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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3.28 지젤, 막간
  2. 2015.03.27 돌아가고 싶은 그 때 2
  3. 2015.03.26 서무의 슬픔 #14. 한밤중의 침입자 26
  4. 2015.03.25 마린스키 샵에서 사온 오페라 글라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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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5.03.23 손에서 미끄러져서 찍혔는데 2
  8. 2015.03.22 유리 스메칼로프 안무 : 저승 세계의 오르페우스(슈클랴로프 & 본다레바) 리뷰 6
  9. 2015.03.22 슈클랴로프 달력 도착해서.. 4
  10. 2015.03.19 서무의 슬픔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29
  11. 2015.03.19 색동 전구들 깜박깜박 2
  12. 2015.03.17 한겨울의 까마귀 2
  13. 2015.03.16 눈밭의 아기와 새 2
  14. 2015.03.15 오늘 만든 발레 달력(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2
  15. 2015.03.13 서무의 슬픔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25
  16. 2015.03.11 어스름 속의 창문과 신호등 불빛 4
  17. 2015.03.10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와 알리나 소모바(이번 공연에서 찍은 사진 한 컷) 6
  18. 2015.03.08 서무의 슬픔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19
  19. 2015.03.07 그냥, 빛이 좋아서.. 2
  20. 2015.03.06 연인들 + 얼음 위로 나가면 안되는데.. 철없는 아빠와 아들
  21. 2015.03.05 마음의 위안을 위한 창문 사진들 2
  22. 2015.03.03 서무의 슬픔 #10. 벨라 등장! (+ 강아지 사진 몇 장) 35
  23. 2015.03.02 비둘기 발 시려~ 10
  24. 2015.02.28 지친 심신을 달래주었던 카페 'Душевная кухня' (두셰브나야 꾸흐냐), 그리고 진짜 맛있는 음식들 20
  25. 2015.02.27 이번에 페테르부르크에서 득템한 CD 몇 장 5
2015. 3. 28. 16:11

지젤, 막간 dance2015. 3. 28. 16:11





막간.


역시 파트리스 바르 안무는 내 취향이 아니지만 그래도 김지영씨의 1막 지젤은 심금을 울리고, 김현웅씨의 알브레히트는 근사하다. 후자에겐 이른바 '알브레히트다움'이 있어서 멋졌다. (그래도 알브레히트 죽일놈!)


2막 곧 시작할듯.. 미르타가 잘 춰줘야 하는데...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
Posted by liontamer
2015. 3. 27. 13:58

돌아가고 싶은 그 때 russia2015. 3. 27. 13:58

 

 

지난 2월. 페테르부르크.

도착 바로 다음날. 바깥 산책 다녀온 후 저녁 공연까지 중간에 잠깐 시간이 남아 호텔 방에 들어와 차 한 잔 마시고 쉬었다.

오늘 너무 피곤한 금요일이라 그런지 저때가 그립다. 여행 시작 직후. 아직은 여유가 넘치고 놀러 다닐 시간도 많이 남아 있을 때.

 

 

방에 서비스로 놓여 있던 과일바구니에서 꺼낸 서양 자두. 그리고 조식 테이블에서 집어왔던 미니 뺑 오 쇼콜라.

 

 

 

다시 가고 싶구나!!

 

** 이 방에서 먹었던 사과파이 : http://tveye.tistory.com/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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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liontamer

 

서무 시리즈도 어느새 꽤 길어져서, 오늘 올리는 것이 14편째이다. 16편까지는 마무리되어 있는데, 이제 많이 바빠져서 뒷이야기들이 또 언제 나올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종류의 이야기들이든, 장편이나 시리즈는 일종의 특징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작가는 등장인물들과 특정한 종류의 유대를 맺게 되는데 그것은 단편과는 또 다른 종류이며 이러한 유대는 점차 복잡해진다. 이것은 텍스트 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인물과 인물들 사이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종류의 관계들이 생겨난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 작가는 시리즈나 장편을 구상할 때는 그런 가능성들을 염두에 둔다. 텍스트의 내외부에서 확장되는 관계와 새롭게 구축되는 우주들에 대한 가능성을 어느 정도는 예측하며 글을 시작하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쓰기 시작한 서무 시리즈인데.. 쓰다 보니 점점 작가의 본 성격도 나오고, 본편과도 조금씩 뒤섞인다. 역시 본편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쓰기 시작한 거라서 그런가보다.

 

하여튼 그건 그거고... 그건 쓰는 사람이 해결해야 할 문제고.

어쨌든 서무 시리즈는 내 입장에선 쓰기 편하고 쓰기 즐겁고 마음의 위안도 된다.

 

 

14편은 지난 13편에서 곧장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왕재수의 비명 소리를 듣고 뛰어간 베르닌은 머리에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고... 그 이후..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신년 특별감사가 마무리된 후 스페호프의 오해로 베르닌은 온천 요양소 티켓을 얻는다. 왕재수와 함께 요양소에 간 베르닌은 온천과 마사지를 만끽한다. 그러나 행복감도 잠시, 한밤중에 누군가가 침입해 오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경고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 14편에는 가벼운 폭력 묘사가 있음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4

 

 

서무의 슬픔

- 한밤중의 침입자 -

 

 

 

 

 

 

 

다닐 베르닌은 책상물림이었다. 그건 확실했다. KGB에 입사한 그의 대학 동기들 대부분은 현장요원을 지망했다. 현장요원이 되면 모두가 선망하는 해외 지사로 파견되어 유럽에서 스파이 활동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어 강습도 따로 받았고 특수 훈련도 받았다. 하지만 베르닌은 그런 쪽으로는 전혀 야망이 없었다. 외국어에는 재능이 없었고 달리기는 곧잘 했지만 운동신경이 특출한 것도 아니었고 특히 누군가를 두들겨 패는 데는 영 소질이 없었다. 군대에서도 키와 체격 때문에 가끔 권투나 삼보 대회에 끌려 나가곤 했지만 항상 예선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 탈락하곤 했다. 그러니 그가 우수한 학교 성적에도 불구하고 현장요원보다 급수가 떨어지는 행정요원 시험을 본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입사 후 연수원에서 기본 훈련은 받았다. 군필자였으니 총도 다룰 줄은 알았지만 별로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하마터면 사격 훈련에서 탈락할 뻔 했다. 기본 호신술 시험에도 통과해야 했는데 교관이 베르닌에게 허우대만 멀쩡하지 왜 이렇게 둔하냐고 대놓고 야단까지 쳤다. 성실한 교관은 그에게 나머지 공부까지 시켰고 결론을 내렸다.

 

“ 넌 둔한 게 아니고 사람 패는 걸 무서워하는 거야! ”

 

“ 교관님, 사람 패는 건 나쁜 거잖아요... 그걸 어떻게 좋아합니까! ”

 

“ 그건 민간인이나 하는 말이고! 넌 국가의 녹을 먹는 보안요원이 될 거잖아! 언제 어디서 당과 연방을 위협하는 반동분자들을 상대하게 될지 모르는데 그놈들의 총칼 앞에서 절대절명의 위기를 오갈 때도 사람 패는 거 나쁘다고 이렇게 빌빌거릴래! ”

 

“ 전 그런 게 싫어서 행정요원 시험을 본 거라고요! ”

 

“ 행정요원이고 뭐고 이건 공통 훈련이야! 통과 못하면 연수원에서 내쫓을 거야!

 

 

책임감 강한 교관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에 베르닌은 사격과 호신술 훈련을 통과했다. 하지만 그건 이미 2년도 더 된 일이었고 입사 후에는 매일같이 국장의 호통과 산더미 같이 몰려드는 서류 작업과 서무 업무, 각종 잡일에 시달리느라 사격이나 호신술은커녕 조깅이나 수영조차 못하고 살아왔다. 이제는 탄창을 갈아 끼우는 방법조차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뒤통수가 깨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어둠 속에서 정신이 들었을 때 베르닌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를 나머지 공부시키면서 호통을 치던 그 교관의 얼굴이었다. 그게 누군지, 왜 생각나는지조차 몰랐다. 한참 후에야 그는 그게 연수원 교관이라는 사실을 기억했고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서 ‘꺼져...’ 라고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현기증과 욕지기가 몰려왔다. 하마터면 누운 채로 토할 뻔 했다. 왜 이렇게 머리가 쿡쿡 쑤시고 아픈 건지, 왜 온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움직일 수도 없는 건지, 사방은 왜 이렇게 캄캄한 건지, 속은 왜 뒤집힐 것처럼 울렁거리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끙끙거리며 일어나보려고 했지만 한참 꿈틀거리고 꼼지락거린 끝에야 자신이 의자에 앉아 있으며 심지어 뭔가로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늘한 공포가 밀려들었고 그 순간 모든 것이 기억났다. 그는 총 소리를 들었고 복도로 나갔고... 창문이 열려 있었고 발자국을 보았다. 왕재수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고... 방문이 잠겨 있었고... 누군가가 뒤에서...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눈을 마구 깜박거렸다.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목쉰 음성으로 속삭이듯 왕재수의 이름을 불렀다.

 

“ 미하일... 미샤... ”

 

대답 대신 바로 옆에서 희미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굉장히 조그맣고 뭉개진 소리였지만 분명히 왕재수의 목소리였다. 아주 약간 안도하며 베르닌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다행히 상체는 옆으로 틀 수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보이는 거라곤 침대로 추정되는 거대하고 판판한 물체 위에 옆으로 누워 있는 사람의 형체뿐이었다. 기다란 팔다리와 날씬한 몸매의 윤곽을 보니 왕재수가 분명했다.

 

“ 야, 너 괜찮아? ”

 

여전히 대답 대신 ‘으으으...’ 하는 신음 소리만 가냘프게 들려왔다. 크게 다쳤든지 입이 막혀 있든지 둘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두 쪽 모두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베르닌은 공포에 사로잡힌 채 몸부림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사람 살려요! 도와줘요! 여기...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짜내려고 해도 자신들의 방이 몇 호실이었는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포기하고 생각나는 것만 외쳐댔다.

 

“ 여기 5층... 사람 살... ”

 

누군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베르닌의 뒤통수를 철썩 갈겼다. 털이 숭숭 난 손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조용히 해! 한번만 더 소리 지르면 가만 안 둬! ”

 

“ 으, 으으으!!! ”

 

“ 시끄러워! 아 정말 귀찮은 놈들이네! 너도 입 막히고 싶냐! ”

 

“ 으오우으으으... ”

 

남자가 뒤통수를 다시 한 번 갈겼다. 그렇게까지 세게 때린 것은 아니었지만 위협을 가하기에는 충분했다. 베르닌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손을 떼어내며 짜증스러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아 정말... 이 자식들은 대체 뭐야. 왜 남의 방에 들어와 가지고... 배고파 죽겠는데... 캄캄해서 보이지도 않고... ”

 

베르닌은 용기를 짜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 저... 그럼 불 켜시면 되잖아요... ”

 

“ 아까처럼 소리 지르려고! 내 얼굴 보고 몽타주인지 뭔지 그리려고! ”

 

“ 아니요... 안 그럴게요. 소리도 안 지르고 얼굴도 안 볼게요. 안 보이는 쪽으로 고개 돌리고 있으면 되잖아요. ”

 

“ 하긴. 뭐 어때. 입 못 놀리게 하면 되지. 야, 불 켤 거니까 소리 지르기만 하면 가만 안 둬! ”

 

베르닌은 끄덕끄덕했다. 남자가 그의 곁을 지나 반대편으로 갔다. 묵직한 발소리를 들으니 덩치가 큰 남자 같았다. 잠시 후 꽝 소리가 나더니 남자가 욕설을 내뱉었다.

 

“ 아야! 에이씨! 망할 놈의 방구석, 왜 이렇게 걸리적거리는 게 많아! 대체 스위치는 어디 있는 거야! ”

 

그러더니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노란 불빛이 확 퍼졌다. 스탠드 램프를 켰는지 그렇게 밝은 빛은 아니었지만 어둠에 젖어 있던 베르닌은 눈이 부셔서 자기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곁에서 다시 ‘우으으’ 하는 가냘픈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닌은 간신히 눈을 떴다. 온통 노랗고 불그스름하게 보였다. 그는 생각대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커튼 띠로 추정되는 알록달록한 끈으로 허리가 결박된 데다 두 팔도 의자 뒤로 묶여 있었다. 아마 책상 앞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놓은 것 같았다. 의자는 침대에 딱 붙어 있었다. 그는 왕재수가 괜찮은지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공포와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어 눈을 가늘게 뜨고 방 안을 먼저 훑어보았다. 그들이 투숙했던 방이 맞았다. 문가의 옷걸이에 왕재수의 근사한 코트가 걸려 있으니 확실했다. 책상과 화장대 사이에 문제의 침입자가 있었다. 등을 돌린 채였기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베르닌이 추측한대로 덩치가 꽤 컸다. 키는 왕재수와 비슷한 정도였지만 체격이 드럼통처럼 딱 벌어져 있었다. 머리털을 짧게 깎았기 때문에 울퉁불퉁한 두상이 더 눈에 띄었다. 심지어 왼편에는 조그맣게 땜통까지 있었다. 검정색 패딩을 걸치고 있었는데 아직도 눈 녹은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남자는 베르닌의 가방을 정신없이 뒤지고 있었다. 베르닌은 ‘강도야!’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묶여 있는데다 무슨 짓을 당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꾹 참았다. 한참 가방을 뒤지더니 남자가 조그맣게 휘파람을 불었고 뭔가를 꺼내서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냈다.

 

“ 어휴, 이거라도 있어 다행이네.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

 

부스럭거리는 소리나 냄새로 미루어보아 식당에서 요리사가 왕재수의 미모에 기분이 좋아져서 야식으로 먹으라고 챙겨준 청어 샌드위치인 것 같았다. 남자가 게걸스럽게 샌드위치를 먹어치우는 동안 베르닌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고 그제야 왕재수 생각이 났다.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묶여 있는 팔 때문에 어깨가 빠지는 것처럼 아팠다.

 

왕재수는 침대 위에 모로 누워 있었다. 시트에 휘감겨 있어 전신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쪽 팔은 침대 모서리에 묶여 있었고 다른 쪽 팔은 등 뒤로 묶여 있었다. 심지어 양쪽 발목마저 가운 끈으로 칭칭 감긴 상태였다. 베개와 시트 사이에 파묻혀서 이마와 눈은 보이지도 않았다. 입에는 손수건으로 재갈이 물려져 있었다. 그러니 끙끙대는 신음 소리밖에 못 낸 것도 당연했다. 베르닌은 걱정스럽게 속삭였다.

 

“ 야... 너 괜찮아? 안 다쳤어? 내 말 들려? ”

 

“ 흐으.... ”

 

왕재수가 그의 말을 듣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사지가 전부 묶여 있었기 때문에 허리와 무릎을 꿈틀거렸을 뿐이었다. 버둥거릴 때마다 끈이 죄어들어와 굉장히 아파 보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급하게 말했다.

 

“ 그냥 가만히 있어. 괜찮을 거야. 괜찮아. ”

 

“ 으... ”

 

왕재수가 고개를 흔들며 계속 꿈틀거렸다. 꽁꽁 묶인 데다 말도 못하게 됐으니 답답하고 괴로운 것 같았다.

 

“ 몸부림치지 말고 내 쪽 좀 봐봐. 괜찮은지 좀 보게... ”

 

“ 으으으... ”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왕재수가 몸부림을 멈추고 고개를 좀 쳐들었다. 베르닌은 잠시 온몸의 잔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뺨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는데다 코피라도 흘렸는지 코 아래부터 턱까지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출혈은 멈춘 건지 핏자국이 말라붙고 있긴 했다. 원래의 예쁘장한 얼굴을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얼음장처럼 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베르닌이 속삭였다.

 

 

“ 피... 저놈이 그런 거야? 다른 데도 맞았어? ”

 

“ 으으... ”

 

 

하긴 입이 막혀 있으니 왕재수에게는 물어봤자 소용이 없었다. 몰골을 보니 두들겨 맞고 결박당한 것 같았다. 베르닌은 이를 악물었다. 너무 화가 치밀어서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마침 청어 샌드위치를 전부 해치운 남자가 몸을 돌리며 베르닌 쪽으로 다가왔다.

 

 

“ 야, 먹을 거 더 없냐? 마실 건 없어? ”

 

“ 마실 거... 어디 있는지 말해줄 테니까 쟤 좀 풀어줘요. ”

 

“ 안 돼! 저 자식은 절대 안 돼! 얼마나 버둥거리는데! 저 녀석 진짜 장난 아니야. 발길질에 늑골 나갈 뻔 했단 말이야! ”

 

“ 제발... 쟤 많이 아팠단 말이에요. 일부러 온천 데리고 온 건데. 피 나도록 때렸잖아요.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저렇게 꽁꽁 묶어놓으면 피도 안 통한단 말이에요. 제발 다리라도 풀어줘요. 아니면 팔 하나라도... ”

 

“ 다리는 죽어도 안 돼! 애새끼가 축구선수라도 되는지 얼마나 발길질이 세찬지 알아! 나 정말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

 

“ 저러다 마비되면 어떡해요... 쟤 축구선수 아니에요. 무용수란 말이에요. 저렇게 묶어놓으면 진짜 몸에 안 좋단 말이에요... 근육이라도 잘못되면 어떻게 해요... 제발... ”

 

“ 에이씨, 어쩐지... 걷어차는 게 장난 아니더라니... 그래도 다리는 안 돼! 팔 하나만 풀어줄 거야! ”

 

“ 재갈도 풀어주세요. ”

 

“ 안 돼! ”

 

“ 제발요... 쟤 소리 안 지를 거예요. 저처럼 가만히 있을 거예요. 그치? ”

 

“ 으으으... ”

 

“ 소리 지르는 게 문제가 아니고! 저 자식은 물어뜯는단 말이야! 아까 물려서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입은 막아놓을 거야! 너도 그만 입 닥쳐! ”

 

 

베르닌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다가왔다. 램프 불빛에 얼굴이 정면으로 비춰졌다. 놀랍게도 앳된 얼굴이었다. 기껏해야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왕재수 또래인 것 같았다. 심지어 이마와 뺨에는 여드름 자국까지 있었다. 갈색 눈에 살짝 내려앉은 주먹코, 아랫입술이 두툼한 입, 턱에 자리 잡은 조그만 보조개까지 영락없이 평범한 동네 청년처럼 보였다. 하지만 평범한 동네 청년이라면 사람을 뒤에서 갈기고 꽁꽁 묶고 협박을 일삼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는 베르닌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뚜벅뚜벅 다가오더니 왕재수의 몸을 옆으로 홱 뒤집었다. 아팠는지 왕재수가 재갈 사이로 뭉개진 신음을 토해냈다.

 

“ 살살 좀 해요. 팔 부러지겠어요... ”

 

“ 시끄러워! 넌 뭔데 자꾸 이 자식 편을 들고 난리야! 애인이라도 되냐! 찝찝하게! 에이, 가뜩이나 이 새끼 때문에 좋다 말았는데! ”

 

“ 좋다 말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

 

“ 어휴, 몰라도 돼! ”

 

 

남자는 화를 버럭 내더니 잠깐 망설이다가 등 뒤로 묶여 있던 왕재수의 왼팔을 풀어주었다. 왕재수가 부르르 떨더니 그 즉시 허리를 홱 비틀며 윙 하고 왼팔을 휘둘렀다. 남자는 급하게 피했지만 뺨 언저리를 얻어맞았다.

 

 

에잇,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애새끼 왜 이렇게 성깔이 더러운 거야! 다시 묶어 버릴까 보다! ”

 

“ 으... 으으으! ”

 

“ 미하일... 야... 미셴카... 제발 가만히 있어. 제발... 위험하단 말이야. 가만히 있어, 응? 내 말 좀 들어. 그래야 너도 안전해. 제발... ”

 

 

베르닌은 겁이 나서 애원하듯 속삭였다. 왕재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몸을 뒤틀며 끙끙거리고 자유로워진 왼쪽 팔꿈치로 매트리스를 꿍꿍 찧어댔지만 베르닌이 그렇게 애원하자 서서히 얌전해졌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 아휴 짜증나... 되는 일이 없네. 간신히 여기까지 왔는데... 야, 마실 거 어딨어! 이 자식 풀어줬잖아! ”

 

“ 저... 저기 있는 내 패딩 주머니에... 주스 있어요. ”

 

 

남자는 후다닥 옷걸이로 달려갔다. 베르닌의 패딩 점퍼 주머니를 뒤져 오렌지 주스 팩을 꺼내더니 모서리를 뜯어서 벌컥벌컥 마셨다. 굉장히 배고프고 목이 말랐던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 베르닌은 엉덩이와 다리를 이용해 의자를 조금씩 움직였고 왕재수 쪽으로 몸을 완전히 틀었다.

 

 

“ 너 괜찮아? 저 사람한테 덤벼들면 안 돼. 위험하니까. 괜찮을 거야. 말귀 아예 못 알아먹는 거 같진 않아. 그러니까... ”

 

“ 우우... ”

 

 

왼팔이 풀린 왕재수는 아까보다는 몸을 똑바로 펴고 있었다. 몸 여기저기 엉켜 있던 시트도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다른 곳은 다친 데가 없는지 보려고 뻣뻣한 고개를 굽혔고, 순간 불길처럼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뱃속이 왈칵 뒤틀려왔다. 왕재수의 매무새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잠옷 앞섶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맨몸이 완전히 드러나 있었고 목덜미와 가슴에는 심하게 할퀸 상처가 나 있었다. 게다가 하얀 피부 위로 몇 개나 찍혀 있는 붉은 손자국들은 누가 봐도 움켜쥔 자국이 분명했다. 이것도 모자라 파자마는 허리 밴드가 터진 채 무릎 아래까지 끌려 내려가 있었고 속옷도 벗겨져서 골반과 허벅지 사이에 걸쳐져 있었다. 왼쪽 허벅지에도 보라색으로 피멍이 들어 있었다.

 

 

으아아, 이 더러운 자식! 용서 못해! 가만 안 둘 거야!

 

 

베르닌은 용솟음치는 분노로 제정신을 잃었다. 눈앞에 시뻘건 불꽃이 번쩍번쩍했다. 그는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의자에 묶인 채로 펄쩍펄쩍 뛰었다. 깜짝 놀란 남자가 후다닥 달려와 베르닌을 덮쳤다. 고함을 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으면서 어떻게든 제압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베르닌의 육체는 이성의 굴레로부터 해방되면서 국가 보안요원으로서 연마해왔던 괴력을 발현시킨 것이 틀림없었다. 앉은 채로 회오리처럼 돌아 의자를 마구 휘둘렀다. 아마 연수원에서 호신술을 가르쳤던 교관이 이 광경을 봤다면 ‘바로 그거야! 주변 물체를 이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 하고 뛸 듯이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닌은 어쨌든 책상물림에 가까웠기에 결국은 균형을 잃고 와장창 쿠당탕 소리를 내며 의자 째로 구르고 넘어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 베르닌은 바닥에 뒤집혀 넘어져 있었다. 여전히 의자에 묶인 채였다. 여전히 화가 나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어디선가 나직하고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왕재수인가 싶어서 와락 걱정이 되어 고개를 돌렸지만 왕재수는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침대에 묶인 채 등잔만큼 커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가 두리번거리는데 왕재수가 턱짓으로 그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알고 보니 의자 아래 그 침입자가 깔려 있었고 괴로워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 으아아... 제발 좀 살려줘... 나 죽네... ”

 

시끄러워! 엄살 피우지 마, 나쁜 자식... 죽여 버릴 거야!

 

“ 으아아... 사람 살려... ”

 

이 더러운 자식! 맛 좀 봐라!

 

 

베르닌은 몸을 옆으로 마구 뒤틀며 아래에 깔린 남자를 의자로 더욱 더 세게 짓이겼다. 남자가 죽는 소리를 하며 어떻게든 몸을 빼내려고 꿈틀거렸다. 베르닌은 더 세게 짓눌렀다.

 

 

“ 으어어... 제발 그만해. 뼈 부러지겠어... 잘못했어. 때린 거 미안해. 으아아.. 풀어줄 테니까 제발 그만... ”

 

“ 시끄러워! 가만 안 둬! 죽여 버릴 거야! 이 더러운 놈아! 감히, 감히 그런 더러운 짓을 하다니... 진짜 용서 못해! ”

 

“ 미안해, 잘못했어... 팬 거 미안해. 묶은 거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너네가 자꾸 소리 질러서... 아야... 으아... ”

 

“ 그게 문제야, 지금! 이 개자식! 더러운 강간범 같으니!! 너 같은 놈은 감옥도 아까워! 없애버릴 거야!! ”

 

 

베르닌이 더욱 치솟는 분노로 의자를 쿵쿵 내리찧자 남자가 괴롭게 소리를 질러댔다.

 

 

“ 으아아...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뭐가 강간범이야... 나 그런 놈 아냐... 진짜야... 오해야! ”

 

“ 뭐가 아니야, 이 나쁜 놈아!! 쟤한테 나쁜 짓 했잖아!! 아무리 쟤가 여자보다 예뻐도 그렇지... 이 짐승 같은 놈! 죽여 버릴 거야! 크아아!

 

“ 아니야, 아니야... 오해야... 으악, 야! 꼬맹아! 네가 말 좀 해줘... 으악! ”

 

“ 말을 어떻게 해! 쟤 입 네가 틀어막았잖아! 두들겨 패서 코피도 내고 옷도 찢어발기고 꽁꽁 묶고! ”

 

“ 으악, 아니야! 틀어막은 건 물어뜯어서 그런 거야... 나 그런 짓 안 했어! 아악, 진짜야! 잠깐만... 내가 쟤 풀어줄게... 제발... 네가 나 이렇게 작살내면 너네 풀어줄 사람 아무도 없어. 지금 이 건물에 사람 없단 말야. 1층에 경비 할아버지 하나밖에 없어. 직원들은 다 별채에서 잔단 말이야. ”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폭주하던 베르닌은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 말도 맞는 것 같았다. 그는 온몸에 힘을 더 주면서 호통쳤다.

 

 

“ 그럼 내 팔부터 풀어줘! ”

 

“ 흑... 너 너무 무서워. 풀어주면 나 더 심하게 팰 거잖아. ”

 

“ 네놈이 우리 패고 묶은 건 생각 안 하냐! 빨랑 안 풀어? ”

 

“ 싫어싫어. 흐흑... 진짜 재수 옴 붙었네.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엉엉... ”

 

 

베르닌이 다시 화가 치밀어서 이 망할 강간범을 죽여 버리고 말겠다는 생각에 의자 아래로 뻗어 내린 두 발로 아래 깔린 놈을 마구 걷어차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왕재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야, 그만 해. 그러다 진짜 죽이겠다! ”

 

 

깜짝 놀라서 베르닌이 고개를 돌렸다. 침대 위에 왕재수가 일어나 앉아 있었다. 발목은 아직 묶여 있었지만 두 팔은 모두 풀려 있었다. 한 손으로는 손수건을 쥐고 있었다. 재갈이 물려 있던 자국이 선명했지만 그래도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 어... 팔 어떻게 풀었어? ”

 

“ 저 바보가 내 팔 하나 풀어줬잖아. 어휴, 매듭을 너무 꽉 묶어놔서 한 손으로 풀기 힘들었어. 아파 죽겠네. ”

 

“ 너 괜찮아? 괜찮은 거야? 으흑... 미안해...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너 놔두고 나가지 않았어야 했는데... 내가 있었으면 그런 일 안 당했을 텐데... 흑... 어떡하지... 미안해... 어흑... ”

 

“ 그래! 너 진짜 나빠! 내가 나가지 말랬잖아! 아휴! 하여튼 이제 그만 좀 해. 웬 사람을 그렇게 두들겨 패니. 야만스럽게. 진짜 저질이야. ”

 

“ 하지만... 너 지금 누구 편 드는 거야! 이 자식이 너한테 그런 짓을 했는데... 완전 강간범에 개자식... ”

 

“ 웬 강간범. 아니야, 그런 거. 너 왜 혼자 소설 쓰니. 그런 일 없었어. ”

 

“ 너... 너... 흑... ”

 

 

베르닌은 갑자기 법대 시절 들었던 범죄심리학 수업이 떠오르면서 속이 상하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느끼며 더듬거렸다.

 

 

“ 흑흑... 불쌍한 녀석... 너무 끔찍한 일을 당해서 자기 회피에 들어갔구나...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막 자기를 세뇌하면서. 어흑... 괜찮아, 네 잘못 아냐. 이 개자식이 나쁜 거야.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엉엉... 어떡하지... 바이올린 깡패랑 같이 오게 하는 건데... 흐흑... 괜히 내가 온천 데리고 와서 나쁜 일 당하게 만들고... 어엉... 엉엉... ”

 

“ 얘가 진짜 왜 이러니. 왜 혼자 울고불고 난리야. 소설 좀 쓰지 마.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휴, 답답해... ”

 

“ 뭐가 아니야... 흐흑... 옷도 다 벗겨지고 몸에 그런 상처까지... 흑... ”

 

아니라고! 아 참, 옷은 저놈이 벗긴 거 맞구나. ”

 

뭐야! 역시 사실이었어! 이 개자식, 죽여 버릴 거야!

 

 

베르닌이 다시 폭주하기 시작하자 왕재수가 발목이 묶인 채 데구르르 굴러서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낑낑대며 두 손으로 베르닌이 묶인 의자를 잡아당겼다. 아래 깔려 있던 남자가 헉헉대며 간신히 옆으로 몸을 굴려 피했다. 코피를 뚝뚝 흘리며 남자가 하소연했다.

 

 

“ 나 진짜 그런 거 아니야. 억울해. 나 강간범 아니야... 그리고 얜 여자도 아니잖아. 내가 왜 사내 녀석한테 그런 짓을 하니. 너네 패고 묶은 건 맞지만 그것도 일부러 그런 거 아니란 말이야. 난 그냥 류바 만나러 온 건데... 오늘 밤에 만나기로 해서 산 넘고 물 건너 몰래 여기까지 온 건데... 류바는 어디 가고 왜 너네들이 여기 있는 거야... 엉엉... 막 두들겨 패고 의자로 짓찧고... 무서워. 엉엉... ”

 

 

화가 나서 몸부림치던 베르닌의 귓가에 단어 하나가 들어왔다. 잠시 그는 그 단어를 언제 들었나 의문했다. 왕재수는 그보다 훨씬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손뼉을 딱 쳤기 때문이다.

 

 

“ 아, 너 류바 만나러 온 거였어? 네가 알릭이구나! 무슨 운전병인가 뭔가. 장교들 따라와서 데이트하려 했는데 장군인가 뭔가 온대서 도루묵 됐다고... 맞지? ”

 

“ 어, 맞아... 너 어떻게 알아? 어... 역시 너 류바랑! ”

 

 

남자가 부르르 떨더니 갑자기 화를 내면서 왕재수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왕재수가 짜증을 내면서 남자의 뺨을 찰싹 후려쳤다.

 

 

“ 어휴, 그만 좀 해! 아까 그렇게 아프게 했으면 됐지 또 난리야! 가뜩이나 지금 다닐이 열 받아서 난린데! 너 나 한 번만 더 손대면 진짜 재미없을 줄 알아! 아까부터 패주고 싶은 거 팔 근육 미워질까봐 꾹 참고 있는 건데! ”

 

“ 하지만... 네가 류바를 어떻게 알아! 나랑 류바 얘기까지 어떻게 다 아냐고! 오늘 밤 데이트는 우리끼리 몰래 약속한 건데! ”

 

“ 류바가 아까 말해줬으니까 그렇지! 데이트할 줄 알고 좋아했는데 취소돼서 엄청 실망하고 있었단 말이야. 근데 넌 어떻게 온 거야? 장군 갔어? ”

 

“ 아니, 그게... 흐흑... ”

 

“ 야, 울지 마! 어휴, 촌스러워. 정말 시골 애들은 왜 이 모양이야. 빨랑 나 묶은 것부터 풀어줘. 매듭을 어떻게 맨 거야, 발목은 죽어도 안 풀리네. ”

 

“ 풀어주면 아까처럼 발로 찰 거잖아... 얼마나 아팠는데. ”

 

“ 더 아프고 싶냐? 너 나 안 풀어주면 쟤가 또 의자로 두들겨 팬다! ”

 

“ 흑흑, 안 돼. 저놈은 순한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무서운 거야. 덩치도 커가지고 의자 휘두르는데 너무 무서웠어. 엄청 아팠어. 뼈 다 부러지는 줄 알았네. 쟤 뭐야, 격투기 선수야? 흐흑... ”

 

“ 징징대지 말고 빨랑 나부터 풀어줘! 나 이렇게 오래 묶여 있으면 근육이 미워진단 말이야! ”

 

“ 으응, 알았어. ”

 

 

남자는 훌쩍훌쩍 울면서 왕재수에게 기어왔다. 떨리는 손으로 왕재수의 발목에 칭칭 감겨 있는 가운 끈의 매듭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는 혹시라도 왕재수가 걷어 찰까봐 미처 끈이 다 풀리기도 전에 후다닥 옆으로 굴러서 피했다. 왕재수는 두 손으로 발목과 종아리를 주무르면서 투덜댔다.

 

 

“ 어휴, 근육 뭉친 것 좀 봐! 야만인! 으아, 내 백옥 같은 살결에 쓸린 자국 난 것 좀 봐! 너 진짜 혼내줄 거야! 난 몸매랑 얼굴로 먹고 사는데! ”

 

“ 미안해. 너 얼굴로 먹고사는 앤 줄 몰랐어. 고의가 아니었어. 엉엉... ”

 

“ 피 안 통해서 저려 죽겠어. 좀 주물러봐! ”

 

“ 응, 알았어. ”

 

 

남자가 코를 훌쩍이며 왕재수의 발목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대체 뭐하는 짓이야!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발목 주물러주는 건 또 뭐냐고! 강간범 주제에 아니라고 하고! 넌 대체 왜 저놈 편을 들어주는 거야! 그리고 난 안 풀어 주냐? 나도 팔 저려 죽겠단 말이야! ”

 

“ 으앙... 저 사이코가 또 막 성질내. 또 나 때릴 거 같아. 무서워... ”

 

누가 사이코야! 으아아!

 

 

베르닌이 다시 폭주할 찰나 왕재수가 옆으로 기어왔다. 결박에서는 풀려났지만 아직 다리가 저려서 일어나기가 힘든 것 같았다. 의자에 묶인 채 옆으로 누워 있는 베르닌의 뒤로 가서 손목과 허리에 묶인 끈을 풀어주었다. 베르닌은 간신히 몸을 굴려서 일어나 앉았다. 어지럽기도 하고 손목과 팔, 다리, 허리가 너무 아팠다. 온몸이 저려서 찌릿찌릿했다. 왕재수가 그의 팔목을 문지르듯 마사지해주었다.

 

 

“ 아... 아야... ”

 

“ 가만히 있어봐. 어휴, 세게도 묶어놨었네. 자국 엄청 깊게 났잖아. 많이 아팠겠다. 연고라도 발라야겠어. 이 방에는 없으려나? ”

 

“ 내가 문제가 아니고... 너! 너 다쳤잖아... 피도 나고... 상처... 그리고, 그리고... 흐흑... 나쁜 짓... 어흑... ”

 

 

베르닌은 죄책감과 가슴을 에는 듯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왕재수를 와락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 흐흑... 불쌍한 녀석. 잘 나가다가 감옥 가고 고문 받고, 다쳐서 춤도 못 추고 시골에 끌려온 것도 모자라서 이게 웬 날벼락이니... 엉엉... ”

 

“ 아니, 그게... 나 그거 아니라니까... ”

 

“ 엉엉, 뭐가 아니야... 너 그렇게 자기 몸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면 안 돼. 가뜩이나 바이올린 깡패랑 그러는 것도 걱정이었는데. 크레믈린 아저씨한테도 그렇게 막 나쁜 짓 당하면서 살았다 그러고... 심지어 저런 더러운 놈한테 겁탈... 엉엉, 그래놓고 아무 일도 아니라 그러고... 흑흑, 이 불쌍한 녀석아. 엉엉... 내가 저놈 가만 안 둘 거야. 크레믈린 아저씨도 혼내 줄 거야. 이제 너 그렇게 살지 마. 내가 너 건드리는 놈들 용서 안 할 거야, 으엉엉... 국장이 뭐라 하든 상관없어. 국장도 내가 혼내줄 거야. 으앙... ”

 

 

베르닌이 목을 놓아 우는 동안 왕재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쁜 일을 당한 후 뒤늦게 찾아온 심리적 충격 때문인가 싶어 더더욱 겁이 난 베르닌은 간신히 눈물을 훔치며 품 안에 있는 왕재수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왕재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상당히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핏자국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너무 불쌍해 보여서 소맷자락에 침이라도 뱉어서 닦아주려는데 왕재수가 갑자기 베르닌의 이마와 뺨에 연이어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두 팔로 베르닌을 껴안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베르닌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당황해서 멍해졌다.

 

 

잠시 후 왕재수가 베르닌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손등으로 눈과 코를 쓱쓱 닦더니 소파로 올라가 벌렁 드러누웠다. 두 다리를 쭉 펴면서 베르닌과 침입자 쪽을 쳐다보았다.

 

 

“ 어휴, 피곤해. 온천까진 좋았는데 뱀 껍질부터 이상하더라니. 야, 알릭!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부터 말 좀 해봐. 제대로 말 안 해 주면 쟤가 또 팰 줄 알아. 그리고 다닐! 너 어디든 좀 앉아. 눕든가. 가뜩이나 신체 나이는 40대인 게 그렇게 의자를 휘두르고 난리를 쳤으니... 하긴 넌 미워질 근육도 없으니까 뭐. ”

 

“ 아니야! 나 안 앉을 거야! 너 데리고 병원 갈 거야! 그리고 저 자식 경찰에 넘기고... 아니지, 내가 체포할 거야! 나 KGB! 보안요원! 무단 침입한 강간범 체포할 권한이 있어!

 

“ 글쎄 그게 아니라고!! 일단 앉아! 설명해 줄 테니까! ”

 

 

그래서 베르닌은 일단 침대에 앉았다. 알릭이란 이름의 침입자는 쭈뼛거리며 도망치고 싶어 했지만 왕재수가 확 째려보자 어째선지 기가 팍 죽어서 카펫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알릭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     *

 

 

 

알릭은 왕재수의 생각대로 류바의 남자친구였다. 검은 숲 너머에 있는 군 부대에서 대대장의 운전병으로 복무하고 있었고 나이는 베르닌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어려서 스물한 살밖에 되지 않았다.

 

 

“ 나 원래 이 동네 토박이야. 할아버지 아빠 삼촌 전부 이쪽에서 벌목공으로 일해. 나도 학교 다닐 때부터 틈틈이 그쪽 일 도와드렸거든. 류바랑은 고등학교 때부터 커플이었어. 졸업하고 나서 류바는 여기 취직하고 난 가족들이랑 벌목 쪽 일하고. 원래 류바 스무 살 되는 생일날 결혼하자고 옛날부터 그랬는데, 그게 작년 5월이었거든. 근데 막 결혼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 갑자기 영장 나오고 징집돼서 완전히 망한 거야. ”

 

“ 미뤄달라고 하면 안 되나? ”

 

 

왕재수의 순진한 질문에 알릭이 한숨을 쉬었다.

 

 

“ 너도 어른 돼봐... 군대는 다 끌려가는 거야. 노멘클라투라 가문이거나 줄 있거나, 둘 중 하나 아니면 그냥 가야돼. 너도 곧 가게 될 거야...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성년이 되면... ”

 

“ 음, 난 군 면제라서 그런 거 잘 몰라. 학교 다닐 때부터 콩쿠르에서 상을 많이 받았거든. 훈장도 여러 번 받고. ”

 

“ 으잉? 면제? 훈장? 뭔 소리야, 너 학생 아냐? ”

 

“ 아니야! 나 엄청 유명한 무용수에 감독... 우주 최고 꽃...

 

“ 그나마 고향 쪽 부대로 갔으니 잘 간 거네, 뭘. 난 연방 변두리 공화국에 딸린 이상한 부대로 갔다고! ”

 

 

아직 분을 삭이지 못한 군필자 베르닌이 왕재수의 ‘우주 최고 꽃미남이자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대천재’ 레퍼토리를 가로막으며 툭 내뱉었다. 알릭이 흠칫 놀라며 웅얼거렸다.

 

 

“ 어, 그건 그러니까... 그렇지만... ”

 

“ 운전병이라며. 그럼 윗분만 모시면 되니까 좀 낫잖아. 행군 같은 것도 덜 하고 웬만한 훈련 할 때도 대대장 옆에 있으니까 일반 병사보단 훨씬 낫지. 나 군 생활할 때도 걔들 얼마나 부러워했었는데. 대대장만 잘 만나면 휴가도 잘 받고! ”

 

“ 아니야, 우리 대대장은 정말 너무 힘들단 말이야. 난 제1 대대장 운전병인데 그 인간 완전 사이코야. 걸핏하면 기합이야. 무슨 대대장이 직접 기합을 주니. 근데 이 작자는 그런다니까! 휴가는 정말 꿈도 못 꿔. 그 인간이 공무 말고도 하도 돌아다니는 일도 많고 애인도 많아서 걸핏하면 차를 쓴단 말이야. 그리고 부하들이 쉬는 꼴을 못 봐. 정기 휴가 나갈 때도 얼마나 들들 볶는데, 저번에는 휴가 나가는 날 아침에 갑자기 자기 사적인 일로 차 써야 한다고 못 가게 했어. 대체 운전병도 있었는데 내가 운전해야 승차감이 더 편하다고 무조건 내가 있어야 된다는 거야... 류바가 서너 번 면회도 왔었는데 고참들이 하도 못살게 굴고 자기들 먹을 건 안 싸 왔냐, 자기들한테 여자 친구 소개 안 시켜 주냐 들들 볶아서 류바가 겁먹고 요즘은 못 와.

그래서 나 진짜 오늘만 고대하고 있었단 말이야... 오늘 우리 사단 장교들 전부 여기서 워크숍인지 뭔지 하기로 했잖아. 말이 워크숍이지 그냥 다 모여서 새해 기념 야유회 하기로 한 거야. 온천하고 술 먹고 놀고... 우리 대대장도 오니까 나도 당연히 따라오는 거고. 윗분들 한번 술 먹고 놀면 장난 아니거든. 이럴 땐 우리도 따로 모여서 술 먹으라고 해줘. 그러니까 난 밤에 살짝 류바랑 만나기로 했었단 말이야. 류바가 엄청 기뻐하면서 5층에 좋은 방 하나 빼놓는다고, 자기 거기서 기다릴 테니까 오라고 했었어. 503호실... ”

 

“ 아, 그게 이 방이구나. ”

 

 

왕재수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베르닌은 왕재수처럼 세상 편하게 이야기를 들을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날카롭게 추궁했다.

 

 

“ 장교들 워크숍 취소됐잖아! 장군이 와서! 근데 넌 어떻게 온 건데! ”

 

“ 그러니까... 갑자기 장군이 온다 해서 발칵 뒤집히고 온천은 당연히 다 취소되고... 완전 망한 거야. 우리 어제부터 장난 아니었어. 눈 다 치우고 나무 심고 꽃 심고... 이 한겨울에 파릇파릇한 나무 찾고 장군 들어오는 타이밍 딱 맞춰서 활짝 필 꽃들 찾느라 죽는 줄 알았어. 장군이 연못 보면서 술 마시는 거 좋아한대서 웅덩이 파고 물 채우고 얼까봐 온수 주입하고 가짜 연잎 만들어서 띄워놓고 정자 만들고 난리도 아니었단 말이야. 난 오늘 밤에 류바랑 사랑을 속삭일 것만 기다리면서 간신히 하루하루 버티고 있었는데 진짜 미칠 것 같았어. 하도 난리가 나서 전화도 못하고... 류바는 하염없이 나 기다릴 텐데. 흑흑... 류바는 진짜 예쁘니까 안 그래도 인기도 많고 노리는 남자들도 많은데... 이러다 딴 남자한테 뺏길까봐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어. ”

 

 

베르닌은 ‘걱정도 팔자야! 류바 별로 안 예뻤어!’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놀랍게도 왕재수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알릭을 쳐다보면서 ‘응, 응. 그래서?’ 하고 계속 묻고 있었다.

 

 

“ 그래서 오후에 장군이 왔는데, 부대 한 바퀴 돌고 나더니 장교들 불러서 계속 술판인 거야! 전에도 그런 적 있대.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사흘 연속 마신대. 그래서 병사들은 오히려 좋아하는 거야. 자기들끼리 술 퍼마시고 노느라 우리한테는 아예 신경도 안 쓰니까. 심지어 여자들도 부른 것 같더라고. ”

 

“ 맞아. 그런 술판 벌어지면 끝장 볼 때까지 마셔. 나 군대 있을 때는... ”

 

“ 어휴, 또 시작이야, 군대 얘기... 그런 건 너네 둘이 따로 얘기해. 그래서, 대대장들은 술 마시고, 너는? ”

 

 

왕재수가 탁 끊었다. 알릭은 이상하게도 왕재수의 말이라면 금세 고분고분해져서 온순하게 말을 이었다.

 

 

“ 다들 부어라마셔라 정신도 없고 병사들도 놀자판 됐거든. 나도 애들이랑 축구하다가... 생각해보니까 밤에 살짝 나갔다 와도 모를 거 같더라고. 고개 하나랑 강 하나만 건너면 되니까... 그래서 점호 끝나고 밤에 살짝 빠져 나온 거야. 류바 보려고... ”

 

“ 뭐야, 그럼 탈영이잖아! 미쳤어! ”

 

 

베르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릭이 황급히 베르닌의 입을 막았다.

 

 

“ 야, 조용히 해... 나 그런 거 아냐. 괜히 오해받게... 나 총도 다 놔두고 나왔어. 나 진짜 류바랑 밤만 보내고 새벽에 돌아갈 생각이었단 말이야. 우리 못 본지 석 달도 넘었어. 그래서 막 고개 넘고 눈길 달려서 왔는데... 흐흑... 문은 다 잠겨 있고... 밖에서 아무리 류바 불러도 대답도 없고. ”

 

“ 류바 모스크바 갔어. 남자친구 오기로 했는데 취소돼서 열 받아서 주말 근무 바꿨대. 밤 기차 타고 모스크바에 놀러간댔어. 아까 7시 좀 넘어서 갔단 말이야. ”

 

 

베르닌은 왕재수가 그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기억하는 것에 놀랐다. 남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릭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 정말? 아... 그랬구나. 그래서 류바가 없었던 거구나... 흑흑... 그럼 난 뭐한 거니... 삽질. 흐흑... ”

 

뭘 하긴 뭘 해! 탈영병 된 거지! 멍충이! 네가 전화 안 해도 어차피 예약이 다 취소됐으니까 류바도 너 못 온다는 거 알았을 거 아냐! 그러니까 모스크바에 갔지! ”

 

 

베르닌이 윽박지르자 왕재수가 그를 확 째려보았다.

 

 

“ 자꾸 갈구지 마. 얘기 좀 듣게. 아까 총 소리도 났는데. 넌 총 안 가져왔다며. 그럼 그건 무슨 소리였어? ”

 

“ 문이 다 잠겨 있어서 들어갈 구멍을 찾고 있는데 경비 할아버지가 저쪽에서 순찰 돌면서 오잖아. 숨다가 돌멩이에 걸려서 울타리에 부딪쳤거든. 소리도 크게 나고 그쪽에 오리들이 모여서 자고 있었는지 푸드득 푸드득 날아가고 시끄러우니까 아저씨가 놀랐는지 총을 쏘더라고. 근데 그거 공포탄이야. 그 할아버지 탄창 채우는 일 없거든. ”

 

“ 아, 그 총 소리가 그거였구나... 진짜 놀랐는데. ”

 

“ 거봐, 너 나가지 말랬잖아. 괜히 나가서... ”

 

 

왕재수가 베르닌을 나무랐다. 베르닌은 억울해서 대들었다.

 

 

“ 야, 그럼 총 소리가 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니! 혹시라도 정말 무장 강도라도 들었으면 큰일이잖아! ”

 

“ 그래도 내 옆에 있었어야지! 나 혼자 놔두고 나가면 어떡해! 너 심지어 몰래 나가려고 나 막 재웠잖아! ”

 

“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랬지... 다친 사람 있을까봐. ”

 

“ 딴 사람 다치는 건 걱정되고 나 다치는 건 걱정 안 되냐! ”

 

“ 돼! 걱정된단 말야! 아까도 얼마나 놀랐는데! 복도에 갔더니 창문은 열려 있지, 발자국은 있지. 근데 방에서 네가 갑자기 비명 지르고... ”

 

“ 저기... 근데 너네는 대체 무슨 관계야? 형제야? ”

 

아니야!!!

 

 

왕재수와 베르닌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 하긴, 형제치곤 너무 안 닮았다. 너네 좀 이상해. 남자들인데 꼭 사귀는 것처럼... 쳐다보는 것도 그렇고 걱정하는 것도 그렇고. 나랑 류바처럼... ”

 

야,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린 그냥 아는 사이고... 온천 와서 그냥 방만 같이 쓰는 거야!!! ”

 

 

베르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왕재수도 맞장구쳤다.

 

 

“ 그래! 나는 사귀는 사람 있어! 얘는 없지만... 하여튼 아니야! ”

 

 

알릭은 황급히 사과했다.

 

 

“ 어, 미안... 너네가 변태란 뜻이 아니었어. 난 그런 게 아니고... ”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남자끼리 응응응 하면 무조건 변태냐! 다들 꼴 보기 싫어! 에잇! ”

 

 

왕재수가 갑자기 화를 내더니 벌떡 일어났다. 줄줄 흘러내리는 파자마를 움켜쥐고 욕실로 들어갔다. 씩씩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물소리에 파묻혔다. 그 사이에 베르닌은 알릭을 훈계했다.

 

 

“ 너 그런 생각 있어도 입 밖에 내지는 마.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줄 아냐. 나중에 사회 나와 보면 알 거야.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 그리고 누가 누구 좋아하고 누가 누구랑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더라고. 그냥 그 사람 자체가 어떤지가 중요해. 그러니까 너랑 다르다고 함부로 변태니 뭐니 하고 욕하면 안 돼. ”

 

“ 으잉,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사내끼리 그런 거 하면 당연히 변태지. 아 찝찝해... ”

 

시끄러워, 한 번만 더 그런 말 하면 의자로 또 패줄 거야!

 

 

베르닌이 협박하자 알릭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때 왕재수가 머리에서 물을 마구 떨어내며 나왔다. 피투성이였던 얼굴도 깨끗하게 닦아낸 후였다. 밴드가 터진 파자마 허리춤에 옷핀을 꽂고 있었다. 왕재수는 아직 화가 잔뜩 나 있는 것 같았지만 알릭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우와, 아깐 몰랐는데 너 진짜 잘생겼구나! 영화배우 같아. 너처럼 잘생긴 애 처음 봐!’ 라고 감탄하자 금세 누그러졌다.

 

 

“ 하여튼. 경비 아저씨는 공포탄 쐈고. 안 들켰어? ”

 

“ 응, 들키지는 않았어. 그래서 약속한 대로 부엉이 소리를 막 냈거든. 근데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류바가 안 나오는 거야. 문도 안 열어주고... 5층 창문은 불도 다 꺼져 있고. 시간도 늦었으니 내가 안 올 줄 알고 류바가 자나보다 싶었어. 그래서 창문으로 들어온 거야. ”

 

“ 5층까지 기어 올라왔다고? 너 몸놀림 둔하던데? ”

 

“ 아니, 마침 창고 앞에 사다리가 있더라고. 그래서 그거 타고 올라왔어. 근데 눈이 쌓여서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 했어. 복도로 들어오긴 했는데 캄캄해서 어디가 503호인지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좀 헤맸어. 근데 어디서 문소리도 나고 발소리도 나서 깜짝 놀라서 문 열린 방에 잠깐 숨었다 나왔어. 그 방은 502호더라고. 살금살금 나와서 보니까 옆방이 503호인 거야. 노크를 했는데 대답은 없고, 문은 밀어보니까 열리더라고. 들어와 보니까 이쪽 침대에 사람이 누워 있잖아. 그래서 난 당연히 류바라고... ”

 

“ 야! 넌 남자랑 여자도 구별 못 하냐! ”

 

“ 캄캄해서 잘 안 보였단 말야. 그리고 불 켜면 혹시라도 경비 아저씨가 밖에서 알아볼까봐... 그리고 류바는 나보다 키도 크고 늘씬하단 말이야. 머리도 짧고. 몸매도 비슷한 거 같고 해서 난 류바인 줄 알고... ”

 

“ 잠깐! 말은 바로 하자. 난 우주 최고 꽃미남에 뭇 남성과 여성들을 넋 나가게 했던 몸매의 소유자라고. 류바와 비교하면 안 되지! ”

 

 

왕재수가 알릭을 노려보면서 아주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대놓고 얘기하진 않았지만 왕재수 역시 류바가 별로 미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알릭은 얼떨떨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횡설수설 사과를 늘어놓았다.

 

 

“ 어, 미안... 하긴 네가 더 예쁘긴 하다. 어떻게 여자보다 더 예쁘지? 그래도 난 류바가 제일 좋아. 하여튼 난 진짜 류바인 줄만 알고... 너무 좋아서 침대로 기어들어가서... 그랬던 거야. 그냥 그거라고. ”

 

야! 뭐가 그냥 그거야! 뭘 그랬던 거냐고! 이 개자식! 그러니까 맞잖아! 강간범! 죽여 버릴 거야!

 

 

꾹꾹 참으며 끝까지 듣고 있었던 베르닌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솟구쳐 일어나 알릭에게 달려들었다. 막 알릭의 얼굴을 짓이겨놓으려고 하는데 왕재수가 뒤에서 그의 허리를 껴안고 질질 끌어당겼다.

 

 

“ 아유, 얘가 정말 오늘 왜 이래. 국장한테 너무 볶여서 그러나. ”

 

“ 뭐가! 다 밝혀졌잖아! 이 자식이 자는 널 덮친 거잖아! 류바인 줄 알고! 고의가 아니었으면 뭐해, 일은 다 저질러놓고! 아까 이놈이 그랬잖아, 너 때문에 좋다가 말았다고! 그게 그 얘기 아냐! ”

 

 

알릭이 훌쩍훌쩍 울면서 변명했다.

 

 

“ 아니야, 안 저질렀어. 하마터면 할 뻔 했지만 안 했어. 진짜야. 그러니까 좋다가 만 거지. 근데 첨엔 진짜 류바인 줄 알았어. 향기가 너무 좋았단 말이야. 그렇게 좋은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남자라고 생각하냐! 살결도 얼마나 매끈매끈하고 부드러웠는데... ”

 

“ 그거야 온천을 했으니 그렇겠지! ”

 

“ 나 원래 피부 완전 좋거든! ”

 

 

왕재수가 베르닌의 옆구리를 확 쥐어박았다. 알릭은 왕재수가 자기 편을 들어주는 것 같자 안도하며 말을 이었다.

 

 

“ 하여튼 그래서... 너네도 알잖아, 나 석 달 동안 못했는데... 남자들만 우글거리는 부대에 있다가 그것도 사랑하는 여자랑 오랜만에 한 침대에 눕게 됐는데 이성 찾게 됐냐! 너무 흥분돼서 꼭 껴안고 뽀뽀했는데 쟤가 가만히 있었단 말이야. 그래서 더더욱 류바라고 생각하고 옷을... ”

 

“ 넌 왜 또 가만히 있었는데! 저놈이 그렇게 뽀뽀하고 몸을 더듬는 것도 몰랐단 말야? ”

 

 

베르닌이 왕재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왕재수가 억울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 난 자고 있었어! 온천도 했지 마사지도 받았지 뱀 때문에 놀랐지 정말 피곤했단 말이야. 알잖아, 난 원래 새벽잠이 많단 말이야. 알람 맞춰도 못 일어나는데... 막 꿈꾸면서 자고 있었어. 근데 갑자기 손이 안으로 쑥 들어오잖아. ”

 

“ 안으로? 어디 안으로!! ”

 

 

왕재수가 잠자코 파자마 안쪽을 가리켰다. 베르닌이 잠깐 멍해졌다가 욕을 하면서 의자를 집어 들려고 했을 때 급하게 알릭이 소리쳤다.

 

 

“ 아니, 그러니까! 나도 놀랐단 말이야! 으악, 나 때리지 마. 맹세코 거기까지밖에 안했어. ”

 

“ 거기까지가 뭔데!!!! ”

 

“ 그러니까... 뽀뽀하고... 여기랑 여기 만지고... ”

 

 

알릭이 쭈뼛거리며 가슴팍과 허벅지 안쪽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베르닌이 폭주할까봐 잽싸게 덧붙였다.

 

 

“ 근데 여기가 판판하잖아! 그리고 여기에... 없어야 할 게 있잖아! 나도 진짜 놀랐단 말이야! 깜짝 놀라서 손 빼려는데 갑자기 얘가 깨서 비명을 지르잖아. 그냥 소리만 지른 줄 알아? 막 주먹 휘두르면서 발길질을 하는데 나 정말 갈비뼈 다 나가는 줄 알았어. 소리 듣고 사람들 오면 나 무단침입에 탈영 죄까지 덮어쓸까봐 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할 수 없이... ”

 

“ 그래서 애를 패고 묶었단 말이야? 그 덩치에! 한 줌밖에 안 되는 애를! 저 조막만한 얼굴을 피범벅을 만들고 몸에 생채기 낸 것도 모자라서 팔다리를 그렇게 꽁꽁 묶고... 옷은 다 벗겨놓고! 이 개자식아! ”

 

아니야! 억울해! 난 옷만 벗겼어. 그것도 류바인 줄 알고 그랬던 거야. 생채기는... 쟤가 하도 몸부림쳐서 엎치락뒤치락하다 긁혀서 그런 거야. 난 쟤한테 걷어차여서 갈비뼈 최소 금갔단 말이야! 피난 것도 쟤 아니야, 나야! 쟤가 들이받아서 코 깨지는 줄 알았어! 코피가 얼마나 많이 났는데! ”

 

 

알릭이 자기 코를 가리켰다. 유심히 보니 콧구멍 아래에 피가 말라붙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왕재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 누가 덮치래. 다 자업자득이지. ”

 

“ 그럼, 그럼 넌 괜찮은 거야? 피 안 났어? 다른 데 다친 덴 없어? ”

 

“ 없다니까. 가슴팍 좀 긁힌 거랑 저 자식이 묶어서 내 백옥 같은 살결에 흠집난 거. 그 정도야. 어휴, 평소 같으면 저렇게 둔한 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데 자다가 깨서 몸이 잘 안 움직이잖아. 그리고 쟤가 뚱뚱해서 몸무게로 깔아 누르니까 꼼짝을 못하겠더라고. 막 버둥거리니까 저 녀석이 날 묶잖아. ”

 

“ 나 처음에 너 팔 하나밖에 안 묶었어! 근데 네가 계속 발길질하고 난리치니까 할 수 없이 묶은 거야. 그 와중에 밖에선 저 녀석이 막 고함지르면서 문 부수려고 하고. 진짜 정신없었단 말이야. ”

 

 

베르닌이 알릭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 시끄러워, 얘 입까지 틀어막았잖아! 얘가 소리 지른 건 한 번밖에 못 들었어! ”

 

“ 그건... 못 움직이게 깔아 누르니까 얘가 막 날 물어뜯잖아. 나 살점도 뜯겨나갔어! 진짜 미친 놈 같았단 말야. 하도 난리를 쳐서 이렇게 가냘픈 애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무슨 특공훈련 받은 놈인 줄 알았다고! 근데 지금 보니까 완전 계집애처럼 생겨서... 군 면제... ”

 

 

베르닌은 왕재수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더니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잠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왕재수가 조그만 상자를 들고 왔다.

 

 

“ 이 요양소 나쁘지 않네. 구급상자도 있고. ”

 

 

왕재수는 상자를 뒤져서 연고를 꺼냈다. 베르닌의 손목을 끌어당겨서 끈에 쓸린 상처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면봉에 소독약을 묻히더니 뒤통수 어딘가를 살살 눌렀다. 머리의 상처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베르닌은 갑작스러운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 아 따가워!!! ”

 

“ 가만히 있어. 그래도 피는 많이 안 났어. 세게도 때렸네. ”

 

 

마지막은 알릭을 째려보면서 한 말이었다. 알릭은 풀이 죽어서 사과했다.

 

 

“ 미안해. 너 묶어 놓자마자 쟤가 들이닥쳐서... 쟨 심지어 덩치도 커서 한방에 제압하지 않으면 큰일 날 거 같아서 그랬어... ”

 

“ 뭘로 때린 거야? 이거 주먹으로 팬 거 아닌데. ”

 

“ 저... 미안해... 레닌... ”

 

 

알릭이 쭈뼛거리며 문가의 카펫을 가리켰다. 레닌 흉상이 박살난 채 나뒹굴고 있었다. 여기저기 석고 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왕재수는 한숨을 쉬었지만 베르닌은 분명 그 순간 그 까만 눈이 반짝 빛나는 것을 보았다. 애초부터 맘에 안 들었던 레닌이 박살난 게 내심 즐거운 게 틀림없었다.

 

 

“ 저런 걸로 사람 머리를 내리치면 어떡해. 큰일 날 뻔 했잖아. 얘가 머리가 단단해서 망정이지. ”

 

“ 미안해. 진짜 미안해. 나 정말 고의가 아니었어. 체포당할까봐 그랬어. 그리고 분명히 류바가 있어야 하는데 침대에 웬 남자가 있으니까... 순간 류바가 바람난 줄 알았어. 딴 남자랑 놀아나는 줄 알고 눈이 뒤집혔어. 미안... 나 정말 나쁜 놈 아니야. 강간범 그런 것도 아냐. 때린 거 미안, 묶은 거 미안... 흑흑, 나 고발하지 마. 엉엉... ”

 

그럼 어떡해! 너 분명 탈영한 거잖아! 너네 부대에 전화할 거야!

 

 

베르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스라친 알릭이 울면서 그나마 자기 말을 잘 들어준 왕재수의 어깨를 와락 껴안고 매달렸다.

 

 

“ 흐흑, 제발... 나 보내줘. 영창 무서워. 군대도 싫은데 영창을 어떻게 견뎌. 나 총도 안 가져왔잖아. 류바 보려고 온 건데... 류바도 없고. 어헝... 감옥 가기 싫어, 엉엉... ”

 

 

베르닌이 알릭을 홱 밀쳐서 왕재수로부터 떼어놓았다.

 

 

시끄러워. 어딜 또 껴안고 난리야! 한 번만 더 얘 건드렸단 봐! 그리고 얜 그런 거 결정할 권한 없어! 나한테 있다고! 나 KGB! 국가 보안요원이란 말야! 사정은 안됐지만 넌 탈영했잖아. 법대로 해야지! 나 법학 전공...

 

 

알릭이 사색이 되어 울음을 터뜨리려는데 왕재수가 끼어들었다.

 

 

“ 다닐, 이제 그만 해. ”

 

“ 뭘 그만 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하지만 법이란 게 있어! 정상 참작은 좀 될 거야. 그래도 원칙은 지켜야지! 그리고... 그리고... 너 다쳤잖아! ”

 

“ 안 다쳤다니까. 코피도 쟤가 난 거라고 했잖아. ”

 

“ 생채기 났잖아! 묶인 자국 나고... 너 피부 엄청 챙기잖아. 묶여서 근육도 미워지고... 추행당하고... 아무리 고의가 아니어도... ”

 

“ 연고 발라서 금방 가라앉을 거야. 이제 그만하고 얘 가라고 하자. ”

 

“ 가라니! 어딜 가라고! 탈영병을! ”

 

“ 총도 안 가져왔잖아. 여자 친구 보고 싶어서 온 거잖아. 류바도 없고 불쌍하잖아. 아직 날 밝으려면 많이 남았으니까 지금 서두르면 대대장인지 뭔지한테 안 들키고 돌아갈 수 있을 거야. ”

 

“ 하지만... ”

 

“ 영창 간대잖아. 그거 감옥 아니야? 감옥 나빠. 사람 괴롭히고 아프게 한단 말이야. 얘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감옥 가면 불쌍하잖아. 대대장이 사이코라며. 너도 맨날 너네 국장 사이코라면서 괴로워하잖아. ”

 

“ 그거랑은 달라... ”

 

“ 뭐가 달라. 군대나 너네 KGB나. 권력 자랑하고 마초 흉내 내고 사람 괴롭히는 데잖아. 당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여기 온천이잖아. 우리 쉬러 온 거잖아. 그러니까 그냥 보내주자. ”

 

“ 하지만... ”

 

“ 나 감옥에 있을 때 너무 무서웠어. 매일매일 심문하고 때리고 나쁜 짓 하고 주사도 놓고. 얼마나 아팠는데. 근데 그거보다 더 싫었던 게 뭔지 알아? 너네 국장 닮은 멍충이들한테 맨날 끌려가서 말도 안 되는 설교만 계속 듣는 거였어. 영창도 그럴 거잖아. ”

 

“ 어... 그거랑은 좀 다를 거야. 넌 정치범이었잖아. 엄청 중요한 죄수였다며. 그래서 사상 교화 받느라 그랬겠지. 군대 영창은 좀 달라. ”

 

“ 어쨌든. 잘못도 없는 사람 감옥 가는 거 싫어. 보내주자. ”

 

 

베르닌은 입을 벌렸다. 원칙과 법규, 보안요원 서약을 생각했다. 팔과 다리가 꽁꽁 묶이고 입이 막히고 옷이 벗겨진 채 버둥거리던 왕재수의 모습이 떠오르자 다시금 몸이 떨려왔다. 절대 안 된다고 하려는데 왕재수가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서 온몸이 굳는 것 같았다. 차라리 속눈썹 깜박깜박하면서 바이올린 깡패에게나 쓰던 수작을 부리면 나을 것 같았다. 싸가지 없는 반동분자 주제에 안 하던 표정을 짓고 안 쓰던 말투를 쓰니까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 보내주는 거야. 그렇지? ”

 

 

왕재수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의문문의 탈을 썼을 뿐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왕재수, 싸가지 없는 놈, 반동분자, 반체제주의자 등등의 욕설을 해줘도 시원찮을 판인데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스페호프의 얼굴이 생각났다.

 

 

“ 알았어. 너 빨리 가. ”

 

“ 고마워. 진짜 고마워. 나 얼른 갈게. 패서 미안해. 묶어서 미안해. ”

 

 

알릭이 후다닥 일어났다. 급하게 나가려는데 왕재수가 붙잡더니 얼굴과 팔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거의가 베르닌에게 두들겨 맞은 상처였지만 왕재수가 물어뜯은 자국도 있었다.

 

 

뺨은 찢어져서 좀 꿰매야겠다. 부대 돌아가면 의무실인지 뭔지 꼭 가봐. ”

 

“ 고마워. 너 착하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류바랑 놀아나는 줄 알고... ”

 

 

왕재수는 ‘대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상상을!’이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자기 가방을 뒤져서 유산지로 꼭꼭 싼 꾸러미를 하나 건네주었다.

 

 

“ 이게 뭐야? ”

 

“ 사과파이. 아까 배고프다고 했잖아. 가면서 먹어. ”

 

“ 아아... 사과파이. 단 거 먹어본지 진짜 오래됐어. 진짜 고마워! 안 잊을게! 나중에 제대해서 사회 나오면 꼭 은혜 갚을게! 류바랑 나랑 결혼할 때 꼭 부를게... 흐흑... ”

 

“ 촌스럽게 왜 또 훌쩍거리는 거야. 빨리 가. 날 밝기 전에! 그리고 뽀뽀 연습이나 좀 해. 너 진짜 못하더라. 류바 불쌍해! ”

 

“ 으응. ”

 

 

마침내 알릭이 떠났다. 베르닌은 시계를 보았다. 새벽 3시였다. 겨울이니까 서두르면 해가 뜨기 전에 부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베르닌은 어쨌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베르닌이 박살난 레닌 조각들을 치우는 동안 왕재수는 묶여 있던 여파로 몸이 너무 쑤신다면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팬티 바람으로 나와서 베르닌을 순간 소스라치게 했다.

 

 

“ 어... 야! 너 왜 옷 안 입고! ”

 

“ 나 입고 잘 옷이 없어. 잠옷 다 찢어졌잖아. ”

 

“ 그래도... 추운데 어떻게 그러고 자냐! 잠깐만 기다려! ”

 

 

베르닌은 급하게 자기 옷을 뒤져서 티셔츠를 한 장 꺼내주었다. 왕재수는 너무 촌스럽다고 툴툴댔지만 결국 베르닌의 티셔츠로 갈아입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막 베르닌도 침대로 들어가면서 불을 끄려는데 왕재수가 발딱 일어나 앉았다.

 

 

“ 왜 그래? ”

 

“ 구급상자... ”

 

뭐? 너 다친 데 있었구나, 근데 그 자식 보내주려고 괜찮은 척 한 거지! ”

 

그게 아니고. 너 머리. 붕대 감고 자야 돼. 안 그러면 베개에 상처 쓸려. ”

 

“ 나 괜찮은데. ”

 

“ 너는 뒤통수가 안 보이잖아. 피도 나고 짓물렀단 말이야. ”

 

 

왕재수가 구급상자를 다시 뒤졌다. 붕대를 가져와 베르닌의 머리에 감아 주었다.

 

 

“ 어, 너 붕대 잘 감는구나. 의외네. 이런 거 못할 거 같은데. 군대도 안 다녀왔잖아. ”

 

“ 군대가 뭐 그리 잘났다고 다들 군대 타령이람. 나 무용수였잖아. 이 바닥은 부상당하는 일이 많아서 붕대쯤은 껌이지. ”

 

“ 그렇구나... 다리는 괜찮아? 아까 근육 다 뭉쳤다고... ”

 

“ 아직 좀 뭉쳤는데 자고 나서 온천하면 괜찮아질 거 같아. ”

 

“ 다행이다. ”

 

 

 

왕재수가 침대로 돌아간 후 베르닌은 램프를 껐다. 너무 피곤했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뭔가가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조심스럽게 왕재수를 불렀다.

 

 

“ 야, 자? ”

 

“ 아니. 근데 졸려. ”

 

“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

 

“ 뭔데? ”

 

“ 너 왜 알릭이 건드렸을 때 가만히 있었어? ”

 

“ 자고 있었다고 했잖아. ”

 

“ 아니야. 너 자고 있지 않았어. 최소한 그 자식이 기어들어왔을 땐 분명히 깼어. ”

 

“ 아냐, 나 자고 있었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

 

“ 아까, 알릭한테 그랬잖아. 뽀뽀 연습하라고. 진짜 못한다고. ”

 

“ 근데, 그게 뭐? 걔 진짜 뽀뽀 못해. 침만 막 묻히고. 불쌍한 류바... ”

 

“ 너 처음에 그랬잖아. 자느라고 알릭이 기어들어온 것도, 건드리는 것도 몰랐다고. 파자마 속으로 손 집어넣어서 깼다고 했잖아. ”

 

“ 맞아! 자다가 그래서 깼어. ”

 

“ 앞뒤가 안 맞잖아. 알릭은 뽀뽀부터 했다고 했어. 좋은 냄새 났다고. 처음에 껴안고 뽀뽀하고 그 다음에 옷 벗기고 만졌다고 했단 말이야. 자고 있었다면서 뽀뽀 못하는 건 어떻게 알아! ”

 

“ 어... 그런가... 에이, 둔한 주제에 어떻게 그런 머리는 잘 돌아가지? 야, 근데 너 지금 나 추궁하는 거야? ”

 

“ 아니. 그게 아니고... ”

 

“ 그러니까 내가 꼬리쳤다 이거 아냐! ”

 

“ 아니야. 절대 그런 게 아니야! 난 그냥... 왜 가만히 있었냐고! 그 자식이 건드렸을 때 깨어 있었잖아. 나 너 힘센 거 알아. 운동천재잖아. 처음에 달려들었으면 그 녀석 둔하니까 네 힘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어. 근데 한참 건드리게 놔둔 거잖아. ”

 

“ 아, 젠장. 몰라. 기분 좋았나보지 뭐. ”

 

“ 너는 대체... 넌 정말... ”

 

 

베르닌은 주먹으로 매트리스를 쾅 내리쳤다.

 

 

너 정말 왜 그러는 거야! 그때... 그때 투레츠키 그 자식이 건드릴 때도 가만히 있었잖아! 왜 그러는데! 그러다 진짜 나쁜 짓 당한단 말이야... 좋아하지도 않는 놈들이 건드리면 못하게 해야지 왜... 나 정말 너 때문에 돌아버리겠어! 왜 그렇게 살아, 왜! ”

 

“ 어... 너 화난 거야? ”

 

“ 답답해서 그래! 어휴! ”

 

“ 나한테 화내지 마. ”

 

“ 어떻게 화를 안 내냐! 너 분명히 내가 안 들어왔으면 그 자식이 나쁜 짓해도 가만히 있었을 거잖아! ”

 

“ 아니야, 안 그래! 걔 내 취향 아니란 말야! 그리고 내가 내 몸 어떻게 굴리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아, 피곤해. 나 잘 거야. ”

 

“ 상관있단 말야! ”

 

“ 뭐가! 왜 상관있어! ”

 

“ 나는... 나는... 그러니까... 너 감시요원... 보고서 써야 되고... ”

 

“ 쳇. 바보 멍충이. ”

 

 

 

왕재수가 담요를 끌어올리며 홱 돌아누웠다.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흘렀다. 베르닌은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숨을 쉬었고 어떻게든 잠을 청해보려고 했다. 그때 왕재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나는 너라고 생각했어. ”

 

“ 뭐? ”

 

“ 넌 줄 알았다고. 그래서 가만히 있었어. ”

 

 

베르닌은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눈을 깜박거렸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런 줄 알았다고? ”

 

“ 밖에 나갔었잖아. 복도 돌아보고 다시 들어온 줄 알았어. ”

 

“ 하지만... 나라고 쳐도... 왜 가만히 있었던 건데! ”

 

“ 너인 줄 알았다고 했잖아. ”

 

 

왕재수가 고집스럽게 되풀이했다. 베르닌은 미칠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 어떻게, 어떻게 나라고 생각할 수가 있어? ”

 

“ 방도 같이 쓰니까 너밖에 들어올 사람 없었고. 뽀뽀도 엄청 못해서. 너 책상물림이잖아. 애인도 별로 안 사귀는 거 같고. ”

 

“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나였으면, 그럼 그런 짓 해도 된다는 거야? ”

 

“ 응. ”

 

“ .... 왜? 왜? ”

 

“ 뭘 새삼스럽게 묻니? 전에 얘기했잖아. 너 조기출근 늦게 퇴근 벌칙 받았을 때, 늦게 출근 조기퇴근이 직장인의 로망이라고 징징대서 내가 해결해줬잖아. 너네 국장한테... ”

 

“ 야, 그게 해결이냐! 그때 네가 나랑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한다고 뻥쳐서 나 정말 지금까지 얼마나 헛소문에 시달리는 줄 알아!! ”

 

“ 내가 그때 그랬잖아. 내가 해주지도 않으면서 거짓말해서 기분 나쁜 거면 해줄 수 있다고. ”

 

“ 어... 하지만! 내가 언제 해 달랬어! 나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난 여자가 좋다고!!! ”

 

누가 뭐래. 나도 그런 줄 알았지. 넌 나타샤 좋아하고 렐랴 좋아하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지. 근데 침대로 기어들어오니까... 또 아닌가보다 했지. ”

 

“ 야! 그게 말이 되냐! 그리고... 좋아, 그렇다 쳐! 나라고 생각했다 쳐!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해! 나라고 괜찮은 게 어딨냐고! 내가 바이올린 아저씨도 아니고! 너랑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그렇게 아무 남자나 건드리게 놔두면 안 된... ”

 

“ 너는 아무 남자가 아니잖아. ”

 

“ 뭐? ”

 

 

왕재수는 입을 다물었다. 베르닌은 너무 어지럽고 정신이 없었다. 불을 켜야 하나 싶었다. 저 골치 아픈 녀석을 일으켜 앉혀 놓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빙빙 꼬지 말고 제대로 말해보라고 추궁하고 싶었다. 동시에 겁도 났다. 그때 왕재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난 네가 국장 명령을 받은 줄 알았어. ”

 

“ 뭐? 국장 명령?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 온천 온 거. 국장이 보낸 거잖아. ”

 

“ 어...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

 

“ 여기 높은 사람들 오는 요양소야. 난 이런 데 많이 다녀서 척 보면 알아. 아까 류바도 그랬어, 너 여기 올 순번 아니라고. 근데 심지어 갑자기 금요일 휴가에, 주말 이용권까지. 너 같은 말단은 그런 특권 죽었다 깨나도 못 얻어. 그러니까 국장이 손을 쓴 거야. 그 앞잡이 사이코가 순수한 호의로 너한테 그런 걸 베풀어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이건 명령이었겠지. 특별 이용권을 내주고 나랑 같이 온천 가라고 한 거야. 감시든 뭐든 뭔가 목적이 있었겠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뭐 난 상관없어. 온천 좋아하니까. 네가 무슨 음모 꾸밀 그릇이 되는 애도 아니고. ”

 

“ 아... 어... 이용권은 국장이 준 거 맞지만... 그런 거 아니야. 진짜 그런 거 아니었어... 난 사실... 투레츠키... ”

 

“ 근데 아까 알릭이 들어와서 막 더듬고 뽀뽀할 땐 진짜 넌 줄 알았어. 그래서 생각했지. 아, 이거구나. 스페호프가 이러라고 명령했나보다... ”

 

“ 국장이 왜 그런 명령을 해! ”

 

“ 몰라. 내가 알게 뭐야, KGB 앞잡이 속셈을 내가 어떻게 다 아니. 사진이라도 찍어놓고 싶었나보지 뭐. ”

 

“ 그런,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단 말이야? 너 미쳤어? ”

 

“ 바보 같은 생각 아니야. KGB 있는 놈들은 가끔 그런 짓 한단 말이야. 옛날에 모스크바 아저씨도 나한테 그렇게... ”

 

“ 절대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좋아, 진짜 아니지만 설령 그렇다 쳐! 내가 국장 명령 받고 널 추행... 덮친다고 쳐! 그걸 알면서도 왜 가만히 있냐고! ”

 

그럼 어떻게 하니. 내가 못하게 하면 넌 국장한테 혼날 거 아냐. 임무 수행 못했다고. 그럼 또 징징댈 거고 잘리니 마니 벌목공도 못하게 될... ”

 

 

베르닌은 왕재수를 두들겨 패서 입을 틀어막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머리가 아팠다. 눈꺼풀이 뜨거웠다. 속이 울렁거렸다.

 

 

“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그 자식이 만지작거릴 때 알았어. 너 아니라는 거. ”

 

“ 그건 어떻게 안 거야? 캄캄했잖아. ”

 

“ 손. 너는 손 크고 두툼하잖아. 서류 작업해서 손가락 끝에 굳은살도 있고. 대신 털은 없잖아. 근데 여기로 손이 쑥 들어왔는데 털이 숭숭 돋아 있더라고. 손도 작고. 그래서 깜짝 놀라서 소리 지른 거야. ”

 

“ 나 국장 명령 받은 거 아니야. 아프다고 뻥쳤더니 국장이 온천 이용권 준 거야. 애초부터 내가 갈 생각도 아니었어. 너랑 바이올린 아저씨 보내려고 한 거였어. 너 폐렴 때문에 아팠잖아. 그리고... 너 금요일에 투레츠키한테 간다고 해서 그랬어. 그 자식이 찝찝하게 구니까 혹시라도 안 좋은 짓 할까봐. 거기 가느니 온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랬던 거야. 국장 명령 아냐. 행여 그런 명령 내린다 해도 절대 그런 거 안 해! 내가 국장이야? 나 절대 사람을 그런 식으로 다루진 않아! 아무리 네가 싸가지 없는 놈이라 해도 그런 짓은 안 한단 말이야!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잠이 싹 달아났다. 한참 동안 말없이 천정을 쳐다보며 누워 있었다. 왕재수도 말이 없어서 잠들었나 싶었는데 어둠 속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 화났어? ”

 

“ 조금. ”

 

“ 미안. 국장이 명령했다고 오해해서. 그때 그 자식이 전화로 협박해서 내가 민감해져 있었나봐. ”

 

“ 아니야. 우리가 너 감시하니까... 우리가 나쁜 거야. ”

 

“ 그건 그래! 너네 나빠! ”

 

“ 앞으로는 못하게 해. ”

 

“ 뭐를? ”

 

“ 누가 그러든! 넌 그렇게 잘난 척하면서 왜 더러운 짓 당해도 가만히 있는 거야! 바이올린 아저씨나 네 맘에 드는 남자 아니면 못 건드리게 하란 말이야. 하지 말라고 말하든가, 패든가! ”

 

“ 근데 난 하다 보면 웬만하면 또 좋아져서... 특히 성감대를 살살 만져주면... ”

 

“ 농담하지 마! 너 분명히 그랬잖아, 취향 아닌 애랑 안 한다고! ”

 

“ 그건 그런데 또 안 그럴 때도 있어서... ”

 

“ 약속해. 이제 안 그런다고! ”

 

“ 아휴, 시골뜨기. 책상물림. 그게 약속한다고 되냐. ”

 

“ 약속하라고. 안 그러면 창밖으로 밀어버릴 거야. ”

 

“ 알았어. 약속할게. 나 이제 잘래. 너무 졸려. 배도 고프네. 괜히 사과파이 줘버렸어. 아침에 차랑 곁들여 먹으려고 가져온 건데. 아깝다... ”

 

“ 카페에 사과파이 있었어. 내일 거기 가서 먹자. ”

 

“ 으응... ”

 

 

왕재수는 졸린지 뭐라고 웅얼거리더니 곧 잠이 들었다. 베르닌은 몇 분 정도 더 천정을 쳐다보며 복잡한 머리를 정리해보려고 했지만 곧 무거운 졸음이 쏟아졌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FIN

- 2015. 3. 9 ~ 3.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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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다음 이야기는 15편에서. 그건 다음주 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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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닌의 보안요원 연수 얘기라든지, 알릭의 군대 얘기 등등은 사실 소련의 KGB 훈련이나 군 제도와 완전히 일치하는 건 아니고, 이 시리즈가 원래 재미로 쓰는 거다 보니 우리 나라 얘기라든지 이것저것 내가 섞었다. 그래도 기본적인 골자는 비슷하다.

 

**

 

14편은 지금까지의 서무 에피소드들과는 기술이나 접근 방식이 달라서 사실 본편이나 전에 쓴 추리소설 외전에 더 가깝다. 왕재수의 성격이나 말투도 그렇고. 코미디보다는 정극에 가깝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를 쓰고 나서는 이 시리즈의 정체성에 대해 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근데 뭐...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 어차피 내가 좋아서 쓰는 시리즈인데 뭐.

 

사실 여기서 왕재수와 베르닌은 막판에 자기들끼리 추리를 해대면서 살짝 홈즈와 왓슨 티를 내고 있기도 하다 :) 똑똑한 왕재수와 고지식한 베르닌 ㅠㅠ

 

**

 

그럼 다음 이야기는 15편에서. 15편에서는 베르닌이 새로운 미션을 받게 되고.. 또 고생문이 열린다~ (근데 난 왜 좋아하고 있지 ㅋㅋ)

 

** 댓글은 언제나 힘이 됩니다 :)

 

 

:
Posted by liontamer
2015. 3. 25. 12:49

마린스키 샵에서 사온 오페라 글라스 dance2015. 3. 25. 12:49

 

 

2월에 페테르부르크 갔을 때, 마지막 날 마린스키 신관 샵에서 지른 오페라 글라스. (아래 깔려 있는 건 마린스키 신관 공연 프로그램)

마린스키는 앞자리 앉을 경우가 아니면 항상 오페라 글라스(노어로 비노끌)를 빌리곤 하는데, 그럴때마다 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마침 환율이 많이 떨어져서, 이 기회에 살까 말까 고민고민... 머무는 내내 고민하다 마지막날 공연 보러 가서, 신관 샵에서 구매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첫날 샀으면 좋았잖아 ㅠㅠ

어차피 유리지갑 박살난 거. 환율 떨어졌으니 괜찮아 괜찮아 하며 조삼모사로 구매 :)

 

검정색도 굉장히 예뻤는데.. 그래도 오페라 글라스는 붉은색이어야지! 하는 생각에 붉은색 선택.

손잡이 달린 것도 있고 대신 금색 목걸이가 달린 것도 있는데, 후자가 편하지만 전자가 더 근사해보여서.. 결국 비실용적이고 외모지상주의인 나는 전자를 선택...

근데 나중에 친구가 이거 보더니 손잡이 헐거워지고 고장나면 어떡하냐고 한다.. 으윽, 난 그 생각까진 못했지.. 역시 실용성과는 담을 쌓았어 ㅠㅠ

 

 

 

 

 

 

 

 

 

손잡이 펴면 이렇게..

 

 

호텔 방에 돌아와서 찍었다.

 

토요일에 지젤 공연 보러 가는데, 이번에는 앞줄이라 사실 필요가 없네.. 표를 늦게 끊어서 앞줄이지만 아주 사이드라.. 무대 한쪽이 많이 가릴 거 같긴 한데 그거야 오페라 글라스로는 해결이 안되니 ㅠ

 

:
Posted by liontamer

 

본편을 계속 손대지 못하고 서무 시리즈만 쓰고 있어서..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 본편 우주에 속한 글들을 다시 뒤적이고 있다. (안 그러면 미샤는 사라지고 왕재수만 남을 것 같아 ㅜㅜ)

 

발췌한 부분은 2년 전 완성한 레닌그라드 배경의 장편 전반부이다. 전에 몇 번 발췌한 적이 있는데, 레닌그라드 대학 강사 트로이와 소년 시절~ 키로프 시절의 미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아래 내용은 소설의 2부, 시간적 배경은 1974년 4월, 미샤의 키로프 극장 첫 시즌이다. 미샤는 18살이다. 전에 그의 키로프 데뷔에 대해 발췌한 적이 있다. (거기서는 해적의 알리를 췄고 이후 지젤의 알브레히트를 췄다) 

 

그때 그가 키로프 정상의 프리마 발레리나인 니나 크류코바의 낙점을 받아 그녀의 파트너로 주요 레퍼토리를 추게 되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시즌 후반부에서도 그녀와 함께 돈키호테의 주역을 추게 된다. 이건 그 첫 공연에 대한 얘기다. (엄밀히 말하면 공연 얘긴 별로 없지만)

 

물론 여기 언급되는 감독 게오르기 다닐로프, 미샤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 선배 무용수 울리얀 세레브랴코프, 그의 친구 레오니드 핀스키, 니나 크류코바 등 등장인물은 모두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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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간의 연방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후 미샤는 폐렴에 걸렸다. 의사와 극장 동료들은 열악한 버스 투어와 궂은 날씨 때문이라고 했지만 트로이는 그게 흠뻑 젖은 채 운하의 바람을 맞으며 걸어왔기 때문이라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증세가 심각한 편이라 담당 의사는 그를 병원에 입원시켰고 며칠 동안은 가족을 제외하고는 면회도 시켜주지 않았다.

 

트로이는 걱정이 되어서 병원 근처를 맴돌았다. 사흘 째 되던 날에는 새로 온 간호사를 속여 형제라고 둘러대고 몰래 병실에 들어갔다. 그는 미샤에게 2인용 병실을 준 것에 놀랐다. 환자가 터져나가는 레닌그라드 병원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병실에는 다른 환자가 아예 없었다.

 

미샤는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환자복을 입고 초조한 얼굴로 병실 안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링거 줄이 바닥에 질질 끌려 다녔다. 트로이를 보자 잠깐 반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손을 흔들었을 뿐 다시 침대와 창문 사이를 도약이라도 하듯 큰 보폭으로 오갔다.

 

“ 누워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열이 장난 아닌 것 같네. ”

 

“ 오늘 공연이 있어. ”

 

“ 대역이 있을 거 아냐. ”

 

“ 세레브랴코프가 추는 꼴을 볼 수는 없어. ”

 

미샤의 눈에 잠깐 분노의 불이 확 일었다가 사라졌다. 트로이는 그게 누군지 몰랐지만 아마 사이가 좋지 않은 동료일 거라고 생각했다. 미샤는 자기 춤에 대해서는 겸양이란 것을 몰랐고 위계질서에 대한 개념 자체가 별로 없었다.

 

“ 지금 나가려던 참이었어. ”

 

“ 무슨 소리야, 거울이라도 좀 봐. 열 때문에 눈까지 빨개졌어. ”

 

“ 넌 의사가 아니잖아. ”

 

미샤는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며 짜증을 냈다. 평소의 차분한 태도는 사라지고 없었다. 자기처럼 건강하기 짝이 없는 젊은이가 어떻게 폐렴 따위에 걸려 병실에 갇혀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미샤는 짜증이 가신 목소리로 급하게 말했다.

 

“ 안드레이, 내과에 가서 아스케로프란 의사 좀 불러다 줘. ”

 

“ 그게 누구야? 너 담당의사는 그론스키란 사람 아니었어? ”

 

“ 그냥 아는 사람이야. 내 이름 얘기하고 좀 데려다 줘. ”

 

그래서 트로이는 2층으로 갔다. 복도 끝 방문에 유리 아스케로프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대기실에 환자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간호사가 다음 환자를 호명하러 나왔을 때 문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환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화가 난 의사가 그를 쫓아내기 직전에 트로이는 미샤의 이름과 와 달라는 부탁을 전했다.

 

의사는 열린 문 사이로 환자들을 힐끗 보더니 간호사를 불렀다.

 

마리야, 10분만 급한 환자를 보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해줘요. 그리고 저기 세묜 그리고리예비치한테는 피부터 뽑고 오라고 해요. ”

 

병실로 가면서 의사가 물었다.

 

“ 극장에서 왔어요? ”

 

“ 아뇨, 친구예요. ”

 

“ 친구가 있긴 있었군. ”

 

혼잣말이었기 때문에 트로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유리 아스케로프는 짙은 갈색 곱슬머리에 키는 작지만 운동선수처럼 다부진 체격의 30대 의사였는데 안경과 흰 가운 때문에 그렇게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스케로프가 들어오자마자 미샤는 인사도 하지 않고 대뜸 말했다.

 

“ 유라, 나갈 수 있게 도와줘. ”

 

“ 헛소리 하지 마. 그론스키가 날 죽이려고 할 걸. ”

 

“ 네 얘기 안 하면 되잖아. ”

 

“ 그저께 마로조프 비서가 데려다준 거 모르는 줄 알아? 난 모가지가 잘리고 싶진 않다고. 정 가고 싶으면 창문으로 나가. ”

 

창문은 왜? 복도로 나가면 되지. 나가는 건 문제가 아냐. 오늘 춤춰야 해. ”

 

“ 그래, 내일 관 속에 들어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시지. ”

 

아스케로프가 나가려는데 미샤가 앞을 막아서며 단어에 힘을 주어 뚝뚝 끊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 열만 좀 내려줘. 몇 시간만. ”

 

“ 그론스키가 처방해 준 거 있잖아. 그거 맞고 좀 자. ”

 

“ 자면 안 되니까 그렇지. 나가야 해. ”

 

아스케로프는 욕지거리를 하며 병실을 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돌아왔다. 가운 안에서 앰풀과 주사기를 꺼내면서도 계속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 침대에 좀 앉아. 정신 사납게 움직이지 말고. ”

 

미샤는 목적이 곧 달성되리라는 것을 알자 얌전하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스케로프는 미샤의 입에 체온계를 쑤셔 넣은 후 손등에서 링거 바늘을 뽑았다. 잠시 후 체온계를 빼내 숫자를 들여다 본 의사는 한숨을 쉬었다.

 

“ 미친놈. 이제 나도 모르겠다. ”

 

아스케로프가 정체 모를 주사를 놔주자 미샤는 눈에 띄게 표정이 풀렸다. 눈으로 웃기까지 했다.

 

“ 너무 좋아하지 마. 몇 시간 안 갈 테니까. 난 여기 없었던 거야. ”

 

“ 그래, 고마워. ”

 

복도에서 아스케로프가 트로이에게 조그만 유리병을 하나 주었다.

 

“ 따라가요. 다시 열이 올라가면 이거 마시게 해요. 안 그러면 골치 아파질 수도 있으니까. ”

 

“ 그냥 미샤한테 주는 게 낫지 않았어요? 아니면 주사랑 같이 주거나. ”

 

정신 나갔어요? 아까 놔준 거랑 이걸 같이 하면 정말 관을 치우게 될 텐데. 그렇다고 저 자식한테 주면 극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 마셔버릴 게 뻔한데. ”

 

“ 당신 생각보다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애에요. ”

 

“ 자기 관리? 웃기는 소리. ”

 

병실로 들어왔을 때 미샤는 벌써 옷을 갈아입은 후였다. 환자복은 베개와 시트 위로 뭉쳐 넣고 담요로 씌워두었지만 누가 봐도 사람이 없다는 게 훤히 보였다.

 

“ 넌 영화도 안 봤냐? 이렇게 허술한 위장은 처음 봐. ”

 

“ 어젠 모르던데. ”

 

“ 어제도 나갔었어? ”

 

“ 리허설이 있었어. ”

 

트로이는 포기하고 미샤를 따라 극장까지 갔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니나 크류코바를 아주 가까이에서 보았다. 동료들은 미샤가 입원했었다는 것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미샤가 최종 점검 때문에 무대에 올라가 있는 동안 트로이는 오케스트라 핏 바로 앞의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하지만 점차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관계자들이 와서 그를 몰아냈고 아무리 트로이가 사정을 꾸며내도 통하지 않았다. 미샤는 크류코바와 공연에 대해 얘기하러 분장실로 가버린 후였다. 그날따라 분장실 출입도 엄격하게 막혔다. 할 수 없이 그는 안면이 있는 안내원 노파를 찾아내 유리병을 맡기며 미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트로이는 미샤가 그 물약을 마셨는지 걱정이 되어 공연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필이면 돈키호테여서 4막까지 있는 공연이었다. 좌석은 완전히 매진이었고 미샤는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 줄 정신이 없었으므로 그는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3층 가장자리 칸막이 좌석 뒤에 서서 공연을 봐야 했다. 기억나는 거라곤 화려한 스페인 의상을 입은 니나 크류코바를 미샤가 한 손으로 들어올려 포즈를 취하던 것과 4막의 결혼식 장면에서 그가 무대를 빙글빙글 돌며 로켓처럼 날았을 때 관객들 모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쟁터의 군인들처럼 함성을 질러댄 것뿐이었다.

 

‘ 다행이야, 약을 마셨구나. ’

 

트로이는 커튼 콜이 계속되는 동안 칸막이를 나가 분장실 쪽으로 갔다. 그러나 분장실 앞도 이미 상기된 얼굴의 여자들로 꽉 차 있었다. 머리가 새하얀 안내원 노파가 꽃만 두고 썩 나가라며 그들을 꾸짖고 있었다. 그녀는 팬들 때문인지 트로이도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그는 계단 구석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서 한참 동안 기다렸다. 극성팬들도 모두 쫓겨나가고 다른 무용수들도 하나둘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오기 시작했지만 미샤는 나오지 않았다. 마침 같은 무대에 올라갔던 레오니드 핀스키가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트로이는 그에게 갔다. 사교성이 좋은 핀스키는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 공연 봤어요? 오늘 정말 대단했죠? ”

 

“ 그래요, 대단했어요. ”

 

건성으로 대답한 후 그는 핀스키에게 정말 궁금한 것을 물었다.

 

“ 미샤 봤어요? 크류코바와 함께 있나요? ”

 

“ 벌써 나갔을 텐데. 제가 가장 늦게 나왔을걸요. 니나는 오늘 남편이 오기로 되어 있고. ”

 

“ 분장실에 가서 봐줄 수 있어요? 계속 아팠거든요. ”

 

“ 괜찮다고 하던데요. 아까도 기침만 좀 하더라고요. ”

 

핀스키는 트로이가 지나치게 걱정이 많다고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순순히 미샤의 분장실로 갔다. 트로이도 안내원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따라 들어가다가 핀스키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었다.

 

미샤는 물약을 제때 마시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다 정신을 잃었는지 젖은 타월을 머리에 두르고 바지도 다 끌어올리지 못한 채 바닥에 모로 누워 있었다. 얼굴과 목, 드러난 상체 전체가 온통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감겨 있는 눈꺼풀만 하얗게 보였다.

 

“ 아, 이런. 너 정말 사람 놀라게 할 거야? 그냥 울리얀이 추게 내버려둘 것이지. ”

 

핀스키는 울상이 되어 욕을 하면서 자기 재킷을 벗어 동료의 몸을 덮었다. 그리고는 복도 밖으로 뛰어나가며 소리쳤다.

 

“ 안나 미하일로브나, 루키얀한테 빨리 와달라고 해 주세요! 게오르기 페트로비치도 계시면 좀 불러주세요! ”

 

트로이는 화장대 위에서 유리병을 발견했다. 뚜껑도 따지 않은 채였다. 그는 급하게 뚜껑을 열고 미샤의 입을 벌려 물약을 쏟아 넣었다. 별로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손놀림이 너무 둔했고 미샤는 기침을 하더니 약을 반 이상 뱉어내 버렸다.

 

다행히 그때 책임자인 게오르기 다닐로프가 극장 의료요원과 함께 분장실로 들이닥쳤다. 고집쟁이라느니 말썽꾸러기라느니 문제아라느니 하는 욕을 줄줄이 쏟아 부으면서도 사색이 되어 미샤를 자기 차로 데려갔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트로이는 다닐로프를 따라가서 병원 주소를 알려주었다.

 

“ 폐렴? 병원에서 빠져나온 거라니, 입원을 했었다니! 이 미친 녀석을 내가 기필코 잘라 버리고 말겠어! ”

 

물론 그건 다닐로프의 진심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정부 관료 못지않게 권위적이라고 소문난 데다 때 이른 요통으로 고생하고 있는 그 깐깐한 인물이 직접 미샤를 들쳐 업고 계단을 달려 내려갔을 리가 없었다. 어쨌든 그 문제아는 키로프가 지난 가을에 발굴한 최상급의 보물이었으니까.

 

 

트로이는 다닐로프의 차에 함께 타고 갔다. 순전히 병원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빈슈테인 거리까지 차를 몰고 가는 내내 다닐로프는 투어가 어떻고 알렉세이와 울리얀이 어떻고 하며 지껄이다가 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성깔이 보통이 아닌 애송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고 탄식했다. 트로이는 발레단의 모든 행정을 책임진 번듯한 고위직 신사가 그렇게 북받친 어조로 끝없이 푸념을 늘어놓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장광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트로이는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미샤의 불처럼 뜨거운 이마에 줄곧 손을 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아스케로프를 불러다주고 극장에 가도록 내버려둔 자기 때문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병원에서 해열 조치를 받은 후 미샤는 곧 정신을 차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트로이에게 공연을 봤느냐고 물었고 1막에서 스텝을 한번 실수했다고 투덜거렸다. 다닐로프의 존재는 완전히 무시했다. 마침내 안도의 한숨이 분노로 바뀐 다닐로프가 그에게 다음 시즌에도 충분히 출 수 있는 역인데 왜 미친 짓을 했느냐고 꾸짖었다. 아픈 건 징계 사유가 되지 않지만 그걸 숨기고 무대에 올라가서 공연을 망치는 건 완벽한 징계감이라고 소리를 높였다. 미샤는 열이 올라 토끼처럼 빨개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 망치지 않았잖아요. ”

 

물론 사실이긴 했지만 다닐로프는 그 대답 때문에 더욱 화가 났다.

 

“ 울리얀이 있잖아, 자네보다 열 배는 경험이 많은 친구가! 니나와도 수십 번은 더 췄어! ”

 

“ 당신의 그 공훈예술가는 도약을 못해요, 게오르기 페트로비치. ”

 

문외한인 트로이조차 미샤가 동료 무용수를 폄하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을 건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얘기가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대선배인 모양이었다. 트로이는 걱정이 되어서 미샤의 등을 세게 찔렀다.

 

“ 자네 징계야, 퇴원하자마자 내 사무실로 곧장 튀어와. ”

 

화가 난 다닐로프가 발을 쿵쿵 구르며 나간 후 트로이는 미샤를 책망했다.

 

“ 너 왜 그래, 감독한테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 ”

 

“ 세레브랴코프가 내 신발에 못을 숨겨 놨다고. 페름에선 집단농장 저수지에 밀어 넣었어. 그래서 지금 이 모양이 된 거야. ”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미샤는 주먹으로 매트리스를 두어 번 내리치며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 그런데 내가 그 자식한테 역을 내줘야겠어? 공훈예술가든 선배든 상관 안 해. 과거의 영광에 매달려 유유자적하는 놈이야, 역겨운 프로파간다 발레로 떴던 인간이라고. ”

 

분을 참을 수 없는지 미샤는 숨을 몰아쉬며 이를 딱딱 부딪쳤다.

 

못을 숨겨놓다니! 저수지에 밀어 넣어? 왜 그런 얘긴 감독한테 하지 않는 거야? ”

 

“ 그럼 진짜 얼간이가 되니까. 축구팀이나 군대와 똑같은 거야. ”

 

“ 둘 다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는 주제에 말은 잘 하는군. 다른 동료들은 몰라? ”

 

미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기침을 참아보려고 애썼다. 얼굴에 다시 열꽃이 확 올라왔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한 살의를 느꼈다. 농장 저수지에 밀어 넣었다니. 세균이 득실거릴 게 뻔한 그 더러운 저수지에. 폐렴으로 끝난 게 운이 좋은 건지도 몰랐다. 얼굴도 모르는 그 인간의 목을 부러뜨리고 싶었다. 뱃가죽에 식칼을 쑤셔 박고 싶었다.

 

트로이가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는 동안 미샤는 10분 가까이 멈추지도 않고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기침을 멈춰보려고 물을 반 컵 정도 마셨다가 다시 시트 위에 물을 왈칵 뱉어냈다. 트로이는 경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그를 뒤에서 껴안았다. 등과 가슴이 격심하게 들먹이고 있었다. 한참 후 기침을 멈추고 좀 안정된 후 미샤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러지 마. ”

 

“ 뭘? ”

 

“ 죽이러 가지 말라고. ”

 

“ 이젠 독심술이라도 하는 거야? ”

 

“ 그런 표정이라면 세 살짜리 애도 알아차릴걸. ”

 

미샤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뒤로 기댔다. 열에 들떠 입술이 부르터 있었다. 트로이는 그의 입술과 턱을 타고 흘러내린 물을 소매로 닦아주었다.

 

“ 신경 쓸 거 없어. 곧 지나갈 일이니까. ”

 

“ 그놈이 잘 나가는 선배라며. ”

 

“ 선배들이 아주 많아. ”

 

생각에 잠긴 얼굴로 미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열기로 흐려진 검은 눈에 파란 불꽃이 반짝였다.

 

“ 상관없어. 실력으로 보여주면 되는 거니까. ”

 

트로이는 웃기 시작했다. 그 침착하고 도도한 미샤 야스민이 대중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어린애처럼, 그것도 솔직하고 진지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트로이는 갑작스럽게 너무나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머리가 핑 돌았다. 병실이 아니었다면 미샤가 그렇게 아픈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포옹하며 사랑을 나눴을 것 같았다.

 

물론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만큼의 이성은 있었다. 미샤가 다시 열이 올라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당직을 서고 있던 아스케로프를 데리러 갔다. 아스케로프가 담당의사의 처방보다 좀 더 센 주사를 놔준 후에야 그는 기침을 멈추고 잠을 잘 수 있었다. 트로이는 다음날까지 병실에 남아 있었고 걱정에 빠진 율리야가 아들을 보러 왔을 때 집으로 돌아갔다.

 

----

 

이 장편을 쓸 때 등장인물 이름 짓는 게 너무 피곤해서(사람이 너무 많이 나와서..) 가끔은 좋아하는 예술가 이름에서 따오기도 하고 마린스키 무용수들 이름에서 따오기도 했다. 울리얀 세레브랴코프는 화가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에서 따왔다.  세레브랴코프와 미샤의 악연은 꽤 오래 지속된다. 의사 유리 아스케로프의 성은 현재 마린스키 제1 솔리스트인 티무르 아스케로프에서 따왔다. 그냥 성만 따온 거라 아무 관계 없음. 

 

초반부에 아스케로프가 언급하는 '마로조프'는 레닌그라드 출신 고위 당 간부로 미샤의 후원자이다. 이 사람은 전에 가끔 언급된 소위 '크레믈린 아저씨'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와는 다른 인물이다(그리고 정치적인 라이벌이기도 하다)

 

..

 

중간에 트로이를 분장실로 안내해주는 레오니드 핀스키는 전에 올렸던 단편 illuminated wall의 화자이다. 그 글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385

 

서두에 언급한 미샤의 키로프 데뷔와 알리, 알브레히트에 대한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28 

 

이 글의 심리적 화자인 트로이와 미샤의 이야기들은 about writing 폴더에 몇 번 발췌한 적이 있다.

 

dance 폴더에서 돈키호테로 검색하면 이 발레에 대한 화보와 리뷰, 각종 동영상 클립들을 볼 수 있다.

 

 

:
Posted by liontamer
2015. 3. 23. 21:48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카르멘' 중에서 dance2015. 3. 23. 21:48

 

 

 

매우 힘든 월요일이니 피로를 달래기 위해.. 아끼는 영상 하나 올려본다 :)

최고의 무용수!! 미하일 바리쉬니코프의 '카르멘' 클립.

브라보!!

 

.. 당신 때문에 노어 전공했다고요 흐흑....

(엄밀히 말하면 당신이랑 도씨 아저씨.. 내 인생 책임져요!)

 

 

:
Posted by liontamer
2015. 3. 23. 14:31

손에서 미끄러져서 찍혔는데 russia2015. 3. 23. 14:31

 

 

 

 

지난 2월, 페테르부르크 갔을 때.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산책하러 갔는데 이때 옆에 있던 레냐가 팔에 꼭 매달리는 바람에 카메라가 미끄러져서 찍힌 사진. 근데 그냥 내 맘에 들어서 남겨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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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liontamer

 

 

어제 마린스키 발레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젊은 안무가들의 신작 발표 공연이 있었다. 매년 이어지는 것인데 올해도 마지막 메인은 유리 스메칼로프의 작품이었다. 작년에는 나보코프의 원작을 바탕으로 안무한 카메라 옵스쿠라였고 올해는 저승 세계의 오르페우스. 모두가 잘 아는 오르페우스 신화를 각색한 작품이었다. 스메칼로프의 인터뷰와 슈클랴로프의 리허설 클립을 보고 굉장히 궁금했는데 마린스키 tv 사이트에 올라와 있어 방금 봤다.

 

나는 스메칼로프가 안무한 작품들을 다 보지는 못했어도 여러 편을 영상으로 봤고 지난 2월에 갔을 때도 마린스키 구관에서 그의 '봄의 예감' 무대를 봤다. 스메칼로프는 에이프만 발레단에서 기본기를 닦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안무 스타일에는 상당히 에이프만 냄새가 배어 있다. 묵직하고 때로 어둡고 드라마틱하며 때로는 과잉이다.

 

이번에 봤던 봄의 예감은 너무 젠체하다 끝나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이별'이나 카메라 옵스쿠라, 볼레로 공장 등은 좋았다. 그리고 오늘 본 저승 세계의 오르페우스는 여태껏 본 그의 안무작 중 가장 내 마음에 들었다. 라흐마니노프도 평소엔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이 작품과는 잘 어울렸다. 일단 오르페우스 신화 자체가 드라마틱하며 심금을 울린다. 무대 미술에도 꽤 신경을 썼고 가끔 스메칼로프 안무에서 과잉으로 치닫는 경우가 있는 죽음과 어둠의 드라마도 이 작품에는 잘 녹아들어갔다. 아마도 그건 슈클랴로프의 드라마틱한 연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젊은 안무가의 신작 치고는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이며 야심찬 작품이지만 그 무게중심은 오롯이 오르페우스의 춤과 그의 절망, 그의 감정선에 놓여 있다.

 

물론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이므로 후자도 중요한 것 같지만 내 개인적 감상으로는 이 작품에서 에우리디케 역의 옥사나 본다레바는.. 음, 열심히 추기는 하지만 사실 뻣뻣하고 밋밋하다는 느낌이 좀 들었는데 이것이 본다레바의 문제인지 아니면 스메칼로프의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의 그림자에 가려진 그저 '여성 파트너'로서의 존재감 밖에 부여받지 못해서인지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인터뷰 클립에서 스메칼로프는 슈클랴로프를 위해 오르페우스를 안무했다고 밝혔는데 요약하자면 '그는 훌륭한 테크닉을 소유하고 있으며 춤 또한 최상급이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내부에는 아주 드라마틱한 영혼이 살아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란 얘기다. 이 얘긴 작년에 카메라 옵스쿠라를 안무했을 때도 했던 말이다. 스메칼로프와 슈클랴로프가 매우 친한 사이이기도 하지만, 안무가로서의 스메칼로프가 무용수로서의 슈클랴로프를 바라보는 시선은 우정이라기보다는 냉철한 판단에서 나온다. 나 역시 거기 동의한다.

 

오르페우스를 춤추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는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절망해 몸부림치는 순간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한 로미오와 어느 정도 중첩되는가 싶지만 셰익스피어와 그리스 비극은 분명 다르다. 로미오가 죽음으로 무대에서 사라지는 순간, 스메칼로프의 오르페우스, 슈클랴로프의 오르페우스는 죽음 너머로 천천히 나아간다. 그래서 이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러브 스토리라기보다는 신화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예술가의 고통스러운 탐색과 죽어버린 뮤즈에 대한 갈망에 더 가깝다.

 

나는 언제나 오르페우스 신화의 결말에 매혹되곤 했다.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뒤를 돌아봐서 에우리디케를 잃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사모하던 님프들에 의해 죽는다. 자신들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아름다운 예술가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님프들은 그를 죽인다.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뜯으며 노래하자 그 음악의 아름다움 때문에 누구도 그를 죽일 수 없었기에, 님프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러 음악이 들리지 않도록 한 후 그를 말 그대로 찢어 죽인다. 그리하여 오르페우스는 다시금 지하로 내려가 이제는 죽은 몸으로 아내와 재회한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가장 아름답고 고통스러운 사랑 이야기이며 예술가와 그의 예술에 대한 가장 시적인 이야기이다.

 

그리고 스메칼로프는 그 마지막을 저버리지 않았다. 섬뜩한 분장을 한 님프들이 달려들어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의 오르페우스를 둘러싸고 그의 옷자락을 찢고 리라를 부숴버릴 때, 그리고 오르페우스가 죽어 넘어질 때 난 오랜만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아마도 그 장면 때문에 내가 이 리뷰를 쓰고 있을 것이다.

 

슈클랴로프의 오르페우스는 사랑에 빠진 남자, 미를 창조하는 예술가, 죽음의 왕국으로 내려가 그곳을 헤매고 사랑하는 여자를 데리고 나올만큼 용기 있는 영웅, 그리고 결국은 뒤를 돌아보고 싶다는 호기심과 욕망을 극복하지 못해 파멸하는 '인간'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그 오르페우스는 고통스럽고 또 아름다웠다. 사랑에 빠진 오르페우스, 그리고 관객들로 하여금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오르페우스였다. 동시에 그 사랑을 거절당한 순간 파괴해버리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언제나 나를 끌어당기는 주제들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를 정말로 좋아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햇빛처럼 밝고 해맑은 속성을 표현하는 능력이 있지만 그의 내부에는 어둠의 드라마를 끌고 나올 능력도 있고 스메칼로프는 그것을 포착한 것이다. (내가 슈클랴로프에게 '정말로' 반한 계기가 된 작품도 롤랑 프티의 '젊은이와 죽음'이었다)

 

월요병으로 괴로워하던 일요일 밤이었지만 그래도 영상으로나마 좋은 작품을 봐서 기분이 좀 나아졌다. 하긴 이게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작품이긴 하지..

 

아래는 스메칼로프의 인터뷰와 슈클랴로프/본다레바의 리허설이 교차된 클립 링크. 이건 유튜브에도 올라왔다. 러시아어 이해하시는 분들은 들어보시면 재미있어요.

 

 

 

이 작품만 발라낸 클립은 아직 유튜브엔 안 올라왔고, 마린스키 티비 사이트에서 3월 21일 방송을 다시보기 하면 볼 수 있다. 이날 젊은 안무가들 공연이 많았는데 나도 아직 이 작품밖에 못봤다. 이 작품은 맨 마지막, 거의 3시간 째에 나온다. 링크는 여기 : http://mariinsky.tv/n/e

 

나중에 유튜브 올라오면 추가로 링크 올려보겠다.

 

** 영상 보자마자 생각나는 대로 썼더니 문장도 부자연스럽고 글도 좀 두서가 없네.. 그래도 잊어버리기 전에 써두자.. 정돈된 리뷰를 올리려고 했더니 이번 2월 마린스키 공연들은커녕 작년 백야 때 본 공연들 리뷰도 마르그리트와 아르망 하나 밖에 못 올렸음 ㅠㅠ

 

** 사족 : 꽃돌이 찬양.

아아... 타이트한 금빛 하의에 반라로 춤추는 슈클랴로프의 오르페우스는 정말 님프들로 하여금 끝없는 욕망을 느끼게 할만큼 근사하구나...

 

** 작년의 스메칼로프 안무 '카메라 옵스쿠라'에 대한 짧은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2740

 

 

:
Posted by liontamer
2015. 3. 22. 00:18

슈클랴로프 달력 도착해서.. dance2015. 3. 22. 00:18

 

 

지난 일요일에 편집해 만든(http://tveye.tistory.com/3570)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발레 달력. 화요일에 도착했다.

표지는 마린스키 신관 커튼의 깃털 무늬, 신관에서 찍었던 사진.

 

 

 

소파에 펼쳐놓고...

 

달력 사진 몇 장. 실물은 대충 이렇게 나온다. 실내에서 찍었더니 색감은 실물보다 좀 어둡고 진하게 나왔다.

 

 

 

 

 

 

 

 

 

 

 

 

 

 

 

 

 

 

 

그리고..

귀여움과 미모의 만남 :) 쿠마와 슈클랴로프 ㅋㅋ

그래도 나름대로 접점을 찾으라고 곱사등이 망아지의 바보 이반 화보 들어 있는 페이지랑 같이 :)

 

쿠마 : 아니 얜 뭐야! 나 혼자 이뻐야 되는데!!

 

 

 

그래서 결국은 달력을 깔고 앉아 버림.

 

쿠마 : 토끼 너 이 안에 있는 걔 보지 마! 나만 봐야지! 나 혼자 제일 귀엽고 이쁠 거야!!!

토끼 : 어.. 하지만 넌 귀염둥이, 걘 꽃돌이... 기준이 좀 다른데..

쿠마 : 안돼! 나 혼자 젤 이뻐야 돼! 꽃돌이고 나발이고!

 

***

 

오늘 마린스키 발레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작년처럼 젊은 안무가 신작 공연들이 올라오는데, 슈클랴로프도 유리 스메칼로프가 안무한 오르페우스에 대한 작품에 나온다. 마린스키에서 제작한 리허설/스메칼로프 인터뷰 필름을 봤는데 인터뷰와 슈클랴로프가 스메칼로프의 지시대로 연습하는 장면과 교차편집되어 있다. 꽤 흥미로웠다. 공연 실황은 생방으로 마린스키 티브이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데 시차 때문에 난 못볼 것 같고... 나중에 유튜브에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오랜만에 이 사람 리허설하는 모습을 보니 좋았다. 다시 무대 보러 가고 싶구나 ㅠ 현실은 바보사업에 짓눌려 항의받다가 심신이 뽀샤질 판이네..

 

 

:
Posted by liontamer

 

우여곡절 끝에 어느새 13편까지 온 서무의 슬픔 시리즈.

 

12편에서 특별감사로 단단히 고생을 한 우리의 말단 직장인이자 고지식한 단추눈 청년 다닐 베르닌. 그는 반드시 금요일 휴가를 내야만 한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매우 피곤한 목요일이다. 아직 주말이 되려면 하루가 더 남아 있다. 고생바가지 베르닌과 남을 잘 부려먹지만 예쁘니까 다 용서되는 왕재수의 이야기로 조금이라도 힘을 내시길~~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신년 특별감사를 마친 후 베르닌은 심신도 지친데다 왕재수가 전설의 서무를 찾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떻게든 금요일 휴가를 내고 싶어 안달이다. 과연 무시무시한 스페호프는 그의 휴가원을 통과시켜 줄 것인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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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3

 

 

서무의 슬픔

-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베르닌은 금요일에 왕재수가 바냐 투레츠키의 암시장에 가지 못하도록 보르쉬와 생선찜과 사과파이를 준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월요일까지 따뜻했던 날씨가 돌변해 화요일부터 다시 눈보라가 몰아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매주 수요일마다 다른 도시에서 식료품을 싣고 들어오던 트럭들이 폭설 때문에 강 너머에서 막혀버렸다. 갑작스러운 추위로 주민들이 텃밭에서 재배해 팔던 야채도 모조리 얼어버렸기 때문에 그 흔한 비트나 양파 한 알 구할 수가 없었다.

 

생선 가게에 갔더니 트럭이 안 와서 꽁꽁 얼어붙은 동태 토막 몇 개와 게 다리 몇 개만 남아 있었는데 상태가 좋지 않았다. 왕재수는 원래부터 입맛이 까다로운데다 특히 생선의 경우 선도를 따졌고 조금이라도 비린내가 나면 안 먹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생선찜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동네 빵집은 ‘기술적인 문제’로 일주일간 휴무라는 쪽지를 내걸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나마도 흑빵과 샌드위치 등속은 다른 매점에서도 팔고 있었지만 사과파이나 케익을 파는 곳에 가려면 강을 건너야 했다. 즉, 보르쉬와 생선찜과 사과파이는 모두 불가능했다.

 

만두라도 빚어볼까 했지만 정육점에도 고기가 없었다. 양고기만 남아 있었는데 베르닌은 이제껏 왕재수가 양고기를 먹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기껏 힘들여 만두 빚고 쪄놨는데 양고기 싫다면서 안 먹으면 말짱 도루묵일 테니까.

 

베르닌은 목요일 내내 사무실에 앉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먹을 것으로 붙들어놓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어쨌든 왕재수가 투레츠키에게 가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투레츠키가 그에게 잘 대해주긴 했지만 건달이나 다름없었고 왕재수에게 집적대는 태도도 심상치 않았다. 왕재수야 아저씨들과 아무데서나 응응을 즐기는 놈인데 자기가 왜 이렇게 과민반응하나 싶기도 했지만 투레츠키만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코즐로프에게 가서 얘길 할까 싶었지만 그는 바이올린 깡패와는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왕재수가 암시장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여기저기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금요일 휴가는 결재를 받은 상태였다. 감시분석부장은 감사 때 베르닌이 엄청나게 고생을 한데다 하마터면 선배들의 잘못을 모두 뒤집어쓸 뻔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그의 휴가원을 반려하지 못했다. 오후에 직원들의 근태에 대해 관심이 지대한 스페호프가 직접 베르닌을 호출하는 불상사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 자네 왜 갑자기 휴가를 냈나? 그것도 금요일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

 

“ 예? 저... 그게...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무가 금요일에 휴가를 내다니! 서무가 지켜야 할 첫 번째 미덕은 월요일과 금요일에 가급적 휴가를 내지 않는 것이야! 어디서 언제 외부 자료 요구가 들어올지 모르고... ”

 

아, 저... 그때 강 건너다 빠졌을 때 제가 좀 다쳐서... 온천에 좀 가려고... ”

 

베르닌은 어버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 그러자 스페호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 다치다니! 언제 말인가! 아니, 혹시 그때? 불여우 암살하려고 강에 밀어 넣다가... 그때 자네도 빠졌단 말인가? 많이 다쳤었나? ”

 

“ 어... 그렇지는 않은데요. 얼음 사이에 끼어서... ”

 

그랬군! 당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며 그 반동분자를 처치하려다 부상을 당했었던 거군! 그런 몸으로도 일주일 넘게 감사를 받으며 야근을 했구먼. 자네야말로 진정 우리 공산당과 소비에트의 모범청년이었어. 그 망할 불여우를 죽이려다 낭패를 봤군. 쯧쯧, 얼음 사이에 끼어서 다쳤다면 뼛속까지 한기가 스몄을 텐데 온천에 가야지. 암, 온천에 가야 하고말고. 그런데 온천에 가려면 요양 허가증이 있어야 할 텐데 그건 받았나? ”

 

“ 어, 저... 아직 못 받았습니다만... ”

 

“ 아니, 허가증도 없이 어떻게 온천에 가려고 했나! 잠깐 기다려보게! ”

 

 

스페호프는 총무부서에 전화를 해서 요양소 허가증에 대해 몇 마디 물었다. 그러더니 호통을 한번 치고, 잠시 후 다시 누그러진 목소리로 몇 마디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

 

 

“ 흠, 자네 차례는 아직 멀었더군. 하지만 당을 위해 그렇게 노력하다 부상을 당한 건데 당연히 특별 이용권을 내줘야지!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박 3일 이용권을 내주라고 했네. 총무부에 가서 받아가게. 요양소가 어디 있는지는 알지? ”

 

“ 아, 예! 감사합니다! ”

 

“ 온천에 푹 담그고 마사지도 받고 반드시 나아서 오게! 몸을 잘 관리해야 하네, 그래야 조만간 그 불여우를 제대로 처치할 수 있지. 참, 이용권은 2인용일세. 그 불여우를 데려가는 것도 좋겠군! ”

 

“ 예? 아니, 왜 걔를... ”

 

“ 그래야 그 녀석이 자네를 더 신뢰하게 될 것 아닌가! 온천도 같이 하고 친한 척하면서 돌봐주란 말일세. 아침에도 하고 저녁에도 하고 밤에도 해주는 건 기본이지. 그래야 조만간 더더욱 손쉽게... ”

 

“ 어... 예... ”

 

 

베르닌은 살짝 얼이 빠져서 국장실을 나왔다. 휴가를 허락받았을 뿐만 아니라 선배들에게만 차례가 돌아가는 특별 요양소 이용권까지 얻다니 꿈만 같았다. 검은 숲 깊은 곳에 있는 온천 요양소는 가브릴로프 주민들에게는 최고의 휴양지였고 다른 도시 노멘클라투라들도 찾아오는 곳이었다. 특히 이런 한겨울에는 이용권 구하는 것이 더욱 하늘의 별 따기였다.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재수와 코즐로프에게 온천 이용권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왕재수가 투레츠키에게 가지 않을 것이고 그는 굳이 왕재수를 돌봐주지 않고도 3일 연휴를 즐길 수 있다! 한 마디로 일석이조였다!

 

그는 총무부에 가서 이용권을 수령했고 쌓인 일을 그대로 미뤄둔 채 정시에 퇴근했다. 곧장 극장으로 차를 몰고 갔다. 극장은 계속된 폭설과 수도관 파열 때문에 주말까지 모든 공연이 취소된 상태였다. 하지만 왕재수는 계속 출근하고 있었다. 파이프 수리 중인 지하실과 기관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수리공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화요일부터는 공연이 올라갈 수 있게 해놓으라고 불벼락을 내리고 있었다. 야단을 치다가 이따금 기침도 했다. 안색이 안 좋아보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왕재수의 팔을 잡아끌고 1층으로 올라왔다.

 

“ 왜 그래! 공사하는 거 봐야 된단 말이야! ”

 

“ 지하실 공기도 안 좋고 습하고 추운데 거기 얼마나 있었던 거야! ”

 

“ 한 시부터. ”

 

미쳤냐! 너 폐렴 두 번이나 걸렸었잖아! 도지면 어쩌려고 그래. 그리고 네가 기술자도 아니면서 옆에서 본다고 뭐가 해결돼? 윗사람이 닦달하면 잘 되던 것도 더 안 된단 말이야. 그냥 기술자들한테 맡기고 넌 집에 가! 공연도 어차피 다 취소되고 발레단 애들도 하나도 안 나왔구만 너 혼자 뭐하는 거야! ”

 

“ 발레단 애들 나왔었어! 점심때까지 3층 연습실에서 내가 연습시키고 돌려보냈단 말이야. 그리고 나는 무용수가 아니라 감독이잖아. 극장이 이 꼬라지가 됐는데 당연히 남아서 지켜봐야지! 가뜩이나 애들 수준도 별로인데 시설까지 이 모양이니... 걸핏하면 파이프 터지고 물 새고. 난방도 안 되고. 이러니 관객들이 외면하지. 아, 머리 아파. 속상해. ”

 

“ 뭘 관객들이 외면해. 요즘 맨날 매진이던데! ”

 

“ 그건 내 이름값 때문이지 진짜 공연 보러 오는 게 아니란 말이야. 공연도 엉망, 극장도 엉망... ”

 

“ 너 여기 관객들 수준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냐? 우린 여태 이 정도 공연들도 잘만 봤는데. ”

 

좋은 거 보여주면 관객 수준은 올라가게 돼 있단 말이야! 욱, 콜록콜록... ”

 

왕재수가 심하게 기침을 했다. 베르닌은 어쩐지 속이 상했고 답답해졌다.

 

“ 야, 너 오늘 뭐 먹었어! 점심 먹었어, 안 먹었어? ”

 

“ 먹었어, 극장 카페에서. ”

 

“ 뭐 먹었는지 대! ”

 

“ 게살 샐러드, 요구르트... ”

 

“ 아침엔! ”

 

“ 사과... ”

 

“ 사과 몇 개? ”

 

“ 한 개... ”

 

“ 그게 전부야? 간식은! 간식 안 먹었어? ”

 

“ 간식 먹을 시간이 어디 있어! 애들 연습시키느라 정신없었어. 아직도 점프하다 자빠지는 놈들이 태반이라고. 그리고 인부들이 하도 게으름피우고 보드카 마시면서 딴 짓을 해대서 옆에서 감시해야 했단 말이야. ”

 

“ 너 이리 와. 안되겠어. ”

 

 

베르닌은 왕재수를 질질 끌고 가서 차에 태웠다. 곧장 항아리 닭고기 식당으로 향했다. 2인분을 주문했다. 싫어하는 왕재수에게 억지로 항아리를 들이밀고 살코기를 포크로 푹 찍어서 손에 쥐어주었다.

 

 

“ 먹어! 이거 다 먹기 전까지는 집에 못 가. ”

 

“ 아, 진짜 싫어! 월요일에도 발렌티나 누나랑 오느라고 먹기 싫은 거 억지로 먹었단 말이야! ”

 

“ 국물까지 다 닦아먹기 전까진 못 일어날 줄 알아라. ”

 

“ 하지만... ”

 

“ 먹으라고 했다. 안 먹으면 감독실하고 너네 집 침실에 고양이 풀어서 바퀴벌레랑 곱등이 물어오게 할 거야.

 

“ 악마. 살인자... ”

 

 

왕재수는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저항도 못하고 포크에 꽂혀 있는 살코기를 먹었다. 베르닌이 흑빵에 국물을 잔뜩 묻혀서 건네주자 멍하게 그것도 먹었다. 고양이와 바퀴벌레와 곱등이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닭다리를 밀어주자 처량한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봤다.

 

 

“ 기름... 껍질 벗기고 먹으면 안 돼? ”

 

안 돼. 껍질 다 먹어!

 

“ 나 기름기 많으면 속 울렁거려서 못 먹어. 진짜야. 거짓말 아냐, 제발 바퀴벌레는 안 돼... 어헝... ”

 

“ 그럼 기름덩어리만 떼어내. 두께 5밀리 이상만. ”

 

“ 너 이상해졌어. 밥 먹는 것도 막 간섭하고. 5밀리는 또 뭐야... ”

 

 

왕재수는 포크와 나이프로 노란 기름덩어리를 제거한 후 껍질이 붙어 있는 닭다리를 발라 먹고 나머지 살코기와 감자와 당근을 건져 먹었다. 이미 자기 몫을 다 해치운 베르닌은 왕재수가 제대로 먹는지 안 먹는지 감시했다. 건더기는 다 먹었지만 국물이 절반 이상 남아 있었다.

 

 

“ 마셔. ”

 

“ 지방질... 나트륨... ”

 

“ 고양이 풀 거야. ”

 

왕재수는 베르닌을 노려보더니 조그만 항아리를 기울여 국물을 조로록 마셨다. 매우 기분 나쁜 표정이었지만 뺨에는 발갛게 혈색이 돌아왔고 눈도 다시 반짝거렸다.

 

“ 너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월요일엔 발렌티나 누나가 반가워서 그 방에 들어갔던 거야! 이런 느끼한 거 안 사줘도 된단 말이야! ”

 

“ 누가 뭐래. 하여튼 너 아직 다 안 나은 거 같아. 온천에나 가. ”

 

“ 온천? 여기 온천 있어? 하긴 시골이니까. ”

 

“ 야, 자꾸 시골 타령 하지 마! 우리 가브릴로프 온천은 연방에서도 유명하단 말이야! 온천이 몸에 얼마나 좋은데! ”

 

“ 나도 알아! 나 온천 진짜 좋아해. 무용수들 온천이랑 마사지 사족 못 써. 예전엔 우리 아저씨들이랑 카를로비 바리에 온천하러 다녔단 말이야. ”

 

“ 여기도 고위층이랑 공무원만 가는 요양소 있어. 나 이번에 이용권 생겼는데 내일부터 일요일까지야. 너 거기나 다녀와. 바이올린 깡패랑 같이 가면 되겠네. ”

 

“ 아. 로만이랑 가면 진짜 좋겠다. 근데 로만은 여동생이 결혼한대서 못가. 그 집 대가족이라 뭔가 다들 모여서 잔치하고.. 만두 빚는대. ”

 

“ 쳇, 옛날 사람... 또 모여앉아서 만두 예쁘게 빚는 여자 타령하겠군.

 

“ 나 온천 가고 싶은데... 꼭 내일 가야 하는 거야? 다음 주는 안 돼? ”

 

“ 이용권 기간이 있어서 내일부터 일요일까지야. ”

 

“ 그럼 안 되겠네... 그냥 너 가. 난 내일 바냐한테나 가보지 뭐. 내일 좋은 거 들어온다고 했는데. ”

 

“ 앗, 안 돼! 너 그냥 나랑 가자. 온천... ”

 

“ 나야 상관없지만... 넌 금요일에 출근하잖아. ”

 

“ 휴가 얻어서 괜찮아. 그럼 짐 다 챙겨놔. 내일 아침 7시에 출발하게. ”

 

“ 어... 그렇게 빨리? 12시쯤 가면 안 돼? 바냐한테 들렀다가... ”

 

“ 안 돼! 눈 와서 길도 막히고 힘들어. 아침에 가야 물이 좋지! ”

 

“ 하긴 그렇겠다. 알았어. 신난다! ”

 

 

*     *     *

 

 

금요일 아침 7시에 베르닌은 왕재수를 데리고 온천 요양소로 떠났다. 요양소는 드넓은 검은 숲 지대에서도 북쪽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베르닌의 걱정과는 달리 요양소 가는 길은 눈이 많이 녹아서 그렇게 운전이 힘들지는 않았다. 아마 노멘클라투라 계층이 많이 이용하는 요양소라 일찌감치 제설작업을 해서 그런 것 같았다. 오히려 구시가지보다 제설이 잘 된 길도 있었다.

 

요양소에 도착하니 9시였다. 로비는 벽에 모자이크 장식도 되어 있고 조각상들도 많아서 제법 호화스러웠다. 총까지 차고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제복 차림의 경비원도 하나 있었다. 비록 문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긴 했지만. 카운터로 갔더니 주근깨투성이의 빨간 머리 여직원 하나가 껌을 씹으며 앉아서 잡지를 읽고 있었다. 베르닌이 바로 앞까지 갔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몇 분 기다리다가 베르닌은 헛기침을 했다.

 

“ 저, 요양소 예약한 사람인데요. 오늘 오전부터 일요일까지... ”

 

“ 아직 접수 시간 안 됐어요. 기다려요. ”

 

“ 언제부터인데요? ”

 

“ 10시요! ”

 

“ 눈 때문에 서둘러서 일찍 왔는걸요. 바깥도 춥고. 지금 자리에 계시는데 접수만 해주시면 안 되나요. ”

 

“ 안 돼요! 10시부터 시작이라고요. 누가 빨리 오래요? 그냥 거기 앉아서 기다려요! ”

 

“ 저... 이 로비는 너무 추운걸요. 같이 온 친구가 폐렴에 걸린 적이 있어서 추운 데 오래 있으면 안 돼요. 열쇠만 주시면 방에 들어가 있을게요. ”

 

그거야 당신들 사정이죠! 난 10시부터 근무라고요. 기다려요!

 

베르닌은 화가 나서 항의를 하려고 했다. 그때 로비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있던 왕재수가 다가와서 물었다.

 

“ 왜? 접수 지금 안 되는 거야? ”

 

“ 응. 10시부터래. ”

 

지금 해주시면 안돼요? 여기 너무 추워요.

 

여자는 짜증을 왈칵 내려고 했지만 왕재수를 보더니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말을 더듬었다.

 

“ 아... 어, 원래는 안 되는데... 로비가 춥죠. 음... 이름이 어떻게 되죠? ”

 

“ 야, 네 이름으로 예약한 거 아냐? ”

 

“ 다닐 베르닌이요. ”

 

“ 베르닌. 아, 보안위원회. 흥! 그렇군요. 당신 젊군요, 아직 여기 올 순번이 아닌 것 같은데. 흠... 그리고 당신은요? ”

 

 

베르닌은 여자의 말투가 자신과 왕재수를 대할 때 180도 다를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감탄했다.

 

“ 야스민이요. 미하일 야스민. ”

 

“ 야스민, 야스민... 앗, 당신! 맞아,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았어! 어머나! 백조의 호수...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어머! 어쩐지 오늘 꿈자리가 좋더라니! 우와, 당신 실물이 더 멋있네요! 사인 좀 해주세요! ”

 

왕재수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사인을 해 주었다. 여자는 완전히 무장 해제되어 황홀감에 잠긴 눈빛으로 어디선가 카메라를 찾아내더니 사진을 같이 찍자고 통사정을 했다. 왕재수가 승낙하자 여자는 베르닌에게 카메라를 들이밀며 빨리 찍으라고 명령했다. 베르닌은 슬슬 짜증이 치밀었지만 사진을 찍어 주었다. 여자는 뛸 듯이 좋아했고 묻지도 않았는데 술술 떠들었다.

 

 

“ 전 류바예요. 짜증내서 미안해요. 원래 오늘부터 일요일까지 저쪽 군부대에서 장교들이 여기로 신년 단합대회를 하러 오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남자친구가 1대대장 운전병이라서 같이 오면 밤에 데이트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무슨 장군이 특별 시찰을 나온다고 해서 다 취소된 거예요. 불쌍한 알릭. 주말만 고대하고 있었을 텐데.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홧김에 주말 근무는 바꿔버렸어요. 장교들 예약이 취소돼서 오늘 손님이 아무도 안 올 줄 알았거든요. 내일부터는 마르파 아줌마가 있을 거예요. 제가 얘기해 놓을게요, 잘 챙겨주라고. 세상에, 이렇게 유명한 분이 오시다니. 그것도 이렇게 미남일 줄이야!

 

 

베르닌은 너무나도 지루해서 빨리 열쇠나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싸가지 없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여자의 말은 중간에 끊는 법이 없었다. 류바가 떠드는 걸 다 들어준 후 그녀가 청하는 대로 사인도 한 장 더 해주었다. 류바가 친구들에게 전화해 자랑할 거라고 하자 왕재수는 베르닌이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환한 미소와 부드러운 눈빛을 동시에 발산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쉿, 제가 여기 와 있는 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면 안 될까요? 저는 여기 쉬러 온 거라서요. ”

 

“ 어머나, 물론이죠! 그래요, 좋아요... 저만 간직할게요! 아아, 어쩜 좋아. 난 남자친구가 있는데... 당신 너무 멋있어요. 잠깐만요, 열쇠 드릴게요. 어차피 장교들도 예약 취소했고 주말엔 두 분이랑 노인네들 몇 명밖에 손님 없으니까 좋은 방으로 드릴게요. 음, 그래... 5층으로... 장교들한테도 안 내주고 살짝 남겨뒀던 방인데... 여기 열쇠요. 식당은 1층에 있고요, 식사 시간은 8시, 12시, 6시예요. 어머, 근데 일찍 나오느라 아침도 못 먹었겠군요. 카페로 가시면 간단한 스낵이 있어요. 손님 없다고 아줌마 놀고 있을 텐데 제가 전화해 드릴게요. 온천은 저쪽... ”

 

 

류바는 시설 설명을 아주 친절하게 늘어놓았다. 심지어 카운터도 비워놓고 둘을 방까지 안내해 주기까지 했다. 베르닌은 이제껏 그렇게 좋은 방에 묵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널찍한데다 윤이 나는 나무 마루가 깔려 있었고 침대 아래에는 푹신한 카펫이 놓여 있었다. 심지어 거실까지 딸려 있었다! 요양소는 제국 시절 귀족의 별장이었기에 벽에도 모자이크 장식이 되어 있었고 그림도 많이 걸려 있었다. 화장대와 옷장, 콘솔도 있었다. 외국인들이나 묵는 고급 호텔처럼 보였다. 양쪽에 하나씩 놓여 있는 침대도 상당히 폭이 넓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베르닌과는 달리 왕재수는 가방을 바닥에 집어던지더니 근사한 가죽소파에 주저앉아 다리를 쭉 펴며 투덜댔다.

 

“ 망할 놈의 레닌. 저거 부수면 너네 국장이 나 잡아가겠지? ”

 

눈을 돌려보니 책상 위에 레닌 석고 흉상이 있었다. 베르닌은 고개를 저었다.

 

“ 괜히 그런 짓 하지 마. 가뜩이나 국장이 너 싫어하는데. ”

 

왕재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무리 봐도 레닌이 맘에 안 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또 들떠서 소리쳤다.

 

“ 우리 빨리 뭐 좀 먹고 온천 하러 가자! ”

 

 

*     *     *

 

 

베르닌은 입사 이래 처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너무나도 편안하고 즐겁게 휴양을 즐겼다. 과연 특권층 위주로 돌아가는 요양소라 그런지 시설도 좋았고 온천수는 따뜻하고 매끌매끌했다. 검은 숲에는 다른 온천 지대도 있었고 노천 온천도 몇 군데 있었지만 이곳은 급이 틀렸다. 온천에 몸을 담가본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날 지경이었다. 기껏해야 항상 피로에 절어 늦게 귀가한 후 녹물 냄새 나는 수돗물로 샤워를 하고 잠들 뿐이었으니까.

 

뜨끈뜨끈한 온천에 들어가 사지를 쭉 늘어뜨리자 온몸이 노곤해지면서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야근과 감사로 인해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왕재수는 과연 무용수 출신이라 온천에 많이 다녀본 듯했다. 온천에 좀 들어가 있더니 어딘가로 마사지를 받으러 간다며 사라졌다. 한 시간 쯤 후 다시 나타나서 베르닌을 잡아끌었다.

 

“ 야, 여기 마사지랑 스파 괜찮아. 가서 좀 받아. ”

 

“ 내가 노인네냐, 마사지를 받게. ”

 

“ 넌 좀 받아야 돼. 맨날 책상 앞에 앉아 있기만 하잖아. 척추도 휘었고 어깨도 구부정하고... 전신 마사지 좀 받아. 잘해주더라. ”

 

베르닌은 내키지 않았지만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마사지사가 여자라서 1차로 기절초풍했고 아주머니가 몸 여기저기를 꾹꾹 누를 때마다 너무 아파서 2차로 크나큰 고통을 겪었다. 비명을 질러대자 마사지사가 투덜댔다.

 

“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엄살이야! 가만히 있어! 많이도 뭉쳤네. ”

 

“ 아... 으악! 아악! 너무 아파요! ”

 

“ 여기 뭉쳐서 그런 거야! 운동 부족이구만. 나이는 젊은데 몸은 벌써 40대는 된 것 같네! 어휴, 척추도 휘었어! 쭉쭉 좀 펴 봐! ”

 

으아악!

 

 

공포의 마사지가 끝난 후 베르닌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걸어 나왔다. 왕재수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공용 풀 맞은편의 의자에 앉아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베르닌은 원망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 너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 뼈가 다 부러지는 것 같았어! ”

 

“ 시원하고 좋잖아. 근육도 다 풀리고. ”

 

“ 나랑 너랑 같냐! 넌 몸 쓰는 직업이고 난 사무직인데! ”

 

“ 그러니까 더더욱 받아야지. 난 척 보면 알아. 너 지금 심각해. 이제부터 운동해야 돼. 마사지도 꼬박꼬박 받고. 안 그러면 신체 나이는 40대로 전락한다고! 나중에 디스크도 생기고 관절도 안 좋아질 거야. ”

 

베르닌은 마사지사의 말이 생각나서 뜨끔했다.

 

“ 어쨌든... 기껏 온천해서 풀렸는데 마사지 때문에 삭신이 쑤시잖아. ”

 

왕재수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우유를 한 팩 건네주었다.

 

“ 어, 웬일로 네가 나 먹을 걸 챙겨놨냐! ”

 

“ 내가 왜! 우유 사러 갔더니 카페 아줌마가 나 예쁘다고 두 개 준 거야! ”

 

“ 하긴 그랬겠지. ”

 

베르닌은 팩을 뜯어서 우유를 마셨다. 목욕 후 마시는 차가운 우유가 꿀맛이었다. 시원하고 고소하고 달콤했다.

 

왕재수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요양소 뒤뜰로 나가더니 팔짝팔짝 뛰고 잠깐 발레 스텝까지 밟았다. 그 해맑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베르닌은 저 싸가지 없는 녀석이 틱틱대지만 않고 매일 저러고만 있으면 자신도 한결 편해질 텐데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좀 춥긴 했지만 하늘도 파랬고 햇살도 쨍해서 좋은 날씨였다. 왕재수는 숲으로 산책을 하러 가고 베르닌은 방에 올라가서 쉬기로 했다.

 

“ 너 아무리 늦어도 5시까지는 들어와야 돼. 여긴 숲속이라 금방 캄캄해지니까. 저녁도 6시에 먹어야 하고. ”

 

“ 알았어. ”

 

“ 야, 잠깐! 스웨터 바람으로 나가면 어떡하냐! 패딩 입어!

 

“ 나 패딩 없잖아! 그놈의 패딩 타령! ”

 

“ 안 돼! 패딩 입어! ”

 

베르닌은 왕재수를 끌고 자기 방으로 갔다. 이럴 줄 알고 챙겨온 여분의 패딩 재킷을 억지로 입히고 머리에 모자를 씌우고서야 놔주었다. 왕재수는 매우 툴툴거리면서 방을 나갔다. 혹시나 나가다가 패딩을 벗어 버릴까봐 베르닌은 산책로 입구까지 쫓아가서 감시했다. 왕재수가 매우 짜증을 냈다.

 

“ 어휴, KGB 앞잡이! 감시꾼! ”

 

“ 그거 벗기만 해. 고양이 불러다가 방에 풀고 바퀴벌레를... ”

 

“ 악마. 살인자! ”

 

 

*    *    *

 

 

베르닌은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갓 세탁해 볕에 잘 말려서 보송보송한 시트 위에 몸을 던지고 따뜻한 담요를 덮었다. 창문 사이로 부드러운 햇빛이 스며들어왔다. 평일에 온천욕을 한 후 오후 햇살을 받으며 푹신하고 깨끗한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잘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는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운 채 이 평온한 여유를 천천히 즐겨보려고 했지만 1분도 안 되어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두어 시간 후 베르닌은 상쾌한 기분으로 깨어났다. 보통 낮잠을 자고 나면 느껴지는 두통조차도 없었다. 몸이 살짝 쑤시기는 했지만 오히려 개운한 느낌이었다. 인생은 살만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심지어 특별 이용권을 내주게 한 스페호프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방 안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베르닌은 램프 스위치를 켰고 시계를 보았다. 5시 반이 다 되어 있었다. 그는 퍼뜩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옆 침대는 오전과 마찬가지로 비어 있었고 시트도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왕재수가 들어온 기색이 없었다. 산책하고 와서 카페에 갔나 싶어 내려가 보았다. 하지만 카페에도 식당에도, 체력 단련실에도, 마사지실에도 왕재수는 없었다. 카운터로 내려가서 류바에게 혹시 왕재수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느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 아뇨, 아까 산책하러 나간 후에 안 들어왔어요. 안 그래도 얼굴 보고 퇴근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 오늘 밤에 기차 타고 모스크바 놀러 가기로 했거든요. ”

 

“ 안 들어왔다고요? 캄캄해지는데... ”

 

 

걱정이 된 베르닌은 패딩을 입고 손전등을 챙긴 후 밖으로 나가 보았다. 이미 해는 진 후였고 어스름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아주 맑은 날씨였는데...

 

“ 길 잃은 거 아니야? 큰일이네. 도시에서 온 애라 숲에서 날 저물면 길 못 찾을 텐데. ”

 

스멀거리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베르닌은 숲으로 가보았다. 아직은 푸르스름한 빛이 깔려 있었지만 곧 캄캄해질 게 뻔했다. 침엽수들과 자작나무들 사이로 좁은 산책로가 이어져 있었지만 인적은 없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점점 어두워져서 손전등을 켰다. 15분쯤 걸어서 꽤 안쪽으로 들어왔는데도 왕재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문득 겁이 났다.

 

“ 발이라도 헛디뎠나? 여기 웅덩이도 많은데 빠진 건 아니겠지? 아니면 안으로 들어가다가 완전히 길 잃은 걸지도 몰라. 북쪽으로 가면 개간도 덜 돼서 엄청 험한데... 큰일났네. 같이 갈 걸... ”

 

베르닌은 자신을 탓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깟 낮잠 두어 시간 자 보겠다고 가뜩이나 도시에서 온데다 깊은 숲이라면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를 혼자 내보내다니 자신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갈라진 얼음 사이로 풍덩 빠져서 물속으로 가라앉던 왕재수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등줄기가 서늘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어떡하지... 어떡해, 무슨 일 생겼으면 어쩌지... 나 때문이야. 어떡하지... ”

 

눈물을 글썽이며 베르닌은 손전등을 켜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왕재수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정신없이 뛰었다.

 

“ 야! 너 어디 있는 거야! 내 말 들려? 나야, 다닐! 들리면 소리 좀 쳐봐! ”

 

눈송이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습한 바람이 점점 차가워졌다. 아무래도 다시 눈보라가 몰아칠 모양이었다. 공포에 질린 베르닌은 그제서야 요양소로 돌아가 수색 인력을 요청할 생각이 들었다. 그때 멀리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니이일! ”

 

분명히 자신의 이름이었다. 왕재수의 목소리였다. 베르닌은 환청인가 의심했지만 목청껏 왕재수를 부르자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이 들려왔다. 베르닌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잠시 후 그의 시야에 왕재수가 들어왔다. 왕재수는 커다란 그루터기 위에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두 팔로 무릎을 꼭 껴안고 덜덜 떨고 있었다. 다행히 패딩은 입고 있었다. 모자까지 그대로 눌러쓰고 있었다. 베르닌은 안도와 함께 긴장이 탁 풀리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왜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만들어! 거기서 뭐하는 거야, 안 들어오고!! 지금 몇 신줄 알아? 해도 다 졌잖아! 왜 내 말 안 듣고! 길 잃은 줄 알았잖아! ”

 

“ 다닐... 흐흑... ”

 

“ 어... 왜 그래, 왜 울어? 너... 다친 거야? 그래서 못 일어나고 앉아 있는 거야? 응? ”

 

“ 어... 흐흑... 다닐... 엉엉... ”

 

왕재수는 고개를 들어서 그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뭔가에 소스라치게 놀란 듯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엉엉 울었다. 어스름 속에서도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는 게 보였다. 얼마나 몸을 떠는지 베르닌조차 몸이 떨려올 지경이었다.

 

“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어떻게 된 거야! 다친 거냐고! ”

 

“ 어흑... 아... 으어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베르닌은 공포와 함께 걱정이 치솟아서 급하게 왕재수 곁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2미터쯤 앞으로 왔을 때 왕재수가 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안 돼! 가까이 오지 마! 그냥 거기 있어! ”

 

“ 왜 그러는 거야! 대체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왜 말을 못해! 너 혹시... ”

 

순간 온갖 나쁜 종류의 일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바냐 투레츠키의 얼굴이라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 그 자식, 그 나쁜 자식이 그런 거야? 여기 왔었어? 투레츠키, 그 자식이 나쁜 짓 한 거냐고! 겁내지 말고 말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

 

흐느껴 울던 왕재수가 그 와중에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 바냐는 왜... 무슨 소리야... 어헝... 앗,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잖아! 아악, 안 돼! 아악!

 

왕재수가 다급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일어서지도 못하고 두 손을 뻗어 마구 흔들며 베르닌에게 저리 가라고 난리를 쳤다. 그 와중에 몸이 크게 휘청했지만 악착같이 그루터기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베르닌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왕재수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려고 했다.

 

다닐, 안 돼! 큰일 나! 거기... 으윽, 으.... 무서운 거... 악!

 

“ 뭐야,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거야! 대체 뭐냐고! ”

 

배, 뱀.....

 

 

왕재수는 힘겹게 그 단어를 내뱉더니 하얗게 질려서 두 손으로 다시 얼굴을 가렸다. 금방이라도 기절해 뒤로 넘어질 것 같았다. 베르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루터기 바로 아래에 울긋불긋하고 기다란 뭔가가 보였다. 손전등을 비춰보자 얼룩덜룩하고 커다란 뱀이 도사리고 있었다. 베르닌도 순간 깜짝 놀랐지만 전등을 샅샅이 비춰도 뱀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왕재수가 비명을 지르며 베르닌을 떠미는 시늉을 했다.

 

“ 안 돼, 오지 마... 물어... 뱀이 물어... 너 물려... 으흑... 안 돼애애!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는 왕재수를 무시하고 베르닌은 손전등을 바짝 들이댔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 야, 진정해. 괜찮아. 이거 뱀 아니야. ”

 

“ 뭐가 아니야... 뱀인데... 거기 그렇게 딱 똬리 틀고 앉아서 나 막 째려보면서... 조금만 움직이면 물려고... 으흑... ”

 

“ 이거 뱀이 허물 벗어놓고 간 거야. 진짜 뱀 아니야. 괜찮아. ”

 

“ 아니야, 뱀 맞아! 막 기다랗고 미끈미끈하고 징그럽고... 흐아악!

 

반신반의하며 그루터기 아래를 힐끗 쳐다 본 왕재수는 손전등 불빛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뱀의 형체를 보고 끔찍하게 비명을 질렀다.

 

“ 아니라니까! 너 수업 시간에 안 배웠냐? 뱀 허물 벗잖아. 허물 뭔지 몰라? 껍질. 이거 그거라고! 그리고 지금 이렇게 추운데 뱀이 어떻게 나오니. 뱀은 겨울잠 잔단 말이야. 그루터기 밑에 허물 벗어놓고 간 거네.

 

베르닌은 근처에 뒹굴고 있는 나뭇가지를 주웠고 그것으로 뱀 허물을 집어서 멀리멀리 안 보이는 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왕재수는 베르닌이 나뭇가지로 껍질을 건드리는 순간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숨이 넘어가는 듯한 신음을 내뱉었고 그대로 기절해서 그루터기 뒤로 굴러 떨어졌다. 허물을 처리한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에게 갔다. 다행히 눈 더미 위로 떨어져서 다치지는 않았다. 베르닌이 어깨를 감싸서 일으키자 왕재수는 뱀이라도 와서 공격한 줄 알았는지 비명을 지르며 거세게 몸부림쳤다.

 

으아악!!!

 

“ 야, 정신 차려! 나야. 이제 그거 없어. 내가 치워버렸어. ”

 

“ 뱀 갔어? ”

 

“ 뱀 아니라니까! 껍질이라고 몇 번을 말해! 어휴, 이 바보 멍충이. 어떻게 살아 있는 뱀하고 그냥 껍데기도 구분 못 하냐! ”

 

“ 정말 뱀 아니었어? 정말 껍질이었어? ”

 

“ 그래! ”

 

“ 왜... 왜 여기 껍질 벗고 간 건데... 어헝... 뱀은 왜 그러는 건데! 이해가 안 돼... 뱀 싫어... 징그러워... 미워... 흐흑... 시골... ”

 

“ 뱀이 무슨 죄야! 뱀은 원래 숲에 살면서 때가 되면 껍데기 벗고 때가 되면 겨울잠 자러 가는 짐승이라고! 왜 애꿎은 뱀을 모함하냐! ”

 

“ 뱀은... 뱀은... 너무 징그럽고... 우욱... ”

 

왕재수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다시 흐느껴 울었다. 너무 놀라고 얼이 빠져서 그런 것 같았다. 얼굴은 하얗고 입술은 파랬다.

 

“ 흐흑... 나 진짜 뱀인 줄 알았어... 산책 마치고 막 돌아오고 있었는데... 그루터기에 걸려 넘어질 뻔 했는데 딱 보니까 눈앞에 뱀이 있잖아. 너무 무서웠어... 꼼짝도 못하고... ”

 

“ 옆으로 돌아서 왔으면 됐잖아. ”

 

“ 아니야... 옛날에 본 영화에서 독사가... 막 똬리 틀고 혀를 날름날름 하면서 째려보고 있다가 사람이 살짝 움직이니까 전광석화처럼 휘리릭 달려들어서 송곳니로 확 물었어... 그 사람 독 퍼져서 그 자리에서 막 소리 지르다 죽었어... 으흑... 뱀... 너무 무서워. 징그러워... 낼름낼름...

 

“ 하긴 너 도시에서 왔으니까 뱀 제대로 본 적 없었겠구나. 바보야, 아까 그거 독사도 아니야. 하나도 안 위험한 뱀인데. 벌목공들은 막 목에 걸고 다니고 먹이도 주고 그래. 보면 재수 좋다고. ”

 

“ 뱀이 어떻게 재수가 좋아... 무서워... ”

 

“ 저 뱀이 나오면 나무가 잘 자라고 홍수도 안 난대. 행운이래. 그러니까 너도 올해 재수 좋을 거야. ”

 

베르닌은 조금이라도 왕재수를 진정시키려고 잽싸게 덧붙였다.

 

“ 뱀 봤으니까 올해 레닌그라드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너 새해 운 좋아지라고 뱀이 껍질 놔두고 간 건데 왜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야. ”

 

“ 그런 거야? 정말 나 시골에서 나갈 수 있어? 그러라고 뱀이 두고 간 거야? ”

 

“ 그렇다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 캄캄해졌잖아. 눈도 오고. 빨리 가서 저녁 먹자. ”

 

“ 으응... ”

 

왕재수가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났다. 하지만 너무 놀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추운데 너무 오랫동안 그루터기 위에 웅크리고 있어서 그런 건지 무릎이 풀리면서 다시 주저앉았다. 눈발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할 수 없이 왕재수의 앞으로 가서 등을 들이댔다.

 

“ 야, 업혀. 가자. ”

 

“ 싫어... 나 일어날 수 있어. 내가 걸어갈 거야. ”

 

“ 지금 못 일어나잖아. 여기 얼마나 그러고 있었어? ”

 

“ 모르겠어... 해 지기 전부터... ”

 

“ 에휴... 두 시간은 그러고 있었던 거네. 몸이 얼어서 그런 거야. 일단 업혀. 가다가 괜찮아지면 걸어가. ”

 

왕재수는 두어 번 일어나보려다가 포기하고 베르닌의 등에 찰싹 업혔다. 평소와는 달리 몸이 아주 뻣뻣했다.

 

“ 진짜 놀랐나보구나. 참 이해가 안 된다니까. 귀신도 안 무서워하면서 왜 벌레랑 뱀 같은 건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

 

“ 몰라. 보기만 하면 몸이 안 움직여. 너무 무서워. 으흑... 시골... ”

 

“ 네가 자꾸 시골 타령하니까 자꾸 그런 게 나타나는 거야! ”

 

“ 아까는 나 재수 좋으라고, 시골에서 빠져나가라고 뱀이 껍질 두고 갔다더니 왜 지금은 반대로 말해? ”

 

“ 어휴... 너 재수 좋으라고 뱀이 껍질 두고 간 거 맞아! 네가 맨날 시골 싫고 무섭고 운운하니까 뱀도 지겨웠겠지! 그래서 이거 보고 빨리 그 잘난 레닌그라드인지 나발인지로 꺼지라고 두고 간 거야! ”

 

“ 둘러대는 것도 되게 못해. 책상물림... ”

 

“ 시끄러워! 배고파 죽겠네. 빨리 걸어갈 거니까 꽉 잡고 있어. ”

 

“ 나 안 무거워? ”

 

“ 안 무거워! 콩알만한 게 삐쩍 말랐잖아! 뭐가 무거워! 그때 아프고 나서 뼈만 남았잖아! ”

 

“ 이렇게 큰 콩알이 어딨어! 나 지난 주랑 이번 주에 열심히 운동해서 다시 살 좀 찌운 건데... 로만이 좋아하는 만큼은 아직 아니지만 엉덩이도 탱글탱글하게... ”

 

“ 제발 그쪽 얘기는 하지 말자! ”

 

 

*     *     *

 

 

숲을 거의 빠져나왔을 때 왕재수가 이제 걸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베르닌은 그를 내려주었다. 왕재수는 아직 좀 비틀거렸지만 팔을 잡아주자 점점 정상으로 돌아왔다. 막상 진정되자 부끄러웠는지 베르닌에게 머뭇거리며 뱀 껍질 얘기는 보고서에 쓰지 말라고 했다.

 

“ 웬일이냐 너? 지금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

 

“ 아니, 그게... 그런 것까지 쓸 거야? 이 KGB 앞잡이... ”

 

“ 부탁하면서 자꾸 욕할 거야? 그럼 써야지. 자세하게... 울었다는 거랑 나한테 업혀 온 것도 쓸 거야! 국장이 되게 좋아하겠다. ”

 

“ 안 돼... 쓰지 마. 그런 얘기 새어나가면 극장 애들 나 무시하고 말 안 듣는단 말이야. 간신히 말 좀 통하게 됐는데. 제발... ”

 

“ 넌 극장에서 체면 세우는 게 제일 중요하냐? ”

 

“ 체면 때문이 아니야! 극장이 총체적으로 엉망이라고 했잖아. 그나마 지금 할 수 있는 건 애들 실력 조금이라도 올려놓는 건데 난 걔들보다 나이도 어리고 딴 데서 온데다 심지어 낙하산이라면서 처음에 엄청 말 안 들었단 말이야. 그나마 내가 천재라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난 바지감독으로 전락했을 거라고! 내가 왜 로만이랑 사귀는 거 극장에서 티 안 내는데... 그러니까 뱀 껍질 얘기 하지 마, 응? ”

 

왕재수가 그렇게 정색을 하면서 얘기하는 게 거의 처음이었으므로 베르닌은 조금 놀랐고 감명을 받았다.

 

“ 어, 알았어. 얘기 안 할게. 근데 그거랑 바이올린 아저씨랑 사귀는 거 티 안 내는 건 무슨 관곈데? ”

 

“ 나 여태껏 극장에서는 한 번도 누구 사귄 적 없었단 말이야. 윗사람한테 특혜 받는다고 오해받을까봐. 근데 심지어 감독 돼서 예술가랑 사귀면 그 사람한테 특혜 준다고 반대로 오해받을 거 아냐. 나도 그렇게 되는 거 싫고 로만도 괜히 오해받으면 싫단 말이야. ”

 

“ 엥. 너 그런 생각도 할 줄 아는구나. 난 또 맨날 그 아저씨랑 응응응 하는 데 정신 팔려서 그런 상식적인 생각은 하지도 않는 줄 알았지. ”

 

그건 상식이 아니고 내가 싫어서 그런 거야! 제일 싫어, 상식 어쩌고 하는 거. 공산당 독재 국가에서 상식이 어딨냐, 전부 지배를 위한 세뇌... ”

 

“ 밀고! 체포! 고문! ”

 

“ 압... ”

 

 

왕재수는 입을 다물었다. 요양소에 돌아오자 이미 7시가 다 되어 있었다. 류바는 코트를 입고 가방을 든 채 현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재수를 보더니 달려와서 두 팔로 와락 포옹하고 뺨에 뽀뽀를 했다.

 

“ 아유, 5분만 더 기다리고 가려고 했어요. 기차 놓칠까봐. 수색대라도 보내야 하나 싶었네요. 길 잃었던 거예요? ”

 

“ 어... 조금이요. ”

 

“ 잘 쉬다가 가세요! 다음에 또 와요. 미리 예약만 해주면 제가 계속 있으면서 잘 챙겨줄게요. 그럼 다음에 봐요! ”

 

 

류바가 차를 몰고 떠난 후 베르닌은 왕재수와 함께 식당으로 갔다.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은 지나 있었지만 류바가 부탁해 놓은 덕에 요리사가 뜨끈뜨끈한 버섯 수프와 쇠고기 커틀릿을 준비해 주었다. 커틀릿은 좀 기름진 편이었지만 아주 맛있었다. 추위에 떨고 뱀 껍질에 놀랐던 왕재수도 정신없이 마지막 한 점까지 흡입했다.

 

저녁을 먹은 후 베르닌은 소화를 좀 시킬까 하고 운동실로 내려가 역시 온천을 하러 온 할아버지들과 탁구를 좀 쳤다. 왕재수는 스트레칭을 하고 근력 운동을 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눈 깜짝하지도 않고 푸시업과 스쿼트를 연속으로 몇십 개 해내는 데 1차로 놀라고 그 야윈 애가 들어 올리는 아령의 무게에 2차로 놀랐다. 저런 녀석이 뱀 껍질을 보고 마비되고 바퀴벌레를 보고 기절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왕재수가 ‘오늘은 피곤하니까 이 정도로 몸만 살짝 풀고 들어가서 자야겠어’라고 했을 때 3차로 놀랐다. 그게 몸만 살짝 푼 거라니!!!

 

베르닌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왕재수는 이미 곯아떨어져 있었다. 거실에서 잘까 하다가 어차피 침대도 따로 떨어져 있고 왕재수가 아플 때 자기 집에 와서 잔 적도 있으므로 뭐 어떠냐 싶기도 했다. 침대로 기어들어가자 분명 낮잠을 잤는데도 금세 졸음이 쏟아졌다. 베르닌은 불을 끄고 1분 만에 잠이 들었다. 온천은 참 좋다고 생각하면서... 내일도 종일 온천을 오락가락하면서 쉬고 맛있는 걸 먹으며 또 쉴 생각을 하니 잠결에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     *     *

 

 

새벽에 베르닌은 탕 하는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잠시 후 창 너머로 어디선가 불꽃이 반짝 일더니 다시 한 번 탕 소리가 들렸다. 놀란 베르닌은 후다닥 램프를 켰다. 제일 먼저 옆 침대를 보았다. 비어 있을까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다행히 비어 있지 않았다. 왕재수도 소리를 들은 듯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아 있었다. 멍하게 베르닌을 쳐다보면서 웅얼거렸다.

 

“ 이게 무슨 소리야? ”

 

“ 총 소리 같아. ”

 

“ 사냥하는 거야? 숲이잖아... ”

 

“ 아니야, 지금 사냥철 아니야. 나가봐야겠어. 너 여기 꼼짝 말고 있어. ”

 

“ 어딜 가려고? 왜 나가! ”

 

“ 총 소리 났잖아. 무슨 일인지 가봐야지. ”

 

“ 네가 왜... ”

 

“ 나 보안요원... 공무원... ”

 

“ 가지 마. 뭔지 모르지만... 가지 마. ”

 

 

왕재수가 아직도 잠이 덜 깬 채 중얼거렸다. 베르닌이 일어나서 옷을 입자 뭔가 심각한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무릎으로 기어와서 소매를 잡고 늘어졌다.

 

 

“ 너 총 없잖아. 가지 마. 여기 있어. ”

 

“ 아니야, 가봐야 돼. 여기 지금 노인 몇 명밖에 없잖아. ”

 

“ 경비 아저씨 있었어... ”

 

“ 경비원은 1층에 있었잖아. 우리 층에는 없단 말이야. 아무 일 아닐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좀 보고 올게. 문 잠그고 있어. ”

 

“ 아무 일 아니라면서 왜 문 잠그고 있으라 해. ”

 

“ 그래야 네가 공연히 무서워하지 않지! ”

 

“ 나는 네가 안 갔으면 좋겠어. ”

 

“ 그냥 복도로 나가서 살짝 보고만 올게. ”

 

“ 그치만 진짜 총 소리였으면 어떻게 하려고... ”

 

“ 괜찮아. 여기 골프채도 있네. 이거 들고 갔다 올게. ”

 

“ 아니야, 그러는 거 아니야. 가면 안 돼. ”

 

 

왕재수가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매달렸다. 감겨 있는 눈을 보니 아직도 비몽사몽인 것 같았다. 왕재수는 원래 새벽에 깨우면 절대 못 일어나는 타입이었다. 그 사이에 환청인지는 모르지만 바깥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나고 발소리도 나는 것 같아서 마음이 급해진 베르닌은 램프 불을 끄고 왕재수를 도로 침대로 밀어 눕히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 너 지금 꿈꾸는 거야. 아무 데도 안 가. 빨리 자라... ”

 

“ 어... 아니야. 너 가지 마. 그때도 내 말 안 들어서 강에 빠져놓고... ”

 

“ 응, 안 가. 너 꿈꾸는 거야. 얼른 자. ”

 

 

왕재수가 도로 잠드는 것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골프채를 휘어잡고 살며시 나갔다. 문을 닫은 후 복도로 살금살금 발걸음을 내디뎠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벽에 달린 작은 램프만 깜박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잘못 들었든지 아니면 밀렵꾼이 숲에서 사냥을 하는 소리였던 게 분명했다. 혹시나 해서 그는 직각으로 방향을 꺾어 다른 쪽 복도 끝까지 가보았다. 비어 있었다. 다른 객실 문도 모두 닫혀 있었다. 다행이다 싶어서 그는 몸을 돌렸다.

 

 

그때 그는 희미하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왼쪽 목덜미 쪽으로 차디찬 바람이 불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 바람이라니... 대체 어디서... ”

 

 

그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복도 왼쪽에는 창문들이 있었다. 그리고 창문 하나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간밤에 내린 눈이 창틀에 쌓여 있었다. 그리고 거기 손자국과 발자국이 움푹 패여 있었다. 흠칫 놀라 복도 바닥을 찬찬히 살폈다. 발자국이 이어지고 있었다. 눈 녹은 물이 고여 있었다. 잠시 베르닌은 그게 자기 발자국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슬리퍼는 바짝 말라 있었다.

 

‘ 누가 바깥에서 들어온 거야... 창문을 넘어 왔어. 하지만 누가! ’

 

 

그때 복도 저편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악!

 

 

그 목소리는 낯익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숲에서 들었던 끔찍하고 다급한 비명 소리였다. 베르닌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화들짝 놀랐고 발을 구르며 복도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미셴카! 미하일!

 

목청이 터져라 왕재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베르닌은 미친 듯이 뛰었다. 방문을 밀어붙였다. 잠겨 있었다. 분명히 그는 문을 잠근 적이 없었다. 왕재수는 그때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야! 내 말 들려? 대답해! 미하일! 미하일!!!!

 

 

대답이 없었다. 적막뿐이었다. 베르닌은 발을 굴렀다. 십 미터 쯤 뒤로 물러났다. 전속력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방문을 들이받았다. 문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열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들이받았다. 쾅 하고 문이 열렸다. 그는 옆으로 고꾸라지며 쿠당탕 넘어졌다. 하지만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베르닌은 정신없이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손을 휘저어 스위치를 찾으려고 애쓰면서 그는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미하일! 미하이이일!

 

 

손에 스위치가 닿았다. 막 스위치를 찰칵 하고 올리려고 했을 때 등 뒤에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서는 순간 뭔가 무거운 것이 머리를 내리쳤다. 베르닌은 비틀거렸지만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고함을 지르려고 했을 때 다시 머리에 둔중한 타격이 느껴졌다. 그는 입을 벌렸고 숨을 몰아쉬었고 한 발짝 나아갔다. 그리고 암흑이 내리덮였다.

 

 

   

 

 

FIN

2015.3.2 ~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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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는 14편에서..

 

특권층이 이용하는 요양소는 실제로 소련 시절에 많았다. 인민이 이용하는 요양소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용권을 받아서 요양소에 가는데, 이렇게 온천과 스파가 있는 곳도 있고 치료를 받는 곳도 있다. 당시 특권계층(노멘클라투라), 당 간부, 고위층 등이 이용하는 요양소는 물론 더 호화스러웠다.

 

베르닌과 왕재수가 간 온천도 아주 호화스러운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준급 시설은 갖춘 곳이다. 이 13편을 쓸 때 카를로비 바리의 온천에 갔던 것을 좀 떠올리면서 썼다. 물론 같지는 않지만. 블로그 내에서 '카를로비 바리'로 검색하면 그 동네 포스팅들을 많이 볼 수 있다.

 

..

 

추위 등으로 식료품 공급이 중단되고 품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나도 옛날에 러시아에 있을 때 겪은 일이다. 그땐 뭣때문인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동네 전체에서 양파를 구할 수가 없었다. 평소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양파가 막상 구할 수 없게 되자 왜 이렇게 쓸 데가 많은지... 모든 음식에 양파가 들어가는 거였다!!! 그래서 엄청 고생하고, 엄청 비싸게 주고 양파를 샀는데 나중에 다시 제 가격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소련 시절엔 원래 식료품이나 물자가 더 귀했고 줄 서서 구매를 해야 했으니 더 피곤했을 듯하다. 물론 이것도 지역차가 있긴 했지만.

 

..

 

'기술적인 문제'(쩨흐니체스까야 쁘라블레마, 또는 쩨흐니체스까야 쁘리치나)로 휴무라는 문구는 러시아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문구이다. 보통 예고 없이 문을 닫거나 뭔가가 작동이 안되거나 담당자가 없을때 써먹는 만능 문구임.. (이 문구 너무너무 싫다!)

 

..

 

류바가 처음에 10시부터 접수니까 안된다고 꼬장부리는 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러시아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인데 소련 시절엔 공산주의/사회주의 체제라 더욱 심했다.

 

..

 

기존 서무 에피소드들은 한 편 당 완결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번 13편은 좀 다르게 끝냈다. 그러니 뒷이야기는 14편을 봐야 한다. 그 이야기는 다음주에..

 

..

 

댓글은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

 

 

:
Posted by liontamer
2015. 3. 19. 09:32

색동 전구들 깜박깜박 russia2015. 3. 19. 09:32

 

 

2월 21일,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공연 시작 전에 근처 거리 산책하다가 찍었다. 색동 전구들 앙증맞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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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liontamer
2015. 3. 17. 14:07

한겨울의 까마귀 russia2015. 3. 17. 14:07

 

 

지난 2월 14일, 페테르부르크. 미하일로프스키 공원.

날이 워낙 흐려서 그렇게 보이긴 하지만, 흑백으로 찍은 건 아니고.. 어쩌다보니 흑백처럼 나왔다.

춥고 습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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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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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16. 13:07

눈밭의 아기와 새 russia2015. 3. 16. 13:07

 

 

지난 2월 14일, 페테르부르크.

 

힘든 월요일이라.. 마음의 위안을 위해 :)

 

:
Posted by liontamer

 

 

 

오늘 메모에서 적은 대로(http://tveye.tistory.com/3569), 2015년 달력 만들었다. 올해는 때를 좀 놓쳐서.. 올해 4월부터 시작했더니 내년 6월까지라 이게 올해 달력인지도 좀 애매하긴 하지만.

 

포토북이나 달력 만들어주는 사이트에서 발레 화보들 편집해서 만들었다. 모레쯤 배송될 듯.

사진들은 웹에서 얻은 게 대부분이라.. 배포는 절대 하지 않고 그냥 나 혼자 집에 걸어놓고 보려고..(소심 ㅠㅠ)

매월 아래 위 두 장씩이다.

오늘은 너무 피곤하고 귀찮아서 대충 비슷비슷한 레이아웃으로 사진 몇장씩 집어넣고 재빨리 해치웠다. 갈수록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왜 이렇게 어깨랑 손가락이 아프지 ㅠㅠ

 

화보의 주인공은 모두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나름대로 월별 주제도 있긴 있지만... 없는 것도 있다. 사진들이 크기나 형태가 천차만별이라 레이아웃 맞추는 게 좀 귀찮아서 크기 맞는 것들끼리 짜맞추다 보니.

 

월요병으로 몸부림치는 힘든 일요일 밤이니 마음의 위안을 위해 달력 중 몇 장만 이미지 올려본다.

 

 

 

 

 

 

 

 

 

 

 

 

** 추가 : 도착한 달력 사진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87

 

** 몇년 전에 만들었던 포토 달력은 아래

http://tveye.tistory.com/608 : 2010년 러시아 달력
http://tveye.tistory.com/401 : 2009년 먹거리 달력

.. 이후에도 거의 매년 만들긴 했는데 따로 포스팅은 안 했다.

:
Posted by liontamer

 

어느 새 가브릴로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본편보다 더 많이 써버려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서무의 슬픔 시리즈.

 

12편은 2월에 러시아에 다녀온 후 썼다. 0편에서 11편까지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웃자고 쓴 농담거리들인데, 12편도 물론 농담이긴 하지만 분위기는 좀 다르다. 문체나 인물에 대한 접근방식도 이전 에피소드들과는 약간 다르게 썼다.

 

12편에서는 가브릴로프 KGB 지국에 모스크바 본부에서 보낸 특별 감사관들이 들이닥친다. 서무인 베르닌은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암담하기만 한데...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신년이 되어도 베르닌의 격무는 계속되고. 그러던 어느날 모스크바 KGB 본부에서 특별감사를 나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려온다. 서무인 베르닌에게 크나큰 시련이 닥쳐오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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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2

 

 

 

 

서무의 슬픔

-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1월 하순으로 접어들 무렵 날벼락이 떨어졌다. 모스크바 KGB 본부에서 특별 감사를 나온다는 것이었다.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는 발칵 뒤집혔다. 보안위원회 내에 감사부서가 있기는 했지만 사안이 중대했으므로 스페호프 국장이 직접 회의를 소집했다. 각 부서장과 선임 직원, 그리고 각 부서 서무들을 모두 호출했다.

 

스페호프는 한 시간 동안 사안의 중대성에 대해 떠들었다. 감사부서에서 모든 준비 작업과 감사 실사를 총괄하되 부서장들은 3일 내로 최근 5년간의 모든 기밀 서류철과 공개 서류철들을 재분류하고 정리할 것이며 혹시라도 누락된 서류가 없는지 꼼꼼하게 살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회계부서에는 특명을 내려 모든 장부와 영수증들을 밤새 재확인하도록 했다. 서무들에게는 5년치 근태기록부와 출장보고서들, 업무추진비 영수증들과 직원 검진 및 요양 내역들, 모든 캐비닛 열쇠와 자물쇠 상태를 점검하고 10년치 생산 문서 목록과 자료실에 보관된 실제 문서를 대조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 모든 작업을 3일 내에 완료해야 했다. 스페호프는 이것으로도 모자라 방송실로 갔다. 국장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각 담당 직원들은 모두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서류철과 장부, 기밀 자료들을 완벽하게 점검해야 하며 앞으로 사흘간은 감사 준비 업무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입사하고 2년을 갓 넘긴 베르닌은 여지껏 외부 특별 감사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왜 그렇게 모두가 난리법석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선배들과 다른 부서 서무들은 모두 한숨을 푹푹 쉬었고 그 즉시 달려가 서류철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베르닌이 멍해져서 그 난리를 지켜보고 있는데 20년차인 발따예프가 혀를 찼다.

 

“ 또 시작이구먼. 이번엔 또 누굴 잡아 죽이려고. 에휴... ”

 

“ 그게 무슨 뜻인가요? 잡아 죽이다니요? ”

 

“ 자네 감사 안 받아봤나? ”

 

“ 작년에 저희 내부 정기 감사는 받았죠. 그때처럼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안 그래도 아까 국장이 업무추진비 영수증이랑 근태기록부, 출장보고서 같은 거 챙기라던데 그건 작년 내부 감사 때 다 한 번씩 체크했었거든요. 그거 하느라 이틀 밤 샜는데 그나마 그때 해놔서 지금은 일이 한결 수월하겠네요. 그때 감사부장님이... ”

 

“ 어이구, 이 순진한 책상물림 같으니... 내부 감사는 우리끼리 하는 거니까 그냥 짜고 치는 거고! ”

 

“ 짜고 치다니요! 저 그 때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감사부장님도 저 불러서 자료 제대로 정리해야 한다고 얼마나 설교를 하고... 선배들 근태기록부랑 휴일근무내역서도 더 제대로 작성해줘야 한다고 귀가 닳도록... ”

 

“ 자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먼. 외부 감사는 차원이 달라. 그것도 모스크바 본부에서 나오는 거라니... 감사철도 아닌데 뜬금없이 웬 특별 감사! 그건 다 목적이 있는 거야. 아예 뭔가를 정해놓고 털기 위해 나오는 거라고. 맘먹고 달려들면 뭔들 안 걸리겠나.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게 어디 있다고! 그게 뭔지 애초부터 알면 다행인데, 망할 놈들이 결코 처음엔 그걸 안 가르쳐주거든. 일단 며칠 동안 우리 전체를 탈탈 털고 들들 볶은 다음에 진을 다 빼놓고 본론으로 들어간단 말이야. 그리고는 쾅!

 

쾅!은 뭔가요? ”

 

“ 어이구 답답아... 뭐긴 뭐야. 몇 명 잡아다 죽이는 거지. 지적! 징계! 감봉. 직위 박탈. 정직. 해임. 뭐 그런 거란 말이야! 잘못한 일에 대해 책임을 묻는 거지! ”

 

“ 그럼 그건 윗분들한테 해당되는 거 아닌가요? 저희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잖아요. 특히 저요. 저는 완전 말단이잖아요. 매일매일 꼬박꼬박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서류도 다 만들고... 제가 결정한 일은 하나도 없는데요. ”

 

“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겠지. 무식하면 편하다니까. ”

 

“ 저 안 무식하다고요! 다들 잊고 계시는데 저 우리 시립 고등학교 전체 2등 졸업이고요! 모스크바 대학교 법학과를... ”

 

 

발따예프는 혀를 차며 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자기 자리로 가 버렸다. 미친 듯이 자기 캐비닛을 뒤지더니 지저분하게 엉켜 있던 서류들을 꺼내 펑펑 소리를 내며 구멍을 뚫고 표지에 끼워 노끈으로 묶었다. 그리고는 표지에 연도와 제목을 써 갈기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배들이 모두 비슷한 짓을 하고 있었다. 몇몇은 몇 년도 무슨무슨 서류가 없어졌다고 울상을 짓다가 누렇게 바랜 종이뭉치를 어디서 찾아오더니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다 쓰더니 서무인 베르닌에게 79년도 문서 접수대장과 발송대장, 보안위원회 직인 상자를 찾아오라고 명령했다.

 

“ 그거 지금 문서 위조하는 거 아닌가요? 벌써 3년 전 날짜잖아요. 그때 문서 없어졌다고 지금 3년 전 날짜로 새로 만드는 거잖아요. 걸리면... ”

 

“ 이 멍충아, 어떻게든 만들어놔야 하는 거야! 서류가 비면 그 즉시 끝장이야! 당장 대장이랑 상자나 가져와! 너도 빨리 네 서류 확인해보고! ”

 

“ 저요? 저는 입사 후 꼬박꼬박 하루도 안 빼먹고 제 서류들은 전부... ”

 

“ 흥,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너 혼자 아무리 꼬박꼬박 다 해놓으면 뭐해! 너 입사한지 2년 좀 넘었지? 감사는 최소 3년에서 5년치를 본다고! 너 전임자가 해놓은 서류들도 다 봐야 한단 말이야! 근데 네 전임은... 그렇지, 그 뻔뻔스러운 바냐 투레츠키! 서류 잘 찾아보는 게 좋을 거야. 바냐 그 자식 엄청 뺀질거렸거든. ”

 

“ 투레츠키요? 그 사람은 저 들어오기 전에 퇴사했는데... ”

 

“ 그러니까 더 문제지! 그놈이 빼먹은 서류들이 뭔지조차 알 수 없을 테니. 하여튼 잘 해보라고! ”

 

 

베르닌은 일단 스페호프가 지시한 모든 사항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다. 그나마도 근태기록부나 영수증, 업무추진비 따위는 매일같이 확인해온 사항들이라 좀 나았다. 최악은 10년치 생산 문서 목록과 자료실의 실제 문서를 대조하는 일이었다.

 

그는 다른 서무들과 함께 손전등을 들고 문서 보관실로 내려갔다. 먼지가 풀풀 피어오르고 각종 벌레들이 출몰하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왕재수였다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기절했을 것이 분명했다. 유경험자인 대외교류부 서무 알렉산드라가 친절하게도 미리 준비한 마스크들을 나눠주지 않았다면 탁한 공기 때문에 잠시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베르닌은 마스크를 쓰고 손전등을 비춰가며 목록과 문서철들을 대조하기 시작했지만 한 시간쯤 지나자 눈알이 빠질 것 같았고 산소도 부족해서 너무나도 괴로웠다. 이미 다른 서무들은 견디지 못하고 하나하나 밖으로 나간 후였다. 베르닌은 하필 비밀서류가 엄청나게 많은 감시분석부 소속이었다. 그 말은 문서고 안쪽에 있는 기밀 문서고에도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두 개의 묵직한 자물쇠를 각각의 열쇠로 열었다. 빨간 줄이 쳐져 있는 기밀 문서고의 문지방을 넘었다. 먼지가 풀풀 피어올랐다. 밀랍 봉인이 찍혀 있는 서류철들의 제목과 목록을 대조했다. 30분쯤 지났을 때 베르닌은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아마 잠깐 정신도 잃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퍼뜩 눈을 떴을 때 그는 책꽂이 사이에 주저앉아 있었고 먼지 구름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그는 반쯤 기어서 기밀 문서고를 빠져나왔다. 하마터면 자물쇠 채우는 것도 잊어버릴 뻔 했다.

 

 

그는 헉헉거리며 뒤뜰로 갔다. 배추밭 근처로 가서 맑은 공기를 정신없이 들이마셨다. 먼저 나와 바람을 쐬고 있던 알렉산드라가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더니 물을 한 컵 주었다.

 

“ 다냐, 문서고에 그렇게 오래 들어가 있으면 큰일 나. 공기가 얼마나 안 좋은데. 거기서 옛날에 서무 하나가 쓰러져서 식물인간 된 적도 있대. ”

 

“ 식물인간이요? 대체 왜! ”

 

“ 왜긴 왜야. 지금처럼 감사 기간에 자료 찾으러 갔는데 아무리 찾아도 문서가 안 나오니까 한참 뒤지다가... 산소 부족에 지하에서 올라오는 유독 가스 때문에 질식해서. 10년인가 병원에 누워 있었을 걸. ”

 

“ 그게 언제예요? 스탈린 시절인가요? ”

 

“ 스탈린은 무슨. 지금처럼 똑같이 브레즈네프 시절이지. 아마 60년대 말이었을 거야. 하여튼 감사는 나빠. 아랫사람들만 죽어난다니까. 특히 서무. 우리 부서는 후배 충원이 안돼서 난 벌써 6년째 서무야. 정말 죽겠어. ”

 

“ 그래도 대외교류부는 국장이 총애하는 부서잖아요. 서류도 우리만큼 많지 않고. ”

 

“ 총애하면 뭐해, 그거야 다 선배들 몫이지. 난 6년차인데도 우리 부서에선 막내라니까! 정말 지겨워. 언제까지 남의 근태기록부 작성해주고 초과근무내역서 만들어주고 업무추진비 대신 정산해줘야 하는지! 자료란 자료는 다 수합해야 하고... 감사도 그래! 정작 담당자들은 다 따로 있는데 결국 자료 만들고 감사실 올라가는 건 서무들이라니까! ”

 

“ 감사실에도 저희가 올라간단 말이에요? 어떻게 그러나요? 저희는 개별 업무에 대해서는 모르는데 질문하면 답변을 할 수가 없잖아요. ”

 

“ 그게 그렇게 되더라고. 다들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거든. 추궁당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그 사람이 징계를 받거든. 그러니까 만만한 서무가 올라가서 당하는 거야. 이거 진짜 충고인데, 다냐. 그쪽 부서 감사받을 때 너한테 자료 가지고 올라가라 하면 정말 웬만하면 못 간다고 버텨. 안 그러면 징계 100프로야. 심지어 네 전임 서무는 그 악명 높은 바냐 투레츠키... ”

 

“ 대체 투레츠키가 어땠길래 다들 그런 말을 하죠? ”

 

“ 그런 서무는 세상에 없었지. 바냐는 아무 것도 안 했어! 얼마나 뺀질거렸는지. 국장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지. 설교를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결국 잘라버렸어. ”

 

“ 인사기록부에는 자진 퇴사한 걸로 되어 있던데요? ”

 

“ 말이 자진 퇴사지. 국장이 내쫓았어.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고 당장 사직서를 쓰든지 아니면 총알을 맞든지 둘 중 하나라고 협박했다니까. ”

 

“ 으악, 그건 살해협박... ”

 

“ 근데 아무도 투레츠키 편을 안 들었다는 게 더 놀랍지! 다들 국장이 오죽하면 그랬겠냐고 했다니까! 국장 재수 없는 거 다 알잖아, 그런데도 다들 이해가 간다는 분위기였어. ”

 

“ 그래서 제가 전에 술자리에서 제 전임자 얘길 하니까 다들 화제를 돌렸군요. ”

 

“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이름이거든. 최고의 뺀질이... 젊은 애가 어찌나 뺀질대는지. 걘 감사실에서도 빠져나갔어. 유일한 인물이지, 감사실에 불려 올라가서도 징계 안 받고 무사했던 서무는. ”

 

“ 어떻게 국장이 그렇게 들들 볶는데도 버틸 수 있었을까요? 전 이해가 안 되네요.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진짜 장난 아니잖아요. ”

 

“ 몰라. 나도 이해 안 돼. 아무도 이해 못 해. 그래서 존경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니까. 하여튼 전설의 서무 바냐 투레츠키야. ”

 

“ 그 사람 지금은 뭐해요? ”

 

“ 글쎄. 퇴사하고 나서 어디 무슨 신문사 같은 데 들어갔다가 또 쫓겨났다던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 ”

 

베르닌은 국장의 장광설을 무시하고 뺀질거릴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바냐 투레츠키는 가히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절반이라도 닮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 날 그는 자정이 다 되어 퇴근했다.

 

 

 

*     *     *

 

 

 

감사가 시작되자 베르닌은 발따예프와 알렉산드라의 경고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생생히 알게 되었다. 본부에서 나온 감사관은 총 세 명이었는데 그 중 직급이 가장 높은 총괄 감사관은 발렌티나 푸카레바라는 나이 지긋한 여자였다. 꼬챙이처럼 마른데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무시무시한 인상이었고 목소리 또한 카랑카랑했다. VIP만 모시는 접견실이 특별 감사 사무실로 꾸며졌다. 국장실 바로 맞은편이었다. 의전을 중시하는 스페호프는 공항까지 직접 마중을 나갔고 푸카레바와 실무 감사관 두 명을 깍듯하게 모셔왔다. 그러나 국장이 근사한 오찬을 함께 하며 분위기를 파악해보려고 했을 때 푸카레바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감사관들에게 접대나 향응을 제공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고 대꾸했다. 점심이든 저녁이든 자신들이 알아서 해결할 테니 다시는 함께 밥이나 술을 먹자는 말을 꺼내지도 말라고 경고했다.

 

실무 감사관들 또한 푸카레바 못지않게 고압적이고 무시무시했다. 아모소프는 베르닌 또래의 젊은 남자였고 카마로프스키는 40대 초반의 중견 감사관이었는데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악질이었다. 도착하고 30분도 되지 않아 첫 번째 요구 자료 목록이 날아왔다. 베르닌은 감시분석부 해당 목록을 보고 기절초풍했다. 설마 정말 10년치 자료를 요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장부와 기밀 서류를 모두 뒤져 통계자료를 계산해 내야 했다. 심지어 기한은 다음날 오전이었다. 서무 관련 자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선배 직원들의 업무와 관련되어 있었다. 베르닌은 선배들에게 가서 요구 자료 목록을 보여주고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수합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다들 꽁무니를 뺐다.

 

 

“ 그건 서무가 해야지! ”

 

“ 아니에요, 이건 전부 내용을 알아야 만들 수 있는 자료들이라고요. 심지어 감사 자료잖아요, 내용이 정확해야 하는데 제가 어떻게 만듭니까! ”

 

“ 당연히 서무가 하는 거야! 자료 취합은 서무 담당이잖아! ”

 

“ 하지만... ”

 

“ 지금 그러고 있는 시간에 자료 찾겠다! ”

 

“ 아아, 정말 너무 하시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밑 자료들은 찾아올 테니 내용 확인과 작성은 각자 담당자들이 하셔야 해요! ”

 

 

베르닌은 별 수 없이 10년치 장부를 뒤졌다. 기밀 문서고에 다시 갔다. 밤을 새서 밑 자료들을 모두 모았다. 다음날 오전에 담당자들에게 내용을 공유했다. 담당자들은 툴툴대면서도 어쨌든 자료를 작성했다. 취합이 완료되었을 때 감시분석부장이 그에게 자료를 제출하고 오라고 했다.

 

 

하지만... 이건 거의가 표트르 키릴로비치와 세르게이 드미트리예비치 업무 관련 자료인데요... 저에게 질문이라도 하면 하나도 대답을 못할 텐데... ”

 

“ 일단 제출만 하고 오는 거야, 이 답답한 친구야! 자료 뒤적거리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감사관이 전화를 할 거야. 그때 담당자가 올라가면 된다고! 썩 가서 제출하고 오지 못해! 벌써 마감 시간이 다 됐잖아. 자료 늦게 제출하면 미운털 박혀서 엄청 괴롭힌단 말이야! ”

 

베르닌은 울며 겨자 먹기로 수십 개의 서류철과 100페이지가 넘는 자료뭉치를 들고 감사실로 올라갔다. 푸카레바는 예카테리나 여제처럼 창가에 앉아 다른 서류철을 들춰 보느라 그에게는 눈조차 돌리지 않았다. 카마로프스키가 딱딱거리며 말했다.

 

 

그 책상 위에 내려놔요!

 

“ 예! ”

 

 

베르닌은 서류철들을 먼저 쿵 하고 내려놓은 후 자료 뭉치도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손등으로 이마의 땀방울을 닦으며 인사를 하고 막 나가려는데 카마로프스키가 그를 멈춰 세웠다.

 

“ 가긴 어딜 가요! 감시분석부. 여기가 가장 요주의 부서야! 목록 대조 좀 해봐야겠어. ”

 

카마로프스키는 15분 동안 그를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세워놓은 채 제출된 서류철과 요구 목록을 대조했다. 그러더니 자료 뭉치를 펄럭펄럭 넘기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이건 뭐야. 어째서 이런 중대한 사안이 감시분석부장 전결로 끝난 거지? 심지어 일상감사마저 생략했군! 이건 지국장까지 결재를 받아야 할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스크바 본부에서도 승인을 받아야 했어! 당장 그 이유를 말해 봐요!

 

“ 어... 저, 그건 제 담당 업무가 아니라서요. 그게... 그건 표트르 키릴로비치, 그러니까 두블린스키가 담당... ”

 

“ 그럼 담당자가 왔어야지! 당신은 대체 뭔데! ”

 

“ 어... 전 서무... ”

 

“ 좋아, 그럼 이건 두블린스키인지 뭔지 하는 작자가 직접 올라와서 답변하라고 하고. ”

 

“ 예, 지금 불러오겠습니다. ”

 

가긴 어딜 가!

 

 

카마로프스키는 구내 전화번호부를 훑더니 수화기를 들었다. 곧장 두블린스키를 호출했다. 그리고는 다시 자료 뭉치를 뒤졌다.

 

 

“ 얼씨구, 잘하는 짓이군. 이것도 당국 승인이 필요한 건데 내부 결재로만 끝내버렸어. 77년이라. 그때 한참 여기서 말 안 들을 때였지. 어디 한번 답변해 보시지! ”

 

“ 저, 77년이라면 저는 입사 전인데요. 이건 세르게이, 그러니까 불라노프 담당 업무... ”

 

“ 대체 당신이 아는 건 뭐야! 어디서 이런 머저리를 올려 보내서 내 시간을 낭비하는 거야! 당장 담당자 불러와! ”

 

“ 예... 구내 전화번호는 475... ”

 

“ 필요 없어! 답답해빠진 당신 얼굴 보고 있으니 더 짜증이 나! 그냥 내려가서 담당자 올라오라고 해! ”

 

 

베르닌은 얼이 빠진 채 감사실을 나갔다. 복도에서 두블린스키와 마주쳤다. 두블린스키는 ‘그것도 하나 제대로 답변 못해서 날 호출하냐!’ 하고 주먹을 흔들어대며 들어갔다. 사무실로 가서 불라노프에게 감사관 얘기를 전달하자 그 역시 벌컥 화를 냈다.

 

 

“ 이 천치야! 대충 대답하고 뭉갰어야지! 꼭 선배까지 올라가게 만들어! ”

 

“ 하지만 저는 정말 하나도 모르는 내용을 묻는단 말이에요. 빨리 올라가보세요. 감사관이 화냈어요. ”

 

“ 에잇, 정말 아무짝에 쓸모없는 자식 같으니! ”

 

오후에 감사실에서 전화가 왔다. 추가 자료를 왕창 요구했다. 주로 오전에 카마로프스키가 질문했던 내용들과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 더해 서무 관련 서류도 추가되었다. 외부 발송 문서 목록들이었는데 문제는 그게 몇 년치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는 거였다. 아무리 찾아도 딱 78년에서 79년 목록이 비었다. 울상이 된 베르닌이 캐비닛을 몽땅 어지르고 있는데 발따예프가 혀를 찼다.

 

“ 찾아봤자야. 78년, 79년. 그 투레츠키 자식이 서무일 때잖아. 그럼 목록 없어. ”

 

“ 뭐라고요? ”

 

“ 목록만 없나, 서류도 없어. 알아서 해결해. ”

 

“ 어떻게 그럴 수가... ”

 

“ 뭘 어떻게 그래. 위조를 하든 만들어내든 이실직고하든. ”

 

“ 그건 그 당시 담당 부서장이... 아, 지금 정보부장. 그분이 올라가서 설명을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

 

“ 웃기고 있네. 감사장에 간부가 왜 올라가냐, 그것도 전임 부서장이. 이건 지금 담당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야. 그러니까 자네! 알아서 하라고! ”

 

 

베르닌은 온몸의 피가 다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문서 수발을 총괄하는 총무부서로 내려갔다. 4년 전 발송철을 몽땅 뒤졌다. 우편요금 영수증철을 모조리 뒤져서 간신히 당시 감시분석부에서 발송한 문서들의 제목과 날짜, 수신처를 찾아냈다. 그 목록들을 만들기 위해 다시 밤을 샜다.

 

 

다음날 아침에 목록을 제출하자 무시무시한 카마로프스키는 왜 이렇게 자료를 늦게 가져왔느냐고 불호령을 내렸다. 감사관을 뭘로 보는 거냐고 야단을 쳤고 징계를 받고 싶어 안달이 났느냐고 비꼬았다. 옆에서 새파랗게 젊은 아모소프가 맞장구를 쳤다. 베르닌이 쭈뼛거리며 대답을 못 하자 더욱 무섭게 혼냈다. 스페호프는 아무것도 아닐 지경이었다. 목구멍까지 자기는 죄가 없고 전임 서무가 목록을 안 만들었다는 말이 밀려나왔지만 어쨌든 누워서 침 뱉기였으므로 꾹 참았다. 계속 야단을 맞다가 추가 요구 자료를 또 잔뜩 떠맡고 내려왔다.

 

 

 

*    *    *

 

 

 

이러한 일이 반복되었다. 나흘째가 되었을 때 베르닌은 수면 결핍과 극심한 스트레스, 감사관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가 요구 자료와 추궁에 시달리든 말든 동료 그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고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너무나 시달린 나머지 헛것을 보기 시작했다. 간신히 눈을 붙였을 때도 카마로프스키의 호통과 아모소프의 이죽거림, 예카테리나 여제처럼 눈을 치뜨며 그를 쏘아보는 푸카레바의 얼음장 같은 표정, 나 몰라라 하는 동료들의 모습이 수백 수천 조각으로 그의 주변을 에워싸고 마구 짓눌러댔다. 식사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뭔가를 먹으면 속이 울렁거리면서 토할 것 같았다. 위염과 장염에 시달렸다. 얼굴에 뾰루지가 잔뜩 돋아났다.

 

시달리고 있는 것이 베르닌만은 아니었다. 다른 부서 서무들도 들들 볶이고 있었다. 운 나쁘게 걸린 담당자들도 고생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자료를 취합하고 일일 수감일지를 작성하고 제출해야 하는 것은 서무들이었다. 특히 베르닌은 총괄 서무라 더 심했다. 금요일이 되었을 때 알렉산드라가 서무들에게 배추밭으로 나오라고 쪽지를 전달했다.

 

 

초췌한 몰골로 배추밭에 모인 서무들에게 알렉산드라가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 본부 쪽에서 들은 정보인데, 이번 감사는 특정 타겟이 없대. 그냥 모스크바에서 지방 보안위원회들 군기 잡으려고 하는 감사래. 요즘 서기장이 오늘 내일 하잖아. 그래서 조만간 주요 인사 라인이 바뀌기 전에 겸사겸사 하는 거래. 하필 우리가 제일 첫 타자라서 자잘한 문제들로 이것저것 걸어서 몇 명 징계 먹이고 갈 거래. ”

 

“ 차라리 국장을 날리려고 하는 거라면 나을 텐데... ”

 

“ 그러게. 보통은 그런 걸로 오잖아. 근데 국장 날리려는 건 아닌가봐. 지난번에 크라베츠 날아간 후로 우리 국장도 끈 떨어져서 위태위태한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가봐. 특히 지금 위험한 게 일반 문서 관리 쪽하고 감시분석 쪽이래. 전자는 딱 서무 업무야. 공직기강으로 걸고 넘어지려나봐. 감시분석이야 뭐 감사 단골 메뉴니까... ”

 

베르닌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서무인데다 심지어 감시분석부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서무들도 괴로워했지만 그나마도 베르닌만큼 심한 상황은 아니어서 약간 안도하기도 했다.

 

“ 다냐,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너는 신참이니까 크게 징계 받지는 않을 거야. 그냥 지적받는 정도고 최악이면 한두 달 감봉일 거야. ”

 

“ 하지만 너무 억울해요. 난 시키는 거 다 했는데... 없는 서류도 다 만들었고... 우리 부서에서 지적당한 건 전부 선배들 업무인데 다들 저한테 가서 자료 제출하게 하고 수감 서류에 사인하게 만들었어요. 다들 책임 안 지려고... ”

 

맙소사, 다냐. 사인을 했단 말이야? 네 책임이라고? ”

 

“ 제대로 읽지도 못했어요. 감사관들이 막 무슨 종이를 들이밀면서 담당자 사인하라고... ”

 

“ 너는 담당자가 아니잖아! 왜 네가 사인을 해! ”

 

“ 선배들이랑 부장에게 가져갔는데 다들 무시하면서 빨리 저한테 사인해서 내라고 하잖아요. ”

 

“ 그래도 안 했어야지... 사인까지 하면 어떻게 하니. 빼도 박도 못하게... 너네 부장이랑 선배들 정말 너무하네. 너한테 다 뒤집어씌운 거잖아. 어쩌면 좋니. 아아, 너도 정말 고지식해서 탈이야. 어쩌면 그러니... 아아, 투레츠키라도 여기 있었다면... ”

 

“ 그 사람 때문에 더 징계 받게 생겼는걸요. 그 사람이 서류 안 만들어 놓고 간 것들 위조한 거 아무래도 걸릴 것 같아요. ”

 

“ 하지만 투레츠키는 징계 안 받았어. 걘 진짜 실수투성이에 징계 받아 마땅한 항목들도 많았는데 감사관이랑 10분 면담하더니 그대로 빠져나왔다고. 네가 걔 반만 닮았어도... 어쩌면 좋니... 투레츠키한테 특별 교육이라도 받았다면 좋으련만... ”

 

 

마음 착한 알렉산드라가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다른 서무들도 동병상련에 젖어 베르닌을 위로했지만 자기 코가 석자라 급하게 사무실로 돌아갔다. 베르닌은 망연자실하게 배추밭에 주저앉아 있다가 터벅터벅 들어갔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감사실에서 날아온 공문이 놓여 있었다. 감사는 화요일에 종료될 예정이며, 월요일 오전에 주요 담당자 몇 명과 대면 질의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명단이 나와 있었는데 베르닌의 이름도 있었다. 그는 11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름 옆에는 몇몇 항목들이 적혀 있었다. 하나는 문서 발송과 관련된 서무 업무였고 나머지는 전부 선배들의 업무였지만 그가 수감 서류에 사인을 해버린 사항들이었다. 아마 그 항목들을 가지고 추궁한 후 최종 징계 결정을 내리려는 것 같았다. 그건 마치 기소장이나 다름없었다. 베르닌은 눈앞이 아찔했다. 운 나쁘면 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그는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아직 퇴근 시간 전이었지만 멍하게 사무실을 나왔다. 입사 후 처음으로 무단 조퇴를 했다.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깨를 떨어뜨리고 나가는 베르닌을 동료나 선배 그 누구도 붙잡아 주거나 위로해 주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원래 그런 거니까.

 

 

*    *    *

 

 

 

춥고 바람 부는 거리로 나오자 눈물이 솟구쳤다. 서럽고 두려운 마음에 훌쩍훌쩍 울면서 베르닌은 한동안 길거리를 쏘다녔다. 억울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잘리면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할 텐데 뭘 해먹고 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2년 넘게 KGB에 다녔지만 한 일이라곤 아무 짝에 쓸모없는 서무 업무에 왕재수의 가정부 노릇뿐이었다. 식당에 취업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전교 2등에 법학 대학 우수 졸업이라는 자신의 학벌을 생각하니 너무나 서글퍼져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 넘었고 길거리도 어둑어둑해졌다. 터덜터덜 집 쪽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알렉산드라가 그의 어깨를 탁 쳤다.

 

“ 다냐! 어휴, 한참 찾았네. ”

 

“ 어, 선배님... ”

 

“ 너 월요일 면담자 명단에 있더라.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아까 수소문했거든, 투레츠키 지금 어디 있는지 찾았어. 너 걔한테 한번 가보렴. 어쨌든 네 전임이잖아. 사정 말하고 노하우 좀 알려달라고 해봐. 적어도 징계 수위는 좀 낮출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

 

“ 투레츠키... 전설의 서무... ”

 

“ 그래그래. 내가 바냐한테 전화도 해놨어. 내일 오후 두 시에 약속 잡았어. 그러니까 거기 가서 잘 좀 물어봐. 혹시 아니, 걔한테 방법 배워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자, 여기 걔 사무실 주소야. ”

 

“ 그 사람 내일 토요일인데도 일을 하나요? ”

 

“ 응, 주말이 제일 수지맞는대. 무슨 암시장 물건들 거래하나봐. 대신 보안위원회 몰래 하는 거니까 너도 절대 비밀 지켜줘야 해. 알았지? ”

 

“ 네...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선배님뿐이에요, 흐흑... ”

 

“ 바냐는 보드카하고 청어를 좋아해. 그러니까 스탄다르트 한두 병하고 청어 통조림 좀 챙겨가. ”

 

“ 네... ”

 

 

베르닌은 식료품 가게에 가서 줄을 섰고 비상금을 털어 스탄다르트 보드카 두 병과 청어 통조림 한 캔을 샀다. 피로가 누적되어 무척 졸렸다. 감사 때문에 밤을 새느라 일주일 만에 들어온 집은 먼지와 설거지 거리가 쌓여 엉망이었다. 그나마 왕재수를 챙겨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폐렴으로 며칠 고생하다 회복된 후 왕재수는 무슨 신작을 준비한다면서 줄곧 극장에 붙어 있었고 바이올린 깡패의 아파트에서 밤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는 혹시나 해서 왕재수의 집에 가보았다. 아파트는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차디찬 햄 샌드위치를 씹으며 도청 테이프를 돌려보니 아무 소리도 녹음되어 있지 않았다. 왕재수도 일주일 내내 집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나마 일을 좀 던 셈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스페호프가 감시 업무 소홀이라고 야단을 쳤겠지만 특별 감사 때문에 난리가 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장도 그 ‘불여우’에 대한 일은 잊고 있는 듯했다.

 

샌드위치를 반쯤 먹다 말고 그는 목이 메어서 맥주를 한 잔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리고는 속이 상해서 흐느껴 울다가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진 채 필름이 끊기듯 깊게 잠들었다.

 

 

*    *    *

 

 

 

토요일 오후 두 시에 그는 알렉산드라가 알려준 주소를 찾아갔다. 바냐 투레츠키의 사무실은 구시가지의 작가 공방들 뒤편에 있는 낡고 허름한 건물 2층에 있었다. 어두컴컴한 아치와 뜰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자 문 앞에서 군복 조끼 차림에 담뱃진으로 잔뜩 절어 있는 험상궂고 덩치 큰 남자가 그를 가로막았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눈을 부라렸다.

 

“ 어... 저... 바냐 투레츠키와 두 시에 약속을 했는데요. 그러니까, 알렉산드라가... ”

 

“ 꼬락서니가 수상한데? 이거 혹시 짭새 아냐?

 

“ 예? 아니, 저... ”

 

“ 아무래도 짭새 같은데! 주머니에 삐쭉 나온 그건 뭐야! ”

 

“ 아니, 이건 그냥... ”

 

남자는 베르닌의 코트 주머니를 뒤져서 청어 통조림을 찾아냈다. 금세 얼굴이 누그러지더니 통조림을 자기 주머니로 밀어 넣었다.

 

“ 흠흠, 진작 보여줄 것이지. 두 시에 바냐와 약속을 했다고? 들어가 봐. ”

 

“ 어, 그거 투레츠키한테 주려고... ”

 

“ 바냐 게 내 거고 내 게 바냐 거야! 아니꼬운 거 있나? ”

 

“ 아, 아니요... ”

 

 

베르닌은 그나마 보드카는 안 들킨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의 문을 하나 더 열자 그야말로 잡동사니로 가득한 우중충한 사무실이 나왔다. 무슨 중고 시장 같았다. 별의별 물건들이 다 있었다. 낡은 트랜지스터부터 수입 세탁기, 누렇게 바랜 외국 잡지와 책들, 통조림들, 꼬부랑 글씨가 붙어 있는 주스와 소스병, 아기 유모차에 무슨 전기드릴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것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마구 널려 있었다.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물건들을 비집고 들어가자 창가에 엄청나게 야한 새빨간 1인용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고 훈장이 덕지덕지 달린 노란 재킷을 입은 젊은 남자 하나가 앉아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삐쩍 마른 남자로 붉은 기 도는 금발 머리를 기름을 발라 올백으로 넘기고 가느다란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금테 안경 너머로 초록색 눈이 이따금 번쩍번쩍 빛났다. 그 인상이 너무 얍삽하고 교활해 보여서 베르닌은 순간 몸을 돌려 나가고 싶었지만 그때 남자가 그를 발견하더니 손을 흔들었다.

 

 

“ 어이, 처음 보는 얼굴인데? 뭐 찾아? ”

 

“ 어... ”

 

“ 아니면 뭐 가져왔나? ”

 

“ 아뇨... 저, 바냐 투레츠키를 찾아왔는데요. 저는 다닐 베르닌... ”

 

“ 아, 다닐. 사셴카가 얘기한 바보가 자네였군. 그렇게 바보같이 서 있지 말고 앉아. ”

 

“ 당신이 바냐... 전설의 서무... ”

 

“ 전설까지야. ”

 

“ 알렉산드라를 사셴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친하셨나 보네요. ”

 

“ 난 누나들하고는 다 친했지. 앉으라니까. ”

 

 

베르닌은 아까부터 앉으려고 했지만 대체 어디에 앉아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소파는 1인용이었고 의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기 때문이다. 투레츠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옆에 쌓여 있는 잡지더미를 가리켰고 그는 할 수 없이 책 위에 앉았다. 보드카 두 병을 내밀자 투레츠키가 뛸 듯이 좋아했다.

 

 

“ 자네 뭘 좀 아는군! 한 잔 할까! ”

 

“ 아뇨, 저... 이건 당신 드시라고 선물로... ”

 

“ 보드카를 혼자 무슨 재미로 마셔! 눈앞에 보드카가 있으면 따야지! 청어 통조림만 있으면 딱인데. 그렇지, 분명히 보랴가 하나쯤 갖고 있을 거야. 보랴! 청어 좀 가져와! ”

 

군복 조끼 입은 거구의 남자가 불쑥 들어오더니 뚜껑을 딴 청어 통조림과 잔 세 개를 건네주었다. 투레츠키는 능숙하게 보드카를 따더니 세 개의 잔에 모두 술을 따랐다. 신나게 건배를 하고 한 입에 보드카를 털어 넣었다. 베르닌은 낮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든 따라 마셨다. 보랴는 청어를 맨손으로 움켜서 입에 쑤셔 넣더니 보드카를 한 잔 더 마시고 휙 나가버렸다. 투레츠키는 맛깔스럽게 술을 마시고 청어를 먹었다. 베르닌은 두 잔째 마시면서 멍하게 투레츠키를 쳐다보다가 노란 재킷에 덕지덕지 달려 있는 것들이 훈장이 아니라 조잡한 에나멜 배지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별과 줄무늬가 그려진 것을 보니 미국산인 것 같았다. 심지어 주머니칼까지 목에 걸고 있었다.

 

보드카를 연달아 넉 잔쯤 마시고 난 후 기분이 좋아진 투레츠키가 자랑을 늘어놓았다.

 

“ 난 말이지, 엄청 잘 나가고 있어. 여기 없는 물건이 없다니까. 모스크바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나한테서도 전부 구할 수 있지. 여기 없는 것도 말만 하면 일주일 내에 구해다 줄 수 있어. 자네 나랑 동업하는 게 어때? 안 그래도 요즘은 손이 모자라서 말이야. 보랴도 괜찮긴 한데 주먹이 앞서서 말이지. ”

 

“ 저... 제의는 감사한데요... 전 당장 월요일에 감사관에게 불려가서 징계를 받을 판이라... ”

 

“ 쳇, 그 망할 놈의 KGB! 그건 정말 내 인생의 흑역사라니까! 꽃 같은 내 인생을 그따위 팍팍한 먼지구덩이에서 2년이나 낭비했다니! 무슨 서류니 감사니... 심지어 그 왕꼴통 스페호프! 그거 완전 초특급 사이코에 개자식이었는데. 그 작자 아직도 있나? ”

 

“ 예... ”

 

“ 여전히 초특급 사이코에 개자식인가? 서무들 들들 볶고? ”

 

“ 네... 특히 저를... ”

 

“ 에이, 말 놔. 우리 나이도 비슷한 거 같은데. 나 올해 스물아홉이라고. ”

 

“ 어, 나도 여름에 그렇게 되는데... ”

 

“ 그럼 동갑이네. 말 놔, 말 놔. 다냐! 건배! ”

 

둘은 건배를 하고 보드카를 한 잔씩 더 마셨다. 베르닌은 어쩐지 마음이 좀 편해졌다. 투레츠키는 자기가 밀수해오는 물건들을 가리키며 출처가 다양하다고 설명하고 다시 한 번 그에게 동업을 제의했다. 베르닌은 쭈뼛거리며 물었다.

 

 

“ 근데 난 보안위원회 소속인데 뭘 믿고 동업을 하자는 거야? 이런 거 불법이잖아. 걸리면 큰일... ”

 

“ 너 나 찌를 거야? 우리 동갑인데! 친구 먹었는데 설마! 정말 그럴 거야? ”

 

“ 아니. 나 그런 짓 절대 안 해. 그래도... ”

 

“ 그럼 된 거지! 난 너 얼굴 보자마자 딱 감이 왔어. 얜 믿을 수 있는 놈이구나! 그러니까 동업하자는 거지~! 나 여태 한 번도 배신당한 적 없어. 이쪽으로는 촉이 뛰어나거든. 내 인생 유일한 실수는 너네 그 KGB 입사했던 거라고. 서무 같은 소리... 쳇. 지금 나 엄청 잘 나가. 이거 벌이도 짭짤하고 예쁜 여자들은 그냥 딸려와. ”

 

“ 어, 고마워. 생각 좀 해볼게. 근데 난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먼저 이것부터 좀 해결해야 하거든. 그러니까 특별 감사... ”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기 때문에 베르닌은 제풀에 뜨끔해서 입을 다물고 급하게 그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랐다. 왕재수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거구의 보랴가 문을 열어주었는데 그에게 딱딱거리던 것과는 달리 문가에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을 한쪽으로 밀어주면서 비단결 같은 어조로 너무나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 조심해야지, 자칫 걸려 넘어져서 그 고운 피부에 흠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니. ”

 

“ 고마워, 보르카. 있다가 저녁 해줄 거야? ”

 

“ 그래그래. 너 좋아하는 거 들어왔어. 부야베스 만들어 줄게~ 정통 마르세유 식으로. ”

 

“ 사프란도 구했어? 부야베스엔 그거 들어가야 되는데. ”

 

“ 그럼, 너 해주려고 내가 구했지~ 볼일 보고 나와. 같이 우리 집 가자. ”

 

“ 응. ”

 

 

베르닌은 너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보랴가 나간 후 왕재수는 잡동사니들 사이를 우아하게 헤집고 창가로 걸어왔다. 투레츠키가 손을 흔들며 윙크를 하더니 돼먹지 못한 영어를 지껄였다.

 

“ 오우, 프리티! 뷰우티! 굿 애프터누운~ 컴 온~ ”

 

“ 안녕, 바냐. ”

 

“ 새로 들어온 거 그쪽에 있어. 예쁜이 오늘은 나 줄 거 없어? ”

 

“ 오늘은 없는데. 너무 바빠서 계속 집에 못 들어갔어. ”

 

“ 노래 테이프도 없는 거야? ”

 

“ 응. 다음에 가져다줄게. ”

 

“ 내 사전에 공짜는 없는데. ”

 

“ 외상 달아놔. ”

 

“ 외상 같은 소리. 나 그렇게 허술하게 장사 안 하는데. ”

 

 

그러더니 투레츠키가 푹신한 소파에서 일어나서 왕재수에게 갔다. 베르닌은 너무 놀라고 얼이 빠져서 멍하게 서 있었다. 왕재수는 그를 보고서도 전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암거래상을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일이니 당연한 것 같기도 했다. 그 순간 투레츠키가 왕재수를 꼭 끌어안고 엉덩이를 움켜쥐듯 어루만지며 입술에 키스를 찐하게 세 번이나 했다. 베르닌이 그 추행 장면에 기겁을 하며 손에 잡히는 대로 보드카 병을 움켜쥐고 휘두르려고 했을 때 투레츠키가 휘파람을 불며 왕재수의 뺨에 또 뽀뽀를 했다. 심지어 혀를 쭉 내밀어 왕재수의 뒷목덜미를 핥기까지 했다!

 

 

“ 아유, 정말 계집애들보다 더 귀엽다니까. 향기도 어쩌면 이렇게 좋니. 거기 신문이랑 다 있으니까 너 보고 싶은 대로 다 보고 가. 내가 너 보여주려고 어제 오후에 막 들여온 따끈따끈한 거야. ”

 

“ 이번 주 신문이야? ”

 

“ 그럼. 그저께 주간지도 있지. 나야 불어는 까막눈이지만. ”

 

“ 알았어. ”

 

 

왕재수는 추행을 당한 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잡지 더미 사이를 비집고 반대편으로 들어가더니 프랑스어로 된 신문 한 뭉치와 영어로 된 신문, 잡지 한 뭉치를 끌어내렸다. 왕재수가 햇볕이 잘 들어오는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다리를 뻗으려는 것을 투레츠키가 금세 어딘가에서 접이의자를 꺼내주더니 그 위에 무릎담요까지 몇 겹으로 개켜서 얹어 주었다. 왕재수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의자에 앉더니 열심히 외국어 신문과 잡지들을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베르닌 쪽으로는 눈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소파 쪽으로 돌아온 투레츠키가 입맛을 다시면서 중얼거렸다.

 

“ 쟨 진짜 귀엽다니까.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싶게 만들어. 계집애였으면 벌써 내가 홀랑... ”

 

“ 저... 너 쟤 누군지 알아? ”

 

“ 미셴카? 그럼. 몇 달 전부터 왔는데. 진짜 끝내준다니까. 좋은 물건도 많고 외국 물정도 많이 알아. 외국 신문들은 다른 애들 같으면 집에 숨겨놓고 사전 찾아가며 한 시간 두 시간씩 읽는데 쟤는 그냥 앉은 자리에서 후딱 읽어치우고 놓고 가니까 진짜 깔끔해. 나한테는 딱 좋지. 내가 처음부터 동업하자고 꼬셨는데 싫다더라고. 손에 먼지 묻히는 거 싫다나. 하긴 쟨 저렇게 귀여우니 땀 흘리는 짓 안 해도 뭔들 안 풀리겠니. ”

 

“ 쟤가 뭐하는지도 아는 거야? ”

 

“ 아니. 나 그런 거 관심 없어. 나는 훌륭한 거래상이야. 여기 오는 손님들에 대해 철칙이 있어. 아무 것도 안 물어봐. 특히 개인 정보는 더더욱! 잘못해서 나나 보랴가 잡혀가도 손님에 대해 아는 게 없으면 불 것도 없잖아. 쟤는 근데 너무 예쁘니까 좀 궁금하긴 하더라. 보랴는 좀 아는 것 같던데. 둘이 가끔 놀더라고. ”

 

“ 가끔 놀아... 맙소사... 바이올린 아저씨도 모자라서... ”

 

“ 왜? 너 쟤 알아? 관심 있어? 너 그런 취향이야? ”

 

“ 아니. 아니야... 절대. 저... 그 특별 감사 말인데. 너의 노하우... ”

 

 

베르닌은 간신히 본론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서무로서의 고통과 임박한 징계의 공포에 대해 설명했다. 투레츠키는 잠시 그의 하소연을 듣더니 지루한 듯 하품을 했고 보드카를 한 잔 더 따라 마셨다. 그리고는 베르닌의 어깨를 툭 쳤다.

 

 

“ 에이, 너 진짜 고지식하구나. 그러니까 스페호프한테 들들 볶이지. 뭘 그런 걸 걱정하냐. 애초부터 자료 다 찾고 만들어준 것부터가 잘못이야. ”

 

“ 어떻게 안 찾고 안 만들어... 난 서무인데. ”

 

“ 서무가 뭐. 지금이 무슨 농노 시대냐?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랬어. 선배란 것들은 원래 그런 것들이야. 서무가 버릇을 잘 들였어야지! 네가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다 해주니까 그것들이 당연한 줄 알고 다 너한테 시켜먹는 거라고. 아예 배 째고 안 했어야지. ”

 

“ 어떻게 안 해. 난 막내인데... ”

 

“ 누군 막내 아니었냐. 그냥 안 하면 되는 거야. 급한 놈이 우물 파게 돼 있어. 네가 안 하면 맘 급한 담당자가 다 하게 된다고. ”

 

“ 하지만 국장이... ”

 

국장이 떠들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그자가 널 죽일 것도 아니고 월급 깎을 것도 아닌데. 그냥 귀나 한 번 씻어주면 그만이지. ”

 

“ 바냐. 스페호프가 너한테 총 겨누고 사표 쓰라고 한 거 사실이야? ”

 

“ 아, 그거? 그 총에 총알도 없었어. 내가 다 빼놨거든. 어차피 그때쯤 그만두고 싶었던 차라 잘됐지 뭐. 그때 그만뒀으니 내가 지금 이렇게 출세를 했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놀고 싶은 대로 놀고 여자들도 잘 꼬이고. 가끔 저렇게 귀여운 애로 눈요기도 하고. ”

 

“ 하지만... 난 당장 월요일 아침 열한 시에 루뱐카 본부 감사관 면담이 있어. 그 면담 끝내고 징계하려는 거래. 선배들 잘못에 대해서도 내가 책임 있다고 사인까지 했단 말이야. 최소 정직, 아니면 잘릴지도 몰라... ”

 

차라리 그냥 사표 내버려. 내 밑에 와서 일해. 월급 잘 쳐줄게. 그깟 말단 공무원 월급보다 훨씬 짭짤할 걸. ”

 

“ 저... 날 믿어줘서 정말 고마운데 난 책상물림이라 이런 일은 소질이 없어. 난 그저 월요일 감사를 잘 넘기고 싶은데... 너 전설의 서무잖아. 그때 감사 어떻게 빠져나간 거야? 제발 방법 좀 가르쳐 줘. 응? ”

 

“ 음...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셋 다 넌 좀 힘들 것 같아. ”

 

“ 왜? 세 가지나 있는데 왜 난 힘들어? 제발 방법 좀 알려줘. 응? 나 노력해 볼게. 일요일도 있으니까 계속 준비하면... ”

 

 

투레츠키는 한숨을 쉬었다.

 

 

“ 넌 그게 문제야, 다냐. 뭐든지 준비하고 연습하고. 그게 책상물림의 특징이야. 그런 걸로 되는 게 아니라고. 전설적인 서무는 타고 나는 거야. 근데 넌 성격이 고지식해서 어려울 것 같아. ”

 

“ 노력할 테니까 제발 좀 가르쳐 줘. 제발... ”

 

좋아. 1번. 아무 것도 모르는 시늉을 하는 거야. 눈을 끔벅끔벅하면서 감사관이 무슨 말을 해도 바보 이반처럼 멍 때리면서 ‘전 신입이라서 아무 것도 모르는데요’라고... ”

 

“ 나 그거 벌써 했었어. 감사관이 나보고 머저리라고 했어. 나 진짜 그 업무 내용을 전혀 몰랐거든. ”

 

“ 그걸 끝까지 밀어붙였어야지! ”

 

“ 근데 선배들이 하도 난리를 쳐서 계속 자료를 취합하고 작성 제출하다 보니까 어느새 나도 내용을 다 알겠더라고. 감사관이 부를 때면 꼭 선배들이 안 보여서 내가 대신 올라가고... 그러다가 조금씩 답변도 해버렸어. ”

 

“ 그것 봐! 벌써 1번은 끝났네. 그나마 너는 그게 제일 가능성 있었는데. ”

 

“ 2번은... ”

 

“ 2번이 효과가 아주 좋지. 바로 거래야.

 

“ 거래라니? ”

 

“ 동료를 팔아넘기는 거지. 가급적 선배로. 윗선일수록 더욱 좋은 거야. 감사관들은 월척을 원하거든. ”

 

“ 하지만 뭘 팔아넘긴다는 거야? 난 너처럼 밀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선배들이랑 그런 거래를 한 적도 없는데. ”

 

“ 답답하긴. 너 서무잖아. 여태 선배들이랑 간부들 근태기록부나 초과근무내역서, 출장보고서 같은 거 다 네가 써줬을 거 아냐. 업무추진비도 네가 정산하고. 그런 거 하면서 약점 잡아놓은 거 없어? 출장 안 갔으면서 갔다고 하고 여비 타갔다든지. 업무추진비로 술 먹었다든지. 아니면 업무 처리하면서 뇌물 받았다든지. 내가 기억하기로 너네 KGB는 그런 일이 횡행했지. 그런 거 몇 개 물증이랑 같이 꽉 쥐고 있다가 감사관한테 흘리는 거야.

 

선생님, 저처럼 피라미 잡아가봤자 별 소득도 없으시잖아요. 제가 괜찮은 정보를 하나 드리죠. 이건 내부 기밀인데요, 저는 서무라서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관님들이 마침 오셨으니 내부 고발을 하고자 합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제 안위를 지켜주신다는 약속이 필요합니다.

 

뭐 이런 거지. 영화 안 봤냐? 이런 거 진짜 잘 통하거든. 난 감사 두 번 받았는데 첫 번째 감사 땐 이걸로 해결했지. 그땐 정보부장을 팔아넘겼어. 꽤 쏠쏠했지. 심지어 나중에 감사관이 술도 한 잔 사줬어. ”

 

 

베르닌은 입을 딱 벌렸다. 머릿속에 잠깐 수많은 초과근무내역서와 출장보고서, 뇌물의 현장 등등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난 그건 도저히 못할 거 같아. 어떻게 동료를 팔아넘기니. 나 그건 못해... ”

 

야, 네가 사느냐 남이 사느냐 이런 문제야. 이건 절대절명의 순간이라고! ”

 

“ 그래도 그건 도저히 안 되겠어. 마지막은... ”

 

“ 흠. 이건 2번보다 더 효과가 좋지. 두 번째 감사 때 제대로 써먹었고. 근데 넌 안 될 거야. ”

 

“ 왜? 왜 안 되는데? ”

 

“ 1번이랑 2번은 노력으로 되는데 3번은 그런 걸로는 안 돼. ”

 

“ 뭔데? 노력해서 안되는 게 어디 있어. 제발 가르쳐줘, 바냐. 우리 동갑이잖아. 보드카도 나눠 마시고. 제발... ”

 

“ 음... 3번은 말이야. ”

 

 

투레츠키가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섰다. 멀끔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를 두 손으로 마구 흐트러뜨렸다. 고개를 숙이더니 금테 안경을 벗어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홱 쳐들고 베르닌을 올려다보며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간절하게 속삭였다.

 

선생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선생님 한 마디에 제 운명이 달려 있어요. 제발... 저 잘리고 싶지 않아요. 제 모든 게 선생님께 달렸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네?

 

 

베르닌은 감전된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안경을 벗은 바냐 투레츠키는 놀랍게도 굉장한 미남이었다. 머리를 흐트러뜨리자 웨이브진 금발 머리가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초록색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에메랄드 같았다. 애들 동화에 나오는 왕자님처럼 생긴데다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이 어딘가 굉장히 불쌍해 보여서 꼭 안아주면서 위로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솟구쳤다. 순간 베르닌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자식은 분명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하는 짓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고 외모도... 그러니까...

 

 

그때 잡동사니들 사이로 왕재수가 걸어 나왔다. 둘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전혀 관심 없는 표정으로 곁을 스쳐가며 투레츠키에게 인사를 했다.

 

 

“ 갈게. 다음에 봐. ”

 

예쁜이 가니? 금요일에 좋은 거 들어올 거야. 네 맘에 쏙 들걸. ”

 

“ 봐야 알지. 별로면 돈 안 줄 거야. ”

 

“ 에이, 금요일에 오는 건 진짜 좋은 거야. 돈 안 주면 너 정말 가만 안 둔다. 아까 정도로는 못 넘어갈걸. 확 덮쳐서 잡아먹는다. ”

 

“ 싫어. 너랑은 안 해. 너 내 취향 아니야. ”

 

“ 서릿발 같기도 하지. 하여튼 귀엽다니까. 잘 가, 주말 잘 보내! ”

 

 

왕재수가 문을 열고 나갔다. 베르닌은 문 너머로 거구의 보랴가 왕재수의 어깨를 껴안고 복도로 나가는 것을 힐끗거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투레츠키가 머리를 빗어 넘기고 안경을 쓰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뺀질거리는 어조로 돌아왔다.

 

“ 자, 3번. 할 수 있을 거 같냐? ”

 

“ 아니... 안 될 거 같아. 그건 엄청 미남이어야 되는 거잖아. ”

 

“ 미남은 아니어도 되는데, 연기를 잘 해야 돼. 그리고 눈이 크고 감정이 풍부해야 되는데 넌 그게 안 되니... 그냥 2번 연습해서 가는 게 나아. ”

 

“ 너 그래서 안경 끼는 거야? 너무 잘생겨서? ”

 

“ 그렇지. 이런 짓 하면서 먹고 살기엔 내가 너무 쓸데없이 미남이라서. ”

 

“ 알렉산드라가 너한테 잘해줬던 것도... ”

 

“ 그래, 누나들은 다 나한테 잘해줬다니까. ”

 

“ 그렇구나. 전설의 서무란 건... 그냥 잘생겼기 때문이었어.

 

“ 그건 아니지. 내 능력 90%에 미모 10%인 거지. 이봐, 다냐. 너무 실망하지 마. 2번 방법을 연습해서 해보고. 실패하면 미련 없이 사표 던지고 나한테 오는 거야! 나랑 같이 이 업계를 평정하는 거지! ”

 

“ 난 책상물림이라고 했잖아. 그리고... ”

 

“ 그리고 뭐? 또 맘에 걸리는 게 있어? 불법이라서? ”

 

“ 아니... 그것보다... 너 너무 손님한테 막 대하는 거 아니야? ”

 

“ 내가? 난 손님을 왕처럼 대접해! 기밀도 다 지켜주고! 개인정보도 안 물어본다 했잖아! ”

 

“ 그치만. 아까 걔... 막 추행하고... ”

 

“ 추행은 무슨 추행! 귀여우니까 좀 쓰다듬어준 거지. ”

 

“ 아니야. 너... 걔가 허락도 안 했는데 막 껴안고... 입술에... ”

 

“ 야, 장난으로 뽀뽀 몇 번 한 걸 가지고. ”

 

“ 그거 뽀뽀 아니었어. 막 입 벌리고 혀도 이렇게 들어가고... 그거 진짜 키스였잖아. 심지어 엉덩이도 만지고... 핥기까지... 강아지도 아닌데. ”

 

“ 어휴, 너 정말 답답하다.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왜 네가 난리야. 너 걔한테 관심 있냐? 그럼 금요일에 와. 내가 소개시켜 줄 테니까. 나 참. ”

 

“ 아니야, 나 그런 거 아냐. 나 여자 좋아해. 근데 하여튼 아까 그건... ”

 

그거 뭐! 걔가 돈 안 줬잖아. 우린 돈 아니면 물물교환인데 오늘은 걔가 물건도 안 가져왔잖아. 그러니까 다른 거라도 줘야지. 여긴 단순해.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는 거라고! 예쁜 애는 그 정도로도 내가 넘어가주니까 오히려 이득이지. ”

 

“ 너 저기... 걔한테 더 심한 짓도 했어? ”

 

너 지금 나 추궁해? 짭새 노릇하는 거야? ”

 

“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좀 마음에 걸려서. 걔 나이도 어려 보이고... 생긴 것만 그렇지 순진한 애일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

 

너 정말 고지식하구나. 더 심한 짓이란 게 뭔지 모르겠네. 그래봤자 뭐. 뽀뽀 좀 하고 좀 쓰다듬고. 아, 뭐 옷 속으로 손 집어넣고 좀 어루만지긴 했네. 조그만 게 얼마나 피부가 고운지. 그게 전부야. 됐냐? 근데 금요일에 또 오늘처럼 돈도 안 가져오고 물건도 안 가져오면 진짜 확 깔아 눕히고 홀랑 잡아먹을 거야. 사내애라도 워낙 예쁘니까. ”

 

 

베르닌은 하마터면 보드카 병으로 투레츠키의 머리를 냅다 내리칠 뻔 했다. 투레츠키는 방금 자신이 죽음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베르닌에게 다시 술을 권했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심호흡을 했고 보드카를 한 잔 더 받아 마신 후 다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투레츠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투레츠키가 아쉬워했다. 보드카가 아직 좀 남아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 친구야, 성공을 빌어. 안되면 사표 내고 나랑 동업을... ”

 

“ 어 그래. 어쨌든 고마워. ”

 

“ 금요일에 와. 어떻게 됐는지 얘기해 줘. 아까 걔도 올 거니까 소개시켜 줄게. ”

 

“ 어, 아니 됐어. 나 갈게. 장사 잘 해. ”

 

 

투레츠키는 손을 흔들어 주었지만 사무실 밖으로 따라 나오지는 않았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보랴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왕재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사프란인지 뭔지를 넣고 부야베스인지 나발인지를 만들어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갔다.

 

 

 

*    *    *

 

 

 

월요일에 베르닌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했다. 1번은 이미 물 건너갔고 3번은 그와 같은 단추눈으로서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2번은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즉 전설의 서무가 가르쳐준 방법들은 다닐 베르닌 같은 책상물림에게는 무용지물일 뿐이었고 그에게 남은 거라곤 무시무시한 감사관과의 면담과 징계, 그리고 잘리는 일 뿐이었다.

 

10시 반에 감시분석부장이 그를 불렀다. 베르닌은 혹시라도 담당 부서장이 자신을 위해 조금이라도 힘을 써주려나 싶었지만 부장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었다.

 

“ 감사관이 얘기하면 허튼 소리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내려와. 괜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직원들 팔지 말고.

 

“ 부장님, 그런데 전 정말 억울합니다. 이건 전부 선배님들 업무인데 왜 제가 이렇게... ”

 

원래 조직 생활이란 게 그런 거야. 우리도 다 초창기엔 그랬어. 그나마 자네는 신참이니까 감사관들도 심하게 징계 안 줄 거야. 그리고 지적받아도 최종 징계는 우리 내부에서 내리는 거니까 사정 봐서 조금 감해 줄 거야. 감봉까진 어쩔 수 없겠지만. 다 이러면서 배운다 생각해. ”

 

 

베르닌이 이번 감사에서 배운 거라곤 조직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수밖에 없다는 암담한 사실 뿐이었다. 동료 직원들은 모두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특히 감사 지적 업무 담당자인 두블린스키와 불라노프는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았는지, 아니면 베르닌과 마주치기가 껄끄러웠는지 일찌감치 당일 출장을 나가버린 후였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억울했던 나머지 그는 잠시 투레츠키의 2번 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차곡차곡 모아놓은 물증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있다 해도 동료들을 팔아넘길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러느니 그냥 자기가 뒤집어쓰는 게 낫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눈앞이 캄캄했고 심장이 답답하게 죄어왔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울렁거렸다.

 

 

마침내 11시가 되었다. 베르닌은 어깨를 떨어뜨린 채 천천히 3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아주 잠깐 그는 국장실로 들어가 스페호프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국장은 특별 감사 기간 내내 쥐죽은 듯 조용했고 심지어 주간회의조차도 진행하지 않았다. 부서장과 동료들도 그를 외면하는 판에 1인자인 국장이 그에게 신경을 써줄 리가 없었다. 오히려 더욱 앞장서서 그를 늑대 밥으로 던져줄 것이다.

 

 

감사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는 노크를 한 후 힘겹게 문을 열었고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갔다. 감사장 내부 배치가 좀 바뀌어 있었다. 책상이 하나밖에 없었다. 카마로프스키와 아모소프는 양쪽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 책상이 떡하니 놓여 있고 발렌티나 푸카레바가 예카테리나 여제처럼 버티고 앉아 있었다. 앞선 면담자였던 정보부서 서무가 눈물을 글썽이며 서류 뭉치를 쥐고 베르닌의 곁을 지나 뛰쳐나갔다. 푸카레바가 우렁차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음! 당신 이름과 소속은?

 

“ 다닐 베르닌... 감시분석부 서무입니다. ”

 

“ 흠, 다닐 베르닌. 아, 감시분석부. 이번 감사에서 제일 문제 많은 부서! 당신이 그 베르닌이군! 먼저 그 77년 사업 건인데! ”

 

 

푸카레바는 필기체로 휘갈겨 쓴 서류를 좍 펼치더니 수십 개의 지적사항들을 줄줄이 읽어 내려갔다. 짱짱하게 틀어 올린 머리 때문에 더욱 더 치켜 올라간 무시무시한 새파란 눈으로 베르닌을 똑바로 쏘아보더니 천둥처럼 쩡쩡 울리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짓이군! 젊은 요원이 벌써부터 이런 문제를 일으키다니! 이건 여기 지국뿐만 아니라 연방 전체 보안위원회에 크나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 문제야! 당신 같은 작자는 그냥 잘라서도 안 되고 완전히 블랙리스트에 올려서 다시는 공직에 발을 못 들여놓도록 단단히 맛을 보여줘야...

 

 

베르닌이 현기증으로 기절하려는 순간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푸카레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야! 중요한 면담 중에! 꺼져!

 

 

아랑곳없이 똑똑 하는 소리가 두 번 더 난 후 문이 열렸다. 베르닌은 어질어질한 가운데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근사한 검은색 코트에 엷은 푸른색의 캐시미어 스카프를 느슨하게 두르고 희미하게 광이 나는 가죽 부츠를 신고 부드럽게 흐트러진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왕재수가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낯선 외부인의 출몰에 놀란 카마로프스키와 아모소프가 ‘당신 누구야! 여긴 출입 금지야!’ 하고 소리치며 그를 내쫓으려고 했을 때 푸카레바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 발렌티나 누나! ”

 

“ 어머나, 미셴카! 정말 너니?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어떻게 여길! 오오, 이게 얼마만이야! ”

 

 

푸카레바가 책상 앞으로 뛰쳐나왔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의자도 쿠당탕 넘어뜨리고 구두도 한 짝 벗겨졌다. 왕재수가 잽싸게 푸카레바의 팔을 붙잡고 허리를 부축해 주었다. 푸카레바는 왕재수를 꼭 껴안고 뺨과 입술에 뽀뽀를 퍼부으며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유, 미셴카! 진짜 반갑네!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

 

“ 저 작년부터 여기 와 있어요. 여기 시립극장 감독으로... ”

 

“ 어머나, 시골로 유배 보냈다더니 그게 여기였구나. 나쁜 작자들. 아무 죄도 없는 비둘기 같은 너를 모함해서 감옥 보내고 고문하더니... 그때 너 구해주려고 우리가 서기장한테 얼마나 탄원서를 냈는데. ”

 

“ 덕분에 가석방됐어요. 누나 덕분이었군요. 고마워요. ”

 

 

왕재수가 푸카레바를 자기 품에 와락 껴안고 다시 뽀뽀를 해 주었다. 푸카레바는 그야말로 정신을 못 차렸다. 황홀한 눈빛으로 왕재수를 올려다보면서 뺨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 어린 것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그때 너 모함한 놈들 지금 다 작살났어. 알지? 게르만이 한 놈은 시베리아 보내고 한 놈은 숙청, 다른 놈은... ”

 

“ 들었어요. 근데 그러면 뭐해요, 전 여기 시골에... ”

 

“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너 같은 애를 이런 시골바닥에 처박니. 너 몸은 괜찮아? 어머나, 살 빠졌네. 얘 마른 것 좀 봐. 얼굴도 더 하얘지고. ”

 

“ 저 좀 아팠어요. 고문당해서... ”

 

“ 나쁜 놈들! 그 짓거리 가담한 놈들 다 잘라버려야 돼! 걱정 마, 누나가 복수해 줄게. 그쪽 다 특별 감사 걸어버려야지! 그런데 여긴 웬일이니? ”

 

“ 아, 저 뭔가 서류 갱신을 해야 한다고 해서 왔어요. 근데 현관에 보니까 무슨 감사 기간이라고 종이가 붙어 있는데 거기 누나 이름이 있더라고요. 등록부서에 물어보니까 누나 맞는 거 같아서 얼굴이라도 보려고 올라왔어요. ”

 

“ 잘했어, 잘했어! 어머, 어쩜 너무 좋다. 그때 크레믈린 축제 때 보고 일 년 만이네. 살 빠졌어도 여전히 멋있구나. 그래, 여기 극장 감독이라고? 혹시 오늘 무대 올라가? 오늘 극장 가면 너 추는 거 볼 수 있는 거야? ”

 

“ 누나, 저 지금 춤 못 춰요. 그때 고문당한 거 다 안 나아서 못 춰요. ”

 

뭐야! 이 몸이 어떤 몸인데!!! 감히 이 아름다운 다리에 손을 대서 춤을 못 추게 만들었다고! 정말 용서가 안 되는구나! 수용소부터 시작해서 그쪽 교화 담당자들 전부 다 감사 걸어서 잘라 버릴 거야! ”

 

 

푸카레바는 발을 구르면서 화를 냈다. 심지어 흐느껴 울기까지 했다.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멍하게 서 있었다. 카마로프스키와 아모소프도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다가 자리에 앉아 서류철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왕재수가 푸카레바를 어린애 어르듯 안아주고 뺨에 키스를 하고 달랬다.

 

“ 아니에요, 누나. 괜찮아요. 저 금방 다 나을 거예요. 근데 지금 뭐하시던 거예요? 쟤는 왜 부르셨어요? ”

 

“ 아, 오늘이 감사 마지막 날이거든. 징계 건 때문에. 아주 악질인 녀석이 있어서 추궁하고 있었어. 당신! 뭘 그렇게 넋 놓고 있는 거야! 당장 똑바로 못 서!

 

 

쩌렁쩌렁한 호통에 베르닌은 퍼뜩 놀라 차려 자세로 섰다. 왕재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푸카레바의 손을 꼭 잡았다.

 

 

“ 어, 이상하네. 쟤 완전 말단인데. 쟤 아무 것도 몰라요. 쟤가 뭘 할 줄 안다고 징계를 해요? ”

 

“ 네가 몰라서 그래. 저 인간이 감시분석부 소속인데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면서 별의별 비리를 다 저지르고 절차도 다 무시하고 온갖 잘못을 저질렀단다. 공무원 자격이 없는 놈이야. 잘라버려야 해. 누나가 하는 일이 그런 거잖니. ”

 

“ 아니에요, 누나. 저 쟤 알아요. 맨날 허드렛일만 하는데. 무슨 서무인지 뭔진데요, 간판에 페인트칠하고 시계 건전지 갈고 우편 심부름이나 하는 앤데 무슨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잘못을 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쟤 우리 집에서 집안일 해주는 앤데. 맨날 아침저녁으로 저 데려다주고 밥해주고 청소해주는 게 일이에요. 누나 뭐 잘못 아는 거 아니에요? ”

 

“ 어, 하지만... 여기 분명히... 담당자... ”

 

“ 쟤 담당은 허드렛일하고 배추밭 관리, 고양이 밥 주기랑 바퀴벌레 퇴치, 그리고 제 집사 노릇이에요. 분명히 그 종이에 뭔가 잘못 썼을 거예요. ”

 

“ 하긴 2년 전에 입사했다고 했으니 책임을 지래야 질 수도 없었겠네. 흠... 유르카, 감시분석부에 전화해서 부장 올라오라고 해. ”

 

“ 누나, 아직 한참 남은 거예요? 저 배고픈데. 오랜만에 누나랑 만났는데 누나는 일만 하고... 누나랑 맛있는 것도 먹고 차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싶은데...

 

“ 아유, 우리 미셰츠카. 어쩜 너는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하니. 네가 이러면 누나가 일을 할 수가 없는데... ”

 

“ 에이, 누나.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서요. 대충 그만 끝내고 저랑 나가면 안돼요? 누나 기름진 거 좋아하시잖아요. 저희 극장 근처에 항아리 닭고기 식당 있는데요, 무지무지 맛있다고 형님누나들이 엄청 좋아해요. 거기 가서 점심 먹고 저랑 차 마시고 산책 가요. 숲길 산책로가 근사해요. ”

 

“ 그래그래, 그러자. 어차피 감사도 다 끝났는데 뭐. 같이 가서 점심 먹고 그간 회포라도 풀자. ”

 

“ 저, 발렌티나 이바노브나. 감시분석부장을 올라오라고 할까요? ”

 

 

카마로프스키가 망설이며 묻자 푸카레바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됐어. 어차피 여긴 피라미 조직이니까. 그냥 아까 면담한 데까지만 하지 뭐. 대충 지적사항 정리해서 공문 때리고 오늘 철수하지. 자네들은 서류 정리하고 오후에 먼저 모스크바 올라가. 난 오랜만에 만난 친구랑 얘기 좀 하고 저녁에 갈 테니까. ”

 

“ 그럼 이 베르닌이란 작자는... ”

 

아유, 그냥 놔둬. 목록에서 지워버려. 우리 미셴카 허드렛일 해주는 애라잖아. 가뜩이나 우리 미셴카는 왕자님처럼 모셔줘야 하는데, 이런 시골에 와서 힘들 텐데 저런 애라도 붙여줘야지. 당신 그만 들어가 봐. 앞으로도 얘 뒷바라지 잘하고! ”

 

“ 네, 네! 안녕히 가십시오! ”

 

 

베르닌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뒷걸음질쳐서 나왔다. 문 너머로 푸카레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럼 너 현관에서 기다릴래? 누나는 이거 서류만 좀 정리하고 코트 입고 나갈게. 한 10분 걸릴 거야. ”

 

“ 네! 제 차로 가요. 시동 걸어놓을게요. 그래야 누나 따뜻하죠. 주차장으로 천천히 나오세요. ”

 

아유, 정말 우리 미셴카는 매너가 최고라니까. 곧 갈게.

 

 

 

*    *    *

 

 

 

베르닌은 사무실로 돌아가는 대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으로 갔다. 찬바람을 쐬니 정신이 좀 들었다. 놀랍게도 왕재수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극장에서 내준 임원용 차라 좋은 차였고 워낙 쓰지를 않아 반짝반짝했다. 전에 한번 나무에 들이받았다고 했지만 수리를 했는지 멀쩡했다. 왕재수가 내려와서 막 차에 타려는 것을 베르닌이 붙잡았다.

 

 

“ 야, 너 어떻게 가려고 그래? 운전 못하면서. 차는 어떻게 가져왔어? ”

 

“ 나 운전할 줄 알아! 서툴러서 그렇지. 항아리 닭고기 가게까지는 몰고 갈 수 있어. 눈도 다 녹았잖아. ”

 

“ 어... 그래. 근데 진짜 고마워. ”

 

“ 뭐가? ”

 

“ 저... 그 감사. 너 아니었으면 나 잘렸을지도 몰라. 고마워. ”

 

“ 설마 발렌티나가 너 잘랐겠냐. 그 누나 얼마나 착한데. ”

 

“ 너는 어떻게 모스크바 특별 감사관을 아는 거야? 고위직인 거 같던데. ”

 

“ 아. 나 볼쇼이에도 있었잖아. 크레믈린 행사에도 자주 가고. 우리 아저씨가 파티 자주 열어서 거기서 만났어. 저 누나가 발레 무지 좋아하거든. 나한테 엄청 잘해줬어. 공연할 때마다 보러 와서 꽃도 주고. ”

 

“ 그랬구나... 너 정말 등록 때문에 온 거야? ”

 

“ 아, 지난주부터 리자가 계속 전화하더라고. 등록 갱신해야 한다고. 바빠서 미루고 있다가 오늘 온 거야. 온 김에 누나도 보고. ”

 

“ 어, 그래... 고마워. ”

 

“ 자꾸 뭐가 고맙다는 거야? 그만 들어가. 추운데 셔츠 바람으로 밖에서 뭐하는 거야! 게다가 그 손목토시! 너 정말 구제불능이야! 그거 하고 돌아다니지 말랬잖아! 아휴 촌스러워. ”

 

“ 너 그때 토요일에... ”

 

“ 토요일 뭐! ”

 

“ 그때 투레츠키랑 나랑 하는 얘기 들었던 거야? 나 감사 받아서 잘릴지도 모른다는 얘기? 그래서 와준 거야? ”

 

“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나 감사가 뭔지도 몰라. 누나 보러 들어온 건데 마침 네가 거기 있어서 방해되니까 빨랑 누나랑 밥 먹고 싶어서 둘러댄 거야. 그만 가! ”

 

“ 운전도 못하는데, 팔 근육 미워져서 운전하면 안 된다면서 차 가지고 오고... 너 항아리 닭고기 느끼해서 안 먹잖아. 근데 그 여자랑 그 식당 간다고 하고... 시골이라 꼴도 보기 싫다면서 산책로 근사하다고 하고... ”

 

“ 나야 싫지! 그래도 발렌티나 누나는 원래 시골이 고향이라 이런 거 좋아한단 말이야. 그리고 차는... 나도 가끔 운전 연습하는 거야! ”

 

“ 어, 그래... 그래. 고맙다. ”

 

“ 얜 자꾸 왜 뜬금없이 고맙대. 빨랑 들어가, 그 손목토시 좀 내버리고! ”

 

“ 저기... ”

 

“ 뭐, 또! ”

 

“ 거기.. 투레츠키... 거기 드나든지 오래됐어? ”

 

“ 어휴, 또 감시꾼 행세야! 그래, 몇 달 됐다! 나도 숨 좀 쉬고 살자! 나 거기서 아무 짓도 안했어. 그냥 외국 신문이랑 잡지 좀 보고 좋은 레코드 같은 거 들어오면 한두 개 들어보는 게 전부야! 그걸로 또 너네 국장한테 일러바치기라도 할 거야? ”

 

“ 아니, 아니야... 나도 갔었는데 뭐... 그게 아니고. 너 저기... 앞으로는 거기 혼자 가지 마. 나랑 같이 가든지 바이올린 아저씨라도 불러서 같이 가. ”

 

“ 아니 왜! 아 귀찮아! 이제 신문도 혼자 못 보러 가게 하니! ”

 

“ 그게 아니고... 그 투레츠키, 걔가 좀 손버릇이 나쁜 거 같아. 저.. 그때도 너한테 집적대고... ”

 

“ 뭐, 뽀뽀한 거? ”

 

그거 뽀뽀 아니었잖아... 바이올린 아저씨가 하는 것처럼 키스했잖아. 다 들었어. 옷 속에 손도 집어넣었다며. 그 사람 위험해. 너한테 흑심 있는 것 같았단 말이야. 너 조심해야 돼. 나쁜 짓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

 

“ 아유, 진짜 시어머니가 따로 없어! 하여튼 알았어! ”

 

“ 아니면 너도 좋아서 받아주는 거야? 그런 거면 미안... 나 그런 쪽은 진짜 잘 몰라서... ”

 

아니야! 나도 걘 싫어! 나도 취향이란 게 있어! 그 자식 너무 얍삽하게 생겨서 완전 내 취향 아니야! 뺀질거리고. 보랴는 괜찮은데. 멋있고. ”

 

 

베르닌은 대체 이놈의 취향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발렌티나 푸카레바가 나왔다. 왕재수가 차 문을 열어주고 깍듯하게 푸카레바를 앉혀준 후 운전석에 탔다. 왕재수가 운전석에 앉다니 정말 낯선 광경이었다. 심지어 푸카레바는 빨간 립스틱까지 새로 칠하고 있었다!

 

 

왕재수의 차가 미끄러져 나간 후 베르닌은 배추밭 쪽으로 갔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시계를 보니 11시 반이었다. 사무실로 돌아갈까 아니면 좀 이르지만 구내식당에 내려가 점심을 먹을까 하다가 그냥 바닥의 넓적한 돌멩이 위에 걸터앉았다. 주변을 힐끔거리던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베르닌을 발견하고는 모른 척하며 슬며시 다가왔다. 베르닌은 호주머니를 뒤져서 아침에 먹으려고 쑤셔 넣었던 샌드위치를 꺼냈고 소시지만 발라내서 던져주었다.

 

고양이가 소시지를 먹는 동안 베르닌은 손목토시를 떼어내 배추밭 한켠에 집어던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4번 방법이 있었던 거였다. 그런데 또 곰곰 생각해보니 4번은 3번과 겹치는 것 같기도 했다. 왕재수야말로 미모 90%에 노력 10%가 분명했다.

 

 

이 모든 것이 어쩐지 불공평했지만 어쨌든 징계 위기에서 벗어났으므로 베르닌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금요일에는 반드시 휴가를 내고 왕재수가 좋아하는 생선찜과 보르쉬와 사과파이를 준비하리라 마음먹었다. 필요하면 만두도 빚어서 찌고 바이올린 깡패도 불러서 거한 저녁을 대접하기로 했다. 무가당 초콜릿과 홍차도 필수로 준비할 것이다. 맛있는 음식과 바이올린 깡패가 있다면 왕재수도 그 망나니 같은 투레츠키의 소굴에 가지 않을 테니까. 앞으로도 못 가게 막을 것이다! 하여튼 그놈은 위험한 놈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애를 얼굴 예쁘다고 추행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친 김에 암거래 현장을 고발하고 잡아넣어버릴까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보드카도 나눠마셨고 동갑인데다 친구까지 먹었으니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그건 포기하기로 했다. 어쨌든 바냐 투레츠키는 전설의 서무였으니까.

 

 

   

 

 

FIN

2015. 2. 27 ~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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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는 13편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쓴 건 14편까지인데, 이제 심기일전해 주말부터는 본편을 다시 써보려는 중이다. (그래도 스트레스 받으면 또 서무 시리즈 쓰고 있겠지 ㅠㅠ)

 

..

 

12편에 등장하는 바냐 투레츠키는 이제껏 이 시리즈에 나왔던 인물들과는 좀 다른 유형이다. 이 인물에 대한 묘사나 접근방식은 사실 러시아 문학에서는 낯설지 않은 뺀질이 사기꾼 이야기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 소련 시절 일리프 & 페트로프의 소설도 그렇고 이런 타입 인간들이 종종 나온다. 일종의 오마쥬랄까.

 

..

 

여기 나오는 특별 감사와 베르닌의 고초는 상당 부분 내가 예전에 겪었던 일들에서 가져왔다. 물론 소설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변형되긴 했지만. 투레츠키가 제시하는 3가지 방법도 일부는 실화. 물론 2번의 뇌물이니 동료 팔아넘기기니 하는 건 적어도 내가 겪은 것은 아니다, 내가 다니는 동안 우리 회사에서 벌어진 것도 아니고. 하지만 어디든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

 

 

바냐 투레츠키의 암시장을 찾는 왕재수의 이야기는 좀 웃기게 변형되긴 했지만. 어쨌든 본편 우주에서도 미샤는 암시장이나 지하출판계를 자주 이용한다. 특히 지하출판, 자가출판 문학들 쪽에는 조예가 깊다. 발레학교 시절부터 비밀문학 서클에 드나들곤 한다.

투레츠키의 암시장은 물론 공산주의/사회주의 체제인 소련에서는 불법이다. 걸리면 잡혀간다!

 

 

..

 

 

12편 마무리에서 베르닌이 금요일에 휴가를 내겠다고 했는데.. 그게 어떻게 될지는 13편으로... 그건 다음주에..

그럼 이제 힘을 내서 본편으로 돌아가 왕재수 대신 진지한 미샤를 데리고, 그리고 고지식한 책상물림이 아닌 능력있고 유들유들한 다닐 베르닌을 데리고 다시 글을 써봐야겠다.

 

댓글은 언제나 힘이 됩니다 :)

 

 

 

:
Posted by liontamer
2015. 3. 11. 15:20

어스름 속의 창문과 신호등 불빛 russia2015. 3. 11. 15:20

 

 

지난 2월 21일. 페테르부르크를 떠나기 전날.

 

이날 저녁 마린스키 신관에서 라트만스키 안무의 안나 카레니나 공연을 보기로 했는데 공연 시작 한시간 전부터 입장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찍 도착해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주변을 좀 산책했다. 축축한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좀 괴로웠지만 ㅠㅠ

 

걷다가 찍은 극장 근처 거리의 어느 건물 창문. 그리고 그 앞 횡단보도의 신호등 불빛.

 

:
Posted by liontamer

 

 

마음의 위안을 위해.

지난 2월 16일.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신관에서 공연된 라트만스키 안무의 곱사등이 망아지 커튼 콜.

 

맨앞에 앉았었는데 사실 신관은 무대도 넓고, 또 곱사등이 망아지는 무대 배경이 모던하고 미니멀리즘 요소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사진이 잘 안 나왔다. 빛때문에 번져서.. 어쨌든 리뷰를 아직 못 올리고 있으니 이때 찍은 사진 한 장이라도 먼저 올려본다. 내가 아래에서 찍다 보니 사진의 무용수들이 원래 기럭지보다 좀 짤막하게 나왔네..

(이날 올렸던 아주 짧은 메모와 사진 세 장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07)

 

미녀 여왕 역의 알리나 소모바. 그리고 귀염둥이 바보 이반 역의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이거 리뷰 써야 하는데.. 공연 보고 메모는 적어놨는데 돌아와서 심신의 여유가 없어 못 쓰고 있네.. 슈클랴로프의 이바누슈카는 정말 최고였다. 귀여움과 생기와 유머의 결정체랄까... 역시 이 사람은 마냥 밝고 해맑은 소년 같은 이미지를 잘 소화했다. 드라마틱하고 열정적인 연기도 잘하지만.. 저 이바누슈카는 정말... 매일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제발 이 둘 주역 버전으로 dvd 좀 내주세요 ㅠㅠ

 

 

** 위의 내가 찍은 사진이 화질도 별로고 크기도 작아서..

전문 사진사가 찍은 사진 한 컷. 사진은 Alex Gouliaev. 곱사등이 망아지 1막의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불새의 깃털을 발견한 후 환희에 차서 도약하며 춤추는 순간이다.

 

 

:
Posted by liontamer

 

애초에 서무의 슬픔 시리즈를 쓰게 된 것은 본편이 잘 안 풀리는데다 회사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기 치유와 풍자를 위해 시작한 건데.. 요즘은 주객이 전도되어 이게 더 잘 써진다 -_- 그 이유는 회사에서 점점 더 피곤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튼, 내가 힘들수록 단추청년 베르닌을 들들 볶으며... (단추야 미안)

 

그러고보니 벌써 11편까지 왔네.. 11편은 9편과 10편을 읽어야 내용이 잘 이어진다. 베르닌과 왕재수가 9편에서 구출해서 10편에서 덜컥 돌봐주게 된 강아지 벨라가 계속 등장한다. 나 혼자 제일 예뻐야 직성이 풀리는 왕재수는 이놈의 멍멍이가 못마땅하기만 한데...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직장인인 베르닌은 역시나 스페호프 국장에게 시달리고 있으니...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강아지 한 마리를 떠맡게 된 베르닌... 강아지 뒷바라지 하랴 까다로운 왕재수 수발 들랴 여념이 없는데.. 가뜩이나 멍멍이를 귀찮아하는 왕재수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이 와중에 스페호프 국장은 서무들을 모두 호출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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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1

 

 

 

서무의 슬픔

-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목요일에 스페호프가 갑자기 부서별 서무들을 모두 호출했다. 요 며칠 동안 강아지 벨라 때문에 빨리 집에 들어가고 있었던 베르닌은 혹시 국장이 밀려 있는 일을 저버리고 꼬박꼬박 칼퇴근한 자신을 본보기로 혹독하게 비판하지 않을까 겁이 났다. 서무 몇 명이 국장실로 모여들자 스페호프는 그들에게 반듯하게 자를 대고 그어놓은 상자와 표 몇 개가 들어 있는 서류 양식을 나눠주면서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 신년이니 전 직원 대상으로 일대 일 면담을 진행하도록 하겠네. 양식은 총 세 가지일세. 하나는 올해 자신의 담당 업무계획. 하나는 자기 계발 계획. 마지막은 나와의 면담 후 그 결과를 정리하여 제출하는 양식이지. 이것은 전 직원이 작성해야 하네. 서무는 이 양식들을 모두 등사하여 직원들에게 배포하도록 하게. 처음 두 자료의 작성 기한은 내일 저녁 5시까지. 5시까지 서무는 부서원들에게서 이 두 자료를 수합해 부서별, 직원 이름별 순서대로 정렬하여 나에게 제출하게. 면담은 월요일부터 시작하겠네. 오전 주간회의를 마치고 오후 1시부터 시작될 예정이야. 여기 면담 순서표가 있네. 선임부서인 감시분석부가 제일 첫 타자일세. 에, 그러니까... 감시분석부 직원들은 알파벳 순서대로 하면... 이 부서에 A로 시작하는 성은 없으니까... 그렇군. 베르닌. ”

 

“ 네? 네!

 

오늘 저녁에는 벨라와 왕재수에게 뭘 먹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베르닌은 자기 이름을 듣고 화들짝 놀라 등을 꼿꼿하게 펴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스페호프는 혀를 끌끌 찼다.

 

“ 군대라도 되나,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른담. 자네가 1번일세. 월요일 1시. 올해의 업무 계획에 대해 2장 이내로 작성할 것이며 이에 덧붙여 자기 계발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도 1장 이상 작성하게. 자네 같은 경우에는 반드시 행정 역량 배양에 대한 중장기 로드맵이 간단하게나마 제시되어야 해. 알겠나? 그럼 이만 가보게. ”

 

 

베르닌은 세 장의 각각 다른 양식들을 가지고 나왔다. 평소에는 다른 서무들에게 양보했을 테지만 오늘은 빨리 집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동료들을 제치고 제일 먼저 자료를 등사했다. 잽싸게 달려가 부서원들에게 자료를 나눠주고 국장의 명령을 전달했다. 다들 한숨과 욕설을 내뱉었다.

 

 

“ 으아... 정말 이 국장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시무식에 그 회의도 모자라서... 어휴... ”

 

“ 작년 연말 내내 부서 성과보고서 쓰느라 그 난리를 쳐놓고... 그때 내년 계획서도 냈잖아. 개인별 계획서를 뭘 또 내래... 심지어 무슨 자기 계발... 집에 가야 자기 계발을 하지 맨날 사무실에 늦게까지 붙잡아놓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하냐고. ”

 

“ 끝나고 나서 결과보고 하라는 건 또 뭐야... 어휴, 이 양식들 좀 봐. 선 밖으로 삐져나가지 말라고 메모까지 붙여놨어. 글씨도 크게 써서 메울까봐 일일이 줄까지 그어놨네... ”

 

“ 주간회의 때도 숨 막혀 죽겠는데 일대 일 면담이라니... 보나마나 18세기 고어와 레닌의 일화를 인용하면서 설교하고 훈계하겠지... ”

 

“ 잠시라도 우리가 마음 편하게 쉬는 꼴을 못 보니 원... 월요일부터 그것도 우리 부서가 제일 먼저 시작이라니. 주말에 나와서 이거 작성하라는 거야 뭐야. ”

 

“ 알파벳 순서면 자네가 1번이구먼... 자네도 참 안됐네, 다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심지어 1번이라니 엄청 스트레스 받겠어. ”

 

저요? 전 대충 쓸 건데요. 잘 쓰나 못 쓰나 어차피 혼날 게 뻔한데요 뭐. ”

 

 

그러자 발따예프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자네 같은 책상물림이 그런 말을 하다니! 내 귀가 잘못됐나? 자네 혹시 요즘 연애하나? ”

 

“ 그건 또 무슨 소린가요? ”

 

“ 원래 연애를 하면 다른 일에 무뎌지지 않나. 일도 소홀히 하고. 안 그래도 요즘 칼퇴 하던데... 아, 하긴. 자네 그 불여우랑 사귄지 몇 달 됐지. 에이 찜찜해,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 요즘은 그 녀석이랑 더 많이 하게 됐나보군. 그래서 일찍 가고 일도 대충 하는 거로군. 다냐, 내 말 듣게. 아무리 예뻐도 그놈은 사내 녀석이야. 자네 앞날에 좋을 거 하나 없단 말이야. 국장이 감시하라고 붙여놓았으니 떨어져 있을 수도 없고... 그 자식이 워낙 불여우로 소문났으니 자네 나이에야 넘치는 혈기에 계집애보다 예쁘장한 놈이 엉겨들면 참기 힘든 것도 이해는 가네만... 제발 그 녀석하고 응응응을 즐기는 짓은 그만두게. 자네 어쩌려고 그러나, 장가도 가야 할 텐데. 어휴... ”

 

아아... 제발요! 전 그 자식하고 진짜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아악 진짜 미치겠네. 다 헛소문이라고요! ”

 

“ 우겨봤자... 다 아는 거... ”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왔다. 찬찬히 살펴보니 국장의 요구자료 양식은 정말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는 대충 아무렇게나 문장을 지어내 표 안에 쑤셔 넣었다. 업무 계획에는 작년에 세운 서무 중장기 계획과 왕재수 감시 스케줄을 휘갈겨 썼다. 자기 계발 계획은 타이프 능력 강화, 비품 장부 정리 능력 배양, 도청 장치 부착 기술 습득 따위를 향후 5개년 중장기계획으로 대충 만들었다. 어차피 아무리 잘 써도 스페호프는 화를 낼 게 뻔했다. 전 같았으면 머리를 짜내고 고민하고 주말에도 나와서 계획서를 창작했을 테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빨빨거리며 뛰노는 귀여운 벨라에 대한 그리움 90%와 폐렴 후유증으로 온종일 밥도 안 먹고 잠만 자려고 하는 왕재수에 대한 걱정 10% 뿐이었다.

 

 

5시가 되어 직원들이 우르르 퇴근했다. 베르닌은 책상 위에 서류를 흩어놓은 죄로 1시간 초과근무를 한 후(벌칙 기간이 아직도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다) 급하게 사무실을 나섰다.

 

 

 

*     *     *

 

 

 

베르닌은 비트 한 덩어리와 양배추 반 통, 쇠고기 약간, 시든 오렌지 한 알과 생강, 레몬 두 알, 강아지용 고무공을 사서 귀가했다. 열쇠로 현관문을 열기 전부터 그의 발소리를 알아들은 벨라가 투다다닥 하며 뛰어나와 문 앞에서 헥헥거리며 팔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벨라가 ‘왕! 왕왕!’ 짖으며 베르닌에게 풀쩍 뛰어 달려들었다. 딴에는 품까지 뛰어오르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베르닌은 컸고 벨라는 조그만 강아지였으므로 무릎 언저리까지 뛰어오른 게 전부였다.

 

 

“ 우리 벨라 집 잘 보고 있었어? 심심했지? ”

 

“ 알알알! 왕왕~! 멍멍! ”

 

“ 오오 그랬어~ 이제 오나 저제 오나 기다렸구나~ 배고팠구나~ 오빠가 밥 줄게~ ”

 

베르닌은 벨라를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벨라는 종이봉투에 들어 있는 쇠고기 냄새에 정신을 못 차렸다. 코로 들이받고는 자꾸 봉투를 찢으며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 쉿, 벨라! 안 돼! 이건 너 먹을 거 아니야! 네 건 어제 삶아놨어. 그거 사료에 섞어줄게 기다려! ”

 

“ 멍! 멍멍멍! ”

 

“ 이건 사람 먹는 거야. 저 싸가지 없는 오빠가 아프니까 수프 끓여주려고 사온 거야. 너는 사료랑 삶은 고기 먹자~ ”

 

“ 왕왕왕! ”

 

 

벨라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베르닌이 쇠고기를 꺼낸 후 종이봉투를 버리자 잽싸게 물고 달아나 봉투를 핥다가 발기발기 찢고 난리를 쳤다. 어찌나 시끄러웠는지 자다가 깬 왕재수가 침실에서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개! 조용히 좀 해! ”

 

“ 어, 너 깼구나. 좀 어때? ”

 

“ 개 좀 조용히 시키면 안 돼? 아아, 저놈은 정말 온종일 짖어... 귀가 먹을 지경이야. 한숨도 못 잤어... 우유배달부 지나가면 짖고... 신문 돌리는 소리에 또 짖고... 밖에서 애들 노는 소리 들리면 또 짖고... ”

 

“ 강아지는 밖에서 뛰어놀아야 하는데 집에 가둬놓으니 답답해서 그렇지... 네가 안 아팠으면 잠깐 산책이라도 시켜주라고 했을 텐데. ”

 

“ 나 산책할 기운도 없는데 무슨 놈의 똥개를 산책시켜. ”

 

“ 너 속은 괜찮아? 어제 많이 토했잖아. ”

 

“ 의사 선생님이 아침에 들렀다 가셨어. 생선 먹였다고 너 욕했어. ”

 

너 때문에 일부러 기름 안 쓰고 쪘는데 그래도 먹으면 안 되는 거였대? ”

 

“ 목도 붓고 열이 나니까 생선도 으깨서 줘야 했는데 통째로 줬다고... ”

 

“ 난리났구만. 어휴... 으깨고 짓이겨서 이유식 만들어 갖다 바쳐야겠네. ”

 

누가 해 달랬어? 나 저녁 안 먹을 거야. 어차피 입맛도 없어. 쳇. ”

 

“ 먹어야 나을 거 아니야. 어젯밤에도 열 올라서 끙끙 앓더니. ”

 

“ 내가 언제! ”

 

“ 수프는 괜찮대? ”

 

“ 응, 보르쉬 먹으래. 비타민이랑 단백질... ”

 

“ 알았어. 보르쉬 끓여줄게. 비트랑 고기 사왔어. 지금 육수 끓이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계속 누워 있으면 더 힘드니까 좀 일어나 있어. ”

 

“ 싫어. 똥개가 자꾸 엉긴단 말이야. ”

 

“ 그렇게 벨라가 싫으면 너네 집으로 가. ”

 

“ 나도 가고 싶어! 근데 그 바퀴벌레... 아아... ”

 

 

왕재수가 입술을 실룩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또 ‘시골’ 운운하며 한바탕 서러움을 표출할 기세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급하게 말을 돌렸다.

 

“ 아니면 바이올린 아저씨한테 가든지... 그러고 보니 그 인간 뭐냐! 네가 이렇게 아픈데. 입원까지 했었는데 왜 코빼기도 안 비추는 거야! 데리고 놀 땐 언제고 지금 아프니까 응응응 못 한다고 안 오는 거야? 나쁜 놈!

 

“ 로만 욕하지 마!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 ”

 

“ 왜! ”

 

“ 새해 들어서 너네 국장이 나 감시 강화할 거라고 했단 말이야. 꼬투리 잡히기만 하면 형량도 늘리고 진짜 감옥에 넣는댔어. 말 안 들으면 나랑 가까운 사람도 다 찾아내서 가만 안 둔댔어. 로만은 전과도 있어서 나랑 놀다 변태라고 잡혀가면 골치 아프단 말이야. 그래서 우리 집으로는 절대 오지 말라고 했어. 우리 집엔 도청 마이크 있잖아. 너네가 설치한 거... 우리가 응응응하는 소리 녹음되면... ”

 

“ 도청 마이크 있긴 한데... 그 도청 내용 듣고 정리해서 보고서 쓰는 거 내가 담당이야... 그런 거 안 쓰니까 걱정하지 마. 듣기도 싫어서 그런 소리 나오면 내가 다 지워버렸어. ”

 

“ 그래도... 국장이 전화해서 엄청 갈궜어. 나쁜 자식, 가만 안 둘 거야. ”

 

“ 국장이 너한테 전화했었어? 언제? ”

 

“ 물에 빠진 날 아침에... ”

 

“ 아, 시무식 했던 날. 근데 왜 전화를 했지? ”

 

“ 그 자식이 나보고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했는데 내가 안 갔거든. 새해니까 와서 서류도 갱신하고 자기한테 사상 재교육 받아야 된다나. 미쳤냐, 극장 일도 바빠 죽겠는데 그 멍청한 놈한테 가서 무슨 교육을 받아. 안 간다 했더니 열 받아서 전화하더니 막 협박하더라고. ”

 

“ 아... 너한테도 그랬구나... 올해 계획이랑 자기 계발 계획 얘기하려고 했나보다. 우리도 월요일부터 그거 할 거라서... ”

 

자기 계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난 이룰 거 다 이룬 몸이야. 전 세계 극장에서 날 다 아는데! 난 브레즈네프에 영국 여왕에 프랑스 대통령에 미국 상원의장도 만났어! 웬 거지발싸개 같은 철밥통 KGB 앞잡이가 나한테 자기 계발 운운 교육 운운이야! 하여튼 그 자식이 열 받아서 막 욕하고 별의별 개소리를 다 늘어놓더라고. 그러더니 두고 보라면서 끊잖아... ”

 

“ 그랬구나... ”

 

 

베르닌은 스페호프가 암살 운운했던 날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왕재수에게 그런 얘기까지 할 수는 없어 가만히 있었다.

 

 

“ 하여튼 너무 걱정하지 마. 그 깡패 얘긴 보고서에 한 번도 안 썼으니까. 거실로 좀 나와 있어. 육수 다 끓은 거 같으니까 수프도 금방 될 거야. ”

 

“ 싫어, 똥개가 자꾸 무릎에 올라오고 슬리퍼 물어뜯어. ”

 

“ 그렇게도 벨라가 싫으냐? 귀엽기만 한데... ”

 

“ 그냥 가만히 한쪽에 앉아 있으면 신경 안 쓰고 괜찮은데 자꾸 성가시게 하잖아. ”

 

“ 벨라는 강아지인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니! 그래도 너 예쁘다고 달라붙는 거잖아. 나한테는 그렇게 오지도 않아. 밥도 내가 주는데... ”

 

 

왕재수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더 투덜거리지 않고 일어나서 거실로 나왔다. 예쁘다고 해주면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게 분명했다.

 

 

베르닌이 보르쉬를 끓이고 레몬생강차를 만드는 동안 왕재수는 소파에 멍하게 앉아 있었다. 벨라가 투다다닥 하고 달려와 무릎에 뛰어오르려고 하자 마침 옆에 놓여 있던 잡지를 말아서 엉덩이를 탁 때리며 꾸짖었다.

 

개! 가만히 있어! 올라오지 마! ”

 

“ 끼이잉 끼이잉... ”

 

 

벨라가 한 번 더 뛰어올랐다. 왕재수가 다시 잡지로 엉덩이를 때렸다.

 

 

개! 혼날 줄 알아! ”

 

“ 이이잉... 낑... ”

 

“ 야, 벨라 때리지 마! ”

 

“ 오냐오냐하니까 더 이러는 거잖아! 버릇 들여야 할 거 아냐. 야, 개! 누가 그렇게 이빨 드러내래! ”

 

“ 벨라! 이름 있잖아, 벨라! 왜 개라고 하는 거야! ”

 

“ 개니까 개라고 하지! 그리고 이거 수놈이라 했잖아! 벨라가 뭐야! ”

 

“ 에휴, 말을 말자. 하여튼 벨라 때리지 마. 저거 봐, 벌써 기죽었네. 꼬리도 내리고 눈치만 보잖아. ”

 

“ 조용해져서 좀 낫네. ”

 

 

베르닌은 혀를 차며 부엌으로 돌아갔다. 뭉근하게 끓인 보르쉬를 그릇 두 개에 옮겨 담고 스메타나를 한 스푼씩 얹고 파슬리를 뿌렸다. 자신이 먹을 소시지를 데치고 왕재수를 위해 메밀죽을 조금 데웠다.

 

 

“ 야, 와서 밥 먹어. ”

 

 

왕재수가 식탁 앞에 와 앉았다. 보르쉬를 천천히 먹었다. 메밀죽도 두어 숟가락 먹었다. 먹는 데 한 나절은 걸리는 것 같았지만 베르닌은 어제 일을 생각하면서 재촉하지 않고 꾹 참았다. 왕재수가 수프를 절반도 못 먹고 숟가락을 놓았을 때도 심호흡을 하며 잔소리를 삼켰다.

 

벨라는 왕재수에게 혼났던 것도 금세 까먹은 듯 다시 식탁 아래로 와서 간절한 눈으로 베르닌을 올려다보며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어댔다. 베르닌이 소시지 조각을 조금 잘라 주자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왕재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마침 알맞게 달여진 레몬생강차를 한 잔 가져다주었다. 이번만큼은 꿀을 두 숟가락이나 듬뿍 넣었다.

 

 

“ 이거 마셔. ”

 

“ 다 봤어, 꿀 잔뜩 넣는 거. 안 먹어. 알잖아, 나 몸매 관리 때문에 차에 설탕이나 꿀 안 넣는 거! ”

 

“ 지금은 꿀 먹어야 돼. 그래야 목이랑 폐에도 좋고 기침도 가셔. 어차피 너 지금 너무 살 빠져서 단 거 먹어도 돼. 몸이 종잇장 같잖아. ”

 

“ 너 자꾸 나보고 말랐다 하는데 진짜 나 벗은 거 안 봐서 그런 거라니까! 나 몸은 날씬해도 필요한 데는 근육 다 붙어 있고 엉덩이가 얼마나 탱글탱글하고 근사한데... 허벅지는 두툼... ”

 

“ 아니야, 거울 좀 봐! 이제 진짜 말랐다니까! ”

 

 

왕재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거울을 보았다. 과연 무용수 출신답게 정말 유연했다. 몸을 완전히 옆으로 틀어서 이리저리 확인했다. 손을 뻗어 몸 여기저기를 샅샅이 만져보기까지 했다. 베르닌은 어쩐지 좀 민망해서 고개를 돌리고 벨라의 앞발을 만지며 놀아주었다.

 

마침내 왕재수가 식탁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레몬생강차에 꿀을 두 숟가락 더 들이붓더니 채 식지도 않은 뜨거운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다가 기침을 했다.

 

 

“ 천천히 마셔야지. 꿀 그렇게 많이 넣으면 독해서 기침 나온다고. ”

 

“ 기침 하지 말라고 꿀 먹으라며! 왜 많이 먹었더니 기침 나오는 거야... ”

 

“ 너무 달아서 독하니까 그렇지! ”

 

“ 정말 엉덩이가 납작해진 거 같아... 나 정말 심각해? 그렇게 말라 보여? ”

 

“ 나한테 그런 거 묻지 마... 바이올린 아저씬 작고 마를수록 좋아한다며! ”

 

“ 아니야... 로만이 날씬한 거 좋아하긴 하는데 엉덩이는 탱글탱글해야 좋다고 했어... 나처럼... 어떡하지. 어떻게 다시 돌려놓지... ”

 

“ 나 그런 거 몰라... 난 사내자식 엉덩이에 관심 없어! 그런 얘기 하기도 싫고 듣기도 싫어... ”

 

“ 빨리 나아서 다시 운동하고 몸 만들어야겠다... ”

 

“ 그러니까 잘 먹어야지. 앞으로 내가 주는 대로 다 먹어!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자신의 미모가 손상됐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꿀꺽꿀꺽 차를 마시고는 베르닌이 까준 오렌지도 반쪽 먹었다. 평소 같았으면 싱싱하지 않다느니 역시 시골이라 수입산 과일은 기대하면 안 된다느니 했을 텐데 말없이 오렌지를 씹으면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속눈썹에 벌써 눈물이 두어 방울 그렁거리고 있었다.

 

우는 왕재수만큼 피곤한 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급하게 설거지를 하러 갔다. 벨라가 투닥투닥 쫓아왔다가 더 이상 나올 게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고는 도로 왕재수 곁으로 갔다. 그러다가 아까 잡지로 맞은 것을 떠올렸는지 슬슬 뒷걸음질쳤고 몇 분쯤 후엔 그 사실을 또 잊은 듯 다시 왕재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왕재수는 오렌지를 먹다가 그 꼴을 보고는 혀를 찼다.

 

 

“ 저거 진짜 멍청한 똥개야... 지능이 낮은가봐. 하긴 그러니까 그 추위에 얼음 위에 올라앉아 있었겠지. ”

 

“ 의사 선생님이 쟤 아직 6개월도 안 됐다고 했어. 어려서 그런 거야. 크면 말귀 다 알아먹을 거야. 훈련도 받고... ”

 

“ 아니야, 될 놈은 애초부터 싹수가 보여. 저건 그냥 바보야. 나 발레학교 때도 그랬어. 안 될 애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돼. 그냥 그런 거라고. ”

 

“ 너 천재라고 자랑하냐? 너 같은 놈은 노력하는 일반인의 맘 따위 몰라. ”

 

“ 그런 거랑 좀 틀려! 나도 노력했어. 엄청나게 노력했단 말이야! 어깨 부서졌을 때도 무대 올라갔어! 근데 노력 가지고 안 되는 것도 있단 말이지. 우리 극장에도 그런 애들 있는데 골치 아파 죽겠어. ”

 

그래도 옆에서 잘 끌어주란 말야! 너 천재라고 다른 애들 무시하지 말고. ”

 

“ 끌어줘서 되는 놈이 있고 안 되는 놈이 있어. 바로 이런 놈. 똥개...

 

벨라 한번만 더 모욕하면 너네 집으로 내쫓을 거야.

 

“ 칫, 자기 집에서 벌레 안 나왔다고 유세하고... ”

 

 

왕재수는 일어나서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스트레칭도 하고 거실을 돌아다니며 걷기도 했다. 하지만 몇 분 후 어지러운 듯 소파로 가서 철푸덕 주저앉았다. 벨라가 머뭇머뭇 소파 아래로 다가갔지만 뛰어오르지는 않았다. 소파 위에 잡지가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재수는 다리를 길게 뻗더니 심심한 듯 노래를 흥얼거렸다. 베르닌은 잠깐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알아먹을 수 없는 말이었다.

 

 

“ 그건 또 어느 나라 말이야? ”

 

“ 바보. ”

 

“ 내가 왜 바보야. 나도 학교 다닐 때 우등생이었어. 난 대학도 나왔는데! ”

 

“ 데이빗 보위란 말이야. ”

 

“ 그게 누구야... ”

 

“ 칫, 모스크바에서 대학 나왔다더니. 내가 아는 모스크바 애들은 파티 가면 보위 노래 틀어놓고 나랑 같이 놀았는데. 책상물림... ”

 

“ 그거 양키들 노래지? 그런 거 들으면 KGB에서 경고 들어와. 누적되면 자아비판도 해야 되고 청년재판에도 회부... ”

 

양키 아니거든! 영국 사람이거든!

 

“ 하여튼... 근데 노래는 좋네. ”

 

“ 당연하지! 그리고 내가 부르니까. ”

 

 

베르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왕재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를 계속 불렀다. 생각보다 노래를 잘 했다. 춤을 출 때나 노래를 부를 땐 그렇게 싸가지 없는 애송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벨라가 꼬리를 치더니 살며시 소파 위로 올라가서 왕재수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왕재수는 무의식적으로 잡지를 집어 들고 내리치려고 했지만 벨라는 눈을 사르르 감으며 황홀하게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노래가 후렴의 절정부에 이르렀을 때는 왕재수의 무릎에 머리를 비비면서 ‘이이잉 끼이잉’ 하고 조그맣게 콧소리를 냈다. 왕재수가 노래를 멈추자 벨라가 무릎을 살짝 들이받으며 ‘으응 으응 멍멍!’ 하고 앙탈 부리는 소리까지 냈다. 다시 노래를 부르자 놀랍게도 조용해져서 가만히 있었다.

 

 

노래를 마친 후 왕재수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벨라를 내려다보았다.

 

 

“ 똥개 주제에 웃겨, 노래도 듣고. ”

 

“ 벨라가 그 노래 좋아하는 거 같아. ”

 

“ 누구보다 낫네, 노래도 들을 줄도 알고. ”

 

“ 이상하다, 며칠 전에 내가 샤워하면서 노래 불렀을 땐 막 잡아먹을 듯이 짖었는데... ”

 

 

베르닌은 고개를 갸웃했고 뜻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강아지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는 생각이 왈칵 들었다. 차라리 고양이가 낫다 싶었다. 그래도 검정고양이 미셴카는 밥 주면 보답한답시고 쥐와 참새, 곱등이라도 물어다주는데...

 

그래도 왕재수의 무릎에 머리를 들이대고 재롱을 부리는 벨라를 보니 서운함이 눈 녹듯 스러졌다. 왕재수는 벨라가 얌전해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자기 노래를 알아줘서 기분이 풀려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개!’ 하고 소리 지르거나 잡지로 때리지 않았다. 대신 소파에 누운 채 노래를 몇 곡 더 흥얼거렸다. 크게 부르고 싶어도 목이 아파서 못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식으로 부르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직하고 조그맣게 불렀다.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노래였다. 베르닌은 설거지를 했고 왕재수가 먼지 때문에 폐렴이 도질까봐 걱정이 되어 물걸레로 청소를 하면서 노래를 들었다. 굉장히 듣기 좋았다. 꼭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처럼 들렸다.

 

 

청소를 하고 다 마른 빨래를 개켜 정리한 후 벨라와 좀 놀아보려고 거실로 돌아왔더니 강아지는 왕재수의 허벅지를 베고 잠들어 있었다. 왕재수도 소파에 길게 뻗어서 쌕쌕거리며 자는 중이었다. 베르닌은 내키지 않았지만 왕재수를 깨웠다.

 

 

“ 야, 너 약 먹고 자야 돼. ”

 

“ 머...거써... ”

 

“ 언제! ”

 

“ 청소...하때... ”

 

“ 침대 가서 자! ”

 

“ ㅇㄱㅎㅇㄴ... ”

 

 

베르닌은 왕재수를 깨우는 것을 포기했다. 성가신 이 녀석을 소파에 놔두고 자기 침대를 되찾을까 했지만 패딩 입히고 강 건너게 하다가 물에 빠져서 아픈 거라고 생각하니 또 가책이 들었다. 그래서 세상모르고 잠든 왕재수를 침실까지 안고 가서 침대에 눕혀 주었다.

 

그 와중에 깨어난 벨라가 왕재수의 무릎에 매달려 안 떨어지는 것에 베르닌은 다시 한 번 배신감을 느꼈지만 자신은 누구처럼 예쁘지도 않고 달착지근한 향내를 풍기는 것도 아니고 노래를 잘 하는 것도 아니니 포기하고 한숨을 쉬며 소파로 가서 잠이 들었다.

 

 

 

*    *    *

 

 

 

금요일에 베르닌은 며칠 동안 밀린 일들을 해치웠다. 금주의 왕재수 도청 보고서를 정리했다. 다행히 이번 주에는 왕재수가 물에 빠지고 폐렴에 걸려서 바이올린 깡패와 응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의로 삭제할 내용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오후 3시부터 감시분석부 사무실을 돌면서 개인별 업무계획서와 자기계발 계획서를 걷었다. 선배들이 아우성을 쳤다. 아직 멀었다는 사람들도 있고 쓸데없는 일을 시킨 스페호프에 대한 성질을 베르닌에게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거 어떻게 하는 거지? 이렇게 하는 거 맞나?’ 하고 물어보는 경우와 ‘자네가 그냥 대충 좀 써줘!’ 라고 반쯤 명령하는 경우가 제일 많았다.

 

 

예전 같았으면 일일이 다 설명해주거나 선배들의 계획서를 전부 받아와 대신 써줬겠지만 베르닌은 빨리 퇴근해서 벨라와 놀고 싶었기 때문에 딱 잘라 말했다.

 

 

국장이 전 직원 대상으로 각각 올해의 업무 계획에 대해 2장 이내로 작성할 것이며 이에 덧붙여 자기 계발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도 1장 이상 작성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써주면 필체가 들통 나 안 됩니다. 5시까지 수합해서 책상에 올려놓으라고 했어요. 안 되면 안 된 대로 그냥 걷어갈 거예요!

 

 

다들 아우성이었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막내 녀석이 벌써부터 못된 버릇만 들어서 선배들을 협박한다, 본시 서무란 것은 부서원의 모든 자료를 작성해주는 법인데 이게 무슨 짓이냐 등등 원성이 빗발쳤다. 베르닌은 마음 한구석이 매우 불편했지만 그래도 안 된다고 맞섰다.

 

 

안됩니다! 전 5시에 자료 수합해 제출한 후 경찰서에도 가봐야 한다고요! 4시 55분에 와서 자료 다 걷을 거예요. 그때까지 안 되는 분들은 국장에게 가서 개별 보고하세요! ”

 

“ 저런 싸가지 없는 놈을 봤나... 불여우랑 놀아나기 시작하더니 못된 짓만 배웠네! 요즘 젊은 것들은 참... 말세야 말세! ”

 

 

베르닌은 괴로운 마음으로 자리에 돌아왔다. 그냥 전처럼 선배들의 보고서를 다 써줄까 망설였다. 가뜩이나 국장에게 들들 볶이는 것도 힘든데 앞으로 선배들마저 자신을 괴롭히고 왕따 시키면 어쩌나 하고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4시 55분에 그는 부서원들의 계획서들을 모두 수합할 수 있었다. 개발세발 써 갈긴 계획서들이 태반이었지만 어쨌든 미제출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선배들은 베르닌에게 눈을 부라렸지만 어쨌든 업무계획서와 자기계발 계획서를 모두 내던졌다.

 

베르닌은 부서원들 성의 알파벳 순서대로 자료를 정렬한 후 종이 서류철에 끼워서 ‘감시분석부’ 라고 쓰고 부서원들 명단과 번호표를 첨부해 국장실로 갔다. 스페호프는 자료를 보더니 서류철을 펼쳐서 내용물을 읽기 시작했다. 맨 앞에 있는 것은 알파벳 순서가 제일 앞인 베르닌 자신의 보고서였다. 막 스페호프가 트집을 잡으려는 태세를 갖추기 직전 베르닌은 잽싸게 선수를 쳤다.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그럼 저는 월요일 1시에 1번으로 면담에 응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경찰서에 가봐야 해서요. 주말 잘 보내십시오! ”

 

 

스페호프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놀라운 표정에는 여러 가지가 함축되어 있었다.

 

 

1. 베르닌이 정시에 퇴근한다.

2. 국장이 자료를 펼쳤는데 지적사항을 말하기도 전에 퇴근 인사를 한다.

3. 베르닌이 주말 인사를 한다 = 베르닌이 주말에 출근하지 않는다!

4. 베르닌이 국장의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서둘러 국장실을 나가버린다!!!!

 

 

스페호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베르닌이 며칠 전 그 반동분자 불여우를 강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던 사실을 떠올리고 꾹 참았다. 어쨌든 고지식한 녀석이니 자신의 지령을 잊을 리 없으며 종국에는 그 녀석이 자신의 뜻대로 불여우를 처치해 줄 거라고 위안했다.

 

 

 

*     *     *

 

 

 

베르닌은 경찰서에 들렀다. 혹시 벨라를 찾으러 온 사람이 없었는지, 혹은 신고된 건 없었는지 물었다. 담당 경찰관은 고개를 저었다.

 

 

“ 다른 동네에서 왔나 봐요. 주인 못 찾을 거예요. 그냥 키워요. 아니면 유기견 수용소에 넘기든가. ”

 

“ 제가 전단지도 만들어서 붙였는데요... 그래도 연락이 없나요? ”

 

“ 바람이 많이 불어서 전단지 같은 건 다 떨어졌을 거예요. ”

 

 

베르닌은 경찰서를 나왔다. 별로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벨라를 자기 식구로 맞이해서 예뻐해 주며 키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집에 돌아오니 거실 소파에 비스듬하게 기댄 왕재수가 무릎에 벨라를 앉혀놓고 털을 빗겨주면서 한 손으로는 등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심지어 애들 동요까지 불러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베르닌이 들어오자 화들짝 놀라며 언제 그랬냐는 듯 벨라를 무릎 아래로 밀어버리고는 시치미를 뗐다.

 

 

“ 어, 너 빨리 왔구나. 아휴, 들어오면 왔다고 말을 해야지. 도둑놈인줄 알았네! ”

 

“ 너 벨라랑 놀아 주는 거야? 털도 빗겨주고... ”

 

내가 왜! 벼룩 있을까봐 검사한 거야! 세균 옮길까봐! ”

 

“ 어, 벨라가 어제보다 털이 더 하얗네. 목욕시켰어? ”

 

“ 때 타서 꼬질꼬질한 게 걸레 같았잖아! ”

 

“ 어제까지 엉덩이 끌고 다니면서 바닥에 비비고 긁더니 지금은 안 그러네. 목욕시켜서 그런가? 나도 시켜줬었는데 계속 그러더니. ”

 

“ 넌 이 똥개 항문낭 안 짜줬잖아! ”

 

“ 그게 뭐야? ”

 

“ 있어! 개 엉덩이에 있는 작은 주머니 같은 거. 목욕시킬 때 그거 꼭 짜줘야 돼. 그거 짜면 냄새나는 물이 찍 나오거나 끈적한 게 나와. 꼬박꼬박 짜줘야 위생을 유지할 수 있고 개도 거기 안 가려워 해. ”

 

“ 어, 너 개 안 키워봤다면서 어떻게 그런 전문적인 지식을 알아? ”

 

볼쇼이에서 마리야 누나가 개 키웠다고 했잖아. 맨날 개 얘기만 했다니까! 내 앞에서 그거 짜는 것도 몇 번 보여줬어. 우윽... ”

 

“ 그래도 너 기특하다. 지저분한 거 싫어하면서 그런 것까지 해주고... 너 사실은 벨라 귀여워하는 거였구나! ”

 

아니야! 똥개를 내가 왜! 자꾸 카펫에 엉덩이 끌고 다니니까 지저분한 거 묻힐까봐 찝찝했단 말이야! 그래서 욕실 가서 짜줬더니 더러운 거 나와서 막 묻고... 할 수 없이 씻긴 거야! 아 정말 싫다... 똥개... ”

 

“ 근데 털도 빗겨주고... 귀 뒤쪽 털은 리본으로 묶어주기까지 했네. 어, 이 분홍색 리본... 렐랴가 준 버찌잼 병에 달려 있던 거... 수입 리본이랬는데. 엄청 고급... 벨라를 이렇게 예쁘게 치장까지 시켜주다니. ”

 

“ 털이 내려와서 개 눈을 찌르고 있었단 말이야! 치장은 무슨! 나 예쁘게 꾸밀 기력도 지금 없는데 똥개를 내가 왜!

 

“ 어, 벨라 먹을 고기 다 떨어졌는데 밥그릇에 삶은 고기가 있네, 그것도 곱게 찢어서 무슨 레스토랑 요리처럼 세팅했네. 물그릇에 부어 놓은 건 심지어 우유네! 집에 우유 없었는데. 네가 벨라 주려고 사온 거야? 고기도 삶고? ”

 

무슨 똥개한테 주려고 우유를 사니! 나 원래 저녁엔 보습하고 피부 관리하려고 우유로 세수하는 거 몰라? 몸도 좀 나아진 거 같아서 바람도 쐬고 산책도 하려고 나간 김에 가게 가서 우유 사온 거란 말이야! 나 먹고 나 세수할 우유 산 거야! 근데 좀 애매하게 남아서 버리느니 아까우니까 똥개 물그릇에 부어놓은 거라고! ”

 

“ 그럼 고기는... 고기도 너 먹으려고 산 거야? ”

 

아니야! 이거, 이거... 어제 네가 끓여놓은 보르쉬... 아까 배고파서 데워먹었는데 목이 아직 부어서 고기는 먹기 힘들었어. 버리려다 이것도 아까우니까 그냥 멍멍이한테 준 거야! 음식물 쓰레기 치우는 셈 치고! ”

 

“ 근데 물에 싹 씻어줬는데? 개가 비트랑 야채 냄새 싫어할까봐 고기에서 수프 국물 다 씻어준 거 아니야? ”

 

아니야! 보르쉬는 빨간색이니까... 그 안에 든 고기도 빨간색이라서 기껏 씻겨놨는데 개털에 빨간 물 들까봐 씻어준 거야! 나 저 멍멍이한테 관심 없어! ”

 

“ 그랬구나, 넌 벨라한테 관심 없는데 그냥 어쩌다 보니 고기도 남고 우유도 남아서 준 거구나. 근데 고기 씻어서 밥그릇에 세팅까지 했으면 벨라 먹으라고 주지 왜 식탁 위에 올려놓은 거야? ”

 

“ 쟤 오후에 간식 먹었단 말이야. 저녁은 우리 먹을 때 줘야지. 아무리 똥개라도 계속 먹일 수는 없잖아! 돼지처럼 되라고! ”

 

“ 간식? 무슨 간식? 나 그런 거 준비 안 해놨었는데? ”

 

 

베르닌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소파 구석에 놓여 있는 노란색의 봉지를 발견했다. 겉에 ‘개 비스킷’이라고 씌어 있었다.

 

 

“ 어... 개 비스킷... 네가 사온 거야? 벨라 주려고? 너 진짜 세심하구나, 난 개 비스킷 같은 거 있는 줄도 몰랐어. ”

 

아냐! 우유 계산하는데 지폐밖에 없었단 말이야. 계산원이 잔돈 없으니 거스름돈 못 준다고 해서 열 받아서 눈에 띄는 거 산 거야! 돈 맞추려고! ”

 

“ 우유보다 개 비스킷이 더 비쌀 거 같은데... ”

 

“ 하여튼! 자꾸 말 시키지 말고 저녁밥 만들어줘! 나 잘 먹어야 돼, 그래야 약도 먹고 운동도 하고 몸도 다시 만들어서 탱글탱글한 엉덩이도 되찾고 로만한테 예쁨 받는단 말이야! ”

 

 

베르닌은 비죽비죽 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부엌으로 갔다. 이틀 전 왕재수가 남겼던 생선을 잘게 토막 내 우하 수프를 끓였다. 보르쉬 끓이고 남았던 양배추를 한 장 한 장 떼어내 데쳤고 거기에 삶은 감자를 곱게 으깨서 곁들였다. 버터는 소화가 안 될까봐 제외하고 대신 설탕과 소금, 식초를 약간 뿌렸다. 그리고 왕재수에게 맞추느라 이유식 같은 음식만 먹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햄과 치즈를 얹은 흑빵을 두 조각 추가했다.

 

 

식탁에 앉기 전에 왕재수가 삶은 고기가 담겨 있는 밥그릇을 내려주었다. 벨라가 혀를 빼물고 헥헥헥 하며 득달같이 달려와 코와 주둥이를 들이밀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호통치며 그릇을 치웠다.

 

 

개! 누가 그러랬어! 기다려!

 

“ 끼이이이잉... 낑낑... 끼낑... 아응 아응... ”

 

기다려!

 

“ 끼웅.... ”

 

 

벨라는 하염없이 슬픈 눈으로 왕재수와 밥그릇을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왕재수가 베르닌과는 달리 절대 밥을 안 줄 것처럼 굴자 체념하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왕재수가 밥그릇을 내려놓자 또 미친 듯이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왕재수가 또 그릇을 치웠다.

 

 

“ 안 돼! 기다리라 했잖아! 먹어 해야 먹는 거랬잖아! ”

 

“ 끼이잉... 끼웅... ”

 

“ 야, 그냥 줘... 벨라 아직 애기란 말이야. 눈 앞에 고기가 있는데 얼마나 먹고 싶겠어. ”

 

“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똥개가 더 똥개 된단 말이야! 개! 기다려!

 

다시 밥그릇을 내려놓자 놀랍게도 벨라가 콧잔등을 실룩거리고 훌쩍거리면서도 주둥이를 들이밀지 않고 기다렸다. 왕재수가 흡족한 듯 말했다.

 

 

“ 됐다. 먹어! ”

 

 

벨라가 미친 듯이 고기를 흡입하는 동안 베르닌은 고개를 저으며 투덜댔다.

 

 

“ 너 이제 보니 우리 국장이랑 좀 비슷한 거 같아. 말 못하고 힘 약한 짐승을 괴롭히고, 막 명령하고... ”

 

“ 개랑 인간이랑 같냐! 개는 서열에 따라 행동하는 동물이야! 지금 이런 거 똑바로 안 해놓으면 머리 위로 기어오른단 말이야! 너는 이미 저놈보다 서열도 아래야! ”

 

“ 저렇게 귀엽고 조그만 강아지한테 서열 운운하다니! 말도 안 돼! ”

 

“ 저 책에 다 나와 있단 말이야! ”

 

“ 무슨 책? ”

 

“ 저거! 네가 빌려다 놓은 거. 개 기르는 법! ”

 

“ 너 그 책도 읽은 거야? 벨라한테 잘 해주려고? ”

 

아니야! 아프니까 계속 누워 있어야 되고 심심했단 말이야. 재밌는 책 보려면 우리 집에 가야 하는데 바퀴벌레 때문에 못 가니까 할 수 없이 저거 본 거야! 옆에 굴러다녀서! ”

 

“ 어 그래... 그랬겠지.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네. 내가 아침에 출근하면서 너네 집 들러서 살충제 쳐놓고 왔어. 아마 이제 바퀴벌레 다 죽고 없을 거야. 밥 먹고 나랑 같이 올라가보자. ”

 

“ 으으, 싫어. 살충제 먹고 바퀴가 나와서 죽어 있으면 어떡해... 그 까맣고 빤딱빤딱한 배를 뒤집고 다리를 까딱까딱하고 있으면... 나 그거 못 버린단 말이야. 윽... 입맛이 딱 떨어지네. 아 괴로워. ”

 

“ 내가 치워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밥이나 빨리 먹어. 너도 너네 집에서 자는 게 더 편하잖아. 벨라도 안 괴롭히고, 침대도 여기보다 훨씬 넓고 푹신하고... ”

 

 

그러나 이미 왕재수는 바퀴벌레 생각에 입맛이 딱 떨어진 것 같았다. 생선 수프를 조금 뜨다가 감자 퓨레를 한 숟갈 먹고, 양배추를 한 장 먹은 후 크게 한숨을 쉬더니 몸서리를 쳤다. 안색이 안 좋은데다 두 눈에 먹구름이 가득한 것이 보나마나 머릿속에서는 ‘시골...’이란 한 마디가 무한 반복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베르닌은 호통을 쳤다.

 

 

빨리 먹어! 엉덩이 탱글탱글해져야 한다며! 어제보다 더 납작해졌어! 바이올린 아저씨가 싫어할 거야! ”

 

“ 아아... 너도 로만도 다들 너무해. 시골... ”

 

 

왕재수는 그래도 수프와 퓨레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데친 양배추도 두어 장 더 집어 먹었다. 먹고 나니 뺨에 혈색도 돌아오고 눈빛도 훨씬 나아졌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집으로 갔다. 왕재수는 쭈뼛거리며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 야, 넌 귀신 나오는 당직실에도 잘만 들어가더니 왜 너네 집에 못 들어가고 이러는 거야! ”

 

“ 바퀴벌레... ”

 

“ 없어! 없다니까! 살충제 쳐서 있었던 것들도 다 죽었어! ”

 

“ 네가 먼저 가서 확인해줘, 제발. ”

 

 

그래서 베르닌은 왕재수를 현관에 세워놓고 자기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벨라가 꼬리를 치며 쪼르르 따라왔다. 그는 살충제를 제일 많이 뿌려놨던 부엌으로 먼저 갔다. 바닥에 바퀴벌레가 두 마리 죽어 있었다. 휴지로 싸서 버렸다. 거실과 침실, 그리고 옷장을 넣어놓는 방으로 가보았다. 바퀴벌레는 없었지만 곱등이로 추정되는 벌레가 한 마리 죽어 있었다. 그것도 휴지로 싸서 버렸다. 결벽증에 가까운 왕재수를 위해 벌레 시체 있던 곳과 살충제 뿌렸던 곳을 물걸레로 닦았다. 휴지로 싼 벌레 시체들을 모조리 태웠다.

 

 

“ 야, 다 치웠어. 이제 아무 것도 없어. 들어와도 돼. ”

 

“ 벌레 많았어? ”

 

“ 아니, 두어 마리 있었어. 조그만 거. 약 먹고 죽어서 다 태워 버렸으니까 이제 괜찮아. 얼른 들어와. 아침에 난방도 돌려놔서 따뜻해. ”

 

“ 으응... ”

 

 

왕재수가 머뭇머뭇 들어왔다. 하지만 부엌 쪽은 차마 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벨라는 신이 났다. 처음 들어와 보는 왕재수의 집은 베르닌의 집보다 더 넓었고 근사했기 때문이다. 부엌도 들어가 보고 욕실과 거실도 탐험했다. 소파에도 기어 올라갔다. 평소 같았으면 ‘개!’ 하고 소리쳤을 테지만 왕재수는 신경이 곤두선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다닐. ”

 

“ 왜? ”

 

“ 이상한 소리 안 들려? ”

 

“ 무슨 소리? ”

 

“ 이 소리... 득득득 하고 벽 긁는 소리... ”

 

“ 난 안 들리는데. ”

 

“ 아니야, 들려. 침실 쪽에서 나는 거 같아. 벽지 긁는 소리 있잖아, 벌레 소리야. 벽하고 벽지 사이를 기어 다니면서 긁는 소리란 말이야. 여기 제일 처음 왔을 때 저 소리 듣고 얼마나 소름끼쳤는지 알아? 나... 정말... ”

 

“ 에이, 너 예민해져서 환청 듣는 거야. 아무 소리도 안 들려. ”

 

“ 하지만... ”

 

 

그때였다. 벨라가 갑자기 ‘알알알알알!’ 하고 짖더니 침실로 득달같이 내달았다. 전광석화처럼 달려가 벽 쪽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 순간 베르닌도 뭔가 시커먼 얼룩 같은 것을 발견했다. 왕재수가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벨라가 투다다닥 하며 앞발을 들어 그것을 내리쳤다. 벽을 뿔뿔뿔 기어가던 바퀴벌레가 툭 떨어졌다. 벌레가 미처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벨라가 다시 앞발로 일격을 가했다. 그러더니 왼쪽 발로 몸통을 누르고 오른쪽 발로 마구 벌레를 내리쳐 다리를 하나하나 떼어내는 것이 아닌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던 왕재수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베르닌의 등 뒤에 숨어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벨라의 현란한 사냥 기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리 절반을 떼낸 후 벨라가 바퀴벌레를 입으로 가져가려고 했기 때문에 그제야 정신이 든 베르닌이 달려가 벌레를 휴지로 감싸 빼앗았다.

 

 

“ 그만, 벨라! 먹으면 안 돼! ”

 

“ 왈왈! ”

 

“ 이거 더러워, 먹으면 안 돼! ”

 

“ 알알알알! ”

 

 

장난감을 빼앗겨 서운하다는 듯 벨라가 짖어댔다. 베르닌은 급하게 벌레를 휴지로 싸서 태워버렸다. 돌아와 보니 왕재수가 물수건으로 벨라의 주둥이와 앞발을 닦아주고 있었다. 다 닦아준 후에는 품에 꼭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퍼부었다.

 

 

잘했어, 개야! 잘했다, 아 착하다! 기특하다! 너 살충견이구나! 개야, 진짜 장하다. 귀엽다, 우리 개!

 

“ 이름 있잖아. 벨라. ”

 

개야, 강아지야, 멍멍아, 잘했다! 우유에 고기 말아줄게!

 

 

왕재수는 바퀴벌레가 사라진 자기 침실에서 자겠다고 했다. 하지만 또 벌레가 나올까봐 무서우니 그날 하룻밤만 개를 놔두고 가면 안 되느냐고 부탁까지 했다. 베르닌은 벨라를 빌려주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 단잠을 잤다.

 

 

 

*    *    *

 

 

 

토요일에는 기온도 오르고 햇살도 따스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벨라를 데리고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스타브로프의 병원에 다녀온 왕재수가 원반 한 개를 들고 뒤늦게 합류했다.

 

 

“ 그건 뭐야? ”

 

“ 원반. 똥개 훈련시키게. ”

 

“ 똥개 아니야, 어제 벌레 잡는 거 봤잖아. 벨라 원래 사냥개인가봐. ”

 

“ 사냥개는 무슨, 체구도 작은데. 그냥 잡종이라니까. 하여튼 개니까 원반 던지면 물어오겠지 뭐. 야, 개! 물어와! ”

 

 

왕재수가 원반을 휙 던졌다. 그러나 벨라는 바퀴벌레에게 달려들던 순발력과 공격성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원반에는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왕재수에게 폴짝 뛰어올라 다시 뽀뽀를 퍼부었다.

 

 

“ 으윽, 이 똥개! 역시 멍청해! 원반 물어오라니까! ”

 

 

원반을 주워온 베르닌이 이번에는 자신이 던져보았다. 벨라는 원반이 날아가든 말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계속 왕재수 곁을 맴돌며 꼬리를 치고 재롱을 부렸다.

 

 

둘은 스무 번쯤 돌아가며 원반을 던지고 소리치며 벨라를 몰아댔지만 강아지는 결국 단 한 번도 원반을 물어오지 않았다. 지친 왕재수가 베르닌의 패딩 점퍼 소매를 붙잡으며 숨을 헐떡였다.

 

 

“ 똥개... 멍청이... 나 이제 집에 가고 싶어. 너무 힘들어, 저 멍청한 멍멍이 훈련시키다가 나 쓰러지겠어. ”

 

“ 웅... 벨라는 이런 쪽으로는 재능이 없나봐. 그래도 얼굴은 귀여우니까... ”

 

“ 귀엽긴 뭐가! 그냥 시골 멍멍이... 그래도 벌레는 잡을 줄 아니까 밥 축내기만 하는 건 아니니 참는다. ”

 

“ 벨라는 내가 키우는 데 네가 뭘 참아. ”

 

“ 어쨌든! 저게 자꾸 나한테 엉기잖아. ”

 

너 솔직히 말해, 벨라 귀엽지? 어젯밤에 침대 위에서 네 옆에 재워줬지? ”

 

아냐! 내가 왜 멍멍이를 침대 위에 재워! 거긴 나랑 로만이랑 꼭 껴안고 사랑을 불태우는 우리만의 공간... ”

 

“ 너 아침밥 먹으러 왔을 때 다 봤어, 머리카락에 개털 붙어 있었어. ”

 

아냐! 그럴 리가 없어!

 

“ 네 머리 새까맣잖아! 벨라 털은 하얘서 금방 눈에 띄는 걸. ”

 

“ 똥개... 또 나 잘 때 올라왔겠지. ”

 

 

 

둘은 벨라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왕재수는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원반 때문에 너무 흥분해서 기력을 소진했는지 자기 집까지 가지도 못하고 베르닌의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벨라는 그 즉시 왕재수의 품으로 파고들어 촉촉하게 젖은 콧등을 그의 뺨에 비벼댔다. 왕재수는 귀찮다고 투덜댔지만 강아지를 떠밀지는 않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베르닌은 혹시 국장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 정시퇴근하고 일은 잔뜩 쌓아놓고 왔으니 국장이 트집을 잡으려고 전화를 한 것 같았다. 떨리는 가슴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 여보세요... ”

 

다행히 국장은 아니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베르닌은 잠시 전화에 귀를 기울였고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지금 오시면 돼요. 여기 주소 아시죠? 네, 전단지에 있는 그 주소. ”

 

 

전화를 끊은 후 베르닌은 왕재수 쪽으로 돌아섰다.

 

 

야, 기적이야! 벨라 주인이 나타났어. 내가 붙인 전단지 봤대. 잃어버린 지 열흘 가까이 돼서 한참 찾아다녔대. ”

 

“ 그래서? ”

 

“ 지금 오라고 했어. 구시가지 쪽에서 전화했다니까 아마 20분 내로 올 거 같아. 정말 다행이다, 벨라야... 주인이 진짜 반가워하더라. ”

 

“ 주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요즘 사기꾼이 얼마나 많은데. ”

 

“ 아니야, 강아지 특징 얘기하는 거 보니까 딱 벨라야. ”

 

“ 전단지에 사진도 넣고 특징도 썼을 거 아냐. 그거 보고 누가 못 읽어. ”

 

“ 그런가... 그래도 진짜 주인 같았어. 엄청 흥분했더라고. 일단 와보면 알겠지. 우리 벨라, 주인 그리웠지? 아휴, 근데 너무 섭섭하네. 주인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어. 야, 너도 그렇지? 벨라랑 정들었잖아. ”

 

 

왕재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 내가 왜. 난 똥개 귀찮아. 빨리 치워버렸으면 좋겠네. ”

 

“ 넌 왜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니. 에휴, 하여튼 손님 오니까 집 좀 치워야겠다. 빗자루가 어디 갔더라... ”

 

 

 

베르닌은 열심히 집을 치웠다. 청소를 다 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달려 나가 문을 여니 30대의 갈색 머리 남자와 귀엽게 생긴 금발의 어린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는 기껏해야 예닐곱 살 밖에 안 돼 보였다.

 

 

“ 안녕하세요, 전화 드린 사람인데요... 개 잃어버린... ”

 

“ 아, 들어오세요. 전 다닐이라고 해요. ”

 

“ 예... 전 료샤라고 해요. 얘는 제 아들 레냐예요. 사실은 아들내미가 강아지 주인이에요. 엄청 예뻐했는데 며칠 전에 산책 나갔다가 잃어버려서 얼마나 울고불고 했는지... 강아지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

 

“ 그랬군요. 레냐, 많이 걱정했겠구나. 강아지 금방 데려올게요. 먼저 차 한 잔 하고 계세요. 레냐는 우유 줄게. ”

 

“ 초코우유 있어요? ”

 

“ 어쩌지, 초코우유는 없는데... ”

 

“ 그럼 그냥 우유 먹어줄게요! ”

 

 

베르닌은 료샤와 레냐를 거실 소파로 안내했다. 차 한 잔과 우유 한 컵을 가져다 준 후 벨라를 데리러 갔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벨라가 보이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고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도 없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벨라가 왕재수 뒤를 따라간 것 같았다. 전화를 했다. 왕재수가 받았다.

 

 

“ 야, 혹시 벨라 거기 있어? ”

 

“ 응. 나 따라왔어. ”

 

“ 좀 데려올래? 주인 왔어. ”

 

“ 사기꾼 아니야? ”

 

“ 아니야, 아빠랑 귀여운 남자애야. 벨라 데리고 지금 빨리 와. ”

 

“ 알았어. ”

 

 

잠시 후 왕재수가 들어왔다. 거실로 곧장 가더니 소파에 앉아 있는 료샤와 레냐를 꼭 범죄자를 훑듯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린 레냐가 먹다 남은 우유가 담긴 컵을 왕재수에게 내밀었다.

 

 

“ 우와, 진짜 잘생긴 형아다. 이거 마셔. ”

 

“ 어른한테 네가 먹던 거 주는 거 아니야, 레냐야. 죄송합니다. ”

 

 

료샤가 아들을 저지하며 사과했다. 왕재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아무리 봐도 벨라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왕재수를 쿡 찔렀다.

 

 

“ 야, 벨라는? ”

 

“ 가만 있어봐. 이 사람들이 진짜 주인인지 어떻게 알아! ”

 

“ 저, 개를 보면 알 것 같은데요... ”

 

“ 당신, 이름이 뭐죠? ”

 

“ 료샤요. ”

 

“ 개를 어디서 잃어버렸죠? ”

 

“ 어, 저... 어디였더라. 레냐, 어디서 잃어버렸니? ”

 

“ 놀이터. 우리 집 앞 놀이터. ”

 

“ 그 ‘우리 집’이 어딘데요! 주소 대봐요! ”

 

“ 아... 저는 레냐랑 같이 안 살아서요. 레냐는 엄마랑, 그러니까 제 전 마누라랑 사는데... 거기 주소가, 아 그렇지. 아브리코트 거리...

 

“ 주소 가지고 횡설수설하는 게 수상해. 거리 이름에 어째서 살구가 들어가는데! 그리고 애가 엄마랑 산다면 엄마랑 왔어야지 왜 당신이랑 같이 오는데! ”

 

“ 어... 그건요. 이라는, 그러니까 제 전 마누라, 애 엄마는 개를 너무 싫어해서... 그놈의 똥개 잃어버렸으니 잘됐다고 하는 마당이라... ”

 

“ 개의 인상착의를 말해봐요! ”

 

“ 하얀색이고요, 귀가 처졌고 주둥이가 짧고 눈이 까맣고... ”

 

“ 그런 거 말고! 그건 얘가 붙인 전단지 사진에 다 나와 있잖아요! 그 개만의 신체적 특징 말이야! 키, 몸무게, 다리 길이, 보폭, 달리기 기록, 털이 눕는 방향, 흉터나 얼룩 유무, 항문낭의 생김새!

 

 

베르닌은 기절초풍했다. 왕재수를 쿡 찔렀다.

 

 

“ 야, 너 뭐해! 그런 것까지 어떻게 다 알아! 지금 무슨 취조해? 우리 취조실에서도 그렇게는 안 해! ”

 

시끄러워! 주인이면 그 정도는 알아야지! 빨리 말해 봐요!

 

 

척 봐도 어리숙해 보이는 료샤는 당황하면서도 기억을 짜내려고 애썼다.

 

 

“ 어... 키는... 이만큼... 엄청 작으니까. 몸무게는 한 3킬로 되려나. 다리는 이 정도. 보폭까진 모르겠는데... 빨빨거리고 뛰어다니니까 이 정도? 그치, 레냐야? ”

 

“ 아빠, 보폭이 뭐야? ”

 

“ 아... 넘어가자. 달리기는, 시간 안 재봐서 모르겠는데 먹을 거 보면 엄청 빨라요. 털이 눕는 건 잘 모르겠네. 털이 어쨌든 복슬복슬해요. 흉터, 얼룩... 그건 모르겠는데... 항문낭은 다른 개들이랑 비슷하게 생겼... ”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걸 보니 당신 사기꾼이 분명해! 어린애까지 동원해서 거짓말을 하다니! 썩 꺼져!

 

 

왕재수가 서릿발처럼 차갑게 소리치더니 홱 돌아섰다. 료샤는 주눅이 들어서 더듬거렸다.

 

“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제가 키우는 개가 아니라서 그래요. 전 작은 개는 안 좋아해서, 특히 멍청한 개는 안 좋아해서요. 그러니까 전 크고 늠름한 장군 타입의, 족보 있는 셰퍼드를 키우는데...

 

“ 누가 셰퍼드 물어봤어요? 썩 나가요! ”

 

“ 아빠, 저 형아 왜 화내? 우리 뜨보록 왜 안 데려다줘? ”

 

“ 뜨보록? 그건 또 뭐야! ”

 

“ 강아지 이름이요... 흰색이라 레냐가 뜨보록이라고 지었어요. ”

 

흥, 뜨보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야, 이 사람들 완전 사기꾼이야! 내보내! ”

 

“ 너 왜 그러니... 주인 맞는 거 같은데. 일단 벨라 데리고 와봐. 얼굴 보면 알 거 아니야. 보여주지도 않고 무조건 우기면 어떻게 해... ”

 

뭘 데려와! 사기꾼한테 왜 개를 보여주니!

 

“ 저 사기꾼 아니에요. 뜨보록 찾으러 온 건데... 개를 주운 건 이 분 같은데 왜 당신이 이렇게 절 쥐 잡듯 추궁하는지 모르겠네요. ”

 

시끄러워요! 얜 순진해서 아무 말이나 다 믿는다고요! 사기꾼이 분명하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요! 안 그러면 신고할 테니까! ”

 

“ 으앙, 아빠... 이 형아 미워... 우리 뜨보록 자기가 키우려고 막 우리 쫓아내.. 앙앙... 뜨보록, 앙앙... ”

 

아 시끄러워, 울지 마! 난 애들 우는 게 제일 싫어! 빨리 집에 가!

 

엉엉, 뜨보록... 앙앙... 뜨보로오오옥!!!

 

 

그때였다. 현관문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킹킹, 헥헥, 헐떡헐떡, 그리고 투닥투닥 소리가 났다. 베르닌이 문을 열어주자 벨라가 우다다다 달려왔다.

 

 

알! 알알알알알알! 멍멍멍! 왕왕왕왕왕왕! 앙앙앙앙앙!

 

 

시끄럽게 우짖으며 벨라가 곧장 레냐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미친 듯이 머리를 처박고 비벼대고 레냐의 얼굴을 침 범벅이 되도록 핥았다.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었다.

 

 

뜨보록! 뜨보록! 으앙, 어디 갔었어! 앙앙! 뜨보록!!

 

 

베르닌은 료샤와 레냐, 벨라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누가 봐도 벨라가 뜨보록인 게 분명했다. 벨라는 레냐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낑낑거리고 있었다. 료샤가 손을 내밀자 마구 핥았지만 곧 다시 레냐에게로 돌아갔다. 베르닌과 왕재수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베르닌은 헛기침을 했다.

 

 

“ 그러니까, 얘 이름이 뜨보록이었군요. 전 하얀색이라 벨라라고 부르고 있었어요. 그래도 주인을 찾아서 다행이네요. ”

 

“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우리 애가 열흘 동안 얼마나 울고불고 개를 찾았는지... 진짜 다행이네요.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

 

“ 보답은요. 벨라가 주인을 찾았으니 그걸로 충분해요. 얼른 데리고 돌아가세요. 레냐야, 앞으로는 강아지 소홀히 하면 안 돼. 알았지? ”

 

“ 네! 고맙습니다! ”

 

 

베르닌은 레냐에게 왕재수 쪽을 가리켰다.

 

 

“ 저 형한테도 인사하렴. 저 형아가 뜨보록 구해 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굉장히 잘해줬단다. ”

 

싫어! 저 형아는 미워! 뜨보록 자기가 키우려고 막 우리 아빠한테 뭐라 했어! 막 안 주려고... ”

 

“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저 형아는 개 별로 안 좋아해. 그냥 주인 아닌 사람들이 뜨보록 데려가면 안 되니까 걱정해서 그런 거야. ”

 

그런 거야? 그럼 무지 고마워요.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료샤와 레냐의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휙 돌아서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벨라와 작별 인사를 했다. 벨라는 베르닌의 뺨에 코를 비벼대며 뽀뽀를 해주었지만 금방이라도 레냐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마침내 료샤와 레냐가 벨라, 아니 뜨보록을 안고 떠났다.

 

 

 

베르닌은 잠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며칠 동안 정들었던 벨라가 떠나니 무척 허전하고 서운했다. 하지만 그래도 벨라가 진짜 주인을 찾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자기가 키웠어도 사무실에 데려가지도 못하니 벨라는 외로웠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레냐가 개를 잃어버려서 얼마나 애가 탔을지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짠했다. 여러 모로 다행이었다.

 

 

잠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재수의 집으로 가보았다. 문이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감시요원이었으므로 열쇠를 꺼내 문을 땄다.

 

 

“ 야, 나야. 들어간다. ”

 

 

대답이 없었다. 혹시 바이올린 아저씨가 왔나 싶어 경계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은 비어 있었다. 침실로 가보니 왕재수가 몸을 웅크린 채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자나 싶었지만 잘 보니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 어... 야, 너 아파? 다시 아픈 거야? ”

 

가... 너네 집.

 

“ 목소리는 왜 그래... 폐렴 도진 거 아니야? ”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베르닌은 걱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왕재수의 어깨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왕재수가 소리 없이 흐느껴 울고 있었다.

 

 

“ 어... 너 많이 아프구나... 병원 갈래? ”

 

“ 아니야. 안 아파. 나 좀 놔둬. ”

 

“ 하지만... ”

 

가라니까!

 

“ 너 왜 그래... 혹시 벨라 때문에 그래? ”

 

아냐! 그깟 똥개 내가 뭐! 나쁜 똥개... 어떻게 그래! 거들떠도 안 보고... 윽... 으흑... 예쁘고 좋은 냄새 난다고 엉겨 붙을 땐 언제고... 윽... 끅... ”

 

 

왕재수가 서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심히 당황했다.

 

 

아니, 야... 너 지금 벨라한테 삐친 거야? 진짜 주인이 왔으니 당연하잖아. ”

 

“ 누가 뭐래! 어차피 잘됐어! 난 똥개 진짜 싫어. 세균덩어리... 멍청하고, 원반도 못 물어오고. 지저분... 시끄럽고. 으흑... 엉엉... 어엉... 멍멍이... ”

 

 

왕재수가 우는 동안 베르닌은 가만히 기다렸다. 마침내 제풀에 지친 왕재수가 울음을 그치자 머뭇거리며 물었다.

 

 

“ 사과파이 먹을래? ”

 

“ 줘. ”

 

“ 차도 마실래? ”

 

“ 설탕 타지 마. ”

 

“ 엉덩이 아직 납작한데... ”

 

“ 타... ”

 

 

그래서 베르닌은 뜨거운 차에 설탕을 두 숟가락 듬뿍 넣은 후 사과파이와 함께 왕재수에게 가져다주었다. 왕재수는 차를 마시고 사과파이를 한 판 해치운 후 베르닌에게 그만 가라고 했다. 그래서 베르닌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베르닌은 다시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벨라가 없으니 정시퇴근도 주말 휴일도 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토요일 밤인데도 불구하고 월요병이 엄습해 왔다. 게다가 월요일에는 국장과의 일대 일 면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숨만 푹푹 쉬다 불편하게 잠이 들었다.

 

 

 

 

 

 

FIN

- 2015.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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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벨라 이야기들이 끝난다 :)

스페호프가 요구하는 업무/자기계발 계획서는 모두 올 초 내가 실제로 겪은 일을 소재로 하고 있다 ㅠㅠ

 

..

 

눈치챈 분들도 있겠지만 벨라의 모델은 내 친구 료샤의 7살 아들 레냐가 키우는 잡종 똥개 뜨보록이다. 그래서 여기에도 등장시켰다 :) 원반 안 물어오는 것부터 멍청한 것, 그러나 얼굴 예쁜 것 등등... 뭐 개 종류는 좀 다르지만. 벨라의 외모는 10편에서 얘기했듯 내가 키웠던 강아지 토리에게서 따왔다. 실제의 뜨보록은 비글과 발바리를 섞은 것처럼 생겼다. 흰색이지만 귀와 눈가에 조그만 갈색 얼룩이 있다.

 

제목인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이란.. 레냐가 사는 동네인 '아브리코트' 거리의 아브리코트가 살구란 뜻이다. 이 이름의 유래는... 예전에 내가 지금 쓰는 가브릴로프와 미샤가 등장하는 본편 구상하면서 거리 이름 만들어 낼때 원어민인 료샤에게 미샤가 사는 거리인 '그루셰바야 거리' 이름이 어떠냐고 물어봤는데(그루샤는 노어로 서양배 란 뜻이다. 미샤가 사는 거리는 오래전 배나무가 우거졌던 곳이라 그렇다 ㅋㅋ) 그때 료샤가 막 웃으면서 이상하진 않지만 배나무 거리라니! 그냥 살구나무 거리가 어떠냐, 자긴 살구가 배보다 좋다..라고 했던 적이 있어서 여기 등장시킨 것이다.

 

어쨌든 료샤와 레냐 덕에 10~11편이 나왔으므로 보답(..인가 ㅋㅋ)의 뜻에서 막판에 둘을 등장시켰음. 작가로서의 양심에 따라 료샤에게 얘기해줬다. 자세한 내용들을 설명하긴 힘들어서 그냥 개와 너희 둘이 찬조출연한다고 했더니 료샤는 매우매우 좋아했음.. (이렇게 어리숙하게 나온 걸 알면 기절초풍할 거야 ㅠㅠ)

 

..

 

벌레 잡는 살충견 벨라 얘긴 전부 내가 키운 강아지 토리의 실화이다. 옛날에 살던 집이 지상 1층이고 낡아서 벌레가 무지 많았는데 토리가 진짜진짜 벌레를 잘 잡았다! 그래서 내가 살충견이라 부르며 이뻐했다.

왕재수가 벨라를 '개!', '강아지!' 하고 부르는 건 사실 내가 토리를 부르던 여러 애칭 중 하나이다. 말 안 들으면 '개!' 하고 혼내고 귀여울 땐 '개야~~~' 하고 이뻐해주고 '강아지야~' 라고도 불렀음 :) 닭살 돋지만... 개 한번 키워보라고요!! 그렇게 되나 안되나!! 엄청 이쁜 내 강아지 내 새끼... 그립다 토리야..

 

..

 

중간에 왕재수가 부르는 노래는 영국 가수 데이빗 보위의 노래들이다. 본편 우주에서도 미샤는 당시 소련에서는 금지되었던 서방 세계의 락 음악이나 영화들, 문학들을 좋아해서 지하출판이나 암시장, 비밀클럽 등등에서 그것들을 항상 입수하고 듣고 공유한다. 가끔은 영문이나 불문으로 된 텍스트들을 번역해 공유하기도 한다.

젠더와 성적 억압에 저항하는 인물, 그리고 기존 성적 질서에 이반하는 퀴어 캠프의 일원답게 미샤는 데이빗 보위를 좋아해서 본편 시리즈중에서도 보위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지나가듯 한번 넣은 적이 있다. 제목을 명기하진 않았지만 그때 그 애가 불렀던 건 보위의 the man who sold the world였다.

 

이 11편에서 왕재수가 베르닌과 벨라에게 불러주는 노래는 아마도 보위의 초창기 노래들, 그러니까 지기 스타더스트 이전이나 그 당시의 노래들인 space oddity나 life on mars, 아마도 the man who sold the world도 있었을 것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유튜브에서 데이빗 보위와 노래 제목으로 검색해보세요. 나도 아주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노래들이다 :) 더 맨 후 솔드 더 월드는 내가 arts 폴더에 너바나 커트 코베인 버전으로 영상도 올렸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250

 

..

 

왕재수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로만 코즐로프를 자신에게 못 오게 한 이유는 농담처럼 서술되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꽤 심각해질 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소련 시절 이성애에 반하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었고 걸리면 성도착으로 체포될 수 있었다. 수용소에 가기도 했다. 본편 우주에서야 좀 진지하게 이 문제를 언급하기도 한다만 이건 서무 시리즈니까 그냥 넘어가자..

 

..

 

시리즈는 12편의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로 이어진다. 벨라가 나왔던 에피소드들과는 느낌이 꽤 다른 얘기다. 어제 13편 완결하고 거기 이어지는 14편 쓰는 중. 이거 다 쓰고 나면 제발 본편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

 

그럼 12편에서... 댓글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

 

 

:
Posted by liontamer
2015. 3. 7. 21:04

그냥, 빛이 좋아서.. russia2015. 3. 7. 21:04

 

 

2월 15일. 페테르부르크.

 

정오를 지난지 얼마 안 된 무렵이었다. 얼어붙은 모이카 운하 수면 위로 눈이 쌓여 있었다. 별다른 피사체는 없었지만 눈 위로 문양을 그리듯 남겨진 빛이 좋아서 그냥 찍었다. 이 도시의 빛은 언제나 마음을 사로잡는다.

 

 

:
Posted by liontamer

 

 

 

 

 

지난 2월, 페테르부르크. 매우 추웠지만 날씨 좋았던 날.

얼어붙은 네바 강 풍경 찍다가 우연히 렌즈 안으로 들어와서 찍었다. 얼굴 안 보이니 올려본다.

 

카메라 내려놓고 나서 구경하고 있는데 같이 산책하던 료샤가 옆에서 짓궂게..

 

료샤 : 너 부러워서 구경하는 거지!

나 : 응.

료샤 : (나의 너무나 순순한 대답에 풀죽음) 에이...

나 : 아니라고 하면 또 막 쿠사리주고 공격하려고 했으면서!

료샤 : 나도 왕년에 데이트할 때 저렇게 네바 강 위로 잘 다녔는데.

나 : 그래그래 참 좋았겠구나~

료샤 : 우리도 지금 가자! 우리도 저렇게 강 위로..

나 : 야! 우리는 데이트하는 사이가 아닌데 그게 무슨 소용이야!

료샤 : 그런 척! 마음의 위안!

나 : 강 위로 나가지 말라고 표지판 있던데!

료샤 : 어휴, 인생 한 방인데 너 왜 이리 겁이 많아 -_-

나 : 인생 한 방인데 운 나빠서 얼음 깨지고 빠지면 한 방에 가는 거지.

료샤 : 칫.

 

그래서 우리는 얼음 위에서 데이트 코스프레를 안(못) 하고 ㅋㅋ 그냥 강변을 따라 걷다가 너무 추워서 차 타고 다시 네프스키 대로 쪽으로 갔음. 게다가 더 웃겼던 것은 이때 레냐가 옆에 있었음. 우리의 대화를 안 듣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다 들었는지 나중에 차 안에서..

 

레냐 : 아빠! 얼음 위로 나가면 큰일나! 안돼!

료샤 : 아빠 얼음 위로 안 가!

레냐 : 아까 쥬쥬한테 가자고 했어! 다 들었어!

료샤 : 아니야, 농담한 거야.

레냐 : 데이트하면 얼음 위로 가야돼?

료샤 : 으잉?

레냐 : 그러면 나는 어른 돼서 쥬쥬랑 가야지~

 

.. 그리하여 나는 매우 뿌듯했으나..

레냐야, 얼음 위로 가면 안된단다~ 라고 타이르며 혼자 마음속으로 뿌듯해함 ㅋㅋ

 

** 꽁꽁 언 네바 강 위로 걸어다니는 사람들 다른 사진들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25

 

 

:
Posted by liontamer
2015. 3. 5. 13:43

마음의 위안을 위한 창문 사진들 russia2015. 3. 5. 13:43

 

 

바보사업 때문에 계속 너무 힘들어서 심신이 엉망이다. 오늘 오전에도 한참 통화하고 자료 다시 보내고.. 삽질의 반복 중. 우울해 죽겠네.

 

마음의 위안을 위해, 창문 사진들 몇 장.

 

여행을 가든 거리를 산책하든 항상 내가 관심을 두는 것들이 몇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창문이다. 그외 간판들, 메뉴, 다리나 울타리 문양 등등도 좋아한다. 특히 창문 보는 걸 좋아한다.

 

지난 2월 15일,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이삭 성당 쪽으로 이어지는 모이카 운하 따라 산책하면서 찍은 창문 사진들 몇 장. 이 날은 춥긴 해도 하늘도 맑고 날씨가 청명했다. 창문들 보기엔 좋은 날씨.. 하긴 뭐든 안 좋겠니.

 

 

 

 

 

 

 

 

 

 

 

** 태그의 '창문'을 클릭하면 그간 올려왔던 창문 사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
Posted by liontamer

 

심신이 피곤할 때 이상하게 잘 써지는 서무의 슬픔 시리즈 ㅠㅠ

지난주에 러시아 다녀와서 원래 본편에 다시 매진하려 했는데 피곤하기도 하고 자꾸 스트레스를 받으니 집중이 안돼서 대신 서무 12편을 썼다 ㅜㅜ 12편에서는 특히 단추를 많이 괴롭히고 기분이 정화되었...(미안해 단추야)

 

서무 시리즈는 원래 매 에피소드마다 완결되는 옴니버스 형식인데 이번 10편은 9편(http://tveye.tistory.com/3524)과 내용상 연결되고 있다. 그러니까, 눈보라가 몰아치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고 퐁당 빠지고 등등... 갖은 우여곡절 끝에 베르닌과 왕재수가 구출(?)해 온 강아지가 10편에도 나온다.

 

이미 왕재수 집사 노릇하느라 이골이 난 우리의 단추 청년 베르닌.. 과연 강아지의 집사마저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얼음물에 풍덩 빠졌던 왕재수는 과연...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다 새해가 오고, 눈보라 속에서 얼어붙은 강을 건너다 베르닌과 왕재수는 길 잃은 강아지를 한 마리 구조한다. 그리고....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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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0

 

 

서무의 슬픔

- 벨라 등장! -

 

 

 

 

 

전날의 눈보라 소동으로 늦잠을 잔 베르닌은 그만 지각을 했고 스페호프에게 불려가 엄청나게 꾸중을 들었다. 이미 전날 책상과 의자 아래가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2주일 간 1시간 초과근무 벌칙을 받은 상태에서 1주일간의 조기출근 벌칙이 추가되었다.

 

오후에 국장이 다시 그를 호출했다. 베르닌은 또 무슨 트집을 잡아서 벌칙을 주려나 하고 쭈뼛거리며 국장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페호프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자네 어째서 그 얘길 하지 않았나? ”

 

“ 무슨 얘길... ”

 

“ 그 불여우 말일세!! 입원했다는 얘길 조금 전에 들었네. 자네와 강을 건너다 빠졌다면서. 죽을 뻔했다고 말이지. ”

 

“ 아, 예... 죄송합니다. 그렇게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았어야... ”

 

“ 잘했네, 잘했어! 책상물림인 줄만 알았는데 자네가 알고 보니 배짱도 있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도 두텁구먼! 그 반동분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하려고 했다니...

 

“ 예? 처치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

 

“ 그렇지! 밖에서는 항상 그렇게 대답하게! 혹시라도 크레믈린에 있는 그 불여우의 후원자들이 알게 되면 자넬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 이 방은 안전하니 괜찮네. 우리 둘만 있을 땐 솔직하게 말해도 좋아. 그렇지 않아도 내가 그놈을 없애버리려고 지령을 내리려다 항상 망설였는데 자네가 어떻게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알고 시도를 했나! 정말 놀랍군, 고지식한 책상물림이었던 자네가 어엿한 암살 요원의 자질을 갖추게 되다니! 정말 잘했네. 눈보라 속에서는 흔적이 남지 않으니 강으로 가서 살얼음 쪽으로 몰고 가 빠뜨려 죽이려고 했던 전략은 아주 훌륭했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뭐 자네는 암살 훈련을 정식으로 받지 않았으니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네. 시도 자체가 훌륭한 일일세! 아아, 다닐. 난 사실 걱정하고 있었다네. 자네가 그 불여우에게 푹 빠져서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도 하고 당직실에서도 하면서 점점 반동분자 물이 들고 당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리게 될까봐 늘 걱정이었네. 그런데 그건 기우였군! 자네는 그 불여우에게 잘해주는 척 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거였군! 앞으로도 그렇게 하게! ”

 

베르닌은 너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버버 하고 말을 더듬었다.

 

“ 어... 저... 저 국장님, 그러니까... 지금... 제가 걜 죽이려고 했다고... ”

 

“ 내 앞에서는 숨기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러는군. ”

 

“ 앞으로도 걜 죽일 기회를 노리라고... ”

 

“ 쉿,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일세. 난 원래 다른 요원을 투입하려고 했는데 비밀 유지를 위해서는 자네가 맡아주는 게 역시 안심이 될 것 같군. 하지만 조심해야 하네. 저 불여우는 워낙 뒤를 봐주는 윗분들이 많아서. 일단 지금은 한 발 물러서야 해. 애송이가 입원까지 했으니 분명 크레믈린에 정보가 들어갔을 거야. 한동안은 전처럼 잘 돌봐주는 척하게.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도 해주는 것도 계속하도록. 그러다 안전해지면 내가 다시 신호를 주겠네. 그때 그놈을 쥐도 새도 모르게...

 

“ 하지만... 우린 모스크바 본부도 아니고 살인면허 같은 것도 없고... 걔는 전혀 위험인물이 아닌데... ”

 

“ 그렇지, 항상 그렇게 얘기하도록 하게! 아아,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군. 드디어 자네가 행정의 기본을 익혔어. 행정의 기본이란 국가와 당에 충성하는 것이지! 체제에 거역하는 놈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네. 기특하기도 하지. 상으로 아침에 내렸던 조기출근 벌칙은 면제해 주겠네. 그만 가보게. ”

 

 

 

베르닌은 무거운 마음으로 국장실을 나왔다. 조기출근 벌칙에서 면제된 것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국장이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다니 너무나 놀라웠다. 혹시라도 국장이 자기에게 왕재수를 죽이거나 해를 끼치라고 명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오금이 저렸다.

 

‘ 지금이 레닌 스탈린 시대도 아닌데 어떻게 사람을 암살하는 걸 저렇게 쉽게 얘기하지? 그것도 저 철딱서니 없는 애를... 싸가지 없긴 해도 나쁜 앤 아닌데... 강아지도 구해줬는데... ’

 

베르닌은 자리로 돌아왔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마음속으로 깊게 다짐했다. 국장이 혹시라도 정말로 왕재수를 죽이라고 하면 크레믈린에 있다는 그 아저씨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그는 크레믈린에 있는 높은 분들에게 연락할 방법도 몰랐고 행여 안다 한들 그 대단한 사람들이 말단 직원인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일 리도 없었다. 정 안되면 바이올린 깡패에게라도 얘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쩐지 코즐로프를 떠올리자 좀 든든해졌다.

 

 

*      *      *

 

 

베르닌은 초과근무 1시간만 하고 퇴근했다. 왕재수를 보러 곧장 병원으로 갔다. 하지만 의사가 병실에 못 들어가게 막았다.

 

자니까 방해하지 마!

 

“ 어... 괜찮은지 확인만 하고 갈게요. ”

 

안 괜찮아! 얼음물에 빠져서 폐렴 도졌어. 애가 온종일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간신히 재워놓은 거야. 부스럭거리면 또 깨니까 들어갈 생각은 하지도 마. ”

 

“ 그럼 병원에 오래 있어야 돼요? ”

 

“ 최소 사흘은 있어야 할 것 같으니 그렇게 알아. 내일까지는 면회 금지니까 와봤자 소용없어. 밖에서 병균 묻혀오면 어쩌려고! ”

 

“ 선생님, 저는 병균의 온상이 아닌데요... 손도 깨끗이 씻고 들어왔어요. ”

 

KGB 나부랭이는 전부 병균 박테리아야!

 

“ 그런 말씀 함부로 하지 마세요. 국장이 알면 잡아갈지도 몰라요. ”

 

아니 이놈이 어디서 감히 국장 운운이야! 여기가 무슨 KGB 고문실이라도 되는 줄 알아! 꺼져! ”

 

 

과연 노의사 스타브로프는 왕년에 시베리아 수용소 생활을 두 번이나 한 사람이라 KGB에 대한 증오가 어마어마했다. 베르닌은 오후에 국장이 했던 무서운 말을 떠올리자 풀이 죽었고 의사에게 대드는 대신 터벅터벅 병원을 나왔다. 왕재수가 생각보다 많이 아프다는 말에 기분이 좋지 않았고 강을 건너자고 했던 것에 가책을 느꼈다.

 

 

그는 아파트 옆에 있는 식료품 가게에 갔다. 웬일로 줄이 굉장히 짧아서 10분 만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까탈스러운 왕재수가 없으니 마음 놓고 느끼하고 기름진 음식을 해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돼지비계와 칼바사 햄을 샀고 정육점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서 쇠뼈와 짜투리 고기를 싸게 얻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는 돼지비계와 햄, 통조림 토마토, 버터 듬뿍, 야채 약간을 투하해 기름기가 둥둥 뜨는 살랸카 수프를 끓였다. 수프를 곁들여 흑빵에 버터를 무지무지 많이 발라서 그 위에 잼도 잔뜩 얹어 먹었다. 차에 설탕도 두 숟가락이나 녹여 마셨다. 왕재수가 봤다면 기절초풍할 저녁 식사였다.

 

에이, 그 녀석 없으니까 진짜 좋네. 나 먹고 싶은 대로 실컷 해 먹을 수 있고. 눈치도 안 보고. 식기들 일일이 안 차리고 냄비 째로 갖다놓고 먹어도 뭐라 하는 녀석 없고. 아이 평화로워. 아이 편해. 설거지도 내일 해야지! ”

 

저녁을 먹은 후 그는 짜투리 고기를 삶아 기름기를 제거하고 쇠뼈를 고아 국물을 냈다. 그리고는 혀로 입천장을 톡톡 치면서 강아지를 불렀다.

 

“ 벨라야! 우리 벨라, 이리 온. 맛있는 거 줄게~ 이리 와~ ”

 

이제나저제나 하며 침을 흘리고 있던 강아지가 꼬리를 치며 달려왔다. 얼음 위에서 발견했을 때는 거무스름한 색이었지만 따뜻한 물로 씻기고 말려주자 놀랍게도 강아지는 눈처럼 하얀 색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래서 베르닌은 강아지에게 하얀 털색을 따서 벨라라는 이름을 붙여주고는 간밤에도 한 침대에서 데리고 잤다. 의사는 강아지가 6개월 정도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귀여움을 받고 자란 강아지인지 낯가림도 없었고 베르닌을 졸졸 따라다녔다.

 

베르닌은 조그만 강아지가 추위에 떨며 고생했으니 몸을 보신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쇠뼈를 곤 국물에서 기름을 모두 걷어내고 후후 불어 식혀서 벨라에게 한 숟갈 한 숟갈 떠먹여 주었다. 벨라는 엄청 잘 먹었다. 삶은 고기를 찢어주자 순식간에 홀랑 먹어치우고는 베르닌을 숭배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배를 뒤집으며 발라당 드러누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강아지가 너무 귀여워서 베르닌은 잠자리에 들 때까지 벨라를 데리고 놀았다.

 

“ 우쭈쭈쭈, 우리 강아지~ 우리 벨라~ 엄마 아빠랑 헤어져서 슬프지? 내가 주인이랑 가족들이랑 다 찾아줄게~ 그때까지 나랑 있자~ 아 예뻐라~ ”

 

벨라는 혀로 베르닌의 뺨을 핥으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래서 베르닌은 강아지의 온기 속에서 아주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     *     *

 

 

다음날 베르닌이 돌아와 보니 벨라가 시무룩하게 몸을 말고 누워 있었다. 거실과 방 여기저기에 실례를 해놓은 것도 모자라 화분의 잎사귀도 몽땅 다 뜯어놓았고 휴지도 마구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벨라야, 왜 이랬니! 이러면 못써!

 

벨라는 하염없이 슬픈 눈망울로 베르닌을 바라보며 낑낑대더니 곧장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베르닌은 화를 내는 대신 어질러진 집을 모두 치웠고 벨라에게 밥을 준 후 도서관에서 빌려온 ‘개 기르는 법’이란 책을 꺼내보았다. 필요한 부분을 찾아내 소리 내어 읽었다.

 

 

개는 주인을 매우 따르는 동물이다. 집에 혼자 내버려두면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는다. 여기저기 실례를 하거나 말썽을 부리며 주인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상태가 심해지면 늑대처럼 구슬프게 짖기도 하고 시름시름 앓게 된다.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벨라가 불쌍했다. 가엾은 강아지를 집에 혼자 놔두면 안 되는 거였다.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 할 수 없지. 사무실에 데려가야지. ’

 

 

다음날 베르닌은 벨라를 몰래 사무실로 데려갔다. 벨라를 넣어둔 조그만 박스를 자기 의자 아래 감춰둔 채 일을 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베르닌이 이따금 몸을 굽혀 박스 안에 있는 벨라와 놀아주었다. 밥도 주고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따분해진 벨라는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자꾸만 박스 바깥으로 기어나오려고 했다.

 

“ 쉿, 벨라... 조용히 해. 사람들한테 들키면 큰일나... ”

 

“ 끼이잉... 끼이잉... ”

 

“ 쉿... 조용히... ”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지나가던 리자가 낌새를 챈 것이다.

 

 

“ 다냐, 이게 무슨 소리에요? 어머낫, 강아지!

 

“ 리자... 제발 쉿... ”

 

“ 어머어머, 얘 진짜 귀엽다. 새로 들인 거예요? ”

 

“ 아뇨, 그게 아니고... 그저께 나랑 왕재수, 아니 미샤랑 강에 빠졌잖아요. 그때 구해준 강아지예요. 주인 찾을 때까지만 데리고 있는 건데... 너무 어려서 집에 혼자 놔두니까 힘들어하는 거 같아서 살짝 데려온 거예요. 근데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요. ”

 

“ 개가 무슨 금붕어나 십자매예요? 박스 안에서 얌전하게 있게... 개는 산책도 시켜주고 놀아줘야 해요. 바깥 공기도 쐬어야 하고. 이렇게 가둬놓으면 병나요. 차라리 뒤뜰에 데려다놔요. 그 배추밭 옆에. 거기 바람막이도 있고 해도 잘 들어서 따뜻해요. ”

 

“ 뜰에 풀어놨다가 도망치거나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해요. 가뜩이나 길 잃은 강아지인데... ”

 

“ 목줄 길고 느슨하게 매 주면 되죠. 이리 줘요, 내가 뒤뜰에 묶어 놓고 올 테니까. ”

 

“ 국장한테 들키면... ”

 

“ 경비원 아저씨한테 얘기해 놓을게요. 국장 오는 기색 있으면 경비실에 숨겨달라고... ”

 

“ 고마워요, 리자. 그때 차 태워준 것도 그렇고 정말 친절하고 착한 거 같아요. ”

 

“ 고마우면 그 꽃돌이 감독님이랑 소개팅 좀... ”

 

“ 나도 그렇게 해주고 싶은데 걔가 좀... ”

 

“ 흥, 됐어요. 농담이에요. 그 사람은 당신 거잖아요. 칫, 운도 좋아. 단추 눈이면서 무슨 재주로 그렇게 멋있는 남자를 낚았담. 아 맞다,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해 준댔죠... 그러고 보면 당신도 대단해요. ”

 

“ 나 진짜 그거 아니에요 ㅠㅠ ”

 

 

리자는 깔깔 웃으며 벨라를 품속에 집어넣고 뒤뜰로 갔다. 베르닌도 불안해서 따라갔다. 알고 보니 리자는 어릴 때부터 개를 여러 마리 키워본 베테랑이었다. 배추밭 옆의 기둥에 기다란 끈을 잡아매더니 벨라의 목에 솜씨 좋게 매어 주었다. 끈이 길어서 벨라는 꽤 넓은 반경 안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리자는 벨라의 곁에 물그릇과 밥그릇도 놓아주고 어디선가 뼈다귀와 바람 빠진 고무공도 주워다 주었다.

 

“ 예쁘다, 벨라야~ 놀고 있어. 우리가 자주 올게~ ”

 

벨라는 땅을 파헤치느라 신이 나서 베르닌과 리자가 사무실로 돌아가도 본척만척했다. 베르닌은 한 시간마다 뒤뜰로 나가보았고 벨라와 조금씩 놀아주었다. 벨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힘든 일을 하면서도 전만큼 스트레스가 심하지 않았다. 어차피 남아서 하나 안 하나 일은 밀리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야근도 하지 않고 초과근무 1시간만 마친 후 벨라와 함께 귀가했다. 강아지 덕분에 인간다운 생활을 하게 된 것 같아 심히 기뻤다.

 

 

그러나 벨라와의 행복한 사무실 생활은 사흘 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의 발단은 가끔 나타나는 검정 도둑고양이 미셴카였다. 고양이는 그 날도 베르닌이 챙겨주는 사료와 생선 찌꺼기를 먹으려고 배추밭 근처에 나타났다가 웬 하얀 강아지를 발견했다. 무시무시하게 발톱을 드러내며 하악거리는 커다란 고양이 때문에 깜짝 놀란 벨라는 왈왈 짖어댔다. 그러나 이 구역의 지배자이자 깡패로 산전수전 다 겪은 검정고양이 미셴카에게 벨라는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았다.

 

한바탕 난리가 났다. 캭캭, 야옹야옹, 왈왈왈, 멍멍멍, 깨갱깨갱 등등 끔찍하고 현란한 소음이 일었다. 뒤뜰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놀란 베르닌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벨라를 깔고 앉아 발톱을 세운 앞발로 강아지의 토실토실하고 복슬복슬한 엉덩이를 마구 후려치고 있었다. 벨라가 죽는 소리를 하며 깨갱거렸다.

 

으악, 미셴카! 이게 무슨 짓이야! 저리 가!

 

야아아아옹!!!!

 

 

베르닌이 삿대질을 하며 벨라를 안아들자 고양이는 엄청나게 서럽고 분한 표정으로 그를 째려보더니 소맷부리를 확 할퀴고 가버렸다.

 

“ 벨라야 놀랐지, 미안 미안. 아휴, 배추밭은 위험해서 안 되겠다... 도로 사무실로 데려가야겠네. ”

 

“ 끼잉끼잉... ”

 

 

하지만 운이 없었다. 벨라를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오다가 스페호프와 떡하니 마주치고 만 것이다. 국장의 두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 자네, 그게 대체 뭔가? ”

 

“ 예? 예...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형... ”

 

개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사무실에서 왜 지저분한 개를 끌어안고 있는 거냔 말일세! ”

 

“ 저... 길 잃은 강아지인데 주인 찾을 때까지만 임시로 제가... 어려서 집에 두면... 우울증... 말썽... 늑대처럼 짖고... ”

 

“ 웬 횡설수설이람. 하여튼 근무지에 짐승을 반입하면 절대 안 되네! 가뜩이나 도둑고양이를 아직도 퇴치하지 못해 골치 아파 죽겠는데 어디서 강아지 새끼까지 데려와서! 당장 갖다 버리게!

 

“ 하지만 이 추운 날씨에 강아지를 어떻게 버립니까... 이렇게 어린데... ”

 

그럼 안락사시키든가!!

 

“ 아아,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국장님은 피도 눈물도 없나요... 이렇게 귀여운 강아지를... ”

 

“ 내 눈엔 근무 질서를 어지럽히는 쓸모없는 생물일 뿐이야! 당장 처리하고 오게! ”

 

 

베르닌은 강아지를 안고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며칠 전 강아지 습득 신고를 했던 경찰서에 가서 혹시 주인이 나타났느냐고 물었다.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는 대답만 들었다. 일말의 기대를 품고 스타브로프의 병원에 가보았다. 의사에게 강아지를 맡아줄 수 있는지 물었다. 노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 나도 맡아주고 싶지만 병원에는 환자가 많아. 개가 병균을 옮길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위험하네. 그리고 마누라가 비염이 심해서 어려워. 그냥 집에 데려다놓고 정시에 퇴근하도록 하게. 그게 개한테도 좋고 자네한테도 좋아. ”

 

“ 하지만 전 항상 노예처럼 일하느라 늦게 들어오는걸요... ”

 

“ 망할 놈의 KGB에 뭐 그렇게 충성할 필요가 있다고! ”

 

별다른 수확 없이 베르닌은 집으로 향했다. 품에 안긴 벨라의 해맑은 까만 눈동자를 보자 마음이 무거웠고 서글펐다. 강아지 한 마리 사무실에서 마음껏 뛰놀지 못하는 세상이 미웠다.

 

 

*     *     *

 

 

집으로 들어오자 벨라는 목이 말랐는지 물그릇에 머리를 처박았다. 한참 물을 먹더니 피곤했는지 곧장 소파로 올라가 잠이 들었다. 베르닌은 한숨을 내쉬고는 밥그릇에 사료를 채워놓고 다시 사무실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침실 문이 열려 있었다. 도둑이라도 들었나 싶어서 침실로 가보았더니 왕재수가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깜짝 놀란 베르닌이 조심스럽게 나가려고 했지만 기척에 왕재수가 깨어났다.

 

“ 어, 너 왔구나. 벌써 밤인가? 나 많이 안 잔 것 같은데. ”

 

“ 너 퇴원한 거야? ”

 

“ 응. 아침에. ”

 

“ 근데 왜 너네 집에 안 가고 여기서 자고 있는 거야? ”

 

“ 우리 집 너무 추워. 난방 고장 난 거 같아. ”

 

“ 아... 내가 가스 밸브 잠가놨었어. 사람 없는데 난방 돌아가면 낭비잖아. 밸브 틀어놓으면 따뜻해질 거야. 너 이제 괜찮아? ”

 

응, 의사 선생님이 병실도 좁고 불편하니까 퇴원하는 게 낫대. 근데 이번 주는 출근하지 말고 무조건 집에서 쉬어야 한대. 다시는 강 건너지 말래. ”

 

“ 선생님이 너 엄청 혼냈지? ”

 

“ 왜 혼나? 멋모르고 강 건너다 큰일 날 수 있다고 수심이랑 얼음 분포도랑 그려가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셨어. 매일매일 옆에 와서 열도 내려주고 수프도 떠먹여주고 자장가도 불러서 재워주셨어. 의사 선생님 진짜 친절하고 완전 좋아. ”

 

“ 엥... 그 할아버지가 그런 면이... 너 혹시 그 선생님하고도... ”

 

“ 뭐가? ”

 

“ 그러니까... 응응응을... 성교를... ”

 

악, 너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의사 선생님 모독하지 마! ”

 

“ 너 참 이상하다... 맨날맨날 아무 남자나 다 덥석덥석 끌어안고 성교 어쩌고 침대 어쩌고 하면서 왜 그 의사 선생님이랑 그런 사이냐고 물어보니까 화내지? ”

 

“ 의사 선생님이잖아! 엄청 착한 할아버지잖아! ”

 

 

대체 그 기준이 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지만 베르닌은 어쨌든 왕재수가 퇴원했다는 데 마음이 놓였다.

 

 

“ 밥은 먹었어? ”

 

“ 병원에서 먹고 왔어.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야? ”

 

“ 어... 아직 낮이야. 나 다시 사무실 가야 돼. 잠깐 들른 거라서. 야근 안하고 올게. 저녁 뭐 먹고 싶어? ”

 

“ 별로 입맛이 없어. 그냥 잘래. ”

 

“ 잘 먹어야 빨리 낫는데... 내가 저녁에 너 좋아하는 생선찜 해줄게. ”

 

“ 그걸 어떻게 믿니. 너 회사 가면 야근이잖아. 분명히 한밤중에 오겠지. 배고프면 그냥 바나나랑 요구르트나 먹을래. ”

 

“ 아니야, 나 오늘 일찍 올 거야. 나 요즘 계속 일찍 왔어. ”

 

“ 그 못된 국장이 개과천선이라도 했어? 아니면 잘렸나? ”

 

“ 아니, 그게 아니고... ”

 

 

베르닌이 강아지 얘기를 하려고 했을 때 마침 잠에서 깬 벨라가 투다다닥 하고 침실로 달려 들어왔다. 꼬리를 치며 베르닌에게 뛰어오다가 왕재수를 발견하더니 ‘왕!’ 하고 짖으며 잽싸게 침대 위로 뛰어올라가 왕재수의 무릎에 찰싹 올라앉았다. 왕재수가 기겁을 했다.

 

악, 이게 뭐야! 저리 가!

 

벨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왕재수의 품으로 팔짝팔짝 뛰어오르면서 목덜미고 얼굴이고 닿는 곳마다 혀로 할짝거리고 뽀뽀를 해댔다. 경악한 왕재수가 부들부들 떨면서 몸부림쳤다.

 

 

저리 가! 저리 가! 아악, 야! 너 왜 보고만 있는 거야! 이것 좀 치워줘! ”

 

“ 왜 그래, 벨라가 너 기억하나봐. 반가워서 그러는 거야. 좀 안아주고 인사해줘. 아는 체 해달라고 그러는 거잖아. ”

 

“ 기억은 무슨 기억! 어디서 이런 지저분한 멍멍이가 굴러들어온 거야! 아악, 빨리 좀 떼어줘! 나 이런 거 너무 싫어! 아 더러워! 으악, 이게 막 핥아... 침까지 묻히고... 우웩! 아악!

 

왕재수가 너무 법석을 피웠기 때문에 베르닌은 벨라를 그의 품에서 떼어내 꼭 안고 머리를 쓸어주었다.

 

 

“ 벨라야, 저 오빠는 네가 무서운가봐. 그러니까 방금처럼 막 뛰어오르면 안 돼. 알았지? ”

 

“ 오빠라니! 난 인간인데! 내가 왜 지저분한 똥개의 오빠여야 돼! 벨라는 또 뭐야! 으윽! 대체 왜 집구석에 개가 들어와 있는 건데! ”

 

“ 너 기억 안나? 그 강아지. 그때 얼음 위에 있던 애야. 네가 구해줬잖아. ”

 

“ 얼음... 아, 그 똥개... 거짓말하지 마! 그 똥개는 거무튀튀한 색깔이었는데 이건 하얗잖아! ”

 

“ 그거 때타서 그런 거였어. 목욕시키니까 하얀색이더라고. 그래서 이름도 지어줬어. 벨라... ”

 

벨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개한테 웬 벨라!

 

“ 하얀색이니까... ”

 

“ 벨라는 레르몬토프 소설 여주인공 이름이란 말이야!! 예쁜 여자한테나 붙여주는 이름이라고! 개는 멍멍이! 바둑이! 누렁이! 흰둥이! 뭐 그렇게 부르는 거야! 게다가 이거 수컷이잖아!!! 이거 안 보여, 이거? 여기 이거! ”

 

 

 

왕재수가 부르르 떨면서 벨라의 뒷다리 사이에 달려 있는 콩알만한 뭔가를 가리켰다.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 어... 그러네... 너무 작아서 몰랐어. 암컷인줄 알았는데... 그래도 강아지니까 그냥 벨라라고 부르자... 벌써 이름도 입에 뱄는데... ”

 

“ 알아서 해, 벨라든 나발이든... 제발 갖다 버려... 아니면 경찰서에 갖다 주든가!! 집안에서 개 따윌 키우다니! 순전 세균 덩어리란 말야! ”

 

“ 야, 너 왜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냐! 국장이랑 똑같은 소릴 하네. 경찰서에 신고했단 말이야, 주인 찾아줄 때까진 데리고 있을 거야. 안 그러면 유기견 수용소로 끌려가서 안락사 당한단 말이야. 그리고 여기 우리 집이야! 내가 내 집에서 개 키우겠다는데 네가 왜 그래! ”

 

“ 그치만... 난 맨날 여기서 저녁도 먹고... 차도 마셔야 되고... 지금 우리 집 난방도 안 되고 추운데... 지금 나 보고 여기 오지 말라는 거야? 똥개 한 마리 때문에!!! ”

 

“ 아니, 그게 아니고... 너 왜 그렇게 흥분해. 벨라 귀엽잖아. 얘 깨끗해. 내가 목욕시켜줬어. 이거 봐, 네가 자기 구해준 거 알고 이렇게 꼬리치잖아. 생명의 은인이라고 좋아하는데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 ”

 

꼴도 보기 싫어! 난 개든 고양이든 짐승은 싫단 말이야!

 

 

왕재수가 바들바들 떨었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흥분해서 소리를 지른 탓에 심하게 기침을 했다.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물을 떠다 주었고 살살 달랬다.

 

 

“ 계속 여기 있을 거 아니란 말이야. 주인 찾으면 돌려보낼 거야. 그렇게 싫으면 문 닫고 있어. 회사 갔다 와서 내가 데리고 있을게. ”

 

“ 안 돼, 저놈 내보내든지 너 회사 가지 마... 저놈이랑 둘이 못 있어... ”

 

“ 그렇게 싫으면 너네 집으로 가면 되잖아. ”

 

“ 우리 집 춥다니까! 그리고... 그리고... 나 우리 집 못가... ”

 

왜? 가스 밸브 열면 금방 따뜻해질 거야. 나랑 같이 가자. 난방 틀어줄게. ”

 

“ 아까... 아침에 갔는데... 부엌에서 바퀴벌레 나왔어. 나 분명히 우리 집에선 음식도 안 해 먹고 깨끗하게 사는데, 맨날 소독약 뿌리는데 대체 그 벌레는 어디서 나온 거야... 시골... 집에 올라가기 싫어... 아... 집에는 바퀴벌레... 여긴 멍멍이... 아... 시골... ”

 

 

왕재수가 깊이 탄식하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울었다. 베르닌은 한 대 패줄까 하다가 왕재수가 아직 아프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참았다. 당직실에서 곱등이와 쥐를 보고 기절했던 것도 생각났다.

 

 

“ 야, 울지 마. 네가 깨끗하게 해놓고 살아도 밖에서 유입되는 벌레는 어쩔 수 없는 거야. 내가 저녁에 와서 벌레 있나 없나 봐 줄 테니까 그동안 여기 있어. 벨라 무서우면 얘는 거실에 묶어놓을게. ”

 

“ 누가 멍멍이 따위 무섭대. 그냥 싫은 거지... ”

 

“ 그래도 네가 구해줬잖아. 그 위험한 상황에서도 강아지 구해서 주머니에 넣어주고 지퍼까지 채워줘 놓고 왜 이제 와서 그러니... ”

 

“ 내가 구하고 싶어서 구했냐. 네가 빠져서 간신히 꺼내놨는데 갑자기 저 똥개가 얼음 위에 가만히 있다가 미친놈처럼 나한테 막 달려오잖아. 아까처럼 막 품으로 파고들어서 얼굴 핥아대니까 너무 싫어서 주머니에 쑤셔 넣은 거란 말이야... 저 녀석 나오지 말라고 지퍼 채우다가 미끄러져서 빠진 거야. 우씨, 생각해 보니까 다 저 녀석 때문이야. 그 물 얼마나 차가웠는데... 나 정말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패딩도 쟤 때문에 더 무거워져서 막 가라앉고... 아우, 어디서 저런 게 나타나서... ”

 

“ 근데 벨라는 너 좋은가봐. 내가 안고 있는데도 자꾸 너한테 가려고 이렇게 몸부림치고 난리잖아. 얘 잘 봐봐, 얼굴도 되게 귀엽고 재롱도 잘 떨어. 맘 풀고 좀 친해져봐. 무서운 거 아니라며. ”

 

안 무서워. 그냥 찝찝해!

 

“ 야! 넌 그 험상궂은 바이올린 아저씨랑은 물고 빨고 별 짓 다하면서 훨씬 작고 귀엽고 목욕까지 시켜서 깨끗한 강아지가 와서 재롱떠는 건 뭐가 찝찝하다는 거야! ”

 

“ 여기서 왜 로만이 나오는데! 멍멍이랑 내가 응응을 할 건 아니잖앗!!!! 그리고... 그리고 로만이 뭐가 험상궂어. 얼마나 멋있는데! ”

 

 

베르닌은 마침내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사무실로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왕재수가 칭얼대니 미칠 것 같았다. 그는 벨라를 안고 거실로 가서 소파 팔걸이에 목줄을 맸다. 벨라의 곁에 신문지와 물그릇, 밥그릇을 놓아 주었다.

 

 

“ 착하지, 벨라야. 몇 시간만 집 보고 있어. 내가 빨리 돌아와서 풀어줄게. 저 나쁜 오빠가 욕해도 신경 쓰지 말고 있어. 알았지? 아 착하다, 아 이뿌다, 우리 강아지... ”

 

그거 수놈이라고 했잖아! 오빠 아니라고!

 

 

방 안에서 왕재수가 버럭 소리쳤다. 베르닌도 맞받아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넌 어떻게 스물다섯 살이나 먹어가지고 그렇게 자기만 알고 유치원생처럼 구냐! 너 때문에 벨라 묶어놨으니까 미안한 맘을 좀 가져보란 말야! 나 올 때까지 그 방에 꼼짝 말고 있든지 너네 집으로 올라가든지 둘 중 하나야! ”

 

“ 난 아픈데... 얼음물에도 빠졌는데... 폐렴도 걸리고... 너 진짜 나빠... 똥개 때문에 날 구박해... ”

 

 

왕재수가 방 안에서 칭얼대고 하소연하는 것을 뒤로 하고(그리고 벨라의 낑낑거림을 역시 뒤로 하고) 베르닌은 아파트를 나와 사무실로 돌아갔다. 머리가 더욱 지끈거렸다.

 

 

*     *     *

 

 

강아지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베르닌은 초과근무 1시간도 무시한 채 정시에 퇴근했다. 돌아오다 식료품 가게에 들러 생선을 한 마리 샀다. 벨라를 위해 짜투리 고기도 얻었다. 그러다 보니 또 마음이 약해져서 옆에 있는 빵집에서 사과파이도 한 조각 포장했다.

 

“ 야, 나 왔어. ”

 

이상하게 집이 조용했다. 툴툴대더니 자기 집으로 돌아갔나 싶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왕왕거리며 반갑게 뛰쳐나왔을 벨라조차 기척이 없었다. 베르닌은 살짝 걱정이 되었다. 거실을 보니 목줄만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 어... 저 자식이 설마 우리 벨라를 내다 버린 거 아냐! ’

 

 

왕재수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베르닌은 부엌과 욕실에 가보았다. 텅 비어 있었다. 혹시나 해서 침실로 가보았다. 왕재수가 담요로 몸을 둘둘 말고 등을 돌린 채 자고 있었다. 그런데 벨라도 거기 있었다. 왕재수의 어깨에 착 달라붙어서 쿨쿨 자고 있는 게 아닌가!

 

“ 싫다고 틱틱댈 땐 언제고... 그래도 나 없을 땐 강아지한테 잘 해주네... ”

 

 

베르닌은 어쩐지 감동을 받았다. 둘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부엌으로 나왔다. 짜투리 고기를 삶고 왕재수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생선을 쪘다. 기름을 두르지 않고 유산지로 감싸서 담백하게 조리하는 방법이었다.

 

‘ 앓느라 살도 더 빠졌으니 기름기 좀 먹어야 할 텐데... 조금만 기름지면 질색팔색을 하니... 우리 벨라는 내가 주는 대로 다 먹는데... ’

 

막 생선이 다 쪄졌을 무렵 방 안에서 왕재수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너 왜 여기 있어! 아악! 저리 가! 악!

 

멍! 멍멍! 끼이잉 끼이잉.... ”

 

베르닌은 렌지의 불을 끈 후 침실로 갔다. 왕재수가 벽에 등을 딱 붙인 채 베개를 마구 휘저으며 벨라를 쫓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벨라는 왕재수가 자기와 놀아주는 줄 알았는지 더욱 흥분하며 팔짝팔짝 뛰었다. 지친 왕재수가 기침을 하면서 베개를 내려놓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훌쩍 뛰어 그의 품으로 쏙 파고들었다. 어김없이 입술과 뺨에 뽀뽀를 퍼부었다. 왕재수가 몸서리를 치며 벨라를 팔꿈치로 밀었다. 차마 손으로 집어 들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얼른 벨라를 안아들었다.

 

 

“ 아아, 정말 왜 똥개까지 이렇게 달라붙는 거야... 줄은 어떻게 풀었어... ”

 

네가 풀어준 거 아니야? 난 네가 일부러 침대에 같이 재워준 줄 알았어. ”

 

“ 내가 왜... 난 이 방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갔단 말이야... 계속 잠만 잤는데... 저게 침대에 올라와서, 내 옆에... 으윽... ”

 

“ 어... 벨라가 진짜 네가 좋은가봐. 나한테는 그렇게 안 왔는데. 내가 불러야 오고... 침대에는 내가 안고 올라가지 않으면 혼자서는 절대 안 올라왔었는데. ”

 

“ 똥개 새끼가 날 왜 좋아하는 거야... 난 멍멍이가 아니란 말이야... ”

 

“ 그러게. 왜 너한테 그렇게 엉기지. 막 구박하는데... 리자한테 물어볼까. ”

 

 

베르닌은 리자에게 전화를 했다. 벨라가 왜 자꾸 왕재수한테 엉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 그러니까, 걔는 벨라를 엄청 싫어하거든요. 막 구박하고... 근데도 벨라는 자꾸 엉겨들어요. ”

 

“ 어머, 다냐. 그거 몰라요? 개들도 사람 얼굴 따지는 애들 있어요. 예쁘고 젊으면 더 좋아해요. 그때 벨라 보니까 노약자는 막 무시하고 성질도 사납던데요. 당신보다 나한테 더 잘 엉겼잖아요. 수놈이라 여자한테 더 잘 엉길 거예요. 꽃돌이 감독님은 여자는 아니어도 예쁘니까 당신한테보다 더 많이 달라붙을걸요. 그리고 좋은 냄새 나면 더 엉겨요. ”

 

“ 개한테 좋은 냄새면 고기 냄새, 뼈다귀 냄새 아니에요? ”

 

“ 그런 냄새도 좋아하지만 달콤한 냄새도 좋아해요. 혹시 그 사람 향수 그런 계열 쓰는지 물어봐요. 향수 안 쓰면 좀 덜할 거예요. ”

 

 

베르닌은 끄덕끄덕한 후 전화를 끊었다. 자기 코로 확인하기 위해 왕재수의 곁으로 다가가 냄새를 맡아보았다. 왕재수가 화들짝 놀랐다.

 

너 뭐해! 왜 킁킁거려! 개한테 옮은 거야? ”

 

“ 어, 리자 말이 맞네... 달콤한 냄새 나. 너 향수 쓰지 마. 그럼 벨라가 안 올지도 몰라. ”

 

“ 그게 무슨 소리야? ”

 

 

리자의 말을 그대로 전달해 주자 왕재수의 얼굴이 죽상으로 변했다.

 

“ 나 지금 향수 안 뿌렸어... 집에 와서 샤워하고 계속 잤단 말이야. 그거 내 체취야. 알잖아, 나 원래 체취 좋은 거... 내 향기에 남자들이 전부 혹하는데... 어째서 인간도 아닌 멍멍이까지 달라붙는 거야... 망했다. ”

 

“ 맛있는 냄새라고 생각해서 계속 뽀뽀하고 핥나보다... ”

 

“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얼굴 예쁘고 좋은 향기 나는 게 죄야? 망할 놈의 똥개 새끼가 예쁜 건 또 알아가지고... ”

 

 

왕재수는 툴툴거렸지만 슬쩍 보니 아까만큼 노발대발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역시 예쁘다는 말에 약간 마음이 풀린 것 같았다. 그래서 베르닌은 그 틈을 타 벨라를 데리고 나가서 삶은 고기와 사료, 물을 먹였다. 그리고는 저녁을 차렸다.

 

“ 야, 밥 먹어. ”

 

“ 안 먹어. 입맛 없어. ”

 

“ 의사 선생님이 약 줬어, 안 줬어? ”

 

“ 줬어. ”

 

“ 식후 30분에 먹으라고 했지? ”

 

“ 어... ”

 

안 먹으면 의사 선생님한테 이른다.

 

“ 에이. ”

 

 

왕재수는 터덜터덜 식탁 앞으로 왔다. 포크로 생선 귀퉁이를 조금 잘라내 깨작거리며 씹었다.

 

 

퍽퍽 좀 먹어라. 약 먹어야 되잖아! 집에 와서 계속 잠만 잤다며. 너 지금 살 엄청 빠졌어. 그때도 말라서 바람에 밀려서 물에 빠진 거잖아. 너 먹으라고 생선도 샀단 말이야. 요즘 생선 비싼데... ”

 

“ 고무 씹는 것 같아. 맛도 하나도 모르겠다고. ”

 

“ 아직 안 나아서 그런 거야. 그래도 다 먹어. 그래야 나으니까. ”

 

“ 이 생선 비싸? ”

 

“ 그래. 창꼬치고기, 비싼 거란 말이야. ”

 

“ 너는 서무라서 월급도 적은데 왜 비싼 걸 사오니. ”

 

야! 너 지금 나 무시해? 너 물고기 한 마리 사 먹일 돈은 있다고!

 

“ 알았어. ”

 

 

왕재수는 갑자기 나이프로 생선을 토막 내더니 포크로 푹푹 쑤셔서 막 먹었다. 표정을 보니 맛도 모르고 무작정 먹는 것 같았다. 반쯤 먹다가 생선이 목에 걸려 기침까지 했다.

 

 

“ 천천히 먹어. 물 좀 마시고. ”

 

“ 응. ”

 

 

남은 생선에 다시 포크질을 하는 왕재수의 괴로운 표정을 보고 베르닌은 혀를 차며 접시를 끌어당겼다.

 

“ 됐다. 그만 먹어라. ”

 

“ 다 먹을 거야, 비싼 거랬어. ”

 

“ 레닌그라드에선 맨날 레스토랑 가고 외제만 먹었다며 이게 비싸봤자. ”

 

“ 그래도 네가 사온 거잖아. 비싼데. ”

 

“ 남은 걸로 내일 수프 끓이면 되니까 억지로 먹지 마. 차나 마셔. 사과파이 줄게. ”

 

 

왕재수는 차만 마시고 사과파이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베르닌은 정말 걱정이 됐다. 그 좋아하는 사과파이를 안 먹다니!

 

 

“ 너 많이 아파? ”

 

“ 아니. 아프진 않은데 입맛이 없어. 똥개가 자꾸 엉기니까 소름 돋아서 더 입맛이 뚝 떨어졌어. ”

 

“ 자꾸 똥개 똥개 하지 마. 잃어버린 주인은 얼마나 속이 타겠어. 그리고 쟤 똥개 아냐. 저렇게 눈처럼 하얗고 예쁘고 귀여운데 왜 똥개야... 저거 종류는 모르겠지만 분명 순종이야. 비싼 개라고. ”

 

“ 순종은 무슨 순종! 귀가 축 처졌잖아. 말귀도 하나도 못 알아먹어. 하지 말라 해도 더 하고! 딱 봐도 잡종 발바리인데... 아까도 보니까 신문지 있는데도 카펫 위에 똥오줌 갈기고... ”

 

“ 넌 개에 대해 하나도 모르잖아! ”

 

“ 너보단 많이 알아. 볼쇼이 있을 때 같이 추던 마리야 누나가 개 키워서 맨날맨날 개 얘기밖에 안 했단 말이야. 저거 똥개야. 완전 잡종. ”

 

“ 아니야! 벨라는 순종이야!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귀여운 귀족견이라고! ”

 

“ 완전 콩깍지가 꼈네. 몰라, 나한테 안 오게만 해줘. 나 잘래. ”

 

“ 약 먹고 자야지! ”

 

“ 시어머니... ”

 

 

왕재수는 알약과 시럽을 먹은 후 침대로 도로 가더니 순식간에 잠들었다. 베르닌은 이게 자기 집인데 왕재수에게 침대를 뺏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조금 우울했지만 그래도 환자니까 참기로 했다. 소파에 주섬주섬 자리를 펴고 있는데 벨라가 또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 위로 팔짝 뛰어올라 왕재수 곁에 자리 잡으려는 것을 간신히 베르닌이 데리고 나왔다.

 

 

“ 어휴, 벨라야. 쟨 너 안 좋아하는데 왜 그렇게 엉기는 거야. 너도 강아지 체면이 있지. 이리 와, 아픈 애 귀찮게 하지 말고. 나랑 소파에서 자자. 너 어제까진 나랑 잘 잤잖아. 이렇게 배신하는 거 아니다, 너. 아무리 개라지만 의리를 지켜야지... ”

 

 

벨라는 꼬리를 치며 베르닌의 뺨을 핥았다. 배를 내놓으며 발라당 뒤집어져 애교를 부렸다. 베르닌은 그 귀여움에 슬슬 녹아버릴 것 같았다.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잠깐 들었다. 그는 벨라를 꼭 껴안고 좁은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     *     *

 

 

 

새벽에 베르닌은 낑낑대는 소리에 깼다. 벨라가 낑낑대면서 그의 옷자락을 물어 당기고 있었다.

 

“ 벨라야, 왜 그러니? 배고파? ”

 

왕! 왕! 왕왕왕왕!

 

“ 야, 한밤중에 그렇게 짖으면 이웃집 사람들 깨잖아. 쉿... ”

 

왕왕! 왕! 왕!

 

벨라가 발을 구르더니 베르닌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앞발로 바닥을 탁탁 치면서 침실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그러더니 투다다다 침실로 뛰어갔다.

 

 

헉, 벨라야! 거기 가면 안 돼! 걘 너 싫어한다니까... 깨기라도 하면 또 계속 짜증낼 거라고! ”

 

 

베르닌은 급하게 벨라의 뒤를 쫓아갔다. 침실에 들어가다가 뭔가가 발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불을 켜보니 왕재수가 카펫에 엎드린 채 숨을 몰아쉬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벨라가 옆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근심스럽게 왕재수를 봤다가 베르닌을 봤다가 낑낑대기를 반복했다.

 

 

“ 어... 야, 너 왜 그래. 많이 아파? ”

 

“ 나 토하고 싶어... 숨 막혀... 으으... ”

 

 

베르닌은 왕재수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 등을 두들겨서 토하게 해준 후 따뜻한 물을 먹였다. 열이 많이 나서 해열제도 먹였다.

 

 

“ 아까 생선을 너무 억지로 먹었나보다... 미안해, 속에서 안 받는데 내가 먹으라 했던 건가봐. ”

 

“ 흑... 생선 비싼 건데 토했어... 엉엉... ”

 

“ 괜찮아. 나중에 또 먹으면 되지. 약 먹었으니까 괜찮아질 거야. 벨라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

 

“ 똥개가 왜... ”

 

“ 벨라가 너 아픈 거 알고 나 깨웠어. 안 그랬으면 나 그냥 잤을 거야. ”

 

“ 칫, 또 내 옆에 와서 자려고 했구나... 똥개... ”

 

 

왕재수는 조그맣게 투덜대더니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또 토하거나 아플까봐 좀 걱정이 됐기 때문에 옆에 남아 있었다. 왕재수는 벨라가 기어 올라와 머리맡에 몸을 말고 자리를 잡았는데도 아무 말도 안 했다. 열이 나서 눈치를 못 챈 것 같기도 했다. 베르닌은 따뜻한 물수건으로 왕재수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 근데 너는 왜 잡혀갔던 거야? 반동분자라고 재판받았잖아. 서류 보니까 테러나 외국 스파이 노릇 같은 건 안 한 거 같던데. 왜 너보고 반동분자에 체제 전복을 기도했다는 거야? 파리에서 나쁜 짓 했어? ”

 

“ 나 반동분자 아니야. 친구들이랑 놀러 나간 건데 막 잡아갔어. ”

 

“ 친구들이 테러리스트... ”

 

“ 아니야! 그냥 나처럼 춤추는 애들이었어. 노래하는 애들이랑. 나는 천재라서 해외 투어를 많이 다녀서 외국에 친구들이 많았단 말이야. 그래서 파리에서도 친구들 만나서 밤에 놀았던 건데 막 체포하고 고문... 다 미워. 시골에나 보내고... ”

 

“ 무단이탈하니까 그렇지. 망명할까봐 그랬나보다. ”

 

“ 나 망명 못해. 망명하면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 아저씨가 끝까지 쫓아와서 손봐준다고 그랬단 말이야. 그 아저씨가 나 못 도망가게 하는 거 윗사람들 다 알아. 나 외국에서 놀러나갔던 거 한두 번도 아닌데 이번에 괜히 잡아다가 못살게 굴고... 시골 보내고. 진짜 싫어. ”

 

“ 야, 잠깐... 너 그 모스크바 아저씨랑 좋아하는 사이 아니었어? 손봐준다는 건 뭐야?

 

“ 아유, 그 아저씨 얼마나 무서운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사람들 모가지 뎅강뎅강 떨어져. 옛날에 엄청 많이 죽였댔어. 말 안 들으면 나한테도 얼마나 무섭게 구는데. 나 갈비뼈도 몇 번 나갔었어. 저번에 혼났을 땐 팔도 막 부러졌어. 엄청 아팠어. ”

 

그럼 진짜 나쁜 놈이잖아! 바이올린 깡패는 아무 것도 아니었네! 그런 악당을 우리 아저씨라고 좋다고 하냐! 일찌감치 정리해, 그런 놈은! ”

 

“ 그게 내 맘대로 되냐. 바보. 근데 그래도 그 아저씨 밤일을 진짜 잘해... ”

 

“ 아아, 너는 정말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니...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너 천재잖아. 예쁘고 인기도 많잖아. 왜 그런 놈들하고 얽혀서... ”

 

그래! 똥개도 있고 바퀴벌레도 있고... 시골... ”

 

 

왕재수는 투덜대다가 갑자기 잠잠해졌다. 약 기운에 잠든 것 같았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고 소파로 돌아갔다. 벨라가 자기를 버리고 왕재수 곁에서 자는 게 섭섭했지만 체념했다. 강아지마저도 얼굴을 따지다니 참 불공평한 세상이었다.

  

 

 

 

 

 

FIN

- 2015. 2.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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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11편으로 이어진다. 그건 주말이나 다음주 초에.

 

'벨라'란 이름은 트와일라잇의 그 오글거리는 여주인공 이름이 아니고! 사실 왕재수 말이 맞다.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유명한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1부 여주인공 이름이 '벨라'이다. 엄밀히 얘기하자면 이 여주인공 이름과 강아지 이름 벨라는 'e'모음 철자가 좀 틀린데.. 발음상 비슷하니 넘어가자. 베르닌이 강아지에게 벨라란 이름을 붙여준 이유는 물론 그런 문학적인 이유가 아니고, 러시아어로 '하얗다'는 뜻의 형용사가 '벨르이'이고 여성형은 '벨라야'인데 여기서 따온 것이다.

왕재수가 강아지 이름 가지고 특히 울컥하는 이유는... 사실 본편 우주의 미샤가 레르몬토프를 좋아하는데다 키로프 시절 저 '우리 시대의 영웅'을 가지고 안무도 하고 벨라라는 여주인공을 등장시키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서무 시리즈니 넘어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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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은 강아지가 투다닥거리는 우스운 에피소드로 쓰기 시작했지만 막판엔 좀 우울하게 끝났는데.. 이게 서무 시리즈이긴 하지만 어쨌든 왕재수가 시골 동네로 유배 좌천된 배경은 본편 우주와 통하는 데가 있어서... 쓰다 보니 그렇게 됐다. 단추를 안 괴롭히면 얘를 괴롭히게 되어 있음 ㅠ

본편에서의 미샤는 훨씬 심각한 상황도 겪고, 체포되었을 때도 왕재수의 얘기보다 좀더 복잡하긴 하다. 원래 반체제적인 인물이기도 하고.. 안무하고 춤췄던 작품들도 당국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들이 많았고, 그리고 저 크레믈린 쪽 아저씨로 지칭되는 인물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와도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다. (writing 폴더에 올렸던 jewels에서도 이 사람 얘기가 에벨리나와의 대화 속에서 언급된다. 그 소설에서도 미샤는 이 사람 파티 갔다가 일 저지름 -_-) 이 인간이 두들겨패고 괴롭히고 운운하는 것도 본편 쪽은 좀더 복잡하고 우울한 편이지만.. 뭐 이건 서무 시리즈니 넘어가자~ 그래도 왕재수는 누구에게나 귀염둥이 우리 아기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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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벨라 얘기나 외모는 사실 옛날에 내가 키웠던 사랑스런 강아지 토리에서 좀 따왔다. 토리는 화이트 포메라니언으로 여기 나오는 벨라보다야 훨씬 똑똑했지만 ㅎㅎ 벨라는 포메라니언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생겼다고 가정했다.

 

화이트 포메라니언은 요렇게 생겼다. 이 사진 출처는 구글링. 내가 키웠던 토리랑도 비슷..

 

 

 

그리고 내가 키웠던 사랑스런 토리 사진 몇 장 :) 토리는 아기 때 데려와 몇년동안 나랑 살다가 나중에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부모님 친구댁으로 입양갔고 이후 그 집과 함께 뉴질랜드로 이민가서 널따란 풀밭에서 뛰놀며 고기반찬 먹고 결혼해 애기 낳고 나보다 팔자좋게 살게 되었다. 어흑... 보고 싶다 토리야... 사랑해..

 

 

 

우리 토리 아기 때. 이 사진 보고 입양하러 갔었다. 2개월...

 

 

 

토리 아기 때~

벨라는 6개월 정도이므로 물론 이것보다는 더 크다 :0 그리고 벨라는 순종 포메라니언도 물론 아니니..

 

 

배냇털 아직 빠지기 전이라 솜털이 보송보송.. 우리 토리는 정말정말 귀여웠다.

 

왕왕거리고 멍멍, 낑낑, 왈왈거리는 등 벨라가 짖는 소리들은 거의 모두 내가 키웠던 토리에게서 따왔음 :) 그리고 우리 토리도 사람 엄청 차별했다 ㅎㅎ

 

저렇게 조그만 강아지였던 우리 토리는 성견이 되어 이렇게 되었다...

 

 

사진 속에선 털을 깎아줘서 원래 포메처럼 복슬복슬하진 않다.

 

 

이것도 털 깎아줬을 때. 포메의 특징은 이렇게 방실방실 활짝 웃는 표정을 잘 짓는다는 것이다. 강아지가 갑자기 저런 표정을 지으면 나는... 완전히 무장해제되고 만다 ㅎㅎㅎ

 

토리야 보고 싶다..

그래서 이번 10편은 우리 토리에게 바친다 :)

 

그럼 11편을 기대하세요~ 댓글도 달아주시고요 :) 우리 토리의 미모 찬양이라든지 ㅎㅎㅎ

(토끼 작가 역시 단추와 마찬가지로 강생이라면 사족을 못씀...)

 

 

.. 사족 : 하지만 왕재수는 벨라보다 자기가 더 예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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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3. 2. 15:04

비둘기 발 시려~ russia2015. 3. 2. 15:04

 

 

지난 2월 14일. 페테르부르크 미하일로프스키 공원.

오전 산책 나갔었다. 눈도 오고... 추웠다.

그러니까.. 비둘기도 분명 발이 시렸을 거야!! 저 빨간 발을 보니 어쩐지 더 추워 보인다!! 추우니 저렇게 목도 집어넣고 가슴깃털도 부풀리고...

 

 

 

 

비둘기 : 어휴, 이 동네는 겨울이 너무 길어서 먹고 살기 쉽지 않아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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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이번에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을 소개하겠다. 네프스키 대로 근방에 있는 슈베드스키 페레울록에 위치해 있는 '두셰브나야 꾸흐냐'(Душевная кухня)라는 카페이다. 이 이름의 뜻은 영혼의 부엌, 소울 키친 정도 된다.

 

이 날은 눈도 오고 길은 진창이고 무척 음습하고 힘든 날이었다. 러시아 박물관 갔다가 로모노소프 찻잔 사러 갔는데 평소 잘만 찾아다녔던 코뉴셴나야 거리의 그 가게가 이날따라 아무리 찾아도 눈에 띄지 않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궂은 날씨 때문인지 길도 잃어서 운하변을 따라 뺑뺑이를 돌고 무척 고생을 했다.

 

이미 찻잔은 포기. 너무너무 피곤하고 춥고 정신이 없고 배도 고프고 멍해서 일단 어디 들어가 몸을 녹이고 밥이라도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길 잃고 헤맬 때 눈에 띄었던 카페가 있어 그곳에 갔다. 스웨덴 대사관 근처에 있는 카페인데 간판도 예쁘지만 대문에 붙어 있는 메모가 어쩐지 마음에 들었던 곳이었다.

 

대문에 씌어 있는 메모는 찍진 않았는데... 이렇게 씌어 있었다.

 

' 우리 가게 문이 좀 무거워요, 잘 안 열릴 때도 있으니 겁먹지 마시고 용기를 내어 세게 밀어 보세요!~'

 

어쩐지 그 메모가 위안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살짝 웃게 만들기도 하는 거였다. 아무리 여행을 많이 다녀도 문이 닫혀 있는 카페에 혼자서 쑥 들어가는 게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이렇게 가로등 램프 아래 카페 간판이 걸려 있다.

 

 

 

카페 두셰브나야 꾸흐냐 라고 적혀 있음. 아래 그림들도 아기자기 귀엽다.

 

 

 

이 칠판에는 '두셰브노 이 베셀로', 마음 따뜻하고 즐거운 곳이란 메모가 적혀 있다.

 

 

 

 

 

슈베드스키 페레울록은 말라야 코뉴셴나야 거리와 발샤야 코뉴셴나야 거리를 잇는 조그만 뒷길이다. 스웨덴 대사관이 있는 곳이다. 이 골목으로 꺾어들면 저 안쪽에 있다.

 

문은 정말 무거웠다. 용기를 내어(ㅋㅋ) 밀고 들어갔다.

 

 

안은 따스했다. 카운터에는 젊은 남자 직원 하나가 앉아 있었다. 내가 멍해 하자 방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안내해주었다. 이때 난 눈도 맞고 바람도 맞고 춥고 길도 잃고 하여튼 반쯤 유체이탈 상태라 노어도 잘 안 들리고 정신이 없었다. 점원은 내가 외국인이라는 걸 알자 약간 당황했으나 아주 친절했다. 손님이 전혀 없었다. 맨 앞 테이블(이 사진에서 왼편에 보이는 주황색 소파 테이블)에 앉을까 했으나 앉아보니 테이블이 내겐 너무 높아서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청년이 코트를 받아주러 왔다.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이후 알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데니스였다)

 

데니스 : 너무 추워서 얼었군요?

나 : 어... 네. 얼었어요. 밖이 추워요.

데니스 : 그럼 몸 녹이도록 차나 커피를 먼저 드릴까요?

나 : 아, 네.

 

 

 

데니스가 차를 한잔 먼저 가져다 주었다. 그냥 그린필드 티백이었다. 하지만 따뜻해서 정말 몸이 녹았다.

 

메뉴판을 보고 주문을 했다. 이때 너무 추워서 일단 뜨거운 수프가 절실했다. 핀란드식 우하(생선수프)가 있어 그것을 골랐다. 우하는 원래 좋아하지만 여기 우하가 연어로 끓인 거라고 되어 있어 잠시 망설였으나 그냥 주문. 그리고 메인으로는 야채 가니쉬를 곁들인 치킨 필레를 주문했다. 수비드로 쪄서 기름에 살짝 볶고 사과소스를 쓴다고 되어 있었다.

 

데니스는 매우 친절했다. 차를 마시고 나니 몸도 살짝 녹았고 정신도 좀 돌아왔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카페 내부를 좀 구경했다. 아주 아늑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타입의 카페였다. 즉, 서재 스타일의 인테리어에 아늑하고 살짝 어둡고 살짝 인텔리겐치야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내가 앉았던 창가 자리. 외국어 서적들을 비롯해 러시아 서적들, 사진 관련 도서들이 있었다.

 

책을 저렇게 무심한 듯 근사하게 흩어 놓는 것도 기술이다. 나 같은 정리벽 있는 성격은 절대 저걸 못한다. (결국은 똑바로 정렬하고 있으니 ㅠㅠ)

 

 

 

 

 

이렇게 가장 안쪽에는 책상과 책꽂이, 책들이 있고 근사한 사진들도 많다.

 

그리고 먼저 수프인 핀란드식 우하가 나왔다. 

 

 

핀스까야 우하. 따끈하게 데운 흑빵 한 조각과 함께.

 

나는 러시아에서 우하를 여러 번 먹어봤다. 가끔은 내가 직접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리고 농담 안 하고, 이 우하는 여태껏 내가 먹었던 우하 중 최고였다. 정말이다.

연어는 자잘하게 조각나 있었고.. 아마도 크림이 섞인듯한 수프로 허브가 들어 있었고... 난 평소 우하에 크림을 넣지 않고 맑게 끓이는 편이고 평소에는 크림 들어간 수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우하는... 정말 맛있었다. 난 이렇게 맛있는 우하를 처음 먹어봤다. 몸이 사르르 녹았다. 살짝 간간했지만 짜지도 않았고.. 비린내 전혀 없고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나 담백하고 구수하고 맛있었다. 저 우하 한 그릇을 끝까지 다먹었다. 흑빵도 따스하고 살짝 시큼하고 구수한 것이 정말 맛있었다. 두셰브나야 꾸흐냐가 맞았다. 정말 맛있는 수프였다. 두고두고 생각날 음식이었다.

 

 

사진 보니 생각난다. 다시 먹고 싶다. 정말 맛있었다.

 

 

 

이어 수비드로 요리한 치킨 필레 등장.

 

보통 러시아에서 닭요리를 시키면 기름에 튀겨진 커틀릿이 많이 나온다. 그렇지 않더라도 하여튼 기름기가 많다. 그러나 이 치킨 요리는 전혀 기름기가 없었다. 일단 닭가슴살을 수증기로 찐 후 기름에 구운 거라서 안은 촉촉했고 전혀 느끼하지 않았다. 소스는 식초가 들어간 듯 살짝 새콤하면서도 달콤하고 조금 묵직한데 홀머스터드가 섞여 있어 느끼하지 않고.

 

거기에 가니쉬로 곁들인 저 파프리카가 진짜 맛있었다. 언젠가부터 소화가 잘 안되는 느낌이라 파프리카를 안먹은지 꽤 됐는데 이것은 소스가 어찌나 달콤한지.. 사과와 꿀이 들어간 것 같았다.. 진짜 달콤하고 맛있고 파프리카는 부들부들하고 물컹한게 정말 맛있었다!! 전부 다 먹었다. 

 

이날 이 카페에서 먹은 이 늦은 점심은 이번 페테르부르크 여행에서 먹은 음식 중 최고였다. 고골의 보르쉬도, 징게르 카페의 근사한 치킨감자 블린도, 심지어 그랜드 호텔 유럽의 비프 스트로가노프보다 더 훌륭했다. 

 

 

 

다 먹고 나니 데니스가 그릇 치우러 왔다. 음식이 입에 맞느냐고 물었다. 아주 맛있었다고 대답.

 

데니스 : 어디서 오셨어요?

나 : 한국이요.

데니스 : 거기 날씨는 어떤가요? 여기처럼 추워요?

나 : 한국도 춥지만 여기가 더 추워요.

데니스 : 거기도 여기처럼 눈 오나요?

나 : 그럼요. 근데 여기가 더 많이 와요. 오늘 날씨 너무 안 좋아요.

데니스 : 여기 춥지만 그래도 지금은 많이 안 추워요. 제 친구는 ㅇㅇ에서 왔는데(못 알아들은 지명) 거긴 영하 30도거든요!

나 : 아, 저 옛날에 여기 살았었는데 그때 한번 영하 30도 내려갔었어요. 뜨람바이 타고 가다 엔진 얼어서 내린 적 있어요.

 

우리는 웃었다.

 

계산을 한 후 나오면서 코트를 찾자 데니스는 오해를 하고 화장실을 가르쳐 주었다. 아니요, 코트요~ 하니까 자기도 잊었다면서 웃으며 코트를 가져다 주었다. 아마 내가 외국인이라 그도 살짝 긴장했던 듯 ㅋ

 

나 : 이 카페가 너무 우유뜨나하고 예뻐요. (우유뜨나는 아늑하고 따스하다는 뜻의 노어이다) 정말 우연하게 찾았는데...

데니스 : 우리 카페에 오는 사람들이 거의 다 그렇게 우연히 들어와요 :)

나 : 너무 좋았어요.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어요.

데니스 : 친구들 꼭 데려오세요~

 

이 날 길 잃고 헤매서 너무 힘들고 짜증났는데 맛있는 음식에 친절한 사람, 좋은 분위기 카페 덕에 기분이 완전히 전환되었다. 역시 맛있는 음식과 따스한 분위기만으로도 사람은 행복해진다.

 

.. 그래서 페테르부르크 떠나기 전날, 카페에 다시 갔다!

 

 

나 : 저 다시 왔어요.

데니스 : 다시 왔네요~ 물론이죠!!

 

 

 

 

 

이번엔 멋진 새 조각품이 있는 창가에 앉았다 :)

 

메뉴를 보고 이번에는 보르쉬와 생선 크넬리(우리 나라의 전과 좀 비슷한 음식) 주문.

 

 

음식 나오기 기다리면서 귀여운 램프 발견~

 

 

여기저기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다 :)

 

 

 

이번엔 티포트로 차 주문. 첨에 마셨던 차 한 잔은 50루블, 이렇게 포트로 나오는 건 100루블. 환율이 떨어져서 지금 100루블이면 약 1800원 정도이다.

 

 

보르쉬가 나왔다.

 

사실 우하 다시 먹고 싶었는데 이곳 음식이 맛있었으니 보르쉬도 먹어보고 싶어서. 다만 어떤 곳은 쇠고기 대신 돼지고기를 쓰기 때문에 물어봤더니 우리는 특이하게 오리고기를 써요~ 라는 대답. 신선한 허브와 스메타나가 같이 나왔다.

 

 

스메타나와 허브 얹어서 보르쉬를 먹었다.

보르쉬도 맛있었다. 내가 스메타나를 좀 많이 넣어서 내 입맛엔 살짝 짠 편이었지만 그것 빼곤 만족!

(그래도 역시 그 우하가 최고였다)

 

 

 

그리고 농어 크넬리가 나왔다. 아마 체코의 크네들리키랑 비슷한 요리가 아닐까 싶은데. 밀가루 반죽 같은 것으로 생선 완자를 감싸서 기름에 구워낸 요리이다. 아래에는 감자 팬케익이 깔려 있다. 이게 양이 상당히 많았다. 맛은 좋았는데 양이 많아서 팬케익은 좀 남겼다. 소스도 그렇지만 감자 팬케익 반죽에는 마늘과 고추가 들어가 살짝 매콤하고 톡 쏘는 맛이 났다. 술을 부르는 맛!!! (하지만 난 차를 마셨지..)

 

맛있게 먹은 후..

 

나오기 전에 데니스와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 카페 여기저기에 17-19 라는 메모가 붙어 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묻자 이 카페가 예전에는 17-19라는 이름으로 다른 곳에 있다가 작년에 이쪽으로 이사오면서 이름이 바뀌었다고 했다.

 

나 : 저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요. 오늘이 삐쩨르(페테르부르크의 애칭) 마지막 날이라 이번 여행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왔어요 :)

데니스 : 영광이에요! 다시 오실 거죠?

나 : 네, 언젠가는. 백야 때 오고 싶은데 아직은 희망사항이에요 :)

데니스 : 꼭 백야 때 오세요!

나 :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데 사진 찍어도 돼요?

데니스 : 그럼요! 우리 약속해요. 백야 때 당신은 친구들을 한 패거리(ㅋㅋ) 데리고 오고 전 차와 커피를 서비스로 드리겠어요~!!

나 : 약속한 거예요 :)

 

그래서 데니스 사진을 두 장 찍었다. 카페 명함도 받았다. 주소와 사이트, 인스타그램 주소 등이 적혀 있었다. 데니스가 자기 이름도 써 주었다. 나도 내 이름을 알려주었다. 페이스북 대신 이 블로그 주소를 알려주었다.

 

나 : 근데 제 블로그는 한국어로 되어 있어요 ㅎㅎ

데니스 : 괜찮아요, 이 참에 외국어 공부 좀 하죠. 공부는 좋은 거예요 ㅋㅋ

 

그리하여 우리는 행복하게 웃었고, 나는 그의 따스한 환송 인사를 받으며 카페를 나왔다. 그리하여 나의 페테르부르크 마지막 날은 행복한 하루가 되었다.

 

그럼 우리의 훈남 청년 데니스(Denys) 사진 두 장. 블로그에 올려도 된다고 허락받음 :)

노어로는 '제니스'에 가깝게 발음된다.

 

 

 

정말 친절한 청년이고 미소가 해사했다. 데니스 덕분에 이 카페가 더욱 더 두셰브나야 꾸흐냐가 된 것 같았다 :)

 

그러니 혹시라도 페테르부르크 여행을 가실 분들은, 시간을 내서 이 카페 'Душевная кухня' (두셰브나야 꾸흐냐)에 꼭 한번 가보세요. 영어 메뉴판도 있음! 그리고 문이 무거워도 겁먹지 마시고 세게 밀고 들어가세요. 혼자 가셔도 겁낼 필요 없어요. 친절한 데니스가 있으니까요.

 

이 카페 지도를 올리고 싶은데 내가 구글 맵 첨부하는 방법을 모르는 컴맹이라.. 카페 사이트 주소들을 아래 첨부한다. 노어 아시는 분들은 아래 주소를 보세요.

 

'Душевная кухня' (Dushevnaya kukhnya)

ШВЕДСКИЙ ПЕРЕУЛОК, 2
(между Малой и Большой Конюшенными, метро «Невский проспект»

전화번호 : 8 911 009 55 48


<인터넷 주소들>

http://17-19.ru/

http://vk.com/club17188019

instagram soul.kitchen

혹은 페이스북에서 'Душевная кухня бывшее 17-19'를 검색해도 나온다. 근데 이게 다 노어로 되어 있다는 함정이 있네..

 

백야 시즌에 꼭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고마웠어요 데니스!

 

Спасибо, Денис!

 

** 이 카페 처음 갔던 날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09

** 치즈홍차님 요청으로 크림 넣은 핀란드식 우하 레시피 찾아내 번역해 올림 : http://tveye.tistory.com/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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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2. 27. 21:46

이번에 페테르부르크에서 득템한 CD 몇 장 arts2015. 2. 27. 21:46

 

 

이번에 페테르부르크에서 득템한 CD 몇 장. 마린스키 신관에서 한 장, 구관에서 한 장, 나머지는 네프스키 대로 쪽에 있는 클래식 음반 가게 두 곳에서 구했다. 7장 중 2장은 선물용.

 

 

루블 환율이 떨어져서 평소보다 저렴하게 구매. 슬픈 건 이번엔 DVD가 거의 없었다는 것인데.. 마린스키 구관에도 소련 키로프 시절 DVD 몇장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오페라.. 신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마린스키는 갈 때마다 불만인 것이, 그 훌륭한 유산을 가진 극장임에도 불구하고 CD나 DVD가 너무 없다.. ㅠ 요즘 마린스키 레이블로 게르기예프 지휘 음반은 가끔 나온다만.. 마린스키가 게르기예프만의 것은 아니란 말이다!!! 특히 발레.. 제발 발레 DVD 좀 많이 내달라고요. 아니, 새로 만드는 게 예산 부담이 된다면 적어도 예전에 나왔던 것들이라도 제대로 다시 내줘... 비노그라도프 시절 작품들도 있잖아. 제발!

 

솔직히 말해서 발레음악 CD의 경우 게르기예프보다는 옛날 키로프-마린스키에 오랫동안 있었던 빅토르 페도토프 버전이 훨씬 좋다. 이번엔 페도토프 지휘 음반 두 장과 테미르카노프 음반 두 장을 건져서 행복했다 :)

 

 

 

프로코피예프 음반 두 장. 왼편은 마린스키 구관에서 구매. 발레 '신데렐라' 전막, 그리고 '드네프르 강가에서'. 지휘자는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 지금 이거 듣고 있다.

 

오른편은 신데렐라, 로미오와 줄리엣 발췌 연주.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는 유리 테미르카노프. 꽤 훌륭!!

 

 

 

왼편은 역시 유리 테미르카노프 지휘,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이것은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페트로프의 '세상의 창조'. 이 음반도 내 맘에 쏙 들었다! 특히 페트루슈카!!! 역시 러시아 작곡가는 러시아 지휘자가!!

 

오른편은 빅토르 페도토프가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녹음한 보로딘과 림스키 코르사코프. 보로딘은 2번 교향곡 '보가트이르스카야'. 딱 보로딘 느낌이다. 그리고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오페라들 서곡 모음. 아는 곡도 있고 모르는 곡도 있는데 나는 원래 러시아 국민악파를 좋아하고 림스키 코르사코프라면 특히 취향에 잘 맞아서 이 음반도 내겐 꽤 성공적이었다.

 

 

 

왼편은 빅토르 페도토프 지휘,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연주의 백조의 호수. 이것은 1895년 버전에 따른 연주이기 때문에 현재 마린스키의 백조의 호수에서 쓰고 있는 악보와는 좀 다른 부분들이 있다. 이것도 좋음 :)

 

그리고 오른편은 친구 주려고 산 선물. 친구가 차이코프스키 연주곡 모음 음반을 부탁했는데 사실 이게 쉬운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구미에 맞는 걸 찾기가 힘들다. 거의가 피아노곡 모음 아니면 비창을 비롯한 교향곡 쪽 음반이라..

 

그래서 음반가게 뒤지다가 그냥 내 취향에 맞는 걸로 골랐다. 내가 피아노를 안 좋아한다는 이유로(ㅋㅋ) 현악 쪽을 고름. 바이올린 콘체르토-키릴 콘드라신, 그리고 로코코 바리에이션-로스트로포비치... 아직 친구 못 만났다. 그래서 포장 안 뜯고 가만히 모셔놓음. 근데 내가 들어보고 싶네..

 

 

 

마지막은 우리 상사를 위한 선물... 클래식을 좋아하는 분이기에.. 마린스키 레이블에서 가장 최근 나온 데니스 마쭈예프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콘체르토... 게르기예프 지휘. 나야 피아노는 별로 안 좋아하니 어떨지 모르겠다만 그래도 이름값이 있으니 그걸로 밀어붙였다. 이건 귀국 다음날 출근해서 이미 전달 완료.

 

오랜 옛날 처음 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을 때,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홀 1층인지 반지하인지에 있었던 아주 작은 음반 가게에 가끔 갔었다. 심지어 거기서 cd도 아니고 공테이프에 녹음한 연주 테이프를 사곤 했었다. 그때 샀던 게 베토벤의 피아노곡(월광, 비창, 열정 시리즈였던 듯),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 등이었다. 그러고보니 그땐 피아노곡도 샀었네 ㅎㅎ 그게 분명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연주 테이프였던 것 같은데.. 그땐 시절이 그런 시절이라 그랬는지 공테이프 녹음 버전... 그 테이프 지금도 갖고 있으면 참 좋을텐데...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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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