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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28편에서 우리의 단추가 본의아니게 현장요원 노릇을 하고 고생고생을 했는데(왕재수도 물론 언제나처럼 매우 고생) 이에 대한 참회의 의미에서(ㅎㅎ) 29편은 한결 가벼운 분위기의 서무 에피소드로 돌아왔다. 이전에 나왔던 인물들도 여럿 다시 등장한다.

 

오랜만에 보랴 등장~ 4월에 태어난 보랴가 생일 파티를 열고 단추와 왕재수를 초대하는데~~

 

** 초반에 등장하는 올리비에 샐러드는 러시아의 감자 샐러드이다. 전에 내가 만들었던 올리비에 샐러드 사진 올린 적이 있다. 그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927

 

** 중간에 언급되는 브이소츠키는 러시아의 유명한 가수이자 음유시인인 블라지미르 브이소츠키이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4월의 어느 날, 베르닌은 신작 준비에 여념이 없는 왕재수를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가고, 거기서 파티 초대를 받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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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9

 

 

 

 

 

서무의 슬픔

- 보랴의 생일 파티 -

 

 

 

 

 

일요일 저녁이었다. 공연 일정표를 보니 오페라가 올라가는 날이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신작 연습이 끝나는 오후 5시에 맞춰서 극장으로 갔다. 물론 왕재수는 퇴근할 기미가 전혀 없었다. 타마라와 데니스, 가릭을 남겨놓고 개인 지도를 하고 있었다.

 

 

신작 공연이 겨우 열흘 앞으로 다가왔으니 이해는 갔지만 베르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골치 아픈 녀석을 집으로 데려가 쉬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귀염둥이 우리 아기’니까 잘 돌봐주겠거니 하고 코즐로프에게 맡겨놨더니 망할 놈의 바이올린 깡패는 밤마다 얼마나 사랑을 불태우는지 도대체 애를 재우는 것 같지가 않았다. 토요일에도 베르닌은 리허설 휴식 시간에 왕재수가 눈이 빨개지고 퀭해진 채 꾸벅꾸벅 조는 것을 보았는데 반주를 도와주러 온 코즐로프도 똑같이 그러고 있었던 것이다!!

 

 

‘ 어휴! 저 인간은 낫살도 먹어가지고 자제 좀 하지 왜 저 녀석 장단에 맞춰서 밤새 노는 거야... 가뜩이나 저 자식 모스크바 끌려갔다 와서 힘들 텐데. 약까지 맞고... 내색 안 해서 그렇지 많이 아팠을 텐데. 오늘은 내가 꼭 데려가야지! 저거 야윈 것 좀 봐! 밥이나 제대로 먹은 건지! 분명히 저 녀석이 그랬어, 로만은 요리 못 한다고. 그러니까 저 모양이지. 뻔할 뻔자 샌드위치 쪼가리나 집어먹고 우유나 마시고 나왔겠지! ’

 

 

베르닌은 구석에서 30분 정도 기다렸다. 데니스와 타마라가 먼저 끝났는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타월로 어깨를 감싸고 문가로 걸어갔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베르닌이 있는 것도 모르고 헉헉거리며 나갔다. 가릭은 아직도 왕재수에게 붙들려 있었다. 왕재수는 숫자를 세기도 하고 이따금 불어를 섞어서 동작 설명을 하다가 답답하면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가릭은 죽어라 돌고 뛰고 뻗고 뒹굴었다. 마침내 왕재수가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 됐어, 오늘은 그만 해. ”

 

“ 아니에요, 감독님. 저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아요. 조금만 더... ”

 

“ 아니야, 그만 해. 더 하면 더 나빠져. ”

 

“ 하지만... ”

 

“ 너 왜 자꾸 거기서 막히는 줄 알아? ”

 

“ 오른쪽 골반이 안 열려서요... ”

 

아니야! 골반은 다 열렸어! 자꾸 틀린다고 의식하니까 몸이 뻣뻣해지잖아. 지금 동작은 틀리는 데 없어. 동작을 하나하나 해낸다고만 생각하니까 자꾸 막히는 거란 말이야. 이게 무슨 올림픽인 줄 아니? 동작 하나하나에 점수 매기는 게 아니라고. 네가 자꾸 고전 발레만 생각하면서 움직이니까 더 그래. 음악을 타야지. 편해져야 돼. 자꾸 음악을 박자 하나둘에 맞춰서 동작 하나둘을 하려고만 하니까 그러는 거라고. 그러니까 오늘은 그만 들어가서 쉬어. 그냥 노래 들으면서 논다고 생각하란 말이야. ”

 

“ 어려워요... 그런 식으로 해본 적 한 번도 없는데... ”

 

“ 그러니까 배우는 거지. 어렵지만 재밌잖아. ”

 

“ 재밌긴 한데 자꾸 막히니까 힘들어요. 감독님. 저 내일 연습실 쓰면 안돼요? 열쇠 주고 가시면 혼자서라도 연습해 볼게요. ”

 

“ 맘대로 하렴. 열쇠는 굳이 가져갈 필요 없어. 나도 나올 거야. 먼저 오면 경비실에서 받아가, 얘기해 놓을 테니까. ”

 

 

가릭이 나오면서 베르닌에게 손을 흔들었다. 데니스 못지않게 땀범벅이 되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아 보였다. 베르닌은 가릭과 짧게 인사를 나눈 후 왕재수에게 갔다.

 

 

“ 가자! ”

 

“ 오페라 보고 가려고 했는데... 오늘 카르멘이야. ”

 

“ 오페라는 부감독이 따로 있잖아! 카르멘 그거 지난달부터 벌써 다섯 번도 넘게 올라갔고. 너 그 중 세 번 봤어! ”

 

 

왕재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너 진짜 나 감시 열심히 하고 있구나! 나도 횟수는 기억 안 나는데. 그래도 오늘은 다른 가수가 부른단 말이야. 그리고 나는 극장 전체를 총괄하는 예술감독이니까 오페라도 틈나는 대로 꼬박꼬박 확인해봐야 한다고. ”

 

아니야, 너 오늘 공연 안 봐. 확인도 안 해. 너 지금 나랑 집에 갈 거야. 저녁 왕창 먹고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푹 잘 거야! 너 내일 월요일인데도 극장 나올 거잖아. 아까 가릭한테 하는 말 다 들었어! 그러니까 오늘은 무조건 집에서 쉬어야 돼. ”

 

“ 하지만 로만도 오페라 때문에 연주하러 갔고... 끝나면 같이 로만 집에 가서 밤을 불태우려고... ”

 

넌 맨날맨날 불태우잖아! 오늘은 안 돼! ”

 

“ 왜 안 돼! 난 성인인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데! ”

 

“ 성인이라도 하는 짓은 여섯 살짜리잖아!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분명히 밥 많이 먹고 많이 쉬어야 한댔잖아! ”

 

“ 많이 먹고 많이 쉬고 있단 말이야! ”

 

“ 좋아. 그러면 너 이리 와봐. ”

 

 

베르닌은 왕재수의 손목을 잡아끌고 연습실에 딸려 있는 탈의실로 갔다. 체중계를 가리키면서 근엄하게 말했다.

 

 

“ 올라가! ”

 

“ 왜! ”

 

“ 지금 몸무게 재봐서 65킬로 넘으면 맘대로 하게 해 줄 거야! 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 밥 많이 먹고 최소 그 정도까지는 찌우라고! ”

 

“ 넘어! 넘는다고! ”

 

“ 그러니까 올라가보라고! ”

 

 

왕재수는 체중계를 힐끗 째려보더니 입술을 삐죽거리며 홱 돌아섰다.

 

 

“ 악마! 사람의 자유를 그깟 숫자를 내세워서 탄압하다니! 난 한참 춤추고 근육질일 때나 그 정도였는데... 너무하잖아. ”

 

“ 좋아, 그러면 2킬로 빼줄게. 63킬로 되면 네 맘대로 해. ”

 

 

왕재수는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저 체중계 원래 몸무게보다 적게 나온단 말이야. 발레리나 여자애들 가뜩이나 숫자에 민감해서 지난번에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바늘 손댔어. ”

 

“ 뭐가 그렇게 구구절절 말이 많아. 일단 재봐! ”

 

싫어! 그런 건 수용소에서나 하는 거야! 키 재고 몸무게 재고 피 뽑고 맨날 차트 적고... 알았어! 오페라 안 보면 되잖아. 흑... ”

 

 

갑자기 왕재수가 훌쩍거렸기 때문에 베르닌은 당황했다.

 

 

“ 야, 왜 또 그런 거 가지고 울어! 알았어, 몸무게 재라고 안 할게. ”

 

“ 엉엉... 나도 다시 예전처럼 되고 싶단 말이야... 로만도 다이어트 하지 말라고 했어, 많이 먹고 몸무게랑 근육이랑 다시 늘리랬는데 잘 안된단 말이야. 흑... 이제 옛날처럼 못 돌아갈 거 같아. 다시는 예전처럼 못 출 거야. 예쁜 것도 한순간이지 금방 미워질 거야. 망했어. 다 끝났어, 엉엉...

 

 

베르닌은 어쩔 줄 몰랐다. 왕재수가 왜 갑자기 슬퍼하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일단 애가 우는 건 괴로웠으므로 열심히 달랬다.

 

 

“ 아니야, 뭐가 망해. 너 요즘 과로해서 살이 안 붙는 거야. 많이 먹어도 그것보다 더 많이 움직이니까 에너지가 다 소모돼서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일 그만하고 맛있는 거 먹고 집에 가서 쉬자. 신작 끝나고 나면 숨 좀 돌리잖아, 그러면 금방 몸도 옛날처럼 돌아올 거야. ”

 

“ 흑, 감옥에서 나온지 벌써 일곱 달도 넘었는데... 아까도 애들 지도해주는데 내가 만든 동작도 힘들었어... 예전엔 열 번 연속으로도 출 수 있었는데. 나 이제 춤 못 출 건가봐. ”

 

“ 에이, 무슨 소리야. 지난번에 바질도 잘 췄잖아. 매일매일 연습하면서 살다가 여기 와서는 안 그러니까 몸이 좀 굳어서 그렇겠지. 근데 너 무용수 은퇴했다면서 아직도 춤은 다시 추고 싶은가보구나? ”

 

“ 은퇴한 거는 무대에 안 올라가는 거고... 춤은 그거랑 다르단 말이야... ”

 

“ 웅... 뭐가 다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끝난 거 하나도 없어. 몸이 나아지고 연습도 꾸준히 하면 전처럼 될 거야. 걱정하지 마. ”

 

“ 춤도 못 추게 되고 시들시들해지면 미워질 거야... ”

 

“ 뭐가 미워지냐! 맨날 우주 최강 꽃미남이라면서 자랑하더니. 어제도 예쁘고 오늘도 예쁘고 내일도 예쁠 테니까 그런 생각하지 마! ”

 

 

왕재수가 여전히 눈물이 주렁주렁 달린 까만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맞아, 나 우주 최강 꽃미남인데. 어제도 예쁘고 오늘도 예쁘고 내일도 예뻐야 되는데... 엄마가 나보고 말랐다고, 눈이 왜 그렇게 퀭해졌냐고 걱정하잖아... 별처럼 반짝반짝하던 내 눈, 엉엉... ”

 

“ 아... 어... 그건 그때 네가 주사를 맞아서 눈이 몽롱해서 그랬을 거야. 그래서 어머니가 착각하셨을 거야. 다음에 보면 안 그러실 거야. ”

 

 

베르닌은 말을 내뱉은 순간 실언했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모스크바에 갔던 일에 대해서도, 눈이 가려진 채 끌려가던 왕재수를 본 것도, 스비제르스키와 만난 일도 왕재수에게는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네가 어떻게 그걸 알아?’ 라고 묻지 않았다. 스비제르스키에게서 들었나 싶기도 했다. 그저 손등으로 눈물을 쓱쓱 닦으면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 나빠... 아픈 건 엄마였는데 엄마가 나 걱정하고. 흑... 그러니까 나 빨리 다시 예뻐져야 되는데. 지금도 예쁘지만 전에는 어마어마하게 예뻤으니까 그때처럼 돌아가야 돼. ”

 

“ 어휴, 지금도 예쁘다고 난리인데 지금보다 어마어마하게 더 예뻐지면 그걸 누가 다 감당하냐! 그러니까 넌 진짜 왕재수야! 자기 잘난 것밖에 모르고! 하여튼 가자! 밥부터 먹어야지! 냉장고에 아무 것도 없어서 장 좀 봐가야 되는데... 뭐 먹고 싶니? ”

 

“ 우리 그냥 스베촉 가서 먹자. 나 갑자기 엄청 배고파. 장 봐서 요리하면 한참 걸리잖아. ”

 

“ 그래, 나도 먹고 싶다, 양파수프랑 사과소스 돼지구이. ”

 

 

그래서 베르닌은 왕재수와 함께 스베촉에 갔다. 저녁 식사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미 꽉 들어차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점원이 왕재수를 보더니 ‘이쪽으로 오세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하면서 구석 창가 자리를 내주었다. 베르닌은 양파수프와 사과소스 돼지구이를 주문했고 왕재수는 대구 커틀릿과 올리비에 샐러드를 주문했다.

 

 

“ 나 네가 올리비에 샐러드 주문하는 거 처음 봐. ”

 

“ 그런가? 나 그거 좋아하는데. ”

 

“ 너무 흔한 거라서 안 먹는 줄 알았어. 아니면 감자랑 마요네즈 때문에 칼로리 생각해서 안 먹나 했지.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

 

“ 레닌그라드에 있을 땐 자주 먹었는데. 하긴 이건 기본 샐러드라서 오히려 제대로 못 만들면 진짜 맛없어, 느끼하고 질척거리고. 보랴는 잘 만들더라고. ”

 

“ 웅, 그러면 난 안되겠구나. 만들어줄 수 있는 메뉴 하나 더 늘었다고 좋아했더니만. ”

 

왜, 만들어줘. 쉽잖아. 감자 삶아서 양파랑 당근이랑 마요네즈랑 식초랑... ”

 

“ 뻔할 뻔자 느끼하고 질척거린다 할 거 아냐! 우리 동네 음식 다 기름지다며. 내가 한 것도 그렇겠지 뭐. ”

 

“ 일단 한번 만들어 줘봐! 먹어보고 판단할 테니까. ”

 

“ 뼈 빠지게 만들었는데 맛없다느니 기름기 많다느니 하면 진 빠진단 말이야. ”

 

“ 감자 샐러드에 기름기 많을 이유가 어디 있어! 아 맞다. 내가 왜 여기 와서 그거 안 먹었는지 생각났어. 너네는 아무래도 돼지기름으로 버무릴 것 같더라고! 너 그럴 거야? ”

 

“ 아니야! 아무리 우리 가브릴로프 사람들이 돼지기름을 많이 먹어도 그렇지, 아무데나 다 넣는 줄 아냐! ”

 

그래! 그때 그 나폴레옹... 렐랴가 준 거... 기름케익. 우웩!

 

“ 야! 그건 렐랴가 감기 걸려서 버터랑 헷갈려서 그랬던 거지! 너 자꾸 렐랴 모욕할 거야? 그래도 너 생각해서 그렇게 만들어다 준 건데! 렐랴처럼 예쁘고 상냥한 여자한테... ”

 

“ 으윽, 또 나왔어. 렐랴 타령. 그렇게 상사병 앓지 말고 한번 들이대보기라도 하라고! ”

 

“ 그게 아니고... ”

 

 

그때 음식이 나왔다. 베르닌이 양파수프를 흡입하는 동안 왕재수는 올리비에 샐러드 접시를 끌어당기더니 3분의 1쯤을 덜어주었다. 베르닌은 호기심으로 샐러드를 먹어보았다. 소스가 별로 질척하지 않았고 감자의 포슬포슬한 식감과 달걀의 풍부한 맛, 상큼한 오이와 고소한 마요네즈, 식초의 조화가 일품이었다. 평범한 감자 샐러드인데도 입맛이 확 돌았다.

 

 

“ 아, 이거 맛있다. ”

 

“ 그치? 잘 먹어보고 집에 가서 이렇게 해줘. ”

 

“ 내가 요리사냐, 먹어본다고 그대로 만들 수 있게! ”

 

“ 보랴는 다른 데서 뭐 먹어보면 그대로 만들던데. 심지어 더 맛있게. ”

 

보랴는 요리사잖아! 나는 서무고! 나도 다른 데서 문서 읽어보면 그대로 만들 수 있어! 서류철도 그대로 할 수 있고! ”

 

“ 칫, 맨날 서무 타령. ”

 

 

베르닌은 배가 고팠기 때문에 수프에 사과소스 돼지구이를 금세 해치웠고 왕재수가 덜어준 감자 샐러드도 다 먹었다. 왕재수는 샐러드는 다 비웠지만 대구 커틀릿은 절반쯤 먹고 나더니 슬금슬금 포크를 내려놓았다. 베르닌은 엄하게 말했다.

 

 

좋은 말 할 때 다 먹어라.

 

“ 먹을 거야! 조금 있다가... ”

 

“ 냅킨으로 입도 닦았잖아! ”

 

“ 샐러드를 너무 열심히 먹었나봐. 배가 너무 불러서 못 먹겠어. 포장해 가서 있다가 먹을게. ”

 

 

베르닌은 몹시 야단을 치고 싶었지만 그나마 가져가서 먹겠다고 하는 게 어디냐 싶어서 점원에게 남은 음식 포장을 부탁했다. 점원은 베르닌을 째려봤다가 왕재수의 부탁이라는 것을 알고는 누그러져서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종이 봉지를 들고 보랴가 직접 나타났다. 왕재수에게 봉지를 건네주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우리 아기 또 어디가 아프니, 왜 조금밖에 못 먹니? ”

 

아니야, 안 아파. 감자 샐러드 먹느라 배가 금방 찼어. 가져가서 먹을게. ”

 

“ 팬에 한번 데워서 먹어야 되는데 너 불도 쓸 줄 모르잖니. ”

 

“ 괜찮아, 다닐이 해 줄 거야. ”

 

 

‘또 나야!’ 라고 야단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면서 베르닌은 보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랴는 만족한 표정을 짓더니 생각난 듯 베르닌에게 말했다.

 

 

“ 참, 그렇지. 너도 내일 와라. 7시까지 오면 돼. ”

 

“ 어디를요? ”

 

“ 우리 집. 내 생일이라 집에서 모여서 놀기로 했거든. 얘도 오고 로만도 올 거야. 근데 내 생일 파티에는 절대 혼자 오면 안 되거든. 꼭 짝꿍을 하나 데려와야 해. 그럼 내일 보자. 난 주문이 밀려서 이만. ”

 

 

보랴가 주방으로 사라진 후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물었다.

 

 

“ 너도 가? ”

 

“ 응, 보랴가 지난주에 얘기했어. 너한테도 말해준다는 걸 까먹었네, 너무 정신이 없어서. ”

 

“ 잘됐다. 둘이 오라고 했으니까 우리 같이 가면 되겠네. 아... 넌 바이올린 아저씨랑 가겠구나. 난 누구랑 가지? ”

 

“ 에이, 그거 아니야. 보랴 얘긴 여자 데려오라는 거야. 남녀 짝 맞추는 걸 좋아하더라고. ”

 

“ 그래도 너는 로만이랑 사귀잖아. 보랴도 알지 않아? ”

 

“ 보랴는 알지만 거기 오는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거 모르잖아. 건전한 소련 시민들이 모이는 파티에서 남자끼리 왔다고 하면 돌 맞으라고. 극장에서도 나랑 로만이랑 그런 거 모르는데. 그리고 보랴 얘긴 꼭 사귀는 상대랑 오라는 게 아니고 그냥 남녀 짝만 맞춰 오라는 거야. ”

 

“ 그럼 넌 누구랑 가? 로만은? ”

 

“ 로만은 오케스트라 동료랑 오기로 했어. 보랴랑도 알거든. 난 나쟈랑 갈 거야. ”

 

“ 아... ”

 

 

베르닌은 누구와 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왕재수가 대구 커틀릿을 먹나 안 먹나 감시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보랴의 파티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   *   *

 

 

 

 

월요일이라 베르닌은 정신없이 바빴다. 주간 회의에서는 매우 심기가 불편한 스페호프가 직원들을 하나하나 질책해 가며 마구 괴롭혀댔다. 지난주의 밀서 작전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 분명했다. 물론 국장은 스비제르스키에게 보기 좋게 한방 먹었다는 것과 작전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베르닌에게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베르닌도 밀서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것과 스비제르스키에게 잡혀가 이야기를 나눴던 사실을 전혀 보고하지 않았다. 금요일에 출근했을 때 그저 밀서를 넣은 흑빵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내용만 간략하게 보고했을 뿐이었다. 스페호프는 다른 것은 묻지도 않았고 알겠다는 단 한 마디와 함께 나가보라고 했을 뿐이었다.

 

월요일은 극장 휴일이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퇴근 시간까지 사무실에 남아서 일을 했다. 굳이 왕재수가 출근했다는 사실을 스페호프에게 보고하고 극장에 갈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일이 너무 많이 밀려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호프는 그에게 서류철 제목에 오타가 있다며 몹시 질책을 했고 회의실 라디에이터 파이프가 하나 구부러져 있다면서 서무의 기본이 안 돼 있다고 야단을 쳤다.

 

베르닌은 서류철 표지들을 일일이 검토해서 오타 두 개를 잡아내고 흰 종이에 제목을 새로 써서 붙여 놓았다. 시설 관리 담당자에게 라디에이터 파이프 수리를 부탁하려고 했으나 담당자는 차를 마신다고 자리를 비운 후 도통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르닌은 망치와 펜치를 들고 가서 직접 파이프를 고쳤다. 그리고는 3월 업무추진비를 정산하고 부서원들의 근태기록부를 정리했다. 주간회의에서 국장이 쏟아냈던 지적사항들을 모조리 타이프로 쳐서 해당 직원들에게 한 부씩 배부했다.

 

 

베르닌은 자잘한 서무 업무들을 대충 정리한 후 마지막으로 지난주의 왕재수 감시보고서와 도청 보고서를 작성해 스페호프에게 제출했다. 모스크바에 다녀오느라 며칠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지난주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스페호프는 별다른 것을 묻지도 않았다. 단지 베르닌이 나가려고 할 때 그를 불러 세우더니 음울한 표정으로 말했을 뿐이었다.

 

 

“ 자네 앞으로 조심하게. ”

 

“ 예? 무엇을요? ”

 

“ 그냥 조심하란 말일세. 모스크바 임무 관련해서. 별 일이야 당연히 없겠지만 어쨌든 그 불여우의 뒤를 봐주는 놈들이 자네를 의심하게 될지도 모르니 앞으로는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는 게 좋겠네. ”

 

“ 저, 저를 의심한다고요? 하지만 저는... ”

 

“ 물론 자네를 의심하거나 해를 끼칠 이유야 별로 없지만 어쨌든 조심하는 게 좋겠어. 저 불여우 녀석이 내 생각보다 더 깜찍하게 머리를 굴리는 것 같단 말이지. 그 녀석이 아침 저녁 밤으로 자네와 잠자리를 하고 저녁밥도 꼭꼭 얻어먹으려고 엉겨 붙는 걸 보니 아직 자네를 꽤 좋아하고 신뢰하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만의 하나 그놈이 자네의 본심을 알아채고 우리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면 골치 아파지는 거야. 그러니 자네도 호신용 권총을 반드시 소지하게. 글리셰프에게 얘기해서 9밀리 마카로프를 하나 내주도록 하겠네. ”

 

 

베르닌은 국장이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는 이유란 밀서 음모가 완전히 스비제르스키에게 발각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장은 스비제르스키가 베르닌이 밀서 전달책으로 파견됐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거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나름대로는 베르닌이 그 무시무시한 크레믈린 아저씨의 손에 처단될 것을 염려하여 현장요원용 권총을 소지하게 해주겠다고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베르닌은 그런 배려가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국장은 애초부터 왕재수와 크레믈린 아저씨를 엿 먹이려고 음모를 꾸며서 그를 사지에 몰아넣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끝내 그에게는 밀서의 내용이나 자초지종에 대해서는 한 톨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피장파장이었다. 그도 스비제르스키와의 조우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으니까. 권총은 그냥 받아서 침대 서랍장에 처박아놓으면 되니까 상관없었다.

 

 

“ 저, 그럼 권총을 지금 수령할까요? ”

 

“ 아닐세, 장부 기재 절차가 좀 복잡하니 내일 9시에 5호실로 가서 글리셰프에게서 인수하게. 그럼 가보게. ”

 

 

베르닌은 국장실을 나왔다. 극장에 가볼까 하다가 퍼뜩 보랴의 파티 생각이 났다.

 

 

‘ 아 맞다, 보랴네 집에 가야 하는데. 누구랑 가지? 여자랑 오랬는데... ’

 

 

베르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일 파티에 같이 갈 여자를 지금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니 아무리 생각해도 방도가 없었다. 그는 보랴를 좋아했으므로 파티에는 꼭 가고 싶었지만 대체 누구와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왕재수와 가면 편할 텐데 어째서 보랴는 남녀 짝을 맞춰 오라 하는 건지 슬며시 부아도 치밀었다. 고민하고 있는데 무거운 장부를 한 아름 안고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알렉산드라와 마주쳤다.

 

 

“ 어, 선배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

 

아... 국장이 3년 이상 지난 서류철들을 전부 문서고로 옮기라고 해서... 아까 들이닥치더니 왜 이렇게 사무실이 지저분하냐고 불벼락을 내리더라고. ”

 

 

베르닌은 알렉산드라의 팔에서 장부들을 모조리 끌어 모았다. 꽤 묵직했다.

 

 

“ 근데 이걸 왜 선배님 혼자 다 옮기고 있는 거예요? 등록부서에는 다른 직원들도 많잖아요. 후배들도 있고. ”

 

“ 걔들은 또 다른 서류 옮기고 있어. 아까부터 다들 난리였어. 괜찮아, 이게 마지막이야. 이리 줘, 다냐. 내가 할게. ”

 

“ 저 내려가던 길이었어요, 문서고 같이 가요. ”

 

“ 그럼 반만 들어주렴. 반은 내가 들게. ”

 

 

베르닌은 머리핀이 거의 머리채 끝까지 내려와 대롱거리고 있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된 데다 장부를 껴안고 나르느라 블라우스 앞섶과 소매가 온통 다 구겨져 있는 알렉산드라의 몰골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 됐어요, 전 안 무거워요. 대체 몇 번이나 문서고에 왔다 갔다 하신 거예요? 그 부서에도 등록 관련 서류랑 장부 엄청 많았을 텐데. ”

 

“ 모르겠네. 오후 내내 서류 분류하고 한두 시간 정도 옮기러 왔다갔다 했나봐. ”

 

“ 저라도 부르지 그러셨어요. 선배님 팔 힘으로는 한 번에 몇 권 옮기지도 못하시면서. 벌써 수십 번은 왕복했겠네요. 아니면 수레라도 찾아달라고 하실 것이지. ”

 

“ 수레는 벌써 대외교류부에서 다 가져갔어. 거기도 서류랑 자료 옮기고 있거든. 감시분석부는 그나마 운이 좋았네, 서류 정리 폭탄 안 맞아서. ”

 

“ 저희 건 이미 감사 받을 때 제가 다 옮겼었어요... 그때도 한참 걸렸어요. 하여튼 앞으로는 이런 거 혼자 다 하지 마세요. 무슨 힘이 있다고. ”

 

“ 그래도 내 업무랑 관련 있는 거잖아. 그리고 네가 무슨 머슴이니, 안 그래도 가뜩이나 국장부터 시작해서 윗사람들도 툭하면 너 불러서 무거운 거 나르게 하고 일 시켜먹는데 왜 나까지 그래야 되니. 하여튼 고마워, 문서고 다 왔다. 여기 놓으면 돼. 고마워, 다냐. ”

 

 

베르닌은 캐비닛에 장부들을 분류해 꽂는 것을 도와준 후 알렉산드라와 함께 문서고를 나왔다. 무거운 장부들을 계속 옮기느라 지쳤는지 알렉산드라가 너무 힘들어보였기 때문에 뒤뜰의 배추밭 쪽으로 데리고 나가서 바람을 좀 쐬게 했다. 알렉산드라는 납작한 돌멩이 위에 주저앉더니 숨을 몰아쉬며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반쯤 풀어진 머리채가 바람을 맞아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생각난 듯 알렉산드라가 주머니에서 작은 꾸러미를 꺼내더니 부스럭거리면서 종이를 펼쳐 소시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물이 든 깡통 옆에 소시지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 고양이 한두 시간 전에 제가 밥 줬어요. 지금쯤 밖에서 다른 놈들 갈구고 있을 걸요. ”

 

“ 아니야, 그래도 5시에서 6시 정도 되면 어슬렁어슬렁 이쪽으로 다시 와. 내가 맨날 퇴근 전에 이거 주고 가거든. 걔 얼마나 똑똑한데. 지난번에는 그 녀석이 은혜 갚는다고 사무실 내 자리에 쥐랑 바퀴벌레 물어다놓고 가서 나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어. ”

 

“ 아, 선배님한테도 그랬구나... 저한테도 그랬어요. ”

 

 

베르닌은 왕재수가 바퀴벌레 곱등이 쥐 시체를 보고 기절했던 때를 떠올리고 쿡쿡 웃었다. 알렉산드라는 깡통 언저리에 묻어 있는 먼지와 흙을 탈탈 털면서 방긋 웃었다.

 

 

“ 그래도 고양이가 추운 겨울을 잘 버텨내서 다행이야. 창고 구석의 나무상자 네가 갖다 놓은 거지? 잘했어. ”

 

“ 예. 근데 전 담요 깔아줄 생각은 못했어요. 그 무릎담요는 선배님이 갖다놓으신 거죠? 미셴카가 그 담요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잘 자더라고요. ”

 

“ 어차피 낡은 담요였는걸. 근데 너 그 고양이한테 이름도 붙여줬구나. 고양이한테 사람 이름 붙여줬네. ”

 

“ 어, 예... 그게... ”

 

“ 어머, 그거 혹시 너랑 같이 사는 그 꽃돌이 이름 아냐? 걔 이름이 미하일이었던 것 같은데. ”

 

엇, 아, 아니에요! 우연의 일치예요! 예, 옛날에 키우던 고양이 이름이 미셴카... 진짜 아니에요! 그 자식 이름 붙인 거 아니에요! ”

 

 

베르닌은 매우 당황했다. 망할 놈의 검정고양이 때문에 왕재수와의 관계에 대해 더 오해를 사는 건 정말 질색이었다. 알렉산드라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베르닌은 알렉산드라가 웃는 걸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퍼뜩 그는 보랴의 파티 생각이 났다.

 

 

“ 선배님, 오늘 저녁에 뭐하세요? ”

 

“ 별 거 없는데. 집에 가려고 했어. 저녁이나 차려먹고 쉬겠지 뭐. 왜? ”

 

“ 아, 저... 아는 사람 생일인데 친구랑 같이 오라고 했거든요. 보랴라는 사람인데 스베촉이라는 식당 요리사고요, 굉장히 착하고 재밌어요. ”

 

“ 어머, 나 스베촉 가끔 가는데. 거기 음식 맛있어. ”

 

“ 아, 그렇구나. 같이 가실래요? 극장 쪽 사람들도 올 거예요. 왕재수, 아니 미하일도 올 거고요. 보랴가 요리를 잘 하니까 맛있는 것도 많이 나올 거고. 저, 낯선 사람들만 있어서 아무래도 좀 그런가요? ”

 

 

베르닌은 알렉산드라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낯을 가리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의 생일 파티에 가려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잠시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곧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응, 가지 뭐. 매일 회사랑 집만 오가니까 정말 질렸어. 네 친구들이면 다 착하고 좋을 것 같아. 같이 가. ”

 

 

 

 

*   *   *

 

 

 

 

보랴의 집은 구시가지의 극장 거리 뒷골목에 있었다. 들어가는 골목도 꼬불꼬불한데다 옛날 건물이라 주차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으므로 왕재수가 알려준 대로 극장 주차장에 댔다. 막 차에서 내리는데 왕재수가 나쟈와 함께 나오는 게 보였다. 나쟈는 베르닌을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했다. 연습이 힘든지 얼마 전에 봤을 때보다 살이 쭉 빠져 있었지만 표정은 아주 밝았다. 베르닌은 알렉산드라를 그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알렉산드라는 왕재수가 여자를 만날 때마다 어김없이 보여주는 그 황홀한 미소와 상냥한 인사에 잠깐 얼굴을 붉혔다. 베르닌은 ‘제발 저놈의 서비스 매너에 속지 마세요!’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왕재수는 앞장서서 능숙하게 좁은 골목들을 이리저리 돌며 그들을 안내했다. 보랴의 집에는 이미 여러 차례 가본 것 같았다. 보랴가 사는 아파트는 옛날 건물이라 제정 시대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겉보기는 고풍스럽고 아름다웠지만 역시나 안뜰로 들어서니 어둑어둑한데다 여기저기 페인트가 벗겨지고 파이프가 휘어진 것이 낡은 건물 티가 났다.

 

 

“ 이쪽으로 와. 여기 엘리베이터 없거든. 계단으로 올라가야 돼. ”

 

“ 역시 옛날 건물은 불편하다니까. 신시가지가 살기는 편하지. ”

 

 

베르닌이 투덜대자 왕재수가 고개를 저었다.

 

 

“ 난 여기가 더 좋은데. 우리 아파트는 촌스러워. 여기는 좋아. 레닌그라드에도 이런 건물 많거든. ”

 

“ 겉모습만 번드르르하면 뭐하냐. 여기 쥐랑 바퀴벌레 엄청 많을 거야! 너 거기 발 조심해! 그쪽에도 구멍 잔뜩 있네! 그런데서 벌레 나온다고! ”

 

 

왕재수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금세 눈이 둥그렇게 커지면서 겁에 질려 눈물을 글썽거릴 기세였지만 나쟈와 알렉산드라 때문인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면서 계단으로 후다닥 뛰어올라갔다. 알렉산드라가 베르닌의 손목을 살짝 꼬집었다.

 

 

“ 너 왜 그러니, 미샤는 레닌그라드에서 살다 왔잖아. 고향 생각나서 이 건물이 좋다는 건데 안됐잖니. ”

 

“ 아아, 선배님도 이미 걸려들었군요. ”

 

“ 뭘 걸려들어? ”

 

“ 아니에요... 리자도 그렇고... 렐랴도... 다들 저 녀석만 보면 편을 들고... ”

 

 

나쟈가 수줍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 전 다냐 얘기 이해해요. 스네고로드도 옛날 건물들이 많은데 이렇게 근사한 스타일도 아니고 목재로 만들어서 진짜 벌레랑 쥐가 많거든요. 발레학교 기숙사는 신축 건물이라 그런지 진짜 깨끗하고 편하더라고요. 전부 미샤 덕분이에요. 여기로 데려와준 것도 그렇고 기숙사도 원래 방이 안 나는 건데 교장 선생님에게 얘기해서 넣어줬어요. ”

 

 

잘 나가다가 결국은 왕재수 칭찬이라니 역시 여자들은 다 똑같은 게 분명했다. 뭔가 섭섭했지만 하여튼 베르닌은 나쟈와 알렉산드라를 데리고 왕재수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보랴의 집은 3층에 있었다. 막 3층에 다 올라왔는데 복도에서 낯익은 금발 머리가 나타났다. 바냐 투레츠키가 이번에는 형광 오렌지색 재킷을 입고 역시 배지를 주렁주렁 단 채 복도로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투레츠키는 왕재수를 발견하고는 휘파람을 불면서 뽀뽀를 하고는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오우, 우리 이쁜이. 꽃미남, 프리티, 미인 중의 미인. 반갑기도 해라. ”

 

“ 안녕, 바냐. ”

 

“ 오랜만이네. 요즘 왜 안 왔냐, 너 보라고 좋은 거 많이 갖다놨는데. ”

 

“ 좀 바빴어. ”

 

“ 너 아프기라도 했냐? 살 빠졌구나. 허리가 한줌이네. 그래도 워낙 예쁘니까 괜찮아. 우리 이쁜이 오랜만에 보니까 기분이 좋네. ”

 

 

베르닌은 투레츠키가 왕재수의 허리와 허벅지에서 손을 떼지 않았기 때문에 점점 기분이 나빠져서 저놈을 한 대 갈길까 말까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때 투레츠키가 왕재수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삐쭉 내밀더니 갑자기 안경을 벗고는 눈부시게 화사한 미소를 마구 방출하며 달려갔다.

 

 

“ 아니, 사셴카! 이게 얼마만인지! 그때 전화만 하고 얼굴 한번 보자고만 하더니. 여기서 보는군요! 잘 있었어요? ”

 

 

그러더니 투레츠키가 왕재수에 이어 알렉산드라를 와락 껴안고는 뺨과 입술에 뽀뽀를 했다. 알렉산드라는 또다시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활짝 웃었다.

 

 

“ 바냐, 진짜 오랜만이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 너무 반갑다. 다냐랑은 전에 본 적 있지? ”

 

“ 그럼요, 소개해주신 덕분에 나랑 친구 먹었죠. 우리 동갑이더라고요. 그건 그렇고 사셴카 요즘 좋은 일 있나보네요. 어쩌면 이렇게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지! 다냐, 너 모르지? 내가 옛날에 사셴카 짝사랑했던 거. 내가 얼마나 쫓아다녔는데. ”

 

“ 그만해, 바냐! 그렇게 얘기하면 다냐가 진짠줄 알잖아. ”

 

“ 이런, 섭섭한데요. 저 진짜 좋아했었다고요. 어떻게 안 좋아합니까, 국장에게 쪼일 때마다 이렇게 귀엽고 상냥한 선배님이 옆에서 도와주고 다정하게 위로해주는데. 엇, 그러고 보니 다냐와 함께 오신 건가요? 설마 둘이? 흠, 축하드립니다. 다른 녀석이면 한 대 팼을 텐데 다냐는 소중한 벗이니 제가 양보해야겠군요. ”

 

 

알렉산드라는 다시 얼굴을 빨갛게 붉히더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바냐.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오늘 다냐 친구가 생일이라고 해서 같이 온 거야. ”

 

“ 아 그래요? 보랴 말씀이군요. 좋은 녀석이죠. 하여튼 다냐랑 사귀는 게 아니라 이거죠. 그럼 조만간 우리 사무실에 놀러오세요. 그간 쌓였던 얘기도 하고 좋은 것도 한 잔 드릴 테니. 다냐, 너도 와. 아 그렇지. 그때 그 파인애플은 어땠냐? 여자가 좋다고 하든? 그거 먹고 뜨거운 밤을 보내는 데 성공했어? ”

 

“ 앗, 어... 파인애플, 그 통조림... 으응... ”

 

 

베르닌은 뜨끔하며 왕재수 쪽을 쳐다보았다. 왕재수는 여자니 뜨거운 밤이니 하는 소리에도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투레츠키와 그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 어, 저... 근데 넌 왜 안 들어가는 거야? 너도 보랴 생일 파티에 온 거 아니야? ”

 

“ 아, 생일 파티. 우린 공적인 사이라서. 난 일하는 관계에서 사생활로 얽히는 건 안 좋아하거든. 그래서 손님들 오기 전에 선물만 주고 가는 거야. 잘 놀다 가라. 사셴카, 그럼 전 이만. 꼭 놀러 와요. ”

 

 

투레츠키는 알렉산드라의 손등에 뽀뽀를 한 후 계단으로 내려가려다 말고 왕재수를 다시 한 번 꼭 껴안으며 뺨을 비볐다.

 

이쁜이 토요일에는 올 거지? 토요일 지나면 프랑스 잡지들은 다른 데로 넘길 거야. 그러니까 꼭 보러 와. ”

 

 

왕재수는 고개를 까딱거렸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투레츠키가 발걸음도 가볍게 계단을 내려간 후 베르닌은 왕재수의 팔을 낚아채 복도 구석으로 데려가서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 너 행여나 토요일에 거기 갈 생각 꿈에도 하지 마. ”

 

“ 잡지 보고 싶은데... ”

 

안 돼! 신작 며칠 남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저 자식이랑 엮이지 마! ”

 

“ 파인애플도 구해주고 괜찮은 녀석인데. ”

 

안 돼! 안된다고 했다! 너 진짜... 방금도 저 자식이 집적대고... ”

 

 “ 바냐는 그런 거 아니야. 장난치는 거야. ”

 

“ 누가 장난을 그런 식으로 쳐! 저 자식은 위험하단 말이야. 전에도 대놓고 너한테 지저분한 말 하고... ”

 

“ 어휴 지겨워. 알았어. 근데 여자들 저렇게 세워놓을 거야? ”

 

 

베르닌은 아차 싶어서 얼른 돌아섰다. 다행히 알렉산드라와 나쟈는 둘이 금방 친해졌는지 복도에 서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워들어보니 투레츠키가 미남이란 얘기인 것 같아서 베르닌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   *   *

 

 

 

 

파티는 아주 즐거웠다. 보랴는 험상궂은 인상과는 달리 친구들이 많았다. 여기저기 손님들이 북적거렸는데 다들 편하게 드나드는 사람들인지 의자가 모자라면 그냥 바닥에도 앉고 창턱에도 걸터앉았다. 식당 동료들이 종이로 고깔모자를 만들어서 씌워주자 보랴는 화도 내지 않고 벙긋벙긋 웃으면서 모자를 내내 쓰고 있었다. 베르닌 일행이 들어가자 굉장히 반갑게 맞아주었다. 알렉산드라를 소개해주자 꼭 왕재수에게 하듯이 친절하고 살가운 말투로 인사를 하고는 안쪽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남자 하나에게 일어나라고 윽박질러서 의자를 내주었다. 알렉산드라가 머뭇거렸다.

 

 

“ 아니, 저... 전 괜찮은데... 저 분이 먼저 와서 앉아 있었... ”

 

“ 저 녀석은 괜찮아요. 사내들은 아무 데나 앉아도 상관없어요. 야, 파블릭! 너도 일어나! 아가씨한테 자리 양보해! ”

 

 

옆자리에 있던 다른 남자도 여지없이 의자를 뺏겼다. 보랴는 알렉산드라와 나쟈를 앉혀 주고는 매의 눈으로 옆을 또 훑어보더니 더 이상 자리를 내줄 남자들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잡동사니들이 잔뜩 쌓여 있던 1인용 소파를 질질 끌고 왔다. 그리고는 한방에 물건들을 쓸어버린 후 왕재수를 끌어다 앉혔다. 왕재수가 항의했다.

 

 

“ 난 앉기 싫어! 그리고 여자들 또 올 거잖아. 걔들 앉혀! ”

 

“ 아니야, 이제 손님들 다 왔어. 너는 아기니까 여기 앉아야 돼. 그리고 여자들이 다 너만 보고 있으니까 여기 있어줘야 되는 거야. ”

 

“ 그게 미남의 자리란 거지. ”

 

 

한쪽에서 오케스트라 여자 동료와 샴페인을 마시고 있던 코즐로프가 눈을 찡긋하며 농담을 했다. 왕재수는 툴툴거리면서도 그대로 앉았다. 베르닌은 알렉산드라에게 자기가 아는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래봤자 코즐로프 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토냐와 가릭도 와 있었다. 왕재수가 데리고 왔다고 했다. 토냐는 베르닌을 보고는 뛸 듯이 반가워했다.

 

 

“ 다냐! 오랜만이에요! ”

 

“ 어, 정말이네요! 이제 다리는 괜찮아요? ”

 

“ 네. 내일부터 연습 시작하려고요. 정말 고마웠어요. ”

 

“ 여긴 저랑 같이 일하는 알렉산드라예요. 이 친구들은 토냐랑 가릭인데요, 발레단 무용수들이에요. ”

 

 

알렉산드라는 토냐와 가릭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다가와서 알렉산드라와 나쟈에게 인사를 하고 말을 걸었다. 베르닌이 굳이 이 사람 저 사람 소개를 시켜줄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다들 소탈했고 유머가 넘쳤다. 너도나도 새로 온 손님들인 토냐와 나쟈, 알렉산드라 곁으로 다가와서 잘해주었다. 게다가 여자들은 코즐로프와 보랴의 말대로 왕재수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렸다. 보기만 하면 얼굴을 붉히며 까르르 웃고 음료수를 따라주고 난리였다.

 

 

보랴는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역시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가브릴로프 남자였다. 모여든 손님들은 다같이 우렁차게 생일 축하 노래를 합창했고 보랴가 초를 끄자 박수를 치고 환성을 지르고 ‘만세 만세 보랴 만세!’ 하고 제창을 하고는 생일 노래를 두 번이나 더 불렀다. 샴페인도 땄고 케익도 잘랐다. 베르닌은 내심 그 굉장한 메도빅이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스메타나 크림과 자두, 딸기가 겹겹이 올라간 거대한 생일 케익을 보자 정신이 혼미했다. 엄청나게 맛있어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는데 왕재수가 손등을 탁 쳤다.

 

 

“ 야! 이건 디저트잖아. 다른 거 다 먹고! ”

 

“ 어... 하지만 저런 케익을 어떻게 보고만 있냐! ”

 

“ 괜찮아, 먹어 먹어. 우리 집에선 순서 같은 거 지킬 필요 없어. 먹고 싶은 거 먹으면 돼. 우리 아가, 너도 이거 한 조각 먹어보렴. 이거 그렇게 단 거 아니야.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가 직접 구워준 거야. ”

 

 

왕재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정말?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오셨어? ”

 

“ 생일 맞은 사람이 직접 요리를 하는 건 안 될 말이니까요. ”

 

 

백발의 노부인이 주방으로부터 나오며 왕재수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양 손에 푸짐한 쇠고기찜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통닭구이 접시를 들고 있는 그 우아한 노부인은 바로 종교박물관의 아말리야 루카셴코였다. 베르닌은 요리 대회 때 맛봤던 그 엄청난 생선파이를 떠올렸고 자기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켰다. 왕재수는 아말리야로부터 접시를 받아들어 너무나 당연한 듯 베르닌에게 넘겨주고는 그녀를 자기가 앉아 있던 소파로 인도했다.

 

 

모두가 아말리야를 보더니 반가워했다. 보랴와는 막역한 사이라고 했다. 생일 파티 음식은 모두 아말리야의 솜씨였다! 소박하면서도 아주 맛있는 요리들이 줄줄이 나왔다. 비트 완두콩 샐러드부터 시작해 청어 절임, 쇠고기찜, 통닭구이, 생선수프, 허브 감자구이, 진하고 달콤한 열매즙 음료와 직접 담근 크바스 등등 끝이 없었다. 입에 닿는 순간 살살 녹는 것 같았다. 다들 이렇게 맛있는 파티 요리는 처음이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베르닌은 정신없이 먹다가 뒤늦게 왕재수를 좀 챙겨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 새 코즐로프가 왕재수의 옆에 와서 접시에 각종 요리를 덜어주고 있었다. 보는 눈만 없었다면 하나하나 입에 넣어줄 기세였다. 나쟈는 보랴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방글방글 웃으며 스네고로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알렉산드라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수프와 버섯파이를 먹고 있었다.

 

 

“ 다냐, 파이 진짜 맛있어. 좀 먹어봐. ”

 

“ 저 벌써 그거 두 개나 먹었어요. 이 열매즙 좀 드셔보세요. 진짜 달고 진해요. 선배님 감기 기운 있다고 하셨잖아요. ”

 

 

알렉산드라는 열매즙을 한 모금 마시더니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아말리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우와, 이거 진짜 맛있다.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이 열매즙은 어떻게 담그셨어요? 이렇게 진하고 달콤한 열매즙은 처음 마셔 봐요. ”

 

“ 크랜베리와 산딸기, 블랙베리로 만드는 거예요. 레시피 적어줄 테니 한번 해봐요, 어렵지 않거든. ”

 

“ 근데 저는 요리 솜씨가 형편없거든요. 심지어 커피도 맛없게 끓여요. ”

 

“ 그건 요리 솜씨가 형편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매일 일하느라 바빠서 그럴 거예요. 시간 날 때 수도원으로 놀러 와요, 열매즙 많이 있으니까 몇 병 줄게요. ”

 

“ 감사해요,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

 

 

그때 보랴가 알렉산드라에게 윤기가 흐르는 황금빛 납작한 사탕 같은 것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는 조그만 유리병을 하나 건네주면서 말했다.

 

 

“ 이거 먹어봐요, 알렉산드라. 레몬생강절임인데 감기에 아주 좋아요. 수도원 약초즙하고 꿀로 절여놓은 거라서 소화도 잘 되고 기관지에도 좋아서 감기 기운 같은 건 금방 다 날아갈 거예요. ”

 

“ 보랴의 레몬생강절임은 유명하지. ”

 

 

아말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드라는 환하게 웃었다.

 

 

어머나, 고마워요 보랴. 어릴 땐 엄마가 생강차 끓여주셨는데 지금은 아파도 그냥 홍차에 설탕이나 타먹고 말거든요. 고마워요. 옛날 생각나네요. ”

 

“ 에이, 설탕은 안돼요. 꿀이어야지. 가뜩이나 일하면서 사는 거 힘든데 잘 먹고 자기 몸 잘 챙겨야지. 주변 친구들도 보면 다들 바빠서 그런지 대충 먹고 툭하면 아프다니까요. 아 그렇지, 미셴카! 우리 아기도 이것 좀 먹자. 기관지에 좋은 거야. ”

 

“ 보랴, 나 단 거 안 먹는 거 알면서 그래. ”

 

“ 약이다 생각하고 먹는 거야. 넌 이런 거 많이 먹어야 돼. ”

 

 

내키지 않아 하는 왕재수에게 알렉산드라가 레몬생강절임을 하나 포크로 찍어서 권했다.

 

 

“ 먹어봐요, 미셴카. 많이 달지 않아요. 굉장히 맛있어요, 상큼하고. ”

 

 

여자에게 투정을 하거나 짜증을 내는 법이 없는 왕재수가 할 수 없이 알렉산드라가 건네준 레몬생강절임을 먹더니 눈을 반짝 빛냈다.

 

 

“ 어, 정말 맛있네. 별로 달지도 않고! 맵지도 않아. ”

 

“ 그렇지? 너도 한 병 싸 줄 테니까 매일 점심 때 한 숟갈씩 먹어라. ”

 

“ 생일인 사람이 왜 거꾸로 선물을 주는 거야! ”

 

“ 뭐 어떠냐, 난 내가 만든 거 맛있게 먹어주는 게 제일 좋은 선물이야. ”

 

 

왕재수는 활짝 웃었다. 베르닌은 알렉산드라와 왕재수가 둘 다 그렇게 밝게 웃는 모습을 보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왕재수는 레몬생강절임을 두어 개 접시에 덜더니 나쟈에게 가서 먹어보라고 권해주었다. 스네고로드에서 직접 데려와서 그런지 살뜰하게 잘 챙겨주는 것 같았다. 나쟈도 생강절임을 먹어보더니 맛있다면서 감탄했다.

 

 

 

 

*   *   *

 

 

 

 

어느 정도 음식을 먹고 난 후 배도 부르고 기분도 좋아진 손님들은 거실로 나왔다. 카드놀이를 하고 수수께끼 놀이도 했다. 베르닌과 알렉산드라도 어울려서 재미있게 놀았다. 알렉산드라는 스무고개를 제일 먼저 맞춰서 예쁜 목도리까지 받았다. 그러다 보랴가 브이소츠키 노래를 틀어놔서 다들 합창을 하기 시작했는데 카세트 플레이어가 낡아서 그런지 지지직거리다 꺼져버리고 말았다. 아쉬워하자 코즐로프가 구석에 굴러다니던 기타를 가져오더니 딩딩딩거리며 연주를 시작했다. 나쟈가 꺅 하고 박수를 쳤다.

 

 

“ 어머, 로만 오시포비치! 바이올린만 켜는 줄 알았어요! 기타도 칠 줄 아시네요! 그것도 브이소츠키라니 멋있어요! ”

 

“ 바이올린은 밥줄이고 기타는 재미로 하는 거지. 우리 미셴카가 피아노를 잘 치는데 여긴 피아노가 없으니까 좀 아쉽네. ”

 

나 바이올린도 켤 줄 알아! 노래도 얼마나 잘하는데! 나 절대음감이야! 음악 천재야!

 

 

신이 난 왕재수가 소파 위로 뛰어올라갔다.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부추기자 흥에 겨워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노래를 잘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브이소츠키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르는 줄은 몰랐다. 사람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치자 더욱 신이 난 왕재수는 음유시인의 우울한 노래에 이어 대중가요도 부르고 심지어 옛날 노래까지 줄줄이 불러댔다. 모두가 손뼉을 치고 박자를 맞추며 따라 불렀다. 얌전한 줄만 알았던 나쟈도 숨은 끼가 발동했는지 소파로 올라가 왕재수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서로 팔짱을 낀 채 발레가 아니라 재즈 스텝까지 밟으며 춤을 췄다.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다들 발을 구르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베르닌은 성인이 된 후 이렇게 재미있고 신나는 파티는 정말 처음이었다.

 

 

‘ 저 녀석 진짜 잘 노는구나. 분위기도 잘 띄우고. 저래서 파티를 좋아한다고 했구나. ’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부르다가 베르닌은 술기운이 올라와서 조금 어지럽기도 하고 덥기도 해서 잠깐 바람이라도 쐴까 하고 베란다 쪽으로 갔다. 창문을 열고 나가니 밤공기가 시원했다. 두 팔을 쭉 뻗으며 찬 공기를 들이마시다가 베르닌은 구석에 있는 누군가에게 걸려 넘어질 뻔 했다.

 

 

“ 죄송해요. 어두워서 못 봤어요. ”

 

“ 아니에요, 괜찮아요. ”

 

 

목소리를 들으니 토냐 같았다.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다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은 안 보였지만 빨간 곱슬머리를 보니 토냐 맞았다. 그런데 토냐가 어깨를 들먹이며 조그맣게 흐느끼고 있었다!

 

 

“ 어, 토냐. 지금 우는 거예요? ”

 

“ 아니에요, 다닐.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저 그냥 여기 좀 있을게요. ”

 

“ 무슨 일이에요, 토냐. 혹시 다리 아픈 거예요? 그럼 추운 데 있으면 안 되는데... 저랑 같이 들어가요. 다리 찜질해드릴게요. 보랴한테 습포 같은 거 있을 거예요. ”

 

“ 아녜요, 안 아파요. 흑... 안 아파도 다 소용없어요... ”

 

 

베르닌은 걱정이 되어서 토냐의 곁으로 다가가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았다. 토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베르닌이 손수건을 꺼내주자 눈과 코를 닦았지만 눈물이 계속 나왔다.

 

 

“ 왜 그래요, 토냐. 이제 다리도 다 나았고 무대에도 다시 올라갈 수 있잖아요. 혹시 기분 상한 일이라도 있었어요? 손님들 중에 무례하게 대한 사람이라도 있었던 거예요? ”

 

“ 아녜요, 다냐. 아... 다 소용없어요. 흑... 나쟈... 귀여운 앤데... 착한 것도 알고 다 아는데 너무 속상해요. ”

 

“ 어... 나쟈랑 싸운 거예요? 친한 줄 알았는데... ”

 

“ 아니요, 싸우긴요... 나쟈는 저랑 타마라 언니를 엄청 따라요. 그게 아니고... 저... 저... 미샤가... 미샤가 나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엉엉... 저 정말 처음부터 미샤 좋아했는데... 말 못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나쟈랑... 흑... 다닐, 너무 속상해요. 전 미샤가 되게 눈 높아서 우리 같은 시골 무용수들한테는 관심 없을 줄 알고 고백도 못 했는데 나쟈랑... 어흑... ”

 

 

베르닌은 당황했다. 어리둥절해지기까지 했다.

 

 

“ 어, 토냐. 그게요... 걔는 그냥 나쟈가 적응 잘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예요. 재능 있는 무용수라고 했어요, 그래서... ”

 

“ 여기도 저한테는 그냥 가릭이랑 가라고 하더니 나쟈는 자기 파트너로 데리고 오고... 와서도 계속 나쟈랑 얘기하고. 옆에 딱 붙어서 챙겨주고 그렇게 상냥하게 쳐다보고 웃고... 신작 때문에 그렇게 바쁜데도 일주일에 두 번씩 꼭 발레학교 가서 나쟈 연습 봐주고. 전 알아요, 다닐. 미샤는 나쟈한테 반한 거예요. 그러니까 스네고로드에서 그 무지막지한 남자들이 위협하는데도 나쟈 데려오고... 너무 슬퍼요. 저 정말 미샤 좋아하는데...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자식은 바이올린 깡패랑 사귄다고요! 나쟈고 렐랴고 당신이고 다 소용없어요! 걘 아저씨들을 좋아한단 말이에요!’ 라고 소리쳐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토냐를 살살 달랬다.

 

 

“ 그렇지 않아요, 토냐. 제가 미샤랑 시간을 많이 보내잖아요. 걔는 나쟈를 여자로 생각 안 해요. 그냥 뒤늦게 재능을 발견한 친구라서 도와주고 싶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걔는 나쟈 뿐만이 아니고 여자한테 별로 관심이 없어요. 알잖아요, 신작도 준비해야 되고... 예술가인지 뭔지잖아요. 그래서 누굴 사귈 여력이 없는 것 같아요. ”

 

“ 정말요? 나쟈랑 그런 사이 아닌 거예요? 나쟈 좋아하는 거 아닌 거예요? 남자들은 맘에 드는 여자 있으면 친절하게 해주잖아요... 가릭이 저한테 그러는 것처럼... ”

 

“ 쟨 여자들한테는 다 친절해요. 남자들한테는 싸가지 없게 굴고! 나쟈랑은 진짜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근데 가릭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솔직히 말해서 전 가릭이 훨씬 나은 거 같아요. 착하고... 당신을 엄청 좋아하잖아요. 옛날부터 많이 좋아했대요. 가릭 괜찮지 않나요? 당신한테 아주 잘해줄 거예요. 미하일 쟤는 자기 잘난 게 최우선인 애라고요. 가릭 같은 남자가 훨씬 낫죠. ”

 

 

토냐는 고개를 저었다.

 

 

“ 가릭이랑은 안돼요. 우리는 발레학교 동기라서 어릴 때부터 그냥 소꿉친구였어요. 가릭은 귀엽고 착하긴 한데 도무지 남자로 안 보이는걸요. 미샤는 처음 보자마자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그때 돈키호테 때도 너무 멋있었고... 저한테 너무 잘해줘서 잠깐 기대까지 했어요... 혹시 저한테 관심 있나 하고요. 흑... 너무 바보 같아... ”

 

“ 어... 아니에요, 토냐. 바보 같은 거 아니에요. 울지 마세요. ”

 

“ 있잖아요, 다냐. 나쟈한테 재능 있다고 했잖아요, 맞아요. 저도 알아요. 미샤가 걜 특별하게 생각하는 거요. 여자로서 좋아하는 거 아니라 해도 질투 나요. 저 너무 못됐나 봐요. 흑... 저도 알아요, 전 재능도 별로 없고 그냥 평범한 무용수인걸요. 그 돈키호테 때도 1군 애들이 스네고로드에 갇히지 않았으면 키트리 역은 평생 꿈도 못 꿨을 거예요. 그래도 미샤 덕분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 같았어요. 저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근데 시계탑에서 다쳤잖아요. 쉬는 동안 몸도 무거워지고... 다시 퇴보한 것 같아요. 쉬운 스텝도 잘 안 되더라고요. 미샤가 절 여자로 안 봐주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무용수로는 인정받고 싶은데 그것도 안 될 것 같아서 너무 속상해요. 미샤는 천재니까 저 같은 평범한 무용수 마음을 모를 거예요. 이러다 금방 저 같은 건 잊어버릴 거 같아요. 그럼 전 다시 군무진으로 내려가겠죠. 다시는 기회를 얻지 못할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면 잠도 안 오고 마음이 아파요. ”

 

 

베르닌은 토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재수를 향한 짝사랑 때문에 울 때는 답답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어쩐지 토냐의 마음이 이해도 되고 조금 이입도 되는 것 같았다. 32회전을 못해서 동동거리다가 왕재수의 지도를 받고 성공하자 기뻐하던 토냐의 모습이 생각났다.

 

 

“ 아니에요, 토냐. 그때 키트리 잘 췄어요. 왕재수, 아니 미샤도 알아요. 당신이 열심히 하는 거. 지금은 다쳐서 쉬었기 때문에 몸이 잘 안 움직이는 거예요. 연습하면 다시 좋아질 거예요. 저기, 토냐... 미하일도, 걔도 그때 힘들어 했어요. 막심이 아파서 갑자기 바질 춰야 했을 때요. 일 년이나 쉬어서 몸이 안 움직인다고 했어요. 진짜 괴로워했어요. ”

 

“ 저랑 돈키호테 췄을 때요? 말도 안돼요. 그때 미샤 진짜 엄청났어요. 전 그렇게 잘 추는 사람 처음 봤어요. 발이 땅에 닿지도 않았는걸요... ”

 

“ 제 눈에도 그렇게 보였는데 걘 아니래요. 몸도 무거워지고 뜻대로 안된다고, 관객들에게 이런 모습 보여줄 수 없다고 정말 속상해했어요. 그러니까, 토냐. 제 얘긴요. 자기한테 만족하는 사람은 없는 거 같아요. 미하일 보세요, 그렇게 천재라고 하는데도 자기 탓을 하고 실력 떨어졌다고 괴로워하고... 사람은 원래 그런 것 같아요. 근데 어떻게 자신한테 100퍼센트 만족하고 살아요.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고 사는 거죠. 그러니까 자꾸 자책하지 말고 힘내요. ”

 

“ 고마워요, 다냐. 진짜 고마워요. 있잖아요, 좀 힘이 되는 것 같아요. ”

 

 

토냐가 베르닌의 손을 꼭 잡더니 뺨에 뽀뽀를 했다. 창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가면서 토냐가 물었다.

 

 

“ 근데 진짜예요? ”

 

“ 뭐가요? ”

 

“ 미샤요. 나쟈 좋아하는 게 아니고 그냥 돌봐준다는 거. 여자 사귈 여력이 없다는 거. ”

 

“ 네. 진짜예요. ”

 

“ 그렇구나. 그래도 좀 희망이 생겼어요. ”

 

 

토냐가 처음으로 방긋 웃었다. 베르닌은 도대체 왕재수가 여자 사귈 여력이 없다는 게 웃을 일인지, 무슨 희망이 있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차라리 나쟈와 사귀는 거라면 마음이 돌아서서 토냐 같은 다른 여자와 사귈 가능성이라도 있지 실지로는 여자에게는 한 톨도 관심이 없는 녀석이 아닌가. 토냐도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거실로 돌아왔더니 다들 여전히 신나게 놀고 있었다. 합창과 춤을 추는 시간은 끝났지만 코즐로프는 여전히 기타를 치고 있었고 보랴도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아말리야는 알렉산드라와 다른 여자들 몇몇에게 요리 레시피를 적어주고 있었고 다른 손님들도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이따금 왁자지껄 웃기도 했다. 왕재수와 나쟈가 같이 있으면 또 토냐가 속상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지만 다행히 그는 보랴와 코즐로프 사이에 끼어 있었다. 열심히 뭐라뭐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보랴는 그런 왕재수가 마냥 귀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토닥거리고 있었다.

 

 

베르닌은 토냐에게 시원한 주스를 한 잔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토냐는 컵에는 눈도 주지 않고 한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베르닌이 시선을 돌리니 가릭과 나쟈가 생일 케익 남은 것을 잘라서 접시에 담으면서 뭔가 재미있는 얘기라도 나누는지 친근하게 웃고 있었다. 토냐가 조그맣게 투덜댔다.

 

 

“ 뭐야, 무용수들이 케익 먹고... ”

 

“ 어... 저거 달지 않아요.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가 직접 구워서 달지 않고 맛있어요. 미하일도 먹었는걸요. 당신도 가서 맛 좀 보세요. 가릭한테 좀 잘라달라고 하면... ”

 

“ 됐어요. 가릭 지금 바쁘네요 뭐. 나쟈랑 신났네. 몸매 관리한다고 케익 같은 거 입에도 안 대더니... ”

 

 

토냐가 가만히 입술을 삐죽거렸다. 금세 표정이 샐쭉해지더니 가릭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말리야와 여자들이 있는 쪽으로 휙 가버렸다. 베르닌은 도대체 여자의 마음이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알렉산드라가 오랜만에 즐겁게 웃고 명랑하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같이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알렉산드라의 눈이 그렇게 밝은 하늘색인지 전에는 전혀 몰랐었다. 뺨이 상기된 채 소리 내어 웃으니 소녀처럼 보였다.

 

베란다 공기를 쐬고서 술에서 깬 베르닌은 다른 손님들과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눴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는 생일 케익도 한 조각 더 가져다 먹었다. 아말리야에게서 흰머리천사날개풀을 말려서 달이는 방법에 대해서도 배웠다. 한참 즐겁게 얘기하고 있는데 코즐로프가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거실 한쪽으로 끌고 가서 속닥거렸다.

 

 

“ 야, 잘 좀 해봐라. ”

 

“ 예? 뭐를요? ”

 

“ 여기 여자들 많잖아. 언제까지 그렇게 죽어라 야근만 하고 독수공방할래. 소피야는 어때? 나랑 같이 온 애 말야. 걔 은근히 괜찮아. 너 엮어주려고 내가 일부러 데리고 온 거란 말이다. 아까 소개시켜줬잖아. ”

 

“ 어, 아... 소피야... 저 금발 머리 아가씨 말이죠? 근데 보랴네 식당 동료랑 지금 완전 불꽃 튀기고 있는데요... ”

 

 

코즐로프는 소파 구석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는 두 남녀 쪽을 힐끗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 넌 어째 멍석을 깔아줘도 이 모양이냐. 아니면 나쟈를 공략해봐. 성격도 좋고 귀엽던데. 스네고로드에서 친해진 거 아니었냐? 토냐도 예쁜데. ”

 

“ 아니, 난 나쟈랑 토냐한테 관심 없거든요. 그냥 친구... ”

 

“ 아, 그렇지. 같이 온 여자가 있었지. 저 아가씨 괜찮구만. 더러운 KGB라서 웬만하면 말리려고 했다만 뭐 너도 같은 밥그릇이니까. 알렉산드라라고 했나? 재치도 있고 볼수록 귀엽네. 많이 조그맣긴 하지만 그게 또 매력일 수도 있으니까. 우리 아기도 조그만 것이 내 품에 쏙...

 

그건 당신이 너무 크니까 그런 거고요! 나 당신이 그런 말 할 때마다 진짜 적응 안 돼요. 미하일은 전혀 조그맣지 않다고요. 180에 가까운 애를!

 

그거랑 상관없어! 우리 아기는 비둘기처럼 조그맣다고! 품에 쏙 들어와서 솜사탕처럼 녹는 것이... ”

 

“ 으윽... 보랴도 그 자식한테 우리 아기라고 하고 당신도 우리 아기라고 하니 나 정말 닭살 돋아 미치겠어요. ”

 

“ 하여튼! 너 왜 우리 아기 얘길 하고 있냐. 내 말의 요지는 알렉산드라인지 하는 쟤랑 잘 해보란 거야. 쟤도 너한테 호감이 있으니까 알지도 못하는 사람 생일 파티에 따라온 거 아니겠냐! 여자는 싫은 남자와 파티에 가지 않는다고! 같이 있는 거 보니까 나름대로 잘 어울리던데. ”

 

“ 아니, 저... 알렉산드라는 그냥 회사 동료예요. 저한테 굉장히 잘해주는 선배라고요. 요즘 일 때문에 힘들어해서, 그래서... ”

 

너 그렇게 친구니 동료니 하고 선 긋다가 주변에 있는 좋은 여자들 다 놓친다! 답답해 죽겠네. 피 끓는 사내놈이 여자 하나 못 안아보고... ”

 

“ 아휴, 여자란 있다가 없다가 하는 거잖아요! 당신이라고 뭐 매일같이 여자가 있었던 건 아닐 거 아녜요! 당신이 무슨 저 녀석처럼 우주 최고 꽃미남도 아니고... ”

 

흥, 난 여자가 없을 땐 남자가 있었다고. 내 침대가 식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

 

 

베르닌은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해야 이 어색하면서도 화끈거리는 대화에서 벗어날까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보랴의 무릎에 반쯤 엎드려 있는 왕재수를 발견하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어, 쟤 왜 저러지? 아픈 거 아니야? ”

 

 

그 말에 코즐로프가 깜짝 놀라며 그쪽으로 뛰어갔다. 베르닌도 급하게 따라갔다. 가까이 가 보니 왕재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보랴의 무릎에 머리와 한쪽 어깨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보랴는 손바람으로 부채질을 해주면서 난감해 하고 있었다. 코즐로프가 왕재수의 어깨를 안아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 보르카, 얘 왜 이러는 거야. 아프다고 했어? ”

 

“ 아니, 그게 아니고... 나도 이럴 줄 몰랐네. 갑자기... ”

 

 

베르닌은 소파 아래 놓여 있는 유리잔을 보고 상황을 깨달았다.

 

 

“ 보랴, 얘한테 술 줬어요? ”

 

“ 어, 노느라 목마르다 해서 샴페인 좀 줬더니만 홀짝 마시더니 갑자기 내 무릎에 얼굴을 박네. ”

 

“ 아... 당신 몰랐군요, 얜 술 못 마시는데... 조금이라도 입에 대면 그 자리에서 기절이에요. 많이 줬어요? ”

 

“ 아니, 반 잔도 안 될 거야. 도수도 되게 약한 건데.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나랑 같이 있을 때 술 마신 적이 없어서 몰랐구나. 크바스 같은 것도 안 마셨거든. 아이고, 우리 아기는 진짜 아기였구나. 잘 돌봐줘야 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서 어쩌지. 술 때문에 아프면 큰일인데. ”

 

 

보랴가 굉장히 미안해했다. 코즐로프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샴페인 반 잔 정도면 괜찮아. 전에도 그냥 필름 끊겨서 한참 자고 나니까 괜찮더라고. 요즘 얘 잠도 못 자고 고생했으니까 차라리 이 기회에 푹 자는 게 나아. ”

 

“ 그래그래, 그럼 내 방에서 재울까. ”

 

 

보랴는 침실로 쓱 들어갔다가 투덜대면서 나왔다.

 

 

“ 젠장, 저 망할 녀석들이 내 침대까지 장악하고 술 퍼마시고 있네. 로만, 너 차 안 가져왔지? ”

 

“ 당연하잖아, 생일 파티니까 술 마시려고 안 가져왔지! ”

 

“ 아, 나 차 가져왔어요. 어차피 같은 아파트에 사니까 내가 데려갈게요. ”

 

 

베르닌이 나섰다. 잠시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코즐로프와 보랴 둘 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는 아빠, 하나는 애인인데 둘 중 누가 더 극성인지 구분이 안 가네요!’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베르닌은 보랴와 코즐로프가 왕재수에게 재킷을 입혀주는 동안 알렉산드라에게 갔다. 그녀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선배님. 저는 미하일이 많이 취해서 데려다 줘야 할 것 같아요. 더 계시다 가시겠어요? ”

 

 

알렉산드라가 퍼뜩 시계를 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어머나, 벌써 자정이 다 됐네!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나도 가야겠어. ”

 

“ 그럼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선배님 댁은 여기서 별로 안 멀잖아요. 내려드리고 갈게요. ”

 

“ 응, 잠깐만. 인사 좀 하고. ”

 

 

알렉산드라는 새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보랴가 알렉산드라에게 재킷과 상품으로 받은 목도리를 가져다주었다.

 

 

“ 정말 즐거웠어요, 보랴. 생일 축하해요. ”

 

“ 이제 몇 분 안 남았어요. 생일은 정말 빨리 지나간다니까. ”

 

“ 전 이렇게 즐거운 파티는 처음이었어요. 좋은 친구들이 많아서 행복하시겠어요. ”

 

“ 이제 내 친구들이 다 당신 친구들이니까 언제라도 놀러 와요. ”

 

“ 고마워요, 보랴. 레몬생강절임도 잘 먹을게요. ”

 

 

알렉산드라가 보랴의 뺨에 뽀뽀를 하고는 코즐로프 쪽으로 고개를 돌려 인사를 했다. 코즐로프는 왕재수를 들쳐 업느라 그렇게까지 다정한 인사를 나누지는 못하고 미소와 함께 짓궂은 농담을 했을 뿐이었다.

 

 

그냥 다닐이랑 둘이 들어가요. 이 녀석은 내가 집까지 업어다 줄 테니까. ”

 

“ 어머, 로만 오시포비치. 다리를 두 개나 건너시겠다고요? ”

 

 

알렉산드라는 다시 뺨을 붉히면서 활짝 웃었다. 베르닌은 입사 이후 몇 년을 통틀어 봐도 오늘 하루만큼 알렉산드라가 자주 웃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   *   *

 

 

 

 

 

코즐로프는 극장 주차장까지 왕재수를 업어다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기 집으로 데려가고 싶은 게 분명했지만 베르닌은 무언의 딱딱한 시선으로 안 된다는 신호를 분명히 전달했다. 만의 하나 왕재수가 밤중에 술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면 저 둘은 또다시 밤을 불태울 것이고, 그러면 왕재수는 또 눈이 퀭해지고 꾸벅꾸벅 졸고 계속 피곤해 할 것이 뻔했다!

 

코즐로프와 왕재수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알렉산드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 굉장히 자상하시네요, 로만 오시포비치. 취한 미샤를 여기까지 업어다 주시고. 엘리베이터도 없었고 여기까지 꽤 걸어야 했는데... 저는 극장 예술가들은 모두 굉장히 까칠한 줄 알았어요. 오늘 만난 분들 보니까 안 그렇네요. 다들 상냥하고 착해요. ”

 

“ 아,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여태 만난 KGB 중에 괜찮은 사람이 딱 두 명 있는데 하나는 저 녀석이고 하나는 당신이군요. 다른 놈들은 다 개자식들이었고. ”

 

로만!

 

 

베르닌이 확 째려보자 알렉산드라가 웃었다.

 

 

괜찮아, 다냐. 맞는 말인데 뭐. 그래도 우리를 괜찮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

 

 

베르닌은 차 문을 열었다. 코즐로프가 뒷좌석에 왕재수를 조심스럽게 태웠다. 그리고는 알렉산드라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왕재수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가볍게 키스를 했다.

 

 

“ 그럼 이만, KGB에서 온 미녀 스파이와 감시꾼 양반. 난 보랴랑 한 잔 더 하고 들어가지. ”

 

“ 나 보고 감시꾼이라고 하는 건 그러려니 하는데요, 알렉산드라는 스파이가 아니거든요! 등록부서 행정요원이라고요. ”

 

“ 다냐, 넌 농담도 이해 못하니. 미녀라고 해줘서 고마워요, 로만 오시포비치. 다음에 또 봐요! ”

 

 

베르닌은 대체 여자들의 마음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다시 한 번 되뇌었다. 차를 출발시켰을 때도 알렉산드라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조그맣게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알렉산드라의 집은 차로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베르닌은 지난번에 그녀를 바래다 준 적이 있어서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상품으로 받은 목도리를 펼쳐보기도 하고 목에 둘러보기도 하면서 좋아했다.

 

 

“ 이거 너무 예쁘지 않아, 다냐? 색깔도 근사해. ”

 

“ 어, 예... 외제인 것 같아요... ”

 

 

분명 투레츠키의 소굴에서 흘러나온 밀수품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해서 차를 세우고 문을 열어주자 알렉산드라가 내렸다. 그리고는 까치발로 서서 두 팔로 베르닌을 살짝 포옹하며 뺨에 뽀뽀를 했다.

 

 

“ 고마워, 다냐. 오늘 정말 즐거웠어. ”

 

“ 저도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스베촉에 같이 가요. 보랴한테 맛있는 거 해달라고 해요. ”

 

알렉산드라는 눈을 반달로 만들면서 웃었다. 가로등 램프 불빛 때문인지 엷은 푸른 눈이 에메랄드 녹색으로 보였다. 베르닌은 언제나 그녀를 동안의 귀여운 외모라고 생각했지만 눈으로 웃으면 정말 예쁘다는 것을, 얼굴 전체로 방긋 웃으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울지 않는 알렉산드라를 보는 것이 기뻤다.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조여 오듯이 기뻤다.

 

 

“ 다냐, 오늘은 모든 게 다 너무 좋아. 이렇게 좋았던 적이 별로 없어서 잠도 안 올 것 같아. ”

 

“ 엥, 그래도 꼭 주무셔야 돼요. 내일도 국장이 들들 볶을 텐데. 레몬생강절임 드시고 푹 주무세요. ”

 

“ 응, 너도 잘 자. 미하일도 잘 돌봐주고. 내일 봐! ”

 

 

알렉산드라는 목도리를 꼭 동여매고는 구두 굽 소리를 내면서 아파트로 뛰어 들어갔다. 베르닌은 잠시 그녀의 자그마한 실루엣이 현관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다시 차에 탔다.

 

 

왕재수는 집에 도착했을 때도 깨어나지 않았다. 베르닌은 혀를 찼다.

 

 

“ 어휴, 이 자식은 정말. 술이라면 냄새만 맡아도 정신 못 차리는 녀석이 어째서 샴페인을 넙죽 받아 마신 거야! 아무리 보랴가 줘도 그렇지! 이렇게 자기 몸을 안 챙기니까 이 모양 이 꼴이지! 내 팔자야. ”

 

 

베르닌은 왕재수를 업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왕재수네 열쇠를 찾기가 귀찮아서 그냥 자신의 집으로 갔다. 재킷과 신발을 벗겨주고 침대에 뉘어주자 왕재수가 몸을 뒤척이더니 끙끙거렸다.

 

 

“ 응... 목말라. ”

 

“ 알았어, 잠깐만. ”

 

 

베르닌은 물을 떠왔다. 왕재수의 어깨를 잡고 반쯤 일으킨 후 입술에 컵을 대주었다. 왕재수는 비몽사몽 상태로 물을 조금 마신 후 다시 베개에 머리를 던졌다. 그리고는 두 팔을 뻗어서 베르닌의 목을 껴안고 뺨에 입술과 코를 비볐다. 베르닌은 화들짝 놀랐다.

 

 

엇, 야! 나 바이올린 아저씨 아니거든!! 나 다닐이야!

 

“ 으응... 잘 자. ”

 

 

왕재수는 마주대고 있던 얼굴을 돌리기는 했지만 베르닌의 목을 두른 두 팔은 풀지 않았다. 울 때나 잠들었을 때는 언제나 그렇듯 몸이 사모바르처럼 따끈따끈했다. 그리고 좋은 냄새가 났다. 다 같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밥을 먹고 땀 흘리고 놀았는데 어째서 이 녀석은 이렇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나는지 이해가 안 갔다. 하긴 우주 최고 꽃미남이라는 놈이니 베르닌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게 당연했다.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왕재수의 팔을 풀어서 시트 위로 내려놓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왕재수는 잠결에도 보살핌을 받는 게 좋은 듯 가만히 미소를 띠었다.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조그맣게 종알거렸다.

 

 

“ 파티... 좋아. ”

 

“ 그래, 잘 놀더라. 그렇게 놀고 싶은 걸 여태 어떻게 참고 살았니. ”

 

“ 안아 줄 거지? 술 깨면... ”

 

 

반쯤 발음이 뭉개진 목소리로 왕재수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베르닌은 더욱 화들짝 놀랐다. 아무래도 그를 코즐로프라고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급하게 담요를 왕재수의 턱 아래까지 끌어올린 후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왕재수는 다시 조그만 한숨을 쉬더니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베르닌은 이상하게 가슴이 쿵쾅거려서 한동안 심호흡을 하고서야 샤워를 하러 갈 수 있었다. 비좁고 불편한 소파로 기어 올라가 잠을 청하면서 베르닌은 이제 취한 왕재수는 자기 집에서 재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   *   *

 

 

 

 

다음날 오후에 베르닌은 언제나처럼 극장에 갔다. 왕재수는 저녁 발레 공연 리허설에 신작 연습이 겹쳐서 굉장히 바빴다. 저녁 식사도 극장 카페인 차이카에서 대충 해결했다. 그날의 발레 공연은 백조의 호수였다. 워낙 자주 올라가는 공연이니 티무르 이즈마일로프에게 맡겨둬도 될 텐데 왕재수의 사전에 ‘공연을 맡긴다’ 란 표현은 없는 게 분명했다. 여전히 백스테이지를 오가며 무대 전체를 조망하고 무용수 몇몇의 동작을 교정하고 관객석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동시에 해내는지 신기했다. 심지어 호들갑을 떨거나 우왕좌왕하지도 않았다. 공연이 끝난 후 베르닌이 그 얘기를 하자 왕재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 그거야 난 천재니까. ”

 

“ 아, 그러시겠지. 물어본 내가 바보지. ”

 

“ 근데 너도 동시에 다 하잖아. ”

 

“ 뭐를? ”

 

“ 서무인지 뭔지. 별의별 쓰잘데 없는 일을 다 하잖아. 무슨 중요한 종이도 막 만들어내고. 도장도 찍어오고. 이거 하고 저거 하고. 국장이 시키는 거 다 하잖아. ”

 

“ 그건 내 업무니까 그렇지! 행정 업무! 서무! ”

 

“ 그러니까 너는 서무라서 동시다발적으로 종이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고, 난 극장 사람이니까 무대를 다룰 줄 아는 거지. ”

 

“ 그런가... 근데 넌 무용수였잖아. 감독이랑은 다른 거잖아. 용케 감독직도 잘 해내고 있네. ”

 

“ 그게 바로 내가 천재라는 증거 아니겠니. ”

 

 

왕재수는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으쓱거리지는 않았다. 무심한 말투로 덧붙였을 뿐이었다.

 

 

“ 나 예전에도 공연 많이 올렸어. 안무도 많이 하고. 그러니까 감독 같은 거 처음 하는 거 아니야. ”

 

“ 아, 그렇구나. 춤만 춘 거 아니었구나. ”

 

“ 응. 극장을 통째로 맡은 건 처음이지만. ”

 

“ 그래봤자 시골 극장이라며. ”

 

“ 그렇지, 그래봤자 시골 극장이지. 그래도 극장은 극장이니까. 관객은 다 같아. 모스크바든 레닌그라드든 여기든. ”

 

“ 정말? ”

 

“ 응. ”

 

 

베르닌은 잘난 척 하는 왕재수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굉장히 의외였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때로 왕재수는 그를 놀라게 만들곤 했다.

 

 

이미 밤늦은 시각이었다. 코즐로프는 전날 밤새 보랴와 술을 퍼마신 결과 숙취가 너무 심해져서 공연 연주를 마치자마자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왕재수는 그나마 연주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했다. 베르닌은 코즐로프가 술병이 나서 오늘도 왕재수와 밤을 불태우지 않게 됐으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 우리도 집에 가자. 너 빨리 들어가서 자야지. 그래야 내일도 이렇게 강행군할 거 아냐. ”

 

“ 응, 근데 잠깐만 스베촉에 들렀다 가자. ”

 

“ 왜? ”

 

“ 보랴한테 선물 줘야 돼. 어제 타이밍을 놓쳤어. 집에 가기 전에 주려고 했는데 샴페인 때문에 망했어. ”

 

 

왕재수가 재킷 주머니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구겨져서 귀퉁이가 찢어진 빨간 크레이프 포장지를 벗겨내면서 투덜댔다.

 

 

“ 주머니에 넣어놨더니 포장지가 다 찢어졌네. 에이... ”

 

“ 와, 그거 뭐야? ”

 

“ 별 거 아냐. 그냥 라이터 같은 거야. 보랴는 담배 피우니까. ”

 

 

베르닌이 궁금해하자 왕재수는 상자를 열어서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베르닌은 그렇게 화려하고 예쁜 라이터는 난생 처음이었다. 짙은 녹색에 금장 테두리를 두른 데다 금빛으로 작은 사자가 새겨져 있고 조그만 파란색 보석이 세 알 박혀 있었다.

 

 

“ 와, 이거 정말 근사하다. 진짜 보석이야? ”

 

응. 근데 알이 굉장히 작으니까 그렇게까지 부르주아 냄새 나는 건 아냐. ”

 

“ 화려한 걸 보니 외제인가 보네. 투레츠키도 이런 건 못 가져오겠다! ”

 

“ 외제 아니야. 레닌그라드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보석 디자이너가 만들어 준 거야. ”

 

“ 넌 담배 안 피우잖아. ”

 

“ 옛날엔 좀 피웠어. 하루에 딱 세 개비. ”

 

“ 세 개비는 또 뭐냐. ”

 

“ 그게... 술도 그런데 담배도 원래 몸에 안 받거든. 그래도 피우고 싶어서 세 개비까지는 어찌어찌... ”

 

몸에 안 받는 걸 왜 억지로 해! 몸 다 버리라고!

 

“ 몸에 좋은 것만 어떻게 하고 사니, 재미없게. 근데 지금은 담배 손도 못 대. 연기 마시면 기침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의사 선생님이 평생 담배는 꿈도 꾸지 말래. 아 진짜 싫다. ”

 

 

베르닌은 시계탑에서 연기를 들이마셨던 것이 떠올라서 문득 걱정이 되었지만 왕재수는 그의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보랴가 좋아할까? 너무 반동분자 같나? ”

 

“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

 

나야 신경 안 쓰는데... 그래도 보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으니까 그렇지. ”

 

“ 네가 준 거니까 좋아할 거야. 네가 주는 거라면 분홍색 슬리퍼를 줘도 좋아라 신고 다닐 걸. ”

 

 

왕재수가 안심하며 미소를 지었다. 베르닌은 맨손으로 청어를 퍼먹고 보드카를 병째 들이마시는 보랴가 군복 조끼 주머니에서 파란 보석이 박힌 화려한 라이터를 꺼내는 것을 상상하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둘은 극장을 나와 스베촉으로 갔다. 이미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라 영업이 끝나 문이 닫혀 있었다.

 

 

“ 어, 보랴네 집으로 가야 하나? ”

 

“ 아니야, 오늘 화요일이잖아. 식재료 들어오는 날이라서 보랴 그거 다듬느라 늦게까지 남아 있어. 나 뒷문 알거든. 그쪽으로 가자. ”

 

 

건물 뒤로 돌아가니 정말 조그만 문이 하나 있었다. 약간 열려 있어서 노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베르닌은 노크를 해야 하나 망설였지만 왕재수는 곧장 문을 밀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자주 와본 모양이었다. 베르닌도 따라 들어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왕재수가 두어 발짝 물러서더니 한 손으로 스카프를 매만지며 조용하게 말했다.

 

 

“ 그냥 가자. ”

 

“ 왜? 보랴 없어? 선물 줘야지. ”

 

“ 내일 점심 때 주지 뭐. 가자. ”

 

 

왕재수는 왔던 길로 다시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어찌나 조용하고 부드러운 몸놀림인지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베르닌은 의아해서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좁은 주방에 보랴가 서 있었다. 바닥에는 양배추와 당근, 감자가 가득 들어 있는 대야가 여러 개 널려 있었다. 대야들 사이에 등받이 없는 조그만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조그만 의자에 알렉산드라가 앉아 있었다. 둘이서 나직한 목소리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란 불빛 속에서 알렉산드라의 푸른 눈은 이제 더욱 부드러운 녹색으로 보였다. 보랴가 뭐라고 말하자 알렉산드라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자 보랴가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다정한 눈빛을 던졌고 알렉산드라가 그의 가슴에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쳐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왕재수는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함께 극장 주차장으로 갔다. 차를 타면서 베르닌이 중얼거렸다.

 

 

“ 우와... 난 상상도 못했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에야 차에서 내리면서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 제일 좋은 생일 선물이네. ”

 

“ 보랴 생일은 어제였는데. ”

 

“ 그러게. 근데 생일 다음날 선물 받는 게 더 좋지 않나? 난 다음날에도 선물 받고 싶어서 엄마한테 또 달라고 했는데. ”

 

“ 어휴, 눈에 선하다. 어리광쟁이. ”

 

아니야! 나 어리광 같은 거 안 부렸어! 그냥 당당하게 선물 달라고 했어! 그리고 커서는 워낙 추종자들이 많아서 맨날맨날 선물 가져다줬어! 무대 올라갈 땐 저것보다 열 배는 더 받았다고. ”

 

“ 어련하시겠어. ”

 

 

베르닌은 차 뒷좌석에 쌓여 있는 꽃다발과 선물 상자들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왕재수의 생일이 한참 남아서 참 다행이었다. 그는 꽃과 상자들을 끌어안고 왕재수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어쨌든 왕재수는 무거운 것을 들면 근육이 미워지니까.

   

 

 

 

 

 

- FIN -

2015. 7. 12 ~ 8. 4

 

 

 

...

 

 

왕재수의 신작에 대한 얘기는 사실 본편의 가브릴로프 우주에서 주축이 되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예전에 이미 구상은 다 해놨는데 서무 시리즈 쓰느라 이 본편을 못 쓰고 있다만.... 본편에서 미샤가 안무하는 신작은 물론 서무 시리즈에 나오는 왕재수의 신작과는 내용이나 형식이 많이 다르다. (본편 언제 쓰나 ㅠ)

 

..

 

블라지미르 브이소츠키는 소련에서는 굉장히 상징적인 문화예술 아이콘이다. 8~90년대가 빅토르 초이라면 60~70년대는 브이소츠키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본편 우주에서도 미샤는 브이소츠키를 매우 좋아하고 이따금 그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이전에 트로이가 나오는 본편을 쓰면서 미샤가 브이소츠키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넣은 적이 있다. 그때는 절친한 친구 일린의 생일파티에서였다. 사실 이번 29편에서 왕재수에게 브이소츠키 노래를 시킨 건 그 본편을 서무 식으로 재변주한 것이다. 하여튼 당시 그 글 쓰면서 그 노래 번역 일부와 영상을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735

물론 미샤는 브이소츠키와는 발성이나 목소리, 노래하는 방식 자체가 많이 다르기 때문에 브이소츠키처럼 부른 것은 아니고 자기 식으로 부드럽고 낮게 긁듯이 불렀다.

 

..

 

왕재수가 왕년에 담배 하루에 세 개비 운운하는 얘기 역시 본편 우주에서 따왔다. 본편에서 미샤가 하루에 딱 세 개비만 피우는데 이 사람은 체질상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못 피우지만 꿋꿋하게 술도 세잔, 담배도 세 개비까지는 피우고 논다...(ㅜㅜ 너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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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30편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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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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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