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무의 슬픔 #37. 뜻밖의 손님 series : 서무의 슬픔2016. 2. 8. 19:40
오랜만에 서무 시리즈 업뎃.
사실 이 37편을 쓴 건 12월이었는데 그러고 나서 심적으로 힘든 일이 많아서 그냥 안 올리고 묵혀놨었다. 지금 보니 우연찮게도 딱 명절 시즌이랑 느낌이 맞는 편이다. 가족 얘기라서...
지난 35~36편에서는 우리의 단추 베르닌과 왕재수가 숲에 갔다가 폭설을 만나 차도 망가지고 벌목공 숙소에 갇히고 심지어 야생짐승 습격도 받는 등 파란만장한 일이 있었는데 이번 37편은 시간적으로는 36편에서 며칠 후에 일어난 이야기이지만 그런 어드벤처는 없다 :) 그래도 앞부분에서 베르닌과 왕재수가 망가진 지굴리(베르닌의 차)나 폭설에 대해 얘기하는 게 까마득하다면 에피소드 35. 4월의 눈보라 : http://tveye.tistory.com/4172, 에피소드 36. 빨간 열매와 초특급 익스프레스 : http://tveye.tistory.com/4189를 다시 읽어보세요~
초반부에 베르닌이 찾아가는 수도원은 22편의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에 나왔던 곳이다. 예고르 사제도 그때 나왔다. 이 수도원은 본편에서도 중요한 장소로 등장한다(그런데 본편은 언제 쓰지 ㅠㅠ 올해는 꼭 이어서 써야지..) 왕재수가 잠깐 언급하는 '레스코프'는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 얘기다.
이번 편에 등장하는 음식들은 대부분 러시아 시골 음식들이다. 쓸땐 그런 생각 안했는데 올리면서 다시 읽어보니 뭔가 기름진 것들이 역시 설날 연휴랑 어울리는 듯한 느낌이...
그럼 재미있게 읽으세요~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4월의 폭설로 검은 숲에 갇혔다가 무사귀환한 베르닌과 왕재수는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오고... 베르닌은 언제나처럼 과로와 야근에 시달리며 자신에게도 집안일을 해줄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푸념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 http://tveye.tistory.com/4062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2부) : http://tveye.tistory.com/4079
* 에피소드 33-1. 도자기 인형 : http://tveye.tistory.com/4098
* 에피소드 34. 딸기 아가씨들과 자선 바자회 : http://tveye.tistory.com/4140
* 에피소드 35. 4월의 눈보라 : http://tveye.tistory.com/4172
* 에피소드 36. 빨간 열매와 초특급 익스프레스 : http://tveye.tistory.com/4189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번외편. 돌아온 등장인물 20문답(리자,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4236
** 번외편. 돌아온 등장인물 20문답(투레츠키, 보랴, 일류샤) : http://tveye.tistory.com/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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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7
서무의 슬픔
- 뜻밖의 손님 -
금요일이 되자 베르닌은 연이은 야근과 스트레스로 지칠 대로 지쳤다. 폭설로 검은 숲에 갇혔다가 돌아오자 스페호프는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눈 때문에 지연된 안전가옥 자물쇠 수리를 빨리 해치우라고 들들 볶았다. 숲에 갔던 첫날은 외출부를 쓰고 가서 괜찮았지만 갇혀 있던 그 다음날은 아예 근태기록부에 붉은 색깔로 무단결근이라 적혀 있었다! 베르닌은 경위서를 작성해 이틀에 걸쳐 감사부서와 인사부서의 협조 도장을 받은 후 국장에게 대면 결재를 요청해서 간신히 무단결근 처리만은 면했다. 그나마도 국장에게 왕재수가 곰의 습격을 받았다는 보고를 했기 때문이었다.
스페호프는 매우 기뻐하며 베르닌을 칭찬했다.
“ 그렇지! 역시 자네는 우리 가브릴로프 토박이야! 검은 숲에는 당연히 곰이 돌아다니지! 그 불여우를 곰이 나오는 곳으로 유인하다니 정말 좋은 생각이었네. 내가 따로 지시를 하지 않았는데도 검은 숲에 그 녀석을 데리고 가서 야생 짐승의 습격을 받게 하다니 자네 정말 머리가 비상하군. 역시 현장요원감이야. 으음, 서무 업무가 막중하긴 하지만 참 고민이 되는군. 자네 같은 인재는 현장요원으로 돌려야 하는데... 행정직도 턱없이 모자라니... 본부에 정원을 늘려달라고 건의해보겠네. 하여튼 잘했네. 그럼 그 불여우는 지금 병원에 있나? ”
“ 아, 아니오. 그날 밤에만 입원했다가 다음날 낮에 퇴원해서 곧장 극장으로 갔습니다. 오늘은 극장 안전 점검의 날이라 공연이 없어서 종교 박물관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브릴로프 수도원 말입니다. ”
“ 흠, 아깝군. 곰에게 제대로 맞았어야 했는데. 그건 그렇고 종교 박물관이라. 음, 자네도 오후에 그쪽으로 가보게. 알다시피 그 망할 놈의 수도원은 반동분자들의 집합소가 아닌가. 그 불여우가 거기서 신부를 만나 또 무슨 작당을 할지 모르니 가서 잘 들어두는 게 좋겠네. ”
“ 하지만... 야스민은 무신론자인 걸요. 지난번에도 수도원에 갔을 때 박물관만 실컷 구경하고 카페에서 차만 마시고 나왔는데요. ”
“ 그놈이 무신론자든 광신도든 중요하지 않아! 일단 수도원에 드나든다는 것 자체로 보고서를 꾸밀 수 있는 거야. 하여튼 오후에는 수도원에 가게! 그리고 그 녀석과 수도원 반동분자들의 커넥션에 대한 보고서 초안을 잡아보는 거야. 주말에는 공연이 있겠지? ”
“ 예, 내일은 백조의 호수, 모레는 지젤입니다. ”
“ 좋아. 요즘은 레베진스키가 꼬리를 밟힌 것 같다면서 정보가 뜸하단 말이야. 자네가 짬을 내서 한번 그 친구를 만나보게. 극장 동향에 대해서도 월요일에 따로 보고하게. 그럼 이만! ”
그래서 베르닌은 산더미 같은 일을 중간에 왕창 끊어버리고 밀린 일에 대한 근심에 짓눌린 채 오후에 수도원으로 갔다.
* * *
왕재수는 수도원 뒤뜰에서 예고르 사제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말리야도 함께였다. 가브릴로프 수도원은 검은 숲에서도 가장 따스하고 밝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뒤뜰에는 이미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겨우 사나흘 전에 폭설이 내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사제의 이야기로는 수도원 쪽에는 눈이 많이 오지 않아서 꽃나무도 많이 얼지 않았다고 했다. 베르닌을 보자 모두가 반겨주면서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 예고르 사제는 지난번에 흰머리천사날개풀을 따러 왔을 때 알게 된 사이였고 아말리야는 보랴의 생일 파티에서 만나 안면이 있었다. 아말리야는 아침에 구웠다면서 산딸기 파이를 큼직하게 잘라 베르닌에게 내밀었다. 너무나도 달콤하고 향긋한 냄새에 베르닌은 이미 정신이 혼미했다. 왕재수가 포크를 건네주면서 물었다.
“ 너 여기 왜 왔어? 일 안해? ”
“ 너 여기 있다니까 국장이 따라가래. ”
“ 칫, 또 반동분자가 어쩌고 수도원이 어쩌고 수작부리는 보고서라도 쓰려는 모양이지. ”
“ 어... 꼭 그런 건 아닌데... 국장이야 뭐... ”
“ 나 신작 때문에 온 거야. 레스코프 소설들을 재구성해서 리브레토를 짤 거란 말이야. 키로프에 있을 때부터 짜놨던 건데 여기 오니까 생각이 좀 바뀌더라고. 이콘이랑 조각상이랑 벽화 보러 온 거란 말이야. 신부님이랑 아말리야는 아무 상관없어. 나 때문에 괜히 끼어들게 하지 마. 알았지? ”
“ 내가 왜 그런 짓 하니. 보고서는 대충 쓸 거야. 오늘 너는 신부님이랑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안 만난 거야. 그냥 여기서 꽃구경하고 박물관에서 그림 보고 간 거야. 두 분도 그렇게 해주실 수 있죠? ”
“ 우리 미셴카를 위해서라면야... ”
“ 하느님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하셨지만...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건 괜찮겠지. ”
베르닌은 정신없이 산딸기 파이를 흡입하고 차를 마셨다. 파이는 너무나도 맛있었다. 부스러기를 마구 흘리며 먹자 왕재수가 한숨을 쉬었다.
“ 왜 이렇게 급하게 먹냐. 점심 안 먹었어? ”
“ 오늘 구내식당 메뉴가 부실했단 말이야. 양배추 수프에 소금 범벅 마카로니였어. ”
“ 우욱, 듣기만 해도 싫다... ”
그때 아말리야가 베르닌이 맛있게 먹는 걸 보니 좋다면서 메도빅과 사과빵을 가져다주었다. 베르닌은 너무 행복해서 기절할 것 같았다. 순식간에 산딸기 파이 한 조각, 메도빅 한 조각, 사과빵 두 개를 해치웠다. 차도 두 잔이나 마셨다. 왕재수는 산딸기 파이 반 조각을 곁들여 우아하게 차를 마시면서 베르닌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혀를 찼다.
“ 손목토시... ”
“ 일하다 왔단 말이야! ”
“ 다 태워버린 줄 알았는데 대체 그거 몇 개나 있는 거야? ”
“ 야! 왜 네 맘대로 내 토시를 태워! 어쩐지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니. 사무실에 여분으로 놔둬서 망정이지. ”
“ 칫. 촌스러우니까 그렇지. 아가일 셔츠도 태우려다 딴 옷이 없는 것 같아서 그건 놔뒀단 말이야. 근데 너 발목은 괜찮아? ”
“ 그때 의사 선생님이 치료해줘서 부기는 가라앉았는데 아직 약간 욱신거려. 찜질해주라고 하셨는데 계속 야근하느라... ”
“ 신부님한테 약초 찜질 받으면 좀 나을 텐데. 나 아까 어깨 찜질 받아서 한결 나았거든. ”
예고르 사제는 베르닌의 발목을 보더니 수도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따끈하게 데운 약초 주머니를 대고 찜질을 해주었다. 발목에 남아 있는 멍 자국에 왕재수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빨리 나으려면 그쪽 발은 쓰면 안 되는데. 계속 걸어 다니고... ”
“ 별로 안 다쳤는데 뭐. 멍 때문에 심해 보이는 거야. 너는 어깨 괜찮아? 흉터라도 생기면 큰일이잖아. ”
“ 그러게. 내 백옥 같은 피부에 흉 지면 안 되는데. 뭐 흉터 남아도 할 수 없지. 눈에 잘 띄진 않을 거야. 나 사실 다른 데도 흉터 있거든. ”
“ 엥, 정말? 너 피부 진짜 좋잖아. 완전 하얗고. 흉터 같은 거 못 봤는데. ”
“ 네가 나 흉터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나 벗은 것도 안 봤으면서! 벌목공 숙소에서 나 목욕할 때도 눈 감고 있어놓고! ”
‘너 아플 때랑 물에 빠졌을 때랑 바질 춘다고 옷 갈아입을 때 봤거든!’ 하고 대꾸해주려고 했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그때도 구석구석 찬찬히 본 적은 없었으므로 베르닌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벗은 걸 봤다고 하는 것도 뭔가 이상한 것 같아서.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 너 왜 흉터 있어? 춤추다 다쳐서? ”
“ 어, 아니... 춤추다 다치는 건 뭐 자주 있는 일이긴 한데 나 원래 흉터 잘 안 생기는 편이야. 피부 재생이 잘 된대. 그냥... ”
왕재수는 말끝을 흐리더니 사제에게 찜질 주머니 만드는 법을 물었다. 사제는 약초가 든 주머니를 여러 개 챙겨주면서 잠깐 쪄서 사용하라고 했다. 찌는 것과 삶는 것의 차이를 그새 까먹은 왕재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에 넣고 끓여요?’ 하고 물었다. 그 바보 같은 질문에 예고르 사제는 말문이 막혔고 베르닌이 대신 끼어들었다.
“ 야, 그때 만두 쪄봤잖아! 찜통에 올려놓고 증기로! ”
“ 아, 그게 찌는 거구나. 우리 집에 찜통 없는데. ”
“ 왜 없어! 지난번에 내가 너네 집에서 찜통에 만두 쪄줬잖아! 에휴, 넌 어차피 몰라도 돼. 집 가면 어차피 내가 이거 데워줄 텐데 뭐. 그 주머니들도 내가 챙길게. ”
마음씨 착한 예고르 사제와 아말리야는 약초 주머니에 열매즙, 왕재수를 위한 약초즙, 베르닌을 위한 수도원 버섯빵과 사과빵을 바리바리 싸주었다. 그래서 베르닌은 뿌듯해하며 왕재수와 함께 수도원을 나왔다.
* * *
수도원 입구에는 왕재수의 번쩍거리는 차가 세워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앉으면서 베르닌이 물었다.
“ 너 어떻게 여기까지 차 끌고 왔어? 운전도 서툴면서. ”
“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랑 같이 왔어. 스베촉에서 보랴랑 같이 점심 먹었거든. 버스 타고 가신다 해서 내 차 타고 같이 가자 했어. ”
“ 뭐야, 그럼 아말리야한테 운전을 시켰단 말이야? 어르신한테! ”
“ 그러면 안 되니? 운전은 잘하는 사람이 하는 거지. 버스도 30분이나 기다려야 한댔는데. 내려서도 수도원까지는 한참 걸어야 되잖아.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도 내 차 몰고 와서 좋다고 했어. 운전하는 재미가 있대. 근데 정말이야? 내 차랑 지굴리랑 달라? ”
“ 어, 이 차야 고급차니까 당연히 운전하는 맛이 다르지. 하긴, 나도 버스 타고 내려서 걸어왔는데 좀 멀긴 하더라. ”
“ 네 차는 어떻게 됐어? 그 털털대는 지굴리. 폐차시켰어? ”
“ 아니. 정비소에 맡겼는데 2주일은 걸릴 거 같아. 문짝도 떨어지고 엔진도 고장나고 유리창도 깨지고... 네가 트렁크 문짝도 떼어버렸잖아. ”
“ 그러니까 차라리 폐차해. 고치는 값이 더 들겠다. KGB에서 수리비용 대준대? ”
“ 안 대준대... 내가 운전 미숙으로 사고 낸 거니까 내 책임이래. ”
“ 그럴 줄 알았어, 쳇. 그냥 내 차 끌라고 했잖아. 나는 네가 출퇴근만 시켜주면 되는데. ”
“ 싫어! 내가 왜 네 차를 끌고 다니냐. 너 출퇴근은 이걸로 시켜줄게. 그치만 우리 회사에 이거 끌고 가긴 싫어. 이건 네 앞으로 나온 차잖아. 극장 임원용! 난 공무원이란 말이야. 청렴 의무도 있고... ”
“ 청렴 의무 같은 소리. 제일 고급차 끌고 다니는 게 공산당 간부랑 노멘클라투라라고. 그럼 너 요즘 어떻게 출퇴근한 거야? 지굴리도 그 모양이면. ”
“ 너 요 며칠 로만네 집에서 자느라 몰랐구나. 나야 걸어 다녔지. 우리 회사는 집에서 가깝잖아. 너네 회사나 강 건너 가는 거지. ”
“ 바보야, 걸어 다니니까 발목이 아직 아픈 거야. 발목 나을 때까지 이 차 가지고 다녀. ”
“ 싫어! ”
“ 책상물림 주제에 웬 똥고집이니. 좋아, 그러면 나 다음 주까진 로만한테 안 가. 너 나 무조건 출퇴근시켜줘! 그러면 나 태워다주고 이 차 끌고 가서 너네 회사에 세워놨다가 밤에 데리러 오면 되지! ”
“ 나야 그럴 수 있지만... 너 일주일 동안 로만도 없이 독수공방할 수 있냐? ”
왕재수의 눈이 금세 휘둥그레지더니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 일주일... 흑... 가뜩이나 요즘 계속 바빠서 로만이랑 많이 못 놀았는데... ”
“ 그것 봐. 그냥 거기 가 있어. 난 살살 걸어 다니면 되니까. ”
“ 아니야! 로만보고 우리 집 오라 그러면 되지! ”
“ 국장한테 걸릴까봐 너 맨날 걱정하잖아. ”
“ 너네 집 놀러왔다 하면 되잖아. 자기가 그렇게 하라 해놓고. ”
별수 없이 베르닌은 발목이 나을 때까지 왕재수의 차를 쓰기로 했다. 왕재수가 꼬치꼬치 캐물어서 지굴리 수리비 견적도 실토했다. 왕재수는 혀를 내둘렀다.
“ 그 돈이면 중고 지굴리 하나 뽑겠다! ”
“ 너 중고 지굴리가 얼마인지 알기나 하냐? 좋은 대접만 받고 살아서 인민들 물가도 모르는 게. ”
“ 흥, 그건 두고 보면 알지. 정비소에 전화해서 일단 수리 보류하라 그래. 그 가격으로 원래 차보다 나은 중고 지굴리 구해주면 될 거 아냐. ”
“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네가 어디서 중고차를 구해! ”
“ 그러니까 기다려보라고! 다 구하는 수가 있어! ”
베르닌은 큰 소리 빵빵 치는 왕재수 때문에 기가 막혔지만 워낙 의외의 인맥이 많으니 혹시나 싶어서 일단 알았다고 했다.
강을 건너 구시가지로 접어들었을 때쯤 왕재수는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코즐로프와 밤새 사랑을 불태운 게 분명했다. 폭설로 갇혔을 때 열이 올라 추워하며 코즐로프를 애타게 찾던 모습이 떠오르자 베르닌은 가슴이 쿡쿡 쑤셨다. 자기가 별 도움이 되지 못한 게 속상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때 투레츠키가 와줘서 다행이었다. 베르닌은 썰매 운송비 100루블을 50루블로 감해주는 대가로 주말에 투레츠키의 일을 돕기로 했었지만 다음날 왕재수가 사무실로 전화를 해왔다. 자기가 투레츠키와 셈을 다 끝냈으니 베르닌은 주말에 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베르닌은 빚이 탕감된 게 기쁘다기보다는 저 녀석이 대체 또 무슨 거래를 한 건지 걱정이 될 뿐이었다.
‘ 이 자식, 혹시 투레츠키랑 자주기로 한 거 아냐? 그 망나니가 그때도 썰매 타고 갈 때 이 자식 비몽사몽인 거 이용해서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설마 몸으로 때우고 100루블이랑 자기 약값 떨어버린 건가? 아니야, 분명히 바냐는 자기 취향 아니라고 했어. 어휴, 정말 이 자식은... 별 이상한 걱정 다 하게 만들고! ’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는데 수위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아는 척을 했다.
“ 엥, 당신 웬일이죠? 그 후진 지굴리는 어디로 가고 이렇게 좋은 차를? 아, 그러면 그렇지. 감독님 차였구먼. 이 차는 매일 구석에 주차만 돼 있더니... 그건 그렇고 그 지굴리는 어디 갔어요? ”
“ 고장 나서 수리 맡겼어요. ”
“ 허참, 그래도 매일 보던 지굴리가 없으니까 좀 섭섭하긴 하네. 그거 연식이 오래돼서 수리비 꽤 나올 텐데. 혹시 폐차할 거면 정비소에 맡기지 말고 나한테 넘겨요. 괜찮게 쳐줄 테니까. ”
“ 안 해요! 폐차 안 해요! 아무리 후진 지굴리라도 그거 내가 아끼는 찬데 왜 다들 폐차하라는 거예요. 잘 고쳐서 십년 이십년 더 쓸 거예요! ”
베르닌이 울컥해서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옆에서 왕재수가 투덜댔다.
“ 십년 이십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폐차 안 하면 내가 불 지를 거야. ”
“ 너 그랬단 봐! 재물 손괴와 방화죄로 고소할 거야! 이건 손목토시와는 경우가 다르단 말이야! 나 법학 전공... ”
“ 너 나 정말 고소할 거야? 악마... ”
왕재수가 깜짝 놀라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까만 눈이 동그래지면서 금세 상처받은 표정이 되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그거 나한테 안 통한다고 했잖아. ”
“ 잘만 통하던데. ”
“ 웃기지 마! 네 착각이야! ”
“ 칫. ”
여전히 지굴리를 폐차시켜 고철 값을 떼먹을 궁리에 눈을 반짝이고 있는 수위를 뒤로 하고 그들은 엘리베이터로 갔다. 베르닌이 살짝 다리를 절룩이자 왕재수가 슬며시 팔을 붙잡아 주었다.
“ 나 괜찮다고 했잖아. ”
“ 그 발에 무게 실으면 안 좋단 말이야. ”
“ 네 어깨나 걱정해! ”
“ 난 괜찮아. 뼈 다친 것도 아니고. 사흘 밤 내내 로만이 곰한테 맞은 부위 찜질도 해주고 어루만져주고 뽀뽀도 해줬어. ”
“ 제발 바이올린 아저씨와 네가 밤을 불태우는 얘긴 하지 말아줬으면. ”
“ 너 이상해. 로만이랑 내가 응응하는 얘기만 나오면 왜 그렇게 민감해지는 거야? 지나친 부정은 억압의 표시라고. 아무래도 너는 욕구불만인 것 같아. 너무 오래 응응을 안 해서 그래. 리자랑은 잘 안되니? ”
“ 웬 리자!!! 갑자기 웬 리자 얘긴데! 나랑 리자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
“ 아 맞다, 넌 렐랴 좋아했지. 근데 렐랴는 아직도 날 너무 좋아한단 말이야. 그때 스네고로드에서도 그렇고 리자는 너 좋아하는 것 같던데. 둘이 좀 잘해보면 안되냐? ”
“ 리자랑 나 엮지 마. 리자는 그런 생각도 없는데... 우린 그냥 동료인데. ”
“ 멍충이. 너 원래 알렉산드라하고도 잘 될 수 있었어. 그때 보랴 생일 파티 때도 알렉산드라 처음엔 너한테 마음 있어보였단 말이야. 근데 네가 바보짓 하니까 그새 보랴가 낚아갔잖아. 하긴 내가 알렉산드라였어도 보랴한테 넘어가긴 했겠다. 보랴 멋있어. ”
“ 으악, 이번엔 또 웬 알렉산드라야! 너는 정말 머릿속에 그런 생각밖에 없냐! 대체 남녀든 남남이든 같이 있으면 무조건 그런... ”
“ 바보 멍충이. ”
둘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갑자기 베르닌은 일주일간의 피로가 몰려와서 그런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월요일부터 검은 숲에 갔다가 폭설로 갇히고 발목을 다치지 않나, 돌아와서는 산더미 같은 일에 짓눌려 야근에 시달리고 집에는 그야말로 잠깐 들러 눈만 붙이고 나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옆에 있는 왕재수의 야윈 얼굴과 어린애처럼 커진 까만 눈을 보니 좀 막막했다.
‘ 이 자식 곰한테 맞고 열 올라서 아팠으니까 잘 먹여야 하는데 오늘 저녁은 뭘 해먹이지. 냉장고도 텅 비어 있고. 시장이라도 봐왔어야 되는데 깜박했네. 다시 나갔다 와야 하나. 아아 귀찮아. 너무 피곤하다. 설거지도 잔뜩 쌓여 있고 빨래도 장난 아닌데... 집 청소도 며칠을 안 한 거야... 아침에도 먼지가 굴러다녔지... 화장실 청소도 해야 하고 쓰레기도 버려야 하고... 근데 이 녀석 밥 먹이고 차도 우려 줘야 하고... 이 녀석 또 피곤하다고 저녁 먹고 나면 자기 집 안 가고 우리 집에서 픽 쓰러져서 잘 텐데... 베갯잇이랑 시트도 갈 때 됐는데. 깔끔 떠는 녀석이니 분명 투덜댈 텐데. 아아, 나도 누가 와서 집안일 좀 해줬으면 좋겠다. 나도 이 녀석이 되고 싶다... ’
급속하게 심란해진 베르닌의 속도 모르고 왕재수가 조잘거렸다.
“ 오늘 저녁 뭐 해줄 거야? 나 아까 수도원에서 버섯 샐러드랑 우하 먹었는데 벌써 배 꺼졌어. 신기해, 오늘은 춤도 안 추고 애들한테 소리도 안 질렀는데 왜 이렇게 벌써 배가 고프지. 수도원 공기가 좋아서 그런가봐. ”
“ 어, 으응... 그래. 다행이다, 너 맨날 입맛 없다 그러고 밥 잘 안 먹더니... 그냥 수도원에서 저녁까지 먹고 올 걸 그랬구나... ”
“ 신부님도 바쁘고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도 내 점심이랑 차랑 파이까지 챙겨주셨는데 저녁까지 얻어먹긴 미안하잖아. ”
‘너는 신부님이랑 아말리야한테는 미안하고 나한테는 맨날 저녁 얻어먹으면서 하나도 안 미안하냐!’ 하고 버럭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깟 밥 챙겨 먹이는 것 가지고 유세하는 것 같기도 해서 베르닌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실 자기가 해준 밥을 왕재수가 맛있게 먹는 걸 보면 뿌듯하기도 했으니까.
“ 어... 그렇구나. 먹고 싶은 거 있니? 집에 아무 것도 없어, 어차피 가게 갔다 와야 하니까... 점심때 우하 먹었으면 생선은 안 해도 되겠구나... 닭가슴살 사다 쪄줄까? ”
“ 집에 왜 아무 것도 없어? ”
“ 너 로만한테 가 있는 동안 계속 야근했거든. ”
“ 너네 국장 나빠! 눈 와서 그렇게 고생했는데 지굴리도 네 돈으로 고치라 하고 막 야근시키고! 가만 안 둘 거야! ”
“ 너도 극장에서 계속 늦게 왔잖아! 내가 모르는 줄 아냐! 분명히 의사 선생님이 폐렴 도질 수도 있으니까 이번 주는 조심조심하고 일은 조금만 하라 했는데! ”
“ 너 어떻게 알아, 내가 늦게 온 거? ”
“ 왜 모르냐! 이번 주 공연 스케줄 오늘 빼고 꽉 찼는데! 너 공연 올라가는 날은 끝까지 남아 있잖아! 아침마다 류다한테 전화해서 물어봤어! ”
“ 우와, 이 감시꾼. 스파이! ”
“ 나 이제 그렇게 불러도 열 받지도 않아. 의사 선생님한테 앞잡이 개자식이란 욕을 너무 많이 들어서 감시꾼 스파이는 양반이야. 그때 나도 다리 다쳤는데 선생님은 너만 끼고 돌고! 나보고 앞잡이라고 하고... ”
“ 레프 사벨리예비치 욕하지 마. 원래 그런 스타일이잖아. 그저께 선생님이 너는 왜 치료받으러 안 오냐고, 너 갖다 주라고 진통 효과 있는 약초즙도 챙겨 주셨었는데. 아, 감독실에 놔두고 왔나보다. 병원에 다시 가볼까? ”
“ 됐어. 신부님이 주신 약초주머니로 찜질하지 뭐. 먹을 거 사러 나가는 것도 귀찮은데 병원까지... ”
“ 우리 집에 먹을 것 좀 있는 거 같은데... 사러 가기 귀찮으면 그냥 우리 집 올라가서 찬장이랑 냉장고 좀 뒤져봐. ”
“ 너도 요리 할 줄 알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누가 만들어준 밥 먹고 싶다. ”
“ 난 요리 배울 시간이 없었단 말이야! 내가 얼마나 바쁜 몸이었는데. 그리고 가만히 있어도 다 나한테 만들어다 주고 갖다 바쳤는데... ”
“ 좋겠다... 아아, 나도 누가 밥 좀 해줬으면. ”
복도에는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아마 이웃집에서 저녁을 해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부럽다고 생각하며 베르닌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현관문에 열쇠를 꽂았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 어, 이상하네... 아침에 너무 졸려서 문을 안 잠그고 나왔나? ”
“ 도둑 든 거 아냐? ”
“ 우리 집에 훔쳐갈 게 뭐가 있냐. 너네 집이라면 몰라도. ”
베르닌은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온기와 함께 고소한 기름 냄새와 맛있는 음식 냄새가 훅 끼쳐왔다. 앞치마를 두르고 한 손에는 뒤집개를 든 베르닌의 어머니가 후다닥 뛰쳐나왔다.
“ 아이고 우리 다누슈카! 이제 퇴근하는구나! 에고에고 우리 아들, 이게 얼마만이냐! ”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 앗, 어머니! 어떻게 된 거예요? 언제 오셨어요! ”
“ 너 우리 옆집 살던 아뉴타 생각나니? ”
“ 어, 네. 클라우디야 아줌마네 딸이요? 저랑 어릴 때 놀던. ”
“ 그래그래, 그 아뉴타. 걔가 이번에 아들을 낳았다지 뭐냐. 그래서 클라우디야도 오랜만에 보고 애기도 볼 겸 아빠랑 같이 올라왔단다. ”
“ 엥, 아버지도 오셨어요? ”
“ 그럼 엄마 혼자 여기까지 기차타고 어떻게 오니, 심심하게. 여보! 그만 일어나요! 우리 다냐가 왔는데! ”
베르닌의 아버지도 달려 나왔다. 졸다가 퍼뜩 깨어난 듯 안경이 코끝에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베르닌을 힘차게 한번 포옹하고는 등짝을 두들기며 기뻐했다.
“ 왔냐, 우리 아들. 새해에도 집에 안 오고! 그러니 엄마아빠가 너 보러 오는 수밖에! ”
“ 어, 저... 그게... ”
“ 괜찮다! 얼마나 일이 바빴으면 그랬겠니, 무려 KGB 아니냐. 어서 들어오렴, 엄마가 너 좋아하는 거 잔뜩 하고 있다. 시장에서 뭘 그렇게 바리바리 계속 사는지! ”
“ 아유 그럼 우리 다냐 몇 달 만에 보는데 맛있는 거 해먹여야죠! 가뜩이나 사내 녀석 혼자 나와 사느라 먹는 것도 부실할 텐데. ”
얼떨떨해진 베르닌은 부모님에게 반쯤 안기다시피 현관 안으로 끌려들어가다 퍼뜩 생각이 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왕재수가 눈이 동그래진 채 복도에 오도카니 서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베르닌은 후다닥 왕재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 아, 저... 여기 제 친구인데요. 미샤라고... 이웃에 살아서... 같이 저녁 먹으려고 했는데... ”
“ 어머나, 친구가 같이 왔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오랜만에 보는 우리 아들 때문에 친구가 있는 걸 못 알아봤네. 미안해요, 미안해. 어서 들어와요, 같이 저녁 먹으면 되겠네. ”
“ 아니, 그게... ”
베르닌은 당황했다. 까다로운데다 낯을 가리는 왕재수가 전형적인 시골 어르신들인 자기 부모님을 불편해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녀석 저녁도 챙겨줘야 하는데 어떡하지 하고 궁리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그야말로 눈부신 미소를 짓더니 인사를 했다.
“ 안녕하세요, 다닐 부모님이시군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겠네요. 저는 미하일이예요. 그냥 미샤라고 부르시면 돼요. ”
“ 아유, 젊은 아이가 참 예의도 바르고 인사성이 좋구나. 어쩌면 이렇게 잘생겼니. 영화배우 뺨치게 생겼네. 어서 들어오렴. 같이 저녁 먹자꾸나. 우리 아들 친구면 아들이지 뭐. 들어오렴. ”
“ 그럼 실례가 안 된다면 들어가겠습니다. 저녁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베르닌은 ‘나 저녁 뭐해 줄 거야? 빨리 밥 줘!’ 하고 들볶던 왕재수와 이 정중하고 얌전한 청년 사이의 어마어마한 차이에 괴리감을 느꼈지만 어쩐지 웃음이 나와서 입을 꾹 다물려고 애쓰며 집으로 들어갔다.
* * *
베르닌의 부모님은 가브릴로프 토박이였지만 몇 년 전 베르닌이 KGB에 입사했을 때쯤 비슷한 소도시인 푸스토프로 이사 가서 살고 있었다. 엔지니어인 아버지가 푸스토프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브릴로프 흑빵 공장에서 오랫동안 장부 담당계로 일한 어머니도 같이 옮겨갔다. 베르닌은 첫해에는 푸스토프에서 새해도 보내고 어머니의 날도 같이 보내는 등 종종 찾아갔지만 그 이후에는 너무 바빠서 거의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간 게 전부였다. 그나마도 지난 가을부터는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이따금 통화를 했을 뿐이었다. 마음속으로는 항상 가책이 느껴졌지만 푸스토프는 가브릴로프에서 기차로 여덟 시간이나 걸렸기 때문에 자주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엉망이던 집안은 어머니가 한바탕 청소를 했는지 그야말로 반짝반짝하게 치워져 있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쓸고 닦아놓았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물건들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베란다에는 일주일 이상 묵혀 두었던 빨래가 가지런히 널려 있었다. 싱크대에 처박아뒀던 그릇들도 모두 말끔하게 설거지가 완료된 상태였다. 냉장고에는 야채와 과일과 고기와 잼, 병조림 등속이 가득했다. 아들 보러 온다면서 어머니가 이것저것 준비해 바리바리 싸들고 온 게 분명했다. 가스렌지 위에는 커다란 냄비와 프라이팬이 올라가 있었다. 냄비에서는 오리고기를 넣은 살랸카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펄펄 끓고 있었고 프라이팬 위에서는 쇠고기 커틀릿이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 때문에 베르닌은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 어서 앉아라, 다냐. 혹시 오늘도 야근할까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밥은 시간 맞춰 먹어야 하는데 때를 넘길까봐... 그래도 오늘은 6시에 왔구나. ”
“ 그럼, 우리 다냐도 이제 벌써 3년차인데! 이제 윗사람들 눈치 보는 시기는 지났지. 곧 승진도 할 거고. 그렇지 않으냐? ”
“ 어, 저 아직도 막내라서요... 저 다음으로는 공채가 안 들어왔어요. 오늘은 외근이 있어서 일찍 온 거예요. 미샤랑 같이 일을 볼 게 있어서요. 얘 아니었으면 오늘도 늦었을 거예요. ”
“ 어머, 너도 우리 다냐랑 같은 회사 다니니? 난 학생인줄 알았지 뭐야... 워낙 어려 보여서. 다냐 동료였구나. 우리 다냐가 막내 직원이랬는데... 설마 다냐보다 선배는 아니겠지? 우리가 큰 실수라도 한 거 아니야? ”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왕재수에게 사과를 했다. 왕재수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에요,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저는 다른 데서 일해요. 다닐보다 어리고요. 전혀 실수하신 거 아니에요. 그리고 선후배가 뭐가 중요해요. 자기 일만 잘하면 되지. 마음 쓰지 마세요. ”
“ 아유, 고맙구나. 어쩌면 요즘 아이답지 않게 말도 이렇게 의젓하게 하니. 그래, 너는 어디서 일하니? 우리 다냐처럼 공무원이니? ”
“ 아, 전 극장에서 일해요. ”
“ 어머, 그렇구나. 어쩐지 번듯한 게 너무 잘생겼더라니. 목소리도 좋고 발음도 좋은 게 배우인가 보구나. 배우 일은 힘들 텐데... 전에 내가 아는 집 딸이 연극배우를 했었는데 초봉이 너무 짜서 허덕이더구나... ”
“ 에이, 처음엔 다 그런 법이지. 우리 애처럼 공무원이면 좀 더 안정적이긴 하겠지만 배우도 좋은 직업이지. 지금이야 나이가 어리니까 대우가 좀 낮은 편이겠지만 찬찬히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 괜찮아질 거다. 그러니 힘을 내렴. 너는 외모가 워낙 뛰어나니 인기도 많을 거고 금방 좋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을 거란다. ”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면서 왕재수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금방이라도 ‘웬 헛소리예요! 난 우주 최강 꽃미남에 세상에서 제일 춤 잘 추는 초특급 수퍼스타란 말이에요! 공훈예술가 출신에 훈장이 몇 갠 줄 알아요? 전세계에서 날 보려고 넙죽넙죽!’ 하고 버럭 소리칠까봐 조마조마해서 마른침을 꿀꺽 삼킨 후 더듬거리며 말했다.
“ 어, 미셴카... 미안해. 우리 부모님은 극장에 잘 안 가시거든. 그쪽은 잘 모르셔. 나도 그랬고... 저, 그래서... ”
“ 왜? 알렉세이 필리포비치 말씀이 맞는걸. 배우는 원래 초봉이 짠 편이야. 성실해야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도 맞고. 넌 내가 재능 하나만으로 올라간 줄 아니? ”
“ 아니... 나도 알아, 너 엄청 노력한 거... 저기... 아버지, 미셴카는 배우가 아니고요, 발레단 감독이에요. ”
“ 음, 사무국에 있는 모양이구나. 너무 잘생겨서 배우인 줄 알았는데 이거 미안하구나. 극장은 일반 공장이나 사무실과는 조직이 좀 다르다는 얘긴 들었다. 젊은 애들에게도 감독직을 주나보구나. 그래, 발레단을 운영하고 뒷받침하는 총무 업무인가 보구나. 우리 다냐도 보안위원회에서 아주 중요한 업무를 맡고 있단다. 서무가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가지. ”
“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감독... ”
모든 일을 아들 위주로 생각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때문에 베르닌은 매우 당황했지만 왕재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요, 다닐이 없으면 얘네 회사는 일이 안 돌아가요. 그래서 국장인지 뭔지 하는 인간이 매일 다닐을 찾아요. 일도 엄청 많이 줘서 고생시켜요. ”
“ 그게 문제란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직원은 인정을 받는 대신 그만큼 일이 많아지니... 게다가 우리 애가 또 워낙 성실해야 말이지. ”
“ 아유, 당신은 정말... 틈만 나면 아들 자랑만 하고. 친구 앞에서 다냐가 얼마나 쑥스럽겠어요. 미안하구나, 미셴카. 배고프지? 우리 저녁 먹자꾸나. 우리 애가 좋아하는 거 많이 했는데 네 입맛에도 맞을 거다. 사내아이들이야 고깃국에 커틀릿이면 껌벅 죽잖니. ”
어머니가 식탁에 접시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나오는 접시들에 눈이 휘둥그레진 왕재수를 보며 베르닌이 웃었다.
“ 너 전에 보랴네 집에서도 놀랐다고 했지. 가브릴로프에서는 원래 한꺼번에 식탁에 다 차려놓고 먹어. 디저트만 빼고. ”
“ 아, 맞다. 보랴한테 들었는데. 그때도 수프랑 샐러드랑 전채랑 메인요리가 한꺼번에 나와서 놀랐어. 전에 렐랴도 알려줬던 것 같아. 근데 평소엔 이렇게 제대로 차린 정찬을 먹는 적이 없으니까 자꾸 까먹고 놀라. ”
“ 미샤는 가브릴로프 출신이 아닌가 보구나? 어디서 왔니? ”
“ 저는 레닌그라드에서 왔어요,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
“ 어머나, 대도시에서 왔구나! 우리 다냐도 모스크바에서 공부했는데. 그래서 둘이 통하는 데가 있나보네. 어쩐지 말투도 그렇고 귀티가 좔좔 흐르더라니. 그리고 그냥 마샤라고 부르렴. 친구 엄마인데 뭘 그렇게 일일이 부칭까지 부르고 그러니. 나는 마샤, 이 사람은 그냥 알료샤라고 불러도 된단다. 이 오이 절임이랑 닭 간 샐러드 좀 먹어보렴. 원래는 닭 염통이랑 간을 섞어야 하는데 시장에 갔더니 염통은 다 떨어졌더구나. 우리 다냐가 어릴 때 참 좋아하던 거야. 어서 먹으렴. ”
베르닌은 이미 정신없이 오이 절임과 닭 간 샐러드를 먹고 있었다. 짭짤하고 시큼한 오이절임도 맛있었지만 닭 간이 쫄깃쫄깃한 게 정말 맛있었다.
“ 우와, 진짜 맛있어요. 이거 먹어본 게 언젠지... 역시 우리 집 닭 간 샐러드가 제일 맛있어요. 어, 근데... ”
베르닌은 문득 왕재수 생각에 뜨끔했다.
‘ 저 녀석 닭 간 같은 거 안 먹을 텐데... 어떡하지... 많이도 덜어주셨네. ’
그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왕재수는 베르닌의 어머니가 접시에 덜어준 오이 절임과 닭 간 샐러드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버터와 기름을 잔뜩 둘러서 튀겨낸 두툼한 호박 올라두슈키도 투정 없이 주는 대로 먹었다. 평소에는 보랴가 만들어줘도 너무 기름진 부침개라면서 입에 잘 대지 않는 음식이었다. 기름이 둥둥 떠 있는 오리고기 살랸카도 곧잘 먹었다. 베르닌의 어머니는 매우 기뻐했다.
“ 얘들이 많이 배고팠나 보구나! 아유, 우리 아들, 엄마가 해주는 커틀릿 먹고 싶어서 어떻게 했니. 구내식당에서 나오는 커틀릿은 납작하고 기름도 안 붙어 있어서 퍽퍽하고 맛도 없고 간에 기별도 안 갔을 텐데. 커틀릿 여러 개 구웠으니 많이 먹으렴. 미셴카는 커틀릿이 입에 맞니? ”
“ 네, 맛있어요,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아니, 마샤. ”
“ 그렇지, 이 커틀릿은 수제란다! 내가 직접 고기 다져서 빚어서 만든 거야. 많이 먹으렴. 어쩌면, 너는 사내애가 고와도 너무 곱구나. 미남인 것도 좋지만 손목을 보니 커틀릿 많이 먹어야겠다. 어서 먹으렴, 모자라면 더 구워주마. 다냐, 맛있니? ”
“ 진짜 맛있어요. 아아, 그리웠어요. ”
베르닌은 정신없이 살랸카를 후루룩 떠먹고 커틀릿을 큼직하게 잘라 마구 입으로 쑤셔 넣었다. 둥그렇게 구워낸 쇠고기 커틀릿을 포크로 누르자 엄청난 양의 기름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입 안에서도 다진 고기가 쫄깃하게 씹히면서 육즙과 기름이 자르르 돌아서 너무나도 고소했다. 맛있게 먹으면서도 슬며시 걱정이 되어 왕재수 쪽을 보았다. 왕재수는 나이프로 커틀릿을 조그맣게 잘라서 우아하게 먹고 있었다. 기름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도 툴툴대지 않았다. 베르닌의 어머니가 흑빵 조각을 접시에 고인 육즙과 기름으로 축축하게 적셔서 건네주며 ‘이게 제일 맛있단다’라고 했을 때도 그 까탈스러운 녀석이 펄쩍 뛰며 ‘기름덩어리 탄수화물!’ 하고 소리치는 대신 빵을 받아들고 ‘감사합니다’라고 대꾸하며 그대로 먹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가 남아 있는 커틀릿을 가지러 가고 아버지가 사레들려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에 베르닌은 왕재수의 손목을 톡 치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 야, 너 이거 느끼하잖아. 억지로 다 안 먹어도 돼. 우리 엄마 여기 토박이라서 음식 전부 엄청 기름진데... 입에 안 맞으면서... ”
“ 괜찮아. 맛있어. ”
“ 나야 맛있긴 하지만 여기 사람들 입맛에 맞는 거지 넌 아니잖아. 우리 엄마 원래 맛있다고 하면 계속 권한단 말이야. 배부르다고 해도 괜찮아. 너 우리 엄마한테 예의 차리느라 억지로 먹는 거잖아. 다이어트 중이라고 내가 말해줄게. 아니면 의사가 기름진 거 제한하라 했다고 해줄 테니까 억지로 먹지 않아도 돼. ”
“ 괜찮은데... ”
“ 너 지난번에 의장 부인, 누구더라, 그래, 이리나한테 끌려갔을 때 거기서 저녁 먹고 계속 괴로워했잖아. 맛없고 기름지다고! 우리 엄마나 이리나나 다 가브릴로프 토박이라서 비슷할 텐데... ”
“ 윽, 잊고 싶은 기억! 이리나가 준 음식은 진짜 장난 아니었어. 너희 어머니랑 비교하지 마. 너희 어머니가 해주신 건 맛있어. 정말이야. ”
“ 하지만... ”
“ 근데 이제 정말 배부르긴 해. 못 먹겠으면 그만 먹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나 많이 먹어. 오랜만에 엄마 밥 먹는 거잖아. ”
“ 그래놓고 나중에 막 투정하려고! ”
그때 베르닌의 어머니가 남은 커틀릿을 수북하게 쌓은 접시를 들고 왔다. 왕재수가 마음에 쏙 드는 듯 직접 커틀릿을 썰어주기까지 했다. 역시 왕재수의 미모는 나이 불문하고 모든 여자들에게 통하는 게 분명했다. 왕재수는 베르닌의 어머니가 썰어준 커틀릿까지만 먹은 후 굉장히 정중하게 너무 맛있는 식사였다며 인사를 했다.
“ 아유, 더 먹지 그러니. 우리 애만 많이 먹은 것 같은데. ”
“ 아니에요, 마샤. 너무 맛있어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먹었어요. 여기 와서 이렇게 맛있는 저녁을 먹은 건 처음이에요. ”
“ 맞아요, 얘 원래 밥 많이 안 먹어요. 이렇게 잘 먹는 거 처음 봤어요. ”
베르닌이 급하게 맞장구를 쳤다. 어머니는 매우 좋아했다. 베르닌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왕재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심지어 접시 치우는 것을 돕는 것이 아닌가! 베르닌은 너무 놀라서 눈이 튀어나올 뻔 했다.
‘ 으아, 저 자식이 식탁 치우는 걸 돕다니! 세상이 멸망하려나봐! ’
베르닌의 어머니는 아무 것도 모르고 굉장히 감동하며 왕재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뺨에 뽀뽀를 해주기까지 했다.
“ 어머나, 미샤는 레닌그라드에서 온 애라 역시 다르구나. 가브릴로프 남자들은 손 하나 까딱 안하고 집안일은 여자들에게만 시키는데! 우리 남편도 그렇고 다냐도 그렇고 집에선 손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혔단다! 미셴카는 정말 착하구나, 어머니가 얼마나 든든하셨을까! 여자친구도 참 좋아하겠구나. 얼굴도 잘생겼지, 목소리도 가수 같고 매너도 좋은데다 집안일까지 도와주다니. 얼마나 인기가 많겠니. 우리 다냐는 마음씨는 비단결 같은데 원체 무뚝뚝하고 표현을 못 하니... ”
베르닌은 무지무지 억울해서 그만 투덜거리고 말았다.
“ 저도 집에서 청소 도와줬었는데... 쓰레기도 버리고... ”
“ 그깟 쓸고 닦는 거랑 쓰레기 몇 번 버리는 거 말고! 너는 엄마가 요리할 때 한 번도 안 도와줬잖니! 설거지도 도와준 역사가 없고! 하긴 아빠부터가 그랬으니!!! 그 아빠에 그 아들... ”
“ 아니, 왜 가만히 있는 나에게... ”
베르닌의 아버지도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아들의 뒤로 슬그머니 숨었다. 베르닌의 어머니가 더욱 비교를 하려고 드는데 왕재수가 여심을 스르르 녹이는 솜사탕 같은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 아니에요, 마샤. 다닐이 얼마나 집안일을 잘하는데요. 요리도 잘하고 청소랑 설거지도 진짜 깨끗하게 잘해요. 그러고 보니 어머니를 닮아서 요리를 잘하는 거였네요. 다닐이 해주는 저녁이 굉장히 맛있거든요. ”
“ 어머나, 그러니? 의외구나. 나는 우리 아들이 어릴 때부터 워낙 모범생에 우등생이라 공부에만 여념이 없어서 집안일이나 심부름 같은 건 아예 시키지를 않았단다. 그래서 모스크바 국립대 갔을 때도 다른 집에서는 아들이 명문대 갔다고 부러워했지만 나는 다냐가 엄마 품 떠나서 기숙사에서 밥을 어떻게 먹고 살지 너무 걱정이 돼서 잠이 안 왔단다. 여기 KGB에 입사하게 돼서 다시 내가 먹을 것도 챙겨주고 살림도 봐줄 수 있겠구나 했는데 알료샤가 푸스코프로 발령을 받는 바람에 우리가 이사를 가게 되지 않았겠니. 사내아이가 자취를 하니 매일 식당 밥이나 먹고 돼지우리 같은 집에서 살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워낙 마음이 쓰여야 말이지. 우리 애도 조금 있으면 스물아홉이 되는데 애가 원체 순진해서 공부만 하고 일만 열심히 하느라 아직 결혼도 못하고... 여자 손길이라도 좀 닿아야 편하게 살 텐데... 에휴... ”
“ 으아, 어머니... 제발... ”
“ 안 그래도 걱정하면서 왔더니 아니나 다를까 싱크대에 그릇이 수북하고 빨래도 안 해서 지저분한 옷가지가 쌓여 있고 집이 돼지우리... 그래서 내가 아까 싹 치웠단다. ”
“ 아니에요, 마샤. 다닐이 원래 되게 깔끔해요. 청소랑 설거지도 꼬박꼬박 잘 하는데 이번 주에 계속 야근하느라 못 한 거예요. 다닐은 정리정돈도 잘하고 요리도 잘해요. 걱정 마세요, 잘 지내고 있어요. ”
“ 그래, 그러면 조금 다행이다만... 그래도 남자가 빨리 장가를 가야 하는데... 이 나이 되도록 엄마아빠에게 제대로 된 여자친구 한번 소개시켜준 적이 없으니... 다른 집 아들들은 스물만 넘으면 제깍제깍 여자 데려와서 결혼하고 손주 보여주느라 바쁜데 우리 다냐는... ”
“ 그러게 말이다. 너 요즘 만나는 여자 없니? ”
가만히 있던 아버지조차 가세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점점 가시방석에 올라앉은 듯 불편해졌다.
‘ 으아, 또 시작됐어... 언제 장가가느냐, 엄마 친구 아들이 어쩌고 손주가 어쩌고 저 레퍼토리... 아아... ’
어머니와 아버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베르닌을 닦달했다.
“ 아까도 아뉴타 아기 보러 갔더니 클라우디야랑 옛날 우리 이웃들이 다 모여서 자기 손주 자랑 며느리 사위 자랑... 그러면서 다냐는 언제 장가가느냐고, 외아들인데 빨리 손주 봐야 하지 않겠냐고 난리더라. 어휴, 그 사람들 앞에서야 우리 다냐는 워낙 회사에서 인정받는 재원이라 나라와 당을 위해 피땀 흘려 일하느라 바빠서 결혼은 조금 미루고 있다고 대답했지만 얼마나 속이 쓰린지. 걔들보다 네가 훨씬 잘났는데. ”
“ 그러게 말이다. 남들 다 하는 결혼 왜 우리 아들은 아직도 못하고... 너 정말 데이트하는 여자도 없니? ”
“ 미셴카, 네가 우리 애한테 여자 친구 좀 소개시켜주고 그러렴. 너는 이렇게 잘생기고 매너도 좋은 걸 보니 여자들이 줄을 서겠구나. 우리 다냐는 너무 애가 착하고 숫기가 없어서 여우같은 계집애들 비위 맞추고 환심 사는 법을 모르는 게 문제란다. 나이가 서른이 다 돼 가는데 우리한테 여자 친구 데려와서 인사시킨 적도 없고... 우리는 정말 걱정이란다. 에휴... ”
베르닌이 펄쩍 뛰려는데 왕재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방긋 웃었다.
“ 떨어져 계셔서 잘 모르시는 거예요. 다닐이 여자들한테 은근히 인기가 많아요. 모스크바 국립대 나온 엘리트에 공무원이고 키도 훤칠하잖아요. 그리고 원체 친절하고 착한 성격이라 여자들이 좋아해요. 일하느라 바빠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금방 좋은 여자랑 결혼할 거예요. 결혼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랑 해야 되는 거잖아요, 두 분처럼. 그러니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걱정도 하지 마시고요. ”
아들에 대한 칭찬과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얘기를 듣자 베르닌의 어머니와 아버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머니는 좋아하며 초콜릿 파이를 가져왔고 아버지는 손뼉을 딱 쳤다.
“ 그러냐? 그럼 정말 다행이구나! 그런데 이 녀석은 왜 우리한텐 그런 얘기도 안 하고! ”
“ 다닐은 겸손해서 자기 자랑을 못 하더라고요. ”
“ 그래, 그렇구나. 그럼 마음이 좀 놓이는구나! 고맙다, 미셴카. 참 좋은 아이로구나. 우리 다냐에게 너 같은 친구가 있어 다행이다. 자, 이건 우리 마누라가 직접 구운 초콜릿 파이란다. 맛있으니 먹어보렴. 아니, 그러고 보니 너 한 잔도 안 마셨구나. 한 잔 받아라. ”
베르닌의 아버지는 웃으며 왕재수에게 보드카를 따라 주었다. 베르닌이 급하게 저지했다.
“ 어, 저... 얘는 술을 못 마셔요. 그냥 주스... ”
“ 허허, 괜찮다. 자식 같아서 따라 주는 거야. 그냥 한 잔만 마시렴. 자, 우리 다냐와 미셴카를 위해 건배! ”
베르닌은 왕재수가 건배만 한 후 안 마실 거라고 생각해서 마음을 놓으며 아버지가 따라 준 보드카를 쭉 들이켰다. 어머니의 맛있는 요리와 보드카는 찰떡궁합이었고 심지어 초콜릿 파이와도 잘 어울렸다. 행복해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보드카를 홀짝 마셔버린 왕재수가 ‘흐응...’ 하고 가냘프게 신음 소리를 내더니 베르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늘어지는 것이 아닌가!
“ 앗! 야! 너 설마 마셨어? ”
“ 목말랐어... 으응, 어지러워. ”
“ 으아, 얘 좀 봐! 한 잔 다 마셨잖아! 너 미쳤냐, 목마르면 나한테 물이나 주스 달라고 하면 됐잖아! ”
“ 왜 그러니, 다냐? 아니, 미셴카는 정말 술이 약한가 보구나! 이를 어쩌면 좋니! ”
어머니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왕재수가 역시나 정해진 수순대로 만취해서 순식간에 기절해버렸기 때문이다.
“ 괜찮아요, 어머니. 얘 원래 술을 못 마셔서 조금만 입에 대도 필름 끊기거든요. 그래서 주지 말라고 한 건데... 집에 데려다 주고 올게요. 바로 윗집이거든요. ”
“ 아이고, 그랬구나. 당신은 어쩌자고 어린애한테 보드카는 따라줘서. ”
베르닌은 왕재수를 평소처럼 번쩍 안아서 데려가려다가 어쩐지 부모님에게 쓸데없는 오해를 사게 될까봐 괜히 제 발이 저려서 아버지에게 왕재수를 업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왕재수의 허리와 어깨를 부축해서 베르닌의 등에 기대 주었다.
“ 저 금방 갔다 올게요. ”
“ 안 도와줘도 되겠니? ”
“ 괜찮아요. 엘리베이터 타고 한 층만 올라가면 되거든요. ”
베르닌은 왕재수를 업고 7층으로 갔다. 들어가 보니 왕재수의 집은 지저분하게 어질러져 있지는 않았지만 며칠 동안 비워놓은 탓에 냉기가 돌았다. 춥긴 했지만 왕재수는 답답한 공기를 못 견디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난방을 확인한 후 침실 창문을 열어 잠깐 환기를 시켰다.
베르닌은 필름이 끊긴 왕재수를 침대에 내려놓고 스웨터와 양말을 벗겨준 후 이불을 덮어주었다. 걱정이 되어서 이마에 손도 짚어보고 숨소리도 들어보았다. 운 좋을 때는 보드카를 마셔도 반나절 쯤 깊게 잠든 후 깨어나는 정도지만 재수 없을 때는 열이 펄펄 끓고 두드러기가 돋고 토하고 굉장히 아프기 때문이다. 부디 전자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베르닌은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왕재수의 이마를 살짝 닦아준 후 잠시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부모님 때문에 내려가 보기는 해야겠고 왕재수 걱정은 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코즐로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코즐로프가 곧 전화를 받았다.
“ 잘못 걸었어요! ”
“ 로만, 나예요. ”
“ 아, 다닐이구나. 웬일이냐? ”
“ 대체 당신은 왜 맨날 전화하면 잘못 걸었다고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
“ 그래야 쓰잘 데 없이 전화한 놈들이 놀라서 끊지! ”
“ 어휴, 말을 말아야지. 혹시 지금 미셴카 집으로 와줄 수 있어요? ”
“ 오늘 밤 늦게까지 책 읽으면서 작업해야 한다고 내일 보자고 하던데. 나랑 있으면 자꾸자꾸 불태우고 싶어서 일을 못한다고. 왜, 무슨 일 있냐? ”
“ 그게... 우리 부모님이 오셔서 같이 저녁을 먹었는데 이 녀석이 보드카를 한 잔 넙죽 받아 마셔서... 취해서 지금 뻗었거든요. 난 부모님 때문에 얘 옆에 있을 수가 없어서... ”
“ 뭣이, 우리 귀염둥이에게 또 보드카를 먹였단 말이야? 너 죽었어! ”
“ 난 말렸는데 이 녀석이 목마르다면서 받아 마셨어요. 와줄 수 있어요? ”
“ 빨랑 전화 끊어. 지금 갈 테니까. ”
코즐로프는 10분 만에 도착했다. 어마어마하게 속도 위반, 신호 위반을 하며 차를 몰고 온 게 뻔했지만 베르닌은 잔소리를 하는 대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코즐로프에게 왕재수를 맡겨놓고 다시 집으로 내려갔다.
식탁은 이제 모두 치워져 있었다. 부모님은 그에게 차를 따라 주었고 회사 일은 힘들지 않은지, 밥은 잘 챙겨먹는지 물었다. 그래도 왕재수가 변호해준 덕분인지 여자 얘기는 이제 묻지 않았다. 예전 이웃들에 대한 얘기, 부모님이 살고 있는 푸스코프에 대한 얘기 등을 나누다가 어머니가 문득 말했다.
“ 미셴카는 참 착하더구나. 보통 그렇게 미남인 아이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고 건방지게 구는 법인데 예의도 바르고 친구 생각할 줄도 알고. 걔는 레닌그라드 출신이라면서 어쩌다 이 동네까지 왔을까. 결혼은 안 했지? 반지는 안 꼈던데. ”
“ 어, 예. 안 했어요. ”
“ 하긴, 아직 한참 어리니... ”
베르닌은 왕재수가 동안이라서 그렇지 자신과 세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얘기하려다 그러면 또 결혼 얘기가 나오고 왕재수의 여자 친구는 누구냐는 등 난감한 질문이 나올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 걔는 그래, 여기 혼자 와 있는 거니? 가족도 없고? ”
“ 네. 혼자 왔어요, 일 때문에요. ”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 그래, 그러면 네가 옆에서 잘 돌봐 주거라. 세상에 믿을 건 가족과 친구뿐이란다. 아무리 당과 회사가 잘해준다 해도 돌아서면 끝이야. 미셴카도 너를 많이 아끼는 것 같던데 그렇게 반듯하고 착한 친구는 아주 귀한 거니까 잘 지내렴. ”
“ 그래, 아빠 말이 맞다. 애가 참 싹싹하고 귀엽더라. 딸이 있었으면 사위 삼고 싶더라니까. 아까 술 마신 게 걱정이 되는구나.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니. 엄마가 올라가서 좀 돌봐줄까. ”
“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푹 자고 일어나면 멀쩡할 거예요. 이제 주무셔야죠. 두 분 침대에서 주무세요. 좀 좁긴 하겠지만... ”
“ 아니야, 네가 편하게 자야지. 계속 야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너랑 아빠랑 침대에서 자렴. 엄마가 소파에서 자마. ”
“ 에이 말도 안돼요. 전 소파에서 자주 자서 괜찮... ”
“ 어머, 멀쩡한 침대 놔두고 왜 소파에서 잔다는 거니? ”
베르닌은 뜨끔했다. 왕재수를 침대에 재우느라 소파에서 자는 적이 많다고 말하는 건 더 난감했기 때문이다. 되는 대로 둘러댔다.
“ 어, 그, 그게... 야근하고 들어오면 시트 정리하기가 귀, 귀찮아서... ”
“ 아유, 다냐. 그러면 못써. 지금이야 젊으니까 괜찮지만 나중에 그거 골병 든단 말이야. ”
“ 괘, 괜찮아요. 베개 꺼내드릴게요, 잠깐만요. ”
베르닌은 부모님을 침실로 모셔다 드린 후 소파로 기어 올라갔다. 오랜만에 어머니의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어서 그런지 몸이 따뜻해지면서 잠이 쏟아졌다. 그는 1분도 안 되어 깊은 잠에 빠졌다.
* * *
다음날 아침 베르닌은 일어나자마자 왕재수의 집으로 올라가 보았다. 노크를 하자 한참 후에야 코즐로프가 문을 열어 주었다.
“ 미셴카는 괜찮아요? 안 아팠어요? ”
“ 안 아팠어. 다행이지. 그냥 죽은 듯이 잠만 자더니 좀 전에 일어나서 씻고 있어. 근데 너는 토요일인데 늦잠도 안 자냐? ”
“ 나도 늦잠 자고 싶긴 한데 부모님이 와 계셔서요. 어르신들은 일찍 일어나시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미셴카랑 같이 아침 먹으러 올래요? 당신도 내 친구라고 하면... ”
“ 호의는 참 고맙다만... 괜찮아. 계속 잠만 자는 미셴카 옆에 밤새 누워 있느라 정말 힘들었단 말이다! 잠자는 미녀도 아니고 원. 극장 가기 전에 한 판 해야... ”
“ 으윽, 알았어요! 됐어요! 근데... 당신 제발 작작 좀 하란 말이에요! 가뜩이나 쟤 요즘 무리해서 계속 비실거리는데!!! ”
“ 그게 맘대로 되는 줄 아냐! 곁에 있기만 하면 불꽃이 튀는데! ”
“ 어휴, 당신들 앞으로 일주일에 하루만 같이 있어요! ”
코즐로프는 쿡쿡 웃더니 베르닌의 등짝을 탁 치며 내려가서 엄마가 해준 밥이나 먹으라고 했다.
아침을 먹은 후 부모님과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 여보세요. ”
“ 나야. ”
“ 어, 너 괜찮니? 숙취는... ”
“ 응, 괜찮아. 나 지금 극장 가려고. ”
“ 어 그래, 내가 데려다 줄까? ”
“ 아니, 로만이 차 가져왔어. 같이 가면 돼. 오늘 낮 한시 반 공연인데 너 부모님 모시고 보러 와. 백조의 호수니까 보시기에도 무난할 거야. 류다한테 얘기해서 좋은 자리 4장 빼놨어. ”
“ 엇, 고마워. 나 부모님이랑 같이 극장 간 건 어릴 때 호두까기 인형 본 거밖에 없는데. 우리 부모님도 극장 가신지 진짜 오래됐을 거야. 좋아하실 것 같아. 근데... 왜 4장이야? 우린 세 명인데. ”
“ 리자도 보러 오라고 했어. 한시까지 극장으로 오라고 했으니까 로비에서 만나서 같이 보렴. 아니면 먼저 만나도 되겠네. ”
“ 엥, 리자? 왜 갑자기 리자를... ”
“ 리자가 발레 좋아하잖아. 전에 나 물에 빠졌을 때도 도와줬고. 같이 발레 보면 좋을 것 같아서. ”
“ 하지만... 좀 어색한데... ”
“ 어색하긴 뭐가 어색해, 사무실에서 맨날 보면서. 오늘 캐스팅도 좋아. 데니스랑 타마라가 춘다고. 아까 전화했더니 리자가 좋아하더라. ”
“ 어, 저기... 나 하나도 아니고 우리 부모님까지 있는데... ”
“ 그 얘기도 했어. 괜찮대. 너희 부모님은 언제 푸스코프로 가셔? ”
“ 아, 저녁 먹고 밤 기차로 가신대. 열시 기차니까 여기서 아홉시쯤 나가시면 될 거야. ”
“ 응, 알았어. 난 백조 끝나고 나서 실무진이랑 회의가 있어서 아마 늦을 거야. 저녁도 극장에서 먹을 거고. 그래도 아홉시 전에는 집에 갈 테니까 인사하러 갈게. 그럼 공연 잘 봐. ”
전화를 끊은 후 베르닌은 리자가 온다는 생각에 좀 당황했다.
‘ 어휴, 이 녀석은 매사가 제멋대로야. 리자가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니야! 갑자기 왜 뜬금없이 리자를 부르고... ’
그러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미셴카 말이 맞아. 리자는 발레 좋아하잖아. 데니스랑 타마라면 제일 잘 추는 애들이니까 좋아할 거야. 요즘 리자도 바빠서 피곤해하던데 좋아하는 발레 보면 기분 전환도 될 거야. 나도 참 바보 같아. 리자가 발레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그 녀석 보고도 맨날 꽃돌이 감독님이라면서 좋아하는데 진작 미셴카한테 표 달라 해서 좀 줄걸. ’
왕재수의 공연 초청 얘기를 들은 부모님은 매우 좋아했다. 특히 어머니는 ‘귀여운 미셴카’ 덕에 십년 만에 극장에 공연을 보러 가게 됐다면서 소녀처럼 설렌 얼굴이었다. 아버지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 잘됐구나. 어차피 오늘은 기차 타러 가기까지 다른 약속이 없으니. 점심은 구시가지에 나가서 먹자꾸나. ”
“ 아, 그래요. 극장 근처에 굉장히 맛있는 식당이 있어요. 우리 거기 가요. ”
베르닌은 스베촉에 전화를 해서 네 명 자리를 예약했다. 그리고는 리자에게도 전화를 했다. 리자는 왕재수가 직접 전화해 공연에 초청했다며 몹시 들뜬 기색이었다.
“ 저, 우리 부모님이랑 난 스베촉에서 열두 시에 점심 먹고 들어가려는데 괜찮으면 같이 먹는 게 어때요? ”
“ 좋아요, 다냐! 안 그래도 그때 블린 먹고 나서 자꾸 보랴의 요리가 생각나더라고요. 열두 시까지 스베촉으로 갈게요! ”
열두 시에 베르닌은 부모님을 모시고 스베촉으로 갔다. 리자도 시간 맞춰 도착했다. 언제나 구김 없고 발랄한 리자는 베르닌의 부모님에게도 밝게 인사를 했고 왕재수를 친구로 둔 베르닌 덕분에 공연을 보게 되었다며 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다.
예쁘고 귀여운 리자를 보자 베르닌의 부모님은 눈이 등잔만 해졌고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좋아했다. 아무리 베르닌이 ‘리자는 회사 동료예요’ 라고 설명을 해도 ‘우리 아들이랑 사귀는 여자인가!’ 하는 기대로 충만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행히 음식이 나왔고 역시 보랴의 솜씨답게 맛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부모님도 식사를 하느라 여념이 없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은 극장으로 갔다. 왕재수가 빼준 자리는 놀랍게도 2층 로열 박스석이었다. 부모님은 깜짝 놀랐고 리자는 말 그대로 펄쩍 뛰었다.
“ 어머나, 다냐! 이렇게 좋은 자리는 처음 앉아 봐요! 역시 꽃돌이 감독님이 최고네요. 우와, 이 샹들리에 좀 봐. 무대도 너무너무 잘 보이네요! ”
“ 그러게 말이야. 이 금장식에 천사 조각 좀 보렴. 평생 이렇게 호화스런 자리에서 발레를 본 적이 없는데 미셴카가 참 고맙구나. 젊은 아이가 수완도 좋지, 아무리 극장에서 일해도 이런 자리를 빼주기는 쉽지 않을 텐데. 이게 제일 좋은 자리 아니니. 이런 자리는 극장 간부들이 자기 손님들 용으로 빼놓는 걸 텐데. ”
리자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 어머나,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잘 모르셨군요. 미셴카가 이 극장 예술 감독이잖아요. 극장장 다음으로 지위가 높아요. 극장에 올라오는 모든 공연에 대해서는 최고 책임자고요. 다냐랑 친하니까 자리를 마련해준 거예요. ”
“ 어, 아니... 근데 걔도 평소엔 이런 자리는 잘 안 주는데... 나는 백스테이지에서 보거나 그냥 2,3층 뒷자리에서 보거든요. 어머니랑 아버지 때문에 좋은 자리 챙겨 줬나 봐요. ”
“ 정말 좋은 아이라니까. 그런데 그 얘기가 정말이니, 리자? 미샤가 극장에서 그렇게 지위가 높다고? 우리는 그냥 사무국 직원들한테 업무별로 감독이란 호칭을 주는 건줄 알았지 뭐니. 그것도 모르고 어제 미셴카에게 차근차근 열심히 하면 성공하게 될 거라고 그랬구나. 미안하기도 해라. 그런데도 미셴카는 화도 안 내고 방긋방긋 웃기만 하고. 착하기도 하지. ”
“ 새파랗게 젊은 아이가 얼마나 재능이 뛰어났으면 벌써 그렇게 출세를 했을까. 이거 우리가 네 친구를 몰라봤구나. 있다가 얼굴 보고 사과라도 해야지 안 되겠다. ”
“ 아니에요, 아버지. 미셴카는 그런 거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아, 이제 공연 시작하려나 봐요. ”
모두가 무척 재미있게 공연을 보았다. 베르닌은 백조의 호수라면 왕재수 감시 업무 때문에 벌써 여러 차례 보았지만 오늘따라 굉장히 재미있었다. 1막 2장에서 백조들이 떼 지어 나올 때도 평소에는 졸았지만 오늘은 옆에서 리자가 이따금 조그맣게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열띤 박수를 치는 등 워낙 몰입하면서 보는 통에 엷은 흥분이 전염된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에 데니스가 춘 지그프리드 왕자가 로트바르트의 날개를 찢을 때쯤 부모님도 박수를 짝짝 치고 있었다.
베르닌의 부모님은 옛날에는 공연 끝나고 배우나 무용수들이 나와서 인사하기 시작할 때가 되면 ‘다 끝났으니까 가자!’ 하고 일어났는데 이번에는 커튼콜이 계속 이어지는데도 박수를 치며 계속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특히 백조 오데트를 춘 타마라가 너무 예쁘다면서 계속 박수를 쳤고 아버지도 ‘허허, 살다 보니 발레가 다 재미있구나’ 하고 웃었다. 커튼콜 막바지에 타마라가 백스테이지로 달려가더니 왕재수의 손목을 잡아끌고 나왔다. 객석은 난리가 났다. 꽃다발들이 무대로 비오듯 날아들었다. 왕재수는 꽃다발들을 주워서 타마라에게 바친 후 객석을 향해 근사한 포즈로 인사를 했다. 리자는 손바닥을 비비며 ‘어쩜, 미셴카는 정말 너무 멋있어요’ 라고 황홀경에 빠졌고 베르닌의 부모님도 깜짝 놀라며 ‘우리 아들의 친구가 굉장한 애였구나’ 하고 웃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과 리자를 데리고 백스테이지까지 찾아가는 게 민폐처럼 느껴져서 저녁에 따로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 *
극장에서 나오자 오후 4시가 좀 넘은 시각이었다. 베르닌의 어머니는 리자에게 집에 들러 차 마시고 가라고 청했다. 리자는 흔쾌히 초대를 받아들였다. 베르닌은 조금 난감했다. 회사 동료들을 집으로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리자라니, 그나마도 어머니가 집을 싹 치우고 정돈해놔서 다행이었다.
집에 들어서면서도 리자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슬리퍼를 찾기 시작했다. 이 집에 이사 온 후로는 왕재수와 코즐로프 외에는 손님이 찾아온 적이 거의 없었고 여자는 더욱 없었기 때문에 리자가 신을만한 슬리퍼가 눈에 띄지 않았다.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그중 제일 깨끗한 슬리퍼를 찾아서 리자에게 건네주었다. 잘 보니 왕재수가 악몽을 꿨다고 울면서 밤중에 찾아왔을 때 신고 왔던 슬리퍼였다. 리자에게는 왕재수가 신었던 슬리퍼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좋아하면서 챙겨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베르닌이 찻물을 올리고 잔을 꺼내고 있는데 리자가 부엌으로 왔다. 핸드백에서 조그만 종이봉지를 꺼냈다.
“ 우리 이거 곁들여서 차 마셔요, 다냐. ”
“ 어, 이게 뭐예요? ”
“ 딸기잼 쿠키요. 아까 스베촉 가는 길에 빵집에서 샀어요. 그 집이 옛날식으로 과자를 구워서 우리 아빠가 좋아하시거든요, 다냐 부모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
“ 우와! 고마워요, 리자. 정말 세심하네요. 저, 미안해요. 토요일이라 다른 스케줄도 있을 텐데 우리 부모님이 갑자기 차 마시자고... ”
“ 어머, 괜찮아요. 오늘 다른 약속 없었어요. 덕분에 엄청 좋은 자리에서 백조의 호수도 보고 맛있는 점심도 얻어먹었잖아요. 이렇게 신나는 주말은 정말 오랜만인걸요. ”
“ 그래도... 미안해요. 저, 우리 부모님이 자꾸 이상하게 넘겨짚는 얘기 하는 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나만 보면 맨날 여자친구는 어디 있느냐 언제 장가가느냐 하는 말밖에 안 해서... 괜히 오해해서 불편하게 만들까봐... ”
리자는 콧잔등에 조그만 주름을 만들더니 깔깔 웃었다.
“ 아유, 우리 엄마아빠도 그래요. 남자친구는 언제 사귀느냐, 결혼은 언제 하느냐 하고요. 우연히 내 옆으로 남자라도 지나가면 금세 남자친구냐고 물어봐요. 부모님이야 다 그렇죠 뭐. 걱정 말아요, 내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설마 당신이 부모님한테 ‘리자가 저랑 결혼할 여잡니다~’ 라고 뻥이라도 쳤겠어요? 세상 남자들이 다 그래도 당신은 그런 말 못 할 텐데. ”
“ 어... 그건 그렇지만... 근데 좀... ”
“ 뭐가요? 내 말이 틀렸어요? ”
“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뻥은 안 치는데요. 그치만 나, 나도 진짜 결혼할 사람이 생기면 그 얘기는 할 거란 말이에요. 다른 남자들처럼... ”
“ 아휴, 바보. ”
리자는 다시 까르르 웃었다. 베르닌의 손목을 살짝 꼬집더니 쟁반에 찻잔을 세팅하고 접시에 딸기잼 쿠키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어르신들을 위해 오래된 빵집에 들러 쿠키를 사온 리자의 세심함에 감동을 받았다. 겨울에 뜨보록을 함께 돌봐주던 것도 생각났다. 자기 차와 숄이 엉망이 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에 빠진 왕재수를 병원까지 태워다주던 것도. 겨우 스물을 갓 넘긴데다 여러 모로 아직 소녀 같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자기보다 훨씬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여자라서 그런가. 하여튼 리자는 착해. 매사에 긍정적이고. 바자회 떠맡았을 때도 앞장서서 아이디어 내고. 나도 리자처럼 되고 싶다. ’
베르닌의 부모님은 리자의 예상대로 딸기잼 쿠키를 아주 좋아했다. 알고 보니 예전에 자주 들르던 빵집이라고 했다. 베르닌은 부모님에 대해 자기가 아는 게 생각보다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부모님은 리자에게 대놓고 ‘우리 아들이랑 결혼할 거지?’ 하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한 시간쯤 차를 마시며 KGB의 고된 행정 업무와 못된 스페호프 국장에 대한 이야기, 자질구레한 신변잡기 등에 대한 수다를 떨었을 뿐이었다. 어느 새 저녁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리자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 어머나,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오늘 오빠 부부가 와서 저녁 먹기로 했거든요. ”
“ 아이고, 아쉽구나. 우리는 널 봐서 너무너무 반가웠단다. 우리 다냐는 공부나 할 줄 알지 착해빠져서 걱정이었는데 주변에 미샤 같이 좋은 친구도 있고 리자처럼 착하고 귀여운 아가씨도 있으니 이제 우린 안심이란다. ”
“ 다냐 주변에 좋은 사람 많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오늘 푸스코프로 돌아가시면 언제 또 오세요? ”
“ 글쎄다. 시간이야 또 내면 아무 때나 올 수 있겠지. 우리 아들만 귀찮아하지 않으면. ”
“ 무슨 소리에요, 어머니. 제가 왜 귀찮아해요. 자주 오세요. 제가 가야 하는데. ”
“ 아니다, 얘야. 넌 바쁘잖니. 리잔카, 우리랑 같이 차 마시고 놀아줘서 고맙구나. 우리 다냐를 잘 부탁한다. ”
“ 부탁은 제가 해야죠. 다냐가 회사에서 많이 도와주거든요.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다음에 다시 오시면 꼭 뵈어요! ”
베르닌의 부모님은 진심으로 섭섭해 하며 리자의 뺨과 입술에 작별 뽀뽀를 했다. 그리고는 베르닌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어서 리자를 바래다주고 오라고 성화였다. ‘제 지굴리는 지금 정비소에 처박혀 있다고요’ 라고 하려다가 여기까지 와준 리자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왕재수의 차를 쓰기로 했다. 어차피 왕재수는 아침에 코즐로프의 차를 타고 출근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리자는 깜짝 놀랐다.
“ 아앗, 다냐! 차 바꿨어요? 이 차 진짜 좋다!! ”
“ 아니에요, 내 팔자에 무슨... 이거 미셴카 차예요. 지굴리 고칠 때까지 쓰라고 해서요. ”
“ 아, 하긴. 근데 이 차 국장 차보다 더 좋네요. 세상에... 그래도 직위로 따지면 우리 국장이 극장 예술감독보다 더 윗급일 텐데. 블리즈네초프 의장이랑 렐랴네 집안에서나 이런 차 몰 걸요. 역시 미샤는 다르네요, 벨스키 의원이 직접 챙긴다더니... ”
“ 차가 좋으면 뭐해요. 그 자식 운전도 하나도 못하고. 맨날 내 지굴리 타고 출퇴근했는걸요. ”
“ 바보, 그럼 지굴리 놔두고 그냥 이 차로 데려다줬으면 됐잖아요. ”
“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요. 그 자식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졌지만 처음에 얼마나 재수 없게 굴었다고요. 사람을 완전 노예에 집사 취급하고. 집안일 해주고 밥 해 먹이는 것도 모자라 출퇴근까지 시켜주려니 화가 나더라고요. 심지어 그 자식 차를 몰아주려니까 내가 더 노예에 운전병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나 남의 차 안 몰아! 내 지굴리 타든지 아니면 네가 알아서 네 차 몰고 가!’ 라고 협박했거든요. 난 그 자식이 당연히 후진 지굴리 싫다고 하면서 자기 차 타고 갈 줄 알았는데 냉큼 ‘나 그럼 지굴리 탈래’ 하는 거예요! 그래서 완전 코 꿰어서 맨날맨날 아침 밤으로 그 자식 출퇴근시켜주고... ”
“ 어머, 다냐. 아하하하. 당신 의외예요, 호호호! ”
리자가 깔깔 웃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대체 뭐가 우습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지만 리자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었다.
“ 왜 그렇게 웃어요? 내가 그 자식한테 코 꿴 게 그렇게 즐거워요? 회사에선 국장한테 볶이고 집에선 그 자식한테... ”
“ 아니요, 그게 아니고... 아아... 당신도 오기를 부리는구나 싶어서요. 지굴리 탈래 네 차 몰고 갈래, 아하하! ”
베르닌은 뭔가 진심으로 억울한 느낌이 들었지만 리자가 너무 좋아하며 웃어댔기 때문에 결국 자기도 웃어버렸다.
리자의 집은 같은 신시가지에 있었고 별로 멀지는 않았지만 작은 숲을 하나 지나가야 했다. 알고 보니 코즐로프와 같은 동네였다. 웃다가 보니 어느새 리자가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베르닌은 차를 세운 후 내려서 리자 쪽 문을 열어주었다. 리자가 동그래진 눈동자를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 어머, 다냐. 고마워요. 근데 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왜 오늘은 문까지 열어주는 거예요? ”
“ 어, 그게요... 난 그런 거 몰랐는데 지난번에 극장에서 나올 때 미셴카랑 걔 비서 류다를 같이 태웠거든요. 류다가 신시가지에 갈 일이 있다고 해서요. 근데 내리는데 미셴카가 나보고 매너 없는 놈이라고 야단을 치는 거예요. 류다랑 자기 놔두고 나 혼자 휙 내려버렸다고요. 여자가 내릴 땐 먼저 내려서 문도 열어주고 식당에선 의자도 빼줄 줄 알아야 하고 또 뭐라더라, 코트도 받아줘야 된대요. 그러니까 류다가 맞다면서 역시 우리 감독님이 최고라는 둥 여자 마음을 제일 잘 안다는 둥 역성을 들잖아요. 그래서 새로운 걸 알게 됐어요. 앞으로는 문도 열어주고 의자도 빼주고 코트도 받아줄 거예요. ”
“ 어머... 아하하하하!!! 다냐!!! 아아... ”
리자는 거의 데굴데굴 구를 정도로 웃었다. 베르닌은 또 다시 좀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리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웃다가 베르닌을 꼭 껴안고 뺨에 뽀뽀를 했다. 깜짝 놀란 베르닌의 표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자는 깔깔대며 소리쳤다.
“ 다냐, 난 괜찮아요. 문 안 열어주고 의자 안 빼주고 코트 안 받아줘도 안 삐칠게요. 아하하하!! ”
“ 그치만... 그 자식 말은 항상 맞거든요. 아니, 그러니까 항상 맞는 건 아니지만 매너인지 뭔지랑 여자에 대한 건... ”
“ 맞긴 맞는데요... 아하하... 근데 좀 이상하네요. 그 차에 미샤도 같이 타고 있었던 거잖아요. 그럼 미샤가 먼저 내려서 류다가 앉아 있는 쪽 문 열어줘도 됐잖아요! 미샤도 남잔데! 왜 자기는 안 하고 당신한테만 뭐라고 하는데요? ”
“ 그게요, 나도 똑같이 따졌는데요... 그 자식이 자기는 항상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나랑 있을 때만 빼고요. 왜 나랑 있을 때는 빼는 거냐고 했더니 그래야 내가 뭐가 잘못된 건지 몸으로 깨닫고 앞으로 안 그럴 게 아니겠냐고... ”
“ 으음, 꽃돌이 감독님은 의외로 굉장히 스파르타식이네요. ”
“ 아니에요! 그게 아니에요! 그 자식 그거 다 뻥이에요. 그 자식 그때 자고 있었단 말이에요! 다 왔는데 자기 안 깨우고 문 안 열어줬다고 삐쳐서 괜히 류다 끌어들여서 나한테 짜증낸 거란 말이에요! 내가 그 자식 삐치는 거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 자식은 여자고 뭐고 지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놈이니까 항상 받들어 모셔줘야 된다고 굳게 믿는 놈이라고요. ”
“ 그래도 제일 좋아하면서. ”
“ 누가요? 누구를요? ”
“ 당신이요. 꽃돌이 감독님 엄청 좋아하잖아요. 맨날 미샤 얘기밖에 안하고. ”
“ 윽, 제발... 그런 거 아니라고... ”
“ 누가 뭐래요,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하는 거 아니라는 건 믿어요. 근데 그런 거 말고요. 하여튼 당신은 뭐든 미샤가 우선이잖아요. 뭘 하든 결국은 미샤 생각으로 돌아오는걸요. ”
“ 하지만... 그건 내가 너무 일에 찌들어서 그래요. 퇴근해서도 항상 그 자식 옆에 붙어서 돌봐주다 보니... 그리고 그 자식 너무 애기 같아서 잠깐이라도 눈 돌리면 금세 사고를 치니... ”
“ 안 그런 것 같던데... 미샤는 굉장히 어른스럽고 여자들이랑 어른들에게도 잘 하고... 세상 물정도 잘 알고 처신도 의젓하고... 그런 얘기 하는 거 당신밖에 없어요. ”
“ 아닌데, 그 자식 완전 애긴데... ”
리자는 다시 까르르 웃더니 베르닌의 뺨에 다시 뽀뽀를 했다.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향이 났다. 달콤한 딸기 향이 아니라 아기 분 같은 냄새였다. 비누 냄새인지 향수인지는 모르지만 향이 좋았다.
“ 나 이제 들어갈게요. 저기 창가에 우리 오빠가 벌써 나와서 손 흔들고 있네요. 다냐,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공연 보여준 것도요. ”
“ 네? 아니에요, 내가 얘기한 거 아니에요. 표는 미셴카가 준 거예요. ”
“ 에이, 이제 와서 뭘 아닌 척. 미샤한테 당신이 얘기했다면서요. 나 발레 좋아한다고. 고마워요. 어머님 아버님도 너무 좋으시더라고요. 인사 전해주세요. 그럼 안녕! ”
* * *
집에 돌아오자 어제처럼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다. 진하고 달콤하기까지 한 보르쉬 냄새와 구수한 고기 요리 냄새가 났다. 공연 때문에 점심을 빨리 먹었기 때문인지 베르닌은 갑자기 엄청나게 배가 고팠다. 마침 저녁을 차리고 있던 어머니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아니, 너 왜 이렇게 일찍 오니? ”
“ 리자도 신시가지에 살더라고요. 가까워서 얼마 안 걸렸어요. ”
“ 우리는 네가 리자랑 저녁 먹고 데이트할 줄 알았단다. ”
“ 네? 아니에요, 저랑 리자는 그냥 회사 동료라고 했잖아요. ”
“ 아유, 그렇구나. 난 또... 아가씨가 참 귀엽고 괜찮더라. 잘 좀 해보렴. 엄마가 보니까 리자도 너한테 호감이 있는 것 같더라. 여자 마음은 여자가 안다고. 나이도 젊은데 어른 모실 줄도 알고 얼굴도 예쁘고 게다가 같은 KGB니 금상첨화 아니니. ”
“ 저... 리자랑 전 진짜 그런 사이가 아닌데... ”
“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란다. 부디 잘해보렴. 아이고, 우리는 네가 이러다 서른이 될 때까지 제대로 된 연애도 못하고 장가도 못 갈까봐 걱정했는데 기우였구나. 식탁으로 가렴. 저녁 먹자. 네가 늦게 올 줄 알고 아빠랑 간단하게 때우고 가려고 보르쉬 끓이고 쇠간만 볶았는데 너무 부실한 것 같기도 하고... ”
“ 아니에요, 딱 좋아요. 아, 이게 쇠간 볶음 냄새였구나. 크림소스에 볶은 거죠? 맞아, 이거 맛있었는데... 식당 가서 먹으면 어머니가 해주는 맛이 안 나더라고요. 작년인가 이거 너무 먹고 싶어서 직접 만들어봤는데 비리고 냄새가 나서 완전 망했어요. ”
“ 내장 요리는 생강이랑 허브를 써야 잡내를 잡을 수 있단다. 어서 손 씻고 와서 앉으렴. ”
저녁 식사는 소박하지만 아주 맛있었다. 크림소스를 끼얹은 쇠간 볶음은 고소하고 감칠맛이 돌았고 보르쉬는 인스턴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비트와 양배추, 쇠고기 등 건더기가 가득해 훨씬 뻑뻑했고 깊은 맛이 일품이었다. 금세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아들이 잘 먹자 내심 뿌듯했는지 미소를 지으면서도 어머니가 짐짓 타이르듯 말했다.
“ 천천히 먹어라, 어릴 땐 보르쉬 싫다고 투정하더니 지금은 잘 먹는구나. ”
“ 너무 맛있어요. 어떻게 해야 이렇게 깊은 맛이 나죠? ”
“ 야채든 고기든 건더기를 아끼면 안 돼. 그리고 육수를 잘 뽑아야 한단다. 맹물에 끓이면 절대 이 맛이 안 나. 시간이 있으면 쇠뼈로 오래 우려 놓으면 더 좋단다. ”
“ 아, 그렇구나... ”
아버지가 허허 웃었다.
“ 이 녀석 보게. 사내 녀석이 요리법을 하나하나 다 묻고. 가뜩이나 야근도 많이 할 텐데 고기 구워먹는 것도 아니고 저 공들여 끓여야 하는 수프를 네가 언제 만들겠냐. 아까 그 식당 맛있던데 거기서 먹는 게 낫겠다. 아니면 리자한테 그 레시피를 가르쳐주는 게 좋겠구나. 리자가 너한테 만들어주면 되지 않니. ”
“ 아니, 그게요... 아버지, 리자랑 저는 그런 관계가 아니고요... 그리고 저 야근 안 할 땐 집에서 요리해 먹거든요. 보르쉬도 자주 만드는데 이 맛은 안 나니까... 아참, 어머니. 보르쉬 남았어요? 많이 끓였으면 좋을 텐데... ”
“ 많이 남았단다. 안 그래도 남은 걸 두고 가면 네가 먹으려나 걱정했는데. 근데 꽤 많이 남아서 아마 냉장고에 넣어놨다가 데워먹어야 할 거야. 요즘 날이 따뜻해서. ”
“ 아, 잘됐다. ”
베르닌이 뛸 듯이 좋아하자 어머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 뭐가 그렇게 좋니? 예전엔 보르쉬 이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으면서. ”
“ 그게 아니고요, 미셴카가 가끔 우리 집에서 같이 저녁 먹어요. 걔는 원래 보르쉬를 좋아하기도 하고, 의사 선생님이 보르쉬에 철분이 많으니 꼬박꼬박 챙겨먹으라고 했거든요. 보통은 인스턴트 보르쉬 데워먹지만 이렇게 맛있는 보르쉬 먹으면 진짜 좋아할 거예요. 그 녀석 극장 일이 너무 바빠서 옆에서 챙겨주지 않으면 끼니도 자주 거르고... 오늘도 저녁 먹고 온다고는 했지만 뻔할 뻔자 굶고 올 거예요. 머릿속에 일 생각뿐이거든요. 이 보르쉬 데워주면 진짜 좋아할 거예요. ”
뜨끈뜨끈하고 맛있는 보르쉬를 떠먹다가 베르닌은 갑작스런 침묵에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들었다. 부모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어머니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고 아버지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라도... ”
“ 다냐, 안 그래도 저녁 먹고 나서 이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너 어제 우리에게 숨긴 게 있더구나. ”
“ 숨기다니요? 제가요? 전 그런 거 없는데... ”
“ 네 친구 미샤 말이다... 아까 네가 리자 바래다주러 나갔을 때 클라우디야랑 통화하다가 오늘 공연 얘기가 나왔단다. 아들을 잘 둬서 극장 예술감독도 알게 되고 덕분에 극장에서 제일 좋은 자리 앉아 발레를 봤다고 자랑했지. 그러니까 클라우디야가 깜짝 놀라는 거야. 극장 감독이라면 설마 그 ‘야스민’을 말하는 거냐고 하면서. 어제 그 아이 성은 못 들었던 것 같아서 이름만 안다고, 미샤라고 했더니 클라우디야가 그 아이 외모를 그대로 묘사하더구나. 그래서 맞다고 했더니 얼마나 놀라는지... 큰일 나려고 그런 반동분자와 저녁을 같이 먹었느냐고, 너랑 많이 친하냐고 묻는 거야. 낌새가 이상해서 살짝 얼버무리면서 그냥 어쩌다보니 식사를 같이 했다고 둘러대면서 그 아이가 정말 반동분자냐고 물어보니 클라우디야가 놀라운 얘기들을 줄줄이 해주더구나! ”
흥분한 어머니가 목이 막혀 기침을 하는 사이에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 우리는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다, 다냐. 너도 알다시피 극장이랑은 담을 쌓았지 않니. 그래도 이름에 성까지 들으니까 우리조차도 귀에 익더구나. 바로 ‘그’ 미하일 야스민이라니. 볼쇼이인지 키로프인지 하여튼 굉장히 유명했던 애 아니냐. 작년 여름에 왜 조국의 반역자라고 대문짝만하게 신문에도 나고. 클라우디야가 말해주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더구나. 완전 반체제주의자라고,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가 기밀을 팔아넘기고 망명하려 했다고, 그래서 감옥에도 갔다 왔다고 하는 거야. 그나마 뒤를 봐주던 윗분이 있어서 여기 극장으로 보냈는데 그래도 반동분자로 소문났으니 절대 가까이 하면 안 된다고 열변을 토하더구나. 얘야, 우리는 정말 놀랐단다. 너는 심지어 KGB 아니냐, 어쩌다 그렇게 위험한 애와 친해진 거니. 그 얘길 듣고 네 엄마는 걱정이 되어 울기까지 했단다. ”
베르닌은 입맛이 싹 달아났다. 수프를 떠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 미샤는 두 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위험한 애가 아니에요. 반역자니 하는 건 과장된 혐의였고요. 진짜 불순한 반동분자였다면 당에서 걔를 석방시켜서 여기로 보내지도 않았을 거예요. 걔는 정치 같은 건 관심도 없어요. 그냥 예술가일 뿐이에요. ”
“ 아이고, 다냐. 그게 그냥 석방이 아니지 않니. 허가 없이는 가브릴로프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는데. 게다가 KGB 특별감시대상이라던데 너는 심지어 KGB 요원이지 않니. 잘못해서 국장이 너희의 친분을 눈치 채기라도 하면 네 앞날이 어떻게 되겠니. 그냥 예술가라니. 너는 그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너무 순진한 게 탈이란다... 공연히 걔랑 어울리다가 나쁜 물이라도 들까봐 너무나 걱정이 되는구나. 게다가 극장이라니, 예술가라니... 너처럼 공부만 하던 애랑은 놀던 물이 다른 애야. 클라우디야 말로는 걔가 사생활도 엄청 복잡하고 나쁜 소문이 많았다고 하더구나. ”
“ 아까는 미샤가 극장 감독이라서 좋은 자리도 구해주고 공연도 보여줘서 좋았다고 하셨잖아요. 어제 같이 식사하실 때도 미샤가 착하고 귀엽다고 마음에 들어 하셨고요. 그런데 어떻게 클라우디야 아줌마의 말만 듣고 순식간에 돌변하실 수가 있어요? 저한테 사람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잖아요. ”
아버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 그래, 네 말이 맞다. 그게 원칙적으로는 맞지. 하지만 너도 사회생활을 하니 알지 않니. 세상 사는 게 그리 호락호락하더냐. 네 말대로 미샤가 좋은 애일지도 모르지. 어제 보니까 심성은 고와 보이더구나. 우리에게도 깍듯했고. 하지만 아무리 좋은 애라 해도 위험한 건 위험한 거란다. 우리가 4~50년대를 어떻게 버텼는지 넌 모를 거다. 위험한 건 듣지도 않고 곁에 가지도 않았단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건 모두 피했지. 안 그러면 잡혀가거나 밀고를 해야 하니까.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몇몇 가지는 변하지 않아. 그것도 저렇게 유명한 애라면 더 그렇지. 가브릴로프의 모든 주민이 걔 이름을 안다고 하더구나. 너는 보안위원회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야. 다른 사람보다 백배는 더 위험해. 여기서 미샤가 실제로 나쁜 애인지 좋은 애인지, 반동분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세상은 그런 거다. 앞으로는 걔랑 얽히지 않는 게 좋겠다. 가까이 지내는 일이 없도록 해라. 알겠니? ”
베르닌은 너무나 답답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막 반박하려고 하는 순간 거실 쪽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온몸이 굳어졌다. 거실에서 부엌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왕재수가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려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멈춰선 것 같았다. 왕재수는 베르닌과 눈이 마주친 순간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나갔다. 부모님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기 때문에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 너 왜 그러니? ”
“ 잠깐만요. ”
베르닌은 벌떡 일어났다. 급하게 거실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왕재수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보았다. 딩동 하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 아...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야. 얼마나 들은 걸까... 바보, 하필이면 이럴 때 딱 들어와 가지고... 평소엔 맨날 늦게 오더니 극장에서는 또 왜 이렇게 일찍 나와 가지고... 그냥 로만한테 가서 밤이나 불태울 것이지. ’
베르닌은 망연자실해져서 한동안 복도에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 우리 어머니랑 아버지가 기차 타러 나가기 전에 인사하려고 일찍 나왔던 거야. 바보 같은 자식... ’
그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왕재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위층으로 올라가볼까 하다가 부모님에게 공연한 빌미를 잡히고 싶지 않아서 도로 집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가 잔뜩 먹구름이 낀 표정으로 물었다.
“ 너 왜 그랬니? 밖에는 왜 나갔다 오고. ”
“ 밖에서 문 두들기는 소리가 나서요. 근데 옆집이더라고요. 가끔 우리 집이랑 착각하는 손님들이 있어요. ”
“ 초인종이 있는데 왜 문을 두들긴담. 예의 없는 사람들이구나. ”
“ 어, 여, 옆집은 초인종이 고장 났어요. ”
“ 그렇구나. 좋은 아파트인데 수위는 제대로 일을 안 하나보구나. 그래도 참 좋은 회사지 뭐냐, 겨우 3년밖에 안 된 직원에게 이렇게 좋은 아파트를 배정해 주다니. 국장이 못살게 굴어도 그러려니 하고 잘 참으면서 다니렴. 일이야 네가 워낙 열심히 할 거고. ”
“ 네. ”
“ 그리고 미샤에 대해서는 엄마아빠 말을 꼭 들으렴. 앞으로는 가까이 지내지 말아라. 알겠니? ”
“ 저는 성인이잖아요, 누구를 친구로 사귈지 말지는 제가 결정할 일인데... ”
“ 얘야,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부디 우리 말을 들어라. 네가 약속을 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걱정이 돼서 밤잠을 못 이룰 것 같구나. ”
베르닌은 무슨 말을 해봤자 소용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어요. 말씀대로 할게요. ”
“ 그래그래, 이제 마음이 좀 놓이는구나. 어서 먹으렴. 아이고, 음식이 다 식어버렸구나. 다시 데워줄까? ”
“ 아니에요, 수프는 다 먹었고 쇠간 볶음은 식어도 맛있어요. 어머니 아버지도 어서 드세요. ”
부모님은 안심했는지 다시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게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이따금 맞장구도 치고 대화에도 끼어들었지만 모든 것은 기계적이었다. 어머니의 요리조차 모래를 씹는 것 같은 맛이었다. 머릿속에는 말없이 몸을 돌려 나가던 왕재수의 뒷모습과 엘리베이터 문의 ‘딩동’ 소리가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 * *
베르닌은 부모님을 기차역까지 모셔다 드리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다, 얘야. 너 어차피 차도 지금 수리 중이잖니. 그냥 버스 타고 가면 되지. 타기만 하면 한 시간도 안 걸리는데. 지금 나가면 딱 9시 버스 타겠구나. ”
어머니는 내심 베르닌이 같이 버스를 타고 기차역까지 가주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베르닌도 그렇게 했겠지만 오늘따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정류장까지 함께 나가서 부모님이 버스를 탈 때까지만 함께 있었다.
부모님이 탄 버스가 떠난 후 베르닌은 아파트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자 따스한 온기와 보르쉬, 쇠간 볶음, 그리고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린 시절 집에서 나던 냄새가 훅 끼쳐왔다.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설거지와 청소를 모두 마치고 싱크대도 깨끗이 닦아놓았다. 보르쉬는 뚜껑 달린 냄비에 잘 담아 시원한 창가에 놓여 있었다. 열기가 다 가시면 냉장고에 넣으라는 어머니의 당부가 생각나서 냄비를 만져 보았다. 아직 따뜻했다. 갑자기 눈가가 따끔거리면서 목구멍으로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 자식, 저녁도 안 먹었을 텐데. ’
그는 냄비를 열어보았다. 보르쉬가 꽤 많이 들어 있었다. 양쪽 손잡이를 잡고 냄비를 들었다. 냄비를 들고 현관으로 걸어가다가 멈춰 섰다. 한숨을 쉬며 냄비를 도로 창가에 갖다 두었다. 그리고는 냉장고를 뒤져 며칠 전 사다놨던 오렌지를 꺼내고 찬장에서 흑빵과 보랴가 챙겨줬던 조그만 연어 통조림을 찾아냈다.
주머니에 오렌지와 통조림을 쑤셔 넣고 한 손에는 흑빵 봉지를 든 채 베르닌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왕재수의 집 문은 잠겨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열쇠로 문을 열었다.
“ 미셴카, 나야. 들어가도 되니? ”
안쪽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지만 답은 없었다. 처음에는 코즐로프가 와 있나 싶었지만 잘 들어보니 아니었다. 이제 베르닌도 진짜 연주와 레코드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레코드가 돌아가고 있었다. 낮고 무거운 현악 연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이올린은 아닌 것 같았다. 왕재수는 거실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다. 활짝 걷힌 커튼 사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재수는 자기 집에서는 커튼을 열어젖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걸핏하면 환기를 시킨다고 창문을 열곤 했지만 그래도 커튼을 반쯤 쳐놓곤 했다. 오랫동안 감시를 받아와서 몸에 밴 습관인 듯 했다.
하지만 지금 커튼은 완전히 걷혀 있었고 왕재수는 반쯤 열린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깥은 어두컴컴했다. 가로등 조명과 맞은편 건물의 불빛들이 흐릿하게 깜박거릴 뿐이었다. 베르닌은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미안해. ”
왕재수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베르닌은 약간 마음이 놓였다. 왕재수는 전혀 화나거나 슬픈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 왜 그런 말을 해? ”
“ 아까... 우리 부모님이 한 얘기... 너 들었잖아. 정말 미안해. ”
베르닌은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바보, 내가 울면 어떡해. 뭘 잘했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눈물을 삼키는데 왕재수가 여전히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 네가 왜 미안해? ”
“ 우리 부모님이니까... 진짜 미안해. 너 그런 애 아닌데... 괜히 넘겨짚고 오해하고... 내가 대신 사과할게. ”
“ 아, 그거. 괜찮아. 사과 안 해도 돼. ”
“ 하지만... ”
“ 나 화 안 났어. 부모님들은 아마 다 그럴 거야. 게다가 스탈린 시대를 보내신 분들이잖아. 괜찮아. ”
“ 아니야.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잘못한 거야. 너는 그런 애가 아니야. 그리고, 그리고 설령 그런 애라 해도 상관없어. 너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돼. 진짜야. ”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왕재수의 손을 꼭 쥐었다. 눈물은 간신히 멈췄는데 콧물이 주르륵 흘러내려서 급하게 훌쩍이며 삼켰다. 왕재수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더니 투덜댔다.
“ 바보 멍충이. 콧물까지 흘리고. 아이 지저분해. ”
“ 시끄러워. 네가 창문 열어놔서 그래. 바람 차갑잖아. ”
“ 환기시키는 거야! ”
“ 너 저녁 안 먹었지? ”
“ 으응... 극장에서 나올 때 토냐가 삶은 달걀 한 알 줘서 먹었어. ”
“ 배 안 고프니? ”
“ 조금 고파. 근데 막 저녁 차려놓고 먹기는 싫어. ”
“ 식탁으로 와. 연어 샌드위치 만들어줄게. ”
왕재수는 창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베르닌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베르닌은 연어 통조림을 땄다. 흑빵에 크림치즈를 바르고 훈제연어를 한 조각 크게 들어내서 얹었다. 왕재수는 좋아하면서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 하나 더 만들어줄까? ”
“ 응. ”
그래서 베르닌은 샌드위치를 두 개 더 만들었다. 한 쪽은 왕재수에게 주고 나머지 한 쪽은 자기가 먹었다. 왕재수는 언제나처럼 천천히 먹었다. 베르닌이 오렌지를 까고 있는데 왕재수가 물었다.
“ 부모님은? 가셨어? ”
“ 어, 응... 아까 버스 타셨으니까... 좀 있으면 기차역 도착하실 거야. 10시 기차거든. ”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샌드위치 조각을 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더니 모두 삼킨 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베르닌이 까놓은 오렌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 좋겠다, 다닐. ”
“ 뭐가? ”
“ 그냥. 보기 좋았어. ”
“ 뭐가 보기 좋아? ”
“ 너희 부모님. 너랑, 엄마아빠랑. 같이 있는 거. ”
“ 아... ”
베르닌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왕재수에게 오렌지 반쪽을 건네주고 남은 반쪽을 만지작거리면서 잠시 후 물었다.
“ 너는 그런 기억 없어? 어머니는 레닌그라드에 계시잖아. 아버지는... ”
“ 있어. 어릴 때. 좋았어. 같이 시장도 보고 저녁도 먹고 썰매도 타고. 근데 우리 엄마는 요리는 잘 못했어. 너희 어머니 음식이 더 맛있었어. ”
“ 그래... 어머니가 끓인 보르쉬 남았는데. 데워다 줄까? ”
“ 나중에. 내일. 지금은 배불러. ”
“ 그래. 내일 데워줄게. ”
왕재수는 활짝 웃었다. 보르쉬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오렌지를 먹으면서 왕재수는 조그맣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럴 것이면 저렇게 우중충한 음악은 틀어놓지 말 것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베르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왕재수가 부르는 노래를 듣자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 FIN -
2015. 12. 6 ~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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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나오는 수도원 사과빵은 내가 좋아하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의 사과빵에서 따왔다. 그 사과빵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359
..
서무 시리즈는 다음편인 38. 문어발과 이쑤시개 편으로 이어진다.. 38편은 훨씬 가벼운 분위기로 썼다. 근데 이건 언제쯤 올릴지..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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