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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0

 

 

 

서무의 슬픔

-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소비에트 연방 국가보안위원회 가브릴로프 지국장인 블라지미르 스페호프는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정확하게 1시간 동안 주간회의를 주재하곤 했다. 서무 업무를 맡고 있는 다닐 베르닌은 그의 모든 지적사항과 하달사항을 정확히 정리해 회의 종료 후 30분 내에 시내의 모든 KGB 요원들에게 전달해야만 했다.

 

스페호프 국장은 당의 명령을 최우선시하는 인물이었다. 원칙을 어기는 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누군가가 어떠한 사소한 일로 자기 눈 밖에 나는 경우, 그는 주간회의를 이용해 반드시 그 요원을 질책하고 미묘하게 모욕을 주었다. 이따금 자아비판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설교였다. 특히 보안위원회와 같은 공공기관의 행정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두세 시간을 연달아 강의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입사 2년차인 다닐 베르닌은 감시분석부서 소속이었고 행정직 중에서는 막내였기 때문에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전체 서무 업무를 맡고 있었다. 모스크바 법대 출신인데다 소싯적에는 똑똑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막상 KGB 밥을 먹게 되자 그는 스페호프 국장의 주요 타겟이 되었다. 업무 능력도 모자라고 행정의 기본이 도대체 되어 있지 않은 풋내기에 책상물림이라면서 들들 볶였다. 베르닌은 언제나 과로와 야근에 시달렸고 서무라는 미명 하에 온갖 잡일을 도맡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매우 억울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매일 전 직원의 근태기록부를 관리했고 소속부서와 기관 전체 업무추진비를 정산했으며 국장의 지시사항을 정리해 하달하고 처리내역을 꼬박꼬박 보고하는 한편 각 사무실들의 비품 현황을 관리했다. 매달 선배 직원들의 초과근무 내역과 현장 요원들의 비용 청구 현황을 정리 보고했으며 문서철들을 만들고 서고를 관리하고 각종 자료들을 수합했다. 모스크바 본부나 시 의회 등 외부 기관에서 날아오는 각종 요구 자료들을 작성해 국장의 확인을 받아 제출했고 그 외 무수한 행정 업무와 국장의 변덕에서 비롯된 가외업무들을 수행했다. 이 모든 것들은 서무 업무에 해당되었는데 베르닌은 입사 이래 2년 동안 대체 서무란 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품었고 마침내 귀에 붙이면 귀걸이, 코에 붙이면 코걸이 식으로 아무 거나 모두 ‘행정’이란 미명 하에 서무 업무가 되고 전부 자기 일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9월 첫째 주 주간회의도 처음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국장은 어마어마한 설교를 늘어놓았고 요원 몇 명을 질책했다. 운 좋게 질책과 자아비판을 피해 간 베르닌이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좋아하고 있는데 갑자기 국장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 그리고 업무분장 일부가 변경되었으니 서무는 회의가 끝나면 변경 내용을 반영해 분장표를 신규 작성하고 내게 결재를 받은 후 모스크바 본부로 속달 발송하도록. 변경 내역은 다음과 같네.

다음 주에 모스크바 본부에서 우리 쪽으로 이송되는 정치범이 있다는 건 다들 알고 있겠지. 무슨 발레인지 연극인지 하던 딴따라인데 아주 악질이야. 세상이 망하려는 징조임이 분명하다만, 이놈은 어마어마한 반동분자에 체제 전복 기도 혐의로 7년형을 받았는데 윗분들의 귀여움을 받아서 어떻게 잘 빠져나왔다더군. 그런 놈은 죽을 때까지 수용소에 처박아놓고 강제노동을 시켜야 정신을 차리는 건데 감옥에서 풀어준 것도 모자라 우리 시립극장 감독인지 나발인지 감투까지 안겨줬어!

하여튼 그 재수 없는 반동분자 애송이의 관리를 우리 기관이 맡게 되었으니 다들 그리 알도록. 그리고 자네! ”

 

수첩에 낙서를 하며 졸음을 쫓고 있던 베르닌은 국장이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 예? 아, 국장님. 예! ”

 

“ 그 자식 감시 업무를 자네에게 분장하기로 했네. 회의 끝나는 대로 내 방으로 오게. ”

 

“ 예? 뭐라고요! 반동분자... 체제 전복... 감독, 7년... 아니, 그러니까... 저보고 유배 죄수를 감시하라고요? 왜 제가? 저는... ”

 

“ 뭐라고 웅얼대는 거야! ”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저는 이미 맡은 업무가 있는데요. 서무에... ”

 

“ 서무는 당연히 하는 거고! 자네 감시분석부서 소속이잖아! 여태 능력 미달로 제대로 된 주무를 못 맡았으니 이번에 자네의 전문성 강화와 능력 배양을 위해 특별히 중요 업무를 맡겨주는 거야! 고맙게 생각하도록! 이만 회의를 마치겠네. 자넨 당장 내 방으로 튀어와! ”

 

 

*    *    *

 

 

베르닌은 항의를 해보려 했지만 물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업무 분장은 당연히 국장의 권리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베르닌은 모스크바 KGB 본부 수용소에서 이송되어 온다는 반동분자 정치범의 감시업무를 맡게 되었다. 스페호프는 애초부터 반체제주의자를 아주 싫어했는데 이번에 온다는 죄수는 특히 더 싫어하는 것 같았다.

 

“ 그 자식이 크레믈린에 줄이 있단 말이야! 그래서 특별히 잘 관리해달라고 압력이 들어오고 있단 말일세! 심지어 파리에서 도망치려다 잡혔다지! 그런 건 그 자리에서 사살해버렸어야 했는데! 수용소에서도 버릇 좀 고쳐주려고 아주 슬쩍 손만 댔는데 불여우 같은 애새끼가 죽는다고 엄살 피우면서 나뒹구니까 높은 분들이 그 즉시 고급 병원으로 옮겨주고 금이야 옥이야 보살핀 끝에 법정 판결도 무시하고 가석방을 시켜주고 우리 쪽으로 보낸 걸세! 모스크바 정치국에 계신 분들이 그 애새끼를 얼마나 감싸고도는지 그런 범죄자 나부랭이를 시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에 배정하고 잘 돌봐주라고 모스크바 본부 이름으로 공문까지 보냈지 뭔가!

하여튼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자네가 그 자식을 잘 감시하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서는 아침부터 밤까지 곁에 딱 붙어 있어야 해! 같은 아파트 이웃에 자네 방을 배정했으니 그놈이 오기 전까지 이사를 완료하게! 그놈 사무실과 아파트 구석구석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도록 했으니 매일같이 대화 내용을 전부 기록하고 보고하도록! 그리고 그놈이 무슨 수상한 행동을 할지 알 수가 없는데다 우리 시의 순진한 젊은이들에게 나쁜 물을 들일 수도 있으니 출퇴근, 식사 등등도 자네가 옆에서 모두 컨트롤하게! ”

 

베르닌은 미약하게 항의했다.

 

“ 저... 국장님. 그건 현장요원이 해야 할 일 같습니다만... 게다가 이사까지 하라니. 그리고 출퇴근과 식사를 제가 컨트롤하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설마 제가 옆에서 그걸 다 챙겨주란 말씀이신가요? ”

 

“ 당연하지 않나! 그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차로 극장 출퇴근을 책임지게! 집안에서도 무슨 음모를 꾸밀지 모르잖나! 게다가 그놈 소문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아나! 사생활이 지저분하다는 얘기가 파다해! 이놈저놈 무릎에 냉큼 올라앉지를 않나... 에이 찝찝해. 그놈이 집으로 이상한 인간들을 끌어들이지 않는지 감시해야 한다는 말이네! ”

 

“ 하지만... 그럼 제 사생활은요... ”

 

“ 뭐 사생활? 자네 지금 감히 사생활 운운하나? 자넨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야! KGB 요원이란 말일세! 당과 연방을 위해 충성하고 행정의 기본을 갈고닦아 훌륭한 소련 청년이 되어야 할 것 아닌가! 어디 그런 미제 자본주의자 같은 소릴 지껄이나! ”

 

 

9월 10일에 베르닌은 기차역으로 나갔다. 모스크바 본부 소속 KGB 요원들로부터 그 무시무시하고 위협적인 반동분자 테러범을 인계받기 위해서였다. 전날 그는 현장요원으로부터 두 시간 동안 사격 재교육을 받은 후 권총까지 한 자루 챙겼다. 체제 전복을 기도했다는 정치범이란 놈은 위험인물이 분명했으므로 여차하면 그 무서운 죄수를 제압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요원들이 나타났다. 베르닌에게 서류뭉치를 들이밀고 서명을 강요했다. 그리고는 로모 카메라로 사진을 한 방 쾅 찍은 후 반동분자 정치범 인계 절차가 완료되었다고 선언했다. 막 모스크바 요원들이 떠나려고 했기 때문에 어리둥절해진 베르닌이 물었다.

 

“ 잠깐만요. 무슨 절차가 완료됐다는 겁니까? 서명만 했지 정작 사람은 넘겨주지 않았잖아요. ”

 

“ 당신 옆에 있잖아요! 아까부터 거기 앉혀 놨구만. 빨랑 데려가요. 우리도 집에 가고 싶으니까. 기차 타고 종일 달려온 것도 피곤한데 도로 타고 가야 하니 어휴 피곤해... 하여튼 우린 갑니다! ”

 

베르닌은 어안이 벙벙했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렸지만 커다란 트렁크 위에 앉아 있는 사내아이 하나뿐이었다.

 

“ 얘, 미안한데 혹시 저 사람들이랑 같이 온 남자 못 봤니? 무시무시한 인상에 수갑 찬... ”

 

“ 수갑은 왜 차는데? ”

 

“ 응, 그러니까... 위험인물이라, 아니, 넌 몰라도 돼. 국가 기밀이거든. ”

 

“ 국가 기밀이라면서 나한테 막 물어봐도 돼? ”

 

“ 어, 원래는 안 되는데... 그 남자 놓치면 큰일나거든. 국가를 전복하려 들었던 죄수라서 꼭 찾아내야 돼. 그 사이에 도망갔으면 정말 큰일인데.. 기차역을 폭파할지도 몰라. 아아, 어쩌지... 난 행정직, 책상물림... 국장한테 전화해서 스나이퍼를 배치해달라고 해야 하나... ”

 

“ 기차역 폭파하면 사람 죽잖아. 왜 그런 짓을 하는데? ”

 

“ 그러니까 위험인물이지! 어휴, 내가 왜 너랑 이런 얘길 하고 있지.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찾아야 돼. 너 혹시 여기 공중전화 어디 있는지 아니? ”

 

“ 나 여기 사람 아니야. 모스크바에서 열네 시간 기차 타고 왔어. 어딜 봐서 내가 이런 촌 동네 주민처럼 보인다는 거야! 시골에 끌려온 것도 열받아죽겠는데 웬 단추눈 스파이까지 붙어서 귀찮게 구는 거야. ”

 

“ 뭐, 단추눈? 너 지금 나보고 하는 말이야? 조그만 게 버르장머리 없이 어른한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고 보니 보자마자 반말 까고! ”

 

“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눈도 딱 단추같이 생기고. 너 스파이 맞잖아, KGB 끄나풀! 나 끌고 가려고 온 놈! ”

 

“ 뭐? ”

 

베르닌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의 눈앞에는 아무리 잘 쳐줘봤자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을까말까 한 사내아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앉아 있었다. 가볍게 흐트러진 까만 머리칼에 하얀 얼굴, 긴 속눈썹에 반짝반짝 빛나는 까만 눈, 오똑 솟은 콧대와 그려놓은 듯한 입술이 어찌나 곱상한지 남장한 여자애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베르닌은 기절초풍했다.

 

“ 설마... 네가 그 정치범! 반동분자! 7년형! ”

 

“ 되게 듣기 싫은 소리다... ”

 

베르닌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뒤적거렸고 인적사항을 읽었다.

 

“ 이름 : 미하일 야스민. 레닌그라드 출신. 평소에는 미샤라고 불린다... ”

 

“ 맞긴 한데 너한테 별로 이름 불리고 싶지 않거든. ”

 

“ 어... 난 테러범이라길래 되게 무지막지하고 험악한 놈일 거라고... ”

 

“ 누가 테러범이야! 난 무지무지 잘 나가던 예술가야! 키로프와 볼쇼이 수석무용수에 엄청 끝내주는 안무가였다고! 세상에서 제일 춤 잘 추는 무용수! 재수 옴 붙어서 이상하게 꼬인 거야! 나 같은 천재는 원래 투기하는 놈들이 많단 말이야.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니 더 꼬인 거라고! 에잇... 빨랑 차나 끌고 와. 여기 추워. 웬 바람이 이렇게 부는지. 하루종일 기차 타고 오느라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 빨리 집으로 데려다 줘. 아, 내 팔자야. 이런 시골로 끌려오다니. ”

 

“ 어... 수갑은 왜 안 차고 있는 거야? ”

 

“ 너 내 말 못 들었어? 나 엄청 유명한 무용수였다니까! 수갑 함부로 채우면 손목에 무리가 오고 자국 생긴단 말이야! 이게 어떤 몸인데! 가뜩이나 감옥에서 괴롭혀서 많이 상했구만. 너 나한테 수갑 채울 생각 꿈에도 하지 마! 내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대면 크레믈린에 있는 우리 아저씨들한테 전화해서 너 혼내 주라 할 거야! ”

 

“ 어, 그러니까... 굳이 수갑 채울 생각은... 안 채워도 너 정도면 뭐... ”

 

베르닌은 안도감에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이 녀석은 외모나 말투, 호리호리하고 날씬한 몸매 어디를 봐도 육체적 위협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권총과 곤봉을 쓸 일은 전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꾸만 짜증이 치미는 건 견딜 수가 없었다.

 

“ 하여튼 가자. 난 다닐 베르닌이야. 널 담당할 보안위원회 요원이야.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어야 돼. 여기서 지켜야 할 것들 정리해놓은 서류 줄 테니까 다 읽고 꼭 지켜야 해! ”

 

“ 뭘 지켜. 나 여기 극장 감독 맡으라던데. 공연만 잘 올리고 애들만 잘 키우면 되지. 담당은 무슨 담당. KGB 스파이 꼴 보기 싫어. 집까지만 태워다주고 앞으로 얼씬도 하지 마! ”

 

시내로 들어오는 차 안에서 베르닌은 점점 부아가 치밀었고 이 애송이는 진짜 싸가지 없는 왕재수란 결론에 도달했다.

 

 

*    *    *

 

 

일주일이 지났을 때 베르닌은 미쳐버릴 지경이 되었다. 물밀 듯 쏟아지는 각종 서무 업무는 더욱 늘어났고 국장은 툭하면 그를 들들 볶았다. 그 와중에 유배수이자 정치범인 미샤인지 뭔지 하는 놈을 감시해야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최악이었다. 국장의 명령과 크레믈린 측의 각별한 관심 때문에 베르닌은 정말 아침부터 밤까지 그 놈을 감시해야 했다. 온종일 사무실에서 격무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도청 내용을 분석해야 했다. 극장에도 뻔질나게 드나들며 내부 동향을 파악하고 그 싸가지 없는 녀석이 어떤 식으로 극장을 운영하는지, 스태프들과 사무국 직원들, 무용수들 사이에서는 어떤 소문이 도는지 전부 파악해야 했다.

 

그나마 그건 분석 업무니까 그의 현업과 관계가 있다고 위안을 삼을 수도 있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아침저녁으로 그 녀석을 차에 태워 출퇴근시켜줘야 한다는 것과, 심지어 집에 돌아오면 저녁 식사까지 챙겨줘야 한다는 거였다. 맨 처음 국장은 저녁에도 그 놈을 감시해야 하니 식당에 가면 따라가서 함께 밥을 먹으라고 명령했지만 문제는 그 애송이가 식당 밥을 아주 싫어한다는 데 있었다.

 

“ 그냥 좀 먹어! 여기 고급 아파트에 딸린 식당이라서 밥 진짜 잘 나오는 데란 말야! 다른 데 구내식당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아? ”

 

“ 기름기가 너무 많단 말이야! 어휴, 역시 여긴 시골이야. 빵이든 고기든 샐러드든 아무데나 무조건 기름을 한 국자씩 들이붓잖아! 저 수프에도 돼지비계가 둥둥 떠 있어! 난 엄청 끝내주는 무용수 출신이잖아. 단백질과 비타민과 칼슘을 섭취하고 지방질은 제한하는 식사에 익숙해져 있어! 이런 건 못 먹어! ”

 

화가 난 베르닌은 국장에게 낱낱이 보고했다가 욕만 바가지로 먹었다.

 

“ 이 얼간아! 그런 것까지 나한테 얘기해야 되겠나! 밥을 해서 먹이면 될 거 아냐! 에잇 정말 어디서 그런 재수 없는 애새끼가 굴러 들어와서... 가뜩이나 정치국 의원들 품에서 놀아나던 불여우라 찝찝해 죽겠구만. ”

 

“ 국장님, 전 요리사도 아니고 가정부도 아닌걸요. 이미 격무에 시달리... ”

 

“ 시끄러워! 당장 나가! 요리사고 가정부고 다른 요원 투입할 예산도 없고 남는 인력도 없어! 자네가 다 해결해! ”

 

결국 베르닌은 그 재수 없는 녀석의 저녁 식사까지 챙겨주게 되었다. 그는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애송이에게 밥을 차려준 후에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야근을 하거나, 아예 집으로 일을 싸와서 밤늦게까지 해야 했다.

 

 

*    *    *

 

 

어느 날 아침 그는 거듭된 야근으로 너무 피곤하고 짜증이 나서 애송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야, 오늘은 못 태워다 줘! 너 혼자 가! ”

 

“ 나 혼자 못 가는데. ”

 

“ 왜 못 가! 너도 차 있잖아! 극장에서 준 거! 좋은 차잖아! ”

 

“ 나 운전 못해. ”

 

“ 뻥치지 마! 면허증 있잖아! 너 서류에서 다 봤어! ”

 

“ 면허는 땄지만 운전은 거의 안 해봤단 말야! 그리고 나 운전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팔 근육에 무리가 가서 별로야. 무용수는 팔 근육을 잘 관리해야 해. 잘못 쓰면 근육이 미워져. ”

 

“ 악! ”

 

베르닌은 간신히 참았다. 싸가지 없는 꼬마를 차로 극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날따라 차도 밀렸고 공사 때문에 길도 덜컹거렸다. 차에서 내리면서 반동분자가 투덜댔다.

 

“ 너무 운전이 험해. 허벅지 근육 다 뭉치는 줄 알았네. ”

 

주먹이 올라가는 것을 꾹 참고 베르닌은 사무실로 갔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허리가 휘도록 일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저녁이었다. 극장에 전화를 했더니 비서가 감독님은 머리가 아프다며 오후에 일찍 퇴근했다고 했다. 웬일로 데려다 달라고 호출을 안 했나 의아했지만 잘됐다 싶어 베르닌은 구내식당에서 샌드위치로 대충 저녁을 때운 후 집으로 돌아갔다.

 

막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받아보니 반동분자 애송이였다.

 

“ 왜! 나 오늘은 너 저녁 안 차려줄 거야! 시간도 벌써 지났고! ”

 

“ 나 차 좀 우려 줘. ”

 

“ 뭐야? ”

 

“ 홍차! 차 좀 우려 달라고! ”

 

“ 야,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 밥 해주는 것도 감지덕지지 무슨 차까지 우려달래! ”

 

“ 칫, 알았어. 되게 뻣뻣하게 구네. ”

 

전화를 끊은 후 베르닌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앉아 있었다. 절대 그 집에 가지도 말고 해주지도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보기가 삑삑 울렸다. 복도로 나가보니 반동분자 애송이의 집에서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베르닌은 다급하게 뛰어나가 꼬마의 집 현관문을 두들겼다.

 

“ 야! 문 열어! 불 난 거야? 빨리 열어! ”

 

문이 열리지 않자 베르닌은 덜컥 겁이 났다.

 

“ 어... 야! 너 괜찮아? 야! 대답 좀 해봐! ”

 

공포에 휩싸인 베르닌은 자기 방으로 뛰어올라가 열쇠꾸러미를 가져왔다. 정신이 없다 보니 어느 열쇠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 열쇠 저 열쇠 다 집어넣고 철컥철컥 돌리는 와중에도 반동분자 꼬마가 연기를 들이마시고 질식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 아아... 그냥 아까 가볼 걸. 같이 있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난 입사 때 특수훈련도 받았으니까 불 끌 수 있었을 텐데. 안 돼, 그 자식 재수 없긴 해도 이건 아니잖아. 제발... ”

 

마침내 문이 열렸다. 베르닌은 애송이의 이름을 부르며 정신없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연기는 부엌 쪽에서 나고 있었다. 뛰어 들어가니 가스렌지 위에서 주전자가 연기와 그을음을 내뿜고 있었다. 급하게 불을 껐다. 주전자 안에는 물이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불이 옮겨 붙은 곳은 없었다. 그러나 꼬마가 보이지 않았다.

 

“ 야! 너 어딨어! 내 말 들려? 야! ”

 

“ 나 여기 있어. ”

 

소리는 거실에서 들려왔다. 허겁지겁 달려가 보니 반동분자 꼬마가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는 티포트를 잡고 한 손으로는 찻잔을 쥐고 있었는데 포트 주둥이에서 시꺼먼 액체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 야, 너 멀쩡하잖아! 왜 문 안 열었어! ”

 

“ 손이 두 개 밖에 없는데 어떻게 나가서 문을 여니! 네가 나보고 차 우리라며! 그래서 차 우리고 있었단 말이야! ”

 

“ 뭐야! 부엌에서 그 난리가 난 것도 몰랐어? 불 날 뻔 했잖아! ”

 

“ 엄청 냄새 났어. 아랫집에서 요리 태운 거 아냐? ”

 

“ 주전자에서 물 따라냈으면 렌지 불을 껐어야지! ”

 

“ 나 물 처음 끓여봤단 말이야! ”

 

“ 어휴, 말을 말자. 야! 너 지금 뭐해! 계속 붓고 있으면 어떡해! 차가 다 쏟아지잖아! ”

 

“ 잘 안 우려져... 벌써 세 번이나 해봤는데 시꺼멓게만 나와... 마셔보면 엄청 쓴 맛만 나. 티백도 다 터지고 가루가 둥둥 떠. 아... 흑흑... ”

 

갑자기 반동분자 꼬마가 찻잔과 포트를 와락 엎지르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한숨을 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 싸구려 티백이야! 여기 매점에선 이런 거밖에 안 팔아! 찻잔도 되게 조잡하고 이도 나갔어. 티포트도 완전 두꺼운 사금파리야! 난 세상에서 제일 얇고 우아한 로모노소프 찻잔에만 마셨었는데. 다들 나한테 차 우려다 바치고 무가당 초콜릿도 주고 날 위해 티타임 해줬는데... 나 이런 거 해본 적 없단 말이야. 차도 영국산이랑 프랑스산이랑 스리랑카산 고급 잎차만 우려 줬는데 여긴 그런 거 없어. 툭하면 찢어지는 싸구려 티백... 안에 들어 있는 것도 찻잎도 아니고 무슨 화약가루 같은 최악의 싸구려... 아아, 시골... 아, 죽고 싶어. 못 참겠어. 아... 흑...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왜 내가... 돌아가고 싶어. 시골 싫어... ”

 

베르닌은 멍해졌다. 무슨 말인지 전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꼬마가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으며 정신적으로 매우 약해져서 폭발 직전이란 사실만은 이해했다.

 

“ 어, 그래... 네가 뭐 얼마나 잘못을 했겠냐. 기껏 춤이나 추던 애가... 서류 다 읽어봤는데 너 테러범도 아니고 진짜 나쁜 짓은 하나도 안 했더라. 그냥 외국에 투어 갔을 때 몇 번 놀러 나가고 금지 서적 읽고 나쁜 노래 듣고 그런 정도였는데 좀 심하게 벌 받았더라. 너 엄청 잘 나가던 애라며, 훈장도 받고 팬들도 많고... 그러다 갑자기 감옥 가고 고문도 받고 우리 동네로 와서 많이 힘들었겠지. 근데 어쩌겠냐, 그게 인생이지. 그러니까 힘내고 울지 마. 저기, 야... 내가 그래도 너보다 몇 살 더 먹었고 인생도 좀 더 알거든. 그니까 내가, 저기, 힘든 거 있으면 다 터놓고 얘기해. 내가 도와줄게. 야... ”

 

“ 흑... 차 좀 우려 줘. ”

 

“ 알았어. 우려 줄 테니까 울지 마. ”

 

베르닌은 행주를 가져와서 엎질러진 찻물을 모두 닦았다. 포트와 찻잔을 가져가 싱크대에서 헹궜다. 태워먹은 주전자를 깨끗이 씻은 후 가스렌지에 올려 물을 끓였다. 티포트에 뜨거운 물을 붓고 티백을 담근 후 몇 차례 들어 올렸다. 주머니 안에 가득 차 있는 분쇄 찻잎을 점핑시켜 차가 잘 우러나오게 했다. 그 사이에 뜨거운 물을 약간 부어 찻잔을 미리 데웠다. 잠시 후 그는 티백을 빼냈다. 찻잔에 차를 부었다. 설탕을 한 스푼 넣어 녹였다. 쟁반에 찻잔을 올려놓고 받침에는 잼을 조금 퍼서 세팅했다.

 

차를 가져다주자 반동분자가 눈물을 닦고는 찻잔을 들었다.

 

“ 어, 안 까맣다... 홍차 색깔이다. 붉은 기 도는 예쁜 갈색이네. 싸구려 티백인데 어떻게 이렇게 잘 우렸지? ”

 

“ 네가 티백을 너무 오래 담가놔서 그랬던 거야. ”

 

“ 으응. ”

 

꼬마는 차를 호로록 마셨다. 다 마신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베르닌은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그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또 울거나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까봐 걱정이 됐다. 예술가란 인간들은 종종 우울증에도 시달리고 그게 악화되면 심지어 자살할 수도 있다는 얘길 어디선가 주워 읽은 기억이 났다. 싸가지 없는 녀석이지만 그래도 안됐다는 생각에 좀 더 신경써주고 잘해줘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는데 꼬마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 이건 정말 아니야. ”

 

“ 어... 그래, 너 지금 상황이 별로 안 좋은 건 이해하는데... 그래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지 어쩌겠어. 그러니까 자꾸 우울해하지 말고 나쁜 생각 하지 말고 힘을 내. ”

 

“ 차에 설탕을 넣다니... 이건 정말 아니란 말이야. ”

 

“ 뭐? ”

 

“ 쳇, 뭐 여기 사람들은 전부 설탕 넣어 마시니까 그렇다 치자. 근데 넌 이제부터 알아둬. 난 몸매 관리 때문에 차에 설탕 안 넣으니까 감안하도록 해. 잼도 설탕 든 건 안 먹어. 그리고 세팅할 때 찻잔 손잡이는 왼쪽으로 해주면 좋겠어. 난 차 마실 때는 왼손잡이거든. 앞으로는 기억해줘. 그래도 설탕 빼곤 차는 나쁘지 않게 우린 것 같아. 저녁밥도 네가 해준 게 제일 나은 거 같고. 뭐 운전은 좀 험하지만 시골이라 길이 안 좋으니까 내가 이해해야겠지. 그럼 이제 가보렴. 피곤해서 좀 자야겠어. 설거지는 내일 와서 해줘. 잘 자렴. ”

 

 

베르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섰다.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 싸가지 없는 반동분자를 왕재수라고 부르기로 가슴깊이 맹세했다.

 

그는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며 뒤척이다 새벽에야 잠이 들었고 그 결과 늦잠을 자서 다음날 지각, 국장에게 엄청난 질책을 받고 하루종일 자아비판을 하게 되었다. 그러느라 근무 시간 내에 서무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늦게까지 야근을 했다.

 

돌아와서는 왕재수에게 설탕을 뺀 차를 우려서 찻잔 손잡이가 왼쪽으로 가도록 세팅을 해주었다. 설거지도 해 주었다. 국가의 녹을 받아먹으며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법이다.

 

  

 

 

FIN

- 2015. 1. 16, liontamer -

 

 

** 손잡이 왼쪽으로 돌려준 로모노소프 찻잔 : http://tveye.tistory.com/3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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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