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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올린 지젤의 알브레히트에 대한 메모와 알브레히트를 추는 루지마토프, 슈클랴로프 영상 클립과 연관해서.(http://tveye.tistory.com/3127)

 

작년 초에 마무리했던 글에서 발췌.

 

배경은 1970년대 소련 레닌그라드. 발췌된 부분은 1973년 가을. 주인공은 레닌그라드 출신 무용수로 이후 안무가가 된다. 발췌된 글에 나오는 트로이는 그의 친구. 율리야는 주인공의 어머니. 트로이에 대해서는 전에 몇번 다른 부분에서 발췌한 적이 있다.

 

크류코바를 비롯해 여기 등장하는 무용수들은 모두 허구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재능 넘치는 신인 무용수의 데뷔나 반응, 출세 등등에 대한 이야기들은 여러 무용수들에게 실제로 있었던 내용에서 일부를 참고하기도 했다. (프리마 발레리나인 크류코바가 미샤를 낙점해 파트너로 만드는 건 사실 크셰신스카야와 니진스키, 두딘스카야와 누레예프의 예에서 따왔다. 워낙 유명한 얘기들이기도 하고)

 

이 글을 쓸 당시 나는 심신 양쪽으로 매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쓰는 행위를 통해 바닥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올 수 있었다. 그래서 완성도나 정교함을 떠나서 내겐 중요한 글이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다시 장편을 쓸 수 있었고 그것도 중요했다.

 

 

* 이 글을 퍼가거나 도용/배포하지 마세요 *

 

...

 

 

 키로프에 입단한 후 미샤 야스민은 스타가 되었다. 그는 일반적인 신입 단원이 거치는 단계들을 훌쩍 뛰어넘었다. 극장에서는 순전히 위계질서를 너무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시즌 첫 한 달 동안은 그에게 두세 차례의 디베르티스망을 추게 했다. 그리고는 곧장 해적의 알리 역을 주었다.

 

 머리에 높은 깃털을 달고 반짝이는 구슬이 박힌 푸른색 하렘 팬츠를 펄럭이며 미샤 야스민이 무대 위로 날듯이 뛰어나왔을 때 어두운 극장 안의 관객들은 놀라움과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트로이는 몇 년 전 콩쿠르 얘기만 들었을 뿐 미샤가 그 역을 추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미샤는 파란 천을 휘감은 흑표범처럼 뛰어올랐고 중력을 경멸하듯 공중에 머물렀다. 그날 밤 옛 황실극장의 황금빛과 푸른빛 벨벳 좌석에 앉아 있던 관객들 모두는 최면에 걸린 듯 집단으로 사랑에 빠졌다. 아직 18살도 되지 않은 신인 무용수에게, 발레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에게. 완벽하게. 주역인 콘라드와 메도라는 기억 저 편으로 사라졌다. 그 무대 위에는 오직 아랍 의상을 입고 우아한 야수처럼 날아오르는 젊은 알리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트로이는 바로 옆 칸에 앉아 있던 잘 차려입은 여자 하나가 연신 소리를 지르다 머리를 뒤로 젖히며 실신하는 것을 보았다. 기절한 여자는 곧 그의 뇌리에서 지워졌다. 옆에 앉아 훌쩍이고 있는 타냐의 온기와 스베타의 향수 냄새도 지워졌다. 그는 두 손으로 얇은 프로그램 종이를 움켜쥔 채 거대하고 텅 빈 구체처럼 어둠 속에 떠 있었다. 폭발하지 않기 위해 싸우면서.

 

 해적으로 인정받은 후 미샤는 수직으로 올라갔다. 가을 중에 지젤의 주역을 맡았다. 프리마 발레리나인 니나 크류코바가 그를 상대역으로 낙점했던 것이다. 트로이조차도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크류코바는 평범한 스타 발레리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키로프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민예술가였고 대스타였다. 가장 완벽한 지젤로 불리는 무용수였다. 그 소식을 들은 타냐는 반쯤 심장 발작을 일으킬 뻔 했다.

 

 트로이는 미샤의 어머니를 모시고 그 공연을 보러 갔다. 율리야 야스미나는 평소에는 감정을 별로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날은 긴장 때문에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팽팽하게 당기며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들과 마찬가지로 늘씬하고 우아한 몸매에 파도처럼 뒤엉키는 검은 머리와 찌르는 듯한 눈빛의 미인이었다. 흐트러진 긴 머리를 핀으로 틀어 올려 고정시키고 수수한 검은 원피스 외에는 목걸이나 귀걸이 따위로 치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긴 손가락에 가느다란 금반지를 하나 끼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무대에 미샤가 등장했을 때 그녀는 몸이 떨리는 듯 아들이 비엔나에서 사다준 커다랗고 아름다운 숄로 어깨를 감쌌다.

 

 타냐는 미샤가 대스타인 크류코바의 존재감에 너무 파묻히지만 않아도 큰 성공일 거라고 말했다. 트로이는 로미오처럼 순진하고 철없는 알브레히트를 기대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지나치게 젊은 귀족, 마음에 드는 여자를 가볍게 건드리고 불장난을 쳤다가 나비처럼 휙 돌아서는 사춘기 소년 같은 알브레히트를. 그건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20년에 가까운 크류코바와 그의 나이 차이도 그렇고 지난 해적 공연에서 보여준 공기와 바람 같은 특질도 그랬다. 관객들은 이미 니진스키 같은 아이, 날개 달린 천사처럼 춤춘다는 새로 온 무용수에 대해 떠들고 있었고 그 젊은 애의 알브레히트라면 생각 없이 말썽을 피워도 마냥 귀엽게 받아들여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샤는 그들의 기대와 예상을 단숨에 박살냈다. 그 무대에서 미샤 야스민이 보여준 알브레히트는 철없고 사랑스러운 귀족 소년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사악하며 야비한 탕아였다. 맨 처음 그가 크류코바의 지젤에게 다가가 손을 얹는 순간부터 관객들은 충격에 빠지기 시작했다. 미샤는 1막 전체를 숨막히는 유혹의 드라마로 바꿔버렸다. 그 알브레히트는 크류코바의 순수하고 청순한 지젤, 완벽하게 성적으로 무지한 그 시골 아가씨에게 아랫배에 불을 당겨놓았다. 트로이는 타이츠와 레이스 의상을 입고 춤추는 고전 발레 무대에서 그런 식의 성적 긴장감을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알브레히트는 검은 눈의 악마처럼 무대를 휩쓸고 다니며 여자를 정복하고 관객들을 공공연하게 유혹했다. 1막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관객석에서 분노 어린 탄식들이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그건 배반당한 여주인공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알브레히트에 대한 순수한 증오였다.

 

 막간 휴식시간에 트로이는 율리야를 데리고 홀로 올라가 시원한 샴페인을 두 잔 주문했다. 율리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주변 관객들이 흥분해 떠드는 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대부분이 새로 온 무용수, 아니, 알브레히트에 대한 얘기였다. 미샤와 친해진 후 여러 차례 극장에 와 보았지만 트로이는 관객들이 그렇게 공연에 몰입해서 무용수가 아니라 배역의 이름을 부르고 생생한 증오로 두 눈을 불태우며 그 망나니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광경을 처음 보았다. 어서 빨리 2막이 되어 그 개 같은 놈이 유령들에게 혼쭐이 났으면 좋겠다고, 결말이라도 바꿔서 유령 여왕이 그 방탕한 자식을 새벽이 되기 전에 죽여버리는 꼴을 봤으면 속이 시원하겠다고 떠들었다. 마치 교양 있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아니라 난생처음 천막극장에 몰려들어 무대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고 홀려버린 시골 농민들 같았다.

 

 크세니야가 그렇게 말했었다. ‘렌스키는 여자를 모르는 애였어. 내게 안겨서도 아무 것도 몰랐어.’ 아무 것도 몰랐던 건 크세니야 자신이었다. 그 알브레히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적 자력으로 휩싸여 있었다. 트로이는 관객들의 격렬한 반응이 그 탕아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온몸을 떨리게 하는 성적 흥분 때문인지 궁금했다. 어쩌면 둘 다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2막에서 미샤는 다시 한 번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그 사악하고 음란한 탕아가 흰 옷을 입고 무게도 없이 자기 앞에 나타난 여자의 유령 앞에서 공포와 놀라움으로 소스라쳤다. 2인무를 추는 동안 그 감정은 점차 깊은 죄책감으로, 그리고 그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사랑으로 바뀌었다. 그 짧은 춤을 추는 동안 미샤의 알브레히트는 타락한 악마에서 첫사랑에 빠진 젊은이로 변모했다. 충족되지 않는 욕망으로 불타던 정복자에서 자기 감정과 육체를 가눌 방법조차 모르는 길 잃은 소년이 되었다. 트로이는 어떻게 그런 변형이 가능한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관객들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의문을 가질 틈이 없었다. 흰 옷 입은 유령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화관을 쓴 여왕이 얼음처럼 차갑게 돌아서는 순간, 미샤의 알브레히트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추락해 나뒹구는 것을 반복하며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또 애원하는 순간 극장 여기저기에서 관객들의 신음과 낮은 비명 소리가 오케스트라 연주와 뒤섞이며 튀어나왔다. 진짜 공포에 질려서, 안타까움으로 발을 구르며 너도나도 애타게 속삭이고 흐느꼈다. 죽이지 말아요, 그만 용서해 줘요. 제발 살려줘요. 트로이는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나이든 부인이 지휘자를 향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음악 좀 멈춰요, 저렇게 추다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그들 중 누구도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장면이 가공의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정말 어떻게? 이 사람들 모두가 넋이 나간 바보들일까? 수십 번 이 공연을 본 사람들도 부지기수일 텐데? 하지만 트로이도 그 순간에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숨도 쉬지 못하고 율리야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그는 굉음을 내며 뒤집힌 썰매에서 튀어나가 눈보라 속으로 추락하는 미샤를 보고 있었다. 현기증과 구역질이 엄습해와 머리와 턱이 덜덜 떨렸다.

 

 관객들은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유령들이 하나둘 무대 너머로 사라지고 창백하고 아름다운 크류코바의 지젤이 두 팔을 뻗어 바닥에 누워 있는 알브레히트를 포옹했을 때도 모든 것이 끝났으며 제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쉽사리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침내 미샤가 몸을 일으켰을 때 극장 안은 안도의 탄식으로 가득 찼다. 


 
 그 날 크류코바의 숭배자들 중 절반 이상이 우상을 배신하고 자신들이 가져온 꽃을 미샤에게 주었다. 미샤가 인사를 할 때 무대 위로 로켓처럼 꽃다발들을 내던졌다. 조준이 잘 되지 않았거나 너무 가벼운 꽃다발은 오케스트라 석 안으로 떨어지며 꽃잎을 비처럼 흩뿌렸다. 트로이는 그 미친 듯한 열기와 사랑이 일상적인 광경이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율리야는 복도로 나가 코트를 찾아 입고 극장의 무거운 문을 두 손으로 밀었다. 트로이는 문을 대신 열어주면서 물었다.

 

 “ 분장실에 모셔다 드릴까요? 담당자가 제 얼굴을 알아요. ”
 “ 아니,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 잠깐이라도 보고 싶지 않으세요? ”
 “ 우리 앞줄에 당 간부들이 앉아 있었어요. 아마 그 사람들과 저녁을 먹으러 갈 걸요. ”


 
 그녀의 어조에서 아들에 대한 자부심과 씁쓸한 분노가 동시에 배어나왔다. 트로이는 당의 이름으로 가족이 체포되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침묵했고 율리야를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네프스키로 나올 때는 버스 대신 지하철을 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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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