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무의 슬픔 #33-1. 도자기 인형 series : 서무의 슬픔2015. 10. 9. 21:50
서무의 슬픔 시리즈 자체가 내가 원래 쓰고 있던 미샤가 나오는 본편이 너무 안 풀리는데다 직장에서 겪는 스트레스가 심해서 이를 풀어보고자 쓰기 시작한 외전이다. 그러나 이 외전 시리즈도 점점 계속되다 보니 어느새 꼬리를 쳐서 외전의 외전 격으로 번외편인 민담 패러디나 등장인물 문답 같은 것이 나왔고, 급기야 댓글들에서 탄생한 일명 우수한 단추인 드미트리 베르닌이 등장하게 되었다.
드미트리 베르닌은 다닐 베르닌의 분신 같은 존재로 이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일종의 평행우주 외전이어야 말이 잘 될 것 같다만, 30편에서 33편까지 총 4편의 드미트리 출연 에피소드를 쓰면서 나는 이것들을 정식 서무 시리즈로 생각하며 썼다. 드미트리는 그냥 다닐과 외모가 쌍둥이 같고 배경이 거의 비슷한 인물일 뿐이라고.
그렇게 우수한 단추 4부작은 완료가 되었지만, 사실 그 4부작에서 마무리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어서 이것을 별도의 에피소드라기보다는 33-1편으로 명명해 올린다. 이번 편은 읽는 사람에 따라 마음에 들 수도 있고 안 들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지 ㅠㅠ
그래도 재미있게 읽으세요!
** 초반부에서 스페호프가 말하는 '크레믈린'과 '스몰니'에 대해. 크레믈린은 모스크바에 있고 스몰니는 레닌그라드(현재의 페테르부르크)에 있다. 두 대도시의 정치 본거지이다.
* 이번 33-1편은 반드시 드미트리 베르닌이 나오는 30~33편을 먼저 읽어야 함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납치되었던 왕재수는 베르닌과 드미트리의 활약으로 무사히 구출된다. 다음날 아침 드미트리는 모스크바로 떠나고 왕재수는 이틀 앞으로 다가온 공연 준비에 여념이 없다, 베르닌은 그런 그의 곁을 지키다 스페호프의 갑작스런 호출을 받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 http://tveye.tistory.com/4062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2부) : http://tveye.tistory.com/4079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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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3-1
서무의 슬픔
- 도자기 인형 -
왕재수는 보르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9시에 집을 나섰다. 곧장 극장으로 가려고 했지만 베르닌이 단호하게 우겨서 병원에 들렀다. 다행히 체온과 맥박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스타브로프는 전날과 같은 약초즙을 베르닌에게 한 병 건네주면서 세 번으로 나눠서 먹이라고 했다. 왕재수에게 직접 주면 단숨에 전부 마셔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무용수들은 모두 나와 있었다. 자신들의 예술감독을 보자 벌떼처럼 모여들어 괜찮으냐고 묻고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지만 왕재수가 인상을 팍 쓰면서 리허설 준비하라고 소리치자 금세 조용해졌다. 공연이 이틀 후로 다가왔기 때문에 10시 반부터 스페이스 리허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최종 드레스 리허설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용수들이야 분장을 할 필요가 없었지만 무대 스태프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옆에서 리허설을 지켜보았다. 전에는 왕재수의 신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었다. 항상 토막토막 연습을 시켰기 때문이다. 고전 발레가 아니어서 이렇다 할 이야기도 없고 뭔가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물 흐르듯 이어지는 음악에 맞춰 계속되는 작품을 보자 놀랍게도 굉장히 재미있었고 심지어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설명을 전혀 듣지 않고서도 무대 위의 무용수들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사람의 몸을 가지고, 다양한 움직임을 통해 이런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처음으로 베르닌은 왜 사람들이 왕재수에게 무용수뿐만 아니라 안무가로서도 천재적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과 같은 문외한조차 넋을 잃고 집중해 보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반체제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검열국과 스페호프가 트집을 잡은 이유는 작품 자체가 아니라 왕재수에 대한 증오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왕재수는 중간 중간 짧은 지적을 하기도 하고 리허설을 잠깐씩 중단시키기도 했다.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매서웠다. 연습실에서나 무대 리허설 때는 언제나 그렇듯 불어와 러시아어를 마구 섞어 썼다. 동작이 틀리는 무용수는 그 자리에서 집어내 정확하게 교정했다. 물론 오케스트라도 피해가지 못했다. 코즐로프마저도 서너 차례 날선 지적을 받았다. 베르닌은 뭐가 잘못됐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왕재수의 교정을 받은 후 되풀이되는 무대는 놀랍게도 아까보다 더 보기 편하고 근사한 느낌이 들었다.
실제 공연은 한 시간 반짜리였지만 교정과 지적 탓에 1차 스페이스 리허설은 두 시간 반이 걸렸다. 왕재수는 무용수들에게 점심식사 후 2차 리허설을 할 거라고 예고했다. 무대 스태프들은 생각지 않은 반복 때문에 조금 툴툴댔지만 왕재수가 한번만 더 쫑알대면 드레스 리허설도 오늘 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자 금세 조용해졌다.
역시나 왕재수는 식사를 하러 나가지 않았다. 무대를 돌아다니며 동선 체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먼지투성이 작업복 차림의 그리고리가 올라오더니 깜짝 놀랄 만큼 상냥하게 말했다.
“ 감독님, 잠깐만 무대 비워주세요. 조명 장치 쪽에 문제가 있어서 고쳐야 하거든요. ”
“ 무슨 소리예요, 조명 정비한지 얼마나 됐다고. 당신은 조명 스태프도 아니잖아요. ”
“ 메인 조명이랑 사이드 쪽 조명 고정 장치가 헐거워요. 아까부터 흔들리더라고요. 빨리 고쳐야 돼요. 안 그러면 위험하니까. ”
왕재수가 고개를 들어 조명을 확인하려는데 그리고리가 그의 팔을 잡더니 거의 안아 올리다시피 해서 무대 아래로 끌어내렸다. 불벼락을 내리겠거니 하는 베르닌의 예상과는 달리 왕재수는 고개를 쭉 빼고 조명 쪽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그리고리에게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물었다.
“ 빠르면 30분, 늦으면 한 시간은 걸리겠네요. 조명감독을 불러올까요? 아까 얘기하려고 했는데 얼굴도 안 보고 가버리더라고요. 스태프들은 우리 인부들을 무시하니까. 감독님이 얘기하셔야 할 것 같아요. ”
“ 일단 먼저 고쳐요. 고친 다음에 조명감독한테 따로 얘기할 테니까. ”
“ 저, 그래도 될까요? 난 극장 스태프가 아니니... ”
“ 조명 자체가 아니고 안전장치 손보는 거니까 괜찮아요. 발견해줘서 고마워요. ”
그리고리가 다른 인부 하나와 함께 조명 장치를 고치는 동안 왕재수는 감독실로 갔다. 류드밀라에게서 일요일에 있었던 주요사항에 대해 보고를 받은 후 다시 나가려고 했기 때문에 베르닌이 그를 붙잡았다.
“ 야, 점심 먹어야 돼. ”
“ 배 안 고픈데... 아침에 보르쉬 먹었잖아. ”
“ 차이카. 스베촉. 내가 싸온 거. 세 개 중 하나 무조건 골라야 돼! 안 그러면 집으로 끌고 갈 거야! ”
왕재수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곧 포기하고 베르닌이 챙겨온 꾸러미를 풀었다. 치즈 샌드위치를 맨입에 덥석 베어 물었다. 베르닌은 우유팩을 뜯어서 건네주었고 삶은 달걀과 오렌지 껍질도 까 주었다. 왕재수는 전날과는 달리 샌드위치와 달걀을 곧잘 먹었다. 우유도 다 마셨다. 베르닌은 마음이 좀 놓였다. 그래도 오렌지는 반을 쪼개서 베르닌에게 내밀었다.
“ 다 먹어. 오렌지 그거 한 개 얼마나 된다고. 좋아하잖아. ”
“ 너도 좋아하잖아, 오렌지. 맨날 나만 주고. “
“ 한 개 더 있으니까 있다가 먹을게. ”
그러자 왕재수가 안심했는지 오렌지를 먹었다. 달다고 좋아하더니 결국은 세 쪽을 떼어서 베르닌에게 먹어보라고 주었다. 오렌지는 달고 시원했다. 문득 베르닌은 투레츠키에게 가서 파인애플 통조림이라도 사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납치되어 온갖 고생을 하고 온 왕재수가 가엾었다. 그리고 내색은 안 해도 드미트리가 떠나버려서 많이 속상할 거란 생각도 들었다.
‘ 그렇게 울었는데... 간밤에는 전혀 몰랐을 텐데... ’
그러자 갑자기 드미트리의 팔에 안겨서 키스를 하고 있던 왕재수의 모습이 어른거려서 베르닌은 뺨이 화끈거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왕재수는 코즐로프와 있을 때도 베르닌이 있든 말든 뜨겁게 키스와 애무를 주고받았으므로 새로울 것도 없었는데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드미트리가 자신과 얼굴이 똑같아서 그런 것 같았다.
‘ 드미트리 싫다더니, 말 한 마디 안 섞고 마카롱이랑 코코뱅도 안 먹더니 그렇게 사랑을 나누고... 하여튼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라니까.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약초즙을 따라주었다. 왕재수는 차는 안 주고 약만 준다고 툴툴대면서도 약초즙을 다 마신 후 시계를 보더니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웠다.
“ 나 15분 후에 깨워줄 수 있어? ”
“ 야, 15분 가지고 피로가 풀리겠냐! 한 시간은 자야지! ”
“ 시간 없는 거 알면서. ”
“ 그러면 30분 후에 깨워줄게. 어차피 애들 밥 먹고 오면 그 정도 되잖아. ”
“ 조명 장치 고친 거 가서 확인해봐야 된단 말이야. 그래야 안심하고 리허설 다시 하지. 애들 무대 위에 있는데 그거 떨어지면 큰일 나. 그리고리가 발견해줘서 다행이긴 한데, 전문 스태프가 아니니까 혹시라도 부착하면서 부품을 잘못 건드리면 조명도 문제 생긴단 말이야. 그러니까 잘 붙은 거 보고 조명감독도 데려와서 확인시켜야 돼. ”
“ 내가 가볼게. 그러면 되잖아. 잘 붙어 있는지는 나도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거 보고 나서 류다한테 조명감독 불러달라고 할게. 30분 후에 무대로 오라고 하면 되잖아. 그러면 네가 그 사람한테 얘기해. 됐지? 좀 자라. ”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 베르닌은 재킷을 벗어서 왕재수에게 덮어준 후 나와서 류드밀라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 미하일이 어제 많이 힘들었어요. 잠깐 눈 좀 붙이게 했으니까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하세요. 특히 검열국에서 누가 오면 절대 못 들어가게 해야 돼요. 모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리고 레베진스키, 혹시라도 극장에 나오면 꼭 저한테 알려주세요. ”
“ 알았어요. ”
류드밀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예상 외의 질문을 했다.
“ 다닐, 어제 미샤 그냥 아팠던 거 아니죠? ”
“ 네? 어... 무슨 뜻이죠? ”
“ 내가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요! 당신 그저께부터 자꾸 레베진스키랑 잔나에 대해 물어보고. 게다가 우리 감독님이 어떤 사람인데! 미셴카가 아무리 아파도 지금 같이 중요한 때 그렇게 무단으로 결근할 리가 없어요. 못 나오더라도 자기가 직접 전화를 했을 거예요. 무용수들에 대해 이것저것 지시라도 했을 거고요. 팔다리가 다 부러졌어도 전화했을 거라고요. 지금도 검열국이니 모르는 사람이니 하는 걸 보니 분명히 주말에 스페호프가 수작을 부렸던 거예요.
가뜩이나 지난번 돈키호테랑 독사과도 그렇고 화재도 그렇고... 애들도 어제 많이 걱정했어요. 감독님한테 말은 안 해도 자기들끼리 엄청 조심하고 있다고요. 먹는 것도 도시락 싸오거나 아예 스베촉에 가서 먹어요.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함부로 얘기도 안 하고요. 나도 레베진스키 주시하고 있어요. 잔나도요. 그 둘이 감독님 반대파 선봉이니까요. 스태프 쪽은 로만이랑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체크하고 있고, 화재 이후부터는 그리고리한테 무대랑 창고 쪽 매일 확인하라 했어요. ”
“ 어... 류다... 난 몰랐어요, 당신이 그렇게 신경 쓰고 있는 줄... 왜 나한테는 얘기 안 했어요? ”
“ 당신은 KGB잖아요! 물론 당신이야 의심은 안 해요. 착한 사람이고 미셴카를 끔찍하게 아끼니까.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스페호프에게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잖아요! 당신은 너무 순진하다고요! ”
“ 휴... 근데 왜 지금은 나한테 이런 얘기 해주는 건데요! ”
“ 수요일 공연 잘 올려야 하니까 그렇죠. 수요일에 높은 분들 엄청 많이 온다면서요... 그거 성공하면 우리 미셴카 복권되고 다시 수도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불쌍한 우리 감독님... 저렇게 열심인데 망할 놈의 스페호프가 계속 괴롭히고. 어제 무슨 일 있었던 거 맞죠? ”
“ 어... 나중에 미샤한테 물어보세요... 근데 조심해야 하는 건 맞아요. ”
“ 알았어요. 내가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 얼른 무대 다녀와요. ”
그래서 베르닌은 무대로 갔다. 마침 뒤쪽 사다리에서 내려온 그리고리가 손을 흔들었다.
“ 다 됐어. 메인이랑 사이드 3번만 문제가 아니었어. 백스테이지 쪽 메인 구동장치도 부품이 몇 개나 빠져 있었어. 꼬마 감독님이 꼭 그쪽에 서서 무대 지켜보던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니까! 어휴, 식은땀이 다 나네. 더러운 놈들 같으니. ”
“ 그게 무슨 뜻이에요? 더러운 놈들이라니. ”
“ 금요일부터 뭔가 좀 이상하더라고. 레베진스키가 자꾸 조명이랑 백스테이지 쪽을 왔다갔다 하는 거야. 꼬마 감독님이랑 무용수들 연습실에 있을 때. 그러더니 시설관리팀 직원 하나랑 조명 쪽을 가리키면서 속닥속닥하더라고. 왜 있잖아, 머리 벗겨지고 배만 뽈록한 키다리. 낌새가 이상해서 쳐다보고 있으니까 나보고 가서 공사 마무리나 하지 왜 여기 얼쩡대느냐면서 화냈거든. 그래서 토요일 아침에 레베진스키가 왔을 때도 따라가 봤는데 감독실 쪽만 가고 무대 쪽은 안 가길래 그냥 잊어버렸거든.
근데 오늘 아침에 그 머리 벗겨진 키다리가 뒤쪽 사다리 타고 조명 쪽으로 올라가더라고. 뭔가 찜찜해서 계속 지켜봤는데 아까 리허설 할 때 보니까 조명이 흔들거리는 거야. 그거 떨어지면 어쩔 뻔 했냐고. 그리고 구동장치도 그래. 지난번에도 그쪽 장치 하나 잘못돼서 꼬마 감독님이 톱니에 다쳤잖아. 이번 것도 딱 그런 식이더라고. 그것도 자로 잰 듯이 딱 감독님이 서 있는 자리 쪽 장치만 고장 났어. 오늘이야 그 장치 쓸 일이 없지만 내일 드레스 리허설 한다며. 무대 장치 다 움직이면 뻔할 뻔자 미셴카는 다쳤을 거라고. 최소한 몸 어딘가는 짓이겨지는 거고 운 나쁘면 깔리는 거란 말이야! 3번 조명도 맨 처음에 미셴카가 무대 점검할 때 서는 자리야. 작정하고 손댄 거라고! ”
“ 그럴 수가... 일단 조명감독하고 무대감독 불러야겠네요. ”
“ 레베진스키하고 그 키다리, 그 두 놈은 절대 못 오게 해! 무대 쪽엔 얼씬도 못하게 하라고! ”
베르닌은 무대감독을 찾으러 갔다. 무대감독은 나이가 지긋했고 항상 코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술꾼이었지만 심성은 착했고 왕재수와도 잘 지내는 편이었다. 감독에게 조명과 구동장치의 이상을 설명하고 제대로 체크해달라고 청했다. 이번 공연에 높은 사람들도 많이 오고 모스크바에서도 관심이 많기 때문에 혹시라도 사고가 나거나 공연이 망쳐지면 모두들 책임 소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는 엄포까지 놓았다. KGB라는 점을 이용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굉장히 찔렸지만 왕재수를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무대감독은 매우 놀라더니 스태프들을 여럿 불러 모아 무대와 백스테이지를 전체적으로 확인하기 시작했고 2차 리허설은 3시 이후로 미루라는 메시지를 왕재수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 * *
감독실로 갔더니 왕재수는 곤하게 자고 있었다. 너무 깊게 자고 있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정말로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두 눈 아래가 푹 패여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자기도 모르게 드미트리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 아휴, 아무리 동경하던 우상이라 해도 그렇지... 밤새 얼마나 놀았으면 이 자식이 잠도 모자라고 이 모양이야. 그렇게 고생하고 온 애를 데리고. ’
그러다가 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 이 자식, 겉으로는 문어발 치는 것 같아도 잘 보니까 진짜 마음에 드는 사람 아니면 잠자리 안 하는 거 같던데. 딤카한테 쌀쌀맞게 굴었어도 마음속으로는 많이 좋아했나봐. 딤카도 얘 구해주려고 그렇게 고생하고 총까지 맞고... 딱 하룻밤밖에 못 보냈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헤어지고. 둘 다 불쌍해. ’
그러다가 또 기분이 이상해지기도 했다. 주된 이유는 드미트리가 자신과 얼굴이 똑같기 때문이었다. 왕재수가 드미트리와 밤을 보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 내 얼굴이랑 완전히 똑같은 녀석인데 그렇게 키스하고 잠자리까지 같이 하고... 그래놓고 나 보면 딤카 생각나서 이상하지 않을까? ’
그때 왕재수가 몸을 뒤척이며 끙끙거렸다. 아픈가 싶어서 이마에 손을 대보려는데 왕재수가 눈을 번쩍 뜨더니 소스라치듯 놀라며 두 손으로 베르닌을 떠밀었다.
“ 저리 가! 저리 가! ”
“ 어... 미셴카. 나야, 다닐. 꿈꿨니? ”
“ 아... ”
왕재수가 숨을 몰아쉬더니 눈을 깜박거려서 졸음을 몰아내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는 베르닌을 쳐다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한숨을 쉬었다.
“ 아, 다닐이구나. 꿈꿨나봐. 지금 몇 시야? ”
“ 두 시야. 근데 리허설은 세 시부터 할 수 있대. ”
베르닌은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다. 왕재수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 그래, 그러면 세 시까진 애들 데리고 따로 연습해야겠다. 레베진스키가 그랬단 말이지... ”
“ 너 정말 몰랐니? 그 작자가 너 감시하고 사진 찍고 무대 장치도 손대게 하고! 그 협박카드도 그렇고 레코드 목록이랑 인형도... ”
“ 목록? 인형? ”
“ 그 목 잘린 인형 말이야. 저기 창가에 있던 거 가져간 거잖아. 그 레코드 목록도! 카드에 작곡가 여섯 명 써놓은 거! 레베진스키가 네 방에서 레코드 뒤졌어. 그리고리가 다 봤대. 그 인간이 계속 네 방 몰래 드나들었대. 그놈이 스페호프 사주 받고 검열요원 그 자식이랑 결탁해서 너 납치하는 거 도운 거야. 진짜 나쁜 놈이야. 잘라버려! ”
“ 아, 그 인형. ”
왕재수는 협박카드와 목 잘린 인형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고개를 돌렸다. 베르닌은 다시금 분노가 솟구쳐서 이를 딱딱 부딪쳤다.
“ 내가 그 자식들 혼내줄 거야. 레베진스키 그 자식은 강물에 거꾸로 처넣을 거고 데미도프 그 자식은 두들겨 패서 검은 숲에 구덩이 파고 묻어 버릴 거야! 그리고 우유랑 주스에 수면제 잔뜩 타서 먹일 거야! 우리한테 한 거 그대로 다 해 줄 거야! ”
“ 바보 멍충이.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냐. 그냥 무시해. 어차피 나 무사히 돌아왔잖아. 공연만 잘 올리면 되지. ”
“ 그치만... 네가 그렇게 고생하고... 딤카는 총까지 맞았잖아. 넌 어떻게 그러냐, 그렇게 못된 짓을 당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너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에 아는 사람들 있잖아. 이런 거 탄원하면 안 되니? 나야 KGB 내부 직원이니까 별 소용없다 치지만 극장 사람들은 도와줄 텐데. 언제까지 이렇게 해코지 당하고 위험에 빠져서 살 수는 없잖아. 넌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
“ 누가 아무렇지도 않대? 근데 지금 내가 떠들어봤자 해결되는 것도 없고 일만 더 꼬인다고. 그리고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모레 공연이란 말이야. ”
“ 아니야! 누가 그래! 공연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단 말이야! ”
“ 그런 게 어디 있어! 이 공연 올리려고 다들 얼마나 고생을... ”
“ 너! 너는 안 중요하냐! 공연이 뭐가 그렇게 소중하다고! 너 죽고 나면! 너 다치고 나면 무슨 소용 있냐고! ”
“ 안 죽었잖아. 안 다쳤잖아. 그럼 된 거잖아. 다닐, 제발 이 얘기 그만하자. 나 너무 머리 아파. 무대까지 말썽이고... 나 내버려두면 안 돼? 제발. ”
“ 하지만... ”
“ 나 원래 기분 나쁜 일은 잊어버린단 말이야. 생각하기 싫어. 그런 일 있을 때마다 다 기억하고 되새겼으면 이제껏 어떻게 살았겠냐. 공연 잘 올리고 싶은데... 네가 자꾸 그 얘기하면 비둘기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다 생각난단 말이야. 기분 안 좋아. ”
왕재수가 너무 간절하게 말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입을 다물었다. 마음속으로는 ‘그런 일 있을 때마다 는 뭐야! 대체 뭘 어떻게 하고 살았으면 기분 나쁜 일이 그렇게 많아서 다 잊어버렸다는 거냐고!’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왕재수는 곧장 무대로 갔다. 무대감독과 스태프들, 조명감독까지 모두 와 있었다. 뚝딱뚝딱 소리를 내며 무대를 손보고 있었다. 왕재수는 베르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로 올라가 여기저기를 살피고 백스테이지의 구동장치도 훑어보았다. 무대감독과 조명감독에게 보고를 받은 후 따끔하게 야단을 쳤다. 무용수들 새끼손가락 하나라도 다치면 전부 모가지라고 버럭 화를 냈다. 왕재수가 스태프들에게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용수들을 아끼는 절반만큼이라도 자기 몸을 생각하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에 베르닌은 혀를 찼다.
잠시 후 머리가 벗겨진 키다리 스태프가 불려왔다. 왕재수가 ‘키릴 수보로긴’이라고 이름과 성을 호명하자 키다리가 화들짝 놀랐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왕재수는 날카롭게 그를 추궁했다. 조명과 무대 구동장치를 손댄 이유가 무엇이냐고 다그쳤다. 수보로긴은 그런 적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증거가 없지 않느냐고 버텼다. 무대감독은 펄펄 뛰었지만 조명감독은 수보로긴이 베테랑 조명 기술자인데 그럴 리가 없다고 변호를 했다. 왕재수는 차갑게 말했다.
“ 수보로긴. 당신 징계야. 일주일 근신. 극장에 나오지 마. ”
“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증거도 없는데 누명을 씌우다니! 감독이면 다야! 항의 성명 제출할 거예요! ”
“ 항의 성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증거가 왜 없어. 목격자도 있고 3번 조명 장치에 묻어 있던 당신 지문도 다 채취했거든. 계속 떠들면 1차로 극장 징계위원회, 2차로 인민재판 연속으로 회부할 거야. 무용수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국가 예산으로 추진되는 공연을 방해했다는 죄목이야. 난 전자가 더 괘씸하지만 아마 재판에서는 후자 때문에 위중하게 처벌받을 걸. 과대 협박한다고 생각하지 마. 난 반동분자잖아, 징계위원회고 재판이고 많이 받아봤거든. 그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당신보단 백배 천배 잘 알아. 감옥 갈 준비나 해. ”
“ 억울해! 난 아무 것도 몰라요! 난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란 말이야! 니콜라이 안토노비치가 조명 위치를 바꿔놔야 한다고 지시해서 따른 것뿐인데... 구동장치도 그쪽 부품 갈아야 하니까 빼놓으라고 한 거란 말이에요! ”
지문 채취는 한 적이 없었으므로 왕재수가 그냥 겁을 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너무 진짜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조차도 순간 ‘와, 저 녀석 대단하다’란 생각이 들었다. 수보로긴의 항의에 스태프들이 웅성거렸다. 그를 변호하던 조명감독조차 얼굴이 파래졌다. 무대감독이 코를 더욱 빨갛게 붉히며 버럭 화를 냈다.
“ 뭐가 어쩌고 어째! 레베진스키의 지시를 받았다고? 그놈이 무대 쪽 사람도 아닌데 어째서 그 인간 지시를 받아! 나와 조명감독 외에 그런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극장장님과 예술감독님 뿐이라고! 네놈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의 지시를 따라야 할 것 아냐! 어째서 그 망할 놈의 뺀질이 레베진스키의 말을 듣는 거냐! 게다가 네놈이 1~2년 된 초짜도 아니고 이 극장에서 10년 넘게 잔뼈가 굵은 놈인데 그래, 그 무식쟁이 레베진스키가 조명 위치 운운, 구동장치 부품 운운하는 걸 곧이곧대로 믿었을 리가 있냐고! 누가 봐도 네놈하고 레베진스키하고 결탁해서 공연 망치려고 한 거잖아! 이 망할 자식아, 넌 모가지야! ”
“ 아니에요! 난 억울해! 그리고 당신이 감독도 아닌데 모가지 운운할 수 있어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난 억울해요! 레베진스키가 아무리 임원급이 아니라 해도 옛날부터 여기 터줏대감이라 우리한테 엄청 갑질을 한단 말이에요. 수석안무가니까 나 같은 스태프에겐 그래도 윗사람이라고요, 지시를 어길 수가 없었다고요! 제발 저 자르지 마세요. 재판 회부하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전 진짜 그런 생각 없었어요. 무용수들 다치게 할 생각 전혀 없었다고요. 전부 레베진스키가 그런 거예요! 진짜예요! ”
왕재수는 수보로긴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검은 눈에 파란 불빛이 번쩍거렸다. 베르닌은 스네고로드를 떠올렸다. 뒤로 물러서던 아르투르를. 수보로긴도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리며 뒤로 물러섰다. 왕재수는 여전히 수보로긴을 주시하며 낮게 말했다.
“ 지금 말한 내용 전부 해명서 써서 제출해. 일주일 근신하고. 한 달 동안 메인 무대 조명 접근 금지야. ”
“ 예, 예... 알겠어요. 그러면 저 재판에 거는 건 아니죠? 자르는 것도 아니고요? 네? ”
“ 그거야 당신 하는 짓에 달려 있지. ”
“ 그렇게 할게요, 감독님.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앞으로는 정말 잘할게요. 그 망할 놈의 레베진스키 때문이에요. ”
수보로긴은 훌쩍훌쩍 울면서 몇 번이나 왕재수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무대에서 내려갔다. 왕재수는 무대감독에게 3시에 정확히 리허설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하고는 연습실로 갔다.
무용수들은 이미 모두 모여서 자기들끼리 연습을 하고 있었다. 리허설이 미뤄졌다는 소식도 들은 후였다. 왕재수는 오전 리허설 때 지적했던 무용수들을 차례로 불러내 동작을 다시 시켜보았고 몇 가지는 직접 시연해보였다. 그때 코즐로프가 들어왔다. 왕재수는 마침 잘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 로만 오시포비치, 파이널의 모차르트 좀 연주해줘요. 마지막 2분만. 가릭, 데니스, 타마라. 준비해. ”
코즐로프는 곧 바이올린을 들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무용수들 앞에서는 코즐로프에게 존대어를 쓰면서 매우 공적인 태도로 대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코즐로프도 마찬가지였다. 감독에 대한 그 깍듯한 태도를 보면 ‘귀염둥이 우리 아기’ 운운하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세 명의 주역 무용수들이 마지막 파트를 추고 나자 왕재수는 가릭에게 어깨를 좀 더 편하게 내릴 것을 주문했고 데니스와 타마라에게는 좋아하는 티를 더 많이 내라고 했다. 코즐로프가 다시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을 때 류드밀라가 연습실로 들어오더니 베르닌을 불렀다.
“ 다냐, 웬 여자가 전화해서 당신을 찾네요. 복도 전화로 돌려놨으니까 거기서 받아 봐요. ”
“ 네, 여자요? 누구지? 나한테 전화할 여자는 없는데. ”
“ 리자라고 하던데요. ”
“ 엇, 리자? 웬일이지? ”
베르닌은 급하게 복도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 아, 리자. 무슨 일이에요? 극장까지 전화를... ”
“ 국장이 당신 좀 들어오래요. ”
“ 예? 저를요? 이유는 말 안 하고요? ”
“ 네. 그냥 지금 빨리 들어와 보라고만 했어요. 그럼 있다 봐요. ”
전화를 끊은 후 베르닌은 두 근 반 세 근 반 하는 가슴을 손으로 꼭 누르며 연습실로 갔다. 이미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다들 무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베르닌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왕재수를 쫓아갔다.
“ 국장이 나보고 잠깐 들어오래. 나 얼른 다녀올게. ”
“ 또 건전지 갈고 표지판 칠하고 배추밭 관리하래? 야근시키고... ”
“ 잘 모르겠어. 늦을 것 같으면 류다한테 전화할게. 저기... 너 조심해. ”
“ 조심할 게 뭐가 있냐. 오늘은 애들 리허설 시키고 몇 명만 나머지 연습시킨 다음에 들여보낼 거야. 나는 무대 배경이랑 의상이랑 음향 같은 것만 한 번 더 체크할 거고. ”
“ 그래도... 아까 그 조명도 그렇고. ”
“ 이제 다 확인했잖아. 얼른 가봐. ”
“ 너 절대로 혼자 다니지 마. 백스테이지에 있을 때도 무거운 거나 위험한 장치 옆에 있지 말고. 알았지? 로만 곁에 꼭 붙어 있어. ”
“ 여기가 집이냐, 극장이지. 쫑알대지 말고 빨리 가. 또 벌목공이 어쩌고 하는 개소리 듣지 말고. ”
그래도 불안감을 억누를 수 없었던 베르닌은 맨 뒤에 따라 나온 코즐로프에게 달려가서 왕재수를 잘 지켜볼 것을 신신당부했다. 코즐로프도 이미 조명과 구동장치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 걱정하지 말고 가봐. 스페호프 그 자식이 또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 망할 놈이 우리 아기를 납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네. 그럴 기미만 보였다 하면 그 자식 인생 종치는 거야! ”
베르닌은 가슴이 철렁했다. 주말에 이미 왕재수가 납치됐다 돌아왔다는 사실을 코즐로프가 안다면 스페호프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도 그 키다리 깡패의 주먹에 가루가 될 것 같았다. 그는 어물어물 왕재수를 부탁하고는 급하게 극장을 나갔다.
* * *
사무실로 향하는 내내 베르닌은 걱정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미칠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장이 갑자기 자기를 보자고 하는 이유는 한 가지 뿐이었다. 드미트리와 자신이 힘을 합쳐 왕재수를 찾아냈다는 사실을 국장이 알아차린 것이다. 이미 드미트리가 스비제르스키의 끄나풀이라고 생각해서 연수도 조기 종료시켜 버렸으니 베르닌 자신에 대한 의심을 품는 것도 당연했다. 해고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왕재수에 대한 걱정으로 심장이 쿵쿵거렸다.
국장실 문은 꽉 닫혀 있었다. 노크를 하려는데 복도 저편에서 스페호프가 그를 불렀다.
“ 아, 왔군. 다닐, 뒤뜰로 좀 나가지. ”
베르닌은 스페호프가 뒤뜰로 향하자 더욱 불안해졌다. 평소 스페호프는 격식을 따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회의실이나 국장실에서 면담을 했다. 뒤뜰도 모자라 서무들의 안식처인 배추밭으로 향하다니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배추밭 너머에서 힐끗거리고 있던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스페호프를 보자마자 털을 있는 대로 곤두세우고 꼬리를 쭉 펴더니 위협적인 소리를 내고는 휙 사라져버렸다. 왜 아직도 도둑고양이를 퇴치하지 못했느냐고 야단을 맞을까봐 순간 겁이 났지만 스페호프는 고양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배추밭을 바라보며 우뚝 서더니 낮고 거친 음성으로 말했다.
“ 작전은 모두 취소일세. 다닐, 무대 장치를 원상 복구해놓게. 살구 주스도 치워버리고. ”
베르닌은 어안이 벙벙했다.
“ 네? 원상복구... 살구 주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대 장치라면 메인 구동장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러니까... 야스민의 수요일 공연에 대한... ”
“ 그럼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구동장치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다만. 하여튼 레베진스키가 얘기한 그것들 말일세. 조금 전에 크레믈린과 스몰니에서 각각 전언이 왔네. 불여우 녀석이 또 수작을 부린 게지. 수요일 공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혹은 불여우가 수요일까지 어딘가 아프거나 다치게 될 경우 그놈을 소관하는 우리 가브릴로프 KGB에게 모든 책임을 묻겠다는 거야. 심지어 벨스키 쪽에서는 수석보좌관이 직접 전화를 했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으니 망할 놈의 수요일 공연까지는 불여우 녀석의 털끝 하나 건드려서는 안 되네. 어서 가서 무대 장치인지 뭔지를 원상복구하고 살구 주스도 치워버리게! ”
“ 어... 하, 하지만... 저, 국장님. 저는 레베진스키에게서 들은 얘기가 전혀 없는데요. ”
“ 뭐야?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분명히 레베진스키에게 자네와 드미트리의 긴밀한 협조를 받아서 진행하라고 했는데. 둘이 인사도 시켜주고 작전도 공유했단 말이네. 자네 드미트리에게 아무 얘기도 못 들었나? ”
“ 못 들었는데요. 어, 저... 그러니까, 저는 공식적인 감시요원이라 너무 윗선에 노출되어 있으니 작전에서는 빠지는 게 낫다고 하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
“ 그런 얘기야 했지. 하지만 그건 직접 장치를 손대면 안 된다는 얘기였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네가 알아야 불여우도 더 잘 속이고 내부 협조도 잘 될 것 아닌가. 분명히 드미트리가 자네에게 모든 작전을 전하고 공유하겠다고 했는데 그 친구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군! ”
“ 저, 국장님... 제가 좀 헷갈리는데요. 드미트리도 본부에서 왔기 때문에 꼬리를 밟힐까봐 작전에서 빠지라고 하신 게 아니었단 말인가요? 그래서 저와 드미트리는 배제하신 것으로 알았... ”
“ 허참, 웬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드미트리 그 친구가 자네를 염려하긴 했었지. 하지만 불여우가 자네를 신뢰하는데다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하는 관계이니 반드시 자네와 모든 작전을 공유하라고 했거늘. 그래, 드미트리가 아무 말도 안 해줬단 말인가? ”
“ 레베진스키를 통해 작전을 진행하신다는 얘기까지밖에... ”
베르닌은 아직도 어리둥절한 상태였지만 불현듯 스페호프가 자신을 떠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미트리는 납치된 왕재수를 찾아낸 일에 베르닌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숨겨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같은 옷을 입었고 얼굴이 비슷한 것을 이용해 검열요원 데미도프를 막아선 것도 자신인 척 하겠다고 했고 마지막으로 스페호프와 면담했을 때도 베르닌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스비제르스키를 팔아서 슬며시 위협을 가하지 않았는가. 이제 드미트리에 대한 분노와 충격이 조금 가신 스페호프가 머리를 굴려서 납치 사건의 실패에 베르닌도 한몫 했을 거라고 추측하고는 그를 유도심문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스페호프가 혀를 찼다.
“ 허참, 어떻게 된 건지 이제야 알겠군. 드미트리 그 친구가 다 좋은데 성취욕이 너무 강해보이더라니. 자네를 질투하고 경계했던 거였어. 내가 그 친구에게 강의를 할 때 해외와 모스크바 본부에서 인정받은 엘리트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행정의 기본을 쌓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것이라는데 중점을 두었거든. 그러면서 자네에게 많이 배워야 한다고 했었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군. 불여우를 혼내주고 공연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모든 공을 자신이 가로채고 싶었던 거야. 레베진스키야 어차피 극장 쪽 정보원에 지나지 않으니 아무리 발 벗고 나서봤자 ‘우리 식구’인 자네만 하겠나. 이번 작전이 제대로 먹히기만 했어도 내가 자네를 제대로 포상했을 것을...
하여튼 일이 이렇게 됐으니 드미트리가 욕심을 부려 자네를 배제한 게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르겠군. 하여튼 그 친구야 본부로 돌아갔고 레베진스키야 수요일 밤에나 돌아올 테니 뒷수습을 해줄 건 지금 자네뿐이야. 어서 극장으로 돌아가서 무대 장치를 도로 고쳐놓고 냉장고에서 주스를 치워버리게. ”
“ 예, 국장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무대 장치는 레베진스키를 통해 고장 내라고 하신 것 같고... 주스는 뭔가요? ”
“ 감독실 냉장고에 보드카와 섞은 살구 주스 팩을 넣어놨단 말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불여우가 술을 못 마시지 않나. 특히 보드카는 마셨다 하면 인사불성이 되니까. 불여우가 그걸 마시고 맛이 가면 입원을 하게 되지 않겠나. 그러면 공연도 물 건너갈 거라고 생각했지. 아니면 무대 장치가 잘못돼서 거기 좀 다치게 되더라도 마찬가지고. 마음 같아서야 그 자식을 납치라도 해서 수요일까지 어디 안전가옥에라도 가둬놓고 싶었네만 지난번 시계탑도 그렇고 이래저래 꼬인 게 많으니 뒷감당이 어려울 것 같아서 포기했었지. 끌어다 쓸 현장요원도 마땅치 않았고. 자, 그럼 불여우가 주스를 마시거나 무대에서 다치기 전에 어서 가서 원상 복구해 놓게. 일단 수요일 공연은 내버려두고 훗날을 도모할 수밖에. ”
베르닌은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간신히 목소리를 짜낼 수 있었다.
“ 레베진스키와 드미트리... 그러면 검열국 쪽 협조는 없었던 건가요? 데미도프는... 야스민 납치 시도는 처음부터 없었던 거고요? ”
“ 웬 검열국 타령인가. 데미도프는 또 누군가? 검열국 그 멍청한 놈들이 애초에 제대로 역할만 해줬어도 반체제 작품이라고 걸어서 아예 공연을 봉쇄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안돼서 이렇게 됐지 않나. 아무짝에 쓸모없는 놈들 같으니. 납치도 그렇지, 차라리 그때 자넬 모스크바에 보낼 게 아니라 불여우를 안전가옥에 가둬놓고 협박이라도 좀 시킬걸 그랬어. 지금이야 공연 며칠 남겨두고 납치 카드를 쓰는 건 우리 무덤 파는 일이니 엄두도 못 내지. 하여튼 자네가 고생이 많네. 그 반동분자 불여우의 비위를 맞추며 옆에 붙어 있고 매일같이 잠자리를 해주는 것도 속이 뒤집힐 텐데 이제 그 망할 공연까지 제대로 올라가게 해줘야 하니... 어서 가보게. 수요일에 극장에서 보세. ”
스페호프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급하게 몸을 돌려 사무실 쪽으로 가버렸다. 베르닌은 너무나 멍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돌멩이 위에 주저앉았다.
‘ 이게 무슨 소리지? 그러면 국장은 미셴카 납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단 말이야? 데미도프에 대해서도 모르고 주말의 납치 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전부 자기가 명령한 건데. 납치는 위험부담이 크니까 아예 포기했다고? 분명히 드미트리가 그랬잖아. 어젯밤에 국장을 만났다고. 국장이 데미도프에게서 자초지종을 보고받았다고. 데미도프가 추궁이 두려워서 우리 얘긴 안하고 미셴카 혼자 도망쳤다고 했고 그 얘길 국장이 드미트리에게 해줬다고. 애초부터 우리한테 맡겼어야 했다고 짜증냈다고. 그런데 왜 국장은 지금 딴 소리를 하는 거지? 나한테 실패한 작전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한 건가? 하지만 국장은 데미도프란 이름을 말했을 때 정말 모르는 눈치였어. 3년 가까이 같이 일했잖아, 그 정도는 표정 보면 알아. 국장은 데미도프를 몰라. 얼굴은 알겠지, 검열요원이고 예전에도 보고를 받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름은 전혀 모르는 거야. 하지만 드미트리는 국장이 그자의 이름을 알려줬다고 했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
머리가 너무나 복잡했고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스페호프가 그를 떠보고 있을 가능성이 제일 컸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졌다. 검열국에 가서 데미도프를 만나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 아, 살구 주스! 그 자식 걸핏하면 목마르다고 아무 거나 막 마시는데... 극장부터 가야 돼. 아, 아니야... 그러면 늦을지도 몰라. ’
베르닌은 급하게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사무실은 등록부서였다. 두리번거리는데 리자가 보였다.
“ 리자, 전화 좀 써도 돼요? ”
“ 네. 그럼요. ”
그는 급하게 다이얼을 돌렸다. 다행히 류드밀라의 목소리가 곧 들려왔다.
“ 류다, 미샤는 별 일 없나요? ”
“ 네. 지금 리허설 중이에요. 구동장치랑 조명도 다 손봐서 이제 괜찮아요. ”
“ 그래요. 저... 감독실에 조그만 냉장고 하나 있잖아요. ”
“ 아, 그 냉장고. 아뇨, 지금 감독실에 없어요. 비서실에 가져다놨어요. 미셴카가 어차피 자기는 거기서 꺼내먹는 거 별로 없고 손님들도 거의 다 날 거쳐서 오니까 여기 두라고 했거든요. 왜요? ”
“ 그 냉장고 안에... 지금 빨리 확인 좀 해줘요. 살구 주스. 종이팩에 든 걸 거예요. 아마 개봉되어 있을 거고요. 그거 꺼내서 버려줘요. ”
“ 아, 그 살구 주스. 없어요. ”
“ 없다고요? 서, 설마... 미샤가 그거 마셨어요? ”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베르닌이 반쯤 고함을 지르려는 순간 류다가 대꾸했다.
“ 아뇨. 미셴카는 그 주스 보지도 못했어요. 내가 버렸거든요. 걱정 마세요. ”
“ 버렸다고요? 당신이? 어, 언제요? 설마 마신 건 아니죠? ”
“ 천만에요. 내가 미쳤다고 그걸 마시겠어요? 지난번 독사과 사건 이후로 감독님 방에 들어오는 음식이랑 과일, 음료수는 내가 하나하나 다 확인하고 있어요. 내가 어제도 나왔었잖아요. 냉장고를 열어보니까 금요일까지 없었던 살구 주스가 하나 떡하니 들어 있는 거예요. 미셴카가 가져온 건 당연히 아니죠. 감독님은 오렌지나 사과 주스는 좋아해도 살구 주스는 달고 텁텁하다고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말린 살구도 입맛에 안 맞는다고 했어요. 목마를 때야 그냥 마시지만. 하여튼 수상해서 꺼내보니까 심지어 주둥이까지 열려있고. 코를 대보니 보드카 냄새가 지독하게 나더라고요! 개수대에 버렸어요. 그것도 스페호프가 넣어놓은 거죠? ”
“ 네, 그래요. 진짜 다행이네요. 고마워요, 류다. 전혀 몰랐어요, 당신이 그렇게 신경 쓰고 있었던 거... ”
“ 우리 감독님 나라도 지켜줘야지 어떻게 해요. 안 그래도 이놈저놈들이 해코지하려고 난리인데. 그래도 어제 안 나와서 걱정 많이 했는데 오늘 감독님 보니까 표정도 좋고 준비도 생각보다 잘 되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근데 당신 언제 돌아와요? 감독님이 좀 전에도 당신 왔느냐, 아니면 늦는다고 전화 왔느냐 하고 물어보던데. ”
“ 아까는 빨리 오라는 말 같은 거 안 했는데. 리허설 때문에 내가 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더니... ”
“ 어머, 무슨 소리예요, 다냐. 미셴카가 얼마나 당신을 신경 쓰는데요. 당신 오면 표정이 달라지는데. 훨씬 편해 보이고 더 잘 웃고. 밥도 더 잘 먹고. 오늘은 그렇게 바쁜데도 틈만 나면 당신 쪽 보면서 확인하던데요. 아침에도 오자마자 나한테 혹시라도 KGB에서 당신을 찾으러 오거나 전화가 오면 즉시 자기한테 알려달라고 했는걸요. ”
“ 아... ”
베르닌은 가슴이 아프게 당겨왔다.
‘ 주말에 너무 놀라서 그런 거야. 내색은 안 했어도 진짜 무서웠던 거야. 그래서 내가 없으면 불안한 거야... 나 없는 동안 또 나쁜 짓을 당할까봐... 빨리 돌아가야겠어. ’
전화를 끊고 나서 베르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극장에 곧장 가야 하나, 검열국에 들러 데미도프를 만나봐야 하나 고민하며 구겨진 재킷 주름을 펴다가 주머니가 불룩해서 이게 뭔가 하고 손을 집어넣었다. 돌돌 말린 휴지 뭉치가 나왔는데 단단했다.
‘ 이게 뭐지? ’
휴지를 펴보니 조그만 도자기 인형이 굴러 나왔다. 금색과 푸른색, 흰색의 천사 인형이었다. 그제야 베르닌은 기억이 났다.
‘ 아, 맞다. 그저께 미셴카 방 창가에서 집어온 거였지. 도로 갖다놔야겠다. ’
그때 리자가 다가오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내밀었다.
“ 다냐, 차 한 잔 마셔요. 며칠 만에 왜 이렇게 야윈 거예요? 면도도 안 하고. 이발도 해야겠네. 아무리 바빠도 스타일 좀 다듬어요. 당신이 드미트리보다 빠지는 게 뭐가 있어요. 옷만 좀 신경 쓰면 훨씬 세련돼 보일 텐데. 꽃돌이 감독님한테 코치 좀 받아요. 근데 드미트리 보니까, 당신도 정장 어울릴 것 같아요. 월급 모아서 양복 한 벌 장만하면 어때요? 아니면 우리 오빠가 요즘 살쪄서 안 입는 양복 있거든요. 그거 갖다 줄 테니까 입어볼래요? 우리 오빠가 당신이랑 키가 비슷하거든요. ”
“ 어, 고마워요, 리자. ”
베르닌은 빨리 극장에 가봐야 할 것 같았지만 리자의 성의가 고마워서 찻잔을 받아 얼른 한 모금 훌쩍 마셨다. 차가 너무 뜨거워서 입술과 혀를 다 델 뻔했다. 리자가 방긋 웃더니 건포도가 박혀 있는 초콜릿 캔디를 내밀었다.
“ 이거랑 같이 먹어요. 이거 드미트리가 준 건데 맛있더라고요. 외제인가 봐요. 드미트리 재미있었는데 너무 빨리 가버려서 아쉬웠어요. 오늘 아침에 갑자기 가버렸다고... ”
“ 어, 예... 그게, 본부에서 빨리 돌아오라고 연락이 왔대요. 그래도 우리 쪽 연수는 다 채운 걸로 해준다더라고요. 다행이죠. 안 그랬으면 다른 데 또 가서 남은 기간만큼 채워야 하잖아요. ”
“ 어머, 다냐. 그렇지 않아요. ”
“ 네, 뭐가요? ”
“ 드미트리요. 남은 연수 기간 없어요. 애초에 다섯 번 연수 코스는 다 밟았거든요. 우리 지부 쪽은 가외로 자원해서 온 거예요. 가점만 2점쯤 더 받을 걸요. 근데 드미트리는 요원 기록부 보니까 워낙 성적이 좋아서 가점이 필요 없는데 왜 왔나 했어요. ”
“ 연수 코스를 다 밟았다고요? 자원해서 왔다고... 국장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
“ 국장은 바쁠 땐 공문만 보고 첨부문서는 잘 안 읽잖아요. 나도 몰랐는데 갈리나 언니가 드미트리한테 폭 빠져서 모스크바 주소 좀 알아봐달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임시 거주등록 담당이잖아요. 그래서 서류를 보니까 그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근데 드미트리는 워낙 매사에 열심이니까 자원해서 왔다 해도 이상하진 않더라고요. 섭섭해요, 인사도 못하고. 그때 토요일 밤에 본 게 마지막이네요. ”
“ 자원... 왜 여기까지... 나한테는 그런 말 안 했는데... ”
“ 어머, 다냐. 이거 그 천사잖아요! ”
리자가 탄성을 지르며 전화기 옆에 베르닌이 내려놓았던 도자기 천사를 집어 들었다.
“ 이거 너무 예뻐요. 어머, 드미트리 의외네요. 내가 달라고 했을 땐 안 줬는데 당신한테는 주고 가다니... 엄청 아끼는 거라고 했는데... 같이 며칠 지내면서 당신한테 엄청 정들었던 모양이네요. ”
베르닌은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
“ 그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리자? 드미트리요? 달라고 했었다니요? 이걸요? 이 인형을? 이건 미하일 거예요. 걔가 감독실 창가에 장식해뒀던 인형인데 드미트리라니요? ”
“ 네? 미샤 거라고요? 아닌데, 분명히 금요일 밤에 드미트리 방에서 봤는걸요. 그때 갈리나 언니랑 카챠 언니랑 같이 갔잖아요. 카드 놀이하는데 내가 꼴찌라서 제일 먼저 끝났거든요. 지는 사람이 뽀뽀하는 거였는데 갈리나 언니가 흑기사 자원한다면서 나 대신 드미트리한테 냉큼 뽀뽀하고 되게 웃겼어요.
하여튼 나머지 셋은 계속 게임하고 난 화장실 다녀오다가 드미트리 가방에 걸려 넘어질 뻔 했거든요. 가방 주워주는데 거기서 이 인형이 굴러 나오는 거예요. 너무 예뻐서 한참 봤어요. 이런 거 가브릴로프에서는 못 구하는 거잖아요, 수도원 공방에서도 이런 스타일로는 안 만들고요. 우리는 전통적으로 목각 인형을 만들잖아요. 박물관에나 가면 있으려나. 이거 맞아요, 금발에 얼굴이랑 손발이랑 하얗고 날개 금색이고 옷은 푸른색이잖아요. 근데 그때 드미트리가 와서 가방을 치우길래 내가 인형 너무 예쁜데 나 주면 안 되느냐고 살짝 물어봤거든요. 드미트리가 웃으면서 그러고 싶지만 소중한 물건이라 안 된다고 했어요. 대신 뽀뽀를 해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진짜 당신이랑은 정반대라니까요! 얼굴은 비슷한데. ”
리자는 까르르 웃으며 떠들다가 베르닌의 굳어진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 어머, 다냐. 농담이에요! 당신 놀린 거 아닌데... 화났어요? ”
“ 아, 아니에요... 리자, 이거 중요한 얘기예요. 기억을 잘 살려 봐요. 정말, 정말 드미트리에게 이런 인형이 있었단 말이에요? 이것과 똑같은? ”
“ 네. 이 인형 같은데... 어... 글쎄요. 똑같이 생긴 거 같은데 잘 보니까 이건 날개를 활짝 펴고 있네요. 드미트리 거는 날개가 이것보다 작았어요. 안쪽으로 좀 접고 있었거든요. 아, 미샤한테도 있었구나... 꽃돌이 감독님은 친절하니까 달라고 하면 줄지도 모르겠네요! ”
“ 날개를 안쪽으로 접고 있었다... ”
베르닌은 눈을 감았다. 도자기 천사. 푸른색 망토와 금빛 날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안으로 살짝 접혀 들어간 날개. 잘려나간 머리.
그건 세 번째 협박편지와 함께 온 선물이었다. 목 잘린 인형.
친애하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그 소중한 공연은 올리지 못할 거야.
파랑새도, 천사도, 검은 기사도 소용없을걸.
말을 잘 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베르닌의 머릿속에 몇 마디 음성들이 스쳐지나갔다.
네가 왜 그렇게 쟤 밥을 챙기는지 좀 알겠어. 레닌그라드에서 봤을 때는 안 그랬는데, 몸매도 훨씬 근육질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말랐네, 그래도 멋있긴 하지만 인형처럼 야윈 걸 보니까 어쩐지 마음이 안 좋아.
근데 혹시 다른 사람은 안 왔나요? 그러니까, 검은 머리에 눈도 까맣고 굉장히 잘생긴 친군데요. 피부가 도자기 인형처럼 하얘요.
외모는 예쁜 도자기 인형 같지만 성격은 어린애 같은 모양이라고만 생각했었어.
드미트리가 그렇게 말했었다. 왕재수에 대해. 인형처럼 야위었다고. 피부가 도자기 인형처럼 하얗다고. 예쁜 도자기 인형 같은 외모라고. 왜 그는 수많은 비유와 묘사를 내버려두고 한결같이 왕재수에 대해 그런 표현을 썼던 것일까? 드미트리는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다양하고 풍부한 어휘를 구사했다. 그런데 왜...
‘ 국장은 드미트리에게 레베진스키와 공동 작전을 수행하라고 했어. 나와도 공유하라고 했어. 그런데 드미트리는 내게 그것을 숨겼어. ’
‘ 국장은 데미도프에 대해, 검열국에 대해 모르고 있었어. 미셴카가 납치됐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어. 그런데 드미트리는 국장이 어젯밤 납치극과 데미도프에 대해 얘기해줬다고 했어. ’
‘ 드미트리는 우리 지부에 의무 연수를 온 것이 아니었어. 5회의 연수는 이미 마친 후였어. 그는 자원해서 왔어. 아무런 필요 없는 추가 2점을 위해. 그리고 나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 ’
‘ 미셴카가 사라진 후 나는 국장에게 가려고 했어. 그런데 드미트리가 나섰어. 나에게는 극장으로 가라고 하고 자신이 앞장서서 국장을 찾아갔어. 미셴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보고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국장을 만나겠다고 할 때마다 드미트리는 나를 저지했어. 내가 모스크바로 가겠다고 했을 때도, 스비제르스키에게 얘기하겠다고 했을 때도 논리적으로 나를 설득하며 그러지 못하게 했어. 그는 미셴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하게 했어. ’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머릿속에서 천둥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 미샤가 뭐라고 했더라... 걔가 분명히 날 보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내 이름을 부르면서... ’
다닐, 이거 말인데...
분명히 그거였다. 협박카드를 읽어보면서, 목 잘린 인형을 만지작거리면서 창백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왕재수가 속삭였다. 인형에 대해, 분명히 그 인형에 대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드미트리가 비틀거리며 쓰러졌고 곧 이어 베르닌 자신이 쓰러졌다. 무겁게 밀려오는 잠에 취해. 수면제가 든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 주스는 드미트리가 따랐어. 그 팩을 냉장고에서 꺼내온 것도 드미트리였어. 미셴카에게 아침을 준비해줬던 것도, 우유를 따라줬던 것도 드미트리였어. 하지만... 드미트리도 수면제를 먹었어, 나보다 먼저 쓰러졌어... 우리는 같은 팩에서 나온 주스를 마셨는걸. 그렇지만 난 드미트리가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어. 나는 그를 깨우지 않았어. 드미트리가 나를 깨웠어. ’
위층에 방울을 달러 갔던 것도 드미트리였다. 아침에 카드를 확인하러 갔던 것도, 세 번째 협박카드와 목 잘린 인형을 들고 왔던 것도 그였다. 왕재수가 사라진 후 식탁 위에서 네 번째 편지와 인형의 머리를 발견한 것도 드미트리였다.
“ 다냐! 정신 좀 차려 봐요, 왜 이러는 거예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어머나, 너무 과로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이리 와요, 휴게실에 가서 좀 누워야겠어요. 차에 꿀 좀 타 줄 테니까... ‘
리자가 걱정스럽게 소리쳤다. 이마에 부드럽고 따뜻한 손바닥을 대보기도 하고 물이 든 컵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베르닌은 고개를 저었다. 귓가에 기계적이고 목쉰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자신의 목소리였다.
“ 아니에요, 괜찮아요. 잊었던 게 생각나서... 저 지금 극장에 가봐야겠어요. 고마워요, 리자. ”
“ 하지만... ”
베르닌은 비틀거리며 사무실을 나섰다.
* * *
베르닌은 곧장 검열국으로 갔다. 하지만 이반 데미도프는 자리에 없었다. 대신 전에 모스크바 출장을 같이 갔던 비탈리 주브치크와 마주쳤다. 주브치크는 매우 반가워하면서 또 같이 출장을 갔으면 좋겠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공무로 바쁘다고 둘러대면서 데미도프에 대해 물었다.
“ 아, 그 친구. 목요일인가 국장한테 엄청 깨지고 나서 지금 휴가 중이지. 말이 휴가지 계속 근신 중이야. 내 부하직원 같았으면 제대로 징계 먹였을 텐데. 글쎄 그 반동분자 꼬마가 국장을 제대로 망신을 줬다지 뭔가. 데미도프 그 녀석이 무슨 음악을 잘못 알려줘서 그랬다지. 그렇게 잘못을 저질렀으면 알아서 사죄하고 기어야지 그 녀석이 사무실에 돌아와서는 얼마나 화를 내고 억울하다고 하고 길길이 날뛰고 반동분자니 불여우니 하고 욕을 하던지. 자기가 그 버릇없는 불여우 꼬마를 단단히 혼내주겠다고 벼르더군. 하여튼 요즘 젊은 것들이란. 아참 그렇군. 자네 금요일에도 여기 오지 않았나? 그때 데미도프랑 같이 나가지 않았나. 그땐 잘 차려입고 있더니 오늘은 또 지난번 같이 촌스러운 몰골이네. ”
“ 제가 여기 왔었다고요? 그자와 같이 나갔다고요? 그게 금요일이었나요? ”
“ 허참, 이 친구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기억력이 그리 신통치 않아서야. 금요일 오후 아니었나. ”
금요일 오후. 베르닌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드미트리는 스페호프에게서 ‘보안위원회 지방 분권의 특성’ 강의를 받은 후 오후에 극장으로 왔다. 왕재수가 그에게 드미트리가 싫다고 짜증을 내고 있을 때쯤이었다.
‘ 극장으로 오기 전에, 그때 검열국에 들렀던 거야. 그때 드미트리는 데미도프를 만났어. 대체 왜! 왜! ’
베르닌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가 버린 드미트리 때문에 서운했고 고마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가슴 아팠었다. 드미트리가 떠났다는 사실에 슬퍼하던 왕재수 때문에 더욱 가슴이 아팠었다. 그런데...
‘ 아니야. 전부 우연이야. 딤카는 좋은 애였어. 미셴카를 구하기 위해 온몸을 다 내던졌어. 총까지 맞았는데... 미셴카를 구했어. 보드카 때문에 정신 잃고 있던 걔한테 인공호흡까지 해줬어. 딤카는 미샤의 팬이었어. 수요일 공연을 올릴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다 해줬어. 그러니까 아니야. 전부 내 망상이야. 잊어버려. 모든 게 잘 끝났잖아. 미샤는 돌아왔어. 모레 공연도 잘 올릴 거야. 딤카는 좋은 친구야. 정말이야... ’
‘ 드미트리는 레베진스키와 사전 접촉을 했어. 레베진스키는 미셴카의 방에서 레코드를 뒤졌어. 목록에 표시를 했어. 여섯 개 음악 전부. 레베진스키는 데미도프에게 그 여섯 개의 음악이 뭔지 알려줬을 수도 있고 드미트리에게 알려줬을 수도 있어. 레베진스키에게 듣지 않았더라도 극장에 많이 다녔던 드미트리는 그 여섯 개의 음악이 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을 거야. 연습실에서 계속 음악을 틀어놓고 있었고 드미트리는 그걸 들었잖아. 그는 발레와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었어. 오랫동안 미셴카의 팬이었다고 했어. 그 애의 인터뷰 기사들까지 다 기억하고 있었어. 그 애의 서류까지, 나도 모르는 일들까지 다 알고 있었어.
내 뒤에 있던 캐비닛. 그 안에도 카드와 색지가 있었어. 누구라도 꺼내갈 수 있었어. 사무실에 있었던 누구라도. 그리고 드미트리는 사무실에 있었어. 내 곁에. 서무 업무를 배우느라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어. 금요일에 그는 일찍 출근했지. 그리고 내가 극장에서 미셴카의 옆에 있는 동안 그는 연습실에서 이따금 밖으로 나가곤 했어. 밤 공연 때는 관객석에서 보겠다고 하며 백스테이지에는 오지 않았어. 그리고 그는 곧장 요원 숙소로 가서 여직원들과 게임을 했던 걸까? 아니면 위층에 들렀을지도... 비둘기와 유리조각, 협박편지... 그리고 드미트리는 열쇠 없이 문을 딸 줄 알았어. 미셴카만큼 잘 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옷핀으로 문을 땄어. 그 애의 수갑을 핀으로 풀었어. 그러니까 미셴카의 방문도 열 수 있었을 거야. 901호도... 오, 하느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
귓가에 왕재수의 열띤 음성이 메아리쳤다.
‘ 그 자식은 구역질난단 말이야! 더러운 KGB 나부랭이에 재수 없는 놈이야! 잘난척하는 말투부터 시작해서 쳐다보는 눈초리까지 다 싫다고! ’
‘ 어휴, 사람 볼 줄 모르는 녀석... 그러니까 책상물림이지! 바보 멍충이! ’
베르닌은 눈을 감았다. 드미트리와 한 침대에 있던 왕재수를 떠올리려고 했다. 깊고 뜨거운 키스를 하던 모습을, 서로를 포옹하며 눕던 모습을. 하지만 다른 광경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병원에서 드미트리와 그가 스페호프에 대해, 똑같은 아가일 무늬 셔츠에 대해, 그리고 저녁 식사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때 그들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던 왕재수의 뻣뻣한 자세와 굳어진 표정. 어김없이 내뱉었던 ‘바보 멍충이’. 사랑을 나누던 둘의 모습을 목격한 이후 베르닌은 그건 드미트리에 대한 말이었다고 생각했다. 같은 옷을 입었으니 베르닌인 척 해서 스페호프로부터 그를 지켜주겠다던 드미트리, 어차피 떠날 몸이니 자기가 모든 것을 뒤집어쓰겠다고 나서던 드미트리의 무모함과 정의감에 감명을 받은 것을 숨기려고 투덜거린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병원 복도에서 왕재수는 베르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도 드미트리에게는 눈 한번 주지 않았다. 코코뱅과 양파수프로 근사한 저녁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닐, 이거 말인데...
왕재수는 그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왜 그렇게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고 나직하게 속삭였던 것일까. 차가워진 손과 창백해진 얼굴, 커다랗게 확장된 눈동자. 그건 수면제 때문이 아니었다. 약기운이 돌았을 때 베르닌은 눈을 크게 뜰 수가 없었다. 온몸이 무거워지면서 열이 솟구쳤고 그대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 미샤는 수면제를 먹은 게 아니었어. 뭔가에 굉장히 놀랐던 거였어. 검은 숲에서 뱀껍질을 봤을 때처럼. 나이트 테이블 위에 있던 비둘기 시체를 봤을 때처럼. 그래서 나에게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거야. ’이거 말인데‘ 라고 했어. 그 '이것'은 뭐였을까? 인형? 협박카드? 분명히 그 순간 걘 뭔가를 봤어. 내가 눈치 채지 못한 것을. 그게 걔를 놀라게 했어. 겁에 질리게 했어. ’
그는 검열국을 나왔다. 전날 내내 내렸던 비가 그친 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무 아래 군데군데 하얗고 노란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잿빛과 푸른색의 비둘기 몇 마리가 종종거리며 지나갔다. 나무 위로 큼직한 까마귀 한 마리가 휙 날아갔다. 흰 비둘기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흰 비둘기는 그리 흔하지 않았으니까.
극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6시가 다 되어 있었다. 2차 스페이스 리허설은 이미 끝난 후였다. 스태프들이 무대와 백스테이지를 오가며 작업 중이었다. 연습실로 가보니 무용수들이 여럿 남아 있었다. 주역인 가릭과 데니스, 타마라는 몇 번이고 그 마지막 동작을 되풀이하며 연습하는 중이었고 조역들도 티무르 이즈마일로프의 지도를 받아가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왕재수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 구경을 하러 와 있던 나쟈가 몹시 반갑게 인사를 했고 감독님은 옆의 연습실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왕재수는 군무진을 데리고 연습하는 중이었다. 주역만 추던 톱스타 출신이었지만 왕재수는 군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코즐로프도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베르닌은 코즐로프가 바이올린 대신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처음 봤다. 아마 왕재수를 지켜보기 위해 피아노 반주를 자원한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피아노 옆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망치로 머리를 계속 두들겨 맞는 듯 했다. 군무진의 움직임은 분명 오전의 리허설 때보다도 훨씬 더 근사하고 정연해져 있었지만 이제 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왕재수의 목소리만을 알아듣고 왕재수의 움직임만을 분간할 수 있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지만 왕재수의 목소리는 또렷했고 스텝과 동작은 활기찼다. 그 반짝이는 검은 눈과 날개 치는 듯 움직이는 두 팔, 이따금 무용수들에게 칭찬을 던질 때 얼굴 전체에 번지는 밝은 미소를 보면 아무도 그가 이틀 동안 납치됐다 돌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어느 순간 음악이 멈추었고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가 끊겼다. 무용수들이 왕재수에게 와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연습이 끝난 모양이었다. 코즐로프가 휘파람을 불었다.
“ 결국 되긴 되는구나. 하도 엉망이라 저 녀석들을 무대에 올릴 수 있을까 했는데 하여튼 미셴카는 대단한 애라니까. 근데 너 왜 이렇게 안색이 안 좋냐. 스페호프 그 개자식이 뭘 또 얼마나 볶았으면. 그렇지 않아도 우리 아기가 걱정하더라. 너 왔냐고 계속 묻고. ”
“ 아... 별일은 없었나요? ”
“ 음, 없었지. 무용수 몇 놈이 수보로긴 그 새낄 산 채로 파묻어버리겠다고 날뛰는 걸 말리느라 고생한 거 빼곤. 붙잡느라 팔 빠지는 줄 알았네. 그래도 무대 올라갈 놈들이 그런 짓하면 근육 미워져서 안 된다고 우리 아기가 호통 치니까 다들 잠잠해져서 다행이야. 수보로긴 그 새낀 내가 따로 손봐줄 거야. ”
“ 그러지 말아요, 로만. 미샤가 항상 걱정하잖아요. 당신이 자기 때문에 일 저질러서 스페호프 눈에 띄면 잡혀간다고... ”
“ 몰래 두들겨 패주면 되지! 수보로긴 그 자식은 용서 못해. 레베진스키도 마찬가지야. 돌아오기만 해봐라! ”
“ 쟤가 여기서 의지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당신 잡혀가면 쟨 정말 못 견딜 거라고요. 그러니까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 그놈들은 내가 패줄 거예요! ”
“ 너 같은 책상물림이 패봤자! 그리고 우리 아기가 나만 의지하는 줄 아냐! 그런 쪽으로는 나보다 널 더 따르지. 저 녀석은 안아주는 남자랑 있으면 정신 못 차린다고. 나하고는 의지하고 말고가 아니란 말이야. ”
“ 로만, 오늘 밤에 쟤랑 같이 있어줄 거죠? ”
“ 아니. 나야 백번이고 그러고 싶은데 쟤가 수요일까진 안 된다고 했으니까. 근데 모스크바에서 왔다는 그 자식은 어디 갔냐? 너랑 엄청 닮은 그 자식 말이야. 그놈 때문에 쟤가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는데. ”
“ 아침에 돌아갔어요. 그러니까 당신 미샤랑 같이 있어도 괜찮아요. ”
“ 우리 아기가 괜찮다고 하면. ”
그때 무용수들을 모두 내보낸 왕재수가 그들 쪽으로 왔다. 베르닌을 보더니 아주 잠깐이었지만 안도의 표정을 지었고 곧 활짝 웃었다.
“ 애들 진짜 많이 좋아졌어. 내일 조금만 더 하면 무대에서도 괜찮을 거야. 로만, 이제 들어가서 쉬어. 내일 아침에 드레스 리허설 해야 하니까. ”
“ 아직 7시도 안됐는데 뭘. 넌 어차피 옆방에서 애들 또 잡을 거잖아. 감시꾼도 모스크바로 돌아갔다면서. 끝날 때까지 여기 있다가 너랑 같이 돌아가면 되겠네. ”
“ 당신 내 말 잊었어? 수요일까지. 안 돼. ”
코즐로프는 한숨을 쉬면서 베르닌에게 그것 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화를 내거나 우기는 대신 왕재수를 긴 팔로 덥석 휘감아 세게 안아준 후 ‘내일 보자!’ 하면서 나가버렸다.
왕재수는 베르닌에게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옆의 연습실로 가서 주역과 조역들이 춤추는 것을 주시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30분쯤 후 왕재수는 무용수들에게 그만 돌아가서 푹 쉬고 아침에 일찍 나오라고 했다. 이례적으로 이른 종료였다.
무용수들이 돌아간 후 왕재수는 무대감독을 불러서 드레스 리허설과 수요일 공연을 위해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사항들을 몇 가지 재확인했다. 거대한 의상실로 가서 새로 도착한 의상과 장신구들도 쭉 훑어보았다. 분장사와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베르닌은 잠자코 왕재수를 따라다녔다.
8시에 왕재수는 퇴근하겠다고 했다. 생각보다 빠른 시각이라 베르닌은 정말이냐고 되묻기까지 했다. 왕재수는 저녁도 집에 가서 먹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재킷을 걸치고 스카프를 두르더니 날듯이 뛰어나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베르닌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 * *
차 안에서 왕재수는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다리를 건너갈 때는 창 너머로 가로등 램프 불빛에 반짝이는 물결을 보면서 손가락으로 사진 찍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신시가지로 접어들자 왕재수는 다시 노래를 흥얼거렸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로등 램프가 꺼져서 캄캄한 골목을 지나갈 때 왼손으로 목덜미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입 안으로 낮게 한숨을 쉬었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왔을 때 왕재수는 자연스럽게 6층 버튼을 눌렀다. 언젠가부터 그는 귀가하면 베르닌의 집으로 곧장 향했다. 엘리베이터 조명 아래에 서자 마냥 하얗고 매끄럽게만 보였던 왕재수의 얼굴에 푸르스름하고 검은 그림자가 졌다. 눈 주위가 거무스름했다. 하지만 복도로 나오자 다시 흠 없이 하얗게 보였다. 속눈썹 그림자였던 게 분명했다.
‘ 도자기 인형. ’
베르닌은 입 안으로 나직하게 뇌었다. 어지러웠다. 울고 싶었다. 왕재수는 곧장 그의 집으로 들어가더니 재킷과 스카프를 벗어 내팽개쳤다. 비누칠을 해서 손을 박박 문질러 씻더니 세수까지 하느라 셔츠 앞자락을 적셔 놓았다. 그래도 왕재수는 툴툴대지 않았다. 젖은 셔츠를 벗더니 빨래 건조대에서 베르닌의 티셔츠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 나 이거 입어도 돼? 옷 마를 때까지만. ”
“ 으응. 아, 거기 네 옷도 있어. 어젯밤에 빨아놨거든. 다 말랐을 거야. ”
왕재수는 건조대 끝에 걸려 있는 하늘색 셔츠를 힐끗 쳐다보았다. 토요일 아침에 베르닌이 가져다 준 셔츠였다. 왕재수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셔츠를 낚아채 휴지통에 처넣었다. 납치당했을 때 입고 있었던 옷이라 그런 것 같았다.
베르닌은 보르쉬를 데웠다. 보랴에게서 주워들은 레시피대로 마카로니를 삶아서 스메타나와 연어알을 얹었다. 양배추와 당근을 채 썰어 곁들였다. 왕재수는 연어알 얹은 마카로니를 좋아하며 먹었다. 보르쉬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베르닌은 기계적으로 숟가락과 포크를 움직였다. 뭔가가 목구멍으로 넘어가고는 있었지만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왕재수가 맛있게 먹는 게 기뻤지만 동시에 어딘가 불안했고 소름이 돋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왕재수는 한 번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휘파람, 노래, 미소, 밝은 표정, ‘연어알 얹으니까 맛있어’ 라는 쾌활한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밝고 사랑스러운 동시에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그 목소리와 표정 어디에도 가식적인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베르닌은 반년이 넘도록 왕재수의 곁에 있었다. 그 애가 어떤 식으로 웃고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잘 알았다. 평상시의 왕재수라면 음식이 맛있다 해도 결코 이렇게 개방적으로 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눈부신 미소를 짓지 않을 것이다. 그건 무대 위에서 보여 주던 미소였다. 완벽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미소. 저녁에 다시 만나 돌아오는 동안, 식사를 하는 동안 왕재수는 단 한번도 ‘바보 멍충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탁월한 배우였으니까.
식사를 마친 후 왕재수는 욕실로 가더니 양치질을 했다. 나와서는 거실 카펫 위에서 두어 번 빙그르르 돌더니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싱크대 앞으로 갔다. 설거지를 하려고 물을 틀었다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침을 삼켰다. 거실로 갔다. 반쯤 잠긴 목소리로 불쑥 말했다.
“ 왜 양치질했어? ”
“ 응? 밥 먹었잖아. 좀 있으면 잘 거고. ”
“ 차 안 마셨잖아. 저녁 먹고 나면 항상 차 달라고 했잖아. 내가 잊으면 화냈잖아. 그런데 달라고도 안 하고. ”
“ 그랬나... 극장에서 마셨으니까. ”
“ 너 극장에서 마셔도 집에서 저녁 먹으면 꼭 차 마시잖아. 애초부터 나한테 저녁 홍차는 연하게 우려야 한다고 야단쳤잖아. ”
“ 잊어버렸어. 아니, 오늘은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았어. 일찍 자려고. ”
“ 왜 화 안 내? ”
“ 왜 화내야 되는데? ”
“ 너 내가 이렇게 꼬치꼬치 간섭하면 화내잖아. 근데 왜 화 안 내냐고. ”
“ 너 왜 그러는 거야? 나 화나게 만들고 싶은 거야? 스페호프한테 엄청 볶이고 왔구나, 그래서 나한테 시비 거는 거지? ”
왕재수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깨를 으쓱거리자 칼라가 늘어난 티셔츠 사이로 불그스름한 키스 자국들이 남아 있는 목덜미가 휑하게 드러났다. 이제 베르닌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왕재수의 손목을 낚아채듯 쥐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 이제 그만해, 미하일. 제발. 그놈 누군지 봤잖아. 누군지 알잖아. 그렇지? 이제 괜찮아. 다 끝났어. 숨길 필요 없어. 말해. 다 말해. 나한테는 말해도 괜찮아. ”
왕재수가 눈을 깜박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 순진한 소년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베르닌이 손목을 더욱 세게 쥐면서 간절하고 고통스러운 눈을 떼지 않자 그 어린애 같은 표정이 사라졌다. 미소도, 홍조도, 휘파람도, 두 눈에서 반짝이던 장난기도 부서진 석고처럼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다. 무대 위의 왕자님 같던 가면이 사라졌다. 창백하고 매끄러운 얼굴 위로 검고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겁고 낮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다닐. ”
“ 아니, 넌 알아. 내가 알기 전부터 알았어. 제발, 미셴카. 괜찮아. 전부 말해도 돼. 나한테는 괜찮아. 알잖아. ”
“ 아니야, 그렇지 않아. 안 괜찮아. 전부 안 괜찮아. 너한테는 안 괜찮아. ”
왕재수는 연속으로 세 번, 숨도 쉬지 않고 ‘안 괜찮아’를 쏟아냈다. 평소 같았으면 정확한 문법과 우아한 말투를 중시하는 레닌그라드 출신답게 ‘괜찮지 않아’라고 했을 것이다. 그는 베르닌의 손을 뿌리치고 뒷걸음질쳤다. 창백하게 질린 채 고개를 양옆으로 마구 흔들면서 계속 뒤로 물러나다 소파에 걸려 휘청거렸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넘어지기 전에 팔을 뻗어 어깨를 붙잡았다. 왕재수가 고개를 돌렸다. 베르닌은 뱃속이 뭉클거렸다. 혈관 속의 피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심장에 칼이 꽂힌 것 같았다. 그는 왕재수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 불덩이처럼 뜨겁고 총에 맞은 새처럼 파르르 떨리는 몸을 두 팔로 세게 조이며 괴롭게 속삭였다.
“ 그건, 그건 드미트리였지? 그렇지? ”
왕재수가 낮게 비명을 질렀다. 목에 걸려서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세게 안고 있는데도 몸을 경련했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다시 한 번, 좀 더 또렷하고 힘 있게 물었다.
“ 널 납치했던 사람. 드미트리였지? 9층으로 데려갔던 사람. 그렇지? 부탁이야, 미하일. 솔직하게 말해줘. 그래야 해. ”
“ 왜? 왜 솔직하게 말해야 되는데? ”
“ 그래야 모든 게 괜찮아지니까. 그래야 네가 더 이상 무섭지 않을 테니까. ”
“ 나는 안 무서운데... 난 다 괜찮은데. ”
“ 아니야, 괜찮지 않아. 내가 바보야? 넌 괜찮지 않을 때만 그렇게 말해! ”
“ 아니야. 난 괜찮아. 안 괜찮은 건 너야. 그러니까 이제 놔줘. 나 아무 말도 하기 싫어. 나 잘래. 다닐, 나 자고 싶어. ”
“ 왜 나한테 안 괜찮다는 거야!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 자식 맞잖아. 드미트리 그 자식이 꾸민 거잖아. 협박편지, 비둘기, 인형, 수면제... 전부! 그 자식이 널 가뒀어. 그래놓고 감쪽같이 날 속이고 같이 널 찾으러 다녔어. 그놈이 널 협박한 거잖아... 이제 그놈은 갔어. 그러니까... ”
“ 네가, 그놈이 좋다고 했잖아! 형제도 없고 친구도 없다고 했잖아! 형 같다고 했잖아! 그놈이 와서 좋다고. 소중하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안 괜찮아... 너는 안 괜찮단 말이야... ”
왕재수가 갑작스럽게 소리쳤다.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팔에 붙들려서 꼼짝도 못하자 머리로 베르닌의 어깨를 들이받았다. 이마와 숨결이 너무 뜨거워서 풀무질을 하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심호흡을 하려고 애썼다. 실패했다. 어쨌든 상관없었다. 그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앉느라고 팔의 힘이 조금 풀어지자 왕재수가 버둥거리며 빠져나가려고 했다. 베르닌은 있는 힘껏 왕재수를 껴안고 못 움직이게 눌렀다. 왕재수가 흐느꼈다.
“ 숨 막혀, 숨 막혀... 왜 이러는 거야. 좀 놔줘. 다닐, 좀 놔줘. ”
“ 알았어, 놔줄게. 근데 1분만 있다가. ”
“ 왜... 지금 놔줘. 숨 막혀. ”
“ 네가 너무 흥분해서 그렇지. 지금도 이렇게 몸부림치는데. 놔주면 벽에 머리 들이받을 거잖아. 다친단 말이야. ”
왕재수는 끙끙거리며 욕을 했지만 버둥거리던 것은 멈췄다. 몸의 경련도 많이 잦아들었다. 베르닌은 마음속으로 100까지 센 후 팔을 풀었고 왕재수를 놔주었다. 반쯤은 그 애가 화를 내며 도망칠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더 이상 왕재수를 붙잡고 있을 기력이 없었다.
왕재수는 도망치지 않았다. 베르닌의 곁에 주저앉더니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래서 베르닌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 나 안 괜찮아. 네 말이 맞아. 안 괜찮아. 나 드미트리 좋아했어. 친구라고 생각했어. 형제처럼 좋았어. 그래서 놀랐어. 실망했어. 슬펐어.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줘. 안 그러면 나 정말 안 괜찮을 거야. 네가 말 안 해도 그놈이 했다는 거 알아. 알게 됐단 말이야. 그런데 네가 계속 아닌 척하면 나 정말 미쳐버릴 거야. 그러니까 그냥 다 얘기해줘. 나도 얘기할게. 우리 다 얘기하고 다 털어버리자. 그러면 둘 다 괜찮아질 거야. 응? 우리 그러자. ”
왕재수가 핏기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두 눈의 빛이 꺼져 있었다.
“ 바보 멍충이. 얘기한다고 괜찮아지는 거였으면 세상천지에 다 맘 편하고 행복한 사람들뿐이게. ”
“ 그래도 기분은 훨씬 더 나아질 거야. ”
“ 옛날에 내 친구도 그렇게 얘기했지. ”
“ 누구, 유라? ”
“ 아니. 유라 말고. 다른 친구. ”
왕재수는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입술만 움직였지만 어쨌든 미소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약간 안심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었다.
“ 걔가 그런 거 맞지? 그랬던 거지? ”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확신하고 있었지만 왕재수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베르닌은 현기증이 나면서 온몸이 조각조각 저며지는 것 같았다.
“ 그 자식이 너 협박한 거지, 그래서 아무 말 안 했던 거지? ”
왕재수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닌이 대체 무슨 협박을 한 거냐고 물어보려는데 왕재수가 입을 열었다.
“ 너부터 얘기해줘. 어떻게 알았는지. 너 아침까지는 몰랐잖아. 끝까지 모를 줄 알았어. ”
그래서 베르닌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머릿속이 아직 다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따금 횡설수설하기도 하고 앞뒤를 놓치기도 했지만 모든 것을 다 말했다. 스페호프와의 면담에서 알아낸 사실. 리자의 이야기들. 도자기 인형. 검열국에서 알게 된 데미도프의 행동과 드미트리의 출현.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지금에야 미심쩍게 느껴지는 드미트리의 행동들. 전부 얘기했다.
* * *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중간에 일어나 물을 마셨지만 곧 돌아와 베르닌의 곁에 앉았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너무 조용해서 잠들었나 싶었지만 눈을 돌리면 곧 왕재수의 시선과 마주쳤다.
마침내 베르닌이 생각나는 모든 이야기를 마쳤을 때 왕재수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 그랬구나. 안전가옥인지 뭔지랑 레베진스키 별장이랑 잔나네 집까지 갔었구나. 힘들었겠다, 비 오는데... ”
“ 난 네가 정말 거기 있는 줄 알았어. 다 뒤졌는데 없어서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 ”
“ 바보... 내가 목걸이 떨어뜨렸는데... 나 찾아오라고... 한참 후에야 찾고. ”
베르닌은 눈을 깜박였다.
“ 어, 그 목걸이... 난 네가 반항하다 떨어진 줄 알았어. 일부러 떨어뜨린 거였구나... ”
“ 응. 그 자식이 날 떠메고 계단으로 올라갔거든. 내가 밀어서 계단에서 한번 구를 뻔했어. ”
“ 넌 수면제 안 먹은 거지? 그 우유도 괜찮았던 거지? ”
“ 수면제는 너만 먹었던 거지. 우유는 이상 없었어. 계단 올라갈 때까진 정신 멀쩡했는데 내가 미니까 그 자식이 머리를 패서 그때 기절했어. ”
“ 위험하게 왜 그랬니... 그것도 계단에서. ”
“ 목걸이 떼어내려고 그랬어. 그 자식이 눈치챌까봐 막 떠밀면서 왼손으로 몰래 떼어냈거든. 그 자식은 몰랐지. ”
베르닌은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왕재수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며 안타깝게 말했다.
“ 아까 분장사한테 고쳐달라고 할걸...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까먹었어. ”
“ 괜찮아. 내일 고치면 되지. 찾아서 다행이야. ”
왕재수는 목걸이를 손으로 꼭 쥐었다. 창백하던 얼굴에 희미한 핏기가 돌았다.
“ 그런데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가. 나만 수면제를 먹었다는 거. 그 자식은 쓰러진 척만 했던 거야? 드미트리랑 나는 같은 팩에서 주스를 따라 마셨잖아. 어떻게 나만 약을 먹을 수가 있지? ”
“ 바보. 약은 주스에 들어 있었던 게 아니야. 컵에 들어 있었던 거지. 네가 주스 달라고 했을 때 그 자식이 부엌에서 컵 가져와서 따라줬잖아. 유리컵이 아니니까 안이 안 보이잖아. 컵에 약을 넣고 그 위로 주스를 부었던 거야. ”
“ 컵에... ”
베르닌은 기억을 더듬었다. 왕재수의 말이 맞았다. 드미트리가 주스를 마시는 것을 보고 갈증을 느낀 그는 주스가 남았느냐고 물었다. 드미트리는 새 컵을 가져와서 그에게 주스를 따라주었다. 그리고는 약기운이 도는 시간을 계산해 감쪽같이 먼저 쓰러진 척했던 것이다. 소름이 돋으면서 분노가 치밀었지만 애써 떨쳐버리려 노력하며 베르닌은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 그때 나한테 무슨 말 하려고 했던 거야? 내가 쓰러지기 전에... 네가 그랬잖아. ‘이거 말인데’ 라고. 인형이랑 카드 만지면서. 설마 그때 드미트리가 협박범이란 걸 알아차린 거였어? ”
“ 응. 그때 알았어. ”
“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 ”
“ 카드. 인형. 전부. ”
“ 그 인형은 네 방 창가에 있던 거였잖아. 두 개 중 하나. 그런데 어떻게 그것만 보고 드미트리라는 걸 안 거야? ”
“ 아니야, 다닐. 그 인형은 내 방에 있던 게 아냐. 같은 사람이 만든 것일 뿐이야. 백조랑 발레리나는 많이 만들었지만 천사는 열두 개 밖에 만들지 않았어. 나한테는 하나밖에 없어. 원래는 두 개였는데 하나는 재작년인가 친구가 놀러 와서 구경하다가 깨뜨렸어. ”
“ 하지만 다 똑같이 생겼잖아... 네 방에 있는 인형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 그것만 가지고 어떻게 드미트리라고 생각했어? ”
“ 자세히 보면 열두 개 인형이 다 조금씩 다르게 생겼거든. 그리고 인형 발바닥에 완성한 날짜랑 일련번호가 적혀 있어. 내 방에 있는 건 1번이야. 깨진 건 2번이고. 협박편지랑 같이 온 건 8번이었어. ”
“ 일련번호... 그랬구나. 하지만 그래도 모르겠어, 어떻게 드미트리인 줄 알았는지... ”
“ 너야 당연히 모르지. 난 알아. 그건 레닌그라드에서 나온 거야. 로모노소프 도자기 공장 일급 디자이너였던 할머니가 있었는데 발레광이었어. 나랑도 친했고. 은퇴한 후에 나랑 동료들 무대 의상이나 장신구들 디자인을 도와줬거든. 천사는 키로프 쪽에서 그 할머니에게 의뢰해서 한정판으로 만든 거야. 그때 내가 작품을 하나 안무했는데 천사가 나왔거든. 할머니는 딱 열두 개만 만들어서 1번, 2번은 나한테 줬어. 나머지는 그 작품 초연 때 극장에서 전시하고 팬들에게 선착순으로 팔았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 인형을 보낸 건 레닌그라드에서 온 사람이야. 그리고 내 작품 초연을 본 사람. 드미트리는 둘 다 해당돼. 내 팬이었다고 했으니까. ”
“ 하지만... 원 주인이 다른 사람에게 팔았을 수도 있잖아. 여기까지 흘러들어왔을 수도 있잖아. ”
“ 너는 발레광들이 어떤지 몰라. 게다가 명장이 만든 한정판 인형이야. 그리고 그 천사는 날 모델로 만든 거야. 내가 그랬잖아, 난 어마어마하게 인기가 많았다고. 내 팬들은 그 천사 구하려고 난투극도 벌인 적 있어. 그걸 손에 넣은 팬이라면 절대 안 내놨을 거야. ”
“ 그런데 그 귀중한 인형의 머리를 자르고 망가뜨리다니... ”
“ 그 자식이 카드랑 인형 들고 와서 친절하게 설명했던 거 기억 안 나? 처음엔 새, 그 다음엔 사람인 거였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거야. 처음엔 파랑새, 그 다음엔 나. ”
“ 비둘기였잖아... ”
“ 여긴 파랑새가 없잖아. 구할 수 있는 새를 죽였던 거야. 파랑새. 천사. 검은 기사. 카드에 그렇게 씌어 있었지. 그때 모든 게 명확해졌어. 범인이 그 자식이라는 게. ”
“ 왜? 파랑새가 발레에 나오는 배역이라서? 드미트리가 발레를 잘 아니까? 여기도 관객들은 있잖아. 극장 사람들도... ”
“ 단순히 발레에 나오는 배역이라서가 아니야. 그건 전부 나를 가리키는 거였어. 그건 전부 내가 키로프에서 췄던 배역이었어. 셋 다 굉장히 중요한 거야. 레닌그라드 팬들이라면 제일 처음 손꼽는 배역들이라고. 세 개 다 한때 내게 붙었던 별명이기도 했어. 파랑새는 내가 키로프에서 제일 처음 췄던 중요한 역이야. 학교 졸업하기 전에 역을 맡겨서 떠들썩했었어. 천사는 아까 얘기한 안무작과도 관계가 있지만 내가 데뷔했을 때부터 제일 많이 불리던 별명이었어. 높이 날고 바닥에 내려오지 않는다고... 그리고 검은 기사는 내가 제일 처음 안무했던 작품에서 춘 거야. 루슬란과 류드밀라. 난 로그다이를 췄어. 알잖아, 주인공이랑 싸우다가 물에 빠져 죽는 기사. 검은 망토를 두르고 나오거든. 그래서 팬들이 그때부터 검은 기사라고 불렀어. 물론 레닌그라드에서만이야. 나중에 모스크바 가서는 또 다른 별명들로 불렸으니까.
가브릴로프에서는 아무도 그런 거 몰라. 렐랴도 인터뷰할 때 보니까 내가 그걸 춘 건 알지만 별명까지 붙었다는 건 몰랐어. 극장 사람들도 그렇고. 내가 그런 얘길 한 적도 없고. 그러니까 그건 드미트리였던 거지. 레닌그라드 토박이. 내 모든 작품을 봤고 안무작은 모두 초연을 봤다고 했어. 로그다이가 제일 인상에 남는다고 했고. 검은 기사 말이야. 그 자식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 청년극장에서 올렸던 작품까지 봤다고 했지. 그놈은 진짜 팬이었어. 레베진스키도, 스페호프도 그런 세심한 협박편지와 선물을 보낼 만큼 똑똑하지 않았어. 여섯 개의 음악도. 그건 레닌그라드에서 온 내 팬만이 보낼 수 있는 거였어. ”
베르닌은 몸을 떨었다. 그토록 드미트리를 좋아하고 신뢰했던 자신이 너무나 바보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배신감이 치솟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왜... 드미트리가 왜... 대체 왜 그런 거야... 그 자식 심지어 스페호프의 지령을 따른 것도 아니었어. 스페호프는 납치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않았어. 드미트리는 네 팬이었잖아. 얼마나 열띠게 너와 네 작품을 옹호했는데... 수요일 공연 꼭 올리게 해주고 싶다고 했는데. 그런데 왜... ”
“ 왜긴 왜야, 사이코니까 그렇지. ”
왕재수는 눈을 감았다.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면서 내키지 않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 팬이라서 그런 거야. 다닐, 넌 극장에 대해서, 무대와 배우에 대해서, 팬에 대해서도 잘 몰라. 어딜 가나 광팬들이 있어. 100명 중 99명은 괜찮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머지 하나가 사이코일 때가 있어. 그것도 꽤 자주. 그러면 재수 옴 붙는 거지. 그리고 그런 팬들은 연극배우보다는 무용수들한테 더 많아. 너도 알다시피 무용수들은 나이와 육체와 힘의 지배를 받는 존재잖아. 드라마 배우보다 수명이 짧은 대신 젊고 외모가 근사한 편이지. 게다가 육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직업이니까. 발레단 동료들도 대부분 한두 명씩 있었어, 골치 아픈 팬이. 나한테는 좀 많았어. 사이코. 스토커. 미친놈들. 내가 그랬잖아, 그 자식 눈초리가 맘에 안 든다고. 재수 없게 쳐다본다고. 비싼 그림이나 고기 감정하듯이 훑어본다고 했잖아. 많이 봤어, 그런 눈빛. 학교 다닐 때부터. 기숙사 앞에서, 극장에서, 주차장에서, 길에서, 카페에서, 집 앞에서, 생각지도 않은 곳 여기저기서. ”
베르닌은 불현듯 첫날 저녁이 생각났다. 연습을 마친 무용수들이 호들갑을 떨며 왕재수를 껴안고 호의를 표시하고 있을 때 드미트리는 저만치 떨어져서 그런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베르닌은 놀랐었다. 자신과 아주 닮은 그 까만 눈에서 그런 강렬한 시선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가. 팬이라면 널 동경하는 거잖아. 좋아하고 아끼는 거잖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런 나쁜 짓을 할 수가 있어? 널 위협하고 납치하고...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야? 드미트리는 수요일 공연 정말 보고 싶어 했어.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어. 아침에 떠날 때 정말로 아쉬워했어. 널 숭배했단 말이야. 걔는 네 작품을... ”
“ 내 작품을 좋아한 게 아니야. 예술가로서의 날 숭배한 것도 아니고. 바로 거기 그냥 애호가와 사이코 스토커의 차이가 있어. 그 자식은 그냥 날 좋아한 거야. 자기 손에 넣고 싶었던 거라고. 너는 그런 거 영영 모를 거야. 사람을 그런 식으로 원할 수 있다는 거. 너무 갖고 싶어서 사이코가 되는 거야. 갖는 순간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놈도 있고 그냥 천천히 말려죽이고 싶어 하는 놈도 있어. 자기 거라고 흔적을 남겨놓는 데서 만족하는 놈도 있고 인형놀이를 하듯이 갖고 노는 놈도 있다고. 너야 이해하기 어렵겠지. 착한 애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잖아, 바보 멍충이가 훨씬 낫다고. ”
왕재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의식적으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부스럭거리더니 한숨을 쉬며 도로 손을 꺼냈다.
“ 한 대 피우고 싶다... 담배 없지? ”
“ 없어. 나 안 피우잖아. ”
“ 넌 왜 담배 안 피우는 거야. 재미없게. ”
“ 야, 난 담배 있어도 너 안 줄 거야! 너 피우면 안 되잖아! 의사 선생님이 절대 피우지 말랬잖아. 원래 체질에 맞지도 않는다면서. ”
“ 매사가 안 된다는 것투성이...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담배 대신 물을 따라 주었다. 왕재수는 물을 딱 한 모금만 마셨다. 그동안 베르닌은 계속해서 팬과 사이코와 스토커에 대해, 누군가를 동경하는 것과 원하는 것, 갈망과 소유욕과 파괴의 경계에 대해 생각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드미트리를 떠올리자 더욱 머리가 뒤엉켰다.
“ 하지만 그 자식이 네 팬이었다면 수요일 공연을 망칠 생각은 아니었을 거 아냐. 근데 그놈은 널 가뒀어. 이상한 협박편지까지 계속 보내고... 왜 그렇게 복잡한 짓을 해야 돼? 그냥 널 납치해서 가뒀으면 끝나는 거잖아. 게다가 나랑 같이 널 찾아다녔어. 왜 그랬던 거지? ”
“ 그놈은 수요일 공연을 방해해야 했지만 완전히 망칠 생각은 아니었어. 왜냐하면 그 자식은 내 팬인 동시에 모스크바에서 온 KGB 나부랭이였으니까. 그놈은 스페호프가 아니라 다른 놈에게서 지령을 받고 있었어. ”
“ 누, 누구... 스비제르스키? ”
낯익은 이름에 왕재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 아니. 그 아저씨야 내 공연을 보고 싶어 하는 걸. 하긴 그 사람과 관계는 있지. 그 자식을 보낸 건 제믈랴코프였으니까. 아, 넌 그렇게 말하면 잘 모르겠구나. 정치꾼이야. 스비제르스키 그 인간과는 정적이고. 날 감옥에 처박는 데 한 몫 했던 놈이야. ”
베르닌은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스페호프가 제믈랴코프에게 보내는 밀서를 그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외교부 차관.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가 도리어 덫에 걸렸던 인물.
“ 드미트리가 제믈랴코프의 지령을 받고 왔단 말이야? 그자는 KGB 쪽이 아니잖아. 외교부 간부잖아. 드미트리는 KGB 요원인데... 어떻게 그자의 명령을 받을 수 있어? ”
“ 바보. 너 정말 이 바닥 모르는구나. 매수하면 끝나는 거지. 게다가 그놈은 해외 지부에서 일했잖아. 런던이랑 파리 어쩌고... 그러니까 외교부 간부랑 엮이는 거야 쉬웠겠지. 제믈랴코프는 우리 아저씨에게 엿을 먹이고 싶었거든. 그래서 그 자식한테 지령을 준 거야. 가서 공연을 방해하라고. 하지만 미묘한 줄타기가 필요했던 거지. 공연이 취소되거나 내가 완전히 맛이 가면 우리 아저씨가 폭발할 테니까. 그래서 그자는 딱 중간만큼만 선을 그은 거야. 공연은 어찌어찌 올라가게 놔둔다 해도 나한테는 혼을 내주고 싶었던 거지. 제믈랴코프 그 인간은 옛날부터 날 진짜 싫어했거든. 게다가 이번에 우리 아저씨한테 제대로 엿 먹은 게 있었대. 그래서 은밀하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거야. 망할 자식이 아저씨를 손댈 용기는 없으니까 나한테 화풀이를 한 거지. ”
“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아낸 거야? 설마 드미트리가 그런 얘길 다 해 준 거야? ”
“ 아주 대충. 그놈 완전 제 잘난 맛에 취해 있었거든. 미친놈이었어. 막 협박하고 윽박지르다가 또 돌변해서 어쨌든 곱게 돌려보내줄 테니 말만 잘 들으라고 어르고... 뭐 그놈이 제믈랴코프의 이름을 거론하지야 않았지. 하지만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 견적 나오더라고. 그 자식은 대놓고 말했어. 말만 잘 들으면 월요일까지 데리고 있다가 보내주겠다고. 근데 네가 어제 목걸이를 발견하는 바람에 하루 당겨진 거지. 하여튼 그게 그놈의 공적인 임무였어. 날 납치하는 거. 혼내주는 거. 공연 준비를 방해해서 질 나쁜 무대를 보여주게 하는 거. 그건 제믈랴코프의 목적이었지. 그놈은 다른 목적이 있었고. ”
“ 다른 목적이라니... ”
“ 먼저 얘기한 거. 사이코. 스토커. 정신 나간 팬의 목적. ”
왕재수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다리를 웅크리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불편해 보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쿠션을 대주려고 했지만 왕재수가 꿈틀거리더니 그의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았다. 베르닌은 반쯤 무의식적으로 그 애의 관자놀이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충격과 분노는 이제 둔해진 상태였다. 더 이상 놀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무서웠다. 드미트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무서웠다. 제믈랴코프의 지령을 받고 온 드미트리보다도 팬으로서의 드미트리가 더 무서웠다. 아니, 드미트리 자체가 아니라 그가 한 짓들을 알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그는 가장 원점으로 돌아가서 물었다. 조금이라도 더 객관적이 되어 보려고.
“ 그러면... 내가 쓰러진 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네가 날 붙잡은 것까진 기억나. 내 이름 부른 것도. 그 다음에는? 너는 수면제를 먹지 않았잖아. 그때 드미트리가 널 붙잡은 거야? ”
“ 응. 그놈이 쓰러졌을 때 깜짝 놀랐어. 그놈이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너까지 쓰러지니까 진짜 놀랐어. 너 제대로 숨도 못 쉬었단 말이야. 막 헐떡거리면서 팔다리도 경련하고... 눈도 안 뜨고 거품까지 물었어. 너무 무서웠어. 네가 어떻게 될까봐. 나 감옥에서 봤어. 이상한 주사 맞고 사람 죽는 거. 꼭 그렇게... ”
왕재수는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끼치는 듯 몸을 떨었다. 눈가에 흐릿하게 눈물이 비쳤다.
‘ 그랬구나. 그래서 901호에서 날 처음 봤을 때 그렇게 물었구나. 괜찮으냐고. 막 쓰러지고 꼼짝도 안 했다고... 가지 말라고 한 건 자기 때문이 아니었어. 날 걱정했던 거야. 약 먹이고 아프게 할 거라던 것도 자기 얘기가 아니었어. 내가 쓰러졌던 걸 떠올렸던 거야. 내가 아플까봐... ’
베르닌은 손등으로 왕재수의 눈을 닦아주었다. 낼 수 있는 가장 상냥한 목소리를 짜냈다.
“ 괜찮아. 나 그때 하나도 안 아팠어. 그냥 졸렸어. 몇 시간 자고 일어나니까 멀쩡했어. 진짜야. ”
“ 응... 근데 그땐 그런 거 몰랐어. 그 자식이 협박했으니까. 진짜 나쁜 약인 줄 알았어. 내가 막 너 인공호흡하려고 하는데 그 자식이 일어났어. 너무나도 멀쩡하게. 웃으면서. 난 너무 놀라서 굳어졌어. 그 자식이 옆으로 다가왔어. 그리고는 네 어깨를 질질 끌어당기는 거야. 그래서 내가 밀쳤어. 건드리지 말라고. 그랬더니 그놈이 그 재수 없는 정중한 말투로 심지어 내 부칭까지 부르면서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물었어. 난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래서 그놈한테 꺼지라고 소리쳤어. 더 이상 수작부리지 말라고, 협박범인 거 다 안다고, 비둘기 죽이고 거지같은 편지 나부랭이 보낸 것도 모자라서 뭐하는 짓이냐고 고함쳤어. 그러자 그놈이 갑자기 씩 웃으면서 생각보다 훨씬 똑똑하다고 했어. 그러더니 무섭냐고 물었어. 네가 잘못될까봐, 죽기라도 할까봐 무섭지 않으냐고. 그러더니 권총을 쥔 손을 들어 올렸어. 나는 그놈이 총을 갖고 있다는 걸 잊고 있었어. 자식은 처음부터 총을 겨누고 있었는데도... ”
“ 그 자식이 너한테, 너한테 총을 겨눴단 말이야? 마카로프... 그걸로 널 협박했단 말이야? ”
왕재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잠시 망설이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베르닌의 열띤 시선을 받자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 내가 아니었어. 너였어. 다닐, 그 자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웃고 있었어. 웬만하면 날 다치게 하진 않을 거라고 했어. ‘난 네 팬이잖아, 미셰츠카’ 라고 했어. 대신 널 쏘겠다고 했어. 쏘지 않더라도 그냥 두면 넌 죽을 거라고 했어. 아주 나쁜 약을 썼다고. 그런 거 전에도 보지 않았느냐고. 내가 말을 잘 들으면 널 쏘지 않을 거라고 했어. 해독제를 줄 거라고 했어. 난 너무 무서웠어. 그놈이 몇 번이나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했거든. 네 머리에 대고. 그래서 난 시키는 대로 했어. ”
“ 뭘... 뭘 어떻게... ”
“ 그 자식은 내 수첩을 가져와서 종이를 뜯어내더니 나한테 편지를 쓰라고 했어. 왼손으로. 문구를 불러줬지. 기억도 잘 안 나. 왕자가 어쩌고 수요일이 어쩌고 하는 거였어. 진짜 유치한 문구였어. 하여튼 불러주는 대로 썼어. 그동안 그놈은 계속 너한테 총을 겨누고 있었어. 다 쓴 후에 그놈은 날 앉혀놓고는 자기 임무에 대해 설명해주겠다고 했어. 제대로 된 설명도 아니었어. 하여튼 말만 잘 들으면 수요일 공연은 올릴 수 있을 거라고 했어. 안 그러면 널 쏴죽일 거라고 했어. ”
“ 하지만... 어떻게 그걸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가 있어? 난 KGB 요원이야. 요원을 죽이면 그건 공식적인 사건이 된다고. 아무리 제믈랴코프가 보냈다 해도 그렇지... 넌 세상 물정에 밝잖아. 근데 어떻게... ”
“ 그놈이 사이코였다고 했잖아. 제믈랴코프의 지령만 수행하는 놈이었다면 그 정도로 불안하진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놈은 미친놈이었어. 눈을 보면 알아. 그리고... 그놈은 스페호프가 널 신뢰한다는 것도 잘 알았어. 내가 중간에 말을 안 듣거나 도망치려고 하면 스페호프에게 네 배신행위를 전부 다 보고하겠다고 했어. 그러면 너는 잘릴 거고 더 이상 KGB 요원이 아니게 되는 거니까, 그리고 나면 아주 깨끗하게 널 죽여 버릴 수 있다고 했어. 그래서 난 그냥 말을 듣기로 했어. ”
베르닌은 숨이 막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고개를 흔들며 거실을 쿵쿵거리며 걸어 다녔다. 간신히 숨을 가다듬고 물었다.
“ 그래서. 그 다음엔? ”
“ 그 다음? 아까 얘기했잖아. 그놈이 날 9층으로 데려갔어. ”
“ 복도에 나왔을 때 소리라도 질렀으면... 그놈이 널 데리고 나왔으면 여긴 비어 있었을 거 아니야. 나한테 총 쏘겠다고 협박할 수도 없었을 거잖아. ”
“ 하나 더 있었어. 너한테 달려들었던 놈. 검열요원. ”
“ 데미도프... 그놈이... ”
“ 응. 근데 난 그 자식 얼굴은 못 봤어. 마스크로 가리고 있었거든. 굳이 얼굴을 꽁꽁 숨긴 걸 보니 내가 아는 놈일 거란 생각은 했어. 드미트리는 그놈에게 여기 남아 있으라고 하면서 바깥에서 내가 소리 지르는 게 들리면 곧장 널 쏴버리라고 했어. 그래서 소리 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개자식이 스카프 찢어서 입도 막고 다리도 묶었어. ”
“ 그래서 떠메고 갔다는 거구나. 손 대신 다리를 묶었던 거야... ”
“ 응. 내가 말을 잘 들었으니까 칭찬하는 뜻으로 손은 묶지 않겠다고 했어. 근데 내가 계단에서 목걸이 떼어내는 거 안 들키려고 떠밀면서 버둥거렸더니 그 자식이 바닥에 메다꽂고 뒤통수를 팼어. 그래서 기절했어. ”
“ 뭐? 그럼 심하게 맞은 거잖아! 왜 의사 선생님한테 얘기 안 했어! 뇌진탕이라도 걸렸으면 어쩌려고! ”
“ 선생님은 알아. 뒤통수 상처를 봤거든. 치료도 해주셨어. 머리카락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으니까... 내가 너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했어. ”
“ 바보 멍충이! 내가 아니고 네가 바보 멍충이야! ”
“ 별로 심하지 않았어.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어. 금방 깨어났고. 그리고 그놈이 그 방에서 직접 소독도 해주고 연고도 발라줬었어. 미친 변태 자식. ”
왕재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떨었다. 베르닌은 공항으로 달려가 비행기를 잡아타고 모스크바 본부로 날아가고 싶은 어마어마한 충동을 억누르느라 이를 악문 채 뭉개진 음성으로 물었다.
“ 그래서. 넌 그때부터 계속 901호에 갇혀 있었던 거야? 보드카 마셨다고 했잖아. 다른 약은 안 먹었어? ”
“ 그 보드카 생각도 하기 싫어. 처음엔 그냥 침실에만 가둬놨었어. 문은 다 잠겨 있고 그놈들이 교대해서 지켰어. 드미트리 그놈은 중간 중간 몇 시간씩 나갔다 들어왔어. 아마 너랑 같이 나 찾으러 다니는 시늉 하느라 그랬겠지. 밥도 주고 차도 줬어. 안 먹으려고 했는데 그놈이 협박해서 억지로 먹었어. 그러다가 그놈들이 방을 비운 거야. 방문은 밖에서 잠겼으니까 못 연다지만 창문은 깨뜨릴 수 있잖아. 그래서 나가려다 걸렸어. ”
“ 9층인데 창문을 깨고 나갈 생각을 했단 말이야? ”
“ 파이프 타고 내려가려고 했었지. 알잖아, 나 벽 잘 타는 거. 근데 그때 데미도프인지 뭔지 하는 자식이 딱 들어와서 망했어. 그놈이 주먹질을 하려는데 드미트리가 들어오더니 저지하는 거야. 무려 키로프에서 오신 귀한 몸이니까 너 같은 녀석이 손대면 안 된다면서 그놈을 내보냈어. 그러더니 그 사이코 새끼가 날 팼어! 그 자식 루뱐카 본부에서 온 놈 맞아, 상처 안 나게 패는 법을 알더라고. 자기는 날 때려도 된대. 내가 졸업도 안 한 풋내기 시절부터 내 무대를 봤으니까, 자기는 진정한 팬이니까 내가 잘못하는 게 있으면 더 잘못하기 전에 때려서라도 바로잡아 줘야 된다는 거야. 너무 웃기지 않아? 사이코나 공산당, 정치꾼, KGB 하수인들 논리나 다 똑같더라고. 하여튼 두들겨 팼어. 내가 못 덤벼들게 수갑 채워놓고. 그래놓고 보드카 먹였어. 내가 말을 안 들으니까 어쩔 수 없이 재워야겠다면서. 얼마나 먹였는지는 기억도 안 나. 생각만 해도 또 토하고 싶네. ”
왕재수는 속이 울렁거리는 듯 손으로 가슴과 배를 쓸었다. 베르닌은 이제 화조차 나지 않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그는 언제나 사람의 선의를 믿었다. 그런 식으로 비열하게, 완벽하게 사악하게 행동하는 인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데 일등공신 노릇을 해온 스페호프조차도 어딘가 어리숙한 면이 있었다. 적어도 그는 스페호프의 패턴을 예측할 수는 있었다. 국장이 어떤 사고방식의 소유자인지도 알았다. 하지만 드미트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드미트리에 대해 품었던 호의와 신뢰는 모두 무의미했다. 그가 느끼고 파악하고 이해했던 드미트리는 모두 허상에 불과했다. 오로지 그 사실만으로도 베르닌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 드미트리가 왕재수에게 그런 비열한 짓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 이후 있었던 일을 물었다. 왕재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 몰라. 기억 안나. 그때부턴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어. 토하고 자다가 깨다가 토하고 또 자고... ”
베르닌은 이제 왕재수가 사실을 숨길 때,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말투와 어떤 단어를 쓰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 더 캐묻지 않았다. 왕재수 때문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 때문이었다. 무서웠다. 드미트리에 대한 모든 환상이 깨질까봐. 드미트리의 행동이 그의 상식과 윤리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더욱 더 깊게 들어 갈까봐.
“ 그럼 내가 갔을 때까지 그러고 있었던 거야? ”
“ 거의. ”
“ 하지만... 난 총소리를 들었어. 두 번. 드미트리는 실제로 총에 맞았고. 그럼 데미도프와 그 자식이 막판에 싸운 거야? 꼬리 밟혔다고 책임 추궁하다 싸우고 열 받은 데미도프가 쏜 거야? 피를 보자 놀라서 그놈은 도망친 거고... ”
베르닌은 그때의 상황을 논리적으로 상상해 재구성하려고 애쓰며 물었다. 왕재수는 소파 구석으로 몸을 바짝 붙이면서 지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대꾸했다.
“ 아니. 총은 내가 쐈어. ”
베르닌은 너무 놀라서 펄쩍 뛰어오를 뻔 했다.
“ 뭐? 네가 쐈다고? 네가 어떻게! 너 그때 기절해 있었잖아! 분명히... 분명히 그랬어. 그래서 그 자식이 인공호흡을 해주고 있었고... 나도... ”
“ 아, 기절. 그래, 잠깐 기절하긴 했지. 그 자식이 목을 졸랐거든. 총 맞고 나서 순간 열 받아서... 그래도 오래 조르진 않았어. 네가 뛰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
“ 하지만... 넌 묶여 있었잖아! 총 같은 거 쏠 줄도 모르잖아! ”
“ 뭘 당겨야 되는지는 나도 알아! 내가 총 쏘는 거 못 봤을 거 같아? ”
왕재수는 갑작스럽게 화가 치미는 듯 입술을 깨물며 발로 소파 아래를 걷어찼다. 그리고는 그때 있었던 일을 낮고 빠른 어조로 쏟아냈다.
“ 난 침대에 묶여 있었어. 데미도프 그 자식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근데 갑자기 그 사이코가 뛰쳐 들어왔어. 데미도프에게 거실로 나가라고 했어. 그러더니 나한테 자는 척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윽박질렀어. 그렇게 말했지. ‘이런 깜찍한 것 같으니, 목걸이를 떨어뜨려? 분명히 보내주겠다고 했잖아. 내 말을 못 믿었어?’ 라고. 그러면서 그 미친놈이 키스를 했어. 다닐, 그 자식이 그랬어. 끝까지 말을 안 듣는 나쁜 애라고, 의원님들이 날 혼내주고 싶었던 것도, 귀여워해 주고 싶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곧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다냐가 올 거라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는 고민 중이래. 다냐는 순진한 녀석이니까 마음에 든다고. 그래도 내가 말을 안 들었으니까 방에 들어오는 즉시 쏴버려야겠다고. 물론 진담은 아니었어. 나도 그건 알았어. 그놈은 널 쏠 생각이 없었어. 적어도 그 방에서는 그럴 수 없었어. 넌 아직 잘리지 않았고 여전히 KGB 요원인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때 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어. 그놈은 다시 키스를 하려고 몸을 숙였어. 재킷 안주머니에 권총이 들어 있는 게 보였어. 내 오른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지. 하지만 왼손은 움직일 수 있었어. 그래서 난 손을 뻗어서 자식의 주머니에서 권총을 낚아챘어. 그리곤 곧장 쐈어. ”
“ 왼손으로... ”
“ 나 어릴 때 양손 쓰는 연습 많이 했어. 근데 총은 처음 쏴봤으니까 오른손으로 쐈어도 빗나갔을 거야. 처음 건 완전히 빗나가고 두 번째 건 어깨에서 피가 나길래 제대로 맞췄나 했는데 아니었어. 그냥 스친 거였어. 그 자식 진짜 화냈어. 앞뒤 안 가리고 곧장 내 손에서 총을 뺏더라고. 자식이 내 팔을 비틀면서 한 손으로 목을 졸랐어. 방으로 달려온 공범 자식한테 그놈이 ‘가! 계단으로 가!’ 하고 소리쳤어. 일부러 그랬겠지. 계단에서 너랑 마주치게 하려고. 그놈 얼굴 보여주려고...
자식은 그놈이 나가는 것을 보려고 잠깐 현관까지 뛰어나갔다 들어왔어. 그리고는 내가 몸부림치니까 올라타서 깔아뭉갰던 것 같아. 하여튼 목을 졸랐어. 너무 숨이 막혀서 기절했던 것 같아. 그때 네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어.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어. 그래서 정신이 잠깐 돌아왔어. 아마 그놈이 손의 힘을 늦췄기 때문일 거야. 네가 바깥에서 뛰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어. 그러자 그놈은 내 목을 놔줬어. 소리쳐 너를 불렀어. 그리고는 귓가에 대고 말했어. ‘한 마디도 하지 마, 미셰츠카. 다닐을 팔아넘길 테니까.’ 나는 상관없다고 했어. 그러든 말든 상관없다고. 그러자 자식은 내 입술에 자기 입을 대고, 숨을 불어넣듯이 입술로 누르면서 속삭였어. ‘아니, 상관있을 걸. 스페호프에게 밀고할 테니까. 그럼 그놈은 많이 힘들 거야.’ 라고. 어쩌면 다른 얘기를 했을지도 몰라. 너무 숨이 막혀서 잘 들리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그때 네가 왔어. 그놈이 널 쏠까봐 무서웠던 것 같기도 해. 근데 기억 잘 안 나. 숨쉬기가 힘들었어. ”
베르닌은 그 방으로 뛰어 들어갔던 순간을 떠올렸다. 드미트리는 침대 위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자세가 부자연스러웠다. 베르닌은 그가 인공호흡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니었다. 그는 협박을 하고 있었다. 목을 조르고 입술을 마주 댄 채 끔찍한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베르닌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화가 나고 슬프고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주먹으로 바닥을 쾅쾅 쳤다. 소리치고 흐느껴 울었다. 훌쩍훌쩍 울고 있는데 왕재수가 옆으로 왔다.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 화 많이 나? ”
“ 왜 나한테 얘기 안했어! 얘기했어야지! 난 그것도 모르고... 그것도 모르고 그 자식이랑 어울려 다니고... 그 자식이 하는 말을 다 믿고... 그놈이 해 주는 저녁 먹고... 한 식탁에서 같이 앉아 있고... 너랑 그 자식 둘이 있게 놔두고... 바보 멍청이! ”
“ 말하면 뭐해. 달라질 것도 없는데. ”
“ 뭐가 없어! 내가 그 자식 죽여 버렸을 거 아냐! 감옥 보내고... ”
“ 네가 어떻게 그놈을 감옥 보내니. 그 자식이 병원에서 너한테 한 말 기억 안 나? 그 개자식이 한 말 중 유일하게 거짓말이 아니라고. 아무도 내 말은 안 믿어줄 거란 말이야. 그리고 내가 납치됐었다는 게 공론화되면 위에선 내 담당 요원인 너한테 책임을 물을 거고. ”
“ 넌 그게 문제란 말이야! 왜 항상 그렇게 나오는데! 내가 어떻게 되든 말든! 나쁜 짓한 놈을 그냥 두란 말이야? ”
“ 그럼 달리 뭘 하니. 달라질 것도 없는데. 그 자식 감옥에 넣는다고 나 잡아갔던 게 없어져? 일만 더 꼬이지. 난 공연만 잘 올리면 되는걸. 달라지게 했으려면 그때 제대로 쐈어야 했는데... 빗나갔잖아. 그걸로 끝인 거야. 에이, 그 자식 가고 다 끝나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망할 놈의 인형... 리자는 그걸 왜 봐가지고 너한테 말하고. ”
“ 그럼 넌 내가 알아채지 못했으면 끝까지 말 안하려던 거였어? ”
“ 응. ”
베르닌은 왕재수를 피가 나도록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두들겨 패고 멱살을 잡아 흔들고 땅에 머리를 마구 박아주고 싶은 건 자기 자신이었다. 괴로워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가방을 뒤지더니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낸 끝에 넓적하고 커다란 초콜릿을 와작 쪼개서 내밀었다. 베르닌은 기가 찼다.
“ 이게 뭐야... ”
“ 여자애들이 줬어. 먹으면 기분 좋아진다고 그러던데, 엄청 달아서. ”
“ 이 상황에서 초콜릿 먹게 됐냐! ”
“ 그럼 어떤 상황에서 먹어? 기분 엄청 나쁘니까 지금 먹어야지. ”
베르닌은 초콜릿을 받아서 입 안에 욱여넣었다. 눈이 질끈 감기도록 달았다. 너무 달아서 기침이 나왔다. 억지로 우걱우걱 씹어서 꿀꺽 삼켰다. 남은 초콜릿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목이 메었지만 눈물 때문인지 초콜릿 때문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왕재수는 자기가 마시던 물컵을 건네주었다. 물을 마시자 마비될 듯하던 단맛이 씻겨 내려가면서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기분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지만 뭔가를 목구멍으로 넘겨서 그런지 북받치던 분노와 괴로움은 조금 잦아들었다.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왕재수로부터 남은 초콜릿을 받아서 마저 먹었다. 왕재수는 가방에서 사과파이도 꺼냈다. 접시도 없이 바닥에 종이봉지 째 내려놓고는 손으로 대충 쪼개서 들고 먹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 차 우려 줄까? ”
“ 응. ”
그래서 베르닌은 찻물을 올렸다. 물은 금방 끓었다. 티포트에 찻잎을 넣으면서 보니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었다. 바쁘다고 설거지를 대충대충 해서 그런 것 같았다. ‘나중에 소다로 닦아야지’ 하고 중얼거리며 그는 차를 우렸다. 접시와 포크도 찾아서 들고 갔다.
차를 따라주니 왕재수는 좋아했다. 차 한 모금, 사과파이 한 입 번갈아가며 먹었다. 한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마시고 초콜릿과 사과파이를 먹었다. 뜨거운 차와 당분 때문에 몸이 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질문을 했다.
“ 저... 그 자식 말이야. 그러면, 그러니까... 어젯밤에 너희들... 밤에 너네 집 갔다가 봤어. 나는 네가 드미트리를 좋아하게 됐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둘이 밤을 보냈다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지? 그 자식이 협박해서 그런 거지? ”
왕재수는 눈을 깜박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한참 후에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우리 이 얘긴 안 하면 안 될까? ”
베르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찻잔을 쥔 채 물끄러미 왕재수를 쳐다보기만 했다. 왕재수는 한숨을 쉬었다.
“ 내가 그랬잖아, 그 자식 사이코 팬이었다고. 그 자식한테 진짜 중요한 건 섹스 자체가 아니야. 나랑 하는 거, 날 자기 걸로 만드는 게 중요한 거지. 아마 나랑 하기 전까진 사내애들이랑 놀아본 적도 없었을 걸. 그놈은 내가 너한테 사실을 말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어. 그래서 새벽까지 하고 싶은 거 하다가 간 거야. ”
“ 그러면, 그러면 9층에 있을 때도 그랬어? 토요일이랑 일요일에도? ”
“ 그게 중요하냐, 어차피 한 번을 하든 몇 번을 하든 한 건 마찬가지인데. ”
“ 말 잘 들으면 곱게 보내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 그런 나쁜 짓을 계속 한 거냐고! ”
“ ‘곱게’의 의미는 ‘두들겨 패거나 불구로 만들지 않고’ 돌려보내준다는 거였지. ”
베르닌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왕재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 하여튼 곱게 돌아왔잖아. 그러니까 그걸로 된 거야. ”
“ 그치만, 어젯밤엔 그냥 우리 집에 남아 있었으면 됐잖아. 내가 금방 돌아왔을 건데. 내 옆에 있었으면 그놈도 대놓고 널 데려가지는 못했을 텐데. 그런데도 그 자식 따라서 올라가고... 너 정말 그 협박을 믿었어? 그놈이 국장한테 일러바쳐서 날 자르게 한다는 거? 그래서 끝까지 입 다물고 그놈이 원하는 대로 해준 거야? ”
“ 처음엔 믿었지. 네가 쓰러지는 걸 봤으니까. 나중엔 안 믿었고. 그놈은 스페호프에게 자기 정체를 드러낼 위험을 무릅쓸 수 없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로 무모한 짓을 하고 있었잖아. 너한테도 이렇게 결국은 꼬리 밟히고. 어쨌든 그놈은 내가 아무 말도 안 할 거란 걸 알았어. 내가 어떤 식으로 생각할지,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알고 있었어. 오랜 팬이라서, 사이코라서, 아니면 영리한 놈이라서, 셋 중 어떤 이유인지는 나도 몰라. 어쩌면 셋 다겠지. ”
“ 나중엔 안 믿었다면서... 그러면 왜... ”
“ 글쎄. 중요한 건 네가 스페호프에게 잘리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네가 그놈을 좋아했다는 건지도 모르지. 넌 바보 멍충이잖아. 난 바보가 실망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어. ”
베르닌은 눈을 깜박였다. 입술을 다물었다 벌렸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왕재수는 그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근데 이제 물 건너갔네. 다 저 망할 인형 때문이야. 다 알아버리고. 울고 소리 지르고 후회하고 자학하고... 바보는 그러면 안 되는 건데. ”
“ 난 바보가 아니야! ”
“ 그러게. 근데 그냥 바보 해. 그게 좋아. ”
“ 너 좋으라고 바보 멍충이로 살란 말이야? ”
“ 그러면 안 되니? ”
베르닌은 왕재수의 뺨을 한 대 후려갈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한 것은 그 반동분자 꼬마의 야윈 몸을 홱 끌어당겨 두 팔로 안아준 것이었다. 너무 세게 안아줘서 왕재수는 왼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놓쳤다. 반쯤 남아 있던 찻물이 테이블과 카펫 위로 엎어져 작은 시내처럼 흘렀다. 얼룩이 질 게 뻔했다. 괜찮았다. 찻물과 먼지와 땀과 피는 지울 수 있었다.
‘ 소다를 타서 닦아야지... ’
아마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입 밖에 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왕재수가 웃었고 ‘바보 멍충이’라고 쏘아붙였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야단을 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왕재수가 사모바르처럼 따끈따끈해지더니 금세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완전히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기다렸고 한참 후에야 그를 침대로 옮겨 뉘었다. 그리고 거실로 나와서 남은 사과파이 한 입, 식은 차 한 모금씩 번갈아 가며 전부 먹고는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FIN
- 2015. 9. 18 ~ 10. 2 -
.. 이렇게 하여 우수한 단추 시리즈는 정말로 끝이다.
이게 뭐냐, 지금 장난하냐! 꿈과 희망의 서무 시리즈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라고 하신다면... 그래서 독립된 34편이 아니라 33-1편으로 번호를 매겼습니다... 이번 편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그냥 이건 일종의 평행우주, 단추의 꿈, 일어나지 않은 일 등등으로 무시하고, 우수한 단추 시리즈는 그냥 33편에서 끝난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사실 나도 우수한 단추 시리즈 쓰는 내내 그냥 33편으로 끝낼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지만. 원래 이 사람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처음부터 이런 결말과 이런 구조를 생각하고 쓴 거라서... 쓰면서도 이건 서무랑 좀 안 맞는데... 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쓰다 보니 또 기분 좋게 끝내고 싶어서 33편으로 그냥 마무리하고 이 결말은 그냥 마음속에서만 가지고 있을까 잠깐 고민도 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모든 이야기가 이 결말을 향해서 서술된 거라서. 그래도 꽤 노력해서 쓴 편이라 단추가 발견한 단서들을 무시한다면 그냥 33편으로 끝나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어차피 리자나 스페호프와의 대화가 아니었다면 단추는 몰랐을테니) 그러니 행복한 서무 시리즈를 원하는 분들은 이 33-1은 그저 평행 우주의 결말이라고 생각하시기를..
..
이번 편에 나오는 왕재수는 서무 에피소드 몇몇개와 마찬가지로 '딱 싸가지 없는 그 서무의 왕재수'라기보다는 본편의 미샤와 훨씬 가깝다. 하긴 왕재수를 아무리 '딱 싸가지 없는 어리광쟁이'로 만들어보려 해도 원판의 강력한 본 인물이 있으니 결국은 당겨놓은 고무줄처럼 자꾸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하는 것 같다.
..
하여튼 이번 편은 별다른 자세한 묘사는 없지만 내용 자체는 조금 그래서... 하여튼 공개 블로그에 올리는 거라서 수위는 많이많이 조절했습니다. 올리면서 다시 읽어보니 아무래도 나는 크레믈린 사촌이 맞는 건가 ㅠㅠ 왕재수에게 너무한 건가 ㅠㅠ 모든 것은 단추의 꿈이었습니다 허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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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발령과 지방 이전, 거듭되는 출장과 업무 폭풍으로 아마 한동안 서무는 자주 올라오지 못할 것 같다. 지금은 34편을 쓰는 중인데 과연 연휴 동안 끝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 (34편은 다시 랄라랄라 분위기로 돌아옵니다 ㅠㅠ) 못 올리더라도 전에 쓴 본편이나 추리 외전 등 다른 글을 매주 발췌해보려고 한다. 그럴 여유가 생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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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 시리즈나 about writing 폴더에 글 남겨주신 분들 항상 감사해요. 글에 대한 이야기들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가져가시거나 베끼거나 인용/변형/사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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