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무의 슬픔 #34. 딸기 아가씨들과 자선 바자회 series : 서무의 슬픔2015. 10. 24. 21:52
한달 넘게 우수한 단추 시리즈로 채워졌던 서무 시리즈가 다시 일상의 서무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단추 베르닌과 스페호프, 회사 동료들이 모두 등장하는 34편이다.
34편은 지방 발령을 받고 난 후 쓴 글이다. 심신이 너무 괴로워서 가벼운 글로 스트레스나 풀려고 했던 거라서 이번 편은 분위기가 꽤 가볍다. 납치도 폭력도 눈물도 고난도 없습니다 :) 그냥 재미있게 읽으시면 됩니다.
난데없이 바자회 특명을 받은 우리 단추는 과연 국장의 기대치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지!!! 그 이야기는 아래를~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우여곡절 끝에 왕재수는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온 신작을 발표하고, 베르닌은 다시 일상의 서무 업무로 돌아간다. 그러나 스페호프가 다시 그를 호출해 또 다른 미션을 부여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 http://tveye.tistory.com/4062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2부) : http://tveye.tistory.com/4079
* 에피소드 33-1. 도자기 인형 : http://tveye.tistory.com/409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4
서무의 슬픔
- 딸기 아가씨들과 자선 바자회 -
신작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수도에서 온 고위직 후원자들도 모두 돌아간 후 왕재수는 출연했던 무용수들에게 특별 휴가를 주었다. 향후 일주일 동안의 공연은 모두 오페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무용수들을 모두 휴가 보낸 후 왕재수는 극장에 틀어박혀 그와 하느님만이 아는 차기 신작의 골격을 잡으려고 했다. 제발 며칠 동안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는 베르닌의 부탁과 설득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결국 베르닌은 스타브로프에게 도움을 청했다. 노의사는 왕재수의 행태에 노발대발하더니 젊은 의사 제냐와 남자 간호사 하나를 대동해 극장으로 찾아왔다. 감독실이 떠나가라 호통을 치더니 왕재수를 거의 포박하다시피 차에 태워 병원으로 데려갔다.
스타브로프는 정밀 검진을 하더니 왕재수를 사흘 동안 병원에 입원시켰다. 왕재수가 아무리 버둥거리고 아우성을 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왕재수만 보면 하염없이 마음이 약해져서 무슨 말이든 다 들어주려고 하는 아내 마르가리타는 아예 접근 금지를 시켜버렸다. 심지어 왕재수가 필살기를 발휘해 예쁜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애원을 해도, 방긋방긋 웃으며 애교를 부려도 노의사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일요일에 실려 왔을 때 이미 입원시켰어야 했는데 신작 공연 때문에 할 수 없이 보내줬던 거라고 대꾸했다. 지금 입원해 쉬지 않으면 나중에는 한 달 동안 더욱 외진 시골 요양소에 갇히게 될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더욱 외진 시골’이란 단어에 화들짝 놀란 왕재수는 결국 한 풀 꺾였고 고분고분하게 사흘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다.
신작이 끝나서 사무실로 복귀하게 된 베르닌은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아침과 밤마다 병원에 왕재수를 보러 갔다. 이틀째 되던 날에는 투레츠키를 통해 파인애플 통조림까지 사들고 갔다. 그러나 이 모든 재앙이 베르닌의 ‘밀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왕재수는 토라져서 베르닌에게 ‘바보 멍충이, 꺼져!’ 하고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고 파인애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죄 없는 코즐로프에게도 삐쳐서 등을 돌리고 누워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무리 코즐로프가 상냥하게 달래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을 나온 베르닌은 무척 속이 상했지만 코즐로프는 웃기만 했다. 퇴원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 당신이야 귀염둥이 우리 아기 어쩌고 밤새 응응을 하면서 불태울 테니 저 자식이 풀어지겠지만 나한테는 계속 삐쳐 있을 거라고요! ”
“ 저 녀석 너한테 삐친 거 아니야.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빨리 작업을 하고 싶은데 병원에 갇혀 있으니 답답해서 그런 거야. 어디 가둬두면 못 견디는 놈이거든. 퇴원하면 다시 빵긋빵긋 웃을 거다. 우리 아기는 그런 게 정말 매력이라니까. 귀엽기도 하지. ”
“ 으윽, 당신이야 콩깍지가 꼈으니 귀엽게 보이겠죠. 난 구박만 받고 미치겠다고요! ”
물론 코즐로프의 말이 맞았다. 퇴원 수속을 밟자 왕재수는 기분이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고 항상 주변 시선을 조심하던 것도 잊어버렸는지 코즐로프를 와락 껴안았고 베르닌을 보자 빨리 집에 가서 파인애플 통조림 뚜껑을 따달라고 졸랐다.
다음날 그들은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로 떠났다. 코즐로프에게는 오케스트라 장기근속 표창으로 받은 3일 요양권이 있었고 왕재수는 의사의 온천 치료 처방전과 극장 간부용 자유 이용권이 있었다. 주변의 의심을 우려해 둘은 각각 떠났다. 월요일 새벽에 베르닌이 왕재수를 요양소까지 실어다 주었고 코즐로프는 오후에 출발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검은 숲까지 다녀온 탓에 베르닌은 매우 피곤한 상태로 출근했다. 하마터면 스페호프의 주간 회의 시간에도 졸 뻔했다. 왕재수의 신작이 아주 성공적으로 끝난 데다 공연을 보러 왔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고위직 간부들이 모두 그의 재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국장은 심기가 불편한 듯 했지만 그래도 최악의 상태는 아니었다. 스페호프는 내심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그를 불러내 모스크바 밀서 사건에 대해 탈탈 털고 해임 통보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게 분명했다. 수요일 공연에는 가브릴로프 출신이자 애초에 왕재수를 이곳으로 보냈던 의원인 벨스키를 비롯해 스비제르스키, 그리고 레닌그라드 최고의 실세이자 왕재수를 오랫동안 후원해온 마로조프까지 크레믈린을 좌지우지하는 인물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페호프와 대화를 나눈 것은 가장 온건한 벨스키 뿐이었고 그것도 공연 시작 직전에 귀빈석에서 잠깐 만났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스페호프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벨스키가 미하일은 연방의 귀중한 예술가이니 신변에 위협이 되는 일이 절대 생기지 않도록 KGB가 최선을 다 해달라고 당부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날 공연이 끝난 후 왕재수는 의원들과 별도의 리셉션 파티에 참석했다. 베르닌은 따라 들어갈 수 없었다. 가브릴로프 쪽 인사들로는 극장장과 의회 의장에게만 참석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왕재수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베르닌은 그가 스비제르스키를 따라가 인근 도시의 호텔에서 밤을 보냈다는 것을 다음날 국장으로부터 들었지만 물론 모르는 척했다.
어쨌든 스페호프는 왕재수의 후원자들, 특히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로부터 무사히 살아 남았기 때문인지 주간 회의 시간에도 평소보다 약간 심한 정도로만 직원들을 볶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공문 두 장을 탁 하고 책상에 내려놓으며 큰 소리로 호명했다.
“ 베르닌! 칸페트나야! ”
베르닌은 ‘예’하고 답변하면서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그러나 의문했다. 함께 호명된 리자는 맨 뒤에 앉아서 동료 여직원들과 메모를 주고받다가 깜짝 놀라서 ‘네!’하며 벌떡 일어났다가 얼굴이 빨개지며 다시 앉았다.
“ 지난번 스네고로드 폭설 때와 마찬가지로 막내 직원들의 봉사가 필요하게 됐네. 알다시피 목요일이 공공기관 연례 바자회일세. 의회와 공산당 부녀회에서 주최하는 행사로 올해 추진위원장은 블리즈네초프 의장의 부인이 맡았단 말이야. 특별히 그녀에게 이야기해서 우리 보안위원회 부스를 중앙으로 배정받았네. 작년에는 너무 구석에 부스를 세워놨더니 실적이 너무 저조해서 우리가 꼴찌에서 두 번째였단 말이네! 이번에도 그런 굴욕을 당할 수는 없어! 알다시피 자선 바자회의 판매 실적도 공공기관 성과평가 지표에 포함된단 말일세. 최근 3년간 실적이 누적되기 때문에 작년의 저조한 성적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올해 반드시 1등을 해야 해! 이번 부스 운영 총괄은 다닐 자네가 맡게. 막내인데다 총괄 서무니까! 그리고 조직 내 물품 기부와 판매 전략 수립은 막내 여직원인 칸페트나야가 책임지게. 둘은 오늘 15시까지 연례 바자회 부스 운영 계획 초안을 수립해 내 방으로 오게. 이상! ”
졸지에 바자회 부스 운영 총괄을 맡게 된 베르닌과 리자는 멍해져서 눈만 깜박거리며 앉아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어휴, 나한테 안 떨어져서 다행이다’란 표정을 지으며 삼삼오오 빠져나갔다. 알렉산드라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 다냐, 리잔카. 안 그래도 바쁠 텐데 골치 아픈 일을 또 떠맡았구나. 내가 몇 년 전에 바자회 부스 운영을 해봤거든. 그때도 막내 여직원이란 이유로 맡았던 것 같아. 그땐 아무 것도 모르니까 우왕좌왕하고 판매 실적도 중간밖에 안돼서 국장한테 엄청 깨졌었어. 국장은 여러 기관이 참여하는 행사에서 실적 측정하는 거 엄청 민감해. 목요일이면 며칠 안 남았잖아. 일단 내가 최근 몇 년간 부스 운영 계획이랑 결과보고서 철을 가져다줄테니까 그것부터 훑어보고 계획 초안을 잡으렴. 나도 오늘 급한 업무 마치면 좀 도와줄게. ”
“ 고마워요, 선배님. ”
“ 사셴카 언니, 정말 언니뿐이에요. 아아, 국장은 정말 너무해요. 매일매일 막내라고 온갖 궂은일은 다 시키고... ”
* * *
베르닌과 리자는 알렉산드라가 챙겨다 준 기존 서류들을 모두 훑어보았다. 자선 바자회 추진위원회에서 온 공문과 행사 추진계획도 읽어보았다. 리자는 입술을 삐쭉거렸다.
“ 이건 내용상 총무부에서 진행해야 하는 업무잖아요. 귀찮으니까 또 국장에게 가서 막내들이 해야 한다고 뒤에서 공작을 한 게 분명해요. 작년에 꼴찌에서 두 번째 한 것도 당연하네요. 이거 보세요, 우리는 애초부터 직원들이 기부한 물품 자체가 적었어요. 좋은 물건도 없었고요. 재작년에도 성적이 나빴네요. 이래놓고 무슨 1등을 하라는 건지. 작년 1등은 어디였어요, 다냐? ”
베르닌은 서류철을 뒤졌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 최근 3년 내내 1등은 가브릴로프 극장에서 차지했어요. 극장이라서 화려한 게 많이 나왔나 봐요. 아무래도 우리 같은 일반 공공기관이랑은 다르잖아요. 무용수들이나 성악가들의 팬들도 많이 몰리고... 의상이랑 장신구 같은 것도 많이 나오고 또 데니스나 타마라 같은 스타 무용수들이 사인회도 같이 해줬나 봐요. 우리로서는 아무래도 따라가기 힘들 것 같아요. ”
“ 아, 맞다. 나도 작년에 극장 부스 가서 터키석 팔찌 샀어요. 진짜 예쁜데 아까워서 회사에는 하고 오지도 못하겠어요. 그때 데니스한테 사인도 받았어요. 앗, 그러면 이번엔 꽃돌이 감독님이 사인회 하겠네요. 다 끝났어요, 다냐. 가뜩이나 극장 부스가 잘 나가는데 미샤가 사인회까지 하면 다 거기로 몰려들 거 아니에요... 아무리 노력해봤자 안 될 테니까 그냥 포기하고 대충 해요. 우리도 부스들 구경하면서 물건들 사고 사인이나 받고 맛있는 거나 먹어요. 그깟 1등 어차피 할 수도 없는 거 공연히 아등바등할 필요 없잖아요! ”
리자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열띠게 외쳤다. 베르닌은 그녀의 말에 따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순간 작년 가을이 생각났다.
“ 그랬으면 좋겠지만... 리자, 작년 체육대회 생각 안 나요? 국장이 얼마나 날 들들 볶았는데요. 전 종목 출전을 시키지 않나, 우승을 못하면 벌목공도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리바운드를 2만개 연습했다고요. 난 지난번에 기관 대표로 요리대회까지 나갔는걸요. 알렉산드라 선배의 말이 맞아요. 국장은 다른 기관들이 참여하는 행사에서 실적을 못 내면 노발대발할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잘리든가 적어도 한 달 이상 들들 볶이고 징계성 잡일을 산더미처럼 떠안게 될 거예요. 1등을 하든지 그에 버금가는 매상을 올리지 않으면 우리의 앞날이 너무 암울해요. 그나마 한동안은 미샤가 신작을 올린다고 해서 극장에 배치되는 바람에 국장에게 덜 볶였지만 이제 다시 사무실로 복귀했는데... 아아, 다시 전처럼 매일매일 들볶이고 밤을 새고 휴일에도 계속 출근하고 설교를 듣는 것만은... ”
베르닌은 갑자기 서러워져서 하마터면 눈물을 쏟으며 훌쩍훌쩍 울 뻔 했다. 아마 혼자였거나 왕재수 앞이었다면 그랬겠지만 도저히 리자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어 콧물을 훌쩍 들이마시며 꾹 참았다. 리자는 코를 살짝 벌름거리더니 방긋 웃었다.
“ 아이 참, 다냐. 당신이 그렇게 심각해지면 어쩔 수 없잖아요. 난 국장한테 야단맞는 건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좋아요. 일단 수요일 오전까지 물품 기부를 받도록 해요. 리스트 양식은 알렉산드라 언니가 주고 간 게 있으니 이걸 쓰면 되겠어요. 내가 등사해서 각 부서 서무들에게 돌릴게요. 1인 1품목을 강제 할당해야 돼요. 안 그러면 발따예프 선배 같은 사람은 절대 안 낼 테니까! 당신은 추진위원회에 가서 행사장 도면과 우리 부스 위치, 홍보물 부착 기준 따위를 알아오세요. 우리 재밌게 해봐요. ”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리자를 바라보았다.
“ 리자, 이게 재미있어요? ”
“ 그럼 어떻게 해요, 재밌게라도 해야죠. 그나마 당신이랑 같이 준비하니까 다행이에요. 발따예프나 타라카노프, 모브린 선배 같은 사람들이랑 같이 하라고 했으면 진짜 열 뻗쳤을 거예요. 자, 얼른 추진위원회에 다녀와요! ”
베르닌은 리자의 긍정적인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매사에 겁을 먹고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항상 투덜대며 일하는 자신과는 하늘과 땅차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리자가 나이는 어리지만 배울 게 많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바자회 추진위원회가 있는 의회 건물로 향했다.
* * *
수요일 오전에 베르닌과 리자는 반쯤 절망 상태가 되었다. 국장의 명령을 무기로 협박해서 전 직원 1인 1물품 제출은 완료되었지만 들어온 물건들을 보니 작년보다 나아진 게 하나도 없었다. 물건들의 질은 하나같이 나빴고 누가 봐도 지갑을 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 떨어지고 해져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얄팍한 외투부터 시작해 구슬이 숭숭 빠져 있는 촌스러운 목걸이, ‘1970년 가브릴로프 KGB 신년 노래자랑 기념‘이란 문구가 떡하니 박혀 있는 고장 난 시계, 심지어 ’1965년 가브릴로프 KGB 가을 등반대회’ 란 문구가 박힌 수건까지 있었다.
리자가 ‘어머나, 이렇게 오래된 수건을 내놓다니! 너무 해져서 걸레로도 못 쓰겠어요!’ 라고 외치는 동안 베르닌은 ‘가을 등반대회까지 했다니! 신년 노래자랑은 또 뭐야! 옛날 국장들도 스페호프 못지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워낙 물건들이 별로라서 가격을 아주 낮게 매기는 수밖에 없었다.
리자가 한숨을 쉬었다.
“ 큰일이네요, 다냐. 내가 봐도 사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요. 거저 줘도 싫은 물건이 대부분인 걸요. 그나마 알렉산드라 언니가 기부한 책이랑 인형은 괜찮은 편이지만... 이 곰 인형을 희귀한 인형이라고 홍보해서 100루블에 팔아볼까요? 근데 국장은 왜 안 내는 거죠? 그렇게 직원들을 볶아놓고 막상 자기는 안 내고! ”
“ 국장은 원래 명령만 하고 자기는 안 하는 거 알잖아요. 그러니까 윗사람이죠. ”
“ 어머, 다냐. 당신 이 책들 다 기부하는 거예요? 뜯지도 않은 새것이네? ”
“ 어, 예... 난 그거 한 질 더 있어요, 예전에 법대 다닐 때 암기 시험 잘 봐서 받은 거 있거든요. 이건 저번 체육대회 MVP 상품으로 받은 거예요. 근데 잘 보면 귀퉁이에 수프 얼룩이 좀 있어요. 냄비 받침으로 쓰던 거라서. ”
“ 흐응, 얼룩은 눈에 안 띄니까 완전 새 책이라고 해서 내놓으면 되긴 되는데... 레닌 전집은 웬만하면 집집마다 있을 것 같아요. 걸핏하면 상품으로 주는 거라서... 학교에서도 그렇고. 우리 집에도 있거든요, 오빠가 예전에 콤소몰에서 받아온 거. 어머나, 여기도 레닌 전집이 있네. 이건 누가 낸 거지? 아, 모브린 선배가 낸 거구나. 앗, 여기도 있어요. 이건 레닌 선집이네... 이건 카체리나 언니가 낸 거고... 어머나, 스탈린 어록도 있어요. 아아... 망했어요. 누가 스탈린 어록을 사겠어요! ”
둘이 괴로워하고 있는데 알렉산드라가 왔다. 높다랗게 쌓여 있는 물건들을 훑어보더니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 이 물건들로는 어림도 없겠네. 작년보다 더 심해. 일단 점심부터 먹자. ”
“ 구내식당 가기 싫어요, 오늘 메뉴 보니까 또 돼지비계 절임이랑 양배추 수프였어요. 지겨워요. ”
“ 어차피 12시가 넘어서 지금 구내식당 가면 한참 줄서야 될 거야. 우리 그냥 스베촉에 가서 먹을까? ”
“ 어, 좋아요. 제 차로 가요. ”
베르닌은 리자와 알렉산드라를 태워서 스베촉으로 갔다. 점심시간이라 손님들로 터져나갔다. 인기 만점인 왕재수가 없으니 꼼짝없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나 했지만 점원 하나가 알렉산드라를 보더니 손뼉을 치고 반색을 했다.
“ 우왓, 사샤! 어서 와요. 보랴 지금 바빠서 좀 기다려야 할 텐데. ”
“ 아니에요, 겐카. 동료들이랑 점심 먹으러 온 거예요. ”
“ 이리 와요, 이 안쪽으로! ”
구석의 창가 자리로 안내받은 후 리자가 방긋 웃었다.
“ 어머, 전에는 꽃돌이 감독님이랑 친한 다냐 덕분에 자리를 받았는데 이번엔 언니 덕분이네요. 남자친구가 좋긴 좋군요! ”
“ 아니야, 그런 거! ”
알렉산드라가 얼굴을 붉혔지만 리자는 깔깔 웃었다. 베르닌도 기분이 좋았고 보랴의 생일 파티에 알렉산드라를 데려갔던 것이 정말 뿌듯했다.
점심시간은 짧았으므로 셋은 빨리 먹을 수 있는 버섯 블린과 감자 수프, 게살 샐러드를 시켰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하나같이 너무나도 맛있었다. 특히 리자는 버섯 블린에서 포크를 놓지 못했다.
“ 어쩜 이렇게 블린이 맛있죠? 우리 이거 한 접시만 더 시키면 안돼요? 가브릴로프에서 제일 맛있는 블린이에요. 어쩌면 이렇게 얄팍하면서도 반질반질하고 풍미가 기가 막힐까요. 속에 들어간 버섯도 너무 향긋해요. 근데 버섯 없이 블린에 스메타나만 얹어도 진짜 맛있어요. ”
“ 응, 보랴가 블린을 잘 구워. 그저께 보랴가 집에서 구워줬는데 나 너무 많이 먹어서 하루만에 3킬로는 찐 것 같아. 숲에서 따온 딸기랑 곁들여 먹으니까 너무 맛있더라고. ”
“ 어머, 언니 좋겠다... 집에서 남자친구가 이렇게 맛있는 블린을 구워주고... 아앗! 그래, 이거예요! 됐어요! ”
리자가 손뼉을 딱 쳤다. 어리둥절해진 베르닌과 알렉산드라를 환한 얼굴로 바라보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 바자회는 오후에 열리잖아요. 보랴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건 어때요? 우리 부스 컨셉을 딸기로 잡는 거예요! 봄이니까 이제 딸기가 나오고 있잖아요! 주말에 우리도 가족끼리 다차에 가서 딸기 잔뜩 따왔거든요. 우리 부스에서 블린을 구워 파는 거예요! 블린 종류는 딸기랑 크림 넣은 거 하나로만 통일하고요. 보랴가 도와주기만 하면 불티나게 팔릴 거예요! 알렉산드라 언니랑 나는 손님을 끌고요. 우리 오빠가 유리병 공장에 다니거든요. 예쁜 공병이 많아요. 공병들에 딸기사탕을 넣어서 리본 달아서 파는 거예요! 블린이랑 딸기사탕이랑 같이 묶어서요! ”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어... 근데 그건 기부랑 상관이 없잖아요... 우리 KGB 직원들이랑은 상관없는 내용인데 우리 부스에서 해도 되나... ”
“ 아휴, 다냐! 다른 부스들도 다 그렇게 한단 말이에요. 어차피 우리 물건들은 팔리지도 않아요. 우리도 이럴 땐 자본주의자들의 상술을 좀 베낄 필요가 있어요. 전에 대학생들에게서 압수했다는 잡지에서 봤는데요, 양키들은 별것도 아닌 물건들을 예쁘게 포장해서 비싸게 팔아먹는대요. 뭐라고 하더라, 패키지? 서로 다른 물건들을 공통되는 주제를 갖다 붙여서 한 세트로 만들어 판다는 거예요,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그럴싸하게 보이는 거고요. 그러니까 우리도 무슨 슬로건 같은 걸 붙여서 딸기 패키지를 만드는 거예요! ”
베르닌은 어안이 벙벙했고 이 자본주의자의 상술이라는 것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지만 알렉산드라는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를 쳤다.
“ 아, 리자! 너 정말 똑똑하구나! 좋은 생각이야. 있잖아, 작년에 우리 단체로 의류공장 견학 갔던 거 생각나니, 다냐? ”
“ 어, 그럼요. 저 그때 이 셔츠 다섯 개 들이 한꺼번에 샀는걸요. ”
“ 그 의류공장이랑 우리 쪽 공공기관이랑 무슨 협약을 맺어서 간 거였잖아. 그때 우리가 무슨 서류 문제를 해결해주는 대신 그쪽에서 직원용 의복을 제공받기로 했었거든. 근데 그때 총무부 담당자가 일을 하도 엉망으로 하는 바람에 원래 받기로 했던 겨울 스웨터가 아니고 그냥 하얀색 반팔 티셔츠가 100장이 온 거야. 반품시키려고 했다가 서류 절차가 복잡하다고 그냥 창고에 갖다 쌓아놨어. 아직도 상자 째 그대로 있어. ”
“ 어, 근데 어떻게 국장이 그걸 그냥 놔둔 거죠? 그런 거 못 참을 텐데... ”
“ 그 담당자가 국장한테 아예 보고를 안 한 거지! 그때 국장이 모스크바 출장 가고 어쩌고 하느라 바빴고, 사실 의류공장에서 옷 받아서 나눠주는 거야 국장 관심 밖의 일이었으니까. 아예 보고를 안 하고 묻어버리면 모르고 넘어가게 되는 거지. 만약 보고를 했다면 해결할 때까지 들들 볶았을 테지만. ”
“ 그렇구나... ”
베르닌은 새로운 문제 해결 방법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신이 너무나 책상물림이라는 생각에 조금 좌절감도 들었다. 자기 같았으면 곧이곧대로 국장에게 물건이 잘못 왔다고 구두 보고한 후 보고서와 경위서를 만들고 온갖 절차를 거쳐 의류공장에 티셔츠를 반품하고 겨울 스웨터를 받아내느라 한 달 이상을 소요했을 것이다. 그동안 국장에게 계속 들들 볶였을 것이고.
“ 그런데 그 티셔츠와 내일 행사는 무슨 관계가 있나요? 반팔 흰 티셔츠는 팔아봤자 별로 매상이 안 오를 텐데... ”
“ 리자가 패키지 얘기를 했잖아. 별 거 아닌 물건들을 예쁘게 포장해서 팔아먹는 거. 블린이랑 딸기사탕이랑 티셔츠를 묶어서 파는 거야! 흰 티셔츠에는 그림을 그릴 수가 있잖아. 딸기를 주제로 하는 거니까 셔츠에 딸기 무늬를 그리는 거야! ”
“ 어... 그치만 언제 딸기 100개를 그려요... 게다가 전 미술이라면 담을 쌓은 걸요. ”
“ 아이 참, 다냐! 100개를 하나하나 그릴 필요 없어요! 학교 다닐 때 그런 거 했잖아요. 판화! 지우개나 감자에 딸기 모양을 새긴 다음에 그걸로 찍어내면 돼요! 이거 너무 좋은 아이디어네요. 슬로건만 생각하면 되는데... 공공기관 행사에 어울리는 슬로건 뭐 없을까요? 다냐, 당신이 행정용어를 많이 알잖아요. 생각 좀 해봐요. ”
“ 어... 난 책상물림이라서 이런 판매 전략 같은 건 진짜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안되겠어요. 경제개발 5개년 그런 것밖에 생각이 안 나요. ”
알렉산드라가 하늘색 눈을 반짝 빛내더니 소리쳤다.
“ 그거다! ‘검은 숲 딸기 유통 활성화 착수 기념 트로이카 패키지!’ 뭔가 있어 보이고 행정용어도 들어가고 우리 러시아 전통문화인 트로이카란 단어도 있고! 이 정도면 국장이나 의장도 대체 왜 블린이랑 딸기사탕이랑 티셔츠가 KGB랑 관계있냐고 트집 못 잡을 거야! 용어만 잘 붙여 놓으면 되니까! ”
“ 꺄, 뭔가 멋있어 보여요! 좋아요, 이걸로 해요! 들어가면서 일단 감자를 몇 알 사요. 사무실에 아크릴 물감이랑 칼은 있었던 것 같아요. 난 오빠에게 전화해서 공병들을 실어다 달라고 할게요. 제일 중요한 게... 보랴가 도와줘야 하는데... ”
그때 마침 보랴가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에서 슬그머니 나왔다. 바쁜 와중이었지만 여자친구를 잠깐이라도 보고 싶었던 게 분명했다. 알렉산드라를 꼭 껴안고 뺨과 입술에 뽀뽀를 하며 반가워했다. 그러다 뒤늦게 베르닌을 발견하고는 벙긋 웃었다.
“ 아, 너 왔구나. 얘기 들었지, 나랑 사셴카랑. ”
“ 어, 예. 축하해요. 둘이 너무 잘 어울려요. ”
“ 다 너 덕분이야. 네가 그때 사셴카 데리고 와서. 근데 애기는 좀 어떠냐. 공연 끝나고 입원했다면서. ”
“ 괜찮아요. 퇴원하고 온천에 갔어요. 내일 돌아올 거예요. ”
“ 아, 그랬구나. 다행이다. ”
리자가 옆구리를 콕 찌르자 알렉산드라가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설명하고는 보랴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보랴는 흔쾌히 승낙했다.
“ 식당 점심시간이 두 시에 끝나니까 그때부터 다섯 시까지는 괜찮을 거야. 블린 그까짓 거 산더미만큼 구울 수 있지! 내일 두 시까지 갈 테니까 세팅만 잘 해놔. ”
“ 고마워요, 보랴! ”
그래서 그들은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식당을 나왔다. 베르닌은 아직도 자본주의자들의 패키지가 과연 매상 1위를 달성할 수 있을지 크나큰 의문이 들었지만 리자와 알렉산드라가 많이 들떠 있기도 했고 어쨌든 엉망인 물건들만 파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열심히 준비해보기로 했다.
* * *
목요일 오후가 되었다. 날씨가 매우 좋았다. 베르닌과 리자는 중앙에 설치된 부스로 일찌감치 가서 물건들을 늘어놓고 한쪽에서는 블린을 구울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빨간색과 초록색의 동그랗고 먹음직스러운 딸기가 세 개씩 그려진 하얀 티셔츠들과 딸기 사탕들이 들어 있는 조그만 유리병들을 매대 제일 앞에 쌓아놓았다. 전날 베르닌과 리자, 알렉산드라는 감자에 문양을 새기고 물감을 묻혀서 티셔츠 100장에 모두 딸기 무늬를 찍었고 유리병마다 딸기 사탕 열 개를 넣어서 녹색 리본을 달았다. 리본은 따로 산 것이 아니고 알렉산드라가 당직실 창문에 걸려 있던 낡은 커튼을 잘라내서 만들었다. 마침 녹색이라 잘됐다 싶었다. 남는 커튼 조각으로는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손재주가 좋은 리자가 하얀 페인트로 직접 ‘검은 숲 딸기 유통 활성화 착수 기념 트로이카 묶음 판매’ 라고 썼다. 패키지라고 쓰면 자본주의 반동분자로 오해받을까봐 베르닌이 걱정했기 때문에 용어를 바꾼 것이다.
스페호프는 각 부서에서 대표 직원 한 명씩을 차출해서 판매와 계산을 도우라고 명령했고 자신도 직접 현장에 왔다. 딸기사탕과 티셔츠, 휴대용 버너를 보자 눈살을 찌푸렸지만 ‘검은 숲 딸기 유통...’이라고 씌어 있는 슬로건을 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닌의 어깨를 툭툭 쳤다.
“ 그렇군, 우리 가브릴로프 숲에서 나는 농산물의 생산 및 유통을 확대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목표를 설정했군. 당과 의회에서 좋아하겠어. 목표는 좋은데 과연 잘 팔릴지 모르겠군. 먹는 것들은 원래 비싸게 받을 수가 없잖은가. ”
“ 묶음 판매로 고급화하겠다는 것이 리자의 전략입니다. ”
“ 흐음... 하여튼 잘 해보게! 이번만큼은 무조건 1등을 해야 돼! 우리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체면이 있지... 1등을 하지 못하면 벌목공 일자리나 알아보는 게 좋을 걸세! ”
뒤에 서 있던 리자가 사색이 되었다. 스페호프가 저쪽으로 사라지자 리자는 파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다냐, 저거 설마 진담은 아니겠죠? ”
“ 그, 글쎄요. 국장은 농담 같은 거 할 줄 모르거든요. 진담으로 하는 거긴 한데... 그래도 진짜로 우리를 벌목공으로 만들지는 않을 거예요. ”
“ 매상은 올릴 자신 있어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극장이 문제란 말이에요. 꽃돌이 감독님이 사인회를 하면... ”
“ 어, 미샤는 오늘 안 와요. 온천에 갔거든요. 걘 바자회 같은 거 관심도 없고요. 그러니까 사인회 같은 건 안 할 거예요. ”
“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치만 데니스도 인기가 많아서... 작년에 나도 데니스한테 사인 받으러 가서 줄섰다가 그 터키석 팔찌 산 거라서요. ”
“ 무용수들도 다 휴가 갔어요. 오늘까지 휴가라서 안 온대요. 류다한테 물어봤어요. ”
리자는 간신히 좀 안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바자회 준비하는 내내 씩씩하고 의기양양했지만 그래도 스페호프가 무섭긴 한 모양이었다. 그때 다른 부스들을 둘러보고 온 알렉산드라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나타났다.
“ 극장은 생각보다 별로 물건이 없어. 근데 삼림국 부스에도 딸기가 있어. 그쪽은 물량이 훨씬 많아. 바구니에 딸기를 쌓아놓고 파는 것 같아. 이래서는 밀릴지도 몰라.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 ”
“ 어, 어떻게 하죠... ”
베르닌도 걱정에 휩싸였다. 리자는 곰곰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손뼉을 딱 쳤다.
“ 그래! 극장이 하는데 왜 우리라고 못해요! 우리도 분장을 하면 되지! 그 양키 잡지에서 보니까 여자들이 토끼 옷을 입었더니 남자들이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사셴카 언니, 이리 와요. 우리 잠깐 저쪽 텐트로... ”
리자와 알렉산드라가 주최측 텐트로 사라진 후 보랴가 왔다. 바자회 때문에 손님이 평소보다 적어서 부주방장에게 맡기고 왔다고 했다. 말은 그렇지만 사실은 알렉산드라를 도와주고 싶어서 서둘러 온 것 같았다. 플래카드를 보더니 픽 웃었다.
“ 뭐냐, 저건. 읽는데도 한참 걸리네. 활성화는 뭐고 트로이카 묶음 판매는 또 뭐야. ”
“ 그냥 말장난이에요. 국장한테 트집 잡힐까봐... ”
“ 난 블린만 구워주면 되는 거지? ”
“ 딸기랑 크림 넣어서 돌돌 말아 달라고 하던데... 그러면 어려울까요? ”
“ 어렵긴. 식은 죽 먹기지. 음료수는 이거 하나야? ”
“ 뜨거운 물 계속 끓여주기도 힘들고 시간도 없으니까 차는 안 팔 거고요, 그냥 이 탄산수에 딸기 시럽 섞어주기로 했어요. ”
보랴는 딸기 시럽의 맛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음, 괜찮네. 이 시럽 누가 만들었냐? ”
“ 리자네 집에서 만든 거래요. ”
“ 아, 어제 같이 있던 그 금발 아가씨? 걔 귀엽더라. 너랑 사귀냐? ”
“ 아니에요, 그냥 동료예요. ”
“ 쯧... 발랄하고 귀엽던데 노력 좀 해보지 그러냐. 안 그래도 로만이 맨날 걱정하던데, 너 독수공방한지 오래 된 것 같다고. 이런 시럽 만들 줄 아는 여자라면 참 괜찮은 건데. ”
“ 리자가 만든 게 아니고 리자 어머니가 만든 거랬어요. ”
“ 에휴, 넌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듣냐! 사셴카는 너보고 착하고 성실하고 어딜 보나 일등 신랑감이라면서 널 못 알아보는 여자들이 이상하다고 그러던데. ”
베르닌은 알렉산드라가 그런 말을 해줬다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쑥스러워서 물통에 시럽을 부어서 휘휘 섞으며 딴청을 부렸다. 보랴가 맛을 보더니 그 정도 배합이면 됐다고 해서 열심히 섞은 후 탄산이 빠질까봐 뚜껑을 꼭 닫아놓았다.
그때 리자와 알렉산드라가 나타났다. 베르닌과 보랴는 둘 다 눈이 등잔만큼 커졌다. 리자가 쾌활하게 소리쳤다.
“ 다냐, 우리 어때요? ”
“ 어, 저... 어... ”
베르닌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보랴도 마찬가지였다. 리자와 알렉산드라는 단을 접어 올려 아주 짧아진 원피스에 딸기 무늬를 그려놓은 에이프런을 두르고 긴 머리를 양쪽으로 높이 올려 묶어 토끼 머리를 하고 있었다. 화장도 곱게 하고 기다란 속눈썹을 달고 입술을 빨간 하트 모양으로 칠하고 있었다. 리자는 방글방글 웃고 있었지만 알렉산드라는 어색한 듯 뺨을 붉히며 쭈뼛거렸다. 보랴의 눈치를 보면서 종알거렸다.
“ 보르카, 나 너무 이상하지? ”
“ 아, 아니... ”
“ 역시 이상하구나... ”
“ 아니야! 누가 이런 걸 보고 이상하다고 해! 이걸 보고 넋이 안 나가면 사내가 아니야! 진짜 예쁘단 말이야! ”
보랴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알렉산드라를 번쩍 안고 빙글빙글 돌리며 펄쩍 뛰었다. 알렉산드라는 창피하다며 꺅꺅거리고 보랴는 아랑곳하지 않고 키스를 하고 난리였다. 리자가 깔깔 웃으며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다냐, 당신은 어때요? ”
“ 어... 어... 저기요... 어어... ”
“ 어휴, 그게 뭐예요! 보랴는 예쁘다고 했는데! 알렉산드라 언니만 예쁘고 나는 안 예쁘다는 거예요? ”
“ 아, 아니요... 저기... 예쁜데요... 너무 낯설어서... 어... ”
“ 맘에 안 드는 거구나! ”
“ 아니, 아니에요. 누가 그래요. 그런 게 아니고요... 이런 거 처음 봐서 그래요. 저... 근데 치마 너무 짧은 거 아니에요? 저기... 극장도 아닌데 좀 야한 거 같은데... ”
“ 맙소사, 다냐... 당신 모스크바에서 공부한 사람이 왜 이렇게 보수적이에요? 그냥 솔직히 말해요, 맘에 안 든다고. 이 스타일이 나랑 안 어울리나보네요. 거울 볼 땐 괜찮아 보였는데 남자들 눈엔 별로인가... 알렉산드라 언니는 아담하니까 어울리는데 난 아닌가보네요. 이런 스타일 소화하기엔 다리가 너무 긴가... ”
리자가 금세 풀이 죽었다. 땋아 올린 머리를 잡아당기더니 에이프런도 풀어버리려고 했다. 베르닌은 어쩔 줄을 몰랐다. 반쯤 풀어진 에이프런 끈을 다시 매주면서 더듬거렸다.
“ 아니에요, 리자. 진짜 그게 아니에요. 잘 어울려요. 저, 난 당신이 이런 모습을 한 걸 본 적이 없어서... 그게 아니고, 저... 바자회에 남자들도 많이 오니까... 저쪽 부스에서는 술도 팔잖아요. 남자들은 취하면 예쁜 여자들한테 괜히 못살게 굴고 그러니까... 좀 걱정돼서. 알렉산드라는 보랴가 있으니까 괜찮지만... ”
“ 그럼 나 예쁜 거예요? ”
리자가 언제 풀이 죽었느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베르닌은 매우 당황했다.
“ 어, 예... 근데 원래 예뻤으니까 저기... ”
“ 아유, 당신 너무 웃겨요. 이래서 꽃돌이 감독님이 당신이랑 그렇게 착 붙어 다니는 거군요. 말도 잘 듣고. ”
리자는 까르르 웃더니 베르닌의 뺨에 뽀뽀를 하고는 좌판에 놓인 물건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어쩐지 더욱 쑥스러워져서 종이컵들만 잔뜩 꺼내 늘어놓았다.
* * *
바자회는 2시에 시작되었다. 주민들과 공공기관 직원들이 많이 왔다. 리자의 자본주의식 패키지 판매 전략은 놀랍게도 주효했다. 중앙에 있는 부스라 위치적 이점도 있었지만 천하일미 요리대회 준우승자인 보랴가 구워주는 블린이라는 강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리본 달린 병에 들어 있는 딸기 사탕은 몇 배로 먹음직스러워 보였고 무엇보다도 알렉산드라와 리자의 딸기 아가씨 분장이 대히트를 쳤다. KGB 부스에 가면 딸기 앞치마를 두르고 토끼 머리를 한 귀여운 아가씨들이 맛있는 블린과 딸기 탄산수를 팔고 있다는 소문이 금세 좍 퍼졌다. 남자들이 줄을 섰다. 알렉산드라는 보랴의 옆에서 블린을 접시에 담고 탄산수를 따라주었고 리자는 딸기 사탕과 티셔츠 패키지를 홍보했다.
“ 와, 이 티셔츠 예쁘다. 얼마에요? ”
“ 티셔츠 한 장에 20루블이에요. ”
“ 좀 비싼데... ”
“ 이거 손으로 그린 딸기예요. 방수물감이라 지워지지도 않고요. 사탕 한 병에 10루블, 티셔츠 한 장에 20루블이지만 사탕이랑 티셔츠를 같이 하시면 25루블에 드려요. 어머, 그러고 보니 딸기 블린 세트 드셨죠? 블린 드신 분들은 사탕이랑 티셔츠를 20루블에 드려요. ”
“ 어, 점점 싸지네... 그러면 블린 먹고 사탕 먹고 티셔츠 사는 게 이득인 거네! ”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블린과 사탕과 티셔츠 패키지가 불티나게 팔렸다. 토끼 머리를 한 자그마한 알렉산드라의 앙증맞은 모습과 늘씬한 리자의 모델 같은 자태 때문에 평소에는 바자회에 관심도 없었던 젊은 남자들도 줄줄이 몰려왔다. 보랴는 알렉산드라의 전화번호를 묻는 청년들에게 이따금 도끼눈을 떴지만 그래도 즐거운 듯 빙긋빙긋 웃으며 손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블린을 구워서 딸기와 크림을 넣어 휙휙 말았다. 남자들이 사진 좀 같이 찍으면 안 되느냐고 졸라대자 당찬 리자는 ‘패키지 구매하신 분들하고만 찍어요!’ 하고 소리쳤다.
베르닌은 곁에서 물건을 팔고 계산을 하고 장부를 적느라 정신이 없었다. 부스가 성황을 이루자 들뜬 스페호프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고 직원들 몇 명을 보내서 장부 정리와 계산, 줄 세우기를 돕게 했다.
“ 잘했네, 잘했어! 자네들이 최고일세! 다닐, 리자베타, 알렉산드라! 내 자네들을 기억해 두겠네! 그래, 다닐. 지금까지 매상이 얼마나 올랐나? ”
“ 그, 글쎄요. 지금 너무 바빠서. 아마 천 루블 넘게 올랐을 겁니다. ”
“ 좋아! 묶음 판매가 다 안 되더라도 티셔츠만 다 팔면 2천 루블 가까이 되겠군! 그러면 우리가 1위일세! 지금 다른 부스들은 죽을 쑤고 있어! 저 꼴 보기 싫은 극장도 천벌을 받았는지 지금 파리만 날리고 있다네! 우리가 1위 한번 해보세! 아니, 블리즈네초프 의장이잖아! 아이고, 이리나도 같이 왔군! ”
스페호프는 어슬렁어슬렁 다가온 의회 의장에게 달려갔다. 바자회 추진위원장이자 공산당 부녀회장인 의장 부인 이리나도 함께였다. 이리나는 가브릴로프에서 제일 가는 노멘클라투라인 돈초프 가문 출신으로 굉장한 여장부였다. 타지 출신인 남편 블리즈네초프도 사실은 그녀가 뒤를 봐줘서 의회 의장 자리를 꿰찼다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다. 가브릴로프에는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노멘클라투라 가문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렐랴의 비슈네프 가문이었고 다른 하나가 돈초프였다. 특히 최근 10여년 동안은 후자의 재력과 정치력이 월등해져 있었다. KGB와 의회는 동등한 위치라면서 의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스페호프 국장마저도 이리나의 비위만은 거스르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했다.
스페호프의 에스코트를 받아 이리나가 가까이 오자 베르닌은 의장이 공처가란 소문이 사실인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50대 초반의 이리나는 굉장한 거구의 금발 머리 아주머니로 보라색 눈 화장을 하고 입술을 검정색에 가까운 빨간색으로 칠한 데다 볼연지도 분홍색으로 세심하게 바르고 연두색 재킷에 노란 원피스, 빨간 구두 등 그야말로 총천연색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블리즈네초프 의장도 뚱뚱한 편이었지만 아내 곁에 서자 아담해보일 지경이었다.
“ 어흠, 그렇군. 이것은 정말로 검은 숲 딸기 생산에 도움이 되겠군요. 이 딸기는 검은 숲에서 따온 것인지? ”
“ 네, 의장님! 제가 직접 따온 거예요. 굉장히 맛있어요. 블린 드셔보세요! 이리나 표도로브나, 여기 포크 드릴게요. ”
리자가 방긋방긋 웃으면서 의장 부부에게 블린 접시를 두 개 내밀었다. 알렉산드라가 급히 딸기 탄산수도 두 컵 따랐다. 의장은 원래 식욕이 왕성한 사람이었으므로 거의 씹지도 않고 딸기 크림 블린을 꿀떡꿀떡 삼키고 음료수도 후루룩 마셨다. 이리나는 블린을 우물우물 먹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음, 맛있네. 아, 당신이었군요, 보랴. 어쩐지 맛있더라니. 그런데 아가씨들은 꼭 이렇게 꾸미고 있어야 하나? 여기는 애들도 오는데 치마가 너무 짧은 것 같군. ”
이리나가 알렉산드라와 리자를 째려보았다. 의장이 아까부터 두 아가씨의 다리를 힐끔거리는 게 영 못마땅했던 것 같았다. 리자가 당황해서 다리를 움츠렸지만 그래도 회사 경험이 더 많은 알렉산드라가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 그러네요, 이리나 표도로브나. 저희 생각이 좀 짧았네요. 앞치마 단을 좀 내릴게요. 이 사탕이랑 티셔츠 맘에 드시면 챙겨드릴게요. ”
이리나는 리본 달린 병 두 개와 티셔츠 두 장을 낚아채면서도 쌀쌀맞게 대꾸했다.
“ 꼭 맘에 드는 건 아니고. 딸기 무늬가 너무 알록달록해서 애들한테나 어울릴 것 같긴 하지만 성의를 봐서 가져가겠어요. 근데 티셔츠가 애들 손바닥만 해서 나한테는 맞지도 않겠네! ”
“ 어머나, 아니에요. 지금 고르신 건 애들용이라 그래요. 여기 성인용은 잘 맞으실 거예요. 피부가 하얗고 화사한 편이시니 잘 어울리실 거예요. ”
알렉산드라는 급하게 제일 큰 티셔츠 두 장을 꺼내서 남아 있던 녹색 리본으로 돌돌 말아 건넸다. 베르닌은 그녀가 ‘제일 큰’이란 단어 대신 교묘하게 ‘애들용’, ‘성인용’이란 단어를 쓰는 것에 감탄했다. 이리나는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티셔츠를 집어서 몸에 대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블린을 두 접시째 먹는 중인 의장의 손목을 확 잡아끌었다.
“ 당신 그만 좀 먹어요! 다른 부스도 가봐야죠! 하여튼 수고하셨네요,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이런 추세라면 보안위원회 부스가 1등을 하겠어요. 대체 극장은 오늘 왜 저 모양인지... 아니, 이렇게 중요한 바자회를 여는데 당연히 예술감독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극장장은 앞장서서 물건 팔고 있는데 미샤는 코빼기도 안보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무용수들까지 전부 휴가를 보내다니요! 정말 미샤는 아무리 잘났어도 그렇지 우리 당과 부녀회를 어떻게 보는 건지... ”
이리나가 콧김을 푸르르 내뿜으며 또각또각 가버렸다. 의장은 접시를 내려놓고 알렉산드라와 리자에게 벙글벙글 웃으며 참 맛있었다고 칭찬하고는 스페호프에게 변명조로 말했다.
“ 이리나 말투에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블라지미르. 방금 극장 부스 갔다가 화가 나서 저런다네. 그 친구가 사인회를 할 줄 알고 은근히 기대했던 모양이야. 에휴, 여편네들이란... 그 망할 놈의 반동분자가 뭐가 좋다고 그저 얼굴 반반하면 다 되는 줄 알고... 하여튼 여자들이란 이해가 안 된다니까. 하여튼 야스민이 온천에 갔다고 하니 오늘 극장 부스는 매상이고 뭐고 망했고 자네 부스가 우승할 것 같으이. 미리 축하하네. 허참, 그 블린 정말 맛있군. 열 접시라도 먹겠는데 마누라가 난리를 치니... 잘 있어요, 예쁜 아가씨들! ”
의장 부부가 사라진 후 스페호프는 더더욱 신이 났다. 드디어 우승이라면서 역시 대 KGB의 능력은 뛰어나다고 껄껄 웃었다. 베르닌에게도 그 불여우 감시 때문에 고생만 죽어라 했는데 여기서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극장 부스가 죽을 쑤고 있는 것이 특히 맘에 드는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정신없이 계산을 하고 거스름돈을 내주다가 보랴가 반죽을 새로 하느라 잠깐 틈이 생겼을 때 알렉산드라에게 물었다.
“ 근데 극장 부스는 왜 죽을 쑤고 있는 거예요? 미샤는 작년에도 없었으니까 변동 요인이 아니고. 무용수들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사인회가 그렇게 중요해요? ”
“ 중요하긴 하지. 왜 우리가 이렇게 딸기 아가씨 노릇을 하고 있겠어. 사실 리자도 작년 극장 부스의 사인회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거거든. 근데 그것보다도... 극장은 원래 좋은 물건들이 많았는데 올해는 진짜 뭐가 없더라고. 그래서 파리 날리고 있어. ”
그때 보랴가 다시 블린을 굽기 시작했다. 계산을 하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 아니, 다냐. 소문난 딸기 부스 운영자가 바로 당신이라니! 나참, 생각지도 않은 재주가 있었군요! ”
류드밀라였다. 이미 딸기 사탕이 든 병과 티셔츠를 가방에 쑤셔 넣고 있었다. 딸기 블린은 다 해치웠는지 음료수를 마시면서 맛있다며 웃었다.
“ 아, 류다! 안 그래도 극장 부스 얘기하고 있었어요. ”
“ 음, 우리 부스는 올해는 공쳤어요. 일단 무용수들이 전부 휴가 가서 얼굴마담이 없잖아요. 그리고 이번에는 무대 의상이나 장신구 같은 건 하나도 못 내놨어요. 작년까지 내놓은 의상이랑 장신구들, 사실은 전부 예전에 무대 올리다가 전임 감독이 레퍼토리에서 빼버린 작품들에서 야금야금 갖다 팔았던 거였어요.
그 사실을 알고 감독님이 엄청 화냈거든요. 의상이랑 장신구 새로 제작하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 왜 있는 것들을 다 헐값에 갖다 팔았느냐,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하고 불을 뿜었어요. 안 그래도 지난번 돈키호테 다시 올릴 때 키트리부터 시작해서 투우사랑 요정 의상들이 없어서 추가 제작을 했거든요. 근데 감독님은 라 바야데르를 다시 올리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그 주인공 의상들이 엄청 화려하잖아요, 터번이랑 아랍 팬츠랑 팔찌들 작년에 엄청 비싸게 팔렸거든요. 작년 기부 목록을 보고 감독님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올해는 발레 작품 관련 물품들은 기부 금지시켰어요. 오페라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부스에 내놓을 게 뭐가 있겠어요. 기껏해야 사진 몇 장, 토슈즈 한두 켤레, 오페라 글라스 두어 개랑 오래된 팸플릿들 정도라고요. 사무국 말단 행정직원 두 명이 팔고 있는데 무용수들 외모랑 비교가 되나요. 게다가 여기서 이렇게 귀여운 딸기 아가씨들이 맛있는 걸 파는데 다들 여기로 몰리는 게 당연하죠. 나 같아도 여기로 오겠네. ”
“ 아, 그렇구나... 그 녀석 때문이구나.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네 부스가 우승하면 모든 게 왕재수 덕이란 생각이 들었다. 티셔츠라도 한 장 챙겨줘야 하나 싶었다. 류다는 딸기 탄산수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쪼로록 마신 후 한숨을 쉬었다.
“ 근데 문제는 우리 극장장이라니까요. 3년 연속 우승해서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이번에 이렇게 파리 날리고 있으니까 지금 열 받아서 펄펄 뛰고 있어요. 미샤를 엄청 욕하고 있어요. 물건을 못 내놓게 했으면 무용수를 내놓든가 자기가 사인회라도 했어야지 팔자 좋게 온천에 갔다고요. 다른 부스들 돌아다니면서 잘 되는 거 보고 얼마나 화를 내고 있는지... ”
“ 으음, 윗분들은 다 똑같군요. ”
“ 그러게 말이에요. 그래도 자기가 양심이 있으면 우리 감독님한테 화내면 안 되죠. 파리 날리던 극장 매일같이 매진시켜주고 있는 게 누군데. 자기 팔자에 언제 크레믈린 의원님들이 줄줄이 와서 악수를 해보겠어요! 다 미샤 덕분이지! 어머나, 결국은 가져왔네... 감독님한테 말도 안 하고! ”
류다가 극장 부스 쪽을 가리키며 펄쩍 뛰었다. 젊은 여직원 하나가 구름처럼 스카프를 늘어뜨리며 부스로 들어가고 있었다.
“ 저게 뭔데요? ”
“ 미셴카 스카프요! 하도 물건도 없고 손님도 없으니까 극장장이 열 받아서 자기 비서한테 감독실에 가서 미샤 스카프랑 셔츠라도 가져오라고 했거든요. 내가 안 된다고 했는데 극장장이 나한테 잘리고 싶으냐고 소리 질러서 못 막았어요. ”
“ 으아... 그 녀석 자기 옷 손대는 거 진짜 싫어하는데... 설마 지금 미샤 옷을 팔려고 하는 거예요? ”
“ 그런가 봐요. ”
“ 아아... 저거 다 아르마나 프로도 에르미 그런 건데... 외제에 엄청 비싼 것들이랬는데... ”
“ 어휴, 어떻게라도 막아봐야겠어요. 하여튼 잘 먹었어요! ”
류드밀라가 극장 부스로 뛰어간 후 다시 손님이 몰려서 베르닌은 정신없이 일했다. 그때 귀에 익은 또렷하고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머, 다냐! 세상에, KGB 부스에서 이런 근사한 기획을 하다니! 보랴를 섭외한 건 신의 한 수네요! 블린 너무 맛있어요! ”
렐랴였다. 한 손에 돌돌 말린 딸기 블린 접시, 다른 손에는 음료수 잔을 들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베르닌은 숨이 턱 막혔다.
“ 아, 안녕하세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
“ 아휴, 그렇게 여러 번 봤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거예요! 그냥 렐랴라고 하라니까요. 보랴, 블린 최고예요! ”
보랴도 바쁘게 블린을 굽는 와중에 렐랴에게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렐랴는 순식간에 블린을 해치우더니 접시를 내려놓고 딸기사탕이 든 병과 티셔츠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 어머나, 아이디어 진짜 좋네요. 사탕은 애들 먹는 거지만 병이랑 리본을 매치하니까 진짜 고급으로 보여요. 이거 누구 아이디어에요? ”
“ 어, 여, 여기... 리자가 낸 아이디어예요. 이쪽은 알렉산드라고요. ”
“ 안녕하세요, 리자! 알렉산드라! 우와, 스타일 너무 좋아요! 둘 다 정말 예뻐요! 토끼 머리랑 그 앞치마 너무 잘 어울리네요. ”
렐랴의 칭찬에 알렉산드라와 리자가 뛸 듯이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렐랴는 가브릴로프 패션과 유행을 선도하는 최고의 미녀였기 때문이다. 렐랴는 사탕과 티셔츠 패키지를 세 개나 사더니 리자에게 자기도 딸기 아가씨 스타일을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리자는 렐랴와 함께 주최측 천막으로 사라지고 베르닌이 대신 블린을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 그는 리자처럼 손이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금세 주문이 밀리기 시작했다.
“ 아까는 딸기 아가씨가 둘이었는데 왜 지금은 하나예요! ”
“ 그러게! 왜 갑자기 시커먼 총각이 블린을 말아주는 거야! ”
리자와 알렉산드라 때문에 줄을 섰던 남자들은 투덜댔지만 의외로 깔깔 웃는 여자들도 있었다.
“ 어머 어머, 남자도 있네! 덩치 큰 남자가 딸기 티셔츠 입으니까 색다르고 귀여워요! 사진 좀 찍어요! ”
베르닌은 리자의 본을 따서 ‘패키지 구매하셔야 사진 찍어드려요!’ 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쑥스럽고 부끄러워서 버벅거리다가 결국 블린 접시와 음료수 컵을 든 아주머니들과 소녀들 사이에 끼어서 사진까지 찍혔다.
다행히 잠시 후 리자가 돌아왔다. 게다가 탐스러운 밤색 머리를 토끼처럼 양쪽으로 땋아 올리고 딸기 무늬 에이프런을 입은 렐랴와 함께였다! 렐랴는 리자와 알렉산드라 곁에서 사이좋게 사진을 찍었고 새로운 스타일에 신이 난 나머지 자원해서 부스에서 티셔츠 판매를 돕기까지 했다!
렐랴가 가세하자 KGB 부스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남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미녀 3인방의 딸기 부스라면서 들썩였다. 티셔츠는 이미 100장 모두 팔렸고 딸기 사탕과 보랴의 블린 반죽과 딸기 시럽도 동이 났다. 아쉬움에 몸부림치던 남자들은 렐랴와 리자, 알렉산드라 셋과 사진을 찍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베르닌이 ‘물건 다 팔렸으니까 이제 끝났어요!’라고 외치려는데 수완 좋은 리자가 냉큼 소리쳤다.
“ 딸기 아가씨들과 사진 한 장 찍는데 5루블이에요! 선착순 10명만 받아요! ”
보랴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알렉산드라의 윙크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원체 예뻐서 언제 어디서나 사진 찍히는데 익숙한 렐랴도 방긋 웃으며 어쨌든 바자회의 기부 목표는 좋은 거니까 동참하겠다고 나섰다. 베르닌은 졸지에 선착순 10명과 딸기 아가씨들을 찍어주는 사진사가 되고 말았다. 10명의 촬영이 끝나자 보랴가 알렉산드라의 앞을 가로막으며 버럭 소리쳤다.
“ 이제 끝났어요! 사진 촬영 끝! 영업 종료! ”
남자들이 항의하려 했지만 보랴의 험상궂은 표정과 우람한 팔뚝을 보고 투덜거리며 물러섰다. 그동안 베르닌은 상자에 돈을 쓸어 담았고 보조 직원이 휘갈겨 쓴 장부를 넘겨받아 금액을 확인했다. 리자와 알렉산드라는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접시와 컵을 한쪽으로 쓸어 모았다. 토끼 머리에 딸기 에이프런을 두른 아름다운 렐랴가 베르닌의 팔을 잡아당겼다.
“ 다냐, 진짜 재미있었어요! 이렇게 재미있는 바자회는 처음이었어요. 당신 고리타분한 줄 알았는데 굉장히 참신하고 재밌는 면도 있네요! ”
“ 어...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이건 리자 아이디어예요. 저는 그냥... ”
“ 렐랴라고 부르라니까... 아휴, 당신 정말. 근데 그 딸기 셔츠 나름대로 어울리네요. 맨날 우중충한 아가일 무늬 셔츠에 손목 토시나 하고 다니더니... 앞으로 이렇게 화사한 옷 입어요. 훨씬 나아요. 얼굴도 살고. ”
“ 어... 어... 저... 딸기를 좋아하시나보네요... ”
베르닌이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리자 렐랴가 은방울을 굴리는 듯 맑은 소리로 웃어댔다.
“ 미치겠네, 다냐! 아... 하여튼 당신 재밌어요. 혹시 스페호프가 괴롭히면 그냥 그만두고 우리 잡지사로 와요! 내가 당신 쓸게요! 안드레이가 짜증내긴 하겠지만... 당신이 오면 미샤랑 인터뷰하기도 더 수월할 텐데. ”
“ 예? 제가 비슈네브이 사드로... 다, 당신이 저를... 그런 생각만으로도... 하지만 저는 책상물... ”
베르닌이 당황하고도 놀라서 얼굴이 빨개지며 더욱 더듬거리자 렐랴는 더욱 까르르 웃어댔다. 옆에서 리자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
“ 농담이죠, 렐랴? 다냐는 우리 KGB에서 촉망받는 인재인데... 모스크바 법학대 수석 졸업자인데 문예지 사무실에서 비서 노릇이라니요... 다냐는 공무원이란 말이에요. 다냐를 뺏길 수는 없어요. ”
“ 어... 저, 리자... 난 수석 졸업이 아니고요... 여기 고등학교 2등 졸업... ”
“ 어쨌든 엘리트잖아요! 다냐는 KGB의 기둥이란 말이에요! ”
리자가 정색을 하자 렐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아, 그렇군요. 난 다냐가 매일 스페호프한테 들들 볶이고 서류철에 구멍만 뚫고 있길래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건데... 알았어요, 리자. 흥분하지 마세요. 그래도 나 농담한 거 아닌데... ”
알렉산드라가 끼어들었다.
“ 다냐야 워낙 성격도 좋고 성실하니까 어딜 가도 환영받을 거예요. 판매 도와줘서 고마워요, 렐랴. 덕분에 금방 매진됐네요. 너무 즐거웠어요. ”
정색하며 따지던 리자 때문에 좀 샐쭉해졌던 렐랴는 알렉산드라의 상냥한 말에 다시 웃었다.
“ 나도 즐거웠어요. KGB엔 책상물림들과 무지막지한 스파이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예쁘고 귀여운 아가씨들도 있다니 너무 놀랐어요. 나중에 두 분 인터뷰하고 싶어요! 언제라도 우리 사무실에 놀러 오세요. 보랴랑 다냐도요! 직접 구운 초콜릿 쿠키를 대접할게요! ”
렐랴의 초콜릿 쿠키를 떠올리자 베르닌은 벌써부터 군침이 돌았고 정신이 혼미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렐랴가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리자가 발을 꽉 밟았지만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렐랴가 펄쩍 뛰었다.
“ 어머나, 극장 부스에 걸어놓은 거 저거 뭐지? 어머, 저건 에르메스잖아! 잠깐 저기 좀 다녀올게요! ”
렐랴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극장 부스 드높이 걸려서 바람결에 펄럭이는 아름다운 오렌지색과 녹색의 스카프를 보자 리자와 알렉산드라도 눈이 동그래지더니 ‘우리도 잠깐 갔다 오자!’ 하면서 뛰쳐나갔다. 졸지에 둘만 남은 베르닌과 보랴는 서로를 마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 * *
가브릴로프 극장장이자 렐랴의 외삼촌인 알렉산드르 먀흐킨은 행정가였기 때문에 예술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간섭하지 않는 편이었고 스페호프처럼 부하들을 들들 볶으며 당의 기치를 강요하는 강성 기관장도 아니었다. 우유부단한 성격에 자기 안위와 자리보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형적인 관료 타입이었다. 그러나 그런 먀흐킨도 바자회 우승만은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극장은 문화국 소속이라 굵직굵직한 정치 경제 기관들에 비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공공기관이 모이는 대회에서 하나라도 우위를 차지하고 싶은 것이 기관장의 속내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가을 체육대회 때도 포기하고 있다가 왕재수의 운동신경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자 부득부득 그를 모든 경기에 다 밀어 넣은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3년 연속 바자회 우승이라는 타이틀이야말로 먀흐킨의 은밀한 기쁨이었는데 난데없이 왕재수의 방해로 극장 부스는 파리만 날리고 어이없는 KGB 부스가 히트를 치고 있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이다.
급기야 그는 자신의 비서를 감독실로 보내 왕재수의 스카프 몇 장과 실크 셔츠 두 벌, 취임식 때 딱 한번 매고는 처박아둔 넥타이를 쓸어오게 했다. 그리고는 의욕 없이 서 있던 사무국 직원들을 내몰고 자기가 직접 판매대 앞에 서더니 스카프와 셔츠를 펄럭펄럭 흔들며 소리쳤다.
“ 외제 명품이오! 레닌그라드 최고 멋쟁이가 몸에 걸쳤던 스카프와 셔츠, 넥타이! 우주 최강 꽃미남 미샤 야스민 감독이 어제까지 입었던 옷가지! 스카프 한 장에 200루블! 셔츠는 300루블! 넥타이 150루블! ”
여자들이 모여들며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다.
“ 우와, 꽃돌이 감독님 옷이래! ”
“ 꺄아, 저 스카프! 저거 프랑스제 명품 아니야? ”
“ 아악, 미샤가 입었던 거라니!!! 저건 무슨 일이 있어도 사야 해! ”
“ 근데 너무 비싸네... 바자회 물건이 이렇게 비싸면 어떻게 해... ”
“ 나스첸카! 나 50루블만 꿔주면 안되니? ”
여자들이 서로 지갑을 뒤지면서 난리를 쳤다. 베르닌과 보랴는 고개를 쭉 빼고 그 소란을 지켜보았다. 렐랴와 알렉산드라, 리자가 헐레벌떡 뛰어가서 여자들 사이로 끼어드는 게 보였다. 그때 스페호프가 베르닌의 곁으로 다가왔다.
“ 음, 우리는 이제 다 팔았나? ”
“ 예, 국장님. 매진입니다. 직원들의 기부물품이 남아 있습니다만 이것들은 전혀 팔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
“ 그래, 매상이 얼마나 올랐나? ”
“ 대략 2800루블 정도 됩니다. ”
“ 그래! 그러면 우리가 우승일 수밖에 없군. 먀흐킨이 지금 불여우의 옷쪼가리를 팔아보겠다고 난리인데 정신 나간 계집애들이 저걸 다 산다고 해도 스카프 세 장에 600루블, 셔츠 두 장 600루블, 거기에 넥타이 150루블이니 다 합치면 1350루블이고 거기에 자질구레한 거 더 팔아봤자 2000루블을 넘길 수는 없어. 이미 다른 부스들도 다 가봤네. 2500루블 넘는 부스는 안 나올 거야. 우리가 우승하는 걸세, 다닐! 정말 수고했네! 그리고 당신, 보리스! 수고했소. 당과 KGB는 당신의 노고를 잊지 않을 것이오! ”
보랴는 당과 KGB 운운하는 말에 콧방귀를 뀌려다가 베르닌을 생각해서 참는 것처럼 보였다. 베르닌은 국장이 보랴의 부업인 밀수업에 대해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조마조마해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그나마도 저렴했던 넥타이가 팔려나갔다. 구매에 성공한 어떤 여자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 넥타이를 꼭 껴안고 뺨에 비비고 뽀뽀를 했다. 다른 여자들이 부러워하며 그녀를 둘러싸고는 ‘어머나, 좋겠다!’, ‘우와, 넥타이 너무 근사하다’, ‘아아, 미샤가 목에 맸던 타이라니!’, ‘향기 너무 좋아!’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신이 난 극장장이 스카프와 셔츠도 팔아보려고 목청을 높이는데 갑자기 꺅꺅 하고 여자들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디선가 후광이 일면서 왕재수가 불쑥 나타났다. 온천에서 막 돌아오면서 광장을 지나치던 길인 것 같았다. 왕재수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어, 내 스카프!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야!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 대체 뭐하는 거예요! ”
먀흐킨이 화들짝 놀랐다. 스카프와 셔츠를 내려놓으며 변명을 했다.
“ 아, 아니 그게... 자네가 무용수들도 못 나오게 하고 물건도 기부 못하게 해서 워낙 우리 부스가 죽을 쑤니까 자네 옷가지라도 몇 개... 이거 전부 자네는 안 입는 거 아닌가... 자네는 워낙 옷이 많으니까... ”
“ 무슨 소리예요! 이거 다 내가 좋아하는 건데! 누구 맘대로 남의 스카프랑 옷을 팔아요! 이리 줘요! ”
왕재수가 정색을 하면서 스카프 세 장과 셔츠 두 장을 낚아챘다. 먀흐킨이 조국과 당과 극장의 명예 어쩌고 하며 어떻게든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왕재수는 발칵 화를 냈다.
“ 극장의 명예는 작품으로 말하는 거지 남의 옷을 도둑질해서 팔아먹으면서 무슨 명예 타령이에요! 당 같은 소리 하고 있네. ”
그러면서 왕재수는 스카프와 셔츠를 둘둘 말아서 마침 옆에 다가온 류드밀라에게 감독실에 도로 갖다놓으라고 건네주었다. 류드밀라는 잽싸게 옷을 챙겨서 부스 뒤로 사라져버렸다. 모여들었던 여자들이 한숨을 쉬고 실망하며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먀흐킨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 자네... 자네... 이건 용납할 수 없어! 아무리 자네가 천재에 매일 공연을 매진시켜도 그렇지...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야! 우리 극장은 3년 동안 바자회 우승을 했단 말이야! 이렇게 허무하게 몰락할 수는 없어! 그것도 저 빌어먹을 KGB의 딸기 아가씬지 뭔지한테 당할 수는 없다고! 좋아! 보안위원회에서 딸기 아가씨를 내세운다면 우리한텐 더 좋은 게 있지! ”
그러더니 먀흐킨은 사무국에서 제일 덩치 좋은 남자 직원 두 명을 불러내서 잠깐 속닥속닥했다. 옷을 되찾은 왕재수가 막 부스를 빠져나가려는데 덩치 좋은 두 남자가 뒤에서 그를 붙잡더니 번쩍 들어서 좌판 위에 올려놓았다. 당황한 왕재수가 ‘뭐야!’ 하고 소리치려는데 먀흐킨이 있는 목청 없는 목청을 다 짜내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 가브릴로프 극장 부스 마감 행사입니다!
연방과 우리 가브릴로프의 초특급 슈퍼스타! 우주 최강 꽃미남! 눈빛만으로도 여심을 버터처럼 녹이는 최고의 왕자님! 우리의 미샤 야스민 감독입니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기회! 우리의 미셴카와의 데이트를 건 경매!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숙녀에게는 미샤를 집으로 초대해 저녁 식사를 만들어주고 행복한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어서 참여하세요! 금액은 500루블부터! 시작! ”
왕재수가 너무 놀라서 뭐라고 항의하려는 순간 여기저기서 여자들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 500! ”
“ 550! ”
“ 600! ”
“ 800! ”
“ 1000! ”
“ 네, 1000루블 나왔습니다! ”
“ 1100! ”
“ 1500! ”
“ 헉, 1500이라니... ”
“ 누구야? ”
다들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먀흐킨조차도 깜짝 놀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미모의 조카딸인 렐랴가 토끼 머리에 딸기 에이프런 차림으로 달려와서 1500루블을 불렀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그야말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왕재수가 미약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 아, 아니! 누구 맘대로 날 팔아! 나 안 해! 나 이런 거 안 해! ”
“ 시끄럽네! 무용수도 안 내주고 물건 기부도 못하게 하고 자기 옷도 못 팔게 했잖은가! 최소한의 감독 노릇은 해야 할 거 아닌가! 다 못하게 했으니 자네가 몸으로라도 때우게! 자, 1500까지 나왔습니다! 이거 다들 우리 미셴카의 진가를 몰라주는 거 아닙니까! 이런 우주 최강 꽃미남과 무슨 재주로 데이트를 하겠습니까! 지금밖에 기회가 없단 말입니다! ”
먀흐킨이 손뼉을 치며 부추겼다. 어떤 여자가 큰 결심을 한 듯 소리쳤다.
“ 처, 천 육백! ”
“ 천 칠백. ”
렐랴가 회색 눈을 반짝거리며 침착하게 맞섰다. 베르닌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어느새 옆으로 모여든 남자들 몇몇은 자신들의 우상인 렐랴가 우주 최강 꽃미남에게 거액을 내거는 모습에 놀라고 절망해서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 자, 천 칠백. 더 없습니까? ”
“ 2천! ”
걸걸한 목소리에 모두가 너무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보라색 눈 화장과 분홍색 볼연지, 짙은 빨간색 입술에 연두색 재킷, 노란 원피스와 빨간 구두 차림의 의장 부인 이리나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당황한 의장이 곁에서 아내의 팔을 잡아당겼다.
“ 여, 여보... 당신 체통이 있지... 당신은 이 바자회 추진위원장이잖소... ”
“ 시끄러워욧! 내가 전부터 미샤한테 저녁 좀 먹으러 오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맨날 바쁘다고 안 오고... 오늘은 어떻게든 미샤를 우리 집에 데려가야겠어요! ”
“ 하, 하지만 당신은 남편이 있고 그 남편이 바로 나... ”
“ 누가 뭐래요! 아니, 누가 내 나이 반밖에 안 되는 예쁜 꼬마랑 잠이라도 자겠대요? 그냥 밥해주고 저녁 시간이나 같이 보내자는 거지! 당신 지금 유치하게 질투라도 하는 거냐고욧! ”
“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아아... ”
먀흐킨은 모른 척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 자아, 그러면 2천이 나왔습니다. 상당한 고액이군요. 더는 없는 것 같으니 그러면 이리나 표도로브나에게 낙찰을... ”
“ 2천 2백. ”
렐랴가 결심한 듯 나섰다. 먀흐킨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렐렌카... 이제 그만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미샤는 네가 굳이 이렇게 안 해도 나중에 따로 저녁 식사를... ”
“ 2천 2백이라고 했어요! ”
렐랴가 회색 눈에 불꽃을 이글거리며 소리쳤다. 두 명의 남자에게 붙들려서 좌판 위에 서 있는 왕재수는 대체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분간이 안 되는지 완전히 멍해진 표정이었다. 먀흐킨은 포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그러면 2천 2백... ”
“ 3천! ”
이리나가 꽥 소리를 질렀다. 너무나 거액이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바자회에 온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렐랴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입술을 열었다. 막 ‘3천 백...’ 이라고 말하려는데 이리나가 렐랴를 똑바로 쏘아보더니 마녀처럼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 똑바로 해, 렐랴! 잡지 문 닫고 싶어? ”
렐랴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라고 대들려고 했지만 허리에 손을 갖다 대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태세를 갖춘 이리나의 야수 같은 모습과 잡지 문 닫고 싶으냐는 협박에 질린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자존심이 팍 상한 듯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왕재수를 쳐다보며 억지로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 좋아요, 미셴카. 난 우리 바자회 목적을 생각해서 거액 기부를 해보려고 했던 건데 이리나 표도로브나가 더 봉사 정신이 투철하신가 보네요. 우리는 나중에 따로 봐요! ”
그리고는 렐랴가 포기했다. 먀흐킨이 신나게 소리쳤다.
“ 그러면 3천 루블로 이리나 표도로브나가 우리 감독과 저녁 데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돈을 주시면 미샤를 보내드리지요! ”
이리나는 당당하게 걸어가더니 장부에 3천 루블이라고 적고 사인을 했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눈을 부라리며 어서 가서 3천 루블을 찾아오라고 명령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의 의장이 어깨를 떨어뜨리고 터벅터벅 은행으로 향했다. 먀흐킨은 이리나가 당연히 금액을 지불할 것을 믿는다며 그녀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현금이 도착하기 전에 왕재수를 건네주겠다고 했다.
완전히 넋이 나간 왕재수가 중얼거렸다.
“ 이게 뭐야... 아니야, 이건 꿈이야... 아니야... ”
“ 이리 와요, 미셰츠카! 내가 전부터 그렇게 밥 좀 먹자고 했는데 매일매일 바쁘다고 도망가고! 우리 집에 가요! 내가 맛있는 거 해 줄 테니까! 돼지비계 절임에 기름 케익이랑 초콜릿 무스랑~ 아유, 정말 사내아이가 어쩌면 이렇게 예쁘담. 아이고, 우리 미셴카 이 피부 좀 봐! 매끈매끈하고 하얀 게 진짜 곱네! 내가 십년만 젊었어도... ”
이리나는 기쁨에 들떠서 우악스러운 팔로 왕재수의 허리를 꼭 껴안고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자기 차로 갔다. 왕재수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 악당들! 이건 탄압이야! 예술가를 팔아넘기다니! 아아아! ”
* * *
그리하여 바자회는 끝났고 가브릴로프 극장이 3천 루블이 넘는 매상으로 4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KGB 부스는 2위에 머물렀다. 1위 발표와 시상은 원래 바자회 추진위원장인 이리나의 몫이었지만 그녀는 왕재수를 낚아채 이른 저녁 식사를 만들어주겠다며 이미 집으로 사라졌고 남편이자 의회 의장인 블리즈네초프는 3천 루블을 찾으러 가느라 역시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추진위 부위원장인 콤소몰 청년의장이 대신했다.
먀흐킨은 감격해서 훨훨 날았고 이 기쁨을 가브릴로프 극장 식구들과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소리쳤다. 스페호프는 펄펄 뛰었지만 가브릴로프를 주름잡는 최고 가문의 이리나가 결정한 일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역시 반동분자 불여우가 만악의 근원이라며 이를 갈더니 두고 보자면서 부르르 떨며 사무실로 돌아가 버렸다.
베르닌은 장부와 2800루블, 남은 기부 물품들을 바자회 추진위원회에 모두 전달한 후 알렉산드라와 리자, 보랴와 함께 부스를 정리했다. 보랴는 시계를 보더니 아쉬워했다.
“ 벌써 다섯 시가 다 됐구만. 저녁 타임이라 난 들어가야겠다. 잔디밭에서 맥주라도 한 잔 하면 딱 좋겠는데... ”
“ 보랴, 정말 고마웠어요. 그렇게 맛있는 블린은 처음이었어요! ”
“ 맞아요! 극장장이 꽃돌이 감독님을 팔아먹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우승이었는데! 그래도 너무 재미있었어요! ”
리자가 보랴를 와락 껴안고 뺨에 뽀뽀를 했다. 보랴는 벙글벙글 웃었고 베르닌의 손을 꽉 잡아 흔들었다.
“ 그러게! 극장장 그놈이 머리는 좋다니까, 우리 애기를 이용하다니! 불쌍한 녀석... 이리나 요리 솜씨 최악인데... ”
“ 으윽... 분명히 돌아와서 나한테 다 화풀이하겠지...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벌써부터 ‘기름기!’, ‘시골!’ 하고 소리 지르며 애꿎은 자신에게 바가지 긁는 왕재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보랴는 쿡쿡 웃었고 프라이팬과 반죽 그릇을 챙겼다. 가기 전에 돌아서더니 알렉산드라를 꼭 껴안았다. 알렉산드라는 두 팔로 보랴의 목에 매달리며 뽀뽀를 했고 ‘있다가 봐, 보르카!’ 하고 인사를 했다.
보랴가 돌아간 후 베르닌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차에 실었다. 그때 리자가 투덜댔다.
“ 우리 사무실 들어가지 말아요! 이렇게 고생했는데! 지금 들어가봤자 퇴근 시간이잖아요! ”
“ 그래! 리자 말이 맞아! 외부 행사 차출돼서 이렇게 일했는데 왜 또 사무실 들어가니! ”
“ 하, 하지만... 물건들도 갖다놔야 하고 전 일도 많이 밀려 있고... ”
“ 물건들이야 내일 캐비닛에 대충 쑤셔 박으면 되죠! 그리고 다냐! 당신이야말로 진짜 들어가면 안돼요! 보나마나 또 서류철에 파묻혀서 밀린 서무 일하느라 야근하고 밤 샐 거 아니에요! 오늘은 못 가요! 오늘은 끝! 딸기 아가씨들의 명령이에요! 날도 따뜻한데 우리 여기 잔디밭에 앉아서 맥주 딱 한잔씩만 마시고 가요! 아까 보랴가 우리 먹으라고 닭튀김 챙겨왔단 말이에요. ”
“ 맞아, 까맣게 잊고 있었네! 보르카가 만든 닭튀김은 식어도 진짜 맛있어. 우리 맥주랑 이거 먹자! ”
베르닌은 안된다고 하려고 했지만 알렉산드라가 딸기무늬 에이프런을 잔디밭에 펼쳐놓고는 종이봉지를 찢어서 그 안에 있던 황금빛 갈색의 바삭바삭한 닭튀김을 좌르르 쏟아놓자 그만 정신이 멍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베르닌은 잔디밭에 앉아 알렉산드라와 리자와 함께 맥주를 마시고 닭튀김을 먹었다. 맥주는 시원했고 닭튀김은 너무나 고소했다. 해는 서서히 넘어가고 있었지만 바람이 따스했고 부드러웠다. 정말 봄이 온 게 분명했다.
FIN
- 2015. 10. 4 ~ 10. 16 -
..
가브릴로프 극장장 먀흐킨은 본편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성격은 비슷한 점도 있고 좀 다른 점도 있지만.
..
초반에 서술된 왕재수의 신작 얘기는.. 그간 그 신작 올리려고 갖은 고생을 다 한 왕재수를 생각하면 신작을 근사하게 올리는 이야기를 1개 에피소드로 할애해 주는 게 맞는 것 같지만 그냥 넘어갔다. 그 이유는 본편의 주요 사건 중 하나가 미샤의 신작 이야기라서. 물론 본편에서 미샤가 준비하는 신작은 서무의 왕재수가 준비한 신작과는 내용도 형식도 완전히 다르지만. (근데 언제 쓰지...)
초반에 언급된 왕재수의 후원자들 이름들은 모두 본편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그 중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와 드미트리 마로조프는 미샤의 오래된 후원자이자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들이다.
..
나름대로 기분 풀려고 쓴 글인데 별 내용은 없었다만... 하여튼 35편을 조금 쓰고 있는 중인데 그건 언제 다 쓸지 모르겠네. 다음주까지 완결이 안되면 다른 글을 조금 올려보겠다.
..
글에 대한 이야기들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시고 절대로 가져가시거나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series : 서무의 슬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무의 슬픔 #36. 빨간 열매와 초특급 익스프레스 (52) | 2015.11.19 |
---|---|
서무의 슬픔 #35. 4월의 눈보라 (70) | 2015.11.06 |
서무의 슬픔 #33-1. 도자기 인형 (114) | 2015.10.09 |
서무의 슬픔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2부) (142) | 2015.10.01 |
서무의 슬픔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113) | 2015.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