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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주말이 되려면 꽤 남았고 심신은 피곤하고..

위안을 위해 서무의 슬픔 시리즈 6편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올린다.

이 시리즈 쓰는 건 업무 스트레스 풀기 좋긴 한데, 막상 본편 쓰기가 어렵네.. 지금 서무 11편 쓰고 있긴 한데, 이거 마치면 당분간 다시 본편에 매진해야겠다. 근데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자꾸 받으니 ㅠㅠ

어쨌든 새 에피소드가 추가될 때마다 이 폴더 두번째 포스팅인 '등장인물 소개와 시리즈 목차'에 목차 추가 수정하고 있다. 포스팅한 후에는 링크도 올리고..(http://tveye.tistory.com/3428)

쓰고 보니 시리즈 중 이번 에피소드가 제일 길다... 그래도 대화가 많아서 분량 자체가 많지는 않다.

 

** 지금까지의 간단한 줄거리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가브릴로프에 새로 부임해 온 시 의회 의장은 야심차게 체육대회를 제안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이번 편에 언급되는 가브릴로프 공공기관들, 그러니까 삼림국, 예산심의국, 출판문화국, 식품관리국 등등은 정확한 소련 시절 공공기관 명칭들이 아니고 내가 대충 만들어낸 것이다. 뭐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들이야 있었겠지만 어쨌든... ***

 

*** 새로 언급된 인물들 중 먀흐킨, 필로모프, 데니스는 본편에도 나온다 :) ***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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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6 

 

 

 

 

서무의 슬픔

-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전날 밤부터 베르닌은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기상이변이 일어나 눈보라가 몰아친다면 금상첨화였다. 마침 사흘 째 평년보다 기온도 낮았고 하늘도 우중충했으므로 그의 소망이 전혀 실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미 10월 하순에 접어들고 있었으니까.

 

그를 이토록 전전긍긍하게 만든 것은 바로 토요일로 예정된 가브릴로프 공공기관 종합 체육대회였다. 원래 가브릴로프 KGB와 시 의회는 매년 친선 체육대회를 열어왔다. 말이 체육대회지 사실은 축구 한 게임 뛴 후 잔디밭에 둘러앉아 너도나도 보드카를 퍼마시며 늘어지는 야유회였다. 그 축구라는 것도 평균 연령대 40세 이상의 배 나온 남자들이 슬렁슬렁 뛰며 공을 차대는 조기축구회 수준이었다. 매년 체육대회 예산은 여유 있게 잡혀 있었으므로 최소한의 모양을 갖추기 위해 축구경기를 하나 끼워 넣은 것이다.

 

입사 2년차인 베르닌은 작년 대회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경기에 나가면 이기든 지든 특별수당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출전은 고참들의 몫이었다. 심지어 스페호프 국장마저 출전했다. 나머지는 열심히 박수부대 노릇을 한 후 샤실릭을 구워먹고 밤중까지 보드카를 퍼마시며 놀았다. 그리 나쁜 기억은 아니었다. 신참이자 서무라는 이유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술심부름을 한 것 외에는. 작년 같은 체육대회라면 그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몇몇 직원들은 휴일에 대회를 한다고 툴툴댔지만 어차피 그는 격무 때문에 토요일에도 출근하는 처지였으므로 상관없었다.

 

문제는 얼마 전 군 출신의 시 의회 의장이 새로 부임하면서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공공기관 종합 체육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선언한 데 있었다. 정력적인 의장은 심지어 직접 공공기관들을 분류해 두 개의 팀을 구성하는 의욕까지 보였다. 팀 이름까지 지었다. 군대 출신답게 독수리 팀과 호랑이 팀이었다. 독수리 팀에는 주요 행정 기관들, 즉 가브릴로프 시 의회와 KGB, 예산심의국, 삼림관리국, 식품관리국 등이 포진되었다. 호랑이 팀은 언론과 문화 관련 기관들로 구성되었다. 교육국, 출판문화국, 검열국, 그리고 가브릴로프 극장과 민속 극장이었다. 의회 의장은 중립을 지키겠다면서 빠졌기 때문에 독수리 팀의 사령관은 KGB 국장인 스페호프가 맡게 되었고 호랑이 팀은 보나마나 질 게 뻔하다고 생각한 기관장들이 너도나도 독이 든 성배를 거부한 나머지 감투 쓰는 것을 좋아하는 가브릴로프 극장장 먀흐킨이 맡게 되었다.

 

완벽주의자이자 호승심으로 가득찬 독재자 스페호프는 체육대회 승리를 위한 특별 TF를 구성했다. 모든 잡무에서 빠져본 적이 없는 베르닌도 끌려 들어갔다. 사전 훈련을 위한 특별 예산을 편성했고 붉은색 상의와 흰색 하의로 이루어진 운동복과 운동화를 새로 구입했다. 각 기관들로부터 후보 선수 명단을 제출받은 후 면밀히 검토해 대표 팀을 꾸렸다. 독수리와 호랑이의 기량은 누가 봐도 압도적인 차이가 났다. 시 의회야 나이든 의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삼림관리국과 KGB가 있었다. 전자는 광대한 가브릴로프의 숲을 관리하고 벌목공들을 지휘하는 곳이라 힘 좋은 남자들이 많았다. KGB야 현장 요원들이 있으니 말이 필요 없었다. 문화니 예술이니 출판이니 하며 비실비실하기 짝이 없는 책상물림들과 계집애 같은 예술가들로 이루어진 호랑이 팀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애초부터 모든 종류의 문화예술을 경멸하는 스페호프는 이번 기회에 그 바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며 굉장한 의욕을 보였다.

 

“ 그 약골들을 밟아버려야 해! 이기는 건 당연한 거고, 단 한 경기에서도 패하면 가만 두지 않겠네! ”

 

스페호프는 세심하게 명단을 검토했다. 조기축구회 아저씨들은 단 한 명도 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각 기관에서 젊은 피들이 대거 수혈되었다. KGB에서는 몇몇 여직원들을 제외하고는 28세의 다닐 베르닌이 막내였다.

 

“ 에 또... 그렇지. 자네는 축구, 높이뛰기, 공굴리기, 농구, 100미터 달리기, 투포환, 이어달리기... 전 종목에 출전하도록. ”

 

“ 국장님, 저는 농구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요. ”

 

“ 상관없어. 180이 넘는 애들이 필요해. 우리 팀은 다 좋은데 의외로 키 큰 놈들이 별로 없단 말이야... 일단 들어가서 리바운드를 전담하도록. 필요하면 레이업 정도는 할 수 있겠지. ”

 

“ 그런데 리바운드가 뭔가요? ”

 

“ 농담하는 거겠지? ”

 

국장의 눈초리가 너무나 매서웠기 때문에 베르닌은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래서 급하게 허풍을 쳤다.

 

“ 아... 하하하, 농담이었습니다. 리바운드를 전담하겠습니다... 저... 그런데 축구는 좀 해봤지만 제가 달리기는 자신이 없어서요. ”

 

“ 자네 기초 체력 시험 기록 보니까 100미터를 11초대에 뛰던데? ”

 

“ 아니, 그건 입사 전이고요... 지금은 운동을 전혀 안 해서요. 매일 야근하느라 운동은커녕 산책할 시간조차... ”

 

“ 시끄러워! 필로모프 빼고는 자네 기록이 제일 좋아. 그 친구가 하필 맹장염에 걸릴 게 뭔지... 100미터 대표로 나가게. 그리고 이어달리기는 마지막 주자로 뛰는 거야. 축구는 원톱 스트라이커. 그리고 키가 크니 높이뛰기쯤은 껌이겠지. 어깨가 넓으니 투포환도 잘 할 거고. ”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어째서 제가 모든 경기에 다 나가야 하는 거죠? 저는 행정직이잖습니까... 현장 요원들도 많은데... ”

 

“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애들이 전부 골골거리지 뭔가. 글리셰프는 격투 연습하다가 팔을 삐었다지를 않나, 스포츠 만능이었던 콜랴는 하도 술을 많이 마셔댄 덕에 지방간 증세가 심해져서 요양소에 갔지. 에멜리얀은 이제 나이가 너무 많아서 뛰는 게 시원찮더군. ”

 

“ 국장님께서 가장 총애하시는 안드레이는... ”

 

“ 그 친구는 사격 전문이야. 스나이퍼라서 막상 이렇게 몸을 쓰고 뒹구는 일에는 맞지 않아. 그리고 언제 다들 이렇게 늙었는지... 필로모프를 빼면 제일 젊은 놈이 서른다섯이더군! 망할 필로모프 녀석은 대체 뭘 잘못 퍼먹고 맹장염이람. 힘 잘 쓰는 놈들은 삼림국에서 전부 채웠으니 자넨 날렵하게 뛰어다니며 우리 독수리 팀의 승리를 견인하게! 가장 젊은 친구니까 그 정도는 당연히 해내야지! 암, 그렇고말고!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란 말이 맞네. 정부의 슬로건을 지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행정의 기본이야. 이번 대회에서 그 약골 호랑이 팀을 이기지 못하면 전부 자네 책임으로 알겠네! ”

 

“ 아니,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저는 원래 수영 외에는 잘하는 운동이 없어서... 차라리 수영 선수로 뽑아주시면 안될까요? 종목을 추가해서... ”

 

“ 야외에서 하는 대회인데 웬 수영! ”

 

“ 그러니까... 즐라타야 강을 횡단한다든지... ”

 

“ 10월말에 강을 헤엄쳐 건너겠다고? 얼어 죽고 싶나? ”

 

“ 하지만... 축구에 달리기에 공굴리기, 높이뛰기에 리바운드에 심지어 투포환이라니... 자신이 별로 없습니다. ”

 

“ 젊은 놈이 왜 이렇게 패기가 없어! 그 따위 자세로 KGB 요원이라니, 덩치가 아깝군! 이런 글러먹은 책상물림 같으니. 군대를 보내야 하나. ”

 

“ 군대는 벌써 다녀왔는걸요... ”

 

“ 군대에도 다녀온 놈이 이렇게 나약한 소리를 지껄여? 설마 밤이고 낮이고 손에 잉크를 묻히며 기사나 써대는 놈들과 계집애처럼 타이츠나 입고 엉덩이를 살랑대는 무용수 녀석들도 못 이기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런 놈이라면 강에 빠져죽어야지! 전승무패가 목표일세! 한 경기라도 지면 각오하게. 그럴 리는 없겠지만 1백만분의 1로 대회에서 패하기라도 하면 자넨 모가지야!

 

“ 아니, 저는 행정직으로 시험을 보고 입사했는데 어째서... ”

 

“ 시끄럽네! 당장 나가서 축구 연습이나 하게! ”

 

스페호프는 심지어 대회 일주일 전부터는 출전 선수들에게서 업무도 모두 면제해 주었다. 베르닌조차도 서무 업무를 면제받았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만큼 국장이 승부욕에 불타고 있었으니 정말이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베르닌도 독수리 팀이 대회에서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상대 팀이 너무 약골이었으니까. 애초부터 의회 의장과 스페호프가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양 팀을 구성했고 경기 종목을 편성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국장의 말대로 전승무패할 자신은 없었다. 축구나 투포환, 공굴리기 따위야 삼림국 덩치들이 있으니 괜찮았지만 달리기 같은 건 어쩐지 무용수들이 다리가 기니까 더 잘할 것 같았다. 최소한 한 경기 정도는 내주게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사실 그가 국장의 말대로 책상물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스페호프에게 엄살을 부리기는 했지만 그는 운동신경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대학 시절에는 축구도 꽤 했다. 문제는 입사 후 2년 동안 너무나도 격무에 찌든 나머지 체중은 불어나고 몸이 둔해졌다는 데 있었다. 2년 동안 운동이라곤 해본 적이 없었다. 최근에는 뱃살이 슬며시 접히고 옆구리살이 만져질 정도였다. 격무와 야근으로 인한 야식, 수면 부족 때문에 만성 식도염과 위염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회 직전 일주일 동안 베르닌은 축구, 높이뛰기, 공굴리기, 농구, 100미터 달리기, 투포환, 이어달리기 연습에 너무 지쳐서 차라리 서무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특히 축구는 더 그랬다. 삼림국의 덩치 큰 녀석들은 힘은 좋았지만 단순무식해서 전략이란 걸 몰랐다. 베르닌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지만 원톱 스트라이커는커녕 공을 발끝에 대보지도 못했다. 승부욕 강한 불곰 같은 삼림국 대표들이 너도나도 골을 넣어 영웅이 되고 싶어 안달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후방 수비수로 밀려났다. 달리기는 아무리 뛰어도 옛날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탈진한 나머지 집에 가면 그대로 뻗어버렸다.

 

 

스페호프는 대회 이틀 전에 베르닌을 상대 팀의 연습장으로 급파했다. 두 팀 모두 비밀 유지를 위해 출전 선수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다. 마침 극장 앞 레닌 광장에서 호랑이 팀의 연습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국장은 베르닌에게 그쪽으로 가서 정보를 좀 긁어모아 오라고 했다.

 

“ 뻔히 제가 독수리 팀 쪽이란 걸 다 아는데 들어오게 할까요? ”

 

“ 아무도 자넬 위협적으로 생각 안 할 걸세! 누가 봐도 얼간이 책상물림이잖나! 바로 그것이 우리의 전략이지. 알고 보니 얼간이가 에이스였다! 삼형제 중 바보 이반인 것이지! ”

 

“ 별로 칭찬 같지 않은데요... ”

 

“ 시끄러워. 빨리 다녀와! 정 의심하면 그 불여우를 보러 왔다고 하게! 다 알지 않나, 자네와 그 불여우... 아침에 하고 점심에 하고 저녁에... ”

 

“ 국장님, 정말 그건 오해입니다. 저희는 진짜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요. 아아 억울해... ”

 

“ 썩 다녀오지 못해! ”

 

그래서 베르닌은 울며 겨자 먹기로 레닌 광장으로 향했다.

 

 

*   *   *

 

 

광장은 한산했다. 호랑이 팀이 축구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무 뒤에 숨어서 지켜보니 별로 위협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체격 조건도 훨씬 떨어지는데다 서로 공을 넣겠다고 아옹다옹하던 독수리 팀과는 정반대로 아무도 나서지 않아서 공이 자기 혼자 굴러가기 일쑤였다. 저 정도면 괜찮겠다 싶었다. 몰래 사진을 찍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어깨를 툭 쳤다.

 

“ 어, 너 여기서 뭐해? ”

 

베르닌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후다닥 카메라를 등 뒤로 감추었다. 옆을 보니 왕재수였다.

 

“ 아, 나... 그냥 지나가다 들렀어. 어, 그러니까... 너 밥은 먹었어? ”

 

“ 내 밥 챙겨주려고 들른 거야? ”

 

“ 어... ”

 

“ 며칠 동안 방치하더니만. 출퇴근도 안 시켜주고... 맨날 한밤중에 들어오느라 내 밥도 안 챙겨주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담. ”

 

“ 어... 알잖아, 나 서무인 거. 국장이 자꾸 괴롭혀서 바빴어. 너 그래서 요즘 끼니 거른 거야? 설마 또 극장 사무실에서 잤어? 그 바이올리니스트 깡패 또 어디 갔어? ”

 

“ 안 갔어. 이번 주는 계속 로만이 집에 와 줬어. 밥도 해주고 차도 우려주고 출퇴근도 시켜줬어. 근데 로만은 침대 기술만 좋지 음식 솜씨는 참 별로야. 차도 대충대충 우려주고 운전도 너보다 못해. 넌 언제 안 바빠지는 거야? ”

 

“ 체육대회 끝나면 좀 나아질 거 같아. ”

 

“ 왜? 너도 거기 나가? ”

 

“ 아, 아니! 난 책, 책상물림이라서 안 나가... 국장이 날 무시하잖니. ”

 

“ 으응...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데 이상하네. 나 같으면 너 쓸 텐데. ”

 

“ 고, 고맙구나. 근데 그게 무슨 뜻이야? 너희 팀 선수들은 네가 뽑아? ”

 

“ 아니, 극장장이 뽑긴 하는데... 자꾸 경기마다 우리 발레단 애들을 집어넣잖아. 다리 길고 체력 좋다고... 그래서 극장장이랑 한바탕 했어. ”

 

“ 왜? 그나마 너네 팀은 무용수들이 제일 낫지 않아? 나이도 젊고 체격도... 너네 맨날 왕자 추는 애, 데니스인지 뭔지 걘 키도 187인가 그렇고 엄청 딱 벌어지고... ”

 

“ 아휴, 정말 너도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운동할 때 쓰는 근육하고 춤 출 때 쓰는 근육은 다르단 말이야! 특히 축구 같은 거 잘못하면 다리 망가지고 근육이 미워져서 큰일 나. 이 와중에 무슨 축구니 농구니 달리기니 투포환까지... 가뜩이나 우리 애들은 춤도 못 춰서 연습 많이 시켜야 되는데 이 바쁜 시기에 어째서 체육대회인지 나발인지를 하는 거야... 무용수들은 그런 거 안 해봤단 말이야. 나도 축구는 하나도 몰라. ”

 

“ 아, 그렇구나... 무용수들은 허우대만 멀쩡하지 운동은 안 되는 거구나. ”

 

“ 우리 애들 못 나가게 하느라 극장장이랑 얼마나 싸웠는지 알아? 아유 머리 아파... 이게 무슨 스탈린 시절 복고주의람. 군기나 잡고 애들 다 불러 모아서 뺑뺑이 돌리고! 공연도 취소해버리고. 심지어 토요일이라니! 극장은 토요일에 관객이 제일 많은데! ”

 

“ 너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다시 잡혀가면 어떡하려고 그래. 또 감옥 가고 고문 받고 싶냐? 나니까 가만히 있는 거지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면 너 밀고 당한다. ”

 

왕재수는 퍼뜩 놀라며 주위를 살피고는 입을 다물었다.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베르닌은 주머니를 뒤져 갱지로 싸 놨던 사과파이 반 조각을 꺼내주었다.

 

“ 자, 먹어. 점심 때 선수들 특식으로 나온 디저트였는데 절반 남겨왔어. ”

 

“ 너는 선수 아니라면서 왜 특식을 받았어? ”

 

“ 어... 누가 안 먹는다면서 줬어. ”

 

다행히 왕재수는 사과파이에 정신이 팔려서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왕재수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파이를 먹는 동안 베르닌은 슬슬 정보를 캐냈다.

 

“ 그럼 무용수들은 거의 안 나오는 거네? 데니스도 안 나와? ”

 

“ 응. 내가 못 나가게 했어. 걔 당장 내일 백조의 호수 춰야 되는데 부상이라도 당하면 어쩌라고. ”

 

“ 그럼 다른 남자애들은 나와? ”

 

“ 아휴 너 진짜 발레랑 담 쌓았지! 발레에 남자들도 많이 나온단 말이야. 주인공만 추는 거 아니야. 솔리스트들도 있고 군무진도 있고... 전부 무대에 나와서 춤추고 연기해야 해. 다 못 나가게 했어. 드라마 하는 애들만 내보냈어. 오케스트라도 거의 못 나가. 악기 다루는데 손 다치면 끝장이잖아. ”

 

“ 그럼 호랑이 팀은 극장 쪽은 거의 안 나오는 거네. 출판문화국이랑 검열국이랑 교육국 정도네. ”

 

“ 응. 근데 출판국 애들은 다들 무슨 터널증후군인지 뭔지 때문에 손목을 잘 못 쓴대. 검열국 애들은 하도 서류 검열을 많이 해서 안경 벗으면 장님 수준이라고 걱정하더라고. 그나마 교육국 애들로 채운 거 같아. 극장장이 나한테 막 화냈어. 가뜩이나 차출할 애들 없는데 내가 고집 부려서 무용수들 못 나가게 한다고. 칫, 그깟 놈의 체육대회가 대수야? 마초 군국주의자들 같으니. 승부에 이기는 게 그렇게 중요해? 그러니까 맨날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 ”

 

“ 밀고... 고문... ”

 

“ 압... ”

 

왕재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정보를 술술 알려준 왕재수가 고맙기도 하고 어쩐지 귀엽기도 해서 베르닌은 다시 주머니를 뒤져 무가당 초콜릿 캔디를 건네주었다. 사탕을 먹으며 좋아하는 왕재수를 뒤로 하고 그는 사무실로 복귀했고 스페호프에게 호랑이 팀의 선수 구성안에 대해 보고했다. 스페호프는 매우 좋아했다.

 

“ 잘됐군! 아주 잘됐어! 데니스 보그다노프가 안 나온단 말이지? 그 팀에서는 그놈 하나만 경계했었는데... 어서 운동장으로 가서 연습을 계속하게! 특히 리바운드! 자네 농구는 형편없더군. 리바운드를 지배하는 자가 경기를 지배한단 말일세! 리바운드 1천개와 레이업 슛 2만개를 연습하게! ”

 

체육대회 전날 밤 베르닌은 과도한 연습으로 몸살이 나고 말았다. 팀의 에이스 노릇을 하며 전승무패를 견인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데 몸살이 나다니 정말 울고 싶었다. 호랑이 팀이 오합지졸이라 다행이긴 했지만 그래도 모든 종목에서 승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비나 우박, 눈보라가 몰아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    *    *

 

 

베르닌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체육대회 당일은 날씨가 아주 화창했다. 기온도 평년보다 높았다. 그리하여 다닐 베르닌은 실낱같이 남아 있던 신앙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다.

 

대회는 시립대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오른편은 빨간색과 흰색 의상의 독수리 팀 응원단이, 왼편은 검은색과 금색 의상의 호랑이 팀 응원단이 자리 잡았다. 주민들도 많이 보러 왔다. 장장 20분에 달하는 의장의 개회사 후 경기가 시작되었다.

 

첫 종목은 거대한 공굴리기였다. 몸 풀기용 게임이었다. 호랑이 팀은 출판문화국 직원들이 출전했고 독수리 팀은 식품 관리국 직원들과 베르닌이 나섰다. 베르닌은 이미 출판문화국 직원들이 터널 증후군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팀원들에게 박자를 세면서 천천히 공을 밀고 가기만 하면 처음에 좀 뒤처져도 이길 거라고 알려주었다. 그의 전략은 들어맞아서 호랑이 팀 선수들은 손목이 아파서 호들갑을 떠느라 결국 운동장 반대편까지 공을 놓치고 말았다. 독수리 팀은 가뿐하게 승리했다.

 

그 다음은 농구였다. 베르닌이 개인적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종목이었다. 죽어라고 연습한 끝에 레이업 슛은 연마했지만 리바운드만은 도통 되지가 않았다. 그래도 덩치 좋은 삼림국 직원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상대 팀 선수들은 대부분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 로만 코즐로프가 끼어 있다는 것이었다. 195센티미터의 바이올린 깡패는 팔을 휘저으며 위협적으로 돌진했다. 분명히 악기 연주자들은 손이 생명이라고 왕재수가 그랬는데 어째서 저 깡패 아저씨는 황소처럼 돌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코즐로프의 키가 너무 커서 다들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가뜩이나 리바운드가 형편없는 베르닌은 키 큰 코즐로프 때문에 단 한 개도 성공하지 못했다. 코즐로프에게 떠밀릴 때마다 코트 바깥에서 스페호프가 욕설을 퍼부었다.

 

“ 이 얼간이 천치 같으니! 리바운드를 지배하는 자가 경기를 지배... ”

 

줄줄 흐르는 콧물과 연달아 터지는 재채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베르닌은 열심히 뛰었다. 다행히 후반이 되었을 때 코즐로프는 연달아 저지른 파울 때문에 퇴장 명령을 받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바이올리니스트는 모든 것이 의회와 KGB의 음모라느니, 승부 조작이라느니 모함이라느니 심판을 매수했느니 하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며 코트에 뻗대고 주저앉았다. 아무도 그를 끌어낼 수가 없어 난감할 지경이었다. 사실 마지막 파울은 누가 봐도 독수리 팀의 잘못이었기 때문에 코즐로프로서는 억울할 만도 했다. 스페호프가 마취총을 투입시켜야겠다고 의장과 은밀하게 속닥거리기 시작했을 때 왕재수가 코트로 나와서 바이올리니스트의 팔을 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 키다리 깡패는 소리를 지르며 반항했다.

 

이거 놔! 경기를 조작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 올림픽도 아니고 동네 공놀이인데 왜 그렇게 흥분해. 당신 내일 연주도 해야 되잖아. 빨리 나와. ”

 

“ 귀염둥이 비둘기 너는 가만히 있어! 부정부패가 이루어졌단 말이야! ”

 

“ 지금 안 나오면 나 삐칠 거야. ”

 

코즐로프는 금세 한풀 꺾여서 순순히 퇴장했다. 구경꾼들은 새로 온 예술 감독의 권위가 대단한 모양이라고 수군거렸다. 나이도 어리고 풋내기라서 극장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줄 알았는데 삐치겠다는 말도 안 되는 협박에도 저 깡패가 겁을 먹다니 대단한 카리스마라고 입을 모았다.

 

어쨌든 코즐로프가 퇴장한 후 상황은 일변했다. 독수리 팀은 곧 역전했고 베르닌은 드디어 리바운드라는 것을 한 개 성공시켰다. 경기는 10점 차이로 승리했다.

 

2대 0이 되자 스페호프는 뛸 듯이 좋아했다. 심지어 베르닌에게 콧물을 닦으라고 손수건까지 건네주었다. 베르닌은 기침을 하면서 죽어가는 목소리로 애걸했다.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분위기를 보니 저희가 가뿐히 이길 것 같은데 저는 이제부터 빠지면 안될까요? 너무 아파서요. ”

 

“ 무슨 소리야!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모르나! 계속 뛰면 감기도 달아나고 말끔히 나을 걸세! 게다가 이번 경기는 100미터 달리기잖아! 11초 주파의 실력을 보여야지!! 다른 애들은 전부 12초도 못 끊어. ”

 

그래서 할 수 없이 베르닌은 코를 훌쩍이며 스타트 레인으로 갔다. 각 팀별로 4명이 출전하게 되어 있었고 베르닌은 가운데 4번 레인이었다. 놀랍게도 금색 티셔츠에 검정색 반바지를 입은 왕재수가 터벅터벅 걸어와서 그의 옆자리인 5번에 섰다.

 

“ 어, 너 뭐야? 경기 나와? ”

 

“ 응. ”

 

“ 왜? 너 왜 나와? 근육 미워진다며... 무용수들은 다 안 나온다며. ”

 

“ 극장장이 집어넣었어. 무용수들 다 못 나오게 했으니까 나라도 뛰래. ”

 

왕재수는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 너도 무용수잖아!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추는... 다리 다치면 어떡하라고! ”

 

“ 나 연초에 은퇴했잖아. 무용수 아니고 감독이니까 뛰어야 한대. 나이도 어리니까 무조건 뛰래. 아 정말 싫다... 강제로 이런 거 시키고 공산당 행사에 동원하고. 열 받아. ”

 

“ 그냥 대충대충 뛰고 들어가. 너 못 뛰어도 아무도 욕 안할 거야. 어차피 기대도 안 하고. 고문당해서 몸도 다 안 나았잖아. ”

 

“ 아 정말 귀찮아. 근데 언제 뛰어야 하는 거야? ‘준비’ 하면 뛰어? ”

 

“ 아니, 그때 뛰면 부정출발로 실격당해. 총 쏘면 뛰어. ”

 

“ 총이라니! ”

 

“ 공포탄이야. 너 정말 이런 거 한 번도 안 해봤구나. ”

 

“ 달리기 하면서 총까지 쏘다니. 정말 저질이야. ”

 

그때 ‘준비’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닌은 급하게 자세를 취했다. 왕재수는 다들 몸을 구부리자 대체 왜 이런가 싶어 멀뚱멀뚱 주위를 둘러보며 무슨 패션모델이나 되는 마냥 금색과 검정색 운동복 맵시를 뽐내며 서 있었다. 총 소리가 탕 하고 울리자 선수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쳐나갔다.

 

베르닌은 미친 듯이 뛰었다.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렸다. 폐가 타고 내장이 다 튀어나올 것 같았다. 50미터까지 선두를 유지했다. 그런데 순식간에 금색과 검정색의 무슨 회오리 같은 것이 그의 곁을 쌩 하고 스쳐지나갔다. 깜짝 놀라 그는 더 죽어라고 뛰었다. 정신없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러나 이미 상대팀 선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골인한 후였다. 운동장이 환호와 충격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스페호프가 경악에 가득 차 고함을 질렀다.

 

2등이라니!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심지어 저 불여우한테 밀리다니! ”

 

베르닌은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아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왕재수가 측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 웬 땀을 그렇게 흘리니. 겨우 그거 뛰어놓고. 너 운동 부족인가 봐. ”

 

“ 방금, 방금 그거 너였어? ”

 

“ 뭐가? ”

 

“ 내 옆으로 뛰어간 거... 회오리. 1등한 애. ”

 

“ 아, 그거? 너네 왜 그렇게 못 뛰어? 모래주머니라도 찼니? ”

 

“ 너 대체 100미터 몇 초에 뛰는 거야? 10초대야? 나... 11초... 그러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2년 전에는 그랬는데. ”

 

“ 몰라. 그런 거 몇 초에 뛰는 게 중요해? 나 원래 뜀박질은 잘 했어. 버스랑 지하철 타면 떠밀릴까봐 맨날 극장까지 뛰어다녔거든. 레닌그라드는 여기처럼 촌동네가 아니라서 버스가 만원이란 말이야. ”

 

베르닌은 입을 딱 벌렸다. 이로써 전승무패 목표는 깨지고 말았다. 스페호프가 저편에서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남은 경기를 모두 이겨야만 그나마 만회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다음 종목은 높이뛰기였다. 베르닌은 별로 자신 없는 종목이었고 심지어 가로대를 쓰러뜨려서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삼림국 직원 보리스가 중학교 때까지 높이뛰기 선수였기 때문에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역시나 보리스는 훌륭했다. 다른 선수들보다 족히 5센티는 더 높이 뛰었다.

 

호랑이 팀의 마지막 선수는 왕재수였다. 왕재수는 운동화 끈을 고쳐 매면서 계속해서 툴툴거렸다.

 

“ 달리기에 나가라 높이뛰기에 나가라... 집단농장에 끌려가서 농활하는 거랑 뭐가 다르담. ”

 

베르닌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예전에 텔레비전으로 봤던 왕재수의 공연 영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슨 왕자인지 뭔지를 추는데 꽤 높이 뛰었던 것 같았다. 몸이 가벼워서 잘 뛸 것 같았다. 그래도 왕재수는 키가 그렇게 크지 않으니 185센티의 보리스보다는 불리할 것이다. 그 순간 왕재수가 다다다 하고 도움닫기를 하더니만 붕 하고 뛰어 올랐다. 가뿐하게 바를 넘었다. 순식간에 보리스의 기록과 동점이 되었다.

 

보리스는 이를 악물고 5센티를 더 올려서 성공했다. 왕재수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15센티를 높여달라고 했다.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를 붙들었다.

 

“ 너 제발 그만해. 15센티 올리면 올림픽 수준이야. 가로대에 걸리면 다리 다칠지도 몰라. 넌 심지어 정면뛰기로 뛰잖아. 그거 잘못하면 가로대 타고 앉아서 크게 다쳐. 차라리 보리스처럼 배면뛰기를 하든가. ”

 

“ 배면뛰기? 아, 아까 쟤가 하던 거? 뒤로 넘는 거? 보기 흉하잖아. 무용수는 죽어도 폼이 중요해! 그리고 난 맨날 정면으로 도약해서 다른 건 잘 안 돼. ”

 

“ 그건 발레잖아! 이건 스포츠야, 다르단 말이야! 다치면 어떡하라고. ”

 

“ 아휴 왜 이렇게 잔소리가 많아. 그냥 뛰면 되지. 뭐가 어렵다고. ”

 

왕재수는 발칵 화를 내더니 끝내 높이를 낮추지 않고 그대로 뛰었다. 베르닌은 무슨 로켓이 날아가는 줄 알았다. 왕재수가 얼마나 높이 뛰었는지 구경꾼들은 소리조차 못 질렀다. 가로대는 멀쩡했다.

 

보리스는 사색이 되었다. 도전을 포기했다. 높이뛰기도 호랑이 팀의 승리로 돌아갔다. 순식간에 2대 2가 되고 말았다.

 

스페호프가 고함을 지르며 선수들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 이런 천치 같은 것들아! 밥은 왜 먹고 사냐! 다른 놈도 아니고 저 계집애 같은 불여우한테 지다니! 창피한 줄 알아야지! 한번만 더 졌다가는 전부 모가지야! ”

 

베르닌은 쭈뼛쭈뼛 나섰다.

 

“ 국장님, 아직 투포환이랑 축구, 이어달리기가 남아 있습니다. 전부 이기면 됩니다. 노여워 마십시오... ”

 

“ 아까 그 꼬마가 100미터 뛰는 거 안 봤나! 이어달리기는 위험해! 남은 두 개를 전부 이겨야 해! 하는 꼬라지를 보니 저 녀석이 남은 경기 세 개에 다 나올 것 같은데! ”

 

“ 예... 나머지는 승리가 가능합니다. 투포환은 어차피 힘을 쓰는 종목이라... 왕재수, 아니 야스민은 출전을 못 할 겁니다. 달리기나 높이뛰기와는 다르니까요. 몸도 하늘하늘하고. 축구는 제가 물어봤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답니다. 규칙도 전혀 모르고요. 그러니까 저희가 이길 겁니다. ”

 

베르닌은 삼림국 덩치들과 함께 투포환 경기에 나갔다. 호랑이 팀에서도 그나마 덩치 큰 선수들 세 명이 나왔다. 그런데 맨 뒤에 왕재수가 터덜터덜 따라 나왔다. 큰 선수들 사이에 끼자 더 가냘프고 날씬해 보였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 왜 투포환까지 나오는 거야? 이것도 극장장이 끼워 넣었어? ”

 

“ 응. 괜히 달리기랑 높이뛰기 잘했나봐. 너네들이 그렇게 못할 줄 몰랐어. 대충 하나만 하고 도망가려고 했는데 망했어. ”

 

“ 다른 경기도 다 나와? ”

 

“ 응... 이어달리기까지 다 뛰래. 진짜 귀찮아. ”

 

“ 설마 축구도? ”

 

“ 아니, 그건 못한다고 했어. 아무 것도 모르잖아. 하긴 극장장이 축구는 자살골 넣을지도 모른다면서 들어가지 말랬어. 근데 자살골이 뭐야? ”

 

“ 있어, 그런 게. 너 투포환이 뭔지는 알아? ”

 

“ 공 던지는 거 아니야? 한 번도 안 해봤어. 아, 진짜 싫다. 나 옛날에 어깨 부상당해서 진짜 힘들었는데. 극장장한테 어깨 아파서 안 된다고 했는데 축구랑 이거 둘 중에 하나 선택하라고 협박하잖아... 축구는 진짜 싫어. 흙먼지 잔뜩 먹고 막 넘어지고 걷어 채이고. 그래서 투포환 한댔어. ”

 

“ 이거 그냥 공 아니고 쇠공인데... 꽤 무거워. 너 잘못하면 다칠지도 몰라. 던지는 방법도 모르잖아. 그냥 기권해. 어깨도 아프다면서. 몸도 그렇게 가냘파서 어떻게 이걸 던지려고... ”

 

“ 대충 던지고 들어가지 뭐. ”

 

왕재수는 잔뜩 풀이 죽은 채 한쪽 구석에 앉아서 다른 선수들이 포환을 던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베르닌은 시 의회 의장이란 놈에게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휴일에 이런 대회를 하는 것도 모자라 저 가냘프고 날씬한 왕재수에게 포환까지 던지게 만들다니. 심지어 고문을 받아서 춤도 못 추게 된 애한테 정말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재수의 말이 옳았다. 이것은 마초 군국주의의 부활이었다!

 

베르닌은 생각보다 포환을 아주 멀리 던졌다. 매일같이 사무실 비품들을 나른 보람이 있었다. 최고의 기록이 나왔다. 스페호프가 그토록 기뻐하며 그의 이름을 연호한 것은 처음이었다. 다행히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좋아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마지막으로 나오더니 빙그르르 돌면서 윙 하고 팔을 휘둘렀다. 쇠공이 진짜 포탄처럼 휙 하고 날아갔다. 운동장 전체를 가로질러 날아가 학교 유리창을 박살냈다. 호랑이 팀이 3대 2로 앞서게 되었다.

 

베르닌은 반쯤 울먹이면서 왕재수를 붙들었다.

 

“ 투포환 못한다고 했었잖아. ”

 

“ 내가 언제 못한댔어. 해본 적 없댔지. ”

 

“ 그게 그거잖아. ”

 

“ 너네들 던지는 거 보고 자세 배워서 이제 할 줄 알아. ”

 

“ 어깨 아프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던져. 자작나무처럼 날씬한 녀석이 대체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거야. ”

 

“ 나 되게 힘센데. 밥 먹고 하던 일이 맨날 발레리나들 번쩍번쩍 드는 거였잖아. 그리고 이거 힘으로 하는 거 아니던데? 전신의 스냅을 이용해서 이렇게 돌면서 던지는 거잖아. ”

 

“ 아아, 대체 너는 못하는 게 뭐야... 어헝. 축구도 잘 하는 거 아니야? ”

 

“ 축구는 진짜 하나도 몰라. 하기도 싫어. 그건 안 나갈 거야. 근데 너 왜 그렇게 울어? ”

 

“ 몰라... 망했어. 너 때문에 나 잘릴지도 몰라. 국장이 오늘 독수리 팀 못 이기면 각오하라고 했는데 넌 왜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이렇게 다 이겨버리는 거야. 허헝... 왜 겉보기처럼 비실거리지 않고 올림픽 선수처럼 뛰는 거냐고. ”

 

“ 나 운동신경 원래 되게 좋은데. 둔하면 춤 못 춰. 말해줬잖아, 내 두툼한 허벅지 근육. 춤도 잘 추고 침대에서도 끝내주고 당연히 운동신경도... ”

 

“ 흐흑 제발 침대 얘긴 그만해... 어헝... 잘리기 싫어. ”

 

“ 아휴 촌스러워. 누가 체육대회 때문에 잘린다고. 나 축구는 안 나간다고 했잖아. 울지 마. ”

 

“ 이어달리기 나올 거잖아, 흐흑... ”

 

“ 우리 애들 전부 너네보다 못 뛰어서 어차피 너네가 이길 거야. 그만 좀 울어, 아 창피해. ”

 

베르닌은 훌쩍훌쩍 울면서 독수리 팀 천막으로 돌아갔다. 천막 안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선수들을 들들 볶고 있던 스페호프가 이를 갈더니 베르닌을 쏘아보았다.

 

“ 그 불여우가 축구 경기에 안 나오는 게 확실한가? ”

 

“ 예... 안 나온답니다. 축구는 하나도 모르고 흙먼지 뒤집어쓰고 걷어채이는 게 싫다고... 자살골이 뭔지도 모르더군요. ”

 

“ 그래? 좋아. ”

 

스페호프는 결연하게 일어섰다. 본부석으로 가더니 의장과 한참 속닥거리고 돌아왔다.

 

“ 좋아. 마지막 기회야! 축구는 반드시 이겨야 하네! 호랑이 팀 선수 명단을 바꿔쳤어! 그 불여우가 선발로 나오게 만들었네! ”

 

선수들이 경악해서 비명을 질렀다.

 

“ 으악, 국장님... 그 꼬마가 또 훨훨 날아서 해트트릭이라도 기록하면 어쩌라고요! 걘 운동천재라고요! 축구 한 번도 안 해 봤다 해도 금방 터득할 게 분명해요. 아예 발도 못 들여놓게 해야... ”

 

“ 이런 머저리들! 내 깊은 뜻을 모르겠나? 설령 우리가 축구를 이긴다 해도 3대 3 동점, 결국 이어달리기에서 승부가 결정되네! 명단 보니까 저놈이 마지막 주자야! 아까 100미터 뛰는 거 안 봤나? 저 불여우가 나오면 이어달리기는 100% 우리가 진다고 봐야 해! 그래서 저놈을 축구 경기에 밀어 넣는 거야! 전쟁 때는 등 뒤에서 칼을 꽂아도 용납되네! 이건 전쟁이야! 여기서 저 불여우를 두들겨 팰 수는 없지만 일단 경기장에서는 짓밟든 걷어차든 모두 경기의 일환이야! 태클 거는 척하면서 밟아버려! 운 나쁘면 페널티 하나 받으면 돼! 어차피 축구는 우리가 유리하니까! 내 말 알아들었나? 저놈이 이어달리기에 못 나오게 만들란 말이야! ”

 

모두가 반색을 하며 ‘네!’ 하고 소리쳤다. 베르닌만 빼고. 베르닌은 속이 울렁거렸다. 가냘픈 왕재수가 불곰 같은 삼림국 덩치들에게 짓밟히는 것을 상상하니 끔찍해서 토할 것 같았다. 하지만 국장 말대로 이어달리기에 왕재수가 나오면 질 게 분명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베르닌은 너무 괴로웠다.

 

 

*    *    *

 

 

왕재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막판에 생각지도 않게 호명되어 떠밀려 나온 데다 축구는 정말 하나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주변에서 덩치 큰 남자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공을 차대고 걸핏하면 옆에서 밀어붙이니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삼림국 덩치들이 본격적으로 밀어붙이지도 않았는데 제풀에 몇 번이나 넘어졌다.

 

골 점유율은 독수리 팀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점수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팀플레이란 간 곳 없고 덩치들이 서로 골을 넣겠다고 아우성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공이 또르르 굴러왔고 베르닌은 운 좋게 주워 먹기 식으로 골을 하나 넣었다. 원톱 스트라이커 노릇을 해낸 것이다!

 

베르닌이 셔츠를 뒤집으며 세레모니를 하자 앞선 경기들 때문에 기가 죽어 있었던 독수리 팀 응원단이 들끓었다. 기뻐서 펄쩍펄쩍 뛰고 있는데 왕재수가 눈물이 글썽글썽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면서 하소연했다.

 

“ 나 축구 너무 싫어. 지저분해, 무서워, 우악스러워. 자꾸 넘어져. 사람들이 자꾸 밀어. 다리 다칠 거 같아. 나가고 싶어. 나 좀 빼주면 안 돼? ”

 

어... 나는 선수라서 그런 권한이 없어. 감독이 교체 사인 보내거나 부상당하지 않으면 못 나가. 너네 감독한테 빼달라고 해야 돼. ”

 

“ 극장장이 분명히 경기 나가지 말라 했는데 아까 따졌더니 그냥 뛰어야 한대. 의장이 나 집어넣어야 한다고 그랬대. ”

 

“ 어, 저기... 너 있잖아. 그냥 저기 너네 팀 골대 앞에 가 있어. 자꾸 사람들 많은 데로 오지 말고. ”

 

“ 알았어. 흐흑, 축구 싫어... 무서워. ”

 

왕재수는 훌쩍훌쩍 울면서 호랑이 팀 골대 앞으로 갔다. 베르닌은 그나마 거기 있어야 삼림국 덩치들에게 짓밟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높이뛰기에서 실패한 나머지 승부욕이 더더욱 불타오른 보리스가 미친 듯이 공을 몰고 내달았다. 중거리 슛을 날렸다. 물론 어처구니없는 뻥 슛이었기 때문에 공은 골대를 맞고 튕겨나갔다. 호랑이 팀 골키퍼가 공을 주워서 마침 골대 근처에 있던 왕재수에게 가볍게 툭 차 주었다. 왕재수는 넋 놓고 있다가 공이 앞에 오자 어쩔 줄 몰라 했다.

 

“ 난 몰라, 왜 나한테 공을 주는 거야. 어떻게 해... ”

 

“ 이 바보야, 공이 오면 차야지 뭘 어떻게 해! ”

 

여차하면 공을 빼앗아 슛을 날리려고 골대 근처에 도사리고 있었던 베르닌이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삼림국 덩치들은 태클 기회를 엿보려고 한쪽으로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배신 발언을 듣지 못했다. 왕재수는 화들짝 놀라더니 홱 돌아서서 독수리 팀의 골대를 향해 냅다 공을 걷어찼다. 베르닌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길고 강력한 장거리 슛을 본 적이 없었다. 과연 무용수 출신이라 그런지 두툼한 허벅지의 힘이 좋아서 그런지 원래 운동천재라서 그런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왕재수는 호랑이 팀 골대에서 독수리 팀 골대까지 단 한 방에 골을 넣었다.

 

다들 경악해서 말을 잃은 사이에 호랑이 팀 공격수 두 명이 또 공을 빼앗아서 몰고 왔다. 당연한 듯 왕재수에게 공을 패스했다. 왕재수는 이제 망설이지도 않고 전광석화처럼 공을 찼다. 이번에는 골키퍼가 몸을 날렸지만 슛이 어찌나 센지 손에 맞고도 골이 되었다. 난리가 났다. 스페호프가 본부석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고함을 질렀다.

 

“ 밟아! 이 천치들아, 잘리고 싶나! 그 불여우한테 해트트릭이라도 내 줄 셈이야? ”

 

베르닌은 어떻게든 말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삼림국 덩치들은 해고의 공포에 휩싸였고 공을 빼앗으려는 척하다가 왕재수를 떠민 후 심판의 시야를 방해하며 걷어찼다. 흙먼지 속에서 왕재수가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심판은 휘슬을 불었고 파울을 범한 보리스에게 옐로카드를 한 장 주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에게 달려갔다. 왕재수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옆으로 누운 채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미처 베르닌이 왕재수를 일으켜 주기도 전에 응원석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로만 코즐로프가 분노에 가득 차서 경기장으로 뛰어들었다.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보리스의 코뼈를 부숴놓았다.

 

“ 이 개 같은 놈들, 다 죽여 버리겠어! 감히 우리 아기를 저렇게 만들다니! 저 조그만 귀염둥이 몸에 흠집을 내다니! 너 죽고 나 죽자! ”

 

“ 으악, 제발 진정해요... 선수도 아니면서 이렇게 들어오면 어떡해요! ”

 

“ 시끄러워, 이 스파이 새끼! 너도 한 패야! 우리 아기가 골 넣는 게 그렇게 밸이 꼬여? 다 죽여 버리고 말겠다! ”

 

바이올린 깡패의 폭주로 보리스를 비롯해 독수리 팀 덩치 서너 명이 코피를 줄줄 흘리며 나가떨어졌다. 대부분 전치 3주 이상의 부상을 입었다. 마침내 심판이 삑삑삑 하고 휘슬을 불었다. 경기를 중단시켰다. 코즐로프의 난입을 문제 삼아 호랑이 팀에게 실격패를 선언했다. 온순하던 호랑이 팀 응원석도 들끓었다. 신문지와 돌멩이가 날아왔다. 먀흐킨이 의장에게 항의했다. 애초부터 독수리 팀 편이었던 의장은 규칙을 따른 것뿐이라며 계속 이랬다가는 이어달리기도 취소하고 호랑이 팀을 실격시킨 후 우승 메달은 독수리 팀에게 수여하겠다고 협박했다. 하는 수 없이 먀흐킨은 입을 다물었다.

 

코즐로프가 끌려 나간 후 베르닌은 한쪽에 아직도 쓰러져 있는 왕재수를 안아서 들것에 뉘었다. 손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흙먼지와 눈물 콧물을 닦아주자 왕재수가 눈을 반짝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 이제 다 끝난 거야? ”

 

“ 너 괜찮아? 병원 가보자. 다리 부러졌으면 어쩌지... 미안해, 진짜 미안해.. 흐흑, 내가 비열한 놈이야. 어헝... 나 살아보겠다고 걔들이 너 밟게 놔뒀어. 엉엉. 바이올린 깡패 말이 맞아. 이렇게 아기 같은 애가 밟을 데가 어디 있다고... ”

 

“ 나 안 다쳤는데? ”

 

“ 뭘 안 다쳐, 그렇게 짓밟혀 놓고. 흐흑, 내가 죽일 놈이지. ”

 

“ 걔네들 되게 둔해. 막 헛발질만 하고, 내가 요리조리 뒹굴면서 피하니까 하나도 못 맞췄어. 먼지 때문에 잘 보지도 못하던데. 나 안 다쳤어. ”

 

베르닌은 멍해졌다. 급하게 왕재수에게서 흙먼지를 털어낸 후 팔다리를 비롯해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정말 멀쩡했다. 무릎이 좀 까진 정도였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울컥 화가 치밀었다.

 

“ 그럼 왜 그렇게 비명 질렀어! 왜 안 일어나고 그렇게 쓰러져 있었냐고!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바이올린 아저씨 정신 나가서 애들 패는 거 못 봤어? ”

 

“ 어, 그게 로만이었어? 난 너네들끼리 싸우는 줄 알았지... 아휴 바보 아저씨. 너무 다혈질이라니까. 나 괜찮은데. 빨리 가서 뽀뽀해 줘야겠다. 그 아저씨 날 너무 예뻐해서 탈이야. ”

 

“ 야,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잖아! 왜 다친 척 했냐고! ”

 

“ 그래야 축구 안 하지! 다쳐야 나갈 수 있다면서. 진짜 나가고 싶었단 말이야. 그깟 공놀이가 뭐가 재밌다고 다들 난리인지... ”

 

“ 두 골이나 넣어 놓고서! ”

 

“ 그건 그냥 차니까 들어간 거야. 하나도 안 어렵더구만. 재미도 없고. 그물 속에 공 차 넣는 게 뭐가 어렵다고. ”

 

왕재수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서 호랑이 팀 천막으로 갔다.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 있는 코즐로프의 팔목을 붙잡고 천막 뒤로 사라졌다.

 

 

*   *   *

 

 

종일 이어진 공공기관 종합체육대회는 양 팀의 점수가 3대 3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경기인 이어달리기로 승패가 결정 날 판이었다. 독수리 팀의 천막은 이어달리기에 나갈 선수 6명의 몸을 풀어주고 스페호프의 지시를 듣느라 분주했다. 국장은 이미 승리감에 취해 있었다.

 

“ 이제 됐어! 그 불여우 다리를 박살냈으니 걱정할 건 하나도 없지! 남은 건 우승뿐이야! 아예 한 바퀴는 앞서 골인해서 저놈들을 뭉개주란 말이야! 감히 대 KGB가 버티고 있는 독수리 팀에게 대들다니, 건방진 녀석들! ”

 

다들 신이 났다. 베르닌만이 불안과 공포에 질린 채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 저, 국장님... 그런데 방금 본부에 물어보니 왕재수, 아니 야스민도 최종 주자로 나온답니다. ”

 

“ 더 잘됐군! 진짜 뛸 놈이 없는 모양이지. 다리 다친 놈이 나오니 얼마나 좋아! 그 재수 없이 오똑 솟은 콧대를 보란 듯이 눌러주란 말일세! ”

 

“ 아니, 그게요... 걔가 별로 다친 것 같지 않더라고요. 뼈는 안 부러진 것 같아서... 아까처럼 잘 뛸지도... ”

 

“ 뭣이!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분명히 보리스가 슬개골을 짓밟아서 부숴놨다고 했는데! 허벅지 근육도 최소한 파열이라고 했는데! 그런 놈에게 지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 같나! 지면 다들 모가지야!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저 따위 계집애 같은 반동분자 꼬마한테 육상으로 농락당한 것도 모자라서 골도 두 개나 먹고... 다리까지 다친 놈에게 계주에서 패하면 다들 줄서서 강에 뛰어들 채비나 해야지! 전부 모가지에 벌목공으로도 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겠어!

 

베르닌은 줄줄 흐르는 콧물을 닦으면서 출발선 쪽으로 갔다. 그는 마지막 주자였다. 앞선 선수들은 모두 1바퀴씩 돌고 최종 주자만 1바퀴 반을 뛰게 되어 있었다. 머리가 아프고 어깨가 무거웠다. 속도 울렁거렸다. 차마 국장에게 왕재수가 하나도 안 다쳤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곧 다가올 해고의 물결에 대해 같은 팀 선수들에게 귀띔을 해 줄 수도 없었다.

 

‘ 다들 땀 빼며 연습했는데... 정말 큰일 났네. 처자식이 있는 사람들인데. ’

 

그때 호랑이 팀 응원단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일었다. 흙먼지 범벅에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금색과 검정색 운동복을 걸친 왕재수가 무릎에 붕대를 감고 내키지 않는 얼굴로 천천히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호랑이 팀 치어리더로 자원봉사 중인 렐랴가 뛰쳐나와 왕재수를 와락 껴안더니 팔목에 자기 스카프를 매어 주고 지저분한 얼굴에 키스까지 해 주었다.

 

“ 우리 미셴카! 당신은 우리 호랑이 팀 영웅이에요! 다쳤는데 이렇게 끝까지 나와서 팀을 위해 뛰다니! 너무 감동적이에요! 힘내요!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선수 아닌 사람은 트랙에 들어오시면 안되는데요. ”

 

“ 어머나, 다냐! 당신 또 질투하는군요! 속 좁은 사람 같으니. ”

 

렐랴는 베르닌에게 삿대질을 하며 꾸짖은 후 진행요원에게 이끌려 응원석으로 돌아갔다. 왕재수는 렐랴가 들어간 후 손목에 묶여 있던 스카프를 풀어서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았다. 베르닌은 참지 못하고 야단쳤다.

 

“ 야, 그건 렐랴의 마음이 담긴 스카프인데 그걸로 얼굴을 닦냐! ”

 

“ 그럼 어떡해. 옷도 더러운데 얼굴이라도 깨끗해야지. 난 미모로 먹고 사는데 이게 뭐야. 정말 싫다. 체육대회 같은 거 만든 놈들 미워! ”

 

“ 무릎에 왜 붕대 감은 거야? 아까 괜찮다며. ”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리며 베르닌이 물었다. 왕재수는 무릎을 툭툭 치면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 좀 까졌는데 빨간 약 발랐더니 보기 싫어서. 별로 아프진 않아. ”

 

“ 그러냐. 다행이구나. 우린 다 잘렸군.

 

“ 뭐? ”

 

“ 아니야. 안 다쳐서 다행이라고. 비신사적으로 밟은 거 대신 사과할게. ”

 

“ 네가 왜? 나한테 공 차는 것도 가르쳐줬는데. 근데 이번에도 총 쏘면 뛰는 거야? ”

 

“ 아니... 총 쏠 때 뛰는 건 제일 첫 주자만 그렇고. 앞의 주자가 너한테 저 막대기를 건네주면 그걸 쥐고 뛰는 거야. 너하고 나는 마지막 주자니까 한참 기다려야 돼. 막대기는 떨어뜨리면 다시 주워서 쥐고 뛰어야 돼. 우리는 한 바퀴 반을 뛰어야 돼. ”

 

“ 아 피곤해. 아까는 총 쏠 때 뛰라더니 이젠 무슨 막대기를 들고 뛰래. 지겹다. 내가 마지막이면 빨리 뛰어야 빨리 끝나겠네? ”

 

“ 어... 그렇겠지. 아아...

 

“ 너 왜 그렇게 한숨을 쉬어? 아이 지저분해. 콧물 나오는 것 좀 봐. 정말 하나하나 다 챙겨줘야 한다니까. ”

 

왕재수가 스카프를 뒤집어서 베르닌의 코를 슥슥 닦아 주었다.

 

“ 으악, 먼지 닦은 것도 모자라서 내 콧물까지 닦으면 어떡해! ”

 

“ 괜찮아, 뒤집었잖아. 먼지 안 묻은 데로 닦았어. ”

 

“ 그 얘기가 아니고 렐랴의 마음이... ”

 

“ 넌 왜 맨날 렐랴 마음 타령이야. 그깟 여자 마음이 뭐가 중요해. 내가 그 아가씨랑 응응을 할 것도 아닌데. ”

 

“ 시끄러워. ”

 

베르닌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불안감을 느끼며 스트레칭을 했다. 그래도 다른 선수들은 모두 호랑이 팀보다 잘 뛰니까 희망은 있었다.

 

총성이 울리고 드디어 계주가 시작되었다. 경기가 중반부로 접어들었을 때쯤 베르닌의 공포는 거의 사라졌다. 뚜껑을 열어보니 호랑이 팀 선수들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넘어지기도 하고 바통을 놓치기도 했다. 마침내 베르닌에게 바통이 왔을 때 독수리 팀은 이미 반 바퀴를 앞서고 있었다. 호랑이 팀 응원단은 초상집 분위기였지만 왕재수가 바통을 받아들자 마지막 희망에 불타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응원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죽어라고 달렸다. 땀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런데 한 바퀴를 거의 다 돌았을 때 갑자기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함성과 갈채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왕재수가 다리에 모터를 단 것처럼 붕 소리를 내며 전력 질주해 오고 있었다.

 

베르닌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왕재수는 무슨 축지법을 쓰는 것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베르닌을 따라잡았다.

 

‘ 으악,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쟤 미친 거 아냐? 사람 맞아? 어떻게 반 바퀴를 따라잡아! ’

 

베르닌은 이를 악물었다. 있는 힘을 다 끌어내어 내달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폐가 부풀어 펑 터질 것 같았다. 그때 왕재수가 그를 추월했다. 나비처럼 훨훨 날아 그의 곁을 지나갔다.

 

“ 안 돼... 안 돼애애애... 으아.... ”

 

베르닌은 울부짖었다. 바통을 쥔 손을 마구 휘저으며 정신없이 달렸다. 왕재수는 이미 결승선 근처까지 가 있었다. 이제 다 끝났다. 모가지. 강에 밀어 넣기. 벌목공도 못 해먹고 쫓겨나는 사람들. 완전히 망했다.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베르닌은 돌덩이 같은 다리를 이끌며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 어쨌든 일단 골인이나 하고 보자 하며 계속 뛰었다. 눈물과 먼지 때문에 앞도 하나도 안 보였다. 어찌어찌 골인을 하고 주저앉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동료들이 달려와 그를 얼싸안고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치고 기뻐했다. 갑자기 사람들이 그를 공중으로 헹가래쳤다. 스페호프가 그의 등짝을 후려치며 ‘잘했네, 잘했어!’ 하고 소리쳤다. 국장이 그에게 칭찬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이것이야말로 꿈이 분명했다.

 

보리스가 그를 와락 껴안았다.

 

“ 다냐, 우리가 해냈어! 우승했어! 우리 안 잘려도 돼! 먹고 살 수 있어! 흑흑, 난 딸린 처자식이 다섯이라고! 말은 안 했지만 진짜 걱정했어. 흐흑, 정말 무서운 하루였어! ”

 

“ 어... 우승? 우리가? 이어달리기 이긴 거야? ”

 

“ 응, 이겼어! 막판에 진짜 심장이 쫄깃했어. 어휴... 그래도 너 덕분에 이겼다. 너 다시 봤어. 책상물림인 줄 알았는데... 얼간이가 에이스였어! ”

 

“ 어떻게 이기지? 왕재수, 아니 야스민이 그렇게 잘 뛰었는데. 나 추월당했었는데... 내가 먼저 들어왔다고? ”

 

“ 아, 그 불여우. 진짜 다행이었어. 결승선 앞까지 그 싸가지 없는 꼬맹이가 막 뛰었는데, 막 골인하기 직전에 무릎을 움켜쥐고 주저앉았어. 바통도 놓치고 못 일어나서 의료진이 와서 데리고 나갔어. 그래서 네가 먼저 들어온 거야. ”

 

“ 아 그랬구나... ”

 

“ 나도 한몫했지! 내가 안 밟았으면 그 자식이 끝까지 뛰었을 거 아냐. 불여우 자식 들것에 실려 갈 때 붕대 푼 거 보니까 무릎이 시뻘건 게 피범벅이더라고. 정말 너네 국장은 선견지명이 있다니까. ”

 

‘ 괜찮다고 했었는데... 안 아프다고... 거짓말이었구나. 아픈데도 괜찮은 척 하고 경기에도 나왔구나... 피가 철철 나는 걸 참고 뛰었던 거구나. ’

 

베르닌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호랑이 팀 천막으로 가 보려고 했지만 그때 시상식이 개최되었다. 독수리 팀은 우승 깃발을 받았다.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은 특별 수당을 받았다. 베르닌은 무려 MVP로 뽑혀 의장과 악수를 하고 의회 구내식당용 1개월 치 식권과 레닌 전집을 상품으로 받았다. 경기에도 지고 수당은커녕 상품 하나 못 받은 호랑이 팀에서는 휘파람을 불며 야유를 보냈다. 렐랴를 비롯해 호랑이 팀 응원단이 한 목소리로 거세게 항의했다.

 

“ 너무하잖아요! 우리 꽃돌이 감독님은 100미터 달리기, 높이뛰기, 투포환에서 우승했고 축구도 두 골이나 넣었는데! MVP를 못 준다면 최소한 특별상이라도 줘야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

 

“ 시끄럽소!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것! 아무리 작은 경기들에서 이기면 뭘 하나, 결국 우승은 못 했는데. 아니꼬우면 내년에 우승하시오! 다들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을 배양하시오! ”

 

의장이 단칼에 잘랐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호랑이 팀은 욕을 하면서 우르르 나가버렸다. 의장과 스페호프와 독수리 팀만이 신나게 보드카를 마시고 샤실릭을 구워먹고 승리를 만끽했다. 베르닌은 보드카를 한 잔 받아 마신 후 너무 지쳐서 천막 구석에 드러누워 잠들어 버렸다.

 

 

*    *    *

 

 

베르닌이 깨어났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잔디밭 여기저기에 술에 취한 동료들이 드러누워 있었다. 집에 돌아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조금 개운하긴 했지만 대신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침대에 몸을 던지려다 그는 혹시나 하고 위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초인종을 눌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병원에 있나 싶었지만 문을 밀어 보았더니 스르르 열렸다.

 

“ 야, 집에 온 거야? 나 들어간다. ”

 

들어가니 왕재수가 소파에 앉아 사과파이 한 판을 껴안고 맨 손으로 퍼먹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헐렁한 가운만 입고 무릎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까만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따금 훌쩍거리면서 파이를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

 

“ 으악, 너 이게 뭐야. 포크랑 접시도 없이... 너 원래 예쁜 식기에 세팅해서 먹는 거 좋아하잖아. 왜 이렇게 울어. 많이 아파? ”

 

“ 남이야 어떻게 먹든 무슨 상관이야. 어헝... ”

 

왜 이렇게 불쌍하게 울고 있는 거야?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왜 혼자 앉아서 궁상스럽게 울면서 파이를 먹고 있니! ”

 

“ 엉엉... 로만이... 어헝... ”

 

“ 뭐, 그 바이올린 깡패? 그 자식이 어쨌는데! 무슨 짓을 했길래! 귀엽다고 물고 빨 때는 언제고 왜 널 울려! ”

 

“ 흑흑, 다 뽀록났어. 엉엉... ”

 

“ 뭐가... 너 사과파이 한 판 다 먹을 수 있는 거? 몸무게? ”

 

“ 아니... 그것까지 들통 나면 큰일 나. 너 제발 입 좀 다물어. ”

 

“ 그럼 대체 뭐야! ”

 

“ 저... 농구... 심판 매수한 거. ”

 

“ 그게 무슨 소리야? 농구? 아까 경기? 무슨 매수? ”

 

“ 막판에 로만 퇴장당한 거... 내가 그런 거야. 심판한테 부탁했어. ”

 

“ 네가? 왜! 그 인간 너네 팀이었잖아! ”

 

“ 로만은 우리 오케스트라 수석이잖아! 바이올리니스트인데 손 다치면 어떻게 해! 내일 당장 공연인데. 아저씨가 너무 다혈질이라서 경기에만 나가면 눈이 뒤집혀서 손 다치든 말든 발광을 하는데 어떻게 그냥 놔둬. 그래서 심판을 매수... ”

 

“ 뭐야? 그래서 같은 팀 뒤통수를 친 거야? 바이올린 아저씨는 그래서 화난 거고? ”

 

“ 아니... 처음엔 내가 자기 다칠까봐 그랬다고 하니까 오히려 좋아하면서 ‘귀여운 내 강아지, 정말 날 사랑하는구나. 우리 아기는 착하기도 하지’ 하면서 쓰다듬어줬는데... 그만 어떻게 심판 매수했는지 들통 나서... ”

 

“ 어떻게 매수했는데! 돈 먹인 거야? ”

 

“ 저... 그게 아니고... 그 심판 아저씨가 의회 경비원인데... 저번부터 나보고 귀엽다고 해서. 엉덩이 한 번만 만지게 해 주면 된다고 해서 옳다구나 하고 그렇게 해줬거든. 암말 안하기로 약속했는데 그 아저씨가 술 먹고 신나서 막 자랑하는 걸 로만이 들어버렸어. 그래서 완전히 망했지 뭐야. 로만이 다 좋은데 질투심이 좀 많거든. 심판 아저씰 막 패려고 해서 못하게 했더니 나보고 아무한테나 꼬리친다고 야단치고... 달리기 져줬다고 너한테도 흑심 있는 거 다 안다고 또 막 소리 질러서 불똥이 이상하게 튀고 난리도 아니었어. 로만은 눈치가 너무 빠르다니까. 완전 망했어, 흐흑... ”

 

“ 잠깐 잠깐! 달리기 져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무릎 아파서 넘어진 거 아니었어? 그래서 실격패... ”

 

“ 무릎? 좀 까진 거라니까. ”

 

“ 무슨 소리야! 붕대 풀었더니 피범벅이었다고... 일어나지도 못해서 들것에 실려 나갔다면서! 그래서 내가 골인하고 우리가 우승... ”

 

“ 아 맞다... 어 그렇지. 응응, 네 말이 맞아. 나 피범벅... 무릎 다쳤어. 넘어져서 실격패. 들것... 못 일어나고... ”

 

왕재수가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평소 전혀 당황하는 일이 없는 싸가지 없는 놈이었으므로 더더욱 의심스러웠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가운을 걷어 올리고 무릎에 감긴 붕대를 낚아챘다. 왕재수가 소리를 질렀다.

 

“ 야, 하지 마! 왜 남의 가운을 벗기고 그래! 이런 건 성교를 할 때만... ”

 

“ 시끄러워! 너 무릎 멀쩡하잖아! 피범벅은 어디로... ”

 

“ 누가 피범벅이래! 내가 아까 그랬잖아, 까져서 빨간 약 발랐더니 보기 싫어서 붕대 감았다고! ”

 

“ 빨간 약... ”

 

“ 샤워했더니 약도 다 씻겨나가고 괜찮아졌단 말이야. 껍데기 벗겨진 거 긁힐까봐 붕대 감아 놓은 거야. 도로 감아놔! ”

 

“ 그럼 다리 아파서 넘어진 거 아니었어? 져준 거... 너 솔직히 말 안 해! 일부러 넘어진 거였어? 져준 거였단 말야? ”

 

“ 아휴, 그래! 져줬다! 그럼 어떡하니! 눈물콧물 짜면서 모가지가 어떻고 벌목공이 어떻고 강에 뛰어들고 하면서 네가 난리를 치는데. 그깟 달리기가 뭐라고 울고불고. 그렇게 우는데 어떻게 그냥 놔두니? ”

 

“ 아아, 이럴 수가... ”

 

베르닌은 탄식했다. 울음을 터뜨렸다.

 

“ 난, 난 또 내가 잘 달려서 팀을 우승시킨 줄 알았... ”

 

“ 너 왜 또 우는 거야? 아 정말 지겨워! 이기면 이긴다고 울고 져주면 져줬다고 울고... ”

 

“ 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경기에서 이기고 싶은 건 모든 사내들의 본성이야! 어떻게 그런 실력을 갖추고도 나한테 져줄 수가 있냐고! ”

 

“ 어휴, 코딱지만 한 촌동네에서 운동회하면서 이기는 게 무슨 대수라고! 내가 무슨 운동선수도 아니고. 애들 공연만 잘 하게 하면 됐지. 마초 군국주의자들이 만든 공산당 행사에서 그깟 경기 이겨봤자 뭐가 중요하니. 하여튼 다들 촌스럽다니까. 스탈린 앞잡이... ”

 

“ 밀고! 체포! 고문! ”

 

“ 압. ”

 

왕재수가 화들짝 놀라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눈물을 닦아주고 바닥에 쏟아진 사과파이를 주워 담아 주면서 물었다.

 

“ 바이올린 아저씨는 어떻게 눈치 챈 거야? 네가 져 준 거. ”

 

“ 어, 그거? 들것에 실려 왔을 때 로만이 너무 놀라서 날 안고 병원으로 냅다 뛰었거든. 의사 선생님이 피 아니라고, 빨간 약이라고 하면서 나 다친 데 없다고 말해줘서 다 들통 났어. 그때부터 막 의심하기 시작해서 농구 매수도 들통 나고... 어헝... 로만은 왜 그러는 걸까. 왜 자꾸 의심하지? 난 키 크고 나이 많고 밤일 잘하는 아저씨가 좋은데. 너는 진짜 내 취향도 아닌데. 눈도 단추 같고...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왕재수가 다시 서럽게 울자 가책이 느껴졌다.

 

“ 울지 마. 내려가서 밥 먹자. 너 좋아하는 보르쉬 끓여줄게. 블린도 구워주고. 어... 차도 우려 줄게. ”

 

“ 보르쉬랑 블린이 무슨 소용이야, 로만이 나 버렸는데. 어헝... 이제 누구한테 안아달라고 하지, 엉엉... ”

 

“ 야! 그깟 깡패가 뭐 잘났다고 그렇게 목을 매냐! 다른 아저씨들 찾으면 되잖아! 그 심판 아저씨랑 놀든가! ”

 

“ 아니야, 아니야... 로만은 틀려. 밤일을 엄청 잘한단 말이야. 어헝... ”

 

“ 시끄러워! 뚝 그쳐! 내려가서 밥 먹어! 다른 아저씨들 찾아줄 테니까 제발 울지 말란 말이야! 아 정말 미치겠네... ”

 

베르닌이 억지로 왕재수를 일으키려고 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바이올린 깡패 로만 코즐로프가 불쑥 들어왔다. 질풍같이 달려 들어오더니 베르닌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왕재수를 와락 껴안더니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 아이구 우리 귀여운 아기, 내 강아지 내 비둘기. 내가 잠깐 미쳤지. 이렇게 조그맣고 예쁜 우리 귀염둥이에게 성질을 부리다니! 이 고운 눈에서 눈물이 나게 만들다니. 어유 내가 미쳤지. 내가 잘못했다 귀염둥아. 우리 이쁜아. 나 생각해서 심판 매수하고 혹시라도 내가 경기 깽판 부렸다고 KGB 놈들한테 체포될까봐 저 스파이 놈한테 져 준 거 다 알면서도 순간 눈이 뒤집히고 말았네. 미안해 우리 천사야. 인형 같은 너에게 못할 짓을 했구나. 아이고 우리 아기 눈 퉁퉁 부은 것 좀 봐. 많이도 울었네. 내가 밤새 안아줄 테니까 눈물 뚝! ”

 

코즐로프가 왕재수를 안고 침실로 들어가 버린 후 베르닌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먼지와 콧물이 묻은 렐랴의 스카프를 조물조물 손빨래해서 창가에 널었다. 혼자서 보르쉬를 끓이고 블린을 구웠다. 마침 MVP 상품으로 받은 레닌 전집이 있었기에 냄비 받침 대신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그래도 냄비 받침은 건졌으니 나름대로 보람 있는 하루였다.

   

   

 

FIN

2014. 11. 29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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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피소드는 사실 내 러시아 친구 료샤와의 대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쓴 것이다. 배나무 거리에 사는 그 불쌍한 남자(=미샤=왕재수)에 대한 피상적인 팩트만 얻어들은 료샤가 제발 그 불쌍한 젊은이에게 축구라도 시켜주라고 들들 볶아서 :) 본편에서는 내용상 안 맞지만 여기선 가능할 것 같아서 ㅎㅎ

료샤와의 그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249, http://tveye.tistory.com/3386

료샤가 미샤를 '배나무 거리의 불쌍한 남자'로 인식하게 된 계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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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호프가 계속해서 소리치는 '리바운드를 지배하는 자가..' 운운하는 얘긴 많이들 아시겠지만 슬램 덩크에서 차용했다 :) 헉, 그런데 슬램 덩크 모르는 분들도 있겠지.. 세대 차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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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는 7편 '보고서의 악몽'으로 이어진다. 그건 며칠 후에~

그럼 이제 나는 본편으로 돌아가서...

철딱서니 없는 베르닌과 왕재수를 진지한 캐릭터로 다시 돌려놓고 ㅠㅠ (잘 안돼 흐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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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