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무의 슬픔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series : 서무의 슬픔2015. 5. 27. 21:29
심적으로 많이 힘든 며칠을 보내고 있어서 이번 23편은 주말 지나서 올릴까 하다가, 서무 시리즈는 내 마음에도 위안을 주는 글이라서 평소처럼 주중에 올려본다.
22편에서 왕재수는 베르닌이 캐온 약초와 투레츠키가 구해준 파인애플 통조림,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독사과 후유증에서 서서히 회복되었다. 23편은 그 이후, 느닷없이 또 다른 명령을 받은 베르닌과 나름대로의 미션을 지닌 왕재수의 이야기이다.
여기 등장하는 스네고로드는 지난 19~20편에서 등장했던 그 폭설 많이 오는 동네이다. (스네그는 눈, 고로드는 도시란 뜻이라 내가 조합해 만든 도시 이름이다)
언급되는 스네고로드 '청년단'은 소련 시절 있었던 공산주의 청년단 콤소몰을 가리킨다. 소년단은 피오네르, 청년단은 콤소몰이다. 콤소몰에 해당되는 나이는 보통 26세까지이다.
여기 등장하는 데니스와 타마라는 가브릴로프 본편에서도 등장한다. 가브릴로프 발레단에서 가장 인기많은 스타 커플 무용수들이다. (지난번 트로이가 나오는 본편에서 언급된 키로프 발레단 코디네이터 타마라와는 다른 인물이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스페호프는 자매도시의 폭설 복구를 위해 직원 대표를 파견하기로 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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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3
서무의 슬픔
-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주말에 개에게 물려 3일 동안 병원 신세를 진 스페호프 국장은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원래 스페호프는 월요일 아침에 제일 저기압이 되곤 했다. 그 이유는 주말 동안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으니 그들을 들들 볶고 훈계를 할 수 없어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월요일 아침에 극에 이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개에게 물린 탓에 월요일에 출근을 못했기 때문에 화요일 아침이 되자 그의 기분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는 9시부터 줄줄이 간부들과 직원들을 호출했다. 사소한 트집을 잡아 엄청난 질책이 이어졌다. 주간 회의에서도 직원들을 계속 박살냈다. 물론 베르닌도 예외는 아니었다. 총괄 서무이자 막내였으므로 언제나 1번 타자였다. 등사기에 튀어 있는 얼룩부터 시작해 빛이 바래고 살짝 비뚤어지게 걸려 있는 부서 명패에 이르기까지 족히 10가지 항목으로 질책을 당했다. 그리고는 간부들의 부서 운영이 엉망인데다 조직의 성과가 곤두박질치고 있다고 분노를 터뜨린 후 모두가 공부하는 조직, 스스로를 연마하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설교가 계속되는 동안 머릿속으로 좀 전에 지적받은 10가지 항목 중 지금 해결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리고 대충 얼버무리고 해결한 것처럼 꾸밀 수 있는 것들을 분류하고 있었다. 옆에서는 발따예프가 초점 없는 눈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수첩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가고 모든 분노를 발산한 후 기분이 좀 나아진 스페호프가 헛기침을 했다.
“ 좋아. 그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네. 아, 그렇지. 잊을 뻔했군. 얼마 전에 우리 자매도시인 스네고로드에 폭설이 내려서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다들 알고 있겠지? 의회에서 정식으로 피해 복구 봉사단을 파견하기로 했네. 이번 봉사단에는 의회와 우리를 비롯해 공공기관 모두가 참여하네. 의회에서 차출 원칙도 보내왔네. 기관별로 두 명, 그리고 남녀평등을 위해 남자 하나 여자 하나일세. 다닐, 자네는 오전 중 의회에 우리 보안위원회 참가자 명단을 유선과 문서로 동시 통보하도록 하게. ”
“ 어, 예. 알겠습니다, 국장님. 그런데 우리 참가자는 누구인가요? ”
“ 음, 그렇지. 뭐 어려울 것 있나. 지금 이 자리에서 정하도록 하지. 음, 누구로 할까. ”
스페호프가 드넓은 회의실에 앉아 있는 수많은 직원들의 얼굴을 한 바퀴 훑었다. 직원들은 모두들 고개를 푹 숙이고 ‘제발 나만은 안 돼...’ 하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번쩍 손을 들었다.
“ 국장님, 건의사항이 있습니다. ”
“ 건의사항이라니? ”
웬 건방진 놈이 국장의 의사결정을 방해하는가 하는 표정으로 스페호프가 따가운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손을 든 것이 평소 총애하던 대외협력부의 세묜 모브린이라는 것을 알자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 아, 세묜. 그래, 말해보게. ”
“ 집단농장 자원봉사는 저도 지난번에 가봐서 아는데 힘을 써야 하는 일이 많아서 젊은이들이 필요합니다. 특히 이번엔 폭설까지 왔다고 하니 더욱 그렇죠. 그러니 연차가 가장 젊은 직원을 파견하는 것이 어떨지 국장님의 의견을 여쭙고자 합니다. ”
베르닌은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예전부터 모브린의 매끄러운 처세술이 부럽기도 했지만 어딘지 얄미운 선배라고 생각해왔는데 지난번에 알렉산드라의 일이 있고부터는 더욱 보기 싫었다. 저 짧은 몇 마디를 통해 모브린은 자신이 이미 자원봉사에 다녀왔으니 이번에는 제외되어야 한다는 점과 막내 직원들을 파견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옳기 때문에 자신은 더더욱 이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동시에 어필하고 있었다! 그 인간이 자기 살 길만 개척했다면 그건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그 건의사항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스페호프가 껄껄 웃으며 손바닥을 탁 쳤다.
“ 허허, 세묜. 자네 어떻게 내 생각을 그렇게 딱 짚었나. 나도 동감일세. 이런 건 당연히 젊은 직원들이 가야지. 막내들이 가는 게 맞네. 그래야 가서 힘도 쓰고 게으름도 안 부리고 다른 기관들 보기에도 체면도 서지. 가뜩이나 우리 KGB는 이름값이 있으니 더더욱 젊은 직원이 가야 하네. 좋아, 우리 막내가 누구더라... 그렇지. 남자는 다닐. 여자는... 으음... ”
여직원에게 별 관심이 없는 스페호프는 한참 기억을 더듬었다. 모브린이 친절하게 그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 등록부서의 리자베타 칸페트나야입니다. ”
“ 그런가? 등록부서에는 여직원이 많아 헷갈리는군. 맞나? ”
등록부장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예, 칸페트나야가 맞습니다. 이제 스물한 살인가 그렇습니다. ”
“ 좋아, 됐군. 서무는 명단을 적게. 우리 봉사요원은 감시분석부의 다닐 베르닌, 그리고 등록부서의 리자베타 칸페트나야일세. 알다시피 스네고로드는 꽤 멀지. 삼림국에서 버스를 준비했다는군. 출발은 내일 밤에 한다고 하네. 그러면 목요일 오전에 도착하겠지. 이틀 동안 봉사를 하고 토요일 아침에 그곳에서 나오는 일정일세. 자세한 건 의회 쪽 담당자에게 문의하도록. 이상! ”
베르닌은 체념한 채 수첩을 주섬주섬 정리해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리자가 울상이 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 다냐, 이게 웬 날벼락이에요. 세묜 선배는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우리랑 무슨 원한을 졌다고... 스네고로드면 버스로 열다섯 시간이에요! 기차로 가는 것도 아니고... 맙소사, 게다가 토요일에 나오면 여기 도착하면 일요일이 다 될 텐데... 주말도 반납하라는 거잖아요. 막내라고 항상 궂은 일만 도맡아 하는데 봉사요원으로까지 차출되다니 정말 너무해요. ”
“ 그러게요. 나야 뭐 세묜이 추천하지 않았더라도 국장이 분명 가라고 했을 테지만 당신은 정말 운이 없네요. 안 갈 수도 없고... 일단 따뜻한 옷을 꼭 챙기세요. 거기 엄청 춥대요. ”
“ 휴... 일도 힘들어죽겠는데 집단농장 봉사까지 가라니. 그런 건 학생 때로 족한 줄 알았는데. 토요일엔 친구들이랑 영화도 보고 놀려고 했는데 완전히 망했네요. ”
리자는 한숨을 폭 쉬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베르닌도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스네고로드라면 스페호프가 왕재수의 공연을 망치기 위해 무용수들을 보내서 폭설에 갇히게 만들었던 그 동네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기 싫었다.
어쨌든 그는 퇴근 직전에 리자와 함께 준비물 리스트를 체크했고 따뜻한 옷 챙겨 입으라고 다시 한 번 신신당부를 했다.
“ 무조건 패딩 입어야 돼요. 모자도 챙겨야 하고. 코트는 안돼요! ”
“ 어머, 당연하죠. 패딩 입어야죠, 거기 추운데. 당연한 소릴 왜 자꾸 해요? ”
“ 어, 그게... 왕재수, 아니 미샤는 귀가 닳도록 얘기해도 패딩을 안 입어서. ”
“ 어휴, 당신은 맨날 그 꽃돌이 감독님 얘기만 하고. 하여튼 내일 봐요. ”
그는 정시에 퇴근했다. 다음날 밤에 출장을 가야 하니 몰아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긴 했지만 의욕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왕재수를 데리러 가야 했다. 독사과를 먹고 심하게 앓았던 왕재수는 일요일 밤에 퇴원했다. 다행히 월요일은 극장 휴일이라 집에서 쉬었지만 화요일이 되자 베르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근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 너 왜 그래, 이번 주는 무대 점검 때문에 주말까지 공연 없잖아. 이 기회에 금요일까지 그냥 쉬어. ”
“ 안 돼. 지난 주 내내 병원에 있느라 자리를 너무 비웠어. 애들 신작 연습도 시켜야 하고... ”
물론 베르닌은 왕재수가 고집을 꺾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딱 한 가지만 약속하게 했다.
“ 6시 전에는 무조건 집에 가야 돼! 극장에서 자는 것도 안 되고 늦게까지 남아서 일하는 것도 절대 안 돼! 내가 저녁에 데리러 갈 거야! ”
“ 아니, 그게... ”
“ 뱀 껍질! ”
“ 악마. ”
그래서 그는 정시에 퇴근해 곧장 극장으로 갔다. 왕재수는 자기 사무실에 있었다. 티무르 이즈마일로프와 뭔가 열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즈마일로프는 나이가 많았지만 왕재수에게는 감독님이라고 존대를 하며 아주 깍듯하게 대했다.
그는 돈키호테 연기 지도를 해준 이즈마일로프가 무척 반가웠지만 물론 노교사는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아닌 다닐 베르닌을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들의 감독님을 괴롭히는 KGB 감시요원이라면서 흘겨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왕재수의 손을 꼭 잡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 거긴 제가 갔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고집을 부리며 꼭 가겠다고 하시니. ”
“ 지난번에 애들만 보내서 그 난리가 났는데 이번에도 또 그럴 수는 없어요. 그리고 거기 괜찮은 애가 하나 있다고 했는데 농장에서 일하느라 여기까지 와서 오디션을 볼 여력이 없대요. 그러니까 내가 가서 볼 거예요. 괜찮으면 데리고 와야지. ”
“ 지난주 내내 입원해 계셨잖아요. 이렇게 야위었는데 그 먼 데까지 어떻게 가시려고 그럽니까. 게다가 그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골수 공산주의자들인지 아세요? 성정도 거칠고 조금만 이념적으로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시비를 거는데 공연히 꼬투리라도 잡히면... ”
“ 그러니까 내가 반동분자라서 꼬투리 잡힐 거란 얘기에요? ”
“ 아니, 그런 뜻은 아니지만 스페호프가 그쪽 관료들하고 결탁해 있으니 또 해코지 음모라도 꾸미면... ”
“ 아 지겨워, 그런 거 하나하나 따지면 일을 어떻게 해요! 이건 감독의 결정이에요! 난 내일 애들이랑 갈 거고 일요일에 돌아올 거니까 그동안 남은 애들 연습 부탁해요. 토요일 백조의 호수는 빅토르 대신 막심 올리기로 한 거 알죠? 레나랑 호흡 잘 좀 봐주세요. 그럼 난 이제 들어가겠어요. 내일 가기 전에 극장 들를 테니까 그때 얘기 더 해요. ”
이즈마일로프는 혀를 차며 감독실을 나갔다. 베르닌을 노려보면서 ‘더러운 KGB 앞잡이’ 하고 혼잣말로 욕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지만 곧장 왕재수를 붙들었다.
“ 야,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너 내일 어디 가는데! ”
“ 어, 들었구나. 우리 애들 데리고 위문 공연 가기로 했어. ”
“ 어디에! ”
“ 스네고로드. ”
“ 뭐야? 네가 왜! 왜 가는데! ”
“ 어휴, 방금 전까지 티무르 보리소비치랑 했던 얘기 되풀이해야 되냐. 거기 그때 폭설 와서 우리 애들 갇혀 있었잖아. 근데 공연 반응은 의외로 좋았대. 그래서 그쪽에서 우리 애들 한번만 더 와달라고 사정하더라고. 그리고 타마라가 거기 농장에서 춤추는 여자애를 하나 봤는데 진짜 원석이더래. 그래서 우리 극장으로 데려왔으면 좋겠다면서 내가 한번 꼭 봤으면 하더라고. ”
“ 그럼 걜 여기로 부르면 되지 왜 네가 가! ”
“ 아유, 아까 얘기한 거 못 들었니? 걔가 농장 노동자라잖아. 여기랑은 워낙 머니까 휴가를 내서 나올 수가 없대. 게다가 지금 거기 폭설 복구 때문에 휴가는 엄두도 못 내고 주말에도 일해야 한다잖아. 몇 번이나 말하니, 우리 발레단 애들 열심히는 하지만 진짜 재능 있는 애들은 거의 없어. 타고난 애가 있으면 무조건 끌어들여야 한단 말이야. 그걸 누가 하겠니! 내가 해야지. 그런 거 볼 줄 아는 사람이 여기 또 있을 것 같아? ”
“ 그래, 너 잘났다. 너 천재인 건 아는데... 너 일요일까지 누워 있었잖아! 지금 출근하는 것도 무리하는 건데 어떻게 거기까지 가냐! ”
“ 버스로 갈 건데. 무슨 자원봉사 때문에 버스 준비한대. 그래서 우리 애들이랑 내 자리도 준비해 달라고 했어. 자리 빼준대. ”
“ 내일 밤에 출발하는 그 버스 말야? 심지어 기차도 아니고 버스로 간다고? 너 정말 정신이 있는 거야? 나도 그거 타고 간다고! 열다섯 시간 걸려! ”
“ 어, 너도 가? 잘됐다! 덜 심심하겠다. ”
“ 잘되고 뭐고, 넌 못 가! 의사 선생님한테 이를 거야! ”
“ 네가 뭔데 못 가게 하는 거야! 이건 예술감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가뜩이나 시골에 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엉망인 극장 조금이라도 괜찮게 바꾸는 것뿐인데. 그것조차 못하게 하면 난 어떻게 살라는 거야! 정말 너무해. 숨 막혀서 죽을 것 같단 말이야! ”
왕재수가 갑자기 왈칵 감정을 쏟아내더니 그런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지 컵을 집어 물을 두어 모금 꿀꺽꿀꺽 마셨다. 베르닌은 컵을 뺏었다.
“ 야, 독사과 때문에 그렇게 고생해놓고 물도 막 마시고... ”
“ 그 놈 이제 그런 짓 안 해. 그런 놈들은 한번 써먹은 짓은 의심 살까봐 안 하거든. 해도 다른 식으로 하지. 그러니까 이제 독은 안 탈 거야. ”
“ 너 정말 거기 가서 공연 지휘만 하고 그 여자애 오디션만 볼 거지? ”
“ 그럼 내가 다른 거 할 게 있냐? 설마 나보고 눈 치우라고? 그런 짓 절대 안 해! ”
“ 하긴, 시켜도 안 하겠지. 일단 집에 가자. 나도 그거 봉사요원으로 차출됐어. 짜증났었는데 지금 보니 차라리 다행이다. 어린애 물가에 내보내는 것도 아니고. 에휴. ”
“ 쳇. 난 내 앞가림 잘 하거든! 너나 잘 해! 근데 오늘 저녁은 뭐야? ”
“ 뭐 먹고 싶은데? 너 거기 가면 농장 구내식당에서 주는 거 먹어야 되니까 오늘 맛있는 거 먹자. 보랴네 식당에 갈까? ”
“ 점심때 갔었어. 보랴가 그때 그 닭고기 수프 비슷한 거 만들어줬어. 저녁은 집에 가서 먹을래. ”
“ 그럼 대게 쪄줄게. 생선가게 특별 이용권 물고기 말고 게도 된다 해서 어제 한 마리 바꿔왔거든. 근데 대게는 비싼 거라고 두 마리로 치더라. ”
“ 우와, 맛있겠다! 아이 좋아! ”
그래서 베르닌은 왕재수와 함께 집에 갔다. 대게를 쪄서 가위로 껍데기를 자르고 살을 잘 발라냈다. 왕재수는 식탁 앞에 앉아 턱을 괸 채 그가 게살을 발라내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긴 왕재수는 그가 먹을 것을 줄 때는 항상 그랬다.
“ 그거 손 많이 가는구나. ”
“ 손에 들고 뜯어먹으면 편한데. 네가 그런 거 안 좋아하잖아. ”
“ 국물 흐르고 손에 냄새 배니까. ”
“ 내 손에 냄새 배는 건 상관없냐? ”
“ 응, 글쎄. 손 깨끗이 씻어라. 그 냄새 오래 가더라. ”
발라낸 게살을 접시에 담아주자 왕재수는 레몬즙을 뿌려서 맛있게 먹었다. 베르닌도 오랜만에 비싼 게살을 먹자 너무 맛있어서 정신없이 흡입했다. 왕재수가 자기 접시에서 게살을 크게 덜어서 베르닌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 야, 너 다 먹어! 왜 나한테 더는 거야! ”
“ 넌 조금밖에 안 담았잖아. 그것도 다 짜투리살. 난 이제 배부르단 말이야. ”
“ 내 것도 많았어. 내가 빨리 먹어서 그런 거야. 너 이거 다 먹어. 그래야 몸도 나아지지. ”
“ 나 이제 괜찮은데. 파인애플 먹고 다 나았어. ”
왕재수는 결국 그에게 게살을 덜어주었다. 식사를 마친 후 베르닌은 왕재수의 집으로 따라가서 짐 챙기는 것을 옆에서 확인했다.
“ 패딩 입고 부츠 신고 모자 쓰고 가야 돼! ”
“ 하지만 난 감독인데! 무대 위에 올라가서 소개도 해야 되고... ”
“ 양복 한 벌, 구두 한 켤레만 챙기면 되잖아. 입고 가는 건 패딩! ”
“ 아... 정말 싫다. 이제 3월인데 너무하잖아. ”
“ 거긴 추워. 여기보다 훨씬 춥단 말이야. 또 눈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
마침내 베르닌은 목적을 달성했고 왕재수는 매우 부루퉁해져서 가방을 현관으로 걷어찼다. 베르닌은 개의치 않았다. 왕재수에게 패딩 입히기라는 힘든 과제를 성공했으므로 뿌듯했다. 봉사요원으로 차출된 게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랬으면 왕재수를 보내놓고 계속 걱정을 할 판이었으니까.
* * *
수요일 밤에 그들은 버스를 타고 스네고로드로 출발했다. 산을 네 개나 넘어야 하는 여정이었다. 열다섯 시간이나 걸리니 밤에 출발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베르닌은 리자와 함께 앞자리에 앉았다. 왕재수는 무용수들과 함께 뒤에 앉아 있었는데 다른 공공기관에서 차출되어 온 젊은 여직원들이 넋을 빼고 그쪽만 쳐다보며 까르르 웃고 속닥거렸다. 리자도 큰 관심을 보였다.
“ 어머, 꽃돌이 감독님도 같이 가네. 버스 같은 거 안 탈 줄 알았는데. ”
“ 그러게요. 기차 타고 갈 것이지... ”
“ 아, 다냐. 그때 폭설 때문에 철로 휘어지고 망가져서 아직 공사 중이잖아요. 몰랐어요? 그래서 우리도 버스로 가잖아요. ”
“ 그렇구나. ”
리자는 주머니에서 사탕 봉지를 꺼냈다. 부스럭거리면서 껍데기를 까더니 사탕 한 알을 베르닌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베르닌은 당황했지만 리자는 방긋 웃었다.
“ 이거 딸기 사탕인데 맛있어요. 멀미 방지용이에요. ”
“ 예, 고마워요. 난 멀미는 안 하는데. ”
“ 다냐, 이럴 땐 ‘고마워요’에서 끝내는 거예요! ”
“ 어, 네. ”
리자는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계속 깔깔 웃었다. 베르닌도 그녀의 명랑한 기분에 감염되어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눴다. 힐끗 돌아보니 왕재수는 주위에 앉아 있는 무용수들과 뭔가 진지하게 토론을 하고 있었다.
‘ 저 녀석 장시간 버스 타는 거 힘들 텐데. 빨리 휴게소가 나왔으면... ’
세 시간 쯤 후 버스가 휴게소에 도착했다. 왕재수는 뒤에 앉아 있었는데도 차가 멈추자 제일 먼저 내렸다.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리자가 버스 계단을 내려오는 데 손을 잡아 주었다.
“ 조심해요, 바닥이 얼어서 미끄러워요. ”
“ 어머... 고마워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
“ 그냥 미샤라고 부르세요. ”
리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왕재수는 리자의 손을 잡아서 얼음이 없는 쪽으로 안내해 주었다. 베르닌은 그걸 보면서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미끄러져 넘어질 뻔 했다. 왕재수가 혀를 찼다.
“ 바닥 얼었다고 했잖아. ”
“ 그러게. 너 괜찮아? ”
“ 그럼 괜찮지 뭐 어때서. 근데 답답하긴 해. ”
“ 우리 뭐 좀 먹고 따뜻한 거 마시자. 20분쯤 쉰대. ”
“ 난 그냥 바람 쐬면서 좀 걸을래. 너희끼리 먹어. ”
“ 미샤, 우리 저기 가서 감자튀김 먹어요. 여기 휴게소 감자튀김이랑 코코아 맛있어요. ”
왕재수는 ‘지방질과 당분이라니!’ 하고 불을 뿜기는커녕 리자에게 아주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 그래요. 그럼 같이 가요. ”
베르닌은 여전히 왕재수가 여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할 때마다 닭살이 돋았고 ‘제발 평소대로 해!’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들은 휴게소 카페에 갔다. 왕재수는 리자에게 감자튀김과 코코아를 사주었다. 리자는 황홀해했다.
“ 어머, 왜 저한테 감자랑 코코아를 사주시는 거예요? 저도 돈 있는데. ”
“ 지난번에 강에 빠졌을 때 도와주셔서요. 다닐한테서 들었어요. ”
“ 아이 참, 그거야 당연한 일인데. 근데 당신은 안 드세요? 이거 엄청 많은데. 나눠먹어요. ”
“ 전 밤에는 잘 안 먹어요. 다닐이 좋아하니까 같이 드세요. ”
베르닌은 감자튀김을 한 움큼 집어서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 야, 조금만 먹어봐. 진짜 맛있어. ”
“ 싫어. 기름기... ”
“ 먹어야 멀미 안 하고 계속 타고 가지! ”
“ 에이... ”
왕재수는 툴툴대면서도 감자튀김을 몇 개 집어서 먹었다. 베르닌이 주는 대로 코코아도 조금 마셨다. 그리고는 바람 쐰다고 밖으로 나갔다. 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꽃돌이 감독님은 의외로 당신 말을 잘 듣네요. 신기해라. ”
“ 뭐가 신기해요, 내가 맞는 말을 하니까 당연히 들어야지! ”
“ 국장이 맨날 반동분자니 불여우니 건방지고 싸가지 없다느니 해서 저 사람 얼굴만 잘나고 성격은 나쁜 줄 알았는데 매너도 좋고 싹싹하네요. 멋있다... 당신 정말 그런 사이 아니에요? ”
“ 아니에요!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하는 사이 절대 아니에요! 전에 얘기했잖아요. 난 진짜 그런 취향 아니라고요! 전부 오해... ”
“ 알았어요, 흥분하지 말아요. 하긴 억울하긴 하겠네요. ”
리자는 쿡쿡 웃으며 남은 감자튀김을 먹고 코코아를 홀짝 마셨다. 베르닌은 흥분한 게 좀 멋쩍어서 컵과 접시를 치우고 리자와 함께 버스에 탔다. 왕재수는 제일 늦게 탔다. 타자마자 창가에 머리를 대고 자기 시작했다. 옆에 앉아 있던 토냐가 살며시 일어나 맨 뒤에 있는 빈자리로 옮겼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라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 돈키호테 때부터 토냐는 왕재수에게 완전히 반해 있는 게 분명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렐랴부터 시작해 왕재수에게 반하는 여자들이 불쌍했다. 리자도 자꾸 왕재수 쪽을 훔쳐보았기 때문에 마음이 쓰였지만 그렇다고 ‘쟨 아저씨들을 좋아해요’ 라고 말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기사는 등을 모두 껐다. 여기저기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닌은 원래 어디에서나 잘 자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금방 졸음이 쏟아졌다. 리자와 말동무를 해줘야 할 텐데 하고 꾹 참으려고 했지만 옆을 보니 리자도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도 단잠에 빠졌다.
한참 자고 일어나니 이미 마지막 산을 넘고 있었다. 리자가 그에게 귤을 까주면서 방긋 웃었다.
“ 진짜 잘 자네요, 다냐. 휴게소도 세 번이나 갔는데 한 번도 안 깨고. ”
“ 어, 그러게요. 잠이 모자랐나 봐요. 당신은 좀 잤어요? ”
“ 휴게소 내릴 때만 깨고 계속 잤어요. 좀 전에 마지막 휴게소였거든요. 극장 사람들이랑 같이 아침 먹었어요. 토냐 진짜 예쁘더라고요. 근데 그 언닌 진짜 조금밖에 안 먹어요. 흑빵에 버터도 안 바르고 토마토랑 우유만 곁들여 먹더라고요. 발레리나 몸무게 유지하려면 힘들겠어요. ”
“ 왕재수, 아니 미샤는요? 걔 뭐 먹었어요? ”
“ 어, 미샤요? 글쎄요... 모르겠네. 먹긴 먹었나? 차는 마시는 것 같던데. ”
“ 어휴, 분명히 아침 잘 챙겨먹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잠깐만요. ”
베르닌은 뒷좌석 쪽으로 갔다. 왕재수는 멀미도 안 나는지 조그만 책을 읽고 있었다. 베르닌을 보더니 호주머니에서 초코바를 꺼내 주었다. 베르닌은 엉겁결에 받았다.
“ 이게 뭐야? ”
“ 너 단 거 좋아하잖아. 아까 휴게소에서 샀어. 자느라 아침도 안 먹었잖아. ”
“ 어, 그래. 고마워. 근데 너 아침 왜 안 먹었어! 리자가 그러는데 차 밖에 안 마셨다고! “
“ 자기도 안 먹어놓고. ”
“ 난 자느라 놓친 거지만 넌 안 먹은 거잖아! ”
“ 버스 타고 내내 앉아서 잠만 자고 배가 안 고팠는걸. 그리고 먹었어. 토냐가 토마토 한 개 줬어. ”
“ 너 스네고로드 가서 삼시세끼 꼬박꼬박 안 먹으면 뱀 잔뜩 잡아와서 목에 걸어줄 거야. 거기도 숲이랑 강 있어서 뱀 많아. 알아서 해. ”
“ 먹으면 되잖아. 어휴, 시어머니. ”
목적을 달성한 후 베르닌은 자리로 돌아왔다. 초코바를 쪼개서 리자에게 반 토막을 내밀었다.
“ 난 아까 먹었어요. 아까 미샤가 여러 개 사서 무용수들이랑 나한테 한 개씩 나눠줬어요. 당신 건 따로 챙기더라고요. 의외로 세심하다니까요. ”
“ 그러네. 자기밖에 모르는 놈인데. ”
“ 아니던데. 토냐 언니가 그러는데 미샤가 무용수들 엄청 챙겨준다던데요. 자기가 선물 받은 초콜릿이랑 사탕도 연습실에 전부 갖다놓는대요. 무용수들은 연습하느라 끼니도 잘 거르고 또 중간중간에 기력도 떨어지니까 초콜릿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
베르닌은 자기가 아는 왕재수와 토냐가 아는 왕재수는 서로 다른 인간인가 싶었다. 그러나 돈키호테 때문에 극장에서 보냈던 며칠을 떠올려보니 감독으로서의 왕재수는 매일 음식 투정이나 하고 시골 타령을 하는 왕재수와는 좀 다른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피곤했다! 감독 노릇하는 왕재수는 너무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아서 문제였고 평소의 왕재수는 너무 그를 가정부 취급해서 문제였다!
* * *
아침에 스네고로드에 도착한 후 봉사단은 청년회관으로 끌려갔다. 차 한 잔과 비스킷 한 개를 얻어먹은 후 곧장 여러 개의 조로 찢어져서 폭설 복구 작업에 투입되었다. 베르닌은 키 크고 체격이 좋다는 이유로 철로 복구 조에 배정되었다. 도서관 쪽에 배정된 리자가 걱정을 했다.
“ 다냐, 제일 힘든 조로 갔네요. 눈만 치우는 것도 아니고... 조심조심해서 해요. 또 고지식하게 있는 힘 없는 힘 다 쓰지 말고. ”
“ 그래도 눈 다 치우고 철로 고치면 집에 갈 때는 기차 타고 갈 수도 있잖아요. ”
“ 어휴, 벌써 저 의욕에 가득 찬 것 좀 봐... 살살 하란 말이에요. 그깟 이틀 일해서 어떻게 기차가 다녀요. 전문가도 아닌데. ”
“ 그런가... 하여튼 당신도 조심해서 해요. 책 옮기는 거 무거울 텐데. ”
“ 책은 남자들이 옮긴대요. 난 페인트 벗겨진 거 칠하는 거랑 화단 정리하는 쪽이에요. 점심 때 식당에서 봐요. ”
리자가 같은 조원들과 함께 도서관 쪽으로 걸어간 후 베르닌은 철로 쪽으로 이동하기 위해 트럭을 탔다. 자리가 없어서 지붕도 없는 짐칸에 타야 했다. 이미 덩치 좋은 남자들 여럿이 올라타 있었다. 동네 남자들도 있고 가브릴로프 봉사단원들도 있었다. 다른 조원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트럭 곁으로 무용수들과 왕재수가 지나갔다. 저녁 공연 연습을 하러 가는 것 같았다. 동네 남자들이 토냐와 타마라 등 예쁜 발레리나들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때 왕재수가 베르닌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 너 어디 가? ”
“ 철로 복구하러. 눈도 치우고. ”
“ 그럼 집에 갈 때는 기차 타고 갈 수 있는 거야? ”
“ 어, 글쎄... 해봐야 알아. ”
“ 알았어. ”
그러더니 왕재수가 트럭 옆으로 오더니 가방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서 베르닌에게 건네주었다.
“ 이게 뭐야? ”
“ 너한테 맞을지는 잘 모르겠다. 작으면 다리 좀 휘어서 쓰렴. ”
왕재수는 베르닌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홱 몸을 돌려 무용수들을 다시 따라잡았다. 베르닌은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날렵하고 근사한 디자인의 선글라스가 들어 있었다. 왕재수가 가끔 끼던 것 같았다. 분명히 이것도 무슨 아르마나인지 에르미인지 프로도인지 하는 비싼 것이 분명했다.
‘ 엥, 이걸 왜 주고 가지? 저 녀석 얼굴 조막만해서 이거 진짜 나한텐 맞지도 않을 텐데. ’
잠시 후 철로 복구 현장에 와서 눈을 치우기 시작했을 때 베르닌은 왕재수의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그 날은 춥긴 했지만 날씨가 맑았고 햇살이 굉장히 밝았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새하얀 눈에 햇살이 반사되어 굉장히 눈이 부시고 따가웠다. 그는 선글라스를 껴보았다. 작아서 다리를 휘어야 했지만 그럭저럭 낄 수 있었다. 한결 나았다. 동네에서 온 남자들도 삼삼오오 선글라스를 끼기 시작했다. 가브릴로프에서 차출된 운 나쁜 봉사요원들만 한숨을 쉬었다.
“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선글라스 가져올걸. 왜 이런 얘긴 안 해 준거야. 다냐, 자넨 진짜 준비성이 좋군. 역시 KGB라 달라. 부럽네. ”
선글라스는 정말 도움이 되었다. 맨눈으로 일하던 사람들은 곧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보다 못한 주민 하나가 청년회관으로 가서 챙 있는 모자들을 여러 개 가져와 나눠주었다. 베르닌은 선글라스 덕에 눈은 아프지 않았지만 얼굴도 따끔거렸고 눈을 치우고 유실된 자갈들을 레일 사이사이에 다시 깔아놓는 작업 때문에 허리가 휠 것 같았다. 봉사단원들은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망가진 레일 연결은 불가능했으므로 오로지 힘을 쓰는 단순작업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르닌은 다시 군대에 온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 철로가 빨리 복구돼야 이 동네 사람들도 기차를 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일했다.
금세 시간이 흘러 점심때가 되었다. 청년회관으로 돌아가 점심을 먹고 조금이나마 쉬려나 했던 봉사단원들의 기대는 스네고로드 공산청년단 대표인 아르투르가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기 시작했을 때 산산조각 났다. 샌드위치 한 개와 사과 한 알, 주스 한 병씩을 나눠주고는 딱 30분의 휴식 시간만 주는 거였다. 의회에서 온 바실리가 참을 수 없는 듯 투덜거렸다.
“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는데 샌드위치 한 조각 주면서 30분만 쉬라니,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야? ”
“ 우리도 한 시간쯤 쉬면서 맛있는 거 먹었으면 좋겠지만 해가 있을 때밖에 일을 못하니까 어쩔 수 없어요. 5시에 철수할 거니까 그때까지만 힘 좀 내라고요. 당과 인민을 위해 이 정도도 못합니까? ”
청년단 대표인 아르투르는 근육이 울룩불룩한 상남자인데다 이 마을 사람들답게 골수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에 바실리는 곧 입을 다물었다. 베르닌은 묵묵히 샌드위치를 먹었다. 힘든 일을 하고 나서 그런지 흑빵 사이에 치즈와 햄, 양배추만 들어 있는데도 꿀맛이었다. 사과도 단숨에 해치우고 주스도 꿀꺽 마셨다. 아르투르가 옆으로 오더니 그를 칭찬했다.
“ 다른 사람들은 요령 피우면서 중간중간 쉬던데 넌 하나도 안 쉬고 우리처럼 열심히 하더라. 선글라스까지 챙겨 오고 정말 제대로 일할 준비가 됐더라고. 어느 기관에서 왔어? ”
“ 어, 난 보안위원회. ”
“ 역시. KGB는 달라. 나도 농장 일만 아니었으면 너네 가브릴로프로 가서 KGB 지원하고 싶었는데 여기서 내가 빠지면 일이 안 돌아가니 포기했지. 전에 너네 국장인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도 본 적 있는데 진짜 사나이 중의 사나이더라고. 이념적으로도 완벽하고. 요즘은 너도 알다시피 워낙 해이해져서 대놓고 반동 짓하는 놈들도 많잖아. 당보다 개인을 앞세우고. 그런데 너네 국장은 진짜 멋지더라고. 완전 내 롤 모델이야. 넌 좋겠다, 그렇게 훌륭한 분을 모시고 일해서. ”
“ 어... 우리 국장 말이야? 어, 그래... 네 롤 모델이구나. 으응... ”
“ 우리 친하게 지내자. 너네랑 우린 자매 도시잖아. 여름엔 여기도 되게 좋거든, 휴가 받으면 놀러와. 우리 집에서 재워줄게. 너 애인 있니? 우리 농장에 예쁜 여자들 진짜 많아. 새침 떠는 도시 여자들이랑 완전 달라. 얼굴도 예쁘고 일도 얼마나 잘하는데. 이념도 반듯해서 당원도 많아. 우린 원래 외지에서 온 남자들이 우리 여자들한테 집적대는 거 싫어하지만 넌 KGB에 엄청 성실해보이니까 괜찮아. ”
“ 어, 날 그렇게 신뢰해주니 고맙다... ”
“ 있다가 청년회관에서 너네 환영 겸 같이 저녁 먹고 공연 보고 파티도 하고 그럴 거야. 너 우리 테이블에 앉아. 너처럼 성실하고 또 KGB이기까지 한 애는 당연히 상석에 앉아야지. 예쁜 애들도 소개시켜줄게. 그럼 이제 일하자. 있다 봐. ”
베르닌은 좀 얼떨떨했다. 친절하게 대해주니 좋기는 한데 스페호프를 롤 모델로 삼고 있다니 어딘지 좀 찜찜한 녀석이었다. 그는 공산주의 수업도 제대로 들었고 콤소몰 행사에도 그럭저럭 출석을 빼먹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진짜 열렬하게 공산주의와 레닌을 신봉해 본 적은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공부할 때도 친구들 대부분은 대놓고 레닌을 욕하곤 했다. 가브릴로프야 촌 도시니까 훨씬 보수적이어서 그런 사람들은 별로 없었는데 스네고로드는 그보다도 더 보수적인 것 같았다.
그러다 30분이 후딱 흘러갔기 때문에 베르닌은 다시 눈을 치우고 자갈을 깔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허리가 펴지지 않을 정도였다. 5시가 되었을 때 아르투르가 손뼉을 딱딱 치면서 모두들 수고했으니 이제 트럭에 타라고 했다. 그러더니 베르닌에게 다가와서 등을 툭툭 쳤다.
“ 너 아까도 진짜 열심히 하더라. 앞에 타. 내 옆자리 하나 비어. 너처럼 열심히 하는 애는 좌석에 앉아서 가야지. ”
“ 어, 난 괜찮은데. 저쪽에 바실리 선배가 엄청 힘들어하던데 나이도 많으니 그 선배 앉혀줘. 난 뒤에 앉아서 갈게. ”
“ 그 사람 계속 게으름피우던데 뭘. 제일 노동 열심히 한 사람이 따뜻하고 편한 자리 앉아야지! 이리 와. ”
그래서 베르닌은 트럭 문을 열고 앞자리에 탔다. 가운데 자리에 끼어 앉아야 해서 오히려 더 불편했지만 아르투르가 아주 큰 혜택을 베풀어주고 있다는 표정으로 빙긋 웃고 있었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돌아가는 내내 아르투르는 스페호프와 공산주의자들의 모범에 대해, 그리고 스네고로드 집단농장의 훌륭한 생산성에 대해 계속 떠들었다. 자부심이 대단했다.
“ 외진 데 있고 기후도 악조건이지만 우리 농장이 얼마나 훌륭하다고. 십년 째 우리 주에서 생산성으로는 5위 안에 들었어. 다들 진짜 열심히 일한다고. 스네고로드가 너네 가브릴로프보다야 훨씬 작지만 당원은 훨씬 많이 배출했는걸. 옛날 혁명 때도 여기가 적위군 아지트였잖아. 우리 노동영웅도 여러 명 나왔어. 스무 살 때 노동영웅 된 여자애도 있는데 걔가 진짜 최고야. 이름이 나쟈인데 양계장 닭들 사료랑 온도를 잘 맞춰줘서 알을 두 배로 낳았다고. 얼굴도 얼마나 귀여운지, 나쟈랑 결혼하고 싶어서 우리 농장 남자들 다 줄섰어. 너네는 스무 살짜리 노동영웅 없잖아. 그치? ”
“ 응, 없어. 대단하네. ”
“ 있다가 나쟈 소개시켜줄게. 걔도 노동영웅이니까 우리 테이블에 앉거든. 근데 너 걔는 눈독들이면 안 돼. 무슨 얘긴지 알지? 아무리 네가 괜찮아도 나쟈는 우리 농장 남자랑 결혼해야 되거든. ”
“ 어, 으응... ”
베르닌은 뭔가 매우 불편했지만 아르투르의 호의와 환대에 대고 그런 기색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끄덕끄덕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마침내 청년회관에 도착해 트럭에서 내렸을 때 그는 숨통이 트이는 기분으로 차가운 저녁 공기를 들이마셨다.
* * *
봉사단원들은 청년회관 구내식당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아르투르의 말대로 맛있는 음식들이 많이 나왔다.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들과 샤실릭이 일품이었다. 먹기 전에 아르투르가 일어나 자매 도시에서 봉사를 와준 형제자매들에게 감사한다며 한바탕 연설을 했다. 청년단원들이 모두 와~ 하고 박수를 쳤다.
아르투르는 정말 베르닌을 자기들 공산청년단 임원들이 앉는 테이블로 안내해 주었다. 베르닌은 머뭇거렸다.
“ 어, 저... 난 일행이 있는데... ”
“ 아, 리자 말이야? 그 아가씨도 이 자리로 불렀어. 어쨌든 KGB니까 의전 챙겨주는 거야. 우린 말이야, KGB가 최고거든. 원래는 의회를 제일 쳐줬는데 요즘 폭설 복구하고 그러는 거 보니까 너무 시원찮아서. 저기 오네. 근데 리자 예쁘다. 뭐 우리 나쟈보단 덜 귀엽지만. ”
언제나 명랑하고 구김살 없는 리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불편하지도 않은 듯 방긋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거리낌 없이 상석 테이블에 앉아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는 베르닌을 보면서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 나 있잖아요, 화단에 꽃 심었어요. 따뜻해지면 분홍색 꽃 필 거예요. 글쎄 맨날 노란 꽃만 심었다잖아요. 페인트도 분홍색이랑 하늘색으로 칠했어요. 철로는 많이 복구됐어요? 어쩜, 그새 얼굴이 다 탔네. 여름도 아닌데... 안경 자국도 나고. 근데 당신 안경 안 끼잖아요. 웬 자국이에요? ”
“ 어, 이거 미샤가 선글라스 빌려줘서요. 덕분에 눈이 안 아팠어요. ”
“ 아, 역시 미샤는 센스가 좋네요. 아까 강당 쪽에서 무용수들 데리고 저녁 공연 연습시키는데 벌써부터 소문을 듣고 여자들이 막 구경 왔더라고요. 진짜 웃겼어요. 잘생겼다고 꺅꺅거리고 사인 받고 싶다고 동동 구르고. 있다가 공연할 때 장난 아닐 것 같아요. 좀 전에 데니스랑 마주쳤는데 자기 지난번에도 왔었는데 그때 자기가 춤추고 받은 관심의 열 배는 되는 것 같다고 툴툴대더라고요. 데니스도 멋있지만 우리 꽃돌이 감독님이랑은 비교가 안 되죠. ”
“ 근데 어떤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는 거예요? 데니스는 원래부터 우리 극장에서 제일 인기 많은 무용수였잖아요. 완전 아폴로처럼 생겼는데, 키도 크고 근육질에... 여자들은 왜 데니스보다 미샤를 더 멋있다고 하는데요? ”
“ 데니스는 그냥 잘생긴 남자고요, 미샤는 보기만 해도 온몸에 전류가 찌잉 하고 오는 것 같아요. 그냥 잘생긴 게 아니고 엄청 섹시해요. 눈빛도 그윽하고 몸가짐도 세련되고... ”
“ 난 데니스가 더 훤칠하고 멋있는 거 같은데... ”
“ 그러니까 그건 남자들 생각이라니까요! ”
그때 아르투르가 리자에게 샤실릭을 한 접시 덜어다 주더니 베르닌에게 양계장의 노동영웅 나쟈를 소개해주었다. 정말 귀여웠다. 노동영웅이라더니 키도 자그마하고 체구도 아담한데다 앳된 외모라 꼭 소녀처럼 보였다. 청년단원들이 농담을 할 때마다 수줍게 웃었지만 말수는 거의 없었다. 상냥한 리자가 말을 걸자 곧잘 대답은 했지만 그럴 때마다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7시가 가까워지자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공연 보러 가자고 동료들을 잡아끌었다. 아르투르는 껄껄 웃었다.
“ 우리 나쟈는 정말 춤을 좋아한다니까. 지난번에도 너네 극장 무용수들 와서 춤 보여주니까 밥도 먹다 말고 보러 가더라고. 얘 완전 부끄럼타는데 가서 사인까지 받더라니까. 난 발레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던데. 발레리나들은 예쁜 것 같은데, 남자들이 왜 그 타이츠 있잖아, 그거 입고 폴짝거리면 되게 민망하더라고. 하여튼 우리도 가자. 일곱 시부터 강당에서 한다며. 주민들 벌써 다 와서 앉아 있더라. 우린 앞자리 앉아야 돼.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감시해야 되거든. ”
“ 신경 쓰이는 일이 뭔데? 그냥 공연이잖아. 규모 큰 작품 가져온 것도 아니고 그냥 무용수들 몇 명 와서 갈라 공연만 보여주는 거 아니야? 음악도 그냥 레코드 틀고? ”
“ 아, 공연이야 뭐든 상관없지. 규모고 음악이고 난 그런 건 잘 모르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고, 이번에 너네 극장에서 그 골치 아픈 놈이 직접 왔잖아. 너도 KGB니까 잘 알지? 그 자식, 반동분자! 왜 크레믈린 낙하산으로 너네 극장 감독 앉힌 놈 있잖아. 지난번에 너네 국장도 그 자식 얘기하면서 진짜 화내더라고. 완전 반역자에 스파이에 반체제주의자인데 강제노동 수용소에 처넣어도 모자랄 판에 너네 극장에 자리 만들어서 앉혀줬다며. 그 자식이 순진한 애들 물들일까봐 걱정이라고 하더라고. 우리 농장 애들은 진짜 순도 100프로인데 괜히 그런 반동분자 와가지고 나쁜 물이라도 들면 어떡하니.
그놈이 무용수들 데리고 온다고 해서 나랑 우리 임원들이 무지 반대했는데 의회 쪽에서 다 찬성하고 앞장서고 우리보고 물정 모른다고 하는 거야! 어휴, 우리 농장에 웬 흙탕물 튀길 일 있냐. 너 이게 너네 가브릴로프 욕하는 거 아닌 거 알지? 너네 극장 무용수들은 괜찮았어. 저번에 눈 치우는 것도 얼마나 잘 도와줬는데. 그냥 그놈 하나 때문에 신경 쓰인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
“ 아, 저... 걔 극장 감독으로서는 굉장히 호평이야. 그리고 지난번에 여기서 무용수들 공연 반응 좋았다고 일부러 자기가 인솔해서 온 거래.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
“ 흥, 무용수들만 와서 춤만 추고 가면 되지 제깟 게 뭐하러 와. 아까 보니까 생긴 것도 완전히 계집애 같은데다 우리 임원들이랑 의회 쪽 간부들한테 인사도 안 하던데. 싸가지 없는 놈. 하여튼 예의주시할 거야. 너도 그놈 감시해야 하지 않아? 그때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가 그러던데, 그 자식한테 밀착 감시요원 붙여놨다고. ”
“ 어, 그, 그래. 여기서는 내가 감시하면 돼. 공연 보러 가자. ”
그들은 강당으로 갔다. 청년단원들 외에도 집단농장 주민들과 어린이들, 학생들도 많이 와서 좌석이 꽉 차 있었다. 특히 젊은 여자들이 어떻게든 앞쪽 자리를 차지해보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나쟈는 자리가 없을까봐 발을 동동 굴렀고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아르투르가 웃으며 농을 걸었다.
“ 뭘 그렇게 걱정하니, 나젠카. 다른 사람 자리 다 없어도 네 자리는 내가 만들어줄 텐데. 이리 와, 맨 앞줄은 의회랑 당 쪽 윗분들, 그리고 나하고 우리 임원 몇 명 앉을 거고 너는 여기 다닐하고 리자랑 두 번째 줄 가운데 앉아. ”
“ 고마워요, 아르투르. ”
“ 고맙긴. 넌 노동영웅이잖아. 우리 농장의 자랑인데. ”
사교적이고 싹싹한 리자는 또래인 나쟈를 제일 가운데 자리로 안내하고는 목도리를 풀더니 주섬주섬 몇 겹으로 개켜서 의자에 방석처럼 깔아주었다.
“ 이거 깔고 앉아. 너 키 작은데 앞자리에 덩치 큰 남자라도 앉으면 안 보이잖아. ”
“ 고마워, 리자. 나 오늘만 기다렸어. 발레 구경하는 거 너무 좋아하는데 여기는 극장도 없고 일 년에 두어 번 너네 극장에서 이렇게 공연 와주는 것밖에 없어서 너무 아쉬워. 그래도 이번에는 2주 만에 또 와줘서 너무 좋아. 지난번에 눈 왔을 때 무용수들이 집에 못 가고 여기 남아서 눈도 치워주고 일 도와주는데 정말 너무 착하고 멋있었어. 그때 타마라랑 친해졌는데 막 울더라고, 토요일에 무대 올라가야 하는데 못 가게 됐다면서 감독님 실망시키게 됐다고 얼마나 슬퍼하는지 나도 너무 미안했어. ”
“ 아, 돈키호테 얘기군요. 그때 다른 무용수들이 무대 올라갔어요. 미안해할 거 없어요. 폭설 때문이었잖아요. ”
베르닌이 끼어들었다. 나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 네, 그래도 여기 오지만 않았으면 타마라랑 데니스가 무대 올라갔을 텐데 괜히 미안하더라고요. 그리고 미샤 야스민이 감독으로 왔다고 해서 휴가라도 내고 가브릴로프에 가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직접 와줘서 너무 기뻐요. 진짜 유명한 사람이잖아요. 아까도 너무 궁금해서 무용수들 연습할 때 살짝 엿봤는데 사람들에게 가려져서 잘 안 보이더라고요. ”
“ 어, 나쟈. 발레 진짜 좋아하나보네요. 난 맨 처음에 걔가 우리 동네 왔을 때 뭐하는 앤지도 몰랐는데... ”
나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교양 없는 인간이 다 있다니 하는 눈빛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어떻게 몰라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데. 신문잡지에도 자주 나오고 문화 채널에서도 예전에 공연 실황이랑 영상 밥 먹듯이 보여줬는데. ”
“ 어, 그러니까... 전 발레는 관심이 별로 없어서. ”
“ 하긴 아르투르도 그렇고 우리 농장 사람들도 많이들 그렇더라고요. 근데 지지난주 공연 때 반응이 진짜 좋았거든요. 작년 재작년보다 훨씬 잘 추는 것 같더라고요, 눈 때문에 갇혀 있는 김에 무용수들도 매일 공연 보여줬고요. 그래서 발레 관심 있는 사람들도 많아졌어요. 오늘 미샤도 무대 올라오면 좋겠는데... 그럼 얼마나 좋을까요. ”
“ 저, 나쟈. 걔는 춤 안 출 거예요. 은퇴했거든요. 대신 걔가 연습시킨 무용수들이니까 무대는 좋을 거예요. ”
“ 아쉬워라... ”
잠시 후 7시가 되자 강당의 불이 꺼지고 무대 위에 조명이 들어왔다. 사실 제대로 된 무대도 아니고 그냥 연단에 무대용 패널을 덧대서 임시로 만든 것에 불과했다. 극장용 막 대신 펄럭거리는 커튼이 봉에 매달려 있는 정도였고 임시 무대는 가브릴로프 극장 무대의 절반도 안 되는 크기였다. 오케스트라 핏은 당연히 없었다. 음악은 찌직거리는 잡음이 섞이는 레코드였다. 그래도 관객들은 기대에 차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무대 위로 왕재수가 나왔다. 사람들은 타이츠 입은 무용수들이 아니라 수트를 입은 젊은 청년이 나온 것에 놀랐고 그의 미모에 두 번째로 놀랐다. 여자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왕재수는 지금껏 베르닌이 들어본 적도 없을 만큼 근사하고 세련된 태도로 인사를 했고 곧이어 오늘 무대에서 보여줄 작품들을 소개해주었다. 특히 발레를 처음 보러 온 사람들이나 어린이들을 위해서 발레에 나오는 마임과 몇 가지 동작을 간단하게 선보여 주기까지 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그렇게 친절하고 쉬운 말투로 뭔가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무대 위의 왕재수는 지난번 춤을 췄을 때와 마찬가지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관객들은 아무도 떠들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왕재수의 동작 하나하나에 굉장히 집중했다.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했다. 설명을 마친 후 왕재수는 다시 인사를 하고 퇴장했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베르닌은 굉장히 즐겁게 공연을 봤다. 돈키호테 역을 해보고 나니 발레가 어떤 것인지 조금씩 감도 잡혔고 또 저 동작이 어떤 건지도 대충 알게 돼서 그런지 진짜 재미있었다. 그리고 왕재수는 초보 관객들을 위해서 아주 유명한 작품과 신나는 작품들의 하이라이트만 모아서 갈라 무대를 짰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백조의 호수 2인무로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쯤이면 코믹한 네 마리 백조의 춤이 나오는 식이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돈키호테의 바질과 키트리 결혼식 장면을 넣어서 관객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베르닌은 관객들이 환호하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왕재수가 추는 바질을 봤다면 기절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약 80분가량의 공연이 모두 끝난 후 무용수들이 나와서 인사를 하자 관객들이 모두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왕재수가 나와서 인사를 하자 더욱 갈채와 환호가 커졌다. 여자들이 꺅꺅 소리를 질렀다. 옆을 보니 나쟈는 거의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강당을 나가면서 아르투르가 베르닌과 리자에게 환영 파티가 있으니 구내식당으로 오라고 했다.
“ 스네고로드 공산당 지부랑 우리 청년단에서 개최하는 거야. 아까 저녁 먹은 거랑 달라. 술도 많고 엄청 재밌을 거야. 특별히 너네 봉사단이랑 무용수들 위해서 하는 거야. 쟤들 지난번에 눈 치우는 것도 도와주고 해서. ”
“ 어, 그래. 고맙다. 그러면 방에 짐만 풀고 금방 갈게. ”
봉사단원들과 무용수들은 청년회관 맞은편에 있는 작은 호텔에 묵게 되어 있었다. 말이 호텔이지 그냥 허름한 기숙사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눈은 다 치워져 있었고 청소도 잘 되어 있었다. 베르닌은 삼림국의 보리스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보리스와는 체육대회 때 친해졌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은 사이였다.
짐을 내려놓고 막 나가다가 그는 복도에서 왕재수와 마주쳤다. 아직 수트 차림인 것을 보니 강당에서 막 들어온 참인 것 같았다.
“ 야, 오늘 공연 재미있었어. 관객 반응도 좋더라. ”
“ 당연하잖아, 내가 지휘한 건데. ”
“ 근데 넌 어쩌면 무대 위에 있을 때랑 지금이랑 말투가 그렇게 다르냐. ”
왕재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 너 얼굴 탔구나. 선크림 바르고 갔어야지, 바보. 내일도 철로 눈 치우러 가는 거야? ”
“ 응. 오늘 눈 많이 치웠는데 우리 갈 때까지 기차는 못 들어올 것 같아. ”
왕재수는 가방에 손을 쑥 집어넣더니 조그만 화장품 튜브를 꺼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 내일 나갈 때 이거 바르고 가. ”
“ 이게 뭐야? ”
“ 선크림! 이런 날씨에 얼굴 엄청 탄단 말이야. 잘못하면 화상 입어. 선글라스 껴서 눈은 괜찮을지 몰라도. ”
“ 겨울에 누가 선크림을 발라. 헤엄치러 온 것도 아닌데. ”
“ 거울 좀 봐라, 너 얼굴 지금 시커매. ”
“ 어, 하여튼 고마워. 선글라스도. 덕분에 눈 안 아팠어. 넌 방 어디야? ”
“ 복도 끝 방. ”
“ 응, 너도 가방 놓고 나올 거지? 복도에서 기다릴까? ”
“ 왜 기다려? ”
“ 여기서 환영파티 해준다고 오랬잖아. ”
“ 아, 그거. 꼭 가야 하나? 아까 당 간부인지 뭔가가 오라고 하긴 했는데. 거기 청년단원들 애들 다 와? ”
“ 응, 여기 공산당하고 청년단원들이 여는 파티랬으니까. ”
“ 얘기 할 게 있어서 가보긴 해야 하는데 너무 졸려. ”
왕재수가 하품을 했다. 베르닌은 슬며시 걱정이 되어서 왕재수를 램프가 켜진 쪽으로 데리고 갔다. 밝은 데서 보니까 안색도 창백하고 아침보다 야위어 보였다.
“ 너 파티 안 가는 게 좋겠다. 퇴원한지 며칠 되지도 않았잖아. 버스에서 새우잠 자고 온종일 애들 연습시키고. 저녁은 먹었어? ”
“ 아니, 무용수들 원래 공연 직전엔 뭐 안 먹거든. ”
“ 넌 무대에도 안 올라갔는데 왜 안 먹어! ”
“ 그럼 애들이 공복에 공연 준비하는데 감독이 돼가지고 나만 뭐 먹니? 중간중간에 초콜릿이랑 우유랑 먹어서 배는 안 고파. 애들은 그 파티 가서 먹겠지 뭐. 술 마시지 말라고 옆에서 얘기 좀 해 줘. 내일도 공연 있으니까. ”
베르닌은 이 골치 아픈 녀석에게 뭘 먹이는 것과 재우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필요한지 재 보았다. 자꾸 하품을 하는 왕재수의 야윈 얼굴을 보니 곧 답이 나왔다.
“ 알았어. 너 지금 빨리 들어가서 자. 내일도 애들 연습시키고 공연 올릴 거라면서. 빨리 누워야지 안 그러면 또 코피 쏟고 아프겠다. ”
“ 나 그때 코피 난 거 힘들어서 그런 거 아냐. 갑자기 바질 춰야 돼서 연습하다 넘어진 거라 했잖아. ”
“ 거짓말하지 마! 토냐가 그러던데, 너 안 다치게 넘어지는 방법 안다고! 야, 이거 봐! 지금 또 코피 나잖아! ”
“ 아니야! 콧물 나오는 거야! ”
왕재수는 손등으로 코와 입을 가리면서 아닌 척 했다. 베르닌은 주머니를 뒤졌지만 손수건이 없었다. 그래서 왕재수를 방으로 데려다 주고 욕실에서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왕재수가 코피를 닦으면서 속상해했다.
“ 아이, 이게 뭐야. 나 안 그랬었는데. 며칠씩 밤새고 춤추고 아저씨들이랑 여럿이 응응응 하고 놀아도 끄떡없었는데. 흑... 짜증나. ”
“ 많이 아팠었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푹 쉬면 좋아질 거야. 불 꺼줄게 빨리 자. ”
“ 싫어, 씻고 잘 거야. ”
“ 알았어. 그러면 씻고 나서 곧장 자. 무용수들한테는 내가 얘기해놓을게. ”
“ 우리 애들 내가 챙겨줘야 되는데. ”
“ 걔들 지난번 폭설 때 갇힌 동안 여기 사람들이랑 많이 친해졌대. 걱정하지 말고 자. ”
“ 응, 알았어. 내일 봐. ”
베르닌은 청년회관으로 갔다. 파티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청년단원들과 당 간부들, 당원들이 봉사단원들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스네고로드 사람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농장을 꾸려가고 있어서 그런지 술도 잘 마셨다. 리자가 어디 있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데니스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 다닐, 우리 감독님은 왜 안 내려와요? ”
“ 어, 미샤요? 먼저 잔대요. 많이 피곤한 것 같았어요. ”
“ 오늘 무대가 지난번보다 몇 배로 더 반응 좋았어요. 그래서 감독님한테 고맙다고 술잔이라도 쨍 하고 싶었는데. ”
“ 아... 그냥 내일 아침에 얘기해요. 근데 미샤가 신신당부하던데... 내일도 무대 올라가야 하니까 당신들 술 마시지 말래요. ”
“ 샴페인 한 잔 마시는 정도는 괜찮지 않나. 나 원래 술 세거든요. 보드카 한 병은 기본인데. ”
“ 몰라요, 난 분명히 전해줬어요. ”
“ 알았어요. 안 마실게요. 애들 전부 마시지 말라고 해야지. ”
데니스는 정말로 옆에 앉아 있는 동료 무용수들에게 술 마시지 말라고 당부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처음에는 ‘한두 잔만 마시면 안 돼?’ 하고 툴툴댔다가 데니스가 ‘감독님이 마시지 말래, 내일 공연에 지장 있대’라고 하자 ‘알았어’ 하고 수긍했다. 베르닌은 조금 감명을 받았다.
“ 어, 정말 다들 한 잔도 안 마시는 거예요? ”
“ 미샤가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감독님 지시니까 따라야죠. ”
“ 아... 나 좀 놀랐어요. ”
“ 왜요? ”
“ 데니스 당신은 우리 극장에서 제일 유명한 무용수잖아요. 십년 넘게 추지 않았어요? 미샤는 당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외부에서 왔는데도 깍듯하게 감독님으로 대하네요. 안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
“ 안 그런 사람들이 이상한 거죠! 감독과 무용수는 엄연히 달라요. 그리고 미샤는 진짜 실력 있는 감독이에요. 무용수로서도 난 미샤 발끝도 못 따라가요. 감독님 욕하고 헐뜯는 건 정치하는 사람들이랑 실력도 없이 출세하고 싶어 하는 극장 사람들이에요, 무용수들은 안 그래요! 우리 조금이라도 더 잘 추게 해주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거 많이 알려주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어떻게 깍듯하게 안 대해요! 지난번에 우리 여기로 보낸 것도 정치하는 사람들이 감독님 괴롭히려고 그랬던 거 다 알아요! 지난주에 감독님 무지 아팠는데 그것도 석연치 않은 이유가 있다는 얘기 돌고 있다고요. 당신도 잘 들어둬요, 미샤랑 친한 것 같지만 어쨌든 KGB에서 왔으니까. 당신네 국장이고 당이고 뭐고 감독님 한번만 더 건드리면 우리 진짜 가만 안 있을 거예요! ”
베르닌은 데니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쩐지 가슴이 뭉클했다. 데니스는 그의 시선을 오해하고는 짜증을 냈다.
“ 왜요! 나보고도 반동분자라고 하려고요? ”
“ 아니요. 난 걔가 그냥 싸가지 없고 자기만 아는 철없는 놈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극장에서 보니까 아닌 것 같더라고요. 다행이에요. ”
“ 뭐가 다행인데요, 미샤가 철없는 반동분자가 아니라서요? ”
“ 어, 그것도 그렇지만... 그냥... 당신들하고 잘 지내서요. ”
데니스는 누그러졌고 그에게 술을 한 잔 따라 주었다. 베르닌은 보드카를 한 잔 마신 후 리자가 있는 쪽 테이블로 갔다. 리자는 청년단원들과 아르투르, 나쟈와 함께 앉아 있었다. 원체 귀엽고 발랄했기 때문에 스네고로드 농장 청년들이 모두 호감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베르닌은 그들과 뒤섞여 술도 마시고 농장 이야기도 들었다. 피곤하기는 했지만 간만에 또래 젊은이들과 섞이니 재미도 있었다. 그러다가 리자가 나쟈를 데리고 무용수들이 있는 쪽 테이블로 옮겨갔다. 아르투르가 베르닌에게 보드카를 한 잔 주면서 기분 좋게 물었다.
“ 너 리자랑 사귀니? ”
“ 어, 아니. 우리 그냥 동료야. ”
“ 그래? 리자 귀엽다. 철은 좀 없는 것 같은데 뭐 아직 어리니까. 그래도 KGB에서 일하는 애니까 신붓감으로는 괜찮지 않니? 잘 해보렴. ”
“ 어... 리자는 눈이 높아... 꽃미남 좋아해. 그리고 우리는 진짜 동료야. ”
“ 흥, 꽃미남이 밥 먹여 주냐? 나도 매일 우리 나쟈한테 해주는 말이 있지. 남자 얼굴 다 필요 없어. 이념 반듯하고 일 잘하고 성실하면 되는 거지. 그런 남자 만나서 결혼해야 돼. 내 마누라도 나 같은 남자 만나서 행운이라고 매일 그러는데. ”
“ 아, 너 결혼했구나. 몰랐어. ”
“ 그럼, 농장 일이랑 청년단 일이랑 얼마나 많은데. 결혼을 해야 안정이 되지. 우리 마누라는 지금 우수 청년단원으로 뽑혀서 페름 쪽 농장에 작업반 교환 가 있어. 일주일 후에 돌아올 거야. 나쟈도 빨리 나 같은 남자를 만나야 되는데. 우리 청년단 쪽 괜찮은 애들 몇 명 내가 이어주려고 했는데 나쟈가 너무 부끄럼이 많아서 자꾸 빼더라고.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안주를 집어먹었다. 갑자기 너무 졸렸다. 언제 일어나야 하나 하고 눈치를 보고 있는데 아르투르가 갑자기 술잔을 쨍 하고 내려놓으며 볼멘소리를 했다.
“ 근데 그 자식, 역시 스페호프 국장님 얘기가 맞더라. ”
“ 어, 미샤 말이야? 왜? ”
“ 완전 싸가지 없고 발랑 까진 반동분자야! 개자식. ”
“ 아니, 왜? 오늘 별 일 없었잖아. 공연 잘 끝내고 반응도 좋았잖아. ”
“ 너 아까 그 자식 인사하는 거 안 들었어? 그 재수 없는 자식이 관객들한테만 인사하고 당과 우리 청년단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잖아. 그 자리를 누가 마련해준 건데! 이건 건방진 것도 모자라서 당을 무시하는 거지 뭐야. ”
“ 아... 저... 걔는 별로 그런 생각 안 했을 거야. 극장에서는 원래 관객이 우선이라... ”
“ 그런 게 어디 있냐! 극장이고 관객이고 전부 당 덕분에 있는 거지! 그리고 이거 봐, 파티에도 안 왔잖아! 심지어 우리 당 간부가 아까 악수까지 하면서 파티 오라고 했는데! 일부러 안 오고 우리 무시하는 거지 뭐야! 건방진 자식, 반동분자 주제에... ”
“ 아... 그게 아니야. 걔 지금 몸이 안 좋아. 지난주에도 많이 아팠어. 아까도 너무 피곤해보여서 그냥 쉬라고 한 거야. 너희를 무시한 게 아니야. ”
“ 일행이라고 애써 감싸줄 필요 없어. 그런 놈은 한 번 보기만 해도 어떤 인간인지 다 보이니까. 너처럼 성실한 애랑은 천지차이야. 얼굴만 반반해가지고 아까도 우리 농장 여자들한테 눈웃음 치고. 반동분자 주제에 어디서 감히 우리 여자들한테 꼬리를 치는 거야. 가뜩이나 완전 바람둥이에 더러운 놈이라고 소문이 파다한 자식이... ”
베르닌은 왕재수가 여자에게 꼬리를 칠 일은 전혀 없고 오히려 반대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르투르와는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술을 한 잔 더 마신 후 졸려서 먼저 일어나겠다고 하고는 자리를 떴다.
* * *
다음날 베르닌은 다시 철로 복구조에 투입되어 눈을 치우고 자갈을 깔았다. 허리를 펼 시간도 없이 열심히 일했다. 그래도 왕재수가 준 선글라스를 끼고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랐더니 눈도 안 아프고 피부도 따끔거리지 않았다. 자갈을 깔면서도 그는 왕재수가 걱정이 됐다. 아침에 밥 먹으러 내려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방을 같이 쓰는 데니스에게 물어보니 너무 깊게 자고 있어서 안 깨웠다고 했다. 대신 빵과 우유, 과일을 챙겨다 주겠다고 했다.
‘ 아침이라도 잘 먹어야 하는데... 무용수들 연습시키다 보면 또 초콜릿 몇 개 집어먹고 굶을 텐데. 어휴, 고집쟁이. 다 낫지도 않았으면서 이 먼 곳까지 왜 부득부득 따라와 가지고. 괜히 아르투르 같은 애들한테 욕이나 먹고. 이 철로는 왜 이렇게 긴 거야... 오늘 복구돼서 내일 기차 들어오면 좋을 텐데. 그럼 돌아갈 때 걔가 조금이라도 덜 힘들 텐데. ’
그는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열심히 눈을 치우고 자갈을 깔았지만 결국 철로 복구는 마무리되지 못했다. 5시가 되자 아르투르가 박수를 쳤고 트럭을 타고 청년회관 쪽으로 돌아왔다.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었고 전날처럼 강당에 공연을 보러 갔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데려온 무용수들이 딱 이틀밖에 머무르지 않는데도 연일 공연을 보여주고 심지어 전날과 작품 구성도 다르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래도 가장 큰 갈채를 받았던 돈키호테 결혼식 춤은 다시 나왔다. 공연이 끝나고 무용수들이 인사를 하는데 관객들이 마른 꽃과 나무열매로 장식한 화환들을 무대로 가져다주었다. 심지어 마지막에 왕재수가 나와서 인사를 하자 젊은 여자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생화로 만든 꽃다발을 안겨주고는 ‘고마워요!’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왕재수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고 장미 꽃다발과 함께 퇴장했다.
아르투르가 간단하게나마 환송 파티를 할 테니 와달라고 했다. 베르닌은 잠시 후 가겠다고 하고는 무대 뒤로 뛰어갔다. 무용수들은 옷을 갈아입으러 갔지만 왕재수는 얼마 안 되는 무대 장비와 음악 테이프를 챙기고 있었다.
“ 야, 그걸 네가 직접 하는 거야? ”
“ 우리 스태프들이 못 왔잖아. ”
“ 그래도... 너는 감독이잖아. ”
“ 어제 여기 사람들한테 맡겨놨더니 레코드도 하나 부서지고 장비도 부품이 빠졌더라고. ”
“ 너 몸은 좀 어때? ”
“ 푹 잤더니 개운해졌어. 근데 여기 진짜 시골이야. 가브릴로프보다 더 심해. 아까 숙소에서 나오다가 똥개들끼리 막 싸우는 것도 봤어. 그리고는 말린 쇠똥 같은 걸 물고 달아나는 거야. 우웩. ”
“ 야! 농사지을 땐 그런 거 다 필요하단 말이야. 행여 여기서 그런 말 꺼내지도 마, 너 맞아죽어! ”
“ 칫. ”
왕재수는 큰 가방에 주섬주섬 장비와 테이프와 레코드를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가방을 들고 한 손으로는 장미 꽃다발을 들었다. 베르닌은 그에게서 가방을 빼앗았다.
“ 야, 이거 엄청 무겁잖아! ”
“ 별로 안 무거운데. 괜찮아, 내가 들고 갈게. ”
“ 무거운 거 들면 근육 미워진다며! 넌 그 꽃이나 챙겨. 근데 너 의외다. 원래 꽃 받으면 발레리나들한테 다 주더니. ”
“ 극장에서는 그러는데... 여기는 지금 생화 구하기 힘든 데잖아. 이런 데서 나 위해서 어렵게 구해서 갖다 준 꽃을 눈앞에서 발레리나한테 주면 관객들 막 열 받아 하더라고. 옛날에 키로프에 있을 때도 이런 집단농장 투어 여러 번 갔었거든. 처음엔 멋모르고 파트너한테 꽃 바쳤는데 여자들이 나중에 걔 지나갈 때 계란 던졌어. 나한테 꼬리쳐서 재수 없다고... ”
“ 헉, 살벌하네. 근데 몰랐어, 난 네가 진짜 화려한 무대에만 올라간 줄 알았거든. 이런 열악한 데에서도 많이 공연했었구나. ”
“ 키로프나 볼쇼이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냐. 위에서 가라고 하면 끌려가는 거지. 집단농장에 무슨 공장지대에... 그래도 그런 게 훨씬 나아, 높은 인간들 파티에 끌려가서 춤추는 것보다는. ”
“ 너 시골 싫어하고 파티 좋아하잖아. ”
“ 그거야 노는 파티지! 파티는 놀려고 가는 거지 높은 인간들 비위맞추고 꼬리치려고 가는 게 아니잖아! 에이, 생각하기 싫어. 나 지금 빨리 가봐야 돼. 중요한 일이 하나 있어서. 내일 우리 몇 시에 출발하는 거야? ”
“ 6시. 혹시 너랑 데니스 늦잠 잘지도 모르니까 내가 나가면서 너네 방에 들를게. ”
베르닌은 가방을 가져다준 후 식당으로 갔다. 환송 파티는 생각보다 짧았다. 전날만큼 북적거리지도 않았다. 아르투르는 여전히 살갑게 굴었지만 어딘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듯했다. 베르닌은 오히려 좋았다. 이틀 내내 농장 사람들과 부대끼다 보니 친해지기도 했지만 아르투르가 너무 국장을 신봉하는 타입이라 그런지 어딘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내색은 안 했지만 리자도 비슷했는지 아르투르가 잠깐 다른 테이블로 갔을 때 베르닌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 다냐, 우리 이제 자러 간다고 하고 일어나요. 계속 앉아 있었더니 너무 답답해요. ”
“ 어, 그래요. 여기 공기가 좀 탁하긴 하네요. ”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투르와 청년단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환대해줘서 고맙다고 하고 기회가 되면 다시 오겠다고 하자 아르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그래. 봄에 농사일 바쁘니까 그때 또 와서 도와주렴. 스페호프 국장님께 인사 전해드리고. 국장님 뵈러 가브릴로프 한번 가야 되는데... 하여튼 고마웠어. 잘 자고 내일 조심해서 돌아가. ”
* * *
베르닌은 리자와 함께 회관을 나왔다. 숙소로 가려는데 리자가 답답하니 바람이라도 좀 쐬고 들어가자고 했다. 베르닌도 탁한 공기 탓에 머리가 아팠기 때문에 그러자고 했다.
둘은 얼어붙은 저수지를 따라 천천히 산책을 했다. 추위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걷다가 리자가 두 팔을 벌려 기지개를 켜고는 투덜댔다.
“ 아르투르는 했던 얘기만 계속하고... 어쩐지 국장 생각나서 별로예요. ”
“ 국장을 존경한대요. ”
“ 세상에 어떻게 우리 국장 같은 사람을 존경할 수가 있담. 어제부터 공연 보는 내내 옆에 앉은 자기네 동료들이랑 속닥대고. 공연 예의도 없고, 심지어 계속 미샤를 욕하잖아요. 웃겨, 정말. 자기들한테 공연 보여주려고 그 먼 길을 왔는데. 꽃돌이 감독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볼쇼이에 있을 때는 그 사람 공연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대요. 어제부터 계속 당이니 임원이니 하는 얘기만 하는데, 미샤는 십대 때부터 크레믈린에 가서 공연해서 엄청 유명했다고요. 자기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당 간부들이랑 심지어 서기장하고도 아는 사이인데! 알지도 못하면서 계속 욕하고... 못돼먹었다고 하고... 진짜 열 받아서 한 대 때려주고 싶었어요. 미샤는 못돼먹지 않았어요! 미끄러질까봐 손도 잡아주고... 감자랑 코코아도 사주고... 나쟈한테도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줬는데요. ”
“ 어... 나쟈요? 어제 파티 때 미샤는 안 왔었는데. ”
“ 아, 아까 오후에요. 난 도서관 쪽 작업 일찍 끝나서 무용수들 연습하는 거 구경 갔었거든요. 근데 나쟈도 왔더라고요. 내가 미샤한테 나쟈 소개시켜주려고 했는데 미샤가 벌써 누군지 알더라고요. 인사도 하고 나쟈랑 따로 얘기도 하더라고요. 나쟈 오늘 설레서 잠도 못 잘 걸요. 무슨 얘기하는지 들어보고 싶었는데 그때 밥 먹으러 오라 해서 먼저 나왔어요. ”
“ 그랬구나... 오늘 일은 어땠어요? 힘들지 않았어요? ”
“ 오늘은 좀 피곤했어요. 벽화 복구를 하는데 청년단에서 자꾸 빨간색만 쓰라는 거예요. 근데 너무 빨간색이 많아서 눈도 아프고 윤곽도 하나도 구분이 안 갈 정도인데도 그러는 거예요. 원래 그림 보니까 여러 가지 색이 섞여 있는 거였거든요. 근데 작년에 바뀐 자기네 당 간부들이 빨간색을 좋아하니까 전부 빨갛게 하라는 거예요. 진짜 융통성도 없고... 여기 청년단원들은 청년 같지도 않고 스탈린 시대에나 어울리겠어요. ”
“ 좀 그런 면이 있긴 하더라고요. 그래도 내색은 하지 마세요. 여기 사람들 엄청 다혈질이래요. 자부심도 대단하고요. ”
“ 하긴... 툭하면 폭설 오고 폭우 쏟아지는데 이 정도로 농장 꾸리려면 보통 성정으로는 안 될 거예요. 아르투르가 자꾸 당신 농장으로 끌어오고 싶어 하던데. 그 사람 아직 당신이 얼마나 순한지 모르나 봐요. ”
“ 어, 나 별로 안 순해요. ”
“ 다냐, 당신 순해요. 어머나, 혹시 내가 당신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예요? 그런 뜻 아니에요. 남자들은 진짜 바보 같아요, 여자들이 성질 욱하고 힘센 남자 좋아하는 줄만 알고. 순하고 착한 게 훨씬 좋아요. 상냥하고. ”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리자를 쳐다보았다. 얼어붙은 수면과 달빛에 반사되어 그런지 리자의 파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불어오는 바람 탓인지 뺨이 발그레했다. 리자가 갑자기 입술을 실룩거리며 까르르 웃었다.
“ 아이 참,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예요. 얼굴에 뭐라도 묻은 것처럼. ”
“ 아, 아니요. 저, 그냥... ”
“ 뭐가 그냥이에요, 바보. ”
“ 나 바보 아니에요. 당신도 그렇고 미샤도 그렇고 다들 나보고 바보라고... ”
“ 바보 맞아요! ”
“ 나 책상물림은 맞지만 바보는 아니란 말이에요. ”
“ 자꾸 미샤 얘기만 하고. 지금도... ”
“ 어, 그건요, 미샤가 맨날 나보고 바보 멍충이라고 하니까... ”
“ 아휴... ”
리자가 베르닌의 팔을 꼬집었다. 살짝 꼬집어서 아프지는 않았다. 리자에게서는 달콤한 딸기 사탕 냄새가 났다. 베르닌은 당황했고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때 오솔길 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와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어?’ 하고 낮게 외쳤다. 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팔에서 손을 떼었다.
“ 뭐예요, 아프게 꼬집지도 않았는데. 그게 아파요? ”
“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쪽에... 잠깐만요. ”
베르닌은 몇 발짝 나아갔다. 수풀 쪽으로 가자 달빛이 비춰져서 잘 보였다. 저수지와 숲을 잇는 오솔길 입구에 덩치 큰 남자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아르투르의 목소리도 들렸다. 함께 눈을 치웠던 젊은이들도 있고 강당 앞자리에 앉았던 청년단 임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베르닌의 귓가에 들어와 박혔던 건 그들이 아니라 왕재수의 목소리였다. 그는 왕재수가 그런 목소리로 얘기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아주 낮은데다 가슴과 목을 울려서 나오는 소리였다. 꼭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았다.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베르닌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청년단원들과 아르투르가 왕재수를 둘러싸고 있었고 욕설을 하면서 삿대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재수는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그 오싹한 저음으로 뭐라뭐라 대꾸를 하고 있었다.
“ 다냐, 왜 그래요? 어머, 미샤 아니에요? 무슨 일이지? ”
“ 잘 모르겠어요. 아르투르가 시비를 거는 거 같아요, 어제부터 계속 미샤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거든요. ”
베르닌은 오솔길 쪽으로 갔다. 가까이 가자 아르투르와 청년단원들이 퍼붓는 욕설과 비난이 똑똑하게 들렸다.
“ 이 반동분자 개자식아, 나라 팔아먹고 당 배신한 것도 모자라서 우리 애들까지 건드리게 놔둘 줄 알아? 그래놓고 멀쩡하게 여기서 나갈 수 있을 줄 알았어? 가만 안 둬! ”
“ 어디서 더러운 짓만 배워가지고! 너 같은 건 모가지를 부러뜨려서 매달아야 돼! 아까도 레닌 동상에 인사도 안 하고 지나가고! 우리가 유심히 봤어! 어제 오늘 강당에서도 한 번도 당에 감사 인사도 안 했어! ”
“ 감히 우리 여자를 집적대? 조국의 반역자 주제에 어디서 그 더러운 손을 대려는 거야! 이런 개자식은 맛을 보여줘야 돼! 여기가 그 잘난 모스크바인 줄 알아!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
왕재수는 별로 무서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덩치 큰 남자들이 아홉 명이나 둘러싸고 있는데도 물러설 생각도 안 했다. 아르투르 쪽을 뚫어지게 노려보면서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아까처럼 가슴을 울려서 내는 저음으로 말했다.
“ 너무 자기들을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 난 웃긴 사람들 좋아하는데, 너희는 우스운 게 아니라 그냥 저질이야. ”
아르투르는 순간 멍해졌다가 곧 욕을 하면서 왕재수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 뭐야! 이 쬐끄만 게 입만 살아가지고! 범죄자에 반역자 주제에! 어디서 감히 당원들한테 욕을 하는 거야! ”
“ 당원이면 뭐! 당이 밥 먹여 주냐? 하긴 너희는 당이 밥 먹여주겠구나. 아무 것도 안 해도 당 간부들 꽁무니 쫓아다니며 아부해서 자리 얻고 으스대고 완장 차고 애들 위에 군림하고. 그러니까 내가 그랬잖아, 너네는 웃긴 게 아니라 저질이라고. 그만 좀 꺼져주면 좋겠네. 난 바쁜 사람이야. ”
“ 이 개자식이! ”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아르투르가 왕재수를 거칠게 떠밀더니 곧장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베르닌이 단원들을 헤치고 뛰어들어 왕재수를 뒤에서 낚아챈 후였다. 베르닌은 두 팔로 아르투르의 주먹을 막으면서 급하게 소리쳤다.
“ 아르투르, 왜 그러는 거야! 이러면 안 되지! ”
“ 넌 저리 비켜! 저 쬐끄만 반동분자 새끼 죽여 버릴 거야! ”
“ 진정해! 오해가 있었던 거 같은데 그래도 폭력을 쓰면 안 돼! 비겁하잖아, 얜 혼잔데 너희는 이렇게 여럿이서 애를 둘러싸고... ”
“ 저 개새끼가 지금 뭐라고 하는지 못 들었어? 우릴 모욕하고 당을 모욕했잖아! 게다가 우리 여자들을 건드리고 희롱하고! ”
“ 말도 안 돼! 얜 그런 애 아니야. 여자들한테 비신사적인 행동 같은 거 안 한단 말이야. 야, 너 오해 산 거 있으면 빨리 사과해! ”
베르닌은 근육질의 아르투르를 간신히 두 팔로 밀어붙이며 왕재수에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왕재수도 굉장히 화가 났는지 꼼짝도 안 했다. 까만 눈을 번쩍번쩍 불태우며 으르렁거렸다.
“ 내가 왜! 난 아무 잘못도 안 했어. 내 할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저 얼간이들이 와서 시비 걸고 개소리를 하잖아. ”
“ 저 더러운 자식이 어디서 누굴 얼간이라고! ”
다른 남자 하나가 벌컥 화를 내면서 왕재수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리자가 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베르닌은 심장이 철렁했다. 하지만 왕재수는 워낙 민첩했기 때문에 잽싸게 옆으로 피해서 다행히 맞지는 않았다. 더욱 화가 난 남자들이 덤벼들려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제발 그만 좀 해요! 미샤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전부 오해란 말이에요! ”
나쟈였다. 얼굴이 빨개져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정신없이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와 왕재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르투르가 나쟈의 팔을 덥석 잡더니 마구 잡아 흔들었다.
“ 나젠카! 어떻게 저 더러운 자식 편을 드니! 넌 노동영웅이야! 다른 여자애들이 다 저 기생오라비 같은 반동분자한테 홀려서 헤롱거려도 너만은 그러면 안 되지! 절대 용서 못해! 감히 너한테 손을 대다니! 저 자식 우리가 죽여 버릴 거야! ”
“ 손 댄 적 없어요! 그런 거 아니란 말이에요! ”
“ 뭐가 아니야! 저 자식이랑 문 걸어 잠그고 한 방에 있었잖아! 계속 저 놈이랑 따로 속닥거리고... 아까 파티에도 안 오고 저 자식 방에 들어가는 거 티모페이가 다 봤어! 너 지금 저 새끼한테 홀려서 제정신이 아니야! 제발 정신 차려! 넌 우리 자랑이야, 노동영웅이고 우리 농장에서 제일 예쁜 애란 말이야! 어떻게 저런 더러운 반역자랑... ”
“ 그런 거 아니라고요! 나는, 나는... 그러니까 미샤 방에 갔던 건 맞아요. 하지만 얘기하러 갔던 거란 말이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
나쟈가 바들바들 떨었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르투르는 더욱 화를 냈다.
“ 뭐가 아니야! 울기까지 하고! 이 새끼가 진짜 나쁜 짓 한 거네! 그러니까 말도 못하지! 죽여 버릴 거야, 감히 우리 나쟈를! ”
“ 어휴, 진짜 시끄럽네. 침도 엄청 튀기고. 우린 그런 사이 아니야. 근데 그런 사이면 뭐, 어쩔 건데! 네깟 것들이 뭔데 성인 여자의 사생활을 이래라저래라 간섭이야! 나쟈가 노동영웅인 게 뭐! 그게 나쟈가 잘해서 된 거지 너네가 해준 거냐? 꼭 못난 놈들이 잘난 여자 앞에서 수탉 노릇하며 으스대지. 나쟈가 누구랑 놀든 말든, 어디서 뭘 하든 너희가 무슨 상관이야! 나쟈 좋을 대로 하면 되는 거지! ”
베르닌은 겁이 나서 왕재수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르투르가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려는 순간 나쟈가 결심한 듯 단호하게 외쳤다.
“ 나 농장 떠날 거예요! 다들 그렇게 아세요! 그리고 미샤한테 시비 걸지 말아요!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 부끄러운 줄 아세요! ”
순간 모두가 멍해졌다. 아르투르가 더듬거렸다.
“ 나젠카... 그게 무슨, 무슨 소리야... 농장을 왜 떠나... 너 설마... 설마 진짜 이 자식이 너랑 결혼이라도 해줄 거라고 믿는 거야? 이런 반동분자 개자식이? 이런 자식은 바람둥이야... 여자를 후리고 그 자리에서 버린단 말이야... 이 자식이 얼마나 더러운 놈인지 넌 상상도 못 해! 아무 데나 꼬리치고 다니고... 넌 순진해서 아무 것도 몰라! ”
“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나, 나 가브릴로프로 갈 거예요! 거기 극장 들어가서 무용수 될 거예요! 아까, 아까 오디션 봤어요. 미샤가 나한테 재능 있다고 했어요, 발레단에 들어오라고 했단 말이에요. 나 춤추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발레리나 되고 싶었는데 우리 동네는 시골이니까 방법이 없었다고요... 항상 텔레비전 보면서 혼자 연습했어요. 미샤가 그랬어요, 정규 교육 안 받았는데 이렇게 추는 건 재능이라고... 나한테 타고 났다고 했어요. 아무도 나한테 그런 말 해준 적 없었어요. 양계장 온도만 잘 맞추고 닭들 잘 돌보라고, 계란 몇 개 낳았냐고만 물어보고... 툭하면 노동영웅 타령만 하고. 그깟 노동영웅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그건 어쩌다 운이 좋아서 닭들이 계란을 많이 낳은 것뿐이에요! 닭이랑 계란은 신물이 나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좀 해요, 미샤한테 시비 걸지 말라고요! ”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르투르는 얼굴이 하얘져서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 나쟈! 너 미쳤어? 그런 헛소리를 정말 믿는 거야? 저 자식은 너 꼬시려고 거짓말하는 거란 말이야! 넌 순진해서 남자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재능은 무슨! 너 벌써 스무 살도 넘었잖아! 이제 와서 무슨 발레를 시작해! 그런 건 어릴 때부터 배워야 하는 거야! 저 자식 말 믿으면 안 돼! 너 끌고 가서 갖고 놀다가 싫증나면 버릴 거라고! ”
그때 왕재수가 나쟈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서 자기 뒤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아르투르에게 똑바로 걸어갔다. 거의 코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다가갔다. 두 눈에서 빨간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아르투르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왕재수는 딱 두 마디만 했다.
“ 나쟈는 발레리나가 될 거야. 그만 꺼져. ”
베르닌은 아르투르가 왕재수의 목을 비틀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에 띄는 작대기를 하나 집어 들고 여차하면 휘두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투르는 그러지 않았다. 이를 갈며 왕재수를 확 쏘아보았지만 갑자기 얼굴이 파래지면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청년단원들이 부르르 떨면서 왕재수에게 덤벼들려고 했지만 아르투르는 한 손으로 그들을 저지하더니 나쟈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너 정말 농장 떠날 거야? 부모님이랑 동생들도 다 버리고? 우리랑 친구들도 다 소용없어? 이 자식 말 한 마디만 믿고 가겠다는 거야? ”
“ 네. 믿어요. ”
아르투르는 멍하게 나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쩐지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 야, 가자. ”
“ 하지만... 저 새끼 손 안 봐줘? 우리 나쟈를 꼬드겨서 지금... ”
“ 알아서 하라고 해! 나쟈 쟤 지금 정신 나갔어. 나중에 피눈물 나보면 정신 차리고 돌아오고 싶겠지. 너 생각 잘해, 나쟈. 그 때 가서 우리가 안 받아주면 정말 갈 곳 없을 거야. ”
나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그만 두 주먹을 꼭 쥔 채 왕재수의 곁에 서서 파들파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아르투르는 입안으로 욕을 하더니 청년단원들과 함께 오솔길로 가버렸다. 베르닌은 그가 끝까지 왕재수 쪽에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아르투르 일당이 사라지고 나자 나쟈가 심호흡을 하더니 왕재수를 보면서 얼굴을 확 붉힌 채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죄송해요. 내일 떠나신 후에 조용히 얘기하고 정리하려고 했는데. 괜히 봉변당하게 만들고... 괜찮으세요? ”
“ 네가 왜 미안해. 별 일 없었는데. 근데 내일 우리랑 같이 안 가도 괜찮아? 쟤들이 너 못 가게 하고 괴롭히면... ”
“ 안 그럴 거예요. 전 아르투르를 잘 알아요. 우리 사촌 오빠거든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어요. 저렇게 나오면 포기한 거예요. 앞으로는 절대 감독님한테 못되게 안 굴 거예요. 겁먹었어요. ”
리자가 끼어들었다.
“ 설마 그 깡패 같은 아르투르가 미샤한테 겁먹어서 그랬을라고. 나쟈, 네가 단호하게 얘기하니까 그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 거야. ”
“ 아니야, 리자. 아르투르는 여자의 의지 같은 건 안 믿어. 그 사람은 감독님 때문에 포기한 거야. 주눅 들었어요. 완장 차고 난 후에 저러는 거 정말 처음 봤어요. 고마워요, 미샤. ”
왕재수는 나쟈의 손을 꼭 잡아주더니 어쩐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 늦어도 다음 주 토요일까지는 와야 돼. 발레학교에 얘기해놓을 거야. 기숙사도 잡아 놓을게. 넌 기초가 없으니까 적어도 일 년은 배워야 돼. 재능이 있다고 다 되는 건 아니야. 진짜 열심히 배우고 연습해야 돼. 발 다 까지고 물집 나고 찢어질 거야. 일단 오면 놀지도 못하고 데이트 같은 것도 못해. 시작이 늦었으니까 그만큼 죽어라고 노력해야 돼. ”
나쟈의 커다란 눈망울에 근심이 어렸다.
“ 저 진짜 죽어라고 할 거예요. 근데 정말 할 수 있을까요? 열 살 때부터 시작한다면서요. 전 벌써 스물한 살인데... ”
“ 왜 못해. 노동영웅이라며. 닭이랑 달걀 신물 난다면서도 노동영웅인지 뭔지 됐는데 좋아하는 춤추려고 노력하는 건데 왜 못하겠어. 너 내 말 잘 들어, 나쟈. 할 수 있을까, 못할 거야라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못해. 춤은 생각으로 추는 거 아냐. 좋아서 추는 거고 하고 싶어서 추는 거고 몸에서 우러나서 추는 거야. 너한테 세 개 다 있어. 그러니까 극장으로 와. ”
나쟈가 왕재수를 와락 포옹했다. 뺨에 뽀뽀를 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 고마워요, 미셴카. 다음 주에 봐요! 전 이제 타마라에게 가볼게요. 아까부터 궁금해 하더라고요. 토냐랑도 친해졌어요. ”
“ 나도 같이 가, 나쟈. 타마라 언니 나랑 같은 방이거든. 잘 자요, 미셴카. 잘 자요, 다냐. 내일 봐요. ”
리자가 나쟈의 팔짱을 끼고 뛰어갔다. 베르닌은 여자들을 바래다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마침 저편에서 무용수들이 산책을 나와서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기 때문에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는 그제야 왕재수 쪽으로 돌아서서 폭풍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 야! 너 정신이 있냐 없냐!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했던 말 잊었어? 여기 사람들 성정 진짜 거칠단 말이야! 골수 공산주의자에... 가만히 있어도 너한테 시비 걸 판에! 나쟈도 그렇지, 몰래 오디션 보고 몰래 진행했어야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잖아! 왜 방으로 데려가고 문을 걸어 잠가! ”
“ 연습실에도 그 망할 청년단원들이 와 있었단 말이야.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수첩에 적고 있었어. 타마라랑 데니스가 잠깐 막아줘서 간신히 나쟈 오디션은 봤는데 인터뷰까지 할 여유가 없었다고. 그래서 방으로 데려간 거야. 내 방도 아니었어, 내 방에 도청장치 있었다고. 그래서 네 방으로 갔었어. ”
“ 엥, 그랬구나. 너 그때 얘기한 애가 나쟈였던 거야? 오디션 봐야 한다던. 나쟈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온 거야? "
“ 응. ”
“ 그렇게 많이 아파놓고. 힘들어서 코피까지 흘리면서... 여자애 하나 데려가려고... ”
“ 내가 그랬잖아, 타고 난 애는 정말 찾기 힘들다고. 나쟈는 보물이야. 꼭 데려가야 돼. ”
“ 그치만, 기초도 하나도 없다며. 일 년 이상 발레학교에 넣을 거라며... ”
“ 현대무용이 아니고 발레니까. 기본 동작도 모르고 토슈즈 한번 안 신어봤으니까 어쩔 수 없어. 안타깝다... 빨리 찾아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좋아. 정말 좋아. 시골 와서 처음이야, 이렇게 좋은 거. ”
왕재수가 환하게 웃었다. 베르닌은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아프게 당겨왔다.
“ 숨겨진 원석을 찾아낸 게 그렇게 좋아? ”
“ 당연하잖아! ”
“ 그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거야? 여기 와서 좋았던 게? ”
“ 바보, 좋을 게 뭐가 있어! 시골인데! ”
“ 어... 하긴 그렇지. 넌 어마어마하게 잘 나가던 애였으니까. 대도시... ”
“ 아, 있어. 로만. 꼭 안아주면 참 좋아. 보고 싶다... ”
베르닌은 이상하게 조금 섭섭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르투르가 멱살을 잡는 통에 떨어져 나뒹굴던 모자를 주워 왕재수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자. 내일 새벽에 출발하는데. ”
“ 응. ”
그들은 별 말 없이 저수지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하얗게 떠오른 보름달이 굉장히 환했다. 갑자기 차가워진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왕재수가 패딩 지퍼를 올리고 턱 언저리까지 칼라를 세웠다. 그 전에는 훨씬 추울 때도 코트 단추를 채우지 않던 애였다. 옆에서 보니 광대뼈가 도드라져 있었고 두툼한 패딩 코트 사이로도 자작나무처럼 야윈 몸의 윤곽이 드러났다. 베르닌은 독사과와 스페호프, 그리고 아르투르의 욕설을 생각했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분노를 느꼈다.
그때 왕재수가 말했다.
“ 아, 하나 더 있다. ”
“ 뭐가? ”
“ 좋은 거. 저녁밥. 네가 해주는 거. ”
“ 뻥치지 마. 툭하면 투정하면서. 레닌그라드에서 엄청 좋은 것만 먹고 다녔다면서. ”
“ 그래도 집에서 저녁은 못 먹었단 말이야. 옛날엔 파트너 발레리나랑 같이 살았는데 걔나 나나 춤추느라 바빠서 요리는 못했으니까. ”
“ 너 사귀는 남자들 많았잖아. 이집 저집에서 저녁밥 안 해줬냐? ”
“ 바보. 잠자리만 하고 나오는 거지. 저녁밥 얻어먹고 같이 살면 눈에 띄잖아. 잡혀가라고. 나 학교 다닐 때부터 감시요원들 붙어 있었는걸. 가끔 친구들 집에 가서 먹긴 했지만 그래도 그거랑 달라. 지금은 집에 오면 네가 밥 주잖아. 그거 좋아. ”
“ 그러니까 우리 동네 와서 좋은 건 잠자는 사람하고 밥 주는 사람인 거네!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
“ 뭐가 너무해. 시골인데 뭘 더 바라니. 그나마 있는 게 어디야. ”
왕재수가 기침을 했다. 베르닌은 자기 목도리를 풀어서 왕재수의 목에 한 바퀴 둘러 주었다. 숙소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왕재수가 목도리를 돌려주었다. 칼라 지퍼도 내렸다. 흐릿한 전구 불빛 아래에서 야윈 얼굴이 더 창백하게 보였다. 눈만 새까맣게 반짝거렸다. 불빛이 반사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까맣고 깊은 눈동자 저 너머에서 조그맣고 새빨간 불꽃이 이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베르닌은 아르투르가 왜 고개를 돌렸는지, 왜 더 이상 왕재수 쪽을 바라볼 수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복도로 나왔을 때 베르닌이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 너 그런 거 아니야. ”
“ 뭐가? ”
“ 아르투르가 말한 거. ”
“ 뭐, 반동분자? 반역자? 한두 번 듣는 소리도 아닌데 뭐. ”
“ 너는 더러운 놈이 아니야. 절대 아니야. ”
“ 너한테는 그게 중요하냐? 그냥 욕인데. ”
“ 하여튼! 국장도 그렇고 다들... 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
“ 그런가. 근데 다 맞을지도 몰라. 아무 것도 모르는 건 너지. 넌 책상물림이고 순진하니까. 나 반동분자 맞을 걸. 반역이 뭔진 모르겠는데, 난 공산주의 싫어하니까 맞나보지 뭐. 더러운 놈인 건, 뭐 그것도 맞겠지. 나는 놀아나는 아저씨들이 많잖아. ”
베르닌은 말문이 막혔다. 잠시 왕재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막 그가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라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방문 앞에 멈춰 섰다. 열쇠로 문을 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 나 잔다. 아침에 깨워줘. ”
“ 어, 그래. 잘 자. ”
“ 내일 집에 가면 몇 시 정도 될 거 같아? ”
“ 글쎄. 빨라도 밤 아홉시? ”
“ 바보, 눈 좀 잘 치우지. 그럼 기차가 왔을 텐데. ”
“ 나 진짜 열심히 치웠는데. 자갈도 얼마나 많이 깔았다고. ”
“ 하긴 그랬겠지. 잘 자. ”
왕재수가 문을 닫았다. 베르닌은 잠시 복도에 서 있다가 한숨을 쉬고는 자기 방으로 갔다. 룸메이트인 보리스는 다른 봉사단원들과 술을 마시는 모양인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패딩을 벗고 주머니에서 왕재수가 준 선글라스와 선크림 튜브를 꺼냈다. 샤워를 하고 나서 거울을 보니 얼굴은 전날보다 더 타지는 않았다. 여전히 안경 자국만 나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그는 보드카를 마시고 싶어졌지만 밖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무척 피곤했지만 그날 밤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아마도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달빛 때문인 것 같았다. 아니면 바람 소리. 그는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다.
FIN
- 2015. 4. 25 ~ 5.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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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자의 본명 리자베타 칸페트나야는 '칸페트이', 즉 사탕, 캔디에서 따왔다 :)
리자가 왕재수를 처음에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라고 부르는 것은 존칭 표현이다. 러시아 이름은 이름 + 부칭(아버지 이름에서 파생됨) + 성으로 구성되는데 이름과 부칭을 함께 부르면 존대 표현이 된다. 왕재수의 본명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야스민으로, 친한 사이에서는 애칭인 미샤, 미셴카, 미셰츠카, 미슈카 등으로 부르지만 격식을 갖춰 부를 때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가 된다.
(본편이든 서무 시리즈에서든 주인공 미샤는 자기 이름을 미샤라고 불러주기를 원하는 편이고 저렇게 격식 갖춰서 부칭까지 부르면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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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영웅은 내가 지어낸 게 아니고 원래 소련 시절에 있었던 서훈이다. 무슨무슨 영웅이 참 많았다. 모성영웅 이런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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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후반부는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이나 왕재수에 대한 접근이 본편과 좀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이거 쓰고 나서는 진짜 본편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24편을 쓰고.. 지금은 25편 후반부를 쓰다가 막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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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렇게 하여 우리의 (바보 멍충이) 단추는 리자랑 아무 일도 없이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가고... 이야기는 24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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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주시면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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