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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es : 서무의 슬픔'에 해당되는 글 52

  1. 2016.02.08 서무의 슬픔 #37. 뜻밖의 손님 39
  2. 2015.12.14 서무의 슬픔 번외편 : 돌아온 등장인물 20문답(투레츠키, 보랴, 일류샤) 40
  3. 2015.12.04 서무의 슬픔 번외편 : 돌아온 등장인물 20문답(리자, 알렉산드라) 42
  4. 2015.11.19 서무의 슬픔 #36. 빨간 열매와 초특급 익스프레스 52
  5. 2015.11.06 서무의 슬픔 #35. 4월의 눈보라 70
  6. 2015.10.24 서무의 슬픔 #34. 딸기 아가씨들과 자선 바자회 93
  7. 2015.10.09 서무의 슬픔 #33-1. 도자기 인형 114
  8. 2015.10.01 서무의 슬픔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2부) 142
  9. 2015.09.24 서무의 슬픔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113
  10. 2015.09.11 서무의 슬픔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91
  11. 2015.09.04 서무의 슬픔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71
  12. 2015.08.28 서무의 슬픔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80
  13. 2015.08.21 서무의 슬픔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81
  14. 2015.08.14 서무의 슬픔 #29. 보랴의 생일 파티 50
  15. 2015.08.07 서무의 슬픔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 별장 81
  16. 2015.07.31 서무의 슬픔 #27. 밀사 베르닌 + 브루벨 그림 한 장 78
  17. 2015.07.03 서무의 슬픔 번외편 :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70
  18. 2015.06.26 서무의 슬픔 #26. 베르닌의 옛 여인 67
  19. 2015.06.19 서무의 슬픔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결선 진출 요리 사진들 몇 장 71
  20. 2015.06.12 서무의 슬픔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78
  21. 2015.06.05 서무의 슬픔 # 24 : 시계탑 전망대에서 65
  22. 2015.05.27 서무의 슬픔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47
  23. 2015.05.20 서무의 슬픔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57
  24. 2015.05.18 잠시 : 우리의 단추 베르닌은 이런 인물이기도 했다(추리 외전 중 발췌..) 10
  25. 2015.05.13 서무의 슬픔 #21. 스페호프의 복수 55

 

오랜만에 서무 시리즈 업뎃.

 

사실 이 37편을 쓴 건 12월이었는데 그러고 나서 심적으로 힘든 일이 많아서 그냥 안 올리고 묵혀놨었다. 지금 보니 우연찮게도 딱 명절 시즌이랑 느낌이 맞는 편이다. 가족 얘기라서...

 

지난 35~36편에서는 우리의 단추 베르닌과 왕재수가 숲에 갔다가 폭설을 만나 차도 망가지고 벌목공 숙소에 갇히고 심지어 야생짐승 습격도 받는 등 파란만장한 일이 있었는데 이번 37편은 시간적으로는 36편에서 며칠 후에 일어난 이야기이지만 그런 어드벤처는 없다 :) 그래도 앞부분에서 베르닌과 왕재수가 망가진 지굴리(베르닌의 차)나 폭설에 대해 얘기하는 게 까마득하다면 에피소드 35. 4월의 눈보라 : http://tveye.tistory.com/4172에피소드 36. 빨간 열매와 초특급 익스프레스 : http://tveye.tistory.com/4189를 다시 읽어보세요~

 

초반부에 베르닌이 찾아가는 수도원은 22편의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에 나왔던 곳이다. 예고르 사제도 그때 나왔다. 이 수도원은 본편에서도 중요한 장소로 등장한다(그런데 본편은 언제 쓰지 ㅠㅠ 올해는 꼭 이어서 써야지..) 왕재수가 잠깐 언급하는 '레스코프'는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 얘기다.

 

이번 편에 등장하는 음식들은 대부분 러시아 시골 음식들이다. 쓸땐 그런 생각 안했는데 올리면서 다시 읽어보니 뭔가 기름진 것들이 역시 설날 연휴랑 어울리는 듯한 느낌이...

 

그럼 재미있게 읽으세요~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4월의 폭설로 검은 숲에 갇혔다가 무사귀환한 베르닌과 왕재수는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오고... 베르닌은 언제나처럼 과로와 야근에 시달리며 자신에게도 집안일을 해줄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푸념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 http://tveye.tistory.com/4062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2부) : http://tveye.tistory.com/4079
* 에피소드 33-1. 도자기 인형 : http://tveye.tistory.com/4098
* 에피소드 34. 딸기 아가씨들과 자선 바자회 : http://tveye.tistory.com/4140
* 에피소드 35. 4월의 눈보라 : http://tveye.tistory.com/4172
* 에피소드 36. 빨간 열매와 초특급 익스프레스 : http://tveye.tistory.com/4189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번외편. 돌아온 등장인물 20문답(리자,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4236

** 번외편. 돌아온 등장인물 20문답(투레츠키, 보랴, 일류샤) :  http://tveye.tistory.com/4251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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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7

 

 

 

 

서무의 슬픔

- 뜻밖의 손님 -

 

 

 

 

 

 

 

금요일이 되자 베르닌은 연이은 야근과 스트레스로 지칠 대로 지쳤다. 폭설로 검은 숲에 갇혔다가 돌아오자 스페호프는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눈 때문에 지연된 안전가옥 자물쇠 수리를 빨리 해치우라고 들들 볶았다. 숲에 갔던 첫날은 외출부를 쓰고 가서 괜찮았지만 갇혀 있던 그 다음날은 아예 근태기록부에 붉은 색깔로 무단결근이라 적혀 있었다! 베르닌은 경위서를 작성해 이틀에 걸쳐 감사부서와 인사부서의 협조 도장을 받은 후 국장에게 대면 결재를 요청해서 간신히 무단결근 처리만은 면했다. 그나마도 국장에게 왕재수가 곰의 습격을 받았다는 보고를 했기 때문이었다.

 

 

스페호프는 매우 기뻐하며 베르닌을 칭찬했다.

 

 

“ 그렇지! 역시 자네는 우리 가브릴로프 토박이야! 검은 숲에는 당연히 곰이 돌아다니지! 그 불여우를 곰이 나오는 곳으로 유인하다니 정말 좋은 생각이었네. 내가 따로 지시를 하지 않았는데도 검은 숲에 그 녀석을 데리고 가서 야생 짐승의 습격을 받게 하다니 자네 정말 머리가 비상하군. 역시 현장요원감이야. 으음, 서무 업무가 막중하긴 하지만 참 고민이 되는군. 자네 같은 인재는 현장요원으로 돌려야 하는데... 행정직도 턱없이 모자라니... 본부에 정원을 늘려달라고 건의해보겠네. 하여튼 잘했네. 그럼 그 불여우는 지금 병원에 있나? ”

 

“ 아, 아니오. 그날 밤에만 입원했다가 다음날 낮에 퇴원해서 곧장 극장으로 갔습니다. 오늘은 극장 안전 점검의 날이라 공연이 없어서 종교 박물관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브릴로프 수도원 말입니다. ”

 

“ 흠, 아깝군. 곰에게 제대로 맞았어야 했는데. 그건 그렇고 종교 박물관이라. 음, 자네도 오후에 그쪽으로 가보게. 알다시피 그 망할 놈의 수도원은 반동분자들의 집합소가 아닌가. 그 불여우가 거기서 신부를 만나 또 무슨 작당을 할지 모르니 가서 잘 들어두는 게 좋겠네. ”

 

“ 하지만... 야스민은 무신론자인 걸요. 지난번에도 수도원에 갔을 때 박물관만 실컷 구경하고 카페에서 차만 마시고 나왔는데요. ”

 

그놈이 무신론자든 광신도든 중요하지 않아! 일단 수도원에 드나든다는 것 자체로 보고서를 꾸밀 수 있는 거야. 하여튼 오후에는 수도원에 가게! 그리고 그 녀석과 수도원 반동분자들의 커넥션에 대한 보고서 초안을 잡아보는 거야. 주말에는 공연이 있겠지? ”

 

“ 예, 내일은 백조의 호수, 모레는 지젤입니다. ”

 

“ 좋아. 요즘은 레베진스키가 꼬리를 밟힌 것 같다면서 정보가 뜸하단 말이야. 자네가 짬을 내서 한번 그 친구를 만나보게. 극장 동향에 대해서도 월요일에 따로 보고하게. 그럼 이만! ”

 

 

그래서 베르닌은 산더미 같은 일을 중간에 왕창 끊어버리고 밀린 일에 대한 근심에 짓눌린 채 오후에 수도원으로 갔다.

 

 

 

*   *   *

 

 

 

왕재수는 수도원 뒤뜰에서 예고르 사제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말리야도 함께였다. 가브릴로프 수도원은 검은 숲에서도 가장 따스하고 밝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뒤뜰에는 이미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겨우 사나흘 전에 폭설이 내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사제의 이야기로는 수도원 쪽에는 눈이 많이 오지 않아서 꽃나무도 많이 얼지 않았다고 했다. 베르닌을 보자 모두가 반겨주면서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 예고르 사제는 지난번에 흰머리천사날개풀을 따러 왔을 때 알게 된 사이였고 아말리야는 보랴의 생일 파티에서 만나 안면이 있었다. 아말리야는 아침에 구웠다면서 산딸기 파이를 큼직하게 잘라 베르닌에게 내밀었다. 너무나도 달콤하고 향긋한 냄새에 베르닌은 이미 정신이 혼미했다. 왕재수가 포크를 건네주면서 물었다.

 

 

“ 너 여기 왜 왔어? 일 안해? ”

 

“ 너 여기 있다니까 국장이 따라가래. ”

 

“ 칫, 또 반동분자가 어쩌고 수도원이 어쩌고 수작부리는 보고서라도 쓰려는 모양이지. ”

 

“ 어... 꼭 그런 건 아닌데... 국장이야 뭐... ”

 

“ 나 신작 때문에 온 거야. 레스코프 소설들을 재구성해서 리브레토를 짤 거란 말이야. 키로프에 있을 때부터 짜놨던 건데 여기 오니까 생각이 좀 바뀌더라고. 이콘이랑 조각상이랑 벽화 보러 온 거란 말이야. 신부님이랑 아말리야는 아무 상관없어. 나 때문에 괜히 끼어들게 하지 마. 알았지? ”

 

“ 내가 왜 그런 짓 하니. 보고서는 대충 쓸 거야. 오늘 너는 신부님이랑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안 만난 거야. 그냥 여기서 꽃구경하고 박물관에서 그림 보고 간 거야. 두 분도 그렇게 해주실 수 있죠? ”

 

“ 우리 미셴카를 위해서라면야... ”

 

“ 하느님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하셨지만...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건 괜찮겠지. ”

 

 

베르닌은 정신없이 산딸기 파이를 흡입하고 차를 마셨다. 파이는 너무나도 맛있었다. 부스러기를 마구 흘리며 먹자 왕재수가 한숨을 쉬었다.

 

 

“ 왜 이렇게 급하게 먹냐. 점심 안 먹었어? ”

 

“ 오늘 구내식당 메뉴가 부실했단 말이야. 양배추 수프에 소금 범벅 마카로니였어. ”

 

“ 우욱, 듣기만 해도 싫다... ”

 

 

그때 아말리야가 베르닌이 맛있게 먹는 걸 보니 좋다면서 메도빅과 사과빵을 가져다주었다. 베르닌은 너무 행복해서 기절할 것 같았다. 순식간에 산딸기 파이 한 조각, 메도빅 한 조각, 사과빵 두 개를 해치웠다. 차도 두 잔이나 마셨다. 왕재수는 산딸기 파이 반 조각을 곁들여 우아하게 차를 마시면서 베르닌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혀를 찼다.

 

 

“ 손목토시... ”

 

“ 일하다 왔단 말이야! ”

 

“ 다 태워버린 줄 알았는데 대체 그거 몇 개나 있는 거야? ”

 

야! 왜 네 맘대로 내 토시를 태워! 어쩐지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니. 사무실에 여분으로 놔둬서 망정이지. ”

 

“ 칫. 촌스러우니까 그렇지. 아가일 셔츠도 태우려다 딴 옷이 없는 것 같아서 그건 놔뒀단 말이야. 근데 너 발목은 괜찮아? ”

 

“ 그때 의사 선생님이 치료해줘서 부기는 가라앉았는데 아직 약간 욱신거려. 찜질해주라고 하셨는데 계속 야근하느라... ”

 

“ 신부님한테 약초 찜질 받으면 좀 나을 텐데. 나 아까 어깨 찜질 받아서 한결 나았거든. ”

 

 

예고르 사제는 베르닌의 발목을 보더니 수도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따끈하게 데운 약초 주머니를 대고 찜질을 해주었다. 발목에 남아 있는 멍 자국에 왕재수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빨리 나으려면 그쪽 발은 쓰면 안 되는데. 계속 걸어 다니고... ”

 

“ 별로 안 다쳤는데 뭐. 멍 때문에 심해 보이는 거야. 너는 어깨 괜찮아? 흉터라도 생기면 큰일이잖아. ”

 

“ 그러게. 내 백옥 같은 피부에 흉 지면 안 되는데. 뭐 흉터 남아도 할 수 없지. 눈에 잘 띄진 않을 거야. 나 사실 다른 데도 흉터 있거든. ”

 

“ 엥, 정말? 너 피부 진짜 좋잖아. 완전 하얗고. 흉터 같은 거 못 봤는데. ”

 

“ 네가 나 흉터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나 벗은 것도 안 봤으면서! 벌목공 숙소에서 나 목욕할 때도 눈 감고 있어놓고! ”

 

 

‘너 아플 때랑 물에 빠졌을 때랑 바질 춘다고 옷 갈아입을 때 봤거든!’ 하고 대꾸해주려고 했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그때도 구석구석 찬찬히 본 적은 없었으므로 베르닌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벗은 걸 봤다고 하는 것도 뭔가 이상한 것 같아서.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 너 왜 흉터 있어? 춤추다 다쳐서? ”

 

“ 어, 아니... 춤추다 다치는 건 뭐 자주 있는 일이긴 한데 나 원래 흉터 잘 안 생기는 편이야. 피부 재생이 잘 된대. 그냥... ”

 

 

왕재수는 말끝을 흐리더니 사제에게 찜질 주머니 만드는 법을 물었다. 사제는 약초가 든 주머니를 여러 개 챙겨주면서 잠깐 쪄서 사용하라고 했다. 찌는 것과 삶는 것의 차이를 그새 까먹은 왕재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에 넣고 끓여요?’ 하고 물었다. 그 바보 같은 질문에 예고르 사제는 말문이 막혔고 베르닌이 대신 끼어들었다.

 

 

“ 야, 그때 만두 쪄봤잖아! 찜통에 올려놓고 증기로! ”

 

“ 아, 그게 찌는 거구나. 우리 집에 찜통 없는데. ”

 

“ 왜 없어! 지난번에 내가 너네 집에서 찜통에 만두 쪄줬잖아! 에휴, 넌 어차피 몰라도 돼. 집 가면 어차피 내가 이거 데워줄 텐데 뭐. 그 주머니들도 내가 챙길게. ”

 

 

마음씨 착한 예고르 사제와 아말리야는 약초 주머니에 열매즙, 왕재수를 위한 약초즙, 베르닌을 위한 수도원 버섯빵과 사과빵을 바리바리 싸주었다. 그래서 베르닌은 뿌듯해하며 왕재수와 함께 수도원을 나왔다.

 

 

 

 

*   *   *

 

 

 

 

수도원 입구에는 왕재수의 번쩍거리는 차가 세워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앉으면서 베르닌이 물었다.

 

 

“ 너 어떻게 여기까지 차 끌고 왔어? 운전도 서툴면서. ”

 

“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랑 같이 왔어. 스베촉에서 보랴랑 같이 점심 먹었거든. 버스 타고 가신다 해서 내 차 타고 같이 가자 했어. ”

 

“ 뭐야, 그럼 아말리야한테 운전을 시켰단 말이야? 어르신한테! ”

 

“ 그러면 안 되니? 운전은 잘하는 사람이 하는 거지. 버스도 30분이나 기다려야 한댔는데. 내려서도 수도원까지는 한참 걸어야 되잖아.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도 내 차 몰고 와서 좋다고 했어. 운전하는 재미가 있대. 근데 정말이야? 내 차랑 지굴리랑 달라? ”

 

“ 어, 이 차야 고급차니까 당연히 운전하는 맛이 다르지. 하긴, 나도 버스 타고 내려서 걸어왔는데 좀 멀긴 하더라. ”

 

“ 네 차는 어떻게 됐어? 그 털털대는 지굴리. 폐차시켰어? ”

 

“ 아니. 정비소에 맡겼는데 2주일은 걸릴 거 같아. 문짝도 떨어지고 엔진도 고장나고 유리창도 깨지고... 네가 트렁크 문짝도 떼어버렸잖아. ”

 

“ 그러니까 차라리 폐차해. 고치는 값이 더 들겠다. KGB에서 수리비용 대준대? ”

 

“ 안 대준대... 내가 운전 미숙으로 사고 낸 거니까 내 책임이래. ”

 

“ 그럴 줄 알았어, 쳇. 그냥 내 차 끌라고 했잖아. 나는 네가 출퇴근만 시켜주면 되는데. ”

 

“ 싫어! 내가 왜 네 차를 끌고 다니냐. 너 출퇴근은 이걸로 시켜줄게. 그치만 우리 회사에 이거 끌고 가긴 싫어. 이건 네 앞으로 나온 차잖아. 극장 임원용! 난 공무원이란 말이야. 청렴 의무도 있고... ”

 

청렴 의무 같은 소리. 제일 고급차 끌고 다니는 게 공산당 간부랑 노멘클라투라라고. 그럼 너 요즘 어떻게 출퇴근한 거야? 지굴리도 그 모양이면. ”

 

“ 너 요 며칠 로만네 집에서 자느라 몰랐구나. 나야 걸어 다녔지. 우리 회사는 집에서 가깝잖아. 너네 회사나 강 건너 가는 거지. ”

 

“ 바보야, 걸어 다니니까 발목이 아직 아픈 거야. 발목 나을 때까지 이 차 가지고 다녀. ”

 

“ 싫어! ”

 

“ 책상물림 주제에 웬 똥고집이니. 좋아, 그러면 나 다음 주까진 로만한테 안 가. 너 나 무조건 출퇴근시켜줘! 그러면 나 태워다주고 이 차 끌고 가서 너네 회사에 세워놨다가 밤에 데리러 오면 되지! ”

 

나야 그럴 수 있지만... 너 일주일 동안 로만도 없이 독수공방할 수 있냐? ”

 

 

왕재수의 눈이 금세 휘둥그레지더니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 일주일... 흑... 가뜩이나 요즘 계속 바빠서 로만이랑 많이 못 놀았는데... ”

 

“ 그것 봐. 그냥 거기 가 있어. 난 살살 걸어 다니면 되니까. ”

 

“ 아니야! 로만보고 우리 집 오라 그러면 되지! ”

 

“ 국장한테 걸릴까봐 너 맨날 걱정하잖아. ”

 

“ 너네 집 놀러왔다 하면 되잖아. 자기가 그렇게 하라 해놓고. ”

 

 

별수 없이 베르닌은 발목이 나을 때까지 왕재수의 차를 쓰기로 했다. 왕재수가 꼬치꼬치 캐물어서 지굴리 수리비 견적도 실토했다. 왕재수는 혀를 내둘렀다.

 

 

그 돈이면 중고 지굴리 하나 뽑겠다!

 

“ 너 중고 지굴리가 얼마인지 알기나 하냐? 좋은 대접만 받고 살아서 인민들 물가도 모르는 게. ”

 

“ 흥, 그건 두고 보면 알지. 정비소에 전화해서 일단 수리 보류하라 그래. 그 가격으로 원래 차보다 나은 중고 지굴리 구해주면 될 거 아냐. ”

 

“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네가 어디서 중고차를 구해! ”

 

“ 그러니까 기다려보라고! 다 구하는 수가 있어! ”

 

 

베르닌은 큰 소리 빵빵 치는 왕재수 때문에 기가 막혔지만 워낙 의외의 인맥이 많으니 혹시나 싶어서 일단 알았다고 했다.

 

 

 

강을 건너 구시가지로 접어들었을 때쯤 왕재수는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코즐로프와 밤새 사랑을 불태운 게 분명했다. 폭설로 갇혔을 때 열이 올라 추워하며 코즐로프를 애타게 찾던 모습이 떠오르자 베르닌은 가슴이 쿡쿡 쑤셨다. 자기가 별 도움이 되지 못한 게 속상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때 투레츠키가 와줘서 다행이었다. 베르닌은 썰매 운송비 100루블을 50루블로 감해주는 대가로 주말에 투레츠키의 일을 돕기로 했었지만 다음날 왕재수가 사무실로 전화를 해왔다. 자기가 투레츠키와 셈을 다 끝냈으니 베르닌은 주말에 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베르닌은 빚이 탕감된 게 기쁘다기보다는 저 녀석이 대체 또 무슨 거래를 한 건지 걱정이 될 뿐이었다.

 

 

‘ 이 자식, 혹시 투레츠키랑 자주기로 한 거 아냐? 그 망나니가 그때도 썰매 타고 갈 때 이 자식 비몽사몽인 거 이용해서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설마 몸으로 때우고 100루블이랑 자기 약값 떨어버린 건가? 아니야, 분명히 바냐는 자기 취향 아니라고 했어. 어휴, 정말 이 자식은... 별 이상한 걱정 다 하게 만들고! ’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는데 수위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아는 척을 했다.

 

 

“ 엥, 당신 웬일이죠? 그 후진 지굴리는 어디로 가고 이렇게 좋은 차를? 아, 그러면 그렇지. 감독님 차였구먼. 이 차는 매일 구석에 주차만 돼 있더니... 그건 그렇고 그 지굴리는 어디 갔어요? ”

 

“ 고장 나서 수리 맡겼어요. ”

 

“ 허참, 그래도 매일 보던 지굴리가 없으니까 좀 섭섭하긴 하네. 그거 연식이 오래돼서 수리비 꽤 나올 텐데. 혹시 폐차할 거면 정비소에 맡기지 말고 나한테 넘겨요. 괜찮게 쳐줄 테니까. ”

 

안 해요! 폐차 안 해요! 아무리 후진 지굴리라도 그거 내가 아끼는 찬데 왜 다들 폐차하라는 거예요. 잘 고쳐서 십년 이십년 더 쓸 거예요!

 

 

베르닌이 울컥해서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옆에서 왕재수가 투덜댔다.

 

 

“ 십년 이십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폐차 안 하면 내가 불 지를 거야. ”

 

“ 너 그랬단 봐! 재물 손괴와 방화죄로 고소할 거야! 이건 손목토시와는 경우가 다르단 말이야! 나 법학 전공... ”

 

“ 너 나 정말 고소할 거야? 악마... ”

 

 

왕재수가 깜짝 놀라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까만 눈이 동그래지면서 금세 상처받은 표정이 되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그거 나한테 안 통한다고 했잖아. ”

 

“ 잘만 통하던데. ”

 

“ 웃기지 마! 네 착각이야! ”

 

“ 칫. ”

 

 

여전히 지굴리를 폐차시켜 고철 값을 떼먹을 궁리에 눈을 반짝이고 있는 수위를 뒤로 하고 그들은 엘리베이터로 갔다. 베르닌이 살짝 다리를 절룩이자 왕재수가 슬며시 팔을 붙잡아 주었다.

 

 

“ 나 괜찮다고 했잖아. ”

 

“ 그 발에 무게 실으면 안 좋단 말이야. ”

 

“ 네 어깨나 걱정해! ”

 

“ 난 괜찮아. 뼈 다친 것도 아니고. 사흘 밤 내내 로만이 곰한테 맞은 부위 찜질도 해주고 어루만져주고 뽀뽀도 해줬어.

 

“ 제발 바이올린 아저씨와 네가 밤을 불태우는 얘긴 하지 말아줬으면. ”

 

“ 너 이상해. 로만이랑 내가 응응하는 얘기만 나오면 왜 그렇게 민감해지는 거야? 지나친 부정은 억압의 표시라고. 아무래도 너는 욕구불만인 것 같아. 너무 오래 응응을 안 해서 그래. 리자랑은 잘 안되니? ”

 

웬 리자!!! 갑자기 웬 리자 얘긴데! 나랑 리자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

 

아 맞다, 넌 렐랴 좋아했지. 근데 렐랴는 아직도 날 너무 좋아한단 말이야. 그때 스네고로드에서도 그렇고 리자는 너 좋아하는 것 같던데. 둘이 좀 잘해보면 안되냐? ”

 

“ 리자랑 나 엮지 마. 리자는 그런 생각도 없는데... 우린 그냥 동료인데. ”

 

“ 멍충이. 너 원래 알렉산드라하고도 잘 될 수 있었어. 그때 보랴 생일 파티 때도 알렉산드라 처음엔 너한테 마음 있어보였단 말이야. 근데 네가 바보짓 하니까 그새 보랴가 낚아갔잖아. 하긴 내가 알렉산드라였어도 보랴한테 넘어가긴 했겠다. 보랴 멋있어. ”

 

으악, 이번엔 또 웬 알렉산드라야! 너는 정말 머릿속에 그런 생각밖에 없냐! 대체 남녀든 남남이든 같이 있으면 무조건 그런... ”

 

“ 바보 멍충이. ”

 

 

둘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갑자기 베르닌은 일주일간의 피로가 몰려와서 그런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월요일부터 검은 숲에 갔다가 폭설로 갇히고 발목을 다치지 않나, 돌아와서는 산더미 같은 일에 짓눌려 야근에 시달리고 집에는 그야말로 잠깐 들러 눈만 붙이고 나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옆에 있는 왕재수의 야윈 얼굴과 어린애처럼 커진 까만 눈을 보니 좀 막막했다.

 

 

‘ 이 자식 곰한테 맞고 열 올라서 아팠으니까 잘 먹여야 하는데 오늘 저녁은 뭘 해먹이지. 냉장고도 텅 비어 있고. 시장이라도 봐왔어야 되는데 깜박했네. 다시 나갔다 와야 하나. 아아 귀찮아. 너무 피곤하다. 설거지도 잔뜩 쌓여 있고 빨래도 장난 아닌데... 집 청소도 며칠을 안 한 거야... 아침에도 먼지가 굴러다녔지... 화장실 청소도 해야 하고 쓰레기도 버려야 하고... 근데 이 녀석 밥 먹이고 차도 우려 줘야 하고... 이 녀석 또 피곤하다고 저녁 먹고 나면 자기 집 안 가고 우리 집에서 픽 쓰러져서 잘 텐데... 베갯잇이랑 시트도 갈 때 됐는데. 깔끔 떠는 녀석이니 분명 투덜댈 텐데. 아아, 나도 누가 와서 집안일 좀 해줬으면 좋겠다. 나도 이 녀석이 되고 싶다...

 

 

급속하게 심란해진 베르닌의 속도 모르고 왕재수가 조잘거렸다.

 

 

“ 오늘 저녁 뭐 해줄 거야? 나 아까 수도원에서 버섯 샐러드랑 우하 먹었는데 벌써 배 꺼졌어. 신기해, 오늘은 춤도 안 추고 애들한테 소리도 안 질렀는데 왜 이렇게 벌써 배가 고프지. 수도원 공기가 좋아서 그런가봐. ”

 

“ 어, 으응... 그래. 다행이다, 너 맨날 입맛 없다 그러고 밥 잘 안 먹더니... 그냥 수도원에서 저녁까지 먹고 올 걸 그랬구나... ”

 

“ 신부님도 바쁘고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도 내 점심이랑 차랑 파이까지 챙겨주셨는데 저녁까지 얻어먹긴 미안하잖아. ”

 

 

‘너는 신부님이랑 아말리야한테는 미안하고 나한테는 맨날 저녁 얻어먹으면서 하나도 안 미안하냐!’ 하고 버럭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깟 밥 챙겨 먹이는 것 가지고 유세하는 것 같기도 해서 베르닌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실 자기가 해준 밥을 왕재수가 맛있게 먹는 걸 보면 뿌듯하기도 했으니까.

 

 

“ 어... 그렇구나. 먹고 싶은 거 있니? 집에 아무 것도 없어, 어차피 가게 갔다 와야 하니까... 점심때 우하 먹었으면 생선은 안 해도 되겠구나... 닭가슴살 사다 쪄줄까? ”

 

“ 집에 왜 아무 것도 없어? ”

 

“ 너 로만한테 가 있는 동안 계속 야근했거든. ”

 

“ 너네 국장 나빠! 눈 와서 그렇게 고생했는데 지굴리도 네 돈으로 고치라 하고 막 야근시키고! 가만 안 둘 거야! ”

 

“ 너도 극장에서 계속 늦게 왔잖아! 내가 모르는 줄 아냐! 분명히 의사 선생님이 폐렴 도질 수도 있으니까 이번 주는 조심조심하고 일은 조금만 하라 했는데! ”

 

“ 너 어떻게 알아, 내가 늦게 온 거? ”

 

“ 왜 모르냐! 이번 주 공연 스케줄 오늘 빼고 꽉 찼는데! 너 공연 올라가는 날은 끝까지 남아 있잖아! 아침마다 류다한테 전화해서 물어봤어! ”

 

우와, 이 감시꾼. 스파이!

 

“ 나 이제 그렇게 불러도 열 받지도 않아. 의사 선생님한테 앞잡이 개자식이란 욕을 너무 많이 들어서 감시꾼 스파이는 양반이야. 그때 나도 다리 다쳤는데 선생님은 너만 끼고 돌고! 나보고 앞잡이라고 하고... ”

 

“ 레프 사벨리예비치 욕하지 마. 원래 그런 스타일이잖아. 그저께 선생님이 너는 왜 치료받으러 안 오냐고, 너 갖다 주라고 진통 효과 있는 약초즙도 챙겨 주셨었는데. 아, 감독실에 놔두고 왔나보다. 병원에 다시 가볼까? ”

 

“ 됐어. 신부님이 주신 약초주머니로 찜질하지 뭐. 먹을 거 사러 나가는 것도 귀찮은데 병원까지... ”

 

“ 우리 집에 먹을 것 좀 있는 거 같은데... 사러 가기 귀찮으면 그냥 우리 집 올라가서 찬장이랑 냉장고 좀 뒤져봐. ”

 

너도 요리 할 줄 알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누가 만들어준 밥 먹고 싶다. ”

 

“ 난 요리 배울 시간이 없었단 말이야! 내가 얼마나 바쁜 몸이었는데. 그리고 가만히 있어도 다 나한테 만들어다 주고 갖다 바쳤는데... ”

 

“ 좋겠다... 아아, 나도 누가 밥 좀 해줬으면. ”

 

 

복도에는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아마 이웃집에서 저녁을 해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부럽다고 생각하며 베르닌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현관문에 열쇠를 꽂았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 어, 이상하네... 아침에 너무 졸려서 문을 안 잠그고 나왔나? ”

 

“ 도둑 든 거 아냐? ”

 

“ 우리 집에 훔쳐갈 게 뭐가 있냐. 너네 집이라면 몰라도. ”

 

 

베르닌은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온기와 함께 고소한 기름 냄새와 맛있는 음식 냄새가 훅 끼쳐왔다. 앞치마를 두르고 한 손에는 뒤집개를 든 베르닌의 어머니가 후다닥 뛰쳐나왔다.

 

 

“ 아이고 우리 다누슈카! 이제 퇴근하는구나! 에고에고 우리 아들, 이게 얼마만이냐! ”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앗, 어머니! 어떻게 된 거예요? 언제 오셨어요! ”

 

“ 너 우리 옆집 살던 아뉴타 생각나니? ”

 

“ 어, 네. 클라우디야 아줌마네 딸이요? 저랑 어릴 때 놀던. ”

 

“ 그래그래, 그 아뉴타. 걔가 이번에 아들을 낳았다지 뭐냐. 그래서 클라우디야도 오랜만에 보고 애기도 볼 겸 아빠랑 같이 올라왔단다. ”

 

“ 엥, 아버지도 오셨어요? ”

 

“ 그럼 엄마 혼자 여기까지 기차타고 어떻게 오니, 심심하게. 여보! 그만 일어나요! 우리 다냐가 왔는데! ”

 

 

베르닌의 아버지도 달려 나왔다. 졸다가 퍼뜩 깨어난 듯 안경이 코끝에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베르닌을 힘차게 한번 포옹하고는 등짝을 두들기며 기뻐했다.

 

 

“ 왔냐, 우리 아들. 새해에도 집에 안 오고! 그러니 엄마아빠가 너 보러 오는 수밖에! ”

 

“ 어, 저... 그게... ”

 

“ 괜찮다! 얼마나 일이 바빴으면 그랬겠니, 무려 KGB 아니냐. 어서 들어오렴, 엄마가 너 좋아하는 거 잔뜩 하고 있다. 시장에서 뭘 그렇게 바리바리 계속 사는지! ”

 

“ 아유 그럼 우리 다냐 몇 달 만에 보는데 맛있는 거 해먹여야죠! 가뜩이나 사내 녀석 혼자 나와 사느라 먹는 것도 부실할 텐데. ”

 

 

얼떨떨해진 베르닌은 부모님에게 반쯤 안기다시피 현관 안으로 끌려들어가다 퍼뜩 생각이 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왕재수가 눈이 동그래진 채 복도에 오도카니 서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베르닌은 후다닥 왕재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 아, 저... 여기 제 친구인데요. 미샤라고... 이웃에 살아서... 같이 저녁 먹으려고 했는데... ”

 

“ 어머나, 친구가 같이 왔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오랜만에 보는 우리 아들 때문에 친구가 있는 걸 못 알아봤네. 미안해요, 미안해. 어서 들어와요, 같이 저녁 먹으면 되겠네. ”

 

“ 아니, 그게... ”

 

 

베르닌은 당황했다. 까다로운데다 낯을 가리는 왕재수가 전형적인 시골 어르신들인 자기 부모님을 불편해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녀석 저녁도 챙겨줘야 하는데 어떡하지 하고 궁리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그야말로 눈부신 미소를 짓더니 인사를 했다.

 

 

“ 안녕하세요, 다닐 부모님이시군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겠네요. 저는 미하일이예요. 그냥 미샤라고 부르시면 돼요. ”

 

“ 아유, 젊은 아이가 참 예의도 바르고 인사성이 좋구나. 어쩌면 이렇게 잘생겼니. 영화배우 뺨치게 생겼네. 어서 들어오렴. 같이 저녁 먹자꾸나. 우리 아들 친구면 아들이지 뭐. 들어오렴. ”

 

그럼 실례가 안 된다면 들어가겠습니다. 저녁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베르닌은 ‘나 저녁 뭐해 줄 거야? 빨리 밥 줘!’ 하고 들볶던 왕재수와 이 정중하고 얌전한 청년 사이의 어마어마한 차이에 괴리감을 느꼈지만 어쩐지 웃음이 나와서 입을 꾹 다물려고 애쓰며 집으로 들어갔다.

 

 

 

 

*   *   *

 

 

 

 

베르닌의 부모님은 가브릴로프 토박이였지만 몇 년 전 베르닌이 KGB에 입사했을 때쯤 비슷한 소도시인 푸스토프로 이사 가서 살고 있었다. 엔지니어인 아버지가 푸스토프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브릴로프 흑빵 공장에서 오랫동안 장부 담당계로 일한 어머니도 같이 옮겨갔다. 베르닌은 첫해에는 푸스토프에서 새해도 보내고 어머니의 날도 같이 보내는 등 종종 찾아갔지만 그 이후에는 너무 바빠서 거의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간 게 전부였다. 그나마도 지난 가을부터는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이따금 통화를 했을 뿐이었다. 마음속으로는 항상 가책이 느껴졌지만 푸스토프는 가브릴로프에서 기차로 여덟 시간이나 걸렸기 때문에 자주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엉망이던 집안은 어머니가 한바탕 청소를 했는지 그야말로 반짝반짝하게 치워져 있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쓸고 닦아놓았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물건들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베란다에는 일주일 이상 묵혀 두었던 빨래가 가지런히 널려 있었다. 싱크대에 처박아뒀던 그릇들도 모두 말끔하게 설거지가 완료된 상태였다. 냉장고에는 야채와 과일과 고기와 잼, 병조림 등속이 가득했다. 아들 보러 온다면서 어머니가 이것저것 준비해 바리바리 싸들고 온 게 분명했다. 가스렌지 위에는 커다란 냄비와 프라이팬이 올라가 있었다. 냄비에서는 오리고기를 넣은 살랸카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펄펄 끓고 있었고 프라이팬 위에서는 쇠고기 커틀릿이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 때문에 베르닌은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 어서 앉아라, 다냐. 혹시 오늘도 야근할까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밥은 시간 맞춰 먹어야 하는데 때를 넘길까봐... 그래도 오늘은 6시에 왔구나. ”

 

“ 그럼, 우리 다냐도 이제 벌써 3년차인데! 이제 윗사람들 눈치 보는 시기는 지났지. 곧 승진도 할 거고. 그렇지 않으냐? ”

 

“ 어, 저 아직도 막내라서요... 저 다음으로는 공채가 안 들어왔어요. 오늘은 외근이 있어서 일찍 온 거예요. 미샤랑 같이 일을 볼 게 있어서요. 얘 아니었으면 오늘도 늦었을 거예요. ”

 

“ 어머, 너도 우리 다냐랑 같은 회사 다니니? 난 학생인줄 알았지 뭐야... 워낙 어려 보여서. 다냐 동료였구나. 우리 다냐가 막내 직원이랬는데... 설마 다냐보다 선배는 아니겠지? 우리가 큰 실수라도 한 거 아니야? ”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왕재수에게 사과를 했다. 왕재수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에요,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저는 다른 데서 일해요. 다닐보다 어리고요. 전혀 실수하신 거 아니에요. 그리고 선후배가 뭐가 중요해요. 자기 일만 잘하면 되지. 마음 쓰지 마세요. ”

 

“ 아유, 고맙구나. 어쩌면 요즘 아이답지 않게 말도 이렇게 의젓하게 하니. 그래, 너는 어디서 일하니? 우리 다냐처럼 공무원이니? ”

 

“ 아, 전 극장에서 일해요. ”

 

“ 어머, 그렇구나. 어쩐지 번듯한 게 너무 잘생겼더라니. 목소리도 좋고 발음도 좋은 게 배우인가 보구나. 배우 일은 힘들 텐데... 전에 내가 아는 집 딸이 연극배우를 했었는데 초봉이 너무 짜서 허덕이더구나... ”

 

“ 에이, 처음엔 다 그런 법이지. 우리 애처럼 공무원이면 좀 더 안정적이긴 하겠지만 배우도 좋은 직업이지. 지금이야 나이가 어리니까 대우가 좀 낮은 편이겠지만 찬찬히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 괜찮아질 거다. 그러니 힘을 내렴. 너는 외모가 워낙 뛰어나니 인기도 많을 거고 금방 좋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을 거란다. ”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면서 왕재수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금방이라도 ‘웬 헛소리예요! 난 우주 최강 꽃미남에 세상에서 제일 춤 잘 추는 초특급 수퍼스타란 말이에요! 공훈예술가 출신에 훈장이 몇 갠 줄 알아요? 전세계에서 날 보려고 넙죽넙죽!’ 하고 버럭 소리칠까봐 조마조마해서 마른침을 꿀꺽 삼킨 후 더듬거리며 말했다.

 

 

“ 어, 미셴카... 미안해. 우리 부모님은 극장에 잘 안 가시거든. 그쪽은 잘 모르셔. 나도 그랬고... 저, 그래서... ”

 

“ 왜? 알렉세이 필리포비치 말씀이 맞는걸. 배우는 원래 초봉이 짠 편이야. 성실해야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도 맞고. 넌 내가 재능 하나만으로 올라간 줄 아니? ”

 

“ 아니... 나도 알아, 너 엄청 노력한 거... 저기... 아버지, 미셴카는 배우가 아니고요, 발레단 감독이에요. ”

 

“ 음, 사무국에 있는 모양이구나. 너무 잘생겨서 배우인 줄 알았는데 이거 미안하구나. 극장은 일반 공장이나 사무실과는 조직이 좀 다르다는 얘긴 들었다. 젊은 애들에게도 감독직을 주나보구나. 그래, 발레단을 운영하고 뒷받침하는 총무 업무인가 보구나. 우리 다냐도 보안위원회에서 아주 중요한 업무를 맡고 있단다. 서무가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가지.

 

“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감독... ”

 

 

모든 일을 아들 위주로 생각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때문에 베르닌은 매우 당황했지만 왕재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다닐이 없으면 얘네 회사는 일이 안 돌아가요. 그래서 국장인지 뭔지 하는 인간이 매일 다닐을 찾아요. 일도 엄청 많이 줘서 고생시켜요. ”

 

“ 그게 문제란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직원은 인정을 받는 대신 그만큼 일이 많아지니... 게다가 우리 애가 또 워낙 성실해야 말이지. ”

 

“ 아유, 당신은 정말... 틈만 나면 아들 자랑만 하고. 친구 앞에서 다냐가 얼마나 쑥스럽겠어요. 미안하구나, 미셴카. 배고프지? 우리 저녁 먹자꾸나. 우리 애가 좋아하는 거 많이 했는데 네 입맛에도 맞을 거다. 사내아이들이야 고깃국에 커틀릿이면 껌벅 죽잖니. ”

 

 

어머니가 식탁에 접시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나오는 접시들에 눈이 휘둥그레진 왕재수를 보며 베르닌이 웃었다.

 

 

“ 너 전에 보랴네 집에서도 놀랐다고 했지. 가브릴로프에서는 원래 한꺼번에 식탁에 다 차려놓고 먹어. 디저트만 빼고. ”

 

“ 아, 맞다. 보랴한테 들었는데. 그때도 수프랑 샐러드랑 전채랑 메인요리가 한꺼번에 나와서 놀랐어. 전에 렐랴도 알려줬던 것 같아. 근데 평소엔 이렇게 제대로 차린 정찬을 먹는 적이 없으니까 자꾸 까먹고 놀라. ”

 

“ 미샤는 가브릴로프 출신이 아닌가 보구나? 어디서 왔니? ”

 

“ 저는 레닌그라드에서 왔어요,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

 

“ 어머나, 대도시에서 왔구나! 우리 다냐도 모스크바에서 공부했는데. 그래서 둘이 통하는 데가 있나보네. 어쩐지 말투도 그렇고 귀티가 좔좔 흐르더라니. 그리고 그냥 마샤라고 부르렴. 친구 엄마인데 뭘 그렇게 일일이 부칭까지 부르고 그러니. 나는 마샤, 이 사람은 그냥 알료샤라고 불러도 된단다. 이 오이 절임이랑 닭 간 샐러드 좀 먹어보렴. 원래는 닭 염통이랑 간을 섞어야 하는데 시장에 갔더니 염통은 다 떨어졌더구나. 우리 다냐가 어릴 때 참 좋아하던 거야. 어서 먹으렴. ”

 

 

베르닌은 이미 정신없이 오이 절임과 닭 간 샐러드를 먹고 있었다. 짭짤하고 시큼한 오이절임도 맛있었지만 닭 간이 쫄깃쫄깃한 게 정말 맛있었다.

 

 

“ 우와, 진짜 맛있어요. 이거 먹어본 게 언젠지... 역시 우리 집 닭 간 샐러드가 제일 맛있어요. 어, 근데... ”

 

 

베르닌은 문득 왕재수 생각에 뜨끔했다.

 

 

‘ 저 녀석 닭 간 같은 거 안 먹을 텐데... 어떡하지... 많이도 덜어주셨네. ’

 

 

그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왕재수는 베르닌의 어머니가 접시에 덜어준 오이 절임과 닭 간 샐러드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버터와 기름을 잔뜩 둘러서 튀겨낸 두툼한 호박 올라두슈키도 투정 없이 주는 대로 먹었다. 평소에는 보랴가 만들어줘도 너무 기름진 부침개라면서 입에 잘 대지 않는 음식이었다. 기름이 둥둥 떠 있는 오리고기 살랸카도 곧잘 먹었다. 베르닌의 어머니는 매우 기뻐했다.

 

 

“ 얘들이 많이 배고팠나 보구나! 아유, 우리 아들, 엄마가 해주는 커틀릿 먹고 싶어서 어떻게 했니. 구내식당에서 나오는 커틀릿은 납작하고 기름도 안 붙어 있어서 퍽퍽하고 맛도 없고 간에 기별도 안 갔을 텐데. 커틀릿 여러 개 구웠으니 많이 먹으렴. 미셴카는 커틀릿이 입에 맞니? ”

 

“ 네, 맛있어요,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아니, 마샤. ”

 

“ 그렇지, 이 커틀릿은 수제란다! 내가 직접 고기 다져서 빚어서 만든 거야. 많이 먹으렴. 어쩌면, 너는 사내애가 고와도 너무 곱구나. 미남인 것도 좋지만 손목을 보니 커틀릿 많이 먹어야겠다. 어서 먹으렴, 모자라면 더 구워주마. 다냐, 맛있니? ”

 

“ 진짜 맛있어요. 아아, 그리웠어요. ”

 

 

베르닌은 정신없이 살랸카를 후루룩 떠먹고 커틀릿을 큼직하게 잘라 마구 입으로 쑤셔 넣었다. 둥그렇게 구워낸 쇠고기 커틀릿을 포크로 누르자 엄청난 양의 기름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입 안에서도 다진 고기가 쫄깃하게 씹히면서 육즙과 기름이 자르르 돌아서 너무나도 고소했다. 맛있게 먹으면서도 슬며시 걱정이 되어 왕재수 쪽을 보았다. 왕재수는 나이프로 커틀릿을 조그맣게 잘라서 우아하게 먹고 있었다. 기름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도 툴툴대지 않았다. 베르닌의 어머니가 흑빵 조각을 접시에 고인 육즙과 기름으로 축축하게 적셔서 건네주며 ‘이게 제일 맛있단다’라고 했을 때도 그 까탈스러운 녀석이 펄쩍 뛰며 ‘기름덩어리 탄수화물!’ 하고 소리치는 대신 빵을 받아들고 ‘감사합니다’라고 대꾸하며 그대로 먹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가 남아 있는 커틀릿을 가지러 가고 아버지가 사레들려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에 베르닌은 왕재수의 손목을 톡 치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 야, 너 이거 느끼하잖아. 억지로 다 안 먹어도 돼. 우리 엄마 여기 토박이라서 음식 전부 엄청 기름진데... 입에 안 맞으면서... ”

 

“ 괜찮아. 맛있어. ”

 

“ 나야 맛있긴 하지만 여기 사람들 입맛에 맞는 거지 넌 아니잖아. 우리 엄마 원래 맛있다고 하면 계속 권한단 말이야. 배부르다고 해도 괜찮아. 너 우리 엄마한테 예의 차리느라 억지로 먹는 거잖아. 다이어트 중이라고 내가 말해줄게. 아니면 의사가 기름진 거 제한하라 했다고 해줄 테니까 억지로 먹지 않아도 돼. ”

 

“ 괜찮은데... ”

 

“ 너 지난번에 의장 부인, 누구더라, 그래, 이리나한테 끌려갔을 때 거기서 저녁 먹고 계속 괴로워했잖아. 맛없고 기름지다고! 우리 엄마나 이리나나 다 가브릴로프 토박이라서 비슷할 텐데... ”

 

“ 윽, 잊고 싶은 기억! 이리나가 준 음식은 진짜 장난 아니었어. 너희 어머니랑 비교하지 마. 너희 어머니가 해주신 건 맛있어. 정말이야. ”

 

“ 하지만... ”

 

“ 근데 이제 정말 배부르긴 해. 못 먹겠으면 그만 먹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나 많이 먹어. 오랜만에 엄마 밥 먹는 거잖아. ”

 

“ 그래놓고 나중에 막 투정하려고! ”

 

 

그때 베르닌의 어머니가 남은 커틀릿을 수북하게 쌓은 접시를 들고 왔다. 왕재수가 마음에 쏙 드는 듯 직접 커틀릿을 썰어주기까지 했다. 역시 왕재수의 미모는 나이 불문하고 모든 여자들에게 통하는 게 분명했다. 왕재수는 베르닌의 어머니가 썰어준 커틀릿까지만 먹은 후 굉장히 정중하게 너무 맛있는 식사였다며 인사를 했다.

 

 

“ 아유, 더 먹지 그러니. 우리 애만 많이 먹은 것 같은데. ”

 

“ 아니에요, 마샤. 너무 맛있어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먹었어요. 여기 와서 이렇게 맛있는 저녁을 먹은 건 처음이에요. ”

 

“ 맞아요, 얘 원래 밥 많이 안 먹어요. 이렇게 잘 먹는 거 처음 봤어요. ”

 

 

베르닌이 급하게 맞장구를 쳤다. 어머니는 매우 좋아했다. 베르닌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왕재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심지어 접시 치우는 것을 돕는 것이 아닌가! 베르닌은 너무 놀라서 눈이 튀어나올 뻔 했다.

 

 

으아, 저 자식이 식탁 치우는 걸 돕다니! 세상이 멸망하려나봐!

 

 

베르닌의 어머니는 아무 것도 모르고 굉장히 감동하며 왕재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뺨에 뽀뽀를 해주기까지 했다.

 

 

어머나, 미샤는 레닌그라드에서 온 애라 역시 다르구나. 가브릴로프 남자들은 손 하나 까딱 안하고 집안일은 여자들에게만 시키는데! 우리 남편도 그렇고 다냐도 그렇고 집에선 손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혔단다! 미셴카는 정말 착하구나, 어머니가 얼마나 든든하셨을까! 여자친구도 참 좋아하겠구나. 얼굴도 잘생겼지, 목소리도 가수 같고 매너도 좋은데다 집안일까지 도와주다니. 얼마나 인기가 많겠니. 우리 다냐는 마음씨는 비단결 같은데 원체 무뚝뚝하고 표현을 못 하니... ”

 

 

베르닌은 무지무지 억울해서 그만 투덜거리고 말았다.

 

 

“ 저도 집에서 청소 도와줬었는데... 쓰레기도 버리고... ”

 

“ 그깟 쓸고 닦는 거랑 쓰레기 몇 번 버리는 거 말고! 너는 엄마가 요리할 때 한 번도 안 도와줬잖니! 설거지도 도와준 역사가 없고! 하긴 아빠부터가 그랬으니!!! 그 아빠에 그 아들... ”

 

“ 아니, 왜 가만히 있는 나에게... ”

 

 

베르닌의 아버지도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아들의 뒤로 슬그머니 숨었다. 베르닌의 어머니가 더욱 비교를 하려고 드는데 왕재수가 여심을 스르르 녹이는 솜사탕 같은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 아니에요, 마샤. 다닐이 얼마나 집안일을 잘하는데요. 요리도 잘하고 청소랑 설거지도 진짜 깨끗하게 잘해요. 그러고 보니 어머니를 닮아서 요리를 잘하는 거였네요. 다닐이 해주는 저녁이 굉장히 맛있거든요. ”

 

“ 어머나, 그러니? 의외구나. 나는 우리 아들이 어릴 때부터 워낙 모범생에 우등생이라 공부에만 여념이 없어서 집안일이나 심부름 같은 건 아예 시키지를 않았단다. 그래서 모스크바 국립대 갔을 때도 다른 집에서는 아들이 명문대 갔다고 부러워했지만 나는 다냐가 엄마 품 떠나서 기숙사에서 밥을 어떻게 먹고 살지 너무 걱정이 돼서 잠이 안 왔단다. 여기 KGB에 입사하게 돼서 다시 내가 먹을 것도 챙겨주고 살림도 봐줄 수 있겠구나 했는데 알료샤가 푸스코프로 발령을 받는 바람에 우리가 이사를 가게 되지 않았겠니. 사내아이가 자취를 하니 매일 식당 밥이나 먹고 돼지우리 같은 집에서 살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워낙 마음이 쓰여야 말이지. 우리 애도 조금 있으면 스물아홉이 되는데 애가 원체 순진해서 공부만 하고 일만 열심히 하느라 아직 결혼도 못하고... 여자 손길이라도 좀 닿아야 편하게 살 텐데... 에휴...

 

“ 으아, 어머니... 제발... ”

 

“ 안 그래도 걱정하면서 왔더니 아니나 다를까 싱크대에 그릇이 수북하고 빨래도 안 해서 지저분한 옷가지가 쌓여 있고 집이 돼지우리... 그래서 내가 아까 싹 치웠단다. ”

 

“ 아니에요, 마샤. 다닐이 원래 되게 깔끔해요. 청소랑 설거지도 꼬박꼬박 잘 하는데 이번 주에 계속 야근하느라 못 한 거예요. 다닐은 정리정돈도 잘하고 요리도 잘해요. 걱정 마세요, 잘 지내고 있어요. ”

 

“ 그래, 그러면 조금 다행이다만... 그래도 남자가 빨리 장가를 가야 하는데... 이 나이 되도록 엄마아빠에게 제대로 된 여자친구 한번 소개시켜준 적이 없으니... 다른 집 아들들은 스물만 넘으면 제깍제깍 여자 데려와서 결혼하고 손주 보여주느라 바쁜데 우리 다냐는... ”

 

그러게 말이다. 너 요즘 만나는 여자 없니?

 

 

가만히 있던 아버지조차 가세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점점 가시방석에 올라앉은 듯 불편해졌다.

 

 

‘ 으아, 또 시작됐어... 언제 장가가느냐, 엄마 친구 아들이 어쩌고 손주가 어쩌고 저 레퍼토리... 아아... ’

 

 

어머니와 아버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베르닌을 닦달했다.

 

 

“ 아까도 아뉴타 아기 보러 갔더니 클라우디야랑 옛날 우리 이웃들이 다 모여서 자기 손주 자랑 며느리 사위 자랑... 그러면서 다냐는 언제 장가가느냐고, 외아들인데 빨리 손주 봐야 하지 않겠냐고 난리더라. 어휴, 그 사람들 앞에서야 우리 다냐는 워낙 회사에서 인정받는 재원이라 나라와 당을 위해 피땀 흘려 일하느라 바빠서 결혼은 조금 미루고 있다고 대답했지만 얼마나 속이 쓰린지. 걔들보다 네가 훨씬 잘났는데. ”

 

그러게 말이다. 남들 다 하는 결혼 왜 우리 아들은 아직도 못하고... 너 정말 데이트하는 여자도 없니? ”

 

“ 미셴카, 네가 우리 애한테 여자 친구 좀 소개시켜주고 그러렴. 너는 이렇게 잘생기고 매너도 좋은 걸 보니 여자들이 줄을 서겠구나. 우리 다냐는 너무 애가 착하고 숫기가 없어서 여우같은 계집애들 비위 맞추고 환심 사는 법을 모르는 게 문제란다. 나이가 서른이 다 돼 가는데 우리한테 여자 친구 데려와서 인사시킨 적도 없고... 우리는 정말 걱정이란다. 에휴... ”

 

 

베르닌이 펄쩍 뛰려는데 왕재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방긋 웃었다.

 

 

“ 떨어져 계셔서 잘 모르시는 거예요. 다닐이 여자들한테 은근히 인기가 많아요. 모스크바 국립대 나온 엘리트에 공무원이고 키도 훤칠하잖아요. 그리고 원체 친절하고 착한 성격이라 여자들이 좋아해요. 일하느라 바빠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금방 좋은 여자랑 결혼할 거예요. 결혼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랑 해야 되는 거잖아요, 두 분처럼. 그러니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걱정도 하지 마시고요. ”

 

 

아들에 대한 칭찬과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얘기를 듣자 베르닌의 어머니와 아버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머니는 좋아하며 초콜릿 파이를 가져왔고 아버지는 손뼉을 딱 쳤다.

 

 

“ 그러냐? 그럼 정말 다행이구나! 그런데 이 녀석은 왜 우리한텐 그런 얘기도 안 하고! ”

 

“ 다닐은 겸손해서 자기 자랑을 못 하더라고요. ”

 

“ 그래, 그렇구나. 그럼 마음이 좀 놓이는구나! 고맙다, 미셴카. 참 좋은 아이로구나. 우리 다냐에게 너 같은 친구가 있어 다행이다. 자, 이건 우리 마누라가 직접 구운 초콜릿 파이란다. 맛있으니 먹어보렴. 아니, 그러고 보니 너 한 잔도 안 마셨구나. 한 잔 받아라. ”

 

 

베르닌의 아버지는 웃으며 왕재수에게 보드카를 따라 주었다. 베르닌이 급하게 저지했다.

 

 

“ 어, 저... 얘는 술을 못 마셔요. 그냥 주스... ”

 

“ 허허, 괜찮다. 자식 같아서 따라 주는 거야. 그냥 한 잔만 마시렴. 자, 우리 다냐와 미셴카를 위해 건배! ”

 

 

베르닌은 왕재수가 건배만 한 후 안 마실 거라고 생각해서 마음을 놓으며 아버지가 따라 준 보드카를 쭉 들이켰다. 어머니의 맛있는 요리와 보드카는 찰떡궁합이었고 심지어 초콜릿 파이와도 잘 어울렸다. 행복해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보드카를 홀짝 마셔버린 왕재수가 ‘흐응...’ 하고 가냘프게 신음 소리를 내더니 베르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늘어지는 것이 아닌가!

 

 

앗! 야! 너 설마 마셨어?

 

“ 목말랐어... 으응, 어지러워. ”

 

“ 으아, 얘 좀 봐! 한 잔 다 마셨잖아! 너 미쳤냐, 목마르면 나한테 물이나 주스 달라고 하면 됐잖아! ”

 

“ 왜 그러니, 다냐? 아니, 미셴카는 정말 술이 약한가 보구나! 이를 어쩌면 좋니! ”

 

 

어머니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왕재수가 역시나 정해진 수순대로 만취해서 순식간에 기절해버렸기 때문이다.

 

 

“ 괜찮아요, 어머니. 얘 원래 술을 못 마셔서 조금만 입에 대도 필름 끊기거든요. 그래서 주지 말라고 한 건데... 집에 데려다 주고 올게요. 바로 윗집이거든요. ”

 

“ 아이고, 그랬구나. 당신은 어쩌자고 어린애한테 보드카는 따라줘서. ”

 

 

베르닌은 왕재수를 평소처럼 번쩍 안아서 데려가려다가 어쩐지 부모님에게 쓸데없는 오해를 사게 될까봐 괜히 제 발이 저려서 아버지에게 왕재수를 업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왕재수의 허리와 어깨를 부축해서 베르닌의 등에 기대 주었다.

 

 

“ 저 금방 갔다 올게요. ”

 

“ 안 도와줘도 되겠니? ”

 

“ 괜찮아요. 엘리베이터 타고 한 층만 올라가면 되거든요. ”

 

 

베르닌은 왕재수를 업고 7층으로 갔다. 들어가 보니 왕재수의 집은 지저분하게 어질러져 있지는 않았지만 며칠 동안 비워놓은 탓에 냉기가 돌았다. 춥긴 했지만 왕재수는 답답한 공기를 못 견디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난방을 확인한 후 침실 창문을 열어 잠깐 환기를 시켰다.

 

 

베르닌은 필름이 끊긴 왕재수를 침대에 내려놓고 스웨터와 양말을 벗겨준 후 이불을 덮어주었다. 걱정이 되어서 이마에 손도 짚어보고 숨소리도 들어보았다. 운 좋을 때는 보드카를 마셔도 반나절 쯤 깊게 잠든 후 깨어나는 정도지만 재수 없을 때는 열이 펄펄 끓고 두드러기가 돋고 토하고 굉장히 아프기 때문이다. 부디 전자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베르닌은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왕재수의 이마를 살짝 닦아준 후 잠시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부모님 때문에 내려가 보기는 해야겠고 왕재수 걱정은 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코즐로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코즐로프가 곧 전화를 받았다.

 

 

잘못 걸었어요!

 

“ 로만, 나예요. ”

 

“ 아, 다닐이구나. 웬일이냐? ”

 

“ 대체 당신은 왜 맨날 전화하면 잘못 걸었다고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

 

“ 그래야 쓰잘 데 없이 전화한 놈들이 놀라서 끊지! ”

 

“ 어휴, 말을 말아야지. 혹시 지금 미셴카 집으로 와줄 수 있어요? ”

 

“ 오늘 밤 늦게까지 책 읽으면서 작업해야 한다고 내일 보자고 하던데. 나랑 있으면 자꾸자꾸 불태우고 싶어서 일을 못한다고. 왜, 무슨 일 있냐? ”

 

“ 그게... 우리 부모님이 오셔서 같이 저녁을 먹었는데 이 녀석이 보드카를 한 잔 넙죽 받아 마셔서... 취해서 지금 뻗었거든요. 난 부모님 때문에 얘 옆에 있을 수가 없어서... ”

 

뭣이, 우리 귀염둥이에게 또 보드카를 먹였단 말이야? 너 죽었어!

 

“ 난 말렸는데 이 녀석이 목마르다면서 받아 마셨어요. 와줄 수 있어요? ”

 

“ 빨랑 전화 끊어. 지금 갈 테니까. ”

 

 

코즐로프는 10분 만에 도착했다. 어마어마하게 속도 위반, 신호 위반을 하며 차를 몰고 온 게 뻔했지만 베르닌은 잔소리를 하는 대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코즐로프에게 왕재수를 맡겨놓고 다시 집으로 내려갔다.

 

 

 

식탁은 이제 모두 치워져 있었다. 부모님은 그에게 차를 따라 주었고 회사 일은 힘들지 않은지, 밥은 잘 챙겨먹는지 물었다. 그래도 왕재수가 변호해준 덕분인지 여자 얘기는 이제 묻지 않았다. 예전 이웃들에 대한 얘기, 부모님이 살고 있는 푸스코프에 대한 얘기 등을 나누다가 어머니가 문득 말했다.

 

 

“ 미셴카는 참 착하더구나. 보통 그렇게 미남인 아이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고 건방지게 구는 법인데 예의도 바르고 친구 생각할 줄도 알고. 걔는 레닌그라드 출신이라면서 어쩌다 이 동네까지 왔을까. 결혼은 안 했지? 반지는 안 꼈던데. ”

 

“ 어, 예. 안 했어요. ”

 

“ 하긴, 아직 한참 어리니... ”

 

 

베르닌은 왕재수가 동안이라서 그렇지 자신과 세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얘기하려다 그러면 또 결혼 얘기가 나오고 왕재수의 여자 친구는 누구냐는 등 난감한 질문이 나올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 걔는 그래, 여기 혼자 와 있는 거니? 가족도 없고? ”

 

“ 네. 혼자 왔어요, 일 때문에요. ”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그래, 그러면 네가 옆에서 잘 돌봐 주거라. 세상에 믿을 건 가족과 친구뿐이란다. 아무리 당과 회사가 잘해준다 해도 돌아서면 끝이야. 미셴카도 너를 많이 아끼는 것 같던데 그렇게 반듯하고 착한 친구는 아주 귀한 거니까 잘 지내렴. ”

 

“ 그래, 아빠 말이 맞다. 애가 참 싹싹하고 귀엽더라. 딸이 있었으면 사위 삼고 싶더라니까. 아까 술 마신 게 걱정이 되는구나.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니. 엄마가 올라가서 좀 돌봐줄까. ”

 

“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푹 자고 일어나면 멀쩡할 거예요. 이제 주무셔야죠. 두 분 침대에서 주무세요. 좀 좁긴 하겠지만... ”

 

“ 아니야, 네가 편하게 자야지. 계속 야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너랑 아빠랑 침대에서 자렴. 엄마가 소파에서 자마. ”

 

“ 에이 말도 안돼요. 전 소파에서 자주 자서 괜찮... ”

 

“ 어머, 멀쩡한 침대 놔두고 왜 소파에서 잔다는 거니? ”

 

 

베르닌은 뜨끔했다. 왕재수를 침대에 재우느라 소파에서 자는 적이 많다고 말하는 건 더 난감했기 때문이다. 되는 대로 둘러댔다.

 

 

“ 어, 그, 그게... 야근하고 들어오면 시트 정리하기가 귀, 귀찮아서... ”

 

“ 아유, 다냐. 그러면 못써. 지금이야 젊으니까 괜찮지만 나중에 그거 골병 든단 말이야. ”

 

“ 괘, 괜찮아요. 베개 꺼내드릴게요, 잠깐만요. ”

 

 

베르닌은 부모님을 침실로 모셔다 드린 후 소파로 기어 올라갔다. 오랜만에 어머니의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어서 그런지 몸이 따뜻해지면서 잠이 쏟아졌다. 그는 1분도 안 되어 깊은 잠에 빠졌다.

 

 

 

 

*   *   *

 

 

 

 

다음날 아침 베르닌은 일어나자마자 왕재수의 집으로 올라가 보았다. 노크를 하자 한참 후에야 코즐로프가 문을 열어 주었다.

 

 

“ 미셴카는 괜찮아요? 안 아팠어요? ”

 

“ 안 아팠어. 다행이지. 그냥 죽은 듯이 잠만 자더니 좀 전에 일어나서 씻고 있어. 근데 너는 토요일인데 늦잠도 안 자냐? ”

 

“ 나도 늦잠 자고 싶긴 한데 부모님이 와 계셔서요. 어르신들은 일찍 일어나시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미셴카랑 같이 아침 먹으러 올래요? 당신도 내 친구라고 하면... ”

 

“ 호의는 참 고맙다만... 괜찮아. 계속 잠만 자는 미셴카 옆에 밤새 누워 있느라 정말 힘들었단 말이다! 잠자는 미녀도 아니고 원. 극장 가기 전에 한 판 해야... ”

 

“ 으윽, 알았어요! 됐어요! 근데... 당신 제발 작작 좀 하란 말이에요! 가뜩이나 쟤 요즘 무리해서 계속 비실거리는데!!! ”

 

“ 그게 맘대로 되는 줄 아냐! 곁에 있기만 하면 불꽃이 튀는데!

 

“ 어휴, 당신들 앞으로 일주일에 하루만 같이 있어요! ”

 

 

코즐로프는 쿡쿡 웃더니 베르닌의 등짝을 탁 치며 내려가서 엄마가 해준 밥이나 먹으라고 했다.

 

 

 

아침을 먹은 후 부모님과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 여보세요. ”

 

“ 나야. ”

 

“ 어, 너 괜찮니? 숙취는... ”

 

“ 응, 괜찮아. 나 지금 극장 가려고. ”

 

“ 어 그래, 내가 데려다 줄까? ”

 

“ 아니, 로만이 차 가져왔어. 같이 가면 돼. 오늘 낮 한시 반 공연인데 너 부모님 모시고 보러 와. 백조의 호수니까 보시기에도 무난할 거야. 류다한테 얘기해서 좋은 자리 4장 빼놨어. ”

 

“ 엇, 고마워. 나 부모님이랑 같이 극장 간 건 어릴 때 호두까기 인형 본 거밖에 없는데. 우리 부모님도 극장 가신지 진짜 오래됐을 거야. 좋아하실 것 같아. 근데... 왜 4장이야? 우린 세 명인데. ”

 

“ 리자도 보러 오라고 했어. 한시까지 극장으로 오라고 했으니까 로비에서 만나서 같이 보렴. 아니면 먼저 만나도 되겠네. ”

 

엥, 리자? 왜 갑자기 리자를... ”

 

“ 리자가 발레 좋아하잖아. 전에 나 물에 빠졌을 때도 도와줬고. 같이 발레 보면 좋을 것 같아서. ”

 

“ 하지만... 좀 어색한데... ”

 

“ 어색하긴 뭐가 어색해, 사무실에서 맨날 보면서. 오늘 캐스팅도 좋아. 데니스랑 타마라가 춘다고. 아까 전화했더니 리자가 좋아하더라. ”

 

“ 어, 저기... 나 하나도 아니고 우리 부모님까지 있는데... ”

 

“ 그 얘기도 했어. 괜찮대. 너희 부모님은 언제 푸스코프로 가셔? ”

 

“ 아, 저녁 먹고 밤 기차로 가신대. 열시 기차니까 여기서 아홉시쯤 나가시면 될 거야. ”

 

“ 응, 알았어. 난 백조 끝나고 나서 실무진이랑 회의가 있어서 아마 늦을 거야. 저녁도 극장에서 먹을 거고. 그래도 아홉시 전에는 집에 갈 테니까 인사하러 갈게. 그럼 공연 잘 봐. ”

 

 

전화를 끊은 후 베르닌은 리자가 온다는 생각에 좀 당황했다.

 

 

‘ 어휴, 이 녀석은 매사가 제멋대로야. 리자가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니야! 갑자기 왜 뜬금없이 리자를 부르고... ’

 

 

그러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미셴카 말이 맞아. 리자는 발레 좋아하잖아. 데니스랑 타마라면 제일 잘 추는 애들이니까 좋아할 거야. 요즘 리자도 바빠서 피곤해하던데 좋아하는 발레 보면 기분 전환도 될 거야. 나도 참 바보 같아. 리자가 발레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그 녀석 보고도 맨날 꽃돌이 감독님이라면서 좋아하는데 진작 미셴카한테 표 달라 해서 좀 줄걸. ’

 

 

왕재수의 공연 초청 얘기를 들은 부모님은 매우 좋아했다. 특히 어머니는 ‘귀여운 미셴카’ 덕에 십년 만에 극장에 공연을 보러 가게 됐다면서 소녀처럼 설렌 얼굴이었다. 아버지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 잘됐구나. 어차피 오늘은 기차 타러 가기까지 다른 약속이 없으니. 점심은 구시가지에 나가서 먹자꾸나. ”

 

아, 그래요. 극장 근처에 굉장히 맛있는 식당이 있어요. 우리 거기 가요. ”

 

 

베르닌은 스베촉에 전화를 해서 네 명 자리를 예약했다. 그리고는 리자에게도 전화를 했다. 리자는 왕재수가 직접 전화해 공연에 초청했다며 몹시 들뜬 기색이었다.

 

 

“ 저, 우리 부모님이랑 난 스베촉에서 열두 시에 점심 먹고 들어가려는데 괜찮으면 같이 먹는 게 어때요? ”

 

“ 좋아요, 다냐! 안 그래도 그때 블린 먹고 나서 자꾸 보랴의 요리가 생각나더라고요. 열두 시까지 스베촉으로 갈게요! ”

 

 

열두 시에 베르닌은 부모님을 모시고 스베촉으로 갔다. 리자도 시간 맞춰 도착했다. 언제나 구김 없고 발랄한 리자는 베르닌의 부모님에게도 밝게 인사를 했고 왕재수를 친구로 둔 베르닌 덕분에 공연을 보게 되었다며 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다.

 

 

예쁘고 귀여운 리자를 보자 베르닌의 부모님은 눈이 등잔만 해졌고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좋아했다. 아무리 베르닌이 ‘리자는 회사 동료예요’ 라고 설명을 해도 ‘우리 아들이랑 사귀는 여자인가!’ 하는 기대로 충만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행히 음식이 나왔고 역시 보랴의 솜씨답게 맛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부모님도 식사를 하느라 여념이 없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은 극장으로 갔다. 왕재수가 빼준 자리는 놀랍게도 2층 로열 박스석이었다. 부모님은 깜짝 놀랐고 리자는 말 그대로 펄쩍 뛰었다.

 

 

어머나, 다냐! 이렇게 좋은 자리는 처음 앉아 봐요! 역시 꽃돌이 감독님이 최고네요. 우와, 이 샹들리에 좀 봐. 무대도 너무너무 잘 보이네요! ”

 

“ 그러게 말이야. 이 금장식에 천사 조각 좀 보렴. 평생 이렇게 호화스런 자리에서 발레를 본 적이 없는데 미셴카가 참 고맙구나. 젊은 아이가 수완도 좋지, 아무리 극장에서 일해도 이런 자리를 빼주기는 쉽지 않을 텐데. 이게 제일 좋은 자리 아니니. 이런 자리는 극장 간부들이 자기 손님들 용으로 빼놓는 걸 텐데. ”

 

 

리자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어머나,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잘 모르셨군요. 미셴카가 이 극장 예술 감독이잖아요. 극장장 다음으로 지위가 높아요. 극장에 올라오는 모든 공연에 대해서는 최고 책임자고요. 다냐랑 친하니까 자리를 마련해준 거예요. ”

 

“ 어, 아니... 근데 걔도 평소엔 이런 자리는 잘 안 주는데... 나는 백스테이지에서 보거나 그냥 2,3층 뒷자리에서 보거든요. 어머니랑 아버지 때문에 좋은 자리 챙겨 줬나 봐요. ”

 

“ 정말 좋은 아이라니까. 그런데 그 얘기가 정말이니, 리자? 미샤가 극장에서 그렇게 지위가 높다고? 우리는 그냥 사무국 직원들한테 업무별로 감독이란 호칭을 주는 건줄 알았지 뭐니. 그것도 모르고 어제 미셴카에게 차근차근 열심히 하면 성공하게 될 거라고 그랬구나. 미안하기도 해라. 그런데도 미셴카는 화도 안 내고 방긋방긋 웃기만 하고. 착하기도 하지. ”

 

“ 새파랗게 젊은 아이가 얼마나 재능이 뛰어났으면 벌써 그렇게 출세를 했을까. 이거 우리가 네 친구를 몰라봤구나. 있다가 얼굴 보고 사과라도 해야지 안 되겠다. ”

 

“ 아니에요, 아버지. 미셴카는 그런 거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아, 이제 공연 시작하려나 봐요. ”

 

 

모두가 무척 재미있게 공연을 보았다. 베르닌은 백조의 호수라면 왕재수 감시 업무 때문에 벌써 여러 차례 보았지만 오늘따라 굉장히 재미있었다. 1막 2장에서 백조들이 떼 지어 나올 때도 평소에는 졸았지만 오늘은 옆에서 리자가 이따금 조그맣게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열띤 박수를 치는 등 워낙 몰입하면서 보는 통에 엷은 흥분이 전염된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에 데니스가 춘 지그프리드 왕자가 로트바르트의 날개를 찢을 때쯤 부모님도 박수를 짝짝 치고 있었다.

 

 

베르닌의 부모님은 옛날에는 공연 끝나고 배우나 무용수들이 나와서 인사하기 시작할 때가 되면 ‘다 끝났으니까 가자!’ 하고 일어났는데 이번에는 커튼콜이 계속 이어지는데도 박수를 치며 계속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특히 백조 오데트를 춘 타마라가 너무 예쁘다면서 계속 박수를 쳤고 아버지도 ‘허허, 살다 보니 발레가 다 재미있구나’ 하고 웃었다. 커튼콜 막바지에 타마라가 백스테이지로 달려가더니 왕재수의 손목을 잡아끌고 나왔다. 객석은 난리가 났다. 꽃다발들이 무대로 비오듯 날아들었다. 왕재수는 꽃다발들을 주워서 타마라에게 바친 후 객석을 향해 근사한 포즈로 인사를 했다. 리자는 손바닥을 비비며 ‘어쩜, 미셴카는 정말 너무 멋있어요’ 라고 황홀경에 빠졌고 베르닌의 부모님도 깜짝 놀라며 ‘우리 아들의 친구가 굉장한 애였구나’ 하고 웃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과 리자를 데리고 백스테이지까지 찾아가는 게 민폐처럼 느껴져서 저녁에 따로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   *

 

 

 

 

극장에서 나오자 오후 4시가 좀 넘은 시각이었다. 베르닌의 어머니는 리자에게 집에 들러 차 마시고 가라고 청했다. 리자는 흔쾌히 초대를 받아들였다. 베르닌은 조금 난감했다. 회사 동료들을 집으로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리자라니, 그나마도 어머니가 집을 싹 치우고 정돈해놔서 다행이었다.

 

 

집에 들어서면서도 리자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슬리퍼를 찾기 시작했다. 이 집에 이사 온 후로는 왕재수와 코즐로프 외에는 손님이 찾아온 적이 거의 없었고 여자는 더욱 없었기 때문에 리자가 신을만한 슬리퍼가 눈에 띄지 않았다.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그중 제일 깨끗한 슬리퍼를 찾아서 리자에게 건네주었다. 잘 보니 왕재수가 악몽을 꿨다고 울면서 밤중에 찾아왔을 때 신고 왔던 슬리퍼였다. 리자에게는 왕재수가 신었던 슬리퍼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좋아하면서 챙겨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베르닌이 찻물을 올리고 잔을 꺼내고 있는데 리자가 부엌으로 왔다. 핸드백에서 조그만 종이봉지를 꺼냈다.

 

 

“ 우리 이거 곁들여서 차 마셔요, 다냐. ”

 

“ 어, 이게 뭐예요? ”

 

딸기잼 쿠키요. 아까 스베촉 가는 길에 빵집에서 샀어요. 그 집이 옛날식으로 과자를 구워서 우리 아빠가 좋아하시거든요, 다냐 부모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

 

“ 우와! 고마워요, 리자. 정말 세심하네요. 저, 미안해요. 토요일이라 다른 스케줄도 있을 텐데 우리 부모님이 갑자기 차 마시자고... ”

 

“ 어머, 괜찮아요. 오늘 다른 약속 없었어요. 덕분에 엄청 좋은 자리에서 백조의 호수도 보고 맛있는 점심도 얻어먹었잖아요. 이렇게 신나는 주말은 정말 오랜만인걸요. ”

 

“ 그래도... 미안해요. 저, 우리 부모님이 자꾸 이상하게 넘겨짚는 얘기 하는 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나만 보면 맨날 여자친구는 어디 있느냐 언제 장가가느냐 하는 말밖에 안 해서... 괜히 오해해서 불편하게 만들까봐... ”

 

 

리자는 콧잔등에 조그만 주름을 만들더니 깔깔 웃었다.

 

 

“ 아유, 우리 엄마아빠도 그래요. 남자친구는 언제 사귀느냐, 결혼은 언제 하느냐 하고요. 우연히 내 옆으로 남자라도 지나가면 금세 남자친구냐고 물어봐요. 부모님이야 다 그렇죠 뭐. 걱정 말아요, 내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설마 당신이 부모님한테 ‘리자가 저랑 결혼할 여잡니다~’ 라고 뻥이라도 쳤겠어요? 세상 남자들이 다 그래도 당신은 그런 말 못 할 텐데. ”

 

“ 어... 그건 그렇지만... 근데 좀... ”

 

“ 뭐가요? 내 말이 틀렸어요? ”

 

“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뻥은 안 치는데요. 그치만 나, 나도 진짜 결혼할 사람이 생기면 그 얘기는 할 거란 말이에요. 다른 남자들처럼... ”

 

“ 아휴, 바보. ”

 

 

리자는 다시 까르르 웃었다. 베르닌의 손목을 살짝 꼬집더니 쟁반에 찻잔을 세팅하고 접시에 딸기잼 쿠키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어르신들을 위해 오래된 빵집에 들러 쿠키를 사온 리자의 세심함에 감동을 받았다. 겨울에 뜨보록을 함께 돌봐주던 것도 생각났다. 자기 차와 숄이 엉망이 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에 빠진 왕재수를 병원까지 태워다주던 것도. 겨우 스물을 갓 넘긴데다 여러 모로 아직 소녀 같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자기보다 훨씬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여자라서 그런가. 하여튼 리자는 착해. 매사에 긍정적이고. 바자회 떠맡았을 때도 앞장서서 아이디어 내고. 나도 리자처럼 되고 싶다. ’

 

 

베르닌의 부모님은 리자의 예상대로 딸기잼 쿠키를 아주 좋아했다. 알고 보니 예전에 자주 들르던 빵집이라고 했다. 베르닌은 부모님에 대해 자기가 아는 게 생각보다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부모님은 리자에게 대놓고 ‘우리 아들이랑 결혼할 거지?’ 하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한 시간쯤 차를 마시며 KGB의 고된 행정 업무와 못된 스페호프 국장에 대한 이야기, 자질구레한 신변잡기 등에 대한 수다를 떨었을 뿐이었다. 어느 새 저녁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리자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 어머나,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오늘 오빠 부부가 와서 저녁 먹기로 했거든요. ”

 

“ 아이고, 아쉽구나. 우리는 널 봐서 너무너무 반가웠단다. 우리 다냐는 공부나 할 줄 알지 착해빠져서 걱정이었는데 주변에 미샤 같이 좋은 친구도 있고 리자처럼 착하고 귀여운 아가씨도 있으니 이제 우린 안심이란다. ”

 

“ 다냐 주변에 좋은 사람 많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오늘 푸스코프로 돌아가시면 언제 또 오세요? ”

 

“ 글쎄다. 시간이야 또 내면 아무 때나 올 수 있겠지. 우리 아들만 귀찮아하지 않으면. ”

 

“ 무슨 소리에요, 어머니. 제가 왜 귀찮아해요. 자주 오세요. 제가 가야 하는데. ”

 

“ 아니다, 얘야. 넌 바쁘잖니. 리잔카, 우리랑 같이 차 마시고 놀아줘서 고맙구나. 우리 다냐를 잘 부탁한다. ”

 

“ 부탁은 제가 해야죠. 다냐가 회사에서 많이 도와주거든요.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다음에 다시 오시면 꼭 뵈어요! ”

 

 

베르닌의 부모님은 진심으로 섭섭해 하며 리자의 뺨과 입술에 작별 뽀뽀를 했다. 그리고는 베르닌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어서 리자를 바래다주고 오라고 성화였다. ‘제 지굴리는 지금 정비소에 처박혀 있다고요’ 라고 하려다가 여기까지 와준 리자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왕재수의 차를 쓰기로 했다. 어차피 왕재수는 아침에 코즐로프의 차를 타고 출근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리자는 깜짝 놀랐다.

 

 

아앗, 다냐! 차 바꿨어요? 이 차 진짜 좋다!!

 

“ 아니에요, 내 팔자에 무슨... 이거 미셴카 차예요. 지굴리 고칠 때까지 쓰라고 해서요. ”

 

“ 아, 하긴. 근데 이 차 국장 차보다 더 좋네요. 세상에... 그래도 직위로 따지면 우리 국장이 극장 예술감독보다 더 윗급일 텐데. 블리즈네초프 의장이랑 렐랴네 집안에서나 이런 차 몰 걸요. 역시 미샤는 다르네요, 벨스키 의원이 직접 챙긴다더니... ”

 

“ 차가 좋으면 뭐해요. 그 자식 운전도 하나도 못하고. 맨날 내 지굴리 타고 출퇴근했는걸요. ”

 

“ 바보, 그럼 지굴리 놔두고 그냥 이 차로 데려다줬으면 됐잖아요. ”

 

“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요. 그 자식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졌지만 처음에 얼마나 재수 없게 굴었다고요. 사람을 완전 노예에 집사 취급하고. 집안일 해주고 밥 해 먹이는 것도 모자라 출퇴근까지 시켜주려니 화가 나더라고요. 심지어 그 자식 차를 몰아주려니까 내가 더 노예에 운전병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나 남의 차 안 몰아! 내 지굴리 타든지 아니면 네가 알아서 네 차 몰고 가!’ 라고 협박했거든요. 난 그 자식이 당연히 후진 지굴리 싫다고 하면서 자기 차 타고 갈 줄 알았는데 냉큼 ‘나 그럼 지굴리 탈래’ 하는 거예요! 그래서 완전 코 꿰어서 맨날맨날 아침 밤으로 그 자식 출퇴근시켜주고... ”

 

어머, 다냐. 아하하하. 당신 의외예요, 호호호!

 

 

리자가 깔깔 웃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대체 뭐가 우습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지만 리자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었다.

 

 

“ 왜 그렇게 웃어요? 내가 그 자식한테 코 꿴 게 그렇게 즐거워요? 회사에선 국장한테 볶이고 집에선 그 자식한테... ”

 

“ 아니요, 그게 아니고... 아아... 당신도 오기를 부리는구나 싶어서요. 지굴리 탈래 네 차 몰고 갈래, 아하하! ”

 

 

베르닌은 뭔가 진심으로 억울한 느낌이 들었지만 리자가 너무 좋아하며 웃어댔기 때문에 결국 자기도 웃어버렸다.

 

 

리자의 집은 같은 신시가지에 있었고 별로 멀지는 않았지만 작은 숲을 하나 지나가야 했다. 알고 보니 코즐로프와 같은 동네였다. 웃다가 보니 어느새 리자가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베르닌은 차를 세운 후 내려서 리자 쪽 문을 열어주었다. 리자가 동그래진 눈동자를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 어머, 다냐. 고마워요. 근데 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왜 오늘은 문까지 열어주는 거예요? ”

 

“ 어, 그게요... 난 그런 거 몰랐는데 지난번에 극장에서 나올 때 미셴카랑 걔 비서 류다를 같이 태웠거든요. 류다가 신시가지에 갈 일이 있다고 해서요. 근데 내리는데 미셴카가 나보고 매너 없는 놈이라고 야단을 치는 거예요. 류다랑 자기 놔두고 나 혼자 휙 내려버렸다고요. 여자가 내릴 땐 먼저 내려서 문도 열어주고 식당에선 의자도 빼줄 줄 알아야 하고 또 뭐라더라, 코트도 받아줘야 된대요. 그러니까 류다가 맞다면서 역시 우리 감독님이 최고라는 둥 여자 마음을 제일 잘 안다는 둥 역성을 들잖아요. 그래서 새로운 걸 알게 됐어요. 앞으로는 문도 열어주고 의자도 빼주고 코트도 받아줄 거예요. ”

 

어머... 아하하하하!!! 다냐!!! 아아...

 

 

리자는 거의 데굴데굴 구를 정도로 웃었다. 베르닌은 또 다시 좀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리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웃다가 베르닌을 꼭 껴안고 뺨에 뽀뽀를 했다. 깜짝 놀란 베르닌의 표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자는 깔깔대며 소리쳤다.

 

 

“ 다냐, 난 괜찮아요. 문 안 열어주고 의자 안 빼주고 코트 안 받아줘도 안 삐칠게요. 아하하하!! ”

 

“ 그치만... 그 자식 말은 항상 맞거든요. 아니, 그러니까 항상 맞는 건 아니지만 매너인지 뭔지랑 여자에 대한 건... ”

 

“ 맞긴 맞는데요... 아하하... 근데 좀 이상하네요. 그 차에 미샤도 같이 타고 있었던 거잖아요. 그럼 미샤가 먼저 내려서 류다가 앉아 있는 쪽 문 열어줘도 됐잖아요! 미샤도 남잔데! 왜 자기는 안 하고 당신한테만 뭐라고 하는데요? ”

 

“ 그게요, 나도 똑같이 따졌는데요... 그 자식이 자기는 항상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나랑 있을 때만 빼고요. 왜 나랑 있을 때는 빼는 거냐고 했더니 그래야 내가 뭐가 잘못된 건지 몸으로 깨닫고 앞으로 안 그럴 게 아니겠냐고... ”

 

“ 으음, 꽃돌이 감독님은 의외로 굉장히 스파르타식이네요. ”

 

아니에요! 그게 아니에요! 그 자식 그거 다 뻥이에요. 그 자식 그때 자고 있었단 말이에요! 다 왔는데 자기 안 깨우고 문 안 열어줬다고 삐쳐서 괜히 류다 끌어들여서 나한테 짜증낸 거란 말이에요! 내가 그 자식 삐치는 거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 자식은 여자고 뭐고 지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놈이니까 항상 받들어 모셔줘야 된다고 굳게 믿는 놈이라고요. ”

 

“ 그래도 제일 좋아하면서. ”

 

“ 누가요? 누구를요? ”

 

당신이요. 꽃돌이 감독님 엄청 좋아하잖아요. 맨날 미샤 얘기밖에 안하고. ”

 

“ 윽, 제발... 그런 거 아니라고... ”

 

“ 누가 뭐래요,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하는 거 아니라는 건 믿어요. 근데 그런 거 말고요. 하여튼 당신은 뭐든 미샤가 우선이잖아요. 뭘 하든 결국은 미샤 생각으로 돌아오는걸요. ”

 

“ 하지만... 그건 내가 너무 일에 찌들어서 그래요. 퇴근해서도 항상 그 자식 옆에 붙어서 돌봐주다 보니... 그리고 그 자식 너무 애기 같아서 잠깐이라도 눈 돌리면 금세 사고를 치니... ”

 

“ 안 그런 것 같던데... 미샤는 굉장히 어른스럽고 여자들이랑 어른들에게도 잘 하고... 세상 물정도 잘 알고 처신도 의젓하고... 그런 얘기 하는 거 당신밖에 없어요. ”

 

“ 아닌데, 그 자식 완전 애긴데... ”

 

 

리자는 다시 까르르 웃더니 베르닌의 뺨에 다시 뽀뽀를 했다.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향이 났다. 달콤한 딸기 향이 아니라 아기 분 같은 냄새였다. 비누 냄새인지 향수인지는 모르지만 향이 좋았다.

 

 

“ 나 이제 들어갈게요. 저기 창가에 우리 오빠가 벌써 나와서 손 흔들고 있네요. 다냐,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공연 보여준 것도요. ”

 

“ 네? 아니에요, 내가 얘기한 거 아니에요. 표는 미셴카가 준 거예요. ”

 

“ 에이, 이제 와서 뭘 아닌 척. 미샤한테 당신이 얘기했다면서요. 나 발레 좋아한다고. 고마워요. 어머님 아버님도 너무 좋으시더라고요. 인사 전해주세요. 그럼 안녕! ”

 

 

 

 

*   *   *

 

 

 

 

집에 돌아오자 어제처럼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다. 진하고 달콤하기까지 한 보르쉬 냄새와 구수한 고기 요리 냄새가 났다. 공연 때문에 점심을 빨리 먹었기 때문인지 베르닌은 갑자기 엄청나게 배가 고팠다. 마침 저녁을 차리고 있던 어머니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아니, 너 왜 이렇게 일찍 오니? ”

 

“ 리자도 신시가지에 살더라고요. 가까워서 얼마 안 걸렸어요. ”

 

“ 우리는 네가 리자랑 저녁 먹고 데이트할 줄 알았단다. ”

 

“ 네? 아니에요, 저랑 리자는 그냥 회사 동료라고 했잖아요. ”

 

“ 아유, 그렇구나. 난 또... 아가씨가 참 귀엽고 괜찮더라. 잘 좀 해보렴. 엄마가 보니까 리자도 너한테 호감이 있는 것 같더라. 여자 마음은 여자가 안다고. 나이도 젊은데 어른 모실 줄도 알고 얼굴도 예쁘고 게다가 같은 KGB니 금상첨화 아니니. ”

 

“ 저... 리자랑 전 진짜 그런 사이가 아닌데... ”

 

“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란다. 부디 잘해보렴. 아이고, 우리는 네가 이러다 서른이 될 때까지 제대로 된 연애도 못하고 장가도 못 갈까봐 걱정했는데 기우였구나. 식탁으로 가렴. 저녁 먹자. 네가 늦게 올 줄 알고 아빠랑 간단하게 때우고 가려고 보르쉬 끓이고 쇠간만 볶았는데 너무 부실한 것 같기도 하고... ”

 

“ 아니에요, 딱 좋아요. 아, 이게 쇠간 볶음 냄새였구나. 크림소스에 볶은 거죠? 맞아, 이거 맛있었는데... 식당 가서 먹으면 어머니가 해주는 맛이 안 나더라고요. 작년인가 이거 너무 먹고 싶어서 직접 만들어봤는데 비리고 냄새가 나서 완전 망했어요. ”

 

“ 내장 요리는 생강이랑 허브를 써야 잡내를 잡을 수 있단다. 어서 손 씻고 와서 앉으렴. ”

 

 

저녁 식사는 소박하지만 아주 맛있었다. 크림소스를 끼얹은 쇠간 볶음은 고소하고 감칠맛이 돌았고 보르쉬는 인스턴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비트와 양배추, 쇠고기 등 건더기가 가득해 훨씬 뻑뻑했고 깊은 맛이 일품이었다. 금세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아들이 잘 먹자 내심 뿌듯했는지 미소를 지으면서도 어머니가 짐짓 타이르듯 말했다.

 

 

천천히 먹어라, 어릴 땐 보르쉬 싫다고 투정하더니 지금은 잘 먹는구나. ”

 

“ 너무 맛있어요. 어떻게 해야 이렇게 깊은 맛이 나죠? ”

 

“ 야채든 고기든 건더기를 아끼면 안 돼. 그리고 육수를 잘 뽑아야 한단다. 맹물에 끓이면 절대 이 맛이 안 나. 시간이 있으면 쇠뼈로 오래 우려 놓으면 더 좋단다. ”

 

“ 아, 그렇구나... ”

 

 

아버지가 허허 웃었다.

 

 

“ 이 녀석 보게. 사내 녀석이 요리법을 하나하나 다 묻고. 가뜩이나 야근도 많이 할 텐데 고기 구워먹는 것도 아니고 저 공들여 끓여야 하는 수프를 네가 언제 만들겠냐. 아까 그 식당 맛있던데 거기서 먹는 게 낫겠다. 아니면 리자한테 그 레시피를 가르쳐주는 게 좋겠구나. 리자가 너한테 만들어주면 되지 않니. ”

 

“ 아니, 그게요... 아버지, 리자랑 저는 그런 관계가 아니고요... 그리고 저 야근 안 할 땐 집에서 요리해 먹거든요. 보르쉬도 자주 만드는데 이 맛은 안 나니까... 아참, 어머니. 보르쉬 남았어요? 많이 끓였으면 좋을 텐데... ”

 

“ 많이 남았단다. 안 그래도 남은 걸 두고 가면 네가 먹으려나 걱정했는데. 근데 꽤 많이 남아서 아마 냉장고에 넣어놨다가 데워먹어야 할 거야. 요즘 날이 따뜻해서. ”

 

“ 아, 잘됐다. ”

 

 

베르닌이 뛸 듯이 좋아하자 어머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 뭐가 그렇게 좋니? 예전엔 보르쉬 이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으면서. ”

 

“ 그게 아니고요, 미셴카가 가끔 우리 집에서 같이 저녁 먹어요. 걔는 원래 보르쉬를 좋아하기도 하고, 의사 선생님이 보르쉬에 철분이 많으니 꼬박꼬박 챙겨먹으라고 했거든요. 보통은 인스턴트 보르쉬 데워먹지만 이렇게 맛있는 보르쉬 먹으면 진짜 좋아할 거예요. 그 녀석 극장 일이 너무 바빠서 옆에서 챙겨주지 않으면 끼니도 자주 거르고... 오늘도 저녁 먹고 온다고는 했지만 뻔할 뻔자 굶고 올 거예요. 머릿속에 일 생각뿐이거든요. 이 보르쉬 데워주면 진짜 좋아할 거예요. ”

 

 

뜨끈뜨끈하고 맛있는 보르쉬를 떠먹다가 베르닌은 갑작스런 침묵에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들었다. 부모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어머니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고 아버지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라도... ”

 

“ 다냐, 안 그래도 저녁 먹고 나서 이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너 어제 우리에게 숨긴 게 있더구나.

 

“ 숨기다니요? 제가요? 전 그런 거 없는데... ”

 

“ 네 친구 미샤 말이다... 아까 네가 리자 바래다주러 나갔을 때 클라우디야랑 통화하다가 오늘 공연 얘기가 나왔단다. 아들을 잘 둬서 극장 예술감독도 알게 되고 덕분에 극장에서 제일 좋은 자리 앉아 발레를 봤다고 자랑했지. 그러니까 클라우디야가 깜짝 놀라는 거야. 극장 감독이라면 설마 그 ‘야스민’을 말하는 거냐고 하면서. 어제 그 아이 성은 못 들었던 것 같아서 이름만 안다고, 미샤라고 했더니 클라우디야가 그 아이 외모를 그대로 묘사하더구나. 그래서 맞다고 했더니 얼마나 놀라는지... 큰일 나려고 그런 반동분자와 저녁을 같이 먹었느냐고, 너랑 많이 친하냐고 묻는 거야. 낌새가 이상해서 살짝 얼버무리면서 그냥 어쩌다보니 식사를 같이 했다고 둘러대면서 그 아이가 정말 반동분자냐고 물어보니 클라우디야가 놀라운 얘기들을 줄줄이 해주더구나! ”

 

 

흥분한 어머니가 목이 막혀 기침을 하는 사이에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 우리는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다, 다냐. 너도 알다시피 극장이랑은 담을 쌓았지 않니. 그래도 이름에 성까지 들으니까 우리조차도 귀에 익더구나. 바로 ‘그’ 미하일 야스민이라니. 볼쇼이인지 키로프인지 하여튼 굉장히 유명했던 애 아니냐. 작년 여름에 왜 조국의 반역자라고 대문짝만하게 신문에도 나고. 클라우디야가 말해주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더구나. 완전 반체제주의자라고,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가 기밀을 팔아넘기고 망명하려 했다고, 그래서 감옥에도 갔다 왔다고 하는 거야. 그나마 뒤를 봐주던 윗분이 있어서 여기 극장으로 보냈는데 그래도 반동분자로 소문났으니 절대 가까이 하면 안 된다고 열변을 토하더구나. 얘야, 우리는 정말 놀랐단다. 너는 심지어 KGB 아니냐, 어쩌다 그렇게 위험한 애와 친해진 거니. 그 얘길 듣고 네 엄마는 걱정이 되어 울기까지 했단다. ”

 

 

베르닌은 입맛이 싹 달아났다. 수프를 떠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 미샤는 두 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위험한 애가 아니에요. 반역자니 하는 건 과장된 혐의였고요. 진짜 불순한 반동분자였다면 당에서 걔를 석방시켜서 여기로 보내지도 않았을 거예요. 걔는 정치 같은 건 관심도 없어요. 그냥 예술가일 뿐이에요. ”

 

“ 아이고, 다냐. 그게 그냥 석방이 아니지 않니. 허가 없이는 가브릴로프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는데. 게다가 KGB 특별감시대상이라던데 너는 심지어 KGB 요원이지 않니. 잘못해서 국장이 너희의 친분을 눈치 채기라도 하면 네 앞날이 어떻게 되겠니. 그냥 예술가라니. 너는 그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너무 순진한 게 탈이란다... 공연히 걔랑 어울리다가 나쁜 물이라도 들까봐 너무나 걱정이 되는구나. 게다가 극장이라니, 예술가라니... 너처럼 공부만 하던 애랑은 놀던 물이 다른 애야. 클라우디야 말로는 걔가 사생활도 엄청 복잡하고 나쁜 소문이 많았다고 하더구나.

 

“ 아까는 미샤가 극장 감독이라서 좋은 자리도 구해주고 공연도 보여줘서 좋았다고 하셨잖아요. 어제 같이 식사하실 때도 미샤가 착하고 귀엽다고 마음에 들어 하셨고요. 그런데 어떻게 클라우디야 아줌마의 말만 듣고 순식간에 돌변하실 수가 있어요? 저한테 사람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잖아요.

 

 

아버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 그래, 네 말이 맞다. 그게 원칙적으로는 맞지. 하지만 너도 사회생활을 하니 알지 않니. 세상 사는 게 그리 호락호락하더냐. 네 말대로 미샤가 좋은 애일지도 모르지. 어제 보니까 심성은 고와 보이더구나. 우리에게도 깍듯했고. 하지만 아무리 좋은 애라 해도 위험한 건 위험한 거란다. 우리가 4~50년대를 어떻게 버텼는지 넌 모를 거다. 위험한 건 듣지도 않고 곁에 가지도 않았단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건 모두 피했지. 안 그러면 잡혀가거나 밀고를 해야 하니까.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몇몇 가지는 변하지 않아. 그것도 저렇게 유명한 애라면 더 그렇지. 가브릴로프의 모든 주민이 걔 이름을 안다고 하더구나. 너는 보안위원회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야. 다른 사람보다 백배는 더 위험해. 여기서 미샤가 실제로 나쁜 애인지 좋은 애인지, 반동분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세상은 그런 거다. 앞으로는 걔랑 얽히지 않는 게 좋겠다. 가까이 지내는 일이 없도록 해라. 알겠니?

 

 

 

베르닌은 너무나 답답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막 반박하려고 하는 순간 거실 쪽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온몸이 굳어졌다. 거실에서 부엌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왕재수가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려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멈춰선 것 같았다. 왕재수는 베르닌과 눈이 마주친 순간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나갔다. 부모님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기 때문에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 너 왜 그러니? ”

 

“ 잠깐만요. ”

 

 

베르닌은 벌떡 일어났다. 급하게 거실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왕재수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보았다. 딩동 하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 아...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야. 얼마나 들은 걸까... 바보, 하필이면 이럴 때 딱 들어와 가지고... 평소엔 맨날 늦게 오더니 극장에서는 또 왜 이렇게 일찍 나와 가지고... 그냥 로만한테 가서 밤이나 불태울 것이지. ’

 

 

베르닌은 망연자실해져서 한동안 복도에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 우리 어머니랑 아버지가 기차 타러 나가기 전에 인사하려고 일찍 나왔던 거야. 바보 같은 자식... ’

 

 

그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왕재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위층으로 올라가볼까 하다가 부모님에게 공연한 빌미를 잡히고 싶지 않아서 도로 집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가 잔뜩 먹구름이 낀 표정으로 물었다.

 

 

“ 너 왜 그랬니? 밖에는 왜 나갔다 오고. ”

 

“ 밖에서 문 두들기는 소리가 나서요. 근데 옆집이더라고요. 가끔 우리 집이랑 착각하는 손님들이 있어요. ”

 

“ 초인종이 있는데 왜 문을 두들긴담. 예의 없는 사람들이구나. ”

 

“ 어, 여, 옆집은 초인종이 고장 났어요. ”

 

“ 그렇구나. 좋은 아파트인데 수위는 제대로 일을 안 하나보구나. 그래도 참 좋은 회사지 뭐냐, 겨우 3년밖에 안 된 직원에게 이렇게 좋은 아파트를 배정해 주다니. 국장이 못살게 굴어도 그러려니 하고 잘 참으면서 다니렴. 일이야 네가 워낙 열심히 할 거고. ”

 

“ 네. ”

 

“ 그리고 미샤에 대해서는 엄마아빠 말을 꼭 들으렴. 앞으로는 가까이 지내지 말아라. 알겠니? ”

 

저는 성인이잖아요, 누구를 친구로 사귈지 말지는 제가 결정할 일인데... ”

 

“ 얘야,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부디 우리 말을 들어라. 네가 약속을 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걱정이 돼서 밤잠을 못 이룰 것 같구나. ”

 

 

베르닌은 무슨 말을 해봤자 소용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어요. 말씀대로 할게요. ”

 

“ 그래그래, 이제 마음이 좀 놓이는구나. 어서 먹으렴. 아이고, 음식이 다 식어버렸구나. 다시 데워줄까? ”

 

“ 아니에요, 수프는 다 먹었고 쇠간 볶음은 식어도 맛있어요. 어머니 아버지도 어서 드세요. ”

 

 

부모님은 안심했는지 다시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게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이따금 맞장구도 치고 대화에도 끼어들었지만 모든 것은 기계적이었다. 어머니의 요리조차 모래를 씹는 것 같은 맛이었다. 머릿속에는 말없이 몸을 돌려 나가던 왕재수의 뒷모습과 엘리베이터 문의 ‘딩동’ 소리가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   *   *

 

 

 

 

베르닌은 부모님을 기차역까지 모셔다 드리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다, 얘야. 너 어차피 차도 지금 수리 중이잖니. 그냥 버스 타고 가면 되지. 타기만 하면 한 시간도 안 걸리는데. 지금 나가면 딱 9시 버스 타겠구나. ”

 

 

어머니는 내심 베르닌이 같이 버스를 타고 기차역까지 가주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베르닌도 그렇게 했겠지만 오늘따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정류장까지 함께 나가서 부모님이 버스를 탈 때까지만 함께 있었다.

 

 

부모님이 탄 버스가 떠난 후 베르닌은 아파트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자 따스한 온기와 보르쉬, 쇠간 볶음, 그리고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린 시절 집에서 나던 냄새가 훅 끼쳐왔다.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설거지와 청소를 모두 마치고 싱크대도 깨끗이 닦아놓았다. 보르쉬는 뚜껑 달린 냄비에 잘 담아 시원한 창가에 놓여 있었다. 열기가 다 가시면 냉장고에 넣으라는 어머니의 당부가 생각나서 냄비를 만져 보았다. 아직 따뜻했다. 갑자기 눈가가 따끔거리면서 목구멍으로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 자식, 저녁도 안 먹었을 텐데. ’

 

 

그는 냄비를 열어보았다. 보르쉬가 꽤 많이 들어 있었다. 양쪽 손잡이를 잡고 냄비를 들었다. 냄비를 들고 현관으로 걸어가다가 멈춰 섰다. 한숨을 쉬며 냄비를 도로 창가에 갖다 두었다. 그리고는 냉장고를 뒤져 며칠 전 사다놨던 오렌지를 꺼내고 찬장에서 흑빵과 보랴가 챙겨줬던 조그만 연어 통조림을 찾아냈다.

 

 

주머니에 오렌지와 통조림을 쑤셔 넣고 한 손에는 흑빵 봉지를 든 채 베르닌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왕재수의 집 문은 잠겨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열쇠로 문을 열었다.

 

 

“ 미셴카, 나야. 들어가도 되니? ”

 

 

안쪽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지만 답은 없었다. 처음에는 코즐로프가 와 있나 싶었지만 잘 들어보니 아니었다. 이제 베르닌도 진짜 연주와 레코드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레코드가 돌아가고 있었다. 낮고 무거운 현악 연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이올린은 아닌 것 같았다. 왕재수는 거실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다. 활짝 걷힌 커튼 사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재수는 자기 집에서는 커튼을 열어젖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걸핏하면 환기를 시킨다고 창문을 열곤 했지만 그래도 커튼을 반쯤 쳐놓곤 했다. 오랫동안 감시를 받아와서 몸에 밴 습관인 듯 했다.

 

 

하지만 지금 커튼은 완전히 걷혀 있었고 왕재수는 반쯤 열린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깥은 어두컴컴했다. 가로등 조명과 맞은편 건물의 불빛들이 흐릿하게 깜박거릴 뿐이었다. 베르닌은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미안해. ”

 

 

왕재수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베르닌은 약간 마음이 놓였다. 왕재수는 전혀 화나거나 슬픈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 왜 그런 말을 해? ”

 

“ 아까... 우리 부모님이 한 얘기... 너 들었잖아. 정말 미안해. ”

 

 

베르닌은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바보, 내가 울면 어떡해. 뭘 잘했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눈물을 삼키는데 왕재수가 여전히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 네가 왜 미안해? ”

 

“ 우리 부모님이니까... 진짜 미안해. 너 그런 애 아닌데... 괜히 넘겨짚고 오해하고... 내가 대신 사과할게. ”

 

“ 아, 그거. 괜찮아. 사과 안 해도 돼. ”

 

“ 하지만... ”

 

“ 나 화 안 났어. 부모님들은 아마 다 그럴 거야. 게다가 스탈린 시대를 보내신 분들이잖아. 괜찮아. ”

 

아니야.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잘못한 거야. 너는 그런 애가 아니야. 그리고, 그리고 설령 그런 애라 해도 상관없어. 너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돼. 진짜야.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왕재수의 손을 꼭 쥐었다. 눈물은 간신히 멈췄는데 콧물이 주르륵 흘러내려서 급하게 훌쩍이며 삼켰다. 왕재수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더니 투덜댔다.

 

 

“ 바보 멍충이. 콧물까지 흘리고. 아이 지저분해. ”

 

“ 시끄러워. 네가 창문 열어놔서 그래. 바람 차갑잖아. ”

 

“ 환기시키는 거야! ”

 

“ 너 저녁 안 먹었지? ”

 

“ 으응... 극장에서 나올 때 토냐가 삶은 달걀 한 알 줘서 먹었어. ”

 

“ 배 안 고프니? ”

 

“ 조금 고파. 근데 막 저녁 차려놓고 먹기는 싫어. ”

 

“ 식탁으로 와. 연어 샌드위치 만들어줄게. ”

 

 

왕재수는 창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베르닌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베르닌은 연어 통조림을 땄다. 흑빵에 크림치즈를 바르고 훈제연어를 한 조각 크게 들어내서 얹었다. 왕재수는 좋아하면서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 하나 더 만들어줄까? ”

 

“ 응. ”

 

 

그래서 베르닌은 샌드위치를 두 개 더 만들었다. 한 쪽은 왕재수에게 주고 나머지 한 쪽은 자기가 먹었다. 왕재수는 언제나처럼 천천히 먹었다. 베르닌이 오렌지를 까고 있는데 왕재수가 물었다.

 

 

“ 부모님은? 가셨어? ”

 

“ 어, 응... 아까 버스 타셨으니까... 좀 있으면 기차역 도착하실 거야. 10시 기차거든. ”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샌드위치 조각을 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더니 모두 삼킨 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베르닌이 까놓은 오렌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 좋겠다, 다닐. ”

 

“ 뭐가? ”

 

“ 그냥. 보기 좋았어. ”

 

“ 뭐가 보기 좋아? ”

 

“ 너희 부모님. 너랑, 엄마아빠랑. 같이 있는 거. ”

 

“ 아... ”

 

 

베르닌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왕재수에게 오렌지 반쪽을 건네주고 남은 반쪽을 만지작거리면서 잠시 후 물었다.

 

 

“ 너는 그런 기억 없어? 어머니는 레닌그라드에 계시잖아. 아버지는... ”

 

“ 있어. 어릴 때. 좋았어. 같이 시장도 보고 저녁도 먹고 썰매도 타고. 근데 우리 엄마는 요리는 잘 못했어. 너희 어머니 음식이 더 맛있었어. ”

 

“ 그래... 어머니가 끓인 보르쉬 남았는데. 데워다 줄까? ”

 

“ 나중에. 내일. 지금은 배불러. ”

 

“ 그래. 내일 데워줄게. ”

 

 

왕재수는 활짝 웃었다. 보르쉬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오렌지를 먹으면서 왕재수는 조그맣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럴 것이면 저렇게 우중충한 음악은 틀어놓지 말 것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베르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왕재수가 부르는 노래를 듣자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 FIN -

2015. 12. 6 ~ 12. 27

 

 

 

...

 

 

초반에 나오는 수도원 사과빵은 내가 좋아하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의 사과빵에서 따왔다. 그 사과빵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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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 시리즈는 다음편인 38. 문어발과 이쑤시개 편으로 이어진다.. 38편은 훨씬 가벼운 분위기로 썼다. 근데 이건 언제쯤 올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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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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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지난주에 이어, 서무의 슬픔 번외편으로 돌아온 등장인물 20문답 두번째.

 

다섯 명의 인터뷰인데 분량 상 두번으로 나누어 올리게 되었다. 지난주는 리자와 알렉산드라. 이번주는 나머지인 투레츠키, 보랴, 일류샤 :) 어쩌다보니 지난주는 여자 이번주는 남자들이네. 물론 토끼, 왕재수, 단추, 지난주 인터뷰대상이었던 리자랑 알렉산드라도 끼어든다~

 

** 이번 편은 지난주의 리자와 알렉산드라 인터뷰를 읽고 보셔야 나머지 애들 얘기가 잘 통한다 : http://tveye.tistory.com/4236

 

** 돌아온 20문답의 문항은 맨처음 번외편이었던 등장인물 20문답의 문항과 동일하다. 지난번 문답(왕재수, 베르닌, 스페호프, 코즐로프, 렐랴)을 먼저 읽으면 더 맥락이 잘 통할 듯.

(베르닌/왕재수 : http://tveye.tistory.com/3492,

스페호프, 코즐로프, 렐랴 : http://tveye.tistory.com/3493)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 http://tveye.tistory.com/4062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2부) : http://tveye.tistory.com/4079
* 에피소드 33-1. 도자기 인형 : http://tveye.tistory.com/4098
* 에피소드 34. 딸기 아가씨들과 자선 바자회 : http://tveye.tistory.com/4140
* 에피소드 35. 4월의 눈보라 : http://tveye.tistory.com/4172
* 에피소드 36. 빨간 열매와 초특급 익스프레스 : http://tveye.tistory.com/4189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번외편. 돌아온 등장인물 20문답(리자,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4236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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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번외편>

 

 

 

번외편 : 돌아온 등장인물 20문답 

#02. 투레츠키 & 보랴 & 일류샤
 

 

 

 

 

<그럼 그 20문답의 문항들은...>

 

 

20 Questions

 

 

 

이름 :

현직 :

경력 :

 

1. 별자리

2. 나이

3. 신장과 체중

4. 머리색 + 헤어스타일

5. 눈 색깔

6. 당신의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은?

7. 가장 좋아하는 음식

8. 당신의 시그니처 칼라는?

9. 취미

10. 데이트 상대에게서 제일 먼저 보는 것

11. ..와 ..가 물에 빠진다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는가.

12. 당신의 매력 포인트는?

13. 가브릴로프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14. 좋아하는 음악/가수/작곡가 등등

15. 어렸을 적 장래희망

16.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면 맡고 싶은 역할

17.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

18. 지금 하고 싶은 것

19. 지금 입고 있는 것

20. 작가에게 한 마디

 

 

 

<돌아온 20문답 등장인물>

 

 

인터뷰어 : 작가(토끼)

인터뷰 대상 : 리자, 알렉산드라, 바냐 투레츠키, 보랴, 일류샤

특별 출연 : 왕재수, 베르닌

 

 

 

 

 

 

 

 

 

  바냐 투레츠키 

 

 

 

 

이름 : 이반 투레츠키

~ 바냐는 이반의 애칭 ~

 

 

현직 : 물류 유통업계 종사 중

 

 

경력

- 가브릴로프 KGB 감시분석부 서무(이른바 전설의 서무~)

- 일간지 ‘가브릴로프 젊은이들의 소리’ 편집국 기자(3개월 만에 잘림)

- 현재 대내외 물류 유통 비즈니스 사무실 운영 중

* 그 외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지하 시장 관련 직종에 발을 뻗고 있으나 아무도 그 실체를 알아낼 수 없음 *

 

 

 

1. 별자리 : 사자자리

 

 

2. 나이 : 28세

 

 

3. 신장과 체중 : 168센티미터, 60킬로

 

 

4. 머리색 + 헤어스타일

: 붉은 기 도는 금발. 평소에는 기름이나 무스를 발라 올백으로 넘기고 있다. 필요시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려 와일드한 매력을 연출한다.

 

 

5. 눈 색깔 : 에메랄드빛 초록색. 그러나 평소에는 안경 속에 잘 감추고 있다.

 

 

6. 당신의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은?

 

투레츠키 : 나는야 자유로운 영혼~ 프리 보헤미안~ 알록달록 선명한 색채를 즐기지. 특히 노란색, 형광색, 빨간색 등등~ 그리고 재킷에는 항상 코스모폴리탄을 상징하는 각국의 배지들을 달아서 나만의 스타일을 확립한다네.

 

 

7. 가장 좋아하는 음식

 

그야 보드카! 청어 통조림과는 찰떡궁합~ 나랑 친구 먹고 싶다면 보드카와 청어를 대령하시오~

 

 

8. 당신의 시그니처 칼라는?

 

나만의 시그니처 칼라라면 선명한 골드랄까~~ 황금~ 옐로우! 내 사무실은 비비드 레드~ 내 빨간 소파 기억나지?

 

 

9. 취미

 

신문물 체험하러 다니는 거. 시장조사. 청어 곁들여 보드카 마시고 노는 거. 예쁜 여자애들이랑 노는 거. 사무실에 예쁜 남자애 오면 눈요기하는 거. 그 외 많지만 굳이 여기서 얘기할 것까지야~

 

 

10. 데이트 상대에게서 제일 먼저 보는 것

 

투레츠키 : 예뻐야지~~ 난 예쁘면 장땡이야. 여자고 남자고~ 그래서 미셴카가 좋아~ 오우 프리티~ 어찌나 이쁘고 귀여운지~ 다냐가 걔한테 뿅 가지만 않았어도 내가 확 덮치는 건데 아쉬워 죽겠네. 마이 프렌드가 계속 목석같이 굴면 내 맘이 좀 바뀔지도~

 

 

베르닌 : 야! 너 걔 안 건드린다고 했잖아!!!!!

 

 

투레츠키 : 근데 너는 어차피 계속 목석같이 굴 거잖아~ 우리 프리티는 그냥 놔두기 너무 아깝잖아. 그러니까 나라도~

 

 

왕재수 : 바냐 너 내 취향 아니라고 했잖아 -_-

 

 

베르닌 : 그래! 쟤는 우락부락하고 험상궂은 아저씨 스타일을 좋아해! 바이올린 아저씨 비롯... 쟨 보랴도 멋있다고 했어! 너처럼 비리비리하고 얍삽한 스타일은 싫어한다고!

 

 

투레츠키 : 나 침대에서 끝내주는데~ 쟤가 몰라서 그래. 우리 이쁜이 속는 셈치고 한번 해보면 엄청 좋을 거야~

 

 

왕재수 : 으응... 그래? 너 잘해? (조금 혹하는 중)

 

 

베르닌 : (왕재수 낚아채서 지굴리에 태우는 중) 야!!!!!!!!!!!!!!! 너 앞으로 저 자식한테 절대 가지 마! 금지! 금지!!! 접근 금지!!!!!!!!!!!!!!!!!!!!!!!!! (아, 왜 이렇게 화가 나지 -_-)

 

 

 

11. 보랴와 왕재수와 베르닌이 물에 빠진다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는가.

 

투레츠키 : 꼭 누굴 구해야 되나? 옷도 젖고 신발도 젖고... 셋 다 수영 잘 하겠지 뭐. 피오네르 때 우리 다 수영 배웠잖아. 원래 자기 목숨 자기가 건사하는 거야~

 

토끼 : 그래도 하나만 골라보렴. 하나 구해주면 10루블 줄게.

 

투레츠키 : 겨우 10루블이라니! 세탁비 10루블, 드라이비 10루블, 찬물 들어가느라 뭉친 내 근육 마사지 비용 20루블~ 합쳐서 50루블 준다면 몰라도!

 

토끼 : -_- 됐어! 구하지 마!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 물어본 내가 바보지.

 

 

 

12. 당신의 매력 포인트는?

 

투레츠키 : 난 존재 자체가 매력인데~~ 일단 머리가 좋지~ 안경 벗으면 엄청 잘생겼고~ 내가 왜 안경을 끼겠어. 내 미모가 냉철한 비즈니스를 방해할까봐~

 

베르닌 : 저 녀석의 매력이란... 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계속 떠드는 거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말려든다는 거야 ㅠㅠ 사기꾼...

 

알렉산드라 : 다냐, 너 왜 그렇게 바냐를 헐뜯니? 바냐 엄청 잘생겼어. 꽃미남이야. 여자한테도 잘해주고. 매력 만점이야.

 

보랴 :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알렉산드라를 바라보며) 자기 있잖아, 바냐가 내 동업자긴 한데... 웬만하면 저 자식 옆엔 가지 말았으면 ㅠㅠ

 

 

 

13. 가브릴로프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내 사무실~ 내 침실~ 그 외 비밀 장소들 몇 군데 있는데 안 가르쳐줌!

 

 

 

14. 좋아하는 음악/가수/작곡가 등등

 

 

투레츠키 : 나는 양키들 대중가요가 좋아~ 나나나나나나나~ 헤이 주드~

 

왕재수 : 비틀즈는 영국인이야 -_- 양키 아니야.

 

투레츠키 : 오우 프리티, 똑똑하기도 하지~ 얼굴도 이쁜데 영어도 잘하고 불어도 잘하고 똑똑하고~ 나랑 동업하자~ 수익은 8:2로 해줄게.

 

왕재수 : 야! 그런 불공정 계약이 어딨어! 난 항상 9:1로 한단 말이야! 내가 9, 네가 1!

 

투레츠키 : 아유, 우리 이쁜이~ 계산도 빠르고 정말 어디 하나 버릴 데가 없다니까~ 그러면 7:3으로 해줄게 나랑 동업하자~~ 콜?

 

 

왕재수 : 싫어, 안 해! 나는 수퍼스타란 말이야! 너랑 급이 달라! 내가 9! 그리고 단추는 계속 내 집사로 써야 하니까 네 몫인 1에서 단추한테도 절반 떼어줘!

 

 

투레츠키 : ... 오우 프리티, 강적인데!!!

 

 

 

15. 어렸을 적 장래희망

 

금광 부자, 석유 부자~

 

 

 

16.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면 맡고 싶은 역할

 

흠, 나는 몬테크리스토 백작. 근데 앞에서 감옥 가는 거랑 나중에 복수하는 거 다 빼고~ 섬에서 보물 찾는 거랑 그걸로 예쁜 여자 끼고 흥청망청 노는 것만 나왔으면 좋겠어~

 

 

 

17.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

자유무역 탄압. KGB. 스페호프!

 

 

18. 지금 하고 싶은 것

보드카 한 잔~~

 

 

19. 지금 입고 있는 것

배지 주렁주렁 달린 노란 재킷이랑 검정색 인조가죽 바지, 빨간 부츠~

 

 

20. 작가에게 한 마디

 

투레츠키 : 알렉산드라 분명히 전생에선 나랑 결혼했었는데 현생에선 왜 보랴한테 뺏긴 거야? 그러면 리자나 렐랴랑 연결시켜줘!

 

토끼 : 그건 번외편이니까 꼭 전생이라고 할 수는 없단 말이야!

 

투레츠키 : 에이 그러면 안 되지. 토끼 너 장사를 그렇게 하냐? 알렉산드라 뺏아가서 나한테 마이너스 만들었으니까 그러면 우리 이쁜이랑 놀게 해줘~ 우리 프리티랑 고우 투 마이 베드~ 투게더~ 그러면 손익 계산 얼추 맞을 거 같아.

 

토끼 : 어, 글쎄... 나는 뭐 너랑 미셴카랑 밤을 불태우는 거 크게 반대 안 하는데... 개인적으론 너랑 미셴카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거든. 근데 우리 단추가 쌍심지 켜고 반대하잖니...

 

베르닌 : 저 토끼 뭐가 어쩌고 어째!!! 역시 크레믈린 사촌이었어!

 

 

 

 

 

 

 

  보랴 

 

 

 

 

이름 : 보리스 도브로류보프

~ 모두에게 그냥 보랴로 통함 ~

 

 

현직 : 구시가지의 식당 ‘스베촉’ 주방장. 부업으로 투레츠키의 밀수업을 돕고 있음

 

 

경력

- 공사장 인부. 벌목공 등 현장 노동자 경험 다수

- 접시닦이 등 식당 허드렛일을 하며 입에 풀칠을 하다가 종교박물관(=가브릴로프 수도원) 식당에 들어가 아말리야 루카셴코를 스승으로 모시고 본격 요리 수업을 받았음

- 현재 가브릴로프에서 손꼽히는 맛집인 스베촉의 주방장~

 

 

 

1. 별자리 : 염소자리

 

 

2. 나이 : 40세

 

 

3. 신장과 체중 : 185센티미터, 90킬로

 

 

4. 머리색 + 헤어스타일

: 연한 갈색, 그냥 짧게 자르고 다닌다. 요리할 때도 편하고.

 

 

5. 눈 색깔 : 회갈색.

 

 

6. 당신의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은?

 

그런 거 없고 그냥 군복 조끼를 즐겨 입음. 주머니가 커서 이것저것 많이 들어감. 주방에서는 앞치마.

 

알렉산드라 : 어머 자기... 내가 그 조끼 빨았는데 뭘 잘못했는지 확 줄어버렸어... 어떡하지?

 

보랴 : 어, 그래? 할 수 없지 뭐. 그거 어차피 오래 돼서 낡았으니까 버릴 때 됐나보네.

 

알렉산드라 : 자기, 미안해~ 그래서 내가 새 셔츠랑 주머니 달린 이쁜 조끼 사왔어. 그거 입어~

 

보랴 : 내 사랑~ 예쁜 짓만 골라서 하네~~ 와락~

 

알렉산드라 : (휴, 다행이다... 그 군복 조끼 너무 보기 싫어서 일부러 줄어들라고 뜨거운 물에 집어넣고 빨았는데~ 이제 버려야지!)

 

 

 

7. 가장 좋아하는 음식

 

보랴 : 나도 보드카랑 청어 통조림~

 

베르닌 : 으잉, 당신은 맛집 주방장인데! 그렇게 요리를 잘하면서 어째서 ㅠㅠ

 

보랴 : 그래도 보드카 마실 때 청어를 맨손으로 퍼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

 

왕재수 : 아이 터프해~ 보랴 멋있어~ 청어도 맨손으로 먹고~

 

베르닌 : 너 저번에 내가 청어 통조림 따다가 손에 기름 좀 묻으니까 비린내 난다고 난리쳤잖아! 근데 왜 보랴는 멋있냐!

 

왕재수 : 그야 보랴는 우락부락하고 멋있는 아저씨니까~~

 

베르닌 : 그게 뭐야 ㅠㅠ

 

 

 

8. 당신의 시그니처 칼라는?

시그니처 칼라가 뭐지? 나 그런 거 몰라.

 

 

9. 취미

맛있는 음식 만드는 거. 투레츠키랑 지하시장 다니는 거(자세히 얘기하면 안 된다는군)

 

 

 

10. 데이트 상대에게서 제일 먼저 보는 것

상냥한 마음씨와 밝은 미소~ 알렉산드라도 웃는 게 예뻤지!!!

 

 

 

11. 투레츠키와 알렉산드라가 물에 빠진다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는가.

 

보랴 : 말이라고!!! 내 사랑 사셴카~~

 

토끼 : 그러면 번외로... 단추랑 미셴카가 빠지면?

 

보랴 : 당연히 애기를 구해야지!!!

 

토끼 : 와, 투레츠키랑 단추 섭섭해 하겠다...

 

보랴 : 쉿, 다닐한테는 비밀이야! 바냐 그놈이야 지도 어차피 나 안 구하고 지 살길만 찾을 테니 상관없는데... 다닐은 상처 입을지도...

 

베르닌 : 다 들었어요 -_- 다들 나 안 구한대요. 나 구해준다는 건 미셴카 밖에 없어요. 미우나 고우나 나 생각해주는 건 그놈뿐인가 봐요.

 

왕재수 : 너 아까 내가 한 말 안 들었냐? 80킬로 무거워서 맘 바꿨다니까.

 

 

 

12. 당신의 매력 포인트는?

 

보랴 : 그런 거 모름! 사내가 무슨 매력 포인트가 있어!

 

알렉산드라 : 보랴는 턱수염이 매력이에요~ 그리고 가슴이 넓어요~

 

보랴 : 내 사랑~ 와락~

 

베르닌 : -_- 바이올린 아저씨 없으니까 좀 나으려니 했는데 저 닭살 행각은 보랴가 더하네 ㅠㅠ

 

왕재수 : 힝, 로만도 가슴 넓은데... 손도 두툼하고!!! 보고 싶어 엉엉... 왜 오늘 로만은 여기 안 온 거야... 엉엉, 나도 알렉산드라처럼 예쁨 받고 싶어!

 

투레츠키 : 오우 프리티, 원한다면 언제든지 내가 예뻐해 주마~

 

왕재수 : (갈등 중) 으응...

 

베르닌 : 악!!!! 안 돼!!!! 접근 금지!!!!!!!!! 금지!!!!!!!!!

 

왕재수 : 칫. 지는 나한테 아무 것도 안 해주면서 방해만 하고... 바보 멍충이.

 

 

 

13. 가브릴로프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수도원 뒤뜰~ 가끔 아말리야와 신부님 만나서 약초도 뜯고 허브도 뜯고!

 

 

 

14. 좋아하는 음악/가수/작곡가 등등

 

보랴 : 이오시프 코브존. 백학 좋아~

 

왕재수 : 나 백학 잘 부르는데! 우우우우우~ 우우우우우~

 

보랴 : 아이고 우리 애기 노래도 잘 부르는구나. 못하는 게 뭐니. 로만은 복 터졌지~

 

 

 

15. 어렸을 적 장래희망

사랑하는 여자랑 일찍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행복한 가정 꾸리며 사는 거... 근데 인생이 뜻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더라고. 그래도 이제 또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으니까~

 

 

 

16.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면 맡고 싶은 역할

 

보랴 : 나 말이야, 이거 비밀인데... 사실 옛날에 영화 출연 한 번 했었어. 벌목공 할 땐데 무슨 선전 영화 찍는다고 문화국에서 와서 쭉 훑어보더니 날 캐스팅했거든. 5개년 막바지에 벌목 할당량을 다 못 채운 상황에서 폭설이 왔는데 사냥꾼 덫에 걸려 다리를 다쳤으면도 마지막 할당된 나무를 다 베고 결국 다리 절단한 노동 영웅 얘기였어. 그거 찍는데 무지 힘들었어. 대사도 엄청 많았는데 도저히 외울 수가 없어서 나중에 다른 놈이 더빙했어. 근데 출연료도 안 주고 보드카 세 병으로 때우고 진짜 나쁜 놈들이었어! 그 보드카는 동료 벌목공들이랑 30분도 안 돼서 다 해치우고 -_-

 

베르닌 : 앗, 나 그 영화 봤어요! 중학교 때 피오네르 캠프에서 다 같이 둘러앉아 보고 감상문까지 써 냈는데! 그게 당신이란 말이에요? 우와, 진짜 연기 못 한다, 다리에 빨간 잉크 칠한 거 너무 티 난다 하면서 애들끼리 엄청 비웃었는데!!!

 

보랴 : 야, 그거 빨간 잉크 아니었어! 잉크 다 떨어졌다고 인스턴트 보르쉬 바른 거였어!

 

리자 : 어머, 그 영화 나도 캠프 가서 봤는데! 그거 가브릴로프 소년단 필수 감상 영화에요! 어머나, 그게 보랴였다니~ 완전 스타네! 사인해 줘요~

 

보랴 : 그 필름 우리 알렉산드라가 보기 전에 태워버려야 되는데 ㅠㅠ

 

투레츠키 : 보랴~ 그깟 거 나한테 맡겨. 일단 문화국 담당자 매수하는데 20루블, 필름 보관소 열쇠 복사에 10루블, 필름 태우는데 20루블, 범법행위 수행 위험수당 50루블, 합이 100루블인데 우린 동업자니까 특별히 할인해서 80루블에 해줄게~

 

 

 

17.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

약자를 괴롭히는 것. 자유무역 탄압(이건 바냐가 이렇게 말하라 해서)

 

 

 

18. 지금 하고 싶은 것

내 사랑 사셴카랑 둘이 집에 가고 싶네~ 맛있는 거 만들어주고 싶네~

 

 

19. 지금 입고 있는 것

낡은 셔츠와 면바지, 앞치마.

 

 

20. 작가에게 한 마디

 

보랴 : 이 토끼 나쁜 토끼! 나 왜 이렇게 과거 있는 남자로 만들어놨니 ㅠㅠ 왜 나는 심지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십대 때 사고를 쳐서 애는 만들고... 여자는 왜 도망가고 애기는 왜 일찍 죽게 만드니 ㅠㅠ 알렉산드라랑 연결시켜줘서 그나마 너 용서하는 거야! 계속 이랬으면 너는 즉시 토끼찜!!!!

 

토끼 : 그래서 전생에선 리자랑 연결시켜주고 현생에선 알렉산드라랑 연결시켜 줬잖아! 이 시리즈에서 지금 여자랑 커플된 거 너 하나밖에 없는 거 알아 몰라! 너 복 터졌어!

 

보랴 : 토끼 너 솔직히 말해, 맨 처음에 나 등장시켰을 땐 우리 애기 미셴카랑 그렇고 그런 사이로 만들려고 했었지!!!

 

토끼 : 어, 으음... 네가 그 녀석 이상형에 가깝긴 하지 ㅋㅋㅋ

 

왕재수 : 토끼 너무해... 나 사실 보랴 첨 나왔을 때 엄청 기대했었는데... 보랴가 나한테 부야베스도 만들어주고... 요리책도 주고... 근데 왜 갑자기 보랴는 아들 잃은 비운의 아빠가 되고... 졸지에 나는 아들 닮은 귀여운 애기로 변해버리고 ㅠㅠ 잉잉...

 

토끼 : 야, 넌 로만 있잖아!!! 그 아저씨 하나로 좀 만족하면 안 되니!!!

 

왕재수 : 다다익선!!!!!!!

 

 

 

 

 

 

★  일류샤 

 

 

 

 

 

이름 : 일류샤

 

토끼 : 너 그거 본명 맞아?

 

일류샤 : 캐묻지 마라, 일개 짐승아! 다친다!

 

토끼 : 감히 나에게 일개 짐승이라니!!! 내가 너 만들었는데!!

 

일류샤 : 알게 뭐야, 미물!

 

 

 

현직 : 게르만 스비제르스키 수하의 특수요원

 

 

경력

- 모스크바 국립대 법학과 중퇴

- 학창시절 스비제르스키에게 전격 발탁된 후 혹독한 훈련 끝에 최고의 특수요원이 됨!

- 필요시 수시로 KGB 비밀임무 수행 중

 

 

일류샤 : 야, 이런 거 다 기밀인데 이렇게 막 공개해도 되냐! 토끼 너 후환이 두렵지도 않냐! 우리 보스가 너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하면!

 

토끼 : 안 두려워~ 크레믈린 아저씨도 내가 만들었어~ 사람들이 나보고 크레믈린 사촌이래 -_-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잘 보이란 말이야! 짐승이 어쩌고 미물이 어쩌고 하지 말고!

 

일류샤 : 엥? 진짜로 네가 우리 만들었어? 이 시리즈 네가 쓰는 거야?

 

토끼 : 그래!

 

일류샤 : 그러면 아까 맨 처음에 나왔던 애 있잖아, 금발에 이쁘장한 여자애, 막 나한테 틱틱대던 애. 걔 모스크바 본부로 발령 나게 해주면 안 돼?

 

토끼 : 할 수는 있는데... 독자들이 그 반대를 원해. 너를 가브릴로프로 보내래.

 

일류샤 : 윽, 싫어! 시골!!!

 

 

 

1. 별자리 : 천칭자리

 

 

2. 나이 : 23세

 

 

3. 신장과 체중 : 172센티미터, 64킬로

 

일류샤 : 나 겉으로 보기엔 조그맣고 호리호리해 보여도 전부 근육임!!

 

베르닌 : 맞아... 저 자식 장난 아냐... 저 자식한테 목 졸리고 팔 꺾여서 죽을 뻔 했어 ㅠㅠ 미셴카보다 허벅지가 더 딴딴해 ㅠㅠ

 

왕재수 : 야! 왕년엔 내 허벅지가 더 두툼했어! 지금은 춤 안 추니까 그런 거야! 어디 저런 앞잡이 개자식이랑 날 비교하냐!

 

일류샤 : 흠, 미셰츠카 너 내 허벅지 본 적 없잖아. 나랑 있을 땐 맨날 약에 취해서 정신 못 차렸잖아. 뭐 굳이 보고 싶다면 사양하진 않겠어~

 

왕재수 : (부르르....) 저 자식 가만 안 둘 거야! 다닐, 뱀 껍질 좀 주워와! 많이많이 주워와!

 

 

 

4. 머리색 + 헤어스타일

: 짙은 금발 곱슬머리.

 

 

5. 눈 색깔 : 갈색.

 

 

 

6. 당신의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은?

 

일류샤 : 난 프로페셔널 요원이라 그런 거 없어. 상황에 필요한 대로 맞춰 입어.

 

토끼 : 근데 자꾸 독자들이 너한테 트렌치 코트 입히래. 안주머니에서 쌍권총 꺼내래.

 

일류샤 : 흠흠, 다들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트렌치 코트 갖고 싶다... 난 멋있으니까 잘 어울리겠지. 보스한테 보너스 땡겨 달라 해서 한 벌 장만해야겠다~ 쌍권총 그까짓 거야 껌이지~

 

토끼 : 앗, 너 트렌치 코트 없어?

 

베르닌 : 저 자식 학부 중퇴 애송이인데 무슨 코트가 있겠냐!

 

왕재수 : 맞아! 앞잡이 망나니 주제에 패션이 뭔지나 알겠어? 저놈이 아르마니가 뭔지 버버리가 뭔지 알겠냐고!

 

베르닌 : 그래그래! 난 알아! 아르마나랑 비비리 알아! 에르미도 알아!

 

일류샤 : 이것들이... 쌍권총 어떻게 쏘는지 보여줄까?

 

 

 

7. 가장 좋아하는 음식

: 가리는 거 없어. 다 잘 먹어. 먹는 거 별로 신경 안 써.

 

 

 

8. 당신의 시그니처 칼라는?

: 프로페셔널이라 상황에 따라 맞춰 입는다고 했잖아. 색깔도 마찬가지야. 시그니처 칼라 따윌 만드는 순간 지는 거야!

 

 

9. 취미

: 화학 실험. 사격 연습. 삼보 대련.

 

왕재수 : 화학 실험이라고 포장하지 마! 마약 조제하는 거잖아!

 

일류샤 : 조국과 당을 위한 임무 수행에 필요한 약물 조제 실험이야!

 

왕재수 : 나한테 주사 놓는 게 어째서 조국과 당을 위한 임무 수행인데! 막 나한테 주사 놓고 약 먹이고! 크레믈린 아저씨한테 데려다 주고! 못된 짓만 하고! 너 단추한테도 주사 놨다며! 으르르! 앞잡이! 망나니!

 

일류샤 : 자꾸 묻지 마. 나도 보스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나 비정규직이야!

 

 

 

10. 데이트 상대에게서 제일 먼저 보는 것

 

일류샤 : 기왕이면 예쁜 애들이 좋은 건 당연지사 아니야? 근데 사실 별로 안 가려. 나 좋다고 와서 안기는 애들은 한번 놀아주면 되고, 내 맘에 드는 예쁜 애들은 내 걸로 만들면 되고~

 

왕재수 : 예쁜 애들은 눈이 없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주게!

 

일류샤 : 이거 왜 이래, 나 인기 많아!!!

 

왕재수 : 난 너 싫어! 난 우주 최강 꽃미남인데 너 싫어!!!

 

일류샤 : 누가 너 좋대! 나도 너 싫어! 재수 없어! 기집애 같은 게 우리 보스한테 꼬리쳐서 보스 마음이나 사로잡고!!! 짜증나! 난 죽어라 노력하고 피땀 흘려 일해서 겨우 보스 오른팔이 됐는데 너는 아무 노력도 안 하고 꼬리만 살랑살랑 쳐서 그분 무릎에 올라앉고!! 재수 없어!

 

왕재수 : 근데 왜 맨날 나 보면 예쁜 미셰츠카라고 해!!!!

 

일류샤 : 으응? 어떻게 들었지? 너 약에 취해 있지 않았냐?

 

왕재수 : 단추한테도 그랬잖아!!!!! 예쁜 미셰츠카한테 안부 전해달라고! 너 나보고 예쁘다고 하지 마! 소름 돋아!!!

 

일류샤 : 그건 뭐... 재수 없어도 예쁜 건 예쁜 거니까. 아까 그 여자애도 예뻤는데... 이쁜 것들은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는지.

 

 

 

11. 크레믈린 아저씨와 왕재수가 물에 빠진다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는가.

 

일류샤 : 이딴 걸 질문이라고... 당연히 우리 보스!

 

토끼 : 근데 그 인간은 미셴카 안고 나오면서 널 디딤돌처럼 짓밟을 거 같아 ㅠㅠ

 

일류샤 : 시끄러워!!!

 

 

 

12. 당신의 매력 포인트는?

 

일류샤 : 뭐니뭐니 해도 나의 동안! 동그랗고 천진난만한 갈색 눈동자와 살짝 들려올라간 코, 뺨의 홍조와 해맑은 미소!!! 상대를 한방에 무장 해제시키지! 이것이야말로 나의 무기 중 하나!

 

베르닌 : 재수 없어 -_- 완전 속았어. 햄 오이 샌드위치나 먹이고... 우씨...

 

왕재수 : 쳇, 너보다 내가 더 동안이거든!!!!

 

일류샤 : 그래봤자 실제 나이도 내가 너보다 어리거든!!!!

 

 

 

13. 가브릴로프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일류샤 : 나 인터뷰 때문에 오늘 처음 왔어. 시골이네. 후져.

 

 

 

14. 좋아하는 음악/가수/작곡가 등등

블라지미르 브이소츠키.

 

 

왕재수 : 앞잡이 주제에 감히 브이소츠키를 좋아하다니! 꺼져!

 

일류샤 : 모스크바 대학생들은 다 브이소츠키 좋아해.

 

베르닌 : 야! 너 중퇴했잖아! 사칭하지 마!!! 우리 학교 이름 더럽히지 맛!!

 

일류샤 : 왜 이러십니까, 선배님. 우리가 학연지연은 또 끈끈하지 않습니까. 모스크바! 법학과!

 

베르닌 : 너 같은 후배 둔 적 없어어어어!!!!!

 

왕재수 : 나쁜 자식, 가만 안 둘 거야! 나 괴롭히고 주사 놔서 크레믈린 아저씨한테 맨날 상납하고... 다닐 속여서 패고! 게다가 뭐? 브이소츠키님을 감히 좋아한다고? 야! 개! 고양이! 다 이리 와! 뱀 껍질 물어와! 바퀴벌레 곱등이 물어와! 많이많이 물어와!

 

 

(그러자 뜨보록과 검정고양이 미셴카 찬조 출연, 많이많이 물어옴)

 

 

왕재수 : 으악, 누가 나한테 가져오래! 저놈한테 풀라고 했잖아! 으아악, 다닐! 다니이이일!!! 멍멍이랑 야옹이가 뱀 껍질이랑 바퀴벌레랑 곱등이 물어왔어 으앙... 빨랑 치워줘... 엉엉...

 

 

일류샤 : 저 녀석은 왜 남의 인터뷰에 끼어들어서 지 혼자 뿌르르 성질내고 가축들 부르고 뱀 껍질 벌레 시체 갖다놓고 혼자 울고불고 하는 거야, 귀엽게.

 

 

 

15. 어렸을 적 장래희망

우주비행사

 

 

왕재수 : 악! 분명히 내가 예전 인터뷰 때 내 장래희망이 우주비행사라고 했었잖아! 저 자식 내 인터뷰 다 베꼈어! 아니면 스토커가 분명해!

 

일류샤 :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소련 남자애들치고 왕년에 우주비행사 안 돼보고 싶었던 놈이 어딨냐! 가가린!!!

 

베르닌 : 나! 난 싫었어! 로켓 떨어지면 어떡해! 우주비행사 되기 싫었어! 그렇게 위험한 짓 뭐하러 해! 우주가 밥 먹여주냐!

 

일류샤, 왕재수 : 저런 꿈도 희망도 없는 유물론자 같으니!!! 바보 멍충이!

 

베르닌 : (충격 받은 단추눈으로 왕재수를 쳐다보며) 너 지금 저놈이랑 의기투합해서 나 욕하는 거야?

 

왕재수 : 엥, 어쩌다 보니... 하여튼 바보 멍충이!!!!

 

 

 

16.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면 맡고 싶은 역할

 

나 로맨틱 코미디 같은 거 나오면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동안에 해맑은 미소에~

 

 

베르닌 : 스탈린 앞잡이 비밀경찰 뭐 그런 거나 해! 사람 막 패고 죽이고!

 

일류샤 : 흠... 너 잊고 있는 모양인데, 스탈린 앞잡이 비밀경찰이 지금의 KGB야. 바로 너! 나야 비정규직이고 KGB 쪽이야 임시 투입될 때만 일하지만 넌 공채 정규직이잖아. 앞잡이 중의 앞잡이는 너지 내가 아니란다.

 

베르닌 : 난 앞잡이 아니야! 난 서무란 말이야!

 

왕재수 : 그래! 얜 앞잡이 아니야! 내 허드렛일 해주는 집사야!!!!

 

베르닌 : 야, 그건 아니고 ㅠㅠ 자꾸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 말란 말이야!

 

 

 

17.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

멍청하게 굴어서 임무 망치는 놈들

 

 

18. 지금 하고 싶은 것

몸이 근질근질한데 총이나 좀 쏘고 올까...

 

 

 

19. 지금 입고 있는 것

체크무늬 셔츠와 청바지. 가브릴로프 대학생 코스프레 중.

 

 

20. 작가에게 한 마디

 

일류샤 : 야, 토끼! 나 원래 좀 멋있는 캐릭터 아니었어? 왜 댓글에선 빵집 점원에 곰 인형한테 수모 당하고 눈물짓는 바보에 햄 오이 샌드위치만 죽어라 만드는 노동자가 된 거야? 그것도 모자라서 왜 저 금발 여자애는 내가 이렇게 친절하게 해줬는데 막 틱틱대는 거야? 미셰츠카도 평소엔 이 정도로 싸가지 없게 안 굴었는데! 꽤 귀여웠는데 왜 지금은 이 모양으로 재수 없냐고!

 

 

왕재수 : 네가 말하는 ‘평소’라는 건! 나한테 주사를 놓거나 약을 먹여서 맹하게 만들어놓은 다음에 크레믈린 아저씨한테 상납하는 때니까 그렇지!!!!! 어휴, 주사만 안 놨어도 너 그 자리에서 내가 확 모가지 비틀었어!

 

 

일류샤 : 나 프로페셔널 요원인데.

 

 

왕재수 : 그게 뭐! 나도 조금 할 줄 알아!

 

 

일류샤 : (호기심 폭발) 뭘 할 줄 아는데?

 

 

왕재수 : 발로 차기! 물어뜯기! 머리 패서 기절시키기! 지난번에 시계탑에 불났을 때 가릭이 막 들어가려 해서 내가 한 방에 기절시켰어!

 

 

일류샤 : 아유 귀여워. 아기가 앙탈부리는 것 같겠구나. 어디 한번 지금 해 보렴~

 

 

 

(왕재수, 일류샤에게 달려든다. 머리를 패려다 팔이 꺾여 제압당한다. 발로 차려다 베어허그를 당해 꼼짝도 못 한다. 물어뜯으려다 도리어 뽀뽀로 원천봉쇄당한다)

 

 

 

왕재수 : 으악!!! 다닐, 이 자식 혼 좀 내줘 엉엉... 으앙... 앙앙...

 

 

베르닌 : 나도 못해 ㅠㅠ 나 저번에 저놈한테 엄청 두들겨 맞았어. 너도 그냥 가만히 있어, 괜히 벌집 쑤시지 말고.

 

 

왕재수 : 으앙 엉엉 앙앙...

 

 

리자 : 아휴 왜 이렇게 소란이야! 어머, 너 뭐하는 거니! 꺅 망측해라! 꽃돌이 감독님을 뒤에서 안고 뽀뽀까지! 이 시리즈 나오는 남자들은 왜 다 이 모양이야 흐흑... 다냐도 꽃돌이 감독님한테 폭 빠져 있고... 저 꼬마도 아까 조금살짝 나 좋아하는 기색 보이더니만 지금 보니까 꽃돌이 감독님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 흐흑... 엉엉... 다냐가 나한테 마음 줄 기색이 없어서 그냥 저 꼬맹이한테 햄 오이 샌드위치나 만들어 달랠까 하고 다시 왔더니만... 엉엉... 이 시리즈 싫어 흐흑..

 

 

일류샤 : (화들짝 놀라 왕재수를 밀치며 리자에게 감) 야! 왜 울어! 햄 오이 샌드위치 만들어주면 되잖아! 이리 와!

 

 

리자 : 저리 가! 다 미워! 흑흑... 역시 난 쿠마에게 가야겠어 엉엉... 헝겊눈 곰팅이랑 사귈 거야, 삐뚤어지고 말겠어!!!

 

 

토끼 : 리자야, 쿠마는 관심 없대 ㅠㅠ 쿠마는 딸기 케익하고 결혼할 거래.

 

 

 

쿠마와 딸기케익 둘의 사랑 영원히~~

 

 

 

 

이것으로 돌아온 20문답, 끝~~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가져가시거나 복제, 인용, 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서무의 슬픔 시리즈

  돌아온 등장인물 20문답 

 

 

 

 

 

 

<돌아온 20문답을 시작하기 전에>

 

 

연초에 서무 시리즈를 연재하기 시작한 후 2월 쯤 번외편으로 등장인물 20문답을 올린 적이 있다. 그때는 에피소드가 10여개 남짓이던 때라서 문답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그야말로 주요 캐릭터인 베르닌, 왕재수, 스페호프(음... 스페호프의 문답은 문답이라고 하기 좀 그렇지만), 코즐로프, 렐랴 다섯 명이었다.

 

서무 시리즈를 작년 가을부터 썼으니 이제 1년 정도 됐는데 그동안 본편은 하나도 못 쓰고 이 시리즈만 무럭무럭 새끼를 쳐서 어느덧 36편까지 전개되었다. 0편부터 시작했으니 본 에피소드는 37개, 그리고 번외편 20문답과 민담 패러디, 우수한 단추 드미트리 베르닌 4부작에서 파생된 33-1편까지 세 편이 더 있으니 40개나 되는 셈이다. 많이도 썼네. 본편은 언제 쓰지 ㅠㅠ 아무래도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 보니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풍자도 하고 짜증도 내고 그냥 웃기도 하고 싶으니 서무 에피소드는 잘 써지나보다.

 

더불어 에피소드들이 쌓여가다 보니 등장인물들에게도 정이 들기도 했고. 아아, 분명 다닐 베르닌은 본편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 나오는 인물 같은 성격에 미샤와 엮이면서 불처럼 타오르는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존재였거늘... 메피스토펠레스는 어디로 가고 순둥이 숙맥 책상물림 서무 단추가 되어버렸으니... 왕재수야 뭐 본편 주인공 미샤가 너무 진지한 인물이니 아예 반대로 만들어보자 하고 의도적으로 철딱서니 없는 꼬마로 묘사하긴 했지만.. 오히려 왕재수는 시리즈가 뒤로 갈수록 본편의 미샤와 뒤섞이는 면이 있기도 하다. 음... 그러면 단추도 메피스토펠레스 성격이 발현되어야 하는데 이 녀석은 절대 안 그럴 듯...

 

하여튼 시리즈가 계속되다 보니 이야기들은 새끼를 치고 등장인물들도 점점 더 늘어나게 되었다. 일회성으로 나온 애들도 있고 계속 나오면서 나름대로 자리를 차지한 애들도 있다. 후자에 해당되는 인물들도 여럿 있는데 이번 ‘돌아온 등장인물 20문답’에서는 그 중 몇 명만 뽑아 보았다 :) 시리즈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긴 했지만 잠깐 등장했더라도 이상하게 댓글에서 자주 회자되는 일류샤(ㅎㅎ) 같은 녀석도 집어넣었다.

 

그래서 이번 ‘돌아온 20문답’의 인터뷰 대상자는 다음과 같다. 미녀 3인방 중 나머지 두 명인 리자와 알렉산드라. 바냐 투레츠키. 보랴. 일류샤. 이렇게 다섯 명이다. 이들만으로는 뭔가 아쉽다고? 우리의 두 주인공 단추와 왕재수도 중간중간 알토란처럼 꼬박꼬박 끼어든다. 그럼 재미있게 읽으시길!

 

 

** 다섯 명의 인터뷰인데 분량 상 두번으로 나누어 올린다. 이번주는 리자와 알렉산드라. (그러나 왕재수, 단추, 보랴, 일류샤 등등도 중간중간 등장한다~)

 

 

** 이번 돌아온 20문답의 문항은 맨처음 번외편이었던 등장인물 20문답의 문항과 동일하다. 지난번 문답(왕재수, 베르닌, 스페호프, 코즐로프, 렐랴)을 먼저 읽으면 더 맥락이 잘 통할 듯.

(베르닌/왕재수 : http://tveye.tistory.com/3492,

스페호프, 코즐로프, 렐랴 : http://tveye.tistory.com/3493)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 http://tveye.tistory.com/4062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2부) : http://tveye.tistory.com/4079
* 에피소드 33-1. 도자기 인형 : http://tveye.tistory.com/4098
* 에피소드 34. 딸기 아가씨들과 자선 바자회 : http://tveye.tistory.com/4140
* 에피소드 35. 4월의 눈보라 : http://tveye.tistory.com/4172
* 에피소드 36. 빨간 열매와 초특급 익스프레스 : http://tveye.tistory.com/4189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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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번외편>

 

 

 

번외편 : 돌아온 등장인물 20문답 

#01. 리자 & 알렉산드라
 

 

 

 

 

<그럼 그 20문답의 문항들은...>

 

 

20 Questions

 

 

 

이름 :

현직 :

경력 :

 

1. 별자리

2. 나이

3. 신장과 체중

4. 머리색 + 헤어스타일

5. 눈 색깔

6. 당신의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은?

7. 가장 좋아하는 음식

8. 당신의 시그니처 칼라는?

9. 취미

10. 데이트 상대에게서 제일 먼저 보는 것

11. ..와 ..가 물에 빠진다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는가.

12. 당신의 매력 포인트는?

13. 가브릴로프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14. 좋아하는 음악/가수/작곡가 등등

15. 어렸을 적 장래희망

16.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면 맡고 싶은 역할

17.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

18. 지금 하고 싶은 것

19. 지금 입고 있는 것

20. 작가에게 한 마디

 

 

 

<돌아온 20문답 등장인물>

 

 

인터뷰어 : 작가(토끼)

인터뷰 대상 : 리자, 알렉산드라, 바냐 투레츠키, 보랴, 일류샤

특별 출연 : 왕재수, 베르닌

 

 

 

 

★  리자 

 

 

 

 

 

이름 : 리자베타 칸페트나야

~ 리자라고 불러주세요 ~

 

 

현직 :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KGB) 등록부서 직원

 

 

경력

- 고등학교 졸업 후 보안위원회 취직. 첫 직장.

 

 

 

1. 별자리 : 양자리

 

 

2. 나이 : 21세

 

 

3. 신장과 체중 : 172센티미터, 몸무게는 안 알려줄 거예요!

 

 

리자 : 어맛, 키랑 몸무게 묻는 건 KGB 기록부로 족하다고요! 가뜩이나 요즘 나 키 커서 손해 보는 것 같은데. 바자회 때 딸기 아가씨 분장했을 때도 앙증맞은 알렉산드라 언니랑 같이 있으니까 나만 삐쭉 커 보이고... 보랴는 보자마자 알렉산드라 언니한테 예쁘다 했는데 다냐는 그런 말도 안 하고.

 

나 요즘 하이힐도 안 신는단 말이에요! 키 크고 늘씬해서 인기 많았었는데 다냐는 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같고...

 

근데 다냐가 좋아하는 꽃돌이 감독님 보니까 엄청 날씬하더라고요! 다냐는 그냥 늘씬한 거 말고 모델처럼 날씬한 타입을 좋아하나 봐요. 나도 그 정도로 관리해야 하나... 하지만 항아리 닭고기랑 초코바는 너무 맛있는데 ㅠㅠ 꽃돌이 감독님은 사과 한 알, 우유 한 잔, 요거트 한 개, 설탕도 안 넣은 홍차 뭐 이런 것만 먹는다는데... 엉엉...

 

 

4. 머리색 + 헤어스타일 : 직모에 가까운 긴 금발. 이른바 허니 블론드~ 귀여운 머리핀을 꽂는 것을 좋아한다.

 

 

5. 눈 색깔 : 맑은 파란색

 

 

리자 : 나 이 시리즈에서 유일하게 금발의 푸른 눈 미녀인데... 다냐는 나 거들떠도 안 보고... 원래 나 같은 블론드 미녀는 어딜 가나 선망의 대상이자 주인공 공주님 아닌가요 ㅠㅠ 근데 다냐는 블론드 별로인가 봐요... 검은 머리 검은 눈의 꽃돌이 감독님한테 폭 빠져가지고... 엉엉...

 

일류샤 : (인터뷰하려고 기다리다가 끼어들며) 어, 나는 좋은데, 금발에 파란 눈... 예쁘잖아. 나도 금발인데~

 

리자 : 어머, 처음 보는 남자~ 너 누구니?

 

일류샤 : 초면인데 너 왜 나한테 반말해!

 

리자 : 자기도 나한테 반말했으면서!

 

일류샤 : 그야 난 나쁜 남니까~

 

리자 : 별꼴이야. 고등학생 같은 게.

 

일류샤 : 나 안 어려! 모스크바 국립대 법학과였는데!!!!

 

리자 : 어머, 거짓말 마! 모스크바 국립대 법학과는 우리 다냐가 졸업했는데! 다냐는 누가 봐도 엘리트! 너는 버릇없는 꼬맹이!

 

일류샤 : (부르르... 총 꺼낼까...) 예쁘니까 참는다...

 

 

 

6. 당신의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은?

 

리자 : 회사에는 멋 내고 출근하면 국장한테 복장 지적받을 확률 100%라 그냥 얌전하게 블라우스랑 치마, 굽 없는 구두 신고 다녀요. 주말에는 늘씬한 각선미를 살려주는 미니스커트나 착 달라붙는 바지~ 그리고 나만의 시그니처 아이템은 바로 귀여운 머리핀이나 브로치~~ 특히 딸기 무늬를 좋아해요~

 

 

7. 가장 좋아하는 음식

 

항아리 닭고기. 뜨끈한 살랸카 수프 등등 기름기 많고 구수한 음식! 그리고 달콤한 초콜릿이랑 크림 케익이랑 딸기크림 블린이랑 딸기 파이~~

 

 

베르닌 : 어, 나도 항아리 닭고기랑 살랸카 좋아하는데... 기름기 많고 구수한 음식 좋아요.

 

리자 : 그쵸~ 역시 우린 가브릴로프 토박이~ 우리 이렇게 식성도 비슷한데... 나랑 있으면 먹고 싶은 거 먹고 편하게 살 텐데 불쌍한 다냐, 꽃돌이 감독님 챙기느라 맨날 기름기 쪽 뺀 닭가슴살에 야채만 차려먹고...

 

일류샤 : 나도 좋아해, 항아리 닭고기랑 살랸카...

 

리자 : 그건 누구나 다 좋아하는 거잖아! 꽃돌이 감독님 빼고!

 

일류샤 : 혹시 햄 오이 샌드위치 같은 건 안 좋아하니?

 

리자 : 좋아해.

 

일류샤 : 나 그거 잘 만드는데. 먹으러 올래?

 

베르닌 : 앗, 너 언제 여기 왔어! 안돼요! 리자, 절대 안돼욧! 저 자식이 만들어주는 거 절대 먹으면 안돼요! 그깟 햄 오이 샌드위치에 넘어가지 말아요!

 

리자 : 어머나, 다냐... 나 생각해주는 거예요? 이건 혹시 질투? 아아...

 

일류샤 : (부스럭부스럭) 내 총이 어디 갔지...

 

 

 

8. 당신의 시그니처 칼라는?

 

리자 : 빨간색이랑 초록색~ 딸기 색깔이요~

 

 

9. 취미

드라이브. 부모님 댁 꽃밭 가꾸기, 강아지들 돌보기.

 

 

10. 데이트 상대에게서 제일 먼저 보는 것

 

리자 : 전 착한 남자가 좋아요. 남을 배려하는 마음씨랑... 근데 꽃돌이 감독님처럼 절대미모라면 순간 눈이 멀게 되긴 하더라고요...

 

일류샤 : 쳇, 착한 남자 재미없어.

 

 

 

11. 베르닌과 왕재수가 물에 빠진다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는가.

 

 

리자 : 어, 어떡하지... 다냐를 구해주고 싶긴 한데 어쩐지 꽃돌이 감독님을 구해줘야 할 것 같아요... 다냐는 우리 시골 남자니까 너끈하게 헤엄쳐서 나올 거 같은데 꽃돌이 감독님은 도시에서 왔고 하늘하늘 날씬하고... 저번에도 얼음물에 빠져서 인사불성인 거 내가 한번 병원으로 실어다 줬거든요... 어떡해, 다냐... 미안해요. 섭섭해 하지 말아요.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에요...

 

베르닌 : 어, 맞아요, 그 녀석 구해주는 게 맞아요! 나는 물에 빠져도 괜찮아요. 근데 그 녀석은 물에 빠지면 또 아플 게 뻔하니까 꼭 구해줘야 돼요~ 고마워요, 리자~

 

리자 : -_- 어쩐지 기분이 나빠... 왜 질투 안 해 ㅠㅠ

 

일류샤 : ... 나는 너 구해줄게.

 

리자 : 어머, 별꼴이야. 멀쩡한 나보고 물에 빠지라는 거니?

 

 

 

12. 당신의 매력 포인트는?

 

리자 : 전 원체 귀엽고 발랄해서 사람들의 호감을 산답니다~~

 

일류샤 : 근데 왜 나한테는 틱틱대 -_-

 

 

 

13. 가브릴로프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날씨 좋을 때 즐라타야 강변 따라 드라이브하면 참 좋아요~ 봄이랑 여름엔 검은 숲도 근사해요. 딸기 따러 가는 것도 좋고요!

 

 

14. 좋아하는 음악/가수/작곡가 등등

 

차이코프스키! 엄마가 발레를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들었어요~ 그래서 꽃돌이 감독님도 좋아요~

 

 

 

15. 어렸을 적 장래희망

 

수의사! 동물을 좋아하거든요! 근데 수학이랑 과학 성적이 안 좋아서 포기했어요 ㅠㅠ

 

 

16.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면 맡고 싶은 역할

 

리자 : 어릴 때부터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너무 감명받았답니다~ 줄리엣 해보고 싶은데 줄리엣이 안 죽었으면 좋겠어요! 해피엔딩으로 로미오랑 잘 먹고 잘 사는 버전으로 연기하고 싶어요!

 

왕재수 : (버럭) 걔들이 안 죽으면 그게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이에요!

 

리자 : 어머, 미샤가 여기까지 오다니~ 어머어머~ 당신이 춘 로미오와 줄리엣도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그 로미오 진짜 멋있었어요~

 

왕재수 : 그거야 당연하죠! 내가 췄으니까! 근데 로미오가 죽었기 때문에 멋있는 거지 거기서 살아났어 봐요, 그게 로미오예요? 자살 쇼했다가 살아나면 그게 돈키호테 바질이지! 왜 맘대로 엔딩을 바꾸려고 하냐고요, 그건 셰익스피어가 아니란 말이에요!

 

리자 : 어머, 미샤는 열 내도 멋있어~ 역시 뼛속까지 예술가로군요~ 어떡해, 난 다냐가 좋은 줄 알았는데 꽃돌이 감독님이 옆에 오니까 또 정신이 혼미해~

 

일류샤 : 쳇. 그래봤자 못 먹는 떡인데... 쟨 남자들한테만 준다고!

 

왕재수 : (일류샤를 째려보며) 앗, 싸가지 없는 자식 여긴 왜 왔어! 다른 남자들 다 줘도 너한텐 안 줄 거야!

 

일류샤 : 너 이상해. 나랑 단추랑 둘다 모스크바 법대 출신인데 왜 차별해!

 

왕재수 : 단추는 단추눈이잖아!

 

일류샤 : 이 동네 이상해 -_- 단추눈이어야 인기 많은가봐. 나 서무 시리즈 싫어... 내가 인기 많은 이야기로 갈래. 나쁜 남자가 주인공인 시리즈 만들어 줘...

 

 

 

17.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

 

나쁜 국장!!! 막내 직원 들들 볶는 선배들!!!

 

 

18. 지금 하고 싶은 것

 

드미트리에게서 배운 뽀뽀 게임~ (누구랑 하고 싶은지는 비밀이에요!)

 

 

19. 지금 입고 있는 것

 

분홍색 사탕 무늬가 자잘하게 그려진 원피스와 하얀색의 짧은 카디건, 리본 달린 플랫 슈즈. 내가 이렇게 입고 나가면 남자들이 다 쳐다보곤 했는데 ㅠㅠ 다냐는 왜... 흐흑...

 

 

 

20. 작가에게 한 마디

 

 

리자 : 토끼! 이게 뭐야!! 나 다냐랑 이어주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 왜 그럴 듯 안 그럴 듯 간만 보는 거야! 스네고로드까지 같이 보내고 딸기 사탕 향기까지 풍기게 했으면 뭐든 돼야 하는 거 아니야? 이게 뭐냐고, 흐흑... 민담 전생에선 나랑 보랴랑 이어줬잖아. 그러면 보랴랑이라도 이어줄줄 알았는데! 왜 또 보랴는 알렉산드라 언니랑 되는 거야! 난 뭐냔 말이야!

 

저번에 렐랴가 자기 실속 없다고 툴툴댔는데 나야말로 그렇잖아! 오죽하면 댓글에서 나보고 가엾은 리자라는 둥, 쿠마랑 엮여서 무슨 딸기 케익 가게 차리라는 둥!

 

아무리 쿠마가 귀여워도 그렇지 나는 인간인데 어떻게 헝겊눈 곰돌이와 사랑에 빠지니! 그리고 쟤는 또 뭐야! 햄 오이 샌드위치 타령하는 저 꼬맹이! 시리즈에서 눈 한번 마주쳐본 적도 없는 웬 못된 망나니 녀석하고 얽어매지를 않나! 나 나쁜 남자 싫어!

 

일류샤 : 왜 날 끌어들이는 거야! 내가 왜 망나니야! 나 나름대로 시크하고 능력 있는 프로페셔널인데! 그리고 너 나쁜 남자 한번이라도 만나 보기나 했어? 나쁜 남자가 얼마나 멋있는데! 쳇, 누가 뭐 너 좋아하기라도 한대! 나도 오늘 너 여기서 처음 봤어! 그냥 좀 친절하게 대해줬더니만... 살다 보니 참 내가 이런 대접을 다 받고... 어휴...

 

베르닌 : (뒤늦게 이들의 티격태격을 발견하고 끼어들며) 흠흠... 전 이 결혼 반댑니다... 리자, 아무리 외로워도 이런 놈하고는 절대 얽히면 안돼요!

 

리자 : 어머나, 다냐~ (혹시 질투하는 건가??)

 

일류샤 : 내 총 어디 갔어!

 

 

 

 

 

 

  알렉산드라 

 

 

 

 

 

이름 : 알렉산드라 크롤리코바

 

 

현직 :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KGB) 등록부서 직원

 

 

경력

 

- 아르한겔스크 대학교 정치학과 졸업(네, 저 가브릴로프 출신 아니에요~)

 

- 아르한겔스크 청년동맹 여성분과 사무국 대외협력 담당 직원

 

-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KGB) 대외협력부 직원 및 서무

 

- 현재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KGB) 등록부서 직원

 

 

 

1. 별자리 : 물고기자리

 

 

2. 나이 : 31세

 

 

3. 신장과 체중 : 작아요! 됐나요! 10센티만 더 커봤으면 소원이 없겠네요! 5센티라도!!!! 몸무게는 묻지 마세요! 키는 작아도 발레리나보다는 더 나갑니다!

 

 

4. 머리색 + 헤어스타일

 

: 갈색의 숱 많은 곱슬머리. 평소엔 그냥 하나로 묶거나 틀어 올리고 다님. 멋 부리는 데 소질 없음. 미용실에도 일 년에 한번쯤 가는 게 전부임. 머리도 웬만하면 짧게 자른 적 없음! (짧게 자르면 손질하기 불편하니까)

 

 

5. 눈 색깔 : 밝은 하늘색

 

 

6. 당신의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은?

 

알렉산드라 : 헤어스타일 얘기했을 때 눈치 채지 않으셨나요? 전 제가 편한 대로 입고 다녀요. 출근할 때는 편한 스웨터와 진이나 면바지, 아니면 움직이기 편하고 여유 있는 긴 치마. 굽이 높지 않은 편한 구두나 운동화. 꼭 필요한 경우엔 원피스와 구두를 착용하는데 너무 불편해요! 대충 입고 다니는 편이라서 중요한 아이템이란 게 있는지 모르겠네... 아, 유색 보석이나 재미있는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좋아해서 여러 개 있어요. 단순하고 밋밋한 차림을 하는 편이라 이따금 포인트를 주려고 걸고 다녀요.

 

리자 : 언니는 키는 작아도 비율이 좋으니까 원피스 잘 어울리는데... 딸기 아가씨 의상도 그렇고 전에 행사 때 짧은 원피스 어울렸어요!

 

알렉산드라 : 근데 그런 거 입으면 내가 너무 어색해서...

 

보랴 : 진짜 예뻤는데... 또 보고 싶다, 딸기 아가씨 분장...

 

알렉산드라 : 정말? 그럼 오늘 밤에 집에서...

 

보랴 : 인생은 아름다워~~

 

리자 : 아아 부러워 ㅠㅠ 나도 인생이 아름답고 싶다...

 

일류샤 : 어디 한번 너도 입어봐, 그 딸기 아가씨 의상인지 뭔지. 내가 한번 봐 줄 테니까.

 

리자 : 어머, 얘 아직도 안 갔어! 조그만 게 딸기 아가씨 타령이나 하고! 어린 게 밝히면 못써!

 

일류샤 : 나 안 어려! 너보다 나이 많아!!!!!! (부들부들...)

 

 

 

7. 가장 좋아하는 음식

 

알렉산드라 : 보라갸 만들어주는 음식 전부!!! 특히 삶은 메밀 곁들여주는 닭찜이랑 시금치 수영풀 수프가 맛있어요!

 

베르닌 : 어, 스베촉에는 그런 메뉴 없었는데...

 

보랴 : 아, 그건 가정식이라서... 집에서만 만들어 먹어. 언제 애기랑 같이 오렴. 애기도 시금치 수영풀 수프를 참 좋아하더라.

 

알렉산드라 : 근데 요즘은 또 보랴가 해주는 닭튀김이랑 감자튀김이 너무너무 맛있어요! 자꾸 먹기만 해서 벌써 3킬로는 찐 것 같아요! 어떡하지...

 

보랴 : 난 내 사랑이 내가 해준 음식 맛있게 먹고 통통해지면 더 좋아~~

 

베르닌 : -_- 초등학교 동기라서 그런가... 보랴랑 바이올린 아저씨랑 말투까지 비슷해 ㅠㅠ 둘 다 연하 애인을 사귀고 있어 그런가 ㅠㅠ

 

 

 

8. 당신의 시그니처 칼라는?

 

알렉산드라 : 시그니처까진 모르겠는데... 평소 검은색 옷을 즐겨 입긴 해요.

 

 

9. 취미

 

독서. 도둑고양이 밥 챙겨주기. 퍼즐 맞추기.

 

 

 

10. 데이트 상대에게서 제일 먼저 보는 것

 

알렉산드라 : 따뜻한 눈빛과 말투! 보랴랑 처음 만났을 때 거기 반했어요!

 

베르닌 : 근데 왜 옛날에 모브린이랑 사귄 거예요? 그 인간은 하나도 안 따뜻하고 싸가지 없는데... 선배님이 너무 아까워요!

 

알렉산드라 : 그땐 어렸기에 ㅠㅠ 번지르르한 외모에 혹해서 그만...

 

베르닌 : 지금도 투레츠키 보면 얼굴 빨개지잖아요.

 

알렉산드라 : 근데 바냐는 진짜 잘생겼잖아.

 

베르닌 : 아아, 여자들이란... 보랴 앞에선 그런 말 하지 마세요 ㅠㅠ

 

 

 

11. 베르닌과 보랴가 물에 빠진다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는가.

 

알렉산드라 : 보랴! (미안해, 다냐 ㅠㅠ)

 

베르닌 : (어쩐지 좀 섭섭하지만) 괜찮아요 ㅠㅠ 예전에 미셴카가 자기는 나랑 로만이 빠지면 나 구해준다고 했으니까 그거 하나로 만족하죠 뭐 ㅠㅠ

 

왕재수 : 나 마음이 좀 바뀌었어. 너 너무 무거워! 80킬로짜리 눈밭 썰매로 끌어주느라 근육이 너무 미워졌어!

 

베르닌 : 야, 그래도 내가 바이올린 아저씨보다는 가볍거든!!!! 그 큰 아저씨를 네가 어떻게 물에서 건져 내냐! 그래도 내가 낫지!

 

왕재수 : 엉엉, 로만 물에 빠지면 안 돼... 내가 못 구해... 엉엉 ㅠㅠ 으앙...

 

베르닌 : (매우 당황) 어... 야, 울지 마... 내가 바이올린 아저씨 구해줄게 ㅠㅠ

 

 

 

12. 당신의 매력 포인트는?

 

알렉산드라 : 모르겠어요. 전 매력이 없는 것 같아요 ㅠ

 

보랴 : 크고 동그란 하늘색 눈동자~ 앙증맞은 자태~ 웃는 얼굴~ 나한테만 보여주는 애교~~ 매력 덩어리야~~

 

리자 : 나 이 방에 더 못 있겠어 ㅠㅠ 보랴 이렇게 닭살일 줄이야...

 

 

 

13. 가브릴로프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즐라타야 강변에 있는 노천 카페가 좋더라고요. 조금 더 따뜻해지면 보랴랑 그쪽으로 데이트하러 갈 거예요~

 

 

 

14. 좋아하는 음악/가수/작곡가 등등

 

 

알렉산드라 : 고백하자면... 블라지미르 브이소츠키.

 

왕재수 : 브이소츠키 안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딨어요!

 

알렉산드라 : 어머, 미셴카. 여기서는 조심해야 돼요, 가브릴로프는 워낙 보수적인 동네라 브이소츠키는 반체제 가수로 간주되고 있어서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이 몰래 좋아하거든요. 어르신들은 브이소츠키를 막돼먹은 망나니라고 해요.

 

왕재수 : 시골... 감히 브이소츠키님을 망나니라고 하다니!!! 시골!!!!

 

 

 

15. 어렸을 적 장래희망

 

우수 공산당원이 되어 인민의 공익에 이바지하고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 모든 것은 세뇌교육의 결과였던 것이죠! 우수 공산당원 같은 소리!

 

 

16.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면 맡고 싶은 역할

 

똑똑하고 이성적인 과학자나 탐정 역을 맡아보고 싶어요! 남자 배역과의 러브라인에 휘말려 허덕대는 역 말고요!

 

 

17.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

 

성희롱. 여성차별. 관료제.

 

 

18. 지금 하고 싶은 것

 

보랴와 강변 산책하고 차 한 잔 마시고 싶어요.

 

 

19. 지금 입고 있는 것

 

복슬복슬한 스웨터와 청바지. 하지만 곧 집에 가서 딸기 아가씨 의상으로 갈아입을 거예요~

 

보랴 : 아이 씐나~

 

알렉산드라 : 자기 너무 밝히지 마~ 여기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20. 작가에게 한 마디

 

 

알렉산드라 : 나 정말 저 토끼한테 엄청 억하심정 있었어! 자기가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은 건 단추한테 다 풀면 그만인 것을 왜 나까지 만들어내서 나한테 온갖 힘든 일 다 겪게 하고! 성희롱에 차별에!!

 

게다가 인간말종 모브린하고 나를 왜 한때 사귄 사이로 만들어서 단추의 옛 여인 나왔을 때 나까지 고생시키고! 내 눈에 눈물 마를 날 없게 만들고! 이 시리즈 보면 난 맨날 울고만 있고!!! 우중충하고 불쌍하고 부정적이고!!!! 그리고는 어쩐지 단추랑 연결시켜줄 것처럼 굴더니만!!! 전생에선 투레츠키랑 갑자기 결혼을 시키고! 그래놓고 투레츠키랑은 연결도 안 해주고... 그래서 이게 뭐냐 하고 짜증내고 있었는데 그래도 보랴랑 연결시켜줬으니까 토끼 이제 용서하겠어~

 

 

토끼 : 어, 그래... 그래도 이 시리즈에서 남녀 커플 거의 없는데 너랑 보랴는 내가 정말 신경 써서 만들어준 케이스라고! 고마운 줄 알아!

 

 

알렉산드라 : 근데!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갑시다! 토끼작가가 자꾸 자기가 내 모델이라고 해서!!! 토끼! 나랑 닮았어 안 닮았어!! 나 미녀라면서! 토끼 미녀야?

 

 

토끼 : ㅠㅠ 너는 그냥 문학적인 캐릭터니까 나랑 다르지 ㅠㅠ 나는 갈색 부스스한 곱슬머리가 아니고 직모야... 그리고 스타일도 좀 다르고... 패션도 너랑 좀 틀려.

 

 

알렉산드라 : 근데 너도 미용실 가는 거 연례행사잖아. 회사엔 맘대로 옷 입고 가고! 키도 작고!

 

 

토끼 : 으응... 근데 하여튼 나는 미녀 3인방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곱사등이 흑염소 사촌이야.. 나는 미녀계가 아니라 동물계야 흐헝...

 

 

 

 

토끼 작가 : 흐헝.. 나는 동물계 ㅜㅜ

 

 

 

 

..

 

 

이렇게 리자와 알렉산드라의 인터뷰가 끝나고.. 다음주에는 3인3색 남자들의 인터뷰가 올라갈 예정. 밀수꾼 바냐 투레츠키와 요리사 보랴, 그리고 나쁜 남자 일류샤. 물론 여기에도 리자, 알렉산드라, 왕재수와 단추가 끼어든다. 기대해주세요~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그리고 제 글은 여기에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가져가시거나 복제, 인용, 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어느덧 금요일이 왔고.. 서무의 슬픔 36편도 왔다.

 

이번 편은 지난 35편 4월의 눈보라(http://tveye.tistory.com/4172)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얘기이기 때문에 전편을 읽어야 연결이 잘 된다.

 

눈 펑펑 내리는 숲속의 조그만 통나무집에 갇혀버린 단추와 왕재수!!! 벽난로에 불을 피워놓고 잠든 둘! 과연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4월의 어느날, 스페호프 국장은 베르닌에게 검은 숲속의 안전가옥 수리 명령을 내리고, 베르닌은 숲으로 가는 길에 왕재수를 온천에 데려다 주려고 함께 길을 나선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몰아친 폭설로 그들은 숲속의 통나무집에 갇히고 마는데... 과연 그들은 예상치 않았던 한가로운 휴일을 보내게 될 것인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 http://tveye.tistory.com/4062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2부) : http://tveye.tistory.com/4079
* 에피소드 33-1. 도자기 인형 : http://tveye.tistory.com/4098
* 에피소드 34. 딸기 아가씨들과 자선 바자회 : http://tveye.tistory.com/4140
* 에피소드 35. 4월의 눈보라 : http://tveye.tistory.com/417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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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6

 

 

 

 

서무의 슬픔

- 빨간 열매와 초특급 익스프레스 -

 

 

 

 

 

 

새벽에 베르닌은 추워서 깨어났다. 무의식적으로 페치카 쪽을 보았다. 불그스름한 불빛이 조그맣게 아른거릴 뿐이었다. 불이 거의 꺼져 있었다. 너무 추워서 콧김이 하얗게 일었다. 옆의 침대를 보니 왕재수가 바짝 웅크린 채 온몸에 담요를 돌돌 말고 잠들어 있었다. 베르닌은 난롯불을 꺼뜨리지 않을 테니 마음 놓고 자라고 큰소리 쳤던 게 생각나서 심한 가책을 느꼈다.

 

 

일어서자 왼쪽 발목이 욱신거렸다. 추워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불을 켜면 왕재수가 깰 것 같아서 불씨에서 나오는 조그만 붉은 빛에 의지해 오른쪽 발에 무게를 실은 채 페치카 쪽으로 갔다. 장작더미 옆에 놔둔 잡지를 몇 장 뜯어서 난로 안으로 던져 넣었다. 불은 좀처럼 일지 않았다. 잡지로 부채질을 했다. 찬바람이 일자 왕재수가 잠결에 ‘아이 추워...’ 라고 웅얼거리며 몸을 더 바짝 웅크렸다. 하지만 깨지는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베르닌은 성냥을 그어서 불을 붙인 종이를 던져 넣고 자기 몸으로 왕재수 쪽을 가로막은 채 열심히 부채질을 했다. 불길이 조금 올라오는 것 같아서 장작을 넣었다. 그래도 벌목공들이 마른 장작을 잘 모아놓은 덕에 불은 금방 붙었다. 곧 난롯불이 화르르 타오르기 시작했고 얼음골 같던 실내에도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휴...’하고 한숨을 쉬고는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난롯불은 여전히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고 공기가 후끈했다. 하지만 창밖으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을 돌려보니 왕재수가 이불로 여전히 몸을 돌돌 만 채 옆으로 누워서 눈만 빼꼼 내놓고 베르닌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졸음이 가시지 않은 듯 눈꺼풀이 반쯤 내려와 있었다. 꽉 잠긴 목소리로 왕재수가 물었다.

 

 

“ 눈 와? ”

 

“ 응. ”

 

“ 시골... ”

 

“ 잠은 잘 잤어? 춥진 않았어? ”

 

“ 응. 더웠어. ”

 

“ 새벽에 추웠는데. 이불 꽁꽁 싸매고 잤으면서. 지금도 마트료슈카처럼 싸고 있으면서. ”

 

“ 네가 이불 덮고 자라고 했잖아. ”

 

“ 어, 그래... 잘했어. ”

 

“ 발목은 어때? ”

 

“ 어제만큼 아프진 않은데 그래도 욱신거려. ”

 

“ 찜질 좀 하면 나을 거야. ”

 

 

왕재수가 이불을 걷어내더니 침대 위에서 그대로 전신을 쫙 펴며 기지개를 켰다. 팬티 바람인 걸 보니 결국 자다가 바지는 벗어버렸던 모양이었다. 앉아서도 스트레칭을 몇 번 하더니 짜증스러운 얼굴로 결국 일어났다. 물을 채운 주전자를 들고 와서 페치카의 고리에 걸었다. 그리고는 창가로 갔다. 창문을 조심스럽게 삥긋 열더니 바깥을 내다보았다.

 

 

“ 어휴... 눈 진짜 많이 왔어. 엄청 쌓였네. 나가지도 못하겠다. ”

 

“ 어제만큼 바람 많이 부니? ”

 

아니. 바람은 별로 안 불어. 근데 추워. 큰일이네. 이쪽은 제설차 안 올까? ”

 

“ 시내가 우선이니까 검은 숲 쪽은 좀 늦게 올 거 같아. 그나마도 도로 쪽만 올 거야. 여기는 숲 속이잖아. 제설차는 못 들어와. 치울 생각도 안 할 거고. ”

 

“ 어제 너 잘 때 내가 차에 다녀왔잖아. 거기 구조 신호 붙여놓고 왔어. ‘빨간 리본 전나무 옆 벌목공 숙소에 갇혀 있어요. 도와주세요‘ 라고. ”

 

“ 와, 잘했어. 난 어제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

 

“ 근데 이렇게 눈이 많이 오니 거기까지 누가 오지도 않겠다. ”

 

 

주전자의 물이 끓자 왕재수는 유리병에서 딸기잼을 퍼내서 접시에 담은 후 거기 뜨거운 물을 부었다. 다행히 내열유리라서 병이 깨지지는 않았다. 뚜껑을 꼭 닫은 후 난롯가에 널어서 따뜻해진 수건으로 유리병을 둘둘 말았다. 그리고는 베르닌의 왼쪽 발목에 대고 수건을 한 바퀴 더 돌려서 감쌌다. 처음에는 따뜻한 정도였지만 점점 뜨끈뜨끈해져 왔다.

 

 

“ 찜질 좀 하고 있어라. 식으면 말하고. ”

 

“ 어, 고마워. 이런 것도 마사지사에게 배운 거야? ”

 

“ 아니, 이건 학교 다닐 때. 춤추는 거 많이 아프니까. ”

 

“ 그렇구나. 하긴 그렇게 높이 뛰는데 안 아플 리가. ”

 

“ 그래도 난 부상 많이 안 당한 편이야. 다른 애들보다 훨씬 유연해서. 다리나 허리는 다친 적 없어. 키로프 있을 때 어깨 때문에 좀 고생하긴 했지만. 옛날에 팔 부러진 거랑. ”

 

“ 그게 뭐야, 어깨 다치고 팔까지 부러진 게 부상 많이 안 당한 거야? ”

 

“ 응. 부상 때문에 쉰 거 다 합쳐도 몇 달도 안 되니까 남자 무용수한테는 진짜 양호한 거야. 팔 부러진 거야 학교 다닐 때였으니까. 뭐 그건 괜찮아. 덕분에 유라도 만나고. ”

 

“ 유라... 그 의사 선생님 말이야? 팔 부러져서 만난 거야? ”

 

“ 응. 그 사람 착해. ”

 

 

왕재수는 무의식적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남아 있는 뜨거운 물을 양동이에 붓더니 결심한 듯 양동이를 들고 ‘제발 쥐가 나오지 않게 해 주세요’ 라고 중얼거리며 별채의 사우나로 갔다.

 

 

 

5분 쯤 후 젖은 머리를 닦으며 팬티 바람으로 돌아온 왕재수는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기분이 좋은 듯 휘파람을 불었다.

 

 

“ 야, 벌써 다 씻은 거야? 머리까지 다 감고? ”

 

“ 그럼 어떡하냐. 온수는 조금밖에 없고 사우나에는 쥐구멍도 있는데. 대충 물만 끼얹고 비누칠은 안 했어. 그래도 머리는 감았으니까. “

 

난 안 해! 머리 안 감을 거야!

 

“ 넌 안 되지, 다리 다쳤는데 함부로 몸 구부리면 안 돼. 지저분해지면 수건으로 싸매고 있으렴. 그래도 세수는 해. 뜨거운 물 좀 남겨놨어. ”

 

 

왕재수가 더운 물 담긴 바가지를 가져오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대충 그의 얼굴을 닦아 주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재수에게서 찜질에 이어 세수 서비스까지 받다니 정말 인생 모를 일이었다.

 

 

잠시 후 왕재수가 현관 밖으로 나갔다 왔다. 머리와 어깨에 하얗게 눈이 내려앉아 있었다. 한 손에 대걸레 자루와 굵은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다.

 

 

“ 엥, 그게 뭐야. 너 청소할 거야? ”

 

“ 아니, 내가 왜 청소를 하니. 그게 아니고 너 이거 짚고 걸어보라고. ”

 

 

왕재수는 전날 문짝 썰매를 동여맸던 밧줄을 풀었다. 나뭇가지를 대걸레 자루 꼭대기에 수직으로 대고는 꽉 동여맸다. 바닥의 걸레는 미끄러질까봐 베르닌의 가방에서 꺼낸 주머니칼로 잘라내 버렸다.

 

 

“ 짚어봐. ”

 

 

베르닌은 대걸레를 겨드랑이 아래 끼고 무게를 실어보았다. 의외로 불편하지 않았다. 오른발에 모든 무게를 실었을 때보다 한결 나았고 왼쪽 발목도 덜 아팠다. 왕재수는 나중에 눈 그칠 때를 대비해서 만든 거니까 집안에서는 움직이지 말고 앉아 있으라고 했지만 베르닌은 신이 나서 임시 목발을 짚고 광과 찬장 쪽으로 가보았다. 옥수수 통조림과 연유 깡통, 커피가루와 돼지비계 절임과 인스턴트 감자 퓌레를 발견했다.

 

 

“ 엥, 이런 것도 있었네. 너 어제 이것들 못 봤어? ”

 

“ 연유랑 돼지비계는 안 먹고. 옥수수 통조림은 따개가 안 달려 있어서 못 땄어. 커피는 잘 안 마시고. 그 감자 가루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

 

“ 하긴... 연유 맛있는데... 커피에 타서 먹어야겠다. 예전에 모스크바 기숙사에 있을 때 사이공에서 온 애가 그렇게 먹는데 맛있더라고. ”

 

 

생각지 않은 음식들에 베르닌은 뿌듯해졌고 숙소와 장작과 먹을 것들을 장만해둔 벌목공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왕재수는 계속 집에만 있으니 배가 고프지 않다면서 차만 마시겠다고 했지만 베르닌은 도끼눈을 떴다.

 

 

안 돼! 먹어야 돼! 이럴 때 아니면 네가 언제 집에 틀어박혀서 삼시세끼 꼬박꼬박 먹냐! 요즘은 나도 바빠서 너 밥 제대로 못 챙겨주잖아! 아침 먹어야 돼! ”

 

“ 어제 카페에서 받아온 사과도 있는데... 나 그거 먹을래. ”

 

사과는 후식! 간식! 오늘 아침은 감자 퓌레랑 연유 넣은 커피랑 치즈 얹은 비스킷이야! ”

 

“ 그게 뭐야, 거의 다 탄수화물이랑 당분... ”

 

“ 치즈는 단백질이잖아! ”

 

“ 아침엔 비타민이 필요하단 말이야! 사과 먹을 거야! ”

 

“ 좋아, 그러면 감자 퓌레랑 연유 넣은 커피랑 치즈 얹은 비스킷이랑 사과 한 알. 끝! ”

 

“ 그건 너나 먹을 식단이고! ”

 

“ 무슨 소리야! 나는 더 먹을 거야! 햄도 잘라먹고 치즈에 잼도 얹을 거고 비스킷도 여러 개 먹을 거야! ”

 

돼지! 80킬로!

 

“ 나는 180이 넘는데! 80킬로 그게 뭐 대수야! ”

 

“ 그 80킬로가 근육이 아니고 전부 살이니까 그렇지! 아휴! 난 사과 한 개만 먹고 싶은데! ”

 

의사 선생님한테 이를 거야!

 

악마! 곱등이 같은 인간!

 

 

베르닌은 페치카에 냄비를 올려놓고 눈 녹인 물을 섞어서 감자 퓌레를 대충 저어가며 끓였다. 접시가 모자랐으므로 전날의 보르쉬처럼 퓌레도 냄비 째 내려놓았다. 비스킷과 치즈와 햄을 쌓아놓고 접시 가장자리에 잼도 두 숟가락 퍼놓고 카페 아가씨에게서 받아온 사과도 한 알 올려놨다. 물을 끓여서 커피가루와 섞고 연유도 부어서 저었다. 왕재수에게도 먹으라고 한 컵 건네주었다. 왕재수는 원망 섞인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차는?... ”

 

“ 차는 점심 때 마셔. 오늘 아침은 커피! 베트남식! ”

 

연유를 왕창 넣었어... 이 동네는 이상해... 아무 데나 연유를 곁들여. 로만도 처음 봤을 때 나한테 사과파이에 연유 끼얹어주고... 심지어 커피에... ”

 

“ 우와, 사과파이에 연유 끼얹으면 맛있는데! ”

 

“ 어휴, 시골... ”

 

“ 커피에 연유 넣는 건 베트남식이란 말이야! 너는 외국물도 많이 먹은 녀석이 그것도 모르냐! 무식하게! ”

 

“ 쳇. ”

 

 

왕재수는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베르닌이 연유 넣은 커피를 호호 불며 조로록 마시고 만면에 미소를 띠며 ‘아 진짜 맛있다! 내가 끓였지만 최고야!’ 하는 것을 보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속는 셈치고 마셔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자기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곧 입술을 더욱 삐죽 내밀었다.

 

“ 엑, 쓰고 달고... ”

 

“ 야, 홍차도 씁쓸하잖아! ”

 

“ 커피랑 차는 맛이 다르잖아. 그리고 난 커피도 그냥 블랙으로 마시는데! 역시 연유를 넣으니 엄청 달아! ”

 

“ 추울 땐 단 게 필요해. 몸도 빨리 따뜻해지고. 너 그거랑 치즈 얹은 비스킷이랑 먹어봐. 치즈가 짭짤하니까 잘 어울릴 거야. ”

 

“ 더더욱 나빠, 달고 짠 거 같이 먹는 거! ”

 

“ 아휴, 한창 바쁠 땐 투정 안 하더니... 너 요즘 좀 살만 하구나! 음식 투정 계속하고! 자꾸 그러면 저기 있는 돼지비계 썰어서 먹인다!

 

“ 으악, 안 돼! 으으... 지난주에 이리나 표도로브나한테 끌려가서 그 망할 놈의 돼지비계 절임 억지로 먹고 나 죽는 줄 알았어! 집에 와서 밤새 울렁거려서 죽는 줄 알았어! 돼지비계에 기름케익에 기름 줄줄 흐르는 커틀릿에... 그 집은 심지어 딸기에도 버터소스를 뿌려먹어! ”

 

“ 그러니까 이리나 그 아줌마에 비하면 이건 담백한 거잖아! 어서 먹어. 너 생각해봐. 내 말 안 듣고 내가 주는 밥 맛 없다고 투정하면 의회에서 너 이리나네 집에서 묵으라고 할지도 모르잖아! 그러고 싶냐? ”

 

“ 안 돼... 안 돼! 악마들! 공산주의 악마!

 

 

왕재수는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지 바들바들 떨더니 치즈 얹은 비스킷을 얼른 한 입 베어 먹고 급하게 연유 넣은 커피도 한 모금 마셨다. 오물오물 꿀꺽 삼키더니 한동안 맛을 음미하고는 입술을 삐죽거리는 대신 콧등에 살짝 주름을 만들었다. 아무 말도 안하고 치즈 비스킷을 한 입 더 먹었다. 그리고는 베르닌이 비스킷에 햄과 치즈와 잼을 한꺼번에 쌓아올려 달고 짠 맛을 응축시키느라 분주한 틈을 타서 슬쩍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더니 혀로 입술을 살짝 핥으며 보일 듯 말듯하게 살짝 웃기까지 했다.

 

 

‘ 뭐야, 저 자식. 맛있으면서. 또 아닌 척하고! 쳇.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감자 퓌레도 먹으라고 강요했다. 왕재수는 커피에 연유가 들어 있어 배가 부르다며 싫다고 했지만 베르닌이 퓌레를 먹으며 ‘와, 이것도 인스턴트 아닌 것 같아. 맛있네! 페치카에서 직화해서 그런가봐!’ 하고 호들갑을 떨자 또 궁금했는지 슬며시 한 숟갈 떠먹어보았다. 그러더니 따뜻해서 좋다면서 몇 숟가락 더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베르닌은 사과를 쪼개서 왕재수와 나눠먹었다. 왕재수는 배가 부르다면서도 사과는 마다하지 않았다. 독사과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도 여전히 사과를 좋아했다. 사과를 먹으면서 왕재수는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 너 걱정돼서 그러니? 극장 가야 되는데 못 가서? ”

 

“ 응. 오늘은 공연도 있는 날인데. ”

 

“ 오늘 공연은 뭐야? ”

 

“ 백조의 호수. ”

 

“ 그건 자주 올리던 거잖아. 너 없어도 괜찮을 거야. ”

 

“ 그래도... 오늘 나쟈가 데뷔하는 날이라 내가 아침부터 봐주기로 했는데... 작은 역이지만 무대에 처음 서는 거니까 특별한 날이란 말이야. 주말에 스네고로드에서 부모님도 오셨다고 했는데. 그래서 학교 기숙사에 방도 하나 따로 잡아주게 했는데. ”

 

“ 너 나쟈 계속 돌봐주고 있었구나? ”

 

“ 응, 내가 데리고 왔잖아. 걘 늦게 시작했으니까 신경을 많이 써줘야 해. 아, 망할 놈의 눈... ”

 

“ 나쟈는 이해해 줄 거야. 딴 데도 아니고 스네고로드에서 왔잖아. ”

 

“ 나 어제 나올 때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잖아. 류다한테라도 전화해놓을걸. 애들 또 말도 안 되는 걱정할지도 몰라. ”

 

“ 에이, 할 수 없지 뭐. 아마 류다가 우리 사무실에 전화해서 나 찾으면서 물어봤을 거야. 나는 지금 온천 간 걸로 되어 있거든, 안전가옥은 기밀사항이라서. 그러니까 내가 온천 갔다는 얘기 들으면 너도 따라서 거기 갔다가 눈 와서 갇혔겠거니 할 거야. 류다 눈치 빠르잖아. ”

 

“ 그래주면 좋겠는데... ”

 

“ 지금 네가 걱정한다고 뭐가 해결되냐. 이렇게 된 거 그냥 쉬고 있어. 눈발 많이 가늘어진 것 같아. 일기예보에서 주중에 기온 올라간다고 했었어. 눈 좀 녹으면 나갈 수 있을 거야. ”

 

“ 일기예보에서 눈 온다고는 안 했잖아. 시골. ”

 

 

왕재수는 뺨을 불룩하게 만들면서 골난 표정을 지었지만 남은 사과를 베어 먹고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 이 사과 맛있어. 달고 물도 많아. ”

 

“ 사과는 시골이 더 맛있지? ”

 

“ 응. 레닌그라드에서 먹던 사과는 퍽퍽했는데. 이제 바람은 안 부나봐. 눈이 되게 조용하게 내리네. ”

 

“ 그러네. ”

 

“ 예쁘다. ”

 

 

왕재수는 사과를 먹으며 창가로 가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가볍고 우아한 스텝을 밟았다. 한쪽 발로 선 채 다리를 위로 쭉 뻗기도 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근사해서 베르닌은 코즐로프가 와서 바이올린을 켜주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왕재수가 폭설로 시골 숲속에 갇힌 것치고는 별로 짜증을 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   *

   

 

 

 

 

한 시간 후 왕재수는 차를 마시고 싶다면서 주전자를 들고 눈을 뜨러 나갔다. 베르닌은 다시 졸음이 쏟아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난롯불 때문인지, 무료해서인지, 아니면 그간 쌓인 피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졸렸다. 왕재수에게 차를 우려 준 후 좀 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갑자기 바깥에서 소스라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 아아아아아!!!!!

 

 

베르닌은 화들짝 놀랐다. 벌떡 일어나 뛰어나가려다 왼쪽 발목이 시큰거려서 주저앉았다. 급하게 왕재수가 만들어준 대걸레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나갔다.

 

 

“ 야! 무슨 일이야! ”

 

아아아아악, 다니이일!!! 아아아악!!!!

 

 

10미터 쯤 떨어진 전나무 아래 왕재수가 서 있었다. 머리에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채 한 손에 주전자를 들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울부짖고 있었다.

 

 

“ 너 왜 그래? 거기 뭐 있어? 쥐라도 나왔니? ”

 

으아아, 다닐! 뱀! 뱀 있어! 아아악!!!

 

 

베르닌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과연 왕재수의 말대로 전나무 근처 눈 더미 사이에 뭔가 울긋불긋하고 기다란 것이 꿈틀꿈틀하는 게 보였다. 색깔을 보니 지난번 온천 요양소 쪽에서 왕재수를 놀라게 했던 뱀과 같은 종류였다.

 

 

“ 이거 독 없는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치워줄게. 너 움직이지 말고 거기 가만히 있어. ”

 

“ 다닐, 으아아... ”

 

 

베르닌은 문가에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서 절룩거리며 눈 더미 쪽으로 갔다. 베르닌이 다가가도 뱀은 가만히 있었다. 심지어 꼬리 쪽에는 눈도 쌓여 있었다. 또 허물 벗어놓은 건가 싶었지만 진짜 뱀이었다. 베르닌은 나뭇가지로 뱀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서 멀리멀리 던져버렸다. 왕재수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나무 뒤쪽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왕재수에게 갔다.

 

 

“ 뱀 버렸어. 이제 괜찮아. ”

 

“ 진짜, 진짜 뱀이었어... 껍질 아니었어... 으앙, 다닐... 엉엉... 뱀이 또 왔어. 나 숲 진짜 싫어... 엉엉... 낼름낼름...

 

 

왕재수가 눈 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세상 끝난 듯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어이도 없고 좀 귀엽다는 생각마저 들면서 웃음이 나려고 했지만 꾹꾹 참으며 왕재수를 어르고 달랬다.

 

 

“ 괜찮아. 이제 저리로 갔어. 빨리 집으로 들어가자. ”

 

“ 또 있으면 어떡해... 지 친구들 같이 왔으면 어떡해... ”

 

“ 뱀은 친구 없어. 혼자 다녀. ”

 

“ 아니야, 뱀도 친구 많아! 영화에서 뱀이 막 구덩이에 수십 수백 마리 모여서 우글우글... ”

 

“ 야, 그건 영화잖아.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자. ”

 

 

왕재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억지로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업어주고 싶었지만 발목이 아파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왕재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뱀이 나왔던 방향을 피해서 지그재그로 걸어가면서 엄마 잃은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 엉엉, 뱀 무서워... 엉엉... 무서워... ”

 

“ 그 뱀 좋은 뱀이라 했잖아. 벌목공들이 목에도 걸고 다닌다니까, 나무 잘 자라고 홍수 안 나게 해준다고. 너 올해 그 뱀 두 번이나 봤으니까 운수 좋을 거야. ”

 

“ 칫, 그때도 운수 좋을 거라 했는데 막 독사과 먹고 불 나고 잡혀가고... 다 거짓부렁이야... ”

 

“ 그건 액땜한 거고! 이제부터 좋아질 거야. 그리고 아까 그 뱀은 독도 없고 안 물어. 너무 무서워하지 마. 그 뱀도 놀랐을 거야. ”

 

“ 그놈이 뭘 놀라, 낼름낼름하면서 나 막 째려보고... 으흑... ”

 

“ 뱀은 변온동물이잖아. 따뜻해져서 겨울잠에서도 깨고 막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 와서 추워지니까 몽롱해져서 그러고 있었던 거야. 불쌍하잖니. ”

 

“ 안 불쌍해... 뱀 안 불쌍해. 무서우니까 안 불쌍해. 시골 와서 뱀 보는 내가 불쌍해. 어헝... 너 지금 뱀 편드는 거야? 흑...

 

“ 아휴, 무슨 뱀을 편드니. 대체 너는... 아무리 천재에 훈장을 많이 받고 높은 사람들 많이 만나도 다 소용없구나! 뱀 무섭다고 울고 뱀 질투하고! 다섯 살짜리도 안 그러겠다.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

 

“ 할머니 할아버지도 뱀은 무서워한단 말이야! 흑... ”

 

 

왕재수는 훌쩍훌쩍 울면서도 발끈했는지 화를 냈다. 문 앞에 다다르자 눈도 털지 않고 급하게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떨어뜨린 주전자를 주워서 나뭇가지에 잔뜩 쌓여 있는 눈을 떠 넣은 후 따라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왕재수는 곧장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발발 떨면서 서럽게 울었다. 베르닌은 달래줄까 하다가 역성을 들어주면 더 울 것 같아서 그냥 놔두고 페치카에 주전자를 걸었다. 장작을 좀 더 넣고 부채질을 해서 불길을 좀 더 살린 후 아침 먹은 그릇들 설거지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왕재수는 뱀이 무섭다느니 시골이 싫다느니 하며 5분쯤 울다가 베르닌이 모른 체 하자 슬며시 눈물을 그치고는 잔뜩 토라져서 발끝으로 철제 침대를 퉁퉁 차며 골을 내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대걸레 목발을 짚고 페치카로 가서 주전자를 내렸다. 마침 김이 모락모락 나며 알맞게 물이 끓어올랐으므로 티백을 넣고 홍차를 우렸다. 그리고는 컵에 차를 따라서 왕재수에게 건네주었다.

 

 

“ 자, 차 마셔. 많이 놀랐으니까 뜨거운 차 마시면 나아질 거야. 너 좋아하는 대로 설탕 안 넣었어. ”

 

 

왕재수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컵을 받아들었다. 베르닌은 그 까만 눈에서 예의 ‘네가 무조건 잘못했다!’를 읽었지만 일단 왕재수가 차를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왕재수는 차를 몇 모금 마신 후 좀 기분이 나아졌는지 한숨을 폭 쉬었고 손목과 발목을 양옆으로 흔들어댔다.

 

 

“ 왜 그러니? ”

 

“ 뱀 때문에 마비돼서 아직도 저려. ”

 

“ 내가 좀 주물러줄게. ”

 

 

베르닌은 왕재수의 곁에 앉아서 손목을 천천히 주물러 주었다. 왕재수가 좋아했다.

 

 

“ 아, 따뜻해. 너 손 따뜻해. ”

 

“ 너 차 우려주려고 불 피우고 물 끓여서 그래. ”

 

“ 불 안 피워도 네 손은 항상 따뜻해. ”

 

“ 그런가... ”

 

 

베르닌은 어쩐지 머쓱해졌지만 왕재수가 좋아하니 자신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왕재수가 뱀 때문에 놀랐던 게 좀 가라앉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발목도 주물러주자 왕재수가 더욱 좋아했다.

 

 

“ 시원해. 옛날로 돌아가서 마사지 받는 것 같아. ”

 

“ 전문 마사지사가 해줬다며. ”

 

“ 응, 당연히 비교는 안 되지! 그래도 꿩 대신 닭이니까. ”

 

“ 내가 닭이냐! ”

 

 

왕재수는 웃더니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차는 이미 다 마신 후였다. 손발이 한결 부드러워졌다고 했다. 내친 김에 다리를 위로 뻗으며 누워서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다가도 문득 생각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심각하게 물었다.

 

 

“ 문틈으로 아까 그 뱀 들어오면 어떡하지? ”

 

“ 안 들어와. 틈 없어. 벌목공들이 지은 숙소잖아. 뱀 안 들어와. ”

 

“ 사우나에는 구멍이랑 틈 많았단 말이야. 쥐도 오락가락하는데 뱀이라고 못 들어오겠니? ”

 

“ 아까 그랬잖아, 추워서 뱀도 몽롱해졌다고. 여기까지 못 기어와. 내가 멀리 치워버렸어. ”

 

“ 밖은 추운데 집은 따뜻하잖아... 뱀도 불 쬐러 들어오면... ”

 

에이, 안 들어와. 백만분의 일로 들어오면 내가 치워버릴게 걱정하지 마. 저기 봐, 문에 엽총도 걸려 있잖아. 여차하면 총도 있으니까 걱정 마. 나 총 쏠 줄 알잖아. ”

 

“ 으응. ”

 

 

왕재수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가방을 뒤졌다. 수첩과 볼펜을 꺼내더니 뭔가를 열심히 적고 동그라미 네모 곡선 따위의 기호를 그리기 시작했다. 베르닌이 잘 모르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더니 일어나서 천천히 걷기도 하고 팔을 들어올리기도 하고 머리를 옆으로 꺾기도 했다. 그렇게 움직이다가 이따금 다시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코즐로프가 전에 말한 대로 새로운 작품을 구상 중인 모양이었다. 책상물림 행정직인 베르닌으로서는 왕재수가 어떻게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고 움직임을 통해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너무나 신기했다.

 

 

한참 동작을 연구하다가 왕재수가 문득 생각난 듯 베르닌을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 그래도 총은 쏘지 마. ”

 

“ 응? ”

 

“ 뱀... 총까지 쏠 필요는 없잖아. ”

 

“ 어, 그래. 맞아. 아까처럼 나뭇가지 같은 걸로 치워버릴게. ”

 

“ 근데 여기 총은 왜 있는 거야? ”

 

“ 아, 여기가 숲 속이잖아. 검은 숲이 원래 옛날부터 자연 환경이 좋아서 짐승들이 많이 살아. 나무도 울창하고 먹을 것도 많고 물도 좋잖아. 지금이야 벌목도 하고 도로도 생겨서 옛날만큼은 아니어도 토끼랑 다람쥐, 여우, 새 그런 거 아직 많아. 벌목공들은 일하다가 이따금 곰도 보고 늑대도 본대. 그래서 벌목 작업할 때는 혼자 안 다니고 항상 짝지어 다녀. 총도 가지고 다니고. 여기도 혹시 모르니까 놔뒀을 거야. ”

 

“ 곰? 늑대? 여우? 정말? 신기하다... 나 그런 거 동물원이랑 서커스에서만 봤어. 보고 싶다. ”

 

“ 토끼나 다람쥐라면 몰라도 곰이랑 늑대가 왜 보고 싶니! 위험하게! ”

 

늑대는 멋있는데... 나 작년에 안무했던 작품에 늑대를 형상화한 캐릭터가 하나 나왔어. 늑대 움직임을 짜 넣고 싶어서 동물원에도 자주 가고 다큐멘터리 영화도 많이 봤는데 아무래도 동물원 늑대는 너무 얌전하더라고. 곰은 서커스 극장에서 몇 번 봤어. 근데 그 곰도 너무 얌전하니까 이상하더라고. ”

 

“ 얌전해서 다행이지! 사람 공격하면 어쩌려고! ”

 

“ 하긴 그런가... ”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동작 연구에 여념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놀랄 만큼 집중했다. 베르닌은 무료해져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보았다. 눈은 아직도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그나마 현관 앞의 눈은 왕재수가 아까 쓸어놓아서 괜찮았지만 빨간 리본 달린 전나무 뒤로는 거의 허리까지 눈이 쌓여 있었다. 걸어가려면 커다란 삽으로 눈을 계속 퍼내면서 나아가야 할 판이었다. 다리를 다친 베르닌과 언제 뱀이 나올지 몰라 두려움에 떠는 왕재수가 삽질을 하면서 눈을 헤치고 숲을 나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눈이 녹을 때까지, 혹은 벌목공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다 왕재수가 차에 붙여놓은 구조신호를 보고 이곳으로 와 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스페호프가 그를 걱정해서 안전가옥 쪽으로 사람들을 보내줄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품고 싶었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현장요원들에겐 모두 징계를 내렸기 때문에 지금 이곳으로 사람을 보내면 안전가옥 위치가 발각되니 꼬장꼬장한 국장이 그래줄 것 같지는 않았다.

 

 

유일한 희망은 추위가 조금씩 누그러지면서 구름이 걷히고 저 멀리서는 햇살이 드문드문 비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눈이 그치면 해가 나고 따뜻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눈이 금방 녹을 것이다. 베르닌 자신이야 사실 일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지만 이래도 야근 저래도 야근이니 여기 며칠 갇혀 있는다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아니었다. 일에 찌들어서 매일매일 괴로워하는 베르닌과는 달리 왕재수는 극장에 가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었고 무용수들에게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한 곳에 갇히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하는 성격이니 지금은 참고 있을지 몰라도 하루만 더 지나가면 폭발할 게 뻔했다! 그나마도 다친 게 왕재수가 아니라 베르닌 자신이라서 다행이었다. 왕재수가 또 다치거나 아픈 것을 상상하니, 그것도 다리를 다치는 것을 상상하니 소름이 오싹 끼쳤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두시가 다 되어 있었다. 점심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베르닌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왕재수는 의자 위에 올라가서 한 발로 선 채 비행기가 나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저러다 넘어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데 왕재수가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또 왔다갔다 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도 반짝반짝했다. 이마와 콧등에 땀방울도 송알송알 맺혀 있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창문을 반쯤 열었다. 왕재수가 좋아했다.

 

 

“ 시원해. 좋아. ”

 

“ 응, 아까보단 덜 춥더라. 환기 좀 시킬게. 이제 점심 먹어야지. ”

 

“ 아침 먹은 지 얼마 안 됐잖아. ”

 

“ 아니야, 벌써 두시야. 너 배 안 고파도 먹어야 돼. ”

 

“ 배고파. 이상해, 아침도 많이 먹었는데... ”

 

“ 그렇게 많이 움직이니까 당연히 금방 배 꺼지지! ”

 

 

베르닌은 광을 열고 인스턴트 살랸카 깡통을 한 개 찾아냈다. 냄비에 내용물을 붓고 햄도 더 썰어서 넣었다. 그리고는 옥수수 통조림도 까서 반쯤 수프에 쏟아 부었다. 왕재수가 질색을 했다.

 

 

“ 우웩! 살랸카에 옥수수까지!!! 짜고 달고!!! ”

 

“ 야, 먹을 게 별로 없잖아. 그렇다고 아침이랑 똑같이 주면 너 싫어할 거잖아! ”

 

“ 웬 햄을 그렇게 많이 넣니!!! 안 그래도 그 칼바사 짜던데! 기름기도 엄청 많고! ”

 

“ 추울 땐 기름진 거랑 단 거랑 뜨거운 거 먹어야 된단 말이야! ”

 

“ 안 추워! 네가 불 잘 때놔서 하나도 안 추운데... ”

 

“ 그래도 먹어봐. 의외로 맛있을 거야. ”

 

“ 난 오믈렛 먹고 싶어. 네가 만든 거 맛있었는데. ”

 

“ 여긴 계란이 없어. 있으면 만들어줄 텐데. 근데 야채도 없어. ”

 

“ 벌목공들 불쌍하구나. 야채는 비트랑 오이 피클밖에 없고... ”

 

“ 여기는 밤에 잠만 자고 잠깐 쉬어가는 데라서 그래. 원래 도시락도 싸다니고 먹을 것 챙겨주는 아주머니도 따라다녀. 날 따뜻해지면 샤실릭도 구워먹고. ”

 

“ 샤실릭... 맛있겠다. ”

 

 

괜히 말했다 싶어서 베르닌은 급하게 옥수수 넣은 살랸카를 끓였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왕재수를 위해 비트 피클과 사과 한 알과 치즈를 잘게 썰어서 섞은 후 해바라기 기름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흑빵이 너무 그리웠지만 별 수 없이 다시 비스킷을 몇 개 꺼내 곁들였다. 통조림 옥수수를 잔뜩 쏟아 부은 덕에 살랸카는 양이 꽤 많아졌다. 맛을 보니 생각보다 좋았다. 차 마셨던 컵을 대충 씻어서 살랸카를 한 국자씩 부었다.

 

 

“ 다 됐다, 먹자. ”

 

“ 으음, 좋은 냄새 나. 이상하네. ”

 

“ 먹어봐, 맛있어. ”

 

 

왕재수는 컵에 담긴 옥수수 살랸카 냄새를 킁킁 맡아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한 숟갈 떠먹었다. 그리고는 또 고개를 갸웃하더니 두 번 더 떠먹었다.

 

 

“ 이상해, 왜 맛있는 거지? 인스턴트 살랸카에 짜디짠 햄 잔뜩 넣고 거기 옥수수까지 때려 부었잖아. 완전 가축 여물 같이 만들었는데 어떻게 맛있을까? ”

 

“ 야! 먹을 거 앞에 두고 여물이 뭐야! ”

 

“ 옥수수 원래 동물 사료로 많이 먹이잖아! 그리고 나 통조림 옥수수 안 좋아하거든. 전에 레닌그라드 있을 때 같이 살던 친구가 한번은 버터에 냉동 옥수수 알갱이를 넣고 볶아줬는데 국물도 흥건하고 너무 보기 싫어서 내가 여물 같다고 치워버리라 했더니 충격 받더라고. ”

 

“ 그 친구 불쌍하다... 나름대로 너 먹이려고 만들어준 걸 텐데... ”

 

“ 아니야! 그때 너무 격렬하게 응응을 하고 나서 배고프니까 아무 거나 있는 거 긁어다 만든 거야. 아무리 응응을 해서 배고파도 그렇지... 그것만은 먹을 수 없었어! ”

 

“ 으윽! 친구라고 했잖아! 왜 친구하고 응응을 하는데! ”

 

“ 그러게... 나도 친구랑은 안 하자 주의였는데... 애초부터 나는 친구도 거의 없었으니까. 그래서 걔랑은 안 하려고 했는데 결국 그렇게 됐어. 보고 싶다. 너 보면 가끔 걔 생각나. ”

 

“ 왜? 걔도 인스턴트 통조림 쓰고 냉동 펠메니 삶아줬니? ”

 

“ 요리는 네가 훨씬 더 잘해. ”

 

 

왕재수는 컵에 담긴 걸쭉한 수프와 옥수수 알갱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수프를 떠먹고 샐러드도 먹었다. 한참 먹은 후에야 샐러드가 맛있다고 했을 뿐이었다. 비스킷은 입에 대지 않았다.

 

 

베르닌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왕재수는 좁은 실내를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외국어 가사이긴 했지만 흥겨운 멜로디는 베르닌의 귀에도 익었다.

 

 

“ 어, 나 그거 극장에서 들어본 거 같아. 무슨 노래야? ”

 

“ 그래도 극장 드나든 보람이 있긴 있네. 투우사의 노래야. ”

 

“ 투우사? 그러면 돈키호테! 망토 춤 출 때 나오는 노랜가? ”

 

“ 아휴, 그건 발레였잖아, 노래 안 나왔잖아. 출연까지 해놓고는. 이건 카르멘에 나오는 거야. 오페라! ”

 

“ 어, 그렇구나... 하여튼 노래 좋아. ”

 

“ 당연하지, 내가 부르니까. 그리고 나는 원래 바리톤이니까. ”

 

“ 바리톤이 뭐지... 근데 너는 발레를 했는데 어떻게 오페라 노래도 다 알아? 그리고 노래도 잘하고... ”

 

나 원래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하고 연기도 잘 하고 팔방미인이잖아.

 

“ 으윽, 물어본 내가 바보지... 저놈의 자기 자랑. ”

 

“ 사실은 사실인데 굳이 겸양 떨 필요 없잖아. 그리고 발레학교에서도 음악이랑 연기 수업 다 받았어. 오페라랑 연극도 맨날 보러 다녔고 그쪽 지인들도 많았어. 그래서 지금 극장 끌고 가는데 도움이 되는 거야. 발레 말고 오페라도 있으니까. 뭐 부감독이 오페라 쪽이니까 전문적인 건 맡기고는 있지만. ”

 

“ 아, 그래서 오페라 무대 때도 자주 가 있는 거구나. 노래 배워서 그렇게 잘 하는 거구나. 어쩐지... ”

 

“ 배워서 잘하는 거면 못 하는 사람 하나도 없게. ”

 

“ 그래도 성악 쪽은 발성인가 뭔가 배우면 되는 거라며. ”

 

“ 음, 너는 성악은 안 될 거야. 차라리 대중가요 쪽을 배워. ”

 

“ 나 피오네르랑 콤소몰에서도 노래 못한다고 맨날 구박받았어. ”

 

“ 노래 좀 못하면 어때, 다른 거 잘하면 되지. 너는 종이로 하는 걸 잘 하잖아. 중요한 종이도 많이 만들고. ”

 

“ 에휴, 내 일은 중요한 거 하나도 없어. 그냥 쓸데없는 서류 작업이지. 망할 놈의 국장. 근데 다른 노래도 불러주면 안되니? ”

 

“ 나는 천재 예술가인데! 막 이래라 저래라 하고 노래 부르라 하고! ”

 

 

 

왕재수가 툴툴댔지만 칭찬을 해주니 기분이 좋은 게 분명했다. 연달아 노래를 불러주었다.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를 두어 곡 더 불러준 후 모두가 잘 아는 노래인 ‘백학’까지 불러주었다. 그러더니 ‘아휴, 분위기 우울해’ 하고 종알거린 후 베르닌이 잘 모르는 영어 노래를 또 흥얼거리며 벽난로에 장작을 집어넣었다. 베르닌은 처음으로 도청 장치가 아쉬웠다. 왕재수의 노래를 녹음해놓고 틈나는 대로 들을 수 있을 테니까.

 

 

 

 

 

*   *   *

 

 

 

 

 

오후 늦게 눈이 그쳤다. 왕재수는 집 앞과 근처 오솔길에 쌓여 있는 눈을 기세 좋게 쓸어내기 시작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삽을 내팽개치고 헉헉거리며 들어와서 난롯가에 주저앉았다.

 

 

“ 틀렸어. 그나마 사람 다니는 길로 나가려면 저 눈을 다 치워야 하는데 너무 많이 쌓여서 불가능해. 따뜻해지면 좀 녹을 텐데 심지어 더 추워진 것 같아. 한겨울처럼 눈이 얼었어. 문짝 썰매를 타고 나가볼까... 연장이라도 있으면 그거라도 좀 쪼개서 스키처럼 만들어볼 수 있으려나. ”

 

“ 일단 오늘 자고 내일 아침에 생각해보자. 지금이야 해질 무렵이니까 추워질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썰매랑 스키는 다르잖니. 너 다리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게다가 벌써 컴컴해지는걸. 그냥 오늘은 맘 비우고 하루 더 잔다고 생각해. ”

 

“ 공연... 나쟈... 아... ”

 

 

왕재수는 한숨을 쉬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기적이 일어나 구조대가 온다 해도 공연 시작까지 극장에 가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땅이 꺼질 듯 계속 한숨을 쉬면서 왕재수는 페치카 쪽으로 갔다. 삽으로 재를 퍼내고 장작을 더 집어넣고 부채질을 해서 사그라지고 있던 불꽃을 키웠다. 베르닌은 감탄했다.

 

 

“ 야, 이제 불 잘 피우네! 내가 하려고 했는데. ”

 

“ 칫, 그러면 아까 좀 피워놓지! 죽어라고 눈 치우고 있었는데 그동안 불도 안 피워놓고! ”

 

“ 미안해. 아까는 불이 잘 타고 있었거든. 좀 전에 네가 문 열었을 때 찬 바람 들어와서 불이 죽었나봐. ”

 

“ 다 나 때문이래. ”

 

“ 네 탓이라고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진짜 불 잘 피운다. 너는 위기 상황에 강한가봐. 군대도 안 갔다 왔으면서 할 건 다 하는구나. ”

 

“ 군대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

 

 

불 잘 피운다고 칭찬을 받자 왕재수는 다시 기분이 좋아진 게 분명했지만 어깨를 으쓱하면서 한 손에는 재가 담긴 삽을, 다른 손으로는 주전자를 들고 문 쪽으로 갔다.

 

 

“ 재 버리고 눈 좀 떠올게. 너 저녁 준비해야 되잖아. ”

 

“ 어, 그래. 아까처럼 멀리 가지 말고 그냥 집 앞에 있는 눈 떠와. 이쪽은 다 깨끗하니까. ”

 

“ 그럴 거야! 나무 쪽으로 가면 또 뱀 나올까봐 무서워. 낼름낼름...

 

 

왕재수가 나간 후 베르닌은 찬장에서 저녁거리를 좀 더 뒤져보았다. 수프 통조림은 이제 보르쉬 두 캔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 보르쉬 어제 줬는데 또 주면 짜증내려나...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자식, 돼지비계를 먹으면 좋을 텐데. 이번엔 통조림 청어랑 오이 피클이랑 섞어서 스프레드를 만들어야겠다. 그거 비스킷에 발라 먹으라 해야지. 아니면 비스킷을 물에 넣고 끓여서 죽을 만들어볼까? 맛 이상하려나... 아니면 감자 퓌레하고 비스킷을 섞어서 끓여볼까? 아, 저 녀석 주전자만 가지고 나갔구나. 냄비에도 물 받아야 하는데. ’

 

 

주전자가 작아서 수프도 끓이고 찻물도 끓이려면 저녁에 다시 한 번 눈을 뜨러 나가야 했다. 베르닌은 냄비를 집어 들었다. 대걸레 목발을 짚고 문 밖으로 나가면서 소리쳤다.

 

 

“ 야, 주전자 너무 꽉 안 채워도 돼. 나도 냄비 가지고 나왔어. ”

 

 

왕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집 앞에는 없었다. 또 깔끔 떤다고 제일 깨끗한 쪽 눈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현관 옆의 작은 나무에 쌓여 있는 눈을 냄비에 쓸어 담다가 시야 가장자리에 이상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앗! 고, 곰!!!!

 

 

좁은 오솔길 한가운데 거대하고 시커먼 곰이 한 마리 서 있었다. 두 발로 섰기 때문에 엄청나게 커 보였다. 곰에게서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왕재수가 서 있었다. 왕재수는 한 손에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삽은 없었다. 고개를 든 채 곰을 쳐다보고 있었다. 둘 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소스라쳤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 어, 어떻게 해야 하지? ’

 

 

어릴 때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떠올려보려고 애를 썼다. 숲에서 곰과 마주치면 움직이지 말라고 했던 것 같았다. 아니, 그건 독사 얘기였다. 옛날 얘기처럼 죽은 척하면 오히려 공격당한다고 했던 것 같았다. 나무로 도망가도 안 된다고 했다. 곰은 나무를 잘 탄다는 것이다. 그럼 도망쳐야 하는 건지, 소리를 질러야 하는 건지, 오히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아야 하는 건지 도저히 기억이 안 났다. 군대에 있을 때 무기 없이 곰과 마주친 선임이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어올라 곰을 겁줘서 쫓았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은 났다. 하지만 분명 허풍 90%였을 게 뻔했다.

 

 

그때 왕재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놀라거나 두려움에 질린 표정은 아니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베르닌을 돌아보면서 나직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소리쳐 물었다.

 

 

“ 다닐, 어떻게 해야 돼? 곰이 계속 나 쳐다봐. ”

 

“ 어... 어... 너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마! 내가, 내가 쫓아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

 

“ 으응? 쫓아야 되는 거야? ”

 

 

왕재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베르닌은 금방이라도 곰이 달려들까 봐 너무나 무서웠다. 그러나 곰은 가만히 있었다. 두 발로 선 채 왕재수가 고개를 갸웃하자 자기도 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왕재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먹이를 먹고 왔나... 배가 부른가?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 맞다! ’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외쳤다.

 

 

너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총 가져올게! 조금만 기다려! 움직이면 안 돼! ”

 

“ 총 안 돼! 곰 쏘면 안 돼! ”

 

“ 이 바보야! 넌 도시에서 와서 몰라! 곰은 맹수란 말이야! 흥분시키지 말고 가만히 있어! 꼼짝도 하지 마! ”

 

 

베르닌은 대걸레 목발을 높이뛰기 장대처럼 멀리 짚으며 정신없이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발목의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급하게 광 쪽으로 갔다. 문에 걸려 있는 엽총을 끄집어 내렸다. 장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총을 들고 미친 듯이 다시 뛰어나갔다. 곰과 왕재수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고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었다. 베르닌은 총을 겨누며 소리쳤다.

 

 

미셴카! 몸 낮춰!

 

 

왕재수가 홱 돌아보았다. 눈이 커다래졌다.

 

 

“ 안 돼, 다닐! 곰 쏘지 마! ”

 

숙여! 위험해!

 

 

그때 베르닌과 곰의 눈이 마주쳤다. 베르닌은 곰의 눈도 새빨개지면서 불이 번쩍번쩍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곰이 갑자기 포악해지더니 ‘크악!’ 소리를 내며 몸을 부풀렸다. 금방이라도 덤벼들 태세였다.

 

 

미셴카! 엎드려!

 

 

왕재수가 놀라서 몸을 숙였다. 베르닌은 방아쇠를 당겼다. 불꽃이 퍽 튀기면서 굉음이 났다. 총알은 한참 빗나가서 옆에 있던 전나무에 가서 맞았다. 곰이 ‘으어억!’ 하고 화난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왕재수가 몸을 웅크리며 눈밭에 데굴데굴 굴렀다. 곰이 쿵쿵거리며 베르닌 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한 방 더 쐈다. 이번에는 어딘가를 스친 것 같았다. 곰이 갑자기 크르릉거리고 카칵거리더니 홱 돌아서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곰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왕재수 쪽으로 달려갔다.

 

 

미셴카, 으아... 정말 큰일 날 뻔 했어! 괜찮니?

 

“ 으으... ”

 

 

왕재수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눈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머리와 등, 팔꿈치 밖에 보이지 않았다. 베르닌은 급하게 눈을 파내고 왕재수의 팔을 잡아서 끌어내려고 했다. 그때 왕재수가 신음했다.

 

 

“ 아... 아파... ”

 

 

베르닌은 놀라서 손을 놓았다. 왕재수가 웅크리고 있는 눈구덩이 안쪽에 핏방울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쳤다. 왕재수는 한 손으로 어깨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옷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있었고 거기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베르닌은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앗! 너 곰한테 물린 거야?

 

 

왕재수는 고개를 저었다. 입술을 덜덜 떨면서 웅얼거렸다.

 

 

“ 앞발에 맞았어. 아파... ”

 

“ 괜찮아, 곰 갔어. 나한테 업혀. ”

 

“ 다리 아픈 주제에... 나 일어날 수 있어. ”

 

 

왕재수는 베르닌을 떠밀더니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손으로 어깨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발짝 못 가고 눈 위로 그대로 넘어졌다. 베르닌은 대걸레 목발을 내던져버렸다. 급하게 왕재수를 들쳐 업었다. 왕재수는 이제 일어날 수 있다고 우기지 않았다. 베르닌의 어깨에 머리를 무겁게 떨어뜨리더니 그대로 몸무게를 다 실어버렸다.

 

 

베르닌은 다리가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뛰다시피 집으로 들어왔다. 기절한 왕재수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는 문을 잠그고 빗장을 걸었다. 창문도 꽉 걸어 잠근 후 총을 내려놓고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왕재수는 얼굴이 하얘진 채 누워 있었다. 눈구덩이에 파묻혔던 탓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젖어 있었다. 타월로 머리와 얼굴을 닦아준 후 일단 스웨터와 셔츠를 벗겼다. 오른쪽 어깨에서 팔꿈치 위쪽까지 기다랗게 할퀸 자국이 나 있었다. 어깨 쪽은 심하게 찢어져서 살점이 패여 있었다.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어깨 전체에 커다랗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곰이 후려친 앞발에 맞아서 생긴 상처였다. 그나마 머리 쪽을 맞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정면으로 맞았다면 정말 큰일 났을 것이다.

 

 

‘ 뼈가 부러졌으면 어떡하지... 그 곰 엄청 컸는데... ’

 

 

베르닌은 일단 너덜너덜해진 셔츠로 왕재수의 어깨를 꽉 동여매서 지혈부터 했다. 만져보니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아서 일단 마음을 좀 놓았다. 그는 왕재수의 눈에 젖은 바지와 신발과 양말을 벗겨주고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준 후 담요를 덮어주었다. 구급상자에서 붕대를 꺼냈다. 피투성이가 된 셔츠를 풀어보니 출혈이 적어지기는 했지만 아직 멈추지는 않았기 때문에 소독은 하지 못하고 일단 붕대를 꽉꽉 감아서 압박을 해주었다.

 

 

‘ 찢어져서 꿰매야 할지도 몰라... 의사 선생님한테 데려가야 하는데... ’

 

 

그때 왕재수가 눈을 떴다.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 아이 아파... ”

 

“ 정신 드니? 곰 이제 갔어. 안으로 들어왔으니까 이제 괜찮아. 곰이 어깨 할퀸 거야. 그래도 다른 데는 다친 데 없으니까 이만하기 다행이다... 많이 아프니? ”

 

“ 어깨랑 팔이 너무 뻐근해. 못 움직이겠어. ”

 

“ 앞발에 맞아서 그래. 그 곰 아무리 안 나가도 250킬로는 됐을 텐데, 제대로 맞았으면 뼈 다 으스러졌을 거야. 그냥 스친 정도라 정말 다행이야. ”

 

“ 곰 죽었어? 총 맞았어? ”

 

“ 아니. 제대로 맞추지도 못했어. 그렇게 큰 곰은 엽총 몇 발 맞아봤자 안 죽어. 그래도 놀랐는지 도망갔어. 다행이야. ”

 

“ 그냥 놔뒀으면 좋았을걸. 곰 놀랐겠다. ”

 

“ 곰한테 죽을 뻔하고도 그런 말이 나오니? ”

 

“ 아니야, 공격하려는 거 아니었어. 곰이 막 걸어오다가 나뭇가지 꺾어서 무슨 열매 같은 거 먹었어. 그러더니 나 보고 멈춰 섰어. 가만히 쳐다보더니 앞발로 나뭇가지 쳐서 내 쪽으로 하나 던져줬어. 열매 달린 거. 빨간 거. 그래서 집으려다가 곰이 공격할까봐 그냥 가만히 있었더니 몇 발짝 다가와서 또 가만히 있는 거야. 곰이 그냥 계속 쳐다봤어. 공격하려고 했으면 벌써 했게. ”

 

“ 그랬구나... 곰이 배부른 상태였나 보다... ”

 

총 쏘지 말랬잖아. 나한테 열매도 먹으라고 줬는데. 나쁜 곰 아니었는데. ”

 

“ 미안해, 곰이 너 앞에 있어서 너무 놀랐어. 너 다칠까봐 그랬어. 내가 총 쏴서 곰이 놀랐나보다... 그래서 네가 다쳤나봐. 미안해... ”

 

“ 괜찮아. 그냥 좀 찢어진 거잖아. 피 많이 나? ”

 

“ 살갗 찢어져서 피는 좀 나는데 좀 있으면 멈출 거야. 걱정하지 마. 나중에 의사 선생님이 치료해주면 금방 나을 거야. ”

 

“ 으응... 뼈만 안 다치면 돼. 근데 아까 맞았을 땐 너무 아팠어. 스친 건데도 서 있을 수가 없었어. 숨이 턱 막히는 게 트럭에 받힌 것 같았어. ”

 

“ 그래, 이만하기 정말 천만다행이야. 춥지는 않아? ”

 

“ 응. 따뜻해. ”

 

“ 이제 무서워하지 마. 곰 안 올 거야. 와도 내가 쫓아버릴게. ”

 

“ 안 무서워. 곰은 안 무서워. ”

 

“ 야, 어떻게 곰이 안 무섭냐! 큰일 날 뻔 했는데... 곰하고 그렇게 일대 일로 마주보고 있는 녀석이 어디 있어! ”

 

“ 곰은 안 무서워. 쳐다보는데 눈이 예뻤어. 곰은 괜찮아. 뱀이 무서워. ”

 

“ 에휴, 철없는 녀석... 독도 없고 물지도 않는 뱀은 무섭다 그러고, 곰한테 맞아 뒹굴어 놓고서도 곰은 안 무섭다니. ”

 

“ 곰은 낼름낼름 안 하잖아. ”

 

“ 하긴, 귀신한테 연애 상담도 해준 놈이니... 그래놓고 바퀴벌레랑 쥐 보면 기절하고. ”

 

바퀴벌레 싫어... 쥐 무서워. 뱀 무서워. 왜 자꾸 그런 거 생각나게 해! 징그러워. 엉엉... ”

 

“ 알았어, 미안해. 그런 거 여기 없어. 걱정 마. 좀 누워 있어. 저녁 차려줄게. 따뜻한 거 먹으면 덜 아플 거야. ”

 

“ 곰은 뭐 먹어? ”

 

“ 곰? 나무열매, 물고기, 작은 짐승... ”

 

“ 갑자기 추워져서 먹이 찾기 힘들겠다. 그래서 아까 열매 먹었구나. ”

 

“ 곰 걱정하지 마. 지가 알아서 잘 먹고 잘 살 거야. 네 걱정이나 해. ”

 

“ 으응. 나는 걱정 안 해. 나한테는 네가 밥 차려주잖아. ”

 

 

베르닌은 스웨터를 벗었다. 왕재수의 성한 쪽 어깨와 등을 받치고 조심스럽게 일으킨 후 자기 스웨터를 입혀 주었다. 다시 눕혀주려는데 왕재수가 고개를 저었다.

 

 

“ 눕기 싫어. 앉아 있을래. 저녁도 먹어야 하잖아. ”

 

“ 그래, 그러면 앉아 있어. 잠깐만. 여기 기대 있어. ”

 

 

베개를 겹쳐서 등에 대 주자 왕재수가 좋아했다. 담요를 덮어준 후 베르닌은 싱크대로 가서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감자 퓌레와 물과 비스킷, 치즈 약간을 섞어서 걸쭉한 수프를 끓이고 통조림 청어와 오이 피클, 비트 피클, 점심 때 살랸카에 넣고 남은 옥수수를 잘 섞어 샐러드를 만들었다. 먹어보니 의외로 둘 다 맛있었다.

 

 

접시를 들고 난롯가로 와보니 왕재수는 베개에 기댄 채 졸고 있었다. 난롯불 바로 앞에 앉아 있어선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이즈가 큰 스웨터 때문인지 어린애처럼 보였다. 접시를 내려놓자 왕재수가 금세 깼다.

 

 

“ 이게 뭐야? ”

 

“ 어... 이거... 감자랑 비스킷이랑 치즈 넣고 끓인 수프... ”

 

“ 그 감자 가루? 비스킷 부숴서 넣은 거야? ”

 

“ 으, 으응... 너무 심심할까봐 치즈도 좀 넣었어. 생긴 건 이래도 맛은 괜찮아. 먹어봐. ”

 

“ 이건? ”

 

“ 어제 먹은 그 청어... 피클 넣고 샐러드 만들었어. 아까 사과 샐러드처럼. 나쁘지 않아. 수프랑 먹으면 잘 넘어갈 거야. 먹고 푹 자면 내일 눈 다 녹고 집에 갈 수 있을 거야. ”

 

“ 응. 둘 다 맛있어 보여. ”

 

 

하지만 말과는 달리 왕재수는 거의 먹지 않았다. 수프를 조금 뜨다 말았고 샐러드는 손도 대지 않았다. 먹으니까 속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베르닌은 걱정이 되었다. 억지로 먹이는 대신 접시를 치워주었다.

 

 

“ 곰 때문에 너무 놀랐나보다. 지금은 안 먹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차 우려 줄까? ”

 

“ 응. ”

 

 

베르닌이 주전자와 컵을 들고 왔을 때 왕재수는 성한 쪽 어깨를 매트리스에 댄 채 모로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눕다가 발로 차버렸는지 담요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베르닌은 담요를 집어서 왕재수를 잘 덮어준 후 남은 음식을 대충 긁어먹었다. 모래를 씹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베르닌은 왕재수가 일어나면 차를 우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왕재수는 깨어나지 않았다. 점점 열이 오르더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괴롭게 몸을 뒤척였다. 상처에서 열이 나서 그런가보다 싶어서 베르닌은 스웨터를 벗기고 붕대를 풀어보았다. 피는 이제 완전히 멎어 있었지만 발톱에 패이고 찢긴 상처가 끔찍해 보였고 부어올라 있었다.

 

 

‘ 소독부터 해줬어야 했나봐... 감염돼서 열 나는 거면 어떡하지? 파상풍 같은 거 걸리면... 얘 피부 엄청 챙기는데... 흉터라도 남으면... ’

 

 

베르닌은 거즈에 소독약을 흠뻑 적셔서 왕재수의 상처를 꼼꼼히 닦아냈다. 알콜이 상처에 닿자 하얀 거품이 일었다. 잠결에도 얼굴을 찡그리며 ‘아아...’ 하고 조그맣게 신음을 내뱉는 걸 보니 많이 아픈 것 같았다. 하긴 어제 왕재수가 유리에 벤 상처를 소독해줬을 때 그 역시 굉장히 따가웠다. 곰 발톱에 긁혀서 살점까지 찢어졌으니 훨씬 아플 것 같았다. 베르닌은 공연히 자기 발목의 상처마저 시큰거려왔다.

 

 

소독을 한 후 베르닌은 피 묻은 붕대를 버리고 깨끗한 붕대를 다시 감아 주었다. 피멍 자국은 훨씬 어두워지고 훨씬 넓게 퍼져 있었다. 이 상처를 코즐로프가 봤다면 펄펄 뛸 것이다. 왕재수가 열이 나면서 몸을 덜덜 떨었기 때문에 스웨터에 재킷까지 껴입히고 난롯불에 마른 바지도 도로 입혀주었다. 막 담요를 두 겹 덮어주었을 때 왕재수가 눈을 반짝 뜨더니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아, 너 깼구나. 상처 아팠지? 소독약 바르느라 그랬어. 소독했으니까 이제 열도 내릴 거야. 차 좀 우려 줄까? ”

 

 

“ 아빠, 나 곰 봤어. ”

 

 

베르닌은 왕재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열기가 올라와서 눈이 불그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꿈을 꾸고 있거나 아파서 헛소리를 하는 게 분명했다.

 

 

“ 어... 그랬구나. 곰 봤구나. 안 무서웠니? ”

 

“ 곰이 나한테 열매 줬어. ”

 

“ 으, 으응... 그랬다고 했지... ”

 

“ 근데 떨어뜨렸어. 잃어버렸어. 엄마 갖다 주려 했는데... ”

 

 

왕재수가 몹시 속상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베르닌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며 왕재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 어, 아니야... 있잖아, 내가 가서 주워다 줄게. 곰 있었던 쪽에 떨어져 있을 거야. 밝아지면 주워다 줄게. ”

 

“ 나도 같이 갈래. 내가 주울 거야. 곰이 나한테 줬어. ”

 

“ 그래, 곰이 너한테 열매 줬구나. 네가 착해서 그런 거야. 이제 자자. 자고 나면 안 아프고 햇빛도 날 거야. 그럼 열매 주워서 집에 가자. ”

 

“ 으응, 엄마도 이리로 왔으면... 다 같이 있었으면... ”

 

 

왕재수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더니 베르닌의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는 몸을 웅크리며 다시 잠이 들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손을 잡은 채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왕재수는 두어 시간 정도 그렇게 얌전하게 잤지만 베르닌은 걱정이 되어서 내내 그의 곁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소독을 해줘서 열이 좀 내리나 싶었는데 11시 즈음이 되자 다시 열이 펄펄 끓었다. 기침도 했다. 아무래도 전날부터 눈을 맞고 돌아다닌 데다 아까 눈구덩이에 파묻혀서 그런 것 같았다.

 

 

‘ 큰일났네. 곰한테 맞아서 그런 게 아닌가봐. 의사 선생님이 그랬는데, 감옥 때문에 기관지가 안 좋아져서 조금만 잘못하면 폐렴 도진다고 했는데... 얜 한번 열 나면 끝도 없이 올라가던데... 어떡하지... 더 아프면 안 되는데. ’

 

 

베르닌은 너무 걱정이 되었다. 붕대에 약간 피가 배어나와 있는 것이 신경 쓰여서 다시 한 번 깨끗한 붕대로 갈아 주었다. 열이 심하니 갈증이 날 것 같아서 왕재수의 입술을 벌려서 따뜻한 물도 조금씩 먹였다. 물을 먹여주자 왕재수가 잠깐 깨어났다. 이번에는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 다닐, 너무 추워. 난롯불 꺼졌나봐. ”

 

“ 으응, 그래. 내가 장작 좀 더 넣을게. 이불 좀 더 덮자. ”

 

 

베르닌은 담요 세 개를 모두 겹쳐서 왕재수를 꽁꽁 싸준 후 페치카에 장작을 더 많이 넣고 불도 더 세게 피웠다. 불길이 난로 밖으로 밀려나올 만큼 세게 피워서 실내가 사우나처럼 후끈후끈해졌다. 왕재수는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다시 추워했다.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덜덜 떨었다. 열이 나서 그런 것 같았다. 베르닌은 근심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할퀸 상처가 아프냐고 물었다. 왕재수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 그냥... 머리가 너무 아파. 추워. ”

 

“ 지금도 추워? ”

 

“ 로만... 추워... ”

 

 

왕재수가 괴로워하면서 베개를 꼭 껴안았다. 기침을 하더니 코즐로프를 찾기 시작했다. 안아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너무 추워서 그런 것 같았다. 베르닌은 예전에 과로와 독감으로 아팠을 때 왕재수가 안아주자 따뜻해졌던 게 생각나서 급하게 셔츠와 바지를 벗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왕재수를 꼭 안아주었다. 왕재수는 몸부림을 치다가 베르닌이 뒤에서 안아주자 금방 얌전해졌다.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베르닌에게 착 달라붙었다.

 

 

“ 이상해. 이렇게 불덩어리 같은데 자꾸 춥다고... 대체 몇 도야... 바보, 그러니까 나가지 말랬는데도 막 눈 맞으면서 차에도 갔다 오고... 아까도 막 눈 치우고... 뱀한테 놀래서 울어놓고 또 기어나가서 곰하고 마주치고 공격이나 당하고. 맨날 자기 무덤 파고... 정말 너란 녀석은... 바보 멍충이. “

 

 

아픈 와중에도 마지막 단어를 알아들었는지 왕재수가 웅얼거렸다.

 

 

“ 아니야... 나 아니야... 바보 멍충이는 다닐이야. "

 

“ 귀는 밝아 가지고... 알았어, 내가 바보 멍충이야. 잘 자고 있는 너 깨워가지고 온천 데려간다고 나오고... 다리나 다쳐가지고 너 고생시키고. 곰도 가만히 있었는데 괜히 총 쏴서 너 다치게 만들고... 내가 바보 멍충이 맞아. 미안해, 미셴카. 진짜 미안해. 그러니까 아프지 마. 아프면 안 돼. ”

 

 

왕재수는 대답하는 대신 더욱 더 베르닌의 품으로 찰싹 파고들었다. 아직도 추운지 부들부들 떨었다. 난롯불에 세 겹의 이불에 불덩어리처럼 뜨거운 왕재수 때문에 베르닌은 덥고 숨이 막히고 어지러웠다. 하지만 왕재수는 아직도 추운지 계속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기침을 할 때마다 가슴과 어깨가 쿵쿵 울렸다. 베르닌은 더운 것도 꾹 참고 왕재수를 꼭 안아주고 기침 때문에 심하게 들먹이는 등을 쓸어주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 아... 정말 어떡하지. 너는 왜 이렇게 아파가지고... 왜 고문은 당해가지고 이렇게 조금만 무리하면 열 나고 아프고... 아파도 곱게 아프면 좀 좋아. 그냥 뜨거운 차 마시고 이불 덮고 푹 자고 편하게 아프면 되잖아. 꼭 이렇게 무지무지 아파서 눈도 못 뜨고 정신도 못 차리고 막 힘들어하고 사람 걱정시키고... 맨날 아프고 맨날 사고치고... 너 때문에 나 정말 미칠 거 같아. 못 살겠어...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와 가지고... 맨날 나 힘들게 하고. 나 괴롭게 하고... ”

 

 

베르닌은 꾹 참으려고 했지만 자꾸 훌쩍훌쩍 울음이 나왔다. 왕재수가 자꾸 아픈 게 어쩐지 전부 자기 잘못 같았다. 꼭 안아줬는데도 왕재수가 계속 추워하고 열이 펄펄 끓고 괴로워하고 기침을 하니 어떻게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정 밖에 되지 않았다. 날이 밝으려면 한참 멀었다. 눈이 녹으려면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어찌어찌 아침이 온다 해도 왕재수를 데리고 나갈 방법이 없었다. 지난번 얼음물에 빠졌을 때나 독사과를 먹었을 때를 떠올려보면 왕재수는 가면 갈수록 더 열이 나고 아플 게 분명했다. 빨리 의사에게 데려가야 했다. 여기 내버려뒀다간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너무 무섭고 걱정이 되어서 베르닌은 견딜 수가 없었다.

 

 

‘ 어떡해... 어떡하지... 어떻게든 오늘 밤만 잘 넘기면... 동 트면 내가 나가서... 눈 치우면서 어떻게든 가면... 여기서 온천 요양소가 제일 가까우니까 거기까지만 가면... 그러면 사람 불러올 수 있어. 내 차에 지도 있으니까... 그거 보고 온천 쪽 가서... ’

 

 

베르닌은 왕재수를 꼭 껴안은 채 하염없이 시계를 보며 기도를 했다.

 

 

‘ 하느님, 제발 빨리 해가 뜨게 해 주세요. 얘가 안 아프게 해주세요. 열이 내리게 해주세요. 자꾸 춥다고 해요. 안 춥게 해주세요. ’

 

 

왕재수가 떨면서 베르닌의 뺨에 자기 얼굴을 비볐다. 얼마나 뜨거운지 살이 다 데는 느낌이었다.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왕재수가 헛소리를 했다.

 

 

“ 뱀 무서워... 바퀴벌레 무서워... ”

 

“ 뱀 없어, 바퀴벌레 없어. 괜찮아. 아무 것도 없어. ”

 

“ 무서워... 추워... ”

 

 

 

베르닌이 어쩔 줄 모르며 왕재수의 이마를 쓸어주고 등을 토닥여주고 있는데 갑자기 바깥에서 컹컹 개 짖는 소리와 삐걱거리는 소리,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쩐지 귀에 익은 쾌활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톱! 스토오옵! 구웃! 굿 보이! 굿 걸! 예에에쓰!

 

 

 

 

 

*   *   *

 

 

 

 

 

베르닌은 정신없이 뛰쳐나갔다. 현관문을 벌컥 열자 사방에 쌓인 눈이 온통 보름달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빨간 리본 달린 전나무 앞에 금색과 검정색으로 칠해서 번쩍번쩍 광이 나는 커다란 썰매가 서 있었다. 큰 썰매였다. 양옆으로 높직하게 난간까지 올린 데다 안쪽 좌석에는 검정 벨벳 덮개까지 씌워져 있었다. 게다가 뒤에는 널찍한 트렁크 칸까지 달려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근사한 썰매였다. 썰매에는 무려 다섯 마리의 커다랗고 북슬북슬한 개들이 매여 있었다.

 

 

우와아... 개썰매!!!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급하게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북슬북슬한 흰색 모피코트에 털모자를 눌러 쓰고 새파란 누비 솜바지와 노란 부츠를 신은 바냐 투레츠키가 신나게 휘파람을 불어대며 벌목공 숙소에 딸린 사우나 별채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별채 바로 옆으로 가더니 기운차게 삽으로 눈을 퍼내고는 무릎을 꿇더니 ‘끙차!’ 하면서 바닥에 놓여 있는 큰 돌을 들어서 옆으로 밀어놓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나무 뚜껑이 나타났다! 투레츠키는 ‘랄라랄라~’ 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나무 뚜껑을 들어올렸다. 베르닌은 두 눈을 의심했다. 그 아래에는 커다란 창고가 있었다! 조그만 사다리까지 놓여 있었고 지하 창고에는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바냐! 나 다닐이야! 바냐!

 

 

노래를 부르며 반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던 투레츠키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마냥 밝던 얼굴을 찌푸리더니 안경을 추켜올리며 ‘흐응’ 하고 고개를 저었다. 베르닌은 그러든 말든 개의치 않고 투레츠키에게 달려갔다.

 

 

“ 바냐! 너무너무 반가워! 아, 나 정말 여기 꼼짝없이 갇힌 줄 알았어! 와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

 

“ 아하, 다냐였구나. 난 또... 어휴, 너 왜 이렇게 사람 간 떨어지게 만드냐! 난 또 짭샌줄 알았잖아! 안 그래도 요즘 뇌물 주는 걸 좀 게을리했더니 자식들이 나 옭아매려고 기회만 보는 것 같아서 슬슬 다시 작업 좀 해야겠다 싶었거든. 근데 넌 여기서 뭐하는 거야? ”

 

“ 나 어제 숲에 왔다가 눈길에 미끄러져서 차 사고 났어. 폭설 때문에 여기 벌목공 숙소에 갇혀 있었어. 너 내 차 보고 여기 온 거 아니야? 차에 구조 신호 남겼잖아. 나 구해주려고 온 거지? ”

 

“ 에이 무슨 소리야. 난 썰매 타고 눈길로 왔는데 네 차를 어떻게 보냐. 하여튼 역시 너랑 나는 인연인가보네. 이왕 이렇게 된 거 너 나 좀 도와라. 어휴, 어제 옮겼어야 했는데 망할 놈의 눈이 이렇게 올 줄이야! 고객 몇 명이 오늘 물건 안 왔다고 얼마나 짜증을 내던지! 난 신뢰가 생명인데 제아무리 자연재해라도 운송 지연을 좌시할 수야 없지.

 

“ 고객... 물건... 앗! 그럼 너 여기다 물건들 숨겨 놓는 거야? 밀수품... ”

 

“ 야, 조용히 해! 내가 무슨 밀수꾼이라도 되는 줄 아냐? 다 합법적인 루트로 들여오는 거야! 사무실은 너도 와봤잖아, 좁아서 이 물건들 다 놔둘 수가 없단 말이야! 일주일마다 물건 배치랑 진열 품목도 다 바꿔줘야 하고. 그러니까 여기 창고를 만든 거야! 정기적으로 배송 오는 물건들도 여기서 수령하는 거고! 그건 그렇고 너 이거 설마 스페호프에게 흘리진 않겠지? 그럼 진짜 나 실망할 거야! 너랑 나랑 동갑인데! 보드카도 나눠 마시고 청어도 같이 먹었는데! ”

 

“ 아, 아니야... 나 절대 그런 거 말 안 해... 저, 바냐... 근데... 저 있잖아... 여기 나만 있는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너도 알지, 미셴카... 그... 영어랑 불어 잘 하고 프랑스 신문 읽으러 오고 네가 귀엽다고 한... ”

 

아, 우리 이쁜이! 걔 요즘 왜 이렇게 뜸하냐! 보랴 생일 때 본 게 마지막이네. 보고 싶어 죽겠네! 요즘은 예쁜 여자들도 예전만큼 안 오고... 이쁜이라도 와주면 좋겠는데. 정말 눈요기가 필요한데! ”

 

“ 그, 그러니까... 있잖아. 나랑 걔랑 여기 같이 왔는데... 곰이... 어... 열매를 주고... 총을 쐈는데 곰이 날뛰고... 그래서 피 나고... ”

 

“ 대체 무슨 소리야, 웬 곰! 열매는 또 뭐고! 너 술 마셨냐? ”

 

“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

 

 

베르닌은 약삭빠른 투레츠키가 거절할까봐 걱정이 스멀거렸지만 그래도 마음이 급해서 불쑥 말했다.

 

 

“ 미셴카가 너무 아파. 열이 펄펄 끓고 인사불성이야. 빨리 의사한테 데려가야 해. 바냐, 제발 도와줘. 응? 걔 좀 시내로 옮겨주면 안되니? 썰매로... 저... 시내가 너무 멀면 온천 요양소라도... 제발... ”

 

“ 에이, 열 나면 푹 자면 괜찮아져. 알잖아, 보드카 쭉 들이키고 난롯불 피워놓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자고 나면 씻은 듯이 나을 거야. 난 좀 바빠서... 짐 실어야 하거든. ”

 

“ 바냐, 제발. 걘 우리랑 체질이 달라. 여기 올 때부터 많이 아팠단 말이야. 술은 한 방울도 못 마셔. 놔두면 정말 큰일 날 거야. 너도 걔 좋아하잖아. 부탁이야. 우리 동갑이잖아. 술친구잖아. 내가 그때 파인애플도 샀잖아. 저... 내가 너 짐 옮기는 거 도와줄게. 다음에도 와서 도와줄게. 부탁이야... 제발 이번 한번만 도와줘. ”

 

 

베르닌은 투레츠키의 손을 덥석 잡고 매달리며 애원을 했다. 투레츠키는 베르닌이 손까지 잡자 당황한 듯 안경 너머로 눈을 동글동글 굴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 아, 뭐 그런 것 가지고... 에이... 그 자식 저번에 나한테 좋은 거 갖다 주기로 해놓고 안 줬는데. ”

 

내가 주라고 할게! 걔 내 말 잘 들어... 뭔지 말해주면 내가 가져다줄게!

 

“ 쳇. 나 바쁜데... 일단 짐부터 싣자. ”

 

“ 바냐, 제발... 짐은 있다가 다시 와서 실으면 안 되니? 미셴카가 정말 아파. 열도 많이 나고 오한도 심하단 말이야. 걔부터 옮겨주면 안 돼? 이러다 걔 잘못되면... ”

 

어휴, 잘못되긴 뭘 잘못되냐! 알았어! 나랑 같이 가서 좀 보자! 잠깐만!

 

 

투레츠키가 지하 창고로 재빠르게 내려가더니 베르닌의 눈에는 잡동사니로밖에 안 보이는 물건들을 뒤적거리다가 뭔가 조그만 병을 한 개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사다리를 기어 올라오더니 다시 휘파람을 불며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왕재수는 세 겹의 담요로 꽁꽁 싸인 채 몸을 웅크리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눈꺼풀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여전히 인사불성이었다. 투레츠키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 우리 이쁜이 많이 아프구나. 그러니까 나한테 꼬박꼬박 왔어야지. 너 주려고 이것도 받아다 놨는데. 요즘은 노인 양반도 건망증이 심해졌는지 맡겨놓기만 하고 가져갈 생각을 안 한단 말야. 그 노인네는 하도 괴팍하니까 물건 가져가라고 닦달하면 지팡이로 두들겨 팰 것 같단 말이지. ”

 

“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널 지팡이로 두들겨 패? ”

 

“ 누구긴 누구야, 꼬장꼬장한 호랑이 영감쟁이. 에휴, 노인네가 울 엄마한테서 나 받아주지만 않았어도! ”

 

“ 어, 레프 사벨리예비치 말이야? 의사 선생님? 나도 그 선생님이 받아주셨는데! 우와! ”

 

“ 우와는 무슨. 우리 세대 토박이 치고 그 영감님이 안 받아준 애들이 얼마나 있겠냐. ”

 

“ 그래도... 우린 동갑이고... 같은 의사 선생님이 받아줬으니까... ”

 

“ 하긴 그래. 동업하면 딱인데. 야, 얘 머리 좀 받쳐봐. ”

 

 

베르닌은 어리둥절해졌지만 시키는 대로 왕재수의 머리를 받쳐서 살짝 쳐들었다. 투레츠키는 지하창고에서 가져온 조그만 병의 마개를 열더니 왕재수의 입을 벌리고 빨간 빛깔이 도는 액체를 부어 넣었다. 베르닌은 깜짝 놀라서 투레츠키의 손목을 붙잡고 저지했다.

 

 

야, 지금 뭐하는 거야! 얘 아무 약이나 먹이면 안 돼! 의사 선생님이... ”

 

“ 어이, 캄 다운~ 릴랙쓰! 나도 알아. 이건 괜찮아. 영감님이 구해달라고 한 약이니까 괜찮아 괜찮아. 이거 구하는 게 얼마나 골치 아픈 줄 아냐? 잡지나 통조림하고는 경우가 다르다고. 그것도 이런 외제 약물은. 우리 이쁜이 이거 먹으면 열도 금방 내리고 괜찮아지거든. 노인네가 나한테 특별 주문한 거야. 지난번에 구해준 거 다 떨어졌다고 또 구해오라 해서 갖다 놨는데 요즘 이쁜이가 하도 뜸해서 약도 안 가져가고. 노인네한테 전화하려니 망할 놈의 의사 선생이 툭하면 맘 잡고 새 삶을 살라는 둥 설교를 해대니 짜증이 나서 원... 나 아니었으면 이 약도 못 들여왔는데 말이지. 하여튼 노인 양반. ”

 

 

베르닌은 멍해졌지만 어쨌든 골자는 알아들었다.

 

 

“ 어, 그러니까... 의사 선생님이 너한테 얘 약을 구해달라고 했다는 거야? 우리나라에서는 구하기 힘든 약인 거야? ”

 

“ 구할 수야 있지,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에서는. 근데 여기서는 힘들거든. 재밌는 거 가르쳐줄까? 모스크바 루트로 구하는 것보다 베를린 루트로 구하는 게 훨씬 쉽거든. 모스크바 쪽은 병원이나 의대를 뚫어야 하는데 그쪽은 뇌물을 엄청 먹여야 돼. 독일놈들이 훨씬 깔끔하다니까. 당케! 이쁜이도 수도에 있었을 땐 높은 분들 다니는 병원에 다녔으니까 약을 받았는데 여기 오니까 안 되는 거지. 노인네가 그쪽 차트를 구해가지고 머리 굴리다가 나한테 전화한 거야. 에이, 꼬장꼬장한 노인네. 그 와중에도 값을 깎고... ”

 

“ 와, 상상이 안 되네. 그 선생님이 너네 사무실에... 마약을 사러... ”

 

야! 이거 마약 아니야! 이거 합법적인 치료 약물이라고! 그냥 처방전이 필요한 것뿐이야! 수입 물량이 딸려서 우리 같은 시골까지 안 들어오는 것뿐이야! 양키들이랑 유럽 놈들은 쉽게 구한다고! 높으신 분들도 그렇고! 이쁜이는 옛날부터 주치의한테서 처방받아서 먹었다고 했어! ”

 

“ 그래도 여기서 들키면 체포되는 거 아니야? 그럼 마약이랑 뭐가 달라? ”

 

달라! 마약은 뿅 가려고 먹는 거고! 이건 안 아프려고 먹는 거잖아. 너 설마 날 마약밀수범으로 의심하냐! 게다가 우리 동네 최고 명의가 처방해준 약물을! 너 지금 나하고 영감쟁이를 동시에 모독했어! ”

 

“ 아, 아니야... 미안해. 바냐, 미안해. 그런 거 아냐. 고마워. 미셴카 위해서 약 구해줘서 고마워. 나는 그게 아니고... 혹시라도 네가 위험해질까봐... ”

 

“ 안 위험해! 너 내 실력을 뭘로 보고! 그리고 노인네야 당연히 나한테 직접 안 오지. 얘가 받으러 왔지. 약만 받아갈 줄 알았는데 웬걸, 이쁜이가 우리 물건들 엄청 관심 많더라고. 아는 것도 많고. 그래서 드나들게 된 거야. 에이, 손님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면 안 되는데... 내 영업 방침에 어긋나는데! 뭐 너랑 얘랑 되게 친하다고 보랴가 그랬으니까. 너랑 내가 남도 아니고. ”

 

“ 그랬구나... 이 약 먹으면 정말 괜찮아질까? ”

 

“ 열은 내릴 거야. 그러니까 그동안 물건 좀 싣자. 너도 도와줘! ”

 

“ 빨리 의사 선생님한테 데려가야 되는데... ”

 

“ 급한 물건은 지금 가져가야 돼! 내가 이 정도나 해주는데! ”

 

“ 어, 그래그래. 내가 도와줄게. 근데 물건 많이 실으면 얠 못 옮기잖아... ”

 

“ 뭐 할 수 없지. 무거운 건 내일 한 번 더 오지 뭐. 급한 물건들은 다행히 조그만 것들이라서. 빨리 와. ”

 

 

베르닌은 왕재수가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 투레츠키를 따라 나갔다. 투레츠키가 지하 창고에서 물건들을 위로 던지면 그것을 받아서 썰매 뒤쪽 트렁크 칸에 차곡차곡 실었다. 물건을 쌓을 때마다 썰매에 매여 있던 개들이 그를 보고 컹컹 짖었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눈을 반짝거리고 머리를 들이받으려고 하는 것이 어서 빨리 달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마침내 물건들을 다 실은 후 투레츠키가 개들을 쓰다듬고 나무에 묶어둔 썰매 줄을 풀면서 말했다.

 

 

“ 야, 이쁜이 데려와. 이제 가자. ”

 

“ 으, 으응... 시내로 가는 거야? ”

 

“ 그래야지. 검은 숲 진입로에 차 세워놨어. 그쪽은 그래도 제설이 좀 됐거든. 병원 앞에 내려줄테니까 이쁜이 나으면 약값 들고 오라고 해. ”

 

“ 내가 가져다줄게. 얼마야? ”

 

“ 야, 계산은 정확하게 해야지 왜 네가 가져다 주냐! 이건 나랑 이쁜이의 문제라고. 하여튼 빨리 애 데리고 와. 시간 없어. ”

 

 

베르닌은 집으로 들어갔다. 왕재수는 여전히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수입 약물 덕분인지 베르닌의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아까보다는 오한과 경련이 많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이마에 손을 대보니 뜨겁긴 했지만 그래도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 썰매 타고 가면 추울 텐데 어떡하지... ’

 

 

베르닌은 일단 왕재수를 업고는 옆구리에 담요를 한 장 꼈다. 가방은 나중에 가지러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발목이 욱신거렸다. 곧 병원에 갈 테니까 괜찮았다.

 

 

썰매는 2인용이었다. 베르닌은 왕재수를 투레츠키의 옆에 앉힌 후 트렁크 칸에 탔다. 물건들을 옆으로 좀 밀어붙이고 몇 개는 무릎 위에 쌓아올렸다. 조금 걱정이 되었다.

 

 

“ 내가 타서 너무 무거우려나... ”

 

“ 무슨 소리, 얘들 얼마나 명견인데. 여기서 아르한겔스크 지부까지 쳐도 얘들만큼 썰매 잘 끄는 개들 못 찾을 걸. 이 정도는 껌이야. 공간이 없어서 더 못 싣는 거지. 야, 너 뭐하냐? ”

 

“ 애 담요로 좀 둘러주려고. 바람 맞으면서 달려갈 거잖아. ”

 

“ 오우 마이 갓! 그 담요 얇아가지고 보풀이 부숭부숭한 게 무슨 도움이 되냐! 에이 정말 가지가지 한다니까! ”

 

 

투레츠키는 툴툴대더니 트렁크 칸에서 얄팍한 종이로 둘둘 말아놓은 커다란 꾸러미를 하나 낚아챘다. 베르닌이 짐을 실을 때 이건 뭔데 이렇게 부피가 커서 자리를 차지하나 하고 짜증을 냈던 물건이었다. 투레츠키는 포장지를 찢어발기더니 자기가 입은 것과 똑같은 하얀 모피코트를 꺼냈다. 그리고는 솜씨 좋게 왕재수의 머리와 등을 받쳐 일으키더니 코트를 대충 입히고 모자까지 씌운 후 지퍼를 목까지 잠가주었다.

 

 

“ 이리나 누님이 구해 달라고 했던 건데... 뭐 우리 이쁜이가 잠깐 먼저 입어도 상관없겠지. 오히려 좋아하려나. ”

 

“ 이리나 누님? 서, 설마... 의장 부인 말이야? ”

 

“ 그럼 다른 이리나 누님도 있냐? 너 이거 비밀이다! 그 아줌마 엄청 까탈스럽단 말이야. 자기가 주문한 거 내가 먼저 뜯었다고 하면... 너 오해하지 마. 나 원래 손님 물건 절대 손 안대. 이거 다 너 때문이야! 네가 하도 울고불고 이쁜이 아프다고 난리쳐서 내가 특별히 서비스해주는 거란 말이야. 혹시라도 이리나가 코트 왜 남의 손 탔냐고 하면 네가 불어버린 걸로 알 거야! ”

 

“ 절대, 절대 말 안할게! 고마워, 바냐... 이거 따뜻하겠다. 바람도 막아주고. 진짜 다행이다. ”

 

 

투레츠키가 보풀 투성이 담요를 그에게 던져주었다.

 

 

“ 담요 너라도 둘러라. 추울 테니까. 눈 오는데 그 옷차림은 뭐냐. ”

 

“ 어제 나올 땐 눈 안 왔단 말이야. 이럴 줄은 몰랐지. ”

 

“ 좋아, 간다! 렛츠 고! 멍멍이들아, 고! 고! ”

 

 

개들이 신나게 달리기 시작했고 썰매가 나는 듯 질주했다. 바람이 씽씽 불었다. 속도가 상당히 빨랐기 때문에 베르닌은 어두운 눈밭에서 개들이 길을 잘못 들거나 나무에 걸려 썰매가 뒤집어질까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투레츠키는 숙련된 솜씨로 개들을 몰았다. 이따금 자리에서 일어나 밧줄을 이리 당기고 저리 당기며 개들에게 영어와 러시아어를 섞어서 한두 마디 외치면서 요리조리 구불구불 잘도 몰았다.

 

 

베르닌은 짐들이 쏟아질까봐 온몸으로 감싸고 누르면서 불편하게 앉아 있었지만 이게 어디냐 싶었다. 뒤에서 보니 투레츠키와 왕재수 둘 다 똑같은 흰색 모피 코트를 입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쌍둥이처럼 보였다. 막 커브를 트는데 나뭇가지 하나가 부러지면서 쌓여 있던 눈이 우르르 쏟아졌다. 투레츠키는 ‘오우!’ 하면서 한 손으로 나뭇가지를 쳐내고 자신과 왕재수의 모자 위로 쏟아진 눈을 툭툭 털어냈다. 차가운 눈을 맞아서 놀랐는지 왕재수가 ‘아이...’ 하고 중얼대며 꿈틀거렸다. 투레츠키가 쾌활하게 말했다.

 

오우 프리티~ 우리 이쁜이 깼니? 너 개썰매 타봤어? 신나지? 바냐 투레츠키의 초특급 익스프레스!

 

으응... 여기 어디야? 누구야? 다닐... 다닐 어디 있어?

 

 

어두컴컴한 눈길을 질주하는 썰매 위에서 깨어난 왕재수가 깜짝 놀랐는지 고개를 마구 흔들며 베르닌을 찾았다. 투레츠키를 알아보지도 못한 것 같았다. 베르닌은 급하게 뒤에서 왕재수의 어깨를 잡았다.

 

 

“ 나 여기 있어, 미셴카. 바냐가 썰매 타고 와서 우리 시내로 데려다 주는 거야. 이제 괜찮아. 걱정 마. ”

 

아... 바냐... 바냐였구나. 털이 북슬북슬해서 몰랐어. 곰인 줄 알았어.

 

“ 오우 프리티, 마이 뷰티! 아임 쏘 새애애드! 섭섭하게 곰이라니! 이렇게 잘생긴 곰이 어딨냐! ”

 

곰 배고파... 곰 열매 먹어.

 

 

왕재수는 웅얼거리더니 기침을 하면서 투레츠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투레츠키는 왕재수의 이마에 손을 대보고는 쯔쯔 혀를 차며 물었다.

 

 

“ 너 아직 춥니? 콜드? ”

 

추워... 더워... 추워...

 

“ 흐흠. 다냐가 아무 것도 안 해줬어? ”

 

 

베르닌은 가책을 느끼며 변명했다.

 

 

“ 불 피워주고 이불 덮어줬어... 근데 약도 없고... ”

 

에이, 약 없으면 다른 거 해줘야지. 하여튼 다냐는 고지식하다니까. 그치? ”

 

 

그리고는 투레츠키가 한 팔로 왕재수를 꼭 껴안고 뺨을 마주 비비며 뽀뽀를 해주고 몸을 꼭 밀착시켜서 베르닌은 기절초풍했다.

 

 

야! 야!!! 뭐하는 거야! 애 아픈데 지금 너는! 안 돼! 손 떼! 야!

 

“ 친구야, 너는 왜 이렇게 아무 것도 모르니. 약이 없으면 안아주면 되잖아.울 이쁜이처럼 아픈 애는 약을 먹이든지 아니면 밤새 꼭 안아주면 괜찮아진단 말이야. 목석이랑 같이 있었으니 계속 아프기만 했지, 마이 푸어 리틀 베이비. 가엾은 녀석. ”

 

“ 아니야! 나, 나도 안아줬단 말이야... 너무 추워해서... 그래서 꼭 안아줬는데 얘가 계속 벌벌 떨고 아프기만 했단 말이야... ”

 

쯔쯔, 그냥 안아줘서 되냐? 메이킹 러브! 핫! 핫 러브! 침대가 부서져라 해줘야 몸도 따뜻해지고 아픈 것도 가시지. 하여튼 이쁜이도 참 운도 없네. 하필 목석이랑 같이 있어가지고 열만 펄펄 끓고 아프기만 했구만. 나랑 있었으면 벌써 다 나았을걸! 그치, 프리티? ”

 

 

그 와중에도 투레츠키가 왕재수를 꼭 껴안고 거의 무릎에 앉히다시피 한 채 집적대고 키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썰매고 해열제고 고마움이고 뭐고 투레츠키의 뒤통수를 냅다 내리칠까 말까 심각한 고뇌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왕재수가 투레츠키에게 바짝 몸을 붙이고 꼭 안기면서 잠꼬대처럼 웅얼거리는 소리에 포기하고 말았다.

 

 

따뜻해... 좋아.

 

“ 그치? 이쁜이 나랑 우리 집 갈까? 병원 안 가도 되겠네. 우리 집 가서 나랑 같이 잘까? 허리 아플 정도로 해줄까? ”

 

으응... 잘래...

 

오케이! 고우 투 마이 베드! 투게더! 예에!

 

 

투레츠키가 좋아하며 휘파람을 불더니 왕재수를 더욱 꼬옥 껴안았다. 베르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한번만 더 얘한테 그렇게 굴어봐! 뭐가 베드야! 나, 나도 영어 조금 알아! 베드 침대잖아! 얘 아프잖아. 열 나서 제정신도 아닌 애를 그런 식으로 꼬시는 게 어딨어! 절대 안 돼! 가만 안 둘 거야!

 

“ 흐응... 넌 그런 말 할 자격 없는 거 같은데. 목석... ”

 

몰라! 나 그런 거 몰라! 네 말이 맞아도 안 돼! 아픈 애한테 그런 짓 하면 안 돼! 건드리지 마! 가만 안 둘 거야!

 

 

투레츠키가 하하 웃었다. 북슬북슬한 모피로 감싸인 왕재수의 등을 쓸어주면서 노래 부르듯 대꾸했다.

 

 

“ 에이, 친구야. 열 내지 마. 너 우리 이쁜이 많이 좋아하는구나. 미처 몰랐네. 내가 이래봬도 철칙이 있지. 친구 여자는 손 안 대. 오우, 웁스! 우리 이쁜이는 여자가 아니지. 낫 걸, 어 보이! 미안 미안. 하여튼 친구 여자도 손 안 대고 남자도 손 안 대. 내가 왜 사셴카를 손 안 대고 있겠냐! 그때 간만에 봤는데 역시나 엄청 귀여워서 간 좀 볼까 했는데 보랴가 그렇게 한 방에 뿅 갈 줄이야! 그래서 알렉산드라 누나는 그냥 형수님으로 모시기로 했잖아. 이쁜인 진짜 많이 아깝긴 한데... 뭐 네가 그렇게 죽고 못 산다면야... 할 수 없지. 우리 동갑에 보드카 친구니까... 내가 포기하마. 섭섭해서 어떡하지, 마이 베이비? ”

 

 

왕재수는 베르닌이 왜 화를 내는지, 투레츠키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이해를 못한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투레츠키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는 잔뜩 졸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아이 시끄러워... 집에 갈래... 다닐. 집에 갈래.

 

“ 그래그래, 집에 가는 거야. 다냐네 집에 가는 거야. 이제 안 춥지? ”

 

응, 따뜻해. 곰... 멍멍이... 썰매...

 

 

왕재수는 점점 희미해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더니 투레츠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있었다. 잠든 것 같았다. 베르닌은 어쩐지 매우 머쓱해져서 물건들을 잔뜩 껴안고는 자기 앞에 삐쭉 솟아 있는 두 개의 하얀 털모자를 번갈아가며 바라보기만 했다. 투레츠키가 휘파람을 불었다.

 

 

“ 달려라, 멍멍이들아~ 달려라! 썰매야 가자! 트로이카야 달려라! ”

 

“ 이거 트로이카 아니잖아. 트로이카는 말 세 마리가 끄는 건데... ”

 

“ 에이, 트로이카라고 치면 좋잖아. 너 자꾸 말꼬리 잡을래! ”

 

“ 아, 아니야. 맞아. 트로이카 맞아. 세상에서 제일 좋은 트로이카야. ”

 

당연하지! 이건 바냐 투레츠키의 초특급 익스프레스라고! 요금은 좀 비싸지만... 뭐 미셴카야 워낙 이쁘고 향기도 좋으니까 내가 기분으로 대폭 할인해서 1등석이지만 2등석 요금만 받을 거고, 너도 2등석이지만 나랑 친구니까 그냥 입석 요금만 칠게. 에, 그러면 2등석 50루블, 입석은 20루블. 코트 대여료는 뭐 우리 베이비가 입은 거니까 그냥 상징적으로 10루블만 할게. 그리고 병원까지는 또 차로 데려다 줘야 하는데 거긴 신시가지인데다 심야 할증까지 치면 응급운송비 30루블... 다 합치면 110루블이네. 에이, 기분이다~ 100루블로 해줄게. 너하고 나는 친구니까~!!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너 그럴 줄 알았어... 에휴, 감동했던 내가 바보지... 근데 내가 짐도 다 실어줬잖아. 조금만 더 빼주면 안되니? ”

 

“ 야, 그건 벌써 다 뺀 거야! 이쁜이 약 먹이고 너랑 실랑이하느라 20분이나 지체했잖아. 시간이 금인데! 네가 짐 실어줬으니까 시간 지연 추가요금은 그냥 빼준 거란 말이야. 너 아무리 고지식해도 그렇지 이런 걸 깎냐! 친구 사이에도 셈은 정확해야지. 그것도 간 쓸개 다 빼줄 만큼 좋아하는 애를 옮겨주고 있는데 흥정을 하다니! 사랑 앞에서 돈 생각하게 됐냐! 올 유 니드 이즈 러브~

 

“ 바냐, 제발 영어 좀 쓰지 마! 뭔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어. 어휴... 알았어. 백 루블 주면 되잖아. 근데 지금은 돈이 없어. 나 눈길에서 차 박은 거 고칠 돈도 없는데... 당장은 못 주겠지만 월급 받으면 나눠서 줄게. ”

 

“ 에이, 나 할부 안 받는데. 그러면 오십 루블만 주고 나머지는 너 주말에 우리 사무실 와서 일 좀 도와줘. 보랴가 요즘 연애하느라 바빠서 많이 안 도와준단 말이야. 주말에 와서 물건도 정리해주고 장부 계산만 조금 도와주면 오십 루블은 그걸로 제해줄게. ”

 

“ 아, 알았어... 그런데 얘 약값은... ”

 

“ 그건 얘한테 따로 받는다고 했잖아. 주말에 올 거지? ”

 

“ 으, 으응... ”

 

 

베르닌은 낚였다는 생각에 머리가 띵했지만 어쨌든 고열과 오한으로 괴로워하는 왕재수와 숲속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마리의 개들은 지치지도 않고 기운차게 질주했고 어느 새 검은 숲이 끝나가면서 저 너머로 도로와 강변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로켓처럼 미끄러져 가는 썰매 위에서 베르닌이 말했다.

 

 

“ 바냐, 근데 그런 거 아니야. ”

 

“ 뭐가? ”

 

“ 저... 나랑 얘랑... 그러니까, 간 쓸개 다 빼주고... 러브... 우리 그런 사이 아닌데... 자꾸 사람들이 오해를... ”

 

“ 에이,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니. 좋아하면 그만이지. 목석이라서 안아주기만 하고 그냥 놔둔 건 좀 바보 같지만. ”

 

“ 아니, 그게... 그게 아니고... ”

 

“ 뭘 그런 걸 변명하냐. 나는 편견이 없는 코스모폴리탄이야. 근데 너 이거 하나는 똑바로 해라. 내가 분명히 그랬잖아, 친구 여자나 남자는 안 건드리는 게 철칙이라고. 근데 너 아까는 막 죽일 듯이 그래놓고 지금은 또 아니라 하고. 너 이쁜이 좋아하는 거 아니면 성질내지 마. 난 언제 어디서나 얘랑은 오케이란 말이야. 네가 좋아하는 거 아니면 나 얘랑 우리 집 갈래. 아픈 거 다 나으면 가도 되잖아, 그렇지? 얘도 아까 좋다 했잖아. ”

 

아니야! 안 돼! 절대 안 돼! 안 돼! 집이고 침대고 안 돼!

 

 

베르닌은 펄쩍 뛰다가 하마터면 썰매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투레츠키는 킥킥 웃었고 휘파람을 불며 노래하듯 말했다.

 

 

“ 거봐. 알았어. 아깝지만 뭐. 백 루블 갚는 거나 잊지 마~ ”

 

오십 루블이었잖아! 나머지는 주말에 가서 일해 주는 걸로 제해준다며! ”

 

“ 아 그랬나? ”

 

으윽, 나 처음으로 스페호프한테 이입되려고 그래! 국장이 너 왜 내쫓았는지 알겠어!

 

“ 야, 왜 내 인생의 흑역사를 들추냐! 그래도 난 전설의 서무인데! ”

 

“ 좋겠다, 전설의 서무라서! 어휴... ”

 

 

베르닌은 한숨을 푹푹 쉬었지만 어쩐지 웃음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투레츠키는 여전히 랄라랄라 휘파람을 불며 개들을 몰았다. 썰매는 검은색과 금색 바람처럼 미끄러지며 달렸고 양옆으로 파도처럼 퍼지는 하얀 눈은 보름달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베르닌은 왕재수를 깨워서 이 멋진 광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거 봐라! 시골이니까 이렇게 예쁘지! 레닌그라드에선 이런 거 못 보지?’ 하고 보란 듯이 자랑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 어차피 예쁘다고 하지도 않을 놈인데 뭐. 맛있어도 맛없다는 놈이니까. 어휴, 바보 멍충이! ’

 

 

그래도 어쩐지 아쉬워진 베르닌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 겨울에 얘 데리고 다시 와야지. 눈 올 때 썰매 태워줘야지. ’

 

 

물론 그때는 다른 썰매를 가져올 것이다! 널빤지를 잘라서 직접 뚝딱뚝딱 만드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는 손재주가 없는 책상물림이니 코즐로프든 보랴든 누구에게든 부탁해서 썰매를 빌리든지 얻어내든지 할 것이다! 100루블이나 주고 바냐 투레츠키의 초특급 익스프레스를 또 타는 것만은 절대 사양이다! 그렇고말고!!!

 

   

 

 

 

 

FIN

- 2015. 11. 2 ~ 11.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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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눈밭 썰매 에피소드가 끝났습니다~ 눈밭 지굴리-벌목공 숙소-썰매 에피소드라고 해야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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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에피소드에서 왕재수가 언급하는 옛날 이야기들은 대부분 본편의 미샤가 실지로 겪은 일이거나 그가 사귀었던 사람들에 대한 얘기다. 부상 얘기도 그렇고. 본편에서도 역시 발레학교 시절 팔을 다쳤다가 의사인 유라와 처음 만나게 되는데 그 얘기를 본격적으로 쓴 적은 없다. 본편에서는 트로이가 미샤에게 유리 아스케로프와 만나게 된 경위를 묻고 미샤가 간단히 대답하는 정도로만 서술했다. 냉동 옥수수 볶아주고 여물 취급받은 불쌍한 '친구'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트로이 얘기다(불쌍한 트로이 ㅠㅠ)

 

왕재수가 안무 작품에 늑대를 형상화한 인물이 등장해서 이를 위해 늑대 움직임을 보러 다녔다는 것도 본편의 주요 사건에서 비롯된 얘기다. 미샤가 체포된 주요 계기가 된 작품인 '불새'를 안무할 때 그는 마왕이자 악역으로 회색 늑대를 원형으로 한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  추가 **

위에서 얘기한 냉동 옥수수 볶아주고 여물 취급받은 트로이의 이야기를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해 올려보았다.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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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나도 바냐 투레츠키가 모는 초특급 익스프레스를 타고 싶다~!! 그깟 백루블 내주겠다!

(투레츠키는 매우 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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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가져가거나 복사, 인용, 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지난주는 쉬었지만 이번주는 서무의 슬픔 새로운 에피소드를 올려본다. 35편!!

 

지난 에피소드에서 단추는 딸기 아가씨들로 변모한 미녀 3인방과 함께 바자회 부스를 운영하며 행복한 한때를 보냈고 왕재수는 이와 반대로 경매에 팔려 무시무시한 이리나에게 끌려가는 등 고난을 당했는데... 과연 이번 편에서는 딸기 아가씨들과 무지개 아줌마의 방해(!!) 없이 단추와 왕재수가 간만에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그럼 재미있게 읽으세요~

 

 

** 중반부에 나오는 페치카는 러시아식 벽난로이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어느덧 베르닌도 3년차 직원이 되고 왕재수도 신작을 성공적으로 발표하는 등 가브릴로프 극장 감독으로서 자리를 잡은 듯하다. 그러나 직원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스페호프 국장은 다닐 베르닌이 서무 일에만 매진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 http://tveye.tistory.com/4062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2부) : http://tveye.tistory.com/4079
* 에피소드 33-1. 도자기 인형 : http://tveye.tistory.com/4098
* 에피소드 34. 딸기 아가씨들과 자선 바자회 : http://tveye.tistory.com/4140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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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5

 

 

 

 

 

서무의 슬픔

- 4월의 눈보라 -

 

 

 

 

 

 

 

바자회가 끝난 후 베르닌은 그야말로 산더미 같은 일에 파묻혔다. 매일 야근을 했고 주말에도 출근을 했다. 왕재수의 신작 때문에 계속 극장에 붙어 있었던 동안 다른 직원이 분담해서 처리했던 업무들은 여기저기 펑크가 나 있었고 스페호프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자 노발대발했다. 어쨌든 분장 상 베르닌의 업무이니 담당자가 모두 수습하라고 명령했다. 베르닌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힘든 것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주말 내내 출근해서 녹초가 된 베르닌이 월요일 주간회의를 마친 후 터벅터벅 사무실로 내려가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그를 국장실로 호출했다.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는지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국장이 예상치 않은 말을 했다.

 

 

“ 자네 바쁘겠지만 당장 검은 숲에 가줘야겠네. ”

 

“ 예? 무슨 일인가요? ”

 

“ 우리 안전가옥들 말일세. 보안 상태가 엉망이야. 얼간이 필로모프에게 일임했던 내 잘못이지. 글쎄 일요일에 가족과 함께 검은 숲에 드라이브를 갔다가 우연히 안전가옥 중 하나를 지나치게 되었지 뭔가. 그런데 자물쇠가 다 망가져 있고 안도 엉망이었어. 최근 누군가가 들락거린 게 분명해! 아무리 요즘 안전가옥을 이용하지 않는다 해도 그렇지. 내 이 일은 절대 그냥 넘어 가지 않아. 필로모프와 요원 지원팀에게 책임을 물을 거야. ”

 

 

 

베르닌은 망가진 자물쇠 얘기에 얼마 전 납치된 왕재수를 찾아 안전가옥들을 쑤시고 다녔던 게 생각나서 뜨끔했다. 들키면 어쩌지 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말을 이었다.

 

 

하여튼! 자네에게 안전가옥 자물쇠 수리와 내부 정리를 맡기겠네. 이것이야말로 가장 급한 일이야! ”

 

“ 하, 하지만... 제 업무는 서무와 야스민 감시인데 어째서... ”

 

“ 현장요원과 지원팀에겐 아침에 이미 근신 조치를 내렸기 때문에 업무에 투입시킬 수 없는 상황이야. 그러니 행정직에게 맡겨야 하는데 다른 직원들은 현장 업무와는 거리가 멀고, 자네는 야스민 감시를 하면서 비공식적으로 이미 현장요원의 길에 들어서 있지 않은가. 안전가옥 관리는 기밀 업무야.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지금 자네뿐이네. 그러니 영광스럽게 알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게. 갈리나에게는 이미 자네에게 열쇠와 안전가옥 배치도를 내주라고 지시해 놓았네. 필요한 물품들도 갈리나가 내줄 걸세. 자물쇠 수리도 필요하지만 도청장치도 새로 부착해야 하니 시간이 꽤 걸릴 거야. 오늘은 검은 숲 쪽 안전가옥들을 처리하고 내일 시내 쪽을 마저 처리하게. 이것은 잡일이 아니야. 당과 KGB 미션을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업무일세! 그럼 어서 갈리나에게 가보게. 이상! ”

 

 

 

 

 

*   *   *

 

 

 

 

 

베르닌은 울며 겨자 먹기로 갈리나에게서 모든 물품을 수령하고 장부를 적었다. 곧장 차를 몰고 검은 숲으로 가려다가 마음을 바꿔서 집으로 향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자기 집이 아니라 왕재수의 집으로.

 

 

11시였지만 왕재수는 아직 자고 있었다. 월요일이라 극장 휴일이었기 때문이다. 베르닌이 깨우자 왕재수는 졸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웅얼댔다.

 

 

“ 너 왜 벌써 왔어? 잘린 거야? 벌목공... ”

 

아니야! 넌 왜 맨날 나만 보면 벌목공 타령이니. ”

 

“ 너 잘리면 벌목공 시킨다고 했잖아... ”

 

“ 어휴, 국장은 괜히 그 얘기 해가지고... 하여튼 아니야. 나 지금 검은 숲 가는데 너 빨리 일어나. 온천 데려다 줄게. 그 근처 지나가거든. ”

 

“ 으응... 온천 지난주에 갔다 왔잖아. ”

 

“ 의사 선생님이 너 매주 온천 가서 스파 치료 받으라고 했잖아. 내일부터는 다시 애들도 지도해야 되고 주말까지 발레 공연 올라가니까 시간 없잖아. 어차피 나 지금 검은 숲에 가야 하니까 데려다줄게. 반나절 동안 온천하고 치료 받고 내 차 타고 돌아오면 되잖아. 가자. ”

 

“ 으응... 온천은 좋은데 나 너무 졸려. ”

 

차에서 자!

 

 

스타브로프로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왕재수를 매주 1회 이상 온천 요양소에 보내라는 특명을 받은 베르닌은 이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베르닌이 강경하게 나오자 왕재수는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원망을 늘어놓으면서도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대충 얼굴에 물을 끼얹고 양치질을 하면서도 온천은 혼자 가면 재미없다는 둥, 반나절만 하고 오는 게 무슨 온천이냐는 둥 종알댔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얇은 셔츠를 집어 드는 것을 보고 참견했다.

 

 

“ 따뜻하게 입어라, 오늘 엄청 추워. 어제까진 따뜻했는데... 비 쏟아질 것 같은 날씨야. 바람도 많이 불고. ”

 

“ 4월인데... 여기는 레닌그라드보다 따뜻한 줄 알았는데... ”

 

“ 꽃샘추위가 한 번씩 온단 말이야. 영하로 내려갈 때도 있어. 스웨터랑 두터운 재킷 입어. ”

 

 

왕재수는 잠이 덜 깨서 그런지 별로 저항하지 않고 스웨터를 겹쳐 입고 두툼한 재킷을 걸쳤다. 니트 스카프도 맸다. 목욕 용품을 챙기더니 비틀거리면서 베르닌을 따라 나섰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면서 습하고 세찬 바람이 몰아쳤다. 막 배나무 거리를 빠져나가는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왕재수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지금 눈 오는 거야? ”

 

“ 어, 그러네... 에이, 진짜 가는 날이 장날이네. ”

 

“ 시골도 다 똑같아... 레닌그라드도 해 쨍쨍 났다가 갑자기 눈보라 몰아치는데. 시골 가면 날씨 좋으니까 요양해서 몸 좋아질 거라고 거짓부렁만 하고... 나쁜 아저씨들... ”

 

“ 야! 여긴 레닌그라드보다 공기가 좋잖아! 그 동네처럼 음습하지도 않고! ”

 

“ 눈 오잖아... 많이 올 거 같아. ”

 

“ 온천하면 좋을 거야. 너 눈 올 때 온천에 들어가는 거 좋다며. ”

 

“ 하긴 그렇긴 해. 너도 같이 가면 안 되니? ”

 

“ 난 안 돼. 국장이 짜증나는 일을 줬거든. ”

 

 

베르닌은 대충 이야기를 해주다가 그래도 안전가옥은 KGB 기밀인데 이렇게 왕재수에게 말해줘도 되나 하고 순간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별 관심 없어 보였다. 별 쓸데없는 일을 다 시킨다고 국장을 욕했을 뿐이었다.

 

 

점심시간이 다 된데다 왕재수도 빈속에 나와서 추울 것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대학교 근처 카페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뜨거운 차와 치즈빵, 조그만 그릇에 든 살랸카와 게살과 쌀밥이 섞인 샐러드를 주문했다. 왕재수는 아니나 다를까 차만 마시고 다른 것은 안 먹으려고 했다. 베르닌은 수프와 빵과 샐러드 중 최소 두 가지를 먹지 않으면 차는 한 방울도 마실 수 없다고 협박했다. 왕재수는 독재자라느니 악마라느니 하고 짜증을 냈지만 살랸카를 먹고 조그만 치즈빵도 두 개 먹었다.

 

 

“ 너 왜 샐러드 안 먹어? 게살 쌀밥 샐러드 좋아했잖아. ”

 

“ 차갑잖아. 추워서 먹기 싫어. ”

 

“ 추위 잘 안 타면서. ”

 

“ 그러게. 근데 오늘은 먹기 싫어. 추워. 빨리 온천 들어가고 싶어. ”

 

 

베르닌은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왕재수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 열은 안 나네. 빈속이라 추운 거야. 수프 다 먹어. ”

 

“ 너는 안 먹어? ”

 

“ 치즈빵도 네 개나 먹었고 너 덕분에 샐러드도 내가 다 먹어야 되잖아! ”

 

“ 문 고치고 청소하려면 많이 먹어야 하잖아. 고기 같은 거 시켜먹어. ”

 

“ 난 아까 나오면서 닭꼬치도 한 개 먹었어. 수프 다 먹었니? 잘했구나, 이제 차 마셔. ”

 

 

왕재수는 차를 마신 후에야 좀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안전가옥에서 일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일하다 먹으려고 물 한 병, 초코바 두 개를 샀다. 그 와중에 카운터의 아가씨가 왕재수를 보더니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사과를 세 알이나 건네주었다.

 

 

카페를 나오니 눈보라가 본격적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았다. 굉장히 추웠다. 순간 베르닌은 국장의 명령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국장에게 볶이는 게 무섭기도 했고 그간 하도 몸과 마음을 혹사당해서 온천 요양소에 한 달쯤 처박아놔도 모자랄 것 같은 왕재수를 보니 측은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   *   *

 

 

 

 

 

검은 숲으로 접어들었을 때 베르닌은 자신의 결심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 눈보라는 멈추지 않았다. 태풍처럼 몰아치던 바람은 약간 잦아들었지만 대신 눈발이 더욱 굵어지더니 왕재수의 말에 따르면 ‘아기 주먹만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중에서 포크레인으로 눈을 쏟아 붓는 것 같았다. 수도원을 지나친 후에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운전이라면 베르닌을 무한 신뢰하는 왕재수조차도 걱정이 되었는지 그냥 차 돌려서 나가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 어... 그러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문제는 지금 차를 돌릴 수가 없어. 길이 너무 좁아서 옆으로 빠져야 하는데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바퀴에 체인도 안 감았고... ”

 

“ 그러면 지금 체인 감으면 안 돼? ”

 

“ 겨울 지나고 트렁크에서 체인 빼버렸어... 조금만 더 가보자. 길 좀 넓어지면 차 돌려볼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앗, 너 안전벨트 왜 안 맸어! 길 미끄럽단 말이야! ”

 

“ 벨트하면 너무 답답해서... 묶이는 거 싫어. ”

 

“ 벨트는 안전을 위해서 매는 거잖아. 누가 널 묶는 게 아니야. ”

 

“ 그래도 싫은데... ”

 

 

베르닌이 확 째려보자 왕재수가 울상을 지으며 안전벨트를 주섬주섬 맸다. 그 사이에도 눈은 계속 쏟아져서 타이어가 푹푹 파묻히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 아이 참, 이거 꼭 그때 같아. 얼음물에 빠졌을 때. 그때도 눈 와서 엔진 멈췄잖아. 또 그러면 어떡해. ”

 

“ 아니야, 그러고 나서 엔진 고쳤으니까 멈추진 않을 거야. 조금만 더 가면 차 돌릴 수 있는 길 나올 거야. ”

 

 

그때 눈의 무게 때문에 앞에 있던 나무의 가지가 부러지면서 앞창을 철썩 때렸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창에 금이 갔다. 베르닌은 놀라서 핸들을 옆으로 꺾었지만 그것은 그의 실수였다. 눈 때문에 타이어가 미끄러지더니 차가 빙그르르 돌며 옆으로 내달았다. 다행히 뒤집어지지는 않았지만 차체가 심하게 옆으로 기울더니 거세게 돌면서 미끄러져 옆에 있던 커다란 전나무를 들이받았다. 끼이익 콰쾅 소리가 울려 퍼졌고 무거운 것이 확 달려들며 덮치는 느낌이 났다. 한순간 베르닌의 눈앞에 별이 번쩍하더니 암흑처럼 캄캄해졌다. 왕재수의 비명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온 것 같았다.

 

 

 

으아아, 다닐!

 

 

 

비명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정신을 차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다리가 너무 아팠다. 뭔가 무거운 것이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끙끙거리며 베르닌은 다리를 빼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너무 아팠다.

 

 

“ 으으... ”

 

“ 정신 들어? ”

 

“ 어... 응... 너 괜찮아? ”

 

“ 나 괜찮아. 너도 괜찮을 거야. 잠깐만 가만히 있어. ”

 

 

베르닌은 왕재수의 목소리와 말투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상시 같으면 짜증내고 꾸짖을 게 뻔한데 지금은 너무 침착하고 온순한 말투였기 때문이다. 왕재수는 무슨 문제가 있을 때만 그런 식으로 말하는 놈이었다.

 

 

베르닌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서서히 시야가 밝아졌다. 차는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채 전나무에 범퍼를 박고 있었다. 다리가 아픈 것도 당연했다. 운전석 쪽 문짝이 반쯤 떨어져 나와 그의 두 다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깨진 창문 파편이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 중 몇 개에 발목도 벤 것 같았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나마도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은 다치지 않았다.

 

 

“ 너는... 넌 괜찮아? 안 다쳤어? ”

 

“ 응. 네가 벨트 채워줘서 안 다쳤어. 어깨만 좀 부딪친 정도야. 어휴, 진짜 시골이야. 웬 눈이 이렇게 오는지... 너 머리는 괜찮아? 어지럽진 않아? ”

 

“ 응. 근데 다리... ”

 

“ 가만히 있어. 내가 문짝 떼어줄게. 지금 함부로 움직이면 다리 더 다쳐. ”

 

 

왕재수가 안전벨트를 풀고는 차 밖으로 나갔다. 옆으로 돌아서 운전석 쪽으로 왔다. 낑낑거리며 차를 옆으로 좀 밀어내서 공간을 확보했다. 그리고는 문짝을 잡아당겨서 바깥으로 열었다. 아래가 반쯤 떨어져나갔기 때문에 다 열리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베르닌은 다리를 빼낼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다리를 빼내자 너무 아파서 소름이 돋았다.

 

 

“ 으윽... 너무 아파. 못 움직이겠어. 부러졌으면 어떡하지... ”

 

 

베르닌은 더럭 겁이 났다. 왕재수는 베르닌의 발목과 다리를 꾹꾹 눌러보고 만져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안 부러졌어. 삔 거야. 어느 쪽이 더 아파? ”

 

“ 왼쪽. ”

 

“ 그래, 그쪽이 더 심하게 끼어 있었으니까. 거긴 뼈에 금 갔을 수도 있겠다. 억지로 움직이면 안 돼. 가만히 있어. ”

 

 

왕재수는 운전석 시트를 뒤로 젖혔다. 베르닌의 두 다리를 조심스럽게 펴고는 무릎과 발목에서 반짝거리는 유리 파편을 털어냈다. 손수건을 꺼내서 피가 맺혀 있는 오른쪽 발목부터 동여맸다.

 

 

“ 유리가 박힌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냥 좀 벤 거야. 일단 지혈해야 되니까 묶어놓을게. 피 많이 안 나니까 금방 멎을 거야. ”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다리를 조금씩 움직여 보게 했다. 오른쪽은 그래도 구부리거나 움직일 수 있었지만 왼쪽은 너무 통증이 심했다. 왕재수는 밖으로 나가더니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왔다. 베르닌의 왼쪽 무릎 아래에 나뭇가지를 대고 자기 스카프로 묶어 고정시켰다.

 

 

“ 나랑 자리 바꿔야 돼. 너 지금 운전하면 안 되니까. ”

 

“ 네가 어떻게 운전을 하니. 멀쩡한 길에서도 들이받으면서. ”

 

“ 그래도 여기 빠져나가야 되잖아. 눈도 이렇게 많이 오는데 어떻게 여기 그냥 있어. 창문도 깨지고 문짝도 반쯤 떨어져서 바람도 들어오고 네 차 난방도 안 되잖아. ”

 

“ 그건 그렇지만... ”

 

 

베르닌은 혹시나 해서 시동을 걸어보았다. 걸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엔진 쪽에서 불길한 퍽 소리와 푸시시 소리가 났다.

 

 

“ 고장 났어. 너무 세게 박았나봐. 눈이 빨리 그쳐야 할 텐데. ”

 

“ 안 그칠 것 같아. 하늘 좀 봐. ”

 

 

왕재수의 말이 맞았다. 하늘은 완전히 잿빛이었다. 바람은 좀 덜했지만 함박눈은 점점 더 심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공기도 아주 차가웠다.

 

 

“ 여기서 온천은 멀어? ”

 

“ 응, 한참 더 가야 돼. ”

 

“ 그러면 안전가옥인지 뭔지 하는 건? 너 거기 간다 했잖아. 가까이 있으면 그런 데라도 들어가 있으면 안 될까? ”

 

“ 안전가옥도 훨씬 더 가야 돼. 앗, 잠깐! 그래... 안전가옥 가는 길에 벌목공 숙소가 하나 있었어. 이 근처였던 거 같은데... 잠깐만 기다려봐. ”

 

 

베르닌은 안전가옥 지도를 꺼냈다. 얼마 전 왕재수를 찾아 안전가옥들을 쑤시고 다닐 때 벌목공 숙소 하나를 지나친 적이 있었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분명 이 근처였다.

 

 

“ 맞아, 전나무에 빨간 리본이 달려 있었는데... 그 나무 옆에 있었는데... 눈 때문에 안 보이네... ”

 

빨간 리본 달린 전나무 찾으면 되는 거야? ”

 

 

왕재수가 밖으로 나가더니 잽싸게 차 위로 기어 올라갔다. 지붕 위로 올라가더니 매처럼 주변을 살폈다. 펄쩍 뛰어오르기까지 해서 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갑자기 왕재수가 환호했다.

 

 

찾았다! 서쪽이네. 그쪽으로도 길 나 있어? ”

 

“ 응. 근데 이렇게 차가 제대로 다니는 길은 아니고, 벌목공들이 낸 오솔길 같은 거 있었어. ”

 

“ 그래, 그러면 거기로 가자. ”

 

그치만... 여기서 보는 거랑 거리가 다를 거야. 많이 걸어야 할 텐데... 나는 지금 못 걸을 거 같아. 나 그냥 여기 놔두고 너만 가. 거기 사람들 있으면 도와 달라 하면 되잖아. ”

 

“ 미쳤냐,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데 너 여기 놔두고 갔다가 얼어 죽으라고? 차 위에서 빨간 리본 전나무 보이는 걸로 대충 계산하면 그냥 걸어가면 15분 거리밖에 안 돼. 근데 지금은 눈도 오고 너도 다리 못 쓰니까 적어도 30분쯤은 걸리겠다. ”

 

 

베르닌은 대체 어디서 그런 계산이 나오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왕재수가 운동 신경과 마찬가지로 공간과 방향 지각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를 걱정하게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 그래도... 날 어떻게 데려가려고 그러니. 너 나 업고 못 가. 지금 눈까지 오잖아. 지난주에 입원도 했으면서. ”

 

안 업어! 근육 미워져. 썰매 태워서 갈 거야!

 

 

 

왕재수가 차 뒤로 갔다. 잠시 달그락거리고 끙끙대더니 차 트렁크 문짝을 떼어냈다. 문짝을 눈 쌓인 바닥 위로 내던지더니 베르닌에게 벨트를 풀어달라고 했다. 자기 벨트도 풀었다. 또 잠시 달그락거리고 탁탁거리더니 문짝 양쪽에 벨트를 연결해서 고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베르닌을 부축해서 밖으로 끌어냈다.

 

 

“ 너 이 위에 앉아. 내가 끌고 갈 거야. ”

 

“ 무거운데 어떻게 끌고 가... 나 80킬로 넘는데... ”

 

“ 다이어트 좀 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도 80킬로... 으윽... ”

 

 

왕재수는 투덜대면서도 베르닌을 문짝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시험 삼아 벨트를 잡아당겨 끌어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 길이가 모자라네. 끌고 가기 힘든데... ”

 

“ 저기, 트렁크 안쪽에 밧줄 뭉치 있을 거야. 저번에 발따예프 이사 간다고 도와줄 때 쓰고 넣어놨어. ”

 

 

왕재수는 좋아하면서 밧줄을 찾아냈다. 또 꼼지락꼼지락 벨트와 밧줄을 연결하더니 매듭을 짓고 고리를 만들어서 멜빵처럼 자기 몸에 얽어맸다. 그리고는 문짝 썰매를 끌기 시작했다.

 

 

“ 으윽, 진짜 무거워! 살 좀 빼! ”

 

“ 미안해. 저, 내가 팔로 이렇게 눈을 헤치면서 가볼까? ”

 

“ 아니야! 가만 있어! 너는 그냥 힘 빼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나 도와주는 거야! ”

 

 

베르닌이 앉아 있는 문짝을 질질 끌고 가면서 왕재수는 이따금 ‘시골’ 운운하며 투덜댔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눈이 너무 많이 왔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눈 때문에 앞이 하나도 안 보였다. 왕재수의 뒷모습조차도 흐릿했다. 왕재수는 10분쯤 기세 좋게 나아가다가 숨을 헐떡이며 잠시 멈춰 섰다. 그러더니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움켜서 정신없이 먹었다. 베르닌은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에 아픈 것도 다 잊었다.

 

 

“ 있잖아... 너 혼자 뛰어가면 금방 거기 도착할 거 아냐. 거기서 사람들 불러오면 되잖아. 나 여기 놔두고... ”

 

아니, 같이 갈 거야! 힘들어서 멈춘 거 아니야. 목 말라서 그런 거야. 아, 알았다.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무거웠구나. ”

 

 

 

왕재수는 밧줄과 벨트를 만지작거리며 길이를 조절하더니 다시 문짝 썰매를 끌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속도가 빨랐다. 베르닌은 아무 것도 안 보였고 길도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왕재수는 놀랍게도 정확하게 벌목공들의 오솔길을 찾아내서 나아갔다. 두어 번 깊게 쌓인 눈에 푹 빠져서 넘어질 뻔했지만 금세 다시 일어났다. 트렁크 문짝은 작고 좁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간신히 앉아 있었다. 아픈 쪽 다리는 왕재수가 문짝에 동여매서 그나마 나았지만 오른쪽 다리는 질질 끌렸다. 너무나 추웠고 눈 때문에 머리가 멍멍해서 베르닌은 하마터면 깜박 잠들 뻔했다. 왕재수가 소리를 질렀다.

 

 

야! 자면 안 돼! 다 왔어, 저기 빨간 리 보이잖아! 아, 저기구나! 나무 뒤에 통나무집 있다! ”

 

 

베르닌은 눈을 비볐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함박눈 때문에 희끄무레한 잿빛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비비자 빨간 리본이 보였고 그 뒤로 통나무집이 보였다. 졸음이 사라지면서 순간 다시 발목과 다리의 통증이 되살아났다. 왕재수는 문짝 썰매를 통나무집 앞까지 끌고 갔다. 그리고는 밧줄 멜빵을 벗어던지고는 곧장 문으로 달려가 쾅쾅 두들기며 사람을 불렀다. 아무런 답이 없었다.

 

 

“ 그래, 없을 줄 알았어. 사람 있었으면 연기가 났을 거야. 근데 아까도 빨간 리본만 보이고 연기는 안 났거든. ”

 

“ 그럼 어쩌지... 문 잠겼을 텐데. ”

 

“ 열면 되지 뭐. ”

 

 

왕재수는 핀을 꺼내지도 않았다. 문고리와 빗장을 조금 딸깍거리는가 싶더니 발로 문을 차서 열었다. 베르닌은 투레츠키가 왕재수에게도 동업을 제의했던 이유가 이런 건가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   *   *

 

 

 

 

 

 

벌목공 숙소는 비어 있었다. 일기예보를 보고 일찌감치 철수한 모양이었다. 통나무집은 작았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조그만 광 같은 방이 딸린 부엌과 거실이 하나로 붙어 있었고 침실은 따로 없이 구석에 작은 철제 침대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광문 높은 곳에는 엽총도 한 자루 걸려 있었다. 페치카 벽난로가 있었고 옆에는 장작이 잔뜩 쌓여 있었다. 현관 맞은편의 작은 문을 열자 화장실과 사우나가 딸린 작은 별채가 앙증맞게 붙어 있었다. 왕재수는 현관 밖에서 눈을 떨어냈다. 베르닌의 머리와 어깨, 옷에 잔뜩 내려앉은 눈도 모두 털어준 후 그를 부축해 침대로 데려갔다. 베르닌을 앉히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 너한테는 침대 너무 좁구나. 잠깐만. ”

 

 

왕재수는 옆에 있던 침대를 하나 더 끌어다 붙여놓았다. 베르닌에게 잠시 앉아서 숨 돌리라고 한 후 왕재수는 찬장을 열어보았고 고개를 저으며 광을 열었다. 뭔가를 한참 뒤적뒤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는 조그만 구급상자가 들려 있었다.

 

 

“ 벌목공들 숙소라서 다행이다. 안전가옥인지 뭔지였으면 약상자 없었을 거 아니야. ”

 

 

왕재수는 베르닌의 신발과 바지를 벗기면서 투덜댔다.

 

 

“ 에이, 응응도 아닌데 남의 바지 벗기는 거 재미없어. ”

 

“ 야! 너는 이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이 드냐! ”

 

“ 그러면 안 드냐! 난 신체 건강하고 욕구가 왕성한 젊은 남자인데!

 

“ 보통의 욕구 왕성한 젊은 남자는 남자 바지 벗기면서 그런 생각 같은 거 안 하거든요! ”

 

난 ‘보통’으로 살아본 적 없거든요!

 

 

왕재수는 급하게 바깥 별채에 가서 비누를 가져왔다. 좁은 싱크대에서 손을 박박 씻었다. 베르닌의 오른쪽 발목에 묶었던 손수건을 풀고는 피가 멎었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독을 했다. 유리에 벤 상처가 너무 따가워서 베르닌은 비명을 꾹 참았다. 거즈를 벤 상처에 대고 반창고를 붙인 후 왕재수는 이제 왼쪽으로 옮겨갔다. 부어오른 발목과 종아리를 살피더니 다시 조심스럽게 꾹꾹 누르면서 아픈 곳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 아야, 거기 아파. ”

 

삔 거네. 이쪽 뼈 좀 어긋난 것 같아. 맘 같아서는 내가 맞춰주고 싶은데. ”

 

“ 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

 

“ 나 무용수였잖아. 밥 먹듯 다치고 밥 먹듯 마사지하고. 마사지해주던 아저씨한테 많이 배웠어. 그리고 안무 시작하면서 해부학도 좀 배웠고. 극장에 있을 땐 동료들 삐끗하면 가끔 응급처치 해주고 그랬어. ”

 

“ 그러면 나한테도 해주면 되잖아. 왜 망설이는데? ”

 

“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너 더 아프면 어떡해. ”

 

“ 무용수들한테는 해줬다며. 그땐 그런 생각 안 했을 거 아냐. ”

 

“ 다르지! 걔들이랑은 춤추는 게 우선이니까. 걔들도 나 믿었고. 근데 너는... 모르겠네. 너 더 아플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

 

“ 나도 너 믿어. 아파도 할 수 없지 뭐. 지금도 아픈걸. ”

 

 

왕재수는 잠깐 베르닌을 빤히 쳐다보더니 발목을 잡고 아무런 경고도 없이 홱 비틀었다.

 

 

으아악!

 

“ 아플 거라고 했잖아. ”

 

으악,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어!

 

“ 한 입으로 두말 하지 마! ”

 

 

왕재수는 베르닌의 발목을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러 주었다. 여전히 아팠지만 놀랍게도 아까처럼 꼼짝달싹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심지어 조금씩 움직일 수도 있었다. 베르닌이 일어서 보려고 하는데 왕재수가 막았다.

 

 

“ 안 돼. 혹시라도 잘못될 수도 있으니까 일어나면 안 돼. 그냥 앉거나 누워 있어야 돼. ”

 

 

그리고는 왕재수가 붕대를 아주 단단하게 감아 주었다. 붕대를 감자 통증이 둔해졌다. 왕재수는 둘둘 말려 있던 담요를 펼쳐서 베르닌의 맨 다리를 덮어주고 그의 뺨과 이마에 난 유리 상처를 소독해주었다.

 

 

“ 그래도 다행이다, 스치면서 조금씩 찢어진 정도라서. 유리 조각 눈에라도 들어갔으면 어쩔 뻔 했니. 진짜 큰일 날 뻔 했어. ”

 

“ 내가 운전 실수해서 그래. 그래도 너 안 다쳐서 다행이다. ”

 

아니야! 네가 운전 실수한 거 아니야! 네 차가 후져서 그래!

 

“ 야, 그래도 내가 아끼는 차란 말이야. 어휴, 수리비 진짜 많이 나오겠네. 트렁크 문짝까지 떼어냈으니... 눈 맞아서 완전히 고장 나면 어쩌지. ”

 

잘됐네! 이 기회에 새 차 사! 어휴, 망할 놈의 지굴리. 옛날에 폐차시켰어야 하는 고철이잖아!

 

“ 야, 내가 너처럼 잘 나가는 극장 임원이냐! 난 말단 사무직이라고! 그 지굴리도 얼마나 큰맘 먹고 장만했던 건데! ”

 

“ 내 차 줄게 그거 끌어! ”

 

“ 내가 왜 네 차를 끌어! ”

 

“ 어차피 나 출퇴근시켜줘야 되잖아! 난 운전도 안 하는데. 아, 근데 여기 춥다... 통나무 사이로 바람 들어와... 문 쪽으로는 눈도 들이치네. ”

 

“ 벌목공들도 하루 이틀씩만 묵는 곳이라 그래. 여기는 다차랑 비슷해서 난로에 불 넣어야 따뜻해져. 너 페치카에 불 피워봤어? ”

 

“ 아니. 다차는 많이 가봤지만 당연히 내가 피우진 않았지. 난 어딜 가나 시중만 받았단 말이야! ”

 

“ 에휴, 어련하겠냐. 내가 피울게. 팔만 좀 잡아줘. ”

 

“ 안 돼! 너는 움직이면 안 돼! 어떻게 하는지 알려줘! ”

 

 

 

다행히 광에 성냥이 있었다. 왕재수는 그래도 베르닌의 지시를 더듬더듬 따랐다. 굴러다니던 잡지 몇 장을 뜯어 불을 붙여서 페치카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장작을 넣고 잡지로 열심히 부채질을 했다. 처음에는 불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았다. 장작을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기 때문이다. 베르닌이 참을성 있게 장작 쌓는 법을 알려주자 왕재수는 괴로워하면서도 하나하나 따라했다. 오랜 시간 끝에 마침내 난로에 불이 일었다. 왕재수는 빈 침대 하나를 질질 끌어다 난로 앞에 갖다 놓고는 베르닌을 부축해서 그쪽으로 앉혔다. 그리고는 다른 침대도 전부 끌어다 놓았다. 몸이 따뜻해지자 살 것 같았다.

 

 

둘은 불을 쬐며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왕재수가 조그만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 눈이 더 많이 오네... 안 그칠 것 같아. ”

 

“ 그러네. 오늘은 여기서 자야 할 수도 있겠다. ”

 

“ 내일 아침엔 나갈 수 있을까? 나 극장 가야 하는데. 할 거 진짜 많은데. ”

 

“ 나도... 일 진짜 많이 밀려 있어. 망할 놈의 국장. ”

 

“ 온천 가려고 나온 건데 이게 뭐야. 시골... ”

 

 

왕재수가 한숨을 폭 쉬더니 기침을 콜록콜록 했다. 춥다면서 보풀이 잔뜩 인 담요를 뒤집어쓰고 난롯가에 바짝 다가앉았다. 베르닌은 걱정이 되었다.

 

 

‘ 저 녀석 원래 추위 나보다 훨씬 잘 견뎠는데. 신작 준비 때문에 너무 무리했나봐. 납치까지 겪고. 아까도 눈이랑 바람 다 맞으면서 나 태운 썰매 끌고 오고... 저러다 또 폐렴 도지면 어떡하지. ’

 

 

왕재수는 잠깐 불을 쬐더니 일어났다. 찬장을 뒤지더니 좋아하며 플라스틱 컵에 들어 있는 홍차 티백들을 찾아냈다. 주전자를 들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 수돗물 그냥 받아서 끓여도 되나? ”

 

“ 어... 글쎄. 검은 숲 쪽 물은 깨끗하긴 한데... 수도 파이프가 문제야, 녹이 슬어서. 나는 괜찮지만 너는 함부로 마시면 안 될 거야. 의사 선생님이 너한테 살균한 거 먹으라고 했잖아. 차라리 밖에 가서 눈을 떠오는 게 나을 거야. ”

 

“ 에이... 물도 가려 마셔야 되고 레닌그라드랑 똑같네. ”

 

“ 레닌그라드는 공기가 나빠서 눈도 못 받아먹을 걸! ”

 

“ 칫. ”

 

 

왕재수는 주전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서 눈을 떠왔다. 하지만 어떻게 물을 끓여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통나무집에는 가스렌지도 없었고 버너도 없었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페치카를 가리켰다.

 

 

“ 저기 위에 고리 있잖아. 거기 주전자를 걸면 돼. ”

 

“ 아, 그렇구나. ”

 

 

물은 금방 끓었다. 왕재수는 스카프로 손잡이를 감싸서 조심조심 주전자를 내렸지만 차를 우리는 일생일대의 대과제에 직면하자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잔뜩 울상이 된 왕재수의 얼굴을 보자 어쩐지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베르닌은 꾹꾹 참으면서 차는 자기가 우려 줄 테니 컵과 설탕만 좀 찾아오라고 했다. 왕재수가 좋아라고 이 빠진 머그 두 개와 설탕 깡통, 숟가락을 가지고 왔다.

 

 

베르닌은 침대에 앉은 채 주전자에 홍차 티백을 넣고 우렸다. 싸구려 티백이라 금방 진해졌기 때문에 3분이 미처 되기 전에 티백을 빼냈다. 컵에 차를 각각 따른 후 숟가락으로 설탕을 펐다. 왕재수에게 묻지도 않고 양쪽 컵에 모두 설탕을 가득 부었다. 왕재수가 눈이 등잔만해지면서 막 성질을 부리려는 찰나 베르닌이 엄하게 말했다.

 

 

“ 지금은 설탕 넣어서 마셔야 돼. 눈 맞아서 춥잖아. 빨리 몸을 데워야 된단 말이야. 에너지도 필요하고. 잔말 말고 주는 대로 마셔. ”

 

“ 악마. 독재자. ”

 

 

그러면서도 왕재수는 설탕 잔뜩 넣은 차를 후후 불어가며 마셨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조그맣게 한숨을 포르르 내쉬기도 하고 목을 울리며 ‘아이, 뜨거워’ 하고 종알거리기도 하고 눈웃음을 짓다가 나직하게 외국어로 된 노래를 두어 소절 흥얼대기도 했다. 베르닌은 발목도 퉁퉁 붓고 삭신이 쑤셨지만 왕재수가 그러는 것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서 폭설로 숲속에 갇힌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마저 슬며시 들었다. 왕재수가 그렇게 해맑은 미소를 짓고 노래를 불렀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렸다. 왕재수가 찻잔을 내려놓더니 담요에서 빠져나왔다.

 

 

“ 이제 따뜻해. 땀 나. ”

 

“ 거봐, 설탕 넣은 차 마셔서 그런 거야. 추우면 있다가 다시 타줄게. ”

 

“ 좀 움직여야겠어. 80킬로 끌고 오느라 근육이 뭉쳤어. ”

 

 

왕재수는 스웨터를 벗더니 셔츠 바람으로 좁은 거실을 왔다갔다 했다. 그러더니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엎드린 채 왕재수가 두 다리를 180도로 찢으며 몸을 앞으로 접는 것을 경이로운 눈으로 구경했다. 볼 때마다 너무나 신기했다. 왕재수는 한참 동안 스트레칭을 하더니 간단한 스텝을 밟으며 춤을 조금 췄다. 베르닌의 눈에도 익은 동작이었다. 얼마 전 올렸던 신작에 나온 동작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니스와 가릭이 췄을 때보다 훨씬 가볍고 우아해 보였다. 넋을 놓고 보다가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그때 바질 멋있었는데. 그거 다시 보여주면 안 되니? ”

 

“ 그건 좁아서 안 돼. ”

 

“ 도는 것만이라도... ”

 

“ 내가 무슨 서커스꾼이냐. ”

 

 

투덜대면서도 왕재수는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았는지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한쪽 발로 서서 다른 쪽 다리를 바깥으로 차면서 기운차게 돌았다. 베르닌은 박수를 짝짝 쳤다.

 

 

“ 와, 진짜 멋있어. 다시 봐도 대단해. 그때 관객들도 진짜 좋아했는데. ”

 

“ 관객들은 원래 이런 거 좋아해. 높이 뛰고 빨리 도는 거. 근데 이런 건 수명이 있으니까... 나이 들면 힘 딸려서 못해. ”

 

“ 넌 아직 어리잖아. ”

 

“ 그래봤자 스물다섯 넘었잖아. 예전만큼 높이 못 뛰어. ”

 

“ 그건 수용소 때문... ”

 

“ 그거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야. 무용수들은 일 년 일 년이 달라. 그래도 서른까진 눈에 안 띄지만 그 나이 넘어가면 테크닉이랑 연기로 더 벌충해야 돼. ”

 

“ 그렇구나. ”

 

“ 뭐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지만. 난 은퇴했으니까. ”

 

“ 은퇴 무르면 되잖아. ”

 

“ 칫, 바보 멍충이. 아무 것도 모르면서. ”

 

 

왕재수는 다시 느릿느릿한 동작을 추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엎드려서 춤을 구경하다가 난롯가의 온기에 온몸이 노곤해져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   *   *

 

 

 

 

 

 

깨어나니 이미 컴컴해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7시였다. 발목은 여전히 부어 있었다. 그때 왕재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찬바람과 함께 눈발이 날려 들어왔다. 왕재수가 재채기를 하면서 머리와 어깨에서 눈을 떨어냈다.

 

 

“ 앗, 너 어디 갔다 오는 거야! ”

 

“ 차에 가서 우리 가방 가지고 왔어. 아무래도 오늘 여기서 자야 할 것 같아서. ”

 

“ 위험하게 혼자 나갔다 오면 어떡하니. 이렇게 추운데. 눈도 많이 오고. ”

 

그러니까 더 캄캄해지고 추워지기 전에 갔다 온 거야. 눈 계속 와. 차도는 다 얼었고 오솔길 쪽도 금방 얼어붙을 거 같아. 눈이 여기까지 쌓였어. 이거 봐. ”

 

 

 

왕재수가 허벅지 아래까지 젖어버린 바지를 가리켰다.

 

 

 

“ 너 빨리 옷 벗어라. 감기 걸린단 말이야. 바지는 이쪽으로 줘, 말리게. ”

 

 

왕재수는 바지와 양말, 신발을 전부 벗어서 페치카 앞 의자에 널었다. 그리고는 급하게 침대로 올라와서 담요를 뒤집어썼다. 베르닌은 비틀거리면서 고리에 걸려 있던 주전자를 내렸다. 왕재수가 함부로 걷지 말라고 흘겨보았다.

 

 

“ 괜찮아. 오른쪽 발로 디디면 조금씩은 견딜만 해. ”

 

 

차를 우려주고 설탕을 타 주자 왕재수가 후후 불며 급하게 마셨다. 춥긴 추웠던 모양이었다. 뺨과 코가 빨갰다.

 

 

“ 가방은 뭐하러 가지러 갔니. 오늘 밤만 자면 괜찮을 텐데. 그 가방에 뭐가 있다고. ”

 

바보, 눈 오는 거 보니까 우리 잘못하면 내일도 못 나간단 말이야. 여기 전화도 없잖아.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차는 들어오지도 못해. 그나마 내가 운동 신경이 좋으니까 눈 헤치고 걸어온 거지. 나 여기 온 거 아무도 모르잖아. 그렇다고 스페호프가 너 찾으러 사람 보내겠냐? ”

 

“ 그런가... 내 가방엔 망치랑 자물쇠랑 서류 뭉치랑 뭐 그런 거밖에 없어. 별 필요도 없는 건데... 네 가방엔 뭐 있는데? ”

 

“ 수건, 비누, 칫솔, 샴푸, 화장품, 속옷이랑 셔츠, 양말... ”

 

“ 으윽, 그럼 별로 도움 되는 거 아니잖아! 먹을 게 있어야지! 그런 걸 가지러 눈 맞으면서 밖에 갔다 왔단 말이냐! ”

 

“ 야, 온천 가려고 나온 거니까 당연히 목욕 준비만 해가지고 왔지! 그리고 밖에서 자니까 당연히 속옷이랑 양말은 갈아입어야 할 거 아니야! ”

 

“ 어휴, 말을 말자. 먹을 게 필요한데... ”

 

“ 먹을 거 있어. 너 잘 때 찾았어. 찬장이랑 광에 통조림이랑 잼이랑 비스킷 있더라고. ”

 

 

 

왕재수가 찬장 쪽으로 가서 뭔가를 한 아름 안고 왔다. 절인 비트와 오이 피클이 들어 있는 유리병, 딸기잼이 반쯤 들어 있는 병과 하얀 비계가 송송 박힌 칼바사 햄 한 덩어리와 마른 비스킷 봉지, 청어 통조림, 노란 치즈 한 덩어리였다.

 

 

“ 다른 건 없어? ”

 

“ 몇 개 더 있긴 한데 그건 다 불에 데워야 하는 거더라고. ”

 

“ 그래도 너 오늘 눈 맞고 떨었으니까 뜨거운 거 먹어야 돼. 수프 통조림 같은 거 없었어? ”

 

“ 있어, 아르카지가 쓰는 그 인스턴트 보르쉬 깡통. 맛없을 거 같아서... ”

 

“ 그건 아르카지가 물 타서 맛없는 거야. 나도 인스턴트 쓰잖아. 그거랑 싱크대에 있는 냄비 가져와. 내가 데울게. ”

 

 

 

왕재수는 찬장에서 보르쉬 깡통을 가지고 왔다. 베르닌은 깡통을 뜯어서 냄비에 보르쉬를 붓고 페치카의 고리에 주전자 대신 냄비를 고정시켰다. 장작을 좀 더 넣었다. 인스턴트 보르쉬가 끓는 동안 왕재수가 싱크대에서 찾아낸 칼과 포크, 숟가락, 이 빠진 사기 접시 두 개를 가져왔다.

 

 

 베르닌은 침대에서 담요를 걷어내고 잡지를 뜯어 종이를 몇 장 깐 후 청어 통조림과 피클 병을 땄다. 햄은 두툼하게 두 조각 자르고 치즈도 얄팍하게 몇 조각 잘라냈다. 비스킷도 몇 개 꺼냈다. 마침 보르쉬가 끓었기 때문에 냄비 째로 올려놓았다. 식사 매너를 중시하는 왕재수는 냄비 째 수프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부아가 치밀었는지 차를 마시던 컵을 대충 씻어서 들고 왔다.

 

 

“ 나 여기 수프 따라줘. ”

 

“ 어휴, 진짜 가지가지 하네. ”

 

 

어쨌든 베르닌은 왕재수의 컵에 보르쉬를 가득 부어 주었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저녁을 먹었다. 배고픈 것도 몰랐는데 막상 먹기 시작하니 정신없이 먹었다. 폭설과 바람 때문에 고생을 해서 무척 지쳐 있었던 게 분명했다. 왕재수도 투정하지 않고 보르쉬를 다 긁어먹고 치즈와 청어를 먹고 심지어 비계가 박혀 있는 칼바사 햄까지 조그맣게 잘라서 한 조각 먹었다. 비스킷 한 개에는 잼까지 얹어서 먹었다. 정말 배고팠던 모양이었다. 하긴 일어나자마자 베르닌에게 이끌려 나와서 카페에서 살랸카와 치즈빵 약간을 먹은 게 전부니 그럴 만도 했다. 베르닌도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흡입했다. 배가 차자 몸이 따뜻해지면서 눈앞이 좀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눈을 맞고 돌아와 덜덜 떨던 왕재수도 뺨에 혈색이 돌고 눈에 생기가 돌아와서 훨씬 나아 보였다.

 

 

다 먹고 나서 왕재수는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그리고는 양동이에 받아놓은 찬물에 끓인 물을 부었다.

 

 

“ 너 뭐해? ”

 

“ 대충 씻긴 해야 되잖아. ”

 

“ 어휴, 우리 집에서는 씻지도 않고 픽픽 쓰러져서 잘만 자더니 왜 여기까지 와서 갖은 깔끔을 다 떠는 거야! 목욕통에라도 들어갈래? ”

 

“ 누가 샤워한대! 그냥 물수건으로 닦기만 할 거야! 눈 맞고 땀 흘리고 진짜 찝찝하단 말이야. 너도 닦아야 돼! 거울 없어서 그렇지 너 얼굴 지금 장난 아니야. 다치고 눈까지 맞았는데 잘 씻고 자야 돼. 안 그러면 병균 옮아서 아프단 말이야. ”

 

“ 유리에 벤 거랑 타박상인데 웬 병균... ”

 

“ 있어! 병균 있단 말이야! 아휴! 난 온천 가려고 했는데. 지난주엔 로만이랑 온천에서 사랑을 불태우며 좋았는데... 어헝, 로만 보고 싶어... 내가 이러고 있는 거 알면 맨발로 뛰어올 텐데.

 

“ 야, 그 아저씨가 진짜 맨발로 뛰어오면 좋겠냐? 추운데 미쳤니 위험한데 왜 왔니 하고 길길이 날뛰고 혼낼 거잖아! 안 봐도 눈에 선하네! ”

 

“ 바보 멍충이! 그래서 네가 지금 애인이 없는 거야! 칫... ”

 

 

투덜거리면서도 왕재수는 조그만 바가지에 더운 물을 뜨더니 현관문 근처에서 세수를 했다. 심지어 자기 가방에서 꺼낸 비누까지 썼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더니 문턱 밖으로 나가서 발까지 씻고 물을 버렸다. 문을 닫더니만 갑자기 스웨터와 셔츠를 훌렁 다 벗고는 심지어 마지막 속옷까지 벗으려고 해서 베르닌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왜 다 벗는 거야! 그냥 물수건으로 닦기만 하면 되잖아! ”

 

“ 응, 닦을 거야. 그래도 다 닦아야 조금이라도 개운하잖아. ”

 

“ 으윽!!! 그러면 사우나 들어가서 닦든가! 양동이 들고 가서 거기서 씻으면 되잖아! 왜 여기서 홀랑 벗는 거야! ”

 

“ 사우나 아까 가봤는데 엄청 조그맣고 음침하단 말이야. 구멍도 있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나는 게 100% 쥐 있단 말이야! 목욕하고 있는데 쥐랑 벌레랑 뱀이라도 들어오면 어떡해... 그건 그렇고 너 왜 그래! 내가 홀랑 벗든 말든! 나랑 응응 할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 ”

 

“ 그래도! 칸막이도 없는 통나무집에서 홀랑 벗은 사내 녀석을 보고 싶진 않단 말이야!!! ”

 

쳇, 그럼 눈 감고 있어라! 내가 목욕하는 거 일생에 한번 곁눈질로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철야 기도하는 놈들이 깔렸는데 복에 겨워가지고. 쳇. ”

 

 

그래서 왕재수가 물수건으로 몸을 닦는 동안 베르닌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왕재수는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수건을 철벅철벅 빨더니 물기를 대충 짜서는 베르닌에게 던져 주었다.

 

 

“ 너도 발이라도 닦아! 세수는 할 수 있으니까 이 바가지에 받아놓은 물로 하고! ”

 

나는 다쳤는데! 난 안 할 거야! ”

 

다쳤으니까 해야 한다고 했잖아!

 

 

왕재수가 마구 째려보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할 수 없이 바가지에 담긴 따뜻한 물로 세수를 하고 손도 깨끗이 씻었다. 셔츠를 벗어서 수건으로 몸도 닦았다. 바지까지 벗으라고 할까봐 내심 ‘뭐라고 핑계를 대며 안 닦지...’ 라고 고민했지만 왕재수는 물수건으로 발을 깨끗이 닦으라고 했을 뿐이었다.

 

 

어쨌든 왕재수의 말이 옳았다. 대충이라도 먼지와 땀을 닦아내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았다. 왕재수는 페치카에 장작을 더 집어넣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 이거 얼마나 가는 거야? 아침까지 불 안 꺼질까? ”

 

글쎄. 그렇게 오래 가진 않을 거야. 중간에 장작 더 넣어줘야 할걸. 내가 새벽에 장작 더 넣을 테니까 넌 걱정 말고 자. ”

 

“ 시골... 난방도 안 되고... 장작으로 불을 피우다니 정말 별로야. ”

 

“ 야! 여긴 숲속이잖아! 레닌그라드도 숲으로 나가면 똑같을걸! ”

 

“ 몰라! 나는 시중만 받았다고 했잖아. 별장도 엄청 호화스러운 데만 다녔단 말이야. 무슨 공작에 대공에 그런 사람들이 쓰던 별장이라 다들 궁전 같았어. ”

 

“ 너는 어떻게 그런 궁전 같은 별장만 다녔어? ”

 

“ 몰라서 묻냐, 우리 아저씨들... 다 고위층이었잖아. 넌 상상도 못할 거야, 그 인간들 얼마나 삐까하게 해놓고 사는지... 그래놓고 인민들한테는 공산주의가 어쩌고 평등이 어쩌고... 양키들 보고 부르주아라고 욕하고... 그 아저씨들 완전 황제에 귀족들만큼 사치스러워. 그런 게 바로 그 잘난 공산주의랑 소련의 실체란 말이야. 평등 좋아하네. 집은 말할 것도 없고 별장에 가도 하인에 하녀에 요리사에... 다 더러운 놈들이야. ”

 

“ 너 시중 받는 거 좋아하잖아. 화려한 거랑 근사한 것도. 그러면서 뭘 더러운 놈들이라 그러냐. 귀족적이고 사치스러운 거 너도 좋아하면서. ”

 

“ 달라! 나는 좋은 건 좋다고 해. 나쁘다고 안 해! 근데 그 작자들은 나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못하게 하고 탄압하면서 자기들은 뒤에서 다 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더러운 놈들인 거야! ”

 

“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근데 너 진짜... 제발 부탁이다. 나하고만 있을 땐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선 절대 그런 말 하지 마. 나 정말 너 때문에 조마조마해 죽겠어. 너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방금 한 말도 밀고하면 그 자리에서 다시 체포된단 말이야. ”

 

“ 지겨워. 독재자들, 더러운 놈들. 나 잘래. ”

 

“ 바지 말랐어, 입고 자. 셔츠도 입고. ”

 

“ 난롯불 이렇게 뜨거운데? 더워. 나 원래 벗고 자잖아. ”

 

“ 나는 몰라, 네가 벗고 자는지 입고 자는지! 알고 싶지 않아! 여긴 숲이라 밤에는 굉장히 추울 거란 말이야. 불 꺼지면 어쩌려고 그래. ”

 

“ 네가 중간에 장작 넣어준다고 했잖아. 계속 따뜻할 텐데 뭐. ”

 

옷 입고 자! 안 그러면 의사 선생님한테 또 밀고할 거야!!!!

 

“ 악마. ”

 

 

왕재수는 투덜거리면서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침대를 난롯가 앞으로 바짝 가져다 놓았다.

 

 

“ 너는 여기서 자. ”

 

“ 싫어! 덥단 말이야! 네가 여기서 자! ”

 

“ 너 아침부터 춥다고 했잖아! 좀 전에도 눈 맞고 들어오고. 너 한번만 더 감기나 폐렴 도지면 의사 선생님이 내 목 졸라 죽일 거란 말이야! ”

 

 

왕재수는 더운 거 질색이라고 투덜대면서도 결국 베르닌의 뜻대로 난롯가 앞 침대에 올라가 누웠다. 베르닌은 자기 침대에 붙어 있던 여분의 침대를 떼어서 왕재수의 침대 쪽으로 밀었다.

 

 

“ 그 침대 왜 움직이는 거야! 너 두 개 붙이고 자라니까. ”

 

“ 너 자다가 뒤척거리잖아! 좁은 침대에서 자다가 떨어질까 봐 그래. ”

 

안 떨어져! 덩치 큰 네가 두 개 붙이고 자! 80킬로 주제에. 난 어차피 침대 두 개 붙여도 소용없어. 가운데 붙은 자리가 배겨서 못 잔단 말이야! ”

 

어휴, 호강에 북받친 놈! 완두콩 공주!

 

내가 왜 공주야! 난 사내인데!!! 왕자님이란 소린 많이 들었어도!

 

“ 으윽... 시끄러워. 빨리 자! ”

 

 

왕재수는 결국 여분의 침대를 베르닌 쪽으로 도로 밀어놓고는 담요도 제대로 덮지 않고 벌렁 드러누웠다. 베르닌이 야단을 치자 툴툴거리며 담요를 끌어다 딱 무릎 위에서 가슴 아래까지만 덮었다. 이불 제대로 덮으라고 더 잔소리를 하려다가 난롯불이 뜨겁긴 했으므로 베르닌은 일단 만족했다. 창밖은 여전히 내리는 눈 때문에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침에는 제발 눈이 그치기를 빌며 베르닌은 불을 끄고 침대로 올라갔다. 오후에 그렇게 잤는데도 무거운 졸음이 몰려왔다. 그는 발목에 둔한 통증을 느끼며 곧 곤히 잠들었다.

 

 

 

 

... to be continued...

 

 

 

 

 

....

 

 

이야기는 36편으로 이어진다.

 

원래 이 이야기는 35편 하나로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분량이 좀 길어져서 흐름에 따라 두 편으로 나누었다. 36편은 지금 후반부 작업 중이다.

 

..

 

완두콩 공주 얘긴 다 아시겠지만... 공주님인지 아닌지 시험해보기 위해 겹겹이 쌓은 매트리스 아래에 완두콩 딱 한 알을 넣었더니 곱게 자란 진짜 공주님은 밤새 등이 배겨서 잠을 설쳤다는 옛날 이야기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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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이 내리는 가운데 숲속 통나무집에 갇힌 단추와 왕재수는 어떻게 될까요~ 다음 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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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가져가거나 복사, 전재, 도용하지 말아 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한달 넘게 우수한 단추 시리즈로 채워졌던 서무 시리즈가 다시 일상의 서무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단추 베르닌과 스페호프, 회사 동료들이 모두 등장하는 34편이다.

 

34편은 지방 발령을 받고 난 후 쓴 글이다. 심신이 너무 괴로워서 가벼운 글로 스트레스나 풀려고 했던 거라서 이번 편은 분위기가 꽤 가볍다. 납치도 폭력도 눈물도 고난도 없습니다 :) 그냥 재미있게 읽으시면 됩니다.

 

난데없이 바자회 특명을 받은 우리 단추는 과연 국장의 기대치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지!!! 그 이야기는 아래를~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우여곡절 끝에 왕재수는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온 신작을 발표하고, 베르닌은 다시 일상의 서무 업무로 돌아간다. 그러나 스페호프가 다시 그를 호출해 또 다른 미션을 부여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 http://tveye.tistory.com/4062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2부) : http://tveye.tistory.com/4079
* 에피소드 33-1. 도자기 인형 : http://tveye.tistory.com/409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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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4

 

 

 

 

 

 

서무의 슬픔

- 딸기 아가씨들과 자선 바자회 -

 

 

 

 

 

 

 

신작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수도에서 온 고위직 후원자들도 모두 돌아간 후 왕재수는 출연했던 무용수들에게 특별 휴가를 주었다. 향후 일주일 동안의 공연은 모두 오페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무용수들을 모두 휴가 보낸 후 왕재수는 극장에 틀어박혀 그와 하느님만이 아는 차기 신작의 골격을 잡으려고 했다. 제발 며칠 동안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는 베르닌의 부탁과 설득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결국 베르닌은 스타브로프에게 도움을 청했다. 노의사는 왕재수의 행태에 노발대발하더니 젊은 의사 제냐와 남자 간호사 하나를 대동해 극장으로 찾아왔다. 감독실이 떠나가라 호통을 치더니 왕재수를 거의 포박하다시피 차에 태워 병원으로 데려갔다.

 

 

스타브로프는 정밀 검진을 하더니 왕재수를 사흘 동안 병원에 입원시켰다. 왕재수가 아무리 버둥거리고 아우성을 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왕재수만 보면 하염없이 마음이 약해져서 무슨 말이든 다 들어주려고 하는 아내 마르가리타는 아예 접근 금지를 시켜버렸다. 심지어 왕재수가 필살기를 발휘해 예쁜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애원을 해도, 방긋방긋 웃으며 애교를 부려도 노의사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일요일에 실려 왔을 때 이미 입원시켰어야 했는데 신작 공연 때문에 할 수 없이 보내줬던 거라고 대꾸했다. 지금 입원해 쉬지 않으면 나중에는 한 달 동안 더욱 외진 시골 요양소에 갇히게 될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더욱 외진 시골’이란 단어에 화들짝 놀란 왕재수는 결국 한 풀 꺾였고 고분고분하게 사흘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다.

 

 

신작이 끝나서 사무실로 복귀하게 된 베르닌은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아침과 밤마다 병원에 왕재수를 보러 갔다. 이틀째 되던 날에는 투레츠키를 통해 파인애플 통조림까지 사들고 갔다. 그러나 이 모든 재앙이 베르닌의 ‘밀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왕재수는 토라져서 베르닌에게 ‘바보 멍충이, 꺼져!’ 하고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고 파인애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죄 없는 코즐로프에게도 삐쳐서 등을 돌리고 누워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무리 코즐로프가 상냥하게 달래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을 나온 베르닌은 무척 속이 상했지만 코즐로프는 웃기만 했다. 퇴원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 당신이야 귀염둥이 우리 아기 어쩌고 밤새 응응을 하면서 불태울 테니 저 자식이 풀어지겠지만 나한테는 계속 삐쳐 있을 거라고요! ”

 

“ 저 녀석 너한테 삐친 거 아니야.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빨리 작업을 하고 싶은데 병원에 갇혀 있으니 답답해서 그런 거야. 어디 가둬두면 못 견디는 놈이거든. 퇴원하면 다시 빵긋빵긋 웃을 거다. 우리 아기는 그런 게 정말 매력이라니까. 귀엽기도 하지. ”

 

“ 으윽, 당신이야 콩깍지가 꼈으니 귀엽게 보이겠죠. 난 구박만 받고 미치겠다고요! ”

 

 

 

물론 코즐로프의 말이 맞았다. 퇴원 수속을 밟자 왕재수는 기분이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고 항상 주변 시선을 조심하던 것도 잊어버렸는지 코즐로프를 와락 껴안았고 베르닌을 보자 빨리 집에 가서 파인애플 통조림 뚜껑을 따달라고 졸랐다.

 

 

다음날 그들은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로 떠났다. 코즐로프에게는 오케스트라 장기근속 표창으로 받은 3일 요양권이 있었고 왕재수는 의사의 온천 치료 처방전과 극장 간부용 자유 이용권이 있었다. 주변의 의심을 우려해 둘은 각각 떠났다. 월요일 새벽에 베르닌이 왕재수를 요양소까지 실어다 주었고 코즐로프는 오후에 출발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검은 숲까지 다녀온 탓에 베르닌은 매우 피곤한 상태로 출근했다. 하마터면 스페호프의 주간 회의 시간에도 졸 뻔했다. 왕재수의 신작이 아주 성공적으로 끝난 데다 공연을 보러 왔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고위직 간부들이 모두 그의 재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국장은 심기가 불편한 듯 했지만 그래도 최악의 상태는 아니었다. 스페호프는 내심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그를 불러내 모스크바 밀서 사건에 대해 탈탈 털고 해임 통보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게 분명했다. 수요일 공연에는 가브릴로프 출신이자 애초에 왕재수를 이곳으로 보냈던 의원인 벨스키를 비롯해 스비제르스키, 그리고 레닌그라드 최고의 실세이자 왕재수를 오랫동안 후원해온 마로조프까지 크레믈린을 좌지우지하는 인물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페호프와 대화를 나눈 것은 가장 온건한 벨스키 뿐이었고 그것도 공연 시작 직전에 귀빈석에서 잠깐 만났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스페호프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벨스키가 미하일은 연방의 귀중한 예술가이니 신변에 위협이 되는 일이 절대 생기지 않도록 KGB가 최선을 다 해달라고 당부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날 공연이 끝난 후 왕재수는 의원들과 별도의 리셉션 파티에 참석했다. 베르닌은 따라 들어갈 수 없었다. 가브릴로프 쪽 인사들로는 극장장과 의회 의장에게만 참석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왕재수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베르닌은 그가 스비제르스키를 따라가 인근 도시의 호텔에서 밤을 보냈다는 것을 다음날 국장으로부터 들었지만 물론 모르는 척했다.

 

 

어쨌든 스페호프는 왕재수의 후원자들, 특히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로부터 무사히 살아 남았기 때문인지 주간 회의 시간에도 평소보다 약간 심한 정도로만 직원들을 볶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공문 두 장을 탁 하고 책상에 내려놓으며 큰 소리로 호명했다.

 

 

베르닌! 칸페트나야!

 

 

베르닌은 ‘예’하고 답변하면서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그러나 의문했다. 함께 호명된 리자는 맨 뒤에 앉아서 동료 여직원들과 메모를 주고받다가 깜짝 놀라서 ‘네!’하며 벌떡 일어났다가 얼굴이 빨개지며 다시 앉았다.

 

 

“ 지난번 스네고로드 폭설 때와 마찬가지로 막내 직원들의 봉사가 필요하게 됐네. 알다시피 목요일이 공공기관 연례 바자회일세. 의회와 공산당 부녀회에서 주최하는 행사로 올해 추진위원장은 블리즈네초프 의장의 부인이 맡았단 말이야. 특별히 그녀에게 이야기해서 우리 보안위원회 부스를 중앙으로 배정받았네. 작년에는 너무 구석에 부스를 세워놨더니 실적이 너무 저조해서 우리가 꼴찌에서 두 번째였단 말이네! 이번에도 그런 굴욕을 당할 수는 없어! 알다시피 자선 바자회의 판매 실적도 공공기관 성과평가 지표에 포함된단 말일세. 최근 3년간 실적이 누적되기 때문에 작년의 저조한 성적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올해 반드시 1등을 해야 해! 이번 부스 운영 총괄은 다닐 자네가 맡게. 막내인데다 총괄 서무니까! 그리고 조직 내 물품 기부와 판매 전략 수립은 막내 여직원인 칸페트나야가 책임지게. 둘은 오늘 15시까지 연례 바자회 부스 운영 계획 초안을 수립해 내 방으로 오게. 이상! ”

 

 

 

졸지에 바자회 부스 운영 총괄을 맡게 된 베르닌과 리자는 멍해져서 눈만 깜박거리며 앉아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어휴, 나한테 안 떨어져서 다행이다’란 표정을 지으며 삼삼오오 빠져나갔다. 알렉산드라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 다냐, 리잔카. 안 그래도 바쁠 텐데 골치 아픈 일을 또 떠맡았구나. 내가 몇 년 전에 바자회 부스 운영을 해봤거든. 그때도 막내 여직원이란 이유로 맡았던 것 같아. 그땐 아무 것도 모르니까 우왕좌왕하고 판매 실적도 중간밖에 안돼서 국장한테 엄청 깨졌었어. 국장은 여러 기관이 참여하는 행사에서 실적 측정하는 거 엄청 민감해. 목요일이면 며칠 안 남았잖아. 일단 내가 최근 몇 년간 부스 운영 계획이랑 결과보고서 철을 가져다줄테니까 그것부터 훑어보고 계획 초안을 잡으렴. 나도 오늘 급한 업무 마치면 좀 도와줄게. ”

 

“ 고마워요, 선배님. ”

 

“ 사셴카 언니, 정말 언니뿐이에요. 아아, 국장은 정말 너무해요. 매일매일 막내라고 온갖 궂은일은 다 시키고... ”

 

 

 

 

*   *   *

 

 

 

 

베르닌과 리자는 알렉산드라가 챙겨다 준 기존 서류들을 모두 훑어보았다. 자선 바자회 추진위원회에서 온 공문과 행사 추진계획도 읽어보았다. 리자는 입술을 삐쭉거렸다.

 

 

“ 이건 내용상 총무부에서 진행해야 하는 업무잖아요. 귀찮으니까 또 국장에게 가서 막내들이 해야 한다고 뒤에서 공작을 한 게 분명해요. 작년에 꼴찌에서 두 번째 한 것도 당연하네요. 이거 보세요, 우리는 애초부터 직원들이 기부한 물품 자체가 적었어요. 좋은 물건도 없었고요. 재작년에도 성적이 나빴네요. 이래놓고 무슨 1등을 하라는 건지. 작년 1등은 어디였어요, 다냐? ”

 

 

베르닌은 서류철을 뒤졌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 최근 3년 내내 1등은 가브릴로프 극장에서 차지했어요. 극장이라서 화려한 게 많이 나왔나 봐요. 아무래도 우리 같은 일반 공공기관이랑은 다르잖아요. 무용수들이나 성악가들의 팬들도 많이 몰리고... 의상이랑 장신구 같은 것도 많이 나오고 또 데니스나 타마라 같은 스타 무용수들이 사인회도 같이 해줬나 봐요. 우리로서는 아무래도 따라가기 힘들 것 같아요. ”

 

“ 아, 맞다. 나도 작년에 극장 부스 가서 터키석 팔찌 샀어요. 진짜 예쁜데 아까워서 회사에는 하고 오지도 못하겠어요. 그때 데니스한테 사인도 받았어요. 앗, 그러면 이번엔 꽃돌이 감독님이 사인회 하겠네요. 다 끝났어요, 다냐. 가뜩이나 극장 부스가 잘 나가는데 미샤가 사인회까지 하면 다 거기로 몰려들 거 아니에요... 아무리 노력해봤자 안 될 테니까 그냥 포기하고 대충 해요. 우리도 부스들 구경하면서 물건들 사고 사인이나 받고 맛있는 거나 먹어요. 그깟 1등 어차피 할 수도 없는 거 공연히 아등바등할 필요 없잖아요!

 

 

리자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열띠게 외쳤다. 베르닌은 그녀의 말에 따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순간 작년 가을이 생각났다.

 

 

“ 그랬으면 좋겠지만... 리자, 작년 체육대회 생각 안 나요? 국장이 얼마나 날 들들 볶았는데요. 전 종목 출전을 시키지 않나, 우승을 못하면 벌목공도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리바운드를 2만개 연습했다고요. 난 지난번에 기관 대표로 요리대회까지 나갔는걸요. 알렉산드라 선배의 말이 맞아요. 국장은 다른 기관들이 참여하는 행사에서 실적을 못 내면 노발대발할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잘리든가 적어도 한 달 이상 들들 볶이고 징계성 잡일을 산더미처럼 떠안게 될 거예요. 1등을 하든지 그에 버금가는 매상을 올리지 않으면 우리의 앞날이 너무 암울해요. 그나마 한동안은 미샤가 신작을 올린다고 해서 극장에 배치되는 바람에 국장에게 덜 볶였지만 이제 다시 사무실로 복귀했는데... 아아, 다시 전처럼 매일매일 들볶이고 밤을 새고 휴일에도 계속 출근하고 설교를 듣는 것만은... ”

 

 

베르닌은 갑자기 서러워져서 하마터면 눈물을 쏟으며 훌쩍훌쩍 울 뻔 했다. 아마 혼자였거나 왕재수 앞이었다면 그랬겠지만 도저히 리자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어 콧물을 훌쩍 들이마시며 꾹 참았다. 리자는 코를 살짝 벌름거리더니 방긋 웃었다.

 

 

“ 아이 참, 다냐. 당신이 그렇게 심각해지면 어쩔 수 없잖아요. 난 국장한테 야단맞는 건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좋아요. 일단 수요일 오전까지 물품 기부를 받도록 해요. 리스트 양식은 알렉산드라 언니가 주고 간 게 있으니 이걸 쓰면 되겠어요. 내가 등사해서 각 부서 서무들에게 돌릴게요. 1인 1품목을 강제 할당해야 돼요. 안 그러면 발따예프 선배 같은 사람은 절대 안 낼 테니까! 당신은 추진위원회에 가서 행사장 도면과 우리 부스 위치, 홍보물 부착 기준 따위를 알아오세요. 우리 재밌게 해봐요. ”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리자를 바라보았다.

 

 

“ 리자, 이게 재미있어요? ”

 

그럼 어떻게 해요, 재밌게라도 해야죠. 그나마 당신이랑 같이 준비하니까 다행이에요. 발따예프나 타라카노프, 모브린 선배 같은 사람들이랑 같이 하라고 했으면 진짜 열 뻗쳤을 거예요. 자, 얼른 추진위원회에 다녀와요! ”

 

 

베르닌은 리자의 긍정적인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매사에 겁을 먹고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항상 투덜대며 일하는 자신과는 하늘과 땅차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리자가 나이는 어리지만 배울 게 많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바자회 추진위원회가 있는 의회 건물로 향했다.

 

 

 

 

*   *   *

 

 

 

 

수요일 오전에 베르닌과 리자는 반쯤 절망 상태가 되었다. 국장의 명령을 무기로 협박해서 전 직원 1인 1물품 제출은 완료되었지만 들어온 물건들을 보니 작년보다 나아진 게 하나도 없었다. 물건들의 질은 하나같이 나빴고 누가 봐도 지갑을 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 떨어지고 해져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얄팍한 외투부터 시작해 구슬이 숭숭 빠져 있는 촌스러운 목걸이, ‘1970년 가브릴로프 KGB 신년 노래자랑 기념‘이란 문구가 떡하니 박혀 있는 고장 난 시계, 심지어 ’1965년 가브릴로프 KGB 가을 등반대회’ 란 문구가 박힌 수건까지 있었다.

 

리자가 ‘어머나, 이렇게 오래된 수건을 내놓다니! 너무 해져서 걸레로도 못 쓰겠어요!’ 라고 외치는 동안 베르닌은 ‘가을 등반대회까지 했다니! 신년 노래자랑은 또 뭐야! 옛날 국장들도 스페호프 못지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워낙 물건들이 별로라서 가격을 아주 낮게 매기는 수밖에 없었다.

 

 

리자가 한숨을 쉬었다.

 

 

“ 큰일이네요, 다냐. 내가 봐도 사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요. 거저 줘도 싫은 물건이 대부분인 걸요. 그나마 알렉산드라 언니가 기부한 책이랑 인형은 괜찮은 편이지만... 이 곰 인형을 희귀한 인형이라고 홍보해서 100루블에 팔아볼까요? 근데 국장은 왜 안 내는 거죠? 그렇게 직원들을 볶아놓고 막상 자기는 안 내고! ”

 

“ 국장은 원래 명령만 하고 자기는 안 하는 거 알잖아요. 그러니까 윗사람이죠. ”

 

“ 어머, 다냐. 당신 이 책들 다 기부하는 거예요? 뜯지도 않은 새것이네? ”

 

“ 어, 예... 난 그거 한 질 더 있어요, 예전에 법대 다닐 때 암기 시험 잘 봐서 받은 거 있거든요. 이건 저번 체육대회 MVP 상품으로 받은 거예요. 근데 잘 보면 귀퉁이에 수프 얼룩이 좀 있어요. 냄비 받침으로 쓰던 거라서. ”

 

“ 흐응, 얼룩은 눈에 안 띄니까 완전 새 책이라고 해서 내놓으면 되긴 되는데... 레닌 전집은 웬만하면 집집마다 있을 것 같아요. 걸핏하면 상품으로 주는 거라서... 학교에서도 그렇고. 우리 집에도 있거든요, 오빠가 예전에 콤소몰에서 받아온 거. 어머나, 여기도 레닌 전집이 있네. 이건 누가 낸 거지? 아, 모브린 선배가 낸 거구나. 앗, 여기도 있어요. 이건 레닌 선집이네... 이건 카체리나 언니가 낸 거고... 어머나, 스탈린 어록도 있어요. 아아... 망했어요. 누가 스탈린 어록을 사겠어요! ”

 

 

둘이 괴로워하고 있는데 알렉산드라가 왔다. 높다랗게 쌓여 있는 물건들을 훑어보더니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 이 물건들로는 어림도 없겠네. 작년보다 더 심해. 일단 점심부터 먹자. ”

 

“ 구내식당 가기 싫어요, 오늘 메뉴 보니까 또 돼지비계 절임이랑 양배추 수프였어요. 지겨워요. ”

 

“ 어차피 12시가 넘어서 지금 구내식당 가면 한참 줄서야 될 거야. 우리 그냥 스베촉에 가서 먹을까? ”

 

“ 어, 좋아요. 제 차로 가요. ”

 

 

 

베르닌은 리자와 알렉산드라를 태워서 스베촉으로 갔다. 점심시간이라 손님들로 터져나갔다. 인기 만점인 왕재수가 없으니 꼼짝없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나 했지만 점원 하나가 알렉산드라를 보더니 손뼉을 치고 반색을 했다.

 

 

“ 우왓, 사샤! 어서 와요. 보랴 지금 바빠서 좀 기다려야 할 텐데. ”

 

“ 아니에요, 겐카. 동료들이랑 점심 먹으러 온 거예요. ”

 

“ 이리 와요, 이 안쪽으로! ”

 

 

구석의 창가 자리로 안내받은 후 리자가 방긋 웃었다.

 

 

“ 어머, 전에는 꽃돌이 감독님이랑 친한 다냐 덕분에 자리를 받았는데 이번엔 언니 덕분이네요. 남자친구가 좋긴 좋군요! ”

 

“ 아니야, 그런 거! ”

 

 

알렉산드라가 얼굴을 붉혔지만 리자는 깔깔 웃었다. 베르닌도 기분이 좋았고 보랴의 생일 파티에 알렉산드라를 데려갔던 것이 정말 뿌듯했다.

 

 

점심시간은 짧았으므로 셋은 빨리 먹을 수 있는 버섯 블린과 감자 수프, 게살 샐러드를 시켰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하나같이 너무나도 맛있었다. 특히 리자는 버섯 블린에서 포크를 놓지 못했다.

 

 

“ 어쩜 이렇게 블린이 맛있죠? 우리 이거 한 접시만 더 시키면 안돼요? 가브릴로프에서 제일 맛있는 블린이에요. 어쩌면 이렇게 얄팍하면서도 반질반질하고 풍미가 기가 막힐까요. 속에 들어간 버섯도 너무 향긋해요. 근데 버섯 없이 블린에 스메타나만 얹어도 진짜 맛있어요. ”

 

“ 응, 보랴가 블린을 잘 구워. 그저께 보랴가 집에서 구워줬는데 나 너무 많이 먹어서 하루만에 3킬로는 찐 것 같아. 숲에서 따온 딸기랑 곁들여 먹으니까 너무 맛있더라고. ”

 

“ 어머, 언니 좋겠다... 집에서 남자친구가 이렇게 맛있는 블린을 구워주고... 아앗! 그래, 이거예요! 됐어요!

 

 

리자가 손뼉을 딱 쳤다. 어리둥절해진 베르닌과 알렉산드라를 환한 얼굴로 바라보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 바자회는 오후에 열리잖아요. 보랴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건 어때요? 우리 부스 컨셉을 딸기로 잡는 거예요! 봄이니까 이제 딸기가 나오고 있잖아요! 주말에 우리도 가족끼리 다차에 가서 딸기 잔뜩 따왔거든요. 우리 부스에서 블린을 구워 파는 거예요! 블린 종류는 딸기랑 크림 넣은 거 하나로만 통일하고요. 보랴가 도와주기만 하면 불티나게 팔릴 거예요! 알렉산드라 언니랑 나는 손님을 끌고요. 우리 오빠가 유리병 공장에 다니거든요. 예쁜 공병이 많아요. 공병들에 딸기사탕을 넣어서 리본 달아서 파는 거예요! 블린이랑 딸기사탕이랑 같이 묶어서요! ”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어... 근데 그건 기부랑 상관이 없잖아요... 우리 KGB 직원들이랑은 상관없는 내용인데 우리 부스에서 해도 되나... ”

 

 

“ 아휴, 다냐! 다른 부스들도 다 그렇게 한단 말이에요. 어차피 우리 물건들은 팔리지도 않아요. 우리도 이럴 땐 자본주의자들의 상술을 좀 베낄 필요가 있어요. 전에 대학생들에게서 압수했다는 잡지에서 봤는데요, 양키들은 별것도 아닌 물건들을 예쁘게 포장해서 비싸게 팔아먹는대요. 뭐라고 하더라, 패키지? 서로 다른 물건들을 공통되는 주제를 갖다 붙여서 한 세트로 만들어 판다는 거예요,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그럴싸하게 보이는 거고요. 그러니까 우리도 무슨 슬로건 같은 걸 붙여서 딸기 패키지를 만드는 거예요!

 

 

베르닌은 어안이 벙벙했고 이 자본주의자의 상술이라는 것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지만 알렉산드라는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를 쳤다.

 

 

“ 아, 리자! 너 정말 똑똑하구나! 좋은 생각이야. 있잖아, 작년에 우리 단체로 의류공장 견학 갔던 거 생각나니, 다냐? ”

 

“ 어, 그럼요. 저 그때 이 셔츠 다섯 개 들이 한꺼번에 샀는걸요. ”

 

“ 그 의류공장이랑 우리 쪽 공공기관이랑 무슨 협약을 맺어서 간 거였잖아. 그때 우리가 무슨 서류 문제를 해결해주는 대신 그쪽에서 직원용 의복을 제공받기로 했었거든. 근데 그때 총무부 담당자가 일을 하도 엉망으로 하는 바람에 원래 받기로 했던 겨울 스웨터가 아니고 그냥 하얀색 반팔 티셔츠가 100장이 온 거야. 반품시키려고 했다가 서류 절차가 복잡하다고 그냥 창고에 갖다 쌓아놨어. 아직도 상자 째 그대로 있어. ”

 

“ 어, 근데 어떻게 국장이 그걸 그냥 놔둔 거죠? 그런 거 못 참을 텐데... ”

 

그 담당자가 국장한테 아예 보고를 안 한 거지! 그때 국장이 모스크바 출장 가고 어쩌고 하느라 바빴고, 사실 의류공장에서 옷 받아서 나눠주는 거야 국장 관심 밖의 일이었으니까. 아예 보고를 안 하고 묻어버리면 모르고 넘어가게 되는 거지. 만약 보고를 했다면 해결할 때까지 들들 볶았을 테지만. ”

 

“ 그렇구나... ”

 

 

베르닌은 새로운 문제 해결 방법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신이 너무나 책상물림이라는 생각에 조금 좌절감도 들었다. 자기 같았으면 곧이곧대로 국장에게 물건이 잘못 왔다고 구두 보고한 후 보고서와 경위서를 만들고 온갖 절차를 거쳐 의류공장에 티셔츠를 반품하고 겨울 스웨터를 받아내느라 한 달 이상을 소요했을 것이다. 그동안 국장에게 계속 들들 볶였을 것이고.

 

 

“ 그런데 그 티셔츠와 내일 행사는 무슨 관계가 있나요? 반팔 흰 티셔츠는 팔아봤자 별로 매상이 안 오를 텐데... ”

 

“ 리자가 패키지 얘기를 했잖아. 별 거 아닌 물건들을 예쁘게 포장해서 팔아먹는 거. 블린이랑 딸기사탕이랑 티셔츠를 묶어서 파는 거야! 흰 티셔츠에는 그림을 그릴 수가 있잖아. 딸기를 주제로 하는 거니까 셔츠에 딸기 무늬를 그리는 거야! ”

 

“ 어... 그치만 언제 딸기 100개를 그려요... 게다가 전 미술이라면 담을 쌓은 걸요. ”

 

“ 아이 참, 다냐! 100개를 하나하나 그릴 필요 없어요! 학교 다닐 때 그런 거 했잖아요. 판화! 지우개나 감자에 딸기 모양을 새긴 다음에 그걸로 찍어내면 돼요! 이거 너무 좋은 아이디어네요. 슬로건만 생각하면 되는데... 공공기관 행사에 어울리는 슬로건 뭐 없을까요? 다냐, 당신이 행정용어를 많이 알잖아요. 생각 좀 해봐요. ”

 

“ 어... 난 책상물림이라서 이런 판매 전략 같은 건 진짜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안되겠어요. 경제개발 5개년 그런 것밖에 생각이 안 나요. ”

 

 

알렉산드라가 하늘색 눈을 반짝 빛내더니 소리쳤다.

 

 

“ 그거다! ‘검은 숲 딸기 유통 활성화 착수 기념 트로이카 패키지!’ 뭔가 있어 보이고 행정용어도 들어가고 우리 러시아 전통문화인 트로이카란 단어도 있고! 이 정도면 국장이나 의장도 대체 왜 블린이랑 딸기사탕이랑 티셔츠가 KGB랑 관계있냐고 트집 못 잡을 거야! 용어만 잘 붙여 놓으면 되니까! ”

 

 

“ 꺄, 뭔가 멋있어 보여요! 좋아요, 이걸로 해요! 들어가면서 일단 감자를 몇 알 사요. 사무실에 아크릴 물감이랑 칼은 있었던 것 같아요. 난 오빠에게 전화해서 공병들을 실어다 달라고 할게요. 제일 중요한 게... 보랴가 도와줘야 하는데... ”

 

 

그때 마침 보랴가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에서 슬그머니 나왔다. 바쁜 와중이었지만 여자친구를 잠깐이라도 보고 싶었던 게 분명했다. 알렉산드라를 꼭 껴안고 뺨과 입술에 뽀뽀를 하며 반가워했다. 그러다 뒤늦게 베르닌을 발견하고는 벙긋 웃었다.

 

 

“ 아, 너 왔구나. 얘기 들었지, 나랑 사셴카랑. ”

 

“ 어, 예. 축하해요. 둘이 너무 잘 어울려요. ”

 

“ 다 너 덕분이야. 네가 그때 사셴카 데리고 와서. 근데 애기는 좀 어떠냐. 공연 끝나고 입원했다면서. ”

 

“ 괜찮아요. 퇴원하고 온천에 갔어요. 내일 돌아올 거예요. ”

 

“ 아, 그랬구나. 다행이다. ”

 

 

리자가 옆구리를 콕 찌르자 알렉산드라가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설명하고는 보랴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보랴는 흔쾌히 승낙했다.

 

 

“ 식당 점심시간이 두 시에 끝나니까 그때부터 다섯 시까지는 괜찮을 거야. 블린 그까짓 거 산더미만큼 구울 수 있지! 내일 두 시까지 갈 테니까 세팅만 잘 해놔. ”

 

“ 고마워요, 보랴! ”

 

 

그래서 그들은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식당을 나왔다. 베르닌은 아직도 자본주의자들의 패키지가 과연 매상 1위를 달성할 수 있을지 크나큰 의문이 들었지만 리자와 알렉산드라가 많이 들떠 있기도 했고 어쨌든 엉망인 물건들만 파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열심히 준비해보기로 했다.

 

 

 

 

*   *   *

 

 

 

 

 

목요일 오후가 되었다. 날씨가 매우 좋았다. 베르닌과 리자는 중앙에 설치된 부스로 일찌감치 가서 물건들을 늘어놓고 한쪽에서는 블린을 구울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빨간색과 초록색의 동그랗고 먹음직스러운 딸기가 세 개씩 그려진 하얀 티셔츠들과 딸기 사탕들이 들어 있는 조그만 유리병들을 매대 제일 앞에 쌓아놓았다. 전날 베르닌과 리자, 알렉산드라는 감자에 문양을 새기고 물감을 묻혀서 티셔츠 100장에 모두 딸기 무늬를 찍었고 유리병마다 딸기 사탕 열 개를 넣어서 녹색 리본을 달았다. 리본은 따로 산 것이 아니고 알렉산드라가 당직실 창문에 걸려 있던 낡은 커튼을 잘라내서 만들었다. 마침 녹색이라 잘됐다 싶었다. 남는 커튼 조각으로는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손재주가 좋은 리자가 하얀 페인트로 직접 ‘검은 숲 딸기 유통 활성화 착수 기념 트로이카 묶음 판매’ 라고 썼다. 패키지라고 쓰면 자본주의 반동분자로 오해받을까봐 베르닌이 걱정했기 때문에 용어를 바꾼 것이다.

 

 

스페호프는 각 부서에서 대표 직원 한 명씩을 차출해서 판매와 계산을 도우라고 명령했고 자신도 직접 현장에 왔다. 딸기사탕과 티셔츠, 휴대용 버너를 보자 눈살을 찌푸렸지만 ‘검은 숲 딸기 유통...’이라고 씌어 있는 슬로건을 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닌의 어깨를 툭툭 쳤다.

 

 

“ 그렇군, 우리 가브릴로프 숲에서 나는 농산물의 생산 및 유통을 확대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목표를 설정했군. 당과 의회에서 좋아하겠어. 목표는 좋은데 과연 잘 팔릴지 모르겠군. 먹는 것들은 원래 비싸게 받을 수가 없잖은가. ”

 

“ 묶음 판매로 고급화하겠다는 것이 리자의 전략입니다. ”

 

“ 흐음... 하여튼 잘 해보게! 이번만큼은 무조건 1등을 해야 돼! 우리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체면이 있지... 1등을 하지 못하면 벌목공 일자리나 알아보는 게 좋을 걸세!

 

 

뒤에 서 있던 리자가 사색이 되었다. 스페호프가 저쪽으로 사라지자 리자는 파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다냐, 저거 설마 진담은 아니겠죠? ”

 

“ 그, 글쎄요. 국장은 농담 같은 거 할 줄 모르거든요. 진담으로 하는 거긴 한데... 그래도 진짜로 우리를 벌목공으로 만들지는 않을 거예요. ”

 

“ 매상은 올릴 자신 있어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극장이 문제란 말이에요. 꽃돌이 감독님이 사인회를 하면... ”

 

“ 어, 미샤는 오늘 안 와요. 온천에 갔거든요. 걘 바자회 같은 거 관심도 없고요. 그러니까 사인회 같은 건 안 할 거예요. ”

 

“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치만 데니스도 인기가 많아서... 작년에 나도 데니스한테 사인 받으러 가서 줄섰다가 그 터키석 팔찌 산 거라서요. ”

 

“ 무용수들도 다 휴가 갔어요. 오늘까지 휴가라서 안 온대요. 류다한테 물어봤어요. ”

 

 

리자는 간신히 좀 안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바자회 준비하는 내내 씩씩하고 의기양양했지만 그래도 스페호프가 무섭긴 한 모양이었다. 그때 다른 부스들을 둘러보고 온 알렉산드라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나타났다.

 

 

“ 극장은 생각보다 별로 물건이 없어. 근데 삼림국 부스에도 딸기가 있어. 그쪽은 물량이 훨씬 많아. 바구니에 딸기를 쌓아놓고 파는 것 같아. 이래서는 밀릴지도 몰라.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 ”

 

“ 어, 어떻게 하죠... ”

 

 

베르닌도 걱정에 휩싸였다. 리자는 곰곰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손뼉을 딱 쳤다.

 

 

그래! 극장이 하는데 왜 우리라고 못해요! 우리도 분장을 하면 되지! 그 양키 잡지에서 보니까 여자들이 토끼 옷을 입었더니 남자들이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사셴카 언니, 이리 와요. 우리 잠깐 저쪽 텐트로... ”

 

 

리자와 알렉산드라가 주최측 텐트로 사라진 후 보랴가 왔다. 바자회 때문에 손님이 평소보다 적어서 부주방장에게 맡기고 왔다고 했다. 말은 그렇지만 사실은 알렉산드라를 도와주고 싶어서 서둘러 온 것 같았다. 플래카드를 보더니 픽 웃었다.

 

 

“ 뭐냐, 저건. 읽는데도 한참 걸리네. 활성화는 뭐고 트로이카 묶음 판매는 또 뭐야. ”

 

“ 그냥 말장난이에요. 국장한테 트집 잡힐까봐... ”

 

“ 난 블린만 구워주면 되는 거지? ”

 

“ 딸기랑 크림 넣어서 돌돌 말아 달라고 하던데... 그러면 어려울까요? ”

 

“ 어렵긴. 식은 죽 먹기지. 음료수는 이거 하나야? ”

 

“ 뜨거운 물 계속 끓여주기도 힘들고 시간도 없으니까 차는 안 팔 거고요, 그냥 이 탄산수에 딸기 시럽 섞어주기로 했어요. ”

 

 

보랴는 딸기 시럽의 맛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음, 괜찮네. 이 시럽 누가 만들었냐? ”

 

“ 리자네 집에서 만든 거래요. ”

 

“ 아, 어제 같이 있던 그 금발 아가씨? 걔 귀엽더라. 너랑 사귀냐? ”

 

“ 아니에요, 그냥 동료예요. ”

 

“ 쯧... 발랄하고 귀엽던데 노력 좀 해보지 그러냐. 안 그래도 로만이 맨날 걱정하던데, 너 독수공방한지 오래 된 것 같다고. 이런 시럽 만들 줄 아는 여자라면 참 괜찮은 건데. ”

 

“ 리자가 만든 게 아니고 리자 어머니가 만든 거랬어요. ”

 

에휴, 넌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듣냐! 사셴카는 너보고 착하고 성실하고 어딜 보나 일등 신랑감이라면서 널 못 알아보는 여자들이 이상하다고 그러던데. ”

 

 

베르닌은 알렉산드라가 그런 말을 해줬다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쑥스러워서 물통에 시럽을 부어서 휘휘 섞으며 딴청을 부렸다. 보랴가 맛을 보더니 그 정도 배합이면 됐다고 해서 열심히 섞은 후 탄산이 빠질까봐 뚜껑을 꼭 닫아놓았다.

 

 

그때 리자와 알렉산드라가 나타났다. 베르닌과 보랴는 둘 다 눈이 등잔만큼 커졌다. 리자가 쾌활하게 소리쳤다.

 

 

“ 다냐, 우리 어때요? ”

 

“ 어, 저... 어... ”

 

 

베르닌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보랴도 마찬가지였다. 리자와 알렉산드라는 단을 접어 올려 아주 짧아진 원피스에 딸기 무늬를 그려놓은 에이프런을 두르고 긴 머리를 양쪽으로 높이 올려 묶어 토끼 머리를 하고 있었다. 화장도 곱게 하고 기다란 속눈썹을 달고 입술을 빨간 하트 모양으로 칠하고 있었다. 리자는 방글방글 웃고 있었지만 알렉산드라는 어색한 듯 뺨을 붉히며 쭈뼛거렸다. 보랴의 눈치를 보면서 종알거렸다.

 

 

“ 보르카, 나 너무 이상하지? ”

 

“ 아, 아니... ”

 

“ 역시 이상하구나... ”

 

아니야! 누가 이런 걸 보고 이상하다고 해! 이걸 보고 넋이 안 나가면 사내가 아니야! 진짜 예쁘단 말이야!

 

 

보랴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알렉산드라를 번쩍 안고 빙글빙글 돌리며 펄쩍 뛰었다. 알렉산드라는 창피하다며 꺅꺅거리고 보랴는 아랑곳하지 않고 키스를 하고 난리였다. 리자가 깔깔 웃으며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다냐, 당신은 어때요? ”

 

“ 어... 어... 저기요... 어어... ”

 

“ 어휴, 그게 뭐예요! 보랴는 예쁘다고 했는데! 알렉산드라 언니만 예쁘고 나는 안 예쁘다는 거예요? ”

 

“ 아, 아니요... 저기... 예쁜데요... 너무 낯설어서... 어... ”

 

“ 맘에 안 드는 거구나! ”

 

“ 아니, 아니에요. 누가 그래요. 그런 게 아니고요... 이런 거 처음 봐서 그래요. 저... 근데 치마 너무 짧은 거 아니에요? 저기... 극장도 아닌데 좀 야한 거 같은데... ”

 

“ 맙소사, 다냐... 당신 모스크바에서 공부한 사람이 왜 이렇게 보수적이에요? 그냥 솔직히 말해요, 맘에 안 든다고. 이 스타일이 나랑 안 어울리나보네요. 거울 볼 땐 괜찮아 보였는데 남자들 눈엔 별로인가... 알렉산드라 언니는 아담하니까 어울리는데 난 아닌가보네요. 이런 스타일 소화하기엔 다리가 너무 긴가... ”

 

 

리자가 금세 풀이 죽었다. 땋아 올린 머리를 잡아당기더니 에이프런도 풀어버리려고 했다. 베르닌은 어쩔 줄을 몰랐다. 반쯤 풀어진 에이프런 끈을 다시 매주면서 더듬거렸다.

 

 

“ 아니에요, 리자. 진짜 그게 아니에요. 잘 어울려요. 저, 난 당신이 이런 모습을 한 걸 본 적이 없어서... 그게 아니고, 저... 바자회에 남자들도 많이 오니까... 저쪽 부스에서는 술도 팔잖아요. 남자들은 취하면 예쁜 여자들한테 괜히 못살게 굴고 그러니까... 좀 걱정돼서. 알렉산드라는 보랴가 있으니까 괜찮지만... ”

 

“ 그럼 나 예쁜 거예요? ”

 

 

리자가 언제 풀이 죽었느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베르닌은 매우 당황했다.

 

 

“ 어, 예... 근데 원래 예뻤으니까 저기... ”

 

“ 아유, 당신 너무 웃겨요. 이래서 꽃돌이 감독님이 당신이랑 그렇게 착 붙어 다니는 거군요. 말도 잘 듣고. ”

 

 

리자는 까르르 웃더니 베르닌의 뺨에 뽀뽀를 하고는 좌판에 놓인 물건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어쩐지 더욱 쑥스러워져서 종이컵들만 잔뜩 꺼내 늘어놓았다.

 

 

 

 

*   *   *

 

 

 

 

바자회는 2시에 시작되었다. 주민들과 공공기관 직원들이 많이 왔다. 리자의 자본주의식 패키지 판매 전략은 놀랍게도 주효했다. 중앙에 있는 부스라 위치적 이점도 있었지만 천하일미 요리대회 준우승자인 보랴가 구워주는 블린이라는 강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리본 달린 병에 들어 있는 딸기 사탕은 몇 배로 먹음직스러워 보였고 무엇보다도 알렉산드라와 리자의 딸기 아가씨 분장이 대히트를 쳤다. KGB 부스에 가면 딸기 앞치마를 두르고 토끼 머리를 한 귀여운 아가씨들이 맛있는 블린과 딸기 탄산수를 팔고 있다는 소문이 금세 좍 퍼졌다. 남자들이 줄을 섰다. 알렉산드라는 보랴의 옆에서 블린을 접시에 담고 탄산수를 따라주었고 리자는 딸기 사탕과 티셔츠 패키지를 홍보했다.

 

 

“ 와, 이 티셔츠 예쁘다. 얼마에요? ”

 

“ 티셔츠 한 장에 20루블이에요. ”

 

“ 좀 비싼데... ”

 

“ 이거 손으로 그린 딸기예요. 방수물감이라 지워지지도 않고요. 사탕 한 병에 10루블, 티셔츠 한 장에 20루블이지만 사탕이랑 티셔츠를 같이 하시면 25루블에 드려요. 어머, 그러고 보니 딸기 블린 세트 드셨죠? 블린 드신 분들은 사탕이랑 티셔츠를 20루블에 드려요. ”

 

“ 어, 점점 싸지네... 그러면 블린 먹고 사탕 먹고 티셔츠 사는 게 이득인 거네! ”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블린과 사탕과 티셔츠 패키지가 불티나게 팔렸다. 토끼 머리를 한 자그마한 알렉산드라의 앙증맞은 모습과 늘씬한 리자의 모델 같은 자태 때문에 평소에는 바자회에 관심도 없었던 젊은 남자들도 줄줄이 몰려왔다. 보랴는 알렉산드라의 전화번호를 묻는 청년들에게 이따금 도끼눈을 떴지만 그래도 즐거운 듯 빙긋빙긋 웃으며 손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블린을 구워서 딸기와 크림을 넣어 휙휙 말았다. 남자들이 사진 좀 같이 찍으면 안 되느냐고 졸라대자 당찬 리자는 ‘패키지 구매하신 분들하고만 찍어요!’ 하고 소리쳤다.

 

 

 

베르닌은 곁에서 물건을 팔고 계산을 하고 장부를 적느라 정신이 없었다. 부스가 성황을 이루자 들뜬 스페호프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고 직원들 몇 명을 보내서 장부 정리와 계산, 줄 세우기를 돕게 했다.

 

 

잘했네, 잘했어! 자네들이 최고일세! 다닐, 리자베타, 알렉산드라! 내 자네들을 기억해 두겠네! 그래, 다닐. 지금까지 매상이 얼마나 올랐나? ”

 

“ 그, 글쎄요. 지금 너무 바빠서. 아마 천 루블 넘게 올랐을 겁니다. ”

 

“ 좋아! 묶음 판매가 다 안 되더라도 티셔츠만 다 팔면 2천 루블 가까이 되겠군! 그러면 우리가 1위일세! 지금 다른 부스들은 죽을 쑤고 있어! 저 꼴 보기 싫은 극장도 천벌을 받았는지 지금 파리만 날리고 있다네! 우리가 1위 한번 해보세! 아니, 블리즈네초프 의장이잖아! 아이고, 이리나도 같이 왔군! ”

 

 

스페호프는 어슬렁어슬렁 다가온 의회 의장에게 달려갔다. 바자회 추진위원장이자 공산당 부녀회장인 의장 부인 이리나도 함께였다. 이리나는 가브릴로프에서 제일 가는 노멘클라투라인 돈초프 가문 출신으로 굉장한 여장부였다. 타지 출신인 남편 블리즈네초프도 사실은 그녀가 뒤를 봐줘서 의회 의장 자리를 꿰찼다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다. 가브릴로프에는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노멘클라투라 가문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렐랴의 비슈네프 가문이었고 다른 하나가 돈초프였다. 특히 최근 10여년 동안은 후자의 재력과 정치력이 월등해져 있었다. KGB와 의회는 동등한 위치라면서 의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스페호프 국장마저도 이리나의 비위만은 거스르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했다.

 

 

스페호프의 에스코트를 받아 이리나가 가까이 오자 베르닌은 의장이 공처가란 소문이 사실인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50대 초반의 이리나는 굉장한 거구의 금발 머리 아주머니로 보라색 눈 화장을 하고 입술을 검정색에 가까운 빨간색으로 칠한 데다 볼연지도 분홍색으로 세심하게 바르고 연두색 재킷에 노란 원피스, 빨간 구두 등 그야말로 총천연색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블리즈네초프 의장도 뚱뚱한 편이었지만 아내 곁에 서자 아담해보일 지경이었다.

 

 

“ 어흠, 그렇군. 이것은 정말로 검은 숲 딸기 생산에 도움이 되겠군요. 이 딸기는 검은 숲에서 따온 것인지? ”

 

“ 네, 의장님! 제가 직접 따온 거예요. 굉장히 맛있어요. 블린 드셔보세요! 이리나 표도로브나, 여기 포크 드릴게요. ”

 

 

리자가 방긋방긋 웃으면서 의장 부부에게 블린 접시를 두 개 내밀었다. 알렉산드라가 급히 딸기 탄산수도 두 컵 따랐다. 의장은 원래 식욕이 왕성한 사람이었으므로 거의 씹지도 않고 딸기 크림 블린을 꿀떡꿀떡 삼키고 음료수도 후루룩 마셨다. 이리나는 블린을 우물우물 먹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음, 맛있네. 아, 당신이었군요, 보랴. 어쩐지 맛있더라니. 그런데 아가씨들은 꼭 이렇게 꾸미고 있어야 하나? 여기는 애들도 오는데 치마가 너무 짧은 것 같군. ”

 

 

이리나가 알렉산드라와 리자를 째려보았다. 의장이 아까부터 두 아가씨의 다리를 힐끔거리는 게 영 못마땅했던 것 같았다. 리자가 당황해서 다리를 움츠렸지만 그래도 회사 경험이 더 많은 알렉산드라가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 그러네요, 이리나 표도로브나. 저희 생각이 좀 짧았네요. 앞치마 단을 좀 내릴게요. 이 사탕이랑 티셔츠 맘에 드시면 챙겨드릴게요. ”

 

 

이리나는 리본 달린 병 두 개와 티셔츠 두 장을 낚아채면서도 쌀쌀맞게 대꾸했다.

 

 

“ 꼭 맘에 드는 건 아니고. 딸기 무늬가 너무 알록달록해서 애들한테나 어울릴 것 같긴 하지만 성의를 봐서 가져가겠어요. 근데 티셔츠가 애들 손바닥만 해서 나한테는 맞지도 않겠네! ”

 

“ 어머나, 아니에요. 지금 고르신 건 애들용이라 그래요. 여기 성인용은 잘 맞으실 거예요. 피부가 하얗고 화사한 편이시니 잘 어울리실 거예요. ”

 

 

알렉산드라는 급하게 제일 큰 티셔츠 두 장을 꺼내서 남아 있던 녹색 리본으로 돌돌 말아 건넸다. 베르닌은 그녀가 ‘제일 큰’이란 단어 대신 교묘하게 ‘애들용’, ‘성인용’이란 단어를 쓰는 것에 감탄했다. 이리나는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티셔츠를 집어서 몸에 대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블린을 두 접시째 먹는 중인 의장의 손목을 확 잡아끌었다.

 

 

당신 그만 좀 먹어요! 다른 부스도 가봐야죠! 하여튼 수고하셨네요,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이런 추세라면 보안위원회 부스가 1등을 하겠어요. 대체 극장은 오늘 왜 저 모양인지... 아니, 이렇게 중요한 바자회를 여는데 당연히 예술감독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극장장은 앞장서서 물건 팔고 있는데 미샤는 코빼기도 안보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무용수들까지 전부 휴가를 보내다니요! 정말 미샤는 아무리 잘났어도 그렇지 우리 당과 부녀회를 어떻게 보는 건지...

 

 

이리나가 콧김을 푸르르 내뿜으며 또각또각 가버렸다. 의장은 접시를 내려놓고 알렉산드라와 리자에게 벙글벙글 웃으며 참 맛있었다고 칭찬하고는 스페호프에게 변명조로 말했다.

 

 

“ 이리나 말투에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블라지미르. 방금 극장 부스 갔다가 화가 나서 저런다네. 그 친구가 사인회를 할 줄 알고 은근히 기대했던 모양이야. 에휴, 여편네들이란... 그 망할 놈의 반동분자가 뭐가 좋다고 그저 얼굴 반반하면 다 되는 줄 알고... 하여튼 여자들이란 이해가 안 된다니까. 하여튼 야스민이 온천에 갔다고 하니 오늘 극장 부스는 매상이고 뭐고 망했고 자네 부스가 우승할 것 같으이. 미리 축하하네. 허참, 그 블린 정말 맛있군. 열 접시라도 먹겠는데 마누라가 난리를 치니... 잘 있어요, 예쁜 아가씨들! ”

 

 

의장 부부가 사라진 후 스페호프는 더더욱 신이 났다. 드디어 우승이라면서 역시 대 KGB의 능력은 뛰어나다고 껄껄 웃었다. 베르닌에게도 그 불여우 감시 때문에 고생만 죽어라 했는데 여기서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극장 부스가 죽을 쑤고 있는 것이 특히 맘에 드는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정신없이 계산을 하고 거스름돈을 내주다가 보랴가 반죽을 새로 하느라 잠깐 틈이 생겼을 때 알렉산드라에게 물었다.

 

 

“ 근데 극장 부스는 왜 죽을 쑤고 있는 거예요? 미샤는 작년에도 없었으니까 변동 요인이 아니고. 무용수들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사인회가 그렇게 중요해요? ”

 

“ 중요하긴 하지. 왜 우리가 이렇게 딸기 아가씨 노릇을 하고 있겠어. 사실 리자도 작년 극장 부스의 사인회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거거든. 근데 그것보다도... 극장은 원래 좋은 물건들이 많았는데 올해는 진짜 뭐가 없더라고. 그래서 파리 날리고 있어. ”

 

 

그때 보랴가 다시 블린을 굽기 시작했다. 계산을 하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 아니, 다냐. 소문난 딸기 부스 운영자가 바로 당신이라니! 나참, 생각지도 않은 재주가 있었군요! ”

 

 

류드밀라였다. 이미 딸기 사탕이 든 병과 티셔츠를 가방에 쑤셔 넣고 있었다. 딸기 블린은 다 해치웠는지 음료수를 마시면서 맛있다며 웃었다.

 

 

“ 아, 류다! 안 그래도 극장 부스 얘기하고 있었어요. ”

 

“ 음, 우리 부스는 올해는 공쳤어요. 일단 무용수들이 전부 휴가 가서 얼굴마담이 없잖아요. 그리고 이번에는 무대 의상이나 장신구 같은 건 하나도 못 내놨어요. 작년까지 내놓은 의상이랑 장신구들, 사실은 전부 예전에 무대 올리다가 전임 감독이 레퍼토리에서 빼버린 작품들에서 야금야금 갖다 팔았던 거였어요.

그 사실을 알고 감독님이 엄청 화냈거든요. 의상이랑 장신구 새로 제작하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 왜 있는 것들을 다 헐값에 갖다 팔았느냐,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하고 불을 뿜었어요. 안 그래도 지난번 돈키호테 다시 올릴 때 키트리부터 시작해서 투우사랑 요정 의상들이 없어서 추가 제작을 했거든요. 근데 감독님은 라 바야데르를 다시 올리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그 주인공 의상들이 엄청 화려하잖아요, 터번이랑 아랍 팬츠랑 팔찌들 작년에 엄청 비싸게 팔렸거든요. 작년 기부 목록을 보고 감독님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올해는 발레 작품 관련 물품들은 기부 금지시켰어요. 오페라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부스에 내놓을 게 뭐가 있겠어요. 기껏해야 사진 몇 장, 토슈즈 한두 켤레, 오페라 글라스 두어 개랑 오래된 팸플릿들 정도라고요. 사무국 말단 행정직원 두 명이 팔고 있는데 무용수들 외모랑 비교가 되나요. 게다가 여기서 이렇게 귀여운 딸기 아가씨들이 맛있는 걸 파는데 다들 여기로 몰리는 게 당연하죠. 나 같아도 여기로 오겠네. ”

 

“ 아, 그렇구나... 그 녀석 때문이구나.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네 부스가 우승하면 모든 게 왕재수 덕이란 생각이 들었다. 티셔츠라도 한 장 챙겨줘야 하나 싶었다. 류다는 딸기 탄산수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쪼로록 마신 후 한숨을 쉬었다.

 

 

“ 근데 문제는 우리 극장장이라니까요. 3년 연속 우승해서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이번에 이렇게 파리 날리고 있으니까 지금 열 받아서 펄펄 뛰고 있어요. 미샤를 엄청 욕하고 있어요. 물건을 못 내놓게 했으면 무용수를 내놓든가 자기가 사인회라도 했어야지 팔자 좋게 온천에 갔다고요. 다른 부스들 돌아다니면서 잘 되는 거 보고 얼마나 화를 내고 있는지... ”

 

“ 으음, 윗분들은 다 똑같군요. ”

 

“ 그러게 말이에요. 그래도 자기가 양심이 있으면 우리 감독님한테 화내면 안 되죠. 파리 날리던 극장 매일같이 매진시켜주고 있는 게 누군데. 자기 팔자에 언제 크레믈린 의원님들이 줄줄이 와서 악수를 해보겠어요! 다 미샤 덕분이지! 어머나, 결국은 가져왔네... 감독님한테 말도 안 하고!

 

 

류다가 극장 부스 쪽을 가리키며 펄쩍 뛰었다. 젊은 여직원 하나가 구름처럼 스카프를 늘어뜨리며 부스로 들어가고 있었다.

 

 

“ 저게 뭔데요? ”

 

미셴카 스카프요! 하도 물건도 없고 손님도 없으니까 극장장이 열 받아서 자기 비서한테 감독실에 가서 미샤 스카프랑 셔츠라도 가져오라고 했거든요. 내가 안 된다고 했는데 극장장이 나한테 잘리고 싶으냐고 소리 질러서 못 막았어요. ”

 

“ 으아... 그 녀석 자기 옷 손대는 거 진짜 싫어하는데... 설마 지금 미샤 옷을 팔려고 하는 거예요? ”

 

“ 그런가 봐요. ”

 

“ 아아... 저거 다 아르마나 프로도 에르미 그런 건데... 외제에 엄청 비싼 것들이랬는데... ”

 

“ 어휴, 어떻게라도 막아봐야겠어요. 하여튼 잘 먹었어요! ”

 

 

류드밀라가 극장 부스로 뛰어간 후 다시 손님이 몰려서 베르닌은 정신없이 일했다. 그때 귀에 익은 또렷하고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머, 다냐! 세상에, KGB 부스에서 이런 근사한 기획을 하다니! 보랴를 섭외한 건 신의 한 수네요! 블린 너무 맛있어요! ”

 

 

렐랴였다. 한 손에 돌돌 말린 딸기 블린 접시, 다른 손에는 음료수 잔을 들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베르닌은 숨이 턱 막혔다.

 

 

“ 아, 안녕하세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

 

“ 아휴, 그렇게 여러 번 봤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거예요! 그냥 렐랴라고 하라니까요. 보랴, 블린 최고예요! ”

 

 

보랴도 바쁘게 블린을 굽는 와중에 렐랴에게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렐랴는 순식간에 블린을 해치우더니 접시를 내려놓고 딸기사탕이 든 병과 티셔츠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 어머나, 아이디어 진짜 좋네요. 사탕은 애들 먹는 거지만 병이랑 리본을 매치하니까 진짜 고급으로 보여요. 이거 누구 아이디어에요? ”

 

“ 어, 여, 여기... 리자가 낸 아이디어예요. 이쪽은 알렉산드라고요. ”

 

“ 안녕하세요, 리자! 알렉산드라! 우와, 스타일 너무 좋아요! 둘 다 정말 예뻐요! 토끼 머리랑 그 앞치마 너무 잘 어울리네요. ”

 

 

렐랴의 칭찬에 알렉산드라와 리자가 뛸 듯이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렐랴는 가브릴로프 패션과 유행을 선도하는 최고의 미녀였기 때문이다. 렐랴는 사탕과 티셔츠 패키지를 세 개나 사더니 리자에게 자기도 딸기 아가씨 스타일을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리자는 렐랴와 함께 주최측 천막으로 사라지고 베르닌이 대신 블린을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 그는 리자처럼 손이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금세 주문이 밀리기 시작했다.

 

 

“ 아까는 딸기 아가씨가 둘이었는데 왜 지금은 하나예요! ”

 

“ 그러게! 왜 갑자기 시커먼 총각이 블린을 말아주는 거야! ”

 

 

리자와 알렉산드라 때문에 줄을 섰던 남자들은 투덜댔지만 의외로 깔깔 웃는 여자들도 있었다.

 

 

“ 어머 어머, 남자도 있네! 덩치 큰 남자가 딸기 티셔츠 입으니까 색다르고 귀여워요! 사진 좀 찍어요! ”

 

 

베르닌은 리자의 본을 따서 ‘패키지 구매하셔야 사진 찍어드려요!’ 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쑥스럽고 부끄러워서 버벅거리다가 결국 블린 접시와 음료수 컵을 든 아주머니들과 소녀들 사이에 끼어서 사진까지 찍혔다.

 

 

다행히 잠시 후 리자가 돌아왔다. 게다가 탐스러운 밤색 머리를 토끼처럼 양쪽으로 땋아 올리고 딸기 무늬 에이프런을 입은 렐랴와 함께였다! 렐랴는 리자와 알렉산드라 곁에서 사이좋게 사진을 찍었고 새로운 스타일에 신이 난 나머지 자원해서 부스에서 티셔츠 판매를 돕기까지 했다!

 

렐랴가 가세하자 KGB 부스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남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미녀 3인방의 딸기 부스라면서 들썩였다. 티셔츠는 이미 100장 모두 팔렸고 딸기 사탕과 보랴의 블린 반죽과 딸기 시럽도 동이 났다. 아쉬움에 몸부림치던 남자들은 렐랴와 리자, 알렉산드라 셋과 사진을 찍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베르닌이 ‘물건 다 팔렸으니까 이제 끝났어요!’라고 외치려는데 수완 좋은 리자가 냉큼 소리쳤다.

 

 

딸기 아가씨들과 사진 한 장 찍는데 5루블이에요! 선착순 10명만 받아요! ”

 

 

보랴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알렉산드라의 윙크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원체 예뻐서 언제 어디서나 사진 찍히는데 익숙한 렐랴도 방긋 웃으며 어쨌든 바자회의 기부 목표는 좋은 거니까 동참하겠다고 나섰다. 베르닌은 졸지에 선착순 10명과 딸기 아가씨들을 찍어주는 사진사가 되고 말았다. 10명의 촬영이 끝나자 보랴가 알렉산드라의 앞을 가로막으며 버럭 소리쳤다.

 

 

이제 끝났어요! 사진 촬영 끝! 영업 종료! ”

 

 

남자들이 항의하려 했지만 보랴의 험상궂은 표정과 우람한 팔뚝을 보고 투덜거리며 물러섰다. 그동안 베르닌은 상자에 돈을 쓸어 담았고 보조 직원이 휘갈겨 쓴 장부를 넘겨받아 금액을 확인했다. 리자와 알렉산드라는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접시와 컵을 한쪽으로 쓸어 모았다. 토끼 머리에 딸기 에이프런을 두른 아름다운 렐랴가 베르닌의 팔을 잡아당겼다.

 

 

“ 다냐, 진짜 재미있었어요! 이렇게 재미있는 바자회는 처음이었어요. 당신 고리타분한 줄 알았는데 굉장히 참신하고 재밌는 면도 있네요! ”

 

“ 어...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이건 리자 아이디어예요. 저는 그냥... ”

 

“ 렐랴라고 부르라니까... 아휴, 당신 정말. 근데 그 딸기 셔츠 나름대로 어울리네요. 맨날 우중충한 아가일 무늬 셔츠에 손목 토시나 하고 다니더니... 앞으로 이렇게 화사한 옷 입어요. 훨씬 나아요. 얼굴도 살고. ”

 

“ 어... 어... 저... 딸기를 좋아하시나보네요... ”

 

 

베르닌이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리자 렐랴가 은방울을 굴리는 듯 맑은 소리로 웃어댔다.

 

 

“ 미치겠네, 다냐! 아... 하여튼 당신 재밌어요. 혹시 스페호프가 괴롭히면 그냥 그만두고 우리 잡지사로 와요! 내가 당신 쓸게요! 안드레이가 짜증내긴 하겠지만... 당신이 오면 미샤랑 인터뷰하기도 더 수월할 텐데. ”

 

“ 예? 제가 비슈네브이 사드로... 다, 당신이 저를... 그런 생각만으로도... 하지만 저는 책상물... ”

 

 

베르닌이 당황하고도 놀라서 얼굴이 빨개지며 더욱 더듬거리자 렐랴는 더욱 까르르 웃어댔다. 옆에서 리자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

 

 

“ 농담이죠, 렐랴? 다냐는 우리 KGB에서 촉망받는 인재인데... 모스크바 법학대 수석 졸업자인데 문예지 사무실에서 비서 노릇이라니요... 다냐는 공무원이란 말이에요. 다냐를 뺏길 수는 없어요. ”

 

“ 어... 저, 리자... 난 수석 졸업이 아니고요... 여기 고등학교 2등 졸업... ”

 

“ 어쨌든 엘리트잖아요! 다냐는 KGB의 기둥이란 말이에요! ”

 

 

리자가 정색을 하자 렐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아, 그렇군요. 난 다냐가 매일 스페호프한테 들들 볶이고 서류철에 구멍만 뚫고 있길래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건데... 알았어요, 리자. 흥분하지 마세요. 그래도 나 농담한 거 아닌데... ”

 

 

알렉산드라가 끼어들었다.

 

 

“ 다냐야 워낙 성격도 좋고 성실하니까 어딜 가도 환영받을 거예요. 판매 도와줘서 고마워요, 렐랴. 덕분에 금방 매진됐네요. 너무 즐거웠어요. ”

 

 

정색하며 따지던 리자 때문에 좀 샐쭉해졌던 렐랴는 알렉산드라의 상냥한 말에 다시 웃었다.

 

 

“ 나도 즐거웠어요. KGB엔 책상물림들과 무지막지한 스파이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예쁘고 귀여운 아가씨들도 있다니 너무 놀랐어요. 나중에 두 분 인터뷰하고 싶어요! 언제라도 우리 사무실에 놀러 오세요. 보랴랑 다냐도요! 직접 구운 초콜릿 쿠키를 대접할게요! ”

 

 

렐랴의 초콜릿 쿠키를 떠올리자 베르닌은 벌써부터 군침이 돌았고 정신이 혼미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렐랴가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리자가 발을 꽉 밟았지만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렐랴가 펄쩍 뛰었다.

 

 

어머나, 극장 부스에 걸어놓은 거 저거 뭐지? 어머, 저건 에르메스잖아! 잠깐 저기 좀 다녀올게요!

 

 

렐랴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극장 부스 드높이 걸려서 바람결에 펄럭이는 아름다운 오렌지색과 녹색의 스카프를 보자 리자와 알렉산드라도 눈이 동그래지더니 ‘우리도 잠깐 갔다 오자!’ 하면서 뛰쳐나갔다. 졸지에 둘만 남은 베르닌과 보랴는 서로를 마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   *   *

 

 

 

 

 

가브릴로프 극장장이자 렐랴의 외삼촌인 알렉산드르 먀흐킨은 행정가였기 때문에 예술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간섭하지 않는 편이었고 스페호프처럼 부하들을 들들 볶으며 당의 기치를 강요하는 강성 기관장도 아니었다. 우유부단한 성격에 자기 안위와 자리보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형적인 관료 타입이었다. 그러나 그런 먀흐킨도 바자회 우승만은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극장은 문화국 소속이라 굵직굵직한 정치 경제 기관들에 비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공공기관이 모이는 대회에서 하나라도 우위를 차지하고 싶은 것이 기관장의 속내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가을 체육대회 때도 포기하고 있다가 왕재수의 운동신경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자 부득부득 그를 모든 경기에 다 밀어 넣은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3년 연속 바자회 우승이라는 타이틀이야말로 먀흐킨의 은밀한 기쁨이었는데 난데없이 왕재수의 방해로 극장 부스는 파리만 날리고 어이없는 KGB 부스가 히트를 치고 있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이다.

 

 

급기야 그는 자신의 비서를 감독실로 보내 왕재수의 스카프 몇 장과 실크 셔츠 두 벌, 취임식 때 딱 한번 매고는 처박아둔 넥타이를 쓸어오게 했다. 그리고는 의욕 없이 서 있던 사무국 직원들을 내몰고 자기가 직접 판매대 앞에 서더니 스카프와 셔츠를 펄럭펄럭 흔들며 소리쳤다.

 

 

외제 명품이오! 레닌그라드 최고 멋쟁이가 몸에 걸쳤던 스카프와 셔츠, 넥타이! 우주 최강 꽃미남 미샤 야스민 감독이 어제까지 입었던 옷가지! 스카프 한 장에 200루블! 셔츠는 300루블! 넥타이 150루블! ”

 

 

여자들이 모여들며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다.

 

 

“ 우와, 꽃돌이 감독님 옷이래! ”

 

“ 꺄아, 저 스카프! 저거 프랑스제 명품 아니야? ”

 

“ 아악, 미샤가 입었던 거라니!!! 저건 무슨 일이 있어도 사야 해! ”

 

“ 근데 너무 비싸네... 바자회 물건이 이렇게 비싸면 어떻게 해... ”

 

“ 나스첸카! 나 50루블만 꿔주면 안되니? ”

 

 

여자들이 서로 지갑을 뒤지면서 난리를 쳤다. 베르닌과 보랴는 고개를 쭉 빼고 그 소란을 지켜보았다. 렐랴와 알렉산드라, 리자가 헐레벌떡 뛰어가서 여자들 사이로 끼어드는 게 보였다. 그때 스페호프가 베르닌의 곁으로 다가왔다.

 

 

“ 음, 우리는 이제 다 팔았나? ”

 

“ 예, 국장님. 매진입니다. 직원들의 기부물품이 남아 있습니다만 이것들은 전혀 팔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

 

“ 그래, 매상이 얼마나 올랐나? ”

 

“ 대략 2800루블 정도 됩니다. ”

 

“ 그래! 그러면 우리가 우승일 수밖에 없군. 먀흐킨이 지금 불여우의 옷쪼가리를 팔아보겠다고 난리인데 정신 나간 계집애들이 저걸 다 산다고 해도 스카프 세 장에 600루블, 셔츠 두 장 600루블, 거기에 넥타이 150루블이니 다 합치면 1350루블이고 거기에 자질구레한 거 더 팔아봤자 2000루블을 넘길 수는 없어. 이미 다른 부스들도 다 가봤네. 2500루블 넘는 부스는 안 나올 거야. 우리가 우승하는 걸세, 다닐! 정말 수고했네! 그리고 당신, 보리스! 수고했소. 당과 KGB는 당신의 노고를 잊지 않을 것이오! ”

 

 

보랴는 당과 KGB 운운하는 말에 콧방귀를 뀌려다가 베르닌을 생각해서 참는 것처럼 보였다. 베르닌은 국장이 보랴의 부업인 밀수업에 대해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조마조마해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그나마도 저렴했던 넥타이가 팔려나갔다. 구매에 성공한 어떤 여자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 넥타이를 꼭 껴안고 뺨에 비비고 뽀뽀를 했다. 다른 여자들이 부러워하며 그녀를 둘러싸고는 ‘어머나, 좋겠다!’, ‘우와, 넥타이 너무 근사하다’, ‘아아, 미샤가 목에 맸던 타이라니!’, ‘향기 너무 좋아!’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신이 난 극장장이 스카프와 셔츠도 팔아보려고 목청을 높이는데 갑자기 꺅꺅 하고 여자들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디선가 후광이 일면서 왕재수가 불쑥 나타났다. 온천에서 막 돌아오면서 광장을 지나치던 길인 것 같았다. 왕재수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 내 스카프!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야!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 대체 뭐하는 거예요! ”

 

 

먀흐킨이 화들짝 놀랐다. 스카프와 셔츠를 내려놓으며 변명을 했다.

 

 

“ 아, 아니 그게... 자네가 무용수들도 못 나오게 하고 물건도 기부 못하게 해서 워낙 우리 부스가 죽을 쑤니까 자네 옷가지라도 몇 개... 이거 전부 자네는 안 입는 거 아닌가... 자네는 워낙 옷이 많으니까... ”

 

무슨 소리예요! 이거 다 내가 좋아하는 건데! 누구 맘대로 남의 스카프랑 옷을 팔아요! 이리 줘요!

 

 

왕재수가 정색을 하면서 스카프 세 장과 셔츠 두 장을 낚아챘다. 먀흐킨이 조국과 당과 극장의 명예 어쩌고 하며 어떻게든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왕재수는 발칵 화를 냈다.

 

 

극장의 명예는 작품으로 말하는 거지 남의 옷을 도둑질해서 팔아먹으면서 무슨 명예 타령이에요! 당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러면서 왕재수는 스카프와 셔츠를 둘둘 말아서 마침 옆에 다가온 류드밀라에게 감독실에 도로 갖다놓으라고 건네주었다. 류드밀라는 잽싸게 옷을 챙겨서 부스 뒤로 사라져버렸다. 모여들었던 여자들이 한숨을 쉬고 실망하며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먀흐킨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자네... 자네... 이건 용납할 수 없어! 아무리 자네가 천재에 매일 공연을 매진시켜도 그렇지...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야! 우리 극장은 3년 동안 바자회 우승을 했단 말이야! 이렇게 허무하게 몰락할 수는 없어! 그것도 저 빌어먹을 KGB의 딸기 아가씬지 뭔지한테 당할 수는 없다고! 좋아! 보안위원회에서 딸기 아가씨를 내세운다면 우리한텐 더 좋은 게 있지!

 

 

 

그러더니 먀흐킨은 사무국에서 제일 덩치 좋은 남자 직원 두 명을 불러내서 잠깐 속닥속닥했다. 옷을 되찾은 왕재수가 막 부스를 빠져나가려는데 덩치 좋은 두 남자가 뒤에서 그를 붙잡더니 번쩍 들어서 좌판 위에 올려놓았다. 당황한 왕재수가 ‘뭐야!’ 하고 소리치려는데 먀흐킨이 있는 목청 없는 목청을 다 짜내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가브릴로프 극장 부스 마감 행사입니다!

연방과 우리 가브릴로프의 초특급 슈퍼스타! 우주 최강 꽃미남! 눈빛만으로도 여심을 버터처럼 녹이는 최고의 왕자님! 우리의 미샤 야스민 감독입니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기회! 우리의 미셴카와의 데이트를 건 경매!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숙녀에게는 미샤를 집으로 초대해 저녁 식사를 만들어주고 행복한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어서 참여하세요! 금액은 500루블부터! 시작!

 

 

왕재수가 너무 놀라서 뭐라고 항의하려는 순간 여기저기서 여자들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 500! ”

 

“ 550! ”

 

“ 600! ”

 

“ 800! ”

 

“ 1000! ”

 

“ 네, 1000루블 나왔습니다! ”

 

“ 1100! ”

 

1500!

 

“ 헉, 1500이라니... ”

 

“ 누구야? ”

 

 

다들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먀흐킨조차도 깜짝 놀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미모의 조카딸인 렐랴가 토끼 머리에 딸기 에이프런 차림으로 달려와서 1500루블을 불렀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그야말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왕재수가 미약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 아, 아니! 누구 맘대로 날 팔아! 나 안 해! 나 이런 거 안 해! ”

 

시끄럽네! 무용수도 안 내주고 물건 기부도 못하게 하고 자기 옷도 못 팔게 했잖은가! 최소한의 감독 노릇은 해야 할 거 아닌가! 다 못하게 했으니 자네가 몸으로라도 때우게! 자, 1500까지 나왔습니다! 이거 다들 우리 미셴카의 진가를 몰라주는 거 아닙니까! 이런 우주 최강 꽃미남과 무슨 재주로 데이트를 하겠습니까! 지금밖에 기회가 없단 말입니다! ”

 

 

먀흐킨이 손뼉을 치며 부추겼다. 어떤 여자가 큰 결심을 한 듯 소리쳤다.

 

 

“ 처, 천 육백! ”

 

“ 천 칠백. ”

 

 

렐랴가 회색 눈을 반짝거리며 침착하게 맞섰다. 베르닌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어느새 옆으로 모여든 남자들 몇몇은 자신들의 우상인 렐랴가 우주 최강 꽃미남에게 거액을 내거는 모습에 놀라고 절망해서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 자, 천 칠백. 더 없습니까? ”

 

2천!

 

 

걸걸한 목소리에 모두가 너무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보라색 눈 화장과 분홍색 볼연지, 짙은 빨간색 입술에 연두색 재킷, 노란 원피스와 빨간 구두 차림의 의장 부인 이리나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당황한 의장이 곁에서 아내의 팔을 잡아당겼다.

 

 

“ 여, 여보... 당신 체통이 있지... 당신은 이 바자회 추진위원장이잖소... ”

 

시끄러워욧! 내가 전부터 미샤한테 저녁 좀 먹으러 오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맨날 바쁘다고 안 오고... 오늘은 어떻게든 미샤를 우리 집에 데려가야겠어요!

 

“ 하, 하지만 당신은 남편이 있고 그 남편이 바로 나... ”

 

누가 뭐래요! 아니, 누가 내 나이 반밖에 안 되는 예쁜 꼬마랑 잠이라도 자겠대요? 그냥 밥해주고 저녁 시간이나 같이 보내자는 거지! 당신 지금 유치하게 질투라도 하는 거냐고욧!

 

“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아아... ”

 

 

먀흐킨은 모른 척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 자아, 그러면 2천이 나왔습니다. 상당한 고액이군요. 더는 없는 것 같으니 그러면 이리나 표도로브나에게 낙찰을... ”

 

2천 2백.

 

 

렐랴가 결심한 듯 나섰다. 먀흐킨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렐렌카... 이제 그만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미샤는 네가 굳이 이렇게 안 해도 나중에 따로 저녁 식사를... ”

 

2천 2백이라고 했어요!

 

 

렐랴가 회색 눈에 불꽃을 이글거리며 소리쳤다. 두 명의 남자에게 붙들려서 좌판 위에 서 있는 왕재수는 대체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분간이 안 되는지 완전히 멍해진 표정이었다. 먀흐킨은 포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그러면 2천 2백... ”

 

3천!

 

 

이리나가 꽥 소리를 질렀다. 너무나 거액이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바자회에 온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렐랴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입술을 열었다. 막 ‘3천 백...’ 이라고 말하려는데 이리나가 렐랴를 똑바로 쏘아보더니 마녀처럼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똑바로 해, 렐랴! 잡지 문 닫고 싶어?

 

 

 

렐랴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라고 대들려고 했지만 허리에 손을 갖다 대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태세를 갖춘 이리나의 야수 같은 모습과 잡지 문 닫고 싶으냐는 협박에 질린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자존심이 팍 상한 듯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왕재수를 쳐다보며 억지로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 좋아요, 미셴카. 난 우리 바자회 목적을 생각해서 거액 기부를 해보려고 했던 건데 이리나 표도로브나가 더 봉사 정신이 투철하신가 보네요. 우리는 나중에 따로 봐요! ”

 

 

그리고는 렐랴가 포기했다. 먀흐킨이 신나게 소리쳤다.

 

 

그러면 3천 루블로 이리나 표도로브나가 우리 감독과 저녁 데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돈을 주시면 미샤를 보내드리지요!

 

 

이리나는 당당하게 걸어가더니 장부에 3천 루블이라고 적고 사인을 했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눈을 부라리며 어서 가서 3천 루블을 찾아오라고 명령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의 의장이 어깨를 떨어뜨리고 터벅터벅 은행으로 향했다. 먀흐킨은 이리나가 당연히 금액을 지불할 것을 믿는다며 그녀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현금이 도착하기 전에 왕재수를 건네주겠다고 했다.

 

 

완전히 넋이 나간 왕재수가 중얼거렸다.

 

 

“ 이게 뭐야... 아니야, 이건 꿈이야... 아니야... ”

 

이리 와요, 미셰츠카! 내가 전부터 그렇게 밥 좀 먹자고 했는데 매일매일 바쁘다고 도망가고! 우리 집에 가요! 내가 맛있는 거 해 줄 테니까! 돼지비계 절임에 기름 케익이랑 초콜릿 무스랑~ 아유, 정말 사내아이가 어쩌면 이렇게 예쁘담. 아이고, 우리 미셴카 이 피부 좀 봐! 매끈매끈하고 하얀 게 진짜 곱네! 내가 십년만 젊었어도...

 

 

이리나는 기쁨에 들떠서 우악스러운 팔로 왕재수의 허리를 꼭 껴안고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자기 차로 갔다. 왕재수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악당들! 이건 탄압이야! 예술가를 팔아넘기다니! 아아아!

 

 

 

 

 

*    *    *

 

 

 

 

 

그리하여 바자회는 끝났고 가브릴로프 극장이 3천 루블이 넘는 매상으로 4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KGB 부스는 2위에 머물렀다. 1위 발표와 시상은 원래 바자회 추진위원장인 이리나의 몫이었지만 그녀는 왕재수를 낚아채 이른 저녁 식사를 만들어주겠다며 이미 집으로 사라졌고 남편이자 의회 의장인 블리즈네초프는 3천 루블을 찾으러 가느라 역시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추진위 부위원장인 콤소몰 청년의장이 대신했다.

 

 

 먀흐킨은 감격해서 훨훨 날았고 이 기쁨을 가브릴로프 극장 식구들과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소리쳤다. 스페호프는 펄펄 뛰었지만 가브릴로프를 주름잡는 최고 가문의 이리나가 결정한 일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역시 반동분자 불여우가 만악의 근원이라며 이를 갈더니 두고 보자면서 부르르 떨며 사무실로 돌아가 버렸다.

 

 

 

베르닌은 장부와 2800루블, 남은 기부 물품들을 바자회 추진위원회에 모두 전달한 후 알렉산드라와 리자, 보랴와 함께 부스를 정리했다. 보랴는 시계를 보더니 아쉬워했다.

 

 

“ 벌써 다섯 시가 다 됐구만. 저녁 타임이라 난 들어가야겠다. 잔디밭에서 맥주라도 한 잔 하면 딱 좋겠는데... ”

 

“ 보랴, 정말 고마웠어요. 그렇게 맛있는 블린은 처음이었어요! ”

 

“ 맞아요! 극장장이 꽃돌이 감독님을 팔아먹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우승이었는데! 그래도 너무 재미있었어요! ”

 

 

리자가 보랴를 와락 껴안고 뺨에 뽀뽀를 했다. 보랴는 벙글벙글 웃었고 베르닌의 손을 꽉 잡아 흔들었다.

 

 

“ 그러게! 극장장 그놈이 머리는 좋다니까, 우리 애기를 이용하다니! 불쌍한 녀석... 이리나 요리 솜씨 최악인데... ”

 

“ 으윽... 분명히 돌아와서 나한테 다 화풀이하겠지...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벌써부터 ‘기름기!’, ‘시골!’ 하고 소리 지르며 애꿎은 자신에게 바가지 긁는 왕재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보랴는 쿡쿡 웃었고 프라이팬과 반죽 그릇을 챙겼다. 가기 전에 돌아서더니 알렉산드라를 꼭 껴안았다. 알렉산드라는 두 팔로 보랴의 목에 매달리며 뽀뽀를 했고 ‘있다가 봐, 보르카!’ 하고 인사를 했다.

 

 

 

보랴가 돌아간 후 베르닌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차에 실었다. 그때 리자가 투덜댔다.

 

 

우리 사무실 들어가지 말아요! 이렇게 고생했는데! 지금 들어가봤자 퇴근 시간이잖아요! ”

 

“ 그래! 리자 말이 맞아! 외부 행사 차출돼서 이렇게 일했는데 왜 또 사무실 들어가니! ”

 

“ 하, 하지만... 물건들도 갖다놔야 하고 전 일도 많이 밀려 있고... ”

 

“ 물건들이야 내일 캐비닛에 대충 쑤셔 박으면 되죠! 그리고 다냐! 당신이야말로 진짜 들어가면 안돼요! 보나마나 또 서류철에 파묻혀서 밀린 서무 일하느라 야근하고 밤 샐 거 아니에요! 오늘은 못 가요! 오늘은 끝! 딸기 아가씨들의 명령이에요! 날도 따뜻한데 우리 여기 잔디밭에 앉아서 맥주 딱 한잔씩만 마시고 가요! 아까 보랴가 우리 먹으라고 닭튀김 챙겨왔단 말이에요. ”

 

“ 맞아, 까맣게 잊고 있었네! 보르카가 만든 닭튀김은 식어도 진짜 맛있어. 우리 맥주랑 이거 먹자! ”

 

 

베르닌은 안된다고 하려고 했지만 알렉산드라가 딸기무늬 에이프런을 잔디밭에 펼쳐놓고는 종이봉지를 찢어서 그 안에 있던 황금빛 갈색의 바삭바삭한 닭튀김을 좌르르 쏟아놓자 그만 정신이 멍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베르닌은 잔디밭에 앉아 알렉산드라와 리자와 함께 맥주를 마시고 닭튀김을 먹었다. 맥주는 시원했고 닭튀김은 너무나 고소했다. 해는 서서히 넘어가고 있었지만 바람이 따스했고 부드러웠다. 정말 봄이 온 게 분명했다.

 

 

   

 

 

 

FIN

- 2015. 10. 4 ~ 10. 16 -

 

 

 

  ..

 

가브릴로프 극장장 먀흐킨은 본편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성격은 비슷한 점도 있고 좀 다른 점도 있지만.

 

..

 

초반에 서술된 왕재수의 신작 얘기는.. 그간 그 신작 올리려고 갖은 고생을 다 한 왕재수를 생각하면 신작을 근사하게 올리는 이야기를 1개 에피소드로 할애해 주는 게 맞는 것 같지만 그냥 넘어갔다. 그 이유는 본편의 주요 사건 중 하나가 미샤의 신작 이야기라서. 물론 본편에서 미샤가 준비하는 신작은 서무의 왕재수가 준비한 신작과는 내용도 형식도 완전히 다르지만. (근데 언제 쓰지...)

 

초반에 언급된 왕재수의 후원자들 이름들은 모두 본편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그 중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와 드미트리 마로조프는 미샤의 오래된 후원자이자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들이다.

 

..

 

나름대로 기분 풀려고 쓴 글인데 별 내용은 없었다만... 하여튼 35편을 조금 쓰고 있는 중인데 그건 언제 다 쓸지 모르겠네. 다음주까지 완결이 안되면 다른 글을 조금 올려보겠다.

 

..

 

글에 대한 이야기들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시고 절대로 가져가시거나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서무의 슬픔 시리즈 자체가 내가 원래 쓰고 있던 미샤가 나오는 본편이 너무 안 풀리는데다 직장에서 겪는 스트레스가 심해서 이를 풀어보고자 쓰기 시작한 외전이다. 그러나 이 외전 시리즈도 점점 계속되다 보니 어느새 꼬리를 쳐서 외전의 외전 격으로 번외편인 민담 패러디나 등장인물 문답 같은 것이 나왔고, 급기야 댓글들에서 탄생한 일명 우수한 단추인 드미트리 베르닌이 등장하게 되었다.

   

드미트리 베르닌은 다닐 베르닌의 분신 같은 존재로 이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일종의 평행우주 외전이어야 말이 잘 될 것 같다만, 30편에서 33편까지 총 4편의 드미트리 출연 에피소드를 쓰면서 나는 이것들을 정식 서무 시리즈로 생각하며 썼다. 드미트리는 그냥 다닐과 외모가 쌍둥이 같고 배경이 거의 비슷한 인물일 뿐이라고.

   

그렇게 우수한 단추 4부작은 완료가 되었지만, 사실 그 4부작에서 마무리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어서 이것을 별도의 에피소드라기보다는 33-1편으로 명명해 올린다. 이번 편은 읽는 사람에 따라 마음에 들 수도 있고 안 들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지 ㅠㅠ

   

그래도 재미있게 읽으세요!

 

** 초반부에서 스페호프가 말하는 '크레믈린'과 '스몰니'에 대해. 크레믈린은 모스크바에 있고 스몰니는 레닌그라드(현재의 페테르부르크)에 있다. 두 대도시의 정치 본거지이다.

 

 

* 이번 33-1편은 반드시 드미트리 베르닌이 나오는 30~33편을 먼저 읽어야 함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납치되었던 왕재수는 베르닌과 드미트리의 활약으로 무사히 구출된다. 다음날 아침 드미트리는 모스크바로 떠나고 왕재수는 이틀 앞으로 다가온 공연 준비에 여념이 없다, 베르닌은 그런 그의 곁을 지키다 스페호프의 갑작스런 호출을 받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 http://tveye.tistory.com/4062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2부) : http://tveye.tistory.com/4079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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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3-1

 

 

 

 

 

 

서무의 슬픔

- 도자기 인형 -

 

 

 

 

 

 

 

왕재수는 보르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9시에 집을 나섰다. 곧장 극장으로 가려고 했지만 베르닌이 단호하게 우겨서 병원에 들렀다. 다행히 체온과 맥박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스타브로프는 전날과 같은 약초즙을 베르닌에게 한 병 건네주면서 세 번으로 나눠서 먹이라고 했다. 왕재수에게 직접 주면 단숨에 전부 마셔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무용수들은 모두 나와 있었다. 자신들의 예술감독을 보자 벌떼처럼 모여들어 괜찮으냐고 묻고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지만 왕재수가 인상을 팍 쓰면서 리허설 준비하라고 소리치자 금세 조용해졌다. 공연이 이틀 후로 다가왔기 때문에 10시 반부터 스페이스 리허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최종 드레스 리허설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용수들이야 분장을 할 필요가 없었지만 무대 스태프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옆에서 리허설을 지켜보았다. 전에는 왕재수의 신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었다. 항상 토막토막 연습을 시켰기 때문이다. 고전 발레가 아니어서 이렇다 할 이야기도 없고 뭔가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물 흐르듯 이어지는 음악에 맞춰 계속되는 작품을 보자 놀랍게도 굉장히 재미있었고 심지어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설명을 전혀 듣지 않고서도 무대 위의 무용수들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사람의 몸을 가지고, 다양한 움직임을 통해 이런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처음으로 베르닌은 왜 사람들이 왕재수에게 무용수뿐만 아니라 안무가로서도 천재적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과 같은 문외한조차 넋을 잃고 집중해 보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반체제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검열국과 스페호프가 트집을 잡은 이유는 작품 자체가 아니라 왕재수에 대한 증오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왕재수는 중간 중간 짧은 지적을 하기도 하고 리허설을 잠깐씩 중단시키기도 했다.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매서웠다. 연습실에서나 무대 리허설 때는 언제나 그렇듯 불어와 러시아어를 마구 섞어 썼다. 동작이 틀리는 무용수는 그 자리에서 집어내 정확하게 교정했다. 물론 오케스트라도 피해가지 못했다. 코즐로프마저도 서너 차례 날선 지적을 받았다. 베르닌은 뭐가 잘못됐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왕재수의 교정을 받은 후 되풀이되는 무대는 놀랍게도 아까보다 더 보기 편하고 근사한 느낌이 들었다.

 

 

실제 공연은 한 시간 반짜리였지만 교정과 지적 탓에 1차 스페이스 리허설은 두 시간 반이 걸렸다. 왕재수는 무용수들에게 점심식사 후 2차 리허설을 할 거라고 예고했다. 무대 스태프들은 생각지 않은 반복 때문에 조금 툴툴댔지만 왕재수가 한번만 더 쫑알대면 드레스 리허설도 오늘 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자 금세 조용해졌다.

 

 

역시나 왕재수는 식사를 하러 나가지 않았다. 무대를 돌아다니며 동선 체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먼지투성이 작업복 차림의 그리고리가 올라오더니 깜짝 놀랄 만큼 상냥하게 말했다.

 

 

감독님, 잠깐만 무대 비워주세요. 조명 장치 쪽에 문제가 있어서 고쳐야 하거든요.

 

무슨 소리예요, 조명 정비한지 얼마나 됐다고. 당신은 조명 스태프도 아니잖아요.

 

메인 조명이랑 사이드 쪽 조명 고정 장치가 헐거워요. 아까부터 흔들리더라고요. 빨리 고쳐야 돼요. 안 그러면 위험하니까.

 

 

왕재수가 고개를 들어 조명을 확인하려는데 그리고리가 그의 팔을 잡더니 거의 안아 올리다시피 해서 무대 아래로 끌어내렸다. 불벼락을 내리겠거니 하는 베르닌의 예상과는 달리 왕재수는 고개를 쭉 빼고 조명 쪽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그리고리에게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물었다.

 

 

빠르면 30, 늦으면 한 시간은 걸리겠네요. 조명감독을 불러올까요? 아까 얘기하려고 했는데 얼굴도 안 보고 가버리더라고요. 스태프들은 우리 인부들을 무시하니까. 감독님이 얘기하셔야 할 것 같아요.

 

일단 먼저 고쳐요. 고친 다음에 조명감독한테 따로 얘기할 테니까.

 

, 그래도 될까요? 난 극장 스태프가 아니니...

 

조명 자체가 아니고 안전장치 손보는 거니까 괜찮아요. 발견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리가 다른 인부 하나와 함께 조명 장치를 고치는 동안 왕재수는 감독실로 갔다. 류드밀라에게서 일요일에 있었던 주요사항에 대해 보고를 받은 후 다시 나가려고 했기 때문에 베르닌이 그를 붙잡았다.

 

 

, 점심 먹어야 돼.

 

배 안 고픈데... 아침에 보르쉬 먹었잖아.

 

차이카. 스베촉. 내가 싸온 거. 세 개 중 하나 무조건 골라야 돼! 안 그러면 집으로 끌고 갈 거야!

 

 

왕재수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곧 포기하고 베르닌이 챙겨온 꾸러미를 풀었다. 치즈 샌드위치를 맨입에 덥석 베어 물었다. 베르닌은 우유팩을 뜯어서 건네주었고 삶은 달걀과 오렌지 껍질도 까 주었다. 왕재수는 전날과는 달리 샌드위치와 달걀을 곧잘 먹었다. 우유도 다 마셨다. 베르닌은 마음이 좀 놓였다. 그래도 오렌지는 반을 쪼개서 베르닌에게 내밀었다.

 

 

다 먹어. 오렌지 그거 한 개 얼마나 된다고. 좋아하잖아.

 

너도 좋아하잖아, 오렌지. 맨날 나만 주고.

 

한 개 더 있으니까 있다가 먹을게.

 

 

그러자 왕재수가 안심했는지 오렌지를 먹었다. 달다고 좋아하더니 결국은 세 쪽을 떼어서 베르닌에게 먹어보라고 주었다. 오렌지는 달고 시원했다. 문득 베르닌은 투레츠키에게 가서 파인애플 통조림이라도 사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납치되어 온갖 고생을 하고 온 왕재수가 가엾었다. 그리고 내색은 안 해도 드미트리가 떠나버려서 많이 속상할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울었는데... 간밤에는 전혀 몰랐을 텐데...

 

 

그러자 갑자기 드미트리의 팔에 안겨서 키스를 하고 있던 왕재수의 모습이 어른거려서 베르닌은 뺨이 화끈거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왕재수는 코즐로프와 있을 때도 베르닌이 있든 말든 뜨겁게 키스와 애무를 주고받았으므로 새로울 것도 없었는데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드미트리가 자신과 얼굴이 똑같아서 그런 것 같았다.

 

 

드미트리 싫다더니, 말 한 마디 안 섞고 마카롱이랑 코코뱅도 안 먹더니 그렇게 사랑을 나누고... 하여튼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라니까.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약초즙을 따라주었다. 왕재수는 차는 안 주고 약만 준다고 툴툴대면서도 약초즙을 다 마신 후 시계를 보더니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웠다.

 

 

15분 후에 깨워줄 수 있어?

 

, 15분 가지고 피로가 풀리겠냐! 한 시간은 자야지!

 

시간 없는 거 알면서.

 

그러면 30분 후에 깨워줄게. 어차피 애들 밥 먹고 오면 그 정도 되잖아.

 

조명 장치 고친 거 가서 확인해봐야 된단 말이야. 그래야 안심하고 리허설 다시 하지. 애들 무대 위에 있는데 그거 떨어지면 큰일 나. 그리고리가 발견해줘서 다행이긴 한데, 전문 스태프가 아니니까 혹시라도 부착하면서 부품을 잘못 건드리면 조명도 문제 생긴단 말이야. 그러니까 잘 붙은 거 보고 조명감독도 데려와서 확인시켜야 돼.

 

내가 가볼게. 그러면 되잖아. 잘 붙어 있는지는 나도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거 보고 나서 류다한테 조명감독 불러달라고 할게. 30분 후에 무대로 오라고 하면 되잖아. 그러면 네가 그 사람한테 얘기해. 됐지? 좀 자라.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 베르닌은 재킷을 벗어서 왕재수에게 덮어준 후 나와서 류드밀라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미하일이 어제 많이 힘들었어요. 잠깐 눈 좀 붙이게 했으니까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하세요. 특히 검열국에서 누가 오면 절대 못 들어가게 해야 돼요. 모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리고 레베진스키, 혹시라도 극장에 나오면 꼭 저한테 알려주세요.

 

알았어요.

 

 

류드밀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예상 외의 질문을 했다.

 

 

다닐, 어제 미샤 그냥 아팠던 거 아니죠?

 

? ... 무슨 뜻이죠?

 

내가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요! 당신 그저께부터 자꾸 레베진스키랑 잔나에 대해 물어보고. 게다가 우리 감독님이 어떤 사람인데! 미셴카가 아무리 아파도 지금 같이 중요한 때 그렇게 무단으로 결근할 리가 없어요. 못 나오더라도 자기가 직접 전화를 했을 거예요. 무용수들에 대해 이것저것 지시라도 했을 거고요. 팔다리가 다 부러졌어도 전화했을 거라고요. 지금도 검열국이니 모르는 사람이니 하는 걸 보니 분명히 주말에 스페호프가 수작을 부렸던 거예요.

가뜩이나 지난번 돈키호테랑 독사과도 그렇고 화재도 그렇고... 애들도 어제 많이 걱정했어요. 감독님한테 말은 안 해도 자기들끼리 엄청 조심하고 있다고요. 먹는 것도 도시락 싸오거나 아예 스베촉에 가서 먹어요.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함부로 얘기도 안 하고요. 나도 레베진스키 주시하고 있어요. 잔나도요. 그 둘이 감독님 반대파 선봉이니까요. 스태프 쪽은 로만이랑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체크하고 있고, 화재 이후부터는 그리고리한테 무대랑 창고 쪽 매일 확인하라 했어요.

 

... 류다... 난 몰랐어요, 당신이 그렇게 신경 쓰고 있는 줄... 왜 나한테는 얘기 안 했어요?

 

당신은 KGB잖아요! 물론 당신이야 의심은 안 해요. 착한 사람이고 미셴카를 끔찍하게 아끼니까.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스페호프에게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잖아요! 당신은 너무 순진하다고요!

 

... 근데 왜 지금은 나한테 이런 얘기 해주는 건데요!

 

수요일 공연 잘 올려야 하니까 그렇죠. 수요일에 높은 분들 엄청 많이 온다면서요... 그거 성공하면 우리 미셴카 복권되고 다시 수도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불쌍한 우리 감독님... 저렇게 열심인데 망할 놈의 스페호프가 계속 괴롭히고. 어제 무슨 일 있었던 거 맞죠?

 

... 나중에 미샤한테 물어보세요... 근데 조심해야 하는 건 맞아요.

 

알았어요. 내가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 얼른 무대 다녀와요.

 

 

그래서 베르닌은 무대로 갔다. 마침 뒤쪽 사다리에서 내려온 그리고리가 손을 흔들었다.

 

 

다 됐어. 메인이랑 사이드 3번만 문제가 아니었어. 백스테이지 쪽 메인 구동장치도 부품이 몇 개나 빠져 있었어. 꼬마 감독님이 꼭 그쪽에 서서 무대 지켜보던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니까! 어휴, 식은땀이 다 나네. 더러운 놈들 같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더러운 놈들이라니.

 

금요일부터 뭔가 좀 이상하더라고. 레베진스키가 자꾸 조명이랑 백스테이지 쪽을 왔다갔다 하는 거야. 꼬마 감독님이랑 무용수들 연습실에 있을 때. 그러더니 시설관리팀 직원 하나랑 조명 쪽을 가리키면서 속닥속닥하더라고. 왜 있잖아, 머리 벗겨지고 배만 뽈록한 키다리. 낌새가 이상해서 쳐다보고 있으니까 나보고 가서 공사 마무리나 하지 왜 여기 얼쩡대느냐면서 화냈거든. 그래서 토요일 아침에 레베진스키가 왔을 때도 따라가 봤는데 감독실 쪽만 가고 무대 쪽은 안 가길래 그냥 잊어버렸거든.

근데 오늘 아침에 그 머리 벗겨진 키다리가 뒤쪽 사다리 타고 조명 쪽으로 올라가더라고. 뭔가 찜찜해서 계속 지켜봤는데 아까 리허설 할 때 보니까 조명이 흔들거리는 거야. 그거 떨어지면 어쩔 뻔 했냐고. 그리고 구동장치도 그래. 지난번에도 그쪽 장치 하나 잘못돼서 꼬마 감독님이 톱니에 다쳤잖아. 이번 것도 딱 그런 식이더라고. 그것도 자로 잰 듯이 딱 감독님이 서 있는 자리 쪽 장치만 고장 났어. 오늘이야 그 장치 쓸 일이 없지만 내일 드레스 리허설 한다며. 무대 장치 다 움직이면 뻔할 뻔자 미셴카는 다쳤을 거라고. 최소한 몸 어딘가는 짓이겨지는 거고 운 나쁘면 깔리는 거란 말이야! 3번 조명도 맨 처음에 미셴카가 무대 점검할 때 서는 자리야. 작정하고 손댄 거라고!

 

그럴 수가... 일단 조명감독하고 무대감독 불러야겠네요.

 

레베진스키하고 그 키다리, 그 두 놈은 절대 못 오게 해! 무대 쪽엔 얼씬도 못하게 하라고!

 

 

베르닌은 무대감독을 찾으러 갔다. 무대감독은 나이가 지긋했고 항상 코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술꾼이었지만 심성은 착했고 왕재수와도 잘 지내는 편이었다. 감독에게 조명과 구동장치의 이상을 설명하고 제대로 체크해달라고 청했다. 이번 공연에 높은 사람들도 많이 오고 모스크바에서도 관심이 많기 때문에 혹시라도 사고가 나거나 공연이 망쳐지면 모두들 책임 소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는 엄포까지 놓았다. KGB라는 점을 이용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굉장히 찔렸지만 왕재수를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무대감독은 매우 놀라더니 스태프들을 여럿 불러 모아 무대와 백스테이지를 전체적으로 확인하기 시작했고 2차 리허설은 3시 이후로 미루라는 메시지를 왕재수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   *   *

 

 

 

 

 

감독실로 갔더니 왕재수는 곤하게 자고 있었다. 너무 깊게 자고 있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정말로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두 눈 아래가 푹 패여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자기도 모르게 드미트리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아휴, 아무리 동경하던 우상이라 해도 그렇지... 밤새 얼마나 놀았으면 이 자식이 잠도 모자라고 이 모양이야. 그렇게 고생하고 온 애를 데리고.

 

 

그러다가 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이 자식, 겉으로는 문어발 치는 것 같아도 잘 보니까 진짜 마음에 드는 사람 아니면 잠자리 안 하는 거 같던데. 딤카한테 쌀쌀맞게 굴었어도 마음속으로는 많이 좋아했나봐. 딤카도 얘 구해주려고 그렇게 고생하고 총까지 맞고... 딱 하룻밤밖에 못 보냈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헤어지고. 둘 다 불쌍해.

 

 

그러다가 또 기분이 이상해지기도 했다. 주된 이유는 드미트리가 자신과 얼굴이 똑같기 때문이었다. 왕재수가 드미트리와 밤을 보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내 얼굴이랑 완전히 똑같은 녀석인데 그렇게 키스하고 잠자리까지 같이 하고... 그래놓고 나 보면 딤카 생각나서 이상하지 않을까?

 

 

그때 왕재수가 몸을 뒤척이며 끙끙거렸다. 아픈가 싶어서 이마에 손을 대보려는데 왕재수가 눈을 번쩍 뜨더니 소스라치듯 놀라며 두 손으로 베르닌을 떠밀었다.

 

 

저리 가! 저리 가!

 

... 미셴카. 나야, 다닐. 꿈꿨니?

 

...

 

 

왕재수가 숨을 몰아쉬더니 눈을 깜박거려서 졸음을 몰아내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는 베르닌을 쳐다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한숨을 쉬었다.

 

 

, 다닐이구나. 꿈꿨나봐. 지금 몇 시야?

 

두 시야. 근데 리허설은 세 시부터 할 수 있대.

 

 

베르닌은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다. 왕재수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그래, 그러면 세 시까진 애들 데리고 따로 연습해야겠다. 레베진스키가 그랬단 말이지...

 

너 정말 몰랐니? 그 작자가 너 감시하고 사진 찍고 무대 장치도 손대게 하고! 그 협박카드도 그렇고 레코드 목록이랑 인형도...

 

목록? 인형?

 

그 목 잘린 인형 말이야. 저기 창가에 있던 거 가져간 거잖아. 그 레코드 목록도! 카드에 작곡가 여섯 명 써놓은 거! 레베진스키가 네 방에서 레코드 뒤졌어. 그리고리가 다 봤대. 그 인간이 계속 네 방 몰래 드나들었대. 그놈이 스페호프 사주 받고 검열요원 그 자식이랑 결탁해서 너 납치하는 거 도운 거야. 진짜 나쁜 놈이야. 잘라버려!

 

, 그 인형.

 

 

왕재수는 협박카드와 목 잘린 인형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고개를 돌렸다. 베르닌은 다시금 분노가 솟구쳐서 이를 딱딱 부딪쳤다.

 

 

내가 그 자식들 혼내줄 거야. 레베진스키 그 자식은 강물에 거꾸로 처넣을 거고 데미도프 그 자식은 두들겨 패서 검은 숲에 구덩이 파고 묻어 버릴 거야! 그리고 우유랑 주스에 수면제 잔뜩 타서 먹일 거야! 우리한테 한 거 그대로 다 해 줄 거야!

 

바보 멍충이.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냐. 그냥 무시해. 어차피 나 무사히 돌아왔잖아. 공연만 잘 올리면 되지.

 

그치만... 네가 그렇게 고생하고... 딤카는 총까지 맞았잖아. 넌 어떻게 그러냐, 그렇게 못된 짓을 당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너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에 아는 사람들 있잖아. 이런 거 탄원하면 안 되니? 나야 KGB 내부 직원이니까 별 소용없다 치지만 극장 사람들은 도와줄 텐데. 언제까지 이렇게 해코지 당하고 위험에 빠져서 살 수는 없잖아. 넌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누가 아무렇지도 않대? 근데 지금 내가 떠들어봤자 해결되는 것도 없고 일만 더 꼬인다고. 그리고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모레 공연이란 말이야.

 

아니야! 누가 그래! 공연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단 말이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이 공연 올리려고 다들 얼마나 고생을...

 

! 너는 안 중요하냐! 공연이 뭐가 그렇게 소중하다고! 너 죽고 나면! 너 다치고 나면 무슨 소용 있냐고!

 

안 죽었잖아. 안 다쳤잖아. 그럼 된 거잖아. 다닐, 제발 이 얘기 그만하자. 나 너무 머리 아파. 무대까지 말썽이고... 나 내버려두면 안 돼? 제발.

 

하지만...

 

나 원래 기분 나쁜 일은 잊어버린단 말이야. 생각하기 싫어. 그런 일 있을 때마다 다 기억하고 되새겼으면 이제껏 어떻게 살았겠냐. 공연 잘 올리고 싶은데... 네가 자꾸 그 얘기하면 비둘기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다 생각난단 말이야. 기분 안 좋아.

 

 

왕재수가 너무 간절하게 말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입을 다물었다. 마음속으로는 그런 일 있을 때마다 는 뭐야! 대체 뭘 어떻게 하고 살았으면 기분 나쁜 일이 그렇게 많아서 다 잊어버렸다는 거냐고!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왕재수는 곧장 무대로 갔다. 무대감독과 스태프들, 조명감독까지 모두 와 있었다. 뚝딱뚝딱 소리를 내며 무대를 손보고 있었다. 왕재수는 베르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로 올라가 여기저기를 살피고 백스테이지의 구동장치도 훑어보았다. 무대감독과 조명감독에게 보고를 받은 후 따끔하게 야단을 쳤다. 무용수들 새끼손가락 하나라도 다치면 전부 모가지라고 버럭 화를 냈다. 왕재수가 스태프들에게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용수들을 아끼는 절반만큼이라도 자기 몸을 생각하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에 베르닌은 혀를 찼다.

 

 

잠시 후 머리가 벗겨진 키다리 스태프가 불려왔다. 왕재수가 키릴 수보로긴이라고 이름과 성을 호명하자 키다리가 화들짝 놀랐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왕재수는 날카롭게 그를 추궁했다. 조명과 무대 구동장치를 손댄 이유가 무엇이냐고 다그쳤다. 수보로긴은 그런 적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증거가 없지 않느냐고 버텼다. 무대감독은 펄펄 뛰었지만 조명감독은 수보로긴이 베테랑 조명 기술자인데 그럴 리가 없다고 변호를 했다. 왕재수는 차갑게 말했다.

 

 

수보로긴. 당신 징계야. 일주일 근신. 극장에 나오지 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증거도 없는데 누명을 씌우다니! 감독이면 다야! 항의 성명 제출할 거예요!

 

항의 성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증거가 왜 없어. 목격자도 있고 3번 조명 장치에 묻어 있던 당신 지문도 다 채취했거든. 계속 떠들면 1차로 극장 징계위원회, 2차로 인민재판 연속으로 회부할 거야. 무용수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국가 예산으로 추진되는 공연을 방해했다는 죄목이야. 난 전자가 더 괘씸하지만 아마 재판에서는 후자 때문에 위중하게 처벌받을 걸. 과대 협박한다고 생각하지 마. 난 반동분자잖아, 징계위원회고 재판이고 많이 받아봤거든. 그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당신보단 백배 천배 잘 알아. 감옥 갈 준비나 해.

 

억울해! 난 아무 것도 몰라요! 난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란 말이야! 니콜라이 안토노비치가 조명 위치를 바꿔놔야 한다고 지시해서 따른 것뿐인데... 구동장치도 그쪽 부품 갈아야 하니까 빼놓으라고 한 거란 말이에요!

 

 

지문 채취는 한 적이 없었으므로 왕재수가 그냥 겁을 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너무 진짜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조차도 순간 , 저 녀석 대단하다란 생각이 들었다. 수보로긴의 항의에 스태프들이 웅성거렸다. 그를 변호하던 조명감독조차 얼굴이 파래졌다. 무대감독이 코를 더욱 빨갛게 붉히며 버럭 화를 냈다.

 

 

뭐가 어쩌고 어째! 레베진스키의 지시를 받았다고? 그놈이 무대 쪽 사람도 아닌데 어째서 그 인간 지시를 받아! 나와 조명감독 외에 그런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극장장님과 예술감독님 뿐이라고! 네놈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의 지시를 따라야 할 것 아냐! 어째서 그 망할 놈의 뺀질이 레베진스키의 말을 듣는 거냐! 게다가 네놈이 1~2년 된 초짜도 아니고 이 극장에서 10년 넘게 잔뼈가 굵은 놈인데 그래, 그 무식쟁이 레베진스키가 조명 위치 운운, 구동장치 부품 운운하는 걸 곧이곧대로 믿었을 리가 있냐고! 누가 봐도 네놈하고 레베진스키하고 결탁해서 공연 망치려고 한 거잖아! 이 망할 자식아, 넌 모가지야!

 

아니에요! 난 억울해! 그리고 당신이 감독도 아닌데 모가지 운운할 수 있어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난 억울해요! 레베진스키가 아무리 임원급이 아니라 해도 옛날부터 여기 터줏대감이라 우리한테 엄청 갑질을 한단 말이에요. 수석안무가니까 나 같은 스태프에겐 그래도 윗사람이라고요, 지시를 어길 수가 없었다고요! 제발 저 자르지 마세요. 재판 회부하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전 진짜 그런 생각 없었어요. 무용수들 다치게 할 생각 전혀 없었다고요. 전부 레베진스키가 그런 거예요! 진짜예요!

 

 

왕재수는 수보로긴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검은 눈에 파란 불빛이 번쩍거렸다. 베르닌은 스네고로드를 떠올렸다. 뒤로 물러서던 아르투르를. 수보로긴도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리며 뒤로 물러섰다. 왕재수는 여전히 수보로긴을 주시하며 낮게 말했다.

 

 

지금 말한 내용 전부 해명서 써서 제출해. 일주일 근신하고. 한 달 동안 메인 무대 조명 접근 금지야.

 

, ... 알겠어요. 그러면 저 재판에 거는 건 아니죠? 자르는 것도 아니고요? ?

 

그거야 당신 하는 짓에 달려 있지.

 

그렇게 할게요, 감독님.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앞으로는 정말 잘할게요. 그 망할 놈의 레베진스키 때문이에요.

 

 

수보로긴은 훌쩍훌쩍 울면서 몇 번이나 왕재수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무대에서 내려갔다. 왕재수는 무대감독에게 3시에 정확히 리허설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하고는 연습실로 갔다.

 

 

무용수들은 이미 모두 모여서 자기들끼리 연습을 하고 있었다. 리허설이 미뤄졌다는 소식도 들은 후였다. 왕재수는 오전 리허설 때 지적했던 무용수들을 차례로 불러내 동작을 다시 시켜보았고 몇 가지는 직접 시연해보였다. 그때 코즐로프가 들어왔다. 왕재수는 마침 잘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만 오시포비치, 파이널의 모차르트 좀 연주해줘요. 마지막 2분만. 가릭, 데니스, 타마라. 준비해.

 

 

코즐로프는 곧 바이올린을 들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무용수들 앞에서는 코즐로프에게 존대어를 쓰면서 매우 공적인 태도로 대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코즐로프도 마찬가지였다. 감독에 대한 그 깍듯한 태도를 보면 귀염둥이 우리 아기운운하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세 명의 주역 무용수들이 마지막 파트를 추고 나자 왕재수는 가릭에게 어깨를 좀 더 편하게 내릴 것을 주문했고 데니스와 타마라에게는 좋아하는 티를 더 많이 내라고 했다. 코즐로프가 다시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을 때 류드밀라가 연습실로 들어오더니 베르닌을 불렀다.

 

 

다냐, 웬 여자가 전화해서 당신을 찾네요. 복도 전화로 돌려놨으니까 거기서 받아 봐요.

 

, 여자요? 누구지? 나한테 전화할 여자는 없는데.

 

리자라고 하던데요.

 

, 리자? 웬일이지?

 

 

베르닌은 급하게 복도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 리자. 무슨 일이에요? 극장까지 전화를...

 

국장이 당신 좀 들어오래요.

 

? 저를요? 이유는 말 안 하고요?

 

. 그냥 지금 빨리 들어와 보라고만 했어요. 그럼 있다 봐요.

 

 

전화를 끊은 후 베르닌은 두 근 반 세 근 반 하는 가슴을 손으로 꼭 누르며 연습실로 갔다. 이미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다들 무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베르닌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왕재수를 쫓아갔다.

 

 

국장이 나보고 잠깐 들어오래. 나 얼른 다녀올게.

 

또 건전지 갈고 표지판 칠하고 배추밭 관리하래? 야근시키고...

 

잘 모르겠어. 늦을 것 같으면 류다한테 전화할게. 저기... 너 조심해.

 

조심할 게 뭐가 있냐. 오늘은 애들 리허설 시키고 몇 명만 나머지 연습시킨 다음에 들여보낼 거야. 나는 무대 배경이랑 의상이랑 음향 같은 것만 한 번 더 체크할 거고.

 

그래도... 아까 그 조명도 그렇고.

 

이제 다 확인했잖아. 얼른 가봐.

 

너 절대로 혼자 다니지 마. 백스테이지에 있을 때도 무거운 거나 위험한 장치 옆에 있지 말고. 알았지? 로만 곁에 꼭 붙어 있어.

 

여기가 집이냐, 극장이지. 쫑알대지 말고 빨리 가. 또 벌목공이 어쩌고 하는 개소리 듣지 말고.

 

 

그래도 불안감을 억누를 수 없었던 베르닌은 맨 뒤에 따라 나온 코즐로프에게 달려가서 왕재수를 잘 지켜볼 것을 신신당부했다. 코즐로프도 이미 조명과 구동장치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말고 가봐. 스페호프 그 자식이 또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 망할 놈이 우리 아기를 납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네. 그럴 기미만 보였다 하면 그 자식 인생 종치는 거야!

 

 

베르닌은 가슴이 철렁했다. 주말에 이미 왕재수가 납치됐다 돌아왔다는 사실을 코즐로프가 안다면 스페호프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도 그 키다리 깡패의 주먹에 가루가 될 것 같았다. 그는 어물어물 왕재수를 부탁하고는 급하게 극장을 나갔다.

 

 

 

 

 

*   *   *

 

 

 

 

 

사무실로 향하는 내내 베르닌은 걱정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미칠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장이 갑자기 자기를 보자고 하는 이유는 한 가지 뿐이었다. 드미트리와 자신이 힘을 합쳐 왕재수를 찾아냈다는 사실을 국장이 알아차린 것이다. 이미 드미트리가 스비제르스키의 끄나풀이라고 생각해서 연수도 조기 종료시켜 버렸으니 베르닌 자신에 대한 의심을 품는 것도 당연했다. 해고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왕재수에 대한 걱정으로 심장이 쿵쿵거렸다.

 

 

국장실 문은 꽉 닫혀 있었다. 노크를 하려는데 복도 저편에서 스페호프가 그를 불렀다.

 

 

, 왔군. 다닐, 뒤뜰로 좀 나가지.

 

 

베르닌은 스페호프가 뒤뜰로 향하자 더욱 불안해졌다. 평소 스페호프는 격식을 따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회의실이나 국장실에서 면담을 했다. 뒤뜰도 모자라 서무들의 안식처인 배추밭으로 향하다니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배추밭 너머에서 힐끗거리고 있던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스페호프를 보자마자 털을 있는 대로 곤두세우고 꼬리를 쭉 펴더니 위협적인 소리를 내고는 휙 사라져버렸다. 왜 아직도 도둑고양이를 퇴치하지 못했느냐고 야단을 맞을까봐 순간 겁이 났지만 스페호프는 고양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배추밭을 바라보며 우뚝 서더니 낮고 거친 음성으로 말했다.

 

 

작전은 모두 취소일세. 다닐, 무대 장치를 원상 복구해놓게. 살구 주스도 치워버리고.

 

 

베르닌은 어안이 벙벙했다.

 

 

? 원상복구... 살구 주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대 장치라면 메인 구동장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러니까... 야스민의 수요일 공연에 대한...

 

그럼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구동장치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다만. 하여튼 레베진스키가 얘기한 그것들 말일세. 조금 전에 크레믈린과 스몰니에서 각각 전언이 왔네. 불여우 녀석이 또 수작을 부린 게지. 수요일 공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혹은 불여우가 수요일까지 어딘가 아프거나 다치게 될 경우 그놈을 소관하는 우리 가브릴로프 KGB에게 모든 책임을 묻겠다는 거야. 심지어 벨스키 쪽에서는 수석보좌관이 직접 전화를 했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으니 망할 놈의 수요일 공연까지는 불여우 녀석의 털끝 하나 건드려서는 안 되네. 어서 가서 무대 장치인지 뭔지를 원상복구하고 살구 주스도 치워버리게!

 

... , 하지만... , 국장님. 저는 레베진스키에게서 들은 얘기가 전혀 없는데요.

 

뭐야?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분명히 레베진스키에게 자네와 드미트리의 긴밀한 협조를 받아서 진행하라고 했는데. 둘이 인사도 시켜주고 작전도 공유했단 말이네. 자네 드미트리에게 아무 얘기도 못 들었나?

 

못 들었는데요. , ... 그러니까, 저는 공식적인 감시요원이라 너무 윗선에 노출되어 있으니 작전에서는 빠지는 게 낫다고 하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그런 얘기야 했지. 하지만 그건 직접 장치를 손대면 안 된다는 얘기였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네가 알아야 불여우도 더 잘 속이고 내부 협조도 잘 될 것 아닌가. 분명히 드미트리가 자네에게 모든 작전을 전하고 공유하겠다고 했는데 그 친구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군!

 

, 국장님... 제가 좀 헷갈리는데요. 드미트리도 본부에서 왔기 때문에 꼬리를 밟힐까봐 작전에서 빠지라고 하신 게 아니었단 말인가요? 그래서 저와 드미트리는 배제하신 것으로 알았...

 

허참, 웬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드미트리 그 친구가 자네를 염려하긴 했었지. 하지만 불여우가 자네를 신뢰하는데다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하는 관계이니 반드시 자네와 모든 작전을 공유하라고 했거늘. 그래, 드미트리가 아무 말도 안 해줬단 말인가?

 

레베진스키를 통해 작전을 진행하신다는 얘기까지밖에...

 

 

 

베르닌은 아직도 어리둥절한 상태였지만 불현듯 스페호프가 자신을 떠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미트리는 납치된 왕재수를 찾아낸 일에 베르닌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숨겨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같은 옷을 입었고 얼굴이 비슷한 것을 이용해 검열요원 데미도프를 막아선 것도 자신인 척 하겠다고 했고 마지막으로 스페호프와 면담했을 때도 베르닌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스비제르스키를 팔아서 슬며시 위협을 가하지 않았는가. 이제 드미트리에 대한 분노와 충격이 조금 가신 스페호프가 머리를 굴려서 납치 사건의 실패에 베르닌도 한몫 했을 거라고 추측하고는 그를 유도심문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스페호프가 혀를 찼다.

 

 

허참, 어떻게 된 건지 이제야 알겠군. 드미트리 그 친구가 다 좋은데 성취욕이 너무 강해보이더라니. 자네를 질투하고 경계했던 거였어. 내가 그 친구에게 강의를 할 때 해외와 모스크바 본부에서 인정받은 엘리트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행정의 기본을 쌓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것이라는데 중점을 두었거든. 그러면서 자네에게 많이 배워야 한다고 했었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군. 불여우를 혼내주고 공연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모든 공을 자신이 가로채고 싶었던 거야. 레베진스키야 어차피 극장 쪽 정보원에 지나지 않으니 아무리 발 벗고 나서봤자 우리 식구인 자네만 하겠나. 이번 작전이 제대로 먹히기만 했어도 내가 자네를 제대로 포상했을 것을...

하여튼 일이 이렇게 됐으니 드미트리가 욕심을 부려 자네를 배제한 게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르겠군. 하여튼 그 친구야 본부로 돌아갔고 레베진스키야 수요일 밤에나 돌아올 테니 뒷수습을 해줄 건 지금 자네뿐이야. 어서 극장으로 돌아가서 무대 장치를 도로 고쳐놓고 냉장고에서 주스를 치워버리게.

 

, 국장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무대 장치는 레베진스키를 통해 고장 내라고 하신 것 같고... 주스는 뭔가요?

 

감독실 냉장고에 보드카와 섞은 살구 주스 팩을 넣어놨단 말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불여우가 술을 못 마시지 않나. 특히 보드카는 마셨다 하면 인사불성이 되니까. 불여우가 그걸 마시고 맛이 가면 입원을 하게 되지 않겠나. 그러면 공연도 물 건너갈 거라고 생각했지. 아니면 무대 장치가 잘못돼서 거기 좀 다치게 되더라도 마찬가지고. 마음 같아서야 그 자식을 납치라도 해서 수요일까지 어디 안전가옥에라도 가둬놓고 싶었네만 지난번 시계탑도 그렇고 이래저래 꼬인 게 많으니 뒷감당이 어려울 것 같아서 포기했었지. 끌어다 쓸 현장요원도 마땅치 않았고. , 그럼 불여우가 주스를 마시거나 무대에서 다치기 전에 어서 가서 원상 복구해 놓게. 일단 수요일 공연은 내버려두고 훗날을 도모할 수밖에.

 

 

베르닌은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간신히 목소리를 짜낼 수 있었다.

 

 

레베진스키와 드미트리... 그러면 검열국 쪽 협조는 없었던 건가요? 데미도프는... 야스민 납치 시도는 처음부터 없었던 거고요?

 

웬 검열국 타령인가. 데미도프는 또 누군가? 검열국 그 멍청한 놈들이 애초에 제대로 역할만 해줬어도 반체제 작품이라고 걸어서 아예 공연을 봉쇄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안돼서 이렇게 됐지 않나. 아무짝에 쓸모없는 놈들 같으니. 납치도 그렇지, 차라리 그때 자넬 모스크바에 보낼 게 아니라 불여우를 안전가옥에 가둬놓고 협박이라도 좀 시킬걸 그랬어. 지금이야 공연 며칠 남겨두고 납치 카드를 쓰는 건 우리 무덤 파는 일이니 엄두도 못 내지. 하여튼 자네가 고생이 많네. 그 반동분자 불여우의 비위를 맞추며 옆에 붙어 있고 매일같이 잠자리를 해주는 것도 속이 뒤집힐 텐데 이제 그 망할 공연까지 제대로 올라가게 해줘야 하니... 어서 가보게. 수요일에 극장에서 보세.

 

 

스페호프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급하게 몸을 돌려 사무실 쪽으로 가버렸다. 베르닌은 너무나 멍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돌멩이 위에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러면 국장은 미셴카 납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단 말이야? 데미도프에 대해서도 모르고 주말의 납치 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전부 자기가 명령한 건데. 납치는 위험부담이 크니까 아예 포기했다고? 분명히 드미트리가 그랬잖아. 어젯밤에 국장을 만났다고. 국장이 데미도프에게서 자초지종을 보고받았다고. 데미도프가 추궁이 두려워서 우리 얘긴 안하고 미셴카 혼자 도망쳤다고 했고 그 얘길 국장이 드미트리에게 해줬다고. 애초부터 우리한테 맡겼어야 했다고 짜증냈다고. 그런데 왜 국장은 지금 딴 소리를 하는 거지? 나한테 실패한 작전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한 건가? 하지만 국장은 데미도프란 이름을 말했을 때 정말 모르는 눈치였어. 3년 가까이 같이 일했잖아, 그 정도는 표정 보면 알아. 국장은 데미도프를 몰라. 얼굴은 알겠지, 검열요원이고 예전에도 보고를 받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름은 전혀 모르는 거야. 하지만 드미트리는 국장이 그자의 이름을 알려줬다고 했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머리가 너무나 복잡했고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스페호프가 그를 떠보고 있을 가능성이 제일 컸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졌다. 검열국에 가서 데미도프를 만나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 살구 주스! 그 자식 걸핏하면 목마르다고 아무 거나 막 마시는데... 극장부터 가야 돼. , 아니야... 그러면 늦을지도 몰라.

 

 

베르닌은 급하게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사무실은 등록부서였다. 두리번거리는데 리자가 보였다.

 

 

리자, 전화 좀 써도 돼요?

 

. 그럼요.

 

 

그는 급하게 다이얼을 돌렸다. 다행히 류드밀라의 목소리가 곧 들려왔다.

 

 

류다, 미샤는 별 일 없나요?

 

. 지금 리허설 중이에요. 구동장치랑 조명도 다 손봐서 이제 괜찮아요.

 

그래요. ... 감독실에 조그만 냉장고 하나 있잖아요.

 

, 그 냉장고. 아뇨, 지금 감독실에 없어요. 비서실에 가져다놨어요. 미셴카가 어차피 자기는 거기서 꺼내먹는 거 별로 없고 손님들도 거의 다 날 거쳐서 오니까 여기 두라고 했거든요. 왜요?

 

그 냉장고 안에... 지금 빨리 확인 좀 해줘요. 살구 주스. 종이팩에 든 걸 거예요. 아마 개봉되어 있을 거고요. 그거 꺼내서 버려줘요.

 

, 그 살구 주스. 없어요.

 

없다고요? , 설마... 미샤가 그거 마셨어요?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베르닌이 반쯤 고함을 지르려는 순간 류다가 대꾸했다.

 

 

아뇨. 미셴카는 그 주스 보지도 못했어요. 내가 버렸거든요. 걱정 마세요.

 

버렸다고요? 당신이? , 언제요? 설마 마신 건 아니죠?

 

천만에요. 내가 미쳤다고 그걸 마시겠어요? 지난번 독사과 사건 이후로 감독님 방에 들어오는 음식이랑 과일, 음료수는 내가 하나하나 다 확인하고 있어요. 내가 어제도 나왔었잖아요. 냉장고를 열어보니까 금요일까지 없었던 살구 주스가 하나 떡하니 들어 있는 거예요. 미셴카가 가져온 건 당연히 아니죠. 감독님은 오렌지나 사과 주스는 좋아해도 살구 주스는 달고 텁텁하다고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말린 살구도 입맛에 안 맞는다고 했어요. 목마를 때야 그냥 마시지만. 하여튼 수상해서 꺼내보니까 심지어 주둥이까지 열려있고. 코를 대보니 보드카 냄새가 지독하게 나더라고요! 개수대에 버렸어요. 그것도 스페호프가 넣어놓은 거죠?

 

, 그래요. 진짜 다행이네요. 고마워요, 류다. 전혀 몰랐어요, 당신이 그렇게 신경 쓰고 있었던 거...

 

우리 감독님 나라도 지켜줘야지 어떻게 해요. 안 그래도 이놈저놈들이 해코지하려고 난리인데. 그래도 어제 안 나와서 걱정 많이 했는데 오늘 감독님 보니까 표정도 좋고 준비도 생각보다 잘 되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근데 당신 언제 돌아와요? 감독님이 좀 전에도 당신 왔느냐, 아니면 늦는다고 전화 왔느냐 하고 물어보던데.

 

아까는 빨리 오라는 말 같은 거 안 했는데. 리허설 때문에 내가 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더니...

 

어머, 무슨 소리예요, 다냐. 미셴카가 얼마나 당신을 신경 쓰는데요. 당신 오면 표정이 달라지는데. 훨씬 편해 보이고 더 잘 웃고. 밥도 더 잘 먹고. 오늘은 그렇게 바쁜데도 틈만 나면 당신 쪽 보면서 확인하던데요. 아침에도 오자마자 나한테 혹시라도 KGB에서 당신을 찾으러 오거나 전화가 오면 즉시 자기한테 알려달라고 했는걸요.

 

...

 

 

베르닌은 가슴이 아프게 당겨왔다.

 

 

주말에 너무 놀라서 그런 거야. 내색은 안 했어도 진짜 무서웠던 거야. 그래서 내가 없으면 불안한 거야... 나 없는 동안 또 나쁜 짓을 당할까봐... 빨리 돌아가야겠어.

 

 

전화를 끊고 나서 베르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극장에 곧장 가야 하나, 검열국에 들러 데미도프를 만나봐야 하나 고민하며 구겨진 재킷 주름을 펴다가 주머니가 불룩해서 이게 뭔가 하고 손을 집어넣었다. 돌돌 말린 휴지 뭉치가 나왔는데 단단했다.

 

 

이게 뭐지?

 

 

휴지를 펴보니 조그만 도자기 인형이 굴러 나왔다. 금색과 푸른색, 흰색의 천사 인형이었다. 그제야 베르닌은 기억이 났다.

 

 

, 맞다. 그저께 미셴카 방 창가에서 집어온 거였지. 도로 갖다놔야겠다.

 

 

그때 리자가 다가오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내밀었다.

 

 

다냐, 차 한 잔 마셔요. 며칠 만에 왜 이렇게 야윈 거예요? 면도도 안 하고. 이발도 해야겠네. 아무리 바빠도 스타일 좀 다듬어요. 당신이 드미트리보다 빠지는 게 뭐가 있어요. 옷만 좀 신경 쓰면 훨씬 세련돼 보일 텐데. 꽃돌이 감독님한테 코치 좀 받아요. 근데 드미트리 보니까, 당신도 정장 어울릴 것 같아요. 월급 모아서 양복 한 벌 장만하면 어때요? 아니면 우리 오빠가 요즘 살쪄서 안 입는 양복 있거든요. 그거 갖다 줄 테니까 입어볼래요? 우리 오빠가 당신이랑 키가 비슷하거든요.

 

, 고마워요, 리자.

 

 

베르닌은 빨리 극장에 가봐야 할 것 같았지만 리자의 성의가 고마워서 찻잔을 받아 얼른 한 모금 훌쩍 마셨다. 차가 너무 뜨거워서 입술과 혀를 다 델 뻔했다. 리자가 방긋 웃더니 건포도가 박혀 있는 초콜릿 캔디를 내밀었다.

 

 

이거랑 같이 먹어요. 이거 드미트리가 준 건데 맛있더라고요. 외제인가 봐요. 드미트리 재미있었는데 너무 빨리 가버려서 아쉬웠어요. 오늘 아침에 갑자기 가버렸다고...

 

, ... 그게, 본부에서 빨리 돌아오라고 연락이 왔대요. 그래도 우리 쪽 연수는 다 채운 걸로 해준다더라고요. 다행이죠. 안 그랬으면 다른 데 또 가서 남은 기간만큼 채워야 하잖아요.

 

어머, 다냐. 그렇지 않아요.

 

, 뭐가요?

 

드미트리요. 남은 연수 기간 없어요. 애초에 다섯 번 연수 코스는 다 밟았거든요. 우리 지부 쪽은 가외로 자원해서 온 거예요. 가점만 2점쯤 더 받을 걸요. 근데 드미트리는 요원 기록부 보니까 워낙 성적이 좋아서 가점이 필요 없는데 왜 왔나 했어요.

 

연수 코스를 다 밟았다고요? 자원해서 왔다고... 국장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국장은 바쁠 땐 공문만 보고 첨부문서는 잘 안 읽잖아요. 나도 몰랐는데 갈리나 언니가 드미트리한테 폭 빠져서 모스크바 주소 좀 알아봐달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임시 거주등록 담당이잖아요. 그래서 서류를 보니까 그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근데 드미트리는 워낙 매사에 열심이니까 자원해서 왔다 해도 이상하진 않더라고요. 섭섭해요, 인사도 못하고. 그때 토요일 밤에 본 게 마지막이네요.

 

자원... 왜 여기까지... 나한테는 그런 말 안 했는데...

 

어머, 다냐. 이거 그 천사잖아요!

 

 

리자가 탄성을 지르며 전화기 옆에 베르닌이 내려놓았던 도자기 천사를 집어 들었다.

 

 

이거 너무 예뻐요. 어머, 드미트리 의외네요. 내가 달라고 했을 땐 안 줬는데 당신한테는 주고 가다니... 엄청 아끼는 거라고 했는데... 같이 며칠 지내면서 당신한테 엄청 정들었던 모양이네요.

 

 

베르닌은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리자? 드미트리요? 달라고 했었다니요? 이걸요? 이 인형을? 이건 미하일 거예요. 걔가 감독실 창가에 장식해뒀던 인형인데 드미트리라니요?

 

 

? 미샤 거라고요? 아닌데, 분명히 금요일 밤에 드미트리 방에서 봤는걸요. 그때 갈리나 언니랑 카챠 언니랑 같이 갔잖아요. 카드 놀이하는데 내가 꼴찌라서 제일 먼저 끝났거든요. 지는 사람이 뽀뽀하는 거였는데 갈리나 언니가 흑기사 자원한다면서 나 대신 드미트리한테 냉큼 뽀뽀하고 되게 웃겼어요.

하여튼 나머지 셋은 계속 게임하고 난 화장실 다녀오다가 드미트리 가방에 걸려 넘어질 뻔 했거든요. 가방 주워주는데 거기서 이 인형이 굴러 나오는 거예요. 너무 예뻐서 한참 봤어요. 이런 거 가브릴로프에서는 못 구하는 거잖아요, 수도원 공방에서도 이런 스타일로는 안 만들고요. 우리는 전통적으로 목각 인형을 만들잖아요. 박물관에나 가면 있으려나. 이거 맞아요, 금발에 얼굴이랑 손발이랑 하얗고 날개 금색이고 옷은 푸른색이잖아요. 근데 그때 드미트리가 와서 가방을 치우길래 내가 인형 너무 예쁜데 나 주면 안 되느냐고 살짝 물어봤거든요. 드미트리가 웃으면서 그러고 싶지만 소중한 물건이라 안 된다고 했어요. 대신 뽀뽀를 해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진짜 당신이랑은 정반대라니까요! 얼굴은 비슷한데.

 

 

리자는 까르르 웃으며 떠들다가 베르닌의 굳어진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 다냐. 농담이에요! 당신 놀린 거 아닌데... 화났어요?

 

, 아니에요... 리자, 이거 중요한 얘기예요. 기억을 잘 살려 봐요. 정말, 정말 드미트리에게 이런 인형이 있었단 말이에요? 이것과 똑같은?

 

. 이 인형 같은데... ... 글쎄요. 똑같이 생긴 거 같은데 잘 보니까 이건 날개를 활짝 펴고 있네요. 드미트리 거는 날개가 이것보다 작았어요. 안쪽으로 좀 접고 있었거든요. , 미샤한테도 있었구나... 꽃돌이 감독님은 친절하니까 달라고 하면 줄지도 모르겠네요!

 

날개를 안쪽으로 접고 있었다...

 

 

베르닌은 눈을 감았다. 도자기 천사. 푸른색 망토와 금빛 날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안으로 살짝 접혀 들어간 날개. 잘려나간 머리.

 

 

그건 세 번째 협박편지와 함께 온 선물이었다. 목 잘린 인형.

 

 

 

친애하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그 소중한 공연은 올리지 못할 거야.

파랑새도, 천사도, 검은 기사도 소용없을걸.

말을 잘 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베르닌의 머릿속에 몇 마디 음성들이 스쳐지나갔다.

 

 

 

네가 왜 그렇게 쟤 밥을 챙기는지 좀 알겠어. 레닌그라드에서 봤을 때는 안 그랬는데, 몸매도 훨씬 근육질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말랐네, 그래도 멋있긴 하지만 인형처럼 야윈 걸 보니까 어쩐지 마음이 안 좋아.

 

 

근데 혹시 다른 사람은 안 왔나요? 그러니까, 검은 머리에 눈도 까맣고 굉장히 잘생긴 친군데요. 피부가 도자기 인형처럼 하얘요.

 

 

외모는 예쁜 도자기 인형 같지만 성격은 어린애 같은 모양이라고만 생각했었어.

 

 

 

드미트리가 그렇게 말했었다. 왕재수에 대해. 인형처럼 야위었다고. 피부가 도자기 인형처럼 하얗다고. 예쁜 도자기 인형 같은 외모라고. 왜 그는 수많은 비유와 묘사를 내버려두고 한결같이 왕재수에 대해 그런 표현을 썼던 것일까? 드미트리는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다양하고 풍부한 어휘를 구사했다. 그런데 왜...

 

 

국장은 드미트리에게 레베진스키와 공동 작전을 수행하라고 했어. 나와도 공유하라고 했어. 그런데 드미트리는 내게 그것을 숨겼어.

 

 

국장은 데미도프에 대해, 검열국에 대해 모르고 있었어. 미셴카가 납치됐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어. 그런데 드미트리는 국장이 어젯밤 납치극과 데미도프에 대해 얘기해줬다고 했어.

 

 

드미트리는 우리 지부에 의무 연수를 온 것이 아니었어. 5회의 연수는 이미 마친 후였어. 그는 자원해서 왔어. 아무런 필요 없는 추가 2점을 위해. 그리고 나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

 

 

미셴카가 사라진 후 나는 국장에게 가려고 했어. 그런데 드미트리가 나섰어. 나에게는 극장으로 가라고 하고 자신이 앞장서서 국장을 찾아갔어. 미셴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보고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국장을 만나겠다고 할 때마다 드미트리는 나를 저지했어. 내가 모스크바로 가겠다고 했을 때도, 스비제르스키에게 얘기하겠다고 했을 때도 논리적으로 나를 설득하며 그러지 못하게 했어. 그는 미셴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하게 했어.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머릿속에서 천둥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미샤가 뭐라고 했더라... 걔가 분명히 날 보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내 이름을 부르면서...

 

 

 

다닐, 이거 말인데...

 

 

 

분명히 그거였다. 협박카드를 읽어보면서, 목 잘린 인형을 만지작거리면서 창백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왕재수가 속삭였다. 인형에 대해, 분명히 그 인형에 대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드미트리가 비틀거리며 쓰러졌고 곧 이어 베르닌 자신이 쓰러졌다. 무겁게 밀려오는 잠에 취해. 수면제가 든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주스는 드미트리가 따랐어. 그 팩을 냉장고에서 꺼내온 것도 드미트리였어. 미셴카에게 아침을 준비해줬던 것도, 우유를 따라줬던 것도 드미트리였어. 하지만... 드미트리도 수면제를 먹었어, 나보다 먼저 쓰러졌어... 우리는 같은 팩에서 나온 주스를 마셨는걸. 그렇지만 난 드미트리가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어. 나는 그를 깨우지 않았어. 드미트리가 나를 깨웠어.

 

 

 

위층에 방울을 달러 갔던 것도 드미트리였다. 아침에 카드를 확인하러 갔던 것도, 세 번째 협박카드와 목 잘린 인형을 들고 왔던 것도 그였다. 왕재수가 사라진 후 식탁 위에서 네 번째 편지와 인형의 머리를 발견한 것도 드미트리였다.

 

 

 

다냐! 정신 좀 차려 봐요, 왜 이러는 거예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어머나, 너무 과로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이리 와요, 휴게실에 가서 좀 누워야겠어요. 차에 꿀 좀 타 줄 테니까...

 

 

리자가 걱정스럽게 소리쳤다. 이마에 부드럽고 따뜻한 손바닥을 대보기도 하고 물이 든 컵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베르닌은 고개를 저었다. 귓가에 기계적이고 목쉰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자신의 목소리였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잊었던 게 생각나서... 저 지금 극장에 가봐야겠어요. 고마워요, 리자.

 

하지만...

 

 

베르닌은 비틀거리며 사무실을 나섰다.

 

 

 

 

 

*   *   *

 

 

 

 

 

베르닌은 곧장 검열국으로 갔다. 하지만 이반 데미도프는 자리에 없었다. 대신 전에 모스크바 출장을 같이 갔던 비탈리 주브치크와 마주쳤다. 주브치크는 매우 반가워하면서 또 같이 출장을 갔으면 좋겠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공무로 바쁘다고 둘러대면서 데미도프에 대해 물었다.

 

 

, 그 친구. 목요일인가 국장한테 엄청 깨지고 나서 지금 휴가 중이지. 말이 휴가지 계속 근신 중이야. 내 부하직원 같았으면 제대로 징계 먹였을 텐데. 글쎄 그 반동분자 꼬마가 국장을 제대로 망신을 줬다지 뭔가. 데미도프 그 녀석이 무슨 음악을 잘못 알려줘서 그랬다지. 그렇게 잘못을 저질렀으면 알아서 사죄하고 기어야지 그 녀석이 사무실에 돌아와서는 얼마나 화를 내고 억울하다고 하고 길길이 날뛰고 반동분자니 불여우니 하고 욕을 하던지. 자기가 그 버릇없는 불여우 꼬마를 단단히 혼내주겠다고 벼르더군. 하여튼 요즘 젊은 것들이란. 아참 그렇군. 자네 금요일에도 여기 오지 않았나? 그때 데미도프랑 같이 나가지 않았나. 그땐 잘 차려입고 있더니 오늘은 또 지난번 같이 촌스러운 몰골이네.

 

 

제가 여기 왔었다고요? 그자와 같이 나갔다고요? 그게 금요일이었나요?

 

 

허참, 이 친구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기억력이 그리 신통치 않아서야. 금요일 오후 아니었나.

 

 

금요일 오후. 베르닌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드미트리는 스페호프에게서 보안위원회 지방 분권의 특성강의를 받은 후 오후에 극장으로 왔다. 왕재수가 그에게 드미트리가 싫다고 짜증을 내고 있을 때쯤이었다.

 

 

극장으로 오기 전에, 그때 검열국에 들렀던 거야. 그때 드미트리는 데미도프를 만났어. 대체 왜! !

 

 

베르닌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가 버린 드미트리 때문에 서운했고 고마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가슴 아팠었다. 드미트리가 떠났다는 사실에 슬퍼하던 왕재수 때문에 더욱 가슴이 아팠었다. 그런데...

 

 

 

아니야. 전부 우연이야. 딤카는 좋은 애였어. 미셴카를 구하기 위해 온몸을 다 내던졌어. 총까지 맞았는데... 미셴카를 구했어. 보드카 때문에 정신 잃고 있던 걔한테 인공호흡까지 해줬어. 딤카는 미샤의 팬이었어. 수요일 공연을 올릴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다 해줬어. 그러니까 아니야. 전부 내 망상이야. 잊어버려. 모든 게 잘 끝났잖아. 미샤는 돌아왔어. 모레 공연도 잘 올릴 거야. 딤카는 좋은 친구야. 정말이야...

 

 

 

드미트리는 레베진스키와 사전 접촉을 했어. 레베진스키는 미셴카의 방에서 레코드를 뒤졌어. 목록에 표시를 했어. 여섯 개 음악 전부. 레베진스키는 데미도프에게 그 여섯 개의 음악이 뭔지 알려줬을 수도 있고 드미트리에게 알려줬을 수도 있어. 레베진스키에게 듣지 않았더라도 극장에 많이 다녔던 드미트리는 그 여섯 개의 음악이 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을 거야. 연습실에서 계속 음악을 틀어놓고 있었고 드미트리는 그걸 들었잖아. 그는 발레와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었어. 오랫동안 미셴카의 팬이었다고 했어. 그 애의 인터뷰 기사들까지 다 기억하고 있었어. 그 애의 서류까지, 나도 모르는 일들까지 다 알고 있었어.

내 뒤에 있던 캐비닛. 그 안에도 카드와 색지가 있었어. 누구라도 꺼내갈 수 있었어. 사무실에 있었던 누구라도. 그리고 드미트리는 사무실에 있었어. 내 곁에. 서무 업무를 배우느라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어. 금요일에 그는 일찍 출근했지. 그리고 내가 극장에서 미셴카의 옆에 있는 동안 그는 연습실에서 이따금 밖으로 나가곤 했어. 밤 공연 때는 관객석에서 보겠다고 하며 백스테이지에는 오지 않았어. 그리고 그는 곧장 요원 숙소로 가서 여직원들과 게임을 했던 걸까? 아니면 위층에 들렀을지도... 비둘기와 유리조각, 협박편지... 그리고 드미트리는 열쇠 없이 문을 딸 줄 알았어. 미셴카만큼 잘 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옷핀으로 문을 땄어. 그 애의 수갑을 핀으로 풀었어. 그러니까 미셴카의 방문도 열 수 있었을 거야. 901호도... , 하느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귓가에 왕재수의 열띤 음성이 메아리쳤다.

 

 

 

그 자식은 구역질난단 말이야! 더러운 KGB 나부랭이에 재수 없는 놈이야! 잘난척하는 말투부터 시작해서 쳐다보는 눈초리까지 다 싫다고!

 

 

어휴, 사람 볼 줄 모르는 녀석... 그러니까 책상물림이지! 바보 멍충이!

 

 

 

베르닌은 눈을 감았다. 드미트리와 한 침대에 있던 왕재수를 떠올리려고 했다. 깊고 뜨거운 키스를 하던 모습을, 서로를 포옹하며 눕던 모습을. 하지만 다른 광경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병원에서 드미트리와 그가 스페호프에 대해, 똑같은 아가일 무늬 셔츠에 대해, 그리고 저녁 식사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때 그들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던 왕재수의 뻣뻣한 자세와 굳어진 표정. 어김없이 내뱉었던 바보 멍충이. 사랑을 나누던 둘의 모습을 목격한 이후 베르닌은 그건 드미트리에 대한 말이었다고 생각했다. 같은 옷을 입었으니 베르닌인 척 해서 스페호프로부터 그를 지켜주겠다던 드미트리, 어차피 떠날 몸이니 자기가 모든 것을 뒤집어쓰겠다고 나서던 드미트리의 무모함과 정의감에 감명을 받은 것을 숨기려고 투덜거린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병원 복도에서 왕재수는 베르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도 드미트리에게는 눈 한번 주지 않았다. 코코뱅과 양파수프로 근사한 저녁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닐, 이거 말인데...

 

 

왕재수는 그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왜 그렇게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고 나직하게 속삭였던 것일까. 차가워진 손과 창백해진 얼굴, 커다랗게 확장된 눈동자. 그건 수면제 때문이 아니었다. 약기운이 돌았을 때 베르닌은 눈을 크게 뜰 수가 없었다. 온몸이 무거워지면서 열이 솟구쳤고 그대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미샤는 수면제를 먹은 게 아니었어. 뭔가에 굉장히 놀랐던 거였어. 검은 숲에서 뱀껍질을 봤을 때처럼. 나이트 테이블 위에 있던 비둘기 시체를 봤을 때처럼. 그래서 나에게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거야. 이거 말인데라고 했어. 그 '이것'은 뭐였을까? 인형? 협박카드? 분명히 그 순간 걘 뭔가를 봤어. 내가 눈치 채지 못한 것을. 그게 걔를 놀라게 했어. 겁에 질리게 했어.

 

 

그는 검열국을 나왔다. 전날 내내 내렸던 비가 그친 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무 아래 군데군데 하얗고 노란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잿빛과 푸른색의 비둘기 몇 마리가 종종거리며 지나갔다. 나무 위로 큼직한 까마귀 한 마리가 휙 날아갔다. 흰 비둘기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흰 비둘기는 그리 흔하지 않았으니까.

 

 

 

극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6시가 다 되어 있었다. 2차 스페이스 리허설은 이미 끝난 후였다. 스태프들이 무대와 백스테이지를 오가며 작업 중이었다. 연습실로 가보니 무용수들이 여럿 남아 있었다. 주역인 가릭과 데니스, 타마라는 몇 번이고 그 마지막 동작을 되풀이하며 연습하는 중이었고 조역들도 티무르 이즈마일로프의 지도를 받아가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왕재수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 구경을 하러 와 있던 나쟈가 몹시 반갑게 인사를 했고 감독님은 옆의 연습실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왕재수는 군무진을 데리고 연습하는 중이었다. 주역만 추던 톱스타 출신이었지만 왕재수는 군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코즐로프도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베르닌은 코즐로프가 바이올린 대신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처음 봤다. 아마 왕재수를 지켜보기 위해 피아노 반주를 자원한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피아노 옆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망치로 머리를 계속 두들겨 맞는 듯 했다. 군무진의 움직임은 분명 오전의 리허설 때보다도 훨씬 더 근사하고 정연해져 있었지만 이제 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왕재수의 목소리만을 알아듣고 왕재수의 움직임만을 분간할 수 있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지만 왕재수의 목소리는 또렷했고 스텝과 동작은 활기찼다. 그 반짝이는 검은 눈과 날개 치는 듯 움직이는 두 팔, 이따금 무용수들에게 칭찬을 던질 때 얼굴 전체에 번지는 밝은 미소를 보면 아무도 그가 이틀 동안 납치됐다 돌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어느 순간 음악이 멈추었고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가 끊겼다. 무용수들이 왕재수에게 와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연습이 끝난 모양이었다. 코즐로프가 휘파람을 불었다.

 

 

결국 되긴 되는구나. 하도 엉망이라 저 녀석들을 무대에 올릴 수 있을까 했는데 하여튼 미셴카는 대단한 애라니까. 근데 너 왜 이렇게 안색이 안 좋냐. 스페호프 그 개자식이 뭘 또 얼마나 볶았으면. 그렇지 않아도 우리 아기가 걱정하더라. 너 왔냐고 계속 묻고.

 

... 별일은 없었나요?

 

, 없었지. 무용수 몇 놈이 수보로긴 그 새낄 산 채로 파묻어버리겠다고 날뛰는 걸 말리느라 고생한 거 빼곤. 붙잡느라 팔 빠지는 줄 알았네. 그래도 무대 올라갈 놈들이 그런 짓하면 근육 미워져서 안 된다고 우리 아기가 호통 치니까 다들 잠잠해져서 다행이야. 수보로긴 그 새낀 내가 따로 손봐줄 거야.

 

그러지 말아요, 로만. 미샤가 항상 걱정하잖아요. 당신이 자기 때문에 일 저질러서 스페호프 눈에 띄면 잡혀간다고...

 

몰래 두들겨 패주면 되지! 수보로긴 그 자식은 용서 못해. 레베진스키도 마찬가지야. 돌아오기만 해봐라!

 

쟤가 여기서 의지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당신 잡혀가면 쟨 정말 못 견딜 거라고요. 그러니까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 그놈들은 내가 패줄 거예요!

 

너 같은 책상물림이 패봤자! 그리고 우리 아기가 나만 의지하는 줄 아냐! 그런 쪽으로는 나보다 널 더 따르지. 저 녀석은 안아주는 남자랑 있으면 정신 못 차린다고. 나하고는 의지하고 말고가 아니란 말이야.

 

로만, 오늘 밤에 쟤랑 같이 있어줄 거죠?

 

아니. 나야 백번이고 그러고 싶은데 쟤가 수요일까진 안 된다고 했으니까. 근데 모스크바에서 왔다는 그 자식은 어디 갔냐? 너랑 엄청 닮은 그 자식 말이야. 그놈 때문에 쟤가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는데.

 

아침에 돌아갔어요. 그러니까 당신 미샤랑 같이 있어도 괜찮아요.

 

우리 아기가 괜찮다고 하면.

 

 

그때 무용수들을 모두 내보낸 왕재수가 그들 쪽으로 왔다. 베르닌을 보더니 아주 잠깐이었지만 안도의 표정을 지었고 곧 활짝 웃었다.

 

 

애들 진짜 많이 좋아졌어. 내일 조금만 더 하면 무대에서도 괜찮을 거야. 로만, 이제 들어가서 쉬어. 내일 아침에 드레스 리허설 해야 하니까.

 

아직 7시도 안됐는데 뭘. 넌 어차피 옆방에서 애들 또 잡을 거잖아. 감시꾼도 모스크바로 돌아갔다면서. 끝날 때까지 여기 있다가 너랑 같이 돌아가면 되겠네.

 

당신 내 말 잊었어? 수요일까지. 안 돼.

 

 

코즐로프는 한숨을 쉬면서 베르닌에게 그것 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화를 내거나 우기는 대신 왕재수를 긴 팔로 덥석 휘감아 세게 안아준 후 내일 보자!하면서 나가버렸다.

 

 

 

왕재수는 베르닌에게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옆의 연습실로 가서 주역과 조역들이 춤추는 것을 주시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30분쯤 후 왕재수는 무용수들에게 그만 돌아가서 푹 쉬고 아침에 일찍 나오라고 했다. 이례적으로 이른 종료였다.

 

 

무용수들이 돌아간 후 왕재수는 무대감독을 불러서 드레스 리허설과 수요일 공연을 위해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사항들을 몇 가지 재확인했다. 거대한 의상실로 가서 새로 도착한 의상과 장신구들도 쭉 훑어보았다. 분장사와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베르닌은 잠자코 왕재수를 따라다녔다.

 

 

8시에 왕재수는 퇴근하겠다고 했다. 생각보다 빠른 시각이라 베르닌은 정말이냐고 되묻기까지 했다. 왕재수는 저녁도 집에 가서 먹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재킷을 걸치고 스카프를 두르더니 날듯이 뛰어나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베르닌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   *   *

 

 

 

 

 

차 안에서 왕재수는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다리를 건너갈 때는 창 너머로 가로등 램프 불빛에 반짝이는 물결을 보면서 손가락으로 사진 찍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신시가지로 접어들자 왕재수는 다시 노래를 흥얼거렸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로등 램프가 꺼져서 캄캄한 골목을 지나갈 때 왼손으로 목덜미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입 안으로 낮게 한숨을 쉬었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왔을 때 왕재수는 자연스럽게 6층 버튼을 눌렀다. 언젠가부터 그는 귀가하면 베르닌의 집으로 곧장 향했다. 엘리베이터 조명 아래에 서자 마냥 하얗고 매끄럽게만 보였던 왕재수의 얼굴에 푸르스름하고 검은 그림자가 졌다. 눈 주위가 거무스름했다. 하지만 복도로 나오자 다시 흠 없이 하얗게 보였다. 속눈썹 그림자였던 게 분명했다.

 

 

도자기 인형.

 

 

베르닌은 입 안으로 나직하게 뇌었다. 어지러웠다. 울고 싶었다. 왕재수는 곧장 그의 집으로 들어가더니 재킷과 스카프를 벗어 내팽개쳤다. 비누칠을 해서 손을 박박 문질러 씻더니 세수까지 하느라 셔츠 앞자락을 적셔 놓았다. 그래도 왕재수는 툴툴대지 않았다. 젖은 셔츠를 벗더니 빨래 건조대에서 베르닌의 티셔츠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 이거 입어도 돼? 옷 마를 때까지만.

 

으응. , 거기 네 옷도 있어. 어젯밤에 빨아놨거든. 다 말랐을 거야.

 

 

왕재수는 건조대 끝에 걸려 있는 하늘색 셔츠를 힐끗 쳐다보았다. 토요일 아침에 베르닌이 가져다 준 셔츠였다. 왕재수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셔츠를 낚아채 휴지통에 처넣었다. 납치당했을 때 입고 있었던 옷이라 그런 것 같았다.

 

 

베르닌은 보르쉬를 데웠다. 보랴에게서 주워들은 레시피대로 마카로니를 삶아서 스메타나와 연어알을 얹었다. 양배추와 당근을 채 썰어 곁들였다. 왕재수는 연어알 얹은 마카로니를 좋아하며 먹었다. 보르쉬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베르닌은 기계적으로 숟가락과 포크를 움직였다. 뭔가가 목구멍으로 넘어가고는 있었지만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왕재수가 맛있게 먹는 게 기뻤지만 동시에 어딘가 불안했고 소름이 돋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왕재수는 한 번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휘파람, 노래, 미소, 밝은 표정, 연어알 얹으니까 맛있어라는 쾌활한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밝고 사랑스러운 동시에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그 목소리와 표정 어디에도 가식적인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베르닌은 반년이 넘도록 왕재수의 곁에 있었다. 그 애가 어떤 식으로 웃고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잘 알았다. 평상시의 왕재수라면 음식이 맛있다 해도 결코 이렇게 개방적으로 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눈부신 미소를 짓지 않을 것이다. 그건 무대 위에서 보여 주던 미소였다. 완벽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미소. 저녁에 다시 만나 돌아오는 동안, 식사를 하는 동안 왕재수는 단 한번도 바보 멍충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탁월한 배우였으니까.

 

 

식사를 마친 후 왕재수는 욕실로 가더니 양치질을 했다. 나와서는 거실 카펫 위에서 두어 번 빙그르르 돌더니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싱크대 앞으로 갔다. 설거지를 하려고 물을 틀었다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침을 삼켰다. 거실로 갔다. 반쯤 잠긴 목소리로 불쑥 말했다.

 

 

왜 양치질했어?

 

? 밥 먹었잖아. 좀 있으면 잘 거고.

 

차 안 마셨잖아. 저녁 먹고 나면 항상 차 달라고 했잖아. 내가 잊으면 화냈잖아. 그런데 달라고도 안 하고.

 

그랬나... 극장에서 마셨으니까.

 

너 극장에서 마셔도 집에서 저녁 먹으면 꼭 차 마시잖아. 애초부터 나한테 저녁 홍차는 연하게 우려야 한다고 야단쳤잖아.

 

잊어버렸어. 아니, 오늘은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았어. 일찍 자려고.

 

왜 화 안 내?

 

왜 화내야 되는데?

 

너 내가 이렇게 꼬치꼬치 간섭하면 화내잖아. 근데 왜 화 안 내냐고.

 

너 왜 그러는 거야? 나 화나게 만들고 싶은 거야? 스페호프한테 엄청 볶이고 왔구나, 그래서 나한테 시비 거는 거지?

 

 

왕재수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깨를 으쓱거리자 칼라가 늘어난 티셔츠 사이로 불그스름한 키스 자국들이 남아 있는 목덜미가 휑하게 드러났다. 이제 베르닌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왕재수의 손목을 낚아채듯 쥐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그만해, 미하일. 제발. 그놈 누군지 봤잖아. 누군지 알잖아. 그렇지? 이제 괜찮아. 다 끝났어. 숨길 필요 없어. 말해. 다 말해. 나한테는 말해도 괜찮아.

 

 

왕재수가 눈을 깜박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 순진한 소년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베르닌이 손목을 더욱 세게 쥐면서 간절하고 고통스러운 눈을 떼지 않자 그 어린애 같은 표정이 사라졌다. 미소도, 조도, 휘파람도, 두 눈에서 반짝이던 장난기도 부서진 석고처럼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다. 무대 위의 왕자님 같던 가면이 사라졌다. 창백하고 매끄러운 얼굴 위로 검고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겁고 낮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다닐.

 

아니, 넌 알아. 내가 알기 전부터 알았어. 제발, 미셴카. 괜찮아. 전부 말해도 돼. 나한테는 괜찮아. 알잖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안 괜찮아. 전부 안 괜찮아. 너한테는 안 괜찮아.

 

 

왕재수는 연속으로 세 번, 숨도 쉬지 않고 안 괜찮아를 쏟아냈다. 평소 같았으면 정확한 문법과 우아한 말투를 중시하는 레닌그라드 출신답게 괜찮지 않아라고 했을 것이다. 그는 베르닌의 손을 뿌리치고 뒷걸음질쳤다. 창백하게 질린 채 고개를 양옆으로 마구 흔들면서 계속 뒤로 물러나다 소파에 걸려 휘청거렸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넘어지기 전에 팔을 뻗어 어깨를 붙잡았다. 왕재수가 고개를 돌렸다. 베르닌은 뱃속이 뭉클거렸다. 혈관 속의 피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심장에 칼이 꽂힌 것 같았다. 그는 왕재수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 불덩이처럼 뜨겁고 총에 맞은 새처럼 파르르 떨리는 몸을 두 팔로 세게 조이며 괴롭게 속삭였다.

 

 

그건, 그건 드미트리였지? 그렇지?

 

 

왕재수가 낮게 비명을 질렀다. 목에 걸려서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세게 안고 있는데도 몸을 경련했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다시 한 번, 좀 더 또렷하고 힘 있게 물었다.

 

 

널 납치했던 사람. 드미트리였지? 9층으로 데려갔던 사람. 그렇지? 부탁이야, 미하일. 솔직하게 말해줘. 그래야 해.

 

? 왜 솔직하게 말해야 되는데?

 

그래야 모든 게 괜찮아지니까. 그래야 네가 더 이상 무섭지 않을 테니까.

 

나는 안 무서운데... 난 다 괜찮은데.

 

아니야, 괜찮지 않아. 내가 바보야? 넌 괜찮지 않을 때만 그렇게 말해! ”

 

아니야. 난 괜찮아. 안 괜찮은 건 너야. 그러니까 이제 놔줘. 나 아무 말도 하기 싫어. 나 잘래. 다닐, 나 자고 싶어.

 

왜 나한테 안 괜찮다는 거야!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 자식 맞잖아. 드미트리 그 자식이 꾸민 거잖아. 협박편지, 비둘기, 인형, 수면제... 전부! 그 자식이 널 가뒀어. 그래놓고 감쪽같이 날 속이고 같이 널 찾으러 다녔어. 그놈이 널 협박한 거잖아... 이제 그놈은 갔어. 그러니까...

 

 

네가, 그놈이 좋다고 했잖아! 형제도 없고 친구도 없다고 했잖아! 형 같다고 했잖아! 그놈이 와서 좋다고. 소중하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안 괜찮아... 너는 안 괜찮단 말이야...

 

 

 

왕재수가 갑작스럽게 소리쳤다.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팔에 붙들려서 꼼짝도 못하자 머리로 베르닌의 어깨를 들이받았다. 이마와 숨결이 너무 뜨거워서 풀무질을 하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심호흡을 하려고 애썼다. 실패했다. 어쨌든 상관없었다. 그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앉느라고 팔의 힘이 조금 풀어지자 왕재수가 버둥거리며 빠져나가려고 했다. 베르닌은 있는 힘껏 왕재수를 껴안고 못 움직이게 눌렀다. 왕재수가 흐느꼈다.

 

 

숨 막혀, 숨 막혀... 왜 이러는 거야. 좀 놔줘. 다닐, 좀 놔줘.

 

알았어, 놔줄게. 근데 1분만 있다가.

 

... 지금 놔줘. 숨 막혀.

 

네가 너무 흥분해서 그렇지. 지금도 이렇게 몸부림치는데. 놔주면 벽에 머리 들이받을 거잖아. 다친단 말이야.

 

 

 

왕재수는 끙끙거리며 욕을 했지만 버둥거리던 것은 멈췄다. 몸의 경련도 많이 잦아들었다. 베르닌은 마음속으로 100까지 센 후 팔을 풀었고 왕재수를 놔주었다. 반쯤은 그 애가 화를 내며 도망칠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더 이상 왕재수를 붙잡고 있을 기력이 없었다.

 

 

왕재수는 도망치지 않았다. 베르닌의 곁에 주저앉더니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래서 베르닌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나 안 괜찮아. 네 말이 맞아. 안 괜찮아. 나 드미트리 좋아했어. 친구라고 생각했어. 형제처럼 좋았어. 그래서 놀랐어. 실망했어. 슬펐어.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줘. 안 그러면 나 정말 안 괜찮을 거야. 네가 말 안 해도 그놈이 했다는 거 알아. 알게 됐단 말이야. 그런데 네가 계속 아닌 척하면 나 정말 미쳐버릴 거야. 그러니까 그냥 다 얘기해줘. 나도 얘기할게. 우리 다 얘기하고 다 털어버리자. 그러면 둘 다 괜찮아질 거야. ? 우리 그러자.

 

 

왕재수가 핏기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두 눈의 빛이 꺼져 있었다.

 

 

바보 멍충이. 얘기한다고 괜찮아지는 거였으면 세상천지에 다 맘 편하고 행복한 사람들뿐이게.

 

그래도 기분은 훨씬 더 나아질 거야.

 

옛날에 내 친구도 그렇게 얘기했지.

 

누구, 유라?

 

아니. 유라 말고. 다른 친구.

 

 

 

왕재수는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입술만 움직였지만 어쨌든 미소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약간 안심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었다.

 

 

걔가 그런 거 맞지? 그랬던 거지?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확신하고 있었지만 왕재수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베르닌은 현기증이 나면서 온몸이 조각조각 저며지는 것 같았다.

 

 

그 자식이 너 협박한 거지, 그래서 아무 말 안 했던 거지?

 

 

왕재수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닌이 대체 무슨 협박을 한 거냐고 물어보려는데 왕재수가 입을 열었다.

 

 

너부터 얘기해줘. 어떻게 알았는지. 너 아침까지는 몰랐잖아. 끝까지 모를 줄 알았어.

 

 

그래서 베르닌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머릿속이 아직 다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따금 횡설수설하기도 하고 앞뒤를 놓치기도 했지만 모든 것을 다 말했다. 스페호프와의 면담에서 알아낸 사실. 리자의 이야기들. 도자기 인형. 검열국에서 알게 된 데미도프의 행동과 드미트리의 출현.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지금에야 미심쩍게 느껴지는 드미트리의 행동들. 전부 얘기했다.

 

 

 

 

*   *   *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중간에 일어나 물을 마셨지만 곧 돌아와 베르닌의 곁에 앉았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너무 조용해서 잠들었나 싶었지만 눈을 돌리면 곧 왕재수의 시선과 마주쳤다.

 

 

마침내 베르닌이 생각나는 모든 이야기를 마쳤을 때 왕재수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그랬구나. 안전가옥인지 뭔지랑 레베진스키 별장이랑 잔나네 집까지 갔었구나. 힘들었겠다, 비 오는데...

 

난 네가 정말 거기 있는 줄 알았어. 다 뒤졌는데 없어서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

 

바보... 내가 목걸이 떨어뜨렸는데... 나 찾아오라고... 한참 후에야 찾고.

 

 

베르닌은 눈을 깜박였다.

 

 

, 그 목걸이... 난 네가 반항하다 떨어진 줄 알았어. 일부러 떨어뜨린 거였구나...

 

. 그 자식이 날 떠메고 계단으로 올라갔거든. 내가 밀어서 계단에서 한번 구를 뻔했어.

 

넌 수면제 안 먹은 거지? 그 우유도 괜찮았던 거지?

 

수면제는 너만 먹었던 거지. 우유는 이상 없었어. 계단 올라갈 때까진 정신 멀쩡했는데 내가 미니까 그 자식이 머리를 패서 그때 기절했어.

 

위험하게 왜 그랬니... 그것도 계단에서.

 

목걸이 떼어내려고 그랬어. 그 자식이 눈치챌까봐 막 떠밀면서 왼손으로 몰래 떼어냈거든. 그 자식은 몰랐지.

 

 

베르닌은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왕재수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며 안타깝게 말했다.

 

 

아까 분장사한테 고쳐달라고 할걸...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까먹었어.

 

괜찮아. 내일 고치면 되지. 찾아서 다행이야.

 

 

왕재수는 목걸이를 손으로 꼭 쥐었다. 창백하던 얼굴에 희미한 핏기가 돌았다.

 

 

그런데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가. 나만 수면제를 먹었다는 거. 그 자식은 쓰러진 척만 했던 거야? 드미트리랑 나는 같은 팩에서 주스를 따라 마셨잖아. 어떻게 나만 약을 먹을 수가 있지?

 

바보. 약은 주스에 들어 있었던 게 아니야. 컵에 들어 있었던 거지. 네가 주스 달라고 했을 때 그 자식이 부엌에서 컵 가져와서 따라줬잖아. 유리컵이 아니니까 안이 안 보이잖아. 컵에 약을 넣고 그 위로 주스를 부었던 거야.

 

컵에...

 

 

베르닌은 기억을 더듬었다. 왕재수의 말이 맞았다. 드미트리가 주스를 마시는 것을 보고 갈증을 느낀 그는 주스가 남았느냐고 물었다. 드미트리는 새 컵을 가져와서 그에게 주스를 따라주었다. 그리고는 약기운이 도는 시간을 계산해 감쪽같이 먼저 쓰러진 척했던 것이다. 소름이 돋으면서 분노가 치밀었지만 애써 떨쳐버리려 노력하며 베르닌은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때 나한테 무슨 말 하려고 했던 거야? 내가 쓰러지기 전에... 네가 그랬잖아. 이거 말인데라고. 인형이랑 카드 만지면서. 설마 그때 드미트리가 협박범이란 걸 알아차린 거였어?

 

. 그때 알았어.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

 

카드. 인형. 전부.

 

그 인형은 네 방 창가에 있던 거였잖아. 두 개 중 하나. 그런데 어떻게 그것만 보고 드미트리라는 걸 안 거야?

 

아니야, 다닐. 그 인형은 내 방에 있던 게 아냐. 같은 사람이 만든 것일 뿐이야. 백조랑 발레리나는 많이 만들었지만 천사는 열두 개 밖에 만들지 않았어. 나한테는 하나밖에 없어. 원래는 두 개였는데 하나는 재작년인가 친구가 놀러 와서 구경하다가 깨뜨렸어.

 

하지만 다 똑같이 생겼잖아... 네 방에 있는 인형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 그것만 가지고 어떻게 드미트리라고 생각했어?

 

자세히 보면 열두 개 인형이 다 조금씩 다르게 생겼거든. 그리고 인형 발바닥에 완성한 날짜랑 일련번호가 적혀 있어. 내 방에 있는 건 1번이야. 깨진 건 2번이고. 협박편지랑 같이 온 건 8번이었어.

 

일련번호... 그랬구나. 하지만 그래도 모르겠어, 어떻게 드미트리인 줄 알았는지...

 

너야 당연히 모르지. 난 알아. 그건 레닌그라드에서 나온 거야. 로모노소프 도자기 공장 일급 디자이너였던 할머니가 있었는데 발레광이었어. 나랑도 친했고. 은퇴한 후에 나랑 동료들 무대 의상이나 장신구들 디자인을 도와줬거든. 천사는 키로프 쪽에서 그 할머니에게 의뢰해서 한정판으로 만든 거야. 그때 내가 작품을 하나 안무했는데 천사가 나왔거든. 할머니는 딱 열두 개만 만들어서 1, 2번은 나한테 줬어. 나머지는 그 작품 초연 때 극장에서 전시하고 팬들에게 선착순으로 팔았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 인형을 보낸 건 레닌그라드에서 온 사람이야. 그리고 내 작품 초연을 본 사람. 드미트리는 둘 다 해당돼. 내 팬이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원 주인이 다른 사람에게 팔았을 수도 있잖아. 여기까지 흘러들어왔을 수도 있잖아.

 

너는 발레광들이 어떤지 몰라. 게다가 명장이 만든 한정판 인형이야. 그리고 그 천사는 날 모델로 만든 거야. 내가 그랬잖아, 난 어마어마하게 인기가 많았다고. 내 팬들은 그 천사 구하려고 난투극도 벌인 적 있어. 그걸 손에 넣은 팬이라면 절대 안 내놨을 거야.

 

그런데 그 귀중한 인형의 머리를 자르고 망가뜨리다니...

 

그 자식이 카드랑 인형 들고 와서 친절하게 설명했던 거 기억 안 나? 처음엔 새, 그 다음엔 사람인 거였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거야. 처음엔 파랑새, 그 다음엔 나.

 

비둘기였잖아...

 

여긴 파랑새가 없잖아. 구할 수 있는 새를 죽였던 거야. 파랑새. 천사. 검은 기사. 카드에 그렇게 씌어 있었지. 그때 모든 게 명확해졌어. 범인이 그 자식이라는 게.

 

? 파랑새가 발레에 나오는 배역이라서? 드미트리가 발레를 잘 아니까? 여기도 관객들은 있잖아. 극장 사람들도...

 

단순히 발레에 나오는 배역이라서가 아니야. 그건 전부 나를 가리키는 거였어. 그건 전부 내가 키로프에서 췄던 배역이었어. 셋 다 굉장히 중요한 거야. 레닌그라드 팬들이라면 제일 처음 손꼽는 배역들이라고. 세 개 다 한때 내게 붙었던 별명이기도 했어. 파랑새는 내가 키로프에서 제일 처음 췄던 중요한 역이야. 학교 졸업하기 전에 역을 맡겨서 떠들썩했었어. 천사는 아까 얘기한 안무작과도 관계가 있지만 내가 데뷔했을 때부터 제일 많이 불리던 별명이었어. 높이 날고 바닥에 내려오지 않는다고... 그리고 검은 기사는 내가 제일 처음 안무했던 작품에서 춘 거야. 루슬란과 류드밀라. 난 로그다이를 췄어. 알잖아, 주인공이랑 싸우다가 물에 빠져 죽는 기사. 검은 망토를 두르고 나오거든. 그래서 팬들이 그때부터 검은 기사라고 불렀어. 물론 레닌그라드에서만이야. 나중에 모스크바 가서는 또 다른 별명들로 불렸으니까.

가브릴로프에서는 아무도 그런 거 몰라. 렐랴도 인터뷰할 때 보니까 내가 그걸 춘 건 알지만 별명까지 붙었다는 건 몰랐어. 극장 사람들도 그렇고. 내가 그런 얘길 한 적도 없고. 그러니까 그건 드미트리였던 거지. 레닌그라드 토박이. 내 모든 작품을 봤고 안무작은 모두 초연을 봤다고 했어. 로그다이가 제일 인상에 남는다고 했고. 검은 기사 말이야. 그 자식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 청년극장에서 올렸던 작품까지 봤다고 했지. 그놈은 진짜 팬이었어. 레베진스키도, 스페호프도 그런 세심한 협박편지와 선물을 보낼 만큼 똑똑하지 않았어. 여섯 개의 음악도. 그건 레닌그라드에서 온 내 팬만이 보낼 수 있는 거였어.

 

 

 

베르닌은 몸을 떨었다. 그토록 드미트리를 좋아하고 신뢰했던 자신이 너무나 바보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배신감이 치솟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드미트리가 왜... 대체 왜 그런 거야... 그 자식 심지어 스페호프의 지령을 따른 것도 아니었어. 스페호프는 납치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않았어. 드미트리는 네 팬이었잖아. 얼마나 열띠게 너와 네 작품을 옹호했는데... 수요일 공연 꼭 올리게 해주고 싶다고 했는데. 그런데 왜...

 

왜긴 왜야, 사이코니까 그렇지.

 

 

왕재수는 눈을 감았다.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면서 내키지 않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팬이라서 그런 거야. 다닐, 넌 극장에 대해서, 무대와 배우에 대해서, 팬에 대해서도 잘 몰라. 어딜 가나 광팬들이 있어. 100명 중 99명은 괜찮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머지 하나가 사이코일 때가 있어. 그것도 꽤 자주. 그러면 재수 옴 붙는 거지. 그리고 그런 팬들은 연극배우보다는 무용수들한테 더 많아. 너도 알다시피 무용수들은 나이와 육체와 힘의 지배를 받는 존재잖아. 드라마 배우보다 수명이 짧은 대신 젊고 외모가 근사한 편이지. 게다가 육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직업이니까. 발레단 동료들도 대부분 한두 명씩 있었어, 골치 아픈 팬이. 나한테는 좀 많았어. 사이코. 스토커. 미친놈들. 내가 그랬잖아, 그 자식 눈초리가 맘에 안 든다고. 재수 없게 쳐다본다고. 비싼 그림이나 고기 감정하듯이 훑어본다고 했잖아. 많이 봤어, 그런 눈빛. 학교 다닐 때부터. 기숙사 앞에서, 극장에서, 주차장에서, 길에서, 카페에서, 집 앞에서, 생각지도 않은 곳 여기저기서.

 

 

베르닌은 불현듯 첫날 저녁이 생각났다. 연습을 마친 무용수들이 호들갑을 떨며 왕재수를 껴안고 호의를 표시하고 있을 때 드미트리는 저만치 떨어져서 그런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베르닌은 놀랐었다. 자신과 아주 닮은 그 까만 눈에서 그런 강렬한 시선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가. 팬이라면 널 동경하는 거잖아. 좋아하고 아끼는 거잖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런 나쁜 짓을 할 수가 있어? 널 위협하고 납치하고...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야? 드미트리는 수요일 공연 정말 보고 싶어 했어.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어. 아침에 떠날 때 정말로 아쉬워했어. 널 숭배했단 말이야. 걔는 네 작품을...

 

내 작품을 좋아한 게 아니야. 예술가로서의 날 숭배한 것도 아니고. 바로 거기 그냥 애호가와 사이코 스토커의 차이가 있어. 그 자식은 그냥 날 좋아한 거야. 자기 손에 넣고 싶었던 거라고. 너는 그런 거 영영 모를 거야. 사람을 그런 식으로 원할 수 있다는 거. 너무 갖고 싶어서 사이코가 되는 거야. 갖는 순간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놈도 있고 그냥 천천히 말려죽이고 싶어 하는 놈도 있어. 자기 거라고 흔적을 남겨놓는 데서 만족하는 놈도 있고 인형놀이를 하듯이 갖고 노는 놈도 있다고. 너야 이해하기 어렵겠지. 착한 애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잖아, 바보 멍충이가 훨씬 낫다고.

 

 

왕재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의식적으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부스럭거리더니 한숨을 쉬며 도로 손을 꺼냈다.

 

 

한 대 피우고 싶다... 담배 없지?

 

없어. 나 안 피우잖아.

 

넌 왜 담배 안 피우는 거야. 재미없게.

 

, 난 담배 있어도 너 안 줄 거야! 너 피우면 안 되잖아! 의사 선생님이 절대 피우지 말랬잖아. 원래 체질에 맞지도 않는다면서.

 

매사가 안 된다는 것투성이...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담배 대신 물을 따라 주었다. 왕재수는 물을 딱 한 모금만 마셨다. 그동안 베르닌은 계속해서 팬과 사이코와 스토커에 대해, 누군가를 동경하는 것과 원하는 것, 갈망과 소유욕과 파괴의 경계에 대해 생각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드미트리를 떠올리자 더욱 머리가 뒤엉켰다.

 

 

하지만 그 자식이 네 팬이었다면 수요일 공연을 망칠 생각은 아니었을 거 아냐. 근데 그놈은 널 가뒀어. 이상한 협박편지까지 계속 보내고... 왜 그렇게 복잡한 짓을 해야 돼? 그냥 널 납치해서 가뒀으면 끝나는 거잖아. 게다가 나랑 같이 널 찾아다녔어. 왜 그랬던 거지?

 

그놈은 수요일 공연을 방해해야 했지만 완전히 망칠 생각은 아니었어. 왜냐하면 그 자식은 내 팬인 동시에 모스크바에서 온 KGB 나부랭이였으니까. 그놈은 스페호프가 아니라 다른 놈에게서 지령을 받고 있었어.

 

, 누구... 스비제르스키?

 

 

낯익은 이름에 왕재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아니. 그 아저씨야 내 공연을 보고 싶어 하는 걸. 하긴 그 사람과 관계는 있지. 그 자식을 보낸 건 제믈랴코프였으니까. , 넌 그렇게 말하면 잘 모르겠구나. 정치꾼이야. 스비제르스키 그 인간과는 정적이고. 날 감옥에 처박는 데 한 몫 했던 놈이야.

 

 

베르닌은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스페호프가 제믈랴코프에게 보내는 밀서를 그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외교부 차관.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가 도리어 덫에 걸렸던 인물.

 

 

드미트리가 제믈랴코프의 지령을 받고 왔단 말이야? 그자는 KGB 쪽이 아니잖아. 외교부 간부잖아. 드미트리는 KGB 요원인데... 어떻게 그자의 명령을 받을 수 있어?

 

바보. 너 정말 이 바닥 모르는구나. 매수하면 끝나는 거지. 게다가 그놈은 해외 지부에서 일했잖아. 런던이랑 파리 어쩌고... 그러니까 외교부 간부랑 엮이는 거야 쉬웠겠지. 제믈랴코프는 우리 아저씨에게 엿을 먹이고 싶었거든. 그래서 그 자식한테 지령을 준 거야. 가서 공연을 방해하라고. 하지만 미묘한 줄타기가 필요했던 거지. 공연이 취소되거나 내가 완전히 맛이 가면 우리 아저씨가 폭발할 테니까. 그래서 그자는 딱 중간만큼만 선을 그은 거야. 공연은 어찌어찌 올라가게 놔둔다 해도 나한테는 혼을 내주고 싶었던 거지. 제믈랴코프 그 인간은 옛날부터 날 진짜 싫어했거든. 게다가 이번에 우리 아저씨한테 제대로 엿 먹은 게 있었대. 그래서 은밀하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거야. 망할 자식이 아저씨를 손댈 용기는 없으니까 나한테 화풀이를 한 거지.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아낸 거야? 설마 드미트리가 그런 얘길 다 해 준 거야?

 

아주 대충. 그놈 완전 제 잘난 맛에 취해 있었거든. 미친놈이었어. 막 협박하고 윽박지르다가 또 돌변해서 어쨌든 곱게 돌려보내줄 테니 말만 잘 들으라고 어르고... 뭐 그놈이 제믈랴코프의 이름을 거론하지야 않았지. 하지만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 견적 나오더라고. 그 자식은 대놓고 말했어. 말만 잘 들으면 월요일까지 데리고 있다가 보내주겠다고. 근데 네가 어제 목걸이를 발견하는 바람에 하루 당겨진 거지. 하여튼 그게 그놈의 공적인 임무였어. 날 납치하는 거. 혼내주는 거. 공연 준비를 방해해서 질 나쁜 무대를 보여주게 하는 거. 그건 제믈랴코프의 목적이었지. 그놈은 다른 목적이 있었고.

 

다른 목적이라니...

 

먼저 얘기한 거. 사이코. 스토커. 정신 나간 팬의 목적.

 

 

왕재수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다리를 웅크리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불편해 보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쿠션을 대주려고 했지만 왕재수가 꿈틀거리더니 그의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았다. 베르닌은 반쯤 무의식적으로 그 애의 관자놀이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충격과 분노는 이제 둔해진 상태였다. 더 이상 놀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 하지만 무서웠다. 드미트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무서웠다. 제믈랴코프의 지령을 받고 온 드미트리보다도 팬으로서의 드미트리가 더 무서웠다. , 드미트리 자체가 아니라 그가 한 짓들을 알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그는 가장 원점으로 돌아가서 물었다. 조금이라도 더 객관적이 되어 보려고.

 

 

그러면... 내가 쓰러진 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네가 날 붙잡은 것까진 기억나. 내 이름 부른 것도. 그 다음에는? 너는 수면제를 먹지 않았잖아. 그때 드미트리가 널 붙잡은 거야?

 

. 그놈이 쓰러졌을 때 깜짝 놀랐어. 그놈이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너까지 쓰러지니까 진짜 놀랐어. 너 제대로 숨도 못 쉬었단 말이야. 막 헐떡거리면서 팔다리도 경련하고... 눈도 안 뜨고 거품까지 물었어. 너무 무서웠어. 네가 어떻게 될까봐. 나 감옥에서 봤어. 이상한 주사 맞고 사람 죽는 거. 꼭 그렇게...

 

 

왕재수는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끼치는 듯 몸을 떨었다. 눈가에 흐릿하게 눈물이 비쳤다.

 

 

그랬구나. 그래서 901호에서 날 처음 봤을 때 그렇게 물었구나. 괜찮으냐고. 막 쓰러지고 꼼짝도 안 했다고... 가지 말라고 한 건 자기 때문이 아니었어. 날 걱정했던 거야. 약 먹이고 아프게 할 거라던 것도 자기 얘기가 아니었어. 내가 쓰러졌던 걸 떠올렸던 거야. 내가 아플까봐...

 

 

베르닌은 손등으로 왕재수의 눈을 닦아주었다. 낼 수 있는 가장 상냥한 목소리를 짜냈다.

 

 

괜찮아. 나 그때 하나도 안 아팠어. 그냥 졸렸어. 몇 시간 자고 일어나니까 멀쩡했어. 진짜야.

 

 

... 근데 그땐 그런 거 몰랐어. 그 자식이 협박했으니까. 진짜 나쁜 약인 줄 알았어. 내가 막 너 인공호흡하려고 하는데 그 자식이 일어났어. 너무나도 멀쩡하게. 웃으면서. 난 너무 놀라서 굳어졌어. 그 자식이 옆으로 다가왔어. 그리고는 네 어깨를 질질 끌어당기는 거야. 그래서 내가 밀쳤어. 건드리지 말라고. 그랬더니 그놈이 그 재수 없는 정중한 말투로 심지어 내 부칭까지 부르면서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물었어. 난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래서 그놈한테 꺼지라고 소리쳤어. 더 이상 수작부리지 말라고, 협박범인 거 다 안다고, 비둘기 죽이고 거지같은 편지 나부랭이 보낸 것도 모자라서 뭐하는 짓이냐고 고함쳤어. 그러자 그놈이 갑자기 씩 웃으면서 생각보다 훨씬 똑똑하다고 했어. 그러더니 무섭냐고 물었어. 네가 잘못될까봐, 죽기라도 할까봐 무섭지 않으냐고. 그러더니 권총을 쥔 손을 들어 올렸어. 나는 그놈이 총을 갖고 있다는 걸 잊고 있었어. 자식은 처음부터 총을 겨누고 있었는데도...

 

 

그 자식이 너한테, 너한테 총을 겨눴단 말이야? 마카로프... 그걸로 널 협박했단 말이야?

 

 

 

왕재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잠시 망설이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베르닌의 열띤 시선을 받자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내가 아니었어. 너였어. 다닐, 그 자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웃고 있었어. 웬만하면 날 다치게 하진 않을 거라고 했어. 난 네 팬이잖아, 미셰츠카라고 했어. 대신 널 쏘겠다고 했어. 쏘지 않더라도 그냥 두면 넌 죽을 거라고 했어. 아주 나쁜 약을 썼다고. 그런 거 전에도 보지 않았느냐고. 내가 말을 잘 들으면 널 쏘지 않을 거라고 했어. 해독제를 줄 거라고 했어. 난 너무 무서웠어. 그놈이 몇 번이나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했거든. 네 머리에 대고. 그래서 난 시키는 대로 했어.

 

 

... 뭘 어떻게...

 

 

그 자식은 내 수첩을 가져와서 종이를 뜯어내더니 나한테 편지를 쓰라고 했어. 왼손으로. 문구를 불러줬지. 기억도 잘 안 나. 왕자가 어쩌고 수요일이 어쩌고 하는 거였어. 진짜 유치한 문구였어. 하여튼 불러주는 대로 썼어. 그동안 그놈은 계속 너한테 총을 겨누고 있었어. 다 쓴 후에 그놈은 날 앉혀놓고는 자기 임무에 대해 설명해주겠다고 했어. 제대로 된 설명도 아니었어. 하여튼 말만 잘 들으면 수요일 공연은 올릴 수 있을 거라고 했어. 안 그러면 널 쏴죽일 거라고 했어.

 

 

하지만... 어떻게 그걸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가 있어? KGB 요원이야. 요원을 죽이면 그건 공식적인 사건이 된다고. 아무리 제믈랴코프가 보냈다 해도 그렇지... 넌 세상 물정에 밝잖아. 근데 어떻게...

 

 

그놈이 사이코였다고 했잖아. 제믈랴코프의 지령만 수행하는 놈이었다면 그 정도로 불안하진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놈은 미친놈이었어. 눈을 보면 알아. 그리고... 그놈은 스페호프가 널 신뢰한다는 것도 잘 알았어. 내가 중간에 말을 안 듣거나 도망치려고 하면 스페호프에게 네 배신행위를 전부 다 보고하겠다고 했어. 그러면 너는 잘릴 거고 더 이상 KGB 요원이 아니게 되는 거니까, 그리고 나면 아주 깨끗하게 널 죽여 버릴 수 있다고 했어. 그래서 난 그냥 말을 듣기로 했어.

 

 

 

베르닌은 숨이 막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고개를 흔들며 거실을 쿵쿵거리며 걸어 다녔다. 간신히 숨을 가다듬고 물었다.

 

 

 

그래서. 그 다음엔?

 

 

그 다음? 아까 얘기했잖아. 그놈이 날 9층으로 데려갔어.

 

 

복도에 나왔을 때 소리라도 질렀으면... 그놈이 널 데리고 나왔으면 여긴 비어 있었을 거 아니야. 나한테 총 쏘겠다고 협박할 수도 없었을 거잖아.

 

 

하나 더 있었어. 너한테 달려들었던 놈. 검열요원.

 

 

데미도프... 그놈이...

 

 

. 근데 난 그 자식 얼굴은 못 봤어. 마스크로 가리고 있었거든. 굳이 얼굴을 꽁꽁 숨긴 걸 보니 내가 아는 놈일 거란 생각은 했어. 드미트리는 그놈에게 여기 남아 있으라고 하면서 바깥에서 내가 소리 지르는 게 들리면 곧장 널 쏴버리라고 했어. 그래서 소리 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개자식이 스카프 찢어서 입도 막고 다리도 묶었어.

 

 

그래서 떠메고 갔다는 거구나. 손 대신 다리를 묶었던 거야...

 

 

. 내가 말을 잘 들었으니까 칭찬하는 뜻으로 손은 묶지 않겠다고 했어. 근데 내가 계단에서 목걸이 떼어내는 거 안 들키려고 떠밀면서 버둥거렸더니 그 자식이 바닥에 메다꽂고 뒤통수를 팼어. 그래서 기절했어.

 

 

? 그럼 심하게 맞은 거잖아! 왜 의사 선생님한테 얘기 안 했어! 뇌진탕이라도 걸렸으면 어쩌려고!

 

 

선생님은 알아. 뒤통수 상처를 봤거든. 치료도 해주셨어. 머리카락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으니까... 내가 너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했어.

 

 

바보 멍충이! 내가 아니고 네가 바보 멍충이야!

 

 

별로 심하지 않았어.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어. 금방 깨어났고. 그리고 그놈이 그 방에서 직접 소독도 해주고 연고도 발라줬었어. 미친 변태 자식.

 

 

 

왕재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떨었다. 베르닌은 공항으로 달려가 비행기를 잡아타고 모스크바 본부로 날아가고 싶은 어마어마한 충동을 억누르느라 이를 악문 채 뭉개진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넌 그때부터 계속 901호에 갇혀 있었던 거야? 보드카 마셨다고 했잖아. 다른 약은 안 먹었어?

 

 

그 보드카 생각도 하기 싫어. 처음엔 그냥 침실에만 가둬놨었어. 문은 다 잠겨 있고 그놈들이 교대해서 지켰어. 드미트리 그놈은 중간 중간 몇 시간씩 나갔다 들어왔어. 아마 너랑 같이 나 찾으러 다니는 시늉 하느라 그랬겠지. 밥도 주고 차도 줬어. 안 먹으려고 했는데 그놈이 협박해서 억지로 먹었어. 그러다가 그놈들이 방을 비운 거야. 방문은 밖에서 잠겼으니까 못 연다지만 창문은 깨뜨릴 수 있잖아. 그래서 나가려다 걸렸어.

 

 

9층인데 창문을 깨고 나갈 생각을 했단 말이야?

 

 

파이프 타고 내려가려고 했었지. 알잖아, 나 벽 잘 타는 거. 근데 그때 데미도프인지 뭔지 하는 자식이 딱 들어와서 망했어. 그놈이 주먹질을 하려는데 드미트리가 들어오더니 저지하는 거야. 무려 키로프에서 오신 귀한 몸이니까 너 같은 녀석이 손대면 안 된다면서 그놈을 내보냈어. 그러더니 그 사이코 새끼가 날 팼어! 그 자식 루뱐카 본부에서 온 놈 맞아, 상처 안 나게 패는 법을 알더라고. 자기는 날 때려도 된대. 내가 졸업도 안 한 풋내기 시절부터 내 무대를 봤으니까, 자기는 진정한 팬이니까 내가 잘못하는 게 있으면 더 잘못하기 전에 때려서라도 바로잡아 줘야 된다는 거야. 너무 웃기지 않아? 사이코나 공산당, 정치꾼, KGB 하수인들 논리나 다 똑같더라고. 하여튼 두들겨 팼어. 내가 못 덤벼들게 수갑 채워놓고. 그래놓고 보드카 먹였어. 내가 말을 안 들으니까 어쩔 수 없이 재워야겠다면서. 얼마나 먹였는지는 기억도 안 나. 생각만 해도 또 토하고 싶네.

 

 

 

왕재수는 속이 울렁거리는 듯 손으로 가슴과 배를 쓸었다. 베르닌은 이제 화조차 나지 않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그는 언제나 사람의 선의를 믿었다. 그런 식으로 비열하게, 완벽하게 사악하게 행동하는 인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데 일등공신 노릇을 해온 스페호프조차도 어딘가 어리숙한 면이 있었다. 적어도 그는 스페호프의 패턴을 예측할 수는 있었다. 국장이 어떤 사고방식의 소유자인지도 알았다. 하지만 드미트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드미트리에 대해 품었던 호의와 신뢰는 모두 무의미했다. 그가 느끼고 파악하고 이해했던 드미트리는 모두 허상에 불과했다. 오로지 그 사실만으로도 베르닌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 드미트리가 왕재수에게 그런 비열한 짓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 이후 있었던 일을 물었다. 왕재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몰라. 기억 안나. 그때부턴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어. 토하고 자다가 깨다가 토하고 또 자고...

 

 

베르닌은 이제 왕재수가 사실을 숨길 때,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말투와 어떤 단어를 쓰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 더 캐묻지 않았다. 왕재수 때문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 때문이었다. 무서웠다. 드미트리에 대한 모든 환상이 깨질까봐. 드미트리의 행동이 그의 상식과 윤리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더욱 더 깊게 들어 갈까봐.

 

 

그럼 내가 갔을 때까지 그러고 있었던 거야?

 

거의.

 

하지만... 난 총소리를 들었어. 두 번. 드미트리는 실제로 총에 맞았고. 그럼 데미도프와 그 자식이 막판에 싸운 거야? 꼬리 밟혔다고 책임 추궁하다 싸우고 열 받은 데미도프가 쏜 거야? 피를 보자 놀라서 그놈은 도망친 거고...

 

 

베르닌은 그때의 상황을 논리적으로 상상해 재구성하려고 애쓰며 물었다. 왕재수는 소파 구석으로 몸을 바짝 붙이면서 지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대꾸했다.

 

 

 

아니. 총은 내가 쐈어.

 

 

 

베르닌은 너무 놀라서 펄쩍 뛰어오를 뻔 했다.

 

 

 

? 네가 쐈다고? 네가 어떻게! 너 그때 기절해 있었잖아! 분명히... 분명히 그랬어. 그래서 그 자식이 인공호흡을 해주고 있었고... 나도...

 

, 기절. 그래, 잠깐 기절하긴 했지. 그 자식이 목을 졸랐거든. 총 맞고 나서 순간 열 받아서... 그래도 오래 조르진 않았어. 네가 뛰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하지만... 넌 묶여 있었잖아! 총 같은 거 쏠 줄도 모르잖아!

 

뭘 당겨야 되는지는 나도 알아! 내가 총 쏘는 거 못 봤을 거 같아?

 

 

 

왕재수는 갑작스럽게 화가 치미는 듯 입술을 깨물며 발로 소파 아래를 걷어찼다. 그리고는 그때 있었던 일을 낮고 빠른 어조로 쏟아냈다.

 

 

 

난 침대에 묶여 있었어. 데미도프 그 자식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근데 갑자기 그 사이코가 뛰쳐 들어왔어. 데미도프에게 거실로 나가라고 했어. 그러더니 나한테 자는 척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윽박질렀어. 그렇게 말했지. 이런 깜찍한 것 같으니, 목걸이를 떨어뜨려? 분명히 보내주겠다고 했잖아. 내 말을 못 믿었어?라고. 그러면서 그 미친놈이 키스를 했어. 다닐, 그 자식이 그랬어. 끝까지 말을 안 듣는 나쁜 애라고, 의원님들이 날 혼내주고 싶었던 것도, 귀여워해 주고 싶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곧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다냐가 올 거라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는 고민 중이래. 다냐는 순진한 녀석이니까 마음에 든다고. 그래도 내가 말을 안 들었으니까 방에 들어오는 즉시 쏴버려야겠다고. 물론 진담은 아니었어. 나도 그건 알았어. 그놈은 널 쏠 생각이 없었어. 적어도 그 방에서는 그럴 수 없었어. 넌 아직 잘리지 않았고 여전히 KGB 요원인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때 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어. 그놈은 다시 키스를 하려고 몸을 숙였어. 재킷 안주머니에 권총이 들어 있는 게 보였어. 내 오른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지. 하지만 왼손은 움직일 수 있었어. 그래서 난 손을 뻗어서 자식의 주머니에서 권총을 낚아챘어. 그리곤 곧장 쐈어.

 

 

왼손으로...

 

 

나 어릴 때 양손 쓰는 연습 많이 했어. 근데 총은 처음 쏴봤으니까 오른손으로 쐈어도 빗나갔을 거야. 처음 건 완전히 빗나가고 두 번째 건 어깨에서 피가 나길래 제대로 맞췄나 했는데 아니었어. 그냥 스친 거였어. 그 자식 진짜 화냈어. 앞뒤 안 가리고 곧장 내 손에서 총을 뺏더라고. 자식이 내 팔을 비틀면서 한 손으로 목을 졸랐어. 방으로 달려온 공범 자식한테 그놈이 ! 계단으로 가!하고 소리쳤어. 일부러 그랬겠지. 계단에서 너랑 마주치게 하려고. 그놈 얼굴 보여주려고...

자식은 그놈이 나가는 것을 보려고 잠깐 현관까지 뛰어나갔다 들어왔어. 그리고는 내가 몸부림치니까 올라타서 깔아뭉갰던 것 같아. 하여튼 목을 졸랐어. 너무 숨이 막혀서 기절했던 것 같아. 그때 네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어.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어. 그래서 정신이 잠깐 돌아왔어. 아마 그놈이 손의 힘을 늦췄기 때문일 거야. 네가 바깥에서 뛰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어. 그러자 그놈은 내 목을 놔줬어. 소리쳐 너를 불렀어. 그리고는 귓가에 대고 말했어. 한 마디도 하지 마, 미셰츠카. 다닐을 팔아넘길 테니까.나는 상관없다고 했어. 그러든 말든 상관없다고. 그러자 자식은 내 입술에 자기 입을 대고, 숨을 불어넣듯이 입술로 누르면서 속삭였어. 아니, 상관있을 걸. 스페호프에게 밀고할 테니까. 그럼 그놈은 많이 힘들 거야.라고. 어쩌면 다른 얘기를 했을지도 몰라. 너무 숨이 막혀서 잘 들리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그때 네가 왔어. 그놈이 널 쏠까봐 무서웠던 것 같기도 해. 근데 기억 잘 안 나. 숨쉬기가 힘들었어.

 

 

 

베르닌은 그 방으로 뛰어 들어갔던 순간을 떠올렸다. 드미트리는 침대 위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자세가 부자연스러웠다. 베르닌은 그가 인공호흡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니었다. 그는 협박을 하고 있었다. 목을 조르고 입술을 마주 댄 채 끔찍한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베르닌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화가 나고 슬프고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주먹으로 바닥을 쾅쾅 쳤다. 소리치고 흐느껴 울었다. 훌쩍훌쩍 울고 있는데 왕재수가 옆으로 왔다.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화 많이 나?

 

 

왜 나한테 얘기 안했어! 얘기했어야지! 난 그것도 모르고... 그것도 모르고 그 자식이랑 어울려 다니고... 그 자식이 하는 말을 다 믿고... 그놈이 해 주는 저녁 먹고... 한 식탁에서 같이 앉아 있고... 너랑 그 자식 둘이 있게 놔두고... 바보 멍청이!

 

 

말하면 뭐해. 달라질 것도 없는데.

 

 

뭐가 없어! 내가 그 자식 죽여 버렸을 거 아냐! 감옥 보내고...

 

 

네가 어떻게 그놈을 감옥 보내니. 그 자식이 병원에서 너한테 한 말 기억 안 나? 그 개자식이 한 말 중 유일하게 거짓말이 아니라고. 아무도 내 말은 안 믿어줄 거란 말이야. 그리고 내가 납치됐었다는 게 공론화되면 위에선 내 담당 요원인 너한테 책임을 물을 거고.

 

 

넌 그게 문제란 말이야! 왜 항상 그렇게 나오는데! 내가 어떻게 되든 말든! 나쁜 짓한 놈을 그냥 두란 말이야?

 

 

그럼 달리 뭘 하니. 달라질 것도 없는데. 그 자식 감옥에 넣는다고 나 잡아갔던 게 없어져? 일만 더 꼬이지. 난 공연만 잘 올리면 되는걸. 달라지게 했으려면 그때 제대로 쐈어야 했는데... 빗나갔잖아. 그걸로 끝인 거야. 에이, 그 자식 가고 다 끝나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망할 놈의 인형... 리자는 그걸 왜 봐가지고 너한테 말하고.

 

 

그럼 넌 내가 알아채지 못했으면 끝까지 말 안하려던 거였어?

 

 

.

 

 

 

베르닌은 왕재수를 피가 나도록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두들겨 패고 멱살을 잡아 흔들고 땅에 머리를 마구 박아주고 싶은 건 자기 자신이었다. 괴로워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가방을 뒤지더니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낸 끝에 넓적하고 커다란 초콜릿을 와작 쪼개서 내밀었다. 베르닌은 기가 찼다.

 

 

 

이게 뭐야...

 

여자애들이 줬어. 먹으면 기분 좋아진다고 그러던데, 엄청 달아서.

 

이 상황에서 초콜릿 먹게 됐냐!

 

그럼 어떤 상황에서 먹어? 기분 엄청 나쁘니까 지금 먹어야지.

 

 

 

베르닌은 초콜릿을 받아서 입 안에 욱여넣었다. 눈이 질끈 감기도록 달았다. 너무 달아서 기침이 나왔다. 억지로 우걱우걱 씹어서 꿀꺽 삼켰다. 남은 초콜릿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목이 메었지만 눈물 때문인지 초콜릿 때문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왕재수는 자기가 마시던 물컵을 건네주었다. 물을 마시자 마비될 듯하던 단맛이 씻겨 내려가면서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기분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지만 뭔가를 목구멍으로 넘겨서 그런지 북받치던 분노와 괴로움은 조금 잦아들었다.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왕재수로부터 남은 초콜릿을 받아서 마저 먹었다. 왕재수는 가방에서 사과파이도 꺼냈다. 접시도 없이 바닥에 종이봉지 째 내려놓고는 손으로 대충 쪼개서 들고 먹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차 우려 줄까?

 

.

 

 

그래서 베르닌은 찻물을 올렸다. 물은 금방 끓었다. 티포트에 찻잎을 넣으면서 보니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었다. 바쁘다고 설거지를 대충대충 해서 그런 것 같았다. 나중에 소다로 닦아야지하고 중얼거리며 그는 차를 우렸다. 접시와 포크도 찾아서 들고 갔다.

 

차를 따라주니 왕재수는 좋아했다. 차 한 모금, 사과파이 한 입 번갈아가며 먹었다. 한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마시고 초콜릿과 사과파이를 먹었다. 뜨거운 차와 당분 때문에 몸이 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질문을 했다.

 

 

 

... 그 자식 말이야. 그러면, 그러니까... 어젯밤에 너희들... 밤에 너네 집 갔다가 봤어. 나는 네가 드미트리를 좋아하게 됐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둘이 밤을 보냈다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지? 그 자식이 협박해서 그런 거지?

 

 

 

왕재수는 눈을 깜박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한참 후에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우리 이 얘긴 안 하면 안 될까?

 

 

베르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찻잔을 쥔 채 물끄러미 왕재수를 쳐다보기만 했다. 왕재수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랬잖아, 그 자식 사이코 팬이었다고. 그 자식한테 진짜 중요한 건 섹스 자체가 아니야. 나랑 하는 거, 날 자기 걸로 만드는 게 중요한 거지. 아마 나랑 하기 전까진 사내애들이랑 놀아본 적도 없었을 걸. 그놈은 내가 너한테 사실을 말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어. 그래서 새벽까지 하고 싶은 거 하다가 간 거야.

 

그러면, 그러면 9층에 있을 때도 그랬어? 토요일이랑 일요일에도?

 

그게 중요하냐, 어차피 한 번을 하든 몇 번을 하든 한 건 마찬가지인데.

 

말 잘 들으면 곱게 보내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 그런 나쁜 짓을 계속 한 거냐고!

 

“ ‘곱게의 의미는 두들겨 패거나 불구로 만들지 않고돌려보내준다는 거였지.

 

 

베르닌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왕재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하여튼 곱게 돌아왔잖아. 그러니까 그걸로 된 거야.

 

 

그치만, 어젯밤엔 그냥 우리 집에 남아 있었으면 됐잖아. 내가 금방 돌아왔을 건데. 내 옆에 있었으면 그놈도 대놓고 널 데려가지는 못했을 텐데. 그런데도 그 자식 따라서 올라가고... 너 정말 그 협박을 믿었어? 그놈이 국장한테 일러바쳐서 날 자르게 한다는 거? 그래서 끝까지 입 다물고 그놈이 원하는 대로 해준 거야?

 

 

처음엔 믿었지. 네가 쓰러지는 걸 봤으니까. 나중엔 안 믿었고. 그놈은 스페호프에게 자기 정체를 드러낼 위험을 무릅쓸 수 없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로 무모한 짓을 하고 있었잖아. 너한테도 이렇게 결국은 꼬리 밟히고. 어쨌든 그놈은 내가 아무 말도 안 할 거란 걸 알았어. 내가 어떤 식으로 생각할지,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알고 있었어. 오랜 팬이라서, 사이코라서, 아니면 영리한 놈이라서, 셋 중 어떤 이유인지는 나도 몰라. 어쩌면 셋 다겠지.

 

 

나중엔 안 믿었다면서... 그러면 왜...

 

 

글쎄. 중요한 건 네가 스페호프에게 잘리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네가 그놈을 좋아했다는 건지도 모르지. 넌 바보 멍충이잖아. 난 바보가 실망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어.

 

 

 

베르닌은 눈을 깜박였다. 입술을 다물었다 벌렸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왕재수는 그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근데 이제 물 건너갔네. 다 저 망할 인형 때문이야. 다 알아버리고. 울고 소리 지르고 후회하고 자학하고... 바보는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난 바보가 아니야!

 

 

그러게. 근데 그냥 바보 해. 그게 좋아.

 

 

너 좋으라고 바보 멍충이로 살란 말이야?

 

 

그러면 안 되니?

 

 

 

베르닌은 왕재수의 뺨을 한 대 후려갈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한 것은 그 반동분자 꼬마의 야윈 몸을 홱 끌어당겨 두 팔로 안아준 것이었다. 너무 세게 안아줘서 왕재수는 왼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놓쳤다. 반쯤 남아 있던 찻물이 테이블과 카펫 위로 엎어져 작은 시내처럼 흘렀다. 얼룩이 질 게 뻔했다. 괜찮았다. 찻물과 먼지와 땀과 피는 지울 수 있었다.

 

 

소다를 타서 닦아야지...

 

 

아마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입 밖에 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왕재수가 웃었고 바보 멍충이라고 쏘아붙였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야단을 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왕재수가 사모바르처럼 따끈따끈해지더니 금세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완전히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기다렸고 한참 후에야 그를 침대로 옮겨 뉘었다. 그리고 거실로 나와서 남은 사과파이 한 입, 식은 차 한 모금씩 번갈아 가며 전부 먹고는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FIN

- 2015. 9. 18 ~ 10. 2 -

 

 

 

 

 

 

.. 이렇게 하여 우수한 단추 시리즈는 정말로 끝이다.

 

이게 뭐냐, 지금 장난하냐! 꿈과 희망의 서무 시리즈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라고 하신다면... 그래서 독립된 34편이 아니라 33-1편으로 번호를 매겼습니다... 이번 편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그냥 이건 일종의 평행우주, 단추의 꿈, 일어나지 않은 일 등등으로 무시하고, 우수한 단추 시리즈는 그냥 33편에서 끝난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사실 나도 우수한 단추 시리즈 쓰는 내내 그냥 33편으로 끝낼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지만. 원래 이 사람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처음부터 이런 결말과 이런 구조를 생각하고 쓴 거라서... 쓰면서도 이건 서무랑 좀 안 맞는데... 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쓰다 보니 또 기분 좋게 끝내고 싶어서 33편으로 그냥 마무리하고 이 결말은 그냥 마음속에서만 가지고 있을까 잠깐 고민도 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모든 이야기가 이 결말을 향해서 서술된 거라서. 그래도 꽤 노력해서 쓴 편이라 단추가 발견한 단서들을 무시한다면 그냥 33편으로 끝나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어차피 리자나 스페호프와의 대화가 아니었다면 단추는 몰랐을테니) 그러니 행복한 서무 시리즈를 원하는 분들은 이 33-1은 그저 평행 우주의 결말이라고 생각하시기를..

 

..

 

이번 편에 나오는 왕재수는 서무 에피소드 몇몇개와 마찬가지로 '딱 싸가지 없는 그 서무의 왕재수'라기보다는 본편의 미샤와 훨씬 가깝다. 하긴 왕재수를 아무리 '딱 싸가지 없는 어리광쟁이'로 만들어보려 해도 원판의 강력한 본 인물이 있으니 결국은 당겨놓은 고무줄처럼 자꾸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하는 것 같다.

 

..

 

 

하여튼 이번 편은 별다른 자세한 묘사는 없지만 내용 자체는 조금 그래서... 하여튼 공개 블로그에 올리는 거라서 수위는 많이많이 조절했습니다. 올리면서 다시 읽어보니 아무래도 나는 크레믈린 사촌이 맞는 건가 ㅠㅠ 왕재수에게 너무한 건가 ㅠㅠ 모든 것은 단추의 꿈이었습니다 허헝..

 

..

 

인사 발령과 지방 이전, 거듭되는 출장과 업무 폭풍으로 아마 한동안 서무는 자주 올라오지 못할 것 같다. 지금은 34편을 쓰는 중인데 과연 연휴 동안 끝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 (34편은 다시 랄라랄라 분위기로 돌아옵니다 ㅠㅠ)  못 올리더라도 전에 쓴 본편이나 추리 외전 등 다른 글을 매주 발췌해보려고 한다. 그럴 여유가 생길 수 있기를..

 

..

 

 

서무 시리즈나 about writing 폴더에 글 남겨주신 분들 항상 감사해요. 글에 대한 이야기들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가져가시거나 베끼거나 인용/변형/사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우여곡절 끝에 여러 편으로 길어진 우수한 단추 시리즈. 지난 1부에 이어 이제 33편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 2부이다.  

 

기존에도 서무 시리즈는 이 장르 저 장르 잡탕이었고 에피소드별 분위기나 문체도 균질하지 않았지만 특히 우수한 단추 이야기들은 서무 시리즈 중에서도 별도의 외전 같은 느낌으로 쓰긴 했다. 기존 서무 에피소드들은 당직실 귀신 외에는 그래도 현실적인 이야기들이었는데 드미트리가 나오는 이야기들은 애초부터 단추와 똑같은 외모에 전공과 성까지 같은 드미트리 베르닌이란 존재 자체가 일종의 평행우주 성격이나 환상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수한 단추 시리즈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과연 베르닌과 드미트리는 사라진 왕재수를 무사히 구해낼 수 있을지. 베르닌의 901호에 대한 추리는 옳았을지, 그리고 금발의 안경잡이 범인은 누구일지. 여기 33편 2부에서... 그럼 재미있게 읽으세요~

 

* 이번 편은 33편 1부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므로 전편을 꼭 읽어야 함(http://tveye.tistory.com/4062)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4월 신작 공연을 앞두고 정체불명의 협박범에게 납치된 왕재수. 베르닌과 드미트리는 힘을 합쳐 가브릴로프 시내를 동분서주하지만 왕재수의 행방은 묘연하고... 그러던 중 베르닌이 발견한 왕재수의 목걸이... 과연 이들은 왕재수를 찾아내고 사흘 앞으로 다가온 공연을 무사히 올릴 수 있을 것인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 http://tveye.tistory.com/406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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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3

 

 

 

 

 

서무의 슬픔

-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 (2부) -

 

 

 

 

 

 

 

 

5층쯤 뛰어올라갔을 때 베르닌은 너무 숨이 차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폐가 터질 것 같았다. 그제야 생각이 나서 무전기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 딤카, 901호야. 열쇠 받았어. 금방 갈 테니까 기다려! ”

 

 

답이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 딤카, 내 말 안 들려? 무슨 일 있어? ”

 

 

순간 베르닌은 벽력같은 굉음에 고막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너무나 큰 소리가 하고 울려 퍼져서 자기도 모르게 귀와 머리를 감싸고 옆으로 데구르르 굴렀다. 손에서 놓친 무전기 너머로 다시 한 번 꽝 소리가 났다. 저 위쪽 어딘가와 무전기 양쪽에서 동시에 꽝 소리가 울려 퍼진 거였다. 베르닌은 불에 덴 듯 벌떡 일어섰다. 총 소리였다. 위에서 난 소리였다. 9층이 분명했다. 투다닥거리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났다.

 

 

딤카! 기다려! 딤카!

 

 

베르닌은 미친 듯이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올라갔다. 8층까지 올라왔을 때 갑작스럽게 시커먼 그림자가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덩어리처럼 그의 정면으로 쇄도했다. 베르닌은 본능적으로 두 팔을 뻗어 그자를 가로막았다. 연한 금발머리였다.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둘 다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맞부딪친 순간 엄청난 충격이 전해져 왔다.

 

베르닌은 악착같이 그자를 가로막다가 가속도와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뒤엉켜서 계단을 굴렀다. 안경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려고 하는데 상대방이 뭔가로 그의 머리를 거세게 쳤다. 아마 베르닌이 고개를 홱 옆으로 돌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계단 난간이 없었다면 두개골이 박살났을지도 몰랐다. 통증과 충격으로 베르닌이 숨을 몰아쉬는 순간 남자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뿌리치고 일어나더니 발로 등을 걷어찼다. 베르닌은 등골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 너무 아파서 눈앞이 새하얘졌지만 고함을 지르며 그자의 발목을 붙들었다. 남자가 욕설을 퍼부으며 다시 한 번 그를 걷어찼다. 베르닌은 옆으로 굴러서 피했다. 머리로 그 자의 종아리를 들이받았다. 남자가 휘청거리더니 균형을 잃고 계단 아래로 쿠당탕 굴러 떨어졌다. 베르닌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쫓아 내려가려는데 위층에서 드미트리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미하일! 미하일!

 

 

그 마법 같은 이름에 베르닌이 얼어붙은 순간 아래쪽 계단에 나뒹굴고 있던 남자가 몸을 솟구쳐 일어나더니 쏜살같이 달려 내려갔다. 베르닌은 그자의 뒤를 쫓으려고 했지만 다시 한 번 드미트리가 ‘미하일!’ 하고 외쳤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범인을 붙잡는 것보다 왕재수가 먼저였다. 게다가 조금 전의 그 총소리. 한순간 베르닌은 머리에서 피가 다 빠져 달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 안 돼... 아닐 거야... 아냐, 걜 쏜 게 아닐 거야... 하느님... 안돼요! ’

 

 

솟구치는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이 베르닌은 뛰고 또 뛰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전력으로 달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마침내 9층에 도착했다. 901호는 맨 끝에 있었다. 정신없이 복도를 내달렸다. 옆집에서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 대체 무슨 일이에요! 웬 소란이냐고요! ”

 

“ 비켜요! KGB라고요! ”

 

 

그 기분 나쁜 단어를 듣자 902호 주민이 몸서리를 치며 잽싸게 문을 쾅 닫았다. 상관없었다. 베르닌은 달렸다. 901호.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순간 베르닌은 가슴이 덜컹했다. 현관에서부터 핏자국이 점점이 이어져 있었다.

 

 

미셴카! 나야, 다닐! 제발... 미셴카!

 

 

그는 구르듯 뛰어 들어갔다. 하마터면 문턱에 발이 걸려 고꾸라질 뻔했다. 어두워서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안쪽에서 드미트리가 소리쳤다.

 

 

“ 다닐, 이쪽이야! ”

 

“ 딤카! 미하일... 미샤는... ”

 

“ 여기 있어! 빨리 와! ”

 

 

머리가 띵해졌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베르닌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나아갔다. 정신없이 벽면을 휘젓다가 손에 닿는 스위치를 올리자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침실이었다. 그는 침실에 들어와 있었다. 커튼이 빽빽하게 드리워져 있고 침대와 나이트테이블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커다랗고 휑한 침실이었다. 한쪽에 문이 하나 붙어 있었다. 아마도 욕실일 것이다. 구조가 왕재수의 집과 똑같다면.

 

 

맨 처음에 그는 드미트리 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드미트리는 침대 위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자세가 부자연스러웠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 이유를 알았다. 인공호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재수는 침대 위에 똑바로 누워 있었다. 오른쪽 팔을 위로 쳐든 채. 손목과 침대 난간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드미트리에게 가려져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손과 무릎을 경련했을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때 드미트리가 입을 떼더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숨을 몰아쉬면서 소리쳤다.

 

 

“ 너 인공호흡 할 줄 알지? ”

 

“ 으, 으응... ”

 

숨은 이제 돌아왔는데... 그래도 교대해 줘. 조금만 더 해주면 될 것 같아. ”

 

 

베르닌은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드미트리를 밀치고 왕재수의 곁으로 바짝 붙었다. 왕재수는 눈을 감은 채 입을 O자로 벌리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숨은 쉬고 있었다. 불규칙하고 약할 뿐이었다. 드미트리가 심장 마사지를 했는지 셔츠 단추가 반쯤 풀어헤쳐져 있었다. 베르닌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인공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왕재수의 입술과 코가 차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수차례 반복해 숨을 불어넣고 있는데 왕재수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무릎으로 그를 들이받았다. 그리고는 묶여 있지 않은 손으로 힘없이 그의 가슴을 밀었다. 고개를 옆으로 피하며 도리질을 했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가냘픈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가... 저리 가...

 

“ 미셴카... 나야. 다닐이야. 정신 들어? 이제 괜찮아! 괜찮아! ”

 

“ 다닐... ”

 

 

왕재수가 눈을 떴다. 베르닌과 눈이 마주치자 두어 차례 눈을 깜박이더니 기침을 하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왼손을 뻗더니 물에 빠진 사람처럼 베르닌의 손목을 아플 정도로 꽉 쥐었다. 베르닌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 이제 괜찮아. 다 끝났어. 그놈 갔어. 집에 가자. ”

 

“ 너 괜찮아? ”

 

“ 나... 당연히 괜찮지. ”

 

“ 아니야... 안 괜찮아. 막 쓰러지고... 꼼짝도 안 하고... ”

 

 

왕재수가 몸을 떨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머리와 손을 쓸어주면서 달랬다.

 

 

“ 괜찮아. 그때 수면제 먹어서 그랬어. 하나도 안 아팠어. 나랑 드미트리는 괜찮아. 넌... 넌 괜찮은 거야? 그놈이 약 먹였어? 그랬어? ”

 

“ 몰라. 아무 것도... 기억 안 나... 다닐, 나 집에 가고 싶어. ”

 

 

왕재수가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건지 약 기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떨구더니 몸을 웅크렸다.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의 맥을 쟀다. 불규칙하고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과 차가운 손발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빨리 의사에게 데려가야 할 것 같았지만 수갑을 풀 수가 없었다. 급한 마음에 수갑을 덜컹거리며 잡아 흔들고 있는데 드미트리가 다가왔다. 핀을 밀어 넣더니 1분 정도 끙끙거리며 씨름한 끝에 수갑을 딸깍 하고 풀었다. 그리고는 왕재수의 팔과 손목을 주무르면서 빠르게 말했다.

 

 

“ 다닐, 의사한테 전화해. ”

 

“ 아, 그래! ”

 

“ 하지 마... 하지 마. ”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던 왕재수의 입술 사이로 희미하지만 단호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베르닌은 부드럽게 달랬다.

 

 

“ 괜찮아, 미셴카. 레프 사벨리예비치한테 전화하는 거야. 너 지금 아프잖아. 그놈이 약 먹였잖아. 의사 선생님이 봐주시면 금방 나을 거야. ”

 

“ 아니야. 괜찮아. 집에 갈래. 조금만 자면 괜찮을 거야. 가지 마, 다닐. 가지 마. ”

 

 

왕재수가 두 팔로 베르닌에게 매달렸다. 감긴 눈 아래로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가면 안 돼, 또 약 먹이고... 막 아프게 하고... 위험해서 안 돼. ”

 

 

베르닌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왕재수를 꼭 껴안고 뺨을 쓰다듬으며 달랬다.

 

 

“ 이제 괜찮아, 미셴카. 아무도 안 와. 약 같은 거 더 안 먹여. 아프게도 안 할 거야. 나 아무 데도 안 갈게. 너 옆에 있을게. 전화는 드미트리한테 하라고 할게. 넌 나랑 의사 선생님한테 가자. 그럼 괜찮지? ”

 

 

왕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절한 것 같았다. 꼭 감은 눈가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드미트리가 한숨을 쉬었다.

 

 

“ 헛소리하는 거야. 약에 취해서... 아까도 저랬어. 감옥에 있을 때랑 혼동하더라고. 일단 나가자. 전화는 내려가서 해야겠다. ”

 

“ 그, 그래. 근데 아까 그 소리는... 총 소리... 그건... 앗, 너 괜찮아?

 

 

그제야 베르닌은 드미트리에게 시선을 돌렸고 깜짝 놀라 고함을 질렀다. 드미트리는 한 손으로 왼쪽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소매가 피로 빨갛게 얼룩져 있었다. 드미트리는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 어, 별 거 아냐... 좀 스친 거야. ”

 

“ 스친 거라니! 총에 맞았잖아! 이 바보야, 그래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앉아봐! 박혔어? 총알 박혔냐고! ”

 

아니야, 다닐. 그냥 스쳤어. 살갗만 찢어진 거야. 정말이야. 걱정하지 마. ”

 

 

베르닌은 급하게 드미트리를 침대에 앉혔다. 셔츠를 벗게 한 후 상처를 살폈다. 피투성이가 되어 있어 육안으로는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일단 상처를 꽉 동여매서 지혈을 했다. 드미트리가 벽에 움푹 파인 자국을 가리켰다.

 

 

“ 그놈이 쐈는데 빗나갔어. 어깨 스치고 저기 가서 맞았어. 총알이랑 탄피는 내가 주웠어. ”

 

“ 총 소리가 두 번 났는데... ”

 

“ 두 방 쐈어. 미친 놈... 사격 솜씨도 엉망이었어. ”

 

“ 다행이다... 정말 큰일 날 뻔 했구나... 너 왜 안 쐈어! 총 있었잖아! 총 잘 쏘면서... 왜 그놈이 너 쏘게 내버려둔 거야! ”

 

 

드미트리가 왕재수 쪽을 힐끗 바라보며 지친 음성으로 대꾸했다.

 

 

“ 쏠 수가 없었어. 그놈이 이 방에 있었거든. 얜 묶여서 인사불성이었고... 혹시라도 내가 잘못 쏴서 총알이 튀기라도 하면... 미하일에게 맞기라도 하면... ”

 

“ 아... 그래... 그렇지... 다행이다... 딤카... 정말 다행이야. 많이 안 다쳐서... 얘가 무사해서... 그런데 그놈은... ”

 

“ 얘긴 좀 있다가 하고 미하일부터 빨리 의사한테 데려가자.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재수 뿐만 아니라 드미트리도 빨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는 급하게 왕재수를 들쳐 업었고 드미트리와 함께 901호에서 빠져나갔다.

 

 

 

 

*    *    *

 

 

 

 

스타브로프는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는 대신 즉시 응급조치를 해주었다. 왕재수의 맥을 재고 혈액 검사를 했다. 마사지를 하고 몸을 따뜻하게 한 후 지난번과는 좀 다른 약초즙을 먹였다. 왕재수는 곧 눈을 떴다. 스타브로프가 상냥하게 달래면서 뭘 먹었거나 주사를 맞은 기억이 있는지 물어보자 고개를 저었다.

 

 

“ 모르겠어요. 술 마신 것 같아요. ”

 

“ 보드카? ”

 

“ 술. 보드카. 토했어요. 잤어요. 잘 몰라요. 근데 이제 괜찮아요. 극장에 갈래요. ”

 

“ 극장 같은 소리! 며칠은 누워 있어야 될 거다! ”

 

“ 말도 안 돼. 애들이 다 기다리는데. 지금 가야 돼요. 수요일 공연... ”

 

안 돼! 입원이야! 나아지지 않으면 수요일 공연이고 뭐고 다 취소해야 돼! ”

 

“ 안 돼... ”

 

 

왕재수가 두 손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눈에서 새빨간 불꽃을 번쩍거리며 스타브로프에게 삿대질을 하고 꾸짖었다.

 

 

선생님이면 다야! 진짜 가야 된단 말이에요! 그 공연... 얼마나 열심히 준비한 건데! 애들이 얼마나 기다리는데! 못 가게 하면 가만 안 둘 거예요! 지금 가야 돼!

 

 

베르닌은 노의사가 버럭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타브로프는 화를 내지 않았다. 왕재수의 머리와 등을 쓸어주면서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그래, 내가 실언했구나. 공연 올려야지.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깟 족제비 같은 KGB 나부랭이 때문에 못 올리게 할 수야 없지. 내가 낫게 해주마.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 있자. 그래야 나아져서 내일 극장에 가고 수요일에 공연도 올릴 수 있지. 어차피 오늘은 벌써 해도 지고 늦었단다. 무용수들도 너 안 오는 줄 알고 집에 갔을 거야. 오늘 푹 자고 내일 가자. 다닐이 그러라는구나. 그렇지? ”

 

 

베르닌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쳤다.

 

 

맞아 맞아! 내가 극장에 얘기했어, 너 아파서 오늘은 못 나오지만 내일 나오니까 다들 연습 많이 하고 있으라고. 그러니까 내일 일찍 가자. 내가 데려다 줄게. 지금은 푹 자는 거야. ”

 

“ 너는? ”

 

“ 나? 내일 너 극장에 데려다 줄게. 같이 있을게. ”

 

“ 지금도... ”

 

“ 지금? 응. 일요일이니까. 회사 안 가. 여기 같이 있어줄게. ”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브로프는 고분고분해진 왕재수를 데리고 몇 가지 검사를 더 해본 후 따뜻한 물과 약초즙을 조금 더 먹이고 재웠다.

 

 

“ 선생님, 미하일은 괜찮은 거예요? 이상한 약을 먹은 건 아닌가요? ”

 

“ 보드카를 마신 것 같기는 하구나. 혈액에서도 알콜 외의 다른 약물 성분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

 

“ 하지만... 어제 아침에 우유에 탄 수면제를 먹은 것 같아요. 그건 괜찮을까요? 전 그거 먹고 세 시간쯤 뻗었거든요. ”

 

“ 어제 아침에 먹었으면 지금쯤 몸 밖으로 배출됐을 거야. 아까보다는 많이 나아졌고. 목이나 팔에 주사 자국은 없더구나. 진찰해 보니 별도의 약물을 먹거나 맞은 건 아닌 듯해. 애가 너무 놀란 것 같아서 입원시키겠다고 했던 거다. 상태 봐서 괜찮아지면 밤에는 집에 돌아가도 될 거야. 내일은 극장에 갈 수 있을 거다. ”

 

“ 다행이다... ”

 

 

복도로 나오니 어깨에 붕대를 감은 드미트리가 앉아 있었다. 안색은 한결 나아보였다. 베르닌을 보자 옆으로 옮겨 앉으며 자리를 내주었다.

 

 

“ 괜찮니? ”

 

“ 응. 스친 거라고 했잖아. 드레싱하고 붕대 감아서 괜찮아. 금방 아물 거래. 그건 그렇고 너도 멍들었구나. 치료 안 받아도 되겠니? ”

 

“ 난 괜찮아. 그놈이랑 좀 뒹군 것뿐이라서. 너 왜 나 안 기다렸어, 같이 들어갔어야지. ”

 

“ 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놈이 문을 열고 나오는 거야. 순간 판단력이 흐려졌어. 그놈도 잡아야 할 것 같고 미하일도 구해야 할 것 같아서 뛰어들었어. 무장하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는데 내 능력을 과신한 거지 뭐. 미안하다, 너 기다렸어야 했는데. ”

 

“ 아니야.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놈 하나였어? ”

 

“ 응. 그런 얼치기한테 당하다니. 자존심 완전 구겼어. 너 그놈 봤어? ”

 

“ 응, 계단에서 좀 엎치락뒤치락했는데 도망쳤어. 얼굴을 제대로 못 봐서 누군지 모르겠어. 금발에 안경 꼈는데 레베진스키는 아니었어. 우리 현장요원도 아니고... 대체 누군지 모르겠어. ”

 

검열요원.

 

“ 뭐? ”

 

 

베르닌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미트리는 다시 한 번, 천천히 되풀이했다.

 

 

“ 검열요원. 그놈이었어. 목요일에 미하일 방에서 봤잖아. 검열국장하고 미하일이 싸울 때, 옆에 있었어. 상상도 못했어, 그놈일 거라고는. ”

 

 

베르닌은 눈을 감았다 떴다. 계단에서 달려들었던 남자의 얼굴이 갑작스럽게 선명해졌다. 연한 금발. 안경. 뾰족한 턱. 흐릿한 갈색 눈. 극장. 감독실. 연습실. 그는 항상 구겨진 양복을 입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수첩에 뭔가를 적거나 왕재수를 상대로 뭔가를 계속 지적하면서 또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그는 베르닌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베르닌이 스페호프의 명령으로 왕재수 곁에 붙어서 감시 업무를 수행하듯, 그 역시 검열국장의 명령에 따라 정기적으로 극장에 왔고 왕재수의 작품을 사전 검열하고 낱낱이 트집을 잡았다.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 회색인.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눈에 띄지 않는 사람.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

 

 

“ 검열요원이었다니... ”

 

 

베르닌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드미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 다닐, 두 번째 카드 기억나? 여섯 명의 작곡가. 그때 내가 그랬잖아, 범인은 검열국장과 미하일이 싸운 걸 아는 사람이라고. 그자는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극장과 발레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았을 거야, 미하일 작품 검열 담당이었으니까. ”

 

“ 그래. 검열국에서는 벌써 몇 달 동안 걜 괴롭혔어. 신작 말고 다른 작품들도 사사건건 지적했어. 우리 국장과 검열국장이 친하거든. 어떻게든 걔 공연을 방해하려고 했어. 하지만... 그럼 레베진스키는 뭐지? 그 목록의 동그라미, 인형... 미샤의 사무실을 뒤지고 사진을... ”

 

“ 그자 혼자서 하지는 않았을 거야. 생각해봐. 미하일이 검열국장에게 여섯 명의 작곡가를 대보라 했을 때 국장은 아무 대답도 못했어. 그자도 옆에 있었지만 귀띔조차 하지 못했어. 그자는 음악에 대해서는 몰랐어. 알았다면 쇼스타코비치 심포니를 7번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미하일이 그랬잖아, 1번과 7번도 구별 못하는 바보라고. 검열국장이 직접 음악을 듣지는 않았을 테니 잘못된 보고서를 올린 건 분명 담당자인 그놈이었겠지. 알잖아, 윗사람들 어떻게 행동하는지. 검열국장은 창피를 당하고서는 열 받아서 그 6개 음악 목록을 당장 내놓으라고 호통 쳤겠지. 그래서 그자는 레베진스키에게 부탁해서 목록을 얻어낸 거야. 스페호프가 레베진스키를 불러서 얘길 나눴잖아. 그러니까 너희 국장은 너와 나, 현장요원들 대신 레베진스키와 검열국의 도움을 받기로 했던 거야. 혹시라도 스비제르스키나 벨스키에게 꼬리가 밟히더라도 KGB가 아니라 극장과 검열국 쪽으로 책임을 돌릴 수 있으니까. 도자기 인형도 레베진스키가 공수해줬겠지. 사진도 많이 찍었다면서. 이전부터 너희 국장의 정보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얘기잖아. 그래서 그 둘을 붙였겠지. 누가 검열국 쪽을 의심했겠니. 너랑 나도 그자를 감독실에서 봤는데도 생각조차 못했으니... ”

 

 

드미트리가 한숨을 쉬었다. 생각할수록 분한 모양이었다.

 

 

“ 보기 좋게 당했어. 네가 아니었다면 아마 수요일까지 미하일은 9층에 갇혀 있었을 테고 공연도 취소됐겠지. 미안하다, 다닐. 내가 능력도 없는 주제에 현장 경험 조금 있다고 나서기나 하고... 네 추리가 아니었다면 미하일을 찾지 못했을 거야. ”

 

“ 아니야, 딤카. 나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계단에서 목걸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끝까지 몰랐을 거야. 게다가 난 그놈이랑 치고받고 싸웠는데도 알아보지도 못했는걸. ”

 

나도 처음엔 못 알아봤어. 근데 그 안경을 보니까 퍼뜩 생각이 나더라고. 목요일에 미하일이랑 검열국장이 한바탕 했을 때 말이야. 너는 중간에서 말렸지만 난 처음에 뒤에서 그냥 지켜봤잖아. 그때 그 작자가 안경을 추켜올리면서 계속 수첩에 뭘 적고 있는 거야. 되게 재수 없다고 생각해서 좀 유심히 봤었거든. ”

 

가만 안 둘 거야! 고발해서 감옥 보낼 거야!

 

 

드미트리가 지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그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근데 다냐, 난 걱정이야. 그놈이 너랑 내 얼굴을 봤잖아. 나야 곧 떠나니까 상관없는데... 네가 이번 작전을 방해했다고 그놈이 스페호프에게 고해바치면... ”

 

“ 상관없어! 나쁜 놈들... 진짜 이번엔 못 참아! 아까 걔 봤잖아... 눈도 못 뜨고 묶여 있고... 더러운 놈들... ”

 

“ 나도 다른 상황 같았으면 그놈 고발하고 본부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했을 거야. 근데 미하일은 워낙 상황이 복잡하니까... 그리고... ”

 

“ 그리고 뭐? ”

 

“ 아까 보니까 미하일은 정말 너한테 의지하는 것 같더라. 그런데 네가 스페호프에게 찍혀서 잘리거나 불이익을 당하게 되면 미하일하고도 헤어지게 될 거고... 걘 더 이상 기댈 데가 없어지겠지. 나 예전엔 몰랐어, 그냥 무대에서 화려한 모습만 봤으니까. 그냥 팬이었으니까. 걘 나한테는 그냥 대단한 예술가일 뿐이었거든. 근데 여기 와서 보니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 있잖아, 다닐. 네가 그랬지. 걔 겉보기만 그렇지 완전히 애기라고. 처음엔 그냥 걔가 유치하게 굴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외모는 예쁜 도자기 인형 같지만 성격은 어린애 같은 모양이라고만 생각했었어. 이제 알겠어. 왜 네가 그렇게 얘기했는지. 너는 걔 옆에 있어야 돼.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남아줘야 한다고. 정의고 뭐고 다 필요 없어. 검열요원 그 작자랑 레베진스키를 고발해봤자 스페호프가 눈 하나 깜짝하겠니?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오리발 내밀고 그나마도 갖고 있던 너에 대한 신뢰를 잃고 널 잘라버리는 걸로 끝나겠지. ”

 

“ 하지만... 미셴카가... 미샤가 그놈 얼굴을 봤잖아. 그놈이 미샤를 끌고 가서 가뒀고... ”

 

“ 미하일은 정치범이잖아. 조건부 석방된 유형수나 다름없다고. 걔의 증언은 아무 소용이 없어. 게다가 걘 약에 취해 있었잖아. 심신미약 상태라 증언 인정도 안 될 거야. 다 그렇게 돌아가더라. 나 파리랑 런던에 있었잖아. 본부에도. 거기서 봤어. 아직도 많이 죽여. 그냥 실종사나 의문사 처리돼. 미하일이 재판에서 즉결처형 판결 받지 않은 건, 그리고 여기로 올 수 있었던 건 그나마도 큰 손이 있었기 때문이야. 넌 미하일이 증언을 한 적이 없다고 믿니? 했었어. 재판에서. 변호인이 아무도 없었지. 그래서 쟨 자기변론을 했었어. 몇 마디 못하고 끌려 나갔어. 체제 부적응자에 정신병자라서 발언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지. 그랬던 앤데 이제 와서 검열요원이 자길 납치해 가뒀다고 증언한들 누가 믿어주겠니. ”

 

 

베르닌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코즐로프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눈 색깔 다른 남자,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의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성도.

 

 

'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의 따윈 없어. 힘센 놈들이 이기는 거지. '

 

' 차르라고 전부 자기 뜻대로 됐을 것 같나? '

 

 

힘없이 베르닌이 중얼거렸다.

 

 

“ 그럼... 그러면 어떻게 해... 그놈이 벌써 국장한테 갔을 거야. 아까 있었던 일... 전부 보고했을 거야. 벌써 다 끝났잖아. 너랑 날 밀고했을 거야. 우리 때문에 작전 망쳤다고. 국장은 이제 날 안 믿을 거야. 내가 고발하든 가만히 있든 이미 다 끝났어. 국장이 나 자를 거야. 미샤는... 아... ”

 

 

드미트리가 그를 쳐다보았다. 뜻을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오랫동안 그를 바라본 후 드미트리가 천천히 말했다.

 

 

우리 같은 옷 입었어.

 

“ 뭐? ”

 

“ 같은 옷. 회색과 겨자색 아가일 무늬 셔츠. ”

 

 

갑자기 얘가 머리가 돌았나 왜 갑자기 옷 타령인가 하는 생각에 베르닌은 멍하게 드미트리를 쳐다보았다. 어쨌든 드미트리의 말이 맞았다. 비에 젖어 샤워를 하고 나온 드미트리에게 자기 옷을 꺼내줬으니까. 이제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 어, 그래... 나 그거 그때 의류공장 견학 갔을 때 세트로 샀던 거야. 같은 거 몇 벌 있어. 근데 미샤가 되게 싫어해, 입고 있는 거 볼 때마다 제발 좀 싹 갖다버리라고 얼마나 성화인지 몰라. ”

 

“ 너랑 나는 많이 닮았지. ”

 

“ 으응. 그렇지. 다들 쌍둥이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까. 미샤 빼고. 걘 너랑 나랑 안 닮았대. ”

 

“ 아. 미하일. 걔야 그렇게 말하겠지. 걔는 널... 음... ”

 

 

드미트리는 고개를 돌리면서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 부럽다. 너처럼 됐으면... ”

 

“ 그게 무슨 소리야. 너 같은 엘리트가. ”

 

“ 그냥... 나도 그 친구한테 너처럼... ”

 

 

그러더니 드미트리가 목을 가다듬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 어쨌든. 내 말은 그게 아니고. 너랑 나랑 되게 닮았잖아. 마침 옷도 똑같이 입었고. 그 자식이 너랑 날 어떻게 구별하겠어. 위층에서 달려들었던 것도 나고 계단에서 싸운 것도 나야. 드미트리 베르닌이라고. 너는 이 건물에 없었던 거야. 넌 그냥 검은 숲에 드라이브 갔다가 저녁에 돌아온 거고 내 연락을 받아서 병원에 온 거야. 미하일을 찾아낸 것도, 그 개자식을 두들겨 팬 것도, 스페호프의 작전을 망친 것도 나인 거야. 그렇게 하면 돼. 그러면 모든 게 괜찮을 거야. ”

 

하지만... 그럼 넌 어쩌려고! 말도 안 돼! 국장이 널 가만 안 놔둘 거야!

 

가만 안 놔두면 제깟 게 어쩌려고. 난 연수요원이야. 모스크바 본부에서 파견되어 왔다고. 너랑은 달라. 여차하면 스비제르스키에게 모든 걸 고해바치겠다고 협박하지 뭐. 처음부터 당신의 얼간이 같은 계획을 저지할 생각으로 모든 것을 감시하고 기록했다고 할 거야. 정 안 되면 그 어르신 이름을 팔기라도 하지 뭐. 먼발치에서 밖에 본 적 없지만 스페호프가 그것까지 알 도리는 없으니까. 스비제르스키는 워낙 모스크바 본부에서도 그렇고 해외 지부에서도 막강했으니까 내가 거기서 만나서 연줄이 있는 사이라고 을러대면 믿을 거야. ”

 

“ 그렇지만... ”

 

“ 그렇게 하는 거야, 다닐. 난 어차피 떠날 사람이잖아. 너는 미하일 옆에 남아 있어야지. ”

 

“ 그래도 네가... ”

 

“ 아 배고프다. 우리 뭐 좀 먹자. 어제부터 제대로 못 먹었잖아. 일단 아무거나 대충 사 먹자. 있다가 미하일 깨어나면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항아리 닭고기라든지... 와인만 있으면 코코뱅 만들어 줄 수도 있고. ”

 

 

드미트리가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기 때문에 얼떨결에 베르닌도 휘말리고 말았다.

 

 

“ 어... 그래... 근데 코코뱅이 뭐야? ”

 

아, 프랑스 요리야. 와인 넣어서 조리는 닭찜이야. 비프 부르기뇽이랑 비슷한 건데 닭으로 만드는 거라서 더 금방 만들지. 미하일은 좋아할 거야. ”

 

“ 와인... 그러면 안 되겠다. 미샤는 술 못 마시니까... ”

 

“ 알콜 다 날아가는 거니까 괜찮아. 우하에 보드카 넣는 것처럼. ”

 

“ 어, 그렇구나... 근데 비프 부르기뇽은 또 뭐야? ”

 

“ 비프 부르기뇽은... ”

 

 

드미트리가 말을 멈췄다. 베르닌은 왜 그런가 싶어서 드미트리의 고개가 향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병실 문가에 왕재수가 서 있었다. 온통 구겨진 하늘색 셔츠에 회색 바지를 입고, 맨발로 뻣뻣하게 서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세를 보니 한참 그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베르닌은 벌떡 일어나서 왕재수에게 갔다.

 

 

“ 어, 너 깼구나! 괜찮니? 왜 거기 그렇게... ”

 

“ 바보 멍충이... ”

 

 

왕재수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더니 홱 돌아서서 도로 병실로 들어가 버렸다. 드미트리에게는 눈도 주지 않았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 그들의 얘기를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바보 멍충이’라는 게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도.

 

 

 

 

*    *    *

 

 

 

 

 

두어 시간 후 스타브로프는 왕재수에게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 즉시 왕재수는 침대에서 뛰어내렸고 시계를 보더니 극장에 가겠다고 했다. 의사가 대꾸하기도 전에 베르닌이 엄하게 말했다.

 

 

“ 안 돼. 지금 나랑 집에 가야 돼. ”

 

“ 아직 8시잖아. 잠깐이라도... ”

 

“ 무용수들 다 집에 가고 아무도 없어. ”

 

“ 아니야! 애들 나 없어도 늦게까지 연습한단 말이야. 사흘 밖에 안 남았잖아. 오늘 하루를 완전히 날렸어. 1시간만 다녀올게. ”

 

“ 아니. 넌 오늘 극장 안 가. 극장에는 내일 아침 일찍 가는 거야. 지금은 나하고 집에 가야 돼. 이거 네 맘대로 하는 거 아니야. ”

 

“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이라도 하는 거야? ”

 

“ 명령 같은 소리! 어휴, 나도 너한테 명령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다고 네가 누구 명령 같은 거 듣냐! 엄청 부탁하는 거야! 제발 집에 가자. 오늘은 제발 내 말 좀 들어줘. 나 정말 걱정했어. 너 못 찾을 줄 알고... 다시 못 볼 줄 알고... ”

 

 

이틀 내내 왕재수를 찾아 헤매던 것을 생각하니 베르닌은 다시금 무릎이 풀리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왕재수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베르닌의 간절한 부탁에 한숨을 쉬었다.

 

 

“ 못 보긴 왜 못 봐. 수요일에 보내준다 했으니까 죽이 됐든 밥이 됐든 그땐 봤겠지. 알았어, 집에 갈게. 근데 나 신발이 없어. 좀 갖다 주지... ”

 

“ 그냥 슬리퍼 신고 나와. 집 가까운데 뭐. ”

 

 

왕재수는 맨발로 병실 여기저기를 뒤지며 슬리퍼를 찾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잠깐 기다리다가 이내 마음이 약해졌다.

 

 

“ 슬리퍼 없구나. 오늘 일요일이라 간호사도 없고 선생님한테 달라고 해야 하는데... 그냥 업혀. 바로 앞이니까... ”

 

“ 싫어. 내가 애도 아닌데. ”

 

“ 나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그래. 배도 고프고. 빨랑 업혀. ”

 

 

왕재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투덜거렸지만 곧 베르닌의 등에 찰싹 업혔다. 몸이 사모바르처럼 따뜻했다.

 

 

‘ 다행이다... 아깐 진짜 차가웠는데. ’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베르닌이 나직하게 물었다.

 

 

“ 저... 있잖아. 너 괜찮아? ”

 

“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이틀을 통으로 날려먹었는데. ”

 

“ 아니, 그게 아니라... 그놈이 너 가뒀잖아. 협박했잖아... 다른 일은 없었어? 보드카 먹였다면서. 때리거나 나쁜 짓한 건 아니야? 너 아까 의사 선생님한테 그랬잖아. 기억 하나도 안 난다고.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나? 그놈 얼굴도 생각 안 나고? ”

 

“ 글쎄. 기억 거의 안 나. ”

 

“ 이 건물이라는 것도 몰랐던 거야? ”

 

“ 응. 나 정말 아무 것도 몰랐어. 네가 갑자기 쓰러졌잖아. 너무 놀라서 소리 지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도 어지럽고 너무 졸렸어. 정신 차렸을 땐 그 방에 있었어. 그놈이 수요일까지 말 잘 듣고 여기 있으면 무사히 보내주겠다잖아. ”

 

“ 근데 얼굴은 기억 안 나? ”

 

“ 나 눈 가려져 있었어. 뻔할 뻔자 스페호프 똘마니겠지 뭐. ”

 

“ 그치만... 그 마지막 편지... 그거 네 글씨였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거야? 그놈이 쓰라고 한 거야? ”

 

“ 뭐, 왕자가 어쩌고 수요일까지 입 다물고 어쩌고? 응. 그 자식이 불러주면서 쓰라고 했어. ”

 

“ 왼손으로... ”

 

“ 그랬나... 기억도 잘 안 나. 머리도 너무 아프고 어지러웠거든. 말 안 들으면 다리 부러뜨린다고 했어. 그래서 그냥 썼어. 그리고 나서는 보드카를 줬어. 종이컵에 가득 담아서. 다리 부러뜨릴까봐 마셨는데 그 다음부터는 진짜 기억 안 나. 토하고 뻗었겠지 뭐. ”

 

“ 그랬구나... 나쁜 자식... 그거 검열요원이었어. 왜 있잖아, 매일 극장 와서 네 작품 지적하던 놈. ”

 

“ 검열요원... ”

 

 

왕재수는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화를 내거나 놀라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조그맣게 물었을 뿐이었다.

 

 

“ 넌 안 다쳤어? 그놈이 덤벼들었다면서. ”

 

“ 응. 그냥 좀 까지고 멍든 게 전부야. 드미트리가 위험했지. 총에 맞았잖아. 스쳐서 그나마 다행이야. ”

 

“ 그 자식은 어디 갔어? ”

 

“ 아... 저녁 준비한다고 집에 먼저 갔어. 있지, 우리 너 찾으러 진짜 여기저기 돌아다녔거든. 여기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딤카가 정말 많이 고생했어. ”

 

 

왕재수는 부스럭거리더니 베르닌의 뒷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따뜻하고 촉촉하고 매끄러웠다. 숨결 때문에 간지러웠다. 베르닌은 어쩐지 머쓱하고 기분이 이상해서 불쑥 투덜댔다.

 

 

“ 야, 왜 킁킁대! 냄새 맡냐, 뜨보록처럼! ”

 

“ 너 비 맞고 돌아다녔구나. 땀도 흘리고. 빨랑 씻어야겠다. ”

 

“ 너 찾으러 다니느라 그런 건데 구박하냐, 냄새 난다고! ”

 

“ 내가 언제 구박했어. 냄새 난다고 안 했어. 그냥 비 맞고 땀 흘렸나 보다 했지. ”

 

“ 그게 그거잖아! 지저분하고 냄새 난다고... ”

 

“ 아니야. 내가 언제 그랬어. 그리고 땀 흘리는 거 지저분한 거 아냐. 나 무용수였잖아. 지금도 연습실 가면 맨날 애들 땀 범벅돼 있는데. 비 맞고 땀 흘리는 거 싫어하지 않아. ”

 

“ 어... 그래... ”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아까보다 더 머쓱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문이 열렸다. 막 복도로 나와서 집으로 걸어가려는데 왕재수가 여전히 베르닌의 뒷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미안. ”

 

“ 뭐가? ”

 

“ 몰라. 전부. ”

 

“ 그래,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나한테 운전 시키고 집안일 시키고 온갖 허드렛일 다 시키더니만... 미안한 거 알았으면 이제부터 음식 투정하지 말고 밥 좀 잘 먹어. ”

 

“ 바보 멍충이. ”

 

“ 으윽! ”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지러울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훅 끼쳐왔다. 드미트리가 부엌에서 얼굴을 내밀더니 환하게 웃었다.

 

 

“ 아,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잘됐다. 저녁도 다 돼가거든. ”

 

“ 이게 무슨 냄새야, 딤카? 너무너무 맛있는 냄새 나! ”

 

“ 냉동실에 있던 그 닭 한 마리로 코코뱅 만들었어. 근데 네가 껍질이랑 기름을 다 떼어내서 너무 퍽퍽할 것 같아서 베이컨을 반 토막 넣었어. 허브 많이 넣고 기름기도 유산지로 한번 흡수시켰으니까 미하일이 먹기에도 괜찮을 거야. 지금 양파수프 끓이고 올리비에 샐러드 만들고 있으니까 너희들 씻고 옷 갈아입으면 얼추 시간 맞을 거야. ”

 

“ 아, 진짜 맛있겠다... ”

 

 

베르닌은 왕재수부터 먼저 욕실로 데려다 주었다. 혼자 씻을 수 있으려나 하고 잠깐 걱정했지만 왕재수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틀더니 그에게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왕재수의 집으로 올라가서 옷가지를 챙겨왔다.

 

 

옷을 욕실 문 앞에 내려놓고는 베르닌은 부엌으로 갔다. 드미트리가 감자 샐러드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 저, 좀 도와줄까? ”

 

“ 아니야, 다 됐어. 수프 불 좀 꺼줄래? 다 됐거든. ”

 

“ 우와, 이건 평소에 먹는 양파수프랑 다르네. 위에 덮인 거 치즈야? ”

 

“ 응. 프랑스식이야. 굉장히 맛있어. 비 맞고 떨었으니까 이거 먹으면 몸도 따뜻해지고 좋을 거야. 미하일도 그렇고. 파리 왔을 때도 대사관 파티에서 이건 잘 먹었댔어. ”

 

“ 그렇구나... 쟤 올리비에 샐러드도 좋아해. 닭고기도 잘 먹고. 잘됐다. 여기 와서는 맨날 기름진 시골 음식이라고 투덜대고 밥도 잘 안 먹었는데 너 덕분에 진짜 맛있는 거 먹을 수 있겠구나. ”

 

“ 난 이 동네 음식 맛있던데. 근데 여기 오래 있으면 살찌긴 하겠더라. 다 기름지고 맛있어서. ”

 

 

드미트리는 접시에 샐러드를 솜씨 좋게 담으면서 욕실 쪽을 힐끗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 나 사무실에 갔었어. ”

 

“ 뭐, 정말? 언제? ”

 

“ 아까. 미하일이랑 네가 병원에 있을 때. 무전기 갖다놓으러. 거기서 스페호프와 마주쳤어. 그 작자한테서 보고를 받은 모양이더라고. 참, 그놈 이름도 알았어. 이반 데미도프래. ”

 

“ 데미도프... 아... 그래, 뭔가 D로 시작하는 성이었어. 검열국에서 가끔 공문이 왔었거든. 그래서... 국장이 뭐라고 해? 그자가 전부 까발린 거야? ”

 

“ 음, 아닌 것 같아. 그 자식도 겁이 났나봐. 우리한테 들키고 총까지 쏜 게 발각되면 골치 아플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미하일이 혼자서 도망쳤다고 보고했더라고. 그래서 스페호프는 완전히 저기압이었어. 나한테 자초지종을 간추려서 들려주더니 진작 나한테 맡길 걸 괜히 검열국 쪽 협조를 받았다가 작전을 망쳤다고 투덜댔어. 나하고 너한테 맡길 걸 그랬다고. 다행이지. ”

 

“ 아... 정말 다행이다... 근데 아직 사흘이나 남았는데... 국장이 또 나쁜 짓을 꾸미면 어떡하지... ”

 

“ 안 그럴 거야. 내가 뻥을 좀 쳤거든. 조금 전에 본부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스비제르스키가 수요일 공연에 관심이 지대해서 조금이라도 거기 차질이 생기면 여기 KGB고 극장이고 문화국이고 완전히 물갈이하겠다고 벼르고 있다고. 그러니까 지금은 손 떼는 게 나을 거라고 했어. ”

 

“ 그걸 믿어? ”

 

“ 믿은 모양이야. 펄펄 뛰더니 나한테 크레믈린 앞잡이라고 욕을 하더라고. 스비제르스키가 보낸 끄나풀 아니냐면서. 그래서 몹시 모욕적이라고 운을 뗀 후 만약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넌지시 물어보니까 안색이 변하더라고. 꺼지라던데. 아마 한동안 몸 사릴 거야. ”

 

 

베르닌은 드미트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왜? ”

 

“ 진짜야? ”

 

“ 뭐가? ”

 

“ 그 사람. 너 그 사람이 보낸 거야? ”

 

“ 누구, 스비제르스키? 그랬으면 내가 이렇게 허술했겠냐. 얼치기한테 총이나 맞고 미하일 납치되도록 놔두고... 너 그 사람 잘 모르는구나. 스비제르스키가 부리는 요원들은 진짜 프로야. 장난 아니라고. 나 같은 건 발끝도 못 따라가. 내가 이미지 메이킹 하느라 잘난 척해서 그렇지 그래봤자 나도 행정요원에 책상물림이라고. 그래도 스페호프는 멍청하니까 곧이곧대로 믿는 것 같았어. ”

 

 

베르닌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드미트리의 말이 어디서부터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헷갈렸다. 드미트리는 다시 웃었다.

 

 

“ 너랑 같이 모스크바 가면 좋겠다. 재미있을 텐데. 책상물림 둘이서. ”

 

“ 응, 나도. 모스크바에도 가고 레닌그라드에도 가면 좋을 텐데. 미셴카도 같이. ”

 

“ 그래. 이제 밥 먹자. 미하일도 다 씻었나보네. 너도 얼른 가서 씻어. 내가 차리고 있을게. ”

 

 

베르닌은 비와 땀과 먼지에 젖어 눅눅하기 짝이 없는 셔츠와 바지를 벗고 속옷 바람으로 욕실로 갔다. 마침 왕재수가 씻고 나와서 옷을 주워 입고 있었다. 셔츠를 입고 나서 못마땅한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속옷부터 겉옷까지 전부 다 까만색만 가져오고. 내가 까마귀냐. ”

 

“ 야! 네가 어제 알록달록하다고 구박해서 그런 거 아냐. 또 뭐라고 할까봐 색깔 있는 옷은 안 골랐단 말이야. ”

 

“ 무지개 아니면 까마귀... ”

 

“ 맨날 우주 최강 꽃미남이라며! 그러면 아무 거나 입어도 다 예뻐야지! 왜 옷 탓을 해! ”

 

“ 물론 난 아무 거나 입어도 예쁘지! 그치만 기분이란 게 있잖아! ”

 

“ 아휴, 난 그런 거 몰라. 한번만 더 불평하면 내 옷 가져다 줄 거야. 아가일 무늬 셔츠랑 손목토시랑 황토색 면바지. 입혀 놓고 사진 찍어서 극장에 돌릴 거야! ”

 

“ 악마! ”

 

 

왕재수는 티셔츠의 주름을 펴더니 몸을 돌려서 현관 쪽으로 향했다.

 

 

“ 야, 너 어디 가! ”

 

“ 집에! 잘 거야! ”

 

“ 저녁 먹어야지! ”

 

“ 배 안 고파. 잘래. ”

 

“ 안 돼. 어제부터 먹은 거 없잖아. 저녁 먹고 자. 너 먹으라고 드미트리가 엄청 맛있는 거 만들었단 말이야. 무슨 꼬꼬에 양파수프... 치즈가 막 올라가 있고... 정통 프랑스 식이랬단 말이야. 너 그런 거 좋아하잖아. 파리에서도 먹었을 거 아니야. ”

 

“ 안 좋아해. 프랑스 음식 안 좋아해! ”

 

“ 저녁 안 먹으면 내일 극장 못 갈 줄 알아. ”

 

 

왕재수는 베르닌의 발을 꽉 밟더니 화를 내면서 거실로 갔다. 카펫에 철썩 드러눕더니 다리를 들어 올리고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안심하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    *    *

 

 

 

 

 

저녁 식사는 아주 근사했다. 닭고기와 베이컨, 감자와 당근, 양파를 와인 소스로 조려낸 코코뱅은 그야말로 혓바닥에서 살살 녹았다. 고기와 야채, 와인이 어우러지며 진한 풍미가 감돌았다. 베르닌은 빵으로 접시를 다 닦아 먹은 것도 모자라 냄비에 남은 소스까지 모두 긁어 먹었다. 그리고 노르스름한 치즈가 두껍게 덮여 있는 양파수프는 예술에 가까웠다. 치즈를 살며시 가르자 김이 펄펄 오르는 황금빛 수프와 캐러멜처럼 갈색으로 변해 푹 익은 양파가 기절할 듯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맛 또한 기가 막혔다. 게다가 감자와 양파, 달걀, 당근만으로 만든 올리비에 샐러드의 소박하고 신선한 맛이 코코뱅과 양파수프의 화려한 맛을 부드럽게 감싸주면서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베르닌은 거의 접시에 코를 박다시피 하며 먹었고 드미트리도 맛있게 먹었지만 왕재수는 음식에 거의 입을 대지 않았다. 드미트리가 중간 중간 살뜰하게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기도 하고 빵에 버터를 발라주기도 했지만 전혀 입맛이 없어 보였다. 베르닌이 협박의 눈길을 보내거나 좀 먹으라고 종용하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조금씩 먹었지만 그나마도 금방 포크를 내려놓았다. 베르닌도 처음에는 야단을 쳤지만 왕재수가 억지로 먹는 기색이 너무 역력했기 때문에 속이 상했다.

 

 

“ 왜 이렇게 안 먹니. 언제 이런 거 또 먹을 수 있다고... 우리 동네에서는 유럽 음식 못 먹잖아. 맛있는데... 드미트리가 너 먹으라고 일부러 이렇게 다 준비한 건데. ”

 

“ 지금은 진짜 못 먹겠어. 내일 먹을게 화내지 마. ”

 

 

왕재수가 하염없이 처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색도 아직 창백했고 몹시 지쳐 보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마음이 아팠다. 그때 드미트리가 상냥하게 말했다.

 

 

“ 입맛 없는 게 당연하지. 못 먹는 술도 억지로 마셨고 많이 놀랐을 텐데. 부엌에 보니까 과일청 있더라. 그거 타 줄 테니까 따끈하게 한 잔 마시고 푹 자면 괜찮아질 거야. ”

 

 

드미트리가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따끈한 과일차를 준비하는 동안 베르닌은 왕재수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마에 손을 대고 체온을 재 보았다. 살짝 뜨거웠지만 왕재수는 본래 체온이 좀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열이 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손목을 잡고 맥박도 쟀다. 왕재수는 베르닌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웬 맥이 이렇게 빨리 뛰니. 너 아프면 솔직하게 말해야 돼. 의사 선생님한테 데려다 줄 테니까. 그래야 내일 극장도 가고 공연 준비도 잘 하지. ”

 

“ 아니야, 안 아파. 다닐, 나 이제 자면 안 돼? 자러 갈래. ”

 

 

베르닌은 안쓰러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잠깐만. 나 아침에 침대 엉망으로 해놓고 나왔거든. 시트만 좀 정리해줄게. ”

 

“ 아니야, 내 방 가서 잘래. 너도 자야 되잖아. ”

 

“ 너네 집에서는 잠 잘 안 온다며. ”

 

“ 오늘은 금방 잘 것 같아. ”

 

“ 그래. 아, 잠깐만... 있잖아, 그러면 조금만 기다릴래? 내가 잠깐만 너네 집 갔다 올게. 좀 치울 게 있어서. 과일차 마시고 있어. ”

 

“ 괜찮은데... ”

 

“ 너네 집 되게 지저분하단 말이야. 그때 그 유리 깨진 것도 안 치웠고.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드미트리가 보랴 표 과일청을 세 잔 타서 나왔기 때문에 베르닌은 얼른 한 잔을 쭉 마셨다. 달콤하면서도 진해서 온몸의 피로가 쫙 풀리는 느낌이었다.

 

 

 

왕재수와 드미트리가 과일차를 마시는 동안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의 집으로 올라갔다. 깨진 유리조각들은 드미트리가 전부 모아서 치워 두었기 때문에 침실은 말끔했다. 그는 냉장고를 열어서 내용물을 모두 꺼낸 후 소독약과 비눗물을 묻힌 행주로 안을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아냈다. 그리고는 안을 다시 채워놓고 문제의 종이봉지를 들고 나왔다.

 

 

‘ 비둘기 꼭 묻어주라고 했으니까... ’

 

 

베르닌은 아파트 뒤뜰로 나왔다. 뒤뜰에는 화단과 나무들이 단정하게 늘어서 있었다. 다행히 비도 그쳤고 땅도 많이 말라 있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제일 남향에 있는 커다란 배나무 아래로 갔다. 모종삽으로 젖은 땅을 파냈다.

 

 

‘ 깊이 묻어야 한다고 했지. 개가 와서 파헤친다고... 그 책 다 읽어 놓고 아닌 척 하고. 하여튼 웃긴 녀석이라니까. ’

 

 

그는 땅을 깊이 판 후 종이봉지에 싸여 있는 비둘기를 묻어 주었다. 정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 흙을 잘 덮은 후 손으로 탁탁 쳐서 단단하게 눌렀다. 돌아서려다 마음이 무거워서 곁의 화단에 피어 있던 조그만 꽃 몇 송이를 뽑아서 비둘기 묻은 자리에 살며시 놓아 주었다.

 

 

 

침대 시트만 정리해주면 되겠다 싶어서 그는 다시 7층으로 올라갔다. 싱크대에서 손을 씻은 후 침실 쪽으로 갔다. 그런데 문이 반쯤 닫혀 있었고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 어, 이상하다. 문 열어놓고 나왔었는데. 바람 불어서 닫혔나. 내가 창문 열어놨었나. 불도 끄고 나온 것 같은데... ’

 

 

갑작스럽게 베르닌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다시 데미도프가 왔을 수도 있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 스페호프가 다른 놈을 보낸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벽에 붙어 가능한 한 소리를 죽이며 문 옆으로 다가섰다. 순식간에 바짝 마른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안을 엿보았다. 그리고 감전된 듯 멍해졌다.

 

 

왕재수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드미트리도 있었다. 한 팔로 왕재수의 허리를 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뺨과 턱을 감싸며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둘은 키스를 하고 있었다. 둘 다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 왕재수의 바지는 반쯤 말려 내려가 있었다. 드미트리가 계속해서 키스를 하면서 한 손으로 자기 벨트를 풀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왕재수의 가슴을 가볍게 밀었다. 왕재수가 매트리스 위에 눕자 드미트리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두른 팔을 더 세게 조이면서 옆으로 누웠고 왕재수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면서 귀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베르닌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급하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딸꾹질이 나는 것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정신없이 뒷걸음질쳐 현관으로 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두 번이나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집으로 돌아온 베르닌은 옷도 벗지 않고 무작정 욕실로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미지근한 물을 두 컵이나 마셨다. 그래도 딸꾹질이 그치지 않아서 거실을 왔다갔다 걸어 다녔고 한참 후에야 침실로 들어갔다.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꽝꽝 울려서 잠이 오지 않았다. 취한 것 같기도 하고 술에서 막 깨어난 것 같기도 했다. 눈앞에 드미트리와 왕재수가 어른거렸다. 너무 놀라서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시트에 이마와 얼굴을 비벼대자 서늘한 기운 덕에 약간 정신이 돌아왔다. 심호흡을 하자 훨씬 나아졌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를 쓰다가 자기도 모르게 투덜댔다.

 

 

‘ 뭐야, 꼴도 보기 싫다더니. 엘리트 따위 싫다더니. 하여튼 문어발... 그럴 거면서 밥도 안 먹고 틱틱대고. 그럴 거면 평소에도 좀 잘해줄 것이지. ’

 

 

한 대 패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베르닌은 돌아누웠다. 어둠 속에서 잠을 청했다. 하루종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왕재수를 찾아 돌아다니고 협박범과 몸싸움을 하고 왕재수를 병원에 데려가고 비둘기까지 묻어주느라 무척 피곤했다. 하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드미트리가 새벽에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소리가 나면 어차피 깨겠지 하면서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문소리는 나지 않았고 베르닌은 거의 뜬눈으로 밤새 뒤척이다 동이 터올 때쯤에야 살풋 잠이 들었다.

 

 

 

 

 

*    *    *

 

 

 

 

 

 

이른 아침에 베르닌은 기척을 느끼고 깨어났다. 침실 문가에 드미트리가 서 있었다. 옷을 완전히 차려입고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베르닌은 잠에 취해 몽롱한 눈으로 드미트리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 어, 딤카... 빨리 일어났구나. ”

 

“ 응, 깨우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

 

“ 가다니, 어딜 가는데? ”

 

모스크바. 본부에서 돌아오라고 연락이 왔어. 지금 공항으로 떠날 거라서. ”

 

 

베르닌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소리야! 모스크바라니. 너 일주일 연수 일정이었잖아. 수요일에 끝나는 거잖아. 왜 오늘... ”

 

“ 본부에서 연수 일정을 축소했대. 사실은 어제 저녁에 요원 숙소에 들렀는데 메시지가 와 있더라고. 얘기할까 하다가 즐겁게 밥 먹고 노는데 괜히 분위기 망치기 싫었어. ”

 

“ 혹시 우리 국장이... ”

 

“ 아, 그것도 이유 중 하나지. 어제 그 작자가 나보고 그랬잖아, 꺼지라고. 그래도 연수 점수는 다 채워주겠대. ”

 

“ 우리 때문에 네가... ”

 

“ 아니야. 나 이걸로 연수 코스 다 마치는 거라서 본부 돌아가면 발령도 받을 거고. 내가 손해 보는 건 하나도 없는걸. 오히려 며칠 빨리 마치는 거니까 더 좋은 거지. 딱 두 개 아쉬운 게 있지만... ”

 

“ 뭔데? ”

 

서무 업무의 효율성 제고! 그 보고서... 국장하고 담판을 못 지었잖아. 그거 사장시키지 말고 꼭 스페호프에게 보여주고 업무 분장 다시 받아. 발따예프 따위에게 휘둘리지 말고. 알았지? ”

 

“ 어... 으응... 고마워. 그런데 다른 하나는... ”

 

“ 수요일 공연. 정말 보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워. 그래도 미하일이 무사하니까 됐어. 다행이야. 나 이제 갈게. 8시 반 비행기라서 지금 나가야 버스를 탈 수 있어. ”

 

“ 어, 내가 공항까지 태워다줄게! 잠깐만 기다려, 나 옷만 갈아입으면 돼. ”

 

“ 아니야, 다닐. 괜찮아. 넌 미하일 옆에 있어야지, 걔 오늘 아침 일찍 극장 가야 하잖아. ”

 

“ 하지만... 딤카... 나 너무 섭섭해. ”

 

“ 에이, 무슨 소리야. 꼭 다시 못 볼 것처럼. 모스크바 오면 꼭 연락해. 나 계속 연수 다니느라 아직 집을 못 구해서 주소랑 전화는 없지만 본부로 연락하면 연결될 거야. 꼭 와. ”

 

“ 응. 근데 저... 있잖아, 너 조금만 기다릴래? 미하일... 내가 걔 깨울게. 너 가는데 인사라도 해야지. 이렇게 그냥 가면 서운해 할 거야. ”

 

“ 아니야, 됐어. 깊게 자더라. 그냥 자게 내버려둬. 꼴 보기 싫은 KGB 나부랭이 돌아간다는데 좋아하겠지. ”

 

“ 하지만... 너희... ”

 

“ 모스크바에서 봐, 다닐. 건강하고. ”

 

 

드미트리가 두 팔을 벌려 베르닌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침실을 나갔다.

 

 

베르닌은 망연자실해서 따라 나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멍하게 서 있다가 한참 후에야 창가로 가서 커튼을 걷었다. 드미트리는 이미 길을 건너서 조그만 점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는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후 옷을 갈아입었다. 위층으로 갔다. 침실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좀 망설이다가 살며시 문을 밀고 들어갔다.

 

 

왕재수는 등을 돌린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담요로 몸을 돌돌 말고 있었지만 한쪽 어깨와 팔이 빠져나와 있었다. 카펫 바닥에 옷가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베르닌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드러난 목덜미와 어깨에 불그스름한 자국들이 몇 개 흩뿌려져 있었다. 간밤에 드미트리가 남긴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닌은 고개를 저으며 조심스럽게 왕재수의 팔을 토닥였다.

 

 

“ 미셴카, 자니? ”

 

“ 으응... ”

 

 

잠에 취한 음성으로 왕재수가 웅얼거렸다.

 

 

“ 저... 있잖아. 드미트리 말이야. 본부에서 연락이 와서 지금 돌아간대. 8시 반 비행기래. 지금쯤 버스 탔을 거야. 저... 우리 공항에 가보지 않을래? 가는 거 보고 인사라도... ”

 

왕재수의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잠들었나 싶어서 베르닌이 다시 한 번 좀 더 큰 소리로 말하려는데 조그맣고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돌아간다고... 지금... ”

 

“ 응. 갑자기 그렇게 됐대. 공항에 같이 가자. ”

 

“ 내가 왜. ”

 

“ 하지만... 너... 저... 너랑 걔랑, 그러니까 어제... 어... ”

 

 

왕재수는 몸을 움찔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지금 가면 이제 다시 보기 힘들 거야. 그러니까 나랑 공항 가자. 옷만 입으면 돼. 차에 시동 걸어놓을게. ”

 

“ 다닐, 나 좀 내버려둬. 제발. ”

 

 

목쉰 음성으로 왕재수가 속삭였다. 마지막 단어에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알았어, 그럼. 더 자라. 있다가 일어나면 우리 집으로 내려와. 아침 먹고 극장에 가자. ”

 

 

왕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전날 비가 와서 공기가 차가웠기 때문에 걱정이 된 베르닌은 흘러내린 담요를 끌어올려 주려고 몸을 굽혔다. 왕재수가 고개를 더욱 옆으로 돌리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뺨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침실을 나갔다. 문을 닫아주려는데 등 뒤로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바보. 울 거면서. ’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잠은 이미 다 달아난 후였다. 냉장고를 뒤져서 드미트리가 어제 코코뱅을 만들고 남겨놓은 짜투리 닭고기와 뼈를 찾아냈다. 육수를 내고 반쯤 말라빠진 비트와 당근을 잘게 썰어 넣어 보르쉬를 끓였다. 달걀도 삶고 샌드위치도 만들고 사과와 오렌지도 챙겼다.

 

 

‘ 아침엔 많이 안 먹는 애니까 수프랑 흑빵 먹이고 차 한 잔 우려주면 될 것 같고. 극장 가면 바쁘다고 점심 거를 테니까 계란이랑 샌드위치랑 과일 먹으라 해야지. ’

 

 

그는 시계를 보았다. 8시였다. 드미트리는 이제 공항에 도착했을 것이다. 잠시 후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떠날 것이다. 그는 서무 업무의 효율성 제고 보고서에 대해, 9밀리 마카로프에 대해, 코코뱅과 마카롱, 프랑스 홍차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키스에 대해. 포옹과 웃음소리에 대해 생각했다. 드미트리는 쾌활하게 잘 웃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 침실에서 들었던 것은 다닐 베르닌에게는 들려준 적이 없는 웃음소리였다. 훨씬 낮고 내밀하고 가슴을 울려나오는 웃음소리였다. 마치 왕재수가 그에게는 결코 그런 눈빛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처럼. 관통하는 듯한 눈빛.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과 같은 눈빛. 기묘하게도 어딘가 고통스럽고 슬픈 눈. 그러자 베르닌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왕재수는 눈을 감고 있었으니까. 드미트리의 품에 안겨 키스를 하는 내내, 서서히 달아오르는 열락에 취한 왕재수는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닌은 분명히 그 눈빛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드미트리도 보았을 것이다. 코즐로프도. 그리고 레닌그라드의 그 의사, 유리 아스케로프도.

 

 

그는 한쪽에 치워두었던 십자가 목걸이를 가지고 왔다. 아마 극장에 가져가면 의상 담당자가 망가진 고리를 고쳐줄 수 있을 것이다. 시커멓게 더러워진 십자가를 옷자락으로 쓱쓱 문질러 닦았다. 얼룩은 금세 사라졌다. 그건 그저 흙과 먼지와 기름이었으니까. 드미트리가 입었던 아가일 무늬 셔츠에 번진 핏자국보다 훨씬 지우기 쉬웠다. 핏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겠지만 어쨌든 지울 수는 있을 것이다. 어차피 같은 셔츠가 여러 벌이니 지워지지 않으면 버리면 된다. 하지만 뭉개진 채 들려오던 흐느낌과 꼭 감긴 눈 너머로도 보이던 깊고 고통스러운 눈빛은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베르닌은 흙과 먼지와 피가 아닌 얼룩을 지우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책상물림이었으니까.

 

 

 

 

 

FIN

- 2015. 9. 6 ~ 9. 18 -

 

 

 

...

 

 

이렇게 하여 우수한 단추 시리즈가 끝났다. 서무는 보통 1~2개 에피소드로 완결되는데 이번 얘기들은 계속 연속되면서 오래 붙잡고 써서 그런가 좀 섭섭하네..

 

사실 완전히 끝난 건 아니고... 다음주에는 33-1편이 올라갈 예정이다. 일종의 디렉터스 컷 같은 건데 이번 우수한 단추 시리즈에 종속되어 있어 별도의 34편이 아니라 33-1이라는 숫자를 붙였다~ 우수한 단추 시리즈는 내용상 왕재수의 등장 분량이 적었는데 33-1에는 이 녀석도 많이 나온다 :) 이건 다음주...

 

..

 

중반부에 드미트리가 왕재수의 재판에 대해 하는 얘기는 본편 우주의 미샤가 겪었던 일에서 가져왔다.

 

..

 

 

... 단추 브라더스의 액션이 너무 적은 이유는... 서무 시리즈라서 나름대로 폭력 묘사는 매우 자제했습니다.. 테이큰 단추는 다른 기회에... :)

(생각해보니 단추의 액션이 제일 무자비했던 것은 14편 검은 숲 온천 요양소에서 어리버리 탈영병 알릭을 상대로 의자 휘두를 때였음... ㅠㅠ)

 

제대로 된 테이큰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단추나 드미트리가 아니라 프로페셔널이자 나쁜 남자인 일류샤가 주인공으로 나와야 할 듯한데... 일류샤는 댓글 우주에서 어느새 쿠마의 마력에 빠져 나쁜 짓을 청산하고 빵집 점원이 되어 있으니 :)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사실 얼마 안되는 낙이기도 해요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가져가시거나 베끼거나 인용/변형/사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일주일 쉬고 돌아온 서무 시리즈.

이번 에피소드에도 이른바 우수한 단추인 드미트리 베르닌이 등장한다 :) 지난 32편에서 협박카드에 이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왕재수! 그리고 그를 찾아 헤매는 단추와 드미트리! 과연 이들은 왕재수를 찾아낼 수 있을지...

33편은 사건도 많고 분량도 꽤 길어서 어쩔 수 없이 1,2부로 나눠 올린다. 이번주는 먼저 1부.

 

사라진 왕자님 왕재수를 찾아 헤매는 명탐정 호위 기사 단추와 드미트리의 모험! 재미있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4월이 되자 왕재수의 신작 공연을 앞두고 협박편지가 이어지고, 급기야 정체불명의 협박범은 왕재수를 납치하는데... 과연 베르닌과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는 그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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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3

 

 

 

 

 

서무의 슬픔

-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 (1부) -

 

 

 

 

 

 

 

드미트리는 먼저 와 있었다. 초조하게 천사상 주위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는데 베르닌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 어휴, 너 안 와서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 ”

 

“ 미안해, 전화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어. ”

 

“ 어디에 전화해? ”

 

“ 미샤 비서. 이것저것 물어보느라고. 검은 숲에 가봐야 할 것 같아. ”

 

“ 검은 숲?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니. ”

 

“ 아 그렇지... 그게, 다차... 레베진스키, 사무국장... 수요일까지 휴가. 사진, 레코드... 사무실에 몰래 드나들고... ”

 

 

베르닌은 순간 머리가 멍해져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드미트리는 우왕좌왕하는 그를 탓하는 대신 참을성 있게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다닐, 너 진짜 여기저기 다녔나보구나. 일단 뭐 좀 먹어야겠다. 눈이 쑥 들어갔어. ”

 

아니야! 지금 뭐 먹을 시간 없어! 빨리 검은 숲에 가야 돼! 레베진스키한테 별장이 있다고 했어! 거기 미샤를 숨겨놨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 자식이 미샤를 감시하고 물건도 다 뒤지고 있었어. 나한테는 그런 얘기 하나도 없었는데... 수요일까지 휴가 냈다고 하잖아. 진짜 의심스럽단 말이야. 너도 빨리 와, 차 저쪽에 세워놨어. ”

 

“ 그래. 일단 차에 타자. 여기 사람들 많이 지나다니니까. ”

 

 

차를 탄 후 드미트리는 베르닌에게 극장에서 있었던 일을 조목조목 물었다. 대학 시절부터 이미 요원으로 활동해서 그런지 드미트리는 베르닌보다 훨씬 침착했고 논리적이었다. 드미트리의 차분한 말투 덕에 베르닌도 점차 흥분을 가라앉혔고 수위와 그리고리에게서 들은 이야기, 레베진스키의 수상한 소행과 사무실에서 발견한 왕재수의 사진, 레코드 목록, 레베진스키의 집에 갔던 이야기, 류다와의 통화로 알게 된 사실 등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할 수 있었다. 드미트리는 그의 말을 끊지 않고 중간 중간 ‘응’이라든지 ‘그랬구나’ 등 추임새만 넣으면서 끝까지 들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 그래서 지금 검은 숲 쪽으로 가고 있는 거야? ”

 

“ 응. 한 시간쯤 가야 돼. 넌 어떻게 됐어? 국장 만났어? ”

 

“ 응. 네 말대로 토요일인데도 나와 있더라. 나보고 왜 왔느냐고 물어서 오늘 극장이 쉬는데 혹시 내가 수행해야 할 업무가 따로 없는지 궁금해서 들렀다고 슬며시 떠봤어. 그자의 의중을 정확히 모르니 협박카드와 미하일이 납치됐다는 얘기는 일단 하지 않았는데 그게 옳은 판단이었던 것 같아. ”

 

“ 왜? 국장이 너도 의심하는 눈치였어? ”

 

내색하진 않았어. 그랬으면 나한테 레베진스키를 소개시켜주진 않았겠지. ”

 

“ 뭐? 레베진스키? 그자가 거기 있었단 말이야? 만났어? ”

 

“ 응, 내가 갔을 때 스페호프의 방에 있었어. 번듯하게 생긴 놈이더라. 그런데 무슨 얘기하는지는 못 들었어. 얘기 다 끝내고 나오려는 참이더라고. 그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가서 엿들었어야 했는데... 스페호프가 그자를 소개시켜주면서 조만간 새 감독이 될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역겨워서 죽는 줄 알았어. ”

 

“ 다른 얘긴 안 해? 미샤에 대해서... ”

 

“ 납치에 레베진스키가 연루되어 있는 것 같긴 했어. 국장이 레베진스키에게 날 소개해 주면서 필요한 게 있으면 내 도움을 받으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레베진스키가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다고, 이제 웬만한 건 다 끝냈다고 하는 거야. 그러더니 스페호프에게 수요일에 보자면서 나가더라고. 그때 나도 들었어, 수요일까지 휴가 냈다는 거. 당장이라도 쫓아나가고 싶었는데 스페호프가 날 붙잡아서 못 나갔어. ”

 

“ 그럼 국장이 너에게 이번 작전에 대해 얘기해준 거야? ”

 

“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니더라고. 나에게 어젯밤에 어디 있었느냐고 묻는 거야. 근데 눈초리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어제만큼 개방적인 분위기가 아니었어. 느낌이 어쩐지 이상해서 너희 집에 갔다는 얘긴 일단 안 하고 요원 숙소에서 여직원들과 파티하며 놀았다고 했어. 카체리나와 갈리나, 리자랑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알리바이가 되잖아. 국장의 의심을 사기 전에 선수를 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내가 해외 근무를 오래 하고 대도시 출신이라 여기 문화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혹시 여직원들이랑 밤에 파티하고 노는 게 KGB 요원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이냐고 물었어. 그러니까 스페호프가 웃는데 뭔가 긴장을 내려놓는 느낌이더라고. 그래서 얼른 금요일에 극장에서 미하일을 감시했던 내용을 간략하게 보고했어. 협박과 납치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주지 않을까 기대했거든. 내게 지시를 내려주면 더 좋은 거고. 근데 물 건너갔어. 그자가 마음을 바꿨어. ”

 

“ 그게 무슨 소리야? 첫날 너한테 지령을 줬다면서. 작전이 진행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고 그때 도우라 했다며. 레베진스키에게도 필요한 게 있으면 네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면서. ”

 

“ 그러게 말이야. 근데 국장이 그러는 거야. 불여우 감시하느라 수고했다고. 근데 공연은 어차피 제대로 올라가지 못할 거라고. 그래서 내가 도와줄 일 없느냐고 물었더니 괜찮대. 내 도움이 필요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됐다면서 사람이 많이 연루될수록 복잡해서 안 되겠다는 거야. 난 아주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조국과 당을 배반한 반동분자를 혼내주는 일에 열성적으로 동참하고 싶었는데 무척 아쉽다고 말했어. 역시 내가 연수요원에 지나지 않아서 능력이 모자란 게 문제인 것 같다고, 도움이 못 되어드린 것 같아 죄송하다고 말이야.

그랬더니 스페호프가 손을 내저으면서 그렇지 않다고, 오해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자기는 나를 믿는다고. 하지만 내가 루뱐카 본부에서 왔기 때문에 약간 우려가 된다는 거야. 모스크바는 아무래도 스비제르스키의 본거지니까 내가 열성적으로 여기서 작전에 참여했다가 공연히 그자의 의심을 사서 피해를 입을까 걱정도 되고, 또 만의 하나 그자가 내 뒤에 끄나풀을 붙였을 수도 있으니 내가 이번 작전에서 한 발짝 물러나 주는 것이 가브릴로프 KGB나 나나 양쪽 모두 낫겠다는 거야. ”

 

“ 완전 궤변이잖아. 그럴 거였으면 애초부터 너한테 지령을 주지 않았어야지! 혹시 국장이 꼬리를 밟았나? 너랑 내가 미셴카랑... ”

 

“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거야. 근데 나한테 레베진스키를 소개시켜 준 것도 그렇고, 극장 감시 업무에서 빼지도 않은 걸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아. 나보고 오늘은 쉬고 수요일까지 계속 극장에 가라고 하더라고. 그러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하나 했어. ”

 

“ 뭔데? ”

 

불여우 감시는 이제 안 해도 될 거라고. 아파서 입원할 예정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그냥 일요일에 극장에 가서 분위기만 파악하라고. ”

 

“ 아파서 입원... 그건 카드에 있었던 말인데. ”

 

 

베르닌은 곰곰 생각하느라 하마터면 신호를 무시하고 직진할 뻔 했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드미트리가 창 너머로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 나와서 레베진스키를 쫓아가려고 했는데 이미 사라진 후더라고. 그래서 갈리나에게 전화를 했어. ”

 

“ 갈리나? 아, 어제 같이 게임했다고 했지? 카체리나랑 리자랑... ”

 

 

베르닌은 ‘지면 뽀뽀하는 게임’이라고 말할 뻔 했다.

 

 

“ 응, 그 아가씨가 총무부서 소속이었던 게 떠오르더라고. 보드 게임하다가 땅과 집을 다 잃고는 괜찮다고, 가브릴로프 안전가옥들이 다 자기 손 안에 있다고 농담을 했어. ”

 

“ 아, 맞아. 갈리나가 그쪽 담당이야. 여기는 이렇다 할 범죄행위도 거의 없고 방첩 업무도 적은 편이라 안전가옥이 몇 개 없어서 그냥 총무부서에서 관리하거든. 그러다 작전이 생기면 현장요원들 쪽으로 넘어가지만. ”

 

“ 응, 그럴 것 같더라. 지방의 소규모 지부들은 그렇게 한다는 얘길 들었어. 스페호프가 납치 사건을 뒤에서 지휘하고 있다면 미하일을 그 안전가옥 중 한 곳에 숨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범인은 현장요원이거나 그쪽 경력이 있을 가능성이 커. 잠긴 문도 따고 들어오고 방울 달린 줄도 잘라버리고 수면제를 쓰고. 그래서 갈리나에게 전화해서 안전가옥들 중 최근에 활용하는 곳이 있느냐고 떠봤어. ”

 

“ 아... 난 그런 건 생각도 못했어. 그래... ”

 

“ 근데 갈리나는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고. 자기가 알기로는 지금 쓰는 곳은 없대. 열쇠는 따로 보관하고 있는데 받아가려면 자기한테 장부를 쓰고 가야 한다더라고. 요 며칠 동안 장부 적고 열쇠 요청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대. 더 물어보면 의심 살 것 같아서 일단 알았다 하고 끊었어. 총무부서에 가봤는데 캐비닛도 많고 다 잠겨 있어서 장부를 못 찾았어. 최소한 가옥들 위치라도 알아내면 도움이 될 것 같았는데. ”

 

아! 나 알아! 그러니까... 캐비닛 열쇠들 여분으로 더 있어. 기밀 자료실 열쇠 빼고는 내가 한 세트씩 가지고 있어, 총괄서무라서. 사무실 가면 있는데, 내 자리 서랍장에... ”

 

“ 어 정말? 잘됐다! 그러면 지금 다시 회사로 갈까? 안전가옥 리스트를 확보하면 훨씬 도움이 될 거야. ”

 

 

베르닌은 시계를 보았다.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우리 국장 보통 주말에도 늦게까지 있어. 8시 넘어서 가야 안전해. 그리고 지금 제일 의심스러운 건 레베진스키잖아. 일단 검은 숲의 그 별장으로 가보는 게 좋겠어. ”

 

“ 그래, 그러자. 아직 많이 가야 하니? ”

 

“ 저 다리 건너서 30분 정도만 가면 돼. ”

 

 

검은 숲으로 가는 동안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깔렸다. 드미트리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갱지로 싼 닭고기 꼬치를 꺼내서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 좀 먹어. 난 아까 너 기다리면서 하나 먹었어. 공원에서 산 거라 벌써 다 식긴 했지만... 너 오늘 먹은 거 없잖아. ”

 

“ 으, 으응. 고마워. ”

 

 

구운 닭고기는 차갑게 식어서 기름기와 소금기가 따로 돌았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입 안에 먹을 것을 넣자 침이 돌면서 문득 배가 무척 고파졌지만 납치된 왕재수를 생각하니 고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 닭고기 수프 끓여주려 했는데... ’

 

 

핸들을 붙잡은 채 한참동안 우물거리며 앉아 있자 목이 메어서 그런 줄 알고 드미트리가 물병을 열어 그의 입에 대 주었다. 베르닌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억지로 음식을 삼켰다. 드미트리가 한숨을 쉬었다.

 

 

“ 여기 갓길에 차 좀 대볼래? 운전 내가 할 테니까 너 좀 쉬어. ”

 

“ 아니야, 괜찮아. 너 길 모르잖아. ”

 

“ 네가 알려주면 되잖아. 어차피 이제 숲으로 접어들어서 한참 직진일 것 같은데. 너 지금 심신이 너무 지쳐 있어서 그래. 힘들어도 좀 먹고 기운을 차려야 돼. 그 별장에 정말 미하일이 갇혀 있다면...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미트리에게 운전대를 넘겨주고 옆에 앉았다. 닭꼬치를 꾸역꾸역 해치우고 물도 마셨다. 자꾸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왕재수를 찾아내고 말리라 다짐했다.

 

 

 

 

*    *    *

 

 

 

 

 

연못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낡은 별장들 사이에서 레베진스키의 흰색 별장은 금세 눈에 띄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별장 여러 군데에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레베진스키의 다차만은 어두컴컴했다. 연못가에서 샤실릭을 구우며 놀고 있는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차를 저만치 떨어진 데 세워놓고 숲길로 돌아서 가기로 했다.

 

 

수풀 사이로 몸을 숨기면서 천천히 걸어가던 드미트리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 가능하면 총 쓰지 말아야겠다. 사람들이 많아서... 애들도 있고. ”

 

“ 어, 으응... 그런데 범인이 무장하고 있으면 어쩌지. 레베진스키 하나라면 걱정 안 되는데... ”

 

“ 최악의 경우엔 쏴야지 뭐. 근데 미하일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 레베진스키는 이런 쪽 훈련 받은 사람 아니지? ”

 

“ 응, 전혀. 미샤처럼 무용수 출신이야. 40대고 류다 말로는 허리가 안 좋아서 은퇴했다고 했어. ”

 

“ 하긴, 아까 보니까 외모가 번듯하긴 해도 신체적으로 위협적인 것 같진 않았어. 그래도 다른 놈이 붙어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너 절대로 나한테서 떨어지면 안 돼. 일단 내가 앞장설게. ”

 

 

현장 경험이 전혀 없는 베르닌은 반대하지 않았다. 몇 달 동안 극장에서 왕재수를 지켜보면서 그는 어떤 일이든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드미트리는 그보다는 훨씬 경험도 많았고 능력도 뛰어났다. 별장 울타리를 뛰어넘자 심장이 두근거렸고 머리가 꽝꽝 울렸다. 불 꺼진 창문 너머에 왕재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흥분과 분노로 정신이 혼미했다. 그때 드미트리가 그를 창고 쪽으로 밀어붙이며 속삭였다.

 

 

“ 몸 숙여, 다냐. ”

 

 

베르닌이 어둠 속으로 몸을 숙였을 때 드미트리가 창문에 돌멩이를 집어던지고는 잽싸게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정적 속에서 딱 소리가 아주 크게 울렸다. 유리가 깨지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큰 소리였다. 그들은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이 켜지지도 않았고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레베진스키의 집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없을 수도 있었고 누군가가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을 수도 있었다.

 

 

5분을 기다린 후 드미트리가 턱짓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빠르게 뛰어갔다. 베르닌도 뒤를 따랐다. 문은 잠겨 있었다. 드미트리가 손잡이를 거세게 비틀며 문을 밀었다. 삐걱거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베르닌은 뒤로 물러났다가 전속력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문에 부딪쳤다. 어깨가 부서지는 것처럼 아팠지만 그 여파로 문이 쾅 소리와 함께 열렸고 그는 가속을 이기지 못해 쿠당탕 나뒹굴었다. 드미트리가 재빨리 그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리고는 차에서 챙겨온 플래시를 켜서 안쪽을 한 바퀴 비추면서 낮게 외쳤다.

 

 

“ 스위치 찾아서 불 켜! ”

 

 

이미 베르닌은 문 안쪽 벽을 훑으며 스위치를 찾고 있었다. 돌출된 스위치가 손바닥에 닿았다. 밀어 올리자 환하게 불이 들어왔고 순간 베르닌은 눈이 부셔서 뒷걸음질쳤다.

 

 

별장은 텅 비어 있었다. 샅샅이 뒤졌지만 식당과 거실, 침실 두 개 모두.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베르닌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여기 있어야 해... 분명히 레베진스키가... 그 인간이 레코드 목록을 적고 수요일까지 휴가를 내고... 미셴카의 방을 뒤졌어. 인형을 가져갔단 말이야... 아... 미셴카... ”

 

 

너무나 실망하고 괴로운 나머지 베르닌은 울부짖기 직전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어느 새 별장 밖으로 나가서 창고와 사우나까지 살펴보고 온 드미트리가 다가와 그를 달랬다.

 

 

“ 진정해, 다냐. ”

 

“ 미셴카, 엉엉... 벌써 밤인데... 아플 거야. 약 먹고 아프고... 먹지도 못하고 무서워하고 있을 거라고! 그 자식은 우리 집 아니면 잠도 못 자는데... 우리가 이렇게 허탕치고 있는 동안에도 걔는... ”

 

 

베르닌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전부 자기 잘못인 것 같았다.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치다가 문득 모스크바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 나 모스크바 갈 거야. 크레믈린... 거기 갈 거야. 스비제르스키한테 다 얘기할 거야. 그러면 그 사람이 해결해 줄 거야...그 사람이 미셴카는 자기 거라고 했으니까 분명히 찾아줄 거야. 구해줄 거라고! ”

 

“ 정신 좀 차려, 다닐! 네가 무슨 힘으로 그 높은 사람을 만나니. 연락처도 없으면서. 있어도 그 사람이 우리 같은 조무래기를 만나줄 것 같니? ”

 

“ 아니야! 만나줄 거야! 미셴카 얘길 하면 만나줄 거야! ”

 

이 멍청아, 그리고 나면! 그자가 힘을 써서 어찌어찌 미하일을 찾아준다 해도 그 다음은 어쩔 건데! 걔가 납치되도록 놔둔 너랑 나는 즉각 모가지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릴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리고 걜 찾아낸다 해도 일을 그렇게 공개적으로 벌려놓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건데? 제아무리 날고 기는 스비제르스키라 해도 미하일을 복권시키고 여기서 빼낼 수는 없어. 파리에서 왜 걜 잡아넣고 재판에 회부했는데, 그 사람이랑 벨스키 같은 걔 후원자들 옭아매려고 그런 거잖아. 다 정치꾼들 싸움이었다고. 그래서 스비제르스키도 걔가 유죄판결 받게 그냥 놔뒀단 말이야. 빼내서 여기로 보낸 것도 수 엄청 쓴 거야. 그러니까 무작정 그 사람 손을 빌려서 미하일을 찾아낸다 해도 그 사실을 스페호프가 알게 되면 더 꼭지가 돌아서 진짜로 걔한테 해코지를 할 수도 있단 말이야. 그냥 수요일 공연 못 올라가게 하고 애 잠깐 잡아놓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질 수도 있단 말이야. 넌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높으신 양반들이 할 일이 없어서 무용수 하나를 붙잡아다 고문하고 유배를 보냈겠니? 그렇게도 유명한 애를, 체포한 순간 국제적인 이목이 쏠릴 게 뻔한 애를? 다 자기들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야. 지금도 그럴 거고. 반년도 넘게 걜 감시하고 돌봤다면서 정말 아무 것도 몰랐구나... ”

 

 

베르닌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등을 돌렸다. 어렴풋이 그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 바보 멍충이... 그래놓고 파리에서 친구들 만나러 놀러갔다가 잡힌 거라고 하고... 진짜 지지리도 운 없는 자식... 왜 그런 인간들하고 얽혀서... 뭐가 우주 최강 꽃미남에 천재라서 좋다는 거야... 하나도 안 좋은 거잖아... 천재에 예뻐서 좋았던 거 하나도 없잖아. 이놈저놈들한테 이용만 당하고 나쁜 짓만 당하고... 바보... ’

 

 

드미트리는 그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훨씬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 미안해, 다닐. 네 마음 이해해. 넌 미하일이랑 그렇게 가까운데 당연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겠지. 우리 일단 내일까지 찾아보자. 범인이 그랬잖아, 공연 취소하면 수요일 지나고 미하일을 돌려보내 주겠다고. 스페호프가 배후에 있으니 해치지는 않을 거야. 안 그래도 공연 취소됐다고 하면 스비제르스키부터 벨스키까지 전부 의심스럽게 이쪽을 주시할 텐데 언제까지 미하일을 숨겨놓을 수도 없을 거고 아프다고 속일 수도 없을 테니까. 내일 밤까지 걜 못 찾으면 네가 국장한테 정식 보고서를 올려. 미하일이 없어졌다고. 그러면 스페호프가 걔가 입원해서 공연 취소됐다는 전문을 보내겠지. ”

 

“ 찾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찾을 거야. ”

 

“ 그래, 사무실로 가보자. 그 안전가옥 명단이랑 열쇠. 그거 찾으러 가자. ”

 

 

 

 

 

*    *    *

 

 

 

 

 

시내로 돌아오는 데는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신시가지로 진입하는 다리 쪽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이미 밤 9시가 넘어 있었기 때문에 스페호프는 퇴근하고 없었다. 수위가 있긴 했지만 베르닌이 원체 주말 출근을 밥 먹듯 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며 ‘또 일하러 나왔어?’ 하고 물었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드미트리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다. 서랍장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냈고 장부를 대조해 총무부서의 자산관리 서류가 들어 있는 캐비닛 열쇠를 찾아냈다. 총괄서무라는 사실이 이토록 기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캐비닛에는 안전가옥 열쇠가 없었다. 주소가 적힌 장부 뿐이었다. 아무래도 열쇠를 비밀 창고에 옮겨둔 것 같았다. 그래도 주소라도 있는 게 어디냐 싶어서 급하게 수첩에 안전가옥 주소들을 베껴 적었다. 혹시라도 현장요원들 중 작전에 투입된 사람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최근 현장요원 활동 명령서와 업무추진비 청구 내역을 뒤졌다. 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아내지 못했다. 하긴 스페호프는 그를 모스크바로 보냈을 때도 서류에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으니 왕재수 납치라는 작전을 문서화했을 리가 만무했다.

 

 

혹시나 해서 그는 물품 청구 내역서와 전표들도 뒤졌다. 그러다가 하얀 카드와 붉은 색지 구입 영수증을 찾아내고 환호했지만 다시 잘 보니 구입 일자가 작년 12월이었다. 신년 축하용으로 유관기관 관계자들에게 발송하기 위해 총무부서에서 100개들이 세트를 구입했던 것이었다. 실망하는 그와는 달리 드미트리는 희망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 100개를 다 보내지는 않았을 거잖아. 남은 카드와 색지를 범인이 쓴 거라면 물품 청구서를 적었을지도 몰라. 그러면 누가 연루되어 있는지 알 수도 있잖아. ”

 

“ 그게... 우리는 물품 청구서를 서무가 한꺼번에 적어. 문구용품 캐비닛은 총무부서에 있는데 원래 그 열쇠랑 장부를 잘 관리해야 하지만 총무부 담당자가 원체 고참에 철밥통이라 맨날 문을 다 열어놓고 다녀. 그래서 물건 떨어지면 저마다 거기 가서 한 움큼씩 집어오고... 그러다 국장이 점검하는 날이면 그 담당자가 부서별 서무들을 들들 볶아서 비어 있는 물건들을 할당하면서 물품 청구서를 다 적어내라고 난리야. 그러니까 카드랑 색지는 누구라도 가져갈 수 있어. 그 물건들 청구서 아마 나도 적은 적 있을 거야. 나는 막내 서무니까 제일 많이 할당받거든. 이거 봐, 이 캐비닛이야. 지금도 문 열려 있잖아. 여기 카드랑 색지도 많이 남아 있네. 같은 종류야. 찾아보면 내 캐비닛에도 몇 장 있을 걸. ”

 

그렇구나. 어쨌든 범인 중에 내부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건 더 명확해진 거네. 일단 안전가옥 리스트를 확보했으니 나가자. 오래 있다 의심 살라. ”

 

“ 나 원래 주말에 자주 나와서 늦게까지 일해. 요즘은 서무 업무도 엄청 밀려 있으니까 괜찮아. ”

 

“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으니까. 참, 무전기 있으면 챙겨가자. 아까도 네가 늦으니까 걱정되더라고. 무전기가 있으면 연락이 되니까 안전가옥 수색도 나눠서 할 수 있을 거야. ”

 

 

좋은 생각이었다. 무전기는 현장요원용 비품이었지만 다행히 특별관리 물품으로 분류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베르닌에게도 캐비닛 열쇠가 있었다. 무전기 두 개를 꺼내서 하나씩 나눠가졌다.

 

안전가옥은 모두 여섯 채였다. 하나는 구시가지에 있었고 둘은 신시가지, 나머지 셋은 시 외곽지대에 있었다. 베르닌은 당장이라도 여섯 채를 모두 돌아보고 싶었지만 신중한 드미트리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어두워졌어. 이 외곽지대는 전부 강변하고 숲에 있는 거 아니야? 아까 별장에서도 어두워서 움직이기가 힘들었어. 어둠 속에서 자칫 잘못하면 우리뿐 아니라 미하일도 위험해질 수 있어. 우리는 지원군이 없잖아. ”

 

“ 하지만... ”

 

“ 일단 오늘은 시내에 있는 곳 한두 군데만 가보는 게 좋겠어. 금방 자정이 될 거야. 아무래도 너희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짧은 시간 동안 미하일을 옮길 수 있고 또 회사하고도 가까우니까 지령받기도 쉬울 거고. ”

 

 

베르닌은 속이 바짝바짝 탔지만 드미트리의 말이 옳았다. 그는 책상물림이라 격투나 작전 수행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어둠 속이라면 더욱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미 밤 10시 반이었다. 그는 주소를 면밀하게 살폈고 집과 사무실에서 제일 가까운 마슬로프 거리의 안전가옥을 골라냈다. 제조공장들 뒤에 있어서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그들의 집에서 도보로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차로는 몇 분 만에 갈 수 있었다.

 

 

차를 세운 후 베르닌은 드미트리와 함께 그 집으로 올라갔다. 그곳 역시 불이 꺼져 있었다. 수위는커녕 다른 층에도 주거민이 없었다. 애초에 건설 노동자용 임시 숙소로 지었다가 몇 달 내에 철거를 앞두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지만 아주 뻑뻑했다. 드미트리가 고개를 저었다.

 

 

“ 여긴 아닌가봐. 한참 안 열어봤나본데... ”

 

 

드미트리의 우울한 예상이 맞았다. 집은 텅 비어 있었고 먼지가 풀풀 날렸다. 바퀴벌레가 득실거렸다. 전구들도 반은 깨져 있었다. 완전히 헛수고였다. 베르닌은 심호흡을 했고 어떻게든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했다.

 

 

“ 딤카, 우리 오늘 한군데만 더 가보자. ”

 

“ 그래, 아직 열두 시 안됐으니까. 신시가지에 하나 더 있지 않았니? ”

 

“ 아니, 안전가옥 말고. 오후에 내가 레베진스키 집에 갔었잖아. 근데 창밖에서 보기만 하고 들어가진 못했어. 근데 아무래도 그자가 걸려. 수요일까지 휴가 낸 것도 그렇고, 레코드 목록에, 사진 찍고 미샤의 사무실 뒤진 것들 하며, 그전에도 사과에 독도 발랐고 나한테 사무실 들어오라면서 국장의 접선책 노릇도 했었어. 그 집에 다시 가봤으면 좋겠어. ”

 

드미트리도 동의했다. 그래서 베르닌은 다시 구시가지로 차를 몰았다. 레베진스키의 집은 별장과 마찬가지로 캄캄했다. 불빛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레베진스키가 스페호프와 결탁한 상황이니 무작정 침입했다가 일이 꼬이면 더 문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둘은 창문으로 들어가는 대신 현관으로 갔다. 여차하면 국장의 지령을 받아서 온 것처럼 꾸밀 생각이었다. 초인종을 울려도 답이 없었다. 별장과는 달리 문이 아주 튼튼해서 체중으로 부딪쳐도 열기 힘들 것 같았다. 드미트리가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 분명히 챙겼는데. 아, 여기 있다. ”

 

 

작은 옷핀이었다. 드미트리는 핀을 반대로 구부려 일자로 편 후 그것을 열쇠 구멍에 쑤셔 넣었다.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계속 돌렸다. 잘 되지 않는 모양인지 한참 끙끙대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순간 숨을 멈췄다. 그리고는 왼쪽으로 두 번, 철컥, 찰카닥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레베진스키의 집은 상당히 넓었다. 복층에 방도 여러 개였고 거실도 아주 넓었다. 화장실도 두 개나 있었다. 이런 집들은 대부분 공동아파트로 분할됐을 텐데 역시 정치적으로 발 빠른 부모 덕에 호화롭고 넓은 집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잘 먹고 잘 살면서 왜 그렇게까지 감독 자리에 연연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레베진스키의 집도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침대 시트는 구겨져 있었고 부엌 싱크대에도 설거지거리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니 오전까지는 집에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베르닌은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왕재수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서 냄새까지 열심히 맡아 보았다. 왕재수의 향수 흔적이 남아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짙은 머스크 향이 가미된 파우더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호화롭고 부르주아 냄새가 났고 동시에 속물적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왕재수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힘이 쭉 빠진 채 배나무 거리로 돌아왔다.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요원 숙소로 돌아가는 대신 베르닌의 집에서 자기로 했다. 베르닌은 드미트리에게 자기 속옷과 잠옷을 한 벌씩 주었다. 정말로 쌍둥이 형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훨씬 좋을 거라고도.

 

 

둘은 간단하게 인스턴트 보르쉬를 데워먹은 후 물을 한 잔씩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베르닌은 왕재수 걱정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너무 피곤했는지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비둘기 시체와 머리 없는 도자기 인형, 빨간 스카프로 꽁꽁 묶여서 끌려가며 울부짖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왕재수를 보았고 아무리 손을 뻗어도 움직일 수가 없어 너무나도 괴로워하며 흐느껴 울었다.

 

 

 

 

*    *    *

 

 

 

 

베르닌은 8시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집안이 어두컴컴해서 처음에는 새벽인 줄 알았다. 창문으로 달려가 보니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르릉거리더니 번개가 번쩍거리고 천둥이 콰쾅 쳤다. 심장에 돌덩이가 달린 듯 무겁고 답답해졌다.

 

 

‘ 그 자식 비오는 거 싫어하는데. 애기 같은 녀석이니까 천둥 치면 무서워할지도 몰라. 안 그래도 잡혀가서 무서울 텐데...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 있는 걸까? ’

 

 

거실로 나가니 소파에서 잤던 드미트리도 막 부스스 일어난 참이었다. 그들은 집안을 샅샅이 살피고 왕재수의 집에도 올라가봤지만 새로 온 편지나 물건은 없었다. 둘은 급하게 씻은 후 잼을 대충 바른 빵과 커피로 3분 만에 아침을 먹었다. 남아 있는 다섯 개의 안전가옥을 위치에 따라 분류했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는 가까우니 괜찮았지만 문제는 외곽에 있는 세 군데였다. 하나는 공항 근처에 있었고 하나는 온천 요양소보다도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가까운 것이 수도원과 옛 교회 근방이었다. 게다가 숲 쪽으로 가는 길은 꽤 험했기 때문에 이렇게 비까지 많이 오는 날씨에는 함께 다섯 군데를 돌면 하루가 모자랄 게 분명했다.

 

 

“ 일단 시내에 있는 두 군데부터 같이 가보자. 운 나쁘게 둘 다 비어 있으면 나머지는 찢어지는 거야. ”

 

 

베르닌은 혼자서 수색하는 것이 불안했지만 일단 그러기로 했다. 아무래도 시내에 있을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스페호프는 왕재수와 관련된 일에 예산과 인력을 많이 투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외곽으로 나갈수록 비용 소모가 더 커지기 마련이니까.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베르닌은 일단 류드밀라에게 전화부터 했다. 왕재수가 몸이 안 좋아서 오늘 못 나가니까 무용수들은 따로 연습해야 할 거라고 말해주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베르닌은 류드밀라가 코즐로프에게 얘기할 거라는 생각에 더욱 근심이 되었다.

 

 

‘ 로만이 달려오기 전에 그 녀석을 꼭 찾아야 되는데... ’

 

 

그들은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뚫고 신시가지의 레스나야 거리 쪽에 있는 안전가옥에 가보았다. 간신히 잠긴 문을 뜯고 들어갔지만 역시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구시가지 시장 근처에 있는 두 번째 안전가옥으로 갔다. 창문 너머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둘은 흥분했다. 특히 베르닌은 왕재수를 구해낼 생각에 이성을 잃을 뻔했다. 심지어 문도 잠겨 있지 않았다. 드미트리가 손으로 밀자 현관문이 스르르 열렸다.

 

 

미하일! 미하일!

 

 

베르닌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뛰어 들어갔다. 고양이 한 마리가 후다닥 도망쳤다. 침실 안쪽에서 기척이 났다. 베르닌은 드미트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냅다 침실로 뛰어들었고 순간 뻣뻣하게 굳어졌다. 한참 뜨거운 사랑을 불태우고 있던 젊은 남녀가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를 응시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여자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꺅꺅 질러댔다.

 

 

“ 어, 어... 미안합니다. 저... 착각을... ”

 

으아악! 이 변태! 썩 나가지 못해!

 

 

베르닌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뛰쳐나왔다. 그 와중에도 화장실과 부엌까지 살펴본 드미트리가 혀를 찼다.

 

 

“ 없어. 여기도 아냐. 젠장. 저것들 가택 침입죄로 확 체포해버려야 되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문 따고 들어와서 놀아나고... KGB 안전가옥인데 관리 진짜 허술하네. ”

 

 

둘은 일단 시장 쪽으로 나와서 제일 처음 보이는 허름한 카페에 들어갔다. 비 때문에 너무 추웠다. 다시 겨울로 돌아간 것 같았다. 춥고 어지럽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뜨거운 차와 향신료를 넣은 양고기와 감자전을 시켜서 정신없이 먹었다. 먹고 나니 두통도 가시고 눈앞도 맑아졌다. 이 와중에도 먹어야 정신을 차릴 수 있다는 것이 서글프고 속상했다.

 

 

먹고 나서 베르닌은 지도를 펼쳤다. 수도원은 근처에 있었다. 온천 요양소는 한참 더 가야 했지만 어쨌든 숲 지대에 있었고 비슷한 방향이었다. 공항이 반대 방향이었다.

 

 

“ 내가 수도원이랑 온천 쪽을 갈 테니까 네가 공항 쪽으로 가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검은 숲 쪽은 내가 지리를 더 잘 아니까. ”

 

“ 응. 그런데 너 혼자서 괜찮을지 모르겠다... 비까지 오는데... 이렇게 하자. 아까처럼 무작정 뛰어들면 안 돼. 일단 안에 미하일이 있는지 살핀 후에 중간에 만나자. 여기서 공항까지는 너무 머니까 무전기가 안 될 거야. 지금이 12시 반이잖아. 음,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계산하면... 그래. 3시부터 1시간마다 무전을 치자. 구시가지에서 검은 숲까지는 그래도 무전이 될지도 모르니까 내가 공항에 갔다가 이쪽으로 돌아올게. 연결이 안 되면 아직까지 내가 여기 못 온 걸로 생각하면 되니까.

 

“ 그래. 근데 넌 공항까지 어떻게 가지... 차가 없잖아. ”

 

“ 극장 앞에 직행 버스 서지 않아? 나 여기 올 때 공항에서 그거 타고 왔어. 시내에서는 신시가지하고 구시가지 딱 한 군데씩만 정차하던데. 쭉 오니까 신시가지까지는 한 시간 만에 오더라. ”

 

“ 아, 맞아. 그거 공항 근처에서는 네 군데쯤 설 거야. 잠깐만... ”

 

 

베르닌은 지도를 다시 살폈고 안전가옥과 가장 가까운 정류장 이름을 적어주었다. 하지만 걱정이 앞섰다.

 

 

“ 비 많이 오는데... 그냥 같이 갈까? ”

 

“ 아니야, 내 걱정은 하지 마. 너도 두 군데 가려면 시간 없잖아. 비 와서 오늘은 진짜 금방 캄캄해질 거야. 그리고 저녁 되기 전까지 미하일을 찾아야 극장에도 소문이 크게 안 나지... ”

 

 

그래서 그들은 헤어졌다. 베르닌은 급하게 세 번째 안전가옥으로 차를 몰았다. 수도원을 지나치자 독사과를 먹고 쓰러졌던 왕재수를 위해 약초를 캐러 갔던 때가 생각났다. 자기도 모르게 성호를 그으면서 기도를 했다.

 

 

“ 하느님, 그때처럼 이번에도 도와주세요. 걔 성깔만 그렇지 진짜 착한 애예요. 꼭 찾을 수 있게 해주세요.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주세요. ”

 

 

세 번째 안전가옥은 낡은 별장이었다. 울타리가 허물어져 가는데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것을 보니 흐루쇼프 시절 이후 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 같았지만 일단은 가보았다.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그나마도 나무로 되어 있었고 삭아서 몇 번 세게 비틀자 문이 그냥 열렸다. 여기는 심지어 쥐까지 돌아다녔다. 거미줄이 빽빽하게 쳐져 있었다. 실망한 와중에도 왕재수가 여기 갇히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곧장 나와서 네 번째 안전가옥으로 향했다. 꽤 먼 곳이었다. 게다가 비가 갈수록 더 많이 와서 속력을 줄여야 했다. 온천 요양소를 지나자 숲이 더욱 울창해졌고 쓰러진 나무도 있어서 운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점점 남은 집이 줄어들자 초조해지면서 남은 두 채에도 왕재수가 없으면 어쩌지 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혹시 우리가 완전히 잘못 짚고 있는 건 아닐까? 안전가옥에 애를 가두려면 현장요원이 연루돼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국장이 투입할만한 사람은 필로모프랑 글리셰프 뿐인데. 글리셰프는 몸이 옛날 같지 않아서 올해 은퇴한다고 했는데... 그럼 필로모프인가... 걘 머리가 나빠서 그런 카드들이랑 인형 보낼 스타일이 아닌데. ’

 

 

네 번째 안전가옥은 통나무집이었다. 벌목공 숙소로 위장되어 있었다. 실지로 늦봄과 여름에는 벌목공들이 이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나마 이곳은 삼림국과의 공조를 통해 운영하는 곳이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입구의 잡초도 최근 베어낸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는 통나무집 측면으로 돌아갔다.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불빛은 새어나오지 않았다. 비 때문에 어두컴컴했지만 어쨌든 낮이니까 불을 꺼놨을 수도 있었다. 전날 밤 드미트리에게 배운 대로 돌멩이를 주워서 창문에 집어던졌다. 딱 소리와 함께 유리에 금이 갔다.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창문을 바깥에서 비틀어 열었다. 삐걱거리더니 반쯤 열렸다.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두컴컴해서 안쪽 깊은 곳은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가서 문을 밀었다. 그대로 열렸다. 관리 수준이 정말 엉망이라고 생각하며 베르닌은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가본 안전가옥 중 제일 깨끗했고 냄새도 별로 나지 않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페치카 난로에 완전히 마른 검은 재가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공항 부근의 안전가옥 뿐이었다.

 

 

베르닌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띵했고 목구멍에서 열기가 치솟았다. 너무나 무력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이제껏 왕재수가 스페호프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 그는 아무 것도 해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스페호프 뿐만이 아니었다. 오른쪽과 왼쪽 눈 색깔이 다른 남자, 벨벳처럼 부드럽고 섬뜩할 정도로 낮게 말하는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도 마찬가지였다. 스네고로드의 아르투르와 청년단원들이 그 애를 둘러싸고 폭언을 퍼부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과 국가와 ‘우리’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그 모든 폭력과 협박과 압력 앞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왕재수를 구해준 적이 없었다. 아마 그 누구도 그래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거기 저항하는 것은 더더욱. 그런데 왜 그 바보, 얼간이, 천치 같은 꼬마는 끊임없이 화를 내고 성깔을 부리며 대들 수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자기 무덤을 파면서도 계속해서 반항하는지, 그럴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 바보... 바퀴벌레만 봐도 울고불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녀석이... 뱀 껍질은 무섭고 총은 안 무서운 거야? 진짜 멍충이... ’

 

 

몇 분 동안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다가 베르닌은 시계를 보았다. 2시 30분이었다. 드미트리도 아마 마지막 안전가옥에 도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안전가옥에 왕재수가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    *    *

 

 

 

 

 

3시에 그는 무전기를 켜보았다. 하지만 잡음만 지직거렸을 뿐 드미트리의 신호를 잡아낼 수는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아직도 검은 숲을 빠져나오지 못했고 드미트리는 도시의 반대편 끝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뒤라면 그도 신시가지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무전이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닌은 아무리 생각해도 레베진스키에게서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안전가옥이 아니라 레베진스키의 뒤를 쫓아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집과 별장을 뒤졌고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 문제는 집이 아니고 레베진스키 자체야. ’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미 줄줄 외고 있는 협박카드의 문구들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풀이했다. 마지막 편지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호위 기사들에게 고함

입 다물고 있으면 왕자님은 무사할 거야.

모스크바에는 아프다고 통보해. 물론 공연은 취소야.

수요일이 지나면 곱게 돌려보내주지. 

추신. ‘곱게’는 물론 조건부야

 

 

아니, 내용보다도 그 필체가 계속해서 아른거렸다.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왼손으로 흘려 썼지만 지독한 악필도 아니었고 단어 하나하나도 명료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야무진 성격이 분명했다. 어디서 봤는지도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집도 사무실도 아니었다.

 

 

‘ 극장이야. 분명히 극장에서 봤어. ’

 

 

 

빗줄기는 좀처럼 가늘어지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은 진흙탕이 되어 있었다. 두 번이나 타이어가 파묻혀서 고생을 했다. 차가 엄청나게 덜컹거렸다. 왕재수가 옆에 있었다면 역시 시골이라느니, 고물차라느니, 운전이 험해서 허벅지 근육이 미워진다느니 하고 별의별 잔소리를 다 늘어놨을 게 뻔했다. 하지만 베르닌은 지금 그 잔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간신히 검은 숲을 빠져나와 다리를 건넜을 때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구시가지에 진입한 것이다. 아직 3시 반이었지만 혹시나 해서 무전기를 다시 켜보았다. 아무런 답이 없었다. 무전 연결이 안 되면 베르닌의 집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레닌 대로를 타면 신시가지로 갈 수 있었고 쵸르나야 거리로 빠지면 극장이었다. 그는 쵸르나야 거리 쪽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극장 앞에 차를 세우기는 했지만 막상 들어가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그를 보면 무용수들이 모여들어 우리 감독님이 많이 아픈 거냐, 수요일 공연 올리는 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냐, 혹시 또 누가 감독님에게 이상한 것이라도 먹인 거냐 운운 난리를 칠 게 뻔했다. 독사과 사건도 류드밀라와 코즐로프는 입을 다물었지만 왕재수가 그때 워낙 아팠기 때문인지 무용수들 사이에는 ‘KGB와 당에서 감독님을 독살하려고 했다더라’ 하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시계탑 화재도 수상하다는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무용수들은 그렇다 치고 코즐로프가 ‘우리 아기 어디가 아픈 거냐!’ 하고 그의 멱살을 잡으며 다그치는 것만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빗속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그는 현관의 수위에게 갔다. 다시 직원 주소록을 요구했다. 수위는 투덜댔다.

 

 

이럴 거면 어제 한꺼번에 볼 것이지. 매일 와서 주소록을 보자고 하니... ”

 

 

베르닌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필요한 주소를 옮겨 적었다. 그리고는 수위에게 물었다.

 

 

“ 사무국장 말인데요, 잔나 르이조바. 오늘 출근했나요? ”

 

“ 안 했어요! 휴가라고요. 화요일에 나올 겁니다. ”

 

 

그는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잔나 르이조바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신호만 울릴 뿐 아무도 받지 않았다. 감독실로 전화를 하자 류드밀라가 받았다.

 

“ 아이고, 다냐. 무용수 애들이 난리예요, 감독님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거냐고. 평소엔 아파도 안 아픈 척하고 웬만하면 늦게까지 남아 있는데 얼마나 아프면 못 나온 거냐고, 자기들이 지금 병원으로 가보겠다고 아우성이에요. 데니스가 애들 말리고는 있는데... 우리 미셴카 많이 아픈 거예요? 레프 사벨리예비치 병원에 있는 거예요? ”

 

“ 어, 아,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너무 과로해서 몸살 난 거예요. 무용수들한테 걱정하지 말고 연습하라 하세요. 어, 저... 미샤가 애들 오늘 제대로 연습 안하면 내일 가서 엄청 들들 볶을 거라고 했다고 전해주세요. 그, 근데 오케스트라도 나왔나요? ”

 

“ 아뇨. 오케스트라는 저녁에 나와요. ”

 

“ 지휘자랑 로만도요? ”

 

“ 네. 로만은 녹음 기술자랑 미팅 때문에 드라마 극장에 가 있어요. 그쪽 장비를 몇 개 빌리기로 했대요. ”

 

“ 저기, 사무국장 말인데요. ”

 

“ 잔나요? 왜요? ”

 

“ 그 사람도 휴가라면서요. 혹시 어디 간다는 얘긴 안 했나요? ”

 

“ 글쎄요, 그런 얘긴 없었는데. 콜랴가 휴가 냈으니까 둘이 별장에라도 갔겠죠. 아니면 바람 쐬러 나갔거나. ”

 

 

베르닌은 쏟아지는 비를 뚫고 포나르나야 거리에 있는 르이조바의 집을 찾아갔다. 막 아파트 근처에 차를 대고 있는데 찍찍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전기 너머로 드미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냐. 들려? ”

 

“ 아, 딤카! 응, 들려. 어떻게 됐어? ”

 

“ 그렇게 묻는 걸 보니 그쪽도 비어 있었던 모양이구나. ”

 

“ 그럼 너도? ”

 

“ 응. 그 집은 심지어 문짝도 다 떨어지고 창문도 깨져 있더라. 나 지금 버스에서 막 내렸어. 볼쇼이 대로 정류장. 너도 신시가지 들어온 거지? ”

 

“ 어, 아냐. 난 포나르나야 거리에 있어. 거기서 강만 건너면 금방이야. 구시가지행 21번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후에 내려서 10번지로 와. ”

 

“ 그게 어디야? ”

 

“ 잔나 르이조바라고, 극장 사무국장 집이야. 레베진스키와 친밀해. ”

 

“ 알았어. 저기 21번 온다. 끊자. ”

 

 

드미트리는 10분 만에 도착했다. 우산이 별 소용없었는지 전신이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같이 다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면서 미안해졌다. 베르닌은 안전가옥에 대한 추리가 빗나갔으니 이제 레베진스키를 추적하는 방법뿐이라고 말했고 드미트리도 동의했다.

 

 

“ 302호면 3층이겠네. 전화는 해봤니? ”

 

“ 응. 안 받더라고. ”

 

“ 흠...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은 못 들어가겠는데... ”

 

 

그때 아파트 현관에서 어떤 여자가 양 손에 보따리를 들고 나왔다. 동글동글한 체구에 눈이 반짝거리고 코를 찡긋거리는 것이 아주 호기심 많고 수다스러워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드미트리는 넉살좋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좀 들어드릴까요? ”

 

“ 아유, 그래주면 고맙지. 비까지 오는데. 조금만 가면 돼. 요 앞 여성회관에 감자랑 양파 갖다 놓으려고. 근데 젊은이는 처음 보네. 우리 아파트 사는 거 아니지? ”

 

“ 네. 사촌 누님을 만나러 왔는데 없는 것 같아서요. 아, 같은 건물에 사시니까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잔나 르이조바라고요, 저기 극장에서 일하는데요. ”

 

“ 아이고, 잔나한테 이렇게 번듯한 사촌이 있었다니! 그런데 어쩌나, 잔나는 아침에 남자친구랑 나갔는데. 내일 아침에나 돌아올 거야. ”

 

“ 아... 전화를 하고 오는 건데, 누님 놀래켜 드리려고 그냥 왔더니만... 그런데 남자친구라니요? 혹시 빨간 머리에 수염을 기른 뚱뚱한 남자인가요? ”

 

“ 에구, 무슨 소리야. 잔나가 얼마나 눈이 높은데. 자네 콜랴 본 적 없나? 벌써 몇 년째 둘이 사귀고 있는데 그러나. 금발에 코도 우뚝하고 옷도 잘 차려입고 그야말로 번듯하지. 근데 빨간 머리 뚱보는 또 누군가? 잔나가 콜랴 몰래 양다리라도 걸치나? ”

 

“ 아니에요. 예전에 누님을 쫓아다니던 남자인데 누님이 싫다고 했어요. 하도 오랜만에 와서... 그러면 콜랴와 같이 나가신 건가요? ”

 

“ 응, 아침에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더라고. 콜랴가 에스코트도 해주고. 둘이 엄청 기분 좋아 보였지. ”

 

근데 혹시 다른 사람은 안 왔나요? 그러니까, 검은 머리에 눈도 까맣고 굉장히 잘생긴 친군데요. 피부가 도자기 인형처럼 하얘요. 키는 이 정도. ”

 

“ 글쎄, 그런 사람은 못 봤는데... 아, 혹시 잔나네 극장에 새로 온 감독인지 뭔지 하는 젊은 애 말인가? 본 적은 없는데 잔나가 말해준 인상착의랑 비슷하네. 걔가 그렇게 반동분자에 콜랴를 중상모략해서 앞길을 막는다고 잔나가 화내던데. 자꾸 일을 벌이면서 극장 직원들을 들들 볶아서 힘들어 죽겠다면서. ”

 

“ 그러게요. 그 친구가 근데 어젠가 오늘 잔나에게 들를 것 같다는 얘길 들어서요. ”

 

“ 설마. 엄청 미남이라던데. 그런 애가 왔으면 눈에 안 띄었겠나. 여기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여자들이 많아서 잘생긴 남자가 하나라도 나타나면 다들 벌떼처럼 모이는걸. ”

 

“ 파티 끝나서 술에 절어서 왔으면 업혀왔겠죠 뭐. 요즘 애들 다 그렇잖아요. 그래도 감독이면 자기 윗사람이니까 잔나가 차로 데려다줬을 수도 있겠네요. ”

 

“ 그런가... 근데 잔나는 어제 안 들어왔어. 오늘 아침에 잠깐 들러서 옷만 갈아입고 나갔어. 내가 옆집이잖아. 잔나가 건망증 때문에 열쇠를 몇 번이나 잃어버렸거든. 그래서 요즘은 열쇠를 꼭 나한테 맡기고 가니까 다 알지. 차에도 콜랴 밖에 없는 것 같던데. ”

 

“ 그렇군요. 제가 잘못 알았나보네요. 아, 여기가 여성회관이군요. 보따리 이쪽에 놔드릴까요? ”

 

“ 그래그래. 고마워, 젊은이. 잔나를 못 보고 가서 어쩌누. ”

 

“ 괜찮아요. 다음 주에 또 올 테니까 그때 보죠 뭐. 누님한테 전해드릴 게 있었는데 그게 좀 아쉽네요. ”

 

“ 나 주고 가. 전해줄 테니까. ”

 

“ 그게 많이 무거워서요. 차에 놔뒀는데... 아주머님께 그런 폐를 끼칠 수야 없죠. ”

 

“ 그러면 내가 열쇠를 줄 테니 올려놓고 가지 그러나. 물건 올려놓고 우리 집 편지함에 열쇠 넣어두고 가면 되지. 난 301호니까. ”

 

 

뒤를 따라가며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던 베르닌은 드미트리의 수완에 감탄했다. 역시 엘리트 요원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미트리의 노력도 헛수고였다. 그들은 302호로 곧장 올라가서 드미트리가 얻어낸 열쇠로 문을 열었지만 르이조바의 집 역시 텅 비어 있었다. 혹시나 잠깐이라도 왕재수를 가둬놓지 않았을까 싶어 구석구석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왕재수는 연기처럼 사라졌고 레베진스키와 르이조바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닌은 너무나 절망해서 스페호프에게 뭐라고 보고를 해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기회에 공연을 당장 취소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선수를 치면 스페호프가 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왕재수가 있는 곳을 알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드미트리는 그게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동의하면서도 아직 저녁이 되지 않았으니 집에 가서 젖은 옷을 갈아입고 조금만 더 고민을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집으로 향했다.

 

 

 

 

*    *    *

 

 

 

 

 

젖은 머리가 헝클어져서 가르마가 불분명해지자 드미트리는 더욱 그와 쌍둥이처럼 보였다. 문득 베르닌은 왕재수가 가르마와 새치, 콧방울, 눈매와 걸음걸이 따위를 거론하던 게 생각났고 가슴이 찌릿했다.

 

 

‘ 내가 봐도 헷갈리는데 걘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봤을까. 바보... 그러면 뭐해, 쓸데없는 데만 똑똑하고. 그래봤자 나쁜 아저씨들한테 괴롭힘만 당하고... 공연 올리겠다고 아등바등 난리치다가 이렇게 잡혀가고. 아, 이 바보 멍충아, 대체 넌 어디 있는 거야... ’

 

 

버스를 타고 공항 부근까지 다녀오느라 고생을 해서 드미트리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젖어 있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온수 스위치를 올렸고 드미트리에게 빨리 씻으라고 했다. 이 와중에 감기까지 걸리면 큰일이었다. 드미트리가 옷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아가일 무늬 셔츠와 바지를 꺼내주었다.

 

 

드미트리가 씻는 동안 베르닌은 답답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집안을 돌아다녔다. 드미트리가 옷을 벗으면서 도로 꺼내놓은 협박카드들을 다시 읽어보았고 마지막 편지도 살펴보았다. 다시 봐도 그 필체는 낯익었다.

 

 

‘ 어디서 봤을까... 극장에서 본 것 같은데... ’

 

 

그는 멍하게 냉장고 쪽으로 갔다. 목이 말라서 맥주라도 한 모금 마시고 싶었지만 문득 범인이 또 다른 음료수에도 약을 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둘 다 비를 맞았으니 차라리 따끈한 차를 마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몸을 돌려 찬장 문을 열었다. 얼마 전에 보랴가 왕재수에게 아침마다 한잔씩 타 마시라고 만들어준 진한 과일청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유리병을 꺼냈는데 뚜껑에 메모가 붙어 있었다.

 

 

찻잔 데우기.

과일청 2큰술 넣기.

펄펄 끓인 물 부어서 젓기.

 

 

이게 뭔가 싶었지만 곧 생각이 났다. 왕재수가 이런 거 타 마시는 방법 모른다고 툴툴거리자 보랴가 ‘먼저 찻잔을 데우란 말이야. 그리고 과일청부터 크게 두 숟가락 넣고! 팔팔 끓인 물 부어서 잘 저어 마시면 돼. 정 모르겠으면 적어!’ 라고 엄하게 말했었다. 왕재수는 짜증을 내면서도 수첩을 찢어서 레시피를 적었고...

 

 

베르닌은 머리가 아찔했다. 네 번째 편지를 가져왔다. 뚜껑의 메모와 대조해보았다. 글씨는 달랐다. 하지만 뭔가가 가슴을 쿡쿡 찔렀다. 기억이 소용돌이쳤다. 극장에서... 그는 연습실에 있었다. 왕재수도 있었고 류드밀라와 레베진스키도 있었다. 그때 왕재수는 반주용 피아노가 조율이 안 맞는다며 화를 내고 있었다. 레베진스키는 왜 아무렇지도 않은 악기 트집을 잡느냐고 했고 류드밀라는 조율기사에게 연락하겠다고 했다. 왕재수는 류드밀라에게 음악은 아무 것도 모르지 않느냐고 짜증을 내더니 수첩에 ‘피아노, ㅇㅇ건반, 플랫, ㅇㅇ음, ㅇㅇ음’ 운운하는 용어들을 마구 써내려간 후 종이를 북 뜯어 그녀에게 쥐어주고는 이대로 읽어주라고 했다. 류드밀라는 왕재수의 음악적 천재성이 아니라 다른 것에 감탄했다.

 

 

“ 어머나, 미셴카! 왼손으로도 글씨 잘 쓰네요! 원래 왼손으로 쓰면 못 알아볼 지경인데 굉장히 또박또박... ”

 

“ 당연하잖아요, 난 천잰데. 균형 감각 키우려고 어릴 때부터 양손을 썼다고요. 그래도 글씨는 오른손으로 많이 써서 역시 왼손으로 쓰면 별로 안 예뻐요. ”

 

 

그때 왕재수는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강가에서 새들에게 먹이를 주다가 벌레에게 물려서 손등이 퉁퉁 부어올랐기 때문이다. 부기는 이틀이 지나서야 빠졌고 왕재수는 그동안 왼손만 쓰면서 시골은 역시 엉망이라고 계속 화를 냈었다.

 

 

피아노, 건반, 플랫. 조율.

 

 

호위 기사들에게 고함

입 다물고 있으면 왕자님은 무사할 거야.

모스크바에는 아프다고 통보해. 물론 공연은 취소야.

수요일이 지나면 곱게 돌려보내주지. 

추신. ‘곱게’는 물론 조건부야.

 

 

 

베르닌의 눈앞에 글씨들이 춤을 췄다가 사라졌다. 똑같았다. 동일인의 필체였다. 그건 왕재수의 글씨였다.

 

 

‘ 이건 걔가 쓴 거야... 하지만 대체 왜! 어떻게! ’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만일 왕재수가 마지막 편지를 썼다면 논리적으로 앞의 세 장도 마찬가지여야 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왕재수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는가. 자기 자신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고 죽은 새와 인형을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그토록 피땀 흘려 준비한 수요일 공연을 중단하다니.

 

 

‘ 인형은 그 녀석 사무실에 있었던 거였어. 오렌지 주스도 그 녀석 냉장고에는 언제나 있었어. 그 녀석처럼 민감한 입맛이라면 우유도 입 대는 순간 저지방 우유가 아니란 걸 알아차렸을 텐데 다 마셨어. 여섯 개의 음악에 대해서라면 자기가 선곡했으니까 물론 다 알고 있겠지. 파랑새, 왕자님, 호위 기사... 발레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보낸 카드. 발레에 대해 그 녀석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은 없어. ' 

 

 

등줄기가 오싹했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걔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말이 안 되잖아. 게다가... 걔가 비둘기를 죽인다고? 벌레만 봐도 무서워서 못 움직이는 애가, 새를 그렇게 좋아하는 애가... 아니야... ’

 

 

베르닌은 하마터면 샤워를 하고 있는 드미트리에게 뛰어 들어갈 뻔 했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었지만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바람이라도 쐴까 하고 창문을 열었지만 비가 너무 심하게 들이쳐서 도로 닫고는 복도로 나갔다. 멍하게 복도를 왕복했다. 점차 이성이 돌아왔다.

 

 

‘ 그래, 마지막 편지를 썼다고 해서 앞의 세 개도 걔가 썼다고 확신할 수는 없어. 미셴카는 우리가 쓰러졌을 때까지는 깨어 있었어. 그 마지막 편지는 범인이 걔를 협박해서 쓰게 만든 거야. 필체를 못 알아보게 하려고 왼손으로 쓰라고 했던 거야. 그럼 미셴카는 수면제를 먹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끌려간 후에 깨어나서 쓴 걸까... 후자라면 범인은 우리가 쓰러졌을 때 다시 왔다는 거고... 그때 우린 세 시간 정도 정신을 잃고 있었지. 미셴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편지를 쓰게 만들었다면, 그리고 그 편지를 들고 범인이 다시 우리 집에 왔다면 미셴카를 숨겨놓은 곳은 그렇게까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야 해. ’

 

 

생각에 잠겨 왔다갔다 하던 베르닌은 어느새 복도 끝 비상계단 앞에 와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왔지 싶어서 집 쪽으로 몸을 돌리다가 베르닌은 멈칫했다. 위쪽 계단 구석에 뭔가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 저게 뭐지? ’

 

 

베르닌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혀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라갔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물체를 급하게 집어든 순간 그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아, 이건! 목걸이! 그 자식 목걸이잖아!

 

 

그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그 목걸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자신이 레닌그라드의 의사 유리 아스케로프로부터 받아온 십자가 목걸이였으니까. 왕재수는 무대에 올라갔을 때와 독사과를 먹고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그 목걸이를 푼 적이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앞뒤로 뒤집어가며 찬찬히 살폈다. 잠금 고리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십자가는 발로 밟힌 듯 귀퉁이에 시커멓게 자국이 나 있었다.

 

 

‘ 미하일이 반항했던 거야. 몸부림치다가 줄이 끊어진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이걸 풀었을 리가 없어.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건데. 하지만 왜 목걸이가 여기 있는 걸까... ’

 

 

해답은 너무나 간단해서 베르닌은 현기증이 났다.

 

 

미셴카는 이 건물 안에 있는 거야! 범인은 멀리 가지 않았어! 그자는 처음부터 여기 숨어 있었어. 그러니까 우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었던 거야. 약을 탄 우유와 주스를 갖다놓고 우리가 미셴카의 집에 없을 때를 노려서 카드와 인형을 놓고 갔어. 우리가 주스를 마시고 정신을 잃었을 타이밍에 들어와 걜 끌고 갔지. 그자가 여기 잠복해 있었다면, 이 건물 안에 은신처가 있었던 거야. 그래! 그자는 미셴카를 거기로 데려간 거야! 엘리베이터는 이용하지 않았어, 주민의 눈에 띌까봐. 그래서 계단으로 간 거야. 위층 주민들은 계단을 이용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목걸이가 여기서 발견된 건, 6층에서 7층으로 가는 계단... 그건 그자의 은신처가 8층 아니면 9층에 있다는 얘기야! 7층에는 그 녀석 집하고 출판문화국장의 집뿐이고... 출판문화국장은 대가족이야. 그 집에는 애를 숨길 수가 없어. 8층과 9층에는 각각 3개의 가구가 있어... 분명히, 분명히 그 중 빈집이 있어. 지난번에 이사나간 집이 있었어. 내가 짐 옮기는 것도 도와줬어. 그러고 나서는 새로 이사 온 집이 없었어. 분명해! ’

 

 

베르닌은 당장 8층으로 달려 올라가려다 멈칫했다. 그는 맨몸이었다. 총도 무전기도 모두 집에 놔둔 채였다. 그리고 왕재수에게는 분명히 범인을 비롯해 감시자가 딸려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는 급하게 복도를 가로질러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막 씻고 나온 드미트리에게 급하게 자신의 추리를 설명했다. 왕재수의 목걸이를 보자 드미트리의 눈빛이 변했다.

 

 

“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다닐. 이런 천치 같으니...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가능성을 생각 못했어! 위층에 빈집이 있어? ”

 

“ 있어. 몇 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번 달에 이사나간 후에 안 들어왔어. 경비실에 가면 알 수 있을 거야! ”

 

“ 예비 열쇠도 얻을 수 있니? ”

 

“ 얻어낼 거야! 공무 수행에 필요하다고 할 거야! ”

 

 

베르닌은 너무나도 마음이 급했다. 경비실에서 열쇠를 얻어내느라 아옹다옹 하는 시간에 범인이 왕재수를 데리고 사라질까봐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드미트리에게 8층에 올라가 있으라고 했다.

 

 

“ 8층하고 9층 사이 계단 있잖아. 거기 잠복해 있어. 두 층을 다 볼 수 있으니까 혹시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무전 쳐. ”

 

 

드미트리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베르닌의 지시에 따랐다. 이 건물을 잘 아는 것은 베르닌이었고 왕재수의 목걸이를 찾아낸 것도, 추리를 해낸 것도 베르닌이니 거기 따르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즉시 권총과 무전기를 챙기더니 소리를 죽여 계단 쪽으로 올라갔다.

 

 

베르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경비실로 갔다. 8층과 9층에 비어 있는 방이 있는지 물었다. 수위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요 며칠 동안 왜 이렇게 그 방을 찾는 사람이 많담. 전화도 몇 번이나 오고. 지난번에도 꼭 이사 들어올 것처럼 찾아와서 실컷 방 구경하게 해주고... 장부에 적으려고 주택 관리국 허가증을 보여 달라고 했더니 그냥 가버린 놈이 있었는데. ”

 

“ 뭐라고요? 그게 누군지 모르세요? ”

 

“ 모르니까 내가 허가증을 보여 달라고 했지. 당신 또래 젊은 남자였어요. 금발머리에 안경 끼고 양복 입고. ”

 

“ 금발이면 레베진스키인데... 젊은 남자였다고요? 40대쯤 되지 않았어요? 미남이었나요? ”

 

 

“ 당신 또래였다니까 웬 40대! 미남은 무슨. 꼭 안경잡이 쥐새끼처럼 생겼던데. 덩치는 좋더군요. 거의 당신만할 걸요. ”

 

“ 그러면... 그 집은 지금 비어 있어요? ”

 

“ 당연히 비어 있지. 이 아파트 들어오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당신이나 7층의 그 반동분자처럼 당국에서 밀어 넣은 사람들이야 모르겠지만 일반인들한텐 여기가 모스크바 시내 아파트에 거주 등록하는 것만큼 어려운 곳이라고요! ”

 

“ 그게 몇 호인가요? ”

 

“ 몇 호였더라... 901호였던 것 같은데... 그렇지. 9층에선 제일 넓은 집. 그 반동분자 집하고 같은 구조였으니까. 욕실 두 개에... ”

 

“ 당장 거기 열쇠 줘요. 이건 공무예요. 당과 연방에 심대한 해악을 끼치는 범죄자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요! ”

 

 

수위가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열쇠들이 매달려 있었다.

 

 

“ 에, 그러니까...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9층이 노란색이었지. 그러면 여기... 에잉, 줄이 다 꼬였잖아. ”

 

 

베르닌은 주머니칼을 꺼내서 꾸러미 한가운데에 뒤엉켜 있는 줄을 싹둑싹둑 잘라버렸다. 수위가 아우성을 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이 뽑혀나가도록 901이란 숫자를 찾았다. 마침내 두 개의 노란색 열쇠가 달린 고리를 낚아챈 베르닌은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엘리베이터는 9층에 있었는데 아무리 버튼을 눌러대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다리다가 머리가 핑핑 돌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진 베르닌은 무작정 계단으로 내달았다.

 

 

 

 

 

to be continued ..

 

 

 

 

...

 

 

 

과연 단추의 예상대로 901호에 왕재수가 갇혀 있을 것인지!!! 그 결과는 다음주의 2부에서 :)

 

..

 

왕재수가 체포된 경위에 대한 드미트리의 설명은 본편 우주에서 미샤가 수용소에 가게 된 주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뭐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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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금요일이라 언제나처럼 서무 시리즈.

이번 편도 이른바 우수한 단추 시리즈에 속한다. 단추와 똑같이 생긴 드미트리 베르닌이 활약한다 :)

지난 31편에서 협박편지와 죽은 비둘기를 받고 공포에 휩싸인 왕재수와 단추!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러 달려온 드미트리. 과연 왕재수는 수요일 신작을 무사히 올릴 수 있을 것인가!

 

..

 

후반부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다차'는 러시아어로 '별장'이란 뜻이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다차란 각별한 공간이다.  여름 휴가를 보내기도 하고 주말에 잠깐씩 가서 텃밭도 가꾸는 곳인데 소련 시절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다차는 우리가 '별장' 하면 떠올리는 호화로운 부자들의 전유물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물론 노멘클라투라 특권층의 별장이야 근사하고 호화로웠지만 일반 인민들의 오두막 같은 다차들도 많았다.

 

..

 

그럼 재미있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밤, 몇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신작 공연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순간, 왕재수는 침실에서 협박편지와 새의 사체를 발견하고... 베르닌은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와 함께 그를 경호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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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2

 

 

 

 

 

 

서무의 슬픔

-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드미트리가 방울을 달고 돌아온 후 그들은 잠시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드미트리는 스페호프가 전에도 왕재수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했던 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베르닌은 돈키호테 공연 방해와 독사과, 시계탑 화재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에는 담담하게 듣던 드미트리도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일단 아침에 협박범이 다시 나타나리라는 예상에는 둘 다 동의했다.

 

 

밤이 늦었기 때문에 그들은 교대로 눈을 붙이며 보초를 서기로 했다. 드미트리는 베르닌에게 피곤해 보이니 먼저 자라고 했다. 베르닌은 평소 같으면 사양했겠지만 며칠간의 피로가 쌓여 너무 졸렸던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소파로 기어 올라갔다. 드미트리는 침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침실과 거실 양쪽을 모두 볼 수 있는 위치였다. 편안한 자세로 서 있었지만 왕재수와 베르닌 모두를 지켜보면서 창문이나 현관문, 혹은 위층에서 수상한 소리가 나면 즉시 움직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무거운 잠에 빠지면서 베르닌은 ‘나도 현장요원 연수 제대로 받아놓을걸...’ 하고 아쉬워했다.

 

 

베르닌이 눈을 떴을 때 드미트리는 여전히 침실 문 앞에 있었다. 부엌에 있던 식탁 의자를 갖다놓고 거기 앉아 있었다. 왕재수는 침대 가장자리에 붙어서 한쪽 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6시 반이었다.

 

 

“ 왜 안 깨웠니. 너 졸리겠다. 이제 내가 보초 설게. ”

 

“ 아, 괜찮아. 나 원래 적게 자는 편이라서. 어제 커피랑 차를 좀 많이 마셨더니 잠이 안 와. 너 더 자. ”

 

“ 아니야, 난 이제 다 깼어. 저, 미샤는 잘 자던? 중간에 안 깨고? ”

 

“ 응. 많이 피곤했나봐. 좀 더 자게 놔두자. ”

 

 

베르닌은 세수를 한 후 찻물을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잠깐 위층에 가서 상황을 살피고 오기로 했다. 드미트리가 주의를 주었다.

 

 

“ 현관문 아래에도 방울 달아놨거든. 소리 날 거야. 놀라지 말고 그냥 끈 살짝 들어 올리고 들어가. ”

 

 

드미트리의 말대로 문 아래에 방울이 달려 있었다. 문과 똑같은 색깔의 어두운 실에 달려 있어서 의식하고 찾지 않는 한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았다. 자물쇠를 열고 문을 밀자 딸랑딸랑 하고 소리가 났다. 아래층에서도 들릴까 하고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요란한 소리였다. 실을 들어 올리자 소리가 멈추었다.

 

 

카드는 와 있지 않았다. 창문은 안에서 잘 잠겨 있었고 역시 방울이 설치되어 있었다. 수상한 기색은 없었다. 베르닌은 집안을 한 바퀴 돈 후 냉장고에서 사과와 오렌지를 꺼내고 침실로 가서 나이트 테이블 위에 있는 수첩을 집었다. 왕재수가 매일 극장이나 공연과 관련해 떠오른 아이디어를 메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옷장에서 왕재수가 입을 옷을 꺼냈다. 그는 패션이라면 아무 것도 몰랐으므로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스웨터와 셔츠, 바지와 양말을 끌어 모았다. 그러다가 왕재수가 스카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스스로 뿌듯해하며 제일 먼저 보이는 붉은색 스카프도 한 장 집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드미트리가 부엌에서 부체르브로드를 만들고 있었다. 가지런하게 자른 흑빵 위에 햄과 치즈, 오이, 토마토 따위를 각각 올려놓았는데 평범한 부체르브로드도 드미트리가 만들자 굉장히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베르닌이 가져온 사과와 오렌지를 보자 반가워했다.

 

 

“ 어, 과일 잘 가져왔구나. 네 냉장고에 먹을 게 별로 없어서... 인스턴트 보르쉬하고 냉동 펠메니밖에 없더라고. 참, 닭도 한 마리 있더라. 평소 같았으면 그걸로 항아리 닭고기라도 만들면 좋을 텐데 지금은 요리에 신경 쓸 여유는 없지. 그렇다고 몸 관리하는 애한테 인스턴트 데워주고 냉동 펠메니 삶아주긴 좀 그러니까. ”

 

“ 응, 요즘 저 녀석이 계속 늦게까지 일하니까 지켜보느라고 나도 장 볼 시간이 없었어. 근데... 쟤 그 보르쉬랑 펠메니 잘 먹어. 아침이야 가볍게 먹으니까 좀 그렇지만. 있다가 저녁에 그거나 해줘야겠다. ”

 

“ 엥, 그 인스턴트 보르쉬를 먹는단 말이야? 진짜 의외네. ”

 

 

드미트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마카롱과 프랑스 홍차도 마다하던 녀석이 인스턴트라니!’ 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거실로 나와서 부체르브로드와 커피, 사과로 이른 아침을 먹었다. 둘 다 홍차를 더 좋아하기는 했지만 잠이 모자라니 강한 카페인이 필요했다. 샌드위치와 사과를 다 먹고 남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왕재수가 뒤척이더니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베르닌은 얼른 곁으로 갔다.

 

 

“ 더 자, 아직 일곱 시밖에 안 됐어. ”

 

“ 극장 가야 되는데. ”

 

“ 오늘 극장 문 닫았잖아. 소독한다고. ”

 

“ 왜 이렇게 사방에 불을 다 켜놨어... 눈 아파. 누구랑 얘기하고 있었어? ”

 

 

베르닌은 왕재수가 아침잠도 많고 자다가 깨면 정신을 차리는데 한참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옆에 앉아서 아이를 어르듯이 상냥하게 말했다.

 

 

“ 너 아직 잠 다 안 깨서 생각 안 나는구나. 어젯밤에 드미트리 왔잖아. ”

 

“ 드미트리가 누구야? ”

 

 

왕재수가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베르닌의 어깨 너머로 거실을 보더니 금세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막 욕을 하려다가 갑자기 생각에 잠긴 눈이 되더니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 맞다. ”

 

“ 밤엔 별 일 없었어. 너네 집에도 갔다 왔는데 아직 아무 기색도 없고. 그러니까 더 자렴. 극장 쉬는데 오늘이라도 많이 자야지. ”

 

“ 싫어. 기분 나쁜 꿈만 꿨어. 바퀴벌레 쥐 곱등이 나오고... 뱀 껍질도 나오고 엄청 무서웠어. 일어날래. ”

 

 

침대에서 내려온 왕재수는 드미트리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고 곧장 욕실로 갔다. 베르닌이 뒤따라가 셔츠와 바지, 새 칫솔을 가져다주자 귀찮아하면서 받아들더니 잠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으악, 너 왜 그래!

 

“ 뭐가? 씻으려고 그러는데. ”

 

“ 여기가 너네 집이냐!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

 

 

왕재수는 거실을 힐끗 보더니 입안으로 욕을 하면서 욕실로 쏙 들어갔다. 문도 탕 닫았다. 그때 드미트리가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 문 다 닫으면 안 돼! 좀 열어놓고 씻으라고 해! ”

 

“ 어, 왜? ”

 

“ 욕실에도 창문 있단 말이야. 잠가놓긴 했지만 그래도 조심해야지! ”

 

 

베르닌은 할 수 없이 욕실 문을 살짝 밀었다. 금세 열렸다. 왕재수는 수용소에서 고생을 해서 그런지 좁은 곳에 처박히는 것이나 문을 잠그는 것을 꺼렸다. 더운 물을 받아놓고 욕조에 들어가 있던 왕재수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 왜? ”

 

“ 창문으로 누가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문 잠그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조금만 삥긋 열어놓을게. ”

 

“ 어휴, 진짜 피곤하게 구네. 난 또 너도 씻으려고 그러는 줄 알았지. ”

 

“ 으악, 내가 왜! 난 사내자식이랑 같이 목욕하는 습관 없거든! ”

 

“ 그럼 여자랑은 있어? ”

 

“ 어... 으악, 없어! 나 변태 아니야! 그런 버릇 없어! ”

 

“ 웬 변태 타령이람. 침대가 부서지게 뒹굴고 나면 잠들거나 씻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고, 상대가 맘에 들었으면 같이 욕조에 들어가는 건 인지상정인데. 네가 그러니까 여자가 안 생기지. 불쌍한 녀석. ”

 

“ 헉... 제발 그런 말은 바이올린 아저씨하고만 하란 말이야! ”

 

“ 근데 이 비누 왜 이렇게 거품이 안 나? 엄청 싸구려 비누구나. 스폰지도 얼마나 오래 썼는지 다 해졌네. ”

 

“ 야, 다 너처럼 외제 비누 쓰는 줄 아냐! 여기 사람들 90%는 그 비누 쓰거든. 그리고 목욕 스펀지는 가게 갈 시간이 없어서 못 샀어. 찜찜하면 그냥 손으로 씻어. ”

 

“ 가뜩이나 거품도 안 나는데... 근데 너 샴푸 안 써? 왜 안 보이지? ”

 

“ 어, 난 그냥 비누로 감아. ”

 

“ 으윽... ”

 

 

갑자기 베르닌은 자기가 왜 욕조에 앉아 있는 왕재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가뜩이나 드미트리에게도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란 얘기를 정색하며 부정해놓았는데 괜히 의심을 살 것 같아서 급하게 돌아 나왔다.

 

 

다행히 드미트리는 왕재수가 먹을 아침을 차리느라 그들의 말을 못 들은 것 같았다. 드미트리는 사과와 치즈를 얹은 부체르브로드 두 개와 가지런히 자른 오렌지, 우유가 담긴 컵을 쟁반에 예쁘게 담아 놓고는 베르닌에게 가스렌지를 가리켰다.

 

 

“ 찻물 다시 올려놨어. 지금 우리면 차 식어 버릴까봐. 나 이제 위층에 가볼게. 새벽은 지났고. 네가 좀 전에 갔을 때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고 했지? 그 사이에 왔다 가지 않았다면 잠복해 있다가 어떤 놈인지 붙잡을 수도 있을 거야. ”

 

“ 어... 혼자 가도 괜찮겠어? 나랑 같이... 아, 안되겠다. 미샤랑 같이 있어야 하니까. ”

 

“ 그래. 너 절대로 미하일 곁을 떠나면 안 돼. 만의 하나 그놈이 여기로 올 수도 있잖아. 기억하지? 무슨 일 생기면 크게 소리 지르는 거. ”

 

“ 그래. 참, 내 전화번호 줄게.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쟤네 집 번호도 적어주는 게 좋겠지? ”

 

“ 아, 괜찮아. 둘 다 외웠어. 나 암기력 뛰어나잖아. 그럼 갔다 올게. 적어도 10시까지는 있어볼게. 카드에서는 ‘아침’이라고 했는데 되게 애매한 시간이란 말이야. ”

 

 

드미트리가 나간 후 베르닌은 다시 한 번 문과 창문을 확인했다. 커튼을 열어젖히고 바깥도 샅샅이 살폈다. 안뜰과 바깥 도로 쪽으로 조깅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하지만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같은 아파트 주민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아침이 되니 밝아서 그런지 간밤의 불안감과 공포도 많이 가라앉았고 왕재수의 말대로 별 것 아닌 장난에 과민 반응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왕재수는 생각보다 금방 씻고 나왔다. 바지만 입고 나오더니 셔츠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투덜댔다.

 

 

“ 이거 여름 셔츠잖아. ”

 

“ 어, 그런가? 긴 소매라서 몰랐어. 스웨터도 가져왔으니까 그거 껴입어. 내가 스카프도 챙겨왔어. 너 맨날 그런 걸로 멋 부리잖아. ”

 

“ 셔츠는 하늘색인데 스웨터는 오렌지색이고 스카프는 빨간색이잖아! 심지어 바지는 회색... ”

 

“ 으응... 그러고 보니 색깔이 다 다르구나. 손에 잡히는 거 가져왔더니. ”

 

“ 야, 사람을 무지개로 만들어놓고 ‘색깔이 다르구나’로 끝날 문제냐 이게! 너 진짜 심각하다. 이 정도로 패션 감각이 엉망인줄은 몰랐어. ”

 

“ 으윽, 지금 패션 타령할 때가 아니잖아. 그래봤자 전부 프로도 아르마나 에르미일 거 아냐! 추우니까 빨리 입어. 요즘 난방도 조금밖에 안 틀어줘서 추운데. 이맘때 감기 많이 걸린단 말이야. 넌 폐렴 때문에 기관지도 약해졌잖아. ”

 

 

왕재수는 툴툴거리면서도 춥긴 했는지 알록달록한 옷을 모두 주워 입었다. 그래도 오렌지 스웨터에 빨간 스카프만은 도저히 맬 수 없다면서 집어던졌다. 베르닌은 그를 소파에 앉힌 후 쟁반을 가져다주고 차를 우려다 주었다.

 

 

먹어. 어제도 저녁 거르고 다 뭉개진 양배추 롤 하나 먹었잖아. ”

 

“ 안 먹어, 그 자식이 만든 거. ”

 

“ 너 다시는 드미트리에 대해 불평하지 마. 걘 한숨도 안 잤어, 계속 너 지키고 있었단 말이야. 이 샌드위치도... 너 몸 관리한다고 일부러 가벼운 재료만 올렸잖아, 저지방 흰 치즈에 사과에. 이거 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잖아. 오렌지랑 우유도 아침에 곧잘 먹으면서. 당장 먹어. 한번만 더 내 앞에서 드미트리 헐뜯고 트집 잡으면 나 정말 화낼 거야.

 

 

베르닌은 왕재수가 짜증을 내며 ‘네깟 게 화내든 말든!’ 하고 소리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재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말없이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샌드위치 한 쪽을 먹고 나서 오렌지도 반 개 먹고 차도 마셨다. 우유도 훌쩍 다 마셨다. 베르닌은 남은 샌드위치 한 개와 오렌지 조각도 먹으라고 하려다 왕재수가 몹시 풀 죽은 표정이었기 때문에 어쩐지 또 마음이 약해져서 한숨을 쉬었다.

 

 

“ 그래도 많이 먹었네. 잘했어. 맛있지? ”

 

“ 맛없어. ”

 

“ 엄청 맛있던데. 걔 요리 정식으로 배웠대. 차도 향 좋더라. 파리에서 가져온 거래. 너 원래 프랑스랑 스리랑카랑 영국산 차만 마셨다고 했잖아. ”

 

“ 향 하나도 안 좋아. 구정물 같아. ”

 

“ 어휴, 너네 어머니 진짜 너 키우느라 고생하셨겠다! 청개구리! ”

 

 

왕재수는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어쨌든 우유도 다 마셨다. 뭘 좀 먹였더니 뺨에도 혈색이 돌고 눈도 반짝거렸다. 오렌지색 스웨터와 하늘색 셔츠 탓인지 얼굴이 더 뽀얗고 어려 보였다. 십대 소년처럼 보였다. 아무리 봐도 괜찮아 보이는데 왕재수가 왜 무지개 타령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무대에 올라갈 때는 레이스랑 금단추 달린 블라우스에 타이츠 따위를 입었던 주제에’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왕재수는 타이츠에 대해 조금이라도 모독을 하면 발칵 화를 냈으므로 베르닌은 입안으로만 투덜거렸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문과 창문을 급하게 훑어본 후 수화기를 들었다.

 

 

“ 여보세요. ”

 

“ 다닐, 나야. ”

 

 

드미트리였다.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 어, 무슨 일 있어? ”

 

“ 세 번째 카드가 왔어. 지금 내려갈게. 미하일 옆에 딱 붙어 있어. ”

 

 

 

 

*    *    *

 

 

 

 

세 번째 카드는 내용이 짧았다. 그리고 하얀색 카드가 아니라 붉은 색지에 검정 글씨로 타이프 쳐져 있었다.

 

 

친애하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그 소중한 공연은 올리지 못할 거야.

파랑새도, 천사도, 검은 기사도 소용없을걸.

말을 잘 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입을 연 것은 베르닌이 아니었다. 왕재수였다.

 

 

“ 이게 전부야? ”

 

“ 아니. ”

 

 

드미트리가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종이 봉지를 찢어서 안에 있던 내용물을 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왕재수는 순간 전날 밤의 악몽이 되살아났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베르닌은 협박범의 두 번째 선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 도자기 인형이잖아. ”

 

“ 그냥 도자기 인형이 아니야. ”

 

 

드미트리가 딱딱하게 굳어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목이 잘린 인형이지. ”

 

 

작은 천사 인형이었다. 기껏해야 베르닌의 약지 길이밖에 되지 않는 장식용 도자기 인형이었다. 흰색 몸체에 날개와 망토는 푸른색과 금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인형이었다. 머리가 완전히 잘려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천사의 목 부분은 들쭉날쭉하게 깨져 있었다.

 

 

희미한 오한을 느끼며 베르닌이 물었다.

 

 

“ 머리는? ”

 

“ 없었어. 이것뿐이었어. 카드 옆에 놓여 있었어. ”

 

“ 어디에? ”

 

“ 나이트 테이블. 어제랑 반대쪽. ”

 

“ 언제, 언제 들어왔다 간 거야? 마주쳤어? ”

 

“ 아니. 그랬으면 붙잡았든지 아니면 몸싸움이라도 했겠지... 네가 돌아오고 내가 올라가기 전에 아침 먹느라 30분쯤 시간이 있었잖아. 그때 왔다 간 것 같아. ”

 

“ 하지만... 그럼 방울이 울렸을 텐데... 그 소리 꽤 크던데... 대체 어디로 들어온 거야! ”

 

“ 현관문을 따고 들어왔을 거야. 너희 쪽 요원들 무시한 거 취소할게. 내 생각이 짧았어. 면밀한 놈이야. 조심성이 뛰어난 것 같아. 아니면 새벽에 내가 올라간 걸 숨어서 봤든지. 문에 설치해뒀던 줄을 잘라버렸더라. 게다가 그 줄하고 방울을 보란 듯이 침대 위에 올려두고 갔더라고. 개새끼. ”

 

 

드미트리가 욕설을 내뱉으며 이를 갈았다. 엘리트 요원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린 것 같았다. 베르닌은 분노보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서 목 잘린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살펴보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왕재수의 손을 꼭 쥐었다. 손이 굉장히 차가웠다. 평소에는 몸이 뜨거운 편이었다. 그렇게 차디찼던 것은 예전에 얼음이 깨져서 강에 빠졌을 때뿐이었다. 얼마나 놀랐으면 이럴까 하고 걱정이 된 베르닌은 왕재수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의외로 왕재수의 표정은 담담했다. 간밤처럼 겁에 질린 것 같지도 않았고 흥분한 기색도 없었다. 심지어 베르닌의 손에서 깨진 도자기 인형을 빼앗아 찬찬히 살피기까지 했다.

 

 

“ 딤카, 이제 어떻게 하지? ”

 

 

베르닌은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왕재수를 코즐로프에게 피신시킨 후 드미트리와 함께 위층에 숨어서 범인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답답한 듯 냉장고로 가서 주스 팩을 꺼냈다. 컵에 오렌지 주스를 따라서 단숨에 들이켰다. 베르닌도 갑자기 속이 타고 목이 바짝 말랐다.

 

 

“ 주스 남았니? ”

 

“ 좀 남았어. 줄까? ”

 

“ 응. ”

 

 

드미트리가 빈 컵을 가져와서 남은 주스를 따라주었다. 시원한 주스를 마시고 나니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드미트리는 어느 새 권총을 꺼내 쥐고 있었다. 왕재수와 베르닌을 쳐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 세 번째 카드에서는 협박이 훨씬 노골적으로 변했어. 다음 카드는 안 올 것 같아. 온다 해도 다른 방식이 될 거고. ”

 

“ 그게, 그게 무슨 뜻이야? ”

 

“ 다닐, 나 본부에 있을 때 이런 사건 몇 번 봤어. 전형적인 겁주기 수법이지만 특정 목적이 결부되면 물리적인 폭력이 수반되는 경우가 대다수야. 게다가 저 인형. 처음엔 카드만 왔고 두 번째엔 죽은 새가 왔어, 그리고 이번엔 목 잘린 인형이야.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어. ”

 

“ 난 새가 더 끔찍했던 것 같은데... 진짜 시체였잖아... 잔인했고. ”

 

 

베르닌이 날개가 짓이겨진 피투성이 비둘기를 떠올리며 내뱉었다. 드미트리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다닐. 그건 그냥 겉보기만 그런 거야. 상징적인 걸 생각해야지. 비둘기는 그냥 새야. 그런데 이번에는 인형이잖아. 사람 모습을 하고 있어. 게다가 머리가 아예 없잖아. 이제 정말 위험해졌어. 미하일을 더 이상 여기 놔두면 안 될 것 같아. 공연도 마찬가지야. 최악의 경우 정말 공연을 미뤄야 할 수도 있어. ”

 

안 돼, 공연은 미룰 수 없어. 얘가 그 공연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데. ”

 

“ 나도 알아. 나도 그 공연 보고 싶어. 난 미하일의 팬이잖아. 하지만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돼. ”

 

“ 하지만... ”

 

 

베르닌은 왕재수 쪽을 쳐다보았다. 공연 취소라니 미쳤느냐고 길길이 날뛸 게 뻔하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장의 카드를 번갈아가며 읽어보고 있었다. 한 손으로 인형을 들었다 놨다를 두어 번 반복했다.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베르닌은 걱정이 되어서 그에게 다가갔다.

 

 

“ 너 괜찮아? ”

 

“ 다닐. 이거 말인데... ”

 

 

왕재수가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 몇 초 사이에도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면서 동공이 비정상적으로 크게 확장되고 있었다. 더럭 겁이 난 베르닌이 왕재수의 어깨를 끌어당기려고 했을 때 갑자기 드미트리가 뒷걸음질쳤다. 비틀거리다 마카로프 권총을 떨어뜨릴 뻔 했다.

 

 

딤카, 왜 그래!

 

“ 어... ”

 

 

드미트리의 눈동자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술 취한 사람처럼 고개를 마구 젓더니 권총을 꽉 쥔 채 쿵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충격에 사로잡힌 베르닌은 드미트리에게 달려가 그를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엄청난 현기증과 멀미가 몰려왔다. 뱃속이 뒤집히는 것처럼 울렁거리더니 걷잡을 수 없이 무거운 졸음이 쏟아지면서 손발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면서 베르닌은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다. 왕재수가 두 팔로 그를 꽉 껴안고 소파로 밀어붙이는 것을 느꼈지만 어쩌면 그건 왕재수가 그의 품으로 넘어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정신이 점점 흐려지는 가운데 베르닌은 ‘다닐! 다닐!’ 하는 낮고 처절한 비명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소리는 곧 뭉개지면서 사라졌고 베르닌도 의식을 잃었다.

 

 

 

 

 

*   *   *

 

 

 

 

 

베르닌은 씁쓸하면서도 시큼한 맛을 느끼며 깨어났다. 머리가 쿵쿵 울렸고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점차 정신이 들었을 때 베르닌은 머리가 울리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그의 뺨을 철썩철썩 때리고 있으며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던 이유는 그 누군가가 실지로 그의 귓가에 대고 낯익은 목소리로 고함을 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냐! 일어나! 정신 차려! 다냐!

 

 

베르닌은 간신히 눈을 떴다. 드미트리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고개를 흔들었다. 눈을 깜박거려 보았다. 그때 드미트리가 그의 입에 물을 흘려 넣었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정신이 들었다.

 

 

“ 정신 드니? ”

 

“ 어... 으응... “

 

 

갑자기 베르닌은 불에 덴 듯 놀랐다.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펄쩍 뛰어 일어나려고 했지만 머리가 너무 무겁고 팔다리에 힘이 없어서 옆으로 쓰러졌다. 드미트리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드미트리의 손에도 별다른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뒤엉켜서 함께 카펫 위로 넘어졌다. 베르닌은 엎드린 채 정신없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미하일! 미하일! 너 괜찮아? 대답 좀 해봐! 미셴카!

 

 

아무런 답이 없었다. 드미트리가 목쉰 음성으로 속삭였다.

 

 

“ 없어, 다냐... 미하일은 사라졌어. 그놈이 왔다 갔어. 아, 빌어먹을... 보기 좋게 당했어... ”

 

 

너무나도 분한 나머지 드미트리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주먹으로 카펫을 내리쳤다.

 

 

“ 다 나 때문이야... 얼간이 천치... 예상했어야 했는데... 아... ”

 

“ 대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우리가... ”

 

“ 약을 탔어! 그 자식은 미하일 집에만 갔었던 게 아니야. 여기도 왔었던 거야. 어제 이미 왔다 간 게 분명해. ”

 

“ 하지만... 어디에? ”

 

그 주스... 다닐, 오렌지 주스! 그거 마시고 나서 어지러웠어. 너하고 내가 같이 마셨잖아. 그 주스 팩, 주둥이가 개봉되어 있었어. 진작 알아챘어야 하는데. 난 네가 마시고 남겨둔 거라고 생각했어. ”

 

“ 아니야, 나 오렌지 주스 산 적 없어. 난 네가 미샤 냉장고에서 가져온 거라고 생각했어. 미샤가 주스를 좋아하거든, 술을 안 마시니까. 그럼, 그럼 범인이 그 주스 팩을 넣어두고 갔단 말이야? 약을 타서? 그래서 우리가... ”

 

“ 그런 것 같아. ”

 

“ 하지만, 미샤는 안 마셨어. 기억 안 나? 걘 네가 만들어준 아침만 먹었어. 차랑 우유만 마셨고. 근데 아까, 아까 걔도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손이 엄청 차가워졌어. 그러니까 주스가 아닐지도 몰라. ”

 

 

드미트리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냉장고로 가더니 우유 팩을 꺼냈다.

 

 

“ 우유... 이거였어. 이것도 열려 있었어. ”

 

 

베르닌은 빨간 색의 우유 팩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머리가 핑 돌았다.

 

 

“ 그거 아니야... 딤카, 나 그거 산 적 없어. 그건 3.5% 우유잖아. 미샤는 저지방 우유만 먹어. 나 그래서 0.5% 아니면 1.8% 우유만 산다고. 오, 하느님... 내가 왜 못 봤을까... 주스도 우유도 다 그놈이 넣어둔 거란 말이야? 수면제를 타서? 우리 집에 왔다 갔다고? 그놈이... 미샤를... ”

 

 

베르닌은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무릎 아래가 물로 변하는 것 같았지만 억지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난 드미트리가 그의 팔을 부축해 주었다.

 

 

“ 안되겠다. 우리 잠깐 앉자. 정신을 차려야 돼. 잠깐만... ”

 

 

드미트리가 비틀거리면서 거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찬 공기가 들어오자 두통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일단 소파에 주저앉았다. 드미트리도 앉았다. 심호흡을 하고 또 했다. 그러다가 드미트리가 화장실로 가서 토했다. 베르닌도 잠시 후 속이 뒤틀려 와서 뒤따라가 토했다.

 

 

실컷 토한 후 세수를 하고 나자 그래도 뱃속이 가라앉았다. 드미트리는 아무래도 꾸준히 자기 관리를 해 와서 그런지 베르닌보다 먼저 정신을 수습한 것 같았다. 아직 다리가 후들거리는 베르닌을 부축해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베르닌이 일어나려고 하자 드미트리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잠깐만 누워 있어. 너 아직 안색이 안 좋아. 아무래도 네가 나보다 약을 더 많이 먹은 것 같아. 수면제가 주스 아래 가라앉아 있었을지도 몰라. 조금만 누워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난 이제 훨씬 나아졌거든. ”

 

“ 딤카, 미하일... 아... 그 자식 어떡하지? 어떻게 하지... 그 협박 편지... 비둘기, 인형... 걔한테 무슨 일이 생겼으면... ”

 

 

베르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너무나 무서웠다. 하얘진 왕재수의 얼굴이 아른거렸고 ‘다닐, 다닐!’ 하고 귓가에 메아리치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끝없이 반복되는 것 같았다.

 

 

‘ 내 탓이야... 싫다고 해도 로만에게 보냈어야 했어. 공연 같은 거 그만두게 했어야 해... 우리 집에도 그놈이 왔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걜 부득부득 여기다 잡아놓고... 내 옆에 있었는데... 그렇게 내 이름 부르고 비명 질렀는데... 그놈이 끌고 가게 놔뒀어... 다 나 때문이야... ’

 

 

현실적인 드미트리는 그를 달래는 대신 거실로 나가더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5분쯤 누워 있었다. 드미트리의 말대로 점점 현기증이 가시면서 기력이 돌아왔다. 문득 모스크바에서 일류샤가 썼던 약이 생각났다. 그 정도로 후유증이 강력한 약은 아닌 것 같았다. 문제는 왕재수였다.

 

 

‘ 그 자식, 술도 못 마시고 약도 아무 거나 못 먹는데... 그때도 약한 진정제 놨는데 하루종일 뻗었다고 일류샤가 그랬어.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손이 차가웠던 거야. ’

 

 

코가 시큰거리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마구 흔들면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혹시라도 왕재수가 집안 어딘가에 자기들처럼 쓰러져 있는데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거실로 나갔다. 그때 드미트리가 부엌에서 그를 불렀다.

 

 

“ 다닐, 이제 좀 괜찮아졌어? ”

 

“ 응. ”

 

“ 이리 좀 와봐. ”

 

 

 

베르닌은 부엌으로 갔다. 드미트리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바위처럼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찌푸린 미간 너머로 분노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의 손에는 구겨진 종잇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 그건... ”

 

“ 그래, 다닐. 네 번째 카드야. ”

 

“ 하지만, 그건... ”

 

 

베르닌은 다시 한 번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건 앞서 왔던 하얀 카드도, 붉은 색지도 아니었다. 옆이 거칠게 찢겨진 푸른색 모눈종이였다. 너무나 눈에 익었다. 왕재수의 수첩에서 뜯어낸 것이 분명했다. 과연 식탁 구석에는 베르닌이 아침에 챙겨왔던 왕재수의 수첩이 놓여 있었다. 베르닌은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서 종이에 마구 휘갈겨 쓴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등줄기를 쿡쿡 쑤시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잠깐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드미트리에게 읽어달라고 했다. 드미트리가 낮고 빠르게 읽었다.

 

 

호위 기사들에게 고함

입 다물고 있으면 왕자님은 무사할 거야.

모스크바에는 아프다고 통보해. 물론 공연은 취소야.

수요일이 지나면 곱게 돌려보내주지. 

추신. ‘곱게’는 물론 조건부야.

 

 

베르닌이 미처 심호흡을 하기도 전에 드미트리가 카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반대편 손바닥을 펼쳤다. 하얀색과 금색의 조그만 물체가 놓여 있었다.

 

 

“ 그건... ”

 

“ 그래, 다닐. 머리야. 그 인형, 잘려나갔던 머리. 식탁 위에 있었어. 이 편지와 함께. 그게 전부야. ”

 

 

드미트리가 아침에 왔던 도자기 인형을 올려놓았다. 잘린 머리는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베르닌은 뱃속이 다시 뒤틀리는 것 같았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더러운 자식! 죽여 버릴 거야! 우리 나가자! 나가서 찾아보자! 멀리 못 갔을지도 몰라!

 

 

드미트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흥분 단계는 지난 것 같았다. 그는 잠자코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 다닐, 벌써 정오가 지났어. 우린 세 시간도 넘게 뻗어 있었어. 그자는 치밀하게 모든 걸 준비했어. 우리의 관심을 미하일의 집으로 돌려놓고 이미 어제 여기 와서 음료수에 약을 타놓고 인형까지 준비했어. 분명히 이 근처에 숨어 있었을 거야. 우리가 약을 먹고 쓰러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입해서 미하일을 끌고 간 거야. 너 나보다 늦게 쓰러지지 않았어? ”

 

“ 응, 네가 쓰러질 때만 해도 왜 그러는지 몰랐어. 그러다가 금방... ”

 

“ 혹시 기척 못 느꼈어? 네가 나보다 늦게 정신을 잃었으니까... 혹시 그때 무슨 단서라도... ”

 

“ 아니... 미샤가 소리를 질렀어. 그건 기억나. 내 이름을 막 불렀는데 겁에 질린 것 같았어. 그리고 걔가 날 붙잡았어. 아니, 붙잡은 것 같기도 하고 나한테 쓰러진 것 같기도 해. ”

 

“ 음... 그렇구나. 그럼 그때 이미 그놈이 들어왔던 걸지도 몰라. 미하일이 끌려가면서 널 불렀던 걸지도... 그때가 여덟시 전이었잖아... 걔가 사라진지 네 시간이 지났어. 납치범에겐 여기서 벗어나기 충분한 시간이지. 그러니까 지금 무턱대고 나간다 해도 미하일을 찾아내기는 어려워. 일단 단서를 끌어 모아서 계획을 짜야 해. ”

 

하지만... 미샤가 위험하단 말이야!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걘 사이코 납치범의 손아귀에 있어... 무슨 나쁜 짓을 당할지 몰라... 딤카, 너는 예전 미샤만 생각해서 그래. 걔 감옥에서 진짜 고생했어. 고문 때문에 몸도 망가졌단 말이야. 여기 와서도 계속 아프고... 폐렴 걸리고 독약 먹고... 의사 선생님이 얼마나 걱정하는데. 아까 그 수면제도... 우린 몇 시간 자고 깨어났지만 걔한테는 치명적일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그냥 이러고 있어! 나 극장에 전화할 거야. 공연 취소라고 얘기할 거야. 모스크바에도 전화해서 공연 취소됐으니까 수요일에 오지 말라고 하면 되잖아. 국장한테 그렇게 보고하면, 그러면 풀어줄지도 모르잖아! 걔 많이 아프단 말이야... 지난주에도 모스크바 끌려가서 그렇게 고생했는데... 더 괴롭힐 데도 없는 애란 말이야! ”

 

 

 

베르닌은 괴롭게 울부짖었다. 스페호프의 하수인에게 끌려가서 협박을 당하고 있는 왕재수를 상상하니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았다. 너무나 걱정이 되어서 미칠 것 같았다. 드미트리는 훌쩍훌쩍 우는 베르닌을 탓하거나 바보 취급하는 대신 그의 어깨를 한 팔로 포옹하며 등을 툭툭 두들겨 주었다.

 

 

“ 진정해, 다냐. 미하일은 괜찮을 거야. 스페호프가 둔하긴 하지만 진짜 바보는 아니잖아. 걔가 누구 후원을 받는지 뻔히 아는데 정말로 해치지는 않을 거야. ”

 

“ 아니야... 독사과 먹였어... 그때, 그때 정말 죽을 뻔했어. 시, 시계탑에 불도 지르고... 그때도, 그때도 죽이려던 건 아니라고 했지만 정말 죽을 뻔했어. 그러니까 지금도... 잘못하면... 그때는 내가 옆에 있었단 말이야. 근데 지금은, 지금은 걔 혼자... 아무도 없이 혼자... ”

 

 

베르닌은 북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흑흑 흐느껴 울었다. 드미트리는 그가 울도록 잠시 내버려두었다. 잠시 후 베르닌이 좀 진정되자 손수건을 건네주고는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 다닐, 목요일 아침에 스페호프가 나 불러서 지령 줬다고 했잖아. 그때 국장이 나에게도 당부했어. 지난주에 뭔가 일이 꼬인 게 있어서 섣불리 일을 벌였다간 역효과라고. 그러니까 공연을 방해하되 미하일한테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면 안 된다고 했어. 행여 잘못해서 걔 몸에 문제가 생기면 공연 취소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가브릴로프 KGB에 악영향이 올 수 있다고. 그러니까 지난번처럼 독약을 쓰거나 다치게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럴 거였다면 어째서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썼겠어. 연쇄 협박편지에, 비둘기 시체에 도자기 인형에... 자동차를 손보거나 밤길에 급습해서 폭행하거나, 아니면 아까 그 우유에 치사량의 수면제를 넣었을 수도 있잖아. 근데 그렇게 안 했어. 심지어 이 편지를 봐. 이건 앞선 카드들처럼 미리 준비한 게 아니야. 타이프를 치지도 않았고 종이를 준비한 것도 아니야. 미하일의 수첩에서 뜯어낸 거잖아. 손으로 썼어. 글씨가 엉망인 걸 보니까 왼손으로 써서 필체를 감춘 것 같아. 우리에게 미하일의 안전을 확신시키고 싶었던 거야. 단순히 공연 취소를 종용하려는 거였다면 굳이 편지를 남길 필요가 뭐가 있겠어. 미하일이 없어지면 당연히 공연도 취소되는 건데.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방법을 찾아보자.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미트리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신체적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왕재수가 낯선 곳에 갇혀 공포에 질려 있는 것을 상상하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 갇히는 거 제일 싫어하는 앤데... 아직도 감옥 갔던 꿈 꾸면 울면서 베개 들고 찾아오는데. ’

 

 

그때 드미트리가 덧붙였다.

 

 

“ 그리고 또 있어, 다닐. ”

 

“ 뭐가? ”

 

“ 우리 총 말이야. 그대로 놔뒀어. ”

 

“ 아... ”

 

 

베르닌은 마카로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드미트리가 주머니에서 권총을 두 자루 꺼냈다. 베르닌은 자신의 권총을 돌려받았다. 총알도 그대로 들어 있었다.

 

 

“ 일반적인 납치범이라면 권총을 가져갔을 거야. 최소한 탄창이라도 제거했겠지. 근데 그대로 놔두고 갔어. ”

 

“ 못 본 게 아닐까? ”

 

“ 아냐, 난 쓰러질 때 총을 손에 쥐고 있었어. 너도 주머니에 넣어놨었잖아. 근데 둘 다 소파 위에 있었어. 그자가 빼내서 올려놨겠지. 진짜 위해를 가하려고 했다면 우릴 쐈을 수도 있잖아. 근데 안 그랬어. 우리 몸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어. ”

 

“ 그럼... 그건 역시 범인이 우리 쪽 사람이란 거네. 우리 국장은 공공기물을 굉장히 중시해. 무기는 말할 것도 없지. 현장요원들에게만 지급하고 그것도 기밀 장부로 관리해. 총알 하나 쓰는 것도 다 적게 하고 권총 관리 제대로 해야 한다고 매뉴얼도 매년 수정보완해서 요원들에게 나눠줘. 권총 분실은 굉장한 징계 사유야. 최소한 정직, 보통은 해고야. 그러니까 국장이라면 권총을 그대로 놔두게 했을 것 같아. ”

 

“ 아, 스페호프가 그런 타입이구나. 설득력 있다. 난 다른 쪽을 생각했거든. 국장은 널 믿지만 너한테 작전을 맡기면 모스크바에서 금세 의심할 거라고 했거든. 그래서 나한테 지령을 준 거고. 그 말은, 어쨌든 우리는 KGB의 울타리 안에 있는 ‘우리’ 사람들인 거야. 그래서 우릴 다치게 하지 않은 거지. 네가 말한 권총 관리도 분명 이유였을 거고. ”

 

“ 응. 국장은 날 신뢰해. 현장요원으로 키우고 싶다고 했어. 근데 우리가 멀쩡한 건 좋지만 미샤를 찾아내는 데는 도움이 안 되잖아. ”

 

“ 아니야, 다닐. 너 내 말 제대로 안 들었구나. 국장이 나한테 지령을 주면서 그랬다고 했잖아. 작전이 진행되면 나도 알게 될 테니까 옆에서 자연스럽게 도우라고 했다고. 그 말은, 협박범이 나에게 접촉을 해올 수도 있다는 뜻이야. 혹여 그자가 조심하느라 안 그런다 해도, 나에게는 스페호프에게 작전 진행에 대해 물어볼 구실이 있는 거야. ”

 

“ 아, 그렇구나!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 그러면, 나도 마찬가지겠네. 어차피 난 걔 감시요원이니까 이 일에 대해 보고를 해야 하잖아. 이런 건 기밀사항에 속하는 거니까 유선 보고는 금지고... 우리 국장 보통 주말에도 출근하거든. 차라리 내가 사무실에 지금 가볼까? 그러면 국장이 정보를 공유해줄 수도 있잖아. ”

 

“ 그렇지. 운이 좋으면 그럴 가능성도 있지. 근데 딱 하나가 걸려. ”

 

“ 뭐가? ”

 

“ 지령에 대해 너한테 말하지 말라고 한 거. 네가 외부의 의심을 받을까봐 그런다고 하긴 했는데... 만의 하나 국장이 널 의심해서 그런 거라면 너에게 일부러 거짓 정보를 줄 수도 있어. 너는 미하일과 굉장히 사이가 좋잖아. 여기 처음 온 나도 첫눈에 알아챘는데... 국장이 언제까지 그걸 위장으로 믿어줄지 모르겠어. ”

 

 

베르닌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스페호프는 단 한 번도 그를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모스크바에 전달할 밀서까지 맡겼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자 의심스러운 구석이 몇 가지 있었다. 독사과 사건 때도 스페호프는 레베진스키에게 약을 맡겼고 베르닌에게는 사과에 독을 바를 거란 정보는 주지 않았다. 시계탑 방화의 경우에는 인부를 매수했으면서도 그에게는 말 한 마디 벙긋하지 않았다. 베르닌의 서무 업무를 면제해주면서 왕재수 곁에서 감시를 하라고 극장에 보냈으니 그가 시계탑에 따라 올라갈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리고 지난주에 모스크바에 다녀온 후 스페호프는 그에게 그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스비제르스키와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드미트리를 그에게 붙여 주면서 왕재수의 공연을 함께 방해하라는 지시를 내렸어야 했다. 그런데 스페호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그리고 하나 더 있어. ”

 

“ 뭔데? ”

 

“ 수요일 공연. 미하일은 그거 올리고 싶어 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근데 지금 스페호프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면 그는 즉시 공연 개최가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크레믈린에 올릴 거야. 물론 미하일이 납치됐다고 하지는 않겠지, 자기 무덤을 파는 꼴이니까. 협박 편지에 쓴 것처럼, 아파서 입원했다고 할 가능성이 제일 크지. 윗분들도 미하일이 고문 후유증으로 계속 고생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을 테니 별로 의심하지 않을 거고. 입원 차트는 조작하면 되는 거잖아. 일단 문서로 보고되면 모든 게 끝나. 미하일이 수요일 전에 무사히 돌아온다 해도 공연은 완전히 물 건너가는 거라고. 걔 정말 그 공연 올리고 싶어 했잖아. 연습실에서 보니까 무용수들도 진짜 열성적이었는데... 어떻게든 그 공연 올리게 해주고 싶어.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재수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그도 잘 알았다.

 

 

“ 하지만... 미샤는 납치됐고 행방도 몰라. 범인은 우리에게 입 다물고 기다리라고 협박했고. 공연 취소하라고. 우리가 말을 안 들으면 미샤를 곱게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했잖아. ”

 

“ 듣는 척 하는 거야. 일단 극장은 오늘 쉬잖아. 내일은 일요일이고. 내일 공연 있니? ”

 

“ 아니, 없어. 오페라도 없고 오전에 어린이 대상 오케스트라 연주회만 하나 있어. 수요일 신작 준비 때문에 화요일까지는 발레 공연이 없어. ”

 

“ 그래, 잘됐다. 그러면 일단 극장 쪽에는 미하일이 아파서 일요일에는 못 나간다고 통보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겉으로는 협박범의 요구에 응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모스크바에 연락하는 건 월요일로 미루는 거야. 어쨌든 지금은 주말이니까 공공기관은 모두 쉬잖아. 일단 그렇게 내일 밤까지 시간을 버는 거야. 그동안 우리가 미하일을 찾아낸다면... ”

 

“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국장에게서 정보를 캐낼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

 

 

드미트리는 세 장의 카드와 마지막 종이쪽지를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생각에 잠긴 눈으로 협박 편지들을 몇 번이나 읽었다.

 

 

“ 있잖아, 다닐. 너희 국장 말이야, 발레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했지? ”

 

응. 나보다 더 몰라. 클래식 음악도 모르고, 오페라도 마찬가지야. 극장엔 관심이 전혀 없어. 국장한테는 무대 올라가는 것들은 그냥 다 딴따라야. ”

 

“ 너희 현장요원들 중에는 그쪽 취미 가진 사람들 있어? ”

 

“ 글쎄, 나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 우리는 현장요원들하고는 가깝게 지내지 않거든. 근데 적어도 내가 미샤 감시요원으로 배정된 후에 극장에서 마주친 요원들은 없었어. 우리 지국에서 발레 관심 있어 하는 직원은 내가 알기로는 리자 밖에 없었어. 리자는 어머니 모시고 가끔 공연도 보러 오거든. 처음에 나한테 미샤 사인도 받아 달라 하고 그랬어. ”

 

“ 아, 리자... ”

 

 

드미트리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드미트리가 물었다.

 

 

“ 너 말이야, 리자랑 친하다고 했지? ”

 

“ 어, 으응. 그렇다고 막 가까이 지내는 건 아니고. 여직원들 중에서는 그래도 인사도 잘 하고 이따금 밥도 같이 먹고. ”

 

“ 리자는 언제 들어왔어? 걘 공채 아니지? 어리니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곧장 들어왔을 것 같은데. ”

 

“ 응, 리자는 공채 요원이 아니야. 등록부서 여직원들은 기능직이라서 따로 채용하거든. 그 부서에서 공채에 사무직은 알렉산드라밖에 없어. 리자는 나보다 몇 달 먼저 들어왔으니까... 걔도 3년쯤 됐겠다. ”

 

“ 그래... ”

 

 

베르닌은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정색을 하며 드미트리를 쳐다보았다.

 

 

“ 야, 너 설마 지금 리자를 의심하는 거야? 말도 안 되잖아! ”

 

“ 난 그냥 모든 가능성을 다 짚어보는 것뿐이야, 다닐. 네 장의 협박편지가 왔는데 그 중 적어도 세 장에는 극장이나 발레와 관계된 얘기가 있어. 첫 번째 편지에는 6가지 음악에 대한 얘기가 있지. 두 번째 편지에서는 파랑새와 검은 기사 얘기가 있어. ”

 

“ 어, 그래. 나 그게 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갔어. 왜 뜬금없이 파랑새가 나오고 기사가 나온 걸까? 죽은 건 비둘기였잖아. 천사는 아마 그 인형 때문인 것 같은데... ”

 

“ 파랑새는 잠자는 미녀에 나오는 배역이야. 검은 기사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기사들의 춤 얘기인 것 같아. 발레 무대를 빗대서 빈정거리고 있는 거야. 미하일을 겨냥한 거라고. 최대한 심기를 건드리려고 했던 거겠지. 무대에 올라가던 애니까 아마 제대로 기분 상했을 거야. 그리고 마지막 편지에도 호위 기사와 왕자 얘기가 있잖아. 전부 고전 발레에 나오는 배역들이라고. 다닐, 이걸 보낸 사람은 극장과 발레에 대해 아는 사람이야. 스페호프와 현장요원들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고. 그러니까 리자가 됐든 발따예프가 됐든 경비 아저씨가 됐든 발레에 관심 있는 너희 직원이라면 일단 의심해 보려고 했던 거야. ”

 

“ 그치만... 말도 안 돼! 리자는 아직 어려! 순진한 여자애란 말이야. 그리고 미샤에 대해서도 얼마나 호감을 갖고 있는데. 이런 끔찍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게다가 비둘기까지 죽였잖아! 리자가 강아지를 얼마나 예뻐하는데. ”

 

“ 진정해, 다닐. 리자가 범인이라고 하지는 않았어. 그냥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는 것뿐이라니까. 리자도 어제 나한테 왔었단 말이야. 나 사실 어제 온 여자들 중 하나쯤은 국장이 보냈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그 지령 때문에 접촉하게 하려고. 카체리나, 갈리나, 그리고 리자였는데 얘기 나눠보니까 극장에 대해 관심 있는 건 리자 뿐이었어. ”

 

아니야, 리자는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냐!

 

 

베르닌은 왕재수에 대한 걱정도 잠시 잊고 열심히 리자를 변호했다. 드미트리는 미심쩍은 느낌을 버리지 못한 것 같았지만 어쨌든 한 발 물러섰다.

 

 

“ 알았어. 하긴 리자가 연루되어 있다면 어젯밤에 나한테 얘기를 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꼭 너희 쪽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

 

“ 맞아, 극장 쪽 사람일 수도 있어. 독사과 때도 레베진스키가, 그러니까 거기 수석안무가인데 국장이 그 사람을 매수했거든. 돈키호테 때도 그렇고. 레베진스키라면 신작의 음악이 뭔지도 다 알고 있을 거야. 연습실에 뻔질나게 드나들었어. 게다가 미샤를 정말 싫어해. 원래 감독 자리에 내정되어 있었는데 미샤가 와서 물먹었거든. ”

 

“ 음... 그렇구나. 스페호프가 이미 극장 쪽에 자기 사람을 심어놨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다닐, 이렇게 하자. 일단 너는 극장 쪽을 맡아. 난 온지 얼마 안돼서 아무래도 이쪽 극장은 잘 모르잖아. 난 지령을 받은 것을 빌미로 너희 국장에게 가서 분위기를 떠볼게. 그 전에 일단 밖으로 나가보자. 미하일도 약을 먹었다면 우리처럼 뻗었겠지. 의식을 잃은 성인 남자를 업어서 옮겼다면 여기 주변 사람들 눈에 띄었을 수도 있어. 오늘 토요일이라서 아침에 사람들 산책도 많이 하던데. 혹시라도 흔적을 남겼을 수도 있으니까.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요일 밤까지 왕재수를 찾아내고 말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마카로프 권총의 탄창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   *   *

 

 

 

 

 

밖으로 나가기 전에 그들은 집안에서 열심히 단서를 수집했다. 베르닌의 집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납치범이 문을 따고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왕재수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범인에게는 열쇠가 있든지 왕재수처럼 핀으로도 문을 잘 따는 재주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현관에 가까운 쪽 카펫 바닥에는 길게 긁힌 자국이 나 있었다. 드미트리는 범인의 신발이 어딘가에 걸려서 긁혔을 거라고 가정했고 카펫에 난 자국과 현관에 남은 금박 흔적을 볼 때 범인은 금박 버클 달린 구두를 신었을 거라고 추리했다. 베르닌과 드미트리 둘 다 그런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던 데다 왕재수는 간밤에 너무 놀란 나머지 슬리퍼를 신은 채 업혀 왔기 때문이다.

 

 

소파 근처에서 베르닌은 10센티미터 정도 길이의 붉은색 천 조각을 발견했고 다시금 가슴을 철사로 죄는 듯 괴로워졌다. 아침에 그가 챙겨온 빨간 스카프에서 찢겨 나온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스카프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왕재수는 옷 색깔과 안 어울린다고 그 스카프를 매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범인이 그것으로 왕재수를 묶었거나 눈이나 입을 막았던 것이다. 드미트리는 붉은색 천 조각을 내려다보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 찢어진 걸 보니 미하일이 저항했나봐. 다치지 않았어야 할 텐데. 그래도 크게 저항하지는 못했을 거야. 이거 말고는 몸싸움의 흔적이 전혀 없거든. 버둥거리다가 약기운이 돌아서 우리처럼 쓰러졌나봐. ”

 

“ 죽여 버릴 거야... ”

 

 

베르닌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버둥거리며 반항하고 자신의 이름을 절망적으로 부르는 왕재수의 모습을 상상하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스비제르스키의 부하들에게 끌려가던 왕재수를 일류샤에게 짓눌린 채 무력하게 지켜보던 때가 떠올랐다. 동시에 너무 걱정이 됐다.

 

 

‘ 바보...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성깔은 또 장난 아닌 녀석이니 막 반항하고 대들면 해코지 당할지도 모르는데... 제깟 게 무슨 힘으로 무장한 납치범을 이겨낸다고... ’

 

 

카펫의 자국과 스카프 조각, 열린 문, 드미트리가 소중하게 챙긴 세 장의 카드와 마지막 쪽지, 그리고 죽은 비둘기와 깨진 도자기 인형 외에는 더 이상의 단서가 없었다. 드미트리는 마지막 쪽지가 타이프라이터 대신 수기로 씌어 있었다는 것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 왼손으로 흘려쓰긴 했지만 그래도 의심 가는 사람들의 필체를 대조해보면 혹시라도 얻는 게 있을지도 몰라. ”

 

 

베르닌은 그리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필체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궁금해서 자기도 왼손으로 글씨를 써봤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자신의 원래 글씨체와는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쪽지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이상한 기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비뚤비뚤 흘려쓰긴 했지만 어디서 본 것 같은 글씨였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본 것 같기도 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 얼마 안 되는 단서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추적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공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 둘이서 주변을 뒤져 왕재수를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같았다. 일단 그들은 경비실에 갔다. 수위에게 낯선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 혹시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남자를 옮긴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수위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가브릴로프에서도 고급 아파트에 속했고 현관과 주차장에 각각 수위가 한 명씩 있었지만 둘 다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울화가 터진 베르닌이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드미트리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 다냐, 저 사람 주머니를 봐... 기대하지 말자. ”

 

 

보드카 병이 삐죽 솟아나와 있었다. 주차장 쪽 수위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닌은 너무나 화가 나서 모두 직무 유기로 인민재판에 회부하고 말겠다고 씩씩거렸지만 물론 수위들은 콧방귀를 뀌었다.

 

 

“ 이상한 사람 하나도 안 내려왔어요! 내가 아침부터 술 마시면서 다 보고 있었는데! 여기 주민들은 내가 다 아는데! ”

 

“ 지금 얘기하는 게 7층의 그 반동분자라면 내가 왜 못 알아봤겠어요! 내가 이렇게 시력이 나빠졌어도 그 녀석이라면 100미터 밖에서도 알아보는데! 근처에 오기만 해도 후광이 나는 꽃미남인데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요! ”

 

 

화가 머리끝까지 난 베르닌 대신 드미트리가 두 번째 수위에게 주차장에 낯선 차가 들어오지 않았느냐고 꼬치꼬치 물었다.

 

 

“ 그거야 모르죠. ”

 

“ 장부에 차 번호 전부 적게 되어 있지 않나요? 이 아파트는 고급 호텔 겸용이잖아요. ”

 

“ 바로 그래서죠! 여기는 위층은 주거 공간이지만 4층까지는 호텔로 쓰고 있잖아요. 윗분들도 자주 이용하는 곳이라서 관용차도 종종 들어오는데 그분들 보는 앞에서 차 번호를 적으란 말입니까? 나도 먹고 살아야지! ”

 

“ 하지만... 그래도 평소에 못 보던 차량이 들어왔다면 기억이... ”

 

“ 글쎄요. 다 비슷비슷한 차들이라. 저 친구 차 하나만 기억나네. 여기는 웬만하면 다 볼가 급의 고급차량인데 저 사람 혼자 낡고 후진 지굴리를 몰고 다니니. ”

 

으윽, 누가 내 차 봤냐고 물어봤어요? ”

 

 

곁에 있던 베르닌이 결국 폭발했다. 드미트리는 간신히 베르닌을 달래서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둘은 건물을 돌면서 주민들과 호텔 투숙객들에게 KGB 신분증을 제시하고는 혹시 오전에 수상한 사람을 보지 못했는지, 인사불성이 된 취객을 옮기는 사람은 없었는지를 물었다.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주변 가게와 공원 쪽에도 가보았다. 목격자는 전혀 없었다.

 

 

“ 엘리베이터로 주차장까지 내려가서 차에 태우고 빠져나갔나봐. 저 망할 인간들은 술 퍼마시느라 하나도 못 봤을 거고.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드미트리는 일단 KGB 사무실로 가서 정보를 수집하고 베르닌은 극장에 가보기로 했다. 혹시라도 스페호프에게 의심받을까봐 베르닌은 드미트리를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준 후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차를 몰았다. 3시간 후 공원의 천사상 앞에서 만나서 정보를 공유하기로 했다.

 

 

 

 

 

*    *    *

 

 

 

 

 

극장 정문은 닫혀 있었다. 후문으로 가자 청소부들과 인부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소독약과 페인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신관 쪽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닌은 수위에게 오늘 출근한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 오늘은 소독 때문에 사무국 쪽에서는 시설관리팀장과 담당자만 나왔고요, 나머지는 전부 임시휴일이죠. 사무직도 그렇고 단원들도 안 나왔어요. ”

 

“ 미하일도 못 봤죠? ”

 

“ 아, 감독님. 오늘은 안 나오셨어요. 어젯밤에 공연 끝나고 나가시면서 보브카에게 모레 보자고 했다던데요. 감독실 커튼이랑 카펫도 싹 벗겨냈고 아침 내내 페인트칠도 다시 해서 오늘은 오셔봤자 허탕이에요. 그나마도 연습실은 지금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감독님이 거긴 소독만 하고 다른 건 손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거든요. 냄새는 좀 나겠지만. ”

 

“ 오케스트라 쪽도 안 나왔죠? ”

 

“ 아무도 안 나왔어요. 아참, 그러고 보니... 아까 니콜라이 안토노비치가 왔다 갔군요. ”

 

“ 니콜라이 안토노비치라면... 어, 레베진스키 말인가요? ”

 

“ 네. 아까 열 시 쯤에 들렀어요. 뭘 놓고 간 게 있다고 안으로 들어가던데. 30분쯤 후에 도로 나왔죠. ”

 

“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

 

“ 글쎄요. 사무실에 간 게 아닐까요? 아니면 연습실에 갔겠죠 뭐. 저는 현관만 지키니까 잘 모르겠네요. 들어가서 물어보시죠. ”

 

 

베르닌은 급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가 풀풀 피어올랐다. 페인트칠 때문인지 사무집기가 복도에 다 나와 있었고 인부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아는 얼굴을 찾다가 감독실 앞에서 그리고리를 발견했다. 인사를 한 후 레베진스키를 혹시 봤느냐고 묻자 그리고리가 짜증을 냈다.

 

 

“ 어휴, 레베진스키인지 뭔지 그 인간 정말 너무 싫어. 얼마나 갑질을 하는지. 그 인간은 툭하면 목에 힘주고 돌아다니면서 우리한테 일 제대로 하라는 둥, 뭐가 비뚤어졌다는 둥 먼지 좀 피우지 말라는 둥 잘난 척이 하늘을 찌른다니까. 제가 무슨 극장장이야 감독이야. 꼬마 감독님은 얼마나 우리한테 잘해주는데. 아까도 자기 방도 아닌데 감독실에 들어가서 책상을 뒤지지를 않나... 기가 막혀서. ”

 

 

현기증을 억누르며 베르닌은 애써 차분하게 물었다.

 

 

“ 감독실이요? 레베진스키가 책상을 뒤졌다고요? ”

 

“ 어... 이거 얘기했다가 나 괜히 잘리는 거 아닌가... 자넨 극장 사람도 아닌데. 레베진스키 귀에 들어가면... ”

 

“ 아니에요, 그 사람한테 절대 말 안 해요. 감독실에 들어갔다면서요. 미하일이 그런 거 허락해준 적 없단 말이에요. 그건 감독의 권한을 침해하는 거니까 얘기해줘야 돼요. ”

 

“ 그게... 사실은 그 인간이 계속 그러더라고. 여기 새로 칠하는 거랑 수리 준비하느라고 우리가 며칠 전부터 여기 와 있었거든. 낮에는 무대 쪽 체크하고, 저녁에 공연 있을 때는 사무공간이랑 연습실 쪽 사전작업을 했는데 레베진스키가 저녁만 되면 여기로 오는 거야. 그것도 꼭 감독님이 공연 때문에 백스테이지에 가 있는 시간만 골라서. ”

 

“ 근데 그걸 보고도 아무도 말 안했단 말이에요? 레베진스키가 남의 시선을 신경 안 쓰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

 

“ 류드밀라도 그 시간에는 퇴근하니까 아무도 없었지. 우리뿐인데 그런 자식은 우리 같은 인부들을 사람 취급 안하니까 아마 의식도 안했을걸. 처음에는 슬며시 노크도 하고 살금살금 들어가더니 2~3일 지나니까 아주 당당하게 들어가더라고. ”

 

“ 뭐 들고 나오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

 

“ 글쎄. 아, 그저께였나. 무슨 수첩을 들고 가더니 감독님 책장에서 레코드들을 막 뒤지면서 뭘 열심히 적더라고. 왜 기억나느냐면, 자네도 자주 들어가서 알겠지만 그 책장이 상당히 크잖아. 레코드가 맨 아래 칸하고 맨 위 칸에 꽂혀 있거든. 위에 있는 거 꺼내다가 몇 장을 와르르 떨어뜨렸어. 이마에 맞았는지 어쨌는지 욕을 하면서 뭘 적더니 도로 꽂아놓더라고. 그 썩을 자식이 의자 놓고 올라갔는데 신발도 안 벗고! 흙투성이 자국 내놔서 나중에 내가 닦아줬어. 귀염둥이 감독님이 모르고 앉았다가 옷 버릴까봐! 우리 감독님 대도시에서 와서 근사한 옷만 입고 다니는데 진흙 묻으면 안 되잖아! ”

 

“ 혹시 레베진스키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이 방에 드나들지는 않았나요? ”

 

“ 글쎄. 원래 감독님은 문을 안 잠그잖아. 자기 있을 때는 아무나 들어올 수 있게 하고. 예전에 있던 늙다리 감독은 비서한테 예약 안 하면 못 들어오게 했거든. 지금은 무용수고 연주자고 나 같은 인부고 노크만 하면 그냥 들어갈 수 있으니까. 그래도 자리 비웠을 때는 류드밀라가 웬만하면 못 들어가게 하더라고. 저녁에 감독님 없었을 때 드나든 건 레베진스키 밖에 없었던 것 같아. ”

 

“ 그렇군요. 고마워요, 그리고리. 감독실에 들어가 봐야겠어요. 그 사람이 뭘 손댔는지 알아내야겠어요. ”

 

“ 어, 그래. 벽 조심해. 페인트칠 아직 다 안 말랐을 거야. ”

 

 

베르닌은 감독실로 들어갔다. 벽에 붙어 있던 가구들은 모두 가운데로 옮겨져 있었다. 책장부터 보았다. 베르닌은 클래식 음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발레에 대해서도 잘 모르기 때문에 여태껏 책장을 유심히 본 적이 없었다. 맨 위와 아래에는 그리고리의 말대로 레코드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매일 음악을 듣는 녀석이 왜 불편하게 맨 위에 꽂아뒀을까 했는데 잘 보니 그 두 칸의 높이가 제일 높아서 레코드를 차곡차곡 꽂기가 편해서인 것 같았다. 아래 칸에 꽂힌 것은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 베르닌도 아는 고전발레 음악들과 러시아 작곡가들의 레코드였다. 위 칸에는 쇼팽을 비롯한 외국 작곡가들의 레코드들이 꽂혀 있었다.

 

 

‘ 레베진스키는 왜 미셴카의 방에 몰래 들어와서 레코드를 살폈을까? ’

 

 

그는 다른 칸들도 훑어보았다. 무용 관련 서적들을 비롯해 무슨 해부학 서적도 있었고 화집, 악보, 도스토예프스키와 푸쉬킨을 비롯한 오래된 문학선집들과 심지어 외국어 서적들도 어지럽게 꽂혀 있었다. 영어와 불어로 되어 있는 책들이었는데 대부분이 무용과 미술에 대한 책이었다. 하긴 그 외의 책들이라면 검열 때문에 감독실에 버젓하게 꽂아놓지도 못했을 게 분명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책상으로 갔다. 서랍도 잠겨 있지 않았다. 들어 있는 것은 모두 공연과 관계된 도면이나 서류뿐이었다. 왕재수는 워낙 검열에 시달려서 그런지 비교적 안전한 것으로 판명된 책과 음반 외에는 감독실에 개인적인 물건들을 가져다놓지 않는 편이었다. 책상과 티 테이블 위에는 관객들과 팬들이 가져다준 꽃다발과 사탕 바구니, 인형 따위가 널려 있었다. 보통은 무용수들이나 직원들에게 고루 나눠주는데 요 며칠 동안은 바빠서 그럴 여유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소독과 페인트칠 때문에 선물들은 매우 어지럽게 널려 있었지만 수상쩍은 건 없어 보였다. 혹시라도 협박 편지가 있을까 했지만 눈에 띄는 카드들은 모두 열렬한 연애편지에 가까웠다.

 

 

돌아서서 나가려다 베르닌은 문득 창가에 시선이 쏠렸다. 화분 두어 개에 조그만 노란색 꽃이 피어 있었다. 물론 왕재수는 식물을 키우는 데는 아무런 재능이 없었으므로 류다가 물을 주고 잘 돌보고 있었다. 하지만 베르닌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화분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도자기 장식품이었다.

 

 

흰색과 푸른색으로 채색된 도자기 종이 두 개 있었다. 그 옆에는 도자기 백조 한 쌍, 한 발로 서 있는 발레리나 인형 한 쌍, 그리고 천사 인형 한 개가 있었다. 베르닌은 순간 머리에서 피가 다 빠져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천사 인형을 집어 들었다.

 

 

‘ 똑같아... 아침에 왔던 그 인형하고... ’

 

 

흰색 몸체에 날개와 망토가 푸른색과 금색으로 채색되어 있는 자그마한 인형이었다. 다른 점이라고는 머리가 제대로 붙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인형이 두 개였던 거야. 여기 와서 천사를 하나 집어갔던 거야. 다른 건 모두 한 쌍이잖아. 천사만 하나일 리가 없어. 그러니까 범인은 극장 쪽 사람이야. 이 방에 드나들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사람. 그리고 레베진스키는 이 방에 왔었어. 레코드를 뒤졌어. 그 자식이 없을 때만 골라서 며칠 동안 계속 밤마다 왔었어. ’

 

 

그는 인형을 휴지로 둘둘 말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복도로 나와서 곧장 레베진스키의 사무실로 갔다. 안무가들은 발레 지도자들과 하나의 사무실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류다의 말에 따르면 레베진스키는 자신이 수석안무가인데 후배들과 한 사무실을 쓴다는 것은 급에 맞지 않는다고 공식적인 항의를 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보통은 레베진스키와 사이가 좋았던 극장장도 짜증이 났는지 가장 나이도 많고 연차와 경험도 오래됐으며 단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티무르 이즈마일로프도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지 않느냐며 그 항의를 묵살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극장장은 당시까지만 해도 유력한 예술감독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었던 레베진스키의 기를 차마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는지 사무실 구석에 칸막이를 쳐서 수석안무가용 공간을 별도로 만들어 주었다.

 

 

안무가 사무실은 감독실보다 더 엉망이었다. 책상과 의자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칸막이도 반쯤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벽의 페인트를 조심하면서 베르닌은 레베진스키의 책상으로 갔다. 공연 팸플릿과 서류, 액자 따위로 폭격을 맞은 듯 어지러웠다. 액자도 굉장히 많았는데 본인의 젊은 시절 무대 사진과 가브릴로프 무용협회, 콤소몰 등에서 받은 표창장, 가브릴로프 지역신문에 실렸던 옛 기사 스크랩 따위였다. 궁금해서 훑어보니 60년대에 가브릴로프 의회 의장과 아르한겔스크 지부 공산당 서기장이 참석한 연찬회에서 레베진스키와 파트너 발레리나가 아다지오 무대를 보여주고 박수를 받았다는 단신이었다.

 

 

‘ 레베진스키는 자기 경력에 대해 자부심이 굉장한가봐. 기껏 우리 동네 신문에서 나온 기사랑 상장인데... 미셴카는 맨날 자기 천재라고 으스대고 애들 쥐 잡듯 해도 자기 사진이나 이런 기사들은 하나도 안 걸어놓던데. 지난번에 류다가 잡지에 나온 기사 스크랩해서 액자에 걸려고 하니까 그런 거 다 걸어놓으면 건물이 몇 개는 있어야 한다면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렇게 대단한 놈이었는데도. 걘 그냥 극장이 좋아서 노력하는데 레베진스키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게 제일 중요한가봐. ’

 

 

그러자 베르닌은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어떻게든 왕재수를 찾아내고 싶었다. 수요일 신작을 제대로 올리게 해 주고 싶었다. 땀범벅에 녹초가 되어서도 눈을 반짝거리며 왕재수만 바라보고 있던 무용수들이 생각났다. 돈키호테 무대도 생각났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남의 서랍을 뒤지는 것이 나쁜 행위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추호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두 번째 서랍에서 그는 누런색의 서류 봉투를 발견했다. 봉투는 반절로 접혀 있었는데 꽤 두툼했다. 밀봉되어 있지는 않았다.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꺼냈을 때 베르닌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엽서 크기의 흑백 사진이 줄을 이어 쏟아졌다. 아무리 적어도 30장은 되는 것 같았다. 하나같이 날짜와 시간이 인쇄되어 있었는데 최근 일주일 사이에 찍은 것들이었다. 모두가 왕재수의 사진이었다. 극장 내의 다양한 장소에서 찍혀 있었다. 백스테이지나 의상실, 소품 창고, 극장 도서실 쪽 사진이 줄줄이 이어졌다. 주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손동작을 하고 있는 사진이 많았다. 감독실에서 검열국장과 검열요원을 상대로 화를 내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심지어 베르닌도 한 장 찍혀 있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고 지난 일주일 동안 왕재수가 이야기를 나눴거나 인사를 하고 지나간 사람들 대부분이 사진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진을 하나하나 뒤집자 파란색 잉크로 사람 이름과 소속이 씌어 있었다. 몇몇 사진에는 이름 대신 ‘?’ 라고만 적어 놓았다. 레베진스키도 그들의 신원을 몰랐던 모양이었다. 어떤 사진들에는 ‘의회 언급’, ‘공산주의에 대한 반동적 언사 - 그 망할 놈의 당으로 꺼져버려’ 등의 구절이 적혀 있었다. 왕재수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반체제적 표현들을 요약해 적은 게 분명했다.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을 억누르며 베르닌은 봉투를 챙겼다. 세 번째 서랍을 열어보았다. 노끈으로 묶어놓은 얄팍한 종이 뭉치가 눈에 띄었다. 서무답게 베르닌은 그 종이가 등록번호에 따라 분류된 자료 목록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극장 보유 음반 목록이었다. 맨 앞장에 파란색 동그라미가 하나 있었다. 무슨 숫자가 딸려 있는 외국어 제목이 적혀 있었고 옆에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 바흐... ”

 

 

그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넘겼다. 목록은 러시아어 알파벳순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두어 장 넘기자 또 파란색 동그라미가 있었다. 민쿠스였다. 그리고 조금 더 아래, 모차르트의 무슨 왈츠에도 동그라미가 있었다. 그리고 쇼팽, 쇼스타코비치... 마지막 동그라미는 슈트라우스였다.

 

 

친애하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쇼스타코비치, 쇼팽, 슈트라우스, 민쿠스, 바흐

마지막은 물론 모차르트겠지.

 

 

여섯 개의 이름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다른 것이라곤 나열된 순서뿐이었다.

 

 

‘ 하나는 알파벳, 하나는 곡의 순서일 거야. ’

 

 

베르닌은 머리가 멍했다. 서랍을 마저 뒤졌지만 더 이상 의심스러운 것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전화 앞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지만 신호가 울리지 않았다. 페인트칠 때문에 코드를 모두 뽑아놓은 것 같았다. 급하게 복도로 뛰쳐나갔다. 여기저기 뒤지다가 결국 로비로 내려가서 수위에게 전화를 쓰게 해달라고 했다.

 

 

다행히 코즐로프는 집에 있었다. 자고 있었는지 꽉 잠긴 목소리였다.

 

 

“ 잘못 걸었어요! ”

 

“ 로만, 나예요. 다닐. ”

 

“ 잘못 걸었어! ”

 

“ 하나만 대답해줘요. 제발. ”

 

“ 뭔데? ”

 

“ 수요일 공연 있잖아요, 그 자식 신작. 거기 음악 여섯 개를 쓰잖아요. ”

 

“ 너 웬일이냐, 그런 것도 알고. 음악은 하나도 모르고 완전 막귀인 줄 알았는데. 기특하구나. ”

 

“ 그 여섯 개... 작곡가가 누구누구인지 기억해요? 순서대로면 더 좋고요. ”

 

“ 당연하지. 쇼스타코비치 1번 교향곡으로 시작해서 쇼팽, 슈트라우스, 민쿠스, 바흐, 마지막은 모차르트지. 근데 바흐는 좀 편곡했어. 미셴카는 그대로 쓰려고 했는데 무용수들이 음악을 너무 버거워하더라고. 근데 왜? ”

 

“ 아, 아니에요. ”

 

“ 야! 너 혹시 스페호프한테 찰싹 붙어서 우리 아기 공연 방해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지? ”

 

“ 으윽, 아직도 날 그렇게 못 믿어요? ”

 

“ 하긴... 우리 아기 보고 싶어 죽겠네. 오늘 같이 있으려고 했는데 무슨 감시꾼인지 뭔지가 더 붙었다고 수요일까지는 아는 체도 하지 말라니... 우리 아기 지금 뭐하냐? 옆에 있냐? ”

 

“ 어, 아, 아니요... 난 밖에 나와 있고요... 미, 미하일은 자고 있어요. 많이 피곤했는지... ”

 

“ 그래, 그 녀석 많이 자야 돼. 신작 공연만 무사히 치르고 나면 일주일쯤 휴가 내고 온천에라도 가라 해야지 안 되겠다. 너도 쉬어라. 내가 같이 못 있어주니 너 혼자 우리 아기 돌보느라 힘들겠구나. ”

 

“ 아니에요. 그럼 이만... ”

 

 

밀려오는 엄청난 가책을 느끼며 베르닌은 전화를 끊었다. 사랑하는 왕재수가 협박을 받고 납치되어 행방이 묘연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코즐로프가 얼마나 상심하고 충격을 받을지 생각만 해도 막막했다.

 

 

그는 수위에게 KGB 신분증을 내세우고 공무임을 강조하며 직원 주소록을 요구했다. 예전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지금은 윤리의식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수위는 툴툴대면서 주소록을 꺼내 주었다.

 

 

‘ 레베진스키, 레베진스키... 여기 있다. ’

 

 

전화번호와 주소를 옮겨 적은 후 그는 극장을 나섰다. 공중전화 부스로 가서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만 울릴 뿐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레베진스키의 집으로 가보기로 했다.

 

 

니콜라이 레베진스키는 극장 사람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구시가지에 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꽤 좋은 동네였다. 제국주의 시절에는 귀족들의 주거 지역이었다. 건물은 낡았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멀끔하게 수리되어 있었다. 예전에 류드밀라가 지나가는 말로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 콜랴 그 사람 집안이 엄청 좋잖아요. 제국 시절엔 상업 쪽으로 돈 많이 벌었고, 부모님도 발 빠르게 볼셰비키에게 붙어서 재산 몰수도 당하지 않고 좋은 자리 차지하고. 물려받은 것도 많다죠. 집에 가면 으리으리하대요. 그래서 전임 감독하고도 사이좋게 지냈죠. 돈도 잘 꿔주고. 여기저기 뇌물도 많이 바쳤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우리 미셴카가 오면서 완전히 물 먹은 거지 뭐겠어요. ’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문을 두들겨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없는 것 같았다. 이때 베르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범법 행위를 했다. 밖으로 나가서 주변을 살폈다. 레베진스키의 집은 건물 2층에 있었는데 베란다 쪽이 마침 커다란 나무로 가려져 있어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았다. 파이프와 1층 창틀을 딛고 기어 올라갔다. 옛날 건물이라 장식용으로 튀어나와 있는 디딤돌이 몇 개 있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올라갔지만 막상 2층에 올라오니 베란다 창문은 꽉 잠겨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깨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베르닌은 차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하고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안을 엿보았다. 베란다 너머 거실에는 발레 의상과 무슨 조잡한 트로피, 사진과 그림들, 그릇과 파베르제 비슷하게 생긴 장식 달걀들이 늘어선 진열장이 보였고 텅 빈 소파도 보였다. 인기척은 없었다. 그는 파이프와 베란다 모서리에 딱 붙은 채 창문을 쾅쾅쾅 두들겨 보았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지만 마지막 희망을 갖고 목청껏 왕재수의 이름을 소리쳐 불러보았다.

 

 

미하일! 거기 있어? 미하일!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최소한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왕재수가 이 집에 갇혀 있다면 아마 입이 막힌 채 묶여 있거나 아직도 수면제에 취해 인사불성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레베진스키가 왕재수를 납치한 장본인이라 해도 자기 집에 그를 가둘 것 같지는 않았다. 왕재수는 레베진스키의 얼굴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레베진스키가 왕재수를 완전히 제거하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닌 한 그런 위험을 무릅쓸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정말 그렇다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순간 치밀었고 베르닌은 하마터면 창문을 두들겨 부술 뻔했다.

 

 

팔과 어깨가 너무 저리고 아픈데다 발소리가 들려왔으므로 그는 결국 아래로 내려왔다. 다행히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주민이었고 베르닌에게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베르닌은 수위에게 가서 레베진스키가 나오는 것을 봤는지, 혹시 취한 남자를 업고 들어가지는 않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곳은 수위가 아예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구시가지의 주택들은 대부분 그랬다.

 

 

이대로 그냥 떠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베르닌은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수첩을 뒤져 류드밀라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류드밀라는 깜짝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어머, 다냐. 웬일이에요? 혹시 우리 감독님이 출근이라도? ”

 

“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저, 혹시 레베진스키가 일요일에 출근한다고 하던가요? ”

 

“ 콜랴요?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요? ”

 

“ 그 사람에게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연락이 안 돼서요. 어, 저... 미하일이 극장 때문에 궁금한 게 있는 모양이에요. ”

 

“ 어휴, 드디어 우리 미셴카도 그 인간의 비리와 뒷공작에 신물이 난 모양이군요. 우리 감독님이 같은 극장 사람 험담하지 말라고 해서 지금까지 말 못하고 꾹 참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요청하기만 하면 그 인간의 지저분한 행태에 대해 하루종일 얘기해줄 수 있어요! 뭐가 궁금해요, 다냐! 내가 다 얘기해줄 수 있으니까 다 물어봐요! 차기 감독이라고 사방에서 추어주니까 전임 감독이랑 찰싹 붙어서 얼마나 위세를 떨면서 애들 괴롭히고 비리 저지르며 권력을 남용했는데! ”

 

“ 어... 아니... 그게... 저, 일단 레베진스키가 내일 극장에 나오는지부터... ”

 

안 나와요! 어제 오전에 감독님한테 와서 휴가원 들이밀면서 사인해달라고 했어요. 그것도 연습실로 와서! 내가 그때 감독님 차라도 한 잔 챙겨주려고 연습실에 갔었는데 무용수들 다 땀 흘리며 연습하고 있는 와중에 그 인간이 뻔뻔스럽게 쑤시고 들어와서 사인해달라고... 그런 건 감독실로 가지고 오든가 나한테 서류 맡기고 가면 어련히 내가 사인 받아주지 않겠느냐고요! 일부러 애들 연습시키는 미셴카 주의를 흐트러뜨리려고! ”

 

“ 그럼 레베진스키는 내일만 휴가인 거예요? ”

 

“ 아뇨! 그 인간 심지어 수요일까지 휴가 냈어요! 말이 되냐고요! 아무리 감독님이 그 인간한테 신작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어도 그렇지! 수요일 초연은 이번 시즌 우리 극장의 제일 크고 중요한 행사인데! 수석안무가란 인간이 물심양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당일에도 휴가를 내다뇨! 자기 열 받았다고 유치하게 시위하는 거지 뭐냐고요! 근데 우리 미셴카도 이럴 땐 감독의 권위를 좀 내세우면서 그 인간한테 수요일 휴가는 안 된다고 했어야 하는데, 저 꼴 보기 싫은 놈 쉰다니까 잘됐다는 표정을 너무 적나라하게 지으면서 너무 흔쾌히 사인을 해주잖아요! 에휴... 하여튼 우리 귀염둥이 감독님은 천재긴 한데 그런 거 보면 아직 어리다니까요. 정치질도 못하고... ”

 

“ 수요일까지 휴가... ”

 

 

베르닌은 침을 삼켰다.

 

 

“ 저, 류다. 레베진스키는 결혼 안했죠? ”

 

“ 했었죠, 두 번이나. 지금은 혼자예요. 바람둥이라서 이 여자 저 여자 엄청 건드리고 다녀요. ”

 

“ 그러면 지금 같이 지내는 사람도 없는 거예요? ”

 

“ 아, 당신 몰랐군요. 우리 사무국장 잔나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요. 그래서 미셴카가 더 고생하는 거죠! 잔나가 레베진스키 밀어주느라고 행정 협조를 제대로 안 해주잖아요! ”

 

“ 어... 잔나 르이조바 말인가요? 혹시 잔나는 어디 사는지 아세요? ”

 

“ 잔나요? 포나르나야 거리 쪽에 사는데 주소는 정확히 모르겠네. 전화번호는 있는데. 근데 왜요? ”

 

“ 레베진스키에게 뭘 물어봐야 하는데 연락이 닿지를 않아서요. ”

 

“ 잔나랑 별장에 놀러갔나 보네. 콜랴는 검은 숲에 다차가 있거든요. ”

 

“ 다차... 검은 숲 어느 쪽이요? 검은 숲 엄청 넓잖아요. ”

 

“ 온천 요양소 가는 쪽에 있어요. 가다 보면 왜 연못 나오고 별장들 몇 채 몰려 있잖아요, 옛날 교회 건물 하나 있고. ”

 

“ 아, 기억나요... ”

 

“ 거기서 제일 큰 게 콜랴네 별장이에요. 부모님이 물려줬대요. 그 집만 지붕이 하얀색이니까 찾기 쉬워요. ”

 

“ 고마워요, 류다. 그럼 잘 쉬어요. ”

 

 

베르닌은 전화를 끊었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곧장 검은 숲으로 가려다가 퍼뜩 생각이 나서 시계를 보았다. 이미 5시 반이 넘어 있었다.

 

 

“ 앗, 맞다! 드미트리하고 5시 반에 만나기로 했는데! ”

 

 

그는 급하게 차를 몰았다.

 

  

 

 

 

 

 

FIN

- 2015. 8. 26 ~ 9. 5 -

 

 

 

...

 

 

 

3.5%, 1.8%, 0.5% 우유는 유지방 함유율에 따른 분류이다. 나도 러시아에 있을 땐 왕재수처럼 1.8이나 0.5를 먹었다. (사실 내 식성이 서무 시리즈의 왕재수랑 좀 많이 비슷한 편이다 ㅎㅎ)

당시 내가 먹었던 우유는 삐뜨몰, 빠르말라뜨 같은 브랜드였다. 3.5%는 빨간색, 1.8%와 0.5%는 파란색과 노란색이었다. (근데 좀 헷갈린다 뭐가 파랑 뭐가 노랑이었는지) 0.5%는 정말 묽다. 3.5%는 묘하게 우리나라 우유보다 훨씬 진하고 고소하게 느껴졌다. (근데 우리 나라 우유도 보통은 3.4%~3.5%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

 

 

..

 

 

아파트 경비원이 고급차 후진차 운운하면서 얘기하는 단추의 차 '지굴리'에 대해 잠깐.

지굴리와 라다는 소련 시절 러시아 국민차종인데 좋아서라기보단 값싸고 투박한 딱 러시아 자동차다. 워낙 많이들 타고 다닌 차인데 나중에는 후진 차라는 이미지가... 간부들이나 노멘클라투라가 타고 다니던 것은 볼가로 대표되는 윗급의 차였다.

서무 시리즈에서도 물론 왕재수는 극장 감독이므로 관용차인 볼가를 타고 다니고 단추는 말단 서무이므로 중고 지굴리를 끌고 다닌다.

지굴리 이미지 두 장. 일부러 먼지투성이에 좀 찌그러진 차 사진을 골라봤다.

 

 

 

 

맨처음 러시아에 갔을땐 소련 붕괴되고 몇년 후라 원체 경제 사정도 안 좋고, 사람들이 돈벌이를 위해 투잡 쓰리잡을 할 때라서.. 택시도 별로 없고 길거리에서 아무 자가용이나 불러서 흥정을 해서 택시처럼 타고 다니곤 했다. 그때 종종 차를 잡아타면 그게 바로 이런 지굴리인 경우가 거의 90%였다. 아직도 그때 탔던 지굴리의 좁은 내부와 먼지투성이의 시트를 잊을 수가 없다. 딱 이 두번째 사진 같은 차를 많이 탔었다 :)

 

..

 

 

원래는 32편으로 끝내서 우수한 단추 3부작으로 하려 했는데 쓰다 보니 좀 길어져서 4부작이 될 예정.. 근데 33편은 아직 쓰는 중이다. 과연 단추와 드미트리는 힘을 합쳐 왕재수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인지!! 33편에서!!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가져가시거나 베끼거나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Posted by liontamer

 

어느덧 9월이다.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간다..  

 

본편도 잘 안 풀리고 일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서무 시리즈를 쓰기 시작한 것이 작년 9월이므로 이 시리즈도 거의 일 년이 되었다. 그동안 본편은 100페이지밖에 못 썼는데 서무 시리즈는 0편부터 31편까지 32개 에피소드에, 번외편도 두 개나 써서 그야말로 주객전도 현상 발생! 본편은 언제 쓰지 싶다가도.. 확실히 사람이란 편한 게 좋고 스트레스 푸는 게 좋은지 서무는 잘 써지고 본편은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며 써야 하다 보니 답보 상태. 그러다 보니 서무 시리즈는 점점 각종 장르의 잡탕으로 변해 가고!!! 

 

지난주에 31편 1부(http://tveye.tistory.com/3994)를 올렸고 이번 주는 2부이다. 이어지는 내용이기 때문에 1부를 먼저 읽어야만 한다. 분량 때문에 끊어서 올리게 되었음. 역시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가 등장하는 우수한 단추 시리즈~   

 

그럼 31편 2부~ 재미있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모스크바 본부에서 파견되어 온 드미트리 베르닌. 베르닌과 똑같은 외모의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는 왕재수의 오랜 팬으로서 반가움을 표시하지만 왕재수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데... 금요일 밤에 집으로 돌아온 베르닌은 모처럼 토요일에 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푹 쉬려고 하지만...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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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1

 

 

 

 

서무의 슬픔

-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 (2부) -

 

 

 

 

 

 

 

 

왕재수는 베르닌의 집에 들르지 않고 곧장 자기 집으로 가서 자겠다고 했다. 베르닌은 뭐라도 먹이고 싶었지만 왕재수가 계속 하품을 하고 있었으므로 포기했다.

 

 

“ 알았어, 그러면 내일 일어나면 내려와. 너 계속 제대로 못 먹었으니까 아침이라도 뜨끈한 국물이랑 좀 먹어야지. 냉동실에 닭 한 마리 넣어놓은 거 있으니까 그걸로 수프 끓여줄게. ”

 

“ 아침부터 고기 수프라니... 그거 항아리 닭고기처럼 기름 둥둥 뜨는 거 아니야? ”

 

“ 아니야! 껍질 다 벗겨서 냉동해놨어! 너 기름기 있으면 안 먹잖아! 어휴, 그 맛있는 거 다 떼어내느라 아까워 죽는 줄 알았네.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딴 데 기어나가지 말고 일어나면 내려와! ”

 

“ 알았어. 어차피 극장도 못 가. 내일 소독하고 페인트칠한댔어. ”

 

“ 그래! 너 내일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서 쉬어! 그래야 수요일 공연도 잘 올리지. 얼른 올라가서 씻고 자라. 너 어제도 그냥 뻗어서 씻지도 않고 잤잖아. 지저분하게. ”

 

“ 뭐가 지저분해! 나 오늘 아침에 샤워했단 말이야! 아휴, 진짜 시어머니처럼... 그리고 내일 바냐한테 갈 거야. 월요일에 그랬잖아, 프랑스 잡지... 토요일까지만 놔둔다고. ”

 

앗, 웃기지 마! 투레츠키 그 자식한텐 절대 못 가! 그 자식 추행범이잖아! 망할 놈의 프랑스 잡지가 밥 먹여 주냐! 잡지 꼭 보고 싶으면 내가 보랴한테 전화해서 갖다 달라 할 테니까 거기 가지 마! ”

 

“ 쳇, 왜 그렇게 바냐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람. 쓸 만한 녀석인데. 잡지 말고도 괜찮은 거 들어왔을지도 모르는데. ”

 

하여튼 안 돼! 정 가고 싶으면 나하고 같이 가!

 

“ 맘대로 해라. 너랑 같이 가든 말든 난 상관없으니까. 하여튼 나 이제 올라가서 잘래. 잘 자. ”

 

“ 그래, 잘 자. ”

 

 

왕재수가 위층으로 올라간 후 베르닌은 샤워를 하려다가 문득 드미트리 생각이 났다.

 

 

‘ 아 맞다, 내일 극장에서 10시에 보자고 했는데. 내일 극장 안 여니까 알려줘야겠다. ’

 

 

그는 요원 숙소에 전화를 했다. 그곳은 기숙사였기 때문에 전화는 각 층별 수위실에 하나씩밖에 없었다. 드미트리 베르닌을 바꿔달라고 하자 수위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다냐? 무슨 일이에요? ”

 

엇, 리자? 어... 어... 왜 당신이 전화를... ”

 

“ 아, 지금 카체리나 언니랑 갈리나 언니하고 같이 드미트리 방에 놀러와 있어요. 언니들이랑 드미트리가 너무 재미있게 놀고 있어서 내가 전화 받으러 나온 거예요. ”

 

“ 어... 그래요...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서... ”

 

“ 드미트리가 모스크바에서 유행하는 카드 게임을 알려줬는데 엄청 웃겨요. 지면 뽀뽀하거나 벌칙을 받아야 돼요. 근데 언니들이 서로 드미트리한테 뽀뽀하고 싶어서 일부러 져주고 분위기가 장난 아니에요. 당신도 올래요? 남자가 모자라는데. 되게 웃길 거 같아요, 얼굴 똑같은 남자 둘이! ”

 

“ 아, 아니에요... 뽀뽀... 벌칙... 난 오늘 너무 피곤해서... 그런데 드미트리가 당신도 오라고 했단 말이에요? ”

 

“ 왜요? 난 오면 안돼요? 드미트리 재밌는데. ”

 

“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저... 드미트리... 걔 진짜 괜찮은 놈이긴 한데... 걔 다음 주 목요일에 모스크바 돌아가니까... 난 그러니까... 괜히 당신이... 아, 그게... ”

 

“ 뭐예요, 다냐! 내가 드미트리한테 반하기라도 할까 봐요? 어머, 당신 진짜 웃겨요. 언제 그런 거 신경 썼다고. 별일이네. ”

 

 

수화기 너머로 리자가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닌은 그저 전화로만 얘기하는 중인데도 얼굴이 갑자기 화끈거렸다.

 

 

“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어, 저... 드미트리 그럼 전화 못 받아요? ”

 

“ 어, 잠깐만요. 여기 왔네요. 바꿔줄게요. ”

 

 

리자의 웃음소리가 멀어지면서 드미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다닐. 집에 들어갔니? ”

 

“ 으, 으응. 방금. ”

 

“ 미하일은? ”

 

“ 자러 올라갔어. ”

 

“ 아, 그럼 너 오늘 업무는 다 끝난 거네. 놀러 올래? 여기 지금 카챠랑 갈린카, 리자랑 있는데. 한 잔하면서 피로도 풀고 어때? ”

 

“ 아, 아니야. 난 오늘 좀 피곤해서... 있잖아, 내일 극장 문 안 연대. 소독하고 페인트칠한다고... 그래서 미하일도 안 나갈 거야. 그러니까 10시까지 안 와도 돼. ”

 

“ 아, 그래? 미하일한테는 잘 된 거네. 계속 쉬지도 않고 일했다면서. ”

 

“ 응, 그나마 다행이야. ”

 

“ 너한테도 다행이다, 너도 주말도 없이 계속 일했잖아. 그럼 내일은 어떻게 할까? 내가 그쪽으로 갈까? ”

 

“ 아, 아니야. 내일은 미하일도 하루 종일 집에서 쉬게 할 거니까 별 일 없을 거야. 너도 쉬어. 어차피 일요일 되면 또 극장 나갈 거니까 거기서 보면 될 것 같아. ”

 

“ 너도 집에서 쉬는 거니? ”

 

“ 어, 난 아직 잘 모르겠어. 저 녀석 하는 짓 좀 봐서. 괜찮을 것 같으면 잠깐 사무실 나갈 수도 있고. 다음 주는 그 신작 때문에 옆에서 계속 봐야 하니까 사무실에 못 나가거든. 일을 좀 해놔야 할 것 같아서. ”

 

“ 음... 그래. 혹시 사무실 가게 되면 나 불러. 도와줄게. ”

 

“ 고마워! ”

 

근데 너 정말 안 올 거니? 리자 진짜 귀엽다. 너 혹시 걔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야? 그런 거면 내가 살짝 도와줄 수 있는데. 나 다리 잘 놓거든. ”

 

아니야! 절대! 그런 거 아니야! 하여튼 잘 쉬어. 나 이제 씻어야겠다. ”

 

“ 그래, 잘 자! ”

 

 

베르닌은 어쩐지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드미트리는 좋은 친구였고 생각보다 예의도 바르고 그의 말을 귀담아 듣는 편이었으므로 리자에게 비신사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것 같긴 했다. 게다가 카체리나와 갈리나도 함께 있다고 했으니까. 사실 드미트리가 리자와 뜨거운 사이가 된다 해도 자신이 간섭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리자가 나이도 어린 편이고 원체 구김살 없이 밝은 성격이다 보니 괜히 드미트리에게 빠져들었다가 상처 입을까봐 걱정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아휴, 내가 왜 이러지. 이게 다 저 녀석 때문이야! 저 녀석 뒤치다꺼리하면서 맨날 속 썩다 보니까 걱정이 습관이 됐어. 공연히 리자까지 걱정하고... 알아서 잘 하겠지 뭐. 그리고 잘 되면 더 좋을 수도 있지 뭐. 요즘은 장거리 연애도 하는데. 뜨거운 물로 샤워나 하고 자야겠다. ’

 

 

샤워를 하니 뭉쳐 있던 근육이 좀 풀리면서 노곤해졌다. 막 파자마를 걸치고 침대로 기어 올라갔는데 갑자기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비명 소리였다. 위층이었다. 비명이 한 차례 더 터져 나왔다가 뚝 끊겼다. 베르닌은 급하게 튀어나갔다.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올라 왕재수의 집으로 달려갔다.

 

 

미하일! 야! 무슨 일이야! 문 좀 열어봐!

 

 

기척이 없었다. 더 이상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베르닌은 갑작스럽게 치솟는 공포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간신히 열쇠를 꺼냈지만 손이 떨려서 잘 돌아가지 않았다. 두어 번 실패한 끝에야 문을 열었다.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베르닌이 목청껏 소리쳤다.

 

 

미하일! 나야! 나 왔어! 괜찮은 거야?

 

다, 다닐...

 

 

가냘픈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침실 쪽이었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침실로 달려갔다. 왕재수가 어두컴컴한 침실 벽에 등을 딱 붙이고 몸을 웅크린 채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방 안은 비어 있었고 창문도 닫혀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 미셴카! 괜찮아? ”

 

“ 어... 아, 안 괜찮아... ”

 

 

왕재수는 고개도 못 들었다. 머리를 무릎 사이에 처박고 두 손으로 발목을 꼭 껴안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베르닌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누가 왔었어? 무서운 거라도 봤어? 꿈꿨니? ”

 

“ 나 나갈래... 다닐, 너네 집 갈래... 무서워... ”

 

 

왕재수가 여전히 고개를 아래로 처박은 채 베르닌을 쿵쿵 들이받았다. 얼마나 몸을 떠는지 발작을 일으킨 병자 같았다. 베르닌은 일단 왕재수를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일으켜서 거실로 데리고 나왔다. 소파로 데려가서 거실과 부엌과 욕실, 서재 불을 모두 켜주었다. 담요로 어깨를 감싸주고 가능한 한 제일 부드러운 목소리를 짜내서 달랬다.

 

 

“ 이제 괜찮아, 나랑 같이 있잖아. 고개 들어도 돼. 불도 다 켰어. 무서운 거 다 갔어. ”

 

“ 아니야... 저 안에 있어. ”

 

“ 뭐가 있었는데? 방에 들어가니까 무서운 게 있었어? ”

 

“ 지, 지금도 있어. ”

 

“ 누가 왔었던 거야? 사람이야? ”

 

“ 몰라... 왔었나봐. 누군지 몰라. 아무도 없었어. ”

 

“ 근데 어떻게 누가 왔었다고 생각해? ”

 

“ 테, 테이블 위에... ”

 

“ 테이블? 나이트 테이블 말이야? ”

 

“ 으, 으응... ”

 

“ 그 위에 뭐가 있었어? 내가 가서 잠깐만 보고 와도 돼? 너 1분만 여기서 기다릴 수 있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혼자 남는 게 너무 무서운 것 같았다. 그래서 베르닌은 침실로 가지 않고 다시 왕재수 곁에 앉았다. 왕재수가 진정될 때까지 옆에 앉아서 기다렸다. 조심스럽게 어깨에 팔을 둘러주었다.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조금 안심이 된 듯 고개를 들더니 뻣뻣하게 몸을 기대왔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얬다. 겁에 질려서 그런지 눈이 평소의 두 배로 커져 있었다. 갑자기 베르닌은 그 표정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검은 숲. 온천 갔을 때, 그루터기 위에서... ’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 저... 혹시 뱀 껍질 같은 거 있었어? 아니면 쥐? 바퀴벌레?

 

 

왕재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가 다시 끄덕였다. 베르닌은 긴가민가했지만 어쨌든 왕재수가 반응을 보였으므로 희망을 얻고 다시 물어보았다.

 

 

“ 그런 거 내가 잘 치우잖아. 내가 저번에도 뱀 껍질 치워줬잖아. 들어가서 금방 치워버리고 올게. 1분만 여기서 기다릴 수 있어? ”

 

 

왕재수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베르닌은 왕재수의 품에 쿠션을 안겨주고는 급하게 침실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고양이가 또 쥐나 벌레를 물어다 놓은 모양이었다.

 

 

‘ 어휴, 다 큰 사내자식이 왜 저렇게 벌레랑 쥐 같은 걸 무서워할까. 귀신도 안 무서워하는 녀석이... 미셴카가 여기까지 쫓아왔나? 어제 소시지 줘서 물어다 준 건가? 그럼 우리 집으로 갖다 줘야지 왜 하필이면... ’

 

 

침실은 어두컴컴했다. 나이트 스탠드에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아마 왕재수가 자러 들어가면서 램프 불을 켰던 것 같았다. 베르닌은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금세 방 안이 환해졌다. 나이트 테이블은 침대 양쪽에 하나씩 있었는데 바깥쪽 테이블 위에는 책 한권과 수첩만 놓여 있었다. 그래서 베르닌은 안쪽으로 가보았다.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막상 테이블 위에 있는 것을 보자 기절초풍했다.

 

 

으악, 이게 뭐야!

 

 

깨진 유리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죽은 새가 한 마리 놓여 있었다. 흰색인데다 체구가 큰 편이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한순간 갈매기인가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가브릴로프에는 갈매기가 없었다. 구역질이 나는 것을 꾹 참고 자세히 보니 하얀 비둘기였다. 피범벅이 되어 있는데다 목이 부러지고 날개가 꺾여서 처참한 몰골이었다.

 

 

“ 고양이가 창문을 깨고 들어왔나 봐... 그래서 유리가 깨져 있나보네... ”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동시에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은 꼭 닫혀 있었고 유리도 멀쩡했다. 게다가 검정고양이 미셴카는 지금까지 이쪽 집으로는 온 적이 없었다. 먹이를 주는 것도 베르닌이지 왕재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베르닌이 알기로 고양이는 새를 사냥할 때 이런 식으로 끔찍하게 죽이지 않았다.

 

 

베르닌은 빗자루와 쓰레받기, 종이봉지를 가져왔다. 죽은 새를 종이봉지에 넣고 쓰레받기에 유리조각들을 쓸어 넣었다. 밖에 갖다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돌아섰는데 슬리퍼 끝에 뭔가가 채이며 바스락거렸다. 하얀색의 작은 카드였다. 몸을 굽혀서 카드를 주웠다. 짧은 글귀가 씌어 있었다. 손으로 쓴 것이 아니라 타이프로 친 것이었다.

 

 

 

친애하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선물이 마음에 드시는지.
그래도 당신은 공연을 포기하지 않겠지.
금요일이 몇 시간 남지 않았어.
그럼 내일 아침을 기대해.
좋은 꿈 꾸시길.

 

 

 

맨 아래에는 서명 대신 붉은 얼룩이 한 방울 번져 있었다. 핏자국 같았다. 베르닌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속이 뒤틀리면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공포와 충격으로 멍해져 있다가 문득 밖에 있는 왕재수 생각이 났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종이봉지와 쓰레받기를 나이트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 끔찍한 카드를 발견한 이상 함부로 그것들을 버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카드를 쥔 채 거실로 나왔다. 왕재수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소파에 웅크린 채였다. 쿠션을 얼마나 꼭 껴안고 있었는지 끄트머리가 다 구겨져 있었다. 베르닌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냈다. 병째로 들고 가서 마개를 열고 왕재수에게 물을 좀 마시라고 했다. 왕재수는 고분고분 물을 마셨다. 아까보다는 덜 창백했고 숨소리도 한결 나았다.

 

 

“ 이제 좀 괜찮아? ”

 

“ 아니... ”

 

“ 그래, 진짜 놀랐겠다. 나라도 그랬을 거야.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

 

“ 으응... ”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일어나지는 못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뱀이나 쥐, 벌레 따위를 보면 몸이 굳어져서 못 움직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죽은 새와 협박 카드를 보고 나니 한심하다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카드를 파자마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왕재수를 들쳐 업었다. 왕재수는 그래도 정신이 좀 돌아왔는지 그의 어깨에 찰싹 매달렸다.

 

 

 

 

*    *    *

 

 

 

 

 

베르닌의 집으로 들어오자 왕재수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침실로 데려가려는데 왕재수가 고개를 저었다.

 

 

“ 방에 들어가기 싫어. 거실에 있을래. ”

 

어... 우리 집은 괜찮아. 이상한 거 없었어. 내가 방금 자려고 들어갔었어. ”

 

“ 그래도 싫어. ”

 

“ 그래, 그러면 소파에 앉아 있자. ”

 

 

베르닌은 왕재수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왕재수는 심호흡을 반복하더니 천천히 머리와 어깨와 팔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발목과 무릎도 돌리듯 움직였다. 나중에는 바닥으로 내려와서 다리를 뻗고 스트레칭을 했다. 베르닌은 잠자코 기다렸다. 왕재수는 놀라거나 흥분했을 때 말을 하기보다는 몸을 움직여야 진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참 후 왕재수가 일어나서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베르닌이 건네준 컵을 쥐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 진정 좀 됐니? ”

 

“ 응. ”

 

“ 그러면 이제 내가 물어보는 거 대답할 수 있어? ”

 

“ 아마도. ”

 

 

베르닌은 그의 곁에 앉았다. 막상 물어보려니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 헷갈렸다. 그는 행정요원이었기 때문에 범죄자는커녕 목격자나 증인 심문 실습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법학과 시절과 요원 연수 때 배웠던 이론을 떠올리면서 일단 시간 순서대로 물었다.

 

 

“ 집에 들어갔을 때 아무도 없었어? ”

 

“ 없었어. ”

 

“ 인기척도 없고? 누가 들어왔었던 것 같은 흔적이라든지. ”

 

“ 내 신발. 항상 가지런히 정돈해 놓는데 부츠 한 짝이 삐뚤어져 있었어. 그리고 침실 문도 난 항상 열어놓고 다니는데 반쯤 닫혀 있었고. ”

 

“ 그럼 누가 들어왔다 나간 거네. 근데 왜 그때 나 안 불렀어? ”

 

“ 우리 집엔 너네 KGB 끄나풀들이 맘대로 드나들잖아. 도청 장치 같은 거 다시 설치하러 왔다 갔나보다 했어. ”

 

“ 어...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다. 그러면 곧장 침실로 들어갔던 거야? ”

 

“ 아니, 스트레칭 좀 하고 욕실로 가서 샤워했어. 그때도 밖에서 이상한 소리 같은 건 안 났어. 내가 들어간 후에는 누구 안 들어왔어. 나 그런 거 잘 알아차리거든. 다 씻고 나서 자려고 침실로 갔는데... 램프 켰는데 테이블 위에 그게 있었어... ”

 

 

왕재수가 다시 창백해졌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뭐였어, 다닐? 그거 뭐였어? 진짜 새였어? ”

 

“ 응. ”

 

“ 갈매기? ”

 

“ 아니. 가브릴로프에는 갈매기 없잖아. 비둘기였어. ”

 

“ 하얬어. 피투성이라서 자세히는 못 봤어. 날개도 다 짓이겨지고... ”

 

 

왕재수가 몸을 떨었다.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로 가더니 심하게 토했다. 끔찍한 광경에 몹시 놀랐으니 그럴 만도 했다. 왕재수가 입을 헹구고 세수를 하고 나왔다. 안색은 안 좋았지만 그래도 눈에는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베르닌은 그제야 왕재수의 손바닥에 피가 배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너 손 다쳤구나. 유리에 베었나 보네. 다른 데는 안 다쳤어? 발은 괜찮아? ”

 

“ 으, 으응... 슬리퍼 신고 있었어. ”

 

 

그래도 불안해서 베르닌은 왕재수를 앉혀놓고 유리에 벤 자국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다행히 왼쪽 손바닥과 손목 외에는 벤 곳이 없었다.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바른 후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 그거 보고서 놀라서 소리 지른 거야? ”

 

“ 응. 진짜 놀랐어. 무서워. ”

 

“ 이제 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 거니까. 그럼 다른 건 못 봤어? ”

 

“ 유리 깨진 거. ”

 

“ 카드는? ”

 

“ 카드? 그게 또 왔어? ”

 

 

베르닌은 ‘또’라는 단어 때문에 심장이 다시 팽팽하게 죄어오는 것 같았다.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왕재수에게 보여주었다. 왕재수는 카드를 받아서 글귀를 눈으로 훑어본 후 조그맣게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는 낮게 욕을 하면서 카드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 미친 놈. 변태. ”

 

 

두 눈에 파랗게 이글거리는 불꽃이 램프처럼 켜지는 것을 보니 공포보다는 분노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지도 몰랐다.

 

 

“ 이건 아까 못 본 거야? ”

 

“ 응, 새 때문에 너무 놀라서 이게 있는지도 몰랐어. ”

 

“ 그러면 ‘또’ 왔느냔 건 무슨 뜻이야? 이런 거 전에도 받았어? ”

 

“ 어. 오늘 아침에. ”

 

“ 뭐야? 근데 왜 아무 말 안 한 거야! ”

 

“ 아침엔 그렇게 끔찍한 게 없었어. 카드만 있었단 말이야. ”

 

“ 이건 협박 편지잖아! 그리고 아침에 발견한 거면 너 자는 동안 들어와서 놓고 간 거 아냐! 근데도 말 안 하고! ”

 

“ 어젯밤에 두고 갔던 건지도 몰라. 나 어제 너네 집에서 잤잖아. 그리고 나 이런 거 예전에도 많이 받았단 말이야. 나 싫어하는 사람들 많았어. 반동분자라고. 그래서 신작 올릴 때마다 욕하고 협박하는 편지들 많이 왔거든. 그냥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 ”

 

“ 아침에는 어디서 발견했어? ”

 

“ 베개 위에 있었어. ”

 

“ 뭐라고 씌어 있었는데? 이거랑 같은 내용이었어? ”

 

“ 아니, 같은 내용은 아니었어. 근데 기억 잘 안 나. 나 원래 재수 없는 얘기나 욕은 잊어버리거든. ”

 

“ 그거 지금 어디 있어? ”

 

“ 휴지통에 버렸어, 기분 나빠서. ”

 

“ 휴지통 오늘 안 비웠잖아. 청소 안 했으니까. 너 잠깐만 여기 있어. 그 카드 찾아올게. ”

 

 

왕재수는 이제 완전히 진정했는지 가지 말라고 매달리지 않았다.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의 집으로 갔다. 침실 휴지통을 뒤집어엎었다. 나이트 테이블 위에 있던 것과 똑같은 모양의 하얀 카드가 굴러 나왔다. 잽싸게 훑어본 후 미지의 협박자가 혼자 있는 왕재수를 공격할까봐 걱정이 되어서 카드를 쥐고 후다닥 뛰어 내려갔다.

 

 

 

왕재수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동댕이쳤던 카드를 다시 손에 쥐고 있었다. 베르닌이 휴지통에서 찾아온 카드를 내밀자 왕재수가 읽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베르닌은 내키지 않았지만 소리 내어 읽었다.

 

 

 

친애하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쇼스타코비치, 쇼팽, 슈트라우스, 민쿠스, 바흐
마지막은 물론 모차르트겠지.
하지만 수요일 공연은 올릴 수 없을 거야.
사랑하는 나리님들께 전화해, 공연은 취소됐다고.
다시 감옥에 가면 이제 살아서 나오지 못할 거야.
금요일. 하루를 줄게. 윗분들께 전화해. 

추신. 굳이 감옥에 넣을 필요도 없을 거야.
 

 

 

 

왕재수는 손에 쥐고 있던 카드를 구겨서 내던졌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 맞아, 저랬지. 하도 싸가지 없는 개소리라서 다 지워버렸는데. 그것만 보고 그냥 재수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완전 사이코에 변태였어. 비둘기 불쌍해. ”

 

 

베르닌은 기가 찼다.

 

 

“ 야, 지금 비둘기 불쌍하다는 말이 나오냐. 네 걱정을 해야지. 이건 진짜 협박이란 말이야. 수요일 공연 올리지 말라고 너 협박하는 거잖아. 죽은 새에 유리 파편까지... 지금 열한 시 반이야. 30분 남았어. 금요일이 지나면 그 자식이 너한테 위해를 끼치겠다고 협박한 거란 말이야. ”

 

“ 그게 뭐. 난 안 무서워. 이깟 얼간이 같은 사이코 자식 때문에 몇 달이나 준비한 공연을 포기하란 말이야? ”

 

“ 아깐 무서워서 움직이지도 못해놓고! ”

 

“ 그건 죽은 새가 있었으니까 그런 거고! 이런 협박은 안 무섭단 말이야. 한두 번 받아본 것도 아닌데! 극장 동료들한테서도 받아봤어! ”

 

“ 그래서, 그때도 이런 거 받았어? ”

 

“ 아니, 이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별거 다 받아봤단 말이야. 분장 상자에 칼이랑 유리도 박혀 있었고... 의상 난도질도 당해봤어. 열성팬한테 가위로 찔릴 뻔한 적도 있고. 피 묻은 편지 따위 수도 없이 받았어. 그래도 공연은 한 번도 취소한 적 없어. 그러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웬 미친놈이 기어 들어와서 쇼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나도 안 무서워. 공연은 그대로 올릴 거야. ”

 

 

베르닌은 고개를 저었다. 극장과 무대에 관해서라면 왕재수를 논리로 설득할 수 없다는 건 자명했다. 그래서 그는 전화기 앞으로 갔다.

 

 

“ 일단 난 상부에 보고해야겠어.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야. ”

 

보고는 무슨 보고! 네 상사는 스페호프잖아! 그래서, 스페호프한테 감시 요원을 더 붙여달라고 하라고? 돌았냐! 그 얼간이 천치는 수요일 공연 망치기만 기도하고 있는 놈인데! 이때다 싶어서 위험하다는 이유로 극장 폐쇄하고 공연도 취소시킬 게 뻔하잖아! ”

 

 

왕재수는 정색을 하면서 그를 막아섰다. 언제 그렇게 비명을 지르고 덜덜 떨었나 싶었다. 하지만 베르닌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왕재수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소리쳤다.

 

 

이 바보야! 얼간이는 너야! 뭐라고 씌어 있는지 다시 읽어봐! 처음에는 공연을 취소하라고 했어. 금요일 하루를 준다고 했지. 이번 카드에는 몇 시간 안 남았다고 했어. 협박범은 네가 어떻게 나올지도 예상하고 있어. 공연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씌어 있잖아. 내일 아침을 기대하라고. 이 말은 내일 아침에 그 자식이 다시 온다는 거잖아. 그게 카드가 될지 저런 짐승 시체가 될지 살아있는 뱀이 될지, 아니면 더 끔찍한 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감옥에 가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거라고 해놓고 추신으로는 굳이 감옥에 보낼 필요도 없다고 했어. 너한테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겠다는 협박이란 말이야. 네 말대로 그냥 미친놈의 개수작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최악의 상황도 예측해야지! 나는, 나는 네 감시요원이고... 그러니까, 국장은 널 감시하라고 붙여놓은 거지만 그것만으로 끝나는 건 아니란 말이야! 너한테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키는 것도 내 임무란 말이야! 그러니까 난 이거 그냥 못 넘어가! 가만히 못 있는단 말이야!

 

 

왕재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문득 베르닌은 왕재수가 소리 지르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자기는 화나면 발칵 소리 지르고 무용수들도 쥐 잡듯 하는 주제에 남이 소리 지르면 못 견디다니 정말 웃기는 녀석이었지만 어쨌든 베르닌은 간신히 진정하고 입을 다물었다. 왕재수는 한 손으로 오른쪽 귀를 감쌌다가 뗐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바보, 네가 말하는 건 경호원이잖아. 멍충이, 우리말도 잘 모르고. 넌 감시요원이지 경호원이 아니라고. ”

 

“ 어쨌든! 나 단어 구분 같은 거 몰라! 나한테는 같아! ”

 

“ 어, 그래. 고맙긴 한데 하여튼 스페호프한테는 말하지 마! 이거 분명히 그 자식 수작이란 말이야. 그때 돈키호테처럼... 겁줘서 공연 취소시키려는 건데 바보같이 그 자식한테 나 협박받았다고 보고해서 빌미를 줄 수는 없어. 너한테는 상부라는 게 있을지 몰라도 나에겐 없어. 수요일 공연에 대해서는 내가 최종 책임자고 결정권자야. 방해받고 싶지 않아. ”

 

“ 어휴, 고집쟁이. 알았어. 나도 국장이 그 망할 신작인지 뭔지 못하게 하는 건 바라지 않아. 국장한테는 말 안 할 거야. 그래도 그냥은 못 넘어가. 너 잠깐 여기 있어. 너네 집 가서 옷 좀 챙겨올 테니까. ”

 

“ 옷은 왜? ”

 

너 여기 있으면 위험해서 안 돼. 로만한테 가 있어. 내가 전화할 테니까. ”

 

안 돼! 로만 끌어들이지 마! 절대 안 돼!

 

 

왕재수가 금세 표정이 달라지면서 단호하게 소리쳤다.

 

 

“ 로만한테 이런 얘기 하지 마. 그 사람 진짜 다혈질이란 말이야. 앞뒤 안 가리고 흥분하다가 분명히 걸려들 거야. 스페호프가 나랑 친한 사람 낚으려고 기회만 보고 있는데... 게다가 그 감시꾼까지 하나 더 붙었는데. 죽어도 안 돼! ”

 

“ 하지만... 그럼 의사 선생님한테 가자. 병원에 있자. 입원한 척 하고 있다가 수요일에 극장 가서 공연 올리면 되잖아. ”

 

“ 일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준비할게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그러냐. 아직 무용수들도 그렇고 오케스트라도 그렇고 부족한 점 많은데. 그리고 의사 선생님을 왜 끌어들이니. 가뜩이나 나이 드신 양반을. 난 여기 있을 거야. 너네 집에 있으면 되잖아! ”

 

“ 너네 집이나 우리 집이나... 한 층 차이인데. ”

 

“ 그래도 너랑 같이 있잖아. ”

 

어휴, 난 행정직이잖아. 책상물림이고. 총도 제대로 못 쏜단 말이야. 좋아, 알았어. 국장한테는 연락 안 할 거야. 너 여기서 자. 대신 한 사람 더 부를 거야. 로만도 아니고 의사 선생님도 아니야. 더 이상 꼬투리 잡지 마. ”

 

 

베르닌은 요원 숙소에 전화했다. 수위에게 드미트리를 바꿔달라고 했다. 다시 리자가 받을까봐 슬며시 걱정이 되었지만 이번에는 드미트리가 곧장 받았다.

 

 

“ 어, 다닐이구나. 여자들 아직 있는데, 맘 바뀌었으면 놀러와. ”

 

“ 아니야, 그게 아니고. 너 우리 집으로 좀 와줄 수 있어? 같이 있는 여직원들한테는 비밀로 해주고. ”

 

“ 응? 왜,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

 

“ 전화로 얘기하긴 좀 그래. 지금 좀 와줄래? ”

 

“ 그래, 알았어. 지금 갈게. 숙소에서 너희 집 가까우니까 금방 가겠다. ”

 

 

드미트리가 이것저것 묻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서자 왕재수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또다시 ‘네가 잘못했다’ 표정이었지만 이제 베르닌은 개의치 않았다.

 

 

“ 드미트리가 올 거야. 걘 현장요원 훈련도 받았고 총도 잘 쏘고 호신술도 뛰어나니까 도움이 될 거야. 감시꾼이니 재수 없다느니 해도 소용없어. 국장 보고도 안 되고, 로만도 안 된다고 했고 의사 선생님한테 가는 것도 싫다고 했으니까 지금 도움 청할 수 있는 건 걔밖에 없어. 그러니까 불평하지 마. 안 통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베르닌의 곁을 지나쳐 침실로 들어가더니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방 안에 들어가는 게 무섭다더니 이제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뒤따라갔다. 창문을 모두 안에서 잠그고 커튼을 쳤다. 그리고 전등을 켰다. 왕재수가 짜증을 냈다.

 

 

“ 왜 그래! 잘 건데. ”

 

“ 오늘은 불편해도 불 켜고 자야 돼. ”

 

“ 눈부신데...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야. 아무 것도 아닌 걸 가지고. ”

 

“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협박범이 또 이상한 거 갖다놓으면 너 놀랄 거잖아. 뱀 껍질이라도 갖다 놓으면 더 무서울 거잖아. 그러니까 예방하려고 그러는 거야. 이불 뒤집어쓰고 자면 괜찮을 거야. 평소엔 밝아도 잠만 잘 자면서. ”

 

“ 아니야! 나 원래 밝으면 잠 못 자! ”

 

“ 웃기시네. 어제도 우리 집에 왔을 때 불 다 켜놨는데 잘만 자더구만. ”

 

“ 그건 너네 집이니까... ”

 

“ 우리 집이면 잠 잘 와? ”

 

“ 응, 너네 집에서는 잠이 더 잘 와. 우리 집에선 로만이 옆에 없으면 잘 못 자거든. 옛날부터 그랬어, 누가 꼭 안아줘야 푹 잤어. 근데 너네 집에선 신기하게 잠이 잘 오더라고. ”

 

“ 어... 그렇구나. 그래서 우리 집 오면 그렇게 금방금방 자는구나. 하여튼 지금도 우리 집이잖아. 그러니까 불 켜놔도 잠 잘 올 거야. 졸리니? ”

 

“ 응, 졸려. 갑자기 너무 졸려. 아까 놀라서 너무 진이 빠졌나봐. ”

 

“ 그래, 얼른 자라. 걱정하지 말고. 드미트리 금방 올 거니까 걔랑 나랑 여기 있을 거야. 무서워할 거 없어. ”

 

“ 안 무서워. 그 자식 오는 건 짜증나지만... 내 옆에 오지 말라고 해. ”

 

“ 알았어, 이 방에는 내가 있을게. 피곤할 텐데 이제 자자. ”

 

 

왕재수는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끌어올렸지만 얼굴을 완전히 가리지는 않았다. 눈을 빼꼼히 내놓은 채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베르닌은 그 눈에 어려 있는 한없이 부드럽고 신뢰로 가득 찬 표정에 충격을 받았다. 주인을 따라다니는 조그만 강아지 같은 눈빛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왕재수에게서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순간 베르닌은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치는 책임감을 느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보호심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던 시계탑 창가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왕재수가 하품을 하더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금세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    *    *

 

 

 

 

 

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깰까봐 급하게 뛰쳐나갔다. 열쇠구멍으로 바깥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 드미트리가 근무 중과 다름없이 말쑥한 차림으로 들어왔다. 베르닌은 주변을 확인한 후 문을 잠갔고 걸쇠도 걸었다. 그리고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큰 소리를 내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드미트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활짝 열린 침실 문 너머로 왕재수가 자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베르닌의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왔다.

 

 

베르닌은 가능한 한 평온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일단 스페호프에게 보고하는 것은 미뤘다는 얘기도 해주고 두 장의 카드를 보여주었다. 드미트리는 놀란 표정이었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이따금 ‘응’이나 ‘그래서?’ 등의 추임새만 넣으며 베르닌의 이야기를 끝까지 침착하게 들었다. 그리고는 카드를 넘겨받아 꼼꼼하게 살핀 후 비둘기 시체를 버렸느냐고 물었다.

 

 

“ 아니, 종이봉지에 싸서 쟤 침실에 그냥 놔뒀어. 혹시나 해서. ”

 

“ 그냥 두면 부패할 거야. 일단 냉장고에 넣어두자. 스페호프에게 보고하지 않는다 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증거물은 제대로 간수해야 돼. 여기로 가져올 수 있어? ”

 

“ 으, 으응. 근데 우리 집 냉장고에 넣는 건 안 돼. 쟤가 그거 다시 보면 심장마비 걸릴 거야. ”

 

“ 그래, 그럼 일단 가져와서 좀 본 후에 도로 쟤네 집 냉장고에 넣어두자. 갔다 올래? 둘이 가는 게 좋긴 한데 미하일을 여기 혼자 놔두면 안 되니까... 사실은 내가 현장을 좀 봤으면 좋겠는데. ”

 

“ 그럼 네가 올라갔다 와. 열쇠 줄 테니까. ”

 

 

드미트리는 머뭇거렸다. 침실 쪽을 힐끗 쳐다본 후 중얼거렸다.

 

 

“ 미하일이 알면 화낼 것 같은데... 나 엄청 싫어하잖아. 자기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갔다고... ”

 

“ 자니까 괜찮아. 그리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

 

“ 그래. 미안하긴 하지만... 심각한 일일 수도 있으니까. 나 금방 다녀올게. 근데 너 총 있어? ”

 

“ 아, 어... 있긴 한데... ”

 

“ 다행이네. 안 그러면 내 거 빌려주려고 했더니. ”

 

“ 너 총 가지고 왔어? ”

 

“ 응. 나 총기 소지 허가받았어. 현장요원 연수도 받았거든. ”

 

“ 어, 그건 아는데... 내가 아무 얘기 안 했는데 어떻게 총을 챙겨올 생각을 다 했네. ”

 

“ 다닐, 나 여기 이틀밖에 안 있었지만 네가 밤중에 함부로 사람 불러낼 성격 아니란 건 파악했어. 목소리도 다급했고.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어. 그리고 다른 이유도 하나 있고. ”

 

“ 그게 뭔데? ”

 

“ 음, 일단 현장 보고 와서 얘기해줄게. 총부터 꺼내라. 쓸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

 

 

베르닌은 며칠 전 스페호프의 지시로 5호실에서 다시 수령한 9밀리 마카로프를 옷장 서랍에서 꺼냈다. 하지만 권총을 쥐고 있자니 다시 불안해졌다.

 

 

“ 저기... 나 총 잘 못 쏘는데... ”

 

“ 걱정 마, 내가 좀 있다 가르쳐줄게. 그리고 그놈 지금은 안 올 거야. 카드에 그렇게 썼잖아. 내일 아침을 기대하라고. 밤에는 안 올 거야. 이런 협박범에겐 패턴이 있어. 강박 관념이 있어서 자신이 예고한 내용을 따르려고 하고. 그래도 위험을 최소화해야 하니까 총은 꼭 가지고 있어. 나 금방 다녀올게. 현장 사진도 좀 찍어놔야겠다. ”

 

 

드미트리가 주머니에서 조그만 로모 카메라를 꺼냈다. 그리고는 재킷 안쪽에 손을 넣어 권총을 확인하더니 잽싸게 밖으로 나갔다.

 

 

베르닌은 9밀리 마카로프를 꼭 쥔 채 침실 문가에 서 있었다. 창문은 모두 잠가 놨지만 그래도 혹시나 누군가가 침입할까봐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이 와중에 왕재수가 저렇게도 곤하게 잠들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드미트리가 와줘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혹시라도 혼자 올라간 드미트리가 협박범에게 공격이라도 당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어 심장이 쿵쿵거렸다.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협박범이 제시한 시한은 금요일 하루였다. 시한이 지났다. 왕재수는 공연을 취소하지 않았다. 그 말은 아침에 뭔가가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머릿속에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쳐지나갔다. 드미트리가 왜 안 오나 싶어 점점 걱정이 됐다. 올라가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열쇠구멍으로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자 드미트리가 들어왔다.

 

 

“ 봤니? ”

 

“ 응. 끔찍하더라. 미하일이 진짜 놀랐겠는데... 일단 잘 싸서 냉장실에 넣어놨어. 유리조각들도 그렇고. 네가 과민반응한 게 아니야, 다닐. 시한이 금요일 하루였다고 했지? ”

 

“ 첫 번째 카드엔 그렇게 돼 있었지. 근데 두 번째 카드에선 쟤가 공연 포기 안 할 거라고 비아냥거리고 있었어. ”

 

“ 그래. 미하일이 어떻게 나올지 다 알면서 일부러 시한을 준 것 같아. 전형적인 겁주기 수법이야. 저러다 끝나면 다행이긴 한데 아무래도 명확한 목적을 가진 놈인 것 같아. ”

 

“ 미샤는 사이코일 거라고 하던데. 예전에도 이런 거 많이 받았다고. ”

 

“ 아니야. 뭐 사이코 기질이 있는 놈일 수야 있지. 근데 계속 공연 얘기를 하고 있잖아. 게다가 첫 번째 카드에는 네가 간과한 아주 중요한 단서가 있어. 작곡가들 얘기를 하고 있잖아. 기억 안 나? 어제 미하일이 검열국장이랑 싸우면서 여섯 명의 작곡가 얘길 했잖아. 누군지 대보라고. 근데 여기 나열한 이름이 여섯 개야. 미하일 신작에 쓰는 음악들 아닐까? 나야 연습하는 걸 못 봤으니 모르지만... 너 알지 않아? ”

 

“ 어, 글쎄... 나 음악은 잘 몰라서... 음악은 들었는데 그게 여섯 가지가 섞인 건지도 몰랐어. 근데 네 말 들으니 그럴 것 같아... 이게 무슨 뜻일까? 왜 중요한 단서가 되는 거야? ”

 

“ 중요한 단서야. 범인은 미하일의 신작에 대해 잘 알고 있어. 그 음악들을 쓴다는 걸 아는 거야. 연습하는 걸 봤거나 압수한 레코드 리스트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 게다가 여섯 명의 이름을, 그것도 미하일이 검열국장에게 이름 대보라고 도발했던 그날 밤에 보낸 카드에 적었잖아. 검열국장이랑 미하일이 싸운 걸 아는 사람이야. ”

 

“ 그러면, 그러면 극장에 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

 

“ 그럴 가능성이 크지. 근데 꼭 극장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 정보원을 통해서 얘기를 전해 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

 

 

드미트리는 카드 두 장을 티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낮게 휘파람을 불더니 소파에 뒹굴고 있던 잡지를 집어 들었다. 이 상황에 팔자 편하게 웬 잡지인가 싶었는데 드미트리가 잡지 표지 귀퉁이의 여백에 볼펜으로 빠르게 문장 하나를 휘갈겨 썼다.

 

 

‘ 너희 집에는 도청 장치 없어?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응, 내가 알기로는 없어. 그 업무는 내가 총괄하잖아. 적어도 우리 쪽에서 붙인 건 없어. ”

 

 

불현듯 머릿속에 스비제르스키가 스쳐 지나갔지만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 S가 널 신뢰하긴 하더라. 아마 이 집엔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

 

 

베르닌은 대체 S가 누구인가 하다가 스페호프이겠거니 하고 혼자 깨달았다. 왜 갑자기 도청이니 S니 하는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드미트리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 다닐. 스페호프가 내게 지령을 줬어. 미하일의 공연을 막으라고. 너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네가 감시요원이란 건 너무 잘 알려져 있으니 위험해서 안 된다고 했어. 그러니까 이건 극장 동료나 일반 열성 팬이 꾸민 짓이 아니야. 이건 보안위원회와 연관된 짓이야. 미리 계획된 협박이라고. 그러니까 절대로 이 문제를 공식화해서는 안 돼. 그러면 스페호프의 계획에 넘어가게 되는 거야. 지금까지의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그는 두 가지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어. 첫째, 협박을 공론화함으로써 미하일에게 관객의 위험을 빌미로 공연을 취소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것. 둘째, 미하일이 입을 다물 경우 그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해서 공연을 막는 것. 내가 보기에 미하일의 성격상 절대 이 일을 KGB에 알릴 것 같지는 않아. 그 말은, 자동으로 두 번째 시나리오가 진행된다는 얘기야. ”

 

 

베르닌은 눈을 깜박였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 국장이, 국장이 너한테 지령을 줬다고? 언제? ”

 

“ 어제 아침에. 너 올라오기 직전에. 작전이 진행될 거라고 했어. 그러면 옆에서 도우라고. 걔가 불여우 짓을 해서 빠져나가서 이것도 저것도 안 될지 모르니 곁에서 감시하는 척하면서 도와주라고 했어. ”

 

“ 그러면... 카드, 죽은 새, 유리... 너는 다 알고 있었던 거야? ”

 

“ 아니, 전혀. 자세한 얘기는 하나도 안 해줬어. 기밀이 새어나가면 안 된다고. 작전이 진행되면 나도 알게 될 거라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도와주면 된다고 했어. 아까 오후에 지방 분권 특성 강의 끝나고 나서 국장이 다시 한 번 얘기했어. 스페호프는 정말로 쟤를 미워하더라. 발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쟤가 올린다는 이유만으로 그 신작을 망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아예 공연을 못 올리게 하든지 무대 위에서 엉망으로 만들든지 둘 중 하나를 노리고 있더라고. ”

 

“ 그래서... 그래서 너 나 따라온 거야? 쟤 감시하는 척하면서 방해하려고? 국장 명령에 따라서 공연 망치려고? 그랬던 거야? ”

 

 

베르닌은 배신감과 충격에 젖어서 부들부들 떨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때 드미트리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다닐. 그런 거 아냐. 내가 그랬잖아, 기억 안 나? 나 저 친구 팬이었어. 무대 다 챙겨봤어. 인터뷰 실린 신문이랑 잡지도 다 구했어. 정말 좋아했다고. 그런데 나보고 미하일 야스민의 공연을 방해하라고? 무대를 망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스페호프는 내가 쟤 팬이라는 걸 전혀 몰랐어. 발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니까. 나는 레닌그라드에서 왔어. 레닌그라드 사람에게 키로프가 어떤 의미인지, 그 극장의 주역 무용수가, 그것도 그 무대에서 제일 빛나던 스타가 어떤 의미인지 너희 국장은 결코 알 수 없을 거야. 아마 너도 모를걸. 그건 레닌그라드 팬이 아니면 절대 이해 못해. 그런데 나보고 쟤 공연을 망치라니, 그런 짓은 절대 못해.

나도 알아, 미하일이 나 싫어하는 거. 곁에 있는 것 자체로도 못 견디는 것도. 하지만 스페호프가 그런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계속 옆에 있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누군가는 미하일을 옆에서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뻔뻔스럽게 계속 극장에 간 거야. 중간에서 널 힘들게 만들긴 했지만... 너한테도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미안하지만 솔직히 널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어. 국장이 그렇게도 널 신뢰하고 있으니까. 괜히 어설프게 얘기했다가 미하일한테 더 안 좋게 돌아갈까봐 입 다물고 있었어. 미안하다, 널 못 믿어서. ”

 

 

베르닌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대신 드미트리가 내민 손을 세게 쥐고 흔들었다. 드미트리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지만 곧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 너 총 잘 못 쏜다고 했지? ”

 

“ 응, 사격 시험도 간신히 통과했어. 군대 있을 때도 총 제대로 못 다룬다고 맨날 깨졌어. ”

 

“ 협박범은 분명히 다시 올 거야. 패턴을 놓고 판단한다면 내일 새벽에서 아침 사이에 나타날 것 같아. 미하일의 집으로 올 가능성이 크지만 밖에서 지켜보고 있다면 여기로 올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너랑 내가 나눠서 감시해야 돼.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그 동안 너한테 마카로프 다루는 거 가르쳐줄게. ”

 

 

드미트리는 탄창을 뺀 9밀리 마카로프를 꺼내서 베르닌에게 총 다루는 법을 속성으로 가르쳐 주었다. 베르닌은 드미트리가 지금껏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더 뛰어난 교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0분 만에 베르닌은 그럭저럭 마카로프를 다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 고마워, 이제 좀 알 것 같아. 내가 너무 힘을 줘서 총을 잡았던 거구나. ”

 

“ 응, 이제 그 느낌만 알면 적어도 오발은 안 할 거야. 탄창 채워놔, 안전장치는 걸어놓더라도. 아참, 근데 우리 아침엔 나눠서 보초 서야 하잖아. 누가 위층으로 올라갈지 정하는 게 좋겠다. ”

 

 

베르닌은 망설이지 않고 대꾸했다.

 

 

“ 네가 올라가는 게 낫겠어. 내가 여기 있을게. ”

 

하긴, 너는 현장 경험이 없으니까 위험하겠다. 아무래도 미하일의 집에서 범인과 마주쳐 몸싸움이 일어날 확률이 더 높으니 내가 가는 게 나을지도... ”

 

“ 어, 저... 그게 아니고... 나는 위험한 게 문제가 아니라... 저... 미샤가 아까 그랬거든. 걔가 너 감시꾼이라고 아직 경계하잖아. 그래서... 너 온다니까 자기 자는 동안 옆으로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 저 자식 완전 철딱서니 없어서... 한번 자기 맘에 안 들면 계속 저러거든. 그래도 아까 너무 놀라기도 했고 안 그런 척해도 많이 무서울 거야. 근데 기분까지 상하게 하면 좀 그러니까... 저, 미안해... ”

 

 

드미트리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 그래. 할 수 없지 뭐. 어쩌겠니. 내가 너처럼 인상이 좋은 것도 아니고 착한 것도 아니니... 게다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으니... 괜찮아. 지금 중요한 건 내 우상한테 잘 보이는 게 아니라 그 친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도와주는 거니까. 그럼 나 지금 잠깐 올라갔다 올게. 아까 문단속 다 해놓고 오긴 했는데, 범인이 혹시라도 아침 전에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미리 가서 장치를 좀 해놓고 와야겠어. ”

 

“ 어떤 장치? 지문 남기게 하는 거? ”

 

“ 아니, 그런 건 나도 없어. 근데 거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창문이나 현관문, 옥상 뭐 그런 쪽에 작은 방울 같은 걸 달아놓는 거야. 좀 웃기지만 혹시라도 효과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까 보니까 미하일 서재에 그런 거 있더라고. ”

 

“ 아, 있어. 무대 소품 몇 개 가져왔더라고. 무대 효과 연구해본다고. 얼마나 걸릴 것 같아? ”

 

“ 20분? 걱정하지 마. 금방 다녀올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크게 소리 지르기로 하자. 이 건물은 방음이 잘 안되니까 위에서 소리치면 여기서도 잘 들릴 거야. 정 안되면 공중에 대고 총 쏴. ”

 

“ 알았어, 너도 무슨 일 생기면 총 쏴. 그러면 내가 도와주러 갈게. ”

 

“ 넌 미하일 옆에 있어야 돼. 절대로 쟤 혼자 놔두면 안 돼. 내 걱정은 하지 마. 너희 지부를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여기 현장요원들 중에 그렇게 실력 좋은 사람들은 없는 걸로 알고 있어. 다들 나이도 많고. 그럼 갔다 올게. ”

 

 

드미트리가 다시 위층으로 올라간 후 베르닌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한 손에 권총을 꼭 쥔 채 거실과 부엌 쪽 창문들을 다시 체크했다. 그리고 침실로 갔다. 왕재수는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린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미동도 없이 누워 있어서 깊이 잠든 줄 알고 구겨진 이불을 바로 해주려는데 왕재수가 목쉰 음성으로 속삭였다.

 

 

“ 총 쏘지 마, 다닐. ”

 

“ 어, 너 깼구나. 피곤하다더니. ”

 

“ 그럼 어떻게 자냐, 밖에서 그렇게 두런두런 얘기를 계속 하는데. ”

 

“ 어, 미안해. 문 닫아주고 싶었는데 협박범이 나타날까봐 걱정돼서 그랬어. 이제 조용히 할 테니까 얼른 자. ”

 

“ 총 쏘지 마. ”

 

“ 아, 이거... 그냥 혹시나 해서 가지고 있는 거야. 만약을 대비해서... 너 총 본 적 없겠구나. 괜찮아, 이거 안전장치도 걸어놨어. 무서워하지 마. ”

 

“ 누가 그래, 내가 총 본 적 없다고. ”

 

“ 어, 너 군대 안 갔다 왔잖아. ”

 

“ 그렇다고 본 적 없는 건 아니야. 그리고 여기서 총 쏘면 안 돼. ”

 

“ 만약을 대비한 거라고 했잖아. 그 나쁜 놈이 들어와서 혹시라도 해코지하려고 하면... ”

 

“ 총소리가 얼마나 큰데... 그 소리 나면 경찰이고 너네 KGB고 다 몰려올 거야. 그 즉시 난 보호 대상이 될 거고 너희 국장은 범인 수색을 한답시고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시간을 끌겠지. 그럼 수요일 공연은 물 건너가는 거야. 총 쏘지 마. ”

 

“ 에휴... 너는 이 와중에도 공연 걱정을 하는구나. 지금 상황이 심각하단 말이야. 드미트리가 그러는데 스페호프가... ”

 

“ 나도 들었어. ”

 

“ 아... 들었구나... 그래도 드미트리가 와줘서 다행이야. 우리 둘이 있을 거니까 이제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

 

“ 당연히 아무 일도 없지! 없던 걱정을 네가 만들고 있잖아! 총이나 들고 다니고! 총도 못 쏘면서. ”

 

“ 어, 아니야. 나 그래도 군대랑 요원 연수 때 사격 배웠어. 그리고 방금 드미트리가 가르쳐줘서 이제 잘 쏠 수 있을 것 같아. ”

 

“ 그래봤자... 하여튼 총 치워. 보기 싫어. ”

 

야! 다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건데! 네가 싫어도 할 수 없어! 그리고 드미트리한테도 너무 심하게 대하지 마. 국장 명령도 무시하고 너 도와주러 왔잖아. 지금도 위험을 무릅쓰고 너네 집에 올라가 있단 말이야. ”

 

 

드미트리 얘기를 하자 왕재수의 눈빛이 딱딱하게 변했다.

 

 

“ 그 자식 얘기 하지 마. ”

 

“ 너 정말 왜 그러니. 아까 우리가 얘기하는 것도 들었다면서. 동향 출신에 옛날부터 네 팬이었다잖아. 네 신작 망치지 않게 하려고 저렇게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데. 조금만 잘 해주면 안 돼? 너 팬들한테 친절하잖아. 여자들에게도... 그것처럼 드미트리한테도... ”

 

“ 그 자식이 여자도 아니고... 그리고 나 팬들에게 다 친절하게 군 거 아냐! 맘에 안 드는 놈은 무시했단 말이야! 그 자식은 맘에 안 들어. ”

 

“ 그치만... ”

 

“ 어디서 굴러먹은 놈인지 단추 눈은 또 닮아가지고... 에이... ”

 

 

왕재수는 불만과 짜증을 잔뜩 쏟아낼 기세였지만 베르닌의 표정을 보고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베르닌은 너무나 안타까웠지만 왕재수의 창백하고 갸름한 얼굴을 보니 다시금 심장이 당겨오는 것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 바보. 운도 지지리도 없는 자식. 온갖 잘난 건 다 가지고 태어난 주제에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들어서 맨날 대들고 성깔 부리다가 감옥 가고 혼나고 여기까지 오고. 이상한 협박까지 받고... ’

 

 

침대에 걸터앉자 왕재수는 그가 졸려서 그런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안쪽으로 몸을 움직여 자리를 내주면서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 졸리면 좀 자. ”

 

“ 나 안 졸려. 그리고 네가 누워 있는데 내가 어떻게 여기서 자냐! ”

 

“ 왜 안 돼? 침대도 넓은데. 어차피 할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꼭 안고 잘 것도 아니고. ”

 

어휴, 너란 놈은 정말!

 

“ 지난번에는 안아서 재워줘 놓고. ”

 

“ 야! 그때는 네가 무서운 꿈 꿨다고 하도 울고불고 해서 그런 거 아냐! ”

 

“ 지금도 잠 안 온단 말이야. 너 때문에 깼어. 총 들고 설쳐서. ”

 

“ 그래서 지금 안아서 재워달란 거야? ”

 

아니야! 내가 언제 그랬어! 졸리면 좀 자라는 거야! 안 그래도 너 면도도 안 해서 꾀죄죄해졌는데 잠까지 못 자면 더 형편없어질 거 아니야! ”

 

“ 알았어, 졸리면 나도 잠깐 잘게. 드미트리 오면 교대로 눈 붙이면 되지 뭐. 그러니까 내 걱정하지 말고 어서 자. 그래야 힘내서 공연도 잘 치러내지. ”

 

 

왕재수는 잠이 안 온다던 말과는 달리 이미 눈꺼풀이 반쯤 감겨 있었다.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 있던 손이 탁 소리를 내며 베개 위로 떨어졌다. 그렇게 자면 나중에 팔이 저릴 것 같아서 손목을 잡아 이불 속으로 집어넣어주려는데 왕재수가 눈을 감은 채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 그 비둘기... 버렸어? ”

 

“ 어... 아니. 드미트리가 그거 증거물이라고 함부로 두면 안 된다고 해서 너희 집 냉장고에 넣어놨어. 저... 내가 나중에 다 치워줄게. 소독약으로 깨끗하게 닦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

 

“ 비둘기 불쌍해... 날개도 막 부러뜨리고... 나쁜 놈. ”

 

 

왕재수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베르닌에게 잡혀 있는 손 대신 반대편 손을 들어 올려 눈을 문질렀다 뗐다. 그리고는 잘 들리지도 않는 딸꾹질을 한 번 하더니 머뭇거리며 속삭였다.

 

 

“ 다닐... 그 비둘기... 나 때문에 죽은 거야? ”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왕재수의 손목을 꽉 쥐었다. 어쩐지 떨려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

 

“ 나 보여주려고... 그래서 새 잡아서 죽이고, 날개 부러뜨리고... 비둘기 잘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나 때문에... ”

 

 

왕재수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베개와 머리칼에 가려져서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숨소리가 불규칙해지면서 빨라졌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권총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왼손으로는 여전히 왕재수의 손을 쥔 채 오른손으로 그의 어깨를 가만히 쓸었다.

 

 

“ 아니야, 미셴카. 너 때문에 죽은 거 아니야. 그냥 그놈이 나쁜 놈인 거야. 그리고 원래부터 죽은 비둘기였을 거야. 사고로 죽은 새를 주워서 가져다 놓은 거야. 그러니까 잊어버려. 다른 생각해. ”

 

“ 다른 생각이 안 들어. ”

 

“ 그러면 좋은 거 생각해봐. 로만. 꼭 안아주면 좋다면서. 아니면, 음... 파인애플이라든가. ”

 

“ 바보, 파인애플은 아플 때 생각나는 건데. ”

 

 

왕재수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속눈썹 끝이 약간 젖어 있었지만 숨소리는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동안 침묵한 끝에 왕재수가 졸음에 취해 무거워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비둘기... 묻어줘. ”

 

“ 그래, 알았어. ”

 

“ 깊이 묻어줘야 돼. 안 그러면 개가 와서 파헤치니까. ”

 

“ 짐승 싫다면서 어떻게 그런 건 또 아니? ”

 

“ 다 알아... 그때 읽었어, 네가 빌려온 책. 멍멍이 와 있었을 때. ”

 

“ 아, 벨라 말이구나. 아니, 뜨보록. 그 녀석 잘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네. 보고 싶다. 너도 보고 싶지? ”

 

“ 내가 왜... 아무짝에 쓸모없는 멍멍이... ”

 

 

왕재수가 잠꼬대하듯 투덜대더니 곧 조용해졌다. 다시 잠든 것 같았다. 베르닌은 무릎에 권총을 얹어 놓은 채로 왕재수의 손을 꼭 잡고 밝은 형광등 불빛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방울을 달러 간 드미트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FIN

- 2015. 8. 16 ~ 8. 25 -

 

 ...

 

과연 세번째 협박 카드가 날아올 것인가~~ 그건 다음주 32편에서~

 

..

 

맨끝에서 벨라, 뜨보록으로 불리는 멍멍이는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코트', '10. 벨라 등장!',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에 등장한 하얀 강아지이다 :)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시간이 참 빨리도 지나간다. 어느덧 금요일. 서무의 슬픔 31편이다.

 

31편은 지난주에 올렸던 30편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이 친구가 나오는 이야기는 조금 길어져서 아마 32편까지 3부작으로 진행될 것 같다. 일명 우수한 단추 3부작(ㅋㅋ)이라 해야 하나. 지금은 32편을 쓰고 있는데 분량상 이게 33편까지 이어지면 4부작이 될지도...

 

원래 서무 시리즈는 1개 에피소드로 완결되는 구조가 대부분이고 뜨보록이 등장했을 때나 하를람피 에피소드, 독사과 에피소드 등 몇가지만 2~3개로 구성되었다. 가능하면 1개로 완결되는 구조를 선호하는데 이번 우수한 단추 얘기는 애초 설정 자체가 짧게는 안 끝나서..

 

31편은 원래는 한번에 올리려고 했으나 쓰다 보니 분량이 꽤 길어서 1부와 2부로 나누어 올리게 되었다. 내용이나 분위기 상으로도 좀 구분되는 편이라서 나눠 올리는 건 문제가 없고..

그냥 이걸 31, 32편으로 나눌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구조상 1,2부가 이어져 있어 편을 나누기에는 어려울 것 같아 그냥 1,2부로 올린다. 2부는 다음주에~ 하긴 차라리 다행이네. 아직 32편은 앞부분만 쓰고 있어서 ㅎㅎ

 

하여튼 31편, 1부~ 재밌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왕재수의 신작 발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목요일, 베르닌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왕재수는 드미트리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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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1

 

 

 

 

서무의 슬픔

-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 (1부) -

 

 

 

 

 

 

 

 

아침 일찍 왕재수를 극장에 데려다주고 사무실에 출근했을 때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드미트리가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타이프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어, 너 일찍 왔구나. 아직 여덟시 밖에 안 됐는데. ”

 

“ 응, 나 원래 일찍 일어나거든. 강변 따라 조깅했는데도 시간이 남아서 그냥 출근했어. 오늘도 오후에 극장 가야 하니까 서류 작업할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아서. ”

 

“ 엥? 너는 서류 작업 할 거 없는데... ”

 

“ 네 서무 업무 말이야. 내가 어제 세부 목표를 설정했잖아. 서무 업무의 효율성 제고! 내가 정리 좀 해봤어. 이제껏 너한테 부당하게 몰려 있던 작업들을 업무분장표에 의거해서 너희 감시분석부 사람들에게 분담했어.

일단 어제 발따예프가 너에게 떠넘기려고 했던 것과 같은 내외부 요구자료 제출 건인데, 이것은 각 업무별 담당자가 1차로 작성한 후 너에게 제출하면 너는 수합한 후 오타나 제출 형식만 점검해서 최종 제출만 하면 되는 거야. 네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자료를 찾고 만들어내는 건 한 마디로 시간 낭비지.

그리고 어제 보니까 직원들의 출근기록부부터 시작해서 휴가원 제출, 출장명령서와 보고서 작성 제출, 심지어 초과근무 기록부까지 네가 다 쓰고 있더라. 그거 인사규정 위반이야. 이것들도 다 당사자가 적고 너는 관리만 하는 것으로 바꿨어.

같은 맥락으로 업무추진비 정산도 마찬가지야. 부서 전체 업무추진비야 서무가 관리한다고 쳐. 하지만 부서장 업무추진비까지 네가 정산해줘서는 안되지! 그건 당연히 감시분석부장이 직접 해야 돼. 그리고 사업별 업무추진비까지 네가 다 정산을 하더라! 그러니까 네 일이 그렇게 많지. 사업별로 쓰는 돈은 당연히 개별 담당자가 내역을 적고 정산을 하는 게 맞아.

그리고 당직실 시계 건전지 교체, 공유지 배추 관리, 표지판 페인트칠 따위를 왜 서무가 하냐. 시설 관리책임자가 있고 수위도 있잖아. 그 업무를 하면서 월급을 받는 건데 왜 그걸 다 서무에게 떠넘겨.

하여튼 내가 다 추려봤어. 이 자료의 1번을 보렴. 이것은 현재 너에게 업무가 집중됨으로써 나타나는 문제점 분석이야. 현황 분석만 있는 게 아니라 아까 얘기한대로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하나하나 다 지적되어 있지. 2번은 개선 방향이야. 요지는 실제 담당자들에게 개별 업무를 분담함으로써 효율성을 도모하자는 것이지. 3번이 개선 후 적용방안이야. 각 업무가 누구누구에게 재분배되는지 적었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으니 누가 봐도 이해가 쉬울 거야. ”

 

 

베르닌은 다섯 장짜리 자료를 뒤적거렸다. 완벽한 논리와 형식으로 구성된 보고서였다. 용어와 문장 등 어느 하나 부족한 점이 없었다. 스페호프가 항상 강조하는 행정의 기본이 훌륭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베르닌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면서 뱃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 저, 드미트리... 이거 진짜 훌륭한 보고서야. 개선방안도 좋고. 근데 있잖아... 나도 이 내용에는 100퍼센트 동의하거든. 근데 문제는... 내가 우리 부서 막내야. 회사 전체에서도 공채 중에는 막내거든... 그래서 말인데... 이거 보면 우리 부장이랑 선배들이 화낼 거야. 그리고 국장도 야단을... ”

 

“ 에이,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하는 거야. 누가 봐도 이 보고서 내용이 사실인데 어떻게 반박하니. 그리고 설령 선배들이 화를 낸다 해도 그런 게 두려워서 잘못된 걸 그대로 방치하면 안 되지. 이건 네가 격무에 시달리는 개인적 문제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야. 조직 발전에 엄청나게 저해되는 일이라고. 효율성을 모두 갉아먹고 직원들의 책임감과 윤리의식도 하락시켜서 결국은 조직이 쇠퇴하게 돼. 여기는 본부도 아니고 지역 소도시잖아. 작지만 강한 조직이 되지 않으면 도태되고 말 거야. 국장에게도 그런 식으로 어필을 하면 이해할 거야. ”

 

“ 아니, 그게... 너는 아직 우리 국장을 잘 몰라서 그래... ”

 

“ 괜찮아, 너는 그냥 있어. 내가 다 설명할게. ”

 

“ 어... 그게... 이거 있잖아, 그러면 나 줘. 내가 분위기 봐서... ”

 

 

베르닌은 일단 드미트리가 만든 보고서를 책상 한쪽에 치워두었다. 드미트리는 고집을 부리는 대신 또 다른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 참, 이것도 봐줄래? ”

 

“ 이건 뭐야? ”

 

“ 아, 야스민 감시 보고서. 어제 너 늦게까지 걔 집에 데려다주느라 시간 없었을 것 같아서 내가 예전 보고서들 보면서 얼추 비슷한 형식으로 정리했어. 수정 보완할 거 있는지 좀 봐줘. ”

 

“ 어, 으응... 너 진짜 손이 빠르구나. 아침에 와서 이걸 다 했단 말이야? ”

 

“ 뭘, 이쯤이야. 해외에 있을 땐 외국어로 된 거 번역까지 해서 올렸는걸. ”

 

 

베르닌은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적당하게 요약되어 있었다. 검열국장과 왕재수의 충돌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내용은 모두 들어가 있었지만 거친 언사들은 순화되어 있었고 예산 및 상부 지침에 대한 설명에 따라 검열국장이 지적을 철회했다는 결론으로 끝났다. 베르닌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아, 굉장히 간결하고 보기 쉽게 작성했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 ”

 

“ 응. 극장에서야 같이 있었으니까 괜찮은데, 도청 테이프는 접근불가라고 해서 귀가 후의 일은 못 적었어. 뭐 네가 같이 있었으니까 그것까지야 내가 안 적어도 되겠지. 근데 밤에는 별 일 없었니? ”

 

“ 뭐가? ”

 

“ 아, 어제 말이야. 네가 야스민 데려다줬잖아. 그 친구 어제 심기가 안 좋았잖니. 아참, 그리고... ”

 

“ 응? 그리고 뭐? ”

 

“ 카체리나한테 들었는데 너 걔랑 그런 관계라고... 미처 몰랐네. 혹시라도 내가 어제 실수한 거 있으면 용서해. ”

 

“ 앗, 뭐가 그런 관계라는 거야! 국장이 나한테 걔 감시하라고 같은 아파트로 이사하게 시킨 거라니까! ”

 

“ 그러니까... 집은 아래층이지만 실은 한집에 살고 있고... 아침 저녁 밤으로 해주고... 나 너 다시 봤어. 진짜 감탄했어! 제 아무리 나라도 하루에 세 번을 그것도 매일은 불가능할 것 같은데... 와, 너 진짜 대단해. ”

 

으악! 아니야! 그거 아니야! 아악...

 

 

베르닌은 펄쩍 뛰었다.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거 다 오해야! 아니란 말이야!

 

“ 하지만 야스민이 직접 국장에게 그렇게 얘기했다고... 그리고 너하고 그 친구가 당직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걸 다른 부서 직원이 목격했다고... ”

 

“ 아니야! 그건 다 오해야. 당직실에서는 걔가 바퀴벌레 곱등이를 보고 기절해서 인공호흡해준 거라고! 국장한테 그렇게 얘기한 건... 그 자식이 내가 너무 일 많다고 힘들어하니까 제 딴에 도와준다고 가서 뻥친 거란 말이야! 진짜 아니야! ”

 

“ 정말? ”

 

“ 진짜 아니야... 제발 너라도 믿어줘. 나 진짜 못살겠다. 장가도 안 갔는데 이게 뭐야... ”

 

“ 흐음... 그럼 다행이고. ”

 

“ 다행이고 뭐고 진짜 아니야. ”

 

“ 그렇구나. 어제 보니까 너랑 야스민이 굉장히 친해 보여서 난 카체리나가 그 얘기했을 때 금방 믿었는데. 아니었구나. 미안하다, 오해해서. ”

 

“ 아니야, 다들 그렇게 믿고 있는데 뭐. 에휴, 내 팔자야... ”

 

“ 그러면 야스민은 애인이 없어? 내가 알기로는 그 친구는 여자랑은 안 사귀는 취향이라서... ”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 너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아? ”

 

“ 나 본부에 있었다니까. 파리랑 런던에도 있었다고 했잖아. 몇 년 전에 런던 페스티벌 때도 스비제르스키 의원이 직접 데리고 왔었는걸. ”

 

 

베르닌은 눈 색깔 다른 남자가 떠올라서 자기도 모르게 등줄기가 오싹했지만 고개를 휘휘 저어 무서운 기억을 떨쳐냈다.

 

 

“ 아, 그, 그렇구나... 그래도 여기는 보수적인 동네니까 그런 얘긴 가급적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

 

“ 흠, 하긴 그렇지.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에서도 그런 거 발각되면 큰 문제니까... 가브릴로프는 더 보수적이니 여기서는 그 친구도 함부로 애인 같은 건 안 만들었겠구나. 보고서에도 그런 건 없더라고. ”

 

“ 으, 으응... 여기서는 극장 일이 너무 바쁘니까 그런 거 신경 쓸 여력이 전혀 없는 것 같더라고. 수용소 후유증 때문에 자주 아프기도 하니까... ”

 

 

베르닌은 코즐로프에 대한 정보까지 드미트리가 알고 있을까봐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드미트리는 왕재수에게 적대적인 것 같지도 않았고 그의 성향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비판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왕재수가 항상 코즐로프가 잡혀갈까봐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끝까지 비밀로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일을 시작하려니 머리도 무겁고 졸음이 가시지 않아서 베르닌은 탕비실로 갔다. 찻물을 올려놓고 티백을 찾고 있는데 뒤따라온 드미트리가 꼬부랑글씨가 씌어 있는 예쁜 티백을 내밀었다.

 

 

“ 이거 마셔봐. 향도 좋고 잠도 잘 깨고 괜찮아. 파리에서 사온 거야. ”

 

“ 어, 그래. 고맙다. 저, 나는 그냥 잠만 깨면 되니까 아무 거나 마셔도 되거든. 이건 그 녀석 갖다 줘야겠어. 차를 좋아하더라고... ”

 

 

티백을 호주머니에 넣으려는데 드미트리가 웃었다.

 

 

“ 아, 야스민 말이야? 나 이거 많아. 한 통 챙겨 줄 테니까 이건 너 마셔. ”

 

“ 하지만 이거 비싸고 좋은 거잖아. ”

 

“ 에이, 아니야. 파리에서는 아침마다 마시던 거야. 이 마카롱이랑 먹으면 잘 어울리더라. ”

 

 

베르닌은 드미트리가 종이 접시에 올려놓은 분홍색연두색의 동그랗고 통통한 과자를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이게 뭐야? ”

 

“ 마카롱. 프랑스 과자야. 계란 흰자와 아몬드 가루로 굽는 건데 가운데에는 맛있는 크림이 있어. ”

 

“ 아... 되게 예쁘다. ”

 

“ 먹어봐, 맛도 좋아. ”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분홍색 과자를 한 개 집어서 입에 넣었다. 혀에 닿는 순간 사르르 녹았다.

 

 

와, 진짜 맛있다! 나 이런 거 처음 먹어봐. ”

 

“ 응, 우리 나라에서는 이렇게 섬세한 과자는 잘 안 만드니까. 차랑 먹으면 더 맛있어. 자리에 가서 먹자. ”

 

“ 아... ”

 

 

베르닌은 다시금 왕재수 생각이 났다. 접시를 든 채 멈칫했다.

 

 

걔도 파리에 갔었는데. 외국 음식도 잘 먹고. 불어 잡지도 읽고. 이건 너무 달아서 안 먹으려나... 그래도 잘 나가던 시절 생각나서 좋아하지 않을까? ’

 

 

그의 마음을 읽은 듯 드미트리가 납작하고 예쁜 깡통을 보여주었다.

 

 

“ 다닐, 이거 열두 개짜리 세트야. 지금 먹고 남은 건 극장 가져가서 티타임 때 같이 먹으면 될 것 같아. ”

 

“ 으, 으응. 배려해줘서 고마워. ”

 

“ 너 야스민이랑 그런 관계 아니라더니 많이 챙기는구나. ”

 

“ 아니, 그게... 그 녀석이 너무 입맛도 까다로운 데다 여기 와서는 계속 아프기만 하니까 좀 신경이 쓰여서... 저, 걔가 어제 검열 때문에 열 받아서 너한테 많이 틱틱거리긴 했지만 나쁜 애는 아니야. 철은 없지만 마음씨도 착하고, 가만 보면 진짜 애기 같아. 잘 나가다가 여기 와서 조그만 극장 살려보겠다고 무진장 애쓰는 거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

 

“ 흠. 근데 걔도 너를 엄청 따르는 것 같던데. ”

 

“ 그게 아니고 날 집사 취급하는 거야! 살림도 다 해주니까... ”

 

“ 어제도 네가 주는 건 잘 먹던데. 다른 사람 말은 잘 안 듣는데 네가 한 마디 하니까 듣고. 재킷 걸치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

 

“ 아니야, 그 자식 남의 말 절대 안 들어. 아휴, 걔 때문에 내가 못 살아... 고집불통. ”

 

 

드미트리는 쿡쿡 웃었고 베르닌과 함께 자리로 돌아와서 마카롱을 곁들여 차를 마셨다. 그리고는 밀려 있던 서류철 정리를 도와주었다. 드미트리는 손이 굉장히 빠르고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도 능해서 금방 끝났다. 그 후에도 자질구레한 업무들을 도와서 순식간에 해치웠다. 한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 붙어있는 기분이었다. 베르닌은 너무 행복했다. 드미트리가 모스크바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오후에 베르닌은 먼저 극장으로 갔다. 드미트리는 스페호프에게 ‘보안위원회 지방 분권의 특성에 대한 강의를 듣고 따라오기로 했다. 베르닌도 입사 후 3개월 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 국장에게서 각종 행정 이론과 이념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나마 드미트리는 오후 2시부터 한 시간만 듣는다니 다행이었다. 베르닌은 퇴근 시간 후인 오후 7시부터 3시간씩 연강을 들었고 숙제도 잔뜩 받았었으니까.

 

 

왕재수는 전날보다는 기분이 괜찮은 것 같았다. 문외한인 베르닌의 눈에도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훨씬 자연스러워진 것처럼 보였다. 왕재수는 연습실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연이 겨우 5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준비할 것이 굉장히 많은 듯했다. 돈키호테 때와는 다르게 관계자들과 미팅도 많은 듯 접견실에도 여러 번 들락거렸다. 극장장과도 30분 정도 열띤 이야기를 나눴고 지휘자에게도 6개의 음악을 어떤 식으로 연결해야 하는지를 놓고 그답지 않게 굉장히 참을성 있는 태도로 설명을 계속했다. 나이든 지휘자가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생기면 즉각 코즐로프에게 부가 설명을 부탁하기까지 했다.

 

 

지휘자와의 미팅을 마친 왕재수가 감독실로 돌아오더니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서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 류다, 차 좀 줄 수 있어요? ”

 

“ 류다 조금 전에 의상 디자이너랑 얘기할 거 있다고 내려갔어. 네가 시킨 거라면서. ”

 

“ 아, 맞다. 빨강 하양 바뀐 거... 에이... 머리 아파서 차 한 잔만 마시고 가려고 했더니... 차이카 가기 싫은데. ”

 

“ 내가 우려 줄게. 좀 쉬어라. 오늘도 일찍 나오고. 점심은 먹었냐? ”

 

“ 먹었어. 류다가 생선완자 가져다 줬어. 기름기 줄줄... 느끼하고 짜고... ”

 

“ 넌 기름기 좀 먹어야 돼! ”

 

 

베르닌은 찻물을 끓였다. 드미트리가 준 티백을 담가서 차를 우렸다. 향긋한 냄새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깡통을 열어서 분홍색 연두색 하늘색의 동그랗고 예쁜 마카롱을 다섯 개 꺼내 접시에 얹었다. 찻잔에 차를 따른 후 쟁반을 들고 소파로 가서 테이블에 놓아 주었다.

 

 

“ 자, 차 마시고 기운 좀 차려. ”

 

“ 아, 이거 무슨 차야? 향 진짜 좋다. 옛날 생각나는 냄새야. ”

 

 

눈을 감고 누워 있던 왕재수가 나른한 음성으로 종알거렸다.

 

 

“ 옛날 생각? ”

 

“ 응, 레닌그라드에 있을 때 나 후원해주던 엄청 잘 나가는 누님이 있었는데, 인민영웅 미망인에 완전 대단한 노멘클라투라였거든. 나한테 어울리는 향수도 주문 제작해주고 프랑스 홍차랑 근사한 옷도 자주 갖다 줬어. 그래서 아침마다 그 차 마셨거든. 근데 그 향이랑 너무 비슷해. ”

 

“ 아, 그렇구나. 차 마셔봐. ”

 

 

왕재수는 몸을 일으켰다. 찻잔을 들고 향을 음미한 후 차를 마시려다 접시에 놓여 있는 예쁜 과자들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마카롱이잖아. 어떻게 이 동네에 마카롱이 있지? 렐랴가 주고 갔나? ”

 

“ 아, 넌 이거 뭔지 아는구나! ”

 

“ 당연히 알지. 이것도 그 누님이 가끔 갖다 줬었어. 파리에서 공연할 때도 가끔 먹었고. ”

 

“ 너 단 걸 다 안 먹는 건 아니었구나. 고급 과자는 먹는구나! ”

 

“ 응, 이건 맛있으니까. 그래도 꾹 참고 딱 한 개씩만 먹었어. 진짜 옛날 생각나네. ”

 

 

왕재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가만히 눈을 감더니 방긋 웃었다. 이따금 왕재수는 차를 마시고 무가당 초콜릿 캔디를 먹고 기분이 좋아지면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므로 베르닌은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왕재수가 조그맣게 흥얼대는 노래 듣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때 왕재수가 하늘색 마카롱에 손을 뻗다가 멈칫하며 물었다.

 

 

“ 근데 이거 어디서 난 거야? ”

 

“ 아, 이거. 드미트리가 가져온 거야. 파리에 있는 우리 대사관에서 근무했다고. 차도 프랑스 거 맞아. 너 주라고 아까 챙겨줬어. ”

 

“ 뭐? 그 자식 아직도 안 갔어? ”

 

“ 응, 일주일 연수라고 했잖아. ”

 

“ 쳇. ”

 

 

왕재수는 마카롱 접시에서 손을 뗐다. 찻잔도 테이블 위에 탁 소리를 내며 내려놓더니 벌떡 일어섰다.

 

 

“ 나 연습실 갈 거야. ”

 

“ 어, 왜 차 안 마셔? 마카롱도 좋아한다면서. 먹고 가. ”

 

“ 안 먹어, 그 재수 없는 자식이 가져온 거라며! ”

 

“ 너 왜 그래. 드미트리 착해. 오늘도 나 엄청 도와줬어. 서무 업무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보고서도 써 주고, 서류철도 다 정리해주고 밀려 있던 일도 같이 다 해치웠어. 너 외국물 먹었다고 일부러 이것들도 챙겨다 준건데 왜 그렇게 걔를 미워하고 그러니. ”

 

“ 그냥 싫어. 보기만 해도 구역질나. ”

 

“ 야! 너무하잖아! 걔랑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 걔 보고 구역질나면 나 보고도 그렇다는 거 아니야! ”

 

“ 아니야! 너랑 다르다고 했잖아! 그리고 너랑 똑같이 생겨도 마찬가지야! 그 자식은 구역질난단 말이야! 더러운 KGB 나부랭이에 재수 없는 놈이야! 잘난척하는 말투부터 시작해서 쳐다보는 눈초리까지 다 싫다고! ”

 

“ 너 어쩌면 그러냐. 잘난 척이라니, 네 말투는 생각 안하냐! 너에 비하면 드미트리는 엄청 겸손한데. 너한테도 엄청 예의바르게 대하던데. 나 같으면 너 벌써 한 대 쥐어박았어! ”

 

“ 어휴, 사람 볼 줄 모르는 녀석... 그러니까 책상물림이지! 바보 멍충이! ”

 

“ 여기서 왜 바보 멍충이가 나오는데! 그래, 나 바보 멍충이야. 근데 걘 아니란 말이야! 완전 똑똑하고 엘리트에... ”

 

누가 뭐래! 난 완전 똑똑하고 엘리트인 놈 싫다고! 재수 없다고! 바보 멍충이가 낫다고 했잖아!

 

 

왕재수가 발칵 화를 냈다. 얼굴이 빨개지더니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감독실을 뛰쳐나가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왜 그러나 싶어서 뒤따라간 베르닌은 문 앞에 서 있는 드미트리를 발견하고 크게 당황했다. 아무래도 전부 다 들은 것 같았다. 어떡하지 하고 베르닌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드미트리가 왕재수에게 굉장히 상냥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제가 아무래도 어제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한 적이 있나 보군요. 기분 나쁘게 해드린 점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존경하는 예술가를 실제로 만나게 되니 흥분해서 그랬나봅니다. ”

 

 

왕재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완전히 무시하고 휙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그 돼먹지 못한 태도에 큰 충격을 받았다. 쫓아나가 피가 나도록 두들겨 패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대신 드미트리에게 사과했다.

 

 

“ 저, 미안해. 많이 기분 나빴겠다. 나도 쟤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싸가지 없긴 해도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저러지는 않았는데. 신작 준비 때문에 너무 예민해져 있어서 그런가봐. ”

 

“ 아니야, 다닐. 왜 네가 사과하니.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나 변호해주는 거 들었어.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괜히 나 때문에 불편하게 됐잖아. 너는 미하일이랑 친한데... ”

 

아니야! 그 싸가지 없는 꼬맹이 자식! 너는 이렇게 좋은 친군데 왜 사람을 몰라보고 그 난리를 치는지 이해가 안 가! 게다가, 게다가 너랑 나랑 이렇게 얼굴까지 닮았는데 그렇게 못되게 굴다니! 내 일도 많이 도와줬다고까지 했는데! 하여튼 자기밖에 모르는 놈에 변덕이 죽 끓는 자식이라니까! 어휴, 어디서 저런 성깔을 얻어왔는지... 너도 저 자식한테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 그냥 멀찍이 떨어져 있어라. 아니면 있다가 공연이나 보고 다른 거 하고 놀아. 국장한테는 내가 대충 보고서 써서 올려줄게. 저 자식 비위맞추다가 너 심장마비 걸리겠다. ”

 

 

드미트리는 소리 내어 웃었다.

 

 

“ 하하, 괜찮아. 우린 KGB니까 어쩔 수 없잖아. 앞잡이 취급받는 거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닌데 뭐. 특히 예술가들은 우리 엄청 싫어하잖아. 게다가 미하일은 어릴 때부터 KGB 감시를 많이 받았고 체포돼서 죽을 뻔 했으니까 그럴 만도 하겠지. 난 오히려 미하일이 너한테는 살갑게 구는 게 신기한걸. 널 진짜 좋아하나봐. ”

 

“ 아까 나보고 하는 소리 안 들었냐! 책상물림에 바보 멍충이라고... 아, 진짜 성질 더러운 녀석이라니까. ”

 

 

베르닌은 한숨을 푹 쉬었다.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왕재수가 드미트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다지만 저렇게 대놓고 적대감을 표시하니 너무나 난감했다. 그리고 드미트리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왕재수가 그럴만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고 더욱더 감복했다. 동갑내기 친구이지만 업무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배울 게 많다고 생각했다.

 

 

 

그날 드미트리는 그냥 다른 데 가서 놀라는 베르닌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왕재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연습실에서도 베르닌의 뒤에 선 채 가능한 한 왕재수의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리허설을 지켜보았다. 그날은 발레 공연이 있어서 왕재수는 언제나처럼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슬며시 밖에 나갔다가 가볍게 집어먹을 수 있는 조그만 샌드위치들과 초코바, 과일들이 가득한 바구니를 가져왔고 베르닌의 손에 쥐어주었다.

 

 

“ 이거 네가 갖다 줘. 내가 가져왔다는 말 하지 말고. ”

 

“ 어, 하지만... 이거 또 비싸고 좋은 거 아니야? ”

 

“ 아니야. 사실은 내가 어제처럼 맛있는 거 싸오긴 했는데 미하일이 내가 가져온 건 싫어하니까... 이건 그냥 학교 앞 카페에서 사온 거야. 네가 가져온 것처럼 하면 먹겠지. 무용수들이야 무대 올라가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 치지만 쟨 정말 조금이라도 먹여야겠더라. 네가 왜 그렇게 쟤 밥을 챙기는지 좀 알겠어. 레닌그라드에서 봤을 때는 안 그랬는데, 몸매도 훨씬 근육질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말랐네, 그래도 멋있긴 하지만 인형처럼 야윈 걸 보니까 어쩐지 마음이 안 좋아. ”

 

“ 아, 어... 너 정말 착하다. 저 자식이 그렇게까지 못되게 구는데도 안쓰러워하고... 먹을 것까지 챙겨오고. ”

 

“ 그게, 감시 대상으로 알기 전부터 팬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나봐. 네가 부럽다. 나도 미하일하고 그렇게 친하면 좋을 텐데. 하긴 일주일밖에 안 있으면서 그런 걸 바란 게 잘못이지 뭐. 얼른 그거 갖다 주렴. 조금 있으면 그나마도 시간 없어서 못 먹겠다. 난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오늘 백조의 호수라며. 기대되네. 난 백스테이지 말고 그냥 관객석에서 볼게. 그러면 미하일 눈에도 안 띄겠지. 공연 끝나면 먼저 들어갈게. 너 설마 내일도 출근하니? ”

 

“ 아, 아니... 출근은 안 하는데 극장에는 나올 거야. 신작 발표 때까지는 저 녀석 옆에 계속 있어야 하거든. 토요일에도 쟤는 10시면 나와. ”

 

“ 응, 그래. 그럼 나도 10시까지 올게. 내일 보자. ”

 

 

 

드미트리가 나가고 나서 베르닌은 바구니를 들고 왕재수에게 갔다.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무용수들은 모두 분장실로 이동한 후였다. 왕재수는 연습실의 마룻바닥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요즘 그는 중간 중간 틈만 나면 소파든 어디든 누워서 잠깐씩 눈을 붙이곤 했다. 하긴 밤늦게 들어오는데다 아침에도 일찍 나가니 잠이 모자랄 법도 했다.

 

 

베르닌은 바구니를 내려놓고 왕재수 곁에 쭈그려 앉았다. 드미트리에게 못되게 군 것 때문에 화가 나 있었지만 딱딱한 마룻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서 금세 잠들어버린 왕재수의 해쓱하고 어린애 같은 얼굴을 보니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면서 마음이 약해졌다.

 

 

“ 어휴, 고집쟁이. 굳이 이렇게까지 아등바등 노력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다고. 어차피 대단한 놈이니까 조금만 보여줘도 다들 천재라고 감탄하는데 왜 이렇게 죽어라고 하는 거야... 진짜 예술가인지 뭔지 하는 놈들 이해 안가... 미련하게 자기 몸 다 축나는 것도 모르고... 나보고 바보 멍충이라고 하면서 알고 보면 자기가 백배 더 바보 멍충이라니까. ”

 

 

왕재수가 몸을 뒤척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혹시 자기 넋두리를 들었나 싶어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몸을 살짝 웅크리더니 쌕쌕 소리를 내며 더욱 곤하게 잠들었다. 이따금 움찔거리는 것을 보니 꿈까지 꾸는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뭐라도 먹여야 할 것 같긴 했지만 잠깐이라도 단잠을 자게 해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대신 이마와 뺨 언저리로 흘러내린 머리카락만 쓸어 올려 주었다. 바닥이 딱딱해서 나중에 몸이 쑤시겠다 싶어서 재킷도 둘둘 말아 왕재수의 어깨와 등 아래에 밀어 넣어 주었다. 그러다가 또 춥겠다 싶어서 구석에 굴러다니던 커다란 타월을 가져와서 몸을 반쯤 덮어 주었다.

 

 

왕재수는 15분쯤 후 깨어났다. 무의식적으로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이 진짜 고양이처럼 보였다. 눈을 깜박이며 잠시 멍해져 있다가 주섬주섬 타월과 재킷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일어나 앉았다. 옆에 앉아 있는 베르닌을 쳐다보더니 깜짝 놀라며 물었다.

 

 

“ 지금 몇 시야? ”

 

“ 6시 40분이야. 아직 시간 있어. 조금 더 자라. ”

 

“ 아니야, 작은 백조 춤 때문에 오케스트라 쪽이랑 얘기할 거 있어. 10분만 앉아 있다 가야겠다. 잠 좀 깨고. 너무 졸려. ”

 

“ 이것 좀 먹어. ”

 

 

베르닌이 바구니를 내밀었다. 왕재수는 바구니를 힐끗 보았지만 손을 뻗지는 않았다.

 

 

“ 왜 안 먹니, 생선완자 먹은 지가 언젠데. 배도 다 꺼졌을 텐데. 오늘도 공연 끝나면 늦을 텐데. ”

 

“ 이것도 그 자식이 가져온 거잖아! ”

 

“ 아, 아니야. 이거 내가 사온 거야. 대학교 앞 카페에서 사왔어. ”

 

“ 어쨌든 안 먹을래. 별로 먹고 싶지 않아.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짐승 같은 감각을 가진 놈이니 냄새를 맡았든지 어쨌든지 드미트리가 사온 음식이란 걸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가방을 뒤져보니 갱지로 둘둘 말려서 납작해지고 속이 다 삐져나온 양배추 롤이 하나 나왔다. 아침에 왕재수를 데려다 준 후 시장에서 사먹었던 게 생각났다.

 

 

“ 이거라도 먹어, 그럼. 먹던 거 아니야. 세 개짜리였는데 두 개 먹고 하나 남은 거야. ”

 

 

왕재수는 잠자코 양배추 롤을 받아들었다. 다 식어빠지고 곤죽이 된 양배추 롤을 세 입 만에 먹어치웠다. 그리고는 오케스트라 연습실로 갔다. 베르닌도 뒤따라갔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백스테이지에 함께 있었다.

 

 

 

 

 

*  *  *

 

 

 

 

 

 

공연이 끝난 후 베르닌은 극장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드미트리는 보이지 않았다. 커튼 콜 때 나간 것 같았다. 카체리나와 데이트를 하러 갔을지도 몰랐다. 왕재수는 무대에 올라갔던 무용수들을 격려하면서도 몇 가지 지적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는 모두에게 토요일 휴가를 주었다.

 

 

“ 어, 그치만 내일도 나와서 연습하고 싶어요... ”

 

“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수요일에 제대로 된 무대 보여주려면 하루쯤은 휴식을 취하는 편이 나아. 그리고 내일 극장 전체 소독하고 페인트칠 다시 한다니까 어차피 연습실도 못 쓰고 아무 것도 못해. 그러니까 내일은 다들 푹 쉬어. 쉰다고 술 퍼마시면 절대 안 돼! ”

 

“ 그래서 내일 공연이 없는 거였구나... ”

 

 

베르닌은 혼잣말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참 다행이었다.

 

 

 

왕재수는 무용수들이 모두 돌아갈 때까지 남아 있었다. 발레 배경 철수와 청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텅 빈 무대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았다. 신작 공연의 동선을 체크하는 것 같아서 베르닌은 묵묵히 기다렸다. 하지만 왕재수는 무대 한가운데로 걸어 나가더니 멈춰선 채 불 꺼진 관객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족히 5분 가까이 그러고 있었다. 베르닌은 돈키호테 무대가 생각났다. 멈출 줄 모르던 함성과 갈채도. 휘파람과 비명과 꽃다발도. 다시 춤을 추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용소 후유증 때문에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 어려운건가 싶다가도 바질을 추던 모습이나 이따금 코즐로프의 연주에 맞춰 혼자서 춤을 추는 것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드미트리의 말에 따르면 체포되기 전에 이미 무용수로서 은퇴 의사를 밝혔다고 했다.

 

 

바보, 괜히 고집 피우고... 그냥 계속 추지. 저렇게 무대를 그리워하면서... ’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쿡쿡 쑤셔왔다. 바이올린이라도 켜면 전처럼 왕재수가 혼자 춤추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을 텐데 싶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근데 로만은 어디 갔어?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공연 끝나니까 그냥 나가버리네. 싸운 건 아니지? ”

 

“ 내가 집에 가라고 했어. 수요일까지는 따로 만나지 말자고 했어. ”

 

“ 왜? 신작 발표 때문에 정신없어서? ”

 

“ 아니. 감시꾼이 하나 더 붙었잖아. 의심받을 짓을 뭐하러 하냐. 그러다 로만 잡혀가면 어떡하라고.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그래, 뭐 걱정된다면 조심하는 게 낫겠지. 근데 너 정말 왜 그렇게 드미트리를 싫어해? 나 없는 동안 걔가 너한테 정말 무례하게라도 굴었어? ”

 

“ 여기 얼쩡거리면서 나 쳐다보는 거 자체가 무례한 짓이야! ”

 

“ 너 처음에 나한테도 못되게 굴었잖아. 그럼 KGB라서 그런 거야? ”

 

“ KGB야 다 재수 없지! ”

 

“ 너무해... 그럼 나 아직도 재수 없는 거야? ”

 

“ 유치하게 왜 이래! 그리고, 그리고 내가 언제 너한테 못되게 굴었어! ”

 

“ 그럼 아니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

 

 

왕재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댔다.

 

 

“ 하여튼 그 자식은 너랑 다르단 말이야. 진짜 재수 없어. 지금도 재수 없고 나중에도 재수 없을 거야. 절대 안 변해! ”

 

“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 친절하고 예의도 바르고... 네 팬이고... 너 원래 팬들 소중하게 생각했잖아. 관객들 중요하다고 그러고. 근데 왜 드미트리한테는 그렇게 굴어? ”

 

“ 몰라. 그렇게 물어봤자... 그냥 싫어. 너 벌목공 될지도 모른다 해서 그냥 참고 있는 거란 말이야. ”

 

“ 그게 참는 거라고? 이왕 참을 거면 그렇게 대놓고 구박은 안 했으면 좋겠어. ”

 

“ 넌 그 자식이 좋냐? ”

 

“ 응, 좋아. ”

 

“ 왜? 그 뺀질거리는 놈이 왜 좋은데? 너랑 얼굴 비슷해서? ”

 

“ 어... 그것도 좀 있고... 그러니까, 있잖아. 나는 형제가 없거든. 외동아들이란 말이야. 사촌은 여러 명 있지만 그래도 또래 남자애는 없어. 그래서 항상 형이나 동생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단 말이야. 근데 드미트리는 진짜 나랑 닮았고... 너무 반가웠어. 어른스럽고 잘 챙겨주고 자상하니까 정말 쌍둥이 형이 생긴 기분이야.

그리고 나 솔직히 학교 다닐 때도 그렇고 친구 많은 편 아니었거든. 여기 입사하고 나서는 바쁘니까 그나마 있던 친구도 다 떨어져 나가고... 회사 사람들은 다들 자기 앞가림하느라 바쁘고 나한테 업무 떠넘기는데 급급하니까... 드미트리처럼 아무 것도 안 바라고 나한테 잘해준 사람은 없었단 말이야. 걔가 오자마자 발따예프가 나한테 일 떠넘긴 것도 차단해 주고... 자기도 바쁠 텐데도 나한테 너무 서무 업무가 부당하게 몰려 있다고 화내면서 서무 업무의 효율성 제고라는 세부 목표도 세우고... 오늘 아침에 나와서 내 업무 덜어주기 위해 굉장한 보고서도 써줬어. 그리고 밀린 일도 다 해치워주고... 나 솔직히 정말 걔한테 고마웠어. 미처 말은 못했지만 친구가 돼줘서 너무 기뻤단 말이야.

너는 워낙 잘 나가는 애였으니까, 주변에 떠받드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으니까 내 기분이 어떤지는 아마 잘 모를 거야... 근데 나한테는 드문 일이란 말이야. 뭐 안 바라고 나한테 상냥하게 대해주는 형 같은 친구 생긴 거 소중하다고. 걔 어차피 일주일밖에 안 있잖아... 그 동안만이라도 좋으니까 나도 걔한테 잘해주고 싶은데 걔는 옛날부터 네 팬이었다고 하고. 네가 그렇게 싸가지 없게 구는데도 화도 안 내고 도리어 너 감싸주고... 그러니까 너도 걔한테 조금만 잘해주면 안되니? ”

 

 

 

왕재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표정은 처음에 드미트리와 마주쳤을 때처럼 어두컴컴했지만 그래도 ‘네가 잘못했다’ 눈초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너무 주절주절 떠들었나 싶어 베르닌이 풀죽은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왕재수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낮게 쏘아붙였다.

 

 

“ 바보 멍충이. ”

 

“ 어휴... 말한 내가 잘못이지... 맨날 나한테는 바보 멍충이라고 그러고... 내 말은 다 무시하고... ”

 

“ 안 무시해. 그 재수 없는 놈한테 성질 안 내고 소리 안 지르면 되는 거잖아. 알았어. 그렇게 할게. 바보 멍충이. 사람 보는 눈도 지지리도 없어가지고. 에휴... ”

 

“ 보는 눈 없는 건 너잖아... 자기 천재라고 맨날 다른 사람들 무시하고... ”

 

 

왕재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재킷 단추를 잠그고 스카프를 매더니 무대에서 내려갔다. 불을 모두 끄고 복도로 나왔을 때 베르닌은 문득 왕재수의 머리가 가을에 기차역에서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많이 자랐다고 생각했다. 짧고 들쭉날쭉하게 흐트러진 머리 때문에 더욱 어려 보였기 때문에 학생이라고 착각했던 것이기도 했다. 류다가 보여준 무용수 시절의 화보나 잡지 사진 속의 왕재수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짧은 머리를 한 적이 없었다. 배우나 가수처럼 목덜미 언저리까지 머리칼을 길렀다. 왕자 역을 추느라 단정하게 빗어 넘겼을 때를 제외한다면 항상 그 머리칼은 바람에 휘날리는 듯 치솟고 월계관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작년 여름에 수용소에서 아무렇게나 잘렸던 게 분명했다. 촌스러운 것은 죽어도 못 견디는 성격이니까 자기가 그렇게 잘랐을 리가 없었다.

 

 

그러자 베르닌은 가슴 한구석이 쿡쿡 쑤시는 듯 아팠다. 그리고 왕재수의 머리가 많이 길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머리칼이 자랐으니 다시 살도 붙을 것이고 드미트리가 기억하는 근사한 무용수의 근육질 몸매로도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 KGB를 그렇게 싫어하는 게 당연해... ’

 

 

어쩐지 마음이 많이 불편해진 베르닌은 드미트리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왕재수는 차에 타서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바깥만 보고 있었다.

 

 

‘ 어쩌지... 화난 건가? ’

 

 

베르닌이 눈치를 보고 있는데 왕재수가 창문에 이마를 살짝 부딪치고는 깜짝 놀란 듯 어깨를 세우더니 곧 다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거였다.

 

 

“ 에휴, 얼마나 피곤했으면... 내일 극장 안 열어서 다행이네. ”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베르닌은 배나무 거리로 접어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병원에 들러 스타브로프에게 잠깐 진료라도 받고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왕재수가 길길이 날뛰며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꾸짖을 게 뻔할 뻔자라 그냥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차를 세웠는데도 왕재수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5분쯤 기다리다가 할 수 없이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 저기... 다 왔으니까 일어나. ”

 

“ 어, 나 안 잤어. ”

 

 

왕재수가 눈을 깜박거리며 차 문을 열었다. 잠이 덜 깼는지 안전벨트 푸는 것을 잊어서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 했다. 베르닌이 혀를 차며 벨트를 풀어 주었다.

 

 

“ 어휴, 안 자긴 뭘 안 자냐. ”

 

“ 나 이거 안 맸는데... 답답해서 원래 벨트 안 매는데... ”

 

“ 내가 아까 너 자는 동안 매준 거야. 저녁에 비와서 길 미끄러워서. ”

 

“ 별 걱정을 다 하네. ”

 

야, 뭐가 별 걱정이야! 당연히 안전벨트 해야지! 사고 나서 다치면 네 몸 누가 건사해준다고! ”

 

“ 안 다쳐! 사고 안 나! ”

 

“ 그걸 어떻게 장담하냐! 사람 일은 모른다고! ”

 

너는 운전 잘 하니까 사고 안 나!

 

“ 엥... ”

 

 

왕재수는 하품을 하면서 엘리베이터로 갔다. 막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왕재수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나도 없어. ”

 

“ 응? 뭐가? ”

 

“ 형제. 사촌. 친척. 다 없다고. ”

 

“ 어떻게 그래, 친척 한둘은 있겠지. ”

 

“ 몰라, 하여튼 없어. 본 적 없어. ”

 

“ 어... 그래. 어릴 때 쓸쓸했겠다. ”

 

“ 뭘 쓸쓸해. 안 쓸쓸해. 난 천잰데. 우주 최고 꽃미남인데. 바보 멍충이. ”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 to be continued

 

 

 

 

..

 

 

이야기는 2부에서 계속된다. 2부는 내용이나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

 

 

..

 

 

중간에 드미트리가 말하는 '당직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을 목격' 얘기는 에피소드 2의 '당직실의 귀신'에 나오는 얘기다~

 

 

..

 

 

왕재수가 회상하는 '레닌그라드의 노멘클라투라, 인민영웅 미망인 누님'은 사실 본편 우주에서 무용수 미샤를 후원하던 레닌그라드의 여성 유력인사 얘기다. 미샤는 키로프 데뷔 직후부터 열성팬들이 많았고 공공연하게 후원과 지지를 표명하는 유력인사들도 많았다. (그게 꼭 크레믈린 아저씨 같은 불순한 인물들만 있는 건 물론 아님!)

 

미샤의 유력한 후원자들과 관련해서... 트로이가 나오는 장편에서는 미샤가 21번째 생일에 후원자이자 연방에서 위세를 떨치는 어느 군 장성으로부터 고급 자동차와 오디오를 선물받고는 이 과분한 선물을 돌려주러 갔다가 장성의 조카딸까지 소개받는 에피소드도 넣었다. (물론 그 장성의 진짜 목적은 후자였음~) 그러니 마카롱 정도야 뭐 :)

 

위의 유력인사 누님은 본편에서도 실지로 미샤에게 고급 초콜릿과 향수, 옷가지 등을 자주 선물해주곤 했는데 미샤는 본편에서도 단 것을 먹지 않기 때문에 그 초콜릿은 파트너 발레리나에게로 모조리.... (나 줘 ㅠㅠ)

 

 

..

 

그럼 2부에서~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작년 가을에 일하다 화딱지나서 서무의 슬픔 1편을 장난치며 쓴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편이다!

 

30편은 이전에 올렸던 에피소드에 단추팬클럽 회원분들이 달아주신 외전 관련 댓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탄생했다 :) 제목을 보고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하여튼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어느새 왕재수의 신작 발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고, 그날 아침 스페호프는 베르닌을 국장실로 호출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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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0

 

 

 

 

서무의 슬픔

-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목요일 오전답게 베르닌은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과 더욱 무거운 머리로 출근해 책상 앞에 앉아 밀린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다음 주 수요일로 다가온 신작 발표 때문에 왕재수는 극장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고 있었고 베르닌은 그걸 옆에서 지켜보랴, 자정이 넘어가면 ‘제발 들어가서 잠 좀 자라!’하고 소리를 지르랴, 새벽 두 시에는 우격다짐으로 왕재수를 끌어내서 차에 처넣고 억지로 집으로 데려가 재우랴, 아침에는 또 왕재수를 극장에 데려다주고 출근하랴 정신이 쏙 빠졌고 정말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무용수들을 지도하느라 머리뿐만 아니라 몸까지 쓰고 있는 왕재수가 대체 어떻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그 망할 놈의 신작을 이유로 국장이 부여한 왕재수 감시 특근 때문에 그의 서무 업무는 쌓여만 갔다. 물론 스페호프도 베르닌에게 오전 근무만 한 후 극장에서 감시를 진행하라고 명령을 내린 만큼 다른 직원 하나에게 서무 업무를 분담해주기는 했지만 제대로 처리된 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아침마다 베르닌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일들과 엉망이라 다시 해야 하는 일들을 마주해야 했다.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지치고 화가 난 베르닌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빨리 수요일이 되어 왕재수의 신작이 무대에 올라가기만을 빌었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이중고도 한결 누그러질 테고 왕재수도 자기 몸을 좀 추스를 수 있을 테니까.

 

 

일찍 출근해서 밀려 있는 문서 접수 대장과 발송 대장을 작성하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전화로 그를 호출했다. 당장 국장실로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베르닌은 ‘내 팔자야’ 하고 중얼거리며 국장실로 갔다.

 

 

스페호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지난주의 밀서 사건 실패 때문에 내내 저기압이었고 직원들을 들들 볶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잔뜩 찌푸리고 있었던 미간도 펴져 있었고 안경도 똑바로 쓰고 있었으며 입가에는 미소까지 번져 있었다. 베르닌은 이것이 웬일인가 싶어서 국장을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문득 접견실로 통하는 옆문이 반쯤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국장님, 부르셨습니까. ”

 

“ 음, 어서 오게. 자네가 해줘야 할 일이 하나 있네. ”

 

“ 예? 혹시 서무 업무인가요? ”

 

“ 글쎄, 서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인사 관리 업무일세. 월요일 주간 회의에서 공지한 바 있지만 루뱐카 본부에서 우리 지국으로 행정 연수요원을 파견했네. 알다시피 본부에서 승진 요건을 채우기 위해서는 총 5개의 지국에서 돌아가면서 연수를 받아야 하는데 이번에는 우리 가브릴로프 지국 차례가 들어있더군. 연수 기간은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일세. 자네가 이 친구를 맡아 줘야겠어.

 

 

베르닌은 눈앞이 아득했다. 미약하게 항의했다.

 

 

“ 저, 국장님. 저는 지금 서무 업무도 굉장히 많이 밀려있고 아시다시피 야스민의 감시 업무가 매우 과중합니다. 그의 신작 공연이 다음 주 수요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 주는 주말도 반납하고 극장에 가야 하고 다음 주는 아예 사무실 출근도 못하고 내내 그의 곁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도저히 연수요원을 돌봐줄 여력이 없습니다만... ”

 

“ 나도 자네가 지금 바쁘다는 건 잘 아네. 물론 망할 놈의 그 불여우 감시가 제일 중요하지! 서무 업무는 지금처럼 스멜로프가 분담해 줄 테니 필수적인 것만 하면 되지만 그렇다고 무시해서도 안 되네! 연수요원에게 자네의 업무를 설명해 줘야 할 테니까.

다른 지국에서는 서무 업무를 등한시하지만 적어도 내가 이끄는 우리 가브릴로프 위원회에서만큼은 이것이 행정의 기본이야! 그러니 반드시 그에게도 내용을 잘 설명해줘야 하네. 여기서가 아니라면 그가 기본 중의 기본인 서무 업무에 대한 이해도를 쌓을 기회가 없게 될 테니.

그리고 감시 업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자네는 지금 우리 가브릴로프에서 가장 이념적으로 문제가 심각한 반동분자, 최악의 정치범을 감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 불여우를 감시하는 현장에 연수요원을 데려가는 거야. 도청분석도 같이 하게. 그럼으로써 우리 지국의 감시분석 업무에 대한 연수도 자동으로 끝나는 셈이지. ”

 

“ 어, 저... 하지만 말씀대로 이것은 인사 관리 업무인데 왜 제가... ”

 

 

베르닌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막내에 서무라는 이유로 매일같이 골치 아픈 일만 잔뜩 떠맡는 게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스페호프는 껄껄 웃었다.

 

 

“ 하하, 다닐. 나도 다른 사람 같았다면 인사부서에 맡겼을 걸세. 하지만 이 친구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 자네도 이 친구를 보면 내 말뜻을 알게 될 걸세. 들어오게, 드미트리. ”

 

 

접견실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리더니 젊은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자신 넘치는 발걸음이었다. 키도 훤칠했고 어깨도 널찍했다.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스페호프가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 인사하게, 드미트리. 이쪽이 다닐 베르닌일세. 일주일 동안 자네를 담당할 감시분석부 요원이자 우리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총괄서무라네. 다닐, 모스크바 본부에서 온 드미트리 베르닌일세. ”

 

 

베르닌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너무 놀라서 딸꾹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온 연수요원의 성이 자신과 똑같다는 것은 그럴 수도 있었다. 어차피 그의 성은 흔한 편이었으니까. 문제는 드미트리 베르닌의 외모가 그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부터 시작해 이목구비와 체격, 심지어 손의 모양까지 닮아 있었다. 물론 자세히 보면 눈매나 표정이 좀 달랐고 베르닌과는 달리 질 좋은 정장을 걸친 데다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말 많이 닮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드미트리 베르닌 역시 깜짝 놀란 듯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스페호프가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 내가 뭐라고 했나, 드미트리! 자네와 판박이라고 하지 않았나! 같이 있으니 꼭 형제 같구먼! 심지어 성까지 같지 않나! 자네 알고 있나, 다닐? 드미트리는 자네와 동갑일세. 7월에 태어났다는군. 자네도 그렇지 않나? ”

 

“ 아... 어, 예... 7월 5일... ”

 

“ 아쉽게도 드미트리는 7월 14일이더군. 그러니 다행히 출생의 비밀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네만. 서류를 보면 친척 관계는 아니던데. 신기하게 닮았단 말이야. 성도 같고... 그러니 이게 인연이 아니면 뭐겠나! 다닐, 이제 내가 왜 드미트리 담당 업무를 자네에게 맡겼는지 알겠지? 잘해보게. 여기 인사부서에서 짜 놓은 연수 일정표가 있네. 기관 전체 소개는 내가 이미 마쳤으니 각 부서를 데리고 돌게. 직원들 인사를 마치면 부서별 업무를 개괄해주고 자네의 서무 업무에 대해 설명해주게나. 밀려 있는 일이 많다고 했으니 일부는 같이 진행해도 상관없네. ”

 

“ 아니, 저... 그러면 오늘 오후에는 극장에 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

 

 

“ 무슨 소리인가! 당연히 극장에 가야지. 일정표를 잘 보게. 오후에는 감시분석 업무 연수일세. 드미트리와 함께 극장에 가서 그 불여우를 감시하게!

서류를 보면 알겠지만 드미트리는 대단한 엘리트 요원이야.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 법학과 출신으로 이미 학창시절에 레닌그라드 KGB에서 특채했지. 영어와 프랑스어에도 능통해서 졸업하자마자 런던과 파리에서 대사관에 근무하며 우리 첩보원들에게 보급품을 지원하고 각종 행정 업무를 도맡았네. 비록 행정요원이지만 해외 근무를 위해서 현장요원 연수도 받았고 사격솜씨와 삼보와 복싱, 유도도 수준급인데다 업무를 우수하게 수행해서 표창도 두 번이나 받았지. 파리에서는 유능한 이 친구를 놔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드미트리가 자진해서 국내 활동에 도움이 되고 싶어 했기 때문에 본부로 돌아와서 지금 연수 코스를 밟고 있는 걸세. 그러니 그 불여우 감시에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연수 보고서는 드미트리가 작성해 제출할 테니 자네는 신경 쓸 것 없네. 그럼 가보게. ”

 

 

 

 

*    *    *

 

 

 

 

 

베르닌은 드미트리와 함께 1층으로 내려왔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지만 어쨌든 국장의 명령대로 각 부서를 돌면서 본부에서 온 연수요원을 소개했다. 다들 둘이 닮았다며 깜짝 놀랐다.

 

 

등록부서로 들어가자 알렉산드라는 서류철을 떨어뜨렸고 리자는 후다닥 달려오더니 ‘어머나! 다냐, 쌍둥이였어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드미트리는 마치 무대 위의 왕재수를 연상시키는 듯한 자세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유감스럽게도 저희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습니다만 우연의 일치란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지요. 그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고 대꾸했다.

 

리자는 두 눈이 동그래진 채 드미트리와 베르닌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고 갑자기 뺨을 붉히더니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어머, 웬일이야! 얼굴만 닮았어, 다냐랑 완전 틀려!’하면서 책상들 사이로 달아났다.

 

 

소개를 모두 마친 후 베르닌은 드미트리를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기관 소개 책자를 꺼내서 각 부서들의 업무를 개괄해주었다.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지만 필기를 하지는 않았다. 베르닌이 가브릴로프 KGB에서만 쓰는 고유용어와 암호에 대해 설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슬며시 걱정이 된 베르닌이 충고했다.

 

 

“ 이건 우리 쪽에서만 쓰는 암호라 메모해 놓는 게 좋을 거야. 연수 보고서 써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

 

“ 흠, 별로 어렵지 않은데 메모까지 할 필요 있어? 다 외웠어. 그리고 굳이 외우지 않아도 본부의 메인 패턴과 동일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알파벳 순서만 바꿔서 대입하면 금방 풀릴 것 같아. 나 런던에서 스파이들 암호문 수신도 담당했거든. ”

 

“ 아, 그랬구나. 그러면 이제 대외교류부 쪽 업무... ”

 

“ 다닐, 나 아까 접견실에서 기다릴 때 이 책자 다 읽었거든. 대충 여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파악이 됐어.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난 기억력과 암기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거든. 여기는 조직이 별로 크지 않고 지역 소도시라 중요한 작전이나 임무가 거의 없잖아. 지금 너희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에서 가장 중요한 미션은 아까 국장이 얘기한대로 미하일 야스민 감시 건 하나 정도야. 어쨌든 진짜 중요한 인물이잖아. 그래서 내가 국장에게 직접 요청했어, 그 업무에 배정해달라고. 잘 부탁해. ”

 

“ 아, 어... 근데 걔 말인데, 야스민... 네가 생각하는 거랑 좀 다를 거야. 그렇게 무시무시한 인물이 아니라서... 정치범이라고 하기에도 좀 그래. 걘 그냥 딱 예술가야. 극장이랑 춤밖에 모르더라고. 수요일에 신작을 올리기로 되어 있어서 지금은 거기만 매달려 있어. ”

 

“ 야스민에 대해서는 나도 알아. 나 레닌그라드 출신이잖아. 내가 문화예술에도 조예가 깊거든. 그 친구 데뷔했을 때부터 무대 많이 봤어. 예전에 유럽 투어 왔을 때 파리랑 런던에서도 봤고. 런던 대사관에 있는 선배 요원 하나가 야스민이랑 친분이 있거든. 그때도 그 친구가 사고 칠 뻔한 거 그 누나가 수습해줬었어. 결국 파리에선 해결 안됐지만.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긴. 극장 들어가기 전부터 유명했었어, 비밀 서클 활동도 하고 하여튼 말썽꾸러기였지. 하여튼 되게 궁금했어. 극장엔 언제 가는 거야? ”

 

“ 오후에 갈 거야. 그럼 부서 업무는 파악했다고 했으니까 지금부터는 서무 업무에 대해 알려줄게. ”

 

“ 음... 그래. 근데 그 전에... 넌 원래 여기 출신이야? 나랑 너무 닮아서 깜짝 놀랐어. 국장 말로는 너 모스크바 국립대 법학과라면서. 전공도 나랑 똑같고. ”

 

“ 응. 여기서 태어났어. 모스크바에서는 공부만 했고. ”

 

“ 그렇구나. 그럼 해외 파견 경험은 없어? ”

 

“ 없어. 난 그냥 군대 갔다 왔다가 졸업하고 곧장 행정요원 시험 보고 여기로 발령받았어. ”

 

“ 음, 그건 나랑 다르구나. 그러면 외국어는? 난 영어랑 불어는 유창하고 독일어는 조금 하는 정도야. ”

 

“ 난 외국어는 모르는데... 독일어만 조금... 법학 공부할 때 약간... ”

 

“ 여기도 사격이나 호신술 시험 정기적으로 보니? ”

 

“ 아, 아니... 현장요원들은 보지만 나 같은 행정요원들은 해당 안 돼. 나 사실 총도 잘 못 쏴. ”

 

“ 흐음... 그건 좀 아쉽다. 행정직이라도 기본적인 건 갖추고 있어야 할 텐데. 내가 좀 가르쳐줄까? 나 총 잘 쏘거든. 9밀리 마카로프는 눈감고도 다뤄. ”

 

“ 아, 으응... 그래. 근데 오늘은 일이 너무 밀려 있으니까 나중에 시간 나면 알려줘.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좀 많거든. 너 서무 업무 해봤니? ”

 

“ 아니. 해외 지국이랑 본부에서는 서무는 진짜 말단 후배가 맡는 업무라서 나 같은 엘리트한테야 당연히 안 주지. 그래서 네가 서무라고 돼 있는 거 보고 좀 놀랐어. 너도 학벌도 좋고 들어온 지는 3년밖에 안됐어도 공채라서 너보다 직급 낮은 직원도 좀 있잖아. 근데 서무라니... ”

 

어, 그게... 우리 국장은 서무 업무가 행정의 기본이라고 생각해서... 문서 작성부터 각종 행정 절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 ”

 

“ 그래? 그렇게 중요한 업무란 말이야? 하긴 나도 안 해봤으니까... 그럼 지금 네 자리로 같이 가서 해보자. ”

 

 

베르닌은 대체 누가 누구에게 업무를 가르쳐주고 있는지 헷갈렸지만 어쨌든 드미트리를 데리고 자기 자리로 갔다. 약 한 시간 동안 베르닌은 서무의 주요 업무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드미트리는 입을 벌린 채 가만히 그의 설명을 들었다. 문서 수발과 각종 업무추진비 정산, 근태기록부와 초과근무, 외출부 기록에 이어 마침내 각종 자료 수합 업무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을 때 발따예프가 휘적휘적 다가와 베르닌의 책상에 종이 한 장을 철썩 하고 내려놓았다.

 

 

“ 이봐, 다닐. 이것 좀 처리하게. 최근 2년간의 절도범과 알콜 중독자 감시 대상자 명단과 처벌 내역을 오늘 5시까지 감사부에 제출하라는군. ”

 

“ 예, 5시요? 전 점심 식사 후에는 극장에 가야 하는데요. ”

 

“ 아주 자네 요즘 호강에 겨웠군! 그 불여우 감시 업무를 핑계로 오후마다 극장에서 놀고 있으니! 별 것도 아닌 자료잖아. 서류철 좀 뒤지면 다 나올 것을. ”

 

“ 어, 예. 일단 거기 놓고 가세요. 감사부에는 제가 전화해 볼게요. ”

 

 

발따예프가 자기 자리로 돌아간 후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 잠깐만 여기서 기다릴래? 급한 자료 제출 건이 있어서... 서류철을 좀 뒤져야 할 것 같아. 아, 그동안 네가 이 문서 접수 대장을 기입하고 시행문에 직인을 받아오면 되겠다. ”

 

“ 잠깐, 다닐. 절도범과 알콜 중독자에 대한 감시 업무는 네 담당이 아니잖아. 너는 서무하고 야스민 감시 담당이라며. ”

 

“ 응, 근데 자료 수합 업무가 있다고 했잖아... 내외부에서 자료 요구가 오면 그걸 만들어서 제출하는 것도 서무 업무야. ”

 

“ 아니지, 수합과 작성은 다른 의미잖아. 수합이라는 것은 각 업무 담당자가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주면 그걸 합쳐서 제출한다는 것이고, 작성은 네가 직접 만드는 거잖아.

 

“ 그게... 문자 하나하나의 뜻은 그렇지만 우리는 그냥 서무가 다 하게 되어 있어. 알다시피 다 선배들이고... ”

 

“ 흐음. ”

 

 

드미트리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베르닌은 감사부에 전화를 했고 자료 제출 기한을 연장할 수 없다는 냉혹한 답변을 받았다. 할 수 없이 문서고에 갔다. 먼지를 들이마시며 최근 2년간의 절도범과 알콜 중독자 관련 서류철을 찾아내 자리로 돌아왔는데 발따예프가 책 한 권과 종이를 한 장 움켜쥔 채 씩씩 거친 숨을 내뱉으며 쿵쾅쿵쾅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 어, 발따예프 선배 왜 저러지? 무슨 일 있나? 하여튼 이것 좀 같이 보자, 드미트리. 절도범과 알콜 중독자 관련 서류철이야. ”

 

“ 그럴 필요 없어, 다닐. 그건 발따예프가 처리할 거야. ”

 

“ 엥? 그게 무슨 소리야? ”

 

“ 아까 네가 부서 업무 소개해주면서 업무분장표 보여줬잖아. 그거 보니까 그 업무는 발따예프 담당이던데. 그거랑 규정집 보여줬어. 제9조 3항. 중대한 사유 없이 자신의 업무를 기피할 경우 그 직원은 징계에 처할 수 있다 는 규정 말이야. 그리고 너는 지금 일도 밀려 있고 연수요원인 나를 관리하고 있고 오후에는 가브릴로프 최대의 요주의 인물인 야스민 감시를 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다른 직원의 업무를 도맡아줄 수 없다고 말해줬어. 자료는 발따예프가 처리할 테니까 넌 신경 안 써도 돼. ”

 

 

베르닌은 눈을 깜박였다.

 

 

“ 어... 그래. 고, 고마워. 그런데 그게... 나도 규정은 아는데, 이게 선후배 관계라는 게 있어서... ”

 

“ 인간관계도 중요하지만 업무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담당자들이 일을 떠넘기면 안 되지! 그러면 조직의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이 문서 접수와 발송 대장도 그래. 이것도 업무 담당자들이 각각 처리하면 훨씬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데 서무가 한꺼번에 모아서 정리하고 무슨 일인지 하나하나 물어보면서 처리하고 있으니 일이 진전도 안 되고 야근만 하게 되지. 업무추진비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좋아, 다닐. 난 항상 어떤 업무를 맡게 되면 단계별로 주요 성과목표를 설정하거든. 알다시피 이번 가브릴로프 연수에서 너희 국장은 내게 두 가지의 목표를 부여했지. 하나는 ‘서무 업무 파악과 행정 능력 배양’, 다른 하나는 ‘정치범 야스민 감시를 통한 실무 전문성 강화’야. 야스민은 아직 못 만났으니까 오후로 미뤄야 할 거고. 전자에 대해서는 지금 세부 목표를 설정했어. ‘서무 업무의 효율성 제고’!!! 이제 점심시간이니 일단 오늘은 현황 파악만 하고 본격적인 개선 방안은 내일 수립하겠어. 그럼 우리 점심 먹자. 너희는 점심을 구내식당에서 먹니? ”

 

 

베르닌은 정신이 몽롱해져 왔지만 마지막 말은 제대로 알아들었다.

 

 

“ 으, 으응. 그러네, 벌써 열두 시구나. 구내식당 가자. 오늘 메뉴는 양배추 수프에 돼지비계 절임, 삶은 마카로니야. ”

 

“ 응, 역시 지역 특색이 반영됐구나. 아까 예산서 보니까 여기는 아무래도 소규모 지국이라 그런지 급량비 예산액이 적더라. 그러니 분명 구내식당 음식은 질이 나쁘고 맛도 없겠지. 나는 꼬박꼬박 운동을 하고 몸을 관리하기 때문에 영양 균형 잡힌 식사에 관심이 많아. 그래서 요리도 직접 하거든. 사실은 도시락을 싸왔는데 구내식당 음식보다는 훨씬 맛있을 거야. 괜찮으면 같이 먹을래? 2인분이야, 넉넉해. ”

 

“ 그, 그래. 근데 실내에선 먹을 데가 마땅치 않은데... 뒤뜰로 가면 괜찮을 거야. 이제 별로 안 추우니까. ”

 

 

베르닌은 드미트리와 함께 뒤뜰로 갔다. 배추밭 쪽으로 가서 예의 그 넓적한 돌멩이 위에 걸터앉았다. 배추밭이 어떻고 시골이 어떻고 하며 트집을 잡을까봐 불안했지만 의외로 드미트리는 빙긋 웃었다.

 

 

“ 여기 좋구나, 공기도 맑고 사람들도 안 오고. 저기는 텃밭 같은 건가보구나. 배추 키우면 잘 자라겠다. 물그릇이 있는 걸 보니 고양이한테 밥을 주나보네. ”

 

“ 으응... 매일 오는 놈이 하나 있어서... ”

 

“ 나도 파리에 있을 때 고양이 키웠거든. 새하얀 페르시아 고양이였는데 정말 귀여웠어. 난 고양이가 좋더라고. 도시락 좀 남겨서 줘야겠다. ”

 

 

베르닌은 드미트리가 배추밭도 알아보는데다 무엇보다도 고양이를 아끼는 모습에 감복했다. 잘난 척 하는 놈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자책했다.

 

 

‘ 알고 보면 좋은 앤데 내가 괜히 자격지심에 그랬네. 진짜 똑똑하기도 한 것 같아. 아까 했던 얘기도 사실 다 맞잖아. 결국 감사 자료도 발따예프가 처리하게 해줬고. 나도 얘한테 잘해줘야지. 얼굴도 닮았는데. ’

 

 

그때 드미트리가 꾸러미를 싸고 있던 신문지를 풀고는 네모반듯한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칸막이가 쳐져 있었고 각 칸막이마다 정갈해 보이는 음식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한입 크기로 자른 샌드위치들과 삶은 달걀, 훈제연어와 치즈, 오이와 토마토 샐러드, 예쁘게 자른 오렌지가 들어 있었다. 상자 옆에는 우유 한 팩과 탄산수 한 병이 놓여 있었다.

 

 

“ 먹어, 다닐. 이건 게살 샌드위치, 이건 칼바사 샌드위치야. 재료가 신선하니까 맛있을 거야. 훈제연어는 이 크림치즈랑 케이퍼 얹어서 같이 먹으면 잘 어울리더라. ”

 

 

베르닌은 샌드위치를 먹었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맛있었다.

 

 

“ 와, 맛있다. 이거 네가 만든 거야? 짜지도 않고 그렇다고 밋밋하지도 않은 게 진짜 신선하고 맛있어. 소스도 담백하고. ”

 

“ 응, 나 요리하는 거 좋아해. 파리에 있을 때는 요리 강습도 받았어. 대사관 요리사들이랑 친하게 지냈거든. 오이랑 토마토 샐러드도 먹어봐. 드레싱이 상큼할 거야. 레몬즙에 꿀을 섞고 견과를 가미했거든. ”

 

“ 진짜 맛있다. 완전 프로 요리사 같아. 너 대단하구나. 일하느라 바빴을 텐데 요리까지 이렇게! 나도 요리는 좀 하지만 그냥 매일매일 끼니 때우기 바빠서 이렇게 제대로 만들지는 못하는데. 샐러드도 너무 맛있어. 우와, 연어도 정말 맛있다. 재료도 신선하고 진짜 건강식이네. 이거 걔가 진짜 좋아하겠다. ”

 

“ 걔가 누구야? ”

 

“ 어? 아, 미셴카... 아니, 야스민. 걔가 엄청 까탈스럽거든. 기름기 있는 것도 안 먹고 단 것도 안 먹고 음식을 좀 가려. 건강식 타령만 하고. 밥 챙겨 먹이는 거 힘들어 죽겠다니까. ”

 

“ 그럴 만도 하겠다. 무용수 출신이잖아. 전에 무대 올라오는 거 보니까 춤추는 것도 그렇고 몸매도 그렇고 자기 관리가 장난 아닐 것 같긴 했어. 근데 야스민한테 네가 밥까지 챙겨줘야 돼? 극장 식당에서 먹으면 되지 않아? 아, 하긴. 수용소 후유증 때문에 아직 식이 조절해야 되겠구나. 그러면 요리사나 가정부 딸려주지 않아? 지난번에 크라스노야르스크 쪽 지부에 갔더니 거기 유배된 정치범 과학자한테는 가정부가 딸려 있던데. 너는 감시 요원이잖아. ”

 

“ 처음에 나도 국장한테 그렇게 건의했는데 예산도 없고 인력도 없으니까 나보고 다 하라는 거야... 나 진짜 별의별 거 다 해. 저녁밥 해먹이고 차도 우려주고 가끔 집 청소도 해주고 바퀴벌레도 잡아줘. 애가 벌레를 너무 무서워해서 손톱만한 바퀴벌레 나와도 호들갑 떨면서 울고불고 난리거든.

우리 동네 음식은 너무 기름져서 싫다고 하도 투정을 해서 고기는 맨날 닭가슴살 아니면 생선이고 그것도 기름 써서 구워야 맛있는데 하도 지방질 운운하고 찡찡대니까 쪄줘야 돼. 그리고 그 나이 먹도록 홍차 우리는 법도 모르는 거야! 맨날 남이 해줬다면서. 그래서 차도 우려 줘야 되고 또 달콤한 잼이나 과자는 안 먹으니 무가당 초콜릿 챙겨줘야 되고.

그뿐이냐. 걔 또 운전은 얼마나 서툰데. 몇 번이나 나무에 차 박았어. 운전 연습 좀 하라 해도 자기는 운전을 하면 팔 근육 미워진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출퇴근시켜준다니까. 우리 사무실은 신시가지라서 집에서도 가까운데 그 녀석 극장은 구시가지에 있으니까 아침에 강 건너서 그 녀석 내려주고 난 다시 신시가지로 돌아와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는 직장인이니까 5시에 끝나잖아. 물론 난 야근을 많이 하니까 더 늦게 끝나지만. 근데 극장은 공연 있으면 10시 넘어서 끝나고 그 녀석은 공연 끝나고도 남아서 일을 하니까 밤늦게 데리러 가야 한다고.

게다가 말도 얼마나 안 듣는데. 너도 서류 읽었나본데, 걔 수용소 후유증 때문에 과로해도 안 되고 끼니도 거르면 안 되거든. 고기 같은 거 많이 먹어야 되고. 근데 맨날 늦게까지 일하고 휴일에도 극장 나가. 귀찮고 바쁘다고 사과 한 알 우유 한 컵 이 따위라고. 아파서 병원에 데려다 놓으면 금세 도로 기어 나오고. 내 말은 듣지도 않아. 사고는 또 얼마나 잘 치는데. 툭하면 구르고 다치고 피나고. 폐렴도 두 번이나 걸렸으니까 따뜻하게 입으라 해도 영하 20도 날씨에도 무슨 패션이 어떻고 하면서 패딩을 안 입는 거야! 도대체 자기 몸을 아낄 줄을 모른다니까. 얼마나 골치 아픈데.

어휴, 이건 감시요원이 아니라 완전히 그 녀석 유모나 집사라고. 맨날 시골이라고 불평불만에 날 얼마나 들들 볶는지. 서무만으로도 벅찬데 그 녀석 감시 때문에 피곤하기도 하고 언제 어디서 그 녀석이 또 사고 칠까 봐 잠도 잘 안와. 아, 내 팔자야...

 

 

베르닌은 그간 쌓여 있었던 하소연을 쏟아놓은 후 한숨을 푹 쉬었다. 드미트리는 그의 폭발에 깜짝 놀란 듯했지만 중간 중간 고개를 끄덕였고 심지어 수첩을 꺼내더니 암호문 설명 때도 하지 않았던 필기를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서러움에 목이 멘 베르닌의 어깨를 토닥이며 플라스틱 컵에 우유를 따라주었다.

 

 

“ 좀 마셔. 그러다 체하겠다. 너 일이 진짜 많이 몰려 있었나 보다. 그 신작인가 뭔가 끝나면 너도 휴가라도 좀 내고 쉬어. ”

 

“ 고마워, 딤카. 너 참 좋은 녀석이구나. 근데 나는 휴가를 못 내. 국장이 싫어하거든, 서무가 휴가 내는 거. 서무는 한 기관의 기반이자 엄마 같은 거라서 함부로 휴가 내면 안 된대. ”

 

그런 게 어디 있냐. 기계도 이따금 기름칠도 해주고 정비를 해줘야 잘 돌아가는 건데 사람은 더 그렇지. 내가 그랬잖아, 효율성이 중요하다고. 미련하게 계속 움직이면서 소처럼 일한다고 조직이 발전하지는 않아. 너희 국장은 구세대적인 발상의 소유자라니까. 하여튼 너무 실망하지 마. 네 서무 업무에 들어가는 노력을 절반으로 줄이고 성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도출하면 되니까.

근데 야스민은 진짜 생각 외네. 레닌그라드에서도 그렇고 모스크바 있을 때도 엄청 톱스타였거든. 발레 모르는 사람들도 그 친구 이름은 다 알았어. 무대에서야 카리스마가 원체 대단했고, 평소에 방송이나 신문 인터뷰 나올 때도 굉장히 도도하고 시크한 타입이었거든. 인터뷰 할 때도 보니까 말도 잘하고 똑똑한 것 같더라고. 그때 파리랑 런던에 투어 왔을 때도 불어랑 영어로 직접 인터뷰한 적도 있어. 안무한 작품들도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편이고. 그래서 난 되게 교양 있고 조용하고 어른스럽고 차가운 스타일일 거라고 생각했어. ”

 

 

베르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딱 그 반대야!! 완전 여섯 살짜리 애기야!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나고 예쁜 놈이라고! 하루라도 예쁘다는 소리 안 들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아! 도도하고 시크하긴! 바퀴벌레 곱등이 쥐 보면 울고불고 매달리고... 뱀껍질 같은 거 맞닥뜨리면 움직이지도 못해. 업어줘야 된다고! 그리고 술도 한 방울도 못 마시는 게 툭하면 목마르다고 샴페인 홀랑 마시고 기절하고... 그럼 또 업어줘야 된단 말이야! 무서운 꿈 꾸면 애기처럼 울면서 찾아와서 재워달라고 하고. 으으... 도도하고 시크한 놈들 다 얼어 죽었네! ”

 

“ 아아, 진짜 충격이다... 나 나름대로 진짜 팬이었는데... 옛날에 키로프에서 팸플릿에 사인도 받은 적 있는데. ”

 

 

드미트리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베르닌은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 그래도 걔 나쁜 녀석은 아냐. 심성은 고와. 자기 몸은 안 챙겨도 데리고 있는 무용수들은 또 끔찍하게 챙겨. 바쁜데도 발레학교에 꼬박꼬박 가서 애들한테 춤도 가르쳐주고. 난 예술은 잘 모르지만 하여튼 천재는 천재인 것 같아. 극장도 예전엔 파리 날렸다는데 요즘은 공연마다 매진이야. 그러니까 정치범이라고 너무 선입견 갖지 마. ”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베르닌에게 음식을 더 권했다. 오렌지로 입가심을 한 후 드미트리는 남은 샌드위치에서 게살과 햄을 발라내고 연어조각도 모아서 물그릇 옆에 깔아놓은 신문지에 예쁘게 올려놓았다.

 

 

“ 고양이가 먹으러 오겠지? ”

 

“ 응, 오후에 올 거야. 완전 특식이네. 좋아하겠다. 나랑 알렉산드라는 소시지 쪼가리나 사료밖에 안 줬는데. ”

 

“ 알렉산드라가 누구야? ”

 

“ 아, 등록부서에 있는 선배. 굉장히 친절하고 착해. 나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많이 도와줬어. 아까 우리 보고 서류철 떨어뜨린 선배 있잖아. ”

 

“ 아, 흑백 스트라이프 블라우스 입고 갈색 곱슬머리에 눈 큰 아가씨. 너랑 사귀는 사이야? ”

 

“ 어, 아니야... ”

 

“ 그러면 내가 데이트 신청해도 되나? 귀엽던데. ”

 

“ 뭐? 인사밖에 안 해놓고... ”

 

“ 뭐 어때. 원래 그렇게 인사 한번 튼 다음에 데이트 시작하는 거지. 나 사실 여자들한테 인기 되게 많아. 데이트 신청 거절당한 적 한 번도 없어. 데이트 첫날 진도도 되게 잘 나가. ”

 

“ 아, 아니... 근데 알렉산드라는 남자친구가 있어... 사귄지 며칠 안 됐거든. 그러니까 저... 알렉산드라는 그냥 놔둬... ”

 

“ 흠, 아쉽네. 그러면 아까 우리 보고 쌍둥이 아니냐고 소리 지른 아가씨는? 금발 머리 있잖아, 걔도 되게 귀엽던데.

 

“ 뭐? 리자? 아, 아니... 리자는 많이 어려. 스무 살 막 넘었단 말이야. 철도 없고... ”

 

“ 스무 살이 뭐가 어리냐. 결혼도 많이 하는데. 애교도 많아 보이고 맘에 들더라. 알렉산드라가 안 되면 리자한테 오늘 데이트하자고 해볼까? 난 발랄한 애들이 또 좋더라고. ”

 

 

베르닌은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 저기... 여자들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물론 네 자유지만... 너는 일주일만 있다가 갈 거잖아. 예를 들어 리자가 너랑 데이트하고 호감이라도 가지면... 그랬다가 네가 일주일 만에 가버리면 리자는 뭐가 되냐. 여기는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가 아니야. 가브릴로프는 좀 보수적인 동네란 말이야. 여자한테 그런 식으로 굴면 나쁜 남자 취급받아. ”

 

“ 어휴, 너 되게 보수적이구나. 아니면 혹시 너 리자하고 좀 그런 관계야? ”

 

아니야! 우리는 그냥 동료 직원이야. 근데 나 리자랑 친하단 말이야. ”

 

“ 으응. ”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더니 눈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 더 없어? ”

 

“ 뭐가? ”

 

“ 너랑 특별히 친한 여직원들. 알렉산드라하고 리자 말고. ”

 

“ 어, 글쎄... 어, 없는데. ”

 

“ 응, 알았어. 그러면 그 둘 빼고 다른 여자들하고는 데이트해도 되지? ”

 

“ 아니, 그게... ”

 

“ 사실 아까 회계부서의 카체리나라는 아가씨가 나한테 관심을 보이더라고. 그래서 오늘 근무 끝나면 잠깐 보자고 했어. 근데 야스민 감시 때문에 늦게 끝나겠지? 오늘 공연 있니? ”

 

“ 있긴 한데 오늘은 발레가 아니고 오페라니까 너는 그냥 5시나 6시에 들어가도 될 거 같아. ”

 

“ 그럼 너는? ”

 

“ 난 걔가 극장에서 나올 때까지 옆에 있어야 돼. 그 녀석은 예술감독이랍시고 오페라도 끝까지 남아서 볼 때가 많아. ”

 

“ 음, 그러면 나도 같이 있을게. 극장에는 언제 가? ”

 

“ 1시 반쯤 가려고. 아까 하던 일 마무리만 좀 해 놓고. ”

 

“ 그래. 그럼 카체리나하고는 지금 차나 한 잔 마셔야겠다. 구내식당에 가면 있겠지? 1시 반에 주차장으로 갈게. ”

 

“ 으, 으응... ”

 

 

드미트리가 구내식당 쪽으로 내려간 후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분명 괜찮은 녀석 같은데 왜 이렇게 뒷골이 당겨오고 피곤한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피했지만 먹이도 주고 잘해주는 베르닌과 알렉산드라에게는 그래도 가까이 다가오는 편이었다. 기분 좋을 때는 살짝 쓸어줘도 가만히 있었다.

 

 

“ 미셴카, 이리 와. 오늘은 맛있는 거 있어. 너 좋아하는 생선도 있네. 얼른 먹어. ”

 

 

고양이가 다가오더니 발로 신문지를 툭툭 쳤다. 수염을 쫑긋거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홱 돌리고 옆으로 물러났다.

 

 

어, 왜 그러니? 맨날 게눈 감추듯 먹더니... 이거 맛있는 거야. 어서 먹어. ”

 

 

혹시 자신이 보고 있어서 그런가 싶어서 베르닌은 잠깐 자리를 피했다. 보통 그런 경우에는 5분쯤 있다 돌아와 보면 미셴카가 음식을 먹은 후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잠시 후 돌아왔더니 햄과 게살, 연어가 신문지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고 검정고양이 미셴카는 돌멩이 옆에 동그마니 앉아서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베르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네 녀석이 잘못했다!’ 하는 표정으로 보여서 베르닌은 이유 없는 가책이 느껴졌다. ‘어, 내가 뭘 잘못했지?’ 하며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되었다.

 

 

“ 미셴카, 왜 그러니? 배가 안 고프니? 다른 데서 맛있는 거 먹고 왔어? ”

 

야아옹!

 

 

뱃가죽도 홀쭉하고 분명히 배가 많이 고파 보이는데 왜 저러나 싶었다. 혹시나 싶어서 베르닌은 주머니를 뒤져서 소시지를 꺼냈다. 껍데기를 벗긴 후 조심스럽게 신문지 옆에 내려놓았다. 그랬더니 고양이가 갑자기 사뿐사뿐 다가왔다. 그리고는 소시지에서 조금 떨어진 쪽에 자리를 잡더니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베르닌이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척 하자 슬금슬금 소시지를 입에 물었다. 곁눈으로 보니 고양이는 배추밭으로 들어가자마자 순식간에 소시지를 먹어치우는 게 아닌가!

 

 

“ 엥, 저 녀석 뭐야. 배고팠던 거 맞잖아. 어휴... 불쌍한 녀석, 맨날 쓰레기나 뒤지고 싸구려 소시지나 받아먹어서 진짜 맛있는 걸 못 알아보는구나... 고양이가 어떻게 생선이랑 게살을 안 먹냐... ”

 

 

베르닌은 자리를 피해주면 미셴카가 와서 남은 연어와 게살을 먹지 않을까 싶어서 사무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문서 대장 정리를 끝내고 다시 뒤뜰로 와보니 신문지 위의 음식은 그대로 남아 있고 물그릇은 비어 있었다. 고양이라는 짐승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베르닌은 주차장으로 갔다.

 

 

 

 

*    *    *

 

 

 

 

 

극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베르닌은 드미트리에게 왕재수 감시 업무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 도청장치는 극장 감독실하고 분장실, 백스테이지에 하나씩 있어. 감독실 전화에도 붙어 있고. 물론 자택에도 있지. 녹음테이프는 내가 듣고 주요 내용을 요약 정리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국장에게 대면 보고를 해. 그런데 요즘은 오후부터는 내가 계속 옆에 붙어 있으니까 오전 녹음본만 들어도 돼. ”

 

“ 뭐라고? 도청 녹음테이프도 네가 듣고 기록하고 심지어 보고까지 한다고? 너 대체 몸이 몇 개냐. 그런 건 원래 엔지니어들이 하는 거잖아. ”

 

“ 너 자꾸 본부랑 해외 지국 생각만 하는데, 여기는 가브릴로프라고. 예산과 인력이 모자란다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도 녹음테이프 매일매일 정리하지는 못해. 몰아서 할 때도 좀 있어. 그래도 극장 내부에 정보원이 있으니까 중요한 내용을 놓치는 적은 없어. 정보원의 보고내용은 내가 받아서 정리하거든. ”

 

“ 그럼 나도 그 지루한 녹음테이프 듣고 보고서 써야 하는 거야? 으윽, 난 해외에 근무할 때도 도청실에서 당직 서는 게 제일 싫었는데... 너무 지겹잖아. 기계적이고... 창의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고. ”

 

“ 어... 넌 안 해도 돼. 사실 자격 요건이 안 돼. 도청이랑 녹음테이프 분석은 인가를 받은 요원만 할 수 있는데 너는 연수요원이라서 승인 떨어지는데 일주일 이상 걸릴 거야. 그냥 내가 할 테니까 이런 업무가 있다는 것만 파악하면 돼. ”

 

“ 다행이다. ”

 

 

베르닌 역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드미트리는 좋은 친구인 것 같았지만 어쨌든 표창을 받은 우수 직원인데다 왕재수를 요주의 정치범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도청 내용을 들었다가 왕재수의 단골 레퍼토리인 공산주의니 레닌이니 스탈린이니 운운하는 얘기라도 튀어나오면 낭패였다.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왕재수와 코즐로프가 딱 붙어서 사랑을 불태우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아무래도 왕재수에게 미리 경고를 해놔야 할 것 같았다.

 

 

드미트리는 감시 업무에 대해 궁금한 듯 이것저것 물었다. 베르닌은 대충 대답해주었다. 서무 업무에 대해서야 자세하게 설명해주었지만 유능한 드미트리가 너무 열을 내어 왕재수에 대한 감시를 시작하면 좋을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드미트리는 왕재수의 신작에 대해서도 꼬치꼬치 물었다.

 

 

“ 저, 나는 예술은 별로 아는 게 없어서... 고전 발레는 아니고... 뭔가 새로운 움직임을 추구하는 거래. 내용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이야기처럼 흘러가는 건 아닌가봐. 남녀가 만나서 좋아하고 헤어지고 뭐 그런 거랬어. 여기 무용수들이 너무 틀에 박혀 있으니까 춤도 재미있게 출 수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만들었대. 나도 그 정도밖에 모르겠어. 근데 연습하는 거 보니까 막 쿵쾅거리고 뛰고 들고 구르고 재미있어 보였어. 코믹하고. 그래서 무용수들이 연습하면서 자기들끼리 많이 웃더라고. 춤추다가 박수도 치고 고함도 지르고 떠들라고 시키기도 해. 근데 그게 다 작품의 요소래. 무슨 말인지 이해는 잘 안 가지만. ”

 

“ 어, 의외네. ”

 

“ 뭐가? ”

 

“ 야스민 말이야. 나 팬이었다고 했잖아. 그 사람이 안무한 건 다 봤거든. 작품 스타일 원래 안 그래. 움직임은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거 많이 쓰지만 주제나 분위기는 딱 러시아 정통 문학 느낌이거든. 엄청 드라마틱하고 무겁고 철학적이고. 결말도 주로 비극이거나 풍자야. 무대 위에서 막 장난치고 그러는 타입 아니거든. 놀랍네. 그 신작 되게 궁금하다. ”

 

“ 엥... 러시아 정통 문학... 드라마틱, 무겁고 철학적... 비극... 진짜 걔랑 안 어울린다... 너 혹시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는 거 아니야? ”

 

“ 착각이라니. 어떻게 야스민이랑 다른 사람을 착각하냐. 그렇게 유명한 스타를. ”

 

 

베르닌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아는 왕재수와 드미트리가 아는 야스민은 다른 인물 같았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으므로 똑똑한 드미트리에게 더 이상 무식쟁이 취급당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극장에 도착한 베르닌은 언제나처럼 감독실 쪽으로 가서 비서인 류드밀라를 찾았다.

 

 

“ 안녕하세요, 류다. ”

 

“ 어서 와요, 다냐. 아앗!

 

 

뒤따라온 드미트리를 보고 류드밀라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두 눈이 둥그레진 채 드미트리와 베르닌을 이리 보고 저리 보았다. 그리고는 회사 사람들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 쌍둥이예요? 아니면 형제? ”

 

“ 저, 아니에요. 그냥 좀 닮은 거예요. 이쪽은 드미트리예요. 모스크바에서 왔는데 업무 연수 때문에 같이 온 거예요. ”

 

“ 어머나, 정말 너무 닮았네! 세상에, 단추 눈이 두 명이야! 근데 이쪽은 되게 세련됐네. 모스크바에서 왔다고요? ”

 

“ 네. 저, 미하일은 연습실에 있나요? ”

 

“ 아뇨, 지금 검열국장이랑 접견실에서 얘기 중이에요. ”

 

“ 네? 검열국에서는 벌써 몇 번이나 왔다 갔잖아요. 왜 국장까지 직접 온 건데요? ”

 

“ 왜 그러겠어요! 다음 주가 공연이니까 재 뿌리려고 그런 거죠! 못된 인간들 같으니! ”

 

“ 또 싸우면 어떡하지... 그냥 검열요원도 아니고 국장이라면서요, 싸우면 안 될 텐데... ”

 

“ 그러게요. 당신이 좀 들어가 봐요. 분위기 봐서 감독님이 흥분하면 좀 말려요. ”

 

 

 

그래서 베르닌은 접견실로 갔다. 살며시 노크를 하고 들어가려는데 드미트리가 따라왔다.

 

 

“ 어, 저기... 너도 들어가려고? ”

 

“ 나 연수 보고서 써야 하잖아. 이거 감시 업무잖아. ”

 

“ 그, 그래... 근데 너랑 나랑 닮아서 자꾸 사람들이 놀라니까 내 뒤에 있어야 돼. 알았지? ”

 

“ 응. ”

 

 

접견실 문은 약간 열려 있었다.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는 걸 보니 역시나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하나마나한 노크를 한 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검열국장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떠들고 있었고 그 옆에는 베르닌도 낯이 익은 검열요원 하나가 수첩에 계속 뭔가를 적고 있었다. 왕재수는 의자도 아니고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찌푸린 미간과 꽉 다문 입술을 보니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누가 봐도 폭발 직전의 표정이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귀를 기울여보니 역시 검열국장은 신작의 이념성을 문제 삼고 있었다.

 

 

“ 그러니까 그게 문제란 말이오! 멀쩡한 음악을 왜 조각조각내고 중간에 휴지부를 넣는단 말이냐 이거야! 그건 쇼스타코비치잖소! 그것도 레닌그라드 심포니! 그 애국적인 음악을 잘라내고 마음대로 편집해서 쓰다니! 이것은 조국에 대한 모독이고 당에 대한 모욕이야! 크레믈린 의원들이 보러 오는 무대에서 그런 불충한 시도를 할 수는 없... ”

 

 

왕재수가 국장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심지어 반말로 쏘아붙였다.

 

 

“ 첫째. 의원들인지 뭔지 그 사람들은 당신 보러 오는 거 아니고 내 작품 보러 오는 거니까 신경 끄시지. 둘째. 쇼스타코비치에 대해서는 당신보다 내가 백배는 더 잘 알고. 셋째. 마음대로 편집한 게 아니라 작품의 흐름에 맞게 편집했어. 넷째. 이번 신작에는 총 6가지 음악을 쓰는데 그 중 쇼스타코비치는 5분밖에 안 들어가. 메인은 쇼팽이고. 당신 쇼팽이 누군지나 알아? 다섯째. 제일 바보 같은 짓이 뭔지 말해줄까? 내가 쓴 쇼스타코비치 심포니는 1번이야. 레닌그라드 심포니는 7번이고. 7번은 벌써 볼쇼이에 있을 때 다른 작품에 썼어! 무용이고 음악이고 담 쌓은 얼간이 주제에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

 

 

검열국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뭐가 어쩌고 어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내가 누군지 알아? 난 국장이야! 검열국 기관장이라고! ”

 

누군지 왜 몰라! 예술 탄압자! 일자무식! 얼간이 천치!

 

“ 이 자식이 감히 누구에게 얼간이라는 거야! ”

 

“ 아, 얼간이가 아니라 이거야? 그럼 대봐, 레닌그라드 심포니가 몇 번인지. 그거라도 맞추면 얼간이 천치에서 천치는 빼 줄게. 그리고 내가 쓴 여섯 가지 음악이 누구누구의 작품인지 대면 얼간이도 취소해줄게. 힌트라도 줄까? 다 유명한 음악가들이야. 쇼스타코비치 빼고는 모두 20세기 이전 사람들이고. 대봐. 레코드 다 압수해갔잖아. 저 얼간이 자식이 리허설 내내 들락거리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도 다 들었고. ”

 

 

검열국장이 멈칫했다. 1번과 7번 구분이 안 되는 것은 베르닌과 마찬가지인 데다 6명의 작곡가가 누구인지는 더욱 모르는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국장이 ‘쇼팽...’ 하고 중얼거리다가 흠칫하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 반동분자 녀석! 스페호프 국장 말이 다 맞았어! 불여우 같으니! 그런 반동적인 작태를 우리 극장 무대에 올릴 수는 없어!

 

네깟 게 뭔데! 공연은 정부와 시 의회에서 승인한 거야! 크레믈린 지역문화예산특위에서 편성해준 예산으로 하는 거고! 너 같은 얼간이들이 죽고 못 살면서 설설 기는 높으신 작자들이 해달라고 한 거라고! ”

 

감히 그 분들에게 높으신 ‘작자들’이란 표현을 쓰다니! 넌 이제 끝장났어! 그대로 다 보고할 거야! 그 잘난 공연이 아니라 네 모가지 걱정이나 해! ”

 

맘대로 해! 이제 좀 나가! 너 때문에 애들 연습을 못 시키고 있잖아! 바보 천치 개소리를 들었더니 귀가 다 썩는 것 같네. 어휴, 귀 좀 씻어야지 안 되겠어. 류다! 비누 좀 가져와요!

 

 

 

베르닌은 창가로 달려갔다. 왕재수의 입을 틀어막았다.

 

 

“ 야, 너 왜 그래! 국장님, 진정하세요. 이 녀석이 요즘 공연 준비 때문에 너무 과로를 해서 제정신이 아니에요. 음악 건은 다시 협의하시면... ”

 

“ 협의 같은 소리! 가만 두지 않겠어, 애송이 불여우 자식 같으니! ”

 

시끄러워, 이 천치야! 빨랑 나가!

 

 

왕재수가 베르닌의 손을 뿌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검열국장이 펄펄 뛰고 있는데 드미트리가 곁으로 다가가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노여움을 좀 가라앉히시지요. 검열국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모스크바 검열본부에서 이런 경우를 대비해 2주 전에 작성한 지침이 있습니다만. 괜찮으시면 제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며칠 전 모스크바에서 지역문화예산특위 조사관을 만난 적이 있어서요. ”

 

 

‘뭐 이런 놈이 있나’ 하고 더욱 화를 내려던 검열국장은 ‘모스크바’, ‘본부’, ‘지역문화예산특위’ 등의 단어를 듣자 좀 누그러지더니 드미트리와 함께 복도로 나갔다. 수행하던 검열요원도 따라 나갔다. 그 틈을 타서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물을 한 잔 건네주었다.

 

 

“ 야, 물 먹고 진정 좀 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열국장인데 그렇게 이성을 잃고 대들면 어떡하니. 가뜩이나 넌 요주의 인물인데. 그러다 또 감옥 갈 수도 있단 말이야. ”

 

보내라고 해!

 

“ 너 감옥 무서웠다면서. 때리고 주사 놓고 못살게 굴었다며. 그리고 너 감옥 가면 공연도 못 올리게 되잖아. 너만 바라보고 있는 무용수 애들 다 어쩌라고. 게다가 바이올린 아저씨는... ”

 

“ 저 바보 천치가 진짜 개소리만 하잖아... ”

 

“ 그게 하루 이틀이니. 여기 정치인들이랑 공공기관 사람들치고 예술 잘 알고 교양 있는 사람들 거의 없어. 심지어 검열국인데 뭘 바라니. 너 볼쇼이랑 키로프에서도 안무했었다며. 해외에서도 공연하고. 그때도 검열 다 받았을 거 아니야. ”

 

그래, 받았어! 그때도 하도 거지같은 짓을 많이 당해서 다 때려치우려고 했던 거란 말이야! 근데 저놈은 여태 만난 검열꾼 중에서도 최악으로 멍청하니까 더 열 받잖아!

 

 

왕재수는 생각할수록 분한 듯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평소에는 웬만하면 하지도 않던 욕지거리를 줄줄이 쏟아냈다. 그것도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놀라운 욕설들이라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 으아, 그만 좀 해. 무용수들이 와서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여자애들 기절초풍하겠다! ”

 

앗, 맞다... 리허설...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어. 애들 다 기다리고 있을 텐데! ”

 

 

왕재수가 퍼뜩 놀라더니 창가에서 뛰어내렸다. 당장 복도로 달려 나가려는 왕재수의 어깨를 잡아 세우며 베르닌이 엄격하게 물었다.

 

 

“ 너 점심 먹었어, 안 먹었어? ”

 

먹었어! 먹었어!

 

“ 두 번이나 그렇게 빨리 대답하는 걸 보니 수상해! 너 점심 안 먹었지? ”

 

“ 먹었어! ”

 

“ 언제, 어디서, 뭐 먹었는데! ”

 

“ 점심시간에, 차이카에서! 어, 저... 보르쉬랑 펠메니... ”

 

“ 뻥치지 마! 차이카에서 펠메니 안 팔잖아! 그리고 너 아르카지가 내주는 보르쉬 죽어도 안 먹잖아! ”

 

에이씨... 그래, 안 먹었다! 무대 의상이 도착했는데 색깔을 반대로 해서 왔잖아! 상의는 빨강, 하의는 하양이어야 되는데 거꾸로 오고... 그거 해결하고 먹으려고 했는데 그러고 나니까 저 얼간이들이 들이닥쳤단 말이야. ”

 

“ 그럼 지금 나랑 차이카 가. 가서 뭐든 먹어야 돼! ”

 

“ 안 돼, 애들 리허설 시켜야 돼. 벌써 한 시간 동안 티무르 보리소비치 혼자서 봐주고 있단 말이야. ”

 

“ 너 어차피 오늘도 늦게까지 애들 갈구면서 연습시킬 거잖아! 그러려면 뭐든 먹어야 돼! 가뜩이나 검열국장한테 소리 지르느라 그나마 남아 있던 칼로리도 다 소모됐겠다. ”

 

 

왕재수는 항의하려고 했지만 베르닌의 엄한 눈초리를 보고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차이카 갔다 올게. ”

 

“ 나랑 같이 가. ”

 

“ 너 지금 나 의심하냐! 간다 하고 안 갈까봐! ”

 

“ 아니야, 의심해서 그런 거! 너 혼자 보내놓으면 보나마나 요구르트 한 개 사과 한 개 사먹고 끝낼 게 뻔할 뻔자니까 그래! ”

 

“ 차이카에서 사과 안 팔아! 요구르트도 지금 가면 다 떨어지고 없단 말이야. 기껏해야 불어터진 마카로니랑 보르쉬 국물만 있겠지. 어휴... ”

 

“ 하여튼 같이 가! ”

 

 

그때 접견실로 드미트리가 들어오면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검열국장은 대충 해결했어. 예술 쪽에 대해서는 정말 하나도 모르더라고. 화가 났던 것도 충분히 이해해요, 미하일. 아참,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안녕하세요, 드미트리 베르닌입니다. ”

 

 

베르닌은 예의 휘둥그레진 눈과 ‘아앗!’과 ‘쌍둥이야?’를 기다렸다. 하지만 왕재수는 눈썹을 약간 치켜 올리며 드미트리가 내민 손을 무시한 채 딱딱한 어조로 물었을 뿐이었다.

 

 

“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

 

“ 어, 저... 모스크바에서 우리 사무실로 연수받으러 온 친구야. 저, 내가 담당하게 돼서 같이 왔어. 네 일에 방해는 안 될 테니까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

 

 

베르닌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드미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힘차게 손을 내밀었지만 왕재수는 금세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그러니까 KGB 나부랭이가 하나 더 온 거네! 꺼져!

 

 

베르닌은 당황했다. 왕재수의 성격을 잘 아니 놀라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예의를 차리고 있었던 드미트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드미트리가 환하게 웃으며 싹싹하게 말했다.

 

 

“ 제가 KGB 본부에서 온 건 맞지만 당신의 감시요원 자격으로 온 건 아니에요. 전 레닌그라드 출신이고 키로프 시절부터 당신 팬이었거든요. 당신이 나온 작품은 다 봤어요. 안무작들은 뉴욕에서 올렸던 것 빼고는 모두 초연으로 봤고요. 제일 첫 작품을 보러 갔던 날이 생각나네요. 루슬란과 류드밀라. 거기서 당신이 춘 로그다이는 정말 잊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청년 극장 무대에서 올렸던 브이소츠키와 마야코프스키 콜라주였어요. 그런 식으로 마야코프스키 시를 해체해서 춤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던 왕재수는 드미트리의 말에 잠깐 멈칫했다. 좀 놀란 것 같았다.

 

 

그건 연극대학 페스티벌 때 올린 소품이라서 아는 사람 별로 없는 건데... ”

 

“ 아까도 얘기했듯이, 팬이었답니다. 그래서 이번 신작도 굉장히 궁금해요. 검열국장 얘기는 너무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크레믈린 지역문화예산특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더군요. 더불어 게오르기 벨스키 의원의 특별 지시에 대해서도 상기시켜주었더니 납득하고 돌아갔습니다. 아마 이제 작품에 대해 트집을 잡지는 않을 겁니다. 음악이든 뭐든 전부요. ”

 

 

베르닌은 매우 감탄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손을 마주잡고 기뻐했다.

 

 

“ 우와, 엘리트 요원이란 건 알았지만 그래도 너 진짜 대단하구나, 드미트리. 그렇지 않아도 이번 신작 때문에 검열국에서 계속 얘 괴롭히고 있었는데. 해결이 돼서 다행이다. 이제 한시름 놨네, 그치? ”

 

 

왕재수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베르닌을 째려보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무조건 잘못했다!’란 표정을 짓고 있던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생각나는 눈초리였다. 어쩐지 억울해진 베르닌이 ‘너 왜 그러냐!’ 하고 물어보려는데 왕재수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 도와준 건 좋은데, 다시는 내 일에 끼어들지 마. 난 바빠서 이만. ”

 

 

드미트리는 왕재수의 무례한 태도에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굉장히 상냥하게 대꾸했다.

 

 

“ 주제넘게 나섰다면 미안합니다. 앞으로는 조심하죠. 실례가 안 된다면 리허설을 구경하고 싶습니다만. ”

 

외부인은 안 돼!

 

 

다시 왕재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드미트리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왕재수를 데리고 구석으로 갔다. 그리고는 화난 왕재수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 미안해, 내가 먼저 얘기해줬어야 하는데. 너 이런 거 싫어하는 거 알긴 아는데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본부에서 행정 연수 온 친구야. 레닌그라드 법대 나왔고 해외에서도 근무했대. 진짜 엘리트야. 네 팬인 것도 맞고 아는 것도 많더라. 아침부터 얘기해보니까 나쁜 애는 아니야. 착해. 내 서무 업무도 많이 도와줬고. 일주일 동안 내가 데리고 다녀야 해. 국장 명령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 저... 극장에도 와 있어야 하고... ”

 

“ 그러니까 내 감시 요원이 하나 더 생긴 게 맞는 거잖아. ”

 

 

왕재수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표정이 더욱 어두컴컴해졌기 때문에 베르닌은 가슴이 철렁했다.

 

 

“ 아, 으응... 저... 너무 화내지 마... 내가 잘 커버할게. 너 방해 안 하게 할게. 그냥 쟤가 네 팬이라서... 알고 보면 괜찮은 애야. 요리도 잘 하고 일도 잘해... 발따예프가 나한테 떠넘긴 일도 다 처리해줬어. 있지... 가뜩이나 감시받는 거 싫을 텐데 연수요원까지 와서 속상하겠지만... ”

 

“ 내가 저 재수 없는 녀석 내쫓으면 너 국장한테 혼나? ”

 

“ 어... 아마도... 국장 명령으로 데려온 거니까... ”

 

“ 너 잘려? 벌목공도 못하게 되는 거야? ”

 

“ 아, 아니야... 설마 그 정도까지야... 근데.. 저... 벌목공... 아... ”

 

“ 알았어, 그럼. 맘대로 하라고 해. ”

 

“ 어,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연습실에 같이 가도 되니? ”

 

“ 맘대로 하라고. ”

 

 

왕재수는 다시 ‘네가 잘못했다’ 표정을 지었지만 아까처럼 버럭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휙 돌아서더니 베르닌과 드미트리의 곁을 지나쳐 복도로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불편한 표정으로 서 있는 드미트리에게 갔다.

 

 

“ 대충 상황 얘기해서 납득했으니까 아까처럼 화내지는 않을 거야. 연습실 같이 들어가서 봐도 돼. 너무 기분 상해하지 마. 쟤 원래 그래. 자기 일 방해받는 거 굉장히 싫어해. 감시받는 것도 그렇고. ”

 

“ 나 기분 안 상했어. 미하일 입장에선 당연하잖아. 감시꾼이 하나 더 생긴 건데. 검열 때문에 그 고생을 하고 결국 수용소까지 갔으니 기분 나쁘겠지 뭐. 나 저 친구가 파리에서 체포됐을 때 그쪽 대사관에 있었거든. 거기 진짜 난리도 아니었어. 우리 대사관 앞에서 피켓 시위에 무슨 퍼포먼스에... 두 달 동안 진짜 매일매일 모여들었어. ”

 

“ 무슨 시위? 우리 대사관 앞에서? 프랑스 사람들이? ”

 

“ 아, 너 몰랐구나. 저 친구 파리에서 망명할 뻔 했잖아. 그거 실패해서 잡힌 거고. 인권 운동가들에 예술가들에 일반 시민들에 하여튼 엄청 많이 모였어. 수용소 수감됐다는 정보까지 새어나가서 더 난리였거든. 풀려날 때까지 계속 시위했어. 파리에서만 그런 거 아니야. 런던이랑 뉴욕에서도 그랬고. ”

 

“ 아... 그랬구나. 근데 쟨 망명하려던 거 아니라던데. 친구들 만나 놀려고 기어나갔다가 잡혔다고 억울해하던데... ”

 

“ 그게 그냥 친구들이 아니니까 그렇지. 국제적으로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에 자유주의자들에... 그 사람들이 저 친구를 몇 년 전부터 자기들 쪽으로 빼오고 싶어서 얼마나 애를 태웠는데. 뭐 미하일 입장에선 억울했을 거야. 망명하려고 했으면 벌써 몇 번은 그냥 빠져나가고도 남았거든. 이건 그냥 친구끼리니까 하는 말이니까 너 한 귀로 듣고 흘려라. 나 솔직히 그때 능력만 됐으면 쟤 빼돌려주고 싶었어. ”

 

뭐? 넌 엘리트 요원이잖아... 표창도 받았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단 말야? ”

 

“ 잡혀가면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아니까 그렇지. 너무 안타깝더라고. 팬이었다고 했잖아. 예술은 예술이고 정치는 정치지. 하여튼 죽거나 다시는 춤 못 추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풀려나서 다행이야. 여기 와 있는 걸 보니까 재능이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후원자들이 남아 있으니까 좀 버티면 언젠가는 복권되겠지. 근데 쟤 성질은 좀 죽여야겠더라... 아까처럼 검열국장에게 대들고 화내면 이로울 거 하나도 없는데... 전에는 곁에서 본 적이 없으니까 이런 스타일인줄은 몰랐어. ”

 

“ 아, 으응... 극장이랑 춤에 대해 간섭하는 거 제일 싫어해... 일단 연습실 가자. 너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보기만 해야 돼. 알았지? ”

 

“ 응. ”

 

 

 

베르닌은 드미트리와 함께 연습실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왕재수는 차이카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겠다던 약속은 헌신짝처럼 걷어찬 채 연습실에서 무용수들을 마구 굴리고 있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고 드미트리에게 귓속말을 했다.

 

 

“ 1층에 가면 차이카라고 카페 하나 있거든. 거기 가서 간단하게 먹을 만한 것 좀 사올래? 저 녀석 너무 바빠서 점심도 걸렀거든. 있다가 쉬는 시간에 좀 먹여야겠어. ”

 

“ 아, 아까 너희가 얘기하는 거 들었어. 내가 혹시나 해서 아까 도시락 바구니에서 초코바하고 닭가슴살 스틱 따로 빼놨거든. 무용수들은 연습하면 먹을 틈이 없으니까 손쉽게 당분과 단백질 보충할 수 있는 간식이 필요하대. 이 가방 안에 넣어놨으니까 좀 있다 주면 될 거야. ”

 

 

베르닌은 정말로 감탄했다.

 

 

“ 와, 너 진짜 대단하다. 근데 미하일은 초코바 안 먹어. 닭가슴살 스틱만 줘야겠다. ”

 

“ 다크 초콜릿 70%니까 아마 먹을 거야. 아까 화 많이 냈으니까 조금 달콤한 거 줘도 모르고 먹을 걸. ”

 

 

쉬는 시간에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초코바와 닭가슴살 스틱을 건네주었다. 왕재수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답답해진 베르닌이 꾸짖었다.

 

 

“ 너 왜 그래. 이거 몸에 좋은 거란 말이야. 초코바도 단 거 아니야. 아까 차이카도 안 갔잖아. ”

 

“ 안 먹어, 감시꾼이 주는 건. ”

 

“ 엥? 너 어떻게 알았어, 이거 드미트리가 챙겨줬는데. ”

 

“ 내가 바보냐! ”

 

 

베르닌은 논쟁을 포기했다. 할 수 없이 차이카에 다녀왔다. 역시 진열대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거라곤 싸구려 초콜릿으로 코팅된 딱딱한 비스킷뿐이었다. 비스킷과 우유를 사서 올라갔다.

 

 

“ 야, 이거라도 먹어. 초콜릿 싫으면 벗겨내고 먹든지. ”

 

 

왕재수는 말없이 비스킷을 먹었다. 설탕 맛만 나는 싸구려 초콜릿을 벗겨낼 생각도 하지 않고 부스러기를 흘리면서 전부 먹었다. 우유도 다 마셨다.

 

 

“ 너 엄청 배고팠구나. 그 비스킷 되게 달던데... 그냥 이 초코바랑 닭가슴살 스틱 먹지... 네 입맛엔 이게 훨씬 맞았을 텐데. ”

 

“ 우리 극장 카페에서 파는 거니까 매상 올려주려고 그런 거야! ”

 

“ 내 주머니 털어서 매상 올리냐! ”

 

“ 그래! KGB 주머니 좀 털면 안 되냐!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 힘든 놈이었다.

 

 

 

 

*   *   *

 

 

 

 

왕재수는 오페라 공연 쪽은 부감독에게 맡겨둔 채 9시까지 남아 있었다. 무용수들을 지도하는 건 8시쯤 끝냈지만 의욕에 찬 주역과 조역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남아서 연습을 계속했다. 왕재수는 그들에게 연습하는 건 좋은데 9시에는 들어가서 자라고 했다.

 

 

“ 우리 그냥 새벽까지 연습하면 안 되나요? 이제 감독님 얘기가 뭔지 알 것 같아요. 박자를 맞추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음악을 타면서 놀라는 거요. 그 느낌을 잊기 전에 계속 연습해보고 싶어요. ”

 

“ 한 번 놀 줄 알게 되면 계속 놀 수 있어. 이제 며칠 안 남았으니까 다들 컨디션 관리해야 돼. 안 그러면 당일에 몸살 나서 못 올라가. 밥 잘 챙겨먹고 잠도 잘 자야 돼. 그리고 오늘부터는 다들 술 마시지 마. 맥주 한 잔, 샴페인 한 모금도 안 돼. 연습 때 아무리 잘해도 무대 위에서 컨디션 별로면 다 소용없어. 나 아홉시에 다시 와서 문 잠글 거야. 그러니까 그 전에 들어가라. ”

 

 

왕재수는 연습실에서 나오더니 의상실과 소품실을 오가며 이것저것 확인을 하고 막판에는 결국 오페라 공연을 체크하러 백스테이지에도 들렀다. 드미트리는 베르닌과 함께 왕재수의 뒤를 따라다녔다. 이따금 수첩에 뭔가를 적기도 하고 왕재수에게 공연이나 준비 과정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왕재수는 드미트리의 질문을 모조리 무시했다. 너무 쌀쌀맞게 굴어서 베르닌이 다 민망할 정도였다.

 

 

마침내 9시가 되었다. 왕재수는 연습실로 갔고 아직 남아 있던 가릭과 데니스를 호통을 치며 내쫓았다. 복도에서 타마라를 발견하고는 여자 무용수에 대한 평소의 상냥함도 잊고 야단을 치려는데 타마라가 잽싸게 선수를 쳤다.

 

 

“ 전 아까 나왔어요. 실은 집에 갔다 온 거예요. ”

 

“ 집에 갔으면 쉬어야지 왜 다시 나와! ”

 

“ 오늘 식사도 제대로 안 하셨잖아요. 이거 가져가서 좀 드세요. 오늘 데니스 어머니가 오셨거든요. 맛있는 거 많이 해놓으셨는데 감독님 생각나서 조금 가져왔어요. 생선수프 좋아하시잖아요. ”

 

 

타마라가 둥그런 보온통과 조그만 꾸러미를 내밀었다.

 

 

“ 연어랑 농어로 끓인 우하예요, 맛있어요. 이건 양배추 파이예요. 같이 드시면 몸도 따뜻해지고 기력도 보충되고 좋아요. ”

 

 

왕재수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야단치는 대신 수프와 파이를 받았고 타마라에게 고맙다고 했다. 타마라는 왕재수를 꼭 껴안고 뺨에 뽀뽀를 했다.

 

 

“ 끼니 거르지 마세요, 미셴카. 우리 실력이 별로라서 많이 힘든 거 알아요. 그래도 진짜 열심히 해서 좋은 무대 보여줄 테니까 감독님도 자기 몸 잘 챙기세요. ”

 

“ 고맙긴 한데 너네 실력 이제 별로 아냐. 전에는 별로였지만 많이 나아졌어. 내가 가르쳤는데 아직까지 별로일 리가 없잖아! 하여튼 너 자꾸 나 껴안지 마! 네가 이러니까 다른 여자애들도 와서 다 껴안잖아! ”

 

우리 꽃미남 감독님 이럴 때나 껴안아보죠!

 

“ 저, 타마라... 저기 당신 남자친구... 데니스가 째려보고 있는데요... ”

 

 

베르닌이 나름대로는 농담을 섞어서 말했다. 타마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 괜찮아요. 이제 데니스가 와서 껴안아줄 거예요. ”

 

 

그러자 정말로 데니스가 와서 왕재수를 와락 껴안았다.

 

 

“ 벌써 한참 전부터 안아주고 싶었어요! 진짜 고마워서요! ”

 

“ 야! 아직 신작 발표 전이거든! 누가 보면 다 끝낸 줄 알겠네! ”

 

“ 나도, 나도! 나도 우리 감독님 안아줘야지! ”

 

 

가릭도 달려들더니 뒤에서 왕재수를 부둥켜안았다. 왕재수는 덩치 큰 두 무용수의 포옹에 붙들린 채 ‘뭐하는 거냐, 이 멍충이들아! 춤이나 좀 잘 춰보란 말이야!’ 하고 투덜댔지만 눈으로는 웃고 있었다.

 

 

어쩐지 뭉클해진 베르닌은 자기도 가서 왕재수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드미트리 쪽을 보았다. 드미트리는 한 손에는 수첩을 든 채 왕재수와 무용수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베르닌은 자신과 아주 닮은 그 까만 눈에서 그런 강렬한 시선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드미트리가 왜 그런 시선을 던지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 기분이 살짝 찝찝했다. 혹시 자기가 이제까지 그냥 넘어가줬던 왕재수의 문제 발언들을 하나하나 적어서 스페호프에게 보고하려는 건가 싶어서 걱정도 됐다.

 

 

‘ 아니야, 괜한 걱정이야. 쟨 좋은 앤데. 미하일의 팬이고 발레도 좋아하니까 관심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 ’

 

 

그때 드미트리가 베르닌을 보더니 빙긋 웃으며 여전히 싹싹한 음성으로 말했다.

 

 

“ 무용수들이 미하일을 잘 따르는구나. 하긴 레닌그라드에서도 후배들하고는 사이좋았다고 했어. 이제 오늘 일과는 다 끝난 건가? ”

 

“ 아, 으응... 이제 집에 갈 거야. 저 녀석이 남는다고 해도 협박해서 집에 데려갈 거야. 계속 과로하고 있거든. ”

 

“ 그럼 너는 미하일 데려다 주고 나서 너희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

 

“ 아, 나 같은 아파트에 있어. 국장이 감시 업무 맡기면서 나 이사시켰거든. 층만 다르고 같은 건물이야. 너는 어디에 있어? ”

 

“ 요원 숙소. ”

 

“ 아, 사무실 뒷길에 있는 거기... 그러면 내가 가면서 내려줄까? ”

 

“ 아니야, 괜찮아. 사실 끝나고 카체리나랑 요 앞에서 한 잔 하고 산책하기로 했거든. ”

 

“ 어, 그랬구나... 그럼 빨리 가봐. 내일 사무실에서 보자. ”

 

“ 그래, 다냐. 오늘 덕분에 많이 배웠다. 내일 아침에 봐. ”

 

 

 

드미트리는 왕재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먼저 나갔다. 왕재수는 인사를 받아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무용수들이 인사를 하고는 베르닌에게 달려와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으앗, 다닐! 난 저 사람이 당신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왜 뜬금없이 감독님에게 저렇게 존댓말을 쓰며 인사하지 하고 깜짝 놀랐어요! ”

 

“ 당신 쌍둥이였어요? 아니면 형제예요? ”

 

“ 아니에요, 그냥 좀 닮은 거예요. 모스크바에서 온 연수요원이에요. ”

 

“ 와, 진짜 똑같이 생겼다... 구분 못할 것 같아요! ”

 

“ 그러게, 목소리도 똑같아요! 그리고 키도 똑같고 체격까지! ”

 

“ 알고 보면 쌍둥이 아니에요? ”

 

“ 감독님은 안 놀라셨어요? 아까 그 사람이랑 다닐 진짜 똑같던데! ”

 

 

왕재수는 고개를 저으며 짜증을 냈다.

 

 

“ 다들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똑같긴 뭐가 똑같아. 완전 다른데. ”

 

“ 어, 그치만 얼굴부터 시작해서 진짜 닮았는데... ”

 

안 닮았어! 하나도 안 닮았다고! 이제 그만 들어가! ”

 

 

타마라와 데니스, 가릭은 ‘진짜 닮았는데’ 하고 중얼거리다가 또 왕재수를 와락 껴안고는 밤 인사를 한 후 우르르 복도를 달려 나갔다. 베르닌도 왕재수의 어깨에 재킷을 뒤집어씌우며 엄하게 말했다.

 

 

“ 너도 이제 가자! ”

 

“ 아, 나 조금만 더... ”

 

“ 너 아까 쟤들한테 뭐라고 했어. 며칠 안 남았으니까 컨디션 관리하라고 했잖아. 지금 아무리 잘해도 당일에 아프면 다 도루묵이라고. 너도 마찬가지야! ”

 

“ 어휴, 내가 한 말 이상하게 해석하지 말란 말이야! 공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

 

그래, 나 문외한이야. 그래도 나 세 번째 주역 맡았던 거 기억 안 나냐?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그때도 네가 나한테 똑같이 얘기했어. 쉬어야 된다고. 그러니까 너도 가서 쉬어야 돼. 오늘 먹은 것도 별로 없잖아. 타마라가 가져다 준 거 맛있겠네. 집에 가서 우하랑 양배추 파이 좀 먹고 자자. ”

 

“ 아휴, 너 갈수록 왜 이렇게 시어머니 노릇을 하냐... 알았어. 가자. ”

 

 

 

 

*   *   *

 

 

 

 

 

왕재수는 차를 타자마자 꾸벅꾸벅 졸았다. 하지만 다리를 건널 때쯤 되자 깨어났고 배가 많이 고팠는지 꾸러미를 풀어서 양배추 파이를 두 개 꺼냈다. 하나는 자기가 먹고 하나는 운전하는 베르닌의 입에 쑤셔 넣어 주었다.

 

 

“ 와, 이거 맛있네. 양배추도 많이 들어 있고 촉촉하고. 근데 아까 그 닭가슴살 스틱도 맛있었는데... 집에 가서 그것도 좀 먹어봐. 내가 챙겨왔어. ”

 

“ 싫어. 감시꾼 나부랭이가 가져온 거 먹기 싫어. ”

 

너무 그러지 마. 네 팬이잖아. 파리에도 있었대. 불어도 잘하고 영어도 잘 한대. 무용이랑 예술도 많이 알고. 그런 거 보면 너랑 잘 통할지도 몰라. ”

 

“ 그래봤자 KGB 끄나풀... 스파이! ”

 

“ 야, 나도 KGB인데... 너무 매도하지 마. ”

 

“ 넌 그 자식처럼 잘난 체 안하잖아. 바보니까. ”

 

“ 야! 너 자꾸 나한테 바보라 할래! 나도 법학 전공하고 나름대로 우등생이었단 말이야! 외국어랑 예술만 모르는 거지... ”

 

“ 하여튼 차라리 그게 낫단 말이야! 바보가 훨씬 나아. ”

 

“ 엥... 그건 또 무슨 논리람... 근데 너 진짜 드미트리 처음 봤을 때 안 놀랐어? ”

 

“ 왜 놀라? ”

 

“ 걔랑 나랑 많이 닮았잖아. 나도 진짜 놀랐는데, 꼭 거울 보는 것처럼. 아침에 걔 보고 나서 나 엄마한테 전화까지 해봤어. 혹시 레닌그라드에 나 모르는 사촌 있었냐고. 근데 아니더라고. 너무 신기하지 않아? 아무 관계도 아닌데 나랑 너무 똑같이 생겼어. ”

 

“ 똑같이 생기긴. 완전히 다른데. ”

 

“ 야, 당사자 눈에도 똑같아 보이는데 웬 고집이냐! 그건 네가 KGB를 너무 싫어하니까 그러는 거지! 아니면 옷차림이 달라서 그런가... 넌 패션인지 뭔지 중시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걔 양복 외제인 것 같더라고. 구두도 완전 반짝거리고. 나도 그렇게 잘 차려입으면 좀 나아보이려나... ”

 

“ 그래, 제발 좀 차려입어라. 오늘도 아가일 무늬 셔츠에 손목토시... 변함이 없네. 근데 옷차림이랑 상관없어. 너랑 걔랑 딱 보면 완전히 다른데 왜 자꾸 닮았다고 다들 난리인지 이해가 안 가. ”

 

“ 참 이상하네... 내가 보기엔 진짜 비슷한데. 어디가 달라? 다른 사람들은 걔랑 나랑 있는 거 보자마자 다 소리 지르고 쌍둥이 아니냐고 물었거든. 네 눈엔 뭐가 다른데? ”

 

“ 어휴, 그런 걸 어떻게 하나하나 말로 설명하니. 그냥 다른 거지. ”

 

“ 그래도... 얼굴이랑 키랑 체격이랑 목소리까지... ”

 

 

왕재수는 베르닌의 얼굴을 힐끗 훑어보더니 귀찮은 듯 중얼거렸다.

 

 

“ 머리 가르마도 너는 오른쪽으로 탔는데 걔는 왼쪽으로 탔고. 너는 관자놀이에 새치가 많은데 걔는 정수리에 몰려 있어. 그리고 너는 눈매가 살짝 처졌는데 걔는 안 처졌고 왼쪽 눈매는 오히려 살짝 위로 올라가 있어. 콧방울도 네가 더 넓고 걔는 약간 위로 올라붙었고. 웃을 때도 너는 양쪽 입가가 똑같이 실룩거리는데 걔는 왼쪽만 더 올라간단 말이야. 어깨도 걔가 좀 더 넓게 각진 편이고. 몸매랑 걸음걸이 보면 그 자식은 운동하는 놈이야. 체격은 비슷해도 너는 살이고 걔는 근육이라고. 걷는 것도 그 녀석이 좀 더 보폭도 넓고 팔도 많이 흔들어.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그 자식은 재수 없게 쳐다본단 말이야! 사람 훑어보는 게 무슨 그림이나 정육점 고기 감정하는 것 같았다고! 그런 자식 딱 보면 알아, 완전 앞잡이! 잘난 체하는 놈이란 말이야. 너랑 완전 달라. ”

 

 

베르닌은 멍해졌다. 머릿속으로 드미트리의 모습을 다시 그려보았다. 하지만 금세 뒤죽박죽이 되었고 뭐가 다른 건지 전혀 분간이 안 갔다.

 

 

“ 어... 그러냐? 난 모르겠는데... 근데 너 진짜 대단하다. 잠깐 쳐다본 거였잖아. 근데 그렇게 여러 가지를 구분했단 말이야? ”

 

“ 그걸 못 보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

 

“ 그런가... 근데 다른 사람들도 다 모르던데... 신기하네. 아, 넌 무용수라서 그런가보다. 안무도 하니까 관찰력이 뛰어난가봐. ”

 

“ 그런 건 안무 안 해도 다 보이는데... ”

 

“ 그래? 근데 난 옛날부터 워낙 평범하게 생겨서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구별하기 어렵다는 얘기 많이 들었거든. 넌 미남이니까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없겠다, ”

 

“ 내가 우주 최강 꽃미남이긴 하지. 어디 갖다놔도 눈에 띄고. 근데 난 너 알아보기 쉽던데. ”

 

“ 그래? ”

 

“ 응. 사람 많이 있어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

 

“ 어, 나 좀 감동할 거 같아... ”

 

제일 책상물림 같은 애 찾으면 되는 거잖아! 아니면 손목토시랑 아가일 무늬만 찾아도... ”

 

“ 어휴, 어쩐지... ”

 

 

 

도착한 후 베르닌은 왕재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우하와 양배추파이를 먹였다. 왕재수는 밤늦은 시각이라느니 나트륨 조절을 해야 한다느니 하는 얘기는 까맣게 잊은 듯 열심히 수프와 파이를 먹었다. 하지만 스트레칭을 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베르닌이 씻고 나오니 왕재수는 자기 집으로 올라가는 대신 소파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피곤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 어휴, 이 녀석... 씻지도 않고... 근데 이 자식 요즘 왜 자꾸 우리 집에서 잠드는 거야. 아휴 귀찮아... ”

 

 

위층까지 업어다주기가 너무 귀찮아진 베르닌은 할 수 없이 왕재수를 안아서 자기 침대로 데려가 뉘었다. 그리고는 ‘요즘 왜 자꾸 주객전도가 되는 걸까’ 하고 투덜대며 소파로 기어 올라가 허리를 꼬부리고 잠이 들었다.

 

 

 

 

 

 

 

- FIN -

2015. 8. 5 ~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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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채셨겠지만 이번 편은 단추팬클럽 분들이 말씀하신 단추 평행우주, 즉 '우수한 단추'에 대한 얘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는 평행우주의 분신으로 설정하는 대신 단추와 쌍둥이처럼 매우 닮은 드미트리 베르닌으로 바꿨다 :) 아이디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치즈홍차님, 가엾은 리자님, sylf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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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한 단추, 아니 드미트리가 왕재수의 레닌그라드와 해외 시절에 대해, 그리고 그의 작품에 대해 하는 이야기들은 거의가 본편 우주의 미샤에게 해당되는 얘기들이다. 파리 망명 실패와 수용소 체포의 뒷배경은 좀더 복잡하지만.. 어쨌든 체포당한 후 서방세계의 인권운동가들과 예술가들, 시민들이 그를 위해 구명 시위를 전개했다는 것은 본편과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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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가 지방 KGB 지국에 연수를 오고 다섯번 연수를 받아야 승진 요건을 채울 수 있다는 얘기들은 내가 이야기 전개를 위해 가상으로 설정한 것이다. 연수 제도야 있겠지만 자세한 사항은 나도 조사 안 해봤다 ㅎㅎ

 

 

...

 

 

왕재수의 신작에 대한 얘기는 지난번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가브릴로프 본편에서 미샤가 준비하는 신작과는 내용과 형식이 전혀 다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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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31편으로 이어지는데... 사실 아직 쓰고 있는 중이라서.. 헥헥... 과연 우수한 단추의 운명은~ 그는 왕재수의 호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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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
Posted by liontamer

 

지난 27~28편에서 우리의 단추가 본의아니게 현장요원 노릇을 하고 고생고생을 했는데(왕재수도 물론 언제나처럼 매우 고생) 이에 대한 참회의 의미에서(ㅎㅎ) 29편은 한결 가벼운 분위기의 서무 에피소드로 돌아왔다. 이전에 나왔던 인물들도 여럿 다시 등장한다.

 

오랜만에 보랴 등장~ 4월에 태어난 보랴가 생일 파티를 열고 단추와 왕재수를 초대하는데~~

 

** 초반에 등장하는 올리비에 샐러드는 러시아의 감자 샐러드이다. 전에 내가 만들었던 올리비에 샐러드 사진 올린 적이 있다. 그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927

 

** 중간에 언급되는 브이소츠키는 러시아의 유명한 가수이자 음유시인인 블라지미르 브이소츠키이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4월의 어느 날, 베르닌은 신작 준비에 여념이 없는 왕재수를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가고, 거기서 파티 초대를 받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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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9

 

 

 

 

 

서무의 슬픔

- 보랴의 생일 파티 -

 

 

 

 

 

일요일 저녁이었다. 공연 일정표를 보니 오페라가 올라가는 날이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신작 연습이 끝나는 오후 5시에 맞춰서 극장으로 갔다. 물론 왕재수는 퇴근할 기미가 전혀 없었다. 타마라와 데니스, 가릭을 남겨놓고 개인 지도를 하고 있었다.

 

 

신작 공연이 겨우 열흘 앞으로 다가왔으니 이해는 갔지만 베르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골치 아픈 녀석을 집으로 데려가 쉬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귀염둥이 우리 아기’니까 잘 돌봐주겠거니 하고 코즐로프에게 맡겨놨더니 망할 놈의 바이올린 깡패는 밤마다 얼마나 사랑을 불태우는지 도대체 애를 재우는 것 같지가 않았다. 토요일에도 베르닌은 리허설 휴식 시간에 왕재수가 눈이 빨개지고 퀭해진 채 꾸벅꾸벅 조는 것을 보았는데 반주를 도와주러 온 코즐로프도 똑같이 그러고 있었던 것이다!!

 

 

‘ 어휴! 저 인간은 낫살도 먹어가지고 자제 좀 하지 왜 저 녀석 장단에 맞춰서 밤새 노는 거야... 가뜩이나 저 자식 모스크바 끌려갔다 와서 힘들 텐데. 약까지 맞고... 내색 안 해서 그렇지 많이 아팠을 텐데. 오늘은 내가 꼭 데려가야지! 저거 야윈 것 좀 봐! 밥이나 제대로 먹은 건지! 분명히 저 녀석이 그랬어, 로만은 요리 못 한다고. 그러니까 저 모양이지. 뻔할 뻔자 샌드위치 쪼가리나 집어먹고 우유나 마시고 나왔겠지! ’

 

 

베르닌은 구석에서 30분 정도 기다렸다. 데니스와 타마라가 먼저 끝났는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타월로 어깨를 감싸고 문가로 걸어갔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베르닌이 있는 것도 모르고 헉헉거리며 나갔다. 가릭은 아직도 왕재수에게 붙들려 있었다. 왕재수는 숫자를 세기도 하고 이따금 불어를 섞어서 동작 설명을 하다가 답답하면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가릭은 죽어라 돌고 뛰고 뻗고 뒹굴었다. 마침내 왕재수가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 됐어, 오늘은 그만 해. ”

 

“ 아니에요, 감독님. 저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아요. 조금만 더... ”

 

“ 아니야, 그만 해. 더 하면 더 나빠져. ”

 

“ 하지만... ”

 

“ 너 왜 자꾸 거기서 막히는 줄 알아? ”

 

“ 오른쪽 골반이 안 열려서요... ”

 

아니야! 골반은 다 열렸어! 자꾸 틀린다고 의식하니까 몸이 뻣뻣해지잖아. 지금 동작은 틀리는 데 없어. 동작을 하나하나 해낸다고만 생각하니까 자꾸 막히는 거란 말이야. 이게 무슨 올림픽인 줄 아니? 동작 하나하나에 점수 매기는 게 아니라고. 네가 자꾸 고전 발레만 생각하면서 움직이니까 더 그래. 음악을 타야지. 편해져야 돼. 자꾸 음악을 박자 하나둘에 맞춰서 동작 하나둘을 하려고만 하니까 그러는 거라고. 그러니까 오늘은 그만 들어가서 쉬어. 그냥 노래 들으면서 논다고 생각하란 말이야. ”

 

“ 어려워요... 그런 식으로 해본 적 한 번도 없는데... ”

 

“ 그러니까 배우는 거지. 어렵지만 재밌잖아. ”

 

“ 재밌긴 한데 자꾸 막히니까 힘들어요. 감독님. 저 내일 연습실 쓰면 안돼요? 열쇠 주고 가시면 혼자서라도 연습해 볼게요. ”

 

“ 맘대로 하렴. 열쇠는 굳이 가져갈 필요 없어. 나도 나올 거야. 먼저 오면 경비실에서 받아가, 얘기해 놓을 테니까. ”

 

 

가릭이 나오면서 베르닌에게 손을 흔들었다. 데니스 못지않게 땀범벅이 되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아 보였다. 베르닌은 가릭과 짧게 인사를 나눈 후 왕재수에게 갔다.

 

 

“ 가자! ”

 

“ 오페라 보고 가려고 했는데... 오늘 카르멘이야. ”

 

“ 오페라는 부감독이 따로 있잖아! 카르멘 그거 지난달부터 벌써 다섯 번도 넘게 올라갔고. 너 그 중 세 번 봤어! ”

 

 

왕재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너 진짜 나 감시 열심히 하고 있구나! 나도 횟수는 기억 안 나는데. 그래도 오늘은 다른 가수가 부른단 말이야. 그리고 나는 극장 전체를 총괄하는 예술감독이니까 오페라도 틈나는 대로 꼬박꼬박 확인해봐야 한다고. ”

 

아니야, 너 오늘 공연 안 봐. 확인도 안 해. 너 지금 나랑 집에 갈 거야. 저녁 왕창 먹고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푹 잘 거야! 너 내일 월요일인데도 극장 나올 거잖아. 아까 가릭한테 하는 말 다 들었어! 그러니까 오늘은 무조건 집에서 쉬어야 돼. ”

 

“ 하지만 로만도 오페라 때문에 연주하러 갔고... 끝나면 같이 로만 집에 가서 밤을 불태우려고... ”

 

넌 맨날맨날 불태우잖아! 오늘은 안 돼! ”

 

“ 왜 안 돼! 난 성인인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데! ”

 

“ 성인이라도 하는 짓은 여섯 살짜리잖아!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분명히 밥 많이 먹고 많이 쉬어야 한댔잖아! ”

 

“ 많이 먹고 많이 쉬고 있단 말이야! ”

 

“ 좋아. 그러면 너 이리 와봐. ”

 

 

베르닌은 왕재수의 손목을 잡아끌고 연습실에 딸려 있는 탈의실로 갔다. 체중계를 가리키면서 근엄하게 말했다.

 

 

“ 올라가! ”

 

“ 왜! ”

 

“ 지금 몸무게 재봐서 65킬로 넘으면 맘대로 하게 해 줄 거야! 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 밥 많이 먹고 최소 그 정도까지는 찌우라고! ”

 

“ 넘어! 넘는다고! ”

 

“ 그러니까 올라가보라고! ”

 

 

왕재수는 체중계를 힐끗 째려보더니 입술을 삐죽거리며 홱 돌아섰다.

 

 

“ 악마! 사람의 자유를 그깟 숫자를 내세워서 탄압하다니! 난 한참 춤추고 근육질일 때나 그 정도였는데... 너무하잖아. ”

 

“ 좋아, 그러면 2킬로 빼줄게. 63킬로 되면 네 맘대로 해. ”

 

 

왕재수는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저 체중계 원래 몸무게보다 적게 나온단 말이야. 발레리나 여자애들 가뜩이나 숫자에 민감해서 지난번에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바늘 손댔어. ”

 

“ 뭐가 그렇게 구구절절 말이 많아. 일단 재봐! ”

 

싫어! 그런 건 수용소에서나 하는 거야! 키 재고 몸무게 재고 피 뽑고 맨날 차트 적고... 알았어! 오페라 안 보면 되잖아. 흑... ”

 

 

갑자기 왕재수가 훌쩍거렸기 때문에 베르닌은 당황했다.

 

 

“ 야, 왜 또 그런 거 가지고 울어! 알았어, 몸무게 재라고 안 할게. ”

 

“ 엉엉... 나도 다시 예전처럼 되고 싶단 말이야... 로만도 다이어트 하지 말라고 했어, 많이 먹고 몸무게랑 근육이랑 다시 늘리랬는데 잘 안된단 말이야. 흑... 이제 옛날처럼 못 돌아갈 거 같아. 다시는 예전처럼 못 출 거야. 예쁜 것도 한순간이지 금방 미워질 거야. 망했어. 다 끝났어, 엉엉...

 

 

베르닌은 어쩔 줄 몰랐다. 왕재수가 왜 갑자기 슬퍼하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일단 애가 우는 건 괴로웠으므로 열심히 달랬다.

 

 

“ 아니야, 뭐가 망해. 너 요즘 과로해서 살이 안 붙는 거야. 많이 먹어도 그것보다 더 많이 움직이니까 에너지가 다 소모돼서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일 그만하고 맛있는 거 먹고 집에 가서 쉬자. 신작 끝나고 나면 숨 좀 돌리잖아, 그러면 금방 몸도 옛날처럼 돌아올 거야. ”

 

“ 흑, 감옥에서 나온지 벌써 일곱 달도 넘었는데... 아까도 애들 지도해주는데 내가 만든 동작도 힘들었어... 예전엔 열 번 연속으로도 출 수 있었는데. 나 이제 춤 못 출 건가봐. ”

 

“ 에이, 무슨 소리야. 지난번에 바질도 잘 췄잖아. 매일매일 연습하면서 살다가 여기 와서는 안 그러니까 몸이 좀 굳어서 그렇겠지. 근데 너 무용수 은퇴했다면서 아직도 춤은 다시 추고 싶은가보구나? ”

 

“ 은퇴한 거는 무대에 안 올라가는 거고... 춤은 그거랑 다르단 말이야... ”

 

“ 웅... 뭐가 다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끝난 거 하나도 없어. 몸이 나아지고 연습도 꾸준히 하면 전처럼 될 거야. 걱정하지 마. ”

 

“ 춤도 못 추게 되고 시들시들해지면 미워질 거야... ”

 

“ 뭐가 미워지냐! 맨날 우주 최강 꽃미남이라면서 자랑하더니. 어제도 예쁘고 오늘도 예쁘고 내일도 예쁠 테니까 그런 생각하지 마! ”

 

 

왕재수가 여전히 눈물이 주렁주렁 달린 까만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맞아, 나 우주 최강 꽃미남인데. 어제도 예쁘고 오늘도 예쁘고 내일도 예뻐야 되는데... 엄마가 나보고 말랐다고, 눈이 왜 그렇게 퀭해졌냐고 걱정하잖아... 별처럼 반짝반짝하던 내 눈, 엉엉... ”

 

“ 아... 어... 그건 그때 네가 주사를 맞아서 눈이 몽롱해서 그랬을 거야. 그래서 어머니가 착각하셨을 거야. 다음에 보면 안 그러실 거야. ”

 

 

베르닌은 말을 내뱉은 순간 실언했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모스크바에 갔던 일에 대해서도, 눈이 가려진 채 끌려가던 왕재수를 본 것도, 스비제르스키와 만난 일도 왕재수에게는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네가 어떻게 그걸 알아?’ 라고 묻지 않았다. 스비제르스키에게서 들었나 싶기도 했다. 그저 손등으로 눈물을 쓱쓱 닦으면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 나빠... 아픈 건 엄마였는데 엄마가 나 걱정하고. 흑... 그러니까 나 빨리 다시 예뻐져야 되는데. 지금도 예쁘지만 전에는 어마어마하게 예뻤으니까 그때처럼 돌아가야 돼. ”

 

“ 어휴, 지금도 예쁘다고 난리인데 지금보다 어마어마하게 더 예뻐지면 그걸 누가 다 감당하냐! 그러니까 넌 진짜 왕재수야! 자기 잘난 것밖에 모르고! 하여튼 가자! 밥부터 먹어야지! 냉장고에 아무 것도 없어서 장 좀 봐가야 되는데... 뭐 먹고 싶니? ”

 

“ 우리 그냥 스베촉 가서 먹자. 나 갑자기 엄청 배고파. 장 봐서 요리하면 한참 걸리잖아. ”

 

“ 그래, 나도 먹고 싶다, 양파수프랑 사과소스 돼지구이. ”

 

 

그래서 베르닌은 왕재수와 함께 스베촉에 갔다. 저녁 식사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미 꽉 들어차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점원이 왕재수를 보더니 ‘이쪽으로 오세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하면서 구석 창가 자리를 내주었다. 베르닌은 양파수프와 사과소스 돼지구이를 주문했고 왕재수는 대구 커틀릿과 올리비에 샐러드를 주문했다.

 

 

“ 나 네가 올리비에 샐러드 주문하는 거 처음 봐. ”

 

“ 그런가? 나 그거 좋아하는데. ”

 

“ 너무 흔한 거라서 안 먹는 줄 알았어. 아니면 감자랑 마요네즈 때문에 칼로리 생각해서 안 먹나 했지.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

 

“ 레닌그라드에 있을 땐 자주 먹었는데. 하긴 이건 기본 샐러드라서 오히려 제대로 못 만들면 진짜 맛없어, 느끼하고 질척거리고. 보랴는 잘 만들더라고. ”

 

“ 웅, 그러면 난 안되겠구나. 만들어줄 수 있는 메뉴 하나 더 늘었다고 좋아했더니만. ”

 

왜, 만들어줘. 쉽잖아. 감자 삶아서 양파랑 당근이랑 마요네즈랑 식초랑... ”

 

“ 뻔할 뻔자 느끼하고 질척거린다 할 거 아냐! 우리 동네 음식 다 기름지다며. 내가 한 것도 그렇겠지 뭐. ”

 

“ 일단 한번 만들어 줘봐! 먹어보고 판단할 테니까. ”

 

“ 뼈 빠지게 만들었는데 맛없다느니 기름기 많다느니 하면 진 빠진단 말이야. ”

 

“ 감자 샐러드에 기름기 많을 이유가 어디 있어! 아 맞다. 내가 왜 여기 와서 그거 안 먹었는지 생각났어. 너네는 아무래도 돼지기름으로 버무릴 것 같더라고! 너 그럴 거야? ”

 

“ 아니야! 아무리 우리 가브릴로프 사람들이 돼지기름을 많이 먹어도 그렇지, 아무데나 다 넣는 줄 아냐! ”

 

그래! 그때 그 나폴레옹... 렐랴가 준 거... 기름케익. 우웩!

 

“ 야! 그건 렐랴가 감기 걸려서 버터랑 헷갈려서 그랬던 거지! 너 자꾸 렐랴 모욕할 거야? 그래도 너 생각해서 그렇게 만들어다 준 건데! 렐랴처럼 예쁘고 상냥한 여자한테... ”

 

“ 으윽, 또 나왔어. 렐랴 타령. 그렇게 상사병 앓지 말고 한번 들이대보기라도 하라고! ”

 

“ 그게 아니고... ”

 

 

그때 음식이 나왔다. 베르닌이 양파수프를 흡입하는 동안 왕재수는 올리비에 샐러드 접시를 끌어당기더니 3분의 1쯤을 덜어주었다. 베르닌은 호기심으로 샐러드를 먹어보았다. 소스가 별로 질척하지 않았고 감자의 포슬포슬한 식감과 달걀의 풍부한 맛, 상큼한 오이와 고소한 마요네즈, 식초의 조화가 일품이었다. 평범한 감자 샐러드인데도 입맛이 확 돌았다.

 

 

“ 아, 이거 맛있다. ”

 

“ 그치? 잘 먹어보고 집에 가서 이렇게 해줘. ”

 

“ 내가 요리사냐, 먹어본다고 그대로 만들 수 있게! ”

 

“ 보랴는 다른 데서 뭐 먹어보면 그대로 만들던데. 심지어 더 맛있게. ”

 

보랴는 요리사잖아! 나는 서무고! 나도 다른 데서 문서 읽어보면 그대로 만들 수 있어! 서류철도 그대로 할 수 있고! ”

 

“ 칫, 맨날 서무 타령. ”

 

 

베르닌은 배가 고팠기 때문에 수프에 사과소스 돼지구이를 금세 해치웠고 왕재수가 덜어준 감자 샐러드도 다 먹었다. 왕재수는 샐러드는 다 비웠지만 대구 커틀릿은 절반쯤 먹고 나더니 슬금슬금 포크를 내려놓았다. 베르닌은 엄하게 말했다.

 

 

좋은 말 할 때 다 먹어라.

 

“ 먹을 거야! 조금 있다가... ”

 

“ 냅킨으로 입도 닦았잖아! ”

 

“ 샐러드를 너무 열심히 먹었나봐. 배가 너무 불러서 못 먹겠어. 포장해 가서 있다가 먹을게. ”

 

 

베르닌은 몹시 야단을 치고 싶었지만 그나마 가져가서 먹겠다고 하는 게 어디냐 싶어서 점원에게 남은 음식 포장을 부탁했다. 점원은 베르닌을 째려봤다가 왕재수의 부탁이라는 것을 알고는 누그러져서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종이 봉지를 들고 보랴가 직접 나타났다. 왕재수에게 봉지를 건네주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우리 아기 또 어디가 아프니, 왜 조금밖에 못 먹니? ”

 

아니야, 안 아파. 감자 샐러드 먹느라 배가 금방 찼어. 가져가서 먹을게. ”

 

“ 팬에 한번 데워서 먹어야 되는데 너 불도 쓸 줄 모르잖니. ”

 

“ 괜찮아, 다닐이 해 줄 거야. ”

 

 

‘또 나야!’ 라고 야단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면서 베르닌은 보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랴는 만족한 표정을 짓더니 생각난 듯 베르닌에게 말했다.

 

 

“ 참, 그렇지. 너도 내일 와라. 7시까지 오면 돼. ”

 

“ 어디를요? ”

 

“ 우리 집. 내 생일이라 집에서 모여서 놀기로 했거든. 얘도 오고 로만도 올 거야. 근데 내 생일 파티에는 절대 혼자 오면 안 되거든. 꼭 짝꿍을 하나 데려와야 해. 그럼 내일 보자. 난 주문이 밀려서 이만. ”

 

 

보랴가 주방으로 사라진 후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물었다.

 

 

“ 너도 가? ”

 

“ 응, 보랴가 지난주에 얘기했어. 너한테도 말해준다는 걸 까먹었네, 너무 정신이 없어서. ”

 

“ 잘됐다. 둘이 오라고 했으니까 우리 같이 가면 되겠네. 아... 넌 바이올린 아저씨랑 가겠구나. 난 누구랑 가지? ”

 

“ 에이, 그거 아니야. 보랴 얘긴 여자 데려오라는 거야. 남녀 짝 맞추는 걸 좋아하더라고. ”

 

“ 그래도 너는 로만이랑 사귀잖아. 보랴도 알지 않아? ”

 

“ 보랴는 알지만 거기 오는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거 모르잖아. 건전한 소련 시민들이 모이는 파티에서 남자끼리 왔다고 하면 돌 맞으라고. 극장에서도 나랑 로만이랑 그런 거 모르는데. 그리고 보랴 얘긴 꼭 사귀는 상대랑 오라는 게 아니고 그냥 남녀 짝만 맞춰 오라는 거야. ”

 

“ 그럼 넌 누구랑 가? 로만은? ”

 

“ 로만은 오케스트라 동료랑 오기로 했어. 보랴랑도 알거든. 난 나쟈랑 갈 거야. ”

 

“ 아... ”

 

 

베르닌은 누구와 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왕재수가 대구 커틀릿을 먹나 안 먹나 감시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보랴의 파티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   *   *

 

 

 

 

월요일이라 베르닌은 정신없이 바빴다. 주간 회의에서는 매우 심기가 불편한 스페호프가 직원들을 하나하나 질책해 가며 마구 괴롭혀댔다. 지난주의 밀서 작전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 분명했다. 물론 국장은 스비제르스키에게 보기 좋게 한방 먹었다는 것과 작전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베르닌에게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베르닌도 밀서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것과 스비제르스키에게 잡혀가 이야기를 나눴던 사실을 전혀 보고하지 않았다. 금요일에 출근했을 때 그저 밀서를 넣은 흑빵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내용만 간략하게 보고했을 뿐이었다. 스페호프는 다른 것은 묻지도 않았고 알겠다는 단 한 마디와 함께 나가보라고 했을 뿐이었다.

 

월요일은 극장 휴일이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퇴근 시간까지 사무실에 남아서 일을 했다. 굳이 왕재수가 출근했다는 사실을 스페호프에게 보고하고 극장에 갈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일이 너무 많이 밀려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호프는 그에게 서류철 제목에 오타가 있다며 몹시 질책을 했고 회의실 라디에이터 파이프가 하나 구부러져 있다면서 서무의 기본이 안 돼 있다고 야단을 쳤다.

 

베르닌은 서류철 표지들을 일일이 검토해서 오타 두 개를 잡아내고 흰 종이에 제목을 새로 써서 붙여 놓았다. 시설 관리 담당자에게 라디에이터 파이프 수리를 부탁하려고 했으나 담당자는 차를 마신다고 자리를 비운 후 도통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르닌은 망치와 펜치를 들고 가서 직접 파이프를 고쳤다. 그리고는 3월 업무추진비를 정산하고 부서원들의 근태기록부를 정리했다. 주간회의에서 국장이 쏟아냈던 지적사항들을 모조리 타이프로 쳐서 해당 직원들에게 한 부씩 배부했다.

 

 

베르닌은 자잘한 서무 업무들을 대충 정리한 후 마지막으로 지난주의 왕재수 감시보고서와 도청 보고서를 작성해 스페호프에게 제출했다. 모스크바에 다녀오느라 며칠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지난주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스페호프는 별다른 것을 묻지도 않았다. 단지 베르닌이 나가려고 할 때 그를 불러 세우더니 음울한 표정으로 말했을 뿐이었다.

 

 

“ 자네 앞으로 조심하게. ”

 

“ 예? 무엇을요? ”

 

“ 그냥 조심하란 말일세. 모스크바 임무 관련해서. 별 일이야 당연히 없겠지만 어쨌든 그 불여우의 뒤를 봐주는 놈들이 자네를 의심하게 될지도 모르니 앞으로는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는 게 좋겠네. ”

 

“ 저, 저를 의심한다고요? 하지만 저는... ”

 

“ 물론 자네를 의심하거나 해를 끼칠 이유야 별로 없지만 어쨌든 조심하는 게 좋겠어. 저 불여우 녀석이 내 생각보다 더 깜찍하게 머리를 굴리는 것 같단 말이지. 그 녀석이 아침 저녁 밤으로 자네와 잠자리를 하고 저녁밥도 꼭꼭 얻어먹으려고 엉겨 붙는 걸 보니 아직 자네를 꽤 좋아하고 신뢰하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만의 하나 그놈이 자네의 본심을 알아채고 우리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면 골치 아파지는 거야. 그러니 자네도 호신용 권총을 반드시 소지하게. 글리셰프에게 얘기해서 9밀리 마카로프를 하나 내주도록 하겠네. ”

 

 

베르닌은 국장이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는 이유란 밀서 음모가 완전히 스비제르스키에게 발각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장은 스비제르스키가 베르닌이 밀서 전달책으로 파견됐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거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나름대로는 베르닌이 그 무시무시한 크레믈린 아저씨의 손에 처단될 것을 염려하여 현장요원용 권총을 소지하게 해주겠다고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베르닌은 그런 배려가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국장은 애초부터 왕재수와 크레믈린 아저씨를 엿 먹이려고 음모를 꾸며서 그를 사지에 몰아넣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끝내 그에게는 밀서의 내용이나 자초지종에 대해서는 한 톨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피장파장이었다. 그도 스비제르스키와의 조우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으니까. 권총은 그냥 받아서 침대 서랍장에 처박아놓으면 되니까 상관없었다.

 

 

“ 저, 그럼 권총을 지금 수령할까요? ”

 

“ 아닐세, 장부 기재 절차가 좀 복잡하니 내일 9시에 5호실로 가서 글리셰프에게서 인수하게. 그럼 가보게. ”

 

 

베르닌은 국장실을 나왔다. 극장에 가볼까 하다가 퍼뜩 보랴의 파티 생각이 났다.

 

 

‘ 아 맞다, 보랴네 집에 가야 하는데. 누구랑 가지? 여자랑 오랬는데... ’

 

 

베르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일 파티에 같이 갈 여자를 지금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니 아무리 생각해도 방도가 없었다. 그는 보랴를 좋아했으므로 파티에는 꼭 가고 싶었지만 대체 누구와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왕재수와 가면 편할 텐데 어째서 보랴는 남녀 짝을 맞춰 오라 하는 건지 슬며시 부아도 치밀었다. 고민하고 있는데 무거운 장부를 한 아름 안고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알렉산드라와 마주쳤다.

 

 

“ 어, 선배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

 

아... 국장이 3년 이상 지난 서류철들을 전부 문서고로 옮기라고 해서... 아까 들이닥치더니 왜 이렇게 사무실이 지저분하냐고 불벼락을 내리더라고. ”

 

 

베르닌은 알렉산드라의 팔에서 장부들을 모조리 끌어 모았다. 꽤 묵직했다.

 

 

“ 근데 이걸 왜 선배님 혼자 다 옮기고 있는 거예요? 등록부서에는 다른 직원들도 많잖아요. 후배들도 있고. ”

 

“ 걔들은 또 다른 서류 옮기고 있어. 아까부터 다들 난리였어. 괜찮아, 이게 마지막이야. 이리 줘, 다냐. 내가 할게. ”

 

“ 저 내려가던 길이었어요, 문서고 같이 가요. ”

 

“ 그럼 반만 들어주렴. 반은 내가 들게. ”

 

 

베르닌은 머리핀이 거의 머리채 끝까지 내려와 대롱거리고 있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된 데다 장부를 껴안고 나르느라 블라우스 앞섶과 소매가 온통 다 구겨져 있는 알렉산드라의 몰골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 됐어요, 전 안 무거워요. 대체 몇 번이나 문서고에 왔다 갔다 하신 거예요? 그 부서에도 등록 관련 서류랑 장부 엄청 많았을 텐데. ”

 

“ 모르겠네. 오후 내내 서류 분류하고 한두 시간 정도 옮기러 왔다갔다 했나봐. ”

 

“ 저라도 부르지 그러셨어요. 선배님 팔 힘으로는 한 번에 몇 권 옮기지도 못하시면서. 벌써 수십 번은 왕복했겠네요. 아니면 수레라도 찾아달라고 하실 것이지. ”

 

“ 수레는 벌써 대외교류부에서 다 가져갔어. 거기도 서류랑 자료 옮기고 있거든. 감시분석부는 그나마 운이 좋았네, 서류 정리 폭탄 안 맞아서. ”

 

“ 저희 건 이미 감사 받을 때 제가 다 옮겼었어요... 그때도 한참 걸렸어요. 하여튼 앞으로는 이런 거 혼자 다 하지 마세요. 무슨 힘이 있다고. ”

 

“ 그래도 내 업무랑 관련 있는 거잖아. 그리고 네가 무슨 머슴이니, 안 그래도 가뜩이나 국장부터 시작해서 윗사람들도 툭하면 너 불러서 무거운 거 나르게 하고 일 시켜먹는데 왜 나까지 그래야 되니. 하여튼 고마워, 문서고 다 왔다. 여기 놓으면 돼. 고마워, 다냐. ”

 

 

베르닌은 캐비닛에 장부들을 분류해 꽂는 것을 도와준 후 알렉산드라와 함께 문서고를 나왔다. 무거운 장부들을 계속 옮기느라 지쳤는지 알렉산드라가 너무 힘들어보였기 때문에 뒤뜰의 배추밭 쪽으로 데리고 나가서 바람을 좀 쐬게 했다. 알렉산드라는 납작한 돌멩이 위에 주저앉더니 숨을 몰아쉬며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반쯤 풀어진 머리채가 바람을 맞아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생각난 듯 알렉산드라가 주머니에서 작은 꾸러미를 꺼내더니 부스럭거리면서 종이를 펼쳐 소시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물이 든 깡통 옆에 소시지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 고양이 한두 시간 전에 제가 밥 줬어요. 지금쯤 밖에서 다른 놈들 갈구고 있을 걸요. ”

 

“ 아니야, 그래도 5시에서 6시 정도 되면 어슬렁어슬렁 이쪽으로 다시 와. 내가 맨날 퇴근 전에 이거 주고 가거든. 걔 얼마나 똑똑한데. 지난번에는 그 녀석이 은혜 갚는다고 사무실 내 자리에 쥐랑 바퀴벌레 물어다놓고 가서 나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어. ”

 

“ 아, 선배님한테도 그랬구나... 저한테도 그랬어요. ”

 

 

베르닌은 왕재수가 바퀴벌레 곱등이 쥐 시체를 보고 기절했던 때를 떠올리고 쿡쿡 웃었다. 알렉산드라는 깡통 언저리에 묻어 있는 먼지와 흙을 탈탈 털면서 방긋 웃었다.

 

 

“ 그래도 고양이가 추운 겨울을 잘 버텨내서 다행이야. 창고 구석의 나무상자 네가 갖다 놓은 거지? 잘했어. ”

 

“ 예. 근데 전 담요 깔아줄 생각은 못했어요. 그 무릎담요는 선배님이 갖다놓으신 거죠? 미셴카가 그 담요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잘 자더라고요. ”

 

“ 어차피 낡은 담요였는걸. 근데 너 그 고양이한테 이름도 붙여줬구나. 고양이한테 사람 이름 붙여줬네. ”

 

“ 어, 예... 그게... ”

 

“ 어머, 그거 혹시 너랑 같이 사는 그 꽃돌이 이름 아냐? 걔 이름이 미하일이었던 것 같은데. ”

 

엇, 아, 아니에요! 우연의 일치예요! 예, 옛날에 키우던 고양이 이름이 미셴카... 진짜 아니에요! 그 자식 이름 붙인 거 아니에요! ”

 

 

베르닌은 매우 당황했다. 망할 놈의 검정고양이 때문에 왕재수와의 관계에 대해 더 오해를 사는 건 정말 질색이었다. 알렉산드라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베르닌은 알렉산드라가 웃는 걸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퍼뜩 그는 보랴의 파티 생각이 났다.

 

 

“ 선배님, 오늘 저녁에 뭐하세요? ”

 

“ 별 거 없는데. 집에 가려고 했어. 저녁이나 차려먹고 쉬겠지 뭐. 왜? ”

 

“ 아, 저... 아는 사람 생일인데 친구랑 같이 오라고 했거든요. 보랴라는 사람인데 스베촉이라는 식당 요리사고요, 굉장히 착하고 재밌어요. ”

 

“ 어머, 나 스베촉 가끔 가는데. 거기 음식 맛있어. ”

 

“ 아, 그렇구나. 같이 가실래요? 극장 쪽 사람들도 올 거예요. 왕재수, 아니 미하일도 올 거고요. 보랴가 요리를 잘 하니까 맛있는 것도 많이 나올 거고. 저, 낯선 사람들만 있어서 아무래도 좀 그런가요? ”

 

 

베르닌은 알렉산드라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낯을 가리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의 생일 파티에 가려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잠시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곧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응, 가지 뭐. 매일 회사랑 집만 오가니까 정말 질렸어. 네 친구들이면 다 착하고 좋을 것 같아. 같이 가. ”

 

 

 

 

*   *   *

 

 

 

 

보랴의 집은 구시가지의 극장 거리 뒷골목에 있었다. 들어가는 골목도 꼬불꼬불한데다 옛날 건물이라 주차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으므로 왕재수가 알려준 대로 극장 주차장에 댔다. 막 차에서 내리는데 왕재수가 나쟈와 함께 나오는 게 보였다. 나쟈는 베르닌을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했다. 연습이 힘든지 얼마 전에 봤을 때보다 살이 쭉 빠져 있었지만 표정은 아주 밝았다. 베르닌은 알렉산드라를 그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알렉산드라는 왕재수가 여자를 만날 때마다 어김없이 보여주는 그 황홀한 미소와 상냥한 인사에 잠깐 얼굴을 붉혔다. 베르닌은 ‘제발 저놈의 서비스 매너에 속지 마세요!’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왕재수는 앞장서서 능숙하게 좁은 골목들을 이리저리 돌며 그들을 안내했다. 보랴의 집에는 이미 여러 차례 가본 것 같았다. 보랴가 사는 아파트는 옛날 건물이라 제정 시대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겉보기는 고풍스럽고 아름다웠지만 역시나 안뜰로 들어서니 어둑어둑한데다 여기저기 페인트가 벗겨지고 파이프가 휘어진 것이 낡은 건물 티가 났다.

 

 

“ 이쪽으로 와. 여기 엘리베이터 없거든. 계단으로 올라가야 돼. ”

 

“ 역시 옛날 건물은 불편하다니까. 신시가지가 살기는 편하지. ”

 

 

베르닌이 투덜대자 왕재수가 고개를 저었다.

 

 

“ 난 여기가 더 좋은데. 우리 아파트는 촌스러워. 여기는 좋아. 레닌그라드에도 이런 건물 많거든. ”

 

“ 겉모습만 번드르르하면 뭐하냐. 여기 쥐랑 바퀴벌레 엄청 많을 거야! 너 거기 발 조심해! 그쪽에도 구멍 잔뜩 있네! 그런데서 벌레 나온다고! ”

 

 

왕재수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금세 눈이 둥그렇게 커지면서 겁에 질려 눈물을 글썽거릴 기세였지만 나쟈와 알렉산드라 때문인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면서 계단으로 후다닥 뛰어올라갔다. 알렉산드라가 베르닌의 손목을 살짝 꼬집었다.

 

 

“ 너 왜 그러니, 미샤는 레닌그라드에서 살다 왔잖아. 고향 생각나서 이 건물이 좋다는 건데 안됐잖니. ”

 

“ 아아, 선배님도 이미 걸려들었군요. ”

 

“ 뭘 걸려들어? ”

 

“ 아니에요... 리자도 그렇고... 렐랴도... 다들 저 녀석만 보면 편을 들고... ”

 

 

나쟈가 수줍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 전 다냐 얘기 이해해요. 스네고로드도 옛날 건물들이 많은데 이렇게 근사한 스타일도 아니고 목재로 만들어서 진짜 벌레랑 쥐가 많거든요. 발레학교 기숙사는 신축 건물이라 그런지 진짜 깨끗하고 편하더라고요. 전부 미샤 덕분이에요. 여기로 데려와준 것도 그렇고 기숙사도 원래 방이 안 나는 건데 교장 선생님에게 얘기해서 넣어줬어요. ”

 

 

잘 나가다가 결국은 왕재수 칭찬이라니 역시 여자들은 다 똑같은 게 분명했다. 뭔가 섭섭했지만 하여튼 베르닌은 나쟈와 알렉산드라를 데리고 왕재수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보랴의 집은 3층에 있었다. 막 3층에 다 올라왔는데 복도에서 낯익은 금발 머리가 나타났다. 바냐 투레츠키가 이번에는 형광 오렌지색 재킷을 입고 역시 배지를 주렁주렁 단 채 복도로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투레츠키는 왕재수를 발견하고는 휘파람을 불면서 뽀뽀를 하고는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오우, 우리 이쁜이. 꽃미남, 프리티, 미인 중의 미인. 반갑기도 해라. ”

 

“ 안녕, 바냐. ”

 

“ 오랜만이네. 요즘 왜 안 왔냐, 너 보라고 좋은 거 많이 갖다놨는데. ”

 

“ 좀 바빴어. ”

 

“ 너 아프기라도 했냐? 살 빠졌구나. 허리가 한줌이네. 그래도 워낙 예쁘니까 괜찮아. 우리 이쁜이 오랜만에 보니까 기분이 좋네. ”

 

 

베르닌은 투레츠키가 왕재수의 허리와 허벅지에서 손을 떼지 않았기 때문에 점점 기분이 나빠져서 저놈을 한 대 갈길까 말까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때 투레츠키가 왕재수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삐쭉 내밀더니 갑자기 안경을 벗고는 눈부시게 화사한 미소를 마구 방출하며 달려갔다.

 

 

“ 아니, 사셴카! 이게 얼마만인지! 그때 전화만 하고 얼굴 한번 보자고만 하더니. 여기서 보는군요! 잘 있었어요? ”

 

 

그러더니 투레츠키가 왕재수에 이어 알렉산드라를 와락 껴안고는 뺨과 입술에 뽀뽀를 했다. 알렉산드라는 또다시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활짝 웃었다.

 

 

“ 바냐, 진짜 오랜만이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 너무 반갑다. 다냐랑은 전에 본 적 있지? ”

 

“ 그럼요, 소개해주신 덕분에 나랑 친구 먹었죠. 우리 동갑이더라고요. 그건 그렇고 사셴카 요즘 좋은 일 있나보네요. 어쩌면 이렇게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지! 다냐, 너 모르지? 내가 옛날에 사셴카 짝사랑했던 거. 내가 얼마나 쫓아다녔는데. ”

 

“ 그만해, 바냐! 그렇게 얘기하면 다냐가 진짠줄 알잖아. ”

 

“ 이런, 섭섭한데요. 저 진짜 좋아했었다고요. 어떻게 안 좋아합니까, 국장에게 쪼일 때마다 이렇게 귀엽고 상냥한 선배님이 옆에서 도와주고 다정하게 위로해주는데. 엇, 그러고 보니 다냐와 함께 오신 건가요? 설마 둘이? 흠, 축하드립니다. 다른 녀석이면 한 대 팼을 텐데 다냐는 소중한 벗이니 제가 양보해야겠군요. ”

 

 

알렉산드라는 다시 얼굴을 빨갛게 붉히더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바냐.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오늘 다냐 친구가 생일이라고 해서 같이 온 거야. ”

 

“ 아 그래요? 보랴 말씀이군요. 좋은 녀석이죠. 하여튼 다냐랑 사귀는 게 아니라 이거죠. 그럼 조만간 우리 사무실에 놀러오세요. 그간 쌓였던 얘기도 하고 좋은 것도 한 잔 드릴 테니. 다냐, 너도 와. 아 그렇지. 그때 그 파인애플은 어땠냐? 여자가 좋다고 하든? 그거 먹고 뜨거운 밤을 보내는 데 성공했어? ”

 

“ 앗, 어... 파인애플, 그 통조림... 으응... ”

 

 

베르닌은 뜨끔하며 왕재수 쪽을 쳐다보았다. 왕재수는 여자니 뜨거운 밤이니 하는 소리에도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투레츠키와 그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 어, 저... 근데 넌 왜 안 들어가는 거야? 너도 보랴 생일 파티에 온 거 아니야? ”

 

“ 아, 생일 파티. 우린 공적인 사이라서. 난 일하는 관계에서 사생활로 얽히는 건 안 좋아하거든. 그래서 손님들 오기 전에 선물만 주고 가는 거야. 잘 놀다 가라. 사셴카, 그럼 전 이만. 꼭 놀러 와요. ”

 

 

투레츠키는 알렉산드라의 손등에 뽀뽀를 한 후 계단으로 내려가려다 말고 왕재수를 다시 한 번 꼭 껴안으며 뺨을 비볐다.

 

이쁜이 토요일에는 올 거지? 토요일 지나면 프랑스 잡지들은 다른 데로 넘길 거야. 그러니까 꼭 보러 와. ”

 

 

왕재수는 고개를 까딱거렸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투레츠키가 발걸음도 가볍게 계단을 내려간 후 베르닌은 왕재수의 팔을 낚아채 복도 구석으로 데려가서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 너 행여나 토요일에 거기 갈 생각 꿈에도 하지 마. ”

 

“ 잡지 보고 싶은데... ”

 

안 돼! 신작 며칠 남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저 자식이랑 엮이지 마! ”

 

“ 파인애플도 구해주고 괜찮은 녀석인데. ”

 

안 돼! 안된다고 했다! 너 진짜... 방금도 저 자식이 집적대고... ”

 

 “ 바냐는 그런 거 아니야. 장난치는 거야. ”

 

“ 누가 장난을 그런 식으로 쳐! 저 자식은 위험하단 말이야. 전에도 대놓고 너한테 지저분한 말 하고... ”

 

“ 어휴 지겨워. 알았어. 근데 여자들 저렇게 세워놓을 거야? ”

 

 

베르닌은 아차 싶어서 얼른 돌아섰다. 다행히 알렉산드라와 나쟈는 둘이 금방 친해졌는지 복도에 서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워들어보니 투레츠키가 미남이란 얘기인 것 같아서 베르닌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   *   *

 

 

 

 

파티는 아주 즐거웠다. 보랴는 험상궂은 인상과는 달리 친구들이 많았다. 여기저기 손님들이 북적거렸는데 다들 편하게 드나드는 사람들인지 의자가 모자라면 그냥 바닥에도 앉고 창턱에도 걸터앉았다. 식당 동료들이 종이로 고깔모자를 만들어서 씌워주자 보랴는 화도 내지 않고 벙긋벙긋 웃으면서 모자를 내내 쓰고 있었다. 베르닌 일행이 들어가자 굉장히 반갑게 맞아주었다. 알렉산드라를 소개해주자 꼭 왕재수에게 하듯이 친절하고 살가운 말투로 인사를 하고는 안쪽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남자 하나에게 일어나라고 윽박질러서 의자를 내주었다. 알렉산드라가 머뭇거렸다.

 

 

“ 아니, 저... 전 괜찮은데... 저 분이 먼저 와서 앉아 있었... ”

 

“ 저 녀석은 괜찮아요. 사내들은 아무 데나 앉아도 상관없어요. 야, 파블릭! 너도 일어나! 아가씨한테 자리 양보해! ”

 

 

옆자리에 있던 다른 남자도 여지없이 의자를 뺏겼다. 보랴는 알렉산드라와 나쟈를 앉혀 주고는 매의 눈으로 옆을 또 훑어보더니 더 이상 자리를 내줄 남자들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잡동사니들이 잔뜩 쌓여 있던 1인용 소파를 질질 끌고 왔다. 그리고는 한방에 물건들을 쓸어버린 후 왕재수를 끌어다 앉혔다. 왕재수가 항의했다.

 

 

“ 난 앉기 싫어! 그리고 여자들 또 올 거잖아. 걔들 앉혀! ”

 

“ 아니야, 이제 손님들 다 왔어. 너는 아기니까 여기 앉아야 돼. 그리고 여자들이 다 너만 보고 있으니까 여기 있어줘야 되는 거야. ”

 

“ 그게 미남의 자리란 거지. ”

 

 

한쪽에서 오케스트라 여자 동료와 샴페인을 마시고 있던 코즐로프가 눈을 찡긋하며 농담을 했다. 왕재수는 툴툴거리면서도 그대로 앉았다. 베르닌은 알렉산드라에게 자기가 아는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래봤자 코즐로프 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토냐와 가릭도 와 있었다. 왕재수가 데리고 왔다고 했다. 토냐는 베르닌을 보고는 뛸 듯이 반가워했다.

 

 

“ 다냐! 오랜만이에요! ”

 

“ 어, 정말이네요! 이제 다리는 괜찮아요? ”

 

“ 네. 내일부터 연습 시작하려고요. 정말 고마웠어요. ”

 

“ 여긴 저랑 같이 일하는 알렉산드라예요. 이 친구들은 토냐랑 가릭인데요, 발레단 무용수들이에요. ”

 

 

알렉산드라는 토냐와 가릭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다가와서 알렉산드라와 나쟈에게 인사를 하고 말을 걸었다. 베르닌이 굳이 이 사람 저 사람 소개를 시켜줄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다들 소탈했고 유머가 넘쳤다. 너도나도 새로 온 손님들인 토냐와 나쟈, 알렉산드라 곁으로 다가와서 잘해주었다. 게다가 여자들은 코즐로프와 보랴의 말대로 왕재수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렸다. 보기만 하면 얼굴을 붉히며 까르르 웃고 음료수를 따라주고 난리였다.

 

 

보랴는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역시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가브릴로프 남자였다. 모여든 손님들은 다같이 우렁차게 생일 축하 노래를 합창했고 보랴가 초를 끄자 박수를 치고 환성을 지르고 ‘만세 만세 보랴 만세!’ 하고 제창을 하고는 생일 노래를 두 번이나 더 불렀다. 샴페인도 땄고 케익도 잘랐다. 베르닌은 내심 그 굉장한 메도빅이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스메타나 크림과 자두, 딸기가 겹겹이 올라간 거대한 생일 케익을 보자 정신이 혼미했다. 엄청나게 맛있어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는데 왕재수가 손등을 탁 쳤다.

 

 

“ 야! 이건 디저트잖아. 다른 거 다 먹고! ”

 

“ 어... 하지만 저런 케익을 어떻게 보고만 있냐! ”

 

“ 괜찮아, 먹어 먹어. 우리 집에선 순서 같은 거 지킬 필요 없어. 먹고 싶은 거 먹으면 돼. 우리 아가, 너도 이거 한 조각 먹어보렴. 이거 그렇게 단 거 아니야.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가 직접 구워준 거야. ”

 

 

왕재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정말?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오셨어? ”

 

“ 생일 맞은 사람이 직접 요리를 하는 건 안 될 말이니까요. ”

 

 

백발의 노부인이 주방으로부터 나오며 왕재수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양 손에 푸짐한 쇠고기찜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통닭구이 접시를 들고 있는 그 우아한 노부인은 바로 종교박물관의 아말리야 루카셴코였다. 베르닌은 요리 대회 때 맛봤던 그 엄청난 생선파이를 떠올렸고 자기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켰다. 왕재수는 아말리야로부터 접시를 받아들어 너무나 당연한 듯 베르닌에게 넘겨주고는 그녀를 자기가 앉아 있던 소파로 인도했다.

 

 

모두가 아말리야를 보더니 반가워했다. 보랴와는 막역한 사이라고 했다. 생일 파티 음식은 모두 아말리야의 솜씨였다! 소박하면서도 아주 맛있는 요리들이 줄줄이 나왔다. 비트 완두콩 샐러드부터 시작해 청어 절임, 쇠고기찜, 통닭구이, 생선수프, 허브 감자구이, 진하고 달콤한 열매즙 음료와 직접 담근 크바스 등등 끝이 없었다. 입에 닿는 순간 살살 녹는 것 같았다. 다들 이렇게 맛있는 파티 요리는 처음이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베르닌은 정신없이 먹다가 뒤늦게 왕재수를 좀 챙겨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 새 코즐로프가 왕재수의 옆에 와서 접시에 각종 요리를 덜어주고 있었다. 보는 눈만 없었다면 하나하나 입에 넣어줄 기세였다. 나쟈는 보랴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방글방글 웃으며 스네고로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알렉산드라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수프와 버섯파이를 먹고 있었다.

 

 

“ 다냐, 파이 진짜 맛있어. 좀 먹어봐. ”

 

“ 저 벌써 그거 두 개나 먹었어요. 이 열매즙 좀 드셔보세요. 진짜 달고 진해요. 선배님 감기 기운 있다고 하셨잖아요. ”

 

 

알렉산드라는 열매즙을 한 모금 마시더니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아말리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우와, 이거 진짜 맛있다.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이 열매즙은 어떻게 담그셨어요? 이렇게 진하고 달콤한 열매즙은 처음 마셔 봐요. ”

 

“ 크랜베리와 산딸기, 블랙베리로 만드는 거예요. 레시피 적어줄 테니 한번 해봐요, 어렵지 않거든. ”

 

“ 근데 저는 요리 솜씨가 형편없거든요. 심지어 커피도 맛없게 끓여요. ”

 

“ 그건 요리 솜씨가 형편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매일 일하느라 바빠서 그럴 거예요. 시간 날 때 수도원으로 놀러 와요, 열매즙 많이 있으니까 몇 병 줄게요. ”

 

“ 감사해요,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

 

 

그때 보랴가 알렉산드라에게 윤기가 흐르는 황금빛 납작한 사탕 같은 것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는 조그만 유리병을 하나 건네주면서 말했다.

 

 

“ 이거 먹어봐요, 알렉산드라. 레몬생강절임인데 감기에 아주 좋아요. 수도원 약초즙하고 꿀로 절여놓은 거라서 소화도 잘 되고 기관지에도 좋아서 감기 기운 같은 건 금방 다 날아갈 거예요. ”

 

“ 보랴의 레몬생강절임은 유명하지. ”

 

 

아말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드라는 환하게 웃었다.

 

 

어머나, 고마워요 보랴. 어릴 땐 엄마가 생강차 끓여주셨는데 지금은 아파도 그냥 홍차에 설탕이나 타먹고 말거든요. 고마워요. 옛날 생각나네요. ”

 

“ 에이, 설탕은 안돼요. 꿀이어야지. 가뜩이나 일하면서 사는 거 힘든데 잘 먹고 자기 몸 잘 챙겨야지. 주변 친구들도 보면 다들 바빠서 그런지 대충 먹고 툭하면 아프다니까요. 아 그렇지, 미셴카! 우리 아기도 이것 좀 먹자. 기관지에 좋은 거야. ”

 

“ 보랴, 나 단 거 안 먹는 거 알면서 그래. ”

 

“ 약이다 생각하고 먹는 거야. 넌 이런 거 많이 먹어야 돼. ”

 

 

내키지 않아 하는 왕재수에게 알렉산드라가 레몬생강절임을 하나 포크로 찍어서 권했다.

 

 

“ 먹어봐요, 미셴카. 많이 달지 않아요. 굉장히 맛있어요, 상큼하고. ”

 

 

여자에게 투정을 하거나 짜증을 내는 법이 없는 왕재수가 할 수 없이 알렉산드라가 건네준 레몬생강절임을 먹더니 눈을 반짝 빛냈다.

 

 

“ 어, 정말 맛있네. 별로 달지도 않고! 맵지도 않아. ”

 

“ 그렇지? 너도 한 병 싸 줄 테니까 매일 점심 때 한 숟갈씩 먹어라. ”

 

“ 생일인 사람이 왜 거꾸로 선물을 주는 거야! ”

 

“ 뭐 어떠냐, 난 내가 만든 거 맛있게 먹어주는 게 제일 좋은 선물이야. ”

 

 

왕재수는 활짝 웃었다. 베르닌은 알렉산드라와 왕재수가 둘 다 그렇게 밝게 웃는 모습을 보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왕재수는 레몬생강절임을 두어 개 접시에 덜더니 나쟈에게 가서 먹어보라고 권해주었다. 스네고로드에서 직접 데려와서 그런지 살뜰하게 잘 챙겨주는 것 같았다. 나쟈도 생강절임을 먹어보더니 맛있다면서 감탄했다.

 

 

 

 

*   *   *

 

 

 

 

어느 정도 음식을 먹고 난 후 배도 부르고 기분도 좋아진 손님들은 거실로 나왔다. 카드놀이를 하고 수수께끼 놀이도 했다. 베르닌과 알렉산드라도 어울려서 재미있게 놀았다. 알렉산드라는 스무고개를 제일 먼저 맞춰서 예쁜 목도리까지 받았다. 그러다 보랴가 브이소츠키 노래를 틀어놔서 다들 합창을 하기 시작했는데 카세트 플레이어가 낡아서 그런지 지지직거리다 꺼져버리고 말았다. 아쉬워하자 코즐로프가 구석에 굴러다니던 기타를 가져오더니 딩딩딩거리며 연주를 시작했다. 나쟈가 꺅 하고 박수를 쳤다.

 

 

“ 어머, 로만 오시포비치! 바이올린만 켜는 줄 알았어요! 기타도 칠 줄 아시네요! 그것도 브이소츠키라니 멋있어요! ”

 

“ 바이올린은 밥줄이고 기타는 재미로 하는 거지. 우리 미셴카가 피아노를 잘 치는데 여긴 피아노가 없으니까 좀 아쉽네. ”

 

나 바이올린도 켤 줄 알아! 노래도 얼마나 잘하는데! 나 절대음감이야! 음악 천재야!

 

 

신이 난 왕재수가 소파 위로 뛰어올라갔다.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부추기자 흥에 겨워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노래를 잘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브이소츠키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르는 줄은 몰랐다. 사람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치자 더욱 신이 난 왕재수는 음유시인의 우울한 노래에 이어 대중가요도 부르고 심지어 옛날 노래까지 줄줄이 불러댔다. 모두가 손뼉을 치고 박자를 맞추며 따라 불렀다. 얌전한 줄만 알았던 나쟈도 숨은 끼가 발동했는지 소파로 올라가 왕재수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서로 팔짱을 낀 채 발레가 아니라 재즈 스텝까지 밟으며 춤을 췄다.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다들 발을 구르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베르닌은 성인이 된 후 이렇게 재미있고 신나는 파티는 정말 처음이었다.

 

 

‘ 저 녀석 진짜 잘 노는구나. 분위기도 잘 띄우고. 저래서 파티를 좋아한다고 했구나. ’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부르다가 베르닌은 술기운이 올라와서 조금 어지럽기도 하고 덥기도 해서 잠깐 바람이라도 쐴까 하고 베란다 쪽으로 갔다. 창문을 열고 나가니 밤공기가 시원했다. 두 팔을 쭉 뻗으며 찬 공기를 들이마시다가 베르닌은 구석에 있는 누군가에게 걸려 넘어질 뻔 했다.

 

 

“ 죄송해요. 어두워서 못 봤어요. ”

 

“ 아니에요, 괜찮아요. ”

 

 

목소리를 들으니 토냐 같았다.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다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은 안 보였지만 빨간 곱슬머리를 보니 토냐 맞았다. 그런데 토냐가 어깨를 들먹이며 조그맣게 흐느끼고 있었다!

 

 

“ 어, 토냐. 지금 우는 거예요? ”

 

“ 아니에요, 다닐.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저 그냥 여기 좀 있을게요. ”

 

“ 무슨 일이에요, 토냐. 혹시 다리 아픈 거예요? 그럼 추운 데 있으면 안 되는데... 저랑 같이 들어가요. 다리 찜질해드릴게요. 보랴한테 습포 같은 거 있을 거예요. ”

 

“ 아녜요, 안 아파요. 흑... 안 아파도 다 소용없어요... ”

 

 

베르닌은 걱정이 되어서 토냐의 곁으로 다가가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았다. 토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베르닌이 손수건을 꺼내주자 눈과 코를 닦았지만 눈물이 계속 나왔다.

 

 

“ 왜 그래요, 토냐. 이제 다리도 다 나았고 무대에도 다시 올라갈 수 있잖아요. 혹시 기분 상한 일이라도 있었어요? 손님들 중에 무례하게 대한 사람이라도 있었던 거예요? ”

 

“ 아녜요, 다냐. 아... 다 소용없어요. 흑... 나쟈... 귀여운 앤데... 착한 것도 알고 다 아는데 너무 속상해요. ”

 

“ 어... 나쟈랑 싸운 거예요? 친한 줄 알았는데... ”

 

“ 아니요, 싸우긴요... 나쟈는 저랑 타마라 언니를 엄청 따라요. 그게 아니고... 저... 저... 미샤가... 미샤가 나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엉엉... 저 정말 처음부터 미샤 좋아했는데... 말 못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나쟈랑... 흑... 다닐, 너무 속상해요. 전 미샤가 되게 눈 높아서 우리 같은 시골 무용수들한테는 관심 없을 줄 알고 고백도 못 했는데 나쟈랑... 어흑... ”

 

 

베르닌은 당황했다. 어리둥절해지기까지 했다.

 

 

“ 어, 토냐. 그게요... 걔는 그냥 나쟈가 적응 잘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예요. 재능 있는 무용수라고 했어요, 그래서... ”

 

“ 여기도 저한테는 그냥 가릭이랑 가라고 하더니 나쟈는 자기 파트너로 데리고 오고... 와서도 계속 나쟈랑 얘기하고. 옆에 딱 붙어서 챙겨주고 그렇게 상냥하게 쳐다보고 웃고... 신작 때문에 그렇게 바쁜데도 일주일에 두 번씩 꼭 발레학교 가서 나쟈 연습 봐주고. 전 알아요, 다닐. 미샤는 나쟈한테 반한 거예요. 그러니까 스네고로드에서 그 무지막지한 남자들이 위협하는데도 나쟈 데려오고... 너무 슬퍼요. 저 정말 미샤 좋아하는데...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자식은 바이올린 깡패랑 사귄다고요! 나쟈고 렐랴고 당신이고 다 소용없어요! 걘 아저씨들을 좋아한단 말이에요!’ 라고 소리쳐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토냐를 살살 달랬다.

 

 

“ 그렇지 않아요, 토냐. 제가 미샤랑 시간을 많이 보내잖아요. 걔는 나쟈를 여자로 생각 안 해요. 그냥 뒤늦게 재능을 발견한 친구라서 도와주고 싶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걔는 나쟈 뿐만이 아니고 여자한테 별로 관심이 없어요. 알잖아요, 신작도 준비해야 되고... 예술가인지 뭔지잖아요. 그래서 누굴 사귈 여력이 없는 것 같아요. ”

 

“ 정말요? 나쟈랑 그런 사이 아닌 거예요? 나쟈 좋아하는 거 아닌 거예요? 남자들은 맘에 드는 여자 있으면 친절하게 해주잖아요... 가릭이 저한테 그러는 것처럼... ”

 

“ 쟨 여자들한테는 다 친절해요. 남자들한테는 싸가지 없게 굴고! 나쟈랑은 진짜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근데 가릭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솔직히 말해서 전 가릭이 훨씬 나은 거 같아요. 착하고... 당신을 엄청 좋아하잖아요. 옛날부터 많이 좋아했대요. 가릭 괜찮지 않나요? 당신한테 아주 잘해줄 거예요. 미하일 쟤는 자기 잘난 게 최우선인 애라고요. 가릭 같은 남자가 훨씬 낫죠. ”

 

 

토냐는 고개를 저었다.

 

 

“ 가릭이랑은 안돼요. 우리는 발레학교 동기라서 어릴 때부터 그냥 소꿉친구였어요. 가릭은 귀엽고 착하긴 한데 도무지 남자로 안 보이는걸요. 미샤는 처음 보자마자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그때 돈키호테 때도 너무 멋있었고... 저한테 너무 잘해줘서 잠깐 기대까지 했어요... 혹시 저한테 관심 있나 하고요. 흑... 너무 바보 같아... ”

 

“ 어... 아니에요, 토냐. 바보 같은 거 아니에요. 울지 마세요. ”

 

“ 있잖아요, 다냐. 나쟈한테 재능 있다고 했잖아요, 맞아요. 저도 알아요. 미샤가 걜 특별하게 생각하는 거요. 여자로서 좋아하는 거 아니라 해도 질투 나요. 저 너무 못됐나 봐요. 흑... 저도 알아요, 전 재능도 별로 없고 그냥 평범한 무용수인걸요. 그 돈키호테 때도 1군 애들이 스네고로드에 갇히지 않았으면 키트리 역은 평생 꿈도 못 꿨을 거예요. 그래도 미샤 덕분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 같았어요. 저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근데 시계탑에서 다쳤잖아요. 쉬는 동안 몸도 무거워지고... 다시 퇴보한 것 같아요. 쉬운 스텝도 잘 안 되더라고요. 미샤가 절 여자로 안 봐주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무용수로는 인정받고 싶은데 그것도 안 될 것 같아서 너무 속상해요. 미샤는 천재니까 저 같은 평범한 무용수 마음을 모를 거예요. 이러다 금방 저 같은 건 잊어버릴 거 같아요. 그럼 전 다시 군무진으로 내려가겠죠. 다시는 기회를 얻지 못할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면 잠도 안 오고 마음이 아파요. ”

 

 

베르닌은 토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재수를 향한 짝사랑 때문에 울 때는 답답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어쩐지 토냐의 마음이 이해도 되고 조금 이입도 되는 것 같았다. 32회전을 못해서 동동거리다가 왕재수의 지도를 받고 성공하자 기뻐하던 토냐의 모습이 생각났다.

 

 

“ 아니에요, 토냐. 그때 키트리 잘 췄어요. 왕재수, 아니 미샤도 알아요. 당신이 열심히 하는 거. 지금은 다쳐서 쉬었기 때문에 몸이 잘 안 움직이는 거예요. 연습하면 다시 좋아질 거예요. 저기, 토냐... 미하일도, 걔도 그때 힘들어 했어요. 막심이 아파서 갑자기 바질 춰야 했을 때요. 일 년이나 쉬어서 몸이 안 움직인다고 했어요. 진짜 괴로워했어요. ”

 

“ 저랑 돈키호테 췄을 때요? 말도 안돼요. 그때 미샤 진짜 엄청났어요. 전 그렇게 잘 추는 사람 처음 봤어요. 발이 땅에 닿지도 않았는걸요... ”

 

“ 제 눈에도 그렇게 보였는데 걘 아니래요. 몸도 무거워지고 뜻대로 안된다고, 관객들에게 이런 모습 보여줄 수 없다고 정말 속상해했어요. 그러니까, 토냐. 제 얘긴요. 자기한테 만족하는 사람은 없는 거 같아요. 미하일 보세요, 그렇게 천재라고 하는데도 자기 탓을 하고 실력 떨어졌다고 괴로워하고... 사람은 원래 그런 것 같아요. 근데 어떻게 자신한테 100퍼센트 만족하고 살아요.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고 사는 거죠. 그러니까 자꾸 자책하지 말고 힘내요. ”

 

“ 고마워요, 다냐. 진짜 고마워요. 있잖아요, 좀 힘이 되는 것 같아요. ”

 

 

토냐가 베르닌의 손을 꼭 잡더니 뺨에 뽀뽀를 했다. 창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가면서 토냐가 물었다.

 

 

“ 근데 진짜예요? ”

 

“ 뭐가요? ”

 

“ 미샤요. 나쟈 좋아하는 게 아니고 그냥 돌봐준다는 거. 여자 사귈 여력이 없다는 거. ”

 

“ 네. 진짜예요. ”

 

“ 그렇구나. 그래도 좀 희망이 생겼어요. ”

 

 

토냐가 처음으로 방긋 웃었다. 베르닌은 도대체 왕재수가 여자 사귈 여력이 없다는 게 웃을 일인지, 무슨 희망이 있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차라리 나쟈와 사귀는 거라면 마음이 돌아서서 토냐 같은 다른 여자와 사귈 가능성이라도 있지 실지로는 여자에게는 한 톨도 관심이 없는 녀석이 아닌가. 토냐도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거실로 돌아왔더니 다들 여전히 신나게 놀고 있었다. 합창과 춤을 추는 시간은 끝났지만 코즐로프는 여전히 기타를 치고 있었고 보랴도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아말리야는 알렉산드라와 다른 여자들 몇몇에게 요리 레시피를 적어주고 있었고 다른 손님들도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이따금 왁자지껄 웃기도 했다. 왕재수와 나쟈가 같이 있으면 또 토냐가 속상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지만 다행히 그는 보랴와 코즐로프 사이에 끼어 있었다. 열심히 뭐라뭐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보랴는 그런 왕재수가 마냥 귀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토닥거리고 있었다.

 

 

베르닌은 토냐에게 시원한 주스를 한 잔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토냐는 컵에는 눈도 주지 않고 한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베르닌이 시선을 돌리니 가릭과 나쟈가 생일 케익 남은 것을 잘라서 접시에 담으면서 뭔가 재미있는 얘기라도 나누는지 친근하게 웃고 있었다. 토냐가 조그맣게 투덜댔다.

 

 

“ 뭐야, 무용수들이 케익 먹고... ”

 

“ 어... 저거 달지 않아요.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가 직접 구워서 달지 않고 맛있어요. 미하일도 먹었는걸요. 당신도 가서 맛 좀 보세요. 가릭한테 좀 잘라달라고 하면... ”

 

“ 됐어요. 가릭 지금 바쁘네요 뭐. 나쟈랑 신났네. 몸매 관리한다고 케익 같은 거 입에도 안 대더니... ”

 

 

토냐가 가만히 입술을 삐죽거렸다. 금세 표정이 샐쭉해지더니 가릭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말리야와 여자들이 있는 쪽으로 휙 가버렸다. 베르닌은 도대체 여자의 마음이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알렉산드라가 오랜만에 즐겁게 웃고 명랑하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같이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알렉산드라의 눈이 그렇게 밝은 하늘색인지 전에는 전혀 몰랐었다. 뺨이 상기된 채 소리 내어 웃으니 소녀처럼 보였다.

 

베란다 공기를 쐬고서 술에서 깬 베르닌은 다른 손님들과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눴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는 생일 케익도 한 조각 더 가져다 먹었다. 아말리야에게서 흰머리천사날개풀을 말려서 달이는 방법에 대해서도 배웠다. 한참 즐겁게 얘기하고 있는데 코즐로프가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거실 한쪽으로 끌고 가서 속닥거렸다.

 

 

“ 야, 잘 좀 해봐라. ”

 

“ 예? 뭐를요? ”

 

“ 여기 여자들 많잖아. 언제까지 그렇게 죽어라 야근만 하고 독수공방할래. 소피야는 어때? 나랑 같이 온 애 말야. 걔 은근히 괜찮아. 너 엮어주려고 내가 일부러 데리고 온 거란 말이다. 아까 소개시켜줬잖아. ”

 

“ 어, 아... 소피야... 저 금발 머리 아가씨 말이죠? 근데 보랴네 식당 동료랑 지금 완전 불꽃 튀기고 있는데요... ”

 

 

코즐로프는 소파 구석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는 두 남녀 쪽을 힐끗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 넌 어째 멍석을 깔아줘도 이 모양이냐. 아니면 나쟈를 공략해봐. 성격도 좋고 귀엽던데. 스네고로드에서 친해진 거 아니었냐? 토냐도 예쁜데. ”

 

“ 아니, 난 나쟈랑 토냐한테 관심 없거든요. 그냥 친구... ”

 

“ 아, 그렇지. 같이 온 여자가 있었지. 저 아가씨 괜찮구만. 더러운 KGB라서 웬만하면 말리려고 했다만 뭐 너도 같은 밥그릇이니까. 알렉산드라라고 했나? 재치도 있고 볼수록 귀엽네. 많이 조그맣긴 하지만 그게 또 매력일 수도 있으니까. 우리 아기도 조그만 것이 내 품에 쏙...

 

그건 당신이 너무 크니까 그런 거고요! 나 당신이 그런 말 할 때마다 진짜 적응 안 돼요. 미하일은 전혀 조그맣지 않다고요. 180에 가까운 애를!

 

그거랑 상관없어! 우리 아기는 비둘기처럼 조그맣다고! 품에 쏙 들어와서 솜사탕처럼 녹는 것이... ”

 

“ 으윽... 보랴도 그 자식한테 우리 아기라고 하고 당신도 우리 아기라고 하니 나 정말 닭살 돋아 미치겠어요. ”

 

“ 하여튼! 너 왜 우리 아기 얘길 하고 있냐. 내 말의 요지는 알렉산드라인지 하는 쟤랑 잘 해보란 거야. 쟤도 너한테 호감이 있으니까 알지도 못하는 사람 생일 파티에 따라온 거 아니겠냐! 여자는 싫은 남자와 파티에 가지 않는다고! 같이 있는 거 보니까 나름대로 잘 어울리던데. ”

 

“ 아니, 저... 알렉산드라는 그냥 회사 동료예요. 저한테 굉장히 잘해주는 선배라고요. 요즘 일 때문에 힘들어해서, 그래서... ”

 

너 그렇게 친구니 동료니 하고 선 긋다가 주변에 있는 좋은 여자들 다 놓친다! 답답해 죽겠네. 피 끓는 사내놈이 여자 하나 못 안아보고... ”

 

“ 아휴, 여자란 있다가 없다가 하는 거잖아요! 당신이라고 뭐 매일같이 여자가 있었던 건 아닐 거 아녜요! 당신이 무슨 저 녀석처럼 우주 최고 꽃미남도 아니고... ”

 

흥, 난 여자가 없을 땐 남자가 있었다고. 내 침대가 식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

 

 

베르닌은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해야 이 어색하면서도 화끈거리는 대화에서 벗어날까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보랴의 무릎에 반쯤 엎드려 있는 왕재수를 발견하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어, 쟤 왜 저러지? 아픈 거 아니야? ”

 

 

그 말에 코즐로프가 깜짝 놀라며 그쪽으로 뛰어갔다. 베르닌도 급하게 따라갔다. 가까이 가 보니 왕재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보랴의 무릎에 머리와 한쪽 어깨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보랴는 손바람으로 부채질을 해주면서 난감해 하고 있었다. 코즐로프가 왕재수의 어깨를 안아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 보르카, 얘 왜 이러는 거야. 아프다고 했어? ”

 

“ 아니, 그게 아니고... 나도 이럴 줄 몰랐네. 갑자기... ”

 

 

베르닌은 소파 아래 놓여 있는 유리잔을 보고 상황을 깨달았다.

 

 

“ 보랴, 얘한테 술 줬어요? ”

 

“ 어, 노느라 목마르다 해서 샴페인 좀 줬더니만 홀짝 마시더니 갑자기 내 무릎에 얼굴을 박네. ”

 

“ 아... 당신 몰랐군요, 얜 술 못 마시는데... 조금이라도 입에 대면 그 자리에서 기절이에요. 많이 줬어요? ”

 

“ 아니, 반 잔도 안 될 거야. 도수도 되게 약한 건데.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나랑 같이 있을 때 술 마신 적이 없어서 몰랐구나. 크바스 같은 것도 안 마셨거든. 아이고, 우리 아기는 진짜 아기였구나. 잘 돌봐줘야 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서 어쩌지. 술 때문에 아프면 큰일인데. ”

 

 

보랴가 굉장히 미안해했다. 코즐로프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샴페인 반 잔 정도면 괜찮아. 전에도 그냥 필름 끊겨서 한참 자고 나니까 괜찮더라고. 요즘 얘 잠도 못 자고 고생했으니까 차라리 이 기회에 푹 자는 게 나아. ”

 

“ 그래그래, 그럼 내 방에서 재울까. ”

 

 

보랴는 침실로 쓱 들어갔다가 투덜대면서 나왔다.

 

 

“ 젠장, 저 망할 녀석들이 내 침대까지 장악하고 술 퍼마시고 있네. 로만, 너 차 안 가져왔지? ”

 

“ 당연하잖아, 생일 파티니까 술 마시려고 안 가져왔지! ”

 

“ 아, 나 차 가져왔어요. 어차피 같은 아파트에 사니까 내가 데려갈게요. ”

 

 

베르닌이 나섰다. 잠시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코즐로프와 보랴 둘 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는 아빠, 하나는 애인인데 둘 중 누가 더 극성인지 구분이 안 가네요!’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베르닌은 보랴와 코즐로프가 왕재수에게 재킷을 입혀주는 동안 알렉산드라에게 갔다. 그녀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선배님. 저는 미하일이 많이 취해서 데려다 줘야 할 것 같아요. 더 계시다 가시겠어요? ”

 

 

알렉산드라가 퍼뜩 시계를 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어머나, 벌써 자정이 다 됐네!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나도 가야겠어. ”

 

“ 그럼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선배님 댁은 여기서 별로 안 멀잖아요. 내려드리고 갈게요. ”

 

“ 응, 잠깐만. 인사 좀 하고. ”

 

 

알렉산드라는 새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보랴가 알렉산드라에게 재킷과 상품으로 받은 목도리를 가져다주었다.

 

 

“ 정말 즐거웠어요, 보랴. 생일 축하해요. ”

 

“ 이제 몇 분 안 남았어요. 생일은 정말 빨리 지나간다니까. ”

 

“ 전 이렇게 즐거운 파티는 처음이었어요. 좋은 친구들이 많아서 행복하시겠어요. ”

 

“ 이제 내 친구들이 다 당신 친구들이니까 언제라도 놀러 와요. ”

 

“ 고마워요, 보랴. 레몬생강절임도 잘 먹을게요. ”

 

 

알렉산드라가 보랴의 뺨에 뽀뽀를 하고는 코즐로프 쪽으로 고개를 돌려 인사를 했다. 코즐로프는 왕재수를 들쳐 업느라 그렇게까지 다정한 인사를 나누지는 못하고 미소와 함께 짓궂은 농담을 했을 뿐이었다.

 

 

그냥 다닐이랑 둘이 들어가요. 이 녀석은 내가 집까지 업어다 줄 테니까. ”

 

“ 어머, 로만 오시포비치. 다리를 두 개나 건너시겠다고요? ”

 

 

알렉산드라는 다시 뺨을 붉히면서 활짝 웃었다. 베르닌은 입사 이후 몇 년을 통틀어 봐도 오늘 하루만큼 알렉산드라가 자주 웃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   *   *

 

 

 

 

 

코즐로프는 극장 주차장까지 왕재수를 업어다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기 집으로 데려가고 싶은 게 분명했지만 베르닌은 무언의 딱딱한 시선으로 안 된다는 신호를 분명히 전달했다. 만의 하나 왕재수가 밤중에 술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면 저 둘은 또다시 밤을 불태울 것이고, 그러면 왕재수는 또 눈이 퀭해지고 꾸벅꾸벅 졸고 계속 피곤해 할 것이 뻔했다!

 

코즐로프와 왕재수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알렉산드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 굉장히 자상하시네요, 로만 오시포비치. 취한 미샤를 여기까지 업어다 주시고. 엘리베이터도 없었고 여기까지 꽤 걸어야 했는데... 저는 극장 예술가들은 모두 굉장히 까칠한 줄 알았어요. 오늘 만난 분들 보니까 안 그렇네요. 다들 상냥하고 착해요. ”

 

“ 아,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여태 만난 KGB 중에 괜찮은 사람이 딱 두 명 있는데 하나는 저 녀석이고 하나는 당신이군요. 다른 놈들은 다 개자식들이었고. ”

 

로만!

 

 

베르닌이 확 째려보자 알렉산드라가 웃었다.

 

 

괜찮아, 다냐. 맞는 말인데 뭐. 그래도 우리를 괜찮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

 

 

베르닌은 차 문을 열었다. 코즐로프가 뒷좌석에 왕재수를 조심스럽게 태웠다. 그리고는 알렉산드라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왕재수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가볍게 키스를 했다.

 

 

“ 그럼 이만, KGB에서 온 미녀 스파이와 감시꾼 양반. 난 보랴랑 한 잔 더 하고 들어가지. ”

 

“ 나 보고 감시꾼이라고 하는 건 그러려니 하는데요, 알렉산드라는 스파이가 아니거든요! 등록부서 행정요원이라고요. ”

 

“ 다냐, 넌 농담도 이해 못하니. 미녀라고 해줘서 고마워요, 로만 오시포비치. 다음에 또 봐요! ”

 

 

베르닌은 대체 여자들의 마음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다시 한 번 되뇌었다. 차를 출발시켰을 때도 알렉산드라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조그맣게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알렉산드라의 집은 차로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베르닌은 지난번에 그녀를 바래다 준 적이 있어서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상품으로 받은 목도리를 펼쳐보기도 하고 목에 둘러보기도 하면서 좋아했다.

 

 

“ 이거 너무 예쁘지 않아, 다냐? 색깔도 근사해. ”

 

“ 어, 예... 외제인 것 같아요... ”

 

 

분명 투레츠키의 소굴에서 흘러나온 밀수품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해서 차를 세우고 문을 열어주자 알렉산드라가 내렸다. 그리고는 까치발로 서서 두 팔로 베르닌을 살짝 포옹하며 뺨에 뽀뽀를 했다.

 

 

“ 고마워, 다냐. 오늘 정말 즐거웠어. ”

 

“ 저도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스베촉에 같이 가요. 보랴한테 맛있는 거 해달라고 해요. ”

 

알렉산드라는 눈을 반달로 만들면서 웃었다. 가로등 램프 불빛 때문인지 엷은 푸른 눈이 에메랄드 녹색으로 보였다. 베르닌은 언제나 그녀를 동안의 귀여운 외모라고 생각했지만 눈으로 웃으면 정말 예쁘다는 것을, 얼굴 전체로 방긋 웃으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울지 않는 알렉산드라를 보는 것이 기뻤다.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조여 오듯이 기뻤다.

 

 

“ 다냐, 오늘은 모든 게 다 너무 좋아. 이렇게 좋았던 적이 별로 없어서 잠도 안 올 것 같아. ”

 

“ 엥, 그래도 꼭 주무셔야 돼요. 내일도 국장이 들들 볶을 텐데. 레몬생강절임 드시고 푹 주무세요. ”

 

“ 응, 너도 잘 자. 미하일도 잘 돌봐주고. 내일 봐! ”

 

 

알렉산드라는 목도리를 꼭 동여매고는 구두 굽 소리를 내면서 아파트로 뛰어 들어갔다. 베르닌은 잠시 그녀의 자그마한 실루엣이 현관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다시 차에 탔다.

 

 

왕재수는 집에 도착했을 때도 깨어나지 않았다. 베르닌은 혀를 찼다.

 

 

“ 어휴, 이 자식은 정말. 술이라면 냄새만 맡아도 정신 못 차리는 녀석이 어째서 샴페인을 넙죽 받아 마신 거야! 아무리 보랴가 줘도 그렇지! 이렇게 자기 몸을 안 챙기니까 이 모양 이 꼴이지! 내 팔자야. ”

 

 

베르닌은 왕재수를 업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왕재수네 열쇠를 찾기가 귀찮아서 그냥 자신의 집으로 갔다. 재킷과 신발을 벗겨주고 침대에 뉘어주자 왕재수가 몸을 뒤척이더니 끙끙거렸다.

 

 

“ 응... 목말라. ”

 

“ 알았어, 잠깐만. ”

 

 

베르닌은 물을 떠왔다. 왕재수의 어깨를 잡고 반쯤 일으킨 후 입술에 컵을 대주었다. 왕재수는 비몽사몽 상태로 물을 조금 마신 후 다시 베개에 머리를 던졌다. 그리고는 두 팔을 뻗어서 베르닌의 목을 껴안고 뺨에 입술과 코를 비볐다. 베르닌은 화들짝 놀랐다.

 

 

엇, 야! 나 바이올린 아저씨 아니거든!! 나 다닐이야!

 

“ 으응... 잘 자. ”

 

 

왕재수는 마주대고 있던 얼굴을 돌리기는 했지만 베르닌의 목을 두른 두 팔은 풀지 않았다. 울 때나 잠들었을 때는 언제나 그렇듯 몸이 사모바르처럼 따끈따끈했다. 그리고 좋은 냄새가 났다. 다 같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밥을 먹고 땀 흘리고 놀았는데 어째서 이 녀석은 이렇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나는지 이해가 안 갔다. 하긴 우주 최고 꽃미남이라는 놈이니 베르닌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게 당연했다.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왕재수의 팔을 풀어서 시트 위로 내려놓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왕재수는 잠결에도 보살핌을 받는 게 좋은 듯 가만히 미소를 띠었다.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조그맣게 종알거렸다.

 

 

“ 파티... 좋아. ”

 

“ 그래, 잘 놀더라. 그렇게 놀고 싶은 걸 여태 어떻게 참고 살았니. ”

 

“ 안아 줄 거지? 술 깨면... ”

 

 

반쯤 발음이 뭉개진 목소리로 왕재수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베르닌은 더욱 화들짝 놀랐다. 아무래도 그를 코즐로프라고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급하게 담요를 왕재수의 턱 아래까지 끌어올린 후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왕재수는 다시 조그만 한숨을 쉬더니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베르닌은 이상하게 가슴이 쿵쾅거려서 한동안 심호흡을 하고서야 샤워를 하러 갈 수 있었다. 비좁고 불편한 소파로 기어 올라가 잠을 청하면서 베르닌은 이제 취한 왕재수는 자기 집에서 재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   *   *

 

 

 

 

다음날 오후에 베르닌은 언제나처럼 극장에 갔다. 왕재수는 저녁 발레 공연 리허설에 신작 연습이 겹쳐서 굉장히 바빴다. 저녁 식사도 극장 카페인 차이카에서 대충 해결했다. 그날의 발레 공연은 백조의 호수였다. 워낙 자주 올라가는 공연이니 티무르 이즈마일로프에게 맡겨둬도 될 텐데 왕재수의 사전에 ‘공연을 맡긴다’ 란 표현은 없는 게 분명했다. 여전히 백스테이지를 오가며 무대 전체를 조망하고 무용수 몇몇의 동작을 교정하고 관객석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동시에 해내는지 신기했다. 심지어 호들갑을 떨거나 우왕좌왕하지도 않았다. 공연이 끝난 후 베르닌이 그 얘기를 하자 왕재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 그거야 난 천재니까. ”

 

“ 아, 그러시겠지. 물어본 내가 바보지. ”

 

“ 근데 너도 동시에 다 하잖아. ”

 

“ 뭐를? ”

 

“ 서무인지 뭔지. 별의별 쓰잘데 없는 일을 다 하잖아. 무슨 중요한 종이도 막 만들어내고. 도장도 찍어오고. 이거 하고 저거 하고. 국장이 시키는 거 다 하잖아. ”

 

“ 그건 내 업무니까 그렇지! 행정 업무! 서무! ”

 

“ 그러니까 너는 서무라서 동시다발적으로 종이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고, 난 극장 사람이니까 무대를 다룰 줄 아는 거지. ”

 

“ 그런가... 근데 넌 무용수였잖아. 감독이랑은 다른 거잖아. 용케 감독직도 잘 해내고 있네. ”

 

“ 그게 바로 내가 천재라는 증거 아니겠니. ”

 

 

왕재수는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으쓱거리지는 않았다. 무심한 말투로 덧붙였을 뿐이었다.

 

 

“ 나 예전에도 공연 많이 올렸어. 안무도 많이 하고. 그러니까 감독 같은 거 처음 하는 거 아니야. ”

 

“ 아, 그렇구나. 춤만 춘 거 아니었구나. ”

 

“ 응. 극장을 통째로 맡은 건 처음이지만. ”

 

“ 그래봤자 시골 극장이라며. ”

 

“ 그렇지, 그래봤자 시골 극장이지. 그래도 극장은 극장이니까. 관객은 다 같아. 모스크바든 레닌그라드든 여기든. ”

 

“ 정말? ”

 

“ 응. ”

 

 

베르닌은 잘난 척 하는 왕재수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굉장히 의외였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때로 왕재수는 그를 놀라게 만들곤 했다.

 

 

이미 밤늦은 시각이었다. 코즐로프는 전날 밤새 보랴와 술을 퍼마신 결과 숙취가 너무 심해져서 공연 연주를 마치자마자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왕재수는 그나마 연주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했다. 베르닌은 코즐로프가 술병이 나서 오늘도 왕재수와 밤을 불태우지 않게 됐으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 우리도 집에 가자. 너 빨리 들어가서 자야지. 그래야 내일도 이렇게 강행군할 거 아냐. ”

 

“ 응, 근데 잠깐만 스베촉에 들렀다 가자. ”

 

“ 왜? ”

 

“ 보랴한테 선물 줘야 돼. 어제 타이밍을 놓쳤어. 집에 가기 전에 주려고 했는데 샴페인 때문에 망했어. ”

 

 

왕재수가 재킷 주머니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구겨져서 귀퉁이가 찢어진 빨간 크레이프 포장지를 벗겨내면서 투덜댔다.

 

 

“ 주머니에 넣어놨더니 포장지가 다 찢어졌네. 에이... ”

 

“ 와, 그거 뭐야? ”

 

“ 별 거 아냐. 그냥 라이터 같은 거야. 보랴는 담배 피우니까. ”

 

 

베르닌이 궁금해하자 왕재수는 상자를 열어서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베르닌은 그렇게 화려하고 예쁜 라이터는 난생 처음이었다. 짙은 녹색에 금장 테두리를 두른 데다 금빛으로 작은 사자가 새겨져 있고 조그만 파란색 보석이 세 알 박혀 있었다.

 

 

“ 와, 이거 정말 근사하다. 진짜 보석이야? ”

 

응. 근데 알이 굉장히 작으니까 그렇게까지 부르주아 냄새 나는 건 아냐. ”

 

“ 화려한 걸 보니 외제인가 보네. 투레츠키도 이런 건 못 가져오겠다! ”

 

“ 외제 아니야. 레닌그라드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보석 디자이너가 만들어 준 거야. ”

 

“ 넌 담배 안 피우잖아. ”

 

“ 옛날엔 좀 피웠어. 하루에 딱 세 개비. ”

 

“ 세 개비는 또 뭐냐. ”

 

“ 그게... 술도 그런데 담배도 원래 몸에 안 받거든. 그래도 피우고 싶어서 세 개비까지는 어찌어찌... ”

 

몸에 안 받는 걸 왜 억지로 해! 몸 다 버리라고!

 

“ 몸에 좋은 것만 어떻게 하고 사니, 재미없게. 근데 지금은 담배 손도 못 대. 연기 마시면 기침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의사 선생님이 평생 담배는 꿈도 꾸지 말래. 아 진짜 싫다. ”

 

 

베르닌은 시계탑에서 연기를 들이마셨던 것이 떠올라서 문득 걱정이 되었지만 왕재수는 그의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보랴가 좋아할까? 너무 반동분자 같나? ”

 

“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

 

나야 신경 안 쓰는데... 그래도 보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으니까 그렇지. ”

 

“ 네가 준 거니까 좋아할 거야. 네가 주는 거라면 분홍색 슬리퍼를 줘도 좋아라 신고 다닐 걸. ”

 

 

왕재수가 안심하며 미소를 지었다. 베르닌은 맨손으로 청어를 퍼먹고 보드카를 병째 들이마시는 보랴가 군복 조끼 주머니에서 파란 보석이 박힌 화려한 라이터를 꺼내는 것을 상상하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둘은 극장을 나와 스베촉으로 갔다. 이미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라 영업이 끝나 문이 닫혀 있었다.

 

 

“ 어, 보랴네 집으로 가야 하나? ”

 

“ 아니야, 오늘 화요일이잖아. 식재료 들어오는 날이라서 보랴 그거 다듬느라 늦게까지 남아 있어. 나 뒷문 알거든. 그쪽으로 가자. ”

 

 

건물 뒤로 돌아가니 정말 조그만 문이 하나 있었다. 약간 열려 있어서 노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베르닌은 노크를 해야 하나 망설였지만 왕재수는 곧장 문을 밀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자주 와본 모양이었다. 베르닌도 따라 들어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왕재수가 두어 발짝 물러서더니 한 손으로 스카프를 매만지며 조용하게 말했다.

 

 

“ 그냥 가자. ”

 

“ 왜? 보랴 없어? 선물 줘야지. ”

 

“ 내일 점심 때 주지 뭐. 가자. ”

 

 

왕재수는 왔던 길로 다시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어찌나 조용하고 부드러운 몸놀림인지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베르닌은 의아해서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좁은 주방에 보랴가 서 있었다. 바닥에는 양배추와 당근, 감자가 가득 들어 있는 대야가 여러 개 널려 있었다. 대야들 사이에 등받이 없는 조그만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조그만 의자에 알렉산드라가 앉아 있었다. 둘이서 나직한 목소리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란 불빛 속에서 알렉산드라의 푸른 눈은 이제 더욱 부드러운 녹색으로 보였다. 보랴가 뭐라고 말하자 알렉산드라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자 보랴가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다정한 눈빛을 던졌고 알렉산드라가 그의 가슴에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쳐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왕재수는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함께 극장 주차장으로 갔다. 차를 타면서 베르닌이 중얼거렸다.

 

 

“ 우와... 난 상상도 못했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에야 차에서 내리면서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 제일 좋은 생일 선물이네. ”

 

“ 보랴 생일은 어제였는데. ”

 

“ 그러게. 근데 생일 다음날 선물 받는 게 더 좋지 않나? 난 다음날에도 선물 받고 싶어서 엄마한테 또 달라고 했는데. ”

 

“ 어휴, 눈에 선하다. 어리광쟁이. ”

 

아니야! 나 어리광 같은 거 안 부렸어! 그냥 당당하게 선물 달라고 했어! 그리고 커서는 워낙 추종자들이 많아서 맨날맨날 선물 가져다줬어! 무대 올라갈 땐 저것보다 열 배는 더 받았다고. ”

 

“ 어련하시겠어. ”

 

 

베르닌은 차 뒷좌석에 쌓여 있는 꽃다발과 선물 상자들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왕재수의 생일이 한참 남아서 참 다행이었다. 그는 꽃과 상자들을 끌어안고 왕재수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어쨌든 왕재수는 무거운 것을 들면 근육이 미워지니까.

   

 

 

 

 

 

- FIN -

2015. 7. 12 ~ 8. 4

 

 

 

...

 

 

왕재수의 신작에 대한 얘기는 사실 본편의 가브릴로프 우주에서 주축이 되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예전에 이미 구상은 다 해놨는데 서무 시리즈 쓰느라 이 본편을 못 쓰고 있다만.... 본편에서 미샤가 안무하는 신작은 물론 서무 시리즈에 나오는 왕재수의 신작과는 내용이나 형식이 많이 다르다. (본편 언제 쓰나 ㅠ)

 

..

 

블라지미르 브이소츠키는 소련에서는 굉장히 상징적인 문화예술 아이콘이다. 8~90년대가 빅토르 초이라면 60~70년대는 브이소츠키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본편 우주에서도 미샤는 브이소츠키를 매우 좋아하고 이따금 그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이전에 트로이가 나오는 본편을 쓰면서 미샤가 브이소츠키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넣은 적이 있다. 그때는 절친한 친구 일린의 생일파티에서였다. 사실 이번 29편에서 왕재수에게 브이소츠키 노래를 시킨 건 그 본편을 서무 식으로 재변주한 것이다. 하여튼 당시 그 글 쓰면서 그 노래 번역 일부와 영상을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735

물론 미샤는 브이소츠키와는 발성이나 목소리, 노래하는 방식 자체가 많이 다르기 때문에 브이소츠키처럼 부른 것은 아니고 자기 식으로 부드럽고 낮게 긁듯이 불렀다.

 

..

 

왕재수가 왕년에 담배 하루에 세 개비 운운하는 얘기 역시 본편 우주에서 따왔다. 본편에서 미샤가 하루에 딱 세 개비만 피우는데 이 사람은 체질상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못 피우지만 꿋꿋하게 술도 세잔, 담배도 세 개비까지는 피우고 논다...(ㅜㅜ 너 왜 그래...)

 

..

 

이야기는 30편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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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서무의 슬픔 28편은 27편 밀사 베르닌(http://tveye.tistory.com/3918)에서 곧장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27~28편은 일반적인 서무 에피소드들과는 성격이라든지 서술 방식이 좀 다른데 그래도 27편에는 유머를 많이 섞은 편이고(내 나름대로는 웃기게 쓴 거지만 안 웃겼을 수도...) 28편은 좀더 건조한 편이다. 사실 28편은 본편 우주에 훨씬 가까운 편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본편에서도 본격적인 이쪽 바닥 얘기를 쓴 적은 거의 없으므로 그냥 놀이터를 좀더 확장해서 놀았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하여튼 28편.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의 브루벨 그림 앞에서 눈 색깔 다른 남자와 마주친 후 겁에 질려 달아나던 베르닌은 해맑게 웃던 법학과 후배 일류샤와 마주친 후 정신을 잃고.. 과연 그의 운명은!!!

 

 

 

** 중간에 나오는 일류셰츠카 란 호칭 역시 일류샤와 마찬가지로 일리야의 애칭이다.

** 9밀리 마카로프는 27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소련제 권총이다.

** 루뱐카는 예전에 몇번 얘기했지만 KGB 본부에 대한 속칭이다.

** 삼보는 러시아 전통 무술이다. 유도랑 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스페호프 국장은 베르닌을 지하 5호실로 호출, 밀서를 전달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겨 모스크바로 급파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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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8

 

 

 

 

서무의 슬픔

-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 별장 -

 

 

 

 

 

 

베르닌은 서너 차례 정신이 들었다가 나갔다가를 반복했다. 몸이 계속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울렁거려서 토할 것 같았지만 머리가 너무 아파서 다시 정신을 잃었다. 아마 완전히 정신을 잃지는 않은 모양인지 어렴풋하게나마 밝은 빛살이 오른쪽 뺨과 관자놀이를 계속 찔러대는 듯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암흑이 내리덮였고 잠시 후 다시 밝아졌다. 몽롱한 상태에서도 베르닌은 거의 기계적으로 생각했다.

 

 

‘ 터널을 지나쳤나보다... ’

 

 

그때 팔과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뒤틀리는 듯이 아팠다. 아마 누군가가 그의 사지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버둥거리며 반항하려고 했지만 쾌활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 그냥 자는 게 나을 걸. 또 맞고 싶지는 않을 텐데. ”

 

 

이상하게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누군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속이 울렁거리면서 햄과 오이 샌드위치의 맛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굉장히 기분이 나빴고 버럭 화를 내고 싶어졌지만 곧 머리가 띵해지면서 깊고 무거운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치솟는 오기로 ‘자라고 한다고 잘 것 같냐!’ 하면서 마구 소리를 질러주고 싶었지만 물론 입을 열기도 전에 완전히 잠에 빠져버렸다.

 

 

 

*    *    *

 

 

 

 

베르닌은 엄청난 숙취를 느끼며 깨어났다.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깨질 것 같은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얻어맞았던 관자놀이가 쿡쿡 쑤셨지만 이 숙취는 맞아서 느껴지는 통증과는 또 달랐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입 안에는 솜을 물고 있는 것 같았고 손발은 축 처져 있었다.

 

 

잠시 베르닌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검은 숲의 온천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여자 친구를 찾아왔던 알릭이 오해로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을 때.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완전히 무기력해진 느낌도 아니었고 온몸이 축 처지는 느낌도 아니었다. 그냥 두들겨 맞아서 멍해졌을 뿐이었다.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차가운 공포가 스멀거렸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기억났다. 스페호프. 5호실. 비행기. 기숙사. 공동욕실. 부엌. 샌드위치. 빵집. 공원. 비둘기. 빵 봉지. 유모차를 끌고 온 여자. 미술관. 그림...

 

 

“ 그만 일어나지 그래. 깬지 10분은 넘었을 텐데. ”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매우 기분이 나빴지만 자기도 모르게 명령에 복종했다.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이 두 겹 세 겹으로 보였다. 보드카를 퍼마시고 취했을 때 같았다. 머릿속이 온통 뿌옇게 흐려져 있었고 두개골과 눈알, 콧구멍과 귓구멍까지 두터운 솜이 꽉꽉 들어차며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눈을 감고 있을 때는 그나마 나았는데 눈을 뜨자 진짜 토할 것 같았고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분명히 관자놀이 부근을 한 대 맞았을 뿐인데 왜 이렇게 괴로운지 알 수가 없었다. 숨이 턱턱 막혀서 절로 낮은 신음이 밀려나왔다.

 

 

미지의 남자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굉장히 안됐다는 듯한 말투로 친근하게 말했다.

 

 

“ 아, 너 이런 거 한 번도 안 맞아봤구나. 대충 몸무게 계산해서 쓴 건데 좀 셌나? 그분 말씀이 맞았군, 정말 초짜였어. 하긴 공항에서부터 따라갔는데도 전혀 모르던 거 보고 대충 눈치 채긴 했었어. 좋아, 내가 너그럽게 봐주지. 10분쯤 더 줄게. 근데 10분 지나면 진짜 깨울 거야. 별로 시간이 없거든. ”

 

 

베르닌은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지만 손은커녕 털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공항에서부터’라는 말이 귓가에 멍멍했지만 금세 머리가 무거워지면서 졸려왔기 때문에 아무래도 꿈인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10분인지 30분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얼마 후 베르닌은 다시 깨어났다. 이제는 두통도 한결 가시고 몸도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기운이 없을 뿐이었다. 눈을 뜨자 금색과 푸른색, 하얀색의 벽지가 보였다. 풍경화가 들어 있는 짙은 금색의 액자도 보였다. 예쁜 장식이 달린 화장대와 서랍장도 보였다. 놀랍도록 여성적이고 역겨울 정도로 부르주아적이며 반동적인 방이었다. 계속 꿈을 꾸고 있나 싶었는데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앞으로 의자 하나가 천천히 밀려왔다. 어떻게 의자가 혼자 움직여 왔을까, 유령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아직 꿈을 꾸는 걸까 하고 의문하고 있는데 호리호리한 남자 하나가 의자 뒤에서 나타났다. 짙은 금빛 곱슬머리에 살짝 들려 올라간 코, 주근깨가 흩뿌려진 얼굴의 젊은 남자였다. 베르닌은 입안으로 ‘일류샤’라고 중얼거렸지만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일류샤가 바짝 다가왔다. 손가락으로 그의 눈꺼풀을 벌려 보더니 손전등을 딸깍딸깍 하고 비춰보았다. 베르닌은 질끈 눈을 감았다. 너무나 눈이 부셨다. 일류샤는 만족한 듯 웃었다.

 

 

“ 깼군. 그래도 누구보단 낫네. 걘 진짜 약한 걸로 놔줘도 하루 종일 뻗어 있더라고. 나 처음 들어왔을 때 그거 모르고 걔한테 약 잘못 써서 게르만 알렉세예비치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몰라. 그렇게 화낼 거라면 애초부터 약을 놓지를 말 것이지. 나 같으면 그렇게 귀여워하는 애한테는 그런 짓 안할 텐데. 하긴 그러니까 내가 기껏 이런 일이나 하고 있겠지. ”

 

 

베르닌은 그가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망할 자식, 사기꾼, 폭행범, 개자식이라고 소리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꾹꾹 참았다. 무서웠다. 환한 미소와 쾌활한 표정을 내세워 그를 두들겨 패고 무슨 약물을 놓은 게 틀림없는 일류샤도 무서웠고 ‘그분’이라는 자도 무서웠다. 어렴풋이 미술관 전시실에서 마주친 남자가 생각났다. 그리고 자신의 임무도 생각났다. 공항에서부터 따라붙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밀서 전달은 실패한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냥 실패로 끝난 게 아니고 그가 붙잡혔다는 데 있었다.

 

‘ 국장이 그랬어, 위험한 임무라고. 그자들이 날 고문하게 된다면 난 모든 걸 발설하게 될 거라고. 그런데 난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이 자식은 그런 걸 모르겠지. 분명히 날 고문할 거야. 어쩌면 좋지... 무서워. ’

 

 

일류샤가 휘파람을 불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표트르 트뵤르도피로고프. 수학과. 어디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아마 너희 국장은 모스크바에서 손 뗀지 십년도 넘었을 거야. 딱 그때 수법이거든. 넌 까먹은 모양인데, 그 3동 말야. 거긴 대학원생들은 안 받아주거든. 누가 봐도 넌 학부생은 아니잖아. 그 방에 들어가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 그렇게 동안도 아니면서. 그리고 수학과라니. 거긴 인문계 기숙사야. 그러니까 너한테 그런 위장을 시켜서 그 방으로 보내면 안되는 거였지.

뭐 너도 문제야. 제대로 된 현장요원이라면 그때 알아차렸을 거야, 내가 법학과라고 했을 때. 뭔가 잘못됐다는 거 말야. 법대 애들 기숙사는 따로 있잖아. 나 진짜 너무 실망했어, 심지어 넌 법학과 나왔잖아. 그런데 전혀 날 의심하지 않았지. 스페호프가 왜 널 보냈을까? 심지어 난 그 순간 이게 뭔가 그자의 심오한 계략이 아닐까 의심하기까지 했다니까. 널 바람막이로 내세우고 다른 녀석을, 진짜 프로페셔널을 따로 보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아니면 네가 연기를 하고 있나 싶기도 했어. 또 이런 생각도 들었지. 애초부터 투서 따위는 없고 그냥 한바탕 쇼를 해서 게르만 알렉세예비치의 신경을 긁고 싶었던 걸까 하고. 순간 너무 헷갈려서 난 심지어 그분에게 전화를 하기까지 했어. 이런 내 의심을 그대로 보고하기까지 했다니까. 그러고 보면 나도 아직 멀었지.

그분이 그러더군. 스페호프는 한물 간 얼간이라서 그 정도까지 머리를 쓸 능력도 없다고. 그리고 넌 그냥 바보라고. 그러니까 그냥 따라가서 새한테 빵 던져주는 거나 보고 조용히 데려오라고 말이야. 나 솔직히 말해서 그래도 조금 의심했거든. 근데 역시 그분이 옳았어. 앞으로는 내 별 거 아닌 머리는 굴리지 않기로 했어. 그냥 그분이 말하는 대로 따를 거야. 그분은 사실 항상 옳지. 틀린 적이 없어. ”

 

 

베르닌은 일류샤가 연극 무대에서 독백을 하듯 계속해서 떠드는 동안 손과 발에 힘을 줘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나았다. 조금만 더 기운이 돌아오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딱딱한 1인용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워 있었는데 묶여 있지는 않았다. 곁눈질로 방 안을 둘러보니 문은 꽉 닫혀 있었지만 커튼이 젖혀진 창문이 있었다. 창밖을 보니 2층이나 3층쯤 되는 것 같았다. 방 안에 일류샤 외의 다른 사람은 없었다. 일류샤는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 거의 왕재수만큼 날씬했고 키는 더 작았다. 전화 부스 앞에서 주먹 한 방으로 자신을 기절시킨 것을 떠올려보면 분명 위협적인 기술을 연마한 현장요원일 테지만 저렇게 경계심 없이 계속 떠들고 있을 때 기습하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그는 저 밉살스러운 놈보다 키도 더 크고 체중도 월등할 테니까. 몸무게로 밀어붙여 쓰러뜨린 후 창문으로 뛰쳐나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 일류샤가 곁눈질로 그를 훑어보더니 동그란 갈색 눈에 살짝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면서 타이르듯 말했다.

 

 

“ 못써, 다닐. 그런 생각 하면. 창 밖에는 말이야, 아주 뾰족하게 깎아놓은 쇠말뚝이 잔뜩 박혀 있거든. 뛰어내리면 살아 있는 꼬치구이가 될 걸. 그리고 나 말인데, 삼보랑 유도 유단자야. 가뜩이나 몰골이 말이 아닌데 괜한데 힘쓰지 마. 나야 그냥 웃고 넘어가줄 수 있지만 그분은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시거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염둥이가 그러면 좀 재미있어하긴 하지. 그래도 눈물 쏙 빠지게 혼을 내주긴 하지만. 그러니까 그냥 얌전히 있어. 넌 별로 귀엽지도 않잖아. 그분이 화나시면 어쩌려고. 나도 그러면 뒷감당 못해. 그래도 학교 선배니까 좀 감싸주고 싶은데. 우리가 또 이런 건 끈끈하잖아. 모스크바! 법학과!

 

 

베르닌은 일류샤를 노려보았다. 입안까지 ‘법학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제 그런 사기는 집어치워!’ 라는 비명이 밀려나오는 것을 꾹꾹 참고 있는데 일류샤가 빙긋 웃었다.

 

 

“ 왜, 못 믿겠어? 나 법학과 맞아. 심지어 졸업 앨범까지 찾아봤는걸. 네 사진 있던데. 존경하는 다닐 베르닌 선배님. 성적도 좋았더라고. 그냥 모스크바에 남았으면 좋았을 텐데 왜 하필 그 촌구석으로 돌아가서. 하긴 넌 루뱐카 본부에서는 못 버텼을 것 같기도 하네. 너무 순진해서. 그래도 수도에 남았으면 좋았을걸. 그럼 내가 존경하는 선배를 두들겨 패고 주사를 놓지 않아도 됐을 거 아냐. 나랑 같이 일하고 있었을 텐데. ”

 

 

베르닌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루뱐카라고? 루뱐카에서 왔다고? 네가? ”

 

“ 아, 이제 말을 하는구나. 다행이야, 주사 때문에 벙어리라도 된 줄 알았네. 지금까지 그런 부작용은 없었지만 말이지. 그럼 내가 어디에서 왔겠니. 너랑 나는 말이야, 같은 기관 소속이라고. 나는 본부, 너는 시골 지국인 것만 다르지. 정말 못써, 다냐. 국가의 녹을 먹는 보안요원이 돼가지고 이런 배신행위나 저지르고 말이야. 그래도 넌 우리 학과 선배고 또 같은 밥그릇을 꿰차고 있으니까 내가 도와줄게. 있는 대로 다 털어놔. 그 봉투를 누가 줬는지, 내용이 뭔지, 누구를 옭아매려고 했던 건지. 그러면 곱게 돌려보내줄 수도 있을 거야. ”

 

 

베르닌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어제부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데다 얻어맞고 약물을 주입당하고 새파란 애송이에게 조롱과 협박을 당하다 보니 두려움과 함께 부아가 치밀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꼬마만큼은 죽도록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일류샤가 재킷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까맣고 반질반질한 권총을 꺼냈다. 아주 자연스럽게 총을 한 손으로 쥐더니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꼼지락거렸다. 베르닌은 숨이 턱에 닿았다.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일류샤는 윙크를 했다.

 

 

“ 아, 다냐. 이제 내 말이 먹히는 거야? 역시 총이 최고야. 그 다음은 칼. 주사는 즉각적인 효과가 안 나오더라고. 이거 낯익지 않아? 9밀리 마카로프. 네 주머니에서 나온 거지. 그래서 너희 국장이 얼간이라는 거야. 이건 일련번호가 있어. 본부에서 각 지부로 지급해준 현장요원용 무기라고. ‘난 가브릴로프 KGB에서 온 몸이오!’ 하고 선언하는 거랑 뭐가 달라. 근데 너 총 쏴본 적이나 있어? 넌 현장요원도 아니던데. 그냥 행정직이잖아. 아니면 스페호프가 요즘 자기 비밀요원으로 키우고 있는 거야? 아무리 봐도 총 잘 쏠 것 같지는 않아. 연수원에서도 사격 점수는 별로였던걸. 하지만 난 사정이 다르지. 난 쏠 줄 알아. 그것도 꽤 잘 쏘는 편이야. 그러니까 말해봐, 다닐. 솔직하게. 그 빵에 집어넣은 문서의 내용. 옭아매려는 대상. 지금. 나도 이제 농담할 기분이 아니거든. 조금 있으면 그분이 오실 거라서. 빨리 해치우는 게 서로 편하잖아. ”

 

 

일류샤가 권총을 들어 올리더니 찰칵 하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베르닌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총을 들이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베르닌은 관자놀이에 권총이 와 닿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었다. 총은 일류샤의 주머니 안에서 체온으로 데워져 있었을 텐데도 굉장히 차가웠다. 뱀이 와 닿는 느낌이었다. 비록 베르닌은 뱀을 만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그리고 뱀은 이렇게 딱딱하고 견고하지도 않겠지만. 이상하게도 검은 숲속 오솔길에서 왕재수가 뱀 껍질을 보고 그루터기로 기어 올라가 꼼짝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 그 자식도 이런 느낌이었던 건가봐... 뱀이랑 총이랑 같은 거였나 봐... 놀리지 말걸... ’

 

 

베르닌은 몸을 떨었다. 일류샤의 앳된 얼굴 너머로 언뜻언뜻 비치는 사악하고 차가운 표정과 조롱 섞인 말투가 무서웠다. 이 꼬마가 갑작스럽게 변덕을 부려 방아쇠를 당길지도 모른다는 비이성적인 공포가 덮쳐왔다. 두려움으로 손발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베르닌은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 난 진짜 아무 것도 몰라.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어. 내용은 전혀 몰라. ”

 

 

일류샤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미간에 주름이 잡히자 갑자기 앳된 느낌이 사라지면서 부쩍 나이 들어 보였다. 심지어 베르닌 자신보다 더. ‘정말 법학과 후배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KGB에서 될성부른 국립대생들에게 일찌감치 접근한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베르닌 자신은 재학 중에는 단 한 번도 그런 제안을 받아본 적이 없었지만. 그러니까 일류샤가 정말 법학과 학생일 수도 있었다. 역겹고 기분 나쁘지만 자신의 후배가 맞을지도 몰랐다. 물론 전혀 아닐 수도 있었다. 현장요원들은 온갖 훈련을 다 받는다고 들었다. 어쩌면 일류샤는 외모와는 달리 베테랑 요원일지도 몰랐다.

 

 

“ 아,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봉투가 있었던 건 인정하는 거네. 흑빵에 넣었지, 안 그래? 그 공원에서. 유모차 밀고 온 여자가 빵 봉지를 바꿔쳤지. 잡아뗄 필요 없어. 그 접선 현장은 내가 보고 있었거든. 사진도 찍었고. 보여줄까? ”

 

 

일류샤가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흐릿하긴 했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그가 사진에 나와 있었다. 벤치에 그와 유모차 밀고 온 여자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 사이에는 빵 봉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사진 속에서 그는 뻣뻣한 자세로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었다.

 

 

“ 여잔 그나마 너보다는 낫던데. 그래봤자 꼬리 다 남겼지만. 자, 다닐. 우린 다 알고 있어. 네가 어제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해서부터 지금까지 어디서 뭘 했는지. 너 요원 서약했잖아. 그럼 잘 알 텐데. 연방과 본부를 배신하는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 본부의 명령을 거부하면 안 된다는 것. 본부의 권위를 대변하는 요원의 심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것. ”

 

“ 그게 너야? 본부의 권위를 대변하는 요원이? ”

 

“ 왜, 날 못 믿어? ”

 

“ 믿으라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네가 루뱐카 소속 요원인지 아니면 적국의 스파이인지, 범법자인지 어떻게 알아. 넌 날 패서 기절시키고 이상한 약물까지 놨고 지금은 권총으로 위협하고 있잖아. 제대로 된 KGB 요원이라면 동료 요원에게 이런 식으로 폭행을 가하고 협박하지는 않아. 넌 내가 본부와 연방을 배신했다고 윽박질렀지만 난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요원 강령과 복무 지침에 나와 있어. 요원은 상부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고. 그리고 작전 수행 시 불필요한 정보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현장요원이 아니지만 공통 지침은 외고 있어. 난 지시에 복종했고 정보를 요구할 수 없었어. 정보 열람은 내 권한이 아니었어. 그래서 내용은 전혀 몰라. 그리고 난 너 안 믿어. 넌 KGB 요원이 아니야. ”

 

 

일류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눈썹은 여전히 치켜 올라간 채였다. 동그란 갈색 눈에 광채가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후 그는 쿡쿡 웃었다.

 

 

“ 어, 다닐. 나 지금 좀 감명 받았어. 그러니까 완전히 얼간이는 아니었구나. 손쓸 수 없는 책상물림이라고 생각했거든. 생각보다 말 잘하네. 겁먹은 것보다 열 받은 게 더 앞섰나보군. 그런데 말이야, 눈앞에 권총이 있을 땐 그런 건방진 얘긴 하는 게 아니야. 무려 모스크바 국립대 법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연방의 기둥인 KGB에 입사한 요원이 이렇게 자기 보호에 허술해서야.

그러니까 정보 열람은 네 권한이 아니라서 넌 충실하게 그 지침을 지켜서 봉투를 안 열어봤다는 거지. 상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고. 좋아, 믿어줄게. 그 상부라는 건 너희 국장이겠지. 너는 그 촌 동네 KGB 소속이니까. 그건 네가 불든 불지 않든 너무 당연한 얘기라서 말이야. 봉투에 든 걸 안 읽어봤다는 것도 좋아. 그랬다고 쳐. 그런데 이거 하나는 꽤 모욕적인 걸. 날 안 믿는다 이거지. 내가 본부 소속 요원이 아니라고. 확신해? ”

 

“ 나 네가 뭐하는 놈인지 몰라. 누가 보낸 놈인지도. 근데 KGB 요원은 아니야! 동료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요원이 어디 있어! 설령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이런 식으로 납치해서 이상한 방에 가둬놓고 심문하는 건 지침에 어긋나! ”

 

“ 그놈의 지침. 책상물림 맞군. 지겨워, 지침에 규정 타령. 법령은 더 그렇지. 하긴 그래서 내가 그 망할 놈의 법학을 때려치운 거지만. 이봐, 다닐. 나 네 후배 맞아. 절반만. 모스크바 국립대 법학과 다녔었지. 작년에 제적당했지만. 위에서는 졸업장을 받으라고 했지만 공부할 시간도 없고 너무 지루하더라고. 일이랑 병행하는 것도 귀찮았고. 그리고 KGB는... 음, 이렇게 말해두지. 명부에 정식으로 이름이 올라 있지는 않지만 임시요원으로 가끔 뛴다고. 아마 너 같은 책상물림은 여권과 요원증을 보여줘야 인정을 하겠지만 말이지. 미안하지만 그것까지는 안 되겠어. ”

 

그러니까 KGB 요원이 아닌 게 맞는 거네. 그럼 이건 불법이야. 당장 나 풀어줘. ”

 

 

베르닌은 자신이 왜 이렇게 당당하게 대들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마도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그리고 일류샤의 뻔뻔스러운 표정과 사악한 비웃음 섞인 말투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기 때문인 것 같았다. 자꾸만 법학과 후배라고 해서 더 화가 난 건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일류샤의 태도 어딘가에는 그에게 진짜 해는 끼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배어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분명 무서웠지만 이상하게도 완전히 무섭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건 베르닌 자신이 이제껏 ‘정말로’ 목숨의 위협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어느 정도로 위험한지 자각이 잘 안되기 때문인 건지도 몰랐다. 요원 연수 때 담당 교관은 그에게 사격이나 호신술도 별로지만 무엇보다도 현실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했었다. 현장요원이 아니라 행정직으로 간 게 다행이라고 했다.

 

 

일류샤가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소리가 났다. 베르닌은 놀라거나 소리를 지를 겨를도 없었다. 심지어 몸을 웅크리지도 못했다. 공포를 느낄 여유도 없었다. 그저 ‘아, 총을 쐈구나’ 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총성은 들리지 않았다. 관자놀이가 날아가지도 않았고 뇌수와 피가 터져 나오지도 않았다. 베르닌은 그대로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일류샤가 휘파람을 불며 웃음을 터뜨렸다.

 

 

“ 재미없어, 놀라지도 않고. 보통은 기절하거나 오줌 싸는데. 진짜 헷갈리게 만드네. 너무 얼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탄창 빼 놓은 거 알아차렸던 건지. 후자라면 생각보다 가능성 있을지도 몰라, 현장요원으로 전과하는 거. ”

 

 

물론 후자가 아니었다. 전자였다. 베르닌은 탄창이 없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심지어 9밀리 마카로프에 총알이 몇 발 들어가는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갑자기 베르닌은 뒤늦게 엄습한 공포로 전신이 부르르 떨려왔다. 속이 뒤틀리면서 토할 것 같았다.

 

 

‘ 저 개자식이 진짜로 방아쇠를 당겼어... 총알이 들어 있었다면 난 이미... ’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베르닌은 소스라쳤다. 일류샤는 테이블 쪽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베르닌을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 예상대로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

 

 

일류샤는 전화를 곧 끊었다. 그리고는 예의 그 해맑고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면서 베르닌에게 다가왔다. 권총은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군용 나이프를 꺼냈다. 예리한 칼날을 목에 슬며시 들이대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 다닐, 우리 장소 좀 옮길까? 이제 일어날 수 있는 거 알아. 걸을 수도 있겠지. 멀리 가지는 않을 거야. 그냥 방만 좀 옮기자고. 허튼 짓 하지 마. 아깐 장난친 거였지만 지금부터는 아니거든. ”

 

 

 

 

*    *    *

 

 

 

 

 

일류샤는 그를 개나 양을 모는 것처럼 끌고 갔다. 그렇다고 뒤에서 팔을 비틀어 붙잡거나 채찍질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옆에 바짝 붙어서 목에 칼날을 겨눈 채 복도로 나와 한발 한발 내딛게 했을 뿐이었다. 베르닌의 두 손은 묶여 있지 않았지만 그래봤자 별 소용도 없는 것이, 그 망할 자식이 무슨 약을 놨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무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릎도 후들거렸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목에 닿아 있는 칼 때문에 멈출 수도 없었다.

 

 

복도는 길게 뻗어 있었고 폭이 넓었다. 천정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바깥을 향해 나 있는 창문들에는 한결같이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꼭 박물관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베르닌은 다시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으로 돌아온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미술관에서 이렇게 사람을 가두고 폭행하고 심문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제국주의 시절의 귀족 별장일 가능성이 컸다. 얻어맞고 쓰러졌을 때 계속 몸이 흔들리던 느낌이 기억났다. 분명 차로 이동했을 것이다.

 

 

일류샤가 그의 어깨를 쿡 찌르더니 귓가에 대고 아주 낮고 조용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 벽에 붙어. 입 다물고. 한 마디라도 입 밖에 내면 찔러버릴 거야. ”

 

 

베르닌은 계속 침묵하고 있는 자신에게 왜 그런 쓸데없는 명령을 하느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물론 꾹 참았다. 그리고 일류샤가 시키는 대로 벽에 등을 기대고 바짝 붙었다. 일류샤도 그의 곁에 붙어 섰다. 대체 왜 그러나 했는데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오른쪽으로 구부러져 있는 복도 저편에서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니, 사람들이었다. 곡선의 복도와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스며들어오는 빛 때문에 기괴하게 늘어나고 왜곡되어 보이는 그림자 셋이 나타났다. 아주 잠깐 베르닌은 샴쌍둥이를 생각했다. 둘이 아니라 셋이었지만.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형체와 색채가 드러났다. 왜곡된 실루엣은 사라지고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 되었다. 그때 베르닌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마 일류샤가 나머지 한 손으로 그의 입을 꽉 틀어막지 않았다면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남자 세 명이었다. 둘은 회색 양복 차림이었는데 꼭 거인 운동선수들에게 몸에 맞지 않는 정장을 입혀 놓은 것 같았다. 얼굴은 아주 무표정한데다 아무런 특색이 없어서 돌아서면 잊어버릴 것 같았다. 꼭 쌍둥이처럼 비슷했다. 그나마 하나는 금발이었고 하나는 갈색 머리라서 구분이 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한가운데에 왕재수가 있었다. 베르닌은 언제 어디서라도 그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돌덩이 로봇처럼 밋밋한 얼굴의 두 회색 거인 사이에서 온통 하얗고 새까맣고 붉고 선명한 왕재수는 흰 눈 위에 뿌려진 핏자국처럼 눈에 띄었다.

 

 

하지만 베르닌을 소스라치게 하고 비명을 지르고 싶게 만든 것은 왕재수가 거기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왕재수는 두툼하고 새까만 천으로 두 눈이 가려진 채 두 남자에게 양쪽 팔을 붙들려 걷고 있었다. 심지어 자기 발로 걷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양쪽의 남자들에게 절반쯤 몸이 들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발이 바닥을 스쳤다가 허공에 떴다가를 반복하는 것을 보니 꼭 연습실에서 왕재수가 보여줬던 신작 안무 같았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 동작은 전혀 우아하지도 않았고 박자에 정확히 들어맞지도 않았다. 질질 끌려가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베르닌과 일류샤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베르닌은 눈알이 빠져라 왕재수 쪽을 응시했다. 아주 가까이에서 보자 심장이 철렁했다. 왕재수는 창백하게 질린 채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는데 짧고 불규칙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거구의 남자들에게 붙들려 있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몸놀림이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다. 베르닌은 현기증을 느끼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 약을 맞았나봐... 나처럼... ’

 

 

그들이 베르닌의 곁을 지나쳐 갔다. 회색 정장의 두 남자는 베르닌과 일류샤를 보고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류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베르닌을 벽에 밀어붙이고 입을 틀어막은 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왕재수가 넘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바닥에 쓰러진 건 아니었다. 두 남자에게 양쪽 팔이 꽉 붙들려 있었으니까. 그저 머리를 젖히면서 서커스 그네를 타는 것처럼 앞뒤로 크게 흔들렸을 뿐이었다. 휘청거리면서 왕재수가 아주 낮고 뭉개진 신음을 토해냈다. 몸을 앞으로 반쯤 접으며 무릎을 꼬았다. 베르닌은 반년이 넘도록 왕재수를 곁에서 돌봐줬기 때문에 그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토할 것 같은 모양이었다. 갈색 머리 남자가 짝패에게 눈짓을 하더니 왕재수의 팔을 놔주었다. 왕재수가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몹시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토했다. 두 손으로 가슴과 배를 감싼 채 몸을 꺾으면서 굉장히 힘들게 캑캑거렸다. 나오는 거라곤 타액에 가까운 액체뿐이었는데 그나마도 제대로 뱉어내지도 못했다. 구역질이 좀 가라앉은 후에도 왕재수는 바닥에 이마를 댄 채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갈색 머리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그의 허리를 안아서 일으켰다.

 

 

“ 가지가지 하는군. 이제 그만 일어나. 시간 없어. ”

 

 

왕재수가 몸부림쳤다. 발음을 반쯤 뭉개면서 목쉰 음성으로 소리쳤다.

 

 

“ 나 안 갈 거야! 안 가! ”

 

“ 안 가긴 왜 안 가. 정신 나간 거 아냐? 지금 가야 돼. 그래야 시간에 맞게 갈 수 있어. 너 좋으라고 가는 거잖아. ”

 

싫어, 안 가!

 

 

왕재수가 남자를 떠밀면서 옆으로 굴렀다. 두 손으로 안대를 잡아채 떼어 내려고 했다. 갈색 머리 남자가 잽싸게 왕재수의 팔을 낚아채더니 뒤로 세게 비틀었다. 왕재수가 낮게 비명을 질렀다. 금발 머리 남자가 가세했다. 뒤에서 왕재수를 마치 포옹을 하듯 두 팔로 휘감더니 꼼짝달싹 못하게 꽉 조였다. 왕재수가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면서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고 흐느꼈다. 베르닌은 속이 왈칵 뒤틀려왔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목에 닿아 있는 칼날과 입을 틀어막은 손도 잊고 그대로 몸을 솟구쳐 그 더러운 자들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일류샤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날쌨다. 순식간에 베르닌의 어깨와 허리를 낚아채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칼자루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너무 아파서 별이 번쩍했다. 일류샤는 베르닌의 몸 위에 올라타서 두 다리로 목과 어깨를 꽉 조이면서 다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아주 낮고 싸늘한 목소리로 귓가에 대고 말했다.

 

 

“ 움직이지 마. 개죽음 아니면 불구야. ”

 

 

베르닌은 몸부림치려고 했다. 하지만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류샤가 센 건지 아니면 약물 때문에 자신의 몸이 이상한 건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솟구쳐 튀어나가 저 망할 놈의 악당들에게서 왕재수를 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왕재수는 기운이 다 빠진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 버둥거리거나 안 가겠다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금발 머리 남자가 팔에서 힘을 풀자 한쪽으로 몸을 축 늘어뜨렸다. 너무 세게 조여서인지 아니면 약 기운 때문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절한 것 같았다. 갈색 머리 남자가 혀를 차면서 동료를 질책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 곱게 모셔가라고 했는데 너 때문에 징계 받겠어. ”

 

“ 내 잘못이 아니야. 포마가 공항에서 제멋대로 주사 놔서 그래. 그 자식 이제 모가지야. 얜 약물 쓰면 안 되는데. ”

 

“ 그놈 신참이라 뭘 몰라서 그랬을 거야. 하여튼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가자. 이 자식 진짜 골치 아프네. 클리닉까진 30분밖에 안 걸리는데 그 동안 정신 좀 차려야 할 텐데. ”

 

 

그러더니 갈색 머리 남자가 일류샤 쪽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했다.

 

 

“ 일류셰츠카, 우리 꼬맹이 친구. 지금 이건 눈감아줬으면 좋겠는데. 너도 봤잖아, 얘가 먼저 시작한 거. ”

 

 

일류샤가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 아니, 먼저 시작한 건 너희들이지. 애초부터 놔주지 말았어야지. 뻔한 수법이잖아. 아픈 척하면서 도망치려는 거. 무시하고 그냥 데려갔어야지. ”

 

“ 아픈 척한 건 아니야. 이 자식 여기 도착했을 때부터 계속 토했거든. 진짜 아팠어. 게르만 알렉세예비치가 의사도 호출했었어. 그러니까 보고는 하지 마. 곱게 모셔다주고 올게. ”

 

“ 지금 그렇게 떠드는 동안 벌써 2분이 더 지났어. ”

 

 

갈색 머리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몸을 돌려서 걸어갔다. 금발 남자가 왕재수를 들쳐 업었다. 이제 왕재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은 여전히 가려져 있었다. 베르닌은 일류샤에게 깔리고 입이 막힌 채 무력하게 그 악당들이 왕재수를 데리고 복도를 지나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분노와 공포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물이 나왔다. 그놈들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일류샤의 목을 비틀고 싶었다. 그때 일류샤가 그를 놔주었다. 하지만 칼을 치우지는 않았다. 여전히 목에 칼을 들이댄 채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일어나. ”

 

 

베르닌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호흡을 하고 또 했다. 여전히 어지러웠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몸에 남아 있는 힘을 전부 손과 무릎에 모으고 또 모았다. 기회는 단 한번 뿐이라고 생각했다. 온몸으로 태클하듯 덮쳐서 깔아뭉개고 칼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 일류샤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고개를 저었다.

 

 

“ 그러지 마, 다닐. 진짜로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게르만 알렉세예비치도 그러지 말라고 했어. 이제 그만 가지. 말 잘 들으면 오후 비행기 탈 수 있을 거야. ”

 

헛소리 하지 마... 나쁜 놈들... 다 더러운 놈들이야! 쟬 어디로 데려가는 건데! 아픈 애란 말이야! 가브릴로프에 있는 내내 아팠어. 입원을 몇 번이나 했는데... 근데 약을 놓고... 술도 못 마시는 앤데. 감옥에서 그렇게 괴롭힌 것도 모자라서 또 끌고 와서 주사 놓고 때리고 기절시키고... 지금도, 지금도 더러운 짓 시키려고 데려가는 거잖아! 다 죽여 버릴 거야!

 

 

일류샤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린애처럼 동그란 갈색 눈에 검은 그림자가 내리덮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별로 좋은 말이 아닌데. 입 다무는 게 좋아, 다닐. 누가 들으면 오해할 테니까. 그 더러운 짓 운운 말이야. 봉투를 열어봤다고 생각할 거야. ”

 

“ 봉투는 무슨 봉투! 쟤한테 들었어! 베를린에서 누가 온다면서! 그래서 쟤 협박했잖아! 그놈한테 가라고 했다고... 지금 거기 보내는 거잖아! 용서 못해, 나쁜 자식들... 고발할 거야! 의회에 가서...

 

 

베르닌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을 때 일류샤가 그의 팔을 꽉 잡고 옆으로 꺾었다. 아팠다. 정말 아팠다. 아까 바닥에 쓰러뜨려 조였을 때보다 더 아팠다. 삼보와 유도 유단자라는 말이 맞았다. 그것도 굉장한 실력자였다. 팔과 어깨가 빠져 달아나는 것 같았다. 등뼈까지 부서지는 듯 아팠다. 비명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든 일류샤의 손에서 칼이라도 빼앗아보려고 버둥거리고 있는데 낮고 우렁차면서도 벨벳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거 참 재미있군. 드라마 배우처럼 구는 건 저 녀석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좋은 구경을 했어. 볼만큼 봤으니 그만 놔줘도 좋아, 일리야. 이제 이 친구와 얘기를 좀 해야겠어. ”

 

 

일류샤가 그를 놔주었다. 등 뒤에 있는 남자를 향해 정중하게 경례를 했다. 장난기도 없고 허세도 없었다. 베르닌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미술관 전시실에서 마주쳤던 남자를 보았다. 어딘가 매를 닮은 거대한 남자. 오른쪽 눈은 푸른색이고 왼쪽 눈은 갈색인 남자.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수차례 봤던 얼굴이었다. 갑작스럽게 베르닌은 그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 게르만 스비제르스키. 맞아. 그 사람이야... ’

 

 

남자가 여전히 벨벳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흠, 그러니까 자네가 다닐 베르닌이군. 아주 좋아, 다닐. ”

 

 

베르닌은 대체 뭐가 좋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긴 스페호프의 호출로 5호실에 갔을 때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으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   *   *

 

 

 

 

 

베르닌은 왕재수의 이른바 크레믈린 아저씨를 실제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정치계의 거물이자 잔혹하기로 소문난 인물. 일반인들에게 그는 권력의 최중심부인 정치국 위원이자 서기장의 최측근이며 단 한 번도 낙마해본 적이 없는 사람, 그러니까 숙청과 권모술수를 능수능란하게 섞어서 구사하는 정치가였고 반면 문화예술 쪽 조예가 깊어 그쪽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는 교양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보안위원회에서 근무하는 베르닌은 물론 다른 사실도 알았다.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KGB 해외 스파이 출신인데다 베를린 지국을 총괄했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런던 지국도 뒤에서 조종했다고 했다. 이미 공식적으로는 KGB에서 발을 뺐지만 그래도 실세였다. 본부의 안드로포프 국장에 대해서도 약점을 쥐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숙청과 암살이 전문 분야라고도 했다.

 

 

베르닌은 아직도 작년 가을에 스페호프가 모스크바에 불려가서 스비제르스키에게 질책을 당한 후 돌아와 분노를 터뜨리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왕재수가 했던 말도 어렴풋하게 기억났다. ‘그건 말이지, 너네 국장이 크라베츠 라인이라서 그래.’ 그리고 바로 어제 스페호프가 했던 말도. ‘스비제르스키는 완전히 여우에 호랑이거든. 그 작자는 현장 요원 출신에 해외 스파이 지국 총괄에 우리 보안위원회를 십몇 년 동안 주무르며 가지고 놀았던 인간이니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몰라.’

 

 

그제서야 베르닌은 명료하게 깨달았다.

 

 

‘ 호랑이. 국장은 호랑이가 연루된 일은 매사에 조심하는 게 좋다고 했어. 그 봉투... 고위직과 연관되어 있다고 했지. 그건 저 사람이었어... 국장은 저 사람을 옭아매려고 했던 거야. 하느님 맙소사, 내가 미쳤지... 하고많은 인간들 중에 하필이면... 난 죽은 목숨이야. 어떡하지... ’

 

 

베르닌은 왕재수가 크레믈린 아저씨에 대해 얘기를 할 때도 단 한 번도 그를 피와 살을 지닌 현실적인 인간으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크레믈린 아저씨란 일종의 환상적인 존재였다.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사악한 마법사나 괴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 무시무시하고 사악한 인물이 그와 같은 방에 있었다.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베르닌은 당장이라도 그가 자신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두려워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가 어떤 인간인지 몰랐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전시실에서 그와 마주친 순간부터 베르닌은 이해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맨 처음 깨어났던 방보다 더 작고 간소한 방에 와 있었다. 방 안에는 스비제르스키와 일류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류샤는 베르닌을 밀어 넣은 후 문가에 서 있었다. 자신의 주인이 나타나자 일류샤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지금껏 보여주었던 여유롭고 건들거리는 태도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근위병처럼 꼿꼿한 정자세로 서 있었다. 손에는 권총을 들고 있었지만 베르닌의 9밀리 마카로프는 아니었다. 자기 총인 모양이었다. 그는 베르닌과 스비제르스키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교묘하게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스비제르스키가 일류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일류샤가 나갔다. 소리도 없이 문이 닫혔다. 이제 방 안에는 그와 베르닌만이 남았다.

 

 

“ 좀 앉지 그러나, 다리가 후들거리는 모양이군. 일리야는 다 좋은데 약물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지. ”

 

 

베르닌은 멍하게 서 있었다. 뱀 앞의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스비제르스키가 어깨를 으쓱했다.

 

 

“ 그럼 내가 먼저 앉지. ”

 

 

스비제르스키가 창문을 등지고 있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베르닌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맞은편에 있는 기다란 소파 귀퉁이에 앉았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 다닐 베르닌. 가브릴로프 출신. 모스크바 국립대 법학과. 군필. 가브릴로프 KGB 지부 행정요원. 감시분석부 소속. 주무는 행정 서무. 그리고 정치범 감시 및 도청 분석. 독신. O형. 28세. 전과 없음. 특이 병력 없음. 이 정도가 서류 앞장에 기재된 내용이겠지. 틀렸거나 빼먹은 게 있나? ”

 

 

베르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스비제르스키가 가볍게 혀를 찼다.

 

 

“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지금 자넬 심문하는 게 아니야. 사실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지. 난 그저 자네와 잠깐 얘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야. 뭐 별 것도 아닌 얘기지. 끝나면 오후 비행기 시간에 맞춰서 보내줄 수도 있겠지.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으니 안심부터 시켜주겠네. 지금 제일 궁금한 질문을 하나 해봐. 뭐든지 대답해줄테니. ”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맹수가 거짓말을 하든 진실을 말하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베르닌은 몸이 떨려왔다. ‘정말 보내주실 건가요?’ 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건 전혀 다른 질문이었다.

 

 

“ 미하일... 괜찮은 건가요? ”

 

 

스비제르스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매처럼 날카롭던 얼굴에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 아, 이건 생각 외로군. 자네 정말 우리 미셴카에게 푹 빠지기라도 했나? 그 녀석은 아니라고 잡아떼던데. 하긴 빠졌다 해도 뭐라고 하겠나. 안 그러는 게 이상한 일이지. 사람 미치게 만드는 꼬마니까. 그래, 다른 질문은 안하나? 이를테면, 정말 보내줄 거냐고 묻는다든지, 자넬 죽이지 않을 거냐고 묻는다든지. 자기 모가지가 달려 있는 와중에 그 녀석에 대해 묻다니, 재미있는 친구란 말이야. ”

 

“ 뭐든지 대답해 주시겠다고... ”

 

“ 아, 물론. 그게 지금 자네가 제일 궁금한 거라면. 걘 괜찮을 거야. 멍텅구리 하나가 쓸데없는 짓을 했지. 진정제를 놨거든. 난 분명히 눈만 가려서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오랜만에 보는 녀석이 그 꼴로 정신 못 차리고 나뒹구는 게 별로 즐겁지는 않더군. 그래도 약에서는 거의 다 깼어. 아마 2~30분 정도 지나면 멀쩡해질 거야. 이제 됐나? ”

 

“ 멀쩡하지 않았어요. 토하고 기절하고... 당신 부하들이 폭력을... ”

 

“ 아 그래, 곱게 데려가라고 했는데 손을 좀 댔더군. 그 얼간이들도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가뜩이나 몰골도 상한 녀석을 그렇게 흥분시키고 기절시키다니 말이지. 그 꼴을 보면 그 녀석 엄마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겠나. 밤이고 낮이고 눈물로 지새고 있었을 텐데 말이지. 감옥에 갔다 온 귀여운 아들 녀석이 얼굴에는 멍이 들고 약기운 때문에 휘청거리고 있으면 참 슬플 텐데. 아마 날 원망하겠지. 참 억울한 일이야. 그렇지 않나, 다닐? 난 정말 선의를 베풀었는데. 아픈 엄마를 만나게 해주려고 이동 금지령도 손봐서 그 녀석을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원망을 받는다면 이것 참 불공평하지 않나? ”

 

 

베르닌은 멍해졌다. 순간 두려움도 잊었다. 눈을 깜박이며 스비제르스키를 쳐다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어머니에게 보냈다고요? 그 외국인이 아니고? 베를린에서 왔다는 높은 사람이 아니고? ”

 

 

스비제르스키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베르닌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타이르는 듯 부드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 이것 참, 다닐. 자넨 현장요원이 되긴 글렀군. 스페호프가 가엾어지는데. 이런 고지식한 친구를 믿고 임무를 맡기다니. 하긴 그자는 원래부터 얼간이였지. 길 잃은 개를 구하려다 강에 빠진 걸 가지고 암살 시도라고 생각하지를 않나, 사과에 약물을 묻혀놓고는 그걸 자네에게 다 떠벌리지를 않나. 제일 등신 같은 짓은 그 시계탑 방화지. 그런데도 자넬 의심하지 않는단 말이야. 그게 그 작자가 얼간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자네가 굉장한 연기력을 보여줘서 그런 건지 좀 궁금했었지. 지금 보니 전자로군. ”

 

 

베르닌은 머리가 핑핑 돌았다. 갈색 눈과 푸른색 눈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역시 오싹했다. 왕재수가 왜 그에 대해 얘기하면서 몸을 떨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독사과... 시계탑... 그건 알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강에 빠진 건... 길 잃은 개... 전 아무에게도 그 얘길 안 했어요. 어떻게... ”

 

“ 아무에게도 얘길 안하긴. 의사 노인네에게도 얘기했고 그 마누라도 들었겠지. 개 주인을 찾는다고 전단도 붙였고. 뭐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해도 어차피 다 알게 되어 있다네. 나는 자네 국장처럼 얼간이가 아니고, 그깟 콩알만한 촌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 따위는 손바닥 보듯 알고 있으니까. 그 얼간이가 미셴카의 돈키호테를 망쳐보려고 별의별 우스꽝스러운 짓을 다 해댄 것도 알아. 그 녀석이 자넬 애지중지하는 것도 알지. 감사관에게서 구해준 것도. 시계탑에서 구해준 것도 알아. 자네가 그 하잘 것 없는 솜씨로 차려주는 저녁 얻어먹는 날이면 그 녀석이 기분 좋아서 웃는 것도 알지. 저녁밥에 연연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놈이 그러는 걸 보니 나조차도 좀 놀랍더군. 난 미셴카가 그 바이올리니스트란 자식과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 어차피 누가 안아주지 않으면 못 견디는 녀석이니까. 그런데 자넨 좀 궁금하더군. 하마터면 질투할 뻔 했다니까. 그 녀석한테 진짜 중요한 건 자는 놈이 아니고 얘기를 나누는 놈이거든. 그래서 겸사겸사 얼간이 스페호프에게 엿도 먹여볼 겸, 자네가 어떤 인간인지 확인도 할 겸 불러본 거야. 그 봉투는... 흠, 다닐. 충고 하나 하지. 이유 없는 친절을 베푸는 인간을 믿지 말게. 이번 일의 교훈으로 그거 하나만 깨달아도 족할 거야. 어차피 현장요원 그릇은 아니니까. ”

 

 

베르닌은 계속해서 뒤통수와 아랫배를 강타당하는 느낌이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 그건 일류샤에 대한 얘긴가요? ”

 

“ 일류샤. 그렇지. 우리 당돌한 일리야가 마음에 들었나? 괜찮은 꼬마지. 졸업을 해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난 그런 애들을 좋아해. 당차고 성깔 있는 놈들. 하긴 그런 축으로는 미셴카를 따라갈 놈이 없지만 걘 총질 따윈 못하니까 예외로 해두지. 아,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한다고 해야겠군. 총을 쥐어주고 가서 누굴 쏘라고 하면 거품을 물면서 바락바락 대들게 뻔하니까. 외국어야 잘하니까 그쪽으로 키워볼 생각도 해봤지만 그런 성질로는 전부 말아먹는 것도 모자라 대놓고 연방에 엿을 먹이려고 날뛰겠지. 우리 미셴카야 반동분자 아닌가. 게다가, 그런 재능을 가진 아이를 기껏 총질이나 시키고 스파이 짓이나 시킨다면 정말 끔찍한 낭비가 아니겠나. 뭐 귀가 닳도록 들었겠지만 백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재능이니까.

하여튼 일리야는 우리 미셰츠카와는 다르지. 일리야 같은 애는 믿어서는 안 돼. 진짜 천재는 관대한 법이지만 모든 걸 노력으로 얻어낸 애는 관대한 척할 뿐이거든. 자넨 아직 진짜 호의와 가면 속의 선의를 구분할 줄 모르더군. 아마 자네가 제대로 된 현장요원이었다면 일리야가 샌드위치를 줬을 때 그곳을 빠져나왔을 거야. 얼간이 스페호프에게 전화를 했겠지. 꼬리를 밟혔다고. ”

 

“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저는 현장요원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배워본 적도 없는 걸요. ”

 

 

베르닌은 문득 떠오른 그의 이름과 부칭을 열거하며 변명조로 대꾸했다. 스비제르스키는 쿡쿡 웃었다.

 

 

“ 그걸 다행으로 여기는 게 좋을 거야. 진짜 현장요원이었다면, 그리고 ‘진짜’ 밀서를 품고 왔다면 자넨 지금 여기 없을 테니까. 내가 그러지 않았나, 일리야가 괜찮은 놈이라고. 실력이 꽤 좋지. 그 빵집에 가기도 전에 벌써 두개골이 쪼개졌든지 내장이 산산조각난 채 모스크바 강물에 수장됐겠지. 하긴 그랬다면 미셴카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나에게 살인자니 도살자니 하면서 온갖 패악을 다 부렸겠군. 아는지 모르겠지만 다닐, 나는 그 녀석에겐 아주 너그러운 편이라서 말이야. 특히 그 자식이 울기 시작하면 그렇게 관대해질 수가 없어.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나, 그 예쁜 눈에 눈물을 주렁주렁 달고 성깔을 부리는데. 그러니까 자넨 운이 참 좋아, 다닐 베르닌. 책상물림 서무일 뿐이라서, 그리고 그 녀석이 애지중지하는 친구라서. 안 그랬다면 참 억울하게 죽을 뻔하지 않았나. 아무 짝에 쓸모없는 거짓 정보를 전해주다 목이 잘려 죽는다면 참 섭섭한 일이지. ”

 

 

베르닌은 현기증이 났다. 수십 가지 질문들이 동시에 머릿속에서 터져 나올 듯 뒤엉켰다. 그중에서도 제일 충격적이고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물었다.

 

 

쓸모없는 거짓 정보라고요? 저는 그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어요. 내용이 뭔지도 전혀 모릅니다. ‘진짜 밀서를 품고 왔다면’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제가 가짜 정보를 가져왔다는 건가요? 그럼 왜 절 이렇게 구금하고 있는 거죠? 그 봉투를 이미 입수하셨을 텐데... ”

 

“ 물론, 쓸모없는 거짓 정보이고말고. 그 얼간이 스페호프가 딱 혹할 만큼의 거짓 정보지. 역시 찰떡같이 걸려들더군. 그 봉투 말인데, 자넨 일리야가 그 여잘 쫓아가서 두들겨 패고 유모차와 아기도 강물에 던져 넣고 빵 봉지를 낚아채기라도 했을 거라고 믿나? 그 빵 봉지는 자네의 접선녀가 벌써 가져가서 제믈랴코프에게 바쳤다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 자네는 임무를 완수한 셈이야. 문서가 그자의 수중에 들어갔으니까. 난 손 하나 대지 않았어. 그냥 내버려뒀지. 그 내용이야 이미 알고 있다네. 자네 국장이 그 문서를 만들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 그거야 당연하지 않나, 내가 흘린 정보인데. 제믈랴코프고 자네 국장이고 아주 덥석 물더군. 하긴 둘 다 얼간이로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놈들이니까. ”

 

“ 당신이 흘린 정보라고요? 저... 제믈랴코프라면... 설마 비탈리 제믈랴코프 말씀이신가요? 외교부 차관... 국장이 문서를 전해주려고 했던 게 그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그 정보를 당신이 흘렸다고요?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

 

 

스비제르스키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천천히 웃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갑고 오싹한 미소였다. 텔레비전이나 신문 사진으로는 결코 분간할 수 없는 냉랭함이었다.

 

 

“ 음, 풋내기에게 강의를 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지만 오늘은 내 기분이 꽤 좋아서 말이야. 귀염둥이를 오랜만에 안아줬더니 참 관대해지는군. 그 녀석이 약에 취해 있지만 않았어도 더 관대해졌을 텐데. 취한 애를 데리고 노는 것도 재미있긴 하지만 오늘은 멀쩡한 상태로 보고 싶었거든. 하여튼 기분이 괜찮으니 자네에게 간단히 설명을 해주지.

베를린에서 고위관료가 온 건 사실이야. 레닌그라드에서 열리는 중요한 비밀회의 때문이지. 물론 여기서 베를린은 ‘동베를린’을 뜻하는 게 아니라네. 서독 쪽 외교관이고 펜타건과 화이트홀 양측에서 사주를 받고 있지. 한쪽은 돈으로 매수했고 한쪽은 미인으로 매수했지. 양키 진영에서도 대가 없는 우정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거든. 그자는 미인을 좋아해. 여자든 남자든 가리지 않아. 그자가 우리 미셴카를 예전부터 눈독들이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야. 알다시피 미셴카는 동맹국가 뿐만 아니라 적국들에서도 공연을 많이 했었으니까. 그자는 미셴카의 공연이라면 놓치지 않았어. 우리 쪽과 협상을 할 때 비밀 조건을 걸었던 적도 있지. 그때 귀염둥이가 무슨 이유인지 성질이 잔뜩 나서 안 가겠다고 패악을 부려서 결국 물 건너갔지만. 그리고 미셴카의 엄마가 아팠다는 것도 사실이지. 레닌그라드 시립병원에 3주 동안 입원해 있었어. 여기까지가 사실이라네. 그 녀석이 얘기해준 것도 그 정도였겠지. ”

 

“ 어떻게, 어떻게 아시는 거죠? 미하일이 제게 그런 얘길 했다는 걸...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것과 베를린 고위직... ”

 

“ 순진하긴. 자네 도청 분석 담당자 아닌가? 그 감독실에 자네들 도청장치만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다고 돌아가서 다른 마이크를 찾아내려고 너무 헛수고 말게. 자네 실력으로는 못 찾아낼 테니까. 물론 그쪽 기술자들도 마찬가지야. 원체 허술해서 말이지. 하여튼 놀랍다니까. 그 녀석 말이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얘긴 남에게 안하는데. 좋아하는 남자에게도, 제일 친한 친구들에게도 안했는데 자네에겐 술술 말하더군. ”

 

 

베르닌은 가슴을 철사로 죄는 것 같았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왕재수가 떠올랐다.

 

'우리 엄마 많이 아팠대. 한 달 가까이 병원에 계셨대. 나 전혀 몰랐어. 그놈이랑 놀아주면 엄마한테 하루 보내주겠다고 하잖아. 그래서 싫다고 했어. 다닐, 우리 엄마 계속 아프면 어떡하지? 나 그냥 간다고 할 걸 그랬나봐.'

 

 

자기도 모르게 베르닌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중얼거렸다.

 

 

“ 그건 비열한 짓이에요. 어머니를 미끼로 그런 짓을 강요하는 건... 사람에게 그렇게 나쁜 짓을 하다니... ”

 

나쁜 짓이라니, 국가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거지. 국가와 당이 개인에 우선하는 것 모르나? 그리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거기까지가 사실이라고 했지 않나. 제믈랴코프는 지금은 좌천된 크라베츠와 한통속이고 내 오랜 적이지. 얼간이 스페호프는 모스크바에 있을 때 크라베츠의 심복이었고. 그래서 제믈랴코프와 자네 국장 사이에는 하잘 것 없는 친분이 있다네. 어제 오후 스페호프는 이제껏 번번이 막혔던 나와 미셴카의 통화 내용을 입수하게 되었네. 본인은 자기들 도청 기술력의 향상 덕분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지. 내가 특별히 우리 쪽 회선을 열어준 거지. 그래서 그는 놀라운 정보를 얻게 되었지. 서독 고위관료가 레닌그라드에 온다. 내가 그자와 결탁해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미셴카를 그자의 방에 밀어 넣으려고 한다. 미셴카에게는 아픈 엄마를 미끼로 협박한다. 그래서 미셴카는 내가 보낸 요원들의 호위를 받아 당일 저녁 비행기로 레닌그라드에 도착할 예정이다. 엄마를 면회하고 병원에서 하루를 보낸다. 다음날 오후에 독일인이 레닌그라드에 도착하면 피곤하다는 이유로 비밀 별장으로 직행한다. 거기서 미셴카와 밀회를 즐긴 후 모종의 대가를 나에게 넘겨준다. 바로 이런 얘기라네.

뛸 듯이 기뻐진 스페호프는 잽싸게 이 모든 정보를 암호문으로 작성했지. 그리고 제믈랴코프의 측근에게 전화를 걸어 아주 간략한 정보를 먼저 알렸네. 도청되더라도 사전 정보가 없이는 해독하기 힘든 일상적인 안부 전화의 틀을 빌려서 말이야. 하지만 그런 전화로는 자세한 밀회 장소와 시간, 기타 내용들을 전할 수는 없었지. 게다가 증거도 없고 말이야. 그래서 스페호프는 암호문으로 작성된 밀서를 모스크바로 직접 보내기로 한 거야. 그 봉투에는 말일세, 다닐. 밀서와 초소형 녹음테이프가 들어 있었다네. 나와 미셴카의 대화 말일세. 자네는 그걸 운반한 전령이 된 거지. ”

 

 

베르닌은 욕지기가 끓어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스페호프에 대한 분노와 함께 자기 앞에 있는 남자에 대한 증오가 솟구쳤다. 너무 화가 나서 공포조차 잊었다. 그는 스비제르스키의 말을 끊고 쏘아붙였다.

 

 

그러니까, 일부러 그런 정보를 흘렸다는 거군요. 제믈랴코프를 속이려고. 그러면 미하일은 레닌그라드에 가지 않은 건가요? 그 독일인은 애초부터 모스크바에 와 있었던 거군요. 어젯밤에 이미 걜 그자에게 보내서 당신 목적을 달성하고 제믈랴코프에겐 물을 먹였다는 거군요. ”

 

“ 아, 다닐. 장족의 발전이군. 괜찮은 추리야. 사실 나도 그렇게 할까 잠깐 망설이기도 했었다네. 문제는 그자에게서 내가 얻어낼 만한 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거야. 뭐 있기야 있었지. 제믈랴코프 같은 조무래기들에게야 군침이 돌만한 것들이. 하지만 이 내가, 그것도 사랑스러운 미셴카안겨주면서까지 얻어내고 싶은 대가는 아니었다네. 자네 몰라서 그러는데 그 녀석은 꽤 비싸게 먹히는 품목이라서. 게다가 내가 꼬마를 제일 마지막으로 봤던 건 그 수용소 클리닉에서였지. 거의 아홉 달 전이야. 그렇게 오랜만에 보는 녀석을 내 품도 아니고 적국의 자본주의자의 품에 안겨줄 만큼 구미 당기는 대가는 별로 없어서. 그러니 내가 제믈랴코프에게 물을 먹인 건 맞지만 미하일을 그자에게 보냈다는 건 억울한 지적이야. 우리 귀염둥이는 그자와 만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안 만날 거야, 뭐 언젠가는 내가 그자에게 진짜로 보낼지도 모르지. 꼭 필요하다면.

자네 말대로 미셴카는 어제 모스크바로 왔지. 얼간이 제믈랴코프와 자네의 스페호프는 그 아이가 레닌그라드로 갔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하긴 레닌그라드로 날아가긴 갔다네, 내리자마자 모스크바행 비행기로 옮겨 탔을 뿐이지. ”

 

 

베르닌은 입을 뻐끔거렸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 그럼, 그럼 걘 어디로 갔던 건가요? 간밤에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어디에서 뭘 한 거죠? ”

 

“ 이런, 당연한 거 아닌가. 섭섭하군, 당연히 자기 주인에게 왔지. 그 녀석이 내 거라는 사실을 잊으면 곤란해. 미셴카는 어제부터 내내 나와 함께 있었다네. 조금 전에 루뱐카 비밀 클리닉을 향해 떠났지. 이틀 전에 그 녀석의 엄마를 거기로 옮겨놨거든. 내 명예를 위해 말하자면, 레닌그라드 시립병원보다 몇 배 나은 곳이야. 좋은 의사들을 붙여줬다네.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 많이 나아졌다고 하더군. 미셰츠카는 사랑하는 엄마를 면회하고 모자의 정을 나눈 후 오늘 밤에 자네들의 그 촌동네로 돌아갈 거야.

그러니 참 배은망덕한 꼬마가 아닌가. 자기에게 이런 혜택을 베풀어줬는데 그렇게 울고불고 발버둥을 치고 욕설을 퍼붓고 뻗대다니. 뭐 난 상관없어. 걘 그런 게 또 귀여우니까. 이제 정리가 좀 됐나? 날 향한 그 말도 안 되는 원망이 좀 가라앉았나? ”

 

“ 그럼... 국장에게 그런 정보를 노출한 이유는... 제믈랴코프에게 밀서와 녹음테이프를 전달하게 한 이유는 결국 그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였다는 건가요? ”

 

“ 함정까지야. 그저 그놈이 호시탐탐 나를 옭아매려고 했으니 내가 멍석을 깔아줘 본 거지. 자네가 전해준 밀서는 20분도 안돼서 그자의 손에 들어갔다네. 내용을 확인한 즉시 제믈랴코프는 레닌그라드에 미리 깔아둔 자기 조무래기들을 비밀별장으로 보냈지. 흠, 30분 전쯤 우리의 독일인께서 별장에 도착하셨겠군.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몇 시간 정도 사우나도 하고 눈도 붙일 겸 말이야. 그는 중요 인물이기 때문에 레닌그라드 KGB의 호위와 감시를 받고 있다네. 제믈랴코프도 나름대로 고위급이긴 하지만 그쪽 KGB의 도움 없이 외국 거물을 감시하고 사진을 찍을만한 능력은 없지. 그래서 그는 레닌그라드 KGB 지국에 밀서를 공유했다네. 그놈도 구르는 재주가 있으니 자기 사람을 심어놨거든. 자기 일파를 비롯해 날 옭아매기 위해 포섭하고 있던 의원들에게도 정보를 흘려놓고 오늘이 지나면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를 제대로 물 먹일 수 있을 거라고 큰소리치고 있었다네.

지금쯤 제믈랴코프는 아주 곤란하게 됐을 거야. 아무리 기다려도 미셴카가 오지 않으니. 그 시간에 미셴카는 루뱐카 클리닉에서 엄마를 면회하고 있을 거라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권을 제시하고 각종 서류를 작성해야 하지. 특히 걔처럼 집행유예 상태의 정치범이라면 더욱. 즉 지금 이 시간 그 녀석의 행방에 대해서는 모스크바 KGB 지국에 훤하게 정보가 남는 거야. 게다가 그는 내가 그 비밀별장에 올 거라고 장담했지만 나는 1시간 전에 크레믈린에서 열렸던 예산회의에 참석했거든. 몸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지 않나. 신망 높은 정치국 의원이자 KGB 현장요원 출신의 애국자를 이런 식으로 모함하고 옭아매다니, 게다가 향후 우리 쪽으로 돌아설 수도 있는 적국의 고위직을 이런 식으로 오해하고 의심하다니, 외교부 간부로서는 정말 어리석고 치명적인 짓이지. 생각하니 참 한심하군. ”

 

 

스비제르스키는 왼쪽 눈을 찡긋했다. 그러자 오른쪽 눈의 푸른색이 더욱 강렬해 보였다. 베르닌은 이제 놀랄 기운도 없었다. 갑자기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아까부터 전신에 감돌고 있던 차디찬 공포는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그 피로감과 역겨운 기분이 두려움을 뒤덮어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그는 어째서인지 퉁퉁 부어오른 혀를 힘겹게 꿈틀거리며 물었다.

 

 

“ 왜 제게 그런 얘기를 전부 해주시는 건가요? 저는 당신의 정적인 제믈랴코프와 한통속이라는 스페호프의 부하 직원인데요. ”

 

“ 아, 이제야 좀 무서워졌나? 알아서는 안 될 얘기를 들려줬으니 이제 자네 머리를 날려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

 

“ 그런 생각도 좀 듭니다만... ”

 

“ 날려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얼간이 스페호프에게 앞으로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의미에서. 하지만 그냥 두겠네. 자네는 스페호프에게 이런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고해바치지 않을 거야. 자넨 접선 임무를 완수했고 지령대로 모스크바 시내에서 몇 시간 동안 놀다가 비행기로 돌아간 거야. 일리야를 만난 적도 없고 나를 만난 적도 없지. 미하일을 본 적은 더더욱 없어. 일이 엉망이 된 건 자네 탓이 아니라 스페호프가 잘못된 정보에 들떠서 제믈랴코프를 들쑤셨기 때문이지. 자네가 입을 다물면 이 정도로 끝나면서 모든 게 순조로워지는 거야. ”

 

“ 제가 당신과 만난 얘기를 하면요? ”

 

“ 그 얼간이 스페호프에게? ”

 

“ 아뇨. 그게 아니라... 누구에게든... 저, 언론이나 그런 곳에... ”

 

하하, 자네 참 순진한 소리를 하는군. 우리 소련에 언론이란 게 있다고 생각하나? 여섯 살짜리 어린애도 다 아는 얘기를. 뭐 맘대로 해보게. 그런 시도를 하려는 즉시 내장이 다 파헤쳐진 채 즐라타야 강물에 둥둥 떠오르게 될 테니까. 뭐 그래도 죽이지는 않을 거야. 다른 이유가 하나 있어서. ”

 

“ 그게 뭐죠? ”

 

“ 귀염둥이가 자넬 애지중지하니까. 그 녀석이 울고불고 고함지르고 나뒹굴면서 패악 부리는 건 보기 싫거든. 작년까진 그런 걸 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이제 마음이 좀 바뀌었어. 자네는 말이야, 다닐 베르닌, 그 녀석에게 던져준 새해 선물 같은 거야. 한 번도 선물 같은 거 달라고 한 적이 없는 놈이거든. 뭘 안겨줘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지. 그러니까 모처럼 받아 안고 좋아하는 걸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꼬마가 자네에게 싫증내지 않기를 기도하게. 내 마음이 바뀌게 될 테니까. ”

 

“ 아니, 그게...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고... 저는 정말 미하일의... ”

 

베르닌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그 녀석의 뭐지? 친구? 나는 그 자식을 감시하라고 붙여 놓은 KGB인데... 친구라는 말을 쓸 수 있나? '

 

 

머릿속에 지난 몇 개월 동안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스페호프. 돈키호테. 독사과. 스네고로드. 시계탑 화재... 그러자 그는 몸이 떨렸고 혀가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 들었다.

'그 녀석도 자기를 괴롭히고 죽이려 드는 기관에 고용된 감시자를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스비제르스키가 코웃음을 쳤다.

 

 

“ 자네가 뭐든 상관없어. 그 녀석이 밥을 달라고 하면 밥을 주고 돌봐 달라 하면 돌봐주고, 재워 달라고 하면 재워주면 되는 거야. 자 달라고 하면 곱게 자 주고. 그게 전부야. 그럼 이제 돌아가게. ”

 

 

베르닌은 스비제르스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을 마주보자 여전히 몸이 오싹했다. 하지만 그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 왜 내버려 두신 거죠? ”

 

“ 뭘 말인가? ”

 

“ 미하일이요. 그렇게 아끼시면서 왜 체포돼서 고문을 받고 좌천되게 내버려 두신 건가요? 독사과도 화재도 다 알고 계시면서 왜 걔를 그런 위험에 처해 있도록 방치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제 말은... 당신은 뭐든지 다 할 수 있고... ”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어깨를 다시 한 번 으쓱했다. 베르닌은 그렇게 거대하고 운동선수처럼 견고한 체격을 가진 남자, 매와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남자가 그토록 우아하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마도 그건 그의 몸짓에 배어 있는 냉랭함 때문인 것 같았다. 오랜 기간의 현장요원 경험과 정치인 생활에서 터득한 태도일지도 몰랐다. 그는 딱 두 마디로만 대답했다.

 

 

“ 만사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거든. 차르라고 전부 자기 뜻대로 됐을 것 같나? ”

 

 

베르닌은 어쩐지 울컥해서 대들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    *    *

 

 

 

 

 

일류샤는 그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에는 9밀리 마카로프도 돌려주었다. 탄창도 다시 끼워져 있었다. 차 안에서 일류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공항에 도착하자 입을 열었다. 여전히 쾌활한 목소리였다. 심지어 존대어를 쓰기까지 했다.

 

 

“ 그럼 안녕히 가세요, 존경하는 선배님. 편안한 비행하시길. ”

 

 

베르닌은 말없이 일류샤를 노려보았다. 머리와 팔이 아직도 지끈거렸다. 일류샤는 웃음을 터뜨렸다.

 

 

“ 그냥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그래. ”

 

“ 이유 없는 친절을 베푸는 놈을 믿지 말라는 거? ”

 

“ 아, 그것도 일리가 있네. 내 얘긴 다른 거긴 하지만. 현장요원 기질은 없으니까 아예 손 떼라는 거. 그래도 꼭 이 바닥에 발 들여놓고 싶으면 호신술 좀 배우라는 거. 정말이지 내가 삼보라도 좀 가르쳐주고 싶은데. ”

 

넌 내가 지금까지 본 개자식들 중에 제일 개자식이야!

 

“ 그거 참 유감이네. 난 너 맘에 들었는데. 선배님인데다 난 못한 졸업까지 하고. 하여튼 잘 가. 외교관 검색대 쓸 수 있게 해놨어. 모처럼 받아온 권총 뺏기면 안 되잖아. 예쁜 미셰츠카에게 내 안부 좀 전해주고. 오늘은 걔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인사도 제대로 못했네. 아쉽게도 말이야. 일류샤가 섭섭해 한다고 말해주면 아마 알 거야. 그럼 이만. ”

 

 

베르닌은 공항으로 들어갔다. 외교관 검색대를 통과했다. 몸수색도 없었고 권총에 대한 지적도 없었다. 그는 4시 비행기를 탔고 무사히 가브릴로프로 돌아왔다.

 

 

 

그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스페호프는 금요일에 출근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9밀리 마카로프를 꺼내 가방에 쑤셔 넣었다. 입고 갔던 옷을 모조리 벗어서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후 보드카를 세 잔 마시고 사흘 동안 냉장고에 처박혀 있던 차디찬 닭고기 롤을 조금 먹었다. 그리고는 취기와 피로에 젖어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베르닌은 중간에 깨지도 않고 연속으로 열다섯 시간을 잤다. 자고 일어나니 관자놀이가 무척 아팠다. 처음에는 숙취 때문인가 했지만 잘 생각해보니 일류샤에게 얻어맞은 자리였다. 비틀렸던 팔도 어찌나 아픈지 제대로 들어 올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혹시나 해서 그는 왕재수의 집으로 가보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밀어보니 스르르 열렸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잠시 베르닌은 같은 비행기를 탔던 걸까 하고 의문했다. 하지만 어머니를 면회하고 왔을 테니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 야, 나야. 오늘 극장 안 갔나보네. 나 들어간다. ”

 

 

대답이 없었다.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무거웠다. 안쪽에서 클래식 음악이 들려왔다. 평소처럼 레코드를 틀어놨나 싶었지만 음악이 훨씬 생생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바이올린 연주 같다는 생각을 하며 거실로 들어갔더니 코즐로프가 와 있었다. 베르닌을 보더니 가볍게 눈짓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예술에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무슨 곡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연주는 근사하고 아름다웠다.

 

 

왕재수도 있었다. 코즐로프와 창가 사이에. 안색은 아직 창백했지만 그 외에는 그렇게 아파보이지는 않았다. 약 기운에서 다 풀려난 모양이었다. 그는 코즐로프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신작 안무인가 싶었지만 연습실에서 본 적이 없는 춤 같았다. 느리고 정밀하고 동시에 무게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베르닌은 단 한 번도 인간의 몸으로부터 그런 움직임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문득 베르닌은 창문을 열어주고 싶어졌다. 완벽하게 드리워져 있는 커튼을 모두 걷어내고 거실의 모든 창문들을 활짝 열어 젖혀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왕재수가 그 즉시 창 너머로 휙 날아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너머로는 추락, 혹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진공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멈춰 섰고 침묵한 채 음악을 들었다.

 

 

 

 

 

- FIN -

2015. 6. 30 ~ 7. 10

 

 

...

 

 

베르닌의 9밀리 마카로프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자면.

 

소련제 권총으로 정확히 말하면 9-18밀리 마카로프 권총이다. 소련 군대와 동맹 국가들에서 사용했다. 모양은 투박해서 딱 러시아 느낌이 난다. 이미지는 아래를 참조하시길. (구글링으로 가져옴)

 

 

 

..

 

눈 색깔 다른 남자이자 '본편에서 온 악당'인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에 대한 묘사는 모두 본편 우주에서 가져왔다. 이 사람은 본편 우주에서 꾸준히 등장하지만 사실 실제 등장 비중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비중과 관계 없이 미샤에게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인물이다. 인물의 성격 설정과 본편 준비를 위한 데이터 구축용 소품 몇편에서 이 사람과 미샤의 관계를 다룬 적이 있긴 한데 그건 말 그대로 데이터 구축용 소품이라 향후 본편을 공개하더라도 그냥 계속 바닥에 묻어둘듯.

 

어쨌든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미샤에게 품고 있는 다분히 뱀파이어적 욕망이나 둘의 뒤틀린 관계는 미샤의 수용소 이야기를 다뤘던 가브릴로프 본편의 프리퀄(about writing 폴더에서 일린의 시점으로 기술된 내용을 두어번 발췌한 적이 있다)과 단편 jewels에서 짤막하게 서술한 적이 있다. 이 사람과 미샤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유가 있을 때 이 본편들이나 데이터 구축 소품에서 조금 인용해 보기로 하겠다. (근데 언제...)

 

물론 이 사람은 가상의 인물이며 이 사람의 정치적 이력에 대한 기술도 모두 픽션이다. 다만 KGB 출신으로 베를린에서 활동했다는 배경은 캐릭터 설정 시 블라지미르 푸틴의 배경에서 좀 따왔다.

 

..

 

 

여기서 묘사한 소련 KGB 요원들의 활동이나 음모 따위는 모두 서무 시리즈를 위한 가상의 이야기들이다. 물론 몇몇 실제 정보나 자료를 반영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서무 에피소드로 놀아보려고 쓴 거라서.. '무슨 놈의 KGB 요원 활동이 이렇게 허술하냐! 흑빵에 봉투 넣는 건 뭐냐! 흰 비둘기 회색 비둘기가 뭐냔 말이냐~ 스페호프는 그래도 명색이 국장이란 놈이 왜 이렇게 멍청하며 고위직이라는 제믈랴코프란 놈은 왜 또 넘어갔냐!' 라고 하신다면... 이건 존 르 카레 소설이 아닙니다 :) 여기서 그런 걸 찾으시면 안됩니다! 이건 그냥 토끼가 스트레스 풀고 놀기 위해 쓰는 서무 시리즈라고요~

 

..

 

여기 등장하는 제믈랴코프, 크라베츠라는 정치인들은 모두 본편 우주에 등장한다. 비중은 거의 없지만 어쨌든 스비제르스키의 정적으로 미샤를 수용소에 처넣은데 크게 일조한 사람들이다. 본편에서 스페호프는 모스크바에 있을때 크라베츠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미샤를 처음부터 아주 싫어할 수밖에 없다. (물론 본편 스페호프는 이렇게 얼간이 같지는 않...)

 

 

..

 

 

하여튼 이번 편은 분위기나 서술 기조 때문에 본편 생각이 많이 났다. 후반부는 더욱. 본편으로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못 그러고 있으니 애꿎은 서무 시리즈가 점점 진지해지네.. 하지만 서무 29편은 좀더 아기자기한 분위기로 돌아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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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거의 한 달 전에 서무의 슬픔 26편을 올린 후 번외편으로 러시아 민담 패러디 곱사등이 흑염소 편을 올렸고 이후 바쁜 업무와 러시아 여행으로 잠시 휴지기가 있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서무 27편!

 

사실 본편을 써야 하는데 어쩌다보니 외전인 서무 시리즈의 늪에 빠져서 어느덧 27편까지 왔다... (지금은 29편 쓰고 있음)

 

전에도 몇 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서무 시리즈도 후반부로 오다보니 점점 본편 색채가 짙어지고 있어서... 어서 빨리 본편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긴 하다만...

 

27편에서는 우리의 단추청년 베르닌이 KGB 요원으로서 어떤 임무를 부여받게 되는데... 과연 그 임무는 무엇일지. 그리고 책상물림 단추가 요원 활동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궁금하신 분들은 이번 편을 읽어주세요~

 

** 도입부에서 언급되는 시계탑 사건은 24편, 독사과 사건은 21~22편에 나온다. 얼음물 사건은 9편이다. 베르닌이 언급하는 권총 규격 보고서 얘긴 3편에 나왔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어느덧 4월초로 접어들고, 왕재수는 신작 발표 준비에 여념이 없고 베르닌은 감시 업무와 서무 업무에 매진하고 있는 중인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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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7

 

 

 

 

서무의 슬픔

- 밀사 베르닌 -

 

 

 

 

 

4월 초가 되었다. 왕재수의 신작 공연이 다가오자 스페호프는 점점 심기가 불편해져서 매일 아침마다 베르닌에게 전날의 왕재수 감시 결과를 브리핑할 것을 요구했다.

 

 

“ 어제는 수석 안무가인 레베진스키가 야스민의 신작 안무가 너무 파격적이라고 지적해서 잠깐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파격적이라고 했던 부분은 무용이 음악을 따라가지 않고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부분과 여자 무용수들이 남자 무용수를 들어 올리는 부분이었습니다. 야스민은 후자의 경우 이미 자신을 비롯해 연방의 여러 창작 발레에서도 선보인 적이 있는 동작이며 국제 발레 무대에서는 이미 오래된 시도라면서 레베진스키의 지적을 일축했습니다. 무용과 음악의 불협화음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 대신 레베진스키에게 19세기를 살고 있는 모양이라면서 비아냥거렸습니다. 이에 레베진스키가 화를 내며 나가버렸지만 야스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습을 진행했습니다. 무용수들은 전반적으로 야스민의 편을 들었고 이후 순조롭게 연습에 참여했습니다. 이상입니다. ”

 

“ 골치 아프군. ”

 

“ 예, 뭐가요? ”

 

“ 그 망할 놈의 무용이란 것 말야! 대체 들어도 들어도 지루하고 머리만 아프니. 불협화음이고 나발이고. 중요한 건 그 불여우 자식이 윗분들에게 잘 보이려고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지! 레베진스키를 그런 식으로 깔아뭉개는 것을 보니 이제 극장이 완전히 자기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기고만장한 게 틀림없어. 에잇, 그 시계탑에서 완전히 끝냈어야 했는데. 자네가 그렇게 몸까지 내던졌는데도 실패하다니.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놈이야. 파이프를 타고 내려오지를 않나, 눈더미로 뛰어내리지를 않나. 계집애처럼 생긴 놈이라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어. 분명 그 불여우는 스비제르스키한테서 현장 요원들이나 받는 훈련을 받은 거야. 그러니까 얼음물에 빠져도 살아나고 불을 질러도 살아나지! 불여우 녀석이 그 무자비한 작자의 무릎에 앉아서 꼬리만 치고 뒹굴기만 한 게 아니었던 거야! 자네도 앞으로 조심하게, 그 녀석이 언제 돌변해서 자넬 해치우려 들지 모르니... 아무래도 자네에게도 일신의 안전을 위해 현장 요원 교육을 좀 시켜야 할 것 같아. ”

 

 

베르닌은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시계탑과 눈더미, 연기와 불길이 떠올랐다. 그는 꽉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 시계탑이요? 그때 화재 났던...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

 

“ 허허, 자네도 알면서 그러나. 그 자식이 매일 다섯 시에 시계탑 전망대에 석양을 보러 올라간다는 얘기를 레베진스키에게서 들었지. 그래서 인부 하나를 매수해서 불씨를 남겨두고 오게 한 건데 타이밍은 잘 맞았다만 그 녀석이 그렇게 날랜 놈일 거란 생각은 못했지. 하필 그때 자네가 따라들어 가다니, 그때는 그놈이 크레믈린에 고해바칠까봐 일부러 입 다물고 있었네만 사실 자네가 따라 들어갔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나는 정말로 감동했다네. 그놈을 끝까지 따라가서 해치우려고 위험을 무릅쓰다니... 그 녀석만 남겨두고 밧줄을 타고 내려온 것까지 정말 더할 나위 없었네만... 자네 잘못은 하나도 없네. 오히려 표창감이지. 그놈이 현장 요원 뺨치는 재난 대응 능력을 갖췄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나. 갈대처럼 삐쩍 말라서 계집애처럼 반반한 얼굴에 의원님들 침대로나 기어드는 꼬마를...

하여튼 다닐, 기밀사항들이라 내가 자네를 공개적으로 포상하지는 못하고 있네만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네. 잊지 않음세, 자네의 이 헌신적인 노력을. 이런 자네를 서무로 키우려고 했다니... 물론 서무도 아주 중요한 직무이지만 자네라면 서무와 현장요원을 겸할 수 있는 재원으로 키우고 싶군.

 

 

베르닌은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멍하게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 화재. 일부러. 죽이려고. ”

 

“ 그렇지. 하지만 뭐 그놈이 죽을 거라고까지는 생각 안 했어. 불이 그렇게 잘 붙을 거란 기대는 안 했거든. 독사과처럼 좀 겁을 주는 용도였지. 운 좋게 불이 잘 옮겨 붙어서 그놈을 해치울 수 있다면 물론 더 좋다고 생각했지만... 원래 자네에게 레베진스키나 그 인부가 귀띔을 해주기로 되어 있었는데 동선이 엇갈렸는지 못 들었던 모양이군.

하여튼 위험을 무릅썼던 자네의 용기는 늦었지만 정말 칭찬해 주고 싶네. 뭐 한동안은 그런 시도를 하기 힘들 거야. 독사과와 시계탑의 간격도 사실 너무 촘촘했거든. 벨스키야 온순한 편이고 정치 경력도 그렇게까지 오래 되지는 않았으니 모르고 넘어가겠지만 스비제르스키는 완전히 여우에 호랑이거든. 그 작자는 현장 요원 출신에 해외 스파이 지국 총괄에 우리 보안위원회를 십몇 년 동안 주무르며 가지고 놀았던 인간이니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몰라. 가뜩이나 독사과인지 시계탑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얘기가 새어들어 갔는지 요 며칠 동안 그 불여우에게 직접 전화까지 했더군. 세 번이나! 그 작자의 전화는 도청도 할 수 없단 말이야. 들키면 말 그대로 모가지인데다 기술력도 우리보다 한 수 위니까. 그러니 이제 신작 발표까지는 함부로 그 불여우를 제거할 수가 없단 말일세. 자네도 조심해야 해. 그건 그렇고 그놈은 아직도 자네를 신뢰하고 있나? ”

 

“ ... 예. 그런 것 같아요. ”

 

“ 아직도 아침 저녁 밤으로 해주고 있겠지? ”

 

“ 아니오, 그건 좀... ”

 

“ 그래, 피곤하긴 하겠지. 하지만 그것도 자네 임무 중 하나이니 잠자리도 소홀히 하면 안 되네. 그래야 그 불여우의 신뢰를 계속 유지하고 스비제르스키의 의심으로부터 우리 지국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어. 그럼 오후에도 극장에 가 보게. 고생이 많군. ”

 

 

사무실로 돌아온 후 베르닌은 산더미처럼 밀린 일을 하느라 허덕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국장의 말을 무한재생하고 있었다. 온몸이 떨리고 괴로웠다. 지금 일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왕재수의 곁에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국장이 인부를 매수해 불까지 지르게 했다니 이것은 독사과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가책도 되고 걱정이 되어서 미칠 것 같았다. 너무 심란한 나머지 그는 서류철에 노끈 구멍을 두 개나 잘못 뚫었다.

 

 

 

*   *   *

 

 

 

 

오후에 베르닌은 극장으로 갔다. 언제나처럼 비서인 류드밀라가 그를 맞아 주었다. 이제는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대답을 해주었다.

 

“ 우리 감독님 오늘 점심은 잘 챙겨 먹었어요. 극장장님하고 의회 의장님이 오셔서 같이 드셨거든요. ”

 

“ 어, 다행이네요. 지금 연습해요? ”

 

“ 아니요, 리허설은 한 시간 후예요. 안에 계시니까 가보세요. ”

 

“ 엥, 정말요? 연습실 아니면 창고니 무대니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느라 바쁜 애가 웬일로 감독실에 있지? ”

 

“ 책을 좀 봐야 한다던데요. 하여튼 너무 방해하지 마세요. 감시고 뭐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라고요! 또 독사과 따위 먹게 하지 말고! ”

 

“ 독사과는 제가 그런 게 아니잖아요. ”

 

“ 어쨌든 스페호프가 배후에 있는 거잖아요! ”

 

“ 어, 그건... 저, 레베진스키는 나왔나요? 어제 걔랑 싸웠잖아요. ”

 

“ 나오긴 했는데 백조의 호수 군무 지도하고 있어서 연습실에 있어요. 아마 이제 감독님 신작 연습할 땐 안 들어갈 거예요. 뭐 그 인간이랑 미셴카랑 싸운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말이죠. 하여튼 옛날부터 능력도 없었던 사람이 계속 감독 자리 욕심만 내더니... 괜히 밸이 꼴리니까 우리 감독님한테 못되게 굴고 여기저기 헐뜯고 다니기나 하고. ”

 

 

베르닌은 류드밀라에게 레베진스키를 잘 감시하라고 말할까 하다가 괜히 왕재수의 입장이 난처해질까봐 꾹 참았다. 감독실 문을 똑똑 노크했다.

 

 

“ 야, 나야. 들어간다. ”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자나 싶어서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왕재수는 등을 돌리고 선 채 전화를 받고 있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도 않고 계속 듣기만 하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의아했다.

 

 

‘ 저 녀석 원래 감독실로 걸려오는 전화는 안 받는데. 걸지도 않고. 도청 때문에 싫다고... ’

 

 

한참 가만히 듣고 있다가 왕재수가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뭐라고 두어 마디 했다. 그리고는 전화를 끊더니 베르닌 쪽을 힐끗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파로 가서 벌렁 드러누웠다. 쿠션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누운 채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잠을 못 잤나 싶어서 커튼을 쳐주려고 창가로 가다가 베르닌은 소파 곁에 멈춰 섰다.

 

 

“ 어, 야... 너 울어? ”

 

“ 내가 왜. ”

 

“ 눈물이 뚝뚝... ”

 

“ 먼지 들어가서 그래. ”

 

“ 먼지투성이 쿠션으로 얼굴을 누르고 있으니까 그렇잖아! ”

 

 

베르닌은 왕재수의 얼굴에서 쿠션을 치워 주었다. 왕재수가 얼굴을 옆으로 돌리더니 눈을 깜박깜박하면서 손등으로 급하게 뺨을 문질렀다. 베르닌은 혀를 찼다.

 

 

“ 눈물만 닦는다고 되는 줄 아냐, 콧물도 줄줄 흘리고 있는데! ”

 

“ 감기 걸렸나보지! ”

 

“ 아니잖아. 무슨 일 있었어? 설마 바이올린 아저씨가 바람이라도... ”

 

“ 아니야. 로만이랑은 아무 일 없어. ”

 

“ 그럼 방금 전화 때문이야? 누군데? ”

 

“ 너랑 무슨 상관이니. ”

 

좋아, 그럼 나 도청 녹음된 거 들어본다!

 

“ 맘대로 해. 어차피 그 사람 전화는 도청 안 된댔어. ”

 

 

베르닌은 손수건을 꺼내서 왕재수의 뺨과 코를 닦아 주었다. 왕재수는 심호흡을 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소파 구석에 나뒹굴고 있던 책을 집어 들어 펼치더니 열심히 읽는 척 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거꾸로 들었잖아. ”

 

“ 뭐가! 네가 어떻게 알아, 이거 불어로 된 건데! ”

 

“ 야, 내가 아무리 불어를 몰라도 글자 거꾸로 뒤집힌 건 알아! ”

 

“ 에이... ”

 

 

왕재수는 책을 내려놓았다. 입술을 꼭 깨물었지만 눈가에 다시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 모스크바에서 전화 온 거지? 그 크레믈린 아저씨... ”

 

“ 어휴, 다른 때는 책상물림이면서 쓸데없을 때만 머리 잘 돌아가. ”

 

“ 무슨 일 있어? 너 원래 그 아저씨랑 통화하면 막 애교부리잖아. ”

 

“ 내가 언제. ”

 

“ 지난번에도... 나 권총 규격 보고서 써야 했을 때도 그 아저씨한테 전화해서 애교부리고... 그러니까 그 아저씨가 한방에 해결해줬잖아. 너 되게 귀염 받잖아. ”

 

“ 바보, 그건 네가 국장한테 볶이니까 불쌍해서 그랬던 거지. 아저씨도 내가 안 하던 짓 하니까 놀라서 금방 들어준 거야. 그 인간 툭하면 나보고 애교 부려보라고 했거든. 안 해서 맨날 혼났어. ”

 

“ 엥, 그래? 너 바이올린 아저씨한텐 맨날 애교 부리잖아. ”

 

“ 로만은 진짜 좋으니까 그렇지! 좋아하면 무슨 짓을 못해! ”

 

“ 아... 그렇구나... 난 네가 원래 그런 줄 알았어. ”

 

“ 뭐가. 원래 아무한테나 꼬리친다고? ”

 

“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기분 나빠하지 마. 그게 아니고 난 네가 원래 애교가 많은 줄 알았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가로 가더니 커튼을 젖히고 바깥을 내다보았을 뿐이었다. 어깨가 축 처진 게 보기만 해도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마음이 쓰인 베르닌이 곁으로 갔을 때 왕재수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우리 엄마 많이 아팠대. 한 달 가까이 병원에 계셨대. 나 전혀 몰랐어. ”

 

“ 아, 그랬구나... 지금은 괜찮아지신 거야? ”

 

“ 응, 좀 나아지셨대. 나쁜 놈들, 아무도 나한테 말 안 해줬어... ”

 

 

베르닌은 왕재수의 등을 토닥토닥해 주었다. 왕재수가 손등으로 눈을 다시 닦았다. 왕재수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에 대해 얘기한 적이 거의 없었다. 딱 한번, 베르닌이 출장을 갔을 때 엄마가 걱정할까봐 편지 따윈 안 쓴다고 얘기했던 게 전부였다.

 

 

“ 그래도 좀 나아지셨다니까 다행이네. 이제 날씨도 따뜻해질 테니까 괜찮아지실 거야. ”

 

“ 우리 엄마는 여름 좋아하는데... 아직 한참 남았어. 레닌그라드는 여기보다 추워. ”

 

“ 에이, 4월 금방 갈 거야. 어머니한테 전화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저, 아니면 너 지금 레닌그라드로 전화해 볼래? 어머니한테. 내가 보고 안 하면 되잖아. ”

 

“ 네가 보고 안 한다고 그놈들이 모르겠니? ”

 

“ 국장한테 여기 전화 내용 보고하는 게 나거든. ”

 

“ 바보. 너네 국장은 얼간이니까 상관없어. 다른 놈들도 다 아는 게 문제지. 우리 엄마한테도 도청 붙여 놨는걸. 그 인간이 방금 나한테 그랬어, 엄마한테 전화하게 해줄 수 있다고. 레닌그라드로 잠깐 보내주겠다고, 엄마 만나게 해준다고. 그래서 싫다고 했어. ”

 

“ 엥? 그 크레믈린 아저씨가 얘기해준 거야? 어머니 편찮으셨다고? 전화하게 해주고 만나게까지 해준다고 했으면 좋다고 해야지 왜 거절을 해! 게다가 레닌그라드! 아무리 잠깐이라도... 너 진짜 돌아가고 싶어 했잖아. ”

 

“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그렇지. 그 인간이 나랑 엄마를 위해서 레닌그라드에 보내준다는 게 아니니까. 또 더러운 짓 시키려고... 베를린에서 무슨 외교관인지 뭔지가 레닌그라드에 온다고... 가서 그놈이랑 놀아주면 엄마한테 하루 보내주겠다고 하잖아. 그래서 싫다고 했어. ”

 

 

베르닌은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로서는 연방을 좌지우지하는 높은 사람들의 정치질과 온갖 모략, 지저분한 뒷공작들이 너무나 낯설었다. 왕재수에게 높은 곳에 있는 아저씨들이 여럿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게 어떤 의미일지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사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로서는 그 아저씨들도 제2, 제3의 코즐로프 같은 존재라고 믿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다. 왕재수를 귀여워해주고 애교를 받아주고 천재에 예쁜 꼬마라면서 오냐오냐 해주는 아저씨들. 그냥 그게 전부라고 믿고 싶었다. 왕재수는 나이 많은 아저씨들을 좋아하는 취향이니까 그 정치인들과도 나름대로 즐겼던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이제 베르닌은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고 마음이 무거웠다. 위로해 주려고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 ‘’는 뭐야... 전에도 그런 일 있었던 거야? ”

 

“ 응. 여러 번. ”

 

“ 그땐 갔었어? ”

 

“ 응... ”

 

 

베르닌은 어색하게 왕재수의 어깨에 팔을 둘러 주었다. 왕재수는 한동안 베르닌에게 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닐, 우리 엄마 계속 아프면 어떡하지? 나 그냥 간다고 할 걸 그랬나봐. ”

 

“ 아니야, 안 간다고 한 거 잘했어. 어머니는 괜찮으실 거야. 가책 느끼지 마. 그런 거 어머니가 아시면 네가 와도 기뻐하지 않으실 거야. ”

 

“ 나 엄마한테 그런 거 한 번도 얘기한 적 없어. 그런 짓 하고 다닌 거 엄마가 알면 안 되는데. 나 체포돼서 엄마가 진짜 많이 슬퍼했댔어. 그래서 아프게 된 건가봐. 나 때문에 아픈 건데 내가 고집부리고 안 가면... ”

 

 

왕재수가 창가 아래 벽에 등을 기대며 웅크리고 앉았다. 항상 전신을 곧게 펴거나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습관이 있는 애가 그렇게 몸을 움츠리자 굉장히 낯설게 보였다. 베르닌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 고집부리는 거 아니야. 안 가는 게 맞는 거야. 얼굴 한번 안 본 사람한테 가서 그런 일 하라고 하는 놈이 나쁜 거야. 내가 어머니에게 전화할 수 있게 도청 안 되는 회선 따줄게. 오늘은 어렵겠지만 내일까지 한번 노력해볼게. ”

 

“ 고마워, 다닐. ”

 

 

왕재수가 일어나더니 스트레칭을 했다. 다시 평온한 표정을 되찾았다. 심지어 베르닌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했다.

 

 

“ 또 손목 토시를 하고 왔네. 내가 언제 너네 집 가서 토시들 다 태워 버릴 거야.

 

야, 이 토시가 얼마나 편한데! 이거 안 하면 소매 금방 더러워진단 말야! 넌 사무직의 슬픔을 모른다고! 특히 서무!

 

“ 토시랑 아가일 무늬 셔츠들! 다 태워버리고 파묻어버릴 거야! ”

 

“ 그럼 난 뭐 입고 출근하냐! 내복 바람으로 나가라고! ”

 

“ 너 아직도 내복 입어? 4월인데! ”

 

우리 사무실 춥단 말이야! 그리고 내복이나 너네 애들이 입는 타이츠나! ”

 

“ 어떻게 타이츠랑 내복을 비교할 수 있냐! 타이츠는 무대 의상이야, 제작 단가도 더 비싸다고! 자기도 지난번에 입어놓고... ”

 

“ 하긴 그게 내복보다 더 불편하긴 하더라. 하여튼 타이츠 입고 무대 올라가던 놈이 남의 토시랑 셔츠랑 내복 가지고 뭐라 할 자격 없다고! ”

 

너 한번만 더 타이츠 모독하기만 해봐!

 

 

왕재수가 진짜로 얼굴을 빨갛게 붉히면서 푸르르 화를 냈다. 그러다가 시계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 나 연습실 가야 돼. 리허설 전에 데니스랑 타마라 동작부터 잡아주기로 했어. 정신이 하나도 없네. ”

 

 

베르닌은 왕재수를 따라 연습실로 갔다. 그나마 손목 토시와 타이츠 얘기로 왕재수가 다른 데 관심이 쏠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리허설을 한 시간 정도 지켜보고 있는데 레베진스키가 슬며시 들어왔다. 왕재수는 무용수들 연습시키느라 정신이 팔려서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신작 연습할 때는 이제 안 들어오겠다더니 왜 왔나 싶어서 의아해하고 있는데 레베진스키는 왕재수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베르닌에게 바짝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다.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가 지금 당장 사무실로 돌아오랍니다. ”

 

“ 예? 국장이? 근데 왜 당신이 이 얘길... ”

 

“ 극장에서 믿을만한 건 나 뿐이니까 그랬겠죠. ”

 

“ 난 당신 안 믿는데... ”

 

“ 하긴 우리가 제대로 접선했던 적이 없으니... 못 믿겠으면 전화를 해보든가요. 극장 밖 공중전화로 하랍니다. ”

 

 

베르닌은 반신반의하며 연습실을 나갔다. 극장 밖에 있는 공중전화로 가서 스페호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장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명령했다.

 

 

“ 다닐, 지금 당장 돌아오게. 5호실로 오도록. ”

 

 

 

 

*   *   *

 

 

 

 

 

베르닌은 5호실에 들어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5호실은 지하 문서고 옆에 있었지만 이중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고 일반 직원들에게는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스페호프와 현장요원들만 드나드는 곳이었다. 건물 설계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비밀 장소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그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었다. 지난 특별 감사 때 다른 선배들의 자료를 정리해주다 알게 되었는데 현장요원들의 무기 따위가 보관되어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스탈린 시절 고문실로 악명 높았던 6호실도 허물어버렸다는 공식 발표와는 달리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건 꽤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이후 일에 짓눌려서 금세 잊어버렸다.

 

 

베르닌이 막 지하로 내려가려는데 나이든 현장요원인 글리셰프가 그에게 다가왔다. 말없이 주머니 속으로 열쇠 꾸러미를 밀어 넣었다. 베르닌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 이게 뭔가요? ”

 

“ 5호실 열쇠. ”

 

“ 국장님이 먼저 가 계신 거 아니에요? ”

 

“ 문 닫으면 자동으로 잠기게 되어 있어. 열쇠 없으면 안 열려. ”

 

 

글리셰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휙 가버렸다. 현장요원들은 언제나 무게를 잡고 잘난 척 하곤 했다. 행정요원들과는 말도 섞지 않았다. 베르닌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지하로 내려갔다. 문서고를 지나니 무거운 이중문이 나타났다. 열쇠로 문 두 개를 열고 들어가자 회색으로 칠해진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방이 나타났다. 등 뒤에서 문이 스르르 닫히더니 철컥 하고 잠겼다. 구석에 조그만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거기 스페호프가 앉아서 안경을 치켜 올리며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 국장님, 부르셨습니까. ”

 

“ 거기 앉게. ”

 

 

베르닌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다. 밀폐된 지하 공간이라서 그런지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스페호프가 고개를 들더니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 지금 모스크바로 가줘야겠어. 출장명령서는 글리셰프가 대신 써줄 걸세. 하지만 모스크바행은 비밀이야. 자넨 오늘부터 2박 3일간 스네고로드에 가축 전염병 예방요원으로 협조 출장을 가는 것으로 되어 있네. 돌아와서 누가 묻거든 그렇게 답해야 하네. 스네고로드 쪽과는 말을 다 맞춰놨으니 걱정할 거 없어. ”

 

“ 예? 모스크바요? 스네고로드... 비밀... 대체 왜... ”

 

“ 중요한 기밀문서를 전해야 하네. 필로모프나 글리셰프를 보내려고 했지만 모스크바 본부에서는 우리 현장요원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꿰뚫고 있어. 이번 일은 그쪽이 알아서는 절대 안 되네. 그래서 기존 요원들은 보낼 수가 없어. 가장 의심받지 않을만한 위치에 있는 직원, 그리고 동시에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직원을 보낼 수밖에 없네. 그것이 바로 자네야. 이번 일은 상당히 위험한 임무일세. 하지만 난 자네를 신뢰하네. 이번 임무를 제대로 수행한다면 자네는 제대로 된 현장요원으로 거듭날 수 있을 거야. 물론 자네는 9밀리 마카로프를 다룰 수 있겠지. 요원 연수도 받았고 작년에 그 불여우 인계 때문에 사격 재훈련도 받았으니. 여기 자네의 권총이 있네. 여분의 탄창은 없네. 흔적을 남겨서 좋을 일이 없으니까. 자네가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총을 쓰게 될 일이야 당연히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

 

“ 어, 저... 권총까지... 대체 이게 무슨 임무인가요? 기밀문서라니, 무슨 내용인지... 누구에게 전하라는 건지... ”

 

“ 내용은 자네가 알 것 없네. 오히려 알면 더 위험하지. 밀사는 자신이 전하는 문서의 내용을 몰라야 해. 그래야 모두가 안전해져. 문서는 암호로 작성되어 있기 때문에 만의 하나 문제가 생겨서 자네가 붙잡히고 문서를 압수당하게 된다 해도 그들이 그 내용을 해독할 수는 없어. 행여 자네를 고문하게 된다고 생각해보게. 자네는 제대로 된 현장요원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 즉시 발설해버리게 될 걸세. 그러니 당연히 자네는 내용을 몰라야 하네. 아, 그렇게 긴장할 것 없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난 어디까지나 원칙적인 얘기를 한 것뿐이니까. 그자들도 자네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할 거야.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 그 불여우의 감시요원을 직접 보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테니까. ”

 

 

베르닌은 멍했다. 그나마 마지막의 ‘불여우’ 얘기에 정신이 좀 들었다.

 

 

“ 저, 국장님. 이번 임무가 야스민과 관련된 일인가요? ”

 

“ 그 불여우와도 관련은 있지. 타겟은 그놈이 아니지만. 더 알 것 없네. 내가 그랬잖나, 자네가 모르는 편이 모두가 안전하다고. 자네는 지금 공항으로 가게. 두 시간 후 출발하는 모스크바 행 비행기를 타는 거야. 여기 자네가 쓸 여권이 있네. 자네는 학생으로 위장하는 거야. 도착하면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기숙사 3동으로 가게. 글리셰프가 이미 모든 것을 다 처리해 두었네. 수위에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수학과 신입생 표트르 트뵤르도피로고프라고 말하면 자네를 기숙사 방으로 인도해 줄 걸세. 오늘 밤은 거기서 자도록 하게. 내일 아침 9시에 학교를 나와서 정문에서 제일 가까운 빵집으로 가는 거야. 흑빵 한 덩어리와 버찌잼 파이 한 개를 사서 종이 봉지에 넣어달라고 하게. 아침에는 줄을 서야 하니 빵을 사서 나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리고 이제부터가 중요한 부분이야. 흑빵을 반으로 가르되 끝까지 가르지는 말고 그 사이에 이 봉투를 집어넣은 후 다시 빵을 하나로 합쳐놓고 봉지에 집어넣게. 빵집에서 두 블록을 내려가면 공원이 나오지. 10시에 분수대 앞 벤치로 가서 앉게. 레닌동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벤치여야 해. 옆에 봉지를 내려놓고 앉아서 비둘기에게 빵 귀퉁이를 떼어서 던져주게. 모이를 주는 것처럼. 그러고 있으면 중년 여자 하나가 유모차를 밀고 산책하러 와서 자네 곁에 앉을 거야. 여자도 자네와 같은 빵 봉지를 가지고 있을 걸세. 이때 암호를 확인해야 하네. 여자가 먼저 ‘회색 비둘기는 많은데 흰 비둘기는 요즘 찾아보기 힘들군요’ 라고 말할 거야. 그럼 자네는 ‘조금 전까지 한 마리가 있었는데 날아갔어요’라고 대답하게. 친절하게 얘기할 필요는 없어. 얼굴을 볼 필요도 없고. 귀찮은 듯이 대꾸하는 거야. 여자가 먼저 일어날 걸세. 그때 여자가 빵 봉지를 바꿔쳐서 가져갈 거야. 

자네는 여자가 떠난 후 곧장 일어나지 말고 3분 정도 더 앉아 있다가 빵 봉지를 들고 일어나게. 그러면 임무 완수일세. 하지만 곧장 공항으로 가면 안 돼. 오히려 의심을 받을 수 있으니. 모스크바 지리는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테니 학교 쪽이든 아르바트든 학생들이 잘 가는 동네에 가서 놀게. 돌아오는 비행기는 4시에 뜰 거야. 그러니 시간 맞춰서 공항으로 가게나.

일단 모스크바에 도착하면 여기 돌아올 때까지 절대 여기로 전화를 하지 말게. 모스크바에서도 지인을 만나거나 연락을 해서는 안 돼. 돌아오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게. 내게 전화할 필요는 없어. 다음날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 처박혀 있게. 2박 3일간 스네고로드 출장으로 되어 있으니까. 금요일에 출근하면 곧장 여기 5호실로 내려오게. 보고는 그 때 하는 거야. 자네가 임무를 완수하면 그 즉시 나는 모스크바에서 그 소식을 받게 될 테니 금요일에 자네 얘기를 들어도 늦지는 않아.

만의 하나 모스크바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그럴 리가 없겠지만 공원 접선이 실패한다면 내 자리가 아닌 당직실 번호로 전화를 하게. 접선에 실패했을 때는 연결음이 두 번 울리면 끊고 다시 걸게. 이것을 세 번 반복하면 되네. 통화는 하지 않는 거야. 접선은 성공했지만 미행이 붙은 것 같다면 상대가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4월인데 아직 춥네요’라고 말하게. 그러면 모스크바 쪽에 있는 내 심복이 자네를 도우러 갈 걸세. 자, 전부 이해했나? “

 

 

베르닌은 심호흡을 했다. 수첩에 메모라도 하고 싶었지만 스페호프가 기밀사항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암호도 헷갈렸고 자기 가명도 헷갈렸다. 결국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빵집에서 흑빵을 사서 그 안에 봉투를 집어넣고 봉한 후 빵 봉지를 바꿔치게 하는 것이 전부였으니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뭔가 계속 찜찜했다.

 

 

“ 저... 그런데 권총은 왜 필요한가요? 말씀대로라면 그냥 빵 봉지만 들고 공원에 가서 앉아 있으면 되는 일인데. ”

 

“ 다른 때 같으면 아무런 위험성이 없겠지만 아무래도 호랑이가 연루된 일은 매사에 조심하는 게 좋지. 권총을 쓸 일은 물론 없을 거야. 하지만 만일을 위해 가져가게. 그렇다고 함부로 총질을 해서는 안 돼. 문서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을 때만 쓰게. 그리고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절대 총을 쏴서는 안 돼. ”

 

“ 호랑이요? 동물원과 관계된 일인가요? ”

 

“ 자네 정말... 많이 나아졌다 생각했는데 그 고지식한 기질은 여전하군. 이번 임무는 고위직과 연관되어 있어. 실세이지만 연방과 정부에 큰 해악을 끼치고 있는 자야. 그자가 알게 될 일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만의 하나를 대비해 조심하라는 거야. 행여 임무 수행에 실패하거나 그자의 부하들에게 붙잡힌다 해도 절대 이번 일에 대해 입 하나 뻥긋해서는 안 되네! 자네는 그저 모스크바에 공부하러 온 블라디보스토크의 표트르 트뵤르도피로고프인 거야. 혹시라도 그자들이 자네의 정체를 이미 알아챘다면 모스크바에 바람 쐬러 놀러왔다고 하게. 다른 말은 일절 해서는 안 돼. 이건 공무야. 보안요원으로서의 신성한 임무라고. 알아들었나? ”

 

“ 어... 예... 그런데 그자들에게 붙잡히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

 

“ 그럴 일은 전혀 없네! 그리고 붙잡힌다 해도 내가 꺼내줄 거야! 걱정 말고 다녀오게! 여기 비행기 표와 여권, 여비, 현장 업무추진비가 있네. 두 시간 후 비행기이니 어서 공항으로 가게. 글리셰프가 태워다 줄 걸세. 그럼 성공을 빌겠네. 잘 다녀오게. ”

 

 

 

 

*   *   *

 

 

 

 

베르닌은 기밀문서와 함께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했다. 권총 때문에 검색대에서 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스페호프가 손을 미리 써두었는지 가브릴로프 공항에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교관 출구를 이용했고 검색도 받지 않았다. 기밀문서는 편지봉투 안에 들어 있었는데 두께가 얄팍한 걸 보니 분량이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사실 봉투보다도 총 때문에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그에게 있어 총이란 군대에 있을 때와 요원 연수를 받을 때나 만져본 것일 뿐 이렇게 민간인들 사이에서 소지하고 다니는 물건이 아니었다. 문서 봉투는 안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지만 대체 이놈의 권총은 어디에 숨겨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요원 연수를 받을 때도 그런 실용적인 지식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현장요원들은 배웠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행정직이 아닌가!

 

 

처음에 베르닌은 권총을 벨트와 허리춤 사이에 꽂고 재킷으로 가려 보았다. 그랬더니 벨트가 축 처지면서 하마터면 허리 밴드가 찢어질 뻔 했다. 그래서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또 재킷으로 가려 보았다. 주머니가 불룩 튀어나와서 누가 봐도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게다가 걸을 때마다 권총이 걸리적거렸고 심지어 중요부위를 툭툭 건드리기까지 했다! 너무 불편해서 결국 그는 화장실에 가서 총을 꺼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슨 띠라도 하나 구해서 안쪽에 차고 있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총을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재킷 단추를 꼭 잠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기밀문서와 총이 한 주머니에 들어 있어 뭔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그래서 다시 화장실로 가서 문서 봉투를 꺼냈고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후 옷핀으로 주머니를 봉해버렸다. 그나마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재킷을 입고 와서 다행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그는 내내 불안에 떨었다. 스페호프는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임무를 맡긴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책상물림에 굼뜨기로 소문난 인물인데 현장요원들이나 맡는 임무를, 그것도 기밀문서를 전하는 일을 맡기다니! 베르닌은 그 새해에 왕재수를 데리고 얼어붙은 강을 건넜던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국장에게 오해를 산 덕분에 왕재수를 비호한다는 의심에서는 벗어난 것까지는 좋은데 팔자에 없는 현장요원 노릇을 하게 되다니! 아무래도 고위직이 연관되어 있는 임무 같은데 내용을 모르니 더욱 답답했다. 실수를 해서 빵 봉지를 제대로 바꿔치지 못하면 어쩌지 하고 생각하니 걱정이 돼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다시 발따예프 일당을 수발해 모스크바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공항에 내려서 버스를 타러 가는 와중에도 경찰들이 눈에 띄자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는 어엿한 KGB였고 신분증도 있었으니 경찰들에게 검문을 받아도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맡은 임무가 있어 그런지 굉장히 긴장이 됐다. 모스크바 시내로 진입해 학교에 도착하자 이미 캄캄한 밤중이 다 되어 있었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야 그의 모교였고 학창 시절에는 기숙사에서 살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익숙한 곳이었지만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간신히 기숙사 3동으로 갔더니 늦은 시각이라 정문이 닫혀 있었다. 스페호프가 이런 얘기는 해준 적이 없었다. 원래 이 시간에는 수위에게 학생증을 제시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무거운 문을 똑똑 노크했더니 잿빛 머리의 뚱뚱한 수위가 나왔다.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통금 시간이 지나서 들여보내 줄 수 없다고 했다.

 

 

어, 저... 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막 도착해서요... 비행기 시간 때문에... ”

 

“ 블라디보스토크? 흠, 거기서 오기로 한 녀석이 하나 있긴 하지. 자네 이름이 뭔가? ”

 

“ 저... 표트르 트뵤르도피로고프요. 수, 수학과예요. ”

 

“ 여권 좀 내놔봐. ”

 

 

베르닌은 떨리는 손으로 위조 여권을 내밀었다. 그의 사진이 붙어 있었고 가명과 여권 번호도 기재되어 있었지만 긴장이 되어 다리가 후들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위는 대충 여권을 훑어보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 이렇게 늦게 올 줄은 몰랐네. 따라와. ”

 

 

수위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서도 베르닌의 머릿속에는 별의별 생각이 오고갔다. 수위가 자기를 복도에서 두들겨 패는 것부터 시작해서 방문을 열면 악당들이 매복해 있다가 그에게 총을 쏘는 상상까지 들었다. 심장이 너무 쿵쿵거려서 수위가 들을까봐 겁이 났다. 기숙사 엘리베이터라 원체 좁아서 수위와 거의 딱 붙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위는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보였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수위가 앞장서더니 문 하나를 열고는 열쇠를 건네주었다.

 

 

“ 창문은 고장 나서 안 열릴 거야. 내일 학생처에 등록부터 하고 시설 관리 사감에게 고쳐 달라고 하게. ”

 

 

수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베르닌은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예전에 지냈던 기숙사와 비슷한 구조였다. 문을 열자 좁은 직사각형의 방이 하나 덜렁 나타났다.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벗고 싶었지만 공동 부엌과 화장실, 욕실은 복도 끝에 있었다. 잠시라도 방을 비운 사이에 누가 들어와 수색을 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에 일단 방문을 다시 잠근 후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후 공동욕실로 갔다. 너무나도 샤워를 하고 싶었지만 긴장이 풀리지 않았고 혹시라도 습격을 당할까 두려워서 그냥 손만 씻고 세수와 양치질만 했다. 발은 물수건으로 닦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으로 돌아온 베르닌은 문부터 꼭꼭 걸어 잠갔다. 불안한 나머지 창가에 붙어 있는 책상을 문 앞으로 옮겨놓았다. 창문은 수위의 말대로 고장이 나서 열리지 않았다. 공기가 답답했지만 그래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깥에 창살이 쳐져 있는 건 더욱 다행이었다. 커튼을 친 후 한숨을 쉬며 딱딱하고 좁은 침대에 주저앉았다. 너무 털썩 주저앉은 나머지 하마터면 침대 합판이 내려앉을 뻔 했다. 분명 왕재수가 옆에 있었다면 ‘그러니까 살 좀 빼라고 했잖아!’ 하고 구박했을 게 뻔했다. 베르닌은 너무 긴장이 된 나머지 왕재수의 잔소리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 그러고 보니 그 자식 어머니 걱정으로 많이 괴로워하고 있을 텐데. 내가 도청 안 되는 회선 따주기로 해놓고 여기 와 있으니... 오늘 같은 날은 혼자 있지 말고 바이올린 아저씨한테라도 가서 자면 좋으련만. ’

 

 

눈물이 글썽글썽하던 왕재수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일단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베개 아래에 쑤셔 넣고 재킷을 벗었다. 날아갈 것처럼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재킷과 셔츠를 벗어 의자에 걸쳐놓고 바지 주머니에서 옷핀을 빼냈다. 반으로 접힌 봉투를 꺼냈다. 잠시 베르닌은 봉투를 뜯어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곧 ‘내가 미쳤지,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국장 말이 맞아, 알면 나한테만 더 불리해져’ 라는 생각에 봉투를 도로 접어서 바지 주머니에 넣고 옷핀으로 봉했다. 벗은 바지를 의자에 걸쳐놓으려니 또 괜히 불안해졌다. 결국 바지도 착착 개켜서 베개 아래로 쑤셔 넣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이 다 되어 있었다. 불을 끄려니 슬며시 무서웠다. 불을 켜고 잘까 했지만 또 곰곰 생각해보니 바깥에서 불 켜진 창을 보고 의심을 하며 침입해올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불을 끄고는 좁은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학생 때도 침대가 좁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지금 다시 눕자 대체 이런 열악한 침대에서 어떻게 몇 년 동안 잤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스프링은 물론 없고 합판 위에 손바닥 두께의 매트리스를 깔아놓고 시트를 덮어씌운 수준이니 등이 배기고 불편한 게 당연하긴 했다. 게다가 베개 아래에 바지와 권총을 모두 쑤셔 넣었더니 뒤통수도 엄청나게 배겼다. 잠자리도 불편한데다 다음날의 임무가 너무 걱정이 되어서 베르닌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베르닌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고 그나마도 악몽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눈을 붙이지도 못한 채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7시였다. 머리도 지끈지끈 아프고 배도 고팠다.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권총을 다시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복도로 나갔다. 그는 대충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머리에 물을 묻힌 후 나왔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재킷 안주머니의 권총과 바지 주머니의 봉투 때문에 꿈도 꿀 수 없었다.

 

부엌 쪽으로 돌아 나오니 이른 시간이었지만 가스렌지에서는 이미 찻물이 끓고 있었고 남학생 몇 명이 싱크대 앞에 선 채 햄과 오이를 얹은 부체르브로드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엄청 맛있어 보였다. 베르닌을 발견한 학생 하나가 붙임성 좋게 인사를 했다.

 

 

“ 안녕, 처음 보네. 대학원생인가? ”

 

“ 어, 어... 어제 도착해서... ”

 

“ 너 모스크바 출신 아니구나? 난 일류샤라고 해. ”

 

“ 어... 난 표, 표트르. ”

 

“ 이거 하나 먹어볼래? 식당 것보다 맛있어. 빵이 안 말랐거든. ”

 

“ 고마워. ”

 

 

베르닌은 샌드위치를 하나 받아먹었다. 굉장히 맛있었다. 곱슬머리에 살짝 들려올라간 코, 발그스름한 뺨 등 척 봐도 스무 살도 안 돼 보이는 일류샤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시종일관 빙긋빙긋 웃었고 친구들과도 농담을 주고받으며 재미있어 했다.

 

 

“ 우린 법학과야. 너는? ”

 

“ 나, 나는 수학과... ”

 

“ 어휴, 엄청 어렵겠다. 무슨 공식에 문제에 그런 것만 풀어야 되는 거 아니야? 샌드위치 하나 더 먹어. ”

 

어, 고, 고마워... 나는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 만나서 반가웠어, 일류샤. ”

 

“ 그래, 잘 가. 앞으로 종종 보자. 수학 골치 아프면 법대로 옮겨. 법학이 지루하긴 해도 보람 있거든. ”

 

“ 응, 분명 그럴 거야. ”

 

 

베르닌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기숙사를 나왔다. 뜻하지 않게 법학과 후배를 만나서 샌드위치를 얻어먹었더니 무겁던 마음이 약간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일류샤야 그에게는 까마득한 후배일 테지만...

 

 

‘ 나도 공부할 땐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법학이 지루하긴 해도 보람 있는 공부라고... 그래서 KGB도 들어온 건데... ’

 

 

끝없는 서무 업무와 스페호프가 생각나고 독사과와 시계탑이 떠오르자 베르닌은 마음이 무거웠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 같았다. 후배인 일류샤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빌었다.

 

 

그는 찬바람을 쐬면서 교정을 좀 거닐었다. 그래도 부체르브로드를 두 쪽 먹었더니 정신이 좀 들었다. 어느덧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학교를 나왔다. 스페호프가 얘기한 빵집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학창 시절 종종 이용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곧 그의 차례가 되었다. 먼저 주문을 했다.

 

 

“ 흑빵 한 덩어리, 버찌잼 파이 하나 주세요. ”

 

“ 흑빵 어떤 종류요? 모스콥스키, 보야르스키, 곡물 박힌 거, 밀가루랑 섞인 거, 어떤 거요? ”

 

 

베르닌은 순간 당황했다.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머릿속으로 계속 흑빵 한 덩어리와 버찌잼 파이만 외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원이 그를 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 모, 모스콥스키요. ”

 

 

점원이 전표를 찢어서 건네주고 등 뒤의 진열대에서 모스콥스키 흑빵과 파이를 꺼내는 동안 베르닌은 옆 칸으로 가서 전표를 내밀고 돈을 냈다. 영수증을 받아서 보여주고 빵과 파이를 받았다. 그러다 뭔가 이상해서 도로 계산대로 갔다.

 

 

“ 어... 저... 종이 봉지를 주셔야 하는데... ”

 

그럼 처음부터 얘길 했어야죠! 종이 봉지는 10코페이카를 더 내야 돼요!

 

“ 예... 여기 10코페이카 드릴게요. ”

 

 

그래서 베르닌은 다시 전표를 끊고 10코페이카를 내고 영수증을 보여주고 갈색 종이 봉지를 받았다. 빵 봉지를 껴안고 빵집을 나왔는데 대체 어디로 가야 사람 눈에 띄지 않고 흑빵을 갈라 봉투를 숨길지 알 수가 없었다. 스페호프도 그런 얘기는 해준 적이 없었다.

 

 

‘ 아아, 뭐가 이렇게 복잡해... 현장요원들도 다 이런 식으로 하나? 설마 해외 나가는 스파이들도 이렇게 어설픈 방법을 쓰는 건 아니겠지? 꼭 흑빵 속에다 봉투를 숨겨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

 

 

결국 그는 도로 학교로 들어갔다. 정문에서 제일 가까운 화장실로 가서 문을 걸어 잠근 후 흑빵을 꺼내서 반으로 쪼갰다. 힘 조절을 못해서 하마터면 끝까지 다 갈라질 뻔 했다. 바지 주머니를 봉하고 있던 옷핀을 뽑은 후 봉투를 꺼냈다. 바지와 베개에 눌린 데다 반으로 접혀 있어서 봉투는 쭈글쭈글하게 주름이 가 있었다. 심지어 봉투 겉면에는 얼룩도 있었다. 아무래도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던 초콜릿 포장지 때문인 것 같았다. 중요한 기밀문서를 이런 식으로 보냈다고 모스크바 쪽 수신자가 스페호프에게 화를 내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러면 국장은 자신을 들들 볶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손수건에 침을 묻혀서 봉투의 얼룩을 문질러 보았지만 자국은 더 지저분하게 번질 뿐이었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봉투를 빵 사이에 쑤셔 넣었다. 그런데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빵 부스러기가 포슬포슬 일어났고 봉투를 넣었더니 빵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낑낑거리다가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아, 그렇구나. 빵을 위에서부터 반으로 가르면 안 되는 거였어... 칼 같은 걸로 가운데에만 금을 그어서 봉투를 쑤셔 넣었어야 하는데. 어휴, 국장은 왜 이런 얘기는 안 해준 거야... 난 현장요원이 아니잖아. 내가 빵에 봉투를 어떻게 넣는지 알 게 뭐야. ’

 

 

결국 베르닌은 봉투를 한 번 더 접은 후 흑빵 안쪽으로 깊숙하게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빵을 양쪽에서 밀어붙여 꼭 눌렀다. 그러자 빵이 붙었다. 너무 눌러 대서 원래 부피의 절반으로 줄어들어버렸지만 어쨌든 옆으로 벌어지지는 않았다. 급하게 봉지에 쑤셔 넣고 흑빵 위에 버찌잼 파이를 얹었다. 허둥거리다 하마터면 봉지 째 바닥에 떨어뜨릴 뻔 했다. 그나마 변기 뚜껑을 닫아놔서 다행이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베르닌은 학교를 나왔다. 빵과 씨름하느라 시간을 보냈더니 이미 10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급하게 걸어서 블록 두 개를 지나 공원에 갔다. 그런데 레닌 동상 정면의 벤치에 하필 할머니 하나가 앉아서 비둘기에게 빵을 주고 있었다! 다른 벤치는 전부 비어 있었다. 베르닌은 난감했다. 할머니가 자리를 비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지, 아니면 옆의 다른 벤치에 앉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어휴, 왜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법은 안 가르쳐준 거야... 난 행정직인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베르닌 쪽을 보더니 손짓을 하며 ‘이봐, 젊은이’ 하고 그를 불렀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어... 왜 그러시죠? ”

 

“ 불 좀 있나? ”

 

“ 저... 죄송합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요... ”

 

“ 에이, 요즘 젊은이들은 참 재미없게 산다니까. 노인네 담뱃불 하나 빌리기도 쉽지 않으니... ”

 

 

할머니는 툴툴대며 일어나더니 엉덩이를 툭툭 털고 느릿느릿 공원을 떠났다. 베르닌은 주위를 둘러본 후 벤치에 얼른 앉았다. 옆자리에 접선자가 앉아야 하니 자리를 비워놔야 할 것 같아서 귀퉁이에 앉았다가 또 아까 그 할머니 같은 사람이 올까봐 걱정이 되어서 다시 옆으로 좀 더 가서 앉았다. 빵 봉지를 옆에 내려놓자 가슴이 쿵쿵쿵 뛰었다. 멍해진 베르닌은 심호흡을 했고 자기도 모르게 자꾸 주변을 둘러보았다.

 

 

‘ 안 돼... 이렇게 자꾸 옆을 두리번거리면 더 수상해 보일 거야. 태연하게 있어야 돼. 난 그냥 산책하다가 잠깐 벤치에 앉아서 쉬는 거야. 아참, 그렇지. 비둘기한테 빵을 주라고 했지... ’

 

 

베르닌은 급하게 빵 봉지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흑빵 위에 버찌잼 파이를 얹어놓았다는 것을 깜박한 나머지 그만 손에 잼이 찐득찐득하게 묻고 말았다. 손수건에 침을 묻혀서 대충 닦았지만 아주 찜찜했다. 흑빵 귀퉁이를 떼어냈더니 빵이 다시 옆으로 벌어지려고 해서 다시 손으로 꼭꼭 눌러야 했다.

 

 

빵조각을 떼어내서 던져주자 비둘기들이 모여 들었다. 빵을 쪼아 먹는 새들을 보고 있으니 왕재수 생각이 났다.

 

 

‘ 그러고 보니 오리한테 먹이 주는 건 봤는데 비둘기한테 주는 건 못 봤네. 비둘기는 안 좋아하나? 아침 출근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네. 분명히 밥도 안 먹었겠지. 오늘도 집에는 밤에나 도착하니까 저녁 못 챙겨주는데. 그 녀석 요즘 신작 때문에 계속 무리하던데 밥이라도 잘 먹어야 하는데 로만이나 류다한테 얘기라도 해놓고 올걸... 어제도 내가 데리러 올 줄 알고 기다렸을 텐데. 또 극장에서 잔 거 아니야? 전화도 못 하고... ’

 

 

그는 왕재수 생각을 하느라 잠시 불안하던 것도 잊었다. 긴장이 풀려서 비둘기들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달칵거리는 바퀴 소리가 났다. 순간 가슴을 뻣뻣하게 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곁눈질을 했다. 스카프로 머리를 감싼 중년 여인 하나가 유모차를 밀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그의 곁에 앉으며 빵 봉지를 내려놓았다. 베르닌은 차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유모차 쪽을 보았다. 조그만 아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워 있었는데 베르닌은 그렇게 못생기고 심술궂게 생긴 아기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여자가 담배를 꺼냈다. 아기 얼굴에 연기를 뿜어도 되나 하고 베르닌이 의문하고 있는데 여자가 무뚝뚝하게 말을 걸었다.

 

 

“ 불 있어요? ”

 

 

베르닌은 매우 당황했다. 분명히 회색 비둘기 흰 비둘기 암호를 얘기해야 하는데 어째서 불 있느냐고 묻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어... 아까 그 할머니도 불 있느냐고 했는데... 설마 암호가 바뀐 건가? 아니면 이 여자가 접선자가 아닌가? 그냥 우연히 비슷한 스타일인 건가? ’

 

 

여자가 짜증스럽게 다시 물었다.

 

 

“ 불 있느냐고요. ”

 

“ 저, 아니요. 전 담배 안 피워서요. 죄송해요. ”

 

“ 흠. ”

 

 

여자는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베르닌이 황당해 하고 있는데 여자가 연기를 내뿜더니 비둘기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회색 비둘기는 많은데 흰 비둘기는 요즘 찾아보기 힘들군요.

 

아, 어... 조금 전까지 한 마리 있었는데 날아갔어요.

 

 

베르닌은 심장이 뛰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입 안이 바짝 말랐고 머릿속에서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유모차의 아기를 어르고 달래며 노래를 불러 주었다. 베르닌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손에 쥐고 있던 빵을 더욱 잘게 부숴서 비둘기들에게 던져 주었다. 잠시 후 여자가 반쯤 탄 담배를 벤치 귀퉁이에 짓이겨 끄더니 꽁초를 휙 던져버리고는 일어섰다. 빵 봉지를 옆구리에 끼더니 베르닌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유모차를 밀면서 가버렸다.

 

 

베르닌은 꼼짝도 못하고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여자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 더듬더듬 손을 뻗어 빵 봉지를 집었다. 떨리는 손으로 봉지 안에 손을 넣었다. 버찌잼 파이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흑빵을 만져 보았다. 반으로 갈라져 있지 않았다. 온전한 덩어리였다. 자기도 모르게 ‘휴우’ 하고 한숨이 새어나왔다.

 

 

잠시 후 베르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다 끝났다는 생각에 날아갈 것 같았다. 마치고 나니 별 것도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빵 봉지를 집어 들고 빠른 걸음으로 공원을 빠져나갔다.

 

 

 

 

*   *   *

 

 

 

 

베르닌은 아르바트 거리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주변에 있으면 어쩐지 의심을 살 것 같아서였다. 미행을 당할지도 모르니 직행 버스 대신 중간에 내려서 갈아타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서를 전달하고 나니 불안감은 거의 다 가셨고 아무리 생각해도 미행이 따라붙은 것 같지도 않았다. 하긴 스페호프의 말이 옳았다. 누가 봐도 평범한 타입에 책상물림인 그를 비밀문서를 전달하는 KGB 요원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돌이켜보면 빵 봉지를 바꿔친 접선자도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여인이었다. 누가 봐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봉투를 직접 전달한 것도 아니고 빵 안에 숨겼으니 들킬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베르닌은 가브릴로프에 돌아갈 때까지는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스를 갈아타려고 내렸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 아르바트는 너무 번화하니까 다른 데를 가야겠다. 그래,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가야지. 거기는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니까. 오늘은 평일이니까 오전에 사람도 별로 없을 거고. 역에서 미술관 가는 길도 한적하고. 거기 있다가 공항으로 가면 되겠어. ’

 

 

그는 지하철역으로 갔다.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도 갈아타야 했다. 미로처럼 뻗은 넓고 어두운 지하철역으로 내려가자 마음이 한결 놓였다. 한 정거장을 간 후 환승을 했다. 승객은 별로 없었다. 싸늘한 지하철 좌석에 앉자 배가 고파왔다. 봉지에서 버찌잼 파이를 꺼내서 먹었다. 꿀맛이었다. 파이를 다 해치운 후에야 이 봉지를 계속 들고 다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두고 내릴까 하다가 친절한 누군가가 빵 놓고 내렸다며 따라올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봉지를 들고 내렸다. 누가 볼까 심장을 졸이며 휴지통에 빵 봉지를 던져 넣고는 급하게 몸을 돌려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갔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역에서 나온 베르닌은 어쩐지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으로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을 향해 걸었다. 4월 초의 모스크바는 따뜻했고 햇살도 밝았다. 시계를 보니 11시가 좀 넘어 있었다. 꼭 옛날에 학교 다니던 때 같았다. 모처럼 휴강이 되었을 때 동기들과 함께 놀러 나갔을 때가 생각났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때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갔던 기억은 없었다. 맨 처음 모스크바에 왔을 때 그래도 유명한 곳이니 가봐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딱 한 번 갔을 뿐이었다.

 

 

미술관은 한적했다. 관람객은 거의 없었다. 도슨트를 따라다니며 설명을 듣는 중학생들이 한 무리 있었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학생들을 피해서 다른 전시실로 갔다. 그는 원래 미술에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그림을 봐도 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전날부터 밀서 전달 임무 때문에 너무 불안에 떨었던 터라 텅 빈 전시실에서 알록달록한 색깔이 칠해진 그림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멍하게 이 전시실 저 전시실을 돌아다니다가 그는 거대한 그림 앞에 멈춰섰다. 짙은 청색과 흰색과 검은색이 섞여 있는 여자의 초상화였다. 깃털 날개가 달려 있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검은 머리의 예쁜 여자였는데 베르닌도 책에서 본 기억이 났다. 유명한 그림 같았지만 제목은 생각나지 않았다. 어쩐지 그림에 눈이 계속 갔다.

 

 

‘ 어, 근데 이 그림 누구 좀 닮은 거 같아. 왜 이렇게 낯익지. 내 주위에 저렇게 생긴 여자는 없는데. ’

 

 

베르닌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목과 화가 이름을 보려고 앞으로 다가가려는데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브루벨, 백조 공주. 학창 시절에 공부를 제대로 안 했나보군. ”

 

 

베르닌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말쑥한 수트 차림의 중년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거의 코즐로프만큼 키가 컸는데 체격은 훨씬 더 컸다. 어딘가 매를 연상시키는 외모의 풍채 좋은 남자였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마 그의 두 눈 색깔이 서로 달라서 그런 것 같았다. 오른쪽 눈은 푸른색이었고 왼쪽 눈은 갈색이었다. 베르닌은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소름이 오싹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모른 척하고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뭔가에 사로잡힌 듯 눈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남자가 목을 울려 웃었다.

 

 

“ 아니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닮긴 닮았지. 그것도 많이. 뭐 그 자식도 알 거야. 한두 번 들은 얘기도 아니고. ”

 

“ 저...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군요.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만. ”

 

 

남자가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 없는 미소였다. 그때 베르닌은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저 그림, 그 자식 닮았어... 많이...

 

 

그리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나 이 사람 알아... 텔레비전에서 본 적 있어... 분명히 본 적 있어.

 

 

온몸에서 피가 빠져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베르닌은 몸을 돌렸다. 거의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전시실을 빠져나왔다. 남자는 쫓아오지 않았다. 잰걸음으로 미술관을 나온 후 주변을 살펴보았다.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노파 한두 명 뿐이었다. 뒷골목 쪽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뛰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 당직실... 당직실로 전화하라고 했어. 암호가 있었는데... 신호 두 번 가면 끊으라고 했나? 아니야, 그건 접선에 실패했을 때야. 미행 붙었을 때 하는 말이 있었어. 뭔가 추운 거랑 연관된 거였는데... ’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일단 지하철역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타고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러다가 지하로 내려가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와 전차를 번갈아가며 타다가 공항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막 버스 정류장 쪽으로 가려고 골목을 돌았을 때 누가 그의 어깨를 탁 쳤다.

 

 

“ 어, 표트르! 여기 웬일이야? 수업 끝났어? ”

 

 

베르닌은 깜짝 놀라 멈춰 섰다. 곱슬머리의 앳된 청년이 그를 보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침에 기숙사 부엌에서 샌드위치를 건네준 법학과 후배 일류샤였다.

 

 

“ 어, 어... ”

 

“ 어디 가? 혹시 트레치야코프? 나 지금 거기 가는 길인데. 같이 갈래? ”

 

“ 어, 아니야... 난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다음에 봐. ”

 

“ 에이, 아쉽네. 그럼 잘 가. ”

 

 

베르닌은 일류샤가 골목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는 다시 뛰려다가 건너편 골목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했다. 전화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스페호프가 미행이 붙으면 모스크바의 심복을 보내주겠다고 했었다. 암호가 아직도 생각이 잘 나지 않았지만 일단 부스로 갔다.

 

 

막 주머니에서 전화 토큰을 꺼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거 시내 전화야. 가브릴로프로는 전화 안 될 걸. 너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

 

 

베르닌은 불에 덴 듯 부르르 떨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일류샤가 서 있었다.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고 했을 때 일류샤가 다가왔다. 베르닌은 일류샤가 한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아무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일류샤가 그의 관자놀이를 내리쳤다. 베르닌은 뒷걸음질치려고 했지만 등에 전화 부스 벽이 와 닿았다. ‘잘됐네, 쓰러지지는 않겠어’ 라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란 생각도 들었다. 아마 ‘샌드위치 같은 거 받아먹으면 안 되는 거였어!’라고 자책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곧 눈앞이 캄캄해졌고 베르닌은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FIN

- 2015. 6. 24 ~ 6. 30 -

 

 

...

 

 

 

과연 베르닌은 무사할 것인가!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28편에서...

 

..

 

 

이번 편은 내용상 스파이 첩보 소설과 하드보일드 장르 소설의 문체를 좀 섞어서 썼다. 점점 서무 시리즈는 내 맘대로 이 장르 저 장르 잡탕 놀이터로 변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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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호프가 베르닌에게 부여한 가명인 표트르 트뵤르도피로고프에 대해.

 

'트뵤르드이'는 '단단한', 딱딱한', '굳은'이란 뜻의 형용사이고 '피로그'는 '파이'란 뜻이다. 그래서 트뵤르도피로고프는 '딱딱하게 굳은 파이'란 뜻이 내재되어 있다. 내가 만들어낸 성이지만 분명 어딘가에 이런 성도 있긴 있을 거다. 실제로 트뵤르도흘레브니코프(딱딱한 빵)란 성이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일류샤는 러시아 남자 이름인 '일리야'의 애칭이다. 러시아 이름들은 별로 많지 않아서 동명이인이 참 많다. 대신 성이 아주 다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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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수가 크레믈린 아저씨의 명령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은 다분히 본편 색채가 짙은데, 본편 우주에서 미샤는 후원자이자 지배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의 지시에 따라 국내외 주요인사와 그런 일을 수행한 적이 좀 있다. 왕재수가 어머니에 대해 걱정하는 장면도 본편 우주의 미샤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가져왔다. 본편 우주에서 미샤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자신의 일로 걱정을 끼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성격으로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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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기숙사에 대한 얘기는 실제와는 다를 수 있다. 나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기숙사에서는 지내본 적이 없고 페테르부르그 국립대학교 기숙사에서 지냈기 때문에 여기서의 묘사는 그곳 기숙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공동부엌과 욕실을 쓰는 기숙사도 있고 각 방별로 욕실과 부엌이 딸려 있는 기숙사도 있었다.

 

베르닌이 침대에 주저앉다가 합판이 내려앉을 뻔 한건 내 실제 경험에서 가져왔다. 오랜 옛날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기숙사에서 지낼때 어느 춥고 힘든날 녹초가 되어 돌아와 침대에 주저앉았는데 침대가 반토막으로 내려앉았다! (내가 엄청 무거워서가 아님!! 워낙 침대가 좁고 열악해서 그런 것임...) 놀라서 침대를 해체해보니 아주 얇은 매트리스 아래 합판이 이어져 있었는데 그 합판이 반토막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청테이프로 합판을 붙인 후 다시 매트리스를 깔았고 이후 몇달 동안 그 위에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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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밀리 마카로프는 러시아제 권총이다. 총기에 관심 많으신 분들이라면 잘 알듯. 28편에서 이 권총 사진도 한번 올려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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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치야코프 미술관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이다.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나 러시아 박물관만한 규모는 아니지만 유명한 그림들이 많다.

 

베르닌과 미지의 남자가 조우하게 된 청색과 흰색, 검은색의 아름다운 여인 초상화는 미하일 브루벨의 '백조공주' 이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전에 두어차례 포스팅한 적이 있고 about writing 폴더에 올렸던 본편 우주의 단편 Jewels에서도 화자 라라가 미샤를 놓고 백조공주랑 닮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 링크들은 아래..

http://tveye.tistory.com/3394  : 단편 Jewels 04편 중에서

http://tveye.tistory.com/1819 : 브루벨의 악마와 백조공주 이미지

 

그래도 아쉬우니 백조공주 이미지를 여기 다시...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이미지 파일은 크기도 작고 색채도 어두운데, 실제 그림은 정말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본편의 미샤를 구상할 때 이 사람이 브루벨 그림의 악마와 백조공주를 연상시키는 타입이라고 설정했는데, 실질적으로는 백조공주를 더 닮았을 거라고 내밀하게 생각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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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 이야기는 28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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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주시면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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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서무의 슬픔 시리즈를 왜 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 폴더 맨 앞에 있는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http://tveye.tistory.com/3427)에도 나와 있고 이따금 에피소드들을 올리면서도 여러번 얘기한 적이 있다. 즉 서무 시리즈는 내가 원래 쓰고 있는 글에서 파생된 일종의 평행우주, 혹은 외전이다.

 

그런데 이 시리즈도 어느덧 30편에 가까워지다보니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고 마냥 웃기고 가볍게 쓰려고 했던 것이 자기 맘대로 증식해서 때로는 우울하기도 하고 때로는 진지하기도 한 이야기들이 툭툭 튀어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도 많아지고 이들도 서로 관계를 맺다보니 가끔은 얘들이 이러이러하면 어떨까 하는 제2의 외전 생각이 또 들고.. 이렇게 새끼를 치고 또 새끼를 치고...

 

8편을 마친 후 등장인물 몇 명의 20문답을 번외편으로 올린 적이 있는데 이번 번외편은 그걸로 따지면 두번째이다. 이번 것은 러시아 민담 패러디이다. 패러디이면서 오마주이기도 하다. 사실 민담은 작가가 드러나 있지 않은데다 아주 원형적인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 어느 문화에서도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이 발견되곤 한다.

 

내가 이번 편을 쓰면서 주로 패러디하거나 오마주를 바친 이야기들은 모두 러시아 민담이다. 제일 유명한 건 물론 아파나셰프 판본의 러시아 민담이고, 또 우리나라에 번역된 황금가지판 러시아 민담도 있고, 그외에도 구전되는 민담들도 많다. 사실 러시아 민담, 특히 이반왕자와 불새 이야기는 나에게 아주 중요한 얘기였고 미샤를 주인공으로 하는 본편에도 여러번 변주되어 등장한다. (실지로 본편 우주에서 미샤는 이반 왕자와 불새를 안무하여 꽤나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예전에 다른 글들에서도 불새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여러 편 변주해서 쓰곤 했다.

 

이번 민담에도 이반왕자와 불새 모티프가 조금 들어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민담들을 고루 섞었다. 아마 읽어보시면 러시아 민담이나 다른 나라 민담들에서 접해 익숙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추소년 베르닌의 이야기!!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모두 서무 시리즈에 나오는 사람들이다. 아, 사람 아닌 배역도 있다. 곱사등이 흑염소 :) 제목을 보시면 알겠지만 이 제목과 '곱사등이 흑염소'란 배역 자체는 표트르 예르쇼프의 유명한 민담 동화인 '곱사등이 망아지'에서 따왔다.

 

블로그에서 불새나 이반 왕자와 불새, 곱사등이 망아지로 검색하면 이 주제에 대해 올린 각종 글이나 리뷰, 이미지 등이 나온다.

 

하여튼.. 나는 민담 애호가이다 보니 쓰는 게 재밌었는데 읽는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 그래도 재밌게 읽어주세요~

 

어쨌든 서무 시리즈에서 파생된 패러디라서 이 시리즈를 읽어야 등장인물들과 연결이 되어 이해가 잘 될 것 같다. 그리고 민담들을 패러디하고 변주하긴 했지만 그래도 서무 시리즈 얘기도 뒤섞여 있고 중간중간 내 식대로 바꾸거나 새로 만들어 넣은 부분들도 있다 :)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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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번외편 - 러시아 민담 패러디

 

 

 

 

서무의 슬픔

-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 -

 

 

 

 

 

 

 

 

옛날 아주 오랜 옛날 러시아 어느 시골 마을에 마음 착한 소년이 살았어요. 소년의 이름은 다닐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단추라고 부르곤 했어요. 단추는 매우 가난했지만 사랑하는 부모님과 세 명의 아름다운 누이인 알렉산드라, 렐랴, 리자가 있어 언제나 행복했어요.

 

 

하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어요. 욕심 많은 지주가 부하들을 보내서 밭의 농작물들을 모조리 쓸어가 버렸고 늙으신 부모님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어요. 돌아가시면서 부모님은 단추의 손을 꼭 잡고 부탁했어요.

 

 

“ 얘야, 다냐. 너는 우리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니 부디 누이들을 잘 부탁한다. 그리고 말하는 짐승을 만나면 절대로 해치지 말고 잘 대해주거라. ”

 

 

단추는 훌쩍훌쩍 울며 꼭 그러겠다고 다짐했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단추네 집 형편은 더욱 기울었어요. 아름다운 세 명의 누이 중 큰 누나인 알렉산드라가 남매들을 모아놓고 말했어요.

 

 

“ 밭일을 해봤자 또 지주가 와서 수탈을 해 갈 테니 농사는 그만두는 것이 좋겠어. 우리는 베를 짜고 수를 놓아서 시장에 갖다 팔고 다냐는 사냥을 해서 털가죽과 고기를 얻는 게 어떨까. ”

 

 

모두가 찬성했어요. 그래서 알렉산드라와 렐랴와 리자는 매일 베를 짜고 수를 놓았고 단추는 산속으로 사냥을 하러 다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단추는 사냥을 나갔다가 낭떠러지의 높은 바위 사이에서 풀을 뜯고 있는 커다란 곱사등이 흑염소를 한 마리 발견했어요. 염소는 많지만 흑염소는 드물었어요. 뿔도 아주 크고 멋있게 꼬부라진데다 새까만 털에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을 보니 잡을 수만 있다면 털가죽과 고기를 팔아서 당분간 배를 곯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단추는 화살을 쏘았지만 곱사등이 흑염소는 팔짝 뛰어오르더니 도망쳐버렸어요.

 

 

돌아온 단추가 그 얘기를 하자 막내인 리자가 툴툴댔어요.

 

 

“ 아이, 오빠는 화살 좀 잘 쏘지... ”

 

 

둘째 누이인 렐랴도 툴툴댔어요.

 

 

“ 오빠는 맨날 다람쥐나 토끼밖에 못 잡아오고... 흑염소를 잡아오면 얼마나 좋아! ”

 

 

하지만 큰 누이인 알렉산드라는 동생들을 나무라며 단추를 달래주었어요.

 

 

“ 우리를 위해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냥을 나가는 다냐에게 그런 말 하면 못써! 다냐, 흑염소는 날쌔서 화살로 잡기 쉽지 않을 테니 덫을 써보는 게 어떻겠니. ”

 

 

단추는 큰 누이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낭떠러지로 올라가 바위들 사이에 덫을 놓았어요. 다음날 낭떠러지로 가보니 과연 덫에 곱사등이 흑염소가 걸려 있었어요. 단추는 몹시 기뻤어요.

 

 

“ 와, 흑염소 가죽이랑 고기랑 뿔을 팔아서 빵도 사고 고기도 사고 기름도 사고 우리 누이들 예쁜 옷도 사줘야지!

 

 

그런데 그때 곱사등이 흑염소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사람처럼 말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 저를 죽이지 마세요, 다닐. 저는 신령한 산짐승이에요. 저를 살려주시면 누이들도 좋은 신랑감을 얻게 해드리고 당신에게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인을 얻게 해드리겠어요. ”

 

 

단추는 빵과 고기와 기름과 누이들의 예쁜 옷이 무척 아까웠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이 말하는 짐승을 절대로 해치지 말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서 흑염소를 덫에서 풀어주었어요. 덫에서 풀려난 곱사등이 흑염소는 수염을 쫑긋거리며 단추에게 와서 뿔을 비벼대며 감사의 인사를 했어요.

 

 

“ 고마워요, 다닐. 저를 살려주셨으니 보답을 하겠어요. 집에 돌아가면 매주 금요일마다 낯선 남자가 하나씩 집으로 찾아와서 누이들에게 구혼을 할 거예요. 그러면 거절하지 말고 누이를 시집보내도록 하세요. 절대로 외모나 행색으로 그들을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

 

“ 하지만 우리 누이들은 정말 예쁜데. 알지도 못하는 남자들을 따라가지 않을 거야! ”

 

“ 누이들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구혼자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따라가게 하세요. 누이들을 모두 시집보내고 나면 다시 이 바위 앞으로 오세요. ”

 

 

단추는 좀 미심쩍었지만 고개를 끄덕였어요.

 

 

첫 번째 금요일이 되었어요. 노란 외투에 번쩍거리는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금발머리를 올백으로 빗어 넘긴 자그마하고 비쩍 마른 남자가 찾아왔어요. 안경까지 쓰고 있는데다 콧수염 때문에 얍삽해 보이는 인상이었기에 단추는 남자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흑염소의 말을 생각하며 보드카를 대접했어요. 남자는 보드카를 한입에 털어 넣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어요.

 

 

“ 안녕하시오, 다닐. 내 이름은 바냐 투레츠키요. 당신 누이 알렉산드라와 결혼하고 싶소. ”

 

“ 알겠어요, 알렉산드라에게 물어보겠어요. ”

 

 

놀랍게도 알렉산드라는 투레츠키를 보자마자 결혼을 승낙했어요. 그래서 알렉산드라는 투레츠키와 함께 당나귀를 타고 떠났어요.

 

 

두 번째 금요일이 되었어요. 키가 훤칠한 남자가 찾아왔어요. 이 남자는 외모는 그럴싸했지만 민망하게도 몸에 찰싹 달라붙는 하얀 타이츠와 블라우스를 입고 장화를 신고 있었어요.

 

 

“ 안녕하시오, 다닐. 내 이름은 가릭이라고 하오. 당신 누이 렐랴와 결혼하고 싶소. ”

 

“ 알겠어요, 렐랴에게 물어보겠어요. ”

 

 

렐랴도 가릭을 보자마자 결혼을 승낙했어요. 그래서 렐랴는 가릭과 함께 소를 타고 떠났어요.

 

 

세 번째 금요일이 되자 덩치가 크고 우락부락한 산적처럼 생긴 남자가 왔어요. 너덜너덜한 군복 차림에 수염까지 기르고 험상궂은 모양새였어요.

 

 

“ 안녕하시오, 다닐. 내 이름은 보랴라고 하오. 당신 누이 리자와 결혼하고 싶소. ”

 

“ 알겠어요, 리자에게 물어보겠어요. ”

 

 

단추는 귀염둥이 막내 누이인 리자를 저렇게 험상궂은 사내에게 시집보내기가 싫었어요. 하지만 리자는 웬일인지 보랴를 보더니 방긋방긋 웃으며 결혼하겠다고 나섰고 둘은 말을 타고 떠났어요.

 

 

다음날 단추는 낭떠러지 바위 앞으로 갔어요. 그러자 곱사등이 흑염소가 나타났어요.

 

 

“ 누이들을 모두 시집보내셨나요? ”

 

응, 근데 다들 수상쩍은 남자들이었어. 우리 누이들이 행복해야 할 텐데. ”

 

“ 누이들은 여왕처럼 살게 될 거예요. 자, 이제 당신 차례예요. ”

 

 

곱사등이 흑염소가 뿔 사이에서 두루마리를 하나 떨어뜨리더니 펴보라고 했어요. 단추가 두루마리를 펴보자 눈부신 미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어요.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에 보석이 아로새겨진 왕관을 쓰고 금실로 수놓인 하얀 비단옷을 입고 눈처럼 새하얀 얼굴에 별처럼 반짝거리는 까만 눈, 장미꽃처럼 붉은 입술의 절세미인이었어요. 단추는 초상화를 보자마자 황홀해서 넋을 잃었어요.

 

 

“ 흑염소야, 흑염소야. 이 사람은 누구니? 어디로 가야 찾을 수 있니? ”

 

이 사람은 절세미인 미셴카예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죠. 그 미모에 반한 마왕 스페호프의 구애를 거절해서 세상 끝 왕국에 감금되어 있답니다. ”

 

“ 내가 미셴카를 구하고 말겠어! 그 세상 끝 왕국은 어디에 있니? ”

 

“ 그건 아무도 모른답니다. 그곳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세 개의 왕국을 먼저 찾아내야 해요. 이 공을 받으세요. 공이 굴러가는 방향으로 계속 가면 첫 번째 왕국에 도달하실 수 있어요. 그 이후는 하느님에게 맡겨야 해요. ”

 

“ 알겠어. 꼭 세상 끝 왕국을 찾아내서 미셴카를 구해 내고 말겠어! 고마워, 흑염소야. ”

 

“ 마음씨 착한 다닐, 당신은 친절하고 마음이 착하니 한 가지 선물을 드리겠어요. 제 뿔 사이에서 털을 하나 뽑아보세요. ”

 

 

단추는 흑염소의 뿔 사이에서 가장 길게 솟아 있는 까맣고 윤나는 털을 하나 뽑았어요.

 

 

“ 마음씨 착한 다닐, 세상이 무너지는 듯이 무섭고 슬플 때 그 털을 꺼내서 어루만지면서 이렇게 말하세요. ‘흑염소야, 흑염소야, 수틀리면 들이받는 흑염소 코즐로프야. 나에게 와주렴.’ 그러면 제가 나타날 거예요. 이제 세상 끝 왕국으로 떠나세요. ”

 

 

그리하여 마음 착한 단추는 곱사등이 흑염소와 헤어져서 세상 끝 왕국을 찾아 떠나게 되었어요.

 

 

 

 

*    *    *

 

 

 

 

단추는 흑염소가 준 공을 던졌어요. 공이 굴러가는 방향대로 걷고 또 걸었어요. 산 넘고 물 건너 계속 걸었어요. 신발이 닳고 옷이 해질 정도로 오래오래 걸었어요. 지치고 힘들 때마다 품에서 절세미인 미셴카의 초상화를 꺼내보며 다짐했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아름다운 미셴카. 마왕의 손아귀에서 꼭 구해드릴게요! ”

 

 

그러던 어느 날 떼굴떼굴 굴러가던 공이 멈춰버렸어요. 아무리 굴려도 더 이상 굴러가지 않았어요. 그때 누더기와 넝마를 걸친 거지떼가 나타나 단추를 다짜고짜 꽁꽁 묶었어요. 아무리 단추가 자기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었어요. 낯선 놈이라면서 자신들의 소굴로 끌고 갔어요. 단추는 기가 막혔어요. 갖은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웬 거지 도적떼의 소굴로 끌려오다니!

 

 

그런데 놀랍게도 거지 도적떼의 소굴은 겉모양만 허름할 뿐 안으로 들어가자 온갖 금은보화가 가득했어요. 거지들이 누더기를 벗자 안에 껴입은 비단옷이 나타났어요. 단추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갑자기 거지들이 ‘왕비 마마!’ 하고 무릎을 꿇었어요. 보석으로 치장한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어요. 단추는 자기 눈을 의심했어요. 그 여인은 큰 누이 알렉산드라였어요. 알렉산드라는 단추를 와락 껴안으며 너무나도 반가워했어요.

 

 

“ 다냐! 사랑하는 내 동생! ”

 

“ 누님!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

 

여기는 개방 왕국이란다. 내 남편 바냐 투레츠키가 다스리는 곳이야.

 

 

그때 바냐 투레츠키가 나타났어요. 여전히 노란 재킷에 번쩍번쩍하는 훈장들을 달고 머리를 올백으로 빗어 넘기고 있었어요. 하지만 안경을 벗자 세상에 그렇게 잘생긴 남자가 또 있을 수가 싶을 정도였어요. 투레츠키는 단추를 보더니 매우 기뻐했어요.

 

 

“ 어이, 처남! 멀리까지 와줘서 고마워! 술 한 잔 하지! ”

 

“ 반가워요, 바냐. 그런데 당신이 개방 왕국의 왕이었다니 몰랐네요. 여기는 허름해서 거지떼 소굴인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네요. ”

 

“ 에이, 그건 다 위장한 거지. 우리는 사실 교역과 상업으로 부를 축적했는데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거지 소굴처럼 꾸미고 있는 거야. ”

 

“ 그랬구나... 여기가 세 개의 왕국 중 첫 번째 왕국인가요? ”

 

“ 응, 그렇지. ”

 

“ 그러면 세상 끝 왕국은 어떻게 가야 하나요? 절세미인 미셴카와 결혼하고 싶어요. ”

 

“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아마 우리 형님에게 가면 알 수 있을 거야. 오늘은 같이 술 마시고 맛있는 거 먹으며 회포를 풀고 내일 가도록 해. ”

 

 

그래서 단추는 투레츠키와 누이 알렉산드라와 함께 먹고 마시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다음날 아침이 되자 투레츠키가 당나귀를 한 마리 끌고 왔어요.

 

 

“ 이놈이 길을 아니까 타고 가면 우리 형님의 왕국에 도착하게 될 거야. ”

 

“ 고마워요, 바냐. 알렉산드라랑 행복하게 사세요. ”

 

 

투레츠키는 단추에게 보석이 박힌 빗을 하나 건네주었어요.

 

 

“ 위기에 처하면 이걸 등 뒤로 던지도록 해. 부디 절세미인 미셴카를 꼭 찾기를! ”

 

 

단추는 빗을 품에 집어넣고 당나귀를 타고 떠났어요. 당나귀는 굉장히 빨랐어요. 바람처럼 달려가 사흘 만에 두 번째 왕국에 도착했어요. 당나귀가 단추를 내려놓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어요. 단추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망토를 두른 건장한 남자들이 나타나 그를 꽁꽁 묶어서 끌고 갔어요.

 

 

끌려가면서 보니 주위에는 거대한 풍차들이 가득했고 푸르른 초원 위로 황금빛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어요. 망토 두른 남자들이 단추를 파란색의 예쁜 지붕과 하얀색 칠이 된 벽이 기다랗게 뻗어 있는 자그마한 궁전으로 끌고 갔어요. 궁전 내부는 참으로 호화로웠어요. 단추가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남자들이 ‘왕비 마마!’ 하고 무릎을 꿇었어요. 예쁜 레이스 드레스에 장미꽃 장식을 달고 있는 미녀가 나타났는데 자세히 보니 둘째 누이 렐랴였어요. 렐랴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달려와 단추를 꼭 껴안았어요.

 

 

“ 다냐 오빠! 정말 보고 싶었어요! ”

 

“ 어, 렐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

 

여기는 풍차 왕국이에요. 내 남편 가릭이 다스리는 곳이에요.

 

 

그때 가릭이 나타났어요. 여전히 하얀 타이츠에 블라우스, 빨간 망토 차림이었지만 그렇게 우아하고 근사해보일 수가 없었어요. 가릭은 단추를 보더니 매우 기뻐했어요.

 

 

“ 어이, 처남! 멀리까지 와줘서 고마워! 술 한 잔 하지! ”

 

“ 반가워요, 가릭. 그런데 당신이 풍차 왕국의 왕이었다니 몰랐네요. 굉장히 유복한 왕국인가 봐요. ”

 

“ 응. 우리는 원체 땅도 기름지고 농사도 잘 되고 소들도 잘 커서 엄청 부자 왕국이야. ”

 

“ 그랬구나... 여기가 세 개의 왕국 중 두 번째 왕국인가요? ”

 

“ 응, 그렇지. ”

 

“ 그러면 세상 끝 왕국은 어떻게 가야 하나요? 절세미인 미셴카와 결혼하고 싶어요. ”

 

“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아마 우리 큰형님에게 가면 알 수 있을 거야. 오늘은 같이 술 마시고 맛있는 거 먹으며 회포를 풀고 내일 가도록 해. ”

 

 

그래서 단추는 가릭과 누이 렐랴와 함께 먹고 마시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다음날 아침이 되자 가릭이 황금빛 소를 한 마리 끌고 왔어요.

 

 

이놈이 길을 아니까 타고 가면 우리 큰형님의 왕국에 도착하게 될 거야. ”

 

“ 고마워요, 가릭. 렐랴랑 행복하게 사세요. ”

 

 

가릭은 단추에게 보석 마개가 박힌 물병을 하나 건네주었어요.

 

 

“ 위기에 처하면 이걸 등 뒤로 던지도록 해. 부디 절세미인 미셴카를 꼭 찾기를! ”

 

 

단추는 물병을 품에 집어넣고 황금소를 타고 떠났어요. 황금소는 굉장히 빨랐어요. 바람처럼 달려가 엿새 만에 세 번째 왕국에 도착했어요. 황금소가 단추를 내려놓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어요. 단추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조그만 날개가 달리고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사탕요정들이 나타나서 그를 꽁꽁 묶어서 끌고 갔어요.

 

 

끌려가면서 보니 주위에는 우유로 된 샘물과 포도주로 된 강이 흐르고 있었어요. 빵으로 만든 언덕과 과자집들이 즐비했어요. 나무에는 맛있는 음식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어요. 사탕요정들이 단추를 초콜릿과 딸기 사탕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궁전으로 끌고 갔어요. 궁전 내부는 참으로 호화로운데다 여기저기 맛있는 음식과 케익이 가득했어요. 단추가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요정들이 ‘왕비 마마!’ 하고 무릎을 꿇었어요. 천사처럼 조그만 날개를 달고 딸기 모양의 보석 팔찌를 찬 미녀가 나타났는데 자세히 보니 막내 누이 리자였어요. 리자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달려와 단추의 뺨에 뽀뽀를 했어요.

 

 

“ 어머 어머, 다냐 오빠!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

 

“ 어, 리자! 이게 어떻게 된 거야? ”

 

여기는 꿀 왕국이에요. 내 남편 보랴가 다스리는 곳이에요.

 

 

그때 보랴가 나타났어요. 군복 대신 곤룡포를 두르고 왕홀을 들고 있는데 그렇게 당당해 보일 수가 없었어요. 보랴는 단추를 보더니 매우 기뻐했어요.

 

 

“ 어이, 처남! 멀리까지 와줘서 고마워! 술 한 잔 하지! ”

 

“ 반가워요, 보랴. 그런데 당신이 꿀 왕국의 왕이었다니 몰랐네요. 사방에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네요. ”

 

“ 그렇지. 여기는 지상낙원이야. 배고픈 인민은 단 하나도 없어. 모두가 조금 일하고 많이 쉬고 맛있는 음식을 언제 어디서나 먹을 수 있어. ”

 

“ 그랬구나... 여기가 세 개의 왕국 중 마지막 왕국인가요? ”

 

“ 응, 그렇지. ”

 

“ 그러면 세상 끝 왕국은 어떻게 가야 하나요? 절세미인 미셴카와 결혼하고 싶어요. ”

 

“ 뭐라고? 세상 끝 왕국에 가겠다고? 음, 다른 사람 같으면 말렸겠지만 자네는 내 처남이니 도와주도록 하겠네. 오늘은 같이 술 마시고 맛있는 거 먹으며 회포를 풀고 내일 가도록 하게. ”

 

 

그래서 단추는 보랴와 누이 리자와 함께 먹고 마시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다음날 아침이 되자 보랴가 백마를 한 마리 끌고 왔어요. 그리고는 청어 세 마리를 내밀었어요.

 

 

“ 내 말 잘 듣게, 다냐. 세상 끝 왕국은 검은 숲을 지나가야 하네. 이 백마가 숲을 통과하게 해줄 걸세. 숲을 지나면 수정과 황금으로 장식된 성이 나타날 것이네. 그러나 성문 앞에는 머리 셋 달린 무서운 괴물이 지키고 있다네. 괴물이 달려들거든 이 청어를 한 마리씩 던져주게. 그런 후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절세미인 미셴카를 찾아낼 수 있을 거야. ”

 

“ 고마워요, 보랴. 리자랑 행복하게 사세요. ”

 

 

보랴는 단추에게 은으로 된 목걸이를 하나 건네주었어요.

 

 

“ 위기에 처하면 이걸 등 뒤로 던지도록 해. 부디 절세미인 미셴카를 그 마왕 스페호프의 손아귀에서 꼭 구해내기를! ”

 

 

 

 

*    *    *

 

 

 

 

백마는 아흐레 밤낮을 달렸어요. 마침내 울창하고 어두컴컴한 검은 숲을 쏜살같이 통과하자 눈부신 햇살과 함께 이제껏 본 적도 없을 만큼 호화롭고 장대한 수정과 황금의 성이 나타났어요. 백마는 단추를 내려주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어요.

 

 

단추는 성벽을 돌아서 문 앞으로 갔어요. 과연 보랴의 말대로 무시무시하게 생긴 머리 셋 달린 괴물이 성문 앞을 지키고 있었어요. 금방이라도 시뻘건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들 기세였어요. 단추는 급하게 보랴가 준 청어 세 마리를 꺼내서 머리 하나당 한 마리씩 던져주었어요. 문지기 괴물은 청어를 쩝쩝 아작아작 씹더니 강아지처럼 온순해져서 금세 단추의 무릎 아래 납작 엎드렸어요. 그래서 단추는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성 내부는 굉장히 넓고 화려했어요. 나선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수정과 황금으로 장식된 홀이 펼쳐졌어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따라가니 커다란 문이 나타났어요. 문을 밀자 붉은 벨벳 커튼이 나타났어요. 벨벳 커튼을 밀어젖히자 녹색 비단 커튼이 나타났어요. 비단 커튼을 열자 황금빛과 푸른빛으로 가득한 침실이 나타났어요.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에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미인이 앉아서 조그만 현이 달린 악기를 연주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에 보석이 아로새겨진 왕관을 쓰고 금실로 수놓인 하얀 비단옷을 입고 눈처럼 새하얀 얼굴에 별처럼 반짝거리는 까만 눈, 장미꽃처럼 붉은 입술의 절세미인이었어요. 바로 두루마리 초상화의 아름다운 미셴카였어요. 단추는 자기도 모르게 미셴카의 발 아래 넙죽 절을 했어요. 미셴카가 깜짝 놀라 악기를 내려놓고 눈을 동그랗게 떴어요.

 

 

“ 당신은 누구신가요? 여기는 세상 끝 왕국이라 인간의 몸으로 찾아올 수 없는 곳인데 어떻게 혈혈단신으로 여기까지 오셨나요? ”

 

“ 아름다운 미셴카, 저는 다닐이라고 해요. 수틀리면 들이받는 흑염소 코즐로프가 보여준 초상화에서 당신을 보고 반해서 여기까지 왔어요. ”

 

“ 아이 참, 어쩌려고 무모하게 여기까지 오셨나요. 여기는 무시무시한 마왕 스페호프가 지배하는 곳이에요. 인간들을 너무 싫어해서 보는 족족 잡아먹고 잔혹하게 죽이고 괴롭히고 수탈하는 간악한 마왕이에요. 당신을 발견하면 즉시 죽이려고 할 거예요. 어서 도망가세요! ”

 

안돼요. 저 혼자 도망갈 수는 없어요. 제가 죽더라도 당신을 마왕의 손아귀에서 구해드리고 말겠어요!

 

 

미셴카가 감동해서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단추의 뺨에 뽀뽀를 했어요. 단추는 너무 황홀해서 기절할 것 같았어요.

 

 

“ 고마워요, 다닐. 저를 구하러 여기까지 와 주시다니. 저는 벌써 3년째 여기 갇혀서 고통을 겪고 있어요. 스페호프는 마왕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무찌를 수가 없어요. 그를 없애는 방법을 알아내야 해요. 마침 오늘이 스페호프가 저에게 오는 날이에요. 마왕은 매달 마지막 주에 여기 와서 사흘 동안 머무르는데 당신은 그동안 제 옷장에 꼭꼭 숨어 계세요. 제가 마왕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보겠어요. 마왕이 이 방을 떠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옷장에서 나오시면 안돼요. ”

 

“ 알겠어요, 미셴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옷장에서 나오지 않을게요. 그런데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실 수 없나요? 아흐레 동안 꼬박 달려왔더니 너무나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네요. ”

 

 

미셴카는 과일과 고기와 빵과 주스와 보드카를 가져다주었어요. 단추는 먹고 마셨어요. 허기와 갈증이 가시자 단추는 너무나도 피곤했어요. 미셴카가 단추를 침대에 뉘어주고 부채질을 해주면서 머리를 빗겨주었어요. 미셴카의 손길이 너무나 부드러웠고 향기도 너무나 달콤해서 단추는 사르르 눈이 감겼어요.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갑자기 미셴카가 화들짝 놀라며 단추를 깨웠어요.

 

 

일어나요, 다닐! 스페호프가 오고 있어요. 창 너머로 벌써 날개 치는 소리가 들려와요. 어서 옷장으로 들어가세요!

 

 

단추는 후다닥 옷장으로 들어갔어요. 옷장은 단추의 시골집보다도 더 넓었고 화려한 의상들과 장식품이 즐비했어요. 단추는 미셴카의 아름다운 가운과 망토 사이에 몸을 숨기고 옷장 틈새로 바깥을 엿보았어요.

 

 

그때 푸드득푸드득 소리와 함께 타는 냄새와 피비린내와 금속 냄새가 진동을 하더니 마왕 스페호프가 창문으로 날아 들어와 거대한 검은 날개를 접으며 내려앉았어요. 그리고는 훌쩍 재주를 넘더니 인간 남자의 모습으로 변신해 곧장 미셴카의 허리를 낚아채고 입술이 떨어져라 키스를 했어요. 미셴카는 가만히 있었지만 얼굴에는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어요. 단추는 너무나도 화가 나서 금방이라도 뛰쳐나가 마왕을 베어죽이고 싶었지만 미셴카와의 약속을 생각하고 꾹 참았어요.

 

 

입술을 뗀 스페호프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어요.

 

 

어디선가 인간 냄새가 나는군! 분명 어딘가 인간이 숨어 있는 거야! ”

 

 

미셴카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어요.

 

 

“ 인간은 무슨! 아무도 제 곁에 못 오게 해놓고서 무슨 인간 냄새가 난다는 거예요! 아마 제 냄새겠죠! ”

 

“ 아니야! 너처럼 달콤하고 황홀한 꽃 냄새가 아니야! 이것은 러시아 촌놈 냄새야! 분명 어딘가 러시아 촌놈이 숨어 있는 거야! ”

 

“ 아유, 또 밖에 나가서 인간을 잡아먹고 왔군요! 자기가 풍기는 냄새잖아요! 저한테 올 때는 인간 잡아먹지 않겠다고 해놓고서! 미워요! ”

 

 

미셴카가 눈을 샐쭉하게 뜨더니 홱 돌아앉았어요. 마왕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고개를 끄덕였어요.

 

 

“ 그런가... 오다가 배고파서 몇 놈 잡아먹긴 했지. 약속은 무슨 약속! 뭐든 내 맘이지! 오늘따라 더 예쁘군. 그래, 오늘도 울고불고 말 안 듣고 결혼 안하겠다고 버둥거릴 생각이야? ”

 

“ 결혼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어차피 매일 당신 맘대로 하면서. ”

 

“ 그래도 데리고 노는 거하고 결혼은 사정이 다르지! 나는 우리 왕국의 제1후계자이지만 결혼을 하지 않으면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단 말이야. 대대로 우리 마왕들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인과 결혼했지. 이 전통을 어길 수는 없어! 계속 이렇게 말을 안 듣고 고집을 부리면 이제 나도 어쩔 수 없지. 억지로 끌고 가서 결혼하든가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악마들에게 너를 제물로 바칠 수밖에!

 

 

미셴카의 얼굴이 새파래지는 것을 보니 결혼도 싫고 악마들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것도 무서운 것 같았어요. 금세 큰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히면서 ‘싫어요 싫어요’ 하고 울먹거리는 것을 보니 단추의 마음은 찢어질 것 같았어요. 그런데 미셴카가 울자 스페호프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더니 미셴카를 와락 껴안고 또 뽀뽀를 하면서 몸을 어루만졌어요.

 

 

나는 네가 울면 더 기분이 좋아. 밤새 울려주고 괴롭혀주겠다!

 

 

단추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려는 찰나 미셴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어요.

 

 

“ 흑... 마왕님과 결혼하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어서 못한단 말이에요! ”

 

“ 아니, 그게 무슨 소리지? 정말로 나와 결혼하고 싶단 말이냐? 3년 내내 결혼 얘기만 나오면 거절하고 울고불고 소란을 피워놓고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

 

저는 고귀한 혈통에 우주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란 말이에요. 제 결혼 상대는 세상에서 제일 강한 남자여야 해요. 그런데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저 같은 것이야 힘이 없으니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세상 어딘가에 당신보다 더 센 남자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이랑 결혼해서 제 모든 것을 맡겼는데 갑자기 어딘가에서 더 강한 남자가 나타나서 당신을 한칼에 죽여 버리기라도 하면 전 어떻게 살아요! 흑흑, 생각만 해도 무서워요. 엉엉... 그래서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어도 못하겠다고요. ”

 

 

스페호프는 굉장히 좋아했어요. 껄껄 웃더니 미셴카를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어요.

 

 

“ 허허, 이런 바보 같으니. 실은 날 좋아하면서도 그런 두려움 때문에 계속 앙탈을 부렸단 말이냐! 역시 인간이라 어리석기 그지없구나! 이 세상에 나보다 강한 남자 따윈 존재하지 않아! 난 악마 왕국의 최고 후계자이며 불사의 마왕이야! 인간의 힘으로 날 죽일 수는 없지!

 

“ 그걸 어떻게 믿어요, 흐흑... 누가 와서 큰 칼로 당신을 뒤에서 찌르기라도 하면... 엉엉... ”

 

“ 하하하, 나는 악마의 가호로 무장한 몸이야! 인간의 칼은 내 몸에 들어가지도 않아! 나는 불사야! ”

 

“ 세상에 불사의 존재가 어디 있어요! 옛날에 우리 유모가 그랬어요, 악마도 모두 죽게 되어 있다고. 그런데 당신이라고 어떻게 안 죽어요! ”

 

“ 허, 그 유모가 좀 똑똑하군. 그렇지, 악마도 모두 죽게 되어 있지. 그러나 나는 내 죽음을 내 몸이 아니라 다른 곳에 숨겨놨기 때문에 그 어떤 공격을 당해도 죽지 않아. ”

 

“ 죽음을 어떻게 다른 데 숨길 수가 있어요? 거짓말. ”

 

“ 거짓말이라니! 감히 나를 의심하느냐! ”

 

“ 당신은 매일 약속도 안 지키고... 인간 안 잡아먹겠다더니 매일 잡아먹고, 절 때리지도 않고 귀여워해주겠다고 해놓고 툭하면 때리고 울리고 밤새 덮치는데 어떻게 믿어요, 엉엉... 죽음을 어떻게 다른 곳에 숨겨요. 그게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안심하고 당신이랑 결혼할 수 있겠어요! ”

 

“ 하하, 귀여운 것 같으니. 내가 사실을 말해주면 오늘 밤은 더 이상 앙탈하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내 품에 안기겠느냐? 사흘 후에 나와 함께 악마 왕국에 가서 결혼하겠느냐? ”

 

“ 사실을 말해주면요. ”

 

내 죽음은 성 안의 호숫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 검은 오리의 심장에 숨겨져 있지. 그 오리를 죽여 심장을 꺼내 터뜨리지 않는 한 난 죽지 않아. 이제 마음이 놓였느냐?

 

“ 호숫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 검은 오리... ”

 

 

미셴카는 단추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중얼거렸어요. 단추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입안으로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외었어요. 미셴카가 더 이상 울지 않고 얌전해지자 스페호프가 좋아했어요. 미셴카를 끌어안고 침대로 갔어요. 밤새 마왕이 미셴카를 데리고 노는 동안 단추는 옷장 안에서 등을 돌리고 웅크린 채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소리를 죽여 엉엉 울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미셴카를 구해줘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다음날 아침에 미셴카가 옷장 문을 열고 단추를 깨웠어요.

 

 

“ 일어나요, 다닐. 일어나요. 마왕이 나갔어요. 저녁에 다시 올 거예요. 어제 마왕이 자기 죽음에 대해 한 얘기를 들었나요? ”

 

“ 호숫가 마당에 놀고 있는 검은 오리요. 제가 지금 당장 가서 그 오리를 죽여 버리겠어요! ”

 

“ 안돼요. 저는 스페호프를 믿을 수가 없어요. 무작정 오리를 죽였다가 그게 아니면 돌이킬 수 없게 돼요. 일단 시험을 해봐야겠어요. 오늘 하루만 지켜봐주세요. ”

 

안돼요, 어제 당신이 그렇게 고초를 당했는데 오늘 또 그런 일을 겪게 할 수는 없어요! 지금 당장 오리를 죽여 버리겠어요!

 

“ 다닐, 제발 오늘 하루만 참아주세요. 저를 믿어주세요. ”

 

 

단추는 미셴카가 까만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부탁하자 마음이 약해져서 고개를 끄덕였어요. 둘은 손을 잡고 정원 안뜰의 호숫가로 갔어요. 오리들이 옹기종기 노닐고 있었는데 정말 검정 오리가 한 마리 있었어요. 단추는 단칼에 오리를 내리치고 싶었지만 미셴카는 오리를 붙잡더니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고 목에는 금실로 수를 놓은 리본을 둘러주었어요. 그리고는 오리를 데리고 침실로 와서 비단 쿠션 위에 올려놓고 먹이를 주고 꽃다발을 바쳤어요.

 

 

오리가 배불리 먹고 잠이 들자 미셴카는 단추와 함께 식사를 하고 정원을 산책했어요. 단추에게 노래도 불러주었어요. 악기를 연주해 주고 천사처럼 춤도 춰주었어요. 단추는 돌아가신 부모님과 자기 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곱사등이 흑염소를 만났던 이야기도 해주었어요. 둘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그러다 어느 덧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어요. 미셴카가 화들짝 놀랐어요.

 

 

“ 다닐, 빨리 침실로 돌아가야 해요! 스페호프가 곧 올 거예요! ”

 

 

 

둘은 급하게 침실로 올라갔어요. 단추를 옷장에 숨긴 후 미셴카는 비단 쿠션을 자기 무릎에 올려놓고 오리의 털을 빗겨주고 노래를 불러주기 시작했어요. 그때 푸드득푸드득 소리와 함께 타는 냄새와 피비린내와 금속 냄새가 진동을 하더니 마왕 스페호프가 창문으로 날아 들어와 거대한 검은 날개를 접으며 내려앉았어요. 그리고는 훌쩍 재주를 넘더니 인간 남자의 모습으로 변신해 곧장 미셴카의 허리를 낚아채려다 오리를 보고는 멈칫했어요.

 

 

“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

 

“ 호숫가 마당의 검은 오리님이요. 마당에 놔뒀다가 누가 와서 심장을 꺼낼까봐 무서워서 여기 데려다 놓았어요. ”

 

“ 그 비단 쿠션과 왕관과 리본은? 노래를 불러주고 털까지 빗겨주다니. ”

 

“ 당신의 죽음을 숨겨둔 오리님인데 어떻게 그냥 내버려둘 수가 있나요. 받들어 모셔야죠. ”

 

 

스페호프가 껄껄 웃었어요. 미셴카를 와락 껴안더니 얼굴에 뽀뽀를 퍼부으며 허리가 끊어져라 웃어댔어요.

 

 

“ 하하하, 역시 인간이란 어리석다니까! 귀엽기도 하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이깟 하찮은 오리 따위에게 내 죽음을 숨겨놓을 리가 없거늘! ”

 

“ 뭐라고요? 또 저에게 거짓말을 하셨단 말이에요? 너무해요. 전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속마음을 다 얘기했는데... 냄새나는 오리까지 데려와서 제 비단 쿠션에 재워줬는데 정말 너무해요. ”

 

 

미셴카가 금세 눈물을 글썽거리며 돌아앉았어요. 마왕은 계속 웃어댔지만 미셴카가 흐느껴 울자 뺨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닦아 주었어요.

 

 

“ 뭘 그렇게 울어! 내가 그랬지! 울면 더 울려주고 싶다고! ”

 

“ 다 거짓말이었어... 당신이랑은 결혼 못 해요! 전 세상에서 제일 강한 남자랑 결혼해야 되는데. 이러다가 누가 와서 당신을 죽이면 난 불행해지겠지... 엉엉... ”

 

“ 허허, 귀여운 것 같으니. 좋아, 내가 사실을 말해주지. 내 죽음은 정원 제일 깊숙한 곳에 있는 오백년 묵은 참나무 안에 숨겨져 있지. 그 참나무를 베어 넘어뜨리지 않는 한 난 죽지 않아. 이제 마음이 놓였느냐?

 

“ 정원 제일 깊숙한 곳에 있는 오백년 묵은 참나무... ”

 

 

미셴카는 단추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중얼거렸어요. 단추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입안으로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외었어요. 미셴카가 더 이상 울지 않고 얌전해지자 스페호프가 좋아했어요. 미셴카를 끌어안고 침대로 갔어요. 밤새 마왕이 미셴카를 데리고 노는 동안 단추는 옷장 안에서 등을 돌리고 웅크린 채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소리를 죽여 엉엉 울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미셴카를 구해줘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다음날 아침에 미셴카가 옷장 문을 열고 단추를 깨웠어요.

 

 

“ 일어나요, 다닐. 일어나요. 마왕이 나갔어요. 저녁에 다시 올 거예요. 어제 마왕이 자기 죽음에 대해 한 얘기를 들었나요? ”

 

“ 정원 제일 깊숙한 곳에 있는 오백년 묵은 참나무요. 제가 지금 당장 가서 그 나무를 베어버리겠어요! ”

 

“ 안돼요. 저는 스페호프를 믿을 수가 없어요. 무작정 나무를 베었다가 그게 아니면 돌이킬 수 없게 돼요. 일단 시험을 해봐야겠어요. 오늘 하루만 지켜봐주세요. ”

 

안돼요, 어제도 당신이 그렇게 고초를 당했는데 오늘 또 그런 일을 겪게 할 수는 없어요! 지금 당장 나무를 베어버리겠어요!

 

“ 다닐, 제발 오늘 하루만 참아주세요. 저를 믿어주세요. ”

 

 

단추는 미셴카가 까만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부탁하자 마음이 약해져서 고개를 끄덕였어요. 둘은 손을 잡고 정원으로 갔어요. 아주 깊이 들어가자 오백년 묵은 참나무가 있었어요. 단추는 도끼로 나무를 내리치고 싶었지만 미셴카는 나무에 금실로 수를 놓은 리본을 둘러주고 꽃다발과 보석을 잔뜩 쌓아놓았어요.

 

 

나무 그늘에 앉아서 미셴카는 단추와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셨어요. 둘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그러다 어느 덧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어요. 미셴카가 화들짝 놀랐어요.

 

 

“ 다닐, 빨리 침실로 돌아가야 해요! 스페호프가 곧 올 거예요! ”

 

 

 

둘은 급하게 침실로 올라갔어요. 단추를 옷장에 숨긴 후 미셴카는 ‘참나무야 참나무야 우리 마왕님을 지켜주렴’ 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때 푸드득푸드득 소리와 함께 타는 냄새와 피비린내와 금속 냄새가 진동을 하더니 마왕 스페호프가 창문으로 날아 들어와 거대한 검은 날개를 접으며 내려앉았어요. 그리고는 훌쩍 재주를 넘더니 인간 남자의 모습으로 변신했어요. 하지만 미셴카의 허리를 낚아채지는 않고 빙긋빙긋 웃었어요.

 

 

“ 정원에 다녀왔는데 참나무에 리본을 둘러주고 꽃다발을 쌓아뒀더군. 내가 가져다줬던 금은보화도 전부 나무 아래 갖다놓고. 대체 왜 그런 거지? ”

 

“ 당신의 죽음을 숨겨둔 위대한 참나무님인데 어떻게 그냥 내버려둘 수가 있나요. 받들어 모셔야죠. ”

 

 

스페호프가 껄껄 웃었어요. 미셴카를 와락 껴안더니 온몸에 뽀뽀를 퍼부으며 허리가 끊어져라 웃어댔어요.

 

 

“ 하하하, 역시 예쁜 애는 미련하다니까!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그깟 썩은 나무 둥치 따위에게 내 죽음을 숨겨놓을 리가 없거늘! ”

 

“ 뭐라고요? 또 저에게 거짓말을 하셨단 말이에요? 너무해요. 전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속마음을 다 얘기했는데... 제 금은보화를 모두 바쳤는데 정말 너무해요. ”

 

 

미셴카가 금세 눈물을 글썽거리며 돌아앉았어요. 마왕은 계속 웃어댔지만 미셴카가 흐느껴 울자 뺨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닦아 주었어요.

 

 

“ 뭘 그렇게 울어! 내가 그랬지! 울면 더 울려주고 싶다고! ”

 

“ 당신은 어쩌면 이럴 수가 있나요! 당신이랑은 결혼 못 해요! 난 세상에서 제일 강한 남자랑 결혼해야 되는데. 이러다가 누가 와서 당신을 죽이면 난 불행해지겠지... 엉엉... 당신은 절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해요!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저 혼자 사랑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흑흑... ”

 

 

미셴카가 목을 놓아 울자 마왕 스페호프는 달래보려고 애를 썼어요. 하지만 미셴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어요. 급기야 미셴카는 창가로 기어 올라가 바깥으로 몸을 내밀며 울부짖었어요.

 

 

당신이 이렇게 저를 속이고 절 믿어주지 않는다면 전 뛰어내려 죽어버리겠어요! 저를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할 수는 없어요!

 

 

스페호프가 껄껄 웃었어요. 한 팔로 미셴카를 안아서 침대로 데려가더니 머리와 얼굴과 목에 뽀뽀를 했어요. 그리고는 결심한 듯 말했어요.

 

 

“ 네가 이토록 나를 사랑하니 사실을 말해주지. 그 누구에게도 말해준 적이 없는 비밀이야. 성 뒤에 있는 호수 한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그 섬에는 천년 묵은 뱀이 한 마리 똬리를 틀고 있지. 그 똬리 아래 작은 상자가 있고 그 상자를 열면 검은 알이 하나 있는데 그 알을 깨뜨려 노른자를 뭉개지 않는 한 난 결코 죽지 않아. 이제 마음이 놓였느냐?

 

“ 호수 한가운데 작은 섬, 뱀, 상자, 검은 알... ”

 

 

미셴카는 단추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중얼거렸어요. 단추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입안으로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외었어요.

 

 

“ 그래. 이제 만족하느냐?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겠느냐? 이제 나와 결혼해 주겠느냐? ”

 

“ 네, 마왕님. ”

 

 

미셴카가 더 이상 울지 않고 얌전해지자 스페호프가 좋아했어요. 미셴카를 끌어안고 침대로 갔어요. 밤새 마왕이 미셴카를 데리고 노는 동안 단추는 옷장 안에서 등을 돌리고 웅크린 채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호수 한가운데 작은 섬, 뱀, 상자, 검은 알’을 수백 번 되풀이했어요.

 

 

 

 

*    *    *

 

 

 

 

다음날 아침에 미셴카가 옷장 문을 열고 단추를 깨웠어요. 사흘 밤 내내 마왕에게 시달려서 해쓱해진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어요.

 

 

“ 일어나세요, 다닐. 일어나세요. 시간이 없어요. 성 뒤에 있는 호수의 작은 섬으로 가서 천년 묵은 뱀의 똬리 아래 있는 상자를 찾아오세요. 저는 스페호프의 마법에 걸려 있어 성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답니다. 당신 혼자 가야 해요. 해가 지기 전까지 꼭 돌아오셔야 해요. 오늘 저녁에 스페호프가 저를 데리고 악마 왕국으로 가겠다고 했어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저는 악마 왕국으로 끌려가 스페호프와 결혼하거나 악마들에게 제물로 바쳐지게 될 거예요. 부디 저를 구해주세요, 다닐. ”

 

“ 걱정 마세요, 미셴카! 제가 반드시 상자를 찾아서 알을 깨뜨리겠어요! 당신을 그놈의 마수에서 구해내고 말겠어요! ”

 

“ 꼭 해가 지기 전까지 돌아와야 해요! 다닐, 사랑해요! ”

 

 

미셴카가 단추를 꼭 껴안더니 입술에 키스를 해 주었어요. 단추는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온몸이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았어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미셴카를 꼭 껴안은 채 가만히 있고 싶었지만 간신히 무릎을 펴고 일어났어요. 그리고는 쏜살같이 성 밖으로 내달렸어요.

 

 

성 뒤에는 정말 거대한 호수가 있었어요. 헤엄을 쳐서는 도저히 섬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단추가 절망하며 탄식하고 있는데 호숫가로 집채만한 철갑상어 한 마리가 올라오더니 물었어요.

 

 

“ 다닐, 왜 그렇게 슬퍼하고 있나요? ”

 

“ 어떻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니. 호수를 건너 섬에 가서 천년 묵은 뱀의 똬리 아래 있는 상자를 꺼내 알을 깨뜨려야 사랑하는 미셴카를 마왕의 손아귀에서 구해낼 수 있는데 호수를 건널 수가 없단다. ”

 

“ 마음씨 착한 다닐, 저는 당신이 구해준 곱사등이 흑염소 코즐로프의 사촌이랍니다. 제 등에 타세요, 섬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

 

 

단추는 물고기가 어떻게 흑염소와 사촌일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는 대신 고마워하며 철갑상어의 등에 올라탔어요. 철갑상어는 물살을 가르며 헤엄쳐갔어요. 마침내 섬에 도착했을 때 철갑상어가 말했어요.

 

 

“ 상자를 찾아내면 곧장 여기로 와서 저를 부르세요. 건너편으로 데려다 드릴게요. ”

 

“ 고마워, 철갑상어야! ”

 

 

단추는 쏜살같이 달려서 섬의 한가운데 언덕으로 올라갔어요. 햇살 잘 드는 언덕 위에 눈처럼 새하얗게 빛이 바랜 시무시하고 거대한 뱀이 한 마리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어요. 뱀의 위용이 너무나 당당해서 단추는 얼어붙었어요. 고향에서 흔히 보던 뱀 생각만 하고 작대기로 치워버려야지 하고 있었는데 과연 천년 묵은 뱀이라 그런지 작대기는 어림도 없었어요. 자칫 잘못하면 물려 죽거나 나무둥치 같은 몸뚱이에 휘감겨 죽을 것 같았어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두더지 한 마리가 단추에게 말을 걸었어요.

 

 

“ 다닐, 왜 그렇게 슬퍼하고 있나요? ”

 

“ 어떻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니. 천년 묵은 뱀의 똬리 아래 있는 상자를 꺼내 알을 깨뜨려야 사랑하는 미셴카를 마왕의 손아귀에서 구해낼 수 있는데 뱀이 너무 크고 무서워서 상자를 꺼낼 수가 없단다. ”

 

“ 마음씨 착한 다닐, 저는 당신이 구해준 곱사등이 흑염소 코즐로프의 사촌이랍니다. 제가 상자를 가져다 드릴게요. ”

 

 

단추는 흑염소에게는 참 사촌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두더지는 천년 묵은 뱀 이 앉아 있는 쪽으로 가더니 잽싸게 땅을 파고 들어갔어요. 그리고는 한참 후에 머리와 콧등에서 흙을 마구 떨어내며 조그만 상자를 물고 왔어요.

 

 

“ 다닐, 상자를 받으세요. 그런데 열쇠가 없네요. 부디 알을 꺼내 깨뜨려서 절세미인 미셴카를 마왕의 손아귀에서 꼭 구하실 수 있기를! ”

 

“ 고마워, 두더지야! 은혜를 잊지 않을게! ”

 

 

단추는 상자를 들고 달려갔어요. 벌써 오후가 다 지나가고 있었어요. 호숫가로 달려가 목청껏 소리쳤어요.

 

 

“ 철갑상어야 철갑상어야! 나를 호수 저편으로 데려다 주렴! ”

 

 

철갑상어가 나타나 단추를 등에 태우고 물살을 가르며 헤엄쳐 갔어요. 마침내 호숫가에 도착했을 때 철갑상어가 단추를 내려주었어요.

 

 

“ 잘 가요, 마음씨 착한 다닐. 부디 절세미인 미셴카를 마왕의 손아귀에서 구해내길 빌어요! ”

 

“ 고마워, 철갑상어야! 이 은혜를 잊지 않을게! ”

 

 

단추는 상자를 가슴에 품고 정신없이 뛰었어요.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어요.

 

 

‘ 큰 일 났네, 미셴카가 반드시 해가 지기 전까지 와 달라고 했는데... ’

 

 

 

단추는 숨이 막히고 폐가 터질 만큼 미친 듯이 뛰었어요. 그러나 막 성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마왕 스페호프가 거대한 날개를 펄럭거리며 날아와 첨탑의 침실 창문에 내려앉는 것이 보였어요. 단추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정신없이 계단으로 달려 올라가려는데 미셴카가 구르듯 뛰쳐나왔어요. 빨간 실로 수를 놓은 모자 속으로 머리칼을 전부 감추고 볼품없는 루바슈카 셔츠와 모피를 덧댄 바지에 장화를 신은 채 뛰쳐나온 미셴카의 초라해진 모습에 단추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어요.

 

 

“ 아아, 미셴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왕관과 망토와 가운은, 그 화려하던 장신구는 다 어디로 갔나요? ”

 

“ 변장을 했어요! 마왕의 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요! ”

 

 

하지만 변장은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평민들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해도 미셴카는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인이었어요. 오히려 허름한 옷차림 때문에 그 미모가 더욱 빛이 났어요. 미셴카는 다급하게 소리쳤어요.

 

 

“ 스페호프가 와요, 다닐! 상자! 상자를 찾으셨나요? ”

 

“ 네! 철갑상어와 두더지가 도와줘서 상자를 찾았어요! 그런데 열쇠가 없어서 상자를 열지 못했어요... ”

 

“ 상자를 꺼내보세요! ”

 

 

단추가 급하게 품에서 상자를 꺼내고 있는데 마왕 스페호프가 무시무시한 고함을 지르며 침실 창가에서 머리를 쭉 빼더니 날카로운 눈초리로 아래를 쭉 훑었어요. 마왕의 눈은 매처럼 예리했어요. 정원에 있는 미셴카를 순식간에 발견하고는 으르렁거리며 순식간에 지상으로 쇄도해 왔어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결혼식 준비를 하라고 했더니 이 초라한 넝마 쪼가리는 뭐냐! 당장 올라가서 곱게 치장하지 못하겠느냐!

 

싫어! 난 안 가! 너 같은 놈이랑 결혼하느니 죽어버릴 테야!

 

뭣이! 귀엽다 귀엽다 하고 봐줬더니 이 맹랑한 것이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려고 해! 그렇게 변덕을 부려봤자 소용없어! 지옥불이 준비됐고 결혼식 만찬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

 

 

마왕이 갈고리 같은 손톱이 자라난 거대하고 무지막지한 손을 뻗어 미셴카의 모자를 홱 벗기더니 머리칼을 잡아챘어요. 미셴카가 질질 끌려가려는 것을 단추가 허리를 껴안고 자기 쪽으로 낚아챘어요. 그리고는 품에 지니고 있던 사냥칼을 꺼내 마왕 스페호프의 손을 내리쳤어요.

 

 

그 더러운 손 치워! 미셴카는 안 갈 거야!

 

“ 아니, 이놈은 뭐야! ”

 

“ 난 가브릴로프 숲에서 온 다닐이다! 미셴카는 너랑 결혼 안 해! 내가 구해줄 거야! ”

 

“ 어쩐지 계속 러시아 촌놈 냄새가 난다 했지!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르는 촌뜨기 하룻강아지가 감히 나에게 대들다니! 너부터 잡아먹고 이 버릇없는 것을 지옥으로 데려가서 악마들에게 제물로 바쳐버리겠다! ”

 

 

스페호프가 시뻘건 입을 쩍 벌리며 불길을 내뿜고 날카로운 이빨과 뱀처럼 갈라진 혀를 드러냈어요! 미셴카가 단추의 손을 홱 끌어당기며 뒤로 물러났어요. 그리고는 바닥의 모래를 한 움큼 쥐어 마왕의 얼굴에 홱 뿌렸어요. 모래가 눈알에 들어가 박혀 스페호프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미셴카는 단추의 손을 잡고 미친 듯이 뛰어서 정원의 수풀 사이에 숨었어요. 그리고는 다급하게 속삭였어요.

 

 

“ 다닐! 상자! 상자를 열어요! 알을 깨뜨려요! ”

 

 

단추는 급하게 상자를 꺼냈어요. 하지만 뚜껑이 꽉 잠겨 있었어요.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아무리 애를 써도 뚜껑이 열리지 않았어요.

 

 

“ 미셴카, 열쇠가 없어서 열리지 않아요! 어쩌면 좋죠? “

 

“ 이 세상에 열리지 않는 상자는 없어요, 잠깐만요. ”

 

 

미셴카가 루바슈카 자락을 여미고 있던 바늘을 뽑았어요. 그리고는 상자의 자물쇠에 바늘을 집어넣고 달칵거리며 이리저리 돌렸어요. 나직하게 노래를 부르면서 계속 바늘을 돌렸어요.

 

 

금바늘 은바늘 우리 어머니의 보석바늘아, 부디 나와 다닐을 마왕으로부터 구해주렴.

 

 

미셴카가 노래를 부르자 딸그락딸그락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바늘이 옆으로 빙그르르 돌아가더니 찰카닥 하면서 자물쇠가 열렸어요. 단추가 허겁지겁 뚜껑을 열려고 하는데 시커먼 그림자가 안개처럼 내리덮이더니 천둥 같은 고함소리가 들려왔어요.

 

 

여기 있었구나! 감히 어딜 도망치려고! 이제 악마 왕국으로 가자! ”

 

 

거대한 날개를 펼친 스페호프가 기다란 팔을 뻗어 미셴카를 낚아채더니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어요. 미셴카가 비명을 질렀지만 마왕의 본모습을 드러낸 스페호프는 너무 크고 무시무시하고 힘이 세서 손아귀에 꽉 붙잡혀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어요. 단추는 소리치며 스페호프를 쫓아가려고 했지만 마왕은 점점 높이 날아올라갔어요. 미셴카가 스페호프의 손아귀에 붙들려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채 소리쳤어요.

 

 

다닐! 알을 깨뜨려요! 알을 깨뜨려요!

 

 

그제야 단추는 제정신이 들었어요. 상자 뚜껑을 활짝 열었어요. 커다랗고 새까만 알이 나타났어요. 단추는 알을 집어 들고는 목청껏 외쳤어요.

 

 

이 간악한 괴물아, 네 죽음이 여기 있다! 이제 사라져라! ”

 

 

끝없이 솟구쳐 올라가던 마왕 스페호프가 움찔했어요. 단추의 손에 들린 검은 알을 발견하고는 괴성을 지르며 쏜살같이 지상으로 하강하기 시작했어요. 마왕이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단추는 있는 힘껏 알을 땅바닥에 집어 던졌어요. 철퍽 소리와 함께 까만 알이 산산조각으로 깨졌어요. 검고 자욱한 안개가 일었어요. 마왕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곤두박질쳤어요. 굉음과 먼지구름이 일었어요. 단추가 어리벙벙해져 있는데 먼지구름과 안개 속에서 미셴카가 비틀거리며 달려와 단추를 와락 껴안았어요.

 

 

“ 다닐, 다닐... ”

 

“ 미셴카! 괜찮아요? ”

 

“ 네, 괜찮아요. 잘했어요! ”

 

“ 이제 마왕이 죽은 건가요? 이제 다 끝난 건가요? ”

 

 

미셴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안개 속에서 끔찍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온통 시커멓고 시뻘겋게 변한 마왕 스페호프가 나타났어요. 두 눈에 번쩍거리는 횃불을 켜고 기어 다니며 발톱으로 땅바닥을 마구 파헤쳤어요. 갑자기 미셴카가 비명을 질렀어요.

 

 

다닐, 도망쳐요! 마왕이 죽지 않았어요! 알이 완전히 깨지지 않았어요!

 

“ 아니에요, 미셴카! 무슨 소리에요! 제가 알을 땅바닥에 메쳤어요! 산산조각 났어요! 여기 이렇게 껍데기들이 흩어져 있잖아요! ”

 

“ 노른자를 완전히 뭉개야 죽는다고 했어요! 노른자가 저기 있어요! 다 뭉개지지 않았어요! ”

 

 

미셴카의 말이 맞았어요! 알껍데기는 산산조각 났지만 노른자가 살아 있었어요. 절반밖에 뭉개지지 않았어요. 절반은 살아서 땅바닥에 둥그렇게 모여 있었어요. 단추가 달려가 노른자를 장화로 밟아 짓이기려고 했지만 그때 스페호프가 거대한 입을 쩍 벌리더니 두 개로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노른자를 휙 쓸어서 집어삼켜버렸어요. 그리고는 부르르 떨더니 온몸에서 불꽃을 튀기며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어요. 두 배 세 배로 커지며 비늘과 가시를 마구 쏟아냈어요.

 

 

감히 날 속이다니, 이 요망한 것 같으니! 너부터 죽여 버리고 말겠다!

 

 

스페호프가 미셴카를 향해 달려들었어요. 단추가 뛰어올라 사냥칼을 휘둘렀어요. 마왕의 혀가 잘려 바닥에 툭 떨어지면서 피가 분수처럼 튀었어요. 마왕이 아픔으로 고함을 지르며 울부짖는 동안 단추는 미셴카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어요. 미셴카가 소리쳤어요.

 

 

“ 우리 성문으로 나가요, 다닐! 검은 숲으로 가요! ”

 

“ 하지만 당신은 마왕의 마법 때문에 성을 나갈 수 없다고 했잖아요! ”

 

“ 이제 나갈 수 있어요! 알껍데기가 깨졌어요! 스페호프가 마지막 남은 노른자를 먹었어요, 자신의 죽음과 한 몸이 되었어요. 마법이 약해졌어요. 어서 뛰어요, 다닐! 마왕은 검은 숲 바깥으로 나올 수 없어요! 숲만 빠져나가면 돼요! ”

 

 

그래서 단추는 미셴카와 함께 달렸어요. 숨을 몰아쉬며 달리고 또 달려 성문을 빠져나왔어요. 그러자 머리 세 개 달린 문지기 괴물이 세 개의 입을 벌리고 괴성을 질렀어요. 미셴카가 공포로 비명을 질렀지만 괴물은 단추를 알아보고 꼬리를 치며 소리쳤어요.

 

 

“ 친절한 다닐, 청어 세 마리를 주신 다닐! 아름다운 미셴카! 내 등에 타요! 숲을 빠져나가게 해 드릴게요! ”

 

 

단추와 미셴카를 등에 태운 문지기 괴물이 쿵쿵거리며 달리기 시작했어요. 어둡고 울창한 검은 숲 깊숙한 곳까지 달렸어요. 그때 굉음이 들리고 하늘이 완전히 새까매졌어요. 마왕 스페호프가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고 있었어요. 불꽃과 우박이 비 오듯 떨어졌어요. 문지기 괴물이 소리쳤어요.

 

 

“ 붙잡히겠어요! 네 발로는 두 개의 날개를 이길 수가 없어요! ”

 

“ 다닐, 어떻게 하죠? 검은 숲을 빠져나가기 전에 스페호프에게 붙잡힐 것 같아요... ”

 

 

공포에 질린 미셴카가 울면서 단추를 꼭 껴안았어요. 그러자 단추는 품 안에서 뭔가가 가슴을 쿡쿡 찌르는 것을 느끼고 손을 집어넣어 보았어요. 보석이 박힌 빗이 잡혔어요.

 

 

“ 아, 투레츠키가 그랬지! 위기에 처하면 이걸 등 뒤로 던지라고! ”

 

 

스페호프가 끼르륵 소리를 내며 내려앉으려는 찰나 단추가 등 뒤로 보석 박힌 빗을 던졌어요. 그러자 순식간에 뾰족뾰족하고 거대한 가시나무들이 쑥쑥 자라나 하늘 끝까지 치솟았어요. 가시나무 넝쿨들이 끝없이 펼쳐졌어요.

 

 

“ 달려, 문지기야! 가시나무 넝쿨이 마왕을 막아주는 동안 검은 숲을 빠져나가야 해! ”

 

 

문지기 괴물이 더욱 빠르게 질주했어요. 단추는 미셴카를 꼭 껴안고 괴물의 등에 매달렸어요.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다시 굉음이 들려왔어요. 가시나무 넝쿨들을 모조리 베어버린 마왕 스페호프가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등 뒤까지 쫓아왔어요. 불꽃과 우박이 비 오듯 떨어졌어요. 문지기 괴물이 소리쳤어요.

 

 

“ 붙잡히겠어요! 네 발로는 두 개의 날개를 이길 수가 없어요! ”

 

“ 다닐, 어떻게 하죠? 검은 숲을 빠져나가기 전에 스페호프에게 붙잡힐 것 같아요... ”

 

 

공포에 질린 미셴카가 울면서 단추를 꼭 껴안았어요. 그러자 단추는 품 안에서 뭔가가 가슴을 쿡쿡 찌르는 것을 느끼고 손을 집어넣어 보았어요. 보석마개가 박힌 물병이 잡혔어요.

 

 

“ 아, 가릭이 그랬지! 위기에 처하면 이걸 등 뒤로 던지라고! ”

 

 

스페호프가 끼르륵 소리를 내며 내려앉으려는 찰나 단추가 등 뒤로 보석 마개 박힌 물병을 던졌어요. 그러자 순식간에 거대한 호수가 나타나 그들과 마왕 사이를 가로막았어요. 거친 파도와 소용돌이가 집채보다 높게 일었어요.

 

 

“ 달려, 문지기야! 호수와 파도가 마왕을 막아주는 동안 검은 숲을 빠져나가야 해! ”

 

 

문지기 괴물이 더욱 빠르게 질주했어요. 단추는 미셴카를 꼭 껴안고 괴물의 등에 매달렸어요.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다시 굉음이 들려왔어요. 호수의 물을 모조리 마셔버린 마왕 스페호프가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등 뒤까지 쫓아왔어요. 불꽃과 우박이 비 오듯 떨어졌어요. 문지기 괴물이 소리쳤어요.

 

 

“ 붙잡히겠어요! 네 발로는 두 개의 날개를 이길 수가 없어요! ”

 

아니에요, 조금만 더 달려요! 검은 숲이 끝나가고 있어요! 저 앞에 빛이 보여요! 숲이 끝나가고 있어요!

 

 

미셴카가 저 너머에서 스며들어오는 황금빛 햇살을 가리키며 소리쳤어요. 하지만 문지기 괴물은 땀과 거품을 토해내며 그만 주저앉고 말았어요.

 

 

“ 나는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어요, 친절한 다닐, 아름다운 미셴카! 멈추면 마왕에게 잡힐 거예요. 빨리 뛰어요! 빨리 뛰어서 숲을 빠져나가요! ”

 

 

그래서 단추와 미셴카는 문지기 괴물의 등에서 뛰어내렸어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검은 숲의 나무들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햇살을 향해 달렸어요. 그러나 그 순간 마왕 스페호프가 검은 안개와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채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내려앉았어요. 입을 쩍 벌리며 잘려나간 혀 너머로 목구멍을 울려대며 소리쳤어요.

 

 

어딜 가려고! 하잘 것 없는 인간 따위가 감히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단추는 사냥칼을 뽑아들려고 했지만 이미 마왕의 혀를 베느라고 내던져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무기가 없었어요. 당황한 단추가 허리춤을 뒤지는 순간 스페호프가 갈고리 같은 발톱을 모두 세우고 단추를 향해 쏜살같이 돌진해 왔어요. 미셴카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어요.

 

 

“ 다닐! 안돼요! ”

 

 

그리고는 미셴카가 마왕과 단추 사이로 몸을 내던졌어요. 두 팔로 단추를 꼭 껴안고 땅바닥에 나뒹굴었어요. 검은 안개와 시뻘건 불길이 일었고 비늘과 우박이 마구 쏟아졌어요. 단추는 데굴데굴 구르면서 미셴카를 꼭 껴안았어요. 미셴카가 몸을 부르르 떨었어요. 스페호프가 다시 입을 쩍 벌리고 덮쳐왔어요. 그때 단추는 품 안에서 뭔가가 가슴을 쿡쿡 찌르는 것을 느끼고 손을 집어넣어 보았어요. 은 목걸이가 만져졌어요.

 

 

“ 아, 보랴가 그랬지! 위기에 처하면 이걸 등 뒤로 던지라고! ”

 

 

단추는 고개를 돌린 채 등 뒤로, 발톱을 세우고 달려드는 마왕 스페호프를 향해 은 목걸이를 내던졌어요. 그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새하얗고 새파란 불기둥이 치솟았어요. 한 줄기 불기둥이 마왕 스페호프의 날개를 꿰뚫고 지나가더니 눈이 멀 것 같은 빛살이 퍼져 나왔어요. 무시무시하고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마왕 스페호프가 몸부림쳤어요. 몸을 뒤틀더니 컥컥 하고 목구멍으로부터 반쯤 뭉개진 노른자를 토해냈어요. 자신의 죽음을 토해냈어요. 단추는 미친 듯이 달려가 노른자를 발로 마구 밟아 짓이겼어요. 노른자가 완전히 뭉개질 때까지 마구 짓이겼어요. 그 순간 마왕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세 차례 토해내더니 번쩍 하는 섬광과 함께 한 줌의 재로 화했어요.

 

 

단추는 너무나 기뻤어요. 박수를 치며 펄쩍 뛰었어요. 땅바닥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미셴카를 안아 일으키며 소리쳤어요.

 

 

“ 우리가 해냈어요, 미셴카! 이제 다 끝났어요! ”

 

 

미셴카가 가냘픈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어요.

 

 

“ 다닐, 마왕이 정말 죽었나요? ”

 

“ 그래요! 노른자를 짓이겼어요! 마왕이 재로 변했어요! ”

 

“ 이제 저는 마왕에게서 풀려났나요? ”

 

“ 그래요! 당신은 이제 자유예요! ”

 

“ 고마워요, 다닐. 고마워요. ”

 

“ 이제 일어나요, 아름다운 미셴카! 검은 숲을 빠져나가요! 한 발짝만 나가면 돼요! 저랑 같이 가요! 저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요! ”

 

“ 그래요, 다닐. 사랑해요. 저에게 입 맞춰 주세요. ”

 

 

그래서 단추는 미셴카의 입술에 키스를 했어요. 그런데 미셴카는 일어나지 않았어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리고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놀란 단추는 미셴카를 껴안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어요. 그러자 미셴카의 어깨와 등과 다리에 패여 있는 끔찍한 상처가 드러났어요. 마왕 스페호프가 단추에게 달려들었을 때 미셴카가 몸을 던져 막았기 때문이었어요. 단추를 구하고 대신 마왕의 갈고리 발톱에 온몸이 찢겨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것이었어요. 단추는 울부짖었어요.

 

 

미셴카! 안돼요! 안돼요! 제발 살아나요!

 

 

하지만 미셴카는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어요. 완전히 숨이 끊어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단추의 품에 누워 있었어요. 단추는 너무나도 절망했어요. 목을 놓아 울었어요. 검은 숲의 모든 나무들이 가지를 내리고 잎사귀를 떨어뜨릴 정도로 슬피 통곡했어요.

 

 

 

 

*    *    *

 

 

 

 

 

단추는 차갑게 식은 미셴카의 이마와 입술에 키스를 하고 비처럼 눈물을 쏟으며 사흘 밤낮을 꼼짝도 하지 않고 검은 숲에 앉아 엉엉 울었어요. 세상이 무너지는 듯 무섭고 슬퍼서 울고 울고 또 울었어요.

 

 

사흘 째 되던 날 단추는 울다가 퍼뜩 흑염소의 말이 떠올랐어요.

 

 

‘ 마음씨 착한 다닐, 세상이 무너지는 듯이 무섭고 슬플 때 제 털을 꺼내서 어루만지면서 이렇게 말하세요. 흑염소야, 흑염소야, 수틀리면 들이받는 흑염소 코즐로프야. 나에게 와주렴. ’

 

 

단추는 급하게 품에서 새까맣고 윤이 나는 털을 꺼냈어요. 한 손으로 미셴카의 손을 꼭 쥐고 한 손으로 털을 어루만지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흑염소야, 흑염소야, 수틀리면 들이받는 흑염소 코즐로프야. 나에게 와주렴.

 

 

그러자 향긋한 풀 냄새와 함께 산들바람이 불어왔고 곱사등이 흑염소 코즐로프가 나타났어요. 단추에게 꾸벅 절을 했어요.

 

 

“ 오랜만이에요, 마음씨 착한 다닐. 세상 끝 왕국에서 절세미인 미셴카를 찾아내셨나요? ”

 

“ 찾아냈단다, 흑염소야. ”

 

“ 마왕 스페호프를 무찌르셨나요? ”

 

“ 무찔렀단다, 흑염소야. ”

 

“ 그러면 왜 저를 부르셨나요? 세상이 무너지는 듯 무섭고 슬퍼진 이유가 무엇인가요? ”

 

“ 어떻게 무섭고 슬프지 않을 수 있겠니, 마왕에게서 날 구해주기 위해 미셴카가 몸을 던졌단다. 가엾은 미셴카가 죽고 말았단다. 죽은 마왕이 미셴카의 혼을 데리고 지옥으로 함께 가버리고 말았단다. ”

 

“ 그럴 리가요, 마음씨 착한 다닐. 죽어버린 악마는 인간의 순수한 영혼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답니다. 자, 미셴카를 안고 일어나세요. 저를 따라 한 발짝만 걸어 나오세요. 여기는 악마의 법도가 지배하는 검은 숲이랍니다. 숲에서 빠져나오세요. ”

 

 

그래서 단추는 차갑게 굳어버린 미셴카의 시체를 안고 일어나 비틀거리며 한 발짝 나아갔어요. 검은 숲에서 빠져나왔어요. 그 순간 그의 뒤에서 거대한 문이 닫히듯 안개가 내리덮였고 숲이 사라졌어요. 그들은 축축하게 젖은 검은 흙이 깔려 있고 푸른 잔디가 피어오른 따스한 언덕 위에 있었어요. 하지만 미셴카는 여전히 차갑게 굳고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숨이 끊어진 채 단추의 품에 안겨 있었어요. 흑염소가 다정하게 말했어요.

 

 

“ 이제 미셴카를 내려놓으세요, 마음씨 착한 다닐. ”

 

싫어, 그럴 수 없어. 미셴카를 내 품에서 떠나보낼 수 없어! 땅에 묻지 않을 거야!

 

 

단추가 고개를 저으며 흐느껴 울었어요.

 

 

“ 떠나보내려는 것이 아니에요. 미셴카를 당신에게 돌려드릴 거예요. 어머니 대지의 품에 절세미인 미셴카를 뉘어 주세요. ”

 

 

그래서 단추는 축축하게 젖은 검은 흙 위로 부드러운 푸른 잔디가 피어오른 언덕 위에, 어머니 대지의 품에 미셴카의 몸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어요. 그러자 곱사등이 흑염소 코즐로프가 미셴카의 코와 입술에 입김을 불었어요. 그리고 노래를 불렀어요.

 

 

생명이여 돌아오너라, 어머니 대지의 품에 안긴 미셴카의 몸으로.

혼이여 돌아오너라, 어머니 대지의 품에 안긴 미셴카의 가슴으로.

 

 

 

황금빛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어요. 따스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어요. 미셴카가 몸을 꿈틀거리더니 눈을 떴어요. 길고도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어요. 그리고 단추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어요. 단추는 너무나도 행복했어요. 미셴카를 일으켜 주었고 두 팔로 꼭 껴안았어요.

 

 

“ 이제 모든 게 다 끝났어요, 아름다운 미셴카! 마왕은 죽었고 마법도 사라졌어요. 당신은 자유예요. 이제 저와 함께 가요. 세 명의 누이들을 보러 세 개의 왕국으로 가요. 저와 함께 어디든 가요. 저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요. 귀여운 아기들도 낳고 언제까지나 함께 행복하게 살아요. ”

 

 

단추가 기쁨에 겨워 청혼을 했어요. 그런데 죽음에서 돌아온 미셴카는 단추의 품에 안겨 행복해하다가 갑자기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어요. 눈을 내리깔더니 고개를 돌렸어요. 놀란 단추가 물었어요.

 

 

“ 아니, 왜 그러시나요, 아름다운 미셴카? 제가 혹시라도 잘못한 게 있나요?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나요? ”

 

아니에요, 다닐. 그게 아니에요.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제 모든 것을 전부 내줄 수 있을 만큼 사랑해요. 하지만 저는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

 

“ 아니, 왜요? 왜 저와 결혼할 수 없나요? 당신은 귀족이고 저는 평민이기 때문인가요?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인이고 저는 하잘 것 없는 사냥꾼이기 때문인가요? ”

 

“ 아니에요, 다닐. 당신은 귀여운 아기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자고 했어요. 저는 당신이 다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

 

“ 무엇을요? 제가 무엇을 다 알고 있는 줄 아셨나요? ”

 

“ 저는 여인이 아니에요, 다닐. 저는 당신과 같은 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어요. 저는 남자예요. ”

 

 

단추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어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미셴카를 멍하게 쳐다보았어요. 미셴카가 갈기갈기 찢어진 루바슈카를 걷어 올려 아직도 마왕의 발톱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맨가슴을 보여 주었어요. 아무런 융기도 없이, 미끈하고 평평하게 뻗어 내린 눈처럼 하얀 몸을 보여주었어요. 단추는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고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돌렸어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어요.

 

 

“ 왜 그런 거예요? 왜 저를 속였나요? ”

 

“ 저는 속인 적이 없어요, 다닐. 전 당신이 아는 줄 알았어요. ”

 

“ 전 몰랐어요. 어떻게 알았겠어요! 당신이 이토록 아름답고 사랑스러운데 어떻게 남자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어요! ”

 

“ 사흘 밤 내내 스페호프가 저에게 왔었잖아요. 밤새 저를 안았어요. 옷장 속에서 저와 스페호프가 밤을 보내는 것을 두 눈으로 보지 않으셨나요? 제가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셨나요? ”

 

“ 아니요, 전 보지 않았어요. 확인하지 않았어요. 그 악독한 마왕이 당신을 괴롭히는 것을 차마 두 눈으로 볼 수가 없었어요. 등을 돌리고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었어요. 하느님 맙소사...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전 당신을 여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여인이라 생각하고 사랑에 빠졌어요. 그런데 당신은 저를 속였어요!

 

 

단추는 놀라고 절망한 나머지 미셴카를 떠밀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어요. 탄식하며 흐느끼고 있는데 곱사등이 흑염소가 곁으로 다가와서 물었어요.

 

 

“ 왜 그렇게 울고 있나요, 마음씨 착한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를 당신의 품으로 돌려드렸는데 무엇이 또 그렇게 슬퍼서 울고 있나요? ”

 

흑염소야, 흑염소야. 너는 나를 속였어! 이 모든 게 다 너 때문이야! 넌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를 얻게 해주겠다고 했어. 너의 말을 믿고 누이들을 시집보내고 세상 끝 왕국까지 와서 마왕을 무찔렀어. 아름다운 미셴카를 구했어. 그런데 미셴카는 여자가 아니었어! 나와 같은 남자였어! 너는 나를 속였어! 미셴카도 나를 속였어! ”

 

“ 아니에요, 다닐. 그렇지 않아요. 저는 당신을 속인 적이 없어요. 저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고 했어요. 여자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아름다운 미셴카도 당신에게 자기가 여자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당신 혼자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에요. ”

 

“ 하지만 분명히 너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고 했잖아! ”

 

“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아름다운 미셴카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인이에요. 세상의 시작으로부터 끝까지, 저 사람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영영 없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인을 얻게 해드렸어요. 아름다움은 불공평한 것이며 칼날처럼 내리치는 무기이며 이성으로 재단할 수도 없고 세상의 질서로 규정할 수도 없어요. 당신은 어찌 저런 아름다움을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려고 하시나요? 설령 미셴카가 마왕의 발톱에 상처를 입어 늙고 더러워지고 추해졌다 하더라도 그는 어머니 대지 위에서 영원히 아름답게 남을 거예요. 그가 당신을 향한 무한한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던졌기 때문이죠. 그런데 당신은 오로지 미셴카가 여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등을 돌리려고 하는군요. 정녕 당신은 아름다운 미셴카를 사랑한 적이 없다는 말인가요? ”

 

 

단추는 뭐라고 항의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어요. 갑자기 가슴이 찌르는 듯 아파왔어요. 심장이 너무나도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단추가 물었어요.

 

 

“ 흑염소야, 흑염소야. 왜 이렇게 심장이 아픈 걸까? 마왕의 발톱에 상처를 입었던 건 아름다운 미셴카인데 왜 내 심장이 이렇게 아픈 걸까? ”

 

“ 글쎄요, 다닐. 그건 아름다운 미셴카가 당신을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이겠죠. 지금도 당신 때문에 심장에서 피를 흘리고 있기 때문이겠죠. ”

 

 

단추는 흙을 털고 일어났어요.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갔어요. 미셴카가 나무 그늘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었어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흐느껴 울고 있었어요. 검은 흙과 푸른 잔디 위로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세상이 끝난 듯 슬피 울고 있었어요. 단추는 무릎을 꿇었어요. 미셴카를 꼭 껴안았어요.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뺨에 입을 맞췄어요. 미셴카가 고개를 들어 단추를 바라보았어요. 울어서 새빨개진 눈으로 단추를 보면서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목소리를 짜내서 물었어요.

 

 

“ 왜 오셨나요, 다닐? ”

 

“ 당신과 함께 세상 어디든 가려고요. ”

 

“ 저랑 결혼할 수 없는데도요? 귀여운 아기들을 낳을 수 없는데도요? 저는 여인이 아니라 당신과 같은 몸인데도요? ”

 

상관없어요. 저는 당신과 함께 갈 거예요. 언제까지나 같이 있을 거예요. ”

 

“ 어쩌면 제가 당신과 함께 가지 않을지도 모르잖아요. ”

 

“ 함께 가 주세요, 아름다운 미셴카.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저와 함께 있어요. 언제까지나. ”

 

 

아름다운 미셴카가 손등으로 눈물을 쓱쓱 닦더니 활짝 웃었어요. 그래서 단추는 미셴카를 더욱 꼭 끌어안았고 입술에 키스를 했어요. 오래오래 키스를 했어요. 그리고 둘은 손을 꼭 잡고 함께 언덕을 걸어 내려갔어요.

 

 

 

 

 

FIN

- 2015. 6. 20 ~ 6. 23 -

 

 

 

..

 

 

이렇게 민담 패러디가 끝났습니다~

 

..

 

끝까지 민담 스타일로 갔다면 아이를 낳고 수염 사이로 술이 줄줄 흐를 때까지 잔치를 즐기는 걸로 끝났겠지만.. 그래도 이건 서무 시리즈에서 나왔으니까 마지막은 내 맘대로 바꿨음 :)

 

그리고 투레츠키의 개방 왕국은 전에 올린 에피소드 댓글에서 단추팬클럽분들과 얘기 나눈 무협외전 아이디어를 조금 집어 넣었다 :)

 

..

 

그럼 다음 이야기는 다시 서무 에피소드로...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본편의 패러디이자 장난거리로 시작했던 서무 시리즈가 이제 벌써 26편...

 

사실 0편이 있으므로 총 27편에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까지 하면 28편이나 된다... 게다가 며칠 전 번외편으로 러시아 민담 패러디를 하나 더 썼음. 음... 본편은 정말 언제 쓰지.. 본편은 겨우 100페이지 밖에 못 썼는데 ㅠㅠ 하여튼 힘빼고 놀면서 써야 술술 쓸 수 있긴 하다만... 본편은 그게 잘 안 되니 문제임.

 

하여튼 26편은 우리의 단추청년 베르닌의 과거를 좀 들춰보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과거 시점으로 서술되는 건 아니고... 단추에게도 꽃피는 봄날이 있긴 있었을까 ㅠㅠ

 

 

* 초반부에 나오는 '돌마'는 다진 고기와 야채를 포도 잎사귀에 돌돌 말아 쪄낸 일종의 고기 롤이다. 보통은 양배추로 말아서 만드는 롤인데(이건 여러 나라에서 다 먹는다) 양배추 롤은 '작은 비둘기'란 뜻의 '골룹츠이'라고 불린다. 나도 골룹츠이만 먹어보고 돌마는 안 먹어봄.

 

* 올랴, 올루슈카는 모두 올가의 애칭. 사셴카는 알렉산드라의 애칭이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언제나처럼 바쁘게 일하는 와중에 베르닌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그리고 다닐 베르닌은 추억과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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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6 

 

 

 

서무의 슬픔

- 베르닌의 옛 여인 -

 

 

 

 

 

 

그 날도 베르닌은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왕재수의 감시를 위해 오후마다 극장에 가는 것까지는 좋은데 일이 너무 밀려서 오전에는 정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발따예프가 소리를 쳤다.

 

 

“ 다닐, 전화 좀 받게! 자네 찾는 전화야! ”

 

“ 어, 예. 누구인가요? ”

 

“ 몰라, 무슨 올가가 어떻고 하는데. ”

 

“ 엥, 그게 누구지? 업무 담당자들 중엔 그런 이름 없는데. ”

 

 

베르닌은 전화를 받았다.

 

 

“ 예, 다닐 베르닌입니다. ”

 

“ 다냐, 나야. ”

 

“ 나라고요? 누구신가요? ”

 

“ 나라니까, 올가. ”

 

“ 그러니까 올가가 누구신지... ”

 

“ 어머, 너 일부러 그러는 거니? 아니면 진짜 날 완전히 잊어버린 거야? 나 말이야, 올랴! 올가 유스코바. ”

 

 

베르닌은 하마터면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 했다.

 

 

“ 뭐? 어... 아... 올가... 그 올가... 저... 올랴. 안녕. 저, 미안. 잊어버린 게 아니고 너무 오랜만이라 목소리를 못 알아들었어. ”

 

“ 하긴, 벌써 2년이 훨씬 넘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

 

 

베르닌은 갑자기 입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꽉 막히는 목을 가다듬으며 웅얼거리듯 물었다.

 

 

“ 근데 어떻게 여기 번호는 알고 전화했어? ”

 

“ 예전에 네가 알려줬잖아. 야근하니까 못 나온다고 그냥 전화로 얘기하자고. 근데 번호는 똑같네. ”

 

아니, 그거 현관 대표번호였어... 민간인한테 우리 직통 번호는 못 알려주거든. ”

 

“ 흠, 너 여전하구나. ”

 

“ 어, 저... 올가... ”

 

 

잠시 베르닌은 올랴라고 불러야 할지 올가라고 불러야 할지 헷갈렸다. 하긴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그때 이후로 연락 한 번도 안 했잖아. ”

 

“ 너 오늘 저녁에 시간 있니? 오랜만에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밥 같이 먹으면 더 좋고. ”

 

“ 아, 어... 저... 왜? ”

 

“ 꼭 이유가 있어야 되니? ”

 

“ 아니, 그게... 저... 우리는, 그러니까... 그때... ”

 

“ 나한테 중요한 일이 생겼는데 널 꼭 보고 싶어서 그래. 다냐, 안되겠니? 너 설마 아직도 나 보는 게 불편한 거야? ”

 

“ 어, 그런 게 아니고... 아니야. 저녁에 잠깐 보자. 어디로 가면 되니? ”

 

“ 난 직장이 천사 공원 쪽인데 너네 사무실은 신시가지 쪽이지? 넌 야근할 테니까 내가 그쪽으로 가야겠네. ”

 

“ 아니야, 나 요즘 오후엔 구시가지 쪽에서 업무 보고 있어. 천사 공원이면 가까우니까 그쪽으로 갈게. 6시까지 갈까? ”

 

“ 어머, 웬일로 네가 그렇게 이른 시간을 잡니. 또 그러다가 미루는 거 아니야? ”

 

“ 아니야, 맞춰서 갈 수 있어. 공원에서 6시에 보자. ”

 

“ 그래, 다냐. 있다가 봐. ”

 

 

전화를 끊고 난 후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    *    *

 

 

 

 

오후에 그는 극장으로 갔다. 왕재수는 그야말로 회오리처럼 연습실을 누비고 다녔다. 신작 공연이 보름 정도밖에 안 남았기 때문에 무용수들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탈탈 털고 있었다. 그 와중에 원래 일정에 따른 공연들도 꾸준히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도 챙기고 있었고 오디션으로 발굴한 2군, 3군 무용수들을 연습시키랴 교정해주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심지어 그렇게 바쁘면서도 스네고로드에서 데려온 나쟈를 일주일에 한 번씩 극장으로 불러와서 직접 지도를 하고 있었다!

 

 

베르닌은 극장에 도착하자마자 왕재수의 비서인 류드밀라에게 들러서 요즘 항상 던지는 질문을 했다.

 

 

“ 걔 점심 먹었어요? ”

 

“ 오늘은 먹었어요. 토냐네 어머니랑 할머니가 감독님 찾아왔거든요. 지난번에 화재 났을 때 토냐 구해준 거 고맙다고 맛있는 걸 바리바리 채운 바구니를 네 개나 들고 오셨더라고요. 그래서 다 같이 나눠먹었어요. ”

 

“ 아, 그랬구나. 토냐는 좀 어때요? 그때 다리 좀 다쳤잖아요. ”

 

“ 많이 좋아졌어요. 다음 주에는 복귀할 수 있을 것 같대요. ”

 

“ 진짜 다행이네요. ”

 

 

베르닌은 연습실로 갔다. 신작 연습이 아직 한창이었다. 왕재수가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를 섞어가며 무용수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베르닌은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시절이 생각났고 다시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잠깐 아쉬워했다. 잠시 후 왕재수가 30분 휴식을 선언했다. 무용수들이 땀을 닦으며 물을 마시고 연습실 구석에 있는 바구니에서 초콜릿 바를 꺼내 먹었다. 베르닌은 오면서 사온 치즈 오이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를 들고 가서 왕재수에게 내밀었다.

 

 

“ 야, 먹어. ”

 

“ 나 배부른데. 아까 점심 많이 먹었어. 토냐 어머니가... ”

 

“ 그래도 먹어둬! 방금까지 소리 지르고 발 탕탕 구른 것만으로도 배 다 꺼졌겠다! ”

 

“ 아유 지겨워. ”

 

 

그래도 왕재수는 치즈 샌드위치를 받았다. 절반을 베르닌에게 주고 반만 먹었지만 주스는 다 마셨다. 무용수들은 거의가 나가고 없었다. 아마 차이카에 가서 숨을 돌리고 뭘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 나 오늘 저녁에 약속 생겼어. 너 오늘은 발레 공연 없잖아. 저녁밥 못 챙겨주니까 바이올린 아저씨랑 먹어. ”

 

“ 에이, 웬 약속... 로만은 오늘 오페라 공연 때문에 늦게 끝나는데. 할 수 없네, 굶어야지. ”

 

“ 야! 내가 안 챙겨준다고 저녁 굶으면 어떡해! ”

 

“ 저녁 한 끼 굶는다고 큰일이라도 생기냐? ”

 

생겨! 너는 생긴다고! 의사 선생님한테 이를 거야! 바이올린 아저씨한테도 얘기할 거야! 바퀴벌레 곱등이 뱀...

 

“ 이제 그거 안 통해! 너도 이제 뱀 못 주워와! 뱀 이제 겨울잠에서 다 깼어! 숲에서 막 꾸물거리면서 기어 다니고 돌아다녀! 낼름낼름... 으앙... ”

 

 

왕재수는 기세 좋게 소리치다가 갑자기 뱀이 날름거리는 모습이 상상됐는지 제풀에 소스라치면서 울먹거렸다. 아무리 잘난 척해도 역시 뱀은 무서운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왕재수를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눈물이 글썽글썽한 얼굴을 보고 극장 감독의 체면을 생각해서 꾹 참았다.

 

 

“ 알았어, 뱀 안 주워올 테니까 밥은 꼭 먹어야 돼. 혼자라도 보랴네 식당에 가서 먹으면 되잖아. ”

 

“ 그 식당 저녁에 가면 사람 많단 말이야. 가뜩이나 며칠 전에 보랴가 요리대회 상 받아서 손님 더 터져나가. 그리고 너도 없으니까 오늘은 남아서 일하다가 로만이랑 같이 들어갈래. ”

 

“ 그러면 내가 보랴한테 전화해서 음식 좀 준비해달라고 할게. 약속은 6시니까 그 전에 내가 가서 포장해 갖다 주면 되잖아. 뭐 먹고 싶니? ”

 

“ 됐어. 나 그냥 토냐 어머니가 준 바구니에서 꺼내먹을게. 아직 이것저것 남았어. 무슨 햄도 직접 훈제해서 만들었다고 하고 도넛도 있고 말린 과일이랑 치킨 샐러드도 남았어. 그거 먹을 테니까 그냥 약속에나 가라. ”

 

“ 아직 시간 있어. 에휴, 그냥 가지 말까... ”

 

“ 왜? 무슨 약속인데? ”

 

어, 그게... 걘 왜 갑자기 나한테 전화를 한 걸까... 벌써 2년도 넘었는데. 별로 좋게 헤어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전화해서 저녁에 보자고 하잖아. ”

 

“ 뭐, 옛날 애인이라도 되냐? ”

 

“ 어... 좀... ”

 

“ 그래도 애인이 있긴 있었구나. 로만이 전에 걱정하던데. 너 모태솔로 아니냐고. 나보고 발레리나들 소개 좀 시켜주라고 하더라고. ”

 

뭐가 모태솔로야! 진짜 그 바이올린 아저씬 저번에도 그러더니... 아니야! 나도 여자 친구 있었어! 나도 남잔데! 어휴, 정말... ”

 

“ 누가 너 남자 아니래? 근데 너 하도 책상물림에 여자 앞에 가면 버벅거리고... 저번에도 나타샤 온다고 해서 꾸며줬는데 굴러들어온 복도 걷어차고. 나 여기 온지 벌써 반년도 넘었는데 그 동안 너 여자랑 데이트 한번 안 했잖아. 주변에 여자들도 없고.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의심이 들지. ”

 

야! 다 너처럼 문어발 연애를 하는 줄 아니! 누가 그렇게 꾸준히 계속 옆에 애인이 있냐! 그것도 너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보통 사람은 연애를 했다가 안 했다가 한다고... 그나마도 잘 안 풀리는 경우도 많아! 그리고, 그리고... 너 알잖아. 난 서무인 거! 게다가 너 감시도 해야 하니까 엄청 엄청 바쁘고... 그래서 여자 사귈 시간은 하나도 없고... 흑... ”

 

 

새삼 서러워진 베르닌이 훌쩍거리자 왕재수가 당황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 촌스럽게 왜 또 징징대는 거야. 알았어, 내가 몰라서 그랬어. 모태솔로 아니고 여자 친구 있었던 거면 다행이네 뭐. 여자야 또 생기겠지. 근데 그 옛날 여자가 갑자기 만나자고 한 거야? ”

 

“ 응. 근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나 진짜 일방적으로 차였거든. ”

 

“ 왜? 역시 너 키스 솜씨가 형편없어서...

 

야! 네가 나 뽀뽀하는 거 본 적이나 있어? 아무 것도 모르면서!!!! ”

 

“ 본 적 없으니까 지금까지의 행태로 판단하는 거지! 그리고 나 이런 쪽 아주 정확하거든! 대충 스타일이랑 골격구조랑 행동 패턴 보면 견적 나온단 말이야! 내가 여태 밤을 불태운 남자들이 몇인데... ”

 

난 남자랑 불태우지 않거든요!!!!

 

“ 여기서 중요한 건 상대가 남자니 여자니 하는 게 아니고 네가 뽀뽀를 잘 못할 거 같다는 거라고! ”

 

“ 우씨, 너 그렇게 나 무시할 거야! 어휴... 내가 아무리 올랴한테 그렇게 차였지만 뽀뽀 못해서 찼다는 말은 안 들었단 말이야! ”

 

“ 그럼 여자가 헤어지는 마당에 뽀뽀 못하니 어쩌니 그런 말을 하겠냐. 근데 그 여자 이름이 올랴야? ”

 

“ 응. ”

 

“ 뭐하는 여잔데? 왜 차였어? 뽀뽀 못하는 거 아니면 이유가 뭘까? ”

 

 

왕재수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베르닌은 부아가 치밀었다.

 

 

“ 야! 넌 내 불행이 재밌냐! 여자한테 차였던 과거 얘기가 그렇게 듣고 싶냐고! 넌 우주 최고 꽃미남이니 뭐니 해서 차여본 적이 없으니 그런 슬픔 따윈 모르겠지! ”

 

“ 글쎄. 난 그렇게 대놓고 누구랑 사귀고 차고 그런 적이 별로 없어서. 그냥 자유로운 영혼이라. ”

 

“ 너 바이올린 아저씨랑 사귀잖아! 로만이 너 차면 안 슬프겠냐! 전에도 체육대회 때 그 아저씨한테 차인 줄 알고 울고불고 해놓고! ”

 

“ 아... 맞아. 흑... 그때 너무 속상했어. 엉엉... 로만은 그때 좀 너무했어. 나 버리는 줄 알고 너무 슬펐어. 엉엉... 로만이 이러다가 나 싫증났다고 차면 어떡하지? 더 어리고 더 날씬한 애 나타났다고 나 버리면... 으앙... ”

 

 

갑자기 왕재수가 바들바들 떨더니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냥 놔뒀다간 또 울음보가 터질 게 뻔했으므로 베르닌은 급하게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랬다.

 

 

“ 아니야, 내가 농담한 거야. 그 아저씨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전에 너 독사과 먹고 아팠을 때도 진짜 괴로워했어. 다이어트 안 해도 된다고, 사과파이 두 판 먹어도 괜찮다고 했어. 울지 마. ”

 

“ 로만이 나 버리면, 엉엉... 가뜩이나 시골이라 좋은 거 하나도 없는데 꼭 안아주는 로만까지 없으면... 어헝... ”

 

“ 야! 여자한테 차인 것도 나고 그 여자 만나러 가야 하는 것도 난데 왜 네가 울고 난리야! 어휴... 맨날 바이올린 아저씨 품에 안겨서 귀염 받고 희희낙락하는 놈이... 난 누구랑 뽀뽀해 본 게 언젠지도 모르겠다! ”

 

“ 그러니까 역시 그 올랴란 여자랑 뽀뽀도 제대로 못하고 차인 거구나... ”

 

“ 아니야! 뽀뽀까진 했어!! 근데 망할 놈의 국장 때문에 진도도 더 못 나가고 결국 뻥 차였다고. 에이... 그리고 나서는 너무 바빠서 여자 만날 시간도 없고... 인기도 더 없어지고... 아... ”

 

 

베르닌은 갑자기 자기 신세가 서러워서 한숨을 푹푹 쉬었다. 왕재수가 울던 것도 잊어버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왜? 국장이 네 연애를 방해한 거야? 그래서 깨진 거야? ”

 

“ 응. 그게... 요원 연수받고 여기로 발령을 받았는데, 출근 며칠 전에 고등학교 동창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라면서 올랴를 소개해줬거든. 예쁘고 귀여워서 딱 내 타입이었어. 올랴도 나 싫지 않은 눈치여서 사흘 쯤 만나보다가 사귀기로 했거든.

근데 그러고 나서 곧장 내가 출근을 하게 됐는데... 알잖아! 우리 국장! 가뜩이나 나 들들 볶는데 그땐 더 심했거든. 신입이라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교육하고 설교하고 밤에는 계속 환영회에 술 파티에... 끝나면 도로 들어가서 일하게 만들고... 맨날 KGB 요원이 갖춰야 할 자세에 대한 설교에 서무의 역할에 대한 강의... 정말 꼬박 일주일 동안은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어. 주말에는 쉬려나 싶었는데 신입이니까 국장이랑 간부들이 주최하는 무슨 등산 모임에 따라와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새벽부터 산에도 가고, 뒤풀이한다고 낮술 먹고 계속 설교 듣고... 그리고는 쌓여 있는 서류철과 영수증 정리가 필요하니 월요일 오전까지 해치우라는 거야. 그래서 산에 갔다가 곧장 사무실로 가서 주말 내내 밤새고 영수증 정리하고... 올랴랑 데이트하기로 했던 건 다 물거품 되고.

올랴는 매일 전화해서 오늘은 만날 수 있느냐고 묻는데 난 일 때문에 안 된다고밖에 못하고... 다음날로 약속 미뤘다가 또 취소하고. 2주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될 거 같은 거야. 올랴도 너무 보고 싶고. 그래서 금요일 저녁에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하고 걔가 일하는 동네로 갔거든. 미안하니까 꽃도 사들고 갔는데... 올랴가 보자마자 날 찼어. 나 같은 남자 질린대. KGB랍시고 생색내는 거냐면서 그렇게 일만 하는 남자 재수 없대.

 

“ 으응, 그랬구나. ”

 

 

왕재수가 측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푸념했다.

 

 

“ 그러니까 다 국장 때문이야. 그 날도 올랴한테 차이고 너무 충격 받아서 보드카 병나발이라도 불려고 했는데 쌓아놓고 온 일 때문에 도로 사무실 기어들어가서 또 주말까지 야근하고... 그리고는 2년 반 동안 계속 들들 볶이고 서무 노릇하면서 과로에 시달리느라 다른 여자 만나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됐다고! 어쩌다 누가 여자를 소개해줘도 일 때문에 약속을 잡을 수도 없고 툭하면 취소되고... 흑흑... ”

 

음, 근데 올랴가 널 찼던 건 정말 뽀뽀 솜씨가 별로여서 그런 건 아닐까? ”

 

야! 너 진짜!

 

아니면 뽀뽀 다음에 아무 진도도 못 나가서 여자가 열 받았던 걸지도... ”

 

“ 으윽, 네 머릿속엔 맨날 그런 생각밖에 없냐! 남녀가 만나서 연애를 한다고 다 곧장 침대로 직행하는 건 아니라고!! ”

 

“ 2주 넘게 만났는데 아무 진도도 없었으면 그게 연애야? 그냥 탐색하는 거지. ”

 

그러니까 너는 모든 연애 = 잠자리라고 생각하잖아! 그거 아니란 말이야! ”

 

“ 그래? 그럼 연애가 뭔데? 나 그런 거 잘 몰라. ”

 

 

왕재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장난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베르닌은 머리가 아팠다.

 

 

“ 뭐긴 뭐야! 서로의 신뢰를 얻는 과정이지!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고... 그게 선결돼서 마음이 깊어져야 관계도 진전되고... ”

 

“ 어... 관계가 진전된다는 게 같이 잔다는 뜻인 거지? ”

 

“ 하여튼, 그런 것도 포함해서... ”

 

“ 그런가. 첫눈에 맘에 들면 그 자리에서 끌어안고 뒹굴 수도... ”

 

“ 으윽, 그러니까 다 너 같은 게 아니라고!! 평범한 사람들은 안 그래! ”

 

“ 아휴 어려워. 하여튼 알았어! 옛날 여자 만나러 가게 돼서 나 저녁 못 차려준다는 거잖아. 잘 다녀오렴! 혹시 아냐, 그 올랴라는 여자가 앨범이라도 보다가 갑자기 옛 생각이 나면서 그러고 보니 그 다닐이라는 남자가 괜찮았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며 후회하고... 요즘 애인도 없고 옆구리도 시리니까 한번 연락해볼까 했던 걸 수도 있잖아. 나쁠 거 없으니 한숨 쉬지 말고 가서 잘 해봐! 혹시 여자가 키스를 원하는 것 같으면 잘 좀 해보고! 다짜고짜 입술만 갖다 비비면 안 돼! 분위기를 잘 맞춰서... ”

 

 

베르닌은 이 녀석의 연애에 대한 얘기는 절대로 100% 전부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    *    *

 

 

 

 

베르닌은 약속 시간보다 10분 먼저 공원에 도착했다. 점점 해가 길어지고는 있었지만 아직 3월이라 이미 석양이 내린 후였다. 그래도 날씨는 좀 풀렸기 때문에 공원에는 산책하는 사람들도 많고 학생들도 많았다. 한가운데에 있는 분수와 천사 조각상을 보니 맨 처음 올랴와 만났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그들은 천사상 아래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브릴로프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지만 자꾸만 머리가 어지러웠고 가슴이 심하게 방망이질쳤다.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사 후 업무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된 데이트 한 번 해본 적이 없고 사실 학창 시절에도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타입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예전의 다닐 베르닌은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자를 보면 금세 마음을 빼앗기곤 했었다. 그리고는 심장이 뛰고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더듬거리는 등 숙맥처럼 행동했다. 여자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엄두도 못 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올랴도 딱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갈색의 긴 머리, 살짝 통통하면서도 볼륨 있는 몸매에 여성스러운 원피스를 즐겨 입었다. 첫눈에 가슴이 뛰었지만 언제나처럼 말을 더듬거리고 속내를 고백하지도 못했는데 다행히 그들을 소개시켜준 친구가 중간에서 열심히 노력해준 덕분에 사흘 만에 사귀기로 한 것이었다. 베르닌의 인생에서 그렇게 빨리 여자와 사귀게 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긴 그래서 그렇게 빨리 차인 걸지도 모르지만.

 

올랴와는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사귀고 헤어진 거라서 아직도 그녀를 생각하면 머리가 멍해지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사실 상처를 입었다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 찼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고 그나마 야근 때문에 제대로 만난 건 며칠 되지도 않았다. 심지어 베르닌은 그때 자기가 사랑에 빠졌던 건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게 너무 빨랐고 관계가 진전되기도 전에 아무런 준비조차 없이 모든 게 끝나버린 것이다. 마음을 정리할 겨를도 없었고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도 헷갈렸다. 사실 그때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멍해졌다가 이어진 야근과 스페호프의 무시무시한 압박 때문에 올랴에 대해서는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혹은 그렇게 차였다는 충격 때문에 회피 모드에 들어갔던 것인지도 몰랐다.

 

 

‘ 근데 올랴는 왜 갑자기 날 보려고 하는 걸까? ’

 

 

베르닌은 하루 종일 그 질문을 백 번도 넘게 한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올랴의 목소리는 약간 긴장된 것 같기도 했고 살짝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베르닌은 올랴와 사귀었던 짧은 기간 동안 그런 음성을 딱 한번 들어봤다. 그건 친구의 도움으로 사흘 만에 사귀게 되어 처음으로 올랴가 이런 말을 했을 때였다.

 

 

“ 다냐, 너 좀 귀여운 거 같아. 이제 사귀는 거니까 매일 만나. ”

 

 

잠시 베르닌은 눈을 감고 가슴을 진정시켰다. 분명히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를 생각하니 이상하게 다시 가슴이 뛰었다.

 

 

‘ 어, 이상하네. 내가 아직 올랴를 못 잊었나? 근데 내가 그렇게까지 걜 좋아했던 거 같지도 않은데. 그냥 충격만 좀 받았던 건데. 근데 올랴는 왜 그때랑 비슷한 말투로 전화를 했을까? 설마 그 자식 말대로 올랴가 갑자기 내가 그리워진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누구처럼 무슨 꽃미남도 아니고 올랴한테 잘해준 것도 하나도 없고 맨날맨날 약속 펑크 내고 일만 하고 책상물림 짓만 했는데. 대체 무슨 일일까? 혹시 가족 중 누가 KGB 쪽에 입사를 하나? 아니면 체포됐나? ’

 

 

아무래도 마지막 가정이 제일 현실적인 것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최근 체포자 명단과 주요 감시 대상자들에 대해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하지만 가브릴로프는 평화로운 시골 동네였기 때문에 최근의 체포자 명단이라 해봤자 술 마시고 행패부린 남자 몇 명밖에 없었다. 주요 감시 대상자 1순위는 왕재수였고 나머지는 급진주의 서클 청년들 몇몇 뿐이었다. 혹시 그 서클에 올랴의 가족이나 지인이 있나 싶기도 했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또각또각 소리가 들리더니 뒤에서 누가 그의 어깨를 살짝 쳤다. 그리고 낯익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냐? ”

 

 

베르닌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올랴가 서 있었다. 금방 올 거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베르닌은 하마터면 침을 잘못 삼켜 기침을 할 뻔 했다.

 

 

“ 어... 올랴, 안녕. 빨리 왔구나. ”

 

“ 6시 정각인걸. 네가 의외네, 항상 늦었잖아. 많이 기다렸어? ”

 

“ 아니야, 나도 방금 왔어. 어, 저... 오랜만이네. 반가워. ”

 

“ 응, 나도 반가워. 어쩜,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 새치만 좀 생겼네. 일이 힘든가 보구나. ”

 

“ 어, 으응... 너는 좀 달라 보이네. ”

 

“ 아, 그래. 머리 잘랐지. 그때가 언젠데. 저녁 먹었니? ”

 

“ 아, 아니... ”

 

“ 응, 난 있다가 또 약속이 있어서... 우리 간단하게 뭐 먹자. ”

 

“ 어, 그, 그래. 간단하게... 그러면 이 앞쪽에 있는 학교 카페에 갈까? ”

 

“ 거긴 너무 시끌시끌하잖아, 학생들도 많고. 포나르나야 거리 쪽에 있는 카페로 가자. 내가 자주 가는 데 있어. ”

 

“ 으, 으응... ”

 

 

올랴가 자연스럽게 그의 팔목에 손을 얹더니 앞으로 잡아끌었다. 베르닌은 당황해서 몸이 뻣뻣해졌다. 그녀는 곧 손을 치웠지만 베르닌은 머리가 멍해졌다. 여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도 그녀는 항상 앞서가곤 했다. 성격도 급한 편이었고 활달했다.

 

 

베르닌은 어색하게 올랴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나란히 걸었다. 2년 반 만에 본 올랴가 낯설게 느껴졌다. 긴 머리는 싹둑 잘라서 단발이 된데다 곱슬곱슬하게 변했고 화장도 훨씬 진해져 있었다. 구두 굽도 훨씬 높아진 것 같았다. 그리고 살이 많이 빠져서 갈대처럼 하늘하늘했다. 발레리나 정도야 물론 아니었지만 하여튼 예전보다 훨씬 마른 몸매로 변해서 더욱 낯설었다. 여전히 예쁘장한 얼굴이었지만 이제 소녀다운 분위기는 전혀 없었고 살짝 예리한 느낌도 들었다. 베르닌은 어느새 ‘예전에 통통할 때가 더 예뻤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자기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찰싹 때렸다.

 

 

“ 어머, 너 왜 그러니? ”

 

“ 아, 아니야. 날벌레가... ”

 

“ 아직 추운데 날벌레가 있어? 아, 다 왔다. 저기야. ”

 

 

올랴는 다시 그의 손목을 잡았다. 조그만 카페 입구로 그를 잡아끌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잡고 있었다. 올랴의 손은 조그맣고 따뜻했고 살짝 촉촉했다. 갑자기 베르닌은 현기증이 났고 옛날 생각이 났다. 맨 처음 올랴의 손을 잡았을 때와 키스를 했을 때가 떠올랐다.

 

 

‘ 나 왜 이러지? 미쳤나봐. 너무 오래 여자를 안 만나서 그런가... ’

 

 

다행히 올랴는 그의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안쪽 테이블로 들어가 앉더니 곧장 베르닌에게 메뉴판을 보여주었다.

 

 

“ 너 뭐 먹을 거야? 난 여기 오면 항상 먹는 거 있어. 여기는 돌마가 맛있거든. 너도 먹어볼래? ”

 

“ 어, 그, 그래. ”

 

“ 마실 건? 난 탄산수. ”

 

“ 나, 나는 그냥 오렌지 주스 마실게. ”

 

 

올랴는 점원을 부르더니 ‘돌마 2인분, 탄산수 하나, 오렌지 주스 하나 주세요’ 라고 속사포처럼 주문을 했다. 잠시 후 음료수가 나오자 물을 한 모금 홀짝 마시고는 귓가에서 물결치는 머리칼을 뒤로 휙 넘기며 입술을 포르르 떨었다.

 

 

“ 아휴, 나 요즘 너무 바빠. 정신이 하나도 없어. 일주일 동안 살이 2킬로나 빠졌다니까. 하긴 너랑은 하도 오랜만에 봐서 그때에 비하면 더 빠졌겠다. 그땐 나 완전히 젖살이 포동포동했잖아. 어제 앨범 보다가 그때 사진들 보고 진짜 창피했어. 어휴, 어쩜 그렇게 토실토실하고 화장도 촌스러웠는지. ”

 

“ 어... 그때? 그때 괜찮았는데. 살찌지 않았었어. ”

 

“ 너 여전하구나. 이럴 땐 그때도 귀여웠지만 지금은 더 예쁜 것 같다고 하는 거야. ”

 

“ 미안해. ”

 

“ 뭐가 미안하니! 어휴, 넌 정말... 농담도 못 알아듣고. 답답해라. 하긴 뭐 그게 매력이었지. 그 동안 잘 지냈니? ”

 

“ 으, 으응... ”

 

“ 여전히 바쁜 거지? 너네 국장이 그렇게 직원들을 들들 볶는다며. 다들 혀를 내두른다고. 스페호프. ”

 

“ 응, 맞아. 그런데 용케 기억하네. 우리 국장에 대해서. 심지어 성까지. ”

 

“ 아, 잊어버렸었지. 근데 요즘 다시 알게 돼서. ”

 

 

그때 음식이 나왔다. 베르닌은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던 시절 이후로는 돌마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가브릴로프의 식당들에서는 양배추로 고기를 싸서 만든 일반적인 ‘골룹츠이’를 팔기 때문이다. 포도나무 잎사귀로 돌돌 말아놓은 고기 롤을 보자 학창 시절이 좀 생각났다.

 

 

“ 우리 동네에도 돌마 파는 데가 있는 줄 몰랐어. ”

 

“ 너 벌써 잊어버렸구나. ”

 

“ 뭐를? ”

 

“ 옛날에 우리 여기 같이 왔었어. 그때도 내가 돌마 주문하니까 네가 똑같은 말 했었어. ”

 

“ 그랬나... ”

 

“ 너 다 잊어버렸구나, 나랑 있었던 일은. 하긴 워낙 짧은 기간이었으니. ”

 

“ 아, 아니야. 안 잊어버렸어. 근데 이상하게 여긴 기억이 안 나네. ”

 

“ 응, 너 그때 엄청 바빴어. 야근하다가 잠깐 나온 거였거든. 주말에도 나가야 한다면서 정신 못 차리고 있었어. 밤도 샜다고 하고. ”

 

“ 그랬구나. ”

 

 

베르닌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잠깐 입을 다물었다. 올랴도 조용해졌다. 둘은 가만히 나이프로 돌마를 썰었다. 잘게 다진 고기와 야채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먹어보니 촉촉했고 양념도 잘 되어 있었다. 분명 맛있는 것 같았지만 베르닌은 입안이 깔깔했고 자꾸 목이 막혔다. 용기를 쥐어짜내 ‘근데 왜 보자고 한 거야?’ 라고 물어보려는데 올랴가 불쑥 물었다.

 

 

“ 너는 어떻게 지내? 결혼은 안 했다는 거 알고. 여자 친구 있니? ”

 

“ 어... 저... 아니. 많이 바빠서... ”

 

“ 그렇구나. ”

 

 

올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생각에 잠긴 표정을 보자 베르닌은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얘가 대체 왜 이러나 싶어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갑자기 올랴가 방긋 웃으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잖아, 다냐. 나 결혼하거든. 다음 주에 결혼해.

 

 

베르닌은 하마터면 포크를 떨어뜨릴 뻔 했다. 자기도 모르게 컵을 들어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멍해진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 어, 어... 그렇구나. 축하해. 다음 주면 진짜 얼마 안 남았네. ”

 

“ 응, 그래서 요즘 진짜 정신없어. 그래도 그전에 너 한 번 보고 싶었어. 전화해서 많이 놀랐지? ”

 

“ 어, 아니... 그냥... 어... 근데 왜 갑자기 내 생각이 난 거야? 우리는, 그러니까, 진짜 잠깐 봤었잖아. ”

 

“ 글쎄. 어제 사진첩 보는데 너랑 찍은 게 한 장 있더라고. 그래서 생각도 나고... 또 우리 그이가 사실은 너네 회사에서 일하거든. 그래서... ”

 

“ 아... 우리 회사? 가브릴로프 KGB?!! ”

 

 

베르닌은 두 번째로 깜짝 놀랐다.

 

 

“ 응. 몇 달 전에 우연히 알게 됐는데 잘 맞아서 결혼하게 됐어. 그이가 아마 너보다는 선배일 거야. 들어간 지 6년쯤 됐다고 했거든. 직급도 높고. 혹시 너랑 같은 부서일지도 모르겠다. ”

 

“ 어... 6년... 그러면 알렉산드라 선배 기수인데... 이름이 뭔데? ”

 

“ 세냐. 그러니까 세묜. 성은 모브린. ”

 

“ 아... 어... 모브린 선배구나... 나도 알아. ”

 

 

베르닌은 3차 충격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세묜 모브린이라면 알렉산드라의 동기이자 대외교류부의 주축 중 하나이며 스페호프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선배가 아닌가. 지난번 메드베지에서 타라카노프가 알렉산드라를 추행했을 때에도 동기를 옹호하는 대신 시류에 영합하는 행동에 앞장서고 베르닌에게도 그냥 넘어가라고 충고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스네고로드에 막내 직원들을 파견하라고 국장을 부추긴 적도 있기 때문에 베르닌의 마음속에서 세묜 모브린은 ‘능력 있을지는 모르지만 친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안 드는 작자’였다. 목구멍까지 ‘올랴, 왜 그런 놈이랑 결혼하니! 네가 아깝잖아!’ 라는 말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올랴는 그런 그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활짝 웃었다.

 

 

“ 아, 너랑도 아는 사이구나. 하긴 같은 회사니까. 친해? ”

 

“ 아, 아니... 친하진 않아. 부서가 달라서. 그냥 부서 합동 회식 때랑 전체 회의 때 얼굴 보는 정도야. ”

 

“ 응, 그렇구나. 세냐는 동료들이랑 두루두루 친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너하고도 친한가 했어. 우리 그이 성격 좋지? ”

 

“ 어... 응... 그렇다고들 하더라. 윗분들도 좋아하고. ”

 

“ 응, 능력도 있어서 그 동기들 중에 제일 먼저 진급했다고 하더라고. 재미있고 멋있어서 좋아. 근데 너 놀랐지? 몇 년 만에 연락해서 보자고 하고 뜬금없이 결혼한다 해서. ”

 

“ 으, 으응... 조금 놀랐어. 그래도 축하해. ”

 

 

올랴는 돌마를 다 먹고 물을 홀짝 마시더니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 다냐, 사실은... 미안한데 오늘 보자고 한 건... 세냐가 질투심이 좀 많은 타입이야. 그래서 말인데... 뭐 너랑 세냐랑 친한 사이 아니라니까 굳이 이런 말 안 해도 될 것 같긴 하지만, 혹시나 해서 말이야. 너랑 나랑, 예전에, 그러니까 우리 잠깐 봤었잖아. 뭐 아주 짧은 기간이었고 별 일도 없었지만. 하여튼 그땐 나도 어렸고... 세냐가 우리 사이 의심할까봐. 미안해. 나 너무 웃기지? 그치만 혹시라도 네가 다른 경로로 전해 듣고 나랑 사귄 적 있다고 말해서 세냐 귀에 들어갈까 봐. 저, 오해는 하지 마. 네가 일부러 그럴 거라는 게 절대 아니고, 그냥 네가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가 세냐가 알게 되면 공연히 오해하고... ”

 

 

당차게 시작했던 올랴의 목소리는 갈수록 모기소리처럼 작아졌다. 얼굴이 빨개졌고 베르닌과 눈을 맞추지 못했다. 베르닌은 이미 3차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터라 이 4차 충격은 그저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음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올랴가 그렇게 얼굴이 빨개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말했다.

 

 

“ 어, 그래그래. 나 이해해. 걱정 마. 세묜 선배한테 절대 말 안할게. 그리고 네 말이 맞아, 우리 진짜 별 거 아니었잖아. 얼마 보지도 않았고 진짜 아무 일도 없었는걸.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결혼 준비 잘 해. ”

 

“ 고마워, 다냐. 진짜 고마워. 미안해. 괜히 너 불러내서. 기분 나쁘지? ”

 

“ 아니야. 전혀 안 그래. 마음 쓰지 마. 괜찮아. ”

 

“ 너 진짜 착하구나, 다냐. 어제 집에서 사진첩 보다가 네 사진 한 장 나왔다고 했잖아. 세냐가 알아보고는 왜 네 사진이 있느냐고 물어보더라고. 깜짝 놀라서 그냥 옛날에 알던 친구라고 둘러댔어. 다 같이 콤소몰 행사 가서 찍은 거라고. 그래서 밤새 한잠도 못 자고 아침에 전화했던 거야. ”

 

“ 그랬구나. 그냥 전화로 얘기해도 됐을 텐데. ”

 

“ 너무 뜬금없을 것 같아서 그랬어. 참, 세냐랑 여기서 7시 반에 보기로 했거든. 사진 본 김에 너랑 잠깐 만나서 저녁 먹는다고 얘기해뒀어. ”

 

“ 엥, 의심할까봐 걱정된다더니 나랑 만난다는 얘길 세묜에게 한 거야? ”

 

“ 편한 사이라는 거 보여줘야 세냐가 의심을 안 하지. 그리고 세냐가 우리 친구였다고 하니까 그럼 오늘 잠깐 같이 보자고 그러더라고. 7시 반 다 됐네. 세냐 금방 올 거야. 우리 그냥 콤소몰 행사에서 만나서 친해진 거야. 그렇게만 말해줘, 응? ”

 

“ 으, 으응... ”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정말 모브린이 카페로 들어섰다. 올랴와 베르닌을 금세 발견하고는 여유 있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올랴를 껴안고 키스를 하고는 모브린이 베르닌에게 빙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 다닐. 요즘 그 불여우 담당 업무 때문에 많이 바쁠 텐데 그래도 올루슈카 축하해주려고 나와 줘서 고마워. 얘기 들었지? 우리 다음 주에... ”

 

“ 아, 예... 결혼하신다고요. 축하드려요. 준비하시느라 많이 바쁘시겠네요. ”

 

“ 그래도 좋은 일이니까. 그래 오랜만에 본다더니 회포는 좀 풀었어? 어제 올랴 앨범에서 자네 사진이 나와서 처음에 내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알아? 그래도 자네니까 망정이지 다른 남자 사진이었으면 나 분명히 질투했을 거야! 자네야 뭐 워낙 바른생활에 순진무구하니까. ”

 

“ 어... 네. 우리는, 그러니까, 콤소몰 행사에서 알게 돼서 친하게 지냈어요. 그런데 입사하고 나선 바빠서 연락이 끊겼어요. 세상이 참 좁네요, 선배님과 올랴가 결혼을 하고. 축하드려요. ”

 

“ 하하, 고마워. 우리 올루슈카가 진짜 귀엽지. 자네도 어서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해야 할 텐데. 올루슈카 친구들 중에 괜찮은 여자 있으면 다리 놔주라고 할게. ”

 

“ 예... 고맙습니다. ”

 

 

그때 올랴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테이블을 떠났다. 베르닌도 이제 가야 하지 않나 싶어서 눈치를 보고 있는데 모브린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 다닐, 올랴가 갑자기 불러내서 놀랐지? 친했어도 한동안은 연락 안 하고 지냈다며. ”

 

“ 어... 조금요. 결혼 얘기도 오늘 처음 들었어요. ”

 

“ 그래. 사실 올랴에겐 내가 자네 잠깐 같이 보자고 한 거였어. 자네 요즘 바쁜데 미안하긴 하지만. 그 앨범 보니까 내가 좀 불안한 게 있어서. ”

 

“ 어, 불안... 왜요? 저랑 올랴는 그냥 친구였는데. ”

 

“ 에이, 누가 그걸 모르나. 의심할 사람이 따로 있지 자네처럼 고지식한 친구를. 그게 아니고... 다닐, 이건 말이야, 사나이 대 사나이로서 부탁하는 건데. 난 우리 회사에서 올랴를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거든. 미안한데, 올랴에겐 꼭 비밀로 해줘. ”

 

“ 예?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뭘 비밀로 해달라는 말씀이신지. ”

 

나랑 알렉산드라 말이야. 우리 옛날 관계. 정리한지 오래됐지만 그래도 올랴는 모르니까. 올랴가 다 좋은데 여자 아니랄까봐 질투심이 좀 있거든. 괜히 알게 되면 맘 상하고 의심할 거야. 그러니까 자네도 꼭 모른 척 해줘. ”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네? 알렉산드라... 우리 회사 알렉산드라 선배요? 옛날 관계요? 선배님이랑요? ”

 

“ 아, 자네 몰랐나? 에이, 그럼 괜히 얘기했군. 하긴 자넨 들어온 지 얼마 안됐으니... 젠장. 그래도 혹시나 다른 친구들이 얘기해서 자네가 생각 없이 올랴에게 옮길 수도 있으니... 나하고 사셴카 말야. 입사 동기잖아. 사내 커플이었거든. 처음에 일 년쯤 사귀었는데 회사 사람들이 거의 다 알았어. 뭐 깊은 관계는 아니었고, 그냥 국장한테 볶이니까 서로 동료 의식에 친해져서 사귄 거야. 진짜 별 거 아니었어. 그러다 둘이 자연스럽게 정리했거든.

근데 하여튼 이 얘기 올랴가 알면 질투할까봐. 사셴카가 좀 동안에 귀염상이잖아. 지난번에 올랴가 우리 집에서 놀다가 내 앨범에서 가을 체육 대회 사진을 본 거야. 그때는 사셴카가 우리 부서였잖아. 여직원은 걔 하나뿐이었고. 올랴가 우리 부서원들끼리 찍은 사진을 보고는 대번에 사셴카를 찍어내면서 꾸미면 예쁘겠다고, 여직원 하나라서 부서에서 인기 많겠다고, 나도 그런 거 아니냐고, 막 꽃 갖다 주고 초콜릿 사주는 거 아니냐고 농담을 하는 거야. 자네도 알잖아, 여자들이 그런 얘기 농담처럼 해도 다 뼈 있는 말이란 거.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 좀 하려고 같이 보자고 한 거야. 남자로서 이해하지? 올랴에게 비밀 지켜줄 거지? ”

 

 

베르닌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이 5차 충격 역시 생각 외였다. 이제 그는 더 이상의 충격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고개를 급히 끄덕였다.

 

 

“ 네, 물론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말 안 할게요. ”

 

“ 고마워, 다닐. 자네 역시 괜찮은 놈이야. ”

 

 

그때 올랴가 돌아왔다. 화장을 고치고 온 것 같았다. 베르닌은 급하게 일어섰다.

 

 

“ 저, 올랴. 나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

 

“ 어머, 다냐. 벌써 가려고? 세냐도 지금 왔는데. 술이라도 한 잔 같이 하면 좋을 텐데. ”

 

 

말과는 달리 올랴의 얼굴에는 안도의 기색이 역력했다. 모브린도 마찬가지였다.

 

 

“ 으, 으응... 나도 사실 할 일이 좀 있어서. 다음에 또 기회 되면 보자. 결혼 다시 한 번 축하해. 선배님, 이만 가볼게요. ”

 

“ 그래, 내일 회사에서 보자고. 잘 가. ”

 

 

베르닌은 이상하게 저려오는 다리를 약간 휘청거리면서 카페를 나섰다.

 

 

 

 

 

*    *    *

 

 

 

 

베르닌은 도저히 집으로 곧장 들어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정처 없이 쏘다니다가 시장 근처에 있는 선술집 겸 식당에 들어갔다. 술이라도 한 잔 마시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았다. 화가 나거나 우울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연속으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기분이 들 뿐이었다.

 

막 보드카를 주문하려는데 옆쪽 구석 테이블에서 낯익은 여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알렉산드라가 혼자 앉아 조그만 잔으로 보드카를 마시고 있었다. 보드카 병 하나가 그대로 옆에 놓여 있었고 안주도 없었다. 이럴 땐 모른 척 해야 하나 싶었지만 술도 약한 편인 알렉산드라가 맥주도 와인도 아니고 보드카를 연속으로 들이키고 있었으므로 걱정이 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옆으로 갔다.

 

 

“ 저... 선배님. ”

 

 

알렉산드라가 깜짝 놀라서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베르닌은 모른 척 할 걸 그랬나 하고 후회했다. 알렉산드라가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 코도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멋쩍은 듯 손등으로 눈을 닦으며 종알거렸다.

 

 

“ 아, 다냐. 안녕. 보드카 오랜만에 마시니까 진짜 독하네. ”

 

“ 저녁은 드신 거예요? 안주도 없이. 술도 잘 못 드시면서. ”

 

“ 글쎄, 밥 생각이 별로 없어서. 넌 여기 웬 일이야? 너희 집은 신시가지 쪽이잖아. ”

 

“ 약속이 있어서 잠깐 근처에 들렀다가... ”

 

 

알렉산드라가 다시 눈가가 빨개지더니 기침을 했다. 빈속에 보드카를 마셔서 그런 것 같았다. 베르닌은 마침 다가온 점원에게 흑빵과 칼바사 햄, 오이 피클을 주문했다. 제일 빨리 나오는 안주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접시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안주에는 손을 대지 않고 다시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베르닌은 잔을 뺏는 대신 흑빵에 햄 한 조각과 오이 피클을 얹어서 건네주었다.

 

 

“ 그러다 속 다 버려요. 이거 드세요. ”

 

“ 고마워. ”

 

 

알렉산드라는 기계적으로 샌드위치를 한 입 먹었지만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기침을 했다. 보드카를 다시 한 모금 마시고는 코가 빨개지면서 다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생각났다. 왕재수도 보드카라면 한 모금만 마셔도 눈물이 나온다고 했다. 알렉산드라는 물을 마시고 간신히 진정되었다.

 

 

“ 아이, 왜 이러지. 미안해, 다냐. ”

 

“ 이제 술 그만 드세요. 어쩌자고 한 잔도 아니고 병으로 시켜서 안주도 없이 드시는 거예요. ”

 

“ 나 아까 너무너무 기분 나쁜 일이 있었어. 그래서 그랬어. 저, 다냐. 나 엄청 취했으니까 그냥 모른 척하고 집에 가렴. ”

 

“ 세묜 선배랑 얘기하시고 기분 상하신 거예요? ”

 

 

베르닌은 자기가 왜 그런 말을 불쑥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은 술 한 잔 안 마셨는데도. 아마 올랴와 보낸 시간 동안 너무 연속으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알렉산드라는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 눈을 깜박였다. 역시 취해서인지 뭐라고 변명을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게 대꾸했다.

 

 

“ 어, 맞아. 근데 너 어떻게 아니? 나랑 세묜이랑 얘기하는 거 봤어? ”

 

“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

 

 

베르닌은 더듬거리다가 마침 점원이 주고 간 잔에 보드카를 따라서 훌쩍 마셨다. 빈속도 아닌데 머리끝까지 금세 어질어질했다. 술기운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오늘 있었던 얘기를 늘어놓았다. 올랴와 사귀었다가 차인 것부터 시작해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는 얘기, 올랴가 자기를 불러낸 진짜 이유에 대해, 그리고 모브린을 잠깐 봤던 얘기도 했다. 모브린의 부탁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려고 했지만 알렉산드라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 그 인간이 그랬구나, 나하고 있었던 일 약혼녀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그래서 그 자식이 너 보러 나온 거였구나. ”

 

“ 어... 아... 저... 선배님, 전 두 분 일 몰랐어요. 진짜예요. ”

 

“ 응,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진짜 웃기는 놈이야. 그때도 만사가 제멋대로에 딴 여자한테 양다리 걸쳐서 내가 그만 만나자고 했던 건데. 내가 미쳤다고 그런 얘길 하고 다니겠니. 헤어지고 나서도 두어 달은 진짜 못살게 굴었단 말이야. 그랬던 인간이 뭘 잘났다고. 같은 부서에서 얼굴 보면서 몇 년 같이 일한 것도 피곤했는데. 그래서 등록부서로 옮긴 게 차라리 편하기도 했었어. 근데 아까 퇴근 직전에 갑자기 우리 부서로 오더니 저녁 좀 같이 먹자는 거야. 싫다고 했더니 중요한 일이라면서 밥 먹기 싫으면 30분만 시간 내달라고... 그래서 업무 때문인가 싶어서 따라갔더니 그 개자식이 나보고 자기 다음 주에 결혼하는데 내 마음이 별로 좋진 않겠지만 축하해 달라면서, 신부가 혹시라도 의심하면 안 되니까 우리 과거에 대해 입 다물어달라는 거야. ”

 

“ 아... 올랴가 저한테 그랬던 것처럼... ”

 

“ 너무 어이가 없어서 왜 그런 걸 걱정하느냐고, 난 네 결혼에 관심도 없고 그런 얘기 떠들고 다닐 마음도 전혀 없다고 했더니 그 뻔뻔스런 자식이 나한테 그래도 아직 자기한테 미련이 약간 남아 있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결혼도 연애도 안 하고 있는 거 아니냐면서, 그래도 자기 결혼하게 됐으니까 이제 자기를 잊고 비밀도 지켜달라고, 좋은 사람 새로 만나라는 거야. 이제 나이도 많은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면서. 아무래도 자기랑 헤어진 상처 때문에 남자를 못 만나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전에 타라카노프한테도 그렇게 결벽증으로 히스테리 부린 거 아니냐는 거야. ”

 

 

알렉산드라는 생각하면 할수록 분한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보드카를 다시 한 잔 꼴깍 삼키고는 기침을 하고 눈물을 쏟았다. 베르닌은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왜 그렇게 속이 상했는지 알 것 같았다.

 

 

“ 선배님, 그런 자식이 한 말 따위 신경 쓰지 마세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놈이에요! 그리고 타라카노프 그놈은 인간 말종이잖아요! 모브린 그 자식 그때도 재수 없게 굴더니... 그런 개자식은 바퀴벌레 곱등이 뱀 껍질처럼 하찮은 놈이니까 진짜 신경 쓸 필요 하나도 없어요. ”

 

“ 내가 남자를 만나든 말든... 결혼을 하든 말든 그건 내 사정인데 걸핏하면 다들 나한테 언제 결혼할 거냐고 하고... 그것도 그 철면피 같은 자식이... 어떻게 내가 그런 놈한테 미련이 있어서 남자를 못 만난다는 말을 할 수 있어... 결벽증이라니. 다냐, 여자가 서른 넘어서 결혼 못하면, 성희롱하는 거 대들면 결벽증인 거야? ”

 

 

알렉산드라는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지난번 타라카노프 사건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괴로워했던 것도 얼마 안 됐는데 모브린 때문에 상처를 후벼 파고 소금까지 뿌린 격인 듯했다. 베르닌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고 올랴 생각이 나면서 자기도 서러워졌다. 자기도 펑펑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알렉산드라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억지로 울음을 그치게 하느니 실컷 울게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자코 기다렸다. 손수건만 꺼내서 건네주었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그들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어떤 여자는 베르닌을 여자 울리는 나쁜 놈이라는 눈초리로 노려보며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잠시 후 알렉산드라가 좀 진정되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더니 빨개진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며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 고마워, 다냐. 맨날 이런 모습만 보이고. 미안해. ”

 

“ 아니에요, 울고 마음 푸는 게 훨씬 나아요. 저도 아까 올랴가 결혼한다고 하고 그게 세묜 선배라면서 저한테 비밀 지켜달라고 했을 때 진짜 충격 받았어요. 그땐 너무 놀라서 기분 나쁘거나 속상한 마음도 안 들었는데 이제 속상해요. 그리고 세묜 선배가 와서 그 얘기했을 땐 더 이상 거기 있고 싶지 않았어요. ”

 

“ 그러게... 너도 굉장히 놀라고 속상했을 텐데. 공연히 내가 이렇게 울고불고 해서 더 당황하게 만들었네. 미안해. 난 왜 항상 이럴까. 매사가 엉망이야. 그래도 사회 나와서 열심히 산 것 같은데 해놓은 것도 없고, 곁에 있어줄 사람도 없고... 다들 만만하게 보고... 돌아서면 매일 혼자고... 되는 일도 없고... ”

 

 

알렉산드라의 눈망울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베르닌은 원래 여자가 울면 당황하는 편인데다 친한 사이인 알렉산드라가 그러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서툴게 위로를 했다.

 

 

“ 만만하게 안 봐요. 안 그래요. 다들 선배님 좋아해요. 모브린이랑 타라카노프 같은 놈들이 이상한 거예요. 혼자 아니에요. 진짜예요. ”

 

“ 흑, 고마워. ”

 

 

알렉산드라가 베르닌을 와락 껴안더니 흑흑 흐느껴 울었다. 지난번에 타라카노프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며 울었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알렉산드라는 굉장히 자그마했다. 품 안에 두 번 들어오고도 남을 것 같았다. 베르닌보다 두세 살 나이도 많았지만 울 때는 꼭 어린애 같았다. 하도 울어서 몸이 뜨끈뜨끈했다. 베르닌은 뜬금없이 왕재수 생각이 났다.

 

 

그 자식도 울면 이렇게 사모바르처럼 뜨끈뜨끈했지. 아플 때도 그랬지만. 구슬처럼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다 큰 자식이 꼭 애기처럼 우네 그랬는데 알렉산드라도 그렇구나... ’

 

 

울고 난 후 알렉산드라는 약간 술이 깼는지 깜짝 놀라면서 베르닌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빨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면서 사과했다.

 

 

“ 아, 미안해... 다냐, 내가 너무 취했나봐. 정말 미안. ”

 

“ 뭐가 미안해요. 괜찮아요. 근데 진짜 많이 취하신 것 같아요. 그만 일어나서 바람 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 으응... ”

 

 

알렉산드라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베르닌은 그녀의 팔을 붙잡아 부축을 해주었다. 대신 계산을 했더니 점원이 보드카가 많이 남았다면서 가져가라고 했다. 그래서 보드카 병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가게를 나왔다. 알렉산드라가 너무 비틀거렸기 때문에 베르닌은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 선배님, 집이 어디에요? 멀어요? ”

 

“ 아니야, 가까워. 여기... 시장 뒤... 괜찮아. 나 이제 갈게. ”

 

“ 집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몇 번지에요? ”

 

“ 126번지... ”

 

 

알렉산드라는 취해서 그런지 거의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했다. 베르닌은 ‘이렇게 술이 약하면서 왜 보드카를 마신 거예요! 어휴, 그 자식도 그렇고 정말... 술도 못 마시는 사람들이 뭘 믿고 이러는 거야!’ 하고 바가지를 긁고 싶었지만 상대가 왕재수가 아니라서 꾹 참았다.

 

 

다행히 126번지는 별로 멀지 않았다. 시장 뒷골목으로 들어가자 금방 건물이 나왔다. 베르닌은 알렉산드라를 부축해서 아파트로 올라갔다. 부축하는 게 너무 불편해서 마음 같아서는 왕재수에게 그랬듯이 들쳐 업고 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여자인데다 알렉산드라가 놀랄 것 같아서 그럴 수는 없었다.

 

 

“ 선배님, 다 왔어요. 열쇠는 있어요? ”

 

“ 으응... 핸드백에... ”

 

 

알렉산드라가 주섬주섬 핸드백을 뒤졌다. 열쇠를 꺼내는가 싶더니 베르닌의 팔에 꼭 매달리며 잠깐 포옹을 하고 볼에 입을 맞췄다.

 

 

“ 고마워, 다냐.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줬어. 고마워. 안 잊을게. ”

 

“ 선배님도 항상 저한테 잘 해주셨잖아요. ”

 

“ 내가 언제... 고마워. 내일 술 깨고 보면 되게 부끄럽겠다. ”

 

“ 저도 술 마실 거예요. 그럼 둘 다 하나도 생각 안 날 거예요. ”

 

“ 마시지 마. 머리 아플 거야. 고마워, 다냐. 잘 자. ”

 

 

베르닌은 알렉산드라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후 아파트를 나왔다.

 

 

 

 

*   *   *

 

 

 

 

 

베르닌은 알렉산드라를 바래다 준 후 기분이 꿀꿀해져서 구시가지 골목을 정처 없이 배회하며 보드카 병나발을 불었다. 공무원이자 KGB 요원이 길에서 음주를 하며 늦은 밤까지 나돌아 다니는 것은 규정 위반이었지만 ‘다 집어치워’ 하고 투덜대며 술을 홀짝홀짝 마셨다. 저녁이라 해봤자 돌마를 약간 입에 댄 게 전부였기 때문에 금세 머리끝까지 술이 올라왔다.

 

 

캄캄한 골목을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다 보니 알렉산드라와 있었을 때는 그녀를 돌보느라 잊고 있었던 충격이 하나둘 되살아났다. 기분이 무척 좋지 않았다. 터무니없게도 올랴에 대한 배신감도 조금 들었다. 그리고 모브린의 멱살을 잡고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알렉산드라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다가 자기도 안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자괴감이 들었고 점점 우울해졌다.

 

 

그는 밤 열한 시 즈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취해서 머리가 빙빙 돌았고 속도 울렁거렸다. 두어 번 주저앉기도 했다. 간신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왔는데 눈에 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왕재수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어, 너 이제 들어오는 거야? ”

 

“ 으응... ”

 

“ 으윽, 술 냄새. 얼마나 퍼마신 거야! ”

 

“ 좀... ”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베르닌은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왕재수는 버튼을 누른 후 그의 팔을 잡아 주었다.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부웅 올라가자 베르닌은 어지러워서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눈치 빠른 왕재수가 짜증을 냈다.

 

 

야! 여기서 토하면 안 돼! 좀만 참아!

 

“ 안 토해... 우욱... ”

 

 

베르닌은 못 견디고 토해버렸다. 하필 왕재수의 신발 위에 토한 것 같았지만 앞이 잘 안 보였다. ‘아휴!’ 하는 소리가 들려온 걸 보니 맞는 것 같긴 했다.

 

 

 

눈을 떠보니 베르닌은 소파에 누워 있었고 이마에 미지근한 물수건이 놓여 있었다. 잠시 필름이 끊겼던 것 같았다. 다시 토할 것 같아서 억지로 일어났는데 화장실이 왜 이렇게 먼지 이해가 안 갔다. 집안 구조가 이상했다. 간신히 화장실로 가서 실컷 토했다. 그러고 나니 울렁거리는 건 가셨지만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그때 왕재수가 와서 그의 팔을 붙잡고 욕실로 데려갔다.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물로 입을 헹궈준 후 다시 부축을 해서 침실로 데려갔다.

 

 

“ 너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

 

“ 많이 안 마셨어. 한 병도 안 마셨다고. ”

 

“ 한 병! 보드카가 맥주냐! ”

 

“ 넌 아무 거나 마셔도 취하는 주제에 뭘 안다고! 술 구별도 못하는 게! ”

 

“ 왜 몰라! 보드카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아까 너 보자마자 어지러웠어! ”

 

 

툴툴대면서 왕재수는 그를 침대에 눕혔다. 베개를 머리 아래로 들이밀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어지럽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베르닌은 뭔가 낯선 느낌이 들었다. 베개의 느낌도, 침대의 느낌도 달랐다. 침실도 훨씬 넓은 것 같았다.

 

 

“ 어... 여기 너네 집이야? ”

 

“ 응. ”

 

“ 저... 나 그냥 소파에... ”

 

“ 그냥 있어. ”

 

“ 뜨보록도 못 올라오게 했잖아, 네 침대... 너랑 바이올린 아저씨의 보금자리라고. ”

 

“ 야! 멍멍이하고 사람하고 같냐! 시끄러워, 그냥 누워서 빨랑 자! 자면 술 깨겠지. ”

 

“ 그래도... 너도 자야 하잖아. 나 토해서 좀 나아졌어. 우리 집으로 갈게. ”

 

“ 시끄러워. ”

 

 

왕재수가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주고는 불을 탁 꺼버렸다. 그리고는 침실을 나갔다. 베르닌은 뭐라고 웅얼대다가 다시 필름이 끊겼다.

 

 

 

 

*   *   *

 

 

 

 

 

두어 시간 후 베르닌은 술이 깨면서 퍼뜩 눈을 떴다. 온갖 숙취가 다 몰려왔다. 머리가 약간 어질어질하긴 했지만 그래도 속은 좀 진정된 것 같았다. 굉장히 목이 말랐다.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나갔더니 거실 소파에 왕재수가 앉아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베르닌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 너 왜 나왔어. 누워서 자라니까. ”

 

“ 너무 목말라서. ”

 

 

왕재수가 냉장고로 가서 물병을 하나 꺼내주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나자 좀 살 것 같았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왕재수가 혀를 찼다.

 

 

“ 고주망태가 돼서 들어온 걸 보니 여자랑 잘 안된 모양이구나. ”

 

“ 잘 되고 말고가 아니고... 으윽... ”

 

“ 그럼 뭐야? 결혼이라도 한대? ”

 

“ 엇, 너 뭐야, 어떻게 그렇게 잘 맞춰? 맞아, 결혼한대. ”

 

“ 으응, 그렇구나. 조용히 결혼할 것이지 뭐하러 옛날 남자한테 전화는 해대는지. 쪼잔한 여자구만. ”

 

“ 그게... ”

 

 

술이 깨면서 극심한 두통과 우울감이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아까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왕재수는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음악에 맞춰 휘파람을 불기도 하면서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대체로 왕재수는 그가 횡설수설하며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면 중간에 말을 끊는 적이 별로 없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게 뻔했지만 베르닌은 어쨌든 가슴이 답답했으므로 왕재수가 듣든 말든 얘기를 줄줄 쏟아놓았다.

 

 

왕재수는 별로 위로를 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을 뿐이었다.

 

 

“ 그렇구나. 그런 게 걱정이 되는 거구나. 결혼할 사이에는 옛날 애인 얘기를 하면 삐치는 건가 보구나. ”

 

“ 그런 사람 많아. ”

 

“ 참 인생 피곤하게 사네. 안 그래도 신경 쓸 거 많은데. 다 정리했으니까 결혼하는 걸 텐데 옛날에 몇 명을 사귀었든 놀아났든 뭐가 그렇게 중요하담. ”

 

“ 그러게. 나도 그런 거 신경 안 쓸 텐데... 올랴는 신경 쓰였나봐. 모브린도... ”

 

“ 그 모브린인지 나발인지는 재수 없어. ”

 

“ 왜? 올랴는 괜찮고 모브린은 나쁜 거야? 둘다 똑같이 행동했잖아. ”

 

“ 올랴는 너한테 미안해했지만 그놈은 알렉산드라한테도 뻔뻔하게 굴고 너한테도 그렇게 굴었잖아. 거짓말도 하고. 지난번에도 성추행범 옹호하면서 잘난 척 했다며. ”

 

“ 아... 너 의외다. 그런 거 기억하는구나. 이름까지. ”

 

“ 네가 그때도 되게 씩씩거리면서 아까처럼 그랬잖아. ”

 

“ 내가 그렇게 얘기하면 다 기억해? ”

 

“ 네가 얘기하는 건 보통은 기억해. ”

 

기억만 하면 뭐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잖아! 밥 챙겨먹으라 해도 말 안 듣고 패딩 입으라 해도 안 입고 출근 날짜 줄이라 해도...

 

“ 그건 나에 대한 거고. 너에 대한 건 대충 기억해. ”

 

“ 엥? 감동받아야 하는 거야? ”

 

“ 이 멍충아, 맨날 징징대는데 어떻게 안 기억해! ”

 

“ 누가 누구 얘길 하는 거야! 어휴... 하여튼 나 너무 꿀꿀해. ”

 

“ 근데 뭐가 그렇게 꿀꿀하니. 올랴랑 다시 잘 될 거란 생각을 하고 갔던 건 아닐 거 아냐. 그렇게까지 좋아했던 것도 아니라며. 모브린은 재수 없는 놈이지만 원래 재수 없는 놈인 거 알았잖아. 알렉산드라는 좀 안되긴 했다. 그래도 넌 할 만큼 했잖아. 바래다주기도 하고. 네가 맨날 나한테 그랬잖아, 세상 일이 다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라며. ”

 

“ 나도 기대는 안 했어. 올랴 때문에 속상했지만 그건 뒤늦게 나타나서 그런 말을 하니까 그랬던 거 같아. 그리고... 이상하게 계속 마음에 남고 속상한 건 그런 게 아니고... 걔가 나 찰 때 그랬거든. 분명히 KGB 따위 너무 싫다고, 공무원 노릇하면서 KGB 완장 차고 생색내는 남자 질색이라고 했는데... 결국 결혼은 모브린이랑 하잖아, 똑같은 KGB인데... 그러니까 KGB가 문제가 아니고 사실 올랴는 내가 그냥 싫었던 거야. 근데 그게 되게 꿀꿀하단 말야. ”

 

“ 왜? 세상 사람이 다 너 좋아하란 법 있냐? 나 같은 우주 최강 꽃미남도 시기 질투하는 놈들에 싫어하는 놈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어떻게 모든 여자에게 다 좋다는 얘길 듣니. ”

 

아니야! 너는 그런 거 몰라! 너는 그래도 추종자들이 엄청 많잖아. 네가 손 하나 까딱하면 거의 다 넘어왔을 거 아냐. 넌 매력 없다고 차이는 게 뭔지 모른단 말이야. 나는, 나는 인기도 없고 지금까지 여자 친구도 몇 명 사귀어보지도 못했고 그나마도 몇 달 이상 간 적도 없단 말이야. 가끔씩 부모님 댁에 가면 언제 결혼하느냐고 다 걱정해. 나도 여름이면 스물아홉이 되고... 알렉산드라가 왜 그렇게 속상해하는지 나도 조금은 이해된단 말이야. 나처럼 여자한테 인기도 없는 책상물림 숙맥은 이러다가 결혼도 영영 못하고 끝까지 혼자... ”

 

 

왕재수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까만 눈이 반짝거렸지만 장난기는 전혀 없었다.

 

 

“ 왜?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

 

“ 결혼 못할까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

 

“ 어... 꼭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좀 그런가봐. 나는 옛날부터 빨리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었어. 착하고 예쁜 여자랑 살면서 귀여운 아기도 낳고 그러고 싶었거든. 너는 대도시에서 와서 모르겠지만 여긴 보수적인 동네야... 빨리 결혼해서 가정 꾸리는 게 미덕이라고. ”

 

“ 레닌그라드도 그래. ”

 

“ 뭐가? ”

 

“ 빨리 결혼해서 빨리 가정 꾸리는 거. 그리고 레닌그라드는 전쟁 때 봉쇄로 남자들이 많이 죽었잖아. 그래서 결혼도 빨리 하고 이혼도 많이 해. 10대 때 결혼하는 애들도 많은 걸. ”

 

“ 거기도 그렇구나... 하여튼... 아까 알렉산드라가 울 때 나 되게 이입됐었어. 나도 뭐든 열심히는 했는데 남은 것도 없고 기껏 서무잖아. 옆에는 아무도 없고. 알렉산드라 데려다주고 나왔는데 길은 캄캄하고 춥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 누구랑 같이 걸어가면서 깔깔 웃고... 갑자기 너무 우울했어. 이러다 정말 결혼도 못하고 끝까지 혼자 남을 것 같았어. 그런 거 너무 속상하잖아... 아무도 나 안 좋아하는 거. “

 

“ 애인이 안 생겨서 두려운 거야, 아니면 결혼을 못 할 거 같아서 두려운 거야? ”

 

“ 둘 다. 근데 특히 두 번째... 오늘은 그런 거 같아. ”

 

“ 그런가. 어렵네. ”

 

 

왕재수가 생각에 잠겼다. 베르닌의 곁에 앉더니 고개를 다시 갸웃했고 잠시 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나는 그럴 일이 없을 텐데. ”

 

“ 뭐가? ”

 

“ 결혼. 난 결혼 같은 거 할 일이 없을 거 아니야. ”

 

“ 어... 왜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인기 많으면서... 지금 극장에도... ”

 

“ 바보. 결혼은 법과 질서가 인정해야 이루어지는 거잖아. 일종의 체제라고. 남자와 여자가 결합해서 만드는 계약체. 그러니까 나는 죽을 때까지 그런 거 만들 일이 없을 거야. 애기는 더더욱. ”

 

“ 아... ”

 

 

베르닌은 말문이 막혔다.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술이 완전히 깨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왕재수가 연방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자신과 다른 이유가 단순히 예술가이기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도.

 

 

아마도 그는 마지막 생각을 입 밖에 냈던 건지도 몰랐다. 술기운에. 그것도 아니라면 언제나 그랬듯 그가 펼쳐진 책처럼 적나라하게 마음을 드러낸 표정을 지었던 것일지도. 왕재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기 때문이다.

 

 

“ 그래봤자 다 똑같아. ”

 

“ 뭐가? ”

 

“ 세상 사는 거. 많이 피곤하고 덜 피곤하고의 차이지. ”

 

“ 엥,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이상해. 철없는 놈이. ”

 

“ 들켰나. 내가 한 말 아니야. ”

 

“ 역시... 바이올린 아저씨로구만. 딱 나이 많은 아저씨가 할 법한 말이네. ”

 

“ 로만은 아니고. 뭐 아저씨는 맞네. ”

 

 

왕재수가 무의식적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하품을 하더니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 나 잘래, 다닐. 너무 졸려. ”

 

“ 어, 그, 그래. 그럼 난 우리 집에 갈게. ”

 

“ 그냥 여기서 자. 너 아까 너네 집 현관이랑 거실에 엄청 토했어. 그거 치울 엄두 안 나서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온 거야. ”

 

“ 어... 그랬구나. 치워야겠다. ”

 

“ 내일 치우고 지금은 자라. 술 퍼마셨잖아. 그래야 내일 아침에 나 태워다 주지. ”

 

“ 그러니까 결국 너 좋은 일 해달라고 돌봐준 거구나! ”

 

“ 응. 근데 너 이제 진짜 살 좀 빼... 무거웠어... 80킬로 넘는 거 같아. ”

 

 

베르닌은 최근 다이어트를 좀 해서 적어도 1킬로는 빠졌을 거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왕재수가 고개를 툭 떨어뜨리고 쌕쌕거리며 잠이 들었기 때문에 한숨을 쉬었다.

 

 

“ 뭐야, 이게. 울 때도 그렇고... 자는 것도 진짜 애기처럼. 순식간에 자네. ”

 

 

베르닌은 왕재수를 안고 침실로 갔다. 침대에 뉘어주고 이불을 덮어주자 왕재수가 눈도 뜨지 못하고는 희미하게 웅얼거렸다.

 

 

“ 아이, 술 냄새. 베개에 뱄어. ”

 

“ 미안해. 베개 바꿔줄게. ”

 

“ 됐어. 마시지도 못하는 거 대리만족이라도 할래. ”

 

 

왕재수는 곧 다시 잠이 들었다. 베르닌은 집으로 갈까 했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거실 소파로 가서 드러누웠다. 왕재수의 소파는 그의 집 소파보다 훨씬 넓고 푹신했다. 침대도 그랬다. 집도 훨씬 넓었다. 쿠션을 머리에 베고 눕자 온몸이 노곤해졌다.

 

 

‘ 토한 거 치우기 싫어서 여기서 자는 거야. 오늘만. 진짜야. 혼자 있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누구처럼 애기도 아닌데. ’

 

 

베르닌은 입 안으로 그렇게 중얼거렸고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FIN

- 2015. 6. 5 ~ 6. 15 -

 

 

...

 

 

어쩌다 보니 26편은 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만...

 

이번 편의 알렉산드라와 세묜 모브린은 18편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http://tveye.tistory.com/3678)에 등장한 적이 있다. 그러고보니 알렉산드라가 나오는 글들은 거의가 좀 우울한 편이네.. 꼭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그렇게 됐다. 아무래도 알렉산드라는 서무 시리즈에서 코믹한 기운도 없고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라서 그런 것 같다.

후반부에서 왕재수가 하는 이야기들은 사실 본편 미샤와 맥이 많이 닿아 있다. 어쨌든 이 사람이 퀴어 캠프의 일원이자 억압된 소련 사회를 살아가는 인물인 것은 본편이든 서무 시리즈든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

 

기껏 새로운 여자 캐릭터를 등장시킨다더니 이 모양이냐! 하고 야단치는 분들께 ㅠ 그래서 분위기 전환용으로 다음주에는 번외편으로 러시아 민담 패러디를 올리겠습니다~ 과연 단추는 번외편에서라도 미녀 군단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인가~!!

 

 

***

 

댓글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서무의 슬픔 25편은 분량이 길어서 두 토막으로 자른 후 지난주에 1부를 올리고 이번에 2부를 올리게 되었다. 쓸 때는 이렇게 파트를 나눌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에 잘린 느낌이 들긴 하지만 ㅠㅠ

 

메르스 불안증은 갈수록 확산되고 있고, 기쁜 뉴스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시기이다. 요리대회에 나가 좌충우돌하는 단추와 맛있는 음식들로 기분 전환하세요~

 

 

**  음식 이름 두어 가지

 

- 샤실릭은 중앙아시아 쪽에서 유래된 꼬치구이로 양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등을 이용한다.

 

- 피로그는 러시아의 커다란 파이이다. 껍데기가 덮여 있고 안에는 다양한 속을 넣을 수 있다. 복수형은 피로기. 조그만 파이는 지소형으로 피로슈카라고 한다. 러시아 피로그는 참 맛있다. 솜씨좋은 주부들은 피로그 안에 여러겹의 속을 넣기도 한다.

 

 

** 이번 편은 1부에서 이어지는 내용이기 때문에 1부를 먼저 보셔야 합니다~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가브릴로프 천하일미 요리대회에 등떠밀려 출전한 베르닌... 어찌어찌 엉망인 요리를 완성은 했으나... 과연 심사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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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5

 

 

 

 

 

서무의 슬픔

-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사회자는 예쁘게 손질한 머리를 찰랑대면서 능숙하게 카메라 앞으로 나섰다. 역시 방송계에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 자, 그럼 이제부터 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심사에 공정을 기하기 위해 참가자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야 하며 누구도 자기 요리에 대한 설명이나 변명은 할 수 없습니다. 요리는 요리로 말하는 법이니까요. 참가자가 많기 때문에 먼저 심사위원 세 분이 돌아가면서 요리를 시식한 후 논의를 통해 결선 진출자 6명을 결정하고 그 중에서 3위까지 시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심사위원 세 분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드미트리 블리즈네초프 의회 의장님, 미하일 야스민 가브릴로프 극장 감독님, 그리고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편집장님입니다. 심사위원장은 연배 순으로 블리즈네초프 의장님이 맡게 되겠습니다. ”

 

 

베르닌은 블리즈네초프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체육대회가 생각나면서 흙먼지와 땀범벅과 벌목공 협박이 절로 떠올랐다. 의장이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스페호프와는 찰떡궁합이라고들 했다. 스페호프의 승부욕이 요리대회까지는 미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렐랴는 이미 조리대 위의 음식들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우아한 손놀림과 함께 어떤 식으로 시식을 할지 나머지 두 명에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왕재수는 이미 너무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조리대 위에 늘어선 음식들 태반이 가브릴로프 특유의 기름진 고기 요리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참가자는 모두 30명이었다. 공정성을 위해 각자 30개의 요리를 모두 시식해 봐야 한다는 렐랴의 주장에 대해 블리즈네초프는 시간도 없고 요리도 너무 많으니 한 사람당 10개씩의 요리를 맛보고 그 중 2개씩 추천을 하여 결선 진출자를 가리자고 했다. 둘 중 어느 쪽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자가 끼어들었다.

 

 

“ 어머나, 시간이 없는데 아직 심사 방식을 결정하지 못하셨군요. 그러면 다수결로 해야죠. 미샤가 두 가지 중 하나로 결정을 해주시죠. ”

 

 

왕재수는 렐랴에게 사과하는 시선을 던지면서 대꾸했다.

 

 

“ 심사위원장 의견대로 하죠. 그게 더 효율적일 것 같네요. ”

 

 

렐랴는 좀 실망한 것 같았지만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블리즈네초프 쪽을 선택한 이유는 효율성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오로지 기름기 뚝뚝 흐르는 음식을 어떻게든 덜 먹어보려는 심산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세 명의 심사위원들은 각 10개씩의 조리대를 돌며 시식을 시작했다. 베르닌도 고개를 쭉 빼고 다른 사람들의 근사한 요리를 구경했다. 의장은 짭짭 냠냠 후룩후룩 소리를 내며 음식을 크게 덜어서 먹었고 렐랴는 요리마다 우아하게 접시에 덜어서 냄새를 먼저 맡은 후 여러 군데를 조금씩 다 먹어 보았다. 그리고 왕재수는 음식의 외양을 먼저 힐끗 살핀 후 나이프와 포크로 딱 한 군데만 썰어내서 천천히 먹었다.

 

 

운 나쁘게도 왕재수는 자리를 잘못 잡았는지 아르카지의 보르쉬를 시식하게 되었다. 사발 앞에 멈춰선 왕재수는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국자로 국물을 한번 휘저었고 건더기 약간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걸 보자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더니 아주 극소량만을 접시에 덜어서 꼭 고양이처럼 혀끝으로 국물을 축여보더니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접시를 내려놓았다. 물을 몇 모금이나 꿀꺽꿀꺽 마시고 입을 흔들었다. 그때부터는 엄청나게 심기가 상한 듯 남아 있는 조리대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세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심사위원들은 조리대에 붙어 있는 이름표도 꼼꼼하게 보면서 수첩에 열심히 적고 있었지만 왕재수는 이름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블리즈네초프 의장의 속도가 제일 빨랐다. 순식간에 열 개의 음식을 모두 맛보더니 다른 쪽 조리대들을 서성거리며 한 바퀴 돌고 이름표를 살피고 렐랴와 왕재수에게 참가자 이름표를 가리키며 뭐라뭐라 속닥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건 뭐지? 음식도 엉망인데 심지어 이름표도 없네. 이런 건 실격 처리해야 하지 않나?

 

 

심사위원들과 사회자뿐만 아니라 참가자들도 모두 의자에서 일어나 대체 뭔가 하고 시선을 던졌다.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의장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자신의 오믈렛 접시였기 때문이다. 렐랴도 다가오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 어머나, 요리는 둘째 치고 정말 이름표가 없네요. 어떻게 된 거지? ”

 

 

베르닌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쭉 빼고 보니 정말 조리대 앞에 매달려 있던 자신의 이름표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재료를 구하러 뛰어다닐 때나 막판에 우왕좌왕했을 때 떨어져버린 것 같았다. 자기 거라고 손을 들어야 하나 망설이는데 블리즈네초프 의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건 실격입니다! 어디 이런 망측한 외양의 달걀쌈 따위를 올려놓지를 않나, 이름표도 없고!

 

 

렐랴도 곰곰 생각하는 듯하더니 의장의 말에 덧붙였다.

 

 

“ 이름표가 없는 걸 보니 아마 이건 참가자들 중 하나가 망친 요리를 빈 조리대에 올려놓은 모양이에요. 어제 받은 참가자 명단을 보면 이 30번 조리대는 비어 있었거든요. 당신 생각은 어떠세요, 미샤? 21번에서 30번은 당신 심사 담당이잖아요. ”

 

 

다른 음식들을 맛보느라 떨어져 있었던 왕재수가 귀찮다는 듯 다가오더니 오믈렛 접시를 힐끗 보았다.

 

 

“ 난 이름표 없어도 상관없는데. 그게 꼭 실격 사유까지 되는 건지... 하여튼 음식이 있으니 만든 사람도 있을 거 아니에요. ”

 

아니, 미하일, 그게 무슨 소리요! 당연히 실격이지! 소속기관과 이름이 없는 출품작은 자격 요건 미달이라 이겁니다! 웬만하면 이건 제외하고 결정하는 게 좋겠어요. ”

 

 

블리즈네초프가 훈계하는 어조로 말했다. 남에게 훈계 듣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게 분명한 왕재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 뭐 그럼 그러시든가요. 어차피 맛도 없겠지 뭐. 다른 것도 다 엉망인데. 그래도 진짜 맛있는 거 하나 찾았어요. 그나마 먹을 만한 거 하나쯤 더 있고. 그게 전부더라고요. 이거라고 맛있을 리가... ”

 

 

그래서 오믈렛은 실격되는 것으로 결론이 나는가 싶었지만 가장 열성적인 렐랴가 참가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 잠깐만요, 그래도 마지막으로 확인해봐야겠어요. 이거 만든 분 있으면 손 좀 들어보세요! ”

 

 

베르닌은 보안위원회 대표의 명예를 걸고 손을 들어야 하나 10분의 1초쯤 고민했지만 곧 깔끔하게 포기했다. 심사위원들이 모두 이게 요리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망측한 외양의 달걀쌈’이란 소리까지 들은 판국에 자기가 만든 거라고 나서기가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특히 왕재수에게 발각되면 며칠 내내 얼마나 들들 볶을지 눈에 선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기 때문에 렐랴도 포기했다.

 

 

“ 좋아요, 그럼 이건 일단 심사 대상에서 제외해 주세요, 미셴카. 다 고르셨나요? ”

 

“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더라고요. ”

 

“ 네, 저도 다 골랐어요. 의장님도 다 고르셨나요? ”

 

“ 난 이미 마음의 결정을 했죠. 다른 음식들을 먹어볼 필요도 없을 겁니다. 두 분도 내가 고른 걸 맛본다면 이견 없이 우승이라고 할 테니까요. ”

 

 

별로 하는 일도 없었던 사회자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 자, 그럼 세 분 모두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 같으니 요리를 두 개씩 선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맨 앞의 심사 테이블로 각각 선택하신 요리 접시를 가지고 나와 주십시오. ”

 

 

참가자들 모두가 숨을 죽였다. 과연 어떤 요리들이 결선에 진출하게 될지 두 손을 부여잡고 가슴을 졸였다. 베르닌도 이미 실격은 했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고개를 뽑았다. 예상 외로 왕재수가 제일 먼저 접시 두 개를 들고 나와서 심사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곧이어 블리즈네초프가 한가운데에 자기가 고른 접시들을 놓았다. 마지막으로 렐랴가 나왔다. 테이블 위에 여섯 개의 접시가 가지런히 놓였다.

 

 

“ 자, 그러면 의장님부터 선정 요리를 소개해 주시고 심사위원들 모두가 맛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

 

“ 에, 그러죠. 먼저 이 키예프식 커틀릿! 바로 예산국 대표 조야 브릴료바의 요리입니다. 조야의 음식 솜씨는 가브릴로프 공공기관 내에서는 워낙 유명한 터라 굳이 소개가 필요 없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키예프식 커틀릿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닭고기 안에 넣는 버터와 기름이 얼마나 촉촉하고 부드러운지, 그리고 튀김옷이 얼마나 공처럼 잘 부풀어 올랐는지, 그리고 그 맛이 얼마나 고소한지 아니겠습니까! 자, 렐랴, 미하일. 내가 직접 썰어드리죠. 한 번 맛을 보면 내가 왜 이 커틀릿을 골랐는지 대번에 이해가 될 겁니다. ”

 

 

블리즈네초프는 얼굴까지 붉혀가며 열성적으로 브릴료바의 커틀릿을 칭찬했다. 모양새를 보니 근사했다. 황금빛으로 튀겨진 타원의 공 모양은 완벽했고 나이프로 가운데를 슥 하고 썰자 하얗게 익은 닭고기와 그 안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버터와 허브와 치즈가 참으로 부드러워 보였다. 채를 썬 후 달달 볶아서 기름에 버무려 놓은 당근과 양배추도 맛있을 것 같았다. 렐랴는 속이 가장 꽉 차 있는 가운데 토막을 접시에 덜어서 포크로 우아하게 먹어 보았다. 왕재수는 렐랴처럼 적극적으로 굴지 않았기 때문에 의장이 직접 접시에 고기를 얹어 주었다. 당근 볶음도 잔뜩 곁들여 주었다. 왕재수가 포크질을 하는 것을 보면서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저 녀석 튀긴 커틀릿 안 먹는데... 심지어 안에 버터랑 치즈까지 잔뜩 들어 있으니... 근데 진짜 맛있겠다... ’

 

 

접시와 포크를 내려놓은 후 렐랴가 고개를 끄덕였다.

 

 

“ 음, 맛있네요. 키예프 커틀릿은 잘못 튀기면 닭고기가 너무 익어서 퍽퍽하거나 질겨지기 마련인데 버터에 기름을 섞고 거기에 치즈를 가미해서 촉촉함을 유지했어요. 버터 덕분에 풍미도 살았고요. 자칫 느끼해질 수 있는 것을 파슬리를 비롯한 허브들을 넣어서 괜찮았어요. 곁들인 당근도 설탕과 기름으로 마리네이드해서 볶은 것 같군요. 우리 가브릴로프 입맛에 잘 맞는 맛있는 요리였어요. ”

 

 

의장은 껄껄 웃었다. 류드밀라의 말대로 브릴료바를 아주 밀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렐랴의 심사평에 대만족했는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왕재수를 채근했다.

 

 

“ 그래, 우리 감독님은 이 훌륭한 요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왕재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 고기가 퍽퍽하지 않은 건 장점일지 모르겠지만 이건 과유불급이에요. 버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풍미를 살릴 수 있고 촉촉함도 유지할 수 있는데 해바라기유를 이렇게 많이 섞다니. 원재료인 닭고기의 맛보다 기름과 버터 맛이 더 강해요. 아직도 입안이 미끌미끌한 것 같다고요. 게다가 이렇게 기름진 요리에 가니쉬마저 기름에 볶은 당근을 곁들이다니... 최소한 당근과 양배추를 마리네이드할 때 식초라도 좀 섞었으면 느끼함이 덜했을 것 같군요. ”

 

 

의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왕재수를 쳐다보더니 잽싸게 자기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 흠, 역시 미하일은 대도시 출신이라서 그런지 이렇게 풍부한 맛의 요리는 많이 드셔보지 않은 것 같군요. 이것은 정통 가브릴로프식 요리지요. 우리의 전통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훌륭한 요리입니다. 자고로 기름과 버터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튀김옷을 보면 알맞은 황금빛에 얼마나 겉이 바삭하면서도 안이 부드러운지 모릅니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온다 이겁니다. 정말이지 이런 요리를 매일 얻어먹고 있는 조야의 남편이 부러울 지경입니다. 다른 요리들도 훌륭하겠지만 사실 이 커틀릿이야말로 최강의 우승 후보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남은 커틀릿을 제가 다 먹어도 되겠지요, 렐랴? ”

 

“ 네, 그건 상관없는데 다른 요리도 맛을 보셔야 하니 조금 있다가 드시는 게 어떨까요? ”

 

 

여전히 공정성을 최우선시하는 렐랴가 조바심을 내며 의장을 저지했다. 그리고는 블리즈네초프가 고른 두 번째 요리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아까보다는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기세 좋게 의장이 두 번째 접시를 가리켰다.

 

 

“ 이것은 삼림국 대표 클라우디야 풀코바의 양고기 샤실릭입니다. 샤실릭이야 뭘로 만들어도 맛있지만 그래도 역시 최고는 양고기가 아니겠습니까. 숯도 없이 이런 실내의 가스렌지와 오븐만으로 샤실릭을 구워낼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가상하고 또 맛도 진짜 야외에서 구운 샤실릭 같다 이겁니다. 붉은 양파를 사이사이 끼워서 양고기의 누린내도 감쪽같이 잡았고 특히 익힌 정도가 예술이죠. 아주 부드럽고 촉촉한 것이 일품입니다. 역시 샤실릭은 이렇게 꼬치를 들고 손으로 먹어야 제 맛이죠. 자, 한 꼬치씩 드셔보시죠. ”

 

 

베르닌은 왕재수의 ‘한 조각도 아니고 한 꼬치라니, 미쳤냐!’ 하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을 보고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렐랴는 의장이 권하기 전에 이미 모범적으로 꼬치를 손에 들고 먹음직스러운 갈색으로 그을린 양고기와 붉은 양파를 먹어보고 있었다. 손으로 꼬치를 들고 먹는데도, 심지어 도톰한 입술 근처에 양고기 육즙이 흘러내려 살짝 묻었는데도 렐랴는 너무너무 매력적이고 예뻐서 베르닌은 잠깐 심장이 두근거렸다. 주위를 보니 다른 남자 참가자들도 입을 헤 벌리고 렐랴를 쳐다보고 있었다. 렐랴는 주의 깊게 맛을 보면서 먹었지만 꼬치 하나를 전부 해치우지는 않았다. 반쯤 먹고 난 후 손수건으로 입을 닦고 물을 좀 마셨다.

 

 

그러는 동안 왕재수는 포크로 양고기 한 점과 양파 한 점을 빼내서 천천히 먹었다. 베르닌은 항상 왕재수가 양고기를 먹는지 안 먹는지 궁금했었다. 양고기는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었고 까탈스러운 왕재수의 식성을 두고 모험을 하기 싫어서 사본 적이 없었다. 잠시 후 왕재수는 접시에 꼬치와 포크를 내려놓고 렐랴처럼 물로 입을 헹궜다. 그리고 짤막하게 평을 했다.

 

 

“ 누린내를 다 잡은 건 아니에요. 민트 젤리나 고수를 썼으면 더 좋았을 걸 그랬어요. 익힌 정도는 나쁘지 않고요. 하지만 샤실릭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숯불에서 오는 맛인데 그게 없는 게 아쉽군요. ”

 

 

렐랴가 곧장 동의했다.

 

 

“ 미샤 말이 맞아요. 우리 가브릴로프에서는 양고기 샤실릭에 고수 대신 보통 황금손가락 버섯을 쓰는데 그 버섯은 여름에 나서 지금은 구하기 힘드니 양파를 대신 쓴 것 같네요. 미샤 얘기대로 민트를 썼으면 더 좋았을 거예요. 육즙은 풍부하네요. 숯불이었다면 훨씬 맛있었을 것 같아요. 오븐이나 가스 렌지를 써야 했으니 샤실릭보다는 스테이크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그래도 전반적으로 맛은 좋았어요. 좋은 양고기를 쓴 것 같네요. ”

 

 

베르닌의 옆에서 류드밀라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좋은 양고기를 쓰셨겠지, 남편이 양떼 농장 지배인에 의장의 친구니까. ”

 

 

아무래도 류드밀라는 심혈을 기울인 파프리카가 결선에 진출하지 못해 속이 상한 것 같았다. 일찌감치 실격을 당한데다 그 전부터 아무런 수상 기대도 없었던 베르닌은 풀코바의 양고기 샤실릭도 너무너무 먹어보고 싶었다. 요리를 하느라 너무 진을 뺐는지 배가 고파서 꼬로록 소리가 났다. 결선 진출 요리들이야 심사위원들이 맛본다 치고, 나머지 조리대 위에 있는 음식들은 자기들에게 나눠주면 안 되나 싶었다.

 

 

이번에는 렐랴가 자신이 고른 요리를 소개할 차례였다. 그녀가 먼저 소개한 요리는 초록빛 풀과 검은색이 도는 자줏빛의 토마토 비슷한 알맹이들이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윤기 나는 갈색 고기 요리였다. 모양만 봐서는 무엇인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 이건 벨르이 오스트로프의 시립공원 관리자인 소피야 마츠케바의 요리예요. 소피야는 요리 솜씨가 뛰어나기로 유명해서 가끔 주부들을 모아놓고 강습도 해요. 공교롭게도 이번 요리도 앞선 클라우디야처럼 양고기를 주재료로 썼네요. 하지만 조리 방식은 완전히 달라요. 일단 향신료가 많이 들어갔고, 제일 중요한 건 검은 숲에서 나는 자두를 넣었다는 점이에요. 저도 양고기 요리를 즐겨 하지만 자두를 써본 적은 없었는데 새로 하나 배웠어요. 탁월한 선택이에요. 말린 자두의 달콤하면서도 살짝 쌉쌀한 맛이 양고기와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맛이 나요. 그리고 큼직한 호두 알갱이들을 사이사이 박아 넣고 허브를 가미해서 누린내도 나지 않아요. 오븐을 쓰지 않고 직접 팬에 구웠기 때문에 껍질도 바삭바삭하고 맛있어요. 두 분도 드셔 보세요. ”

 

 

블리즈네초프가 나이프로 고기를 크게 한 토막 썰더니 덥석 입에 쑤셔 넣었다. 잠시 후 자두도 한 알 밀어 넣었다. 우물우물 씹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흠, 이것은 꽤 이국적인 맛이군요. 뭔가 허브와 향신료가 잔뜩 들어가서 더운 나라 음식 맛이 나는군. 자두를 넣다니 좀 신기한데... 내 취향으로는 양고기는 역시 샤실릭 쪽이 더 마음에 들긴 합니다. 하여튼 특이한 맛이로군요. 창의적이에요. ”

 

 

자기가 미는 요리들의 순서가 끝나서 그런지 블리즈네초프의 평은 생각보다 짧았고 건조했다. 렐랴는 왕재수가 고기를 작게 썰어서 자두와 호두, 초록색 풀 등속을 곁들여 먹어보는 동안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잠시 후 왕재수가 말했다.

 

 

“ 나쁘지 않아요. 자두와 양고기가 잘 어울리는 편이고 불 조절을 잘 했는지 육즙도 살아 있어요. 난 처음 두 가지보다 이게 더 나은 것 같아요. 여기서는 잘 쓰지 않는 향신료를 많이 넣었네요. 카다몬, 고수, 그리고 사프란이 조금 들어간 것 같군요.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허브는 로즈마리와 타임, 그리고 잘 모르는 풀이 하나 더 들어간 것 같아요. 살짝 습한 향을 생각하면 풀이 아니라 버섯 같기도 하고. ”

 

 

렐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그게 제가 아까 얘기한 황금손가락 버섯이에요. 가브릴로프 토종 버섯이에요. 그런데 정말 대단하네요, 미셴카. 한 입밖에 안 먹었는데 향신료와 허브를 모두 맞추셨어요. ”

 

 

왕재수는 별로 으쓱하지도 않았다. 베르닌은 마츠케바가 분명 투레츠키에게서 향신료를 조달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두와 각종 향신료를 곁들인 양고기 구이라니 베르닌으로서는 생소했지만 까탈스러운 왕재수가 처음으로 ‘나쁘지 않다’고 했으니 분명 맛있을 것 같았다. 더더욱 꼬로록 소리가 커졌다.

 

 

자두 양고기 요리에 이어 렐랴가 뽑은 것은 갈색과 황금빛, 그리고 크림색이 겹겹이 어우러진 근사한 메도빅이었다. 보자마자 베르닌은 보랴의 솜씨라는 것을 깨달았다. 왕재수 쪽을 보니 ‘크림과 당분!’ 하고 소리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는 표정이었다! 블리즈네초프마저도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 아니, 이건 메인 요리가 아닌데. 의외로군요, 렐랴. 디저트를 뽑다니. ”

 

“ 저도 처음에는 왜 하고많은 요리들을 놔두고 케익을 만들었을까 했지만... 이건 정말 대단해요. 말이 필요 없어요. 구시가지에 있는 식당 스베촉의 보리스 도브로류보프의 솜씨인데요, 스베촉이야 그쪽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워낙 맛있는 식당이라고 소문이 나 있으니 메인 요리야 의심할 필요도 없지만 설마 케익까지 이렇게 잘 만드는 줄은 몰랐어요. 다들 아시겠지만 전 제과제빵에 아주 강점을 가지고 있어요. 메도빅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이건... 이 메도빅을 한 입 먹는 순간 전 무릎을 꿇고 말았어요. 진짜 달콤하고 맛있어요. 게다가 이렇게 겹겹이 층을 쌓다니... 열두 겹은 되는 것 같아요! 한 시간 동안 이렇게 완성도 높은 케익을 만들어 내다니 정말 대단해요. 한 입 먹는 순간 우승감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

 

 

의장과 왕재수가 동시에 케익을 잘라서 입에 넣었다. 베르닌은 12겹으로 층층이 쌓여 있는 꿀케익 메도빅 사이사이에 들어 있는 크림의 단면을 보고 반쯤 기절할 것 같았다. 먹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음식 투정이나 부리는 왕재수 대신 자기가 심사위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주위를 보니 다른 사람들도 군침을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딱 차 한 잔 마시기 좋은 오후 시간이었다!

 

블리즈네초프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아, 맛있군요. 음... 상급의 메도빅이야. 모스크바에서 먹었던 것 같은 맛이군. 이런 솜씨라면 메인 요리를 만들어줬으면 좋았을 것을. ”

 

“ 전부 메인 요리니까 케익도 하나쯤 있는 게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정말 맛있잖아요. ”

 

 

렐랴가 열성적으로 변호했다. 그때 케익을 삼킨 왕재수가 휘파람을 불었다. 베르닌은 그가 뭘 먹고 휘파람을 부는 것을 처음 봤다. 렐랴와 블리즈네초프도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왕재수가 활짝 웃었다.

 

 

이거 맛있어요. 난 원래 단 거 잘 안 먹는데... 분명히 많이 달콤한데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아요. 꿀 크림도 많이 들어 있는데 느끼하지도 않고, 겹겹이 쌓여서 이렇게 층이 높은데도 입에 들어가는 순간 삭 녹아버리는 게 가볍고 부드러워요. 위에 뿌린 아몬드와 호두도 너무 고소하고. 어릴 때 먹어본 것 같은 맛이야. ”

 

“ 그렇죠? 메도빅은 흔하니까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메도빅이라면 서기장 식탁에라도 올라가겠어요. ”

 

 

렐랴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조했다. 베르닌은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가 메도빅을 손으로 마구 움켜서 와구와구 먹고 싶은 것을 혼신의 힘을 다해 참고 또 참았다.

 

 

‘ 아아 먹고 싶다! 먹고 싶다! 먹고 싶다! ’

 

 

꿀케익의 고문도 모자라 이제 왕재수의 차례가 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까다로운 왕재수가 맛있다고 하는 음식은 대체 얼마나 맛있을지 베르닌은 머리가 띵했다. 이것은 대회라는 이름을 빙자해 선량한 인민들의 뱃속과 침샘을 고문하는 악독한 짓이었다!

 

 

왕재수가 별 말 없이 테이블에 놓여 있는 황갈색의 커다란 피로그 파이를 가리키자 블리즈네초프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 자, 미하일. 설명이 필요합니다. 누가 만든 음식인지... ”

 

“ 글쎄요, 난 이름표를 안 봐서... ”

 

“ 아니, 어떻게 이름표를 안 보고 뽑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건 대회인데! 누가 만들었는지가 제일 중요한데. ”

 

“ 누가 만들었는지는 나중에 번호 보면 알잖아요. 제일 맛있는 거 고르는 거라고 해서 그렇게 한 건데. 여기서 먹어본 것 중에 이게 제일 맛있었어요. 두 분이 고른 것들보다 더 맛있어요. 생선을 넣은 파이는 잘못 구우면 엄청 질척해지는데 이건 완벽해요. 맛을 보면 연어와 농어를 섞은 것 같아요, 시금치와 마늘, 견과를 넣어서 풍미가 살아 있어요. 소스는 스메타나를 썼는데 굉장히 부드럽고 생선과도 잘 어울려요. 비린 맛도 전혀 없고 촉촉하면서도 전혀 과하지 않고 담백해요. ”

 

“ 어머나, 생선 파이로군요. 맛있겠어요. 처음으로 생선 요리가 나왔네요! ”

 

 

아직도 이름표 타령을 하고 있는 의장을 밀치고 렐랴가 앞으로 나왔다. 기대에 찬 표정으로 생선 파이를 나이프로 썰었다. 단면이 나타나자 렐랴를 비롯해 홀 안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와...’ 하고 군침을 삼켰다. 생선 파이는 한 마디로 아름다웠다! 아주 두툼한데다 황금빛 파이 시트 위로 붉은 연어 살이 깔려 있고 그 위에 녹색 시금치와 노르스름한 견과가 한 겹 덮여 있고 또 그 위에 하얀 농어 살이 두툼하게 얹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시금치와 견과가 한 층 얹혀 있고 이것을 바삭하게 구워진 황갈색 파이 껍질이 완벽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줄줄 흘렀다.

 

렐랴는 잘라낸 파이를 한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서서히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아름다운 회색 눈에 황홀감이 어렸다. 파이를 삼킨 후 렐랴가 나직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아, 미셴카. 이건 정말 맛있네요. 다른 말이 필요 없어요... 아...

 

 

렐랴는 나이프로 파이를 아까보다 더 크게 썰었다. 잘라낸 파이 조각을 이제껏 늘어놓았던 미사여구 같은 것도 없이 급하게 다시 먹었다. 너무 맛있게 먹다가 목이 막혀서 잠깐 기침까지 했다. 왕재수가 컵을 건네주자 렐랴는 물을 마신 후 한숨을 쉬었다.

 

 

“ 아아... 이제껏 제가 요리를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런 파이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겠어요.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보다 뛰어난 요리는 안 나올 것 같아요. 의장님, 한번 드셔보세요. 오늘의 우승 요리가 여기 있네요. ”

 

 

조리대 쪽을 돌았던 블리즈네초프가 다가왔다. 아주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지도 않았다. 한 손에 이름표를 들고 있었다. 왕재수를 쳐다보며 딱딱한 음성으로 물었다.

 

 

“ 이거 말인데, 미하일. 혹시 24번이었나요? ”

 

“ 그런가... 잠깐만요. ”

 

 

왕재수가 테이블 한쪽에 놔뒀던 수첩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맞을 걸요, 24번하고 27번. 27번은 저 쇠고기 요리니까 24번 맞아요. ”

 

 

의장이 혀를 찼다.

 

 

“ 으음... 그렇군... 안타깝지만 이건 안 됩니다. 이건 실격이에요. ”

 

 

렐랴와 왕재수 뿐만 아니라 참가자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렐랴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 아니 왜요, 아까 30번처럼 이름표가 없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인가요? 이렇게 맛있는 요리가 왜 실격이란 거죠? ”

 

“ 거참, 렐랴. 대회 지침 기억 안 납니까? ”

 

“ 왜 기억이 안 나겠어요, 제가 대회 추진위원이고 매뉴얼과 심사 원칙도 다 손봤는데. 어디에도 생선 파이가 안 된다는 규정은 없어요. ”

 

“ 생선은 여기서 중요한 게 아니지요, 파이도 그렇고. 중요한 것은 제1조 1항입니다. 천하일미 요리대회에 출품되는 요리는 소비에트 연방과 가브릴로프의 이념과 미풍양속을 해치면 안 된다.

 

“ 그래요, 그건 어느 대회 어느 행사 지침에나 1번으로 들어가는 거잖아요. 형식적인 거죠. 대체 생선 파이가 우리 소비에트 연방과 가브릴로프의 이념과 미풍양속을 해칠 구석이 어디 있다고... ”

 

허참... 이거 안 보입니까? 이 십자가 표시! 이건 정교 십자가라고요! 파이 껍질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지 않소! 이건 수도원 파이라고요! 알다시피 하느님인지 뭔지를 숭배하는 정교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레닌주의의 적이며 소비에트 연방의 뿌리를 갉아먹는 미신이자 백해무익한 반동 세력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달리 수도원이 폐쇄된 게 아니지! 그런데 어떻게 감히 그것도 혁명의 요람이었던 우리 가브릴로프에서 당과 의회가 예산을 댄 요리대회에 반동적인 수도원 음식이 나온 것도 모자라 껍데기에 십자 표시까지 그려져 있을 수가! ”

 

 

렐랴가 고개를 저었다.

 

 

“ 그게 무슨 얘긴가요, 의장님. 이게 수도원 음식이라고요? 누가 만든 건데요? 이름표를 보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긴 종교 박물관이라고 씌어 있는데요, 아말리야 루카셴코... 아, 아말리야였군요! 어쩐지...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저희 대회에 나와 주시다니 이건 진짜 영광이에요! ”

 

 

렐랴의 열광에도 불구하고 의장은 냉랭했다.

 

 

영광이고 뭐고 이건 실격이에요! 아무리 맛있어도 제1 지침을 위반했으니 절대 안 됩니다.

 

“ 의장님,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는 수도원이 아니라 종교 박물관 대표잖아요! 박물관도 공공기관인데 어째서 안 된다는 건가요! 물론 생선 파이는 수도원의 대표적인 음식 중 하나죠. 하지만 그렇게 치면 우리 러시아 전통 음식 중 교회와 한번이라도 연을 맺지 않았던 음식이 어디 있나요! ”

 

“ 다른 걸 다 떠나서 파이 위의 십자 표시 때문에 실격 처리를 할 수밖에 없어요! ”

 

 

가만히 있던 왕재수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 아 정말 가지가지 하네요. 십자 표시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난 눈 씻고 찾아봐도 못 찾겠는데! ”

 

“ 여기, 여기 이 십자 표시가 안 보인단 말입니까! ”

 

 

의장이 파이 껍질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베르닌도 류드밀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쭉 빼고 파이 껍데기를 바라보았다. 가운데에 십자 표시로 금이 가 있었다. 왕재수가 코웃음을 쳤다.

 

 

이건 파이가 터질까봐 수증기가 빠져나가도록 가볍게 금을 낸 거잖아요! 이렇게 속이 꽉꽉 차 있는 두툼한 파이는 잘못하면 부풀어 터질 수도 있고 야채의 수분 때문에 안이 질척해지기 때문에 공기구멍을 조그맣게 내준 거라고요! 껍데기에 금 그은 걸 갖고 십자가라니! 이렇게 돌려서 보면 십자가가 아니고 X 표시인데! ”

 

“ X도 문제지 뭐란 말이오! 그리스도(Христос)의 X 아니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이건 반동적인 음식이오! 실격이오! ”

 

“ 무슨 낱말 맞추기도 아니고, 맛있는 음식을 뽑는 대회라더니 무슨 그리스도가 어떻고 수도원에 반동이 어떻고... 그럼 애초에 종교 박물관은 참가하지 말라고 접수를 막든가. 왜 이제 와서 트집인지 이해가 안 가네요! ”

 

 

왕재수가 화를 내며 따졌다. 평소에 자기 일이 아닌 모든 것을 귀찮아하는 성격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진짜 단단히 열 받은 것 같았다. 의장은 왕재수가 조목조목 따지자 말문이 막혔는지 잠깐 어버버 하다가 공격 방향을 잽싸게 돌렸다.

 

 

“ 아니, 참 이상하군요. 하고많은 요리 중에 하필 종교적 반동 색채가 뚜렷한 생선 파이를 고르고. 그것도 모자라 명확히 드러난 십자 표시를 놓고도 이 음식을 변호하니... 이봐요, 미하일. 내가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지만 가뜩이나 당신은 이념적으로도 불확실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는데. 자꾸 이렇게 우기면 당신이 아직도 반체제주의와 불순한 이념을 버리지 못했다고 의심을 받게 된단 말입니다.

 

맛있는 걸 맛있다고 하는데 뭐가 불순하다는 거예요!

 

 

왕재수가 굽히지 않고 화를 냈다. 베르닌은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진다고 생각했다. 저 녀석의 입을 막아야 하나 하고 걱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오른편 구석에 앉아 있던 백발의 노부인이 일어나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이제 그만들 하시죠. 그 생선 파이는 내가 수도원에서 전해져 오는 정통 레시피로 만들었으니 정교 쪽 요리라는 것은 의장님 얘기가 맞습니다. 대회 지침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몰랐군요. 몰라서 수도원 레시피로 파이를 만든 것이니 지침에 따라 실격 처리를 해주시면 되겠네요. 그러니 다들 진정하세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에게는 내 파이를 맛있게 드셔주신데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껍데기의 십자 모양 금은 미하일 얘기가 맞아요. 공기구멍을 미세하게 내서 수증기를 빼내기 위한 거였답니다. 여러분 중 누구라도 파이 맛이 궁금하면 나중에 따로 나에게 놀러오세요. 그럼 난 이만 나가보겠어요. ”

 

 

아말리야가 꼿꼿하고 우아하게 홀을 나간 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머쓱해진 의장이 헛기침을 한 후 왕재수에게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뒤늦게 왕재수의 후원자 아저씨들 생각이 난 것 같았다.

 

 

“ 자, 이렇게 해결이 됐군요. 아까는 내가 실수한 것 같은데. 고의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니 잊어줘요, 미하일. 아무래도 나는 의회를 이끌고 있어 법령과 지침에 민감하다 보니 당신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예술가라는 것을 깜박했단 말이지요. 하여튼 다음 요리를 소개해 주시죠. 냄새가 아주 맛있게 나는데. ”

 

“ 그래요, 미셴카. 생선 파이는 진짜 맛있었지만 지침에 위배된다니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마지막 요리를 소개해 주세요. ”

 

 

왕재수가 소리 없이 휘파람을 불었다. 표정은 다시 평온해졌지만 몇 달 동안 왕재수를 봐온 베르닌은 그가 잔뜩 열 받아서 전부 뒤집어엎고 나가버리고 싶지만 렐랴를 봐서 참고 있는 상태라는 것쯤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럴 때는 왕재수가 여자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성격이란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의장을 적으로 돌려봐야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가뜩이나 이런 자리에서, 심지어 방송 취재까지 와 있는 자리에서 반동분자니 이념이 불순한 인간이니 하고 몰리기 시작하면 더욱 큰일이었다. 국장이야 아주 좋아하겠지만...

 

 

왕재수는 마지막 접시를 가리키며 김이 다 빠졌다는 듯 건조하게 말했다.

 

 

“ 아까 게 제일 맛있긴 했는데. 나머지는 다 고만고만했어요. 딱 하나 빼놓고는. 그건 정말 입에 댈 수도 없는 고약한 요리였어요. 보르쉬 냄새만 풍기는 구정물 같은 게 하나 있더라고요. 하여튼 다른 것들 중엔 그나마 이게 제일 나았어요. 비프 스트로가노프네요. 소스는 제대로 만들었어요. 고기는 너무 익혔고요. ”

 

 

의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이름표를 확인했다.

 

 

“ 27번이라고 했으니... 안드레이 오로빈스키, 아, ‘비슈네브이 사드’ 잡지 대표로군요. 여기 대표라면 렐랴가 나와야 했을 텐데 심사위원이라 못 나와서 다른 사람이 나왔나 보군요. 아깝네요, 렐랴. 당신이야말로 강력한 우승 후보였는데. ”

 

“ 저야 추진위원에 심사위원까지 겸하고 있으니 당연히 나오면 안 되죠. 안드레이는 원래 요리 솜씨가 있는 편이었어요. 이 비프 스트로가노프는 저희 집안 레시피로 만든 것 같군요. 저는 맛만 보고 평은 하지 않겠어요, 어쨌든 저희 잡지 쪽 참가자니까요. ”

 

 

안드레이의 비프 스트로가노프도 근사해 보였다. 상아빛의 풍성한 감자 퓌레 위에 먹음직스러운 갈색 소스로 잘 버무려진 쇠고기와 양송이가 예쁘게 올라가 있었다. 베르닌은 안드레이의 ‘이건 경쟁이에요!’가 떠올라서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먹어보고 싶기는 했다. 블리즈네초프는 조금 전에 아말리야의 요리를 실격시키고 나자 왕재수의 눈치가 보였는지 고기를 거의 한 국자 가깝게 떠서는 쩝쩝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배를 쓸며 만족스럽게 껄껄 웃었다.

 

 

“ 어험, 역시 레닌그라드에서 오셔서 그런지 귀족적인 요리를 고르셨군요, 미하일. 그리고 렐랴, 자랑스러워해도 되겠군요. 이건 훌륭한 비프 스트로가노프입니다. 고기도 맛있고 특히 소스가 부드러운 크림 맛과 고기 육즙이 조화되어 일품이에요! 이것 참... 조야의 키예프 커틀릿만 아니었어도 우승감이라고 단언할 수 있으련만... 참 맛있군요. ”

 

 

렐랴는 고기와 양송이를 포크로 떠서 천천히 먹었고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힐끗 보니 저편에 앉아 있는 안드레이의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갰다. 분명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렐랴는 아까 했던 말대로 음식에 평을 하지는 않았다. 베르닌은 그녀의 공정한 태도에 감명을 받았고 역시 렐랴는 최고라고 생각했다.

 

 

블리즈네초프가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 자, 그럼 이제 다 먹어봤으니 수상자를 가려야 할 때가... ”

 

잠깐만요.

 

 

왕재수가 의장의 말을 끊었다.

 

 

“ 다 먹은 거 아니에요. 아직 하나 남았어요. ”

 

“ 그게 무슨 소립니까, 미하일. 한 사람당 10개씩 맡아서 모두 맛을 봤는데. 각자 뽑은 요리도 서로 다 맛을 봤고. ”

 

“ 아니에요, 아직 하나 남았어요. 30번. 이름표 떨어졌다고 아까 실격시키자고 한 거 말예요. 난 저거 먹어보고 싶어요. ”

 

“ 아니, 그 망측한 달걀쌈 말입니까? 그건 이름표도 없는데... ”

 

“ 벌써 하나 실격시켰잖아요! 내가 맡은 건 10개인데 그 중 심사 대상이 8개밖에 안 된다는 건 공정하지 않아요. 그리고 분명히 아까 심사 원칙을 정할 때 심사위원별로 두 개씩 추천을 해서 총 여섯 가지 요리를 맛보고 고르자고 했잖아요. 내가 고른 건 하나 뿐이니까 하나 더 채워야 해요! ”

 

 

렐랴가 고개를 끄덕였다.

 

 

“ 미샤 말에 일리가 있네요. 애초에 모두가 1번부터 30번까지를 모두 맛봤다면 모르겠지만 심사위원 하나 당 10개를 맛보고 두 개씩 추천하기로 했는데 미샤는 본의 아니게 하나밖에 추천하지 못했잖아요. ”

 

“ 하지만... 그러면 아까 맛본 다른 요리들 중에서 추가로 하나를 더... ”

 

“ 전부 별로였단 말이에요! 비슷비슷했어요. 군계일학으로 맛있었던 생선 파이를 십자빵이니 뭐니 해서 떨어뜨렸잖아요. 저 비프 스트로가노프도 다른 것들보다 약간 나은 정도였고 나머지는 다 그냥 그랬어요. 그러니까 마지막 하나 남은 걸 먹어봐야겠어요. ”

 

“ 하지만 저건 망측한 달걀쌈... 심지어 이름표도 없고... ”

 

“ 이름표 없어도 분명 누가 만들었으니까 저기 있는 거잖아요. 나도 알아요, 분명 맛없을 거. 그래도 심사의 공정성을 위해서 먹어는 봐야겠어요. 별로면 난 그냥 저 비프 스트로가노프 하나만 추천할게요. ”

 

 

블리즈네초프는 좀 짜증이 난 것 같았지만 조야 브릴료바를 밀어주기 위해 최대의 경쟁자인 아말리야를 실격시킨 것이 좀 찔렸는지, 아니면 왕재수가 대드는 게 골치 아팠는지 결국 동의했다. 베르닌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 저 자식, 왜 갑자기 내 걸 먹어보겠다는 거야. 그냥 아까 그렇게 실격시키는 걸로 끝냈으면 그만이지. 안 그래도 엉망인데 또 무슨 말을 늘어놓으려고. 다 식어빠져서 더더욱 맛도 없겠구만. 시간 없어서 야채도 다 안 익은 거 쑤셔 넣은 건데. 에이 참... 나 여기 온 거 비밀로 하고 있어야지. 내 거라는 거 알면 얼마나 구박을 하려고... ’

 

 

베르닌의 속마음 따위는 물론 아랑곳하지 않고 왕재수가 조리대로 갔다. 의장과 렐랴는 따라오지 않았다. 렐랴는 왕재수의 편을 들어주긴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역시 ‘망측한 달걀’이란 의장의 말에 동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왕재수는 나이프로 오믈렛을 자르더니 주르르 쏟아져 나오는 야채와 식어버린 치즈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포크로 달걀지단과 야채 속을 쓸어 모아 한 입 먹었다. 이제 곧 까칠한 조롱이 쏟아져 나오겠거니 하고 베르닌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꼭꼭 눌렀다.

 

 

왕재수가 갑자기 ‘어?’ 하더니 오믈렛을 조금 더 잘랐다. 그리고는 한 입 더 먹었다. 그리고는 달걀지단 안쪽을 헤쳐보기도 하고 토마토 때문에 질척하게 뒤섞인 야채속도 따로 먹어 보았다.

 

 

“ 어, 이거 이상해... 맛있어!

 

 

왕재수는 오믈렛을 더 자르더니 또 먹었다. 예상외의 반응에 놀란 렐랴가 다가왔다.

 

 

“ 맛있다고요? 그게요? 정말이에요, 미셴카? 대체 무슨 맛인데요? ”

 

그냥 맛있어요. 다른 건 전부 고기에 생선 일색이고 기름도 많이 들어가서 무겁고 느끼했는데 이건 굉장히 가벼워요. 그냥 편하게 먹을 수 있고 맛이 소박하고 담백해요. 야채가 많이 들어 있어서 좋아요. 어떻게 이런 게 맛있을 수가 있지? 다 먹어도 되나?

 

“ 잠깐만요, 저도 먹어볼래요. ”

 

 

왕재수는 렐랴에게 직접 오믈렛을 잘라 주었다. 렐랴는 포크로 달걀지단을 돌돌 말아서 야채와 함께 입 안에 밀어 넣고는 오물오물 씹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 어, 그러고 보니 꽤 맛있네요. 생긴 게 너무 엉망이어서 기대 안 했는데. 메인 요리도 아니고 디저트도 아니지만 가볍고 맛있어요. 야채도 사각사각 씹혀서 좋네요. 식감을 위해 일부러 덜 익힌 건가 봐요. 어떻게 이런 게 맛있을 수가 있느냐고 하셨는데, 끝 맛에서 오는 은은한 풍미가 있어요. 기름을 두르고 부친 게 아닌 것 같아요. 버터를 쓴 것 같은데... 꼭 아까 보랴의 메도빅에서 풍겼던 그 은은한 맛이 나네요. 좋은 버터인가 봐요. 미셴카, 이걸 여섯 번째 결선 진출 요리로 추가하실 건가요? ”

 

“ 네. ”

 

 

렐랴가 접시를 들고 중앙 테이블로 갔다. 블리즈네초프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별 수 없이 오믈렛 가장자리를 조금 잘라서 먹었다.

 

 

“ 두 분이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 이해가 잘 안 가는군요. 이건 천하일미 요리대회인데, 이런 전채나 안주 같은 달걀쌈을 결선에 진출시키다니요. 뭐 맛은 그럭저럭 나쁘진 않지만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평범한 맛인데. 그냥 계란 부쳐서 야채랑 치즈 조금 넣고 둘둘 말아놓은 거 아닙니까. 그나마도 옆구리도 다 터뜨리고... 오죽 창피했으면 이름표도 떼어버렸겠어요."

 

“ 그래도 난 이거 고를 거예요. 맛있어요. 이제 더 안 드실 거죠? ”

 

 

왕재수가 의장의 손에서 접시를 빼앗았다. 남은 오믈렛을 반으로 자르더니 두 입 만에 전부 먹어버렸다. 그리고는 두 눈을 반달 모양으로 뜨더니 까맣고 기다란 속눈썹을 나비처럼 파닥거리면서 좋아했다.

 

 

“ 아, 맛있어. ”

 

 

류드밀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베르닌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 저거 진짜 맛있나 봐요. 우리 미셴카는 맛없는 건 절대 안 먹는데. 저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봐요. 심지어 다 먹었어요. 대체 누가 만든 거지? ”

 

“ 그, 글쎄요... 신기하네요. 맛없어 보이는데... ”

 

 

베르닌은 멍해져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왕재수가 너무 기름진 음식들을 많이 먹어본 나머지 미각이 어떻게 됐나 싶었다. 렐랴야 왕재수를 좋아하니 그의 기분을 맞춰주고 싶어서 둘러댄 게 분명했다.

 

 

렐랴가 말했다.

 

 

“ 이제 여섯 개의 요리를 모두 맛보았네요. 순서대로 조야 브릴료바의 키예프식 커틀릿, 클라우디야 풀코바의 양고기 샤실릭, 소피야 마츠케바의 자두를 곁들인 양고기 구이, 보리스 도브로류보프의 메도빅, 안드레이 오로빈스키의 비프 스트로가노프, 익명 참가자의 야채 오믈렛입니다. 그럼 수상자 결정을 위해 잠시 논의를 해야겠네요. ”

 

 

심사위원석에서 블리즈네초프와 렐랴, 왕재수가 목소리를 낮추어 열심히 토론을 하는 동안 사회자는 잠시 휴식시간을 선언했다. 그리고는 참가자들에게 결선 진출에 실패하고 조리대에 남아 있는 음식들을 맛보라고 해주었다. 모두들 이 순간만을 기다렸는지 우르르 나가서 이 음식 저 음식을 먹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베르닌도 급하게 뛰쳐나갔다. 나와 있는 모든 음식들을 먹어보고 싶었다. 아르카지의 보르쉬만 빼고. 다들 진짜 맛있었다. 류드밀라의 생선을 채운 파프리카도 꿀맛이었다.

 

 

“ 우와, 류다. 이거 진짜 맛있네요. 담백하고. ”

 

“ 그렇죠! 이게 우리 감독님 쪽에 배정이 됐어야 뽑아줬을 텐데. 하필 의장 쪽 조리대라서 떨어진 거예요! 30개를 다 먹어봐야 공정한데... 이건 전부 의장의 음모라고요. 아까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떨어뜨리는 것 좀 봐요! 뻔할 뻔자 조야 브릴료바가 우승이고 렐랴가 추천한 두 개 중 하나, 감독님이 추천한 것 중 하나가 각각 2~3위로 배정될 게 분명해요. 렐랴도 집안이 워낙 좋아서 의장이 눈치를 보고 있고, 우리 감독님도 일단 심사위원으로 불러놨으니 아말리야 실격시킨 것도 있고 해서 체면치레 상 분명 하나쯤은 붙여줄 거라고요. ”

 

“ 으잉, 되게 복잡하네요. 그냥 제일 맛있는 걸로 세 개 뽑으면 될 텐데 렐랴와 저 녀석과 의장이 추천한 걸 하나하나씩 배정까지 해야 한다고요? 공정하지 않네요. ”

 

“ 원래 이런 심사는 다 나눠 먹기 식이라고요! 당연히 1등이야 권력 구조상 의장이 미는 쪽이겠지만... 과연 렐랴와 우리 감독님 중 누구를 의장이 더 신경 쓸지가 관건이군요. 그것에 따라 2, 3위가 결정되겠죠! 우리 귀염둥이 감독님이야 정치적으로 의회와는 상극이니 아마 렐랴가 추천한 쪽에서 2등이 나오겠죠. 근데 딱 하나, 감독님이 추천한 안드레이는 렐랴 비서니까 그런 걸 안배해서 걔가 2등이 될 수도 있겠네요. ”

 

 

베르닌은 머리가 아팠다. 기껏 요리대회인데 맛있는 게 우선이 아니라 여기서도 정치싸움을 해야 하다니 짜증이 났다.

 

 

‘ 뭐 나랑 무슨 상관이야. 맛있는 거나 먹어야지. 우와, 이것도 진짜 맛있다! 안 뽑힌 것들도 이렇게 맛있는데 저 앞에 있는 건 얼마나 맛있을까! ’

 

 

그러다가 베르닌은 자신의 오믈렛도 앞 테이블에 나가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결선 진출한 요리라고 무조건 맛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    *

 

 

 

 

20분 쯤 후 심사위원들이 나왔다. 블리즈네초프 의장은 화색이 완연한 얼굴이었고 렐랴는 불만스러운 듯 도톰한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었으며 왕재수는 다 귀찮다는 듯 졸린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 대체 왜 나와 있는지 이해가 안 가는 예쁜 사회자가 방긋 웃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 자, 의장님. 이제 결과가 나왔나요? ”

 

“ 네, 열띤 토론 끝에 1위부터 3위까지의 수상자가 결정되었습니다. 3위부터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

 

 

홀이 조용해졌다. 의장은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우렁차게 외쳤다.

 

 

3위는 문예지 비슈네브이 사드 대표 안드레이 오로빈스키의 비프 스트로가노프입니다!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

 

 

안드레이가 펄쩍 뛰며 일어났다. 너무나도 좋아했다. 렐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우승해야 한다더니 3위만 해도 너무 좋은 모양이었다. 뛰어나가다가 하마터면 의자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의장은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2위는 스베촉 식당 대표 보리스 도브로류보프의 메도빅입니다!

 

 

보랴가 느릿느릿 일어났다. 안드레이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아서 혹시 우승을 노리고 있었나 싶었지만 앞으로 나가면서 보랴도 활짝 웃었다. 베르닌은 꼭 자기가 상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의장은 헛기침을 했고 더욱 우렁차게 외쳤다.

 

 

대망의 1위, 우승자는 예산국 대표 조야 브릴료바의 키예프식 치킨 커틀릿입니다! 축하합니다!

 

 

꽃무늬 원피스와 털조끼를 걸친 우람한 체구의 중년 여인이 환호성을 지르며 일어났다. 우당탕쿵탕 뛰어나가더니 블리즈네초프 의장을 와락 껴안고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의장 곁에 있던 렐랴가 그 기세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는데 다행히 왕재수가 잽싸게 그녀의 팔을 붙잡아 주었다. 렐랴는 균형을 잡았는데도 한동안 왕재수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황홀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류드밀라가 한숨을 쉬면서 어디 감히 금쪽같은 자기들 감독님을 넘보느냐고 투덜댔다.

 

 

의장이 시상을 했다. 상장과 포크 모양의 트로피 외의 부상으로 1위인 브릴료바에게는 검은 숲 온천 요양소 2인용의 2주일치 휴양권이 수여되었다. 2위인 보랴는 온천 요양소 1주일 휴양권, 3위인 안드레이는 3일 휴양권을 받았다. 참가자들은 열심히 박수를 쳤지만 사실 1위인 브릴료바보다는 보랴가 훨씬 환호를 많이 받았다. 베르닌도 그 세 가지 요리 중에서는 메도빅이 제일 맛있어 보였고 또 보랴도 좋았기 때문에 손바닥이 떨어져라 박수를 쳤다.

 

 

수상자들이 인사를 하고 들어간 후 이제 다 끝났나 싶었는데 의장이 에헴 하며 말을 이었다.

 

 

“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의 결선 진출자들에게는 부상으로 레닌 선집과 역대 서기장 명언집을 수여하도록 하겠습니다. 클라우디야 풀코바, 소피야 마츠케바, 그리고 달걀쌈을 만든 익명의 참가자는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

 

 

사람들이 웅성웅성했다. 다들 그 망측한 달걀쌈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나 궁금한 듯했다. 베르닌은 잠시 나갈까 말까 망설였지만 부끄럽기도 했고 내내 아닌 척 하고 있다가 이제야 나가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생각해서 가만히 있었다. 풀코바와 마츠케바가 나가자 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음, 역시 달걀쌈을 만든 참가자는 자리에 없는 모양이군요. 아마 중도 포기를 했거나 급한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운 모양이지요. 그러면 두 분께만 시상하도록 하겠습니다. ”

 

 

두툼한 레닌 선집과 서기장 명언집을 받아든 풀코바와 마츠케바가 인사를 한 후 자리로 돌아왔다. 모두의 박수가 이어진 후 의장이 대회 종료를 선언했다.

 

 

 

*    *    *

 

 

 

 

바깥 복도에서 왕재수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보랴가 나왔다. 베르닌은 보랴의 손을 꼭 잡고 축하를 했다.

 

 

“ 진짜 축하해요. 그 메도빅 정말 맛있어 보였어요. 먹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네요. 스베촉에서는 메도빅 안 팔아요? ”

 

“ 우리 식당은 밥집이라 디저트는 아이스크림이랑 초콜릿 무스밖에 없어. 먹고 싶으면 주말에 예쁜이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 와라. 메도빅 그거 한판 굽는 게 뭐 어렵냐. 아까 애기가 케익 맛있게 먹는 거 보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

 

“ 그러게요, 걔 춤추던 애라서 원래 단 거 안 먹는데. 그 메도빅이 진짜 맛있었나 봐요. ”

 

“ 사람이 살면서 때로는 단 것도 먹고 즐거움도 누려야지. 하여튼 애 데리고 놀러 와라. 난 이제 식당 가봐야겠다. ”

 

 

보랴가 돌아간 후에도 왕재수는 한참 나오지 않았다. 의장도 아까 나갔는데 대체 뭘 하나 궁금해서 홀로 다시 들어가 보니 왕재수는 렐랴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를 보더니 턱짓으로 테이블 위에 있는 접시를 가리켰다. 보랴의 메도빅이 조금 남아 있었다. 렐랴도 그를 보더니 눈부신 미소를 띠며 상냥하게 말했다.

 

 

“ 어머, 다냐. 어쩐 일이에요. 이리 와서 차 한 잔 마셔요. 이 메도빅 좀 먹어봐요. 진짜 맛있어요. ”

 

“ 어, 네. 감사합니다. ”

 

 

당일 접수를 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대회에 참가했다는 걸 렐랴와 왕재수가 모르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창피해서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을 것 같았다. 그는 렐랴가 건네준 찻잔을 받기는 했지만 차를 마시기도 전에 아까부터 너무나 먹고 싶었던 메도빅을 덥석 포크로 잘라서 먹었다. 먹는 순간 혀와 입술과 목구멍 전체가 사르르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 우와, 이거 진짜 맛있어요. 진짜진짜 맛있어요. ”

 

“ 그렇죠? 보랴가 저보다 훨씬 잘 만드는 것 같아요. 비법이 뭘까? 내일 가서 물어봐야겠어요. 그건 그렇고 전 그만 가봐야겠네요, 미셴카. 원고 마감이 걸려 있어서요. 모레 잠자는 미녀는 꼭 보러 갈게요. 취재도 해야 하니까. 그럼 그때 봐요. 다냐, 안녕. ”

 

 

렐랴가 그를 가볍게 포옹하며 뺨에 뽀뽀를 했다. 그리고는 베르닌이 황홀함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왕재수와도 포옹을 했다. 물론 왕재수와의 포옹과 뽀뽀는 훨씬 길었다. 왕재수는 렐랴와 다정하게 인사를 한 후 그녀가 나가자 베르닌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 다 먹었으면 우리도 가자. 나 속도 울렁거리고 멀미 나. 기름기 너무 많이 먹었나봐. 나가서 맑은 공기 쐬면서 걸어야겠어. 집까지 걸어갈래. ”

 

“ 엥, 나 차 가져왔는데. 걸어가려면 한참 걸리잖아. 난 배고픈데. ”

 

 

왕재수가 냅킨으로 뭔가를 주섬주섬 싸더니 그에게 내밀었다.

 

 

“ 이거 먹으면서 가면 되잖아. ”

 

“ 이게 뭐야? ”

 

“ 아, 이거. 진짜 맛있는 거. 수도원 할머니가 만든 생선 파이. 들고 먹을 수 있을 거야. ”

 

“ 와! 나 이거 아까부터 진짜 먹고 싶었는데! ”

 

“ 뭐? ”

 

 

베르닌은 뜨끔해서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며칠 전부터 생선 파이가 너무 먹고 싶더라고. 그래, 집까지 걸어가지 뭐. 가자. ”

 

 

둘은 출판문화국을 나왔다. 찬바람을 쐬자 왕재수가 살 것 같다는 듯 심호흡을 했다.

 

 

“ 어휴, 느끼해서 죽는 줄 알았네. 다시는 이런 거 안 해! 렐랴가 부탁해도 안 할 거야! 우욱... 계속 그 기름 케익 먹는 기분이었어. ”

 

“ 네가 입맛이 유별나서 그래! 이쪽 지방 사람들은 원래 기름지고 풍부한 요리를 좋아한다고! 얼마나 맛있는데... ”

 

“ 그렇겠지, 돼지기름이나 펑펑 들이붓고. ”

 

 

베르닌은 걸어가면서 생선 파이를 베어 물었다. 먹는 순간 머리가 백지가 되는 것 같았다. 담백하고 고소하면서도 촉촉하고 부드럽고 신선했다. 시금치와 견과와 생선, 버터와 마늘의 맛이 오감을 자극했다. 세상에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또 있을까 싶었다. 수도원에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말도 하지 않고 거의 숨도 안 쉬고 파이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너무 급하게 먹어치우느라 마지막 한 입이 목에 걸려서 캑캑 기침까지 했다. 왕재수가 혀를 차더니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물을 마시고 숨을 고른 후 베르닌이 중얼거렸다.

 

 

“ 진짜 맛있다. 정말 맛있어. ”

 

“ 응. 오늘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었어. 하긴 진짜 맛있었던 건 세 개밖에 없었어. 이거랑 보랴가 만든 메도빅이랑 그 오믈렛. ”

 

“ 너 있잖아, 그 오믈렛 말이야. 진짜 맛있었어? ”

 

“ ‘그’ 오믈렛이라고? ”

 

“ 아니, 그게... 있잖아... 저... 사실 나도 아까 그 대회 참가했었어. 국장이 우리도 나가야 된다고 등 떠밀어서 급하게 왔었거든... 저기... 근데 재료를 준비해야 되는 줄 몰랐어. 그래서 막판에 여기저기서 빌려서... 류다가 토마토랑 치즈 빌려주고 아르카지가 야채 좀 주고... 보랴가 계란이랑 버터랑 소금 후추 같은 거 줘서 내가... 저... 그 오믈렛 사실은 내가... ”

 

알아. 네가 만든 거.

 

 

베르닌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게다가 왕재수가 너무나 무심하게 대꾸해서 더욱 놀랐다.

 

 

“ 뭐? 안다고? 어, 어떻게? 이름표도 떨어져 버렸는데... 너 아까 내가 요리하는 거 본 거야? ”

 

“ 아니. 나 조리 시간 동안 자고 있었어. 자꾸 옆에서 블리즈네초프가 누굴 뽑아야 한다느니 당이 어떻다느니 하고 개소리를 하잖아. 너무 듣기 싫어서 피곤하다고 자버렸어. 네가 온 줄은 몰랐어. ”

 

“ 근데 어떻게 알았어? 내가 만든 건줄? ”

 

“ 한 입 먹으니 알겠던데. ”

 

“ 어떻게? 어떻게 알아? ”

 

“ 그럼 모르냐? 맨날 저녁밥 해주는데. 그리고 자세히 보니 안 먹어봐도 알겠더라! 계란 옆구리도 다 터지고 플레이팅도 엉망이고 접시 완전 더럽혀놓고. 너 말고 누가 그렇게 지저분하게 음식을 담냐!

 

“ 어... 그건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재료 구하느라 막판 10분도 안돼서 만든 거란 말이야! 원래 펠메니 만들려고 했는데... ”

 

“ 아, 펠메니 만들었으면 좋았을 걸. 그때 새해에 만든 펠메니 맛있었는데. 바보, 왜 재료는 안 가져와서. ”

 

“ 나 진짜 아무 것도 모르고 온 거였단 말이야! ”

 

뭐 알았다고 달라졌겠냐. 그래봤자 망측한 달걀쌈이지. 어휴, 야채도 절반 밖에 안 익고 치즈는 한쪽으로 다 뭉치고.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왕재수의 독설에 베르닌은 조금 마음이 상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으니 뭐라고 할 말도 없었다. 풀이 죽어 있는데 왕재수가 덧붙였다.

 

 

“ 근데 진짜 맛있었어. 아까 심사 토론할 때 나 사실 그거 밀었거든. 근데 블리즈네초프가 메인 요리나 디저트는 되지만 그런 건 안 된다는 거야. 렐랴는 맛있긴 한데 플레이팅이 너무 부족해서 감점 요인이라고 하고. 그래서 그냥 그 스트로가노프로 낙착된 거야. 그거 고기 너무 익혀서 난 별로였는데. 그나마 다른 것보단 나은 정도였어. ”

 

“ 아... 나 감동할 것 같아. 너 내 거라는 거 알고 그렇게 편 들어줬구나. 고마워. ”

 

아니야! 웬 헛소리야! 대회는 경쟁인데 무슨 친분 관계가 소용이 있어! 공정하게 해야지! 로만이 나왔어도 절대 안 뽑아줘! 로만은 요리 실력 형편없으니까! 오믈렛이 맛있었어! 맛있으니까 뽑았던 거야. 나도 그거 왜 맛있었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하여튼 맛있었어! 그리고 엄청 감질났어! 태운 데가 많아서 먹을 수 있는 게 너무 적었단 말이야. ”

 

 

베르닌은 왕재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왕재수가 왈칵 신경질을 냈다.

 

 

“ 왜! 왜 그렇게 쳐다봐! ”

 

“ 진짜 맛있었어? ”

 

“ 그래! 내가 언제 음식 가지고 거짓말한 적 있냐! ”

 

“ 하긴... 그렇구나... 저... 그럼 나중에 만들어줄까? ”

 

“ 나중 말고! 오늘! 오늘 저녁으로 만들어줘! ”

 

“ 응, 알았어. 집에 계란 다 떨어졌는데 가게 들러서 사 가자. ”

 

“ 가게 가면 줄 서야 되잖아! 우리 집 냉장고에 계란 몇 알 있어! 그걸로 해줘! 많이많이 해줘! ”

 

“ 그래. 크고 둥그렇게 말아줄게. 시간에 안 쫓기니까 옆구리도 안 터뜨리고 태우지도 않을 수 있을 거야. ”

 

“ 야채도 절반만 익혀줘. ”

 

“ 어, 그래... 근데 안 익은 야채가 좋니? ”

 

“ 응, 난 너무 푹 익은 야채 싫어. 그래서 맛있었나. 스메타나 뿌려 먹으면 더 맛있을 거 같더라. 우리 빨리 가자. 먹고 싶다. ”

 

“ 그래, 빨리 가자. 고마워. ”

 

“ 뭐가? ”

 

“ 내가 해준 거 맛있다고 해줘서. 너 맨날 내가 해주는 밥이 맛없지는 않은 거지 맛있는 건 아니라고 했잖아. ”

 

어... 그래! 맛없지는 않은 정도였어! 그냥 그런 거야! 착각하지 마! 아까는 너무 느끼한 걸 많이 먹어서 맛있게 느껴진 거였어! ”

 

“ 그럼 그냥 보랴네 식당 가서 저녁 먹고 갈래? 오믈렛은 나중에... ”

 

안 돼! 너 왜 말 바꿔! 빨리 집에 가서 해줘! 망측한 달걀쌈 해줘!

 

 

베르닌은 자꾸 웃음이 났지만 왕재수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를 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꾹꾹 참았다. 그리고 잰걸음으로 다리를 건너는 왕재수를 따라잡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FIN

- 2015. 5. 15 ~ 6. 3 -

 

 

..

 

 

이렇게 하여 천하일미 요리대회가 끝났습니다~

 

 

..

 

보랴의 본명인 보리스 도브로류보프에 대해.

도브로류보프라는 성은 '착한, 선한'이란 뜻의 러시아어 '도브르이'와 '사랑'이란 뜻의 '류보피'를 합성해서 만들었다. 실지로 있는 성이기도 하다. 우락부락하지만 마음 착한 보랴를 위해 :)

 

 

..

 

 

여기 나오는 요리들은 대부분 러시아에서 먹어볼 수 있는 것들이다 :) 자두를 넣은 양고기라든가 샤실릭이야 원래는 좀 더운 동네에서 나온 거긴 하지만..

 

결선 진출한 요리들 사진을 몇 개 올려보자면... (어떤 건 내가 직접 먹고 찍은 것, 어떤 건 구글링.... 내가 찍은 사진에는 서명이 붙어 있음)

 

 

 

1. 키예프식 치킨 커틀릿

 

이건 내가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음식점 '고골'에서 먹었던 것이다. 유명한 음식점이고 음식 또한 풍미가 좋은데 단점은 진짜 러시아 스타일이라서 가끔 내겐 너무 기름지다는 것이다... 이 커틀릿도 내겐 많이 기름진 편이었음.

(내 식성은 단추나 렐랴보다는 왕재수와 비슷한 편이어서 ㅎㅎ)

 

 

 

커틀릿을 자르면 단면은 이렇게..

접시 아래를 보면 기름이 주르르...

 

맛있긴 했지만 기름져서 다 못 먹었음..

개인적으로 고골에서 제일 맛있었던 음식은 보르쉬였다~

이 레스토랑에 대한 이전 포스팅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2815 (보르쉬와 생선완자)

 

 

 

2. 메도빅

 

이미 여러번 포스팅한 적이 있는 러시아 꿀케익 메도빅. 러시아에서는 메도빅이라고 하고 체코에선 메도브닉이라 한다. 체코 쪽이 좀 더 진한 맛이었다. (프라하에 머무는 내내 여기저기서 메도브닉을 많이도 먹었는데 거기서 먹었던 메도브닉들은 praha fragments 2013 폴더를 보면 종종 나온다)

 

이것은 페테르부르크의 베이커리 겸 카페 겸 레스토랑인 '고스찌'의 메도빅. 여기는 음식도 디저트도 모두 맛있다. 페테르부르크에 가면 꼭 들르는 곳이다. 크림이 정말 풍부하고 달콤하다.

 

 

 

이건 프라하의 메도브닉.

때깔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건 프라하의 유명한 카페인 그랜드 카페 오리엔트에서 먹었던 것이다. 여기 메도브닉 참 맛있다!

 

 

 

 

3. 비프 스트로가노프

 

스트로가노프 백작(공작이었나.. 맨날 헷갈림.. 서무 25에서는 공작이라고 썼는데)의 레시피로 태어난 러시아 귀족 요리. 이게 미국과 유럽으로 건너오면서 이상한 에그 누들이나 곁들여 먹고, 또 그냥 갈색 국물에 비벼진 고기스튜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정통 스트로가노프는 보통 이런 식이다. 감자 퓌레 위에 양송이와 쇠고기, 크림소스로 요리한 게 올라간다..

 

이것은 고스찌의 비프 스트로가노프. 전에 내가 올린 적 있다. 맛있긴 했는데 크림 소스가 너무 농후하여 내게는 다 먹기가 버거웠다..

 

 

이것은 페테르부르크의 유서깊은 호텔인 그랜드 호텔 유럽(옛 이름 유럽 호텔)의 비프 스트로가노프. 지난 2월에... 여기서는 스트로가노프 공작(백작 ㅠ)의 오리지널 레시피를 쓴다고 했는데 이거 진짜 맛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먹은 스트로가노프가 제일 맛있었다.

 

맨 위에 양파 튀김이 올라간다... 안드레이가 렐랴에게서 전수받아 만든 비프 스트로가노프도 이런 식이다. 그러나 왕재수의 말대로.. 안드레이는 고기를 너무 바싹 익히고 말았음

 

 

 

 

 

 

4. 샤실릭

 

샤실릭은 워낙 유명하니 많이들 아실 듯.. 고기는 양고기, 소.돼지, 닭 등을 모두 쓸 수 있고 때로 생선을 쓸 때도 있음. 제대로 구운 샤실릭은 진짜 맛있다. 양고기 샤실릭도 잘 구우면 누린내가 안 난다.

 

 

 

보통 이렇게 야외에서 숯불에 굽는다. 일종의 바베큐 요리인데 러시아 사람들은 야외로 놀러가면 샤실릭 구워먹는 걸 좋아한다.

 

그건 그렇고 이 사진의 샤실릭은 엄청 기다랗고 고기도 진짜 많이 꽂았네 ㅎㅎ

 

 

 

 

 

 

5. 자두를 곁들인 양고기 구이

 

이 사진은 러시아에서 요리 방송과 책자 등으로 요즘 잘 나가는 율리야 브이소츠카야의 요리. 나도 이건 안 먹어봤고 지난 2월에 페테르부르크 갔을 때 이 사람 요리책을 한권 사왔는데 거기서 봤다. 맛있어 보인다!!

 

 

 

6. 이것이 피로그. 생선 파이.

 

에피소드 시작 전에 잠깐 썼듯 피로그는 들어가는 속에 따라 아주 다양해진다. 여기서는 아말리야처럼 연어를 넣은 연어 피로그 사진들 몇 장. 아말리야는 연어에 농어, 시금치와 견과로 층을 여러 겹 넣었기 때문에 사진의 파이들보다 훨씬 풍성하게 만들었다.

 

잘 구워낸 러시아의 피로그는 참 맛있다!! 옛날엔 러시아 주부의 살림솜씨를 피로그 속을 몇겹 넣어 굽느냐로도 평가했다고 한다.

 

 

 

이렇게 동그란 모양도 있고, 직사각형으로 굽는 경우도 많다. 구워서는 잘라서 먹는다~

 

 

 

연어 피로그는 이런 모양으로 속을 넣기도 하고..

 

 

 

보통은 이런 모양으로 속을 넣는다~

 

 

 

 

 

이건 연어 피로그는 아니고. 쌀과 고기, 허브 등을 층별로 넣어 겹겹이 속을 만들어낸 보야르스키 피로그.

 

 

 

마지막은 그냥 가면 섭섭하니 오믈렛 ㅎㅎ

 

야채 오믈렛 사진 두 장.

 

러시아어로 계란 부침 요리는 야이츠니짜 라고 하는데 그 이름 쓸까 하다가 너무 어렵게 들릴 것 같아 그냥 오믈렛이라고 썼다. 단추가 만든 건 이런 오믈렛과 우리 나라 계란말이의 중간쯤 되는 건데 옆구리가 터졌다 ㅋㅋ

 

 

 

 

너무 음식 테러인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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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다음 이야기는 26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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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메르스 공포로 뒤숭숭한 나날이다.

서무 25편으로 조금이라도 불안증도 잊고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를 덜어내 보세요~

 

이번 편은 분량이 길어서 1부와 2부로 나누어 올린다. 2부는 다음 주에~

 

원래 서무 시리즈 중반 즈음부터 번외편으로 등장인물들의 요리와 레시피를 소개하는 걸 하나 써볼 생각이었는데 그러다가 요즘 냉장고를 부탁해도 재밌게 보고 해서 요리대회 형태로 써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서 이번 편이 나왔다~

 

재밌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독사과와 화재 소동도 가라앉고 베르닌과 왕재수는 일상 생활로 돌아온다. 그런데 어느날 오전 스페호프가 베르닌을 호출해 생각지도 않은 지시를 내리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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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5

 

 

 

 

서무의 슬픔

-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간만에 공연이 없는 목요일 저녁이었다. 왕재수는 신작 준비 때문에 극장에 나와 있었고 베르닌도 국장의 지령 덕분에 최근에는 오후를 극장에서 보내고 있었다. 왕재수가 5시에 무용수들과 신작 연습을 마치고 나왔을 때 베르닌은 그를 복도에서 낚아챘다.

 

 

“ 집에 가자! ”

 

“ 어, 나 할 거 아직 남았는데. ”

 

“ 오늘 공연 없잖아! 내일도 발레 아니고 오페라잖아. ”

 

“ 아까 연습할 때 보니까 음악이 미묘하게 비는 데가 있어. 안무를 좀 바꿔야 할 것 같아. ”

 

“ 그건 내일 해. 바이올린 아저씨가 아까 신신당부하고 갔어, 너 저녁 챙겨 먹이고 일찍 재우라고. 어제도 밤 새다시피 했다며! ”

 

“ 칫, 어젯밤은 일하다 그런 거 아니야! 전부 로만 책임인데! 자기 전에 스트레칭하고 있는데 갑자기 뒷모습이 너무 섹시하다면서 확 덮치더니 밤새 해줘놓고!

 

“ 으아, 난 그런 거 알고 싶지 않아. 차라리 그냥 일하다 그랬다고 해줘! ”

 

“ 일하다 밤 샜다고 하면 맨날 혼내면서. ”

 

“ 하여튼, 작작 하란 말이야! 일이든 응응이든! 넌 대체 왜 중간이란 게 없는 거야! ”

 

“ 난 그런 거 몰라! 중간쯤 하느니 안 하는 게 낫지! ”

 

 

 

어쨌든 베르닌은 왕재수를 차에 태워서 집으로 돌아왔다. 양파와 감자를 넣은 수프를 끓이고 닭가슴살을 구워서 스메타나를 얹었다. 비트 샐러드도 만들어서 곁들였다.

 

 

“ 야, 다 됐어. 밥 먹어! ”

 

 

소파에 누워 졸고 있던 왕재수가 부스스 일어나 부엌으로 왔다. 식탁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 이게 뭐야? ”

 

“ 양파 감자 수프. ”

 

“ 이건? ”

 

“ 너 좋아하는 거. 스메타나 얹은 닭가슴살. 보랴네 식당에서 좋아했잖아. 나도 따라서 해봤어. ”

 

어휴... 그릇이 이게 뭐니. 이도 다 나가고... 수프도 옆에 다 흘렸네. 전부터 보니까 넌 국자를 참 거칠게 쓰더라. 스메타나도 너무 왕창 부었고. ”

 

야! 맛있기만 하면 되지! 기껏 저녁밥 해줬더니 이젠 별 걸 다 트집이냐!

 

“ 요리의 기본은 맛이지만 플레이팅도 중요하다고! ”

 

“ 플레이팅이 뭐야? ”

 

“ 예쁘게 담는 거! ”

 

으윽, 여긴 시골이야! 그런 거 없어! 빨랑 먹어!

 

“ 보랴는 예쁘게 담아주던데. ”

 

“ 보랴는 요리사고 난 공무원이잖아! 책상물림! 난 시간에 쫓기며 허기 채우려고 요리하는 건데 그깟 플레이팅인지 뭔지까지 어떻게 챙기냐. 오늘따라 왜 이렇게 투정이람. 빨랑 먹어. ”

 

 

왕재수는 툴툴거리더니 숟가락을 들었다. 양파 감자 수프를 떠먹었다. 그러더니 별 말 없이 수프를 먹고 이따금 흑빵을 국물에 담갔다 먹기도 했다. 그리고는 잘 안 드는 나이프로 닭가슴살을 자르면서 다시 한 마디 했다.

 

 

“ 저온에 오랫동안 익히면 고기가 부드러워지는데... 이거 너무 퍽퍽해. ”

 

“ 배고파 죽겠는데 언제 저온에 익히고 있냐! 그냥 먹어! 원래 닭가슴살은 고기 중에서도 제일 맛없는 부위잖아. 네가 좋아하는 거니까 일부러 한 거야. 난 닭가슴살 안 좋아한단 말이야. ”

 

“ 닭가슴살도 촉촉하고 부드럽게 구울 수 있단 말이야. 보랴네 식당에서 나온 건... ”

 

“ 어휴, 그럼 이제 보랴 식당 가서 먹어, 나한테 해 달라 하지 말고! ”

 

“ 그래도 집에서 먹는 건 좋아. 스메타나에 찍어먹으니까 좀 낫다. ”

 

 

베르닌이 먹어봐도 닭가슴살이 질기고 퍽퍽하긴 했다. 하지만 왕재수의 음식투정은 정말 싫었다. 한동안 해주는 대로 잘 먹더니 오늘은 극장에서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이었다. 몇 달 동안 관찰한 결과 왕재수는 극장에서 심기가 불편한 일이 생기면 음식투정이나 시골타령 지수가 높아지곤 했다.

 

 

그래도 왕재수는 비트 샐러드에 대해서는 별 불평을 하지 않았다. 비트를 썰어서 스메타나에 버무린 게 전부니까. 차를 우려주자 한 모금 마신 후 칭찬까지 했다.

 

 

“ 싸구려 티백인데 그래도 잘 우린단 말이야. 내가 우리면 시꺼메지고 티백도 다 터지는데. ”

 

“ 그렇겠지, 무슨 영국산이니 프랑스산이니 스리랑카산이니 고급 잎차에 세상에서 제일 얇은 로모노소프 찻잔에만 마셨던 몸이라 티백으로 홍차 우리는 건 못하시겠지. ”

 

“ 그래! 이렇게 이 빠진 사금파리 같은 찻잔에 화약가루 같은 티백 차를 마시게 될 줄이야. 에휴, 내 팔자야. 시골에 온 것도 모자라 돼먹지 못한 시골 행사에까지 끌려가게 생겼으니. ”

 

“ 무슨 행사? 너 또 어디 가? ”

 

“ 나 툭하면 초청장 날아와. 어휴,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때만 그럴 줄 알았는데 웬 시골에도 이렇게 행사가 많은지. 무슨 현판 개막식에 오라고 하질 않나, 누구 취임식에 오라고 하지를 않나 심지어 콤소몰 체육대회에 오라고까지! 그런 건 다 안 간다고 거절했는데 내일 건 빼도 박도 못하고 가야 돼. 무슨 요리대회인지 뭔지를 하는데 심사위원이라고 이름을 올려놓고는 꼭 와야 한다잖아. ”

 

“ 엥, 넌 극장 사람인데 요리대회 심사위원은 또 뭐야. ”

 

“ 그러니까! 안 가려 했는데 렐랴가 너무 간곡하게 부탁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 나는 대도시 출신이고 해외에도 많이 가봤고 미식가니까 꼭 필요하다는 거야. 어휴. ”

 

“ 으잉, 렐랴? 그 행사 렐랴가 주최하는 거야? ”

 

“ 그런가봐. 렐랴네 잡지하고 또 의회에 무슨 기관이 모여서 하는 건데 되게 할 일도 없나봐. 그런 허접한 행사엔 원래 안 가는데 렐랴가 지난주에 극장까지 찾아와서 부탁하잖아. ”

 

“ 어... 넌 렐랴한테 관심 없으면서.... 사실 관심 있었던 거야? ”

 

“ 나 아플 때 바나나 줬다며. 심지어 지난주에 진짜 파인애플까지 들고 왔더라고. 그걸 어디서 구했을까. 미안해서 어쩔 수 없었어. ”

 

“ 야, 너 사람 됐구나! 미안하고 고마운 걸 다 알고! ”

 

“ 쳇, 나도 예의란 건 안다고! 하여튼 그러니까 내일은 저녁밥 안 해줘도 돼, 거기서 뭐든 집어먹겠지. 시골에서 요리대회라니, 아 촌스러워. ”

 

 

베르닌은 심사평으로 왕재수의 음식투정을 듣게 될 대회 참가자들이 불쌍했지만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왕재수가 차를 마시고 무가당 초콜릿을 먹은 후 기분이 좋아져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괜히 툴툴댔다가 왕재수가 다시 짜증을 내기 시작하면 안 되니까. 그리고 베르닌은 내심 왕재수가 부르는 노래 듣기를 좋아했으므로 꼭꼭 입을 다물었다.

 

 

 

*    *    *

 

 

 

다음날이었다. 매일 오후를 극장에서 감시 업무로 보내느라 일이 많이 밀려 있었기 때문에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그를 호출했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베르닌은 터덜터덜 국장실로 갔다. 그랬더니 스페호프가 못마땅한 얼굴로 얄팍한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 국장님, 부르셨습니까. ”

 

“ 자네 지금 당장 출판문화국으로 가보게. ”

 

“ 예? 출판문화국에는 무슨 일로... ”

 

“ 방금 제1회 가브릴로프 천하일미 요리대회 추진위원회로부터 전화를 받았네. 오늘이 대회 당일이라는군. 공문 보낸 게 언제인데 왜 아직까지도 참가자 명단을 보내지 않았느냐면서 대회 시작 30분 전까지 와서 현장 접수를 하라는 것이 아닌가! ”

 

“ 예? 가브릴로프 천하일미... 공문... 저는 그런 공문을 접수한 적이 없는데... 그런 명단 요구가 있었다면 제가 알았을 텐데... ”

 

 

베르닌은 공문을 꼼꼼히 살피지 않았다면서 국장의 불벼락이 내릴 거라고 생각하며 움츠러들었다.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한숨을 쉬었다.

 

 

“ 아닐세. 자네는 오후마다 극장으로 파견을 가 있지 않았나. 자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 외부 문서 수신을 스멜로프에게 맡겨놨더니만 그 녀석이 덜렁거리다가 첨부 서류를 누락시켰지 뭔가. 좀 전에 불러다 족쳤더니만 기억도 못하더니 책상을 뒤져서 이제야 이걸 찾아왔단 말일세! 아주 혼쭐을 내놨지.

 

 

스페호프가 방금까지 뒤적이고 있던 얇은 서류를 툭 던졌다. ‘붙임 1. 제1회 가브릴로프 천하일미 요리대회 참여 대상 기관 현황’, ‘붙임 2. 기관별 참가자 명단 양식’ 두 가지로 되어 있었다. 붙임 1을 보니 시의 각종 공공기관 명단이 쭉 나열되어 있었는데 두 번째 줄에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가 떡하니 들어 있었다.

 

 

“ 어, 우리도 들어 있었네요. ”

 

“ 그러게 말이야! 이게 알고 보니 의회 특별예산을 배정받아 개최되는 거라는군! 공공기관들은 전부 참석 대상이야. 에잇, 돈이 썩어나나... 이따위 허접한 행사에 시의 예산을 낭비하다니. 그래서 말인데, 다닐. 자네가 가보게. ”

 

“ 네? 제가요? 아니 왜... 저는 요리를 배운 적도 없고... ”

 

“ 그냥 가서 보안위원회 참가자 이름만 채워주란 말이야! 체육대회도 아니고 이깟 쓰잘데없는 행사에서 우승할 필요도 없고... 하지만 의회 의장이 추진위원장이라니까 우리도 얼굴은 내밀어야 한단 말이야. 이런 건 서무가 맡는 것이야. 어서 다녀오게. 게다가 거기 심사위원에 그 불여우도 들어 있다지 않나. 머릿수도 채우고 그 자식 감시도 계속하고. 2시에 시작한다니까 어서 준비하고 가보게나. ”

 

 

베르닌은 어이가 없었지만 어쨌든 국장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으므로 업무를 대충 정리하고는 출판문화국으로 향했다.

 

 

 

*    *    *

 

 

 

 

출판문화국은 구시가지의 레닌 대로변에 있었다. 렐랴의 문예지인 비슈네브이 사드 사무실도 같은 건물에 있었기 때문에 지난번에 가본 적이 있었다. 건물 앞에 ‘제1회 가브릴로프 천하일미 요리대회’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잘 읽어보니 주최는 시 의회였고 주관은 가브릴로프 천하일미 요리대회 추진위원회였다. 그 아래 씌어 있는 내용을 또 읽어보니 추진위원회는 가브릴로프 방송 제1채널과 식품위생국, 그리고 비슈네브이 사드가 협력해 구성한 단체였다.

 

 

‘ 아, 그 녀석 말이 맞구나. 렐랴가 추진위원회에 들어 있었네. 어휴, 웬 요리대회...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만 올 텐데... 난 그냥 옆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야지. “

 

 

베르닌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요리대회니까 지하 구내식당에서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경비원에게 물어보니 2층 대강당으로 안내해주었다. 출판문화국 강당은 가끔 공연이나 전시가 이루어지는 곳이었기 때문에 꽤 넓었다. 강당으로 가보니 조리대가 죽 늘어서 있었다! 대회를 위해 준비한 모양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조리대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어떤 건 소속기관명과 이름이 붙어 있었고 어떤 건 이름만 있었다. 잘 보니 공공기관 대표들과 일반 시민들이 함께 참가하는 모양이었다.

 

 

둘러보다가 그는 뒤에 있는 등록 데스크로 갔다. 중년 남자 하나가 서류철을 놓고 앉아 있었다. 기관명과 성명을 말하니 남자가 종잇조각을 하나 뽑아들고는 베르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 당신 그러고 왔어요? ”

 

“ 네, 사무실에서 곧장 오느라. ”

 

“ 앞치마랑 머릿수건은요? ”

 

“ 엥, 그런 것까지 준비해야 하나요? ”

 

“ 요리대회인데 당연한 거 아닙니까! 가뜩이나 보안위원회는 명단도 안 내고 뺀질거리더니... 앞치마 안 매면 실격이에요! 머릿수건도 마찬가지고. 아예 머리를 빡빡 깎든지 아니면 머릿수건 둘러야 한다고요! ”

 

“ 어, 예... 구해올게요.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그런데 저는 어디에서 조리를 해야 하나요? 조리대들에 전부 이름이 붙어 있던데. ”

 

“ 저쪽 귀퉁이에 하나 남겨놨으니까 그리로 가면 되겠네. ”

 

“ 빈 조리대를 못 찾았는데... ”

 

 

남자는 툴툴대더니 베르닌을 맨 뒤 가장자리에 있는 조리대로 안내했다. 30번이라는 번호가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조리대를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것 같았다. 옆 조리대와 큰 차이가 났다. 싱크도 작았고 도마도 홈이 움푹 패여 있는데다 조리대 크기 자체도 작았다. 남자는 조리대에 ‘다닐 베르닌, 보안위원회’라고 휘갈겨 쓴 종잇조각을 철썩 붙이고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자, 이제 가서 앞치마나 구해와요. 대회는 1시간 후에 시작이지만 참가자들은 10분 전까지는 자기 조리대 앞에 정렬해야 해요. ”

 

 

베르닌은 밖으로 나왔다. 부엌용품 파는 가게로 가서 줄을 섰다. 앞치마 하나와 머릿수건을 산 후 눈에 띄는 카페에 가서 샌드위치 한쪽과 커피 한 잔으로 점심을 때웠다. 샌드위치를 입 안에 우겨넣고 있는데 누가 그의 어깨를 탁 치면서 맞은편에 앉았다. 고개를 드니 왕재수의 비서 류드밀라였다.

 

 

“ 어머, 다냐.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

 

“ 어, 안녕하세요, 류다. 무슨 요리대회가 있다고 해서요. 국장이 가라고 해서 왔어요. ”

 

“ 아, 천하일미 요리대회? 나도 극장 대표로 나가는데. ”

 

“ 어, 정말요? 당신 요리 잘 해요? ”

 

“ 좀 하는 편이죠. 나간다고 했더니 감독님이 짜증내긴 했지만. ”

 

“ 엥, 그 자식이 왜 짜증내요? ”

 

“ 뻔할 뻔자 기름이 줄줄 흐르는 생선완자 만들 거 아니냐면서. 가뜩이나 심사 때문에 온갖 기름진 걸 다 먹어야 할 텐데 나까지 거드는 거냐고 툴툴대더라고요. ”

 

“ 와, 생선완자 맛있겠다... ”

 

“ 그쵸! 나 생선완자 진짜 잘 만드는데! 전에도 잔뜩 구워서 발레단에 돌렸더니 다 좋아했거든요. 맛있다면서. 미샤 빼곤 다 좋아했다고요. 근데 우리 감독님이 심사위원이라니까 생선완자 대신 딴 거 만들기로 했어요. 생선을 다져서 토마토랑 치즈를 넣고 파프리카 안에 넣고 구워낼 거예요. 전부 까다로운 우리 감독님이 좋아하는 재료니까 분명히 상을 받을 수 있겠지! ”

 

“ 아... 그것도 진짜 맛있겠어요. 근데 상품은 뭐예요? ”

 

“ 1등은 온천 요양소 2주일 휴양권이래요! 2등, 3등도 휴양권 주는데 날짜만 좀 짧은 것 같더라고요. 다냐, 알잖아요. 검은 숲 그 온천 요양소. 높은 분들만 가잖아요. 진짜 가고 싶은데... 그리고 의회에서 가브릴로프 대표 요리사라고 표창장도 준대요. 꼭 상 타고 싶어요. 근데 세상에, 내가 나간다니까 망할 놈의 아르카지가 갑자기 자기도 가겠다고 나서지 뭐예요. 내참, 주제를 알아야지. ”

 

“ 아르카지? 당신네 차이카 카페의 그 아르카지요? 거기 되게 맛없는데. ”

 

“ 그러니까 말이에요! 심지어 그 작자는 매니저이지 요리사도 아니라고요. 맨날 보드카에 물만 타는 인간인데. 우리 극장 망신이지 뭐겠어요. 근데 당신은 뭐 만들 거예요? 미셴카가 그러던데, 당신 요리 잘 한다고. 어휴, 생각지 않은 실력자가 나타났네. 미식가인 우리 감독님이 인정한 사람이 떡하니 출전하다니. 불공평해요. ”

 

“ 어, 저... 저 요리 잘 못해요. 걔한테 해주는 것도 그냥 보르쉬에 펠메니 같은 거라서... 오늘은 머릿수 채우러 온 거예요. ”

 

“ 하긴, 우리가 아무리 잘해봤자 벌써 우승은 예산국의 조야 브릴료바로 낙착돼 있대요. 의장이 밀어주고 있거든요. 지금 의회랑 예산국이랑 밀고 당기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조야가 그쪽 책임자라지 뭐예요. 그리고 조야는 중앙당이랑도 연줄이 있으니... 보나마나 우승이죠 뭐. 2등이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그나마 렐랴가 주최측이라서 참가를 안 하는 게 진짜 다행이에요. 그 아가씨가 출전했어 봐요... 대번에 우승이지. 하여튼 불공평하다니까, 누구는 집안 좋아, 얼굴 예뻐, 능력 있어, 심지어 요리까지 잘하니... 우리 감독님한테 흑심 품어서 이번에도 심사위원으로 끌어들이고... 이러다 렐랴랑 우리 미셴카랑 결혼하는 거 아닐지... 그 여자 언감생심 우리 금쪽같은 감독님 넘보기만 해봐. ”

 

“ 어, 렐랴도 굉장히 예쁜데... ”

 

그래도 우리 미셴카가 훨씬 아깝단 말이에요! 렐랴가 아무리 잘 나가도 그게 우리 동네에서나 그렇지! 우리 감독님은 연방을 뒤흔든 톱스타였고 외국에서도 다 아는 사람인데! 렐랴는 안돼요! 그리고 아무리 발레에 대해 아는 척해도 우리처럼 극장 쪽 사람도 아니고! 미셴카는 우리 발레단 아가씨랑 결혼하면 참 좋을 텐데. 토냐가 참 귀엽고 착한데. 레나도 예쁘고... 타마라가 제일 예쁘긴 한데 걘 옛날부터 데니스랑 사귀니까 차마 안 되겠고... 이번에 스네고로드에서 데려온 애, 나쟈라는 애도 귀엽더군요. 벌써부터 감독님이 걔한테 반해서 데려온 거 아니냐, 조만간 동거하거나 결혼할 거 같다고 여자애들이 얼마나 상심하고 있는지. ”

 

“ 어... 무용수들이 연습만 하는 게 아니고 별의별 가십을 다 나누는군요. 근데 미샤는 나쟈한테 그런 감정 있어서 데려온 거 아니에요. 재능이 뛰어나서 데려왔다고 했어요. 미샤는 발레단 사람들이랑은 안 사귀는 게 철칙이랬어요. ”

 

“ 흥, 그걸 어떻게 믿어요. 옛날에 키로프 있을 때도 파트너 발레리나랑 얼마나 알콩달콩 잘 살았는데. 지나이다 세도바 몰라요? 둘이 공식 커플이었잖아요. 같은 아파트에서 3년이나 동거하고. 여자가 배신하고 딴 남자랑 결혼해서 그렇지. 참 그 여자도 대단하지, 어떻게 우리 미셴카 같은 남자를 버리고... ”

 

 

베르닌은 그 지나이다라는 여자도 자기처럼 밥이나 차려주고 청소나 해주는 불쌍한 집사 노릇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대회 시작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함께 출판문화국으로 갔다.

 

 

 

 

*    *    *

 

 

 

 

대회는 생각보다 거창한 개막식으로 시작되었다. 꼭 작년 가을의 체육대회 같았다. 의회 의장은 청산유수처럼 연설을 했다. 가브릴로프의 광활한 자연과 풍부한 식재료를 찬양하고 각종 영양소를 고루고루 살려 만들어내는 천하일미로 가브릴로프 인민들의 미감을 충족시키고 건강을 증진함으로써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을 배양하고 궁극적으로는 연방에 이바지하는 훌륭한 소련 시민을 만들어내는데 이바지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베르닌은 생전 처음으로 어설프게 머릿수건을 동여매고 앞치마를 질끈 묶은 채 좁은 조리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키가 큰 편이었지만 앞에 죽 늘어선 참가자들도 모자라 바로 앞과 대각선 방향에 세워진 기둥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보일 지경이었다. 뭐 차라리 나았다. 어차피 대충대충 하고 끝낼 테니까 눈에 안 띄는 편이 훨씬 나았다.

 

 

어쨌든 의장이 인사말을 마친 후 방송에서 본 적이 있는 여자가 사회를 보면서 심사위원 소개를 했다. 심사위원은 총 세 명이었다. 의장이 심사위원장이었고 렐랴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베르닌은 어떻게든 렐랴를 보려고 조리대 옆으로 나와서 고개를 쭉 뺐다. 긴 머리를 말끔하게 틀어 올리고 검은색 투피스를 차려입은 렐랴는 눈부시게 예뻤다. 왕재수는 의장의 인사말이 끝날 무렵에야 들어와서 렐랴의 옆에 앉았다. 정장을 입은 두 심사위원과는 달리 평소처럼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검정 셔츠에 청회색 스카프를 두르고 빛바랜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의장이 못마땅한 듯 실눈을 떴지만 마침 방송사 카메라가 심사위원석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그저 눈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그에 비해 렐랴는 환한 얼굴로 방긋 웃으며 왕재수를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왕재수도 렐랴에게는 상냥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주기까지 했다.

 

 

그때 사회자가 말했다.

 

 

“ 그럼 지금부터 조리를 시작하겠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60분입니다. 그때까지 모든 조리와 플레이팅을 마치지 못하면 실격입니다. 종이 울리고 나면 모든 참가자는 조리대를 떠나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가 조그만 종을 땡 하고 울렸다. 그 즉시 참가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촤라라락 하면서 바구니에서 각종 야채와 고기를 쏟아내 손질을 하지 않나, 렌지를 켜고 팬을 달구지를 않나, 물을 끓이지를 않나, 척척척척 서걱서걱서걱 통통통통 칼질을 하지를 않나 각종 소음들이 난무했다. 여기저기서 치지지짓 하는 소리가 들리고 기름 냄새가 나는가 하면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올라오기도 했다. 벌써부터 맛있는 냄새도 났다.

 

베르닌은 한동안 멍하게 서 있다가 자기도 어쨌든 참가자니까 뭐든 하긴 해야 할 것 같았다. 뭘 만들지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래도 명색이 대회니까 조금이라도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펠메니를 빚자! 열댓 개만 빚으면 금방 할 수 있고 찌는 것도 금방 하니까 한 시간 내에 할 수 있겠지. ’

 

 

사실 펠메니는 새해 전야에 왕재수가 졸라대서 딱 한번 빚어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전혀 어렵지 않았었다. 자꾸 사고를 치던 왕재수도 곁에 없으니 더욱 쉬울 것이다. 베르닌은 책상물림답게 요리를 하기 전에 먼저 머릿속으로 필요한 내용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았다.

 

 

재료는 그러니까... 만두피에는 밀가루. 계란 노른자. 기름 조금. 만두소는 고기, 다져야겠지. 소랑 돼지를 섞으면 더 좋을 거고. 양파, 후추, 소금. 재료도 참 간단하네. 일단 고기 다져서 속부터 만들어놓고 반죽을 해야겠다. ’

 

 

모든 것을 정리한 후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기 위해 베르닌은 먼저 손을 씻었다. 자꾸만 풀어지는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꽁꽁 동여맸다. 그리고 조리대 위에 있는 도마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칼이 어디 있나 헤매다가 간신히 서랍에서 날이 무뎌 보이는 칼을 한 자루 꺼냈다. 이제 다 됐다! 요리만 하면 된다!! 그런데...

 

 

어? 근데 고기는 어디 있지? 밀가루는? 양파는?

 

 

베르닌은 멍해졌다. 조리대 위에 있는 거라고는 도마와 가스렌지, 채반과 프라이팬과 냄비, 그릇 몇 개가 전부였다. 서랍을 뒤져봐도 칼과 숟가락, 포크 따위밖에 없었다. 최소한의 조리도구는 있었지만 식재료가 전혀 없었다!!!

 

 

당황한 베르닌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참가자들은 미친 듯이 요리를 하고 있었다. 야채와 고기와 과일, 밀가루와 각종 향신료가 난무했다. 그는 통로 쪽으로 나가보았다. 식재료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누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 다냐, 뭐하는 거예요. 가뜩이나 시간도 모자라는데 왜 이렇게 왔다갔다 해요? ”

 

 

류드밀라였다. 커다란 그릇에 토마토와 흰 살 생선을 다져서 기름으로 버무리다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베르닌은 그녀의 렌지 화구 위에서 파프리카가 불꽃을 내뿜으며 타들어가고 있는 것에 기겁을 했다.

 

 

으아, 류다! 파프리카요! 팬에 올렸어야죠! 새까맣게 타고 있어요! ”

 

“ 어휴, 당신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군요. 이건 원래 이렇게 하는 거라고요! 껍데기가 시커멓게 다 타야 쉽게 벗겨지는 건데. 하여튼 총각이라 아무 것도 모른다니까. ”

 

“ 비싼 파프리카 껍데기를 왜 다 태워요? ”

 

“ 그래야 속살이 더 달고 쫄깃해지죠! 어머어머, 이거 영업비밀인데 내가 왜 경쟁자에게... 근데 당신 왜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어요? ”

 

“ 어... 저... 아무리 찾아도 식재료가 안 보여서요. 당신은 어디서 가져왔어요? 냉장고가 안 보여요. ”

 

“ 어머, 웬 냉장고! 다냐, 당신 대회 규칙 안 읽었어요? 요리 재료는 직접 준비해오는 거잖아요. 설마 하나도 안 가져온 거예요? 몸만 왔어요? ”

 

“ 어, 네... 전혀 몰랐어요. 당연히 여기 오면 다 주는 건줄 알았어요. ”

 

“ 바보, 그런 대회가 어디 있어요. 그럴 거였으면 애초부터 뭐 만들 건지 적어서 내라고 했을 거 아니에요. 어쩌나. 나도 여분이 없긴 한데. 뭐 만들려고 했는데요? ”

 

“ 저... 펠메니요... ”

 

“ 엥, 펠메니... 그럼 밀가루랑 고기가 필요하잖아요. 난 속 채운 파프리카라서 그런 거 없는데... 토마토 한 개 남는데 이거라도 가져가요. ”

 

 

류드밀라는 불그스름하고 조그만 토마토 한 알을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자르고 남은 치즈도 떼어주었다.

 

 

“ 펠메니엔 별 도움 안 되겠네. 빨리 돌아다니면서 재료 구해 봐요. ”

 

“ 어, 예... 고마워요, 류다. 파프리카 다 탔네요. ”

 

“ 어머, 잘도 탔네. 이제 껍데기 벗겨야지. ”

 

 

류드밀라가 파프리카를 집어 시커멓게 탄 껍질을 벗기는 동안 베르닌은 토마토 한 알과 치즈 조각을 들고 털레털레 조리대 앞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것으로 만들 수 있는 요리는 전혀 없었다. 목을 쭉 빼고 보니 아는 얼굴이 또 보였다. 극장 카페 차이카의 매니저 아르카지였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르카지에게 갔다.

 

 

“ 안녕하세요, 아르카샤. ”

 

“ 어, 그래. 너도 왔구나. ”

 

 

아르카지는 냄비에 뭔가를 계속 퐁당퐁당 던져 넣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핏 보니 흐릿한 붉은빛을 띠는 국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 뭐 만드시는 거예요? ”

 

“ 보르쉬! ”

 

“ 네? 정말요? 보르쉬라고요? ”

 

“ 너 지금 내가 기껏 보르쉬 만든다고 무시하냐! 보르쉬가 아무리 흔해빠진 음식이라도 수프의 기본이야! 가정식에 충실해야지! 나만의 특별 레시피로 만든 보르쉬라고! ”

 

“ 어, 아니... 그게 아니고요. 보르쉬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근데 국물이 너무 많은 거 같은데... 건더기는 거의 없고 물만 흥건... ”

 

시끄러워! 나만의 특별 레시피라고 했잖아! 보르쉬라고 무조건 비트랑 고기랑 양배추가 잔뜩 들어있으란 법 있냐! 내 보르쉬는 주스처럼 훌훌 마시는 간편 보르쉬란 말이야! 병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빨대로 조로록 마실 수 있게 만드는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

 

“ 엥... 그럼 그건 그냥 야채 주스... ”

 

시끄러워! 너 지금 내 요리 훼방 놓으려고 그러는 거지? 역시 KGB 놈팽이였어! 어떻게든 우리 극장에서 우승자가 나오는 걸 방해하려고!

 

“ 저, 아니에요. 죄송해요, 아르카샤. 당신 요리 맛있을 것 같아요. 저어... 전 오늘 갑자기 대회 나가라고 해서 몸만 왔거든요. 재료가 하나도 없어서요... 저는 펠메니를 만들어야 하는데... 보르쉬엔 고기랑 양파가 들어가지 않나요? 남는 고기랑 양파 있으면 저 좀 빌려주시면 안 되나요? ”

 

 

마침 양파를 숭덩숭덩 썰어서 냄비에 부어넣고 있던 아르카지는 한숨을 쉬면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이런 미련퉁아, 그럼 빨리 말을 했어야지. 보르쉬가 어떻고 국물이 어떻고 하고 있냐! 먼저 얘길 했으면 내가 지금 양파를 다 안 넣었을 거 아냐! 이미 늦었어, 양파 다 썰어서 넣어버렸단 말이야! ”

 

“ 어, 저어... 그럼 고기라도... ”

 

“ 고기는 당연히 맨 처음에 넣었지! 육수 내려고! 어휴, 가뜩이나 시간도 없는데... 잠깐만 기다려봐. 잘 찾아보면 자투리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금만 기다려, 수프 간 좀 보고. ”

 

 

아르카지는 숟가락도 아니고 국자를 냄비에 왈칵 담그더니 엷은 붉은빛이 도는 국물을 잔뜩 펐다. 후후 불더니 후루룩 마시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 음, 아직 맛이 안 우러났어. 한참 끓여야겠어. ”

 

“ 아니, 그게요... 아무리 봐도 국물이 너무 한강... ”

 

“ 시끄러워! 주스처럼 마시는 보르쉬라 했잖아! ”

 

“ 아참 그렇지... 수프는 그냥 불 위에 올려놓으면 졸아들 테니 그 사이에 자투리 좀... ”

 

무슨 소리야! 수프는 손맛과 정성이라고! 계속계속 이렇게 떠먹으면서 간을 봐야지! 좀만 기다려.

 

 

베르닌은 너무 답답했지만 그래도 고기와 양파를 얻을 수 있는 기회라 잠시 기다렸다. 아르카지는 쉴 새 없이 국자를 담갔다 뺐다 하며 간을 보았다. 국자를 자꾸 넣으면 수프의 온도가 계속 내려가서 잘 끓지 않고 그나마 적은 건더기의 맛도 빨리 우러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베르닌은 더 이상 지적을 하지 않으려고 꾹 참았다. 그러다 문득 차이카의 보르쉬가 생각나서 자기도 모르게 한 마디 해버렸다.

 

 

“ 근데 차이카에서는 맨날 깡통 보르쉬만 데워주잖아요. 혹시 그게 아쉬워서 이번에 보르쉬로 승부하시는 거예요? ”

 

 

아르카지가 펄쩍 뛰었다.

 

 

뭐야? 깡통 보르쉬라니!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그거 다 내가 하나하나 계량해서 내 정통 레시피로 만들게 하는 건데!!! 그건 정통 보르쉬, 지금 만드는 건 대회용으로 특별히 개발한 주스 식 보르쉬라고! 어디서 깡통 보르쉬 얘길... 물론 차이카 메뉴는 깡통 보르쉬가 주재료긴 하지만 난 물을 두 배로 타서 만들게 한단 말이야! 그게 정통이야! 옛날에 없이 살던 시절에 무슨 능력이 있어서 고기랑 비트랑 야채 펑펑 넣어서 진한 수프를 끓였겠어! 난 우리들의 어머니 러시아의 전통을 살린 진짜 옛 맛 그대로의 보르쉬를 차이카에서 선보이게 한 거라고! 에잇, 감히 내 전통 옛 보르쉬를 모독하다니... 자투리 안 줄까보다! ”

 

 

베르닌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지만 꾹 참고 애걸했다.

 

 

“ 잘못했어요, 아르카샤. 제가 잘못 알고 있었네요. 저는 근본 없는 책상물림이라 전통의 옛 맛을 잘 몰랐어요. 제발 자투리 좀 주세요. 시간도 벌써 많이 갔는데 이러다 저 펠메니 못 만들지도 몰라요. ”

 

 

아르카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째려보았지만 심사위원석을 힐끗 쳐다보았다. 의회 의장과 렐랴는 뭔가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왕재수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르카지가 한숨을 쉬었다.

 

 

“ 너 예뻐서 주는 거 아니야. 저번에 우리 감독님 아플 때 도와줬다 해서 주는 거야. 에이 짜증나. 내 요리에 깃든 정성을 모독하다니. ”

 

 

그리고는 국자를 잠깐 내려놓더니 도마를 뒤집고 그릇을 이것저것 달그락거리더니 손뼉을 딱 쳤다.

 

 

“ 여기 좀 남았네! 이거 가져가. ”

 

 

베르닌은 매우 실망했다. 아르카지가 내민 것은 양파 반쪽과 양배추 귀퉁이, 당근 4분의 1토막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 어, 고마워요... 근데 혹시 고기는 남은 거 없나요? ”

 

“ 고기는 없어. 처음에 다 넣어버려서. 이거라도 가져가. 나 이제 수프 간 맞춰야 돼. 빨랑 가! ”

 

 

베르닌은 하는 수 없이 야채 자투리를 들고 자리를 떴다. 도저히 이것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또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렐랴의 사무실에서 만났던 잘생긴 비서 안드레이가 양손에 각각 냄비와 팬을 든 채 요리에 여념이 없었다. 굉장히 맛있는 냄새가 확 풍겨왔다. 의심의 여지없는 쇠고기 냄새였다. 그는 머뭇거리며 다가갔다. 안드레이와는 한번밖에 보지 않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인사를 했다.

 

 

“ 저, 안드레이.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 다닐 베르닌이에요. 왜 얼마 전에 릴리아나 페트로브나를 뵈러 찾아갔었던. ”

 

 

안드레이는 그를 곁눈으로 힐끗 보더니 귀찮은 듯 대꾸했다.

 

 

“ 아, 그 KGB... 미샤 감시요원인 주제에 엄청 친한 척 하는 사람이군요. ”

 

“ 저... 전 걔랑 친한 척 한 적은 없는데... ”

 

“ 흥, 안 그랬으면 당신 주제에 우리 편집장님 사무실에 발을 들여놓을 수나 있었을 것 같아요? 렐랴가 미샤에게 가진 호감을 악용하다니 정말 당신은 박쥐같은 인간이에요! 어디 언감생심 우리 편집장님한테 흑심을 품고. 툭하면 우리 잡지 검열해서 트집 잡는 KGB 주제에. ”

 

“ 아니에요, 안드레이. 저는 그런 쪽 관여 안 해요. 그건 우리 국장이... ”

 

시끄러워요, 요리에 방해되니까 빨리 돌아가요! 아니면 이것까지 감시하려는 거예요? ”

 

 

아무래도 안드레이는 가브릴로프의 수많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렐랴에게 속절없이 반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렐랴가 베르닌에게 상냥하게 대해준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듯했다.

 

 

“ 그렇지 않아요, 저... 근데 당신이 만드는 요리는 굉장히 근사해보이네요. 쇠고기 요리 같은데... 냄새도 너무너무 맛있게 나요. 렐랴만 요리 잘하는 줄 알았는데 당신도 굉장히 잘하나 보네요. ”

 

 

요리를 칭찬하자 안드레이의 얼굴이 한결 펴졌다.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흥, 그래도 요리 보는 눈은 있네. 이건 말이죠, 렐랴에게서 직접 전수받은 레시피로 만드는 비프 스트로가노프라고요!

 

“ 우와, 비프 스트로가노프요? 그거 고급 요리잖아요. 대단하다... ”

 

“ 그렇죠! 게다가 이건 렐랴가 대대손손 전해져 내려오는 테레슈킨 공작 가문의 레시피를 그대로 재현한 거라고요! 알죠? 렐랴 외가는 제정 시절 공작 가문이었던 거. 이건 원조인 스트로가노프 공작에게서 테레슈킨 공작이 직접 받아낸 레시피라고 했어요! 이 쇠고기로 말할 것 같으면 마블링이 끝내주는 진짜 고급 등심과 안심을 잘 배합한 것이고 크림은...

 

“ 크림도 부드럽게 잘 엉기는 것이 수입산인가 보네요. ”

 

당연하죠! 외제 아니면 이렇게 향긋한 풍미가 돌지 않는다고요! 버터는 렐랴가 직접 만든 거고! 이런 재료와 이런 레시피로 만드는 요리 본 적 있어요? 당연히 내가 우승이죠! ”

 

“ 진짜 그렇겠다... 이렇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요리는 처음 봐요. 우와... 렐랴도 대단하지만 이걸 배워서 만들 수 있는 당신도 대단하네요. 전 비프 스트로가노프는 모스크바에서 공부할 때 몇 번 먹어본 적밖에 없는데 그때도 이렇게 때깔이 근사한 건 한 번도 못 봤어요. 고기랑 소스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네요. ”

 

 

베르닌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안드레이는 굉장히 좋아했다.

 

 

“ 역시 그렇죠? 내가 우승하겠죠? 나 반드시 우승해야 돼요. 그럼 렐랴가 내 실력도 인정해 주고 내 마음도 알아주겠지... 렐랴는 날 그냥 비서 취급만 하고 남자로는 안 봐준다니까요. 내가 왜 거기 입사했는데... ”

 

“ 아, 그렇구나... 렐랴 때문에 들어간 거구나... ”

 

 

얘기를 하면서 안드레이는 고기 냄비에 크림소스를 붓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볶기 시작했다. 두 배로 고소하고 부드럽고 그윽해진 냄새가 났다. 베르닌은 넋을 놓고 있다가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 그런데요, 사실은 저는 갑자기 이 대회에 출전하게 돼서... 펠메니를 만들려고 하는데 재료가 없어서요. 혹시 쇠고기 자투리 남는 거 있으면 조금만 빌려주시면 안 되나요?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

 

 

안드레이가 갑자기 정색을 했다.

 

 

뭐가 어째요? 고기를 빌려달라고요? 당신 미쳤어요? 이 고기가 얼마나 고급 쇠고기인데! 그리고 그걸 다 떠나서, 어떻게 감히 대회에서 식재료를 빌려달라고 할 수 있어요! 이건 경쟁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릴! 당장 꺼져요! 내참, 별 소릴 다 듣겠네!

 

“ 아니, 저... 어차피 전 순위권에는 못 들 거고요... 그래도 참가는 했으니까 펠메니 몇 개만 빚으려고... ”

 

시끄러워요! 이건 경쟁이라고 했잖아요! 꺼져요!

 

 

베르닌은 풀이 팍 죽어서 안드레이의 조리대를 떠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안드레이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 어쩌지... 재료가 없네. 그냥 실격 당하려나... ”

 

 

그때 어딘가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너 다닐이냐? 난 또 누가 이렇게 정신 사납게 왔다 갔다 하나 했네. ”

 

 

베르닌은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았다. 대각선 방향의 반대편 구석 조리대 앞에서 보랴가 한 손을 흔들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그쪽으로 갔다.

 

 

“ 아, 당신도 나오는 줄 몰랐어요. 아까 이쪽 이름표 봤었는데... 당신 성이 도브로류보프였군요. 기관명이 없는 걸 보니 개인 출전인가 보네요. ”

 

“ 응, 귀찮아서 안 나오려 했는데 우리 식당에서 나가라고 어찌나 등을 떠미는지. 그런데 넌 뭐냐, KGB 대표가 너야? ”

 

“ 예, 아침에 갑자기 국장이 부르더니 대회 나가라잖아요. 아무 것도 모르고 왔거든요. 근데 뭐 만들어요? 양파 수프랑 사과소스 돼지구이 만들지... 난 당신 요리 중에 그게 제일 맛있었어요. ”

 

“ 에이, 그건 맨날 식당에서 만드니까 재미없잖아. 난 오늘 케익 만들어. 다들 메인 요리만 만드는 것 같더라고. 디저트도 있어야 덜 지겹지. ”

 

“ 뭔데요? 아무 것도 없는데요? ”

 

 

아무리 봐도 조리대에 있는 거라곤 커다란 사발에 가득 들어 있는 호두와 아몬드뿐이었으므로 베르닌은 고개를 갸웃했다. 보랴가 웃었다.

 

 

“ 반죽은 벌써 오븐에 들어갔지. ”

 

“ 오븐이 어디 있어요? ”

 

“ 저 뒤에 공용 오븐 있잖니. 너 진짜 아무 것도 모르고 왔구나. ”

 

“ 아, 그렇구나... 하긴 굽는 요리들은 오븐이 필요하니... 근데 호두랑 아몬드 들어가는 케익도 여러 가지잖아요. 뭐 만드는 거예요? ”

 

“ 메도빅. ”

 

“ 아, 맛있겠다! 근데 너무 흔하지 않아요? ”

 

“ 흔하면 어때. 진짜 맛있으면 되지. 옛날에 우리 아들내미가 좋아했던 거야. 한 판 구워서 잘라주면 순식간에 해치우고는 ‘아빠 아빠 더 주세요’ 하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

 

 

보랴는 눈시울을 잠깐 붉혔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 근데 너는 왜 아까부터 요리는 안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냐? 벌써 다 만들었어? ”

 

“ 아니요. 전 진짜 아무 것도 모르고 등 떠밀려서 와서요... 재료를 하나도 안 가져왔어요. 여기서 다 주는 줄 알았거든요. 혹시 재료 남는 거 빌려줄 수 있어요? ”

 

 

베르닌은 안드레이의 ‘이건 경쟁이에요!’란 말이 생각나서 한 대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쭈뼛쭈뼛 물어보았다. 그리고 보랴는 그의 등짝을 정말 한 대 쳤다.

 

 

“ 이런 바보 같으니. 요리대회에 나오면서 식재료를 안 가져왔다고? 하긴 모르고 왔으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뭐가 필요하니? 나한테 있는 거야 다 줄 수 있지. ”

 

 

베르닌은 뛸 듯이 기뻤다.

 

 

“ 고마워요, 보랴! 난 펠메니 빚으려고 하는데... 밀가루하고 고기, 계란, 기름, 소금, 후추가 필요해요. 야채는 조금 얻었거든요. ”

 

“ 엥, 펠메니? 하필 그거냐... 난 케익이라서 고기랑 기름, 후추는 없는데. 가만있자, 밀가루가... 이런... 계량을 정확히 해서 가져왔거든. 밀가루는 전부 반죽해서 지금 오븐 안에 들어가 있으니... ”

 

 

보랴가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조리대 위와 아래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계란 세 알과 버터 한 토막을 건네주었다.

 

 

“ 어쩌냐. 이것밖에 없구나. 참, 소금도 좀 줄 수 있겠다. 잠깐만 기다려. ”

 

 

보랴가 작은 병을 꺼내더니 접시에 소금을 두어 숟가락 정도 쏟아주었다.

 

 

“ 펠메니... 음... 이걸로는 안 되겠구나. 제일 중요한 밀가루와 고기가 없으니... 근데 너 어차피 지금 재료 다 구해도 펠메니는 못 빚을 거다. 시간도 다 돼 가는데 언제 반죽하고 빚어서 찌겠냐. 차라리 있는 거 가지고 다른 걸 만들렴. 빨리 가라, 시간 없다. ”

 

“ 고마워요, 보랴. 진짜 고마워요. ”

 

 

베르닌은 진심으로 고마워서 보랴를 와락 껴안았다. 보랴는 다시 한 번 그의 등짝을 철썩 때렸다.

 

 

“ 황소만한 사내놈이 뭐하는 거야. 우리 예쁜이라면 몰라도. 빨리 가! ”

 

 

베르닌은 계란과 버터와 소금을 들고 조리대로 돌아왔다. 그때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 이제 15분 남았습니다!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15분 남았다니! 언제 45분이 흘렀단 말인가! 류드밀라와 아르카지, 안드레이와 보랴에게 가서 재료를 구하는데 시간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메인인 밀가루와 고기는 구하지도 못했다. 대충 하고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시간은 다 돼 가고 펠메니는 수포로 돌아가고 아무 것도 못하고 있자 머리가 핑 돌았고 눈앞이 캄캄했다.

 

 

‘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래도 우리 회사 대표로 나왔는데 아무 것도 못 만들면 안 되는데... 큰 일 났네... 뭐 만들지... 메인이 될만한 건 하나도 없으니... 어떡해... ’

 

 

베르닌은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신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바보, 재료를 주는 대회가 어디 있어.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걸... 여기가 미국도 아닌데. 아까 앞치마 사러 갔을 때 식재료도 샀어야지...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매사가 이런 식이야. 책상물림... 멍충이... 현실에선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흑... 이런 식으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나가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 이거 아무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막막한 거야, 엉엉... ’

 

 

눈물이 어른어른해서 조리대도 제대로 안 보였다. 막막하고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무정한 사회자가 또 소리를 쳤다.

 

 

자, 10분 남았습니다! 참가자들은 이제 마무리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베르닌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기계적으로 벽시계를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심사위원석에 있는 왕재수가 눈에 들어왔다. 왕재수는 애초부터 대회에 관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조리대와 참가자들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왕재수는 한 손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들기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아주 작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돈키호테 무대에 올라갔던 덕분에 베르닌은 그게 마임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무슨 동작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발레 마임인 건 분명했다.

 

 

‘ 저 자식, 말로는 은퇴했다 하면서 잠시도 가만히 못 있는구나. 몸에 배서 그런가, 신작 안무인가? 아니면 계속 연습하는 건지도 몰라. ’

 

 

갑자기 베르닌은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해왔다.

 

 

‘ 자기 천재라고 엄청 으스대더니 사실은 죽어라고 저렇게 연습했겠구나. 그러고 보니 저 녀석 나랑 있을 때도 맨날 발로 박자 세고 손가락도 꼭 예쁜 모양으로 폈지. 그때 바질 출 때도 보니까 힘들어서 허덕거리면서도 끝까지 연습하고... ’

 

 

그러자 베르닌은 어쩐지 막막함과 자책감이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 그래, 아무 거나 만들어보자. 10분 동안 뭐든 못 만들겠어. 있는 걸로 해보지 뭐. 뭐든 내놓기는 해야 할 거 아냐. 음, 그러니까... 토마토. 치즈 조금. 양파랑 양배추랑 당근 쪼가리 조금. 계란. 버터. 소금... 그래, 오믈렛을 만들어야겠다. 그건 금방 만드니까. ’

 

 

베르닌은 급하게 그릇에 계란 세 알을 깨어 넣었다. 소금을 넣고 휘휘 저었다. 그리고 토마토와 양파, 양배추와 당근을 잘게 썰었다. 시간이 없었으므로 화구 두 개를 모두 써야 할 것 같았다. 양쪽에 팬을 올려놓았다. 버터를 둘렀다. 화력이 더 센 쪽 프라이팬에 야채를 볶고 불이 좀 약한 쪽 팬에는 달걀물을 조심스럽게 부어서 블린처럼 얄팍하게 부치기 시작했다.

 

 

3분 남았습니다!

 

 

이미 다른 참가자들은 부산스럽게 접시에 요리를 담아내고 있었다. 베르닌은 도저히 야채를 다 익힐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반쯤 익어가는 계란 위로 야채 볶던 것을 그대로 투하하고 잘게 썬 치즈를 얹었다. 그리고는 숟가락과 뒤집개로 조심스럽게 계란을 둘둘 말았다. 하지만 그는 손놀림도 둔했고 마음이 너무 급했기 때문에 그만 계란 옆구리가 터지고 말았다.

 

 

“ 으아, 망했다. ”

 

 

어쨌든 그는 살살 오믈렛을 굴려서 옆 부분을 익혔다. 잘못해서 한쪽 귀퉁이는 새까맣게 타고 말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회자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1분 남았습니다! 정확히 1분 후면 모두 손을 떼고 조리대를 떠나 뒤에 정렬된 의자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베르닌은 우왕좌왕하면서 뒤집개와 숟가락으로 오믈렛을 집어서 접시 위에 얹어놓았다. 그 와중에 옆구리가 더 터져서 안에 있는 야채들이 좌르르 삐져나왔다. 한마디로 재앙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남은 토마토와 양배추로 장식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때 땡 하는 종소리가 났다.

 

 

자, 그만! 다들 자리로 돌아가세요!

 

 

베르닌은 땀에 흠뻑 젖은 채 터덜터덜 맨 뒷자리로 가서 앉았다. 류드밀라가 그의 곁으로 와 앉으면서 중얼거렸다.

 

 

“ 어휴, 시간이 왜 이렇게 모자라는지. 오븐 화력이 생각보다 안 좋아서 파프리카 속 익히는 데 너무 오래 걸렸어요. 막판에 간을 한번 봤어야 했는데... 망했네. 당신은 어떻게 됐어요, 펠메니 만들었어요? ”

 

“ 아니요. 재료를 못 구해서 그냥 아무 거나 대충 만들었어요. ”

 

“ 엥, 그래도 요리 대횐데 아깝네... 뭐 할 수 없죠.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두는 수밖에. 근데 어차피 나도 오늘 입상은 포기했어요. 저쪽에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있는 거 봤어요? 설마 아말리야가 올 줄이야... 우리 가브릴로프에서 제일 요리 잘하는 분이잖아요. 아무리 렐랴가 요즘 날고 긴다지만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에 비하면 갓난아기죠. ”

 

“ 엥, 그게 누구예요? ”

 

“ 아, 당신 KGB라서 교회엔 가지도 않겠네요. 저쪽에 앉아 계신 흰머리 할머니요. 수도원 요리사. 아, 수도원이라고 하면 잡혀가려나. 종교박물관 식당 요리사요. 예고르 신부님이랑 소꿉친구인데 어릴 때부터 거기서 요리를 하셨죠. 진짜 맛있어요. 수도원 요리사만 아니었어도 요리로 벌써 훈장을 몇십 개는 받아야 하는데. ”

 

“ 어, 그 수도원 식당... 버섯 감자 블린이랑 열매즙 진짜 맛있었어요. 그게 저 분 솜씨였구나. ”

 

“ 볼 것도 없이 아말리야가 우승이에요. 아무리 의장이 조야 브릴료바를 밀어준다 해도. 요리 명인이 왔는데 양심이 있다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저 분을 두고 조야를 뽑아주겠어요. ”

 

“ 그렇구나... 보랴도 엄청 요리 잘 하는데... ”

 

“ 뭐라고요? 스베촉의 보랴 말이에요? 그 사람도 왔어요? ”

 

“ 네, 저쪽에 있잖아요. 아까 계란이랑 버터도 빌려줬어요. ”

 

“ 망했네. 저 사람 진짜 손맛 좋은데... 3등도 못하겠네... 에휴... ”

 

 

베르닌은 어쨌든 엉망이긴 했지만 뭔가를 만들어서 내긴 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to be continued..

 

..

 

 

 

여기 언급된 요리들은 대부분 러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리들이다 :)

 

류드밀라의 파프리카 요리는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미카엘이 만든 파프리콘이랑 약간 비슷한데, 사실 파프리카 껍데기를 직화로 태운 후 조리하거나 속을 채워 요리하는 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라서 :) 류드밀라는 생선살과 토마토, 치즈를 넣었으니 파프리콘과는 좀 다르지만. 하여튼 이거 쓸 당시 냉장고~를 한창 재밌게 보던 때라 아이디어를 좀 얻었다.

 

메도빅이나 비프 스트로가노프, 보르쉬에 대해서는 블로그에서도 전에 몇번 올린 적이 있으니 검색해 보시면 사진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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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류드밀라가 왕재수랑 옛날에 같이 동거했다고 언급하는 '지나이다 세도바'는 본편 우주에서 미샤의 발레학교 동창이자 키로프 극장 시절 파트너 발레리나이다. 미샤의 동료이자 친구이며 류드밀라의 말대로, 키로프 초창기 3년 정도는 한 아파트에서 같이 살기도 했다. (물론 둘이 같이 살자고 해서 산 건 아니고, 신진 스타 커플을 만들어내기 위해 극장 측에서 이들에게 새 아파트를 내주면서 같이 거주등록을 시켰음)

 

지나이다에 대한 이야기들은 나중에 본편에서 발췌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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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천하일미 요리대회에 출품된 요리들은 어떤 것들일까! 단추의 오믈렛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심사 결과는! 이 모든 것은 다음주 2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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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편을 쓸 때는 몸도 안 좋고 심리적으로도 불안하고 힘들어서 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음식도 제대로 못 먹던 때라서 맛있는 거 묘사하면서 대리만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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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서무 시리즈가 엄청 길어졌다. 벌써 24편이다!

 

전에는 미리 써둔 게 많아서 일주일에 하나씩 올렸는데 이제 남은 게 25편 하나 뿐이라 올리는 간격이 좀 길어질 것 같기도 하다. 바쁘기도 했고 5월에 몸이 아파서 심신이 불안정하여 그런 것도 있고, 또 20편 이후로는 각 에피소드마다 분량이 꽤 길어져서 더 그런 것도 있다. 25편은 분량 때문에 두편으로 쪼개서 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여튼 24편!

 

폭설의 도시 스네고로드에서 돌아온 단추와 왕재수. 드디어 가브릴로프에도 3월이 오고...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아 눈도 녹지 않았지만 그래도 3월이다. 그리고 단추는 다시 극장으로 향하는데...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어느덧 3월로 접어들고, 스페호프는 베르닌에게 왕재수의 신작 발표 전까지 특별 감시 업무를 부여한다. 베르닌은 극장으로 향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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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4

 

 

 

서무의 슬픔

- 시계탑 전망대에서 -

 

 

 

 

스네고로드에서 돌아온 후 베르닌은 굉장히 바빴다. 계속 사무실을 비웠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도 그의 업무를 대신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며칠째 야근을 했다.

 

그 와중에 국장이 스네고로드 자원봉사 보고서를 요구했고 거기 더해 왕재수와 청년단원의 충돌에 대해서도 보고서를 쓰라고 했다. 아마 스네고로드에 심어놓은 정보원이 미리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있었던 일만 간략하게 보고했다. 왕재수가 아르투르와 당에 대해 퍼부었던 비난은 빼버렸지만 국장은 이미 그 내용도 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독사과 사건 이후 베르닌은 스페호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뱃속에서 분노가 들끓었고 동시에 서늘한 공포도 스멀거렸다. 물론 베르닌은 불순분자를 감시하고 체포하는 것이 KGB의 임무이며 자신이 속한 감시분석부의 주무도 그쪽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신체적 위해를 입히거나 암살을 시도하는 것은 해외 스파이들이나 하는 짓, 스탈린 공포정치 시절에나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에서는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가브릴로프였다. 평화롭고 지루한 동네였다. 도시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왕재수가 닳도록 얘기하는 대로 시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무서운 일들은 어울리지 않았다.

 

 

책상물림에 고지식하기 짝이 없지만 어릴 적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고 입사 시험 때도 연역 논술 점수가 제일 좋았던 베르닌은 논리적으로 분석을 해 보았다. 스페호프도 정말로 왕재수를 죽일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국장 자신의 입으로 혼만 내주겠다고 했으니까. 아마도 그건 매수된 레베진스키가 사과 세 알에 약을 고루 바르는 대신 한 알에만 왕창 발라놨기 때문일 것이다. 레베진스키라고 그렇게 끔찍한 목적으로 약을 많이 바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레베진스키를 잘 몰랐지만 극장 내의 평으로는 조금 무능하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그저 시골 극장의 감독직 하나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고 할 만큼 용의주도하고 사악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무용수 출신의 안무가라는 사람이 KGB에서 쓰는 독약에 대해 뭘 알겠는가. 심지어 베르닌 자신조차 전혀 몰랐던 약물인데. 그리고 국장은 왕재수의 크레믈린 아저씨를 비롯한 중앙의 후원자들을 아주 경계하고 있었으니 고의적인 암살을 시도할 만큼 무모한 인물은 아니었다.

 

 

문제는 전처럼 ‘혼만 내주려다’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결국 베르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국장에게 신뢰를 얻어서 계속해서 왕재수의 감시요원으로 남아 있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행히 국장은 그의 속마음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그가 왕재수를 도와주는 것도 현장요원으로서 연기력을 발휘하는 거라고 착각을 해 주었다. 분명 얼음을 깨고 강물에 빠졌던 것이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그러니 그가 왕재수를 위험에서 지키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국장의 불신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서무 업무와 야근이었다!

 

 

그 날은 월요일이었다. 주간회의부터 시작해 아주 바쁜 날이었다. 베르닌은 주말에도 나왔지만 쌓여 있는 일을 보니 오늘도 야근 예약이라는 생각에 우울해져 있었다. 오후에는 밀려 있던 직원 외출부와 출장기록부에 사인을 받기 위해 국장실에 올라갔다. 그가 너무나도 싫어하는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국장은 후딱 사인을 해주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연번을 매기는 방식부터 시작해 서류철 노끈의 위치, 같은 날짜 내에서는 해당 직원의 성을 알파벳순으로 기재해야 한다는 문서 작성 매뉴얼 따위에 대해 ‘행정의 기본’이라는 명목 하에 족히 30분 동안 설교를 늘어놓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스페호프는 약 10분 간 설교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베르닌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열심히 듣고 있다는 표시를 하자 만족해서 그랬는지 갑자기 주루룩 사인을 해주더니만 서류철들을 탁 하고 덮었다.

 

 

“ 자, 됐네. 그건 그렇고 지난 주 내내 야근을 하더군. 어제도 나왔고. ”

 

“ 어, 예. 월초에 야스민을 병원에서 감시하고 또 며칠 전엔 스네고로드에 다녀오느라 일이 많아서요. 저... 열심히 해서 밀린 일은 이번 주 중에 모두 마무리하겠습니다. ”

 

 

베르닌은 쌓아둔 일 때문에 혼이 날까봐 더듬거리며 변명과 의지를 섞어 중얼댔다. 하지만 스페호프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닐세. 물론 서무 업무는 중요하지. 행정의 기본이고. 하지만 자네의 또 다른 주무는 그 불여우 감시야. 그런데 스네고로드에서 복귀한 후 그 녀석 감시는 소홀히 하고 있는 것 같군, 물론 극장 쪽에도 정보원을 두엇 붙여 놓긴 했고 자네 얘기대로 자리를 계속 비웠으니 지난주에는 어쩔 수 없었다 치지만, 그래도 정식 훈련을 받지 않은 민간인 정보원과 내가 키우고 있는 요원은 하늘과 땅 차이지. 게다가 자네는 그 불여우에게 몸까지 던져서 아침부터 저녁, 밤에 해주면서 신뢰까지 얻어냈으니 자네를 대신할 수 있는 감시요원은 지금 구하기도 힘들어.

그 자식이 4월에 신작 공연을 앞두고 있다지. 당초 나는 검열국을 방패로 그 신작인지 뭔지의 이념성을 지적해 끌어내리려 했지. 그러나 그 영악한 불여우가 지난번 돈키호테인지 나발인지 무대에서 직접 춤까지 추고 그때 왔었던 모스크바 의원님들에게 자기 신작을 홍보해버린 바람에 이제 내용이나 이념으로 걸기에는 어렵게 됐어. 그 신작 공연에는 높은 인간들이 많이 올 거야. 심지어 스비제르스키에 마로조프까지 온단 말일세! 그 두 작자들이야말로 불여우를 끼고 돌았던 실세 중의 실세지! 더러운 불여우 녀석이 지금이야 끈이 떨어져서 헌신짝 신세가 됐지만 4월에 그 나리님들이 와서 공연을 보고 혹시라도 그 자식을 다시 귀엽게 보기라도 한다면 만사가 엉망이 되는 거야!

그러니 자네는 오늘부터 당분간 오후부터는 극장으로 가서 그 녀석을 감시하게. 행여 그 자식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면 서무 업무를 제대로 못 해서 나에게 징계를 받아 근신 중이라고 하게. 어차피 자네는 녀석과 잠자리도 같이 하고 살림을 해주는 사이이니 충분히 믿을 걸세. 그럼 어서 가보게! ”

 

 

 

*   *   *

 

 

 

그날은 월요일이라 극장은 휴일이었다. 하지만 왕재수가 집에서 쉬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스네고로드에서 돌아와 둘 다 녹초가 되어 뻗어버린 일요일에 저녁밥을 해먹인 이후 베르닌은 왕재수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왕재수도 신작 준비와 무용수들 지도 때문에 굉장히 바빴을 게 분명했다. 베르닌은 스타브로프에게도 전화를 해보았다. 의사는 왕재수가 독사과 후유증에서는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먹고 자는 것만 잘 챙겨주면 될 거라고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공연이 없는 날이라 극장이 한산할 줄 알았지만 뒤로 돌아가니 신관 공사 때문에 꽤 시끌시끌했다. 극장 10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시에서는 여러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특히 가브릴로프 출신이자 요즘 크레믈린 정치국에서 꽤 잘 나가고 있는 의원인 게오르기 벨스키가 특별예산을 많이 편성해 주고 있었다. 어머니가 옛날에 가브릴로프 발레단에서 춤을 췄었기 때문에 극장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고 했다. 왕재수가 춤추던 시절에는 아주 강력한 후원자였고 수용소에서 빼내서 이곳으로 보내는 데 가장 힘을 써준 사람이라고도 했다. 베르닌은 다른 데서 그 얘기를 듣고는 너무 궁금해서 왕재수에게 물어보기까지 했다.

 

 

“ 너 있잖아, 그 크레믈린 아저씨. 벨스키가 그 사람이야? ”

 

“ 아니야, 그 사람. ”

 

“ 엥, 너 엄청 후원해 줬다며. 가브릴로프에선 그 사람이 제일 유명해. 서기장 다음으로 유명한 정치인이야. 우리 시 출신으로 그렇게 출세한 건 그 사람뿐인데. ”

 

“ 내가 알게 뭐야, 정치하는 사람들. ”

 

“ 그래도 너 후원자라며. 우리 극장에 보내준 것도... ”

 

그래, 그 사람이 나 꽂았다! 나 낙하산인 거 다 알면서 그러니. 쳇... 그래도 그 사람이랑은 안 잤어. 아저씨들이 다 사내애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

 

“ 그럼 크레믈린 아저씨는 누구야? 정말 그 사람이야? 스비제르스키... ”

 

“ 몰라, 네가 무슨 상관이니. ”

 

 

베르닌은 차라리 게오르기 벨스키가 크레믈린 아저씨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온건한 이미지인데다 어쨌든 가브릴로프 출신이었으니까. 하지만 돌아가는 걸 보니 왕재수의 크레믈린 아저씨는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맞는 것 같았다. 그는 KGB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던 인물로 정치국의 진짜 실세 중 하나였다. 원체 무자비하다고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고 이전에는 스페호프를 불러 호되게 질책을 한 적도 있었다. 신작 공연 때 그 사람이 온다고 하니 스페호프가 그전에 무슨 음모를 꾸밀지 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무서운 크레믈린 아저씨에 대해 생각하며 베르닌은 공사장 쪽으로 갔다. 신관은 이미 1~2년 전에 공사를 시작해서 지금은 마무리 작업 중이었다. 신관에는 중규모의 공연장 하나와 연주 홀, 카페, 연습실들이 들어온다고 했다. 왕재수의 말에 따르면 신관 무대는 어린이용 공연을 비롯해 발레와 오페라 갈라 공연용으로 쓸 예정이었다. 연주 홀도 음향 시설을 보강해 오케스트라가 따로 연주회를 자주 열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는 거였다. 베르닌은 극장이나 무대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돈키호테를 해보고 나니 신관 공사가 잘 끝나서 관객들이 더 많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재수는 신관과 구관 사이에 세워진 시계탑 입구에 있었다. 얼핏 보면 오래된 건물처럼 보였지만 사실 옛날 건축양식을 본 따 급조한 건축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속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완공이 된 모양이었다. 토냐와 가릭의 뒤로 극장의 스타 커플인 타마라와 데니스, 그리고 나쟈가 보였다. 베르닌이 다가가자 나쟈가 제일 먼저 인사를 했다.

 

 

“ 안녕하세요, 다닐. ”

 

“ 어, 안녕하세요! 언제 온 거예요? ”

 

“ 사흘 전에요. 지금은 타마라 언니네에 있고요, 수요일부터는 발레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기로 했어요. ”

 

 

반갑게 인사를 한 후 베르닌은 왕재수 쪽을 보았다. 왕재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너 웬일이야? 일하고 있을 시간 아냐, 여긴 왜 왔어? ”

 

어, 그게... 외근 갔다가 근처라 들렀어. 넌 왜 휴일인데 나와 있는 거야? ”

 

“ 공사 마무리되는 것도 좀 보고, 나쟈 학교 수업은 다음 주부터니까 그전에 기본 좀 가르쳐주느라고. ”

 

“ 어, 그랬구나... ”

 

 

베르닌은 어쩐지 어색해졌다. 무용수들이 곁에 있는데다 왕재수는 일하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가 딱히 있을만한 구실이 없었다. 그는 돈키호테 무대에 함께 올라갔던 토냐와 가릭이 너무 반가웠지만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아닌 다닐 베르닌은 무용수들에게 있어 KGB 감시요원일 뿐이었다.

 

 

쭈뼛거리고 있는데 타마라와 데니스는 나쟈에게 시내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곧 자리를 떴고 가릭과 토냐는 시계탑에 올라가서 왕재수만 남았다.

 

 

“ 너 주말에 안 들어왔지. 설마 또 극장에서 잔 거야? ”

 

아니야, 로만한테 가 있었어. 나 지난주에 극장 이틀밖에 못 나왔어. 로만이 나 무조건 쉬어야 한다면서 자기 집에 가둬놓고 문도 다 잠가버리고... 극장 가면 두들겨 팰 거라고 얼마나 협박을 했다고. ”

 

“ 그 아저씨 웬일로 기특한 짓을 했네. ”

 

뭐가 기특해! 감옥이냐? 사람을 막 가두고... 너무 열 받아서 로만이랑 한바탕 싸웠어. 확 나가버리려다 말았어. ”

 

“ 문도 다 잠갔다면서 어떻게 나가. 바이올린 아저씨 5층인가 살지 않아? ”

 

“ 흥, 그깟 잠긴 문 누가 못 여니! 정 안되면 창문 깨고 파이프 타고 내려가면 그만이지. 맘만 먹으면 나갈 수 있었는데 내가 져준 거야. ”

 

“ 네가 웬일로? 너 완전 고집쟁이에 하고 싶은 대로만 하잖아.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의사 선생님이 사흘만 출근하라는 것도 안 들었잖아. 근데 어떻게 바이올린 아저씨 말은 듣는 거야? ”

 

아휴, 이 바보 멍충이. 로만은 내가 성질내고 있으면 갑자기 꼭 안아준단 말이야! 너랑 의사 선생님은 그게 안 되잖아! 그리고 로만이 얼마나 잠자리를 잘하는데... 그러니까 그냥 못 이기는 척 하고 있었... ”

 

“ 으윽, 그만 해. 알았어. 나 있잖아, 오늘부터 당분간 오후에 사무실 안 들어가도 되는데 극장 가끔 와도 돼? ”

 

“ 4월까지? ”

 

“ 어, 글쎄... 모르겠어. 근데 넌 왜 4월까지라고 생각하는 거야? ”

 

“ 너네 국장이 명령한 거 아니야? 나 4월에 신작 올리는 거 때문에? 옆에 가서 감시하라고. ”

 

 

베르닌은 멍해졌다. 가끔 그는 왕재수가 춤 말고 머리도 천재인가 싶었다.

 

 

“ 저... 맞아. 지난번 돈키호테 때도 그렇고... 미안해. 근데 나 정말 그런 거 아니야. 나 국장한테 진짜 최소한만 보고하고... ”

 

“ 누가 뭐래. 맘대로 하렴. 언제는 뭐 안 했냐. ”

 

 

메마르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에 왕재수가 코트 단추를 채우고 스카프를 꼭 여몄다. 이제 3월이었지만 아직도 추웠다. 지난주에는 폭설까지 와서 시계탑 주변으로는 청소부들이 한쪽으로 밀어놓은 눈이 산처럼 높이 쌓여 있을 정도였다. 왕재수는 부츠에서 눈을 털어내다가 시계탑을 올려다보면서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 진짜 흉물스러워.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했담. ”

 

“ 어, 난 괜찮은데. 이거 꼭 수도원 쪽에 있는 시계탑 같잖아. ”

 

“ 예산 퍼부어주니까 그걸로 여기다 세워놓은 거잖아. 전시용으로... 잘 보면 엄청 조잡해. 색깔 칠한 것부터 시작해서 저 시계 꼴 좀 봐. 자재도 싸구려에 꼴 보기 싫어. 옛날 거 흉내 내서 만든 가짜 티 엄청 나. 이거 왜 만들었는지 알아? 예전에 벨스키가 고향 도시라고 시찰 왔을 때 시 의원들이랑 우리 극장장하고 간담회를 하다가 자기는 수도원에 있는 시계탑이 참 맘에 든다고, 극장 뒤에도 그런 걸 지었다면 풍경이 근사했을 것 같다고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했다는 거야. 그 말에 여기다 저걸 짓자고 한 거래! 저런 흉물스러운 거 만들 돈 있으면 우리 극장 무대랑 음향 쪽에나 더 투자해 주지... 아니면 무용수들 기숙사나 더 지어주든가. 하긴 정치하는 인간들에게야 예술이 무슨 가치가 있겠니. 그저 선전용에 전시용이지. ”

 

“ 어... 저게 그렇게 엉망이고 조잡한 거구나. 난 건축이나 미술이랑 담 쌓아서 그런지 잘 모르겠어. 나처럼 잘 모르는 주민들은 그냥 괜찮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근데 저거 엄청 높다. 구시가지에 이 정도로 높은 거 없지 않나? ”

 

“ 8층 높이쯤 될 거야. 우리 아파트 정도. 구시가지 랜드 마크로 만들려고 일부러 높게 만들었대. 전망대도 만들고. 근데 저 전망대 진짜 잘못 만들었어. 올라가봤는데 너무 좁아. 사람들 많이 들어갈 수도 없고 창문도 양쪽으로 두 개 밖에 없는데 그나마 하나는 시계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아. 그냥 눈 가리고 아웅인 거야. 하긴 언제 소련에서 안 그런 적 있었나. ”

 

너 제발 소련, 당, 공산주의, 레닌 이런 말 하지 마... 불안해 죽겠어. 나야 보고 안한다지만 국장이 여기저기 정보원 심어놨다고 했단 말이야. 감옥 그렇게 싫다면서 또 꼬투리 잡혀 끌려가면 어쩌려고 그러냐. ”

 

“ 아 지겨워... 악마들... ”

 

 

왕재수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 뭐 딱 하나 건질 건 있어. 전망대 창문에서 보는 석양은 예쁘더라고. 구시가지랑 강이랑 검은 숲이 보여서. 나 석양 보는 거 좋아하거든. 그래서 완공되기 전부터 가끔 올라가서 해 지는 거 구경했어. ”

 

“ 아, 하긴. 우리 사무실이랑 집은 신시가지에 있으니... 이쪽 석양이 멋있긴 하지. 위에서 보면 근사하겠다. 여기는 높은 건물이 없잖아. ”

 

“ 5시쯤 올라가면 괜찮을 거야. 같이 보러 올라가자. 나 지금 무대 쪽 체크하러 가봐야 돼. 넌 산책이나 하렴. ”

 

“ 어, 그래. ”

 

 

왕재수는 신관으로 들어가고 베르닌은 잠시 극장 주변을 산책했다. 월요일 오후에 사무실이 아니라 구시가지에 와서 차갑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전에는 왕재수를 감시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오던 곳이었지만 돈키호테 이후 그는 극장이 좋아졌고 자꾸만 연습실과 분장실과 백스테이지가 생각났다. 심지어 맛없기 그지없는 극장 카페 차이카조차도 가끔 생각났다.

 

 

생각난 김에 그는 극장 1층으로 가보았다. 월요일이라 닫았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차이카는 문을 열었고 공사 인부들이 앉아서 요기를 하고 있었다. 베르닌이 오렌지 주스를 한 잔 시켜서 테이블로 걸어오는데 인부 하나가 그에게 아는 체를 했다. 예전에 KGB 창고 부설 공사를 할 때 안면을 텄던 그리고리였다. 햄 치즈 샌드위치를 착착 접어서 몇 입 만에 해치운 후 그리고리가 탄산수를 한 모금 꿀꺽 마셨다. 그리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맛있다. 이맘때가 제일 배고프거든. ”

 

“ 그러게요, 공사하다 보면 진짜 배고플 텐데. 그래도 카페라도 열어서 다행이네요. ”

 

“ 전에는 월요일엔 안 열었어. 열어도 우리는 이런 데서 못 먹고 그냥 공사장에 쭈그리고 앉아서 통조림이나 까먹고 말았거든. 근데 꼬마 감독님이 지난번에 그거 보더니 우리한테 카페 열어주라고 하더라고. 극장장이 안 된다고 했는데 미셴카가 어차피 공연 있는 날은 우리도 5시엔 일 끝내니까 관객들 자리 뺏을 일도 없는데 왜 멀쩡한 사람들을 땅바닥에 앉아서 먹게 하느냐고 화냈어. 말로만 노동자의 권익 운운하지 말라고 따지니까 극장장이랑 시설팀장이 뭐라 할 말이 없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 여기 와서 배 채울 수 있게 됐어. 반값 할인 식권도 받았어. ”

 

“ 아... 그랬구나. 의외네요, 걔가 그런 생각도 할 줄 알고... ”

 

“ 고맙다고 했더니 그 앙증맞은 감독님이 뭐라는 줄 알아? 우리가 예뻐서 그런 게 아니고 반대라고, 공사장에서 퍼질러 앉아 청어 통조림이나 까먹고 햄이나 우물거리니까 자꾸 보드카 퍼마시고 일도 엉망인 거 아니냐고, 그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거니까 착각하지 말래. 카페에도 얘기해서 우리한테는 보드카 못 주게 해놨다면서. 얼마나 귀여운지. 여기서 안 주면 어때, 보드카야 우리가 다 따로 챙겨오는데. 하여튼 좋은 애야. 무대 공사할 때도 자기가 궁금한 거 있으면 옆에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감투 과시도 안 하고 젠 체도 하나도 안 한다니까. ”

 

“ 이상하다... 걔 엄청 잘난 척하는데. 무용수들도 막 쥐 잡듯 하고. ”

 

“ 우리한테는 안 그래. 뭐 갈구긴 하지. 아까도 우리 십장한테 오더니 시계탑 전망대에 쌓아놓은 자재 언제 치울 거냐고 막 성질내더라고. 그거 다 쓰려고 놔둔 거라고 했더니 공사 끝났다면서 어디에 쓸 거냐고, 그러면 공사가 끝난 게 아니지 않느냐고 또 화내고. 젊은 애가 눈썰미가 엄청 좋다니까. 그거 십장이 일부러 자재 남겨먹은 거거든. 철수할 때 슬며시 자기가 챙기려고. 딱 걸렸지. ”

 

아니, 뭐라고요? 자재 챙겨 가면 안 되죠! 그건 횡령인데.

 

“ 에이, 물정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정색해. 다른 공사장에서도 다 그렇게 하는데. ”

 

 

베르닌은 나중에 왕재수에게 귀띔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카페를 나왔다.

 

 

 

*   *   *

 

 

 

베르닌은 한동안 로비를 돌아다니다가 시계를 보니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어서 시계탑 쪽으로 다시 가려고 극장을 나왔다. 그런데 현관 계단에 가릭이 쭈그리고 앉아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은 표정으로 보드카를 병나발 불고 있었고 옆에 왕재수가 앉아 있었다. 맨 처음에 베르닌은 왕재수가 무용수는 술 마시면 안 된다며 가릭을 쥐 잡듯 잡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옆으로 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가릭은 울먹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하며 두 손으로 가슴을 쾅쾅 쳤고 왕재수는 얘기를 들어주고 있는 거였다. 잘 들어보니 연애상담이었다.

 

 

“ 흑흑,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다니. 저 정말 용기내서 고백한 거였는데... ”

 

“ 그래서 오늘 나온 거구나! 난 또 연습하려고 나온 줄 알고 기특하다 생각했었네. 스네고로드도 그래서 따라가겠다고 자원한 거였지? ”

 

“ 네. 근데 다 망했어요. 흑... 일부러 분위기 좋은 데서 고백하려고 시계탑까지 데리고 올라갔는데... ”

 

“ 이 멍충아, 그 안이 지금 얼마나 어수선한데. 자재도 막 쌓여 있고 먼지구덩이에... 누가 여자를 그런 데로 데려가서 고백을 하니! ”

 

“ 그치만 감독님은 매일 저녁에 거기 올라가시잖아요. 전망대에서 보는 풍경 좋다면서. ”

 

“ 어휴, 내 말을 제대로 들었어야지! 석양 보는 게 좋다고 했잖아! 해 질 때 올라갔어야지. 타이밍이 너무 빨랐잖아. 먼지 풀풀 피어오르고 전기도 제대로 안 들어오는데 자재들 사이에서 무슨 분위기를 찾고 무슨 고백을 하니! ”

 

“ 어흑... 문제는 먼지구덩이도 자재도 아니란 말이에요. 분위기가 아무리 좋았어도 안됐을 거예요. 토냐가 저한테 미안하다면서 자기는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너무 좋아해서 도저히 저한테 마음을 줄 수 없다는 거예요. 엉엉... ”

 

“ 아, 그래? 그 남자랑 토냐 지금 사귄대? ”

 

“ 아니요... ”

 

“ 그럼 뭘 걱정이야. 잘해주면서 마음을 뺏으면 되지. ”

 

“ 흑... 그게 안 되니까 그렇죠! ”

 

“ 왜 안 돼? 왜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니? ”

 

“ 그건, 그건... 토냐가 좋아하는 사람이 당신이니까 그렇죠! ”

 

 

가릭이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술병을 와락 넘어뜨렸다.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엉엉, 정말 너무해... 그렇게 인기 많으면서 왜 토냐까지... 흑... ”

 

 

왕재수는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 아 뭐... 여자들은 다 나 좋아해. 토냐라고 예외겠니. 그거 그냥 팬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그러는 거야. 그러다 말 거야. ”

 

“ 아니에요! 토냐는 진짜 진심으로 감독님 좋아한단 말이에요! 맨날 당신 얘기밖에 안 해요. 밤이고 낮이고 감독님 생각만 한다고... 그래서 난 남자로 안 보인대요. 흑... ”

 

“ 뭘 그렇게 절망하니. 난 토냐한테 그런 감정 없는데. 난 극장 여자들이랑 절대 안 사귄단 말이야. 그러니까 진정 좀 해라. ”

 

그건 감독님 사정이고요! 토냐는 진짜로 사랑에 빠졌단 말이에요. 엉엉, 내가 옛날부터 좋아했는데. 흐흑... 용기 없어서 고백 못하고 있었는데... 내가 바보야. 너무 늦었어. ”

 

“ 뭘 늦냐. 너랑 사귀고 있었다 해도 어차피 토냐는 나한테 반하게 되어 있었어. 나 보면 여자들 다 그래. 그러다가 금방 포기한다니까. 그러니까 질질 짜지 말고 연습이나 열심히 해. 여자들은 노력하는 남자를 좋아해. ”

 

“ 하지만 노력하는 남자보다 이미 성공한 남자를 더 좋아한단 말이에요! ”

 

“ 누구, 나 말이야? 여자들이 날 좋아하는 건 성공이랑 별로 관계없어. 내가 우주 최고 꽃미남이라서 그렇지.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잖아. 혹시라도 토냐가 고백이라도 하면 내가 잘 거절할게. ”

 

“ 그럼 토냐가 상처받을 텐데... ”

 

“ 상처받아도 할 수 없잖아. 난 토냐한테 털끝만큼도 그런 마음이 없는데. 그러면서 받아주면 그게 더 나쁘지. ”

 

“ 그럼 정말 나쟈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때 스네고로드에서 한 번 보고 데려오셨잖아요... 학교에도 넣어주고 기숙사까지 잡아주고... ”

 

“ 으윽, 너 내 말 안 들었냐! 난 극장 여자들하고 절대 안 사귄다고! 하여튼 이런 거 안 좋아! 동료들이랑 좋아하고 사귀고... 에잇... 지금 네가 연애할 때냐? 어디서 얻어걸려서 투우사 한번 추고 나더니만... 연습 많이 해서 더 잘해야 할 거 아냐! ”

 

 

왕재수가 다시 쥐 잡는 모드로 돌아오는 것 같아서 베르닌은 말리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가릭이 코를 킁킁댔다.

 

 

“ 이게 무슨 냄새지? 어디서 이렇게 타는 냄새가 나지? ”

 

 

베르닌도 뭔가 매캐하게 타는 냄새를 맡았다. 어디서 샤실릭이라도 굽나 싶어서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왕재수가 벌떡 일어나더니 계단 위로 뛰어올라갔다. 그리고는 몸을 한 바퀴 돌려 주위를 살피더니 다급하게 소리쳤다.

 

 

시계탑에서 불 난 것 같아! 소방서에 전화 좀 해줘!

 

 

베르닌은 급한 마음에 차이카로 뛰어 들어갔다. 매니저 아르카지에게 화재 신고를 해달라고 했다. 아르카지가 소방서에 전화를 하는 동안 베르닌은 급하게 뛰쳐나와 신관 쪽으로 달려갔다. 왕재수의 말이 맞았다. 시계탑의 높은 창문 사이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퍼지고 있었다. 타는 냄새가 나면서 창문 너머로 조그만 불꽃이 이글거리는 것이 보였다. 왕재수가 주변에 있던 청소부들과 인부들에게 빨리 피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신관에서 뛰쳐나온 그리고리에게 왕재수가 소리쳐 물었다.

 

 

“ 다 나왔어요? 남아 있는 사람 없어요? ”

 

“ 다 나왔어요! 인부 몇 명 없었어요. 이름 다 확인했어요! ”

 

“ 청소부 아주머니들은요? ”

 

“ 여기, 여기, 여기! 우리 다 여기 있어요! ”

 

 

청소원들이 손을 들어가며 목청껏 소리쳤다. 왕재수는 그리고리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 시계탑은요? 거긴 아무도 없어요? ”

 

“ 없어요, 공사 끝났잖아요. 우린 다 나왔어요. ”

 

“ 그나마 다행... ”

 

 

그때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가릭이었다. 얼굴이 새파래진 채 가릭이 울부짖었다.

 

 

토냐! 토냐가 저 위에 있어요! 아까 나 혼자 내려왔어요... 토냐는 안 내려왔어요... 토냐!

 

 

왕재수가 가릭을 잡아 흔들었다.

 

 

“ 무슨 소리야! 너 내려온지 한참 된 거 아냐? 토냐도 벌써 내려왔겠지! ”

 

“ 아니에요... 저 방금 내려오자마자 감독님이랑 마주친 거였어요... 토냐는 위에 남았어요. 주변 다 찾아봤어요, 토냐가 없어요... 저 위에 토냐가... ”

 

 

베르닌은 고개를 저었다. 토냐는 이미 내려와서 집에 갔을 거라고 대답해주려고 했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희미하지만 날카로운 여자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위쪽이었다. 시계탑 쪽이었다. 가릭이 소스라쳤다.

 

 

토냐! 토냐 목소리예요! 오 하느님, 토냐가 정말 저 위에... ”

 

 

가릭이 거품을 물고 비명을 질러대며 미친 듯이 시계탑 입구로 돌진하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달려들더니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주먹으로 가릭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베르닌은 저지할 겨를도 없었다. 가릭은 비틀거리더니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사람들이 웅성거릴 틈도 주지 않고 왕재수가 소리쳤다.

 

 

“ 누가 얘 좀 옮겨요! 다닐, 소방서에 전화했어? ”

 

“ 해, 했어... 아르카지가 했어... ”

 

“ 소방서 어디 있어? 소방차 오는 데 얼마나 걸려? ”

 

“ 신, 신시가지... 우리 동네 근처... 강 건너서 와야 돼... ”

 

안 돼, 시간 없어! 그 장갑 좀 내놔요!

 

 

왕재수가 몸을 홱 돌리며 그리고리의 손에 끼워져 있던 목장갑을 벗겼다. 급하게 장갑을 끼더니 코트를 벗어서 내던졌다. 그리고는 단거리 주자처럼 급하게 시계탑 입구로 뛰어 들어갔다.

 

 

“ 안돼요, 감독님! 큰일 나요! 거기 좁아서 연기도 안 빠진다고요! 소방차 올 때까지 기다려요! ”

 

 

청소원들과 인부들이 고함을 질렀지만 왕재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멍하게 굳어져 있었던 베르닌은 왕재수의 모습이 입구의 암흑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을 때 감전된 듯이 펄쩍 뛰었다.

 

 

미하일! 기다려! 기다려!

 

 

물론 왕재수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베르닌은 욕을 퍼부었고 정신없이 왕재수를 따라 시계탑으로 뛰어 들어갔다.

 

 

 

*   *   *

 

 

 

시계탑 안은 밖에서 볼 때와 완전히 달랐다. 나선 계단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었고 몇 개의 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층마다 방이 한두 개씩 있었다. 불은 위에서 난 것 같았다. 구조 때문인지 연기와 불길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왕재수는 수사슴처럼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올라갔다. 층마다 멈춰서 토냐의 이름을 목청껏 불렀다. 어디선가 가냘픈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한참 뛰어올라간 끝에 베르닌은 간신히 왕재수를 따라잡았다. 이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왕재수는 연기가 밀려 내려오는 층계와 벽에 난 창문 사이에 선 채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냄새를 맡기도 하고 고개를 휘휘 젓기도 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등짝을 철썩 때렸다.

 

 

“ 너 미쳤어? 소방차 올 때까지 기다렸어야지! 금방 올 텐데! ”

 

토냐가 위에 있어. 못 내려온 거야. 소리만 지르고 있잖아... 다치거나 갇힌 거야. 안 그랬으면 벌써 내려왔을 거라고. ”

 

“ 하지만... ”

 

한 층 더 올라가야 돼. 그쪽에 있는 것 같아. 너 빨리 내려가. 위험하니까. ”

 

“ 이 미친놈아! 위험하다면서 너는 올라가도 되냐! ”

 

“ 넌 덩치도 크고 둔해서 안 돼! 빨랑 내려가! 위험하다고 했잖아! ”

 

“ 그럼 너는! 죽었다 살아난지 며칠이나 됐다고! ”

 

저리 가! 토냐 구해야 돼! 토냐는 내 책임이야! 우리 무용수들 다 내 책임이란 말이야! 내가 구해야 돼! 빨리 가!

 

안 가! 너 혼자 못 보내! 나도 갈 거야! 갈 거면 빨리 올라가!

 

 

왕재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왕재수의 눈에 스쳐간 파란 불꽃에 베르닌은 움찔했다. 가릭의 관자놀이를 후려쳤을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급하게 그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 너 나 패기만 해봐! 나 KGB잖아, 공무원 폭행... ”

 

“ 시끄러워! 맘대로 해, 바보 멍충이... 거추장스럽게... ”

 

 

왕재수는 홱 돌아서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토냐의 이름을 부르면서 순식간에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베르닌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재킷 칼라를 세워 코와 입을 감싼 채 왕재수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전망대 층에 도달했다. 불꽃이 이리 튀고 저리 튀었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는데 안쪽에서 연기와 불길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베르닌은 화재 현장에 들어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시무시했다. 왕재수는 정신없이 주변을 뒤졌다. 불길이 올라오는 것도 무섭지 않은지 연기 사이를 마구 헤치고 다니며 소리를 쳤다.

 

 

“ 토냐! 어디 있어? 전망대야! 토냐! ”

 

“ 살려줘요! 아래... 바닥.... ”

 

 

가냘픈 비명 소리가 연기 속에서 들려왔다. 베르닌은 방향을 잡을 수가 없어 갈팡질팡했다. 하지만 왕재수는 곧장 몸을 틀더니 왼쪽으로 달려갔다. 기둥처럼 거대하게 세워져 있는 나무와 콘크리트, 철골 자재들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가더니 자욱한 연기 속에서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다친 줄 알고 소름이 돋아서 쫓아갔다. 하지만 왕재수는 다친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토냐를 발견한 거였다. 토냐는 쓰러진 자재에 다리가 깔려 있었다. 그렇게 자그마하고 날씬한 여자로서는 아무리 버둥거려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토냐를 덮어 누르고 있는 나무 자재는 이미 불길이 옮겨 붙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 미셴카... 못 움직이겠어요... 무서워요... ”

 

 

토냐가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조그만 얼굴이 눈물과 검댕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 뭐가 무서워! 꺼내줄 거야, 울지 마! 산소 낭비하지 마! ”

 

 

왕재수가 두 손으로 자재를 붙잡고 마구 밀어댔다. 그 와중에 불꽃이 튀면서 소매에 옮겨 붙을 뻔 했지만 왕재수는 침착하게 불티를 털어냈다. 베르닌이 급하게 합류했다. 무슨 기둥인지 들보인지 엄청나게 무거웠다. 자재가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왕재수가 베르닌에게 소리쳤다.

 

 

“ 내가 밀게, 넌 토냐 끌어내! 쟤 지금 못 움직여, 끌어내줘야 돼! ”

 

“ 네가 끌어내! 내가 더 힘세잖아! ”

 

“ 아니야, 내가 하는 게 더 나아! 빨리 해! ”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복종했다. 왕재수가 두 팔로 자재 기둥을 끌어안았다.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옆으로 비틀면서 자재를 한순간 들어올렸다. 그 무거운 자재 기둥이 정말로 움직였다. 올라갔다. 순간 베르닌은 토냐의 어깨와 팔을 붙잡아 앞으로 홱 끌어당겼다. 자그마한 인형 같은 토냐가 주르륵 하고 끌려나왔다. 왕재수는 있는 힘을 다해 자재를 들어 올린 채 버티고 있었다. 이마와 목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베르닌이 소리쳤다.

 

 

“ 됐어! 놔도 돼! ”

 

 

왕재수가 자재를 놓았다. 쿵 소리와 함께 연기와 불꽃이 일었다. 왕재수는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토냐를 껴안고 일어섰다.

 

 

“ 토냐, 정신 차려! 너 내 말 들려? ”

 

“ 미셴카... 어흑... 다리... 내 다리... ”

 

 

토냐가 흐느껴 울었다. 왕재수가 토냐를 안고 뛰면서 소리쳤다.

 

 

“ 다리 괜찮아! 걱정 마! 괜찮아! ”

 

“ 뼈 으스러진 것 같아요... 아... 이제 어떻게 해요... ”

 

“ 아니야! 그냥 금만 간 거야! 만져봤어. 괜찮아! 몇 달 있으면 다 나아! 춤 다시 출 수 있어! 괜찮아! ”

 

 

그 절박한 와중에도 어떻게 왕재수와 토냐가 다리 얘기를 할 수 있는지 베르닌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불길이 너무 거세져서 온몸이 후끈거렸고 숨이 턱턱 막혔다. 빨리 빠져나가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그때 불어온 바람 때문에 불이 옆으로 옮겨 붙으면서 뭔가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자재가 우르르 무너졌다. 순식간에 계단으로 내려가는 출구가 막혀버렸다. 토냐가 비명을 질렀다. 뒤에서는 불길이 소용돌이치듯 다가오고 있었고 계단으로 가는 길은 비스듬하게 무너져 벽처럼 변해버린 자재에 완전히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 아, 아... 미셴카... 이제 우리 못 나가요... 엄마... 엄마... ”

 

 

토냐가 부들부들 떨며 울부짖었다. 너무나 애처롭게 울어서 베르닌도 끔찍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왕재수는 울지 않았다. 비명도 안 질렀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도 주변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베르닌에게 토냐를 좀 안고 있으라고 하고는 옆으로 쓰러져 있는 철골 자재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 자재랑 천정 사이에 틈이 있어. 꽤 넓어. 저기 보이지? 토냐, 내가 지금 너 저기로 던질 거야. 저 틈새 사이로 던질 거니까 준비해. 너 다리 하나도 못 움직이는 거 아니야. 움직일 수 있어. 내 말 잘 들어, 아파도 무조건 뛰어야 돼. 못 뛰면 걷고, 그것도 안 될 것 같으면 기어. 그것도 안 되면 굴러. 춤 같은 거 생각하지 마! 무조건 내려가는 거야! 바람이 위로 불고 있어. 아래에는 불 안 번졌어. 연기도 없어. 내가 지금 던져주면 무조건 굴러. 한 층만 내려가면 돼. 그 아래는 괜찮아. 내 말 알아들어? ”

 

“ 하, 하지만... ”

 

하지만이고 뭐고 없어! 지금 던질 거야! 너 무용수야 아니야! 안 다치게 떨어지는 거 알아 몰라! 내가 가르쳐줬잖아! ”

 

 

베르닌은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벽처럼 서 있는 자재와 천정 사이에 정말 큰 틈새가 있었다. 토냐 정도 체구의 여자라면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왕재수라도 가능할 것이다. 기어 올라간다면 체격이 큰 베르닌조차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오르는 연기와 불꽃 때문에 기어 올라갈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사람을 번쩍 들어서 그 위로 던진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가 절망에 차서 안 된다고 중얼거리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그에게 토냐를 올려달라고 했다. 그는 토냐의 몸을 밀어서 왕재수가 서 있는 자재 위로 올렸다.

 

 

“ 너도 올라와, 다닐. 네 도움이 필요해. ”

 

“ 어떻게... ”

 

높이가 모자라. 엎드려줘. 너 밟고 올라갈 거야. 무거워도 조금만 참아줘. ”

 

 

베르닌은 수평으로 쌓여 있는 자재 위로 기어 올라갔다. 왕재수가 시키는 대로 엎드렸다. 왕재수가 토냐를 안고 그의 등 위로 올라갔다. 둘 다 자작나무처럼 날씬한 애들이었지만 두 명의 무게가 얹히자 무거웠다. 숨이 턱 막혔다. 어쩌면 자욱한 연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무서웠다. 아무리 왕재수가 무용수로 잔뼈가 굵고 여자를 들어 올리는 데 도가 텄다고 하지만 천정의 틈새로 여자를 들어서 던져 넣는 것을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토냐는 다리도 다쳤는데... 그때 왕재수가 펄쩍 뛰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베르닌은 등과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었다.

 

 

왕재수는 정말로 토냐를 투포환처럼 집어던졌다. 토냐는 몸을 옆으로 비틀며 자재와 천정 사이의 틈새로 거의 새처럼 날아갔다. 잠시 후 자재 너머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무 것도 안 보였기 때문에 왕재수가 소리를 질렀다.

 

 

“ 토냐! 괜찮아? ”

 

“ 네... ”

 

“ 빨리 일어나! 일어날 수 있어? ”

 

“ 아... 아악... ”

 

 

토냐는 괴롭게 비명을 토해냈지만 잠시 후 훌쩍이며 소리쳤다.

 

 

“ 일어났어요. 걸을 수 있어요... ”

 

“ 빨리 가! 빨리 내려가! ”

 

“ 하지만... ”

 

“ 빨리 가! ”

 

“ 당신들은 어떡하고요... 저 틈새로 못 나오잖아요... 나 혼자 어떻게... ”

 

“ 우린 올라갈 거야! 옥상으로 올라갈 거니까 괜찮아! 소방차 이제 다 왔어! 그러니까 걱정 말고 가! 너 감독 말 안 들어? 빨리 가! ”

 

“ 미셴카! 미셴카! ”

 

빨리 가! 말 안 들으면 너 자를 거야!

 

 

흐느낌과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점차 멀어졌다. 왕재수는 처음으로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벽처럼 비스듬하게 무너져 출구를 가리고 있는 그 무시무시하고 불꽃이 퍽퍽 튀고 있는 거대한 자재들을 밀어보았다. 꿈쩍도 안 했다. 몇 초도 안 되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이쪽으로는 못 나가. ”

 

“ 내가 너 던져줄게. 아까 토냐한테 한 것처럼... ”

 

“ 그건 나랑 토냐니까 된 거야. 너하고 나는 안 돼. 올라가야 돼. ”

 

“ 어디로... 여기가 제일 꼭대기잖아... ”

 

“ 옥상. 지붕 위! 뚜껑 열고 올라가야 돼! 사다리 있어! ”

 

“ 하지만... ”

 

 

왕재수는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두 눈에 파랗고 빨간 불빛이 번쩍번쩍했다. 그러더니 창가로 달려갔다. 허드렛물이 들어 있는 양동이를 본 것 같았다. 그 물로 불을 끄려는 거냐고 베르닌이 절망적으로 투덜대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스카프를 풀었다. 순식간에 두 토막으로 쫙 찢더니 양동이에 철썩 담갔다. 베르닌에게 달려오더니 그의 코와 입을 물에 흠뻑 적신 스카프 조각으로 한 바퀴 감싸 묶었다. 나머지 한 조각으로는 자기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쪽을 가리켰다.

 

 

“ 다닐. 옥상은 저쪽 방으로 가야 올라갈 수 있어. ”

 

“ 뭐? 저쪽에도 방이 있단 말이야? ”

 

“ 이쪽은 전망대랑 시계가 있는 쪽이고, 뒤쪽에 작은 창고가 있어. 거기 사다리랑 옥상 입구가 있어. 올라가려면 저 방으로 들어가야 돼. ”

 

“ 하지만... 저쪽은 불이... ”

 

“ 이쪽도 금방 옮겨 붙어. 내가 먼저 갈 거야. 연기 때문에 소리 못 지를 수도 있어. 내가 들어가면 20까지 세. 그리고 들어와. 불길이 퍼져 나오면 들어오지 마. 도로 나와. 알았어? ”

 

“ 무슨 개소리야! 네가 뭔데 먼저 들어가! ”

 

“ 구조를 아니까! 내가 먼저 가서 사다리로 갈 거야. 20 세는 동안 뚜껑까지 열 거야. 그때 네가 들어오는 거야. 심호흡해야 돼. 연기 마시면 질식하니까. 무조건 사다리 타고 올라와서 옥상으로 가는 거야. 뚜껑 닫으면 불 올라오는 거 막을 수 있을 거야. ”

 

“ 안 돼! 너 혼자 못 들어가! 난 화생방도 해봤어! 군대도 갔다 왔고 요원 훈련도 받... ”

 

시끄러워! 잘못하면 둘 다 죽어! 여긴 극장이야! 내가 아는 곳이야! 지금 들어간다. 숫자 세! ”

 

 

왕재수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총알처럼 연기 속으로 튀어 들어갔다.

 

 

그때 베르닌은 왜 자신이 왕재수를 말리거나 주먹을 휘두르거나 따라 들어가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1부터 숫자를 세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점점 불길이 몰려들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숨 쉬기가 버거웠다. 그나마 왕재수가 물에 적신 스카프를 둘러주지 않았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았다. 베르닌은 화재가 났을 때 여기저기서 불꽃이 퍽퍽 소리를 내며 터진다는 것도, 갑작스럽게 소용돌이치는 불길이 솟아오른다는 것도 전혀 몰랐었다. 눈물콧물이 줄줄 흘렀다. 시커먼 연기가 갈수록 짙어졌고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솟았다.

 

 

“ 20! ”

 

 

그는 심호흡을 했다.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모을 수 있는 숨을 다 끌어모아 들이쉰 후 왕재수가 사라졌던 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연기 때문에 앞이 거의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마터면 자재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쿠당탕 소리를 내며 달려 들어가자 전망대 쪽에서 퍼지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맵고 짙은 연기가 폭풍처럼 밀어닥쳤다.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은 느낌이었다. 뺨이 따끔따끔하면서 굉장히 아팠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돌진했다. 시커먼 연기 안개 사이로 짙은 초록색이 잠깐 아른거렸다. 왕재수의 스웨터 색깔이었다. 그는 그쪽으로 뛰었다. 왕재수는 사다리 위에 있었다. 두 손으로 미친 듯이 천정을 쾅쾅 치고 있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너무 뜨거워서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왕재수는 스카프로 칭칭 감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안 열려. 잠겼어. ”

 

“ 열쇠... 열쇠 있을 거야! ”

 

“ 찾아봤어. 안 보여. 가지고 내려갔나 봐. ”

 

 

웅얼거리던 왕재수가 입을 다물었다. 스카프로 감싸여 눈과 이마밖에 안 보이는데다 검댕으로 더럽혀져 있었지만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알아볼 수는 있었다. 베르닌은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왕재수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왕재수가 머리를 젖힌 채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하마터면 함께 사다리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지만 베르닌은 한 손으로 사다리를 붙잡고 버텼다. 그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숨이 막혔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사다리에 몸을 부딪치며 간신히 내려왔다. 왕재수를 안고 정신없이 연기를 헤치며 뛰었다. 갈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전망대 방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베르닌은 그나마 가장 불길에서 멀고 공기 상태가 나은 창가로 달려갔다. 왕재수를 창가 안쪽에 기대어 앉히고 스카프를 푼 후 양동이에 남아 있는 물을 손으로 떠서 얼굴에 뿌렸다. 물을 맞아서인지, 아니면 열린 창문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바람과 산소 때문인지 왕재수가 곧 기침을 하며 눈을 떴다. 눈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 너 괜찮아? 숨 쉴 수 있는 거지? ”

 

“ 으응... 잠깐 질식했나봐. ”

 

“ 그것 봐! 혼자 들어가지 말랬잖아! ”

 

“ 열쇠만 있었어도... 옥상으로는 못 가겠다. ”

 

 

왕재수는 심호흡을 하며 잠시 멍해진 채 앉아 있었다. 스카프를 다시 물에 적셔서 얼굴을 감쌌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정신이 아득했다. 자재들이 끔찍할 정도로 매운 냄새를 풍기며 타오르고 있었다. 여기저기 불기둥이 솟았다. 점점 불길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서웠다. 동시에 무섭지 않았다. 현실 같지가 않았다. 곧 소방수들이 올라와서 자재를 모두 치워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구해낼 것이고...

 

 

갑자기 왕재수가 창가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연기와 불꽃이 넘실대는 오른쪽으로 뛰어갔다.

 

 

“ 야, 너 미쳤어? 뭐하는 짓이야! ”

 

 

왕재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더니 연기 속에서 정신없이 뭔가를 뒤졌다. 불꽃이 마구 튀는 것도, 타들어가는 자재가 쾅 하고 옆으로 쓰러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 분명히 여기 있었어... 여기... ”

 

 

베르닌은 왕재수가 연기를 마셔서 돌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왕재수가 벌떡 일어나 다시 창가 쪽으로 달려왔다. 품에 지저분한 회색의 밧줄 뭉치를 껴안고 있었다.

 

 

“ 어제 봤었어. 공사할 때 쓰던 거야. 이거 풀어봐. 길이 좀 보게. ”

 

 

왕재수는 밧줄 뭉치를 베르닌에게 내던졌다. 베르닌은 급하게 줄을 풀었다.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풀려나오는 밧줄이 꽤 길어 보였다. 마침내 다 풀었을 때 왕재수는 팔을 펼치더니 밧줄에 대 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밧줄을 착착 접었다가 폈다. 그리고는 창가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다닐, 이것 좀 잡고 있어. ”

 

 

베르닌이 밧줄 뭉치를 잡자 왕재수가 줄 끝을 잡고 거세게 잡아당겼다. 고개를 갸웃했다. 계속해서 당겨보면서 줄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더니 불쑥 물었다.

 

 

“ 너 몇 킬로야? ”

 

“ 지금 몸무게 묻게 됐냐? ”

 

“ 솔직하게 말해! 지금 몇 킬로야? 제일 최근에 쟀을 때 몇 킬로였어? ”

 

 

베르닌은 멍해졌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분명히 스타브로프의 병원에서 체중을 쟀었다. 왕재수에게 수혈을 해주려고... 그때...

 

 

“ 파, 팔십 킬로 정도... ”

 

 

왕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에 새까만 막이 내리덮이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연기 때문에 숨이 막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심장과 폐가 터질 것 같았다. 그때 왕재수가 장갑을 벗었다. 온통 시커메지고 해진 목장갑을 베르닌에게 건넸다.

 

 

“ 장갑 껴, 다닐. ”

 

“ 왜! 네 거잖아! ”

 

“ 여기서 몇 분 못 버틸 거야. 저기 불이랑 연기 보이지? 저거 다 타고 나면 금방 이리로 옮겨 붙을 거야. 옥상으로는 못 가. 계단 쪽도 막혔어. 창문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어. 밧줄 묶을 거야. 줄 타고 내려가는 거야. ”

 

“ 뭐라고! 너 미쳤어? 이거, 이거 10층은 될 텐데... ”

 

“ 아니, 10층까진 안 돼. 8층 정도야. 할 수 있어. 밧줄 길이 재봤어. 거의 바닥까지 닿아. 파이프 쪽으로 밧줄 내리면 돼. 옛날 시계탑 흉내 내서 만들었잖아. 중간중간 장식돌이 있어. 발 디딜 수 있다고. 할 수 있어. 너 군대 갔다 왔잖아. 유격인지 뭔지 훈련 같은 거 했을 거 아냐. 줄타기 훈련 안 했어? ”

 

“ 했어. 그래... ”

 

“ 그러니까! 지금 그 방법밖에 없어. ”

 

 

왕재수는 밧줄 뭉치를 껴안고 창가로 갔다. 창가 쪽에 고정되어 있는 튼튼한 철골 파이프에 밧줄을 칭칭 감고 꽉 묶었다. 밧줄을 팽팽하게 당겨보았다. 그리고는 창밖으로 밧줄을 내려뜨리고 풀었다. 밧줄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베르닌은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정말 높았다. 아득했다. 그는 고소공포증이 없었지만 그래도 무서웠다. 줄을 타고 내려갈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까마득한 아래로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지만 불길이 펑펑 터지는 소리 때문인지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소방차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양동이와 바가지를 나르고 있는 게 보였다. 고무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는 것도 보였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오는 건 불가능했다. 방화복을 입은 소방수들이 아니라면 자살행위였다.

 

 

마침내 밧줄이 모두 풀렸다. 땅바닥까지 닿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왕재수의 말대로 거의 근접한 것 같았다.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다가와서 패딩을 벗으라고 했다.

 

 

“ 몸이 가벼워야 해. 공기 저항도 줄여야 되고. ”

 

 

베르닌은 패딩 재킷을 벗었다. 왕재수가 장갑을 다시 한 번 건넸다.

 

 

“ 너는! 네 걸 나한테 주면 넌 어쩌려고! ”

 

난 너처럼 둔하지 않아. 너 지금 손에 화상 입어서 맨손으로 밧줄 못 타. ”

 

웃기지 마! 네 거 절대 안 껴! 빨랑 도로 껴!

 

 

왕재수가 스웨터를 벗었다. 그러더니 안에 입었던 셔츠 소매를 북 찢어서 양쪽 손바닥을 붕대 감듯 칭칭 동여맸다. 어쩌면 그렇게 손놀림이 빠른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 됐지? 장갑 껴. ”

 

 

베르닌은 할 수 없이 목장갑을 끼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밧줄이 던져진 것을 보자 갑작스럽게 진짜 공포가 밀려들었다. 어지러워서 비틀거리는데 왕재수가 그의 등짝을 철썩 때렸다.

 

 

“ 야, 정신 차려! 무서워할 시간 없어! 맨날 군대 갔다 온 거 자랑하더니... 너 먼저 내려가는 거야. 지금 가! ”

 

안 돼! 너 먼저 내려가! 아까도 질식해서 기절했잖아... 계속 아팠었잖아. 너보단 내가 더 폐활량도 좋고 잘 버틸 수 있어. 너 먼저 내려가! ”

 

 

베르닌이 고함을 지르며 왕재수를 확 잡아서 창가 쪽으로 밀었다. 왕재수는 벌컥 화를 냈다.

 

 

이 바보 멍충아! 넌 둔하잖아! 네가 뒤에 내려오면 내 위에 네가 있게 되잖아! 그러다 네가 미끄러지면 나까지 떨어지잖아! 그러니까 너 먼저 가!

 

뭐야! 그러니까 너 지금 떨어질 거면 나 혼자 떨어지라는 거야?

 

그래! 위험 요소를 최소화해야지! 알아들었으면 빨리 가! ”

 

 

베르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렇게 절박한 와중에도 어떻게 섭섭한 마음이 드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어쨌든 화가 났다. 왕재수를 때려주고 싶었지만 어쨌든 그 말이 맞았다. 그는 왕재수보다 몸놀림도 둔한데다 덩치도 컸다. 자칫 잘못해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왕재수를 덮치며 함께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가 먼저 내려가는 게 나았다.

 

 

그는 창턱에 몸을 기대고 다시 한 번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너무 아찔했다.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이렇게 절박한 순간인데도 어떻게든 내려가는 순간을 늦춰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그때 왕재수가 그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으며 세게 포옹을 했다. 뺨이 마주 닿았다. 연기 때문에 거칠어지고 목쉰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 아래 보지 마. 줄만 잡고 하나 둘 세면서 내려가. 천천히. ”

 

“ 너 금방 내려올 거지? ”

 

“ 그래. 그러니까 이제 가. 그래야 내가 따라가지. ”

 

“ 알았어, 갈게. ”

 

 

왕재수가 팔을 풀고 물러섰다. 까만 눈에 소용돌이치는 불길이 반사되어 붉은 불빛이 일렁거렸다. 한순간 베르닌은 솟구치는 공포와 강렬한 보호심을 동시에 느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 아래에서 봐, 다닐. ”

 

“ 그래. 조심해. ”

 

 

베르닌은 창가로 기어 올라갔다. 더 이상 우물쭈물할 수는 없었다. 불길이 이제 창가까지 덮쳐오고 있었다. 그가 먼저 내려가야 왕재수도 따라 내려올 수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빨리 가야 했다.

 

 

“ 너 언제 내려올 거야? 나 한 층만 내려가면 따라올 거지? ”

 

“ 응. 그럴 거야. 자, 가! ”

 

 

베르닌은 밧줄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생각보다 밧줄의 두께가 얄팍했다. 그가 매달리자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줄이 끊어지면 어쩌지 하고 겁이 더럭 나려고 하는데 왕재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 안 끊어져. 매듭도 안 풀려. 뱃사람 매듭으로 묶었어. 가. ”

 

 

그래서 베르닌은 심호흡을 하고는 창밖으로 몸을 완전히 빼냈다. 천천히 밧줄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계탑의 벽면과 파이프를 디디며 한 발 한 발 내려갔다. 벽이 생각보다 미끄러웠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여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정신없는 순간에도 그는 토냐를 떠올렸다.

 

 

‘ 다행이야, 무사히 내려갔구나... ’

 

 

어쩐지 토냐가 무사하다는 생각이 들자 쿵쾅거리던 가슴도 조금 가라앉고 호흡도 규칙적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왕재수의 말이 옳았다. 줄만 잡고, 아래를 보지 말고, 하나 둘 세면서 오직 한 발 두 발 내딛는 것만 생각해야 했다. 팔이 마비되는 것처럼 아파왔다.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밧줄이 흔들렸다. 그는 밧줄을 더욱 꽉 움켜잡았다. 발이 바깥으로 튀어나온 턱에 닿았다. 창턱이었다. 한 층 아래로 내려온 것이다. 왕재수가 토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바로 그 층이었다. 매캐하고 뜨거운 연기가 확 밀려나와서 얼굴을 델 것 같았다. 불이 아래로 번지기 시작한 것 같았다. 바람 방향이 바뀐 것인지, 내부의 뭔가가 허물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연기 때문에 하마터면 그는 밧줄을 놓칠 뻔 했다. 간신히 창턱을 두 발로 꽉 밟으면서 밧줄을 꼭 쥐었다. 그리고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기억이 희미해졌다. 어떻게 밧줄을 타고 벽과 파이프를 밟으며 내려왔는지 어렴풋한 꿈처럼 느껴졌다. 세찬 바람과 매운 연기, 마비되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팔과 어깨, 후들거리는 무릎, 이 모든 것이 으깬 죽처럼 뒤섞였지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기계처럼 숫자를 셌다. 하나 둘, 하나 둘, 그리고 숫자에 맞춰 줄을 잡았다 놨다 했고 발을 떼었다 디뎠다 했다. 귓가에는 계속 왕재수의 목소리만 윙윙거리고 있었다. '아래 보지 마. 줄만 잡고 하나 둘 세면서 내려가. 천천히.'

 

 

그때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려왔다. 뭐라고 하는지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땀방울이 흘러내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는 밧줄에 대고 눈을 비볐다. 쓰라렸다. 눈을 떴다. 순간 그는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줄을 놓칠 뻔 했다. 하지만 놓쳤어도 별다를 건 없었을 것이다. 줄이 끝나 있었다. 겨우 한 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차가운 공포에 휩싸인 채 그는 처음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이 보였다! 가까웠다! 1층 높이였다. 그는 숨을 몰아쉬었고 밧줄을 놓았다. 아래로 뛰어내렸다. 두 발과 무릎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아팠다. 하지만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둘러쌌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튼처럼 그를 휩쌌다. 베르닌은 멍하게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고개를 저었다. 한 손으로 뺨을 찰싹 때려보았다. 그러자 어지러웠고 속이 울렁거렸다. 기침을 해보았다. 아마도 조금 토한 것 같았다. 누군가가 입에 물병을 대 주었다. 물을 마시자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그제야 베르닌은 퍼뜩 놀라 소리쳤다.

 

 

“ 소방차! 소방차 왔어요? ”

 

“ 추돌사고가 나서 막혔다가 이제 뚫렸대요, 금방 도착할 거예요. ”

 

 

중요하지 않았다.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온몸이 칼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왕재수가 생각났다. 왕재수는 거의 다 내려왔어야 했다. 분명히 베르닌이 한 층 내려가면 따라 내려온다고 했었다. 그보다 훨씬 가볍고 민첩한 애니까 이제 내려와야 했다. 그런데...

 

 

베르닌은 두 손으로 가슴을 부여안은 채 고개를 쭉 빼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왕재수는 아직 전망대 창가에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왕재수의 검은 머리칼이 마구 흩날리는 게 보였다. 그는 상체를 쭉 뺀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르닌이 무사히 내려갔는지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베르닌이 막 고함을 지르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창밖으로 나왔다. 밧줄을 잡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베르닌에게 하나 둘 세라고 했던 것과는 천지차이의 몸놀림이었다.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왕재수는 밧줄을 타면서 내려오고 있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밧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파이프를 잡고 있었다. 너무나 불편해 보였다. 대체 왜 저러나 싶어 속이 터질 것 같았는데 그 순간 밧줄이 툭 하고 끊어졌다.

 

 

어느 새 그의 곁에 와 있었던 토냐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아악, 미셴카!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도 너나할 것 없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베르닌은 눈앞이 아찔했다. 끊어진 밧줄이 길고 거대한 채찍처럼 휘리릭 돌더니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행히 왕재수는 밧줄이 끊어진 순간 두 손으로 파이프를 꽉 잡고 매달렸다. 두 발로 파이프와 장식돌을 디뎠다. 베르닌은 바로 옆에 툭 떨어진 밧줄을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들었다. 군데군데 올이 풀리고 해져 있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너무나 무서웠다. 두 손을 부여잡은 채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 괜찮아, 괜찮을 거야. 쟨 운동천재잖아... 문도 잘 따고... 파이프 타고 내려올 수 있어... 할 수 있어... 오 하느님... ”

 

 

그의 곁에는 토냐와 가릭이 바짝 붙어 있었다. 토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흐느껴 울고만 있었다. 차마 위를 올려다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가릭은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숫자를 세는 것 같았다. 아마도... 왕재수가 그에게 해줬던 말처럼. '아래 보지 마. 줄만 잡고 하나 둘 세면서 내려가. 천천히.'  하지만 이제 밧줄은 없었다.

 

 

베르닌은 숨이 막혔지만 그래도 정신없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왕재수는 전혀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파이프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파이프는 밧줄과 달랐다. 미끄러웠다. 왕재수는 장갑도 없었다. 손바닥을 천 조각으로 대충 동여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낮은 철봉을 잡고 움직이는 것처럼 편안하고 침착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몸놀림 하나하나가 정확했다. 베르닌처럼 헛디디거나 우왕좌왕하거나 중간중간 멈추지도 않았다. 그 명료하고 침착한 움직임에 베르닌의 공포가 가라앉았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왕재수는 전망대에서 2층이나 내려왔다. 지상에서 3분의 2 정도 높이였다. 저런 속도라면 금방 내려올 것 같았다.

 

 

왕재수가 창턱에 도달했을 때 갑작스럽게 안쪽에서 펑 소리가 났다. 시커먼 연기와 불꽃이 펑펑 소리를 내더니 거대한 구름기둥처럼 창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해일처럼 왕재수를 덮쳤다. 거대한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충격파를 정면으로 받은 왕재수가 휘청했다. 머리와 몸이 완전히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고 파이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양손 모두.

 

 

안 돼! 미하일! 안 돼!!!!!!!!!!

 

 

베르닌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솟구쳐 일어났다. 시커먼 연기와 세찬 바람 속에서 왕재수가 추락했다. 토냐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모두가 비명을 질렀다. 적어도 5층 높이였다. 그리고...

 

 

왕재수는 공처럼 동그랗게 몸을 만 채 그대로 떨어지더니 높이 쌓여 있던 눈더미 속으로 포탄처럼 처박혔다. 철썩 소리와 함께 눈보라가 거세게 일었다. 정신없이 달려갔던 베르닌은 발을 헛디뎠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을 뒤집어쓴 채 엉덩방아를 찧었다.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 미하일, 미하일... 안 돼... 안 돼... ”

 

 

흐느끼고 울부짖으며 베르닌은 두 손으로 눈을 마구 파냈다. 머릿속이 완전히 하얗게 되었다. 심장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고함치고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눈을 파내는데 옆에서 갑자기 왕재수가 머리를 불쑥 내밀며 부르르 하고 눈을 떨어냈다. 자꾸자꾸 눈을 떨어내더니 기침을 하고는 ‘어휴...’ 하고 탄식을 내뱉으며 다시 눈더미 위에 드러누웠다.

 

 

미처 베르닌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가릭이 달려들었다. 두 팔로 왕재수의 어깨를 껴안고 이마와 얼굴에서 눈을 떨어내며 소리쳤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괜찮으세요? 정신 들어요?

 

“ 아유,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누르지 마, 무거워. ”

 

 

왕재수가 목쉰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한 손으로 눈을 움켜서 정신없이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누군가가 달려와 물병을 건네주었다. 왕재수는 물을 반병쯤 마시고 나서 계속 기침을 했다. 검댕으로 더럽혀진 뺨 위로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눈을 움켜서 얼굴을 닦아내며 왕재수가 투덜댔다.

 

 

“ 아, 진짜 싫어. 시골... 소화기 하나 없고... 시설팀장 가만 안 둘 거야... ”

 

 

그제야 베르닌이 정신을 차렸다. 가릭을 밀쳐내고 왕재수를 부둥켜안았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횡설수설 중얼거렸다.

 

 

“ 너 괜찮아? 괜찮아? 다리... 근육... 부러지고... 높은 데서 떨어져... 장갑도 없고... 줄... 끊어지... ”

 

“ 뭐래는 거야. 나 괜찮아. ”

 

“ 정말? 정말 괜찮은 거야? 저렇게 높은 데서 떨어졌는데... 어떻게... 다리 부러졌을 텐데... ”

 

“ 안 부러졌어. 괜찮아. 눈 위로 떨어졌잖아. 아, 소방차 왔다. 참 빨리도 오네. 에잇, 진짜 시골이라니까. ”

 

 

왕재수가 눈더미에서 기어 나왔다. 일어서려고 하는데 가릭이 그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서 못 일어나게 했다.

 

 

“ 안 돼요, 감독님. 움직이지 마세요. 의사가 봐야 돼요! 금 갔을 수도 있어요, 근육 잘못됐을 수도 있다고요! 가만히 있어요! ”

 

“ 나 괜찮... ”

 

 

그때 소방차가 도착했다. 구급차와 의료요원들도 함께 왔다. 소방대원들이 호스로 물을 뿌리고 불을 끄는 동안 의료요원들이 토냐와 왕재수와 베르닌을 안전한 쪽으로 옮겼다. 토냐는 얌전하게 들것에 누웠지만 왕재수는 매우 싫어하며 자기는 괜찮다고 버티려고 했다. 하지만 가릭이 그를 번쩍 들어서 들것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베르닌에게 고개를 돌렸다.

 

 

“ 당신도 빨리 가서 진찰받아요! ”

 

“ 어, 나... 난 안 다쳤어요... ”

 

“ 뭐가 안 다쳐요! 얼굴이랑 손에 물집 좀 봐요... 흑... ”

 

 

그러더니 갑자기 가릭이 울면서 베르닌을 와락 껴안았다.

 

 

고마워요, 다닐. 고마워요... 토냐 구해줘서 고마워요, 엉엉...

 

“ 저... 내가 구한 거 아니에요... 저 자식이... ”

 

“ 같이 올라갔잖아요... 토냐한테 들었어요... 자재에 깔린 것도 꺼내주고 빠져나올 수 있게 등까지 받쳐줬다고... 어흑... 우리 감독님 감시하는 KGB라고 욕했던 거 미안해요... 당신 아니었으면... 엉엉... ”

 

 

가릭은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훌쩍거리면서 베르닌을 구급차 쪽으로 데리고 갔다. 토냐가 치료를 받고 있었다. 양쪽 다리에 피와 진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겁에 질린 토냐는 계속해서 ‘다리 부러진 거예요? 금 갔어요? 근육 다친 거예요?’ 하고 묻고 있었다. 의료요원은 다리를 만져보면서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 부러졌으면 일어나지도 못해요. 금 갔는지는 엑스레이 찍어봐야 할 것 같아요. 일단 병원으로 가보는 게 좋겠어요. 그래도 이만하기 다행이네요. 목이 많이 쉬었네. 연기 많이 마셨어요? ”

 

“ 네, 조금... 근데 목쉰 건 소리 지르고 울어서 그래요... 너무 무서워서... ”

 

“ 이제 괜찮으니 마음 놔요. ”

 

 

토냐의 다리 상처를 드레싱하고 붕대를 감아준 후 의료요원이 왕재수 쪽으로 갔다. 그 사이에 다른 요원이 베르닌을 진찰했다. 청진기를 대고 폐 소리를 듣고 상의를 벗게 한 후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 연기 마셔서 기관지에 염증이 생겼을 거예요. 병원에 가야 해요. 일단 화상만 먼저... ”

 

 

베르닌은 아픈 것도 모르고 있었다. 거울을 보니 뺨 양쪽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손바닥은 좀 더 심했다. 물집에 진물에 껍질이 다 벗겨져 있었다. 드레싱을 하자 너무나도 쓰라려서 비명이 절로 나왔다. 잠시 후 그와 토냐는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걱정이 된 토냐가 의료요원에게 왜 왕재수는 함께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 구급차가 두 대 왔어요. 다른 차로 가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

 

“ 그 높은 데서 떨어졌는데... ”

 

 

토냐가 부르르 떨었다. 베르닌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 동안 울었다. 자기 때문에 둘 다 죽을 뻔했다고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베르닌은 그녀를 달래주면서도 왕재수에 대한 걱정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 멀쩡할 리가 없어... 아무리 눈 위로 떨어졌다 해도 그렇지... 연기도 엄청 마셨는데... 폐렴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독사과도 먹었고... ’

 

 

그때 구급차가 멈췄다. 스타브로프의 병원은 아니었다. 신시가지까지 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제일 가까운 병원으로 온 것 같았다. 토냐는 들것에 실려 가고 베르닌은 안내해주는 대로 걸어서 병실로 들어갔다.

 

 

 

*   *   *

 

 

 

베르닌은 생각보다 오래 진찰을 받았다. 엑스레이도 찍고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화상 치료를 꼼꼼하게 받았다. 몸 여기저기에 나 있는 타박상 치료도 받았다. 긴장이 풀리자 온몸이 쑤셨다. 의사는 그래도 이만하기 다행이라면서 연기 들이마신 것 때문에 며칠 동안 병원에 다녀야 한다고 했다. 어느 새 뒤따라온 가릭이 자기 옷을 한 뭉치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검댕 투성이에 연기로 푹 절은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가릭은 그보다도 키가 컸기 때문에 소매를 조금 접어야 했다. 가릭은 심지어 그의 패딩 재킷도 주워다 주었다. 그가 밧줄을 타고 내려간 후 왕재수가 창밖으로 집어던졌는지 눈더미 근처에 떨어져 있었다고 했다.

 

 

“ 토냐는 어떻대요? ”

 

“ 다행이에요... 오른쪽 발목에 살짝 금만 갔대요. 토냐가 워낙 날씬해서 완전히 짓눌린 게 아니라 자재 틈새에 끼어 있었나 봐요.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많이 나서 토냐가 너무 놀랐던 거였어요. 조금만 늦었어도... 우린 다리 다치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거라서...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오늘은 입원하기로 했어요. 토냐 어머니도 곧 오실 거예요. ”

 

“ 다행이다... 미하일은요? ”

 

“ 감독님도 큰 이상은 없대요. 당신보다 화상도 덜 입었대요. 근데 연기 마신 것 때문에 아직 치료 중인 것 같아요. ”

 

“ 부러지거나 금 간 데도 없대요? ”

 

“ 네, 괜찮대요. 떨어지느라 타박상만 좀 입었다고... 눈더미 덕분이에요. 정말 하늘이 도왔죠. 볼 때마다 눈 대충 치워놨다고 짜증냈었는데 그게 없었다면... ”

 

 

베르닌은 복도로 나왔다. 의자에 주저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20분쯤 후 왕재수가 나왔다. 역시 가릭이 가져다 준 옷을 입은 건지 자루처럼 헐렁한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다. 코트는 없었다. 창밖으로 던질 거라면 값비싼 자기 코트나 던질 것이지 왜 베르닌 자신의 패딩 재킷만 챙겼는지 불쑥 짜증이 났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왕재수는 시계탑에 들어갈 때 이미 코트를 벗어버렸던 것 같기도 했다. 머리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데다 군데군데 재가 묻어 있고 마구 솟구쳐 있었지만 얼굴은 깨끗하게 닦아낸 후였다. 가릭의 말 대로였다. 뺨과 입술 언저리의 조그만 물집을 제외하면 왕재수의 예쁘장한 얼굴과 하얀 피부는 별로 손상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다행이다 싶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었다. 버럭 소리를 쳤다.

 

 

야! 너 왜 그렇게 늦게 내려왔어! 분명히 나 한 층만 내려가면 따라 내려온다 했잖아! 꾸물거리다가 줄 끊어지고! ”

 

“ 바보, 그 줄 엄청 낡고 해져 있었는데 거기 어떻게 두 명이 매달리냐. 대번에 끊어지지. 그나마 네가 먼저 내려가서 망정이지. ”

 

“ 뭐야? 너... 너 그 줄 끊어질 줄 알고 있었단 말이야? ”

 

“ 당연하잖아. 그러니까 너 먼저 가라고 했지. 너랑 나랑 몸무게 합치면 아무리 적어도 140킬로야. 둘이 매달리는 즉시 밧줄 끊어졌다고. 어제 인부들이 그걸로 시멘트 포대 옮기는 거 봤었어. 40킬로짜리 두 개. 그러니까 잠깐 동안 네 몸무게쯤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봤어. 문제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거니까 중력이 작용해서 무게가 더 쏠린다는 건데... 그래도 어찌어찌 1층까지는 내려가겠더라고. ”

 

 

베르닌은 숨이 턱 막혀왔다. 눈을 깜박였다. 입을 다물었다 벌렸다. 왕재수의 침착한 얼굴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억누르며 물었다.

 

 

“ 너 그래서 내 몸무게 물었던 거야? ”

 

“ 응. 대충 그 정도 될 거 같긴 했어. 내가 하던 일이 뭐야, 파트너 들어 올리고 지탱해주던 거잖아. 무게와 중력에 대해 모르면 안무도 못해. 밧줄이 지탱할 수 있는 하중 계산을... ”

 

“ 이 개자식아! 그럼 너 먼저 내려갔어야지! 네가 나보다 훨씬 가볍잖아! 너 내려가고 나서 내가 따라가는 게 순서잖아! 왜 거꾸로... 내가 먼저 가서 밧줄 끊어진 거잖아! 너는... ”

 

 

왕재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 나라도 마찬가지야. 밧줄이 많이 약했어. 끊어지게 돼 있었어. 내가 먼저 내려갔어도 너 내려올 때 중간에 끊어졌을 거야. 기껏 1~2분 차이였을걸. 어차피 두 명이 내려올 만큼 튼튼하지 않았... ”

 

 

베르닌은 견딜 수가 없었다. 왕재수의 따귀를 철썩 후려치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이 바보 멍청아! 너 먼저 내려갔어야지! 죽고 싶어 안달이 났냐! 목숨이 두 개라도 돼? 너 살 궁리를 해야지 그 상황에서 그런 병신 짓을 하면 어쩌란 말야!

 

 

왕재수가 두 눈이 둥그레졌다. 맞아서 새빨개진 뺨을 한 손으로 꼭 쥔 채 몹시 당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 아니, 그게... 너는 둔하니까... 중간에 줄 끊어지면 넌 떨어졌을 거고... 어차피 나는 파이프 타고 내려올 생각이었어. 여차하면 뛰어내리려고 했었어. 눈더미 봐놨다고... 전에도 그렇게 눈 위로 떨어져서 멀쩡한 적 있... ”

 

 

시끄러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야! 이 얼간이 새끼야! 가만 안 둘 거야! 네까짓 게 뭔데 성인군자 노릇이야! 하던 대로 싸가지 없게 자기 몸 하나만 챙길 것이지 왜 그 상황에서 잘난 척하면서 영웅 노릇이냐고! 이 미친 자식아, 정말 너는! ”

 

“ 어... 다닐, 소리 지르지 마... 제발... ”

 

 

왕재수가 두 손으로 귀를 감싸며 부탁했다. 휘둥그렇게 뜬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하지만 베르닌은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대며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귓가에 대고 망치를 쾅쾅 두들기는 것 같았다. 화가 났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자신조차 알 수가 없었다. 계속 고함을 지르고 왕재수를 다그쳤다. 멱살을 잡고 마구 잡아 흔들었다.

 

 

너 또 그럴 거야? 또 이런 식으로 할 거냐고! 나 정말 너 때문에 미쳐버릴 거 같아! 넌 정말....

 

 

너무 시끄러웠는지 복도로 사람들이 몇 명 달려 나왔다. 가릭이 깜짝 놀라서 베르닌을 왕재수에게서 떼어놓으며 소리쳤다.

 

 

“ 왜 이래요, 다닐! 제발 진정해요! ”

 

“ 시끄러워요! 지금 진정하게 됐냐고! 저 바보 같은 자식이... 가만 안 둘 거야!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

 

 

왕재수가 울먹거렸다.

 

 

“ 왜 화내... 소리 지르는 거 싫어... 화내는 거 싫어... 엉엉... 미워... ”

 

 

그러더니 왕재수가 베르닌을 밀치고 일어났다. 서럽게 울면서 사람들을 헤치고 휘청휘청 걸어서 복도를 빠져나갔다.

 

 

베르닌은 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한동안 씩씩거리며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두르고 욕을 하다가 조금씩 제정신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떠나고 가릭만 남아 있었다. 가릭은 측은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 진정해요, 다닐. ”

 

“ 바보 같은 자식... 끊어질 거 뻔히 알았으면서... 따라 내려올 거라고 거짓말하고... 나 안심시키고는... 내가 뒤에 내려간다니까 자기 위로 떨어질 거라고 겁주고... 거짓말쟁이... 애초부터 다 알았으면서... ”

 

 

베르닌은 몸을 떨었다. 타는 듯한 분노가 누그러들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꼭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울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연기와 불꽃과 온몸을 태워버릴 듯한 열기, 펑펑 터지는 소리, 바람, 밧줄, 통증, 그리고 공포가 되살아났다. 가릭은 어쩔 줄 모르며 서 있다가 베르닌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그리고는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 저 있잖아요... 토냐가 아까 탑에서 혼자 내려왔을 때, 걔도 화냈어요. 얼마나 울고 화냈는지 몰라요. 당신이랑 똑같았어요, 감독님 보고 바보 멍청이라고 그랬어요. 자기 구하러 왔다고... 소리 지르고 울었어요. 그러니까 이해해요. 그래도 그 분한테 화내지 마세요. 지난번에도 톱니장치 고장 났을 때 애들 다칠까봐 막아줬어요. 미샤는 좋은 사람이에요. ”

 

“ 나도, 나도 안다고요! 개자식이... 생긴 대로 재수 없게 놀 것이지 왜 안 어울리게 좋은 놈이냐고요... 어흑... ”

 

 

베르닌은 손등으로 눈물콧물을 문지르며 끅끅 울었다. 가릭은 한동안 기다렸다가 그에게 물을 한 잔 가져다주었다. 물을 마신 후 베르닌은 딸꾹질을 했고 숨을 골랐고 서서히 진정되었다. 잠시 후 그는 가릭에게 고맙다고 한 후 병원을 나섰다.

 

 

 

*    *    *

 

 

 

 

병원 밖으로 나와 보니 레닌 대로 근처였다. 이미 해는 져버린 후였고 도로 위로는 차들이 씽씽 달리고 있었다. 차를 가져오려면 극장으로 다시 가야 했지만 시계탑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극장 쪽에서 연기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불은 다 끈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주변을 헤매 다녔지만 왕재수는 눈에 띄지 않았다.

 

 

‘ 이 바보... 설마 다시 극장에 간 거 아니야? ’

 

 

그는 눈에 띄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서 극장 당직실에 전화를 해보았다. 왕재수는 구급차에 실려 간 후 극장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화재는 다 진압되었다고 했다. 집으로 전화를 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코즐로프에게 전화를 하려다 ‘우리 귀염둥이 아기가 사지에 들어가도록 놔두다니 제정신이냐! 크아아!’ 하고 폭주할 게 뻔했기 때문에 포기했다.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바이올린 깡패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 이 자식... 코트도 버리고... 아까도 스웨터 한 장밖에 안 입고 있었는데... 바람 불고 추운데 어디로 간 거야... ’

 

 

베르닌은 한참 주변을 헤매다가 공원을 가로질러 시느이 교각까지 갔다. 왕재수가 가끔 이용하는 길이었다. 왕재수는 베르닌이 차로 출근시켜주지 않을 때면 보통 배나무 거리의 아파트에서부터 레스나야 거리를 지난 후 시느이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의 극장까지 걸어가곤 했다. 도보로는 한 시간 이상 걸렸지만 운전 실력이 형편없으니 그 쪽이 낫다고 했다.

 

 

 

베르닌은 푸른색으로 칠해진 아담한 시느이 다리로 갔다. 가로등 램프가 줄줄이 켜져 있었다. 다리 위로 올라가 한 바퀴 둘러보다가 그는 건너편 강가에 앉아 있는 왕재수를 발견했다.

 

 

그는 급하게 다리를 건너갔다.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강가로 내려갔다. 왕재수는 판판한 돌멩이 위에 걸터앉아 출렁이는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 위로 뭔가를 집어던지고 있었다. 잘 보니 오리들에게 빵부스러기를 던져주고 있었다. 짙은 색의 청둥오리들이 삼삼오오 유빙을 헤치고 미끄러져 와서 먹이를 받아먹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맥이 다 풀리는 느낌이었다. 얼굴도 보지 않고 그는 혼잣말처럼 투덜댔다.

 

 

“ 동물 싫다더니 추운데 앉아서 뭐하는 거야... ”

 

“ 동물은 싫지만 새는 좋아. ”

 

“ 새도 동물인데! ”

 

“ 아니야, 새는 새야! 새는 날아다니잖아! 특히 오리는 날기도 하고 헤엄도 칠 줄 알고... ”

 

“ 곧 죽어도 자기 말이 맞다고... ”

 

 

베르닌은 가릭이 빌려줬던 패딩 재킷을 벗어서 왕재수의 어깨에 덮어씌웠다. 왕재수는 고개를 들어서 그를 쳐다보았다. 어두웠기 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두 눈은 말라 있었다. 이따금 반짝거렸지만 그건 가로등 불빛과 수면에 비친 달빛 때문이었다. 눈물이 고여 있는 건 아니었다. 베르닌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말했다.

 

 

“ 미안해, 화내서. 너 소리 지르는 거 싫어하는 거 알면서... ”

 

“ 그래, 소리 지르는 거 싫어. 앞으로는 그러지 마. ”

 

“ 구해줘서 고마워. 그 말을 먼저 했어야 됐는데. ”

 

“ 구해준 것까지야. 자기 힘으로 줄 타고 내려갔으면서. 나 없었어도 그렇게 했을 걸. 하긴 애초부터 쫓아온 네가 바보지. ”

 

“ 다시는 그러지 마. 위험한 짓... ”

 

“ 그거 위험한 짓 아니었어. 그 상황에서 제일 합리적인 결정이었다고. ”

 

“ 아니야, 그렇지 않아.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리면 합리적인 결정을 하면 안 돼. 자기가 살아날 짓을 해야 돼. 알아들어? 약속해, 앞으로는 안 그럴 거라고. ”

 

뭘? 불났을 때 뛰어들지 말라고? 토냐가 갇혀서 죽게 놔두라고? ”

 

“ 아니... 토냐 구한 건 맞아. 잘했어. 그거 말고... 아까 나랑 있었을 때... ”

 

“ 토냐는 구해야 되고 너는 놔둬야 해? 그런 게 어디 있어? ”

 

“ 토냐는 약자고 나는 아니니까. ”

 

“ 아니야, 불 속에서는 모두 약자야. ”

 

 

왕재수가 손에 쥐고 있던 흑빵 짜투리를 부숴서 전부 수면 위로 뿌렸다. 오리들이 잽싸게 부스러기를 낚아채는 것을 보면서 왕재수가 덧붙였다.

 

 

“ 그리고 나 목숨 여러 개야. 많이 살아났어. 두 개보다 더 많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

 

“ 뭐가 여러 개야! 네가 고양이냐! ”

 

“ 옛날에도 여러 번 죽을 뻔 했었는데 다 살아났어. 작년에 감옥도 가고... 여기 와서도... 얼음물에 빠지고... 독사과 먹고... 그래도 지금 멀쩡하잖아. 그리고 어릴 때 썰매 타러 갔다가 아까처럼 눈더미로 떨어진 적 있는데 그때도 괜찮았는걸. 진짜야. ”

 

“ 그래도 이제 그 목숨 몇 개 안 남았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절대 위험한 짓 하지 마. 알았지? ”

 

“ 위험하고 안 위험한 걸 어떻게 알아? ”

 

“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위험한 거야. ”

 

“ 칫, 넌 책상물림인데 그걸 어떻게 믿니. ”

 

“ 하여튼 약속해! 안 그러면 이제 저녁밥 안 해 줄 거야. ”

 

“ 알았어. 치사하긴. ”

 

 

왕재수는 패딩을 입었고 지퍼를 올렸다. 그리고는 생각난 듯 베르닌을 훑어보았다.

 

 

“ 넌 안 추워? ”

 

“ 80킬로니까 괜찮아. 너보다 지방질이 많아서. ”

 

“ 하긴. ”

 

 

그래도 바람이 불어오자 왕재수는 베르닌의 곁에 몸을 딱 붙였다. 오랫동안 스웨터 한 장만 걸친 채 앉아 있었을 텐데도 몸이 따뜻했다. 베르닌도 몸이 녹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한동안 그렇게 앉아서 오리들을 구경했다. 어두운 강물 위로 미처 녹지 않은 얼음이 둥둥 떠다녔고 불그스름한 가로등 램프 불빛과 하얀 달빛이 겹쳐져 부드럽게 반짝거렸다. 잠시 후 오리들이 하나둘 날아가기 시작했다. 왕재수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 여기 오리들은 꼭 갈매기처럼 높이 나네. ”

 

“ 레닌그라드 오리들이랑 종류가 좀 틀릴 걸. ”

 

“ 시골이라 그런 거지 뭐. 근데 예쁘다. ”

 

“ 거봐, 시골이라도 좋은 거 있잖아. ”

 

“ 아니야! 누가 좋대? 예쁘다고 한 거지! ”

 

“ 그게 그거 아니야? ”

 

“ 아니야! 좋은 건 좋은 거고 예쁜 건 예쁜 거야! ”

 

“ 그랬다 하자. ”

 

 

마지막 오리가 날아간 후 그들은 일어섰고 레스나야 거리를 지나 배나무 거리의 집으로 돌아갔다. 왕재수는 배가 고프다면서 저녁을 달라고 했다. 연이은 야근으로 부엌에 남아 있는 거라곤 냉동 펠메니와 인스턴트 보르쉬가 전부였지만 베르닌은 그렇게 맛있는 저녁은 난생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았다. 왕재수는 별 말 하지 않았지만 보르쉬 접시에 거의 코를 박고 먹었고 펠메니에도 평소보다 스메타나를 훨씬 많이 찍어서 먹었다. 그리고는 베르닌이 홍차에 설탕을 두 숟가락이나 넣었는데도 투정하지 않고 홀짝 마셨다. 사실은 달착지근한 차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고 베르닌은 내심 생각했지만 물론 입 밖에 내서 말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또 시골이 어떻고 무용수의 식단이 어떻고 근육이 미워지는 게 어떻고 하며 투정을 부릴 테니까. 하긴 그런 투정쯤은 받아줄 수 있는 날이었지만 어쨌든 베르닌은 입을 다물었다.

     

 

 

 

 

 

FIN

- 2015. 5. 3 ~ 5. 12 -

 

  ...

 

 

초반부에 언급되는 가브릴로프 출신 국회의원인 게오르기 벨스키는 본편에도 등장한다. 본편에서도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미샤를 끌어내 가브릴로프로 보내준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왕재수의 말대로 이 사람은 '그' 크레믈린 아저씨는 아니지만, 어쨌든 본편에서도 미샤를 많이 후원해준 사람이다.

'그' 크레믈린 아저씨는 베르닌의 의심대로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를 가리키고, 스페호프가 높은 분들 얘기하면서 언급한 '마로조프' 역시 레닌그라드 출신의 유력한 국회의원으로 미샤의 후원자이다. 이 사람이 화자로 나오는 단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 올린 적이 있다 : http://tveye.tistory.com/2877

 

..

 

24편도 사건들이나 미샤의 성격, 행동 패턴 등 상당히 본편 색채가 짙은데 25편으로 가면 다시 서무 느낌으로 돌아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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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수가 어릴 때 썰매 타다가 눈더미 위로 떨어진 적 있다고 얘기하는 내용은 사실 이전에 쓴 본편 우주의 트로이가 등장하는 장편 초반부에 나온다. 나중에 발췌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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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25편으로 이어진다~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
Posted by liontamer

 

심적으로 많이 힘든 며칠을 보내고 있어서 이번 23편은 주말 지나서 올릴까 하다가, 서무 시리즈는 내 마음에도 위안을 주는 글이라서 평소처럼 주중에 올려본다.

 

22편에서 왕재수는 베르닌이 캐온 약초와 투레츠키가 구해준 파인애플 통조림,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독사과 후유증에서 서서히 회복되었다. 23편은 그 이후, 느닷없이 또 다른 명령을 받은 베르닌과 나름대로의 미션을 지닌 왕재수의 이야기이다.

 

여기 등장하는 스네고로드는 지난 19~20편에서 등장했던 그 폭설 많이 오는 동네이다. (스네그는 눈, 고로드는 도시란 뜻이라 내가 조합해 만든 도시 이름이다)

 

언급되는 스네고로드 '청년단'은 소련 시절 있었던 공산주의 청년단 콤소몰을 가리킨다. 소년단은 피오네르, 청년단은 콤소몰이다. 콤소몰에 해당되는 나이는 보통 26세까지이다.

 

여기 등장하는 데니스와 타마라는 가브릴로프 본편에서도 등장한다. 가브릴로프 발레단에서 가장 인기많은 스타 커플 무용수들이다. (지난번 트로이가 나오는 본편에서 언급된 키로프 발레단 코디네이터 타마라와는 다른 인물이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스페호프는 자매도시의 폭설 복구를 위해 직원 대표를 파견하기로 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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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3

 

 

 

 

서무의 슬픔

-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주말에 개에게 물려 3일 동안 병원 신세를 진 스페호프 국장은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원래 스페호프는 월요일 아침에 제일 저기압이 되곤 했다. 그 이유는 주말 동안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으니 그들을 들들 볶고 훈계를 할 수 없어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월요일 아침에 극에 이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개에게 물린 탓에 월요일에 출근을 못했기 때문에 화요일 아침이 되자 그의 기분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는 9시부터 줄줄이 간부들과 직원들을 호출했다. 사소한 트집을 잡아 엄청난 질책이 이어졌다. 주간 회의에서도 직원들을 계속 박살냈다. 물론 베르닌도 예외는 아니었다. 총괄 서무이자 막내였으므로 언제나 1번 타자였다. 등사기에 튀어 있는 얼룩부터 시작해 빛이 바래고 살짝 비뚤어지게 걸려 있는 부서 명패에 이르기까지 족히 10가지 항목으로 질책을 당했다. 그리고는 간부들의 부서 운영이 엉망인데다 조직의 성과가 곤두박질치고 있다고 분노를 터뜨린 후 모두가 공부하는 조직, 스스로를 연마하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설교가 계속되는 동안 머릿속으로 좀 전에 지적받은 10가지 항목 중 지금 해결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리고 대충 얼버무리고 해결한 것처럼 꾸밀 수 있는 것들을 분류하고 있었다. 옆에서는 발따예프가 초점 없는 눈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수첩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가고 모든 분노를 발산한 후 기분이 좀 나아진 스페호프가 헛기침을 했다.

 

 

“ 좋아. 그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네. 아, 그렇지. 잊을 뻔했군. 얼마 전에 우리 자매도시인 스네고로드에 폭설이 내려서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다들 알고 있겠지? 의회에서 정식으로 피해 복구 봉사단을 파견하기로 했네. 이번 봉사단에는 의회와 우리를 비롯해 공공기관 모두가 참여하네. 의회에서 차출 원칙도 보내왔네. 기관별로 두 명, 그리고 남녀평등을 위해 남자 하나 여자 하나일세. 다닐, 자네는 오전 중 의회에 우리 보안위원회 참가자 명단을 유선과 문서로 동시 통보하도록 하게. ”

 

“ 어, 예. 알겠습니다, 국장님. 그런데 우리 참가자는 누구인가요? ”

 

“ 음, 그렇지. 뭐 어려울 것 있나. 지금 이 자리에서 정하도록 하지. 음, 누구로 할까. ”

 

 

스페호프가 드넓은 회의실에 앉아 있는 수많은 직원들의 얼굴을 한 바퀴 훑었다. 직원들은 모두들 고개를 푹 숙이고 ‘제발 나만은 안 돼...’ 하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번쩍 손을 들었다.

 

 

“ 국장님, 건의사항이 있습니다. ”

 

“ 건의사항이라니? ”

 

 

웬 건방진 놈이 국장의 의사결정을 방해하는가 하는 표정으로 스페호프가 따가운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손을 든 것이 평소 총애하던 대외협력부의 세묜 모브린이라는 것을 알자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 아, 세묜. 그래, 말해보게. ”

 

“ 집단농장 자원봉사는 저도 지난번에 가봐서 아는데 힘을 써야 하는 일이 많아서 젊은이들이 필요합니다. 특히 이번엔 폭설까지 왔다고 하니 더욱 그렇죠. 그러니 연차가 가장 젊은 직원을 파견하는 것이 어떨지 국장님의 의견을 여쭙고자 합니다.

 

 

베르닌은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예전부터 모브린의 매끄러운 처세술이 부럽기도 했지만 어딘지 얄미운 선배라고 생각해왔는데 지난번에 알렉산드라의 일이 있고부터는 더욱 보기 싫었다. 저 짧은 몇 마디를 통해 모브린은 자신이 이미 자원봉사에 다녀왔으니 이번에는 제외되어야 한다는 점과 막내 직원들을 파견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옳기 때문에 자신은 더더욱 이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동시에 어필하고 있었다! 그 인간이 자기 살 길만 개척했다면 그건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그 건의사항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스페호프가 껄껄 웃으며 손바닥을 탁 쳤다.

 

 

“ 허허, 세묜. 자네 어떻게 내 생각을 그렇게 딱 짚었나. 나도 동감일세. 이런 건 당연히 젊은 직원들이 가야지. 막내들이 가는 게 맞네. 그래야 가서 힘도 쓰고 게으름도 안 부리고 다른 기관들 보기에도 체면도 서지. 가뜩이나 우리 KGB는 이름값이 있으니 더더욱 젊은 직원이 가야 하네. 좋아, 우리 막내가 누구더라... 그렇지. 남자는 다닐. 여자는... 으음... ”

 

 

여직원에게 별 관심이 없는 스페호프는 한참 기억을 더듬었다. 모브린이 친절하게 그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 등록부서의 리자베타 칸페트나야입니다. ”

 

“ 그런가? 등록부서에는 여직원이 많아 헷갈리는군. 맞나? ”

 

 

등록부장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예, 칸페트나야가 맞습니다. 이제 스물한 살인가 그렇습니다. ”

 

“ 좋아, 됐군. 서무는 명단을 적게. 우리 봉사요원은 감시분석부의 다닐 베르닌, 그리고 등록부서의 리자베타 칸페트나야일세. 알다시피 스네고로드는 꽤 멀지. 삼림국에서 버스를 준비했다는군. 출발은 내일 밤에 한다고 하네. 그러면 목요일 오전에 도착하겠지. 이틀 동안 봉사를 하고 토요일 아침에 그곳에서 나오는 일정일세. 자세한 건 의회 쪽 담당자에게 문의하도록. 이상! ”

 

 

베르닌은 체념한 채 수첩을 주섬주섬 정리해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리자가 울상이 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 다냐, 이게 웬 날벼락이에요. 세묜 선배는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우리랑 무슨 원한을 졌다고... 스네고로드면 버스로 열다섯 시간이에요! 기차로 가는 것도 아니고... 맙소사, 게다가 토요일에 나오면 여기 도착하면 일요일이 다 될 텐데... 주말도 반납하라는 거잖아요. 막내라고 항상 궂은 일만 도맡아 하는데 봉사요원으로까지 차출되다니 정말 너무해요. ”

 

“ 그러게요. 나야 뭐 세묜이 추천하지 않았더라도 국장이 분명 가라고 했을 테지만 당신은 정말 운이 없네요. 안 갈 수도 없고... 일단 따뜻한 옷을 꼭 챙기세요. 거기 엄청 춥대요. ”

 

“ 휴... 일도 힘들어죽겠는데 집단농장 봉사까지 가라니. 그런 건 학생 때로 족한 줄 알았는데. 토요일엔 친구들이랑 영화도 보고 놀려고 했는데 완전히 망했네요. ”

 

 

리자는 한숨을 폭 쉬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베르닌도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스네고로드라면 스페호프가 왕재수의 공연을 망치기 위해 무용수들을 보내서 폭설에 갇히게 만들었던 그 동네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기 싫었다.

 

 

어쨌든 그는 퇴근 직전에 리자와 함께 준비물 리스트를 체크했고 따뜻한 옷 챙겨 입으라고 다시 한 번 신신당부를 했다.

 

 

“ 무조건 패딩 입어야 돼요. 모자도 챙겨야 하고. 코트는 안돼요! ”

 

어머, 당연하죠. 패딩 입어야죠, 거기 추운데. 당연한 소릴 왜 자꾸 해요? ”

 

어, 그게... 왕재수, 아니 미샤는 귀가 닳도록 얘기해도 패딩을 안 입어서. ”

 

“ 어휴, 당신은 맨날 그 꽃돌이 감독님 얘기만 하고. 하여튼 내일 봐요. ”

 

 

그는 정시에 퇴근했다. 다음날 밤에 출장을 가야 하니 몰아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긴 했지만 의욕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왕재수를 데리러 가야 했다. 독사과를 먹고 심하게 앓았던 왕재수는 일요일 밤에 퇴원했다. 다행히 월요일은 극장 휴일이라 집에서 쉬었지만 화요일이 되자 베르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근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 너 왜 그래, 이번 주는 무대 점검 때문에 주말까지 공연 없잖아. 이 기회에 금요일까지 그냥 쉬어. ”

 

“ 안 돼. 지난 주 내내 병원에 있느라 자리를 너무 비웠어. 애들 신작 연습도 시켜야 하고... ”

 

 

물론 베르닌은 왕재수가 고집을 꺾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딱 한 가지만 약속하게 했다.

 

 

“ 6시 전에는 무조건 집에 가야 돼! 극장에서 자는 것도 안 되고 늦게까지 남아서 일하는 것도 절대 안 돼! 내가 저녁에 데리러 갈 거야! ”

 

“ 아니, 그게... ”

 

뱀 껍질!

 

“ 악마. ”

 

 

그래서 그는 정시에 퇴근해 곧장 극장으로 갔다. 왕재수는 자기 사무실에 있었다. 티무르 이즈마일로프와 뭔가 열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즈마일로프는 나이가 많았지만 왕재수에게는 감독님이라고 존대를 하며 아주 깍듯하게 대했다.

 

그는 돈키호테 연기 지도를 해준 이즈마일로프가 무척 반가웠지만 물론 노교사는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아닌 다닐 베르닌을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들의 감독님을 괴롭히는 KGB 감시요원이라면서 흘겨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왕재수의 손을 꼭 잡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 거긴 제가 갔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고집을 부리며 꼭 가겠다고 하시니. ”

 

“ 지난번에 애들만 보내서 그 난리가 났는데 이번에도 또 그럴 수는 없어요. 그리고 거기 괜찮은 애가 하나 있다고 했는데 농장에서 일하느라 여기까지 와서 오디션을 볼 여력이 없대요. 그러니까 내가 가서 볼 거예요. 괜찮으면 데리고 와야지. ”

 

“ 지난주 내내 입원해 계셨잖아요. 이렇게 야위었는데 그 먼 데까지 어떻게 가시려고 그럽니까. 게다가 그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골수 공산주의자들인지 아세요? 성정도 거칠고 조금만 이념적으로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시비를 거는데 공연히 꼬투리라도 잡히면... ”

 

“ 그러니까 내가 반동분자라서 꼬투리 잡힐 거란 얘기에요? ”

 

“ 아니, 그런 뜻은 아니지만 스페호프가 그쪽 관료들하고 결탁해 있으니 또 해코지 음모라도 꾸미면... ”

 

“ 아 지겨워, 그런 거 하나하나 따지면 일을 어떻게 해요! 이건 감독의 결정이에요! 난 내일 애들이랑 갈 거고 일요일에 돌아올 거니까 그동안 남은 애들 연습 부탁해요. 토요일 백조의 호수는 빅토르 대신 막심 올리기로 한 거 알죠? 레나랑 호흡 잘 좀 봐주세요. 그럼 난 이제 들어가겠어요. 내일 가기 전에 극장 들를 테니까 그때 얘기 더 해요. ”

 

 

이즈마일로프는 혀를 차며 감독실을 나갔다. 베르닌을 노려보면서 ‘더러운 KGB 앞잡이’ 하고 혼잣말로 욕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지만 곧장 왕재수를 붙들었다.

 

 

“ 야,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너 내일 어디 가는데! ”

 

“ 어, 들었구나. 우리 애들 데리고 위문 공연 가기로 했어. ”

 

“ 어디에! ”

 

“ 스네고로드. ”

 

뭐야? 네가 왜! 왜 가는데! ”

 

“ 어휴, 방금 전까지 티무르 보리소비치랑 했던 얘기 되풀이해야 되냐. 거기 그때 폭설 와서 우리 애들 갇혀 있었잖아. 근데 공연 반응은 의외로 좋았대. 그래서 그쪽에서 우리 애들 한번만 더 와달라고 사정하더라고. 그리고 타마라가 거기 농장에서 춤추는 여자애를 하나 봤는데 진짜 원석이더래. 그래서 우리 극장으로 데려왔으면 좋겠다면서 내가 한번 꼭 봤으면 하더라고. ”

 

“ 그럼 걜 여기로 부르면 되지 왜 네가 가! ”

 

“ 아유, 아까 얘기한 거 못 들었니? 걔가 농장 노동자라잖아. 여기랑은 워낙 머니까 휴가를 내서 나올 수가 없대. 게다가 지금 거기 폭설 복구 때문에 휴가는 엄두도 못 내고 주말에도 일해야 한다잖아. 몇 번이나 말하니, 우리 발레단 애들 열심히는 하지만 진짜 재능 있는 애들은 거의 없어. 타고난 애가 있으면 무조건 끌어들여야 한단 말이야. 그걸 누가 하겠니! 내가 해야지. 그런 거 볼 줄 아는 사람이 여기 또 있을 것 같아? ”

 

“ 그래, 너 잘났다. 너 천재인 건 아는데... 너 일요일까지 누워 있었잖아! 지금 출근하는 것도 무리하는 건데 어떻게 거기까지 가냐! ”

 

“ 버스로 갈 건데. 무슨 자원봉사 때문에 버스 준비한대. 그래서 우리 애들이랑 내 자리도 준비해 달라고 했어. 자리 빼준대. ”

 

“ 내일 밤에 출발하는 그 버스 말야? 심지어 기차도 아니고 버스로 간다고? 너 정말 정신이 있는 거야? 나도 그거 타고 간다고! 열다섯 시간 걸려! ”

 

“ 어, 너도 가? 잘됐다! 덜 심심하겠다. ”

 

잘되고 뭐고, 넌 못 가! 의사 선생님한테 이를 거야!

 

네가 뭔데 못 가게 하는 거야! 이건 예술감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가뜩이나 시골에 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엉망인 극장 조금이라도 괜찮게 바꾸는 것뿐인데. 그것조차 못하게 하면 난 어떻게 살라는 거야! 정말 너무해. 숨 막혀서 죽을 것 같단 말이야! ”

 

 

왕재수가 갑자기 왈칵 감정을 쏟아내더니 그런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지 컵을 집어 물을 두어 모금 꿀꺽꿀꺽 마셨다. 베르닌은 컵을 뺏었다.

 

 

“ 야, 독사과 때문에 그렇게 고생해놓고 물도 막 마시고... ”

 

“ 그 놈 이제 그런 짓 안 해. 그런 놈들은 한번 써먹은 짓은 의심 살까봐 안 하거든. 해도 다른 식으로 하지. 그러니까 이제 독은 안 탈 거야. ”

 

“ 너 정말 거기 가서 공연 지휘만 하고 그 여자애 오디션만 볼 거지? ”

 

“ 그럼 내가 다른 거 할 게 있냐? 설마 나보고 눈 치우라고? 그런 짓 절대 안 해! ”

 

“ 하긴, 시켜도 안 하겠지. 일단 집에 가자. 나도 그거 봉사요원으로 차출됐어. 짜증났었는데 지금 보니 차라리 다행이다. 어린애 물가에 내보내는 것도 아니고. 에휴. ”

 

“ 쳇. 난 내 앞가림 잘 하거든! 너나 잘 해! 근데 오늘 저녁은 뭐야? ”

 

“ 뭐 먹고 싶은데? 너 거기 가면 농장 구내식당에서 주는 거 먹어야 되니까 오늘 맛있는 거 먹자. 보랴네 식당에 갈까? ”

 

“ 점심때 갔었어. 보랴가 그때 그 닭고기 수프 비슷한 거 만들어줬어. 저녁은 집에 가서 먹을래. ”

 

“ 그럼 대게 쪄줄게. 생선가게 특별 이용권 물고기 말고 게도 된다 해서 어제 한 마리 바꿔왔거든. 근데 대게는 비싼 거라고 두 마리로 치더라. ”

 

우와, 맛있겠다! 아이 좋아!

 

 

그래서 베르닌은 왕재수와 함께 집에 갔다. 대게를 쪄서 가위로 껍데기를 자르고 살을 잘 발라냈다. 왕재수는 식탁 앞에 앉아 턱을 괸 채 그가 게살을 발라내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긴 왕재수는 그가 먹을 것을 줄 때는 항상 그랬다.

 

 

“ 그거 손 많이 가는구나. ”

 

“ 손에 들고 뜯어먹으면 편한데. 네가 그런 거 안 좋아하잖아. ”

 

“ 국물 흐르고 손에 냄새 배니까. ”

 

“ 내 손에 냄새 배는 건 상관없냐? ”

 

“ 응, 글쎄. 손 깨끗이 씻어라. 그 냄새 오래 가더라. ”

 

 

발라낸 게살을 접시에 담아주자 왕재수는 레몬즙을 뿌려서 맛있게 먹었다. 베르닌도 오랜만에 비싼 게살을 먹자 너무 맛있어서 정신없이 흡입했다. 왕재수가 자기 접시에서 게살을 크게 덜어서 베르닌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 야, 너 다 먹어! 왜 나한테 더는 거야! ”

 

넌 조금밖에 안 담았잖아. 그것도 다 짜투리살. 난 이제 배부르단 말이야. ”

 

“ 내 것도 많았어. 내가 빨리 먹어서 그런 거야. 너 이거 다 먹어. 그래야 몸도 나아지지. ”

 

“ 나 이제 괜찮은데. 파인애플 먹고 다 나았어. ”

 

 

왕재수는 결국 그에게 게살을 덜어주었다. 식사를 마친 후 베르닌은 왕재수의 집으로 따라가서 짐 챙기는 것을 옆에서 확인했다.

 

 

패딩 입고 부츠 신고 모자 쓰고 가야 돼!

 

“ 하지만 난 감독인데! 무대 위에 올라가서 소개도 해야 되고... ”

 

“ 양복 한 벌, 구두 한 켤레만 챙기면 되잖아. 입고 가는 건 패딩! ”

 

“ 아... 정말 싫다. 이제 3월인데 너무하잖아. ”

 

“ 거긴 추워. 여기보다 훨씬 춥단 말이야. 또 눈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

 

 

마침내 베르닌은 목적을 달성했고 왕재수는 매우 부루퉁해져서 가방을 현관으로 걷어찼다. 베르닌은 개의치 않았다. 왕재수에게 패딩 입히기라는 힘든 과제를 성공했으므로 뿌듯했다. 봉사요원으로 차출된 게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랬으면 왕재수를 보내놓고 계속 걱정을 할 판이었으니까.

 

 

 

*    *    *

 

 

 

 

수요일 밤에 그들은 버스를 타고 스네고로드로 출발했다. 산을 네 개나 넘어야 하는 여정이었다. 열다섯 시간이나 걸리니 밤에 출발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베르닌은 리자와 함께 앞자리에 앉았다. 왕재수는 무용수들과 함께 뒤에 앉아 있었는데 다른 공공기관에서 차출되어 온 젊은 여직원들이 넋을 빼고 그쪽만 쳐다보며 까르르 웃고 속닥거렸다. 리자도 큰 관심을 보였다.

 

 

“ 어머, 꽃돌이 감독님도 같이 가네. 버스 같은 거 안 탈 줄 알았는데. ”

 

“ 그러게요. 기차 타고 갈 것이지... ”

 

“ 아, 다냐. 그때 폭설 때문에 철로 휘어지고 망가져서 아직 공사 중이잖아요. 몰랐어요? 그래서 우리도 버스로 가잖아요. ”

 

“ 그렇구나. ”

 

 

리자는 주머니에서 사탕 봉지를 꺼냈다. 부스럭거리면서 껍데기를 까더니 사탕 한 알을 베르닌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베르닌은 당황했지만 리자는 방긋 웃었다.

 

 

“ 이거 딸기 사탕인데 맛있어요. 멀미 방지용이에요. ”

 

“ 예, 고마워요. 난 멀미는 안 하는데. ”

 

“ 다냐, 이럴 땐 ‘고마워요’에서 끝내는 거예요! ”

 

“ 어, 네. ”

 

 

리자는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계속 깔깔 웃었다. 베르닌도 그녀의 명랑한 기분에 감염되어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눴다. 힐끗 돌아보니 왕재수는 주위에 앉아 있는 무용수들과 뭔가 진지하게 토론을 하고 있었다.

 

 

‘ 저 녀석 장시간 버스 타는 거 힘들 텐데. 빨리 휴게소가 나왔으면... ’

 

 

세 시간 쯤 후 버스가 휴게소에 도착했다. 왕재수는 뒤에 앉아 있었는데도 차가 멈추자 제일 먼저 내렸다.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리자가 버스 계단을 내려오는 데 손을 잡아 주었다.

 

 

“ 조심해요, 바닥이 얼어서 미끄러워요. ”

 

“ 어머... 고마워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

 

“ 그냥 미샤라고 부르세요. ”

 

 

리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왕재수는 리자의 손을 잡아서 얼음이 없는 쪽으로 안내해 주었다. 베르닌은 그걸 보면서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미끄러져 넘어질 뻔 했다. 왕재수가 혀를 찼다.

 

 

“ 바닥 얼었다고 했잖아. ”

 

“ 그러게. 너 괜찮아? ”

 

“ 그럼 괜찮지 뭐 어때서. 근데 답답하긴 해. ”

 

“ 우리 뭐 좀 먹고 따뜻한 거 마시자. 20분쯤 쉰대. ”

 

“ 난 그냥 바람 쐬면서 좀 걸을래. 너희끼리 먹어. ”

 

“ 미샤, 우리 저기 가서 감자튀김 먹어요. 여기 휴게소 감자튀김이랑 코코아 맛있어요. ”

 

 

왕재수는 ‘지방질과 당분이라니!’ 하고 불을 뿜기는커녕 리자에게 아주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 그래요. 그럼 같이 가요. ”

 

 

베르닌은 여전히 왕재수가 여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할 때마다 닭살이 돋았고 ‘제발 평소대로 해!’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들은 휴게소 카페에 갔다. 왕재수는 리자에게 감자튀김과 코코아를 사주었다. 리자는 황홀해했다.

 

 

“ 어머, 왜 저한테 감자랑 코코아를 사주시는 거예요? 저도 돈 있는데. ”

 

“ 지난번에 강에 빠졌을 때 도와주셔서요. 다닐한테서 들었어요. ”

 

“ 아이 참, 그거야 당연한 일인데. 근데 당신은 안 드세요? 이거 엄청 많은데. 나눠먹어요. ”

 

“ 전 밤에는 잘 안 먹어요. 다닐이 좋아하니까 같이 드세요. ”

 

 

베르닌은 감자튀김을 한 움큼 집어서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 야, 조금만 먹어봐. 진짜 맛있어. ”

 

“ 싫어. 기름기... ”

 

“ 먹어야 멀미 안 하고 계속 타고 가지! ”

 

“ 에이... ”

 

 

왕재수는 툴툴대면서도 감자튀김을 몇 개 집어서 먹었다. 베르닌이 주는 대로 코코아도 조금 마셨다. 그리고는 바람 쐰다고 밖으로 나갔다. 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꽃돌이 감독님은 의외로 당신 말을 잘 듣네요. 신기해라. ”

 

“ 뭐가 신기해요, 내가 맞는 말을 하니까 당연히 들어야지! ”

 

“ 국장이 맨날 반동분자니 불여우니 건방지고 싸가지 없다느니 해서 저 사람 얼굴만 잘나고 성격은 나쁜 줄 알았는데 매너도 좋고 싹싹하네요. 멋있다... 당신 정말 그런 사이 아니에요? ”

 

아니에요!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하는 사이 절대 아니에요! 전에 얘기했잖아요. 난 진짜 그런 취향 아니라고요! 전부 오해...

 

“ 알았어요, 흥분하지 말아요. 하긴 억울하긴 하겠네요. ”

 

 

리자는 쿡쿡 웃으며 남은 감자튀김을 먹고 코코아를 홀짝 마셨다. 베르닌은 흥분한 게 좀 멋쩍어서 컵과 접시를 치우고 리자와 함께 버스에 탔다. 왕재수는 제일 늦게 탔다. 타자마자 창가에 머리를 대고 자기 시작했다. 옆에 앉아 있던 토냐가 살며시 일어나 맨 뒤에 있는 빈자리로 옮겼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라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 돈키호테 때부터 토냐는 왕재수에게 완전히 반해 있는 게 분명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렐랴부터 시작해 왕재수에게 반하는 여자들이 불쌍했다. 리자도 자꾸 왕재수 쪽을 훔쳐보았기 때문에 마음이 쓰였지만 그렇다고 ‘쟨 아저씨들을 좋아해요’ 라고 말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기사는 등을 모두 껐다. 여기저기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닌은 원래 어디에서나 잘 자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금방 졸음이 쏟아졌다. 리자와 말동무를 해줘야 할 텐데 하고 꾹 참으려고 했지만 옆을 보니 리자도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도 단잠에 빠졌다.

 

 

한참 자고 일어나니 이미 마지막 산을 넘고 있었다. 리자가 그에게 귤을 까주면서 방긋 웃었다.

 

 

“ 진짜 잘 자네요, 다냐. 휴게소도 세 번이나 갔는데 한 번도 안 깨고. ”

 

“ 어, 그러게요. 잠이 모자랐나 봐요. 당신은 좀 잤어요? ”

 

“ 휴게소 내릴 때만 깨고 계속 잤어요. 좀 전에 마지막 휴게소였거든요. 극장 사람들이랑 같이 아침 먹었어요. 토냐 진짜 예쁘더라고요. 근데 그 언닌 진짜 조금밖에 안 먹어요. 흑빵에 버터도 안 바르고 토마토랑 우유만 곁들여 먹더라고요. 발레리나 몸무게 유지하려면 힘들겠어요. ”

 

“ 왕재수, 아니 미샤는요? 걔 뭐 먹었어요? ”

 

“ 어, 미샤요? 글쎄요... 모르겠네. 먹긴 먹었나? 차는 마시는 것 같던데. ”

 

“ 어휴, 분명히 아침 잘 챙겨먹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잠깐만요. ”

 

 

베르닌은 뒷좌석 쪽으로 갔다. 왕재수는 멀미도 안 나는지 조그만 책을 읽고 있었다. 베르닌을 보더니 호주머니에서 초코바를 꺼내 주었다. 베르닌은 엉겁결에 받았다.

 

 

“ 이게 뭐야? ”

 

너 단 거 좋아하잖아. 아까 휴게소에서 샀어. 자느라 아침도 안 먹었잖아. ”

 

“ 어, 그래. 고마워. 근데 너 아침 왜 안 먹었어! 리자가 그러는데 차 밖에 안 마셨다고! “

 

“ 자기도 안 먹어놓고. ”

 

“ 난 자느라 놓친 거지만 넌 안 먹은 거잖아! ”

 

“ 버스 타고 내내 앉아서 잠만 자고 배가 안 고팠는걸. 그리고 먹었어. 토냐가 토마토 한 개 줬어. ”

 

너 스네고로드 가서 삼시세끼 꼬박꼬박 안 먹으면 뱀 잔뜩 잡아와서 목에 걸어줄 거야. 거기도 숲이랑 강 있어서 뱀 많아. 알아서 해.

 

“ 먹으면 되잖아. 어휴, 시어머니. ”

 

 

목적을 달성한 후 베르닌은 자리로 돌아왔다. 초코바를 쪼개서 리자에게 반 토막을 내밀었다.

 

 

“ 난 아까 먹었어요. 아까 미샤가 여러 개 사서 무용수들이랑 나한테 한 개씩 나눠줬어요. 당신 건 따로 챙기더라고요. 의외로 세심하다니까요. ”

 

“ 그러네. 자기밖에 모르는 놈인데. ”

 

“ 아니던데. 토냐 언니가 그러는데 미샤가 무용수들 엄청 챙겨준다던데요. 자기가 선물 받은 초콜릿이랑 사탕도 연습실에 전부 갖다놓는대요. 무용수들은 연습하느라 끼니도 잘 거르고 또 중간중간에 기력도 떨어지니까 초콜릿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

 

 

베르닌은 자기가 아는 왕재수와 토냐가 아는 왕재수는 서로 다른 인간인가 싶었다. 그러나 돈키호테 때문에 극장에서 보냈던 며칠을 떠올려보니 감독으로서의 왕재수는 매일 음식 투정이나 하고 시골 타령을 하는 왕재수와는 좀 다른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피곤했다! 감독 노릇하는 왕재수는 너무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아서 문제였고 평소의 왕재수는 너무 그를 가정부 취급해서 문제였다!

 

 

 

*   *   *

 

 

 

 

아침에 스네고로드에 도착한 후 봉사단은 청년회관으로 끌려갔다. 차 한 잔과 비스킷 한 개를 얻어먹은 후 곧장 여러 개의 조로 찢어져서 폭설 복구 작업에 투입되었다. 베르닌은 키 크고 체격이 좋다는 이유로 철로 복구 조에 배정되었다. 도서관 쪽에 배정된 리자가 걱정을 했다.

 

 

“ 다냐, 제일 힘든 조로 갔네요. 눈만 치우는 것도 아니고... 조심조심해서 해요. 또 고지식하게 있는 힘 없는 힘 다 쓰지 말고. ”

 

“ 그래도 눈 다 치우고 철로 고치면 집에 갈 때는 기차 타고 갈 수도 있잖아요. ”

 

“ 어휴, 벌써 저 의욕에 가득 찬 것 좀 봐... 살살 하란 말이에요. 그깟 이틀 일해서 어떻게 기차가 다녀요. 전문가도 아닌데. ”

 

“ 그런가... 하여튼 당신도 조심해서 해요. 책 옮기는 거 무거울 텐데. ”

 

“ 책은 남자들이 옮긴대요. 난 페인트 벗겨진 거 칠하는 거랑 화단 정리하는 쪽이에요. 점심 때 식당에서 봐요. ”

 

 

리자가 같은 조원들과 함께 도서관 쪽으로 걸어간 후 베르닌은 철로 쪽으로 이동하기 위해 트럭을 탔다. 자리가 없어서 지붕도 없는 짐칸에 타야 했다. 이미 덩치 좋은 남자들 여럿이 올라타 있었다. 동네 남자들도 있고 가브릴로프 봉사단원들도 있었다. 다른 조원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트럭 곁으로 무용수들과 왕재수가 지나갔다. 저녁 공연 연습을 하러 가는 것 같았다. 동네 남자들이 토냐와 타마라 등 예쁜 발레리나들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때 왕재수가 베르닌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 너 어디 가? ”

 

“ 철로 복구하러. 눈도 치우고. ”

 

“ 그럼 집에 갈 때는 기차 타고 갈 수 있는 거야? ”

 

“ 어, 글쎄... 해봐야 알아. ”

 

“ 알았어. ”

 

 

그러더니 왕재수가 트럭 옆으로 오더니 가방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서 베르닌에게 건네주었다.

 

 

“ 이게 뭐야? ”

 

“ 너한테 맞을지는 잘 모르겠다. 작으면 다리 좀 휘어서 쓰렴. ”

 

 

왕재수는 베르닌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홱 몸을 돌려 무용수들을 다시 따라잡았다. 베르닌은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날렵하고 근사한 디자인의 선글라스가 들어 있었다. 왕재수가 가끔 끼던 것 같았다. 분명히 이것도 무슨 아르마나인지 에르미인지 프로도인지 하는 비싼 것이 분명했다.

 

 

‘ 엥, 이걸 왜 주고 가지? 저 녀석 얼굴 조막만해서 이거 진짜 나한텐 맞지도 않을 텐데. ’

 

잠시 후 철로 복구 현장에 와서 눈을 치우기 시작했을 때 베르닌은 왕재수의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그 날은 춥긴 했지만 날씨가 맑았고 햇살이 굉장히 밝았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새하얀 눈에 햇살이 반사되어 굉장히 눈이 부시고 따가웠다. 그는 선글라스를 껴보았다. 작아서 다리를 휘어야 했지만 그럭저럭 낄 수 있었다. 한결 나았다. 동네에서 온 남자들도 삼삼오오 선글라스를 끼기 시작했다. 가브릴로프에서 차출된 운 나쁜 봉사요원들만 한숨을 쉬었다.

 

 

“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선글라스 가져올걸. 왜 이런 얘긴 안 해 준거야. 다냐, 자넨 진짜 준비성이 좋군. 역시 KGB라 달라. 부럽네. ”

 

 

선글라스는 정말 도움이 되었다. 맨눈으로 일하던 사람들은 곧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보다 못한 주민 하나가 청년회관으로 가서 챙 있는 모자들을 여러 개 가져와 나눠주었다. 베르닌은 선글라스 덕에 눈은 아프지 않았지만 얼굴도 따끔거렸고 눈을 치우고 유실된 자갈들을 레일 사이사이에 다시 깔아놓는 작업 때문에 허리가 휠 것 같았다. 봉사단원들은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망가진 레일 연결은 불가능했으므로 오로지 힘을 쓰는 단순작업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르닌은 다시 군대에 온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 철로가 빨리 복구돼야 이 동네 사람들도 기차를 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일했다.

 

 

금세 시간이 흘러 점심때가 되었다. 청년회관으로 돌아가 점심을 먹고 조금이나마 쉬려나 했던 봉사단원들의 기대는 스네고로드 공산청년단 대표인 아르투르가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기 시작했을 때 산산조각 났다. 샌드위치 한 개와 사과 한 알, 주스 한 병씩을 나눠주고는 딱 30분의 휴식 시간만 주는 거였다. 의회에서 온 바실리가 참을 수 없는 듯 투덜거렸다.

 

 

“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는데 샌드위치 한 조각 주면서 30분만 쉬라니,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야? ”

 

“ 우리도 한 시간쯤 쉬면서 맛있는 거 먹었으면 좋겠지만 해가 있을 때밖에 일을 못하니까 어쩔 수 없어요. 5시에 철수할 거니까 그때까지만 힘 좀 내라고요. 당과 인민을 위해 이 정도도 못합니까?

 

 

청년단 대표인 아르투르는 근육이 울룩불룩한 상남자인데다 이 마을 사람들답게 골수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에 바실리는 곧 입을 다물었다. 베르닌은 묵묵히 샌드위치를 먹었다. 힘든 일을 하고 나서 그런지 흑빵 사이에 치즈와 햄, 양배추만 들어 있는데도 꿀맛이었다. 사과도 단숨에 해치우고 주스도 꿀꺽 마셨다. 아르투르가 옆으로 오더니 그를 칭찬했다.

 

 

“ 다른 사람들은 요령 피우면서 중간중간 쉬던데 넌 하나도 안 쉬고 우리처럼 열심히 하더라. 선글라스까지 챙겨 오고 정말 제대로 일할 준비가 됐더라고. 어느 기관에서 왔어? ”

 

“ 어, 난 보안위원회. ”

 

“ 역시. KGB는 달라. 나도 농장 일만 아니었으면 너네 가브릴로프로 가서 KGB 지원하고 싶었는데 여기서 내가 빠지면 일이 안 돌아가니 포기했지. 전에 너네 국장인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도 본 적 있는데 진짜 사나이 중의 사나이더라고. 이념적으로도 완벽하고. 요즘은 너도 알다시피 워낙 해이해져서 대놓고 반동 짓하는 놈들도 많잖아. 당보다 개인을 앞세우고. 그런데 너네 국장은 진짜 멋지더라고. 완전 내 롤 모델이야. 넌 좋겠다, 그렇게 훌륭한 분을 모시고 일해서. ”

 

“ 어... 우리 국장 말이야? 어, 그래... 네 롤 모델이구나. 으응... ”

 

“ 우리 친하게 지내자. 너네랑 우린 자매 도시잖아. 여름엔 여기도 되게 좋거든, 휴가 받으면 놀러와. 우리 집에서 재워줄게. 너 애인 있니? 우리 농장에 예쁜 여자들 진짜 많아. 새침 떠는 도시 여자들이랑 완전 달라. 얼굴도 예쁘고 일도 얼마나 잘하는데. 이념도 반듯해서 당원도 많아. 우린 원래 외지에서 온 남자들이 우리 여자들한테 집적대는 거 싫어하지만 넌 KGB에 엄청 성실해보이니까 괜찮아. ”

 

“ 어, 날 그렇게 신뢰해주니 고맙다... ”

 

“ 있다가 청년회관에서 너네 환영 겸 같이 저녁 먹고 공연 보고 파티도 하고 그럴 거야. 너 우리 테이블에 앉아. 너처럼 성실하고 또 KGB이기까지 한 애는 당연히 상석에 앉아야지. 예쁜 애들도 소개시켜줄게. 그럼 이제 일하자. 있다 봐. ”

 

 

베르닌은 좀 얼떨떨했다. 친절하게 대해주니 좋기는 한데 스페호프를 롤 모델로 삼고 있다니 어딘지 좀 찜찜한 녀석이었다. 그는 공산주의 수업도 제대로 들었고 콤소몰 행사에도 그럭저럭 출석을 빼먹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진짜 열렬하게 공산주의와 레닌을 신봉해 본 적은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공부할 때도 친구들 대부분은 대놓고 레닌을 욕하곤 했다. 가브릴로프야 촌 도시니까 훨씬 보수적이어서 그런 사람들은 별로 없었는데 스네고로드는 그보다도 더 보수적인 것 같았다.

 

 

그러다 30분이 후딱 흘러갔기 때문에 베르닌은 다시 눈을 치우고 자갈을 깔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허리가 펴지지 않을 정도였다. 5시가 되었을 때 아르투르가 손뼉을 딱딱 치면서 모두들 수고했으니 이제 트럭에 타라고 했다. 그러더니 베르닌에게 다가와서 등을 툭툭 쳤다.

 

 

“ 너 아까도 진짜 열심히 하더라. 앞에 타. 내 옆자리 하나 비어. 너처럼 열심히 하는 애는 좌석에 앉아서 가야지. ”

 

“ 어, 난 괜찮은데. 저쪽에 바실리 선배가 엄청 힘들어하던데 나이도 많으니 그 선배 앉혀줘. 난 뒤에 앉아서 갈게. ”

 

“ 그 사람 계속 게으름피우던데 뭘. 제일 노동 열심히 한 사람이 따뜻하고 편한 자리 앉아야지! 이리 와. ”

 

 

그래서 베르닌은 트럭 문을 열고 앞자리에 탔다. 가운데 자리에 끼어 앉아야 해서 오히려 더 불편했지만 아르투르가 아주 큰 혜택을 베풀어주고 있다는 표정으로 빙긋 웃고 있었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돌아가는 내내 아르투르는 스페호프와 공산주의자들의 모범에 대해, 그리고 스네고로드 집단농장의 훌륭한 생산성에 대해 계속 떠들었다. 자부심이 대단했다.

 

 

“ 외진 데 있고 기후도 악조건이지만 우리 농장이 얼마나 훌륭하다고. 십년 째 우리 주에서 생산성으로는 5위 안에 들었어. 다들 진짜 열심히 일한다고. 스네고로드가 너네 가브릴로프보다야 훨씬 작지만 당원은 훨씬 많이 배출했는걸. 옛날 혁명 때도 여기가 적위군 아지트였잖아. 우리 노동영웅도 여러 명 나왔어. 스무 살 때 노동영웅 된 여자애도 있는데 걔가 진짜 최고야. 이름이 나쟈인데 양계장 닭들 사료랑 온도를 잘 맞춰줘서 알을 두 배로 낳았다고. 얼굴도 얼마나 귀여운지, 나쟈랑 결혼하고 싶어서 우리 농장 남자들 다 줄섰어. 너네는 스무 살짜리 노동영웅 없잖아. 그치? ”

 

“ 응, 없어. 대단하네. ”

 

“ 있다가 나쟈 소개시켜줄게. 걔도 노동영웅이니까 우리 테이블에 앉거든. 근데 너 걔는 눈독들이면 안 돼. 무슨 얘긴지 알지? 아무리 네가 괜찮아도 나쟈는 우리 농장 남자랑 결혼해야 되거든. ”

 

“ 어, 으응... ”

 

 

베르닌은 뭔가 매우 불편했지만 아르투르의 호의와 환대에 대고 그런 기색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끄덕끄덕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마침내 청년회관에 도착해 트럭에서 내렸을 때 그는 숨통이 트이는 기분으로 차가운 저녁 공기를 들이마셨다.

 

 

 

*   *   *

 

 

 

 

봉사단원들은 청년회관 구내식당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아르투르의 말대로 맛있는 음식들이 많이 나왔다.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들과 샤실릭이 일품이었다. 먹기 전에 아르투르가 일어나 자매 도시에서 봉사를 와준 형제자매들에게 감사한다며 한바탕 연설을 했다. 청년단원들이 모두 와~ 하고 박수를 쳤다.

 

 

아르투르는 정말 베르닌을 자기들 공산청년단 임원들이 앉는 테이블로 안내해 주었다. 베르닌은 머뭇거렸다.

 

 

“ 어, 저... 난 일행이 있는데... ”

 

“ 아, 리자 말이야? 그 아가씨도 이 자리로 불렀어. 어쨌든 KGB니까 의전 챙겨주는 거야. 우린 말이야, KGB가 최고거든. 원래는 의회를 제일 쳐줬는데 요즘 폭설 복구하고 그러는 거 보니까 너무 시원찮아서. 저기 오네. 근데 리자 예쁘다. 뭐 우리 나쟈보단 덜 귀엽지만. ”

 

 

언제나 명랑하고 구김살 없는 리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불편하지도 않은 듯 방긋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거리낌 없이 상석 테이블에 앉아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는 베르닌을 보면서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 나 있잖아요, 화단에 꽃 심었어요. 따뜻해지면 분홍색 꽃 필 거예요. 글쎄 맨날 노란 꽃만 심었다잖아요. 페인트도 분홍색이랑 하늘색으로 칠했어요. 철로는 많이 복구됐어요? 어쩜, 그새 얼굴이 다 탔네. 여름도 아닌데... 안경 자국도 나고. 근데 당신 안경 안 끼잖아요. 웬 자국이에요? ”

 

“ 어, 이거 미샤가 선글라스 빌려줘서요. 덕분에 눈이 안 아팠어요. ”

 

“ 아, 역시 미샤는 센스가 좋네요. 아까 강당 쪽에서 무용수들 데리고 저녁 공연 연습시키는데 벌써부터 소문을 듣고 여자들이 막 구경 왔더라고요. 진짜 웃겼어요. 잘생겼다고 꺅꺅거리고 사인 받고 싶다고 동동 구르고. 있다가 공연할 때 장난 아닐 것 같아요. 좀 전에 데니스랑 마주쳤는데 자기 지난번에도 왔었는데 그때 자기가 춤추고 받은 관심의 열 배는 되는 것 같다고 툴툴대더라고요. 데니스도 멋있지만 우리 꽃돌이 감독님이랑은 비교가 안 되죠. ”

 

근데 어떤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는 거예요? 데니스는 원래부터 우리 극장에서 제일 인기 많은 무용수였잖아요. 완전 아폴로처럼 생겼는데, 키도 크고 근육질에... 여자들은 왜 데니스보다 미샤를 더 멋있다고 하는데요? ”

 

데니스는 그냥 잘생긴 남자고요, 미샤는 보기만 해도 온몸에 전류가 찌잉 하고 오는 것 같아요. 그냥 잘생긴 게 아니고 엄청 섹시해요. 눈빛도 그윽하고 몸가짐도 세련되고... ”

 

“ 난 데니스가 더 훤칠하고 멋있는 거 같은데... ”

 

“ 그러니까 그건 남자들 생각이라니까요! ”

 

 

그때 아르투르가 리자에게 샤실릭을 한 접시 덜어다 주더니 베르닌에게 양계장의 노동영웅 나쟈를 소개해주었다. 정말 귀여웠다. 노동영웅이라더니 키도 자그마하고 체구도 아담한데다 앳된 외모라 꼭 소녀처럼 보였다. 청년단원들이 농담을 할 때마다 수줍게 웃었지만 말수는 거의 없었다. 상냥한 리자가 말을 걸자 곧잘 대답은 했지만 그럴 때마다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7시가 가까워지자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공연 보러 가자고 동료들을 잡아끌었다. 아르투르는 껄껄 웃었다.

 

 

“ 우리 나쟈는 정말 춤을 좋아한다니까. 지난번에도 너네 극장 무용수들 와서 춤 보여주니까 밥도 먹다 말고 보러 가더라고. 얘 완전 부끄럼타는데 가서 사인까지 받더라니까. 난 발레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던데. 발레리나들은 예쁜 것 같은데, 남자들이 왜 그 타이츠 있잖아, 그거 입고 폴짝거리면 되게 민망하더라고. 하여튼 우리도 가자. 일곱 시부터 강당에서 한다며. 주민들 벌써 다 와서 앉아 있더라. 우린 앞자리 앉아야 돼.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감시해야 되거든. ”

 

“ 신경 쓰이는 일이 뭔데? 그냥 공연이잖아. 규모 큰 작품 가져온 것도 아니고 그냥 무용수들 몇 명 와서 갈라 공연만 보여주는 거 아니야? 음악도 그냥 레코드 틀고? ”

 

“ 아, 공연이야 뭐든 상관없지. 규모고 음악이고 난 그런 건 잘 모르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고, 이번에 너네 극장에서 그 골치 아픈 놈이 직접 왔잖아. 너도 KGB니까 잘 알지? 그 자식, 반동분자! 왜 크레믈린 낙하산으로 너네 극장 감독 앉힌 놈 있잖아. 지난번에 너네 국장도 그 자식 얘기하면서 진짜 화내더라고. 완전 반역자에 스파이에 반체제주의자인데 강제노동 수용소에 처넣어도 모자랄 판에 너네 극장에 자리 만들어서 앉혀줬다며. 그 자식이 순진한 애들 물들일까봐 걱정이라고 하더라고. 우리 농장 애들은 진짜 순도 100프로인데 괜히 그런 반동분자 와가지고 나쁜 물이라도 들면 어떡하니.

그놈이 무용수들 데리고 온다고 해서 나랑 우리 임원들이 무지 반대했는데 의회 쪽에서 다 찬성하고 앞장서고 우리보고 물정 모른다고 하는 거야! 어휴, 우리 농장에 웬 흙탕물 튀길 일 있냐. 너 이게 너네 가브릴로프 욕하는 거 아닌 거 알지? 너네 극장 무용수들은 괜찮았어. 저번에 눈 치우는 것도 얼마나 잘 도와줬는데. 그냥 그놈 하나 때문에 신경 쓰인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

 

“ 아, 저... 걔 극장 감독으로서는 굉장히 호평이야. 그리고 지난번에 여기서 무용수들 공연 반응 좋았다고 일부러 자기가 인솔해서 온 거래.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

 

“ 흥, 무용수들만 와서 춤만 추고 가면 되지 제깟 게 뭐하러 와. 아까 보니까 생긴 것도 완전히 계집애 같은데다 우리 임원들이랑 의회 쪽 간부들한테 인사도 안 하던데. 싸가지 없는 놈. 하여튼 예의주시할 거야. 너도 그놈 감시해야 하지 않아? 그때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가 그러던데, 그 자식한테 밀착 감시요원 붙여놨다고. ”

 

“ 어, 그, 그래. 여기서는 내가 감시하면 돼. 공연 보러 가자. ”

 

 

그들은 강당으로 갔다. 청년단원들 외에도 집단농장 주민들과 어린이들, 학생들도 많이 와서 좌석이 꽉 차 있었다. 특히 젊은 여자들이 어떻게든 앞쪽 자리를 차지해보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나쟈는 자리가 없을까봐 발을 동동 굴렀고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아르투르가 웃으며 농을 걸었다.

 

 

“ 뭘 그렇게 걱정하니, 나젠카. 다른 사람 자리 다 없어도 네 자리는 내가 만들어줄 텐데. 이리 와, 맨 앞줄은 의회랑 당 쪽 윗분들, 그리고 나하고 우리 임원 몇 명 앉을 거고 너는 여기 다닐하고 리자랑 두 번째 줄 가운데 앉아. ”

 

“ 고마워요, 아르투르. ”

 

“ 고맙긴. 넌 노동영웅이잖아. 우리 농장의 자랑인데. ”

 

 

사교적이고 싹싹한 리자는 또래인 나쟈를 제일 가운데 자리로 안내하고는 목도리를 풀더니 주섬주섬 몇 겹으로 개켜서 의자에 방석처럼 깔아주었다.

 

 

“ 이거 깔고 앉아. 너 키 작은데 앞자리에 덩치 큰 남자라도 앉으면 안 보이잖아. ”

 

“ 고마워, 리자. 나 오늘만 기다렸어. 발레 구경하는 거 너무 좋아하는데 여기는 극장도 없고 일 년에 두어 번 너네 극장에서 이렇게 공연 와주는 것밖에 없어서 너무 아쉬워. 그래도 이번에는 2주 만에 또 와줘서 너무 좋아. 지난번에 눈 왔을 때 무용수들이 집에 못 가고 여기 남아서 눈도 치워주고 일 도와주는데 정말 너무 착하고 멋있었어. 그때 타마라랑 친해졌는데 막 울더라고, 토요일에 무대 올라가야 하는데 못 가게 됐다면서 감독님 실망시키게 됐다고 얼마나 슬퍼하는지 나도 너무 미안했어. ”

 

“ 아, 돈키호테 얘기군요. 그때 다른 무용수들이 무대 올라갔어요. 미안해할 거 없어요. 폭설 때문이었잖아요. ”

 

 

베르닌이 끼어들었다. 나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 네, 그래도 여기 오지만 않았으면 타마라랑 데니스가 무대 올라갔을 텐데 괜히 미안하더라고요. 그리고 미샤 야스민이 감독으로 왔다고 해서 휴가라도 내고 가브릴로프에 가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직접 와줘서 너무 기뻐요. 진짜 유명한 사람이잖아요. 아까도 너무 궁금해서 무용수들 연습할 때 살짝 엿봤는데 사람들에게 가려져서 잘 안 보이더라고요. ”

 

“ 어, 나쟈. 발레 진짜 좋아하나보네요. 난 맨 처음에 걔가 우리 동네 왔을 때 뭐하는 앤지도 몰랐는데... ”

 

 

나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교양 없는 인간이 다 있다니 하는 눈빛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어떻게 몰라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데. 신문잡지에도 자주 나오고 문화 채널에서도 예전에 공연 실황이랑 영상 밥 먹듯이 보여줬는데. ”

 

“ 어, 그러니까... 전 발레는 관심이 별로 없어서. ”

 

“ 하긴 아르투르도 그렇고 우리 농장 사람들도 많이들 그렇더라고요. 근데 지지난주 공연 때 반응이 진짜 좋았거든요. 작년 재작년보다 훨씬 잘 추는 것 같더라고요, 눈 때문에 갇혀 있는 김에 무용수들도 매일 공연 보여줬고요. 그래서 발레 관심 있는 사람들도 많아졌어요. 오늘 미샤도 무대 올라오면 좋겠는데... 그럼 얼마나 좋을까요. ”

 

“ 저, 나쟈. 걔는 춤 안 출 거예요. 은퇴했거든요. 대신 걔가 연습시킨 무용수들이니까 무대는 좋을 거예요. ”

 

“ 아쉬워라... ”

 

 

잠시 후 7시가 되자 강당의 불이 꺼지고 무대 위에 조명이 들어왔다. 사실 제대로 된 무대도 아니고 그냥 연단에 무대용 패널을 덧대서 임시로 만든 것에 불과했다. 극장용 막 대신 펄럭거리는 커튼이 봉에 매달려 있는 정도였고 임시 무대는 가브릴로프 극장 무대의 절반도 안 되는 크기였다. 오케스트라 핏은 당연히 없었다. 음악은 찌직거리는 잡음이 섞이는 레코드였다. 그래도 관객들은 기대에 차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무대 위로 왕재수가 나왔다. 사람들은 타이츠 입은 무용수들이 아니라 수트를 입은 젊은 청년이 나온 것에 놀랐고 그의 미모에 두 번째로 놀랐다. 여자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왕재수는 지금껏 베르닌이 들어본 적도 없을 만큼 근사하고 세련된 태도로 인사를 했고 곧이어 오늘 무대에서 보여줄 작품들을 소개해주었다. 특히 발레를 처음 보러 온 사람들이나 어린이들을 위해서 발레에 나오는 마임과 몇 가지 동작을 간단하게 선보여 주기까지 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그렇게 친절하고 쉬운 말투로 뭔가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무대 위의 왕재수는 지난번 춤을 췄을 때와 마찬가지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관객들은 아무도 떠들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왕재수의 동작 하나하나에 굉장히 집중했다.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했다. 설명을 마친 후 왕재수는 다시 인사를 하고 퇴장했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베르닌은 굉장히 즐겁게 공연을 봤다. 돈키호테 역을 해보고 나니 발레가 어떤 것인지 조금씩 감도 잡혔고 또 저 동작이 어떤 건지도 대충 알게 돼서 그런지 진짜 재미있었다. 그리고 왕재수는 초보 관객들을 위해서 아주 유명한 작품과 신나는 작품들의 하이라이트만 모아서 갈라 무대를 짰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백조의 호수 2인무로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쯤이면 코믹한 네 마리 백조의 춤이 나오는 식이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돈키호테의 바질과 키트리 결혼식 장면을 넣어서 관객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베르닌은 관객들이 환호하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왕재수가 추는 바질을 봤다면 기절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약 80분가량의 공연이 모두 끝난 후 무용수들이 나와서 인사를 하자 관객들이 모두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왕재수가 나와서 인사를 하자 더욱 갈채와 환호가 커졌다. 여자들이 꺅꺅 소리를 질렀다. 옆을 보니 나쟈는 거의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강당을 나가면서 아르투르가 베르닌과 리자에게 환영 파티가 있으니 구내식당으로 오라고 했다.

 

 

스네고로드 공산당 지부랑 우리 청년단에서 개최하는 거야. 아까 저녁 먹은 거랑 달라. 술도 많고 엄청 재밌을 거야. 특별히 너네 봉사단이랑 무용수들 위해서 하는 거야. 쟤들 지난번에 눈 치우는 것도 도와주고 해서. ”

 

“ 어, 그래. 고맙다. 그러면 방에 짐만 풀고 금방 갈게. ”

 

 

봉사단원들과 무용수들은 청년회관 맞은편에 있는 작은 호텔에 묵게 되어 있었다. 말이 호텔이지 그냥 허름한 기숙사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눈은 다 치워져 있었고 청소도 잘 되어 있었다. 베르닌은 삼림국의 보리스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보리스와는 체육대회 때 친해졌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은 사이였다.

 

 

짐을 내려놓고 막 나가다가 그는 복도에서 왕재수와 마주쳤다. 아직 수트 차림인 것을 보니 강당에서 막 들어온 참인 것 같았다.

 

 

“ 야, 오늘 공연 재미있었어. 관객 반응도 좋더라. ”

 

“ 당연하잖아, 내가 지휘한 건데. ”

 

“ 근데 넌 어쩌면 무대 위에 있을 때랑 지금이랑 말투가 그렇게 다르냐. ”

 

 

왕재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 너 얼굴 탔구나. 선크림 바르고 갔어야지, 바보. 내일도 철로 눈 치우러 가는 거야? ”

 

“ 응. 오늘 눈 많이 치웠는데 우리 갈 때까지 기차는 못 들어올 것 같아. ”

 

 

왕재수는 가방에 손을 쑥 집어넣더니 조그만 화장품 튜브를 꺼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 내일 나갈 때 이거 바르고 가. ”

 

“ 이게 뭐야? ”

 

“ 선크림! 이런 날씨에 얼굴 엄청 탄단 말이야. 잘못하면 화상 입어. 선글라스 껴서 눈은 괜찮을지 몰라도. ”

 

“ 겨울에 누가 선크림을 발라. 헤엄치러 온 것도 아닌데. ”

 

“ 거울 좀 봐라, 너 얼굴 지금 시커매. ”

 

“ 어, 하여튼 고마워. 선글라스도. 덕분에 눈 안 아팠어. 넌 방 어디야? ”

 

“ 복도 끝 방. ”

 

“ 응, 너도 가방 놓고 나올 거지? 복도에서 기다릴까? ”

 

“ 왜 기다려? ”

 

“ 여기서 환영파티 해준다고 오랬잖아. ”

 

“ 아, 그거. 꼭 가야 하나? 아까 당 간부인지 뭔가가 오라고 하긴 했는데. 거기 청년단원들 애들 다 와? ”

 

“ 응, 여기 공산당하고 청년단원들이 여는 파티랬으니까. ”

 

“ 얘기 할 게 있어서 가보긴 해야 하는데 너무 졸려. ”

 

 

왕재수가 하품을 했다. 베르닌은 슬며시 걱정이 되어서 왕재수를 램프가 켜진 쪽으로 데리고 갔다. 밝은 데서 보니까 안색도 창백하고 아침보다 야위어 보였다.

 

 

“ 너 파티 안 가는 게 좋겠다. 퇴원한지 며칠 되지도 않았잖아. 버스에서 새우잠 자고 온종일 애들 연습시키고. 저녁은 먹었어? ”

 

“ 아니, 무용수들 원래 공연 직전엔 뭐 안 먹거든. ”

 

“ 넌 무대에도 안 올라갔는데 왜 안 먹어! ”

 

그럼 애들이 공복에 공연 준비하는데 감독이 돼가지고 나만 뭐 먹니? 중간중간에 초콜릿이랑 우유랑 먹어서 배는 안 고파. 애들은 그 파티 가서 먹겠지 뭐. 술 마시지 말라고 옆에서 얘기 좀 해 줘. 내일도 공연 있으니까. ”

 

 

베르닌은 이 골치 아픈 녀석에게 뭘 먹이는 것과 재우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필요한지 재 보았다. 자꾸 하품을 하는 왕재수의 야윈 얼굴을 보니 곧 답이 나왔다.

 

 

“ 알았어. 너 지금 빨리 들어가서 자. 내일도 애들 연습시키고 공연 올릴 거라면서. 빨리 누워야지 안 그러면 또 코피 쏟고 아프겠다. ”

 

“ 나 그때 코피 난 거 힘들어서 그런 거 아냐. 갑자기 바질 춰야 돼서 연습하다 넘어진 거라 했잖아. ”

 

“ 거짓말하지 마! 토냐가 그러던데, 너 안 다치게 넘어지는 방법 안다고! 야, 이거 봐! 지금 또 코피 나잖아! ”

 

“ 아니야! 콧물 나오는 거야! ”

 

 

왕재수는 손등으로 코와 입을 가리면서 아닌 척 했다. 베르닌은 주머니를 뒤졌지만 손수건이 없었다. 그래서 왕재수를 방으로 데려다 주고 욕실에서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왕재수가 코피를 닦으면서 속상해했다.

 

 

“ 아이, 이게 뭐야. 나 안 그랬었는데. 며칠씩 밤새고 춤추고 아저씨들이랑 여럿이 응응응 하고 놀아도 끄떡없었는데. 흑... 짜증나. ”

 

“ 많이 아팠었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푹 쉬면 좋아질 거야. 불 꺼줄게 빨리 자. ”

 

“ 싫어, 씻고 잘 거야. ”

 

“ 알았어. 그러면 씻고 나서 곧장 자. 무용수들한테는 내가 얘기해놓을게. ”

 

“ 우리 애들 내가 챙겨줘야 되는데. ”

 

“ 걔들 지난번 폭설 때 갇힌 동안 여기 사람들이랑 많이 친해졌대. 걱정하지 말고 자. ”

 

“ 응, 알았어. 내일 봐. ”

 

 

 

베르닌은 청년회관으로 갔다. 파티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청년단원들과 당 간부들, 당원들이 봉사단원들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스네고로드 사람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농장을 꾸려가고 있어서 그런지 술도 잘 마셨다. 리자가 어디 있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데니스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 다닐, 우리 감독님은 왜 안 내려와요? ”

 

“ 어, 미샤요? 먼저 잔대요. 많이 피곤한 것 같았어요. ”

 

“ 오늘 무대가 지난번보다 몇 배로 더 반응 좋았어요. 그래서 감독님한테 고맙다고 술잔이라도 쨍 하고 싶었는데. ”

 

“ 아... 그냥 내일 아침에 얘기해요. 근데 미샤가 신신당부하던데... 내일도 무대 올라가야 하니까 당신들 술 마시지 말래요. ”

 

“ 샴페인 한 잔 마시는 정도는 괜찮지 않나. 나 원래 술 세거든요. 보드카 한 병은 기본인데. ”

 

“ 몰라요, 난 분명히 전해줬어요. ”

 

“ 알았어요. 안 마실게요. 애들 전부 마시지 말라고 해야지. ”

 

 

데니스는 정말로 옆에 앉아 있는 동료 무용수들에게 술 마시지 말라고 당부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처음에는 ‘한두 잔만 마시면 안 돼?’ 하고 툴툴댔다가 데니스가 ‘감독님이 마시지 말래, 내일 공연에 지장 있대’라고 하자 ‘알았어’ 하고 수긍했다. 베르닌은 조금 감명을 받았다.

 

 

“ 어, 정말 다들 한 잔도 안 마시는 거예요? ”

 

“ 미샤가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감독님 지시니까 따라야죠.

 

“ 아... 나 좀 놀랐어요. ”

 

“ 왜요? ”

 

“ 데니스 당신은 우리 극장에서 제일 유명한 무용수잖아요. 십년 넘게 추지 않았어요? 미샤는 당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외부에서 왔는데도 깍듯하게 감독님으로 대하네요. 안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

 

“ 안 그런 사람들이 이상한 거죠! 감독과 무용수는 엄연히 달라요. 그리고 미샤는 진짜 실력 있는 감독이에요. 무용수로서도 난 미샤 발끝도 못 따라가요. 감독님 욕하고 헐뜯는 건 정치하는 사람들이랑 실력도 없이 출세하고 싶어 하는 극장 사람들이에요, 무용수들은 안 그래요! 우리 조금이라도 더 잘 추게 해주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거 많이 알려주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어떻게 깍듯하게 안 대해요! 지난번에 우리 여기로 보낸 것도 정치하는 사람들이 감독님 괴롭히려고 그랬던 거 다 알아요! 지난주에 감독님 무지 아팠는데 그것도 석연치 않은 이유가 있다는 얘기 돌고 있다고요. 당신도 잘 들어둬요, 미샤랑 친한 것 같지만 어쨌든 KGB에서 왔으니까. 당신네 국장이고 당이고 뭐고 감독님 한번만 더 건드리면 우리 진짜 가만 안 있을 거예요!

 

 

베르닌은 데니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쩐지 가슴이 뭉클했다. 데니스는 그의 시선을 오해하고는 짜증을 냈다.

 

 

“ 왜요! 나보고도 반동분자라고 하려고요? ”

 

“ 아니요. 난 걔가 그냥 싸가지 없고 자기만 아는 철없는 놈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극장에서 보니까 아닌 것 같더라고요. 다행이에요. ”

 

“ 뭐가 다행인데요, 미샤가 철없는 반동분자가 아니라서요? ”

 

“ 어, 그것도 그렇지만... 그냥... 당신들하고 잘 지내서요. ”

 

 

데니스는 누그러졌고 그에게 술을 한 잔 따라 주었다. 베르닌은 보드카를 한 잔 마신 후 리자가 있는 쪽 테이블로 갔다. 리자는 청년단원들과 아르투르, 나쟈와 함께 앉아 있었다. 원체 귀엽고 발랄했기 때문에 스네고로드 농장 청년들이 모두 호감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베르닌은 그들과 뒤섞여 술도 마시고 농장 이야기도 들었다. 피곤하기는 했지만 간만에 또래 젊은이들과 섞이니 재미도 있었다. 그러다가 리자가 나쟈를 데리고 무용수들이 있는 쪽 테이블로 옮겨갔다. 아르투르가 베르닌에게 보드카를 한 잔 주면서 기분 좋게 물었다.

 

 

“ 너 리자랑 사귀니? ”

 

“ 어, 아니. 우리 그냥 동료야. ”

 

“ 그래? 리자 귀엽다. 철은 좀 없는 것 같은데 뭐 아직 어리니까. 그래도 KGB에서 일하는 애니까 신붓감으로는 괜찮지 않니? 잘 해보렴. ”

 

“ 어... 리자는 눈이 높아... 꽃미남 좋아해. 그리고 우리는 진짜 동료야. ”

 

“ 흥, 꽃미남이 밥 먹여 주냐? 나도 매일 우리 나쟈한테 해주는 말이 있지. 남자 얼굴 다 필요 없어. 이념 반듯하고 일 잘하고 성실하면 되는 거지. 그런 남자 만나서 결혼해야 돼. 내 마누라도 나 같은 남자 만나서 행운이라고 매일 그러는데. ”

 

“ 아, 너 결혼했구나. 몰랐어. ”

 

“ 그럼, 농장 일이랑 청년단 일이랑 얼마나 많은데. 결혼을 해야 안정이 되지. 우리 마누라는 지금 우수 청년단원으로 뽑혀서 페름 쪽 농장에 작업반 교환 가 있어. 일주일 후에 돌아올 거야. 나쟈도 빨리 나 같은 남자를 만나야 되는데. 우리 청년단 쪽 괜찮은 애들 몇 명 내가 이어주려고 했는데 나쟈가 너무 부끄럼이 많아서 자꾸 빼더라고.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안주를 집어먹었다. 갑자기 너무 졸렸다. 언제 일어나야 하나 하고 눈치를 보고 있는데 아르투르가 갑자기 술잔을 쨍 하고 내려놓으며 볼멘소리를 했다.

 

 

“ 근데 그 자식, 역시 스페호프 국장님 얘기가 맞더라. ”

 

“ 어, 미샤 말이야? 왜? ”

 

완전 싸가지 없고 발랑 까진 반동분자야! 개자식.

 

“ 아니, 왜? 오늘 별 일 없었잖아. 공연 잘 끝내고 반응도 좋았잖아. ”

 

“ 너 아까 그 자식 인사하는 거 안 들었어? 그 재수 없는 자식이 관객들한테만 인사하고 당과 우리 청년단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잖아. 그 자리를 누가 마련해준 건데! 이건 건방진 것도 모자라서 당을 무시하는 거지 뭐야. ”

 

“ 아... 저... 걔는 별로 그런 생각 안 했을 거야. 극장에서는 원래 관객이 우선이라... ”

 

“ 그런 게 어디 있냐! 극장이고 관객이고 전부 당 덕분에 있는 거지! 그리고 이거 봐, 파티에도 안 왔잖아! 심지어 우리 당 간부가 아까 악수까지 하면서 파티 오라고 했는데! 일부러 안 오고 우리 무시하는 거지 뭐야! 건방진 자식, 반동분자 주제에... ”

 

“ 아... 그게 아니야. 걔 지금 몸이 안 좋아. 지난주에도 많이 아팠어. 아까도 너무 피곤해보여서 그냥 쉬라고 한 거야. 너희를 무시한 게 아니야. ”

 

“ 일행이라고 애써 감싸줄 필요 없어. 그런 놈은 한 번 보기만 해도 어떤 인간인지 다 보이니까. 너처럼 성실한 애랑은 천지차이야. 얼굴만 반반해가지고 아까도 우리 농장 여자들한테 눈웃음 치고. 반동분자 주제에 어디서 감히 우리 여자들한테 꼬리를 치는 거야. 가뜩이나 완전 바람둥이에 더러운 놈이라고 소문이 파다한 자식이...

 

 

베르닌은 왕재수가 여자에게 꼬리를 칠 일은 전혀 없고 오히려 반대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르투르와는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술을 한 잔 더 마신 후 졸려서 먼저 일어나겠다고 하고는 자리를 떴다.

 

 

 

*    *    *

  

 

 

 

다음날 베르닌은 다시 철로 복구조에 투입되어 눈을 치우고 자갈을 깔았다. 허리를 펼 시간도 없이 열심히 일했다. 그래도 왕재수가 준 선글라스를 끼고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랐더니 눈도 안 아프고 피부도 따끔거리지 않았다. 자갈을 깔면서도 그는 왕재수가 걱정이 됐다. 아침에 밥 먹으러 내려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방을 같이 쓰는 데니스에게 물어보니 너무 깊게 자고 있어서 안 깨웠다고 했다. 대신 빵과 우유, 과일을 챙겨다 주겠다고 했다.

 

 

‘ 아침이라도 잘 먹어야 하는데... 무용수들 연습시키다 보면 또 초콜릿 몇 개 집어먹고 굶을 텐데. 어휴, 고집쟁이. 다 낫지도 않았으면서 이 먼 곳까지 왜 부득부득 따라와 가지고. 괜히 아르투르 같은 애들한테 욕이나 먹고. 이 철로는 왜 이렇게 긴 거야... 오늘 복구돼서 내일 기차 들어오면 좋을 텐데. 그럼 돌아갈 때 걔가 조금이라도 덜 힘들 텐데. ’

 

 

그는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열심히 눈을 치우고 자갈을 깔았지만 결국 철로 복구는 마무리되지 못했다. 5시가 되자 아르투르가 박수를 쳤고 트럭을 타고 청년회관 쪽으로 돌아왔다.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었고 전날처럼 강당에 공연을 보러 갔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데려온 무용수들이 딱 이틀밖에 머무르지 않는데도 연일 공연을 보여주고 심지어 전날과 작품 구성도 다르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래도 가장 큰 갈채를 받았던 돈키호테 결혼식 춤은 다시 나왔다. 공연이 끝나고 무용수들이 인사를 하는데 관객들이 마른 꽃과 나무열매로 장식한 화환들을 무대로 가져다주었다. 심지어 마지막에 왕재수가 나와서 인사를 하자 젊은 여자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생화로 만든 꽃다발을 안겨주고는 ‘고마워요!’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왕재수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고 장미 꽃다발과 함께 퇴장했다.

 

 

아르투르가 간단하게나마 환송 파티를 할 테니 와달라고 했다. 베르닌은 잠시 후 가겠다고 하고는 무대 뒤로 뛰어갔다. 무용수들은 옷을 갈아입으러 갔지만 왕재수는 얼마 안 되는 무대 장비와 음악 테이프를 챙기고 있었다.

 

 

“ 야, 그걸 네가 직접 하는 거야? ”

 

“ 우리 스태프들이 못 왔잖아. ”

 

“ 그래도... 너는 감독이잖아. ”

 

“ 어제 여기 사람들한테 맡겨놨더니 레코드도 하나 부서지고 장비도 부품이 빠졌더라고. ”

 

“ 너 몸은 좀 어때? ”

 

“ 푹 잤더니 개운해졌어. 근데 여기 진짜 시골이야. 가브릴로프보다 더 심해. 아까 숙소에서 나오다가 똥개들끼리 막 싸우는 것도 봤어. 그리고는 말린 쇠똥 같은 걸 물고 달아나는 거야. 우웩. ”

 

“ 야! 농사지을 땐 그런 거 다 필요하단 말이야. 행여 여기서 그런 말 꺼내지도 마, 너 맞아죽어! ”

 

“ 칫. ”

 

 

왕재수는 큰 가방에 주섬주섬 장비와 테이프와 레코드를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가방을 들고 한 손으로는 장미 꽃다발을 들었다. 베르닌은 그에게서 가방을 빼앗았다.

 

 

“ 야, 이거 엄청 무겁잖아! ”

 

“ 별로 안 무거운데. 괜찮아, 내가 들고 갈게. ”

 

“ 무거운 거 들면 근육 미워진다며! 넌 그 꽃이나 챙겨. 근데 너 의외다. 원래 꽃 받으면 발레리나들한테 다 주더니. ”

 

“ 극장에서는 그러는데... 여기는 지금 생화 구하기 힘든 데잖아. 이런 데서 나 위해서 어렵게 구해서 갖다 준 꽃을 눈앞에서 발레리나한테 주면 관객들 막 열 받아 하더라고. 옛날에 키로프에 있을 때도 이런 집단농장 투어 여러 번 갔었거든. 처음엔 멋모르고 파트너한테 꽃 바쳤는데 여자들이 나중에 걔 지나갈 때 계란 던졌어. 나한테 꼬리쳐서 재수 없다고... ”

 

“ 헉, 살벌하네. 근데 몰랐어, 난 네가 진짜 화려한 무대에만 올라간 줄 알았거든. 이런 열악한 데에서도 많이 공연했었구나. ”

 

“ 키로프나 볼쇼이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냐. 위에서 가라고 하면 끌려가는 거지. 집단농장에 무슨 공장지대에... 그래도 그런 게 훨씬 나아, 높은 인간들 파티에 끌려가서 춤추는 것보다는. ”

 

“ 너 시골 싫어하고 파티 좋아하잖아. ”

 

“ 그거야 노는 파티지! 파티는 놀려고 가는 거지 높은 인간들 비위맞추고 꼬리치려고 가는 게 아니잖아! 에이, 생각하기 싫어. 나 지금 빨리 가봐야 돼. 중요한 일이 하나 있어서. 내일 우리 몇 시에 출발하는 거야? ”

 

“ 6시. 혹시 너랑 데니스 늦잠 잘지도 모르니까 내가 나가면서 너네 방에 들를게. ”

 

 

베르닌은 가방을 가져다준 후 식당으로 갔다. 환송 파티는 생각보다 짧았다. 전날만큼 북적거리지도 않았다. 아르투르는 여전히 살갑게 굴었지만 어딘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듯했다. 베르닌은 오히려 좋았다. 이틀 내내 농장 사람들과 부대끼다 보니 친해지기도 했지만 아르투르가 너무 국장을 신봉하는 타입이라 그런지 어딘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내색은 안 했지만 리자도 비슷했는지 아르투르가 잠깐 다른 테이블로 갔을 때 베르닌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 다냐, 우리 이제 자러 간다고 하고 일어나요. 계속 앉아 있었더니 너무 답답해요. ”

 

“ 어, 그래요. 여기 공기가 좀 탁하긴 하네요. ”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투르와 청년단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환대해줘서 고맙다고 하고 기회가 되면 다시 오겠다고 하자 아르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그래. 봄에 농사일 바쁘니까 그때 또 와서 도와주렴. 스페호프 국장님께 인사 전해드리고. 국장님 뵈러 가브릴로프 한번 가야 되는데... 하여튼 고마웠어. 잘 자고 내일 조심해서 돌아가. ”

 

 

 

*    *    *

 

 

 

 

베르닌은 리자와 함께 회관을 나왔다. 숙소로 가려는데 리자가 답답하니 바람이라도 좀 쐬고 들어가자고 했다. 베르닌도 탁한 공기 탓에 머리가 아팠기 때문에 그러자고 했다.

 

 

둘은 얼어붙은 저수지를 따라 천천히 산책을 했다. 추위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걷다가 리자가 두 팔을 벌려 기지개를 켜고는 투덜댔다.

 

 

“ 아르투르는 했던 얘기만 계속하고... 어쩐지 국장 생각나서 별로예요. ”

 

“ 국장을 존경한대요. ”

 

“ 세상에 어떻게 우리 국장 같은 사람을 존경할 수가 있담. 어제부터 공연 보는 내내 옆에 앉은 자기네 동료들이랑 속닥대고. 공연 예의도 없고, 심지어 계속 미샤를 욕하잖아요. 웃겨, 정말. 자기들한테 공연 보여주려고 그 먼 길을 왔는데. 꽃돌이 감독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볼쇼이에 있을 때는 그 사람 공연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대요. 어제부터 계속 당이니 임원이니 하는 얘기만 하는데, 미샤는 십대 때부터 크레믈린에 가서 공연해서 엄청 유명했다고요. 자기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당 간부들이랑 심지어 서기장하고도 아는 사이인데! 알지도 못하면서 계속 욕하고... 못돼먹었다고 하고... 진짜 열 받아서 한 대 때려주고 싶었어요. 미샤는 못돼먹지 않았어요! 미끄러질까봐 손도 잡아주고... 감자랑 코코아도 사주고... 나쟈한테도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줬는데요. ”

 

“ 어... 나쟈요? 어제 파티 때 미샤는 안 왔었는데. ”

 

“ 아, 아까 오후에요. 난 도서관 쪽 작업 일찍 끝나서 무용수들 연습하는 거 구경 갔었거든요. 근데 나쟈도 왔더라고요. 내가 미샤한테 나쟈 소개시켜주려고 했는데 미샤가 벌써 누군지 알더라고요. 인사도 하고 나쟈랑 따로 얘기도 하더라고요. 나쟈 오늘 설레서 잠도 못 잘 걸요. 무슨 얘기하는지 들어보고 싶었는데 그때 밥 먹으러 오라 해서 먼저 나왔어요. ”

 

“ 그랬구나... 오늘 일은 어땠어요? 힘들지 않았어요? ”

 

“ 오늘은 좀 피곤했어요. 벽화 복구를 하는데 청년단에서 자꾸 빨간색만 쓰라는 거예요. 근데 너무 빨간색이 많아서 눈도 아프고 윤곽도 하나도 구분이 안 갈 정도인데도 그러는 거예요. 원래 그림 보니까 여러 가지 색이 섞여 있는 거였거든요. 근데 작년에 바뀐 자기네 당 간부들이 빨간색을 좋아하니까 전부 빨갛게 하라는 거예요. 진짜 융통성도 없고... 여기 청년단원들은 청년 같지도 않고 스탈린 시대에나 어울리겠어요. ”

 

“ 좀 그런 면이 있긴 하더라고요. 그래도 내색은 하지 마세요. 여기 사람들 엄청 다혈질이래요. 자부심도 대단하고요. ”

 

“ 하긴... 툭하면 폭설 오고 폭우 쏟아지는데 이 정도로 농장 꾸리려면 보통 성정으로는 안 될 거예요. 아르투르가 자꾸 당신 농장으로 끌어오고 싶어 하던데. 그 사람 아직 당신이 얼마나 순한지 모르나 봐요. ”

 

“ 어, 나 별로 안 순해요. ”

 

“ 다냐, 당신 순해요. 어머나, 혹시 내가 당신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예요? 그런 뜻 아니에요. 남자들은 진짜 바보 같아요, 여자들이 성질 욱하고 힘센 남자 좋아하는 줄만 알고. 순하고 착한 게 훨씬 좋아요. 상냥하고. ”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리자를 쳐다보았다. 얼어붙은 수면과 달빛에 반사되어 그런지 리자의 파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불어오는 바람 탓인지 뺨이 발그레했다. 리자가 갑자기 입술을 실룩거리며 까르르 웃었다.

 

 

“ 아이 참,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예요. 얼굴에 뭐라도 묻은 것처럼. ”

 

“ 아, 아니요. 저, 그냥... ”

 

“ 뭐가 그냥이에요, 바보. ”

 

나 바보 아니에요. 당신도 그렇고 미샤도 그렇고 다들 나보고 바보라고... ”

 

“ 바보 맞아요! ”

 

“ 나 책상물림은 맞지만 바보는 아니란 말이에요. ”

 

“ 자꾸 미샤 얘기만 하고. 지금도... ”

 

“ 어, 그건요, 미샤가 맨날 나보고 바보 멍충이라고 하니까... ”

 

“ 아휴... ”

 

 

리자가 베르닌의 팔을 꼬집었다. 살짝 꼬집어서 아프지는 않았다. 리자에게서는 달콤한 딸기 사탕 냄새가 났다. 베르닌은 당황했고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때 오솔길 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와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어?’ 하고 낮게 외쳤다. 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팔에서 손을 떼었다.

 

 

“ 뭐예요, 아프게 꼬집지도 않았는데. 그게 아파요? ”

 

“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쪽에... 잠깐만요. ”

 

 

베르닌은 몇 발짝 나아갔다. 수풀 쪽으로 가자 달빛이 비춰져서 잘 보였다. 저수지와 숲을 잇는 오솔길 입구에 덩치 큰 남자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아르투르의 목소리도 들렸다. 함께 눈을 치웠던 젊은이들도 있고 강당 앞자리에 앉았던 청년단 임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베르닌의 귓가에 들어와 박혔던 건 그들이 아니라 왕재수의 목소리였다. 그는 왕재수가 그런 목소리로 얘기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아주 낮은데다 가슴과 목을 울려서 나오는 소리였다. 꼭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았다.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베르닌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청년단원들과 아르투르가 왕재수를 둘러싸고 있었고 욕설을 하면서 삿대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재수는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그 오싹한 저음으로 뭐라뭐라 대꾸를 하고 있었다.

 

 

“ 다냐, 왜 그래요? 어머, 미샤 아니에요? 무슨 일이지? ”

 

“ 잘 모르겠어요. 아르투르가 시비를 거는 거 같아요, 어제부터 계속 미샤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거든요. ”

 

 

베르닌은 오솔길 쪽으로 갔다. 가까이 가자 아르투르와 청년단원들이 퍼붓는 욕설과 비난이 똑똑하게 들렸다.

 

 

“ 이 반동분자 개자식아, 나라 팔아먹고 당 배신한 것도 모자라서 우리 애들까지 건드리게 놔둘 줄 알아? 그래놓고 멀쩡하게 여기서 나갈 수 있을 줄 알았어? 가만 안 둬! ”

 

“ 어디서 더러운 짓만 배워가지고! 너 같은 건 모가지를 부러뜨려서 매달아야 돼! 아까도 레닌 동상에 인사도 안 하고 지나가고! 우리가 유심히 봤어! 어제 오늘 강당에서도 한 번도 당에 감사 인사도 안 했어! ”

 

“ 감히 우리 여자를 집적대? 조국의 반역자 주제에 어디서 그 더러운 손을 대려는 거야! 이런 개자식은 맛을 보여줘야 돼! 여기가 그 잘난 모스크바인 줄 알아!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

 

 

왕재수는 별로 무서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덩치 큰 남자들이 아홉 명이나 둘러싸고 있는데도 물러설 생각도 안 했다. 아르투르 쪽을 뚫어지게 노려보면서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아까처럼 가슴을 울려서 내는 저음으로 말했다.

 

 

“ 너무 자기들을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 난 웃긴 사람들 좋아하는데, 너희는 우스운 게 아니라 그냥 저질이야. ”

 

 

아르투르는 순간 멍해졌다가 곧 욕을 하면서 왕재수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뭐야! 이 쬐끄만 게 입만 살아가지고! 범죄자에 반역자 주제에! 어디서 감히 당원들한테 욕을 하는 거야!

 

당원이면 뭐! 당이 밥 먹여 주냐? 하긴 너희는 당이 밥 먹여주겠구나. 아무 것도 안 해도 당 간부들 꽁무니 쫓아다니며 아부해서 자리 얻고 으스대고 완장 차고 애들 위에 군림하고. 그러니까 내가 그랬잖아, 너네는 웃긴 게 아니라 저질이라고. 그만 좀 꺼져주면 좋겠네. 난 바쁜 사람이야. ”

 

“ 이 개자식이! ”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아르투르가 왕재수를 거칠게 떠밀더니 곧장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베르닌이 단원들을 헤치고 뛰어들어 왕재수를 뒤에서 낚아챈 후였다. 베르닌은 두 팔로 아르투르의 주먹을 막으면서 급하게 소리쳤다.

 

 

“ 아르투르, 왜 그러는 거야! 이러면 안 되지! ”

 

“ 넌 저리 비켜! 저 쬐끄만 반동분자 새끼 죽여 버릴 거야! ”

 

“ 진정해! 오해가 있었던 거 같은데 그래도 폭력을 쓰면 안 돼! 비겁하잖아, 얜 혼잔데 너희는 이렇게 여럿이서 애를 둘러싸고... ”

 

“ 저 개새끼가 지금 뭐라고 하는지 못 들었어? 우릴 모욕하고 당을 모욕했잖아! 게다가 우리 여자들을 건드리고 희롱하고! ”

 

“ 말도 안 돼! 얜 그런 애 아니야. 여자들한테 비신사적인 행동 같은 거 안 한단 말이야. 야, 너 오해 산 거 있으면 빨리 사과해! ”

 

 

베르닌은 근육질의 아르투르를 간신히 두 팔로 밀어붙이며 왕재수에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왕재수도 굉장히 화가 났는지 꼼짝도 안 했다. 까만 눈을 번쩍번쩍 불태우며 으르렁거렸다.

 

 

“ 내가 왜! 난 아무 잘못도 안 했어. 내 할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저 얼간이들이 와서 시비 걸고 개소리를 하잖아. ”

 

“ 저 더러운 자식이 어디서 누굴 얼간이라고! ”

 

 

다른 남자 하나가 벌컥 화를 내면서 왕재수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리자가 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베르닌은 심장이 철렁했다. 하지만 왕재수는 워낙 민첩했기 때문에 잽싸게 옆으로 피해서 다행히 맞지는 않았다. 더욱 화가 난 남자들이 덤벼들려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제발 그만 좀 해요! 미샤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전부 오해란 말이에요! ”

 

 

나쟈였다. 얼굴이 빨개져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정신없이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와 왕재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르투르가 나쟈의 팔을 덥석 잡더니 마구 잡아 흔들었다.

 

 

“ 나젠카! 어떻게 저 더러운 자식 편을 드니! 넌 노동영웅이야! 다른 여자애들이 다 저 기생오라비 같은 반동분자한테 홀려서 헤롱거려도 너만은 그러면 안 되지! 절대 용서 못해! 감히 너한테 손을 대다니! 저 자식 우리가 죽여 버릴 거야! ”

 

“ 손 댄 적 없어요! 그런 거 아니란 말이에요! ”

 

“ 뭐가 아니야! 저 자식이랑 문 걸어 잠그고 한 방에 있었잖아! 계속 저 놈이랑 따로 속닥거리고... 아까 파티에도 안 오고 저 자식 방에 들어가는 거 티모페이가 다 봤어! 너 지금 저 새끼한테 홀려서 제정신이 아니야! 제발 정신 차려! 넌 우리 자랑이야, 노동영웅이고 우리 농장에서 제일 예쁜 애란 말이야! 어떻게 저런 더러운 반역자랑... ”

 

“ 그런 거 아니라고요! 나는, 나는... 그러니까 미샤 방에 갔던 건 맞아요. 하지만 얘기하러 갔던 거란 말이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

 

 

나쟈가 바들바들 떨었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르투르는 더욱 화를 냈다.

 

 

“ 뭐가 아니야! 울기까지 하고! 이 새끼가 진짜 나쁜 짓 한 거네! 그러니까 말도 못하지! 죽여 버릴 거야, 감히 우리 나쟈를! ”

 

“ 어휴, 진짜 시끄럽네. 침도 엄청 튀기고. 우린 그런 사이 아니야. 근데 그런 사이면 뭐, 어쩔 건데! 네깟 것들이 뭔데 성인 여자의 사생활을 이래라저래라 간섭이야! 나쟈가 노동영웅인 게 뭐! 그게 나쟈가 잘해서 된 거지 너네가 해준 거냐? 꼭 못난 놈들이 잘난 여자 앞에서 수탉 노릇하며 으스대지. 나쟈가 누구랑 놀든 말든, 어디서 뭘 하든 너희가 무슨 상관이야! 나쟈 좋을 대로 하면 되는 거지! ”

 

 

베르닌은 겁이 나서 왕재수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르투르가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려는 순간 나쟈가 결심한 듯 단호하게 외쳤다.

 

 

나 농장 떠날 거예요! 다들 그렇게 아세요! 그리고 미샤한테 시비 걸지 말아요!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 부끄러운 줄 아세요! ”

 

 

순간 모두가 멍해졌다. 아르투르가 더듬거렸다.

 

 

“ 나젠카... 그게 무슨, 무슨 소리야... 농장을 왜 떠나... 너 설마... 설마 진짜 이 자식이 너랑 결혼이라도 해줄 거라고 믿는 거야? 이런 반동분자 개자식이? 이런 자식은 바람둥이야... 여자를 후리고 그 자리에서 버린단 말이야... 이 자식이 얼마나 더러운 놈인지 넌 상상도 못 해! 아무 데나 꼬리치고 다니고... 넌 순진해서 아무 것도 몰라! ”

 

“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나, 나 가브릴로프로 갈 거예요! 거기 극장 들어가서 무용수 될 거예요! 아까, 아까 오디션 봤어요. 미샤가 나한테 재능 있다고 했어요, 발레단에 들어오라고 했단 말이에요. 나 춤추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발레리나 되고 싶었는데 우리 동네는 시골이니까 방법이 없었다고요... 항상 텔레비전 보면서 혼자 연습했어요. 미샤가 그랬어요, 정규 교육 안 받았는데 이렇게 추는 건 재능이라고... 나한테 타고 났다고 했어요. 아무도 나한테 그런 말 해준 적 없었어요. 양계장 온도만 잘 맞추고 닭들 잘 돌보라고, 계란 몇 개 낳았냐고만 물어보고... 툭하면 노동영웅 타령만 하고. 그깟 노동영웅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그건 어쩌다 운이 좋아서 닭들이 계란을 많이 낳은 것뿐이에요! 닭이랑 계란은 신물이 나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좀 해요, 미샤한테 시비 걸지 말라고요! ”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르투르는 얼굴이 하얘져서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나쟈! 너 미쳤어? 그런 헛소리를 정말 믿는 거야? 저 자식은 너 꼬시려고 거짓말하는 거란 말이야! 넌 순진해서 남자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재능은 무슨! 너 벌써 스무 살도 넘었잖아! 이제 와서 무슨 발레를 시작해! 그런 건 어릴 때부터 배워야 하는 거야! 저 자식 말 믿으면 안 돼! 너 끌고 가서 갖고 놀다가 싫증나면 버릴 거라고!

 

 

그때 왕재수가 나쟈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서 자기 뒤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아르투르에게 똑바로 걸어갔다. 거의 코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다가갔다. 두 눈에서 빨간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아르투르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왕재수는 딱 두 마디만 했다.

 

 

나쟈는 발레리나가 될 거야. 그만 꺼져.

 

 

베르닌은 아르투르가 왕재수의 목을 비틀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에 띄는 작대기를 하나 집어 들고 여차하면 휘두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투르는 그러지 않았다. 이를 갈며 왕재수를 확 쏘아보았지만 갑자기 얼굴이 파래지면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청년단원들이 부르르 떨면서 왕재수에게 덤벼들려고 했지만 아르투르는 한 손으로 그들을 저지하더니 나쟈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너 정말 농장 떠날 거야? 부모님이랑 동생들도 다 버리고? 우리랑 친구들도 다 소용없어? 이 자식 말 한 마디만 믿고 가겠다는 거야? ”

 

“ 네. 믿어요. ”

 

 

아르투르는 멍하게 나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쩐지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 야, 가자. ”

 

“ 하지만... 저 새끼 손 안 봐줘? 우리 나쟈를 꼬드겨서 지금... ”

 

“ 알아서 하라고 해! 나쟈 쟤 지금 정신 나갔어. 나중에 피눈물 나보면 정신 차리고 돌아오고 싶겠지. 너 생각 잘해, 나쟈. 그 때 가서 우리가 안 받아주면 정말 갈 곳 없을 거야. ”

 

 

나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그만 두 주먹을 꼭 쥔 채 왕재수의 곁에 서서 파들파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아르투르는 입안으로 욕을 하더니 청년단원들과 함께 오솔길로 가버렸다. 베르닌은 그가 끝까지 왕재수 쪽에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아르투르 일당이 사라지고 나자 나쟈가 심호흡을 하더니 왕재수를 보면서 얼굴을 확 붉힌 채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죄송해요. 내일 떠나신 후에 조용히 얘기하고 정리하려고 했는데. 괜히 봉변당하게 만들고... 괜찮으세요? ”

 

“ 네가 왜 미안해. 별 일 없었는데. 근데 내일 우리랑 같이 안 가도 괜찮아? 쟤들이 너 못 가게 하고 괴롭히면... ”

 

“ 안 그럴 거예요. 전 아르투르를 잘 알아요. 우리 사촌 오빠거든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어요. 저렇게 나오면 포기한 거예요. 앞으로는 절대 감독님한테 못되게 안 굴 거예요. 겁먹었어요. ”

 

 

리자가 끼어들었다.

 

 

설마 그 깡패 같은 아르투르가 미샤한테 겁먹어서 그랬을라고. 나쟈, 네가 단호하게 얘기하니까 그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 거야. ”

 

“ 아니야, 리자. 아르투르는 여자의 의지 같은 건 안 믿어. 그 사람은 감독님 때문에 포기한 거야. 주눅 들었어요. 완장 차고 난 후에 저러는 거 정말 처음 봤어요. 고마워요, 미샤. ”

 

 

왕재수는 나쟈의 손을 꼭 잡아주더니 어쩐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 늦어도 다음 주 토요일까지는 와야 돼. 발레학교에 얘기해놓을 거야. 기숙사도 잡아 놓을게. 넌 기초가 없으니까 적어도 일 년은 배워야 돼. 재능이 있다고 다 되는 건 아니야. 진짜 열심히 배우고 연습해야 돼. 발 다 까지고 물집 나고 찢어질 거야. 일단 오면 놀지도 못하고 데이트 같은 것도 못해. 시작이 늦었으니까 그만큼 죽어라고 노력해야 돼. ”

 

 

나쟈의 커다란 눈망울에 근심이 어렸다.

 

 

“ 저 진짜 죽어라고 할 거예요. 근데 정말 할 수 있을까요? 열 살 때부터 시작한다면서요. 전 벌써 스물한 살인데... ”

 

“ 왜 못해. 노동영웅이라며. 닭이랑 달걀 신물 난다면서도 노동영웅인지 뭔지 됐는데 좋아하는 춤추려고 노력하는 건데 왜 못하겠어. 너 내 말 잘 들어, 나쟈. 할 수 있을까, 못할 거야라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못해. 춤은 생각으로 추는 거 아냐. 좋아서 추는 거고 하고 싶어서 추는 거고 몸에서 우러나서 추는 거야. 너한테 세 개 다 있어. 그러니까 극장으로 와.

 

 

나쟈가 왕재수를 와락 포옹했다. 뺨에 뽀뽀를 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 고마워요, 미셴카. 다음 주에 봐요! 전 이제 타마라에게 가볼게요. 아까부터 궁금해 하더라고요. 토냐랑도 친해졌어요. ”

 

“ 나도 같이 가, 나쟈. 타마라 언니 나랑 같은 방이거든. 잘 자요, 미셴카. 잘 자요, 다냐. 내일 봐요. ”

 

 

리자가 나쟈의 팔짱을 끼고 뛰어갔다. 베르닌은 여자들을 바래다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마침 저편에서 무용수들이 산책을 나와서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기 때문에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는 그제야 왕재수 쪽으로 돌아서서 폭풍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야! 너 정신이 있냐 없냐!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했던 말 잊었어? 여기 사람들 성정 진짜 거칠단 말이야! 골수 공산주의자에... 가만히 있어도 너한테 시비 걸 판에! 나쟈도 그렇지, 몰래 오디션 보고 몰래 진행했어야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잖아! 왜 방으로 데려가고 문을 걸어 잠가! ”

 

“ 연습실에도 그 망할 청년단원들이 와 있었단 말이야.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수첩에 적고 있었어. 타마라랑 데니스가 잠깐 막아줘서 간신히 나쟈 오디션은 봤는데 인터뷰까지 할 여유가 없었다고. 그래서 방으로 데려간 거야. 내 방도 아니었어, 내 방에 도청장치 있었다고. 그래서 네 방으로 갔었어. ”

 

“ 엥, 그랬구나. 너 그때 얘기한 애가 나쟈였던 거야? 오디션 봐야 한다던. 나쟈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온 거야? " 

 

“ 응. ”

 

“ 그렇게 많이 아파놓고. 힘들어서 코피까지 흘리면서... 여자애 하나 데려가려고... ”

 

“ 내가 그랬잖아, 타고 난 애는 정말 찾기 힘들다고. 나쟈는 보물이야. 꼭 데려가야 돼. ”

 

“ 그치만, 기초도 하나도 없다며. 일 년 이상 발레학교에 넣을 거라며... ”

 

“ 현대무용이 아니고 발레니까. 기본 동작도 모르고 토슈즈 한번 안 신어봤으니까 어쩔 수 없어. 안타깝다... 빨리 찾아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좋아. 정말 좋아. 시골 와서 처음이야, 이렇게 좋은 거. ”

 

 

왕재수가 환하게 웃었다. 베르닌은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아프게 당겨왔다.

 

 

“ 숨겨진 원석을 찾아낸 게 그렇게 좋아? ”

 

“ 당연하잖아! ”

 

“ 그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거야? 여기 와서 좋았던 게? ”

 

“ 바보, 좋을 게 뭐가 있어! 시골인데! ”

 

“ 어... 하긴 그렇지. 넌 어마어마하게 잘 나가던 애였으니까. 대도시... ”

 

아, 있어. 로만. 꼭 안아주면 참 좋아. 보고 싶다... ”

 

 

베르닌은 이상하게 조금 섭섭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르투르가 멱살을 잡는 통에 떨어져 나뒹굴던 모자를 주워 왕재수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자. 내일 새벽에 출발하는데. ”

 

“ 응. ”

 

 

그들은 별 말 없이 저수지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하얗게 떠오른 보름달이 굉장히 환했다. 갑자기 차가워진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왕재수가 패딩 지퍼를 올리고 턱 언저리까지 칼라를 세웠다. 그 전에는 훨씬 추울 때도 코트 단추를 채우지 않던 애였다. 옆에서 보니 광대뼈가 도드라져 있었고 두툼한 패딩 코트 사이로도 자작나무처럼 야윈 몸의 윤곽이 드러났다. 베르닌은 독사과와 스페호프, 그리고 아르투르의 욕설을 생각했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분노를 느꼈다.

 

 

그때 왕재수가 말했다.

 

 

“ 아, 하나 더 있다. ”

 

“ 뭐가? ”

 

“ 좋은 거. 저녁밥. 네가 해주는 거. ”

 

“ 뻥치지 마. 툭하면 투정하면서. 레닌그라드에서 엄청 좋은 것만 먹고 다녔다면서. ”

 

“ 그래도 집에서 저녁은 못 먹었단 말이야. 옛날엔 파트너 발레리나랑 같이 살았는데 걔나 나나 춤추느라 바빠서 요리는 못했으니까. ”

 

“ 너 사귀는 남자들 많았잖아. 이집 저집에서 저녁밥 안 해줬냐? ”

 

“ 바보. 잠자리만 하고 나오는 거지. 저녁밥 얻어먹고 같이 살면 눈에 띄잖아. 잡혀가라고. 나 학교 다닐 때부터 감시요원들 붙어 있었는걸. 가끔 친구들 집에 가서 먹긴 했지만 그래도 그거랑 달라. 지금은 집에 오면 네가 밥 주잖아. 그거 좋아. ”

 

“ 그러니까 우리 동네 와서 좋은 건 잠자는 사람하고 밥 주는 사람인 거네!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

 

“ 뭐가 너무해. 시골인데 뭘 더 바라니. 그나마 있는 게 어디야. ”

 

 

왕재수가 기침을 했다. 베르닌은 자기 목도리를 풀어서 왕재수의 목에 한 바퀴 둘러 주었다. 숙소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왕재수가 목도리를 돌려주었다. 칼라 지퍼도 내렸다. 흐릿한 전구 불빛 아래에서 야윈 얼굴이 더 창백하게 보였다. 눈만 새까맣게 반짝거렸다. 불빛이 반사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까맣고 깊은 눈동자 저 너머에서 조그맣고 새빨간 불꽃이 이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베르닌은 아르투르가 왜 고개를 돌렸는지, 왜 더 이상 왕재수 쪽을 바라볼 수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복도로 나왔을 때 베르닌이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 너 그런 거 아니야. ”

 

“ 뭐가? ”

 

“ 아르투르가 말한 거. ”

 

“ 뭐, 반동분자? 반역자? 한두 번 듣는 소리도 아닌데 뭐. ”

 

“ 너는 더러운 놈이 아니야. 절대 아니야. ”

 

“ 너한테는 그게 중요하냐? 그냥 욕인데. ”

 

“ 하여튼! 국장도 그렇고 다들... 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

 

“ 그런가. 근데 다 맞을지도 몰라. 아무 것도 모르는 건 너지. 넌 책상물림이고 순진하니까. 나 반동분자 맞을 걸. 반역이 뭔진 모르겠는데, 난 공산주의 싫어하니까 맞나보지 뭐. 더러운 놈인 건, 뭐 그것도 맞겠지. 나는 놀아나는 아저씨들이 많잖아. ”

 

 

베르닌은 말문이 막혔다. 잠시 왕재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막 그가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라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방문 앞에 멈춰 섰다. 열쇠로 문을 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 나 잔다. 아침에 깨워줘. ”

 

“ 어, 그래. 잘 자. ”

 

“ 내일 집에 가면 몇 시 정도 될 거 같아? ”

 

“ 글쎄. 빨라도 밤 아홉시? ”

 

“ 바보, 눈 좀 잘 치우지. 그럼 기차가 왔을 텐데. ”

 

“ 나 진짜 열심히 치웠는데. 자갈도 얼마나 많이 깔았다고. ”

 

“ 하긴 그랬겠지. 잘 자. ”

 

 

왕재수가 문을 닫았다. 베르닌은 잠시 복도에 서 있다가 한숨을 쉬고는 자기 방으로 갔다. 룸메이트인 보리스는 다른 봉사단원들과 술을 마시는 모양인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패딩을 벗고 주머니에서 왕재수가 준 선글라스와 선크림 튜브를 꺼냈다. 샤워를 하고 나서 거울을 보니 얼굴은 전날보다 더 타지는 않았다. 여전히 안경 자국만 나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그는 보드카를 마시고 싶어졌지만 밖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무척 피곤했지만 그날 밤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아마도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달빛 때문인 것 같았다. 아니면 바람 소리. 그는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다.

   

 

 

 

 

 

FIN

- 2015. 4. 25 ~ 5. 2 -

 

..

 

 

리자의 본명 리자베타 칸페트나야는 '칸페트이', 즉 사탕, 캔디에서 따왔다 :)

 

리자가 왕재수를 처음에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라고 부르는 것은 존칭 표현이다. 러시아 이름은 이름 + 부칭(아버지 이름에서 파생됨) + 성으로 구성되는데 이름과 부칭을 함께 부르면 존대 표현이 된다. 왕재수의 본명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야스민으로, 친한 사이에서는 애칭인 미샤, 미셴카, 미셰츠카, 미슈카 등으로 부르지만 격식을 갖춰 부를 때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가 된다.

(본편이든 서무 시리즈에서든 주인공 미샤는 자기 이름을 미샤라고 불러주기를 원하는 편이고 저렇게 격식 갖춰서 부칭까지 부르면 싫어한다)

 

..

 

노동영웅은 내가 지어낸 게 아니고 원래 소련 시절에 있었던 서훈이다. 무슨무슨 영웅이 참 많았다. 모성영웅 이런것도 있었다.

 

..

 

이번 편은 후반부는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이나 왕재수에 대한 접근이 본편과 좀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이거 쓰고 나서는 진짜 본편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24편을 쓰고.. 지금은 25편 후반부를 쓰다가 막혀 있음..)

 

..

 

어쨌든 이렇게 하여 우리의 (바보 멍충이) 단추는 리자랑 아무 일도 없이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가고... 이야기는 24편으로..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주시면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서무 시리즈가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역시 길어지고 나니 본편과 혼재되면서 뒤로 갈수록 에피소드가 길어지기도 하고 때로 심각해지기도 한다. 분명히 맨처음에 음식투정하던 왕재수, 당직실 귀신 등장할 땐 독사과가 나올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뭐 이런 시리즈야 자체적으로 진화하는 법이니까 할 수 없다!

 

이번 22편은 지난 21편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얘기이다. 스페호프의 음모로 백설공주처럼 독사과를 먹고 쓰러진 왕재수... 원체 나쁜 약물을 쓴 탓에 왕재수의 상태는 좀처럼 좋아지지를 않고.. 마음 착한 단추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22편은 아픈 왕재수를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단추의 이야기이다 :)

 

이번 편은 분량이 꽤 긴 편이라 반토막으로 나눠서 올릴까 하다가 흐름이 끊길 것 같아 그냥 전체 다 올려본다. 재밌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수차례 방해공작과 음모 끝에 드디어 스페호프는 눈엣가시 같은 왕재수에게 독사과를 먹이는 데 성공하고.. 왕재수는 위독한 상태에 빠진다. 아픈 왕재수는 헛소리를 하며 괴로워하고 베르닌은 어떻게든 그를 낫게 해주고 싶어 노력한다...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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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2

 

 

서무의 슬픔

-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베르닌은 수요일 아침에 20분이나 지각을 했다. 병원에서 쪽잠을 자고 일찍 일어났지만 차마 왕재수를 놓고 나올 수가 없어 머뭇거리다가 의사에게 쫓겨나다시피 나왔기 때문이다. 초췌한 몰골로 사무실에 들어서는데 발따예프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 다닐, 국장이 찾으니까 빨리 올라가 봐! ”

 

“ 저를요? 왜요? ”

 

“ 나도 모르지! 9시 되기 전부터 자네 왔냐고 묻던데! 또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쯧쯧... ”

 

 

베르닌은 잠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페이퍼 나이프를 바라보았다. 가슴 속에 감추고 들어가서 국장을 확 찔러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울컥 치솟았지만 고개를 저으며 사무실을 나와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갔다.

 

 

스페호프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심지어 대중가요였다. 베르닌을 보더니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 오, 다닐. 어서 오게. 얘기 들었네. 자네 병원에 아침까지 있었다면서. 그 불여우 곁에 붙어서. 극장에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 ”

 

“ 예. ”

 

 

베르닌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왕재수에게 심폐소생을 해준데다 울고불고 병원에 연락하고 심지어 수혈까지 해주었으니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해고뿐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두렵지도 않았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드는 인간들과 일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자르려면 자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활짝 웃었다.

 

 

잘했네. 자네 정말 일취월장했군. 따로 지시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위장 전술을 펼치다니. 대충 전해 들었네. 자네가 그 녀석을 병원으로 데려갔다지. 인공호흡도 좀 해주고. 아주 놀란 척 했다고. 훌륭한 연기였네. 덕분에 우리 쪽에 대한 의심은 받지 않겠어. 자네 아무래도 현장요원으로 전직해야겠어. 행정의 기본도 안 되고 서무 업무도 실수투성이라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자넨 현장 체질이었던 거야. 그래서 문서 작성이 엉망이었던 게지. 그 녀석 감시를 시킨 보람이 있군. 그래, 그 녀석이 사과를 몇 개나 먹었던가? ”

 

“ 사과... 역시 사과였군요. ”

 

“ 그렇지. 사과 껍질에 발라놨다네. 그 녀석이 사과를 좋아한다는 얘길 들었거든. 자네가 보는 앞에서 먹던가? 내가 그걸 봤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고소했을까~!

 

“ 아닙니다. 제가 갔을 때는 이미 먹은 후였습니다. 한 알밖에 안 먹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약물 분량을 잘못 조절했는지 상태가 굉장히 심각했습니다. 숨도 못 쉬고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

 

“ 흠, 이상하군. 그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쉽게 죽어버리면, 그것도 이목이 집중되는 극장에서 죽었으면 우리도 골치 아파서 안 되는데. 그래서 일부러 조금만 쓴 건데 그럴 리가 없어. 하긴 레베진스키가 애송이를 혼내주고 싶은 의욕이 앞서서 사과 한 알에 왕창 발라놨을지도 모르겠군. 내가 그렇게 세 알에 고루고루 펴 바르라고 했건만! ”

 

“ 의사가 그러는데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수용소 후유증 때문에 조금만 독성 있는 걸 먹어도 쇼크 일으킨다고...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이번엔 너무 나갔던 것 같아요... 정말 죽을 뻔했다고... ”

 

“ 흥, 아쉽군. 이왕 쇼크 일으킨 거 그냥 해치웠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건 내 개인적인 희망이고, 자네 말이 일리가 있네. 냉정하게 생각하면 지금 그놈이 죽어버리면 안되지. 그러면 분명히 크레믈린에서 검시를 하라고 했을 거고, 약물이 검출됐으면 우리가 수세에 몰렸을 테니 그놈이 안 죽은 게 지금으로서는 낫네. 자네도 내 말 명심하게, 다닐. 나중에 정말로 그 녀석을 해치울 때는 증거가 남는 걸 쓰면 안 되네. 지난번 얼음물 수장 작전이 딱 좋았는데 다시 생각하니 아깝구먼. 하여튼 좋았어. 그놈이 많이 아픈가? ”

 

“ 예. 아직 의식이 없어요. 어젯밤에 잠깐 깨서 헛소리한 게 전부입니다. ”

 

뭐야? 의식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깨어나서 많이 아파해야지! 아파서 펄쩍펄쩍 뛰고 바닥을 나뒹굴어야 약을 먹인 보람이 있지! 실컷 아파야 제대로 버릇을 고쳐주는 건데! 그래, 언제쯤 깨어난다던가? ”

 

“ 저어... 잘 모르겠습니다. 아침에도 계속 혼수 상태였고. 의사 얘기론 고비는 넘겼으니 아마 오늘 중 정신이 돌아올 거라고는 하던데... 국장님, 걔 정말 많이 아팠던 게 분명해요. 정신 잃기 전에 아프다면서 얼마나 울고 몸부림쳤는데요. 이제 그만... ”

 

 

베르닌은 다시금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꾹 참았다. 다행히 흥에 겨운 스페호프는 그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하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옳지 옳지, 그랬어야지! 싸가지 없는 애송이 녀석 그래야 버릇을 좀 고쳐주지! 자네 지난주처럼 특별 근무를 지시하겠네. 그놈 곁에 딱 붙어 있게. 아예 그놈의 보호자로 병원에 등록하는 거야. 그놈은 서류상 우리 소관이니 KGB 요원이 보호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네. 게다가 자네는 그놈과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도 하는 사이니 구실도 있어. 그럼으로써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지. 첫째, 우리 쪽으로 쏠리는 의심을 없애는 것. 둘째, 그놈의 상태를 가장 먼저 파악할 수 있다는 것.

자네가 고생이 많네만 다 훌륭한 요원으로 커나가는 데 피가 되고 살이 된다고 생각하고 이만 가보게. 그놈이 퇴원할 때까지 자네의 서무 업무는 면제해 주겠네. 암, 지금 서무가 중요한 게 아니지. 괜찮은 현장요원 하나를 양성하고 있는 이 마당에! 어서 가게. 매일 오후 4시에 내게 보고를 하게. 직접 오기 어려운 상황일 때는 전화로 보고해도 좋네. 그럼 이상! ”

 

 

베르닌은 국장실을 나왔다. 분노가 들끓었지만 스페호프가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휴가를 내고 병원에 가버릴까 하고 고민하던 차였으니까.

 

 

 

*   *   *

 

 

 

 

베르닌은 곧장 병원으로 갔다. 스타브로프가 그를 발견하고 펄쩍 뛰었다.

 

 

“ 아니, 이 녀석은 등 떠밀어서 보내놨더니 왜 금방 돌아온 거야? 네 녀석 정말 사표라도 낸 거냐? ”

 

“ 아니오, 국장이 저보고 보호자 등록하고 옆에서 감시하랍니다. 다행히 절 의심하지는 않네요. 얘가 나을 때까지 여기 있으래요. 약을 사과 세 알에 고루고루 바르라고 했는데 한 알에 왕창 발라서 그런 것 같대요. ”

 

“ 어느 쪽이든 변할 건 없어! 그 자식은 인간 말종에 더러운 살인마야! 어린 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런 짓을 하나! ”

 

“ 국장은... 걔가 자기 인사말을 중간에 끊었다고 앙심을 품은 것 같아요. ”

 

“ 인사말 한 번만 더 끊었다가는 대량학살이라도 하겠군! ”

 

 

노의사는 부르르 떨며 화를 냈다. 베르닌은 스타브로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말대꾸를 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물었다.

 

 

“ 저, 선생님. 미샤는 정신이 들었나요? ”

 

“ 잠깐 깨긴 했는데 계속 헛소리만 하고 정신도 오락가락해서 도로 재웠어. 아마 오늘은 종일 그럴 거야. ”

 

“ 괜찮아지는 거죠? 그렇죠? ”

 

글쎄다, 부작용 때문에 약물을 전혀 못 쓰니... 그래도 어제 달여 준 약초가 좀 듣는 것 같으니 다행이긴 한데, 그나마 얼마 남지도 않았어. 그게 수도원 주변에만 자라는 건데 있다가 마누라에게 좀 캐 오라 해야겠어. ”

 

어, 제가 갔다 올게요. 저 여기서 근무하라고 지시받았어요. 시간 많아요. ”

 

“ 네 녀석은 약초 구분할 줄 모르잖아. ”

 

“ 가르쳐주시면 되잖아요. 저희 집에 식물도감 있는데 그거 가져오면... ”

 

“ 웬 식물도감 타령이냐, 책상물림이라더니 정말 그렇구나. 쯧쯧. 제냐, 이 녀석한테 흰머리천사날개풀 캐는 법 좀 알려줘라. 바구니랑 숟가락 갖다 주고. ”

 

 

아직 진료 시간 전이라 커피를 마시고 있던 예브게니가 약제실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접시와 바구니, 면장갑 한 켤레, 나무로 만든 숟가락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베르닌은 접시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식물을 주의 깊게 살폈다.

 

 

“ 이게 흰머리 어쩌고 하는 풀이에요? ”

 

흰머리천사날개풀이요. ”

 

“ 이름 진짜 어렵네요. ”

 

“ 이름 외워두는 게 찾기 편하실 거예요. 딱 그렇게 생겼거든요. 이거 보세요, 맨 위 끝부분은 흰색이고 동그랗게 고리 모양이잖아요. 여기 중간에 달린 두 장의 큰 풀잎이 날개예요. 얘들은 한데 모여 자라기는 하는데 키가 작고 지팡이 모양으로 처져 있어요. 그래서 다른 풀들 사이에 섞이면 잘 안 보여요. 그러니까 몸을 바짝 낮춰야 찾을 수 있어요. 큰 풀들이나 나무 주변에 바짝 붙어 자라거든요. 그리고 잎도 중요하지만 뿌리에 있는 진액이 해독 작용을 하니까 뿌리를 다치면 절대 안 돼요. 쇠붙이가 닿아도 안 되고요. 그래서 이 나무 숟가락을 드리는 거예요. 흙을 파내서 뿌리까지 조심해서 캐내야 돼요. ”

 

“ 어, 뭔가 어렵네요. 얼마나 캐야 돼요? ”

 

“ 많을수록 좋은데... 달이면 진짜 얼마 안 나오거든요. 이 바구니 꽉 채워도 세 컵 나올까 말까예요. 미샤한테는 지금 약을 못 쓰니까 이것밖에 못 주거든요. ”

 

“ 바구니 더 주세요. 많이 캐올 테니까. ”

 

“ 이 바구니 하나 채우는 것도 시간 오래 걸릴 거예요. ”

 

“ 그래도... 많이많이 캐올 거예요. 바구니 하나 더 줘요. 근데 아직 겨울인데 풀이 있을까요? ”

 

“ 원래 늦겨울부터 봄까지만 자라요. 그리고 수도원 뒤뜰이 다른 데보다 해도 잘 들고 따뜻하거든요. 그래서 요맘때는 거기서만 캘 수 있어요. 2월 중순부터 올라오니까 지금은 꽤 자랐을 거예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

 

 

베르닌은 곧장 숲으로 가려다가 잠깐 병실로 올라가보았다. 왕재수는 여전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쉭쉭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누워 있었다. 의식이 없으니 못 알아들을 게 뻔했지만 베르닌은 몸을 굽혀서 그의 귓가에 대고 조그맣게 말했다.

 

 

“ 미셴카, 내가 약초 캐올게. 그거 먹으면 안 아플 거래.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나 올 때까지 꼭 정신 차려야 돼! ”

 

 

 

베르닌은 차를 몰고 강변도로를 쭉 달렸다. 검은 숲에 있는 가브리엘 수도원으로 갔다. 혁명 이후 수도원은 종교 박물관이 되어 있었고 미사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신도들이 삼삼오오 찾아오곤 했다. 수도원은 가브릴로프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였지만 정교 신자가 아닌 베르닌은 어릴 때 외에는 이곳에 와본 적이 없었다.

 

차를 입구 쪽에 세워놓고 바구니 두 개에 풀 한 포기, 면장갑 한 켤레와 나무 숟가락 두 개를 든 채 한참 풀밭과 화단을 지나 걸어가자 수도원 건물들과 첨탑, 천사상이 나타났다. 뒤뜰이 어느 쪽인가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검정 옷을 입은 대머리 노인이 나타났다. 수도원의 책임자인 예고르 사제였다. 베르닌은 좀 움츠러들었지만 사제는 상냥한 어조로 그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 저, 신부님. 저는 다닐이라고 하는데요, 흰천사날개머리, 아니, 흰날개... 저... 하여튼 끝이 하얗고 고리가 달리고 날개모양 잎이 달린 약초를 캐러 왔어요. ”

 

“ 흰머리천사날개풀 얘기구먼. 그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자네가 어떻게 아나? ”

 

“ 레프 사벨리예비치, 그러니까 스타브로프 선생님이 보내셨어요. 굉장히 아픈 애가 있는데 약초가 많이 필요하대요. 달여서 먹여야 한다고. ”

 

“ 저런, 레부슈카가 보냈구먼. 작년에도 내가 좀 캐서 보냈는데 벌써 다 쓴 모양이군. 이리 오게. 며칠 전에 왔으면 미리 캐 놓은 게 남아 있었을 텐데 벌목공 애들이 뱀에 물려서 내가 다 써버렸지 뭔가. 근데 시내 쪽이면 뱀에 물린 것도 아닐 텐데. 레부슈카가 웬만하면 이거 안 써도 애들 다 고치는데. ”

 

“ 다른 약이 안 듣는대요. 그래서 이 약초가 많이 필요하대요. 그런데 신부님은 의사 선생님과 잘 아시나 봐요. 애칭으로 부르시고. ”

 

“ 그 영감탱이랑 어릴 때부터 이웃사촌이었거든. 근데 죽어도 신앙은 안 받아들인다니까. 영감쟁이가 성질은 더러워도 착해. 사람도 많이 살렸고. 자, 이쪽으로 오게. 도와주겠네. 그런데 웬 바구니를 그렇게 큰 걸 두 개나 가져왔나. ”

 

“ 애가 너무 아파서요. 정신도 못 차리고, 이것밖에 희망이 없어서요. 많이많이 가져가야 돼요, 흑... ”

 

 

사제는 베르닌의 등짝을 토닥토닥해주더니 뒤뜰로 그를 안내했다. 말이 뒤뜰이지 아주 넓은 풀밭이었다. 예브게니의 말대로 해가 잘 드는 곳이어서 마치 이곳에만 봄이 온 것 같았다. 심지어 꽃도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사제는 끙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히더니 어딘가를 가리켰다.

 

 

“ 저기 있구먼. 숟가락 좀 줘보게. 내가 하는 거 보고 배우게. ”

 

 

사제가 순식간에 풀을 여러 포기 캐냈다. 베르닌은 두 눈으로 보면서도 약초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우왕좌왕하자 사제가 말했다.

 

 

“ 자세를 낮춰야지. 자네는 키도 큰데 그렇게 뻣뻣하게 서서 어떻게 약초를 찾나. 이건 천사가 주고 간 풀이야! 하느님과 천사도 우리 앞에 몸을 낮추지 않나, 인간도 당연히 무릎을 꿇어야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거야!

 

 

베르닌은 종교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므로 그냥 ‘네네’ 하면서 무릎을 꿇고 몸을 낮췄다. 그러자 사제의 말대로 바닥에 모여 있는 흰색 고리 달린 풀들이 보였다. 나무 숟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흙을 파냈다. 검은 흙은 축축했고 다행히 얼어 있지도 않았다. 봄이 오고 있나 싶었다. 낑낑대며 간신히 풀 한 포기를 캐냈다. 사제가 칭찬했다.

 

 

“ 잘했네. 뿌리를 다치면 안 되거든. 자넨 여기서 캐게. 난 저쪽에서 캐고 있을 테니. 그 바구니 한 개는 나를 주고. ”

 

“ 어, 저... 신부님.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신부님 연세도 많으신데... 허리도 아프시잖아요. ”

 

“ 괜찮네. 사람이 많이 아프다는데 당연히 도와야지. 그리고 자네보다 내가 훨씬 빨리 캘 거야. 이맘때마다 이거 캐는 게 재미거든. 시작하세. ”

 

 

베르닌은 무릎을 꿇고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포기 캐는데 몇 분이나 걸렸다. 줄기를 끊어 먹기도 하고 아까운 뿌리를 뭉개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요령이 생겼다. 무릎과 허리가 뻐근했고 면장갑도 금세 닳았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한쪽을 다 캐고 나서 다른 쪽을 또 찾아보니 이제 하얀 고리가 달린 풀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열심히 흙을 파내고 뿌리째 채취했다. 그러다가 너무 열심히 팠는지, 아니면 힘 조절을 못해서인지 나무 숟가락이 툭 부러졌다. 손으로 좀 파다가 다행히 부러진 나뭇가지 한 개를 발견해서 그것으로 다시 파기 시작했다.

 

젖은 흙을 파내자 지렁이도 나오고 처음 보는 벌레들도 많이 나왔다. 살살 한쪽으로 치워가며 약초를 계속 캤다.

 

 

“ 어휴, 그 녀석이랑 같이 안 와서 천만다행이네. 이거 봤으면 또 호들갑떨고 울고불고 시골이 어쩌고 난리쳤을 거 아니야. ”

 

 

투덜대다가 갑자기 목구멍이 당기면서 눈물콧물이 찍 나왔다. 장갑이고 소맷자락이고 온통 흙투성이라 닦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훌쩍 하고 콧물을 들이마시면서 그는 계속 약초를 캤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기저기를 기어 다니며 약초를 캐고 있는데 사제가 다가와서 그를 불렀다.

 

 

“ 다닐, 그만 됐네. 바구니가 넘칠 지경이군. 나도 이쪽에 한 바구니 캐 놨으니 가져가면 될 거야. 추운데 갑자기 그렇게 땀을 흘리고 흙을 파면 감기 걸린다네. 이쪽으로 와서 뜨거운 거 한 잔 마시고 요기 좀 하고 가게. 점심때가 지났다네. ”

 

 

베르닌은 아직도 참나무 아래에 약초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더 캐고 싶었지만 사제의 말대로 바구니가 넘칠 지경이었기 때문에 무릎의 흙을 털고 일어났다.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사제는 그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픈 아이가 빨리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린 후 뜨겁게 데운 나무열매 음료에 꿀을 타서 허브 잎사귀를 띄워 한 잔 주었다. 쭉 마시자 차갑게 얼었던 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볶은 버섯과 으깬 감자로 속을 넣은 두툼한 블린과 비트 피클도 일품이었다. 베르닌은 허겁지겁 먹었다. 너무 맛있었다.

 

 

“ 신부님, 감사합니다. 약초도 캐주시고 점심까지 주시다니. ”

 

“ 뭘, 하느님의 종인데 당연한 걸 가지고. 바구니를 엎을 수도 있으니 이 상자에 담아 가게. 그리고 열매즙 한 병 넣었으니 아픈 애가 정신 좀 차리면 따끈하게 데워서 꿀 타서 먹이게나. 기력 보충에 도움이 될 거야. 레부슈카에게 안부 전해주고. 그럼 잘 가게. ”

 

 

베르닌은 흰머리천사날개풀을 가득 담은 상자와 나무열매즙 한 병을 들고 수도원을 나왔다. 차에 타기 전에 돌아서서 수도원 정문과 천사상을 향해. 순서도 헷갈리는 성호를 긋고 꾸벅 인사를 했다.

 

‘ 하느님 고마워요. 그 녀석이 빨리 낫게 해 주세요. 신부님 고마워요. 천사야 고마워. ’

 

 

 

*    *    *

 

 

 

 

상자에 가득 채워 온 약초를 보고 스타브로프는 처음으로 베르닌을 칭찬했다.

 

 

“ 잘했구나. 밤중까지 캐려나 싶었는데, 의외의 재주가 있군. ”

 

“ 저어, 신부님이 도와주셨어요. 선생님 동기라고 하시면서. ”

 

“ 그러면 그렇지, 예고르의 솜씨군. 오, 좋아. 열매즙도 챙겨줬네. 노인네가 그래도 쓸모는 있다니까. 그 친구 만났으면 점심도 얻어먹었겠군. ”

 

“ 네, 맛있었어요. 저 수도원에서 밥 처음 먹어봤는데 진짜 맛있었어요. 담백한 맛이라 미샤가 좋아할 것 같아요, 나중에 데려가야겠어요. ”

 

“ 걘 벌써 내가 데려갔었어. 예고르하고도 몇 번 봤고. 다들 네놈처럼 발랑 까진 무신론자 놈팽이는 아니라고! ”

 

“ 어, 근데 걔 무신론자랬는데. 그리고 선생님도 교회 안 가시잖아요. ”

 

“ 여기서 중요한 건 ‘무신론자’가 아니고 ‘발랑 까진 놈팽이’라는 것이야! ”

 

“ 억울해요. 발랑 까진 놈팽이란 말 처음 들어요. 전 책상물림인데.

 

“ KGB의 녹을 먹고 있으니 감수해! ”

 

 

베르닌은 의사와 마르가리타에게 약초를 맡기고 일단 집으로 갔다. 흙투성이가 된 옷을 벗고 깨끗하게 샤워를 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로만 코즐로프와 마주쳤다. 표정이 아주 좋지 않았다.

 

 

“ 어, 당신... 언제 왔어요? ”

 

“ 그 자식 어디 사냐! ”

 

“ 누구요? ”

 

스페호프! 죽여 버릴 거야! 모가지를 비틀어버릴 거야!

 

“ 어, 저... 안돼요. 그럼 당신 체포된단 말이에요. 미샤가 당신 잡혀갈까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

 

일이 이렇게 됐는데 잡혀가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내 그 살인마 새끼를!

 

 

코즐로프는 이를 갈면서 주먹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꽝 하고 쳤다.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으아, 당신 뭐해요! 연주자는 손이 생명이라면서! 분명히 미샤가 그랬는데... 왜 손을 망가뜨려요! ”

 

“ 그놈 면상을 짓이겨주고 싶은데 여기 없으니까! ”

 

“ 어디까지 들었어요? ”

 

“ 들을 만큼 다. 류다한테 얘기 듣고 아까 병원에도 갔었어. 노인네가 악착같이 숨기잖아, 보호자 아니라고 나 못 들어오게 하고! 날 의심하다니... 그렇다고 우리 사이를 털어놓기도 뭐하고... 젠장! ”

 

“ 아... 그렇구나. 그럼 걔 못 본 거예요? 하긴 지금은 들어가 봤자 애가 정신도 못 차리니 별 소용이 없으니... ”

 

당장 나도 들어갈 수 있게 하란 말이야! 네놈 같은 앞잡이는 보호자 등록하고 나는 이게 뭐야!

 

“ 어, 알겠어요. 내가 선생님한테 얘기할게요. 근데... 류다에게 들은 거면 지금 극장에 소문 다 퍼졌겠네요? ”

 

“ 안 퍼졌어. 내가 류다 입 막았어. 어제 애 실려 가자마자 류다가 우리 집에 왔었어. ”

 

“ 집에요? 전화도 아니고? ”

 

“ 류다가 바보냐, 그 여자가 극장에서 비서 노릇만 20년이야. 돌아가는 꼴 보니 당연히 도청될 거 같으니까 직접 온 거지. 나랑 걔랑 제일 친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나마 믿을만하다고 생각해서. 못 참겠다면서 성명서 내고 애들한테 다 알리자는 걸 간신히 막았다니까. ”

 

“ 어, 당신 진짜 의외네요. 국장 때려죽이니 마니 난리면서 어떻게 또 류다한테는 입 다물라고 했어요? ”

 

“ 성명서 내고 애들한테 알리면 뭐, 스페호프가 눈이나 깜짝하겠냐? 수사 담당하는 것도 네놈들이고 우리 귀염둥이도 유배 상태라서 네놈들 소관인데. 증거도 없고 도리어 애들만 찍혀서 서류에 빨간 줄 가고. 우리 아기도 무시 안 당하려고 그렇게 기를 쓰고 있는데 KGB 끄나풀한테 이런 짓이나 당한다는 거 극장 애들한테 알려지면 못 참지. 걔가 왜 악착같이 매일 기어 나오는데. 아픈 거 보여주기 싫어서 그런 거잖아. 하여튼 류다도 이해했어. 지금 극장에서 이거 아는 거 그 여자랑 나밖에 없어. ”

 

“ 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

 

“ 어, 그래? 목격자가 더 있었냐? ”

 

“ 아뇨, 그게 아니고요. 국장이 눈 깜짝하든 말든 나쁜 짓을 했으니까 공론화되는 게 맞다고요. 나는, 나는 보안서약을 해서 내부고발을 할 수가 없게 돼 있어요. 그리고 설령 고발을 한다 해도 내가 잘리면 국장이 걔한테 ‘진짜’ 감시요원을 붙일 테니까 위험하다고요. 하지만 극장에서 들고 일어나는 건 다르잖아요. 걘 당신네 감독이니까. 당신들은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고... 정의 실현을... ”

 

“ 휴, 이런 책상물림 같으니. 언제 철들래.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아냐?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의 따윈 없어. 힘센 놈들이 이기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 아기가 이렇게 됐지. ”

 

 

베르닌은 우울해졌다. 고개를 떨어뜨렸다가 코즐로프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 걔도 그런 식으로 얘기하던데. 그래서 당신이랑 사귀는 건가 보네요. 생각이 같아서... ”

 

“ 걔랑 나는 해결 방식이 다르지. 우리 귀염둥이는 나쁜 짓 당해도 그냥 나 몰라라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지만, 나는 그런 거 아니야! 나쁜 짓 당했으면 갚아야지! 공권력 따위 안 믿어. 내 손으로 그 더러운 놈 모가지를!

 

“ 으아, 제발 그만둬요. 당신 잡혀가면 쟤 정말 못 견딜 거라고요! 가뜩이나 아픈 애를 왜 더 괴롭히려고. ”

 

“ 안 잡혀가면 되지! 하여튼 그 자식 두고 봐! ”

 

 

베르닌은 코즐로프의 분노를 무마하기 위해 서둘러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의사에게 코즐로프가 왕재수와 가장 친한 사이라고 말해주고 옆에서 돌봐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의사는 툴툴댔다.

 

 

“ 어찌 된 게 이 놈의 꼬맹이가 사람 보는 눈이 없다니까. 그나마 친구라고 있는 녀석들이 한 놈은 앞잡이, 한 놈은 키다리 깡패.

 

“ 말은 바로 하셔야죠! 이 녀석은 앞잡이 맞지만 저는 어엿한 오케스트라 수석이고 예술가란 말입니다! ”

 

“ 그러면 뭐해! 걸핏하면 주먹질이나 하면서. 에이, 하여튼 따라오게. 애 조금 전에 깼으니까. ”

 

 

베르닌은 뛸 듯이 기뻤다.

 

 

“ 정말요? 그럼 이제 괜찮은 거예요? ”

 

“ 아직 헛소리를 하는데, 그래도 어제보다는 좀 나아. 그냥 얼굴만 잠깐 보고 나와, 호들갑 떨고 소리 지르지 말고. 애 놀라니까. ”

 

 

왕재수는 정말 눈을 뜨고 있었다. 마르가리타가 머리를 받치고 초록색 액체를 숟가락으로 떠먹이고 있었다. 흰머리천사날개풀을 달여서 만든 약초즙이 분명했다. 한 숟가락 받아먹을 때마다 왕재수가 굉장히 싫어했다.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끙끙거렸다.

 

 

“ 아이 써... ”

 

“ 그래도 다 삼켜야 안 아파. ”

 

“ 얼마나 남았어요? ”

 

“ 세 숟가락. ”

 

“ 한꺼번에... ”

 

“ 많으면 못 삼켜서 안 돼. ”

 

 

왕재수는 아주 괴로워하며 느릿느릿 약초즙을 받아먹었다. 베르닌은 대체 무슨 맛일까 싶어서 컵 가장자리에 묻은 즙을 슬쩍 손가락으로 찍어 핥아먹어 보았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썼다. 초콜릿이나 사탕 생각이 간절했다.

 

 

마침내 약초즙을 다 먹이는데 성공한 마르가리타는 베개를 고쳐주고 왕재수를 다시 뉘어주었다. 왕재수는 기침을 좀 하더니 금방 눈을 감았다. 잠든 줄 알고 베르닌과 코즐로프가 나가려는데 다시 눈을 뜨더니 그들 쪽을 보았다. 금세 얼굴이 펴졌다. 자기 쪽으로 오라고 턱짓을 했다. 코즐로프가 후다닥 달려가 왕재수의 손을 꼭 잡고 뺨에 뽀뽀를 했다.

 

 

우리 아기, 귀염둥이 내 강아지. 얼마나 아팠니. 이제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 ”

 

“ 손에 피 나. ”

 

“ 응? ”

 

“ 손 다쳤잖아! 손 다치면 안 되는데. 어휴... 맨날맨날... ”

 

 

코즐로프는 아까 엘리베이터 문을 치는 바람에 살갗이 벗겨진 손등을 내려다보더니 급하게 소매로 핏방울을 닦았다.

 

 

“ 아니야, 이거 밥 먹다가 토마토 소스 묻은 거야. 피 아니야. ”

 

“ 오늘 무슨 요일이야? ”

 

“ 수요일이야. ”

 

“ 나 극장 갈래. 오늘 공연... ”

 

“ 오늘 발레 공연 없어, 목요일하고 토요일에 있어. ”

 

“ 아니야, 있어! 나 오늘 무대 올라가는데. 오늘 로미오와 줄리엣이야! ”

 

“ 아가야, 우리 극장엔 로미오와 줄리엣 안 올리잖니. ”

 

“ 으응, 무슨 소리야. 나 벌써 몇 번이나 췄는데. 지나 어디 갔지? ”

 

 

코즐로프가 당황하고 있는데 마르가리타가 슬며시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어르고 달랬다.

 

 

“ 미셴카, 로만이 잘못 말한 거야. 오늘 수요일 아니야. 오늘은 너 무대 안 올라가니까 이제 자야지. ”

 

“ 아닌데, 나 오늘 올라가야 되는데. 내 어마어마한 춤 보려고 팬들 엄청 많이 올 텐데. ”

 

“ 그래그래, 근데 좀 자야 무대도 올라갈 수 있어. 약 먹었으니까 자자. ”

 

“ 풀 맛 나는 거, 너무 써, 너무 싫어. 맛없어. 흑... 파인애플... ”

 

 

횡설수설하다가 왕재수는 뜬금없이 파인애플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 파인애플. 엉엉... 파인애플 먹고 싶어. 파인애플... 아이 더워. 아이 써... 흑, 파인애플... ”

 

“ 그래그래, 자고 나서 파인애플 먹자. 지금은 자야 돼. 불 꺼줄게. ”

 

 

마르가리타가 급하게 불을 끄고 커튼을 쳤다. 캄캄해지자 왕재수가 조용해지더니 잠이 들었다.

 

 

병실에서 나온 코즐로프가 굉장히 속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손 다친 거 야단치길래 정신 든 줄 알았더니 아직 오락가락하는구나. ”

 

“ 의사 선생님이 오늘 하루종일 그럴 거랬어요.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어젠 진짜 장난 아니었거든요. 근데 갑자기 파인애플을 찾네... 쟤 원래 그거 좋아했어요? ”

 

“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냐. 쟤 밥이랑 간식 챙겨주는 건 너였잖아. ”

 

“ 사과 좋아하는 건 아는데... 과일은 다 잘 먹는데 파인애플은 한 번도 먹은 적 없거든요. ”

 

“ 먹기야 먹겠지. 우리 동네에 그런 부르주아 과일이 안 들어오니까 안 먹었겠지. 약 때문에 입맛이 쓰니까 그런가보다. 오렌지나 좀 사와야겠다. ”

 

“ 당신 극장 안 가도 돼요? 오늘 연주 없어요? ”

 

“ 있어. 있는데 안 갈 거야! 우리 아기가 이 모양인데! ”

 

“ 여긴 내가 있어줄 테니까 극장 가요. 쟤 저렇게 헛소리 하는 와중에도 당신 손 다친 건 알아보잖아요. 연주 빠졌다는 거 알면 화낼 거예요. ”

 

 

코즐로프는 한숨을 쉬었지만 그의 말이 맞다고 했다. 시계를 보더니 욕을 하면서 극장에 갔다. 베르닌은 딱히 할 일도 없고 왕재수가 자는 걸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마르가리타에게 갔다. 약초 손질하는 것을 도왔다. 흙을 살살 떨어내고 흐르는 물에 풀을 깨끗이 씻었다. 마르가리타는 절반은 채반에 받쳐 물기를 탈탈 털고 나머지 절반은 커다란 냄비에 넣고 물을 붓더니 약불로 달이기 시작했다.

 

 

“ 저, 마르가리타 이사예브나. 이 절반은 어떻게 하나요? ”

 

“ 그건 저쪽 창가에 펼쳐놔 주렴. 햇볕에 좀 말리게. 원래는 말려서 쓰는 게 더 약효가 좋은데 지금은 남은 게 별로 없어서... 급하니까 생으로 먼저 달여야지. 그대로 달이면 즙이 얼마 안 나온단다. ”

 

“ 이거 계속 먹이면 나아지는 거죠? ”

 

“ 음, 어젯밤보다는 아침이 나았고, 지금이 아침보다 좀 나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독소가 좀 빠지면 뭐라도 좀 먹여야 할 텐데. 열이 심해서 그런지 아침부터 계속 파인애플만 찾는구나. ”

 

“ 진짜 먹고 싶은가보네... 파인애플을 어디서 구하지... ”

 

그러게 말이야. 우리 동네에 파인애플이란 게 들어왔던 때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구나. 나도 옛날에 모스크바에 갔을 때 한 번 먹어본 게 전부니... ”

 

“ 과일 가게에 부탁하면 받아다 주지 않을까요? ”

 

“ 오렌지랑 레몬까지는 되는데 파인애플 같은 고급 과일은 안 될 거야. ”

 

“ 에이... 하여튼 입맛만 고급이야, 싸가지 없는 녀석. ”

 

 

베르닌은 투덜거리면서 병원을 나왔다. 밑져야 본전이니 과일 가게에나 가보자 싶어서. 아직 오후인데도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한참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파인애플은 없었다. 점원에게 물어보았다가 욕을 먹었다.

 

 

“ 뭐라고요? 파인애플? 웬 뚱딴지같은 소리람. 여기가 무슨 동남아예요? 강 얼음도 다 안 녹았는데 사과도 배도 아니고 웬 파인애플! 완전 부르주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

 

 

그래서 베르닌은 시들시들한 오렌지를 두 알 사서 돌아왔다. 다섯 시쯤 왕재수가 다시 깨어났다. 여전히 헛소리를 하다가 또 파인애플을 찾았다. 의사가 오렌지는 줘도 된다고 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열심히 껍질을 까고 오렌지를 짜서 즙을 냈다. 하지만 왕재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으응, 이거 아니야! 파인애플... 파인애플 먹고 싶어. ”

 

“ 나중에 갖다 줄게. 이거 먼저 먹어. 너 목마르잖아. ”

 

“ 흑, 파인애플 아니야... 이거 싫어. ”

 

 

입술에 컵을 대주고 오렌지즙을 흘려 넣자 왕재수가 반쯤 먹고 반쯤은 혀로 밀어내버렸다. 그리고는 베르닌을 꾸짖었다.

 

 

막 억지로 먹이고! 파인애플도 아닌데. 흑... 엄마... ”

 

“ 조금만 더 먹어봐. 그래야 기운을 차리지. 오렌지도 달고 시원해... ”

 

“ 엉엉, 시골... 파인애플 없어. 엄마... 아빠... ”

 

 

왕재수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훌쩍훌쩍 울면서 허공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다가 베르닌의 팔을 베고 잠이 들었다. 밤 아홉 시에도 한번 깨서 파인애플을 찾고 새벽 네 시에도 깨서 파인애플을 찾았다. 그럴 때마다 실망해서 울다가 열에 들떠서 잠들곤 했다. 베르닌은 안타까운 나머지 파인애플을 따러 가는 꿈을 계속 꿨다.

 

 

 

*   *   *

 

 

 

다음날이 되자 왕재수는 조금 나아졌다. 여전히 열이 나고 온몸에 힘이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잠시 일어나 앉고 미음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오후에는 코즐로프와 베르닌의 얼굴도 알아보았다. 베르닌을 보고 눈을 깜박이며 걱정했다.

 

 

“ 너 왜 여기 있어? 국장이 자르면 어떡하니. 벌목공... ”

 

“ 안 잘라. 너 괜찮아질 때까지 여기 있기로 했어. ”

 

“ 면도도 안 했네. 아 지저분해. ”

 

“ 이제 안 아프냐, 면도 안 한 것도 보이고! ”

 

“ 아파. 근데 엄청엄청 아프진 않아. ”

 

 

왕재수는 그러더니 코즐로프에게는 쌀쌀맞게 빨리 극장에 가라고 했다. 코즐로프는 굉장히 섭섭한 눈치였다.

 

 

“ 우리 아가야, 어쩌면 그러니. 이 녀석한테는 그렇게 친절하게 말해주고 왜 나한테는 눈길 한 번 안 주니. ”

 

“ 잡혀간단 말이야. 빨리 가. ”

 

“ 안 잡혀가. 걱정하지 마. ”

 

“ 당신한테도 사과 먹이면 어떡해. 흑... ”

 

 

왕재수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또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베르닌이 급하게 그를 달랬다.

 

 

“ 아니야, 안 그래. 국장이 로만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라. 걱정하지 마. ”

 

“ 사과 맛있었어. 예뻤어. 달았어. 시원했어. 독 있는 건 줄 몰랐어. 엉엉, 몰라서 먹은 거야. 진짜야. ”

 

“ 그래그래, 네 잘못 아니야. 우리 아기는 사과 좋아하잖아. 독 묻혀놓은 놈이 나쁜 거야. 네 잘못 하나도 아니야. ”

 

“ 더워. 목말라. 파인애플 먹고 싶어. ”

 

“ 지금 겨울이라 파인애플 파는 데가 없어. 배 깎아줄게 그거 먹자. 배도 달고 시원해. ”

 

“ 아니야, 배는 퍽퍽하고 파삭파삭해. 파인애플... ”

 

 

왕재수는 다시 파인애플 타령을 하면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베르닌이 배를 깎아서 한 조각 먹여주자 퍽퍽하고 떫다면서 뱉어버렸다. 두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스타브로프가 들어와서는 왕재수에게 다시 약초 달인 즙을 먹였다. 왕재수는 싫다고 발버둥치려다가 의사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고분고분하게 쓰디쓴 약초즙을 마셨다. 스타브로프는 미지근하게 적신 수건으로 왕재수의 이마를 닦아준 후 토닥토닥 재웠다.

 

 

“ 아직 열이 오르락내리락해서 그렇지. 그게 신경계 약물이라 정신 착란 증세가 좀 있어. 몸이 나아지면 착란도 가실 거다. 파인애플 타령하면서 헛소리하기 시작하면 열 오르는 거니까 그러면 나나 제냐를 불러. ”

 

“ 불쌍한 자식, 언제까지 이럴지. ”

 

먹고 싶은 걸 먹여주면 좀 나아질 텐데. 하고많은 것 중에 하필 파인애플인지. 안타깝구나. ”

 

 

의사가 혀를 차며 나갔다. 베르닌은 기필코 파인애플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코즐로프는 입술을 깨물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베르닌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고 휙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곰곰 생각하다가 병원을 나섰다. 차를 몰고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갔다. 출판문화국 옆 건물로 가서 비슈네브이 사드 편집실로 올라갔더니 깎아놓은 듯 잘생긴 남자 비서가 그를 맞아 주었다.

 

 

“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

 

“ 저는 다닐 베르닌인데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를 잠깐 볼 수 있을까요? ”

 

“ 음, 선약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어디에서 오셨나요? ”

 

“ 저어... 그러니까... 보안위원회... ”

 

 

비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검열국 쪽 공문은 벌써 다 처리했는데 또 무슨 문제가 있나요? ”

 

“ 아뇨, 그게 아니고요... 저,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 ”

 

 

그러자 비서는 알만하다는 듯 비웃는 표정을 띠었다.

 

 

“ 우리 편집장님에게 개인적으로 볼 일 있다고 찾아오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그냥 돌아가시죠. ”

 

“ 아니에요! 저... 저 데이트 신청하러 온 거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

 

“ 안드류샤!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

 

 

렐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렐렌카. 아무것도 아니에요. 또 추종자 하나가 찾아와서 귀찮게 굴어서요. ”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저예요! 다닐 베르닌!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1분만 시간 내주세요. 제발... 미샤 때문이에요. ”

 

다냐? 뭐라고요? 미샤?

 

 

렐랴가 문을 열더니 예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비서를 야단쳤다.

 

 

“ 왜 나 찾아온 손님을 못 들어오게 막고 있는 거야! 나한테 얘기도 안 해주고! 다냐는 나랑 잘 아는 사이인데. 앞으로 다냐 오면 곧장 들여보내!

 

 

베르닌은 잠시 의기양양하게 비서를 째려보고는 편집장실로 들어갔다. 렐랴의 사무실은 굉장히 예쁘고 아늑했다. 꽃향기가 떠돌았고 레이스 커튼에 결 좋은 나무 책장에 장식 달린 테이블에, 그야말로 여성적이고 우아한 방이었다. 티 테이블 위에는 사과와 오렌지, 초콜릿 캔디가 담겨 있는 예쁜 접시가 놓여 있었다. 과일 접시를 보니 희망이 솟았다.

 

렐랴는 그를 소파로 안내하며 상냥하게 물었다.

 

 

“ 차 마실래요, 다냐? ”

 

“ 어, 정말 감사한데요... 괜찮습니다. 시간이 없어서요. 저... ”

 

“ 미샤가 뭔가를 부탁했나요? 설마 제게 뭘 전해주라고? ”

 

 

렐랴가 기대에 찬 얼굴로 아름다운 회색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베르닌은 갑자기 미안해졌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 저, 그게 아니고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밖에는 도와주실 분이 없을 것 같아서요. 사실은 미샤가 많이 아프거든요. 그래서... ”

 

뭐라고요? 미샤가 아프다고요? 어머나, 어디가요? 아이 참... 불쌍한 미샤. 수용소에서 고생했다더니... 지금 어디 있는데요? 간호가 필요한가요? ”

 

 

렐랴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주섬주섬 스카프를 매더니 옷걸이에서 코트를 낚아챘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다. 당황한 베르닌은 더듬거렸다.

 

 

“ 어, 그게...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지금 면회는 안 되고요. 저, 그러니까... 파인애플... ”

 

“ 아니, 얼마나 아프면 면회도 안 된다는 건가요? 세상에... 불쌍한 미샤. 근데 뭐라고요? 파인애플? ”

 

“ 저어, 걔가 열이 많이 나서 그런지 자꾸 파인애플이 먹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과일 가게에 가도 파인애플이 없고, 지금 겨울이라 구할 데도 없다고 해서요.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당신은 우리 동네에서 요리도 제일 잘 하고 수입 식재료도 많이 쓰고 또 외국문학도 전공하셨고 집안도 좋으니까 파인애플도 구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 ”

 

“ 그랬군요. 고마워요, 다냐. 미샤가 아플 때 제일 먼저 나를 생각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음... 파인애플... 음... 어쩌죠? 아무리 생각해봐도 파인애플은 구할 데가 없는데. 내가 수입 식재료나 과일을 구해오는 루트가 있긴 한데 열대 과일은 취급을 안 해요. 내 요리에도 그쪽 과일들은 써본 적이 없거든요. 일단 모스크바에 있는 지인에게 한번 부탁해볼게요. 근데 아직 겨울이라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보통 모스크바에 있는 물건도 여기까지 받으려면 2~3일 걸리는데 지금은 아마 못 구할 거예요. 우리 연방 국가들 쪽이라면... 음, 중앙아시아 쪽에는 있으려나요? 아니지, 그쪽은 참외랑 수박이지... 아아, 어쩌면 좋죠. ”

 

 

렐랴가 속상해하다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비서에게 소리를 질렀다.

 

 

안드류샤, 모스크바에 전화 좀 넣어줘! 발레리야한테!

 

 

그리고는 잠시 후 전화가 연결되자 수화기를 꼭 붙들고 한동안 열띠게 대화를 나눴다. 베르닌은 제발 그 발레리야라는 모스크바 여인이 파인애플을 비행기로 특급 발송해줄 수 있다고 말해주기만을 빌었다. 그러나 잠시 후 렐랴가 전화를 끊더니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 파인애플은 안 된대요. 전에는 쿠바 쪽에서 들여왔는데 지금 그쪽에 무슨 병이 돌아서 검역 때문에 과일이 못 건너온대요. 어쩌죠, 다냐... 불쌍한 미샤, 다른 건 먹고 싶어 하는 거 없나요? 아참, 바나나 있어요. 바나나도 괜찮지 않을까요? 잠깐만요. ”

 

 

렐랴는 창가로 갔다. 바구니에서 바나나 한 송이를 꺼내고 냉장고에서 체리가 들어 있는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 미샤가 체리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이거 우리 별장에서 딴 거예요. 우리 벚나무는 양키들 체리처럼 열매가 달아요. 하나도 쓰지 않아요. 바나나도 어렵게 구한 거예요. 이거라도 가져가요, 다냐. ”

 

“ 고마워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이렇게 귀한 과일들을 챙겨주시다니. 정말 천사 같네요. 미샤도 고마워할 거예요. ”

 

“ 그런데 정말 내가 가서 간호해 주면 안 되나요? 여자의 손길이 필요할 것 같은데. ”

 

“ 의사 선생님이 지금은 안정해야 되니까 면회하면 안 된대요. 나아지면 말씀드릴게요. ”

 

“ 그래요, 다냐. 미샤가 아프다니 너무 속상해요. 바나나랑 체리 먹으면 나아질 거예요. 당신도 그 사람을 위해 파인애플 구하러 오고 착하네요. 혹시라도 발레리야가 파인애플 구하면 보내준다고 했으니까 들어오면 전화할게요. ”

 

 

렐랴는 예쁜 바구니에 바나나와 체리를 담아주고는 창가에 있는 커다란 유리병에서 아몬드 쿠키를 한줌 집어 손수건으로 싸주었다.

 

 

“ 다냐, 가면서 쿠키라도 먹어요. 왜 이렇게 뺨이 쏙 들어갔어요. 파인애플 구하러 다니느라 밥도 못 먹었나보네. 다음에 미샤 나으면 우리 집 놀러 와요, 맛있는 거 해 줄 테니까. 그럼 잘 가요. ”

 

 

베르닌은 바나나와 체리와 아몬드 쿠키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렐랴의 고운 마음씨에 가슴이 떨리도록 감동했다. 미모와 요리 솜씨와 비단결 같은 마음씨를 다 갖춘 보기 드문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까지 챙겨주며 쿠키를 싸주다니 정말 황홀할 지경이었다. 분명히 왕재수도 바나나와 체리를 보면 감동할 것이다. 바나나도 고급 과일 아닌가!

 

 

 

왕재수는 계속 자다 깨다 하고 있었다. 처음처럼 40도를 훨씬 넘는 고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열이 계속 났기 때문에 좀처럼 기운을 못 차렸다. 저녁이 되자 스타브로프는 왕재수를 깨우더니 엄격하게 말했다.

 

 

“ 이제 죽이랑 수프는 먹어도 되니까 먹어보자. ”

 

“ 싫어요. 입맛 없어요. 잘래요. ”

 

“ 먹어야 열도 내려가고 기운도 나는 거야! 먹은 게 없으니까 자꾸 자고 싶은 거다. 먹고 나아야 극장에도 나가지. ”

 

“ 파인애플 먹고 싶은데... ”

 

엄동설한에 파인애플이 어디 있다고 그러느냐! 자꾸 어리광부리고 파인애플 타령만 하면 약초즙을 한 냄비 먹일 테다!

 

“ 약초즙 싫어... 흑... ”

 

 

왕재수가 흠칫 놀라더니 구슬만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훌쩍훌쩍 울면서 의사가 주는 대로 묽은 오트밀을 한 숟가락씩 받아먹었다. 먹으면서도 계속 쓴 맛이 난다고 괴로워했다. 베르닌은 옆에서 살살 달랬다.

 

 

“ 야, 꾹 참고 다 먹어. 의사 선생님 말이 맞아. 먹어야 낫지. 다 먹으면 맛있는 거 줄게. ”

 

“ 파인애플? ”

 

“ 아니, 근데 파인애플보다 맛있는 거야. 그러니까 오트밀 다 먹어, 응? ”

 

 

왕재수는 꾸역꾸역 오트밀을 다 먹었다. 그래봤자 어린이용 접시에 담겨 있어 얼마 되지도 않았다. 의사가 베르닌에게 건더기 없이 맑은 국물만 우려낸 생선수프를 반 컵 건네주며 마저 먹이라고 말한 후 나가버렸다. 왕재수에게 음식 먹이는 것이 노의사에겐 크나큰 도전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왕재수는 냄새도 맡기 싫어했다. 베르닌이 살살 달랬다.

 

 

“ 이거 너 좋아하는 우하야. 생선 수프 좋아하잖아. 좀 먹어봐. 기름기도 하나도 없네. ”

 

“ 비린내 나. 엉엉... ”

 

“ 비린내 하나도 안 나. 내가 끓여주는 것도 잘 먹었잖아. 이건 마르가리타 이사예브나가 직접 만드신 거야. 진짜 맛있는 우하야. ”

 

“ 비린내 나고 쓰단 말이야. 흐흑... 파인애플... ”

 

“ 착하지, 코 막고 먹자. 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 먹어야 낫는다고. 이거 먹고 맛있는 거 먹자. ”

 

 

왕재수는 괴로워하면서도 손가락으로 코를 쥐고는 우하를 한 모금씩 꼴깍 삼켰다. 그래도 튜브로 주입하던 첫날이나 한 숟가락씩 힘들게 넘기던 둘째 날을 생각하면 많이 나아진 거였다. 간신히 반 컵을 다 먹은 왕재수가 헉헉거리면서 베르닌에게 파인애플을 내놓으라고 했다. 베르닌은 창가에 놔뒀던 바구니를 가져왔다. 바나나 껍질을 까 주었다.

 

“ 먹어, 바나나야. 렐랴가 줬어. 너 빨리 나으라고. ”

 

왕재수는 고개를 저었다.

 

“ 안 먹어. 바나나 싫어. ”

 

“ 좀 먹어봐. 파인애플보다 바나나가 더 달고 맛있어. 이것도 수입이야. 비싼 거잖아. ”

 

“ 바나나 텁텁해. 목말라. 싫어. ”

 

 

베르닌은 바나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고 부드럽고 정말 맛있었다. 일부러 더 맛있게 먹었다.

 

 

“ 으음, 맛있다. 진짜 달다. 먹어볼래? ”

 

“ 너 다 먹어. ”

 

“ 어휴. 그럼 체리 먹어. 너 체리 좋아한다며. 렐랴가 별장에서 딴 거래. 그때 버찌잼도 이걸로 만들었나봐. 그 잼도 진짜 맛있었어. ”

 

 

왕재수는 체리를 두 알쯤 먹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씨를 뱉더니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파인애플 아니잖아. 분명히, 분명히 비린내 나는 거 먹으면 파인애플 준다고 했는데. ”

 

“ 내가 언제! 파인애플만큼 맛있는 거 준다고 했지! ”

 

“ 파인애플 왜 없어? 흑... ”

 

제발 그만 좀 해라! 이 겨울에 파인애플을 어디서 구하니! 여기가 무슨 미국이냐? 가게에도 없고 렐랴도 못 구한다잖아! 귀한 바나나까지 챙겨줬는데 그냥 이걸로 안 되니? 아프다고 자꾸 어리광만 부릴래?

 

 

“ 어... 다닐... 나한테 화내... 소리 질러. 흑... 무서워... 엉엉... ”

 

 

왕재수가 부들부들 떨더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굉장히 서럽게 울었다. 당황한 베르닌이 다가가자 무서워하면서 몸을 홱 웅크렸다.

 

 

“ 엉엉, 다닐이 나한테 소리 질러. 안 그랬는데 막 화내. 흑, 이제 막 때리려고. 소리 지르고 때리고 가두려고. 엉엉, 무서워. 로만... 엉엉... 유라, 유라 어딨어. 엉엉... ”

 

 

왕재수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면서 목을 놓아 울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어쩔 줄을 몰랐다. 최대한 목소리를 상냥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

 

 

“ 아니야, 나 소리 안 질러. 화 안 내. 미안해, 네가 바나나 안 먹어서 그랬어. 안 그럴게. 울지 마. 안 무서워. 나 하나도 안 무서워. 아무도 안 때려, 가두는 사람 없어. 아이 참 어떡하지... ”

 

 

베르닌이 계속 달래자 왕재수가 이불 사이로 눈만 빼꼼 내밀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열이 나서 얼굴도 눈동자도 새빨갰다.

 

 

‘ 아 맞다, 파인애플 타령하면 열 올라서 헛소리하는 거랬지. 독약 때문에 착란증도 있다고. 화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가뜩이나 소리 지르면 싫어하는 앤데. ’

 

 

다행히 왕재수는 베르닌이 어르고 달래자 곧 진정되었다. 울음도 그쳤다. 하지만 바나나와 체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아, 내 목걸이!

 

“ 어, 그거... 그거 그저께 의사 선생님이 풀어놨어. 너 열 때문에 막 몸부림쳐서 잘못하면 다친다고. ”

 

“ 안 돼... 내 목걸이. 유라가 준 건데... 목걸이... ”

 

 

왕재수는 엄마 잃은 어린애처럼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급하게 침대 곁에 있는 간이 캐비닛을 열었다. 손수건에 잘 싸놓았던 목걸이를 꺼냈다. 왕재수에게 보여주었다.

 

 

“ 자, 이거 봐. 여기 있잖아. 걱정하지 마. ”

 

“ 목걸이... 이리 줘. 흑... ”

 

 

왕재수가 목걸이를 홱 낚아챘다. 손으로 꼭 쥐었다. 하지만 손아귀에 힘이 없어서 목걸이가 주르르 미끄러져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왕재수가 또 기절할 것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재빨리 목걸이를 주웠다. 옷자락에 슥슥 닦은 후 왕재수의 목에 걸어주었다. 지금은 몸부림치지는 않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목걸이를 걸어주자 왕재수는 눈에 띄게 얌전해졌다. 손으로 십자가를 문지르더니 ‘아이, 파인애플...‘ 하고 두어 번 중얼거리고는 한숨을 폭 쉬고 갑자기 베개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잠이 들었다.

 

 

 

*   *   *

 

 

 

 

왕재수가 잠든 후 베르닌은 병실을 나왔다. 굳은 결심을 하고 구시가지의 작가 공방들을 지나 허름한 건물로 갔다. 이미 8시가 다 되어 있었기 때문에 문이 닫혀 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계단에서 보랴와 마주쳤다. 지난번처럼 군복 조끼 차림에 험상궂은 몰골이었다. 베르닌은 청어 통조림이 없는데 어떡하지 하고 순간 움츠러들었지만 보랴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 어, 너 왔구나. ”

 

“ 어, 안녕하세요. 기억하는군요. ”

 

“ 같이 보드카 마셨잖아. 당연히 기억하지. 바냐 보러 왔냐? ”

 

“ 예... ”

 

“ 근데 예쁜이는 어디 가고 너 혼자 와. ”

 

“ 어, 저... 무슨 얘긴지... ”

 

“ 우리 예쁜이 있잖아. 미셴카. 너랑 친하잖아. ”

 

“ 헉... 그걸 어떻게 알아요? 바냐가 분명히 고객들의 개인 정보에는 관심 없다 했는데! ”

 

“ 그거야 바냐가 그런 거지! 너 걔랑 친한 거 아니야? 식당에도 같이 몇 번 왔잖아. ”

 

“ 엥, 무슨 식당이요? ”

 

“ 너 우리 식당에 가끔 밥 먹으러 오잖아. 예쁜이는 더 자주 오고. ”

 

“ 엥? 식당? 당신 식당에서 일해요? ”

 

“ 스베촉. 나 거기 주방에 있거든. 예쁜이가 내가 해주는 요리 맛있다고 자주 오지. 여긴 부업 뛰는 거고. ”

 

 

베르닌은 기억을 더듬었다. 왕재수와 가끔 가는 극장과 이콘 박물관 사이에 있는 그 식당 이름이 스베촉이었던 것 같았다.

 

 

“ 엇, 당신 그 식당 요리사예요? 거기 음식 맛있던데. ”

 

“ 흠흠, 내가 좀 요리를 잘 하지. 지난 일요일에도 걔가 자기네 극장에 점심 좀 맞춰 달라 해서 내가 힘 좀 썼지. ”

 

“ 아, 맞아... 공연 때문에 무용수들 점심 그 식당에서 주문했다고... 그렇구나. 되게 의외네. ”

 

“ 뭐가 의외야! 내가 요리 잘 하는 게 의외냐? ”

 

“ 어... 예. 근데 뭐... 하여튼 엄청 맛있더라고요. 그렇구나. 아, 그래서 걔한테 요리책도 준 거구나.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보랴는 그를 안으로 데려갔다. 투레츠키가 예의 그 새빨간 소파에 비스듬하게 드러누워 담배를 피우며 음정과 박자가 전혀 안 맞는 노래를 흥얼대고 있었다. 랄라랄라 하고 휘파람을 불다가 베르닌을 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 어이 친구!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감사는 잘 넘겼냐? 안 잘렸어? ”

 

“ 어, 응... 덕분에. ”

 

“ 그래? 역시 2번을 쓴 거야? 동료 팔아넘기기... ”

 

“ 아니. 다행히 감사관이랑 아는 사람이 있어서 도와줬어. 그래서 징계를 안 받았어. ”

 

아, 그건 0번이지. 근데 너는 딱 보니까 그런 줄 같은 건 없어보여서 말 안했던 건데 구르는 재주가 있었구나. 아쉽네, 차라리 그때 잘렸으면 나랑 동업하는 건데. 하여튼 어서 와. 술 한 잔 할래? ”

 

“ 어, 고마워. 근데 오늘은 물건 좀 구하려고... ”

 

“ 그래? 뭔데? 말만 해. 다 있어. 없으면 구해줄 수 있고. ”

 

 

베르닌은 심호흡을 했다. 정말 이곳만큼은 오고 싶지 않았다. 투레츠키를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남은 희망이라고는 여기뿐이었다.

 

 

“ 파인애플. ”

 

“ 파인애플? 먹는 파인애플 말이야? ”

 

“ 응. 혹시 있어? 그거 수입이잖아. 너 밀수품들 다루잖... ”

 

야, 말조심해! 밀수품이라니. 다 내가 괜찮은 애들에게서 괜찮은 루트로 구해 오는 건데. 같은 말이라도 그렇게 하냐! ”

 

“ 어, 미안... 하여튼 넌 외제 다루니까... 파인애플 있어? 그러니까... 아픈 애가 있어서 자꾸 파인애플을... ”

 

“ 에이, 됐어. 사정 얘기할 필요 없어. 내가 그랬잖아, 고객의 개인적 정보는 취급 안 한다고. 그러니까 파인애플이 필요하다는 거지? 음, 파인애플이라... 지금은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잠깐 기다려봐. 물건이 많으니까 어쩌면 있을지도 몰라. 좀 앉아라. 내가 찾아보고 올 테니까. 근데 파인애플은 좀 비싸. ”

 

“ 으응... 비싸겠지... 그래도 있으면 살 거야. ”

 

“ 알았어. 좀 기다려봐. ”

 

 

돈 문제를 확인한 후 투레츠키는 잡동사니들 사이를 여기저기 헤집고 다녔다. 뭔가 그만의 질서에 따라 물건들을 배열해 놓은 모양인지 기호와 숫자를 중얼중얼대며 한동안 계속 잡동사니를 뒤졌다. 그러더니 혀를 찼다.

 

 

“ 지금은 없구만. 급하게 필요한 거야? ”

 

“ 어, 구할 수 있는 거야? ”

 

“ 못 구하는 게 어딨냐. 돈만 있으면 다 구하지. ”

 

“ 그치만... 렐랴에게 물어보니 지금 쿠바에서 전염병이 돌아서 검역 때문에 과일이 못 들어온다고... 중앙아시아, 수박, 참외... ”

 

“ 야, 너 지금 나 무시하냐? 내가 누군데! 난 바냐 투레츠키라고! 내가 못 구하는 건 없어! 언제까지 필요해? ”

 

“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내일은 아무래도 안 되려나? ”

 

“ 글쎄다. 이건 멀리서 가져오는 거라. 내일은 어렵겠는데. 모레까지는 들어올 거야. ”

 

“ 저, 혹시라도 내일 늦게라도 들어오면 나한테 연락해줄 수 있어? 전화번호 적어줄게. ”

 

“ 그래. 알았어. 속달은 비용 더 붙는데. ”

 

“ 그래도 부탁 좀 할게. 진짜 너밖에 없어. 그거 구해줄 사람... 부탁이야. ”

 

“ 흠, 그래. 내 능력이라면 구할 수 있지. 걱정 마. 자, 이제 됐으니까 술 한 잔 하자! 참, 너 생각 좀 해봤냐? 그 왕꼴통 스페호프랑 일하는 거 때려치우고 나랑 동업. 짭짤하게 쳐준다니까. 재미없잖아, 공무원 노릇. 뭐하러 그 병신들 뒤치다꺼리 해주냐. 나라 위해 목숨 바칠 일 있냐. 그놈들 다 사기꾼인데. ”

 

 

베르닌은 평소 같았으면 ‘아니야! 나는 국가와 인민을 위해 일해! 사명 의식이 있어!’라고 반박했겠지만 왕재수가 이렇게 되고 나니 딱히 부정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 응, 네 말도 일리가 있는데... 그냥 난 적성에 안 맞는 거 같아. 책상물림이잖아. 그래도 생각해 줘서 고마워. 그럼 너만 믿고 갈게. ”

 

“ 에이, 나랑 동업하지. 그럼 파인애플쯤은 공짜로 구해줄 수 있는데. ”

 

 

투레츠키는 못내 아쉬워했지만 그것도 잠시, 베르닌이 문 쪽으로 걸어가자 다시 빨간 소파에 드러누워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건물을 나와서 차에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보랴가 그를 툭 쳤다.

 

 

“ 야, 그 아프다는 애 혹시 우리 예쁜이야? ”

 

“ 어... 네. ”

 

“ 어쩐지. 그래서 어제 안 왔구나. 원래 어제 우리 집 와서 블린 구워먹기로 했었는데. 많이 아프냐? ”

 

“ 열도 많이 나고 헛소리도 하고 그래요. ”

 

쯧쯧. 그랬구만. 열나면 기력이 떨어지니까 보양식을 좀 먹어야 할 텐데. ”

 

“ 제대로 못 먹어요. 아파서 그런지 전부 다 씁쓸하고 비린내 난다고... 억지로 죽이랑 수프 먹이고 있어요. ”

 

“ 불쌍한 것. 그 조그맣고 귀여운 것이 아프다니. 나 일요일에 공연도 봤는데. 걔가 표 줘서. 춤도 엄청 잘 추더구만. 완전 날아다니고. 너무 열심히 춰서 몸살났나보구나. 그래, 지금 병원에 있냐? ”

 

“ 네. 근데 지금 면회는 안 돼요. ”

 

“ 알았다. 빨리 나아야 할 텐데. 나중에 우리 식당에 밥 먹으러 와라. 너 오면 많이 퍼 줄게. ”

 

 

보랴와 헤어진 후 베르닌은 병원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왕재수는 더 이상 칭얼거리지 않고 깊게 잠들어 있었다. 그는 바나나와 체리, 아몬드 쿠키를 좀 집어먹고 보호자용 간이침대에 누워서 또 하느님에게 ‘제발 파인애플을 구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한 후 잠이 들었다.

 

 

 

*   *   *

 

 

 

다음날 아침에 베르닌은 잠깐 사무실에 들렀다. 전날도 정신이 없어 전화 보고를 깜박했기 때문이다. 스페호프는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 그래, 그놈은 어떤가? 벌써 다 나았나? ”

 

“ 아니오, 아직도 아픕니다. 헛소리도 하고요, 열도 안 떨어지고. 잘 먹지도 못하고요. ”

 

“ 아이고 고소해라. 극장에서도 우리를 의심하는 기색은 없더군. 역시 그때 자네의 연기가 한 몫 했던 거야. 건방진 녀석, 이제 버릇이 좀 들었겠지. 내일 그 망할 돈키호테인지 뭔지를 또 하던데, 어디 다시 한 번 올라가서 그 방정맞은 춤을 춰보라 하고 싶군. 하하하. ”

 

“ 그런데 레베진스키가 사과에 약물을 묻혀놨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이 휴가를 냈던 건가 보네요. ”

 

“ 그렇지. 알리바이가 필요하니까 미리 약을 묻혀놓고 곧장 휴가를 가라고 했지. 불여우를 빨리 해치워야 그 친구가 감독직을 맡을 텐데. 우리 KGB를 위해 많이 애쓴 친구니까 잘 돼야 할 텐데. ”

 

“ 예. 저는 그럼 다시 병원으로 가 보겠습니다. 제가 여기 와 있는 걸 알면 혹시라도 의심받을지 모르니. ”

 

“ 옳지. 그러게나. 아참 그렇지. 가는 길에 총무부에 가서 업무추진비를 좀 타 가게. ”

 

“ 예? 무슨 명목으로... ”

 

“ 어쨌든 그놈은 우리 소관 죄수니까, 입원까지 했으니 문병용 과일바구니라도 좀 사가란 말일세. 이것은 우리 가브릴로프 KGB에서 공식적으로 보내는 것일세. 국장인 내 이름으로 말이지. 여기 내가 카드도 쓰고 리본도 준비했네. 이것을 달아서 주란 말일세. 그래야 우리 KGB가 그놈을 잘 돌봐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고 행여 있을지도 모르는 크레믈린의 의심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지. 암, 기관장인 내가 이렇게 공적으로 쾌유 카드와 선물까지 보내는데! ”

 

 

베르닌은 잠시 스페호프를 빤히 쳐다보았다. 뱃속이 뒤틀려왔다. 당장이라도 의자를 휘두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는데 스페호프는 그것을 감탄의 시선으로 오해하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자네도 나중에 연륜이 쌓이면 이 정도는 할 수 있게 된다네. 자, 이 리본과 카드를 가져가게나. 총무부에는 내가 얘기해뒀네. 국장 명의라 좀 두둑하게 편성하라 했으니 받아가게. 남은 걸로는 저녁이라도 사먹게. 불여우 녀석 간호해주는 척 하느라 얼굴이 많이 상했군. 그럼 어서 들어가게. ”

 

 

베르닌은 리본과 카드를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총무부에 가서 업무추진비를 수령했다. 20루블이나 들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국장실에 달려가 스페호프의 면전에 돈을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다시 꾹 참고 병원을 나왔다. 투레츠키가 구해 주는 파인애플은 비싸게 먹힐 테니 그 값이나 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원으로 가려다가 너무 우울하기도 하고 극장 분위기가 어떤가 싶기도 해서 그는 차를 몰고 구시가지로 갔다. 가는 길에 잠깐 공원에 내려서 바람을 좀 쐬니 기분이 약간 나아지는 것 같았다. 여전히 추웠지만 그래도 바람이 약간 부드러워진 것을 보니 3월이 오긴 온 모양이었다.

 

벤치에 앉아 멍하게 스페호프의 카드와 리본을 뒤집으며 찢어버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그를 탁 쳤다.

 

 

“ 여기서 뭐하냐? ”

 

“ 어, 당신. 왜 극장에 안 들어가고... ”

 

“ 리허설은 오후부터라서. ”

 

 

코즐로프였다. 언제나처럼 말끔한 옷차림이었다. 베르닌은 그의 곁에 있는 커다란 개를 보고 깜짝 놀랐다.

 

 

“ 어, 당신 개 키워요? ”

 

“ 아, 우리 부모님 댁에서 키우는 놈인데 잠깐 데려왔어. ”

 

“ 몰랐어요, 당신 개 좋아하는 줄. 깔끔 떠는 성격이라 싫어할 거 같은데. ”

 

“ 별로 싫어하진 않는데 좋지도 않아. 개 털 빠지는 거 싫어. ”

 

“ 근데 왜 데리고 왔어요? 부모님이 여행이라도 가셨나요? ”

 

“ 어, 그게 말이지... 음, 우리 아기 때문에. ”

 

“ 엥, 미샤요? 왜요? ”

 

“ 그 녀석이 개를 좋아하는 거 같아서. 저번에 너랑 같이 주웠다는 그 멍멍이 말이야. 주인이 찾아가고 나서 어찌나 실망을 하는지. 전에도 갑자기 나보고 고향집에는 멍멍이 없느냐고 묻는 거야. 있다고 했더니 좋겠다면서, 멍멍이 귀엽다고, 벌레도 잡아주고 자기가 노래 불러주면 좋아하고 자기한테 재롱도 부린다면서. 멍멍이 있는 집 좋겠다는 거야. ”

 

“ 그랬구나. 벨라 가고 나서 막 울더니만. 쳇, 데리고 있을 때는 똥개라고 짜증내더니. ”

 

“ 그래서 우리 아기 기분 좀 전환될까 하고 부모님 댁에 가서 이놈 데리고 온 거지. 이름은 흘롑. 시커먼 색이라. ”

 

“ 어, 근데요... 그게... ”

 

 

베르닌은 개를 한 번 보고 코즐로프를 한 번 봤다. 한숨을 쉬었다.

 

 

“ 저 있잖아요, 그때 그 강아지, 벨라, 아니 뜨보록 걔는 엄청 작고 귀여웠거든요. 겨우 요만하고... 온통 하얀색에 털도 복슬복슬하고 눈도 동그랗고... 품에 쏙 들어오고 장난 아니게 재롱둥이였어요. 근데 이놈은 너무 크고 못생겼는데... ”

 

 

베르닌이 그렇게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흘롑은 사냥개와 농장견을 합쳐놓은 모양새의 잡종이었는데 덩치가 아주 컸고 털도 북슬북슬한데다 시커멓고 얼굴도 험상궂었다. 게다가 자기를 헐뜯는 것을 눈치 챘는지 베르닌 쪽을 노려보며 으르르르 하고 위협적으로 목을 울려댔다. 코즐로프는 흘롑의 목줄을 잡아당기며 엄하게 말했다.

 

 

안 돼.

 

“ 끼잉... ”

 

“ 어, 말은 잘 듣네요. ”

 

“ 내가 강아지 때부터 훈련시켰으니까. ”

 

“ 개 안 좋아한다면서요. ”

 

그건 그거고! 똥개 밥값은 시켜야 할 거 아냐! 내가 우리 부모님 농장 지키라고 사 드린 놈인데. 근데 정말 얘 안 귀엽냐? ”

 

“ 당신 눈엔 얘가 귀여워요? ”

 

“ 하긴... 좀 크긴 하지. 우리 아기는 안 좋아하려나. ”

 

 

베르닌은 어이가 없었다. 말이라고 하느냐고 하려다 갑자기 왕재수가 투레츠키는 못생겼다고 하고 보랴를 멋있다고 하던 게 떠올랐다.

 

 

“ 어, 음... 글쎄요. 귀여워할지도 모르겠네요. 근데 지금은 안 될 걸요. 걔 아프잖아요. 세균 옮을지도 모른다고 의사 선생님이 못 데리고 들어오게 할 거예요. 낫고 나면 모를까... ”

 

하긴 그렇지. 리허설 하는 동안 극장 뒤에 묶어놔야겠다. 근데 그건 뭐냐? ”

 

“ 아... 에잇! 나쁜 놈!!

 

 

베르닌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서 리본을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스페호프의 위선적인 행태에 대해 간단하게 말해 주었다. 코즐로프는 길길이 날뛰는 대신 가느다란 푸른 눈을 더욱 가느다랗게 뜨고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 그래, 그렇단 말이지. 우리 아기한테 독 묻은 사과 먹여놓고 보란 듯이 위문 선물이랑 카드를 보내겠단 말이지. ”

 

아뇨! 선물 안 사요! 카드도 안 줄 거예요! 내가 미쳤습니까! 이깟 놈의 카드! 에잇!

 

“ 뭐라고 썼는지나 좀 보자. ”

 

 

코즐로프가 베르닌의 손에서 리본과 카드를 빼앗았다.

 

 

수신 : 가브릴로프 시립극장 예술감독 미하일 야스민.

귀하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발신 :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지국장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흠. 재미없는 놈. 역시 얼간이야. ”

 

나쁜 인간이에요! 여태 나도 얼마나 들들 볶았는데... 서무랍시고 맨날 부려먹고 툭하면 불러다 설교하고... 다 찢어버릴 거야!

 

“ 놔둬. 가져가서 연구 좀 해 보게. 한방 먹여줄 거야. ”

 

 

코즐로프는 리본과 카드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시계를 보더니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래서 둘은 흘롑을 극장 뒤뜰에 묶어놓고 경비원에게 봐달라고 한 후 스베촉에 갔다. 본격적인 점심시간은 아직 아니었기 때문에 자리가 많았다. 주문을 하는데 보랴가 주방에서 나왔다.

 

 

“ 야, 너 왔구나. ”

 

“ 예. 지나가다 들렀어요. 여긴 로만. ”

 

알아. 지난번에 예쁜이가 소개시켜줬어. 로만하고는 벌써 술도 한 잔 같이 했지. 알고 보니 이 친구랑 나랑 초등학교 동기더라고. 귀염둥이 아프다며. 걱정 많겠네. ”

 

“ 뭘 좀 먹어야 할 텐데 그게 걱정이야. 못 먹으니까 자꾸 잠만 자려고 한다니까. ”

 

에그, 불쌍해라. 애기가 얼마나 아플꼬. 안 그래도 내가 어제 얘기 듣고 보양식 좀 만들어놨어. 있다가 싸 줄 테니까 가져다 좀 먹여. 그게 아플 때 진짜 좋은 거거든. 땀 한번 쭉 빼고 나면 금방 나아. 기력도 회복되고. ”

 

“ 그래, 고맙다. ”

 

 

점심을 먹으면서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보랴랑 아는 사이였다니. 심지어 초등학교 동기라고요? 근데 저 사람 미샤한테 집적대던데. 어째 그건 그냥 놔두나요? ”

 

“ 보랴가 귀여운 애를 좋아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사내애랑 놀아나는 취미는 없거든. 저 친구가 십대 때 사고 쳐서 아들을 낳았는데 걔가 아파서 일찍 죽었어. 근데 미셴카가 죽은 아들이랑 닮았대. 저 친구 생긴 걸 보면 죽은 애가 그렇게 예뻤을 리야 없겠지만. 하여튼 그래서 우리 귀염둥이를 엄청 예뻐해. ”

 

“ 아, 그런 거였구나. 난 또...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했던 자신을 마음속으로 꾸짖었다. 식사를 다 하고 계산을 하는데 보랴가 나왔다. 보자기로 꼭꼭 싼 보온병을 건네주었다.

 

 

“ 이거 가져가서 애기 먹여라. 뜨거울 때 먹어야 돼. 식으면 한번 데워서 주고. 이거 진짜 몸에 좋은 거야. 소화 잘 되는 밤이랑 몸 따뜻하게 해주는 생강이랑 약초랑 넣어서 닭고기랑 푹푹 고았어. 예쁜이는 기름기 많으면 안 먹으니까 기름도 다 걷어내고 맑은 국물만 한번 걸러서 건더기랑 섞은 거야. 푹 고아서 건더기도 거의 젤리 형태니까 살살 먹으면 돼. 소화 잘돼. 토하는 것도 잡아주고. 꼭 가져가서 먹여라. ”

 

“ 어, 고마워요, 보랴. 당신이 줬다고 하면 분명히 먹을 거예요. ”

 

“ 그래그래. 빨리 나아야 할 텐데. 애기 나으면 데리고 너희들 다 놀러와. 우리 집에서 놀자. ”

 

“ 고맙다, 보랴. 나중에 보자. ”

 

 

보랴는 코즐로프의 등을 탁 치고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베르닌은 보자기에 싼 보온병을 소중하게 들고 나왔다. 코즐로프는 리허설을 한 후 저녁에 들르겠다면서 극장으로 돌아갔다. 베르닌은 병원으로 갔다.

 

 

 

*    *    *

 

 

 

 

왕재수는 깨어 있었다. 전날보다는 좀 나아진 것 같았다. 아직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의 초점도 흐렸지만 그래도 베르닌을 보자 좋아했다.

 

 

“ 너 어디 갔었어? 하루 종일 없고. ”

 

“ 뭐가 하루 종일이니. 이제 열두시 반이네. 점심 먹어야지. ”

 

“ 안 먹어. 먹기 싫어. ”

 

“ 먹기 싫어도 먹어야 낫지. ”

 

“ 너무 쓰단 말이야. 맛없고 비리고... ”

 

“ 이거 봐. 아까 보랴 만났어. 보랴가 너 아프다니까 걱정하면서 이거 만들어줬어. 너 꼭 먹으래. 이거 먹으면 낫는대. 보양식이라서 소화도 잘되고 몸도 따뜻해지고 기력도 보충된대. 그러니까 좀 먹어보자. ”

 

“ 싫어, 안 먹어. 먹기 싫단 말이야. ”

 

“ 그래도 보랴가 너 먹으라고 만든 거잖니. 너 보랴 멋있다며. ”

 

“ 으응, 보랴 멋있어. 흑, 그래도 먹기 싫은데. ”

 

“ 보랴 성의를 봐서 한 숟가락만 먹어보자. ”

 

“ 으응... ”

 

 

베르닌은 의사에게 보온병의 내용물을 보여주고 먹여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후였다. 뚜껑을 열자 김이 펄펄 올라오는 게 아직도 뜨끈뜨끈했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릇에 반쯤 부었다. 으깬 밤과 생강편, 닭고기가 푹 익어서 숟가락만 대도 젤리처럼 몽글거리며 으깨졌고 맑은 국물은 투명할 지경이었다. 베르닌은 혹시라도 너무 뜨거울까봐 자기가 먼저 한 숟가락 먹어보았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다! 항아리 닭고기는 비교도 안 돼! 혀에서 그냥 녹는 거 같아. 와... 내가 떠줄게, 한번 먹어봐. ”

 

“ 맛있으면 너 다 먹어. ”

 

“ 무슨 소리야, 보랴가 너 먹으라고 만들었다잖아. 이 정도로 푹 고아서 만들려면 밤새 불에 얹어 놨을 텐데. 정성을 생각해야지. 아 해봐. ”

 

“ 힝... ”

 

 

왕재수는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베르닌이 숟가락을 내밀자 할 수 없이 받아먹었다. 두 번째 숟가락도 먹었다. 하지만 세 번째는 거부했다.

 

 

“ 이제 됐어. ”

 

“ 왜 그래, 더 먹어봐. 맛있는데. 진짜 정성들여 만든 건데. 보랴가 만들어 준 거잖아. ”

 

“ 먹기 싫어. 더워... ”

 

“ 먹고 땀 빼면 낫는 거래. ”

 

“ 더워. 달고 시원한 거 먹고 싶어. 파인애... ”

 

 

베르닌은 급하게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릇을 치웠다. 왕재수가 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하염없이 불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파인애플 타령을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재수는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 흑... 파인애플 없는데... 없는 거 알면서 자꾸 달라 해서 미안해. 엉엉... ”

 

“ 어, 너 정신 좀 들었구나. 파인애플 못 구하는 것도 알고. ”

 

“ 어떻게 구해, 여기 시골인데. 미안해. ”

 

“ 괜찮아. 아프니까 먹고 싶은 거야. 미안해, 못 구해다 줘서. 근데 내가 어디 부탁해놨거든. 내일은 파인애플 구해올 수 있을지도 몰라. ”

 

“ 정말? 근데 내일이면... 나 지금 너무 더워. 여기도 뜨겁고 머리도 아프고... 여기 너무 답답해. 머리부터 몸 안이 다 쪼개지는 것 같아.

 

 

왕재수가 이마와 가슴을 손으로 문지르면서 괴롭게 숨을 몰아쉬었다. 심호흡을 해보려고 애를 썼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등을 쓸어주고 손목을 문질러 주면서 호흡을 도와주었다. 왕재수는 많이 힘든지 얼굴을 찡그리며 눈물을 흘렸다.

 

 

“ 아이, 독사과나 먹이고. 진짜 나빠. 흑... 달고 시원한 거... 파인애플... ”

 

“ 조금만 참아. 내일 파인애플 줄게. 그때까지 보랴가 만들어준 거랑 약초즙이랑 먹자. ”

 

“ 약초즙 싫어. 너무 써서 토할 거 같아. ”

 

“ 그래도 그거 먹어서 너 좀 나은 거야. 처음엔 이렇게 말도 못하고 나 알아보지도 못했어. 약초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그 풀 내가 수도원 가서 캐온 거니까 써도 참고 먹어야 돼. ”

 

“ 네가 캐왔어? 어떻게? ”

 

“ 응, 나무 숟가락이랑 바구니랑 들고 가서 수도원 뒤뜰에서 신부님이랑 같이 캤어. 신부님도 너 빨리 나으라고 같이 캐주시고 기도도 해주셨어. 그러니까 약초즙 먹어. ”

 

“ 시골이라서 풀도 캐는구나. ”

 

 

왕재수는 아픈 것도 잠시 잊었는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때다 싶어서 베르닌은 닭고기 수프를 다시 한 숟가락 떴다.

 

 

“ 조금만 더 먹어. 먹을 땐 더워도 땀 흘리고 나면 시원해질 거야. 진짜야. 이렇게 뜨끈한 수프 먹고 땀 빼는 거 원래 우리 동네 민간요법이야. 이거 먹고 약초즙 먹고 한숨 자면 훨씬 나을 거야. ”

 

거짓말. 선생님도 그런 말 하면서 이상한 거 자꾸 먹였는데 계속 아픈데. ”

 

“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단 말이야. 어제보단 덜 아프잖아, 그치? 그저께보다는 더 많이 안 아프고. ”

 

“ 몰라. 그저께는 기억 안 나. 어제는 많이 아팠어. 지금도... ”

 

 

왕재수는 그래도 수프를 몇 숟가락 더 먹었다. 그릇의 절반쯤을 비웠다. 그리고는 고분고분하게 약초즙도 먹었다. 다 삼키고 나서는 물을 마셨다. 더운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숨을 헐떡거렸다.

 

 

“ 더워. 너무 더워. ”

 

“ 창문도 열어 놨는데... 밖은 추워. ”

 

“ 너무 더워. 아... 파인애플... 흑... ”

 

 

왕재수가 훌쩍거리며 다시 파인애플을 찾기 시작했다. 수프 때문인지 아니면 아파서 열이 오르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베르닌은 의사를 데리러 갔다. 스타브로프가 왔을 때 왕재수는 이불을 모두 차 내고 얼굴이 빨개진 채 쌕쌕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이따금 깜짝깜짝 놀라면서 ‘파인애플...‘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의사는 이불로 왕재수를 꽁꽁 싸주고는 몇 가지 검사를 했다.

 

 

“ 그래도 어제보다는 나아졌어. 헛소리도 덜 하고. 땀이 나면 한결 낫긴 할 텐데. 아직도 파인애플만 찾는구나. 그놈의 파인애플 하늘에서 좀 내려와 주면 좀 좋아. ”

 

“ 근데 정말 파인애플을 먹으면 나아질까요? ”

 

“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니까 도움이 되긴 하겠지. 감옥에 있을 때부터 하도 나쁜 일을 당해서 많이 놀란 것 같구나.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왕재수는 뜨거운 걸 먹었는데도 땀도 제대로 흘리지 않고 얼굴만 빨개진 채 계속 숨을 헐떡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자꾸 파인애플 타령을 할 땐 답답하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지만 오죽 아프면 그럴까 싶기도 하고 자기가 소속된 조직에서 위해를 끼쳤다는 사실에 가책도 느껴져서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간호사가 들어왔다.

 

 

“ 다냐, 전화 왔어요. ”

 

“ 네? 어디서요? ”

 

“ 무슨 투레츠키라고... ”

 

“ 엇, 잠깐만요! ”

 

 

베르닌은 급하게 뛰어나갔다.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 야, 물건 들어왔어. 가지러 와. ”

 

“ 어, 진짜? 지금 갈게! ”

 

 

그는 코트를 걸치는 것도 잊고 후다닥 달려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   *   *

 

 

 

 

투레츠키는 의기양양하게 그를 맞이했다.

 

 

“ 야, 내가 힘 좀 썼다. 원래 이틀이 기본인데 너랑 나랑 친구니까 속달로 해달라고 갈군 거야. ”

 

“ 고마워, 바냐. 진짜 고마워. 너 정말 대단하구나. 역시... 괜히 전설의 서무가 아니었어. ”

 

“ 내가 전설의 서무는 맞지만 서무랑 이건 차원이 다르지. 근데 속달 요금이 더 붙어. 나 외상 취급 안하는 거 알지? 원래는 무조건 선불 아니면 계약금 걸어야 되는데 넌 친구니까 내가 그냥 가져온 거야.

 

“ 고마워. 지금 돈 줄게. 얼마야? ”

 

“ 파인애플은 10루블, 운송비 10루블, 속달 추가요금 10루블. 30루블인데 넌 친구니까 5루블 깎아줄게. ”

 

 

엄청나게 비쌌지만 베르닌은 두말하지 않고 지갑을 꺼냈다. 스페호프가 준 20루블에 사비 5루블을 보탰다. 기관 업무추진비를 쓰는 것도 전혀 가책이 되지 않았다. 분명히 스페호프가 왕재수의 문병 과일바구니를 사라고 했다. 그리고 국장과 KGB가 왕재수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금고를 다 털어도 모자랐다. 투레츠키는 돈을 받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오우, 화끈한데. 너 의외로 돈 쓸 줄 아는구나. 여자냐? 좋아하는 여자가 먹고 싶어 하는 거구나. 그럼 돈이 문제가 아니지. ”

 

“ 아니, 그게 아니라 누가 아파서... ”

 

“ 됐어. 나도 참, 개인적인 거 안 물어보는 게 철칙인데 네가 너무 예상외로 돈을 척 내놔서 순간 궁금했네. 이리 와. 물건 줄 테니까. ”

 

 

베르닌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투레츠키를 따라 창가로 갔다. 투레츠키는 보따리 몇 개를 치우고는 커다란 종이 상자를 끌어당겼다. 베르닌도 파인애플을 실물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기대감이 증폭되었다. 파인애플은 큰 과일이니까 상자도 큰 것 같았다.

 

그때 투레츠키가 상자를 열고 손을 쑥 집어넣어 뭔가 부스럭부스럭하더니 조그만 깡통을 한 개 꺼냈다.

 

 

“ 자, 여기 있다. 힘들게 구했네. ”

 

 

베르닌은 두 눈을 의심했다.

 

 

이게 뭐야?

 

“ 뭐긴 뭐야, 파인애플이지. ”

 

아니야, 파인애플은, 파인애플은 과일이잖아! 아열대 과일. 커다랗고 삐죽삐죽하고 두꺼운 가시 같은 게 달려 있고 위에 이파리도 있고. 근데 이건, 이건 깡통이잖아!

 

“ 에이, 제대로 봐야지. 그냥 깡통이 아니잖아. ”

 

 

투레츠키가 베르닌의 눈앞에 깡통을 불쑥 들이밀었다. 삐죽삐죽하고 두꺼운 가시 같은 게 빽빽하게 달려 있고 이파리가 달린 파인애플 그림이 그려져 있고 노란색의 동그란 과육이 담긴 접시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베르닌은 멍해졌다.

 

 

“ 어, 이건, 이건 그냥 통조림이잖아!

 

“ 그럼 당연히 통조림이지, 너 설마 생과일을 가져올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제정신이냐? 잘못하면 다 썩어 문드러지라고. 통조림이 최고지. 그리고 이거 미제야! 미제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줄 아냐? 이거 봐, 영어로 씌어 있잖아. 파인애플. PINEAPPLE!

 

“ 하지만... 난 당연히 생과일일 거라고... 파인애플이라고 하면 당연히 과일이라고 생각하지 누가 통조림을... ”

 

“ 아이고 답답해라. 여기 오는 사람들은 전부 통조림 구해달라고 한다고. 그럼 애초부터 ‘생과일’이라든지 ‘통조림 아닌’ 파인애플이라고 했어야지. 내가 이거 구하려고 얼마나 그쪽 녀석을 갈구고... 친구인 너를 위해서 손해도 무릅쓰고 내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구해온 건데 너는 통조림이 어떻고 삐죽삐죽한 가시에 이파리가 어떻고 하면서! ”

 

“ 저... 바냐. 네가 나쁘다는 게 아니야. 고생해서 구해다 준 건 진짜 고마워. 근데... 아, 어떡하지. 밤이고 낮이고 파인애플 타령만 하면서 그렇게 괴로워하는데 통조림이라니... 파인애플 갖다 준다고 간신히 어르고 달래놨는데... 진짜 실망할 거야. 더 아프면 어떻게 하지... ”

 

 

베르닌은 망연자실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질어질했고 눈물이 났다. 투레츠키는 잠깐 당황한 듯했지만 곧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 에이, 뭘 그렇게 실망하고 그러냐.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통조림이 훨씬 더 맛있어. 그 여자도 분명히 이거 먹어보면 좋아할 거야. 가져가봐. ”

 

“ 하지만... ”

 

“ 그럼 안 가져갈 거니? 환불해줘? ”

 

“ 너 환불도 해주니? ”

 

“ 개봉 안 한 건 환불해줘. 난 정직한 상인이라고! 근데 운송비랑 속달비는 제하고 물건 값만 환불하는 거야. 원래 그래. 그러니까 10루블. 줄까? ”

 

 

멍해진 와중에도 베르닌은 15루블이나 떼이고 통조림조차 못 받는 건 너무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됐어, 그냥 통조림 가져갈래. 어휴... 너 완전 바가지야. 누가 통조림을 25루블이나 받아! ”

 

이게 소련 통조림이냐! 이건 미제야! 비행기 타고 온 거란 말이야! 심지어 위험을 무릅쓰고 지하로 거래해온 건데! 너 날 무시하고 심지어 악덕업자라고 누명까지 씌웠어. 나 이런 건 그냥 못 넘어가! 이 장사는 신뢰가 생명인데. ”

 

“ 화내지 마. 너무 비싸서 그런 거니까. 네 수완은 인정할게. ”

 

“ 그래! 난 수완이랑 신뢰 관계 두 개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하여튼 내 말 믿어. 통조림이 최고야! 잘 가라. 또 오고. 다음에 올 땐 보드카 가져와. 그럼 내가 좋은 거 줄게. ”

 

 

베르닌은 다시 여기 오면 성을 갈겠다는 다짐을 하며 문을 열고 나왔다.

 

 

 

*    *    *

 

 

 

 

힘이 쭉 빠진 채 병원으로 돌아오니 코즐로프가 우울한 얼굴로 복도에 앉아 있었다.

 

 

“ 어, 당신 극장 안 가요? 오늘 저녁 공연 있잖아요. 연주... ”

 

“ 이제 가려고. 잠깐 들렀어, 우리 아기 보려고. ”

 

“ 근데 왜 복도에 나와 있어요? ”

 

“ 막 잠들었거든. 어휴, 나 정말 못 참겠다. 애 아픈 거 더 이상 못 보겠어. 왜 계속 저 상태인 거냐. 멀쩡해진 것 같다가도 금방 또 헛소리하고. 열도 떨어질 듯 떨어질 듯하다가 도로 올라가고. 아까는 계속 속이 다 타는 것 같다고 하고... 파인애플만 입이 닳도록 찾고. 여기 노인네가 명의인 건 아는데,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는데 도대체 믿을 수가 없으니. 나아지고 있는 거면 헛소리도 없어져야지. 아무래도 그 망할 놈이 먹인 독약이 머리로 간 거 아닐까 싶다. 저러다 영영 제정신 안 돌아오면... ”

 

 

베르닌은 바이올린 깡패가 이를 악물고 손등으로 눈을 지그시 누르는 것에 좀 놀랐지만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괜찮아질 거예요. 당신은 걔 옆에 내내 붙어 있지 않았잖아요.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거 맞아요.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요, 쟤 감옥에 있을 때도 그 약물 맞았다고요. 근데 주사 그만 놓게 하고 해독약 같은 것도 안 줬더니 혼자서 나았다고 했어요. 그냥 시간이 좀 걸리는 것뿐이에요. 분명히 나을 거예요. 그러니까 괜히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부정 탄단 말이에요! 신부님이 기도도 해줬는데! ”

 

“ 신부고 나발이고 하느님도 없는데 무슨. ”

 

그래도, 하느님 없어도 기도는 좋은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랑 신부님이랑 렐랴랑 보랴랑... 전부 걱정해주고 있잖아요. 걔 걱정해주는 사람이 더 많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괜찮아질 거예요! 다시는 그런 나쁜 말 하지 말아요!

 

“ 좋겠다, 너는. 아직 젊어서. 아직 세상이 장밋빛이구나. ”

 

 

코즐로프는 한숨을 쉬더니 일어섰다.

 

 

“ 나 극장 간다. 공연 끝나고 다시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있어줘. 밤엔 너도 집에 가서 좀 쉬어라. 계속 병원에서 잤잖아. 그러다 몸살 난다. 그 간이침대 불편하던데. 덩치도 큰 녀석이. ”

 

“ 당신보단 내가 낫죠! 당신은 그 침대에 반도 안 들어가겠네요. ”

 

“ 다리를 반으로 접으니까 되긴 되더라고. 하여튼 갔다 오마. ”

 

 

코즐로프가 떠난 후 베르닌은 병실로 들어갔다. 왕재수는 마트료슈카처럼 이불로 꽁꽁 싸인 채 누워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빨갰다. 이마는 뜨거웠지만 보송보송했다.

 

 

‘ 왜 땀이 안 나는 걸까? 난 보랴가 만들어준 수프 한 숟가락만 먹어도 개운하고 땀나려고 하던데. 땀을 흘려서 바깥으로 열이 빠져나가야 좀 나아질 텐데 그게 안 되니까 자꾸 덥다고 하고 속이 뜨겁고 답답한 건가. 대체 무슨 약을 먹인 거야, 나쁜 놈들... ’

 

 

그때 왕재수가 꿈틀거리면서 눈을 떴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목걸이를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 목말라... 아... ”

 

 

베르닌은 급하게 물컵을 가져와 왕재수의 입에 대 주었다. 물을 조금 마신 후 왕재수가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몸을 조금 일으켰다.

 

 

“ 고마워. ”

 

“ 아직도 그렇게 아파? 땀 하나도 안 났어? ”

 

“ 응... 춤 좀 추면 땀도 나고 괜찮아질 텐데. ”

 

“ 안 돼, 걷지도 못하면서 무슨 춤이야. ”

 

“ 안에 뭐가 잔뜩 걸려 있는 것 같아. 자꾸 어지러워. 다닐, 나 자고 싶어. 자꾸 깨는 거 무서워. 처음엔 괜찮은데 이러다가 네가 막 세 명 네 명으로 보이기 시작할 거야. 그러면 막 더워지고 목마르고 아파. 그럼 파인애플 먹고 싶고... 하아...

 

 

왕재수가 숨을 몰아쉬었다. 베르닌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서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꺼냈다.

 

 

“ 저기, 있잖아... 겨울이라서 진짜 파인애플은 못 구했어. 미안해. 통조림이라도 먹을래? 이것도 맛있대. 미제래... 투레츠키가 구해준 거야. ”

 

아, 아! 파인애플!

 

 

왕재수가 탄성을 질렀다. 초점이 흐렸던 두 눈에 반짝 하고 광채가 돌았다.

 

 

파인애플이다! 아아! 진짜 파인애플이야!

 

“ 어... 저... 이거 통조림이야. 진짜 아니야... ”

 

아니야! 파인애플이야! 이거... 이거 맞아! 아, 맛있겠다! 아...

 

“ 으잉? 이게 맞아? 파인애플은 삐죽삐죽하고 두꺼운 가시 같은 게 나 있고 위에 이파리가 달려 있는... ”

 

통조림! 파인애플 통조림! 아플 때 먹는 거... 달고 시원한 거!

 

 

왕재수가 흥분해서 다시 아플까봐 걱정이 된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어, 그래. 그렇구나. 잠깐만 기다려. 파인애플 먹자. 내가 뚜껑 따가지고 올게. ”

 

 

탕비실에 가서 통조림 뚜껑을 따서 돌아왔을 때 왕재수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열에 들떠서 온통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독사과를 먹고 쓰러진 후 처음으로 표정이 밝아져 있었다.

 

베르닌은 접시에 통조림 파인애플 과육을 몇 개 꺼내 담았다. 동그랗고 납작하고 샛노란 과육을 한입 크기로 썰었다. 조그만 것 한 토막을 포크로 찍어서 왕재수의 입에 넣어 주었다. 왕재수는 오물오물 먹었다. 눈을 감고 행복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 아아... 파인애플. 달아, 시원해. ”

 

“ 맛있니? ”

 

“ 응. 맛있어. 진짜 달아! 아 시원해. 목말랐어. 파인애플 진짜 먹고 싶었어. 더 먹어도 돼? ”

 

“ 응, 더 줄게. ”

 

 

베르닌은 잘라놓은 파인애플을 먹여주었다. 천천히 조금씩 먹였다. 왕재수는 파인애플을 몇 조각 먹더니 국물 먹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 국물이라니? ”

 

“ 깡통에 있는 거. 통조림 국물. ”

 

“ 에, 그건 설탕물 아니야? ”

 

“ 으응, 파인애플 물이야. 먹고 싶어. ”

 

 

베르닌은 깡통을 기울여서 컵에 국물을 따랐다. 파인애플 과즙과 설탕이 섞여 있어 굉장히 달 것 같았다. 왕재수는 반 컵이나 마셨다. 마시고 나더니 너무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목을 울리는 소리를 냈다.

 

 

“ 아아... 살 것 같아. 시원해... 아... ”

 

다행이다... 근데 넌 단 거 안 먹잖아. 신기하다. 통조림이라 엄청 달 텐데 어떻게 이건 맛있어해? 난 네가 이거 안 먹을 줄 알았어. 진짜 파인애플만 입에 댈 줄 알았는데... ”

 

“ 아니야, 이거 맞아. 어릴 때 아프면 이거 먹었어. 아빠가 암시장에 가서 구해오셨어. 나 먹고 열 내리라고... 이거 먹으면 금방 나았어. 열도 내렸어. 아이 좋아, 아이 맛있어. ”

 

“ 그랬구나... 아기 때부터 먹었던 거라서 그렇게 찾았구나. 몰랐어. ”

 

“ 너도 먹어봐. 맛있어. ”

 

“ 너 있다가 더 먹어야지. ”

 

“ 아니야, 나 많이 먹었어. 맛있으니까 먹어봐. ”

 

“ 그래, 좀 있다 나도 먹을게. ”

 

“ 나 이제 나을 거 같아. 이제 안 더워. 아까만큼 안 아파. ”

 

“ 그래그래. 이제 나을 거야. ”

 

아이 땀 나. 아까만큼 덥지도 않은데 왜 땀이 나지?

 

아, 정말이네! 너 이마에 땀났어! 이제 열 내리려나봐! 파인애플 먹어서 그런가보다!

 

 

베르닌은 뛸 듯이 기뻤다. 손수건으로 왕재수의 이마와 콧등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왕재수는 가만히 있더니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누웠다. 베르닌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 이제 좀 자자. 자고 나면 훨씬 나아질 거야. 의사 선생님도 그랬어, 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진짜 다행이다. ”

 

“ 다닐, 고마워. ”

 

“ 통조림? 이거 투레츠키가 구해준 거야. ”

 

“ 너 바냐 싫어하잖아. 근데 통조림 구하러 가고... ”

 

“ 에이, 그게 뭐 어렵다고. ”

 

“ 풀도 캐오고... ”

 

“ 흰머리천사날개풀이래. 되게 재밌었어. 나중에 같이 캐러 가자. ”

 

“ 으응... 싫어. 손에 흙 묻잖아. ”

 

 

왕재수는 이미 눈꺼풀이 무거워진 것 같았다.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파인애플... 좋아. ”

 

“ 통조림인 줄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걸... ”

 

“ 아빠. 아빠 보고 싶어. ”

 

“ 그래, 얼른 낫자. 공연도 잘 했잖아. 그러니까 너 곧 레닌그라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아빠도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

 

“ 못 봐... 아빠 이제 못 봐. 나 어릴 때 돌아가셨어. ”

 

“ 아... 그랬구나. 미안해. ”

 

“ 아빠... 파인애플 맛있어. ”

 

 

왕재수는 조그맣게 웅얼거리더니 곧 잠이 들었다. 베르닌은 통조림 깡통을 접시로 잘 덮어 놓고는 의사에게 갔다.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스타브로프가 들어와서 왕재수의 체온과 맥을 재고 눈꺼풀과 혀, 목구멍, 피부 상태를 관찰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열이 내리고 있구나. 맥박도 훨씬 안정적이고. 푹 자고 나면 좋아질 거다. ”

 

“ 정말 파인애플 덕분인가요? ”

 

“ 허허, 깡통 파인애플로 사람이 나으면 세상에 불치병 환자는 하나도 없겠구나. 그러면 참 좋을 텐데. 하여튼 도움이 됐을 거다. 잘했다, 이 녀석아. 그래도 소싯적 신동이었다고 어디서 또 통조림은 구해왔구나. 이제 너도 집에 가서 좀 쉬어라. 얘는 마누라와 내가 봐줄 테니. ”

 

“ 아니에요, 선생님은 응급환자도 많고 바쁘시잖아요. 연세도 많으신데. 밤에 로만이 오기로 했어요. 저 여기 있을게요. ”

 

“ 그러면 옆 병실이 지금 비어 있으니 거기 누워서 좀 자거라. 간이침대 좁아서 새우잠만 자고 힘들었을 텐데. 저녁 시간 되면 깨워주마. ”

 

 

그래서 베르닌은 빈 침대에 몸을 눕혔다. 무거운 잠이 쏟아졌다. 왕재수가 독사과를 먹고 쓰러진 후 처음으로 그 역시 깊고 개운하게 푹 잤다. 자고 일어나서 의사의 사택으로 올라가 마르가리타가 차려준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저녁을 먹고 병실로 가보니 왕재수는 아직 자고 있었지만 숨소리도 한결 나았고 안색도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예브게니의 말로는 땀을 한바탕 쭉 흘리고 나서 열이 내렸다고 했다. 베르닌은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따뜻하게 적신 수건으로 왕재수의 얼굴과 몸을 닦아주고 환자복도 갈아입혀 주었다. 그는 왕재수가 다시 살이 빠진 것을 보고 속이 상했지만 퇴원하고 나서 맛있는 것을 잔뜩 먹이고 보랴에게도 데려가서 대접을 받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위안했다.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코즐로프가 왔다. 왕재수가 나아진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 베르닌이 보란 듯이 깡통을 내밀자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아니, 이거였단 말이야? 과일이 아니고? 통조림? ”

 

“ 이거였더라고요... 아기 때 아프면 이거 먹었대요. ”

 

으아... 이건 나도 구할 수 있는 거였는데! 으윽, 모스크바에 있는 내 친구 통조림 장사하는데... 아아, 내가 바보였어! 진작 부탁했으면 우리 아기가 빨리 먹고 나아졌을 텐데! ”

 

“ 통조림인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근데 당신 늦었네요. 공연이 그렇게 길었어요? ”

 

“ 아... 일이 좀 생겨서. 너 이제 들어가 봐라. 내가 있을 테니까. ”

 

“ 당신 내일도 극장 가야 되잖아요. 내일 돈키호테 다시 올린다고 들었는데. 그럼 오전에 드레스 리허설 있잖아요. ”

 

“ 드레스 리허설은 오늘 했어. 그때야 워낙 시간에 쫓기니까 당일 오전에 했던 거고. 오후에 가면 돼. 가서 좀 쉬어라. ”

 

 

그래서 베르닌은 집으로 돌아왔다. 깨끗하게 씻고 푹 잤다. 피로가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    *    *

 

 

 

 

다음날인 토요일에 그는 다시 병원에 갔다. 왕재수는 깨어 있었고 의사의 말대로 열도 내리고 몸이 훨씬 나아져서 이제 혼자서 걸어 다닐 수도 있었다. 베르닌을 보자 좋아했다. 코즐로프와 베르닌에게 통조림 파인애플을 먹어보라고 극구 권했다. 그래서 셋은 파인애플을 나눠먹었다. 꿀처럼 달았다. 베르닌은 그렇게 맛있는 통조림을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았다.

 

 

파인애플을 다 먹은 후 왕재수는 그들에게 극장에 가보라 했다. 베르닌에게도 가서 오후 돈키호테 공연을 꼭 보고 자기한테 얘기해 달라고 했다.

 

 

“ 내가 지휘해야 하는데. 애들한테 너무 미안해. 걔들 스네고로드에 끌려가서 눈 치우느라 초연 무대 서지도 못하고... 오늘 처음 무대 올라가는 건데 내가 이러고 있으니. ”

 

“ 괜찮아, 우리 귀염둥이 아픈 거 아는데 뭐. 애들이 병원 오겠다는 것도 내가 막았어. 빨리 낫는 게 더 중요해. 그래야 다시 극장에도 나가지. 하여튼 우리 갔다 올게. ”

 

 

베르닌은 코즐로프와 함께 극장에 갔다. 코즐로프는 연주 준비를 하러 가고 그는 류드밀라에게 갔다. 왕재수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자 류드밀라가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는 베르닌에게 차와 쿠키를 주면서 생각난 듯 말했다.

 

 

“ 참, 콜랴 있잖아요. ”

 

“ 콜랴가 누구에요? ”

 

“ 아참, 당신은 그 사람이랑 안 친하지. 레베진스키요. 우리 감독님만 그런 거 아니고 그 사람도 병가 냈어요. ”

 

“ 그 사람은 집에 일 있다고 휴가였잖아요. ”

 

 

베르닌은 ‘독사과, 알리바이, 끄나풀’이란 단어들을 간신히 입안으로 삼켰다.

 

 

“ 아, 그건 수요일까지였는데. 그저께 술 한 잔 하고 집에 가는데 좀도둑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뒤에서 누가 덮쳐서 뒤통수를 한 방 맞고 강에 빠졌대요. 맞은 건 심하지 않은데 강에 빠졌다 나와서 감기가 지독하게 들었다지 뭐예요. 하여튼 밤늦게 술 마시고 다니는 건 위험한 것 같아요. 당신도 조심해요, 야근 많이 한다면서. ”

 

“ 아, 그래요? 잘됐... 아니, 안됐네요. ”

 

 

짐작 가는 데가 있었던 베르닌은 비죽비죽 밀려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얼버무렸다. 그리고 오후 5시의 돈키호테 공연을 봤다. 무대에 올라가서 연기를 해봐서 그런지 공연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굉장히 재미있었다. 특히 돈키호테 연기를 하는 무용수를 집중해서 봤다. 확실히 자신의 어설픈 연기와 크게 차이가 났다. 다시 하면 이 부분은 이렇게 할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바질 역의 무용수는 열심히 추기는 했지만 역시 왕재수와는 하늘과 땅 차이란 생각도 들었다.

 

 

로비에서 그는 생각지 않게 리자와 마주쳤다.

 

 

“ 어머, 다냐! 역시 꽃돌이 감독님 때문에 온 거군요! ”

 

“ 어, 리자... 당신은 웬일이에요? ”

 

“ 우리 엄마가 발레 좋아하셔서요. 같이 공연 보러 왔어요. 엄마, 여기 우리 회사 다냐예요. ”

 

 

베르닌은 리자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리자는 방긋방긋 웃더니 손뼉을 딱 쳤다.

 

 

“ 아참, 다냐. 그 얘기 들었어요? ”

 

“ 무슨 얘기요? ”

 

“ 우리 국장이요! 오늘 병원에 입원했대요. 잘만 하면 월요일에도 안 나올지도 몰라요! ”

 

“ 엥? 국장이요? 왜요? 어디가 아프대요? ”

 

“ 있잖아요, 국장이 밤마다 집 근처를 산책한다나 봐요. 어제도 밤에 산책하고 있는데 갑자기 웬 집채만한 들개가 나타나서 국장한테 달려들었다지 뭐예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대요. 냅다 달려들어서 목줄기를 물어뜯으려는 걸 국장이 간신히 떼굴떼굴 굴러서 치명상은 안 입었는데요, 그래도 여기저기 물렸대요. 구르면서 다치기도 하고. 광견병 주사 맞고 다친 데 치료 중인데 타박상도 입었고 다리도 좀 삐었대요. 아유, 근데 난 그 얘기 들으니까 왜 이렇게 고소하지. ”

 

“ 들개... 집채만한... ”

 

“ 월요일에 국장 휴가였으면 좋겠어요. 엇, 우리 엄마가 빨리 오라고 하시네요. 우리 월요일에 봐요. 안녕! ”

 

 

베르닌은 주차장으로 갔다. 잠시 후 코즐로프가 나왔다. 연주복을 채 갈아입지도 않은 채였다. 그는 코즐로프를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강을 건너면서 베르닌이 입을 열었다.

 

 

“ 레베진스키 두들겨 맞고 강에 빠졌다면서요. ”

 

“ 그랬다더라. ”

 

“ 밤길 조심을 안 했네요. ”

 

“ 흥, 제깟 놈이 조심해봤자. ”

 

“ 근데 우리 국장은 개한테 물려서 입원했대요. ”

 

“ 아주 잘 됐구나. ”

 

“ 집채만한 개였대요. ”

 

“ 개도 악당을 알아본 모양이지. ”

 

“ 근데 어떻게 한 거예요? ”

 

“ 뭐가? ”

 

“ 레베진스키는 알겠는데, 국장 말이에요. 우리 국장 현장요원 출신이라 눈치 되게 빠른데. 개한테 ‘물어!’하고 소리 지르면 금방 눈치 채고 대응했을 텐데.

 

“ 우리 흘롑이 얼마나 똑똑한데. 그리고 소리 지르고 명령할 필요 하나도 없었지. 다 사전훈련을 시켜놔서. ”

 

“ 엥, 어떻게요? ”

 

위문 카드.

 

“ 예? ”

 

“ 그 개자식이 쓴 카드랑 리본 있잖아. 너한테 맡겼던 거. 그거 내가 가져갔잖아. ”

 

“ 아, 그거요? 근데 그걸로 어떻게... ”

 

“ 미련하긴. 그놈 냄새가 배어 있잖아. 우리 흘롑이 사냥개 출신이거든. 허수아비에 그거 붙여놓고 공격 훈련 시켰지. 아주 한 방에! ”

 

“ 흘롑은 참 좋은 개네요. ”

 

“ 그렇지! 훌륭한 멍멍이지. 우리 아기가 좋아해야 할 텐데. 잘 뜯어보면 귀엽고 앙증맞은 멍멍이거든.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끄덕했고 오랜만에 큰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벨라가 훨씬 귀여운 멍멍이라고 생각했다.

 

 

 

 

 

FIN

- 2015. 4. 17 ~ 4. 23 -

 

 

...

 

 

흰머리천사날개풀은 가상의 약초로 내가 붙인 이름이다 :)

물론 파인애플은 실재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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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시절 러시아 정교는 핍박을 받았고 수도원이나 정교 교회들은 모두 폐쇄되어 병원, 도서관, 보관소, 공장, 대부분은 박물관으로 변모했다. 여기 등장하는 예고르 사제는 본편에도 등장한다. 가브릴로프는 정교 전통이 깊은 도시라 사제님, 신부님이란 호칭으로 불리고 있지만 사실 이 수도원도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고 예고르 신부도 박물관 총괄 관리자이다. 가브릴로프 본편에서 이 수도원은 중요한 장소 중 하나로 등장한다.

 

예고르 사제가 단추에게 대접하는 감자 블린과 열매즙은 내가 지난 2월에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 징게르 카페에서 마슬레니짜 기간에 먹었던 맛있는 블린과 따뜻한 열매즙 음료에서 따왔다. 그건 나중에 따로 소개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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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롑'은 흑빵이란 뜻의 러시아어이다 :)

뜨보록은 흰색이라 뜨보록. 흘롑은 검정개라 흘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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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도 옛날엔 바나나랑 파인애플이 엄청 고급 과일이었다. 지금이야 바나나가 흔해빠졌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때만 해도 바나나는 진짜 고급 과일이라 그거 하나 먹는 게 쉽지 않았다. 파인애플도 마찬가지...

이것은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 특히 추운 동네일 수록 더했다.

 

사실 이 에피소드 쓸 때 내가 떠올렸던 건 어릴 때 엄청 아팠을 때 먹었던 황도 백도 깐포도였다 :) 요즘 세대는 잘 모르실지도 ㅠㅠ

 

그런데 요즘 내가 위장이 너무 아파서 고생하다 보니 오늘은 집에 가다 황도라도 사다 먹어야 할 거 같다.. 아무래도 왕재수를 너무 괴롭혀서 벌받은 것 같다 ㅠㅠ

 

(드디어 사다 먹은 황도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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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수가 파인애플과 아빠를 결부시켜 생각하는 내용은 사실 본편 우주에서 미샤가 어린 시절 잃은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에서 좀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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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23편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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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저에게 정말 큰 힘이 된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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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서무 시리즈 때문에 본편이 안 써진다고 투덜대고는 있지만.. 사실 가브릴로프 본편의 외전은 서무 시리즈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재작년부터 본편 시작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끙끙 앓다가 렐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추리소설 외전을 한 편 쓴 적이 있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이때도 이 추리 소설 외전은 상당한 장편이 되었음... 본편 빼곤 뭐든 다 쉬워요 엉엉...

 

이때 이미 본편 등장인물들과 플롯은 거의 구성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외전에는 본편 캐릭터들을 그대로 데려왔다. 물론 성격이라든지 특징 등은 비슷한 사람도 있고 완전히 다른 사람도 있었다. 인물들 간의 관계도 물론 비슷한 것도 있지만 완전히 다른 점도 많았다.

 

미샤는 본편과 비슷한 성격이지만 좀더 다정한 타입으로 변했고(물론 서무 시리즈의 왕재수와는 전혀 다르다!) 렐랴는 본편에서는 버릇없는 귀족 아가씨였지만 이 외전에서는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인물이다 보니 좀 철은 없어도 당차고 똑똑한 인물이 되었다. 코즐로프도 본편과는 꽤 다른 성격이 되어버렸는데 여기서 나온 들이받는 성격이 서무 시리즈로 가버렸다.. (미안해 코즐로프야..)

 

완전히 다른 것은 바로 다닐 베르닌, 서무 시리즈 주인공 단추인데... 이 사람은 본편과 이 추리 외전, 그리고 서무 시리즈 세가지에서 모두 성격도 특징도 꽤 다르다! 본편에서는 무모하고 열정적인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인물(살짝 뺀질거리기도 한다)이라면 서무 시리즈에서는 고지식한 책상물림에 하염없는 순둥이 말단 서무, 그리고 이 추리 외전에서는 역시 고지식한 책상물림 기질이 있기는 하지만 명예욕도 있고 앞장서서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탐정 역할이었다. 천의 얼굴 베르닌~ 이래서 서무 시리즈에서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도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목요일쯤 서무 22편 올라갈 예정이지만, 그 전에 머리 식힐 겸 추리 외전에서의 베르닌과 렐랴, 코즐로프에 대한 내용을 조금 발췌해 본다~ 서무 시리즈의 단추, 렐랴, 코즐로프와 한번 비교해 보세요 :) 잘 보면 스페호프에 대한 묘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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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먼저 단추와 코즐로프에 대한 묘사. 소설 프롤로그 부분이다. 이야기는 아리따운 엄친딸 렐랴가 근사한 만찬을 준비하고 열두 명의 손님을 초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만찬의 목적은 갓 부임해온 시립극장 예술감독인 미샤를 유혹하려는 것임^^;) 단추 베르닌과 코즐로프도 그 손님 명단에 들어 있다. 렐랴가 그 둘을 초대한 이유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은 두 명 더 있었다. 불청객까지는 아니었지만 로만 코즐로프가 거기 속했다. 코즐로프는 가브릴로프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원래 렐랴는 지휘자인 콘스탄틴 볼코프를 초청하려고 했었다. 친분도 있는 사이인데다 파티에서 사랑받는 타입의 둥글둥글한 아저씨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코프는 손녀의 생일과 겹친다며 난색을 표했고 대신 코즐로프를 밀어 넣었다. 가브릴로프 문화예술계를 꽉 잡고 있는 숙녀답게 렐랴는 코즐로프와도 안면이 있었지만 둘은 전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코즐로프는 오케스트라의 실세였는데 현학적이고 냉소적인 인물이었고 이따금 싸움꾼으로 변모하기도 했다. 모스크바 물을 먹은 적이 있기 때문에 거만하게 구는 적도 많았고 보통은 음울하기 짝이 없었다. 렐랴는 그를 키라의 옆자리에 배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까칠한 화가와 냉소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둘이서 잘해보라지.

 

마지막은 진짜 불청객이었다. 그녀가 별장에서 파티를 여는 것은 가끔 있는 일이었고 누구를 손님으로 부르든 지금껏 간섭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명단에 미샤 야스민이 들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가브릴로프 KGB 지부에서 렐랴에게 연락을 해왔던 것이다. 자신들 쪽 사람을 하나 끼워 넣지 않으면 파티를 취소하거나 그 요주의 인물을 제외해야 할 거라고 조용하지만 명령에 가까운 경고를 해왔다. 미샤는 당연하게도 보안위원회의 특별 감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렐랴는 아버지와 친척들에게 얘기해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킬까 하다가 국장인 블라지미르 스페호프가 친히 전화를 해왔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스페호프의 비위를 건드려서 좋을 일은 별로 없었으니까. 그자는 심사가 뒤틀린 사이코였다. 원래는 모스크바 KGB 본부에 있었지만 어떤 일에 휘말려 가브릴로프로 전출당해 지부 국장을 맡고 있었는데 한번 앙심을 품으면 잊는 법이 없었고 의심스러운 사상이 엿보이는 젊은이들이라면 악착같이 감시했다. 그러니 그가 미샤 야스민이 초청된 파티에 감시자를 딸려 보내려고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그나마 스페호프 자신이 오는 것이 아니라 다닐 베르닌을 보내는 것이 다행이었다. 베르닌은 가브릴로프 KGB 지부에서 서기 업무를 보고 있었고 스페호프의 비서 중 하나이기도 했다. 렐랴는 베르닌의 조그맣고 광택 없는 까만 단추 같은 눈을 아주 싫어했고 그의 촌스러운 매너와 그보다 더 엉망인 옷차림은 더욱 싫어했다. 이미 서른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꼭 풋내기 대학생 같은 몰골이었다. 그녀는 스페호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베르닌에게도 초청장을 보냈지만 마음 속으로는 어떻게든 미묘하게 모욕을 주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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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번엔 소설 전반부. 갑작스럽게 시체가 발견된 후, 손님들을 모두 거실에 몰아넣고 나서 베르닌과 렐랴가 나누는 대화이다 :) 여기 인용되는 키라, 데니스, 알렉세이 등등은 모두 본편에도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키라는 미샤의 화가 친구이며(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도 둘이 미술관 갔던 얘기를 잠깐 발췌한 적 있다), 데니스와 알렉세이는 가브릴로프 극장의 무용수들이다.

 

 

모포를 들고 다시 복도를 돌아 나왔을 때 렐랴는 베르닌이 시체 곁에 무릎을 꿇고 뭔가를 살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찌나 열중해 있는지 그녀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 뭐 새로운 거라도 있어요? ”

 

베르닌이 희미하게 움찔하더니 시체의 손을 내려놓았다. 렐랴는 어렴풋이 베르닌의 소매 안쪽으로 초록색 광채가 반짝 사라지는 것을 본 것 같았지만 램프 불빛이 시계에 반사된 것인지도 몰랐다.

 

“ 별로. 가서 얘기하죠. 모포가 꽤 크군요. 혼자 들고 오기 힘들었겠어요. 그럴 줄 알았으면 같이 갈 걸 그랬네요. ”

 

“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소용없어요. 매너와는 담쌓은 사람이란 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

 

“ 매너는 극장 남자들에게나 기대해요. 왕자님 역할이 몸에 밴 사람들이 우글거리잖아요. 데니스도 그렇고 야스민도. 하긴 알렉세이도 키라에게 잘 해주더군요. 그나마 이불이 흰색이 아니라서 기분은 좀 나은데. ”

 

베르닌은 렐랴의 도움을 받아 모포를 펼쳐 시체를 덮었다. 모포 아래로 맨발이 빠져나와 있는 것을 보자 렐랴는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모포를 끌어당겨 시체를 완전히 덮으면서 렐랴가 중얼거렸다.

 

뜨거운 차와 파이라도 좀 갖다 줘야겠어. 다들 숙취 때문에 괴로울 거야. ”

 

“ 그러는 게 좋을 겁니다. 진술하려면 다들 정신을 차려야 할 테니까. 차와 음식 준비는 타마라 니콜라예브나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군요. 혼자 준비하려면 번거로울 테니까. ”

 

“ 가지가지 하는군요. 무매너에 성차별주의 발언까지. 나 혼자 할 수 있어요. 내가 여자라서가 아니라 주인이기 때문이죠. ”

 

“ 사과하라는 뜻인가요? 다시 봤습니다,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예쁜 얼굴과 살림 솜씨로 맘에 드는 남자를 유혹하려고 파티를 연 전형적인 귀족 아가씨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사과해야겠네요. ”

 

 

렐랴는 어째서 베르닌의 그 형편없는 매너와 끔찍할 정도로 무례한 발언에 화조차 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그럴 가치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싸늘한 미소를 띠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 당연히 사과해야죠. 그리고, 잊지 말아요, 다냐. 당신도 그 잠재적 용의자에 해당된다는 사실. 내가 심문하겠다고 했잖아요. ”

 

“ 잊었을 리가. 그래, 언제 하려고요. 지금? ”

 

“ 다른 사람들 얘기 좀 들어보고요. ”

 

“ 뜻대로 하시죠, 비슈네브이 사드 편집장님. 아마 맘 상할 얘기가 좀 많이 나올 겁니다. 그래도 당신은 키라처럼 울지는 않겠죠. 그 아가씨처럼 누구에게 목맬 정도로 빠져 있지는 않으니까. 그런 타입도 아니고. ”

 

“ 내기라도 하고 싶네요, 다냐. ”

 

“ 뭘 말인가요. 범인을 누가 먼저 밝혀내는지? ”

 

“ 아뇨. 난 당신처럼 탐정 놀이에 빠져 있는 철없는 사내애가 아니에요. 그런 내기 따윈 안 해요. ”

 

 

렐랴는 부드럽고 도톰한 입술을 치켜 올리며 도도하게 말했다.

 

 

“ 당신 지금까지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해봤죠? 여자가 정말 싫어하는 타입이니까. ”

 

“ 얼마 걸겠어요? ”

 

“ 글쎄요, 이 목걸이라도 걸까요? ”

 

“ 진짜 진주 같은데? 공연한 짓 하지 말아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가서 뜨거운 차나 준비해 주시죠. 아까 키라 모이세예브나 말 못 들었어요? 그 레닌그라드 친구에겐 뜨거운 게 필요할 걸요. 아직 고문 후유증이 있어서. 물론 신경통 앓고 있는 당신 외삼촌과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신부님에게도 뜨거운 차가 필요하겠죠. ”

 

“ 당신, 내기에 응하지 않았어요. 결론이 났네요. ”

 

“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

 

 

다닐 베르닌이 웃기 시작했다. 렐랴는 처음으로 그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미소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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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전은 3인칭 시점이긴 하지만 다분히 렐랴의 관점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초반부의 베르닌은 이런 사람으로 보인다.. 요즘은 하도 서무 시리즈를 많이 써서 그런지 오랜만에 저 추리소설의 베르닌을 보니 굉장히 뺀질거리는 것처럼 보이네.. 서무 시리즈였다면 시체를 발견한 단추는 훌쩍훌쩍 울며 책상물림 짓을 하고 있을텐데 :) 하지만 이 외전도 후반부로 가면 베르닌의 다른 면모가 드러난다~ 렐랴도 그렇고 :)

 

이 추리 외전은 분량이 꽤 길긴 한데... 서무 시리즈도 잘 안 풀릴 때가 오면 이 외전을 한번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그래도 베르닌은 서무 시리즈 단추가 더 귀엽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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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서무의 슬픔 시리즈도 이제 20편이 넘어갔다. 0편부터 시작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숫자보다 하나가 더 많다. 여기에 외전으로 들어갔던 등장인물 20문답이 있다.

 

본편이 답보 상태에 접어든 대신 서무 시리즈는 꼬박꼬박 잘 써져서 24편까지 완료가 된 상태이다. 그 뒤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계속 쓸 것 같긴 하다. 문제는 자꾸 본편이랑 섞인다는 것이 ㅠㅠ

 

하여튼 그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고. 어느덧 21편.

 

지난 20편에서 왕재수는 스페호프의 갖은 방해공작을 무릅쓰고 돈키호테 공연을 잘 올렸다. 물론 하를람피 푸고비체프의 도움을 받아서 :) 21편은 여기서 이어지는 얘기다.

 

* 전에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루뱐카는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를 가리키는 속어이다. 모스크바의 루뱐카 지역에 있어서 그렇게 불린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높은 사람들 앞에서 왕재수의 공연을 망치려고 했던 방해공작이 실패로 돌아간 후 스페호프 국장은 복수심에 불타고...새로운 음모를 짜낸다. 과연 베르닌은 그 음모를 분쇄하고 왕재수를 위험에서 지켜낼 수 있을 것인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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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1

 

 

 

 

서무의 슬픔

- 스페호프의 복수 -

 

 

 

 

 

 

월요일 아침부터 가브릴로프 KGB 지국의 모든 직원들은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다. 국장실로부터 공산당 찬가와 콤소몰 행진곡이 꽝꽝거리며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국장은 예술과는 담을 쌓았지만 당이 인정한 음악에 대해서는 굉장한 애호가였다. 국장실 벽 삼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에는 레닌과 스탈린을 비롯한 서기장들의 연설 모음집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주해 등을 비롯한 가지각색의 공산당 관련 서적과 각종 레코드, 테이프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특히 프로파간다 음악들을 매우 좋아했다. 그러니 국장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공산당 찬가와 콤소몰 행진곡이 나온다는 것은 일급 경고였다! 최악의 저기압일 때만 틀어놓는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전날의 돈키호테 공연 때문에 국장의 심기가 매우 나쁘리라고 예상하며 출근했기 때문이다. 분명 주간 회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를 호출해 극장에서의 일을 추궁할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9시가 되자 스페호프가 직접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국장실로 올라오라고 했다.

 

 

베르닌은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머리를 짜내며 계단을 올라갔다. 자기도 모르게 돈키호테처럼 다리를 높이 들고 휘적휘적 걷고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공연을 방해하기는커녕 출연까지 했다는 사실을 국장이 알게 된다면 큰일이었다.

 

 

국장실 문은 열려 있었고 여전히 콤소몰 행진곡이 우렁차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베르닌은 심호흡을 한 후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스페호프가 서류를 뒤적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눈이 번쩍 빛났다.

 

 

“ 국장님, 안녕하십니까. ”

 

“ 그놈이 주인공인지 뭔지를 출 거라는 걸 끝까지 몰랐나? ”

 

“ 어, 예... 철저히 비밀로 해서요... 그 나이 많은 선생이 출 거라고 생각했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공연이랑 극장은 잘 몰라서 그만... ”

 

“ 하긴 발레단 내부에 있는 놈도 몰랐는데 자네가 무슨 수로 알았겠나. 그 여우같은 놈이 우리 모두를 속였어, 보기 좋게 갖고 놀았어! 망할 자식. 의원들이 얼마나 넋을 빼고 보던지. 내참 구역질이 나서. 사내자식들이 민망한 타이츠를 입고 펄쩍펄쩍 뛰지를 않나, 얼굴에 분칠을 하고 속눈썹을 붙이지 않나, 계집애들이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지를 않나. 연방과 당을 이끄는 인물들이 그딴 지저분한 짓거리를 보면서 천재가 어쩌고 뮤즈가 어쩌고 하고 있으니... 아주 그 더러운 불여우 꼬마한테 제대로 홀렸다니까. 그 자식이 무대에 올라간다는 건 나도 3시에야 알았네, 레베진스키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알려주더군. 의원님들이 공항에서 들이닥치는 시간이라 도저히 그 자식을 손봐 줄 수는 없었어. 시간도 그렇고 잘못하면 의심받기 쉬우니... 그래서 그 풍차인지 뭔지를 건드려놨는데 망할 놈의 키다리 놈팽이 대가리가 박살날 줄 알았더니만 돌머리인지 멀쩡하게 나오지 뭔가! 그 자식은 대체 어디서 굴러온 건달 녀석인지! 무슨 푸고비체프인지 뭔지. 서류에도 그런 이름은 없더군! 그 불여우 꼬마가 분명 어딘가에서 끌어온 악당일 거야! 자네도 잘 찾아보도록 하게! 이상하게 그놈이 아주 꼴 보기 싫더군! 제일 먼저 제거한 배역이었는데 어디서 그런 녀석이 굴러 들어와서... ”

 

“ 어, 예... 그 푸고비체프란 사람은 무슨 벌목공 출신인데 다른 지역에서 잠깐 놀러왔다가 어젯밤에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

 

 

베르닌은 자기보호 본능이 발동해 무의식적으로 급하게 둘러댔다. 스페호프는 족히 5분도 넘게 욕설을 퍼붓더니 물을 한 컵 꿀꺽꿀꺽 마셨다.

 

 

“ 알았네. 하여튼 호락호락하지 않은 놈이야. 막판에 그렇게 받아치다니. 그 깜찍한 녀석이 전에 내 인사말도 40초 만에 끊어버렸지. 그거야말로 정말 용서할 수 없어! 그래도 하나 알게 된 사실이 있지. 그때 내가 VIP석에 앉았지 않나, 의원들 옆에. 그 인간들이 나누는 얘길 들었지. 애송이가 아프긴 정말 아픈 모양이더군. 그 망할 놈의 의사 영감탱이가 우리에겐 조작된 차트를 제출하고 있었어. 모스크바 의원들은 그 영감이 크레믈린 쪽으로 보낸 차트 원본을 본 모양이야. 조금만 삐끗하면 수용소 후유증이 도지니까 조심조심해야 한다지. 그래서 윗분들이 그놈을 우리 동네로 보냈다는 거야! 공기 맑은 곳에서 요양하라고! 흥, 아주 잘됐어! 대놓고 암살하는 건 그 불여우 녀석한테 혹한 윗분들이 많으니 아직은 위험하지. 이미 극장 쪽에 얘길 해뒀네. 제깟 게 펑크 난 배역은 땜빵할 수 있을지 몰라도 L-950은 못 버티지!

 

“ 어, 저... 국장님. L-950이 뭔가요? ”

 

“ 아참, 그렇지. 자넨 현장요원이 아니지. 자세히 알 것 없네. 루뱐카 본부에서 쓰는 거라서. 뭐 조금만 쓰니까 검출도 안 될 거고, 일반인한테는 별 문제도 안 되는 분량이지만 그 꼴 보기 싫은 애송이는 알콜을 분해 못 시키니까 제대로 작용할 것이야! 자넨 오늘부터 그 자식을 면밀하게 관찰하게. 열이 나고 아프기 시작하면 제대로 걸려든 거지! 당장 죽이진 못해도 혼쭐을 좀 내줘야겠어! ”

 

“ 저...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설마 그건 약물 얘긴가요? 극장에 심어놓은 내부 스파이에게 전달하셨다는 건가요? 그래서 그걸 몰래 야스민에게 먹여서 아프게 한다고요? ”

 

“ 음, 다닐. 자네 많이 늘었군. 역시 그 불여우 감시 업무를 분장해 줬던 보람이 있다니까. 이제야 감시분석부의 어엿한 일원이 되어 가는군. 잘해 보게. 그 망할 불여우 때문에 힘들겠지만 이 경험을 토대로 행정의 기본뿐만 아니라 현장요원으로서의 역량도 서서히 배양할 수 있을 것이네. ”

 

“ 저, 국장님. 그럼 차라리 그 약물, 무슨 L이 어쩌고 하는 걸 저에게 주시면 제가 직접... ”

 

“ 아니, 안 되네. 불여우를 직접 처치하고자 하는 자네의 열정과 공명심은 높이 사네만 그건 위험하지. 이미 자네가 감시요원인 걸 온 천하가 다 아는데 약물까지 맡기면 즉시 크레믈린에서 의심대상이 될 걸세. 발레단 쪽에 있는 친구가 몰래 먹이는 게 낫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말게, 나중에 진짜 기회가 올 테니까. 이번 것은 죽이려는 것까지는 아니거든. 그저 그 싸가지 없는 개자식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야! 가만 안 두겠어! 버릇없는 반동분자 녀석!!!! 자, 그렇게 알고 오늘 저녁부터 그놈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살펴주게! 이상! 주간 회의에서 보세! ”

 

 

베르닌은 묵묵히 자리로 돌아왔다. 주위를 살폈다. 주간 회의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배나무 거리 교차로 앞 공중전화로 갔다. 극장 감독실로 다이얼을 돌렸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왜 비서도 전화를 안 받는지 불안해하며 동동 구르다가 문득 깨달았다.

 

 

‘ 아 맞다, 오늘 월요일이지. 극장 노는 날. ’

 

 

왕재수는 보통 월요일에도 출근하곤 했지만 전날까지 돈키호테 때문에 그렇게 과로를 했으니 못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았다. 그래도 오후에 기어 나올지도 모르니 걱정이 되었다. 왕재수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그 집 전화에는 도청장치가 부착되어 있었지만 어차피 그 내용을 정리하는 건 자신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왕재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 아직 자나... 하긴 아침잠이 엄청 많은 애니까. 어제 집에 들어오긴 했나 모르겠네... 국회의원들한테 인사하고 같이 저녁 먹으러 간다고 했었는데. ’

 

 

걱정이 된 베르닌은 잠시 우왕좌왕하다가 수첩을 뒤져서 코즐로프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다이얼을 돌리니 한참 후에 코즐로프의 까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걸었어요!

 

“ 어, 나 다닐인데요. ”

 

“ 왜 뜬새벽부터 전화야! ”

 

“ 9시 넘었는데... ”

 

“ 9시면 뜬새벽이지! 월요일이라 밀린 잠 자고 있는데! 무슨 일이야? ”

 

“ 어, 저... 미샤 거기 있어요? ”

 

“ 우리 아기는 왜! ”

 

“ 할 얘기가 있어서요. 당신이랑 같이 있어요? ”

 

“ 있긴 한데 지금 자. ”

 

“ 잠깐만 깨워 주면 안 돼요? 진짜 중요한 얘기가... ”

 

안 돼. 우리 아기 잘 때는 절대 못 깨워! 가뜩이나 동 다 텄을 때 들어와서 잠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도 알잖아, 우리 비둘기가 요 며칠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 망할 놈의 공연인지 뭔지 때문에! ”

 

“ 어... 왜 그렇게 늦게 들어온 거예요? ”

 

“ 높은 분들한테 인사하고 저녁 먹고 술자리에도 끌려갔으니까 그렇지. ”

 

“ 엥, 술 마신 거 아니죠? 걔 술 마시면 안 되는데. ”

 

“ 술 마셨으면 제 발로 걸어 들어왔겠냐. 그놈들이 옆에 끼고 노느라 늦었겠지. 에이, 개자식들. 우리 아기 감옥 끌려갈 때 나 몰라라 했던 건 언제고 이제 와서... 중요한 얘기가 뭔데? 내가 전해주면 안 되냐? ”

 

“ 아니, 저... 걔 오늘 극장 안 가죠? ”

 

“ 안 가! 간다 해도 내가 못 가게 할 거야. 사람 몸이 무슨 무쇠도 아니고. 오늘은 우리 집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 ”

 

“ 다행이다... 그럼 내일은 나가요? 내일 공연 없는 거 같았는데. ”

 

“ 나는 오케스트라 연습 때문에 나가고, 얘도 나가겠지 뭐. 신작 때문에 할 거 많으니까. ”

 

“ 저, 공연 없으면 내일까지 쉬게 하면 안 되나요? 의사 선생님도 일주일에 3일만 나가라고 했잖아요. 가뜩이나 과로했는데. ”

 

“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 녀석 성깔에 내 말 듣겠냐. ”

 

 

베르닌은 시계를 보았다. 주간 회의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 어, 그럼 있잖아요, 이거 중요한 얘기니까 꼭 전해주세요. 당분간 극장에서는 물이나 음료수 절대 마시지 말라고. ”

 

“ 왜? 스페호프 그 자식이 독이라도 탄다든? ”

 

“ 엇... 어... 당신 정말 예리하네요. 어떻게 알았지? ”

 

“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 ”

 

“ 어, 그래요. 국장이 어제 공연 때문에 엄청 열 받았어요. 이상한 약물 써서 아프게 만들 거랬어요. 알콜 약물이라 했으니까 분명히 음료수에 탈 거예요. 걔 목마른 거 못 참잖아요, 보이는 대로 물이랑 주스랑 막 마시잖아요. 집에서 물이랑 주스 싸가라고 해요. 절대, 절대 극장에서 뭐 받아 마시면 안 돼요. 차도 마시면 안 돼요. 내일까지 쉬게 하고요. ”

 

“ 알았다. 내가 그 더러운 놈 죽여 버릴 거야. 밤길 조심하라 해라, 등짝에 칼을...

 

 

코즐로프가 점차 잠이 깨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미는 것 같은 눈치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주간 회의에 늦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뛰었다.

 

 

 

*    *    *

 

 

 

베르닌은 바쁜 와중에도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화요일 오전에 그는 다시 극장에 전화를 해보았다. 류드밀라가 받았다.

 

 

“ 감독님은 오늘 안 나오세요. ”

 

“ 어, 그래요? 휴가예요? ”

 

“ 네, 대휴예요. 2주일 동안 하루도 안 쉬고 계속 나왔었거든요. ”

 

 

다행이라 생각하며 베르닌은 전화를 끊었다. 밤에 코즐로프의 집에 들러서 왕재수에게 직접 위험을 알려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긴 바이올린 깡패가 어련히 옆에서 잘 막아주려나 싶기도 했다.

 

 

오후 늦게 그는 구시가지에 갈 일이 생겼다. 얼마 전 다녀온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의 발표 자료로 만들었던 ‘레닌과 스탈린,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경제 모델에 따른 가브릴로프의 공산당원 교육 정책’ 원고가 필요하다는 교육국의 공문 때문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발송 대장에 적고 우편으로 보냈겠지만 직접 가져다주겠다고 자청했다. 극장이 교육국에서 10분 거리였기 때문이다. 외출부에 적고 사인을 받으러 갔더니 스페호프는 칭찬을 했다.

 

 

“ 그렇지, 바로 이거야. 드디어 자네가 서무 업무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KGB 직원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정보 공유의 범위를 확대했구먼! 교육국에 가면 담당자에게 전해주지 말고 반드시 이 공문의 전결권자인 본부장에게 직접 가서 원고를 건네주게! 그래야 우리 KGB가 이 정도로 공부하는 조직이라는 것을 어필할 수 있는 것이네! 어서 다녀오게. ”

 

 

베르닌은 차를 몰고 다리를 건넜다. 교육국에 갔다. 본부장인 우니보프에게 가서 원고를 전해 주었다. 우니보프는 고개를 갸웃했다.

 

 

“ 아니,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건가? 이건 우리 부서 플레타노프가 요청한 자료일 텐데. ”

 

“ 예, 본부장님이 공문에 사인을 하셨기 때문에 직접 전해드리라고 우리 국장님이 지시했습니다. ”

 

“ 허참, 하여튼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는 꼼꼼하다니까. 책상 위에 놓고 가게. 그냥 플레타노프에게 갖다 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여튼 잘 가게. ”

 

 

 

귀찮아하는 우니보프의 책상 위에 원고를 내려놓은 후 베르닌은 극장으로 갔다. 스페호프가 정확히 누구를 매수했는지, 그리고 음료수가 투입될만한 루트가 무엇인지 파악해 볼 생각이었다. 내심 그는 안무가인 레베진스키를 의심하고 있었다. 왕재수 때문에 감독직도 빼앗긴데다 신작이 반동적이라고 검열국에 찌른 적도 있고 스페호프에게 공연에 대한 정보도 제공했으니까.

 

 

마침 그는 분장사인 타치야나와 마주쳤다. 타치야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눈을 찡긋하며 인사를 했다.

 

 

“ 안녕, 하를람피. ”

 

“ 안녕하세요, 타치야나 이바노브나. 혹시 레베진스키가 지금 어디 있는지 보셨나요? ”

 

“ 콜랴? 오후 반차 내고 나갔대. 내일도 휴가야, 집에 일이 있다고. ”

 

“ 아, 그래요? ”

 

 

다행이다 싶어서 그는 1층 카페 차이카로 내려가 보았다. 맛없고 질 나쁜 음식만 내놓는 곳이니 음료수에 약을 타도 티가 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런데 차이카는 문이 닫혀 있었고 ‘기술적인 문제로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영업을 중단함’이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그나마 나쁜 가능성 하나가 사라진 셈이니 다행이었다. 극장 2층에서 5층까지 작은 카페가 하나씩 있었지만 그건 공연을 할 때만 열고 관객을 대상으로 하니까 왕재수가 가서 뭘 마실 일은 거의 없었다.

 

조금 마음이 놓인 그는 복도로 나왔다. 그러다가 왕재수와 마주쳤다.

 

 

“ 어, 너 웬일이야? ”

 

“ 앗, 너 왜 여기 있어! 오늘 대휴라고 했잖아! 안 나온다며! ”

 

어, 그건 어떻게 알아? 대휴 내긴 했는데, 할 게 많아서 점심 먹고 나왔어. ”

 

“ 너 미쳤냐, 그렇게 무리해놓고. 쉴 때 푹 쉬어야지, 어제도 아침에 들어갔다면서 기껏 하루 쉬고 나오면 어떻게 해. ”

 

“ 괜찮은데. 푹 자서 피로 다 풀렸어. 어젯밤에 우리 애들 스네고로드에서 다 돌아왔거든. 자기들 없이 돈키호테 올라갔다고 얼마나 상심하는지. 그거 토요일에 한 번 더 있잖아. 걔들 올려야 해서 연습도 봐줘야 하고. ”

 

 

베르닌은 급하게 주변을 둘러본 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 너 얘기 들었지? 절대 뭐 마시면 안 돼. ”

 

“ 어휴, 어떻게 하루종일 아무 것도 안 마시니. ”

 

“ 집에서 가져오란 말이야. 여기서 주는 건 안 돼. 국장 진짜 화났어. 너 가만 안 둔대. ”

 

“ 그 자식 하나도 안 무서워, 얼간이 앞잡이. 애들 괴롭히고 공연 망치려 들고 풍차도 고장 내고. 예술 탄압자! 두고 봐! ”

 

“ 두고 보는 건 좋은데, 너 진짜 내 말 들어야 돼. 오늘 극장 와서 뭐 마신 거 있어? ”

 

“ 안 마셨어! 주스 마시고 싶은데 안 된다 하고... 아까도 류다가 차 우려 주고 토냐가 오렌지 주스 갖다 주고 가릭이 우유 갖다 줬는데 하나도 못 마셨어. 우리 애들이 주는 건 마셔도 되는 거 아니야? ”

 

“ 안 돼, 누가 걔들 몰래 약 탈 수도 있잖아. 입에 대지 마. ”

 

“ 칫, 시어머니. 맘먹으면 무슨 짓으로든 못 먹이겠니. 그런 거 하나하나 신경 쓰다가는 아무 것도 못해. 아프면 할 수 없지 뭐. ”

 

“ 야! 뭐가 할 수 없어! 약속해, 음료수 입에 안 댄다고! 안 그러면 뱀 껍질, 바퀴벌레, 곱등이... ”

 

“ 어휴, 또 시작이야! 맨날 너는 그렇게 협박... ”

 

 

왕재수가 갑자기 말을 뚝 그쳤다. 베르닌은 누가 있나 싶어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 왜? 무슨 소리라도 들었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베르닌의 팔을 움켜쥐었다. 어찌나 꽉 잡았는지 팔이 부러지는 것 같았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면서 입을 벌렸다. 그러더니 베르닌의 팔을 놓치고 심하게 비틀거렸다. 베르닌은 너무 놀라서 급하게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야! 너 왜 그래!

 

“ 어... ”

 

 

왕재수가 머리를 뒤로 젖히더니 춤을 추듯이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숨을 헐떡이며 두 손으로 귀를 감쌌다. 무릎으로 허공을 찼다. 베르닌은 공포에 질렸다. 급하게 왕재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이마와 목에 손을 대 보았다.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왕재수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괴롭게 헐떡거렸다. 순식간에 얼굴이 파래지면서 숨소리가 약해졌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스웨터를 벗기고 셔츠 단추를 두 개 풀었다. 정신없이 가슴을 압박하고 인공호흡을 했다. 반응이 거의 없었다. 베르닌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미친 듯이 심폐소생술을 반복했다.

 

다행히 왕재수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열이 펄펄 끓었다. 베르닌은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 미하일, 너 내 목소리 들려? ”

 

“ 왜 때려... 아파... ”

 

“ 너 솔직히 말해! 뭐 마셨어! 극장 와서 뭐 마셨냐고! ”

 

“ 아무 것도... 마시지 말랬잖아. ”

 

“ 하지만... 너 분명히 뭔가를 입에 댔어! 그래서 아픈 거야! 열 나잖아! ”

 

“ 아니야, 안 마셨어... 나 자고 싶어. 추워. 집에 갈래. ”

 

 

베르닌은 왕재수를 들쳐 업고 감독실로 갔다. 류드밀라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 것을 손사래를 치며 막았다.

 

 

“ 류다, 의사 선생님한테 전화 좀 해줘요. 빨리. ”

 

 

류드밀라가 전화를 거는 사이에 그는 소파에 왕재수를 눕혀 주었다. 왕재수는 거의 의식을 잃고 있었다. 눈꺼풀까지 새빨갰다. 베르닌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류드밀라가 불렀다.

 

 

“ 의사 선생님이 바꿔 달래요, 다냐. ”

 

 

베르닌은 급하게 수화기를 낚아챘다. 의사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목소리를 낮추려고 애쓰며 생각나는 대로 전부 말했다.

 

 

“ 미하일, 갑자기 열이 펄펄 끓고 숨을 못 쉬고 쓰러졌어요. 약을 탄 것 같아요. 국장... 혼내 줄 거라고 했어요. 루뱐카, 약물... 음료수에 탄 것 같은데 얜 마신 게 없대요. 빨리 와주세요. ”

 

 

횡설수설하는 베르닌과는 달리 수화기 너머로 노의사의 침착한 음성이 들려왔다.

 

 

“ 이름. 약물 이름 들었나? ”

 

“ 어, 저... 기억이 안 나요. 무슨 L 어쩌고였어요, 뒤에 숫자가 있고... 루뱐카에서 쓰는 거랬어요. 알콜... 열 나고 아프게 만드는 거라고 국장이 그랬어요. 숨도 못 쉬어서 인공호흡 했어요. 근데 아무 것도 안 마셨다고... 물도 주스도 차도 안 마셨다고... ”

 

“ 담요로 싸주고 아무 것도 먹이지 마. 애 의식은 있나? ”

 

“ 있다가 없다가 해요. ”

 

“ 마신 거 말고, 먹은 게 있는지 물어봐. 지금. ”

 

 

베르닌은 소파로 갔다. 류드밀라가 이미 무릎담요로 왕재수의 몸을 덮어주고 있었다. 베르닌은 손으로 왕재수의 뺨을 쓸어보았다. 아주 뜨거웠다. 왕재수가 눈을 깜박였기 때문에 급하게 물었다.

 

 

“ 너 여기 와서 먹은 거 있어? 마신 거 말고, 먹은 거. 음식이든 뭐든. ”

 

“ 안 먹었어. ”

 

“ 아무 것도? ”

 

“ 으응... ”

 

 

그때 류드밀라가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하나 있어요! 감독님, 기억 안 나세요? 사과! 아까 그 사과!

 

“ 아... 사과 먹었어. ”

 

“ 사과라니! 무슨 사과! 어디서 난 건데! ”

 

“ 방에 있어서... 맛있었어. ”

 

 

류드밀라가 잠자코 티 테이블을 가리켰다. 사과 두 알이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빨갛고 반질거리는 예쁜 사과였다.

 

 

“ 류다, 저 사과 누가 가져온 거예요? ”

 

“ 모르겠어요. 와보니까 사과가 있었어요. 우리 감독님은 워낙 인기가 많으니까 너도나도 꽃이니 과일이니 케익이니 갖다 바치거든요. ”

 

 

베르닌은 전화기로 달려갔다. 의사에게 사과 얘기를 했다.

 

 

“ 남은 거 잘 보관하고 있어. 지금 갈 테니까. ”

 

 

류드밀라가 훌쩍훌쩍 울었다.

 

 

“ 내 잘못이에요, 누가 들어오는지 봤어야 했는데 오늘 감독님 휴가라고 해서 타치야나 이바노브나 방에 가서 차 마시느라 자리를 비웠었어요. 대체 누가 그랬을까요, 흐흑... ”

 

“ 당신 잘못 아니에요. 일단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

 

 

울고 있는 류드밀라를 뒤로 하고 베르닌은 왕재수의 손을 꼭 잡았다. 갑작스럽게 분통이 치밀어서 꾸짖었다.

 

 

이 바보야! 어디서 난 건지도 모르는 사과를 왜 먹어!

 

“ 네가 아무 것도 마시지 말라며. 목말랐어... 사과 좋아해. 맛있었어. 흑... 너 왜 자꾸 왔다갔다 해, 아이 어지러워. ”

 

“ 뭐가 왔다갔다 해, 나 가만히 있는데. ”

 

“ 막 빙글빙글 돌고, 왔다갔다 하고... 아유 이제 세 명 네 명 되네. 어, 이제 열 명 됐다. 자꾸 늘어나. ”

 

열 나서 그래. 눈 감고 있어. 의사 선생님 금방 올 거니까 조금만 참아. ”

 

“ 나 안 아파. 애들한테 갈래. 연습시켜야 되는데. ”

 

“ 시끄러워, 이 바보야! 내가 열 명으로 보인다며! 근데 어떻게 안 아파! ”

 

“ 아니야! 이제 안 보여! 하나도 없어! 소리만 들... ”

 

 

왕재수가 마취 주사라도 맞은 듯 다시 조용해졌다. 류드밀라가 엉엉 울면서 베르닌의 뺨을 찰싹 때렸다.

 

 

“ 이 악마! 금쪽같은 우리 감독님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

 

“ 저, 류다. 제가 안 그랬어요. ”

 

“ 당신네 KGB가 한 짓이잖아! 누가 모를 줄 알고! 그저께 돈키호테도 못 올리게 하려고 갖은 해코지를 다 하더니! 어흑, 난 왜 자리를 비웠을까... 왜 사과 먹게 놔뒀을까, 엉엉... ”

 

“ 아니에요, 당신은 아무 것도 몰랐잖아요. 의사 선생님 오시면 괜찮아질 거예요. 근데 알콜 약물이면 액체일 텐데 어떻게 사과에 들어 있을까... 주사기로 주입했을까? ”

 

아아, 이 살인자들 같으니!

 

 

류드밀라가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왕재수가 꿈틀거리더니 눈도 뜨지 않고 그녀를 꾸짖었다.

 

 

“ 류다, 조용히 좀 해요! 애들 놀라서 내일 공연 망친단 말이에요! ”

 

“ 지금 공연이 중요하냐고요! 사람이 이렇게 됐는데... ”

 

“ 지난번에도 팔 찢어졌을 때 애들이 울고불고 난리치다가 공연 말아먹었는데! 나 지금 피도 안 나고 아프지도 않으니까 애들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

 

“ 너 진짜 안 아파? ”

 

“ 안 아파! ”

 

 

왕재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깜짝 놀라며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 어, 아파... 너무 아파... ”

 

“ 안 아프다며! ”

 

“ 너무 아파, 엉엉. 여기, 여기, 여기 너무 아파. ”

 

 

왕재수가 몸부림치면서 목과 가슴과 다리를 쾅쾅 때렸다. 베르닌의 손을 끌어당겨서 자기 가슴 위에 올려놓고 마구 비벼댔다. 베르닌의 손등 위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끓는 물을 엎지른 것 같았다. 베르닌은 어쩔 줄을 몰랐다. 무섭기도 했고 괴롭기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왕재수는 다시 정신을 잃어버렸다.

 

 

잠시 후 스타브로프가 도착했다. 소파에 누워 있는 왕재수의 눈꺼풀을 벌려보고 맥박과 체온을 재고 입을 벌려서 목구멍 안쪽을 살폈다. 셔츠 단추를 모두 풀어서 피부 상태를 확인했다. 

 

의사는 베르닌에게 남은 사과가 있으면 달라고 했다. 베르닌은 떨리는 손으로 접시를 가져다주었다. 의사는 사과를 쥐고 꼼꼼하게 살폈다. 새빨갛게 반질거리는 표면을 쓸어보았다. 그리고는 굳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뭔지는 모르겠지만 껍질에 바른 것 같군. 그냥 알콜 계열이었으면 애가 먹기 전에 휘발돼 버렸을 테니 다른 약물과 섞었을 거야. 이 바보 같은 녀석, 도시에서 왔으니 이쪽 동네 사과치곤 색깔이 너무 빨갛다는 생각 같은 건 못했겠지. 여기 애였으면 의심했을 텐데. 이건 내가 가져가겠네. 무슨 약인지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 ”

 

“ 저, 선생님. 얜 괜찮을까요? 이렇게 아파하는 거 처음 봤어요. 헛소리도 하고 정신도 오락가락해요. 멀쩡했다가 헛소리했다가... ”

 

“ 스페호프가 약물 이름을 말했나? ”

 

“ 네. 근데 기억이 안 나요. L... 숫자... 0이 들어간 것 같아요. ”

 

“ 알아내. 당장. 그거 알아내서 병원으로 튀어와. 전화는 하지 말고. ”

 

“ 이러다 괜찮아지는 거죠? 국장이 그랬어요, 죽이진 않을 거라고. 그냥 좀 아프게만 할 거라고. 어흑... 나쁜 국장... ”

 

뭘 잘했다고 울어, 이 앞잡이 녀석아! 빨리 가서 약 이름 알아와! 뭔지 알기 전까진 주사도 못 놓고 약도 못 써. 난 얘 데리고 갈 테니까!

 

 

 

 

*    *    *

 

 

 

 

베르닌은 눈물콧물을 쏟으며 극장을 나왔다. 모든 신호와 속도를 위반하며 다리를 건너 순식간에 사무실까지 왔다. 국장실로 허겁지겁 달려가려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 맞아, 이러고 들어가면 국장이 분명 의심할 거야. 정신 차려야 돼. 국장한테 가면 안 돼! ’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사무실들은 거의가 텅 비어 있었다. 등록 부서 앞을 지나가는데 알렉산드라가 나왔다.

 

 

“ 어머, 다냐. 왜 그렇게 안색이 안 좋니? 무슨 일 있어? ”

 

“ 아... 아니에요. 앗, 선배님! 저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저... ”

 

 

베르닌은 급하게 주위를 살핀 후 물었다.

 

 

“ 선배님, 새로 맡으신 업무 중에 현장요원 물품 관리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맞아요? ”

 

“ 응, 맞아. 지난주에도 엄청 들어왔어. 오자마자 그거 장부 적고 대금 요청하느라 혼났어. ”

 

“ 약품도 있어요? ”

 

“ 응, 있어. 근데 약품이랑 무기 같은 건 장부를 따로 관리해. 기밀사항이라서. 왜? ”

 

“ 국장이 저한테 약품 이름을 하나 말해줬는데 까먹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요. 잊어버리면 혼날 텐데... ”

 

 

알렉산드라는 금세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장부 보면 생각나지 않을까? ”

 

“ 예,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근데 기밀사항이라면서 저 보여줘도 돼요? ”

 

“ 뭐 어때. 너 안 혼나는 게 더 중요해! 이깟 놈의 회사 내가 뭐하러 충성하니. 이리 와. ”

 

 

알렉산드라는 베르닌을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쪽 캐비닛을 열더니 장부를 한 권 꺼냈다. 최근 페이지를 펼쳤다.

 

 

“ 들어온 게 언제래? ”

 

“ 어,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오래 되진 않았을 것 같아요. 본부에서 쓰는 거라고 했거든요. ”

 

“ 응, 그럼 여기부터 봐. 나 약속 때문에 나가봐야 하는데, 다 보면 캐비닛 안에 넣어놓고 잠가놔. 열쇠는 여기 컵 아래 두고. ”

 

“ 고마워요, 선배님. ”

 

“ 고맙긴, 내일 보자. ”

 

 

알렉산드라가 나간 후 베르닌은 급하게 장부의 약품 목록을 살폈다. 지난주 목록에는 L로 시작하는 이름이 없었다. 조급해진 그는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어지러웠고 식은땀이 났다.

 

 

‘ 어떡하지... 빨리 찾아내야 되는데. 그냥 아픈 것도 아니고... 의사 선생님도 약이 뭔지 모르면 애를 치료할 수도 없다고 했는데. 혹시 새로 들여온 약이 아니고 우리 비품 관리실에 원래 있었던 게 아닐까? 현장요원용으로... 그치만 여긴 시골이라 현장요원이나마나 다들 그냥 땡땡이치는 분위기인데 그런 약을 쟁여둘 필요가 없었을 텐데... ’

 

 

베르닌은 미칠 것 같았다. 장부는 작년 가을부터 기록되어 있었다. 9월치까지 모두 뒤졌지만 L로 시작하는 약물은 없었다. 그때 갑자기 베르닌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L은 약품 이름이 아니었어! 그건 루뱐카(Lubyanka)를 가리키는 거야! 그건 분류목록 번호였어! 이름은 그냥 숫자로만 되어 있는 거야!

 

 

그는 장부를 다시 넘겼다. 1주일 전 목록에서 L-약품 카테고리를 찾아냈다. 루뱐카에서 반입한 약품이란 뜻이었다. 놀랍게도 숫자가 있었다. 세 자리 숫자가 있었고 오로지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0이 들어 있었다.

 

 

950. 맞아, L-950이라고 했어!

 

 

베르닌은 급하게 장부를 집어넣고 캐비닛 문을 잠갔다. 열쇠를 알렉산드라의 컵 아래에 쑤셔 넣었다. 정신없이 전화 다이얼을 돌리려다가 의사가 전화하지 말고 직접 오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는 급하게 뛰어나갔다.

 

 

 

*    *    *

 

 

 

 

왕재수는 얼굴과 목덜미와 팔에 새빨갛게 두드러기가 돋은 채 알아들을 수 도 없는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간호사가 주머니 같은 것을 몸에 대 주면서 열을 식혀주고 있었는데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옆에서는 스타브로프가 스포이트로 핏방울을 톡톡 떨어뜨리며 무슨 시약 검사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베르닌이 뛰어 들어오자 의사는 실험을 멈추고 거칠게 물었다.

 

 

“ 뭔지 알아냈나? ”

 

“ 950! 국장은 L-950이라고 했어요. L은 루뱐카의 머리글자였어요. 이제 된 거죠? 무슨 약인지 알았으니까 해독제 찾을 수 있는 거죠? ”

 

“ 950... L-950... ”

 

 

노의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몇 번이나 숫자를 입안으로 뇌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며 욕설을 내뱉었다. 얼굴에 패인 주름이 더 깊어졌다.

 

 

“ 저, 선생님. 왜 그러시나요? 그렇게 나쁜 약인가요? 국장이 그랬어요, 그 정도 분량이면 보통 사람들한테는 별 문제 안 된다고... ”

 

의심 가는 것들이 있긴 한데 정확하게 뭔지 모르겠군. 그 숫자는 별로 도움이 안 돼. KGB 살인마들이 쓰는 기호는 나도 몰라. 이름을 알아내야 해. 피 검사를 하고 있는데 알콜 계열이라는 것 외엔 너무 정보가 없어. ”

 

“ 저, 해열제 놔주면 안 되나요? 두드러기 완화해주는 약이랑... ”

 

“ 무슨 약을 먹었는지 모르니 아무 거나 놔주면 안 돼. 잘못하면 큰일 나. 죽이려고 작정한 거지. 더러운 놈 같으니. ”

 

 

베르닌은 겁에 질렸다.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에요, 국장이 그랬어요. 죽이려는 건 아니라고... 조금 아프게만 할 거라고 했어요. 겨우 사과 한 알 먹었는데 왜 죽어요? 선생님은 우리 시에서 제일 훌륭한 의사잖아요. 그런데 왜 무슨 약인지 못 알아내요? 얘 차트도 다 있잖아요, 무슨 약 써야 괜찮은지 다 아시잖아요. 엉엉, 제발 어떻게 좀 해보세요. ”

 

“ 그놈이 쓴 약물 이름! 그거 알아내야 돼! 그거 모르면 다른 약은 아무 것도 못 써! 그냥 계속 이렇게 놔두면서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단 말이야! 이 얼간이 천치야, 너 모스크바에 아는 놈 없어? 정보 얻어낼 놈 없냔 말이야! ”

 

 

베르닌은 하마터면 왕재수의 크레믈린 아저씨에 대해 얘기할 뻔 했다. KGB 출신인데다 지금도 본부를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했으니 연락만 하면 금세 모든 정보가 흘러들어올 게 뻔했다. 하지만 그렇게 높은 사람에게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 무서운 아저씨가 자기부터 죽여 버릴 것 같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워한다는 왕재수조차 말을 안 들으면 뼈도 부러뜨리고 마구 괴롭혔다고 했으니 자기처럼 하찮은 감시요원은 그 자리에서 없애버릴 게 뻔했다. ‘눈앞에서 내 귀염둥이가 약을 먹고 쓰러지게 놔두다니, 너 따위 천치는 모가지를 베어버리겠다!’ 하면서 정말 그의 목을 자를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베르닌은 자신을 호되게 질책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어떻게 이 상황에서 나 혼자 살자고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크레믈린 아저씨한테 연락을 해야 돼! 그 방법뿐이야! ’

 

 

순간 베르닌의 머릿속에 밝은 빛이 번쩍했다.

 

 

나타샤!

 

“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이 와중에 웬 여자를 찾아! ”

 

 

스타브로프가 화를 버럭 냈다.

 

 

“ 나타샤! 제 동기예요! 지난번 파티에 왔었어요. 루뱐카 본부에 있어요! 전화번호가... 그래! 전화번호 받았어! 잠깐만요! ”

 

 

베르닌은 호주머니를 뒤집어 수첩을 꺼냈다. 전화번호를 뒤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나타샤가 그에게 번호를 적어줬었다. 그 파티에서. 아르마니와 에르메스에 감탄하면서.

 

 

“ 여기 있다! 선생님, 잠깐만요. 전화 좀 쓸게요! 아, 안 돼... 선생님은 반동분자 리스트에 들어 있으니까 전화 도청될지도 몰라요. 저 밖에서 전화 좀 하고 올게요! ”

 

 

그는 병원에서 달려 나왔다. 근처 빵집까지 갔다. 빵집 앞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외전화가 가능한 부스였다. 토큰을 집어넣고 급하게 다이얼을 돌렸다. 나타샤가 과연 집에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나타샤는 미인이니 추종자와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동동 구르는 순간 나타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

 

“ 나타샤. 안녕, 저... 나 다닐이야. 다닐 베르닌. 기억나? 우리 지난 가을에 잠깐 봤잖아, 여기 가브릴로프 파티에서... ”

 

“ 어머, 다냐! 안녕! 오랜만이야! 어쩜 너 그때 나랑 커피 마시기로 해놓고 그냥 가버리고! 내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아니? ”

 

“ 아, 그때... 미안해. 그때 갑자기 급한 일이 터져서 그랬어. 미안해. ”

 

“ 그 동안 잘 지냈니? 너 모스크바 안 와? 보고 싶다, 다냐~ ”

 

“ 아... 그러게. 모스크바 가게 되면 꼭 한번 보자. 저, 있잖아, 나타샤.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

 

“ 뭔데? ”

 

“ 본부에서 쓰는 약물들 있잖아. 내가 지금 비품 정리를 하고 있거든. 근데 번호만 있고 이름이 없어서 너무 헷갈려서... 혹시 네가 알까 해서. ”

 

“ 아, 요원들이랑 실험실에서 쓰는 거? 맞아, 우린 번호로 기재하니까 다른 기관들에서는 못 알아듣더라. 근데 너는 같은 KGB인데 왜 몰라? ”

 

“ 어... 나는 그쪽 담당이 아니라서 몰랐어. 근데 이번에 분장이 좀 바뀌어서... 950번인데 혹시 알아? ”

 

“ 950? 글쎄, 나도 그렇게 말하니까 잘 모르겠네. 장부를 봐야 아는데 나 지금 퇴근해서... 내일 사무실 가야 알 수 있을 거 같아. 내일 아침에 내 자리로 전화할래? ”

 

“ 아... 내일 아침이면 늦을 것 같아. 어쩌지... ”

 

 

온몸이 새빨개져서 열이 펄펄 끓고 있는 왕재수를 떠올리며 베르닌은 쏟아지는 눈물을 억눌렀다. 그때 나타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근데 너네 지국에는 약물 색인 없어? 그거 본부에서 다 배포해줬을 텐데. 1월에도 수정본 인쇄해서 지부별로 다 보냈는데? 그거 보면 번호랑 이름 다 적혀 있잖아. ”

 

“ 색인... 1월... 아!!!

 

 

베르닌이 탄성을 질렀다. 나타샤가 뭐라고 하는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마터면 수화기를 그대로 내던지고 뛰쳐나갈 뻔 했다.

 

 

고마워, 나타샤. 정말 고마워. 우리 모스크바에서 꼭 보자! 저녁 잘 보내! ”

 

 

 

그는 급하게 차를 몰고 다시 사무실로 갔다. 자신의 자리로 달려갔다. 등 뒤의 캐비닛을 열었다. 온갖 책자들이 어지럽게 꽂혀 있었다. 나타샤의 말이 맞았다. 약물 색인이 있었다. 1월에 본부에서 보내온 자료였다. 그가 수령해서 접수 대장에 기록까지 했었다. 검정 표지에 ‘1982년 소비에트 연방 보안위원회 업무용 화학약품 색인’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책자를 찾아냈다. 갱지에 빽빽하게 약품 목록이 인쇄되어 있었다. 번호 순이었다. 그는 급하게 페이지를 넘겼다. 950번을 찾아냈다. 있었다. 이름이 있었다. 러시아어가 아니었다. 영어도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되어 있었다. 생긴 걸 보니 독일어 같았다. 일단 수첩에 옮겨 적었다. 혹시 몰라서 손바닥에도 적었다.

 

 

‘ 제발, 제발 조금만 더 버텨봐 이 바보야. 금방 갈게. 아프지 마. 제발... ’

 

 

베르닌은 의자를 쿠당탕 넘어뜨리며 정신없이 사무실을 달려 나갔다.

 

 

 

 

*   *   *

 

 

 

 

베르닌이 약물의 이름을 휘갈겨 적은 수첩을 내밀었을 때 스타브로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이 굳어졌을 뿐이었다. 곧장 왕재수의 침대로 다가가더니 팔목에 주사 바늘을 찔러 넣었다. 피를 뽑아냈다. 피가 계속 빨려나왔다. 베르닌은 공포에 질렸다.

 

 

“ 선생님, 왜 그러시는 거예요? 가뜩이나 아픈 애한테서 피를 그렇게 많이 뽑으면 어떻게 하나요! 빈혈이라도 오면... ”

 

“ 시끄러워. ”

 

 

노의사는 한결 냉정해져 있었다. 피를 잔뜩 뽑아낸 후 베르닌을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 너 O형이지? ”

 

“ 어, 예. 어떻게 아세요? ”

 

“ 내가 받아준 놈인데 왜 몰라! ”

 

“ 어... 진짜 대단하시네요. 선생님이 받아주신 애들 진짜 많잖아요. 근데 그 많은 사람들 혈액형을 다 기억하신단 말이에요? ”

 

“ 아니, 다는 기억 못해. 근데 네 녀석은 기억하지. 아기 때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다가 코가 깨져서 피 철철 나고 네 어머니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안고 왔었거든. ”

 

“ 어, 맞아요. 그랬다고 했어요. 그래서 콧대가 죽었다고 엄마가 안타까워하셨어요. 그것 때문에 장가를 못 가나 하고 자책하시고... ”

 

“ 시끄러워. 지난 일주일 동안 음주한 적 있어 없어! ”

 

“ 어... 없어요. 바빠서... ”

 

“ 아팠던 적은? 다른 질환은 없는 거 알고. ”

 

“ 저기... 지난번 출장 갔을 때 후두염. 그리고 레닌그라드에서 본 의사 얘기론 위염이랑 역류성 식도염... ”

 

“ 그건 됐고. 작년 검진 차트 보니까 간 질환이나 그런 건 없었고. 저쪽 가서 키랑 체중 좀 재봐. ”

 

“ 아니 왜요? ”

 

“ 빨리 재! 제냐, 이 녀석 좀 봐줘! ”

 

 

스타브로프의 병원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젊은 의사 예브게니가 다가와서 베르닌을 체중계로 인도했다. 베르닌은 몸무게를 쟀고 깜짝 놀랐다. 작년보다 3킬로나 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충격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브게니가 명확한 음성으로 말했다.

 

 

“ 선생님, 183.4센티미터, 81.2킬로그램입니다. ”

 

“ 흠, 좋아. 알았어. 너 저리 가서 준비해. 수혈 좀 해야겠어. ”

 

“ 수혈이요? 얘 O형이에요? ”

 

“ 앞잡이 감시꾼 주제에 그것도 몰라? ”

 

“ 다행이다... ”

 

 

베르닌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혈액형이 같아서, 수혈을 해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예브게니가 그를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다. 피를 약간 뽑는 것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심지어 소변 검사도 했다. 그리고는 또 무슨 실험을 했다. 1시간 쯤 후 고개를 끄덕였다.

 

 

“ 괜찮을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지금 병원에 O형 혈액이 없거든요. 저 정도 환자는 원래는 대도시로 데리고 나가야 하는데 레프 사벨리예비치가 절대로 다른 데로 내보내면 안 된다고 해서. 저 상태면 수혈도 그렇게 안전한 건 아니거든요. ”

 

“ 저, 제냐. 쟤는, 그러니까 미하일은 많이 위험한 거예요? 약을 많이 쓰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냥 아프기만 할 거라고 들었는데... ”

 

“ 굉장히 위험했어요. 맨 처음에 심폐소생 안 해주셨으면 그때 못 깨어났을지도 몰라요. 레프 사벨리예비치 얘기로는 저 분이 알콜 분해를 못하는 체질이라고 하시더군요. 수용소에서 안 좋은 약을 많이 맞아서 조금만 잘못하면 쇼크 일으킨다고. 아까 같은 약물은 소량만 먹어도 치명적이에요. 술도 입에 대면 절대 안 되는데 독물이라니요, 정말 위험하죠. ”

 

“ 그럼... 그럼 이제 괜찮은 거예요? 무슨 약인 줄 알았으니까 레프 사벨리예비치가 해독제도 뭔지 알겠네요? 이제 안 위험한 거죠? ”

 

“ 저, 잘 모르겠어요. 저도 그쪽은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요. 근데 어쨌든 열이 빨리 내려야 해요. 피도 일부러 뽑으신 것 같아요. 독소가 퍼지는 것도 막고 열도 내리려고요. 이쪽으로 오세요, 수혈 준비해야 하니까.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수혈을 했다. 왕재수의 팔로 자신의 피가 흘러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왕재수는 하얘진 얼굴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나마 두드러기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눈꺼풀이 푹 꺼진데다 입술이 부르터 있었고 가슴팍에는 심폐소생술 때문에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전혀 나아보이지 않았다.

 

 

수혈을 하고 난 후 예브게니가 그에게 초콜릿과 빵, 우유를 주었다. 베르닌은 그제야 허기를 느꼈다. 점심 이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정신없이 뛰어다녔으니까. 허겁지겁 빵을 먹고 우유를 마시고 초콜릿을 먹는데 스타브로프가 들어왔다. 왕재수의 체온을 재고 피를 약간 뽑더니 또 무슨 검사를 했다. 그리고는 왕재수의 코에 가느다란 튜브를 꽂아 넣었다. 튜브를 타고 짙은 녹색 액체가 흘러들어가자 왕재수가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괴로운지 얼굴을 찌푸리며 ‘응...응...’ 하고 가냘픈 소리를 냈다. 베르닌은 속이 뒤집힐 듯 구역질이 났지만 꾹 참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그게 뭔가요, 선생님? 해독제인가요? 왜 혈관에 안 놓고 코로 주입하나요? 진짜 괴로울 것 같은데... ”

 

“ 약물이 아니라서. 원래는 먹여야 하는데 지금 자기 힘으로 삼키지를 못하니 어쩔 수 없어. ”

 

“ 뭔데요? 그게 뭔데요? ”

 

“ 약초 달인 거. 넌 설명해줘도 모를 거야. ”

 

“ 왜 해독제를 안 놔주고 그런 걸 먹이는데요? ”

 

“ 왜 그러겠나, 이 앞잡아... 생각이란 걸 좀 해봐라. 해독제가 있으면 뭘 하나, 얘한테는 못 쓰는 약인데. 네 녀석은 그래, 그 망할 놈의 스페호프가 죽이진 않을 거라고 한 말을 그렇게 철석같이 믿는 거냐? 그 약은 수용소에서 얘한테 놨던 거야. 하긴 그땐 다른 것들도 잔뜩 섞었지. 거기서 그거 맞고 죽을 뻔 했어! 해독제에도 부작용 일으켜서 모스크바로 옮겼다고! 그걸 그 더러운 놈이 몰랐을 것 같나? 다 알고서 한 짓이야! 조금 아프고 말다니, 개소리 하지 마! 해독제 따윈 못 놔. 방금 준 게 전부야. 화학물질은 절대 못 써. 이걸로 열이 내리면 다행인데 안 내려가면... ”

 

 

의사가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욕을 했다. 굉장히 늙어 보였다. 베르닌은 스타브로프가 두 번이나 수용소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너무나 무서웠다. 더 이상 초콜릿을 먹을 수가 없었다. 두 손을 부여잡은 채 훌쩍훌쩍 울었다.

 

 

‘ 어떡하지? 열이 안 내려가면 어떡하지? 정말 잘못되면 어떡하지... 나 때문이야. 난 어제부터 알았는데. 국장 얘기 다 들었는데... 내가 못 막았어. 극장 가게 놔뒀어. 사과 먹게 놔뒀어. 다 나 때문이야. ’

 

 

베르닌이 울자 의사가 혀를 찼다. 분노가 좀 진정된 것 같았다.

 

 

“ 울긴 왜 울어, 못난 놈아. 좀 기다려볼 수밖에. ”

 

“ 열이 안 내리면... 그럼 얜 주, 죽나요? ”

 

“ 죽긴 왜 죽어! 안 죽어! ”

 

“ 그치만... 약도 못 쓰고... 흑... ”

 

“ 그때도 해독제 안 쓰고 다른 약 아무 것도 안 주고 오래오래 돌봐줬더니 혼자 일어났다고 했어. 그때보다 훨씬 적게 썼고 약 섞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여기 와서 맑은 공기 쐬고 몸도 나아졌으니까 괜찮아질 거야. 열만 좀 내리면... ”

 

“ 아까보다 열 내린 거 아니에요? 두드러기도 없어지고... ”

 

“ 그건 피 뽑아서 내린 거야. 그래도 아직 40도야. 적어도 2도는 더 떨어져야 돼. ”

 

“ 안 내리면... ”

 

“ 시끄러워! 내릴 거야. 안 내려가도 내리게 할 거니까 네놈은 이제 입 닥치고 꺼져! ”

 

“ 싫어요, 여기 있을래요. 흐흑, 얘 괜찮아질 때까지 있을래요. ”

 

“ 에잇, 망할 놈의 KGB 스파이 자식. 다닐 네놈은 신동이라고 소문났던 놈이 대체 왜 거긴 들어가 가지고! ”

 

엉엉... 저 그만 둘 거예요. 이런 나쁜 짓 하는 데인 줄 몰랐어요... 아무 잘못 없는 애한테 해코지하고 죽이려고 하는 곳인 줄 몰랐어요. 어헝... 으앙... 미하일, 제발 일어나. 엉엉... 잘못했어, 엉엉...

 

 

그때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시끄러워... 뭐라는 거야...

 

 

베르닌은 불에 덴 듯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 왕재수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시끄러워.

 

“ 너, 너 괜찮은 거야? 정신이 들어? 이제 안 아파? ”

 

너 왜 울어? 또 국장이 자른대? 벌목공... ”

 

“ 아니야, 안 잘라. 흑... ”

 

 

베르닌이 울음보를 터뜨리려는데 스타브로프가 그를 밀쳤다. 왕재수에게 바짝 다가가서 뺨을 살며시 토닥거리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 아가야, 추운지 더운지 말해보렴. ”

 

더워요.

 

“ 기분은 어떠냐? ”

 

쟤가 너무 시끄럽게 해요.

 

“ 그건 기분이 아니잖니. ”

 

둥둥 뜨는 것 같아요. 몸이 막 갈라져서 풍선들 되는 거 같아요. 풍선이 엄청 많아요. 점점 더 많아져요.

 

 

스타브로프가 왕재수의 맥박과 체온을 쟀다. 머리를 쓸어주더니 손을 꼭 잡아주었다. 왕재수가 좋아했다. 포르르 한숨을 쉬더니 도로 눈을 감았다.

 

 

“ 이제 푹 자렴. ”

 

쟤 왜 울어요?

 

“ 아니야, 안 울어. 나 안 울었어. 너 빨리 자. 자고 빨리 열 내려야 돼. ”

 

 

베르닌이 눈물콧물을 삼키면서 왕재수의 다른 쪽 손을 꼭 쥐었다. 여전히 불처럼 뜨거웠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조금 덜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

 

 

왕재수는 곧 다시 잠들었다. 스타브로프는 한숨을 쉬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베르닌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저, 이제 괜찮은 거예요? 깨고, 저도 알아보고, 말도 하고... ”

 

“ 안 괜찮아도 헛소리는 할 수 있어. ”

 

“ 그럼... ”

 

“ 열은 좀 내렸어. 30분만 더 기다려 보자. ”

 

 

그건 베르닌의 인생에서 가장 긴 30분이었다. 마침내 30분 후 의사가 왕재수의 체온과 맥박을 다시 쟀다. 그리고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 아주 위험한 상황은 넘겼구나. 고생은 많이 하겠지만 며칠 여기서 데리고 돌봐주면 천천히 나아질 거야. ”

 

“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

 

“ 너도 이제 그만 들어가거라. ”

 

“ 아니에요, 저 여기 있을 거예요. 제가 얘 보호자예요. 흑... 나을 때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

 

“ 이런 철없는 녀석 같으니. 출근은 안 하겠다는 말이냐? ”

 

“ 출근은 무슨 출근이에요! 사람 죽이려드는 나쁜 놈들하고는 일 안해요! 그만 둘 거예요! 국장... 내가 가만 안 둘 거예요!! ”

 

“ 이 멍충아. 네가 뭘 가만 안 둬. 무슨 힘이 있다고. 그냥 모른 척하고 출근해! 그래야 스페호프 그 개자식이 안심을 하지. 네놈이 그만둔다고 끝날 것 같아? 다른 놈을 붙이겠지. 진짜 악질적인 놈으로. 그러느니 네 녀석이 붙어 있는 게 낫지! ”

 

“ 그래요, 그건 맞는데요... 저 너무 괴로워서... 흑... ”

 

 

베르닌이 훌쩍훌쩍 울자 의사는 더 이상 그를 야단치지 않았다. 등짝을 두어 번 쓸어주더니 팔을 잡아당겼다.

 

 

“ 알았다. 오늘은 여기서 자렴. 그래도 너 보호자로는 등록 못시켜. 스페호프가 알면 의심받으니까. 일단 저녁 먹으러 올라가자. 얜 어차피 계속 잘 거고 제냐가 옆에서 봐줄 거야. ”

 

“ 전 저녁 안 먹을래요. 우유랑 빵 먹었어요. 여기 있을래요. ”

 

“ 이런 등신아, 그건 피 뽑아서 먹은 거고! 저녁 제대로 안 먹으면 너도 몸살 나고 그럼 옆에서 돌봐줄 수도 없잖아! 잔말 말고 따라와, 마누라가 저녁 해놨다니까 가서 같이 먹게. ”

 

 

그래서 베르닌은 스타브로프의 사택으로 갔다. 노의사의 아내인 마르가리타가 차려준 뜨끈한 수프와 고기파이를 먹었다. 마르가리타는 음식 솜씨가 아주 뛰어났지만 베르닌은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안 먹어서 몸살이 나면 왕재수를 돌봐줄 수 없다는 생각에 열심히 꾸역꾸역 먹었을 뿐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 베르닌은 의사를 따라 다시 병실로 내려왔다. 왕재수는 쇳소리가 섞인 숨결을 내뱉으면서 자고 있었다. 전혀 편해 보이지 않았다. 베르닌은 침대 곁에 의자를 바짝 붙이고 거기 앉았다. 왕재수의 손목을 잡고 자기도 모르게 투덜댔다.

 

 

“ 바보, 무슨 백설공주라도 되냐? 사과 예쁘다고 덥석 받아먹고. 하여튼 말도 더럽게 안 듣고. 분명히 내가 극장 가지 말고 쉬라 했는데! 씨... 너 두고 봐. 고양이 시켜서 쥐랑 바퀴벌레랑 곱등이 다 물어오라 할 거야! 검은 숲에 가서 뱀 껍질 주워 올 거야. 땅 속에서 잠자는 뱀들도 전부 파내서 잡아 올 거야. 많이많이 파올 거야! 진짜 혼내줄 거야! ”

 

 

발갛게 달아올라 있던 왕재수의 얼굴에 잠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베르닌은 혹시나 해서 물었다.

 

 

“ 미셴카. 너 깼어?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

 

 

왕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다. 손으로 뺨을 쓰다듬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깊이 잠들어 있었다. 베르닌은 투덜댔다.

 

 

“ 바보 멍충이. 백설공주 얘기만 들었구나. 그러니까 좋다고 웃지. 어휴... 하여튼 너란 놈은 정말... 에잇... ”

 

 

그는 왕재수의 손을 꼭 쥔 채 계속 투덜거렸고 그러다가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예브게니와 간호사가 와서 그를 옆쪽 침대에 뉘어 주었다. 밤중에 그는 여러 차례 깨어났고 그럴 때마다 스타브로프가 곁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안심하고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왕재수가 한 손에는 과일접시를, 다른 한 손에는 새빨간 사과를 들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춤이 너무 멋져서 그는 박수를 짝짝짝 쳤다. 그런데 왕재수가 춤을 추면서 사과를 먹으려고 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후다닥 달려갔다. 사과를 빼앗아서 바닥에 내팽개치고 마구 밟았다. 과일접시도 낚아채서 멀리멀리 던져버렸다. 왕재수는 짜증을 내면서 그를 꾸짖었다.

 

 

“ 아유, 왜 사과 못 먹게 하니! 나 얼마나 목말랐는데! ”

 

안 돼! 사과 먹으면 안 돼! 독 있어서 안 돼!

 

“ 그럼 나 뭐 먹어! 너 빨리 나 맛있는 거 해줘! 많이많이 해줘! ”

 

“ 알았어, 뭐 해줄까?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다 해줄게. ”

 

“ 보르쉬랑 펠메니! ”

 

“ 왜 하필 그거야! 깡통이랑 공장에서 나온 냉동 만두인데. ”

 

“ 그래도 우리 엄마가 해준 것만큼 맛있어. 빨리 해줘. ”

 

“ 그래그래. 우리 같이 보르쉬랑 펠메니 먹자. ”

 

 

그래서 베르닌은 꿈속에서 깡통을 따서 보르쉬를 데우고 냉동실에서 펠메니를 꺼내 삶았다. 그리고 왕재수와 마주앉아 맛있게 먹었다. 꿈속에서도 맛있는 걸 느낄 수 있다니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떻게 꿈에서 꿈인 줄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또 신기해하면서 계속 먹었다. 다음날 아침에 깨어날 때까지 그는 꿈속에서 왕재수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

 

 

   

 

 

 

FIN

- 2015. 4. 12 ~ 16 -

 

....

 

 

이야기는 22편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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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950은 내가 여러가지 특징을 조합해서 설정한 가상의 약물이다. 그러나 루뱐카를 비롯하여 소련의 정신교화 수용소 등지에서는 정치범의 교화를 위해 약물치료나 고문이 자행되곤 했다.

이번 21편은 사실 본편 우주와 연관이 있다. 미샤가 가브릴로프로 유배되기 전에 정신교화 수용소에서 재교화를 받고 또 L-950을 비롯한 약물 칵테일 요법으로 심신에 큰 타격을 받는 이야기를 전에 쓴 적이 있다. 가브릴로프 본편의 프리퀄이다. 상당히 우울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 중 두어 군데는 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한 적이 있다. 주로 그의 친구 일린의 시점에서 전개된 3부에서 발췌한 부분들이었다.

그 발췌문은 여기..

http://tveye.tistory.com/3613,
http://tveye.tistory.com/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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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부에서 베르닌이 전화하는 모스크바 동기 나타샤는 5편 '무도회에 간 베르닌'(http://tveye.tistory.com/3458)에서 등장한 적이 있다. 베르닌이 모스크바 대학 시절 짝사랑했던 상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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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 시리즈답지 않게 웃을 일이 없었던 에피소드이지만... 하여튼 22편으로~ 과연 왕재수가 나아질지... 그건 다음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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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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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