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무의 슬픔 #14. 한밤중의 침입자 series : 서무의 슬픔2015. 3. 26. 19:25
서무 시리즈도 어느새 꽤 길어져서, 오늘 올리는 것이 14편째이다. 16편까지는 마무리되어 있는데, 이제 많이 바빠져서 뒷이야기들이 또 언제 나올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종류의 이야기들이든, 장편이나 시리즈는 일종의 특징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작가는 등장인물들과 특정한 종류의 유대를 맺게 되는데 그것은 단편과는 또 다른 종류이며 이러한 유대는 점차 복잡해진다. 이것은 텍스트 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인물과 인물들 사이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종류의 관계들이 생겨난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 작가는 시리즈나 장편을 구상할 때는 그런 가능성들을 염두에 둔다. 텍스트의 내외부에서 확장되는 관계와 새롭게 구축되는 우주들에 대한 가능성을 어느 정도는 예측하며 글을 시작하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쓰기 시작한 서무 시리즈인데.. 쓰다 보니 점점 작가의 본 성격도 나오고, 본편과도 조금씩 뒤섞인다. 역시 본편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쓰기 시작한 거라서 그런가보다.
하여튼 그건 그거고... 그건 쓰는 사람이 해결해야 할 문제고.
어쨌든 서무 시리즈는 내 입장에선 쓰기 편하고 쓰기 즐겁고 마음의 위안도 된다.
14편은 지난 13편에서 곧장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왕재수의 비명 소리를 듣고 뛰어간 베르닌은 머리에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고... 그 이후..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신년 특별감사가 마무리된 후 스페호프의 오해로 베르닌은 온천 요양소 티켓을 얻는다. 왕재수와 함께 요양소에 간 베르닌은 온천과 마사지를 만끽한다. 그러나 행복감도 잠시, 한밤중에 누군가가 침입해 오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경고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 14편에는 가벼운 폭력 묘사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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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4
서무의 슬픔
- 한밤중의 침입자 -
다닐 베르닌은 책상물림이었다. 그건 확실했다. KGB에 입사한 그의 대학 동기들 대부분은 현장요원을 지망했다. 현장요원이 되면 모두가 선망하는 해외 지사로 파견되어 유럽에서 스파이 활동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어 강습도 따로 받았고 특수 훈련도 받았다. 하지만 베르닌은 그런 쪽으로는 전혀 야망이 없었다. 외국어에는 재능이 없었고 달리기는 곧잘 했지만 운동신경이 특출한 것도 아니었고 특히 누군가를 두들겨 패는 데는 영 소질이 없었다. 군대에서도 키와 체격 때문에 가끔 권투나 삼보 대회에 끌려 나가곤 했지만 항상 예선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 탈락하곤 했다. 그러니 그가 우수한 학교 성적에도 불구하고 현장요원보다 급수가 떨어지는 행정요원 시험을 본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입사 후 연수원에서 기본 훈련은 받았다. 군필자였으니 총도 다룰 줄은 알았지만 별로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하마터면 사격 훈련에서 탈락할 뻔 했다. 기본 호신술 시험에도 통과해야 했는데 교관이 베르닌에게 허우대만 멀쩡하지 왜 이렇게 둔하냐고 대놓고 야단까지 쳤다. 성실한 교관은 그에게 나머지 공부까지 시켰고 결론을 내렸다.
“ 넌 둔한 게 아니고 사람 패는 걸 무서워하는 거야! ”
“ 교관님, 사람 패는 건 나쁜 거잖아요... 그걸 어떻게 좋아합니까! ”
“ 그건 민간인이나 하는 말이고! 넌 국가의 녹을 먹는 보안요원이 될 거잖아! 언제 어디서 당과 연방을 위협하는 반동분자들을 상대하게 될지 모르는데 그놈들의 총칼 앞에서 절대절명의 위기를 오갈 때도 사람 패는 거 나쁘다고 이렇게 빌빌거릴래! ”
“ 전 그런 게 싫어서 행정요원 시험을 본 거라고요! ”
“ 행정요원이고 뭐고 이건 공통 훈련이야! 통과 못하면 연수원에서 내쫓을 거야! ”
책임감 강한 교관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에 베르닌은 사격과 호신술 훈련을 통과했다. 하지만 그건 이미 2년도 더 된 일이었고 입사 후에는 매일같이 국장의 호통과 산더미 같이 몰려드는 서류 작업과 서무 업무, 각종 잡일에 시달리느라 사격이나 호신술은커녕 조깅이나 수영조차 못하고 살아왔다. 이제는 탄창을 갈아 끼우는 방법조차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뒤통수가 깨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어둠 속에서 정신이 들었을 때 베르닌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를 나머지 공부시키면서 호통을 치던 그 교관의 얼굴이었다. 그게 누군지, 왜 생각나는지조차 몰랐다. 한참 후에야 그는 그게 연수원 교관이라는 사실을 기억했고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서 ‘꺼져...’ 라고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현기증과 욕지기가 몰려왔다. 하마터면 누운 채로 토할 뻔 했다. 왜 이렇게 머리가 쿡쿡 쑤시고 아픈 건지, 왜 온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움직일 수도 없는 건지, 사방은 왜 이렇게 캄캄한 건지, 속은 왜 뒤집힐 것처럼 울렁거리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끙끙거리며 일어나보려고 했지만 한참 꿈틀거리고 꼼지락거린 끝에야 자신이 의자에 앉아 있으며 심지어 뭔가로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늘한 공포가 밀려들었고 그 순간 모든 것이 기억났다. 그는 총 소리를 들었고 복도로 나갔고... 창문이 열려 있었고 발자국을 보았다. 왕재수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고... 방문이 잠겨 있었고... 누군가가 뒤에서...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눈을 마구 깜박거렸다.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목쉰 음성으로 속삭이듯 왕재수의 이름을 불렀다.
“ 미하일... 미샤... ”
대답 대신 바로 옆에서 희미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굉장히 조그맣고 뭉개진 소리였지만 분명히 왕재수의 목소리였다. 아주 약간 안도하며 베르닌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다행히 상체는 옆으로 틀 수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보이는 거라곤 침대로 추정되는 거대하고 판판한 물체 위에 옆으로 누워 있는 사람의 형체뿐이었다. 기다란 팔다리와 날씬한 몸매의 윤곽을 보니 왕재수가 분명했다.
“ 야, 너 괜찮아? ”
여전히 대답 대신 ‘으으으...’ 하는 신음 소리만 가냘프게 들려왔다. 크게 다쳤든지 입이 막혀 있든지 둘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두 쪽 모두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베르닌은 공포에 사로잡힌 채 몸부림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 도와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사람 살려요! 도와줘요! 여기... ”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짜내려고 해도 자신들의 방이 몇 호실이었는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포기하고 생각나는 것만 외쳐댔다.
“ 여기 5층... 사람 살... ”
누군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베르닌의 뒤통수를 철썩 갈겼다. 털이 숭숭 난 손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조용히 해! 한번만 더 소리 지르면 가만 안 둬! ”
“ 으, 으으으!!! ”
“ 시끄러워! 아 정말 귀찮은 놈들이네! 너도 입 막히고 싶냐! ”
“ 으오우으으으... ”
남자가 뒤통수를 다시 한 번 갈겼다. 그렇게까지 세게 때린 것은 아니었지만 위협을 가하기에는 충분했다. 베르닌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손을 떼어내며 짜증스러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아 정말... 이 자식들은 대체 뭐야. 왜 남의 방에 들어와 가지고... 배고파 죽겠는데... 캄캄해서 보이지도 않고... ”
베르닌은 용기를 짜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 저... 그럼 불 켜시면 되잖아요... ”
“ 아까처럼 소리 지르려고! 내 얼굴 보고 몽타주인지 뭔지 그리려고! ”
“ 아니요... 안 그럴게요. 소리도 안 지르고 얼굴도 안 볼게요. 안 보이는 쪽으로 고개 돌리고 있으면 되잖아요. ”
“ 하긴. 뭐 어때. 입 못 놀리게 하면 되지. 야, 불 켤 거니까 소리 지르기만 하면 가만 안 둬! ”
베르닌은 끄덕끄덕했다. 남자가 그의 곁을 지나 반대편으로 갔다. 묵직한 발소리를 들으니 덩치가 큰 남자 같았다. 잠시 후 꽝 소리가 나더니 남자가 욕설을 내뱉었다.
“ 아야! 에이씨! 망할 놈의 방구석, 왜 이렇게 걸리적거리는 게 많아! 대체 스위치는 어디 있는 거야! ”
그러더니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노란 불빛이 확 퍼졌다. 스탠드 램프를 켰는지 그렇게 밝은 빛은 아니었지만 어둠에 젖어 있던 베르닌은 눈이 부셔서 자기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곁에서 다시 ‘우으으’ 하는 가냘픈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닌은 간신히 눈을 떴다. 온통 노랗고 불그스름하게 보였다. 그는 생각대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커튼 띠로 추정되는 알록달록한 끈으로 허리가 결박된 데다 두 팔도 의자 뒤로 묶여 있었다. 아마 책상 앞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놓은 것 같았다. 의자는 침대에 딱 붙어 있었다. 그는 왕재수가 괜찮은지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공포와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어 눈을 가늘게 뜨고 방 안을 먼저 훑어보았다. 그들이 투숙했던 방이 맞았다. 문가의 옷걸이에 왕재수의 근사한 코트가 걸려 있으니 확실했다. 책상과 화장대 사이에 문제의 침입자가 있었다. 등을 돌린 채였기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베르닌이 추측한대로 덩치가 꽤 컸다. 키는 왕재수와 비슷한 정도였지만 체격이 드럼통처럼 딱 벌어져 있었다. 머리털을 짧게 깎았기 때문에 울퉁불퉁한 두상이 더 눈에 띄었다. 심지어 왼편에는 조그맣게 땜통까지 있었다. 검정색 패딩을 걸치고 있었는데 아직도 눈 녹은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남자는 베르닌의 가방을 정신없이 뒤지고 있었다. 베르닌은 ‘강도야!’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묶여 있는데다 무슨 짓을 당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꾹 참았다. 한참 가방을 뒤지더니 남자가 조그맣게 휘파람을 불었고 뭔가를 꺼내서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냈다.
“ 어휴, 이거라도 있어 다행이네.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
부스럭거리는 소리나 냄새로 미루어보아 식당에서 요리사가 왕재수의 미모에 기분이 좋아져서 야식으로 먹으라고 챙겨준 청어 샌드위치인 것 같았다. 남자가 게걸스럽게 샌드위치를 먹어치우는 동안 베르닌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고 그제야 왕재수 생각이 났다.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묶여 있는 팔 때문에 어깨가 빠지는 것처럼 아팠다.
왕재수는 침대 위에 모로 누워 있었다. 시트에 휘감겨 있어 전신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쪽 팔은 침대 모서리에 묶여 있었고 다른 쪽 팔은 등 뒤로 묶여 있었다. 심지어 양쪽 발목마저 가운 끈으로 칭칭 감긴 상태였다. 베개와 시트 사이에 파묻혀서 이마와 눈은 보이지도 않았다. 입에는 손수건으로 재갈이 물려져 있었다. 그러니 끙끙대는 신음 소리밖에 못 낸 것도 당연했다. 베르닌은 걱정스럽게 속삭였다.
“ 야... 너 괜찮아? 안 다쳤어? 내 말 들려? ”
“ 흐으.... ”
왕재수가 그의 말을 듣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사지가 전부 묶여 있었기 때문에 허리와 무릎을 꿈틀거렸을 뿐이었다. 버둥거릴 때마다 끈이 죄어들어와 굉장히 아파 보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급하게 말했다.
“ 그냥 가만히 있어. 괜찮을 거야. 괜찮아. ”
“ 으... ”
왕재수가 고개를 흔들며 계속 꿈틀거렸다. 꽁꽁 묶인 데다 말도 못하게 됐으니 답답하고 괴로운 것 같았다.
“ 몸부림치지 말고 내 쪽 좀 봐봐. 괜찮은지 좀 보게... ”
“ 으으으... ”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왕재수가 몸부림을 멈추고 고개를 좀 쳐들었다. 베르닌은 잠시 온몸의 잔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뺨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는데다 코피라도 흘렸는지 코 아래부터 턱까지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출혈은 멈춘 건지 핏자국이 말라붙고 있긴 했다. 원래의 예쁘장한 얼굴을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얼음장처럼 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베르닌이 속삭였다.
“ 피... 저놈이 그런 거야? 다른 데도 맞았어? ”
“ 으으... ”
하긴 입이 막혀 있으니 왕재수에게는 물어봤자 소용이 없었다. 몰골을 보니 두들겨 맞고 결박당한 것 같았다. 베르닌은 이를 악물었다. 너무 화가 치밀어서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마침 청어 샌드위치를 전부 해치운 남자가 몸을 돌리며 베르닌 쪽으로 다가왔다.
“ 야, 먹을 거 더 없냐? 마실 건 없어? ”
“ 마실 거... 어디 있는지 말해줄 테니까 쟤 좀 풀어줘요. ”
“ 안 돼! 저 자식은 절대 안 돼! 얼마나 버둥거리는데! 저 녀석 진짜 장난 아니야. 발길질에 늑골 나갈 뻔 했단 말이야! ”
“ 제발... 쟤 많이 아팠단 말이에요. 일부러 온천 데리고 온 건데. 피 나도록 때렸잖아요.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저렇게 꽁꽁 묶어놓으면 피도 안 통한단 말이에요. 제발 다리라도 풀어줘요. 아니면 팔 하나라도... ”
“ 다리는 죽어도 안 돼! 애새끼가 축구선수라도 되는지 얼마나 발길질이 세찬지 알아! 나 정말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
“ 저러다 마비되면 어떡해요... 쟤 축구선수 아니에요. 무용수란 말이에요. 저렇게 묶어놓으면 진짜 몸에 안 좋단 말이에요... 근육이라도 잘못되면 어떻게 해요... 제발... ”
“ 에이씨, 어쩐지... 걷어차는 게 장난 아니더라니... 그래도 다리는 안 돼! 팔 하나만 풀어줄 거야! ”
“ 재갈도 풀어주세요. ”
“ 안 돼! ”
“ 제발요... 쟤 소리 안 지를 거예요. 저처럼 가만히 있을 거예요. 그치? ”
“ 으으으... ”
“ 소리 지르는 게 문제가 아니고! 저 자식은 물어뜯는단 말이야! 아까 물려서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입은 막아놓을 거야! 너도 그만 입 닥쳐! ”
베르닌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다가왔다. 램프 불빛에 얼굴이 정면으로 비춰졌다. 놀랍게도 앳된 얼굴이었다. 기껏해야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왕재수 또래인 것 같았다. 심지어 이마와 뺨에는 여드름 자국까지 있었다. 갈색 눈에 살짝 내려앉은 주먹코, 아랫입술이 두툼한 입, 턱에 자리 잡은 조그만 보조개까지 영락없이 평범한 동네 청년처럼 보였다. 하지만 평범한 동네 청년이라면 사람을 뒤에서 갈기고 꽁꽁 묶고 협박을 일삼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는 베르닌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뚜벅뚜벅 다가오더니 왕재수의 몸을 옆으로 홱 뒤집었다. 아팠는지 왕재수가 재갈 사이로 뭉개진 신음을 토해냈다.
“ 살살 좀 해요. 팔 부러지겠어요... ”
“ 시끄러워! 넌 뭔데 자꾸 이 자식 편을 들고 난리야! 애인이라도 되냐! 찝찝하게! 에이, 가뜩이나 이 새끼 때문에 좋다 말았는데! ”
“ 좋다 말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
“ 어휴, 몰라도 돼! ”
남자는 화를 버럭 내더니 잠깐 망설이다가 등 뒤로 묶여 있던 왕재수의 왼팔을 풀어주었다. 왕재수가 부르르 떨더니 그 즉시 허리를 홱 비틀며 윙 하고 왼팔을 휘둘렀다. 남자는 급하게 피했지만 뺨 언저리를 얻어맞았다.
“ 에잇,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애새끼 왜 이렇게 성깔이 더러운 거야! 다시 묶어 버릴까 보다! ”
“ 으... 으으으! ”
“ 미하일... 야... 미셴카... 제발 가만히 있어. 제발... 위험하단 말이야. 가만히 있어, 응? 내 말 좀 들어. 그래야 너도 안전해. 제발... ”
베르닌은 겁이 나서 애원하듯 속삭였다. 왕재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몸을 뒤틀며 끙끙거리고 자유로워진 왼쪽 팔꿈치로 매트리스를 꿍꿍 찧어댔지만 베르닌이 그렇게 애원하자 서서히 얌전해졌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 아휴 짜증나... 되는 일이 없네. 간신히 여기까지 왔는데... 야, 마실 거 어딨어! 이 자식 풀어줬잖아! ”
“ 저... 저기 있는 내 패딩 주머니에... 주스 있어요. ”
남자는 후다닥 옷걸이로 달려갔다. 베르닌의 패딩 점퍼 주머니를 뒤져 오렌지 주스 팩을 꺼내더니 모서리를 뜯어서 벌컥벌컥 마셨다. 굉장히 배고프고 목이 말랐던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 베르닌은 엉덩이와 다리를 이용해 의자를 조금씩 움직였고 왕재수 쪽으로 몸을 완전히 틀었다.
“ 너 괜찮아? 저 사람한테 덤벼들면 안 돼. 위험하니까. 괜찮을 거야. 말귀 아예 못 알아먹는 거 같진 않아. 그러니까... ”
“ 우우... ”
왼팔이 풀린 왕재수는 아까보다는 몸을 똑바로 펴고 있었다. 몸 여기저기 엉켜 있던 시트도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다른 곳은 다친 데가 없는지 보려고 뻣뻣한 고개를 굽혔고, 순간 불길처럼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뱃속이 왈칵 뒤틀려왔다. 왕재수의 매무새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잠옷 앞섶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맨몸이 완전히 드러나 있었고 목덜미와 가슴에는 심하게 할퀸 상처가 나 있었다. 게다가 하얀 피부 위로 몇 개나 찍혀 있는 붉은 손자국들은 누가 봐도 움켜쥔 자국이 분명했다. 이것도 모자라 파자마는 허리 밴드가 터진 채 무릎 아래까지 끌려 내려가 있었고 속옷도 벗겨져서 골반과 허벅지 사이에 걸쳐져 있었다. 왼쪽 허벅지에도 보라색으로 피멍이 들어 있었다.
“ 으아아, 이 더러운 자식! 용서 못해! 가만 안 둘 거야! ”
베르닌은 용솟음치는 분노로 제정신을 잃었다. 눈앞에 시뻘건 불꽃이 번쩍번쩍했다. 그는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의자에 묶인 채로 펄쩍펄쩍 뛰었다. 깜짝 놀란 남자가 후다닥 달려와 베르닌을 덮쳤다. 고함을 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으면서 어떻게든 제압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베르닌의 육체는 이성의 굴레로부터 해방되면서 국가 보안요원으로서 연마해왔던 괴력을 발현시킨 것이 틀림없었다. 앉은 채로 회오리처럼 돌아 의자를 마구 휘둘렀다. 아마 연수원에서 호신술을 가르쳤던 교관이 이 광경을 봤다면 ‘바로 그거야! 주변 물체를 이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 하고 뛸 듯이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닌은 어쨌든 책상물림에 가까웠기에 결국은 균형을 잃고 와장창 쿠당탕 소리를 내며 의자 째로 구르고 넘어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 베르닌은 바닥에 뒤집혀 넘어져 있었다. 여전히 의자에 묶인 채였다. 여전히 화가 나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어디선가 나직하고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왕재수인가 싶어서 와락 걱정이 되어 고개를 돌렸지만 왕재수는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침대에 묶인 채 등잔만큼 커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가 두리번거리는데 왕재수가 턱짓으로 그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알고 보니 의자 아래 그 침입자가 깔려 있었고 괴로워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 으아아... 제발 좀 살려줘... 나 죽네... ”
“ 시끄러워! 엄살 피우지 마, 나쁜 자식... 죽여 버릴 거야! ”
“ 으아아... 사람 살려... ”
“ 이 더러운 자식! 맛 좀 봐라! ”
베르닌은 몸을 옆으로 마구 뒤틀며 아래에 깔린 남자를 의자로 더욱 더 세게 짓이겼다. 남자가 죽는 소리를 하며 어떻게든 몸을 빼내려고 꿈틀거렸다. 베르닌은 더 세게 짓눌렀다.
“ 으어어... 제발 그만해. 뼈 부러지겠어... 잘못했어. 때린 거 미안해. 으아아.. 풀어줄 테니까 제발 그만... ”
“ 시끄러워! 가만 안 둬! 죽여 버릴 거야! 이 더러운 놈아! 감히, 감히 그런 더러운 짓을 하다니... 진짜 용서 못해! ”
“ 미안해, 잘못했어... 팬 거 미안해. 묶은 거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너네가 자꾸 소리 질러서... 아야... 으아... ”
“ 그게 문제야, 지금! 이 개자식! 더러운 강간범 같으니!! 너 같은 놈은 감옥도 아까워! 없애버릴 거야!! ”
베르닌이 더욱 치솟는 분노로 의자를 쿵쿵 내리찧자 남자가 괴롭게 소리를 질러댔다.
“ 으아아...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뭐가 강간범이야... 나 그런 놈 아냐... 진짜야... 오해야! ”
“ 뭐가 아니야, 이 나쁜 놈아!! 쟤한테 나쁜 짓 했잖아!! 아무리 쟤가 여자보다 예뻐도 그렇지... 이 짐승 같은 놈! 죽여 버릴 거야! 크아아! ”
“ 아니야, 아니야... 오해야... 으악, 야! 꼬맹아! 네가 말 좀 해줘... 으악! ”
“ 말을 어떻게 해! 쟤 입 네가 틀어막았잖아! 두들겨 패서 코피도 내고 옷도 찢어발기고 꽁꽁 묶고! ”
“ 으악, 아니야! 틀어막은 건 물어뜯어서 그런 거야... 나 그런 짓 안 했어! 아악, 진짜야! 잠깐만... 내가 쟤 풀어줄게... 제발... 네가 나 이렇게 작살내면 너네 풀어줄 사람 아무도 없어. 지금 이 건물에 사람 없단 말야. 1층에 경비 할아버지 하나밖에 없어. 직원들은 다 별채에서 잔단 말이야. ”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폭주하던 베르닌은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 말도 맞는 것 같았다. 그는 온몸에 힘을 더 주면서 호통쳤다.
“ 그럼 내 팔부터 풀어줘! ”
“ 흑... 너 너무 무서워. 풀어주면 나 더 심하게 팰 거잖아. ”
“ 네놈이 우리 패고 묶은 건 생각 안 하냐! 빨랑 안 풀어? ”
“ 싫어싫어. 흐흑... 진짜 재수 옴 붙었네.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엉엉... ”
베르닌이 다시 화가 치밀어서 이 망할 강간범을 죽여 버리고 말겠다는 생각에 의자 아래로 뻗어 내린 두 발로 아래 깔린 놈을 마구 걷어차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왕재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야, 그만 해. 그러다 진짜 죽이겠다! ”
깜짝 놀라서 베르닌이 고개를 돌렸다. 침대 위에 왕재수가 일어나 앉아 있었다. 발목은 아직 묶여 있었지만 두 팔은 모두 풀려 있었다. 한 손으로는 손수건을 쥐고 있었다. 재갈이 물려 있던 자국이 선명했지만 그래도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 어... 팔 어떻게 풀었어? ”
“ 저 바보가 내 팔 하나 풀어줬잖아. 어휴, 매듭을 너무 꽉 묶어놔서 한 손으로 풀기 힘들었어. 아파 죽겠네. ”
“ 너 괜찮아? 괜찮은 거야? 으흑... 미안해...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너 놔두고 나가지 않았어야 했는데... 내가 있었으면 그런 일 안 당했을 텐데... 흑... 어떡하지... 미안해... 어흑... ”
“ 그래! 너 진짜 나빠! 내가 나가지 말랬잖아! 아휴! 하여튼 이제 그만 좀 해. 웬 사람을 그렇게 두들겨 패니. 야만스럽게. 진짜 저질이야. ”
“ 하지만... 너 지금 누구 편 드는 거야! 이 자식이 너한테 그런 짓을 했는데... 완전 강간범에 개자식... ”
“ 웬 강간범. 아니야, 그런 거. 너 왜 혼자 소설 쓰니. 그런 일 없었어. ”
“ 너... 너... 흑... ”
베르닌은 갑자기 법대 시절 들었던 범죄심리학 수업이 떠오르면서 속이 상하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느끼며 더듬거렸다.
“ 흑흑... 불쌍한 녀석... 너무 끔찍한 일을 당해서 자기 회피에 들어갔구나...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막 자기를 세뇌하면서. 어흑... 괜찮아, 네 잘못 아냐. 이 개자식이 나쁜 거야.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엉엉... 어떡하지... 바이올린 깡패랑 같이 오게 하는 건데... 흐흑... 괜히 내가 온천 데리고 와서 나쁜 일 당하게 만들고... 어엉... 엉엉... ”
“ 얘가 진짜 왜 이러니. 왜 혼자 울고불고 난리야. 소설 좀 쓰지 마.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휴, 답답해... ”
“ 뭐가 아니야... 흐흑... 옷도 다 벗겨지고 몸에 그런 상처까지... 흑... ”
“ 아니라고! 아 참, 옷은 저놈이 벗긴 거 맞구나. ”
“ 뭐야! 역시 사실이었어! 이 개자식, 죽여 버릴 거야! ”
베르닌이 다시 폭주하기 시작하자 왕재수가 발목이 묶인 채 데구르르 굴러서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낑낑대며 두 손으로 베르닌이 묶인 의자를 잡아당겼다. 아래 깔려 있던 남자가 헉헉대며 간신히 옆으로 몸을 굴려 피했다. 코피를 뚝뚝 흘리며 남자가 하소연했다.
“ 나 진짜 그런 거 아니야. 억울해. 나 강간범 아니야... 그리고 얜 여자도 아니잖아. 내가 왜 사내 녀석한테 그런 짓을 하니. 너네 패고 묶은 건 맞지만 그것도 일부러 그런 거 아니란 말이야. 난 그냥 류바 만나러 온 건데... 오늘 밤에 만나기로 해서 산 넘고 물 건너 몰래 여기까지 온 건데... 류바는 어디 가고 왜 너네들이 여기 있는 거야... 엉엉... 막 두들겨 패고 의자로 짓찧고... 무서워. 엉엉... ”
화가 나서 몸부림치던 베르닌의 귓가에 단어 하나가 들어왔다. 잠시 그는 그 단어를 언제 들었나 의문했다. 왕재수는 그보다 훨씬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손뼉을 딱 쳤기 때문이다.
“ 아, 너 류바 만나러 온 거였어? 네가 알릭이구나! 무슨 운전병인가 뭔가. 장교들 따라와서 데이트하려 했는데 장군인가 뭔가 온대서 도루묵 됐다고... 맞지? ”
“ 어, 맞아... 너 어떻게 알아? 어... 역시 너 류바랑! ”
남자가 부르르 떨더니 갑자기 화를 내면서 왕재수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왕재수가 짜증을 내면서 남자의 뺨을 찰싹 후려쳤다.
“ 어휴, 그만 좀 해! 아까 그렇게 아프게 했으면 됐지 또 난리야! 가뜩이나 지금 다닐이 열 받아서 난린데! 너 나 한 번만 더 손대면 진짜 재미없을 줄 알아! 아까부터 패주고 싶은 거 팔 근육 미워질까봐 꾹 참고 있는 건데! ”
“ 하지만... 네가 류바를 어떻게 알아! 나랑 류바 얘기까지 어떻게 다 아냐고! 오늘 밤 데이트는 우리끼리 몰래 약속한 건데! ”
“ 류바가 아까 말해줬으니까 그렇지! 데이트할 줄 알고 좋아했는데 취소돼서 엄청 실망하고 있었단 말이야. 근데 넌 어떻게 온 거야? 장군 갔어? ”
“ 아니, 그게... 흐흑... ”
“ 야, 울지 마! 어휴, 촌스러워. 정말 시골 애들은 왜 이 모양이야. 빨랑 나 묶은 것부터 풀어줘. 매듭을 어떻게 맨 거야, 발목은 죽어도 안 풀리네. ”
“ 풀어주면 아까처럼 발로 찰 거잖아... 얼마나 아팠는데. ”
“ 더 아프고 싶냐? 너 나 안 풀어주면 쟤가 또 의자로 두들겨 팬다! ”
“ 흑흑, 안 돼. 저놈은 순한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무서운 거야. 덩치도 커가지고 의자 휘두르는데 너무 무서웠어. 엄청 아팠어. 뼈 다 부러지는 줄 알았네. 쟤 뭐야, 격투기 선수야? 흐흑... ”
“ 징징대지 말고 빨랑 나부터 풀어줘! 나 이렇게 오래 묶여 있으면 근육이 미워진단 말이야! ”
“ 으응, 알았어. ”
남자는 훌쩍훌쩍 울면서 왕재수에게 기어왔다. 떨리는 손으로 왕재수의 발목에 칭칭 감겨 있는 가운 끈의 매듭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는 혹시라도 왕재수가 걷어 찰까봐 미처 끈이 다 풀리기도 전에 후다닥 옆으로 굴러서 피했다. 왕재수는 두 손으로 발목과 종아리를 주무르면서 투덜댔다.
“ 어휴, 근육 뭉친 것 좀 봐! 야만인! 으아, 내 백옥 같은 살결에 쓸린 자국 난 것 좀 봐! 너 진짜 혼내줄 거야! 난 몸매랑 얼굴로 먹고 사는데! ”
“ 미안해. 너 얼굴로 먹고사는 앤 줄 몰랐어. 고의가 아니었어. 엉엉... ”
“ 피 안 통해서 저려 죽겠어. 좀 주물러봐! ”
“ 응, 알았어. ”
남자가 코를 훌쩍이며 왕재수의 발목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야! 대체 뭐하는 짓이야!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발목 주물러주는 건 또 뭐냐고! 강간범 주제에 아니라고 하고! 넌 대체 왜 저놈 편을 들어주는 거야! 그리고 난 안 풀어 주냐? 나도 팔 저려 죽겠단 말이야! ”
“ 으앙... 저 사이코가 또 막 성질내. 또 나 때릴 거 같아. 무서워... ”
“ 누가 사이코야! 으아아! ”
베르닌이 다시 폭주할 찰나 왕재수가 옆으로 기어왔다. 결박에서는 풀려났지만 아직 다리가 저려서 일어나기가 힘든 것 같았다. 의자에 묶인 채 옆으로 누워 있는 베르닌의 뒤로 가서 손목과 허리에 묶인 끈을 풀어주었다. 베르닌은 간신히 몸을 굴려서 일어나 앉았다. 어지럽기도 하고 손목과 팔, 다리, 허리가 너무 아팠다. 온몸이 저려서 찌릿찌릿했다. 왕재수가 그의 팔목을 문지르듯 마사지해주었다.
“ 아... 아야... ”
“ 가만히 있어봐. 어휴, 세게도 묶어놨었네. 자국 엄청 깊게 났잖아. 많이 아팠겠다. 연고라도 발라야겠어. 이 방에는 없으려나? ”
“ 내가 문제가 아니고... 너! 너 다쳤잖아... 피도 나고... 상처... 그리고, 그리고... 흐흑... 나쁜 짓... 어흑... ”
베르닌은 죄책감과 가슴을 에는 듯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왕재수를 와락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 흐흑... 불쌍한 녀석. 잘 나가다가 감옥 가고 고문 받고, 다쳐서 춤도 못 추고 시골에 끌려온 것도 모자라서 이게 웬 날벼락이니... 엉엉... ”
“ 아니, 그게... 나 그거 아니라니까... ”
“ 엉엉, 뭐가 아니야... 너 그렇게 자기 몸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면 안 돼. 가뜩이나 바이올린 깡패랑 그러는 것도 걱정이었는데. 크레믈린 아저씨한테도 그렇게 막 나쁜 짓 당하면서 살았다 그러고... 심지어 저런 더러운 놈한테 겁탈... 엉엉, 그래놓고 아무 일도 아니라 그러고... 흑흑, 이 불쌍한 녀석아. 엉엉... 내가 저놈 가만 안 둘 거야. 크레믈린 아저씨도 혼내 줄 거야. 이제 너 그렇게 살지 마. 내가 너 건드리는 놈들 용서 안 할 거야, 으엉엉... 국장이 뭐라 하든 상관없어. 국장도 내가 혼내줄 거야. 으앙... ”
베르닌이 목을 놓아 우는 동안 왕재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쁜 일을 당한 후 뒤늦게 찾아온 심리적 충격 때문인가 싶어 더더욱 겁이 난 베르닌은 간신히 눈물을 훔치며 품 안에 있는 왕재수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왕재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상당히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핏자국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너무 불쌍해 보여서 소맷자락에 침이라도 뱉어서 닦아주려는데 왕재수가 갑자기 베르닌의 이마와 뺨에 연이어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두 팔로 베르닌을 껴안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베르닌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당황해서 멍해졌다.
잠시 후 왕재수가 베르닌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손등으로 눈과 코를 쓱쓱 닦더니 소파로 올라가 벌렁 드러누웠다. 두 다리를 쭉 펴면서 베르닌과 침입자 쪽을 쳐다보았다.
“ 어휴, 피곤해. 온천까진 좋았는데 뱀 껍질부터 이상하더라니. 야, 알릭!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부터 말 좀 해봐. 제대로 말 안 해 주면 쟤가 또 팰 줄 알아. 그리고 다닐! 너 어디든 좀 앉아. 눕든가. 가뜩이나 신체 나이는 40대인 게 그렇게 의자를 휘두르고 난리를 쳤으니... 하긴 넌 미워질 근육도 없으니까 뭐. ”
“ 아니야! 나 안 앉을 거야! 너 데리고 병원 갈 거야! 그리고 저 자식 경찰에 넘기고... 아니지, 내가 체포할 거야! 나 KGB! 보안요원! 무단 침입한 강간범 체포할 권한이 있어! ”
“ 글쎄 그게 아니라고!! 일단 앉아! 설명해 줄 테니까! ”
그래서 베르닌은 일단 침대에 앉았다. 알릭이란 이름의 침입자는 쭈뼛거리며 도망치고 싶어 했지만 왕재수가 확 째려보자 어째선지 기가 팍 죽어서 카펫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알릭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 *
알릭은 왕재수의 생각대로 류바의 남자친구였다. 검은 숲 너머에 있는 군 부대에서 대대장의 운전병으로 복무하고 있었고 나이는 베르닌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어려서 스물한 살밖에 되지 않았다.
“ 나 원래 이 동네 토박이야. 할아버지 아빠 삼촌 전부 이쪽에서 벌목공으로 일해. 나도 학교 다닐 때부터 틈틈이 그쪽 일 도와드렸거든. 류바랑은 고등학교 때부터 커플이었어. 졸업하고 나서 류바는 여기 취직하고 난 가족들이랑 벌목 쪽 일하고. 원래 류바 스무 살 되는 생일날 결혼하자고 옛날부터 그랬는데, 그게 작년 5월이었거든. 근데 막 결혼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 갑자기 영장 나오고 징집돼서 완전히 망한 거야. ”
“ 미뤄달라고 하면 안 되나? ”
왕재수의 순진한 질문에 알릭이 한숨을 쉬었다.
“ 너도 어른 돼봐... 군대는 다 끌려가는 거야. 노멘클라투라 가문이거나 줄 있거나, 둘 중 하나 아니면 그냥 가야돼. 너도 곧 가게 될 거야...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성년이 되면... ”
“ 음, 난 군 면제라서 그런 거 잘 몰라. 학교 다닐 때부터 콩쿠르에서 상을 많이 받았거든. 훈장도 여러 번 받고. ”
“ 으잉? 면제? 훈장? 뭔 소리야, 너 학생 아냐? ”
“ 아니야! 나 엄청 유명한 무용수에 감독... 우주 최고 꽃... ”
“ 그나마 고향 쪽 부대로 갔으니 잘 간 거네, 뭘. 난 연방 변두리 공화국에 딸린 이상한 부대로 갔다고! ”
아직 분을 삭이지 못한 군필자 베르닌이 왕재수의 ‘우주 최고 꽃미남이자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대천재’ 레퍼토리를 가로막으며 툭 내뱉었다. 알릭이 흠칫 놀라며 웅얼거렸다.
“ 어, 그건 그러니까... 그렇지만... ”
“ 운전병이라며. 그럼 윗분만 모시면 되니까 좀 낫잖아. 행군 같은 것도 덜 하고 웬만한 훈련 할 때도 대대장 옆에 있으니까 일반 병사보단 훨씬 낫지. 나 군 생활할 때도 걔들 얼마나 부러워했었는데. 대대장만 잘 만나면 휴가도 잘 받고! ”
“ 아니야, 우리 대대장은 정말 너무 힘들단 말이야. 난 제1 대대장 운전병인데 그 인간 완전 사이코야. 걸핏하면 기합이야. 무슨 대대장이 직접 기합을 주니. 근데 이 작자는 그런다니까! 휴가는 정말 꿈도 못 꿔. 그 인간이 공무 말고도 하도 돌아다니는 일도 많고 애인도 많아서 걸핏하면 차를 쓴단 말이야. 그리고 부하들이 쉬는 꼴을 못 봐. 정기 휴가 나갈 때도 얼마나 들들 볶는데, 저번에는 휴가 나가는 날 아침에 갑자기 자기 사적인 일로 차 써야 한다고 못 가게 했어. 대체 운전병도 있었는데 내가 운전해야 승차감이 더 편하다고 무조건 내가 있어야 된다는 거야... 류바가 서너 번 면회도 왔었는데 고참들이 하도 못살게 굴고 자기들 먹을 건 안 싸 왔냐, 자기들한테 여자 친구 소개 안 시켜 주냐 들들 볶아서 류바가 겁먹고 요즘은 못 와.
그래서 나 진짜 오늘만 고대하고 있었단 말이야... 오늘 우리 사단 장교들 전부 여기서 워크숍인지 뭔지 하기로 했잖아. 말이 워크숍이지 그냥 다 모여서 새해 기념 야유회 하기로 한 거야. 온천하고 술 먹고 놀고... 우리 대대장도 오니까 나도 당연히 따라오는 거고. 윗분들 한번 술 먹고 놀면 장난 아니거든. 이럴 땐 우리도 따로 모여서 술 먹으라고 해줘. 그러니까 난 밤에 살짝 류바랑 만나기로 했었단 말이야. 류바가 엄청 기뻐하면서 5층에 좋은 방 하나 빼놓는다고, 자기 거기서 기다릴 테니까 오라고 했었어. 503호실... ”
“ 아, 그게 이 방이구나. ”
왕재수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베르닌은 왕재수처럼 세상 편하게 이야기를 들을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날카롭게 추궁했다.
“ 장교들 워크숍 취소됐잖아! 장군이 와서! 근데 넌 어떻게 온 건데! ”
“ 그러니까... 갑자기 장군이 온다 해서 발칵 뒤집히고 온천은 당연히 다 취소되고... 완전 망한 거야. 우리 어제부터 장난 아니었어. 눈 다 치우고 나무 심고 꽃 심고... 이 한겨울에 파릇파릇한 나무 찾고 장군 들어오는 타이밍 딱 맞춰서 활짝 필 꽃들 찾느라 죽는 줄 알았어. 장군이 연못 보면서 술 마시는 거 좋아한대서 웅덩이 파고 물 채우고 얼까봐 온수 주입하고 가짜 연잎 만들어서 띄워놓고 정자 만들고 난리도 아니었단 말이야. 난 오늘 밤에 류바랑 사랑을 속삭일 것만 기다리면서 간신히 하루하루 버티고 있었는데 진짜 미칠 것 같았어. 하도 난리가 나서 전화도 못하고... 류바는 하염없이 나 기다릴 텐데. 흑흑... 류바는 진짜 예쁘니까 안 그래도 인기도 많고 노리는 남자들도 많은데... 이러다 딴 남자한테 뺏길까봐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어. ”
베르닌은 ‘걱정도 팔자야! 류바 별로 안 예뻤어!’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놀랍게도 왕재수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알릭을 쳐다보면서 ‘응, 응. 그래서?’ 하고 계속 묻고 있었다.
“ 그래서 오후에 장군이 왔는데, 부대 한 바퀴 돌고 나더니 장교들 불러서 계속 술판인 거야! 전에도 그런 적 있대.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사흘 연속 마신대. 그래서 병사들은 오히려 좋아하는 거야. 자기들끼리 술 퍼마시고 노느라 우리한테는 아예 신경도 안 쓰니까. 심지어 여자들도 부른 것 같더라고. ”
“ 맞아. 그런 술판 벌어지면 끝장 볼 때까지 마셔. 나 군대 있을 때는... ”
“ 어휴, 또 시작이야, 군대 얘기... 그런 건 너네 둘이 따로 얘기해. 그래서, 대대장들은 술 마시고, 너는? ”
왕재수가 탁 끊었다. 알릭은 이상하게도 왕재수의 말이라면 금세 고분고분해져서 온순하게 말을 이었다.
“ 다들 부어라마셔라 정신도 없고 병사들도 놀자판 됐거든. 나도 애들이랑 축구하다가... 생각해보니까 밤에 살짝 나갔다 와도 모를 거 같더라고. 고개 하나랑 강 하나만 건너면 되니까... 그래서 점호 끝나고 밤에 살짝 빠져 나온 거야. 류바 보려고... ”
“ 뭐야, 그럼 탈영이잖아! 미쳤어! ”
베르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릭이 황급히 베르닌의 입을 막았다.
“ 야, 조용히 해... 나 그런 거 아냐. 괜히 오해받게... 나 총도 다 놔두고 나왔어. 나 진짜 류바랑 밤만 보내고 새벽에 돌아갈 생각이었단 말이야. 우리 못 본지 석 달도 넘었어. 그래서 막 고개 넘고 눈길 달려서 왔는데... 흐흑... 문은 다 잠겨 있고... 밖에서 아무리 류바 불러도 대답도 없고. ”
“ 류바 모스크바 갔어. 남자친구 오기로 했는데 취소돼서 열 받아서 주말 근무 바꿨대. 밤 기차 타고 모스크바에 놀러간댔어. 아까 7시 좀 넘어서 갔단 말이야. ”
베르닌은 왕재수가 그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기억하는 것에 놀랐다. 남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릭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 정말? 아... 그랬구나. 그래서 류바가 없었던 거구나... 흑흑... 그럼 난 뭐한 거니... 삽질. 흐흑... ”
“ 뭘 하긴 뭘 해! 탈영병 된 거지! 멍충이! 네가 전화 안 해도 어차피 예약이 다 취소됐으니까 류바도 너 못 온다는 거 알았을 거 아냐! 그러니까 모스크바에 갔지! ”
베르닌이 윽박지르자 왕재수가 그를 확 째려보았다.
“ 자꾸 갈구지 마. 얘기 좀 듣게. 아까 총 소리도 났는데. 넌 총 안 가져왔다며. 그럼 그건 무슨 소리였어? ”
“ 문이 다 잠겨 있어서 들어갈 구멍을 찾고 있는데 경비 할아버지가 저쪽에서 순찰 돌면서 오잖아. 숨다가 돌멩이에 걸려서 울타리에 부딪쳤거든. 소리도 크게 나고 그쪽에 오리들이 모여서 자고 있었는지 푸드득 푸드득 날아가고 시끄러우니까 아저씨가 놀랐는지 총을 쏘더라고. 근데 그거 공포탄이야. 그 할아버지 탄창 채우는 일 없거든. ”
“ 아, 그 총 소리가 그거였구나... 진짜 놀랐는데. ”
“ 거봐, 너 나가지 말랬잖아. 괜히 나가서... ”
왕재수가 베르닌을 나무랐다. 베르닌은 억울해서 대들었다.
“ 야, 그럼 총 소리가 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니! 혹시라도 정말 무장 강도라도 들었으면 큰일이잖아! ”
“ 그래도 내 옆에 있었어야지! 나 혼자 놔두고 나가면 어떡해! 너 심지어 몰래 나가려고 나 막 재웠잖아! ”
“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랬지... 다친 사람 있을까봐. ”
“ 딴 사람 다치는 건 걱정되고 나 다치는 건 걱정 안 되냐! ”
“ 돼! 걱정된단 말야! 아까도 얼마나 놀랐는데! 복도에 갔더니 창문은 열려 있지, 발자국은 있지. 근데 방에서 네가 갑자기 비명 지르고... ”
“ 저기... 근데 너네는 대체 무슨 관계야? 형제야? ”
“ 아니야!!! ”
왕재수와 베르닌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 하긴, 형제치곤 너무 안 닮았다. 너네 좀 이상해. 남자들인데 꼭 사귀는 것처럼... 쳐다보는 것도 그렇고 걱정하는 것도 그렇고. 나랑 류바처럼... ”
“ 야,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린 그냥 아는 사이고... 온천 와서 그냥 방만 같이 쓰는 거야!!! ”
베르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왕재수도 맞장구쳤다.
“ 그래! 나는 사귀는 사람 있어! 얘는 없지만... 하여튼 아니야! ”
알릭은 황급히 사과했다.
“ 어, 미안... 너네가 변태란 뜻이 아니었어. 난 그런 게 아니고... ”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남자끼리 응응응 하면 무조건 변태냐! 다들 꼴 보기 싫어! 에잇! ”
왕재수가 갑자기 화를 내더니 벌떡 일어났다. 줄줄 흘러내리는 파자마를 움켜쥐고 욕실로 들어갔다. 씩씩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물소리에 파묻혔다. 그 사이에 베르닌은 알릭을 훈계했다.
“ 너 그런 생각 있어도 입 밖에 내지는 마.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줄 아냐. 나중에 사회 나와 보면 알 거야.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 그리고 누가 누구 좋아하고 누가 누구랑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더라고. 그냥 그 사람 자체가 어떤지가 중요해. 그러니까 너랑 다르다고 함부로 변태니 뭐니 하고 욕하면 안 돼. ”
“ 으잉,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사내끼리 그런 거 하면 당연히 변태지. 아 찝찝해... ”
“ 시끄러워, 한 번만 더 그런 말 하면 의자로 또 패줄 거야! ”
베르닌이 협박하자 알릭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때 왕재수가 머리에서 물을 마구 떨어내며 나왔다. 피투성이였던 얼굴도 깨끗하게 닦아낸 후였다. 밴드가 터진 파자마 허리춤에 옷핀을 꽂고 있었다. 왕재수는 아직 화가 잔뜩 나 있는 것 같았지만 알릭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우와, 아깐 몰랐는데 너 진짜 잘생겼구나! 영화배우 같아. 너처럼 잘생긴 애 처음 봐!’ 라고 감탄하자 금세 누그러졌다.
“ 하여튼. 경비 아저씨는 공포탄 쐈고. 안 들켰어? ”
“ 응, 들키지는 않았어. 그래서 약속한 대로 부엉이 소리를 막 냈거든. 근데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류바가 안 나오는 거야. 문도 안 열어주고... 5층 창문은 불도 다 꺼져 있고. 시간도 늦었으니 내가 안 올 줄 알고 류바가 자나보다 싶었어. 그래서 창문으로 들어온 거야. ”
“ 5층까지 기어 올라왔다고? 너 몸놀림 둔하던데? ”
“ 아니, 마침 창고 앞에 사다리가 있더라고. 그래서 그거 타고 올라왔어. 근데 눈이 쌓여서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 했어. 복도로 들어오긴 했는데 캄캄해서 어디가 503호인지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좀 헤맸어. 근데 어디서 문소리도 나고 발소리도 나서 깜짝 놀라서 문 열린 방에 잠깐 숨었다 나왔어. 그 방은 502호더라고. 살금살금 나와서 보니까 옆방이 503호인 거야. 노크를 했는데 대답은 없고, 문은 밀어보니까 열리더라고. 들어와 보니까 이쪽 침대에 사람이 누워 있잖아. 그래서 난 당연히 류바라고... ”
“ 야! 넌 남자랑 여자도 구별 못 하냐! ”
“ 캄캄해서 잘 안 보였단 말야. 그리고 불 켜면 혹시라도 경비 아저씨가 밖에서 알아볼까봐... 그리고 류바는 나보다 키도 크고 늘씬하단 말이야. 머리도 짧고. 몸매도 비슷한 거 같고 해서 난 류바인 줄 알고... ”
“ 잠깐! 말은 바로 하자. 난 우주 최고 꽃미남에 뭇 남성과 여성들을 넋 나가게 했던 몸매의 소유자라고. 류바와 비교하면 안 되지! ”
왕재수가 알릭을 노려보면서 아주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대놓고 얘기하진 않았지만 왕재수 역시 류바가 별로 미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알릭은 얼떨떨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횡설수설 사과를 늘어놓았다.
“ 어, 미안... 하긴 네가 더 예쁘긴 하다. 어떻게 여자보다 더 예쁘지? 그래도 난 류바가 제일 좋아. 하여튼 난 진짜 류바인 줄만 알고... 너무 좋아서 침대로 기어들어가서... 그랬던 거야. 그냥 그거라고. ”
“ 야! 뭐가 그냥 그거야! 뭘 그랬던 거냐고! 이 개자식! 그러니까 맞잖아! 강간범! 죽여 버릴 거야! ”
꾹꾹 참으며 끝까지 듣고 있었던 베르닌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솟구쳐 일어나 알릭에게 달려들었다. 막 알릭의 얼굴을 짓이겨놓으려고 하는데 왕재수가 뒤에서 그의 허리를 껴안고 질질 끌어당겼다.
“ 아유, 얘가 정말 오늘 왜 이래. 국장한테 너무 볶여서 그러나. ”
“ 뭐가! 다 밝혀졌잖아! 이 자식이 자는 널 덮친 거잖아! 류바인 줄 알고! 고의가 아니었으면 뭐해, 일은 다 저질러놓고! 아까 이놈이 그랬잖아, 너 때문에 좋다가 말았다고! 그게 그 얘기 아냐! ”
알릭이 훌쩍훌쩍 울면서 변명했다.
“ 아니야, 안 저질렀어. 하마터면 할 뻔 했지만 안 했어. 진짜야. 그러니까 좋다가 만 거지. 근데 첨엔 진짜 류바인 줄 알았어. 향기가 너무 좋았단 말이야. 그렇게 좋은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남자라고 생각하냐! 살결도 얼마나 매끈매끈하고 부드러웠는데... ”
“ 그거야 온천을 했으니 그렇겠지! ”
“ 나 원래 피부 완전 좋거든! ”
왕재수가 베르닌의 옆구리를 확 쥐어박았다. 알릭은 왕재수가 자기 편을 들어주는 것 같자 안도하며 말을 이었다.
“ 하여튼 그래서... 너네도 알잖아, 나 석 달 동안 못했는데... 남자들만 우글거리는 부대에 있다가 그것도 사랑하는 여자랑 오랜만에 한 침대에 눕게 됐는데 이성 찾게 됐냐! 너무 흥분돼서 꼭 껴안고 뽀뽀했는데 쟤가 가만히 있었단 말이야. 그래서 더더욱 류바라고 생각하고 옷을... ”
“ 넌 왜 또 가만히 있었는데! 저놈이 그렇게 뽀뽀하고 몸을 더듬는 것도 몰랐단 말야? ”
베르닌이 왕재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왕재수가 억울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 난 자고 있었어! 온천도 했지 마사지도 받았지 뱀 때문에 놀랐지 정말 피곤했단 말이야. 알잖아, 난 원래 새벽잠이 많단 말이야. 알람 맞춰도 못 일어나는데... 막 꿈꾸면서 자고 있었어. 근데 갑자기 손이 안으로 쑥 들어오잖아. ”
“ 안으로? 어디 안으로!! ”
왕재수가 잠자코 파자마 안쪽을 가리켰다. 베르닌이 잠깐 멍해졌다가 욕을 하면서 의자를 집어 들려고 했을 때 급하게 알릭이 소리쳤다.
“ 아니, 그러니까! 나도 놀랐단 말이야! 으악, 나 때리지 마. 맹세코 거기까지밖에 안했어. ”
“ 거기까지가 뭔데!!!! ”
“ 그러니까... 뽀뽀하고... 여기랑 여기 만지고... ”
알릭이 쭈뼛거리며 가슴팍과 허벅지 안쪽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베르닌이 폭주할까봐 잽싸게 덧붙였다.
“ 근데 여기가 판판하잖아! 그리고 여기에... 없어야 할 게 있잖아! 나도 진짜 놀랐단 말이야! 깜짝 놀라서 손 빼려는데 갑자기 얘가 깨서 비명을 지르잖아. 그냥 소리만 지른 줄 알아? 막 주먹 휘두르면서 발길질을 하는데 나 정말 갈비뼈 다 나가는 줄 알았어. 소리 듣고 사람들 오면 나 무단침입에 탈영 죄까지 덮어쓸까봐 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할 수 없이... ”
“ 그래서 애를 패고 묶었단 말이야? 그 덩치에! 한 줌밖에 안 되는 애를! 저 조막만한 얼굴을 피범벅을 만들고 몸에 생채기 낸 것도 모자라서 팔다리를 그렇게 꽁꽁 묶고... 옷은 다 벗겨놓고! 이 개자식아! ”
“ 아니야! 억울해! 난 옷만 벗겼어. 그것도 류바인 줄 알고 그랬던 거야. 생채기는... 쟤가 하도 몸부림쳐서 엎치락뒤치락하다 긁혀서 그런 거야. 난 쟤한테 걷어차여서 갈비뼈 최소 금갔단 말이야! 피난 것도 쟤 아니야, 나야! 쟤가 들이받아서 코 깨지는 줄 알았어! 코피가 얼마나 많이 났는데! ”
알릭이 자기 코를 가리켰다. 유심히 보니 콧구멍 아래에 피가 말라붙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왕재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 누가 덮치래. 다 자업자득이지. ”
“ 그럼, 그럼 넌 괜찮은 거야? 피 안 났어? 다른 데 다친 덴 없어? ”
“ 없다니까. 가슴팍 좀 긁힌 거랑 저 자식이 묶어서 내 백옥 같은 살결에 흠집난 거. 그 정도야. 어휴, 평소 같으면 저렇게 둔한 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데 자다가 깨서 몸이 잘 안 움직이잖아. 그리고 쟤가 뚱뚱해서 몸무게로 깔아 누르니까 꼼짝을 못하겠더라고. 막 버둥거리니까 저 녀석이 날 묶잖아. ”
“ 나 처음에 너 팔 하나밖에 안 묶었어! 근데 네가 계속 발길질하고 난리치니까 할 수 없이 묶은 거야. 그 와중에 밖에선 저 녀석이 막 고함지르면서 문 부수려고 하고. 진짜 정신없었단 말이야. ”
베르닌이 알릭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 시끄러워, 얘 입까지 틀어막았잖아! 얘가 소리 지른 건 한 번밖에 못 들었어! ”
“ 그건... 못 움직이게 깔아 누르니까 얘가 막 날 물어뜯잖아. 나 살점도 뜯겨나갔어! 진짜 미친 놈 같았단 말야. 하도 난리를 쳐서 이렇게 가냘픈 애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무슨 특공훈련 받은 놈인 줄 알았다고! 근데 지금 보니까 완전 계집애처럼 생겨서... 군 면제... ”
베르닌은 왕재수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더니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잠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왕재수가 조그만 상자를 들고 왔다.
“ 이 요양소 나쁘지 않네. 구급상자도 있고. ”
왕재수는 상자를 뒤져서 연고를 꺼냈다. 베르닌의 손목을 끌어당겨서 끈에 쓸린 상처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면봉에 소독약을 묻히더니 뒤통수 어딘가를 살살 눌렀다. 머리의 상처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베르닌은 갑작스러운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 아 따가워!!! ”
“ 가만히 있어. 그래도 피는 많이 안 났어. 세게도 때렸네. ”
마지막은 알릭을 째려보면서 한 말이었다. 알릭은 풀이 죽어서 사과했다.
“ 미안해. 너 묶어 놓자마자 쟤가 들이닥쳐서... 쟨 심지어 덩치도 커서 한방에 제압하지 않으면 큰일 날 거 같아서 그랬어... ”
“ 뭘로 때린 거야? 이거 주먹으로 팬 거 아닌데. ”
“ 저... 미안해... 레닌... ”
알릭이 쭈뼛거리며 문가의 카펫을 가리켰다. 레닌 흉상이 박살난 채 나뒹굴고 있었다. 여기저기 석고 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왕재수는 한숨을 쉬었지만 베르닌은 분명 그 순간 그 까만 눈이 반짝 빛나는 것을 보았다. 애초부터 맘에 안 들었던 레닌이 박살난 게 내심 즐거운 게 틀림없었다.
“ 저런 걸로 사람 머리를 내리치면 어떡해. 큰일 날 뻔 했잖아. 얘가 머리가 단단해서 망정이지. ”
“ 미안해. 진짜 미안해. 나 정말 고의가 아니었어. 체포당할까봐 그랬어. 그리고 분명히 류바가 있어야 하는데 침대에 웬 남자가 있으니까... 순간 류바가 바람난 줄 알았어. 딴 남자랑 놀아나는 줄 알고 눈이 뒤집혔어. 미안... 나 정말 나쁜 놈 아니야. 강간범 그런 것도 아냐. 때린 거 미안, 묶은 거 미안... 흑흑, 나 고발하지 마. 엉엉... ”
“ 그럼 어떡해! 너 분명 탈영한 거잖아! 너네 부대에 전화할 거야! ”
베르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스라친 알릭이 울면서 그나마 자기 말을 잘 들어준 왕재수의 어깨를 와락 껴안고 매달렸다.
“ 흐흑, 제발... 나 보내줘. 영창 무서워. 군대도 싫은데 영창을 어떻게 견뎌. 나 총도 안 가져왔잖아. 류바 보려고 온 건데... 류바도 없고. 어헝... 감옥 가기 싫어, 엉엉... ”
베르닌이 알릭을 홱 밀쳐서 왕재수로부터 떼어놓았다.
“ 시끄러워. 어딜 또 껴안고 난리야! 한 번만 더 얘 건드렸단 봐! 그리고 얜 그런 거 결정할 권한 없어! 나한테 있다고! 나 KGB! 국가 보안요원이란 말야! 사정은 안됐지만 넌 탈영했잖아. 법대로 해야지! 나 법학 전공... ”
알릭이 사색이 되어 울음을 터뜨리려는데 왕재수가 끼어들었다.
“ 다닐, 이제 그만 해. ”
“ 뭘 그만 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하지만 법이란 게 있어! 정상 참작은 좀 될 거야. 그래도 원칙은 지켜야지! 그리고... 그리고... 너 다쳤잖아! ”
“ 안 다쳤다니까. 코피도 쟤가 난 거라고 했잖아. ”
“ 생채기 났잖아! 묶인 자국 나고... 너 피부 엄청 챙기잖아. 묶여서 근육도 미워지고... 추행당하고... 아무리 고의가 아니어도... ”
“ 연고 발라서 금방 가라앉을 거야. 이제 그만하고 얘 가라고 하자. ”
“ 가라니! 어딜 가라고! 탈영병을! ”
“ 총도 안 가져왔잖아. 여자 친구 보고 싶어서 온 거잖아. 류바도 없고 불쌍하잖아. 아직 날 밝으려면 많이 남았으니까 지금 서두르면 대대장인지 뭔지한테 안 들키고 돌아갈 수 있을 거야. ”
“ 하지만... ”
“ 영창 간대잖아. 그거 감옥 아니야? 감옥 나빠. 사람 괴롭히고 아프게 한단 말이야. 얘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감옥 가면 불쌍하잖아. 대대장이 사이코라며. 너도 맨날 너네 국장 사이코라면서 괴로워하잖아. ”
“ 그거랑은 달라... ”
“ 뭐가 달라. 군대나 너네 KGB나. 권력 자랑하고 마초 흉내 내고 사람 괴롭히는 데잖아. 당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여기 온천이잖아. 우리 쉬러 온 거잖아. 그러니까 그냥 보내주자. ”
“ 하지만... ”
“ 나 감옥에 있을 때 너무 무서웠어. 매일매일 심문하고 때리고 나쁜 짓 하고 주사도 놓고. 얼마나 아팠는데. 근데 그거보다 더 싫었던 게 뭔지 알아? 너네 국장 닮은 멍충이들한테 맨날 끌려가서 말도 안 되는 설교만 계속 듣는 거였어. 영창도 그럴 거잖아. ”
“ 어... 그거랑은 좀 다를 거야. 넌 정치범이었잖아. 엄청 중요한 죄수였다며. 그래서 사상 교화 받느라 그랬겠지. 군대 영창은 좀 달라. ”
“ 어쨌든. 잘못도 없는 사람 감옥 가는 거 싫어. 보내주자. ”
베르닌은 입을 벌렸다. 원칙과 법규, 보안요원 서약을 생각했다. 팔과 다리가 꽁꽁 묶이고 입이 막히고 옷이 벗겨진 채 버둥거리던 왕재수의 모습이 떠오르자 다시금 몸이 떨려왔다. 절대 안 된다고 하려는데 왕재수가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서 온몸이 굳는 것 같았다. 차라리 속눈썹 깜박깜박하면서 바이올린 깡패에게나 쓰던 수작을 부리면 나을 것 같았다. 싸가지 없는 반동분자 주제에 안 하던 표정을 짓고 안 쓰던 말투를 쓰니까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 보내주는 거야. 그렇지? ”
왕재수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의문문의 탈을 썼을 뿐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왕재수, 싸가지 없는 놈, 반동분자, 반체제주의자 등등의 욕설을 해줘도 시원찮을 판인데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스페호프의 얼굴이 생각났다.
“ 알았어. 너 빨리 가. ”
“ 고마워. 진짜 고마워. 나 얼른 갈게. 패서 미안해. 묶어서 미안해. ”
알릭이 후다닥 일어났다. 급하게 나가려는데 왕재수가 붙잡더니 얼굴과 팔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거의가 베르닌에게 두들겨 맞은 상처였지만 왕재수가 물어뜯은 자국도 있었다.
“ 뺨은 찢어져서 좀 꿰매야겠다. 부대 돌아가면 의무실인지 뭔지 꼭 가봐. ”
“ 고마워. 너 착하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류바랑 놀아나는 줄 알고... ”
왕재수는 ‘대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상상을!’이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자기 가방을 뒤져서 유산지로 꼭꼭 싼 꾸러미를 하나 건네주었다.
“ 이게 뭐야? ”
“ 사과파이. 아까 배고프다고 했잖아. 가면서 먹어. ”
“ 아아... 사과파이. 단 거 먹어본지 진짜 오래됐어. 진짜 고마워! 안 잊을게! 나중에 제대해서 사회 나오면 꼭 은혜 갚을게! 류바랑 나랑 결혼할 때 꼭 부를게... 흐흑... ”
“ 촌스럽게 왜 또 훌쩍거리는 거야. 빨리 가. 날 밝기 전에! 그리고 뽀뽀 연습이나 좀 해. 너 진짜 못하더라. 류바 불쌍해! ”
“ 으응. ”
마침내 알릭이 떠났다. 베르닌은 시계를 보았다. 새벽 3시였다. 겨울이니까 서두르면 해가 뜨기 전에 부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베르닌은 어쨌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베르닌이 박살난 레닌 조각들을 치우는 동안 왕재수는 묶여 있던 여파로 몸이 너무 쑤신다면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팬티 바람으로 나와서 베르닌을 순간 소스라치게 했다.
“ 어... 야! 너 왜 옷 안 입고! ”
“ 나 입고 잘 옷이 없어. 잠옷 다 찢어졌잖아. ”
“ 그래도... 추운데 어떻게 그러고 자냐! 잠깐만 기다려! ”
베르닌은 급하게 자기 옷을 뒤져서 티셔츠를 한 장 꺼내주었다. 왕재수는 너무 촌스럽다고 툴툴댔지만 결국 베르닌의 티셔츠로 갈아입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막 베르닌도 침대로 들어가면서 불을 끄려는데 왕재수가 발딱 일어나 앉았다.
“ 왜 그래? ”
“ 구급상자... ”
“ 뭐? 너 다친 데 있었구나, 근데 그 자식 보내주려고 괜찮은 척 한 거지! ”
“ 그게 아니고. 너 머리. 붕대 감고 자야 돼. 안 그러면 베개에 상처 쓸려. ”
“ 나 괜찮은데. ”
“ 너는 뒤통수가 안 보이잖아. 피도 나고 짓물렀단 말이야. ”
왕재수가 구급상자를 다시 뒤졌다. 붕대를 가져와 베르닌의 머리에 감아 주었다.
“ 어, 너 붕대 잘 감는구나. 의외네. 이런 거 못할 거 같은데. 군대도 안 다녀왔잖아. ”
“ 군대가 뭐 그리 잘났다고 다들 군대 타령이람. 나 무용수였잖아. 이 바닥은 부상당하는 일이 많아서 붕대쯤은 껌이지. ”
“ 그렇구나... 다리는 괜찮아? 아까 근육 다 뭉쳤다고... ”
“ 아직 좀 뭉쳤는데 자고 나서 온천하면 괜찮아질 거 같아. ”
“ 다행이다. ”
왕재수가 침대로 돌아간 후 베르닌은 램프를 껐다. 너무 피곤했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뭔가가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조심스럽게 왕재수를 불렀다.
“ 야, 자? ”
“ 아니. 근데 졸려. ”
“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
“ 뭔데? ”
“ 너 왜 알릭이 건드렸을 때 가만히 있었어? ”
“ 자고 있었다고 했잖아. ”
“ 아니야. 너 자고 있지 않았어. 최소한 그 자식이 기어들어왔을 땐 분명히 깼어. ”
“ 아냐, 나 자고 있었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
“ 아까, 알릭한테 그랬잖아. 뽀뽀 연습하라고. 진짜 못한다고. ”
“ 근데, 그게 뭐? 걔 진짜 뽀뽀 못해. 침만 막 묻히고. 불쌍한 류바... ”
“ 너 처음에 그랬잖아. 자느라고 알릭이 기어들어온 것도, 건드리는 것도 몰랐다고. 파자마 속으로 손 집어넣어서 깼다고 했잖아. ”
“ 맞아! 자다가 그래서 깼어. ”
“ 앞뒤가 안 맞잖아. 알릭은 뽀뽀부터 했다고 했어. 좋은 냄새 났다고. 처음에 껴안고 뽀뽀하고 그 다음에 옷 벗기고 만졌다고 했단 말이야. 자고 있었다면서 뽀뽀 못하는 건 어떻게 알아! ”
“ 어... 그런가... 에이, 둔한 주제에 어떻게 그런 머리는 잘 돌아가지? 야, 근데 너 지금 나 추궁하는 거야? ”
“ 아니. 그게 아니고... ”
“ 그러니까 내가 꼬리쳤다 이거 아냐! ”
“ 아니야. 절대 그런 게 아니야! 난 그냥... 왜 가만히 있었냐고! 그 자식이 건드렸을 때 깨어 있었잖아. 나 너 힘센 거 알아. 운동천재잖아. 처음에 달려들었으면 그 녀석 둔하니까 네 힘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어. 근데 한참 건드리게 놔둔 거잖아. ”
“ 아, 젠장. 몰라. 기분 좋았나보지 뭐. ”
“ 너는 대체... 넌 정말... ”
베르닌은 주먹으로 매트리스를 쾅 내리쳤다.
“ 너 정말 왜 그러는 거야! 그때... 그때 투레츠키 그 자식이 건드릴 때도 가만히 있었잖아! 왜 그러는데! 그러다 진짜 나쁜 짓 당한단 말이야... 좋아하지도 않는 놈들이 건드리면 못하게 해야지 왜... 나 정말 너 때문에 돌아버리겠어! 왜 그렇게 살아, 왜! ”
“ 어... 너 화난 거야? ”
“ 답답해서 그래! 어휴! ”
“ 나한테 화내지 마. ”
“ 어떻게 화를 안 내냐! 너 분명히 내가 안 들어왔으면 그 자식이 나쁜 짓해도 가만히 있었을 거잖아! ”
“ 아니야, 안 그래! 걔 내 취향 아니란 말야! 그리고 내가 내 몸 어떻게 굴리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아, 피곤해. 나 잘 거야. ”
“ 상관있단 말야! ”
“ 뭐가! 왜 상관있어! ”
“ 나는... 나는... 그러니까... 너 감시요원... 보고서 써야 되고... ”
“ 쳇. 바보 멍충이. ”
왕재수가 담요를 끌어올리며 홱 돌아누웠다.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흘렀다. 베르닌은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숨을 쉬었고 어떻게든 잠을 청해보려고 했다. 그때 왕재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나는 너라고 생각했어. ”
“ 뭐? ”
“ 넌 줄 알았다고. 그래서 가만히 있었어. ”
베르닌은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눈을 깜박거렸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런 줄 알았다고? ”
“ 밖에 나갔었잖아. 복도 돌아보고 다시 들어온 줄 알았어. ”
“ 하지만... 나라고 쳐도... 왜 가만히 있었던 건데! ”
“ 너인 줄 알았다고 했잖아. ”
왕재수가 고집스럽게 되풀이했다. 베르닌은 미칠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 어떻게, 어떻게 나라고 생각할 수가 있어? ”
“ 방도 같이 쓰니까 너밖에 들어올 사람 없었고. 뽀뽀도 엄청 못해서. 너 책상물림이잖아. 애인도 별로 안 사귀는 거 같고. ”
“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나였으면, 그럼 그런 짓 해도 된다는 거야? ”
“ 응. ”
“ .... 왜? 왜? ”
“ 뭘 새삼스럽게 묻니? 전에 얘기했잖아. 너 조기출근 늦게 퇴근 벌칙 받았을 때, 늦게 출근 조기퇴근이 직장인의 로망이라고 징징대서 내가 해결해줬잖아. 너네 국장한테... ”
“ 야, 그게 해결이냐! 그때 네가 나랑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한다고 뻥쳐서 나 정말 지금까지 얼마나 헛소문에 시달리는 줄 알아!! ”
“ 내가 그때 그랬잖아. 내가 해주지도 않으면서 거짓말해서 기분 나쁜 거면 해줄 수 있다고. ”
“ 어... 하지만! 내가 언제 해 달랬어! 나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난 여자가 좋다고!!! ”
“ 누가 뭐래. 나도 그런 줄 알았지. 넌 나타샤 좋아하고 렐랴 좋아하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지. 근데 침대로 기어들어오니까... 또 아닌가보다 했지. ”
“ 야! 그게 말이 되냐! 그리고... 좋아, 그렇다 쳐! 나라고 생각했다 쳐!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해! 나라고 괜찮은 게 어딨냐고! 내가 바이올린 아저씨도 아니고! 너랑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그렇게 아무 남자나 건드리게 놔두면 안 된... ”
“ 너는 아무 남자가 아니잖아. ”
“ 뭐? ”
왕재수는 입을 다물었다. 베르닌은 너무 어지럽고 정신이 없었다. 불을 켜야 하나 싶었다. 저 골치 아픈 녀석을 일으켜 앉혀 놓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빙빙 꼬지 말고 제대로 말해보라고 추궁하고 싶었다. 동시에 겁도 났다. 그때 왕재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난 네가 국장 명령을 받은 줄 알았어. ”
“ 뭐? 국장 명령?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 온천 온 거. 국장이 보낸 거잖아. ”
“ 어...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
“ 여기 높은 사람들 오는 요양소야. 난 이런 데 많이 다녀서 척 보면 알아. 아까 류바도 그랬어, 너 여기 올 순번 아니라고. 근데 심지어 갑자기 금요일 휴가에, 주말 이용권까지. 너 같은 말단은 그런 특권 죽었다 깨나도 못 얻어. 그러니까 국장이 손을 쓴 거야. 그 앞잡이 사이코가 순수한 호의로 너한테 그런 걸 베풀어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이건 명령이었겠지. 특별 이용권을 내주고 나랑 같이 온천 가라고 한 거야. 감시든 뭐든 뭔가 목적이 있었겠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뭐 난 상관없어. 온천 좋아하니까. 네가 무슨 음모 꾸밀 그릇이 되는 애도 아니고. ”
“ 아... 어... 이용권은 국장이 준 거 맞지만... 그런 거 아니야. 진짜 그런 거 아니었어... 난 사실... 투레츠키... ”
“ 근데 아까 알릭이 들어와서 막 더듬고 뽀뽀할 땐 진짜 넌 줄 알았어. 그래서 생각했지. 아, 이거구나. 스페호프가 이러라고 명령했나보다... ”
“ 국장이 왜 그런 명령을 해! ”
“ 몰라. 내가 알게 뭐야, KGB 앞잡이 속셈을 내가 어떻게 다 아니. 사진이라도 찍어놓고 싶었나보지 뭐. ”
“ 그런,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단 말이야? 너 미쳤어? ”
“ 바보 같은 생각 아니야. KGB 있는 놈들은 가끔 그런 짓 한단 말이야. 옛날에 모스크바 아저씨도 나한테 그렇게... ”
“ 절대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좋아, 진짜 아니지만 설령 그렇다 쳐! 내가 국장 명령 받고 널 추행... 덮친다고 쳐! 그걸 알면서도 왜 가만히 있냐고! ”
“ 그럼 어떻게 하니. 내가 못하게 하면 넌 국장한테 혼날 거 아냐. 임무 수행 못했다고. 그럼 또 징징댈 거고 잘리니 마니 벌목공도 못하게 될... ”
베르닌은 왕재수를 두들겨 패서 입을 틀어막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머리가 아팠다. 눈꺼풀이 뜨거웠다. 속이 울렁거렸다.
“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그 자식이 만지작거릴 때 알았어. 너 아니라는 거. ”
“ 그건 어떻게 안 거야? 캄캄했잖아. ”
“ 손. 너는 손 크고 두툼하잖아. 서류 작업해서 손가락 끝에 굳은살도 있고. 대신 털은 없잖아. 근데 여기로 손이 쑥 들어왔는데 털이 숭숭 돋아 있더라고. 손도 작고. 그래서 깜짝 놀라서 소리 지른 거야. ”
“ 나 국장 명령 받은 거 아니야. 아프다고 뻥쳤더니 국장이 온천 이용권 준 거야. 애초부터 내가 갈 생각도 아니었어. 너랑 바이올린 아저씨 보내려고 한 거였어. 너 폐렴 때문에 아팠잖아. 그리고... 너 금요일에 투레츠키한테 간다고 해서 그랬어. 그 자식이 찝찝하게 구니까 혹시라도 안 좋은 짓 할까봐. 거기 가느니 온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랬던 거야. 국장 명령 아냐. 행여 그런 명령 내린다 해도 절대 그런 거 안 해! 내가 국장이야? 나 절대 사람을 그런 식으로 다루진 않아! 아무리 네가 싸가지 없는 놈이라 해도 그런 짓은 안 한단 말이야!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잠이 싹 달아났다. 한참 동안 말없이 천정을 쳐다보며 누워 있었다. 왕재수도 말이 없어서 잠들었나 싶었는데 어둠 속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 화났어? ”
“ 조금. ”
“ 미안. 국장이 명령했다고 오해해서. 그때 그 자식이 전화로 협박해서 내가 민감해져 있었나봐. ”
“ 아니야. 우리가 너 감시하니까... 우리가 나쁜 거야. ”
“ 그건 그래! 너네 나빠! ”
“ 앞으로는 못하게 해. ”
“ 뭐를? ”
“ 누가 그러든! 넌 그렇게 잘난 척하면서 왜 더러운 짓 당해도 가만히 있는 거야! 바이올린 아저씨나 네 맘에 드는 남자 아니면 못 건드리게 하란 말이야. 하지 말라고 말하든가, 패든가! ”
“ 근데 난 하다 보면 웬만하면 또 좋아져서... 특히 성감대를 살살 만져주면... ”
“ 농담하지 마! 너 분명히 그랬잖아, 취향 아닌 애랑 안 한다고! ”
“ 그건 그런데 또 안 그럴 때도 있어서... ”
“ 약속해. 이제 안 그런다고! ”
“ 아휴, 시골뜨기. 책상물림. 그게 약속한다고 되냐. ”
“ 약속하라고. 안 그러면 창밖으로 밀어버릴 거야. ”
“ 알았어. 약속할게. 나 이제 잘래. 너무 졸려. 배도 고프네. 괜히 사과파이 줘버렸어. 아침에 차랑 곁들여 먹으려고 가져온 건데. 아깝다... ”
“ 카페에 사과파이 있었어. 내일 거기 가서 먹자. ”
“ 으응... ”
왕재수는 졸린지 뭐라고 웅얼거리더니 곧 잠이 들었다. 베르닌은 몇 분 정도 더 천정을 쳐다보며 복잡한 머리를 정리해보려고 했지만 곧 무거운 졸음이 쏟아졌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FIN
- 2015. 3. 9 ~ 3.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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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다음 이야기는 15편에서. 그건 다음주 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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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닌의 보안요원 연수 얘기라든지, 알릭의 군대 얘기 등등은 사실 소련의 KGB 훈련이나 군 제도와 완전히 일치하는 건 아니고, 이 시리즈가 원래 재미로 쓰는 거다 보니 우리 나라 얘기라든지 이것저것 내가 섞었다. 그래도 기본적인 골자는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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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편은 지금까지의 서무 에피소드들과는 기술이나 접근 방식이 달라서 사실 본편이나 전에 쓴 추리소설 외전에 더 가깝다. 왕재수의 성격이나 말투도 그렇고. 코미디보다는 정극에 가깝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를 쓰고 나서는 이 시리즈의 정체성에 대해 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근데 뭐...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 어차피 내가 좋아서 쓰는 시리즈인데 뭐.
사실 여기서 왕재수와 베르닌은 막판에 자기들끼리 추리를 해대면서 살짝 홈즈와 왓슨 티를 내고 있기도 하다 :) 똑똑한 왕재수와 고지식한 베르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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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 이야기는 15편에서. 15편에서는 베르닌이 새로운 미션을 받게 되고.. 또 고생문이 열린다~ (근데 난 왜 좋아하고 있지 ㅋㅋ)
** 댓글은 언제나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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