하는 의장의 개회사 후 경기가 시작되었다.

 

첫 종목은 거대한 공굴리기였다. 몸 풀기용 게임이었다. 호랑이 팀은 출판문화국 직원들이 출전했고 독수리 팀은 식품 관리국 직원들과 베르닌이 나섰다. 베르닌은 이미 출판문화국 직원들이 터널 증후군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팀원들에게 박자를 세면서 천천히 공을 밀고 가기만 하면 처음에 좀 뒤처져도 이길 거라고 알려주었다. 그의 전략은 들어맞아서 호랑이 팀 선수들은 손목이 아파서 호들갑을 떠느라 결국 운동장 반대편까지 공을 놓치고 말았다. 독수리 팀은 가뿐하게 승리했다.

 

그 다음은 농구였다. 베르닌이 개인적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종목이었다. 죽어라고 연습한 끝에 레이업 슛은 연마했지만 리바운드만은 도통 되지가 않았다. 그래도 덩치 좋은 삼림국 직원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상대 팀 선수들은 대부분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 로만 코즐로프가 끼어 있다는 것이었다. 195센티미터의 바이올린 깡패는 팔을 휘저으며 위협적으로 돌진했다. 분명히 악기 연주자들은 손이 생명이라고 왕재수가 그랬는데 어째서 저 깡패 아저씨는 황소처럼 돌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코즐로프의 키가 너무 커서 다들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가뜩이나 리바운드가 형편없는 베르닌은 키 큰 코즐로프 때문에 단 한 개도 성공하지 못했다. 코즐로프에게 떠밀릴 때마다 코트 바깥에서 스페호프가 욕설을 퍼부었다.

 

“ 이 얼간이 천치 같으니! 리바운드를 지배하는 자가 경기를 지배... ”

 

줄줄 흐르는 콧물과 연달아 터지는 재채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베르닌은 열심히 뛰었다. 다행히 후반이 되었을 때 코즐로프는 연달아 저지른 파울 때문에 퇴장 명령을 받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바이올리니스트는 모든 것이 의회와 KGB의 음모라느니, 승부 조작이라느니 모함이라느니 심판을 매수했느니 하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며 코트에 뻗대고 주저앉았다. 아무도 그를 끌어낼 수가 없어 난감할 지경이었다. 사실 마지막 파울은 누가 봐도 독수리 팀의 잘못이었기 때문에 코즐로프로서는 억울할 만도 했다. 스페호프가 마취총을 투입시켜야겠다고 의장과 은밀하게 속닥거리기 시작했을 때 왕재수가 코트로 나와서 바이올리니스트의 팔을 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 키다리 깡패는 소리를 지르며 반항했다.

 

이거 놔! 경기를 조작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 올림픽도 아니고 동네 공놀이인데 왜 그렇게 흥분해. 당신 내일 연주도 해야 되잖아. 빨리 나와. ”

 

“ 귀염둥이 비둘기 너는 가만히 있어! 부정부패가 이루어졌단 말이야! ”

 

“ 지금 안 나오면 나 삐칠 거야. ”

 

코즐로프는 금세 한풀 꺾여서 순순히 퇴장했다. 구경꾼들은 새로 온 예술 감독의 권위가 대단한 모양이라고 수군거렸다. 나이도 어리고 풋내기라서 극장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줄 알았는데 삐치겠다는 말도 안 되는 협박에도 저 깡패가 겁을 먹다니 대단한 카리스마라고 입을 모았다.

 

어쨌든 코즐로프가 퇴장한 후 상황은 일변했다. 독수리 팀은 곧 역전했고 베르닌은 드디어 리바운드라는 것을 한 개 성공시켰다. 경기는 10점 차이로 승리했다.

 

2대 0이 되자 스페호프는 뛸 듯이 좋아했다. 심지어 베르닌에게 콧물을 닦으라고 손수건까지 건네주었다. 베르닌은 기침을 하면서 죽어가는 목소리로 애걸했다.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분위기를 보니 저희가 가뿐히 이길 것 같은데 저는 이제부터 빠지면 안될까요? 너무 아파서요. ”

 

“ 무슨 소리야!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모르나! 계속 뛰면 감기도 달아나고 말끔히 나을 걸세! 게다가 이번 경기는 100미터 달리기잖아! 11초 주파의 실력을 보여야지!! 다른 애들은 전부 12초도 못 끊어. ”

 

그래서 할 수 없이 베르닌은 코를 훌쩍이며 스타트 레인으로 갔다. 각 팀별로 4명이 출전하게 되어 있었고 베르닌은 가운데 4번 레인이었다. 놀랍게도 금색 티셔츠에 검정색 반바지를 입은 왕재수가 터벅터벅 걸어와서 그의 옆자리인 5번에 섰다.

 

“ 어, 너 뭐야? 경기 나와? ”

 

“ 응. ”

 

“ 왜? 너 왜 나와? 근육 미워진다며... 무용수들은 다 안 나온다며. ”

 

“ 극장장이 집어넣었어. 무용수들 다 못 나오게 했으니까 나라도 뛰래. ”

 

왕재수는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 너도 무용수잖아!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추는... 다리 다치면 어떡하라고! ”

 

“ 나 연초에 은퇴했잖아. 무용수 아니고 감독이니까 뛰어야 한대. 나이도 어리니까 무조건 뛰래. 아 정말 싫다... 강제로 이런 거 시키고 공산당 행사에 동원하고. 열 받아. ”

 

“ 그냥 대충대충 뛰고 들어가. 너 못 뛰어도 아무도 욕 안할 거야. 어차피 기대도 안 하고. 고문당해서 몸도 다 안 나았잖아. ”

 

“ 아 정말 귀찮아. 근데 언제 뛰어야 하는 거야? ‘준비’ 하면 뛰어? ”

 

“ 아니, 그때 뛰면 부정출발로 실격당해. 총 쏘면 뛰어. ”

 

“ 총이라니! ”

 

“ 공포탄이야. 너 정말 이런 거 한 번도 안 해봤구나. ”

 

“ 달리기 하면서 총까지 쏘다니. 정말 저질이야. ”

 

그때 ‘준비’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닌은 급하게 자세를 취했다. 왕재수는 다들 몸을 구부리자 대체 왜 이런가 싶어 멀뚱멀뚱 주위를 둘러보며 무슨 패션모델이나 되는 마냥 금색과 검정색 운동복 맵시를 뽐내며 서 있었다. 총 소리가 탕 하고 울리자 선수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쳐나갔다.

 

베르닌은 미친 듯이 뛰었다.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렸다. 폐가 타고 내장이 다 튀어나올 것 같았다. 50미터까지 선두를 유지했다. 그런데 순식간에 금색과 검정색의 무슨 회오리 같은 것이 그의 곁을 쌩 하고 스쳐지나갔다. 깜짝 놀라 그는 더 죽어라고 뛰었다. 정신없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러나 이미 상대팀 선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골인한 후였다. 운동장이 환호와 충격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스페호프가 경악에 가득 차 고함을 질렀다.

 

2등이라니!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심지어 저 불여우한테 밀리다니! ”

 

베르닌은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아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왕재수가 측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 웬 땀을 그렇게 흘리니. 겨우 그거 뛰어놓고. 너 운동 부족인가 봐. ”

 

“ 방금, 방금 그거 너였어? ”

 

“ 뭐가? ”

 

“ 내 옆으로 뛰어간 거... 회오리. 1등한 애. ”

 

“ 아, 그거? 너네 왜 그렇게 못 뛰어? 모래주머니라도 찼니? ”

 

“ 너 대체 100미터 몇 초에 뛰는 거야? 10초대야? 나... 11초... 그러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2년 전에는 그랬는데. ”

 

“ 몰라. 그런 거 몇 초에 뛰는 게 중요해? 나 원래 뜀박질은 잘 했어. 버스랑 지하철 타면 떠밀릴까봐 맨날 극장까지 뛰어다녔거든. 레닌그라드는 여기처럼 촌동네가 아니라서 버스가 만원이란 말이야. ”

 

베르닌은 입을 딱 벌렸다. 이로써 전승무패 목표는 깨지고 말았다. 스페호프가 저편에서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남은 경기를 모두 이겨야만 그나마 만회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다음 종목은 높이뛰기였다. 베르닌은 별로 자신 없는 종목이었고 심지어 가로대를 쓰러뜨려서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삼림국 직원 보리스가 중학교 때까지 높이뛰기 선수였기 때문에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역시나 보리스는 훌륭했다. 다른 선수들보다 족히 5센티는 더 높이 뛰었다.

 

호랑이 팀의 마지막 선수는 왕재수였다. 왕재수는 운동화 끈을 고쳐 매면서 계속해서 툴툴거렸다.

 

“ 달리기에 나가라 높이뛰기에 나가라... 집단농장에 끌려가서 농활하는 거랑 뭐가 다르담. ”

 

베르닌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예전에 텔레비전으로 봤던 왕재수의 공연 영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슨 왕자인지 뭔지를 추는데 꽤 높이 뛰었던 것 같았다. 몸이 가벼워서 잘 뛸 것 같았다. 그래도 왕재수는 키가 그렇게 크지 않으니 185센티의 보리스보다는 불리할 것이다. 그 순간 왕재수가 다다다 하고 도움닫기를 하더니만 붕 하고 뛰어 올랐다. 가뿐하게 바를 넘었다. 순식간에 보리스의 기록과 동점이 되었다.

 

보리스는 이를 악물고 5센티를 더 올려서 성공했다. 왕재수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15센티를 높여달라고 했다.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를 붙들었다.

 

“ 너 제발 그만해. 15센티 올리면 올림픽 수준이야. 가로대에 걸리면 다리 다칠지도 몰라. 넌 심지어 정면뛰기로 뛰잖아. 그거 잘못하면 가로대 타고 앉아서 크게 다쳐. 차라리 보리스처럼 배면뛰기를 하든가. ”

 

“ 배면뛰기? 아, 아까 쟤가 하던 거? 뒤로 넘는 거? 보기 흉하잖아. 무용수는 죽어도 폼이 중요해! 그리고 난 맨날 정면으로 도약해서 다른 건 잘 안 돼. ”

 

“ 그건 발레잖아! 이건 스포츠야, 다르단 말이야! 다치면 어떡하라고. ”

 

“ 아휴 왜 이렇게 잔소리가 많아. 그냥 뛰면 되지. 뭐가 어렵다고. ”

 

왕재수는 발칵 화를 내더니 끝내 높이를 낮추지 않고 그대로 뛰었다. 베르닌은 무슨 로켓이 날아가는 줄 알았다. 왕재수가 얼마나 높이 뛰었는지 구경꾼들은 소리조차 못 질렀다. 가로대는 멀쩡했다.

 

보리스는 사색이 되었다. 도전을 포기했다. 높이뛰기도 호랑이 팀의 승리로 돌아갔다. 순식간에 2대 2가 되고 말았다.

 

스페호프가 고함을 지르며 선수들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 이런 천치 같은 것들아! 밥은 왜 먹고 사냐! 다른 놈도 아니고 저 계집애 같은 불여우한테 지다니! 창피한 줄 알아야지! 한번만 더 졌다가는 전부 모가지야! ”

 

베르닌은 쭈뼛쭈뼛 나섰다.

 

“ 국장님, 아직 투포환이랑 축구, 이어달리기가 남아 있습니다. 전부 이기면 됩니다. 노여워 마십시오... ”

 

“ 아까 그 꼬마가 100미터 뛰는 거 안 봤나! 이어달리기는 위험해! 남은 두 개를 전부 이겨야 해! 하는 꼬라지를 보니 저 녀석이 남은 경기 세 개에 다 나올 것 같은데! ”

 

“ 예... 나머지는 승리가 가능합니다. 투포환은 어차피 힘을 쓰는 종목이라... 왕재수, 아니 야스민은 출전을 못 할 겁니다. 달리기나 높이뛰기와는 다르니까요. 몸도 하늘하늘하고. 축구는 제가 물어봤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답니다. 규칙도 전혀 모르고요. 그러니까 저희가 이길 겁니다. ”

 

베르닌은 삼림국 덩치들과 함께 투포환 경기에 나갔다. 호랑이 팀에서도 그나마 덩치 큰 선수들 세 명이 나왔다. 그런데 맨 뒤에 왕재수가 터덜터덜 따라 나왔다. 큰 선수들 사이에 끼자 더 가냘프고 날씬해 보였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 왜 투포환까지 나오는 거야? 이것도 극장장이 끼워 넣었어? ”

 

“ 응. 괜히 달리기랑 높이뛰기 잘했나봐. 너네들이 그렇게 못할 줄 몰랐어. 대충 하나만 하고 도망가려고 했는데 망했어. ”

 

“ 다른 경기도 다 나와? ”

 

“ 응... 이어달리기까지 다 뛰래. 진짜 귀찮아. ”

 

“ 설마 축구도? ”

 

“ 아니, 그건 못한다고 했어. 아무 것도 모르잖아. 하긴 극장장이 축구는 자살골 넣을지도 모른다면서 들어가지 말랬어. 근데 자살골이 뭐야? ”

 

“ 있어, 그런 게. 너 투포환이 뭔지는 알아? ”

 

“ 공 던지는 거 아니야? 한 번도 안 해봤어. 아, 진짜 싫다. 나 옛날에 어깨 부상당해서 진짜 힘들었는데. 극장장한테 어깨 아파서 안 된다고 했는데 축구랑 이거 둘 중에 하나 선택하라고 협박하잖아... 축구는 진짜 싫어. 흙먼지 잔뜩 먹고 막 넘어지고 걷어 채이고. 그래서 투포환 한댔어. ”

 

“ 이거 그냥 공 아니고 쇠공인데... 꽤 무거워. 너 잘못하면 다칠지도 몰라. 던지는 방법도 모르잖아. 그냥 기권해. 어깨도 아프다면서. 몸도 그렇게 가냘파서 어떻게 이걸 던지려고... ”

 

“ 대충 던지고 들어가지 뭐. ”

 

왕재수는 잔뜩 풀이 죽은 채 한쪽 구석에 앉아서 다른 선수들이 포환을 던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베르닌은 시 의회 의장이란 놈에게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휴일에 이런 대회를 하는 것도 모자라 저 가냘프고 날씬한 왕재수에게 포환까지 던지게 만들다니. 심지어 고문을 받아서 춤도 못 추게 된 애한테 정말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재수의 말이 옳았다. 이것은 마초 군국주의의 부활이었다!

 

베르닌은 생각보다 포환을 아주 멀리 던졌다. 매일같이 사무실 비품들을 나른 보람이 있었다. 최고의 기록이 나왔다. 스페호프가 그토록 기뻐하며 그의 이름을 연호한 것은 처음이었다. 다행히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좋아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마지막으로 나오더니 빙그르르 돌면서 윙 하고 팔을 휘둘렀다. 쇠공이 진짜 포탄처럼 휙 하고 날아갔다. 운동장 전체를 가로질러 날아가 학교 유리창을 박살냈다. 호랑이 팀이 3대 2로 앞서게 되었다.

 

베르닌은 반쯤 울먹이면서 왕재수를 붙들었다.

 

“ 투포환 못한다고 했었잖아. ”

 

“ 내가 언제 못한댔어. 해본 적 없댔지. ”

 

“ 그게 그거잖아. ”

 

“ 너네들 던지는 거 보고 자세 배워서 이제 할 줄 알아. ”

 

“ 어깨 아프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던져. 자작나무처럼 날씬한 녀석이 대체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거야. ”

 

“ 나 되게 힘센데. 밥 먹고 하던 일이 맨날 발레리나들 번쩍번쩍 드는 거였잖아. 그리고 이거 힘으로 하는 거 아니던데? 전신의 스냅을 이용해서 이렇게 돌면서 던지는 거잖아. ”

 

“ 아아, 대체 너는 못하는 게 뭐야... 어헝. 축구도 잘 하는 거 아니야? ”

 

“ 축구는 진짜 하나도 몰라. 하기도 싫어. 그건 안 나갈 거야. 근데 너 왜 그렇게 울어? ”

 

“ 몰라... 망했어. 너 때문에 나 잘릴지도 몰라. 국장이 오늘 독수리 팀 못 이기면 각오하라고 했는데 넌 왜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이렇게 다 이겨버리는 거야. 허헝... 왜 겉보기처럼 비실거리지 않고 올림픽 선수처럼 뛰는 거냐고. ”

 

“ 나 운동신경 원래 되게 좋은데. 둔하면 춤 못 춰. 말해줬잖아, 내 두툼한 허벅지 근육. 춤도 잘 추고 침대에서도 끝내주고 당연히 운동신경도... ”

 

“ 흐흑 제발 침대 얘긴 그만해... 어헝... 잘리기 싫어. ”

 

“ 아휴 촌스러워. 누가 체육대회 때문에 잘린다고. 나 축구는 안 나간다고 했잖아. 울지 마. ”

 

“ 이어달리기 나올 거잖아, 흐흑... ”

 

“ 우리 애들 전부 너네보다 못 뛰어서 어차피 너네가 이길 거야. 그만 좀 울어, 아 창피해. ”

 

베르닌은 훌쩍훌쩍 울면서 독수리 팀 천막으로 돌아갔다. 천막 안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선수들을 들들 볶고 있던 스페호프가 이를 갈더니 베르닌을 쏘아보았다.

 

“ 그 불여우가 축구 경기에 안 나오는 게 확실한가? ”

 

“ 예... 안 나온답니다. 축구는 하나도 모르고 흙먼지 뒤집어쓰고 걷어채이는 게 싫다고... 자살골이 뭔지도 모르더군요. ”

 

“ 그래? 좋아. ”

 

스페호프는 결연하게 일어섰다. 본부석으로 가더니 의장과 한참 속닥거리고 돌아왔다.

 

“ 좋아. 마지막 기회야! 축구는 반드시 이겨야 하네! 호랑이 팀 선수 명단을 바꿔쳤어! 그 불여우가 선발로 나오게 만들었네! ”

 

선수들이 경악해서 비명을 질렀다.

 

“ 으악, 국장님... 그 꼬마가 또 훨훨 날아서 해트트릭이라도 기록하면 어쩌라고요! 걘 운동천재라고요! 축구 한 번도 안 해 봤다 해도 금방 터득할 게 분명해요. 아예 발도 못 들여놓게 해야... ”

 

“ 이런 머저리들! 내 깊은 뜻을 모르겠나? 설령 우리가 축구를 이긴다 해도 3대 3 동점, 결국 이어달리기에서 승부가 결정되네! 명단 보니까 저놈이 마지막 주자야! 아까 100미터 뛰는 거 안 봤나? 저 불여우가 나오면 이어달리기는 100% 우리가 진다고 봐야 해! 그래서 저놈을 축구 경기에 밀어 넣는 거야! 전쟁 때는 등 뒤에서 칼을 꽂아도 용납되네! 이건 전쟁이야! 여기서 저 불여우를 두들겨 팰 수는 없지만 일단 경기장에서는 짓밟든 걷어차든 모두 경기의 일환이야! 태클 거는 척하면서 밟아버려! 운 나쁘면 페널티 하나 받으면 돼! 어차피 축구는 우리가 유리하니까! 내 말 알아들었나? 저놈이 이어달리기에 못 나오게 만들란 말이야! ”

 

모두가 반색을 하며 ‘네!’ 하고 소리쳤다. 베르닌만 빼고. 베르닌은 속이 울렁거렸다. 가냘픈 왕재수가 불곰 같은 삼림국 덩치들에게 짓밟히는 것을 상상하니 끔찍해서 토할 것 같았다. 하지만 국장 말대로 이어달리기에 왕재수가 나오면 질 게 분명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베르닌은 너무 괴로웠다.

 

 

*    *    *

 

 

왕재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막판에 생각지도 않게 호명되어 떠밀려 나온 데다 축구는 정말 하나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주변에서 덩치 큰 남자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공을 차대고 걸핏하면 옆에서 밀어붙이니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삼림국 덩치들이 본격적으로 밀어붙이지도 않았는데 제풀에 몇 번이나 넘어졌다.

 

골 점유율은 독수리 팀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점수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팀플레이란 간 곳 없고 덩치들이 서로 골을 넣겠다고 아우성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공이 또르르 굴러왔고 베르닌은 운 좋게 주워 먹기 식으로 골을 하나 넣었다. 원톱 스트라이커 노릇을 해낸 것이다!

 

베르닌이 셔츠를 뒤집으며 세레모니를 하자 앞선 경기들 때문에 기가 죽어 있었던 독수리 팀 응원단이 들끓었다. 기뻐서 펄쩍펄쩍 뛰고 있는데 왕재수가 눈물이 글썽글썽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면서 하소연했다.

 

“ 나 축구 너무 싫어. 지저분해, 무서워, 우악스러워. 자꾸 넘어져. 사람들이 자꾸 밀어. 다리 다칠 거 같아. 나가고 싶어. 나 좀 빼주면 안 돼? ”

 

어... 나는 선수라서 그런 권한이 없어. 감독이 교체 사인 보내거나 부상당하지 않으면 못 나가. 너네 감독한테 빼달라고 해야 돼. ”

 

“ 극장장이 분명히 경기 나가지 말라 했는데 아까 따졌더니 그냥 뛰어야 한대. 의장이 나 집어넣어야 한다고 그랬대. ”

 

“ 어, 저기... 너 있잖아. 그냥 저기 너네 팀 골대 앞에 가 있어. 자꾸 사람들 많은 데로 오지 말고. ”

 

“ 알았어. 흐흑, 축구 싫어... 무서워. ”

 

왕재수는 훌쩍훌쩍 울면서 호랑이 팀 골대 앞으로 갔다. 베르닌은 그나마 거기 있어야 삼림국 덩치들에게 짓밟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높이뛰기에서 실패한 나머지 승부욕이 더더욱 불타오른 보리스가 미친 듯이 공을 몰고 내달았다. 중거리 슛을 날렸다. 물론 어처구니없는 뻥 슛이었기 때문에 공은 골대를 맞고 튕겨나갔다. 호랑이 팀 골키퍼가 공을 주워서 마침 골대 근처에 있던 왕재수에게 가볍게 툭 차 주었다. 왕재수는 넋 놓고 있다가 공이 앞에 오자 어쩔 줄 몰라 했다.

 

“ 난 몰라, 왜 나한테 공을 주는 거야. 어떻게 해... ”

 

“ 이 바보야, 공이 오면 차야지 뭘 어떻게 해! ”

 

여차하면 공을 빼앗아 슛을 날리려고 골대 근처에 도사리고 있었던 베르닌이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삼림국 덩치들은 태클 기회를 엿보려고 한쪽으로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배신 발언을 듣지 못했다. 왕재수는 화들짝 놀라더니 홱 돌아서서 독수리 팀의 골대를 향해 냅다 공을 걷어찼다. 베르닌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길고 강력한 장거리 슛을 본 적이 없었다. 과연 무용수 출신이라 그런지 두툼한 허벅지의 힘이 좋아서 그런지 원래 운동천재라서 그런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왕재수는 호랑이 팀 골대에서 독수리 팀 골대까지 단 한 방에 골을 넣었다.

 

다들 경악해서 말을 잃은 사이에 호랑이 팀 공격수 두 명이 또 공을 빼앗아서 몰고 왔다. 당연한 듯 왕재수에게 공을 패스했다. 왕재수는 이제 망설이지도 않고 전광석화처럼 공을 찼다. 이번에는 골키퍼가 몸을 날렸지만 슛이 어찌나 센지 손에 맞고도 골이 되었다. 난리가 났다. 스페호프가 본부석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고함을 질렀다.

 

“ 밟아! 이 천치들아, 잘리고 싶나! 그 불여우한테 해트트릭이라도 내 줄 셈이야? ”

 

베르닌은 어떻게든 말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삼림국 덩치들은 해고의 공포에 휩싸였고 공을 빼앗으려는 척하다가 왕재수를 떠민 후 심판의 시야를 방해하며 걷어찼다. 흙먼지 속에서 왕재수가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심판은 휘슬을 불었고 파울을 범한 보리스에게 옐로카드를 한 장 주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에게 달려갔다. 왕재수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옆으로 누운 채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미처 베르닌이 왕재수를 일으켜 주기도 전에 응원석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로만 코즐로프가 분노에 가득 차서 경기장으로 뛰어들었다.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보리스의 코뼈를 부숴놓았다.

 

“ 이 개 같은 놈들, 다 죽여 버리겠어! 감히 우리 아기를 저렇게 만들다니! 저 조그만 귀염둥이 몸에 흠집을 내다니! 너 죽고 나 죽자! ”

 

“ 으악, 제발 진정해요... 선수도 아니면서 이렇게 들어오면 어떡해요! ”

 

“ 시끄러워, 이 스파이 새끼! 너도 한 패야! 우리 아기가 골 넣는 게 그렇게 밸이 꼬여? 다 죽여 버리고 말겠다! ”

 

바이올린 깡패의 폭주로 보리스를 비롯해 독수리 팀 덩치 서너 명이 코피를 줄줄 흘리며 나가떨어졌다. 대부분 전치 3주 이상의 부상을 입었다. 마침내 심판이 삑삑삑 하고 휘슬을 불었다. 경기를 중단시켰다. 코즐로프의 난입을 문제 삼아 호랑이 팀에게 실격패를 선언했다. 온순하던 호랑이 팀 응원석도 들끓었다. 신문지와 돌멩이가 날아왔다. 먀흐킨이 의장에게 항의했다. 애초부터 독수리 팀 편이었던 의장은 규칙을 따른 것뿐이라며 계속 이랬다가는 이어달리기도 취소하고 호랑이 팀을 실격시킨 후 우승 메달은 독수리 팀에게 수여하겠다고 협박했다. 하는 수 없이 먀흐킨은 입을 다물었다.

 

코즐로프가 끌려 나간 후 베르닌은 한쪽에 아직도 쓰러져 있는 왕재수를 안아서 들것에 뉘었다. 손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흙먼지와 눈물 콧물을 닦아주자 왕재수가 눈을 반짝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 이제 다 끝난 거야? ”

 

“ 너 괜찮아? 병원 가보자. 다리 부러졌으면 어쩌지... 미안해, 진짜 미안해.. 흐흑, 내가 비열한 놈이야. 어헝... 나 살아보겠다고 걔들이 너 밟게 놔뒀어. 엉엉. 바이올린 깡패 말이 맞아. 이렇게 아기 같은 애가 밟을 데가 어디 있다고... ”

 

“ 나 안 다쳤는데? ”

 

“ 뭘 안 다쳐, 그렇게 짓밟혀 놓고. 흐흑, 내가 죽일 놈이지. ”

 

“ 걔네들 되게 둔해. 막 헛발질만 하고, 내가 요리조리 뒹굴면서 피하니까 하나도 못 맞췄어. 먼지 때문에 잘 보지도 못하던데. 나 안 다쳤어. ”

 

베르닌은 멍해졌다. 급하게 왕재수에게서 흙먼지를 털어낸 후 팔다리를 비롯해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정말 멀쩡했다. 무릎이 좀 까진 정도였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울컥 화가 치밀었다.

 

“ 그럼 왜 그렇게 비명 질렀어! 왜 안 일어나고 그렇게 쓰러져 있었냐고!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바이올린 아저씨 정신 나가서 애들 패는 거 못 봤어? ”

 

“ 어, 그게 로만이었어? 난 너네들끼리 싸우는 줄 알았지... 아휴 바보 아저씨. 너무 다혈질이라니까. 나 괜찮은데. 빨리 가서 뽀뽀해 줘야겠다. 그 아저씨 날 너무 예뻐해서 탈이야. ”

 

“ 야,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잖아! 왜 다친 척 했냐고! ”

 

“ 그래야 축구 안 하지! 다쳐야 나갈 수 있다면서. 진짜 나가고 싶었단 말이야. 그깟 공놀이가 뭐가 재밌다고 다들 난리인지... ”

 

“ 두 골이나 넣어 놓고서! ”

 

“ 그건 그냥 차니까 들어간 거야. 하나도 안 어렵더구만. 재미도 없고. 그물 속에 공 차 넣는 게 뭐가 어렵다고. ”

 

왕재수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서 호랑이 팀 천막으로 갔다.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 있는 코즐로프의 팔목을 붙잡고 천막 뒤로 사라졌다.

 

 

*   *   *

 

 

종일 이어진 공공기관 종합체육대회는 양 팀의 점수가 3대 3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경기인 이어달리기로 승패가 결정 날 판이었다. 독수리 팀의 천막은 이어달리기에 나갈 선수 6명의 몸을 풀어주고 스페호프의 지시를 듣느라 분주했다. 국장은 이미 승리감에 취해 있었다.

 

“ 이제 됐어! 그 불여우 다리를 박살냈으니 걱정할 건 하나도 없지! 남은 건 우승뿐이야! 아예 한 바퀴는 앞서 골인해서 저놈들을 뭉개주란 말이야! 감히 대 KGB가 버티고 있는 독수리 팀에게 대들다니, 건방진 녀석들! ”

 

다들 신이 났다. 베르닌만이 불안과 공포에 질린 채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 저, 국장님... 그런데 방금 본부에 물어보니 왕재수, 아니 야스민도 최종 주자로 나온답니다. ”

 

“ 더 잘됐군! 진짜 뛸 놈이 없는 모양이지. 다리 다친 놈이 나오니 얼마나 좋아! 그 재수 없이 오똑 솟은 콧대를 보란 듯이 눌러주란 말일세! ”

 

“ 아니, 그게요... 걔가 별로 다친 것 같지 않더라고요. 뼈는 안 부러진 것 같아서... 아까처럼 잘 뛸지도... ”

 

“ 뭣이!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분명히 보리스가 슬개골을 짓밟아서 부숴놨다고 했는데! 허벅지 근육도 최소한 파열이라고 했는데! 그런 놈에게 지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 같나! 지면 다들 모가지야!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저 따위 계집애 같은 반동분자 꼬마한테 육상으로 농락당한 것도 모자라서 골도 두 개나 먹고... 다리까지 다친 놈에게 계주에서 패하면 다들 줄서서 강에 뛰어들 채비나 해야지! 전부 모가지에 벌목공으로도 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겠어!

 

베르닌은 줄줄 흐르는 콧물을 닦으면서 출발선 쪽으로 갔다. 그는 마지막 주자였다. 앞선 선수들은 모두 1바퀴씩 돌고 최종 주자만 1바퀴 반을 뛰게 되어 있었다. 머리가 아프고 어깨가 무거웠다. 속도 울렁거렸다. 차마 국장에게 왕재수가 하나도 안 다쳤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곧 다가올 해고의 물결에 대해 같은 팀 선수들에게 귀띔을 해 줄 수도 없었다.

 

‘ 다들 땀 빼며 연습했는데... 정말 큰일 났네. 처자식이 있는 사람들인데. ’

 

그때 호랑이 팀 응원단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일었다. 흙먼지 범벅에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금색과 검정색 운동복을 걸친 왕재수가 무릎에 붕대를 감고 내키지 않는 얼굴로 천천히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호랑이 팀 치어리더로 자원봉사 중인 렐랴가 뛰쳐나와 왕재수를 와락 껴안더니 팔목에 자기 스카프를 매어 주고 지저분한 얼굴에 키스까지 해 주었다.

 

“ 우리 미셴카! 당신은 우리 호랑이 팀 영웅이에요! 다쳤는데 이렇게 끝까지 나와서 팀을 위해 뛰다니! 너무 감동적이에요! 힘내요!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선수 아닌 사람은 트랙에 들어오시면 안되는데요. ”

 

“ 어머나, 다냐! 당신 또 질투하는군요! 속 좁은 사람 같으니. ”

 

렐랴는 베르닌에게 삿대질을 하며 꾸짖은 후 진행요원에게 이끌려 응원석으로 돌아갔다. 왕재수는 렐랴가 들어간 후 손목에 묶여 있던 스카프를 풀어서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았다. 베르닌은 참지 못하고 야단쳤다.

 

“ 야, 그건 렐랴의 마음이 담긴 스카프인데 그걸로 얼굴을 닦냐! ”

 

“ 그럼 어떡해. 옷도 더러운데 얼굴이라도 깨끗해야지. 난 미모로 먹고 사는데 이게 뭐야. 정말 싫다. 체육대회 같은 거 만든 놈들 미워! ”

 

“ 무릎에 왜 붕대 감은 거야? 아까 괜찮다며. ”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리며 베르닌이 물었다. 왕재수는 무릎을 툭툭 치면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 좀 까졌는데 빨간 약 발랐더니 보기 싫어서. 별로 아프진 않아. ”

 

“ 그러냐. 다행이구나. 우린 다 잘렸군.

 

“ 뭐? ”

 

“ 아니야. 안 다쳐서 다행이라고. 비신사적으로 밟은 거 대신 사과할게. ”

 

“ 네가 왜? 나한테 공 차는 것도 가르쳐줬는데. 근데 이번에도 총 쏘면 뛰는 거야? ”

 

“ 아니... 총 쏠 때 뛰는 건 제일 첫 주자만 그렇고. 앞의 주자가 너한테 저 막대기를 건네주면 그걸 쥐고 뛰는 거야. 너하고 나는 마지막 주자니까 한참 기다려야 돼. 막대기는 떨어뜨리면 다시 주워서 쥐고 뛰어야 돼. 우리는 한 바퀴 반을 뛰어야 돼. ”

 

“ 아 피곤해. 아까는 총 쏠 때 뛰라더니 이젠 무슨 막대기를 들고 뛰래. 지겹다. 내가 마지막이면 빨리 뛰어야 빨리 끝나겠네? ”

 

“ 어... 그렇겠지. 아아...

 

“ 너 왜 그렇게 한숨을 쉬어? 아이 지저분해. 콧물 나오는 것 좀 봐. 정말 하나하나 다 챙겨줘야 한다니까. ”

 

왕재수가 스카프를 뒤집어서 베르닌의 코를 슥슥 닦아 주었다.

 

“ 으악, 먼지 닦은 것도 모자라서 내 콧물까지 닦으면 어떡해! ”

 

“ 괜찮아, 뒤집었잖아. 먼지 안 묻은 데로 닦았어. ”

 

“ 그 얘기가 아니고 렐랴의 마음이... ”

 

“ 넌 왜 맨날 렐랴 마음 타령이야. 그깟 여자 마음이 뭐가 중요해. 내가 그 아가씨랑 응응을 할 것도 아닌데. ”

 

“ 시끄러워. ”

 

베르닌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불안감을 느끼며 스트레칭을 했다. 그래도 다른 선수들은 모두 호랑이 팀보다 잘 뛰니까 희망은 있었다.

 

총성이 울리고 드디어 계주가 시작되었다. 경기가 중반부로 접어들었을 때쯤 베르닌의 공포는 거의 사라졌다. 뚜껑을 열어보니 호랑이 팀 선수들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넘어지기도 하고 바통을 놓치기도 했다. 마침내 베르닌에게 바통이 왔을 때 독수리 팀은 이미 반 바퀴를 앞서고 있었다. 호랑이 팀 응원단은 초상집 분위기였지만 왕재수가 바통을 받아들자 마지막 희망에 불타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응원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죽어라고 달렸다. 땀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런데 한 바퀴를 거의 다 돌았을 때 갑자기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함성과 갈채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왕재수가 다리에 모터를 단 것처럼 붕 소리를 내며 전력 질주해 오고 있었다.

 

베르닌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왕재수는 무슨 축지법을 쓰는 것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베르닌을 따라잡았다.

 

‘ 으악,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쟤 미친 거 아냐? 사람 맞아? 어떻게 반 바퀴를 따라잡아! ’

 

베르닌은 이를 악물었다. 있는 힘을 다 끌어내어 내달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폐가 부풀어 펑 터질 것 같았다. 그때 왕재수가 그를 추월했다. 나비처럼 훨훨 날아 그의 곁을 지나갔다.

 

“ 안 돼... 안 돼애애애... 으아.... ”

 

베르닌은 울부짖었다. 바통을 쥔 손을 마구 휘저으며 정신없이 달렸다. 왕재수는 이미 결승선 근처까지 가 있었다. 이제 다 끝났다. 모가지. 강에 밀어 넣기. 벌목공도 못 해먹고 쫓겨나는 사람들. 완전히 망했다.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베르닌은 돌덩이 같은 다리를 이끌며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 어쨌든 일단 골인이나 하고 보자 하며 계속 뛰었다. 눈물과 먼지 때문에 앞도 하나도 안 보였다. 어찌어찌 골인을 하고 주저앉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동료들이 달려와 그를 얼싸안고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치고 기뻐했다. 갑자기 사람들이 그를 공중으로 헹가래쳤다. 스페호프가 그의 등짝을 후려치며 ‘잘했네, 잘했어!’ 하고 소리쳤다. 국장이 그에게 칭찬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이것이야말로 꿈이 분명했다.

 

보리스가 그를 와락 껴안았다.

 

“ 다냐, 우리가 해냈어! 우승했어! 우리 안 잘려도 돼! 먹고 살 수 있어! 흑흑, 난 딸린 처자식이 다섯이라고! 말은 안 했지만 진짜 걱정했어. 흐흑, 정말 무서운 하루였어! ”

 

“ 어... 우승? 우리가? 이어달리기 이긴 거야? ”

 

“ 응, 이겼어! 막판에 진짜 심장이 쫄깃했어. 어휴... 그래도 너 덕분에 이겼다. 너 다시 봤어. 책상물림인 줄 알았는데... 얼간이가 에이스였어! ”

 

“ 어떻게 이기지? 왕재수, 아니 야스민이 그렇게 잘 뛰었는데. 나 추월당했었는데... 내가 먼저 들어왔다고? ”

 

“ 아, 그 불여우. 진짜 다행이었어. 결승선 앞까지 그 싸가지 없는 꼬맹이가 막 뛰었는데, 막 골인하기 직전에 무릎을 움켜쥐고 주저앉았어. 바통도 놓치고 못 일어나서 의료진이 와서 데리고 나갔어. 그래서 네가 먼저 들어온 거야. ”

 

“ 아 그랬구나... ”

 

“ 나도 한몫했지! 내가 안 밟았으면 그 자식이 끝까지 뛰었을 거 아냐. 불여우 자식 들것에 실려 갈 때 붕대 푼 거 보니까 무릎이 시뻘건 게 피범벅이더라고. 정말 너네 국장은 선견지명이 있다니까. ”

 

‘ 괜찮다고 했었는데... 안 아프다고... 거짓말이었구나. 아픈데도 괜찮은 척 하고 경기에도 나왔구나... 피가 철철 나는 걸 참고 뛰었던 거구나. ’

 

베르닌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호랑이 팀 천막으로 가 보려고 했지만 그때 시상식이 개최되었다. 독수리 팀은 우승 깃발을 받았다.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은 특별 수당을 받았다. 베르닌은 무려 MVP로 뽑혀 의장과 악수를 하고 의회 구내식당용 1개월 치 식권과 레닌 전집을 상품으로 받았다. 경기에도 지고 수당은커녕 상품 하나 못 받은 호랑이 팀에서는 휘파람을 불며 야유를 보냈다. 렐랴를 비롯해 호랑이 팀 응원단이 한 목소리로 거세게 항의했다.

 

“ 너무하잖아요! 우리 꽃돌이 감독님은 100미터 달리기, 높이뛰기, 투포환에서 우승했고 축구도 두 골이나 넣었는데! MVP를 못 준다면 최소한 특별상이라도 줘야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

 

“ 시끄럽소!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것! 아무리 작은 경기들에서 이기면 뭘 하나, 결국 우승은 못 했는데. 아니꼬우면 내년에 우승하시오! 다들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을 배양하시오! ”

 

의장이 단칼에 잘랐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호랑이 팀은 욕을 하면서 우르르 나가버렸다. 의장과 스페호프와 독수리 팀만이 신나게 보드카를 마시고 샤실릭을 구워먹고 승리를 만끽했다. 베르닌은 보드카를 한 잔 받아 마신 후 너무 지쳐서 천막 구석에 드러누워 잠들어 버렸다.

 

 

*    *    *

 

 

베르닌이 깨어났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잔디밭 여기저기에 술에 취한 동료들이 드러누워 있었다. 집에 돌아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조금 개운하긴 했지만 대신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침대에 몸을 던지려다 그는 혹시나 하고 위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초인종을 눌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병원에 있나 싶었지만 문을 밀어 보았더니 스르르 열렸다.

 

“ 야, 집에 온 거야? 나 들어간다. ”

 

들어가니 왕재수가 소파에 앉아 사과파이 한 판을 껴안고 맨 손으로 퍼먹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헐렁한 가운만 입고 무릎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까만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따금 훌쩍거리면서 파이를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

 

“ 으악, 너 이게 뭐야. 포크랑 접시도 없이... 너 원래 예쁜 식기에 세팅해서 먹는 거 좋아하잖아. 왜 이렇게 울어. 많이 아파? ”

 

“ 남이야 어떻게 먹든 무슨 상관이야. 어헝... ”

 

왜 이렇게 불쌍하게 울고 있는 거야?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왜 혼자 앉아서 궁상스럽게 울면서 파이를 먹고 있니! ”

 

“ 엉엉... 로만이... 어헝... ”

 

“ 뭐, 그 바이올린 깡패? 그 자식이 어쨌는데! 무슨 짓을 했길래! 귀엽다고 물고 빨 때는 언제고 왜 널 울려! ”

 

“ 흑흑, 다 뽀록났어. 엉엉... ”

 

“ 뭐가... 너 사과파이 한 판 다 먹을 수 있는 거? 몸무게? ”

 

“ 아니... 그것까지 들통 나면 큰일 나. 너 제발 입 좀 다물어. ”

 

“ 그럼 대체 뭐야! ”

 

“ 저... 농구... 심판 매수한 거. ”

 

“ 그게 무슨 소리야? 농구? 아까 경기? 무슨 매수? ”

 

“ 막판에 로만 퇴장당한 거... 내가 그런 거야. 심판한테 부탁했어. ”

 

“ 네가? 왜! 그 인간 너네 팀이었잖아! ”

 

“ 로만은 우리 오케스트라 수석이잖아! 바이올리니스트인데 손 다치면 어떻게 해! 내일 당장 공연인데. 아저씨가 너무 다혈질이라서 경기에만 나가면 눈이 뒤집혀서 손 다치든 말든 발광을 하는데 어떻게 그냥 놔둬. 그래서 심판을 매수... ”

 

“ 뭐야? 그래서 같은 팀 뒤통수를 친 거야? 바이올린 아저씨는 그래서 화난 거고? ”

 

“ 아니... 처음엔 내가 자기 다칠까봐 그랬다고 하니까 오히려 좋아하면서 ‘귀여운 내 강아지, 정말 날 사랑하는구나. 우리 아기는 착하기도 하지’ 하면서 쓰다듬어줬는데... 그만 어떻게 심판 매수했는지 들통 나서... ”

 

“ 어떻게 매수했는데! 돈 먹인 거야? ”

 

“ 저... 그게 아니고... 그 심판 아저씨가 의회 경비원인데... 저번부터 나보고 귀엽다고 해서. 엉덩이 한 번만 만지게 해 주면 된다고 해서 옳다구나 하고 그렇게 해줬거든. 암말 안하기로 약속했는데 그 아저씨가 술 먹고 신나서 막 자랑하는 걸 로만이 들어버렸어. 그래서 완전히 망했지 뭐야. 로만이 다 좋은데 질투심이 좀 많거든. 심판 아저씰 막 패려고 해서 못하게 했더니 나보고 아무한테나 꼬리친다고 야단치고... 달리기 져줬다고 너한테도 흑심 있는 거 다 안다고 또 막 소리 질러서 불똥이 이상하게 튀고 난리도 아니었어. 로만은 눈치가 너무 빠르다니까. 완전 망했어, 흐흑... ”

 

“ 잠깐 잠깐! 달리기 져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무릎 아파서 넘어진 거 아니었어? 그래서 실격패... ”

 

“ 무릎? 좀 까진 거라니까. ”

 

“ 무슨 소리야! 붕대 풀었더니 피범벅이었다고... 일어나지도 못해서 들것에 실려 나갔다면서! 그래서 내가 골인하고 우리가 우승... ”

 

“ 아 맞다... 어 그렇지. 응응, 네 말이 맞아. 나 피범벅... 무릎 다쳤어. 넘어져서 실격패. 들것... 못 일어나고... ”

 

왕재수가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평소 전혀 당황하는 일이 없는 싸가지 없는 놈이었으므로 더더욱 의심스러웠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가운을 걷어 올리고 무릎에 감긴 붕대를 낚아챘다. 왕재수가 소리를 질렀다.

 

“ 야, 하지 마! 왜 남의 가운을 벗기고 그래! 이런 건 성교를 할 때만... ”

 

“ 시끄러워! 너 무릎 멀쩡하잖아! 피범벅은 어디로... ”

 

“ 누가 피범벅이래! 내가 아까 그랬잖아, 까져서 빨간 약 발랐더니 보기 싫어서 붕대 감았다고! ”

 

“ 빨간 약... ”

 

“ 샤워했더니 약도 다 씻겨나가고 괜찮아졌단 말이야. 껍데기 벗겨진 거 긁힐까봐 붕대 감아 놓은 거야. 도로 감아놔! ”

 

“ 그럼 다리 아파서 넘어진 거 아니었어? 져준 거... 너 솔직히 말 안 해! 일부러 넘어진 거였어? 져준 거였단 말야? ”

 

“ 아휴, 그래! 져줬다! 그럼 어떡하니! 눈물콧물 짜면서 모가지가 어떻고 벌목공이 어떻고 강에 뛰어들고 하면서 네가 난리를 치는데. 그깟 달리기가 뭐라고 울고불고. 그렇게 우는데 어떻게 그냥 놔두니? ”

 

“ 아아, 이럴 수가... ”

 

베르닌은 탄식했다. 울음을 터뜨렸다.

 

“ 난, 난 또 내가 잘 달려서 팀을 우승시킨 줄 알았... ”

 

“ 너 왜 또 우는 거야? 아 정말 지겨워! 이기면 이긴다고 울고 져주면 져줬다고 울고... ”

 

“ 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경기에서 이기고 싶은 건 모든 사내들의 본성이야! 어떻게 그런 실력을 갖추고도 나한테 져줄 수가 있냐고! ”

 

“ 어휴, 코딱지만 한 촌동네에서 운동회하면서 이기는 게 무슨 대수라고! 내가 무슨 운동선수도 아니고. 애들 공연만 잘 하게 하면 됐지. 마초 군국주의자들이 만든 공산당 행사에서 그깟 경기 이겨봤자 뭐가 중요하니. 하여튼 다들 촌스럽다니까. 스탈린 앞잡이... ”

 

“ 밀고! 체포! 고문! ”

 

“ 압. ”

 

왕재수가 화들짝 놀라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눈물을 닦아주고 바닥에 쏟아진 사과파이를 주워 담아 주면서 물었다.

 

“ 바이올린 아저씨는 어떻게 눈치 챈 거야? 네가 져 준 거. ”

 

“ 어, 그거? 들것에 실려 왔을 때 로만이 너무 놀라서 날 안고 병원으로 냅다 뛰었거든. 의사 선생님이 피 아니라고, 빨간 약이라고 하면서 나 다친 데 없다고 말해줘서 다 들통 났어. 그때부터 막 의심하기 시작해서 농구 매수도 들통 나고... 어헝... 로만은 왜 그러는 걸까. 왜 자꾸 의심하지? 난 키 크고 나이 많고 밤일 잘하는 아저씨가 좋은데. 너는 진짜 내 취향도 아닌데. 눈도 단추 같고...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왕재수가 다시 서럽게 울자 가책이 느껴졌다.

 

“ 울지 마. 내려가서 밥 먹자. 너 좋아하는 보르쉬 끓여줄게. 블린도 구워주고. 어... 차도 우려 줄게. ”

 

“ 보르쉬랑 블린이 무슨 소용이야, 로만이 나 버렸는데. 어헝... 이제 누구한테 안아달라고 하지, 엉엉... ”

 

“ 야! 그깟 깡패가 뭐 잘났다고 그렇게 목을 매냐! 다른 아저씨들 찾으면 되잖아! 그 심판 아저씨랑 놀든가! ”

 

“ 아니야, 아니야... 로만은 틀려. 밤일을 엄청 잘한단 말이야. 어헝... ”

 

“ 시끄러워! 뚝 그쳐! 내려가서 밥 먹어! 다른 아저씨들 찾아줄 테니까 제발 울지 말란 말이야! 아 정말 미치겠네... ”

 

베르닌이 억지로 왕재수를 일으키려고 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바이올린 깡패 로만 코즐로프가 불쑥 들어왔다. 질풍같이 달려 들어오더니 베르닌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왕재수를 와락 껴안더니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 아이구 우리 귀여운 아기, 내 강아지 내 비둘기. 내가 잠깐 미쳤지. 이렇게 조그맣고 예쁜 우리 귀염둥이에게 성질을 부리다니! 이 고운 눈에서 눈물이 나게 만들다니. 어유 내가 미쳤지. 내가 잘못했다 귀염둥아. 우리 이쁜아. 나 생각해서 심판 매수하고 혹시라도 내가 경기 깽판 부렸다고 KGB 놈들한테 체포될까봐 저 스파이 놈한테 져 준 거 다 알면서도 순간 눈이 뒤집히고 말았네. 미안해 우리 천사야. 인형 같은 너에게 못할 짓을 했구나. 아이고 우리 아기 눈 퉁퉁 부은 것 좀 봐. 많이도 울었네. 내가 밤새 안아줄 테니까 눈물 뚝! ”

 

코즐로프가 왕재수를 안고 침실로 들어가 버린 후 베르닌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먼지와 콧물이 묻은 렐랴의 스카프를 조물조물 손빨래해서 창가에 널었다. 혼자서 보르쉬를 끓이고 블린을 구웠다. 마침 MVP 상품으로 받은 레닌 전집이 있었기에 냄비 받침 대신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그래도 냄비 받침은 건졌으니 나름대로 보람 있는 하루였다.

   

   

 

FIN

2014. 11. 29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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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피소드는 사실 내 러시아 친구 료샤와의 대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쓴 것이다. 배나무 거리에 사는 그 불쌍한 남자(=미샤=왕재수)에 대한 피상적인 팩트만 얻어들은 료샤가 제발 그 불쌍한 젊은이에게 축구라도 시켜주라고 들들 볶아서 :) 본편에서는 내용상 안 맞지만 여기선 가능할 것 같아서 ㅎㅎ

료샤와의 그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249, http://tveye.tistory.com/3386

료샤가 미샤를 '배나무 거리의 불쌍한 남자'로 인식하게 된 계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87

 

..

 

스페호프가 계속해서 소리치는 '리바운드를 지배하는 자가..' 운운하는 얘긴 많이들 아시겠지만 슬램 덩크에서 차용했다 :) 헉, 그런데 슬램 덩크 모르는 분들도 있겠지.. 세대 차이 ㅠㅠ

 

..

 

시리즈는 7편 '보고서의 악몽'으로 이어진다. 그건 며칠 후에~

그럼 이제 나는 본편으로 돌아가서...

철딱서니 없는 베르닌과 왕재수를 진지한 캐릭터로 다시 돌려놓고 ㅠㅠ (잘 안돼 흐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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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2. 3. 21:23

초록 머리, 검정 머리 russia2015. 2. 3. 21:23

 

 

작년 4월 초. 페테르부르크.

네바 강변 따라 걷다가.. 궁전 교각 근처에서 발견한 청둥오리 두 마리.

청둥오리 좋아해서 마주치면 사진 찍는다.

수컷 암컷 같이 둥둥 떠가는 건 자주 봤지만 사내애들 둘이 저렇게 딱 붙어서 가는 건 첨 봐서 찍었다. 근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줌 당겨도 이 모양. 눈을 크게 뜨고 가운데를 찾아보세요~

 

 

 

 

그리고 이번엔 깜장 머리 갈매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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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2. 2. 21:20

황금 독수리들 russia2015. 2. 2. 21:20

 

 

작년 4월 초. 상트 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린스키 공원 울타리의 황금 독수리들.

잘 보면 쌍두독수리들도 보인다. 러시아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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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월요병을 달래는 마린스키 무용수 화보 몇 장.

 

말이 필요없는 최고의 발레리나, 울리야나 로파트키나로 시작.

마린스키 브 콘탁테 페이지에서 얻어온 사진. 캡션이 달려 있긴 한데 노어라서.. 2013년 3월의 제13회 마린스키 국제 발레 페스티벌 때, '한여름밤의 꿈' 무대 화보이다. 사진사는 Gene Schiavone.

 

 

 

그리고 아름다운 디아나 비슈네바. 분장실 사진 두 컷.

이건 비슈네바의 페이스북에서 얻은 것 같은데 긴가민가..

난 분장실이나 연습실의 무용수들 사진들을 매우 좋아한다.

 

 

 

 

이제부터는 사심 가득한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화보 몇 장 :)

이건 최근 뉴욕 투어. 백조의 호수 추는 중. 빅토리야 테료쉬키나와 함께.

아무리 봐도 지그프리드가 백조들보다 더 예쁜 건 반칙이지만.. 어쨌든 눈호강!!

사진사는 Jack Vartoogian.

 

 

 

역시 Jack Vartoogian의 사진 한 컷 더.

테료쉬키나 오데트를 안고 있는 슈클랴로프 지그프리드..

 

잘못했어, 오데트야.. 나 용서해줘 ㅠㅠ 나는 많이 예쁘니까 좀 용서해줘 ㅠㅠ 나처럼 예쁜 왕자 어디 가서 구하기 쉽지 않아... 저 영국 가봐, 왕세자가 66살이야..

 

 

 

테료쉬키나 오데트를 떡하니 허벅지에 올려놓고 포즈 잡는 슈클랴로프 지그프리드.

 

이걸 잘해야 진짜 마린스키 지그프리드임!!! 이거 못하면 좀 빈정 상함.. 이거랑 로트바르트 날개 멋있게 뜯는 거.. 게스트 무용수가 마린스키 와서 지그프리드 출 때마다 유심히 보는데 확실히 이 두 개가 좀 약함 ㅋㅋ 슈클랴로프는 물론 잘한다 :)

 

 

뉴욕 투어 갔을 때. 백조 리허설 중인 슈클랴로프와 빅토리야 테료쉬키나.

사진은 Natalie Keyssar.

역시 리허설 사진들은 날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다.

 

 

마지막은 예카테리나 콘다우로바와 함께 춘 젊은이와 죽음.

사진은 Alex Gouliayev.

전에도 쓴 적 있지만 내가 슈클랴로프를 무용수로서 재평가하게 된 무대였다. 그전까지는 귀엽고 반듯하고 예쁜 무용수였다면 이 무대를 직접 본 후 배우로서의 그의 역량을 평가하게 되었음.

얘가 추는 이 무대 다시 한번 바로 앞에서 보고 싶다. 원체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고. 롤랑 프티의 모든 작품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이 작품만은 매우 좋아한다.

태그의 '젊은이와 죽음'을 클릭하면 전에 이 발레에 대해 올렸던 포스팅, 사진, 영상들을 볼 수 있다. 덧붙여 writing 폴더에 발췌했던 미샤와 이 작품에 대한 짧은 대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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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참으로 긴 일주일이었다. 여러 가지로 힘들어서 녹초가 되었다.

스트레스와 피로를 달랠 겸 서무의 슬픔 5편 올려본다.

우리의 고지식한 책상물림 청년 다닐 베르닌은 과연 가고 싶은 파티에 갈 수 있을 것인가...

 

 

**  지금까지의 간단한 줄거리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는 나름대로 자기 입장에서는 베르닌을 도와주려고 애쓰는데... 별 도움은 안 되는 것 같고 베르닌의 일상은 고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날 베르닌은 소싯적에 짝사랑하던 아름다운 여인 나타샤가 파티에 온다는 소식을 입수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5편에 등장하는 모스크바 쪽 사람들은 모두 가상의 인물들이다. 마타 하리보다 예쁘다는 알렉산드라 피르멘스카야, 볼쇼이의 프리마 발레리나 마리야 아브라모바 등등 모두 실재하지 않음 :)

참고로 이 시리즈에서 종종 언급되는 '루뱐카'란 단어는 모스크바에 있는 국가보안위원회(KGB) 본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나라 안기부가 남산으로 호칭되었듯, KGB 본부도 모스크바의 루뱐카라는 동네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곤 했다. 무시무시한 곳이었고 불쌍한 미샤도 거기 끌려가서 고초를 좀 겪었지만 뭐 이 시리즈는 웃자고 쓰는 거라서 그런 심각한 얘긴 안 나온다 :)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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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5

 

 

 

서무의 슬픔

- 무도회에 간 베르닌 -

 

 

 

 

베르닌이 뭔가를 간절하게 원하는 적은 별로 없었다. 스페호프 국장 아래에서 일하는 서무의 특성상 매일 과중한 업무에 짓눌려 그럴만한 여유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저녁 시 의회 대강당에서 개최되는 파티만큼은 꼭 가고 싶었다. 모스크바 KGB 본부와 가브릴로프 시 의회가 무슨 협약을 체결한 기념으로 그쪽 보안위원회와 중앙의회 관계자들, 심지어 볼쇼이 극장 무용수와 가수들까지 30여명이 내려왔고 시에서는 대규모의 축하 파티를 열기로 한 것이다.

 

물론 베르닌은 평소 그런 파티에 가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보통은 윗사람들이 우글대는 탓에 아주 지루하고 우중충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온 KGB 쪽 사람들은 거의가 2~30대의 젊은 요원들이었다. 그리고 그가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던 시절 친하게 지냈던 동료들도 여러 명 있었다. 특히 대학 시절 잠깐 사귈 뻔 했던 금발 미녀 나타샤도 얼마 전 모스크바 본부 요원으로 특채되었고 이번 파티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가브릴로프 쪽 참석자들은 시 의회와 KGB 직원들, 그리고 극장 관계자들과 예술가들이었다.

 

파티는 금요일 저녁 8시부터였다. 정상적인 직장인이라면 당연히 아무런 어려움 없이 참석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심지어 극장도 일찌감치 이 날은 공연을 아예 비워버렸다. 의회나 보안위원회와는 관계가 없었지만 볼쇼이에서 온 예술가들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닐 베르닌은 정상적인 직장인에 해당되지 않았다. 1주일 내내 밤 10시까지 야근하고 있었고 그나마 못한 일들은 주말에 몰아서 해야 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도 초대장을 받았다.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모든 현장 요원과 행정 요원들이 파티 초청 대상이었다. 다들 아침부터 차려입고 난리였다. 모스크바에서 온 미녀 스파이 출신 여자 요원들이 어떻고, 볼쇼이 발레리나가 어떻고 하며 다들 가슴 설레 했다. 베르닌은 파티에 무척 가고 싶었기 때문에 그날 아침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국장실로 들어갔다.

 

근태기록부와 업무추진비 청구서, 공유지 배추 현안사항 검토 보고서 등 서류를 한 아름 내려놓으며 베르닌은 스페호프 국장의 눈치를 살폈다. 국장은 별로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휘파람을 불며 서류들을 휙휙 넘겼다. 저기압일 때는 서류 한 장 한 장, 단어 하나하나를 걸고넘어지며 그를 들들 볶기 때문이다. 국장은 별다른 트집도 없이 서류 전부에 사인을 해주었다. 아마 미녀 요원들이 참석하는 파티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분위기를 놓칠세라 베르닌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 저어, 국장님. 오늘 저녁 파티 말인데요... ”

 

“ 아, 우리 파티. 알렉산드라 피르멘스카야가 온다더군. 자네 그 여자 모를 거야. 런던에서 날리던 스파이였지. 마타 하리는 비교도 안될 만큼 미인이야. 그러고 보니 걜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3년 전이군. ”

 

“ 그렇군요. 친하셨나 보군요. 저, 제 동료들도 왔더라고요. 모스크바에 있을 때 친했던 사람들인데. 대학 동기도 오고... ”

 

“ 친구들은 자네처럼 한심한 수준이 아니었나보군, 루뱐카 본부에 채용된 걸 보니. ”

 

“ 꼭 그런 건 아니고요... 공부는 제가 더 잘했습니다만. 저, 그래서 말인데 저도 오늘 파티에 가려고 하는데... ”

 

“ 아, 자네도 가고 싶다... 그래, 물론이지. 자네도 우리 요원인데 당연히 갈 수 있지. 초청 명단에 들어 있다면... ”

 

“ 들어 있습니다. 제 이름도 들어 있거든요. ”

 

“ 그래, 그럼 가게나. ”

 

베르닌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렇게 쉽게 허락을 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최소 한 시간 이상의 설교를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 대신 일은 마무리하고 가야지. 심지어 금요일이니... 어디 보자, 지금 처리가 안 된 일들이 뭐더라. 음, 공유지 배추 문제는 현안사항 검토만 있고 해결 방안이 없군. 해결 방안을 최소한 5가지를 제시하고 보건의회와 보안위원회의 공유지 문제에 대한 중장기 로드맵도 첨부하게.

그리고 당직실 앞에 자꾸 도둑고양이가 벌레와 쥐를 물어다 놓던데 고양이 퇴치 방안에 대해서도 5가지 이상, 각각 소요예산안을 첨부하도록.

그리고 주차장의 안내 표지판은 페인트가 다 벗겨지고 기름때가 앉아서 참 꼴 보기 싫더군. 표지판의 때를 닦아놓든지 새것으로 교체해 놓게. 글씨 색깔도 파란색으로 해놨더니 눈에 잘 띄지 않고 금방 더러워지더군. 오렌지색으로 바꾸고.

그리고 요즘 직원들이 전화를 받을 때 안내 멘트가 천차만별이야. 모스크바 본부에서 쓰는 멘트를 조사해 전화 인사 매뉴얼을 다시 제작하여 전 직원들 자리에 붙여 놓게.

음, 그리고 이 업무추진비 청구서 말인데. 이번엔 그냥 넘어가겠네만 양식이 완전히 바뀌어야 하네. 서명 란과 영수증 붙이는 란의 크기도 조절해야 하고 자리도 서로 바뀌어야 보기 좋을 것 같군. 그리고 업무추진비는 10월 현재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월별 청구 예상 목록을 작성해서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보고하게.

에, 또... 그렇지. 그 망할 놈의 불여우가 있지. 그 자식 사무실의 도청장치를 새것으로 갈아야 해. 그 여우같은 것이 전화기와 액자 뒤에 붙어 있던 장치를 망가뜨렸더군. 감시 부서에 얘기해서 제일 성능 좋은 걸로, 특수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는 떼어내거나 교란시킬 수 없는 장치로 바꿔달라고 하게. 그건 반드시 오늘 중 교체해야 해. 아무래도 그 싸가지 없는 꼬마가 자꾸 크레믈린에 전화를 걸어서 날 모함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뭐 이 정도일세. 별로 많지는 않군. 오늘 중 전부 처리할 수 있겠지. 하나라도 안 되면 파티는 꿈도 꾸지 말게. 암, 안되지. 일이 남아 있는데 그것도 서무가 그걸 미뤄놓고 파티에 가다니.

 

베르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풀이 죽어 국장실을 나왔다.

 

 

*    *    *

 

 

8시가 되었을 때 사무실에 남아 있는 것은 베르닌 한 명뿐이었다. 그는 하루종일 허리가 휘도록 일했다. 공유지 배추 해결방안과 중장기 로드맵은 소설에 가까운 보고서를 만들어냈고 고양이 퇴치 방안에 대해서는 보건의회와 야생동물 보호협회에 들러 억지로 다섯 가지를 짜냈다. 20년째 버티고 있는 철밥통 고참이자 언제나 말만 많고 하는 일은 없는 발따예프가 어깨 너머로 보고서를 넘겨다보면서 충고했다.

 

“ 아니, 뭘 그런 걸 갖고 의회니 협회니 드나들고 그렇게 골치를 앓아?  1. 고양이를 때려죽인다. 2. 쥐약 섞은 생선을 놓는다. 3. 유년부, 소년부, 청년부, 일반부 대상으로 고양이 사냥 콩쿠르를 개최해 시상한다. 4. 고양이 서식지를 찾아내 불을 지른다. 5. 고양이가 올만한 길목에 끈끈이 덫을 놓는다.  3분만에 다 나오잖나. 예산만 계산하면 되겠구먼. ”

 

“ 그런 잔인한 방법은 안 되지요! 선배님 방법은 전부 고양이를 죽이는 거잖아요! ”

 

“ 아니, 그럼 고양이 퇴치 방안이면 고양이를 죽여야지! 그것들을 살려놓으려고 하니까 이렇게 낑낑거리고 있는 거 아냐! 허참, 미련하기는. ”

 

“ 고양이가 불쌍하잖아요! 특히 저 검은 고양이 미셴카... 맨날 여기 와서 밥도 얻어먹고... 귀엽고... ”

 

“ 귀여운 게 밥 먹여주나? 그리고 누가 진짜 죽이랬나? 보고서라는 건 그냥 보고서지, 누가 그걸 실행하는 적 있냐고. 자네가 그래서 국장한테 볶이는 거야. 워낙 고지식해야 말이지... 책상물림이니 원... 난 이만 가네. 예쁜 여자들 보러 파티에 가야지. 하는 꼴을 보니 자넨 오늘 파티는커녕 밤을 새겠군. ”

 

 

5시가 되어 모두 퇴근한 후 베르닌은 주차장으로 가서 안내 표지판을 물걸레로 닦기 시작했다. 찌든 때는 지워지지 않았다. 홧김에 그는 하얀 페인트통과 오렌지색 페인트 통을 가져왔다. 표지판을 온통 흰색으로 다시 칠했다. 그러나 그는 손재주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흰 페인트가 여기저기 뭉치고 말았다. 그리고 원래 있던 글씨를 흰 페인트가 다 덮어버렸기 때문에 반듯하게 다시 ‘주차장은 오른쪽입니다’라는 글씨를 오렌지색으로 써야 했는데 자를 대고서도 선 하나 똑바로 못 긋는 그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시간 동안 끙끙대다가 그는 괴로워하며 표지판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페인트 냄새를 너무 맡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말라빠진 샌드위치를 먹으며 그는 전화 인사 매뉴얼을 새로 만들었고 수십 장을 등사해 직원들 자리에 하나하나 붙여 놓았다. 업무추진비 정산 양식을 다시 만들었다. 그리고 10월 현재부터 익년 상반기까지의 월별 기관 업무추진비 집행 예상액을 산출하여 목록을 만든 후 이를 첨부하여 기본계획을 작성한 후 국장실 책상 위에 곱게 내려놓았다.

 

시계를 보니 이미 8시 반이었다. 아직 도청장치와 문제의 표지판이 남아 있었다. 표지판은 아무래도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주말에는 문을 여는 가게도 없으니 포기하고 월요일에 국장에게 제대로 깨지는 수밖에 없었다. 감시부서 직원들은 모두 파티에 가버렸기 때문에 그는 직접 장부를 작성한 후 물품보관실에 가서 최신식 도청장치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엔지니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쪽 지식은 별로 없었지만 어쨌든 장부 번호를 대조해 모스크바에서 직송된 초소형 도청장치 두 개를 찾아냈다. 둘 다 부착자의 지문 인식으로만 제거될 수 있다고 씌어 있었다. 설명서를 열심히 읽어보았지만 수화기를 해체해 내부에 마이크를 설치하는 것부터가 너무 어려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베르닌은 차를 몰고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의 극장으로 향했다. 그나마 극장 사람들도 모두 파티에 가서 다행이었다. 아무리 왕재수가 극장 직원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해도 어쨌든 자기네 감독의 사무실에 도청마이크를 설치하러 온 KGB 요원을 보고 기분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     *     *

 

 

극장은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청소부나 경비 요원조차 안 보였다. 그는 곧장 감독실로 갔다. 놀랍게도 사무실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망할 놈의 왕재수는 에너지 절감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이었다. 분명 잘 차려입고 파티에 가느라 정신이 팔려서 불 끄는 것도 잊었겠지 하고 투덜대면서 베르닌은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회의 테이블 위에 커다란 종이를 펼쳐놓고 이상한 기하학적 그림을 그리고 있던 왕재수가 고개를 들더니 반색을 했다.

 

“ 어, 오랜만이잖아! ”

 

“ 아... 어... 그래. ”

 

“ 이번 주는 바쁘다고 태워다주지도 않고... 맨날 늦게 온다고 밥도 안 해 주고. ”

 

“ 너 바이올린 아저씨 집에서 계속 잤잖아. ”

 

“ 네가 늦게 오니까 그렇지. 나도 밥은 먹어야 하잖아. ”

 

베르닌은 머뭇거렸다. 차마 왕재수가 보는 앞에서 도청장치를 설치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화제를 돌렸다.

 

“ 너 왜 남아 있어? 파티 안 가? ”

 

“ 무슨 파티? ”

 

“ 의회에서 여는 파티. 모스크바에서 다 왔잖아. 볼쇼이에서도 오고. 너네 쪽 사람들도 다 갔잖아. 난 당연히 너도 간 줄 알았지. ”

 

“ 아, 그거. 난 파티 안 좋아해. ”

 

“ 설마. 그런 데 엄청 많이 다녔을 거 같은데. ”

 

“ 어휴, 그런 파티가 얼마나 지겨운지 알아? 맨날맨날 이 의원님 저 의원님, 무슨 시장, 무슨 장관, 무슨 대사가 여는 파티가 어떻고... 가기 싫어도 맨날 불려가고. 가면 맨날 춤추라 하고 춤 안 추면 술 마시라 하고 예쁘다고 감탄하고. 여자애들은 자꾸 사귀자고 들이대면서 안아 달라 하고 아저씨들은 막 집적대고. 진짜 질색이야. ”

 

“ 그럼 너 오늘 그 파티 안 가? 볼쇼이에서 같이 췄던 여자도 왔던데? ”

 

“ 어, 마리야랑 에벨리나랑 왔다더라. 상관없어.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

 

“ 배부른 소리하고 있네. 그래도 가봐. 난 가고 싶어도 못 가는데. 대학 때 나랑 사귈 뻔 했던 나타샤도 오는데... 진짜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

 

“ 넌 왜 못 가? 의회랑 KGB에서 공동 주최하는 파티 아냐? ”

 

“ 일이 너무 많아서. 국장이 던져준 일을 다 끝내야 파티에 갈 수 있는데 아직 다 못했어. 못 갈 것 같아. 벌써 9시잖아... ”

 

“ 많이 남았어? ”

 

“ 어, 두어 가지... ”

 

“ 여긴 왜 왔어? ”

 

“ 어? 아... 어... 너네 혹시 남는 주차 표지판 없어? ”

 

도청장치를 주머니 속에 꼭꼭 밀어 넣으며 베르닌은 급한 대로 둘러댔다. 그리고 하얀 페인트와 오렌지 페인트의 비극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 으응, 그래서 네 바지에 그렇게 페인트가 튀어 있었구나. 우리도 남는 건 없을 텐데. 아, 저걸로 하면 되겠네. ”

 

왕재수는 사무실 한켠에 세워져 있는 ‘감독실’ 입간판을 끌고 왔다.

 

“ 그건 복도에 세워놓는 거 아냐? 왜 안에 넣어놨어? ”

 

“ 아휴, 닭살 돋아. 감독이 무슨 벼슬이야? 명패 붙어 있는 것도 모자라서 웬 입간판. 사람들 지나가다 걸려서 넘어지기나 하고. 치우라 하려고 했는데 다들 파티 가버려서 일단 여기다 넣어놨어. 이거 가져가. ”

 

“ 크기는 비슷한데... 감독실이라고 씌어 있잖아. ‘주차장은 오른쪽입니다’하고 화살표가 그려져 있어야 하는걸. 하얀색이랑 오렌지색이어야 하고. ”

 

“ 뭐가 어려워, 대충 칠하면 되지. 저쪽 작화실에 페인트 있어. 좀 들고 와, 무거우니까. 알지? 난 무거운 거 들면 근육 미워지잖아. ”

 

베르닌은 무거운 입간판을 들고 왕재수를 따라 작화실로 갔다. 왕재수는 페인트통과 붓을 꺼내더니 순식간에 간판을 흰색으로 다시 칠하고는 거대한 선풍기를 틀어 페인트를 말렸다.

 

“ ‘주차장은 오른쪽입니다’? 화살표도 오른쪽? ”

 

“ 응. ”

 

“ 어휴, 촌스러워... ”

 

왕재수는 붓에 오렌지색 페인트를 묻히더니 휘리릭 글씨를 쓰고 화살표를 그렸다. 찍어낸 듯이 반듯했다. 얼룩 하나 없었다.

 

“ 다 됐네. 마르면 가져가. ”

 

“ 어, 고마워. 너 대단하다. 간판업자가 그린 것 같아. ”

 

“ 너 어떻게 나한테 간판업자 운운할 수가 있어? 업자가 만들면 그냥 간판이지만 내가 손댄 거니까 이건 예술작품이라고!

 

“ 어, 그래... 넌 참 재수 없는데 그래도 능력은 좋은 거 같아. 고마워. ”

 

“ 이거 갖다놓으면 다 끝나는 거야? 그럼 너 파티 갈 수 있어? ”

 

“ 어... 아니. 하나 더 남긴 했어. ”

 

“ 뭔데? 말해봐, 도와줄 테니까. ”

 

“ 아니, 그게... ”

 

베르닌은 너무 찔려서 말을 더듬었다. 왕재수가 표지판까지 그려주며 도와줬는데 자기는 도청장치를 설치하러 왔다는 사실에 큰 가책을 느꼈다.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서다가 그만 주머니에서 도청장치들이 툭 떨어졌다. 호기심 많은 왕재수는 잽싸게 그것들을 주웠다.

 

“ 아니, 야... 그거... ”

 

“ 어, 이거 도청마이크! 너 이거 여기 달려고 온 거구나!

 

“ 아니야... 여기 달려고 한 거 아니야... ”

 

“ 뭐가 아니야. 전화기랑 액자 뒤에 달려고 온 거지? 나 도청하려고! ”

 

“ 저... 고의가 아니야. 나도 그런 거 하고 싶지 않았는데 국장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었어. 어... 진짜 미안해. ”

 

“ 칫, 난 또 나 혼자 저녁 안 먹고 있을까봐 온 줄 알았지. ”

 

“ 저녁 안 먹었어? ”

 

“ 그럼 어떻게 먹어. 너도 없고... ”

 

“ 바이올린 아저씨 있잖아. ”

 

“ 로만 그 파티에 끌려갔어. 끝날 때까지 연주해야 된대. ”

 

“ 그렇구나. 너는 삼시세끼 꼬박꼬박 챙겨먹어야 하는 앤데... 가뜩이나 남이 안 챙겨주면 먹지도 않고. 안 그래도 말랐는데 더 마르면 안 될 텐데. 저기, 내가 샌드위치라도 만들어다 줄까? ”

 

“ 됐어. 너 빨리 파티 가야 하잖아. ”

 

“ 아니야, 나 파티 못 가. 일도 남았고... ”

 

“ 뭐, 그 도청마이크? 설치해. ”

 

“ 어, 정말? 너 그런 거 싫어하잖아. ”

 

“ 상관없어. 지금 붙여놔. 너 국장한테 검사받고 나서 월요일에 도로 떼면 되니까. ”

 

“ 이거 네 맘대로 못 떼는 거야. 최신식이라서 설치자 지문 인식 없이는 제거 못해. ”

 

“ 아, 그래? 그럼 내가 붙이면 되겠네. 줘봐. ”

 

왕재수는 베르닌의 손에서 도청마이크를 낚아챘다. 자기 사무실로 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수화기를 해체하고 무슨 코일들을 잡아당기더니 거기 초소형 마이크를 연결하고는 다시 수화기를 조립했다. 그리고는 벽의 그림 액자를 들어내더니 나사못을 한 개 빼내고는 안쪽의 코일들에 남은 마이크를 연결했다.

 

“ 됐네. 너네 쪽에서 스위치 올리면 다 들릴 걸. 만족하냐? ”

 

“ 넌 어떻게 이런 걸 다 할 줄 알아? ”

 

“ 우리 모스크바 아저씨가 KGB 실세... 매일 침대에서 날 안고 만지작거리면서 이런 얘기를... ”

 

성질 더러운 바이올리니스트도 모자라 무시무시한 고위직 의원의 품에 안겨서 귀여움을 받고 있는 왕재수의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베르닌은 급하게 그의 입을 막으며 사과했다.

 

“ 어쨌든 미안하다. 나도 이런 짓 하게 될 줄 알았으면 이 직장에 안 들어왔을 텐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

 

너 그렇게 떠들 시간 있어? 파티 가고 싶다며. 이제 다 됐잖아. 빨리 가. ”

 

“ 아니... 어차피 못 가. ”

 

“ 왜? ”

 

“ 바지에 페인트도 잔뜩 묻었고... 셔츠도 다 구겨지고... 나 양복 이거 한 벌밖에 없거든. ”

 

“ 아휴, 촌스럽게 누가 파티에 양복을 입고 가니? 이 옷도 유행 지난 지 십 년은 된 것 같은데. 너 이거 고등학교 졸업식 때 샀던 거지? ”

 

“ 어, 어떻게 알았어? 그러고 보니 십 년 전이네. 그리고 파티에 온 거 국장이 보면 날 죽이려고 할 거야. ”

 

“ 왜? 하라는 일 다 했잖아. 표지판도 만들고 도청마이크도 붙이고. ”

 

“ 그래도 국장은 어떻게든 트집을 잡을 거야. 그 사람은 내가 자기 눈앞에서 즐겁게 노는 꼴 못 봐. ”

 

“ 그럼 국장이 널 못 알아보면 되는 거겠네. ”

 

“ 어떻게 날 못 알아봐. 같이 일하는데. 맨날 툭하면 자기 방으로 불러서 눈을 마주보며 설교를 늘어놓는데. ”

 

“ 변신하고 가면 되잖아. 어차피 이렇게 촌스러운 꼴로 파티 가면 재미도 없어. 이리 와봐. ”

 

왕재수는 베르닌을 소파에 앉혀놓더니 한쪽에 있는 캐비닛을 열었다. 베르닌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서류용 캐비닛이 아니라 옷장이었기 때문이다. 옷들이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 자신의 집에 있는 옷보다 훨씬 많은 것 같았다.

 

“ 너 왜 옷을 여기다 전부 놓고 다녀? ”

 

“ 전부는 무슨. 가끔 여기서 잘 때도 있으니까 그냥 몇 벌만 가져다 놓은 거야. 똑같은 거 다시 입기 싫잖아. ”

 

“ 이게 몇 벌 가져다 놓은 거라고!! 여자들도 이렇게 옷 많이 안 사겠다. ”

 

“ 내가 산 거 아니야. 다 선물 받은 거야. 나는 워낙 예쁘고 맵시가 좋으니까 외국 디자이너들도 막 자기들 신상이라면서 갖다 주고... 팬들도 갖다 바쳤거든. 아휴, 여긴 시골이라서 이제 예쁜 옷 갖다 주는 사람이 없어. ”

 

베르닌은 입을 딱 벌렸다. 역시 왕재수는 그와는 딴 세상에 사는 게 분명했다. 문득 그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 가끔 여기서 잔다고? 여기 소파에서? ”

 

“ 응. ”

 

“ 왜? ”

 

너 야근해서 나 안 태워다 줄 때랑 로만이 다른 일 때문에 못 재워줄 때. ”

 

“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집이 없는 것도 아닌데! ”

 

“ 캄캄할 때 혼자 강 건너서 집까지 걸어가는 거 싫단 말이야. 난 운전도 엉망이고. 전에도 차 몰고 가다가 배나무 들이받았어. ”

 

“ 그래서 여기서 잔단 말이야? 극장은 밤에 난방도 안 되는데! 너 그때 고문당한 거 다 낫지도 않았잖아! 툭하면 아프잖아. 그것도 저 소파에서? 너 다리 길어서 저 소파에 맞지도 않겠다! ”

 

“ 아유, 정말 왜 이렇게 잔소리야! 남이야 어디서 자든 말든! 나 원래 옛날부터 노숙도 잘 하고 아무데서나 잘 잤거든! ”

 

“ 노숙이라니!! 미쳤냐? ”

 

“ 공원에서 멋있는 아저씨들이랑 몰래몰래 성교를 하고서 여럿이 꼭 껴안고 낙엽 더미 속에서... ”

 

“ 헉, 그만해! ”

 

왕재수는 혀를 날름하더니 옷장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는 옷을 한 아름 안고 베르닌에게 다가와 명령했다.

 

“ 야, 옷 벗어. ”

 

“ 뭐? 왜!! 너, 너... 나 그런 거 아닌 거 알지? 그러니까 나는... ”

 

“ 옷 갈아입어야 파티에 가지! 벌써 9시 반 넘었잖아! 빨랑 갈아입어야 그 나타샤인가 뭔가도 보고 춤도 출 거 아니야. ”

 

“ 그래서 네 옷 입고 가라고? ”

 

“ 국장이 넌줄 몰라야 한다며. 여자한테도 잘 보이고. ”

 

“ 내가 네 옷을 어떻게 입냐? 난 180 넘는다고. 사이즈도 너보다 크고! ”

 

“ 괜찮아, 바지 길이는 맞을 거야. 넌 허리가 길고 난 다리가 길잖니. 그리고 이 옷들은 품이랑 허리가 좀 크게 나와서 어차피 나한테는 안 맞아. 버리려다가 아르마니라서 아까워서 놔뒀던 거거든. ”

 

“ 아르마니가 뭐야? ”

 

“ 있어, 그런 게. 좋은 거야. 빨랑 그 누더기 벗고 갈아입어. ”

 

그래서 베르닌은 옷을 갈아입었다. 청회색의 실크 셔츠와 짙은 색의 착 붙는 진을 입고 부드러운 가죽 느낌이 일품인 근사한 벨트를 맸다.

 

“ 답답해... 너무 꽉 끼어. ”

 

“ 끼는 게 아니고 딱 맞는 거야. 네가 여태 너무 헐렁한 옷만 입어버릇해서 그래. 남자는 핏이 잘 맞아야 멋있어 보인다고. ”

 

“ 하나도 안 편해. 셔츠도 너무 끼고 바지도 벨트 안 해도 될 거 같아. ”

 

“ 그 벨트는 멋으로 하는 거야! 셔츠는 지금이 딱 좋아. ”

 

“ 넥타이 할까? ”

 

“ 윽, 이 셔츠에 넥타이는 안 되지! 너 정말 패션하고는 담 쌓았구나. 이런 차림에는 이렇게 스카프를 매야 멋있는 거야. 그리고 이 재킷 입어. ”

 

재킷 길이가 너무 짧아... 이 지퍼는 뭐야? 주머니도 아닌 게 왜 달렸지? ”

 

“ 지퍼는 장식이야. ”

 

“ 이런 게 멋있는 거야? ”

 

“ 응, 훨씬 낫네. 근데 너 머리가 너무 엉망이야. ”

 

왕재수는 이상한 병을 꺼내서 손에 크림 같은 걸 쭉 짜내더니 그걸 베르닌의 머리털에 바르고 조물조물 만지작거리더니 가르마를 바꾸고 뒷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리고는 서랍에서 이상한 팔레트 같은 걸 꺼내더니 베르닌의 얼굴 여기저기에 붓질을 했다.

 

“ 으악, 뭐하는 거야? ”

 

“ 너 맨날 야근하느라 피부가 너무 안 좋아. 여기 잡티랑 뾰루지랑... 컨실러로 가려주는 거야. ”

 

“ 이런 건 여자들이나 하는 거잖아! ”

 

“ 괜찮아, 눈에 안 띄게 해줄게. 남자는 피부가 좋아야 먹고 들어간다고. 아, 이제 대충 됐다. 그래도 구제불능일 줄 알았는데 키가 있어서 꾸며놓으니 괜찮네. 야, 그렇게 어깨 구부정하게 하지 마. 머리 들고 어깨 펴고. 그렇지, 걸을 때도 정면을 보고 당당하게. 그래야 키랑 어깨가 돋보이고 멋있어 보이지. 훨씬 낫네. ”

 

“ 너무 어려워... ”

 

“ 처음에만 그런 거야. 다 됐으니까 빨리 가라. ”

 

“ 너 정말 안 가? ”

 

“ 난 안 가. 파티 싫어. 일하던 거 마저 할 거야. ”

 

“ 그게 일하는 거였어? 난 낙서하는 줄 알았네. ”

 

“ 진짜 무식하다니까, 예술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고. 신작 무대 동선 짜는 거야. 나 할 거 많아. 빨리 가. 잘 놀아라. 나타샤 잘 꼬셔. ”

 

“ 고마워. ”

 

베르닌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극장을 나섰다. 복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는 급하게 차를 몰고 시 의회 대강당으로 향했다.

 

 

*    *    *

 

 

강당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극장 오케스트라가 계속해서 대중적인 춤곡을 연주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잘 차려입은 남녀들이 모여 춤을 추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기도 하며 흥겨운 분위기였다. 베르닌은 쭈뼛거리며 슬며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모두에게 무시당하며 투명인간 취급받을 게 뻔했으므로 잽싸게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지나가 나타샤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자들이 하나둘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남자들도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저 남자 누구야? 모스크바에서 왔나? ”

 

“ 어머, 이 동네는 시골인 줄 알았는데 어쩜 저렇게 세련된 남자가 다 있지? 아르바트보다 물이 더 좋네. ”

 

어머, 저 남자 키도 크고 완전 스타일 좋아. 소개시켜 달라고 하고 싶다. ”

 

처음에 베르닌은 그게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 줄도 모르고 대체 어디에 그렇게 멋있는 남자가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때 하필 스페호프 국장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공유지 배추와 표지판과 업무추진비, 전화 매뉴얼과 도청마이크에 대해 설교를 늘어놓고 감히 파티에 올 엄두를 내다니 서무의 기본 자세가 안 됐다는 호통을 칠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베르닌이 몸을 움츠렸는데 놀랍게도 국장은 그를 그대로 지나쳐갔다. 표정을 보니 그를 전혀 못 알아본 것 같았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능력에 새삼 감탄했다.

 

그때 난생 처음 보는 미인이 그에게 다가와 춤을 청했다. 알고 보니 화제의 인물인 미녀 스파이 알렉산드라 피르멘스카야였다. 정말 예뻤지만 눈매가 좀 올라가서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는 나타샤와 렐랴가 더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물론 내색하지는 않았다. 피르멘스카야는 춤을 춘 후 투덜댔다.

 

당신 춤은 못 추는군요. 하긴 이 동네 사람이니... 스타일만 좋은 거였어. ”

 

“ 혹시 나타샤 아직 남아 있나요? ”

 

“ 나타샤? 아, 그 신참. 걔 알아요? ”

 

“ 동창이라서... ”

 

“ 저쪽에 있네요. 얘 나타샤! 멋쟁이가 널 찾는다! ”

 

피르멘스카야는 나타샤를 데려다 주고 다른 남자들 사이로 사라졌다. 베르닌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나타샤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미인이었다. 그러나 긴 금발을 늘어뜨리고 풍만한 가슴을 반쯤 드러낸 채 엉덩이를 흔들며 다가오는 나타샤를 보자 베르닌은 낯선 기분이 들었다.

 

“ 처음 뵈어요, 전 나타샤라고 해요. 모스크바 KGB 본부에서 왔죠. 당신은 혹시 극장 쪽? ”

 

“ 나타샤, 나야! 나 기억 안나? 같이 학부 다녔잖아. 다닐. 다닐 베르닌. ”

 

어머, 다냐? 어머나 세상에... 너 어쩌면 이렇게 변했니. 못 알아봤잖아. 어머어머, 너 정말 환골탈태했다! 이렇게 멋있는 남자인 줄 알았으면 그때 안 찼을 텐데... 그땐 너무 촌스럽고 눈도 단추 같다고 생각했거든. 내가 잘못 봤었던 거구나. 와, 진짜 멋있어졌다. 헤어스타일도 끝내준다. 어머, 혹시 이 재킷은 베르사체 아니야? ”

 

“ 아르마니래... ”

 

어머나, 해외 스파이로 빠져도 손에 대볼까 말까 하다던 그 아르마니! 게다가 이 스카프... 이건 에르메스잖아! 어머 세상에...

 

베르닌은 에르메스가 뭔지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타샤가 풍만한 가슴을 비벼대며 바짝 몸을 붙여왔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어쩐지 우울해져서 물었다.

 

“ 그때 내 고백 안 받아준 거, 공부하느라 시간 없다고 했었잖아. 그거 아니었던 거야? 내가 촌스러워서 그랬어? ”

 

아, 그때... 뭘 그런 걸 기억하고 그래. 옛날은 옛날이고 지금이 중요하지. ”

 

“ 내 눈 단추 같아서 그랬던 거야? ”

 

“ 지금은 아니야. 멋있어. 어쩜 피부도 이렇게 좋아졌니. 광이 나네. 너 모스크바 안 올라와? 지금 어디 살아? 너네 집에 커피 마시러 가도 돼? ”

 

“ 어... 나중에 시간 되면. 근데 저쪽에서 날 찾는 거 같아. 있다 다시 봐. ”

 

베르닌은 나타샤를 조심스럽게 밀어붙이고 다른 쪽으로 피했다. 너무나 울적했다. 왜 그런지 자신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테이블 쪽으로 가자 맛있는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각종 샌드위치와 꼬치구이, 훈제연어 샐러드와 과일즙과 사과파이, 초콜릿 케익 등 평소에는 실컷 먹기 힘든 요리가 가득했다. 꼬치를 한 개 해치우고 훈제연어를 몇 조각 우물우물 씹다가 베르닌은 문득 왕재수 생각이 났다.

 

‘ 그러고 보니 걔가 좋아하는 거네. 고기보다 생선을 더 좋아하던데. 저 사과파이. 바이올린 깡패 때문에 다이어트 한다더니 사과파이는 앉은 자리에서 한 판 다 먹었지. 단 거 안 먹는다고 우기더니만. ’

 

사과파이는 참 맛있었다. 울적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먹고 있는 동안에도 쉴 새 없이 여자들이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놀라운 것은 가브릴로프 KGB 직원들 중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거였다. 심지어 같은 사무실의 리자는 그를 모스크바에서 온 요원으로 착각하고 데이트를 신청하기까지 했다. 렐랴가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하긴 렐랴는 원체 눈썰미가 좋으니 그에게 왜 왕재수 옷을 훔쳐 입고 왔느냐고 화를 낼지도 몰랐다.

 

사과파이를 먹은 후 과일즙을 마시고 있는데 번쩍거리는 목걸이를 늘어뜨리고 붉은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자그마하고 날씬한 여자가 다가왔다. 심지어 베르닌조차도 그게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인민예술가이자 볼쇼이의 프리마 발레리나인 마리야 아브라모바였다. 텔레비전에도 많이 나왔고 왕재수와도 여러 번 같이 무대에 올라갔던 적이 있었다. 이미 40살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여전히 예뻤다. 그가 인사를 하자 아브라모바가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파티에서 마주친 여자들 중 그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역시 볼쇼이 발레리나라 콧대가 높은가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아브라모바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 당신 여기 KGB라면서요? ”

 

“ 아, 네. 혹시 도와드릴 일이라도? ”

 

“ 뺨 한 대만 때려줘도 돼요? ”

 

“ 어... 아니요... 안되는데요. 대체 왜 그러시죠? 제가 실수라도 했나요? ”

 

당신들이 미샤를 여기 못 오게 했잖아요!

 

“ 미샤가 누구지... 아, 왕재수... 아니, 야스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긴가요. 걔는 지금 바빠요. 신작 무대 동선을 그린대요. 파티도 엄청 싫어한다고... ”

 

“ 파티를 싫어해요? 걔가? 우리 귀염둥이 미셴카가? 핑계도 좀 댈만한 걸 대야지! 걔가 얼마나 잘 노는 앤데. 파티만 왔다 하면 순식간에 가운데로 뛰어나가 스테이지를 장악하고...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도 추고. 다들 몰려들어서 예쁘다고 칭찬해 주면 좋아하고. 걔 체포된 후에 우리 한 번도 못 봤어요. 당신들이 걔한테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로는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시외로 전화도 못하게 하고 도청이나 해대고... 우리가 걔 만나게 해달라고 신청서류를 얼마나 많이 넣었는지 알아요? 당신들이 전부 묵살했잖아요! 당국의 승인이 없어 안 된다고! 어제 간신히 걔랑 통화했어요. 그것도 무슨 선을 따서 몰래 전화하는 거라고 하던데요! 도청마이크가 하도 많이 숨겨져 있어서 그거 다 떼어 내느라 힘들었다고. 걔 어제 나랑 전화하면서 막 울었어요. 자기도 파티 가고 싶은데 못 가게 한다고. 나랑 에벨리나랑 볼쇼이 친구들이랑 다 보고 싶은데 얼굴도 못 본다고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내 가슴이 다 찢어졌단 말이에요! ”

 

“ 어... 왕재수는 파티 싫다고 했는데. 지루해서 안 가는 거랬는데. 당신이랑 에벨리나랑 하나도 안 친하다고... 나 보고 잘 놀고 오라고 했는데. ”

 

“ 안 친하다니! 우리가 얼마나 친했는데. 나랑은 파트너였다고요! 우리 집에서도 얼마나 많이 재워줬는데. 누나 누나 하면서 얼마나 잘 따랐는데! 어제도 ‘누나, 나 파티 가고 싶어. 누나 보고 싶어’ 하면서 어찌나 울던지. 양심이 좀 있어 봐요! 더러운 KGB 같으니! 애를 잡아가고 고문한 것도 모자라서 이런 촌구석에 처박아 놓고 친구가 와도 못 만나게 하고 파티에도 못 가게 하다니! 도청이나 해대고! 심지어 무슨 감시요원까지 붙였다면서요. 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출퇴근도 같이 하고 아예 집에 같이 살면서 먹는 것 자는 것까지 다 감시한다고... 그 더러운 감시요원이란 인간 마주치기만 하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 아니, 그게... 그 감시요원이란 사람도 아마 명령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걸 거예요. 그리고 그게 감시가 아니고... 왕재수, 아니 야스민을 가정부처럼 잘 보살펴 주는... ”

 

“ 역시 가재는 게 편이라고 역성드는 것 좀 봐! 진짜 한 대 때릴 거야! ”

 

아브라모바가 빨갛게 칠한 긴 손톱을 세우며 달려들려고 해서 베르닌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다행히 볼쇼이에서 온 일행이 그녀를 진정시키며 다른 쪽으로 데려갔다. 베르닌은 구석으로 몸을 피한 후 한숨을 쉬었다.

 

 

*     *    *

 

 

베르닌이 작은 보따리를 들고 문을 열었을 때 왕재수는 소파에 누워 음악을 듣고 있었다. 베르닌으로서는 처음 듣는 시끄러운 음악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가사인 걸 보니 암시장에서 구한 레코드인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베르닌을 보자 왕재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 어, 너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이제 겨우 열한 시밖에 안됐는데. ”

 

“ 끝나서 온 거야. ”

 

“ 끝나긴, 원래 지금이 제일 재밌을 땐데. 모스크바 애들 원래 새벽까지 노는데. ”

 

“ 파티 재미없다더니. ”

 

“ 그러니까, 나 말고, 노는 애들 말이야. 난 재미없어. 지루해. 근데 너 정말 왜 벌써 온 거야? 나타샤 못 만났어? ”

 

“ 만났어. ”

 

“ 어, 근데 안 통했어? 그럴 리가... 내가 꾸며줘서 안 통한 적 없는데. 심지어 아르마니인데... 그 여자 혹시 여자 좋아하는 거 아냐? ”

 

“ 좋아했어. 나보고 멋있다고 했어. 아르마니 좋대. ”

 

“ 역시 그렇지? 근데 왜 벌써 왔어? 보통 그러면 커피 마시러 집에 가자고 할 텐데. 그리고 나면 침대로... ”

 

“ 그런 분위기긴 했는데 내가 별로 안 내켰어. ”

 

“ 아, 나타샤가 못 본 사이에 역변한 거야? 아니면 이미 결혼해서? 애 엄마 된 거야? ”

 

“ 그냥. 너무 옛날 일이라 그런지 다시 보니까 예전 같지 않더라고. 생각보다 별로 안 좋아했었나봐. ”

 

“ 그럼 딴 여자들이랑 잘 해보지. 같이 놀자던 애들 없었어? 이렇게 하고 갔으면 있어야 되는데. ”

 

“ 있었어. 많았어. ”

 

근데 왜 그냥 온 거야! 바보... 멍석 깔아주면 못 놀고. 국장한테 들켰어? ”

 

“ 국장이 못 알아보더라. ”

 

“ 에이. 그럼 새벽까지 남았어야지. 하여튼 너도 참 재미없다. 하긴 그렇게 야근을 많이 했으니 피곤했겠구나. 아, 너 나 태워다 주려고 들른 거구나! 잘됐다! 집까지 태워줘. ”

 

베르닌은 말없이 주섬주섬 보따리를 풀었다. 갱지로 대충 덮어 놓은 종이접시 몇 개와 과일즙이 든 유리병을 꺼냈다.

 

“ 그게 뭐야? ”

 

“ 너 저녁도 안 먹었잖아. 좀 먹어. ”

 

“ 어, 이거 연어야? 어디서 났어? ”

 

“ 테이블에 많이 남아서 싸온 거야. ”

 

“ 아휴, 촌스럽게 파티 음식을 싸오고 그래. 진짜 창피하게. ”

 

“ 내가 창피하지 네가 창피하냐? 그냥 먹어. ”

 

왕재수는 좋아하면서 레몬을 쭉쭉 짜더니 훈제연어를 입 안으로 마구 밀어 넣었다. 정신없이 먹는 걸 보니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 야, 천천히 먹어. 목메잖아. 과일즙 마셔가면서 먹어. 아무도 안 뺏아먹으니까. ”

 

“ 이거 닭꼬치야? ”

 

“ 그래. 넌 양고기 안 좋아하잖아. 닭고기로 골라왔어. ”

 

“ 맛있다. 근데 식었어. ”

 

“ 데워다 줘? ”

 

“ 아니. 그냥 먹을래. 식어도 맛있어. ”

 

“ 도대체 마지막으로 뭘 먹은 게 언제야! 너 점심도 안 먹었지? ”

 

“ 오늘 바빴어. ”

 

“ 바쁘긴 뭐가 바빠. 하루종일 방에 처박혀서 우느라고 안 먹었겠지.

 

“ 뭐? ”

 

“ 아니야. 아무 것도. ”

 

“ 우와, 이거 사과파이야? ”

 

“ 그래. 맛있더라. ”

 

“ 나 이거 다 먹어도 돼? 너 안 먹어? ”

 

난 많이 먹고 왔어. 너 다 먹어. 좋아하잖아, 사과파이. 한 판은 껌이잖아. ”

 

“ 누가! 그 큰 걸 내가 어떻게 다 먹어! ”

 

“ 내숭 떠는 건 바이올린 아저씨 앞에서나 하셔. 사과파이 한 판 다 해치우는 거 전에 다 봤거든! ”

 

“ 에이... ”

 

왕재수는 입을 삐죽거리다가 사과파이를 집어서 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세 조각을 먹어치운 후 갑자기 근심스러운 눈망울로 그를 쳐다보았다.

 

“ 너 말하면 안 돼. ”

 

“ 뭘? ”

 

“ 로만한테. 나 사과파이 한 판 먹을 수 있는 거. ”

 

“ 다 큰 사내자식이 기껏 사과파이 한 판 먹는 게 뭐가 어때서! ”

 

“ 그래도... 로만은 나 그런 거 몰라... ”

 

“ 야, 너 그 못돼먹은 깡패한테 왜 그렇게 쩔쩔 매는 거야! 너처럼 성깔도 더럽고 재수 없는 녀석이 그 아저씨한테는 왜 그렇게 구는데! 어리고 예쁜 애 손아귀에 넣었으면 됐지 그 자식은 자기 분수도 모르고 왜 그렇게 난리야! ”

 

“ 네가 몰라서 그래. 로만이 침대에서 엄청 끝내주거든. 그래서 그 아저씨하고는 깨지기 싫단 말이야. ”

 

“ 에휴, 말을 말자. 너랑은 모든 얘기가 침대로 끝나니... ”

 

“ 원래 그런 거야. 파티도 그렇고. 바보, 기껏 차려 입혀서 보내놨더니 여자들이랑 놀지도 못하고 침대로 가지도 못하고 한 시간 만에 돌아오기나 하고. 아깝다. 파티... ”

 

“ 너 솔직히 말해. 파티 가고 싶었지? ”

 

“ 아니. 내가 왜? 지루하다고 했잖아. ”

 

“ 아브라모바가 그러는데 너 파티 가면 장난 아니게 놀았다던데? 스테이지를 장악하고 막 테이블 위로도 올라가고... ”

 

“ 에이, 그건 젊었을 때지. ”

 

“ 놀고 있네, 지금은 그럼 늙었냐? 스물다섯 밖에 안 된 게. ”

 

“ 너 그것도 로만한테 얘기하면 안 돼. 그 사람 나 스물두 살인 줄 알아. ”

 

“ 뭔 소리야. 너 취임식 때 극장장이 너 나이 다 얘기했잖아! ”

 

“ 그런가... 그럼 다 들킨 거네. 아, 망했다. 하여튼. 너네 파티는 뻔할 뻔자 재미도 없었을 거야. 시골 파티니까 음악도 되게 별로였을 거고. 그러니까 하나도 가고 싶지 않았어. ”

 

“ 아브라모바한테 누나 누나 하면서 찰싹 붙어서 스테이지를 장악하면서 춤추고 싶지 않았다는 거지? ”

 

“ 당연하지! ”

 

“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가서 추고 싶지도 않았던 거지? ”

 

“ 어... ”

 

“ 하긴 지금은 못 추겠구나. 스물다섯 살이나 먹어서. 늙어서. 테이블 위에 올라가면 헛디뎌서 떨어지겠네. ”

 

왕재수는 테이블을 힐끗 보더니 입술을 삐죽거렸다. 금세 사슴 같은 눈망울이 되었다. 베르닌은 종이접시와 유리병, 무대 동선이 그려진 종이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노래가 흘러나오는 오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 물론 이런 근본 없는 노래에 맞춰서는 못 추겠지. 클래식 아니면 너 못 추잖아. ”

 

“ 뭐가! 나 절대음감인데! 못 추는 음악 하나도 없어! 내가, 내가 이걸로 안무도 했었는데! ”

 

“ 말도 안 돼. 그래도 테이블 위에선 못 출걸. ”

 

왕재수가 발칵 화를 내더니 테이블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레코드가 다 돌아갈 때까지 족히 30분 가까이 미친 듯이 춤을 췄다. 베르닌은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열심히 구경했다.

 

“ 와, 너 진짜 잘 추는구나. 헛디디지도 않네. ”

 

“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잘 노는데! 이런 나를 못 가게 하다니. ”

 

“ 어딜 못 가게 해? ”

 

“ 아니야! ”

 

베르닌은 웃었고 춤춰서 덥고 목이 마르다는 왕재수에게 과일즙을 한 잔 더 따라주었다. 그리고 왕재수가 남은 사과파이를 다 먹어치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럭저럭 괜찮은 하루였다.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왕재수가 과도하게 춤을 춘 후유증으로 곯아떨어져서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들쳐 업고 올라가야 했던 것만 빼면. 역시 끝까지 속을 썩이는 놈이었다. 어쨌든 표지판을 그려준 걸 생각해서 베르닌은 그날만큼은 왕재수를 용서해주기로 했다.

 

 

 

- FIN -

201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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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나름대로 신데렐라 패러디로 쓴 거긴 한데..

신데렐라 : 베르닌

계모 : 스페호프

새언니 : 발따예프 외 동료들

요정대모 : 왕재수

왕자 : 나타샤(!)

 

하여튼 이야기는 6편의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으로 이어진다. 그건 다음주 중에..

 

왕재수가 사과파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가끔 언급했던 코즐로프와의 이야기에 나온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65

 

그리고 사과파이 사진 두어 개는 아래 링크..

http://tveye.tistory.com/3416
http://tveye.tistory.com/3457

 

 

:
Posted by liontamer
2015. 1. 28. 20:28

모든 메뉴 40% 할인이래요 russia2015. 1. 28. 20:28

 

 

12시부터 17시까지..

 

상트 페테르부르크, 작년 4월. 해군성 공원 쪽으로 걸어가다가 어느 레스토랑 앞에서 발견 :)

 

근데 40% 할인이면 얼마인가요~~ 옆에 원래 메뉴판도 같이 세워놔야 알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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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liontamer

 

피곤하기 그지없는 화요일 밤. 아직 주말까지는 한참 남았다.

그 피곤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 서무의 슬픔 에피소드 4편 올려본다.

4편에서는 드디어 이제껏 대화에서만 언급되었던 바이올린 아저씨 로만 코즐로프가 전면에 등장한다 :)

 

 

**  지금까지의 간단한 줄거리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는 나름대로 자기 입장에서는 베르닌을 도와주려고 애쓰는데... 별 도움은 안 되는 것 같고 베르닌의 일상은 고되기만 하다.

그리고 유명 무용수이자 톱스타였다는 왕재수는 극장 감독이라고는 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베르닌으로서는 알 수조차 없다. 과연 그는 훈장까지 받은 프로페셔널이 맞는 것인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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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4

 

 

서무의 슬픔

-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그 날 베르닌은 일진이 좋지 않았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수도관이 얼어서 아침부터 물이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왕재수의 집으로 올라가 문을 두들겼지만 답이 없었다. 감시요원답게 그는 열쇠를 꺼내 문을 따고 들어갔다. 어차피 왕재수도 슬슬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으니까.

 

“ 야, 나 욕실 좀 쓸게. 우리 집 수도관 얼었어. ”

 

침실 문은 꼭 닫혀 있었고 물론 대답도 없었다. 자나보다 싶어서 베르닌은 급하게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양치질을 했다. 굉장히 바쁜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나오다가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립극장 바이올리니스트인 로만 코즐로프가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뭘 쳐다봐, 스파이 자식아. 빨리 꺼져! ”

 

“ 어... 당신 왜 여기... 그러니까, 원래 여기로는 안 오는 걸로... ”

 

“ 난 안 온 거야. 스페호프한테 꼬아 바치면 죽을 줄 알아. ”

 

“ 난 그런 짓 안 해요! ”

 

“ 꺼져! ”

 

“ 내가 왜요! 여긴 우리 집... 이 아니고 왕재수 집인데 나는 아침저녁으로 여기 와서 집안일을... 이 아니고, 어쨌든 걜 아침마다 출근시켜주는... ”

 

“ 뭐, 왕재수? 이 스파이 자식이 지금 누구 보고 그렇게 부르는 거야, 설마 우리 귀염둥이를 보고 왕재수라고! ”

 

“ 당신 눈에야 귀엽겠지만 내 눈엔 왕재수라고요! ”

 

그러자 코즐로프가 벌떡 일어나 주먹을 휘두르며 그에게 다가왔다. 깡말라서 별 거 아닌 줄 알았던 바이올리니스트는 일어서자 어마어마하게 컸기 때문에 베르닌은 움찔했다. 게다가 주먹도 엄청나게 울퉁불퉁해 보였다. 베르닌이 뒤로 물러서면서 KGB 요원을 두들겨 패면 폭행죄로 입건될 수 있다고 웅얼대고 있는데 왕재수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 아휴,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어, 너 왔구나. 벌써 나갈 시간이야? 잠깐만 기다려. ”

 

“ 뭘 기다려? 저 새끼 내려가라고 해! 넌 내 차로 데려다주면 되잖아. ”

 

코즐로프가 화를 버럭 냈다. 베르닌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지만 왕재수는 그를 해방시켜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 당신 차 타고 가면 우리 사이 소문나잖아. 그냥 쟤랑 같이 갈래. ”

 

“ 소문은 무슨 소문! 어차피 같은 극장에서 일하는데! ”

 

“ 안 돼 안 돼, 당신 잡혀가면 큰일나. ”

 

그러면서 왕재수가 코즐로프의 허리를 껴안고 온갖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토할 것 같아서 급하게 말했다.

 

“ 야, 나 10분 후에 출발할 거야! 갈 거면 그때까지 나와! ”

 

그리고는 코즐로프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 하고 그 집을 뛰쳐나갔다.

 

극장에 내려주고 차를 돌려 나가려고 하자 왕재수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 아침 안 먹어? 우리 카페 오늘 아침에 삶은 소시지랑 메밀죽 나온대. 너 그거 좋아하잖아. ”

 

“ 나 빨리 가야 돼. 오늘 엄청 바빠. ”

 

“ 으응, 불쌍하구나. 알았어, 밤에 봐. ”

 

“ 오후에 올 거야. ”

 

“ 왜? ”

 

“ 너네 오늘 무슨 행사하잖아! 우리 국장이 연설도 하고. 나 차출돼서 행사 보조해야 돼. ”

 

“ 아, 그거... 네가 할 게 뭐가 있어? 행사는 우리 극장에서 준비하는 거야, 우리 애들이 다 할 건데. 너네 국장은 그냥 와서 2분 동안 스피치만 하고 내려가는 건데. ”

 

“ 흥, 2분이 아닐 걸. 국장은 마이크 잡았다 하면 안 놓는다고. ”

 

“ 무슨 소리야, 큐시트도 다 써놨고 너네 국장은 구색 맞추기로 넣어놓은 건데. 시간 초과하면 안 돼, 인사말 하는 사람들이 일곱 명이라고!! 그거 끝나고 곧장 공연 시작하는데 10팀이 나와야 돼. 딱 8시에 끝나면 리셉션인데 거기서 모스크바 의원들은 건배 제의만 하고 다시 비행기를 타야 해서 시간 늘어지면 안 된다고! ”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왕재수를 쳐다보았다.

 

“ 너도 일을 하긴 하는구나. 맨날 노는 줄 알았는데, 행사 일정을 그렇게 꿰고 있다니. 심지어 진짜 진지하네. ”

 

“ 나 일해! 엄청 열심히 한다고! 내가 감독이잖아! 너는 이런 행사를 진행해 본 적이 없어서 몰라. 1분만 늘어져도 다 어그러진단 말이야. 너네 국장한테 헛소리 늘어놓지 말라고 전해. 2분 넘어가면 절대 안 돼. ”

 

“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 난 보조라고! ”

 

“ 알았어, 그만 가. ”

 

왕재수는 손을 내저으며 급하게 자기 사무실로 올라가 버렸다. 카페에서 아침 먹자고 하더니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   *   *

 

 

 사무실에 들어오니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선배 직원들의 근태기록부와 초과근무 내역서를 수합하여 결재문서를 만들고, 도장이 비뚤어지게 찍혔다고 국장에게 반려당한 세계 전도 구입 전표를 다시 요청하는 문서를 만들고, 마침내 저녁 극장 행사 프로그램을 펼치려는데 국장실에서 한바탕 깨지고 나와 시뻘겋게 달아오른 선배 직원이 그에게 이제 네 차례니 빨리 들어가는 게 좋을 거라고 경고했다.

 

국장실로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국장은 매우 저기압이었다. 오늘따라 멀끔한 양복을 차려입고 머리도 잘 빗어 넘기고 있었지만 얼굴은 죽상이었다.

 

“ 자네 서무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나? ”

 

“ 예? 서무란... 저어... 자료를 취합하고 우리 지부의 업무추진비를 관리하고 직원들의 근태를 관리하고... ”

 

“ 서무란 행정의 기본이야! 올바른 서무로 육성되지 않는 이상 제대로 된 행정인은 결코 될 수 없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겠나? ”

 

“ 글쎄요... 제가 또 무슨 실수라도... 문서의 구두점을 틀렸을지도... 아니면 첫 줄을 7칸 떼어야 했는데 8칸 떼었을지도. 아니면 업무추진비 영수증을 풀로 붙여야 하는데 클립을 써서... ”

 

베르닌이 자아비판을 하기 시작하자 국장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뭐야? 8칸? 클립! 용서할 수 없는 일이군. 됐네, 그건 내일 다시 얘기하지. 이건 또 다른 문제일세. 어제 머리가 아파 바람도 쐴 겸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두 가지가 눈에 띄었네. 첫째. 당직실로 내려가는 계단 맞은편에 걸려 있는 시계가 멈춰 있었네. 당장 건전지를 교체하게. 서무는 언제나 사무환경을 신경 써야 해. 다른 곳도 매일 둘러봐야 하네, 분명 어딘가 미흡한 곳이 있을 거야. 게다가 두 번째. 건물 뒤의 텃밭 말인데, 청소부들이 남는 시간에 거기 배추를 재배하고 있는 모양이야. ”

 

“ 그 텃밭은 당국의 허가를 받은 것이고 저희와는 관할이 달라서요. 청소부들에게 할당된 토지라서 보건의회 소속입니다. ”

 

“ 누가 뭐라고 했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야. 어제 보니 배추가 누렇게 시들어가고 있었네. 청소부들에게 무슨 활용 계획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방치해서 버릴 거라면 사료 공장에 기증을 하든지 우리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든지 방법을 강구해야 하네. 그건 물론 서무의 역할이지. 그리고 그 땅을 그렇게 활용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도 재검토해보게! 보건의회에 검토보고서를 제출하는 거야! 이 두 가지는 사소할 수도 있지만 첫 번째는 내부 고객만족, 두 번째는 인력 운영과 공유지 및 공유지 재배 물건의 처분 문제와도 연관될 수 있다는 말이네. ”

 

“ 국장님, 텃밭은 저희 소관이 아니라니까요! 공유지라 해도 저희 쪽 공유지가 아니고 보안위원회는 그 땅과 재배 작물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시계는... 아무도 그 계단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당직을 하지 않으니까요. 어차피 제가 매일 야근을 하니까 당직 명령은 허울뿐이고 다들 그냥 5시에 퇴근한다고요. 행정 낭비예요. 차라리 그 시계를 없애버리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면 쓸데없는 건전지 비용도 절약하고... ”

 

“ 행정의 알파벳도 모르는 주제에 행정 낭비라는 단어를 남용하다니! 썩 나가지 못해! 오늘 중 보안위원회와 보건의회의 공유지 텃밭 문제 재검토 보고서를 올리고 시계 건전지를 교체하여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내게 보고하게! ”

 

“ 저는 오늘 4시에 극장에 가야 하는데요... 그 문화 행사 보조... ”

 

“ 오전에 끝내면 되지 않나! 그리고 2시에 다시 내 방으로 오게. 행사 때문에 할 말이 있으니까! ”

 

 

베르닌은 지하 계단으로 내려갔다. 시계를 떼어냈다. 회계팀으로 달려가 물품 구입 요청서를 써서 제출하고 도장을 받은 후 건전지를 사러 잡화점에 갔다. 30분 동안 줄을 서서 건전지 두 개를 요청하고 지급 요청 전표를 끊고 돈을 내고 영수증 전표를 받았다. 돌아와서 회계팀에 전표를 제출한 후 시계에 건전지를 끼우고 시간을 맞춰서 도로 지하 계단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는 텃밭에 가서 배추의 상태를 확인했다. 막 배추 하나를 뽑아보려는데 청소부 대표가 다가와서 자기들이 수프 끓여먹으려고 익히고 있는 배추를 왜 손대느냐고 버럭 화를 냈다. 엄연히 보건의회 소속 텃밭인데 왜 KGB에서 눈독을 들이느냐, 배추가 먹고 싶으면 직접 재배를 하든지 식료품 가게에 가서 줄을 서서 사 먹어라 하고 소리를 질렀다. 베르닌은 공유지의 재검토에 대해 말할까 하다가 피곤해서 그냥 예예 하고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    *    *

  

 

베르닌은 4시 반에 극장에 도착했다. 로비부터 시작해 계단, 카페, 무대와 홀, 백스테이지 모두 사람들이 좍 깔려 있었고 뭔가를 뚝딱뚝딱 만드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무용수들이 리허설을 진행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연주자들이 깽깽거리는 소리를 내며 악기를 짓이기고 있었다. 마이크를 시험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조명을 체크하는지 무대 위로 붉고 파란 빛이 왔다갔다했다. 여기저기서 소음이 일었고 사람들을 호명하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정신을 가다듬자 수트를 쫙 빼입은 왕재수가 무대와 오케스트라 핏을 바람처럼 오가며 사람들에게 뭐라뭐라 지시를 내리는 것이 보였다. 꼭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다시금 저놈이 일을 하긴 하는구나 싶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베르닌을 발견한 왕재수가 환하게 웃었다.

 

“ 너 왔구나! 잘됐다, 이리 와봐! ”

 

“ 나 왜? ”

 

“ 우리 도와주러 온 거 아니야? 나 좀 도와줘. ”

 

“ 나 너네 도와주러 온 거 아니야. 국장이 보낸 거야. 행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스크린하고 보고서 써야 돼. 나는 그냥 여기 구석자리에 앉아서 계속 모니터링하다 갈 거야. ”

 

“ 그럼 할 일 없는 거잖아. 하나만 도와줘. ”

 

“ 국장이 5시 45분에 온단 말이야. 수행해야 돼. ”

 

“ 지금 하나만 해주면 돼. ”

 

“ 뭔데? ”

 

“ 방송에서 취재 온다고 들이닥쳤는데 나 지금 인터뷰해줄 시간이 없어. 네가 대신 좀 해줘. ”

 

“ 내가 어떻게 인터뷰를 해! 나는 여기 일은 하나도 모르는데! ”

 

“ 이거, 프로그램에 다 있어. 그냥 이거 보면서 읽어주면 돼. ”

 

“ 너네 쪽 사람 시키면 되잖아! ”

 

“ 우리 애들은 다 바빠. 그냥 나인 척 하면서 인터뷰 해줘. ”

 

“ 그걸 누가 믿냐! 네 얼굴은 온 국민이 다 아는데!!! “

 

“ 괜찮아, 내가 카메라맨한테 얘기해놨어. 뒷모습만 잡아달라고. 너도 머리 까맣잖아. 프로그램에 동그라미쳐 준 것만 순서대로 읽어. 어차피 내가 쓴 거니까 그냥 대독만 하는 거야. ”

 

베르닌은 울며 겨자 먹기로 프로그램을 받아들었다. 왕재수가 가리킨 대로 감독실에 가보니 카메라맨과 기자들이 죽치고 있었다. 눈에 익은 국영채널 지역뉴스 기자도 보였다. 쭈뼛거리며 들어가자 이미 얘기를 들었는지 기자가 그에게 소리쳤다.

 

“ 질문하면 그냥 하나씩 읽어요! 얼굴 안 잡을 테니까. ”

 

“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

 

생방 아니에요. 자막 깔고 화면은 무대 배경으로 돌릴 거니까 상관없어요. 어차피 국회의원들 때문에 사람 얼굴은 정면으로 잡지도 않을 거예요. ”

 

“ 난 왕재수, 아니 야스민과 목소리도 다른데... ”

 

“ 오케스트라 음악에 많이 묻힐 거니까 괜찮아요! ”

 

그래서 베르닌은 프로그램을 펼쳐놓고 기자의 질문에 더듬거리며 대답을 했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극장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프티파와 이바노프의 안무와 20세기 모던 댄스의 혁신에 대해, 프로파간다 발레의 특성과 안무에 적용되어야 하는 해부학 이론에 대해 줄줄이 늘어놓았다. 이걸 다 왕재수가 썼다면 천재임이 분명했다.

 

어쨌든 대충 인터뷰를 마친 후 그는 식은땀으로 흥건해진 이마를 닦으며 복도로 나왔다. 그때 낯익은 향수 냄새가 확 풍겨왔다. 돌아보니 렐랴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 안녕하세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여기는 웬일로... ”

 

“ 왜 당신이 인터뷰를 하는 거예요! 난 미샤 인터뷰하러 온 건데! ”

 

“ 왕재수, 아니 야스민이 대신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너무 바빠서요. ”

 

“ 쿠키는요? ”

 

“ 어... 아, 그 쿠키. 전해줬어요. 잘 먹던데요. ”

 

“ 편지 얘긴 안 해요? ”

 

“ 어... 글쎄요, 그런 얘기까진. ”

 

“ 당신 쿠키 먹었어요, 안 먹었어요? ”

 

“ 저... 조금... 근데 걔가 먹으라고 준 거예요. ”

 

“ 알았어요. 근데 나는 미샤와 꼭 인터뷰를 해야겠어요. 지금 그 사람 어디 있어요? 데려다 주세요. ”

 

걔 지금 정신없어요. 아마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방송에도 절 내보냈죠. ”

 

“ 방송이랑 다르잖아요. 내 문예지는 가브릴로프에서 제일 부수를 많이 찍는다고요! 게다가 수준도 높고요.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난 미샤랑도 잘 알고. ”

 

“ 하지만... 왕재수가 엄청 예민해요. 일곱 명이 인사말을 해야 하고 10개 팀이 올라가야 한대요. 1분이라도 늘어지면 큰일난다고... ”

 

“ 5분만요. 잡지 마감에 맞추려면 꼭 지금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요. 다냐, 도와줘요. 제발요. 난 편집장이에요. 우리 잡지가 중요해서 그래요. 내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고요. ”

 

렐랴가 인형처럼 예쁜 회색 눈을 깜박이며 간절하게 올려다보자 베르닌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 어, 그래요. 따라오세요. ”

 

렐랴를 아래 세워놓고 베르닌이 무대 위로 올라가서 사정을 얘기하자 왕재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절했다.

 

“ 안돼. 지금 최종 리허설 중이야. ”

 

“ 5분만 내주면 되잖아. ”

 

“ 무용수들 움직임이 이상하고 조명도 틀어졌어. 하잘것없는 잡지 인터뷰할 시간 없어. ”

 

“ 하잘것없다니! 렐랴의 잡지란 말이야. ”

 

“ 그러니까! 별 내용도 없고 잘난 척만 하는 계집애들 잡지란 말이야. ”

 

“ 딱이네, 너랑 똑같네. 가서 좀 해줘라. 렐랴가 기다리고 있다고. 잼도 주고 쿠키도 줬잖아. 편지는 읽었냐? 물어보던데. ”

 

“ 무슨 편지? 아, 뭔가 분홍색 봉투에 있던 그거? 냄비 받침으로 쓰다가 수프 엎질러서 버렸어. ”

 

“ 뭐야? 넌 진짜 싸가지 없는 자식이야!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

 

“ 나한테 여자의 마음이 무슨 소용이야! 정말 지겨워. 아무 생각 없는 여자들이 맨날 와서 매달리고 편지랑 선물 밀어 넣고 잘생겼다고 꺅꺅거리면서 안아달라고 찡찡대고... 릴리아나 페트로브나도 마찬가지... ”

 

“ 이 재수 없는 개자식, 지금 렐랴를 모욕한 거야! ”

 

“ 내가 왜 개자식이야?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좀 내려가, 너 때문에 리허설이 중단되고 있잖아. ”

 

베르닌은 너무 화가 나서 왕재수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한 대 패려고 하는데 렐랴가 깜짝 놀라서 뛰어올라와 그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 어머나, 다냐! 이게 무슨 짓이에요! 왜 미샤랑 싸워요? 그만둬요! ”

 

“ 놔두세요, 이 자식은 좀 맞아야 돼요!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왕재수... ”

 

“ 무대 위에서 그러면 어떡해요... 리허설도 다 중단됐잖아요! 아무리 예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도 그렇지... ”

 

“ 아니, 전 그게 아니고... ”

 

“ 미안해요, 미샤. 제가 인터뷰를 너무 하고 싶어서 다냐에게 부탁했는데 이렇게 바쁜 줄 몰랐네요. 끝나고 꼭 부탁해요. ”

 

베르닌은 왕재수의 멱살을 놔주었다. 그런데 왕재수는 언제 틱틱댔느냐는 듯 눈웃음을 치면서 부드럽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 알겠어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행사 마치고 리셉션에서 얘기해요. 지금은 바빠서 이만. ”

 

렐랴는 방긋 웃으며 왕재수의 뺨에 키스를 하고는 베르닌의 팔을 낚아채 아래로 내려왔다.

 

“ 아휴, 다냐!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요! 미샤가 지금 얼마나 예민하겠어요. 높은 사람들도 많이 오고 큰 행사인데. 심지어 멱살까지 잡고! 안 그래도 당신 KGB라고 다들 곱지 않게 보는데! ”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당신 지금 왕재수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서 그래요! 그 자식 진짜 싸가지 없고 나쁜 놈이라고요! ”

 

“ 어머, 다냐. 설마 질투하는 거 아니죠? 남자들은 정말 왜 그런지 몰라, 좀 멋있는 남자가 있으면 꼭 헐뜯고... ”

 

“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다시는 제게 왕재수에 대한 걸 부탁하지 마세요! 얽히기 싫은 놈이에요! ”

 

“ 싫어요, 그래도 당신이 제일 친하잖아요. ”

 

“ 안 친해요. 그 자식이랑 제일 친한 건... 로만 코즐로프예요! 바이올리니스트! 맨날 붙어 다녀요, 앞으로는 그 사람에게... ”

 

“ 싫어요, 로만 오시포비치는. 인상도 음침하고 말투도 까칠해요. 당신이 제일 착하고 상냥해요. 난 당신이 더 좋아요. ”

 

베르닌은 뭔가 휘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왕재수와 대화할 때와 비슷한 익숙한 기분이었다. 문제는 거기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도 없고 어쩐지 그래그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는 것이다. 예쁜 애들은 다 그런가 싶었다.

 

렐랴는 자신의 문예지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놓은 후 베르닌에게 다시 뭔가를 쥐어주었다. 이번엔 예쁜 포장지로 싸여 있는 작은 유리병이었다. 또 잼인가 싶었지만 별장에서 직접 채취해 가공한 꿀이라고 했다. 잼도 안 먹는데 꿀이라고 먹겠느냐고 하려다가 왕재수가 안 먹으면 자기가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냥 받았다. 병만 받아 호주머니에 쑤셔 넣자 렐랴가 혀를 차며 분홍색 봉투도 밀어 넣었다.

 

“ 편지요... ”

 

“ 아, 편지. 네... 그런데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

 

“ 왜요? ”

 

“ 저... 왕재수, 아니, 야스민 말인데요... ”

 

“ 또 헐뜯으려는 건가요? ”

 

“ 아뇨, 그게 아니고... 저, 걔는 여자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 ”

 

“ 알아요, 미샤는 보통 사람과 다르잖아요. 천재 예술가예요! 언제나 자신의 내면과 예술적 성취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느라 힘들어 해요. 여기 오기 전까지 고초도 많이 겪었잖아요. 그러니까 이해해요, 여자에게 관심 못 보이는 거...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옆에서 잘 돌봐주고 아껴줘야 해요. 그러면 언젠가는... ”

 

베르닌은 왕재수의 이른바 ‘아저씨’들과 성질 더러운 바이올리니스트가 떠올랐지만 차마 순진하고 귀여운 렐랴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말았다.

 

 

렐랴가 유관단체와 언론사 쪽 좌석으로 이동한 후 베르닌은 할 일이 없어 멀뚱멀뚱 리허설을 지켜보고 있었다. 왕재수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조명 기사에게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무용수들 사이로 달려가더니 맨 앞에 선 남자의 다리를 붙잡고 좍 찢어댔다. 무용수가 비명을 질러댔다.

 

“ 으악, 감독님! 도저히 안 되겠어요! 이건 사내들은 신체조건 상 안 되는 동작... 으악! ”

 

“ 뭐가 안돼! 그냥 찢어! 어깨를 낮추고 다리를 이렇게 뒤로 찢으면 되는데 뭐가 어려워! 이렇게 하면 되잖아, 나처럼! ”

 

“ 으악, 당신은 천재니까 되는 거고요! ”

 

“ 내가 천재인 건 나도 알아! 근데 이건 바보라도 할 수 있는 거라고! ”

 

“ 아, 아악! 사람 살려! ”

 

“ 이게 무용수야 나무토막이야! 됐어, 다 찢었네. 돌아! ”

 

“ 으악, 찢고 있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어떻게 돌아요! ”

 

“ 원래 도는 동작이잖아! 찢는 건 거들 뿐! 돌아야지! ”

 

“ 아악, 십년 넘게 췄어도 이런 동작은 처음... ”

 

당연하지, 내가 만든 거니까. 내가 스무 살 때 안무해서 열화 같은 성원과 찬사를 받고 해외에도 가지고 나가고 훈장도 받은 훌륭한 작품이라고. ”

 

“ 으윽, 이건 당신만 할 수 있는 동작... ”

 

“ 시끄러워! 빨랑 돌아! ”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기에 베르닌은 고개를 돌렸다. 남자 무용수는 처절한 비명을 질러댄 끝에 마침내 왕재수가 원하는 대로 동작을 구사한 것 같았다. 참으로 놀라웠다. 왕재수는 정말 천재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자기와 있으면 바보 같은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자기와 있어도 싸가지는 없지만 일할 때는 싸가지 없는 걸 넘어서서 무섭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앞으로는 심기를 건드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한바탕 활화산 같은 폭발이 지나간 후 왕재수가 무대 전체를 다시 한 번 점검하는 동안 베르닌은 좁지만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고 한숨을 쉬었다. 국장이 도착하기까지는 15분 정도 남아 있었다. 잠시라도 숨을 돌리며 공유지의 배추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뒤통수에 따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모르는 척 하려고 했는데 억센 손이 뒷덜미를 홱 낚아챘다.

 

“ 야, 나와. ”

 

“ 왜 그러시는 거죠? 전 행사 모니터링 중입니다. 공무 중이라고요. ”

 

“ 공무 좋아하네, 우리 귀염둥이 감시질이나 하고 있는 주제에. 당장 안 나와? 그럼 여기서 하지. ”

 

위협을 느낀 베르닌이 미처 몸을 돌리기도 전에 코즐로프가 주먹을 날렸다. 의자들 사이에 서 있었던 코즐로프가 다리를 약간 헛디디지만 않았어도 얼굴을 정통으로 맞아 코뼈가 박살날 뻔 했다. 쿠당탕 소리를 내며 베르닌이 옆으로 넘어졌다. 근처에 있던 스태프들은 깜짝 놀랐지만 싸움을 건 쪽이 극장에서도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코즐로프인데다 당하는 쪽이 얄미운 KGB 요원이란 사실을 깨닫자 다들 나 몰라라 했다. 베르닌이 비명을 질렀다.

 

“ 이게 무슨 짓이에요! 대체 왜! ”

 

“ 입 다물어, 개자식아! ”

 

코즐로프는 무대 위에 있던 왕재수가 그쪽을 쳐다보는 것을 눈치 채고 급하게 베르닌의 멱살을 휘어잡은 채 끌고 나갔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다시 바닥에 그를 패대기쳤다. 발로 마구 걷어차려는 것을 베르닌이 KGB 입사 당시 3일간 받았던 기초 훈련을 떠올리며 간신히 옆으로 굴러 피하자 코즐로프는 더욱 화를 냈다.

 

“ 이 자식이 감히 피해? 가만 안 두겠어, 작살내 주겠어! ”

 

“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요! 고발할 겁니다! 이건 폭행에 공무 방해죄... ”

 

“ 네놈이 우리 귀염둥이 멱살을 잡고 두들겨 패려고 했잖아! ”

 

“ 안 팼어요! 그냥 멱살만 잡았다가 금방 놔줬다고요! ”

 

“ 그리고 온갖 험한 말을... ”

 

“ 뭐가요! 싸가지 없는 놈한테 싸가지 없다고 한 게 뭐가 잘못이라고! ”

“ 뭣이,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착해빠진 우리 귀염둥이를 보고 싸가지 없다고? 인형처럼 조그만 우리 아기를 어디 때릴 구석이 있다고 주먹을 휘두르지를 않나... ”

 

“ 대체 왜 다들 이 모양인지! 렐랴도 그렇고 당신도! 그 왕재수한테 넋이 나간 건 그렇다 쳐요! 그렇다고 왜 날 이렇게 들들 볶느냐고요! ”

 

“ 네놈이 우리 아기를 괴롭혔잖아! 매일 감시하고! ”

 

“ 뭘 감시해요! 국장이 가외업무를 준 거라고요, 초과근무수당도 안 나와요! 사무실에서 뼈 빠지게 혹사당하고 아침저녁으로 저 자식 출퇴근시키고 집에 가면 해먹이고! 감시가 아니라 가정부라고요! 아기는 무슨 아기! 그 자식 나이가 몇 살인데! 뭐가 순진하고 착해빠져요, 응응을 하는 아저씨들이 몇 명인데! 그리고 조그맣긴 뭐가! ”

 

“ 조그맣지! 인형처럼 조그만 것이 아장아장... ”

 

“ 놀고 있네. 저렇게 큰 인형이 어디 있답니까! 척 봐도 175는 훨씬 넘겠구먼, 몸무게도 아무리 안 나가도 60킬로는 넘을 텐데! 아장아장 같은 소리. 다리가 저렇게 길쭉한데 휘적휘적 걸으면 몰라도 뭐가 아장아장! ”

 

“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우리 귀염둥이를 비방해! ”

 

코즐로프가 다시 주먹질을 했다. 억울함을 견디지 못한 베르닌이 맞받아 주먹을 휘두르자 바이올리니스트는 더욱 화를 냈다. 기껏해야 악기나 연주하는 인간이 왜 이렇게 포악하고 힘이 센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 베르닌이 고함을 지르며 도움을 요청하려는데 갑자기 왕재수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휴, 대체 뭐하는 짓이야! 당장 안 일어나! ”

 

신기하게도 미친 듯이 주먹질을 하던 코즐로프는 왕재수의 한 마디에 금세 벌떡 일어났다. 베르닌은 코피를 닦으면서 왕재수에게 하소연을 했다.

 

“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저 사람이 괜히 와서 시비 걸고 멱살 잡고 두들겨 패고... 너는 스물다섯도 넘었는데 아기라고 하고 너 키가 이만한데 조그만 인형이라고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고... 그리고 너 솔직히 아무리 날씬해도 60킬로 넘잖아, 키가 있는데... "

 

“ 조용히 해! 한번만 더 로만 앞에서 몸무게 얘기 했단 봐! ”

 

왕재수가 베르닌의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그리고는 코즐로프를 확 째려보면서 꾸짖었다.

 

“ 15분 후 시작인데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수석이란 인간이 복도에서 노닥거려? 오케스트라 애들 지금 다 퍼져 있단 말이야! 조율도 해야 하고 군기도 잡아야 하는데 당신이 이러고 있으면 어쩌라고! 당장 안 들어가? ”

 

“ 어, 그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걱정 마, 우리 비둘기야. 내가 오케스트라 꽉 잡을 테니까 그쪽은 걱정하지 마. 가서 숨이나 좀 돌리렴. ”

 

“ 오케스트라 아까 리허설할 때 보니까 클라리넷 소리 이상했어. 한 번 더 체크해. ”

 

“ 아유, 우리 아기는 역시 절대음감이야. 클라리넷 이상한 건 또 어떻게 알아챘누. 아까 내가 체크했어. ”

 

“ 알았어. 아참, 그리고 왜 애꿎은 애를 패는 거야! ”

 

“ 아까 이 자식이 너 멱살 잡았잖아. ”

 

“ 아니야, 내 칼라에 벌레가 붙어서 털어준 거야. 바보, 앞으로는 절대 얘 패지 마. 내 말도 얼마나 잘 듣는데. 밥도 잘 해주고. ”

 

“ 너 설마 이 자식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 ”

 

“ 왝, 난 키 큰 아저씨가 좋아. 쟤는 진짜 취향 아니야. 눈도 단추 같고. ”

 

“ 그렇지? 우리 아기는 역시 내가 제일 멋있는 거지? ”

 

“ 응응. 빨리 들어가! ”

 

코즐로프가 오케스트라 대기실로 사라진 후 왕재수가 베르닌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코피를 닦고 나서 베르닌이 물었다.

 

“ 왜 거짓말했어? ”

 

“ 뭐? ”

 

“ 벌레 털어준 거 아니었잖아. ”

 

“ 안 그랬으면 로만이 너 작살냈을 걸. ”

 

“ 언제 나 걱정했다고. ”

 

“ 왜, 난 맨날 너 걱정해. 국장 때문에 맨날 야근한다고 징징대고, 귀신 나왔다고 울고 권총 규격 때문에 징징대잖아. 너는 맨날 챙겨줘야 하잖아. 갓난아기처럼. ”

 

“ 뭐라고? 너 설마 정말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

 

“ 응. ”

 

“ .... 그 말은 기분 나빠. ”

 

“ 뭐가? ”

 

“ 단추... ”

 

“ 너는 눈이 단추 같잖아. ”

 

“ 단추 눈은 봉제 인형한테나 달려 있는 거야. ”

 

“ 봉제 인형 귀엽잖아. ”

 

“ 아니, 그러니까 그게... 뭔가 이상하잖아! ”

 

“ 너랑 노닥거릴 시간 없어. 가서 시작 준비해야 돼. ”

 

왕재수가 바람같이 사라졌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도로 홀에 들어가 앉아 있으려고 했지만 그때 스페호프가 도착해서 급하게 수행하러 나갔다.

 

 

*    *    *

 

 

행사는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모스크바에서 국회의원들도 왔다. 인사말에 이어 10개 팀의 갈라 공연도 원활하게 흘러갔다. 리셉션 파티도 잘 끝났다. 한마디로, 성공한 행사였다. 모두가 행복했다. 단 한 사람, 스페호프 국장을 제외하고는.

 

인사말이 문제였다. 왕재수의 말대로 총 7명이 인사말을 하게 되어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온 정치국 의원이 제일 첫 번째, 그 다음은 서기국 의원, 그 다음은 내무부 국장, 그 다음은 모스크바 문화예술국장, 그 다음은 가브릴로프 시 의회 의장, 여섯 번째가 가브릴로프 KGB 국장인 스페호프, 마지막이 가브릴로프 출판문화국장이었다. 모두에게는 각 2분이 주어졌다. 총 14분이었다.

 

문제는 이런 거였다. 정치국 의원은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의 인사말은 5분 동안 이어졌다. 그 중 왕재수에 대한 칭찬이 3분을 차지했다. 정치국 의원보다는 덜 중요하지만 그래도 아주 중요한 서기국 의원도 비슷하게 인사말을 늘어놓았다. 3분 동안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무부 국장, 문화예술국장... 마침내 시 의회 의장이 인사말을 마쳤을 때 시간은 1분밖에 남지 않았다.

 

스페호프 국장은 앞에 나서서 사회를 보고 잘난 척하고 인사말 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의 가브릴로프 시의 역사부터 시작했다. 온갖 고어와 프랑스어 문장들을 인용했다. 그리고 KGB가 시 문화예술에 공헌한 사례를 들기 시작했을 때 마이크가 꺼졌다.

 

적막이 감돌았다.

 

 

국장은 소리가 나오지 않는 마이크를 툭툭 때려보더니 당황하여 백스테이지 쪽 스태프에게 손짓을 해댔다. 그때 국장을 비추고 있던 조명도 꺼졌다.

 

 

잠시 후 다시 불이 들어왔다. 국장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다시 VIP 좌석에 앉아 있었다. 가브릴로프 출판문화국장이 올라가서 마지막 인사말을 했다. ‘신사숙녀 여러분, 이 행사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출판문화국에서는 후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라는 두 문장이 끝나자 다시 마이크가 꺼졌다.

 

7명의 인사말은 총 14분 동안 진행되었다.

 

스페호프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공연이 시작되었을 때 씩씩거리더니 뭐라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욕설을 채 두 마디도 내뱉기 전에 모스크바 정치국 의원의 경호원 두 명이 다가와서 그를 정중한 척, 하지만 눈에 띌 정도로 세게 양쪽 팔을 붙들고 복도로 데리고 나갔다.

 

베르닌은 급하게 따라나갔다. 국장은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욕설을 퍼부으며 길길이 날뛰었다.

 

“ 감히 나에게 이런 치욕을 주다니! 용서할 수 없어! 극장 의전 담당자 누구야! 없애버리고 말겠다!

 

그때 왕재수가 나왔다.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 좀 조용히 해, 공연에 방해돼. ”

 

“ 이 따위 짓을 하다니! 이런 거지같은 행사가 어디 있어! 담당자 불러와! ”

 

“ 당신 마이크 내가 껐어. ”

 

“ 뭣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감히 내 마이크를! ”

 

“ 인사말 총 시간이 14분인데 앞에서 13분을 썼어. 당신한테 40초 주고 출판문화국장한테 20초 줬어. 이 정도면 배려해 준 거야. ”

 

“ 그럼 앞에서부터 시간 잘랐어야지! ”

 

“ 모스크바는 가브릴로프보다 의전 상 우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다 인정해 줘야 했고. 여기는 시 의회 의장, 당신, 출판문화국장인데 의장은 눈치가 빨라서 1분밖에 안 했어. 그러니까 아주 공평해. 60초, 40초, 20초. 의전 상 배분한 거야. 아예 끊어버리려다가 40초 준 거니까 고맙게 생각하고 그만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어. 자꾸 시끄럽게 굴면 모스크바에서 온 우리 아저씨한테 얘기해서 당신 입 다물게 시키라 할 거야. ”

 

 

베르닌은 국장이 분노로 왕재수의 목을 비틀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국장은 풀이 죽었고 한숨을 쉬며 등을 돌려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쫓아나가려고 했지만 국장은 버럭 화를 냈다.

 

“ 따라오지 말게! ”

 

“ 하지만... ”

 

“ 남아서 행사 모니터링해! 끝까지! ”

 

“ 저, 리셉션 파티까지요? ”

 

“ 당연하지! 저 재수 없는 불여우가 혹시 범법을 저지르지 않는지 확실하게 감시해! ”

 

그래서 베르닌은 남았다. 파티에도 갔다. 파티에는 온갖 맛있는 음식들이 즐비했다. 렐랴가 어깨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행사가 끝나자 기분이 누그러진 왕재수는 렐랴와 3분 정도 인터뷰도 해주었다. 렐랴는 베르닌에게 샴페인도 한 잔 권했다. 아주 행복한 하루였다. 공유지의 배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만 빼면 완벽했다.

 

그리고 그날의 가장 큰 행복은, 집에 도착했을 때 왕재수가 그에게 렐랴가 준 꿀을 먹으라고 떠넘긴 거였다. 두 번째 행복은, 왕재수가 국장의 마이크를 꺼버린 거였다. 세 번째 행복은 스페호프가 두통이 심해서 다음날 휴가를 내겠다고 연락해 온 것이었다. 참 운 좋은 하루였다.

 

 

 

 

- FIN -

201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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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는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으로 이어진다. 그건 주말에...

 

 

** 전반부에서 베르닌이 건전지 사러 잡화점 가서 줄 서서 기다리고 전표 끊고 돈 내고 또 전표 끊고 하는 건 아마 러시아에서 생활해보신 분들이라면 이해하실 듯.. 지금이야 러시아도 자본주의 문화가 퍼져서 저런 곳이 별로 없지만 예전엔 저랬다. 줄 서는 건 일상. 이 코너에선 물건 사겠다고 전표 끊고, 그거 가져가서 저 코너에서 물건 요청, 또 여기서는 돈 지불, 저기서는 지불 전표에 도장, 또 여기서는 물건 받기 등등~

학교에서 등록금 낼 때도 이 사무실 가서 이 절차 밟고 저 사무실 가서 저 절차 밟고.. 중간에 또 커피 브레이크라고 쉬고... 또 어느 담당자는 휴가라 안 되고.. 등록금 한 번 내는 것도 한 나절! 운 나쁘면 며칠에 걸쳐서 처리해야 했다. 지금이야 많이 나아졌겠지 :)

 

** 바이올린 아저씨 로만 코즐로프는 이 시리즈에서 대책없는 깡패 같은 거친 남자로 나오긴 한다만.. 뭐 이 사람이 본편에서도 좀 까칠하고 폭력 성향이 조금 있긴 하지만 저런 남자는 아니다. 저렇게 닭살 멘트를 폭탄처럼 쏟아놓는 사람은 더더욱 아님 :) 하긴 여기 나오는 인물들 전부 본편의 원래 성격과는 많이 차이가 있다. 이건 그냥 웃자고 쓰는 얘기들이라서....

로만 코즐로프와 미샤에 대한 얘기는 writing 폴더에. 링크는 아래..

http://tveye.tistory.com/3146

http://tveye.tistory.com/3165

http://tveye.tistory.com/3253

  

***

 

댓글에서 지난 3편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http://tveye.tistory.com/3444) 때문에 쿠키 드시고 싶으셨다는 분들이 계셔서..

렐랴가 만든 쿠키랑 똑같지는 않지만 러시아 쿠키 사진 몇 장으로 눈 위안이라도... ㅠㅠ

러시아에서는 쿠키를 뻬체니예(печенье)라고 한다. 수제 뻬체니예 사진들..

 

 

 

 

 

 

 

 

 

두번째랑 이 네번째 쿠키를 섞어 놓은 게 아마 렐랴가 만든 쿠키랑 비슷할 듯..

 

그리고 이렇게 예쁘게 포장을 해서... 사모하는 왕재수에게 갖다 바침(베르닌을 시켜서..)

렐랴야, 다 소용없어 ㅠㅠ (그냥 나 줘..)

 

 

 

:
Posted by liontamer
2015. 1. 25. 15:14

빛바랜 페테르부르크 사진들 몇 장 russia2015. 1. 25. 15:14

 

 

작년 봄, 페테르부르크.

 

이 날은 4월 5일이었다. 날이 흐렸고 이날따라 피곤해서 dslr 대신 조그만 디카 후지를 들고 나가서 그리보예도프 운하부터 예술광장까지 천천히 거닐었다. 쓰고 있는 글 배경이 1970~80년대 소련의 레닌그라드였기 때문에 그때 느낌을 조금이라도 재현해보려고 로모 필터를 넣어 사진 몇 장 찍었다. 

 

이때 찍은 거 당시 몇 장 올린 적 있다 : http://tveye.tistory.com/2720

 

위의 풍경은 그리보예도프 운하와 관광보트.

 

 

미하일로프스키 공원의 울타리. 이 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러시아 박물관(루스끼 무제이)이 나온다.

 

 

 

 

 

러시아 박물관 정문 쪽 울타리. 안쪽으로 박물관이 보인다.

 

 

 

예술 광장 앞 공원.

 

 

 

마지막은 예술광장을 지키고 계시는 우리 푸쉬킨 동상.. 흐린 실루엣만 나왔지만 역시나 머리 위에 새가 앉아 있다.

 

.. 이것이 일요일 예약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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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liontamer

 

주말에 자리를 비울 것 같아서.. 금요일 밤에 서무의 슬픔 3편 올려본다.

만국의 직장인들이여 유리지갑들이여 말단들이여 사무직들이여 봉기하라 ㅠㅠ

 

 

**  지금까지의 간단한 줄거리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는 나름대로 자기 입장에서는 베르닌을 도와주려고 애쓰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3편 시작에 앞서 **

- 에피소드 3에 언급되는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는 실존인물이다. 그러나 권총규격이니 운운하는 스페호프 국장의 얘기는 전부 그냥 웃자고 쓴 얘기..

- 베르닌과 왕재수가 렐랴를 '릴리아나 페트로브나'라고 부르는 건 러시아어의 존칭 개념임. (렐랴는 애칭, 릴리아나 페트로브나는 본명 + 부칭)

- 보르쉬는 비트 수프, 펠메니는 러시아식 만두이다.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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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

 

 

서무의 슬픔

-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10월 초가 되었을 때 베르닌은 업무에 찌들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 애초부터 일이 많았지만 9월에 가브릴로프 시 의회와 공공기관들 내부에서 대대적으로 조직 개편이 일어나는 바람에 KGB에서는 새로 들어온 사람들의 서류를 탈탈 터느라 여념이 없었고 그 덕에 말단이자 비서이며 서무인 베르닌의 업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왕재수도 시립극장 감독으로 부임해오고 그 감시 업무까지 떠맡게 되었으니 베르닌은 몸이 열 개라도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 날도 베르닌은 산더미처럼 서류를 쌓아놓고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국장이 근교 도시로 출장을 가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서무가 조금이라도 노는 꼴을 볼 수 없었던 국장은 전날 어마어마한 업무 리스트를 하달하고는 다음날 자정까지 자기 책상 위에 완료된 서류들을 모두 올려놓으라고 엄포를 놓고 떠났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목록이 길게 이어졌다.

 

직원 외출부를 작전요원 및 감시요원, 행정직원별로 서류철 3개 만들기, 대외용 외출부 기재 칠판을 역시 요원별로 3개 만들기, 국장실에 걸어놓을 세계 전도 구입하기(사이즈는 120센티미터 x 60센티미터, 대륙별 색깔 구분 필수), 내무부에서 실시하는 연방 보안위원회 지국별 고객 만족도 조사 대비를 위한 전화 응대 매뉴얼 만들기(제정신이 박힌 일반인이라면 아무도 KGB에 전화하지 않으므로 아무 짝에 쓸모없는 매뉴얼이었다), 국장실 캐비닛에 비치할 다과 리스트 만들기 및 다과 구입하기, 전표 처리하기, 선배 직원들의 초과 근무 내역 작성 및 근태기록부 대조하기, 선배 직원들의 출장 내역 정리 및 출장비 지급하고 전표 처리하기...

 

이것도 모자라 맨 뒷장에는 작전요원에게 배부되는 권총 규격의 중장기 로드맵을 작성하라는 특별 과제가 주어져 있었다. 전날 국장실에서 목록을 전달받아 읽던 베르닌은 참다못해 항의했다.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대체 권총 규격의 중장기 로드맵이란 건 뭡니까? 모스크바 표준으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38구경... ”

 

“ 이런 근시안적인 천치 같으니. 그래서 자네가 발전이 없는 거야. 대체 언제가 되어야 제대로 된 행정가가 되겠나. 행정의 기본이란 향후 10년을 내다보고 중장기 계획을 만들어서 닥쳐올 감사에 대비하는 것이야. 지금이야 38구경이지. 하지만 요원들의 신체적 조건은 변화하기 마련이야. 45구경으로 바뀔 가능성은 생각 못하나? 게다가 미제 양키들이 38구경을 쓰고 있지. 국가적 자존심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단 말일세! 아직까지야 안드로포프가 KGB를 장악하고 있으니 변동이 없겠지만 서기장은 오늘내일 하고 있고 그자가 죽으면 안드로포프가 자리를 낚아챌 거야. 그럼 KGB 수장도 바뀔 거고, 전체 질서가 재편될 가능성이 크지. 그런 와중에 권총 규격이라고 안 바뀌겠나! 제발 꼭대기에 달고 있는 그 머리란 걸 좀 써 보게! ”

 

“ 권총은 국영 공장에서 대량 생산합니다! 권총 규격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산 제조 라인이 다 바뀌어야 하고 그건 단순히 KGB 수장의 변덕에 의해 좌우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비용을 요구하는 짓이란 말입니다. 효율성 측면에서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게다가 규격이 바뀌는 순간 작전요원들의 훈련에도 변화를 주어야 하고 사격 교관들도 새로운 훈련을 받아야 하니 이 또한 대규모의 추가 비용을 초래합니다. 게다가 45구경은 38구경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해외 비밀요원들이 사용하기에는 은폐도 어렵고 특히 여성 요원들에게는 큰 짐이 될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권총 규격의 중장기 로드맵이란 건... ”

 

“ 비용이라니! 효율성이라니! 어디서 그런 자본주의적인 발상을 지껄이고 있는 건가! 자네 수용소에 가고 싶나! 밖에서는 절대 그런 말은 입도 뻥긋하지 말게! 자넨 정말 운이 좋은 줄 알아! 그나마 내가 부하들을 아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

 

국장은 족히 20분 가까이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베르닌을 혼내고 훈계했다. 마침내 국장실에서 나왔을 때 베르닌은 너무 지쳐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직실 귀신이라도 다시 나타나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물론 자신이 혼자 있을 때 말고... 이왕이면 국장실로 가서 얄미운 국장을 혼내줬으면 했지만 전에 보니 귀신도 상당히 사람의 외모를 따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리고 예쁘장한 왕재수를 그렇게 좋아했나 싶었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귀신이 자기한테도 귀엽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어쨌든 국장은 출장을 떠났고 가브릴로프 작전요원들과 감시요원들은 모두 강가에 피크닉을 나가서 샤실릭을 구워먹으며 뒹굴었고 사무실 행정직원들도 너도나도 어딘가로 사라져 농땡이를 치며 행복을 만끽했다. 그야말로 어린이 주간이었다.

 

오로지 말단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만이 햇살 찬란한 가을날에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남아 외출부 서류철을 3개 만들고 대외용 외출 칠판 3개와 색깔이 들어간 세계 전도 구입 요청 서류를 작성하고 전화 응대 매뉴얼을 끄적거리고 선배들의 초과 근무 내역을 창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권총 규격의 중장기 로드맵이 대체 무엇인지, 국장이 요구하는 로드맵이란 38구경에서 45구경으로의 1차 진화에서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무슨 생화학 캡슐을 장착한 신무기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안드로포프 위원장의 권력 승계 구도를 예측해 환경 분석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머리가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격무 때문에 너무 골치가 아프고 힘들어서 베르닌은 이 빠진 머그에 뜨거운 물을 붓고 굴러다니던 홍차 티백을 담갔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유리병 뚜껑을 열고는 티스푼으로 잼을 마구 퍼먹기 시작했다. 카페인과 당분을 섭취하자 그나마 두통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게다가 잼이 아주 맛있어서 순식간에 유리병을 절반쯤 비웠다. 다 먹어치우려다가 야근할 때를 대비해 좀 남겨놔야겠다는 생각에 내키지 않는 손을 뻗어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는 다시 선배들의 초과 근무 내역을 지어내면서 출근부를 대조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들리더니 강렬한 향수 냄새가 확 끼쳐오면서 세찬 바람이 휙 하고 불어왔다. 베르닌이 상대방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책상 위로 구겨진 서류 몇 장이 회오리처럼 내동댕이쳐졌다.

 

대체 이게 무슨 헛소리예요! 당장 취소하지 못해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KGB 나부랭이들 같으니! 문화가 뭔지 예술이 뭔지 한 마디도 이해 못하는 야만인들 주제에 감히 내 잡지 발간을 방해하다니! ”

 

고개를 들자 렐랴 비슈네바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씩씩거리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렐랴는 월간 문예지 비슈네브이 사드 편집장으로 나이는 겨우 스물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굉장한 노멘클라투라 가문 출신인데다 가브릴로프에서도 손꼽히는 미녀였다. 지금 보니 성깔도 손꼽힐 것 같았다.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왜 그러십니까? ”

 

“ 뭘 왜 그래요! 이거 당신이 보낸 거잖아요! 당신 이름 적혀 있잖아요, 다닐 베르닌!! 우리 잡지 발간일은 매월 15일이라고요! 당장 내일 나가야 하는데 무슨 절차를 안 지켰으니 당월호 발간 불가, 검열국 재승인 요망... 이게 무슨 헛소리냐고요! ”

 

베르닌은 구겨진 서류를 펼쳐 보았다.

 

“ 아, 난 또 뭐라고요... 잡지 뒤표지에 인쇄하는 문구 하나가 잘못됐더군요. ‘본 인쇄물은 가브릴로프 시 의회 및 출판문화국, 보안위원회의 검열 및 승인을 거쳐 출판되었습니다’라는 문구 말입니다. 보안위원회가 출판문화국보다 상위기관이기 때문에 순서가 바뀌어야 합니다. 사실 시 의회와는 동급이지만 그거야 알파벳 순서상 의회가 앞으로 와도 별 문제없고... ”

 

렐랴는 더욱 폭발했다.

 

그런 하잘것없는 이유 때문에 내 잡지 발간을 막았다고요? 보안위원회고 검열국이고 다 그 밥에 그 나물인데 뭐가 먼저 온들 어때서요! ”

 

“ 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국장이 이런 문제에 너무 민감해서요... ”

 

“ 그리고 그깟 문구 순서가 문제라면 당신이 좀 바꿔줄 수도 있었잖아요! 아니면 전화해서 인쇄소에 넘기기 전에 문구만 바꾸라고 귀띔해줬으면 이런 바보짓을 안 해도 되잖아요! ”

 

“ 그게 말입니다... 저도 전화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때 국장이 불러서 행정 절차를 지켜야 하는 이유와 서무의 기본자세에 대해 한 시간 동안 설교를 하고... 당신 문예지의 이 문구를 예로 들면서 올바른 처리 방법에 대해 떠들어댔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 ”

 

“ 그러니까, 지금 내 잡지가 당신 국장의 변태적 강박관념 때문에 희생양이 됐다는 얘기잖아요! 당신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어요? 국장한테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꾸하고 서류 처리 대신 나한테 전화를 해줬으면 별 문제 없이 풀렸을 거 아녜요!!! ”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그건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라고요. 그리고 당신은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러는 거고요! 제가 당신에게 몰래 전화를 했다는 게 들통나면 국장은 제 살점을 도려내고 뼈를 갈아서 길거리 도둑고양이한테 던져줄 거라고요! ”

 

베르닌은 억울한 마음에 언성을 높였지만 렐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그러니까 몰래 했어야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니까, 빨리 이 사태를 해결해 줘요! ”

 

“ 해결 방법은 간단합니다. 문구를 수정해서 다시 검열국에 승인 요청을 하시는 거죠. 검열국에서 통과가 되면 저희 쪽으로 넘어올 거고 그럼 제가 발간 승인 공문을 기안하고... 국장 결재가 완료되면 저희 쪽 문서 발송 담당자에게 요청해서 발송철에 기재하여 번호를 딴 후 당신 사무실로 서류를 발송해드리지요. 그런데 오늘이 수요일이군요... 검열국 통과는 빠르면 내일... 저희 쪽으로 넘어오면 목요일 저녁... 그런데 국장이 출장을 갔으니 금요일 오전에 결재를 받고... 발송 담당자를 거치면 금요일 오후. 그러면 우체국이 문을 닫으니 다음 주 월요일이면 승인 확정이 되고, 발간은 화요일... ”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던 렐랴는 다시 펄펄 뛰었다.

 

“ 화요일이라뇨! 문구 하나 수정하는 데 어째서 일주일이 걸린단 말인가요! 잡지 발간일은 내일이에요! 이건 나와 독자들 사이의 약속이라고요! 검열국엔 내가 가서 얘기하겠어요! 한 시간 내로 서류에 도장 받아서 가져올 수 있다고요! 그럼 여기선 당신이 해결해주면 되잖아요! 국장 도장 어딨는지 몰라요? 도장 대신 찍어주고! ”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당신은 행정 절차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위임 전결 규정이란 게 있어요. 제가 국장 대신 도장을 찍을 수는 없다고요! 그리고... 우리는 도장 안 씁니다. 서명을 한다고요! ”

 

“ 당신 서무라면서요! 국장 서명 어떻게 생겼는지 알잖아요, 대충 똑같이 그리면 되죠! ”

“ 그건 범죄 행위라고요! 국장이 알면 제 목을 쳐서 남은 피 한 방울까지 다 짜버릴 거예요. 어찌어찌 서명을 위조한다 쳐도.. 지금 문서 발송 담당자가 자리를 비워서 발송이 안돼요. ”

 

“ 그깟 서류철에 기재하고 번호 따는 게 왜 담당자가 따로 필요해요! 그것도 지금 당신이 그냥 해주면 되잖아요. 1분도 안 걸릴 텐데! ”

 

“ 담당자가 돌아와서 서류철을 보면 난리를 칠 거예요... 제 권한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서류철에 기재를 해도 우체국에... ”

 

“ 대체 왜 우체국이 필요해요! 다리 하나 건너면 우리 사무실인데! 그리고 내가 직접 왔잖아요. 나한테 서류 건네주면 끝인데 무슨 우편 발송이 필요하냐고요! 아아 답답해! ”

 

렐랴가 두 손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온통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회색 눈동자가 분노로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니 정말 예뻤다. 왜 가브릴로프 남자들이 그렇게 이 여자에게 목을 매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잠시 베르닌이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고 있는 동안 렐랴는 심호흡을 하더니 조금 진정되었다.

 

“ 휴... 고지식한 당신에게 아무리 말해봤자 알아들을 리도 없고.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자, 빨리 문서부터 새로 만들어요. 국장 서명이랑 발송철 기재도 해요. 그 동안 난 검열국에 가서 수정본으로 승인 문서를 받아올 테니. 자, 빨리! ”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지금 보안위원회의 규정을 어기고 있는 겁니다. ”

 

“ 그래서 정말 안 해주겠다는 거예요? 내일 잡지가 나와야 한다니까요! 설마 정말 내 부탁을 안 들어주겠다는 거냐고요! ”

 

렐랴가 다시 콧김을 내뿜으며 소리를 지를 기세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재빨리 서류를 낚아챘다.

 

“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지금 해 드릴 테니까 빨리 검열국에 다녀오세요. 하지만 이건 비밀입니다. 이런 편법을 썼다는 게 발각되면 국장이 절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요. ”

 

렐랴는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베르닌의 손목을 꼭 쥐었다.

 

“ 고마워요, 다냐! 화내서 미안해요. 당신한테 화난 게 아니에요, 내일이 발간일인데 이런 일이 생겨서 그런 거예요. 당신네 국장은 워낙 예술이랑은 담을 쌓아서 애초부터 우리 잡지에 초를 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당신이 담당자라 다행이에요. ”

 

“ 저, 그런데 손목을 좀... 타이프를 쳐야 해서요. ”

 

렐랴는 샐쭉해진 눈으로 베르닌을 흘겨보더니 손목을 놔주었다. 베르닌이 발간 승인 문서를 타이핑하는 동안 렐랴는 책상에 쌓여있는 산더미 같은 서류를 훑어보았고 혀를 찼다.

 

“ 다냐, 이게 다 뭐예요? 다 당신 일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가고 왜 혼자 남아서 이렇게 일에 파묻혀 있어요? ”

 

“ 예... ”

 

“ 왜 그러는 건데요? 일을 다 같이 해야지 왜 당신 혼자... ”

 

“ 서무라서요. ”

 

“ 당신 불쌍하네요. 스페호프 너무 못됐어요. ”

 

베르닌은 어쩐지 가슴이 뭉클했다. 감동이 밀려왔다. 얼굴도 예쁜 여자가 마음도 곱다는 생각에 울컥해서 하마터면 ‘승인하오니 만전을 기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문장을 ‘만전을 기해주시기 바람’이라고 오타를 칠 뻔 했다. 막 타이핑을 마치고 국장 사인을 위조해 그리려는데 갑자기 렐랴가 뭔가를 홱 낚아채더니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물었다.

 

“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다닐? 대체 왜 이게 여기 있는 건지 설명해 봐요. ”

 

베르닌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렐랴를 빤히 바라보았다. 렐랴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채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뚜껑이 반쯤 열린 작은 유리병이 쥐어져 있었다.

 

“ 어, 그거요? 버찌잼인데요. 차 마실 때 곁들여 먹는 거. 차 한 잔 드릴까요? 같이 먹으면 맛있어요. ”

 

“ 누가 몰라요, 버찌잼인 거! 대체 이게 왜 여기 있냐고 묻잖아요! ”

 

“ 그러니까요, 잼은 차에 곁들여 먹으면 맛있고... 일하다 보면 머리도 아프고 힘드니까 뜨거운 차를 마시면 힘이 나고. 그래서 갖다 놓은 거죠. 차 마실 때 같이... ”

 

그. 러. 니. 까. 대체 왜 이걸 당신이 갖고 있냐고요!!!!! ”

 

“ 아니,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저는 잼을 먹으면 안 되나요? 아무리 제가 당신들이 경멸하는 KGB 직원이라지만 잼을 먹으면 안 된다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국장에게 들들 볶여서 이렇게 시달리고 있는데... ”

 

“ 이건, 이건 내가 만든 잼이라고요! 검은 숲에서 직접 따서 먼지를 다 걸러내고 레몬즙과 수입 설탕을 넣어서 오래오래 끓여서 만든 수제 버찌잼이란 말이에요! 게다가 이 유리병... 이 뚜껑, 이 분홍색 리본.... 이 병을 구하려고 내가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 ”

 

“ 와,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정말 대단하군요. 이 잼을 직접 만들었다니. 이렇게 맛있는 잼은 처음 먹어봤어요. ”

 

“ 그렇겠죠! 내가 만든 거니까! 내가 궁금한 건 왜 이게 여기 있냐는 거예요! 이건 내가, 내가 미샤에게 준 거란 말이에요! 선물한 거라고요! 왜 이게 여기... 당신, 소문대로 그 사람 감시하는 게 맞죠? 그 사람 집에 숨어들고 도청하고 물건도 가져가고! 잼까지!!! ”

 

“ 미샤가 누구지? ....아, 왕재수... 아니, 야스민. 맞아요, 이거 그 자식이 준 거예요. 물건을 가져가다니요, 전 그런 짓 안합니다! 그놈이 먹으라고 준거라고요! ”

 

“ 거짓말! 이건 선물인데... 설마 미샤가 그럴 리가 없어요! 내가 포장지로 예쁘게 싸서 선물이니까 내 생각하면서 먹으라고 준 건데... 그 사람 먹으라고 밤새 만든 잼인데... 당신이 그냥 가져온 거죠!! 매일매일 그 사람 집에 드나들며 감시하고 못살게 굴고 물건도 가져가고! ”

 

“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잼은 야스민이 준 거고요. 제가 그 자식 집에 매일 드나드는 건 맞아요. 다 업무 때문이죠. 얼마나 지겨운지 아십니까? 국장이 절 그 자식 감시자로 붙이는 바람에 전 이사까지 했어요. 그 자식 아래층으로... 아침저녁 차로 출퇴근시켜주지, 밥도 해서 먹이고 설거지까지 해주지, 차도 우려주지... 전 정말 노예처럼 살고 있다고요! 사무실에서는 국장에게 들들 볶이고 집에 가면 여섯 살짜리나 다름없는 왕재수를 돌봐야지. 진짜 미칠 것 같다고요! ”

 

“ 왕재수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그렇게 멋진 남자에게. 당신 지금 질투하는 거죠? 하긴 온 동네 남자들이 전부 그이를 질투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네요. 잘생겼지 젊고 유능하지. 세련미가 넘치고 옷도 잘 입고... ”

 

“ 30분만 같이 있어 보세요, 탁아소 어린애처럼 유치한데다 진짜 왕재수란 걸 알게 될 테니! ”

 

“ 질투 그만 해요! 정말 미샤가 당신한테 이 잼을 줬단 말이에요? 대체 왜 그랬을까... 그럼 미샤는 한 입도 안 먹은 거예요? 그렇게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요? 그래서 내가 만든 건 입에도 대기 싫었을까요? 아아.... ”

 

렐랴의 아름다운 회색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고였다. 베르닌은 어쩐지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 마음이 심히 불편했다.

 

“ 저, 그런 게 아니고요... 왕재수, 아니 야스민은 원래 잼을 안 좋아하나 봐요. 그래서 어제 제가 차 우려주면서, 잼이 맛있어 보이니 접시에 좀 담아줄까 하고 물었는데 자기 버찌잼 안 먹는다고... 그냥 가져가서 먹으라고 주더라고요. ”

 

“ 아아... 그럼 미샤는 원래 버찌잼을 못 먹는데 내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받아준 거군요. 정말 착하기도 하지... 그렇게 잘생긴 남자가 마음까지 비단결이라니... ”

 

베르닌은 렐랴가 품은 환상이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왕재수에 대해 조금이라도 나쁜 말을 하면 피곤해질 것 같아서 꾹 참았다. 대신 옆 사무실에서 문서 발송철을 가져와 번호를 딴 후 위조한 승인 문서를 렐랴에게 건네주었다.

 

“ 여기 있습니다. 대신 꼭 검열국에서 문서를 받으세요. 그거 없으면 나중에 문제가 아주 커질 수 있으니 잊으면 안 됩니다. ”

 

“ 고마워요. 덕분에 내일 잡지를 발간할 수 있게 됐군요. 아참 그리고... ”

 

렐랴는 핸드백에서 뭔가 바스락거리는 물건을 꺼냈다. 금색 포장지로 싸여 있는 작은 상자였다.

 

“ 이거 미샤에게 좀 전해 주세요. ”

 

“ 이게 뭔데요? ”

 

“ 쿠키예요. 직접 구운 거예요. 잼은 안 먹는다고 했으니... 이 편지랑 같이 전해줘요. 뜯어보면 안돼요! ”

 

“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

 

“ 감시요원이니까... ”

 

“ 전 그런 짓 안 합니다! 여자 편지를 뜯어 읽는 비겁한 짓은 안 해요! ”

 

“ 알았어요, 고지식한 사람이니까 편지는 뜯어 읽을 것 같지 않군요. 근데 당신 아무래도 쿠키는 먹어버릴 것 같단 말이에요. ”

 

“ 안 먹어요! 그대로 야스민한테 전해주면 되잖아요. 절대 안 먹어요. 이제 됐나요? ”

 

“ 네. 꼭 전해줘야 해요. 이거 버찌잼보다 더 공들여 구운 쿠키라고요. 유기농 밀가루로 반죽하고 벨기에에서 공수한 초콜릿을 녹여 넣었어요. 별장에서 직접 증류한 보드카에 크랜베리와 호두를 한 달 동안 절였다고요. 가엾은 미샤... 대도시에서 좋은 데서만 자고 좋은 거 입고 좋은 것만 먹고 살다가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으니... 내 쿠키는 파리에서 먹던 것만큼 맛있을 거예요. 미샤가 꼭 먹고 기분 좋아졌으면 좋겠어요. ”

 

베르닌은 쿠키 상자를 받았다. 렐랴가 온 진짜 이유는 잡지 발간 건보다는 쿠키 상자 때문이라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어쩐지 섭섭한 기분이 들었지만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새로 타이핑한 서류를 소중하게 한 팔로 낀 채 렐랴가 뺨에 가볍게 키스를 했을 때 베르닌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고 왕재수에 대해서도 한없이 관대해져서 오늘은 야근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 쿠키 상자를 전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베르닌은 권총 규격 중장기 로드맵 과제를 싸들고 정시에 퇴근했다. 강을 건너가 극장에 들러 왕재수를 태웠다. 왕재수는 심기가 불편한지 차에 타자마자 스카프로 얼굴을 칭칭 감고 몸을 웅크린 채 창밖만 바라보았다. 내릴 때 얼핏 보니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왕재수가 너무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베르닌은 쿠키 상자를 건네주는 것은 미루고 조심스럽게 저녁 먹으러 올 거냐고 물었다.

 

“ 아니. ”

 

“ 너 어제 저녁도 안 먹었잖아. ”

 

“ 그깟 저녁밥 좀 안 먹으면 어때. ”

 

“ 맘대로 해라. 네가 배고프지 내가 배고프냐. ”

 

왕재수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태도로 휙 올라가버렸다. 베르닌은 귀찮은데 잘됐다 싶어서 자기 집으로 갔다. 가스렌지에 인스턴트 보르쉬를 데우고 냉동 펠메니를 삶았다. 그러나 막 먹으려고 보니 평소처럼 2인분을 만들어서 양이 너무 많았다. 먹고 남길까 했지만 펠메니는 시간이 지나면 끈적해지고 맛이 없어지는 음식이라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베르닌은 계단을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왕재수는 곧 문을 열어주었다.

 

“ 너 왜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열어? ”

 

“ 그러면 안 돼? ”

 

“ 도둑이면 어쩌려고! ”

 

“ 도둑이 여기 어떻게 와. 감시 카메라가 주렁주렁 달렸는데. 네가 도청 마이크도 달아놨잖아. 밑에 너도 살고. ”

 

“ 너 지금 비꼬는 거야? 내가 그런 거 아니잖아. 국장이 시킨 거잖아. ”

 

“ 왜 올라왔어? ”

 

“ 내려와서 밥 먹어. ”

 

“ 안 먹는다고 했잖아. ”

 

“ 네 거까지 만들었단 말이야. 빨리 내려와. ”

 

왕재수는 한숨을 쉬더니 베르닌을 따라 내려왔다. 여전히 스카프로 얼굴을 칭칭 감고 있었다. 그릇에 보르쉬를 부어주고 펠메니 접시를 밀어주면서 베르닌이 투덜댔다.

 

“ 식탁 앞에서 그 스카프는 뭐야. 풀고 빨리 먹어. ”

 

왕재수는 스카프를 풀고 포크로 펠메니를 푹 쑤셔서 맨입으로 한 개를 집어먹었다.

 

“ 스메타나 있잖아, 찍어 먹어! ”

 

“ 먹으래서 펠메니 먹잖아.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야... ”

 

“ 제대로 먹으란 말이야! 보르쉬도 좀 퍽퍽 퍼먹고. 펠메니도 스메타나 찍어서 두 개씩 먹어! ”

 

“ 나 입맛이 없다고 했잖아. 왜 자꾸 먹으래. ”

 

“ 어제 저녁도 안 먹고, 오늘 아침에도 카페 갔을 때 차만 마시고 안 먹었잖아! 그러다 쓰러진다고! ”

 

“ 안 쓰러져. 점심 때 양상추랑 당근이랑 토마토에 구운 닭가슴살이랑 우유를 먹었어. 잘 먹고 있단 말이야! ”

 

“ 그게 뭐야! 그것만 먹고 어떻게 살아! 네가 무슨 토끼냐? ”

 

“ 토끼는 초식동물이야. 닭가슴살을 먹지 않아. ”

 

“ 어쨌든! 왜 그렇게 조금 먹는 거야! 가뜩이나 마른 게! ”

 

“ 안 말랐어! ”

 

왕재수가 갑자기 화를 냈다. 얼굴을 빨갛게 붉히더니 눈물을 글썽글썽했다.

 

“ 어, 어... 너 울어? 내가 뭘 잘못 말했어? ”

 

“ 아니야. ”

 

“ 극장에서 무슨 일 있었어? 또 사람들이 나쁜 소리하고 욕해? 어리다고 말 안 들어? ”

 

“ 그건 맨날 있는 일인걸. ”

 

어쩐지 왕재수가 불쌍해진 베르닌은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기며 달래주려고 했다. 왕재수는 위로를 해주자 참았던 서러움이 울컥 터진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훌쩍 울었다. 베르닌은 이상하게도 정의감이 용솟음쳐서 버럭 소리쳤다.

 

“ 누구야, 누가 괴롭혀! 다 말해! 내가 보고서에 다 쓸게!

 

“ 보고서에 쓰면 뭐... 뭐가 달라져. ”

 

“ 뭐 그건 그렇지만... 너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에 아저씨들 있잖아. 괴롭히는 놈들 일러바치면 되잖아. ”

 

“ 이건 그렇게 안 돼... 일러바치면 큰일나. ”

 

“ 왜? 대체 무슨 일이야, 어떤 놈인데! ”

 

“ 로만이.. 그저께 침대에서 나보고... 요즘 살찐 것 같다고. ”

 

“ 뭐, 그 바이올린 아저씨? 침대...(무시하자) 너보고? 살쪘다고? 그 인간 미친 거 아니야? ”

 

“ 그 사람은 엄청 날씬한 애들 좋아해. ”

 

“ 너는 날씬하잖아! 날씬한 것도 아니고 말랐어! ”

 

“ 너 나 벗은 거 안 봤잖아. 나 안 말랐어. ”

 

(내가 왜 너 벗은 걸 봐야 하냐) 말랐어! 누가 봐도 말랐다고! ”

 

“ 로만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대. 근데 처음 잘 때도 벗은 거 보고 생각보다 근육질이라고 그러더니... 그저께는 여기 공기가 좋은가보다고, 나 살찌고 있다고... 막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

 

“ 허벅지는 왜? ”

 

“ 되게 하늘하늘하고 날씬하고 예쁜 앤 줄 알았는데 허벅지가 두툼해서 만지면 엄청 딱딱하다고... 그럼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야... 내가 여자야? 허벅지가 보들보들하게? 난 엄연히 사내라고! 그리고 나는 무용을 해서 허벅지가 두툼해. 춤추느라 거기 근육이 발달해서 그런 거야. 살쪄서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흐흑... ”

 

“ 그럼 너 그것 때문에 계속 굶고 있었어? ”

 

“ 굶은 거 아니야, 식이요법하는 거야. ”

 

“ 근데 너는 되게 날씬하고 예쁜데... ”

 

“ 고마워, 흐흑... 근데 로만은 더 날씬하고 더 예뻐야 좋은가봐. ”

 

“ 아니 그 인간은 지 생각은 안하고! 나이도 많은 아저씨가! ”

 

“ 그치? 그리고 바보 같아. 내가 왜 그렇게 밤일을 잘하는데... 다 이 두툼한 허벅지에서 나오는 건데! 여기 근육 줄어들면 지금만큼 좋지도 않을 건데 바보 같이... 내가 해주면 좋아서 죽으려고 하면서, 자꾸자꾸 하고 싶어 하는 주제에... 멍청한 남자... ”

 

“ 야,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란 말이야... 그럼 얼굴은 왜 가리고 있었던 거야? ”

 

“ 어... 다이어트를 했더니 피부에 뾰루지가 났어. 너무 기분 나빠. 여기... ”

 

왕재수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왼쪽 뺨 아래를 가리켰다.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 샅샅이 살펴보니 모래알보다도 작게 돋아난 빨간색 뾰루지가 보였다.

 

“ 이거? 보이지도 않잖아! 겨우 이런 거 갖고 그 난리를 쳤단 말이야? ”

 

“ 보여! 나는 피부가 하얘서 이런 거 금방 눈에 띈단 말이야. 그리고 작은 거 하나 생기면 금방 번질지 어떻게 알아... 남자는 피부가 중요해. 넌 이 피부가 그냥 유지되는 줄 알았어? 내가 어릴 때부터 얼마나 피부 관리를 했는데... 우유로 세수하고 분장 지울 때 클렌징도 진짜 신경 쓰고 보습도 잘해주고 자외선 차단 크림도 꼬박꼬박... ”

 

“ 말을 말자... 빨리 먹어. 하나도 살 안 쪘어. ”

 

“ 하지만 로만이... ”

 

“ 아, 그 망할 바이올린 아저씨! 넌 그렇게 잘난 척하고 다니면서 왜 남자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는 거야! 귀여우니까 농담한 거 아냐! ”

 

“ 그런가? 막 뽀뽀해주긴 했어, 허벅지랑 또... ”

 

“ 그만해! ”

 

베르닌은 자꾸 이상한 쪽으로 휘말리는 것 같아서 손을 휘저으며 왕재수의 입에 스메타나를 적신 펠메니를 쑤셔 넣었다. 왕재수는 펠메니를 삼키고 나서 보르쉬를 한 숟갈 떠먹고 맛있다고 좋아하더니 또 불쑥 물었다.

 

“ 나 귀여워? ”

 

“ 뭔 소리야! ”

 

“ 네가 그랬잖아. 로만이 농담한 거라고, 나 귀여워서. ”

 

“ 누가 내가 그렇대!! 그냥 그 인간 입장에서 그럴 거란 얘기지! 그 인간은 나이도 많고 변태니까! 너는 하나도 안 귀여워. 재수 없어, 싸가지도 없고 엄청 귀찮게 구는 왕재수야! ”

 

실컷 야단을 치다가 베르닌은 왕재수가 또 우는 게 아닌가 싶어 슬쩍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왕재수는 울지도 않았고 전혀 화난 것 같지도 않았다. 열심히 스메타나에 펠메니를 꼭꼭 찍어서 먹고 있었다. 보르쉬도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다 먹고 나자 안색도 훨씬 나아지고 눈도 반짝거려서 훨씬 나아보였다.

 

식탁을 치우고 나서 베르닌은 차를 우렸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나서 쿠키 상자를 가져왔다.

 

“ 자, 누가 너 주래. ”

 

“ 누가? ”

 

“ 렐랴. ”

 

“ 어... 왜 너한테 갔지? ”

 

“ 일 때문에 왔다가 전해달라고 줬어. 너 그 버찌잼 렐랴가 준 거 왜 말 안했어? 내 자리에 있는 거 보고 엄청 화냈단 말이야. ”

 

“ 그게 릴리아나 페트로브나가 준 거였나? 나 그런 거 기억 잘 못해. 하루에도 그런 거 열 개 스무 개씩 받는단 말이야. 단 거 먹지도 않고. ”

 

“ 이건 먹어야 돼. 렐랴가 직접 구웠대. 무슨 벨기에 초콜릿에 유기농에 크랜베리에 어쩌고... 너 엄청 좋아하는 거 같았어. ”

 

“ 과자야? 나 과자 안 먹는데... ”

 

“ 시끄러워! 먹어야 해! 여자가 정성을 다해 구운 쿠키를 안 먹다니 그런 인간 말종이 어딨어! ”

 

“ 여자가 정성을 다해 구운 쿠키를 꼭 먹어야 하는 거였으면 난 지금쯤 1천 킬로는 나갔을 걸! 춤출 때 그런 거 진짜 많이 받았단 말이야! ”

 

“ 입 닥쳐. 다른 여자도 아니고 렐랴가 구운 거니까 꼭 먹어야 돼! 나한테 신신당부했단 말이야, 너 먹이라고! ”

 

“ 아 귀찮아. 릴리아나 페트로브나가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꼭 먹어야 한다는 거야... 싫은데. 살찌고... ”

 

“ 뭐가 그렇게라니! 그 여자는, 그 여자는 특별하단 말이야! ”

 

“ 뭐가 특별해? ”

 

“ 어, 그러니까... 똑똑하고... 세련되고, 예쁘고... ”

 

“ 나는 어차피 여자랑 잠도 안 자는데 예쁜 게 무슨 소용... 나만 예쁘면 되는데... ”

 

이 왕재수! 당장 먹지 못해!

 

베르닌이 버럭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왕재수는 깜짝 놀라서 급하게 포장지를 뜯었다. 상자를 뒤집어서 윤기가 자르르 도는 초콜릿 쿠키를 식탁 위에 와르르 쏟았다. 베르닌은 쿠키를 하나 집어서 왕재수의 입에 그대로 쑤셔 넣었다.

 

“ 아... 달아. 진짜 달아! ”

 

“ 시끄러워, 더 먹어! ”

 

“ 벌써 두 개나 먹었어. 제발 그만. ”

 

“ 안 돼! 세 개는 더 먹어야 돼! 렐랴의 마음이 담긴 쿠키야! ”

 

“ 나는 렐랴의 마음은 별로 필요가... 으읍... ”

 

왕재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쿠키 다섯 개를 먹었다. 그리고는 괴로워하며 차를 꿀꺽꿀꺽 마셨다. 달아서 미칠 것 같다, 뾰루지가 번지고 더 살쪄서 로만이 또 놀리면 어떻게 하느냐 운운하면서 투덜댔다. 쿠키는 정말 근사해 보였다. 달콤한 초콜릿 냄새와 향긋한 버터 냄새가 감돌았고 크랜베리와 호두가 쏙쏙 박혀 있었다.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남은 쿠키를 다 먹으라고 했다.

 

“ 안 돼. 난 안 먹어. ”

 

“ 왜?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

 

“ 렐랴가 너 먹이라고 했어. 내가 버찌잼 먹었다고 화냈어. ”

 

“ 내가 다 먹었다고 하면 되잖아. ”

 

“ 거짓말하기 싫어. ”

 

“ 그건 뭐야? ”

 

“ 어 이거... 권총 규격 중장기 로드맵... 자정까지 다 만들어야 하는데 손도 못 댔다. 국장이 나 괴롭히려고 준 거야... 아무래도 못 할 거 같아. 일부러 나 엿 먹으라고 준 거라서 어떻게 만들어도 혼낼 거야. ”

 

“ 무슨 뜻이야, 권총 규격 중장기...? ”

 

그래서 베르닌은 대충 설명을 해 주었다. 왕재수는 굉장히 지루해했다. 심지어 중간에 설명을 끊었다.

 

“ 알았어. 하여튼 KGB랑 관계있는 거네. 좀만 기다려. ”

 

그러더니 왕재수가 전화기 쪽으로 갔다. 수화기를 들더니 잠시 후 평소와는 싹 달라진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며 속삭였다.

 

“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전데요~ 루뱐카에서 쓰는 권총 있잖아요... 아, 그런 게 아니고요. ....아니에요, 저 매일매일 너무 외로워요~ 의원님의 손길이 그리워요~ ”

 

베르닌은 속이 울렁거려서 급하게 싱크대 쪽으로 가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연애 전화를 할 거라면 자기 집에서 하지 어째서 여기 내려와서 시외전화요금이 청구될 짓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설거지를 다 하고 나자 왕재수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 야, 됐어. 그거 하지 마. 다 해결됐어. ”

 

“ 뭐가? 어떻게? ”

 

“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 아저씨한테 전화했어. 권총 규격 뭐 그런 거 신경쓰지 마. ”

 

“ 너네 아저씨하고 권총 규격의 중장기 로드맵이 무슨 상관인데! ”

 

“ 우리 아저씨가 KGB 실세잖아. 앞으로 10년 간 38구경으로 통일하고 절대 안 바꾼다고 내일 전국 KGB 지부에 공문 보낸대. 됐지? ”

 

베르닌은 크나큰 존경심과 고마움을 느꼈다. 왕재수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너무나 고마워서 칭찬을 해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왕재수가 기침을 하더니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 너 왜 그래? 뭐 잘못 삼켰어? ”

 

“ 아... 어... 으아... ”

 

왕재수는 제대로 된 말도 못했다. 눈물을 흘리고 기침을 하면서 비틀거리더니 베르닌의 목을 와락 껴안고 매달렸다.

 

“ 야, 왜 이래! 이런 짓은 바이올린 아저씨한테나 가서 해! 가뜩이나 국장이 오해하고 있는 마당에! ”

 

“ 쿠키... 우욱... ”

 

왕재수가 베르닌의 어깨를 반쯤 할퀴면서 머리로 들이받았다. 그러더니 베르닌의 가슴에 무겁게 기대듯 쓰러지고 말았다.

 

“ 야! 왜 이래! 정신 차려! 야! ”

 

혼비백산한 베르닌은 기절한 왕재수를 들쳐 업고 아파트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근처에 있는 레프 스타브로프의 병원으로 데려가 응급실에 뉘었다. 기절한 왕재수는 열이 펄펄 끓었다. 손발도 경련했다. 코피도 쏟았다. 너무 놀란 베르닌이 망연자실해 있는데 스타브로프가 왔다.

 

“ 레프 사벨리예비치! 큰일 났어요! 왕재수가, 아니, 야스민이 이상해요! 고문 후유증 때문에 발작했나 봅니다! 빨리 어떻게 좀 해 주세요! ”

 

“ 이 골치 아픈 자식, 또 술을 마셨군! 마시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는지! 어휴! ”

 

노의사는 왕재수에게 주사를 한방 찔러 넣었다. 지혈도 해주고 얼음찜질도 해 주었다. 잠시 후 왕재수는 훨씬 나아져서 얌전하게 잠이 들었다. 베르닌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 깨기만 해봐, 이 자식 혼내줘야지. 알콜 알레르기가 있는 놈이 왜 술을 마신 거야! 네놈도 그렇지, 애한테 술을 먹이고! ”

 

“ 술이라니요. 그런 적 없는데요. ”

 

“ 뭐가 없어, 딱 보드카 쇼크인데! ”

 

베르닌은 곰곰 생각해보았다. 귓가에 렐랴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거 버찌잼보다 더 공들여 구운 쿠키라고요. 유기농 밀가루로 반죽하고 벨기에에서 공수한 초콜릿을 녹여 넣었어요. 별장에서 직접 증류한 보드카에 크랜베리와 호두를 한 달 동안 절였다고요.

 

 

베르닌은 왕재수를 병원에 뉘어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테이블에 아직도 그대로 쏟아져 있는 초콜릿 쿠키들을 몽땅 먹어 치웠다. 어차피 왕재수는 먹으면 큰일 나니까 더 먹으면 안 되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렐랴가 온 정성을 다해 구운 쿠키니까 방치하면 그녀의 마음을 무시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왕재수가 먹긴 먹었다, 다섯 개나 먹었다. 그러니까 베르닌은 왕재수와 렐랴 양쪽을 위해, 마음의 평화를 위해 남은 초콜릿 쿠키를 전부 먹어치운 것뿐이다.

 

그리고 초콜릿 쿠키는 정말 맛있었다. 버찌잼보다 훨씬 더!

 

 

 

 

 

FIN

201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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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아저씨 로만 코즐로프에 대한 얘기와 본편의 발췌내용에 대한 링크는 2편 말미에..(http://tveye.tistory.com/3437)

 

블로그 내에서 '보르쉬'와 '펠메니'로 검색하면 그 음식들에 대한 사진이나 포스팅을 볼 수 있다 :)

 

이야기는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로 이어진다. 그건 다음주에..

4편에서는 이른바 '프로페셔널'로서 '일'이란 걸 하는 왕재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
Posted by liontamer

 

연말정산 때문에 너무 화딱지 나서, 원래 쓰던 본편도, 서무의 슬픔 시리즈도 잠시 미뤄두고 토끼(나)와 쿠마가 등장하는 짧은 패러디 드라마를 하나 썼다. 연말정산 때문에 망하는 토끼 얘기로, 발레 '지젤'의 오마쥬이다. 연말정산 때문에 짜증내며 친구랑 대화하다 아이디어가 나왔다.

 

제목은 '토끼의 비극', 부제는 '쿠마와 유리지갑의 망령들'이다. 평소 나의 TASTY AND HAPPY 폴더를 보신 분들이라면 쿠마와 케익에 대한 이야기들을 잘 아실듯. 등장인물들은 모두 우리 집 인형들 ㅋㅋ + 내 친구('쥬인'이란 이름으로 등장. 토끼의 옛 룸메이트이자 주인 노릇했었음)

 

발레 '지젤' 오마쥬이므로 드라마 올리기 전에 지젤 줄거리 먼저. 내가 이 얘기에서 필요한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시 정리했음.

 

 

<발레 '지젤' 줄거리>

 

1막

 

춤 잘 추고 아름다운 시골 처녀 지젤은 로이스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로이스는 사실 평민으로 변장한 알브레히트 백작이었다. 둘은 사랑에 빠져 희희낙락한다. 지젤은 ‘사랑한다 - 사랑하지 않는다’ 꽃점을 치는데 꽃잎을 세어보니 후자인 것 같아 절망하지만 이때 알브레히트가 꽃잎을 한 개 떼어버리고는 ‘사랑한다’라는 결과를 보여준다. 둘은 행복하게 춤을 추고 논다. 지젤의 엄마는 심장이 약한 딸을 걱정하며 그렇게 춤추기를 좋아하다 남자에게 농락당해 죽으면 밤마다 모여들어 춤을 추며 남자를 꼬여 죽이는 윌리 유령이 된다고 경고한다.

 

시골 마을에 귀족들이 사냥 행차를 온다. 지젤 엄마가 귀족들을 집으로 모신다. 지젤은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 바틸드 앞에서 춤을 추고 목걸이도 상으로 받는다.

 

지젤을 짝사랑하는 산지기 힐라리온은 아무래도 수상해서 알브레히트의 뒤를 밟아 그의 망토와 칼을 찾아내고 그가 귀족임을 알아낸다. 그는 지젤에게 이 사실을 폭로하지만 지젤은 알브레히트가 ‘아니야 아니야~’라고 말하자 사랑의 콩깍지 때문에 그 말을 믿는다.

 

화가 난 힐라리온은 사냥 나온 귀족들을 호출, 알고 보니 바틸드는 알브레히트의 약혼녀였다. 충격을 받은 지젤은 광란하다 심장마비로 죽는다. 알브레히트는 힐라리온을 비난하다 절망하며 퇴장한다.

 

2막

 

한밤중 묘지. 남자들에게 배신당해 죽은 여자들이 윌리 유령들이 되어 모여든다. 이들의 여왕은 매정하고 아름다운 미르타. 오늘은 새 윌리가 오는 날이다. 미르타가 묘지에서 지젤을 소환한다. 지젤은 여왕의 명령에 따라 춤을 춘다.

 

알브레히트가 참회하며 묘지를 찾아온다. 지젤의 무덤에 꽃을 바치고 뉘우치며 고뇌하는데 지젤의 유령이 나타나 그를 품어준다.

 

그러나 이때 힐라리온이 윌리들에게 휩싸여 나타난다.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미르타는 외면하고 힐라리온은 결국 윌리들에게 희생당한다.

 

다음 차례로 알브레히트가 등장한다. 힐라리온과 같은 운명을 겪을 찰나 지젤이 나타나 그를 감싸고 용서를 구한다. 지젤은 그를 구하기 위해 계속해서 춤을 춘다. 미르타는 알브레히트를 용서하지 않으려고 하고 알브레히트도 미친 듯이 춤을 추며 파멸의 위기로 접어들지만 그때 닭이 울고 새벽이 온다. 윌리들은 사라지고 지젤은 사랑하는 남자를 구원한 후 천천히 무덤 너머로 사라진다. 알브레히트는 참회하며 무릎 꿇는다.

 

...

 

그럼 이제 본격적인 토끼의 비극~

 

** 이 글을 무단 복제, 전재, 배포하지 말아주세요 **

 

 

** 이 글을 아이디어를 내준 친구 '쥬인'과 그간 쿠마를 아주 이뻐해주신 '치즈홍차님'께 바칩니다 **

 

 

 

토끼의 비극

- 부제 : 쿠마와 유리지갑의 망령들 -

(발레 ‘지젤’에 대한 오마쥬)

 

 

 

 

<등장인물>

 

 

토끼(지젤)

 

쿠마(알브레히트)

쥬인(토끼의 주인, 지젤 엄마)

과모츠카(힐라리온)

용감한 조지, 마샤, 타마라 등등(지젤 친구들)

국세청(알브레히트 약혼녀 바틸드)

여왕과 유리지갑들(미르타, 윌리들)

 

 

 

 

<제 1막>

 

(막이 오르면 조그만 오피스텔 소파에 토끼가 앉아 쿠마를 무릎에 앉혀놓고 놀고 있다. 주변에는 마샤, 타마라 등 마트료슈카들과 용감한 조지를 비롯한 영 플레이모빌 등이 늘어서 있지만 토끼의 관심은 오로지 쿠마에게 쏠려 있다. 찻잔에 차를 따라주고 케익을 차려준다. 쿠마의 귀여움에 토끼는 정신이 혼미하지만 어딘가 근심스러운 표정이다.)

 

 

쿠마 : 토끼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나만 봐야지~

 

토끼 : 쿠마야, 연말정산 시즌이 돌아왔는데 이번에 바뀐 게 많아서 돈을 토해내야 할지도 모른대. 이전까지는 환급을 받아서 2월에 좀 숨통이 트여서 너한테 맛있는 케익도 더 많이 사줬잖아. 근데 토해내게 되면 너와 이렇게 행복한 티타임을 갖는 것도 못하게 될지도 몰라. 돈을 토해내면 난 파산하게 되고 그럼 케익을 사주지 못할 거야. 그럼 쿠마는 날 버릴지도 몰라 ㅠ

 

쿠마 : 토끼야, 걱정 마. 너는 부양가족이 많으니까 공제를 많이 받을 수 있잖아. 나도 있고 용감한 조지와 그 외 이름 없는 놈들, 마샤, 타마라, 로조치카가 있잖아. 게다가 마샤랑 타마라랑 로조치카는 뱃속에 새끼들도 엄청 많잖아.

 

(토끼의 부양가족들)

 

 

 

 

 

 

토끼 : 그렇지만 정부에서 제도를 바꿨대. 바뀐 거 읽어봐도 하나도 모르겠어. 혹시라도 토해내면 어쩌지.

 

(토끼, 갑자기 옆에 있던 꽃을 한 송이 뽑아내 꽃잎을 한 장 한 장 세어보기 시작한다)

 

 

 

토끼 : (꽃잎을 세면서) 환급된다, 토한다, 환급된다, 토한다, 환급된다.... 토한다!!! 으흑...

 

(토끼 : OTL 포즈가 되어 극도로 절망한다)

 

 

 

쿠마 : (꽃잎을 잽싸게 한 장 뜯어낸 후 토끼에게 꽃을 보여주면서 하나하나 센다) 환급된다, 토한다, 환급된다, 토한다, 환급된다!

 

토끼 : (반색한다) 환급되는구나! 꺄하하!!

 

(신난 토끼는 쿠마의 손을 잡고 소파에서 팔짝팔짝 뛰더니 그 길로 외출, 온 동네 케익 가게를 순회하며 온갖 종류의 크림과 딸기가 얹힌 케익들을 사들인다. 쿠마와 함께 마음껏 먹으며 기뻐한다)

 

 

 

 

(이 광경을 과모츠카가 지켜보고 있다.)

 

 

 

과모츠카 : (독백) 난 무려 괌에서 온 예쁜 애인데 토끼는 맨날 저 미련하고 식탐 많은 곰팅이한테만 정신이 팔려서 날 봐주지도 않아. 분명 저 곰팅이 때문에 토끼가 망할 거야.

 

        

 

(모두가 과모츠카를 무시한다.)

 

(이때 토끼가 쿠마와 함께 케익 상자들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온다. 마침 놀러온 쥬인이 토끼를 타이른다)

 

  (사진 제공 : 쥬인)

 

쥬인 : 이 철없는 토끼야, 케익 좀 작작 사들여. 곰한테 오냐오냐하면서 자꾸자꾸 케익을 사 먹이다가는 연말정산 때 파산하고 유리지갑이 된다!

 

토끼 : 아니야, 나 환급받아. 여태까지 꼬박꼬박 환급받았어.

 

쥬인 : 이번에 연말정산 제도가 바뀌었단 말이야. 잘못하면 싱글세 폭탄을 맞게 될지도 모르니 낭비 좀 그만해. 저 숲속에 파산해서 죽은 유리지갑들 많아.

 

토끼 : 걱정 마 쥬인. 난 부양가족도 많고 신용카드, 체크카드, 현금영수증을 잘 섞어서 써왔고 심지어 올해는 월세까지 추가로 생기고 기부금도 더 냈는걸. 난 안 토할 거야~

 

쥬인 : 제발 그러길 빈다. 그래도 쿠마한테 너무 현혹되지 마.

 

(토끼와 쿠마, 아랑곳하지 않고 케익을 퍼먹으며 신나게 논다. 이때 사랑받지 못해 화가 난 과모츠카가 불쑥 등장한다)

 

 

 

과모츠카 : (쿠마를 가리키며) 토끼야! 넌 저 곰팅이에게 속고 있어! 저놈은 널 현혹해서 파멸로 이끌고 있는 거야! 저건 식충이 곰팅이일 뿐 부양가족이 아니란 말야! 넌 이러다 다 토해내고 파산할 거야!

 

토끼 : (깜짝 놀람) 그게 무슨 소리야!

 

 

 

쿠마 : (과모츠카에게 주먹질 하는 시늉, 토끼에겐 귀여운 눈망울 어택) 토끼야 저런 찌질한 애 말 듣지 마. 괜히 우리 질투하는 거야. 넌 환급받을 거야. 아까 꽃점도 쳤잖아. 부양가족도 많고...

 

토끼 : 그렇지? 맞아, 쿠마가 맞아. 과모츠카 넌 왜 그러니!

 

과모츠카 : (분노) 뭐야? 좋아,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지. 나와라 국세청!!

 

(과모츠카의 소환에 국세청의 화신이 등장한다. 연말정산 매뉴얼과 기타 잡다한 수첩을 들고 있다. 모두가 깜짝 놀란다)

 

 

 

국세청 : 에, 그러니까.. 토끼. 당신은 월급쟁이에 1인가구로군요. 토해낼 게 좀 많겠는데.

 

토끼 : 엥? 그게 무슨 소리에요. 난 부양가족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여기 우리 쿠마부터 시작해 마샤(새끼 열 마리), 타마라(새끼 다섯 마리), 로조치카(새끼 스무 마리), 여기 용감한 조지, 나머지 애들 넷... 부양가족 공제만 받아도... 그리고 없었던 월세도 추가됐고 기부금도 전보다 훨씬 많이 냈는걸요.

 

 

 

 

국세청 : 어휴, 어딜 가나 이놈의 월급쟁이들이란. 여기 바뀐 산식과 매뉴얼을 보란 말이오! 게다가 저런 곰팅이와 나무인형들, 플라스틱 인형들은 부양가족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법령이 있소! 토끼 당신은 1인가구란 말이오! 이번에 싱글세가 생긴 거 모르시오? 공제 범위도 대폭 축소됐소! 월세와 기부금 그까짓 것 추가해봤자 복구는 불가능하오! 자, 여기 당신의 가상 연말정산 결과가 있소! 엄청 토해 내는구만. 두 눈으로 확인하시오!

 

(국세청, 가상 연말정산 결과가 적힌 쪽지를 토끼의 눈앞에 들이댄다. 토끼, 쪽지에 적힌 숫자를 보고 경악한다)

 

 

 

 

토끼 : (횡설수설한다) 마이너스여야 환급인데 왜 마이너스가 안 보이지? 왜 음수가 아니라 양수지? 응? 환급받아야 하는데? 응? 나 왜 1인가구지? 응? 이거 환급받는 거지? 오타 난 거지? 어? 나 토하나? 나 토하는구나! 어, 나 파산하나? 꺄하하 나 파산하는구나!

 

(토끼, 절망해 귀를 휘두르고 팔짝팔짝 뛰며 광란한다. 쥬인이 토끼를 껴안고 위로한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토끼, 충격으로 귀를 접고 쓰러져 죽는다. 모두 충격에 빠진다)

 

쿠마 : 헉! 토끼야아!!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과모츠카!

 

과모츠카 : 헛소리 마랏! 다 너 때문이야! 네놈이 토끼를 현혹해서 자꾸 케익을 사게 만들고 결국 파산으로 몰고 간 거야! 귀여움으로 토끼를 파멸시켰어!

 

쿠마 : 아아악!!!

 

(쿠마, 오열한다. 막이 내린다)

 

 

 

<제 2막>

 

(숲 속 묘지. 토끼의 비석이 서 있다. 과모츠카가 슬퍼하며 나타난다)

 

 

 

과모츠카 : 흑흑, 불쌍한 토끼. 곰한테 속아서 파산하고 죽었어. 극락왕생하거라... (꽃을 바치고 퇴장한다)

 

(텅 빈 숲속에 젊은 남녀의 유령들이 나타난다. 남자는 넥타이를 맨 경우도 많다. 이들은 연말정산 결과 싱글세 폭탄을 맞아 돈을 토해낸 충격으로 파산하고 사망한 유리지갑의 망령들이다. 모두들 한 손에는 깨진 유리지갑을 들고 있다. 이들을 이끄는 것은 유리지갑 여왕이다)

 

   

 

유리지갑 여왕 : 오늘 토끼 한 마리가 우리 대열에 합류하였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부양하던 귀여운 인형들의 배신으로 1인가구가 되어 싱글세 폭탄을 맞고 죽었다고 한다. 그럼 우리의 일원인 토끼를 소환하도록 하겠다. 토끼야 나오너라~

 

(비석 뒤에서 깨진 유리지갑을 든 토끼가 귀를 축 늘어뜨리고 불쌍한 표정으로 등장한다) 

 

 

유리지갑 여왕 : 토끼, 너도 이제부터 유리지갑이 되었다. 우리를 파멸시킨 원흉인 귀여운 인형들이 묘지에 찾아오면 다 같이 유리지갑으로 두들겨 패서 응징하도록!

 

토끼 : 근데 우리를 파멸시킨 원흉은 귀여운 인형들이 아니라 국세청...

 

유리지갑 여왕 : 국세청이란 놈은 원체 무시무시한 놈이라 유리지갑으로 아무리 패도 끄떡없으니 우리 힘으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인형들을 먼저 처치하는 것이야! 시범을 보여주마. 얘들아, 가서 하나 잡아 오너라~!

 

(유리지갑들, 여왕과 함께 퇴장. 토끼, 두리번거리다 일단 퇴장)

 

(쿠마, 담요 드레스를 두르고 한손에 케익 상자를 들고 침통한 표정으로 등장한다. 토끼의 비석 앞에 케익을 바친다)

 

 

 

쿠마 : 흑흑, 토끼야. 잘못했어. 케익은 맛있었는데... 놀 때는 좋았는데. 이제 토끼 없어. 아무도 나한테 케익 안 사줘 ㅠㅠ 토끼야 보고 싶어. 토끼야아아!

 

(토끼가 깡충깡충 뛰어와 쿠마를 꼭 안아준다. 함께 케익을 먹는다)

 

 

 

 

토끼 : (케익을 다 먹고 나서) 쿠마야, 여기는 위험한 곳이니 어서 돌아가도록 해. 새 주인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 해.

 

쿠마 : 싫어 싫어, 난 토끼가 좋아. 토끼가 주인이어야지! 다른 주인들은 토끼처럼 케익 많이 안 사줄 거야!

 

토끼 : 아이 참 쿠마야. 나도 너랑 같이 살고 싶지만 난 유리지갑들과 같이 살게 됐어. 너 여깄으면 큰일나. 얼른 가.

 

 

 

쿠마 : 잉잉, 토끼야. 잉잉...

 

토끼 : 앗, 유리지갑들이 온다! 숨어!

 

(토끼와 쿠마, 함께 숨는다. 이때 유리지갑들이 과모츠카를 끌고 우르르 몰려온다. 유리지갑 여왕이 준엄하게 가운데로 나선다)

 

 

 

 

유리지갑 여왕 : 이 요망한 인형을 매우 쳐라!

 

과모츠카 : 으앙, 내가 무슨 죄가 있다는 거야! 토끼를 파멸시킨 건 내가 아니라 쿠마란 말이야!

 

유리지갑 여왕 : 시끄럽다! 얘들아 응징해라!!

 

(유리지갑 망령들, 한 손에 든 깨진 유리지갑으로 과모츠카를 마구 때린다. 과모츠카는 만신창이가 되어 빈사 상태로 끌려나간다)

 

 

유리지갑 여왕 : 그 다음 차례!!

 

(유리지갑 망령들이 쿠마를 끌고 우르르 몰려나온다. 쿠마, 겁에 질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여왕을 보고 실낱같은 희망으로 속삭이듯 묻는다)

 

 

 

쿠마 : 케익 사주나?

 

유리지갑 여왕 : 뭣이! 저것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얘들아 저 미련한 곰팅이를 응징해라!!

 

(유리지갑 망령들이 쿠마를 둘러싸고 깨진 유리지갑으로 두들겨 패려는 찰나 토끼가 깡충깡충 뛰어온다. 쿠마를 꼭 껴안고 방어한다)

 

 

 

토끼 : 우리 쿠마 때리지 마! 그래도 내 새끼...

 

유리지갑 여왕 : 아니, 저 토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저놈 때문에 네가 파멸한 것이야! 저 곰팅이는 두들겨패야 돼!

 

토끼 : 아니야! 우리 쿠마는 귀여우니까 괜찮아! 국세청이 나빠! 정부가 나빠! 증세 없는 복지라고 뻥친 놈들이 나빠! 스리슬쩍 싱글세 만들어놓고 부자감세에 기업만 싸고 도는 놈들이 나빠! 만국의 유리지갑들아 단결하라, 유리지갑들아 봉기하라~

 

유리지갑들 : 그래그래 봉기하자~

 

유리지갑 여왕 : (뭔가 말렸다는 느낌이지만) 그래그래 봉기하자~ 가자 그놈들 응징하러!!

 

(유리지갑 망령들과 여왕, 다 함께 깨진 유리지갑을 휘두르며 숲을 나가서 정부 쪽으로 행진해 간다. 토끼는 쿠마에게 간다)

 

토끼 : 쿠마야, 나도 이제 가봐야 돼. 우리 쿠마 나 없어도 꿋꿋하게 잘 살고 새 주인 찾아서 예쁨 받고 케익 많이 먹으렴!

 

쿠마 : 아앙, 토끼야아...

 

토끼 : 쿠마야 잘 있어!

 

(토끼, 유리지갑들이 행진해 간 쪽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쿠마, 하염없이 토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앞발을 뻗어 절규하며 케익 상자 위에 엎어진다)

 

 

쿠마 : 토끼야아!!!!! 케익 ㅠㅠ

 

(막이 내린다)

 

---

 

** 중간의 쥬인 사진은 친구인 쥬인이 자기 얼굴만 없다면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제공함

** DANCE 폴더에서 '지젤'로 검색하면 이 발레 영상이나 리뷰, 사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
Posted by liontamer
2015. 1. 22. 09:55

휙 지나가는 마차 russia2015. 1. 22. 09:55

 

 

역시 작년 7월, 페테르부르크.

해군성 공원 근처.

마차가 휙 지나가서 사진은 흔들렸다만 느낌이 맘에 들어서 지우지 않고 놔뒀다.

 

보기엔 좋은데.. 타는 사람들도 좋겠다만.. 말은 힘들 거 같고.. (항상 짐승에게 이입함. 토끼라서 그런가 ㅠ)

이때 내가 머물던 호텔이 이삭 성당 맞은편에 있었는데 백야 시즌이라 밤 늦게까지 저렇게 관광 마차가 다녔다. 그래서 내내 따가닥따가닥 말발굽 소리도 들리고.. 가뜩이나 백야라 두터운 커튼 사이로 빛도 들어오는데.. 그래서 잠을 자주 설쳤다. 그래도 그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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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1. 21. 21:31

잘 보면 보인다 russia2015. 1. 21. 21:31

 

 

강아지 :)

 

작년 7월, 상트 페테르부르크. 카잔 성당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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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앞서 올린 0편, 1편에 이어.. 서무의 슬픔 시리즈 에피소드 2.

과연 가엾은 직장인이자 집사 다닐 베르닌은 이 험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 에피소드 2에 나오는 정치국이니 국방위원이니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상의 인물들임. 안드로포프만 빼고)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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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

 

서무의 슬픔

- 당직실의 귀신 -

   

 

 

블라지미르 스페호프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연방 보안위원회 국장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후 가브릴로프 KGB 지부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연방 회의에는 최근 2~3년 간 정치국의 음모에 가담하느라 바빠서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던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돌연 나타났고 각 지역 국장들을 피눈물이 나도록 질책했으며 특히 스페호프를 탈탈 털었다고 한다.

 

스비제르스키는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KGB 소속이 아니었지만 안드로포프 총국장 뒤에 있는 진짜 실세였으므로 모두들 꼼짝없이 당했다. 그것까지는 알겠지만 대체 스페호프가 왜 털렸는지 베르닌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곳은 촌구석이라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동네이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면서 그 말을 하자 왕재수가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 그건 말이지, 너네 국장이 크라베츠 라인이라서 그래. ”

“ 크라베츠가 누구야? ”

“ 이번에 숙청당해서 시베리아로 좌천된 국방위원. ”

“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

“ 어, 그 사람이 날 재판에 걸었거든. 감옥도 보내고 막 고문도 하고. 나 엄청 아팠어. 그래서 우리 아저씨가 열 받아서 그런 거야. 스페호프는 그 사람 측근이었거든. ”

“ 아저씨? 스비제르스키랑 너랑 친척이야? ”

“ 아휴, 침대를 같이 쓰는 거라고. 아참, 너는 그렇게 말하면 이해 못하지. 성적 교합을... ”

“ 야, 그만해! 그럼 스비제르스키가 크라베츠를 좌천시켜서.. ”

아니야, 이 아저씨는 무조건 죽이려고 했는데 다른 아저씨가 끼어들어서 좌천시켰어. 그 아저씨는 레닌그라드에 있는데, 물론 친척은 아니고, 성적... ”

 

베르닌은 무가당 초콜릿 캔디를 왕재수의 입에 쑤셔 넣어 그 낯 뜨거운 이야기를 가로막았다. 어쨌든 상황을 거의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고난이 전부 왕재수 때문이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스페호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직원들을 들들 볶았고 어마어마한 업무 지시를 하달했다. 중력과 비례하는 관료제 법칙에 따라 그 모든 업무들은 서무이며 말단인 베르닌에게 집중되었다. 주로 아무 짝에 쓸모없는 일들이었는데 어차피 베르닌이 하는 일들은 다 그런 종류였으니 놀라울 것도 없었다. 왕재수의 국장 면담 덕에 한동안 1시간 늦게 출근, 조기 퇴근하던 기쁨도 국장이 모스크바에 다녀온 후 완전히 사라졌다. 하긴 그 이상한 면담 때문에 국장에게는 억울하게도 일종의 변태 노예 같은 것으로 각인되었으니 늦게 출근 조기 퇴근도 그리 반갑지 않았지만.

 

베르닌은 너무 짜증이 났지만 왕재수에게 이게 다 너 때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또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왕재수는 처음 생각만큼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았다.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한테는 애교도 부렸고 나름대로 친절도 베풀었다. 문제는 그게 인간의 친절이라기보다는 고양이의 보은에 가깝다는 것이다. 고양이는 모든 것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짐승인데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먹이를 바친답시고 죽은 쥐를 물어다 놓지 않는가.

 

짜증이 북받쳐서 베르닌은 사무실 뒤뜰에 종종 출몰하는 못돼먹은 검정 도둑고양이를 왕재수의 이름을 따서 미셴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돌을 던지고 두들겨 패주고 싶었지만 할퀴며 달려들까봐 꾹 참았다. 오히려 가끔 소시지 조각이나 청어 꼬리를 던져주었다. 어쩐지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게 불쌍하고 자주 보다 보니 얼굴도 귀여운 것 같아서. 그러다가 검정고양이가 보은을 한답시고 정말로 죽은 쥐와 참새를 물어다 놔서 기겁을 했다.

 

 

*   *   *

 

 

그날도 베르닌은 혼자 남아 야근을 하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 째 새벽에 귀가하는 중이었다. 일이 너무 많아서 2시간 조기 출근에 자정 이후 귀가하게 되어 아침에 태워다 줄 수도 없고 저녁에 차 우려 주러 갈 수도 없게 됐다고 통보하자 왕재수는 전처럼 화내거나 원망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사태를 받아들였다.

 

“ 뭐 할 수 없지. 알았어. ”

“ 뭐야, 왜 그렇게 침착해! 억지 안 부려? 아침에 어떻게 출근하려고. 너 운전 엉망이잖아. 극장까지 걸어가려고? ”

“ 아니, 로만이 태워주기로 했어. 아침에 너 안 오면 그냥 이제부터 그 사람 집에서 자려고. 차도 그냥 그 아저씨한테 우려달래지 뭐. 틱틱거려서 좀 짜증은 나지만. ”

“ 그 멀대같은 바이올리니스트? 아저씨라고 부르는 걸 보니 혹시... ”

“ 아, 우리 같이 잔지 좀 됐어. 그러니까 성적... ”

“ 그만해. 알았어. 잘됐구나. 이제 나 괴롭히지 마. ”

 

베르닌은 어쩐지 기분이 나빠져서 도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귀찮았던 거 잘된 일인데 왜 섭섭한지 알 수가 없었다. 화가 나서 검정고양이에게 돌을 던졌다가 미셴카가 발톱을 드러내며 덤비는 통에 옷자락만 된통 찢어졌다.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혼자 앉아 아무리 눈이 빠져라 일을 해도 도무지 줄어들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지만 본 업무는커녕 국장이 가외로 던져준 수많은 정리사항들에 선배들이 떠넘긴 일들까지 산더미같이 쌓여 있어 며칠 밤을 더 새도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어깨도 뻐근하고 속도 울렁거렸다. 마침내 베르닌은 통조림 수프라도 까서 먹으려고 당직실로 갔다. 당직실은 비어 있었다. 원래 모든 직원들이 순서대로 당직을 서게 되어 있었지만 선배들은 어차피 베르닌이 매일 야근을 하니까 굳이 남을 필요 없다면서 다들 집에 가 버렸다.

 

찬장에서 깡통을 꺼내 장부에 번호와 이름, 숫자를 적고 야근 특식용 카테고리에 체크를 한 후 베르닌은 따개로 뚜껑을 땄다. 막 수프를 후루룩 마시려는데 뭔가가 어깨를 꽉 잡아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요사스러운 냉기가 감돌았다. 기분이 좋지 않아 뒤를 돌아보려는데 퍽 소리가 나면서 천정의 등이 꺼졌다.

 

전구가 나갔는지 두꺼비집 문제인지 알 수가 없어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벽 쪽으로 가는데 뭔가가 스르르 나타나 베르닌의 얼굴을 철썩철썩 때렸다. 너무 놀라서 베르닌이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나자 그것의 형체가 보였다. 산발한 머리에 희끄무레한 얼굴의 기다란 남자가 서 있었다. 사실 서 있다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갈가리 찢긴 죄수복을 걸쳤는데 드러난 몸 여기저기에는 하얀 뼈가 그대로 불거져 있고 살가죽이 뜯겨 나가고 피멍과 고름이 가득했다. 무릎 아래로는 아무 것도 없었고 쇠사슬 족쇄만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한 마디로 귀신이었다. 눈알이 빠져 달아난 눈구멍에서 피와 진물을 줄줄 흘리며 귀신이 음산하게 흐느꼈다.

 

“ 내 다리 내놔~ 이 개자식들아. 내 다리 내놔~ ”

 

베르닌은 기절초풍했다. 통조림 깡통을 내던지며 비명을 질렀다.

 

“ 으악, 저리가! ”

“ 너네들이 나 고문해서 다리도 자르고 가죽도 벗기고 죽였잖아! 무릎 시려! 나 꼴 보기 싫다고 지옥에서도 안 받아줘. 다리 내놔! 너 가죽 나 줘, 눈알도 나 줘~ ”

“ 나 아니야, 내가 안 그랬어! 으아악, 살려줘요!! ”

“ 줄 때까지 맨날맨날 올 거야! ”

 

베르닌은 너무 무서워서 몸부림치며 미친 듯이 도망쳐 나왔다. 창 너머로 보니 당직실 어둠 속으로 하얗고 시퍼런 불빛이 번쩍번쩍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베르닌은 그 길로 주차장으로 달려가 차에 올라탔다. 공포 때문인지 시동도 잘 걸리지 않았다. 조바심에 계속 시동을 걸고 있는데 건물 바깥으로 하얗고 시퍼런 불빛이 둥둥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다리 없는 귀신이 차 앞으로 불쑥 나타나 창문을 두들겼다.

 

“ 다리 내놔~ 가죽 내놔~ 눈알 내놔~ ”

“ 아아악! ”

 

베르닌은 미친 듯이 엑셀을 밟았다. 레이서처럼 차를 몰아 그 무시무시한 곳을 빠져나갔다. 귀신은 KGB 바깥으로는 나올 수 없는지 정문 울타리까지 쫓아 나와 회오리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계속해서 끔찍한 몰골로 다리를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    *    *

 

 

두려움과 충격으로 반쯤 넋이 나간 베르닌은 미친 듯이 차를 몰았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집이 아니라 극장 앞에 와 있었다. 왜 거기로 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창 너머로 불빛이 보였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후들후들 떨리는 무릎을 붙잡고 기어가듯 극장으로 들어갔다.

 

“ 어, 너 웬일이야? ”

 

하필 남아 있던 것은 왕재수였다. 무대 의상들과 각종 장신구들을 감독실 여기저기에 벌려놓고 이상한 스케치와 메모가 널려 있는 노트를 읽던 중이었다. 매일 빈둥빈둥 노는 줄 알았는데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모습을 보자 놀라울 지경이었다.

 

“ 어, 난 그냥... ”

“ 나 데리러 왔어? 아이 참, 안 그래도 되는데. ”

“ 아니 그게 아니고... ”

“ 잘됐다, 나 차 좀 우려 줘. 로만은 티백만 담갔다 빼주고 되게 달달한 잼만 퍼줘서 별로야. 네가 해주는 게 제일 맛있어~ ”

“ 야, 내가 무슨 네 종이냐? 농노 해방된 지가 언젠데.. 흐흑... ”

 

베르닌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면서 귀신 생각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베르닌이 울자 왕재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 너 또 왜 울어? 진짜 촌스럽다니까. 국장이 또 뭐라 했어? ”

“ 아니야, 그게 아니야... 당직실... 귀신... 어헝, 다리 주기 싫어. 가죽 주기 싫어. 내 눈알... 엉엉... ”

 

왕재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베르닌이 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참 후에야 진정된 베르닌은 왕재수가 준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과 콧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다. 왕재수는 혀를 찼다.

 

“ 바보야. 뭘 그런 걸 가지고 울고 그래, 촌스럽게. ”

“ 그럴 줄 알았어! 귀신 따위 안 믿을 줄 알았다고. 나도 안 믿었어. 근데 있는 걸 어떡하란 말야! 지하에 고문실도 있고 스탈린 때 하도 많이 고문해 죽여대서 귀신 있다는 소문은 옛날부터 들었어. 근데 왜 하필 나한테 나타나서... ”

“ 나 귀신 믿어. 옛날부터 보고 싶었는데. ”

“ 허세부리지 마! 아아 이제 어쩌지... 내일까지 끝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다 놔두고 와버렸어. 다리랑 가죽이랑 눈알 줄 때까지 계속 나타난대. 야근은 계속 해야 하고... 큰일났네. 너무 무서워... 그렇다고 일을 안 하면 국장이 날 죽이겠지. 아아... 내 팔자야... ”

 

베르닌이 푸념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갑자기 일어나 재킷을 입고 스카프를 맸다. 그리고는 바닥에 깔려 있던 망토에 온갖 잡동사니를 밀어 넣고 주섬주섬 보따리를 싸더니 명령했다.

 

“ 야, 이거 들어. ”

“ 싫어! 국장이 시킨 일도 모자라서 너네 물건까지 옮기란 말이야? 너 정말 양심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아무리 싸가지 없다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날 부려먹어야겠어? ”

“ 툴툴대지 말고 빨리 들어. 난 무거운 거 함부로 들면 안 돼, 근육이 미워진단 말이야. ”

베르닌은 보따리를 짊어졌다. 엄청나게 무거워서 허리가 휠 것 같았다.

 

“ 어디로 가져가면 되는데? 창고? ”

“ 아니, 네 차에 실어. ”

“ 나 너 안 태워다 줄 거야! 짐까지 옮기라고... ”

“ 우리 집 가는 거 아니야. 너네 사무실 가는 거지. ”

“ 왜!!! ”

“ 귀신 때문에 무섭다며. 내가 쫓아줄게. ”

“ 네가 어떻게! ”

“ 하여튼 가자. ”

“ 싫어 싫어... 다시 가기 싫어. 귀신이 내 가죽 벗기고 다리 잘라갈 거야. ”

“ 아이 참, 그럼 넌 그냥 차 안에 있어. 나만 들어갔다 오면 되지 뭐. ”

 

 

...

 

 

베르닌은 왕재수와 함께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건물 밖에서 보니 창 너머로 아직도 하얗고 퍼런 불빛이 번쩍번쩍했다.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풀려서 베르닌이 주저앉자 왕재수가 한숨을 쉬면서 어깨를 토닥거렸다.

 

“ 겁도 진짜 많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

 

그리고는 왕재수가 보따리를 짊어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베르닌은 잠시 공포로 멍해져서 차 안에 앉아 있다가 문득 가책이 들었다.

 

‘ 저렇게 가냘픈 아이에게 저 무거운 걸 혼자 들고 가게 하다니... 근육이 미워질 텐데... 아파트에서 바퀴벌레만 봐도 소리치면서 달려오던 놈인데 그런 화초 같은 자식을 귀신한테 내던지다니... ’

 

너무너무 가기 싫었지만 왕재수가 걱정이 되기도 했고 고마운 마음에 각종 복잡한 감정이 들어서 베르닌은 용기를 내어 당직실로 가보기로 했다. 무서운 마음에 나뭇가지를 꺾어 대충 십자로 엮은 후 주머니에 꽂았다.

 

 

당직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기운을 짜내 문틈으로 안을 엿보자 왕재수와 귀신이 소파에 앉아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심지어 귀신은 왕재수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훌쩍훌쩍 울기까지 했다.

 

“ 그랬구나, 그놈들이 다리도 자르고 눈알도 파먹고 가죽도 벗기고 내장도 도려냈구나. 엄청 미워져서 슬펐겠다. 남자는 외모가 중요한데. ”

“ 응응, 나 원래 되게 잘생겼었는데. 여자들이 줄섰는데 고문당해서 미워지고 추해졌어. 그래서 죽었는데 지옥에 갔더니 못생겼다고 안 받아줘. 지옥 물을 흐린다고... 흑흑, 그래서 구천을 떠돌아다녀. 강물에 비친 내 얼굴 보고 나도 놀라, 엉엉. 다리도 없고 눈깔도 없고 살가죽도 없어. ”

“ 괜찮아 괜찮아. 다시 예쁘게 해줄게. 이리 와. ”

 

그러더니 왕재수가 보따리를 풀고는 각종 무대 의상을 꺼내 귀신에게 입혀주기 시작했다. 곱슬곱슬한 금발 가발을 씌우고 튜닉을 입힌 후 오페라 황제용 구슬 박힌 기다란 벨벳 가운을 입혀서 다리가 나오지 않도록 잘 가려주었다. 얼굴에도 분장용 파우더를 발라 핏자국을 감춰주고 눈구멍에 유리눈알을 박아주고 안경도 씌워 주었다. 마지막으로 망토를 둘러주자 귀신은 아주 흡족해 했다.

 

“ 와, 나 엄청 멋있는 것 같아! 이제 지옥 가면 문 열어주겠지? ”

“ 그럼. 서로 데이트하자고 줄 설 걸. ”

“ 고마워, 이쁜아. 얼굴도 고운데 마음은 더 곱네. 잊지 않을게. ”

“ 이제 다시는 여기 오지 마. 알았지? ”

“ 그치만 예쁘고 착한 너 보러 다시 오고 싶어. ”

“ 나 여기 안 살아. 여기 오면 또 나쁜 놈들이 고문하려고 할지도 몰라. 그 옷이랑 안경이랑 눈알이랑 다 뺏아 갈지도 몰라. 절대 오지 마. ”

“ 아까 왔던 애도 귀엽던데... 눈도 단추 같고... ”

“ 걔도 여기 안 살아! 절대 오지 마! 망토 뺏기고 싶니? ”

“ 안 돼, 간신히 다시 잘생겨졌는데... 다시는 안 와야지. 고마워 이쁜아. 복 받을 거야~ ”

 

귀신이 퍽 소리를 내며 허공 어딘가로 사라졌다. 베르닌은 크나큰 감명을 받았다. 달려 들어가 왕재수를 와락 껴안고 환호했다.

 

“ 와, 너 진짜 용감하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내가 널 여태 오해하고 있었어. 얼굴만 믿고 아무 짝에 쓸모없이 놀기만 하는 애라고... 미안해. ”

“ 흠, 뭘 이런 걸 가지고... 앞으로 또 나타나면 나 불러. 근데 아마 안 올 거야. 다른 귀신들이랑 데이트하러 다니느라 바빠서. ”

 

갑자기 베르닌은 왕재수가 가슴에 폭 안겨서 기대어 있는 것을 깨닫고 당황해서 머뭇머뭇 포옹을 풀고는 뒤로 물러났다.

 

“ 어, 저기... 그러니까. 나 시동 걸어 놓을 테니 내려와. ”

 

그리고는 왕재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후다닥 뛰어나갔다. 괜히 오해를 사서 또 이상한 소문이 퍼질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거라고는 침대와 성적 교... 밖에 없는 놈이니 항상 헛소문을 조심해야 했다. 더 이상 저녁에도 하고 밤에도 하고 아침에도 해주는 정력적 노예라는 루머를 듣고 싶지 않았다.

 

 

차에 시동을 걸고 기다리는데 건물 안에서 무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악!

 

베르닌은 깜짝 놀라 미친 듯이 달려갔다. 훨씬 더 다급하고 공포에 찬 비명이 두어 번 더 울리더니 뚝 끊겼다. 왕재수의 목소리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너무 놀란 베르닌이 당직실로 뛰어들었을 때 검은 그림자가 바람처럼 휙 지나쳐갔다. 하지만 시선을 돌릴 겨를도 없었다. 왕재수가 바닥에 기절해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왕재수의 얼굴이 너무 새하얗게 질린데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것 같아서 베르닌은 공포에 질렸다.

 

“ 정신 차려! 너 왜 그래? 그놈이 다시 온 거야? 너 공격한 거야? ”

 

뺨을 찰싹찰싹 때리자 왕재수가 잠깐 눈을 떴다. 두려움에 질려 축구공처럼 커진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며 횡설수설했다.

 

“ 버, 벌레... 쥐... 아악! ”

 

주변을 둘러보니 과연 문지방에 죽은 쥐 두 마리와 커다란 바퀴벌레와 곱등이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리고 복도 저편에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도도하게 웅크리고 앉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헉, 미셴카! 또 쥐를 물어왔구나! 나 이런 거 안 먹는다니까... ”

 

고양이가 못마땅한 듯 날카롭게 야옹거렸다. 베르닌은 왕재수를 깨워보려고 애썼다.

 

“ 야, 정신차려. 고양이가 물어다 준 거야. 밥 주니까 고맙다고 사냥해 온 거라고. 다 죽은 건데 뭐가 무섭다고! ”

“ 무서워. 으앙... ”

 

왕재수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간신히 일어나려다 문지방에 널려 있는 쥐와 벌레 시체를 보고는 다시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다. 기절한 것도 모자라 숨도 못 쉬고 경련까지 일으켰다. 공포로 쇼크를 일으킨 것 같았다. 왕재수가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와락 걱정이 된 베르닌은 급하게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헤치고 심장 마사지를 하면서 인공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왕재수는 제대로 숨을 쉬기 시작했지만 눈을 뜨기만 하면 쥐와 벌레를 목격하고 다시 울면서 몸부림쳤다.

 

“ 무서워, 으앙... ”

 

베르닌은 빗자루를 가져와 쥐와 벌레 시체를 쓸어서 버렸다. 쓰레기통에 처넣고 있는데 고양이가 다가와서 원망스럽게 야옹야옹 울더니 발톱으로 할퀴고 가버렸다.

 

“ 야, 미셴카! 나 원망하지 마! 사람은 이런 거 안 먹는단 말이야. 또 이런 거 물어오면 밥 안줘! ”

 

손을 씻고 돌아오니 왕재수가 일어나 앉아 있었다. 아직도 무서운지 손등으로 눈을 닦으며 계속 훌쩍훌쩍 울었다.

 

“ 울지 마. 쥐랑 벌레 이제 없어. 다 버렸어. 일어나. 가자. ”

“ 나 못 걸어가. ”

“ 왜! ”

“ 바닥에 쥐랑 벌레 있었어... 고양이가 복도에서부터 그것들 물고 막 달려왔어. 바닥에 흘린 거 다시 갖고 놀았어. 바닥 더러워. 못 밟겠어. ”

“ 악! ”

 

할수 없이 베르닌은 왕재수를 들쳐 업고 복도를 지나 주차장까지 갔다. 차 안에 내려놓자 왕재수가 몸서리를 쳤다.

 

“ 시골은 정말 싫어... 쥐도 있고 바퀴벌레도 있고... ”

“ 뻥치시네. 레닌그라드에도 쥐랑 바퀴벌레 다 있잖아! ”

“ 여기만큼 안 크단 말이야! 여기는 바퀴벌레가 쥐만 하고 쥐가 고양이만 해! 고양이는 개만 해! ”

“ 알았어, 그랬다 해. 귀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게 어떻게 쥐랑 바퀴는 그렇게 무서워하냐. ”

“ 쥐랑 바퀴는 더럽잖아! 징그럽고... 막 세균도 옮기고!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귀신에게서 구해준 게 고마웠기 때문에 더 이상 타박 주지 않고 시동을 걸었다.

 

“ 극장으로 데려다 줘? ”

“ 집에 갈래. 쥐 때문에 기분 잡쳤어. ”

“ 알았어. ”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왕재수가 불쑥 물었다.

 

“ 너 왜 그랬어? ”

“ 뭐? ”

“ 왜 고양이한테 내 이름 붙였어? ”

“ 아니야, 네 이름... ”

“ 맞잖아. 미셴카라고 불렀잖아. 왜 나한테는 이름도 안 부르면서 고양이는 내 이름으로 불러? ”

“ 내가 붙인 거 아니야! 사무실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서 나도 입에 익은 거야! 나 고양이 싫어해! ”

고양이한테는 밥도 주고 예뻐해 주고 잘해주면서 나한테는 소리만 질러. ”

“ 시끄러! 빨리 들어가! ”

“ 내일 아침에 태워다 줄 거야? ”

“ 바이올리니스트가 태워다 준다며! 그 집에서 잔다며! ”

“ 로만 오늘 어디 갔어. 모레 돌아와. 그래서 극장에 있었어. 집 오기 힘들어서. ”

“ 알았어, 태워다 주면 되잖아. 빨리 들어가! ”

 

왕재수가 집으로 올라간 후 베르닌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남은 일을 계속할까 했지만 귀신 때문에 놀라고 기절했던 놈 때문에 놀란 가슴이 아직도 벌렁거려서 그냥 귀가했다. 꿈속에서도 다리와 가죽과 눈알을 달라고 소리치던 귀신과 죽은 쥐에 놀라 엉엉 우는 왕재수가 자꾸 나와서 잠을 설쳤다.

 

 

*    *    *

 

 

다음날 베르닌은 두 시간 일찍 출근해 간밤에 미뤄뒀던 일을 계속했고 8시 반에는 다시 아파트로 가서 왕재수를 태워 극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밀린 일을 계속 하고 있는데 10시 쯤 국장이 그를 호출했다. 또 무슨 야단을 치고 설교를 늘어놓으려나 잔뜩 긴장한 베르닌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국장실로 갔다. 복도에서 다른 직원들과 마주쳤는데 다들 수군거리며 눈을 피해서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국장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그를 쏘아보더니 밑도 끝도 없이 말했다.

 

“ 오늘부터 다시 조기 퇴근하게. 출근 시간도 늦추고. ”

“ 아니, 왜요? 지시하신 일들이 산더미라 가뜩이나 야근하고 있는데... ”

“ 산더미였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자네는 야근을 하는 게 아니라 즐기고 있더군. 신성한 KGB 사무실에서 그런 짓을 하게 둘 수는 없지! 암, 그럴 수 없고말고! ”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

“ 내가 모를 줄 알고! 한밤중에 당직실에서 그 여우같은 꼬마하고 놀아나는 거 다 아네! ”

“ 놀아나다니요!!! 대체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

“ 간밤에도 그랬지 않나! 알렉산드르가 잊고 간 물건 때문에 새벽에 왔다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했네! 당직실 바닥에 애새끼를 눕히고 옷을 벗기고 입술이 닳아 없어져라 키스를 하고... 참 입에 담기도 민망해서 원! 앞으로 그런 짓은 집에서 하게! 자택근무로 쳐 줄 테니까! ”

“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그 자식이 바퀴벌레 때문에... 고양이가! ”

“ 변명은 필요 없어. 당장이라도 모가지를 치고 싶지만 그러면 또 그 불여우가 모스크바에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치겠지. 세상에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 아침에 하는 것도 모자라 새벽에 당직실에서까지 놀아나다니. 자네 정말 대단하군. 존경하고 싶어질 지경이야. 책상물림 주제에 이상한 쪽으로 능력이 있다니까. 당장 나가게. 그 불여우 생각하면 골치가 깨질 것 같으니까... 오늘부터 조기 퇴근해! ”

 

 

베르닌은 아무 말 없이 국장실을 나왔다. 계속 일을 하다가 1시간 조기 퇴근했다. 극장에 가서 왕재수를 태워 돌아왔고 아파트에 올라가서는 차를 우려 주었다. 무가당 다크초콜릿 캔디도 주었다. 저녁도 차려주고 설거지도 해주었다.

 

왕재수는 간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르닌은 ‘난 네가 정말 싫다’라고 말해주려다 꾹 참았다. 어쨌든 귀신 나오는 당직실에 앉아 야근하는 것보다는 아주 조금은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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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은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드디어 여자 캐릭터 등장~ 그건 주말에..

 

** 전반부에 베르닌과 왕재수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멀대 같은 바이올리니스트 로만은 writing 폴더에서 두어번 발췌했던 그 사과파이 얘기(http://tveye.tistory.com/3165, http://tveye.tistory.com/3146)의 화자. 물론 이 시리즈에서는 좀 웃기게 바뀌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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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