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무의 슬픔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series : 서무의 슬픔2015. 9. 11. 08:20
금요일이라 언제나처럼 서무 시리즈.
이번 편도 이른바 우수한 단추 시리즈에 속한다. 단추와 똑같이 생긴 드미트리 베르닌이 활약한다 :)
지난 31편에서 협박편지와 죽은 비둘기를 받고 공포에 휩싸인 왕재수와 단추!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러 달려온 드미트리. 과연 왕재수는 수요일 신작을 무사히 올릴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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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다차'는 러시아어로 '별장'이란 뜻이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다차란 각별한 공간이다. 여름 휴가를 보내기도 하고 주말에 잠깐씩 가서 텃밭도 가꾸는 곳인데 소련 시절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다차는 우리가 '별장' 하면 떠올리는 호화로운 부자들의 전유물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물론 노멘클라투라 특권층의 별장이야 근사하고 호화로웠지만 일반 인민들의 오두막 같은 다차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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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재미있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밤, 몇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신작 공연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순간, 왕재수는 침실에서 협박편지와 새의 사체를 발견하고... 베르닌은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와 함께 그를 경호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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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2
서무의 슬픔
-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드미트리가 방울을 달고 돌아온 후 그들은 잠시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드미트리는 스페호프가 전에도 왕재수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했던 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베르닌은 돈키호테 공연 방해와 독사과, 시계탑 화재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에는 담담하게 듣던 드미트리도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일단 아침에 협박범이 다시 나타나리라는 예상에는 둘 다 동의했다.
밤이 늦었기 때문에 그들은 교대로 눈을 붙이며 보초를 서기로 했다. 드미트리는 베르닌에게 피곤해 보이니 먼저 자라고 했다. 베르닌은 평소 같으면 사양했겠지만 며칠간의 피로가 쌓여 너무 졸렸던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소파로 기어 올라갔다. 드미트리는 침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침실과 거실 양쪽을 모두 볼 수 있는 위치였다. 편안한 자세로 서 있었지만 왕재수와 베르닌 모두를 지켜보면서 창문이나 현관문, 혹은 위층에서 수상한 소리가 나면 즉시 움직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무거운 잠에 빠지면서 베르닌은 ‘나도 현장요원 연수 제대로 받아놓을걸...’ 하고 아쉬워했다.
베르닌이 눈을 떴을 때 드미트리는 여전히 침실 문 앞에 있었다. 부엌에 있던 식탁 의자를 갖다놓고 거기 앉아 있었다. 왕재수는 침대 가장자리에 붙어서 한쪽 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6시 반이었다.
“ 왜 안 깨웠니. 너 졸리겠다. 이제 내가 보초 설게. ”
“ 아, 괜찮아. 나 원래 적게 자는 편이라서. 어제 커피랑 차를 좀 많이 마셨더니 잠이 안 와. 너 더 자. ”
“ 아니야, 난 이제 다 깼어. 저, 미샤는 잘 자던? 중간에 안 깨고? ”
“ 응. 많이 피곤했나봐. 좀 더 자게 놔두자. ”
베르닌은 세수를 한 후 찻물을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잠깐 위층에 가서 상황을 살피고 오기로 했다. 드미트리가 주의를 주었다.
“ 현관문 아래에도 방울 달아놨거든. 소리 날 거야. 놀라지 말고 그냥 끈 살짝 들어 올리고 들어가. ”
드미트리의 말대로 문 아래에 방울이 달려 있었다. 문과 똑같은 색깔의 어두운 실에 달려 있어서 의식하고 찾지 않는 한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았다. 자물쇠를 열고 문을 밀자 딸랑딸랑 하고 소리가 났다. 아래층에서도 들릴까 하고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요란한 소리였다. 실을 들어 올리자 소리가 멈추었다.
카드는 와 있지 않았다. 창문은 안에서 잘 잠겨 있었고 역시 방울이 설치되어 있었다. 수상한 기색은 없었다. 베르닌은 집안을 한 바퀴 돈 후 냉장고에서 사과와 오렌지를 꺼내고 침실로 가서 나이트 테이블 위에 있는 수첩을 집었다. 왕재수가 매일 극장이나 공연과 관련해 떠오른 아이디어를 메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옷장에서 왕재수가 입을 옷을 꺼냈다. 그는 패션이라면 아무 것도 몰랐으므로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스웨터와 셔츠, 바지와 양말을 끌어 모았다. 그러다가 왕재수가 스카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스스로 뿌듯해하며 제일 먼저 보이는 붉은색 스카프도 한 장 집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드미트리가 부엌에서 부체르브로드를 만들고 있었다. 가지런하게 자른 흑빵 위에 햄과 치즈, 오이, 토마토 따위를 각각 올려놓았는데 평범한 부체르브로드도 드미트리가 만들자 굉장히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베르닌이 가져온 사과와 오렌지를 보자 반가워했다.
“ 어, 과일 잘 가져왔구나. 네 냉장고에 먹을 게 별로 없어서... 인스턴트 보르쉬하고 냉동 펠메니밖에 없더라고. 참, 닭도 한 마리 있더라. 평소 같았으면 그걸로 항아리 닭고기라도 만들면 좋을 텐데 지금은 요리에 신경 쓸 여유는 없지. 그렇다고 몸 관리하는 애한테 인스턴트 데워주고 냉동 펠메니 삶아주긴 좀 그러니까. ”
“ 응, 요즘 저 녀석이 계속 늦게까지 일하니까 지켜보느라고 나도 장 볼 시간이 없었어. 근데... 쟤 그 보르쉬랑 펠메니 잘 먹어. 아침이야 가볍게 먹으니까 좀 그렇지만. 있다가 저녁에 그거나 해줘야겠다. ”
“ 엥, 그 인스턴트 보르쉬를 먹는단 말이야? 진짜 의외네. ”
드미트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마카롱과 프랑스 홍차도 마다하던 녀석이 인스턴트라니!’ 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거실로 나와서 부체르브로드와 커피, 사과로 이른 아침을 먹었다. 둘 다 홍차를 더 좋아하기는 했지만 잠이 모자라니 강한 카페인이 필요했다. 샌드위치와 사과를 다 먹고 남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왕재수가 뒤척이더니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베르닌은 얼른 곁으로 갔다.
“ 더 자, 아직 일곱 시밖에 안 됐어. ”
“ 극장 가야 되는데. ”
“ 오늘 극장 문 닫았잖아. 소독한다고. ”
“ 왜 이렇게 사방에 불을 다 켜놨어... 눈 아파. 누구랑 얘기하고 있었어? ”
베르닌은 왕재수가 아침잠도 많고 자다가 깨면 정신을 차리는데 한참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옆에 앉아서 아이를 어르듯이 상냥하게 말했다.
“ 너 아직 잠 다 안 깨서 생각 안 나는구나. 어젯밤에 드미트리 왔잖아. ”
“ 드미트리가 누구야? ”
왕재수가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베르닌의 어깨 너머로 거실을 보더니 금세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막 욕을 하려다가 갑자기 생각에 잠긴 눈이 되더니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 맞다. ”
“ 밤엔 별 일 없었어. 너네 집에도 갔다 왔는데 아직 아무 기색도 없고. 그러니까 더 자렴. 극장 쉬는데 오늘이라도 많이 자야지. ”
“ 싫어. 기분 나쁜 꿈만 꿨어. 바퀴벌레 쥐 곱등이 나오고... 뱀 껍질도 나오고 엄청 무서웠어. 일어날래. ”
침대에서 내려온 왕재수는 드미트리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고 곧장 욕실로 갔다. 베르닌이 뒤따라가 셔츠와 바지, 새 칫솔을 가져다주자 귀찮아하면서 받아들더니 잠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 으악, 너 왜 그래! ”
“ 뭐가? 씻으려고 그러는데. ”
“ 여기가 너네 집이냐!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
왕재수는 거실을 힐끗 보더니 입안으로 욕을 하면서 욕실로 쏙 들어갔다. 문도 탕 닫았다. 그때 드미트리가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 문 다 닫으면 안 돼! 좀 열어놓고 씻으라고 해! ”
“ 어, 왜? ”
“ 욕실에도 창문 있단 말이야. 잠가놓긴 했지만 그래도 조심해야지! ”
베르닌은 할 수 없이 욕실 문을 살짝 밀었다. 금세 열렸다. 왕재수는 수용소에서 고생을 해서 그런지 좁은 곳에 처박히는 것이나 문을 잠그는 것을 꺼렸다. 더운 물을 받아놓고 욕조에 들어가 있던 왕재수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 왜? ”
“ 창문으로 누가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문 잠그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조금만 삥긋 열어놓을게. ”
“ 어휴, 진짜 피곤하게 구네. 난 또 너도 씻으려고 그러는 줄 알았지. ”
“ 으악, 내가 왜! 난 사내자식이랑 같이 목욕하는 습관 없거든! ”
“ 그럼 여자랑은 있어? ”
“ 어... 으악, 없어! 나 변태 아니야! 그런 버릇 없어! ”
“ 웬 변태 타령이람. 침대가 부서지게 뒹굴고 나면 잠들거나 씻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고, 상대가 맘에 들었으면 같이 욕조에 들어가는 건 인지상정인데. 네가 그러니까 여자가 안 생기지. 불쌍한 녀석. ”
“ 헉... 제발 그런 말은 바이올린 아저씨하고만 하란 말이야! ”
“ 근데 이 비누 왜 이렇게 거품이 안 나? 엄청 싸구려 비누구나. 스폰지도 얼마나 오래 썼는지 다 해졌네. ”
“ 야, 다 너처럼 외제 비누 쓰는 줄 아냐! 여기 사람들 90%는 그 비누 쓰거든. 그리고 목욕 스펀지는 가게 갈 시간이 없어서 못 샀어. 찜찜하면 그냥 손으로 씻어. ”
“ 가뜩이나 거품도 안 나는데... 근데 너 샴푸 안 써? 왜 안 보이지? ”
“ 어, 난 그냥 비누로 감아. ”
“ 으윽... ”
갑자기 베르닌은 자기가 왜 욕조에 앉아 있는 왕재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가뜩이나 드미트리에게도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란 얘기를 정색하며 부정해놓았는데 괜히 의심을 살 것 같아서 급하게 돌아 나왔다.
다행히 드미트리는 왕재수가 먹을 아침을 차리느라 그들의 말을 못 들은 것 같았다. 드미트리는 사과와 치즈를 얹은 부체르브로드 두 개와 가지런히 자른 오렌지, 우유가 담긴 컵을 쟁반에 예쁘게 담아 놓고는 베르닌에게 가스렌지를 가리켰다.
“ 찻물 다시 올려놨어. 지금 우리면 차 식어 버릴까봐. 나 이제 위층에 가볼게. 새벽은 지났고. 네가 좀 전에 갔을 때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고 했지? 그 사이에 왔다 가지 않았다면 잠복해 있다가 어떤 놈인지 붙잡을 수도 있을 거야. ”
“ 어... 혼자 가도 괜찮겠어? 나랑 같이... 아, 안되겠다. 미샤랑 같이 있어야 하니까. ”
“ 그래. 너 절대로 미하일 곁을 떠나면 안 돼. 만의 하나 그놈이 여기로 올 수도 있잖아. 기억하지? 무슨 일 생기면 크게 소리 지르는 거. ”
“ 그래. 참, 내 전화번호 줄게.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쟤네 집 번호도 적어주는 게 좋겠지? ”
“ 아, 괜찮아. 둘 다 외웠어. 나 암기력 뛰어나잖아. 그럼 갔다 올게. 적어도 10시까지는 있어볼게. 카드에서는 ‘아침’이라고 했는데 되게 애매한 시간이란 말이야. ”
드미트리가 나간 후 베르닌은 다시 한 번 문과 창문을 확인했다. 커튼을 열어젖히고 바깥도 샅샅이 살폈다. 안뜰과 바깥 도로 쪽으로 조깅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하지만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같은 아파트 주민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아침이 되니 밝아서 그런지 간밤의 불안감과 공포도 많이 가라앉았고 왕재수의 말대로 별 것 아닌 장난에 과민 반응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왕재수는 생각보다 금방 씻고 나왔다. 바지만 입고 나오더니 셔츠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투덜댔다.
“ 이거 여름 셔츠잖아. ”
“ 어, 그런가? 긴 소매라서 몰랐어. 스웨터도 가져왔으니까 그거 껴입어. 내가 스카프도 챙겨왔어. 너 맨날 그런 걸로 멋 부리잖아. ”
“ 셔츠는 하늘색인데 스웨터는 오렌지색이고 스카프는 빨간색이잖아! 심지어 바지는 회색... ”
“ 으응... 그러고 보니 색깔이 다 다르구나. 손에 잡히는 거 가져왔더니. ”
“ 야, 사람을 무지개로 만들어놓고 ‘색깔이 다르구나’로 끝날 문제냐 이게! 너 진짜 심각하다. 이 정도로 패션 감각이 엉망인줄은 몰랐어. ”
“ 으윽, 지금 패션 타령할 때가 아니잖아. 그래봤자 전부 프로도 아르마나 에르미일 거 아냐! 추우니까 빨리 입어. 요즘 난방도 조금밖에 안 틀어줘서 추운데. 이맘때 감기 많이 걸린단 말이야. 넌 폐렴 때문에 기관지도 약해졌잖아. ”
왕재수는 툴툴거리면서도 춥긴 했는지 알록달록한 옷을 모두 주워 입었다. 그래도 오렌지 스웨터에 빨간 스카프만은 도저히 맬 수 없다면서 집어던졌다. 베르닌은 그를 소파에 앉힌 후 쟁반을 가져다주고 차를 우려다 주었다.
“ 먹어. 어제도 저녁 거르고 다 뭉개진 양배추 롤 하나 먹었잖아. ”
“ 안 먹어, 그 자식이 만든 거. ”
“ 너 다시는 드미트리에 대해 불평하지 마. 걘 한숨도 안 잤어, 계속 너 지키고 있었단 말이야. 이 샌드위치도... 너 몸 관리한다고 일부러 가벼운 재료만 올렸잖아, 저지방 흰 치즈에 사과에. 이거 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잖아. 오렌지랑 우유도 아침에 곧잘 먹으면서. 당장 먹어. 한번만 더 내 앞에서 드미트리 헐뜯고 트집 잡으면 나 정말 화낼 거야. ”
베르닌은 왕재수가 짜증을 내며 ‘네깟 게 화내든 말든!’ 하고 소리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재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말없이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샌드위치 한 쪽을 먹고 나서 오렌지도 반 개 먹고 차도 마셨다. 우유도 훌쩍 다 마셨다. 베르닌은 남은 샌드위치 한 개와 오렌지 조각도 먹으라고 하려다 왕재수가 몹시 풀 죽은 표정이었기 때문에 어쩐지 또 마음이 약해져서 한숨을 쉬었다.
“ 그래도 많이 먹었네. 잘했어. 맛있지? ”
“ 맛없어. ”
“ 엄청 맛있던데. 걔 요리 정식으로 배웠대. 차도 향 좋더라. 파리에서 가져온 거래. 너 원래 프랑스랑 스리랑카랑 영국산 차만 마셨다고 했잖아. ”
“ 향 하나도 안 좋아. 구정물 같아. ”
“ 어휴, 너네 어머니 진짜 너 키우느라 고생하셨겠다! 청개구리! ”
왕재수는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어쨌든 우유도 다 마셨다. 뭘 좀 먹였더니 뺨에도 혈색이 돌고 눈도 반짝거렸다. 오렌지색 스웨터와 하늘색 셔츠 탓인지 얼굴이 더 뽀얗고 어려 보였다. 십대 소년처럼 보였다. 아무리 봐도 괜찮아 보이는데 왕재수가 왜 무지개 타령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무대에 올라갈 때는 레이스랑 금단추 달린 블라우스에 타이츠 따위를 입었던 주제에’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왕재수는 타이츠에 대해 조금이라도 모독을 하면 발칵 화를 냈으므로 베르닌은 입안으로만 투덜거렸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문과 창문을 급하게 훑어본 후 수화기를 들었다.
“ 여보세요. ”
“ 다닐, 나야. ”
드미트리였다.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 어, 무슨 일 있어? ”
“ 세 번째 카드가 왔어. 지금 내려갈게. 미하일 옆에 딱 붙어 있어. ”
* * *
세 번째 카드는 내용이 짧았다. 그리고 하얀색 카드가 아니라 붉은 색지에 검정 글씨로 타이프 쳐져 있었다.
친애하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그 소중한 공연은 올리지 못할 거야.
파랑새도, 천사도, 검은 기사도 소용없을걸.
말을 잘 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입을 연 것은 베르닌이 아니었다. 왕재수였다.
“ 이게 전부야? ”
“ 아니. ”
드미트리가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종이 봉지를 찢어서 안에 있던 내용물을 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왕재수는 순간 전날 밤의 악몽이 되살아났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베르닌은 협박범의 두 번째 선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 도자기 인형이잖아. ”
“ 그냥 도자기 인형이 아니야. ”
드미트리가 딱딱하게 굳어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목이 잘린 인형이지. ”
작은 천사 인형이었다. 기껏해야 베르닌의 약지 길이밖에 되지 않는 장식용 도자기 인형이었다. 흰색 몸체에 날개와 망토는 푸른색과 금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인형이었다. 머리가 완전히 잘려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천사의 목 부분은 들쭉날쭉하게 깨져 있었다.
희미한 오한을 느끼며 베르닌이 물었다.
“ 머리는? ”
“ 없었어. 이것뿐이었어. 카드 옆에 놓여 있었어. ”
“ 어디에? ”
“ 나이트 테이블. 어제랑 반대쪽. ”
“ 언제, 언제 들어왔다 간 거야? 마주쳤어? ”
“ 아니. 그랬으면 붙잡았든지 아니면 몸싸움이라도 했겠지... 네가 돌아오고 내가 올라가기 전에 아침 먹느라 30분쯤 시간이 있었잖아. 그때 왔다 간 것 같아. ”
“ 하지만... 그럼 방울이 울렸을 텐데... 그 소리 꽤 크던데... 대체 어디로 들어온 거야! ”
“ 현관문을 따고 들어왔을 거야. 너희 쪽 요원들 무시한 거 취소할게. 내 생각이 짧았어. 면밀한 놈이야. 조심성이 뛰어난 것 같아. 아니면 새벽에 내가 올라간 걸 숨어서 봤든지. 문에 설치해뒀던 줄을 잘라버렸더라. 게다가 그 줄하고 방울을 보란 듯이 침대 위에 올려두고 갔더라고. 개새끼. ”
드미트리가 욕설을 내뱉으며 이를 갈았다. 엘리트 요원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린 것 같았다. 베르닌은 분노보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서 목 잘린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살펴보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왕재수의 손을 꼭 쥐었다. 손이 굉장히 차가웠다. 평소에는 몸이 뜨거운 편이었다. 그렇게 차디찼던 것은 예전에 얼음이 깨져서 강에 빠졌을 때뿐이었다. 얼마나 놀랐으면 이럴까 하고 걱정이 된 베르닌은 왕재수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의외로 왕재수의 표정은 담담했다. 간밤처럼 겁에 질린 것 같지도 않았고 흥분한 기색도 없었다. 심지어 베르닌의 손에서 깨진 도자기 인형을 빼앗아 찬찬히 살피기까지 했다.
“ 딤카, 이제 어떻게 하지? ”
베르닌은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왕재수를 코즐로프에게 피신시킨 후 드미트리와 함께 위층에 숨어서 범인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답답한 듯 냉장고로 가서 주스 팩을 꺼냈다. 컵에 오렌지 주스를 따라서 단숨에 들이켰다. 베르닌도 갑자기 속이 타고 목이 바짝 말랐다.
“ 주스 남았니? ”
“ 좀 남았어. 줄까? ”
“ 응. ”
드미트리가 빈 컵을 가져와서 남은 주스를 따라주었다. 시원한 주스를 마시고 나니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드미트리는 어느 새 권총을 꺼내 쥐고 있었다. 왕재수와 베르닌을 쳐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 세 번째 카드에서는 협박이 훨씬 노골적으로 변했어. 다음 카드는 안 올 것 같아. 온다 해도 다른 방식이 될 거고. ”
“ 그게, 그게 무슨 뜻이야? ”
“ 다닐, 나 본부에 있을 때 이런 사건 몇 번 봤어. 전형적인 겁주기 수법이지만 특정 목적이 결부되면 물리적인 폭력이 수반되는 경우가 대다수야. 게다가 저 인형. 처음엔 카드만 왔고 두 번째엔 죽은 새가 왔어, 그리고 이번엔 목 잘린 인형이야.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어. ”
“ 난 새가 더 끔찍했던 것 같은데... 진짜 시체였잖아... 잔인했고. ”
베르닌이 날개가 짓이겨진 피투성이 비둘기를 떠올리며 내뱉었다. 드미트리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다닐. 그건 그냥 겉보기만 그런 거야. 상징적인 걸 생각해야지. 비둘기는 그냥 새야. 그런데 이번에는 인형이잖아. 사람 모습을 하고 있어. 게다가 머리가 아예 없잖아. 이제 정말 위험해졌어. 미하일을 더 이상 여기 놔두면 안 될 것 같아. 공연도 마찬가지야. 최악의 경우 정말 공연을 미뤄야 할 수도 있어. ”
“ 안 돼, 공연은 미룰 수 없어. 얘가 그 공연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데. ”
“ 나도 알아. 나도 그 공연 보고 싶어. 난 미하일의 팬이잖아. 하지만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돼. ”
“ 하지만... ”
베르닌은 왕재수 쪽을 쳐다보았다. 공연 취소라니 미쳤느냐고 길길이 날뛸 게 뻔하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장의 카드를 번갈아가며 읽어보고 있었다. 한 손으로 인형을 들었다 놨다를 두어 번 반복했다.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베르닌은 걱정이 되어서 그에게 다가갔다.
“ 너 괜찮아? ”
“ 다닐. 이거 말인데... ”
왕재수가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 몇 초 사이에도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면서 동공이 비정상적으로 크게 확장되고 있었다. 더럭 겁이 난 베르닌이 왕재수의 어깨를 끌어당기려고 했을 때 갑자기 드미트리가 뒷걸음질쳤다. 비틀거리다 마카로프 권총을 떨어뜨릴 뻔 했다.
“ 딤카, 왜 그래! ”
“ 어... ”
드미트리의 눈동자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술 취한 사람처럼 고개를 마구 젓더니 권총을 꽉 쥔 채 쿵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충격에 사로잡힌 베르닌은 드미트리에게 달려가 그를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엄청난 현기증과 멀미가 몰려왔다. 뱃속이 뒤집히는 것처럼 울렁거리더니 걷잡을 수 없이 무거운 졸음이 쏟아지면서 손발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면서 베르닌은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다. 왕재수가 두 팔로 그를 꽉 껴안고 소파로 밀어붙이는 것을 느꼈지만 어쩌면 그건 왕재수가 그의 품으로 넘어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정신이 점점 흐려지는 가운데 베르닌은 ‘다닐! 다닐!’ 하는 낮고 처절한 비명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소리는 곧 뭉개지면서 사라졌고 베르닌도 의식을 잃었다.
* * *
베르닌은 씁쓸하면서도 시큼한 맛을 느끼며 깨어났다. 머리가 쿵쿵 울렸고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점차 정신이 들었을 때 베르닌은 머리가 울리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그의 뺨을 철썩철썩 때리고 있으며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던 이유는 그 누군가가 실지로 그의 귓가에 대고 낯익은 목소리로 고함을 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다냐! 일어나! 정신 차려! 다냐! ”
베르닌은 간신히 눈을 떴다. 드미트리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고개를 흔들었다. 눈을 깜박거려 보았다. 그때 드미트리가 그의 입에 물을 흘려 넣었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정신이 들었다.
“ 정신 드니? ”
“ 어... 으응... “
갑자기 베르닌은 불에 덴 듯 놀랐다.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펄쩍 뛰어 일어나려고 했지만 머리가 너무 무겁고 팔다리에 힘이 없어서 옆으로 쓰러졌다. 드미트리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드미트리의 손에도 별다른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뒤엉켜서 함께 카펫 위로 넘어졌다. 베르닌은 엎드린 채 정신없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 미하일! 미하일! 너 괜찮아? 대답 좀 해봐! 미셴카! ”
아무런 답이 없었다. 드미트리가 목쉰 음성으로 속삭였다.
“ 없어, 다냐... 미하일은 사라졌어. 그놈이 왔다 갔어. 아, 빌어먹을... 보기 좋게 당했어... ”
너무나도 분한 나머지 드미트리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주먹으로 카펫을 내리쳤다.
“ 다 나 때문이야... 얼간이 천치... 예상했어야 했는데... 아... ”
“ 대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우리가... ”
“ 약을 탔어! 그 자식은 미하일 집에만 갔었던 게 아니야. 여기도 왔었던 거야. 어제 이미 왔다 간 게 분명해. ”
“ 하지만... 어디에? ”
“ 그 주스... 다닐, 오렌지 주스! 그거 마시고 나서 어지러웠어. 너하고 내가 같이 마셨잖아. 그 주스 팩, 주둥이가 개봉되어 있었어. 진작 알아챘어야 하는데. 난 네가 마시고 남겨둔 거라고 생각했어. ”
“ 아니야, 나 오렌지 주스 산 적 없어. 난 네가 미샤 냉장고에서 가져온 거라고 생각했어. 미샤가 주스를 좋아하거든, 술을 안 마시니까. 그럼, 그럼 범인이 그 주스 팩을 넣어두고 갔단 말이야? 약을 타서? 그래서 우리가... ”
“ 그런 것 같아. ”
“ 하지만, 미샤는 안 마셨어. 기억 안 나? 걘 네가 만들어준 아침만 먹었어. 차랑 우유만 마셨고. 근데 아까, 아까 걔도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손이 엄청 차가워졌어. 그러니까 주스가 아닐지도 몰라. ”
드미트리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냉장고로 가더니 우유 팩을 꺼냈다.
“ 우유... 이거였어. 이것도 열려 있었어. ”
베르닌은 빨간 색의 우유 팩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머리가 핑 돌았다.
“ 그거 아니야... 딤카, 나 그거 산 적 없어. 그건 3.5% 우유잖아. 미샤는 저지방 우유만 먹어. 나 그래서 0.5% 아니면 1.8% 우유만 산다고. 오, 하느님... 내가 왜 못 봤을까... 주스도 우유도 다 그놈이 넣어둔 거란 말이야? 수면제를 타서? 우리 집에 왔다 갔다고? 그놈이... 미샤를... ”
베르닌은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무릎 아래가 물로 변하는 것 같았지만 억지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난 드미트리가 그의 팔을 부축해 주었다.
“ 안되겠다. 우리 잠깐 앉자. 정신을 차려야 돼. 잠깐만... ”
드미트리가 비틀거리면서 거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찬 공기가 들어오자 두통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일단 소파에 주저앉았다. 드미트리도 앉았다. 심호흡을 하고 또 했다. 그러다가 드미트리가 화장실로 가서 토했다. 베르닌도 잠시 후 속이 뒤틀려 와서 뒤따라가 토했다.
실컷 토한 후 세수를 하고 나자 그래도 뱃속이 가라앉았다. 드미트리는 아무래도 꾸준히 자기 관리를 해 와서 그런지 베르닌보다 먼저 정신을 수습한 것 같았다. 아직 다리가 후들거리는 베르닌을 부축해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베르닌이 일어나려고 하자 드미트리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잠깐만 누워 있어. 너 아직 안색이 안 좋아. 아무래도 네가 나보다 약을 더 많이 먹은 것 같아. 수면제가 주스 아래 가라앉아 있었을지도 몰라. 조금만 누워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난 이제 훨씬 나아졌거든. ”
“ 딤카, 미하일... 아... 그 자식 어떡하지? 어떻게 하지... 그 협박 편지... 비둘기, 인형... 걔한테 무슨 일이 생겼으면... ”
베르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너무나 무서웠다. 하얘진 왕재수의 얼굴이 아른거렸고 ‘다닐, 다닐!’ 하고 귓가에 메아리치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끝없이 반복되는 것 같았다.
‘ 내 탓이야... 싫다고 해도 로만에게 보냈어야 했어. 공연 같은 거 그만두게 했어야 해... 우리 집에도 그놈이 왔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걜 부득부득 여기다 잡아놓고... 내 옆에 있었는데... 그렇게 내 이름 부르고 비명 질렀는데... 그놈이 끌고 가게 놔뒀어... 다 나 때문이야... ’
현실적인 드미트리는 그를 달래는 대신 거실로 나가더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5분쯤 누워 있었다. 드미트리의 말대로 점점 현기증이 가시면서 기력이 돌아왔다. 문득 모스크바에서 일류샤가 썼던 약이 생각났다. 그 정도로 후유증이 강력한 약은 아닌 것 같았다. 문제는 왕재수였다.
‘ 그 자식, 술도 못 마시고 약도 아무 거나 못 먹는데... 그때도 약한 진정제 놨는데 하루종일 뻗었다고 일류샤가 그랬어.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손이 차가웠던 거야. ’
코가 시큰거리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마구 흔들면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혹시라도 왕재수가 집안 어딘가에 자기들처럼 쓰러져 있는데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거실로 나갔다. 그때 드미트리가 부엌에서 그를 불렀다.
“ 다닐, 이제 좀 괜찮아졌어? ”
“ 응. ”
“ 이리 좀 와봐. ”
베르닌은 부엌으로 갔다. 드미트리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바위처럼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찌푸린 미간 너머로 분노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의 손에는 구겨진 종잇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 그건... ”
“ 그래, 다닐. 네 번째 카드야. ”
“ 하지만, 그건... ”
베르닌은 다시 한 번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건 앞서 왔던 하얀 카드도, 붉은 색지도 아니었다. 옆이 거칠게 찢겨진 푸른색 모눈종이였다. 너무나 눈에 익었다. 왕재수의 수첩에서 뜯어낸 것이 분명했다. 과연 식탁 구석에는 베르닌이 아침에 챙겨왔던 왕재수의 수첩이 놓여 있었다. 베르닌은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서 종이에 마구 휘갈겨 쓴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등줄기를 쿡쿡 쑤시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잠깐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드미트리에게 읽어달라고 했다. 드미트리가 낮고 빠르게 읽었다.
호위 기사들에게 고함
입 다물고 있으면 왕자님은 무사할 거야.
모스크바에는 아프다고 통보해. 물론 공연은 취소야.
수요일이 지나면 곱게 돌려보내주지.
추신. ‘곱게’는 물론 조건부야.
베르닌이 미처 심호흡을 하기도 전에 드미트리가 카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반대편 손바닥을 펼쳤다. 하얀색과 금색의 조그만 물체가 놓여 있었다.
“ 그건... ”
“ 그래, 다닐. 머리야. 그 인형, 잘려나갔던 머리. 식탁 위에 있었어. 이 편지와 함께. 그게 전부야. ”
드미트리가 아침에 왔던 도자기 인형을 올려놓았다. 잘린 머리는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베르닌은 뱃속이 다시 뒤틀리는 것 같았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 더러운 자식! 죽여 버릴 거야! 우리 나가자! 나가서 찾아보자! 멀리 못 갔을지도 몰라! ”
드미트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흥분 단계는 지난 것 같았다. 그는 잠자코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 다닐, 벌써 정오가 지났어. 우린 세 시간도 넘게 뻗어 있었어. 그자는 치밀하게 모든 걸 준비했어. 우리의 관심을 미하일의 집으로 돌려놓고 이미 어제 여기 와서 음료수에 약을 타놓고 인형까지 준비했어. 분명히 이 근처에 숨어 있었을 거야. 우리가 약을 먹고 쓰러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입해서 미하일을 끌고 간 거야. 너 나보다 늦게 쓰러지지 않았어? ”
“ 응, 네가 쓰러질 때만 해도 왜 그러는지 몰랐어. 그러다가 금방... ”
“ 혹시 기척 못 느꼈어? 네가 나보다 늦게 정신을 잃었으니까... 혹시 그때 무슨 단서라도... ”
“ 아니... 미샤가 소리를 질렀어. 그건 기억나. 내 이름을 막 불렀는데 겁에 질린 것 같았어. 그리고 걔가 날 붙잡았어. 아니, 붙잡은 것 같기도 하고 나한테 쓰러진 것 같기도 해. ”
“ 음... 그렇구나. 그럼 그때 이미 그놈이 들어왔던 걸지도 몰라. 미하일이 끌려가면서 널 불렀던 걸지도... 그때가 여덟시 전이었잖아... 걔가 사라진지 네 시간이 지났어. 납치범에겐 여기서 벗어나기 충분한 시간이지. 그러니까 지금 무턱대고 나간다 해도 미하일을 찾아내기는 어려워. 일단 단서를 끌어 모아서 계획을 짜야 해. ”
“ 하지만... 미샤가 위험하단 말이야!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걘 사이코 납치범의 손아귀에 있어... 무슨 나쁜 짓을 당할지 몰라... 딤카, 너는 예전 미샤만 생각해서 그래. 걔 감옥에서 진짜 고생했어. 고문 때문에 몸도 망가졌단 말이야. 여기 와서도 계속 아프고... 폐렴 걸리고 독약 먹고... 의사 선생님이 얼마나 걱정하는데. 아까 그 수면제도... 우린 몇 시간 자고 깨어났지만 걔한테는 치명적일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그냥 이러고 있어! 나 극장에 전화할 거야. 공연 취소라고 얘기할 거야. 모스크바에도 전화해서 공연 취소됐으니까 수요일에 오지 말라고 하면 되잖아. 국장한테 그렇게 보고하면, 그러면 풀어줄지도 모르잖아! 걔 많이 아프단 말이야... 지난주에도 모스크바 끌려가서 그렇게 고생했는데... 더 괴롭힐 데도 없는 애란 말이야! ”
베르닌은 괴롭게 울부짖었다. 스페호프의 하수인에게 끌려가서 협박을 당하고 있는 왕재수를 상상하니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았다. 너무나 걱정이 되어서 미칠 것 같았다. 드미트리는 훌쩍훌쩍 우는 베르닌을 탓하거나 바보 취급하는 대신 그의 어깨를 한 팔로 포옹하며 등을 툭툭 두들겨 주었다.
“ 진정해, 다냐. 미하일은 괜찮을 거야. 스페호프가 둔하긴 하지만 진짜 바보는 아니잖아. 걔가 누구 후원을 받는지 뻔히 아는데 정말로 해치지는 않을 거야. ”
“ 아니야... 독사과 먹였어... 그때, 그때 정말 죽을 뻔했어. 시, 시계탑에 불도 지르고... 그때도, 그때도 죽이려던 건 아니라고 했지만 정말 죽을 뻔했어. 그러니까 지금도... 잘못하면... 그때는 내가 옆에 있었단 말이야. 근데 지금은, 지금은 걔 혼자... 아무도 없이 혼자... ”
베르닌은 북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흑흑 흐느껴 울었다. 드미트리는 그가 울도록 잠시 내버려두었다. 잠시 후 베르닌이 좀 진정되자 손수건을 건네주고는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 다닐, 목요일 아침에 스페호프가 나 불러서 지령 줬다고 했잖아. 그때 국장이 나에게도 당부했어. 지난주에 뭔가 일이 꼬인 게 있어서 섣불리 일을 벌였다간 역효과라고. 그러니까 공연을 방해하되 미하일한테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면 안 된다고 했어. 행여 잘못해서 걔 몸에 문제가 생기면 공연 취소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가브릴로프 KGB에 악영향이 올 수 있다고. 그러니까 지난번처럼 독약을 쓰거나 다치게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럴 거였다면 어째서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썼겠어. 연쇄 협박편지에, 비둘기 시체에 도자기 인형에... 자동차를 손보거나 밤길에 급습해서 폭행하거나, 아니면 아까 그 우유에 치사량의 수면제를 넣었을 수도 있잖아. 근데 그렇게 안 했어. 심지어 이 편지를 봐. 이건 앞선 카드들처럼 미리 준비한 게 아니야. 타이프를 치지도 않았고 종이를 준비한 것도 아니야. 미하일의 수첩에서 뜯어낸 거잖아. 손으로 썼어. 글씨가 엉망인 걸 보니까 왼손으로 써서 필체를 감춘 것 같아. 우리에게 미하일의 안전을 확신시키고 싶었던 거야. 단순히 공연 취소를 종용하려는 거였다면 굳이 편지를 남길 필요가 뭐가 있겠어. 미하일이 없어지면 당연히 공연도 취소되는 건데.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방법을 찾아보자.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미트리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신체적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왕재수가 낯선 곳에 갇혀 공포에 질려 있는 것을 상상하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 갇히는 거 제일 싫어하는 앤데... 아직도 감옥 갔던 꿈 꾸면 울면서 베개 들고 찾아오는데. ’
그때 드미트리가 덧붙였다.
“ 그리고 또 있어, 다닐. ”
“ 뭐가? ”
“ 우리 총 말이야. 그대로 놔뒀어. ”
“ 아... ”
베르닌은 마카로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드미트리가 주머니에서 권총을 두 자루 꺼냈다. 베르닌은 자신의 권총을 돌려받았다. 총알도 그대로 들어 있었다.
“ 일반적인 납치범이라면 권총을 가져갔을 거야. 최소한 탄창이라도 제거했겠지. 근데 그대로 놔두고 갔어. ”
“ 못 본 게 아닐까? ”
“ 아냐, 난 쓰러질 때 총을 손에 쥐고 있었어. 너도 주머니에 넣어놨었잖아. 근데 둘 다 소파 위에 있었어. 그자가 빼내서 올려놨겠지. 진짜 위해를 가하려고 했다면 우릴 쐈을 수도 있잖아. 근데 안 그랬어. 우리 몸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어. ”
“ 그럼... 그건 역시 범인이 우리 쪽 사람이란 거네. 우리 국장은 공공기물을 굉장히 중시해. 무기는 말할 것도 없지. 현장요원들에게만 지급하고 그것도 기밀 장부로 관리해. 총알 하나 쓰는 것도 다 적게 하고 권총 관리 제대로 해야 한다고 매뉴얼도 매년 수정보완해서 요원들에게 나눠줘. 권총 분실은 굉장한 징계 사유야. 최소한 정직, 보통은 해고야. 그러니까 국장이라면 권총을 그대로 놔두게 했을 것 같아. ”
“ 아, 스페호프가 그런 타입이구나. 설득력 있다. 난 다른 쪽을 생각했거든. 국장은 널 믿지만 너한테 작전을 맡기면 모스크바에서 금세 의심할 거라고 했거든. 그래서 나한테 지령을 준 거고. 그 말은, 어쨌든 우리는 KGB의 울타리 안에 있는 ‘우리’ 사람들인 거야. 그래서 우릴 다치게 하지 않은 거지. 네가 말한 권총 관리도 분명 이유였을 거고. ”
“ 응. 국장은 날 신뢰해. 현장요원으로 키우고 싶다고 했어. 근데 우리가 멀쩡한 건 좋지만 미샤를 찾아내는 데는 도움이 안 되잖아. ”
“ 아니야, 다닐. 너 내 말 제대로 안 들었구나. 국장이 나한테 지령을 주면서 그랬다고 했잖아. 작전이 진행되면 나도 알게 될 테니까 옆에서 자연스럽게 도우라고 했다고. 그 말은, 협박범이 나에게 접촉을 해올 수도 있다는 뜻이야. 혹여 그자가 조심하느라 안 그런다 해도, 나에게는 스페호프에게 작전 진행에 대해 물어볼 구실이 있는 거야. ”
“ 아, 그렇구나!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 그러면, 나도 마찬가지겠네. 어차피 난 걔 감시요원이니까 이 일에 대해 보고를 해야 하잖아. 이런 건 기밀사항에 속하는 거니까 유선 보고는 금지고... 우리 국장 보통 주말에도 출근하거든. 차라리 내가 사무실에 지금 가볼까? 그러면 국장이 정보를 공유해줄 수도 있잖아. ”
“ 그렇지. 운이 좋으면 그럴 가능성도 있지. 근데 딱 하나가 걸려. ”
“ 뭐가? ”
“ 지령에 대해 너한테 말하지 말라고 한 거. 네가 외부의 의심을 받을까봐 그런다고 하긴 했는데... 만의 하나 국장이 널 의심해서 그런 거라면 너에게 일부러 거짓 정보를 줄 수도 있어. 너는 미하일과 굉장히 사이가 좋잖아. 여기 처음 온 나도 첫눈에 알아챘는데... 국장이 언제까지 그걸 위장으로 믿어줄지 모르겠어. ”
베르닌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스페호프는 단 한 번도 그를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모스크바에 전달할 밀서까지 맡겼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자 의심스러운 구석이 몇 가지 있었다. 독사과 사건 때도 스페호프는 레베진스키에게 약을 맡겼고 베르닌에게는 사과에 독을 바를 거란 정보는 주지 않았다. 시계탑 방화의 경우에는 인부를 매수했으면서도 그에게는 말 한 마디 벙긋하지 않았다. 베르닌의 서무 업무를 면제해주면서 왕재수 곁에서 감시를 하라고 극장에 보냈으니 그가 시계탑에 따라 올라갈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리고 지난주에 모스크바에 다녀온 후 스페호프는 그에게 그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스비제르스키와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드미트리를 그에게 붙여 주면서 왕재수의 공연을 함께 방해하라는 지시를 내렸어야 했다. 그런데 스페호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그리고 하나 더 있어. ”
“ 뭔데? ”
“ 수요일 공연. 미하일은 그거 올리고 싶어 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근데 지금 스페호프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면 그는 즉시 공연 개최가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크레믈린에 올릴 거야. 물론 미하일이 납치됐다고 하지는 않겠지, 자기 무덤을 파는 꼴이니까. 협박 편지에 쓴 것처럼, 아파서 입원했다고 할 가능성이 제일 크지. 윗분들도 미하일이 고문 후유증으로 계속 고생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을 테니 별로 의심하지 않을 거고. 입원 차트는 조작하면 되는 거잖아. 일단 문서로 보고되면 모든 게 끝나. 미하일이 수요일 전에 무사히 돌아온다 해도 공연은 완전히 물 건너가는 거라고. 걔 정말 그 공연 올리고 싶어 했잖아. 연습실에서 보니까 무용수들도 진짜 열성적이었는데... 어떻게든 그 공연 올리게 해주고 싶어.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재수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그도 잘 알았다.
“ 하지만... 미샤는 납치됐고 행방도 몰라. 범인은 우리에게 입 다물고 기다리라고 협박했고. 공연 취소하라고. 우리가 말을 안 들으면 미샤를 곱게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했잖아. ”
“ 듣는 척 하는 거야. 일단 극장은 오늘 쉬잖아. 내일은 일요일이고. 내일 공연 있니? ”
“ 아니, 없어. 오페라도 없고 오전에 어린이 대상 오케스트라 연주회만 하나 있어. 수요일 신작 준비 때문에 화요일까지는 발레 공연이 없어. ”
“ 그래, 잘됐다. 그러면 일단 극장 쪽에는 미하일이 아파서 일요일에는 못 나간다고 통보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겉으로는 협박범의 요구에 응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모스크바에 연락하는 건 월요일로 미루는 거야. 어쨌든 지금은 주말이니까 공공기관은 모두 쉬잖아. 일단 그렇게 내일 밤까지 시간을 버는 거야. 그동안 우리가 미하일을 찾아낸다면... ”
“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국장에게서 정보를 캐낼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
드미트리는 세 장의 카드와 마지막 종이쪽지를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생각에 잠긴 눈으로 협박 편지들을 몇 번이나 읽었다.
“ 있잖아, 다닐. 너희 국장 말이야, 발레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했지? ”
“ 응. 나보다 더 몰라. 클래식 음악도 모르고, 오페라도 마찬가지야. 극장엔 관심이 전혀 없어. 국장한테는 무대 올라가는 것들은 그냥 다 딴따라야. ”
“ 너희 현장요원들 중에는 그쪽 취미 가진 사람들 있어? ”
“ 글쎄, 나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 우리는 현장요원들하고는 가깝게 지내지 않거든. 근데 적어도 내가 미샤 감시요원으로 배정된 후에 극장에서 마주친 요원들은 없었어. 우리 지국에서 발레 관심 있어 하는 직원은 내가 알기로는 리자 밖에 없었어. 리자는 어머니 모시고 가끔 공연도 보러 오거든. 처음에 나한테 미샤 사인도 받아 달라 하고 그랬어. ”
“ 아, 리자... ”
드미트리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드미트리가 물었다.
“ 너 말이야, 리자랑 친하다고 했지? ”
“ 어, 으응. 그렇다고 막 가까이 지내는 건 아니고. 여직원들 중에서는 그래도 인사도 잘 하고 이따금 밥도 같이 먹고. ”
“ 리자는 언제 들어왔어? 걘 공채 아니지? 어리니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곧장 들어왔을 것 같은데. ”
“ 응, 리자는 공채 요원이 아니야. 등록부서 여직원들은 기능직이라서 따로 채용하거든. 그 부서에서 공채에 사무직은 알렉산드라밖에 없어. 리자는 나보다 몇 달 먼저 들어왔으니까... 걔도 3년쯤 됐겠다. ”
“ 그래... ”
베르닌은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정색을 하며 드미트리를 쳐다보았다.
“ 야, 너 설마 지금 리자를 의심하는 거야? 말도 안 되잖아! ”
“ 난 그냥 모든 가능성을 다 짚어보는 것뿐이야, 다닐. 네 장의 협박편지가 왔는데 그 중 적어도 세 장에는 극장이나 발레와 관계된 얘기가 있어. 첫 번째 편지에는 6가지 음악에 대한 얘기가 있지. 두 번째 편지에서는 파랑새와 검은 기사 얘기가 있어. ”
“ 어, 그래. 나 그게 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갔어. 왜 뜬금없이 파랑새가 나오고 기사가 나온 걸까? 죽은 건 비둘기였잖아. 천사는 아마 그 인형 때문인 것 같은데... ”
“ 파랑새는 잠자는 미녀에 나오는 배역이야. 검은 기사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기사들의 춤 얘기인 것 같아. 발레 무대를 빗대서 빈정거리고 있는 거야. 미하일을 겨냥한 거라고. 최대한 심기를 건드리려고 했던 거겠지. 무대에 올라가던 애니까 아마 제대로 기분 상했을 거야. 그리고 마지막 편지에도 호위 기사와 왕자 얘기가 있잖아. 전부 고전 발레에 나오는 배역들이라고. 다닐, 이걸 보낸 사람은 극장과 발레에 대해 아는 사람이야. 스페호프와 현장요원들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고. 그러니까 리자가 됐든 발따예프가 됐든 경비 아저씨가 됐든 발레에 관심 있는 너희 직원이라면 일단 의심해 보려고 했던 거야. ”
“ 그치만... 말도 안 돼! 리자는 아직 어려! 순진한 여자애란 말이야. 그리고 미샤에 대해서도 얼마나 호감을 갖고 있는데. 이런 끔찍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게다가 비둘기까지 죽였잖아! 리자가 강아지를 얼마나 예뻐하는데. ”
“ 진정해, 다닐. 리자가 범인이라고 하지는 않았어. 그냥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는 것뿐이라니까. 리자도 어제 나한테 왔었단 말이야. 나 사실 어제 온 여자들 중 하나쯤은 국장이 보냈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그 지령 때문에 접촉하게 하려고. 카체리나, 갈리나, 그리고 리자였는데 얘기 나눠보니까 극장에 대해 관심 있는 건 리자 뿐이었어. ”
“ 아니야, 리자는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냐! ”
베르닌은 왕재수에 대한 걱정도 잠시 잊고 열심히 리자를 변호했다. 드미트리는 미심쩍은 느낌을 버리지 못한 것 같았지만 어쨌든 한 발 물러섰다.
“ 알았어. 하긴 리자가 연루되어 있다면 어젯밤에 나한테 얘기를 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꼭 너희 쪽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
“ 맞아, 극장 쪽 사람일 수도 있어. 독사과 때도 레베진스키가, 그러니까 거기 수석안무가인데 국장이 그 사람을 매수했거든. 돈키호테 때도 그렇고. 레베진스키라면 신작의 음악이 뭔지도 다 알고 있을 거야. 연습실에 뻔질나게 드나들었어. 게다가 미샤를 정말 싫어해. 원래 감독 자리에 내정되어 있었는데 미샤가 와서 물먹었거든. ”
“ 음... 그렇구나. 스페호프가 이미 극장 쪽에 자기 사람을 심어놨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다닐, 이렇게 하자. 일단 너는 극장 쪽을 맡아. 난 온지 얼마 안돼서 아무래도 이쪽 극장은 잘 모르잖아. 난 지령을 받은 것을 빌미로 너희 국장에게 가서 분위기를 떠볼게. 그 전에 일단 밖으로 나가보자. 미하일도 약을 먹었다면 우리처럼 뻗었겠지. 의식을 잃은 성인 남자를 업어서 옮겼다면 여기 주변 사람들 눈에 띄었을 수도 있어. 오늘 토요일이라서 아침에 사람들 산책도 많이 하던데. 혹시라도 흔적을 남겼을 수도 있으니까.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요일 밤까지 왕재수를 찾아내고 말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마카로프 권총의 탄창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 * *
밖으로 나가기 전에 그들은 집안에서 열심히 단서를 수집했다. 베르닌의 집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납치범이 문을 따고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왕재수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범인에게는 열쇠가 있든지 왕재수처럼 핀으로도 문을 잘 따는 재주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현관에 가까운 쪽 카펫 바닥에는 길게 긁힌 자국이 나 있었다. 드미트리는 범인의 신발이 어딘가에 걸려서 긁혔을 거라고 가정했고 카펫에 난 자국과 현관에 남은 금박 흔적을 볼 때 범인은 금박 버클 달린 구두를 신었을 거라고 추리했다. 베르닌과 드미트리 둘 다 그런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던 데다 왕재수는 간밤에 너무 놀란 나머지 슬리퍼를 신은 채 업혀 왔기 때문이다.
소파 근처에서 베르닌은 10센티미터 정도 길이의 붉은색 천 조각을 발견했고 다시금 가슴을 철사로 죄는 듯 괴로워졌다. 아침에 그가 챙겨온 빨간 스카프에서 찢겨 나온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스카프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왕재수는 옷 색깔과 안 어울린다고 그 스카프를 매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범인이 그것으로 왕재수를 묶었거나 눈이나 입을 막았던 것이다. 드미트리는 붉은색 천 조각을 내려다보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 찢어진 걸 보니 미하일이 저항했나봐. 다치지 않았어야 할 텐데. 그래도 크게 저항하지는 못했을 거야. 이거 말고는 몸싸움의 흔적이 전혀 없거든. 버둥거리다가 약기운이 돌아서 우리처럼 쓰러졌나봐. ”
“ 죽여 버릴 거야... ”
베르닌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버둥거리며 반항하고 자신의 이름을 절망적으로 부르는 왕재수의 모습을 상상하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스비제르스키의 부하들에게 끌려가던 왕재수를 일류샤에게 짓눌린 채 무력하게 지켜보던 때가 떠올랐다. 동시에 너무 걱정이 됐다.
‘ 바보...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성깔은 또 장난 아닌 녀석이니 막 반항하고 대들면 해코지 당할지도 모르는데... 제깟 게 무슨 힘으로 무장한 납치범을 이겨낸다고... ’
카펫의 자국과 스카프 조각, 열린 문, 드미트리가 소중하게 챙긴 세 장의 카드와 마지막 쪽지, 그리고 죽은 비둘기와 깨진 도자기 인형 외에는 더 이상의 단서가 없었다. 드미트리는 마지막 쪽지가 타이프라이터 대신 수기로 씌어 있었다는 것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 왼손으로 흘려쓰긴 했지만 그래도 의심 가는 사람들의 필체를 대조해보면 혹시라도 얻는 게 있을지도 몰라. ”
베르닌은 그리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필체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궁금해서 자기도 왼손으로 글씨를 써봤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자신의 원래 글씨체와는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쪽지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이상한 기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비뚤비뚤 흘려쓰긴 했지만 어디서 본 것 같은 글씨였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본 것 같기도 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 얼마 안 되는 단서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추적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공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 둘이서 주변을 뒤져 왕재수를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같았다. 일단 그들은 경비실에 갔다. 수위에게 낯선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 혹시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남자를 옮긴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수위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가브릴로프에서도 고급 아파트에 속했고 현관과 주차장에 각각 수위가 한 명씩 있었지만 둘 다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울화가 터진 베르닌이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드미트리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 다냐, 저 사람 주머니를 봐... 기대하지 말자. ”
보드카 병이 삐죽 솟아나와 있었다. 주차장 쪽 수위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닌은 너무나 화가 나서 모두 직무 유기로 인민재판에 회부하고 말겠다고 씩씩거렸지만 물론 수위들은 콧방귀를 뀌었다.
“ 이상한 사람 하나도 안 내려왔어요! 내가 아침부터 술 마시면서 다 보고 있었는데! 여기 주민들은 내가 다 아는데! ”
“ 지금 얘기하는 게 7층의 그 반동분자라면 내가 왜 못 알아봤겠어요! 내가 이렇게 시력이 나빠졌어도 그 녀석이라면 100미터 밖에서도 알아보는데! 근처에 오기만 해도 후광이 나는 꽃미남인데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요! ”
화가 머리끝까지 난 베르닌 대신 드미트리가 두 번째 수위에게 주차장에 낯선 차가 들어오지 않았느냐고 꼬치꼬치 물었다.
“ 그거야 모르죠. ”
“ 장부에 차 번호 전부 적게 되어 있지 않나요? 이 아파트는 고급 호텔 겸용이잖아요. ”
“ 바로 그래서죠! 여기는 위층은 주거 공간이지만 4층까지는 호텔로 쓰고 있잖아요. 윗분들도 자주 이용하는 곳이라서 관용차도 종종 들어오는데 그분들 보는 앞에서 차 번호를 적으란 말입니까? 나도 먹고 살아야지! ”
“ 하지만... 그래도 평소에 못 보던 차량이 들어왔다면 기억이... ”
“ 글쎄요. 다 비슷비슷한 차들이라. 저 친구 차 하나만 기억나네. 여기는 웬만하면 다 볼가 급의 고급차량인데 저 사람 혼자 낡고 후진 지굴리를 몰고 다니니. ”
“ 으윽, 누가 내 차 봤냐고 물어봤어요? ”
곁에 있던 베르닌이 결국 폭발했다. 드미트리는 간신히 베르닌을 달래서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둘은 건물을 돌면서 주민들과 호텔 투숙객들에게 KGB 신분증을 제시하고는 혹시 오전에 수상한 사람을 보지 못했는지, 인사불성이 된 취객을 옮기는 사람은 없었는지를 물었다.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주변 가게와 공원 쪽에도 가보았다. 목격자는 전혀 없었다.
“ 엘리베이터로 주차장까지 내려가서 차에 태우고 빠져나갔나봐. 저 망할 인간들은 술 퍼마시느라 하나도 못 봤을 거고.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드미트리는 일단 KGB 사무실로 가서 정보를 수집하고 베르닌은 극장에 가보기로 했다. 혹시라도 스페호프에게 의심받을까봐 베르닌은 드미트리를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준 후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차를 몰았다. 3시간 후 공원의 천사상 앞에서 만나서 정보를 공유하기로 했다.
* * *
극장 정문은 닫혀 있었다. 후문으로 가자 청소부들과 인부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소독약과 페인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신관 쪽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닌은 수위에게 오늘 출근한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 오늘은 소독 때문에 사무국 쪽에서는 시설관리팀장과 담당자만 나왔고요, 나머지는 전부 임시휴일이죠. 사무직도 그렇고 단원들도 안 나왔어요. ”
“ 미하일도 못 봤죠? ”
“ 아, 감독님. 오늘은 안 나오셨어요. 어젯밤에 공연 끝나고 나가시면서 보브카에게 모레 보자고 했다던데요. 감독실 커튼이랑 카펫도 싹 벗겨냈고 아침 내내 페인트칠도 다시 해서 오늘은 오셔봤자 허탕이에요. 그나마도 연습실은 지금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감독님이 거긴 소독만 하고 다른 건 손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거든요. 냄새는 좀 나겠지만. ”
“ 오케스트라 쪽도 안 나왔죠? ”
“ 아무도 안 나왔어요. 아참, 그러고 보니... 아까 니콜라이 안토노비치가 왔다 갔군요. ”
“ 니콜라이 안토노비치라면... 어, 레베진스키 말인가요? ”
“ 네. 아까 열 시 쯤에 들렀어요. 뭘 놓고 간 게 있다고 안으로 들어가던데. 30분쯤 후에 도로 나왔죠. ”
“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
“ 글쎄요. 사무실에 간 게 아닐까요? 아니면 연습실에 갔겠죠 뭐. 저는 현관만 지키니까 잘 모르겠네요. 들어가서 물어보시죠. ”
베르닌은 급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가 풀풀 피어올랐다. 페인트칠 때문인지 사무집기가 복도에 다 나와 있었고 인부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아는 얼굴을 찾다가 감독실 앞에서 그리고리를 발견했다. 인사를 한 후 레베진스키를 혹시 봤느냐고 묻자 그리고리가 짜증을 냈다.
“ 어휴, 레베진스키인지 뭔지 그 인간 정말 너무 싫어. 얼마나 갑질을 하는지. 그 인간은 툭하면 목에 힘주고 돌아다니면서 우리한테 일 제대로 하라는 둥, 뭐가 비뚤어졌다는 둥 먼지 좀 피우지 말라는 둥 잘난 척이 하늘을 찌른다니까. 제가 무슨 극장장이야 감독이야. 꼬마 감독님은 얼마나 우리한테 잘해주는데. 아까도 자기 방도 아닌데 감독실에 들어가서 책상을 뒤지지를 않나... 기가 막혀서. ”
현기증을 억누르며 베르닌은 애써 차분하게 물었다.
“ 감독실이요? 레베진스키가 책상을 뒤졌다고요? ”
“ 어... 이거 얘기했다가 나 괜히 잘리는 거 아닌가... 자넨 극장 사람도 아닌데. 레베진스키 귀에 들어가면... ”
“ 아니에요, 그 사람한테 절대 말 안 해요. 감독실에 들어갔다면서요. 미하일이 그런 거 허락해준 적 없단 말이에요. 그건 감독의 권한을 침해하는 거니까 얘기해줘야 돼요. ”
“ 그게... 사실은 그 인간이 계속 그러더라고. 여기 새로 칠하는 거랑 수리 준비하느라고 우리가 며칠 전부터 여기 와 있었거든. 낮에는 무대 쪽 체크하고, 저녁에 공연 있을 때는 사무공간이랑 연습실 쪽 사전작업을 했는데 레베진스키가 저녁만 되면 여기로 오는 거야. 그것도 꼭 감독님이 공연 때문에 백스테이지에 가 있는 시간만 골라서. ”
“ 근데 그걸 보고도 아무도 말 안했단 말이에요? 레베진스키가 남의 시선을 신경 안 쓰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
“ 류드밀라도 그 시간에는 퇴근하니까 아무도 없었지. 우리뿐인데 그런 자식은 우리 같은 인부들을 사람 취급 안하니까 아마 의식도 안했을걸. 처음에는 슬며시 노크도 하고 살금살금 들어가더니 2~3일 지나니까 아주 당당하게 들어가더라고. ”
“ 뭐 들고 나오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
“ 글쎄. 아, 그저께였나. 무슨 수첩을 들고 가더니 감독님 책장에서 레코드들을 막 뒤지면서 뭘 열심히 적더라고. 왜 기억나느냐면, 자네도 자주 들어가서 알겠지만 그 책장이 상당히 크잖아. 레코드가 맨 아래 칸하고 맨 위 칸에 꽂혀 있거든. 위에 있는 거 꺼내다가 몇 장을 와르르 떨어뜨렸어. 이마에 맞았는지 어쨌는지 욕을 하면서 뭘 적더니 도로 꽂아놓더라고. 그 썩을 자식이 의자 놓고 올라갔는데 신발도 안 벗고! 흙투성이 자국 내놔서 나중에 내가 닦아줬어. 귀염둥이 감독님이 모르고 앉았다가 옷 버릴까봐! 우리 감독님 대도시에서 와서 근사한 옷만 입고 다니는데 진흙 묻으면 안 되잖아! ”
“ 혹시 레베진스키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이 방에 드나들지는 않았나요? ”
“ 글쎄. 원래 감독님은 문을 안 잠그잖아. 자기 있을 때는 아무나 들어올 수 있게 하고. 예전에 있던 늙다리 감독은 비서한테 예약 안 하면 못 들어오게 했거든. 지금은 무용수고 연주자고 나 같은 인부고 노크만 하면 그냥 들어갈 수 있으니까. 그래도 자리 비웠을 때는 류드밀라가 웬만하면 못 들어가게 하더라고. 저녁에 감독님 없었을 때 드나든 건 레베진스키 밖에 없었던 것 같아. ”
“ 그렇군요. 고마워요, 그리고리. 감독실에 들어가 봐야겠어요. 그 사람이 뭘 손댔는지 알아내야겠어요. ”
“ 어, 그래. 벽 조심해. 페인트칠 아직 다 안 말랐을 거야. ”
베르닌은 감독실로 들어갔다. 벽에 붙어 있던 가구들은 모두 가운데로 옮겨져 있었다. 책장부터 보았다. 베르닌은 클래식 음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발레에 대해서도 잘 모르기 때문에 여태껏 책장을 유심히 본 적이 없었다. 맨 위와 아래에는 그리고리의 말대로 레코드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매일 음악을 듣는 녀석이 왜 불편하게 맨 위에 꽂아뒀을까 했는데 잘 보니 그 두 칸의 높이가 제일 높아서 레코드를 차곡차곡 꽂기가 편해서인 것 같았다. 아래 칸에 꽂힌 것은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 베르닌도 아는 고전발레 음악들과 러시아 작곡가들의 레코드였다. 위 칸에는 쇼팽을 비롯한 외국 작곡가들의 레코드들이 꽂혀 있었다.
‘ 레베진스키는 왜 미셴카의 방에 몰래 들어와서 레코드를 살폈을까? ’
그는 다른 칸들도 훑어보았다. 무용 관련 서적들을 비롯해 무슨 해부학 서적도 있었고 화집, 악보, 도스토예프스키와 푸쉬킨을 비롯한 오래된 문학선집들과 심지어 외국어 서적들도 어지럽게 꽂혀 있었다. 영어와 불어로 되어 있는 책들이었는데 대부분이 무용과 미술에 대한 책이었다. 하긴 그 외의 책들이라면 검열 때문에 감독실에 버젓하게 꽂아놓지도 못했을 게 분명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책상으로 갔다. 서랍도 잠겨 있지 않았다. 들어 있는 것은 모두 공연과 관계된 도면이나 서류뿐이었다. 왕재수는 워낙 검열에 시달려서 그런지 비교적 안전한 것으로 판명된 책과 음반 외에는 감독실에 개인적인 물건들을 가져다놓지 않는 편이었다. 책상과 티 테이블 위에는 관객들과 팬들이 가져다준 꽃다발과 사탕 바구니, 인형 따위가 널려 있었다. 보통은 무용수들이나 직원들에게 고루 나눠주는데 요 며칠 동안은 바빠서 그럴 여유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소독과 페인트칠 때문에 선물들은 매우 어지럽게 널려 있었지만 수상쩍은 건 없어 보였다. 혹시라도 협박 편지가 있을까 했지만 눈에 띄는 카드들은 모두 열렬한 연애편지에 가까웠다.
돌아서서 나가려다 베르닌은 문득 창가에 시선이 쏠렸다. 화분 두어 개에 조그만 노란색 꽃이 피어 있었다. 물론 왕재수는 식물을 키우는 데는 아무런 재능이 없었으므로 류다가 물을 주고 잘 돌보고 있었다. 하지만 베르닌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화분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도자기 장식품이었다.
흰색과 푸른색으로 채색된 도자기 종이 두 개 있었다. 그 옆에는 도자기 백조 한 쌍, 한 발로 서 있는 발레리나 인형 한 쌍, 그리고 천사 인형 한 개가 있었다. 베르닌은 순간 머리에서 피가 다 빠져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천사 인형을 집어 들었다.
‘ 똑같아... 아침에 왔던 그 인형하고... ’
흰색 몸체에 날개와 망토가 푸른색과 금색으로 채색되어 있는 자그마한 인형이었다. 다른 점이라고는 머리가 제대로 붙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 인형이 두 개였던 거야. 여기 와서 천사를 하나 집어갔던 거야. 다른 건 모두 한 쌍이잖아. 천사만 하나일 리가 없어. 그러니까 범인은 극장 쪽 사람이야. 이 방에 드나들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사람. 그리고 레베진스키는 이 방에 왔었어. 레코드를 뒤졌어. 그 자식이 없을 때만 골라서 며칠 동안 계속 밤마다 왔었어. ’
그는 인형을 휴지로 둘둘 말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복도로 나와서 곧장 레베진스키의 사무실로 갔다. 안무가들은 발레 지도자들과 하나의 사무실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류다의 말에 따르면 레베진스키는 자신이 수석안무가인데 후배들과 한 사무실을 쓴다는 것은 급에 맞지 않는다고 공식적인 항의를 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보통은 레베진스키와 사이가 좋았던 극장장도 짜증이 났는지 가장 나이도 많고 연차와 경험도 오래됐으며 단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티무르 이즈마일로프도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지 않느냐며 그 항의를 묵살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극장장은 당시까지만 해도 유력한 예술감독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었던 레베진스키의 기를 차마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는지 사무실 구석에 칸막이를 쳐서 수석안무가용 공간을 별도로 만들어 주었다.
안무가 사무실은 감독실보다 더 엉망이었다. 책상과 의자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칸막이도 반쯤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벽의 페인트를 조심하면서 베르닌은 레베진스키의 책상으로 갔다. 공연 팸플릿과 서류, 액자 따위로 폭격을 맞은 듯 어지러웠다. 액자도 굉장히 많았는데 본인의 젊은 시절 무대 사진과 가브릴로프 무용협회, 콤소몰 등에서 받은 표창장, 가브릴로프 지역신문에 실렸던 옛 기사 스크랩 따위였다. 궁금해서 훑어보니 60년대에 가브릴로프 의회 의장과 아르한겔스크 지부 공산당 서기장이 참석한 연찬회에서 레베진스키와 파트너 발레리나가 아다지오 무대를 보여주고 박수를 받았다는 단신이었다.
‘ 레베진스키는 자기 경력에 대해 자부심이 굉장한가봐. 기껏 우리 동네 신문에서 나온 기사랑 상장인데... 미셴카는 맨날 자기 천재라고 으스대고 애들 쥐 잡듯 해도 자기 사진이나 이런 기사들은 하나도 안 걸어놓던데. 지난번에 류다가 잡지에 나온 기사 스크랩해서 액자에 걸려고 하니까 그런 거 다 걸어놓으면 건물이 몇 개는 있어야 한다면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렇게 대단한 놈이었는데도. 걘 그냥 극장이 좋아서 노력하는데 레베진스키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게 제일 중요한가봐. ’
그러자 베르닌은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어떻게든 왕재수를 찾아내고 싶었다. 수요일 신작을 제대로 올리게 해 주고 싶었다. 땀범벅에 녹초가 되어서도 눈을 반짝거리며 왕재수만 바라보고 있던 무용수들이 생각났다. 돈키호테 무대도 생각났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남의 서랍을 뒤지는 것이 나쁜 행위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추호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두 번째 서랍에서 그는 누런색의 서류 봉투를 발견했다. 봉투는 반절로 접혀 있었는데 꽤 두툼했다. 밀봉되어 있지는 않았다.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꺼냈을 때 베르닌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엽서 크기의 흑백 사진이 줄을 이어 쏟아졌다. 아무리 적어도 30장은 되는 것 같았다. 하나같이 날짜와 시간이 인쇄되어 있었는데 최근 일주일 사이에 찍은 것들이었다. 모두가 왕재수의 사진이었다. 극장 내의 다양한 장소에서 찍혀 있었다. 백스테이지나 의상실, 소품 창고, 극장 도서실 쪽 사진이 줄줄이 이어졌다. 주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손동작을 하고 있는 사진이 많았다. 감독실에서 검열국장과 검열요원을 상대로 화를 내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심지어 베르닌도 한 장 찍혀 있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고 지난 일주일 동안 왕재수가 이야기를 나눴거나 인사를 하고 지나간 사람들 대부분이 사진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진을 하나하나 뒤집자 파란색 잉크로 사람 이름과 소속이 씌어 있었다. 몇몇 사진에는 이름 대신 ‘?’ 라고만 적어 놓았다. 레베진스키도 그들의 신원을 몰랐던 모양이었다. 어떤 사진들에는 ‘의회 언급’, ‘공산주의에 대한 반동적 언사 - 그 망할 놈의 당으로 꺼져버려’ 등의 구절이 적혀 있었다. 왕재수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반체제적 표현들을 요약해 적은 게 분명했다.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을 억누르며 베르닌은 봉투를 챙겼다. 세 번째 서랍을 열어보았다. 노끈으로 묶어놓은 얄팍한 종이 뭉치가 눈에 띄었다. 서무답게 베르닌은 그 종이가 등록번호에 따라 분류된 자료 목록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극장 보유 음반 목록이었다. 맨 앞장에 파란색 동그라미가 하나 있었다. 무슨 숫자가 딸려 있는 외국어 제목이 적혀 있었고 옆에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 바흐... ”
그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넘겼다. 목록은 러시아어 알파벳순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두어 장 넘기자 또 파란색 동그라미가 있었다. 민쿠스였다. 그리고 조금 더 아래, 모차르트의 무슨 왈츠에도 동그라미가 있었다. 그리고 쇼팽, 쇼스타코비치... 마지막 동그라미는 슈트라우스였다.
친애하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쇼스타코비치, 쇼팽, 슈트라우스, 민쿠스, 바흐
마지막은 물론 모차르트겠지.
여섯 개의 이름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다른 것이라곤 나열된 순서뿐이었다.
‘ 하나는 알파벳, 하나는 곡의 순서일 거야. ’
베르닌은 머리가 멍했다. 서랍을 마저 뒤졌지만 더 이상 의심스러운 것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전화 앞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지만 신호가 울리지 않았다. 페인트칠 때문에 코드를 모두 뽑아놓은 것 같았다. 급하게 복도로 뛰쳐나갔다. 여기저기 뒤지다가 결국 로비로 내려가서 수위에게 전화를 쓰게 해달라고 했다.
다행히 코즐로프는 집에 있었다. 자고 있었는지 꽉 잠긴 목소리였다.
“ 잘못 걸었어요! ”
“ 로만, 나예요. 다닐. ”
“ 잘못 걸었어! ”
“ 하나만 대답해줘요. 제발. ”
“ 뭔데? ”
“ 수요일 공연 있잖아요, 그 자식 신작. 거기 음악 여섯 개를 쓰잖아요. ”
“ 너 웬일이냐, 그런 것도 알고. 음악은 하나도 모르고 완전 막귀인 줄 알았는데. 기특하구나. ”
“ 그 여섯 개... 작곡가가 누구누구인지 기억해요? 순서대로면 더 좋고요. ”
“ 당연하지. 쇼스타코비치 1번 교향곡으로 시작해서 쇼팽, 슈트라우스, 민쿠스, 바흐, 마지막은 모차르트지. 근데 바흐는 좀 편곡했어. 미셴카는 그대로 쓰려고 했는데 무용수들이 음악을 너무 버거워하더라고. 근데 왜? ”
“ 아, 아니에요. ”
“ 야! 너 혹시 스페호프한테 찰싹 붙어서 우리 아기 공연 방해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지? ”
“ 으윽, 아직도 날 그렇게 못 믿어요? ”
“ 하긴... 우리 아기 보고 싶어 죽겠네. 오늘 같이 있으려고 했는데 무슨 감시꾼인지 뭔지가 더 붙었다고 수요일까지는 아는 체도 하지 말라니... 우리 아기 지금 뭐하냐? 옆에 있냐? ”
“ 어, 아, 아니요... 난 밖에 나와 있고요... 미, 미하일은 자고 있어요. 많이 피곤했는지... ”
“ 그래, 그 녀석 많이 자야 돼. 신작 공연만 무사히 치르고 나면 일주일쯤 휴가 내고 온천에라도 가라 해야지 안 되겠다. 너도 쉬어라. 내가 같이 못 있어주니 너 혼자 우리 아기 돌보느라 힘들겠구나. ”
“ 아니에요. 그럼 이만... ”
밀려오는 엄청난 가책을 느끼며 베르닌은 전화를 끊었다. 사랑하는 왕재수가 협박을 받고 납치되어 행방이 묘연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코즐로프가 얼마나 상심하고 충격을 받을지 생각만 해도 막막했다.
그는 수위에게 KGB 신분증을 내세우고 공무임을 강조하며 직원 주소록을 요구했다. 예전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지금은 윤리의식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수위는 툴툴대면서 주소록을 꺼내 주었다.
‘ 레베진스키, 레베진스키... 여기 있다. ’
전화번호와 주소를 옮겨 적은 후 그는 극장을 나섰다. 공중전화 부스로 가서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만 울릴 뿐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레베진스키의 집으로 가보기로 했다.
니콜라이 레베진스키는 극장 사람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구시가지에 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꽤 좋은 동네였다. 제국주의 시절에는 귀족들의 주거 지역이었다. 건물은 낡았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멀끔하게 수리되어 있었다. 예전에 류드밀라가 지나가는 말로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 콜랴 그 사람 집안이 엄청 좋잖아요. 제국 시절엔 상업 쪽으로 돈 많이 벌었고, 부모님도 발 빠르게 볼셰비키에게 붙어서 재산 몰수도 당하지 않고 좋은 자리 차지하고. 물려받은 것도 많다죠. 집에 가면 으리으리하대요. 그래서 전임 감독하고도 사이좋게 지냈죠. 돈도 잘 꿔주고. 여기저기 뇌물도 많이 바쳤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우리 미셴카가 오면서 완전히 물 먹은 거지 뭐겠어요. ’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문을 두들겨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없는 것 같았다. 이때 베르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범법 행위를 했다. 밖으로 나가서 주변을 살폈다. 레베진스키의 집은 건물 2층에 있었는데 베란다 쪽이 마침 커다란 나무로 가려져 있어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았다. 파이프와 1층 창틀을 딛고 기어 올라갔다. 옛날 건물이라 장식용으로 튀어나와 있는 디딤돌이 몇 개 있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올라갔지만 막상 2층에 올라오니 베란다 창문은 꽉 잠겨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깨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베르닌은 차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하고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안을 엿보았다. 베란다 너머 거실에는 발레 의상과 무슨 조잡한 트로피, 사진과 그림들, 그릇과 파베르제 비슷하게 생긴 장식 달걀들이 늘어선 진열장이 보였고 텅 빈 소파도 보였다. 인기척은 없었다. 그는 파이프와 베란다 모서리에 딱 붙은 채 창문을 쾅쾅쾅 두들겨 보았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지만 마지막 희망을 갖고 목청껏 왕재수의 이름을 소리쳐 불러보았다.
“ 미하일! 거기 있어? 미하일! ”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최소한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왕재수가 이 집에 갇혀 있다면 아마 입이 막힌 채 묶여 있거나 아직도 수면제에 취해 인사불성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레베진스키가 왕재수를 납치한 장본인이라 해도 자기 집에 그를 가둘 것 같지는 않았다. 왕재수는 레베진스키의 얼굴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레베진스키가 왕재수를 완전히 제거하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닌 한 그런 위험을 무릅쓸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정말 그렇다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순간 치밀었고 베르닌은 하마터면 창문을 두들겨 부술 뻔했다.
팔과 어깨가 너무 저리고 아픈데다 발소리가 들려왔으므로 그는 결국 아래로 내려왔다. 다행히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주민이었고 베르닌에게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베르닌은 수위에게 가서 레베진스키가 나오는 것을 봤는지, 혹시 취한 남자를 업고 들어가지는 않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곳은 수위가 아예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구시가지의 주택들은 대부분 그랬다.
이대로 그냥 떠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베르닌은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수첩을 뒤져 류드밀라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류드밀라는 깜짝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어머, 다냐. 웬일이에요? 혹시 우리 감독님이 출근이라도? ”
“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저, 혹시 레베진스키가 일요일에 출근한다고 하던가요? ”
“ 콜랴요?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요? ”
“ 그 사람에게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연락이 안 돼서요. 어, 저... 미하일이 극장 때문에 궁금한 게 있는 모양이에요. ”
“ 어휴, 드디어 우리 미셴카도 그 인간의 비리와 뒷공작에 신물이 난 모양이군요. 우리 감독님이 같은 극장 사람 험담하지 말라고 해서 지금까지 말 못하고 꾹 참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요청하기만 하면 그 인간의 지저분한 행태에 대해 하루종일 얘기해줄 수 있어요! 뭐가 궁금해요, 다냐! 내가 다 얘기해줄 수 있으니까 다 물어봐요! 차기 감독이라고 사방에서 추어주니까 전임 감독이랑 찰싹 붙어서 얼마나 위세를 떨면서 애들 괴롭히고 비리 저지르며 권력을 남용했는데! ”
“ 어... 아니... 그게... 저, 일단 레베진스키가 내일 극장에 나오는지부터... ”
“ 안 나와요! 어제 오전에 감독님한테 와서 휴가원 들이밀면서 사인해달라고 했어요. 그것도 연습실로 와서! 내가 그때 감독님 차라도 한 잔 챙겨주려고 연습실에 갔었는데 무용수들 다 땀 흘리며 연습하고 있는 와중에 그 인간이 뻔뻔스럽게 쑤시고 들어와서 사인해달라고... 그런 건 감독실로 가지고 오든가 나한테 서류 맡기고 가면 어련히 내가 사인 받아주지 않겠느냐고요! 일부러 애들 연습시키는 미셴카 주의를 흐트러뜨리려고! ”
“ 그럼 레베진스키는 내일만 휴가인 거예요? ”
“ 아뇨! 그 인간 심지어 수요일까지 휴가 냈어요! 말이 되냐고요! 아무리 감독님이 그 인간한테 신작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어도 그렇지! 수요일 초연은 이번 시즌 우리 극장의 제일 크고 중요한 행사인데! 수석안무가란 인간이 물심양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당일에도 휴가를 내다뇨! 자기 열 받았다고 유치하게 시위하는 거지 뭐냐고요! 근데 우리 미셴카도 이럴 땐 감독의 권위를 좀 내세우면서 그 인간한테 수요일 휴가는 안 된다고 했어야 하는데, 저 꼴 보기 싫은 놈 쉰다니까 잘됐다는 표정을 너무 적나라하게 지으면서 너무 흔쾌히 사인을 해주잖아요! 에휴... 하여튼 우리 귀염둥이 감독님은 천재긴 한데 그런 거 보면 아직 어리다니까요. 정치질도 못하고... ”
“ 수요일까지 휴가... ”
베르닌은 침을 삼켰다.
“ 저, 류다. 레베진스키는 결혼 안했죠? ”
“ 했었죠, 두 번이나. 지금은 혼자예요. 바람둥이라서 이 여자 저 여자 엄청 건드리고 다녀요. ”
“ 그러면 지금 같이 지내는 사람도 없는 거예요? ”
“ 아, 당신 몰랐군요. 우리 사무국장 잔나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요. 그래서 미셴카가 더 고생하는 거죠! 잔나가 레베진스키 밀어주느라고 행정 협조를 제대로 안 해주잖아요! ”
“ 어... 잔나 르이조바 말인가요? 혹시 잔나는 어디 사는지 아세요? ”
“ 잔나요? 포나르나야 거리 쪽에 사는데 주소는 정확히 모르겠네. 전화번호는 있는데. 근데 왜요? ”
“ 레베진스키에게 뭘 물어봐야 하는데 연락이 닿지를 않아서요. ”
“ 잔나랑 별장에 놀러갔나 보네. 콜랴는 검은 숲에 다차가 있거든요. ”
“ 다차... 검은 숲 어느 쪽이요? 검은 숲 엄청 넓잖아요. ”
“ 온천 요양소 가는 쪽에 있어요. 가다 보면 왜 연못 나오고 별장들 몇 채 몰려 있잖아요, 옛날 교회 건물 하나 있고. ”
“ 아, 기억나요... ”
“ 거기서 제일 큰 게 콜랴네 별장이에요. 부모님이 물려줬대요. 그 집만 지붕이 하얀색이니까 찾기 쉬워요. ”
“ 고마워요, 류다. 그럼 잘 쉬어요. ”
베르닌은 전화를 끊었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곧장 검은 숲으로 가려다가 퍼뜩 생각이 나서 시계를 보았다. 이미 5시 반이 넘어 있었다.
“ 앗, 맞다! 드미트리하고 5시 반에 만나기로 했는데! ”
그는 급하게 차를 몰았다.
FIN
- 2015. 8. 26 ~ 9. 5 -
...
3.5%, 1.8%, 0.5% 우유는 유지방 함유율에 따른 분류이다. 나도 러시아에 있을 땐 왕재수처럼 1.8이나 0.5를 먹었다. (사실 내 식성이 서무 시리즈의 왕재수랑 좀 많이 비슷한 편이다 ㅎㅎ)
당시 내가 먹었던 우유는 삐뜨몰, 빠르말라뜨 같은 브랜드였다. 3.5%는 빨간색, 1.8%와 0.5%는 파란색과 노란색이었다. (근데 좀 헷갈린다 뭐가 파랑 뭐가 노랑이었는지) 0.5%는 정말 묽다. 3.5%는 묘하게 우리나라 우유보다 훨씬 진하고 고소하게 느껴졌다. (근데 우리 나라 우유도 보통은 3.4%~3.5%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
..
아파트 경비원이 고급차 후진차 운운하면서 얘기하는 단추의 차 '지굴리'에 대해 잠깐.
지굴리와 라다는 소련 시절 러시아 국민차종인데 좋아서라기보단 값싸고 투박한 딱 러시아 자동차다. 워낙 많이들 타고 다닌 차인데 나중에는 후진 차라는 이미지가... 간부들이나 노멘클라투라가 타고 다니던 것은 볼가로 대표되는 윗급의 차였다.
서무 시리즈에서도 물론 왕재수는 극장 감독이므로 관용차인 볼가를 타고 다니고 단추는 말단 서무이므로 중고 지굴리를 끌고 다닌다.
지굴리 이미지 두 장. 일부러 먼지투성이에 좀 찌그러진 차 사진을 골라봤다.
맨처음 러시아에 갔을땐 소련 붕괴되고 몇년 후라 원체 경제 사정도 안 좋고, 사람들이 돈벌이를 위해 투잡 쓰리잡을 할 때라서.. 택시도 별로 없고 길거리에서 아무 자가용이나 불러서 흥정을 해서 택시처럼 타고 다니곤 했다. 그때 종종 차를 잡아타면 그게 바로 이런 지굴리인 경우가 거의 90%였다. 아직도 그때 탔던 지굴리의 좁은 내부와 먼지투성이의 시트를 잊을 수가 없다. 딱 이 두번째 사진 같은 차를 많이 탔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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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32편으로 끝내서 우수한 단추 3부작으로 하려 했는데 쓰다 보니 좀 길어져서 4부작이 될 예정.. 근데 33편은 아직 쓰는 중이다. 과연 단추와 드미트리는 힘을 합쳐 왕재수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인지!! 33편에서!!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가져가시거나 베끼거나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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