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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올린 0편, 1편에 이어.. 서무의 슬픔 시리즈 에피소드 2.

과연 가엾은 직장인이자 집사 다닐 베르닌은 이 험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 에피소드 2에 나오는 정치국이니 국방위원이니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상의 인물들임. 안드로포프만 빼고)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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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

 

서무의 슬픔

- 당직실의 귀신 -

   

 

 

블라지미르 스페호프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연방 보안위원회 국장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후 가브릴로프 KGB 지부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연방 회의에는 최근 2~3년 간 정치국의 음모에 가담하느라 바빠서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던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돌연 나타났고 각 지역 국장들을 피눈물이 나도록 질책했으며 특히 스페호프를 탈탈 털었다고 한다.

 

스비제르스키는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KGB 소속이 아니었지만 안드로포프 총국장 뒤에 있는 진짜 실세였으므로 모두들 꼼짝없이 당했다. 그것까지는 알겠지만 대체 스페호프가 왜 털렸는지 베르닌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곳은 촌구석이라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동네이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면서 그 말을 하자 왕재수가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 그건 말이지, 너네 국장이 크라베츠 라인이라서 그래. ”

“ 크라베츠가 누구야? ”

“ 이번에 숙청당해서 시베리아로 좌천된 국방위원. ”

“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

“ 어, 그 사람이 날 재판에 걸었거든. 감옥도 보내고 막 고문도 하고. 나 엄청 아팠어. 그래서 우리 아저씨가 열 받아서 그런 거야. 스페호프는 그 사람 측근이었거든. ”

“ 아저씨? 스비제르스키랑 너랑 친척이야? ”

“ 아휴, 침대를 같이 쓰는 거라고. 아참, 너는 그렇게 말하면 이해 못하지. 성적 교합을... ”

“ 야, 그만해! 그럼 스비제르스키가 크라베츠를 좌천시켜서.. ”

아니야, 이 아저씨는 무조건 죽이려고 했는데 다른 아저씨가 끼어들어서 좌천시켰어. 그 아저씨는 레닌그라드에 있는데, 물론 친척은 아니고, 성적... ”

 

베르닌은 무가당 초콜릿 캔디를 왕재수의 입에 쑤셔 넣어 그 낯 뜨거운 이야기를 가로막았다. 어쨌든 상황을 거의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고난이 전부 왕재수 때문이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스페호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직원들을 들들 볶았고 어마어마한 업무 지시를 하달했다. 중력과 비례하는 관료제 법칙에 따라 그 모든 업무들은 서무이며 말단인 베르닌에게 집중되었다. 주로 아무 짝에 쓸모없는 일들이었는데 어차피 베르닌이 하는 일들은 다 그런 종류였으니 놀라울 것도 없었다. 왕재수의 국장 면담 덕에 한동안 1시간 늦게 출근, 조기 퇴근하던 기쁨도 국장이 모스크바에 다녀온 후 완전히 사라졌다. 하긴 그 이상한 면담 때문에 국장에게는 억울하게도 일종의 변태 노예 같은 것으로 각인되었으니 늦게 출근 조기 퇴근도 그리 반갑지 않았지만.

 

베르닌은 너무 짜증이 났지만 왕재수에게 이게 다 너 때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또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왕재수는 처음 생각만큼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았다.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한테는 애교도 부렸고 나름대로 친절도 베풀었다. 문제는 그게 인간의 친절이라기보다는 고양이의 보은에 가깝다는 것이다. 고양이는 모든 것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짐승인데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먹이를 바친답시고 죽은 쥐를 물어다 놓지 않는가.

 

짜증이 북받쳐서 베르닌은 사무실 뒤뜰에 종종 출몰하는 못돼먹은 검정 도둑고양이를 왕재수의 이름을 따서 미셴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돌을 던지고 두들겨 패주고 싶었지만 할퀴며 달려들까봐 꾹 참았다. 오히려 가끔 소시지 조각이나 청어 꼬리를 던져주었다. 어쩐지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게 불쌍하고 자주 보다 보니 얼굴도 귀여운 것 같아서. 그러다가 검정고양이가 보은을 한답시고 정말로 죽은 쥐와 참새를 물어다 놔서 기겁을 했다.

 

 

*   *   *

 

 

그날도 베르닌은 혼자 남아 야근을 하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 째 새벽에 귀가하는 중이었다. 일이 너무 많아서 2시간 조기 출근에 자정 이후 귀가하게 되어 아침에 태워다 줄 수도 없고 저녁에 차 우려 주러 갈 수도 없게 됐다고 통보하자 왕재수는 전처럼 화내거나 원망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사태를 받아들였다.

 

“ 뭐 할 수 없지. 알았어. ”

“ 뭐야, 왜 그렇게 침착해! 억지 안 부려? 아침에 어떻게 출근하려고. 너 운전 엉망이잖아. 극장까지 걸어가려고? ”

“ 아니, 로만이 태워주기로 했어. 아침에 너 안 오면 그냥 이제부터 그 사람 집에서 자려고. 차도 그냥 그 아저씨한테 우려달래지 뭐. 틱틱거려서 좀 짜증은 나지만. ”

“ 그 멀대같은 바이올리니스트? 아저씨라고 부르는 걸 보니 혹시... ”

“ 아, 우리 같이 잔지 좀 됐어. 그러니까 성적... ”

“ 그만해. 알았어. 잘됐구나. 이제 나 괴롭히지 마. ”

 

베르닌은 어쩐지 기분이 나빠져서 도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귀찮았던 거 잘된 일인데 왜 섭섭한지 알 수가 없었다. 화가 나서 검정고양이에게 돌을 던졌다가 미셴카가 발톱을 드러내며 덤비는 통에 옷자락만 된통 찢어졌다.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혼자 앉아 아무리 눈이 빠져라 일을 해도 도무지 줄어들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지만 본 업무는커녕 국장이 가외로 던져준 수많은 정리사항들에 선배들이 떠넘긴 일들까지 산더미같이 쌓여 있어 며칠 밤을 더 새도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어깨도 뻐근하고 속도 울렁거렸다. 마침내 베르닌은 통조림 수프라도 까서 먹으려고 당직실로 갔다. 당직실은 비어 있었다. 원래 모든 직원들이 순서대로 당직을 서게 되어 있었지만 선배들은 어차피 베르닌이 매일 야근을 하니까 굳이 남을 필요 없다면서 다들 집에 가 버렸다.

 

찬장에서 깡통을 꺼내 장부에 번호와 이름, 숫자를 적고 야근 특식용 카테고리에 체크를 한 후 베르닌은 따개로 뚜껑을 땄다. 막 수프를 후루룩 마시려는데 뭔가가 어깨를 꽉 잡아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요사스러운 냉기가 감돌았다. 기분이 좋지 않아 뒤를 돌아보려는데 퍽 소리가 나면서 천정의 등이 꺼졌다.

 

전구가 나갔는지 두꺼비집 문제인지 알 수가 없어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벽 쪽으로 가는데 뭔가가 스르르 나타나 베르닌의 얼굴을 철썩철썩 때렸다. 너무 놀라서 베르닌이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나자 그것의 형체가 보였다. 산발한 머리에 희끄무레한 얼굴의 기다란 남자가 서 있었다. 사실 서 있다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갈가리 찢긴 죄수복을 걸쳤는데 드러난 몸 여기저기에는 하얀 뼈가 그대로 불거져 있고 살가죽이 뜯겨 나가고 피멍과 고름이 가득했다. 무릎 아래로는 아무 것도 없었고 쇠사슬 족쇄만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한 마디로 귀신이었다. 눈알이 빠져 달아난 눈구멍에서 피와 진물을 줄줄 흘리며 귀신이 음산하게 흐느꼈다.

 

“ 내 다리 내놔~ 이 개자식들아. 내 다리 내놔~ ”

 

베르닌은 기절초풍했다. 통조림 깡통을 내던지며 비명을 질렀다.

 

“ 으악, 저리가! ”

“ 너네들이 나 고문해서 다리도 자르고 가죽도 벗기고 죽였잖아! 무릎 시려! 나 꼴 보기 싫다고 지옥에서도 안 받아줘. 다리 내놔! 너 가죽 나 줘, 눈알도 나 줘~ ”

“ 나 아니야, 내가 안 그랬어! 으아악, 살려줘요!! ”

“ 줄 때까지 맨날맨날 올 거야! ”

 

베르닌은 너무 무서워서 몸부림치며 미친 듯이 도망쳐 나왔다. 창 너머로 보니 당직실 어둠 속으로 하얗고 시퍼런 불빛이 번쩍번쩍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베르닌은 그 길로 주차장으로 달려가 차에 올라탔다. 공포 때문인지 시동도 잘 걸리지 않았다. 조바심에 계속 시동을 걸고 있는데 건물 바깥으로 하얗고 시퍼런 불빛이 둥둥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다리 없는 귀신이 차 앞으로 불쑥 나타나 창문을 두들겼다.

 

“ 다리 내놔~ 가죽 내놔~ 눈알 내놔~ ”

“ 아아악! ”

 

베르닌은 미친 듯이 엑셀을 밟았다. 레이서처럼 차를 몰아 그 무시무시한 곳을 빠져나갔다. 귀신은 KGB 바깥으로는 나올 수 없는지 정문 울타리까지 쫓아 나와 회오리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계속해서 끔찍한 몰골로 다리를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    *    *

 

 

두려움과 충격으로 반쯤 넋이 나간 베르닌은 미친 듯이 차를 몰았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집이 아니라 극장 앞에 와 있었다. 왜 거기로 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창 너머로 불빛이 보였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후들후들 떨리는 무릎을 붙잡고 기어가듯 극장으로 들어갔다.

 

“ 어, 너 웬일이야? ”

 

하필 남아 있던 것은 왕재수였다. 무대 의상들과 각종 장신구들을 감독실 여기저기에 벌려놓고 이상한 스케치와 메모가 널려 있는 노트를 읽던 중이었다. 매일 빈둥빈둥 노는 줄 알았는데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모습을 보자 놀라울 지경이었다.

 

“ 어, 난 그냥... ”

“ 나 데리러 왔어? 아이 참, 안 그래도 되는데. ”

“ 아니 그게 아니고... ”

“ 잘됐다, 나 차 좀 우려 줘. 로만은 티백만 담갔다 빼주고 되게 달달한 잼만 퍼줘서 별로야. 네가 해주는 게 제일 맛있어~ ”

“ 야, 내가 무슨 네 종이냐? 농노 해방된 지가 언젠데.. 흐흑... ”

 

베르닌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면서 귀신 생각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베르닌이 울자 왕재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 너 또 왜 울어? 진짜 촌스럽다니까. 국장이 또 뭐라 했어? ”

“ 아니야, 그게 아니야... 당직실... 귀신... 어헝, 다리 주기 싫어. 가죽 주기 싫어. 내 눈알... 엉엉... ”

 

왕재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베르닌이 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참 후에야 진정된 베르닌은 왕재수가 준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과 콧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다. 왕재수는 혀를 찼다.

 

“ 바보야. 뭘 그런 걸 가지고 울고 그래, 촌스럽게. ”

“ 그럴 줄 알았어! 귀신 따위 안 믿을 줄 알았다고. 나도 안 믿었어. 근데 있는 걸 어떡하란 말야! 지하에 고문실도 있고 스탈린 때 하도 많이 고문해 죽여대서 귀신 있다는 소문은 옛날부터 들었어. 근데 왜 하필 나한테 나타나서... ”

“ 나 귀신 믿어. 옛날부터 보고 싶었는데. ”

“ 허세부리지 마! 아아 이제 어쩌지... 내일까지 끝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다 놔두고 와버렸어. 다리랑 가죽이랑 눈알 줄 때까지 계속 나타난대. 야근은 계속 해야 하고... 큰일났네. 너무 무서워... 그렇다고 일을 안 하면 국장이 날 죽이겠지. 아아... 내 팔자야... ”

 

베르닌이 푸념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갑자기 일어나 재킷을 입고 스카프를 맸다. 그리고는 바닥에 깔려 있던 망토에 온갖 잡동사니를 밀어 넣고 주섬주섬 보따리를 싸더니 명령했다.

 

“ 야, 이거 들어. ”

“ 싫어! 국장이 시킨 일도 모자라서 너네 물건까지 옮기란 말이야? 너 정말 양심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아무리 싸가지 없다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날 부려먹어야겠어? ”

“ 툴툴대지 말고 빨리 들어. 난 무거운 거 함부로 들면 안 돼, 근육이 미워진단 말이야. ”

베르닌은 보따리를 짊어졌다. 엄청나게 무거워서 허리가 휠 것 같았다.

 

“ 어디로 가져가면 되는데? 창고? ”

“ 아니, 네 차에 실어. ”

“ 나 너 안 태워다 줄 거야! 짐까지 옮기라고... ”

“ 우리 집 가는 거 아니야. 너네 사무실 가는 거지. ”

“ 왜!!! ”

“ 귀신 때문에 무섭다며. 내가 쫓아줄게. ”

“ 네가 어떻게! ”

“ 하여튼 가자. ”

“ 싫어 싫어... 다시 가기 싫어. 귀신이 내 가죽 벗기고 다리 잘라갈 거야. ”

“ 아이 참, 그럼 넌 그냥 차 안에 있어. 나만 들어갔다 오면 되지 뭐. ”

 

 

...

 

 

베르닌은 왕재수와 함께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건물 밖에서 보니 창 너머로 아직도 하얗고 퍼런 불빛이 번쩍번쩍했다.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풀려서 베르닌이 주저앉자 왕재수가 한숨을 쉬면서 어깨를 토닥거렸다.

 

“ 겁도 진짜 많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

 

그리고는 왕재수가 보따리를 짊어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베르닌은 잠시 공포로 멍해져서 차 안에 앉아 있다가 문득 가책이 들었다.

 

‘ 저렇게 가냘픈 아이에게 저 무거운 걸 혼자 들고 가게 하다니... 근육이 미워질 텐데... 아파트에서 바퀴벌레만 봐도 소리치면서 달려오던 놈인데 그런 화초 같은 자식을 귀신한테 내던지다니... ’

 

너무너무 가기 싫었지만 왕재수가 걱정이 되기도 했고 고마운 마음에 각종 복잡한 감정이 들어서 베르닌은 용기를 내어 당직실로 가보기로 했다. 무서운 마음에 나뭇가지를 꺾어 대충 십자로 엮은 후 주머니에 꽂았다.

 

 

당직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기운을 짜내 문틈으로 안을 엿보자 왕재수와 귀신이 소파에 앉아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심지어 귀신은 왕재수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훌쩍훌쩍 울기까지 했다.

 

“ 그랬구나, 그놈들이 다리도 자르고 눈알도 파먹고 가죽도 벗기고 내장도 도려냈구나. 엄청 미워져서 슬펐겠다. 남자는 외모가 중요한데. ”

“ 응응, 나 원래 되게 잘생겼었는데. 여자들이 줄섰는데 고문당해서 미워지고 추해졌어. 그래서 죽었는데 지옥에 갔더니 못생겼다고 안 받아줘. 지옥 물을 흐린다고... 흑흑, 그래서 구천을 떠돌아다녀. 강물에 비친 내 얼굴 보고 나도 놀라, 엉엉. 다리도 없고 눈깔도 없고 살가죽도 없어. ”

“ 괜찮아 괜찮아. 다시 예쁘게 해줄게. 이리 와. ”

 

그러더니 왕재수가 보따리를 풀고는 각종 무대 의상을 꺼내 귀신에게 입혀주기 시작했다. 곱슬곱슬한 금발 가발을 씌우고 튜닉을 입힌 후 오페라 황제용 구슬 박힌 기다란 벨벳 가운을 입혀서 다리가 나오지 않도록 잘 가려주었다. 얼굴에도 분장용 파우더를 발라 핏자국을 감춰주고 눈구멍에 유리눈알을 박아주고 안경도 씌워 주었다. 마지막으로 망토를 둘러주자 귀신은 아주 흡족해 했다.

 

“ 와, 나 엄청 멋있는 것 같아! 이제 지옥 가면 문 열어주겠지? ”

“ 그럼. 서로 데이트하자고 줄 설 걸. ”

“ 고마워, 이쁜아. 얼굴도 고운데 마음은 더 곱네. 잊지 않을게. ”

“ 이제 다시는 여기 오지 마. 알았지? ”

“ 그치만 예쁘고 착한 너 보러 다시 오고 싶어. ”

“ 나 여기 안 살아. 여기 오면 또 나쁜 놈들이 고문하려고 할지도 몰라. 그 옷이랑 안경이랑 눈알이랑 다 뺏아 갈지도 몰라. 절대 오지 마. ”

“ 아까 왔던 애도 귀엽던데... 눈도 단추 같고... ”

“ 걔도 여기 안 살아! 절대 오지 마! 망토 뺏기고 싶니? ”

“ 안 돼, 간신히 다시 잘생겨졌는데... 다시는 안 와야지. 고마워 이쁜아. 복 받을 거야~ ”

 

귀신이 퍽 소리를 내며 허공 어딘가로 사라졌다. 베르닌은 크나큰 감명을 받았다. 달려 들어가 왕재수를 와락 껴안고 환호했다.

 

“ 와, 너 진짜 용감하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내가 널 여태 오해하고 있었어. 얼굴만 믿고 아무 짝에 쓸모없이 놀기만 하는 애라고... 미안해. ”

“ 흠, 뭘 이런 걸 가지고... 앞으로 또 나타나면 나 불러. 근데 아마 안 올 거야. 다른 귀신들이랑 데이트하러 다니느라 바빠서. ”

 

갑자기 베르닌은 왕재수가 가슴에 폭 안겨서 기대어 있는 것을 깨닫고 당황해서 머뭇머뭇 포옹을 풀고는 뒤로 물러났다.

 

“ 어, 저기... 그러니까. 나 시동 걸어 놓을 테니 내려와. ”

 

그리고는 왕재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후다닥 뛰어나갔다. 괜히 오해를 사서 또 이상한 소문이 퍼질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거라고는 침대와 성적 교... 밖에 없는 놈이니 항상 헛소문을 조심해야 했다. 더 이상 저녁에도 하고 밤에도 하고 아침에도 해주는 정력적 노예라는 루머를 듣고 싶지 않았다.

 

 

차에 시동을 걸고 기다리는데 건물 안에서 무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악!

 

베르닌은 깜짝 놀라 미친 듯이 달려갔다. 훨씬 더 다급하고 공포에 찬 비명이 두어 번 더 울리더니 뚝 끊겼다. 왕재수의 목소리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너무 놀란 베르닌이 당직실로 뛰어들었을 때 검은 그림자가 바람처럼 휙 지나쳐갔다. 하지만 시선을 돌릴 겨를도 없었다. 왕재수가 바닥에 기절해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왕재수의 얼굴이 너무 새하얗게 질린데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것 같아서 베르닌은 공포에 질렸다.

 

“ 정신 차려! 너 왜 그래? 그놈이 다시 온 거야? 너 공격한 거야? ”

 

뺨을 찰싹찰싹 때리자 왕재수가 잠깐 눈을 떴다. 두려움에 질려 축구공처럼 커진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며 횡설수설했다.

 

“ 버, 벌레... 쥐... 아악! ”

 

주변을 둘러보니 과연 문지방에 죽은 쥐 두 마리와 커다란 바퀴벌레와 곱등이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리고 복도 저편에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도도하게 웅크리고 앉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헉, 미셴카! 또 쥐를 물어왔구나! 나 이런 거 안 먹는다니까... ”

 

고양이가 못마땅한 듯 날카롭게 야옹거렸다. 베르닌은 왕재수를 깨워보려고 애썼다.

 

“ 야, 정신차려. 고양이가 물어다 준 거야. 밥 주니까 고맙다고 사냥해 온 거라고. 다 죽은 건데 뭐가 무섭다고! ”

“ 무서워. 으앙... ”

 

왕재수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간신히 일어나려다 문지방에 널려 있는 쥐와 벌레 시체를 보고는 다시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다. 기절한 것도 모자라 숨도 못 쉬고 경련까지 일으켰다. 공포로 쇼크를 일으킨 것 같았다. 왕재수가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와락 걱정이 된 베르닌은 급하게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헤치고 심장 마사지를 하면서 인공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왕재수는 제대로 숨을 쉬기 시작했지만 눈을 뜨기만 하면 쥐와 벌레를 목격하고 다시 울면서 몸부림쳤다.

 

“ 무서워, 으앙... ”

 

베르닌은 빗자루를 가져와 쥐와 벌레 시체를 쓸어서 버렸다. 쓰레기통에 처넣고 있는데 고양이가 다가와서 원망스럽게 야옹야옹 울더니 발톱으로 할퀴고 가버렸다.

 

“ 야, 미셴카! 나 원망하지 마! 사람은 이런 거 안 먹는단 말이야. 또 이런 거 물어오면 밥 안줘! ”

 

손을 씻고 돌아오니 왕재수가 일어나 앉아 있었다. 아직도 무서운지 손등으로 눈을 닦으며 계속 훌쩍훌쩍 울었다.

 

“ 울지 마. 쥐랑 벌레 이제 없어. 다 버렸어. 일어나. 가자. ”

“ 나 못 걸어가. ”

“ 왜! ”

“ 바닥에 쥐랑 벌레 있었어... 고양이가 복도에서부터 그것들 물고 막 달려왔어. 바닥에 흘린 거 다시 갖고 놀았어. 바닥 더러워. 못 밟겠어. ”

“ 악! ”

 

할수 없이 베르닌은 왕재수를 들쳐 업고 복도를 지나 주차장까지 갔다. 차 안에 내려놓자 왕재수가 몸서리를 쳤다.

 

“ 시골은 정말 싫어... 쥐도 있고 바퀴벌레도 있고... ”

“ 뻥치시네. 레닌그라드에도 쥐랑 바퀴벌레 다 있잖아! ”

“ 여기만큼 안 크단 말이야! 여기는 바퀴벌레가 쥐만 하고 쥐가 고양이만 해! 고양이는 개만 해! ”

“ 알았어, 그랬다 해. 귀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게 어떻게 쥐랑 바퀴는 그렇게 무서워하냐. ”

“ 쥐랑 바퀴는 더럽잖아! 징그럽고... 막 세균도 옮기고!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귀신에게서 구해준 게 고마웠기 때문에 더 이상 타박 주지 않고 시동을 걸었다.

 

“ 극장으로 데려다 줘? ”

“ 집에 갈래. 쥐 때문에 기분 잡쳤어. ”

“ 알았어. ”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왕재수가 불쑥 물었다.

 

“ 너 왜 그랬어? ”

“ 뭐? ”

“ 왜 고양이한테 내 이름 붙였어? ”

“ 아니야, 네 이름... ”

“ 맞잖아. 미셴카라고 불렀잖아. 왜 나한테는 이름도 안 부르면서 고양이는 내 이름으로 불러? ”

“ 내가 붙인 거 아니야! 사무실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서 나도 입에 익은 거야! 나 고양이 싫어해! ”

고양이한테는 밥도 주고 예뻐해 주고 잘해주면서 나한테는 소리만 질러. ”

“ 시끄러! 빨리 들어가! ”

“ 내일 아침에 태워다 줄 거야? ”

“ 바이올리니스트가 태워다 준다며! 그 집에서 잔다며! ”

“ 로만 오늘 어디 갔어. 모레 돌아와. 그래서 극장에 있었어. 집 오기 힘들어서. ”

“ 알았어, 태워다 주면 되잖아. 빨리 들어가! ”

 

왕재수가 집으로 올라간 후 베르닌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남은 일을 계속할까 했지만 귀신 때문에 놀라고 기절했던 놈 때문에 놀란 가슴이 아직도 벌렁거려서 그냥 귀가했다. 꿈속에서도 다리와 가죽과 눈알을 달라고 소리치던 귀신과 죽은 쥐에 놀라 엉엉 우는 왕재수가 자꾸 나와서 잠을 설쳤다.

 

 

*    *    *

 

 

다음날 베르닌은 두 시간 일찍 출근해 간밤에 미뤄뒀던 일을 계속했고 8시 반에는 다시 아파트로 가서 왕재수를 태워 극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밀린 일을 계속 하고 있는데 10시 쯤 국장이 그를 호출했다. 또 무슨 야단을 치고 설교를 늘어놓으려나 잔뜩 긴장한 베르닌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국장실로 갔다. 복도에서 다른 직원들과 마주쳤는데 다들 수군거리며 눈을 피해서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국장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그를 쏘아보더니 밑도 끝도 없이 말했다.

 

“ 오늘부터 다시 조기 퇴근하게. 출근 시간도 늦추고. ”

“ 아니, 왜요? 지시하신 일들이 산더미라 가뜩이나 야근하고 있는데... ”

“ 산더미였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자네는 야근을 하는 게 아니라 즐기고 있더군. 신성한 KGB 사무실에서 그런 짓을 하게 둘 수는 없지! 암, 그럴 수 없고말고! ”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

“ 내가 모를 줄 알고! 한밤중에 당직실에서 그 여우같은 꼬마하고 놀아나는 거 다 아네! ”

“ 놀아나다니요!!! 대체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

“ 간밤에도 그랬지 않나! 알렉산드르가 잊고 간 물건 때문에 새벽에 왔다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했네! 당직실 바닥에 애새끼를 눕히고 옷을 벗기고 입술이 닳아 없어져라 키스를 하고... 참 입에 담기도 민망해서 원! 앞으로 그런 짓은 집에서 하게! 자택근무로 쳐 줄 테니까! ”

“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그 자식이 바퀴벌레 때문에... 고양이가! ”

“ 변명은 필요 없어. 당장이라도 모가지를 치고 싶지만 그러면 또 그 불여우가 모스크바에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치겠지. 세상에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 아침에 하는 것도 모자라 새벽에 당직실에서까지 놀아나다니. 자네 정말 대단하군. 존경하고 싶어질 지경이야. 책상물림 주제에 이상한 쪽으로 능력이 있다니까. 당장 나가게. 그 불여우 생각하면 골치가 깨질 것 같으니까... 오늘부터 조기 퇴근해! ”

 

 

베르닌은 아무 말 없이 국장실을 나왔다. 계속 일을 하다가 1시간 조기 퇴근했다. 극장에 가서 왕재수를 태워 돌아왔고 아파트에 올라가서는 차를 우려 주었다. 무가당 다크초콜릿 캔디도 주었다. 저녁도 차려주고 설거지도 해주었다.

 

왕재수는 간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르닌은 ‘난 네가 정말 싫다’라고 말해주려다 꾹 참았다. 어쨌든 귀신 나오는 당직실에 앉아 야근하는 것보다는 아주 조금은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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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은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드디어 여자 캐릭터 등장~ 그건 주말에..

 

** 전반부에 베르닌과 왕재수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멀대 같은 바이올리니스트 로만은 writing 폴더에서 두어번 발췌했던 그 사과파이 얘기(http://tveye.tistory.com/3165, http://tveye.tistory.com/3146)의 화자. 물론 이 시리즈에서는 좀 웃기게 바뀌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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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