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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공포로 뒤숭숭한 나날이다.

서무 25편으로 조금이라도 불안증도 잊고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를 덜어내 보세요~

 

이번 편은 분량이 길어서 1부와 2부로 나누어 올린다. 2부는 다음 주에~

 

원래 서무 시리즈 중반 즈음부터 번외편으로 등장인물들의 요리와 레시피를 소개하는 걸 하나 써볼 생각이었는데 그러다가 요즘 냉장고를 부탁해도 재밌게 보고 해서 요리대회 형태로 써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서 이번 편이 나왔다~

 

재밌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독사과와 화재 소동도 가라앉고 베르닌과 왕재수는 일상 생활로 돌아온다. 그런데 어느날 오전 스페호프가 베르닌을 호출해 생각지도 않은 지시를 내리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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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5

 

 

 

 

서무의 슬픔

-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간만에 공연이 없는 목요일 저녁이었다. 왕재수는 신작 준비 때문에 극장에 나와 있었고 베르닌도 국장의 지령 덕분에 최근에는 오후를 극장에서 보내고 있었다. 왕재수가 5시에 무용수들과 신작 연습을 마치고 나왔을 때 베르닌은 그를 복도에서 낚아챘다.

 

 

“ 집에 가자! ”

 

“ 어, 나 할 거 아직 남았는데. ”

 

“ 오늘 공연 없잖아! 내일도 발레 아니고 오페라잖아. ”

 

“ 아까 연습할 때 보니까 음악이 미묘하게 비는 데가 있어. 안무를 좀 바꿔야 할 것 같아. ”

 

“ 그건 내일 해. 바이올린 아저씨가 아까 신신당부하고 갔어, 너 저녁 챙겨 먹이고 일찍 재우라고. 어제도 밤 새다시피 했다며! ”

 

“ 칫, 어젯밤은 일하다 그런 거 아니야! 전부 로만 책임인데! 자기 전에 스트레칭하고 있는데 갑자기 뒷모습이 너무 섹시하다면서 확 덮치더니 밤새 해줘놓고!

 

“ 으아, 난 그런 거 알고 싶지 않아. 차라리 그냥 일하다 그랬다고 해줘! ”

 

“ 일하다 밤 샜다고 하면 맨날 혼내면서. ”

 

“ 하여튼, 작작 하란 말이야! 일이든 응응이든! 넌 대체 왜 중간이란 게 없는 거야! ”

 

“ 난 그런 거 몰라! 중간쯤 하느니 안 하는 게 낫지! ”

 

 

 

어쨌든 베르닌은 왕재수를 차에 태워서 집으로 돌아왔다. 양파와 감자를 넣은 수프를 끓이고 닭가슴살을 구워서 스메타나를 얹었다. 비트 샐러드도 만들어서 곁들였다.

 

 

“ 야, 다 됐어. 밥 먹어! ”

 

 

소파에 누워 졸고 있던 왕재수가 부스스 일어나 부엌으로 왔다. 식탁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 이게 뭐야? ”

 

“ 양파 감자 수프. ”

 

“ 이건? ”

 

“ 너 좋아하는 거. 스메타나 얹은 닭가슴살. 보랴네 식당에서 좋아했잖아. 나도 따라서 해봤어. ”

 

어휴... 그릇이 이게 뭐니. 이도 다 나가고... 수프도 옆에 다 흘렸네. 전부터 보니까 넌 국자를 참 거칠게 쓰더라. 스메타나도 너무 왕창 부었고. ”

 

야! 맛있기만 하면 되지! 기껏 저녁밥 해줬더니 이젠 별 걸 다 트집이냐!

 

“ 요리의 기본은 맛이지만 플레이팅도 중요하다고! ”

 

“ 플레이팅이 뭐야? ”

 

“ 예쁘게 담는 거! ”

 

으윽, 여긴 시골이야! 그런 거 없어! 빨랑 먹어!

 

“ 보랴는 예쁘게 담아주던데. ”

 

“ 보랴는 요리사고 난 공무원이잖아! 책상물림! 난 시간에 쫓기며 허기 채우려고 요리하는 건데 그깟 플레이팅인지 뭔지까지 어떻게 챙기냐. 오늘따라 왜 이렇게 투정이람. 빨랑 먹어. ”

 

 

왕재수는 툴툴거리더니 숟가락을 들었다. 양파 감자 수프를 떠먹었다. 그러더니 별 말 없이 수프를 먹고 이따금 흑빵을 국물에 담갔다 먹기도 했다. 그리고는 잘 안 드는 나이프로 닭가슴살을 자르면서 다시 한 마디 했다.

 

 

“ 저온에 오랫동안 익히면 고기가 부드러워지는데... 이거 너무 퍽퍽해. ”

 

“ 배고파 죽겠는데 언제 저온에 익히고 있냐! 그냥 먹어! 원래 닭가슴살은 고기 중에서도 제일 맛없는 부위잖아. 네가 좋아하는 거니까 일부러 한 거야. 난 닭가슴살 안 좋아한단 말이야. ”

 

“ 닭가슴살도 촉촉하고 부드럽게 구울 수 있단 말이야. 보랴네 식당에서 나온 건... ”

 

“ 어휴, 그럼 이제 보랴 식당 가서 먹어, 나한테 해 달라 하지 말고! ”

 

“ 그래도 집에서 먹는 건 좋아. 스메타나에 찍어먹으니까 좀 낫다. ”

 

 

베르닌이 먹어봐도 닭가슴살이 질기고 퍽퍽하긴 했다. 하지만 왕재수의 음식투정은 정말 싫었다. 한동안 해주는 대로 잘 먹더니 오늘은 극장에서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이었다. 몇 달 동안 관찰한 결과 왕재수는 극장에서 심기가 불편한 일이 생기면 음식투정이나 시골타령 지수가 높아지곤 했다.

 

 

그래도 왕재수는 비트 샐러드에 대해서는 별 불평을 하지 않았다. 비트를 썰어서 스메타나에 버무린 게 전부니까. 차를 우려주자 한 모금 마신 후 칭찬까지 했다.

 

 

“ 싸구려 티백인데 그래도 잘 우린단 말이야. 내가 우리면 시꺼메지고 티백도 다 터지는데. ”

 

“ 그렇겠지, 무슨 영국산이니 프랑스산이니 스리랑카산이니 고급 잎차에 세상에서 제일 얇은 로모노소프 찻잔에만 마셨던 몸이라 티백으로 홍차 우리는 건 못하시겠지. ”

 

“ 그래! 이렇게 이 빠진 사금파리 같은 찻잔에 화약가루 같은 티백 차를 마시게 될 줄이야. 에휴, 내 팔자야. 시골에 온 것도 모자라 돼먹지 못한 시골 행사에까지 끌려가게 생겼으니. ”

 

“ 무슨 행사? 너 또 어디 가? ”

 

“ 나 툭하면 초청장 날아와. 어휴,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때만 그럴 줄 알았는데 웬 시골에도 이렇게 행사가 많은지. 무슨 현판 개막식에 오라고 하질 않나, 누구 취임식에 오라고 하지를 않나 심지어 콤소몰 체육대회에 오라고까지! 그런 건 다 안 간다고 거절했는데 내일 건 빼도 박도 못하고 가야 돼. 무슨 요리대회인지 뭔지를 하는데 심사위원이라고 이름을 올려놓고는 꼭 와야 한다잖아. ”

 

“ 엥, 넌 극장 사람인데 요리대회 심사위원은 또 뭐야. ”

 

“ 그러니까! 안 가려 했는데 렐랴가 너무 간곡하게 부탁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 나는 대도시 출신이고 해외에도 많이 가봤고 미식가니까 꼭 필요하다는 거야. 어휴. ”

 

“ 으잉, 렐랴? 그 행사 렐랴가 주최하는 거야? ”

 

“ 그런가봐. 렐랴네 잡지하고 또 의회에 무슨 기관이 모여서 하는 건데 되게 할 일도 없나봐. 그런 허접한 행사엔 원래 안 가는데 렐랴가 지난주에 극장까지 찾아와서 부탁하잖아. ”

 

“ 어... 넌 렐랴한테 관심 없으면서.... 사실 관심 있었던 거야? ”

 

“ 나 아플 때 바나나 줬다며. 심지어 지난주에 진짜 파인애플까지 들고 왔더라고. 그걸 어디서 구했을까. 미안해서 어쩔 수 없었어. ”

 

“ 야, 너 사람 됐구나! 미안하고 고마운 걸 다 알고! ”

 

“ 쳇, 나도 예의란 건 안다고! 하여튼 그러니까 내일은 저녁밥 안 해줘도 돼, 거기서 뭐든 집어먹겠지. 시골에서 요리대회라니, 아 촌스러워. ”

 

 

베르닌은 심사평으로 왕재수의 음식투정을 듣게 될 대회 참가자들이 불쌍했지만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왕재수가 차를 마시고 무가당 초콜릿을 먹은 후 기분이 좋아져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괜히 툴툴댔다가 왕재수가 다시 짜증을 내기 시작하면 안 되니까. 그리고 베르닌은 내심 왕재수가 부르는 노래 듣기를 좋아했으므로 꼭꼭 입을 다물었다.

 

 

 

*    *    *

 

 

 

다음날이었다. 매일 오후를 극장에서 감시 업무로 보내느라 일이 많이 밀려 있었기 때문에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그를 호출했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베르닌은 터덜터덜 국장실로 갔다. 그랬더니 스페호프가 못마땅한 얼굴로 얄팍한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 국장님, 부르셨습니까. ”

 

“ 자네 지금 당장 출판문화국으로 가보게. ”

 

“ 예? 출판문화국에는 무슨 일로... ”

 

“ 방금 제1회 가브릴로프 천하일미 요리대회 추진위원회로부터 전화를 받았네. 오늘이 대회 당일이라는군. 공문 보낸 게 언제인데 왜 아직까지도 참가자 명단을 보내지 않았느냐면서 대회 시작 30분 전까지 와서 현장 접수를 하라는 것이 아닌가! ”

 

“ 예? 가브릴로프 천하일미... 공문... 저는 그런 공문을 접수한 적이 없는데... 그런 명단 요구가 있었다면 제가 알았을 텐데... ”

 

 

베르닌은 공문을 꼼꼼히 살피지 않았다면서 국장의 불벼락이 내릴 거라고 생각하며 움츠러들었다.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한숨을 쉬었다.

 

 

“ 아닐세. 자네는 오후마다 극장으로 파견을 가 있지 않았나. 자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 외부 문서 수신을 스멜로프에게 맡겨놨더니만 그 녀석이 덜렁거리다가 첨부 서류를 누락시켰지 뭔가. 좀 전에 불러다 족쳤더니만 기억도 못하더니 책상을 뒤져서 이제야 이걸 찾아왔단 말일세! 아주 혼쭐을 내놨지.

 

 

스페호프가 방금까지 뒤적이고 있던 얇은 서류를 툭 던졌다. ‘붙임 1. 제1회 가브릴로프 천하일미 요리대회 참여 대상 기관 현황’, ‘붙임 2. 기관별 참가자 명단 양식’ 두 가지로 되어 있었다. 붙임 1을 보니 시의 각종 공공기관 명단이 쭉 나열되어 있었는데 두 번째 줄에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가 떡하니 들어 있었다.

 

 

“ 어, 우리도 들어 있었네요. ”

 

“ 그러게 말이야! 이게 알고 보니 의회 특별예산을 배정받아 개최되는 거라는군! 공공기관들은 전부 참석 대상이야. 에잇, 돈이 썩어나나... 이따위 허접한 행사에 시의 예산을 낭비하다니. 그래서 말인데, 다닐. 자네가 가보게. ”

 

“ 네? 제가요? 아니 왜... 저는 요리를 배운 적도 없고... ”

 

“ 그냥 가서 보안위원회 참가자 이름만 채워주란 말이야! 체육대회도 아니고 이깟 쓰잘데없는 행사에서 우승할 필요도 없고... 하지만 의회 의장이 추진위원장이라니까 우리도 얼굴은 내밀어야 한단 말이야. 이런 건 서무가 맡는 것이야. 어서 다녀오게. 게다가 거기 심사위원에 그 불여우도 들어 있다지 않나. 머릿수도 채우고 그 자식 감시도 계속하고. 2시에 시작한다니까 어서 준비하고 가보게나. ”

 

 

베르닌은 어이가 없었지만 어쨌든 국장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으므로 업무를 대충 정리하고는 출판문화국으로 향했다.

 

 

 

*    *    *

 

 

 

 

출판문화국은 구시가지의 레닌 대로변에 있었다. 렐랴의 문예지인 비슈네브이 사드 사무실도 같은 건물에 있었기 때문에 지난번에 가본 적이 있었다. 건물 앞에 ‘제1회 가브릴로프 천하일미 요리대회’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잘 읽어보니 주최는 시 의회였고 주관은 가브릴로프 천하일미 요리대회 추진위원회였다. 그 아래 씌어 있는 내용을 또 읽어보니 추진위원회는 가브릴로프 방송 제1채널과 식품위생국, 그리고 비슈네브이 사드가 협력해 구성한 단체였다.

 

 

‘ 아, 그 녀석 말이 맞구나. 렐랴가 추진위원회에 들어 있었네. 어휴, 웬 요리대회...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만 올 텐데... 난 그냥 옆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야지. “

 

 

베르닌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요리대회니까 지하 구내식당에서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경비원에게 물어보니 2층 대강당으로 안내해주었다. 출판문화국 강당은 가끔 공연이나 전시가 이루어지는 곳이었기 때문에 꽤 넓었다. 강당으로 가보니 조리대가 죽 늘어서 있었다! 대회를 위해 준비한 모양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조리대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어떤 건 소속기관명과 이름이 붙어 있었고 어떤 건 이름만 있었다. 잘 보니 공공기관 대표들과 일반 시민들이 함께 참가하는 모양이었다.

 

 

둘러보다가 그는 뒤에 있는 등록 데스크로 갔다. 중년 남자 하나가 서류철을 놓고 앉아 있었다. 기관명과 성명을 말하니 남자가 종잇조각을 하나 뽑아들고는 베르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 당신 그러고 왔어요? ”

 

“ 네, 사무실에서 곧장 오느라. ”

 

“ 앞치마랑 머릿수건은요? ”

 

“ 엥, 그런 것까지 준비해야 하나요? ”

 

“ 요리대회인데 당연한 거 아닙니까! 가뜩이나 보안위원회는 명단도 안 내고 뺀질거리더니... 앞치마 안 매면 실격이에요! 머릿수건도 마찬가지고. 아예 머리를 빡빡 깎든지 아니면 머릿수건 둘러야 한다고요! ”

 

“ 어, 예... 구해올게요.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그런데 저는 어디에서 조리를 해야 하나요? 조리대들에 전부 이름이 붙어 있던데. ”

 

“ 저쪽 귀퉁이에 하나 남겨놨으니까 그리로 가면 되겠네. ”

 

“ 빈 조리대를 못 찾았는데... ”

 

 

남자는 툴툴대더니 베르닌을 맨 뒤 가장자리에 있는 조리대로 안내했다. 30번이라는 번호가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조리대를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것 같았다. 옆 조리대와 큰 차이가 났다. 싱크도 작았고 도마도 홈이 움푹 패여 있는데다 조리대 크기 자체도 작았다. 남자는 조리대에 ‘다닐 베르닌, 보안위원회’라고 휘갈겨 쓴 종잇조각을 철썩 붙이고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자, 이제 가서 앞치마나 구해와요. 대회는 1시간 후에 시작이지만 참가자들은 10분 전까지는 자기 조리대 앞에 정렬해야 해요. ”

 

 

베르닌은 밖으로 나왔다. 부엌용품 파는 가게로 가서 줄을 섰다. 앞치마 하나와 머릿수건을 산 후 눈에 띄는 카페에 가서 샌드위치 한쪽과 커피 한 잔으로 점심을 때웠다. 샌드위치를 입 안에 우겨넣고 있는데 누가 그의 어깨를 탁 치면서 맞은편에 앉았다. 고개를 드니 왕재수의 비서 류드밀라였다.

 

 

“ 어머, 다냐.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

 

“ 어, 안녕하세요, 류다. 무슨 요리대회가 있다고 해서요. 국장이 가라고 해서 왔어요. ”

 

“ 아, 천하일미 요리대회? 나도 극장 대표로 나가는데. ”

 

“ 어, 정말요? 당신 요리 잘 해요? ”

 

“ 좀 하는 편이죠. 나간다고 했더니 감독님이 짜증내긴 했지만. ”

 

“ 엥, 그 자식이 왜 짜증내요? ”

 

“ 뻔할 뻔자 기름이 줄줄 흐르는 생선완자 만들 거 아니냐면서. 가뜩이나 심사 때문에 온갖 기름진 걸 다 먹어야 할 텐데 나까지 거드는 거냐고 툴툴대더라고요. ”

 

“ 와, 생선완자 맛있겠다... ”

 

“ 그쵸! 나 생선완자 진짜 잘 만드는데! 전에도 잔뜩 구워서 발레단에 돌렸더니 다 좋아했거든요. 맛있다면서. 미샤 빼곤 다 좋아했다고요. 근데 우리 감독님이 심사위원이라니까 생선완자 대신 딴 거 만들기로 했어요. 생선을 다져서 토마토랑 치즈를 넣고 파프리카 안에 넣고 구워낼 거예요. 전부 까다로운 우리 감독님이 좋아하는 재료니까 분명히 상을 받을 수 있겠지! ”

 

“ 아... 그것도 진짜 맛있겠어요. 근데 상품은 뭐예요? ”

 

“ 1등은 온천 요양소 2주일 휴양권이래요! 2등, 3등도 휴양권 주는데 날짜만 좀 짧은 것 같더라고요. 다냐, 알잖아요. 검은 숲 그 온천 요양소. 높은 분들만 가잖아요. 진짜 가고 싶은데... 그리고 의회에서 가브릴로프 대표 요리사라고 표창장도 준대요. 꼭 상 타고 싶어요. 근데 세상에, 내가 나간다니까 망할 놈의 아르카지가 갑자기 자기도 가겠다고 나서지 뭐예요. 내참, 주제를 알아야지. ”

 

“ 아르카지? 당신네 차이카 카페의 그 아르카지요? 거기 되게 맛없는데. ”

 

“ 그러니까 말이에요! 심지어 그 작자는 매니저이지 요리사도 아니라고요. 맨날 보드카에 물만 타는 인간인데. 우리 극장 망신이지 뭐겠어요. 근데 당신은 뭐 만들 거예요? 미셴카가 그러던데, 당신 요리 잘 한다고. 어휴, 생각지 않은 실력자가 나타났네. 미식가인 우리 감독님이 인정한 사람이 떡하니 출전하다니. 불공평해요. ”

 

“ 어, 저... 저 요리 잘 못해요. 걔한테 해주는 것도 그냥 보르쉬에 펠메니 같은 거라서... 오늘은 머릿수 채우러 온 거예요. ”

 

“ 하긴, 우리가 아무리 잘해봤자 벌써 우승은 예산국의 조야 브릴료바로 낙착돼 있대요. 의장이 밀어주고 있거든요. 지금 의회랑 예산국이랑 밀고 당기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조야가 그쪽 책임자라지 뭐예요. 그리고 조야는 중앙당이랑도 연줄이 있으니... 보나마나 우승이죠 뭐. 2등이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그나마 렐랴가 주최측이라서 참가를 안 하는 게 진짜 다행이에요. 그 아가씨가 출전했어 봐요... 대번에 우승이지. 하여튼 불공평하다니까, 누구는 집안 좋아, 얼굴 예뻐, 능력 있어, 심지어 요리까지 잘하니... 우리 감독님한테 흑심 품어서 이번에도 심사위원으로 끌어들이고... 이러다 렐랴랑 우리 미셴카랑 결혼하는 거 아닐지... 그 여자 언감생심 우리 금쪽같은 감독님 넘보기만 해봐. ”

 

“ 어, 렐랴도 굉장히 예쁜데... ”

 

그래도 우리 미셴카가 훨씬 아깝단 말이에요! 렐랴가 아무리 잘 나가도 그게 우리 동네에서나 그렇지! 우리 감독님은 연방을 뒤흔든 톱스타였고 외국에서도 다 아는 사람인데! 렐랴는 안돼요! 그리고 아무리 발레에 대해 아는 척해도 우리처럼 극장 쪽 사람도 아니고! 미셴카는 우리 발레단 아가씨랑 결혼하면 참 좋을 텐데. 토냐가 참 귀엽고 착한데. 레나도 예쁘고... 타마라가 제일 예쁘긴 한데 걘 옛날부터 데니스랑 사귀니까 차마 안 되겠고... 이번에 스네고로드에서 데려온 애, 나쟈라는 애도 귀엽더군요. 벌써부터 감독님이 걔한테 반해서 데려온 거 아니냐, 조만간 동거하거나 결혼할 거 같다고 여자애들이 얼마나 상심하고 있는지. ”

 

“ 어... 무용수들이 연습만 하는 게 아니고 별의별 가십을 다 나누는군요. 근데 미샤는 나쟈한테 그런 감정 있어서 데려온 거 아니에요. 재능이 뛰어나서 데려왔다고 했어요. 미샤는 발레단 사람들이랑은 안 사귀는 게 철칙이랬어요. ”

 

“ 흥, 그걸 어떻게 믿어요. 옛날에 키로프 있을 때도 파트너 발레리나랑 얼마나 알콩달콩 잘 살았는데. 지나이다 세도바 몰라요? 둘이 공식 커플이었잖아요. 같은 아파트에서 3년이나 동거하고. 여자가 배신하고 딴 남자랑 결혼해서 그렇지. 참 그 여자도 대단하지, 어떻게 우리 미셴카 같은 남자를 버리고... ”

 

 

베르닌은 그 지나이다라는 여자도 자기처럼 밥이나 차려주고 청소나 해주는 불쌍한 집사 노릇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대회 시작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함께 출판문화국으로 갔다.

 

 

 

 

*    *    *

 

 

 

 

대회는 생각보다 거창한 개막식으로 시작되었다. 꼭 작년 가을의 체육대회 같았다. 의회 의장은 청산유수처럼 연설을 했다. 가브릴로프의 광활한 자연과 풍부한 식재료를 찬양하고 각종 영양소를 고루고루 살려 만들어내는 천하일미로 가브릴로프 인민들의 미감을 충족시키고 건강을 증진함으로써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을 배양하고 궁극적으로는 연방에 이바지하는 훌륭한 소련 시민을 만들어내는데 이바지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베르닌은 생전 처음으로 어설프게 머릿수건을 동여매고 앞치마를 질끈 묶은 채 좁은 조리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키가 큰 편이었지만 앞에 죽 늘어선 참가자들도 모자라 바로 앞과 대각선 방향에 세워진 기둥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보일 지경이었다. 뭐 차라리 나았다. 어차피 대충대충 하고 끝낼 테니까 눈에 안 띄는 편이 훨씬 나았다.

 

 

어쨌든 의장이 인사말을 마친 후 방송에서 본 적이 있는 여자가 사회를 보면서 심사위원 소개를 했다. 심사위원은 총 세 명이었다. 의장이 심사위원장이었고 렐랴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베르닌은 어떻게든 렐랴를 보려고 조리대 옆으로 나와서 고개를 쭉 뺐다. 긴 머리를 말끔하게 틀어 올리고 검은색 투피스를 차려입은 렐랴는 눈부시게 예뻤다. 왕재수는 의장의 인사말이 끝날 무렵에야 들어와서 렐랴의 옆에 앉았다. 정장을 입은 두 심사위원과는 달리 평소처럼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검정 셔츠에 청회색 스카프를 두르고 빛바랜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의장이 못마땅한 듯 실눈을 떴지만 마침 방송사 카메라가 심사위원석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그저 눈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그에 비해 렐랴는 환한 얼굴로 방긋 웃으며 왕재수를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왕재수도 렐랴에게는 상냥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주기까지 했다.

 

 

그때 사회자가 말했다.

 

 

“ 그럼 지금부터 조리를 시작하겠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60분입니다. 그때까지 모든 조리와 플레이팅을 마치지 못하면 실격입니다. 종이 울리고 나면 모든 참가자는 조리대를 떠나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가 조그만 종을 땡 하고 울렸다. 그 즉시 참가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촤라라락 하면서 바구니에서 각종 야채와 고기를 쏟아내 손질을 하지 않나, 렌지를 켜고 팬을 달구지를 않나, 물을 끓이지를 않나, 척척척척 서걱서걱서걱 통통통통 칼질을 하지를 않나 각종 소음들이 난무했다. 여기저기서 치지지짓 하는 소리가 들리고 기름 냄새가 나는가 하면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올라오기도 했다. 벌써부터 맛있는 냄새도 났다.

 

베르닌은 한동안 멍하게 서 있다가 자기도 어쨌든 참가자니까 뭐든 하긴 해야 할 것 같았다. 뭘 만들지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래도 명색이 대회니까 조금이라도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펠메니를 빚자! 열댓 개만 빚으면 금방 할 수 있고 찌는 것도 금방 하니까 한 시간 내에 할 수 있겠지. ’

 

 

사실 펠메니는 새해 전야에 왕재수가 졸라대서 딱 한번 빚어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전혀 어렵지 않았었다. 자꾸 사고를 치던 왕재수도 곁에 없으니 더욱 쉬울 것이다. 베르닌은 책상물림답게 요리를 하기 전에 먼저 머릿속으로 필요한 내용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았다.

 

 

재료는 그러니까... 만두피에는 밀가루. 계란 노른자. 기름 조금. 만두소는 고기, 다져야겠지. 소랑 돼지를 섞으면 더 좋을 거고. 양파, 후추, 소금. 재료도 참 간단하네. 일단 고기 다져서 속부터 만들어놓고 반죽을 해야겠다. ’

 

 

모든 것을 정리한 후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기 위해 베르닌은 먼저 손을 씻었다. 자꾸만 풀어지는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꽁꽁 동여맸다. 그리고 조리대 위에 있는 도마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칼이 어디 있나 헤매다가 간신히 서랍에서 날이 무뎌 보이는 칼을 한 자루 꺼냈다. 이제 다 됐다! 요리만 하면 된다!! 그런데...

 

 

어? 근데 고기는 어디 있지? 밀가루는? 양파는?

 

 

베르닌은 멍해졌다. 조리대 위에 있는 거라고는 도마와 가스렌지, 채반과 프라이팬과 냄비, 그릇 몇 개가 전부였다. 서랍을 뒤져봐도 칼과 숟가락, 포크 따위밖에 없었다. 최소한의 조리도구는 있었지만 식재료가 전혀 없었다!!!

 

 

당황한 베르닌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참가자들은 미친 듯이 요리를 하고 있었다. 야채와 고기와 과일, 밀가루와 각종 향신료가 난무했다. 그는 통로 쪽으로 나가보았다. 식재료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누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 다냐, 뭐하는 거예요. 가뜩이나 시간도 모자라는데 왜 이렇게 왔다갔다 해요? ”

 

 

류드밀라였다. 커다란 그릇에 토마토와 흰 살 생선을 다져서 기름으로 버무리다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베르닌은 그녀의 렌지 화구 위에서 파프리카가 불꽃을 내뿜으며 타들어가고 있는 것에 기겁을 했다.

 

 

으아, 류다! 파프리카요! 팬에 올렸어야죠! 새까맣게 타고 있어요! ”

 

“ 어휴, 당신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군요. 이건 원래 이렇게 하는 거라고요! 껍데기가 시커멓게 다 타야 쉽게 벗겨지는 건데. 하여튼 총각이라 아무 것도 모른다니까. ”

 

“ 비싼 파프리카 껍데기를 왜 다 태워요? ”

 

“ 그래야 속살이 더 달고 쫄깃해지죠! 어머어머, 이거 영업비밀인데 내가 왜 경쟁자에게... 근데 당신 왜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어요? ”

 

“ 어... 저... 아무리 찾아도 식재료가 안 보여서요. 당신은 어디서 가져왔어요? 냉장고가 안 보여요. ”

 

“ 어머, 웬 냉장고! 다냐, 당신 대회 규칙 안 읽었어요? 요리 재료는 직접 준비해오는 거잖아요. 설마 하나도 안 가져온 거예요? 몸만 왔어요? ”

 

“ 어, 네... 전혀 몰랐어요. 당연히 여기 오면 다 주는 건줄 알았어요. ”

 

“ 바보, 그런 대회가 어디 있어요. 그럴 거였으면 애초부터 뭐 만들 건지 적어서 내라고 했을 거 아니에요. 어쩌나. 나도 여분이 없긴 한데. 뭐 만들려고 했는데요? ”

 

“ 저... 펠메니요... ”

 

“ 엥, 펠메니... 그럼 밀가루랑 고기가 필요하잖아요. 난 속 채운 파프리카라서 그런 거 없는데... 토마토 한 개 남는데 이거라도 가져가요. ”

 

 

류드밀라는 불그스름하고 조그만 토마토 한 알을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자르고 남은 치즈도 떼어주었다.

 

 

“ 펠메니엔 별 도움 안 되겠네. 빨리 돌아다니면서 재료 구해 봐요. ”

 

“ 어, 예... 고마워요, 류다. 파프리카 다 탔네요. ”

 

“ 어머, 잘도 탔네. 이제 껍데기 벗겨야지. ”

 

 

류드밀라가 파프리카를 집어 시커멓게 탄 껍질을 벗기는 동안 베르닌은 토마토 한 알과 치즈 조각을 들고 털레털레 조리대 앞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것으로 만들 수 있는 요리는 전혀 없었다. 목을 쭉 빼고 보니 아는 얼굴이 또 보였다. 극장 카페 차이카의 매니저 아르카지였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르카지에게 갔다.

 

 

“ 안녕하세요, 아르카샤. ”

 

“ 어, 그래. 너도 왔구나. ”

 

 

아르카지는 냄비에 뭔가를 계속 퐁당퐁당 던져 넣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핏 보니 흐릿한 붉은빛을 띠는 국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 뭐 만드시는 거예요? ”

 

“ 보르쉬! ”

 

“ 네? 정말요? 보르쉬라고요? ”

 

“ 너 지금 내가 기껏 보르쉬 만든다고 무시하냐! 보르쉬가 아무리 흔해빠진 음식이라도 수프의 기본이야! 가정식에 충실해야지! 나만의 특별 레시피로 만든 보르쉬라고! ”

 

“ 어, 아니... 그게 아니고요. 보르쉬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근데 국물이 너무 많은 거 같은데... 건더기는 거의 없고 물만 흥건... ”

 

시끄러워! 나만의 특별 레시피라고 했잖아! 보르쉬라고 무조건 비트랑 고기랑 양배추가 잔뜩 들어있으란 법 있냐! 내 보르쉬는 주스처럼 훌훌 마시는 간편 보르쉬란 말이야! 병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빨대로 조로록 마실 수 있게 만드는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

 

“ 엥... 그럼 그건 그냥 야채 주스... ”

 

시끄러워! 너 지금 내 요리 훼방 놓으려고 그러는 거지? 역시 KGB 놈팽이였어! 어떻게든 우리 극장에서 우승자가 나오는 걸 방해하려고!

 

“ 저, 아니에요. 죄송해요, 아르카샤. 당신 요리 맛있을 것 같아요. 저어... 전 오늘 갑자기 대회 나가라고 해서 몸만 왔거든요. 재료가 하나도 없어서요... 저는 펠메니를 만들어야 하는데... 보르쉬엔 고기랑 양파가 들어가지 않나요? 남는 고기랑 양파 있으면 저 좀 빌려주시면 안 되나요? ”

 

 

마침 양파를 숭덩숭덩 썰어서 냄비에 부어넣고 있던 아르카지는 한숨을 쉬면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이런 미련퉁아, 그럼 빨리 말을 했어야지. 보르쉬가 어떻고 국물이 어떻고 하고 있냐! 먼저 얘길 했으면 내가 지금 양파를 다 안 넣었을 거 아냐! 이미 늦었어, 양파 다 썰어서 넣어버렸단 말이야! ”

 

“ 어, 저어... 그럼 고기라도... ”

 

“ 고기는 당연히 맨 처음에 넣었지! 육수 내려고! 어휴, 가뜩이나 시간도 없는데... 잠깐만 기다려봐. 잘 찾아보면 자투리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금만 기다려, 수프 간 좀 보고. ”

 

 

아르카지는 숟가락도 아니고 국자를 냄비에 왈칵 담그더니 엷은 붉은빛이 도는 국물을 잔뜩 펐다. 후후 불더니 후루룩 마시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 음, 아직 맛이 안 우러났어. 한참 끓여야겠어. ”

 

“ 아니, 그게요... 아무리 봐도 국물이 너무 한강... ”

 

“ 시끄러워! 주스처럼 마시는 보르쉬라 했잖아! ”

 

“ 아참 그렇지... 수프는 그냥 불 위에 올려놓으면 졸아들 테니 그 사이에 자투리 좀... ”

 

무슨 소리야! 수프는 손맛과 정성이라고! 계속계속 이렇게 떠먹으면서 간을 봐야지! 좀만 기다려.

 

 

베르닌은 너무 답답했지만 그래도 고기와 양파를 얻을 수 있는 기회라 잠시 기다렸다. 아르카지는 쉴 새 없이 국자를 담갔다 뺐다 하며 간을 보았다. 국자를 자꾸 넣으면 수프의 온도가 계속 내려가서 잘 끓지 않고 그나마 적은 건더기의 맛도 빨리 우러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베르닌은 더 이상 지적을 하지 않으려고 꾹 참았다. 그러다 문득 차이카의 보르쉬가 생각나서 자기도 모르게 한 마디 해버렸다.

 

 

“ 근데 차이카에서는 맨날 깡통 보르쉬만 데워주잖아요. 혹시 그게 아쉬워서 이번에 보르쉬로 승부하시는 거예요? ”

 

 

아르카지가 펄쩍 뛰었다.

 

 

뭐야? 깡통 보르쉬라니!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그거 다 내가 하나하나 계량해서 내 정통 레시피로 만들게 하는 건데!!! 그건 정통 보르쉬, 지금 만드는 건 대회용으로 특별히 개발한 주스 식 보르쉬라고! 어디서 깡통 보르쉬 얘길... 물론 차이카 메뉴는 깡통 보르쉬가 주재료긴 하지만 난 물을 두 배로 타서 만들게 한단 말이야! 그게 정통이야! 옛날에 없이 살던 시절에 무슨 능력이 있어서 고기랑 비트랑 야채 펑펑 넣어서 진한 수프를 끓였겠어! 난 우리들의 어머니 러시아의 전통을 살린 진짜 옛 맛 그대로의 보르쉬를 차이카에서 선보이게 한 거라고! 에잇, 감히 내 전통 옛 보르쉬를 모독하다니... 자투리 안 줄까보다! ”

 

 

베르닌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지만 꾹 참고 애걸했다.

 

 

“ 잘못했어요, 아르카샤. 제가 잘못 알고 있었네요. 저는 근본 없는 책상물림이라 전통의 옛 맛을 잘 몰랐어요. 제발 자투리 좀 주세요. 시간도 벌써 많이 갔는데 이러다 저 펠메니 못 만들지도 몰라요. ”

 

 

아르카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째려보았지만 심사위원석을 힐끗 쳐다보았다. 의회 의장과 렐랴는 뭔가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왕재수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르카지가 한숨을 쉬었다.

 

 

“ 너 예뻐서 주는 거 아니야. 저번에 우리 감독님 아플 때 도와줬다 해서 주는 거야. 에이 짜증나. 내 요리에 깃든 정성을 모독하다니. ”

 

 

그리고는 국자를 잠깐 내려놓더니 도마를 뒤집고 그릇을 이것저것 달그락거리더니 손뼉을 딱 쳤다.

 

 

“ 여기 좀 남았네! 이거 가져가. ”

 

 

베르닌은 매우 실망했다. 아르카지가 내민 것은 양파 반쪽과 양배추 귀퉁이, 당근 4분의 1토막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 어, 고마워요... 근데 혹시 고기는 남은 거 없나요? ”

 

“ 고기는 없어. 처음에 다 넣어버려서. 이거라도 가져가. 나 이제 수프 간 맞춰야 돼. 빨랑 가! ”

 

 

베르닌은 하는 수 없이 야채 자투리를 들고 자리를 떴다. 도저히 이것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또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렐랴의 사무실에서 만났던 잘생긴 비서 안드레이가 양손에 각각 냄비와 팬을 든 채 요리에 여념이 없었다. 굉장히 맛있는 냄새가 확 풍겨왔다. 의심의 여지없는 쇠고기 냄새였다. 그는 머뭇거리며 다가갔다. 안드레이와는 한번밖에 보지 않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인사를 했다.

 

 

“ 저, 안드레이.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 다닐 베르닌이에요. 왜 얼마 전에 릴리아나 페트로브나를 뵈러 찾아갔었던. ”

 

 

안드레이는 그를 곁눈으로 힐끗 보더니 귀찮은 듯 대꾸했다.

 

 

“ 아, 그 KGB... 미샤 감시요원인 주제에 엄청 친한 척 하는 사람이군요. ”

 

“ 저... 전 걔랑 친한 척 한 적은 없는데... ”

 

“ 흥, 안 그랬으면 당신 주제에 우리 편집장님 사무실에 발을 들여놓을 수나 있었을 것 같아요? 렐랴가 미샤에게 가진 호감을 악용하다니 정말 당신은 박쥐같은 인간이에요! 어디 언감생심 우리 편집장님한테 흑심을 품고. 툭하면 우리 잡지 검열해서 트집 잡는 KGB 주제에. ”

 

“ 아니에요, 안드레이. 저는 그런 쪽 관여 안 해요. 그건 우리 국장이... ”

 

시끄러워요, 요리에 방해되니까 빨리 돌아가요! 아니면 이것까지 감시하려는 거예요? ”

 

 

아무래도 안드레이는 가브릴로프의 수많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렐랴에게 속절없이 반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렐랴가 베르닌에게 상냥하게 대해준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듯했다.

 

 

“ 그렇지 않아요, 저... 근데 당신이 만드는 요리는 굉장히 근사해보이네요. 쇠고기 요리 같은데... 냄새도 너무너무 맛있게 나요. 렐랴만 요리 잘하는 줄 알았는데 당신도 굉장히 잘하나 보네요. ”

 

 

요리를 칭찬하자 안드레이의 얼굴이 한결 펴졌다.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흥, 그래도 요리 보는 눈은 있네. 이건 말이죠, 렐랴에게서 직접 전수받은 레시피로 만드는 비프 스트로가노프라고요!

 

“ 우와, 비프 스트로가노프요? 그거 고급 요리잖아요. 대단하다... ”

 

“ 그렇죠! 게다가 이건 렐랴가 대대손손 전해져 내려오는 테레슈킨 공작 가문의 레시피를 그대로 재현한 거라고요! 알죠? 렐랴 외가는 제정 시절 공작 가문이었던 거. 이건 원조인 스트로가노프 공작에게서 테레슈킨 공작이 직접 받아낸 레시피라고 했어요! 이 쇠고기로 말할 것 같으면 마블링이 끝내주는 진짜 고급 등심과 안심을 잘 배합한 것이고 크림은...

 

“ 크림도 부드럽게 잘 엉기는 것이 수입산인가 보네요. ”

 

당연하죠! 외제 아니면 이렇게 향긋한 풍미가 돌지 않는다고요! 버터는 렐랴가 직접 만든 거고! 이런 재료와 이런 레시피로 만드는 요리 본 적 있어요? 당연히 내가 우승이죠! ”

 

“ 진짜 그렇겠다... 이렇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요리는 처음 봐요. 우와... 렐랴도 대단하지만 이걸 배워서 만들 수 있는 당신도 대단하네요. 전 비프 스트로가노프는 모스크바에서 공부할 때 몇 번 먹어본 적밖에 없는데 그때도 이렇게 때깔이 근사한 건 한 번도 못 봤어요. 고기랑 소스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네요. ”

 

 

베르닌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안드레이는 굉장히 좋아했다.

 

 

“ 역시 그렇죠? 내가 우승하겠죠? 나 반드시 우승해야 돼요. 그럼 렐랴가 내 실력도 인정해 주고 내 마음도 알아주겠지... 렐랴는 날 그냥 비서 취급만 하고 남자로는 안 봐준다니까요. 내가 왜 거기 입사했는데... ”

 

“ 아, 그렇구나... 렐랴 때문에 들어간 거구나... ”

 

 

얘기를 하면서 안드레이는 고기 냄비에 크림소스를 붓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볶기 시작했다. 두 배로 고소하고 부드럽고 그윽해진 냄새가 났다. 베르닌은 넋을 놓고 있다가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 그런데요, 사실은 저는 갑자기 이 대회에 출전하게 돼서... 펠메니를 만들려고 하는데 재료가 없어서요. 혹시 쇠고기 자투리 남는 거 있으면 조금만 빌려주시면 안 되나요?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

 

 

안드레이가 갑자기 정색을 했다.

 

 

뭐가 어째요? 고기를 빌려달라고요? 당신 미쳤어요? 이 고기가 얼마나 고급 쇠고기인데! 그리고 그걸 다 떠나서, 어떻게 감히 대회에서 식재료를 빌려달라고 할 수 있어요! 이건 경쟁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릴! 당장 꺼져요! 내참, 별 소릴 다 듣겠네!

 

“ 아니, 저... 어차피 전 순위권에는 못 들 거고요... 그래도 참가는 했으니까 펠메니 몇 개만 빚으려고... ”

 

시끄러워요! 이건 경쟁이라고 했잖아요! 꺼져요!

 

 

베르닌은 풀이 팍 죽어서 안드레이의 조리대를 떠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안드레이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 어쩌지... 재료가 없네. 그냥 실격 당하려나... ”

 

 

그때 어딘가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너 다닐이냐? 난 또 누가 이렇게 정신 사납게 왔다 갔다 하나 했네. ”

 

 

베르닌은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았다. 대각선 방향의 반대편 구석 조리대 앞에서 보랴가 한 손을 흔들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그쪽으로 갔다.

 

 

“ 아, 당신도 나오는 줄 몰랐어요. 아까 이쪽 이름표 봤었는데... 당신 성이 도브로류보프였군요. 기관명이 없는 걸 보니 개인 출전인가 보네요. ”

 

“ 응, 귀찮아서 안 나오려 했는데 우리 식당에서 나가라고 어찌나 등을 떠미는지. 그런데 넌 뭐냐, KGB 대표가 너야? ”

 

“ 예, 아침에 갑자기 국장이 부르더니 대회 나가라잖아요. 아무 것도 모르고 왔거든요. 근데 뭐 만들어요? 양파 수프랑 사과소스 돼지구이 만들지... 난 당신 요리 중에 그게 제일 맛있었어요. ”

 

“ 에이, 그건 맨날 식당에서 만드니까 재미없잖아. 난 오늘 케익 만들어. 다들 메인 요리만 만드는 것 같더라고. 디저트도 있어야 덜 지겹지. ”

 

“ 뭔데요? 아무 것도 없는데요? ”

 

 

아무리 봐도 조리대에 있는 거라곤 커다란 사발에 가득 들어 있는 호두와 아몬드뿐이었으므로 베르닌은 고개를 갸웃했다. 보랴가 웃었다.

 

 

“ 반죽은 벌써 오븐에 들어갔지. ”

 

“ 오븐이 어디 있어요? ”

 

“ 저 뒤에 공용 오븐 있잖니. 너 진짜 아무 것도 모르고 왔구나. ”

 

“ 아, 그렇구나... 하긴 굽는 요리들은 오븐이 필요하니... 근데 호두랑 아몬드 들어가는 케익도 여러 가지잖아요. 뭐 만드는 거예요? ”

 

“ 메도빅. ”

 

“ 아, 맛있겠다! 근데 너무 흔하지 않아요? ”

 

“ 흔하면 어때. 진짜 맛있으면 되지. 옛날에 우리 아들내미가 좋아했던 거야. 한 판 구워서 잘라주면 순식간에 해치우고는 ‘아빠 아빠 더 주세요’ 하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

 

 

보랴는 눈시울을 잠깐 붉혔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 근데 너는 왜 아까부터 요리는 안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냐? 벌써 다 만들었어? ”

 

“ 아니요. 전 진짜 아무 것도 모르고 등 떠밀려서 와서요... 재료를 하나도 안 가져왔어요. 여기서 다 주는 줄 알았거든요. 혹시 재료 남는 거 빌려줄 수 있어요? ”

 

 

베르닌은 안드레이의 ‘이건 경쟁이에요!’란 말이 생각나서 한 대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쭈뼛쭈뼛 물어보았다. 그리고 보랴는 그의 등짝을 정말 한 대 쳤다.

 

 

“ 이런 바보 같으니. 요리대회에 나오면서 식재료를 안 가져왔다고? 하긴 모르고 왔으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뭐가 필요하니? 나한테 있는 거야 다 줄 수 있지. ”

 

 

베르닌은 뛸 듯이 기뻤다.

 

 

“ 고마워요, 보랴! 난 펠메니 빚으려고 하는데... 밀가루하고 고기, 계란, 기름, 소금, 후추가 필요해요. 야채는 조금 얻었거든요. ”

 

“ 엥, 펠메니? 하필 그거냐... 난 케익이라서 고기랑 기름, 후추는 없는데. 가만있자, 밀가루가... 이런... 계량을 정확히 해서 가져왔거든. 밀가루는 전부 반죽해서 지금 오븐 안에 들어가 있으니... ”

 

 

보랴가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조리대 위와 아래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계란 세 알과 버터 한 토막을 건네주었다.

 

 

“ 어쩌냐. 이것밖에 없구나. 참, 소금도 좀 줄 수 있겠다. 잠깐만 기다려. ”

 

 

보랴가 작은 병을 꺼내더니 접시에 소금을 두어 숟가락 정도 쏟아주었다.

 

 

“ 펠메니... 음... 이걸로는 안 되겠구나. 제일 중요한 밀가루와 고기가 없으니... 근데 너 어차피 지금 재료 다 구해도 펠메니는 못 빚을 거다. 시간도 다 돼 가는데 언제 반죽하고 빚어서 찌겠냐. 차라리 있는 거 가지고 다른 걸 만들렴. 빨리 가라, 시간 없다. ”

 

“ 고마워요, 보랴. 진짜 고마워요. ”

 

 

베르닌은 진심으로 고마워서 보랴를 와락 껴안았다. 보랴는 다시 한 번 그의 등짝을 철썩 때렸다.

 

 

“ 황소만한 사내놈이 뭐하는 거야. 우리 예쁜이라면 몰라도. 빨리 가! ”

 

 

베르닌은 계란과 버터와 소금을 들고 조리대로 돌아왔다. 그때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 이제 15분 남았습니다!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15분 남았다니! 언제 45분이 흘렀단 말인가! 류드밀라와 아르카지, 안드레이와 보랴에게 가서 재료를 구하는데 시간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메인인 밀가루와 고기는 구하지도 못했다. 대충 하고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시간은 다 돼 가고 펠메니는 수포로 돌아가고 아무 것도 못하고 있자 머리가 핑 돌았고 눈앞이 캄캄했다.

 

 

‘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래도 우리 회사 대표로 나왔는데 아무 것도 못 만들면 안 되는데... 큰 일 났네... 뭐 만들지... 메인이 될만한 건 하나도 없으니... 어떡해... ’

 

 

베르닌은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신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바보, 재료를 주는 대회가 어디 있어.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걸... 여기가 미국도 아닌데. 아까 앞치마 사러 갔을 때 식재료도 샀어야지...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매사가 이런 식이야. 책상물림... 멍충이... 현실에선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흑... 이런 식으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나가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 이거 아무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막막한 거야, 엉엉... ’

 

 

눈물이 어른어른해서 조리대도 제대로 안 보였다. 막막하고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무정한 사회자가 또 소리를 쳤다.

 

 

자, 10분 남았습니다! 참가자들은 이제 마무리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베르닌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기계적으로 벽시계를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심사위원석에 있는 왕재수가 눈에 들어왔다. 왕재수는 애초부터 대회에 관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조리대와 참가자들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왕재수는 한 손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들기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아주 작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돈키호테 무대에 올라갔던 덕분에 베르닌은 그게 마임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무슨 동작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발레 마임인 건 분명했다.

 

 

‘ 저 자식, 말로는 은퇴했다 하면서 잠시도 가만히 못 있는구나. 몸에 배서 그런가, 신작 안무인가? 아니면 계속 연습하는 건지도 몰라. ’

 

 

갑자기 베르닌은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해왔다.

 

 

‘ 자기 천재라고 엄청 으스대더니 사실은 죽어라고 저렇게 연습했겠구나. 그러고 보니 저 녀석 나랑 있을 때도 맨날 발로 박자 세고 손가락도 꼭 예쁜 모양으로 폈지. 그때 바질 출 때도 보니까 힘들어서 허덕거리면서도 끝까지 연습하고... ’

 

 

그러자 베르닌은 어쩐지 막막함과 자책감이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 그래, 아무 거나 만들어보자. 10분 동안 뭐든 못 만들겠어. 있는 걸로 해보지 뭐. 뭐든 내놓기는 해야 할 거 아냐. 음, 그러니까... 토마토. 치즈 조금. 양파랑 양배추랑 당근 쪼가리 조금. 계란. 버터. 소금... 그래, 오믈렛을 만들어야겠다. 그건 금방 만드니까. ’

 

 

베르닌은 급하게 그릇에 계란 세 알을 깨어 넣었다. 소금을 넣고 휘휘 저었다. 그리고 토마토와 양파, 양배추와 당근을 잘게 썰었다. 시간이 없었으므로 화구 두 개를 모두 써야 할 것 같았다. 양쪽에 팬을 올려놓았다. 버터를 둘렀다. 화력이 더 센 쪽 프라이팬에 야채를 볶고 불이 좀 약한 쪽 팬에는 달걀물을 조심스럽게 부어서 블린처럼 얄팍하게 부치기 시작했다.

 

 

3분 남았습니다!

 

 

이미 다른 참가자들은 부산스럽게 접시에 요리를 담아내고 있었다. 베르닌은 도저히 야채를 다 익힐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반쯤 익어가는 계란 위로 야채 볶던 것을 그대로 투하하고 잘게 썬 치즈를 얹었다. 그리고는 숟가락과 뒤집개로 조심스럽게 계란을 둘둘 말았다. 하지만 그는 손놀림도 둔했고 마음이 너무 급했기 때문에 그만 계란 옆구리가 터지고 말았다.

 

 

“ 으아, 망했다. ”

 

 

어쨌든 그는 살살 오믈렛을 굴려서 옆 부분을 익혔다. 잘못해서 한쪽 귀퉁이는 새까맣게 타고 말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회자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1분 남았습니다! 정확히 1분 후면 모두 손을 떼고 조리대를 떠나 뒤에 정렬된 의자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베르닌은 우왕좌왕하면서 뒤집개와 숟가락으로 오믈렛을 집어서 접시 위에 얹어놓았다. 그 와중에 옆구리가 더 터져서 안에 있는 야채들이 좌르르 삐져나왔다. 한마디로 재앙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남은 토마토와 양배추로 장식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때 땡 하는 종소리가 났다.

 

 

자, 그만! 다들 자리로 돌아가세요!

 

 

베르닌은 땀에 흠뻑 젖은 채 터덜터덜 맨 뒷자리로 가서 앉았다. 류드밀라가 그의 곁으로 와 앉으면서 중얼거렸다.

 

 

“ 어휴, 시간이 왜 이렇게 모자라는지. 오븐 화력이 생각보다 안 좋아서 파프리카 속 익히는 데 너무 오래 걸렸어요. 막판에 간을 한번 봤어야 했는데... 망했네. 당신은 어떻게 됐어요, 펠메니 만들었어요? ”

 

“ 아니요. 재료를 못 구해서 그냥 아무 거나 대충 만들었어요. ”

 

“ 엥, 그래도 요리 대횐데 아깝네... 뭐 할 수 없죠.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두는 수밖에. 근데 어차피 나도 오늘 입상은 포기했어요. 저쪽에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있는 거 봤어요? 설마 아말리야가 올 줄이야... 우리 가브릴로프에서 제일 요리 잘하는 분이잖아요. 아무리 렐랴가 요즘 날고 긴다지만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에 비하면 갓난아기죠. ”

 

“ 엥, 그게 누구예요? ”

 

“ 아, 당신 KGB라서 교회엔 가지도 않겠네요. 저쪽에 앉아 계신 흰머리 할머니요. 수도원 요리사. 아, 수도원이라고 하면 잡혀가려나. 종교박물관 식당 요리사요. 예고르 신부님이랑 소꿉친구인데 어릴 때부터 거기서 요리를 하셨죠. 진짜 맛있어요. 수도원 요리사만 아니었어도 요리로 벌써 훈장을 몇십 개는 받아야 하는데. ”

 

“ 어, 그 수도원 식당... 버섯 감자 블린이랑 열매즙 진짜 맛있었어요. 그게 저 분 솜씨였구나. ”

 

“ 볼 것도 없이 아말리야가 우승이에요. 아무리 의장이 조야 브릴료바를 밀어준다 해도. 요리 명인이 왔는데 양심이 있다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저 분을 두고 조야를 뽑아주겠어요. ”

 

“ 그렇구나... 보랴도 엄청 요리 잘 하는데... ”

 

“ 뭐라고요? 스베촉의 보랴 말이에요? 그 사람도 왔어요? ”

 

“ 네, 저쪽에 있잖아요. 아까 계란이랑 버터도 빌려줬어요. ”

 

“ 망했네. 저 사람 진짜 손맛 좋은데... 3등도 못하겠네... 에휴... ”

 

 

베르닌은 어쨌든 엉망이긴 했지만 뭔가를 만들어서 내긴 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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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언급된 요리들은 대부분 러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리들이다 :)

 

류드밀라의 파프리카 요리는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미카엘이 만든 파프리콘이랑 약간 비슷한데, 사실 파프리카 껍데기를 직화로 태운 후 조리하거나 속을 채워 요리하는 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라서 :) 류드밀라는 생선살과 토마토, 치즈를 넣었으니 파프리콘과는 좀 다르지만. 하여튼 이거 쓸 당시 냉장고~를 한창 재밌게 보던 때라 아이디어를 좀 얻었다.

 

메도빅이나 비프 스트로가노프, 보르쉬에 대해서는 블로그에서도 전에 몇번 올린 적이 있으니 검색해 보시면 사진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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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류드밀라가 왕재수랑 옛날에 같이 동거했다고 언급하는 '지나이다 세도바'는 본편 우주에서 미샤의 발레학교 동창이자 키로프 극장 시절 파트너 발레리나이다. 미샤의 동료이자 친구이며 류드밀라의 말대로, 키로프 초창기 3년 정도는 한 아파트에서 같이 살기도 했다. (물론 둘이 같이 살자고 해서 산 건 아니고, 신진 스타 커플을 만들어내기 위해 극장 측에서 이들에게 새 아파트를 내주면서 같이 거주등록을 시켰음)

 

지나이다에 대한 이야기들은 나중에 본편에서 발췌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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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천하일미 요리대회에 출품된 요리들은 어떤 것들일까! 단추의 오믈렛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심사 결과는! 이 모든 것은 다음주 2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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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편을 쓸 때는 몸도 안 좋고 심리적으로도 불안하고 힘들어서 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음식도 제대로 못 먹던 때라서 맛있는 거 묘사하면서 대리만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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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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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