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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서무의 슬픔 시리즈는 계속된다~

 

20편은 지난 19편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드디어 공연은 코앞으로 닥치고.. 무대라면 아무 것도 모르는 베르닌은 과연 돈키호테 역을 잘 소화해 낼 수 있을지! 그리고 왕재수는 스페호프의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제대로 공연을 올릴 수 있을지~~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왕재수는 야심차게 고전발레 돈키호테를 리메이크해 무대에 올리려고 하고 스페호프는 공연을 망치기 위해 갖은 술수를 동원해 배역을 맡은 무용수들을 시골에 보내버린다. 이에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과연 왕재수는 공연을 제대로 올릴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생애 최초로 무대에 올라가게 된 베르닌, 예명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는 문제의 돈키호테를 소화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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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0

 

 

 

서무의 슬픔

-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토요일에 베르닌은 든든하게 아침 식사를 한 후 10시쯤 극장에 갔다. 어디로 가야 하나 두리번거리다 제1 연습실로 갔다. 남녀 군무 연습이 한창이었는데 슬며시 들어가자 이즈마일로프가 그에게 손짓을 했다.

 

“ 하를람피, 자넨 3연습실로 가게. 감독님이 2막 지도해준다고 하니까. ”

 

 

그래서 베르닌은 3연습실로 갔다. 왕재수는 주역과 중요 조역 무용수들을 데리고 동작을 교정해주고 있었다. 언제 그렇게 피곤해했느냐는 듯 활기차게 박자를 세고 이해할 수 없는 프랑스어 용어를 쏟아내면서 무용수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토냐는 이미 멋쟁이 감독님에게 넋이 빠지도록 반해버린 것 같았다. 토슈즈가 찢어져 달아날 정도로 열심히 돌고 뛰었다. 메인 투우사로 발탁된 가릭도 어제보다 훨씬 몸놀림이 유연해지고 보자기도 휙휙 잘 돌렸다. 다른 무용수들도 열심이었다. 잠시 후 베르닌을 발견한 왕재수가 가까이 오라고 했다.

 

 

너 이리 와. 산초랑 맞춰보는 건 좀 있다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봐줄 거고, 인형극장 뒤집는 거랑 풍차 장면 먼저 나랑 해 보자. 풍차 매달리는 건 미리 해봐야 되니까 지하로 내려가서... 토냐, 막심은 아직 연락 없어? ”

 

“ 네, 아직이요. 이상하네요. 전화도 안 받고... 분명히 오늘 8시까지 온다고 했거든요. 저 아직 1막이 잘 안돼서 감독님 오시기 전에 먼저 맞춰보기로 했는데... ”

 

“ 알았어. 일단 솔로 파트 연습하고 있어. ”

 

 

왕재수는 베르닌을 데리고 지하의 무대 아래로 갔다. 베르닌은 거대한 풍차 모형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가까이서 보니 엄청나게 컸다. 뒤쪽에는 복잡한 장치가 되어 있었다. 왕재수가 뭔가를 만지작거리자 풍차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입을 벌리고 구경하다 문득 겁이 났다.

 

 

“ 야, 여기 매달리란 말야? 이거 엄청 크잖아! 되게 높아!

 

“ 응, 근데 반쯤 돌아가다가 커튼 내려올 거야. 걱정하지 마. 뒤에 매트도 다 깔아놓을 거니까. 이렇게 하는 거야. ”

 

 

왕재수가 음악을 틀더니 소품용 창을 들고 풍차로 돌진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날개 끝의 손잡이에 팔을 걸치더니 어깨와 가슴을 기대고 매달렸다. 한 손으로는 창을 휘두르고 나머지 한 팔과 몸으로 날개에 의지한 채 온몸을 퍼덕이며 천천히 올라갔다. 반쯤 올라갔을 때 왕재수는 창을 던지더니 훌쩍 뛰어내렸다. 베르닌은 그가 다칠까봐 급하게 뛰어갔지만 물론 숙련된 왕재수는 가볍게 착지했다.

 

 

“ 어... 난 너처럼 못 내려와... ”

 

“ 네가 올라갈 땐 아까 정도에서 멈추면서 막이 내릴 거야. 그리고 나면 날개가 도로 내려오니까 넌 그냥 매달려 있기만 하면 돼. 혹시 놓치더라도 뒤에 매트 다 깔아놓으니까 위험하지 않아. 한 번 해보자. 풍차는 내가 조작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

 

 

그래서 베르닌은 풍차로 돌진해 날개에 매달렸다. 막상 매달리니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날개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빠른 것 같고 몸이 붕 뜨는 것이 무서워서 도저히 왕재수처럼 창을 휘두르고 몸을 버둥거릴 수가 없었다. 죽은 듯이 뻣뻣하게 매달려 있는데 잠시 후 풍차가 멈추더니 거꾸로 내려왔다. 바닥에 내려오자 좀 싱겁다는 생각이 들면서 무서워했던 자신이 창피했다.

 

 

“ 생각보다 쉽지? 이번엔 한번 움직이면서 해봐. ”

 

 

베르닌은 왕재수의 독려를 받아가며 연습을 했다. 오히려 마임을 하는 것보다 더 쉬웠다. 다섯 번 만에 꽤 잘 소화했다는 칭찬을 받았고 내친 김에 인형극장 부수는 연기도 배웠다. 그것도 생각보다 잘 된 것 같았다.

 

 

“ 음, 넌 의외로 폭력적인 연기를 잘 하는구나. 국장한테 맺힌 게 많아서 그런가. 하긴 저번에 보니까 의자도 잘 휘둘렀지. 잘했어. 이제 티무르 보리소비치한테 가서 나머지 배워. 오후에 다 같이 리허설해 볼 거야. ”

 

“ 어, 그래. 근데 넌 맨날 나보고 바보 멍충이라 하면서 극장에선 안 그러는구나. ”

 

“ 애초부터 넌 프로가 아니니까 기대치가 낮거든! ”

 

“ 야, 그럼 역시 내가 못한다는 거네. ”

 

“ 아니야,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나아.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교묘하게 조종당하는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뿌듯하기도 했고 재미도 있었으므로 슬슬 신이 나서 빠르게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왕재수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터벅터벅 따라왔다.

 

 

“ 야, 조심해. 거기 계단 턱 튀어나왔어. 앗, 그럴 줄 알았어! ”

 

 

베르닌은 발을 헛디딘 왕재수를 급하게 붙잡아주었다.

 

 

“ 너 왜 그래? ”

 

“ 불안해서 그래. 막심이 안 와서. ”

 

“ 막심이 누구야? ”

 

“ 바질. ”

 

“ 아, 어제 그 말총머리 남자애? ”

 

“ 응, 되게 열심인 애거든. 벌써 왔어야 되는데. ”

 

“ 어제 늦게까지 연습했잖아. 피곤해서 늦잠 자는 거 아닐까? ”

 

“ 스무 살밖에 안된 앤데. ”

 

 

계단을 다 올라왔을 때 류드밀라가 헉헉거리며 뛰어왔다.

 

 

미셴카! 큰일났어요!

 

“ 왜 그래요, 류다? ”

 

“ 방금 의사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막심이 아침에 병원으로 찾아왔대요. 근데 들어오자마자 막 토사곽란하고... 배가 아프다고 바닥에 뒹굴더래요. 의사 선생님은 일단 응급조치를 해줬대요. 근데 계속 토한대요. 좀 전에 정신 차리자마자 막 당신을 찾더래요. 울면서 극장에 가야 한다는 걸 의사 선생님이 못 가게 막고 전화하셨어요. ”

 

 

베르닌은 왕재수가 기절할까봐 걱정이 돼서 급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갑자기 전날 저녁 스페호프가 한 가지 잊은 게 있지만 밤에 처리할 거라고 했던 말이 퍼뜩 생각났다.

 

 

왕재수는 기절하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더니 제일 가까운 사무실로 들어가 스타브로프의 병원에 전화를 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울고 싶어진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어떻게 된 거야? 막심 많이 아파? 못 온대? ”

 

급성 식중독이래. 막심 말로는 어젯밤까진 괜찮았고 새벽에 목말라서 우유를 한 잔 마셨는데 맛도 이상하지 않았대.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우유에 나쁜 게 섞여 있었던 것 같다고. 자세한 건 피 검사 해봐야 한대.

 

“ 뭐야? 그건 독살 시도... ”

 

“ 그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닌데 하여튼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한대. 죽이기까지 하면 일이 너무 커지니까 딱 며칠 아플 정도만 약물 썼겠지. 더러운 놈들. 다 나 때문이야. 불쌍한 막심. 얼마나 아플까. ”

 

 

왕재수는 매우 상심한 것처럼 보였다. 의자에 주저앉더니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쉬었다. 베르닌은 어쩔 줄을 몰랐다.

 

 

“ 저... 야, 그거 네 잘못 아니야. 우리 국장이 나쁜 거야. 자책하지 마. 막심 괜찮아질 거야. ”

 

그냥 공연 접을 걸 그랬나봐. 괜히 애들 끌려가서 눈 치우게 해서 근육 미워지게 만들고, 막심은 아프고. 너네 국장은 나 때문에 그러는 건데 공연히 애꿎은 애들만 고생하고... 어중이떠중이들 억지로 무대에 올리고... ”

 

야, 뭐가 어중이떠중이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지금 저 위에서 땀 빼고 발이 닳게 연습하는 애들은 뭐가 되니! 어제 토냐 보니까 처음으로 주역 맡았다고 엄청 좋아하던데! 애들 실력 좀 떨어지면 어때! 열심히 하잖아! 너 믿고 그렇게 죽어라 하고 있는데! 넌 천재라서 그런 거 몰라! 재능 좀 없어도 열심히 하면 그 걸로도 족하다고 한번이라도 생각해주면 안 돼? ”

 

 

왕재수는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안 돼. 재능은 재능이야. 열심히 하는 건 당연히 중요하지. 90퍼센트까지는 커버할 수 있어. 그치만 나머지 10퍼센트는 안된다고. 그 10퍼센트 때문에 무대가 달라져. ”

 

“ 공연 보러 오는 사람들은 90퍼센트만 돼도 기뻐할 거야! ”

 

“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야, 다닐. 이건 더하기 빼기 산수가 아니거든. ”

 

난 그런 거 몰라! 위에서 애들 죽어라 연습하는 것만 알아! 나도, 나도 웃기는 이름 달고 연습하잖아. 근데 네가 이러면 어떡하니. 한 번만 더 쟤들 어중이떠중이라고 해봐. 한 대 팰 거야!

 

“ 언제는 나 때릴 데 하나도 없다고 하더니. ”

 

 

왕재수가 목을 울리며 쿡쿡 웃었다. 베르닌은 이 와중에 웃는 왕재수 때문에 더럭 겁이 났다.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졌나 싶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고개를 들더니 훨씬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 점심 먹어야겠어. 같이 가자. ”

 

“ 어... 아직 점심시간 안됐어. 열한시 반인데. ”

 

“ 좀 일찍 가지 뭐. ”

 

 

왕재수는 밖으로 나가더니 류드밀라를 불렀다.

 

 

“ 류다, 위에 있는 사람들한테 열두 시 되면 점심 먹으러 가라고 해요. 한 시 반부터 다시 연습 시작한다고. 그리고 다섯 시에 스페이스 리허설 하는 거 스태프들한테 다시 환기시켜 주고요. 드레스 리허설은 내일 열 시예요. ”

 

 

 

*    *    *

 

 

 

 

왕재수는 베르닌과 함께 자주 가던 박물관 앞 식당에 갔다. 그러더니 지금껏 베르닌이 봐온 중 가장 많은 음식을 주문했다. 마카로니 샐러드에 살랸카, 구운 감자, 쇠고기찜, 우유, 심지어 초콜릿 무스까지 주문했다. 베르닌은 이 녀석이 왜 자기한테 묻지도 않고 2인분을 시키나 했지만 왕재수는 그에게 뭘 먹을 거냐고 물었다.

 

 

“ 어... 나, 나는 감자수프랑 사과소스 돼지구이. 근데 너 왜 이렇게 많이 시켜? 누가 또 와? ”

 

“ 안 와. 내가 다 먹을 거야. ”

 

“ 으잉? ”

 

 

음식이 나왔다. 왕재수는 먹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꼭꼭 씹어서 열심히 먹었다. 무슨 숙제를 하는 아이처럼 순서대로 점진적으로 꾸역꾸역 먹었다. 왕재수가 쇠고기찜을 먹다가 목에 걸려 기침을 하기 시작했을 때 베르닌은 우유를 밀어주고 접시를 빼앗았다.

 

 

너 그만 먹어!

 

“ 언제는 많이 먹으라고 하더니! ”

 

“ 이렇게 많이 안 먹었었잖아! 너 지금 스트레스 받아서 막 먹는 거잖아! 이러다 탈 나! ”

 

“ 아니, 탈 안 나. 다 필요한 만큼 계산해서 먹는 거야. ”

 

“ 진작 좀 이렇게 먹었으면 참 좋았겠네! 너 설마 지금 그 초콜릿 무스까지 먹으려는 거야? ”

 

“ 왜, 먹고 싶어? 잘라줄게 먹어. ”

 

 

왕재수가 포크로 초콜릿 무스를 반토막내서 베르닌 앞으로 밀어주었다.

 

 

“ 아니, 내가 달라는 게 아니고... ”

 

“ 먹어둬. 오후에 연습 많이 해야 할 테니까. 무용수들이랑 합도 맞춰봐야 하니 당분이 필요할 거야. ”

 

 

베르닌은 디저트를 먹었다. 엄청나게 맛있었다. 혀가 녹는 것 같았다. 왕재수는 무스를 한 입에 긁어먹은 후 물을 한 모금 꿀꺽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고 나왔다. 극장으로 돌아오면서 베르닌이 짜증을 냈다.

 

 

“ 야, 너 왜 내 것까지 돈 내? ”

 

“ 내가 고용한 배우라서. ”

 

“ 출연료도 안 주면서 밥 한 끼 사주는 걸로 때우냐! ”

 

“ 출연료 줄 거야.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앞으로. ”

 

“ 엥, 정말? ”

 

“ 당연하잖아! 배우로서 무대에 출연하는데 당연히 대가를 받아야지! ”

 

“ 어... 난 그냥 땜빵이잖아. ”

 

아니야! 넌 땜빵이 아니야. 그런 마음가짐 따위 버려! 너는 돈키호테야. 그 역 피땀 흘려 연습해서 당당히 얻은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무대 올라가! 자기가 땜빵이란 생각하면 정말 땜빵밖에 안 돼!

 

“ 그런가... 근데 자꾸 푸고비체프라고 하면 웃겨서... ”

 

“ 웃지 말란 말이야. 이거 봐, 포스터랑 팸플릿 벌써 나왔어. 너 이름 인쇄되어 있잖아. 돈키호테 :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

 

“ 어, 정말이네. ”

 

 

베르닌은 홀린 듯이 포스터를 응시했다. 포스터의 중앙에는 바질과 키트리가 화려한 포즈를 취하고 서 있었지만 배경으로는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었다. 아랫단에 배역과 무용수들 이름이 씌어 있었는데 토냐와 막심에 이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무려 세 번째에 있었다. 베르닌은 멍해졌다. 물론 자신의 진짜 이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홀했다.

 

 

왕재수가 그의 등짝을 탁 쳤다.

 

 

“ 야, 정신 차려. ”

 

“ 와, 나 이런 적 한 번도 없었거든. 학예회 때도 연극이나 발표회 같은 거 안 나가봤어. 나보고 책상물림이니까 못할 거라고 역을 안 줬어. ”

 

“ 흥, 바보들, 좋은 기회 놓쳤네. 너 잘만 하는구만. ”

 

 

베르닌은 포스터와 팸플릿을 한 장씩 챙겼다. 둘둘 말아서 가방에 넣어놓고 연습실로 갔다. 왕재수는 그에게 조금 쉬다가 이즈마일로프에게서 추가 지도를 받고 산초를 비롯한 나머지 무용수들과 모든 장면을 하나하나 맞춰보라고 했다.

 

 

“ 어, 근데 1막도 그렇고, 3막 자살 쇼 때도 그렇고 바질이 있어야 내가 연기를 할 수 있잖아. 막심 못 온다며. ”

 

“ 다른 애 넣을 거야. 연습시켜서. 오늘 스페이스 리허설 때까진 일단 안톤한테 바질 역할 해달라고 할거니까 그 사람이랑 맞춰봐. ”

 

“ 어, 그 안무 선생님? 마흔다섯은 되지 않았어? ”

 

“ 그러니까 그림만 맞춰보라는 거지. 연습하고 있어, 난 토냐 지도 좀 해줄 테니까. 걔 올 때까지 눈 좀 붙여야겠어. 있다 봐. ”

 

 

왕재수는 감독실로 가더니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먹고 나서 절대 곧장 눕지 않는 애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조금 불안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든지 몸이 아주 힘들든지 둘 중 하나였다. 어쨌든 왕재수가 조금이라도 자는 것은 좋은 일이란 생각에 그는 옷걸이에서 코트를 내려서 이미 잠든 왕재수의 몸 위에 덮어주고 나왔다. 문득 정오에 스페호프에게 전화하는 것을 잊었다는 생각이 났다. 드라마 극장 앞 전화를 쓰라고 했지만 다 귀찮았다. 못된 국장은 꼴도 보기 싫었다. 사무실 전화로 다이얼을 돌렸다.

 

 

스페호프는 공연이 어떻게 되고 있느냐, 바질 역을 구했느냐 하고 물었다.

 

 

“ 어, 그 바질이란 게 남자 주인공이라면... 그 역 맡은 무용수가 아프다고 하네요. 입원해서 못 올 것 같답니다. 그래서 야스민이 굉장히 충격을 받고... 지금은 소파에 드러누워 있어요. ”

 

하하하, 바로 그것이야! 됐어! 이제 됐어! 제깟 게 아무리 기를 써봤자, 주인공들이 다 없는데 뭘 어쩌겠나! 그럼 내일 공연은 취소되겠군! ”

 

“ 취소할 것 같지는 않고요. 무용수들에게 연습은 계속 시킬 모양입니다. ”

 

“ 뭐라고? 분명히 끌어다 쓸 놈들도 다 떨어져서 이제 죽었다 깨나도 방법이 없다고 레베진스키가 그랬는데! 연습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바질인지 뭔지 하는 놈팽이가 없는데! ”

 

“ 춤 가르쳐주는 선생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으로 쓴대요. ”

 

“ 선생이라면 나이가 많을 텐데? ”

 

“ 예, 40대 중반쯤 됐어요. 머리도 벗겨지고... ”

 

“ 흥, 그럼 잘해보라고 하게! 그런 어중이떠중이들 데리고 억지로 공연 올려봤자 엉망일 테니. 거지같은 무대를 보고 나면 그놈 떠받들고 귀여워하던 의원들도 이제 정신을 차리고 그 불여우 녀석을 헌신짝처럼 버리겠지. 차라리 공연 그대로 올라가는 게 우리한테는 더 좋아. 그럼 그 자식 이제 퇴물 된 거 알고 크레믈린에서도 손 뗄 테니까. 그러고 나면 그 불여우를 쥐도 새도 모르게...

 

“ 어,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이만 끊어야겠습니다. 사람들이 오는군요. ”

 

 

베르닌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국장은 왜 그렇게 왕재수를 미워할까 싶었다.

 

 

‘ 싸가지가 없어서 그렇지 나쁜 앤 아닌데. 자기 일은 열심히 하고. 하긴 국장은 자기한테 고분고분하게 굴어도 들들 볶으니... ’

 

 

그는 1연습실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도를 받고 연습을 하고 다른 무용수들과 맞춰보았다. 키트리에게 반해서 어설프게 춤을 추는 장면과 숲속 요정 나라 장면은 토냐가 올 때까지 한참 기다려야 했다. 토냐는 왕재수에게서 개인 지도를 받고 난 여파로 얼굴이 온통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게 옆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5시 스페이스 리허설 때 베르닌은 처음으로 극장 무대에 올라가 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무대 배경도 없고 의상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미 흥분이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근 2시간 30분 동안 연습을 하고 나니 공연의 흐름을 알 것 같았다. 스페이스 리허설은 중간 중간 왕재수의 코멘트로 중단되긴 했지만 그래도 큰 무리 없이 흘러갔다. 바질 역을 안톤이 추느라 모양새가 좀 이상하긴 했다. 리허설을 마친 후 가릭이 불안하게 물었다.

 

 

“ 감독님, 막심은 못 오나요? 식중독이라면서요. ”

 

“ 올 거야. 내일. 하지만 다들 비밀로 해줘. ”

 

“ 어, 왜요? ”

 

“ 그래야 더 이상 문제가 안 생겨. ”

 

“ 예. ”

 

 

베르닌은 무용수들이 스페호프의 공작에 대해 어디까지 눈치를 채고 있을지 궁금했다. 분위기를 보니 어느 정도 알고는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무용수들은 이제 그와도 친해져서 걸핏하면 ‘하를람피, 이쪽으로 와서 초콜릿 먹어요!’, ‘하를람피, 결혼했어요? 애들 몇 살이에요?’ 등등 말을 걸어왔고 ‘당신 외모만 보면 우리 원래 돈키호테 역 하던 선배보다 더 잘 어울려요’ 라고 칭찬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베르닌이 무용수나 배우 출신이 아닌 일반인이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뻣뻣하다고 타박하는 대신 가능한 한 도와주려고 애썼다. 호기심 많은 무용수들은 그의 직업이 뭔지도 궁금해 했다. 베르닌은 벌목공이라고 둘러댔다.

 

 

스페이스 리허설을 마친 후 왕재수는 무용수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집에 들어가 쉬라고 했다. 의욕에 찬 무용수들은 모두 밤늦게까지 남아서 더 연습하겠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왕재수는 단호했다.

 

 

“ 아니, 이제 가서 쉬어야 돼. 잘 자고 쉬어야 내일 무대에서 잘 할 수 있어. 빨리 가서 자. 오늘은 다른 데로 새지 말고 무조건 가서 씻고 자! ”

 

 

왕재수는 슬며시 다가온 베르닌에게도 이즈마일로프에게서 30분만 더 동작 교정 받은 후 가서 자라고 했다.

 

 

“ 너는? ”

 

“ 난 오늘 극장에 있어야 해.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자. ”

 

“ 안 돼! 어제도 바닥에 쓰러져 자는 거 내가 데려왔었는데. ”

 

“ 오늘은 로만이 있어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

 

“ 다른 애들은 집에 다 보내면서 왜! ”

 

“ 너네 국장이 또 무슨 짓할지 모르니까 극장에 남아서 지켜봐야 돼. ”

 

“ 그럼 나도 있을 거야! 너 혼자 남는다고 뭘 할 수 있다고! ”

 

“ 제발 집에 가서 쉬어라. 무대를 위해서니까. 아마추어나 초짜들이 제일 많이 하는 실수가 그거야. 전날까지 미친 듯이 연습하고 흥분해서 밤잠 다 설치고 막상 무대에 올라가서는 백지가 된다고. 그냥 가서 자. 이건 감독으로서의 명령이야.

 

“ 야! 난 KGB지 배우가 아닌데 왜 네 명령을 들어야 되니? ”

 

“ 너는 지금 다닐 베르닌이 아니라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니까 그렇지. 하를람피는 배우야. 그러니까 내 지시에 따라야 돼. ”

 

 

베르닌은 할 수 없이 왕재수의 지시에 따랐다. 이즈마일로프에게서 특히 어색한 부분을 교정 받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가면서 보니까 왕재수는 토냐와 꽃 파는 처녀 역 발레리나들을 데리고 한창 열띠게 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저러다 탈나지 싶었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냥 돌아갔다.

 

 

 

*    *    *

 

 

 

 

마침내 일요일이 되었다. 베르닌은 일찍 일어났다. 어쩐지 입맛도 없고 뱃속이 울렁거렸다. 따뜻한 차 한 잔만 마시고 집을 나섰다. 날씨는 꽤 싸늘했다. 극장 계단을 올라가는데 자기도 모르게 돈키호테처럼 팔을 휘두르며 휘적휘적 걷고 있었다.

 

 

연습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아직 8시도 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대 쪽으로 가보자 그쪽은 10시의 드레스 리허설 때문에 스태프들이 무대 배경을 설치하고 조명을 손보고 청소를 하는 등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왕재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감독실로 가보았다.

 

 

감독실은 비어 있었지만 복도 끝에 있는 욕실 문이 열려 있었다. 혹시나 해서 힐끗 훔쳐보자 왕재수가 등을 돌린 채 간이욕조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기도라도 하나 싶었지만 무신론자라고 얘기했던 게 생각났다. 헛기침을 했다.

 

 

“ 어, 음... 너 좀 잤어? ”

 

“ 아. 너 왔구나. 밖에서 좀 기다릴래? ”

 

 

베르닌은 간이욕조에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식겁했다.

 

 

“ 어! 야, 코피 나는 거야? ”

 

“ 아이 시끄러워. 조용히 좀 해. ”

 

“ 엄청 많이 나잖아! ”

 

 

베르닌은 급하게 휴지를 뜯어왔다. 코를 틀어막아 주려고 했다. 왕재수는 휴지를 빼앗아서 코를 감싸 누르며 투덜댔다.

 

 

“ 막아봤자 지금 소용없어. 그냥 이러다 멈출 거야. ”

 

이 바보천치야. 공연 한번만 더 올렸다간 사람 죽겠다! 자기 몸 축나는 건 생각도 안 하냐!

 

“ 나 이거 과로해서 나는 거 아니야. 넘어지는 바람에 코를 찧었어. 아파 죽는 줄 알았네. 그나마 내 잘생긴 콧대가 무사해서 망정이지. ”

 

“ 뻥치지 마! ”

 

“ 진짜야. 스텝이 꼬여서... ”

 

“ 스텝이 왜 꼬여! 애들 잡아주고 가르쳐주기만 하면서! ”

 

“ 언제부터 춤 잘 알았다고. 아, 이제 멈췄다. ”

 

 

왕재수는 찬물로 얼굴을 닦고 감독실로 나왔다. 베르닌은 욕조를 물로 씻어 내린 후 따라 나왔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왕재수를 훑어보았다. 얼굴이 창백했지만 그렇다고 어디가 많이 아파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운동복 바지를 입고 있는 것을 보니 더럭 걱정이 됐다. 차려입는 것에 목숨을 거는 놈이 저런 옷을 걸치고 있다니!

 

 

“ 너 막 일어난 거야? 그래서 잠옷 입고 있는 거야? ”

 

“ 아니, 나 6시에 일어났어. 8시 됐니? 우리 카페 열었겠다. 아침 먹으러 가야겠어. 너도 같이 가자. ”

 

 

왕재수는 옷을 갈아입거나 재킷을 걸치지도 않고 그대로 1층 카페에 내려갔다. 카운터로 가더니 속사포처럼 주문을 했다.

 

 

“ 우유 한 잔, 연어 샌드위치 한 개, 보르쉬 한 그릇, 사과 한 알, 차 한 잔. 초코바 두 개. 계산은 달아놔요. 이 사람도 같은 걸로. ”

 

“ 어, 나는 칼바사 샌드위치... ”

 

“ 하나는 칼바사 샌드위치로 바꿔줘요. ”

 

 

왕재수는 낡은 쟁반에 음식을 한 아름 담아서 창가 테이블로 갔다. 맨 먼저 보르쉬를 먹었다. 몇 숟갈 만에 보르쉬를 해치운 후 투덜댔다.

 

 

“ 에이, 진짜 맛없어. 깡통에 들어 있는 거 데워주는 것도 모자라 물까지 타고. 어떻게 변하지가 않는지. 우리 극장 카페 개선 좀 하라 해야겠어. 극장장이랑 얘기해야지. ”

 

“ 맛없는 줄 알면서 왜 시켰냐. 그것도 내 것까지... 진짜 맛없네. ”

 

“ 철분 섭취하려고. 아침에 피 봤잖아. ”

 

“ 난 코피 안 났는데! ”

 

“ 그래도 먹어둬! 아침에 뜨끈한 국물 좀 먹어야 몸이 풀리고 땀도 나. ”

 

 

아침을 먹은 후 왕재수는 연습실로 올라갔다. 스트레칭을 했다. 평소보다 훨씬 오랫동안 했다. 베르닌이 이제껏 보지 못한 동작들도 차근차근 했다. 잠시 후 로만 코즐로프가 악보와 바이올린을 옆에 낀 채 불쑥 들어왔다. 일자 눈썹에 콧수염을 붙이고 있는 베르닌을 보더니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인사를 했다.

 

 

안녕하시오,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 안녕하세요... ”

 

“ 허, 이 녀석 진짜 감쪽같네. 이름은 또 어디서 그런 걸 주워 붙였나. ”

 

“ 어, 내 얼굴 알아보겠어요? 들키면 안 되는데... ”

 

“ 아니, 우리 비둘기가 말해줘서 안 거야. 그 눈썹이 신의 한 수인데. ”

 

 

왕재수가 끼어들어 둘의 대화를 끊었다.

 

 

“ 로만, 연주 좀 해줘. ”

 

“ 어느 장면? ”

 

“ 솔로 전부. 그리고 1막의 3인무랑. 그거부터 해줘. ”

 

“ 너 정말 괜찮겠어? 무대 한참 안 올라갔잖아. 다치면 어쩌려고. ”

 

“ 그러게! 몸 다 굳었는데. 내 명성에 누가 되겠지. 에휴, 할 수 없지. ”

 

 

코즐로프는 혀를 차더니 바이올린을 들었다. 왕재수가 몸을 곧게 펴고 섰다. 심호흡을 했다. 베르닌은 대체 쟤가 왜 저러나 싶었다. 코즐로프가 바이올린을 켜는 순간 왕재수가 움직였다. 점프를 하고 앞으로 달려 나가며 발을 구르고 빙글 돌고 경쾌하게 춤을 췄다. 음악이 귀에 익었다. 잘 보니 1막에서 바질이 꽃 파는 처녀들과 추는 3인무였다. 왕재수가 어찌나 가볍게 추는지 저절로 어깨가 들썩였다. 춤은 금방 끝났다.

 

 

“ 한 번 더 해줘? ”

 

“ 아니, 이건 괜찮아. ”

 

“ 다음 갈까? ”

 

“ 음, 결혼식 솔로부터 해줘. 불안해. ”

 

“ 알았어. 셋 세고 간다. ”

 

 

음악과 함께 왕재수가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베르닌은 멍해졌다. 왕재수는 너무나 가볍게 훌쩍 뛰어올랐고 공중에서 나사처럼 회전을 했고 다리를 탁탁 맞부딪쳤다. 나중에는 연습실 전체를 빙글빙글 돌며 가로질러 뛰었다. 마지막으로는 그 자리에서 다리를 뻗으며 힘차게 돌았는데 키트리의 32회 푸에테인지 뭔지를 출 때보다 훨씬 더 박력 있었다.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연주를 마친 코즐로프도 활을 내려놓고 짝짝 박수를 쳤다. 왕재수는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우와, 진짜 멋있다! 나 네가 이 정도로 잘 추는 줄 몰랐어! 맨날 말만 들었지... 막심이랑 안톤이 추던 거랑 완전 비교돼. 이야.

 

 

왕재수는 숨을 몰아쉬며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 날 걔들이랑 비교하면 안 되지. 아아, 큰일이다. 몸이 무거워. 이런 꼴로 무대에 올라가다니... 오늘 보러 오는 사람들 전부 키로프에서 내가 이거 추는 거 닳도록 봤는데. 완전 실망하겠어. ”

 

야,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무대에 올라가다니? ”

 

 

왕재수가 일어나 앉았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면서 대꾸했다.

 

 

“ 막심은 못 올 거야. 공연은 올려야 돼. 그래서 내가 출 거야. 토냐랑은 어제 따로 맞춰봤어. ”

 

“ 어... 그렇구나! 바질이 없는 게 아니었네. 네가 있었구나! ”

 

“ ‘내가 있었구나’가 아니지. 난 은퇴했는데... 난 이 극장 감독이지 무용수가 아니라고! ”

 

“ 그래도, 네가 올라간다니 진짜 다행이다! 넌 우리 나라에서 제일 잘 추는 무용수... ”

 

“ ...였지. 그리고 말은 바로 하자. ‘우리 나라’가 아니고 ‘전 세계’에서였어. 지금은 아니야. 나 마지막으로 무대 올라갔던 게 1년 전이야. 몸이 다 굳었어. 이건 정말 자살 행위야. 이런 꼴을 관객에게 보여 줘야 하다니... ”

 

 

왕재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베르닌은 그가 왜 그렇게 우울해 하는지, 어째서 수심에 잠기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야, 너 그러지 마. 나 태어나서 이런 거 처음 봤어. 진짜 장난 아냐. 춤 보면서 심장 떨리는 거 처음이었어. 관객들도 좋아할 거야. 당신도 한 마디 해봐요! ”

 

 

코즐로프는 바이올린을 한쪽으로 얌전하게 밀어놓고는 왕재수에게 와서 꼭 안아주고 어깨를 토닥토닥 해주었다. 그리고는 등을 쓸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 우리 아기가 원래 실력이 안 나와서 속상한 거구나. 1년이나 쉬었는데 이 정도로 출 수 있는 게 대단한 거야. 다시 연습하면 금방 옛날처럼 될 수 있을 거야. 오늘은 공연 올리는 게 제일 중요한 거니까 네 실력이 성에 안 차도 마음을 비워. 그래야 세상 사는 게 좀 편해진다. 무대는 앞으로도 계속 올라갈 수 있잖아. ”

 

아니야, 무대는 항상 한 번뿐이야! 제대로 못 추고 세상 편하게 사느니 잘 추고 힘들게 사는 게 백 배 나아.

 

“ 그건 우리 아기가 아직 아기라서 그런 거야. 예술가는 아기로 남아도 상관없지만 너는 이제 감독이니까 계속 그렇게 아기처럼 굴면 못써. ”

 

“ 흑... ”

 

 

왕재수가 코즐로프의 품에 안겨서 훌쩍훌쩍 울었다. 옛날만큼 실력이 안 나오는 게 속상한 건지 스페호프의 방해공작에 맞서 공연을 올리는 게 힘들어서 그런 건지 베르닌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국장이 이 사실을 알아서는 절대 안 된다! 마지막까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것도 왕재수가 주인공을 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는 헛기침을 했다.

 

 

“ 저, 난 티무르 보리소비치에게 갈게. 10시에 드레스 리허설 가면 되지? ”

 

“ 의상부터 챙겨 입어야 돼. 어제 네 사이즈에 맞게 수선은 다 한 거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지금 가서 입어봐. 있다 보자. ”

 

 

왕재수가 언제 울었냐는 듯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코즐로프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베르닌은 연습실을 나왔다. 잠깐 박물관 앞으로 가서 전화를 했다. 스페호프가 받았다.

 

 

“ 자네 웬일인가, 아직 10시도 안됐는데 빨리 전화를 했군. 그래, 어떻게 됐나? 오늘 공연을 올리긴 올리나? ”

 

“ 예. ”

 

“ 배역은 어제와 그대로고? ”

 

“ 그런 것 같습니다. 아침에 보니까 야스민이 많이 아픈 것 같더라고요. 코피도 엄청 흘리고. ”

 

암, 그래야지! 제깟 게 아무리 잘난척한다 해도 오냐오냐 자란 애송이가 어떻게 이 모든 재앙을 다 견딘담. 꼬마가 아프다는 건 나도 들었네. 분명 화병이 난 게지! 오죽하면 오후에 의원님들이 오실 때도 극장장이 직접 수행하고 극장 견학을 시킬 예정이라는군. 원래 그놈이 하게 되어 있었거든. 아주 잘됐지 뭔가! 오늘만 지나면 끈 다 떨어지고 그 조그만 불여우를 완전히 매장시켜버릴 수 있을 거야! 하여튼 며칠 동안 수고 많았네, 다닐. 나는 5시 공연에 맞춰서 가겠네. 그 망할 녀석이 나한테는 초대장도 안 보냈더군. 하지만 극장장이 내 자리도 의원님들 옆으로 빼놓았지. 있다 보세! ”

 

 

 

10시에 베르닌은 의상을 차려입고 드레스 리허설에 들어갔다. 무대 배경도 설치되어 있고 오케스트라도 들어오는 등 관객만 없다 뿐이지 모든 것이 진짜 공연과 흡사했다. 리허설 시작 직전 왕재수가 무용수들을 모아놓고 막심의 불참과 자신이 바질을 출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전날 미리 맞춰봤던 토냐와 꽃 파는 처녀 역의 두 무용수를 제외하고는 다들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지만 곧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드레스 리허설은 스페이스 리허설보다 훨씬 진짜 같았지만 관객이 없어서 그런지 베르닌은 한결 안정되었다. 놀랍게도 무용수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실수도 훨씬 줄어들었다. 아마 왕재수가 무대 한가운데 나와 바질을 춰주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한결 의지가 되는 기분이라고 떠들었다. 일단 무대 위로 올라오자 베르닌은 아직도 서툰 마임을 순서대로 소화하고 키트리와 어설픈 춤을 추고 집시 인형극장에 뛰어들고 풍차에 매달리느라 왕재수가 뭘 어떻게 추는지 제대로 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왕재수가 토냐와 2인무를 추고 나중에 솔로를 출 때마다 백스테이지로부터 환호성이 들려왔다. 왕재수는 심지어 의상을 차려입지도 않고 운동복 차림으로 끝까지 췄다.

 

 

리허설이 끝난 후 왕재수는 무용수들에게 다가가서 마지막으로 몇 가지 교정을 해 주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절대 극장에서 나가지 말 것이며 연습실에서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점심은 연습실로 가져다 줄 테니 그것만 먹으라고 신신당부했다. 무용수들이 연습실로 이동한 후 베르닌이 물었다.

 

 

“ 점심을 시켰어? 어디서? ”

 

“ 박물관 앞 식당. ”

 

“ 어, 그랬구나. 국장이 또 음식에 뭐 탈까봐 그랬구나. ”

 

“ 응. 너도 딴 거 먹지 마. 나 이제 의상 맞춰봐야 돼. 옛날보다 근육이 줄어서 큰일이야, 안 멋있어 보일 텐데... 장식 좀 많이 달아 달라 해야겠어. 아... 난 왜 그렇게 죽어라고 다이어트를 했을까. 흐흑... ”

 

“ 바이올린 아저씨에게 잘 보이려고. ”

 

“ 그러게. 근데 아까 로만이 그러는데 나 근육 붙은 게 더 좋대. 에이... ”

 

“ 너무 걱정하지 마. 넌 예쁘잖아. 의상 입으면 멋있어 보일 거야. ”

 

“ 응, 내가 예쁜 거야 알지. 그치만 무대 올라갈 땐 지금보단 더 체격이 있는 게 낫거든. 작아 보이면 안 돼. ”

 

“ 너 안 작잖아. 키도 그 정도면 괜찮고 비율도 좋잖아. 아까 토냐랑 추는 거 보니까 커 보이던데. ”

 

“ 응. 근데 무대가 크니까 잘못하면 작아 보이거든. 전에는 내 카리스마로 커버해서 관객들은 다 나 180 넘는 줄 알았어. 근데 지금은 모르겠어. 에이, 걱정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그냥 해야지. ”

 

 

베르닌은 왕재수가 의상을 맞춰보는 내내 곁에 있었다. 나와서도 계속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왕재수가 투덜댔다.

 

 

“ 야, 연습실 가서 애들이랑 같이 있어! 귀찮아 죽겠네. 나 원래 공연 시작 전에는 혼자 있어야 한단 말이야. ”

 

“ 안 돼! 국장이 정보 입수하면 너한테도 해코지할 거란 말이야! 나 없다고 생각하고 할 거 해! ”

 

 

왕재수는 한숨을 쉬었지만 베르닌이 붙어 있게 내버려두었다. 4시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국회의원들이 도착했을 때 왕재수는 수트로 갈아입고 잠깐 로비로 나가서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의원들이 그를 포옹하고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느니, 극장을 구경시켜달라느니 하는 얘기를 쏟아내려고 했을 때 그는 딱 잘라 말했다.

 

 

“ 극장장님이 안내해 주실 겁니다. 저는 공연 준비 때문에 들어가 봐야 해서요. 끝나고 뵙죠. ”

 

그게 사실인가? 로비에 붙어 있는 알림 보니까 자네가 오늘 바질을 춘다고...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게 웬 횡재인지!

 

“ 예. 원래 주역이 아파서요. 그럼 이만. ”

 

 

 

왕재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분장실로 가버렸다. 베르닌은 급하게 따라갔지만 왕재수가 단호하게 그를 밀어냈다.

 

 

“ 넌 저쪽으로 가. 3번으로. 이제 금방 공연 시작하니까 분장도 해야지. ”

 

“ 아니, 안 돼. 여기서 분장할 거야. 곧 국장이 올 거라고. 무대 올라갈 때까진 안심 안 돼. 너 보고 있어야 돼. ”

 

“ 아, 진짜 감시요원 노릇 제대로 하네. 맘대로 해! ”

 

 

그때 타치야나가 들어왔다. 베르닌에게 먼저 분장을 해 주었다. 베르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얼굴에 파운데이션과 파우더를 바르고 눈화장이란 것을 하고 블러셔니 셰이드니 하는 것을 칠하게 되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니 너무나도 어색했다.

 

 

“ 저, 타치야나 드미트리예브나... 화장이 너무 진한 거 같아요. 아이라인도 너무 두껍고. 이상해요. 웃길 거 같아요. ”

 

“ 관객석에서 보면 괜찮아. 무대 분장은 원래 그런 거야. 걱정하지 마. ”

 

“ 그런가... ”

 

 

타치야나는 베르닌의 등을 탁 치더니 웃으면서 왕재수 쪽으로 갔다. 머리를 손질해 주고 분장을 해주면서 아주 만족해했다.

 

 

“ 30년 동안 여기서 일했는데 이렇게 수월한 사람은 처음이네. 우리 감독님은 어쩜 이렇게 조금만 손대도 확 사는지. 원래 잘생긴 건 알았지만 딱 무대 체질이네. 콧대도 세울 필요도 없고. 아이라인만 그리고 볼살만 좀 부풀릴게. 요 며칠 야위어가지고. ”

 

“ 파운데이션 한 톤 낮춰 주세요. ”

 

“ 아니 왜? 이렇게 하얗고 고운 피부를? 다른 애들은 더 하얗게 해달라고 난리인데. ”

 

토냐보다 하얗게 보이면 안 되니까요. 2인무 출 땐 발레리나가 살아야 하는데 제 미모가 튀면 안 돼요.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너 자기만 잘나 보이고 싶어 하는 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왕재수가 눈을 감고 명상인지 뭔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분장을 마친 후 왕재수는 1막의 바질 의상으로 갈아입었고 스트레칭을 좀 했다. 그리고는 다시 화장대 앞에 앉았다.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풀더니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눈을 감은 채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다. 무신론자라고 했지만 베르닌이 레닌그라드에서 목걸이를 가져다 준 날부터 왕재수는 단 한 번도 그걸 목에서 푼 적이 없었다. 베르닌은 눈을 감았고 신앙심도 없었지만 어쨌든 기도를 했다.

 

 

하느님, 제가 실수 안 하게 해주세요. 풍차 잘 매달리게 해 주세요. 국장한테 안 들키게 해 주세요. 제발 공연이 무사히 끝나게 해 주세요. 저 녀석이 옛날만큼 못 춰도 높은 분들이 못 알아차리게 해 주세요. 공연 꼭 잘 끝나야 돼요. 안 그러면 쟤가 울 거예요. 저 싸가지 없는 놈이 아픈데 죽어라고 노력하고 있어요. 코피도 막 쏟아놓고 넘어졌다고 거짓말도 했어요. 쟤 오랜만에 춤 춰보려고 밥도 많이 먹고 초콜릿도 막 먹었어요.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

 

 

기도를 하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 첫 번째 벨이 울렸다. 왕재수가 일어섰다.

 

 

“ 가자, 무대 나갈 준비하게. ”

 

 

 

*    *    *

 

 

 

 

다닐 베르닌, 아니 하를람피 푸고비체프의 생애 첫 무대 데뷔는 흥분과 우왕좌왕으로 점철되었다. 무대에 등장한 순간 그는 멍해졌다. 분명 드레스 리허설을 해봐서 괜찮을 것 같았는데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프롤로그에서 기사가 되리라 다짐하고 떠나는 장면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 본격적인 1막에서 그가 갑옷을 입고 냄비를 머리에 쓰고 긴 창을 들고 산초와 함께 휘적휘적 나오자 관객석에서 박수가 일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조명은 또 왜 이렇게 눈부신지, 음악은 어째서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 것 같은지 이해가 안 갔다. 한순간 그는 어느 쪽으로 움직여야 할지 백지가 되었다. 다행히 키트리 아빠 역 무용수가 그를 콕콕 찔러서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래도 걱정했던 키트리 둘시네아 착각 장면과 키트리 손잡고 춤추기는 다행히 그럭저럭 큰 실수 없이 해냈다. 몸이 엄청나게 뻣뻣했을 뿐이었다.

 

 

사실 그가 실수를 했어도 관객들은 몰랐을 것이다. 관객들은 바질을 추는 왕재수 때문에 완전히 흥분했다. 포스터와 팸플릿에는 여전히 막심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고 주역이 바뀌었다는 내용은 오로지 극장 로비와 홀 앞에 붙은 종이에 손으로 갈겨 쓴 게 전부였지만 원체 왕재수가 유명한 무용수였기 때문인지 대부분은 그가 나오자마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웅성거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왕재수가 한 번 뛰어오를 때마다, 한 바퀴 돌 때마다 박수를 쳤다. 토냐를 두 번이나 한 손으로 번쩍 들었을 때는 함성도 나왔다.

 

 

투우사 춤도 큰 환호를 받았다. 가릭이 망토를 휘두르며 무대를 휘젓자 여자들이 꺅 하고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쳐댔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돈키호테를 관객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라고 말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1막을 마친 후 베르닌은 보드카에 취한 듯 황홀해졌다. 흥분이 되어서 백스테이지에서도 펄쩍 뛰고 휘적휘적 걸어 다니고 창을 휘둘렀다. 완전히 돈키호테가 된 기분이었다. 다른 무용수들도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보였다. 그때 왕재수가 다가왔기 때문에 다들 1막에서 저지른 실수에 대해 꾸중을 들을 줄 알고 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전혀 꾸중을 하지 않았다. 밝게 웃으며 격려를 해줬을 뿐이었다.

 

 

다들 잘했어! 너희는 3막 준비하고. 집시들, 요정들 이쪽으로. 하를람피, 풍차 돌진 준비됐지? 커튼 내려오면 잽싸게 준비해서 1분 만에 배경 올리고 요정 가는 거야. ”

 

 

베르닌은 아직도 어떻게 무대 배경이 그렇게 휘리릭 바뀌는지 신기했지만 물론 물어볼 겨를은 없었다. 2막에 올라갈 생각을 하니 더욱 흥분이 됐다. 베르닌으로서는 무용수들이 많이 나오고 그 사이에 끼어 밀려다녀야 하는 1막이나 근엄한 연기를 해야 하는 3막에 비해 2막이 제일 재미있었다. 폭력적인 연기를 잘한다고 왕재수에게서 칭찬까지 받지 않았는가!

 

 

베르닌은 인형극장 뒤집어엎는 연기를 실감나게 해냈다. 드디어 대망의 풍차 돌격을 할 차례였다. 그는 창을 꼬나 쥐고 으아아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풍차로 내달았다. 기세 좋게 풍차 날개에 매달렸다. 한 손으로 창을 휘두르며 발버둥을 쳤다. 풍차가 돌아가며 베르닌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관객들이 ‘우와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베르닌도 신이 났지만 그때 풍차가 엄청나게 빨리 돌기 시작했다. 연습할 때보다 세 배는 빠른 것 같았다. 심지어 중간에 멈추지도 않았다. 베르닌은 너무나 놀라고 어지럽고 두려워서 비명을 지를 뻔 했지만 꾹 참았다. ‘국장! 국장이 그런 거야!’ 란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풍차가 휙휙 돌며 순식간에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베르닌은 악착같이 매달려 보려 했지만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튕겨져 나갔다. 머리가 어딘가에 부딪치는 것 같았다.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이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베르닌은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베르닌은 눈을 떴다. 막이 내려와 있었고 그는 백스테이지 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무용수들이 걱정스럽게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한목소리로 외쳤다.

 

 

“ 하를람피! 하를람피, 정신 차려요! ”

 

 

베르닌은 눈을 떴다. 그때 무용수들을 밀어젖히고 왕재수가 달려왔다. 그의 곁에 털썩 주저앉더니 두 손으로 베르닌의 머리와 얼굴을 거칠게 쓰다듬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너 괜찮아? 미안해. 진짜 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 아... 으흑... 어떡하면 좋아, 엉엉... ”

 

“ 어... 나 괜찮아. ”

 

 

“ 뭐가 괜찮아, 그 높은 데서 튕겨 나왔는데... 흑... 그 개자식이 풍차 손 댈 거란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 너 끌어들여서 미안해. 미안... 아... 공연 접을게. 중단할게. 잘못했어. 다들 나 때문에 끌려가고 아프고 다치고... 이제 안 할게. 공연 접을게. 엉엉...

 

 

왕재수가 베르닌의 두 손을 와락 부여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괴롭게 몸부림쳤다. 베르닌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 나 진짜 괜찮아. 매트 위로 떨어졌어. 혹만 조금 난 거야. 1분 지나지 않았어? 요정 장면 가야 하잖아! ”

 

“ 아니야, 중단할 거야. 지금 내가 무대 위로 올라가서 관객들한테 얘기할 거야. 더 이상 너희들 다치게 놔둘 수 없어. 엉엉... ”

 

안 다쳤다고! 그리고 네가 그랬잖아! 공연은 올라가야 하는 거라고! 관객과의 약속이라며! 얘들 다 연습했잖아! 너도 그 몸으로 지금 바질 추잖아! 빨랑 요정들 내보내고 오케스트라에 얘기해! 나도 지금 나갈 거야!

 

 

왕재수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베르닌은 왕재수가 분장을 손봐야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용수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 감독님. 저희 진짜 괜찮아요. 공연 나갈래요. 겨우 몇 분밖에 안 지났으니까 관객들도 모를 거예요. 풍차처럼 위험한 거 이제 안 나오잖아요. 저희 조심해서 할게요. 저희 이렇게 신나는 공연 처음이에요. ”

 

 

왕재수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 아휴, 누가 너희들 걱정돼서 그러는 줄 알아? 무대 사고 나서 내 명성에 누가 될까봐 그러지! 알았어, 1분 내로 막 올릴 거니까 요정들 빨리 가서 준비해. 하를람피, 너도 나가서 꿈꾸는 포즈로 누워 있고. 가! ”

 

 

그래서 베르닌은 다시 무대로 나갔다. 음악이 다시 연주되었고 막이 서서히 올랐다. 다행히 관객들은 갑자기 화사한 요정 나라가 나타나자 아무런 의심도 없이 ‘와아...’ 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베르닌은 한쪽에 앉아 있다가 요정들 사이를 천천히 헤집고 팔을 허우적거리며 다니는 등 느릿느릿한 연기만 하면 됐다. 뒤통수가 좀 띵하고 바닥에 부딪친 팔다리가 아팠지만 그나마 매트 위로 떨어져서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2막이 끝나자 왕재수는 곧장 의료요원을 불렀다. 다행히 베르닌의 생각대로 다친 곳은 거의 없었다. 멍만 좀 들었을 뿐이었다. 왕재수가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화를 냈다.

 

 

너네 국장 가만 안 둘 거야! 나쁜 자식!

 

“ 어, 제발 또 이상한 짓 저지를 생각은 하지 마. ”

 

너 검은 숲에 가서 뱀 껍질 파와! 곱등이랑 바퀴벌레랑 쥐랑 다 잡아와서 국장실에 풀어!

 

“ 알았어. 공연 끝나고 그렇게 할게. ”

 

뱀 껍질 많이많이 파와!

 

 

 

3막이 되었다. 관객들은 왕재수의 자살 쇼를 너무너무 좋아했다. 왕재수가 죽은 척하고 누워 있다가 토냐의 손에 뽀뽀를 쪽 하고, 돈키호테 베르닌의 종용에 못 이겨 키트리 아빠가 결혼을 허락하자마자 폴짝 뛰어 일어나자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베르닌도 덩달아 신이 났다.

 

 

결혼식 장면이 되었다. 하객 역의 솔리스트들이 열심히 춰서 박수를 받았다. 토냐는 32회 푸에테를 무리 없이 췄다! 갈채도 많이 받고 환호도 받았다. 그리고 왕재수가 바질의 솔로를 추기 시작하자 다들 넋이 나갔다. 첫 번째 점프에서 다들 숨을 죽였다.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두 번째 점프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고함과 환성을 지르고 휘파람을 불었다. 무대를 가로지르며 날아다니듯 뛰기 시작하자 미친 듯이 박수를 치고 브라보를 외쳐댔다. 난리가 났다. 음악 소리가 하나도 안 들렸다. 마지막 푸에테에서는 다들 기립했다. 베르닌은 스페호프가 VIP석에 앉은 채 ‘기립이라니! 저 불여우 반동분자에게 웬 호강이란 말이냐!’ 라고 욕설을 퍼붓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고 속으로 쿡쿡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되었다. 베르닌, 아니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아니 돈키호테는 위엄 있게 바질과 키트리를 축복한 후 산초를 거느리고 먼 길을 떠났다. 무대를 떠나 백스테이지로 돌아오자 베르닌은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막이 내리는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왕재수가 활짝 웃으며 무용수들을 칭찬했다.

 

 

“ 다들 정말 잘했어! 며칠 만에 일취월장했어! 연습 많이 하면 스네고로드 간 애들 돌아오더라도 진짜 주역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죽어라고 연습해라! 그리고 하를람피! 잘했어. ”

 

“ 맞아, 잘했어! 잘했어요! 무용수도 아닌데! 일반인인데 진짜 잘했어요! ”

 

“ 맞아맞아! ”

 

 

베르닌은 찡했다. 막 눈물을 흘리려는데 왕재수가 등짝을 찰싹 갈겼다.

 

 

“ 야! 인사해야지! 나갈 준비해! ”

 

 

그래서 베르닌은 무대 인사를 하러 나갔다. 영광스럽게도 그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나가게 되어 있었다! 인사를 하자 관객들이 큰 박수를 보내 주었다. 휘파람도 불어주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왕재수와 토냐가 나오자 극장이 떠나갈 듯한 환호가 일었다. 공연 때보다 조명이 밝아져서 VIP석에 있던 높으신 분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는 게 보였다. 스페호프로 추정되는 검은 그림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관객들을 헤치고 밖으로 나가는 것도 보였다.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나자 안내원 아주머니들이 꽃다발을 바리바리 싸들고 무대로 나왔다. 토냐와 가릭에게 꽃다발을 한두 개씩 전해주었다. 그러더니 왕재수에게 나머지 꽃을 모두 주었다. 꽃에 파묻혀 얼굴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왕재수는 자기 팔로 껴안을 수 있는 꽃다발을 모조리 모아서 토냐에게 바쳤다. 더욱 큰 박수갈채가 일었다. 베르닌도 박수를 치고 있는데 안내원 아주머니가 그에게 다가와 빨간 장미가 가득한 꽃다발을 하나 건네주었다.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엥? 이걸 왜 저한테 주시나요? ”

 

이건 당신한테 온 거예요.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라고 카드도 있잖아요.

 

 

베르닌은 얼떨떨해졌다. 장미 꽃다발을 꼭 껴안았다. 황홀했다. 하마터면 다 같이 인사를 하다가 발을 헛디딜 뻔 했다. 커튼콜이 계속 반복됐다. 예전에 베르닌은 왕재수를 감시하느라 울며 겨자 먹기로 공연을 보게 될 때마다 저 망할 놈의 커튼콜은 왜 하는지, 왜 끝날 것 같으면서도 다시 막이 올라가고 무용수들이 우르르 나와 다시 인사를 하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막상 무대에 올라와보니 커튼콜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수와 환호를 받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마침내 커튼콜이 끝났다. 막이 내려왔고 홀에는 불이 밝게 들어왔다. 관객들이 물밀 듯 빠져나갔다. 왕재수는 무용수들을 하나하나 토닥여 주었다. 마지막으로 베르닌에게 다가오더니 와락 포옹을 했다.

 

 

“ 고마워, 덕분에 공연 끝냈어. ”

 

이거 봐, 나 꽃 받았어!

 

“ 좋겠구나, 꽃도 받고. ”

 

“ 근데 누가 준 걸까? 나 여기 나오는 거 아무도 모르는데. ”

 

“ 그러게. 꽃이 남았나보네. ”

 

“ 아니야! 여기 내 이름 쓴 카드도 있어! 어, 근데 이거 네 글씨 아니야? ”

 

 

베르닌은 카드를 펼쳐 보았다. 딱 한 줄 씌어 있었다. 소리 내어 읽었다.

 

 

‘첫 무대 축하’, 야 이거 네가 준 거구나! 내 데뷔 축하해주려고! 고마워! ”

 

내가 왜! 바빠 죽겠는데 왜 그런 짓을 하니! 하여튼 좋겠구나, 꽃 받아서. 난 빨리 씻고 의원 아저씨들한테 인사하러 가야 돼. 고생했으니까 그만 들어가서 푹 쉬렴. 내일 삭신이 쑤실 걸. 잘 자! ”

 

 

왕재수는 급하게 분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베르닌은 복도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왕재수가 분장을 모두 지우고 말갛게 된 얼굴로 나왔다. 수트 차림이었지만 재킷은 팔에 걸치고 있었다. 셔츠 칼라 사이로 목걸이가 힐끗 보였다. 금색의 조그만 십자가가 반질거리는 것을 보니 또 손에 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 너 아직 안 갔어? 분장도 안 지웠네. 옷도 안 갈아입고. 그러다 감기 걸린다. 빨리 씻고 들어가서 쉬어. ”

 

“ 응, 이제 들어갈 거야. 저기, 있잖아. ”

 

“ 왜? ”

 

“ 너 계속 무대 올라가면 안 돼? 오늘 진짜 멋있었어. 빈 말이 아니야. 그런 거 처음 봤어. 관객들도 좋아했잖아. ”

 

“ 칫, 여긴 시골이니까 그렇지. 그런 걸 언제 봤겠니. ”

 

“ 시골 관객들한테 네 춤 계속 보여주면 안 되는 거야? ”

 

“ 나 은퇴했다고 했잖아. 오늘은 공연 빵꾸날까 봐 억지로 올라간 거야. ”

 

“ 은퇴 무르면 안 돼? ”

 

“ 쳇, 아무 것도 모르면서. ”

 

 

왕재수는 툴툴거렸지만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베르닌에게 빨리 가서 자라고 했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분장을 지웠다. 일자 눈썹을 지우고 콧수염을 떼어냈다. 샤워를 했다. 극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하를람피 푸고비체프와 돈키호테는 사라지고 그는 다닐 베르닌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눕자 아직도 짜릿하게 남아 있는 흥분과 함께 텅 빈 듯한 허무함이 몰려왔다. 그래서 그는 물병에 꽂아서 부엌 식탁에 올려두었던 꽃다발을 침실로 가져왔다. 나이트 테이블 위에 병을 내려놓았다. 풍성하게 피어 있는 빨간 장미꽃들과 카드를 보자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그는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FIN

- 2015. 4. 9 ~ 4. 12 -

 

..

 

 

왕재수가 올리는 돈키호테는 기본적으로는 키로프 극장(현 마린스키) 버전을 따르고 있다. 풍차에 사람 매달리는 얘긴 전에 얘기했듯 극장마다 다른데, 인형을 쓰는 곳들도 많다.

 

..

 

 

베르닌은 당연히 티팬티를 입었다! 그런데 이거 쓸 때는 그냥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서 묘사를 안했는데 19편에 달아주신 댓글들을 보고 좀 아까웠다. 티팬티 에피소드 넣을 걸 ㅎㅎㅎ

 

글에는 빠졌지만, 베르닌은 드레스 리허설 때 의상 담당자가 가져다준 티팬티와 타이츠에 매우매우 당황하고.. 그나마 돈키호테 역은 타이츠 위에 짧은 하의를 겹쳐 입어 불행중 다행이 되었다. 그는 왕재수에게 티팬티 안 입으면 안되느냐고 애걸하고 싶었겠지만 알다시피 그때 왕재수는 갑작스럽게 무대에 올라가느라 정신도 없고 매우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므로 착한 베르닌은 꾹 참고 그냥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얼마나 불편했을꼬 ㅎㅎ)

 

공연 끝난 후... 왕재수는 그에게 기념으로 그 티팬티를 가지라고 했을 거고... 이리하여 베르닌은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라는 예명과 티팬티를 기념으로 얻게 되었다... 이건 원글에는 없는 내용이니 디렉터스 컷인가 ㅎㅎ

 

..

 

 

서무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코미디 풍자이기 때문에 완전 초짜 베르닌이 3일 연습해서 돈키호테 역을 어떻게든 해냈다만.. 사실 현실에서는 많이 힘든 일이다 :) 돈키호테가 결코 쉬운 역이 아니라서... 뭐 모르지. 베르닌이 사실은 연기 천재였던 걸지도!!!

 

..

 

 

공연을 올리는 왕재수의 마음가짐이라든지, 바질을 준비하는 왕재수와 코즐로프의 대화는 서무 시리즈라 조금 가볍고 때로는 우습게 표현했지만 사실 이쪽은 본편의 미샤와 더 맥이 닿아 있다.

 

본편 우주에서도 바질은 미샤에게 특별한 역 중 하나였다. 이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했던 글(http://tveye.tistory.com/3594) 에서도 미샤가 폐렴을 무릅쓰고 바질 데뷔 무대를 추는 내용이 나온다.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설정한 미샤의 경력 노트에서 이 사람은 발레학교 시절에도 국제 콩쿠르에서 바질 역으로 상을 받은 적이 있다. 미샤는 소년 시절 콩쿠르 입상 경력이 많은데 바질, 알리 등 화려한 역을 추곤 했다.

 

왕재수가 19편에서 얘기했듯 돈키호테는 남성 무용수들의 화려한 춤이 눈에 들어오는 발레이다. 특히 바질의 춤은 관객들을 아주 사로잡는다. 화려하고 역동적이어서 결혼식 솔로에서 바질이 그랑 주테(두 다리를 쫙 뻗고 공중을 가로질러 점프하며 무대를 한 바퀴 도는 것)를 시작하면 관객들이 박수를 치며 즐거워한다.

 

내 인생 첫 돈키호테는 오랜 옛날 마린스키 무대에서 본 거였는데 그땐 기본지식이 없어서 그런 장면이 나오는줄도 몰랐기에 결혼식 장면에서 바질(아래 첨부한 영상의 뱌체슬라프 사모두로프가 췄다)이 펄쩍 날아오르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는데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내 인생에서 공연 보고 그렇게 흥분했던 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모든 관객들이 말 그대로 박수를 치고 환호하고 기립했다.

 

이후 많은 공연들을 보았지만 그토록 관객들이 흥분하고 모두가 혼연일체가 됐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아마 그때가 90년대였고 아직 러시아 관객들은 소련식으로 발레를 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련 시절 관객들의 반응은 지금 러시아 관객들 반응보다 훨씬 열정적이었다) 본편과 이 20편에서 미샤(=왕재수)가 바질을 출 때 관객들이 박수치고 환호하고 발 구르는 장면은 저때의 경험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

 

 

19편과 20편 쓸 때는 물론 민쿠스의 돈키호테 음악을 많이 들었다 :)

 

유튜브에서 발레 돈키호테를 검색하시면 여러 극장들의 여러 영상들이 많이 나오니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찾아보셔도 좋을 듯. 추천하는 것은 2006년 마린스키 버전. 깨끗한 테크니션이자 원더키드인 레오니드 사라파노프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인 올레샤 노비코바가 바질과 키트리, 그리고 최고의 연기파 돈키호테인 블라지미르 포노마료프가 나온다. 요즘은 이반 바실리예프와 나탈리야 오시포바의 돈키호테도 많이들 좋아하지만 나는 모스크바보다는 페테르부르크 쪽 입맛이라 전자가 더 좋다.

 

조금 아쉬우니 다음 포스팅에서 바질의 화려한 춤 영상 클립을 몇 개 소개하도록 하고..

여기서도 바질의 춤 아주 짧은 클립 두 개만.

 

먼저 바질이 키트리의 두 친구인 꽃파는 아가씨들과 추는 짧은 3인무. 1막이다. 짧지만 신나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춤이다. 20편에서 왕재수가 연습실에서 코즐로프에게 제일 먼저 켜달라고 해서 춰보는 춤이기도 하다.  

 

사심을 담아~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가 추는 버전~

 

 

 

 

두번째는 위에서 말했던 뱌체슬라프 사모두로프가 춘 결혼식 바질 솔로 중 첫번째 춤이다. 90년대 녹화본이라 화질은 나쁘지만 가볍고 통통 튀는 춤이 일품이다. 이 영상은 전에도 올린 적이 있다. 이건 갈라 콘서트나 콩쿠르 수상 무대인 것 같다. 사모두로프는 이것으로 국제콩쿠르 수상도 했었다.

 

이 사람은 말 그대로 jumper였다. 바질 역은 정말 최고였다. 얼마나 가볍고 탄력있게 날아오르는지. 내 인생 첫 바질이라 그런지 정말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사람은 이후 로열발레단으로 건너갔다가 지금은 러시아 어느 극장(아, 갑자기 이름 생각이 안나ㅠㅠ)의 예술감독이자 안무가로 활동 중이고 겨기서 선보인 작품으로 올해 황금 마스크 상도 탔다.

 

 

 

 

다른 무용수들의 바질 영상은 다음 포스팅에.. (http://tveye.tistory.com/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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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21편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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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비타민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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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