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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기 그지없는 화요일 밤. 아직 주말까지는 한참 남았다.

그 피곤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 서무의 슬픔 에피소드 4편 올려본다.

4편에서는 드디어 이제껏 대화에서만 언급되었던 바이올린 아저씨 로만 코즐로프가 전면에 등장한다 :)

 

 

**  지금까지의 간단한 줄거리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는 나름대로 자기 입장에서는 베르닌을 도와주려고 애쓰는데... 별 도움은 안 되는 것 같고 베르닌의 일상은 고되기만 하다.

그리고 유명 무용수이자 톱스타였다는 왕재수는 극장 감독이라고는 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베르닌으로서는 알 수조차 없다. 과연 그는 훈장까지 받은 프로페셔널이 맞는 것인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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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4

 

 

서무의 슬픔

-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그 날 베르닌은 일진이 좋지 않았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수도관이 얼어서 아침부터 물이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왕재수의 집으로 올라가 문을 두들겼지만 답이 없었다. 감시요원답게 그는 열쇠를 꺼내 문을 따고 들어갔다. 어차피 왕재수도 슬슬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으니까.

 

“ 야, 나 욕실 좀 쓸게. 우리 집 수도관 얼었어. ”

 

침실 문은 꼭 닫혀 있었고 물론 대답도 없었다. 자나보다 싶어서 베르닌은 급하게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양치질을 했다. 굉장히 바쁜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나오다가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립극장 바이올리니스트인 로만 코즐로프가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뭘 쳐다봐, 스파이 자식아. 빨리 꺼져! ”

 

“ 어... 당신 왜 여기... 그러니까, 원래 여기로는 안 오는 걸로... ”

 

“ 난 안 온 거야. 스페호프한테 꼬아 바치면 죽을 줄 알아. ”

 

“ 난 그런 짓 안 해요! ”

 

“ 꺼져! ”

 

“ 내가 왜요! 여긴 우리 집... 이 아니고 왕재수 집인데 나는 아침저녁으로 여기 와서 집안일을... 이 아니고, 어쨌든 걜 아침마다 출근시켜주는... ”

 

“ 뭐, 왕재수? 이 스파이 자식이 지금 누구 보고 그렇게 부르는 거야, 설마 우리 귀염둥이를 보고 왕재수라고! ”

 

“ 당신 눈에야 귀엽겠지만 내 눈엔 왕재수라고요! ”

 

그러자 코즐로프가 벌떡 일어나 주먹을 휘두르며 그에게 다가왔다. 깡말라서 별 거 아닌 줄 알았던 바이올리니스트는 일어서자 어마어마하게 컸기 때문에 베르닌은 움찔했다. 게다가 주먹도 엄청나게 울퉁불퉁해 보였다. 베르닌이 뒤로 물러서면서 KGB 요원을 두들겨 패면 폭행죄로 입건될 수 있다고 웅얼대고 있는데 왕재수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 아휴,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어, 너 왔구나. 벌써 나갈 시간이야? 잠깐만 기다려. ”

 

“ 뭘 기다려? 저 새끼 내려가라고 해! 넌 내 차로 데려다주면 되잖아. ”

 

코즐로프가 화를 버럭 냈다. 베르닌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지만 왕재수는 그를 해방시켜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 당신 차 타고 가면 우리 사이 소문나잖아. 그냥 쟤랑 같이 갈래. ”

 

“ 소문은 무슨 소문! 어차피 같은 극장에서 일하는데! ”

 

“ 안 돼 안 돼, 당신 잡혀가면 큰일나. ”

 

그러면서 왕재수가 코즐로프의 허리를 껴안고 온갖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토할 것 같아서 급하게 말했다.

 

“ 야, 나 10분 후에 출발할 거야! 갈 거면 그때까지 나와! ”

 

그리고는 코즐로프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 하고 그 집을 뛰쳐나갔다.

 

극장에 내려주고 차를 돌려 나가려고 하자 왕재수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 아침 안 먹어? 우리 카페 오늘 아침에 삶은 소시지랑 메밀죽 나온대. 너 그거 좋아하잖아. ”

 

“ 나 빨리 가야 돼. 오늘 엄청 바빠. ”

 

“ 으응, 불쌍하구나. 알았어, 밤에 봐. ”

 

“ 오후에 올 거야. ”

 

“ 왜? ”

 

“ 너네 오늘 무슨 행사하잖아! 우리 국장이 연설도 하고. 나 차출돼서 행사 보조해야 돼. ”

 

“ 아, 그거... 네가 할 게 뭐가 있어? 행사는 우리 극장에서 준비하는 거야, 우리 애들이 다 할 건데. 너네 국장은 그냥 와서 2분 동안 스피치만 하고 내려가는 건데. ”

 

“ 흥, 2분이 아닐 걸. 국장은 마이크 잡았다 하면 안 놓는다고. ”

 

“ 무슨 소리야, 큐시트도 다 써놨고 너네 국장은 구색 맞추기로 넣어놓은 건데. 시간 초과하면 안 돼, 인사말 하는 사람들이 일곱 명이라고!! 그거 끝나고 곧장 공연 시작하는데 10팀이 나와야 돼. 딱 8시에 끝나면 리셉션인데 거기서 모스크바 의원들은 건배 제의만 하고 다시 비행기를 타야 해서 시간 늘어지면 안 된다고! ”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왕재수를 쳐다보았다.

 

“ 너도 일을 하긴 하는구나. 맨날 노는 줄 알았는데, 행사 일정을 그렇게 꿰고 있다니. 심지어 진짜 진지하네. ”

 

“ 나 일해! 엄청 열심히 한다고! 내가 감독이잖아! 너는 이런 행사를 진행해 본 적이 없어서 몰라. 1분만 늘어져도 다 어그러진단 말이야. 너네 국장한테 헛소리 늘어놓지 말라고 전해. 2분 넘어가면 절대 안 돼. ”

 

“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 난 보조라고! ”

 

“ 알았어, 그만 가. ”

 

왕재수는 손을 내저으며 급하게 자기 사무실로 올라가 버렸다. 카페에서 아침 먹자고 하더니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   *   *

 

 

 사무실에 들어오니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선배 직원들의 근태기록부와 초과근무 내역서를 수합하여 결재문서를 만들고, 도장이 비뚤어지게 찍혔다고 국장에게 반려당한 세계 전도 구입 전표를 다시 요청하는 문서를 만들고, 마침내 저녁 극장 행사 프로그램을 펼치려는데 국장실에서 한바탕 깨지고 나와 시뻘겋게 달아오른 선배 직원이 그에게 이제 네 차례니 빨리 들어가는 게 좋을 거라고 경고했다.

 

국장실로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국장은 매우 저기압이었다. 오늘따라 멀끔한 양복을 차려입고 머리도 잘 빗어 넘기고 있었지만 얼굴은 죽상이었다.

 

“ 자네 서무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나? ”

 

“ 예? 서무란... 저어... 자료를 취합하고 우리 지부의 업무추진비를 관리하고 직원들의 근태를 관리하고... ”

 

“ 서무란 행정의 기본이야! 올바른 서무로 육성되지 않는 이상 제대로 된 행정인은 결코 될 수 없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겠나? ”

 

“ 글쎄요... 제가 또 무슨 실수라도... 문서의 구두점을 틀렸을지도... 아니면 첫 줄을 7칸 떼어야 했는데 8칸 떼었을지도. 아니면 업무추진비 영수증을 풀로 붙여야 하는데 클립을 써서... ”

 

베르닌이 자아비판을 하기 시작하자 국장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뭐야? 8칸? 클립! 용서할 수 없는 일이군. 됐네, 그건 내일 다시 얘기하지. 이건 또 다른 문제일세. 어제 머리가 아파 바람도 쐴 겸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두 가지가 눈에 띄었네. 첫째. 당직실로 내려가는 계단 맞은편에 걸려 있는 시계가 멈춰 있었네. 당장 건전지를 교체하게. 서무는 언제나 사무환경을 신경 써야 해. 다른 곳도 매일 둘러봐야 하네, 분명 어딘가 미흡한 곳이 있을 거야. 게다가 두 번째. 건물 뒤의 텃밭 말인데, 청소부들이 남는 시간에 거기 배추를 재배하고 있는 모양이야. ”

 

“ 그 텃밭은 당국의 허가를 받은 것이고 저희와는 관할이 달라서요. 청소부들에게 할당된 토지라서 보건의회 소속입니다. ”

 

“ 누가 뭐라고 했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야. 어제 보니 배추가 누렇게 시들어가고 있었네. 청소부들에게 무슨 활용 계획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방치해서 버릴 거라면 사료 공장에 기증을 하든지 우리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든지 방법을 강구해야 하네. 그건 물론 서무의 역할이지. 그리고 그 땅을 그렇게 활용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도 재검토해보게! 보건의회에 검토보고서를 제출하는 거야! 이 두 가지는 사소할 수도 있지만 첫 번째는 내부 고객만족, 두 번째는 인력 운영과 공유지 및 공유지 재배 물건의 처분 문제와도 연관될 수 있다는 말이네. ”

 

“ 국장님, 텃밭은 저희 소관이 아니라니까요! 공유지라 해도 저희 쪽 공유지가 아니고 보안위원회는 그 땅과 재배 작물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시계는... 아무도 그 계단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당직을 하지 않으니까요. 어차피 제가 매일 야근을 하니까 당직 명령은 허울뿐이고 다들 그냥 5시에 퇴근한다고요. 행정 낭비예요. 차라리 그 시계를 없애버리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면 쓸데없는 건전지 비용도 절약하고... ”

 

“ 행정의 알파벳도 모르는 주제에 행정 낭비라는 단어를 남용하다니! 썩 나가지 못해! 오늘 중 보안위원회와 보건의회의 공유지 텃밭 문제 재검토 보고서를 올리고 시계 건전지를 교체하여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내게 보고하게! ”

 

“ 저는 오늘 4시에 극장에 가야 하는데요... 그 문화 행사 보조... ”

 

“ 오전에 끝내면 되지 않나! 그리고 2시에 다시 내 방으로 오게. 행사 때문에 할 말이 있으니까! ”

 

 

베르닌은 지하 계단으로 내려갔다. 시계를 떼어냈다. 회계팀으로 달려가 물품 구입 요청서를 써서 제출하고 도장을 받은 후 건전지를 사러 잡화점에 갔다. 30분 동안 줄을 서서 건전지 두 개를 요청하고 지급 요청 전표를 끊고 돈을 내고 영수증 전표를 받았다. 돌아와서 회계팀에 전표를 제출한 후 시계에 건전지를 끼우고 시간을 맞춰서 도로 지하 계단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는 텃밭에 가서 배추의 상태를 확인했다. 막 배추 하나를 뽑아보려는데 청소부 대표가 다가와서 자기들이 수프 끓여먹으려고 익히고 있는 배추를 왜 손대느냐고 버럭 화를 냈다. 엄연히 보건의회 소속 텃밭인데 왜 KGB에서 눈독을 들이느냐, 배추가 먹고 싶으면 직접 재배를 하든지 식료품 가게에 가서 줄을 서서 사 먹어라 하고 소리를 질렀다. 베르닌은 공유지의 재검토에 대해 말할까 하다가 피곤해서 그냥 예예 하고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    *    *

  

 

베르닌은 4시 반에 극장에 도착했다. 로비부터 시작해 계단, 카페, 무대와 홀, 백스테이지 모두 사람들이 좍 깔려 있었고 뭔가를 뚝딱뚝딱 만드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무용수들이 리허설을 진행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연주자들이 깽깽거리는 소리를 내며 악기를 짓이기고 있었다. 마이크를 시험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조명을 체크하는지 무대 위로 붉고 파란 빛이 왔다갔다했다. 여기저기서 소음이 일었고 사람들을 호명하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정신을 가다듬자 수트를 쫙 빼입은 왕재수가 무대와 오케스트라 핏을 바람처럼 오가며 사람들에게 뭐라뭐라 지시를 내리는 것이 보였다. 꼭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다시금 저놈이 일을 하긴 하는구나 싶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베르닌을 발견한 왕재수가 환하게 웃었다.

 

“ 너 왔구나! 잘됐다, 이리 와봐! ”

 

“ 나 왜? ”

 

“ 우리 도와주러 온 거 아니야? 나 좀 도와줘. ”

 

“ 나 너네 도와주러 온 거 아니야. 국장이 보낸 거야. 행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스크린하고 보고서 써야 돼. 나는 그냥 여기 구석자리에 앉아서 계속 모니터링하다 갈 거야. ”

 

“ 그럼 할 일 없는 거잖아. 하나만 도와줘. ”

 

“ 국장이 5시 45분에 온단 말이야. 수행해야 돼. ”

 

“ 지금 하나만 해주면 돼. ”

 

“ 뭔데? ”

 

“ 방송에서 취재 온다고 들이닥쳤는데 나 지금 인터뷰해줄 시간이 없어. 네가 대신 좀 해줘. ”

 

“ 내가 어떻게 인터뷰를 해! 나는 여기 일은 하나도 모르는데! ”

 

“ 이거, 프로그램에 다 있어. 그냥 이거 보면서 읽어주면 돼. ”

 

“ 너네 쪽 사람 시키면 되잖아! ”

 

“ 우리 애들은 다 바빠. 그냥 나인 척 하면서 인터뷰 해줘. ”

 

“ 그걸 누가 믿냐! 네 얼굴은 온 국민이 다 아는데!!! “

 

“ 괜찮아, 내가 카메라맨한테 얘기해놨어. 뒷모습만 잡아달라고. 너도 머리 까맣잖아. 프로그램에 동그라미쳐 준 것만 순서대로 읽어. 어차피 내가 쓴 거니까 그냥 대독만 하는 거야. ”

 

베르닌은 울며 겨자 먹기로 프로그램을 받아들었다. 왕재수가 가리킨 대로 감독실에 가보니 카메라맨과 기자들이 죽치고 있었다. 눈에 익은 국영채널 지역뉴스 기자도 보였다. 쭈뼛거리며 들어가자 이미 얘기를 들었는지 기자가 그에게 소리쳤다.

 

“ 질문하면 그냥 하나씩 읽어요! 얼굴 안 잡을 테니까. ”

 

“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

 

생방 아니에요. 자막 깔고 화면은 무대 배경으로 돌릴 거니까 상관없어요. 어차피 국회의원들 때문에 사람 얼굴은 정면으로 잡지도 않을 거예요. ”

 

“ 난 왕재수, 아니 야스민과 목소리도 다른데... ”

 

“ 오케스트라 음악에 많이 묻힐 거니까 괜찮아요! ”

 

그래서 베르닌은 프로그램을 펼쳐놓고 기자의 질문에 더듬거리며 대답을 했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극장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프티파와 이바노프의 안무와 20세기 모던 댄스의 혁신에 대해, 프로파간다 발레의 특성과 안무에 적용되어야 하는 해부학 이론에 대해 줄줄이 늘어놓았다. 이걸 다 왕재수가 썼다면 천재임이 분명했다.

 

어쨌든 대충 인터뷰를 마친 후 그는 식은땀으로 흥건해진 이마를 닦으며 복도로 나왔다. 그때 낯익은 향수 냄새가 확 풍겨왔다. 돌아보니 렐랴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 안녕하세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여기는 웬일로... ”

 

“ 왜 당신이 인터뷰를 하는 거예요! 난 미샤 인터뷰하러 온 건데! ”

 

“ 왕재수, 아니 야스민이 대신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너무 바빠서요. ”

 

“ 쿠키는요? ”

 

“ 어... 아, 그 쿠키. 전해줬어요. 잘 먹던데요. ”

 

“ 편지 얘긴 안 해요? ”

 

“ 어... 글쎄요, 그런 얘기까진. ”

 

“ 당신 쿠키 먹었어요, 안 먹었어요? ”

 

“ 저... 조금... 근데 걔가 먹으라고 준 거예요. ”

 

“ 알았어요. 근데 나는 미샤와 꼭 인터뷰를 해야겠어요. 지금 그 사람 어디 있어요? 데려다 주세요. ”

 

걔 지금 정신없어요. 아마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방송에도 절 내보냈죠. ”

 

“ 방송이랑 다르잖아요. 내 문예지는 가브릴로프에서 제일 부수를 많이 찍는다고요! 게다가 수준도 높고요.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난 미샤랑도 잘 알고. ”

 

“ 하지만... 왕재수가 엄청 예민해요. 일곱 명이 인사말을 해야 하고 10개 팀이 올라가야 한대요. 1분이라도 늘어지면 큰일난다고... ”

 

“ 5분만요. 잡지 마감에 맞추려면 꼭 지금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요. 다냐, 도와줘요. 제발요. 난 편집장이에요. 우리 잡지가 중요해서 그래요. 내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고요. ”

 

렐랴가 인형처럼 예쁜 회색 눈을 깜박이며 간절하게 올려다보자 베르닌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 어, 그래요. 따라오세요. ”

 

렐랴를 아래 세워놓고 베르닌이 무대 위로 올라가서 사정을 얘기하자 왕재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절했다.

 

“ 안돼. 지금 최종 리허설 중이야. ”

 

“ 5분만 내주면 되잖아. ”

 

“ 무용수들 움직임이 이상하고 조명도 틀어졌어. 하잘것없는 잡지 인터뷰할 시간 없어. ”

 

“ 하잘것없다니! 렐랴의 잡지란 말이야. ”

 

“ 그러니까! 별 내용도 없고 잘난 척만 하는 계집애들 잡지란 말이야. ”

 

“ 딱이네, 너랑 똑같네. 가서 좀 해줘라. 렐랴가 기다리고 있다고. 잼도 주고 쿠키도 줬잖아. 편지는 읽었냐? 물어보던데. ”

 

“ 무슨 편지? 아, 뭔가 분홍색 봉투에 있던 그거? 냄비 받침으로 쓰다가 수프 엎질러서 버렸어. ”

 

“ 뭐야? 넌 진짜 싸가지 없는 자식이야!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

 

“ 나한테 여자의 마음이 무슨 소용이야! 정말 지겨워. 아무 생각 없는 여자들이 맨날 와서 매달리고 편지랑 선물 밀어 넣고 잘생겼다고 꺅꺅거리면서 안아달라고 찡찡대고... 릴리아나 페트로브나도 마찬가지... ”

 

“ 이 재수 없는 개자식, 지금 렐랴를 모욕한 거야! ”

 

“ 내가 왜 개자식이야?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좀 내려가, 너 때문에 리허설이 중단되고 있잖아. ”

 

베르닌은 너무 화가 나서 왕재수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한 대 패려고 하는데 렐랴가 깜짝 놀라서 뛰어올라와 그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 어머나, 다냐! 이게 무슨 짓이에요! 왜 미샤랑 싸워요? 그만둬요! ”

 

“ 놔두세요, 이 자식은 좀 맞아야 돼요!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왕재수... ”

 

“ 무대 위에서 그러면 어떡해요... 리허설도 다 중단됐잖아요! 아무리 예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도 그렇지... ”

 

“ 아니, 전 그게 아니고... ”

 

“ 미안해요, 미샤. 제가 인터뷰를 너무 하고 싶어서 다냐에게 부탁했는데 이렇게 바쁜 줄 몰랐네요. 끝나고 꼭 부탁해요. ”

 

베르닌은 왕재수의 멱살을 놔주었다. 그런데 왕재수는 언제 틱틱댔느냐는 듯 눈웃음을 치면서 부드럽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 알겠어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행사 마치고 리셉션에서 얘기해요. 지금은 바빠서 이만. ”

 

렐랴는 방긋 웃으며 왕재수의 뺨에 키스를 하고는 베르닌의 팔을 낚아채 아래로 내려왔다.

 

“ 아휴, 다냐!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요! 미샤가 지금 얼마나 예민하겠어요. 높은 사람들도 많이 오고 큰 행사인데. 심지어 멱살까지 잡고! 안 그래도 당신 KGB라고 다들 곱지 않게 보는데! ”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당신 지금 왕재수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서 그래요! 그 자식 진짜 싸가지 없고 나쁜 놈이라고요! ”

 

“ 어머, 다냐. 설마 질투하는 거 아니죠? 남자들은 정말 왜 그런지 몰라, 좀 멋있는 남자가 있으면 꼭 헐뜯고... ”

 

“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다시는 제게 왕재수에 대한 걸 부탁하지 마세요! 얽히기 싫은 놈이에요! ”

 

“ 싫어요, 그래도 당신이 제일 친하잖아요. ”

 

“ 안 친해요. 그 자식이랑 제일 친한 건... 로만 코즐로프예요! 바이올리니스트! 맨날 붙어 다녀요, 앞으로는 그 사람에게... ”

 

“ 싫어요, 로만 오시포비치는. 인상도 음침하고 말투도 까칠해요. 당신이 제일 착하고 상냥해요. 난 당신이 더 좋아요. ”

 

베르닌은 뭔가 휘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왕재수와 대화할 때와 비슷한 익숙한 기분이었다. 문제는 거기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도 없고 어쩐지 그래그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는 것이다. 예쁜 애들은 다 그런가 싶었다.

 

렐랴는 자신의 문예지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놓은 후 베르닌에게 다시 뭔가를 쥐어주었다. 이번엔 예쁜 포장지로 싸여 있는 작은 유리병이었다. 또 잼인가 싶었지만 별장에서 직접 채취해 가공한 꿀이라고 했다. 잼도 안 먹는데 꿀이라고 먹겠느냐고 하려다가 왕재수가 안 먹으면 자기가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냥 받았다. 병만 받아 호주머니에 쑤셔 넣자 렐랴가 혀를 차며 분홍색 봉투도 밀어 넣었다.

 

“ 편지요... ”

 

“ 아, 편지. 네... 그런데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

 

“ 왜요? ”

 

“ 저... 왕재수, 아니, 야스민 말인데요... ”

 

“ 또 헐뜯으려는 건가요? ”

 

“ 아뇨, 그게 아니고... 저, 걔는 여자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 ”

 

“ 알아요, 미샤는 보통 사람과 다르잖아요. 천재 예술가예요! 언제나 자신의 내면과 예술적 성취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느라 힘들어 해요. 여기 오기 전까지 고초도 많이 겪었잖아요. 그러니까 이해해요, 여자에게 관심 못 보이는 거...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옆에서 잘 돌봐주고 아껴줘야 해요. 그러면 언젠가는... ”

 

베르닌은 왕재수의 이른바 ‘아저씨’들과 성질 더러운 바이올리니스트가 떠올랐지만 차마 순진하고 귀여운 렐랴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말았다.

 

 

렐랴가 유관단체와 언론사 쪽 좌석으로 이동한 후 베르닌은 할 일이 없어 멀뚱멀뚱 리허설을 지켜보고 있었다. 왕재수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조명 기사에게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무용수들 사이로 달려가더니 맨 앞에 선 남자의 다리를 붙잡고 좍 찢어댔다. 무용수가 비명을 질러댔다.

 

“ 으악, 감독님! 도저히 안 되겠어요! 이건 사내들은 신체조건 상 안 되는 동작... 으악! ”

 

“ 뭐가 안돼! 그냥 찢어! 어깨를 낮추고 다리를 이렇게 뒤로 찢으면 되는데 뭐가 어려워! 이렇게 하면 되잖아, 나처럼! ”

 

“ 으악, 당신은 천재니까 되는 거고요! ”

 

“ 내가 천재인 건 나도 알아! 근데 이건 바보라도 할 수 있는 거라고! ”

 

“ 아, 아악! 사람 살려! ”

 

“ 이게 무용수야 나무토막이야! 됐어, 다 찢었네. 돌아! ”

 

“ 으악, 찢고 있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어떻게 돌아요! ”

 

“ 원래 도는 동작이잖아! 찢는 건 거들 뿐! 돌아야지! ”

 

“ 아악, 십년 넘게 췄어도 이런 동작은 처음... ”

 

당연하지, 내가 만든 거니까. 내가 스무 살 때 안무해서 열화 같은 성원과 찬사를 받고 해외에도 가지고 나가고 훈장도 받은 훌륭한 작품이라고. ”

 

“ 으윽, 이건 당신만 할 수 있는 동작... ”

 

“ 시끄러워! 빨랑 돌아! ”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기에 베르닌은 고개를 돌렸다. 남자 무용수는 처절한 비명을 질러댄 끝에 마침내 왕재수가 원하는 대로 동작을 구사한 것 같았다. 참으로 놀라웠다. 왕재수는 정말 천재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자기와 있으면 바보 같은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자기와 있어도 싸가지는 없지만 일할 때는 싸가지 없는 걸 넘어서서 무섭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앞으로는 심기를 건드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한바탕 활화산 같은 폭발이 지나간 후 왕재수가 무대 전체를 다시 한 번 점검하는 동안 베르닌은 좁지만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고 한숨을 쉬었다. 국장이 도착하기까지는 15분 정도 남아 있었다. 잠시라도 숨을 돌리며 공유지의 배추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뒤통수에 따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모르는 척 하려고 했는데 억센 손이 뒷덜미를 홱 낚아챘다.

 

“ 야, 나와. ”

 

“ 왜 그러시는 거죠? 전 행사 모니터링 중입니다. 공무 중이라고요. ”

 

“ 공무 좋아하네, 우리 귀염둥이 감시질이나 하고 있는 주제에. 당장 안 나와? 그럼 여기서 하지. ”

 

위협을 느낀 베르닌이 미처 몸을 돌리기도 전에 코즐로프가 주먹을 날렸다. 의자들 사이에 서 있었던 코즐로프가 다리를 약간 헛디디지만 않았어도 얼굴을 정통으로 맞아 코뼈가 박살날 뻔 했다. 쿠당탕 소리를 내며 베르닌이 옆으로 넘어졌다. 근처에 있던 스태프들은 깜짝 놀랐지만 싸움을 건 쪽이 극장에서도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코즐로프인데다 당하는 쪽이 얄미운 KGB 요원이란 사실을 깨닫자 다들 나 몰라라 했다. 베르닌이 비명을 질렀다.

 

“ 이게 무슨 짓이에요! 대체 왜! ”

 

“ 입 다물어, 개자식아! ”

 

코즐로프는 무대 위에 있던 왕재수가 그쪽을 쳐다보는 것을 눈치 채고 급하게 베르닌의 멱살을 휘어잡은 채 끌고 나갔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다시 바닥에 그를 패대기쳤다. 발로 마구 걷어차려는 것을 베르닌이 KGB 입사 당시 3일간 받았던 기초 훈련을 떠올리며 간신히 옆으로 굴러 피하자 코즐로프는 더욱 화를 냈다.

 

“ 이 자식이 감히 피해? 가만 안 두겠어, 작살내 주겠어! ”

 

“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요! 고발할 겁니다! 이건 폭행에 공무 방해죄... ”

 

“ 네놈이 우리 귀염둥이 멱살을 잡고 두들겨 패려고 했잖아! ”

 

“ 안 팼어요! 그냥 멱살만 잡았다가 금방 놔줬다고요! ”

 

“ 그리고 온갖 험한 말을... ”

 

“ 뭐가요! 싸가지 없는 놈한테 싸가지 없다고 한 게 뭐가 잘못이라고! ”

“ 뭣이,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착해빠진 우리 귀염둥이를 보고 싸가지 없다고? 인형처럼 조그만 우리 아기를 어디 때릴 구석이 있다고 주먹을 휘두르지를 않나... ”

 

“ 대체 왜 다들 이 모양인지! 렐랴도 그렇고 당신도! 그 왕재수한테 넋이 나간 건 그렇다 쳐요! 그렇다고 왜 날 이렇게 들들 볶느냐고요! ”

 

“ 네놈이 우리 아기를 괴롭혔잖아! 매일 감시하고! ”

 

“ 뭘 감시해요! 국장이 가외업무를 준 거라고요, 초과근무수당도 안 나와요! 사무실에서 뼈 빠지게 혹사당하고 아침저녁으로 저 자식 출퇴근시키고 집에 가면 해먹이고! 감시가 아니라 가정부라고요! 아기는 무슨 아기! 그 자식 나이가 몇 살인데! 뭐가 순진하고 착해빠져요, 응응을 하는 아저씨들이 몇 명인데! 그리고 조그맣긴 뭐가! ”

 

“ 조그맣지! 인형처럼 조그만 것이 아장아장... ”

 

“ 놀고 있네. 저렇게 큰 인형이 어디 있답니까! 척 봐도 175는 훨씬 넘겠구먼, 몸무게도 아무리 안 나가도 60킬로는 넘을 텐데! 아장아장 같은 소리. 다리가 저렇게 길쭉한데 휘적휘적 걸으면 몰라도 뭐가 아장아장! ”

 

“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우리 귀염둥이를 비방해! ”

 

코즐로프가 다시 주먹질을 했다. 억울함을 견디지 못한 베르닌이 맞받아 주먹을 휘두르자 바이올리니스트는 더욱 화를 냈다. 기껏해야 악기나 연주하는 인간이 왜 이렇게 포악하고 힘이 센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 베르닌이 고함을 지르며 도움을 요청하려는데 갑자기 왕재수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휴, 대체 뭐하는 짓이야! 당장 안 일어나! ”

 

신기하게도 미친 듯이 주먹질을 하던 코즐로프는 왕재수의 한 마디에 금세 벌떡 일어났다. 베르닌은 코피를 닦으면서 왕재수에게 하소연을 했다.

 

“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저 사람이 괜히 와서 시비 걸고 멱살 잡고 두들겨 패고... 너는 스물다섯도 넘었는데 아기라고 하고 너 키가 이만한데 조그만 인형이라고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고... 그리고 너 솔직히 아무리 날씬해도 60킬로 넘잖아, 키가 있는데... "

 

“ 조용히 해! 한번만 더 로만 앞에서 몸무게 얘기 했단 봐! ”

 

왕재수가 베르닌의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그리고는 코즐로프를 확 째려보면서 꾸짖었다.

 

“ 15분 후 시작인데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수석이란 인간이 복도에서 노닥거려? 오케스트라 애들 지금 다 퍼져 있단 말이야! 조율도 해야 하고 군기도 잡아야 하는데 당신이 이러고 있으면 어쩌라고! 당장 안 들어가? ”

 

“ 어, 그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걱정 마, 우리 비둘기야. 내가 오케스트라 꽉 잡을 테니까 그쪽은 걱정하지 마. 가서 숨이나 좀 돌리렴. ”

 

“ 오케스트라 아까 리허설할 때 보니까 클라리넷 소리 이상했어. 한 번 더 체크해. ”

 

“ 아유, 우리 아기는 역시 절대음감이야. 클라리넷 이상한 건 또 어떻게 알아챘누. 아까 내가 체크했어. ”

 

“ 알았어. 아참, 그리고 왜 애꿎은 애를 패는 거야! ”

 

“ 아까 이 자식이 너 멱살 잡았잖아. ”

 

“ 아니야, 내 칼라에 벌레가 붙어서 털어준 거야. 바보, 앞으로는 절대 얘 패지 마. 내 말도 얼마나 잘 듣는데. 밥도 잘 해주고. ”

 

“ 너 설마 이 자식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 ”

 

“ 왝, 난 키 큰 아저씨가 좋아. 쟤는 진짜 취향 아니야. 눈도 단추 같고. ”

 

“ 그렇지? 우리 아기는 역시 내가 제일 멋있는 거지? ”

 

“ 응응. 빨리 들어가! ”

 

코즐로프가 오케스트라 대기실로 사라진 후 왕재수가 베르닌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코피를 닦고 나서 베르닌이 물었다.

 

“ 왜 거짓말했어? ”

 

“ 뭐? ”

 

“ 벌레 털어준 거 아니었잖아. ”

 

“ 안 그랬으면 로만이 너 작살냈을 걸. ”

 

“ 언제 나 걱정했다고. ”

 

“ 왜, 난 맨날 너 걱정해. 국장 때문에 맨날 야근한다고 징징대고, 귀신 나왔다고 울고 권총 규격 때문에 징징대잖아. 너는 맨날 챙겨줘야 하잖아. 갓난아기처럼. ”

 

“ 뭐라고? 너 설마 정말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

 

“ 응. ”

 

“ .... 그 말은 기분 나빠. ”

 

“ 뭐가? ”

 

“ 단추... ”

 

“ 너는 눈이 단추 같잖아. ”

 

“ 단추 눈은 봉제 인형한테나 달려 있는 거야. ”

 

“ 봉제 인형 귀엽잖아. ”

 

“ 아니, 그러니까 그게... 뭔가 이상하잖아! ”

 

“ 너랑 노닥거릴 시간 없어. 가서 시작 준비해야 돼. ”

 

왕재수가 바람같이 사라졌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도로 홀에 들어가 앉아 있으려고 했지만 그때 스페호프가 도착해서 급하게 수행하러 나갔다.

 

 

*    *    *

 

 

행사는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모스크바에서 국회의원들도 왔다. 인사말에 이어 10개 팀의 갈라 공연도 원활하게 흘러갔다. 리셉션 파티도 잘 끝났다. 한마디로, 성공한 행사였다. 모두가 행복했다. 단 한 사람, 스페호프 국장을 제외하고는.

 

인사말이 문제였다. 왕재수의 말대로 총 7명이 인사말을 하게 되어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온 정치국 의원이 제일 첫 번째, 그 다음은 서기국 의원, 그 다음은 내무부 국장, 그 다음은 모스크바 문화예술국장, 그 다음은 가브릴로프 시 의회 의장, 여섯 번째가 가브릴로프 KGB 국장인 스페호프, 마지막이 가브릴로프 출판문화국장이었다. 모두에게는 각 2분이 주어졌다. 총 14분이었다.

 

문제는 이런 거였다. 정치국 의원은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의 인사말은 5분 동안 이어졌다. 그 중 왕재수에 대한 칭찬이 3분을 차지했다. 정치국 의원보다는 덜 중요하지만 그래도 아주 중요한 서기국 의원도 비슷하게 인사말을 늘어놓았다. 3분 동안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무부 국장, 문화예술국장... 마침내 시 의회 의장이 인사말을 마쳤을 때 시간은 1분밖에 남지 않았다.

 

스페호프 국장은 앞에 나서서 사회를 보고 잘난 척하고 인사말 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의 가브릴로프 시의 역사부터 시작했다. 온갖 고어와 프랑스어 문장들을 인용했다. 그리고 KGB가 시 문화예술에 공헌한 사례를 들기 시작했을 때 마이크가 꺼졌다.

 

적막이 감돌았다.

 

 

국장은 소리가 나오지 않는 마이크를 툭툭 때려보더니 당황하여 백스테이지 쪽 스태프에게 손짓을 해댔다. 그때 국장을 비추고 있던 조명도 꺼졌다.

 

 

잠시 후 다시 불이 들어왔다. 국장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다시 VIP 좌석에 앉아 있었다. 가브릴로프 출판문화국장이 올라가서 마지막 인사말을 했다. ‘신사숙녀 여러분, 이 행사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출판문화국에서는 후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라는 두 문장이 끝나자 다시 마이크가 꺼졌다.

 

7명의 인사말은 총 14분 동안 진행되었다.

 

스페호프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공연이 시작되었을 때 씩씩거리더니 뭐라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욕설을 채 두 마디도 내뱉기 전에 모스크바 정치국 의원의 경호원 두 명이 다가와서 그를 정중한 척, 하지만 눈에 띌 정도로 세게 양쪽 팔을 붙들고 복도로 데리고 나갔다.

 

베르닌은 급하게 따라나갔다. 국장은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욕설을 퍼부으며 길길이 날뛰었다.

 

“ 감히 나에게 이런 치욕을 주다니! 용서할 수 없어! 극장 의전 담당자 누구야! 없애버리고 말겠다!

 

그때 왕재수가 나왔다.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 좀 조용히 해, 공연에 방해돼. ”

 

“ 이 따위 짓을 하다니! 이런 거지같은 행사가 어디 있어! 담당자 불러와! ”

 

“ 당신 마이크 내가 껐어. ”

 

“ 뭣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감히 내 마이크를! ”

 

“ 인사말 총 시간이 14분인데 앞에서 13분을 썼어. 당신한테 40초 주고 출판문화국장한테 20초 줬어. 이 정도면 배려해 준 거야. ”

 

“ 그럼 앞에서부터 시간 잘랐어야지! ”

 

“ 모스크바는 가브릴로프보다 의전 상 우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다 인정해 줘야 했고. 여기는 시 의회 의장, 당신, 출판문화국장인데 의장은 눈치가 빨라서 1분밖에 안 했어. 그러니까 아주 공평해. 60초, 40초, 20초. 의전 상 배분한 거야. 아예 끊어버리려다가 40초 준 거니까 고맙게 생각하고 그만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어. 자꾸 시끄럽게 굴면 모스크바에서 온 우리 아저씨한테 얘기해서 당신 입 다물게 시키라 할 거야. ”

 

 

베르닌은 국장이 분노로 왕재수의 목을 비틀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국장은 풀이 죽었고 한숨을 쉬며 등을 돌려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쫓아나가려고 했지만 국장은 버럭 화를 냈다.

 

“ 따라오지 말게! ”

 

“ 하지만... ”

 

“ 남아서 행사 모니터링해! 끝까지! ”

 

“ 저, 리셉션 파티까지요? ”

 

“ 당연하지! 저 재수 없는 불여우가 혹시 범법을 저지르지 않는지 확실하게 감시해! ”

 

그래서 베르닌은 남았다. 파티에도 갔다. 파티에는 온갖 맛있는 음식들이 즐비했다. 렐랴가 어깨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행사가 끝나자 기분이 누그러진 왕재수는 렐랴와 3분 정도 인터뷰도 해주었다. 렐랴는 베르닌에게 샴페인도 한 잔 권했다. 아주 행복한 하루였다. 공유지의 배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만 빼면 완벽했다.

 

그리고 그날의 가장 큰 행복은, 집에 도착했을 때 왕재수가 그에게 렐랴가 준 꿀을 먹으라고 떠넘긴 거였다. 두 번째 행복은, 왕재수가 국장의 마이크를 꺼버린 거였다. 세 번째 행복은 스페호프가 두통이 심해서 다음날 휴가를 내겠다고 연락해 온 것이었다. 참 운 좋은 하루였다.

 

 

 

 

- FIN -

201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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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는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으로 이어진다. 그건 주말에...

 

 

** 전반부에서 베르닌이 건전지 사러 잡화점 가서 줄 서서 기다리고 전표 끊고 돈 내고 또 전표 끊고 하는 건 아마 러시아에서 생활해보신 분들이라면 이해하실 듯.. 지금이야 러시아도 자본주의 문화가 퍼져서 저런 곳이 별로 없지만 예전엔 저랬다. 줄 서는 건 일상. 이 코너에선 물건 사겠다고 전표 끊고, 그거 가져가서 저 코너에서 물건 요청, 또 여기서는 돈 지불, 저기서는 지불 전표에 도장, 또 여기서는 물건 받기 등등~

학교에서 등록금 낼 때도 이 사무실 가서 이 절차 밟고 저 사무실 가서 저 절차 밟고.. 중간에 또 커피 브레이크라고 쉬고... 또 어느 담당자는 휴가라 안 되고.. 등록금 한 번 내는 것도 한 나절! 운 나쁘면 며칠에 걸쳐서 처리해야 했다. 지금이야 많이 나아졌겠지 :)

 

** 바이올린 아저씨 로만 코즐로프는 이 시리즈에서 대책없는 깡패 같은 거친 남자로 나오긴 한다만.. 뭐 이 사람이 본편에서도 좀 까칠하고 폭력 성향이 조금 있긴 하지만 저런 남자는 아니다. 저렇게 닭살 멘트를 폭탄처럼 쏟아놓는 사람은 더더욱 아님 :) 하긴 여기 나오는 인물들 전부 본편의 원래 성격과는 많이 차이가 있다. 이건 그냥 웃자고 쓰는 얘기들이라서....

로만 코즐로프와 미샤에 대한 얘기는 writing 폴더에. 링크는 아래..

http://tveye.tistory.com/3146

http://tveye.tistory.com/3165

http://tveye.tistory.com/3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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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에서 지난 3편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http://tveye.tistory.com/3444) 때문에 쿠키 드시고 싶으셨다는 분들이 계셔서..

렐랴가 만든 쿠키랑 똑같지는 않지만 러시아 쿠키 사진 몇 장으로 눈 위안이라도... ㅠㅠ

러시아에서는 쿠키를 뻬체니예(печенье)라고 한다. 수제 뻬체니예 사진들..

 

 

 

 

 

 

 

 

 

두번째랑 이 네번째 쿠키를 섞어 놓은 게 아마 렐랴가 만든 쿠키랑 비슷할 듯..

 

그리고 이렇게 예쁘게 포장을 해서... 사모하는 왕재수에게 갖다 바침(베르닌을 시켜서..)

렐랴야, 다 소용없어 ㅠㅠ (그냥 나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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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