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무의 슬픔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series : 서무의 슬픔2015. 1. 23. 22:43
주말에 자리를 비울 것 같아서.. 금요일 밤에 서무의 슬픔 3편 올려본다.
만국의 직장인들이여 유리지갑들이여 말단들이여 사무직들이여 봉기하라 ㅠㅠ
** 지금까지의 간단한 줄거리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는 나름대로 자기 입장에서는 베르닌을 도와주려고 애쓰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3편 시작에 앞서 **
- 에피소드 3에 언급되는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는 실존인물이다. 그러나 권총규격이니 운운하는 스페호프 국장의 얘기는 전부 그냥 웃자고 쓴 얘기..
- 베르닌과 왕재수가 렐랴를 '릴리아나 페트로브나'라고 부르는 건 러시아어의 존칭 개념임. (렐랴는 애칭, 릴리아나 페트로브나는 본명 + 부칭)
- 보르쉬는 비트 수프, 펠메니는 러시아식 만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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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
서무의 슬픔
-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10월 초가 되었을 때 베르닌은 업무에 찌들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 애초부터 일이 많았지만 9월에 가브릴로프 시 의회와 공공기관들 내부에서 대대적으로 조직 개편이 일어나는 바람에 KGB에서는 새로 들어온 사람들의 서류를 탈탈 터느라 여념이 없었고 그 덕에 말단이자 비서이며 서무인 베르닌의 업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왕재수도 시립극장 감독으로 부임해오고 그 감시 업무까지 떠맡게 되었으니 베르닌은 몸이 열 개라도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 날도 베르닌은 산더미처럼 서류를 쌓아놓고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국장이 근교 도시로 출장을 가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서무가 조금이라도 노는 꼴을 볼 수 없었던 국장은 전날 어마어마한 업무 리스트를 하달하고는 다음날 자정까지 자기 책상 위에 완료된 서류들을 모두 올려놓으라고 엄포를 놓고 떠났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목록이 길게 이어졌다.
직원 외출부를 작전요원 및 감시요원, 행정직원별로 서류철 3개 만들기, 대외용 외출부 기재 칠판을 역시 요원별로 3개 만들기, 국장실에 걸어놓을 세계 전도 구입하기(사이즈는 120센티미터 x 60센티미터, 대륙별 색깔 구분 필수), 내무부에서 실시하는 연방 보안위원회 지국별 고객 만족도 조사 대비를 위한 전화 응대 매뉴얼 만들기(제정신이 박힌 일반인이라면 아무도 KGB에 전화하지 않으므로 아무 짝에 쓸모없는 매뉴얼이었다), 국장실 캐비닛에 비치할 다과 리스트 만들기 및 다과 구입하기, 전표 처리하기, 선배 직원들의 초과 근무 내역 작성 및 근태기록부 대조하기, 선배 직원들의 출장 내역 정리 및 출장비 지급하고 전표 처리하기...
이것도 모자라 맨 뒷장에는 작전요원에게 배부되는 권총 규격의 중장기 로드맵을 작성하라는 특별 과제가 주어져 있었다. 전날 국장실에서 목록을 전달받아 읽던 베르닌은 참다못해 항의했다.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대체 권총 규격의 중장기 로드맵이란 건 뭡니까? 모스크바 표준으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38구경... ”
“ 이런 근시안적인 천치 같으니. 그래서 자네가 발전이 없는 거야. 대체 언제가 되어야 제대로 된 행정가가 되겠나. 행정의 기본이란 향후 10년을 내다보고 중장기 계획을 만들어서 닥쳐올 감사에 대비하는 것이야. 지금이야 38구경이지. 하지만 요원들의 신체적 조건은 변화하기 마련이야. 45구경으로 바뀔 가능성은 생각 못하나? 게다가 미제 양키들이 38구경을 쓰고 있지. 국가적 자존심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단 말일세! 아직까지야 안드로포프가 KGB를 장악하고 있으니 변동이 없겠지만 서기장은 오늘내일 하고 있고 그자가 죽으면 안드로포프가 자리를 낚아챌 거야. 그럼 KGB 수장도 바뀔 거고, 전체 질서가 재편될 가능성이 크지. 그런 와중에 권총 규격이라고 안 바뀌겠나! 제발 꼭대기에 달고 있는 그 머리란 걸 좀 써 보게! ”
“ 권총은 국영 공장에서 대량 생산합니다! 권총 규격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산 제조 라인이 다 바뀌어야 하고 그건 단순히 KGB 수장의 변덕에 의해 좌우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비용을 요구하는 짓이란 말입니다. 효율성 측면에서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게다가 규격이 바뀌는 순간 작전요원들의 훈련에도 변화를 주어야 하고 사격 교관들도 새로운 훈련을 받아야 하니 이 또한 대규모의 추가 비용을 초래합니다. 게다가 45구경은 38구경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해외 비밀요원들이 사용하기에는 은폐도 어렵고 특히 여성 요원들에게는 큰 짐이 될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권총 규격의 중장기 로드맵이란 건... ”
“ 비용이라니! 효율성이라니! 어디서 그런 자본주의적인 발상을 지껄이고 있는 건가! 자네 수용소에 가고 싶나! 밖에서는 절대 그런 말은 입도 뻥긋하지 말게! 자넨 정말 운이 좋은 줄 알아! 그나마 내가 부하들을 아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
국장은 족히 20분 가까이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베르닌을 혼내고 훈계했다. 마침내 국장실에서 나왔을 때 베르닌은 너무 지쳐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직실 귀신이라도 다시 나타나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물론 자신이 혼자 있을 때 말고... 이왕이면 국장실로 가서 얄미운 국장을 혼내줬으면 했지만 전에 보니 귀신도 상당히 사람의 외모를 따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리고 예쁘장한 왕재수를 그렇게 좋아했나 싶었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귀신이 자기한테도 귀엽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어쨌든 국장은 출장을 떠났고 가브릴로프 작전요원들과 감시요원들은 모두 강가에 피크닉을 나가서 샤실릭을 구워먹으며 뒹굴었고 사무실 행정직원들도 너도나도 어딘가로 사라져 농땡이를 치며 행복을 만끽했다. 그야말로 어린이 주간이었다.
오로지 말단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만이 햇살 찬란한 가을날에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남아 외출부 서류철을 3개 만들고 대외용 외출 칠판 3개와 색깔이 들어간 세계 전도 구입 요청 서류를 작성하고 전화 응대 매뉴얼을 끄적거리고 선배들의 초과 근무 내역을 창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권총 규격의 중장기 로드맵이 대체 무엇인지, 국장이 요구하는 로드맵이란 38구경에서 45구경으로의 1차 진화에서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무슨 생화학 캡슐을 장착한 신무기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안드로포프 위원장의 권력 승계 구도를 예측해 환경 분석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머리가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격무 때문에 너무 골치가 아프고 힘들어서 베르닌은 이 빠진 머그에 뜨거운 물을 붓고 굴러다니던 홍차 티백을 담갔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유리병 뚜껑을 열고는 티스푼으로 잼을 마구 퍼먹기 시작했다. 카페인과 당분을 섭취하자 그나마 두통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게다가 잼이 아주 맛있어서 순식간에 유리병을 절반쯤 비웠다. 다 먹어치우려다가 야근할 때를 대비해 좀 남겨놔야겠다는 생각에 내키지 않는 손을 뻗어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는 다시 선배들의 초과 근무 내역을 지어내면서 출근부를 대조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들리더니 강렬한 향수 냄새가 확 끼쳐오면서 세찬 바람이 휙 하고 불어왔다. 베르닌이 상대방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책상 위로 구겨진 서류 몇 장이 회오리처럼 내동댕이쳐졌다.
“ 대체 이게 무슨 헛소리예요! 당장 취소하지 못해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KGB 나부랭이들 같으니! 문화가 뭔지 예술이 뭔지 한 마디도 이해 못하는 야만인들 주제에 감히 내 잡지 발간을 방해하다니! ”
고개를 들자 렐랴 비슈네바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씩씩거리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렐랴는 월간 문예지 비슈네브이 사드 편집장으로 나이는 겨우 스물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굉장한 노멘클라투라 가문 출신인데다 가브릴로프에서도 손꼽히는 미녀였다. 지금 보니 성깔도 손꼽힐 것 같았다.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왜 그러십니까? ”
“ 뭘 왜 그래요! 이거 당신이 보낸 거잖아요! 당신 이름 적혀 있잖아요, 다닐 베르닌!! 우리 잡지 발간일은 매월 15일이라고요! 당장 내일 나가야 하는데 무슨 절차를 안 지켰으니 당월호 발간 불가, 검열국 재승인 요망... 이게 무슨 헛소리냐고요! ”
베르닌은 구겨진 서류를 펼쳐 보았다.
“ 아, 난 또 뭐라고요... 잡지 뒤표지에 인쇄하는 문구 하나가 잘못됐더군요. ‘본 인쇄물은 가브릴로프 시 의회 및 출판문화국, 보안위원회의 검열 및 승인을 거쳐 출판되었습니다’라는 문구 말입니다. 보안위원회가 출판문화국보다 상위기관이기 때문에 순서가 바뀌어야 합니다. 사실 시 의회와는 동급이지만 그거야 알파벳 순서상 의회가 앞으로 와도 별 문제없고... ”
렐랴는 더욱 폭발했다.
“ 그런 하잘것없는 이유 때문에 내 잡지 발간을 막았다고요? 보안위원회고 검열국이고 다 그 밥에 그 나물인데 뭐가 먼저 온들 어때서요! ”
“ 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국장이 이런 문제에 너무 민감해서요... ”
“ 그리고 그깟 문구 순서가 문제라면 당신이 좀 바꿔줄 수도 있었잖아요! 아니면 전화해서 인쇄소에 넘기기 전에 문구만 바꾸라고 귀띔해줬으면 이런 바보짓을 안 해도 되잖아요! ”
“ 그게 말입니다... 저도 전화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때 국장이 불러서 행정 절차를 지켜야 하는 이유와 서무의 기본자세에 대해 한 시간 동안 설교를 하고... 당신 문예지의 이 문구를 예로 들면서 올바른 처리 방법에 대해 떠들어댔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 ”
“ 그러니까, 지금 내 잡지가 당신 국장의 변태적 강박관념 때문에 희생양이 됐다는 얘기잖아요! 당신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어요? 국장한테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꾸하고 서류 처리 대신 나한테 전화를 해줬으면 별 문제 없이 풀렸을 거 아녜요!!! ”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그건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라고요. 그리고 당신은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러는 거고요! 제가 당신에게 몰래 전화를 했다는 게 들통나면 국장은 제 살점을 도려내고 뼈를 갈아서 길거리 도둑고양이한테 던져줄 거라고요! ”
베르닌은 억울한 마음에 언성을 높였지만 렐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그러니까 몰래 했어야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니까, 빨리 이 사태를 해결해 줘요! ”
“ 해결 방법은 간단합니다. 문구를 수정해서 다시 검열국에 승인 요청을 하시는 거죠. 검열국에서 통과가 되면 저희 쪽으로 넘어올 거고 그럼 제가 발간 승인 공문을 기안하고... 국장 결재가 완료되면 저희 쪽 문서 발송 담당자에게 요청해서 발송철에 기재하여 번호를 딴 후 당신 사무실로 서류를 발송해드리지요. 그런데 오늘이 수요일이군요... 검열국 통과는 빠르면 내일... 저희 쪽으로 넘어오면 목요일 저녁... 그런데 국장이 출장을 갔으니 금요일 오전에 결재를 받고... 발송 담당자를 거치면 금요일 오후. 그러면 우체국이 문을 닫으니 다음 주 월요일이면 승인 확정이 되고, 발간은 화요일... ”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던 렐랴는 다시 펄펄 뛰었다.
“ 화요일이라뇨! 문구 하나 수정하는 데 어째서 일주일이 걸린단 말인가요! 잡지 발간일은 내일이에요! 이건 나와 독자들 사이의 약속이라고요! 검열국엔 내가 가서 얘기하겠어요! 한 시간 내로 서류에 도장 받아서 가져올 수 있다고요! 그럼 여기선 당신이 해결해주면 되잖아요! 국장 도장 어딨는지 몰라요? 도장 대신 찍어주고! ”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당신은 행정 절차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위임 전결 규정이란 게 있어요. 제가 국장 대신 도장을 찍을 수는 없다고요! 그리고... 우리는 도장 안 씁니다. 서명을 한다고요! ”
“ 당신 서무라면서요! 국장 서명 어떻게 생겼는지 알잖아요, 대충 똑같이 그리면 되죠! ”
“ 그건 범죄 행위라고요! 국장이 알면 제 목을 쳐서 남은 피 한 방울까지 다 짜버릴 거예요. 어찌어찌 서명을 위조한다 쳐도.. 지금 문서 발송 담당자가 자리를 비워서 발송이 안돼요. ”
“ 그깟 서류철에 기재하고 번호 따는 게 왜 담당자가 따로 필요해요! 그것도 지금 당신이 그냥 해주면 되잖아요. 1분도 안 걸릴 텐데! ”
“ 담당자가 돌아와서 서류철을 보면 난리를 칠 거예요... 제 권한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서류철에 기재를 해도 우체국에... ”
“ 대체 왜 우체국이 필요해요! 다리 하나 건너면 우리 사무실인데! 그리고 내가 직접 왔잖아요. 나한테 서류 건네주면 끝인데 무슨 우편 발송이 필요하냐고요! 아아 답답해! ”
렐랴가 두 손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온통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회색 눈동자가 분노로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니 정말 예뻤다. 왜 가브릴로프 남자들이 그렇게 이 여자에게 목을 매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잠시 베르닌이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고 있는 동안 렐랴는 심호흡을 하더니 조금 진정되었다.
“ 휴... 고지식한 당신에게 아무리 말해봤자 알아들을 리도 없고.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자, 빨리 문서부터 새로 만들어요. 국장 서명이랑 발송철 기재도 해요. 그 동안 난 검열국에 가서 수정본으로 승인 문서를 받아올 테니. 자, 빨리! ”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지금 보안위원회의 규정을 어기고 있는 겁니다. ”
“ 그래서 정말 안 해주겠다는 거예요? 내일 잡지가 나와야 한다니까요! 설마 정말 내 부탁을 안 들어주겠다는 거냐고요! ”
렐랴가 다시 콧김을 내뿜으며 소리를 지를 기세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재빨리 서류를 낚아챘다.
“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지금 해 드릴 테니까 빨리 검열국에 다녀오세요. 하지만 이건 비밀입니다. 이런 편법을 썼다는 게 발각되면 국장이 절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요. ”
렐랴는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베르닌의 손목을 꼭 쥐었다.
“ 고마워요, 다냐! 화내서 미안해요. 당신한테 화난 게 아니에요, 내일이 발간일인데 이런 일이 생겨서 그런 거예요. 당신네 국장은 워낙 예술이랑은 담을 쌓아서 애초부터 우리 잡지에 초를 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당신이 담당자라 다행이에요. ”
“ 저, 그런데 손목을 좀... 타이프를 쳐야 해서요. ”
렐랴는 샐쭉해진 눈으로 베르닌을 흘겨보더니 손목을 놔주었다. 베르닌이 발간 승인 문서를 타이핑하는 동안 렐랴는 책상에 쌓여있는 산더미 같은 서류를 훑어보았고 혀를 찼다.
“ 다냐, 이게 다 뭐예요? 다 당신 일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가고 왜 혼자 남아서 이렇게 일에 파묻혀 있어요? ”
“ 예... ”
“ 왜 그러는 건데요? 일을 다 같이 해야지 왜 당신 혼자... ”
“ 서무라서요. ”
“ 당신 불쌍하네요. 스페호프 너무 못됐어요. ”
베르닌은 어쩐지 가슴이 뭉클했다. 감동이 밀려왔다. 얼굴도 예쁜 여자가 마음도 곱다는 생각에 울컥해서 하마터면 ‘승인하오니 만전을 기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문장을 ‘만전을 기해주시기 바람’이라고 오타를 칠 뻔 했다. 막 타이핑을 마치고 국장 사인을 위조해 그리려는데 갑자기 렐랴가 뭔가를 홱 낚아채더니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물었다.
“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다닐? 대체 왜 이게 여기 있는 건지 설명해 봐요. ”
베르닌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렐랴를 빤히 바라보았다. 렐랴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채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뚜껑이 반쯤 열린 작은 유리병이 쥐어져 있었다.
“ 어, 그거요? 버찌잼인데요. 차 마실 때 곁들여 먹는 거. 차 한 잔 드릴까요? 같이 먹으면 맛있어요. ”
“ 누가 몰라요, 버찌잼인 거! 대체 이게 왜 여기 있냐고 묻잖아요! ”
“ 그러니까요, 잼은 차에 곁들여 먹으면 맛있고... 일하다 보면 머리도 아프고 힘드니까 뜨거운 차를 마시면 힘이 나고. 그래서 갖다 놓은 거죠. 차 마실 때 같이... ”
“ 그. 러. 니. 까. 대체 왜 이걸 당신이 갖고 있냐고요!!!!! ”
“ 아니,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저는 잼을 먹으면 안 되나요? 아무리 제가 당신들이 경멸하는 KGB 직원이라지만 잼을 먹으면 안 된다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국장에게 들들 볶여서 이렇게 시달리고 있는데... ”
“ 이건, 이건 내가 만든 잼이라고요! 검은 숲에서 직접 따서 먼지를 다 걸러내고 레몬즙과 수입 설탕을 넣어서 오래오래 끓여서 만든 수제 버찌잼이란 말이에요! 게다가 이 유리병... 이 뚜껑, 이 분홍색 리본.... 이 병을 구하려고 내가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 ”
“ 와,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정말 대단하군요. 이 잼을 직접 만들었다니. 이렇게 맛있는 잼은 처음 먹어봤어요. ”
“ 그렇겠죠! 내가 만든 거니까! 내가 궁금한 건 왜 이게 여기 있냐는 거예요! 이건 내가, 내가 미샤에게 준 거란 말이에요! 선물한 거라고요! 왜 이게 여기... 당신, 소문대로 그 사람 감시하는 게 맞죠? 그 사람 집에 숨어들고 도청하고 물건도 가져가고! 잼까지!!! ”
“ 미샤가 누구지? ....아, 왕재수... 아니, 야스민. 맞아요, 이거 그 자식이 준 거예요. 물건을 가져가다니요, 전 그런 짓 안합니다! 그놈이 먹으라고 준거라고요! ”
“ 거짓말! 이건 선물인데... 설마 미샤가 그럴 리가 없어요! 내가 포장지로 예쁘게 싸서 선물이니까 내 생각하면서 먹으라고 준 건데... 그 사람 먹으라고 밤새 만든 잼인데... 당신이 그냥 가져온 거죠!! 매일매일 그 사람 집에 드나들며 감시하고 못살게 굴고 물건도 가져가고! ”
“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잼은 야스민이 준 거고요. 제가 그 자식 집에 매일 드나드는 건 맞아요. 다 업무 때문이죠. 얼마나 지겨운지 아십니까? 국장이 절 그 자식 감시자로 붙이는 바람에 전 이사까지 했어요. 그 자식 아래층으로... 아침저녁 차로 출퇴근시켜주지, 밥도 해서 먹이고 설거지까지 해주지, 차도 우려주지... 전 정말 노예처럼 살고 있다고요! 사무실에서는 국장에게 들들 볶이고 집에 가면 여섯 살짜리나 다름없는 왕재수를 돌봐야지. 진짜 미칠 것 같다고요! ”
“ 왕재수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그렇게 멋진 남자에게. 당신 지금 질투하는 거죠? 하긴 온 동네 남자들이 전부 그이를 질투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네요. 잘생겼지 젊고 유능하지. 세련미가 넘치고 옷도 잘 입고... ”
“ 30분만 같이 있어 보세요, 탁아소 어린애처럼 유치한데다 진짜 왕재수란 걸 알게 될 테니! ”
“ 질투 그만 해요! 정말 미샤가 당신한테 이 잼을 줬단 말이에요? 대체 왜 그랬을까... 그럼 미샤는 한 입도 안 먹은 거예요? 그렇게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요? 그래서 내가 만든 건 입에도 대기 싫었을까요? 아아.... ”
렐랴의 아름다운 회색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고였다. 베르닌은 어쩐지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 마음이 심히 불편했다.
“ 저, 그런 게 아니고요... 왕재수, 아니 야스민은 원래 잼을 안 좋아하나 봐요. 그래서 어제 제가 차 우려주면서, 잼이 맛있어 보이니 접시에 좀 담아줄까 하고 물었는데 자기 버찌잼 안 먹는다고... 그냥 가져가서 먹으라고 주더라고요. ”
“ 아아... 그럼 미샤는 원래 버찌잼을 못 먹는데 내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받아준 거군요. 정말 착하기도 하지... 그렇게 잘생긴 남자가 마음까지 비단결이라니... ”
베르닌은 렐랴가 품은 환상이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왕재수에 대해 조금이라도 나쁜 말을 하면 피곤해질 것 같아서 꾹 참았다. 대신 옆 사무실에서 문서 발송철을 가져와 번호를 딴 후 위조한 승인 문서를 렐랴에게 건네주었다.
“ 여기 있습니다. 대신 꼭 검열국에서 문서를 받으세요. 그거 없으면 나중에 문제가 아주 커질 수 있으니 잊으면 안 됩니다. ”
“ 고마워요. 덕분에 내일 잡지를 발간할 수 있게 됐군요. 아참 그리고... ”
렐랴는 핸드백에서 뭔가 바스락거리는 물건을 꺼냈다. 금색 포장지로 싸여 있는 작은 상자였다.
“ 이거 미샤에게 좀 전해 주세요. ”
“ 이게 뭔데요? ”
“ 쿠키예요. 직접 구운 거예요. 잼은 안 먹는다고 했으니... 이 편지랑 같이 전해줘요. 뜯어보면 안돼요! ”
“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
“ 감시요원이니까... ”
“ 전 그런 짓 안 합니다! 여자 편지를 뜯어 읽는 비겁한 짓은 안 해요! ”
“ 알았어요, 고지식한 사람이니까 편지는 뜯어 읽을 것 같지 않군요. 근데 당신 아무래도 쿠키는 먹어버릴 것 같단 말이에요. ”
“ 안 먹어요! 그대로 야스민한테 전해주면 되잖아요. 절대 안 먹어요. 이제 됐나요? ”
“ 네. 꼭 전해줘야 해요. 이거 버찌잼보다 더 공들여 구운 쿠키라고요. 유기농 밀가루로 반죽하고 벨기에에서 공수한 초콜릿을 녹여 넣었어요. 별장에서 직접 증류한 보드카에 크랜베리와 호두를 한 달 동안 절였다고요. 가엾은 미샤... 대도시에서 좋은 데서만 자고 좋은 거 입고 좋은 것만 먹고 살다가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으니... 내 쿠키는 파리에서 먹던 것만큼 맛있을 거예요. 미샤가 꼭 먹고 기분 좋아졌으면 좋겠어요. ”
베르닌은 쿠키 상자를 받았다. 렐랴가 온 진짜 이유는 잡지 발간 건보다는 쿠키 상자 때문이라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어쩐지 섭섭한 기분이 들었지만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새로 타이핑한 서류를 소중하게 한 팔로 낀 채 렐랴가 뺨에 가볍게 키스를 했을 때 베르닌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고 왕재수에 대해서도 한없이 관대해져서 오늘은 야근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 쿠키 상자를 전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베르닌은 권총 규격 중장기 로드맵 과제를 싸들고 정시에 퇴근했다. 강을 건너가 극장에 들러 왕재수를 태웠다. 왕재수는 심기가 불편한지 차에 타자마자 스카프로 얼굴을 칭칭 감고 몸을 웅크린 채 창밖만 바라보았다. 내릴 때 얼핏 보니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왕재수가 너무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베르닌은 쿠키 상자를 건네주는 것은 미루고 조심스럽게 저녁 먹으러 올 거냐고 물었다.
“ 아니. ”
“ 너 어제 저녁도 안 먹었잖아. ”
“ 그깟 저녁밥 좀 안 먹으면 어때. ”
“ 맘대로 해라. 네가 배고프지 내가 배고프냐. ”
왕재수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태도로 휙 올라가버렸다. 베르닌은 귀찮은데 잘됐다 싶어서 자기 집으로 갔다. 가스렌지에 인스턴트 보르쉬를 데우고 냉동 펠메니를 삶았다. 그러나 막 먹으려고 보니 평소처럼 2인분을 만들어서 양이 너무 많았다. 먹고 남길까 했지만 펠메니는 시간이 지나면 끈적해지고 맛이 없어지는 음식이라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베르닌은 계단을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왕재수는 곧 문을 열어주었다.
“ 너 왜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열어? ”
“ 그러면 안 돼? ”
“ 도둑이면 어쩌려고! ”
“ 도둑이 여기 어떻게 와. 감시 카메라가 주렁주렁 달렸는데. 네가 도청 마이크도 달아놨잖아. 밑에 너도 살고. ”
“ 너 지금 비꼬는 거야? 내가 그런 거 아니잖아. 국장이 시킨 거잖아. ”
“ 왜 올라왔어? ”
“ 내려와서 밥 먹어. ”
“ 안 먹는다고 했잖아. ”
“ 네 거까지 만들었단 말이야. 빨리 내려와. ”
왕재수는 한숨을 쉬더니 베르닌을 따라 내려왔다. 여전히 스카프로 얼굴을 칭칭 감고 있었다. 그릇에 보르쉬를 부어주고 펠메니 접시를 밀어주면서 베르닌이 투덜댔다.
“ 식탁 앞에서 그 스카프는 뭐야. 풀고 빨리 먹어. ”
왕재수는 스카프를 풀고 포크로 펠메니를 푹 쑤셔서 맨입으로 한 개를 집어먹었다.
“ 스메타나 있잖아, 찍어 먹어! ”
“ 먹으래서 펠메니 먹잖아.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야... ”
“ 제대로 먹으란 말이야! 보르쉬도 좀 퍽퍽 퍼먹고. 펠메니도 스메타나 찍어서 두 개씩 먹어! ”
“ 나 입맛이 없다고 했잖아. 왜 자꾸 먹으래. ”
“ 어제 저녁도 안 먹고, 오늘 아침에도 카페 갔을 때 차만 마시고 안 먹었잖아! 그러다 쓰러진다고! ”
“ 안 쓰러져. 점심 때 양상추랑 당근이랑 토마토에 구운 닭가슴살이랑 우유를 먹었어. 잘 먹고 있단 말이야! ”
“ 그게 뭐야! 그것만 먹고 어떻게 살아! 네가 무슨 토끼냐? ”
“ 토끼는 초식동물이야. 닭가슴살을 먹지 않아. ”
“ 어쨌든! 왜 그렇게 조금 먹는 거야! 가뜩이나 마른 게! ”
“ 안 말랐어! ”
왕재수가 갑자기 화를 냈다. 얼굴을 빨갛게 붉히더니 눈물을 글썽글썽했다.
“ 어, 어... 너 울어? 내가 뭘 잘못 말했어? ”
“ 아니야. ”
“ 극장에서 무슨 일 있었어? 또 사람들이 나쁜 소리하고 욕해? 어리다고 말 안 들어? ”
“ 그건 맨날 있는 일인걸. ”
어쩐지 왕재수가 불쌍해진 베르닌은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기며 달래주려고 했다. 왕재수는 위로를 해주자 참았던 서러움이 울컥 터진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훌쩍 울었다. 베르닌은 이상하게도 정의감이 용솟음쳐서 버럭 소리쳤다.
“ 누구야, 누가 괴롭혀! 다 말해! 내가 보고서에 다 쓸게! ”
“ 보고서에 쓰면 뭐... 뭐가 달라져. ”
“ 뭐 그건 그렇지만... 너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에 아저씨들 있잖아. 괴롭히는 놈들 일러바치면 되잖아. ”
“ 이건 그렇게 안 돼... 일러바치면 큰일나. ”
“ 왜? 대체 무슨 일이야, 어떤 놈인데! ”
“ 로만이.. 그저께 침대에서 나보고... 요즘 살찐 것 같다고. ”
“ 뭐, 그 바이올린 아저씨? 침대...(무시하자) 너보고? 살쪘다고? 그 인간 미친 거 아니야? ”
“ 그 사람은 엄청 날씬한 애들 좋아해. ”
“ 너는 날씬하잖아! 날씬한 것도 아니고 말랐어! ”
“ 너 나 벗은 거 안 봤잖아. 나 안 말랐어. ”
“ (내가 왜 너 벗은 걸 봐야 하냐) 말랐어! 누가 봐도 말랐다고! ”
“ 로만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대. 근데 처음 잘 때도 벗은 거 보고 생각보다 근육질이라고 그러더니... 그저께는 여기 공기가 좋은가보다고, 나 살찌고 있다고... 막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
“ 허벅지는 왜? ”
“ 되게 하늘하늘하고 날씬하고 예쁜 앤 줄 알았는데 허벅지가 두툼해서 만지면 엄청 딱딱하다고... 그럼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야... 내가 여자야? 허벅지가 보들보들하게? 난 엄연히 사내라고! 그리고 나는 무용을 해서 허벅지가 두툼해. 춤추느라 거기 근육이 발달해서 그런 거야. 살쪄서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흐흑... ”
“ 그럼 너 그것 때문에 계속 굶고 있었어? ”
“ 굶은 거 아니야, 식이요법하는 거야. ”
“ 근데 너는 되게 날씬하고 예쁜데... ”
“ 고마워, 흐흑... 근데 로만은 더 날씬하고 더 예뻐야 좋은가봐. ”
“ 아니 그 인간은 지 생각은 안하고! 나이도 많은 아저씨가! ”
“ 그치? 그리고 바보 같아. 내가 왜 그렇게 밤일을 잘하는데... 다 이 두툼한 허벅지에서 나오는 건데! 여기 근육 줄어들면 지금만큼 좋지도 않을 건데 바보 같이... 내가 해주면 좋아서 죽으려고 하면서, 자꾸자꾸 하고 싶어 하는 주제에... 멍청한 남자... ”
“ 야,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란 말이야... 그럼 얼굴은 왜 가리고 있었던 거야? ”
“ 어... 다이어트를 했더니 피부에 뾰루지가 났어. 너무 기분 나빠. 여기... ”
왕재수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왼쪽 뺨 아래를 가리켰다.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 샅샅이 살펴보니 모래알보다도 작게 돋아난 빨간색 뾰루지가 보였다.
“ 이거? 보이지도 않잖아! 겨우 이런 거 갖고 그 난리를 쳤단 말이야? ”
“ 보여! 나는 피부가 하얘서 이런 거 금방 눈에 띈단 말이야. 그리고 작은 거 하나 생기면 금방 번질지 어떻게 알아... 남자는 피부가 중요해. 넌 이 피부가 그냥 유지되는 줄 알았어? 내가 어릴 때부터 얼마나 피부 관리를 했는데... 우유로 세수하고 분장 지울 때 클렌징도 진짜 신경 쓰고 보습도 잘해주고 자외선 차단 크림도 꼬박꼬박... ”
“ 말을 말자... 빨리 먹어. 하나도 살 안 쪘어. ”
“ 하지만 로만이... ”
“ 아, 그 망할 바이올린 아저씨! 넌 그렇게 잘난 척하고 다니면서 왜 남자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는 거야! 귀여우니까 농담한 거 아냐! ”
“ 그런가? 막 뽀뽀해주긴 했어, 허벅지랑 또... ”
“ 그만해! ”
베르닌은 자꾸 이상한 쪽으로 휘말리는 것 같아서 손을 휘저으며 왕재수의 입에 스메타나를 적신 펠메니를 쑤셔 넣었다. 왕재수는 펠메니를 삼키고 나서 보르쉬를 한 숟갈 떠먹고 맛있다고 좋아하더니 또 불쑥 물었다.
“ 나 귀여워? ”
“ 뭔 소리야! ”
“ 네가 그랬잖아. 로만이 농담한 거라고, 나 귀여워서. ”
“ 누가 내가 그렇대!! 그냥 그 인간 입장에서 그럴 거란 얘기지! 그 인간은 나이도 많고 변태니까! 너는 하나도 안 귀여워. 재수 없어, 싸가지도 없고 엄청 귀찮게 구는 왕재수야! ”
실컷 야단을 치다가 베르닌은 왕재수가 또 우는 게 아닌가 싶어 슬쩍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왕재수는 울지도 않았고 전혀 화난 것 같지도 않았다. 열심히 스메타나에 펠메니를 꼭꼭 찍어서 먹고 있었다. 보르쉬도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다 먹고 나자 안색도 훨씬 나아지고 눈도 반짝거려서 훨씬 나아보였다.
식탁을 치우고 나서 베르닌은 차를 우렸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나서 쿠키 상자를 가져왔다.
“ 자, 누가 너 주래. ”
“ 누가? ”
“ 렐랴. ”
“ 어... 왜 너한테 갔지? ”
“ 일 때문에 왔다가 전해달라고 줬어. 너 그 버찌잼 렐랴가 준 거 왜 말 안했어? 내 자리에 있는 거 보고 엄청 화냈단 말이야. ”
“ 그게 릴리아나 페트로브나가 준 거였나? 나 그런 거 기억 잘 못해. 하루에도 그런 거 열 개 스무 개씩 받는단 말이야. 단 거 먹지도 않고. ”
“ 이건 먹어야 돼. 렐랴가 직접 구웠대. 무슨 벨기에 초콜릿에 유기농에 크랜베리에 어쩌고... 너 엄청 좋아하는 거 같았어. ”
“ 과자야? 나 과자 안 먹는데... ”
“ 시끄러워! 먹어야 해! 여자가 정성을 다해 구운 쿠키를 안 먹다니 그런 인간 말종이 어딨어! ”
“ 여자가 정성을 다해 구운 쿠키를 꼭 먹어야 하는 거였으면 난 지금쯤 1천 킬로는 나갔을 걸! 춤출 때 그런 거 진짜 많이 받았단 말이야! ”
“ 입 닥쳐. 다른 여자도 아니고 렐랴가 구운 거니까 꼭 먹어야 돼! 나한테 신신당부했단 말이야, 너 먹이라고! ”
“ 아 귀찮아. 릴리아나 페트로브나가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꼭 먹어야 한다는 거야... 싫은데. 살찌고... ”
“ 뭐가 그렇게라니! 그 여자는, 그 여자는 특별하단 말이야! ”
“ 뭐가 특별해? ”
“ 어, 그러니까... 똑똑하고... 세련되고, 예쁘고... ”
“ 나는 어차피 여자랑 잠도 안 자는데 예쁜 게 무슨 소용... 나만 예쁘면 되는데... ”
“ 이 왕재수! 당장 먹지 못해! ”
베르닌이 버럭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왕재수는 깜짝 놀라서 급하게 포장지를 뜯었다. 상자를 뒤집어서 윤기가 자르르 도는 초콜릿 쿠키를 식탁 위에 와르르 쏟았다. 베르닌은 쿠키를 하나 집어서 왕재수의 입에 그대로 쑤셔 넣었다.
“ 아... 달아. 진짜 달아! ”
“ 시끄러워, 더 먹어! ”
“ 벌써 두 개나 먹었어. 제발 그만. ”
“ 안 돼! 세 개는 더 먹어야 돼! 렐랴의 마음이 담긴 쿠키야! ”
“ 나는 렐랴의 마음은 별로 필요가... 으읍... ”
왕재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쿠키 다섯 개를 먹었다. 그리고는 괴로워하며 차를 꿀꺽꿀꺽 마셨다. 달아서 미칠 것 같다, 뾰루지가 번지고 더 살쪄서 로만이 또 놀리면 어떻게 하느냐 운운하면서 투덜댔다. 쿠키는 정말 근사해 보였다. 달콤한 초콜릿 냄새와 향긋한 버터 냄새가 감돌았고 크랜베리와 호두가 쏙쏙 박혀 있었다.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남은 쿠키를 다 먹으라고 했다.
“ 안 돼. 난 안 먹어. ”
“ 왜?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
“ 렐랴가 너 먹이라고 했어. 내가 버찌잼 먹었다고 화냈어. ”
“ 내가 다 먹었다고 하면 되잖아. ”
“ 거짓말하기 싫어. ”
“ 그건 뭐야? ”
“ 어 이거... 권총 규격 중장기 로드맵... 자정까지 다 만들어야 하는데 손도 못 댔다. 국장이 나 괴롭히려고 준 거야... 아무래도 못 할 거 같아. 일부러 나 엿 먹으라고 준 거라서 어떻게 만들어도 혼낼 거야. ”
“ 무슨 뜻이야, 권총 규격 중장기...? ”
그래서 베르닌은 대충 설명을 해 주었다. 왕재수는 굉장히 지루해했다. 심지어 중간에 설명을 끊었다.
“ 알았어. 하여튼 KGB랑 관계있는 거네. 좀만 기다려. ”
그러더니 왕재수가 전화기 쪽으로 갔다. 수화기를 들더니 잠시 후 평소와는 싹 달라진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며 속삭였다.
“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전데요~ 루뱐카에서 쓰는 권총 있잖아요... 아, 그런 게 아니고요. ....아니에요, 저 매일매일 너무 외로워요~ 의원님의 손길이 그리워요~ ”
베르닌은 속이 울렁거려서 급하게 싱크대 쪽으로 가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연애 전화를 할 거라면 자기 집에서 하지 어째서 여기 내려와서 시외전화요금이 청구될 짓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설거지를 다 하고 나자 왕재수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 야, 됐어. 그거 하지 마. 다 해결됐어. ”
“ 뭐가? 어떻게? ”
“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 아저씨한테 전화했어. 권총 규격 뭐 그런 거 신경쓰지 마. ”
“ 너네 아저씨하고 권총 규격의 중장기 로드맵이 무슨 상관인데! ”
“ 우리 아저씨가 KGB 실세잖아. 앞으로 10년 간 38구경으로 통일하고 절대 안 바꾼다고 내일 전국 KGB 지부에 공문 보낸대. 됐지? ”
베르닌은 크나큰 존경심과 고마움을 느꼈다. 왕재수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너무나 고마워서 칭찬을 해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왕재수가 기침을 하더니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 너 왜 그래? 뭐 잘못 삼켰어? ”
“ 아... 어... 으아... ”
왕재수는 제대로 된 말도 못했다. 눈물을 흘리고 기침을 하면서 비틀거리더니 베르닌의 목을 와락 껴안고 매달렸다.
“ 야, 왜 이래! 이런 짓은 바이올린 아저씨한테나 가서 해! 가뜩이나 국장이 오해하고 있는 마당에! ”
“ 쿠키... 우욱... ”
왕재수가 베르닌의 어깨를 반쯤 할퀴면서 머리로 들이받았다. 그러더니 베르닌의 가슴에 무겁게 기대듯 쓰러지고 말았다.
“ 야! 왜 이래! 정신 차려! 야! ”
혼비백산한 베르닌은 기절한 왕재수를 들쳐 업고 아파트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근처에 있는 레프 스타브로프의 병원으로 데려가 응급실에 뉘었다. 기절한 왕재수는 열이 펄펄 끓었다. 손발도 경련했다. 코피도 쏟았다. 너무 놀란 베르닌이 망연자실해 있는데 스타브로프가 왔다.
“ 레프 사벨리예비치! 큰일 났어요! 왕재수가, 아니, 야스민이 이상해요! 고문 후유증 때문에 발작했나 봅니다! 빨리 어떻게 좀 해 주세요! ”
“ 이 골치 아픈 자식, 또 술을 마셨군! 마시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는지! 어휴! ”
노의사는 왕재수에게 주사를 한방 찔러 넣었다. 지혈도 해주고 얼음찜질도 해 주었다. 잠시 후 왕재수는 훨씬 나아져서 얌전하게 잠이 들었다. 베르닌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 깨기만 해봐, 이 자식 혼내줘야지. 알콜 알레르기가 있는 놈이 왜 술을 마신 거야! 네놈도 그렇지, 애한테 술을 먹이고! ”
“ 술이라니요. 그런 적 없는데요. ”
“ 뭐가 없어, 딱 보드카 쇼크인데! ”
베르닌은 곰곰 생각해보았다. 귓가에 렐랴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거 버찌잼보다 더 공들여 구운 쿠키라고요. 유기농 밀가루로 반죽하고 벨기에에서 공수한 초콜릿을 녹여 넣었어요. 별장에서 직접 증류한 보드카에 크랜베리와 호두를 한 달 동안 절였다고요.
베르닌은 왕재수를 병원에 뉘어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테이블에 아직도 그대로 쏟아져 있는 초콜릿 쿠키들을 몽땅 먹어 치웠다. 어차피 왕재수는 먹으면 큰일 나니까 더 먹으면 안 되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렐랴가 온 정성을 다해 구운 쿠키니까 방치하면 그녀의 마음을 무시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왕재수가 먹긴 먹었다, 다섯 개나 먹었다. 그러니까 베르닌은 왕재수와 렐랴 양쪽을 위해, 마음의 평화를 위해 남은 초콜릿 쿠키를 전부 먹어치운 것뿐이다.
그리고 초콜릿 쿠키는 정말 맛있었다. 버찌잼보다 훨씬 더!
FIN
201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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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아저씨 로만 코즐로프에 대한 얘기와 본편의 발췌내용에 대한 링크는 2편 말미에..(http://tveye.tistory.com/3437)
블로그 내에서 '보르쉬'와 '펠메니'로 검색하면 그 음식들에 대한 사진이나 포스팅을 볼 수 있다 :)
이야기는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로 이어진다. 그건 다음주에..
4편에서는 이른바 '프로페셔널'로서 '일'이란 걸 하는 왕재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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