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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금요일이 왔고.. 서무의 슬픔 36편도 왔다.

 

이번 편은 지난 35편 4월의 눈보라(http://tveye.tistory.com/4172)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얘기이기 때문에 전편을 읽어야 연결이 잘 된다.

 

눈 펑펑 내리는 숲속의 조그만 통나무집에 갇혀버린 단추와 왕재수!!! 벽난로에 불을 피워놓고 잠든 둘! 과연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4월의 어느날, 스페호프 국장은 베르닌에게 검은 숲속의 안전가옥 수리 명령을 내리고, 베르닌은 숲으로 가는 길에 왕재수를 온천에 데려다 주려고 함께 길을 나선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몰아친 폭설로 그들은 숲속의 통나무집에 갇히고 마는데... 과연 그들은 예상치 않았던 한가로운 휴일을 보내게 될 것인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 http://tveye.tistory.com/4062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2부) : http://tveye.tistory.com/4079
* 에피소드 33-1. 도자기 인형 : http://tveye.tistory.com/4098
* 에피소드 34. 딸기 아가씨들과 자선 바자회 : http://tveye.tistory.com/4140
* 에피소드 35. 4월의 눈보라 : http://tveye.tistory.com/417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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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6

 

 

 

 

서무의 슬픔

- 빨간 열매와 초특급 익스프레스 -

 

 

 

 

 

 

새벽에 베르닌은 추워서 깨어났다. 무의식적으로 페치카 쪽을 보았다. 불그스름한 불빛이 조그맣게 아른거릴 뿐이었다. 불이 거의 꺼져 있었다. 너무 추워서 콧김이 하얗게 일었다. 옆의 침대를 보니 왕재수가 바짝 웅크린 채 온몸에 담요를 돌돌 말고 잠들어 있었다. 베르닌은 난롯불을 꺼뜨리지 않을 테니 마음 놓고 자라고 큰소리 쳤던 게 생각나서 심한 가책을 느꼈다.

 

 

일어서자 왼쪽 발목이 욱신거렸다. 추워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불을 켜면 왕재수가 깰 것 같아서 불씨에서 나오는 조그만 붉은 빛에 의지해 오른쪽 발에 무게를 실은 채 페치카 쪽으로 갔다. 장작더미 옆에 놔둔 잡지를 몇 장 뜯어서 난로 안으로 던져 넣었다. 불은 좀처럼 일지 않았다. 잡지로 부채질을 했다. 찬바람이 일자 왕재수가 잠결에 ‘아이 추워...’ 라고 웅얼거리며 몸을 더 바짝 웅크렸다. 하지만 깨지는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베르닌은 성냥을 그어서 불을 붙인 종이를 던져 넣고 자기 몸으로 왕재수 쪽을 가로막은 채 열심히 부채질을 했다. 불길이 조금 올라오는 것 같아서 장작을 넣었다. 그래도 벌목공들이 마른 장작을 잘 모아놓은 덕에 불은 금방 붙었다. 곧 난롯불이 화르르 타오르기 시작했고 얼음골 같던 실내에도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휴...’하고 한숨을 쉬고는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난롯불은 여전히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고 공기가 후끈했다. 하지만 창밖으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을 돌려보니 왕재수가 이불로 여전히 몸을 돌돌 만 채 옆으로 누워서 눈만 빼꼼 내놓고 베르닌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졸음이 가시지 않은 듯 눈꺼풀이 반쯤 내려와 있었다. 꽉 잠긴 목소리로 왕재수가 물었다.

 

 

“ 눈 와? ”

 

“ 응. ”

 

“ 시골... ”

 

“ 잠은 잘 잤어? 춥진 않았어? ”

 

“ 응. 더웠어. ”

 

“ 새벽에 추웠는데. 이불 꽁꽁 싸매고 잤으면서. 지금도 마트료슈카처럼 싸고 있으면서. ”

 

“ 네가 이불 덮고 자라고 했잖아. ”

 

“ 어, 그래... 잘했어. ”

 

“ 발목은 어때? ”

 

“ 어제만큼 아프진 않은데 그래도 욱신거려. ”

 

“ 찜질 좀 하면 나을 거야. ”

 

 

왕재수가 이불을 걷어내더니 침대 위에서 그대로 전신을 쫙 펴며 기지개를 켰다. 팬티 바람인 걸 보니 결국 자다가 바지는 벗어버렸던 모양이었다. 앉아서도 스트레칭을 몇 번 하더니 짜증스러운 얼굴로 결국 일어났다. 물을 채운 주전자를 들고 와서 페치카의 고리에 걸었다. 그리고는 창가로 갔다. 창문을 조심스럽게 삥긋 열더니 바깥을 내다보았다.

 

 

“ 어휴... 눈 진짜 많이 왔어. 엄청 쌓였네. 나가지도 못하겠다. ”

 

“ 어제만큼 바람 많이 부니? ”

 

아니. 바람은 별로 안 불어. 근데 추워. 큰일이네. 이쪽은 제설차 안 올까? ”

 

“ 시내가 우선이니까 검은 숲 쪽은 좀 늦게 올 거 같아. 그나마도 도로 쪽만 올 거야. 여기는 숲 속이잖아. 제설차는 못 들어와. 치울 생각도 안 할 거고. ”

 

“ 어제 너 잘 때 내가 차에 다녀왔잖아. 거기 구조 신호 붙여놓고 왔어. ‘빨간 리본 전나무 옆 벌목공 숙소에 갇혀 있어요. 도와주세요‘ 라고. ”

 

“ 와, 잘했어. 난 어제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

 

“ 근데 이렇게 눈이 많이 오니 거기까지 누가 오지도 않겠다. ”

 

 

주전자의 물이 끓자 왕재수는 유리병에서 딸기잼을 퍼내서 접시에 담은 후 거기 뜨거운 물을 부었다. 다행히 내열유리라서 병이 깨지지는 않았다. 뚜껑을 꼭 닫은 후 난롯가에 널어서 따뜻해진 수건으로 유리병을 둘둘 말았다. 그리고는 베르닌의 왼쪽 발목에 대고 수건을 한 바퀴 더 돌려서 감쌌다. 처음에는 따뜻한 정도였지만 점점 뜨끈뜨끈해져 왔다.

 

 

“ 찜질 좀 하고 있어라. 식으면 말하고. ”

 

“ 어, 고마워. 이런 것도 마사지사에게 배운 거야? ”

 

“ 아니, 이건 학교 다닐 때. 춤추는 거 많이 아프니까. ”

 

“ 그렇구나. 하긴 그렇게 높이 뛰는데 안 아플 리가. ”

 

“ 그래도 난 부상 많이 안 당한 편이야. 다른 애들보다 훨씬 유연해서. 다리나 허리는 다친 적 없어. 키로프 있을 때 어깨 때문에 좀 고생하긴 했지만. 옛날에 팔 부러진 거랑. ”

 

“ 그게 뭐야, 어깨 다치고 팔까지 부러진 게 부상 많이 안 당한 거야? ”

 

“ 응. 부상 때문에 쉰 거 다 합쳐도 몇 달도 안 되니까 남자 무용수한테는 진짜 양호한 거야. 팔 부러진 거야 학교 다닐 때였으니까. 뭐 그건 괜찮아. 덕분에 유라도 만나고. ”

 

“ 유라... 그 의사 선생님 말이야? 팔 부러져서 만난 거야? ”

 

“ 응. 그 사람 착해. ”

 

 

왕재수는 무의식적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남아 있는 뜨거운 물을 양동이에 붓더니 결심한 듯 양동이를 들고 ‘제발 쥐가 나오지 않게 해 주세요’ 라고 중얼거리며 별채의 사우나로 갔다.

 

 

 

5분 쯤 후 젖은 머리를 닦으며 팬티 바람으로 돌아온 왕재수는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기분이 좋은 듯 휘파람을 불었다.

 

 

“ 야, 벌써 다 씻은 거야? 머리까지 다 감고? ”

 

“ 그럼 어떡하냐. 온수는 조금밖에 없고 사우나에는 쥐구멍도 있는데. 대충 물만 끼얹고 비누칠은 안 했어. 그래도 머리는 감았으니까. “

 

난 안 해! 머리 안 감을 거야!

 

“ 넌 안 되지, 다리 다쳤는데 함부로 몸 구부리면 안 돼. 지저분해지면 수건으로 싸매고 있으렴. 그래도 세수는 해. 뜨거운 물 좀 남겨놨어. ”

 

 

왕재수가 더운 물 담긴 바가지를 가져오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대충 그의 얼굴을 닦아 주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재수에게서 찜질에 이어 세수 서비스까지 받다니 정말 인생 모를 일이었다.

 

 

잠시 후 왕재수가 현관 밖으로 나갔다 왔다. 머리와 어깨에 하얗게 눈이 내려앉아 있었다. 한 손에 대걸레 자루와 굵은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다.

 

 

“ 엥, 그게 뭐야. 너 청소할 거야? ”

 

“ 아니, 내가 왜 청소를 하니. 그게 아니고 너 이거 짚고 걸어보라고. ”

 

 

왕재수는 전날 문짝 썰매를 동여맸던 밧줄을 풀었다. 나뭇가지를 대걸레 자루 꼭대기에 수직으로 대고는 꽉 동여맸다. 바닥의 걸레는 미끄러질까봐 베르닌의 가방에서 꺼낸 주머니칼로 잘라내 버렸다.

 

 

“ 짚어봐. ”

 

 

베르닌은 대걸레를 겨드랑이 아래 끼고 무게를 실어보았다. 의외로 불편하지 않았다. 오른발에 모든 무게를 실었을 때보다 한결 나았고 왼쪽 발목도 덜 아팠다. 왕재수는 나중에 눈 그칠 때를 대비해서 만든 거니까 집안에서는 움직이지 말고 앉아 있으라고 했지만 베르닌은 신이 나서 임시 목발을 짚고 광과 찬장 쪽으로 가보았다. 옥수수 통조림과 연유 깡통, 커피가루와 돼지비계 절임과 인스턴트 감자 퓌레를 발견했다.

 

 

“ 엥, 이런 것도 있었네. 너 어제 이것들 못 봤어? ”

 

“ 연유랑 돼지비계는 안 먹고. 옥수수 통조림은 따개가 안 달려 있어서 못 땄어. 커피는 잘 안 마시고. 그 감자 가루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

 

“ 하긴... 연유 맛있는데... 커피에 타서 먹어야겠다. 예전에 모스크바 기숙사에 있을 때 사이공에서 온 애가 그렇게 먹는데 맛있더라고. ”

 

 

생각지 않은 음식들에 베르닌은 뿌듯해졌고 숙소와 장작과 먹을 것들을 장만해둔 벌목공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왕재수는 계속 집에만 있으니 배가 고프지 않다면서 차만 마시겠다고 했지만 베르닌은 도끼눈을 떴다.

 

 

안 돼! 먹어야 돼! 이럴 때 아니면 네가 언제 집에 틀어박혀서 삼시세끼 꼬박꼬박 먹냐! 요즘은 나도 바빠서 너 밥 제대로 못 챙겨주잖아! 아침 먹어야 돼! ”

 

“ 어제 카페에서 받아온 사과도 있는데... 나 그거 먹을래. ”

 

사과는 후식! 간식! 오늘 아침은 감자 퓌레랑 연유 넣은 커피랑 치즈 얹은 비스킷이야! ”

 

“ 그게 뭐야, 거의 다 탄수화물이랑 당분... ”

 

“ 치즈는 단백질이잖아! ”

 

“ 아침엔 비타민이 필요하단 말이야! 사과 먹을 거야! ”

 

“ 좋아, 그러면 감자 퓌레랑 연유 넣은 커피랑 치즈 얹은 비스킷이랑 사과 한 알. 끝! ”

 

“ 그건 너나 먹을 식단이고! ”

 

“ 무슨 소리야! 나는 더 먹을 거야! 햄도 잘라먹고 치즈에 잼도 얹을 거고 비스킷도 여러 개 먹을 거야! ”

 

돼지! 80킬로!

 

“ 나는 180이 넘는데! 80킬로 그게 뭐 대수야! ”

 

“ 그 80킬로가 근육이 아니고 전부 살이니까 그렇지! 아휴! 난 사과 한 개만 먹고 싶은데! ”

 

의사 선생님한테 이를 거야!

 

악마! 곱등이 같은 인간!

 

 

베르닌은 페치카에 냄비를 올려놓고 눈 녹인 물을 섞어서 감자 퓌레를 대충 저어가며 끓였다. 접시가 모자랐으므로 전날의 보르쉬처럼 퓌레도 냄비 째 내려놓았다. 비스킷과 치즈와 햄을 쌓아놓고 접시 가장자리에 잼도 두 숟가락 퍼놓고 카페 아가씨에게서 받아온 사과도 한 알 올려놨다. 물을 끓여서 커피가루와 섞고 연유도 부어서 저었다. 왕재수에게도 먹으라고 한 컵 건네주었다. 왕재수는 원망 섞인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차는?... ”

 

“ 차는 점심 때 마셔. 오늘 아침은 커피! 베트남식! ”

 

연유를 왕창 넣었어... 이 동네는 이상해... 아무 데나 연유를 곁들여. 로만도 처음 봤을 때 나한테 사과파이에 연유 끼얹어주고... 심지어 커피에... ”

 

“ 우와, 사과파이에 연유 끼얹으면 맛있는데! ”

 

“ 어휴, 시골... ”

 

“ 커피에 연유 넣는 건 베트남식이란 말이야! 너는 외국물도 많이 먹은 녀석이 그것도 모르냐! 무식하게! ”

 

“ 쳇. ”

 

 

왕재수는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베르닌이 연유 넣은 커피를 호호 불며 조로록 마시고 만면에 미소를 띠며 ‘아 진짜 맛있다! 내가 끓였지만 최고야!’ 하는 것을 보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속는 셈치고 마셔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자기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곧 입술을 더욱 삐죽 내밀었다.

 

“ 엑, 쓰고 달고... ”

 

“ 야, 홍차도 씁쓸하잖아! ”

 

“ 커피랑 차는 맛이 다르잖아. 그리고 난 커피도 그냥 블랙으로 마시는데! 역시 연유를 넣으니 엄청 달아! ”

 

“ 추울 땐 단 게 필요해. 몸도 빨리 따뜻해지고. 너 그거랑 치즈 얹은 비스킷이랑 먹어봐. 치즈가 짭짤하니까 잘 어울릴 거야. ”

 

“ 더더욱 나빠, 달고 짠 거 같이 먹는 거! ”

 

“ 아휴, 한창 바쁠 땐 투정 안 하더니... 너 요즘 좀 살만 하구나! 음식 투정 계속하고! 자꾸 그러면 저기 있는 돼지비계 썰어서 먹인다!

 

“ 으악, 안 돼! 으으... 지난주에 이리나 표도로브나한테 끌려가서 그 망할 놈의 돼지비계 절임 억지로 먹고 나 죽는 줄 알았어! 집에 와서 밤새 울렁거려서 죽는 줄 알았어! 돼지비계에 기름케익에 기름 줄줄 흐르는 커틀릿에... 그 집은 심지어 딸기에도 버터소스를 뿌려먹어! ”

 

“ 그러니까 이리나 그 아줌마에 비하면 이건 담백한 거잖아! 어서 먹어. 너 생각해봐. 내 말 안 듣고 내가 주는 밥 맛 없다고 투정하면 의회에서 너 이리나네 집에서 묵으라고 할지도 모르잖아! 그러고 싶냐? ”

 

“ 안 돼... 안 돼! 악마들! 공산주의 악마!

 

 

왕재수는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지 바들바들 떨더니 치즈 얹은 비스킷을 얼른 한 입 베어 먹고 급하게 연유 넣은 커피도 한 모금 마셨다. 오물오물 꿀꺽 삼키더니 한동안 맛을 음미하고는 입술을 삐죽거리는 대신 콧등에 살짝 주름을 만들었다. 아무 말도 안하고 치즈 비스킷을 한 입 더 먹었다. 그리고는 베르닌이 비스킷에 햄과 치즈와 잼을 한꺼번에 쌓아올려 달고 짠 맛을 응축시키느라 분주한 틈을 타서 슬쩍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더니 혀로 입술을 살짝 핥으며 보일 듯 말듯하게 살짝 웃기까지 했다.

 

 

‘ 뭐야, 저 자식. 맛있으면서. 또 아닌 척하고! 쳇.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감자 퓌레도 먹으라고 강요했다. 왕재수는 커피에 연유가 들어 있어 배가 부르다며 싫다고 했지만 베르닌이 퓌레를 먹으며 ‘와, 이것도 인스턴트 아닌 것 같아. 맛있네! 페치카에서 직화해서 그런가봐!’ 하고 호들갑을 떨자 또 궁금했는지 슬며시 한 숟갈 떠먹어보았다. 그러더니 따뜻해서 좋다면서 몇 숟가락 더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베르닌은 사과를 쪼개서 왕재수와 나눠먹었다. 왕재수는 배가 부르다면서도 사과는 마다하지 않았다. 독사과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도 여전히 사과를 좋아했다. 사과를 먹으면서 왕재수는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 너 걱정돼서 그러니? 극장 가야 되는데 못 가서? ”

 

“ 응. 오늘은 공연도 있는 날인데. ”

 

“ 오늘 공연은 뭐야? ”

 

“ 백조의 호수. ”

 

“ 그건 자주 올리던 거잖아. 너 없어도 괜찮을 거야. ”

 

“ 그래도... 오늘 나쟈가 데뷔하는 날이라 내가 아침부터 봐주기로 했는데... 작은 역이지만 무대에 처음 서는 거니까 특별한 날이란 말이야. 주말에 스네고로드에서 부모님도 오셨다고 했는데. 그래서 학교 기숙사에 방도 하나 따로 잡아주게 했는데. ”

 

“ 너 나쟈 계속 돌봐주고 있었구나? ”

 

“ 응, 내가 데리고 왔잖아. 걘 늦게 시작했으니까 신경을 많이 써줘야 해. 아, 망할 놈의 눈... ”

 

“ 나쟈는 이해해 줄 거야. 딴 데도 아니고 스네고로드에서 왔잖아. ”

 

“ 나 어제 나올 때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잖아. 류다한테라도 전화해놓을걸. 애들 또 말도 안 되는 걱정할지도 몰라. ”

 

“ 에이, 할 수 없지 뭐. 아마 류다가 우리 사무실에 전화해서 나 찾으면서 물어봤을 거야. 나는 지금 온천 간 걸로 되어 있거든, 안전가옥은 기밀사항이라서. 그러니까 내가 온천 갔다는 얘기 들으면 너도 따라서 거기 갔다가 눈 와서 갇혔겠거니 할 거야. 류다 눈치 빠르잖아. ”

 

“ 그래주면 좋겠는데... ”

 

“ 지금 네가 걱정한다고 뭐가 해결되냐. 이렇게 된 거 그냥 쉬고 있어. 눈발 많이 가늘어진 것 같아. 일기예보에서 주중에 기온 올라간다고 했었어. 눈 좀 녹으면 나갈 수 있을 거야. ”

 

“ 일기예보에서 눈 온다고는 안 했잖아. 시골. ”

 

 

왕재수는 뺨을 불룩하게 만들면서 골난 표정을 지었지만 남은 사과를 베어 먹고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 이 사과 맛있어. 달고 물도 많아. ”

 

“ 사과는 시골이 더 맛있지? ”

 

“ 응. 레닌그라드에서 먹던 사과는 퍽퍽했는데. 이제 바람은 안 부나봐. 눈이 되게 조용하게 내리네. ”

 

“ 그러네. ”

 

“ 예쁘다. ”

 

 

왕재수는 사과를 먹으며 창가로 가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가볍고 우아한 스텝을 밟았다. 한쪽 발로 선 채 다리를 위로 쭉 뻗기도 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근사해서 베르닌은 코즐로프가 와서 바이올린을 켜주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왕재수가 폭설로 시골 숲속에 갇힌 것치고는 별로 짜증을 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   *

   

 

 

 

 

한 시간 후 왕재수는 차를 마시고 싶다면서 주전자를 들고 눈을 뜨러 나갔다. 베르닌은 다시 졸음이 쏟아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난롯불 때문인지, 무료해서인지, 아니면 그간 쌓인 피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졸렸다. 왕재수에게 차를 우려 준 후 좀 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갑자기 바깥에서 소스라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 아아아아아!!!!!

 

 

베르닌은 화들짝 놀랐다. 벌떡 일어나 뛰어나가려다 왼쪽 발목이 시큰거려서 주저앉았다. 급하게 왕재수가 만들어준 대걸레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나갔다.

 

 

“ 야! 무슨 일이야! ”

 

아아아아악, 다니이일!!! 아아아악!!!!

 

 

10미터 쯤 떨어진 전나무 아래 왕재수가 서 있었다. 머리에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채 한 손에 주전자를 들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울부짖고 있었다.

 

 

“ 너 왜 그래? 거기 뭐 있어? 쥐라도 나왔니? ”

 

으아아, 다닐! 뱀! 뱀 있어! 아아악!!!

 

 

베르닌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과연 왕재수의 말대로 전나무 근처 눈 더미 사이에 뭔가 울긋불긋하고 기다란 것이 꿈틀꿈틀하는 게 보였다. 색깔을 보니 지난번 온천 요양소 쪽에서 왕재수를 놀라게 했던 뱀과 같은 종류였다.

 

 

“ 이거 독 없는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치워줄게. 너 움직이지 말고 거기 가만히 있어. ”

 

“ 다닐, 으아아... ”

 

 

베르닌은 문가에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서 절룩거리며 눈 더미 쪽으로 갔다. 베르닌이 다가가도 뱀은 가만히 있었다. 심지어 꼬리 쪽에는 눈도 쌓여 있었다. 또 허물 벗어놓은 건가 싶었지만 진짜 뱀이었다. 베르닌은 나뭇가지로 뱀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서 멀리멀리 던져버렸다. 왕재수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나무 뒤쪽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왕재수에게 갔다.

 

 

“ 뱀 버렸어. 이제 괜찮아. ”

 

“ 진짜, 진짜 뱀이었어... 껍질 아니었어... 으앙, 다닐... 엉엉... 뱀이 또 왔어. 나 숲 진짜 싫어... 엉엉... 낼름낼름...

 

 

왕재수가 눈 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세상 끝난 듯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어이도 없고 좀 귀엽다는 생각마저 들면서 웃음이 나려고 했지만 꾹꾹 참으며 왕재수를 어르고 달랬다.

 

 

“ 괜찮아. 이제 저리로 갔어. 빨리 집으로 들어가자. ”

 

“ 또 있으면 어떡해... 지 친구들 같이 왔으면 어떡해... ”

 

“ 뱀은 친구 없어. 혼자 다녀. ”

 

“ 아니야, 뱀도 친구 많아! 영화에서 뱀이 막 구덩이에 수십 수백 마리 모여서 우글우글... ”

 

“ 야, 그건 영화잖아.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자. ”

 

 

왕재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억지로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업어주고 싶었지만 발목이 아파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왕재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뱀이 나왔던 방향을 피해서 지그재그로 걸어가면서 엄마 잃은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 엉엉, 뱀 무서워... 엉엉... 무서워... ”

 

“ 그 뱀 좋은 뱀이라 했잖아. 벌목공들이 목에도 걸고 다닌다니까, 나무 잘 자라고 홍수 안 나게 해준다고. 너 올해 그 뱀 두 번이나 봤으니까 운수 좋을 거야. ”

 

“ 칫, 그때도 운수 좋을 거라 했는데 막 독사과 먹고 불 나고 잡혀가고... 다 거짓부렁이야... ”

 

“ 그건 액땜한 거고! 이제부터 좋아질 거야. 그리고 아까 그 뱀은 독도 없고 안 물어. 너무 무서워하지 마. 그 뱀도 놀랐을 거야. ”

 

“ 그놈이 뭘 놀라, 낼름낼름하면서 나 막 째려보고... 으흑... ”

 

“ 뱀은 변온동물이잖아. 따뜻해져서 겨울잠에서도 깨고 막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 와서 추워지니까 몽롱해져서 그러고 있었던 거야. 불쌍하잖니. ”

 

“ 안 불쌍해... 뱀 안 불쌍해. 무서우니까 안 불쌍해. 시골 와서 뱀 보는 내가 불쌍해. 어헝... 너 지금 뱀 편드는 거야? 흑...

 

“ 아휴, 무슨 뱀을 편드니. 대체 너는... 아무리 천재에 훈장을 많이 받고 높은 사람들 많이 만나도 다 소용없구나! 뱀 무섭다고 울고 뱀 질투하고! 다섯 살짜리도 안 그러겠다.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

 

“ 할머니 할아버지도 뱀은 무서워한단 말이야! 흑... ”

 

 

왕재수는 훌쩍훌쩍 울면서도 발끈했는지 화를 냈다. 문 앞에 다다르자 눈도 털지 않고 급하게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떨어뜨린 주전자를 주워서 나뭇가지에 잔뜩 쌓여 있는 눈을 떠 넣은 후 따라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왕재수는 곧장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발발 떨면서 서럽게 울었다. 베르닌은 달래줄까 하다가 역성을 들어주면 더 울 것 같아서 그냥 놔두고 페치카에 주전자를 걸었다. 장작을 좀 더 넣고 부채질을 해서 불길을 좀 더 살린 후 아침 먹은 그릇들 설거지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왕재수는 뱀이 무섭다느니 시골이 싫다느니 하며 5분쯤 울다가 베르닌이 모른 체 하자 슬며시 눈물을 그치고는 잔뜩 토라져서 발끝으로 철제 침대를 퉁퉁 차며 골을 내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대걸레 목발을 짚고 페치카로 가서 주전자를 내렸다. 마침 김이 모락모락 나며 알맞게 물이 끓어올랐으므로 티백을 넣고 홍차를 우렸다. 그리고는 컵에 차를 따라서 왕재수에게 건네주었다.

 

 

“ 자, 차 마셔. 많이 놀랐으니까 뜨거운 차 마시면 나아질 거야. 너 좋아하는 대로 설탕 안 넣었어. ”

 

 

왕재수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컵을 받아들었다. 베르닌은 그 까만 눈에서 예의 ‘네가 무조건 잘못했다!’를 읽었지만 일단 왕재수가 차를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왕재수는 차를 몇 모금 마신 후 좀 기분이 나아졌는지 한숨을 폭 쉬었고 손목과 발목을 양옆으로 흔들어댔다.

 

 

“ 왜 그러니? ”

 

“ 뱀 때문에 마비돼서 아직도 저려. ”

 

“ 내가 좀 주물러줄게. ”

 

 

베르닌은 왕재수의 곁에 앉아서 손목을 천천히 주물러 주었다. 왕재수가 좋아했다.

 

 

“ 아, 따뜻해. 너 손 따뜻해. ”

 

“ 너 차 우려주려고 불 피우고 물 끓여서 그래. ”

 

“ 불 안 피워도 네 손은 항상 따뜻해. ”

 

“ 그런가... ”

 

 

베르닌은 어쩐지 머쓱해졌지만 왕재수가 좋아하니 자신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왕재수가 뱀 때문에 놀랐던 게 좀 가라앉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발목도 주물러주자 왕재수가 더욱 좋아했다.

 

 

“ 시원해. 옛날로 돌아가서 마사지 받는 것 같아. ”

 

“ 전문 마사지사가 해줬다며. ”

 

“ 응, 당연히 비교는 안 되지! 그래도 꿩 대신 닭이니까. ”

 

“ 내가 닭이냐! ”

 

 

왕재수는 웃더니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차는 이미 다 마신 후였다. 손발이 한결 부드러워졌다고 했다. 내친 김에 다리를 위로 뻗으며 누워서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다가도 문득 생각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심각하게 물었다.

 

 

“ 문틈으로 아까 그 뱀 들어오면 어떡하지? ”

 

“ 안 들어와. 틈 없어. 벌목공들이 지은 숙소잖아. 뱀 안 들어와. ”

 

“ 사우나에는 구멍이랑 틈 많았단 말이야. 쥐도 오락가락하는데 뱀이라고 못 들어오겠니? ”

 

“ 아까 그랬잖아, 추워서 뱀도 몽롱해졌다고. 여기까지 못 기어와. 내가 멀리 치워버렸어. ”

 

“ 밖은 추운데 집은 따뜻하잖아... 뱀도 불 쬐러 들어오면... ”

 

에이, 안 들어와. 백만분의 일로 들어오면 내가 치워버릴게 걱정하지 마. 저기 봐, 문에 엽총도 걸려 있잖아. 여차하면 총도 있으니까 걱정 마. 나 총 쏠 줄 알잖아. ”

 

“ 으응. ”

 

 

왕재수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가방을 뒤졌다. 수첩과 볼펜을 꺼내더니 뭔가를 열심히 적고 동그라미 네모 곡선 따위의 기호를 그리기 시작했다. 베르닌이 잘 모르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더니 일어나서 천천히 걷기도 하고 팔을 들어올리기도 하고 머리를 옆으로 꺾기도 했다. 그렇게 움직이다가 이따금 다시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코즐로프가 전에 말한 대로 새로운 작품을 구상 중인 모양이었다. 책상물림 행정직인 베르닌으로서는 왕재수가 어떻게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고 움직임을 통해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너무나 신기했다.

 

 

한참 동작을 연구하다가 왕재수가 문득 생각난 듯 베르닌을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 그래도 총은 쏘지 마. ”

 

“ 응? ”

 

“ 뱀... 총까지 쏠 필요는 없잖아. ”

 

“ 어, 그래. 맞아. 아까처럼 나뭇가지 같은 걸로 치워버릴게. ”

 

“ 근데 여기 총은 왜 있는 거야? ”

 

“ 아, 여기가 숲 속이잖아. 검은 숲이 원래 옛날부터 자연 환경이 좋아서 짐승들이 많이 살아. 나무도 울창하고 먹을 것도 많고 물도 좋잖아. 지금이야 벌목도 하고 도로도 생겨서 옛날만큼은 아니어도 토끼랑 다람쥐, 여우, 새 그런 거 아직 많아. 벌목공들은 일하다가 이따금 곰도 보고 늑대도 본대. 그래서 벌목 작업할 때는 혼자 안 다니고 항상 짝지어 다녀. 총도 가지고 다니고. 여기도 혹시 모르니까 놔뒀을 거야. ”

 

“ 곰? 늑대? 여우? 정말? 신기하다... 나 그런 거 동물원이랑 서커스에서만 봤어. 보고 싶다. ”

 

“ 토끼나 다람쥐라면 몰라도 곰이랑 늑대가 왜 보고 싶니! 위험하게! ”

 

늑대는 멋있는데... 나 작년에 안무했던 작품에 늑대를 형상화한 캐릭터가 하나 나왔어. 늑대 움직임을 짜 넣고 싶어서 동물원에도 자주 가고 다큐멘터리 영화도 많이 봤는데 아무래도 동물원 늑대는 너무 얌전하더라고. 곰은 서커스 극장에서 몇 번 봤어. 근데 그 곰도 너무 얌전하니까 이상하더라고. ”

 

“ 얌전해서 다행이지! 사람 공격하면 어쩌려고! ”

 

“ 하긴 그런가... ”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동작 연구에 여념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놀랄 만큼 집중했다. 베르닌은 무료해져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보았다. 눈은 아직도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그나마 현관 앞의 눈은 왕재수가 아까 쓸어놓아서 괜찮았지만 빨간 리본 달린 전나무 뒤로는 거의 허리까지 눈이 쌓여 있었다. 걸어가려면 커다란 삽으로 눈을 계속 퍼내면서 나아가야 할 판이었다. 다리를 다친 베르닌과 언제 뱀이 나올지 몰라 두려움에 떠는 왕재수가 삽질을 하면서 눈을 헤치고 숲을 나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눈이 녹을 때까지, 혹은 벌목공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다 왕재수가 차에 붙여놓은 구조신호를 보고 이곳으로 와 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스페호프가 그를 걱정해서 안전가옥 쪽으로 사람들을 보내줄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품고 싶었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현장요원들에겐 모두 징계를 내렸기 때문에 지금 이곳으로 사람을 보내면 안전가옥 위치가 발각되니 꼬장꼬장한 국장이 그래줄 것 같지는 않았다.

 

 

유일한 희망은 추위가 조금씩 누그러지면서 구름이 걷히고 저 멀리서는 햇살이 드문드문 비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눈이 그치면 해가 나고 따뜻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눈이 금방 녹을 것이다. 베르닌 자신이야 사실 일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지만 이래도 야근 저래도 야근이니 여기 며칠 갇혀 있는다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아니었다. 일에 찌들어서 매일매일 괴로워하는 베르닌과는 달리 왕재수는 극장에 가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었고 무용수들에게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한 곳에 갇히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하는 성격이니 지금은 참고 있을지 몰라도 하루만 더 지나가면 폭발할 게 뻔했다! 그나마도 다친 게 왕재수가 아니라 베르닌 자신이라서 다행이었다. 왕재수가 또 다치거나 아픈 것을 상상하니, 그것도 다리를 다치는 것을 상상하니 소름이 오싹 끼쳤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두시가 다 되어 있었다. 점심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베르닌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왕재수는 의자 위에 올라가서 한 발로 선 채 비행기가 나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저러다 넘어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데 왕재수가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또 왔다갔다 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도 반짝반짝했다. 이마와 콧등에 땀방울도 송알송알 맺혀 있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창문을 반쯤 열었다. 왕재수가 좋아했다.

 

 

“ 시원해. 좋아. ”

 

“ 응, 아까보단 덜 춥더라. 환기 좀 시킬게. 이제 점심 먹어야지. ”

 

“ 아침 먹은 지 얼마 안 됐잖아. ”

 

“ 아니야, 벌써 두시야. 너 배 안 고파도 먹어야 돼. ”

 

“ 배고파. 이상해, 아침도 많이 먹었는데... ”

 

“ 그렇게 많이 움직이니까 당연히 금방 배 꺼지지! ”

 

 

베르닌은 광을 열고 인스턴트 살랸카 깡통을 한 개 찾아냈다. 냄비에 내용물을 붓고 햄도 더 썰어서 넣었다. 그리고는 옥수수 통조림도 까서 반쯤 수프에 쏟아 부었다. 왕재수가 질색을 했다.

 

 

“ 우웩! 살랸카에 옥수수까지!!! 짜고 달고!!! ”

 

“ 야, 먹을 게 별로 없잖아. 그렇다고 아침이랑 똑같이 주면 너 싫어할 거잖아! ”

 

“ 웬 햄을 그렇게 많이 넣니!!! 안 그래도 그 칼바사 짜던데! 기름기도 엄청 많고! ”

 

“ 추울 땐 기름진 거랑 단 거랑 뜨거운 거 먹어야 된단 말이야! ”

 

“ 안 추워! 네가 불 잘 때놔서 하나도 안 추운데... ”

 

“ 그래도 먹어봐. 의외로 맛있을 거야. ”

 

“ 난 오믈렛 먹고 싶어. 네가 만든 거 맛있었는데. ”

 

“ 여긴 계란이 없어. 있으면 만들어줄 텐데. 근데 야채도 없어. ”

 

“ 벌목공들 불쌍하구나. 야채는 비트랑 오이 피클밖에 없고... ”

 

“ 여기는 밤에 잠만 자고 잠깐 쉬어가는 데라서 그래. 원래 도시락도 싸다니고 먹을 것 챙겨주는 아주머니도 따라다녀. 날 따뜻해지면 샤실릭도 구워먹고. ”

 

“ 샤실릭... 맛있겠다. ”

 

 

괜히 말했다 싶어서 베르닌은 급하게 옥수수 넣은 살랸카를 끓였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왕재수를 위해 비트 피클과 사과 한 알과 치즈를 잘게 썰어서 섞은 후 해바라기 기름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흑빵이 너무 그리웠지만 별 수 없이 다시 비스킷을 몇 개 꺼내 곁들였다. 통조림 옥수수를 잔뜩 쏟아 부은 덕에 살랸카는 양이 꽤 많아졌다. 맛을 보니 생각보다 좋았다. 차 마셨던 컵을 대충 씻어서 살랸카를 한 국자씩 부었다.

 

 

“ 다 됐다, 먹자. ”

 

“ 으음, 좋은 냄새 나. 이상하네. ”

 

“ 먹어봐, 맛있어. ”

 

 

왕재수는 컵에 담긴 옥수수 살랸카 냄새를 킁킁 맡아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한 숟갈 떠먹었다. 그리고는 또 고개를 갸웃하더니 두 번 더 떠먹었다.

 

 

“ 이상해, 왜 맛있는 거지? 인스턴트 살랸카에 짜디짠 햄 잔뜩 넣고 거기 옥수수까지 때려 부었잖아. 완전 가축 여물 같이 만들었는데 어떻게 맛있을까? ”

 

“ 야! 먹을 거 앞에 두고 여물이 뭐야! ”

 

“ 옥수수 원래 동물 사료로 많이 먹이잖아! 그리고 나 통조림 옥수수 안 좋아하거든. 전에 레닌그라드 있을 때 같이 살던 친구가 한번은 버터에 냉동 옥수수 알갱이를 넣고 볶아줬는데 국물도 흥건하고 너무 보기 싫어서 내가 여물 같다고 치워버리라 했더니 충격 받더라고. ”

 

“ 그 친구 불쌍하다... 나름대로 너 먹이려고 만들어준 걸 텐데... ”

 

“ 아니야! 그때 너무 격렬하게 응응을 하고 나서 배고프니까 아무 거나 있는 거 긁어다 만든 거야. 아무리 응응을 해서 배고파도 그렇지... 그것만은 먹을 수 없었어! ”

 

“ 으윽! 친구라고 했잖아! 왜 친구하고 응응을 하는데! ”

 

“ 그러게... 나도 친구랑은 안 하자 주의였는데... 애초부터 나는 친구도 거의 없었으니까. 그래서 걔랑은 안 하려고 했는데 결국 그렇게 됐어. 보고 싶다. 너 보면 가끔 걔 생각나. ”

 

“ 왜? 걔도 인스턴트 통조림 쓰고 냉동 펠메니 삶아줬니? ”

 

“ 요리는 네가 훨씬 더 잘해. ”

 

 

왕재수는 컵에 담긴 걸쭉한 수프와 옥수수 알갱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수프를 떠먹고 샐러드도 먹었다. 한참 먹은 후에야 샐러드가 맛있다고 했을 뿐이었다. 비스킷은 입에 대지 않았다.

 

 

베르닌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왕재수는 좁은 실내를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외국어 가사이긴 했지만 흥겨운 멜로디는 베르닌의 귀에도 익었다.

 

 

“ 어, 나 그거 극장에서 들어본 거 같아. 무슨 노래야? ”

 

“ 그래도 극장 드나든 보람이 있긴 있네. 투우사의 노래야. ”

 

“ 투우사? 그러면 돈키호테! 망토 춤 출 때 나오는 노랜가? ”

 

“ 아휴, 그건 발레였잖아, 노래 안 나왔잖아. 출연까지 해놓고는. 이건 카르멘에 나오는 거야. 오페라! ”

 

“ 어, 그렇구나... 하여튼 노래 좋아. ”

 

“ 당연하지, 내가 부르니까. 그리고 나는 원래 바리톤이니까. ”

 

“ 바리톤이 뭐지... 근데 너는 발레를 했는데 어떻게 오페라 노래도 다 알아? 그리고 노래도 잘하고... ”

 

나 원래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하고 연기도 잘 하고 팔방미인이잖아.

 

“ 으윽, 물어본 내가 바보지... 저놈의 자기 자랑. ”

 

“ 사실은 사실인데 굳이 겸양 떨 필요 없잖아. 그리고 발레학교에서도 음악이랑 연기 수업 다 받았어. 오페라랑 연극도 맨날 보러 다녔고 그쪽 지인들도 많았어. 그래서 지금 극장 끌고 가는데 도움이 되는 거야. 발레 말고 오페라도 있으니까. 뭐 부감독이 오페라 쪽이니까 전문적인 건 맡기고는 있지만. ”

 

“ 아, 그래서 오페라 무대 때도 자주 가 있는 거구나. 노래 배워서 그렇게 잘 하는 거구나. 어쩐지... ”

 

“ 배워서 잘하는 거면 못 하는 사람 하나도 없게. ”

 

“ 그래도 성악 쪽은 발성인가 뭔가 배우면 되는 거라며. ”

 

“ 음, 너는 성악은 안 될 거야. 차라리 대중가요 쪽을 배워. ”

 

“ 나 피오네르랑 콤소몰에서도 노래 못한다고 맨날 구박받았어. ”

 

“ 노래 좀 못하면 어때, 다른 거 잘하면 되지. 너는 종이로 하는 걸 잘 하잖아. 중요한 종이도 많이 만들고. ”

 

“ 에휴, 내 일은 중요한 거 하나도 없어. 그냥 쓸데없는 서류 작업이지. 망할 놈의 국장. 근데 다른 노래도 불러주면 안되니? ”

 

“ 나는 천재 예술가인데! 막 이래라 저래라 하고 노래 부르라 하고! ”

 

 

 

왕재수가 툴툴댔지만 칭찬을 해주니 기분이 좋은 게 분명했다. 연달아 노래를 불러주었다.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를 두어 곡 더 불러준 후 모두가 잘 아는 노래인 ‘백학’까지 불러주었다. 그러더니 ‘아휴, 분위기 우울해’ 하고 종알거린 후 베르닌이 잘 모르는 영어 노래를 또 흥얼거리며 벽난로에 장작을 집어넣었다. 베르닌은 처음으로 도청 장치가 아쉬웠다. 왕재수의 노래를 녹음해놓고 틈나는 대로 들을 수 있을 테니까.

 

 

 

 

 

*   *   *

 

 

 

 

 

오후 늦게 눈이 그쳤다. 왕재수는 집 앞과 근처 오솔길에 쌓여 있는 눈을 기세 좋게 쓸어내기 시작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삽을 내팽개치고 헉헉거리며 들어와서 난롯가에 주저앉았다.

 

 

“ 틀렸어. 그나마 사람 다니는 길로 나가려면 저 눈을 다 치워야 하는데 너무 많이 쌓여서 불가능해. 따뜻해지면 좀 녹을 텐데 심지어 더 추워진 것 같아. 한겨울처럼 눈이 얼었어. 문짝 썰매를 타고 나가볼까... 연장이라도 있으면 그거라도 좀 쪼개서 스키처럼 만들어볼 수 있으려나. ”

 

“ 일단 오늘 자고 내일 아침에 생각해보자. 지금이야 해질 무렵이니까 추워질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썰매랑 스키는 다르잖니. 너 다리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게다가 벌써 컴컴해지는걸. 그냥 오늘은 맘 비우고 하루 더 잔다고 생각해. ”

 

“ 공연... 나쟈... 아... ”

 

 

왕재수는 한숨을 쉬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기적이 일어나 구조대가 온다 해도 공연 시작까지 극장에 가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땅이 꺼질 듯 계속 한숨을 쉬면서 왕재수는 페치카 쪽으로 갔다. 삽으로 재를 퍼내고 장작을 더 집어넣고 부채질을 해서 사그라지고 있던 불꽃을 키웠다. 베르닌은 감탄했다.

 

 

“ 야, 이제 불 잘 피우네! 내가 하려고 했는데. ”

 

“ 칫, 그러면 아까 좀 피워놓지! 죽어라고 눈 치우고 있었는데 그동안 불도 안 피워놓고! ”

 

“ 미안해. 아까는 불이 잘 타고 있었거든. 좀 전에 네가 문 열었을 때 찬 바람 들어와서 불이 죽었나봐. ”

 

“ 다 나 때문이래. ”

 

“ 네 탓이라고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진짜 불 잘 피운다. 너는 위기 상황에 강한가봐. 군대도 안 갔다 왔으면서 할 건 다 하는구나. ”

 

“ 군대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

 

 

불 잘 피운다고 칭찬을 받자 왕재수는 다시 기분이 좋아진 게 분명했지만 어깨를 으쓱하면서 한 손에는 재가 담긴 삽을, 다른 손으로는 주전자를 들고 문 쪽으로 갔다.

 

 

“ 재 버리고 눈 좀 떠올게. 너 저녁 준비해야 되잖아. ”

 

“ 어, 그래. 아까처럼 멀리 가지 말고 그냥 집 앞에 있는 눈 떠와. 이쪽은 다 깨끗하니까. ”

 

“ 그럴 거야! 나무 쪽으로 가면 또 뱀 나올까봐 무서워. 낼름낼름...

 

 

왕재수가 나간 후 베르닌은 찬장에서 저녁거리를 좀 더 뒤져보았다. 수프 통조림은 이제 보르쉬 두 캔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 보르쉬 어제 줬는데 또 주면 짜증내려나...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자식, 돼지비계를 먹으면 좋을 텐데. 이번엔 통조림 청어랑 오이 피클이랑 섞어서 스프레드를 만들어야겠다. 그거 비스킷에 발라 먹으라 해야지. 아니면 비스킷을 물에 넣고 끓여서 죽을 만들어볼까? 맛 이상하려나... 아니면 감자 퓌레하고 비스킷을 섞어서 끓여볼까? 아, 저 녀석 주전자만 가지고 나갔구나. 냄비에도 물 받아야 하는데. ’

 

 

주전자가 작아서 수프도 끓이고 찻물도 끓이려면 저녁에 다시 한 번 눈을 뜨러 나가야 했다. 베르닌은 냄비를 집어 들었다. 대걸레 목발을 짚고 문 밖으로 나가면서 소리쳤다.

 

 

“ 야, 주전자 너무 꽉 안 채워도 돼. 나도 냄비 가지고 나왔어. ”

 

 

왕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집 앞에는 없었다. 또 깔끔 떤다고 제일 깨끗한 쪽 눈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현관 옆의 작은 나무에 쌓여 있는 눈을 냄비에 쓸어 담다가 시야 가장자리에 이상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앗! 고, 곰!!!!

 

 

좁은 오솔길 한가운데 거대하고 시커먼 곰이 한 마리 서 있었다. 두 발로 섰기 때문에 엄청나게 커 보였다. 곰에게서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왕재수가 서 있었다. 왕재수는 한 손에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삽은 없었다. 고개를 든 채 곰을 쳐다보고 있었다. 둘 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소스라쳤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 어, 어떻게 해야 하지? ’

 

 

어릴 때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떠올려보려고 애를 썼다. 숲에서 곰과 마주치면 움직이지 말라고 했던 것 같았다. 아니, 그건 독사 얘기였다. 옛날 얘기처럼 죽은 척하면 오히려 공격당한다고 했던 것 같았다. 나무로 도망가도 안 된다고 했다. 곰은 나무를 잘 탄다는 것이다. 그럼 도망쳐야 하는 건지, 소리를 질러야 하는 건지, 오히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아야 하는 건지 도저히 기억이 안 났다. 군대에 있을 때 무기 없이 곰과 마주친 선임이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어올라 곰을 겁줘서 쫓았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은 났다. 하지만 분명 허풍 90%였을 게 뻔했다.

 

 

그때 왕재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놀라거나 두려움에 질린 표정은 아니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베르닌을 돌아보면서 나직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소리쳐 물었다.

 

 

“ 다닐, 어떻게 해야 돼? 곰이 계속 나 쳐다봐. ”

 

“ 어... 어... 너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마! 내가, 내가 쫓아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

 

“ 으응? 쫓아야 되는 거야? ”

 

 

왕재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베르닌은 금방이라도 곰이 달려들까 봐 너무나 무서웠다. 그러나 곰은 가만히 있었다. 두 발로 선 채 왕재수가 고개를 갸웃하자 자기도 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왕재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먹이를 먹고 왔나... 배가 부른가?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 맞다! ’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외쳤다.

 

 

너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총 가져올게! 조금만 기다려! 움직이면 안 돼! ”

 

“ 총 안 돼! 곰 쏘면 안 돼! ”

 

“ 이 바보야! 넌 도시에서 와서 몰라! 곰은 맹수란 말이야! 흥분시키지 말고 가만히 있어! 꼼짝도 하지 마! ”

 

 

베르닌은 대걸레 목발을 높이뛰기 장대처럼 멀리 짚으며 정신없이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발목의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급하게 광 쪽으로 갔다. 문에 걸려 있는 엽총을 끄집어 내렸다. 장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총을 들고 미친 듯이 다시 뛰어나갔다. 곰과 왕재수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고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었다. 베르닌은 총을 겨누며 소리쳤다.

 

 

미셴카! 몸 낮춰!

 

 

왕재수가 홱 돌아보았다. 눈이 커다래졌다.

 

 

“ 안 돼, 다닐! 곰 쏘지 마! ”

 

숙여! 위험해!

 

 

그때 베르닌과 곰의 눈이 마주쳤다. 베르닌은 곰의 눈도 새빨개지면서 불이 번쩍번쩍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곰이 갑자기 포악해지더니 ‘크악!’ 소리를 내며 몸을 부풀렸다. 금방이라도 덤벼들 태세였다.

 

 

미셴카! 엎드려!

 

 

왕재수가 놀라서 몸을 숙였다. 베르닌은 방아쇠를 당겼다. 불꽃이 퍽 튀기면서 굉음이 났다. 총알은 한참 빗나가서 옆에 있던 전나무에 가서 맞았다. 곰이 ‘으어억!’ 하고 화난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왕재수가 몸을 웅크리며 눈밭에 데굴데굴 굴렀다. 곰이 쿵쿵거리며 베르닌 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한 방 더 쐈다. 이번에는 어딘가를 스친 것 같았다. 곰이 갑자기 크르릉거리고 카칵거리더니 홱 돌아서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곰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왕재수 쪽으로 달려갔다.

 

 

미셴카, 으아... 정말 큰일 날 뻔 했어! 괜찮니?

 

“ 으으... ”

 

 

왕재수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눈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머리와 등, 팔꿈치 밖에 보이지 않았다. 베르닌은 급하게 눈을 파내고 왕재수의 팔을 잡아서 끌어내려고 했다. 그때 왕재수가 신음했다.

 

 

“ 아... 아파... ”

 

 

베르닌은 놀라서 손을 놓았다. 왕재수가 웅크리고 있는 눈구덩이 안쪽에 핏방울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쳤다. 왕재수는 한 손으로 어깨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옷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있었고 거기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베르닌은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앗! 너 곰한테 물린 거야?

 

 

왕재수는 고개를 저었다. 입술을 덜덜 떨면서 웅얼거렸다.

 

 

“ 앞발에 맞았어. 아파... ”

 

“ 괜찮아, 곰 갔어. 나한테 업혀. ”

 

“ 다리 아픈 주제에... 나 일어날 수 있어. ”

 

 

왕재수는 베르닌을 떠밀더니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손으로 어깨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발짝 못 가고 눈 위로 그대로 넘어졌다. 베르닌은 대걸레 목발을 내던져버렸다. 급하게 왕재수를 들쳐 업었다. 왕재수는 이제 일어날 수 있다고 우기지 않았다. 베르닌의 어깨에 머리를 무겁게 떨어뜨리더니 그대로 몸무게를 다 실어버렸다.

 

 

베르닌은 다리가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뛰다시피 집으로 들어왔다. 기절한 왕재수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는 문을 잠그고 빗장을 걸었다. 창문도 꽉 걸어 잠근 후 총을 내려놓고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왕재수는 얼굴이 하얘진 채 누워 있었다. 눈구덩이에 파묻혔던 탓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젖어 있었다. 타월로 머리와 얼굴을 닦아준 후 일단 스웨터와 셔츠를 벗겼다. 오른쪽 어깨에서 팔꿈치 위쪽까지 기다랗게 할퀸 자국이 나 있었다. 어깨 쪽은 심하게 찢어져서 살점이 패여 있었다.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어깨 전체에 커다랗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곰이 후려친 앞발에 맞아서 생긴 상처였다. 그나마 머리 쪽을 맞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정면으로 맞았다면 정말 큰일 났을 것이다.

 

 

‘ 뼈가 부러졌으면 어떡하지... 그 곰 엄청 컸는데... ’

 

 

베르닌은 일단 너덜너덜해진 셔츠로 왕재수의 어깨를 꽉 동여매서 지혈부터 했다. 만져보니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아서 일단 마음을 좀 놓았다. 그는 왕재수의 눈에 젖은 바지와 신발과 양말을 벗겨주고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준 후 담요를 덮어주었다. 구급상자에서 붕대를 꺼냈다. 피투성이가 된 셔츠를 풀어보니 출혈이 적어지기는 했지만 아직 멈추지는 않았기 때문에 소독은 하지 못하고 일단 붕대를 꽉꽉 감아서 압박을 해주었다.

 

 

‘ 찢어져서 꿰매야 할지도 몰라... 의사 선생님한테 데려가야 하는데... ’

 

 

그때 왕재수가 눈을 떴다.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 아이 아파... ”

 

“ 정신 드니? 곰 이제 갔어. 안으로 들어왔으니까 이제 괜찮아. 곰이 어깨 할퀸 거야. 그래도 다른 데는 다친 데 없으니까 이만하기 다행이다... 많이 아프니? ”

 

“ 어깨랑 팔이 너무 뻐근해. 못 움직이겠어. ”

 

“ 앞발에 맞아서 그래. 그 곰 아무리 안 나가도 250킬로는 됐을 텐데, 제대로 맞았으면 뼈 다 으스러졌을 거야. 그냥 스친 정도라 정말 다행이야. ”

 

“ 곰 죽었어? 총 맞았어? ”

 

“ 아니. 제대로 맞추지도 못했어. 그렇게 큰 곰은 엽총 몇 발 맞아봤자 안 죽어. 그래도 놀랐는지 도망갔어. 다행이야. ”

 

“ 그냥 놔뒀으면 좋았을걸. 곰 놀랐겠다. ”

 

“ 곰한테 죽을 뻔하고도 그런 말이 나오니? ”

 

“ 아니야, 공격하려는 거 아니었어. 곰이 막 걸어오다가 나뭇가지 꺾어서 무슨 열매 같은 거 먹었어. 그러더니 나 보고 멈춰 섰어. 가만히 쳐다보더니 앞발로 나뭇가지 쳐서 내 쪽으로 하나 던져줬어. 열매 달린 거. 빨간 거. 그래서 집으려다가 곰이 공격할까봐 그냥 가만히 있었더니 몇 발짝 다가와서 또 가만히 있는 거야. 곰이 그냥 계속 쳐다봤어. 공격하려고 했으면 벌써 했게. ”

 

“ 그랬구나... 곰이 배부른 상태였나 보다... ”

 

총 쏘지 말랬잖아. 나한테 열매도 먹으라고 줬는데. 나쁜 곰 아니었는데. ”

 

“ 미안해, 곰이 너 앞에 있어서 너무 놀랐어. 너 다칠까봐 그랬어. 내가 총 쏴서 곰이 놀랐나보다... 그래서 네가 다쳤나봐. 미안해... ”

 

“ 괜찮아. 그냥 좀 찢어진 거잖아. 피 많이 나? ”

 

“ 살갗 찢어져서 피는 좀 나는데 좀 있으면 멈출 거야. 걱정하지 마. 나중에 의사 선생님이 치료해주면 금방 나을 거야. ”

 

“ 으응... 뼈만 안 다치면 돼. 근데 아까 맞았을 땐 너무 아팠어. 스친 건데도 서 있을 수가 없었어. 숨이 턱 막히는 게 트럭에 받힌 것 같았어. ”

 

“ 그래, 이만하기 정말 천만다행이야. 춥지는 않아? ”

 

“ 응. 따뜻해. ”

 

“ 이제 무서워하지 마. 곰 안 올 거야. 와도 내가 쫓아버릴게. ”

 

“ 안 무서워. 곰은 안 무서워. ”

 

“ 야, 어떻게 곰이 안 무섭냐! 큰일 날 뻔 했는데... 곰하고 그렇게 일대 일로 마주보고 있는 녀석이 어디 있어! ”

 

“ 곰은 안 무서워. 쳐다보는데 눈이 예뻤어. 곰은 괜찮아. 뱀이 무서워. ”

 

“ 에휴, 철없는 녀석... 독도 없고 물지도 않는 뱀은 무섭다 그러고, 곰한테 맞아 뒹굴어 놓고서도 곰은 안 무섭다니. ”

 

“ 곰은 낼름낼름 안 하잖아. ”

 

“ 하긴, 귀신한테 연애 상담도 해준 놈이니... 그래놓고 바퀴벌레랑 쥐 보면 기절하고. ”

 

바퀴벌레 싫어... 쥐 무서워. 뱀 무서워. 왜 자꾸 그런 거 생각나게 해! 징그러워. 엉엉... ”

 

“ 알았어, 미안해. 그런 거 여기 없어. 걱정 마. 좀 누워 있어. 저녁 차려줄게. 따뜻한 거 먹으면 덜 아플 거야. ”

 

“ 곰은 뭐 먹어? ”

 

“ 곰? 나무열매, 물고기, 작은 짐승... ”

 

“ 갑자기 추워져서 먹이 찾기 힘들겠다. 그래서 아까 열매 먹었구나. ”

 

“ 곰 걱정하지 마. 지가 알아서 잘 먹고 잘 살 거야. 네 걱정이나 해. ”

 

“ 으응. 나는 걱정 안 해. 나한테는 네가 밥 차려주잖아. ”

 

 

베르닌은 스웨터를 벗었다. 왕재수의 성한 쪽 어깨와 등을 받치고 조심스럽게 일으킨 후 자기 스웨터를 입혀 주었다. 다시 눕혀주려는데 왕재수가 고개를 저었다.

 

 

“ 눕기 싫어. 앉아 있을래. 저녁도 먹어야 하잖아. ”

 

“ 그래, 그러면 앉아 있어. 잠깐만. 여기 기대 있어. ”

 

 

베개를 겹쳐서 등에 대 주자 왕재수가 좋아했다. 담요를 덮어준 후 베르닌은 싱크대로 가서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감자 퓌레와 물과 비스킷, 치즈 약간을 섞어서 걸쭉한 수프를 끓이고 통조림 청어와 오이 피클, 비트 피클, 점심 때 살랸카에 넣고 남은 옥수수를 잘 섞어 샐러드를 만들었다. 먹어보니 의외로 둘 다 맛있었다.

 

 

접시를 들고 난롯가로 와보니 왕재수는 베개에 기댄 채 졸고 있었다. 난롯불 바로 앞에 앉아 있어선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이즈가 큰 스웨터 때문인지 어린애처럼 보였다. 접시를 내려놓자 왕재수가 금세 깼다.

 

 

“ 이게 뭐야? ”

 

“ 어... 이거... 감자랑 비스킷이랑 치즈 넣고 끓인 수프... ”

 

“ 그 감자 가루? 비스킷 부숴서 넣은 거야? ”

 

“ 으, 으응... 너무 심심할까봐 치즈도 좀 넣었어. 생긴 건 이래도 맛은 괜찮아. 먹어봐. ”

 

“ 이건? ”

 

“ 어제 먹은 그 청어... 피클 넣고 샐러드 만들었어. 아까 사과 샐러드처럼. 나쁘지 않아. 수프랑 먹으면 잘 넘어갈 거야. 먹고 푹 자면 내일 눈 다 녹고 집에 갈 수 있을 거야. ”

 

“ 응. 둘 다 맛있어 보여. ”

 

 

하지만 말과는 달리 왕재수는 거의 먹지 않았다. 수프를 조금 뜨다 말았고 샐러드는 손도 대지 않았다. 먹으니까 속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베르닌은 걱정이 되었다. 억지로 먹이는 대신 접시를 치워주었다.

 

 

“ 곰 때문에 너무 놀랐나보다. 지금은 안 먹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차 우려 줄까? ”

 

“ 응. ”

 

 

베르닌이 주전자와 컵을 들고 왔을 때 왕재수는 성한 쪽 어깨를 매트리스에 댄 채 모로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눕다가 발로 차버렸는지 담요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베르닌은 담요를 집어서 왕재수를 잘 덮어준 후 남은 음식을 대충 긁어먹었다. 모래를 씹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베르닌은 왕재수가 일어나면 차를 우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왕재수는 깨어나지 않았다. 점점 열이 오르더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괴롭게 몸을 뒤척였다. 상처에서 열이 나서 그런가보다 싶어서 베르닌은 스웨터를 벗기고 붕대를 풀어보았다. 피는 이제 완전히 멎어 있었지만 발톱에 패이고 찢긴 상처가 끔찍해 보였고 부어올라 있었다.

 

 

‘ 소독부터 해줬어야 했나봐... 감염돼서 열 나는 거면 어떡하지? 파상풍 같은 거 걸리면... 얘 피부 엄청 챙기는데... 흉터라도 남으면... ’

 

 

베르닌은 거즈에 소독약을 흠뻑 적셔서 왕재수의 상처를 꼼꼼히 닦아냈다. 알콜이 상처에 닿자 하얀 거품이 일었다. 잠결에도 얼굴을 찡그리며 ‘아아...’ 하고 조그맣게 신음을 내뱉는 걸 보니 많이 아픈 것 같았다. 하긴 어제 왕재수가 유리에 벤 상처를 소독해줬을 때 그 역시 굉장히 따가웠다. 곰 발톱에 긁혀서 살점까지 찢어졌으니 훨씬 아플 것 같았다. 베르닌은 공연히 자기 발목의 상처마저 시큰거려왔다.

 

 

소독을 한 후 베르닌은 피 묻은 붕대를 버리고 깨끗한 붕대를 다시 감아 주었다. 피멍 자국은 훨씬 어두워지고 훨씬 넓게 퍼져 있었다. 이 상처를 코즐로프가 봤다면 펄펄 뛸 것이다. 왕재수가 열이 나면서 몸을 덜덜 떨었기 때문에 스웨터에 재킷까지 껴입히고 난롯불에 마른 바지도 도로 입혀주었다. 막 담요를 두 겹 덮어주었을 때 왕재수가 눈을 반짝 뜨더니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아, 너 깼구나. 상처 아팠지? 소독약 바르느라 그랬어. 소독했으니까 이제 열도 내릴 거야. 차 좀 우려 줄까? ”

 

 

“ 아빠, 나 곰 봤어. ”

 

 

베르닌은 왕재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열기가 올라와서 눈이 불그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꿈을 꾸고 있거나 아파서 헛소리를 하는 게 분명했다.

 

 

“ 어... 그랬구나. 곰 봤구나. 안 무서웠니? ”

 

“ 곰이 나한테 열매 줬어. ”

 

“ 으, 으응... 그랬다고 했지... ”

 

“ 근데 떨어뜨렸어. 잃어버렸어. 엄마 갖다 주려 했는데... ”

 

 

왕재수가 몹시 속상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베르닌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며 왕재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 어, 아니야... 있잖아, 내가 가서 주워다 줄게. 곰 있었던 쪽에 떨어져 있을 거야. 밝아지면 주워다 줄게. ”

 

“ 나도 같이 갈래. 내가 주울 거야. 곰이 나한테 줬어. ”

 

“ 그래, 곰이 너한테 열매 줬구나. 네가 착해서 그런 거야. 이제 자자. 자고 나면 안 아프고 햇빛도 날 거야. 그럼 열매 주워서 집에 가자. ”

 

“ 으응, 엄마도 이리로 왔으면... 다 같이 있었으면... ”

 

 

왕재수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더니 베르닌의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는 몸을 웅크리며 다시 잠이 들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손을 잡은 채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왕재수는 두어 시간 정도 그렇게 얌전하게 잤지만 베르닌은 걱정이 되어서 내내 그의 곁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소독을 해줘서 열이 좀 내리나 싶었는데 11시 즈음이 되자 다시 열이 펄펄 끓었다. 기침도 했다. 아무래도 전날부터 눈을 맞고 돌아다닌 데다 아까 눈구덩이에 파묻혀서 그런 것 같았다.

 

 

‘ 큰일났네. 곰한테 맞아서 그런 게 아닌가봐. 의사 선생님이 그랬는데, 감옥 때문에 기관지가 안 좋아져서 조금만 잘못하면 폐렴 도진다고 했는데... 얜 한번 열 나면 끝도 없이 올라가던데... 어떡하지... 더 아프면 안 되는데. ’

 

 

베르닌은 너무 걱정이 되었다. 붕대에 약간 피가 배어나와 있는 것이 신경 쓰여서 다시 한 번 깨끗한 붕대로 갈아 주었다. 열이 심하니 갈증이 날 것 같아서 왕재수의 입술을 벌려서 따뜻한 물도 조금씩 먹였다. 물을 먹여주자 왕재수가 잠깐 깨어났다. 이번에는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 다닐, 너무 추워. 난롯불 꺼졌나봐. ”

 

“ 으응, 그래. 내가 장작 좀 더 넣을게. 이불 좀 더 덮자. ”

 

 

베르닌은 담요 세 개를 모두 겹쳐서 왕재수를 꽁꽁 싸준 후 페치카에 장작을 더 많이 넣고 불도 더 세게 피웠다. 불길이 난로 밖으로 밀려나올 만큼 세게 피워서 실내가 사우나처럼 후끈후끈해졌다. 왕재수는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다시 추워했다.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덜덜 떨었다. 열이 나서 그런 것 같았다. 베르닌은 근심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할퀸 상처가 아프냐고 물었다. 왕재수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 그냥... 머리가 너무 아파. 추워. ”

 

“ 지금도 추워? ”

 

“ 로만... 추워... ”

 

 

왕재수가 괴로워하면서 베개를 꼭 껴안았다. 기침을 하더니 코즐로프를 찾기 시작했다. 안아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너무 추워서 그런 것 같았다. 베르닌은 예전에 과로와 독감으로 아팠을 때 왕재수가 안아주자 따뜻해졌던 게 생각나서 급하게 셔츠와 바지를 벗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왕재수를 꼭 안아주었다. 왕재수는 몸부림을 치다가 베르닌이 뒤에서 안아주자 금방 얌전해졌다.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베르닌에게 착 달라붙었다.

 

 

“ 이상해. 이렇게 불덩어리 같은데 자꾸 춥다고... 대체 몇 도야... 바보, 그러니까 나가지 말랬는데도 막 눈 맞으면서 차에도 갔다 오고... 아까도 막 눈 치우고... 뱀한테 놀래서 울어놓고 또 기어나가서 곰하고 마주치고 공격이나 당하고. 맨날 자기 무덤 파고... 정말 너란 녀석은... 바보 멍충이. “

 

 

아픈 와중에도 마지막 단어를 알아들었는지 왕재수가 웅얼거렸다.

 

 

“ 아니야... 나 아니야... 바보 멍충이는 다닐이야. "

 

“ 귀는 밝아 가지고... 알았어, 내가 바보 멍충이야. 잘 자고 있는 너 깨워가지고 온천 데려간다고 나오고... 다리나 다쳐가지고 너 고생시키고. 곰도 가만히 있었는데 괜히 총 쏴서 너 다치게 만들고... 내가 바보 멍충이 맞아. 미안해, 미셴카. 진짜 미안해. 그러니까 아프지 마. 아프면 안 돼. ”

 

 

왕재수는 대답하는 대신 더욱 더 베르닌의 품으로 찰싹 파고들었다. 아직도 추운지 부들부들 떨었다. 난롯불에 세 겹의 이불에 불덩어리처럼 뜨거운 왕재수 때문에 베르닌은 덥고 숨이 막히고 어지러웠다. 하지만 왕재수는 아직도 추운지 계속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기침을 할 때마다 가슴과 어깨가 쿵쿵 울렸다. 베르닌은 더운 것도 꾹 참고 왕재수를 꼭 안아주고 기침 때문에 심하게 들먹이는 등을 쓸어주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 아... 정말 어떡하지. 너는 왜 이렇게 아파가지고... 왜 고문은 당해가지고 이렇게 조금만 무리하면 열 나고 아프고... 아파도 곱게 아프면 좀 좋아. 그냥 뜨거운 차 마시고 이불 덮고 푹 자고 편하게 아프면 되잖아. 꼭 이렇게 무지무지 아파서 눈도 못 뜨고 정신도 못 차리고 막 힘들어하고 사람 걱정시키고... 맨날 아프고 맨날 사고치고... 너 때문에 나 정말 미칠 거 같아. 못 살겠어...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와 가지고... 맨날 나 힘들게 하고. 나 괴롭게 하고... ”

 

 

베르닌은 꾹 참으려고 했지만 자꾸 훌쩍훌쩍 울음이 나왔다. 왕재수가 자꾸 아픈 게 어쩐지 전부 자기 잘못 같았다. 꼭 안아줬는데도 왕재수가 계속 추워하고 열이 펄펄 끓고 괴로워하고 기침을 하니 어떻게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정 밖에 되지 않았다. 날이 밝으려면 한참 멀었다. 눈이 녹으려면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어찌어찌 아침이 온다 해도 왕재수를 데리고 나갈 방법이 없었다. 지난번 얼음물에 빠졌을 때나 독사과를 먹었을 때를 떠올려보면 왕재수는 가면 갈수록 더 열이 나고 아플 게 분명했다. 빨리 의사에게 데려가야 했다. 여기 내버려뒀다간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너무 무섭고 걱정이 되어서 베르닌은 견딜 수가 없었다.

 

 

‘ 어떡해... 어떡하지... 어떻게든 오늘 밤만 잘 넘기면... 동 트면 내가 나가서... 눈 치우면서 어떻게든 가면... 여기서 온천 요양소가 제일 가까우니까 거기까지만 가면... 그러면 사람 불러올 수 있어. 내 차에 지도 있으니까... 그거 보고 온천 쪽 가서... ’

 

 

베르닌은 왕재수를 꼭 껴안은 채 하염없이 시계를 보며 기도를 했다.

 

 

‘ 하느님, 제발 빨리 해가 뜨게 해 주세요. 얘가 안 아프게 해주세요. 열이 내리게 해주세요. 자꾸 춥다고 해요. 안 춥게 해주세요. ’

 

 

왕재수가 떨면서 베르닌의 뺨에 자기 얼굴을 비볐다. 얼마나 뜨거운지 살이 다 데는 느낌이었다.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왕재수가 헛소리를 했다.

 

 

“ 뱀 무서워... 바퀴벌레 무서워... ”

 

“ 뱀 없어, 바퀴벌레 없어. 괜찮아. 아무 것도 없어. ”

 

“ 무서워... 추워... ”

 

 

 

베르닌이 어쩔 줄 모르며 왕재수의 이마를 쓸어주고 등을 토닥여주고 있는데 갑자기 바깥에서 컹컹 개 짖는 소리와 삐걱거리는 소리,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쩐지 귀에 익은 쾌활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톱! 스토오옵! 구웃! 굿 보이! 굿 걸! 예에에쓰!

 

 

 

 

 

*   *   *

 

 

 

 

 

베르닌은 정신없이 뛰쳐나갔다. 현관문을 벌컥 열자 사방에 쌓인 눈이 온통 보름달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빨간 리본 달린 전나무 앞에 금색과 검정색으로 칠해서 번쩍번쩍 광이 나는 커다란 썰매가 서 있었다. 큰 썰매였다. 양옆으로 높직하게 난간까지 올린 데다 안쪽 좌석에는 검정 벨벳 덮개까지 씌워져 있었다. 게다가 뒤에는 널찍한 트렁크 칸까지 달려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근사한 썰매였다. 썰매에는 무려 다섯 마리의 커다랗고 북슬북슬한 개들이 매여 있었다.

 

 

우와아... 개썰매!!!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급하게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북슬북슬한 흰색 모피코트에 털모자를 눌러 쓰고 새파란 누비 솜바지와 노란 부츠를 신은 바냐 투레츠키가 신나게 휘파람을 불어대며 벌목공 숙소에 딸린 사우나 별채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별채 바로 옆으로 가더니 기운차게 삽으로 눈을 퍼내고는 무릎을 꿇더니 ‘끙차!’ 하면서 바닥에 놓여 있는 큰 돌을 들어서 옆으로 밀어놓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나무 뚜껑이 나타났다! 투레츠키는 ‘랄라랄라~’ 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나무 뚜껑을 들어올렸다. 베르닌은 두 눈을 의심했다. 그 아래에는 커다란 창고가 있었다! 조그만 사다리까지 놓여 있었고 지하 창고에는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바냐! 나 다닐이야! 바냐!

 

 

노래를 부르며 반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던 투레츠키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마냥 밝던 얼굴을 찌푸리더니 안경을 추켜올리며 ‘흐응’ 하고 고개를 저었다. 베르닌은 그러든 말든 개의치 않고 투레츠키에게 달려갔다.

 

 

“ 바냐! 너무너무 반가워! 아, 나 정말 여기 꼼짝없이 갇힌 줄 알았어! 와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

 

“ 아하, 다냐였구나. 난 또... 어휴, 너 왜 이렇게 사람 간 떨어지게 만드냐! 난 또 짭샌줄 알았잖아! 안 그래도 요즘 뇌물 주는 걸 좀 게을리했더니 자식들이 나 옭아매려고 기회만 보는 것 같아서 슬슬 다시 작업 좀 해야겠다 싶었거든. 근데 넌 여기서 뭐하는 거야? ”

 

“ 나 어제 숲에 왔다가 눈길에 미끄러져서 차 사고 났어. 폭설 때문에 여기 벌목공 숙소에 갇혀 있었어. 너 내 차 보고 여기 온 거 아니야? 차에 구조 신호 남겼잖아. 나 구해주려고 온 거지? ”

 

“ 에이 무슨 소리야. 난 썰매 타고 눈길로 왔는데 네 차를 어떻게 보냐. 하여튼 역시 너랑 나는 인연인가보네. 이왕 이렇게 된 거 너 나 좀 도와라. 어휴, 어제 옮겼어야 했는데 망할 놈의 눈이 이렇게 올 줄이야! 고객 몇 명이 오늘 물건 안 왔다고 얼마나 짜증을 내던지! 난 신뢰가 생명인데 제아무리 자연재해라도 운송 지연을 좌시할 수야 없지.

 

“ 고객... 물건... 앗! 그럼 너 여기다 물건들 숨겨 놓는 거야? 밀수품... ”

 

“ 야, 조용히 해! 내가 무슨 밀수꾼이라도 되는 줄 아냐? 다 합법적인 루트로 들여오는 거야! 사무실은 너도 와봤잖아, 좁아서 이 물건들 다 놔둘 수가 없단 말이야! 일주일마다 물건 배치랑 진열 품목도 다 바꿔줘야 하고. 그러니까 여기 창고를 만든 거야! 정기적으로 배송 오는 물건들도 여기서 수령하는 거고! 그건 그렇고 너 이거 설마 스페호프에게 흘리진 않겠지? 그럼 진짜 나 실망할 거야! 너랑 나랑 동갑인데! 보드카도 나눠 마시고 청어도 같이 먹었는데! ”

 

“ 아, 아니야... 나 절대 그런 거 말 안 해... 저, 바냐... 근데... 저 있잖아... 여기 나만 있는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너도 알지, 미셴카... 그... 영어랑 불어 잘 하고 프랑스 신문 읽으러 오고 네가 귀엽다고 한... ”

 

아, 우리 이쁜이! 걔 요즘 왜 이렇게 뜸하냐! 보랴 생일 때 본 게 마지막이네. 보고 싶어 죽겠네! 요즘은 예쁜 여자들도 예전만큼 안 오고... 이쁜이라도 와주면 좋겠는데. 정말 눈요기가 필요한데! ”

 

“ 그, 그러니까... 있잖아. 나랑 걔랑 여기 같이 왔는데... 곰이... 어... 열매를 주고... 총을 쐈는데 곰이 날뛰고... 그래서 피 나고... ”

 

“ 대체 무슨 소리야, 웬 곰! 열매는 또 뭐고! 너 술 마셨냐? ”

 

“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

 

 

베르닌은 약삭빠른 투레츠키가 거절할까봐 걱정이 스멀거렸지만 그래도 마음이 급해서 불쑥 말했다.

 

 

“ 미셴카가 너무 아파. 열이 펄펄 끓고 인사불성이야. 빨리 의사한테 데려가야 해. 바냐, 제발 도와줘. 응? 걔 좀 시내로 옮겨주면 안되니? 썰매로... 저... 시내가 너무 멀면 온천 요양소라도... 제발... ”

 

“ 에이, 열 나면 푹 자면 괜찮아져. 알잖아, 보드카 쭉 들이키고 난롯불 피워놓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자고 나면 씻은 듯이 나을 거야. 난 좀 바빠서... 짐 실어야 하거든. ”

 

“ 바냐, 제발. 걘 우리랑 체질이 달라. 여기 올 때부터 많이 아팠단 말이야. 술은 한 방울도 못 마셔. 놔두면 정말 큰일 날 거야. 너도 걔 좋아하잖아. 부탁이야. 우리 동갑이잖아. 술친구잖아. 내가 그때 파인애플도 샀잖아. 저... 내가 너 짐 옮기는 거 도와줄게. 다음에도 와서 도와줄게. 부탁이야... 제발 이번 한번만 도와줘. ”

 

 

베르닌은 투레츠키의 손을 덥석 잡고 매달리며 애원을 했다. 투레츠키는 베르닌이 손까지 잡자 당황한 듯 안경 너머로 눈을 동글동글 굴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 아, 뭐 그런 것 가지고... 에이... 그 자식 저번에 나한테 좋은 거 갖다 주기로 해놓고 안 줬는데. ”

 

내가 주라고 할게! 걔 내 말 잘 들어... 뭔지 말해주면 내가 가져다줄게!

 

“ 쳇. 나 바쁜데... 일단 짐부터 싣자. ”

 

“ 바냐, 제발... 짐은 있다가 다시 와서 실으면 안 되니? 미셴카가 정말 아파. 열도 많이 나고 오한도 심하단 말이야. 걔부터 옮겨주면 안 돼? 이러다 걔 잘못되면... ”

 

어휴, 잘못되긴 뭘 잘못되냐! 알았어! 나랑 같이 가서 좀 보자! 잠깐만!

 

 

투레츠키가 지하 창고로 재빠르게 내려가더니 베르닌의 눈에는 잡동사니로밖에 안 보이는 물건들을 뒤적거리다가 뭔가 조그만 병을 한 개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사다리를 기어 올라오더니 다시 휘파람을 불며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왕재수는 세 겹의 담요로 꽁꽁 싸인 채 몸을 웅크리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눈꺼풀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여전히 인사불성이었다. 투레츠키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 우리 이쁜이 많이 아프구나. 그러니까 나한테 꼬박꼬박 왔어야지. 너 주려고 이것도 받아다 놨는데. 요즘은 노인 양반도 건망증이 심해졌는지 맡겨놓기만 하고 가져갈 생각을 안 한단 말야. 그 노인네는 하도 괴팍하니까 물건 가져가라고 닦달하면 지팡이로 두들겨 팰 것 같단 말이지. ”

 

“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널 지팡이로 두들겨 패? ”

 

“ 누구긴 누구야, 꼬장꼬장한 호랑이 영감쟁이. 에휴, 노인네가 울 엄마한테서 나 받아주지만 않았어도! ”

 

“ 어, 레프 사벨리예비치 말이야? 의사 선생님? 나도 그 선생님이 받아주셨는데! 우와! ”

 

“ 우와는 무슨. 우리 세대 토박이 치고 그 영감님이 안 받아준 애들이 얼마나 있겠냐. ”

 

“ 그래도... 우린 동갑이고... 같은 의사 선생님이 받아줬으니까... ”

 

“ 하긴 그래. 동업하면 딱인데. 야, 얘 머리 좀 받쳐봐. ”

 

 

베르닌은 어리둥절해졌지만 시키는 대로 왕재수의 머리를 받쳐서 살짝 쳐들었다. 투레츠키는 지하창고에서 가져온 조그만 병의 마개를 열더니 왕재수의 입을 벌리고 빨간 빛깔이 도는 액체를 부어 넣었다. 베르닌은 깜짝 놀라서 투레츠키의 손목을 붙잡고 저지했다.

 

 

야, 지금 뭐하는 거야! 얘 아무 약이나 먹이면 안 돼! 의사 선생님이... ”

 

“ 어이, 캄 다운~ 릴랙쓰! 나도 알아. 이건 괜찮아. 영감님이 구해달라고 한 약이니까 괜찮아 괜찮아. 이거 구하는 게 얼마나 골치 아픈 줄 아냐? 잡지나 통조림하고는 경우가 다르다고. 그것도 이런 외제 약물은. 우리 이쁜이 이거 먹으면 열도 금방 내리고 괜찮아지거든. 노인네가 나한테 특별 주문한 거야. 지난번에 구해준 거 다 떨어졌다고 또 구해오라 해서 갖다 놨는데 요즘 이쁜이가 하도 뜸해서 약도 안 가져가고. 노인네한테 전화하려니 망할 놈의 의사 선생이 툭하면 맘 잡고 새 삶을 살라는 둥 설교를 해대니 짜증이 나서 원... 나 아니었으면 이 약도 못 들여왔는데 말이지. 하여튼 노인 양반. ”

 

 

베르닌은 멍해졌지만 어쨌든 골자는 알아들었다.

 

 

“ 어, 그러니까... 의사 선생님이 너한테 얘 약을 구해달라고 했다는 거야? 우리나라에서는 구하기 힘든 약인 거야? ”

 

“ 구할 수야 있지,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에서는. 근데 여기서는 힘들거든. 재밌는 거 가르쳐줄까? 모스크바 루트로 구하는 것보다 베를린 루트로 구하는 게 훨씬 쉽거든. 모스크바 쪽은 병원이나 의대를 뚫어야 하는데 그쪽은 뇌물을 엄청 먹여야 돼. 독일놈들이 훨씬 깔끔하다니까. 당케! 이쁜이도 수도에 있었을 땐 높은 분들 다니는 병원에 다녔으니까 약을 받았는데 여기 오니까 안 되는 거지. 노인네가 그쪽 차트를 구해가지고 머리 굴리다가 나한테 전화한 거야. 에이, 꼬장꼬장한 노인네. 그 와중에도 값을 깎고... ”

 

“ 와, 상상이 안 되네. 그 선생님이 너네 사무실에... 마약을 사러... ”

 

야! 이거 마약 아니야! 이거 합법적인 치료 약물이라고! 그냥 처방전이 필요한 것뿐이야! 수입 물량이 딸려서 우리 같은 시골까지 안 들어오는 것뿐이야! 양키들이랑 유럽 놈들은 쉽게 구한다고! 높으신 분들도 그렇고! 이쁜이는 옛날부터 주치의한테서 처방받아서 먹었다고 했어! ”

 

“ 그래도 여기서 들키면 체포되는 거 아니야? 그럼 마약이랑 뭐가 달라? ”

 

달라! 마약은 뿅 가려고 먹는 거고! 이건 안 아프려고 먹는 거잖아. 너 설마 날 마약밀수범으로 의심하냐! 게다가 우리 동네 최고 명의가 처방해준 약물을! 너 지금 나하고 영감쟁이를 동시에 모독했어! ”

 

“ 아, 아니야... 미안해. 바냐, 미안해. 그런 거 아냐. 고마워. 미셴카 위해서 약 구해줘서 고마워. 나는 그게 아니고... 혹시라도 네가 위험해질까봐... ”

 

“ 안 위험해! 너 내 실력을 뭘로 보고! 그리고 노인네야 당연히 나한테 직접 안 오지. 얘가 받으러 왔지. 약만 받아갈 줄 알았는데 웬걸, 이쁜이가 우리 물건들 엄청 관심 많더라고. 아는 것도 많고. 그래서 드나들게 된 거야. 에이, 손님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면 안 되는데... 내 영업 방침에 어긋나는데! 뭐 너랑 얘랑 되게 친하다고 보랴가 그랬으니까. 너랑 내가 남도 아니고. ”

 

“ 그랬구나... 이 약 먹으면 정말 괜찮아질까? ”

 

“ 열은 내릴 거야. 그러니까 그동안 물건 좀 싣자. 너도 도와줘! ”

 

“ 빨리 의사 선생님한테 데려가야 되는데... ”

 

“ 급한 물건은 지금 가져가야 돼! 내가 이 정도나 해주는데! ”

 

“ 어, 그래그래. 내가 도와줄게. 근데 물건 많이 실으면 얠 못 옮기잖아... ”

 

“ 뭐 할 수 없지. 무거운 건 내일 한 번 더 오지 뭐. 급한 물건들은 다행히 조그만 것들이라서. 빨리 와. ”

 

 

베르닌은 왕재수가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 투레츠키를 따라 나갔다. 투레츠키가 지하 창고에서 물건들을 위로 던지면 그것을 받아서 썰매 뒤쪽 트렁크 칸에 차곡차곡 실었다. 물건을 쌓을 때마다 썰매에 매여 있던 개들이 그를 보고 컹컹 짖었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눈을 반짝거리고 머리를 들이받으려고 하는 것이 어서 빨리 달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마침내 물건들을 다 실은 후 투레츠키가 개들을 쓰다듬고 나무에 묶어둔 썰매 줄을 풀면서 말했다.

 

 

“ 야, 이쁜이 데려와. 이제 가자. ”

 

“ 으, 으응... 시내로 가는 거야? ”

 

“ 그래야지. 검은 숲 진입로에 차 세워놨어. 그쪽은 그래도 제설이 좀 됐거든. 병원 앞에 내려줄테니까 이쁜이 나으면 약값 들고 오라고 해. ”

 

“ 내가 가져다줄게. 얼마야? ”

 

“ 야, 계산은 정확하게 해야지 왜 네가 가져다 주냐! 이건 나랑 이쁜이의 문제라고. 하여튼 빨리 애 데리고 와. 시간 없어. ”

 

 

베르닌은 집으로 들어갔다. 왕재수는 여전히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수입 약물 덕분인지 베르닌의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아까보다는 오한과 경련이 많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이마에 손을 대보니 뜨겁긴 했지만 그래도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 썰매 타고 가면 추울 텐데 어떡하지... ’

 

 

베르닌은 일단 왕재수를 업고는 옆구리에 담요를 한 장 꼈다. 가방은 나중에 가지러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발목이 욱신거렸다. 곧 병원에 갈 테니까 괜찮았다.

 

 

썰매는 2인용이었다. 베르닌은 왕재수를 투레츠키의 옆에 앉힌 후 트렁크 칸에 탔다. 물건들을 옆으로 좀 밀어붙이고 몇 개는 무릎 위에 쌓아올렸다. 조금 걱정이 되었다.

 

 

“ 내가 타서 너무 무거우려나... ”

 

“ 무슨 소리, 얘들 얼마나 명견인데. 여기서 아르한겔스크 지부까지 쳐도 얘들만큼 썰매 잘 끄는 개들 못 찾을 걸. 이 정도는 껌이야. 공간이 없어서 더 못 싣는 거지. 야, 너 뭐하냐? ”

 

“ 애 담요로 좀 둘러주려고. 바람 맞으면서 달려갈 거잖아. ”

 

“ 오우 마이 갓! 그 담요 얇아가지고 보풀이 부숭부숭한 게 무슨 도움이 되냐! 에이 정말 가지가지 한다니까! ”

 

 

투레츠키는 툴툴대더니 트렁크 칸에서 얄팍한 종이로 둘둘 말아놓은 커다란 꾸러미를 하나 낚아챘다. 베르닌이 짐을 실을 때 이건 뭔데 이렇게 부피가 커서 자리를 차지하나 하고 짜증을 냈던 물건이었다. 투레츠키는 포장지를 찢어발기더니 자기가 입은 것과 똑같은 하얀 모피코트를 꺼냈다. 그리고는 솜씨 좋게 왕재수의 머리와 등을 받쳐 일으키더니 코트를 대충 입히고 모자까지 씌운 후 지퍼를 목까지 잠가주었다.

 

 

“ 이리나 누님이 구해 달라고 했던 건데... 뭐 우리 이쁜이가 잠깐 먼저 입어도 상관없겠지. 오히려 좋아하려나. ”

 

“ 이리나 누님? 서, 설마... 의장 부인 말이야? ”

 

“ 그럼 다른 이리나 누님도 있냐? 너 이거 비밀이다! 그 아줌마 엄청 까탈스럽단 말이야. 자기가 주문한 거 내가 먼저 뜯었다고 하면... 너 오해하지 마. 나 원래 손님 물건 절대 손 안대. 이거 다 너 때문이야! 네가 하도 울고불고 이쁜이 아프다고 난리쳐서 내가 특별히 서비스해주는 거란 말이야. 혹시라도 이리나가 코트 왜 남의 손 탔냐고 하면 네가 불어버린 걸로 알 거야! ”

 

“ 절대, 절대 말 안할게! 고마워, 바냐... 이거 따뜻하겠다. 바람도 막아주고. 진짜 다행이다. ”

 

 

투레츠키가 보풀 투성이 담요를 그에게 던져주었다.

 

 

“ 담요 너라도 둘러라. 추울 테니까. 눈 오는데 그 옷차림은 뭐냐. ”

 

“ 어제 나올 땐 눈 안 왔단 말이야. 이럴 줄은 몰랐지. ”

 

“ 좋아, 간다! 렛츠 고! 멍멍이들아, 고! 고! ”

 

 

개들이 신나게 달리기 시작했고 썰매가 나는 듯 질주했다. 바람이 씽씽 불었다. 속도가 상당히 빨랐기 때문에 베르닌은 어두운 눈밭에서 개들이 길을 잘못 들거나 나무에 걸려 썰매가 뒤집어질까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투레츠키는 숙련된 솜씨로 개들을 몰았다. 이따금 자리에서 일어나 밧줄을 이리 당기고 저리 당기며 개들에게 영어와 러시아어를 섞어서 한두 마디 외치면서 요리조리 구불구불 잘도 몰았다.

 

 

베르닌은 짐들이 쏟아질까봐 온몸으로 감싸고 누르면서 불편하게 앉아 있었지만 이게 어디냐 싶었다. 뒤에서 보니 투레츠키와 왕재수 둘 다 똑같은 흰색 모피 코트를 입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쌍둥이처럼 보였다. 막 커브를 트는데 나뭇가지 하나가 부러지면서 쌓여 있던 눈이 우르르 쏟아졌다. 투레츠키는 ‘오우!’ 하면서 한 손으로 나뭇가지를 쳐내고 자신과 왕재수의 모자 위로 쏟아진 눈을 툭툭 털어냈다. 차가운 눈을 맞아서 놀랐는지 왕재수가 ‘아이...’ 하고 중얼대며 꿈틀거렸다. 투레츠키가 쾌활하게 말했다.

 

오우 프리티~ 우리 이쁜이 깼니? 너 개썰매 타봤어? 신나지? 바냐 투레츠키의 초특급 익스프레스!

 

으응... 여기 어디야? 누구야? 다닐... 다닐 어디 있어?

 

 

어두컴컴한 눈길을 질주하는 썰매 위에서 깨어난 왕재수가 깜짝 놀랐는지 고개를 마구 흔들며 베르닌을 찾았다. 투레츠키를 알아보지도 못한 것 같았다. 베르닌은 급하게 뒤에서 왕재수의 어깨를 잡았다.

 

 

“ 나 여기 있어, 미셴카. 바냐가 썰매 타고 와서 우리 시내로 데려다 주는 거야. 이제 괜찮아. 걱정 마. ”

 

아... 바냐... 바냐였구나. 털이 북슬북슬해서 몰랐어. 곰인 줄 알았어.

 

“ 오우 프리티, 마이 뷰티! 아임 쏘 새애애드! 섭섭하게 곰이라니! 이렇게 잘생긴 곰이 어딨냐! ”

 

곰 배고파... 곰 열매 먹어.

 

 

왕재수는 웅얼거리더니 기침을 하면서 투레츠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투레츠키는 왕재수의 이마에 손을 대보고는 쯔쯔 혀를 차며 물었다.

 

 

“ 너 아직 춥니? 콜드? ”

 

추워... 더워... 추워...

 

“ 흐흠. 다냐가 아무 것도 안 해줬어? ”

 

 

베르닌은 가책을 느끼며 변명했다.

 

 

“ 불 피워주고 이불 덮어줬어... 근데 약도 없고... ”

 

에이, 약 없으면 다른 거 해줘야지. 하여튼 다냐는 고지식하다니까. 그치? ”

 

 

그리고는 투레츠키가 한 팔로 왕재수를 꼭 껴안고 뺨을 마주 비비며 뽀뽀를 해주고 몸을 꼭 밀착시켜서 베르닌은 기절초풍했다.

 

 

야! 야!!! 뭐하는 거야! 애 아픈데 지금 너는! 안 돼! 손 떼! 야!

 

“ 친구야, 너는 왜 이렇게 아무 것도 모르니. 약이 없으면 안아주면 되잖아.울 이쁜이처럼 아픈 애는 약을 먹이든지 아니면 밤새 꼭 안아주면 괜찮아진단 말이야. 목석이랑 같이 있었으니 계속 아프기만 했지, 마이 푸어 리틀 베이비. 가엾은 녀석. ”

 

“ 아니야! 나, 나도 안아줬단 말이야... 너무 추워해서... 그래서 꼭 안아줬는데 얘가 계속 벌벌 떨고 아프기만 했단 말이야... ”

 

쯔쯔, 그냥 안아줘서 되냐? 메이킹 러브! 핫! 핫 러브! 침대가 부서져라 해줘야 몸도 따뜻해지고 아픈 것도 가시지. 하여튼 이쁜이도 참 운도 없네. 하필 목석이랑 같이 있어가지고 열만 펄펄 끓고 아프기만 했구만. 나랑 있었으면 벌써 다 나았을걸! 그치, 프리티? ”

 

 

그 와중에도 투레츠키가 왕재수를 꼭 껴안고 거의 무릎에 앉히다시피 한 채 집적대고 키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썰매고 해열제고 고마움이고 뭐고 투레츠키의 뒤통수를 냅다 내리칠까 말까 심각한 고뇌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왕재수가 투레츠키에게 바짝 몸을 붙이고 꼭 안기면서 잠꼬대처럼 웅얼거리는 소리에 포기하고 말았다.

 

 

따뜻해... 좋아.

 

“ 그치? 이쁜이 나랑 우리 집 갈까? 병원 안 가도 되겠네. 우리 집 가서 나랑 같이 잘까? 허리 아플 정도로 해줄까? ”

 

으응... 잘래...

 

오케이! 고우 투 마이 베드! 투게더! 예에!

 

 

투레츠키가 좋아하며 휘파람을 불더니 왕재수를 더욱 꼬옥 껴안았다. 베르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한번만 더 얘한테 그렇게 굴어봐! 뭐가 베드야! 나, 나도 영어 조금 알아! 베드 침대잖아! 얘 아프잖아. 열 나서 제정신도 아닌 애를 그런 식으로 꼬시는 게 어딨어! 절대 안 돼! 가만 안 둘 거야!

 

“ 흐응... 넌 그런 말 할 자격 없는 거 같은데. 목석... ”

 

몰라! 나 그런 거 몰라! 네 말이 맞아도 안 돼! 아픈 애한테 그런 짓 하면 안 돼! 건드리지 마! 가만 안 둘 거야!

 

 

투레츠키가 하하 웃었다. 북슬북슬한 모피로 감싸인 왕재수의 등을 쓸어주면서 노래 부르듯 대꾸했다.

 

 

“ 에이, 친구야. 열 내지 마. 너 우리 이쁜이 많이 좋아하는구나. 미처 몰랐네. 내가 이래봬도 철칙이 있지. 친구 여자는 손 안 대. 오우, 웁스! 우리 이쁜이는 여자가 아니지. 낫 걸, 어 보이! 미안 미안. 하여튼 친구 여자도 손 안 대고 남자도 손 안 대. 내가 왜 사셴카를 손 안 대고 있겠냐! 그때 간만에 봤는데 역시나 엄청 귀여워서 간 좀 볼까 했는데 보랴가 그렇게 한 방에 뿅 갈 줄이야! 그래서 알렉산드라 누나는 그냥 형수님으로 모시기로 했잖아. 이쁜인 진짜 많이 아깝긴 한데... 뭐 네가 그렇게 죽고 못 산다면야... 할 수 없지. 우리 동갑에 보드카 친구니까... 내가 포기하마. 섭섭해서 어떡하지, 마이 베이비? ”

 

 

왕재수는 베르닌이 왜 화를 내는지, 투레츠키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이해를 못한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투레츠키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는 잔뜩 졸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아이 시끄러워... 집에 갈래... 다닐. 집에 갈래.

 

“ 그래그래, 집에 가는 거야. 다냐네 집에 가는 거야. 이제 안 춥지? ”

 

응, 따뜻해. 곰... 멍멍이... 썰매...

 

 

왕재수는 점점 희미해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더니 투레츠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있었다. 잠든 것 같았다. 베르닌은 어쩐지 매우 머쓱해져서 물건들을 잔뜩 껴안고는 자기 앞에 삐쭉 솟아 있는 두 개의 하얀 털모자를 번갈아가며 바라보기만 했다. 투레츠키가 휘파람을 불었다.

 

 

“ 달려라, 멍멍이들아~ 달려라! 썰매야 가자! 트로이카야 달려라! ”

 

“ 이거 트로이카 아니잖아. 트로이카는 말 세 마리가 끄는 건데... ”

 

“ 에이, 트로이카라고 치면 좋잖아. 너 자꾸 말꼬리 잡을래! ”

 

“ 아, 아니야. 맞아. 트로이카 맞아. 세상에서 제일 좋은 트로이카야. ”

 

당연하지! 이건 바냐 투레츠키의 초특급 익스프레스라고! 요금은 좀 비싸지만... 뭐 미셴카야 워낙 이쁘고 향기도 좋으니까 내가 기분으로 대폭 할인해서 1등석이지만 2등석 요금만 받을 거고, 너도 2등석이지만 나랑 친구니까 그냥 입석 요금만 칠게. 에, 그러면 2등석 50루블, 입석은 20루블. 코트 대여료는 뭐 우리 베이비가 입은 거니까 그냥 상징적으로 10루블만 할게. 그리고 병원까지는 또 차로 데려다 줘야 하는데 거긴 신시가지인데다 심야 할증까지 치면 응급운송비 30루블... 다 합치면 110루블이네. 에이, 기분이다~ 100루블로 해줄게. 너하고 나는 친구니까~!!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너 그럴 줄 알았어... 에휴, 감동했던 내가 바보지... 근데 내가 짐도 다 실어줬잖아. 조금만 더 빼주면 안되니? ”

 

“ 야, 그건 벌써 다 뺀 거야! 이쁜이 약 먹이고 너랑 실랑이하느라 20분이나 지체했잖아. 시간이 금인데! 네가 짐 실어줬으니까 시간 지연 추가요금은 그냥 빼준 거란 말이야. 너 아무리 고지식해도 그렇지 이런 걸 깎냐! 친구 사이에도 셈은 정확해야지. 그것도 간 쓸개 다 빼줄 만큼 좋아하는 애를 옮겨주고 있는데 흥정을 하다니! 사랑 앞에서 돈 생각하게 됐냐! 올 유 니드 이즈 러브~

 

“ 바냐, 제발 영어 좀 쓰지 마! 뭔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어. 어휴... 알았어. 백 루블 주면 되잖아. 근데 지금은 돈이 없어. 나 눈길에서 차 박은 거 고칠 돈도 없는데... 당장은 못 주겠지만 월급 받으면 나눠서 줄게. ”

 

“ 에이, 나 할부 안 받는데. 그러면 오십 루블만 주고 나머지는 너 주말에 우리 사무실 와서 일 좀 도와줘. 보랴가 요즘 연애하느라 바빠서 많이 안 도와준단 말이야. 주말에 와서 물건도 정리해주고 장부 계산만 조금 도와주면 오십 루블은 그걸로 제해줄게. ”

 

“ 아, 알았어... 그런데 얘 약값은... ”

 

“ 그건 얘한테 따로 받는다고 했잖아. 주말에 올 거지? ”

 

“ 으, 으응... ”

 

 

베르닌은 낚였다는 생각에 머리가 띵했지만 어쨌든 고열과 오한으로 괴로워하는 왕재수와 숲속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마리의 개들은 지치지도 않고 기운차게 질주했고 어느 새 검은 숲이 끝나가면서 저 너머로 도로와 강변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로켓처럼 미끄러져 가는 썰매 위에서 베르닌이 말했다.

 

 

“ 바냐, 근데 그런 거 아니야. ”

 

“ 뭐가? ”

 

“ 저... 나랑 얘랑... 그러니까, 간 쓸개 다 빼주고... 러브... 우리 그런 사이 아닌데... 자꾸 사람들이 오해를... ”

 

“ 에이,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니. 좋아하면 그만이지. 목석이라서 안아주기만 하고 그냥 놔둔 건 좀 바보 같지만. ”

 

“ 아니, 그게... 그게 아니고... ”

 

“ 뭘 그런 걸 변명하냐. 나는 편견이 없는 코스모폴리탄이야. 근데 너 이거 하나는 똑바로 해라. 내가 분명히 그랬잖아, 친구 여자나 남자는 안 건드리는 게 철칙이라고. 근데 너 아까는 막 죽일 듯이 그래놓고 지금은 또 아니라 하고. 너 이쁜이 좋아하는 거 아니면 성질내지 마. 난 언제 어디서나 얘랑은 오케이란 말이야. 네가 좋아하는 거 아니면 나 얘랑 우리 집 갈래. 아픈 거 다 나으면 가도 되잖아, 그렇지? 얘도 아까 좋다 했잖아. ”

 

아니야! 안 돼! 절대 안 돼! 안 돼! 집이고 침대고 안 돼!

 

 

베르닌은 펄쩍 뛰다가 하마터면 썰매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투레츠키는 킥킥 웃었고 휘파람을 불며 노래하듯 말했다.

 

 

“ 거봐. 알았어. 아깝지만 뭐. 백 루블 갚는 거나 잊지 마~ ”

 

오십 루블이었잖아! 나머지는 주말에 가서 일해 주는 걸로 제해준다며! ”

 

“ 아 그랬나? ”

 

으윽, 나 처음으로 스페호프한테 이입되려고 그래! 국장이 너 왜 내쫓았는지 알겠어!

 

“ 야, 왜 내 인생의 흑역사를 들추냐! 그래도 난 전설의 서무인데! ”

 

“ 좋겠다, 전설의 서무라서! 어휴... ”

 

 

베르닌은 한숨을 푹푹 쉬었지만 어쩐지 웃음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투레츠키는 여전히 랄라랄라 휘파람을 불며 개들을 몰았다. 썰매는 검은색과 금색 바람처럼 미끄러지며 달렸고 양옆으로 파도처럼 퍼지는 하얀 눈은 보름달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베르닌은 왕재수를 깨워서 이 멋진 광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거 봐라! 시골이니까 이렇게 예쁘지! 레닌그라드에선 이런 거 못 보지?’ 하고 보란 듯이 자랑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 어차피 예쁘다고 하지도 않을 놈인데 뭐. 맛있어도 맛없다는 놈이니까. 어휴, 바보 멍충이! ’

 

 

그래도 어쩐지 아쉬워진 베르닌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 겨울에 얘 데리고 다시 와야지. 눈 올 때 썰매 태워줘야지. ’

 

 

물론 그때는 다른 썰매를 가져올 것이다! 널빤지를 잘라서 직접 뚝딱뚝딱 만드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는 손재주가 없는 책상물림이니 코즐로프든 보랴든 누구에게든 부탁해서 썰매를 빌리든지 얻어내든지 할 것이다! 100루블이나 주고 바냐 투레츠키의 초특급 익스프레스를 또 타는 것만은 절대 사양이다! 그렇고말고!!!

 

   

 

 

 

 

FIN

- 2015. 11. 2 ~ 11.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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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눈밭 썰매 에피소드가 끝났습니다~ 눈밭 지굴리-벌목공 숙소-썰매 에피소드라고 해야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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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에피소드에서 왕재수가 언급하는 옛날 이야기들은 대부분 본편의 미샤가 실지로 겪은 일이거나 그가 사귀었던 사람들에 대한 얘기다. 부상 얘기도 그렇고. 본편에서도 역시 발레학교 시절 팔을 다쳤다가 의사인 유라와 처음 만나게 되는데 그 얘기를 본격적으로 쓴 적은 없다. 본편에서는 트로이가 미샤에게 유리 아스케로프와 만나게 된 경위를 묻고 미샤가 간단히 대답하는 정도로만 서술했다. 냉동 옥수수 볶아주고 여물 취급받은 불쌍한 '친구'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트로이 얘기다(불쌍한 트로이 ㅠㅠ)

 

왕재수가 안무 작품에 늑대를 형상화한 인물이 등장해서 이를 위해 늑대 움직임을 보러 다녔다는 것도 본편의 주요 사건에서 비롯된 얘기다. 미샤가 체포된 주요 계기가 된 작품인 '불새'를 안무할 때 그는 마왕이자 악역으로 회색 늑대를 원형으로 한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  추가 **

위에서 얘기한 냉동 옥수수 볶아주고 여물 취급받은 트로이의 이야기를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해 올려보았다.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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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나도 바냐 투레츠키가 모는 초특급 익스프레스를 타고 싶다~!! 그깟 백루블 내주겠다!

(투레츠키는 매우 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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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