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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 가브릴로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본편보다 더 많이 써버려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서무의 슬픔 시리즈.

 

12편은 2월에 러시아에 다녀온 후 썼다. 0편에서 11편까지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웃자고 쓴 농담거리들인데, 12편도 물론 농담이긴 하지만 분위기는 좀 다르다. 문체나 인물에 대한 접근방식도 이전 에피소드들과는 약간 다르게 썼다.

 

12편에서는 가브릴로프 KGB 지국에 모스크바 본부에서 보낸 특별 감사관들이 들이닥친다. 서무인 베르닌은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암담하기만 한데...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신년이 되어도 베르닌의 격무는 계속되고. 그러던 어느날 모스크바 KGB 본부에서 특별감사를 나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려온다. 서무인 베르닌에게 크나큰 시련이 닥쳐오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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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2

 

 

 

 

서무의 슬픔

-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1월 하순으로 접어들 무렵 날벼락이 떨어졌다. 모스크바 KGB 본부에서 특별 감사를 나온다는 것이었다.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는 발칵 뒤집혔다. 보안위원회 내에 감사부서가 있기는 했지만 사안이 중대했으므로 스페호프 국장이 직접 회의를 소집했다. 각 부서장과 선임 직원, 그리고 각 부서 서무들을 모두 호출했다.

 

스페호프는 한 시간 동안 사안의 중대성에 대해 떠들었다. 감사부서에서 모든 준비 작업과 감사 실사를 총괄하되 부서장들은 3일 내로 최근 5년간의 모든 기밀 서류철과 공개 서류철들을 재분류하고 정리할 것이며 혹시라도 누락된 서류가 없는지 꼼꼼하게 살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회계부서에는 특명을 내려 모든 장부와 영수증들을 밤새 재확인하도록 했다. 서무들에게는 5년치 근태기록부와 출장보고서들, 업무추진비 영수증들과 직원 검진 및 요양 내역들, 모든 캐비닛 열쇠와 자물쇠 상태를 점검하고 10년치 생산 문서 목록과 자료실에 보관된 실제 문서를 대조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 모든 작업을 3일 내에 완료해야 했다. 스페호프는 이것으로도 모자라 방송실로 갔다. 국장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각 담당 직원들은 모두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서류철과 장부, 기밀 자료들을 완벽하게 점검해야 하며 앞으로 사흘간은 감사 준비 업무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입사하고 2년을 갓 넘긴 베르닌은 여지껏 외부 특별 감사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왜 그렇게 모두가 난리법석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선배들과 다른 부서 서무들은 모두 한숨을 푹푹 쉬었고 그 즉시 달려가 서류철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베르닌이 멍해져서 그 난리를 지켜보고 있는데 20년차인 발따예프가 혀를 찼다.

 

“ 또 시작이구먼. 이번엔 또 누굴 잡아 죽이려고. 에휴... ”

 

“ 그게 무슨 뜻인가요? 잡아 죽이다니요? ”

 

“ 자네 감사 안 받아봤나? ”

 

“ 작년에 저희 내부 정기 감사는 받았죠. 그때처럼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안 그래도 아까 국장이 업무추진비 영수증이랑 근태기록부, 출장보고서 같은 거 챙기라던데 그건 작년 내부 감사 때 다 한 번씩 체크했었거든요. 그거 하느라 이틀 밤 샜는데 그나마 그때 해놔서 지금은 일이 한결 수월하겠네요. 그때 감사부장님이... ”

 

“ 어이구, 이 순진한 책상물림 같으니... 내부 감사는 우리끼리 하는 거니까 그냥 짜고 치는 거고! ”

 

“ 짜고 치다니요! 저 그 때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감사부장님도 저 불러서 자료 제대로 정리해야 한다고 얼마나 설교를 하고... 선배들 근태기록부랑 휴일근무내역서도 더 제대로 작성해줘야 한다고 귀가 닳도록... ”

 

“ 자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먼. 외부 감사는 차원이 달라. 그것도 모스크바 본부에서 나오는 거라니... 감사철도 아닌데 뜬금없이 웬 특별 감사! 그건 다 목적이 있는 거야. 아예 뭔가를 정해놓고 털기 위해 나오는 거라고. 맘먹고 달려들면 뭔들 안 걸리겠나.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게 어디 있다고! 그게 뭔지 애초부터 알면 다행인데, 망할 놈들이 결코 처음엔 그걸 안 가르쳐주거든. 일단 며칠 동안 우리 전체를 탈탈 털고 들들 볶은 다음에 진을 다 빼놓고 본론으로 들어간단 말이야. 그리고는 쾅!

 

쾅!은 뭔가요? ”

 

“ 어이구 답답아... 뭐긴 뭐야. 몇 명 잡아다 죽이는 거지. 지적! 징계! 감봉. 직위 박탈. 정직. 해임. 뭐 그런 거란 말이야! 잘못한 일에 대해 책임을 묻는 거지! ”

 

“ 그럼 그건 윗분들한테 해당되는 거 아닌가요? 저희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잖아요. 특히 저요. 저는 완전 말단이잖아요. 매일매일 꼬박꼬박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서류도 다 만들고... 제가 결정한 일은 하나도 없는데요. ”

 

“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겠지. 무식하면 편하다니까. ”

 

“ 저 안 무식하다고요! 다들 잊고 계시는데 저 우리 시립 고등학교 전체 2등 졸업이고요! 모스크바 대학교 법학과를... ”

 

 

발따예프는 혀를 차며 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자기 자리로 가 버렸다. 미친 듯이 자기 캐비닛을 뒤지더니 지저분하게 엉켜 있던 서류들을 꺼내 펑펑 소리를 내며 구멍을 뚫고 표지에 끼워 노끈으로 묶었다. 그리고는 표지에 연도와 제목을 써 갈기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배들이 모두 비슷한 짓을 하고 있었다. 몇몇은 몇 년도 무슨무슨 서류가 없어졌다고 울상을 짓다가 누렇게 바랜 종이뭉치를 어디서 찾아오더니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다 쓰더니 서무인 베르닌에게 79년도 문서 접수대장과 발송대장, 보안위원회 직인 상자를 찾아오라고 명령했다.

 

“ 그거 지금 문서 위조하는 거 아닌가요? 벌써 3년 전 날짜잖아요. 그때 문서 없어졌다고 지금 3년 전 날짜로 새로 만드는 거잖아요. 걸리면... ”

 

“ 이 멍충아, 어떻게든 만들어놔야 하는 거야! 서류가 비면 그 즉시 끝장이야! 당장 대장이랑 상자나 가져와! 너도 빨리 네 서류 확인해보고! ”

 

“ 저요? 저는 입사 후 꼬박꼬박 하루도 안 빼먹고 제 서류들은 전부... ”

 

“ 흥,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너 혼자 아무리 꼬박꼬박 다 해놓으면 뭐해! 너 입사한지 2년 좀 넘었지? 감사는 최소 3년에서 5년치를 본다고! 너 전임자가 해놓은 서류들도 다 봐야 한단 말이야! 근데 네 전임은... 그렇지, 그 뻔뻔스러운 바냐 투레츠키! 서류 잘 찾아보는 게 좋을 거야. 바냐 그 자식 엄청 뺀질거렸거든. ”

 

“ 투레츠키요? 그 사람은 저 들어오기 전에 퇴사했는데... ”

 

“ 그러니까 더 문제지! 그놈이 빼먹은 서류들이 뭔지조차 알 수 없을 테니. 하여튼 잘 해보라고! ”

 

 

베르닌은 일단 스페호프가 지시한 모든 사항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다. 그나마도 근태기록부나 영수증, 업무추진비 따위는 매일같이 확인해온 사항들이라 좀 나았다. 최악은 10년치 생산 문서 목록과 자료실의 실제 문서를 대조하는 일이었다.

 

그는 다른 서무들과 함께 손전등을 들고 문서 보관실로 내려갔다. 먼지가 풀풀 피어오르고 각종 벌레들이 출몰하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왕재수였다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기절했을 것이 분명했다. 유경험자인 대외교류부 서무 알렉산드라가 친절하게도 미리 준비한 마스크들을 나눠주지 않았다면 탁한 공기 때문에 잠시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베르닌은 마스크를 쓰고 손전등을 비춰가며 목록과 문서철들을 대조하기 시작했지만 한 시간쯤 지나자 눈알이 빠질 것 같았고 산소도 부족해서 너무나도 괴로웠다. 이미 다른 서무들은 견디지 못하고 하나하나 밖으로 나간 후였다. 베르닌은 하필 비밀서류가 엄청나게 많은 감시분석부 소속이었다. 그 말은 문서고 안쪽에 있는 기밀 문서고에도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두 개의 묵직한 자물쇠를 각각의 열쇠로 열었다. 빨간 줄이 쳐져 있는 기밀 문서고의 문지방을 넘었다. 먼지가 풀풀 피어올랐다. 밀랍 봉인이 찍혀 있는 서류철들의 제목과 목록을 대조했다. 30분쯤 지났을 때 베르닌은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아마 잠깐 정신도 잃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퍼뜩 눈을 떴을 때 그는 책꽂이 사이에 주저앉아 있었고 먼지 구름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그는 반쯤 기어서 기밀 문서고를 빠져나왔다. 하마터면 자물쇠 채우는 것도 잊어버릴 뻔 했다.

 

 

그는 헉헉거리며 뒤뜰로 갔다. 배추밭 근처로 가서 맑은 공기를 정신없이 들이마셨다. 먼저 나와 바람을 쐬고 있던 알렉산드라가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더니 물을 한 컵 주었다.

 

“ 다냐, 문서고에 그렇게 오래 들어가 있으면 큰일 나. 공기가 얼마나 안 좋은데. 거기서 옛날에 서무 하나가 쓰러져서 식물인간 된 적도 있대. ”

 

“ 식물인간이요? 대체 왜! ”

 

“ 왜긴 왜야. 지금처럼 감사 기간에 자료 찾으러 갔는데 아무리 찾아도 문서가 안 나오니까 한참 뒤지다가... 산소 부족에 지하에서 올라오는 유독 가스 때문에 질식해서. 10년인가 병원에 누워 있었을 걸. ”

 

“ 그게 언제예요? 스탈린 시절인가요? ”

 

“ 스탈린은 무슨. 지금처럼 똑같이 브레즈네프 시절이지. 아마 60년대 말이었을 거야. 하여튼 감사는 나빠. 아랫사람들만 죽어난다니까. 특히 서무. 우리 부서는 후배 충원이 안돼서 난 벌써 6년째 서무야. 정말 죽겠어. ”

 

“ 그래도 대외교류부는 국장이 총애하는 부서잖아요. 서류도 우리만큼 많지 않고. ”

 

“ 총애하면 뭐해, 그거야 다 선배들 몫이지. 난 6년차인데도 우리 부서에선 막내라니까! 정말 지겨워. 언제까지 남의 근태기록부 작성해주고 초과근무내역서 만들어주고 업무추진비 대신 정산해줘야 하는지! 자료란 자료는 다 수합해야 하고... 감사도 그래! 정작 담당자들은 다 따로 있는데 결국 자료 만들고 감사실 올라가는 건 서무들이라니까! ”

 

“ 감사실에도 저희가 올라간단 말이에요? 어떻게 그러나요? 저희는 개별 업무에 대해서는 모르는데 질문하면 답변을 할 수가 없잖아요. ”

 

“ 그게 그렇게 되더라고. 다들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거든. 추궁당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그 사람이 징계를 받거든. 그러니까 만만한 서무가 올라가서 당하는 거야. 이거 진짜 충고인데, 다냐. 그쪽 부서 감사받을 때 너한테 자료 가지고 올라가라 하면 정말 웬만하면 못 간다고 버텨. 안 그러면 징계 100프로야. 심지어 네 전임 서무는 그 악명 높은 바냐 투레츠키... ”

 

“ 대체 투레츠키가 어땠길래 다들 그런 말을 하죠? ”

 

“ 그런 서무는 세상에 없었지. 바냐는 아무 것도 안 했어! 얼마나 뺀질거렸는지. 국장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지. 설교를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결국 잘라버렸어. ”

 

“ 인사기록부에는 자진 퇴사한 걸로 되어 있던데요? ”

 

“ 말이 자진 퇴사지. 국장이 내쫓았어.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고 당장 사직서를 쓰든지 아니면 총알을 맞든지 둘 중 하나라고 협박했다니까. ”

 

“ 으악, 그건 살해협박... ”

 

“ 근데 아무도 투레츠키 편을 안 들었다는 게 더 놀랍지! 다들 국장이 오죽하면 그랬겠냐고 했다니까! 국장 재수 없는 거 다 알잖아, 그런데도 다들 이해가 간다는 분위기였어. ”

 

“ 그래서 제가 전에 술자리에서 제 전임자 얘길 하니까 다들 화제를 돌렸군요. ”

 

“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이름이거든. 최고의 뺀질이... 젊은 애가 어찌나 뺀질대는지. 걘 감사실에서도 빠져나갔어. 유일한 인물이지, 감사실에 불려 올라가서도 징계 안 받고 무사했던 서무는. ”

 

“ 어떻게 국장이 그렇게 들들 볶는데도 버틸 수 있었을까요? 전 이해가 안 되네요.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진짜 장난 아니잖아요. ”

 

“ 몰라. 나도 이해 안 돼. 아무도 이해 못 해. 그래서 존경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니까. 하여튼 전설의 서무 바냐 투레츠키야. ”

 

“ 그 사람 지금은 뭐해요? ”

 

“ 글쎄. 퇴사하고 나서 어디 무슨 신문사 같은 데 들어갔다가 또 쫓겨났다던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 ”

 

베르닌은 국장의 장광설을 무시하고 뺀질거릴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바냐 투레츠키는 가히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절반이라도 닮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 날 그는 자정이 다 되어 퇴근했다.

 

 

 

*     *     *

 

 

 

감사가 시작되자 베르닌은 발따예프와 알렉산드라의 경고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생생히 알게 되었다. 본부에서 나온 감사관은 총 세 명이었는데 그 중 직급이 가장 높은 총괄 감사관은 발렌티나 푸카레바라는 나이 지긋한 여자였다. 꼬챙이처럼 마른데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무시무시한 인상이었고 목소리 또한 카랑카랑했다. VIP만 모시는 접견실이 특별 감사 사무실로 꾸며졌다. 국장실 바로 맞은편이었다. 의전을 중시하는 스페호프는 공항까지 직접 마중을 나갔고 푸카레바와 실무 감사관 두 명을 깍듯하게 모셔왔다. 그러나 국장이 근사한 오찬을 함께 하며 분위기를 파악해보려고 했을 때 푸카레바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감사관들에게 접대나 향응을 제공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고 대꾸했다. 점심이든 저녁이든 자신들이 알아서 해결할 테니 다시는 함께 밥이나 술을 먹자는 말을 꺼내지도 말라고 경고했다.

 

실무 감사관들 또한 푸카레바 못지않게 고압적이고 무시무시했다. 아모소프는 베르닌 또래의 젊은 남자였고 카마로프스키는 40대 초반의 중견 감사관이었는데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악질이었다. 도착하고 30분도 되지 않아 첫 번째 요구 자료 목록이 날아왔다. 베르닌은 감시분석부 해당 목록을 보고 기절초풍했다. 설마 정말 10년치 자료를 요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장부와 기밀 서류를 모두 뒤져 통계자료를 계산해 내야 했다. 심지어 기한은 다음날 오전이었다. 서무 관련 자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선배 직원들의 업무와 관련되어 있었다. 베르닌은 선배들에게 가서 요구 자료 목록을 보여주고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수합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다들 꽁무니를 뺐다.

 

 

“ 그건 서무가 해야지! ”

 

“ 아니에요, 이건 전부 내용을 알아야 만들 수 있는 자료들이라고요. 심지어 감사 자료잖아요, 내용이 정확해야 하는데 제가 어떻게 만듭니까! ”

 

“ 당연히 서무가 하는 거야! 자료 취합은 서무 담당이잖아! ”

 

“ 하지만... ”

 

“ 지금 그러고 있는 시간에 자료 찾겠다! ”

 

“ 아아, 정말 너무 하시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밑 자료들은 찾아올 테니 내용 확인과 작성은 각자 담당자들이 하셔야 해요! ”

 

 

베르닌은 별 수 없이 10년치 장부를 뒤졌다. 기밀 문서고에 다시 갔다. 밤을 새서 밑 자료들을 모두 모았다. 다음날 오전에 담당자들에게 내용을 공유했다. 담당자들은 툴툴대면서도 어쨌든 자료를 작성했다. 취합이 완료되었을 때 감시분석부장이 그에게 자료를 제출하고 오라고 했다.

 

 

하지만... 이건 거의가 표트르 키릴로비치와 세르게이 드미트리예비치 업무 관련 자료인데요... 저에게 질문이라도 하면 하나도 대답을 못할 텐데... ”

 

“ 일단 제출만 하고 오는 거야, 이 답답한 친구야! 자료 뒤적거리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감사관이 전화를 할 거야. 그때 담당자가 올라가면 된다고! 썩 가서 제출하고 오지 못해! 벌써 마감 시간이 다 됐잖아. 자료 늦게 제출하면 미운털 박혀서 엄청 괴롭힌단 말이야! ”

 

베르닌은 울며 겨자 먹기로 수십 개의 서류철과 100페이지가 넘는 자료뭉치를 들고 감사실로 올라갔다. 푸카레바는 예카테리나 여제처럼 창가에 앉아 다른 서류철을 들춰 보느라 그에게는 눈조차 돌리지 않았다. 카마로프스키가 딱딱거리며 말했다.

 

 

그 책상 위에 내려놔요!

 

“ 예! ”

 

 

베르닌은 서류철들을 먼저 쿵 하고 내려놓은 후 자료 뭉치도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손등으로 이마의 땀방울을 닦으며 인사를 하고 막 나가려는데 카마로프스키가 그를 멈춰 세웠다.

 

“ 가긴 어딜 가요! 감시분석부. 여기가 가장 요주의 부서야! 목록 대조 좀 해봐야겠어. ”

 

카마로프스키는 15분 동안 그를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세워놓은 채 제출된 서류철과 요구 목록을 대조했다. 그러더니 자료 뭉치를 펄럭펄럭 넘기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이건 뭐야. 어째서 이런 중대한 사안이 감시분석부장 전결로 끝난 거지? 심지어 일상감사마저 생략했군! 이건 지국장까지 결재를 받아야 할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스크바 본부에서도 승인을 받아야 했어! 당장 그 이유를 말해 봐요!

 

“ 어... 저, 그건 제 담당 업무가 아니라서요. 그게... 그건 표트르 키릴로비치, 그러니까 두블린스키가 담당... ”

 

“ 그럼 담당자가 왔어야지! 당신은 대체 뭔데! ”

 

“ 어... 전 서무... ”

 

“ 좋아, 그럼 이건 두블린스키인지 뭔지 하는 작자가 직접 올라와서 답변하라고 하고. ”

 

“ 예, 지금 불러오겠습니다. ”

 

가긴 어딜 가!

 

 

카마로프스키는 구내 전화번호부를 훑더니 수화기를 들었다. 곧장 두블린스키를 호출했다. 그리고는 다시 자료 뭉치를 뒤졌다.

 

 

“ 얼씨구, 잘하는 짓이군. 이것도 당국 승인이 필요한 건데 내부 결재로만 끝내버렸어. 77년이라. 그때 한참 여기서 말 안 들을 때였지. 어디 한번 답변해 보시지! ”

 

“ 저, 77년이라면 저는 입사 전인데요. 이건 세르게이, 그러니까 불라노프 담당 업무... ”

 

“ 대체 당신이 아는 건 뭐야! 어디서 이런 머저리를 올려 보내서 내 시간을 낭비하는 거야! 당장 담당자 불러와! ”

 

“ 예... 구내 전화번호는 475... ”

 

“ 필요 없어! 답답해빠진 당신 얼굴 보고 있으니 더 짜증이 나! 그냥 내려가서 담당자 올라오라고 해! ”

 

 

베르닌은 얼이 빠진 채 감사실을 나갔다. 복도에서 두블린스키와 마주쳤다. 두블린스키는 ‘그것도 하나 제대로 답변 못해서 날 호출하냐!’ 하고 주먹을 흔들어대며 들어갔다. 사무실로 가서 불라노프에게 감사관 얘기를 전달하자 그 역시 벌컥 화를 냈다.

 

 

“ 이 천치야! 대충 대답하고 뭉갰어야지! 꼭 선배까지 올라가게 만들어! ”

 

“ 하지만 저는 정말 하나도 모르는 내용을 묻는단 말이에요. 빨리 올라가보세요. 감사관이 화냈어요. ”

 

“ 에잇, 정말 아무짝에 쓸모없는 자식 같으니! ”

 

오후에 감사실에서 전화가 왔다. 추가 자료를 왕창 요구했다. 주로 오전에 카마로프스키가 질문했던 내용들과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 더해 서무 관련 서류도 추가되었다. 외부 발송 문서 목록들이었는데 문제는 그게 몇 년치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는 거였다. 아무리 찾아도 딱 78년에서 79년 목록이 비었다. 울상이 된 베르닌이 캐비닛을 몽땅 어지르고 있는데 발따예프가 혀를 찼다.

 

“ 찾아봤자야. 78년, 79년. 그 투레츠키 자식이 서무일 때잖아. 그럼 목록 없어. ”

 

“ 뭐라고요? ”

 

“ 목록만 없나, 서류도 없어. 알아서 해결해. ”

 

“ 어떻게 그럴 수가... ”

 

“ 뭘 어떻게 그래. 위조를 하든 만들어내든 이실직고하든. ”

 

“ 그건 그 당시 담당 부서장이... 아, 지금 정보부장. 그분이 올라가서 설명을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

 

“ 웃기고 있네. 감사장에 간부가 왜 올라가냐, 그것도 전임 부서장이. 이건 지금 담당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야. 그러니까 자네! 알아서 하라고! ”

 

 

베르닌은 온몸의 피가 다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문서 수발을 총괄하는 총무부서로 내려갔다. 4년 전 발송철을 몽땅 뒤졌다. 우편요금 영수증철을 모조리 뒤져서 간신히 당시 감시분석부에서 발송한 문서들의 제목과 날짜, 수신처를 찾아냈다. 그 목록들을 만들기 위해 다시 밤을 샜다.

 

 

다음날 아침에 목록을 제출하자 무시무시한 카마로프스키는 왜 이렇게 자료를 늦게 가져왔느냐고 불호령을 내렸다. 감사관을 뭘로 보는 거냐고 야단을 쳤고 징계를 받고 싶어 안달이 났느냐고 비꼬았다. 옆에서 새파랗게 젊은 아모소프가 맞장구를 쳤다. 베르닌이 쭈뼛거리며 대답을 못 하자 더욱 무섭게 혼냈다. 스페호프는 아무것도 아닐 지경이었다. 목구멍까지 자기는 죄가 없고 전임 서무가 목록을 안 만들었다는 말이 밀려나왔지만 어쨌든 누워서 침 뱉기였으므로 꾹 참았다. 계속 야단을 맞다가 추가 요구 자료를 또 잔뜩 떠맡고 내려왔다.

 

 

 

*    *    *

 

 

 

이러한 일이 반복되었다. 나흘째가 되었을 때 베르닌은 수면 결핍과 극심한 스트레스, 감사관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가 요구 자료와 추궁에 시달리든 말든 동료 그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고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너무나 시달린 나머지 헛것을 보기 시작했다. 간신히 눈을 붙였을 때도 카마로프스키의 호통과 아모소프의 이죽거림, 예카테리나 여제처럼 눈을 치뜨며 그를 쏘아보는 푸카레바의 얼음장 같은 표정, 나 몰라라 하는 동료들의 모습이 수백 수천 조각으로 그의 주변을 에워싸고 마구 짓눌러댔다. 식사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뭔가를 먹으면 속이 울렁거리면서 토할 것 같았다. 위염과 장염에 시달렸다. 얼굴에 뾰루지가 잔뜩 돋아났다.

 

시달리고 있는 것이 베르닌만은 아니었다. 다른 부서 서무들도 들들 볶이고 있었다. 운 나쁘게 걸린 담당자들도 고생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자료를 취합하고 일일 수감일지를 작성하고 제출해야 하는 것은 서무들이었다. 특히 베르닌은 총괄 서무라 더 심했다. 금요일이 되었을 때 알렉산드라가 서무들에게 배추밭으로 나오라고 쪽지를 전달했다.

 

 

초췌한 몰골로 배추밭에 모인 서무들에게 알렉산드라가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 본부 쪽에서 들은 정보인데, 이번 감사는 특정 타겟이 없대. 그냥 모스크바에서 지방 보안위원회들 군기 잡으려고 하는 감사래. 요즘 서기장이 오늘 내일 하잖아. 그래서 조만간 주요 인사 라인이 바뀌기 전에 겸사겸사 하는 거래. 하필 우리가 제일 첫 타자라서 자잘한 문제들로 이것저것 걸어서 몇 명 징계 먹이고 갈 거래. ”

 

“ 차라리 국장을 날리려고 하는 거라면 나을 텐데... ”

 

“ 그러게. 보통은 그런 걸로 오잖아. 근데 국장 날리려는 건 아닌가봐. 지난번에 크라베츠 날아간 후로 우리 국장도 끈 떨어져서 위태위태한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가봐. 특히 지금 위험한 게 일반 문서 관리 쪽하고 감시분석 쪽이래. 전자는 딱 서무 업무야. 공직기강으로 걸고 넘어지려나봐. 감시분석이야 뭐 감사 단골 메뉴니까... ”

 

베르닌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서무인데다 심지어 감시분석부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서무들도 괴로워했지만 그나마도 베르닌만큼 심한 상황은 아니어서 약간 안도하기도 했다.

 

“ 다냐,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너는 신참이니까 크게 징계 받지는 않을 거야. 그냥 지적받는 정도고 최악이면 한두 달 감봉일 거야. ”

 

“ 하지만 너무 억울해요. 난 시키는 거 다 했는데... 없는 서류도 다 만들었고... 우리 부서에서 지적당한 건 전부 선배들 업무인데 다들 저한테 가서 자료 제출하게 하고 수감 서류에 사인하게 만들었어요. 다들 책임 안 지려고... ”

 

맙소사, 다냐. 사인을 했단 말이야? 네 책임이라고? ”

 

“ 제대로 읽지도 못했어요. 감사관들이 막 무슨 종이를 들이밀면서 담당자 사인하라고... ”

 

“ 너는 담당자가 아니잖아! 왜 네가 사인을 해! ”

 

“ 선배들이랑 부장에게 가져갔는데 다들 무시하면서 빨리 저한테 사인해서 내라고 하잖아요. ”

 

“ 그래도 안 했어야지... 사인까지 하면 어떻게 하니. 빼도 박도 못하게... 너네 부장이랑 선배들 정말 너무하네. 너한테 다 뒤집어씌운 거잖아. 어쩌면 좋니. 아아, 너도 정말 고지식해서 탈이야. 어쩌면 그러니... 아아, 투레츠키라도 여기 있었다면... ”

 

“ 그 사람 때문에 더 징계 받게 생겼는걸요. 그 사람이 서류 안 만들어 놓고 간 것들 위조한 거 아무래도 걸릴 것 같아요. ”

 

“ 하지만 투레츠키는 징계 안 받았어. 걘 진짜 실수투성이에 징계 받아 마땅한 항목들도 많았는데 감사관이랑 10분 면담하더니 그대로 빠져나왔다고. 네가 걔 반만 닮았어도... 어쩌면 좋니... 투레츠키한테 특별 교육이라도 받았다면 좋으련만... ”

 

 

마음 착한 알렉산드라가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다른 서무들도 동병상련에 젖어 베르닌을 위로했지만 자기 코가 석자라 급하게 사무실로 돌아갔다. 베르닌은 망연자실하게 배추밭에 주저앉아 있다가 터벅터벅 들어갔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감사실에서 날아온 공문이 놓여 있었다. 감사는 화요일에 종료될 예정이며, 월요일 오전에 주요 담당자 몇 명과 대면 질의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명단이 나와 있었는데 베르닌의 이름도 있었다. 그는 11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름 옆에는 몇몇 항목들이 적혀 있었다. 하나는 문서 발송과 관련된 서무 업무였고 나머지는 전부 선배들의 업무였지만 그가 수감 서류에 사인을 해버린 사항들이었다. 아마 그 항목들을 가지고 추궁한 후 최종 징계 결정을 내리려는 것 같았다. 그건 마치 기소장이나 다름없었다. 베르닌은 눈앞이 아찔했다. 운 나쁘면 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그는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아직 퇴근 시간 전이었지만 멍하게 사무실을 나왔다. 입사 후 처음으로 무단 조퇴를 했다.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깨를 떨어뜨리고 나가는 베르닌을 동료나 선배 그 누구도 붙잡아 주거나 위로해 주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원래 그런 거니까.

 

 

*    *    *

 

 

 

춥고 바람 부는 거리로 나오자 눈물이 솟구쳤다. 서럽고 두려운 마음에 훌쩍훌쩍 울면서 베르닌은 한동안 길거리를 쏘다녔다. 억울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잘리면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할 텐데 뭘 해먹고 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2년 넘게 KGB에 다녔지만 한 일이라곤 아무 짝에 쓸모없는 서무 업무에 왕재수의 가정부 노릇뿐이었다. 식당에 취업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전교 2등에 법학 대학 우수 졸업이라는 자신의 학벌을 생각하니 너무나 서글퍼져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 넘었고 길거리도 어둑어둑해졌다. 터덜터덜 집 쪽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알렉산드라가 그의 어깨를 탁 쳤다.

 

“ 다냐! 어휴, 한참 찾았네. ”

 

“ 어, 선배님... ”

 

“ 너 월요일 면담자 명단에 있더라.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아까 수소문했거든, 투레츠키 지금 어디 있는지 찾았어. 너 걔한테 한번 가보렴. 어쨌든 네 전임이잖아. 사정 말하고 노하우 좀 알려달라고 해봐. 적어도 징계 수위는 좀 낮출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

 

“ 투레츠키... 전설의 서무... ”

 

“ 그래그래. 내가 바냐한테 전화도 해놨어. 내일 오후 두 시에 약속 잡았어. 그러니까 거기 가서 잘 좀 물어봐. 혹시 아니, 걔한테 방법 배워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자, 여기 걔 사무실 주소야. ”

 

“ 그 사람 내일 토요일인데도 일을 하나요? ”

 

“ 응, 주말이 제일 수지맞는대. 무슨 암시장 물건들 거래하나봐. 대신 보안위원회 몰래 하는 거니까 너도 절대 비밀 지켜줘야 해. 알았지? ”

 

“ 네...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선배님뿐이에요, 흐흑... ”

 

“ 바냐는 보드카하고 청어를 좋아해. 그러니까 스탄다르트 한두 병하고 청어 통조림 좀 챙겨가. ”

 

“ 네... ”

 

 

베르닌은 식료품 가게에 가서 줄을 섰고 비상금을 털어 스탄다르트 보드카 두 병과 청어 통조림 한 캔을 샀다. 피로가 누적되어 무척 졸렸다. 감사 때문에 밤을 새느라 일주일 만에 들어온 집은 먼지와 설거지 거리가 쌓여 엉망이었다. 그나마 왕재수를 챙겨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폐렴으로 며칠 고생하다 회복된 후 왕재수는 무슨 신작을 준비한다면서 줄곧 극장에 붙어 있었고 바이올린 깡패의 아파트에서 밤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는 혹시나 해서 왕재수의 집에 가보았다. 아파트는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차디찬 햄 샌드위치를 씹으며 도청 테이프를 돌려보니 아무 소리도 녹음되어 있지 않았다. 왕재수도 일주일 내내 집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나마 일을 좀 던 셈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스페호프가 감시 업무 소홀이라고 야단을 쳤겠지만 특별 감사 때문에 난리가 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장도 그 ‘불여우’에 대한 일은 잊고 있는 듯했다.

 

샌드위치를 반쯤 먹다 말고 그는 목이 메어서 맥주를 한 잔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리고는 속이 상해서 흐느껴 울다가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진 채 필름이 끊기듯 깊게 잠들었다.

 

 

*    *    *

 

 

 

토요일 오후 두 시에 그는 알렉산드라가 알려준 주소를 찾아갔다. 바냐 투레츠키의 사무실은 구시가지의 작가 공방들 뒤편에 있는 낡고 허름한 건물 2층에 있었다. 어두컴컴한 아치와 뜰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자 문 앞에서 군복 조끼 차림에 담뱃진으로 잔뜩 절어 있는 험상궂고 덩치 큰 남자가 그를 가로막았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눈을 부라렸다.

 

“ 어... 저... 바냐 투레츠키와 두 시에 약속을 했는데요. 그러니까, 알렉산드라가... ”

 

“ 꼬락서니가 수상한데? 이거 혹시 짭새 아냐?

 

“ 예? 아니, 저... ”

 

“ 아무래도 짭새 같은데! 주머니에 삐쭉 나온 그건 뭐야! ”

 

“ 아니, 이건 그냥... ”

 

남자는 베르닌의 코트 주머니를 뒤져서 청어 통조림을 찾아냈다. 금세 얼굴이 누그러지더니 통조림을 자기 주머니로 밀어 넣었다.

 

“ 흠흠, 진작 보여줄 것이지. 두 시에 바냐와 약속을 했다고? 들어가 봐. ”

 

“ 어, 그거 투레츠키한테 주려고... ”

 

“ 바냐 게 내 거고 내 게 바냐 거야! 아니꼬운 거 있나? ”

 

“ 아, 아니요... ”

 

 

베르닌은 그나마 보드카는 안 들킨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의 문을 하나 더 열자 그야말로 잡동사니로 가득한 우중충한 사무실이 나왔다. 무슨 중고 시장 같았다. 별의별 물건들이 다 있었다. 낡은 트랜지스터부터 수입 세탁기, 누렇게 바랜 외국 잡지와 책들, 통조림들, 꼬부랑 글씨가 붙어 있는 주스와 소스병, 아기 유모차에 무슨 전기드릴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것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마구 널려 있었다.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물건들을 비집고 들어가자 창가에 엄청나게 야한 새빨간 1인용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고 훈장이 덕지덕지 달린 노란 재킷을 입은 젊은 남자 하나가 앉아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삐쩍 마른 남자로 붉은 기 도는 금발 머리를 기름을 발라 올백으로 넘기고 가느다란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금테 안경 너머로 초록색 눈이 이따금 번쩍번쩍 빛났다. 그 인상이 너무 얍삽하고 교활해 보여서 베르닌은 순간 몸을 돌려 나가고 싶었지만 그때 남자가 그를 발견하더니 손을 흔들었다.

 

 

“ 어이, 처음 보는 얼굴인데? 뭐 찾아? ”

 

“ 어... ”

 

“ 아니면 뭐 가져왔나? ”

 

“ 아뇨... 저, 바냐 투레츠키를 찾아왔는데요. 저는 다닐 베르닌... ”

 

“ 아, 다닐. 사셴카가 얘기한 바보가 자네였군. 그렇게 바보같이 서 있지 말고 앉아. ”

 

“ 당신이 바냐... 전설의 서무... ”

 

“ 전설까지야. ”

 

“ 알렉산드라를 사셴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친하셨나 보네요. ”

 

“ 난 누나들하고는 다 친했지. 앉으라니까. ”

 

 

베르닌은 아까부터 앉으려고 했지만 대체 어디에 앉아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소파는 1인용이었고 의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기 때문이다. 투레츠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옆에 쌓여 있는 잡지더미를 가리켰고 그는 할 수 없이 책 위에 앉았다. 보드카 두 병을 내밀자 투레츠키가 뛸 듯이 좋아했다.

 

 

“ 자네 뭘 좀 아는군! 한 잔 할까! ”

 

“ 아뇨, 저... 이건 당신 드시라고 선물로... ”

 

“ 보드카를 혼자 무슨 재미로 마셔! 눈앞에 보드카가 있으면 따야지! 청어 통조림만 있으면 딱인데. 그렇지, 분명히 보랴가 하나쯤 갖고 있을 거야. 보랴! 청어 좀 가져와! ”

 

군복 조끼 입은 거구의 남자가 불쑥 들어오더니 뚜껑을 딴 청어 통조림과 잔 세 개를 건네주었다. 투레츠키는 능숙하게 보드카를 따더니 세 개의 잔에 모두 술을 따랐다. 신나게 건배를 하고 한 입에 보드카를 털어 넣었다. 베르닌은 낮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든 따라 마셨다. 보랴는 청어를 맨손으로 움켜서 입에 쑤셔 넣더니 보드카를 한 잔 더 마시고 휙 나가버렸다. 투레츠키는 맛깔스럽게 술을 마시고 청어를 먹었다. 베르닌은 두 잔째 마시면서 멍하게 투레츠키를 쳐다보다가 노란 재킷에 덕지덕지 달려 있는 것들이 훈장이 아니라 조잡한 에나멜 배지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별과 줄무늬가 그려진 것을 보니 미국산인 것 같았다. 심지어 주머니칼까지 목에 걸고 있었다.

 

보드카를 연달아 넉 잔쯤 마시고 난 후 기분이 좋아진 투레츠키가 자랑을 늘어놓았다.

 

“ 난 말이지, 엄청 잘 나가고 있어. 여기 없는 물건이 없다니까. 모스크바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나한테서도 전부 구할 수 있지. 여기 없는 것도 말만 하면 일주일 내에 구해다 줄 수 있어. 자네 나랑 동업하는 게 어때? 안 그래도 요즘은 손이 모자라서 말이야. 보랴도 괜찮긴 한데 주먹이 앞서서 말이지. ”

 

“ 저... 제의는 감사한데요... 전 당장 월요일에 감사관에게 불려가서 징계를 받을 판이라... ”

 

“ 쳇, 그 망할 놈의 KGB! 그건 정말 내 인생의 흑역사라니까! 꽃 같은 내 인생을 그따위 팍팍한 먼지구덩이에서 2년이나 낭비했다니! 무슨 서류니 감사니... 심지어 그 왕꼴통 스페호프! 그거 완전 초특급 사이코에 개자식이었는데. 그 작자 아직도 있나? ”

 

“ 예... ”

 

“ 여전히 초특급 사이코에 개자식인가? 서무들 들들 볶고? ”

 

“ 네... 특히 저를... ”

 

“ 에이, 말 놔. 우리 나이도 비슷한 거 같은데. 나 올해 스물아홉이라고. ”

 

“ 어, 나도 여름에 그렇게 되는데... ”

 

“ 그럼 동갑이네. 말 놔, 말 놔. 다냐! 건배! ”

 

둘은 건배를 하고 보드카를 한 잔씩 더 마셨다. 베르닌은 어쩐지 마음이 좀 편해졌다. 투레츠키는 자기가 밀수해오는 물건들을 가리키며 출처가 다양하다고 설명하고 다시 한 번 그에게 동업을 제의했다. 베르닌은 쭈뼛거리며 물었다.

 

 

“ 근데 난 보안위원회 소속인데 뭘 믿고 동업을 하자는 거야? 이런 거 불법이잖아. 걸리면 큰일... ”

 

“ 너 나 찌를 거야? 우리 동갑인데! 친구 먹었는데 설마! 정말 그럴 거야? ”

 

“ 아니. 나 그런 짓 절대 안 해. 그래도... ”

 

“ 그럼 된 거지! 난 너 얼굴 보자마자 딱 감이 왔어. 얜 믿을 수 있는 놈이구나! 그러니까 동업하자는 거지~! 나 여태 한 번도 배신당한 적 없어. 이쪽으로는 촉이 뛰어나거든. 내 인생 유일한 실수는 너네 그 KGB 입사했던 거라고. 서무 같은 소리... 쳇. 지금 나 엄청 잘 나가. 이거 벌이도 짭짤하고 예쁜 여자들은 그냥 딸려와. ”

 

“ 어, 고마워. 생각 좀 해볼게. 근데 난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먼저 이것부터 좀 해결해야 하거든. 그러니까 특별 감사... ”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기 때문에 베르닌은 제풀에 뜨끔해서 입을 다물고 급하게 그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랐다. 왕재수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거구의 보랴가 문을 열어주었는데 그에게 딱딱거리던 것과는 달리 문가에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을 한쪽으로 밀어주면서 비단결 같은 어조로 너무나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 조심해야지, 자칫 걸려 넘어져서 그 고운 피부에 흠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니. ”

 

“ 고마워, 보르카. 있다가 저녁 해줄 거야? ”

 

“ 그래그래. 너 좋아하는 거 들어왔어. 부야베스 만들어 줄게~ 정통 마르세유 식으로. ”

 

“ 사프란도 구했어? 부야베스엔 그거 들어가야 되는데. ”

 

“ 그럼, 너 해주려고 내가 구했지~ 볼일 보고 나와. 같이 우리 집 가자. ”

 

“ 응. ”

 

 

베르닌은 너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보랴가 나간 후 왕재수는 잡동사니들 사이를 우아하게 헤집고 창가로 걸어왔다. 투레츠키가 손을 흔들며 윙크를 하더니 돼먹지 못한 영어를 지껄였다.

 

“ 오우, 프리티! 뷰우티! 굿 애프터누운~ 컴 온~ ”

 

“ 안녕, 바냐. ”

 

“ 새로 들어온 거 그쪽에 있어. 예쁜이 오늘은 나 줄 거 없어? ”

 

“ 오늘은 없는데. 너무 바빠서 계속 집에 못 들어갔어. ”

 

“ 노래 테이프도 없는 거야? ”

 

“ 응. 다음에 가져다줄게. ”

 

“ 내 사전에 공짜는 없는데. ”

 

“ 외상 달아놔. ”

 

“ 외상 같은 소리. 나 그렇게 허술하게 장사 안 하는데. ”

 

 

그러더니 투레츠키가 푹신한 소파에서 일어나서 왕재수에게 갔다. 베르닌은 너무 놀라고 얼이 빠져서 멍하게 서 있었다. 왕재수는 그를 보고서도 전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암거래상을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일이니 당연한 것 같기도 했다. 그 순간 투레츠키가 왕재수를 꼭 끌어안고 엉덩이를 움켜쥐듯 어루만지며 입술에 키스를 찐하게 세 번이나 했다. 베르닌이 그 추행 장면에 기겁을 하며 손에 잡히는 대로 보드카 병을 움켜쥐고 휘두르려고 했을 때 투레츠키가 휘파람을 불며 왕재수의 뺨에 또 뽀뽀를 했다. 심지어 혀를 쭉 내밀어 왕재수의 뒷목덜미를 핥기까지 했다!

 

 

“ 아유, 정말 계집애들보다 더 귀엽다니까. 향기도 어쩌면 이렇게 좋니. 거기 신문이랑 다 있으니까 너 보고 싶은 대로 다 보고 가. 내가 너 보여주려고 어제 오후에 막 들여온 따끈따끈한 거야. ”

 

“ 이번 주 신문이야? ”

 

“ 그럼. 그저께 주간지도 있지. 나야 불어는 까막눈이지만. ”

 

“ 알았어. ”

 

 

왕재수는 추행을 당한 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잡지 더미 사이를 비집고 반대편으로 들어가더니 프랑스어로 된 신문 한 뭉치와 영어로 된 신문, 잡지 한 뭉치를 끌어내렸다. 왕재수가 햇볕이 잘 들어오는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다리를 뻗으려는 것을 투레츠키가 금세 어딘가에서 접이의자를 꺼내주더니 그 위에 무릎담요까지 몇 겹으로 개켜서 얹어 주었다. 왕재수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의자에 앉더니 열심히 외국어 신문과 잡지들을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베르닌 쪽으로는 눈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소파 쪽으로 돌아온 투레츠키가 입맛을 다시면서 중얼거렸다.

 

“ 쟨 진짜 귀엽다니까.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싶게 만들어. 계집애였으면 벌써 내가 홀랑... ”

 

“ 저... 너 쟤 누군지 알아? ”

 

“ 미셴카? 그럼. 몇 달 전부터 왔는데. 진짜 끝내준다니까. 좋은 물건도 많고 외국 물정도 많이 알아. 외국 신문들은 다른 애들 같으면 집에 숨겨놓고 사전 찾아가며 한 시간 두 시간씩 읽는데 쟤는 그냥 앉은 자리에서 후딱 읽어치우고 놓고 가니까 진짜 깔끔해. 나한테는 딱 좋지. 내가 처음부터 동업하자고 꼬셨는데 싫다더라고. 손에 먼지 묻히는 거 싫다나. 하긴 쟨 저렇게 귀여우니 땀 흘리는 짓 안 해도 뭔들 안 풀리겠니. ”

 

“ 쟤가 뭐하는지도 아는 거야? ”

 

“ 아니. 나 그런 거 관심 없어. 나는 훌륭한 거래상이야. 여기 오는 손님들에 대해 철칙이 있어. 아무 것도 안 물어봐. 특히 개인 정보는 더더욱! 잘못해서 나나 보랴가 잡혀가도 손님에 대해 아는 게 없으면 불 것도 없잖아. 쟤는 근데 너무 예쁘니까 좀 궁금하긴 하더라. 보랴는 좀 아는 것 같던데. 둘이 가끔 놀더라고. ”

 

“ 가끔 놀아... 맙소사... 바이올린 아저씨도 모자라서... ”

 

“ 왜? 너 쟤 알아? 관심 있어? 너 그런 취향이야? ”

 

“ 아니. 아니야... 절대. 저... 그 특별 감사 말인데. 너의 노하우... ”

 

 

베르닌은 간신히 본론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서무로서의 고통과 임박한 징계의 공포에 대해 설명했다. 투레츠키는 잠시 그의 하소연을 듣더니 지루한 듯 하품을 했고 보드카를 한 잔 더 따라 마셨다. 그리고는 베르닌의 어깨를 툭 쳤다.

 

 

“ 에이, 너 진짜 고지식하구나. 그러니까 스페호프한테 들들 볶이지. 뭘 그런 걸 걱정하냐. 애초부터 자료 다 찾고 만들어준 것부터가 잘못이야. ”

 

“ 어떻게 안 찾고 안 만들어... 난 서무인데. ”

 

“ 서무가 뭐. 지금이 무슨 농노 시대냐?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랬어. 선배란 것들은 원래 그런 것들이야. 서무가 버릇을 잘 들였어야지! 네가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다 해주니까 그것들이 당연한 줄 알고 다 너한테 시켜먹는 거라고. 아예 배 째고 안 했어야지. ”

 

“ 어떻게 안 해. 난 막내인데... ”

 

“ 누군 막내 아니었냐. 그냥 안 하면 되는 거야. 급한 놈이 우물 파게 돼 있어. 네가 안 하면 맘 급한 담당자가 다 하게 된다고. ”

 

“ 하지만 국장이... ”

 

국장이 떠들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그자가 널 죽일 것도 아니고 월급 깎을 것도 아닌데. 그냥 귀나 한 번 씻어주면 그만이지. ”

 

“ 바냐. 스페호프가 너한테 총 겨누고 사표 쓰라고 한 거 사실이야? ”

 

“ 아, 그거? 그 총에 총알도 없었어. 내가 다 빼놨거든. 어차피 그때쯤 그만두고 싶었던 차라 잘됐지 뭐. 그때 그만뒀으니 내가 지금 이렇게 출세를 했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놀고 싶은 대로 놀고 여자들도 잘 꼬이고. 가끔 저렇게 귀여운 애로 눈요기도 하고. ”

 

“ 하지만... 난 당장 월요일 아침 열한 시에 루뱐카 본부 감사관 면담이 있어. 그 면담 끝내고 징계하려는 거래. 선배들 잘못에 대해서도 내가 책임 있다고 사인까지 했단 말이야. 최소 정직, 아니면 잘릴지도 몰라... ”

 

차라리 그냥 사표 내버려. 내 밑에 와서 일해. 월급 잘 쳐줄게. 그깟 말단 공무원 월급보다 훨씬 짭짤할 걸. ”

 

“ 저... 날 믿어줘서 정말 고마운데 난 책상물림이라 이런 일은 소질이 없어. 난 그저 월요일 감사를 잘 넘기고 싶은데... 너 전설의 서무잖아. 그때 감사 어떻게 빠져나간 거야? 제발 방법 좀 가르쳐 줘. 응? ”

 

“ 음...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셋 다 넌 좀 힘들 것 같아. ”

 

“ 왜? 세 가지나 있는데 왜 난 힘들어? 제발 방법 좀 알려줘. 응? 나 노력해 볼게. 일요일도 있으니까 계속 준비하면... ”

 

 

투레츠키는 한숨을 쉬었다.

 

 

“ 넌 그게 문제야, 다냐. 뭐든지 준비하고 연습하고. 그게 책상물림의 특징이야. 그런 걸로 되는 게 아니라고. 전설적인 서무는 타고 나는 거야. 근데 넌 성격이 고지식해서 어려울 것 같아. ”

 

“ 노력할 테니까 제발 좀 가르쳐 줘. 제발... ”

 

좋아. 1번. 아무 것도 모르는 시늉을 하는 거야. 눈을 끔벅끔벅하면서 감사관이 무슨 말을 해도 바보 이반처럼 멍 때리면서 ‘전 신입이라서 아무 것도 모르는데요’라고... ”

 

“ 나 그거 벌써 했었어. 감사관이 나보고 머저리라고 했어. 나 진짜 그 업무 내용을 전혀 몰랐거든. ”

 

“ 그걸 끝까지 밀어붙였어야지! ”

 

“ 근데 선배들이 하도 난리를 쳐서 계속 자료를 취합하고 작성 제출하다 보니까 어느새 나도 내용을 다 알겠더라고. 감사관이 부를 때면 꼭 선배들이 안 보여서 내가 대신 올라가고... 그러다가 조금씩 답변도 해버렸어. ”

 

“ 그것 봐! 벌써 1번은 끝났네. 그나마 너는 그게 제일 가능성 있었는데. ”

 

“ 2번은... ”

 

“ 2번이 효과가 아주 좋지. 바로 거래야.

 

“ 거래라니? ”

 

“ 동료를 팔아넘기는 거지. 가급적 선배로. 윗선일수록 더욱 좋은 거야. 감사관들은 월척을 원하거든. ”

 

“ 하지만 뭘 팔아넘긴다는 거야? 난 너처럼 밀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선배들이랑 그런 거래를 한 적도 없는데. ”

 

“ 답답하긴. 너 서무잖아. 여태 선배들이랑 간부들 근태기록부나 초과근무내역서, 출장보고서 같은 거 다 네가 써줬을 거 아냐. 업무추진비도 네가 정산하고. 그런 거 하면서 약점 잡아놓은 거 없어? 출장 안 갔으면서 갔다고 하고 여비 타갔다든지. 업무추진비로 술 먹었다든지. 아니면 업무 처리하면서 뇌물 받았다든지. 내가 기억하기로 너네 KGB는 그런 일이 횡행했지. 그런 거 몇 개 물증이랑 같이 꽉 쥐고 있다가 감사관한테 흘리는 거야.

 

선생님, 저처럼 피라미 잡아가봤자 별 소득도 없으시잖아요. 제가 괜찮은 정보를 하나 드리죠. 이건 내부 기밀인데요, 저는 서무라서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관님들이 마침 오셨으니 내부 고발을 하고자 합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제 안위를 지켜주신다는 약속이 필요합니다.

 

뭐 이런 거지. 영화 안 봤냐? 이런 거 진짜 잘 통하거든. 난 감사 두 번 받았는데 첫 번째 감사 땐 이걸로 해결했지. 그땐 정보부장을 팔아넘겼어. 꽤 쏠쏠했지. 심지어 나중에 감사관이 술도 한 잔 사줬어. ”

 

 

베르닌은 입을 딱 벌렸다. 머릿속에 잠깐 수많은 초과근무내역서와 출장보고서, 뇌물의 현장 등등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난 그건 도저히 못할 거 같아. 어떻게 동료를 팔아넘기니. 나 그건 못해... ”

 

야, 네가 사느냐 남이 사느냐 이런 문제야. 이건 절대절명의 순간이라고! ”

 

“ 그래도 그건 도저히 안 되겠어. 마지막은... ”

 

“ 흠. 이건 2번보다 더 효과가 좋지. 두 번째 감사 때 제대로 써먹었고. 근데 넌 안 될 거야. ”

 

“ 왜? 왜 안 되는데? ”

 

“ 1번이랑 2번은 노력으로 되는데 3번은 그런 걸로는 안 돼. ”

 

“ 뭔데? 노력해서 안되는 게 어디 있어. 제발 가르쳐줘, 바냐. 우리 동갑이잖아. 보드카도 나눠 마시고. 제발... ”

 

“ 음... 3번은 말이야. ”

 

 

투레츠키가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섰다. 멀끔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를 두 손으로 마구 흐트러뜨렸다. 고개를 숙이더니 금테 안경을 벗어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홱 쳐들고 베르닌을 올려다보며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간절하게 속삭였다.

 

선생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선생님 한 마디에 제 운명이 달려 있어요. 제발... 저 잘리고 싶지 않아요. 제 모든 게 선생님께 달렸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네?

 

 

베르닌은 감전된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안경을 벗은 바냐 투레츠키는 놀랍게도 굉장한 미남이었다. 머리를 흐트러뜨리자 웨이브진 금발 머리가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초록색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에메랄드 같았다. 애들 동화에 나오는 왕자님처럼 생긴데다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이 어딘가 굉장히 불쌍해 보여서 꼭 안아주면서 위로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솟구쳤다. 순간 베르닌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자식은 분명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하는 짓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고 외모도... 그러니까...

 

 

그때 잡동사니들 사이로 왕재수가 걸어 나왔다. 둘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전혀 관심 없는 표정으로 곁을 스쳐가며 투레츠키에게 인사를 했다.

 

 

“ 갈게. 다음에 봐. ”

 

예쁜이 가니? 금요일에 좋은 거 들어올 거야. 네 맘에 쏙 들걸. ”

 

“ 봐야 알지. 별로면 돈 안 줄 거야. ”

 

“ 에이, 금요일에 오는 건 진짜 좋은 거야. 돈 안 주면 너 정말 가만 안 둔다. 아까 정도로는 못 넘어갈걸. 확 덮쳐서 잡아먹는다. ”

 

“ 싫어. 너랑은 안 해. 너 내 취향 아니야. ”

 

“ 서릿발 같기도 하지. 하여튼 귀엽다니까. 잘 가, 주말 잘 보내! ”

 

 

왕재수가 문을 열고 나갔다. 베르닌은 문 너머로 거구의 보랴가 왕재수의 어깨를 껴안고 복도로 나가는 것을 힐끗거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투레츠키가 머리를 빗어 넘기고 안경을 쓰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뺀질거리는 어조로 돌아왔다.

 

“ 자, 3번. 할 수 있을 거 같냐? ”

 

“ 아니... 안 될 거 같아. 그건 엄청 미남이어야 되는 거잖아. ”

 

“ 미남은 아니어도 되는데, 연기를 잘 해야 돼. 그리고 눈이 크고 감정이 풍부해야 되는데 넌 그게 안 되니... 그냥 2번 연습해서 가는 게 나아. ”

 

“ 너 그래서 안경 끼는 거야? 너무 잘생겨서? ”

 

“ 그렇지. 이런 짓 하면서 먹고 살기엔 내가 너무 쓸데없이 미남이라서. ”

 

“ 알렉산드라가 너한테 잘해줬던 것도... ”

 

“ 그래, 누나들은 다 나한테 잘해줬다니까. ”

 

“ 그렇구나. 전설의 서무란 건... 그냥 잘생겼기 때문이었어.

 

“ 그건 아니지. 내 능력 90%에 미모 10%인 거지. 이봐, 다냐. 너무 실망하지 마. 2번 방법을 연습해서 해보고. 실패하면 미련 없이 사표 던지고 나한테 오는 거야! 나랑 같이 이 업계를 평정하는 거지! ”

 

“ 난 책상물림이라고 했잖아. 그리고... ”

 

“ 그리고 뭐? 또 맘에 걸리는 게 있어? 불법이라서? ”

 

“ 아니... 그것보다... 너 너무 손님한테 막 대하는 거 아니야? ”

 

“ 내가? 난 손님을 왕처럼 대접해! 기밀도 다 지켜주고! 개인정보도 안 물어본다 했잖아! ”

 

“ 그치만. 아까 걔... 막 추행하고... ”

 

“ 추행은 무슨 추행! 귀여우니까 좀 쓰다듬어준 거지. ”

 

“ 아니야. 너... 걔가 허락도 안 했는데 막 껴안고... 입술에... ”

 

“ 야, 장난으로 뽀뽀 몇 번 한 걸 가지고. ”

 

“ 그거 뽀뽀 아니었어. 막 입 벌리고 혀도 이렇게 들어가고... 그거 진짜 키스였잖아. 심지어 엉덩이도 만지고... 핥기까지... 강아지도 아닌데. ”

 

“ 어휴, 너 정말 답답하다.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왜 네가 난리야. 너 걔한테 관심 있냐? 그럼 금요일에 와. 내가 소개시켜 줄 테니까. 나 참. ”

 

“ 아니야, 나 그런 거 아냐. 나 여자 좋아해. 근데 하여튼 아까 그건... ”

 

그거 뭐! 걔가 돈 안 줬잖아. 우린 돈 아니면 물물교환인데 오늘은 걔가 물건도 안 가져왔잖아. 그러니까 다른 거라도 줘야지. 여긴 단순해.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는 거라고! 예쁜 애는 그 정도로도 내가 넘어가주니까 오히려 이득이지. ”

 

“ 너 저기... 걔한테 더 심한 짓도 했어? ”

 

너 지금 나 추궁해? 짭새 노릇하는 거야? ”

 

“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좀 마음에 걸려서. 걔 나이도 어려 보이고... 생긴 것만 그렇지 순진한 애일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

 

너 정말 고지식하구나. 더 심한 짓이란 게 뭔지 모르겠네. 그래봤자 뭐. 뽀뽀 좀 하고 좀 쓰다듬고. 아, 뭐 옷 속으로 손 집어넣고 좀 어루만지긴 했네. 조그만 게 얼마나 피부가 고운지. 그게 전부야. 됐냐? 근데 금요일에 또 오늘처럼 돈도 안 가져오고 물건도 안 가져오면 진짜 확 깔아 눕히고 홀랑 잡아먹을 거야. 사내애라도 워낙 예쁘니까. ”

 

 

베르닌은 하마터면 보드카 병으로 투레츠키의 머리를 냅다 내리칠 뻔 했다. 투레츠키는 방금 자신이 죽음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베르닌에게 다시 술을 권했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심호흡을 했고 보드카를 한 잔 더 받아 마신 후 다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투레츠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투레츠키가 아쉬워했다. 보드카가 아직 좀 남아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 친구야, 성공을 빌어. 안되면 사표 내고 나랑 동업을... ”

 

“ 어 그래. 어쨌든 고마워. ”

 

“ 금요일에 와. 어떻게 됐는지 얘기해 줘. 아까 걔도 올 거니까 소개시켜 줄게. ”

 

“ 어, 아니 됐어. 나 갈게. 장사 잘 해. ”

 

 

투레츠키는 손을 흔들어 주었지만 사무실 밖으로 따라 나오지는 않았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보랴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왕재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사프란인지 뭔지를 넣고 부야베스인지 나발인지를 만들어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갔다.

 

 

 

*    *    *

 

 

 

월요일에 베르닌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했다. 1번은 이미 물 건너갔고 3번은 그와 같은 단추눈으로서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2번은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즉 전설의 서무가 가르쳐준 방법들은 다닐 베르닌 같은 책상물림에게는 무용지물일 뿐이었고 그에게 남은 거라곤 무시무시한 감사관과의 면담과 징계, 그리고 잘리는 일 뿐이었다.

 

10시 반에 감시분석부장이 그를 불렀다. 베르닌은 혹시라도 담당 부서장이 자신을 위해 조금이라도 힘을 써주려나 싶었지만 부장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었다.

 

“ 감사관이 얘기하면 허튼 소리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내려와. 괜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직원들 팔지 말고.

 

“ 부장님, 그런데 전 정말 억울합니다. 이건 전부 선배님들 업무인데 왜 제가 이렇게... ”

 

원래 조직 생활이란 게 그런 거야. 우리도 다 초창기엔 그랬어. 그나마 자네는 신참이니까 감사관들도 심하게 징계 안 줄 거야. 그리고 지적받아도 최종 징계는 우리 내부에서 내리는 거니까 사정 봐서 조금 감해 줄 거야. 감봉까진 어쩔 수 없겠지만. 다 이러면서 배운다 생각해. ”

 

 

베르닌이 이번 감사에서 배운 거라곤 조직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수밖에 없다는 암담한 사실 뿐이었다. 동료 직원들은 모두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특히 감사 지적 업무 담당자인 두블린스키와 불라노프는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았는지, 아니면 베르닌과 마주치기가 껄끄러웠는지 일찌감치 당일 출장을 나가버린 후였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억울했던 나머지 그는 잠시 투레츠키의 2번 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차곡차곡 모아놓은 물증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있다 해도 동료들을 팔아넘길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러느니 그냥 자기가 뒤집어쓰는 게 낫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눈앞이 캄캄했고 심장이 답답하게 죄어왔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울렁거렸다.

 

 

마침내 11시가 되었다. 베르닌은 어깨를 떨어뜨린 채 천천히 3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아주 잠깐 그는 국장실로 들어가 스페호프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국장은 특별 감사 기간 내내 쥐죽은 듯 조용했고 심지어 주간회의조차도 진행하지 않았다. 부서장과 동료들도 그를 외면하는 판에 1인자인 국장이 그에게 신경을 써줄 리가 없었다. 오히려 더욱 앞장서서 그를 늑대 밥으로 던져줄 것이다.

 

 

감사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는 노크를 한 후 힘겹게 문을 열었고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갔다. 감사장 내부 배치가 좀 바뀌어 있었다. 책상이 하나밖에 없었다. 카마로프스키와 아모소프는 양쪽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 책상이 떡하니 놓여 있고 발렌티나 푸카레바가 예카테리나 여제처럼 버티고 앉아 있었다. 앞선 면담자였던 정보부서 서무가 눈물을 글썽이며 서류 뭉치를 쥐고 베르닌의 곁을 지나 뛰쳐나갔다. 푸카레바가 우렁차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음! 당신 이름과 소속은?

 

“ 다닐 베르닌... 감시분석부 서무입니다. ”

 

“ 흠, 다닐 베르닌. 아, 감시분석부. 이번 감사에서 제일 문제 많은 부서! 당신이 그 베르닌이군! 먼저 그 77년 사업 건인데! ”

 

 

푸카레바는 필기체로 휘갈겨 쓴 서류를 좍 펼치더니 수십 개의 지적사항들을 줄줄이 읽어 내려갔다. 짱짱하게 틀어 올린 머리 때문에 더욱 더 치켜 올라간 무시무시한 새파란 눈으로 베르닌을 똑바로 쏘아보더니 천둥처럼 쩡쩡 울리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짓이군! 젊은 요원이 벌써부터 이런 문제를 일으키다니! 이건 여기 지국뿐만 아니라 연방 전체 보안위원회에 크나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 문제야! 당신 같은 작자는 그냥 잘라서도 안 되고 완전히 블랙리스트에 올려서 다시는 공직에 발을 못 들여놓도록 단단히 맛을 보여줘야...

 

 

베르닌이 현기증으로 기절하려는 순간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푸카레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야! 중요한 면담 중에! 꺼져!

 

 

아랑곳없이 똑똑 하는 소리가 두 번 더 난 후 문이 열렸다. 베르닌은 어질어질한 가운데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근사한 검은색 코트에 엷은 푸른색의 캐시미어 스카프를 느슨하게 두르고 희미하게 광이 나는 가죽 부츠를 신고 부드럽게 흐트러진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왕재수가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낯선 외부인의 출몰에 놀란 카마로프스키와 아모소프가 ‘당신 누구야! 여긴 출입 금지야!’ 하고 소리치며 그를 내쫓으려고 했을 때 푸카레바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 발렌티나 누나! ”

 

“ 어머나, 미셴카! 정말 너니?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어떻게 여길! 오오, 이게 얼마만이야! ”

 

 

푸카레바가 책상 앞으로 뛰쳐나왔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의자도 쿠당탕 넘어뜨리고 구두도 한 짝 벗겨졌다. 왕재수가 잽싸게 푸카레바의 팔을 붙잡고 허리를 부축해 주었다. 푸카레바는 왕재수를 꼭 껴안고 뺨과 입술에 뽀뽀를 퍼부으며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유, 미셴카! 진짜 반갑네!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

 

“ 저 작년부터 여기 와 있어요. 여기 시립극장 감독으로... ”

 

“ 어머나, 시골로 유배 보냈다더니 그게 여기였구나. 나쁜 작자들. 아무 죄도 없는 비둘기 같은 너를 모함해서 감옥 보내고 고문하더니... 그때 너 구해주려고 우리가 서기장한테 얼마나 탄원서를 냈는데. ”

 

“ 덕분에 가석방됐어요. 누나 덕분이었군요. 고마워요. ”

 

 

왕재수가 푸카레바를 자기 품에 와락 껴안고 다시 뽀뽀를 해 주었다. 푸카레바는 그야말로 정신을 못 차렸다. 황홀한 눈빛으로 왕재수를 올려다보면서 뺨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 어린 것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그때 너 모함한 놈들 지금 다 작살났어. 알지? 게르만이 한 놈은 시베리아 보내고 한 놈은 숙청, 다른 놈은... ”

 

“ 들었어요. 근데 그러면 뭐해요, 전 여기 시골에... ”

 

“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너 같은 애를 이런 시골바닥에 처박니. 너 몸은 괜찮아? 어머나, 살 빠졌네. 얘 마른 것 좀 봐. 얼굴도 더 하얘지고. ”

 

“ 저 좀 아팠어요. 고문당해서... ”

 

“ 나쁜 놈들! 그 짓거리 가담한 놈들 다 잘라버려야 돼! 걱정 마, 누나가 복수해 줄게. 그쪽 다 특별 감사 걸어버려야지! 그런데 여긴 웬일이니? ”

 

“ 아, 저 뭔가 서류 갱신을 해야 한다고 해서 왔어요. 근데 현관에 보니까 무슨 감사 기간이라고 종이가 붙어 있는데 거기 누나 이름이 있더라고요. 등록부서에 물어보니까 누나 맞는 거 같아서 얼굴이라도 보려고 올라왔어요. ”

 

“ 잘했어, 잘했어! 어머, 어쩜 너무 좋다. 그때 크레믈린 축제 때 보고 일 년 만이네. 살 빠졌어도 여전히 멋있구나. 그래, 여기 극장 감독이라고? 혹시 오늘 무대 올라가? 오늘 극장 가면 너 추는 거 볼 수 있는 거야? ”

 

“ 누나, 저 지금 춤 못 춰요. 그때 고문당한 거 다 안 나아서 못 춰요. ”

 

뭐야! 이 몸이 어떤 몸인데!!! 감히 이 아름다운 다리에 손을 대서 춤을 못 추게 만들었다고! 정말 용서가 안 되는구나! 수용소부터 시작해서 그쪽 교화 담당자들 전부 다 감사 걸어서 잘라 버릴 거야! ”

 

 

푸카레바는 발을 구르면서 화를 냈다. 심지어 흐느껴 울기까지 했다.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멍하게 서 있었다. 카마로프스키와 아모소프도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다가 자리에 앉아 서류철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왕재수가 푸카레바를 어린애 어르듯 안아주고 뺨에 키스를 하고 달랬다.

 

“ 아니에요, 누나. 괜찮아요. 저 금방 다 나을 거예요. 근데 지금 뭐하시던 거예요? 쟤는 왜 부르셨어요? ”

 

“ 아, 오늘이 감사 마지막 날이거든. 징계 건 때문에. 아주 악질인 녀석이 있어서 추궁하고 있었어. 당신! 뭘 그렇게 넋 놓고 있는 거야! 당장 똑바로 못 서!

 

 

쩌렁쩌렁한 호통에 베르닌은 퍼뜩 놀라 차려 자세로 섰다. 왕재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푸카레바의 손을 꼭 잡았다.

 

 

“ 어, 이상하네. 쟤 완전 말단인데. 쟤 아무 것도 몰라요. 쟤가 뭘 할 줄 안다고 징계를 해요? ”

 

“ 네가 몰라서 그래. 저 인간이 감시분석부 소속인데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면서 별의별 비리를 다 저지르고 절차도 다 무시하고 온갖 잘못을 저질렀단다. 공무원 자격이 없는 놈이야. 잘라버려야 해. 누나가 하는 일이 그런 거잖니. ”

 

“ 아니에요, 누나. 저 쟤 알아요. 맨날 허드렛일만 하는데. 무슨 서무인지 뭔진데요, 간판에 페인트칠하고 시계 건전지 갈고 우편 심부름이나 하는 앤데 무슨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잘못을 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쟤 우리 집에서 집안일 해주는 앤데. 맨날 아침저녁으로 저 데려다주고 밥해주고 청소해주는 게 일이에요. 누나 뭐 잘못 아는 거 아니에요? ”

 

“ 어, 하지만... 여기 분명히... 담당자... ”

 

“ 쟤 담당은 허드렛일하고 배추밭 관리, 고양이 밥 주기랑 바퀴벌레 퇴치, 그리고 제 집사 노릇이에요. 분명히 그 종이에 뭔가 잘못 썼을 거예요. ”

 

“ 하긴 2년 전에 입사했다고 했으니 책임을 지래야 질 수도 없었겠네. 흠... 유르카, 감시분석부에 전화해서 부장 올라오라고 해. ”

 

“ 누나, 아직 한참 남은 거예요? 저 배고픈데. 오랜만에 누나랑 만났는데 누나는 일만 하고... 누나랑 맛있는 것도 먹고 차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싶은데...

 

“ 아유, 우리 미셰츠카. 어쩜 너는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하니. 네가 이러면 누나가 일을 할 수가 없는데... ”

 

“ 에이, 누나.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서요. 대충 그만 끝내고 저랑 나가면 안돼요? 누나 기름진 거 좋아하시잖아요. 저희 극장 근처에 항아리 닭고기 식당 있는데요, 무지무지 맛있다고 형님누나들이 엄청 좋아해요. 거기 가서 점심 먹고 저랑 차 마시고 산책 가요. 숲길 산책로가 근사해요. ”

 

“ 그래그래, 그러자. 어차피 감사도 다 끝났는데 뭐. 같이 가서 점심 먹고 그간 회포라도 풀자. ”

 

“ 저, 발렌티나 이바노브나. 감시분석부장을 올라오라고 할까요? ”

 

 

카마로프스키가 망설이며 묻자 푸카레바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됐어. 어차피 여긴 피라미 조직이니까. 그냥 아까 면담한 데까지만 하지 뭐. 대충 지적사항 정리해서 공문 때리고 오늘 철수하지. 자네들은 서류 정리하고 오후에 먼저 모스크바 올라가. 난 오랜만에 만난 친구랑 얘기 좀 하고 저녁에 갈 테니까. ”

 

“ 그럼 이 베르닌이란 작자는... ”

 

아유, 그냥 놔둬. 목록에서 지워버려. 우리 미셴카 허드렛일 해주는 애라잖아. 가뜩이나 우리 미셴카는 왕자님처럼 모셔줘야 하는데, 이런 시골에 와서 힘들 텐데 저런 애라도 붙여줘야지. 당신 그만 들어가 봐. 앞으로도 얘 뒷바라지 잘하고! ”

 

“ 네, 네! 안녕히 가십시오! ”

 

 

베르닌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뒷걸음질쳐서 나왔다. 문 너머로 푸카레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럼 너 현관에서 기다릴래? 누나는 이거 서류만 좀 정리하고 코트 입고 나갈게. 한 10분 걸릴 거야. ”

 

“ 네! 제 차로 가요. 시동 걸어놓을게요. 그래야 누나 따뜻하죠. 주차장으로 천천히 나오세요. ”

 

아유, 정말 우리 미셴카는 매너가 최고라니까. 곧 갈게.

 

 

 

*    *    *

 

 

 

베르닌은 사무실로 돌아가는 대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으로 갔다. 찬바람을 쐬니 정신이 좀 들었다. 놀랍게도 왕재수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극장에서 내준 임원용 차라 좋은 차였고 워낙 쓰지를 않아 반짝반짝했다. 전에 한번 나무에 들이받았다고 했지만 수리를 했는지 멀쩡했다. 왕재수가 내려와서 막 차에 타려는 것을 베르닌이 붙잡았다.

 

 

“ 야, 너 어떻게 가려고 그래? 운전 못하면서. 차는 어떻게 가져왔어? ”

 

“ 나 운전할 줄 알아! 서툴러서 그렇지. 항아리 닭고기 가게까지는 몰고 갈 수 있어. 눈도 다 녹았잖아. ”

 

“ 어... 그래. 근데 진짜 고마워. ”

 

“ 뭐가? ”

 

“ 저... 그 감사. 너 아니었으면 나 잘렸을지도 몰라. 고마워. ”

 

“ 설마 발렌티나가 너 잘랐겠냐. 그 누나 얼마나 착한데. ”

 

“ 너는 어떻게 모스크바 특별 감사관을 아는 거야? 고위직인 거 같던데. ”

 

“ 아. 나 볼쇼이에도 있었잖아. 크레믈린 행사에도 자주 가고. 우리 아저씨가 파티 자주 열어서 거기서 만났어. 저 누나가 발레 무지 좋아하거든. 나한테 엄청 잘해줬어. 공연할 때마다 보러 와서 꽃도 주고. ”

 

“ 그랬구나... 너 정말 등록 때문에 온 거야? ”

 

“ 아, 지난주부터 리자가 계속 전화하더라고. 등록 갱신해야 한다고. 바빠서 미루고 있다가 오늘 온 거야. 온 김에 누나도 보고. ”

 

“ 어, 그래... 고마워. ”

 

“ 자꾸 뭐가 고맙다는 거야? 그만 들어가. 추운데 셔츠 바람으로 밖에서 뭐하는 거야! 게다가 그 손목토시! 너 정말 구제불능이야! 그거 하고 돌아다니지 말랬잖아! 아휴 촌스러워. ”

 

“ 너 그때 토요일에... ”

 

“ 토요일 뭐! ”

 

“ 그때 투레츠키랑 나랑 하는 얘기 들었던 거야? 나 감사 받아서 잘릴지도 모른다는 얘기? 그래서 와준 거야? ”

 

“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나 감사가 뭔지도 몰라. 누나 보러 들어온 건데 마침 네가 거기 있어서 방해되니까 빨랑 누나랑 밥 먹고 싶어서 둘러댄 거야. 그만 가! ”

 

“ 운전도 못하는데, 팔 근육 미워져서 운전하면 안 된다면서 차 가지고 오고... 너 항아리 닭고기 느끼해서 안 먹잖아. 근데 그 여자랑 그 식당 간다고 하고... 시골이라 꼴도 보기 싫다면서 산책로 근사하다고 하고... ”

 

“ 나야 싫지! 그래도 발렌티나 누나는 원래 시골이 고향이라 이런 거 좋아한단 말이야. 그리고 차는... 나도 가끔 운전 연습하는 거야! ”

 

“ 어, 그래... 그래. 고맙다. ”

 

“ 얜 자꾸 왜 뜬금없이 고맙대. 빨랑 들어가, 그 손목토시 좀 내버리고! ”

 

“ 저기... ”

 

“ 뭐, 또! ”

 

“ 거기.. 투레츠키... 거기 드나든지 오래됐어? ”

 

“ 어휴, 또 감시꾼 행세야! 그래, 몇 달 됐다! 나도 숨 좀 쉬고 살자! 나 거기서 아무 짓도 안했어. 그냥 외국 신문이랑 잡지 좀 보고 좋은 레코드 같은 거 들어오면 한두 개 들어보는 게 전부야! 그걸로 또 너네 국장한테 일러바치기라도 할 거야? ”

 

“ 아니, 아니야... 나도 갔었는데 뭐... 그게 아니고. 너 저기... 앞으로는 거기 혼자 가지 마. 나랑 같이 가든지 바이올린 아저씨라도 불러서 같이 가. ”

 

“ 아니 왜! 아 귀찮아! 이제 신문도 혼자 못 보러 가게 하니! ”

 

“ 그게 아니고... 그 투레츠키, 걔가 좀 손버릇이 나쁜 거 같아. 저.. 그때도 너한테 집적대고... ”

 

“ 뭐, 뽀뽀한 거? ”

 

그거 뽀뽀 아니었잖아... 바이올린 아저씨가 하는 것처럼 키스했잖아. 다 들었어. 옷 속에 손도 집어넣었다며. 그 사람 위험해. 너한테 흑심 있는 것 같았단 말이야. 너 조심해야 돼. 나쁜 짓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

 

“ 아유, 진짜 시어머니가 따로 없어! 하여튼 알았어! ”

 

“ 아니면 너도 좋아서 받아주는 거야? 그런 거면 미안... 나 그런 쪽은 진짜 잘 몰라서... ”

 

아니야! 나도 걘 싫어! 나도 취향이란 게 있어! 그 자식 너무 얍삽하게 생겨서 완전 내 취향 아니야! 뺀질거리고. 보랴는 괜찮은데. 멋있고. ”

 

 

베르닌은 대체 이놈의 취향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발렌티나 푸카레바가 나왔다. 왕재수가 차 문을 열어주고 깍듯하게 푸카레바를 앉혀준 후 운전석에 탔다. 왕재수가 운전석에 앉다니 정말 낯선 광경이었다. 심지어 푸카레바는 빨간 립스틱까지 새로 칠하고 있었다!

 

 

왕재수의 차가 미끄러져 나간 후 베르닌은 배추밭 쪽으로 갔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시계를 보니 11시 반이었다. 사무실로 돌아갈까 아니면 좀 이르지만 구내식당에 내려가 점심을 먹을까 하다가 그냥 바닥의 넓적한 돌멩이 위에 걸터앉았다. 주변을 힐끔거리던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베르닌을 발견하고는 모른 척하며 슬며시 다가왔다. 베르닌은 호주머니를 뒤져서 아침에 먹으려고 쑤셔 넣었던 샌드위치를 꺼냈고 소시지만 발라내서 던져주었다.

 

고양이가 소시지를 먹는 동안 베르닌은 손목토시를 떼어내 배추밭 한켠에 집어던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4번 방법이 있었던 거였다. 그런데 또 곰곰 생각해보니 4번은 3번과 겹치는 것 같기도 했다. 왕재수야말로 미모 90%에 노력 10%가 분명했다.

 

 

이 모든 것이 어쩐지 불공평했지만 어쨌든 징계 위기에서 벗어났으므로 베르닌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금요일에는 반드시 휴가를 내고 왕재수가 좋아하는 생선찜과 보르쉬와 사과파이를 준비하리라 마음먹었다. 필요하면 만두도 빚어서 찌고 바이올린 깡패도 불러서 거한 저녁을 대접하기로 했다. 무가당 초콜릿과 홍차도 필수로 준비할 것이다. 맛있는 음식과 바이올린 깡패가 있다면 왕재수도 그 망나니 같은 투레츠키의 소굴에 가지 않을 테니까. 앞으로도 못 가게 막을 것이다! 하여튼 그놈은 위험한 놈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애를 얼굴 예쁘다고 추행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친 김에 암거래 현장을 고발하고 잡아넣어버릴까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보드카도 나눠마셨고 동갑인데다 친구까지 먹었으니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그건 포기하기로 했다. 어쨌든 바냐 투레츠키는 전설의 서무였으니까.

 

 

   

 

 

FIN

2015. 2. 27 ~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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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는 13편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쓴 건 14편까지인데, 이제 심기일전해 주말부터는 본편을 다시 써보려는 중이다. (그래도 스트레스 받으면 또 서무 시리즈 쓰고 있겠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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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편에 등장하는 바냐 투레츠키는 이제껏 이 시리즈에 나왔던 인물들과는 좀 다른 유형이다. 이 인물에 대한 묘사나 접근방식은 사실 러시아 문학에서는 낯설지 않은 뺀질이 사기꾼 이야기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 소련 시절 일리프 & 페트로프의 소설도 그렇고 이런 타입 인간들이 종종 나온다. 일종의 오마쥬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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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나오는 특별 감사와 베르닌의 고초는 상당 부분 내가 예전에 겪었던 일들에서 가져왔다. 물론 소설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변형되긴 했지만. 투레츠키가 제시하는 3가지 방법도 일부는 실화. 물론 2번의 뇌물이니 동료 팔아넘기기니 하는 건 적어도 내가 겪은 것은 아니다, 내가 다니는 동안 우리 회사에서 벌어진 것도 아니고. 하지만 어디든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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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냐 투레츠키의 암시장을 찾는 왕재수의 이야기는 좀 웃기게 변형되긴 했지만. 어쨌든 본편 우주에서도 미샤는 암시장이나 지하출판계를 자주 이용한다. 특히 지하출판, 자가출판 문학들 쪽에는 조예가 깊다. 발레학교 시절부터 비밀문학 서클에 드나들곤 한다.

투레츠키의 암시장은 물론 공산주의/사회주의 체제인 소련에서는 불법이다. 걸리면 잡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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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편 마무리에서 베르닌이 금요일에 휴가를 내겠다고 했는데.. 그게 어떻게 될지는 13편으로... 그건 다음주에..

그럼 이제 힘을 내서 본편으로 돌아가 왕재수 대신 진지한 미샤를 데리고, 그리고 고지식한 책상물림이 아닌 능력있고 유들유들한 다닐 베르닌을 데리고 다시 글을 써봐야겠다.

 

댓글은 언제나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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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