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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올린 1~2장에 이어 세번째.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부활절을 앞둔 토요일 밤. 일린의 집에 모인 극장 동료들과 라라, 아냐, 그리고 미샤가 부활절 케익과 과자를 먹고 달걀에 색칠을 한다.

 

서두에 언급되는 쿨리치는 러시아 정교의 부활절 케익, 그리고 파스하는 부활절에 먹는 과자이다. 글 끝나고 맨 아래에 이미지 몇 장 있음.

 


* 이 글을 무단으로 전재, 배포, 복제, 인용하거나 퍼가지 말아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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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els

пасхальный рассказ

 

 

 

- 3 -

  

 

 

 

저녁은 정말 즐거웠다. 그날 밤은 오페라 공연이 올라가는 날이라 아빠와 절친한 발레단 동료들이 여러 명 왔다. 발레 교사인 마르가리타 아줌마와 이그나트 아저씨, 분장사인 알렉산드라 아줌마, 의상 담당자인 율렌카 언니도 왔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엄청나게 크고 멋진 부활절 쿨리치 케익을 만들어 왔고 알렉산드라 아줌마는 파스하 과자를 만들어 왔다. 그리고 율렌카와 이그나트 아저씨는 달걀을 잔뜩 삶아 왔다. 푸짐한 저녁을 먹은 후 다 같이 테이블에 둘러 앉아 달걀 장식을 했다.

 

사실 진짜 정교 신자는 별로 없었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만 독실한 신자였고 아빠와 나, 아냐는 셋 다 세례를 받긴 했지만 교회에 나가지는 않았다. 엄마는 학교에서 교회나 세례 얘기 하지 말라고 했다. 괜히 선생님들에게 책잡힐 짓을 하지 말라는 거였다. 그래서인지 엄마와 아빠랑 함께 살았을 때는 부활절 음식을 만들어 먹었던 기억도, 계란에 색칠을 하며 놀았던 기억도 없지만 그땐 나도 워낙 어렸으니 정확하지는 않다. 이렇게 부활절 전날 모여 같이 식사하고 계란 장식을 하기 시작한 건 2~3년 전부터였는데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아빠의 친구들은 전부 재미있는 사람들이었고 나와 아냐를 아주 귀여워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미샤도 있어서 백배는 더 좋았다.

 

미샤는 한 번도 부활절 파티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쿨리치와 파스하는 먹어봤지만 그것도 학교 다닐 때 친구가 가져다 줘서 한 입 먹은 게 전부라고 했다. 부활절 계란도 장식해본 적이 없다는 거였다.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 레닌그라드에선 이런 거 안 해? 혁명 도시라 안 하나? ”

“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난 안 해봤어. ”

“ 하긴 너야 직접 안 해도 주변에서 여자들이 가져다 줬겠지. ”

 

이그나트 아저씨가 농담을 했다. 이미 마르가리타 아줌마와 알렉산드라 아줌마, 율렌카 세 명이 미샤를 둘러싸고 계속해서 쿨리치와 차를 권하고 있는데다 아냐는 그의 무릎에 앉아 장식하던 계란을 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샤는 쿨리치를 딱 한 조각만 먹었기 때문에 모두의 공분을 샀다. 마르가리타 아줌마의 그 맛있는 쿨리치를 한 조각만 먹는다는 건 범죄라는 거였다. 모두 미샤가 원래 케익이나 초콜릿을 잘 먹지 않는데다 늦은 저녁에는 가능하면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짓궂은 이그나트 아저씨는 계속해서 놀려댔다.

 

“ 내가 너 같았으면 저 쿨리치 두 판은 해치웠을걸. 살찌는 체질도 아니면서 너무 엄격한 거 아냐? ”

“ 내 체질에 대해 뭘 안다고. ”

“ 내가 여태껏 봐온 무용수가 얼마나 많은데. 딱 보면 알아. 넌 웬만해서는 살 안 붙어. 은퇴해도 그럴걸. 스탄카랑 비슷한 타입이야. 그러니까 그냥 먹어. ”

스탄카가 얼마나 많이 먹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차에도 설탕이 아니라 잼을 가득 넣어 먹는다고! 보통 사람이 저렇게 먹으면 풍선처럼 부풀걸! ”

“ 극과 극이라니까. 누구는 차에 잼을 풀어먹고 누구는 설탕 한 톨도 안 넣으니. 라루샤, 어느 쪽이 더 좋아? 차에 아무 것도 안 넣은 거 마실 수 있어? ”

 

난 물론 설탕을 탄 차를 좋아했지만 이그나트 아저씨가 미샤를 놀리는 게 싫었기 때문에 고개를 쳐들고 쌀쌀맞게 대꾸했다.

 

“ 당연하죠. 차에 설탕이랑 잼 넣는 건 아기들이나 하는 건데. ”

“ 저렇게 단칼에 자기 아빠를 배신하다니. 역시 딸자식은 키워봐야 소용이 없어. 아무리 예뻐해도 잘생긴 오빠가 나타나면 대번에 그쪽으로 가버린다니까. ”

“ 나 그런 거 아니야! ”

“ 뭐가 아니야, 라라는 미셴카랑 결혼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

 

가슴이 철렁했는데 다행히 미샤가 귀퉁이를 부숴버린 달걀을 보여주면서 이그나트 아저씨의 입을 막았다.

 

“ 이거 어떻게 하지? 벌써 세 개째야. ”

“ 세 개째 먹었다고 하는 거라면 참 좋을 텐데. ”

“ 포기해, 이그나트. 쟤가 이 시간에 계란을 세 개나 먹으면 레닌이 관에서 벌떡 일어날 걸. 그건 그렇고 미샤는 정말 계란 장식 한 번도 안 해봤나봐. 그렇게 꽉 쥐니까 껍질이 부서져버리지. 이쪽으로 와서 라라한테 좀 배워. 우리 중에 라라가 제일 잘해. ”

 

내 옆에 있던 마르가리타 아줌마가 일어나더니 미샤와 자리를 바꿔 주었다. 미샤는 부서진 계란과 물감 묻힌 붓을 양손에 쥔 채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아냐가 다시 달려가 냉큼 무릎에 앉으려는 걸 아빠가 저지했다.

 

“ 아네츠카, 그렇게 무릎에 앉아 있으니까 미샤가 계란 색칠을 못하잖아. 너도 이제 다 컸는데 얼마나 무겁겠어. ”

난 아냐가 앉아 있어도 괜찮은데. 계란 색칠은 원래 할 줄 모르는 거고. ”

“ 안 돼. 그게 어떤 다리인데, 저리거나 뭉치면 내가 죄책감이 들 거라고. ”

 

아냐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 미셴카, 나 무거워? 다리 저려? ”

“ 아니, 하나도 안 무거워. 괜찮아. ”

“ 오래 앉아 있으면 무거워질 거야. 이리 와, 아네츠카. 어쩌면 이렇게 계란을 예쁘게 칠했니. 아줌마한테도 이렇게 예쁘게 칠하는 거 가르쳐줘. ”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아냐를 옆에 데려다 앉히며 살살 구슬렸다. 사실 알렉산드라 아줌마의 달걀이 최고였다. 분장사라 그런지 물감을 칠하고 반짝이 장식을 붙이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 사이에 미샤는 내가 장식한 달걀들을 구경했고 정말로 감탄했다.

 

“ 진짜 예쁘다. 이건 절대 못 먹겠는데. 이 빨간색은 물감 섞은 거야? ”

“ 응, 빨강이랑 이 분홍색이랑 흰색을 섞는 거야. 이렇게. ”

 

난 붓을 들고 계란에 덧칠을 하면서 시범을 보여 주었다. 미샤는 새 계란을 들고 따라서 해보았지만 또 껍질을 잘못 건드려서 귀퉁이를 부수고 말았다.

 

“ 그렇게 잡으면 안 돼. 살살 쥐어야지. 아니면 여기 이렇게 올려놓고 해. ”

“ 파트너들은 그렇게도 고이고이 잘 받쳐주면서 애꿎은 계란은 왜 이렇게 박살을 내는지 모르겠네. ”

 

율렌카마저 웃으면서 미샤를 놀렸다. 미샤는 다들 놀려대자 조금 부아가 치민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있었다. 제일 나이가 많은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미샤를 감싸주었다.

 

“ 안 해봤으니까 그렇지. 얜 무신론자잖아. 교회는 가본 적도 없는 앤데 잘 하는 게 이상하지. ”

“ 아, 알렉산드라 필리포브나. 저 세례 받았어요. ”

“ 그건 또 금시초문인데. 정교 신자였어? ”

“ 아니, 그냥 세례만 받은 거야. 학교 다닐 때 아는 사람이 데려갔었어. 무신론자인 건 맞아. ”

“ 그럼 세례는 왜 받았담. ”

“ 나중에 친구가 애를 낳으면 대부가 될 수 있다고 해서. ”

“ 조그만 게 그런 생각을 다 했단 말야? 학교 다닐 때였다면서. 이 친구도 웃긴 구석이 있단 말야. ”

“ 그런가? 난 진짜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래서 받은 거라고. 스탄카를 조금만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걸, 그럼 라라는 안 되더라도 아냐한테는 대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

“ 산수 좀 해봐라, 아네츠카 태어났을 때도 기껏해야 열너덧 살이었을 텐데 어떻게 대부가 됐겠어. ”

“ 아 그렇구나. 어쩐지 불공평한데. 속은 것 같아. 세례 무르고 싶어. ”

 

다들 웃었지만 난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샤가 스물한 살이라서 다행이었다. 나이가 더 많았거나 내가 더 어렸다면, 그리고 미샤가 아빠와 더 일찍 친해졌으면 정말 나나 아냐의 대부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친척이 아니더라도 대부와 결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진짜 큰일 날 뻔 했다. 내 속도 모르고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미샤가 나랑 아냐의 대부가 됐으면 정말 좋았을 거라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동안 미샤는 내가 계란을 칠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붓질을 하다가 미샤의 시선이 느껴지자 그때부터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아서 몇 번이나 색을 잘못 칠하고 구슬을 비뚤어지게 붙여버렸다.

 

“ 아, 오빠가 그렇게 쳐다봐서 망했어. ”

“ 왜 망했다고 해? ”

“ 색도 다 삐져나오고 구슬도 비뚤어졌잖아. ”

“ 그래? 난 이게 제일 예쁜데? 이제 어떻게 하는지 좀 알 것 같아. ”

 

미샤는 계란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아까 껍질을 부숴버린 계란이었다. 내가 깨끗한 새 계란을 건네주자 미샤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난 이걸로 할래. 그건 또 깰 것 같아. ”

“ 그건 다 부서졌잖아. ”

“ 괜찮아, 연습하는 거야. ”

“ 깨진 건 내가 먹으면 되는데. ”

“ 라루츠카, 계란 더 먹으면 자다가 배탈 날 지도 몰라. ”

 

아빠가 부드럽게 경고했다. 괜찮다고 우기고 싶었지만 사실 아빠 말이 맞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새 계란에 이번에는 노란색과 초록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계란 장식을 하면서 어른들은 극장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낮의 라 바야데르 얘기도 나왔다. 다들 미샤의 춤을 칭찬했다. 뉴욕에서 백조의 호수를 올려서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그 양키들이 우리의 제대로 된 라 바야데르를 봤다면 기절했을 거라고 쿡쿡 웃었다. 율렌카는 뉴욕 리셉션과 대사관 파티에서 누구누구를 만났느냐고 물었다. 미샤는 내가 잘 모르는 미국 사람들 이름을 몇 개 댔고 다들 그 높은 사람들을 만났느냐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난 뿌듯했다. 하긴 미샤는 브레즈네프 서기장을 만난 적도 여러 번 있었고 국회의원들과도 많이 알았다. 우리 아빠도 높은 의원님들 몇 명과 잘 아는 사이였지만 미샤만큼은 아니었다. 그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미샤가 우리 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고 지금도 내 옆에 앉아 부활절 계란 장식을 하고 있다는 것이 갑자기 생소하고 놀랍게만 여겨졌다. 왕자님을 곁에 앉히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미샤는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대사관 행사와 정치가들에 대해 더 물어보려고 했을 때 갑자기 휘파람을 불더니 테이블 위에 계란을 가볍게 내려놓았다.

 

“ 라라, 어떤지 봐줘. ”

“ 다 했어? ”

“ 응. ”

 

난 미샤의 달걀에 깜짝 놀랐다. 그런 부활절 달걀은 처음이었다. 원래 부활절 계란은 표면을 매끈하게 칠하고 무늬를 넣거나 장식을 붙이는 건데 미샤는 껍데기를 핀으로 찔러서 전체를 우툴두툴하게 만들었다. 아마 색칠을 하지 않았다면 그냥 껍데기가 부서져 금이 간 계란으로 보였을 테지만 미샤는 거기 멋진 그림을 그렸다. 이마에 보석을 달고 있는 금빛 머리의 천사였다. 계란이 작아서 얼굴과 어깨까지만 그렸고 날개도 없었지만 그래도 천사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깨지고 금간 껍질 덕에 그건 꼭 정교한 모자이크처럼 보였다. 스테인드글라스 같았다. 투명한 래커를 칠하면 더 그렇게 보일 것 같았다.

 

“ 우와, 미셴카. 이거 너무 예뻐. 이콘 같아. 나 주면 안 돼? ”

“ 맘에 들어? ”

“ 응, 진짜 좋아. 갖고 싶어. ”

“ 그럼 라라 가져. ”

 

난 뛸 듯이 기뻐서 계란을 조심스럽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아빠와 이그나트 아저씨, 아줌마들에게 자랑했다. 졸고 있던 아냐가 계란을 보더니 미샤에게 자기도 그려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사실 내 동생은 계란이 예뻐서라기보다는 나만 미샤에게서 선물을 받은 게 샘이 나서 그런 거였지만 미샤는 아냐를 달래면서 지금 그려주겠다고 했다. 미샤가 아까 깨진 계란을 한 개 더 끌어당겨 나머지 껍데기에 금을 내는 동안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이콘 그리는 걸 배웠느냐고 물었다.

 

“ 아니요, 배우지는 않았지만 레닌그라드에 친구가 있어요. 박물관에서 이콘을 복원해요. 옆에서 좀 봤어요. ”

 

난 이콘에는 관심도 없었고 그 전까지는 그 고리타분한 성화가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미샤의 달걀은 무척 예뻤기 때문에 박물관에 가서 이콘을 자세히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냐는 이콘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미샤를 재촉했다.

 

“ 나도, 나도 이콘. 나도 언니처럼 예쁜 계란. ”

“ 무신론자에 부활절 계란은 처음이라는 친구가 이렇게 근사한 걸 만들어 버리면 우린 어떻게 하라고. 나도 베껴봐야겠어. 아네츠카, 내가 만들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누구 게 더 예쁜지 말해줘. ”

 

이그나트 아저씨가 웃으면서 자기 계란도 핀으로 찔러 모자이크 무늬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들 맞장구쳤고 너도나도 계란 껍데기를 핀으로 가볍게 부쉈다. 나도 합류했는데 핀이 모자라서 손톱으로 금을 냈다. 모두 모자이크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에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율렌카가 달려갔다. 난 혹시라도 툴라에서 엄마가 전화했나 싶어 벌떡 일어났지만 그건 미샤에게 온 전화였다. 율렌카가 이름을 부르자 미샤가 손짓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 후 율렌카가 자리로 돌아왔다.

 

“ 왜 없다고 하랬어? 여기 있는 거 아는 것 같던데. 다시 한대. ”

“ 그때도 난 없는 거야. ”

“ 누군데 그래? ”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율렌카가 대답했다.

 

“ 바실리예프. ”

“ 어느 바실리예프? 한둘이어야지. ”

“ 의원님 비서. ”

“ 아, 빌어먹을. 게르만 스비제르스키 비서 말야? ”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어버린 이그나트 아저씨가 급하게 입을 막으며 나와 아냐 쪽을 보았다.

 

“ 미안, 욕하면 안 되는데. 아저씨가 잘못했으니 못 들은 걸로 해줘. ”

“ 또 욕하면 내쫓을 거야. ”

 

우리는 가만히 있었지만 아빠가 핀잔을 주었다. 아빠는 평소에는 아주 다정하고 상냥했지만 우리 앞에서 욕을 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그나트 아저씨를 더 야단치는 대신 아빠는 미샤에게 시선을 돌렸다.

 

“ 너 오늘 다른 일정 있었어? ”

“ 아니, 없었어. ”

“ 그런데 왜 의원실에서 전화가 와? 또 마음대로 파티에 안 간 거야? ”

“ 그런 거 없었어. ”

“ 애들 앞에서 거짓말하지 마. ”

 

아빠의 눈빛이 엄격해졌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표정이었다. 미샤도 아빠가 그렇게 쳐다보면 꼼짝도 못 했다. 눈을 돌리면서 미샤가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정말이야. 그런 거 없었어. 아까 극장에서 나올 때 갑자기 전화 왔던 거야. 별 것도 아니고. 문화국 간부들이 저녁 먹는다고 거기 오라고 해서 선약 때문에 안 된다고 했어. 그것뿐이야. ”

“ 그래, 거기 오는 사람들이 누구였는데? 포노마레바? ”

“ 아마도. ”

“ 그 여자 국장이잖아... 바실리예프가 전화한 걸 보니 그쪽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스비제르스키도 있는 거 아냐? ”

“ 몰라. 생각하기 싫어. 벌써 저녁 식사 시간도 다 지나갔는데. ”

“ 아까 얘기하지 그랬어. 잠깐이라도 얼굴 비추고 오는 게 나았을 텐데. ”

“ 싫어. 뉴욕에서도 실컷 팔려 다녔어. 이쪽이 천 배는 더 좋아. ”

 

아빠는 말없이 미샤를 잠깐 바라보았다. 잘못을 저지른 나와 아냐를 타이를 때와 눈빛이 똑같았다. 하지만 미샤는 고개를 돌려버렸고 아냐의 계란을 마저 색칠하기 시작했다. 이그나트 아저씨와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아무리 우리 나라가 무신론 국가라 해도 부활절 전날은 가족이랑 친구들과 보내는 날이지 높은 분들과 밥 먹는 날이 아니라고 열띠게 미샤의 편을 들어 주었다.

 

잠시 후 우리는 모두 모자이크 달걀을 완성했다. 아냐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심사를 맡긴 후 다들 조마조마하게 결정을 기다렸다. 난 아냐가 제일 좋아하는 분홍색과 보라색, 초록색을 섞어 알록달록하게 칠한 계란을 두 개나 만들어서 제일 앞으로 밀어준 후 간절하게 말했다.

 

“ 아누슈카, 이거 봐. 진짜 예쁘지, 그치? 언니 계란이 제일 예쁘지? ”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는 게 마냥 즐겁기만 한 아냐는 내 계란을 들어서 굴려보더니 신나게 귀퉁이를 부숴서 껍데기를 까버렸다. 내가 동생의 배신에 속상해서 토라지자 다들 웃기 시작했지만 아냐는 다른 계란들도 모두 부수기 시작했다. 일곱 살짜리 여자애에게 모자이크 계란이란 우툴두툴한 껍질을 벗기고 싶어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장난감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냐는 미샤가 준 달걀은 깨지 않았다. 배신감에 젖은 이그나트 아저씨가 아냐의 조그만 손을 잡고 하소연했다.

 

“ 아네츠카, 왜 이 계란은 가만 놔두는 거니? 아저씨가 그려준 계란보다 이게 더 예뻐서 그러니? ”

“ 안 돼, 이건. 미셴카가 준 거야. 언니랑 나랑 하나씩 가져야 돼. ”

 

아냐는 이그나트 아저씨가 혹시라도 계란을 뺏을까봐 소매 속으로 숨겼다. 미샤가 아냐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는 의기양양하게 웃자 이그나트 아저씨가 투덜댔다.

 

“ 이건 불공평해. 심사위원이 계란의 예술성이 아니라 참가자에 대한 사적 감정을 우선시했어. ”

“ 예술성은 무슨, 이건 그냥 껍질을 찌그러뜨려서 5분 만에 색칠한 달걀이라고. 그냥 소련 미술이야. 그러니까 아냐는 제대로 한 거야. 제일 먼저 눈에 띈 걸 고른 거지. ”

 

미샤가 고개를 쳐들며 노래하듯 말했다. 어른들 모두 웃었다. 때로 미샤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얘기를 하곤 했다.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율렌카가 일어나려고 했지만 아냐가 달려갔다. 아냐는 전화나 라디오라면 무조건 좋아했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엄마!’ 하고 소리친 걸 보니 그 애도 엄마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외할머니와 온천에 가느라 우리를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아냐는 잠깐 수화기를 들고 있다가 눈이 동그래지더니 금세 울먹이면서 아빠를 찾았다. 아빠가 얼른 달려가 아냐를 안아주면서 누구냐고 물었다.

 

“ 몰라, 미셴카를 찾아. 모르는 아저씨야. 목소리가 무서워. 미셴카 없다고 했더니 거짓말하면 잡혀간대. ”

 

아빠가 아냐를 달래면서 전화를 바꿔달라고 했을 때 미샤가 일어나서 그쪽으로 갔다. 수화기를 든 채 돌아서서 잠시 통화를 했다. 목소리가 낮아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미샤가 전화를 끊더니 창가로 갔다. 바깥을 내려다보더니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깜짝 놀랐다. 미샤가 욕을 하는 것도, 그리고 그걸 듣고도 아빠가 화를 내지 않는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울고 있는 아냐를 마르가리타 아줌마의 품에 내려놓고 창가로 갔다. 나도 따라갔다.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아파트 현관 앞에 차가 한 대 서 있을 뿐이었다. 크고 위압감 넘치는 차였다. 양복을 차려입은 덩치 큰 아저씨가 차에서 내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냥 느낌에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 집 창문을 올려다보며 층수를 세는 것처럼 보였다.

 

미샤가 커튼을 휙 쳤다. 그리고는 아빠가 입을 열기 전에 내 쪽을 보면서 사과하듯 말했다.

 

“ 미안, 라라. 좀 나갔다 올게. ”

“ 어디? 조금만 있으면 잠잘 시간인데. ”

“ 미안해. ”

 

미샤는 내 곁을 지나 욕실로 갔다. 손에 묻은 달걀 껍질 부스러기와 물감 자국을 깨끗하게 씻어낸 후 재킷을 걸쳤다. 아냐를 안고 있던 마르가리타 아줌마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 옷도 갈아입고 가. 셔츠에 물감 튀었어. 높은 사람들이라며. 아까 선물 받은 거 있잖아, 그 수트 멋지던데. ”

“ 버렸어. ”

“ 버리다니! 팬들이 준 선물 버린 적 없잖아. ”

“ 팬들이 준 거 아냐. ”

 

미샤는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았지만 아냐가 다시 울음보를 터뜨리며 무릎을 잡고 늘어지자 곰 인형을 안겨 주며 부드럽게 그 애를 달랬다.

 

“ 잠깐 나갔다 오는 거야, 체브라슈카랑 놀고 있어. ”

“ 나도 갈래, 또 나 자는 동안 언니만 극장 데려가려고! ”

 

극장에 갔던 걸 어떻게 알았나 싶어 가슴이 뜨끔했다. 아냐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자 아빠가 그 애를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 때 초인종이 울렸다.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문을 열자 아까 차에서 내렸던 아저씨가 서 있었다. 양복 차림이었지만 허리에 뭔가 까만 걸 차고 있었다. 무전기 같았지만 그냥 지갑일지도 몰랐다. 덩치도 크고 무섭게 생긴 아저씨였지만 알렉산드라 아줌마에게는 인사를 했고 정중하게 물었다.

 

“ 미하일 세르게예비치가 여기 계신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그 아저씨가 정말 싫어졌다. 미샤는 자기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을 아주 싫어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대꾸하기 전에 미샤가 내 손을 한 번 쥐고 흔든 후 현관으로 갔다.

 

미샤가 그 꼴 보기 싫은 아저씨와 나간 후 이그나트 아저씨가 한숨을 쉬며 투덜댔다.

 

“ 지나치게 유명한 것도 독이라니까. 뉴욕에서 돌아온지 얼마나 됐다고 이 시간에 차까지 보내서 애를 불러내나. 마리야 얘기론 거기서도 계속 여기저기 끌려 다녔다던데. 연습 시간도 두 시간 밖에 안 줬다더라고. 뉴욕 가서도 하루도 안돼서 무대에 올려놓고 좀 너무한 거 아냐? ”

“ 외교 행사로 가면 원래 좀 그래. 미국이니까 더 심했겠지. 쟨 많이 다녀봐서 익숙하긴 할 거야. ”

 

그때 아냐를 재우는 데 성공한 아빠가 나왔고 우리는 남은 계란들을 마저 장식했다. 쿨리치도 조금 더 먹었다. 이그나트 아저씨가 오리와 토끼에 대한 재미있는 노래를 가르쳐주었고 율렌카가 발레리나들이 쓰는 예쁜 머리띠를 줬지만 미샤가 없어서 그런지 아까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율렌카가 머리띠를 씌워주고 귀엽다며 사진을 찍어주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미샤가 썼던 깃털 터번이 더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란 장식을 다 한 후 어른들은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고 난 소파에 앉아 앨리스 그림책을 보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 갑자기 아빠가 내 허리에 팔을 넣고 안아 올렸기 때문에 깜짝 놀라 깼다.

 

“ 라라, 침대에 가서 자야지. 이러다 감기 걸린다. ”

“ 나 안 잤어. ”

“ 자야지. 아저씨랑 아줌마들도 다 갔어. ”

가다니? 미샤가 금방 돌아온다고 했는데. 그렇게 다 가버리면 어떻게 해. ”

“ 벌써 열두 시가 다 됐어. 잠잘 시간 한참 지났잖아. ”

“ 안 돼. 다 가버렸다면서. 미샤가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고 다 자고 있으면 섭섭할 거야. ”

“ 미샤는 오늘 못 올 거야. 그러니까 그만 자자. ”

“ 아니야, 온다고 했어. 미샤는 나한테 거짓말 안 해. ”

 

그래도 아빠가 자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난 결국 울고 말았다. 아냐처럼 굴고 싶지는 않았지만 너무 서운하고 속상했다. 엄마였다면 호통을 치고 혼냈겠지만 아빠는 손수건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면서 가만히 달랬다.

 

“ 라루샤, 계속 울 거야? ”

“ 아빠가 억지로 자라고 하니까 그렇지. ”

“ 지금 많이 졸리잖아. 이렇게 늦게까지 안 자고 있으면 감기 걸려. 다음 주말에 미샤랑 다차에 가려고 했는데 너 감기 걸리면 아냐만 데려가야 할지도 몰라. ”

“ 안 돼, 나도 데려가. ”

“ 그러니까 가서 자자. ”

“ 잘 거야. 미샤 오는 것만 보고. 나 그냥 가만히 앉아서 책 보고 있을게. 미샤 오면 문만 열어주고 금방 잘 거야. 진짜야. ”

“ 라라야, 미샤는 오늘 못 올 거야. ”

“ 왜? 온다고 했는데. ”

“ 아까 차 타고 갔잖아. 혼자서는 못 와. 차로 데려다 줘야 하는데 그 사람들도 밤에는 자야 하잖아.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올 거야. 자고 일어나면 와 있을 테니까 그만 자는 게 좋겠어. ”

 

아빠 말이 맞긴 했다. 결국 난 아빠 손을 잡고 침실로 가서 아냐 옆에 누웠다. 하지만 아빠가 이마에 키스를 해 주고 불을 껐을 때 아직도 미련이 가시지 않아 훌쩍거리면서 투정을 부렸다.

 

“ 아빠가 차로 데리고 오면 될 텐데. 아니면 미셴카가 자기 차로 갔으면 좋았을 걸. ”

“ 미샤는 운전하는 거 싫어하잖아. 운전도 얼마나 못하는데. 이렇게 캄캄한데 잘못하면 사고 나. ”

“ 그럼 그냥 있으라고 해. ”

“ 그래, 착하지. 이제 자. ”

 

그래서 난 아냐의 손을 꼭 잡고 일단 자기로 했다. 하지만 미샤가 돌아오면 금방 나갈 수 있도록 방문은 열어 두었다. 미샤는 밤에 오면 우리가 깰까봐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아빠가 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오곤 했다. 캄캄하면 미샤가 발을 헛디딜 수도 있으니까 아빠에게 거실 램프를 켜놓으라고 했다. 물론 아빠는 내 말대로 해주었다. 안심하고 난 곧 잠들었다.

 

 

*   *   *

 

 

새벽에 난 벨 소리를 듣고 깼다. 초인종 소리인 줄 알고 잠결에 정신없이 침대에서 내려오다 굴러 떨어질 뻔 했다. 하지만 그건 전화벨 소리였다. 간신히 잠에서 조금 깬 후 창밖을 보았다. 아직 어두컴컴했다. 혹시 미샤가 왔나 싶어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는데 아빠가 옷을 입고 있었다.

 

“ 아빠 뭐해? ”

“ 왜 일어났니? 아직 아침 안됐는데. 가서 더 자렴. ”

“ 미셴카 왔어? ”

“ 아니. ”

“ 왜 옷 입어? ”

“ 아빠 잠깐 나갔다 올게, 얼른 자. ”

어디 가는데? 이렇게 캄캄한데 나랑 아냐만 놔두고 어디 가? 나도 갈래. ”

“ 안 돼. ”

 

그때 아빠의 목소리가 너무 단호했기 때문에 난 더 이상 떼를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빠는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램프에 비친 얼굴이 하얗게 굳어져 있었다. 아빠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아서 더럭 겁이 났다.

 

“ 아빠 왜 그래? 어디 아파? ”

“ 아니야. 아빠 지금 빨리 나가야 해. 금방 올 테니까 자고 있어. ”

 

아빠는 급하게 현관으로 뛰어나가려다 내가 너무 놀라서 눈물을 꾹 참으며 서 있는 걸 보고 어깨를 토닥이며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 괜찮아, 라라. 미샤를 데리러 가는 거야. 아빠 보고 데려오라 했잖아. ”

“ 밤에는 못 온다면서. ”

“ 응, 그래서 아빠가 데리러 가는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자고 있어. ”

“ 그럼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

“ 밖에 추워서 안 돼. 아빠 지금 갈게. 안 그러면 미샤가 많이 기다려야 할 거야. ”

“ 그럼 빨리 다녀와. ”

 

아빠가 입 맞춰주는 것도 잊고 나가 버려서 좀 서운했지만 미샤가 빨리 올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잠이 좀 깼기 때문에 침실로 돌아가는 대신 소파에 앉아 앨리스 그림책을 다시 뒤적이며 아빠가 미샤를 데려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왜 그렇게 늦게 가는지 이해가 안 갔다. 미샤와 함께 있을 때는 너무 금방 가서 아쉬웠는데.

 

책을 세 번이나 본 후에는 미샤가 만들어준 이콘 달걀을 가지고 놀았다. 아냐에게 만들어준 계란도 의자 아래에서 찾아냈다. 아냐 건 이콘이 아니라 하얀 백조와 빨간 꽃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예뻤다. 둘 다 갖고 싶었지만 아냐를 놔두고 공연 보러 갔던 게 생각나서 계란을 동생의 과자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버텼지만 아빠와 미샤는 오지 않았고 결국 난 너무 졸려서 도로 아냐 곁으로 파고 들어가 잠들어 버렸다.

 

 

*   *   *

 

 

아빠는 아침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미샤도 마찬가지였다. 집은 텅 비어 있었고 색색으로 장식한 계란들만 가득했다. 간밤에 노느라 평소의 일요일보다 훨씬 늦게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자는 동안 아빠가 벌써 왔다가 나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빠는 극장에서 일했기 때문에 친구들 부모님과는 달리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나갈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미샤도 그랬고. 역시 안 자고 버텼어야 했는데...

 

잠시 후 아냐가 일어났다. 눈을 비비면서 제일 처음 한 말은 역시 미셴카가 왔느냐는 거였다. 그 다음에는 아빠를 찾았고 둘 다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또 울음보를 터뜨리려고 했다. 살살 달래서 식탁으로 데려갔다. 잔소리하는 엄마가 없으니까 아침에 케익을 먹자고 구슬리자 아냐는 금방 좋아했다.

 

우리는 단둘이 앉아 삶은 달걀과 쿨리치를 먹었다. 아냐는 우유를 마셨지만 난 차를 끓였다. 미샤처럼 설탕도 안 넣고 잼도 곁들이지 않고 마셔보았다. 하지만 너무 씁쓸하고 맛이 없어서 미샤가 어떻게 이런 차를 매일 마실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용수가 되는 건 너무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쿨리치를 먹으면서 아냐는 어제 공연에 대해 물었다. 이미 다 들통났기 때문에 숨기는 것도 미안해져서 동생이 물어보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미샤에게서 받은 초콜릿을 전부 꺼내 아냐에게 주었다. 아냐는 초콜릿 한 입, 우유 한 모금, 쿨리치 한 입을 번갈아 먹으면서 한결 기분이 좋아졌는지 방글방글 웃었고 미샤가 왕자님을 췄는지, 공주님과 결혼했는지 열심히 물었다.

 

“ 왕자님은 아니지만 귀족으로 나왔어. 막 호랑이도 잡아오고 코끼리 등에도 타고 그래! ”

“ 우와, 호랑이랑 코끼리 나와? ”

“ 호랑이는 가죽만 나오고, 이렇게 큰 코끼리 등에 예쁜 안장을 깔고 거기 미셴카가 타고 나와! ”

“ 진짜 코끼리? ”

“ 진짠 줄 알았는데 아빠가 아니래. 근데 진짜 코끼리 같아. ”

“ 미셴카가 코끼리 타고 와서 공주님이랑 결혼해? ”

“ 응. 근데 공주님이 못됐어. 좋은 공주님 아니야. ”

 

공주님이 솔로르의 사랑을 받는 무희를 질투해 죽인다는 얘길 해주자 아냐는 깜짝 놀랐지만 곧 공주 편을 들기 시작했다. 어린 아냐는 공주님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긴 나도 지젤 남자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냐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 나도 공주님 될 거야. 그래서 미셴카랑 결혼해야지. ”

 

안 그래도 차고 넘치는 발레리나와 팬들도 모자라 나보다 훨씬 귀엽게 생긴 동생까지 라이벌이 된다는 생각에 깜짝 놀라서 난 급하게 말했다.

 

“ 에이, 안되지. 넌 아기잖아. 미셴카는 스무 살도 넘었는데. ”

“ 내가 스무 살 돼서 미셴카랑 동갑 되면 결혼할래. ”

“ 너 아빠랑 결혼한댔잖아. 아빠한테 이를 거야. ”

“ 안 돼! 아빠한테 말하지 마. 아빠랑도 결혼할 건데. ”

 

아냐는 울상이 되어 잠깐 고민하더니 또 명쾌한 답을 내놨다.

 

“ 월 수 금은 아빠랑 결혼하고 화 목 토는 미셴카랑 결혼해야지. ”

“ 그럼 일요일은? ”

“ 일요일엔 바냐랑 결혼할 거야. ”

 

좋은 생각이었다. 솔로르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굳이 니키야가 죽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지만 또 곰곰 생각하니 아냐와 나눠서 미샤와 결혼하는 것도 싫었다. 아무리 내 동생이지만 질투날 것 같았다.

 

쿨리치를 두 조각 째 먹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나보다도 아냐가 먼저 뛰어나갔지만 아빠가 아니라 마르가리타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우리가 아침 못 먹고 있을까봐 왔다면서 보자기를 풀어 생선 수프가 가득 담긴 냄비와 샌드위치 접시를 꺼냈다. 그리고는 우리 식탁을 보고 기절초풍했다.

 

“ 너희 아침부터 케익 먹었니? 초콜릿까지! ”

“ 이거 아줌마가 만든 거잖아요, 너무 맛있어서 또 먹은 거예요. ”

“ 그래도 애들이 아침에 밥을 먹어야지... ”

“ 밥이 없었는걸요. 아빠도 없고. ”

“ 하긴 그랬겠네. 너희 아빠도 워낙 정신이 없어서... 좀 전에야 나한테 전화했더라. 빨리 알았으면 아까 왔을 텐데. 둘 다 배고팠겠구나. ”

“ 우리 아빠 어디 있어요? ”

“ 아빠가 말 안 해줬어? ”

“ 몰라요. 새벽에 나갔어요. 미셴카 데리러 간댔는데 아침에 안 왔어요. 전화도 안 해주고. 우리 아빠 봤어요? 극장 갔어요? 미셴카랑? ”

“ 아니, 스탄카는 병원에 있어. 극장에는 오후에나 갈 거야. ”

“ 병원? 아빠 아파요? ”

 

난 깜짝 놀라서 수프 그릇을 엎을 뻔 했다. 갑자기 새벽에 봤던 아빠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그릇을 똑바로 놔주면서 나와 아냐에게 아빠는 하나도 아프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럼 왜 병원에 있느냐고 캐묻자 아줌마는 미샤가 조금 아파서 아빠가 돌봐주러 갔다는 거였다. 미샤는 간밤까지 멀쩡했는데 어디가 아파서 새벽에 아빠가 그렇게 급하게 나간 거냐고 물었지만 아줌마도 잘 모른다고 했다. 아마 뉴욕 다녀온 여독 때문에 피곤해서 몸살이라도 났나보다고 했다. 낮의 무대에서 그렇게 날아다녔는데 몸살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미샤의 등과 어깨에 번져 있던 피멍이 떠올랐다.

 

난 급하게 의자에서 내려가서 옷을 입었다. 아줌마가 미샤는 금방 괜찮아질 테니까 가만히 앉아서 아침 먹으라고 달랬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미샤는 평소에 몸이 아파도 약도 안 먹고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가 종종 야단치곤 했다. 그런 사람이 병원에 있다니 진짜 많이 아픈 게 분명했다.

 

아줌마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아빠였다. 난 아줌마에게서 수화기를 빼앗았고 울음이 나오는 걸 꾹 참으며 아빠에게 어느 병원이냐고 물었다. 아빠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미샤가 많이 아픈 거냐고 묻자 아줌마랑 똑같은 대답을 했다.

 

“ 아니야, 조금 아픈 거야. 이제 괜찮아. ”

“ 나 병원에 갈래. ”

“ 안 와도 돼, 그냥 아냐랑 있어. 아빠가 조금 있다 집에 갈게. ”

“ 미샤가 아프다며. 아픈 사람은 옆에서 돌봐줘야 돼. 나 잘해. 전에 엄마가 아플 때도 간호해 줬어. 주스도 갖다 주고 안마도 해 줬어. 미셴카도 안마해 줘야 돼, 어제도 세료쟈 아저씨가 해 줬잖아. 어깨랑 등에 멍이 엄청 많았어. 나 같으면 울었을 거야. ”

“ 그래, 라루츠카는 간호를 잘 하지. 아빠도 알아. 근데 오늘은 안 오는 게 좋겠어. ”

“ 왜? 미샤가 그렇게 많이 아픈 거야? 아니면 다 나았어? 좀 있다 아빠랑 같이 올 거야? ”

“ 아니, 그렇게 많이 아픈 건 아닌데 그래도 조금은 여기 있어야 돼. ”

“ 내가 가면 왜 안 되는데? ”

“ 미샤는 아픈 걸 보여주는 게 부끄러운가봐. ”

“ 왜? ”

“ 남자들은 원래 그래. ”

“ 아빠한테는 괜찮아? ”

“ 아빠한테도 별로 안 보여주고 싶대. 그래서 아빠도 금방 갈 거야. ”

“ 아빠도 그래? 아프면 부끄러워? ”

“ 아니, 아빠는 안 그래. ”

“ 그럼 남자라서 그런 게 아니네. ”

“ 응, 라라 말이 맞네. 아닌가보다. ”

“ 난 알아. 미셴카는 왕자님이라서 그래. 왕자님들은 아픈 거 티 안 내. 그래야 공주님도 구해주고 신하들에게도 위엄 있게 보일 수 있어. ”

 

아빠는 잠시 아무 말도 안 했다. 병원 복도인지 수화기 너머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미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어 귀를 바짝 갖다 댔지만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윙윙거릴 뿐이었다. 마침내 아빠가 입을 열었다. 내 말이 맞다면서 아냐와 함께 조금만 놀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마르가리타 아줌마를 바꿔달라고 했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한참 동안 수화기에 귀를 대고 있었다. 그러다 달력을 힐끗 쳐다보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 수요일이 로미오와 줄리엣인데 올라갈 수 있을까? 안될 것 같으면 지금 노비코프에게 얘기해야 돼. 그래야 대역 준비 시키지. 그 날 서기국 의원들 공연 보러 온다고 했는데 좀 걱정이네. ”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줌마는 한숨을 쉬더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우리를 식탁에 똑바로 앉혀놓고 생선 수프를 다 먹는지 안 먹는지 감시했다. 난 미샤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아빠의 말이 생각나서 입을 다물었다. 미샤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아픈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싫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들어왔다. 잠을 설쳤는지 피곤해 보였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와 아냐에게 하루 종일 집을 비워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커다란 오렌지를 두 개나 가져다 줬다. 키오스크에서 파는 조그맣고 껍질이 우툴두툴하고 시들어빠진 오렌지가 아니라 진짜 크고 동그랗고 매끈한 오렌지였다. 아냐는 그 자리에서 단숨에 오렌지를 해치웠다.

 

“ 라루샤는 안 먹니? 간식 많이 먹었어? ”

“ 안 먹을래. ”

“ 굉장히 달던데. 아빠가 까줄 테니까 조금만 먹어봐. ”

“ 싫어. 그냥 놔둘 거야. ”

“ 아빠가 늦게 와서 토라진 거야? ”

“ 아니야. 놔뒀다가 미샤 오면 같이 먹을 거야. 미샤는 오렌지 좋아해. 초콜릿보다 오렌지가 더 좋댔어. ”

 

아빠는 웃었고 나에게 착하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오렌지는 미샤가 우리 먹으라고 준 거니까 다 먹어도 된다고 했다. 그 말에 좀 안심이 되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미샤가 어떤지 물어보았다. 마르가리타 아줌마가 공연 걱정하던데 못 올라가는 거냐고도 물었다.

 

“ 내일까지만 쉬면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공연도 올라갈 거야. ”

“ 그치만 전에 내가 감기 걸렸을 땐 일주일이나 학교 안 갔는걸. 선생님도 더 쉬라고 했었어. ”

“ 미샤는 어른이잖아. ”

“ 아니야, 어른은 아빠랑 이그나트 아저씨랑 마르가리타 아줌마 같은 사람들이야. 미샤는 오빠야. ”

“ 이그나트랑 미샤는 네 살밖에 차이 안 나는데 너무하네. 이그나트가 삐치겠는데. ”

“ 이그나트 아저씨는 수염 있잖아! ”

“ 수염이 없어야 오빠인 거야? ”

“ 응. 그리고 잘생겨야 돼. ”

“ 라루샤가 이그나트를 두 번 죽이는구나. ”

 

아빠는 소리 내어 웃더니 오렌지를 까주었다. 오렌지는 정말 맛있었다. 미샤가 준 거라서 더 그럴지도 몰랐다. 그래도 여전히 난 초콜릿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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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4장으로 이어진다. 그건 내일..

 

러시아 정교 신자들은 부활절이 되면 쿨리치라는 케익과 파스하라는 과자를 굽는다. 쿨리치는 동그란 케익, 파스하는 사다리꼴 모양의 과자이다. 파스하에는 보통 XB라는 글자를 새기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부활하셨네' 라는 문장의 약자이다. 이미지 몇 장... 좀 작지만..

 

 

 

일반적인 쿨리치는 이렇게 생겼다. 촌스럽지만.. 원래 러시아 음식 모양새가 좀 촌스럽다. 그게 매력임^^; 아래에 이콘 그림이 그려진 부활절 달걀들이 늘어서 있다. 이건 시판용 달걀.

 

 

쿨리치~

마트료슈카와 달걀과 함께. 보통 집에서 색칠하는 달걀은 붉은색을 비롯해 저렇게 알록달록 칠한다.

 

 

 

전통적으로는 부활절 달걀은 붉은색으로 칠한다.

 

 

 

파스하 과자. 왼편엔 XB, 정면엔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파스하 과자 사진 몇 개 더.

 

 

 

쿨리치와 파스하, 색칠 달걀 함께.

 

 

 

 

 

러시아 정교 부활절 달걀 사진 몇 개.. 이 달걀에도 그리스도 부활하셨네 라고 적혀 있음.

 

 

 

 

 

모양은 촌스럽지만 맛있는 쿨리치와 파스하 과자.. 그런데 한 조각밖에 안 먹는 미샤.. 이것은 정신 승리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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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