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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0.24 서무의 슬픔 #34. 딸기 아가씨들과 자선 바자회 93
  2. 2015.10.24 물방울들
  3. 2015.10.22 빛이 필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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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5.10.09 서무의 슬픔 #33-1. 도자기 인형 114
  10. 2015.10.08 노는 아이들 2
  11. 2015.10.05 안드리스 리에파 2
  12. 2015.10.01 서무의 슬픔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2부) 142
  13. 2015.10.01 발칸 스타일의 사과 케익, 고스찌에서 6
  14. 2015.09.30 청명한 여름 아침, 두 개의 운하를 따라 걸으며 2
  15. 2015.09.30 반짝이는 강물과 금빛 사원 종루,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서 2
  16. 2015.09.29 루빈슈테인 거리를 따라 산책하며, 그 의사가 온 곳 6
  17. 2015.09.28 찬란한 빛 속의 궁전 다리와 얼어붙은 네바 강 풍경
  18. 2015.09.25 천사, 성당, 광장, 마차, 그리고 운하
  19. 2015.09.24 페테르부르크 거리 메뉴판 세 개
  20. 2015.09.24 서무의 슬픔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113
  21. 2015.09.23 네프스키 거리의 야경, 겨울 밤 4
  22. 2015.09.22 사제와 바이크족, 모두 석양 보러 나왔다 + 편견자 료샤 6
  23. 2015.09.18 서무 시리즈 대신 : 썰매를 타러 간 미샤와 트로이 47
  24. 2015.09.17 눈에 덮인 바다, 썰매 타러 가는 사람들 2
  25. 2015.09.15 러시아 박물관 창 밖 풍경 2

 

한달 넘게 우수한 단추 시리즈로 채워졌던 서무 시리즈가 다시 일상의 서무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단추 베르닌과 스페호프, 회사 동료들이 모두 등장하는 34편이다.

 

34편은 지방 발령을 받고 난 후 쓴 글이다. 심신이 너무 괴로워서 가벼운 글로 스트레스나 풀려고 했던 거라서 이번 편은 분위기가 꽤 가볍다. 납치도 폭력도 눈물도 고난도 없습니다 :) 그냥 재미있게 읽으시면 됩니다.

 

난데없이 바자회 특명을 받은 우리 단추는 과연 국장의 기대치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지!!! 그 이야기는 아래를~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우여곡절 끝에 왕재수는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온 신작을 발표하고, 베르닌은 다시 일상의 서무 업무로 돌아간다. 그러나 스페호프가 다시 그를 호출해 또 다른 미션을 부여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 http://tveye.tistory.com/4062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2부) : http://tveye.tistory.com/4079
* 에피소드 33-1. 도자기 인형 : http://tveye.tistory.com/409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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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4

 

 

 

 

 

 

서무의 슬픔

- 딸기 아가씨들과 자선 바자회 -

 

 

 

 

 

 

 

신작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수도에서 온 고위직 후원자들도 모두 돌아간 후 왕재수는 출연했던 무용수들에게 특별 휴가를 주었다. 향후 일주일 동안의 공연은 모두 오페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무용수들을 모두 휴가 보낸 후 왕재수는 극장에 틀어박혀 그와 하느님만이 아는 차기 신작의 골격을 잡으려고 했다. 제발 며칠 동안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는 베르닌의 부탁과 설득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결국 베르닌은 스타브로프에게 도움을 청했다. 노의사는 왕재수의 행태에 노발대발하더니 젊은 의사 제냐와 남자 간호사 하나를 대동해 극장으로 찾아왔다. 감독실이 떠나가라 호통을 치더니 왕재수를 거의 포박하다시피 차에 태워 병원으로 데려갔다.

 

 

스타브로프는 정밀 검진을 하더니 왕재수를 사흘 동안 병원에 입원시켰다. 왕재수가 아무리 버둥거리고 아우성을 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왕재수만 보면 하염없이 마음이 약해져서 무슨 말이든 다 들어주려고 하는 아내 마르가리타는 아예 접근 금지를 시켜버렸다. 심지어 왕재수가 필살기를 발휘해 예쁜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애원을 해도, 방긋방긋 웃으며 애교를 부려도 노의사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일요일에 실려 왔을 때 이미 입원시켰어야 했는데 신작 공연 때문에 할 수 없이 보내줬던 거라고 대꾸했다. 지금 입원해 쉬지 않으면 나중에는 한 달 동안 더욱 외진 시골 요양소에 갇히게 될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더욱 외진 시골’이란 단어에 화들짝 놀란 왕재수는 결국 한 풀 꺾였고 고분고분하게 사흘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다.

 

 

신작이 끝나서 사무실로 복귀하게 된 베르닌은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아침과 밤마다 병원에 왕재수를 보러 갔다. 이틀째 되던 날에는 투레츠키를 통해 파인애플 통조림까지 사들고 갔다. 그러나 이 모든 재앙이 베르닌의 ‘밀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왕재수는 토라져서 베르닌에게 ‘바보 멍충이, 꺼져!’ 하고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고 파인애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죄 없는 코즐로프에게도 삐쳐서 등을 돌리고 누워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무리 코즐로프가 상냥하게 달래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을 나온 베르닌은 무척 속이 상했지만 코즐로프는 웃기만 했다. 퇴원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 당신이야 귀염둥이 우리 아기 어쩌고 밤새 응응을 하면서 불태울 테니 저 자식이 풀어지겠지만 나한테는 계속 삐쳐 있을 거라고요! ”

 

“ 저 녀석 너한테 삐친 거 아니야.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빨리 작업을 하고 싶은데 병원에 갇혀 있으니 답답해서 그런 거야. 어디 가둬두면 못 견디는 놈이거든. 퇴원하면 다시 빵긋빵긋 웃을 거다. 우리 아기는 그런 게 정말 매력이라니까. 귀엽기도 하지. ”

 

“ 으윽, 당신이야 콩깍지가 꼈으니 귀엽게 보이겠죠. 난 구박만 받고 미치겠다고요! ”

 

 

 

물론 코즐로프의 말이 맞았다. 퇴원 수속을 밟자 왕재수는 기분이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고 항상 주변 시선을 조심하던 것도 잊어버렸는지 코즐로프를 와락 껴안았고 베르닌을 보자 빨리 집에 가서 파인애플 통조림 뚜껑을 따달라고 졸랐다.

 

 

다음날 그들은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로 떠났다. 코즐로프에게는 오케스트라 장기근속 표창으로 받은 3일 요양권이 있었고 왕재수는 의사의 온천 치료 처방전과 극장 간부용 자유 이용권이 있었다. 주변의 의심을 우려해 둘은 각각 떠났다. 월요일 새벽에 베르닌이 왕재수를 요양소까지 실어다 주었고 코즐로프는 오후에 출발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검은 숲까지 다녀온 탓에 베르닌은 매우 피곤한 상태로 출근했다. 하마터면 스페호프의 주간 회의 시간에도 졸 뻔했다. 왕재수의 신작이 아주 성공적으로 끝난 데다 공연을 보러 왔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고위직 간부들이 모두 그의 재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국장은 심기가 불편한 듯 했지만 그래도 최악의 상태는 아니었다. 스페호프는 내심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그를 불러내 모스크바 밀서 사건에 대해 탈탈 털고 해임 통보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게 분명했다. 수요일 공연에는 가브릴로프 출신이자 애초에 왕재수를 이곳으로 보냈던 의원인 벨스키를 비롯해 스비제르스키, 그리고 레닌그라드 최고의 실세이자 왕재수를 오랫동안 후원해온 마로조프까지 크레믈린을 좌지우지하는 인물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페호프와 대화를 나눈 것은 가장 온건한 벨스키 뿐이었고 그것도 공연 시작 직전에 귀빈석에서 잠깐 만났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스페호프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벨스키가 미하일은 연방의 귀중한 예술가이니 신변에 위협이 되는 일이 절대 생기지 않도록 KGB가 최선을 다 해달라고 당부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날 공연이 끝난 후 왕재수는 의원들과 별도의 리셉션 파티에 참석했다. 베르닌은 따라 들어갈 수 없었다. 가브릴로프 쪽 인사들로는 극장장과 의회 의장에게만 참석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왕재수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베르닌은 그가 스비제르스키를 따라가 인근 도시의 호텔에서 밤을 보냈다는 것을 다음날 국장으로부터 들었지만 물론 모르는 척했다.

 

 

어쨌든 스페호프는 왕재수의 후원자들, 특히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로부터 무사히 살아 남았기 때문인지 주간 회의 시간에도 평소보다 약간 심한 정도로만 직원들을 볶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공문 두 장을 탁 하고 책상에 내려놓으며 큰 소리로 호명했다.

 

 

베르닌! 칸페트나야!

 

 

베르닌은 ‘예’하고 답변하면서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그러나 의문했다. 함께 호명된 리자는 맨 뒤에 앉아서 동료 여직원들과 메모를 주고받다가 깜짝 놀라서 ‘네!’하며 벌떡 일어났다가 얼굴이 빨개지며 다시 앉았다.

 

 

“ 지난번 스네고로드 폭설 때와 마찬가지로 막내 직원들의 봉사가 필요하게 됐네. 알다시피 목요일이 공공기관 연례 바자회일세. 의회와 공산당 부녀회에서 주최하는 행사로 올해 추진위원장은 블리즈네초프 의장의 부인이 맡았단 말이야. 특별히 그녀에게 이야기해서 우리 보안위원회 부스를 중앙으로 배정받았네. 작년에는 너무 구석에 부스를 세워놨더니 실적이 너무 저조해서 우리가 꼴찌에서 두 번째였단 말이네! 이번에도 그런 굴욕을 당할 수는 없어! 알다시피 자선 바자회의 판매 실적도 공공기관 성과평가 지표에 포함된단 말일세. 최근 3년간 실적이 누적되기 때문에 작년의 저조한 성적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올해 반드시 1등을 해야 해! 이번 부스 운영 총괄은 다닐 자네가 맡게. 막내인데다 총괄 서무니까! 그리고 조직 내 물품 기부와 판매 전략 수립은 막내 여직원인 칸페트나야가 책임지게. 둘은 오늘 15시까지 연례 바자회 부스 운영 계획 초안을 수립해 내 방으로 오게. 이상! ”

 

 

 

졸지에 바자회 부스 운영 총괄을 맡게 된 베르닌과 리자는 멍해져서 눈만 깜박거리며 앉아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어휴, 나한테 안 떨어져서 다행이다’란 표정을 지으며 삼삼오오 빠져나갔다. 알렉산드라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 다냐, 리잔카. 안 그래도 바쁠 텐데 골치 아픈 일을 또 떠맡았구나. 내가 몇 년 전에 바자회 부스 운영을 해봤거든. 그때도 막내 여직원이란 이유로 맡았던 것 같아. 그땐 아무 것도 모르니까 우왕좌왕하고 판매 실적도 중간밖에 안돼서 국장한테 엄청 깨졌었어. 국장은 여러 기관이 참여하는 행사에서 실적 측정하는 거 엄청 민감해. 목요일이면 며칠 안 남았잖아. 일단 내가 최근 몇 년간 부스 운영 계획이랑 결과보고서 철을 가져다줄테니까 그것부터 훑어보고 계획 초안을 잡으렴. 나도 오늘 급한 업무 마치면 좀 도와줄게. ”

 

“ 고마워요, 선배님. ”

 

“ 사셴카 언니, 정말 언니뿐이에요. 아아, 국장은 정말 너무해요. 매일매일 막내라고 온갖 궂은일은 다 시키고... ”

 

 

 

 

*   *   *

 

 

 

 

베르닌과 리자는 알렉산드라가 챙겨다 준 기존 서류들을 모두 훑어보았다. 자선 바자회 추진위원회에서 온 공문과 행사 추진계획도 읽어보았다. 리자는 입술을 삐쭉거렸다.

 

 

“ 이건 내용상 총무부에서 진행해야 하는 업무잖아요. 귀찮으니까 또 국장에게 가서 막내들이 해야 한다고 뒤에서 공작을 한 게 분명해요. 작년에 꼴찌에서 두 번째 한 것도 당연하네요. 이거 보세요, 우리는 애초부터 직원들이 기부한 물품 자체가 적었어요. 좋은 물건도 없었고요. 재작년에도 성적이 나빴네요. 이래놓고 무슨 1등을 하라는 건지. 작년 1등은 어디였어요, 다냐? ”

 

 

베르닌은 서류철을 뒤졌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 최근 3년 내내 1등은 가브릴로프 극장에서 차지했어요. 극장이라서 화려한 게 많이 나왔나 봐요. 아무래도 우리 같은 일반 공공기관이랑은 다르잖아요. 무용수들이나 성악가들의 팬들도 많이 몰리고... 의상이랑 장신구 같은 것도 많이 나오고 또 데니스나 타마라 같은 스타 무용수들이 사인회도 같이 해줬나 봐요. 우리로서는 아무래도 따라가기 힘들 것 같아요. ”

 

“ 아, 맞다. 나도 작년에 극장 부스 가서 터키석 팔찌 샀어요. 진짜 예쁜데 아까워서 회사에는 하고 오지도 못하겠어요. 그때 데니스한테 사인도 받았어요. 앗, 그러면 이번엔 꽃돌이 감독님이 사인회 하겠네요. 다 끝났어요, 다냐. 가뜩이나 극장 부스가 잘 나가는데 미샤가 사인회까지 하면 다 거기로 몰려들 거 아니에요... 아무리 노력해봤자 안 될 테니까 그냥 포기하고 대충 해요. 우리도 부스들 구경하면서 물건들 사고 사인이나 받고 맛있는 거나 먹어요. 그깟 1등 어차피 할 수도 없는 거 공연히 아등바등할 필요 없잖아요!

 

 

리자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열띠게 외쳤다. 베르닌은 그녀의 말에 따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순간 작년 가을이 생각났다.

 

 

“ 그랬으면 좋겠지만... 리자, 작년 체육대회 생각 안 나요? 국장이 얼마나 날 들들 볶았는데요. 전 종목 출전을 시키지 않나, 우승을 못하면 벌목공도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리바운드를 2만개 연습했다고요. 난 지난번에 기관 대표로 요리대회까지 나갔는걸요. 알렉산드라 선배의 말이 맞아요. 국장은 다른 기관들이 참여하는 행사에서 실적을 못 내면 노발대발할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잘리든가 적어도 한 달 이상 들들 볶이고 징계성 잡일을 산더미처럼 떠안게 될 거예요. 1등을 하든지 그에 버금가는 매상을 올리지 않으면 우리의 앞날이 너무 암울해요. 그나마 한동안은 미샤가 신작을 올린다고 해서 극장에 배치되는 바람에 국장에게 덜 볶였지만 이제 다시 사무실로 복귀했는데... 아아, 다시 전처럼 매일매일 들볶이고 밤을 새고 휴일에도 계속 출근하고 설교를 듣는 것만은... ”

 

 

베르닌은 갑자기 서러워져서 하마터면 눈물을 쏟으며 훌쩍훌쩍 울 뻔 했다. 아마 혼자였거나 왕재수 앞이었다면 그랬겠지만 도저히 리자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어 콧물을 훌쩍 들이마시며 꾹 참았다. 리자는 코를 살짝 벌름거리더니 방긋 웃었다.

 

 

“ 아이 참, 다냐. 당신이 그렇게 심각해지면 어쩔 수 없잖아요. 난 국장한테 야단맞는 건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좋아요. 일단 수요일 오전까지 물품 기부를 받도록 해요. 리스트 양식은 알렉산드라 언니가 주고 간 게 있으니 이걸 쓰면 되겠어요. 내가 등사해서 각 부서 서무들에게 돌릴게요. 1인 1품목을 강제 할당해야 돼요. 안 그러면 발따예프 선배 같은 사람은 절대 안 낼 테니까! 당신은 추진위원회에 가서 행사장 도면과 우리 부스 위치, 홍보물 부착 기준 따위를 알아오세요. 우리 재밌게 해봐요. ”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리자를 바라보았다.

 

 

“ 리자, 이게 재미있어요? ”

 

그럼 어떻게 해요, 재밌게라도 해야죠. 그나마 당신이랑 같이 준비하니까 다행이에요. 발따예프나 타라카노프, 모브린 선배 같은 사람들이랑 같이 하라고 했으면 진짜 열 뻗쳤을 거예요. 자, 얼른 추진위원회에 다녀와요! ”

 

 

베르닌은 리자의 긍정적인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매사에 겁을 먹고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항상 투덜대며 일하는 자신과는 하늘과 땅차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리자가 나이는 어리지만 배울 게 많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바자회 추진위원회가 있는 의회 건물로 향했다.

 

 

 

 

*   *   *

 

 

 

 

수요일 오전에 베르닌과 리자는 반쯤 절망 상태가 되었다. 국장의 명령을 무기로 협박해서 전 직원 1인 1물품 제출은 완료되었지만 들어온 물건들을 보니 작년보다 나아진 게 하나도 없었다. 물건들의 질은 하나같이 나빴고 누가 봐도 지갑을 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 떨어지고 해져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얄팍한 외투부터 시작해 구슬이 숭숭 빠져 있는 촌스러운 목걸이, ‘1970년 가브릴로프 KGB 신년 노래자랑 기념‘이란 문구가 떡하니 박혀 있는 고장 난 시계, 심지어 ’1965년 가브릴로프 KGB 가을 등반대회’ 란 문구가 박힌 수건까지 있었다.

 

리자가 ‘어머나, 이렇게 오래된 수건을 내놓다니! 너무 해져서 걸레로도 못 쓰겠어요!’ 라고 외치는 동안 베르닌은 ‘가을 등반대회까지 했다니! 신년 노래자랑은 또 뭐야! 옛날 국장들도 스페호프 못지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워낙 물건들이 별로라서 가격을 아주 낮게 매기는 수밖에 없었다.

 

 

리자가 한숨을 쉬었다.

 

 

“ 큰일이네요, 다냐. 내가 봐도 사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요. 거저 줘도 싫은 물건이 대부분인 걸요. 그나마 알렉산드라 언니가 기부한 책이랑 인형은 괜찮은 편이지만... 이 곰 인형을 희귀한 인형이라고 홍보해서 100루블에 팔아볼까요? 근데 국장은 왜 안 내는 거죠? 그렇게 직원들을 볶아놓고 막상 자기는 안 내고! ”

 

“ 국장은 원래 명령만 하고 자기는 안 하는 거 알잖아요. 그러니까 윗사람이죠. ”

 

“ 어머, 다냐. 당신 이 책들 다 기부하는 거예요? 뜯지도 않은 새것이네? ”

 

“ 어, 예... 난 그거 한 질 더 있어요, 예전에 법대 다닐 때 암기 시험 잘 봐서 받은 거 있거든요. 이건 저번 체육대회 MVP 상품으로 받은 거예요. 근데 잘 보면 귀퉁이에 수프 얼룩이 좀 있어요. 냄비 받침으로 쓰던 거라서. ”

 

“ 흐응, 얼룩은 눈에 안 띄니까 완전 새 책이라고 해서 내놓으면 되긴 되는데... 레닌 전집은 웬만하면 집집마다 있을 것 같아요. 걸핏하면 상품으로 주는 거라서... 학교에서도 그렇고. 우리 집에도 있거든요, 오빠가 예전에 콤소몰에서 받아온 거. 어머나, 여기도 레닌 전집이 있네. 이건 누가 낸 거지? 아, 모브린 선배가 낸 거구나. 앗, 여기도 있어요. 이건 레닌 선집이네... 이건 카체리나 언니가 낸 거고... 어머나, 스탈린 어록도 있어요. 아아... 망했어요. 누가 스탈린 어록을 사겠어요! ”

 

 

둘이 괴로워하고 있는데 알렉산드라가 왔다. 높다랗게 쌓여 있는 물건들을 훑어보더니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 이 물건들로는 어림도 없겠네. 작년보다 더 심해. 일단 점심부터 먹자. ”

 

“ 구내식당 가기 싫어요, 오늘 메뉴 보니까 또 돼지비계 절임이랑 양배추 수프였어요. 지겨워요. ”

 

“ 어차피 12시가 넘어서 지금 구내식당 가면 한참 줄서야 될 거야. 우리 그냥 스베촉에 가서 먹을까? ”

 

“ 어, 좋아요. 제 차로 가요. ”

 

 

 

베르닌은 리자와 알렉산드라를 태워서 스베촉으로 갔다. 점심시간이라 손님들로 터져나갔다. 인기 만점인 왕재수가 없으니 꼼짝없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나 했지만 점원 하나가 알렉산드라를 보더니 손뼉을 치고 반색을 했다.

 

 

“ 우왓, 사샤! 어서 와요. 보랴 지금 바빠서 좀 기다려야 할 텐데. ”

 

“ 아니에요, 겐카. 동료들이랑 점심 먹으러 온 거예요. ”

 

“ 이리 와요, 이 안쪽으로! ”

 

 

구석의 창가 자리로 안내받은 후 리자가 방긋 웃었다.

 

 

“ 어머, 전에는 꽃돌이 감독님이랑 친한 다냐 덕분에 자리를 받았는데 이번엔 언니 덕분이네요. 남자친구가 좋긴 좋군요! ”

 

“ 아니야, 그런 거! ”

 

 

알렉산드라가 얼굴을 붉혔지만 리자는 깔깔 웃었다. 베르닌도 기분이 좋았고 보랴의 생일 파티에 알렉산드라를 데려갔던 것이 정말 뿌듯했다.

 

 

점심시간은 짧았으므로 셋은 빨리 먹을 수 있는 버섯 블린과 감자 수프, 게살 샐러드를 시켰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하나같이 너무나도 맛있었다. 특히 리자는 버섯 블린에서 포크를 놓지 못했다.

 

 

“ 어쩜 이렇게 블린이 맛있죠? 우리 이거 한 접시만 더 시키면 안돼요? 가브릴로프에서 제일 맛있는 블린이에요. 어쩌면 이렇게 얄팍하면서도 반질반질하고 풍미가 기가 막힐까요. 속에 들어간 버섯도 너무 향긋해요. 근데 버섯 없이 블린에 스메타나만 얹어도 진짜 맛있어요. ”

 

“ 응, 보랴가 블린을 잘 구워. 그저께 보랴가 집에서 구워줬는데 나 너무 많이 먹어서 하루만에 3킬로는 찐 것 같아. 숲에서 따온 딸기랑 곁들여 먹으니까 너무 맛있더라고. ”

 

“ 어머, 언니 좋겠다... 집에서 남자친구가 이렇게 맛있는 블린을 구워주고... 아앗! 그래, 이거예요! 됐어요!

 

 

리자가 손뼉을 딱 쳤다. 어리둥절해진 베르닌과 알렉산드라를 환한 얼굴로 바라보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 바자회는 오후에 열리잖아요. 보랴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건 어때요? 우리 부스 컨셉을 딸기로 잡는 거예요! 봄이니까 이제 딸기가 나오고 있잖아요! 주말에 우리도 가족끼리 다차에 가서 딸기 잔뜩 따왔거든요. 우리 부스에서 블린을 구워 파는 거예요! 블린 종류는 딸기랑 크림 넣은 거 하나로만 통일하고요. 보랴가 도와주기만 하면 불티나게 팔릴 거예요! 알렉산드라 언니랑 나는 손님을 끌고요. 우리 오빠가 유리병 공장에 다니거든요. 예쁜 공병이 많아요. 공병들에 딸기사탕을 넣어서 리본 달아서 파는 거예요! 블린이랑 딸기사탕이랑 같이 묶어서요! ”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어... 근데 그건 기부랑 상관이 없잖아요... 우리 KGB 직원들이랑은 상관없는 내용인데 우리 부스에서 해도 되나... ”

 

 

“ 아휴, 다냐! 다른 부스들도 다 그렇게 한단 말이에요. 어차피 우리 물건들은 팔리지도 않아요. 우리도 이럴 땐 자본주의자들의 상술을 좀 베낄 필요가 있어요. 전에 대학생들에게서 압수했다는 잡지에서 봤는데요, 양키들은 별것도 아닌 물건들을 예쁘게 포장해서 비싸게 팔아먹는대요. 뭐라고 하더라, 패키지? 서로 다른 물건들을 공통되는 주제를 갖다 붙여서 한 세트로 만들어 판다는 거예요,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그럴싸하게 보이는 거고요. 그러니까 우리도 무슨 슬로건 같은 걸 붙여서 딸기 패키지를 만드는 거예요!

 

 

베르닌은 어안이 벙벙했고 이 자본주의자의 상술이라는 것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지만 알렉산드라는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를 쳤다.

 

 

“ 아, 리자! 너 정말 똑똑하구나! 좋은 생각이야. 있잖아, 작년에 우리 단체로 의류공장 견학 갔던 거 생각나니, 다냐? ”

 

“ 어, 그럼요. 저 그때 이 셔츠 다섯 개 들이 한꺼번에 샀는걸요. ”

 

“ 그 의류공장이랑 우리 쪽 공공기관이랑 무슨 협약을 맺어서 간 거였잖아. 그때 우리가 무슨 서류 문제를 해결해주는 대신 그쪽에서 직원용 의복을 제공받기로 했었거든. 근데 그때 총무부 담당자가 일을 하도 엉망으로 하는 바람에 원래 받기로 했던 겨울 스웨터가 아니고 그냥 하얀색 반팔 티셔츠가 100장이 온 거야. 반품시키려고 했다가 서류 절차가 복잡하다고 그냥 창고에 갖다 쌓아놨어. 아직도 상자 째 그대로 있어. ”

 

“ 어, 근데 어떻게 국장이 그걸 그냥 놔둔 거죠? 그런 거 못 참을 텐데... ”

 

그 담당자가 국장한테 아예 보고를 안 한 거지! 그때 국장이 모스크바 출장 가고 어쩌고 하느라 바빴고, 사실 의류공장에서 옷 받아서 나눠주는 거야 국장 관심 밖의 일이었으니까. 아예 보고를 안 하고 묻어버리면 모르고 넘어가게 되는 거지. 만약 보고를 했다면 해결할 때까지 들들 볶았을 테지만. ”

 

“ 그렇구나... ”

 

 

베르닌은 새로운 문제 해결 방법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신이 너무나 책상물림이라는 생각에 조금 좌절감도 들었다. 자기 같았으면 곧이곧대로 국장에게 물건이 잘못 왔다고 구두 보고한 후 보고서와 경위서를 만들고 온갖 절차를 거쳐 의류공장에 티셔츠를 반품하고 겨울 스웨터를 받아내느라 한 달 이상을 소요했을 것이다. 그동안 국장에게 계속 들들 볶였을 것이고.

 

 

“ 그런데 그 티셔츠와 내일 행사는 무슨 관계가 있나요? 반팔 흰 티셔츠는 팔아봤자 별로 매상이 안 오를 텐데... ”

 

“ 리자가 패키지 얘기를 했잖아. 별 거 아닌 물건들을 예쁘게 포장해서 팔아먹는 거. 블린이랑 딸기사탕이랑 티셔츠를 묶어서 파는 거야! 흰 티셔츠에는 그림을 그릴 수가 있잖아. 딸기를 주제로 하는 거니까 셔츠에 딸기 무늬를 그리는 거야! ”

 

“ 어... 그치만 언제 딸기 100개를 그려요... 게다가 전 미술이라면 담을 쌓은 걸요. ”

 

“ 아이 참, 다냐! 100개를 하나하나 그릴 필요 없어요! 학교 다닐 때 그런 거 했잖아요. 판화! 지우개나 감자에 딸기 모양을 새긴 다음에 그걸로 찍어내면 돼요! 이거 너무 좋은 아이디어네요. 슬로건만 생각하면 되는데... 공공기관 행사에 어울리는 슬로건 뭐 없을까요? 다냐, 당신이 행정용어를 많이 알잖아요. 생각 좀 해봐요. ”

 

“ 어... 난 책상물림이라서 이런 판매 전략 같은 건 진짜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안되겠어요. 경제개발 5개년 그런 것밖에 생각이 안 나요. ”

 

 

알렉산드라가 하늘색 눈을 반짝 빛내더니 소리쳤다.

 

 

“ 그거다! ‘검은 숲 딸기 유통 활성화 착수 기념 트로이카 패키지!’ 뭔가 있어 보이고 행정용어도 들어가고 우리 러시아 전통문화인 트로이카란 단어도 있고! 이 정도면 국장이나 의장도 대체 왜 블린이랑 딸기사탕이랑 티셔츠가 KGB랑 관계있냐고 트집 못 잡을 거야! 용어만 잘 붙여 놓으면 되니까! ”

 

 

“ 꺄, 뭔가 멋있어 보여요! 좋아요, 이걸로 해요! 들어가면서 일단 감자를 몇 알 사요. 사무실에 아크릴 물감이랑 칼은 있었던 것 같아요. 난 오빠에게 전화해서 공병들을 실어다 달라고 할게요. 제일 중요한 게... 보랴가 도와줘야 하는데... ”

 

 

그때 마침 보랴가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에서 슬그머니 나왔다. 바쁜 와중이었지만 여자친구를 잠깐이라도 보고 싶었던 게 분명했다. 알렉산드라를 꼭 껴안고 뺨과 입술에 뽀뽀를 하며 반가워했다. 그러다 뒤늦게 베르닌을 발견하고는 벙긋 웃었다.

 

 

“ 아, 너 왔구나. 얘기 들었지, 나랑 사셴카랑. ”

 

“ 어, 예. 축하해요. 둘이 너무 잘 어울려요. ”

 

“ 다 너 덕분이야. 네가 그때 사셴카 데리고 와서. 근데 애기는 좀 어떠냐. 공연 끝나고 입원했다면서. ”

 

“ 괜찮아요. 퇴원하고 온천에 갔어요. 내일 돌아올 거예요. ”

 

“ 아, 그랬구나. 다행이다. ”

 

 

리자가 옆구리를 콕 찌르자 알렉산드라가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설명하고는 보랴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보랴는 흔쾌히 승낙했다.

 

 

“ 식당 점심시간이 두 시에 끝나니까 그때부터 다섯 시까지는 괜찮을 거야. 블린 그까짓 거 산더미만큼 구울 수 있지! 내일 두 시까지 갈 테니까 세팅만 잘 해놔. ”

 

“ 고마워요, 보랴! ”

 

 

그래서 그들은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식당을 나왔다. 베르닌은 아직도 자본주의자들의 패키지가 과연 매상 1위를 달성할 수 있을지 크나큰 의문이 들었지만 리자와 알렉산드라가 많이 들떠 있기도 했고 어쨌든 엉망인 물건들만 파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열심히 준비해보기로 했다.

 

 

 

 

*   *   *

 

 

 

 

 

목요일 오후가 되었다. 날씨가 매우 좋았다. 베르닌과 리자는 중앙에 설치된 부스로 일찌감치 가서 물건들을 늘어놓고 한쪽에서는 블린을 구울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빨간색과 초록색의 동그랗고 먹음직스러운 딸기가 세 개씩 그려진 하얀 티셔츠들과 딸기 사탕들이 들어 있는 조그만 유리병들을 매대 제일 앞에 쌓아놓았다. 전날 베르닌과 리자, 알렉산드라는 감자에 문양을 새기고 물감을 묻혀서 티셔츠 100장에 모두 딸기 무늬를 찍었고 유리병마다 딸기 사탕 열 개를 넣어서 녹색 리본을 달았다. 리본은 따로 산 것이 아니고 알렉산드라가 당직실 창문에 걸려 있던 낡은 커튼을 잘라내서 만들었다. 마침 녹색이라 잘됐다 싶었다. 남는 커튼 조각으로는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손재주가 좋은 리자가 하얀 페인트로 직접 ‘검은 숲 딸기 유통 활성화 착수 기념 트로이카 묶음 판매’ 라고 썼다. 패키지라고 쓰면 자본주의 반동분자로 오해받을까봐 베르닌이 걱정했기 때문에 용어를 바꾼 것이다.

 

 

스페호프는 각 부서에서 대표 직원 한 명씩을 차출해서 판매와 계산을 도우라고 명령했고 자신도 직접 현장에 왔다. 딸기사탕과 티셔츠, 휴대용 버너를 보자 눈살을 찌푸렸지만 ‘검은 숲 딸기 유통...’이라고 씌어 있는 슬로건을 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닌의 어깨를 툭툭 쳤다.

 

 

“ 그렇군, 우리 가브릴로프 숲에서 나는 농산물의 생산 및 유통을 확대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목표를 설정했군. 당과 의회에서 좋아하겠어. 목표는 좋은데 과연 잘 팔릴지 모르겠군. 먹는 것들은 원래 비싸게 받을 수가 없잖은가. ”

 

“ 묶음 판매로 고급화하겠다는 것이 리자의 전략입니다. ”

 

“ 흐음... 하여튼 잘 해보게! 이번만큼은 무조건 1등을 해야 돼! 우리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체면이 있지... 1등을 하지 못하면 벌목공 일자리나 알아보는 게 좋을 걸세!

 

 

뒤에 서 있던 리자가 사색이 되었다. 스페호프가 저쪽으로 사라지자 리자는 파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다냐, 저거 설마 진담은 아니겠죠? ”

 

“ 그, 글쎄요. 국장은 농담 같은 거 할 줄 모르거든요. 진담으로 하는 거긴 한데... 그래도 진짜로 우리를 벌목공으로 만들지는 않을 거예요. ”

 

“ 매상은 올릴 자신 있어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극장이 문제란 말이에요. 꽃돌이 감독님이 사인회를 하면... ”

 

“ 어, 미샤는 오늘 안 와요. 온천에 갔거든요. 걘 바자회 같은 거 관심도 없고요. 그러니까 사인회 같은 건 안 할 거예요. ”

 

“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치만 데니스도 인기가 많아서... 작년에 나도 데니스한테 사인 받으러 가서 줄섰다가 그 터키석 팔찌 산 거라서요. ”

 

“ 무용수들도 다 휴가 갔어요. 오늘까지 휴가라서 안 온대요. 류다한테 물어봤어요. ”

 

 

리자는 간신히 좀 안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바자회 준비하는 내내 씩씩하고 의기양양했지만 그래도 스페호프가 무섭긴 한 모양이었다. 그때 다른 부스들을 둘러보고 온 알렉산드라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나타났다.

 

 

“ 극장은 생각보다 별로 물건이 없어. 근데 삼림국 부스에도 딸기가 있어. 그쪽은 물량이 훨씬 많아. 바구니에 딸기를 쌓아놓고 파는 것 같아. 이래서는 밀릴지도 몰라.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 ”

 

“ 어, 어떻게 하죠... ”

 

 

베르닌도 걱정에 휩싸였다. 리자는 곰곰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손뼉을 딱 쳤다.

 

 

그래! 극장이 하는데 왜 우리라고 못해요! 우리도 분장을 하면 되지! 그 양키 잡지에서 보니까 여자들이 토끼 옷을 입었더니 남자들이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사셴카 언니, 이리 와요. 우리 잠깐 저쪽 텐트로... ”

 

 

리자와 알렉산드라가 주최측 텐트로 사라진 후 보랴가 왔다. 바자회 때문에 손님이 평소보다 적어서 부주방장에게 맡기고 왔다고 했다. 말은 그렇지만 사실은 알렉산드라를 도와주고 싶어서 서둘러 온 것 같았다. 플래카드를 보더니 픽 웃었다.

 

 

“ 뭐냐, 저건. 읽는데도 한참 걸리네. 활성화는 뭐고 트로이카 묶음 판매는 또 뭐야. ”

 

“ 그냥 말장난이에요. 국장한테 트집 잡힐까봐... ”

 

“ 난 블린만 구워주면 되는 거지? ”

 

“ 딸기랑 크림 넣어서 돌돌 말아 달라고 하던데... 그러면 어려울까요? ”

 

“ 어렵긴. 식은 죽 먹기지. 음료수는 이거 하나야? ”

 

“ 뜨거운 물 계속 끓여주기도 힘들고 시간도 없으니까 차는 안 팔 거고요, 그냥 이 탄산수에 딸기 시럽 섞어주기로 했어요. ”

 

 

보랴는 딸기 시럽의 맛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음, 괜찮네. 이 시럽 누가 만들었냐? ”

 

“ 리자네 집에서 만든 거래요. ”

 

“ 아, 어제 같이 있던 그 금발 아가씨? 걔 귀엽더라. 너랑 사귀냐? ”

 

“ 아니에요, 그냥 동료예요. ”

 

“ 쯧... 발랄하고 귀엽던데 노력 좀 해보지 그러냐. 안 그래도 로만이 맨날 걱정하던데, 너 독수공방한지 오래 된 것 같다고. 이런 시럽 만들 줄 아는 여자라면 참 괜찮은 건데. ”

 

“ 리자가 만든 게 아니고 리자 어머니가 만든 거랬어요. ”

 

에휴, 넌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듣냐! 사셴카는 너보고 착하고 성실하고 어딜 보나 일등 신랑감이라면서 널 못 알아보는 여자들이 이상하다고 그러던데. ”

 

 

베르닌은 알렉산드라가 그런 말을 해줬다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쑥스러워서 물통에 시럽을 부어서 휘휘 섞으며 딴청을 부렸다. 보랴가 맛을 보더니 그 정도 배합이면 됐다고 해서 열심히 섞은 후 탄산이 빠질까봐 뚜껑을 꼭 닫아놓았다.

 

 

그때 리자와 알렉산드라가 나타났다. 베르닌과 보랴는 둘 다 눈이 등잔만큼 커졌다. 리자가 쾌활하게 소리쳤다.

 

 

“ 다냐, 우리 어때요? ”

 

“ 어, 저... 어... ”

 

 

베르닌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보랴도 마찬가지였다. 리자와 알렉산드라는 단을 접어 올려 아주 짧아진 원피스에 딸기 무늬를 그려놓은 에이프런을 두르고 긴 머리를 양쪽으로 높이 올려 묶어 토끼 머리를 하고 있었다. 화장도 곱게 하고 기다란 속눈썹을 달고 입술을 빨간 하트 모양으로 칠하고 있었다. 리자는 방글방글 웃고 있었지만 알렉산드라는 어색한 듯 뺨을 붉히며 쭈뼛거렸다. 보랴의 눈치를 보면서 종알거렸다.

 

 

“ 보르카, 나 너무 이상하지? ”

 

“ 아, 아니... ”

 

“ 역시 이상하구나... ”

 

아니야! 누가 이런 걸 보고 이상하다고 해! 이걸 보고 넋이 안 나가면 사내가 아니야! 진짜 예쁘단 말이야!

 

 

보랴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알렉산드라를 번쩍 안고 빙글빙글 돌리며 펄쩍 뛰었다. 알렉산드라는 창피하다며 꺅꺅거리고 보랴는 아랑곳하지 않고 키스를 하고 난리였다. 리자가 깔깔 웃으며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다냐, 당신은 어때요? ”

 

“ 어... 어... 저기요... 어어... ”

 

“ 어휴, 그게 뭐예요! 보랴는 예쁘다고 했는데! 알렉산드라 언니만 예쁘고 나는 안 예쁘다는 거예요? ”

 

“ 아, 아니요... 저기... 예쁜데요... 너무 낯설어서... 어... ”

 

“ 맘에 안 드는 거구나! ”

 

“ 아니, 아니에요. 누가 그래요. 그런 게 아니고요... 이런 거 처음 봐서 그래요. 저... 근데 치마 너무 짧은 거 아니에요? 저기... 극장도 아닌데 좀 야한 거 같은데... ”

 

“ 맙소사, 다냐... 당신 모스크바에서 공부한 사람이 왜 이렇게 보수적이에요? 그냥 솔직히 말해요, 맘에 안 든다고. 이 스타일이 나랑 안 어울리나보네요. 거울 볼 땐 괜찮아 보였는데 남자들 눈엔 별로인가... 알렉산드라 언니는 아담하니까 어울리는데 난 아닌가보네요. 이런 스타일 소화하기엔 다리가 너무 긴가... ”

 

 

리자가 금세 풀이 죽었다. 땋아 올린 머리를 잡아당기더니 에이프런도 풀어버리려고 했다. 베르닌은 어쩔 줄을 몰랐다. 반쯤 풀어진 에이프런 끈을 다시 매주면서 더듬거렸다.

 

 

“ 아니에요, 리자. 진짜 그게 아니에요. 잘 어울려요. 저, 난 당신이 이런 모습을 한 걸 본 적이 없어서... 그게 아니고, 저... 바자회에 남자들도 많이 오니까... 저쪽 부스에서는 술도 팔잖아요. 남자들은 취하면 예쁜 여자들한테 괜히 못살게 굴고 그러니까... 좀 걱정돼서. 알렉산드라는 보랴가 있으니까 괜찮지만... ”

 

“ 그럼 나 예쁜 거예요? ”

 

 

리자가 언제 풀이 죽었느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베르닌은 매우 당황했다.

 

 

“ 어, 예... 근데 원래 예뻤으니까 저기... ”

 

“ 아유, 당신 너무 웃겨요. 이래서 꽃돌이 감독님이 당신이랑 그렇게 착 붙어 다니는 거군요. 말도 잘 듣고. ”

 

 

리자는 까르르 웃더니 베르닌의 뺨에 뽀뽀를 하고는 좌판에 놓인 물건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어쩐지 더욱 쑥스러워져서 종이컵들만 잔뜩 꺼내 늘어놓았다.

 

 

 

 

*   *   *

 

 

 

 

바자회는 2시에 시작되었다. 주민들과 공공기관 직원들이 많이 왔다. 리자의 자본주의식 패키지 판매 전략은 놀랍게도 주효했다. 중앙에 있는 부스라 위치적 이점도 있었지만 천하일미 요리대회 준우승자인 보랴가 구워주는 블린이라는 강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리본 달린 병에 들어 있는 딸기 사탕은 몇 배로 먹음직스러워 보였고 무엇보다도 알렉산드라와 리자의 딸기 아가씨 분장이 대히트를 쳤다. KGB 부스에 가면 딸기 앞치마를 두르고 토끼 머리를 한 귀여운 아가씨들이 맛있는 블린과 딸기 탄산수를 팔고 있다는 소문이 금세 좍 퍼졌다. 남자들이 줄을 섰다. 알렉산드라는 보랴의 옆에서 블린을 접시에 담고 탄산수를 따라주었고 리자는 딸기 사탕과 티셔츠 패키지를 홍보했다.

 

 

“ 와, 이 티셔츠 예쁘다. 얼마에요? ”

 

“ 티셔츠 한 장에 20루블이에요. ”

 

“ 좀 비싼데... ”

 

“ 이거 손으로 그린 딸기예요. 방수물감이라 지워지지도 않고요. 사탕 한 병에 10루블, 티셔츠 한 장에 20루블이지만 사탕이랑 티셔츠를 같이 하시면 25루블에 드려요. 어머, 그러고 보니 딸기 블린 세트 드셨죠? 블린 드신 분들은 사탕이랑 티셔츠를 20루블에 드려요. ”

 

“ 어, 점점 싸지네... 그러면 블린 먹고 사탕 먹고 티셔츠 사는 게 이득인 거네! ”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블린과 사탕과 티셔츠 패키지가 불티나게 팔렸다. 토끼 머리를 한 자그마한 알렉산드라의 앙증맞은 모습과 늘씬한 리자의 모델 같은 자태 때문에 평소에는 바자회에 관심도 없었던 젊은 남자들도 줄줄이 몰려왔다. 보랴는 알렉산드라의 전화번호를 묻는 청년들에게 이따금 도끼눈을 떴지만 그래도 즐거운 듯 빙긋빙긋 웃으며 손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블린을 구워서 딸기와 크림을 넣어 휙휙 말았다. 남자들이 사진 좀 같이 찍으면 안 되느냐고 졸라대자 당찬 리자는 ‘패키지 구매하신 분들하고만 찍어요!’ 하고 소리쳤다.

 

 

 

베르닌은 곁에서 물건을 팔고 계산을 하고 장부를 적느라 정신이 없었다. 부스가 성황을 이루자 들뜬 스페호프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고 직원들 몇 명을 보내서 장부 정리와 계산, 줄 세우기를 돕게 했다.

 

 

잘했네, 잘했어! 자네들이 최고일세! 다닐, 리자베타, 알렉산드라! 내 자네들을 기억해 두겠네! 그래, 다닐. 지금까지 매상이 얼마나 올랐나? ”

 

“ 그, 글쎄요. 지금 너무 바빠서. 아마 천 루블 넘게 올랐을 겁니다. ”

 

“ 좋아! 묶음 판매가 다 안 되더라도 티셔츠만 다 팔면 2천 루블 가까이 되겠군! 그러면 우리가 1위일세! 지금 다른 부스들은 죽을 쑤고 있어! 저 꼴 보기 싫은 극장도 천벌을 받았는지 지금 파리만 날리고 있다네! 우리가 1위 한번 해보세! 아니, 블리즈네초프 의장이잖아! 아이고, 이리나도 같이 왔군! ”

 

 

스페호프는 어슬렁어슬렁 다가온 의회 의장에게 달려갔다. 바자회 추진위원장이자 공산당 부녀회장인 의장 부인 이리나도 함께였다. 이리나는 가브릴로프에서 제일 가는 노멘클라투라인 돈초프 가문 출신으로 굉장한 여장부였다. 타지 출신인 남편 블리즈네초프도 사실은 그녀가 뒤를 봐줘서 의회 의장 자리를 꿰찼다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다. 가브릴로프에는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노멘클라투라 가문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렐랴의 비슈네프 가문이었고 다른 하나가 돈초프였다. 특히 최근 10여년 동안은 후자의 재력과 정치력이 월등해져 있었다. KGB와 의회는 동등한 위치라면서 의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스페호프 국장마저도 이리나의 비위만은 거스르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했다.

 

 

스페호프의 에스코트를 받아 이리나가 가까이 오자 베르닌은 의장이 공처가란 소문이 사실인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50대 초반의 이리나는 굉장한 거구의 금발 머리 아주머니로 보라색 눈 화장을 하고 입술을 검정색에 가까운 빨간색으로 칠한 데다 볼연지도 분홍색으로 세심하게 바르고 연두색 재킷에 노란 원피스, 빨간 구두 등 그야말로 총천연색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블리즈네초프 의장도 뚱뚱한 편이었지만 아내 곁에 서자 아담해보일 지경이었다.

 

 

“ 어흠, 그렇군. 이것은 정말로 검은 숲 딸기 생산에 도움이 되겠군요. 이 딸기는 검은 숲에서 따온 것인지? ”

 

“ 네, 의장님! 제가 직접 따온 거예요. 굉장히 맛있어요. 블린 드셔보세요! 이리나 표도로브나, 여기 포크 드릴게요. ”

 

 

리자가 방긋방긋 웃으면서 의장 부부에게 블린 접시를 두 개 내밀었다. 알렉산드라가 급히 딸기 탄산수도 두 컵 따랐다. 의장은 원래 식욕이 왕성한 사람이었으므로 거의 씹지도 않고 딸기 크림 블린을 꿀떡꿀떡 삼키고 음료수도 후루룩 마셨다. 이리나는 블린을 우물우물 먹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음, 맛있네. 아, 당신이었군요, 보랴. 어쩐지 맛있더라니. 그런데 아가씨들은 꼭 이렇게 꾸미고 있어야 하나? 여기는 애들도 오는데 치마가 너무 짧은 것 같군. ”

 

 

이리나가 알렉산드라와 리자를 째려보았다. 의장이 아까부터 두 아가씨의 다리를 힐끔거리는 게 영 못마땅했던 것 같았다. 리자가 당황해서 다리를 움츠렸지만 그래도 회사 경험이 더 많은 알렉산드라가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 그러네요, 이리나 표도로브나. 저희 생각이 좀 짧았네요. 앞치마 단을 좀 내릴게요. 이 사탕이랑 티셔츠 맘에 드시면 챙겨드릴게요. ”

 

 

이리나는 리본 달린 병 두 개와 티셔츠 두 장을 낚아채면서도 쌀쌀맞게 대꾸했다.

 

 

“ 꼭 맘에 드는 건 아니고. 딸기 무늬가 너무 알록달록해서 애들한테나 어울릴 것 같긴 하지만 성의를 봐서 가져가겠어요. 근데 티셔츠가 애들 손바닥만 해서 나한테는 맞지도 않겠네! ”

 

“ 어머나, 아니에요. 지금 고르신 건 애들용이라 그래요. 여기 성인용은 잘 맞으실 거예요. 피부가 하얗고 화사한 편이시니 잘 어울리실 거예요. ”

 

 

알렉산드라는 급하게 제일 큰 티셔츠 두 장을 꺼내서 남아 있던 녹색 리본으로 돌돌 말아 건넸다. 베르닌은 그녀가 ‘제일 큰’이란 단어 대신 교묘하게 ‘애들용’, ‘성인용’이란 단어를 쓰는 것에 감탄했다. 이리나는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티셔츠를 집어서 몸에 대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블린을 두 접시째 먹는 중인 의장의 손목을 확 잡아끌었다.

 

 

당신 그만 좀 먹어요! 다른 부스도 가봐야죠! 하여튼 수고하셨네요,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이런 추세라면 보안위원회 부스가 1등을 하겠어요. 대체 극장은 오늘 왜 저 모양인지... 아니, 이렇게 중요한 바자회를 여는데 당연히 예술감독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극장장은 앞장서서 물건 팔고 있는데 미샤는 코빼기도 안보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무용수들까지 전부 휴가를 보내다니요! 정말 미샤는 아무리 잘났어도 그렇지 우리 당과 부녀회를 어떻게 보는 건지...

 

 

이리나가 콧김을 푸르르 내뿜으며 또각또각 가버렸다. 의장은 접시를 내려놓고 알렉산드라와 리자에게 벙글벙글 웃으며 참 맛있었다고 칭찬하고는 스페호프에게 변명조로 말했다.

 

 

“ 이리나 말투에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블라지미르. 방금 극장 부스 갔다가 화가 나서 저런다네. 그 친구가 사인회를 할 줄 알고 은근히 기대했던 모양이야. 에휴, 여편네들이란... 그 망할 놈의 반동분자가 뭐가 좋다고 그저 얼굴 반반하면 다 되는 줄 알고... 하여튼 여자들이란 이해가 안 된다니까. 하여튼 야스민이 온천에 갔다고 하니 오늘 극장 부스는 매상이고 뭐고 망했고 자네 부스가 우승할 것 같으이. 미리 축하하네. 허참, 그 블린 정말 맛있군. 열 접시라도 먹겠는데 마누라가 난리를 치니... 잘 있어요, 예쁜 아가씨들! ”

 

 

의장 부부가 사라진 후 스페호프는 더더욱 신이 났다. 드디어 우승이라면서 역시 대 KGB의 능력은 뛰어나다고 껄껄 웃었다. 베르닌에게도 그 불여우 감시 때문에 고생만 죽어라 했는데 여기서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극장 부스가 죽을 쑤고 있는 것이 특히 맘에 드는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정신없이 계산을 하고 거스름돈을 내주다가 보랴가 반죽을 새로 하느라 잠깐 틈이 생겼을 때 알렉산드라에게 물었다.

 

 

“ 근데 극장 부스는 왜 죽을 쑤고 있는 거예요? 미샤는 작년에도 없었으니까 변동 요인이 아니고. 무용수들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사인회가 그렇게 중요해요? ”

 

“ 중요하긴 하지. 왜 우리가 이렇게 딸기 아가씨 노릇을 하고 있겠어. 사실 리자도 작년 극장 부스의 사인회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거거든. 근데 그것보다도... 극장은 원래 좋은 물건들이 많았는데 올해는 진짜 뭐가 없더라고. 그래서 파리 날리고 있어. ”

 

 

그때 보랴가 다시 블린을 굽기 시작했다. 계산을 하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 아니, 다냐. 소문난 딸기 부스 운영자가 바로 당신이라니! 나참, 생각지도 않은 재주가 있었군요! ”

 

 

류드밀라였다. 이미 딸기 사탕이 든 병과 티셔츠를 가방에 쑤셔 넣고 있었다. 딸기 블린은 다 해치웠는지 음료수를 마시면서 맛있다며 웃었다.

 

 

“ 아, 류다! 안 그래도 극장 부스 얘기하고 있었어요. ”

 

“ 음, 우리 부스는 올해는 공쳤어요. 일단 무용수들이 전부 휴가 가서 얼굴마담이 없잖아요. 그리고 이번에는 무대 의상이나 장신구 같은 건 하나도 못 내놨어요. 작년까지 내놓은 의상이랑 장신구들, 사실은 전부 예전에 무대 올리다가 전임 감독이 레퍼토리에서 빼버린 작품들에서 야금야금 갖다 팔았던 거였어요.

그 사실을 알고 감독님이 엄청 화냈거든요. 의상이랑 장신구 새로 제작하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 왜 있는 것들을 다 헐값에 갖다 팔았느냐,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하고 불을 뿜었어요. 안 그래도 지난번 돈키호테 다시 올릴 때 키트리부터 시작해서 투우사랑 요정 의상들이 없어서 추가 제작을 했거든요. 근데 감독님은 라 바야데르를 다시 올리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그 주인공 의상들이 엄청 화려하잖아요, 터번이랑 아랍 팬츠랑 팔찌들 작년에 엄청 비싸게 팔렸거든요. 작년 기부 목록을 보고 감독님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올해는 발레 작품 관련 물품들은 기부 금지시켰어요. 오페라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부스에 내놓을 게 뭐가 있겠어요. 기껏해야 사진 몇 장, 토슈즈 한두 켤레, 오페라 글라스 두어 개랑 오래된 팸플릿들 정도라고요. 사무국 말단 행정직원 두 명이 팔고 있는데 무용수들 외모랑 비교가 되나요. 게다가 여기서 이렇게 귀여운 딸기 아가씨들이 맛있는 걸 파는데 다들 여기로 몰리는 게 당연하죠. 나 같아도 여기로 오겠네. ”

 

“ 아, 그렇구나... 그 녀석 때문이구나.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네 부스가 우승하면 모든 게 왕재수 덕이란 생각이 들었다. 티셔츠라도 한 장 챙겨줘야 하나 싶었다. 류다는 딸기 탄산수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쪼로록 마신 후 한숨을 쉬었다.

 

 

“ 근데 문제는 우리 극장장이라니까요. 3년 연속 우승해서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이번에 이렇게 파리 날리고 있으니까 지금 열 받아서 펄펄 뛰고 있어요. 미샤를 엄청 욕하고 있어요. 물건을 못 내놓게 했으면 무용수를 내놓든가 자기가 사인회라도 했어야지 팔자 좋게 온천에 갔다고요. 다른 부스들 돌아다니면서 잘 되는 거 보고 얼마나 화를 내고 있는지... ”

 

“ 으음, 윗분들은 다 똑같군요. ”

 

“ 그러게 말이에요. 그래도 자기가 양심이 있으면 우리 감독님한테 화내면 안 되죠. 파리 날리던 극장 매일같이 매진시켜주고 있는 게 누군데. 자기 팔자에 언제 크레믈린 의원님들이 줄줄이 와서 악수를 해보겠어요! 다 미샤 덕분이지! 어머나, 결국은 가져왔네... 감독님한테 말도 안 하고!

 

 

류다가 극장 부스 쪽을 가리키며 펄쩍 뛰었다. 젊은 여직원 하나가 구름처럼 스카프를 늘어뜨리며 부스로 들어가고 있었다.

 

 

“ 저게 뭔데요? ”

 

미셴카 스카프요! 하도 물건도 없고 손님도 없으니까 극장장이 열 받아서 자기 비서한테 감독실에 가서 미샤 스카프랑 셔츠라도 가져오라고 했거든요. 내가 안 된다고 했는데 극장장이 나한테 잘리고 싶으냐고 소리 질러서 못 막았어요. ”

 

“ 으아... 그 녀석 자기 옷 손대는 거 진짜 싫어하는데... 설마 지금 미샤 옷을 팔려고 하는 거예요? ”

 

“ 그런가 봐요. ”

 

“ 아아... 저거 다 아르마나 프로도 에르미 그런 건데... 외제에 엄청 비싼 것들이랬는데... ”

 

“ 어휴, 어떻게라도 막아봐야겠어요. 하여튼 잘 먹었어요! ”

 

 

류드밀라가 극장 부스로 뛰어간 후 다시 손님이 몰려서 베르닌은 정신없이 일했다. 그때 귀에 익은 또렷하고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머, 다냐! 세상에, KGB 부스에서 이런 근사한 기획을 하다니! 보랴를 섭외한 건 신의 한 수네요! 블린 너무 맛있어요! ”

 

 

렐랴였다. 한 손에 돌돌 말린 딸기 블린 접시, 다른 손에는 음료수 잔을 들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베르닌은 숨이 턱 막혔다.

 

 

“ 아, 안녕하세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

 

“ 아휴, 그렇게 여러 번 봤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거예요! 그냥 렐랴라고 하라니까요. 보랴, 블린 최고예요! ”

 

 

보랴도 바쁘게 블린을 굽는 와중에 렐랴에게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렐랴는 순식간에 블린을 해치우더니 접시를 내려놓고 딸기사탕이 든 병과 티셔츠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 어머나, 아이디어 진짜 좋네요. 사탕은 애들 먹는 거지만 병이랑 리본을 매치하니까 진짜 고급으로 보여요. 이거 누구 아이디어에요? ”

 

“ 어, 여, 여기... 리자가 낸 아이디어예요. 이쪽은 알렉산드라고요. ”

 

“ 안녕하세요, 리자! 알렉산드라! 우와, 스타일 너무 좋아요! 둘 다 정말 예뻐요! 토끼 머리랑 그 앞치마 너무 잘 어울리네요. ”

 

 

렐랴의 칭찬에 알렉산드라와 리자가 뛸 듯이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렐랴는 가브릴로프 패션과 유행을 선도하는 최고의 미녀였기 때문이다. 렐랴는 사탕과 티셔츠 패키지를 세 개나 사더니 리자에게 자기도 딸기 아가씨 스타일을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리자는 렐랴와 함께 주최측 천막으로 사라지고 베르닌이 대신 블린을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 그는 리자처럼 손이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금세 주문이 밀리기 시작했다.

 

 

“ 아까는 딸기 아가씨가 둘이었는데 왜 지금은 하나예요! ”

 

“ 그러게! 왜 갑자기 시커먼 총각이 블린을 말아주는 거야! ”

 

 

리자와 알렉산드라 때문에 줄을 섰던 남자들은 투덜댔지만 의외로 깔깔 웃는 여자들도 있었다.

 

 

“ 어머 어머, 남자도 있네! 덩치 큰 남자가 딸기 티셔츠 입으니까 색다르고 귀여워요! 사진 좀 찍어요! ”

 

 

베르닌은 리자의 본을 따서 ‘패키지 구매하셔야 사진 찍어드려요!’ 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쑥스럽고 부끄러워서 버벅거리다가 결국 블린 접시와 음료수 컵을 든 아주머니들과 소녀들 사이에 끼어서 사진까지 찍혔다.

 

 

다행히 잠시 후 리자가 돌아왔다. 게다가 탐스러운 밤색 머리를 토끼처럼 양쪽으로 땋아 올리고 딸기 무늬 에이프런을 입은 렐랴와 함께였다! 렐랴는 리자와 알렉산드라 곁에서 사이좋게 사진을 찍었고 새로운 스타일에 신이 난 나머지 자원해서 부스에서 티셔츠 판매를 돕기까지 했다!

 

렐랴가 가세하자 KGB 부스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남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미녀 3인방의 딸기 부스라면서 들썩였다. 티셔츠는 이미 100장 모두 팔렸고 딸기 사탕과 보랴의 블린 반죽과 딸기 시럽도 동이 났다. 아쉬움에 몸부림치던 남자들은 렐랴와 리자, 알렉산드라 셋과 사진을 찍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베르닌이 ‘물건 다 팔렸으니까 이제 끝났어요!’라고 외치려는데 수완 좋은 리자가 냉큼 소리쳤다.

 

 

딸기 아가씨들과 사진 한 장 찍는데 5루블이에요! 선착순 10명만 받아요! ”

 

 

보랴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알렉산드라의 윙크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원체 예뻐서 언제 어디서나 사진 찍히는데 익숙한 렐랴도 방긋 웃으며 어쨌든 바자회의 기부 목표는 좋은 거니까 동참하겠다고 나섰다. 베르닌은 졸지에 선착순 10명과 딸기 아가씨들을 찍어주는 사진사가 되고 말았다. 10명의 촬영이 끝나자 보랴가 알렉산드라의 앞을 가로막으며 버럭 소리쳤다.

 

 

이제 끝났어요! 사진 촬영 끝! 영업 종료! ”

 

 

남자들이 항의하려 했지만 보랴의 험상궂은 표정과 우람한 팔뚝을 보고 투덜거리며 물러섰다. 그동안 베르닌은 상자에 돈을 쓸어 담았고 보조 직원이 휘갈겨 쓴 장부를 넘겨받아 금액을 확인했다. 리자와 알렉산드라는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접시와 컵을 한쪽으로 쓸어 모았다. 토끼 머리에 딸기 에이프런을 두른 아름다운 렐랴가 베르닌의 팔을 잡아당겼다.

 

 

“ 다냐, 진짜 재미있었어요! 이렇게 재미있는 바자회는 처음이었어요. 당신 고리타분한 줄 알았는데 굉장히 참신하고 재밌는 면도 있네요! ”

 

“ 어...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이건 리자 아이디어예요. 저는 그냥... ”

 

“ 렐랴라고 부르라니까... 아휴, 당신 정말. 근데 그 딸기 셔츠 나름대로 어울리네요. 맨날 우중충한 아가일 무늬 셔츠에 손목 토시나 하고 다니더니... 앞으로 이렇게 화사한 옷 입어요. 훨씬 나아요. 얼굴도 살고. ”

 

“ 어... 어... 저... 딸기를 좋아하시나보네요... ”

 

 

베르닌이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리자 렐랴가 은방울을 굴리는 듯 맑은 소리로 웃어댔다.

 

 

“ 미치겠네, 다냐! 아... 하여튼 당신 재밌어요. 혹시 스페호프가 괴롭히면 그냥 그만두고 우리 잡지사로 와요! 내가 당신 쓸게요! 안드레이가 짜증내긴 하겠지만... 당신이 오면 미샤랑 인터뷰하기도 더 수월할 텐데. ”

 

“ 예? 제가 비슈네브이 사드로... 다, 당신이 저를... 그런 생각만으로도... 하지만 저는 책상물... ”

 

 

베르닌이 당황하고도 놀라서 얼굴이 빨개지며 더욱 더듬거리자 렐랴는 더욱 까르르 웃어댔다. 옆에서 리자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

 

 

“ 농담이죠, 렐랴? 다냐는 우리 KGB에서 촉망받는 인재인데... 모스크바 법학대 수석 졸업자인데 문예지 사무실에서 비서 노릇이라니요... 다냐는 공무원이란 말이에요. 다냐를 뺏길 수는 없어요. ”

 

“ 어... 저, 리자... 난 수석 졸업이 아니고요... 여기 고등학교 2등 졸업... ”

 

“ 어쨌든 엘리트잖아요! 다냐는 KGB의 기둥이란 말이에요! ”

 

 

리자가 정색을 하자 렐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아, 그렇군요. 난 다냐가 매일 스페호프한테 들들 볶이고 서류철에 구멍만 뚫고 있길래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건데... 알았어요, 리자. 흥분하지 마세요. 그래도 나 농담한 거 아닌데... ”

 

 

알렉산드라가 끼어들었다.

 

 

“ 다냐야 워낙 성격도 좋고 성실하니까 어딜 가도 환영받을 거예요. 판매 도와줘서 고마워요, 렐랴. 덕분에 금방 매진됐네요. 너무 즐거웠어요. ”

 

 

정색하며 따지던 리자 때문에 좀 샐쭉해졌던 렐랴는 알렉산드라의 상냥한 말에 다시 웃었다.

 

 

“ 나도 즐거웠어요. KGB엔 책상물림들과 무지막지한 스파이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예쁘고 귀여운 아가씨들도 있다니 너무 놀랐어요. 나중에 두 분 인터뷰하고 싶어요! 언제라도 우리 사무실에 놀러 오세요. 보랴랑 다냐도요! 직접 구운 초콜릿 쿠키를 대접할게요! ”

 

 

렐랴의 초콜릿 쿠키를 떠올리자 베르닌은 벌써부터 군침이 돌았고 정신이 혼미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렐랴가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리자가 발을 꽉 밟았지만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렐랴가 펄쩍 뛰었다.

 

 

어머나, 극장 부스에 걸어놓은 거 저거 뭐지? 어머, 저건 에르메스잖아! 잠깐 저기 좀 다녀올게요!

 

 

렐랴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극장 부스 드높이 걸려서 바람결에 펄럭이는 아름다운 오렌지색과 녹색의 스카프를 보자 리자와 알렉산드라도 눈이 동그래지더니 ‘우리도 잠깐 갔다 오자!’ 하면서 뛰쳐나갔다. 졸지에 둘만 남은 베르닌과 보랴는 서로를 마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   *   *

 

 

 

 

 

가브릴로프 극장장이자 렐랴의 외삼촌인 알렉산드르 먀흐킨은 행정가였기 때문에 예술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간섭하지 않는 편이었고 스페호프처럼 부하들을 들들 볶으며 당의 기치를 강요하는 강성 기관장도 아니었다. 우유부단한 성격에 자기 안위와 자리보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형적인 관료 타입이었다. 그러나 그런 먀흐킨도 바자회 우승만은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극장은 문화국 소속이라 굵직굵직한 정치 경제 기관들에 비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공공기관이 모이는 대회에서 하나라도 우위를 차지하고 싶은 것이 기관장의 속내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가을 체육대회 때도 포기하고 있다가 왕재수의 운동신경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자 부득부득 그를 모든 경기에 다 밀어 넣은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3년 연속 바자회 우승이라는 타이틀이야말로 먀흐킨의 은밀한 기쁨이었는데 난데없이 왕재수의 방해로 극장 부스는 파리만 날리고 어이없는 KGB 부스가 히트를 치고 있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이다.

 

 

급기야 그는 자신의 비서를 감독실로 보내 왕재수의 스카프 몇 장과 실크 셔츠 두 벌, 취임식 때 딱 한번 매고는 처박아둔 넥타이를 쓸어오게 했다. 그리고는 의욕 없이 서 있던 사무국 직원들을 내몰고 자기가 직접 판매대 앞에 서더니 스카프와 셔츠를 펄럭펄럭 흔들며 소리쳤다.

 

 

외제 명품이오! 레닌그라드 최고 멋쟁이가 몸에 걸쳤던 스카프와 셔츠, 넥타이! 우주 최강 꽃미남 미샤 야스민 감독이 어제까지 입었던 옷가지! 스카프 한 장에 200루블! 셔츠는 300루블! 넥타이 150루블! ”

 

 

여자들이 모여들며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다.

 

 

“ 우와, 꽃돌이 감독님 옷이래! ”

 

“ 꺄아, 저 스카프! 저거 프랑스제 명품 아니야? ”

 

“ 아악, 미샤가 입었던 거라니!!! 저건 무슨 일이 있어도 사야 해! ”

 

“ 근데 너무 비싸네... 바자회 물건이 이렇게 비싸면 어떻게 해... ”

 

“ 나스첸카! 나 50루블만 꿔주면 안되니? ”

 

 

여자들이 서로 지갑을 뒤지면서 난리를 쳤다. 베르닌과 보랴는 고개를 쭉 빼고 그 소란을 지켜보았다. 렐랴와 알렉산드라, 리자가 헐레벌떡 뛰어가서 여자들 사이로 끼어드는 게 보였다. 그때 스페호프가 베르닌의 곁으로 다가왔다.

 

 

“ 음, 우리는 이제 다 팔았나? ”

 

“ 예, 국장님. 매진입니다. 직원들의 기부물품이 남아 있습니다만 이것들은 전혀 팔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

 

“ 그래, 매상이 얼마나 올랐나? ”

 

“ 대략 2800루블 정도 됩니다. ”

 

“ 그래! 그러면 우리가 우승일 수밖에 없군. 먀흐킨이 지금 불여우의 옷쪼가리를 팔아보겠다고 난리인데 정신 나간 계집애들이 저걸 다 산다고 해도 스카프 세 장에 600루블, 셔츠 두 장 600루블, 거기에 넥타이 150루블이니 다 합치면 1350루블이고 거기에 자질구레한 거 더 팔아봤자 2000루블을 넘길 수는 없어. 이미 다른 부스들도 다 가봤네. 2500루블 넘는 부스는 안 나올 거야. 우리가 우승하는 걸세, 다닐! 정말 수고했네! 그리고 당신, 보리스! 수고했소. 당과 KGB는 당신의 노고를 잊지 않을 것이오! ”

 

 

보랴는 당과 KGB 운운하는 말에 콧방귀를 뀌려다가 베르닌을 생각해서 참는 것처럼 보였다. 베르닌은 국장이 보랴의 부업인 밀수업에 대해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조마조마해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그나마도 저렴했던 넥타이가 팔려나갔다. 구매에 성공한 어떤 여자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 넥타이를 꼭 껴안고 뺨에 비비고 뽀뽀를 했다. 다른 여자들이 부러워하며 그녀를 둘러싸고는 ‘어머나, 좋겠다!’, ‘우와, 넥타이 너무 근사하다’, ‘아아, 미샤가 목에 맸던 타이라니!’, ‘향기 너무 좋아!’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신이 난 극장장이 스카프와 셔츠도 팔아보려고 목청을 높이는데 갑자기 꺅꺅 하고 여자들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디선가 후광이 일면서 왕재수가 불쑥 나타났다. 온천에서 막 돌아오면서 광장을 지나치던 길인 것 같았다. 왕재수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 내 스카프!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야!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 대체 뭐하는 거예요! ”

 

 

먀흐킨이 화들짝 놀랐다. 스카프와 셔츠를 내려놓으며 변명을 했다.

 

 

“ 아, 아니 그게... 자네가 무용수들도 못 나오게 하고 물건도 기부 못하게 해서 워낙 우리 부스가 죽을 쑤니까 자네 옷가지라도 몇 개... 이거 전부 자네는 안 입는 거 아닌가... 자네는 워낙 옷이 많으니까... ”

 

무슨 소리예요! 이거 다 내가 좋아하는 건데! 누구 맘대로 남의 스카프랑 옷을 팔아요! 이리 줘요!

 

 

왕재수가 정색을 하면서 스카프 세 장과 셔츠 두 장을 낚아챘다. 먀흐킨이 조국과 당과 극장의 명예 어쩌고 하며 어떻게든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왕재수는 발칵 화를 냈다.

 

 

극장의 명예는 작품으로 말하는 거지 남의 옷을 도둑질해서 팔아먹으면서 무슨 명예 타령이에요! 당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러면서 왕재수는 스카프와 셔츠를 둘둘 말아서 마침 옆에 다가온 류드밀라에게 감독실에 도로 갖다놓으라고 건네주었다. 류드밀라는 잽싸게 옷을 챙겨서 부스 뒤로 사라져버렸다. 모여들었던 여자들이 한숨을 쉬고 실망하며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먀흐킨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자네... 자네... 이건 용납할 수 없어! 아무리 자네가 천재에 매일 공연을 매진시켜도 그렇지...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야! 우리 극장은 3년 동안 바자회 우승을 했단 말이야! 이렇게 허무하게 몰락할 수는 없어! 그것도 저 빌어먹을 KGB의 딸기 아가씬지 뭔지한테 당할 수는 없다고! 좋아! 보안위원회에서 딸기 아가씨를 내세운다면 우리한텐 더 좋은 게 있지!

 

 

 

그러더니 먀흐킨은 사무국에서 제일 덩치 좋은 남자 직원 두 명을 불러내서 잠깐 속닥속닥했다. 옷을 되찾은 왕재수가 막 부스를 빠져나가려는데 덩치 좋은 두 남자가 뒤에서 그를 붙잡더니 번쩍 들어서 좌판 위에 올려놓았다. 당황한 왕재수가 ‘뭐야!’ 하고 소리치려는데 먀흐킨이 있는 목청 없는 목청을 다 짜내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가브릴로프 극장 부스 마감 행사입니다!

연방과 우리 가브릴로프의 초특급 슈퍼스타! 우주 최강 꽃미남! 눈빛만으로도 여심을 버터처럼 녹이는 최고의 왕자님! 우리의 미샤 야스민 감독입니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기회! 우리의 미셴카와의 데이트를 건 경매!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숙녀에게는 미샤를 집으로 초대해 저녁 식사를 만들어주고 행복한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어서 참여하세요! 금액은 500루블부터! 시작!

 

 

왕재수가 너무 놀라서 뭐라고 항의하려는 순간 여기저기서 여자들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 500! ”

 

“ 550! ”

 

“ 600! ”

 

“ 800! ”

 

“ 1000! ”

 

“ 네, 1000루블 나왔습니다! ”

 

“ 1100! ”

 

1500!

 

“ 헉, 1500이라니... ”

 

“ 누구야? ”

 

 

다들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먀흐킨조차도 깜짝 놀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미모의 조카딸인 렐랴가 토끼 머리에 딸기 에이프런 차림으로 달려와서 1500루블을 불렀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그야말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왕재수가 미약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 아, 아니! 누구 맘대로 날 팔아! 나 안 해! 나 이런 거 안 해! ”

 

시끄럽네! 무용수도 안 내주고 물건 기부도 못하게 하고 자기 옷도 못 팔게 했잖은가! 최소한의 감독 노릇은 해야 할 거 아닌가! 다 못하게 했으니 자네가 몸으로라도 때우게! 자, 1500까지 나왔습니다! 이거 다들 우리 미셴카의 진가를 몰라주는 거 아닙니까! 이런 우주 최강 꽃미남과 무슨 재주로 데이트를 하겠습니까! 지금밖에 기회가 없단 말입니다! ”

 

 

먀흐킨이 손뼉을 치며 부추겼다. 어떤 여자가 큰 결심을 한 듯 소리쳤다.

 

 

“ 처, 천 육백! ”

 

“ 천 칠백. ”

 

 

렐랴가 회색 눈을 반짝거리며 침착하게 맞섰다. 베르닌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어느새 옆으로 모여든 남자들 몇몇은 자신들의 우상인 렐랴가 우주 최강 꽃미남에게 거액을 내거는 모습에 놀라고 절망해서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 자, 천 칠백. 더 없습니까? ”

 

2천!

 

 

걸걸한 목소리에 모두가 너무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보라색 눈 화장과 분홍색 볼연지, 짙은 빨간색 입술에 연두색 재킷, 노란 원피스와 빨간 구두 차림의 의장 부인 이리나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당황한 의장이 곁에서 아내의 팔을 잡아당겼다.

 

 

“ 여, 여보... 당신 체통이 있지... 당신은 이 바자회 추진위원장이잖소... ”

 

시끄러워욧! 내가 전부터 미샤한테 저녁 좀 먹으러 오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맨날 바쁘다고 안 오고... 오늘은 어떻게든 미샤를 우리 집에 데려가야겠어요!

 

“ 하, 하지만 당신은 남편이 있고 그 남편이 바로 나... ”

 

누가 뭐래요! 아니, 누가 내 나이 반밖에 안 되는 예쁜 꼬마랑 잠이라도 자겠대요? 그냥 밥해주고 저녁 시간이나 같이 보내자는 거지! 당신 지금 유치하게 질투라도 하는 거냐고욧!

 

“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아아... ”

 

 

먀흐킨은 모른 척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 자아, 그러면 2천이 나왔습니다. 상당한 고액이군요. 더는 없는 것 같으니 그러면 이리나 표도로브나에게 낙찰을... ”

 

2천 2백.

 

 

렐랴가 결심한 듯 나섰다. 먀흐킨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렐렌카... 이제 그만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미샤는 네가 굳이 이렇게 안 해도 나중에 따로 저녁 식사를... ”

 

2천 2백이라고 했어요!

 

 

렐랴가 회색 눈에 불꽃을 이글거리며 소리쳤다. 두 명의 남자에게 붙들려서 좌판 위에 서 있는 왕재수는 대체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분간이 안 되는지 완전히 멍해진 표정이었다. 먀흐킨은 포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그러면 2천 2백... ”

 

3천!

 

 

이리나가 꽥 소리를 질렀다. 너무나 거액이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바자회에 온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렐랴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입술을 열었다. 막 ‘3천 백...’ 이라고 말하려는데 이리나가 렐랴를 똑바로 쏘아보더니 마녀처럼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똑바로 해, 렐랴! 잡지 문 닫고 싶어?

 

 

 

렐랴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라고 대들려고 했지만 허리에 손을 갖다 대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태세를 갖춘 이리나의 야수 같은 모습과 잡지 문 닫고 싶으냐는 협박에 질린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자존심이 팍 상한 듯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왕재수를 쳐다보며 억지로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 좋아요, 미셴카. 난 우리 바자회 목적을 생각해서 거액 기부를 해보려고 했던 건데 이리나 표도로브나가 더 봉사 정신이 투철하신가 보네요. 우리는 나중에 따로 봐요! ”

 

 

그리고는 렐랴가 포기했다. 먀흐킨이 신나게 소리쳤다.

 

 

그러면 3천 루블로 이리나 표도로브나가 우리 감독과 저녁 데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돈을 주시면 미샤를 보내드리지요!

 

 

이리나는 당당하게 걸어가더니 장부에 3천 루블이라고 적고 사인을 했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눈을 부라리며 어서 가서 3천 루블을 찾아오라고 명령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의 의장이 어깨를 떨어뜨리고 터벅터벅 은행으로 향했다. 먀흐킨은 이리나가 당연히 금액을 지불할 것을 믿는다며 그녀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현금이 도착하기 전에 왕재수를 건네주겠다고 했다.

 

 

완전히 넋이 나간 왕재수가 중얼거렸다.

 

 

“ 이게 뭐야... 아니야, 이건 꿈이야... 아니야... ”

 

이리 와요, 미셰츠카! 내가 전부터 그렇게 밥 좀 먹자고 했는데 매일매일 바쁘다고 도망가고! 우리 집에 가요! 내가 맛있는 거 해 줄 테니까! 돼지비계 절임에 기름 케익이랑 초콜릿 무스랑~ 아유, 정말 사내아이가 어쩌면 이렇게 예쁘담. 아이고, 우리 미셴카 이 피부 좀 봐! 매끈매끈하고 하얀 게 진짜 곱네! 내가 십년만 젊었어도...

 

 

이리나는 기쁨에 들떠서 우악스러운 팔로 왕재수의 허리를 꼭 껴안고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자기 차로 갔다. 왕재수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악당들! 이건 탄압이야! 예술가를 팔아넘기다니! 아아아!

 

 

 

 

 

*    *    *

 

 

 

 

 

그리하여 바자회는 끝났고 가브릴로프 극장이 3천 루블이 넘는 매상으로 4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KGB 부스는 2위에 머물렀다. 1위 발표와 시상은 원래 바자회 추진위원장인 이리나의 몫이었지만 그녀는 왕재수를 낚아채 이른 저녁 식사를 만들어주겠다며 이미 집으로 사라졌고 남편이자 의회 의장인 블리즈네초프는 3천 루블을 찾으러 가느라 역시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추진위 부위원장인 콤소몰 청년의장이 대신했다.

 

 

 먀흐킨은 감격해서 훨훨 날았고 이 기쁨을 가브릴로프 극장 식구들과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소리쳤다. 스페호프는 펄펄 뛰었지만 가브릴로프를 주름잡는 최고 가문의 이리나가 결정한 일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역시 반동분자 불여우가 만악의 근원이라며 이를 갈더니 두고 보자면서 부르르 떨며 사무실로 돌아가 버렸다.

 

 

 

베르닌은 장부와 2800루블, 남은 기부 물품들을 바자회 추진위원회에 모두 전달한 후 알렉산드라와 리자, 보랴와 함께 부스를 정리했다. 보랴는 시계를 보더니 아쉬워했다.

 

 

“ 벌써 다섯 시가 다 됐구만. 저녁 타임이라 난 들어가야겠다. 잔디밭에서 맥주라도 한 잔 하면 딱 좋겠는데... ”

 

“ 보랴, 정말 고마웠어요. 그렇게 맛있는 블린은 처음이었어요! ”

 

“ 맞아요! 극장장이 꽃돌이 감독님을 팔아먹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우승이었는데! 그래도 너무 재미있었어요! ”

 

 

리자가 보랴를 와락 껴안고 뺨에 뽀뽀를 했다. 보랴는 벙글벙글 웃었고 베르닌의 손을 꽉 잡아 흔들었다.

 

 

“ 그러게! 극장장 그놈이 머리는 좋다니까, 우리 애기를 이용하다니! 불쌍한 녀석... 이리나 요리 솜씨 최악인데... ”

 

“ 으윽... 분명히 돌아와서 나한테 다 화풀이하겠지...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벌써부터 ‘기름기!’, ‘시골!’ 하고 소리 지르며 애꿎은 자신에게 바가지 긁는 왕재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보랴는 쿡쿡 웃었고 프라이팬과 반죽 그릇을 챙겼다. 가기 전에 돌아서더니 알렉산드라를 꼭 껴안았다. 알렉산드라는 두 팔로 보랴의 목에 매달리며 뽀뽀를 했고 ‘있다가 봐, 보르카!’ 하고 인사를 했다.

 

 

 

보랴가 돌아간 후 베르닌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차에 실었다. 그때 리자가 투덜댔다.

 

 

우리 사무실 들어가지 말아요! 이렇게 고생했는데! 지금 들어가봤자 퇴근 시간이잖아요! ”

 

“ 그래! 리자 말이 맞아! 외부 행사 차출돼서 이렇게 일했는데 왜 또 사무실 들어가니! ”

 

“ 하, 하지만... 물건들도 갖다놔야 하고 전 일도 많이 밀려 있고... ”

 

“ 물건들이야 내일 캐비닛에 대충 쑤셔 박으면 되죠! 그리고 다냐! 당신이야말로 진짜 들어가면 안돼요! 보나마나 또 서류철에 파묻혀서 밀린 서무 일하느라 야근하고 밤 샐 거 아니에요! 오늘은 못 가요! 오늘은 끝! 딸기 아가씨들의 명령이에요! 날도 따뜻한데 우리 여기 잔디밭에 앉아서 맥주 딱 한잔씩만 마시고 가요! 아까 보랴가 우리 먹으라고 닭튀김 챙겨왔단 말이에요. ”

 

“ 맞아, 까맣게 잊고 있었네! 보르카가 만든 닭튀김은 식어도 진짜 맛있어. 우리 맥주랑 이거 먹자! ”

 

 

베르닌은 안된다고 하려고 했지만 알렉산드라가 딸기무늬 에이프런을 잔디밭에 펼쳐놓고는 종이봉지를 찢어서 그 안에 있던 황금빛 갈색의 바삭바삭한 닭튀김을 좌르르 쏟아놓자 그만 정신이 멍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베르닌은 잔디밭에 앉아 알렉산드라와 리자와 함께 맥주를 마시고 닭튀김을 먹었다. 맥주는 시원했고 닭튀김은 너무나 고소했다. 해는 서서히 넘어가고 있었지만 바람이 따스했고 부드러웠다. 정말 봄이 온 게 분명했다.

 

 

   

 

 

 

FIN

- 2015. 10. 4 ~ 10. 16 -

 

 

 

  ..

 

가브릴로프 극장장 먀흐킨은 본편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성격은 비슷한 점도 있고 좀 다른 점도 있지만.

 

..

 

초반에 서술된 왕재수의 신작 얘기는.. 그간 그 신작 올리려고 갖은 고생을 다 한 왕재수를 생각하면 신작을 근사하게 올리는 이야기를 1개 에피소드로 할애해 주는 게 맞는 것 같지만 그냥 넘어갔다. 그 이유는 본편의 주요 사건 중 하나가 미샤의 신작 이야기라서. 물론 본편에서 미샤가 준비하는 신작은 서무의 왕재수가 준비한 신작과는 내용도 형식도 완전히 다르지만. (근데 언제 쓰지...)

 

초반에 언급된 왕재수의 후원자들 이름들은 모두 본편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그 중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와 드미트리 마로조프는 미샤의 오래된 후원자이자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들이다.

 

..

 

나름대로 기분 풀려고 쓴 글인데 별 내용은 없었다만... 하여튼 35편을 조금 쓰고 있는 중인데 그건 언제 다 쓸지 모르겠네. 다음주까지 완결이 안되면 다른 글을 조금 올려보겠다.

 

..

 

글에 대한 이야기들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시고 절대로 가져가시거나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2015. 10. 24. 00:14

물방울들 russia2015. 10. 24. 00:14

 

 

네바 강.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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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10. 22. 23:48

빛이 필요해서 russia2015. 10. 22. 23:48

 

 

 

 

2월. 페테르부르크.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과 그리보예도프 운하.

 

아주 많은 빛이 필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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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10. 19. 20:53

극장 - 마린스키 russia2015. 10. 19. 20:53

 

 

 

 

 

 

 

 

 

7월. 발레 해적 보러 갔던 날.

맨 위 두 장은 마린스키 신관 내부.

세번째 사진은 공연 시작 직전, 운하와 마린스키 극장(구관)

마지막은 공연 마치고 나와서 찍은 마린스키 신관. 7월 백야 막바지 시즌이라 캄캄하지는 않다.

 

..

 

 

이 바닥에는 미치도록 환멸이 느껴지는데 그래도 극장은 그립다. 극장에서는 일을 안 해봐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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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10. 18. 14:58

춤, 무용수들, 극장 사진 몇 장 dance2015. 10. 18. 14:58

 

 

마음의 위안을 위해.

마린스키 발레단 '곱사등이 망아지' 홍보 이미지. 왼편에 있는 여왕 역은 알리나 소모바.

러시아어를 아신다면 이 무대 세트 자체로 '곱사등이 망아지'라는 러시아어 제목을 형상화하고 있는 게 보이실듯. 재기넘치고 발랄한 이미지이다.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최근.

1948년 1월생이니 올해로 67세이지만 여전히 춤을 춘다. 여전히 근사하다.

이번에 소련 시절 미국으로 망명했던 시인 브로드스키를 소재로 한 작품 무대에 올랐다. 아침에 꽤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무용수로서도 위대하지만 굉장히 똑똑하기도 한 사람이다.

내게 러시아어를 전공하게 했던 두 사람 중 하나.

 

 

 

이 사람은 마린스키 발레단의 신예 무용수 다비드 잘례예프.

사진은 '아가씨와 건달' 중 주인공 건달을 추는 모습.

 

 

 

 

 

위안을 위해 슈클랴로프 화보 몇 장.

저승 세계의 오르페우스, 유리 스메칼로프 안무.

사진은 Irina Tuminene

출처는 슈클랴로프의 인스타그램.

 

 

 

사진은 alex gouliaev.

신데렐라의 왕자를 추는 중. 출처는 슈클랴로프의 인스타그램.

 

 

 

라이몬다. 빅토리야 테료쉬키나와 함께.

사진은 Matt Masin.

 

 

 

라이몬다.

옥사나 스코릭과 함께.

이 아름다운 극장은 마린스키.

 

 

 

이건 마린스키 극장 브 콘탁테 페이지에서.

마린스키 신관 무대 백스테이지. 발레 '카니발' 시작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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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10. 15. 21:01

빛과 그림자 russia2015. 10. 15. 21:01

 

 

겨울.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아주 추운 날이었다. 춥고 맑은 날.

 

지난 5월에 아플때도 그랬지만 심신이 매우 힘들고 아플 때 가끔 이날 찍었던 사진들을 보게 된다. 이날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는 아주 밝은 빛과 아주 차가운 얼음, 그리고 그림자가 다 있었다. 위안을 받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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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10. 13. 21:39

숨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russia2015. 10. 13. 21:39

 

 

 

궁전 교각. 2월, 페테르부르크.

다리 아래 어둠 속에 오리 두 마리가 숨어 있음. 마음의 위안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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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10. 9. 22:31

아틀라스 발 아래에서, 행운을 빌며 russia2015. 10. 9. 22:31

 

 

전에 한두번 사진 올린 적이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 건물에 장식되어 있는 아틀라스 조각상들.

 

이 조각상의 발을 만지면(정확히 말하면 발가락들)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있다. 아틀라스의 힘과 마법의 정기를 받는다는 것이다. 특히 신랑신부가 조각상의 발가락을 만지면 행복하고 오래오래 살고 그들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은 미남미녀가 된다나.

 

결혼하려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아틀라스의 발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해서 나도 전부터 여기 지나갈때마다 발가락을 만져보고 싶다..라고 생각만 하고 어쩐지 부끄러워서 못해보다가 지난 여름에 갔을때 조각상 발을 전부 만져봤다. 발가락 하나하나 전부. 조각상이 10개였던 것 같은데 그럼 발가락이 100개인가.. 하여튼 생각보다 많았다. 이미 발가락 만지고 있는 사람들에 사진 찍는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돌아가면서 천천히 해봤다. 저 10명 중에서도 특히 마법이 센 거인이 하나 있는데 바깥쪽에서 두번째 있는 애라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다 만져보자 하고 다 만져봄.

 

너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이때를 생각하며.. 아틀라스들아, 거인들아, 내게 힘을 주렴. 행운 좀 줘요 ㅠㅠ

 

 

 

 

 

 

 

내가 이렇게 만지고 있는 조각상들은 전부 다른 조각상들이다.

 

단단하고 차갑고 매끄러웠다. 더운 날이라 그런지 조각상 발을 문지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꽃도 놓여 있었다. 아마 신랑신부가 놓고 간 꽃인 듯.

 

 

 

신랑이나 약혼자는 없지만.. 생기게 해줘요. 아니면 행운이라도 줘요.

 

 

 

 

 

그렇게 거인의 발가락들을 다 만져보고 천천히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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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서무의 슬픔 시리즈 자체가 내가 원래 쓰고 있던 미샤가 나오는 본편이 너무 안 풀리는데다 직장에서 겪는 스트레스가 심해서 이를 풀어보고자 쓰기 시작한 외전이다. 그러나 이 외전 시리즈도 점점 계속되다 보니 어느새 꼬리를 쳐서 외전의 외전 격으로 번외편인 민담 패러디나 등장인물 문답 같은 것이 나왔고, 급기야 댓글들에서 탄생한 일명 우수한 단추인 드미트리 베르닌이 등장하게 되었다.

   

드미트리 베르닌은 다닐 베르닌의 분신 같은 존재로 이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일종의 평행우주 외전이어야 말이 잘 될 것 같다만, 30편에서 33편까지 총 4편의 드미트리 출연 에피소드를 쓰면서 나는 이것들을 정식 서무 시리즈로 생각하며 썼다. 드미트리는 그냥 다닐과 외모가 쌍둥이 같고 배경이 거의 비슷한 인물일 뿐이라고.

   

그렇게 우수한 단추 4부작은 완료가 되었지만, 사실 그 4부작에서 마무리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어서 이것을 별도의 에피소드라기보다는 33-1편으로 명명해 올린다. 이번 편은 읽는 사람에 따라 마음에 들 수도 있고 안 들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지 ㅠㅠ

   

그래도 재미있게 읽으세요!

 

** 초반부에서 스페호프가 말하는 '크레믈린'과 '스몰니'에 대해. 크레믈린은 모스크바에 있고 스몰니는 레닌그라드(현재의 페테르부르크)에 있다. 두 대도시의 정치 본거지이다.

 

 

* 이번 33-1편은 반드시 드미트리 베르닌이 나오는 30~33편을 먼저 읽어야 함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납치되었던 왕재수는 베르닌과 드미트리의 활약으로 무사히 구출된다. 다음날 아침 드미트리는 모스크바로 떠나고 왕재수는 이틀 앞으로 다가온 공연 준비에 여념이 없다, 베르닌은 그런 그의 곁을 지키다 스페호프의 갑작스런 호출을 받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 http://tveye.tistory.com/4062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2부) : http://tveye.tistory.com/4079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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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3-1

 

 

 

 

 

 

서무의 슬픔

- 도자기 인형 -

 

 

 

 

 

 

 

왕재수는 보르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9시에 집을 나섰다. 곧장 극장으로 가려고 했지만 베르닌이 단호하게 우겨서 병원에 들렀다. 다행히 체온과 맥박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스타브로프는 전날과 같은 약초즙을 베르닌에게 한 병 건네주면서 세 번으로 나눠서 먹이라고 했다. 왕재수에게 직접 주면 단숨에 전부 마셔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무용수들은 모두 나와 있었다. 자신들의 예술감독을 보자 벌떼처럼 모여들어 괜찮으냐고 묻고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지만 왕재수가 인상을 팍 쓰면서 리허설 준비하라고 소리치자 금세 조용해졌다. 공연이 이틀 후로 다가왔기 때문에 10시 반부터 스페이스 리허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최종 드레스 리허설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용수들이야 분장을 할 필요가 없었지만 무대 스태프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옆에서 리허설을 지켜보았다. 전에는 왕재수의 신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었다. 항상 토막토막 연습을 시켰기 때문이다. 고전 발레가 아니어서 이렇다 할 이야기도 없고 뭔가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물 흐르듯 이어지는 음악에 맞춰 계속되는 작품을 보자 놀랍게도 굉장히 재미있었고 심지어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설명을 전혀 듣지 않고서도 무대 위의 무용수들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사람의 몸을 가지고, 다양한 움직임을 통해 이런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처음으로 베르닌은 왜 사람들이 왕재수에게 무용수뿐만 아니라 안무가로서도 천재적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과 같은 문외한조차 넋을 잃고 집중해 보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반체제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검열국과 스페호프가 트집을 잡은 이유는 작품 자체가 아니라 왕재수에 대한 증오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왕재수는 중간 중간 짧은 지적을 하기도 하고 리허설을 잠깐씩 중단시키기도 했다.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매서웠다. 연습실에서나 무대 리허설 때는 언제나 그렇듯 불어와 러시아어를 마구 섞어 썼다. 동작이 틀리는 무용수는 그 자리에서 집어내 정확하게 교정했다. 물론 오케스트라도 피해가지 못했다. 코즐로프마저도 서너 차례 날선 지적을 받았다. 베르닌은 뭐가 잘못됐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왕재수의 교정을 받은 후 되풀이되는 무대는 놀랍게도 아까보다 더 보기 편하고 근사한 느낌이 들었다.

 

 

실제 공연은 한 시간 반짜리였지만 교정과 지적 탓에 1차 스페이스 리허설은 두 시간 반이 걸렸다. 왕재수는 무용수들에게 점심식사 후 2차 리허설을 할 거라고 예고했다. 무대 스태프들은 생각지 않은 반복 때문에 조금 툴툴댔지만 왕재수가 한번만 더 쫑알대면 드레스 리허설도 오늘 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자 금세 조용해졌다.

 

 

역시나 왕재수는 식사를 하러 나가지 않았다. 무대를 돌아다니며 동선 체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먼지투성이 작업복 차림의 그리고리가 올라오더니 깜짝 놀랄 만큼 상냥하게 말했다.

 

 

감독님, 잠깐만 무대 비워주세요. 조명 장치 쪽에 문제가 있어서 고쳐야 하거든요.

 

무슨 소리예요, 조명 정비한지 얼마나 됐다고. 당신은 조명 스태프도 아니잖아요.

 

메인 조명이랑 사이드 쪽 조명 고정 장치가 헐거워요. 아까부터 흔들리더라고요. 빨리 고쳐야 돼요. 안 그러면 위험하니까.

 

 

왕재수가 고개를 들어 조명을 확인하려는데 그리고리가 그의 팔을 잡더니 거의 안아 올리다시피 해서 무대 아래로 끌어내렸다. 불벼락을 내리겠거니 하는 베르닌의 예상과는 달리 왕재수는 고개를 쭉 빼고 조명 쪽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그리고리에게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물었다.

 

 

빠르면 30, 늦으면 한 시간은 걸리겠네요. 조명감독을 불러올까요? 아까 얘기하려고 했는데 얼굴도 안 보고 가버리더라고요. 스태프들은 우리 인부들을 무시하니까. 감독님이 얘기하셔야 할 것 같아요.

 

일단 먼저 고쳐요. 고친 다음에 조명감독한테 따로 얘기할 테니까.

 

, 그래도 될까요? 난 극장 스태프가 아니니...

 

조명 자체가 아니고 안전장치 손보는 거니까 괜찮아요. 발견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리가 다른 인부 하나와 함께 조명 장치를 고치는 동안 왕재수는 감독실로 갔다. 류드밀라에게서 일요일에 있었던 주요사항에 대해 보고를 받은 후 다시 나가려고 했기 때문에 베르닌이 그를 붙잡았다.

 

 

, 점심 먹어야 돼.

 

배 안 고픈데... 아침에 보르쉬 먹었잖아.

 

차이카. 스베촉. 내가 싸온 거. 세 개 중 하나 무조건 골라야 돼! 안 그러면 집으로 끌고 갈 거야!

 

 

왕재수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곧 포기하고 베르닌이 챙겨온 꾸러미를 풀었다. 치즈 샌드위치를 맨입에 덥석 베어 물었다. 베르닌은 우유팩을 뜯어서 건네주었고 삶은 달걀과 오렌지 껍질도 까 주었다. 왕재수는 전날과는 달리 샌드위치와 달걀을 곧잘 먹었다. 우유도 다 마셨다. 베르닌은 마음이 좀 놓였다. 그래도 오렌지는 반을 쪼개서 베르닌에게 내밀었다.

 

 

다 먹어. 오렌지 그거 한 개 얼마나 된다고. 좋아하잖아.

 

너도 좋아하잖아, 오렌지. 맨날 나만 주고.

 

한 개 더 있으니까 있다가 먹을게.

 

 

그러자 왕재수가 안심했는지 오렌지를 먹었다. 달다고 좋아하더니 결국은 세 쪽을 떼어서 베르닌에게 먹어보라고 주었다. 오렌지는 달고 시원했다. 문득 베르닌은 투레츠키에게 가서 파인애플 통조림이라도 사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납치되어 온갖 고생을 하고 온 왕재수가 가엾었다. 그리고 내색은 안 해도 드미트리가 떠나버려서 많이 속상할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울었는데... 간밤에는 전혀 몰랐을 텐데...

 

 

그러자 갑자기 드미트리의 팔에 안겨서 키스를 하고 있던 왕재수의 모습이 어른거려서 베르닌은 뺨이 화끈거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왕재수는 코즐로프와 있을 때도 베르닌이 있든 말든 뜨겁게 키스와 애무를 주고받았으므로 새로울 것도 없었는데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드미트리가 자신과 얼굴이 똑같아서 그런 것 같았다.

 

 

드미트리 싫다더니, 말 한 마디 안 섞고 마카롱이랑 코코뱅도 안 먹더니 그렇게 사랑을 나누고... 하여튼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라니까.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약초즙을 따라주었다. 왕재수는 차는 안 주고 약만 준다고 툴툴대면서도 약초즙을 다 마신 후 시계를 보더니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웠다.

 

 

15분 후에 깨워줄 수 있어?

 

, 15분 가지고 피로가 풀리겠냐! 한 시간은 자야지!

 

시간 없는 거 알면서.

 

그러면 30분 후에 깨워줄게. 어차피 애들 밥 먹고 오면 그 정도 되잖아.

 

조명 장치 고친 거 가서 확인해봐야 된단 말이야. 그래야 안심하고 리허설 다시 하지. 애들 무대 위에 있는데 그거 떨어지면 큰일 나. 그리고리가 발견해줘서 다행이긴 한데, 전문 스태프가 아니니까 혹시라도 부착하면서 부품을 잘못 건드리면 조명도 문제 생긴단 말이야. 그러니까 잘 붙은 거 보고 조명감독도 데려와서 확인시켜야 돼.

 

내가 가볼게. 그러면 되잖아. 잘 붙어 있는지는 나도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거 보고 나서 류다한테 조명감독 불러달라고 할게. 30분 후에 무대로 오라고 하면 되잖아. 그러면 네가 그 사람한테 얘기해. 됐지? 좀 자라.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 베르닌은 재킷을 벗어서 왕재수에게 덮어준 후 나와서 류드밀라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미하일이 어제 많이 힘들었어요. 잠깐 눈 좀 붙이게 했으니까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하세요. 특히 검열국에서 누가 오면 절대 못 들어가게 해야 돼요. 모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리고 레베진스키, 혹시라도 극장에 나오면 꼭 저한테 알려주세요.

 

알았어요.

 

 

류드밀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예상 외의 질문을 했다.

 

 

다닐, 어제 미샤 그냥 아팠던 거 아니죠?

 

? ... 무슨 뜻이죠?

 

내가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요! 당신 그저께부터 자꾸 레베진스키랑 잔나에 대해 물어보고. 게다가 우리 감독님이 어떤 사람인데! 미셴카가 아무리 아파도 지금 같이 중요한 때 그렇게 무단으로 결근할 리가 없어요. 못 나오더라도 자기가 직접 전화를 했을 거예요. 무용수들에 대해 이것저것 지시라도 했을 거고요. 팔다리가 다 부러졌어도 전화했을 거라고요. 지금도 검열국이니 모르는 사람이니 하는 걸 보니 분명히 주말에 스페호프가 수작을 부렸던 거예요.

가뜩이나 지난번 돈키호테랑 독사과도 그렇고 화재도 그렇고... 애들도 어제 많이 걱정했어요. 감독님한테 말은 안 해도 자기들끼리 엄청 조심하고 있다고요. 먹는 것도 도시락 싸오거나 아예 스베촉에 가서 먹어요.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함부로 얘기도 안 하고요. 나도 레베진스키 주시하고 있어요. 잔나도요. 그 둘이 감독님 반대파 선봉이니까요. 스태프 쪽은 로만이랑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체크하고 있고, 화재 이후부터는 그리고리한테 무대랑 창고 쪽 매일 확인하라 했어요.

 

... 류다... 난 몰랐어요, 당신이 그렇게 신경 쓰고 있는 줄... 왜 나한테는 얘기 안 했어요?

 

당신은 KGB잖아요! 물론 당신이야 의심은 안 해요. 착한 사람이고 미셴카를 끔찍하게 아끼니까.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스페호프에게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잖아요! 당신은 너무 순진하다고요!

 

... 근데 왜 지금은 나한테 이런 얘기 해주는 건데요!

 

수요일 공연 잘 올려야 하니까 그렇죠. 수요일에 높은 분들 엄청 많이 온다면서요... 그거 성공하면 우리 미셴카 복권되고 다시 수도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불쌍한 우리 감독님... 저렇게 열심인데 망할 놈의 스페호프가 계속 괴롭히고. 어제 무슨 일 있었던 거 맞죠?

 

... 나중에 미샤한테 물어보세요... 근데 조심해야 하는 건 맞아요.

 

알았어요. 내가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 얼른 무대 다녀와요.

 

 

그래서 베르닌은 무대로 갔다. 마침 뒤쪽 사다리에서 내려온 그리고리가 손을 흔들었다.

 

 

다 됐어. 메인이랑 사이드 3번만 문제가 아니었어. 백스테이지 쪽 메인 구동장치도 부품이 몇 개나 빠져 있었어. 꼬마 감독님이 꼭 그쪽에 서서 무대 지켜보던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니까! 어휴, 식은땀이 다 나네. 더러운 놈들 같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더러운 놈들이라니.

 

금요일부터 뭔가 좀 이상하더라고. 레베진스키가 자꾸 조명이랑 백스테이지 쪽을 왔다갔다 하는 거야. 꼬마 감독님이랑 무용수들 연습실에 있을 때. 그러더니 시설관리팀 직원 하나랑 조명 쪽을 가리키면서 속닥속닥하더라고. 왜 있잖아, 머리 벗겨지고 배만 뽈록한 키다리. 낌새가 이상해서 쳐다보고 있으니까 나보고 가서 공사 마무리나 하지 왜 여기 얼쩡대느냐면서 화냈거든. 그래서 토요일 아침에 레베진스키가 왔을 때도 따라가 봤는데 감독실 쪽만 가고 무대 쪽은 안 가길래 그냥 잊어버렸거든.

근데 오늘 아침에 그 머리 벗겨진 키다리가 뒤쪽 사다리 타고 조명 쪽으로 올라가더라고. 뭔가 찜찜해서 계속 지켜봤는데 아까 리허설 할 때 보니까 조명이 흔들거리는 거야. 그거 떨어지면 어쩔 뻔 했냐고. 그리고 구동장치도 그래. 지난번에도 그쪽 장치 하나 잘못돼서 꼬마 감독님이 톱니에 다쳤잖아. 이번 것도 딱 그런 식이더라고. 그것도 자로 잰 듯이 딱 감독님이 서 있는 자리 쪽 장치만 고장 났어. 오늘이야 그 장치 쓸 일이 없지만 내일 드레스 리허설 한다며. 무대 장치 다 움직이면 뻔할 뻔자 미셴카는 다쳤을 거라고. 최소한 몸 어딘가는 짓이겨지는 거고 운 나쁘면 깔리는 거란 말이야! 3번 조명도 맨 처음에 미셴카가 무대 점검할 때 서는 자리야. 작정하고 손댄 거라고!

 

그럴 수가... 일단 조명감독하고 무대감독 불러야겠네요.

 

레베진스키하고 그 키다리, 그 두 놈은 절대 못 오게 해! 무대 쪽엔 얼씬도 못하게 하라고!

 

 

베르닌은 무대감독을 찾으러 갔다. 무대감독은 나이가 지긋했고 항상 코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술꾼이었지만 심성은 착했고 왕재수와도 잘 지내는 편이었다. 감독에게 조명과 구동장치의 이상을 설명하고 제대로 체크해달라고 청했다. 이번 공연에 높은 사람들도 많이 오고 모스크바에서도 관심이 많기 때문에 혹시라도 사고가 나거나 공연이 망쳐지면 모두들 책임 소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는 엄포까지 놓았다. KGB라는 점을 이용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굉장히 찔렸지만 왕재수를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무대감독은 매우 놀라더니 스태프들을 여럿 불러 모아 무대와 백스테이지를 전체적으로 확인하기 시작했고 2차 리허설은 3시 이후로 미루라는 메시지를 왕재수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   *   *

 

 

 

 

 

감독실로 갔더니 왕재수는 곤하게 자고 있었다. 너무 깊게 자고 있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정말로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두 눈 아래가 푹 패여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자기도 모르게 드미트리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아휴, 아무리 동경하던 우상이라 해도 그렇지... 밤새 얼마나 놀았으면 이 자식이 잠도 모자라고 이 모양이야. 그렇게 고생하고 온 애를 데리고.

 

 

그러다가 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이 자식, 겉으로는 문어발 치는 것 같아도 잘 보니까 진짜 마음에 드는 사람 아니면 잠자리 안 하는 거 같던데. 딤카한테 쌀쌀맞게 굴었어도 마음속으로는 많이 좋아했나봐. 딤카도 얘 구해주려고 그렇게 고생하고 총까지 맞고... 딱 하룻밤밖에 못 보냈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헤어지고. 둘 다 불쌍해.

 

 

그러다가 또 기분이 이상해지기도 했다. 주된 이유는 드미트리가 자신과 얼굴이 똑같기 때문이었다. 왕재수가 드미트리와 밤을 보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내 얼굴이랑 완전히 똑같은 녀석인데 그렇게 키스하고 잠자리까지 같이 하고... 그래놓고 나 보면 딤카 생각나서 이상하지 않을까?

 

 

그때 왕재수가 몸을 뒤척이며 끙끙거렸다. 아픈가 싶어서 이마에 손을 대보려는데 왕재수가 눈을 번쩍 뜨더니 소스라치듯 놀라며 두 손으로 베르닌을 떠밀었다.

 

 

저리 가! 저리 가!

 

... 미셴카. 나야, 다닐. 꿈꿨니?

 

...

 

 

왕재수가 숨을 몰아쉬더니 눈을 깜박거려서 졸음을 몰아내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는 베르닌을 쳐다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한숨을 쉬었다.

 

 

, 다닐이구나. 꿈꿨나봐. 지금 몇 시야?

 

두 시야. 근데 리허설은 세 시부터 할 수 있대.

 

 

베르닌은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다. 왕재수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그래, 그러면 세 시까진 애들 데리고 따로 연습해야겠다. 레베진스키가 그랬단 말이지...

 

너 정말 몰랐니? 그 작자가 너 감시하고 사진 찍고 무대 장치도 손대게 하고! 그 협박카드도 그렇고 레코드 목록이랑 인형도...

 

목록? 인형?

 

그 목 잘린 인형 말이야. 저기 창가에 있던 거 가져간 거잖아. 그 레코드 목록도! 카드에 작곡가 여섯 명 써놓은 거! 레베진스키가 네 방에서 레코드 뒤졌어. 그리고리가 다 봤대. 그 인간이 계속 네 방 몰래 드나들었대. 그놈이 스페호프 사주 받고 검열요원 그 자식이랑 결탁해서 너 납치하는 거 도운 거야. 진짜 나쁜 놈이야. 잘라버려!

 

, 그 인형.

 

 

왕재수는 협박카드와 목 잘린 인형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고개를 돌렸다. 베르닌은 다시금 분노가 솟구쳐서 이를 딱딱 부딪쳤다.

 

 

내가 그 자식들 혼내줄 거야. 레베진스키 그 자식은 강물에 거꾸로 처넣을 거고 데미도프 그 자식은 두들겨 패서 검은 숲에 구덩이 파고 묻어 버릴 거야! 그리고 우유랑 주스에 수면제 잔뜩 타서 먹일 거야! 우리한테 한 거 그대로 다 해 줄 거야!

 

바보 멍충이.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냐. 그냥 무시해. 어차피 나 무사히 돌아왔잖아. 공연만 잘 올리면 되지.

 

그치만... 네가 그렇게 고생하고... 딤카는 총까지 맞았잖아. 넌 어떻게 그러냐, 그렇게 못된 짓을 당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너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에 아는 사람들 있잖아. 이런 거 탄원하면 안 되니? 나야 KGB 내부 직원이니까 별 소용없다 치지만 극장 사람들은 도와줄 텐데. 언제까지 이렇게 해코지 당하고 위험에 빠져서 살 수는 없잖아. 넌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누가 아무렇지도 않대? 근데 지금 내가 떠들어봤자 해결되는 것도 없고 일만 더 꼬인다고. 그리고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모레 공연이란 말이야.

 

아니야! 누가 그래! 공연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단 말이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이 공연 올리려고 다들 얼마나 고생을...

 

! 너는 안 중요하냐! 공연이 뭐가 그렇게 소중하다고! 너 죽고 나면! 너 다치고 나면 무슨 소용 있냐고!

 

안 죽었잖아. 안 다쳤잖아. 그럼 된 거잖아. 다닐, 제발 이 얘기 그만하자. 나 너무 머리 아파. 무대까지 말썽이고... 나 내버려두면 안 돼? 제발.

 

하지만...

 

나 원래 기분 나쁜 일은 잊어버린단 말이야. 생각하기 싫어. 그런 일 있을 때마다 다 기억하고 되새겼으면 이제껏 어떻게 살았겠냐. 공연 잘 올리고 싶은데... 네가 자꾸 그 얘기하면 비둘기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다 생각난단 말이야. 기분 안 좋아.

 

 

왕재수가 너무 간절하게 말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입을 다물었다. 마음속으로는 그런 일 있을 때마다 는 뭐야! 대체 뭘 어떻게 하고 살았으면 기분 나쁜 일이 그렇게 많아서 다 잊어버렸다는 거냐고!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왕재수는 곧장 무대로 갔다. 무대감독과 스태프들, 조명감독까지 모두 와 있었다. 뚝딱뚝딱 소리를 내며 무대를 손보고 있었다. 왕재수는 베르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로 올라가 여기저기를 살피고 백스테이지의 구동장치도 훑어보았다. 무대감독과 조명감독에게 보고를 받은 후 따끔하게 야단을 쳤다. 무용수들 새끼손가락 하나라도 다치면 전부 모가지라고 버럭 화를 냈다. 왕재수가 스태프들에게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용수들을 아끼는 절반만큼이라도 자기 몸을 생각하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에 베르닌은 혀를 찼다.

 

 

잠시 후 머리가 벗겨진 키다리 스태프가 불려왔다. 왕재수가 키릴 수보로긴이라고 이름과 성을 호명하자 키다리가 화들짝 놀랐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왕재수는 날카롭게 그를 추궁했다. 조명과 무대 구동장치를 손댄 이유가 무엇이냐고 다그쳤다. 수보로긴은 그런 적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증거가 없지 않느냐고 버텼다. 무대감독은 펄펄 뛰었지만 조명감독은 수보로긴이 베테랑 조명 기술자인데 그럴 리가 없다고 변호를 했다. 왕재수는 차갑게 말했다.

 

 

수보로긴. 당신 징계야. 일주일 근신. 극장에 나오지 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증거도 없는데 누명을 씌우다니! 감독이면 다야! 항의 성명 제출할 거예요!

 

항의 성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증거가 왜 없어. 목격자도 있고 3번 조명 장치에 묻어 있던 당신 지문도 다 채취했거든. 계속 떠들면 1차로 극장 징계위원회, 2차로 인민재판 연속으로 회부할 거야. 무용수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국가 예산으로 추진되는 공연을 방해했다는 죄목이야. 난 전자가 더 괘씸하지만 아마 재판에서는 후자 때문에 위중하게 처벌받을 걸. 과대 협박한다고 생각하지 마. 난 반동분자잖아, 징계위원회고 재판이고 많이 받아봤거든. 그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당신보단 백배 천배 잘 알아. 감옥 갈 준비나 해.

 

억울해! 난 아무 것도 몰라요! 난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란 말이야! 니콜라이 안토노비치가 조명 위치를 바꿔놔야 한다고 지시해서 따른 것뿐인데... 구동장치도 그쪽 부품 갈아야 하니까 빼놓으라고 한 거란 말이에요!

 

 

지문 채취는 한 적이 없었으므로 왕재수가 그냥 겁을 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너무 진짜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조차도 순간 , 저 녀석 대단하다란 생각이 들었다. 수보로긴의 항의에 스태프들이 웅성거렸다. 그를 변호하던 조명감독조차 얼굴이 파래졌다. 무대감독이 코를 더욱 빨갛게 붉히며 버럭 화를 냈다.

 

 

뭐가 어쩌고 어째! 레베진스키의 지시를 받았다고? 그놈이 무대 쪽 사람도 아닌데 어째서 그 인간 지시를 받아! 나와 조명감독 외에 그런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극장장님과 예술감독님 뿐이라고! 네놈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의 지시를 따라야 할 것 아냐! 어째서 그 망할 놈의 뺀질이 레베진스키의 말을 듣는 거냐! 게다가 네놈이 1~2년 된 초짜도 아니고 이 극장에서 10년 넘게 잔뼈가 굵은 놈인데 그래, 그 무식쟁이 레베진스키가 조명 위치 운운, 구동장치 부품 운운하는 걸 곧이곧대로 믿었을 리가 있냐고! 누가 봐도 네놈하고 레베진스키하고 결탁해서 공연 망치려고 한 거잖아! 이 망할 자식아, 넌 모가지야!

 

아니에요! 난 억울해! 그리고 당신이 감독도 아닌데 모가지 운운할 수 있어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난 억울해요! 레베진스키가 아무리 임원급이 아니라 해도 옛날부터 여기 터줏대감이라 우리한테 엄청 갑질을 한단 말이에요. 수석안무가니까 나 같은 스태프에겐 그래도 윗사람이라고요, 지시를 어길 수가 없었다고요! 제발 저 자르지 마세요. 재판 회부하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전 진짜 그런 생각 없었어요. 무용수들 다치게 할 생각 전혀 없었다고요. 전부 레베진스키가 그런 거예요! 진짜예요!

 

 

왕재수는 수보로긴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검은 눈에 파란 불빛이 번쩍거렸다. 베르닌은 스네고로드를 떠올렸다. 뒤로 물러서던 아르투르를. 수보로긴도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리며 뒤로 물러섰다. 왕재수는 여전히 수보로긴을 주시하며 낮게 말했다.

 

 

지금 말한 내용 전부 해명서 써서 제출해. 일주일 근신하고. 한 달 동안 메인 무대 조명 접근 금지야.

 

, ... 알겠어요. 그러면 저 재판에 거는 건 아니죠? 자르는 것도 아니고요? ?

 

그거야 당신 하는 짓에 달려 있지.

 

그렇게 할게요, 감독님.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앞으로는 정말 잘할게요. 그 망할 놈의 레베진스키 때문이에요.

 

 

수보로긴은 훌쩍훌쩍 울면서 몇 번이나 왕재수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무대에서 내려갔다. 왕재수는 무대감독에게 3시에 정확히 리허설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하고는 연습실로 갔다.

 

 

무용수들은 이미 모두 모여서 자기들끼리 연습을 하고 있었다. 리허설이 미뤄졌다는 소식도 들은 후였다. 왕재수는 오전 리허설 때 지적했던 무용수들을 차례로 불러내 동작을 다시 시켜보았고 몇 가지는 직접 시연해보였다. 그때 코즐로프가 들어왔다. 왕재수는 마침 잘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만 오시포비치, 파이널의 모차르트 좀 연주해줘요. 마지막 2분만. 가릭, 데니스, 타마라. 준비해.

 

 

코즐로프는 곧 바이올린을 들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무용수들 앞에서는 코즐로프에게 존대어를 쓰면서 매우 공적인 태도로 대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코즐로프도 마찬가지였다. 감독에 대한 그 깍듯한 태도를 보면 귀염둥이 우리 아기운운하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세 명의 주역 무용수들이 마지막 파트를 추고 나자 왕재수는 가릭에게 어깨를 좀 더 편하게 내릴 것을 주문했고 데니스와 타마라에게는 좋아하는 티를 더 많이 내라고 했다. 코즐로프가 다시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을 때 류드밀라가 연습실로 들어오더니 베르닌을 불렀다.

 

 

다냐, 웬 여자가 전화해서 당신을 찾네요. 복도 전화로 돌려놨으니까 거기서 받아 봐요.

 

, 여자요? 누구지? 나한테 전화할 여자는 없는데.

 

리자라고 하던데요.

 

, 리자? 웬일이지?

 

 

베르닌은 급하게 복도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 리자. 무슨 일이에요? 극장까지 전화를...

 

국장이 당신 좀 들어오래요.

 

? 저를요? 이유는 말 안 하고요?

 

. 그냥 지금 빨리 들어와 보라고만 했어요. 그럼 있다 봐요.

 

 

전화를 끊은 후 베르닌은 두 근 반 세 근 반 하는 가슴을 손으로 꼭 누르며 연습실로 갔다. 이미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다들 무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베르닌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왕재수를 쫓아갔다.

 

 

국장이 나보고 잠깐 들어오래. 나 얼른 다녀올게.

 

또 건전지 갈고 표지판 칠하고 배추밭 관리하래? 야근시키고...

 

잘 모르겠어. 늦을 것 같으면 류다한테 전화할게. 저기... 너 조심해.

 

조심할 게 뭐가 있냐. 오늘은 애들 리허설 시키고 몇 명만 나머지 연습시킨 다음에 들여보낼 거야. 나는 무대 배경이랑 의상이랑 음향 같은 것만 한 번 더 체크할 거고.

 

그래도... 아까 그 조명도 그렇고.

 

이제 다 확인했잖아. 얼른 가봐.

 

너 절대로 혼자 다니지 마. 백스테이지에 있을 때도 무거운 거나 위험한 장치 옆에 있지 말고. 알았지? 로만 곁에 꼭 붙어 있어.

 

여기가 집이냐, 극장이지. 쫑알대지 말고 빨리 가. 또 벌목공이 어쩌고 하는 개소리 듣지 말고.

 

 

그래도 불안감을 억누를 수 없었던 베르닌은 맨 뒤에 따라 나온 코즐로프에게 달려가서 왕재수를 잘 지켜볼 것을 신신당부했다. 코즐로프도 이미 조명과 구동장치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말고 가봐. 스페호프 그 자식이 또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 망할 놈이 우리 아기를 납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네. 그럴 기미만 보였다 하면 그 자식 인생 종치는 거야!

 

 

베르닌은 가슴이 철렁했다. 주말에 이미 왕재수가 납치됐다 돌아왔다는 사실을 코즐로프가 안다면 스페호프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도 그 키다리 깡패의 주먹에 가루가 될 것 같았다. 그는 어물어물 왕재수를 부탁하고는 급하게 극장을 나갔다.

 

 

 

 

 

*   *   *

 

 

 

 

 

사무실로 향하는 내내 베르닌은 걱정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미칠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장이 갑자기 자기를 보자고 하는 이유는 한 가지 뿐이었다. 드미트리와 자신이 힘을 합쳐 왕재수를 찾아냈다는 사실을 국장이 알아차린 것이다. 이미 드미트리가 스비제르스키의 끄나풀이라고 생각해서 연수도 조기 종료시켜 버렸으니 베르닌 자신에 대한 의심을 품는 것도 당연했다. 해고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왕재수에 대한 걱정으로 심장이 쿵쿵거렸다.

 

 

국장실 문은 꽉 닫혀 있었다. 노크를 하려는데 복도 저편에서 스페호프가 그를 불렀다.

 

 

, 왔군. 다닐, 뒤뜰로 좀 나가지.

 

 

베르닌은 스페호프가 뒤뜰로 향하자 더욱 불안해졌다. 평소 스페호프는 격식을 따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회의실이나 국장실에서 면담을 했다. 뒤뜰도 모자라 서무들의 안식처인 배추밭으로 향하다니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배추밭 너머에서 힐끗거리고 있던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스페호프를 보자마자 털을 있는 대로 곤두세우고 꼬리를 쭉 펴더니 위협적인 소리를 내고는 휙 사라져버렸다. 왜 아직도 도둑고양이를 퇴치하지 못했느냐고 야단을 맞을까봐 순간 겁이 났지만 스페호프는 고양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배추밭을 바라보며 우뚝 서더니 낮고 거친 음성으로 말했다.

 

 

작전은 모두 취소일세. 다닐, 무대 장치를 원상 복구해놓게. 살구 주스도 치워버리고.

 

 

베르닌은 어안이 벙벙했다.

 

 

? 원상복구... 살구 주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대 장치라면 메인 구동장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러니까... 야스민의 수요일 공연에 대한...

 

그럼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구동장치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다만. 하여튼 레베진스키가 얘기한 그것들 말일세. 조금 전에 크레믈린과 스몰니에서 각각 전언이 왔네. 불여우 녀석이 또 수작을 부린 게지. 수요일 공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혹은 불여우가 수요일까지 어딘가 아프거나 다치게 될 경우 그놈을 소관하는 우리 가브릴로프 KGB에게 모든 책임을 묻겠다는 거야. 심지어 벨스키 쪽에서는 수석보좌관이 직접 전화를 했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으니 망할 놈의 수요일 공연까지는 불여우 녀석의 털끝 하나 건드려서는 안 되네. 어서 가서 무대 장치인지 뭔지를 원상복구하고 살구 주스도 치워버리게!

 

... , 하지만... , 국장님. 저는 레베진스키에게서 들은 얘기가 전혀 없는데요.

 

뭐야?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분명히 레베진스키에게 자네와 드미트리의 긴밀한 협조를 받아서 진행하라고 했는데. 둘이 인사도 시켜주고 작전도 공유했단 말이네. 자네 드미트리에게 아무 얘기도 못 들었나?

 

못 들었는데요. , ... 그러니까, 저는 공식적인 감시요원이라 너무 윗선에 노출되어 있으니 작전에서는 빠지는 게 낫다고 하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그런 얘기야 했지. 하지만 그건 직접 장치를 손대면 안 된다는 얘기였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네가 알아야 불여우도 더 잘 속이고 내부 협조도 잘 될 것 아닌가. 분명히 드미트리가 자네에게 모든 작전을 전하고 공유하겠다고 했는데 그 친구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군!

 

, 국장님... 제가 좀 헷갈리는데요. 드미트리도 본부에서 왔기 때문에 꼬리를 밟힐까봐 작전에서 빠지라고 하신 게 아니었단 말인가요? 그래서 저와 드미트리는 배제하신 것으로 알았...

 

허참, 웬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드미트리 그 친구가 자네를 염려하긴 했었지. 하지만 불여우가 자네를 신뢰하는데다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하는 관계이니 반드시 자네와 모든 작전을 공유하라고 했거늘. 그래, 드미트리가 아무 말도 안 해줬단 말인가?

 

레베진스키를 통해 작전을 진행하신다는 얘기까지밖에...

 

 

 

베르닌은 아직도 어리둥절한 상태였지만 불현듯 스페호프가 자신을 떠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미트리는 납치된 왕재수를 찾아낸 일에 베르닌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숨겨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같은 옷을 입었고 얼굴이 비슷한 것을 이용해 검열요원 데미도프를 막아선 것도 자신인 척 하겠다고 했고 마지막으로 스페호프와 면담했을 때도 베르닌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스비제르스키를 팔아서 슬며시 위협을 가하지 않았는가. 이제 드미트리에 대한 분노와 충격이 조금 가신 스페호프가 머리를 굴려서 납치 사건의 실패에 베르닌도 한몫 했을 거라고 추측하고는 그를 유도심문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스페호프가 혀를 찼다.

 

 

허참, 어떻게 된 건지 이제야 알겠군. 드미트리 그 친구가 다 좋은데 성취욕이 너무 강해보이더라니. 자네를 질투하고 경계했던 거였어. 내가 그 친구에게 강의를 할 때 해외와 모스크바 본부에서 인정받은 엘리트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행정의 기본을 쌓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것이라는데 중점을 두었거든. 그러면서 자네에게 많이 배워야 한다고 했었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군. 불여우를 혼내주고 공연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모든 공을 자신이 가로채고 싶었던 거야. 레베진스키야 어차피 극장 쪽 정보원에 지나지 않으니 아무리 발 벗고 나서봤자 우리 식구인 자네만 하겠나. 이번 작전이 제대로 먹히기만 했어도 내가 자네를 제대로 포상했을 것을...

하여튼 일이 이렇게 됐으니 드미트리가 욕심을 부려 자네를 배제한 게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르겠군. 하여튼 그 친구야 본부로 돌아갔고 레베진스키야 수요일 밤에나 돌아올 테니 뒷수습을 해줄 건 지금 자네뿐이야. 어서 극장으로 돌아가서 무대 장치를 도로 고쳐놓고 냉장고에서 주스를 치워버리게.

 

, 국장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무대 장치는 레베진스키를 통해 고장 내라고 하신 것 같고... 주스는 뭔가요?

 

감독실 냉장고에 보드카와 섞은 살구 주스 팩을 넣어놨단 말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불여우가 술을 못 마시지 않나. 특히 보드카는 마셨다 하면 인사불성이 되니까. 불여우가 그걸 마시고 맛이 가면 입원을 하게 되지 않겠나. 그러면 공연도 물 건너갈 거라고 생각했지. 아니면 무대 장치가 잘못돼서 거기 좀 다치게 되더라도 마찬가지고. 마음 같아서야 그 자식을 납치라도 해서 수요일까지 어디 안전가옥에라도 가둬놓고 싶었네만 지난번 시계탑도 그렇고 이래저래 꼬인 게 많으니 뒷감당이 어려울 것 같아서 포기했었지. 끌어다 쓸 현장요원도 마땅치 않았고. , 그럼 불여우가 주스를 마시거나 무대에서 다치기 전에 어서 가서 원상 복구해 놓게. 일단 수요일 공연은 내버려두고 훗날을 도모할 수밖에.

 

 

베르닌은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간신히 목소리를 짜낼 수 있었다.

 

 

레베진스키와 드미트리... 그러면 검열국 쪽 협조는 없었던 건가요? 데미도프는... 야스민 납치 시도는 처음부터 없었던 거고요?

 

웬 검열국 타령인가. 데미도프는 또 누군가? 검열국 그 멍청한 놈들이 애초에 제대로 역할만 해줬어도 반체제 작품이라고 걸어서 아예 공연을 봉쇄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안돼서 이렇게 됐지 않나. 아무짝에 쓸모없는 놈들 같으니. 납치도 그렇지, 차라리 그때 자넬 모스크바에 보낼 게 아니라 불여우를 안전가옥에 가둬놓고 협박이라도 좀 시킬걸 그랬어. 지금이야 공연 며칠 남겨두고 납치 카드를 쓰는 건 우리 무덤 파는 일이니 엄두도 못 내지. 하여튼 자네가 고생이 많네. 그 반동분자 불여우의 비위를 맞추며 옆에 붙어 있고 매일같이 잠자리를 해주는 것도 속이 뒤집힐 텐데 이제 그 망할 공연까지 제대로 올라가게 해줘야 하니... 어서 가보게. 수요일에 극장에서 보세.

 

 

스페호프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급하게 몸을 돌려 사무실 쪽으로 가버렸다. 베르닌은 너무나 멍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돌멩이 위에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러면 국장은 미셴카 납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단 말이야? 데미도프에 대해서도 모르고 주말의 납치 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전부 자기가 명령한 건데. 납치는 위험부담이 크니까 아예 포기했다고? 분명히 드미트리가 그랬잖아. 어젯밤에 국장을 만났다고. 국장이 데미도프에게서 자초지종을 보고받았다고. 데미도프가 추궁이 두려워서 우리 얘긴 안하고 미셴카 혼자 도망쳤다고 했고 그 얘길 국장이 드미트리에게 해줬다고. 애초부터 우리한테 맡겼어야 했다고 짜증냈다고. 그런데 왜 국장은 지금 딴 소리를 하는 거지? 나한테 실패한 작전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한 건가? 하지만 국장은 데미도프란 이름을 말했을 때 정말 모르는 눈치였어. 3년 가까이 같이 일했잖아, 그 정도는 표정 보면 알아. 국장은 데미도프를 몰라. 얼굴은 알겠지, 검열요원이고 예전에도 보고를 받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름은 전혀 모르는 거야. 하지만 드미트리는 국장이 그자의 이름을 알려줬다고 했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머리가 너무나 복잡했고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스페호프가 그를 떠보고 있을 가능성이 제일 컸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졌다. 검열국에 가서 데미도프를 만나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 살구 주스! 그 자식 걸핏하면 목마르다고 아무 거나 막 마시는데... 극장부터 가야 돼. , 아니야... 그러면 늦을지도 몰라.

 

 

베르닌은 급하게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사무실은 등록부서였다. 두리번거리는데 리자가 보였다.

 

 

리자, 전화 좀 써도 돼요?

 

. 그럼요.

 

 

그는 급하게 다이얼을 돌렸다. 다행히 류드밀라의 목소리가 곧 들려왔다.

 

 

류다, 미샤는 별 일 없나요?

 

. 지금 리허설 중이에요. 구동장치랑 조명도 다 손봐서 이제 괜찮아요.

 

그래요. ... 감독실에 조그만 냉장고 하나 있잖아요.

 

, 그 냉장고. 아뇨, 지금 감독실에 없어요. 비서실에 가져다놨어요. 미셴카가 어차피 자기는 거기서 꺼내먹는 거 별로 없고 손님들도 거의 다 날 거쳐서 오니까 여기 두라고 했거든요. 왜요?

 

그 냉장고 안에... 지금 빨리 확인 좀 해줘요. 살구 주스. 종이팩에 든 걸 거예요. 아마 개봉되어 있을 거고요. 그거 꺼내서 버려줘요.

 

, 그 살구 주스. 없어요.

 

없다고요? , 설마... 미샤가 그거 마셨어요?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베르닌이 반쯤 고함을 지르려는 순간 류다가 대꾸했다.

 

 

아뇨. 미셴카는 그 주스 보지도 못했어요. 내가 버렸거든요. 걱정 마세요.

 

버렸다고요? 당신이? , 언제요? 설마 마신 건 아니죠?

 

천만에요. 내가 미쳤다고 그걸 마시겠어요? 지난번 독사과 사건 이후로 감독님 방에 들어오는 음식이랑 과일, 음료수는 내가 하나하나 다 확인하고 있어요. 내가 어제도 나왔었잖아요. 냉장고를 열어보니까 금요일까지 없었던 살구 주스가 하나 떡하니 들어 있는 거예요. 미셴카가 가져온 건 당연히 아니죠. 감독님은 오렌지나 사과 주스는 좋아해도 살구 주스는 달고 텁텁하다고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말린 살구도 입맛에 안 맞는다고 했어요. 목마를 때야 그냥 마시지만. 하여튼 수상해서 꺼내보니까 심지어 주둥이까지 열려있고. 코를 대보니 보드카 냄새가 지독하게 나더라고요! 개수대에 버렸어요. 그것도 스페호프가 넣어놓은 거죠?

 

, 그래요. 진짜 다행이네요. 고마워요, 류다. 전혀 몰랐어요, 당신이 그렇게 신경 쓰고 있었던 거...

 

우리 감독님 나라도 지켜줘야지 어떻게 해요. 안 그래도 이놈저놈들이 해코지하려고 난리인데. 그래도 어제 안 나와서 걱정 많이 했는데 오늘 감독님 보니까 표정도 좋고 준비도 생각보다 잘 되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근데 당신 언제 돌아와요? 감독님이 좀 전에도 당신 왔느냐, 아니면 늦는다고 전화 왔느냐 하고 물어보던데.

 

아까는 빨리 오라는 말 같은 거 안 했는데. 리허설 때문에 내가 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더니...

 

어머, 무슨 소리예요, 다냐. 미셴카가 얼마나 당신을 신경 쓰는데요. 당신 오면 표정이 달라지는데. 훨씬 편해 보이고 더 잘 웃고. 밥도 더 잘 먹고. 오늘은 그렇게 바쁜데도 틈만 나면 당신 쪽 보면서 확인하던데요. 아침에도 오자마자 나한테 혹시라도 KGB에서 당신을 찾으러 오거나 전화가 오면 즉시 자기한테 알려달라고 했는걸요.

 

...

 

 

베르닌은 가슴이 아프게 당겨왔다.

 

 

주말에 너무 놀라서 그런 거야. 내색은 안 했어도 진짜 무서웠던 거야. 그래서 내가 없으면 불안한 거야... 나 없는 동안 또 나쁜 짓을 당할까봐... 빨리 돌아가야겠어.

 

 

전화를 끊고 나서 베르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극장에 곧장 가야 하나, 검열국에 들러 데미도프를 만나봐야 하나 고민하며 구겨진 재킷 주름을 펴다가 주머니가 불룩해서 이게 뭔가 하고 손을 집어넣었다. 돌돌 말린 휴지 뭉치가 나왔는데 단단했다.

 

 

이게 뭐지?

 

 

휴지를 펴보니 조그만 도자기 인형이 굴러 나왔다. 금색과 푸른색, 흰색의 천사 인형이었다. 그제야 베르닌은 기억이 났다.

 

 

, 맞다. 그저께 미셴카 방 창가에서 집어온 거였지. 도로 갖다놔야겠다.

 

 

그때 리자가 다가오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내밀었다.

 

 

다냐, 차 한 잔 마셔요. 며칠 만에 왜 이렇게 야윈 거예요? 면도도 안 하고. 이발도 해야겠네. 아무리 바빠도 스타일 좀 다듬어요. 당신이 드미트리보다 빠지는 게 뭐가 있어요. 옷만 좀 신경 쓰면 훨씬 세련돼 보일 텐데. 꽃돌이 감독님한테 코치 좀 받아요. 근데 드미트리 보니까, 당신도 정장 어울릴 것 같아요. 월급 모아서 양복 한 벌 장만하면 어때요? 아니면 우리 오빠가 요즘 살쪄서 안 입는 양복 있거든요. 그거 갖다 줄 테니까 입어볼래요? 우리 오빠가 당신이랑 키가 비슷하거든요.

 

, 고마워요, 리자.

 

 

베르닌은 빨리 극장에 가봐야 할 것 같았지만 리자의 성의가 고마워서 찻잔을 받아 얼른 한 모금 훌쩍 마셨다. 차가 너무 뜨거워서 입술과 혀를 다 델 뻔했다. 리자가 방긋 웃더니 건포도가 박혀 있는 초콜릿 캔디를 내밀었다.

 

 

이거랑 같이 먹어요. 이거 드미트리가 준 건데 맛있더라고요. 외제인가 봐요. 드미트리 재미있었는데 너무 빨리 가버려서 아쉬웠어요. 오늘 아침에 갑자기 가버렸다고...

 

, ... 그게, 본부에서 빨리 돌아오라고 연락이 왔대요. 그래도 우리 쪽 연수는 다 채운 걸로 해준다더라고요. 다행이죠. 안 그랬으면 다른 데 또 가서 남은 기간만큼 채워야 하잖아요.

 

어머, 다냐. 그렇지 않아요.

 

, 뭐가요?

 

드미트리요. 남은 연수 기간 없어요. 애초에 다섯 번 연수 코스는 다 밟았거든요. 우리 지부 쪽은 가외로 자원해서 온 거예요. 가점만 2점쯤 더 받을 걸요. 근데 드미트리는 요원 기록부 보니까 워낙 성적이 좋아서 가점이 필요 없는데 왜 왔나 했어요.

 

연수 코스를 다 밟았다고요? 자원해서 왔다고... 국장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국장은 바쁠 땐 공문만 보고 첨부문서는 잘 안 읽잖아요. 나도 몰랐는데 갈리나 언니가 드미트리한테 폭 빠져서 모스크바 주소 좀 알아봐달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임시 거주등록 담당이잖아요. 그래서 서류를 보니까 그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근데 드미트리는 워낙 매사에 열심이니까 자원해서 왔다 해도 이상하진 않더라고요. 섭섭해요, 인사도 못하고. 그때 토요일 밤에 본 게 마지막이네요.

 

자원... 왜 여기까지... 나한테는 그런 말 안 했는데...

 

어머, 다냐. 이거 그 천사잖아요!

 

 

리자가 탄성을 지르며 전화기 옆에 베르닌이 내려놓았던 도자기 천사를 집어 들었다.

 

 

이거 너무 예뻐요. 어머, 드미트리 의외네요. 내가 달라고 했을 땐 안 줬는데 당신한테는 주고 가다니... 엄청 아끼는 거라고 했는데... 같이 며칠 지내면서 당신한테 엄청 정들었던 모양이네요.

 

 

베르닌은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리자? 드미트리요? 달라고 했었다니요? 이걸요? 이 인형을? 이건 미하일 거예요. 걔가 감독실 창가에 장식해뒀던 인형인데 드미트리라니요?

 

 

? 미샤 거라고요? 아닌데, 분명히 금요일 밤에 드미트리 방에서 봤는걸요. 그때 갈리나 언니랑 카챠 언니랑 같이 갔잖아요. 카드 놀이하는데 내가 꼴찌라서 제일 먼저 끝났거든요. 지는 사람이 뽀뽀하는 거였는데 갈리나 언니가 흑기사 자원한다면서 나 대신 드미트리한테 냉큼 뽀뽀하고 되게 웃겼어요.

하여튼 나머지 셋은 계속 게임하고 난 화장실 다녀오다가 드미트리 가방에 걸려 넘어질 뻔 했거든요. 가방 주워주는데 거기서 이 인형이 굴러 나오는 거예요. 너무 예뻐서 한참 봤어요. 이런 거 가브릴로프에서는 못 구하는 거잖아요, 수도원 공방에서도 이런 스타일로는 안 만들고요. 우리는 전통적으로 목각 인형을 만들잖아요. 박물관에나 가면 있으려나. 이거 맞아요, 금발에 얼굴이랑 손발이랑 하얗고 날개 금색이고 옷은 푸른색이잖아요. 근데 그때 드미트리가 와서 가방을 치우길래 내가 인형 너무 예쁜데 나 주면 안 되느냐고 살짝 물어봤거든요. 드미트리가 웃으면서 그러고 싶지만 소중한 물건이라 안 된다고 했어요. 대신 뽀뽀를 해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진짜 당신이랑은 정반대라니까요! 얼굴은 비슷한데.

 

 

리자는 까르르 웃으며 떠들다가 베르닌의 굳어진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 다냐. 농담이에요! 당신 놀린 거 아닌데... 화났어요?

 

, 아니에요... 리자, 이거 중요한 얘기예요. 기억을 잘 살려 봐요. 정말, 정말 드미트리에게 이런 인형이 있었단 말이에요? 이것과 똑같은?

 

. 이 인형 같은데... ... 글쎄요. 똑같이 생긴 거 같은데 잘 보니까 이건 날개를 활짝 펴고 있네요. 드미트리 거는 날개가 이것보다 작았어요. 안쪽으로 좀 접고 있었거든요. , 미샤한테도 있었구나... 꽃돌이 감독님은 친절하니까 달라고 하면 줄지도 모르겠네요!

 

날개를 안쪽으로 접고 있었다...

 

 

베르닌은 눈을 감았다. 도자기 천사. 푸른색 망토와 금빛 날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안으로 살짝 접혀 들어간 날개. 잘려나간 머리.

 

 

그건 세 번째 협박편지와 함께 온 선물이었다. 목 잘린 인형.

 

 

 

친애하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그 소중한 공연은 올리지 못할 거야.

파랑새도, 천사도, 검은 기사도 소용없을걸.

말을 잘 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베르닌의 머릿속에 몇 마디 음성들이 스쳐지나갔다.

 

 

 

네가 왜 그렇게 쟤 밥을 챙기는지 좀 알겠어. 레닌그라드에서 봤을 때는 안 그랬는데, 몸매도 훨씬 근육질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말랐네, 그래도 멋있긴 하지만 인형처럼 야윈 걸 보니까 어쩐지 마음이 안 좋아.

 

 

근데 혹시 다른 사람은 안 왔나요? 그러니까, 검은 머리에 눈도 까맣고 굉장히 잘생긴 친군데요. 피부가 도자기 인형처럼 하얘요.

 

 

외모는 예쁜 도자기 인형 같지만 성격은 어린애 같은 모양이라고만 생각했었어.

 

 

 

드미트리가 그렇게 말했었다. 왕재수에 대해. 인형처럼 야위었다고. 피부가 도자기 인형처럼 하얗다고. 예쁜 도자기 인형 같은 외모라고. 왜 그는 수많은 비유와 묘사를 내버려두고 한결같이 왕재수에 대해 그런 표현을 썼던 것일까? 드미트리는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다양하고 풍부한 어휘를 구사했다. 그런데 왜...

 

 

국장은 드미트리에게 레베진스키와 공동 작전을 수행하라고 했어. 나와도 공유하라고 했어. 그런데 드미트리는 내게 그것을 숨겼어.

 

 

국장은 데미도프에 대해, 검열국에 대해 모르고 있었어. 미셴카가 납치됐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어. 그런데 드미트리는 국장이 어젯밤 납치극과 데미도프에 대해 얘기해줬다고 했어.

 

 

드미트리는 우리 지부에 의무 연수를 온 것이 아니었어. 5회의 연수는 이미 마친 후였어. 그는 자원해서 왔어. 아무런 필요 없는 추가 2점을 위해. 그리고 나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

 

 

미셴카가 사라진 후 나는 국장에게 가려고 했어. 그런데 드미트리가 나섰어. 나에게는 극장으로 가라고 하고 자신이 앞장서서 국장을 찾아갔어. 미셴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보고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국장을 만나겠다고 할 때마다 드미트리는 나를 저지했어. 내가 모스크바로 가겠다고 했을 때도, 스비제르스키에게 얘기하겠다고 했을 때도 논리적으로 나를 설득하며 그러지 못하게 했어. 그는 미셴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하게 했어.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머릿속에서 천둥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미샤가 뭐라고 했더라... 걔가 분명히 날 보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내 이름을 부르면서...

 

 

 

다닐, 이거 말인데...

 

 

 

분명히 그거였다. 협박카드를 읽어보면서, 목 잘린 인형을 만지작거리면서 창백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왕재수가 속삭였다. 인형에 대해, 분명히 그 인형에 대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드미트리가 비틀거리며 쓰러졌고 곧 이어 베르닌 자신이 쓰러졌다. 무겁게 밀려오는 잠에 취해. 수면제가 든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주스는 드미트리가 따랐어. 그 팩을 냉장고에서 꺼내온 것도 드미트리였어. 미셴카에게 아침을 준비해줬던 것도, 우유를 따라줬던 것도 드미트리였어. 하지만... 드미트리도 수면제를 먹었어, 나보다 먼저 쓰러졌어... 우리는 같은 팩에서 나온 주스를 마셨는걸. 그렇지만 난 드미트리가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어. 나는 그를 깨우지 않았어. 드미트리가 나를 깨웠어.

 

 

 

위층에 방울을 달러 갔던 것도 드미트리였다. 아침에 카드를 확인하러 갔던 것도, 세 번째 협박카드와 목 잘린 인형을 들고 왔던 것도 그였다. 왕재수가 사라진 후 식탁 위에서 네 번째 편지와 인형의 머리를 발견한 것도 드미트리였다.

 

 

 

다냐! 정신 좀 차려 봐요, 왜 이러는 거예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어머나, 너무 과로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이리 와요, 휴게실에 가서 좀 누워야겠어요. 차에 꿀 좀 타 줄 테니까...

 

 

리자가 걱정스럽게 소리쳤다. 이마에 부드럽고 따뜻한 손바닥을 대보기도 하고 물이 든 컵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베르닌은 고개를 저었다. 귓가에 기계적이고 목쉰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자신의 목소리였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잊었던 게 생각나서... 저 지금 극장에 가봐야겠어요. 고마워요, 리자.

 

하지만...

 

 

베르닌은 비틀거리며 사무실을 나섰다.

 

 

 

 

 

*   *   *

 

 

 

 

 

베르닌은 곧장 검열국으로 갔다. 하지만 이반 데미도프는 자리에 없었다. 대신 전에 모스크바 출장을 같이 갔던 비탈리 주브치크와 마주쳤다. 주브치크는 매우 반가워하면서 또 같이 출장을 갔으면 좋겠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공무로 바쁘다고 둘러대면서 데미도프에 대해 물었다.

 

 

, 그 친구. 목요일인가 국장한테 엄청 깨지고 나서 지금 휴가 중이지. 말이 휴가지 계속 근신 중이야. 내 부하직원 같았으면 제대로 징계 먹였을 텐데. 글쎄 그 반동분자 꼬마가 국장을 제대로 망신을 줬다지 뭔가. 데미도프 그 녀석이 무슨 음악을 잘못 알려줘서 그랬다지. 그렇게 잘못을 저질렀으면 알아서 사죄하고 기어야지 그 녀석이 사무실에 돌아와서는 얼마나 화를 내고 억울하다고 하고 길길이 날뛰고 반동분자니 불여우니 하고 욕을 하던지. 자기가 그 버릇없는 불여우 꼬마를 단단히 혼내주겠다고 벼르더군. 하여튼 요즘 젊은 것들이란. 아참 그렇군. 자네 금요일에도 여기 오지 않았나? 그때 데미도프랑 같이 나가지 않았나. 그땐 잘 차려입고 있더니 오늘은 또 지난번 같이 촌스러운 몰골이네.

 

 

제가 여기 왔었다고요? 그자와 같이 나갔다고요? 그게 금요일이었나요?

 

 

허참, 이 친구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기억력이 그리 신통치 않아서야. 금요일 오후 아니었나.

 

 

금요일 오후. 베르닌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드미트리는 스페호프에게서 보안위원회 지방 분권의 특성강의를 받은 후 오후에 극장으로 왔다. 왕재수가 그에게 드미트리가 싫다고 짜증을 내고 있을 때쯤이었다.

 

 

극장으로 오기 전에, 그때 검열국에 들렀던 거야. 그때 드미트리는 데미도프를 만났어. 대체 왜! !

 

 

베르닌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가 버린 드미트리 때문에 서운했고 고마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가슴 아팠었다. 드미트리가 떠났다는 사실에 슬퍼하던 왕재수 때문에 더욱 가슴이 아팠었다. 그런데...

 

 

 

아니야. 전부 우연이야. 딤카는 좋은 애였어. 미셴카를 구하기 위해 온몸을 다 내던졌어. 총까지 맞았는데... 미셴카를 구했어. 보드카 때문에 정신 잃고 있던 걔한테 인공호흡까지 해줬어. 딤카는 미샤의 팬이었어. 수요일 공연을 올릴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다 해줬어. 그러니까 아니야. 전부 내 망상이야. 잊어버려. 모든 게 잘 끝났잖아. 미샤는 돌아왔어. 모레 공연도 잘 올릴 거야. 딤카는 좋은 친구야. 정말이야...

 

 

 

드미트리는 레베진스키와 사전 접촉을 했어. 레베진스키는 미셴카의 방에서 레코드를 뒤졌어. 목록에 표시를 했어. 여섯 개 음악 전부. 레베진스키는 데미도프에게 그 여섯 개의 음악이 뭔지 알려줬을 수도 있고 드미트리에게 알려줬을 수도 있어. 레베진스키에게 듣지 않았더라도 극장에 많이 다녔던 드미트리는 그 여섯 개의 음악이 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을 거야. 연습실에서 계속 음악을 틀어놓고 있었고 드미트리는 그걸 들었잖아. 그는 발레와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었어. 오랫동안 미셴카의 팬이었다고 했어. 그 애의 인터뷰 기사들까지 다 기억하고 있었어. 그 애의 서류까지, 나도 모르는 일들까지 다 알고 있었어.

내 뒤에 있던 캐비닛. 그 안에도 카드와 색지가 있었어. 누구라도 꺼내갈 수 있었어. 사무실에 있었던 누구라도. 그리고 드미트리는 사무실에 있었어. 내 곁에. 서무 업무를 배우느라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어. 금요일에 그는 일찍 출근했지. 그리고 내가 극장에서 미셴카의 옆에 있는 동안 그는 연습실에서 이따금 밖으로 나가곤 했어. 밤 공연 때는 관객석에서 보겠다고 하며 백스테이지에는 오지 않았어. 그리고 그는 곧장 요원 숙소로 가서 여직원들과 게임을 했던 걸까? 아니면 위층에 들렀을지도... 비둘기와 유리조각, 협박편지... 그리고 드미트리는 열쇠 없이 문을 딸 줄 알았어. 미셴카만큼 잘 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옷핀으로 문을 땄어. 그 애의 수갑을 핀으로 풀었어. 그러니까 미셴카의 방문도 열 수 있었을 거야. 901호도... , 하느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귓가에 왕재수의 열띤 음성이 메아리쳤다.

 

 

 

그 자식은 구역질난단 말이야! 더러운 KGB 나부랭이에 재수 없는 놈이야! 잘난척하는 말투부터 시작해서 쳐다보는 눈초리까지 다 싫다고!

 

 

어휴, 사람 볼 줄 모르는 녀석... 그러니까 책상물림이지! 바보 멍충이!

 

 

 

베르닌은 눈을 감았다. 드미트리와 한 침대에 있던 왕재수를 떠올리려고 했다. 깊고 뜨거운 키스를 하던 모습을, 서로를 포옹하며 눕던 모습을. 하지만 다른 광경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병원에서 드미트리와 그가 스페호프에 대해, 똑같은 아가일 무늬 셔츠에 대해, 그리고 저녁 식사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때 그들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던 왕재수의 뻣뻣한 자세와 굳어진 표정. 어김없이 내뱉었던 바보 멍충이. 사랑을 나누던 둘의 모습을 목격한 이후 베르닌은 그건 드미트리에 대한 말이었다고 생각했다. 같은 옷을 입었으니 베르닌인 척 해서 스페호프로부터 그를 지켜주겠다던 드미트리, 어차피 떠날 몸이니 자기가 모든 것을 뒤집어쓰겠다고 나서던 드미트리의 무모함과 정의감에 감명을 받은 것을 숨기려고 투덜거린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병원 복도에서 왕재수는 베르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도 드미트리에게는 눈 한번 주지 않았다. 코코뱅과 양파수프로 근사한 저녁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닐, 이거 말인데...

 

 

왕재수는 그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왜 그렇게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고 나직하게 속삭였던 것일까. 차가워진 손과 창백해진 얼굴, 커다랗게 확장된 눈동자. 그건 수면제 때문이 아니었다. 약기운이 돌았을 때 베르닌은 눈을 크게 뜰 수가 없었다. 온몸이 무거워지면서 열이 솟구쳤고 그대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미샤는 수면제를 먹은 게 아니었어. 뭔가에 굉장히 놀랐던 거였어. 검은 숲에서 뱀껍질을 봤을 때처럼. 나이트 테이블 위에 있던 비둘기 시체를 봤을 때처럼. 그래서 나에게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거야. 이거 말인데라고 했어. 그 '이것'은 뭐였을까? 인형? 협박카드? 분명히 그 순간 걘 뭔가를 봤어. 내가 눈치 채지 못한 것을. 그게 걔를 놀라게 했어. 겁에 질리게 했어.

 

 

그는 검열국을 나왔다. 전날 내내 내렸던 비가 그친 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무 아래 군데군데 하얗고 노란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잿빛과 푸른색의 비둘기 몇 마리가 종종거리며 지나갔다. 나무 위로 큼직한 까마귀 한 마리가 휙 날아갔다. 흰 비둘기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흰 비둘기는 그리 흔하지 않았으니까.

 

 

 

극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6시가 다 되어 있었다. 2차 스페이스 리허설은 이미 끝난 후였다. 스태프들이 무대와 백스테이지를 오가며 작업 중이었다. 연습실로 가보니 무용수들이 여럿 남아 있었다. 주역인 가릭과 데니스, 타마라는 몇 번이고 그 마지막 동작을 되풀이하며 연습하는 중이었고 조역들도 티무르 이즈마일로프의 지도를 받아가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왕재수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 구경을 하러 와 있던 나쟈가 몹시 반갑게 인사를 했고 감독님은 옆의 연습실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왕재수는 군무진을 데리고 연습하는 중이었다. 주역만 추던 톱스타 출신이었지만 왕재수는 군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코즐로프도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베르닌은 코즐로프가 바이올린 대신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처음 봤다. 아마 왕재수를 지켜보기 위해 피아노 반주를 자원한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피아노 옆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망치로 머리를 계속 두들겨 맞는 듯 했다. 군무진의 움직임은 분명 오전의 리허설 때보다도 훨씬 더 근사하고 정연해져 있었지만 이제 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왕재수의 목소리만을 알아듣고 왕재수의 움직임만을 분간할 수 있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지만 왕재수의 목소리는 또렷했고 스텝과 동작은 활기찼다. 그 반짝이는 검은 눈과 날개 치는 듯 움직이는 두 팔, 이따금 무용수들에게 칭찬을 던질 때 얼굴 전체에 번지는 밝은 미소를 보면 아무도 그가 이틀 동안 납치됐다 돌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어느 순간 음악이 멈추었고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가 끊겼다. 무용수들이 왕재수에게 와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연습이 끝난 모양이었다. 코즐로프가 휘파람을 불었다.

 

 

결국 되긴 되는구나. 하도 엉망이라 저 녀석들을 무대에 올릴 수 있을까 했는데 하여튼 미셴카는 대단한 애라니까. 근데 너 왜 이렇게 안색이 안 좋냐. 스페호프 그 개자식이 뭘 또 얼마나 볶았으면. 그렇지 않아도 우리 아기가 걱정하더라. 너 왔냐고 계속 묻고.

 

... 별일은 없었나요?

 

, 없었지. 무용수 몇 놈이 수보로긴 그 새낄 산 채로 파묻어버리겠다고 날뛰는 걸 말리느라 고생한 거 빼곤. 붙잡느라 팔 빠지는 줄 알았네. 그래도 무대 올라갈 놈들이 그런 짓하면 근육 미워져서 안 된다고 우리 아기가 호통 치니까 다들 잠잠해져서 다행이야. 수보로긴 그 새낀 내가 따로 손봐줄 거야.

 

그러지 말아요, 로만. 미샤가 항상 걱정하잖아요. 당신이 자기 때문에 일 저질러서 스페호프 눈에 띄면 잡혀간다고...

 

몰래 두들겨 패주면 되지! 수보로긴 그 자식은 용서 못해. 레베진스키도 마찬가지야. 돌아오기만 해봐라!

 

쟤가 여기서 의지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당신 잡혀가면 쟨 정말 못 견딜 거라고요. 그러니까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 그놈들은 내가 패줄 거예요!

 

너 같은 책상물림이 패봤자! 그리고 우리 아기가 나만 의지하는 줄 아냐! 그런 쪽으로는 나보다 널 더 따르지. 저 녀석은 안아주는 남자랑 있으면 정신 못 차린다고. 나하고는 의지하고 말고가 아니란 말이야.

 

로만, 오늘 밤에 쟤랑 같이 있어줄 거죠?

 

아니. 나야 백번이고 그러고 싶은데 쟤가 수요일까진 안 된다고 했으니까. 근데 모스크바에서 왔다는 그 자식은 어디 갔냐? 너랑 엄청 닮은 그 자식 말이야. 그놈 때문에 쟤가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는데.

 

아침에 돌아갔어요. 그러니까 당신 미샤랑 같이 있어도 괜찮아요.

 

우리 아기가 괜찮다고 하면.

 

 

그때 무용수들을 모두 내보낸 왕재수가 그들 쪽으로 왔다. 베르닌을 보더니 아주 잠깐이었지만 안도의 표정을 지었고 곧 활짝 웃었다.

 

 

애들 진짜 많이 좋아졌어. 내일 조금만 더 하면 무대에서도 괜찮을 거야. 로만, 이제 들어가서 쉬어. 내일 아침에 드레스 리허설 해야 하니까.

 

아직 7시도 안됐는데 뭘. 넌 어차피 옆방에서 애들 또 잡을 거잖아. 감시꾼도 모스크바로 돌아갔다면서. 끝날 때까지 여기 있다가 너랑 같이 돌아가면 되겠네.

 

당신 내 말 잊었어? 수요일까지. 안 돼.

 

 

코즐로프는 한숨을 쉬면서 베르닌에게 그것 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화를 내거나 우기는 대신 왕재수를 긴 팔로 덥석 휘감아 세게 안아준 후 내일 보자!하면서 나가버렸다.

 

 

 

왕재수는 베르닌에게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옆의 연습실로 가서 주역과 조역들이 춤추는 것을 주시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30분쯤 후 왕재수는 무용수들에게 그만 돌아가서 푹 쉬고 아침에 일찍 나오라고 했다. 이례적으로 이른 종료였다.

 

 

무용수들이 돌아간 후 왕재수는 무대감독을 불러서 드레스 리허설과 수요일 공연을 위해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사항들을 몇 가지 재확인했다. 거대한 의상실로 가서 새로 도착한 의상과 장신구들도 쭉 훑어보았다. 분장사와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베르닌은 잠자코 왕재수를 따라다녔다.

 

 

8시에 왕재수는 퇴근하겠다고 했다. 생각보다 빠른 시각이라 베르닌은 정말이냐고 되묻기까지 했다. 왕재수는 저녁도 집에 가서 먹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재킷을 걸치고 스카프를 두르더니 날듯이 뛰어나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베르닌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   *   *

 

 

 

 

 

차 안에서 왕재수는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다리를 건너갈 때는 창 너머로 가로등 램프 불빛에 반짝이는 물결을 보면서 손가락으로 사진 찍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신시가지로 접어들자 왕재수는 다시 노래를 흥얼거렸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로등 램프가 꺼져서 캄캄한 골목을 지나갈 때 왼손으로 목덜미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입 안으로 낮게 한숨을 쉬었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왔을 때 왕재수는 자연스럽게 6층 버튼을 눌렀다. 언젠가부터 그는 귀가하면 베르닌의 집으로 곧장 향했다. 엘리베이터 조명 아래에 서자 마냥 하얗고 매끄럽게만 보였던 왕재수의 얼굴에 푸르스름하고 검은 그림자가 졌다. 눈 주위가 거무스름했다. 하지만 복도로 나오자 다시 흠 없이 하얗게 보였다. 속눈썹 그림자였던 게 분명했다.

 

 

도자기 인형.

 

 

베르닌은 입 안으로 나직하게 뇌었다. 어지러웠다. 울고 싶었다. 왕재수는 곧장 그의 집으로 들어가더니 재킷과 스카프를 벗어 내팽개쳤다. 비누칠을 해서 손을 박박 문질러 씻더니 세수까지 하느라 셔츠 앞자락을 적셔 놓았다. 그래도 왕재수는 툴툴대지 않았다. 젖은 셔츠를 벗더니 빨래 건조대에서 베르닌의 티셔츠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 이거 입어도 돼? 옷 마를 때까지만.

 

으응. , 거기 네 옷도 있어. 어젯밤에 빨아놨거든. 다 말랐을 거야.

 

 

왕재수는 건조대 끝에 걸려 있는 하늘색 셔츠를 힐끗 쳐다보았다. 토요일 아침에 베르닌이 가져다 준 셔츠였다. 왕재수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셔츠를 낚아채 휴지통에 처넣었다. 납치당했을 때 입고 있었던 옷이라 그런 것 같았다.

 

 

베르닌은 보르쉬를 데웠다. 보랴에게서 주워들은 레시피대로 마카로니를 삶아서 스메타나와 연어알을 얹었다. 양배추와 당근을 채 썰어 곁들였다. 왕재수는 연어알 얹은 마카로니를 좋아하며 먹었다. 보르쉬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베르닌은 기계적으로 숟가락과 포크를 움직였다. 뭔가가 목구멍으로 넘어가고는 있었지만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왕재수가 맛있게 먹는 게 기뻤지만 동시에 어딘가 불안했고 소름이 돋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왕재수는 한 번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휘파람, 노래, 미소, 밝은 표정, 연어알 얹으니까 맛있어라는 쾌활한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밝고 사랑스러운 동시에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그 목소리와 표정 어디에도 가식적인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베르닌은 반년이 넘도록 왕재수의 곁에 있었다. 그 애가 어떤 식으로 웃고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잘 알았다. 평상시의 왕재수라면 음식이 맛있다 해도 결코 이렇게 개방적으로 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눈부신 미소를 짓지 않을 것이다. 그건 무대 위에서 보여 주던 미소였다. 완벽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미소. 저녁에 다시 만나 돌아오는 동안, 식사를 하는 동안 왕재수는 단 한번도 바보 멍충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탁월한 배우였으니까.

 

 

식사를 마친 후 왕재수는 욕실로 가더니 양치질을 했다. 나와서는 거실 카펫 위에서 두어 번 빙그르르 돌더니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싱크대 앞으로 갔다. 설거지를 하려고 물을 틀었다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침을 삼켰다. 거실로 갔다. 반쯤 잠긴 목소리로 불쑥 말했다.

 

 

왜 양치질했어?

 

? 밥 먹었잖아. 좀 있으면 잘 거고.

 

차 안 마셨잖아. 저녁 먹고 나면 항상 차 달라고 했잖아. 내가 잊으면 화냈잖아. 그런데 달라고도 안 하고.

 

그랬나... 극장에서 마셨으니까.

 

너 극장에서 마셔도 집에서 저녁 먹으면 꼭 차 마시잖아. 애초부터 나한테 저녁 홍차는 연하게 우려야 한다고 야단쳤잖아.

 

잊어버렸어. 아니, 오늘은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았어. 일찍 자려고.

 

왜 화 안 내?

 

왜 화내야 되는데?

 

너 내가 이렇게 꼬치꼬치 간섭하면 화내잖아. 근데 왜 화 안 내냐고.

 

너 왜 그러는 거야? 나 화나게 만들고 싶은 거야? 스페호프한테 엄청 볶이고 왔구나, 그래서 나한테 시비 거는 거지?

 

 

왕재수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깨를 으쓱거리자 칼라가 늘어난 티셔츠 사이로 불그스름한 키스 자국들이 남아 있는 목덜미가 휑하게 드러났다. 이제 베르닌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왕재수의 손목을 낚아채듯 쥐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그만해, 미하일. 제발. 그놈 누군지 봤잖아. 누군지 알잖아. 그렇지? 이제 괜찮아. 다 끝났어. 숨길 필요 없어. 말해. 다 말해. 나한테는 말해도 괜찮아.

 

 

왕재수가 눈을 깜박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 순진한 소년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베르닌이 손목을 더욱 세게 쥐면서 간절하고 고통스러운 눈을 떼지 않자 그 어린애 같은 표정이 사라졌다. 미소도, 조도, 휘파람도, 두 눈에서 반짝이던 장난기도 부서진 석고처럼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다. 무대 위의 왕자님 같던 가면이 사라졌다. 창백하고 매끄러운 얼굴 위로 검고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겁고 낮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다닐.

 

아니, 넌 알아. 내가 알기 전부터 알았어. 제발, 미셴카. 괜찮아. 전부 말해도 돼. 나한테는 괜찮아. 알잖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안 괜찮아. 전부 안 괜찮아. 너한테는 안 괜찮아.

 

 

왕재수는 연속으로 세 번, 숨도 쉬지 않고 안 괜찮아를 쏟아냈다. 평소 같았으면 정확한 문법과 우아한 말투를 중시하는 레닌그라드 출신답게 괜찮지 않아라고 했을 것이다. 그는 베르닌의 손을 뿌리치고 뒷걸음질쳤다. 창백하게 질린 채 고개를 양옆으로 마구 흔들면서 계속 뒤로 물러나다 소파에 걸려 휘청거렸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넘어지기 전에 팔을 뻗어 어깨를 붙잡았다. 왕재수가 고개를 돌렸다. 베르닌은 뱃속이 뭉클거렸다. 혈관 속의 피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심장에 칼이 꽂힌 것 같았다. 그는 왕재수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 불덩이처럼 뜨겁고 총에 맞은 새처럼 파르르 떨리는 몸을 두 팔로 세게 조이며 괴롭게 속삭였다.

 

 

그건, 그건 드미트리였지? 그렇지?

 

 

왕재수가 낮게 비명을 질렀다. 목에 걸려서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세게 안고 있는데도 몸을 경련했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다시 한 번, 좀 더 또렷하고 힘 있게 물었다.

 

 

널 납치했던 사람. 드미트리였지? 9층으로 데려갔던 사람. 그렇지? 부탁이야, 미하일. 솔직하게 말해줘. 그래야 해.

 

? 왜 솔직하게 말해야 되는데?

 

그래야 모든 게 괜찮아지니까. 그래야 네가 더 이상 무섭지 않을 테니까.

 

나는 안 무서운데... 난 다 괜찮은데.

 

아니야, 괜찮지 않아. 내가 바보야? 넌 괜찮지 않을 때만 그렇게 말해! ”

 

아니야. 난 괜찮아. 안 괜찮은 건 너야. 그러니까 이제 놔줘. 나 아무 말도 하기 싫어. 나 잘래. 다닐, 나 자고 싶어.

 

왜 나한테 안 괜찮다는 거야!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 자식 맞잖아. 드미트리 그 자식이 꾸민 거잖아. 협박편지, 비둘기, 인형, 수면제... 전부! 그 자식이 널 가뒀어. 그래놓고 감쪽같이 날 속이고 같이 널 찾으러 다녔어. 그놈이 널 협박한 거잖아... 이제 그놈은 갔어. 그러니까...

 

 

네가, 그놈이 좋다고 했잖아! 형제도 없고 친구도 없다고 했잖아! 형 같다고 했잖아! 그놈이 와서 좋다고. 소중하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안 괜찮아... 너는 안 괜찮단 말이야...

 

 

 

왕재수가 갑작스럽게 소리쳤다.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팔에 붙들려서 꼼짝도 못하자 머리로 베르닌의 어깨를 들이받았다. 이마와 숨결이 너무 뜨거워서 풀무질을 하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심호흡을 하려고 애썼다. 실패했다. 어쨌든 상관없었다. 그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앉느라고 팔의 힘이 조금 풀어지자 왕재수가 버둥거리며 빠져나가려고 했다. 베르닌은 있는 힘껏 왕재수를 껴안고 못 움직이게 눌렀다. 왕재수가 흐느꼈다.

 

 

숨 막혀, 숨 막혀... 왜 이러는 거야. 좀 놔줘. 다닐, 좀 놔줘.

 

알았어, 놔줄게. 근데 1분만 있다가.

 

... 지금 놔줘. 숨 막혀.

 

네가 너무 흥분해서 그렇지. 지금도 이렇게 몸부림치는데. 놔주면 벽에 머리 들이받을 거잖아. 다친단 말이야.

 

 

 

왕재수는 끙끙거리며 욕을 했지만 버둥거리던 것은 멈췄다. 몸의 경련도 많이 잦아들었다. 베르닌은 마음속으로 100까지 센 후 팔을 풀었고 왕재수를 놔주었다. 반쯤은 그 애가 화를 내며 도망칠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더 이상 왕재수를 붙잡고 있을 기력이 없었다.

 

 

왕재수는 도망치지 않았다. 베르닌의 곁에 주저앉더니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래서 베르닌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나 안 괜찮아. 네 말이 맞아. 안 괜찮아. 나 드미트리 좋아했어. 친구라고 생각했어. 형제처럼 좋았어. 그래서 놀랐어. 실망했어. 슬펐어.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줘. 안 그러면 나 정말 안 괜찮을 거야. 네가 말 안 해도 그놈이 했다는 거 알아. 알게 됐단 말이야. 그런데 네가 계속 아닌 척하면 나 정말 미쳐버릴 거야. 그러니까 그냥 다 얘기해줘. 나도 얘기할게. 우리 다 얘기하고 다 털어버리자. 그러면 둘 다 괜찮아질 거야. ? 우리 그러자.

 

 

왕재수가 핏기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두 눈의 빛이 꺼져 있었다.

 

 

바보 멍충이. 얘기한다고 괜찮아지는 거였으면 세상천지에 다 맘 편하고 행복한 사람들뿐이게.

 

그래도 기분은 훨씬 더 나아질 거야.

 

옛날에 내 친구도 그렇게 얘기했지.

 

누구, 유라?

 

아니. 유라 말고. 다른 친구.

 

 

 

왕재수는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입술만 움직였지만 어쨌든 미소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약간 안심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었다.

 

 

걔가 그런 거 맞지? 그랬던 거지?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확신하고 있었지만 왕재수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베르닌은 현기증이 나면서 온몸이 조각조각 저며지는 것 같았다.

 

 

그 자식이 너 협박한 거지, 그래서 아무 말 안 했던 거지?

 

 

왕재수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닌이 대체 무슨 협박을 한 거냐고 물어보려는데 왕재수가 입을 열었다.

 

 

너부터 얘기해줘. 어떻게 알았는지. 너 아침까지는 몰랐잖아. 끝까지 모를 줄 알았어.

 

 

그래서 베르닌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머릿속이 아직 다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따금 횡설수설하기도 하고 앞뒤를 놓치기도 했지만 모든 것을 다 말했다. 스페호프와의 면담에서 알아낸 사실. 리자의 이야기들. 도자기 인형. 검열국에서 알게 된 데미도프의 행동과 드미트리의 출현.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지금에야 미심쩍게 느껴지는 드미트리의 행동들. 전부 얘기했다.

 

 

 

 

*   *   *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중간에 일어나 물을 마셨지만 곧 돌아와 베르닌의 곁에 앉았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너무 조용해서 잠들었나 싶었지만 눈을 돌리면 곧 왕재수의 시선과 마주쳤다.

 

 

마침내 베르닌이 생각나는 모든 이야기를 마쳤을 때 왕재수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그랬구나. 안전가옥인지 뭔지랑 레베진스키 별장이랑 잔나네 집까지 갔었구나. 힘들었겠다, 비 오는데...

 

난 네가 정말 거기 있는 줄 알았어. 다 뒤졌는데 없어서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

 

바보... 내가 목걸이 떨어뜨렸는데... 나 찾아오라고... 한참 후에야 찾고.

 

 

베르닌은 눈을 깜박였다.

 

 

, 그 목걸이... 난 네가 반항하다 떨어진 줄 알았어. 일부러 떨어뜨린 거였구나...

 

. 그 자식이 날 떠메고 계단으로 올라갔거든. 내가 밀어서 계단에서 한번 구를 뻔했어.

 

넌 수면제 안 먹은 거지? 그 우유도 괜찮았던 거지?

 

수면제는 너만 먹었던 거지. 우유는 이상 없었어. 계단 올라갈 때까진 정신 멀쩡했는데 내가 미니까 그 자식이 머리를 패서 그때 기절했어.

 

위험하게 왜 그랬니... 그것도 계단에서.

 

목걸이 떼어내려고 그랬어. 그 자식이 눈치챌까봐 막 떠밀면서 왼손으로 몰래 떼어냈거든. 그 자식은 몰랐지.

 

 

베르닌은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왕재수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며 안타깝게 말했다.

 

 

아까 분장사한테 고쳐달라고 할걸...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까먹었어.

 

괜찮아. 내일 고치면 되지. 찾아서 다행이야.

 

 

왕재수는 목걸이를 손으로 꼭 쥐었다. 창백하던 얼굴에 희미한 핏기가 돌았다.

 

 

그런데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가. 나만 수면제를 먹었다는 거. 그 자식은 쓰러진 척만 했던 거야? 드미트리랑 나는 같은 팩에서 주스를 따라 마셨잖아. 어떻게 나만 약을 먹을 수가 있지?

 

바보. 약은 주스에 들어 있었던 게 아니야. 컵에 들어 있었던 거지. 네가 주스 달라고 했을 때 그 자식이 부엌에서 컵 가져와서 따라줬잖아. 유리컵이 아니니까 안이 안 보이잖아. 컵에 약을 넣고 그 위로 주스를 부었던 거야.

 

컵에...

 

 

베르닌은 기억을 더듬었다. 왕재수의 말이 맞았다. 드미트리가 주스를 마시는 것을 보고 갈증을 느낀 그는 주스가 남았느냐고 물었다. 드미트리는 새 컵을 가져와서 그에게 주스를 따라주었다. 그리고는 약기운이 도는 시간을 계산해 감쪽같이 먼저 쓰러진 척했던 것이다. 소름이 돋으면서 분노가 치밀었지만 애써 떨쳐버리려 노력하며 베르닌은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때 나한테 무슨 말 하려고 했던 거야? 내가 쓰러지기 전에... 네가 그랬잖아. 이거 말인데라고. 인형이랑 카드 만지면서. 설마 그때 드미트리가 협박범이란 걸 알아차린 거였어?

 

. 그때 알았어.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

 

카드. 인형. 전부.

 

그 인형은 네 방 창가에 있던 거였잖아. 두 개 중 하나. 그런데 어떻게 그것만 보고 드미트리라는 걸 안 거야?

 

아니야, 다닐. 그 인형은 내 방에 있던 게 아냐. 같은 사람이 만든 것일 뿐이야. 백조랑 발레리나는 많이 만들었지만 천사는 열두 개 밖에 만들지 않았어. 나한테는 하나밖에 없어. 원래는 두 개였는데 하나는 재작년인가 친구가 놀러 와서 구경하다가 깨뜨렸어.

 

하지만 다 똑같이 생겼잖아... 네 방에 있는 인형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 그것만 가지고 어떻게 드미트리라고 생각했어?

 

자세히 보면 열두 개 인형이 다 조금씩 다르게 생겼거든. 그리고 인형 발바닥에 완성한 날짜랑 일련번호가 적혀 있어. 내 방에 있는 건 1번이야. 깨진 건 2번이고. 협박편지랑 같이 온 건 8번이었어.

 

일련번호... 그랬구나. 하지만 그래도 모르겠어, 어떻게 드미트리인 줄 알았는지...

 

너야 당연히 모르지. 난 알아. 그건 레닌그라드에서 나온 거야. 로모노소프 도자기 공장 일급 디자이너였던 할머니가 있었는데 발레광이었어. 나랑도 친했고. 은퇴한 후에 나랑 동료들 무대 의상이나 장신구들 디자인을 도와줬거든. 천사는 키로프 쪽에서 그 할머니에게 의뢰해서 한정판으로 만든 거야. 그때 내가 작품을 하나 안무했는데 천사가 나왔거든. 할머니는 딱 열두 개만 만들어서 1, 2번은 나한테 줬어. 나머지는 그 작품 초연 때 극장에서 전시하고 팬들에게 선착순으로 팔았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 인형을 보낸 건 레닌그라드에서 온 사람이야. 그리고 내 작품 초연을 본 사람. 드미트리는 둘 다 해당돼. 내 팬이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원 주인이 다른 사람에게 팔았을 수도 있잖아. 여기까지 흘러들어왔을 수도 있잖아.

 

너는 발레광들이 어떤지 몰라. 게다가 명장이 만든 한정판 인형이야. 그리고 그 천사는 날 모델로 만든 거야. 내가 그랬잖아, 난 어마어마하게 인기가 많았다고. 내 팬들은 그 천사 구하려고 난투극도 벌인 적 있어. 그걸 손에 넣은 팬이라면 절대 안 내놨을 거야.

 

그런데 그 귀중한 인형의 머리를 자르고 망가뜨리다니...

 

그 자식이 카드랑 인형 들고 와서 친절하게 설명했던 거 기억 안 나? 처음엔 새, 그 다음엔 사람인 거였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거야. 처음엔 파랑새, 그 다음엔 나.

 

비둘기였잖아...

 

여긴 파랑새가 없잖아. 구할 수 있는 새를 죽였던 거야. 파랑새. 천사. 검은 기사. 카드에 그렇게 씌어 있었지. 그때 모든 게 명확해졌어. 범인이 그 자식이라는 게.

 

? 파랑새가 발레에 나오는 배역이라서? 드미트리가 발레를 잘 아니까? 여기도 관객들은 있잖아. 극장 사람들도...

 

단순히 발레에 나오는 배역이라서가 아니야. 그건 전부 나를 가리키는 거였어. 그건 전부 내가 키로프에서 췄던 배역이었어. 셋 다 굉장히 중요한 거야. 레닌그라드 팬들이라면 제일 처음 손꼽는 배역들이라고. 세 개 다 한때 내게 붙었던 별명이기도 했어. 파랑새는 내가 키로프에서 제일 처음 췄던 중요한 역이야. 학교 졸업하기 전에 역을 맡겨서 떠들썩했었어. 천사는 아까 얘기한 안무작과도 관계가 있지만 내가 데뷔했을 때부터 제일 많이 불리던 별명이었어. 높이 날고 바닥에 내려오지 않는다고... 그리고 검은 기사는 내가 제일 처음 안무했던 작품에서 춘 거야. 루슬란과 류드밀라. 난 로그다이를 췄어. 알잖아, 주인공이랑 싸우다가 물에 빠져 죽는 기사. 검은 망토를 두르고 나오거든. 그래서 팬들이 그때부터 검은 기사라고 불렀어. 물론 레닌그라드에서만이야. 나중에 모스크바 가서는 또 다른 별명들로 불렸으니까.

가브릴로프에서는 아무도 그런 거 몰라. 렐랴도 인터뷰할 때 보니까 내가 그걸 춘 건 알지만 별명까지 붙었다는 건 몰랐어. 극장 사람들도 그렇고. 내가 그런 얘길 한 적도 없고. 그러니까 그건 드미트리였던 거지. 레닌그라드 토박이. 내 모든 작품을 봤고 안무작은 모두 초연을 봤다고 했어. 로그다이가 제일 인상에 남는다고 했고. 검은 기사 말이야. 그 자식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 청년극장에서 올렸던 작품까지 봤다고 했지. 그놈은 진짜 팬이었어. 레베진스키도, 스페호프도 그런 세심한 협박편지와 선물을 보낼 만큼 똑똑하지 않았어. 여섯 개의 음악도. 그건 레닌그라드에서 온 내 팬만이 보낼 수 있는 거였어.

 

 

 

베르닌은 몸을 떨었다. 그토록 드미트리를 좋아하고 신뢰했던 자신이 너무나 바보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배신감이 치솟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드미트리가 왜... 대체 왜 그런 거야... 그 자식 심지어 스페호프의 지령을 따른 것도 아니었어. 스페호프는 납치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않았어. 드미트리는 네 팬이었잖아. 얼마나 열띠게 너와 네 작품을 옹호했는데... 수요일 공연 꼭 올리게 해주고 싶다고 했는데. 그런데 왜...

 

왜긴 왜야, 사이코니까 그렇지.

 

 

왕재수는 눈을 감았다.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면서 내키지 않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팬이라서 그런 거야. 다닐, 넌 극장에 대해서, 무대와 배우에 대해서, 팬에 대해서도 잘 몰라. 어딜 가나 광팬들이 있어. 100명 중 99명은 괜찮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머지 하나가 사이코일 때가 있어. 그것도 꽤 자주. 그러면 재수 옴 붙는 거지. 그리고 그런 팬들은 연극배우보다는 무용수들한테 더 많아. 너도 알다시피 무용수들은 나이와 육체와 힘의 지배를 받는 존재잖아. 드라마 배우보다 수명이 짧은 대신 젊고 외모가 근사한 편이지. 게다가 육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직업이니까. 발레단 동료들도 대부분 한두 명씩 있었어, 골치 아픈 팬이. 나한테는 좀 많았어. 사이코. 스토커. 미친놈들. 내가 그랬잖아, 그 자식 눈초리가 맘에 안 든다고. 재수 없게 쳐다본다고. 비싼 그림이나 고기 감정하듯이 훑어본다고 했잖아. 많이 봤어, 그런 눈빛. 학교 다닐 때부터. 기숙사 앞에서, 극장에서, 주차장에서, 길에서, 카페에서, 집 앞에서, 생각지도 않은 곳 여기저기서.

 

 

베르닌은 불현듯 첫날 저녁이 생각났다. 연습을 마친 무용수들이 호들갑을 떨며 왕재수를 껴안고 호의를 표시하고 있을 때 드미트리는 저만치 떨어져서 그런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베르닌은 놀랐었다. 자신과 아주 닮은 그 까만 눈에서 그런 강렬한 시선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가. 팬이라면 널 동경하는 거잖아. 좋아하고 아끼는 거잖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런 나쁜 짓을 할 수가 있어? 널 위협하고 납치하고...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야? 드미트리는 수요일 공연 정말 보고 싶어 했어.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어. 아침에 떠날 때 정말로 아쉬워했어. 널 숭배했단 말이야. 걔는 네 작품을...

 

내 작품을 좋아한 게 아니야. 예술가로서의 날 숭배한 것도 아니고. 바로 거기 그냥 애호가와 사이코 스토커의 차이가 있어. 그 자식은 그냥 날 좋아한 거야. 자기 손에 넣고 싶었던 거라고. 너는 그런 거 영영 모를 거야. 사람을 그런 식으로 원할 수 있다는 거. 너무 갖고 싶어서 사이코가 되는 거야. 갖는 순간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놈도 있고 그냥 천천히 말려죽이고 싶어 하는 놈도 있어. 자기 거라고 흔적을 남겨놓는 데서 만족하는 놈도 있고 인형놀이를 하듯이 갖고 노는 놈도 있다고. 너야 이해하기 어렵겠지. 착한 애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잖아, 바보 멍충이가 훨씬 낫다고.

 

 

왕재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의식적으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부스럭거리더니 한숨을 쉬며 도로 손을 꺼냈다.

 

 

한 대 피우고 싶다... 담배 없지?

 

없어. 나 안 피우잖아.

 

넌 왜 담배 안 피우는 거야. 재미없게.

 

, 난 담배 있어도 너 안 줄 거야! 너 피우면 안 되잖아! 의사 선생님이 절대 피우지 말랬잖아. 원래 체질에 맞지도 않는다면서.

 

매사가 안 된다는 것투성이...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담배 대신 물을 따라 주었다. 왕재수는 물을 딱 한 모금만 마셨다. 그동안 베르닌은 계속해서 팬과 사이코와 스토커에 대해, 누군가를 동경하는 것과 원하는 것, 갈망과 소유욕과 파괴의 경계에 대해 생각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드미트리를 떠올리자 더욱 머리가 뒤엉켰다.

 

 

하지만 그 자식이 네 팬이었다면 수요일 공연을 망칠 생각은 아니었을 거 아냐. 근데 그놈은 널 가뒀어. 이상한 협박편지까지 계속 보내고... 왜 그렇게 복잡한 짓을 해야 돼? 그냥 널 납치해서 가뒀으면 끝나는 거잖아. 게다가 나랑 같이 널 찾아다녔어. 왜 그랬던 거지?

 

그놈은 수요일 공연을 방해해야 했지만 완전히 망칠 생각은 아니었어. 왜냐하면 그 자식은 내 팬인 동시에 모스크바에서 온 KGB 나부랭이였으니까. 그놈은 스페호프가 아니라 다른 놈에게서 지령을 받고 있었어.

 

, 누구... 스비제르스키?

 

 

낯익은 이름에 왕재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아니. 그 아저씨야 내 공연을 보고 싶어 하는 걸. 하긴 그 사람과 관계는 있지. 그 자식을 보낸 건 제믈랴코프였으니까. , 넌 그렇게 말하면 잘 모르겠구나. 정치꾼이야. 스비제르스키 그 인간과는 정적이고. 날 감옥에 처박는 데 한 몫 했던 놈이야.

 

 

베르닌은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스페호프가 제믈랴코프에게 보내는 밀서를 그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외교부 차관.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가 도리어 덫에 걸렸던 인물.

 

 

드미트리가 제믈랴코프의 지령을 받고 왔단 말이야? 그자는 KGB 쪽이 아니잖아. 외교부 간부잖아. 드미트리는 KGB 요원인데... 어떻게 그자의 명령을 받을 수 있어?

 

바보. 너 정말 이 바닥 모르는구나. 매수하면 끝나는 거지. 게다가 그놈은 해외 지부에서 일했잖아. 런던이랑 파리 어쩌고... 그러니까 외교부 간부랑 엮이는 거야 쉬웠겠지. 제믈랴코프는 우리 아저씨에게 엿을 먹이고 싶었거든. 그래서 그 자식한테 지령을 준 거야. 가서 공연을 방해하라고. 하지만 미묘한 줄타기가 필요했던 거지. 공연이 취소되거나 내가 완전히 맛이 가면 우리 아저씨가 폭발할 테니까. 그래서 그자는 딱 중간만큼만 선을 그은 거야. 공연은 어찌어찌 올라가게 놔둔다 해도 나한테는 혼을 내주고 싶었던 거지. 제믈랴코프 그 인간은 옛날부터 날 진짜 싫어했거든. 게다가 이번에 우리 아저씨한테 제대로 엿 먹은 게 있었대. 그래서 은밀하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거야. 망할 자식이 아저씨를 손댈 용기는 없으니까 나한테 화풀이를 한 거지.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아낸 거야? 설마 드미트리가 그런 얘길 다 해 준 거야?

 

아주 대충. 그놈 완전 제 잘난 맛에 취해 있었거든. 미친놈이었어. 막 협박하고 윽박지르다가 또 돌변해서 어쨌든 곱게 돌려보내줄 테니 말만 잘 들으라고 어르고... 뭐 그놈이 제믈랴코프의 이름을 거론하지야 않았지. 하지만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 견적 나오더라고. 그 자식은 대놓고 말했어. 말만 잘 들으면 월요일까지 데리고 있다가 보내주겠다고. 근데 네가 어제 목걸이를 발견하는 바람에 하루 당겨진 거지. 하여튼 그게 그놈의 공적인 임무였어. 날 납치하는 거. 혼내주는 거. 공연 준비를 방해해서 질 나쁜 무대를 보여주게 하는 거. 그건 제믈랴코프의 목적이었지. 그놈은 다른 목적이 있었고.

 

다른 목적이라니...

 

먼저 얘기한 거. 사이코. 스토커. 정신 나간 팬의 목적.

 

 

왕재수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다리를 웅크리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불편해 보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쿠션을 대주려고 했지만 왕재수가 꿈틀거리더니 그의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았다. 베르닌은 반쯤 무의식적으로 그 애의 관자놀이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충격과 분노는 이제 둔해진 상태였다. 더 이상 놀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 하지만 무서웠다. 드미트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무서웠다. 제믈랴코프의 지령을 받고 온 드미트리보다도 팬으로서의 드미트리가 더 무서웠다. , 드미트리 자체가 아니라 그가 한 짓들을 알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그는 가장 원점으로 돌아가서 물었다. 조금이라도 더 객관적이 되어 보려고.

 

 

그러면... 내가 쓰러진 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네가 날 붙잡은 것까진 기억나. 내 이름 부른 것도. 그 다음에는? 너는 수면제를 먹지 않았잖아. 그때 드미트리가 널 붙잡은 거야?

 

. 그놈이 쓰러졌을 때 깜짝 놀랐어. 그놈이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너까지 쓰러지니까 진짜 놀랐어. 너 제대로 숨도 못 쉬었단 말이야. 막 헐떡거리면서 팔다리도 경련하고... 눈도 안 뜨고 거품까지 물었어. 너무 무서웠어. 네가 어떻게 될까봐. 나 감옥에서 봤어. 이상한 주사 맞고 사람 죽는 거. 꼭 그렇게...

 

 

왕재수는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끼치는 듯 몸을 떨었다. 눈가에 흐릿하게 눈물이 비쳤다.

 

 

그랬구나. 그래서 901호에서 날 처음 봤을 때 그렇게 물었구나. 괜찮으냐고. 막 쓰러지고 꼼짝도 안 했다고... 가지 말라고 한 건 자기 때문이 아니었어. 날 걱정했던 거야. 약 먹이고 아프게 할 거라던 것도 자기 얘기가 아니었어. 내가 쓰러졌던 걸 떠올렸던 거야. 내가 아플까봐...

 

 

베르닌은 손등으로 왕재수의 눈을 닦아주었다. 낼 수 있는 가장 상냥한 목소리를 짜냈다.

 

 

괜찮아. 나 그때 하나도 안 아팠어. 그냥 졸렸어. 몇 시간 자고 일어나니까 멀쩡했어. 진짜야.

 

 

... 근데 그땐 그런 거 몰랐어. 그 자식이 협박했으니까. 진짜 나쁜 약인 줄 알았어. 내가 막 너 인공호흡하려고 하는데 그 자식이 일어났어. 너무나도 멀쩡하게. 웃으면서. 난 너무 놀라서 굳어졌어. 그 자식이 옆으로 다가왔어. 그리고는 네 어깨를 질질 끌어당기는 거야. 그래서 내가 밀쳤어. 건드리지 말라고. 그랬더니 그놈이 그 재수 없는 정중한 말투로 심지어 내 부칭까지 부르면서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물었어. 난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래서 그놈한테 꺼지라고 소리쳤어. 더 이상 수작부리지 말라고, 협박범인 거 다 안다고, 비둘기 죽이고 거지같은 편지 나부랭이 보낸 것도 모자라서 뭐하는 짓이냐고 고함쳤어. 그러자 그놈이 갑자기 씩 웃으면서 생각보다 훨씬 똑똑하다고 했어. 그러더니 무섭냐고 물었어. 네가 잘못될까봐, 죽기라도 할까봐 무섭지 않으냐고. 그러더니 권총을 쥔 손을 들어 올렸어. 나는 그놈이 총을 갖고 있다는 걸 잊고 있었어. 자식은 처음부터 총을 겨누고 있었는데도...

 

 

그 자식이 너한테, 너한테 총을 겨눴단 말이야? 마카로프... 그걸로 널 협박했단 말이야?

 

 

 

왕재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잠시 망설이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베르닌의 열띤 시선을 받자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내가 아니었어. 너였어. 다닐, 그 자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웃고 있었어. 웬만하면 날 다치게 하진 않을 거라고 했어. 난 네 팬이잖아, 미셰츠카라고 했어. 대신 널 쏘겠다고 했어. 쏘지 않더라도 그냥 두면 넌 죽을 거라고 했어. 아주 나쁜 약을 썼다고. 그런 거 전에도 보지 않았느냐고. 내가 말을 잘 들으면 널 쏘지 않을 거라고 했어. 해독제를 줄 거라고 했어. 난 너무 무서웠어. 그놈이 몇 번이나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했거든. 네 머리에 대고. 그래서 난 시키는 대로 했어.

 

 

... 뭘 어떻게...

 

 

그 자식은 내 수첩을 가져와서 종이를 뜯어내더니 나한테 편지를 쓰라고 했어. 왼손으로. 문구를 불러줬지. 기억도 잘 안 나. 왕자가 어쩌고 수요일이 어쩌고 하는 거였어. 진짜 유치한 문구였어. 하여튼 불러주는 대로 썼어. 그동안 그놈은 계속 너한테 총을 겨누고 있었어. 다 쓴 후에 그놈은 날 앉혀놓고는 자기 임무에 대해 설명해주겠다고 했어. 제대로 된 설명도 아니었어. 하여튼 말만 잘 들으면 수요일 공연은 올릴 수 있을 거라고 했어. 안 그러면 널 쏴죽일 거라고 했어.

 

 

하지만... 어떻게 그걸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가 있어? KGB 요원이야. 요원을 죽이면 그건 공식적인 사건이 된다고. 아무리 제믈랴코프가 보냈다 해도 그렇지... 넌 세상 물정에 밝잖아. 근데 어떻게...

 

 

그놈이 사이코였다고 했잖아. 제믈랴코프의 지령만 수행하는 놈이었다면 그 정도로 불안하진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놈은 미친놈이었어. 눈을 보면 알아. 그리고... 그놈은 스페호프가 널 신뢰한다는 것도 잘 알았어. 내가 중간에 말을 안 듣거나 도망치려고 하면 스페호프에게 네 배신행위를 전부 다 보고하겠다고 했어. 그러면 너는 잘릴 거고 더 이상 KGB 요원이 아니게 되는 거니까, 그리고 나면 아주 깨끗하게 널 죽여 버릴 수 있다고 했어. 그래서 난 그냥 말을 듣기로 했어.

 

 

 

베르닌은 숨이 막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고개를 흔들며 거실을 쿵쿵거리며 걸어 다녔다. 간신히 숨을 가다듬고 물었다.

 

 

 

그래서. 그 다음엔?

 

 

그 다음? 아까 얘기했잖아. 그놈이 날 9층으로 데려갔어.

 

 

복도에 나왔을 때 소리라도 질렀으면... 그놈이 널 데리고 나왔으면 여긴 비어 있었을 거 아니야. 나한테 총 쏘겠다고 협박할 수도 없었을 거잖아.

 

 

하나 더 있었어. 너한테 달려들었던 놈. 검열요원.

 

 

데미도프... 그놈이...

 

 

. 근데 난 그 자식 얼굴은 못 봤어. 마스크로 가리고 있었거든. 굳이 얼굴을 꽁꽁 숨긴 걸 보니 내가 아는 놈일 거란 생각은 했어. 드미트리는 그놈에게 여기 남아 있으라고 하면서 바깥에서 내가 소리 지르는 게 들리면 곧장 널 쏴버리라고 했어. 그래서 소리 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개자식이 스카프 찢어서 입도 막고 다리도 묶었어.

 

 

그래서 떠메고 갔다는 거구나. 손 대신 다리를 묶었던 거야...

 

 

. 내가 말을 잘 들었으니까 칭찬하는 뜻으로 손은 묶지 않겠다고 했어. 근데 내가 계단에서 목걸이 떼어내는 거 안 들키려고 떠밀면서 버둥거렸더니 그 자식이 바닥에 메다꽂고 뒤통수를 팼어. 그래서 기절했어.

 

 

? 그럼 심하게 맞은 거잖아! 왜 의사 선생님한테 얘기 안 했어! 뇌진탕이라도 걸렸으면 어쩌려고!

 

 

선생님은 알아. 뒤통수 상처를 봤거든. 치료도 해주셨어. 머리카락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으니까... 내가 너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했어.

 

 

바보 멍충이! 내가 아니고 네가 바보 멍충이야!

 

 

별로 심하지 않았어.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어. 금방 깨어났고. 그리고 그놈이 그 방에서 직접 소독도 해주고 연고도 발라줬었어. 미친 변태 자식.

 

 

 

왕재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떨었다. 베르닌은 공항으로 달려가 비행기를 잡아타고 모스크바 본부로 날아가고 싶은 어마어마한 충동을 억누르느라 이를 악문 채 뭉개진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넌 그때부터 계속 901호에 갇혀 있었던 거야? 보드카 마셨다고 했잖아. 다른 약은 안 먹었어?

 

 

그 보드카 생각도 하기 싫어. 처음엔 그냥 침실에만 가둬놨었어. 문은 다 잠겨 있고 그놈들이 교대해서 지켰어. 드미트리 그놈은 중간 중간 몇 시간씩 나갔다 들어왔어. 아마 너랑 같이 나 찾으러 다니는 시늉 하느라 그랬겠지. 밥도 주고 차도 줬어. 안 먹으려고 했는데 그놈이 협박해서 억지로 먹었어. 그러다가 그놈들이 방을 비운 거야. 방문은 밖에서 잠겼으니까 못 연다지만 창문은 깨뜨릴 수 있잖아. 그래서 나가려다 걸렸어.

 

 

9층인데 창문을 깨고 나갈 생각을 했단 말이야?

 

 

파이프 타고 내려가려고 했었지. 알잖아, 나 벽 잘 타는 거. 근데 그때 데미도프인지 뭔지 하는 자식이 딱 들어와서 망했어. 그놈이 주먹질을 하려는데 드미트리가 들어오더니 저지하는 거야. 무려 키로프에서 오신 귀한 몸이니까 너 같은 녀석이 손대면 안 된다면서 그놈을 내보냈어. 그러더니 그 사이코 새끼가 날 팼어! 그 자식 루뱐카 본부에서 온 놈 맞아, 상처 안 나게 패는 법을 알더라고. 자기는 날 때려도 된대. 내가 졸업도 안 한 풋내기 시절부터 내 무대를 봤으니까, 자기는 진정한 팬이니까 내가 잘못하는 게 있으면 더 잘못하기 전에 때려서라도 바로잡아 줘야 된다는 거야. 너무 웃기지 않아? 사이코나 공산당, 정치꾼, KGB 하수인들 논리나 다 똑같더라고. 하여튼 두들겨 팼어. 내가 못 덤벼들게 수갑 채워놓고. 그래놓고 보드카 먹였어. 내가 말을 안 들으니까 어쩔 수 없이 재워야겠다면서. 얼마나 먹였는지는 기억도 안 나. 생각만 해도 또 토하고 싶네.

 

 

 

왕재수는 속이 울렁거리는 듯 손으로 가슴과 배를 쓸었다. 베르닌은 이제 화조차 나지 않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그는 언제나 사람의 선의를 믿었다. 그런 식으로 비열하게, 완벽하게 사악하게 행동하는 인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데 일등공신 노릇을 해온 스페호프조차도 어딘가 어리숙한 면이 있었다. 적어도 그는 스페호프의 패턴을 예측할 수는 있었다. 국장이 어떤 사고방식의 소유자인지도 알았다. 하지만 드미트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드미트리에 대해 품었던 호의와 신뢰는 모두 무의미했다. 그가 느끼고 파악하고 이해했던 드미트리는 모두 허상에 불과했다. 오로지 그 사실만으로도 베르닌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 드미트리가 왕재수에게 그런 비열한 짓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 이후 있었던 일을 물었다. 왕재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몰라. 기억 안나. 그때부턴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어. 토하고 자다가 깨다가 토하고 또 자고...

 

 

베르닌은 이제 왕재수가 사실을 숨길 때,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말투와 어떤 단어를 쓰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 더 캐묻지 않았다. 왕재수 때문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 때문이었다. 무서웠다. 드미트리에 대한 모든 환상이 깨질까봐. 드미트리의 행동이 그의 상식과 윤리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더욱 더 깊게 들어 갈까봐.

 

 

그럼 내가 갔을 때까지 그러고 있었던 거야?

 

거의.

 

하지만... 난 총소리를 들었어. 두 번. 드미트리는 실제로 총에 맞았고. 그럼 데미도프와 그 자식이 막판에 싸운 거야? 꼬리 밟혔다고 책임 추궁하다 싸우고 열 받은 데미도프가 쏜 거야? 피를 보자 놀라서 그놈은 도망친 거고...

 

 

베르닌은 그때의 상황을 논리적으로 상상해 재구성하려고 애쓰며 물었다. 왕재수는 소파 구석으로 몸을 바짝 붙이면서 지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대꾸했다.

 

 

 

아니. 총은 내가 쐈어.

 

 

 

베르닌은 너무 놀라서 펄쩍 뛰어오를 뻔 했다.

 

 

 

? 네가 쐈다고? 네가 어떻게! 너 그때 기절해 있었잖아! 분명히... 분명히 그랬어. 그래서 그 자식이 인공호흡을 해주고 있었고... 나도...

 

, 기절. 그래, 잠깐 기절하긴 했지. 그 자식이 목을 졸랐거든. 총 맞고 나서 순간 열 받아서... 그래도 오래 조르진 않았어. 네가 뛰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하지만... 넌 묶여 있었잖아! 총 같은 거 쏠 줄도 모르잖아!

 

뭘 당겨야 되는지는 나도 알아! 내가 총 쏘는 거 못 봤을 거 같아?

 

 

 

왕재수는 갑작스럽게 화가 치미는 듯 입술을 깨물며 발로 소파 아래를 걷어찼다. 그리고는 그때 있었던 일을 낮고 빠른 어조로 쏟아냈다.

 

 

 

난 침대에 묶여 있었어. 데미도프 그 자식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근데 갑자기 그 사이코가 뛰쳐 들어왔어. 데미도프에게 거실로 나가라고 했어. 그러더니 나한테 자는 척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윽박질렀어. 그렇게 말했지. 이런 깜찍한 것 같으니, 목걸이를 떨어뜨려? 분명히 보내주겠다고 했잖아. 내 말을 못 믿었어?라고. 그러면서 그 미친놈이 키스를 했어. 다닐, 그 자식이 그랬어. 끝까지 말을 안 듣는 나쁜 애라고, 의원님들이 날 혼내주고 싶었던 것도, 귀여워해 주고 싶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곧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다냐가 올 거라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는 고민 중이래. 다냐는 순진한 녀석이니까 마음에 든다고. 그래도 내가 말을 안 들었으니까 방에 들어오는 즉시 쏴버려야겠다고. 물론 진담은 아니었어. 나도 그건 알았어. 그놈은 널 쏠 생각이 없었어. 적어도 그 방에서는 그럴 수 없었어. 넌 아직 잘리지 않았고 여전히 KGB 요원인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때 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어. 그놈은 다시 키스를 하려고 몸을 숙였어. 재킷 안주머니에 권총이 들어 있는 게 보였어. 내 오른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지. 하지만 왼손은 움직일 수 있었어. 그래서 난 손을 뻗어서 자식의 주머니에서 권총을 낚아챘어. 그리곤 곧장 쐈어.

 

 

왼손으로...

 

 

나 어릴 때 양손 쓰는 연습 많이 했어. 근데 총은 처음 쏴봤으니까 오른손으로 쐈어도 빗나갔을 거야. 처음 건 완전히 빗나가고 두 번째 건 어깨에서 피가 나길래 제대로 맞췄나 했는데 아니었어. 그냥 스친 거였어. 그 자식 진짜 화냈어. 앞뒤 안 가리고 곧장 내 손에서 총을 뺏더라고. 자식이 내 팔을 비틀면서 한 손으로 목을 졸랐어. 방으로 달려온 공범 자식한테 그놈이 ! 계단으로 가!하고 소리쳤어. 일부러 그랬겠지. 계단에서 너랑 마주치게 하려고. 그놈 얼굴 보여주려고...

자식은 그놈이 나가는 것을 보려고 잠깐 현관까지 뛰어나갔다 들어왔어. 그리고는 내가 몸부림치니까 올라타서 깔아뭉갰던 것 같아. 하여튼 목을 졸랐어. 너무 숨이 막혀서 기절했던 것 같아. 그때 네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어.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어. 그래서 정신이 잠깐 돌아왔어. 아마 그놈이 손의 힘을 늦췄기 때문일 거야. 네가 바깥에서 뛰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어. 그러자 그놈은 내 목을 놔줬어. 소리쳐 너를 불렀어. 그리고는 귓가에 대고 말했어. 한 마디도 하지 마, 미셰츠카. 다닐을 팔아넘길 테니까.나는 상관없다고 했어. 그러든 말든 상관없다고. 그러자 자식은 내 입술에 자기 입을 대고, 숨을 불어넣듯이 입술로 누르면서 속삭였어. 아니, 상관있을 걸. 스페호프에게 밀고할 테니까. 그럼 그놈은 많이 힘들 거야.라고. 어쩌면 다른 얘기를 했을지도 몰라. 너무 숨이 막혀서 잘 들리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그때 네가 왔어. 그놈이 널 쏠까봐 무서웠던 것 같기도 해. 근데 기억 잘 안 나. 숨쉬기가 힘들었어.

 

 

 

베르닌은 그 방으로 뛰어 들어갔던 순간을 떠올렸다. 드미트리는 침대 위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자세가 부자연스러웠다. 베르닌은 그가 인공호흡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니었다. 그는 협박을 하고 있었다. 목을 조르고 입술을 마주 댄 채 끔찍한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베르닌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화가 나고 슬프고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주먹으로 바닥을 쾅쾅 쳤다. 소리치고 흐느껴 울었다. 훌쩍훌쩍 울고 있는데 왕재수가 옆으로 왔다.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화 많이 나?

 

 

왜 나한테 얘기 안했어! 얘기했어야지! 난 그것도 모르고... 그것도 모르고 그 자식이랑 어울려 다니고... 그 자식이 하는 말을 다 믿고... 그놈이 해 주는 저녁 먹고... 한 식탁에서 같이 앉아 있고... 너랑 그 자식 둘이 있게 놔두고... 바보 멍청이!

 

 

말하면 뭐해. 달라질 것도 없는데.

 

 

뭐가 없어! 내가 그 자식 죽여 버렸을 거 아냐! 감옥 보내고...

 

 

네가 어떻게 그놈을 감옥 보내니. 그 자식이 병원에서 너한테 한 말 기억 안 나? 그 개자식이 한 말 중 유일하게 거짓말이 아니라고. 아무도 내 말은 안 믿어줄 거란 말이야. 그리고 내가 납치됐었다는 게 공론화되면 위에선 내 담당 요원인 너한테 책임을 물을 거고.

 

 

넌 그게 문제란 말이야! 왜 항상 그렇게 나오는데! 내가 어떻게 되든 말든! 나쁜 짓한 놈을 그냥 두란 말이야?

 

 

그럼 달리 뭘 하니. 달라질 것도 없는데. 그 자식 감옥에 넣는다고 나 잡아갔던 게 없어져? 일만 더 꼬이지. 난 공연만 잘 올리면 되는걸. 달라지게 했으려면 그때 제대로 쐈어야 했는데... 빗나갔잖아. 그걸로 끝인 거야. 에이, 그 자식 가고 다 끝나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망할 놈의 인형... 리자는 그걸 왜 봐가지고 너한테 말하고.

 

 

그럼 넌 내가 알아채지 못했으면 끝까지 말 안하려던 거였어?

 

 

.

 

 

 

베르닌은 왕재수를 피가 나도록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두들겨 패고 멱살을 잡아 흔들고 땅에 머리를 마구 박아주고 싶은 건 자기 자신이었다. 괴로워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가방을 뒤지더니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낸 끝에 넓적하고 커다란 초콜릿을 와작 쪼개서 내밀었다. 베르닌은 기가 찼다.

 

 

 

이게 뭐야...

 

여자애들이 줬어. 먹으면 기분 좋아진다고 그러던데, 엄청 달아서.

 

이 상황에서 초콜릿 먹게 됐냐!

 

그럼 어떤 상황에서 먹어? 기분 엄청 나쁘니까 지금 먹어야지.

 

 

 

베르닌은 초콜릿을 받아서 입 안에 욱여넣었다. 눈이 질끈 감기도록 달았다. 너무 달아서 기침이 나왔다. 억지로 우걱우걱 씹어서 꿀꺽 삼켰다. 남은 초콜릿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목이 메었지만 눈물 때문인지 초콜릿 때문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왕재수는 자기가 마시던 물컵을 건네주었다. 물을 마시자 마비될 듯하던 단맛이 씻겨 내려가면서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기분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지만 뭔가를 목구멍으로 넘겨서 그런지 북받치던 분노와 괴로움은 조금 잦아들었다.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왕재수로부터 남은 초콜릿을 받아서 마저 먹었다. 왕재수는 가방에서 사과파이도 꺼냈다. 접시도 없이 바닥에 종이봉지 째 내려놓고는 손으로 대충 쪼개서 들고 먹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차 우려 줄까?

 

.

 

 

그래서 베르닌은 찻물을 올렸다. 물은 금방 끓었다. 티포트에 찻잎을 넣으면서 보니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었다. 바쁘다고 설거지를 대충대충 해서 그런 것 같았다. 나중에 소다로 닦아야지하고 중얼거리며 그는 차를 우렸다. 접시와 포크도 찾아서 들고 갔다.

 

차를 따라주니 왕재수는 좋아했다. 차 한 모금, 사과파이 한 입 번갈아가며 먹었다. 한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마시고 초콜릿과 사과파이를 먹었다. 뜨거운 차와 당분 때문에 몸이 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질문을 했다.

 

 

 

... 그 자식 말이야. 그러면, 그러니까... 어젯밤에 너희들... 밤에 너네 집 갔다가 봤어. 나는 네가 드미트리를 좋아하게 됐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둘이 밤을 보냈다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지? 그 자식이 협박해서 그런 거지?

 

 

 

왕재수는 눈을 깜박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한참 후에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우리 이 얘긴 안 하면 안 될까?

 

 

베르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찻잔을 쥔 채 물끄러미 왕재수를 쳐다보기만 했다. 왕재수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랬잖아, 그 자식 사이코 팬이었다고. 그 자식한테 진짜 중요한 건 섹스 자체가 아니야. 나랑 하는 거, 날 자기 걸로 만드는 게 중요한 거지. 아마 나랑 하기 전까진 사내애들이랑 놀아본 적도 없었을 걸. 그놈은 내가 너한테 사실을 말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어. 그래서 새벽까지 하고 싶은 거 하다가 간 거야.

 

그러면, 그러면 9층에 있을 때도 그랬어? 토요일이랑 일요일에도?

 

그게 중요하냐, 어차피 한 번을 하든 몇 번을 하든 한 건 마찬가지인데.

 

말 잘 들으면 곱게 보내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 그런 나쁜 짓을 계속 한 거냐고!

 

“ ‘곱게의 의미는 두들겨 패거나 불구로 만들지 않고돌려보내준다는 거였지.

 

 

베르닌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왕재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하여튼 곱게 돌아왔잖아. 그러니까 그걸로 된 거야.

 

 

그치만, 어젯밤엔 그냥 우리 집에 남아 있었으면 됐잖아. 내가 금방 돌아왔을 건데. 내 옆에 있었으면 그놈도 대놓고 널 데려가지는 못했을 텐데. 그런데도 그 자식 따라서 올라가고... 너 정말 그 협박을 믿었어? 그놈이 국장한테 일러바쳐서 날 자르게 한다는 거? 그래서 끝까지 입 다물고 그놈이 원하는 대로 해준 거야?

 

 

처음엔 믿었지. 네가 쓰러지는 걸 봤으니까. 나중엔 안 믿었고. 그놈은 스페호프에게 자기 정체를 드러낼 위험을 무릅쓸 수 없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로 무모한 짓을 하고 있었잖아. 너한테도 이렇게 결국은 꼬리 밟히고. 어쨌든 그놈은 내가 아무 말도 안 할 거란 걸 알았어. 내가 어떤 식으로 생각할지,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알고 있었어. 오랜 팬이라서, 사이코라서, 아니면 영리한 놈이라서, 셋 중 어떤 이유인지는 나도 몰라. 어쩌면 셋 다겠지.

 

 

나중엔 안 믿었다면서... 그러면 왜...

 

 

글쎄. 중요한 건 네가 스페호프에게 잘리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네가 그놈을 좋아했다는 건지도 모르지. 넌 바보 멍충이잖아. 난 바보가 실망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어.

 

 

 

베르닌은 눈을 깜박였다. 입술을 다물었다 벌렸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왕재수는 그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근데 이제 물 건너갔네. 다 저 망할 인형 때문이야. 다 알아버리고. 울고 소리 지르고 후회하고 자학하고... 바보는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난 바보가 아니야!

 

 

그러게. 근데 그냥 바보 해. 그게 좋아.

 

 

너 좋으라고 바보 멍충이로 살란 말이야?

 

 

그러면 안 되니?

 

 

 

베르닌은 왕재수의 뺨을 한 대 후려갈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한 것은 그 반동분자 꼬마의 야윈 몸을 홱 끌어당겨 두 팔로 안아준 것이었다. 너무 세게 안아줘서 왕재수는 왼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놓쳤다. 반쯤 남아 있던 찻물이 테이블과 카펫 위로 엎어져 작은 시내처럼 흘렀다. 얼룩이 질 게 뻔했다. 괜찮았다. 찻물과 먼지와 땀과 피는 지울 수 있었다.

 

 

소다를 타서 닦아야지...

 

 

아마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입 밖에 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왕재수가 웃었고 바보 멍충이라고 쏘아붙였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야단을 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왕재수가 사모바르처럼 따끈따끈해지더니 금세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완전히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기다렸고 한참 후에야 그를 침대로 옮겨 뉘었다. 그리고 거실로 나와서 남은 사과파이 한 입, 식은 차 한 모금씩 번갈아 가며 전부 먹고는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FIN

- 2015. 9. 18 ~ 10. 2 -

 

 

 

 

 

 

.. 이렇게 하여 우수한 단추 시리즈는 정말로 끝이다.

 

이게 뭐냐, 지금 장난하냐! 꿈과 희망의 서무 시리즈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라고 하신다면... 그래서 독립된 34편이 아니라 33-1편으로 번호를 매겼습니다... 이번 편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그냥 이건 일종의 평행우주, 단추의 꿈, 일어나지 않은 일 등등으로 무시하고, 우수한 단추 시리즈는 그냥 33편에서 끝난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사실 나도 우수한 단추 시리즈 쓰는 내내 그냥 33편으로 끝낼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지만. 원래 이 사람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처음부터 이런 결말과 이런 구조를 생각하고 쓴 거라서... 쓰면서도 이건 서무랑 좀 안 맞는데... 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쓰다 보니 또 기분 좋게 끝내고 싶어서 33편으로 그냥 마무리하고 이 결말은 그냥 마음속에서만 가지고 있을까 잠깐 고민도 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모든 이야기가 이 결말을 향해서 서술된 거라서. 그래도 꽤 노력해서 쓴 편이라 단추가 발견한 단서들을 무시한다면 그냥 33편으로 끝나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어차피 리자나 스페호프와의 대화가 아니었다면 단추는 몰랐을테니) 그러니 행복한 서무 시리즈를 원하는 분들은 이 33-1은 그저 평행 우주의 결말이라고 생각하시기를..

 

..

 

이번 편에 나오는 왕재수는 서무 에피소드 몇몇개와 마찬가지로 '딱 싸가지 없는 그 서무의 왕재수'라기보다는 본편의 미샤와 훨씬 가깝다. 하긴 왕재수를 아무리 '딱 싸가지 없는 어리광쟁이'로 만들어보려 해도 원판의 강력한 본 인물이 있으니 결국은 당겨놓은 고무줄처럼 자꾸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하는 것 같다.

 

..

 

 

하여튼 이번 편은 별다른 자세한 묘사는 없지만 내용 자체는 조금 그래서... 하여튼 공개 블로그에 올리는 거라서 수위는 많이많이 조절했습니다. 올리면서 다시 읽어보니 아무래도 나는 크레믈린 사촌이 맞는 건가 ㅠㅠ 왕재수에게 너무한 건가 ㅠㅠ 모든 것은 단추의 꿈이었습니다 허헝..

 

..

 

인사 발령과 지방 이전, 거듭되는 출장과 업무 폭풍으로 아마 한동안 서무는 자주 올라오지 못할 것 같다. 지금은 34편을 쓰는 중인데 과연 연휴 동안 끝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 (34편은 다시 랄라랄라 분위기로 돌아옵니다 ㅠㅠ)  못 올리더라도 전에 쓴 본편이나 추리 외전 등 다른 글을 매주 발췌해보려고 한다. 그럴 여유가 생길 수 있기를..

 

..

 

 

서무 시리즈나 about writing 폴더에 글 남겨주신 분들 항상 감사해요. 글에 대한 이야기들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가져가시거나 베끼거나 인용/변형/사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2015. 10. 8. 22:39

노는 아이들 russia2015. 10. 8. 22:39

 

 

마음의 위안을 위해.

지난 7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의 강변에서.

 

:
Posted by liontamer
2015. 10. 5. 22:09

안드리스 리에파 dance2015. 10. 5. 22:09

 

 

오늘 본 유일하게 아름답고 유일하게 내게 위안을 준 것.

해적의 알리를 춤추고 있는 안드리스 리에파의 사진.

Andris Liepa

사진 : Nina Alovert

 

안드리스 리에파는 키로프 시절 유명한 무용수였고(마리스 리에파의 아들이다) 사진사인 알로베르트 역시 발레계에서는 유명한 인물이다. 내가 제일 처음 샀던 발레 화보집도 알로베르트가 찍은 것이었다. 아주 오래 전. 그 화보집에서 처음 안드리스 리에파의 화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던 기억도 난다.

 

.. 너무나 힘들고 괴로운 하루를 보내고 멍하게 페이스북을 훑다가 팔로우하는 발레 사진작가가 공유해놓은 이 화보를 보았다. 오늘 처음으로 그냥 무조건적인 아름다움을 봤다. 처음으로 위안을 얻었다. 고마워요, 안드리스. 고마워요, 니나.

 

 

** 지금 보니 이 의상은 알리가 아니라 랑켄뎀 같네, 동작도 그렇고..

:
Posted by liontamer

 

우여곡절 끝에 여러 편으로 길어진 우수한 단추 시리즈. 지난 1부에 이어 이제 33편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 2부이다.  

 

기존에도 서무 시리즈는 이 장르 저 장르 잡탕이었고 에피소드별 분위기나 문체도 균질하지 않았지만 특히 우수한 단추 이야기들은 서무 시리즈 중에서도 별도의 외전 같은 느낌으로 쓰긴 했다. 기존 서무 에피소드들은 당직실 귀신 외에는 그래도 현실적인 이야기들이었는데 드미트리가 나오는 이야기들은 애초부터 단추와 똑같은 외모에 전공과 성까지 같은 드미트리 베르닌이란 존재 자체가 일종의 평행우주 성격이나 환상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수한 단추 시리즈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과연 베르닌과 드미트리는 사라진 왕재수를 무사히 구해낼 수 있을지. 베르닌의 901호에 대한 추리는 옳았을지, 그리고 금발의 안경잡이 범인은 누구일지. 여기 33편 2부에서... 그럼 재미있게 읽으세요~

 

* 이번 편은 33편 1부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므로 전편을 꼭 읽어야 함(http://tveye.tistory.com/4062)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4월 신작 공연을 앞두고 정체불명의 협박범에게 납치된 왕재수. 베르닌과 드미트리는 힘을 합쳐 가브릴로프 시내를 동분서주하지만 왕재수의 행방은 묘연하고... 그러던 중 베르닌이 발견한 왕재수의 목걸이... 과연 이들은 왕재수를 찾아내고 사흘 앞으로 다가온 공연을 무사히 올릴 수 있을 것인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 http://tveye.tistory.com/406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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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3

 

 

 

 

 

서무의 슬픔

-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 (2부) -

 

 

 

 

 

 

 

 

5층쯤 뛰어올라갔을 때 베르닌은 너무 숨이 차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폐가 터질 것 같았다. 그제야 생각이 나서 무전기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 딤카, 901호야. 열쇠 받았어. 금방 갈 테니까 기다려! ”

 

 

답이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 딤카, 내 말 안 들려? 무슨 일 있어? ”

 

 

순간 베르닌은 벽력같은 굉음에 고막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너무나 큰 소리가 하고 울려 퍼져서 자기도 모르게 귀와 머리를 감싸고 옆으로 데구르르 굴렀다. 손에서 놓친 무전기 너머로 다시 한 번 꽝 소리가 났다. 저 위쪽 어딘가와 무전기 양쪽에서 동시에 꽝 소리가 울려 퍼진 거였다. 베르닌은 불에 덴 듯 벌떡 일어섰다. 총 소리였다. 위에서 난 소리였다. 9층이 분명했다. 투다닥거리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났다.

 

 

딤카! 기다려! 딤카!

 

 

베르닌은 미친 듯이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올라갔다. 8층까지 올라왔을 때 갑작스럽게 시커먼 그림자가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덩어리처럼 그의 정면으로 쇄도했다. 베르닌은 본능적으로 두 팔을 뻗어 그자를 가로막았다. 연한 금발머리였다.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둘 다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맞부딪친 순간 엄청난 충격이 전해져 왔다.

 

베르닌은 악착같이 그자를 가로막다가 가속도와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뒤엉켜서 계단을 굴렀다. 안경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려고 하는데 상대방이 뭔가로 그의 머리를 거세게 쳤다. 아마 베르닌이 고개를 홱 옆으로 돌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계단 난간이 없었다면 두개골이 박살났을지도 몰랐다. 통증과 충격으로 베르닌이 숨을 몰아쉬는 순간 남자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뿌리치고 일어나더니 발로 등을 걷어찼다. 베르닌은 등골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 너무 아파서 눈앞이 새하얘졌지만 고함을 지르며 그자의 발목을 붙들었다. 남자가 욕설을 퍼부으며 다시 한 번 그를 걷어찼다. 베르닌은 옆으로 굴러서 피했다. 머리로 그 자의 종아리를 들이받았다. 남자가 휘청거리더니 균형을 잃고 계단 아래로 쿠당탕 굴러 떨어졌다. 베르닌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쫓아 내려가려는데 위층에서 드미트리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미하일! 미하일!

 

 

그 마법 같은 이름에 베르닌이 얼어붙은 순간 아래쪽 계단에 나뒹굴고 있던 남자가 몸을 솟구쳐 일어나더니 쏜살같이 달려 내려갔다. 베르닌은 그자의 뒤를 쫓으려고 했지만 다시 한 번 드미트리가 ‘미하일!’ 하고 외쳤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범인을 붙잡는 것보다 왕재수가 먼저였다. 게다가 조금 전의 그 총소리. 한순간 베르닌은 머리에서 피가 다 빠져 달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 안 돼... 아닐 거야... 아냐, 걜 쏜 게 아닐 거야... 하느님... 안돼요! ’

 

 

솟구치는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이 베르닌은 뛰고 또 뛰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전력으로 달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마침내 9층에 도착했다. 901호는 맨 끝에 있었다. 정신없이 복도를 내달렸다. 옆집에서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 대체 무슨 일이에요! 웬 소란이냐고요! ”

 

“ 비켜요! KGB라고요! ”

 

 

그 기분 나쁜 단어를 듣자 902호 주민이 몸서리를 치며 잽싸게 문을 쾅 닫았다. 상관없었다. 베르닌은 달렸다. 901호.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순간 베르닌은 가슴이 덜컹했다. 현관에서부터 핏자국이 점점이 이어져 있었다.

 

 

미셴카! 나야, 다닐! 제발... 미셴카!

 

 

그는 구르듯 뛰어 들어갔다. 하마터면 문턱에 발이 걸려 고꾸라질 뻔했다. 어두워서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안쪽에서 드미트리가 소리쳤다.

 

 

“ 다닐, 이쪽이야! ”

 

“ 딤카! 미하일... 미샤는... ”

 

“ 여기 있어! 빨리 와! ”

 

 

머리가 띵해졌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베르닌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나아갔다. 정신없이 벽면을 휘젓다가 손에 닿는 스위치를 올리자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침실이었다. 그는 침실에 들어와 있었다. 커튼이 빽빽하게 드리워져 있고 침대와 나이트테이블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커다랗고 휑한 침실이었다. 한쪽에 문이 하나 붙어 있었다. 아마도 욕실일 것이다. 구조가 왕재수의 집과 똑같다면.

 

 

맨 처음에 그는 드미트리 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드미트리는 침대 위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자세가 부자연스러웠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 이유를 알았다. 인공호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재수는 침대 위에 똑바로 누워 있었다. 오른쪽 팔을 위로 쳐든 채. 손목과 침대 난간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드미트리에게 가려져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손과 무릎을 경련했을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때 드미트리가 입을 떼더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숨을 몰아쉬면서 소리쳤다.

 

 

“ 너 인공호흡 할 줄 알지? ”

 

“ 으, 으응... ”

 

숨은 이제 돌아왔는데... 그래도 교대해 줘. 조금만 더 해주면 될 것 같아. ”

 

 

베르닌은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드미트리를 밀치고 왕재수의 곁으로 바짝 붙었다. 왕재수는 눈을 감은 채 입을 O자로 벌리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숨은 쉬고 있었다. 불규칙하고 약할 뿐이었다. 드미트리가 심장 마사지를 했는지 셔츠 단추가 반쯤 풀어헤쳐져 있었다. 베르닌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인공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왕재수의 입술과 코가 차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수차례 반복해 숨을 불어넣고 있는데 왕재수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무릎으로 그를 들이받았다. 그리고는 묶여 있지 않은 손으로 힘없이 그의 가슴을 밀었다. 고개를 옆으로 피하며 도리질을 했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가냘픈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가... 저리 가...

 

“ 미셴카... 나야. 다닐이야. 정신 들어? 이제 괜찮아! 괜찮아! ”

 

“ 다닐... ”

 

 

왕재수가 눈을 떴다. 베르닌과 눈이 마주치자 두어 차례 눈을 깜박이더니 기침을 하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왼손을 뻗더니 물에 빠진 사람처럼 베르닌의 손목을 아플 정도로 꽉 쥐었다. 베르닌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 이제 괜찮아. 다 끝났어. 그놈 갔어. 집에 가자. ”

 

“ 너 괜찮아? ”

 

“ 나... 당연히 괜찮지. ”

 

“ 아니야... 안 괜찮아. 막 쓰러지고... 꼼짝도 안 하고... ”

 

 

왕재수가 몸을 떨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머리와 손을 쓸어주면서 달랬다.

 

 

“ 괜찮아. 그때 수면제 먹어서 그랬어. 하나도 안 아팠어. 나랑 드미트리는 괜찮아. 넌... 넌 괜찮은 거야? 그놈이 약 먹였어? 그랬어? ”

 

“ 몰라. 아무 것도... 기억 안 나... 다닐, 나 집에 가고 싶어. ”

 

 

왕재수가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건지 약 기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떨구더니 몸을 웅크렸다.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의 맥을 쟀다. 불규칙하고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과 차가운 손발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빨리 의사에게 데려가야 할 것 같았지만 수갑을 풀 수가 없었다. 급한 마음에 수갑을 덜컹거리며 잡아 흔들고 있는데 드미트리가 다가왔다. 핀을 밀어 넣더니 1분 정도 끙끙거리며 씨름한 끝에 수갑을 딸깍 하고 풀었다. 그리고는 왕재수의 팔과 손목을 주무르면서 빠르게 말했다.

 

 

“ 다닐, 의사한테 전화해. ”

 

“ 아, 그래! ”

 

“ 하지 마... 하지 마. ”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던 왕재수의 입술 사이로 희미하지만 단호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베르닌은 부드럽게 달랬다.

 

 

“ 괜찮아, 미셴카. 레프 사벨리예비치한테 전화하는 거야. 너 지금 아프잖아. 그놈이 약 먹였잖아. 의사 선생님이 봐주시면 금방 나을 거야. ”

 

“ 아니야. 괜찮아. 집에 갈래. 조금만 자면 괜찮을 거야. 가지 마, 다닐. 가지 마. ”

 

 

왕재수가 두 팔로 베르닌에게 매달렸다. 감긴 눈 아래로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가면 안 돼, 또 약 먹이고... 막 아프게 하고... 위험해서 안 돼. ”

 

 

베르닌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왕재수를 꼭 껴안고 뺨을 쓰다듬으며 달랬다.

 

 

“ 이제 괜찮아, 미셴카. 아무도 안 와. 약 같은 거 더 안 먹여. 아프게도 안 할 거야. 나 아무 데도 안 갈게. 너 옆에 있을게. 전화는 드미트리한테 하라고 할게. 넌 나랑 의사 선생님한테 가자. 그럼 괜찮지? ”

 

 

왕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절한 것 같았다. 꼭 감은 눈가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드미트리가 한숨을 쉬었다.

 

 

“ 헛소리하는 거야. 약에 취해서... 아까도 저랬어. 감옥에 있을 때랑 혼동하더라고. 일단 나가자. 전화는 내려가서 해야겠다. ”

 

“ 그, 그래. 근데 아까 그 소리는... 총 소리... 그건... 앗, 너 괜찮아?

 

 

그제야 베르닌은 드미트리에게 시선을 돌렸고 깜짝 놀라 고함을 질렀다. 드미트리는 한 손으로 왼쪽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소매가 피로 빨갛게 얼룩져 있었다. 드미트리는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 어, 별 거 아냐... 좀 스친 거야. ”

 

“ 스친 거라니! 총에 맞았잖아! 이 바보야, 그래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앉아봐! 박혔어? 총알 박혔냐고! ”

 

아니야, 다닐. 그냥 스쳤어. 살갗만 찢어진 거야. 정말이야. 걱정하지 마. ”

 

 

베르닌은 급하게 드미트리를 침대에 앉혔다. 셔츠를 벗게 한 후 상처를 살폈다. 피투성이가 되어 있어 육안으로는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일단 상처를 꽉 동여매서 지혈을 했다. 드미트리가 벽에 움푹 파인 자국을 가리켰다.

 

 

“ 그놈이 쐈는데 빗나갔어. 어깨 스치고 저기 가서 맞았어. 총알이랑 탄피는 내가 주웠어. ”

 

“ 총 소리가 두 번 났는데... ”

 

“ 두 방 쐈어. 미친 놈... 사격 솜씨도 엉망이었어. ”

 

“ 다행이다... 정말 큰일 날 뻔 했구나... 너 왜 안 쐈어! 총 있었잖아! 총 잘 쏘면서... 왜 그놈이 너 쏘게 내버려둔 거야! ”

 

 

드미트리가 왕재수 쪽을 힐끗 바라보며 지친 음성으로 대꾸했다.

 

 

“ 쏠 수가 없었어. 그놈이 이 방에 있었거든. 얜 묶여서 인사불성이었고... 혹시라도 내가 잘못 쏴서 총알이 튀기라도 하면... 미하일에게 맞기라도 하면... ”

 

“ 아... 그래... 그렇지... 다행이다... 딤카... 정말 다행이야. 많이 안 다쳐서... 얘가 무사해서... 그런데 그놈은... ”

 

“ 얘긴 좀 있다가 하고 미하일부터 빨리 의사한테 데려가자.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재수 뿐만 아니라 드미트리도 빨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는 급하게 왕재수를 들쳐 업었고 드미트리와 함께 901호에서 빠져나갔다.

 

 

 

 

*    *    *

 

 

 

 

스타브로프는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는 대신 즉시 응급조치를 해주었다. 왕재수의 맥을 재고 혈액 검사를 했다. 마사지를 하고 몸을 따뜻하게 한 후 지난번과는 좀 다른 약초즙을 먹였다. 왕재수는 곧 눈을 떴다. 스타브로프가 상냥하게 달래면서 뭘 먹었거나 주사를 맞은 기억이 있는지 물어보자 고개를 저었다.

 

 

“ 모르겠어요. 술 마신 것 같아요. ”

 

“ 보드카? ”

 

“ 술. 보드카. 토했어요. 잤어요. 잘 몰라요. 근데 이제 괜찮아요. 극장에 갈래요. ”

 

“ 극장 같은 소리! 며칠은 누워 있어야 될 거다! ”

 

“ 말도 안 돼. 애들이 다 기다리는데. 지금 가야 돼요. 수요일 공연... ”

 

안 돼! 입원이야! 나아지지 않으면 수요일 공연이고 뭐고 다 취소해야 돼! ”

 

“ 안 돼... ”

 

 

왕재수가 두 손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눈에서 새빨간 불꽃을 번쩍거리며 스타브로프에게 삿대질을 하고 꾸짖었다.

 

 

선생님이면 다야! 진짜 가야 된단 말이에요! 그 공연... 얼마나 열심히 준비한 건데! 애들이 얼마나 기다리는데! 못 가게 하면 가만 안 둘 거예요! 지금 가야 돼!

 

 

베르닌은 노의사가 버럭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타브로프는 화를 내지 않았다. 왕재수의 머리와 등을 쓸어주면서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그래, 내가 실언했구나. 공연 올려야지.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깟 족제비 같은 KGB 나부랭이 때문에 못 올리게 할 수야 없지. 내가 낫게 해주마.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 있자. 그래야 나아져서 내일 극장에 가고 수요일에 공연도 올릴 수 있지. 어차피 오늘은 벌써 해도 지고 늦었단다. 무용수들도 너 안 오는 줄 알고 집에 갔을 거야. 오늘 푹 자고 내일 가자. 다닐이 그러라는구나. 그렇지? ”

 

 

베르닌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쳤다.

 

 

맞아 맞아! 내가 극장에 얘기했어, 너 아파서 오늘은 못 나오지만 내일 나오니까 다들 연습 많이 하고 있으라고. 그러니까 내일 일찍 가자. 내가 데려다 줄게. 지금은 푹 자는 거야. ”

 

“ 너는? ”

 

“ 나? 내일 너 극장에 데려다 줄게. 같이 있을게. ”

 

“ 지금도... ”

 

“ 지금? 응. 일요일이니까. 회사 안 가. 여기 같이 있어줄게. ”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브로프는 고분고분해진 왕재수를 데리고 몇 가지 검사를 더 해본 후 따뜻한 물과 약초즙을 조금 더 먹이고 재웠다.

 

 

“ 선생님, 미하일은 괜찮은 거예요? 이상한 약을 먹은 건 아닌가요? ”

 

“ 보드카를 마신 것 같기는 하구나. 혈액에서도 알콜 외의 다른 약물 성분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

 

“ 하지만... 어제 아침에 우유에 탄 수면제를 먹은 것 같아요. 그건 괜찮을까요? 전 그거 먹고 세 시간쯤 뻗었거든요. ”

 

“ 어제 아침에 먹었으면 지금쯤 몸 밖으로 배출됐을 거야. 아까보다는 많이 나아졌고. 목이나 팔에 주사 자국은 없더구나. 진찰해 보니 별도의 약물을 먹거나 맞은 건 아닌 듯해. 애가 너무 놀란 것 같아서 입원시키겠다고 했던 거다. 상태 봐서 괜찮아지면 밤에는 집에 돌아가도 될 거야. 내일은 극장에 갈 수 있을 거다. ”

 

“ 다행이다... ”

 

 

복도로 나오니 어깨에 붕대를 감은 드미트리가 앉아 있었다. 안색은 한결 나아보였다. 베르닌을 보자 옆으로 옮겨 앉으며 자리를 내주었다.

 

 

“ 괜찮니? ”

 

“ 응. 스친 거라고 했잖아. 드레싱하고 붕대 감아서 괜찮아. 금방 아물 거래. 그건 그렇고 너도 멍들었구나. 치료 안 받아도 되겠니? ”

 

“ 난 괜찮아. 그놈이랑 좀 뒹군 것뿐이라서. 너 왜 나 안 기다렸어, 같이 들어갔어야지. ”

 

“ 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놈이 문을 열고 나오는 거야. 순간 판단력이 흐려졌어. 그놈도 잡아야 할 것 같고 미하일도 구해야 할 것 같아서 뛰어들었어. 무장하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는데 내 능력을 과신한 거지 뭐. 미안하다, 너 기다렸어야 했는데. ”

 

“ 아니야.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놈 하나였어? ”

 

“ 응. 그런 얼치기한테 당하다니. 자존심 완전 구겼어. 너 그놈 봤어? ”

 

“ 응, 계단에서 좀 엎치락뒤치락했는데 도망쳤어. 얼굴을 제대로 못 봐서 누군지 모르겠어. 금발에 안경 꼈는데 레베진스키는 아니었어. 우리 현장요원도 아니고... 대체 누군지 모르겠어. ”

 

검열요원.

 

“ 뭐? ”

 

 

베르닌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미트리는 다시 한 번, 천천히 되풀이했다.

 

 

“ 검열요원. 그놈이었어. 목요일에 미하일 방에서 봤잖아. 검열국장하고 미하일이 싸울 때, 옆에 있었어. 상상도 못했어, 그놈일 거라고는. ”

 

 

베르닌은 눈을 감았다 떴다. 계단에서 달려들었던 남자의 얼굴이 갑작스럽게 선명해졌다. 연한 금발. 안경. 뾰족한 턱. 흐릿한 갈색 눈. 극장. 감독실. 연습실. 그는 항상 구겨진 양복을 입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수첩에 뭔가를 적거나 왕재수를 상대로 뭔가를 계속 지적하면서 또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그는 베르닌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베르닌이 스페호프의 명령으로 왕재수 곁에 붙어서 감시 업무를 수행하듯, 그 역시 검열국장의 명령에 따라 정기적으로 극장에 왔고 왕재수의 작품을 사전 검열하고 낱낱이 트집을 잡았다.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 회색인.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눈에 띄지 않는 사람.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

 

 

“ 검열요원이었다니... ”

 

 

베르닌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드미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 다닐, 두 번째 카드 기억나? 여섯 명의 작곡가. 그때 내가 그랬잖아, 범인은 검열국장과 미하일이 싸운 걸 아는 사람이라고. 그자는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극장과 발레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았을 거야, 미하일 작품 검열 담당이었으니까. ”

 

“ 그래. 검열국에서는 벌써 몇 달 동안 걜 괴롭혔어. 신작 말고 다른 작품들도 사사건건 지적했어. 우리 국장과 검열국장이 친하거든. 어떻게든 걔 공연을 방해하려고 했어. 하지만... 그럼 레베진스키는 뭐지? 그 목록의 동그라미, 인형... 미샤의 사무실을 뒤지고 사진을... ”

 

“ 그자 혼자서 하지는 않았을 거야. 생각해봐. 미하일이 검열국장에게 여섯 명의 작곡가를 대보라 했을 때 국장은 아무 대답도 못했어. 그자도 옆에 있었지만 귀띔조차 하지 못했어. 그자는 음악에 대해서는 몰랐어. 알았다면 쇼스타코비치 심포니를 7번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미하일이 그랬잖아, 1번과 7번도 구별 못하는 바보라고. 검열국장이 직접 음악을 듣지는 않았을 테니 잘못된 보고서를 올린 건 분명 담당자인 그놈이었겠지. 알잖아, 윗사람들 어떻게 행동하는지. 검열국장은 창피를 당하고서는 열 받아서 그 6개 음악 목록을 당장 내놓으라고 호통 쳤겠지. 그래서 그자는 레베진스키에게 부탁해서 목록을 얻어낸 거야. 스페호프가 레베진스키를 불러서 얘길 나눴잖아. 그러니까 너희 국장은 너와 나, 현장요원들 대신 레베진스키와 검열국의 도움을 받기로 했던 거야. 혹시라도 스비제르스키나 벨스키에게 꼬리가 밟히더라도 KGB가 아니라 극장과 검열국 쪽으로 책임을 돌릴 수 있으니까. 도자기 인형도 레베진스키가 공수해줬겠지. 사진도 많이 찍었다면서. 이전부터 너희 국장의 정보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얘기잖아. 그래서 그 둘을 붙였겠지. 누가 검열국 쪽을 의심했겠니. 너랑 나도 그자를 감독실에서 봤는데도 생각조차 못했으니... ”

 

 

드미트리가 한숨을 쉬었다. 생각할수록 분한 모양이었다.

 

 

“ 보기 좋게 당했어. 네가 아니었다면 아마 수요일까지 미하일은 9층에 갇혀 있었을 테고 공연도 취소됐겠지. 미안하다, 다닐. 내가 능력도 없는 주제에 현장 경험 조금 있다고 나서기나 하고... 네 추리가 아니었다면 미하일을 찾지 못했을 거야. ”

 

“ 아니야, 딤카. 나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계단에서 목걸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끝까지 몰랐을 거야. 게다가 난 그놈이랑 치고받고 싸웠는데도 알아보지도 못했는걸. ”

 

나도 처음엔 못 알아봤어. 근데 그 안경을 보니까 퍼뜩 생각이 나더라고. 목요일에 미하일이랑 검열국장이 한바탕 했을 때 말이야. 너는 중간에서 말렸지만 난 처음에 뒤에서 그냥 지켜봤잖아. 그때 그 작자가 안경을 추켜올리면서 계속 수첩에 뭘 적고 있는 거야. 되게 재수 없다고 생각해서 좀 유심히 봤었거든. ”

 

가만 안 둘 거야! 고발해서 감옥 보낼 거야!

 

 

드미트리가 지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그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근데 다냐, 난 걱정이야. 그놈이 너랑 내 얼굴을 봤잖아. 나야 곧 떠나니까 상관없는데... 네가 이번 작전을 방해했다고 그놈이 스페호프에게 고해바치면... ”

 

“ 상관없어! 나쁜 놈들... 진짜 이번엔 못 참아! 아까 걔 봤잖아... 눈도 못 뜨고 묶여 있고... 더러운 놈들... ”

 

“ 나도 다른 상황 같았으면 그놈 고발하고 본부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했을 거야. 근데 미하일은 워낙 상황이 복잡하니까... 그리고... ”

 

“ 그리고 뭐? ”

 

“ 아까 보니까 미하일은 정말 너한테 의지하는 것 같더라. 그런데 네가 스페호프에게 찍혀서 잘리거나 불이익을 당하게 되면 미하일하고도 헤어지게 될 거고... 걘 더 이상 기댈 데가 없어지겠지. 나 예전엔 몰랐어, 그냥 무대에서 화려한 모습만 봤으니까. 그냥 팬이었으니까. 걘 나한테는 그냥 대단한 예술가일 뿐이었거든. 근데 여기 와서 보니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 있잖아, 다닐. 네가 그랬지. 걔 겉보기만 그렇지 완전히 애기라고. 처음엔 그냥 걔가 유치하게 굴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외모는 예쁜 도자기 인형 같지만 성격은 어린애 같은 모양이라고만 생각했었어. 이제 알겠어. 왜 네가 그렇게 얘기했는지. 너는 걔 옆에 있어야 돼.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남아줘야 한다고. 정의고 뭐고 다 필요 없어. 검열요원 그 작자랑 레베진스키를 고발해봤자 스페호프가 눈 하나 깜짝하겠니?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오리발 내밀고 그나마도 갖고 있던 너에 대한 신뢰를 잃고 널 잘라버리는 걸로 끝나겠지. ”

 

“ 하지만... 미셴카가... 미샤가 그놈 얼굴을 봤잖아. 그놈이 미샤를 끌고 가서 가뒀고... ”

 

“ 미하일은 정치범이잖아. 조건부 석방된 유형수나 다름없다고. 걔의 증언은 아무 소용이 없어. 게다가 걘 약에 취해 있었잖아. 심신미약 상태라 증언 인정도 안 될 거야. 다 그렇게 돌아가더라. 나 파리랑 런던에 있었잖아. 본부에도. 거기서 봤어. 아직도 많이 죽여. 그냥 실종사나 의문사 처리돼. 미하일이 재판에서 즉결처형 판결 받지 않은 건, 그리고 여기로 올 수 있었던 건 그나마도 큰 손이 있었기 때문이야. 넌 미하일이 증언을 한 적이 없다고 믿니? 했었어. 재판에서. 변호인이 아무도 없었지. 그래서 쟨 자기변론을 했었어. 몇 마디 못하고 끌려 나갔어. 체제 부적응자에 정신병자라서 발언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지. 그랬던 앤데 이제 와서 검열요원이 자길 납치해 가뒀다고 증언한들 누가 믿어주겠니. ”

 

 

베르닌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코즐로프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눈 색깔 다른 남자,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의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성도.

 

 

'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의 따윈 없어. 힘센 놈들이 이기는 거지. '

 

' 차르라고 전부 자기 뜻대로 됐을 것 같나? '

 

 

힘없이 베르닌이 중얼거렸다.

 

 

“ 그럼... 그러면 어떻게 해... 그놈이 벌써 국장한테 갔을 거야. 아까 있었던 일... 전부 보고했을 거야. 벌써 다 끝났잖아. 너랑 날 밀고했을 거야. 우리 때문에 작전 망쳤다고. 국장은 이제 날 안 믿을 거야. 내가 고발하든 가만히 있든 이미 다 끝났어. 국장이 나 자를 거야. 미샤는... 아... ”

 

 

드미트리가 그를 쳐다보았다. 뜻을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오랫동안 그를 바라본 후 드미트리가 천천히 말했다.

 

 

우리 같은 옷 입었어.

 

“ 뭐? ”

 

“ 같은 옷. 회색과 겨자색 아가일 무늬 셔츠. ”

 

 

갑자기 얘가 머리가 돌았나 왜 갑자기 옷 타령인가 하는 생각에 베르닌은 멍하게 드미트리를 쳐다보았다. 어쨌든 드미트리의 말이 맞았다. 비에 젖어 샤워를 하고 나온 드미트리에게 자기 옷을 꺼내줬으니까. 이제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 어, 그래... 나 그거 그때 의류공장 견학 갔을 때 세트로 샀던 거야. 같은 거 몇 벌 있어. 근데 미샤가 되게 싫어해, 입고 있는 거 볼 때마다 제발 좀 싹 갖다버리라고 얼마나 성화인지 몰라. ”

 

“ 너랑 나는 많이 닮았지. ”

 

“ 으응. 그렇지. 다들 쌍둥이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까. 미샤 빼고. 걘 너랑 나랑 안 닮았대. ”

 

“ 아. 미하일. 걔야 그렇게 말하겠지. 걔는 널... 음... ”

 

 

드미트리는 고개를 돌리면서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 부럽다. 너처럼 됐으면... ”

 

“ 그게 무슨 소리야. 너 같은 엘리트가. ”

 

“ 그냥... 나도 그 친구한테 너처럼... ”

 

 

그러더니 드미트리가 목을 가다듬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 어쨌든. 내 말은 그게 아니고. 너랑 나랑 되게 닮았잖아. 마침 옷도 똑같이 입었고. 그 자식이 너랑 날 어떻게 구별하겠어. 위층에서 달려들었던 것도 나고 계단에서 싸운 것도 나야. 드미트리 베르닌이라고. 너는 이 건물에 없었던 거야. 넌 그냥 검은 숲에 드라이브 갔다가 저녁에 돌아온 거고 내 연락을 받아서 병원에 온 거야. 미하일을 찾아낸 것도, 그 개자식을 두들겨 팬 것도, 스페호프의 작전을 망친 것도 나인 거야. 그렇게 하면 돼. 그러면 모든 게 괜찮을 거야. ”

 

하지만... 그럼 넌 어쩌려고! 말도 안 돼! 국장이 널 가만 안 놔둘 거야!

 

가만 안 놔두면 제깟 게 어쩌려고. 난 연수요원이야. 모스크바 본부에서 파견되어 왔다고. 너랑은 달라. 여차하면 스비제르스키에게 모든 걸 고해바치겠다고 협박하지 뭐. 처음부터 당신의 얼간이 같은 계획을 저지할 생각으로 모든 것을 감시하고 기록했다고 할 거야. 정 안 되면 그 어르신 이름을 팔기라도 하지 뭐. 먼발치에서 밖에 본 적 없지만 스페호프가 그것까지 알 도리는 없으니까. 스비제르스키는 워낙 모스크바 본부에서도 그렇고 해외 지부에서도 막강했으니까 내가 거기서 만나서 연줄이 있는 사이라고 을러대면 믿을 거야. ”

 

“ 그렇지만... ”

 

“ 그렇게 하는 거야, 다닐. 난 어차피 떠날 사람이잖아. 너는 미하일 옆에 남아 있어야지. ”

 

“ 그래도 네가... ”

 

“ 아 배고프다. 우리 뭐 좀 먹자. 어제부터 제대로 못 먹었잖아. 일단 아무거나 대충 사 먹자. 있다가 미하일 깨어나면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항아리 닭고기라든지... 와인만 있으면 코코뱅 만들어 줄 수도 있고. ”

 

 

드미트리가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기 때문에 얼떨결에 베르닌도 휘말리고 말았다.

 

 

“ 어... 그래... 근데 코코뱅이 뭐야? ”

 

아, 프랑스 요리야. 와인 넣어서 조리는 닭찜이야. 비프 부르기뇽이랑 비슷한 건데 닭으로 만드는 거라서 더 금방 만들지. 미하일은 좋아할 거야. ”

 

“ 와인... 그러면 안 되겠다. 미샤는 술 못 마시니까... ”

 

“ 알콜 다 날아가는 거니까 괜찮아. 우하에 보드카 넣는 것처럼. ”

 

“ 어, 그렇구나... 근데 비프 부르기뇽은 또 뭐야? ”

 

“ 비프 부르기뇽은... ”

 

 

드미트리가 말을 멈췄다. 베르닌은 왜 그런가 싶어서 드미트리의 고개가 향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병실 문가에 왕재수가 서 있었다. 온통 구겨진 하늘색 셔츠에 회색 바지를 입고, 맨발로 뻣뻣하게 서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세를 보니 한참 그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베르닌은 벌떡 일어나서 왕재수에게 갔다.

 

 

“ 어, 너 깼구나! 괜찮니? 왜 거기 그렇게... ”

 

“ 바보 멍충이... ”

 

 

왕재수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더니 홱 돌아서서 도로 병실로 들어가 버렸다. 드미트리에게는 눈도 주지 않았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 그들의 얘기를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바보 멍충이’라는 게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도.

 

 

 

 

*    *    *

 

 

 

 

 

두어 시간 후 스타브로프는 왕재수에게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 즉시 왕재수는 침대에서 뛰어내렸고 시계를 보더니 극장에 가겠다고 했다. 의사가 대꾸하기도 전에 베르닌이 엄하게 말했다.

 

 

“ 안 돼. 지금 나랑 집에 가야 돼. ”

 

“ 아직 8시잖아. 잠깐이라도... ”

 

“ 무용수들 다 집에 가고 아무도 없어. ”

 

“ 아니야! 애들 나 없어도 늦게까지 연습한단 말이야. 사흘 밖에 안 남았잖아. 오늘 하루를 완전히 날렸어. 1시간만 다녀올게. ”

 

“ 아니. 넌 오늘 극장 안 가. 극장에는 내일 아침 일찍 가는 거야. 지금은 나하고 집에 가야 돼. 이거 네 맘대로 하는 거 아니야. ”

 

“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이라도 하는 거야? ”

 

“ 명령 같은 소리! 어휴, 나도 너한테 명령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다고 네가 누구 명령 같은 거 듣냐! 엄청 부탁하는 거야! 제발 집에 가자. 오늘은 제발 내 말 좀 들어줘. 나 정말 걱정했어. 너 못 찾을 줄 알고... 다시 못 볼 줄 알고... ”

 

 

이틀 내내 왕재수를 찾아 헤매던 것을 생각하니 베르닌은 다시금 무릎이 풀리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왕재수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베르닌의 간절한 부탁에 한숨을 쉬었다.

 

 

“ 못 보긴 왜 못 봐. 수요일에 보내준다 했으니까 죽이 됐든 밥이 됐든 그땐 봤겠지. 알았어, 집에 갈게. 근데 나 신발이 없어. 좀 갖다 주지... ”

 

“ 그냥 슬리퍼 신고 나와. 집 가까운데 뭐. ”

 

 

왕재수는 맨발로 병실 여기저기를 뒤지며 슬리퍼를 찾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잠깐 기다리다가 이내 마음이 약해졌다.

 

 

“ 슬리퍼 없구나. 오늘 일요일이라 간호사도 없고 선생님한테 달라고 해야 하는데... 그냥 업혀. 바로 앞이니까... ”

 

“ 싫어. 내가 애도 아닌데. ”

 

“ 나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그래. 배도 고프고. 빨랑 업혀. ”

 

 

왕재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투덜거렸지만 곧 베르닌의 등에 찰싹 업혔다. 몸이 사모바르처럼 따뜻했다.

 

 

‘ 다행이다... 아깐 진짜 차가웠는데. ’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베르닌이 나직하게 물었다.

 

 

“ 저... 있잖아. 너 괜찮아? ”

 

“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이틀을 통으로 날려먹었는데. ”

 

“ 아니, 그게 아니라... 그놈이 너 가뒀잖아. 협박했잖아... 다른 일은 없었어? 보드카 먹였다면서. 때리거나 나쁜 짓한 건 아니야? 너 아까 의사 선생님한테 그랬잖아. 기억 하나도 안 난다고.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나? 그놈 얼굴도 생각 안 나고? ”

 

“ 글쎄. 기억 거의 안 나. ”

 

“ 이 건물이라는 것도 몰랐던 거야? ”

 

“ 응. 나 정말 아무 것도 몰랐어. 네가 갑자기 쓰러졌잖아. 너무 놀라서 소리 지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도 어지럽고 너무 졸렸어. 정신 차렸을 땐 그 방에 있었어. 그놈이 수요일까지 말 잘 듣고 여기 있으면 무사히 보내주겠다잖아. ”

 

“ 근데 얼굴은 기억 안 나? ”

 

“ 나 눈 가려져 있었어. 뻔할 뻔자 스페호프 똘마니겠지 뭐. ”

 

“ 그치만... 그 마지막 편지... 그거 네 글씨였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거야? 그놈이 쓰라고 한 거야? ”

 

“ 뭐, 왕자가 어쩌고 수요일까지 입 다물고 어쩌고? 응. 그 자식이 불러주면서 쓰라고 했어. ”

 

“ 왼손으로... ”

 

“ 그랬나... 기억도 잘 안 나. 머리도 너무 아프고 어지러웠거든. 말 안 들으면 다리 부러뜨린다고 했어. 그래서 그냥 썼어. 그리고 나서는 보드카를 줬어. 종이컵에 가득 담아서. 다리 부러뜨릴까봐 마셨는데 그 다음부터는 진짜 기억 안 나. 토하고 뻗었겠지 뭐. ”

 

“ 그랬구나... 나쁜 자식... 그거 검열요원이었어. 왜 있잖아, 매일 극장 와서 네 작품 지적하던 놈. ”

 

“ 검열요원... ”

 

 

왕재수는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화를 내거나 놀라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조그맣게 물었을 뿐이었다.

 

 

“ 넌 안 다쳤어? 그놈이 덤벼들었다면서. ”

 

“ 응. 그냥 좀 까지고 멍든 게 전부야. 드미트리가 위험했지. 총에 맞았잖아. 스쳐서 그나마 다행이야. ”

 

“ 그 자식은 어디 갔어? ”

 

“ 아... 저녁 준비한다고 집에 먼저 갔어. 있지, 우리 너 찾으러 진짜 여기저기 돌아다녔거든. 여기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딤카가 정말 많이 고생했어. ”

 

 

왕재수는 부스럭거리더니 베르닌의 뒷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따뜻하고 촉촉하고 매끄러웠다. 숨결 때문에 간지러웠다. 베르닌은 어쩐지 머쓱하고 기분이 이상해서 불쑥 투덜댔다.

 

 

“ 야, 왜 킁킁대! 냄새 맡냐, 뜨보록처럼! ”

 

“ 너 비 맞고 돌아다녔구나. 땀도 흘리고. 빨랑 씻어야겠다. ”

 

“ 너 찾으러 다니느라 그런 건데 구박하냐, 냄새 난다고! ”

 

“ 내가 언제 구박했어. 냄새 난다고 안 했어. 그냥 비 맞고 땀 흘렸나 보다 했지. ”

 

“ 그게 그거잖아! 지저분하고 냄새 난다고... ”

 

“ 아니야. 내가 언제 그랬어. 그리고 땀 흘리는 거 지저분한 거 아냐. 나 무용수였잖아. 지금도 연습실 가면 맨날 애들 땀 범벅돼 있는데. 비 맞고 땀 흘리는 거 싫어하지 않아. ”

 

“ 어... 그래... ”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아까보다 더 머쓱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문이 열렸다. 막 복도로 나와서 집으로 걸어가려는데 왕재수가 여전히 베르닌의 뒷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미안. ”

 

“ 뭐가? ”

 

“ 몰라. 전부. ”

 

“ 그래,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나한테 운전 시키고 집안일 시키고 온갖 허드렛일 다 시키더니만... 미안한 거 알았으면 이제부터 음식 투정하지 말고 밥 좀 잘 먹어. ”

 

“ 바보 멍충이. ”

 

“ 으윽! ”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지러울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훅 끼쳐왔다. 드미트리가 부엌에서 얼굴을 내밀더니 환하게 웃었다.

 

 

“ 아,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잘됐다. 저녁도 다 돼가거든. ”

 

“ 이게 무슨 냄새야, 딤카? 너무너무 맛있는 냄새 나! ”

 

“ 냉동실에 있던 그 닭 한 마리로 코코뱅 만들었어. 근데 네가 껍질이랑 기름을 다 떼어내서 너무 퍽퍽할 것 같아서 베이컨을 반 토막 넣었어. 허브 많이 넣고 기름기도 유산지로 한번 흡수시켰으니까 미하일이 먹기에도 괜찮을 거야. 지금 양파수프 끓이고 올리비에 샐러드 만들고 있으니까 너희들 씻고 옷 갈아입으면 얼추 시간 맞을 거야. ”

 

“ 아, 진짜 맛있겠다... ”

 

 

베르닌은 왕재수부터 먼저 욕실로 데려다 주었다. 혼자 씻을 수 있으려나 하고 잠깐 걱정했지만 왕재수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틀더니 그에게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왕재수의 집으로 올라가서 옷가지를 챙겨왔다.

 

 

옷을 욕실 문 앞에 내려놓고는 베르닌은 부엌으로 갔다. 드미트리가 감자 샐러드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 저, 좀 도와줄까? ”

 

“ 아니야, 다 됐어. 수프 불 좀 꺼줄래? 다 됐거든. ”

 

“ 우와, 이건 평소에 먹는 양파수프랑 다르네. 위에 덮인 거 치즈야? ”

 

“ 응. 프랑스식이야. 굉장히 맛있어. 비 맞고 떨었으니까 이거 먹으면 몸도 따뜻해지고 좋을 거야. 미하일도 그렇고. 파리 왔을 때도 대사관 파티에서 이건 잘 먹었댔어. ”

 

“ 그렇구나... 쟤 올리비에 샐러드도 좋아해. 닭고기도 잘 먹고. 잘됐다. 여기 와서는 맨날 기름진 시골 음식이라고 투덜대고 밥도 잘 안 먹었는데 너 덕분에 진짜 맛있는 거 먹을 수 있겠구나. ”

 

“ 난 이 동네 음식 맛있던데. 근데 여기 오래 있으면 살찌긴 하겠더라. 다 기름지고 맛있어서. ”

 

 

드미트리는 접시에 샐러드를 솜씨 좋게 담으면서 욕실 쪽을 힐끗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 나 사무실에 갔었어. ”

 

“ 뭐, 정말? 언제? ”

 

“ 아까. 미하일이랑 네가 병원에 있을 때. 무전기 갖다놓으러. 거기서 스페호프와 마주쳤어. 그 작자한테서 보고를 받은 모양이더라고. 참, 그놈 이름도 알았어. 이반 데미도프래. ”

 

“ 데미도프... 아... 그래, 뭔가 D로 시작하는 성이었어. 검열국에서 가끔 공문이 왔었거든. 그래서... 국장이 뭐라고 해? 그자가 전부 까발린 거야? ”

 

“ 음, 아닌 것 같아. 그 자식도 겁이 났나봐. 우리한테 들키고 총까지 쏜 게 발각되면 골치 아플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미하일이 혼자서 도망쳤다고 보고했더라고. 그래서 스페호프는 완전히 저기압이었어. 나한테 자초지종을 간추려서 들려주더니 진작 나한테 맡길 걸 괜히 검열국 쪽 협조를 받았다가 작전을 망쳤다고 투덜댔어. 나하고 너한테 맡길 걸 그랬다고. 다행이지. ”

 

“ 아... 정말 다행이다... 근데 아직 사흘이나 남았는데... 국장이 또 나쁜 짓을 꾸미면 어떡하지... ”

 

“ 안 그럴 거야. 내가 뻥을 좀 쳤거든. 조금 전에 본부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스비제르스키가 수요일 공연에 관심이 지대해서 조금이라도 거기 차질이 생기면 여기 KGB고 극장이고 문화국이고 완전히 물갈이하겠다고 벼르고 있다고. 그러니까 지금은 손 떼는 게 나을 거라고 했어. ”

 

“ 그걸 믿어? ”

 

“ 믿은 모양이야. 펄펄 뛰더니 나한테 크레믈린 앞잡이라고 욕을 하더라고. 스비제르스키가 보낸 끄나풀 아니냐면서. 그래서 몹시 모욕적이라고 운을 뗀 후 만약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넌지시 물어보니까 안색이 변하더라고. 꺼지라던데. 아마 한동안 몸 사릴 거야. ”

 

 

베르닌은 드미트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왜? ”

 

“ 진짜야? ”

 

“ 뭐가? ”

 

“ 그 사람. 너 그 사람이 보낸 거야? ”

 

“ 누구, 스비제르스키? 그랬으면 내가 이렇게 허술했겠냐. 얼치기한테 총이나 맞고 미하일 납치되도록 놔두고... 너 그 사람 잘 모르는구나. 스비제르스키가 부리는 요원들은 진짜 프로야. 장난 아니라고. 나 같은 건 발끝도 못 따라가. 내가 이미지 메이킹 하느라 잘난 척해서 그렇지 그래봤자 나도 행정요원에 책상물림이라고. 그래도 스페호프는 멍청하니까 곧이곧대로 믿는 것 같았어. ”

 

 

베르닌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드미트리의 말이 어디서부터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헷갈렸다. 드미트리는 다시 웃었다.

 

 

“ 너랑 같이 모스크바 가면 좋겠다. 재미있을 텐데. 책상물림 둘이서. ”

 

“ 응, 나도. 모스크바에도 가고 레닌그라드에도 가면 좋을 텐데. 미셴카도 같이. ”

 

“ 그래. 이제 밥 먹자. 미하일도 다 씻었나보네. 너도 얼른 가서 씻어. 내가 차리고 있을게. ”

 

 

베르닌은 비와 땀과 먼지에 젖어 눅눅하기 짝이 없는 셔츠와 바지를 벗고 속옷 바람으로 욕실로 갔다. 마침 왕재수가 씻고 나와서 옷을 주워 입고 있었다. 셔츠를 입고 나서 못마땅한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속옷부터 겉옷까지 전부 다 까만색만 가져오고. 내가 까마귀냐. ”

 

“ 야! 네가 어제 알록달록하다고 구박해서 그런 거 아냐. 또 뭐라고 할까봐 색깔 있는 옷은 안 골랐단 말이야. ”

 

“ 무지개 아니면 까마귀... ”

 

“ 맨날 우주 최강 꽃미남이라며! 그러면 아무 거나 입어도 다 예뻐야지! 왜 옷 탓을 해! ”

 

“ 물론 난 아무 거나 입어도 예쁘지! 그치만 기분이란 게 있잖아! ”

 

“ 아휴, 난 그런 거 몰라. 한번만 더 불평하면 내 옷 가져다 줄 거야. 아가일 무늬 셔츠랑 손목토시랑 황토색 면바지. 입혀 놓고 사진 찍어서 극장에 돌릴 거야! ”

 

“ 악마! ”

 

 

왕재수는 티셔츠의 주름을 펴더니 몸을 돌려서 현관 쪽으로 향했다.

 

 

“ 야, 너 어디 가! ”

 

“ 집에! 잘 거야! ”

 

“ 저녁 먹어야지! ”

 

“ 배 안 고파. 잘래. ”

 

“ 안 돼. 어제부터 먹은 거 없잖아. 저녁 먹고 자. 너 먹으라고 드미트리가 엄청 맛있는 거 만들었단 말이야. 무슨 꼬꼬에 양파수프... 치즈가 막 올라가 있고... 정통 프랑스 식이랬단 말이야. 너 그런 거 좋아하잖아. 파리에서도 먹었을 거 아니야. ”

 

“ 안 좋아해. 프랑스 음식 안 좋아해! ”

 

“ 저녁 안 먹으면 내일 극장 못 갈 줄 알아. ”

 

 

왕재수는 베르닌의 발을 꽉 밟더니 화를 내면서 거실로 갔다. 카펫에 철썩 드러눕더니 다리를 들어 올리고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안심하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    *    *

 

 

 

 

 

저녁 식사는 아주 근사했다. 닭고기와 베이컨, 감자와 당근, 양파를 와인 소스로 조려낸 코코뱅은 그야말로 혓바닥에서 살살 녹았다. 고기와 야채, 와인이 어우러지며 진한 풍미가 감돌았다. 베르닌은 빵으로 접시를 다 닦아 먹은 것도 모자라 냄비에 남은 소스까지 모두 긁어 먹었다. 그리고 노르스름한 치즈가 두껍게 덮여 있는 양파수프는 예술에 가까웠다. 치즈를 살며시 가르자 김이 펄펄 오르는 황금빛 수프와 캐러멜처럼 갈색으로 변해 푹 익은 양파가 기절할 듯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맛 또한 기가 막혔다. 게다가 감자와 양파, 달걀, 당근만으로 만든 올리비에 샐러드의 소박하고 신선한 맛이 코코뱅과 양파수프의 화려한 맛을 부드럽게 감싸주면서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베르닌은 거의 접시에 코를 박다시피 하며 먹었고 드미트리도 맛있게 먹었지만 왕재수는 음식에 거의 입을 대지 않았다. 드미트리가 중간 중간 살뜰하게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기도 하고 빵에 버터를 발라주기도 했지만 전혀 입맛이 없어 보였다. 베르닌이 협박의 눈길을 보내거나 좀 먹으라고 종용하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조금씩 먹었지만 그나마도 금방 포크를 내려놓았다. 베르닌도 처음에는 야단을 쳤지만 왕재수가 억지로 먹는 기색이 너무 역력했기 때문에 속이 상했다.

 

 

“ 왜 이렇게 안 먹니. 언제 이런 거 또 먹을 수 있다고... 우리 동네에서는 유럽 음식 못 먹잖아. 맛있는데... 드미트리가 너 먹으라고 일부러 이렇게 다 준비한 건데. ”

 

“ 지금은 진짜 못 먹겠어. 내일 먹을게 화내지 마. ”

 

 

왕재수가 하염없이 처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색도 아직 창백했고 몹시 지쳐 보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마음이 아팠다. 그때 드미트리가 상냥하게 말했다.

 

 

“ 입맛 없는 게 당연하지. 못 먹는 술도 억지로 마셨고 많이 놀랐을 텐데. 부엌에 보니까 과일청 있더라. 그거 타 줄 테니까 따끈하게 한 잔 마시고 푹 자면 괜찮아질 거야. ”

 

 

드미트리가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따끈한 과일차를 준비하는 동안 베르닌은 왕재수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마에 손을 대고 체온을 재 보았다. 살짝 뜨거웠지만 왕재수는 본래 체온이 좀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열이 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손목을 잡고 맥박도 쟀다. 왕재수는 베르닌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웬 맥이 이렇게 빨리 뛰니. 너 아프면 솔직하게 말해야 돼. 의사 선생님한테 데려다 줄 테니까. 그래야 내일 극장도 가고 공연 준비도 잘 하지. ”

 

“ 아니야, 안 아파. 다닐, 나 이제 자면 안 돼? 자러 갈래. ”

 

 

베르닌은 안쓰러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잠깐만. 나 아침에 침대 엉망으로 해놓고 나왔거든. 시트만 좀 정리해줄게. ”

 

“ 아니야, 내 방 가서 잘래. 너도 자야 되잖아. ”

 

“ 너네 집에서는 잠 잘 안 온다며. ”

 

“ 오늘은 금방 잘 것 같아. ”

 

“ 그래. 아, 잠깐만... 있잖아, 그러면 조금만 기다릴래? 내가 잠깐만 너네 집 갔다 올게. 좀 치울 게 있어서. 과일차 마시고 있어. ”

 

“ 괜찮은데... ”

 

“ 너네 집 되게 지저분하단 말이야. 그때 그 유리 깨진 것도 안 치웠고.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드미트리가 보랴 표 과일청을 세 잔 타서 나왔기 때문에 베르닌은 얼른 한 잔을 쭉 마셨다. 달콤하면서도 진해서 온몸의 피로가 쫙 풀리는 느낌이었다.

 

 

 

왕재수와 드미트리가 과일차를 마시는 동안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의 집으로 올라갔다. 깨진 유리조각들은 드미트리가 전부 모아서 치워 두었기 때문에 침실은 말끔했다. 그는 냉장고를 열어서 내용물을 모두 꺼낸 후 소독약과 비눗물을 묻힌 행주로 안을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아냈다. 그리고는 안을 다시 채워놓고 문제의 종이봉지를 들고 나왔다.

 

 

‘ 비둘기 꼭 묻어주라고 했으니까... ’

 

 

베르닌은 아파트 뒤뜰로 나왔다. 뒤뜰에는 화단과 나무들이 단정하게 늘어서 있었다. 다행히 비도 그쳤고 땅도 많이 말라 있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제일 남향에 있는 커다란 배나무 아래로 갔다. 모종삽으로 젖은 땅을 파냈다.

 

 

‘ 깊이 묻어야 한다고 했지. 개가 와서 파헤친다고... 그 책 다 읽어 놓고 아닌 척 하고. 하여튼 웃긴 녀석이라니까. ’

 

 

그는 땅을 깊이 판 후 종이봉지에 싸여 있는 비둘기를 묻어 주었다. 정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 흙을 잘 덮은 후 손으로 탁탁 쳐서 단단하게 눌렀다. 돌아서려다 마음이 무거워서 곁의 화단에 피어 있던 조그만 꽃 몇 송이를 뽑아서 비둘기 묻은 자리에 살며시 놓아 주었다.

 

 

 

침대 시트만 정리해주면 되겠다 싶어서 그는 다시 7층으로 올라갔다. 싱크대에서 손을 씻은 후 침실 쪽으로 갔다. 그런데 문이 반쯤 닫혀 있었고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 어, 이상하다. 문 열어놓고 나왔었는데. 바람 불어서 닫혔나. 내가 창문 열어놨었나. 불도 끄고 나온 것 같은데... ’

 

 

갑작스럽게 베르닌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다시 데미도프가 왔을 수도 있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 스페호프가 다른 놈을 보낸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벽에 붙어 가능한 한 소리를 죽이며 문 옆으로 다가섰다. 순식간에 바짝 마른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안을 엿보았다. 그리고 감전된 듯 멍해졌다.

 

 

왕재수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드미트리도 있었다. 한 팔로 왕재수의 허리를 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뺨과 턱을 감싸며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둘은 키스를 하고 있었다. 둘 다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 왕재수의 바지는 반쯤 말려 내려가 있었다. 드미트리가 계속해서 키스를 하면서 한 손으로 자기 벨트를 풀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왕재수의 가슴을 가볍게 밀었다. 왕재수가 매트리스 위에 눕자 드미트리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두른 팔을 더 세게 조이면서 옆으로 누웠고 왕재수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면서 귀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베르닌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급하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딸꾹질이 나는 것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정신없이 뒷걸음질쳐 현관으로 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두 번이나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집으로 돌아온 베르닌은 옷도 벗지 않고 무작정 욕실로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미지근한 물을 두 컵이나 마셨다. 그래도 딸꾹질이 그치지 않아서 거실을 왔다갔다 걸어 다녔고 한참 후에야 침실로 들어갔다.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꽝꽝 울려서 잠이 오지 않았다. 취한 것 같기도 하고 술에서 막 깨어난 것 같기도 했다. 눈앞에 드미트리와 왕재수가 어른거렸다. 너무 놀라서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시트에 이마와 얼굴을 비벼대자 서늘한 기운 덕에 약간 정신이 돌아왔다. 심호흡을 하자 훨씬 나아졌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를 쓰다가 자기도 모르게 투덜댔다.

 

 

‘ 뭐야, 꼴도 보기 싫다더니. 엘리트 따위 싫다더니. 하여튼 문어발... 그럴 거면서 밥도 안 먹고 틱틱대고. 그럴 거면 평소에도 좀 잘해줄 것이지. ’

 

 

한 대 패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베르닌은 돌아누웠다. 어둠 속에서 잠을 청했다. 하루종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왕재수를 찾아 돌아다니고 협박범과 몸싸움을 하고 왕재수를 병원에 데려가고 비둘기까지 묻어주느라 무척 피곤했다. 하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드미트리가 새벽에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소리가 나면 어차피 깨겠지 하면서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문소리는 나지 않았고 베르닌은 거의 뜬눈으로 밤새 뒤척이다 동이 터올 때쯤에야 살풋 잠이 들었다.

 

 

 

 

 

*    *    *

 

 

 

 

 

 

이른 아침에 베르닌은 기척을 느끼고 깨어났다. 침실 문가에 드미트리가 서 있었다. 옷을 완전히 차려입고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베르닌은 잠에 취해 몽롱한 눈으로 드미트리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 어, 딤카... 빨리 일어났구나. ”

 

“ 응, 깨우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

 

“ 가다니, 어딜 가는데? ”

 

모스크바. 본부에서 돌아오라고 연락이 왔어. 지금 공항으로 떠날 거라서. ”

 

 

베르닌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소리야! 모스크바라니. 너 일주일 연수 일정이었잖아. 수요일에 끝나는 거잖아. 왜 오늘... ”

 

“ 본부에서 연수 일정을 축소했대. 사실은 어제 저녁에 요원 숙소에 들렀는데 메시지가 와 있더라고. 얘기할까 하다가 즐겁게 밥 먹고 노는데 괜히 분위기 망치기 싫었어. ”

 

“ 혹시 우리 국장이... ”

 

“ 아, 그것도 이유 중 하나지. 어제 그 작자가 나보고 그랬잖아, 꺼지라고. 그래도 연수 점수는 다 채워주겠대. ”

 

“ 우리 때문에 네가... ”

 

“ 아니야. 나 이걸로 연수 코스 다 마치는 거라서 본부 돌아가면 발령도 받을 거고. 내가 손해 보는 건 하나도 없는걸. 오히려 며칠 빨리 마치는 거니까 더 좋은 거지. 딱 두 개 아쉬운 게 있지만... ”

 

“ 뭔데? ”

 

서무 업무의 효율성 제고! 그 보고서... 국장하고 담판을 못 지었잖아. 그거 사장시키지 말고 꼭 스페호프에게 보여주고 업무 분장 다시 받아. 발따예프 따위에게 휘둘리지 말고. 알았지? ”

 

“ 어... 으응... 고마워. 그런데 다른 하나는... ”

 

“ 수요일 공연. 정말 보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워. 그래도 미하일이 무사하니까 됐어. 다행이야. 나 이제 갈게. 8시 반 비행기라서 지금 나가야 버스를 탈 수 있어. ”

 

“ 어, 내가 공항까지 태워다줄게! 잠깐만 기다려, 나 옷만 갈아입으면 돼. ”

 

“ 아니야, 다닐. 괜찮아. 넌 미하일 옆에 있어야지, 걔 오늘 아침 일찍 극장 가야 하잖아. ”

 

“ 하지만... 딤카... 나 너무 섭섭해. ”

 

“ 에이, 무슨 소리야. 꼭 다시 못 볼 것처럼. 모스크바 오면 꼭 연락해. 나 계속 연수 다니느라 아직 집을 못 구해서 주소랑 전화는 없지만 본부로 연락하면 연결될 거야. 꼭 와. ”

 

“ 응. 근데 저... 있잖아, 너 조금만 기다릴래? 미하일... 내가 걔 깨울게. 너 가는데 인사라도 해야지. 이렇게 그냥 가면 서운해 할 거야. ”

 

“ 아니야, 됐어. 깊게 자더라. 그냥 자게 내버려둬. 꼴 보기 싫은 KGB 나부랭이 돌아간다는데 좋아하겠지. ”

 

“ 하지만... 너희... ”

 

“ 모스크바에서 봐, 다닐. 건강하고. ”

 

 

드미트리가 두 팔을 벌려 베르닌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침실을 나갔다.

 

 

베르닌은 망연자실해서 따라 나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멍하게 서 있다가 한참 후에야 창가로 가서 커튼을 걷었다. 드미트리는 이미 길을 건너서 조그만 점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는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후 옷을 갈아입었다. 위층으로 갔다. 침실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좀 망설이다가 살며시 문을 밀고 들어갔다.

 

 

왕재수는 등을 돌린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담요로 몸을 돌돌 말고 있었지만 한쪽 어깨와 팔이 빠져나와 있었다. 카펫 바닥에 옷가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베르닌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드러난 목덜미와 어깨에 불그스름한 자국들이 몇 개 흩뿌려져 있었다. 간밤에 드미트리가 남긴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닌은 고개를 저으며 조심스럽게 왕재수의 팔을 토닥였다.

 

 

“ 미셴카, 자니? ”

 

“ 으응... ”

 

 

잠에 취한 음성으로 왕재수가 웅얼거렸다.

 

 

“ 저... 있잖아. 드미트리 말이야. 본부에서 연락이 와서 지금 돌아간대. 8시 반 비행기래. 지금쯤 버스 탔을 거야. 저... 우리 공항에 가보지 않을래? 가는 거 보고 인사라도... ”

 

왕재수의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잠들었나 싶어서 베르닌이 다시 한 번 좀 더 큰 소리로 말하려는데 조그맣고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돌아간다고... 지금... ”

 

“ 응. 갑자기 그렇게 됐대. 공항에 같이 가자. ”

 

“ 내가 왜. ”

 

“ 하지만... 너... 저... 너랑 걔랑, 그러니까 어제... 어... ”

 

 

왕재수는 몸을 움찔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지금 가면 이제 다시 보기 힘들 거야. 그러니까 나랑 공항 가자. 옷만 입으면 돼. 차에 시동 걸어놓을게. ”

 

“ 다닐, 나 좀 내버려둬. 제발. ”

 

 

목쉰 음성으로 왕재수가 속삭였다. 마지막 단어에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알았어, 그럼. 더 자라. 있다가 일어나면 우리 집으로 내려와. 아침 먹고 극장에 가자. ”

 

 

왕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전날 비가 와서 공기가 차가웠기 때문에 걱정이 된 베르닌은 흘러내린 담요를 끌어올려 주려고 몸을 굽혔다. 왕재수가 고개를 더욱 옆으로 돌리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뺨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침실을 나갔다. 문을 닫아주려는데 등 뒤로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바보. 울 거면서. ’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잠은 이미 다 달아난 후였다. 냉장고를 뒤져서 드미트리가 어제 코코뱅을 만들고 남겨놓은 짜투리 닭고기와 뼈를 찾아냈다. 육수를 내고 반쯤 말라빠진 비트와 당근을 잘게 썰어 넣어 보르쉬를 끓였다. 달걀도 삶고 샌드위치도 만들고 사과와 오렌지도 챙겼다.

 

 

‘ 아침엔 많이 안 먹는 애니까 수프랑 흑빵 먹이고 차 한 잔 우려주면 될 것 같고. 극장 가면 바쁘다고 점심 거를 테니까 계란이랑 샌드위치랑 과일 먹으라 해야지. ’

 

 

그는 시계를 보았다. 8시였다. 드미트리는 이제 공항에 도착했을 것이다. 잠시 후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떠날 것이다. 그는 서무 업무의 효율성 제고 보고서에 대해, 9밀리 마카로프에 대해, 코코뱅과 마카롱, 프랑스 홍차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키스에 대해. 포옹과 웃음소리에 대해 생각했다. 드미트리는 쾌활하게 잘 웃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 침실에서 들었던 것은 다닐 베르닌에게는 들려준 적이 없는 웃음소리였다. 훨씬 낮고 내밀하고 가슴을 울려나오는 웃음소리였다. 마치 왕재수가 그에게는 결코 그런 눈빛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처럼. 관통하는 듯한 눈빛.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과 같은 눈빛. 기묘하게도 어딘가 고통스럽고 슬픈 눈. 그러자 베르닌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왕재수는 눈을 감고 있었으니까. 드미트리의 품에 안겨 키스를 하는 내내, 서서히 달아오르는 열락에 취한 왕재수는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닌은 분명히 그 눈빛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드미트리도 보았을 것이다. 코즐로프도. 그리고 레닌그라드의 그 의사, 유리 아스케로프도.

 

 

그는 한쪽에 치워두었던 십자가 목걸이를 가지고 왔다. 아마 극장에 가져가면 의상 담당자가 망가진 고리를 고쳐줄 수 있을 것이다. 시커멓게 더러워진 십자가를 옷자락으로 쓱쓱 문질러 닦았다. 얼룩은 금세 사라졌다. 그건 그저 흙과 먼지와 기름이었으니까. 드미트리가 입었던 아가일 무늬 셔츠에 번진 핏자국보다 훨씬 지우기 쉬웠다. 핏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겠지만 어쨌든 지울 수는 있을 것이다. 어차피 같은 셔츠가 여러 벌이니 지워지지 않으면 버리면 된다. 하지만 뭉개진 채 들려오던 흐느낌과 꼭 감긴 눈 너머로도 보이던 깊고 고통스러운 눈빛은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베르닌은 흙과 먼지와 피가 아닌 얼룩을 지우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책상물림이었으니까.

 

 

 

 

 

FIN

- 2015. 9. 6 ~ 9. 18 -

 

 

 

...

 

 

이렇게 하여 우수한 단추 시리즈가 끝났다. 서무는 보통 1~2개 에피소드로 완결되는데 이번 얘기들은 계속 연속되면서 오래 붙잡고 써서 그런가 좀 섭섭하네..

 

사실 완전히 끝난 건 아니고... 다음주에는 33-1편이 올라갈 예정이다. 일종의 디렉터스 컷 같은 건데 이번 우수한 단추 시리즈에 종속되어 있어 별도의 34편이 아니라 33-1이라는 숫자를 붙였다~ 우수한 단추 시리즈는 내용상 왕재수의 등장 분량이 적었는데 33-1에는 이 녀석도 많이 나온다 :) 이건 다음주...

 

..

 

중반부에 드미트리가 왕재수의 재판에 대해 하는 얘기는 본편 우주의 미샤가 겪었던 일에서 가져왔다.

 

..

 

 

... 단추 브라더스의 액션이 너무 적은 이유는... 서무 시리즈라서 나름대로 폭력 묘사는 매우 자제했습니다.. 테이큰 단추는 다른 기회에... :)

(생각해보니 단추의 액션이 제일 무자비했던 것은 14편 검은 숲 온천 요양소에서 어리버리 탈영병 알릭을 상대로 의자 휘두를 때였음... ㅠㅠ)

 

제대로 된 테이큰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단추나 드미트리가 아니라 프로페셔널이자 나쁜 남자인 일류샤가 주인공으로 나와야 할 듯한데... 일류샤는 댓글 우주에서 어느새 쿠마의 마력에 빠져 나쁜 짓을 청산하고 빵집 점원이 되어 있으니 :)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사실 얼마 안되는 낙이기도 해요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가져가시거나 베끼거나 인용/변형/사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2015. 10. 1. 09:00

발칸 스타일의 사과 케익, 고스찌에서 russia2015. 10. 1. 09:00

 

 

부쩍 추워졌다. 출근하는데 스산하고 빗방울 떨어지고 바람 불고 어두컴컴해서 딱 러시아 가을 날씨였다. 이런 날씨엔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아늑한 카페에 틀어박히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건만.. 출근해서 이제 일을 시작해야 하고... 슬픈 마음에 그 아늑한 카페와 따뜻한 차와 맛있는 케익 사진 올려본다.

 

지난 7월, 페테르부르크 갔을 때. 항상 들르는 카페 겸 레스토랑 고스찌. 여기는 음식도 맛있고 디저트도 맛있다. 세르비아 출신 부부가 주방장/파티셰를 하고 있다.

 

이 날 갔을때 아주 친절한 남자 점원이 디저트를 이것저것 추천해주기도 하고, 주인이 세르비아인이라 식재료를 세르비아와 발칸에서 공수해온다는 얘기도 해주었는데 무척 재미있었다. 내가 여기 메도빅이 최고라고 하자 매우 좋아했고 자기도 메도빅을 좋아한다, 축제 분위기 나는 케익이라서..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스메딴닉 케익과 브라우니를 추천해주었다. (떠나는 날 다시 와서 그 스메딴닉을 먹어봤는데 슬프게도 스메딴닉은 내 취향은 아니었음 ㅠㅠ)

 

사진의 케익은 '발칸 스타일의 사과 케익'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맨 위에 놓여 있는 파란 체리 같은 것이 미니 사과인가 싶었다(장식용인지 살짝 떫었음). 케익 아주 맛있었다.

 

 

 

여기가 그곳이다. 예전에 사진 올렸지만.. '다이어트 따위에 낭비하기엔 인생은 너무 짧다'란 문구가 붙어 있는 그 카페. 진열대의 케익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세뇌되어 끄덕끄덕 :) 여기 케익들은 그런 문구를 붙일 자격이 있다.

 

진열대 너머로 점원의 등이 보인다. 뒷모습을 보니 이 사람은 나랑 얘기한 그 점원은 아닌 듯.

 

 

 

 

 

 

 

전에도 몇번 이곳 사진 올린 적 있지만.. 아늑하고 따스한 내부. 이 카페 너무 좋다. 밥 먹을 땐 2층으로 올라가서 먹는데 2층은 좀 더 밝고 널찍한 분위기이고 1층, 흔히 말하는 반지하층의 이 카페는 아주 아늑하다. 러시아어로는 '우유뜨나'한 분위기라고 한다.

 

 

 

 

 

아아.. 추워지니 저 케익들과 저 아늑한 카페가 너무나 그립구나!!

 

 

그래서 마지막으로 케익 사진 한 장 더...

 

** 이날의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900

 

.. 혹시라도 페테르부르크에 여행가실 분들은 고스찌에 꼭 가보세요. 이삭 성당으로 내려가는 쪽 방향의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에 있습니다~

 

.. 태그의 고스찌를 클릭하면 전에 올린 사진들을 볼 수 있다

 

:
Posted by liontamer

 

 

작년 7월 페테르부르크.

 

여름 아침 산책하면서 찍은 운하 사진들 몇 장. 당시 숙소는 이삭 광장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모이카 운하를 따라 걷다가 크라스느이 다리(빨간 다리)를 건너서는 그리보예도프 운하로 접어들었다.

 

 

 

여기까지는 모이카 운하. 멀리 크라스느이 다리가 보인다.

이 다리와 근처 피자헛에 대한 추억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958

 

 

 

 

길을 건너서 그리보예도프 운하 쪽으로 건너와 다시 걸었다.

좋은 날씨였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서 거울같은 수면이 살며시 흔들렸다. 흔들리는 수면에 비친 건물들 풍경이 운치 있었다.

 

 

 

이렇게.. 색색의 파스텔톤 건물이 수면에 비춰지자 무지갯빛으로 보였다. 어떻게 보면 기름 얼룩을 띄워놓은 마블링 색지 같기도 하고..

 

 

 

 

 

 

 

 

 

한적하고 여유롭게 저 운하변을 따라 다시 걷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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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추석 연휴가 끝나고 출근했더니 잠도 모자라고 피곤하고 집중도 잘 안되고 정신이 없다. 언제 쉬었냐는 듯 다시 주말만을 기다리고 있음..

 

마음의 위안을 위해 여름에 페테르부르크에서 찍은 사진 몇장. 올 여름은 페테르부르크도 기록적으로 추워서 내가 갔을 때도 비오고 바람불고 9월 중순~하순 그 동네 날씨였는데 다행히 가기 전날 날씨가 이렇게 화창해지고 기온도 올라갔다. 그래서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의 강변에는 일광욕하러 나온 사람들도 무척 많았다.

 

료샤와 레냐랑 요새 산책하면서 찍은 사진 몇 장.

 

 

 

 

 

 

 

산책 마치고 돌아나오다가.. 마침 2시라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의 명종곡은 매우 아름답다. 잠시 돌바닥에 앉아서 아름답게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들었다. 행복했다.

 

.. 저 크록스 샌들을 줄창 신고 다녔더니 무지 편하긴 했지만... 발등에 선크림 바르는 걸 까먹어서 나중에 보니 줄무늬 모양으로 타버렸다... 다른 데는 열심히 발랐는데 발등을 까먹었어 ㅠㅠ

 

 

 

 

 

지난번에 여기 갔다가 카페에서 쉬면서 이때 찍은 핸드폰 사진을 올린 적이 있긴 하다만.. (http://tveye.tistory.com/3901)

그건 폰카라 화질이 떨어지므로 카메라로 찍은 사진도 여기 올림.

 

 

 

종소리 듣고서 돌아나오면서...

 

 

 

요새로 통하는 나무 다리 건너다가.. 아래를 보고 오리가 있어서 반가워하며.. 이쪽에 새들이 무지무지 많이 온다. 오리, 갈매기, 비둘기, 잘 모르는 새들~

 

 

여기는 비둘기들이 모여 있었다...

 

 

 

강을 바라보며 이렇게 호젓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커플도 있고...

 

 

다리 건너와서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과 요새를 향해 인사하는 중. 안녕, 또 올게요!

 

... 흑, 또 가고 싶다! 현실은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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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예전 러시아 사진들 뒤적이다 발견한 2013년 페테르부르크 사진들.

 

이건 당시 면세점에서 샀던 조그만 소니 똑딱이로 찍은 것인데 카메라가 너무 작기도 하고 소니의 색감은 나와 영 맞지 않아서 이때 좀 찍은 후 안 가지고 다녔다. 이따금 바보사업 행사를 할때 자료사진 촬영용으로 대충 찍으려고 썼을 뿐이다. 그래서 2013년에 페테르부르크 갔을때도 이걸로 찍은 사진들은 따로 폴더를 만들어 처박아놓고 잊고 있었다.

 

다시 봐도 화질도 색감도 맘에 안 들지만.. 하여튼 잊고 있었던 사진들이라 반가워서 올려본다. 너무 맘에 안 드는 사진 몇 장은 살짝 필터를 넣어 보정을 조금 했다. 이때 이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은 사이즈 설정을 실수해서 이렇게 기다란 비율로 찍혔다. 지나고 보니 좀 색다르긴 하다.

 

이건 2013년 9월에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이다. 2012년과 2013년에 갔을 때에는 한창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던 무렵이라서 페테르부르크 골목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이 글의 주인공 미샤와 그의 친구들이 주로 다니던 곳들이나 글의 중요한 배경이 되는 곳들을 산책하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이 골목도 그런 목적으로 다시 갔었다. 바로 루빈슈테인 거리이다.

 

루빈슈테인 거리는 네프스키 대로에서 뻗어나온 조그만 골목 같은 거리이다. 위치는 모스크바 기차역과 판탄카 사이, 블라지미르스카야 거리와 자고로드느이 대로 근방에 있다. 조그맣고 좁은 골목이지만 이곳은 요즘 페테르부르크의 소위 '힙'한 카페와 음식점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곳이다.

 

물론 내가 쓴 글에서 이 루빈슈테인 거리는 음식점 거리가 아니라 다른 배경으로 나온다. 루빈슈테인 거리는 미샤의 본편 우주 중 트로이가 나오는 장편에 종종 등장하는 곳인데, 이곳에 미샤의 오랜 연인인 의사 유리 아스케로프가 근무하는 시립병원이 있는 것으로 설정했다. (유리 아스케로프는 서무 시리즈에서도 왕재수의 편지를 전해주러 온 베르닌에게 자신의 목걸이를 건네주는 것으로 특별 출연했었다) 실제의 루빈슈테인 거리에는 병원도 없고 상당히 조그만 골목이므로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적 허구이다.

 

어쨌든 그 본편에서 이 거리는 일종의 상징성을 띠는 곳이었다. 심리적 화자인 트로이는 일련의 질투심과 복잡한 감정 때문에 아스케로프를 종종 '루빈슈테인 거리의 의사'라고 칭한다. 소설의 몇몇 이야기도 그 병원에서 전개되기도 하고... 이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했던 미샤의 키로프 첫 시즌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가 폐렴에 걸려 입원했다가 아스케로프로부터 정체불명의 약물을 투약받고 돈키호테를 추러 나갔던 곳도 바로 이 거리의 병원에서였다. 

(그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94)

 

이 사진을 찍으며 산책했던 것은 그 장편을 모두 마친 후였는데, 오랜만에 루빈슈테인 거리를 산책하면서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역시 병원이 들어설만한 장소는 없었다 :) 하여튼 소설적 상상력의 공간으로 변형시킨 것으로 해두자. 나는 1970년대 소련의 레닌그라드를 생각하며 썼지만... 사진은 2013년 9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이다.

 

 

 

이건 루빈슈테인 거리는 아니고, 블라지미르스카야 거리. 이 길을 따라 쭉 가다가 루빈슈테인 쪽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페테르부르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비둘기들. 비둘기 외에도 까마귀와 갈매기가 많다.

 

 

 

연극 광고들이 붙어 있다. 그 이유는...

 

 

 

여기 유명한 MDT, 즉 말르이 드라마 극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엔 아마 말리 극장이라고 번역되었을 것이다. 예전에 엘지아트센터에서도 몇번 공연해서 연극 좋아하는 분들은 잘 아는 곳. 유명한 레프 도진이 이끄는 극장이다. 오른편을 보면 9월 공연작들의 리스트가 주욱 늘어서있다. 체호프의 세 자매를 비롯해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등 쟁쟁한 작품들이 줄줄...

 

 

 

건너편에서 전면을 찍어보았다. 그런데 구도가 완전히 비뚤어졌네.. 길이 좁아서 주차된 차들을 피해 찍을 수 없었음..

 

 

 

루빈슈테인 거리 11번지 표지판. 그리고 왼편에는 음식점 간판. 이 거리에는 근사한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많다.

 

 

 

 

 

카페-바 '레오나르도'의 메뉴 간판. 따뜻한 닭고기를 곁들인 샐러드가 370루블,  에클레어 70루블 등등..

 

 

이건 수공예 선물가게.

 

 

 

여기도 카페 앞. 비즈니스 런치 간판이 붙어 있는데 그 앞 의자에 젊은 남자가 앉아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다가오는 여자도 그렇고 골목 풍경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굉장히 '페테르부르크' 느낌이라서 사진 찍었다.

 

 

 

 

 

 

 

 

 

거리 전경은 이렇다. 짧고 좁다. 지금이야 이렇게 차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지만 소련 시절엔 안 그랬을 것이다.

 

 

 

창가의 이 남자는 내가 좋아하는 창문 사진 찍다가 우연히 렌즈에 들어왔다.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과 전체적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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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산책하고 걸어서 돌아오던 길에 찍은 궁전 다리 부근 사진 몇 장.

 

많이 추웠지만 워낙 맑고 하늘이 파랗고 햇살이 찬란한 날씨였다. 하얗게 얼어붙은 네바 강 때문에 눈이 멀 정도로 사방이 눈부시고 찬란했다.

 

왼편에 보이는 난간이 궁전 다리 난간. 왼편 첨탑 실루엣이 해군성 건물, 오른편의 돔은 이삭 성당 실루엣. 그리고 수평의 페테르부르크 여기저기를 수직으로 수놓고 있는 가로등 램프들.

 

 

 

찬란한 빛 때문에 거의 그림자처럼 보였던 궁전 다리와 건너편 건물들 사진 한 장 더. 아래의 하얀 평지는 바로 얼어붙은 네바 강.

 

 

 

 

 

궁전 다리. 네바 강의 얼음 위로 교각의 그림자가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다.

 

 

 

이건 어쩐지 내 마음에 들어서 현상도 했다. 사무실에 가져다 붙여놓으려고... 이 사진을 보고 있으면 네바 강변을 걷고 궁전 다리를 걸어 건너는 미샤와 트로이가 떠오른다. (트로이는 강변에 있는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항상 이 다리를 걸어서 건넜고 본편에서도 미샤와 트로이가 이 다리를 건너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넣은 적이 있다. 미샤가 트로이에게 언성을 높이는 유일한 장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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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25. 20:02

천사, 성당, 광장, 마차, 그리고 운하 russia2015. 9. 25. 20:02

 

 

7월에 산책하면서 찍었던 페테르부르크 사진들 몇 장.

이삭 성당과 궁전광장, 그리고 마린스키 극장으로 향하는 모이카 운하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세 군데 모두 내가 쓰고 있는 글의 주인공인 미샤가 어린 시절부터 매일같이 걸어다녔던 곳들이다.

 

위의 사진은 이삭 성당의 천사.

 

 

 

이건 원로원 광장에서 바라본 이삭 성당. 페테르부르크에서 제일 높은 건물. (근데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제한구역 외에서는 도시 개발도 계속 이루어지고 고층건물도 짓고 있는 것 같아서... 이삭 성당보다 높은 건물은 짓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도시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말았으면...)

 

여름에 갔더니 사진 기준으로 오른편 종루는 수리 중이었다.

 

 

 

여기는 궁전광장.

전에 썼던 illuminated wall에서 미샤가 권력자의 별장에 춤추러 가는 것을 거부하고 백야의 레닌그라드 거리를 쏘다니다가 즉흥적으로 춤을 추던 곳. 그런데 여기 산책하러 올때마다 생각한다. '미안하다, 미셴카.. 여기서 춤추려면 발이 무지 아팠겠구나 ㅠㅠ)

 

 

 

궁전광장 사진 한 장 더. 관광마차가 이렇게 세워져 있다.

마차와 말이 근사해 보이긴 하지만.. 나는 사실 마차 관광에 반대하는 편이라서.. 말도 불쌍하고... 작년 백야 때 앙글레테르 호텔에 묵었을땐 새벽까지 마차가 다녀서 말발굽 소리 때문에 잠도 다 설침..

(그런데 또 벨벳처럼 반질반질한 흑마는 좋아해서... 만일 새까맣고 근사한 말을 태워주겠다고 하면 혹해서 탈지도 몰라...)

 

 

 

이건 모이카 운하. 이삭 성당 뒤쪽으로 걸어와서 이 운하를 따라 쭉 올라가면 마린스키 극장이 나온다. 본편 우주에서 미샤는 키로프 입단 첫해에 사도바야 거리에 있는 아파트에서 동료 무용수들이랑 함께 살았기 때문에 극장에 출근할 때는 항상 이 길을 따라 걸어갔다. 원체 산책을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지난번 발췌한 썰매 에피소드에서 잠깐 언급했듯 떠밀려서 다칠까봐 사람 많은 버스는 타지 않는 것으로 구상했다. (그리고 마린스키 앞에는 지하철이 없다)

 

그리고 아주 춥거나 비바람으로 우중충한 날이 아니면 이 운하를 따라 마린스키까지 걸어가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다.

이때는 7월이라 햇살이 굉장히 찬란해서 더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는 이 길을 따라 마린스키에 갈 때마다 무용화와 책 한 권, 볼펜과 모눈종이 수첩, 갈아입을 옷, 이따금 사과 한 알이나 물병을 쑤셔넣은 가방을 어깨에 비스듬하게 메고 극장으로 걸어가는 신입단원 미샤를 떠올리곤 한다 :)

 

 

 

찬란하고 아름다운 도시. 페테르부르크.

결국은 항상 같은 결론으로 끝낸다. 다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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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24. 17:28

페테르부르크 거리 메뉴판 세 개 russia2015. 9. 24. 17:28

 

 

손으로 쓴 메뉴판과 간판 구경하는 것을 좋아해서 종종 사진 찍는다.

여름. 페테르부르크 리체이느이 대로에서 발견한 카페 메뉴판.

테이크아웃일 땐 69루블부터~

 

 

 

3가지 음식으로 구성된 런치. 290루블.

 

 

 

이것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건물에 있는 카페의 메뉴판. 여기 꼭 한번 가고 싶었는데 아직 못 가봤다. 다음에 페테르부르크 가면 꼭 가봐야지.

직접 구운 최고의 디저트와 빵. 테이크 아웃일 땐 20% 할인 이라고 씌어 있다.

타르트랑 에클레어 먹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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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쉬고 돌아온 서무 시리즈.

이번 에피소드에도 이른바 우수한 단추인 드미트리 베르닌이 등장한다 :) 지난 32편에서 협박카드에 이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왕재수! 그리고 그를 찾아 헤매는 단추와 드미트리! 과연 이들은 왕재수를 찾아낼 수 있을지...

33편은 사건도 많고 분량도 꽤 길어서 어쩔 수 없이 1,2부로 나눠 올린다. 이번주는 먼저 1부.

 

사라진 왕자님 왕재수를 찾아 헤매는 명탐정 호위 기사 단추와 드미트리의 모험! 재미있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4월이 되자 왕재수의 신작 공연을 앞두고 협박편지가 이어지고, 급기야 정체불명의 협박범은 왕재수를 납치하는데... 과연 베르닌과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는 그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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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3

 

 

 

 

 

서무의 슬픔

-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 (1부) -

 

 

 

 

 

 

 

드미트리는 먼저 와 있었다. 초조하게 천사상 주위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는데 베르닌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 어휴, 너 안 와서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 ”

 

“ 미안해, 전화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어. ”

 

“ 어디에 전화해? ”

 

“ 미샤 비서. 이것저것 물어보느라고. 검은 숲에 가봐야 할 것 같아. ”

 

“ 검은 숲?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니. ”

 

“ 아 그렇지... 그게, 다차... 레베진스키, 사무국장... 수요일까지 휴가. 사진, 레코드... 사무실에 몰래 드나들고... ”

 

 

베르닌은 순간 머리가 멍해져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드미트리는 우왕좌왕하는 그를 탓하는 대신 참을성 있게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다닐, 너 진짜 여기저기 다녔나보구나. 일단 뭐 좀 먹어야겠다. 눈이 쑥 들어갔어. ”

 

아니야! 지금 뭐 먹을 시간 없어! 빨리 검은 숲에 가야 돼! 레베진스키한테 별장이 있다고 했어! 거기 미샤를 숨겨놨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 자식이 미샤를 감시하고 물건도 다 뒤지고 있었어. 나한테는 그런 얘기 하나도 없었는데... 수요일까지 휴가 냈다고 하잖아. 진짜 의심스럽단 말이야. 너도 빨리 와, 차 저쪽에 세워놨어. ”

 

“ 그래. 일단 차에 타자. 여기 사람들 많이 지나다니니까. ”

 

 

차를 탄 후 드미트리는 베르닌에게 극장에서 있었던 일을 조목조목 물었다. 대학 시절부터 이미 요원으로 활동해서 그런지 드미트리는 베르닌보다 훨씬 침착했고 논리적이었다. 드미트리의 차분한 말투 덕에 베르닌도 점차 흥분을 가라앉혔고 수위와 그리고리에게서 들은 이야기, 레베진스키의 수상한 소행과 사무실에서 발견한 왕재수의 사진, 레코드 목록, 레베진스키의 집에 갔던 이야기, 류다와의 통화로 알게 된 사실 등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할 수 있었다. 드미트리는 그의 말을 끊지 않고 중간 중간 ‘응’이라든지 ‘그랬구나’ 등 추임새만 넣으면서 끝까지 들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 그래서 지금 검은 숲 쪽으로 가고 있는 거야? ”

 

“ 응. 한 시간쯤 가야 돼. 넌 어떻게 됐어? 국장 만났어? ”

 

“ 응. 네 말대로 토요일인데도 나와 있더라. 나보고 왜 왔느냐고 물어서 오늘 극장이 쉬는데 혹시 내가 수행해야 할 업무가 따로 없는지 궁금해서 들렀다고 슬며시 떠봤어. 그자의 의중을 정확히 모르니 협박카드와 미하일이 납치됐다는 얘기는 일단 하지 않았는데 그게 옳은 판단이었던 것 같아. ”

 

“ 왜? 국장이 너도 의심하는 눈치였어? ”

 

내색하진 않았어. 그랬으면 나한테 레베진스키를 소개시켜주진 않았겠지. ”

 

“ 뭐? 레베진스키? 그자가 거기 있었단 말이야? 만났어? ”

 

“ 응, 내가 갔을 때 스페호프의 방에 있었어. 번듯하게 생긴 놈이더라. 그런데 무슨 얘기하는지는 못 들었어. 얘기 다 끝내고 나오려는 참이더라고. 그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가서 엿들었어야 했는데... 스페호프가 그자를 소개시켜주면서 조만간 새 감독이 될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역겨워서 죽는 줄 알았어. ”

 

“ 다른 얘긴 안 해? 미샤에 대해서... ”

 

“ 납치에 레베진스키가 연루되어 있는 것 같긴 했어. 국장이 레베진스키에게 날 소개해 주면서 필요한 게 있으면 내 도움을 받으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레베진스키가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다고, 이제 웬만한 건 다 끝냈다고 하는 거야. 그러더니 스페호프에게 수요일에 보자면서 나가더라고. 그때 나도 들었어, 수요일까지 휴가 냈다는 거. 당장이라도 쫓아나가고 싶었는데 스페호프가 날 붙잡아서 못 나갔어. ”

 

“ 그럼 국장이 너에게 이번 작전에 대해 얘기해준 거야? ”

 

“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니더라고. 나에게 어젯밤에 어디 있었느냐고 묻는 거야. 근데 눈초리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어제만큼 개방적인 분위기가 아니었어. 느낌이 어쩐지 이상해서 너희 집에 갔다는 얘긴 일단 안 하고 요원 숙소에서 여직원들과 파티하며 놀았다고 했어. 카체리나와 갈리나, 리자랑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알리바이가 되잖아. 국장의 의심을 사기 전에 선수를 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내가 해외 근무를 오래 하고 대도시 출신이라 여기 문화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혹시 여직원들이랑 밤에 파티하고 노는 게 KGB 요원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이냐고 물었어. 그러니까 스페호프가 웃는데 뭔가 긴장을 내려놓는 느낌이더라고. 그래서 얼른 금요일에 극장에서 미하일을 감시했던 내용을 간략하게 보고했어. 협박과 납치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주지 않을까 기대했거든. 내게 지시를 내려주면 더 좋은 거고. 근데 물 건너갔어. 그자가 마음을 바꿨어. ”

 

“ 그게 무슨 소리야? 첫날 너한테 지령을 줬다면서. 작전이 진행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고 그때 도우라 했다며. 레베진스키에게도 필요한 게 있으면 네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면서. ”

 

“ 그러게 말이야. 근데 국장이 그러는 거야. 불여우 감시하느라 수고했다고. 근데 공연은 어차피 제대로 올라가지 못할 거라고. 그래서 내가 도와줄 일 없느냐고 물었더니 괜찮대. 내 도움이 필요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됐다면서 사람이 많이 연루될수록 복잡해서 안 되겠다는 거야. 난 아주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조국과 당을 배반한 반동분자를 혼내주는 일에 열성적으로 동참하고 싶었는데 무척 아쉽다고 말했어. 역시 내가 연수요원에 지나지 않아서 능력이 모자란 게 문제인 것 같다고, 도움이 못 되어드린 것 같아 죄송하다고 말이야.

그랬더니 스페호프가 손을 내저으면서 그렇지 않다고, 오해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자기는 나를 믿는다고. 하지만 내가 루뱐카 본부에서 왔기 때문에 약간 우려가 된다는 거야. 모스크바는 아무래도 스비제르스키의 본거지니까 내가 열성적으로 여기서 작전에 참여했다가 공연히 그자의 의심을 사서 피해를 입을까 걱정도 되고, 또 만의 하나 그자가 내 뒤에 끄나풀을 붙였을 수도 있으니 내가 이번 작전에서 한 발짝 물러나 주는 것이 가브릴로프 KGB나 나나 양쪽 모두 낫겠다는 거야. ”

 

“ 완전 궤변이잖아. 그럴 거였으면 애초부터 너한테 지령을 주지 않았어야지! 혹시 국장이 꼬리를 밟았나? 너랑 내가 미셴카랑... ”

 

“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거야. 근데 나한테 레베진스키를 소개시켜 준 것도 그렇고, 극장 감시 업무에서 빼지도 않은 걸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아. 나보고 오늘은 쉬고 수요일까지 계속 극장에 가라고 하더라고. 그러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하나 했어. ”

 

“ 뭔데? ”

 

불여우 감시는 이제 안 해도 될 거라고. 아파서 입원할 예정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그냥 일요일에 극장에 가서 분위기만 파악하라고. ”

 

“ 아파서 입원... 그건 카드에 있었던 말인데. ”

 

 

베르닌은 곰곰 생각하느라 하마터면 신호를 무시하고 직진할 뻔 했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드미트리가 창 너머로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 나와서 레베진스키를 쫓아가려고 했는데 이미 사라진 후더라고. 그래서 갈리나에게 전화를 했어. ”

 

“ 갈리나? 아, 어제 같이 게임했다고 했지? 카체리나랑 리자랑... ”

 

 

베르닌은 ‘지면 뽀뽀하는 게임’이라고 말할 뻔 했다.

 

 

“ 응, 그 아가씨가 총무부서 소속이었던 게 떠오르더라고. 보드 게임하다가 땅과 집을 다 잃고는 괜찮다고, 가브릴로프 안전가옥들이 다 자기 손 안에 있다고 농담을 했어. ”

 

“ 아, 맞아. 갈리나가 그쪽 담당이야. 여기는 이렇다 할 범죄행위도 거의 없고 방첩 업무도 적은 편이라 안전가옥이 몇 개 없어서 그냥 총무부서에서 관리하거든. 그러다 작전이 생기면 현장요원들 쪽으로 넘어가지만. ”

 

“ 응, 그럴 것 같더라. 지방의 소규모 지부들은 그렇게 한다는 얘길 들었어. 스페호프가 납치 사건을 뒤에서 지휘하고 있다면 미하일을 그 안전가옥 중 한 곳에 숨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범인은 현장요원이거나 그쪽 경력이 있을 가능성이 커. 잠긴 문도 따고 들어오고 방울 달린 줄도 잘라버리고 수면제를 쓰고. 그래서 갈리나에게 전화해서 안전가옥들 중 최근에 활용하는 곳이 있느냐고 떠봤어. ”

 

“ 아... 난 그런 건 생각도 못했어. 그래... ”

 

“ 근데 갈리나는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고. 자기가 알기로는 지금 쓰는 곳은 없대. 열쇠는 따로 보관하고 있는데 받아가려면 자기한테 장부를 쓰고 가야 한다더라고. 요 며칠 동안 장부 적고 열쇠 요청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대. 더 물어보면 의심 살 것 같아서 일단 알았다 하고 끊었어. 총무부서에 가봤는데 캐비닛도 많고 다 잠겨 있어서 장부를 못 찾았어. 최소한 가옥들 위치라도 알아내면 도움이 될 것 같았는데. ”

 

아! 나 알아! 그러니까... 캐비닛 열쇠들 여분으로 더 있어. 기밀 자료실 열쇠 빼고는 내가 한 세트씩 가지고 있어, 총괄서무라서. 사무실 가면 있는데, 내 자리 서랍장에... ”

 

“ 어 정말? 잘됐다! 그러면 지금 다시 회사로 갈까? 안전가옥 리스트를 확보하면 훨씬 도움이 될 거야. ”

 

 

베르닌은 시계를 보았다.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우리 국장 보통 주말에도 늦게까지 있어. 8시 넘어서 가야 안전해. 그리고 지금 제일 의심스러운 건 레베진스키잖아. 일단 검은 숲의 그 별장으로 가보는 게 좋겠어. ”

 

“ 그래, 그러자. 아직 많이 가야 하니? ”

 

“ 저 다리 건너서 30분 정도만 가면 돼. ”

 

 

검은 숲으로 가는 동안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깔렸다. 드미트리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갱지로 싼 닭고기 꼬치를 꺼내서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 좀 먹어. 난 아까 너 기다리면서 하나 먹었어. 공원에서 산 거라 벌써 다 식긴 했지만... 너 오늘 먹은 거 없잖아. ”

 

“ 으, 으응. 고마워. ”

 

 

구운 닭고기는 차갑게 식어서 기름기와 소금기가 따로 돌았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입 안에 먹을 것을 넣자 침이 돌면서 문득 배가 무척 고파졌지만 납치된 왕재수를 생각하니 고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 닭고기 수프 끓여주려 했는데... ’

 

 

핸들을 붙잡은 채 한참동안 우물거리며 앉아 있자 목이 메어서 그런 줄 알고 드미트리가 물병을 열어 그의 입에 대 주었다. 베르닌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억지로 음식을 삼켰다. 드미트리가 한숨을 쉬었다.

 

 

“ 여기 갓길에 차 좀 대볼래? 운전 내가 할 테니까 너 좀 쉬어. ”

 

“ 아니야, 괜찮아. 너 길 모르잖아. ”

 

“ 네가 알려주면 되잖아. 어차피 이제 숲으로 접어들어서 한참 직진일 것 같은데. 너 지금 심신이 너무 지쳐 있어서 그래. 힘들어도 좀 먹고 기운을 차려야 돼. 그 별장에 정말 미하일이 갇혀 있다면...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미트리에게 운전대를 넘겨주고 옆에 앉았다. 닭꼬치를 꾸역꾸역 해치우고 물도 마셨다. 자꾸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왕재수를 찾아내고 말리라 다짐했다.

 

 

 

 

*    *    *

 

 

 

 

 

연못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낡은 별장들 사이에서 레베진스키의 흰색 별장은 금세 눈에 띄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별장 여러 군데에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레베진스키의 다차만은 어두컴컴했다. 연못가에서 샤실릭을 구우며 놀고 있는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차를 저만치 떨어진 데 세워놓고 숲길로 돌아서 가기로 했다.

 

 

수풀 사이로 몸을 숨기면서 천천히 걸어가던 드미트리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 가능하면 총 쓰지 말아야겠다. 사람들이 많아서... 애들도 있고. ”

 

“ 어, 으응... 그런데 범인이 무장하고 있으면 어쩌지. 레베진스키 하나라면 걱정 안 되는데... ”

 

“ 최악의 경우엔 쏴야지 뭐. 근데 미하일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 레베진스키는 이런 쪽 훈련 받은 사람 아니지? ”

 

“ 응, 전혀. 미샤처럼 무용수 출신이야. 40대고 류다 말로는 허리가 안 좋아서 은퇴했다고 했어. ”

 

“ 하긴, 아까 보니까 외모가 번듯하긴 해도 신체적으로 위협적인 것 같진 않았어. 그래도 다른 놈이 붙어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너 절대로 나한테서 떨어지면 안 돼. 일단 내가 앞장설게. ”

 

 

현장 경험이 전혀 없는 베르닌은 반대하지 않았다. 몇 달 동안 극장에서 왕재수를 지켜보면서 그는 어떤 일이든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드미트리는 그보다는 훨씬 경험도 많았고 능력도 뛰어났다. 별장 울타리를 뛰어넘자 심장이 두근거렸고 머리가 꽝꽝 울렸다. 불 꺼진 창문 너머에 왕재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흥분과 분노로 정신이 혼미했다. 그때 드미트리가 그를 창고 쪽으로 밀어붙이며 속삭였다.

 

 

“ 몸 숙여, 다냐. ”

 

 

베르닌이 어둠 속으로 몸을 숙였을 때 드미트리가 창문에 돌멩이를 집어던지고는 잽싸게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정적 속에서 딱 소리가 아주 크게 울렸다. 유리가 깨지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큰 소리였다. 그들은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이 켜지지도 않았고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레베진스키의 집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없을 수도 있었고 누군가가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을 수도 있었다.

 

 

5분을 기다린 후 드미트리가 턱짓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빠르게 뛰어갔다. 베르닌도 뒤를 따랐다. 문은 잠겨 있었다. 드미트리가 손잡이를 거세게 비틀며 문을 밀었다. 삐걱거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베르닌은 뒤로 물러났다가 전속력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문에 부딪쳤다. 어깨가 부서지는 것처럼 아팠지만 그 여파로 문이 쾅 소리와 함께 열렸고 그는 가속을 이기지 못해 쿠당탕 나뒹굴었다. 드미트리가 재빨리 그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리고는 차에서 챙겨온 플래시를 켜서 안쪽을 한 바퀴 비추면서 낮게 외쳤다.

 

 

“ 스위치 찾아서 불 켜! ”

 

 

이미 베르닌은 문 안쪽 벽을 훑으며 스위치를 찾고 있었다. 돌출된 스위치가 손바닥에 닿았다. 밀어 올리자 환하게 불이 들어왔고 순간 베르닌은 눈이 부셔서 뒷걸음질쳤다.

 

 

별장은 텅 비어 있었다. 샅샅이 뒤졌지만 식당과 거실, 침실 두 개 모두.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베르닌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여기 있어야 해... 분명히 레베진스키가... 그 인간이 레코드 목록을 적고 수요일까지 휴가를 내고... 미셴카의 방을 뒤졌어. 인형을 가져갔단 말이야... 아... 미셴카... ”

 

 

너무나 실망하고 괴로운 나머지 베르닌은 울부짖기 직전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어느 새 별장 밖으로 나가서 창고와 사우나까지 살펴보고 온 드미트리가 다가와 그를 달랬다.

 

 

“ 진정해, 다냐. ”

 

“ 미셴카, 엉엉... 벌써 밤인데... 아플 거야. 약 먹고 아프고... 먹지도 못하고 무서워하고 있을 거라고! 그 자식은 우리 집 아니면 잠도 못 자는데... 우리가 이렇게 허탕치고 있는 동안에도 걔는... ”

 

 

베르닌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전부 자기 잘못인 것 같았다.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치다가 문득 모스크바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 나 모스크바 갈 거야. 크레믈린... 거기 갈 거야. 스비제르스키한테 다 얘기할 거야. 그러면 그 사람이 해결해 줄 거야...그 사람이 미셴카는 자기 거라고 했으니까 분명히 찾아줄 거야. 구해줄 거라고! ”

 

“ 정신 좀 차려, 다닐! 네가 무슨 힘으로 그 높은 사람을 만나니. 연락처도 없으면서. 있어도 그 사람이 우리 같은 조무래기를 만나줄 것 같니? ”

 

“ 아니야! 만나줄 거야! 미셴카 얘길 하면 만나줄 거야! ”

 

이 멍청아, 그리고 나면! 그자가 힘을 써서 어찌어찌 미하일을 찾아준다 해도 그 다음은 어쩔 건데! 걔가 납치되도록 놔둔 너랑 나는 즉각 모가지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릴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리고 걜 찾아낸다 해도 일을 그렇게 공개적으로 벌려놓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건데? 제아무리 날고 기는 스비제르스키라 해도 미하일을 복권시키고 여기서 빼낼 수는 없어. 파리에서 왜 걜 잡아넣고 재판에 회부했는데, 그 사람이랑 벨스키 같은 걔 후원자들 옭아매려고 그런 거잖아. 다 정치꾼들 싸움이었다고. 그래서 스비제르스키도 걔가 유죄판결 받게 그냥 놔뒀단 말이야. 빼내서 여기로 보낸 것도 수 엄청 쓴 거야. 그러니까 무작정 그 사람 손을 빌려서 미하일을 찾아낸다 해도 그 사실을 스페호프가 알게 되면 더 꼭지가 돌아서 진짜로 걔한테 해코지를 할 수도 있단 말이야. 그냥 수요일 공연 못 올라가게 하고 애 잠깐 잡아놓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질 수도 있단 말이야. 넌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높으신 양반들이 할 일이 없어서 무용수 하나를 붙잡아다 고문하고 유배를 보냈겠니? 그렇게도 유명한 애를, 체포한 순간 국제적인 이목이 쏠릴 게 뻔한 애를? 다 자기들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야. 지금도 그럴 거고. 반년도 넘게 걜 감시하고 돌봤다면서 정말 아무 것도 몰랐구나... ”

 

 

베르닌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등을 돌렸다. 어렴풋이 그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 바보 멍충이... 그래놓고 파리에서 친구들 만나러 놀러갔다가 잡힌 거라고 하고... 진짜 지지리도 운 없는 자식... 왜 그런 인간들하고 얽혀서... 뭐가 우주 최강 꽃미남에 천재라서 좋다는 거야... 하나도 안 좋은 거잖아... 천재에 예뻐서 좋았던 거 하나도 없잖아. 이놈저놈들한테 이용만 당하고 나쁜 짓만 당하고... 바보... ’

 

 

드미트리는 그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훨씬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 미안해, 다닐. 네 마음 이해해. 넌 미하일이랑 그렇게 가까운데 당연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겠지. 우리 일단 내일까지 찾아보자. 범인이 그랬잖아, 공연 취소하면 수요일 지나고 미하일을 돌려보내 주겠다고. 스페호프가 배후에 있으니 해치지는 않을 거야. 안 그래도 공연 취소됐다고 하면 스비제르스키부터 벨스키까지 전부 의심스럽게 이쪽을 주시할 텐데 언제까지 미하일을 숨겨놓을 수도 없을 거고 아프다고 속일 수도 없을 테니까. 내일 밤까지 걜 못 찾으면 네가 국장한테 정식 보고서를 올려. 미하일이 없어졌다고. 그러면 스페호프가 걔가 입원해서 공연 취소됐다는 전문을 보내겠지. ”

 

“ 찾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찾을 거야. ”

 

“ 그래, 사무실로 가보자. 그 안전가옥 명단이랑 열쇠. 그거 찾으러 가자. ”

 

 

 

 

 

*    *    *

 

 

 

 

 

시내로 돌아오는 데는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신시가지로 진입하는 다리 쪽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이미 밤 9시가 넘어 있었기 때문에 스페호프는 퇴근하고 없었다. 수위가 있긴 했지만 베르닌이 원체 주말 출근을 밥 먹듯 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며 ‘또 일하러 나왔어?’ 하고 물었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드미트리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다. 서랍장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냈고 장부를 대조해 총무부서의 자산관리 서류가 들어 있는 캐비닛 열쇠를 찾아냈다. 총괄서무라는 사실이 이토록 기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캐비닛에는 안전가옥 열쇠가 없었다. 주소가 적힌 장부 뿐이었다. 아무래도 열쇠를 비밀 창고에 옮겨둔 것 같았다. 그래도 주소라도 있는 게 어디냐 싶어서 급하게 수첩에 안전가옥 주소들을 베껴 적었다. 혹시라도 현장요원들 중 작전에 투입된 사람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최근 현장요원 활동 명령서와 업무추진비 청구 내역을 뒤졌다. 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아내지 못했다. 하긴 스페호프는 그를 모스크바로 보냈을 때도 서류에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으니 왕재수 납치라는 작전을 문서화했을 리가 만무했다.

 

 

혹시나 해서 그는 물품 청구 내역서와 전표들도 뒤졌다. 그러다가 하얀 카드와 붉은 색지 구입 영수증을 찾아내고 환호했지만 다시 잘 보니 구입 일자가 작년 12월이었다. 신년 축하용으로 유관기관 관계자들에게 발송하기 위해 총무부서에서 100개들이 세트를 구입했던 것이었다. 실망하는 그와는 달리 드미트리는 희망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 100개를 다 보내지는 않았을 거잖아. 남은 카드와 색지를 범인이 쓴 거라면 물품 청구서를 적었을지도 몰라. 그러면 누가 연루되어 있는지 알 수도 있잖아. ”

 

“ 그게... 우리는 물품 청구서를 서무가 한꺼번에 적어. 문구용품 캐비닛은 총무부서에 있는데 원래 그 열쇠랑 장부를 잘 관리해야 하지만 총무부 담당자가 원체 고참에 철밥통이라 맨날 문을 다 열어놓고 다녀. 그래서 물건 떨어지면 저마다 거기 가서 한 움큼씩 집어오고... 그러다 국장이 점검하는 날이면 그 담당자가 부서별 서무들을 들들 볶아서 비어 있는 물건들을 할당하면서 물품 청구서를 다 적어내라고 난리야. 그러니까 카드랑 색지는 누구라도 가져갈 수 있어. 그 물건들 청구서 아마 나도 적은 적 있을 거야. 나는 막내 서무니까 제일 많이 할당받거든. 이거 봐, 이 캐비닛이야. 지금도 문 열려 있잖아. 여기 카드랑 색지도 많이 남아 있네. 같은 종류야. 찾아보면 내 캐비닛에도 몇 장 있을 걸. ”

 

그렇구나. 어쨌든 범인 중에 내부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건 더 명확해진 거네. 일단 안전가옥 리스트를 확보했으니 나가자. 오래 있다 의심 살라. ”

 

“ 나 원래 주말에 자주 나와서 늦게까지 일해. 요즘은 서무 업무도 엄청 밀려 있으니까 괜찮아. ”

 

“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으니까. 참, 무전기 있으면 챙겨가자. 아까도 네가 늦으니까 걱정되더라고. 무전기가 있으면 연락이 되니까 안전가옥 수색도 나눠서 할 수 있을 거야. ”

 

 

좋은 생각이었다. 무전기는 현장요원용 비품이었지만 다행히 특별관리 물품으로 분류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베르닌에게도 캐비닛 열쇠가 있었다. 무전기 두 개를 꺼내서 하나씩 나눠가졌다.

 

안전가옥은 모두 여섯 채였다. 하나는 구시가지에 있었고 둘은 신시가지, 나머지 셋은 시 외곽지대에 있었다. 베르닌은 당장이라도 여섯 채를 모두 돌아보고 싶었지만 신중한 드미트리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어두워졌어. 이 외곽지대는 전부 강변하고 숲에 있는 거 아니야? 아까 별장에서도 어두워서 움직이기가 힘들었어. 어둠 속에서 자칫 잘못하면 우리뿐 아니라 미하일도 위험해질 수 있어. 우리는 지원군이 없잖아. ”

 

“ 하지만... ”

 

“ 일단 오늘은 시내에 있는 곳 한두 군데만 가보는 게 좋겠어. 금방 자정이 될 거야. 아무래도 너희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짧은 시간 동안 미하일을 옮길 수 있고 또 회사하고도 가까우니까 지령받기도 쉬울 거고. ”

 

 

베르닌은 속이 바짝바짝 탔지만 드미트리의 말이 옳았다. 그는 책상물림이라 격투나 작전 수행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어둠 속이라면 더욱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미 밤 10시 반이었다. 그는 주소를 면밀하게 살폈고 집과 사무실에서 제일 가까운 마슬로프 거리의 안전가옥을 골라냈다. 제조공장들 뒤에 있어서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그들의 집에서 도보로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차로는 몇 분 만에 갈 수 있었다.

 

 

차를 세운 후 베르닌은 드미트리와 함께 그 집으로 올라갔다. 그곳 역시 불이 꺼져 있었다. 수위는커녕 다른 층에도 주거민이 없었다. 애초에 건설 노동자용 임시 숙소로 지었다가 몇 달 내에 철거를 앞두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지만 아주 뻑뻑했다. 드미트리가 고개를 저었다.

 

 

“ 여긴 아닌가봐. 한참 안 열어봤나본데... ”

 

 

드미트리의 우울한 예상이 맞았다. 집은 텅 비어 있었고 먼지가 풀풀 날렸다. 바퀴벌레가 득실거렸다. 전구들도 반은 깨져 있었다. 완전히 헛수고였다. 베르닌은 심호흡을 했고 어떻게든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했다.

 

 

“ 딤카, 우리 오늘 한군데만 더 가보자. ”

 

“ 그래, 아직 열두 시 안됐으니까. 신시가지에 하나 더 있지 않았니? ”

 

“ 아니, 안전가옥 말고. 오후에 내가 레베진스키 집에 갔었잖아. 근데 창밖에서 보기만 하고 들어가진 못했어. 근데 아무래도 그자가 걸려. 수요일까지 휴가 낸 것도 그렇고, 레코드 목록에, 사진 찍고 미샤의 사무실 뒤진 것들 하며, 그전에도 사과에 독도 발랐고 나한테 사무실 들어오라면서 국장의 접선책 노릇도 했었어. 그 집에 다시 가봤으면 좋겠어. ”

 

드미트리도 동의했다. 그래서 베르닌은 다시 구시가지로 차를 몰았다. 레베진스키의 집은 별장과 마찬가지로 캄캄했다. 불빛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레베진스키가 스페호프와 결탁한 상황이니 무작정 침입했다가 일이 꼬이면 더 문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둘은 창문으로 들어가는 대신 현관으로 갔다. 여차하면 국장의 지령을 받아서 온 것처럼 꾸밀 생각이었다. 초인종을 울려도 답이 없었다. 별장과는 달리 문이 아주 튼튼해서 체중으로 부딪쳐도 열기 힘들 것 같았다. 드미트리가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 분명히 챙겼는데. 아, 여기 있다. ”

 

 

작은 옷핀이었다. 드미트리는 핀을 반대로 구부려 일자로 편 후 그것을 열쇠 구멍에 쑤셔 넣었다.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계속 돌렸다. 잘 되지 않는 모양인지 한참 끙끙대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순간 숨을 멈췄다. 그리고는 왼쪽으로 두 번, 철컥, 찰카닥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레베진스키의 집은 상당히 넓었다. 복층에 방도 여러 개였고 거실도 아주 넓었다. 화장실도 두 개나 있었다. 이런 집들은 대부분 공동아파트로 분할됐을 텐데 역시 정치적으로 발 빠른 부모 덕에 호화롭고 넓은 집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잘 먹고 잘 살면서 왜 그렇게까지 감독 자리에 연연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레베진스키의 집도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침대 시트는 구겨져 있었고 부엌 싱크대에도 설거지거리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니 오전까지는 집에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베르닌은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왕재수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서 냄새까지 열심히 맡아 보았다. 왕재수의 향수 흔적이 남아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짙은 머스크 향이 가미된 파우더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호화롭고 부르주아 냄새가 났고 동시에 속물적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왕재수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힘이 쭉 빠진 채 배나무 거리로 돌아왔다.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요원 숙소로 돌아가는 대신 베르닌의 집에서 자기로 했다. 베르닌은 드미트리에게 자기 속옷과 잠옷을 한 벌씩 주었다. 정말로 쌍둥이 형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훨씬 좋을 거라고도.

 

 

둘은 간단하게 인스턴트 보르쉬를 데워먹은 후 물을 한 잔씩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베르닌은 왕재수 걱정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너무 피곤했는지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비둘기 시체와 머리 없는 도자기 인형, 빨간 스카프로 꽁꽁 묶여서 끌려가며 울부짖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왕재수를 보았고 아무리 손을 뻗어도 움직일 수가 없어 너무나도 괴로워하며 흐느껴 울었다.

 

 

 

 

*    *    *

 

 

 

 

베르닌은 8시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집안이 어두컴컴해서 처음에는 새벽인 줄 알았다. 창문으로 달려가 보니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르릉거리더니 번개가 번쩍거리고 천둥이 콰쾅 쳤다. 심장에 돌덩이가 달린 듯 무겁고 답답해졌다.

 

 

‘ 그 자식 비오는 거 싫어하는데. 애기 같은 녀석이니까 천둥 치면 무서워할지도 몰라. 안 그래도 잡혀가서 무서울 텐데...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 있는 걸까? ’

 

 

거실로 나가니 소파에서 잤던 드미트리도 막 부스스 일어난 참이었다. 그들은 집안을 샅샅이 살피고 왕재수의 집에도 올라가봤지만 새로 온 편지나 물건은 없었다. 둘은 급하게 씻은 후 잼을 대충 바른 빵과 커피로 3분 만에 아침을 먹었다. 남아 있는 다섯 개의 안전가옥을 위치에 따라 분류했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는 가까우니 괜찮았지만 문제는 외곽에 있는 세 군데였다. 하나는 공항 근처에 있었고 하나는 온천 요양소보다도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가까운 것이 수도원과 옛 교회 근방이었다. 게다가 숲 쪽으로 가는 길은 꽤 험했기 때문에 이렇게 비까지 많이 오는 날씨에는 함께 다섯 군데를 돌면 하루가 모자랄 게 분명했다.

 

 

“ 일단 시내에 있는 두 군데부터 같이 가보자. 운 나쁘게 둘 다 비어 있으면 나머지는 찢어지는 거야. ”

 

 

베르닌은 혼자서 수색하는 것이 불안했지만 일단 그러기로 했다. 아무래도 시내에 있을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스페호프는 왕재수와 관련된 일에 예산과 인력을 많이 투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외곽으로 나갈수록 비용 소모가 더 커지기 마련이니까.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베르닌은 일단 류드밀라에게 전화부터 했다. 왕재수가 몸이 안 좋아서 오늘 못 나가니까 무용수들은 따로 연습해야 할 거라고 말해주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베르닌은 류드밀라가 코즐로프에게 얘기할 거라는 생각에 더욱 근심이 되었다.

 

 

‘ 로만이 달려오기 전에 그 녀석을 꼭 찾아야 되는데... ’

 

 

그들은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뚫고 신시가지의 레스나야 거리 쪽에 있는 안전가옥에 가보았다. 간신히 잠긴 문을 뜯고 들어갔지만 역시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구시가지 시장 근처에 있는 두 번째 안전가옥으로 갔다. 창문 너머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둘은 흥분했다. 특히 베르닌은 왕재수를 구해낼 생각에 이성을 잃을 뻔했다. 심지어 문도 잠겨 있지 않았다. 드미트리가 손으로 밀자 현관문이 스르르 열렸다.

 

 

미하일! 미하일!

 

 

베르닌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뛰어 들어갔다. 고양이 한 마리가 후다닥 도망쳤다. 침실 안쪽에서 기척이 났다. 베르닌은 드미트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냅다 침실로 뛰어들었고 순간 뻣뻣하게 굳어졌다. 한참 뜨거운 사랑을 불태우고 있던 젊은 남녀가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를 응시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여자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꺅꺅 질러댔다.

 

 

“ 어, 어... 미안합니다. 저... 착각을... ”

 

으아악! 이 변태! 썩 나가지 못해!

 

 

베르닌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뛰쳐나왔다. 그 와중에도 화장실과 부엌까지 살펴본 드미트리가 혀를 찼다.

 

 

“ 없어. 여기도 아냐. 젠장. 저것들 가택 침입죄로 확 체포해버려야 되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문 따고 들어와서 놀아나고... KGB 안전가옥인데 관리 진짜 허술하네. ”

 

 

둘은 일단 시장 쪽으로 나와서 제일 처음 보이는 허름한 카페에 들어갔다. 비 때문에 너무 추웠다. 다시 겨울로 돌아간 것 같았다. 춥고 어지럽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뜨거운 차와 향신료를 넣은 양고기와 감자전을 시켜서 정신없이 먹었다. 먹고 나니 두통도 가시고 눈앞도 맑아졌다. 이 와중에도 먹어야 정신을 차릴 수 있다는 것이 서글프고 속상했다.

 

 

먹고 나서 베르닌은 지도를 펼쳤다. 수도원은 근처에 있었다. 온천 요양소는 한참 더 가야 했지만 어쨌든 숲 지대에 있었고 비슷한 방향이었다. 공항이 반대 방향이었다.

 

 

“ 내가 수도원이랑 온천 쪽을 갈 테니까 네가 공항 쪽으로 가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검은 숲 쪽은 내가 지리를 더 잘 아니까. ”

 

“ 응. 그런데 너 혼자서 괜찮을지 모르겠다... 비까지 오는데... 이렇게 하자. 아까처럼 무작정 뛰어들면 안 돼. 일단 안에 미하일이 있는지 살핀 후에 중간에 만나자. 여기서 공항까지는 너무 머니까 무전기가 안 될 거야. 지금이 12시 반이잖아. 음,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계산하면... 그래. 3시부터 1시간마다 무전을 치자. 구시가지에서 검은 숲까지는 그래도 무전이 될지도 모르니까 내가 공항에 갔다가 이쪽으로 돌아올게. 연결이 안 되면 아직까지 내가 여기 못 온 걸로 생각하면 되니까.

 

“ 그래. 근데 넌 공항까지 어떻게 가지... 차가 없잖아. ”

 

“ 극장 앞에 직행 버스 서지 않아? 나 여기 올 때 공항에서 그거 타고 왔어. 시내에서는 신시가지하고 구시가지 딱 한 군데씩만 정차하던데. 쭉 오니까 신시가지까지는 한 시간 만에 오더라. ”

 

“ 아, 맞아. 그거 공항 근처에서는 네 군데쯤 설 거야. 잠깐만... ”

 

 

베르닌은 지도를 다시 살폈고 안전가옥과 가장 가까운 정류장 이름을 적어주었다. 하지만 걱정이 앞섰다.

 

 

“ 비 많이 오는데... 그냥 같이 갈까? ”

 

“ 아니야, 내 걱정은 하지 마. 너도 두 군데 가려면 시간 없잖아. 비 와서 오늘은 진짜 금방 캄캄해질 거야. 그리고 저녁 되기 전까지 미하일을 찾아야 극장에도 소문이 크게 안 나지... ”

 

 

그래서 그들은 헤어졌다. 베르닌은 급하게 세 번째 안전가옥으로 차를 몰았다. 수도원을 지나치자 독사과를 먹고 쓰러졌던 왕재수를 위해 약초를 캐러 갔던 때가 생각났다. 자기도 모르게 성호를 그으면서 기도를 했다.

 

 

“ 하느님, 그때처럼 이번에도 도와주세요. 걔 성깔만 그렇지 진짜 착한 애예요. 꼭 찾을 수 있게 해주세요.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주세요. ”

 

 

세 번째 안전가옥은 낡은 별장이었다. 울타리가 허물어져 가는데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것을 보니 흐루쇼프 시절 이후 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 같았지만 일단은 가보았다.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그나마도 나무로 되어 있었고 삭아서 몇 번 세게 비틀자 문이 그냥 열렸다. 여기는 심지어 쥐까지 돌아다녔다. 거미줄이 빽빽하게 쳐져 있었다. 실망한 와중에도 왕재수가 여기 갇히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곧장 나와서 네 번째 안전가옥으로 향했다. 꽤 먼 곳이었다. 게다가 비가 갈수록 더 많이 와서 속력을 줄여야 했다. 온천 요양소를 지나자 숲이 더욱 울창해졌고 쓰러진 나무도 있어서 운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점점 남은 집이 줄어들자 초조해지면서 남은 두 채에도 왕재수가 없으면 어쩌지 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혹시 우리가 완전히 잘못 짚고 있는 건 아닐까? 안전가옥에 애를 가두려면 현장요원이 연루돼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국장이 투입할만한 사람은 필로모프랑 글리셰프 뿐인데. 글리셰프는 몸이 옛날 같지 않아서 올해 은퇴한다고 했는데... 그럼 필로모프인가... 걘 머리가 나빠서 그런 카드들이랑 인형 보낼 스타일이 아닌데. ’

 

 

네 번째 안전가옥은 통나무집이었다. 벌목공 숙소로 위장되어 있었다. 실지로 늦봄과 여름에는 벌목공들이 이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나마 이곳은 삼림국과의 공조를 통해 운영하는 곳이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입구의 잡초도 최근 베어낸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는 통나무집 측면으로 돌아갔다.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불빛은 새어나오지 않았다. 비 때문에 어두컴컴했지만 어쨌든 낮이니까 불을 꺼놨을 수도 있었다. 전날 밤 드미트리에게 배운 대로 돌멩이를 주워서 창문에 집어던졌다. 딱 소리와 함께 유리에 금이 갔다.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창문을 바깥에서 비틀어 열었다. 삐걱거리더니 반쯤 열렸다.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두컴컴해서 안쪽 깊은 곳은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가서 문을 밀었다. 그대로 열렸다. 관리 수준이 정말 엉망이라고 생각하며 베르닌은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가본 안전가옥 중 제일 깨끗했고 냄새도 별로 나지 않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페치카 난로에 완전히 마른 검은 재가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공항 부근의 안전가옥 뿐이었다.

 

 

베르닌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띵했고 목구멍에서 열기가 치솟았다. 너무나 무력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이제껏 왕재수가 스페호프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 그는 아무 것도 해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스페호프 뿐만이 아니었다. 오른쪽과 왼쪽 눈 색깔이 다른 남자, 벨벳처럼 부드럽고 섬뜩할 정도로 낮게 말하는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도 마찬가지였다. 스네고로드의 아르투르와 청년단원들이 그 애를 둘러싸고 폭언을 퍼부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과 국가와 ‘우리’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그 모든 폭력과 협박과 압력 앞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왕재수를 구해준 적이 없었다. 아마 그 누구도 그래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거기 저항하는 것은 더더욱. 그런데 왜 그 바보, 얼간이, 천치 같은 꼬마는 끊임없이 화를 내고 성깔을 부리며 대들 수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자기 무덤을 파면서도 계속해서 반항하는지, 그럴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 바보... 바퀴벌레만 봐도 울고불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녀석이... 뱀 껍질은 무섭고 총은 안 무서운 거야? 진짜 멍충이... ’

 

 

몇 분 동안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다가 베르닌은 시계를 보았다. 2시 30분이었다. 드미트리도 아마 마지막 안전가옥에 도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안전가옥에 왕재수가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    *    *

 

 

 

 

 

3시에 그는 무전기를 켜보았다. 하지만 잡음만 지직거렸을 뿐 드미트리의 신호를 잡아낼 수는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아직도 검은 숲을 빠져나오지 못했고 드미트리는 도시의 반대편 끝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뒤라면 그도 신시가지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무전이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닌은 아무리 생각해도 레베진스키에게서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안전가옥이 아니라 레베진스키의 뒤를 쫓아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집과 별장을 뒤졌고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 문제는 집이 아니고 레베진스키 자체야. ’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미 줄줄 외고 있는 협박카드의 문구들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풀이했다. 마지막 편지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호위 기사들에게 고함

입 다물고 있으면 왕자님은 무사할 거야.

모스크바에는 아프다고 통보해. 물론 공연은 취소야.

수요일이 지나면 곱게 돌려보내주지. 

추신. ‘곱게’는 물론 조건부야

 

 

아니, 내용보다도 그 필체가 계속해서 아른거렸다.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왼손으로 흘려 썼지만 지독한 악필도 아니었고 단어 하나하나도 명료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야무진 성격이 분명했다. 어디서 봤는지도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집도 사무실도 아니었다.

 

 

‘ 극장이야. 분명히 극장에서 봤어. ’

 

 

 

빗줄기는 좀처럼 가늘어지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은 진흙탕이 되어 있었다. 두 번이나 타이어가 파묻혀서 고생을 했다. 차가 엄청나게 덜컹거렸다. 왕재수가 옆에 있었다면 역시 시골이라느니, 고물차라느니, 운전이 험해서 허벅지 근육이 미워진다느니 하고 별의별 잔소리를 다 늘어놨을 게 뻔했다. 하지만 베르닌은 지금 그 잔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간신히 검은 숲을 빠져나와 다리를 건넜을 때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구시가지에 진입한 것이다. 아직 3시 반이었지만 혹시나 해서 무전기를 다시 켜보았다. 아무런 답이 없었다. 무전 연결이 안 되면 베르닌의 집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레닌 대로를 타면 신시가지로 갈 수 있었고 쵸르나야 거리로 빠지면 극장이었다. 그는 쵸르나야 거리 쪽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극장 앞에 차를 세우기는 했지만 막상 들어가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그를 보면 무용수들이 모여들어 우리 감독님이 많이 아픈 거냐, 수요일 공연 올리는 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냐, 혹시 또 누가 감독님에게 이상한 것이라도 먹인 거냐 운운 난리를 칠 게 뻔했다. 독사과 사건도 류드밀라와 코즐로프는 입을 다물었지만 왕재수가 그때 워낙 아팠기 때문인지 무용수들 사이에는 ‘KGB와 당에서 감독님을 독살하려고 했다더라’ 하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시계탑 화재도 수상하다는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무용수들은 그렇다 치고 코즐로프가 ‘우리 아기 어디가 아픈 거냐!’ 하고 그의 멱살을 잡으며 다그치는 것만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빗속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그는 현관의 수위에게 갔다. 다시 직원 주소록을 요구했다. 수위는 투덜댔다.

 

 

이럴 거면 어제 한꺼번에 볼 것이지. 매일 와서 주소록을 보자고 하니... ”

 

 

베르닌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필요한 주소를 옮겨 적었다. 그리고는 수위에게 물었다.

 

 

“ 사무국장 말인데요, 잔나 르이조바. 오늘 출근했나요? ”

 

“ 안 했어요! 휴가라고요. 화요일에 나올 겁니다. ”

 

 

그는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잔나 르이조바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신호만 울릴 뿐 아무도 받지 않았다. 감독실로 전화를 하자 류드밀라가 받았다.

 

“ 아이고, 다냐. 무용수 애들이 난리예요, 감독님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거냐고. 평소엔 아파도 안 아픈 척하고 웬만하면 늦게까지 남아 있는데 얼마나 아프면 못 나온 거냐고, 자기들이 지금 병원으로 가보겠다고 아우성이에요. 데니스가 애들 말리고는 있는데... 우리 미셴카 많이 아픈 거예요? 레프 사벨리예비치 병원에 있는 거예요? ”

 

“ 어, 아,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너무 과로해서 몸살 난 거예요. 무용수들한테 걱정하지 말고 연습하라 하세요. 어, 저... 미샤가 애들 오늘 제대로 연습 안하면 내일 가서 엄청 들들 볶을 거라고 했다고 전해주세요. 그, 근데 오케스트라도 나왔나요? ”

 

“ 아뇨. 오케스트라는 저녁에 나와요. ”

 

“ 지휘자랑 로만도요? ”

 

“ 네. 로만은 녹음 기술자랑 미팅 때문에 드라마 극장에 가 있어요. 그쪽 장비를 몇 개 빌리기로 했대요. ”

 

“ 저기, 사무국장 말인데요. ”

 

“ 잔나요? 왜요? ”

 

“ 그 사람도 휴가라면서요. 혹시 어디 간다는 얘긴 안 했나요? ”

 

“ 글쎄요, 그런 얘긴 없었는데. 콜랴가 휴가 냈으니까 둘이 별장에라도 갔겠죠. 아니면 바람 쐬러 나갔거나. ”

 

 

베르닌은 쏟아지는 비를 뚫고 포나르나야 거리에 있는 르이조바의 집을 찾아갔다. 막 아파트 근처에 차를 대고 있는데 찍찍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전기 너머로 드미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냐. 들려? ”

 

“ 아, 딤카! 응, 들려. 어떻게 됐어? ”

 

“ 그렇게 묻는 걸 보니 그쪽도 비어 있었던 모양이구나. ”

 

“ 그럼 너도? ”

 

“ 응. 그 집은 심지어 문짝도 다 떨어지고 창문도 깨져 있더라. 나 지금 버스에서 막 내렸어. 볼쇼이 대로 정류장. 너도 신시가지 들어온 거지? ”

 

“ 어, 아냐. 난 포나르나야 거리에 있어. 거기서 강만 건너면 금방이야. 구시가지행 21번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후에 내려서 10번지로 와. ”

 

“ 그게 어디야? ”

 

“ 잔나 르이조바라고, 극장 사무국장 집이야. 레베진스키와 친밀해. ”

 

“ 알았어. 저기 21번 온다. 끊자. ”

 

 

드미트리는 10분 만에 도착했다. 우산이 별 소용없었는지 전신이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같이 다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면서 미안해졌다. 베르닌은 안전가옥에 대한 추리가 빗나갔으니 이제 레베진스키를 추적하는 방법뿐이라고 말했고 드미트리도 동의했다.

 

 

“ 302호면 3층이겠네. 전화는 해봤니? ”

 

“ 응. 안 받더라고. ”

 

“ 흠...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은 못 들어가겠는데... ”

 

 

그때 아파트 현관에서 어떤 여자가 양 손에 보따리를 들고 나왔다. 동글동글한 체구에 눈이 반짝거리고 코를 찡긋거리는 것이 아주 호기심 많고 수다스러워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드미트리는 넉살좋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좀 들어드릴까요? ”

 

“ 아유, 그래주면 고맙지. 비까지 오는데. 조금만 가면 돼. 요 앞 여성회관에 감자랑 양파 갖다 놓으려고. 근데 젊은이는 처음 보네. 우리 아파트 사는 거 아니지? ”

 

“ 네. 사촌 누님을 만나러 왔는데 없는 것 같아서요. 아, 같은 건물에 사시니까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잔나 르이조바라고요, 저기 극장에서 일하는데요. ”

 

“ 아이고, 잔나한테 이렇게 번듯한 사촌이 있었다니! 그런데 어쩌나, 잔나는 아침에 남자친구랑 나갔는데. 내일 아침에나 돌아올 거야. ”

 

“ 아... 전화를 하고 오는 건데, 누님 놀래켜 드리려고 그냥 왔더니만... 그런데 남자친구라니요? 혹시 빨간 머리에 수염을 기른 뚱뚱한 남자인가요? ”

 

“ 에구, 무슨 소리야. 잔나가 얼마나 눈이 높은데. 자네 콜랴 본 적 없나? 벌써 몇 년째 둘이 사귀고 있는데 그러나. 금발에 코도 우뚝하고 옷도 잘 차려입고 그야말로 번듯하지. 근데 빨간 머리 뚱보는 또 누군가? 잔나가 콜랴 몰래 양다리라도 걸치나? ”

 

“ 아니에요. 예전에 누님을 쫓아다니던 남자인데 누님이 싫다고 했어요. 하도 오랜만에 와서... 그러면 콜랴와 같이 나가신 건가요? ”

 

“ 응, 아침에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더라고. 콜랴가 에스코트도 해주고. 둘이 엄청 기분 좋아 보였지. ”

 

근데 혹시 다른 사람은 안 왔나요? 그러니까, 검은 머리에 눈도 까맣고 굉장히 잘생긴 친군데요. 피부가 도자기 인형처럼 하얘요. 키는 이 정도. ”

 

“ 글쎄, 그런 사람은 못 봤는데... 아, 혹시 잔나네 극장에 새로 온 감독인지 뭔지 하는 젊은 애 말인가? 본 적은 없는데 잔나가 말해준 인상착의랑 비슷하네. 걔가 그렇게 반동분자에 콜랴를 중상모략해서 앞길을 막는다고 잔나가 화내던데. 자꾸 일을 벌이면서 극장 직원들을 들들 볶아서 힘들어 죽겠다면서. ”

 

“ 그러게요. 그 친구가 근데 어젠가 오늘 잔나에게 들를 것 같다는 얘길 들어서요. ”

 

“ 설마. 엄청 미남이라던데. 그런 애가 왔으면 눈에 안 띄었겠나. 여기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여자들이 많아서 잘생긴 남자가 하나라도 나타나면 다들 벌떼처럼 모이는걸. ”

 

“ 파티 끝나서 술에 절어서 왔으면 업혀왔겠죠 뭐. 요즘 애들 다 그렇잖아요. 그래도 감독이면 자기 윗사람이니까 잔나가 차로 데려다줬을 수도 있겠네요. ”

 

“ 그런가... 근데 잔나는 어제 안 들어왔어. 오늘 아침에 잠깐 들러서 옷만 갈아입고 나갔어. 내가 옆집이잖아. 잔나가 건망증 때문에 열쇠를 몇 번이나 잃어버렸거든. 그래서 요즘은 열쇠를 꼭 나한테 맡기고 가니까 다 알지. 차에도 콜랴 밖에 없는 것 같던데. ”

 

“ 그렇군요. 제가 잘못 알았나보네요. 아, 여기가 여성회관이군요. 보따리 이쪽에 놔드릴까요? ”

 

“ 그래그래. 고마워, 젊은이. 잔나를 못 보고 가서 어쩌누. ”

 

“ 괜찮아요. 다음 주에 또 올 테니까 그때 보죠 뭐. 누님한테 전해드릴 게 있었는데 그게 좀 아쉽네요. ”

 

“ 나 주고 가. 전해줄 테니까. ”

 

“ 그게 많이 무거워서요. 차에 놔뒀는데... 아주머님께 그런 폐를 끼칠 수야 없죠. ”

 

“ 그러면 내가 열쇠를 줄 테니 올려놓고 가지 그러나. 물건 올려놓고 우리 집 편지함에 열쇠 넣어두고 가면 되지. 난 301호니까. ”

 

 

뒤를 따라가며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던 베르닌은 드미트리의 수완에 감탄했다. 역시 엘리트 요원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미트리의 노력도 헛수고였다. 그들은 302호로 곧장 올라가서 드미트리가 얻어낸 열쇠로 문을 열었지만 르이조바의 집 역시 텅 비어 있었다. 혹시나 잠깐이라도 왕재수를 가둬놓지 않았을까 싶어 구석구석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왕재수는 연기처럼 사라졌고 레베진스키와 르이조바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닌은 너무나 절망해서 스페호프에게 뭐라고 보고를 해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기회에 공연을 당장 취소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선수를 치면 스페호프가 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왕재수가 있는 곳을 알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드미트리는 그게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동의하면서도 아직 저녁이 되지 않았으니 집에 가서 젖은 옷을 갈아입고 조금만 더 고민을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집으로 향했다.

 

 

 

 

*    *    *

 

 

 

 

 

젖은 머리가 헝클어져서 가르마가 불분명해지자 드미트리는 더욱 그와 쌍둥이처럼 보였다. 문득 베르닌은 왕재수가 가르마와 새치, 콧방울, 눈매와 걸음걸이 따위를 거론하던 게 생각났고 가슴이 찌릿했다.

 

 

‘ 내가 봐도 헷갈리는데 걘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봤을까. 바보... 그러면 뭐해, 쓸데없는 데만 똑똑하고. 그래봤자 나쁜 아저씨들한테 괴롭힘만 당하고... 공연 올리겠다고 아등바등 난리치다가 이렇게 잡혀가고. 아, 이 바보 멍충아, 대체 넌 어디 있는 거야... ’

 

 

버스를 타고 공항 부근까지 다녀오느라 고생을 해서 드미트리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젖어 있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온수 스위치를 올렸고 드미트리에게 빨리 씻으라고 했다. 이 와중에 감기까지 걸리면 큰일이었다. 드미트리가 옷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아가일 무늬 셔츠와 바지를 꺼내주었다.

 

 

드미트리가 씻는 동안 베르닌은 답답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집안을 돌아다녔다. 드미트리가 옷을 벗으면서 도로 꺼내놓은 협박카드들을 다시 읽어보았고 마지막 편지도 살펴보았다. 다시 봐도 그 필체는 낯익었다.

 

 

‘ 어디서 봤을까... 극장에서 본 것 같은데... ’

 

 

그는 멍하게 냉장고 쪽으로 갔다. 목이 말라서 맥주라도 한 모금 마시고 싶었지만 문득 범인이 또 다른 음료수에도 약을 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둘 다 비를 맞았으니 차라리 따끈한 차를 마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몸을 돌려 찬장 문을 열었다. 얼마 전에 보랴가 왕재수에게 아침마다 한잔씩 타 마시라고 만들어준 진한 과일청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유리병을 꺼냈는데 뚜껑에 메모가 붙어 있었다.

 

 

찻잔 데우기.

과일청 2큰술 넣기.

펄펄 끓인 물 부어서 젓기.

 

 

이게 뭔가 싶었지만 곧 생각이 났다. 왕재수가 이런 거 타 마시는 방법 모른다고 툴툴거리자 보랴가 ‘먼저 찻잔을 데우란 말이야. 그리고 과일청부터 크게 두 숟가락 넣고! 팔팔 끓인 물 부어서 잘 저어 마시면 돼. 정 모르겠으면 적어!’ 라고 엄하게 말했었다. 왕재수는 짜증을 내면서도 수첩을 찢어서 레시피를 적었고...

 

 

베르닌은 머리가 아찔했다. 네 번째 편지를 가져왔다. 뚜껑의 메모와 대조해보았다. 글씨는 달랐다. 하지만 뭔가가 가슴을 쿡쿡 찔렀다. 기억이 소용돌이쳤다. 극장에서... 그는 연습실에 있었다. 왕재수도 있었고 류드밀라와 레베진스키도 있었다. 그때 왕재수는 반주용 피아노가 조율이 안 맞는다며 화를 내고 있었다. 레베진스키는 왜 아무렇지도 않은 악기 트집을 잡느냐고 했고 류드밀라는 조율기사에게 연락하겠다고 했다. 왕재수는 류드밀라에게 음악은 아무 것도 모르지 않느냐고 짜증을 내더니 수첩에 ‘피아노, ㅇㅇ건반, 플랫, ㅇㅇ음, ㅇㅇ음’ 운운하는 용어들을 마구 써내려간 후 종이를 북 뜯어 그녀에게 쥐어주고는 이대로 읽어주라고 했다. 류드밀라는 왕재수의 음악적 천재성이 아니라 다른 것에 감탄했다.

 

 

“ 어머나, 미셴카! 왼손으로도 글씨 잘 쓰네요! 원래 왼손으로 쓰면 못 알아볼 지경인데 굉장히 또박또박... ”

 

“ 당연하잖아요, 난 천잰데. 균형 감각 키우려고 어릴 때부터 양손을 썼다고요. 그래도 글씨는 오른손으로 많이 써서 역시 왼손으로 쓰면 별로 안 예뻐요. ”

 

 

그때 왕재수는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강가에서 새들에게 먹이를 주다가 벌레에게 물려서 손등이 퉁퉁 부어올랐기 때문이다. 부기는 이틀이 지나서야 빠졌고 왕재수는 그동안 왼손만 쓰면서 시골은 역시 엉망이라고 계속 화를 냈었다.

 

 

피아노, 건반, 플랫. 조율.

 

 

호위 기사들에게 고함

입 다물고 있으면 왕자님은 무사할 거야.

모스크바에는 아프다고 통보해. 물론 공연은 취소야.

수요일이 지나면 곱게 돌려보내주지. 

추신. ‘곱게’는 물론 조건부야.

 

 

 

베르닌의 눈앞에 글씨들이 춤을 췄다가 사라졌다. 똑같았다. 동일인의 필체였다. 그건 왕재수의 글씨였다.

 

 

‘ 이건 걔가 쓴 거야... 하지만 대체 왜! 어떻게! ’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만일 왕재수가 마지막 편지를 썼다면 논리적으로 앞의 세 장도 마찬가지여야 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왕재수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는가. 자기 자신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고 죽은 새와 인형을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그토록 피땀 흘려 준비한 수요일 공연을 중단하다니.

 

 

‘ 인형은 그 녀석 사무실에 있었던 거였어. 오렌지 주스도 그 녀석 냉장고에는 언제나 있었어. 그 녀석처럼 민감한 입맛이라면 우유도 입 대는 순간 저지방 우유가 아니란 걸 알아차렸을 텐데 다 마셨어. 여섯 개의 음악에 대해서라면 자기가 선곡했으니까 물론 다 알고 있겠지. 파랑새, 왕자님, 호위 기사... 발레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보낸 카드. 발레에 대해 그 녀석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은 없어. ' 

 

 

등줄기가 오싹했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걔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말이 안 되잖아. 게다가... 걔가 비둘기를 죽인다고? 벌레만 봐도 무서워서 못 움직이는 애가, 새를 그렇게 좋아하는 애가... 아니야... ’

 

 

베르닌은 하마터면 샤워를 하고 있는 드미트리에게 뛰어 들어갈 뻔 했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었지만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바람이라도 쐴까 하고 창문을 열었지만 비가 너무 심하게 들이쳐서 도로 닫고는 복도로 나갔다. 멍하게 복도를 왕복했다. 점차 이성이 돌아왔다.

 

 

‘ 그래, 마지막 편지를 썼다고 해서 앞의 세 개도 걔가 썼다고 확신할 수는 없어. 미셴카는 우리가 쓰러졌을 때까지는 깨어 있었어. 그 마지막 편지는 범인이 걔를 협박해서 쓰게 만든 거야. 필체를 못 알아보게 하려고 왼손으로 쓰라고 했던 거야. 그럼 미셴카는 수면제를 먹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끌려간 후에 깨어나서 쓴 걸까... 후자라면 범인은 우리가 쓰러졌을 때 다시 왔다는 거고... 그때 우린 세 시간 정도 정신을 잃고 있었지. 미셴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편지를 쓰게 만들었다면, 그리고 그 편지를 들고 범인이 다시 우리 집에 왔다면 미셴카를 숨겨놓은 곳은 그렇게까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야 해. ’

 

 

생각에 잠겨 왔다갔다 하던 베르닌은 어느새 복도 끝 비상계단 앞에 와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왔지 싶어서 집 쪽으로 몸을 돌리다가 베르닌은 멈칫했다. 위쪽 계단 구석에 뭔가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 저게 뭐지? ’

 

 

베르닌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혀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라갔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물체를 급하게 집어든 순간 그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아, 이건! 목걸이! 그 자식 목걸이잖아!

 

 

그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그 목걸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자신이 레닌그라드의 의사 유리 아스케로프로부터 받아온 십자가 목걸이였으니까. 왕재수는 무대에 올라갔을 때와 독사과를 먹고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그 목걸이를 푼 적이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앞뒤로 뒤집어가며 찬찬히 살폈다. 잠금 고리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십자가는 발로 밟힌 듯 귀퉁이에 시커멓게 자국이 나 있었다.

 

 

‘ 미하일이 반항했던 거야. 몸부림치다가 줄이 끊어진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이걸 풀었을 리가 없어.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건데. 하지만 왜 목걸이가 여기 있는 걸까... ’

 

 

해답은 너무나 간단해서 베르닌은 현기증이 났다.

 

 

미셴카는 이 건물 안에 있는 거야! 범인은 멀리 가지 않았어! 그자는 처음부터 여기 숨어 있었어. 그러니까 우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었던 거야. 약을 탄 우유와 주스를 갖다놓고 우리가 미셴카의 집에 없을 때를 노려서 카드와 인형을 놓고 갔어. 우리가 주스를 마시고 정신을 잃었을 타이밍에 들어와 걜 끌고 갔지. 그자가 여기 잠복해 있었다면, 이 건물 안에 은신처가 있었던 거야. 그래! 그자는 미셴카를 거기로 데려간 거야! 엘리베이터는 이용하지 않았어, 주민의 눈에 띌까봐. 그래서 계단으로 간 거야. 위층 주민들은 계단을 이용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목걸이가 여기서 발견된 건, 6층에서 7층으로 가는 계단... 그건 그자의 은신처가 8층 아니면 9층에 있다는 얘기야! 7층에는 그 녀석 집하고 출판문화국장의 집뿐이고... 출판문화국장은 대가족이야. 그 집에는 애를 숨길 수가 없어. 8층과 9층에는 각각 3개의 가구가 있어... 분명히, 분명히 그 중 빈집이 있어. 지난번에 이사나간 집이 있었어. 내가 짐 옮기는 것도 도와줬어. 그러고 나서는 새로 이사 온 집이 없었어. 분명해! ’

 

 

베르닌은 당장 8층으로 달려 올라가려다 멈칫했다. 그는 맨몸이었다. 총도 무전기도 모두 집에 놔둔 채였다. 그리고 왕재수에게는 분명히 범인을 비롯해 감시자가 딸려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는 급하게 복도를 가로질러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막 씻고 나온 드미트리에게 급하게 자신의 추리를 설명했다. 왕재수의 목걸이를 보자 드미트리의 눈빛이 변했다.

 

 

“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다닐. 이런 천치 같으니...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가능성을 생각 못했어! 위층에 빈집이 있어? ”

 

“ 있어. 몇 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번 달에 이사나간 후에 안 들어왔어. 경비실에 가면 알 수 있을 거야! ”

 

“ 예비 열쇠도 얻을 수 있니? ”

 

“ 얻어낼 거야! 공무 수행에 필요하다고 할 거야! ”

 

 

베르닌은 너무나도 마음이 급했다. 경비실에서 열쇠를 얻어내느라 아옹다옹 하는 시간에 범인이 왕재수를 데리고 사라질까봐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드미트리에게 8층에 올라가 있으라고 했다.

 

 

“ 8층하고 9층 사이 계단 있잖아. 거기 잠복해 있어. 두 층을 다 볼 수 있으니까 혹시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무전 쳐. ”

 

 

드미트리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베르닌의 지시에 따랐다. 이 건물을 잘 아는 것은 베르닌이었고 왕재수의 목걸이를 찾아낸 것도, 추리를 해낸 것도 베르닌이니 거기 따르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즉시 권총과 무전기를 챙기더니 소리를 죽여 계단 쪽으로 올라갔다.

 

 

베르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경비실로 갔다. 8층과 9층에 비어 있는 방이 있는지 물었다. 수위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요 며칠 동안 왜 이렇게 그 방을 찾는 사람이 많담. 전화도 몇 번이나 오고. 지난번에도 꼭 이사 들어올 것처럼 찾아와서 실컷 방 구경하게 해주고... 장부에 적으려고 주택 관리국 허가증을 보여 달라고 했더니 그냥 가버린 놈이 있었는데. ”

 

“ 뭐라고요? 그게 누군지 모르세요? ”

 

“ 모르니까 내가 허가증을 보여 달라고 했지. 당신 또래 젊은 남자였어요. 금발머리에 안경 끼고 양복 입고. ”

 

“ 금발이면 레베진스키인데... 젊은 남자였다고요? 40대쯤 되지 않았어요? 미남이었나요? ”

 

 

“ 당신 또래였다니까 웬 40대! 미남은 무슨. 꼭 안경잡이 쥐새끼처럼 생겼던데. 덩치는 좋더군요. 거의 당신만할 걸요. ”

 

“ 그러면... 그 집은 지금 비어 있어요? ”

 

“ 당연히 비어 있지. 이 아파트 들어오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당신이나 7층의 그 반동분자처럼 당국에서 밀어 넣은 사람들이야 모르겠지만 일반인들한텐 여기가 모스크바 시내 아파트에 거주 등록하는 것만큼 어려운 곳이라고요! ”

 

“ 그게 몇 호인가요? ”

 

“ 몇 호였더라... 901호였던 것 같은데... 그렇지. 9층에선 제일 넓은 집. 그 반동분자 집하고 같은 구조였으니까. 욕실 두 개에... ”

 

“ 당장 거기 열쇠 줘요. 이건 공무예요. 당과 연방에 심대한 해악을 끼치는 범죄자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요! ”

 

 

수위가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열쇠들이 매달려 있었다.

 

 

“ 에, 그러니까...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9층이 노란색이었지. 그러면 여기... 에잉, 줄이 다 꼬였잖아. ”

 

 

베르닌은 주머니칼을 꺼내서 꾸러미 한가운데에 뒤엉켜 있는 줄을 싹둑싹둑 잘라버렸다. 수위가 아우성을 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이 뽑혀나가도록 901이란 숫자를 찾았다. 마침내 두 개의 노란색 열쇠가 달린 고리를 낚아챈 베르닌은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엘리베이터는 9층에 있었는데 아무리 버튼을 눌러대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다리다가 머리가 핑핑 돌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진 베르닌은 무작정 계단으로 내달았다.

 

 

 

 

 

to be continued ..

 

 

 

 

...

 

 

 

과연 단추의 예상대로 901호에 왕재수가 갇혀 있을 것인지!!! 그 결과는 다음주의 2부에서 :)

 

..

 

왕재수가 체포된 경위에 대한 드미트리의 설명은 본편 우주에서 미샤가 수용소에 가게 된 주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뭐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

 

댓글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2015. 9. 23. 20:52

네프스키 거리의 야경, 겨울 밤 russia2015. 9. 23. 20:52

 

 

지난 2월에 페테르부르크 갔을 때.

떠나기 전날 밤, 마린스키 신관에서 공연 보고(라트만스키의 안나 카레니나였다), 춥고 캄캄하고 숙소도 네프스키 대로 중심에 있어서 그냥 버스를 탔다. 당시 머물던 호텔은 고스치니 드보르 정류장에서 더 가까웠지만 한 정거장 전인 카잔 성당 앞에서 내렸다. 마지막으로 야경 보고 가려고.

 

내 카메라는 오래된 니콘 dslr인데 무거운 걸 못 드는 탓에 렌즈도 기본 번들 중 하나라서 딱히 야경을 근사하게 잡지는 못한다(카메라 탓이 아니고 실은 내 탓임.. 사진 찍는 걸 좀 제대로 배워보고픈데..) 어쨌든 그나마 건진 몇 장 올려본다.

 

카잔 성당.

지난번에 이 카잔 성당과 그 앞의 분수 사진들 여러번 올렸다. 이때는 겨울이라 분수는 작동하지 않았다.

 

옛날 유학생 시절 한밤중에 버스를 타고 가면서 카잔 성당을 보면 낮과는 달리 상당히 괴괴한 느낌이 들었다. 모양도 그렇고 규모도 커서 더 그런 것 같다.

 

 

 

이 근사한 아르누보식 건물은 전에 몇차례 올렸던 돔 크니기 건물.

 

 

 

그리고 걸어가면서 찍은 네프스키 대로 사진 몇 장.

 

 

 

 

예카테리나 카톨릭 성당. 나의 비밀 장소 중 하나. 여기는 그 성당 앞 광장이다.

낮에는 저기서 그림을 팔고 또 초상화가들이 늘어서서 초상화를 그리지만 밤에는 이렇게 골조만 남아 텅 빈 느낌을 자아낸다.

 

 

 

 

 

길을 건너야 하므로 이렇게 지하도로 들어갔다. 이 지하도는 지하철 '고스치니 드보르' 역과 연결되어 있다. 지금은 그나마 음침한 느낌이 덜하지만 옛날엔 진짜 음침했다. 여기서 이것저것 많이도 샀었지. 불법으로 학생 교통권을 판매하는 아저씨들도 있었고(거기서 한번 산 적도 있다). 그리고 이 지하도를 지나다 보면 바이올린 켜는 악사도 있었고... 옛 기억이 새록새록...

 

 

 

지하도를 건넜다.

맞은편에 보이는 저 큰 건물이 고스치니 드보르. 백화점이다. 한때는 페테르부르크 제일의 백화점이었다. 규모가 엄청나다. 아주 기다란 건물이 이어져 있다. 옛날엔 가끔 갔는데 갈때마다 길을 잃었고 다리가 엄청 아팠다. 제정 러시아 시절 생긴 곳이다. 모스크바의 '굼', 페테르부르크의 '고스치니 드보르'.

 

 

 

이때 내가 머물렀던 호텔은 네프스키 대로에서 꺾어들어가 미하일로프스카야 거리로 들어가면 나온다. 예술광장 바로 앞. 그랜드 호텔 유럽 전경. 왼편이다. 오른편에는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건물이 있다.

 

 

 

호텔 앞에 다 와서...

좋은 호텔이다. 여름엔 비싼 데다 방이 없어서 못 갔지만...

 

:
Posted by liontamer

 

 

지난 7월. 페테르부르크 네바 강변에 석양 보러 나왔을 때.

해지기 직전. 이삭 성당과 청동기사상.

 

 

 

구름은 이리도 신비롭고..

 

 

석양 구경 중인 사제들

 

 

 

그리고 바이커들.

백야 시즌이면 궁전광장과 네바 강변에 바이크족들이 많이 나타난다.

 

.. 이때 나는 레냐와 료샤와 함께 강변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이 사진에는 안 나와 있는 가죽 재킷 차림의 바이커 하나가 휘파람을 불며 나에게 아는 체를 했다. (내가 해골 그려진 옷을 입고 있어서 그랬나??)

 

료샤 : (매우 짜증) 야, 그쪽 보지 마! 이쪽으로 와!

나 : 왜? 바이커가 나한테 인사했어. 저 오토바이는 기종이 뭘까?

료샤 : 그쪽 가지 마! 날라리들이란 말이다!

나 : 오토바이만 탔지 착할지도..

료샤 : 폭주족이잖아, 위험하니까 그쪽 보지 마.

나 : 편견을 버려라 친구야

료샤 : 싫어, 편견을 간직한채 친구를 보호할테야.

나 : -_- 편견자!!! (내 맘대로 단어 만듬) 네가 뭔데 날 보호하냐! 너나 잘해.

(강변에 산책 나오기 전에 들렀던 카페 고스찌에서 내가 점원과 웃고 인사하는 것을 본 료샤가 짜증나는 농담을 해서 나는 아직 삐쳐 있던 상황임)

료샤 : 쳇. 그래도 나는 남자니까 이렇게 억울한 상황에서도 기사도를 발휘해 친구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나 : 뭐가 기사도야! 바이커가 휘파람 불고 손 흔든 거 보고 그쪽 보지 말라고 한 거 가지고!

레냐 : (갑자기 끼어들어서) 아빠, 나도 오토바이 사줘.

료샤 : 오토바이 안돼. 위험해.

레냐 : 오토바이 멋있는데... 아빠는 왜 오토바이 없어? 오토바이 태워줘.

료샤 : 아빠는 오토바이보다 훨씬 좋은 차가 있잖아. 그 차에 너 맨날 태워주잖아.

레냐 : 오토바이가 더 멋있는데.. 그치 쥬쥬?(나에게 역성 들어달라고 함)

나 : 응, 오토바이 멋있어.

 

.. 그리하여 료샤는 상처받은 눈으로 아들과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며 세상을 모르는 것들이 어쩌고... 하고 걸어갔다.

 

흥...사실 나도 오토바이 별로 안 좋아한다. 시끄러워서. 하지만 그땐 삐쳐있었으니까 편견자에게 틱틱댔다 ㅋㅋ

(이후 석양 보면서 곧 화해했음 ㅎㅎ 그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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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원래 금요일마다 서무 시리즈를 올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아직 33편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우수한 단추 시리즈가 생각보다 길어지기도 했고... 그래서 이번주에는 서무 대신 예전에 쓴 본편 중 에피소드 하나를 발췌해 올려본다.

 

예전에도 몇번 트로이와 미샤가 나오는 본편을 조금씩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 이번 에피소드는 그 장편의 전반부에서 통째로 발췌했다. 그 소설은 총 4부 2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는 미샤가 발레학교에 다니던 소년 시절을 잠깐 다루고 있고 2부부터는 그가 키로프에 입단해 무용수로서 활동했던 초기 몇 년을 다뤘다.

 

배경은 1973년 1월, 소련의 레닌그라드(현재의 페테르부르크). 심리적 화자인 트로이는 레닌그라드 국립대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미샤는 바가노바 발레학교 졸업반이다. 함께 등장하는 알리사, 갈랴, 료카, 이고리, 코스챠 등은 트로이의 비밀 문학 서클 멤버들이다. (이전에 이들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몇 개 발췌한 적이 있다. 표절에 대한 에피소드, 메밀죽 에피소드 등. about writing 폴더에 있음)

 

알리사는 트로이의 소꿉친구이자 대학교 동기이다. 그녀는 이후 런던 대사관에서 KGB 요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서무 시리즈에서 우수한 단추 드미트리 베르닌이 왕재수가 런던에서 사고친 것을 선배 누나가 수습해줬다고 언급했는데 그게 바로 알리사임. 그 이야기도 전에 발췌한 적 있다. 런던에 투어를 갔던 미샤가 사라져서 알리사가 찾으러 다닌 에피소드임 : http://tveye.tistory.com/2390

 

여기 발췌한 에피소드는 1부 4장. 상당히 전반부에 해당된다. 미샤는 아직 17살이다. 트로이와는 문학 서클에서 만나 매우 친하게 지내고 있다. 트로이는 자신의 정체성과 미샤에 대한 갈망을 꼭꼭 숨기고 있다.

 

이 에피소드에서 서무 시리즈 중 한 가지 에피소드가 나왔다. 읽어보면 금방 아실듯~ 그 외에도 조금 연결된 에피소드가 두어 개 있다.

 

** 초반에 친구들이 미샤에게 '키로프야, 볼쇼이야? 스파스 나 크로비야, 바실리야? 에르미타주야, 트레치야코프야?'라고 추궁하는 것과 관련해. 전자는 레닌그라드, 후자는 모스크바의 명소들이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3일째 계속된 지긋지긋한 폭설이 그치고 잠시 해가 났을 때 알리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 뭐해? ”

 

“ 뭘 하겠어, 논문 붙잡고 있지. ”

 

“ 오늘은 그만 해, 날씨가 아깝잖아. 썰매나 타러 가자. 이고리랑 코스챠랑 레나도 올 거야. 갈랴랑 료카도 시간 되면 온대. ”

 

“ 어디로 갈 건데? ”

 

“ 우리 다차 ”

 

 

트로이는 알리사네 집 별장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전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만 가면 되는 거리였고 아담한 별장 앞에는 호수가 있었다. 썰매 타기에는 최고의 장소였다.

 

 

“ 로미오도 데려와. 걔도 새해라 휴가잖아. ”

 

“ 아, 물어보고. 걘 워낙 바빠서. ”

 

“ 네가 오라고 하면 올 거야. 걔도 졸업하기 전에 좀 놀아야 돼. ”

 

 

연말에 미샤의 발레학교 갈라 콘서트 무대를 보러 갔다 온 후로 알리사를 비롯한 친구들은 미샤를 로미오라고 불렀다. 동기 여학생과 함께 로미오와 줄리엣 2인무를 췄기 때문이다. 배역에 따라 별명이 바뀌었기 때문에 지난번 백조의 호수 갈라 때는 왕자님이라고 불렀고 백야 축제 발표회 때는 투우사라고 불렀다. 그들은 모두 미샤가 이번 여름에 졸업하면 키로프에 들어갈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오직 트로이만이 그가 모스크바로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도 친구들의 믿음이 강력했기 때문에 어느 날 트로이가 진지하게 ‘근데 볼쇼이에서 이전부터 걜 찍었다던데. 같은 조건이면 모스크바로 가지 않을까?’ 라고 운을 떼어 보았다. 그러자 타냐를 비롯해 발레에 대해서는 오직 타이츠 차림의 몸매 좋은 남녀가 나와서 떼를 이루어 춤춘다는 것 밖에 모르는 코스챠까지도 한목소리로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로미오는 우리 거야! 우리 레닌그라드에서 낳아 기른 애라구! 감히 모스크바 따위가 어떻게 걔를 넘봐! 근본도 없는 볼쇼이 따위! ”

 

 

그들은 정색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다음 모임에 미샤가 왔을 때 그를 둘러싸고 강력하게 추궁하기까지 했다.

 

 

너 똑바로 대답해. 레닌그라드야, 모스크바야? 키로프야, 볼쇼이야? 스파스 나 크로비야, 바실리야? 에르미타주야, 트레치야코프야?”

 

 

미샤는 망설이지도 않고 빠르게 대답했다.

 

 

“ 레닌그라드, 키로프, 스파스 나 크로비, 에르미타주. 당연하잖아. ”

 

 

친구들은 모두 환호하며 술잔을 돌렸지만 트로이는 여전히 그가 모스크바로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프리모르스카야 역 근처에 사는 미샤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마침 휴가라 집에 와 있었던 미샤가 전화를 받았고 트로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샤의 어머니는 아직 젊은 편이었고 미인이었지만 말도 별로 없고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에 트로이는 항상 위축되곤 했다.

 

미샤는 그날 약속도 없고 할 일도 없다며 같이 가겠다고 했다.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트로이는 서랍을 뒤져 여분의 모자와 장갑을 챙겼다.

 

 

 

*   *   *

 

 

 

 

호수는 꽁꽁 얼어 있었고 여기저기 눈더미가 봉긋하게 솟아 있었다. 그들은 알리사네 별장에서 2인용 썰매를 몇 대 끌어냈다. 얼어붙은 호수는 이미 어린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썰매와 스케이트를 타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면적이 넓었기 때문에 그렇게 혼잡하지는 않았다. 더욱 근사한 것은 호수 뒤편으로부터 경사를 그리며 뻗어 내려온 눈 덮인 언덕이었다.

 

 

날씨는 여전히 코끝이 시릴 정도로 추웠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랬고 오랜만에 나온 태양이 차가운 황금빛을 발하며 하얀 눈과 얼음 위로 광채를 흩뿌리고 있었다. 다들 좋은 날씨 때문에 즐겁게 흥분했다. 한참 호수 위에서 썰매를 타고 놀다가 이고리가 신나게 외쳤다.

 

 

“ 우리 언덕에 올라가자! 꼭대기부터 타고 내려오자! ”

 

“ 그래, 그러자! ”

 

 

그들은 썰매를 끌고 언덕 뒷길을 따라 우우 올라갔다. 트로이는 가장 큰 썰매를 끌고 가다가 그루터기에 걸려 하마터면 나자빠질 뻔 했다. 눈 위에서 절대로 미끄러지는 법이 없는 미샤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를 잡아 주었다.

 

 

“ 고마워. ”

 

“ 부츠를 그렇게 끌지 말고 이렇게 걸어봐. ”

 

 

미샤가 얼어붙은 눈길 위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시범을 보여주었다. 트로이는 그렇게 걸을 수만 있다면 자기도 지금쯤 로미오라고 불리고 있을 거라고 대꾸할 수도 있었지만 두툼한 스키 점퍼를 입고도 새처럼 가볍게 움직이는 그의 몸놀림에 시선을 빼앗겨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트로이가 챙겨준 보라색 니트 모자 아래로 검은 머리칼이 빠져나와 춤을 추듯 솟아오르기 직전이었다. 치수가 큰 모자를 이마까지 푹 눌러쓰고 있는데도 어떻게 그 머리카락들이 제멋대로 빠져나올 수 있는지 트로이처럼 짧은 금발 머리로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꼭대기에 올라왔을 때는 이미 알리사와 코스챠, 갈랴와 료카가 먼저 짝을 지어 썰매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이고리와 레나가 함께 썰매에 올라앉으면서 그들에게 혀를 끌끌 찼다.

 

 

“ 안됐다, 늦게 올라온 팀은 아가씨들이 없네. 그냥 둘이 타. ”

 

 

트로이는 이고리의 농담을 가볍게 무시했지만 미샤는 어린애처럼 궁금해 하며 물었다.

 

 

“ 썰매는 꼭 아가씨와 타야 하는 거야? 왜? ”

 

“ 썰렁하게 무슨 소리야, 꼭 한 번도 안 타 본 것처럼. 이거 여자 꼬시려고 타는 거잖아. 넌 로미오가 돼갖고 그것도 모르냐? ”

 

 

농담과 함께 윙크를 던지며 이고리와 레나의 썰매가 휙 미끄러져 내려갔다. 트로이는 썰매를 눈 위에 똑바로 고정시키면서 미샤에게 물었다.

 

 

“ 너 진짜 썰매 한 번도 안 타 봤어? ”

 

“ 어릴 땐 타 봤지. 여섯 살 때까지 아버지랑 네바 강에 타러 갔었어. ”

 

“ 그럼 그 다음엔 안 탔어? ”

 

“ 응, 춤추기 시작하고부터는 못 탔지. 지금도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가 알면 길길이 날뛸걸. ”

 

 

알렉산드르 클리모프는 미샤의 은사였다. 발레학교 최고의 교사이자 옛 키로프 스타였는데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온순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 왜? 그분 진짜 성인군자라며. ”

 

“ 다리 다칠까봐. ”

 

“ 아... 그렇구나. ”

 

 

트로이는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미샤는 출퇴근 시간처럼 사람이 붐빌 때에는 지하철이나 버스도 타지 않았다. 눈이나 비가 많이 오지 않을 때면 거리가 멀어도 걸어 다니는 것을 선호했다. 이제껏 트로이는 그게 단순히 미샤가 산책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언제 어디에서나 틈이 날 때마다 스트레칭을 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떠밀려 넘어질 위험이 따르는 장소를 피하는 것도 습관이 되어 있었다.

 

 

“ 그럼 우리 그냥 내려가자. 경사가 생각보다 가파른데. ”

 

“ 괜찮아, 너하고 타니까 별 일 없을 거야. ”

 

 

두터운 점퍼와 스웨터를 껴입고 부츠와 모자로 무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트로이는 몸을 떨었다. 견딜 수 없는 애정과 뜨거운 갈망이 내부에서 치솟아 사방으로 넘쳐흐를 것 같았다. 그는 열기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미샤에게 들킬까봐 고개를 돌렸다.

 

 

썰매가 꽤 커서 남자 두 명이 앉을 수는 있었지만 트로이는 팔과 다리가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힘겹게 몸을 구겨 넣어야 했다. 미샤가 그의 팔과 무릎을 앞으로 잡아당겼고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 네 자리가 없잖아. ”

 

“ 앞에 앉으면 돼. ”

 

 

미샤는 앞쪽의 좁은 공간에 몸을 밀어넣고 무릎을 세우더니 트로이의 어깨와 가슴에 바짝 기댔다. 아무리 조그맣고 날씬한 여자애들이라도 그렇게 유연하게 몸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터번처럼 뒤로 늘어지는 보라색 모자에 감싸인 미샤의 머리가 그의 어깨와 턱 사이에 와 닿았을 때 트로이는 도저히 썰매를 탈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깃털로 부풀려진 스키 점퍼 사이로도 그 아이의 단단한 견갑골과 미끈한 등의 윤곽을 느낄 수 있었다. 미샤는 거미처럼 길게 구부러진 트로이의 다리와 허벅지 안쪽에 자기 다리를 밀착시키고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인양 앉아 휘파람을 불었다.

 

 

“ 그땐 띠로 묶었어. ”

 

“ 언제? ”

 

“ 네바 강에 갔을 때 말야. 우리 아버지도 너처럼 컸거든. 내가 떨어질까봐 커튼 띠로 허리를 묶었어. ”

 

 

미샤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적이 별로 없었다. 어릴 때 얘기는 더욱 더. 다른 상황이었다면 트로이는 궁금해서 이것저것 더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미샤의 몸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지기 위해 뻣뻣한 등과 허리를 억지로 젖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천둥치듯 울려대는 심장 소리를 그 애가 눈치챌까봐 너무나 두려웠다.

 

 

트로이가 꼼짝도 하지 않자 빨리 내달리고 싶어 안달이 났던 미샤가 몸을 홱 틀며 썰매를 출발시켰다. 썰매는 미끄러진다기보다는 반쯤 허공을 날아 언덕 아래로 쇳소리를 내며 달려 내려갔다. 넘어져서 중간에 멈췄다가 다시 내려가고 있던 갈랴와 료카가 자신들의 곁을 바람처럼 스쳐 내려가는 썰매를 보며 경이롭게 소리쳤다.

 

 

“ 와, 너희 건 로켓 같아! ”

 

 

로켓은 길고 경사진 언덕을 단숨에 달려 내려와 호수 언저리까지 미끄러져 와서야 멈춰섰다. 눈과 얼음 가루가 분수처럼 튀었다. 트로이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고 머리가 멍멍했다. 온 몸이 불덩어리가 된 것 같았다. 어렴풋이 귓가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샤가 머리를 그의 어깨 위에 내려놓고 소파에 기댄 것처럼 편안하게 앉아 웃고 있었다.

 

 

“ 들었어? 로켓이래. ”

 

 

트로이는 미샤가 그렇게 어린애처럼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추위와 흥분 때문에 뺨과 콧날과 입술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썹 언저리까지 늘어진 털실 모자 아래로 까만 눈이 폭죽처럼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 일어날 수만 있다면 트로이는 눈 속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일리야 드보르킨이 내뻗은 손으로부터 물 속으로 도망쳤듯이.

 

 

미샤가 훌쩍 일어나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 다시 올라가자. ”

 

 

그들은 다시 썰매를 끌고 언덕을 올라갔다. 반쯤 올라갔을 때 미샤가 트로이의 손에서 썰매를 빼앗았다. 끌어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투박하고 커다란 나무 썰매를 발레리나 파트너를 들어올리듯 가볍게 끌었다. 잠깐이었지만 트로이는 그가 눈 위에서 춤을 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로미오처럼, 황금빛과 광택 나는 검정색으로 무늬를 놓은 흰 옷을 입고 백조를 사냥하러 갔던 왕자처럼, 거대한 붉은 천을 휘두르며 허세를 부리던 투우사처럼.

 

 

그들은 여러 차례 썰매를 더 탔다. 한번은 레나가 끼어들어 트로이를 이고리 쪽으로 내쫓았다. 미샤는 레나를 앞에 앉히고 능숙하게 썰매를 몰았다. 비좁은 썰매를 거의 자신만큼 뻣뻣한 이고리와 함께 타고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눈더미에 처박힐 뻔한 트로이는 언덕 중턱에 앉아 레나가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며 미샤의 팔에 안겨 썰매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구경했다.

 

 

“ 로미오와 줄리엣이네. ”

 

 

알리사가 트로이 뒤로 다가와 모자에서 눈을 털어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 둘이 사귀면 좋겠어, 레노츠카는 쟤 때문에 우리한테 오는 건데. ”

 

 

트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모임에 오는 여자애들의 대부분이 미샤에게 반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레나라고 다를 이유가 없었다. 그는 대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로켓 같지 않은데. 느려졌어. ”

 

“ 무게가 확 줄어들었잖아. 레노츠카 얼마나 날씬하다구. ”

 

 

알리사가 옳았다. 미샤는 레나를 허공으로 들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파트너 발레리나를 손쉽게 띄워 올리고 빙글빙글 돌리듯이. 조그맣고 아름다운 금발머리 인형 같은 레나를 끌어당겨 키스를 하며 포옹할 것이다. 심장을 짓누르는 듯 산란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밀어를 속삭이며 뜨겁게 사랑을 나눌 것이다. 레나는 봇물처럼 흘러넘치는 욕망으로 온몸을 적시고 정신을 잃을 것이다.

 

 

해가 지고 있었다. 멀리서 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목격한 트로이는 돌아가자고 했다.

 

 

“ 다시 눈이 올 것 같아. 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아. ”

 

“ 딱 한 번만 더 타고 가자. 그냥 가면 자다가 아쉬워서 울 거야. ”

 

 

내키지 않았지만 트로이는 알리사와 함께 썰매를 끌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결혼한지 3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신혼부부처럼 사이가 좋은 갈랴와 료카가 서로를 꼭 껴안고 키스를 하다가 그들을 보고는 멋쩍은 듯 웃더니 잽싸게 썰매를 타고 휙 내려갔다. 트로이는 알리사와 함께 타려고 했지만 까다로운 알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 난 너랑 안 탈래. 내 썰매는 너하고 타기엔 너무 좁아. ”

 

“ 나 아까 이고리랑 같이 탔다가 넘어질 뻔 했단 말이야. ”

 

“ 그건 이고리 탓이 아니지. 네가 커서 그런 거잖아. 볼래? ”

 

 

그러더니 알리사는 마침 올라온 이고리에게 손짓을 해 자기 썰매에 태우고는 방울 소리를 짤랑이며 바람처럼 미끄러져 내려갔다. 트로이는 그냥 걸어서 내려갈까 하고 망설였다. 더 이상 썰매를 타고 싶지 않았다. 레나와 미샤가 함께 날아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코스챠가 빨간 칠이 되어 있는 썰매를 끌고 터덜터덜 올라왔다. 전부터 흠모하던 알리사가 파트너인 자기를 버리고 이고리와 가버린 것에 상심하고 말았다며 투덜대고 있었다.

 

 

나도 아가씨를 뺏아야지. 로미오는 여자들이 줄을 섰으니까 좀 뺏겨도 괜찮아. ”

 

 

레나와 미샤가 마지막으로 올라왔다. 코스챠는 신부를 강탈하는 카자크 전사처럼 레나의 가냘픈 손목을 낚아채 자기 썰매에 태웠다. 그리고는 웃음과 짜증이 반쯤 섞인 레나의 비명과 함께 의기양양하게 언덕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 아가씨를 뺏겼어. 썰매로 여자 꼬드기는 건 대실패야. ”

 

 

코스챠의 썰매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미샤가 노래하듯 말했다. 화가 난 기색은커녕 밝게 웃고 있었다.

 

 

“ 썰매로 여자를 낚을 수 있었으면 난 벌써 열두 번은 결혼했겠다. ”

 

“ 위안이 좀 되는군. ”

 

 

미샤는 썰매에 올라탔다. 모자가 반쯤 벗겨져 흘러내리고 있는데다 목도리의 매듭도 풀려 있었다. 트로이는 미샤의 뒤에 타면서 모자를 제대로 씌워주었다. 목도리도 묶어주려고 하는데 미샤가 고개를 저었다.

 

 

“ 더워, 답답해. ”

 

 

그리고는 목도리를 훌훌 풀어 무릎 아래로 내던졌다. 스키 점퍼 칼라 사이로 우아하게 뻗어 내린 목과 어깨가 힐끗 보였다. 트로이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 해가 반쯤 넘어가고 있었다. 거대한 구름이 밀려오고 있었고 차디찬 바람이 불어와 언덕에 쌓인 눈을 안개처럼 날려대고 있었다. 그는 몸을 가능한 한 뒤로 젖히고 두 손으로는 썰매 가장자리를 꽉 움켜쥐었다.

 

 

“ 어두워졌어, 빨리 내려가자. ”

 

 

썰매가 쉭쉭 소리를 내며 솟아올랐다. 맹렬한 기세로 날아올랐다. 귀를 찢는 듯한 바람이 일었다. 트로이는 정말 로켓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떻게 엔진조차 없는 썰매가 이런 기계음과 폭발음을 내며 허공으로 튀어나가는 걸까 하고 경이로움에 사로잡혔다. 한순간 그는 거대하고 끈적거리는 검은 덩어리가 번개처럼 눈앞으로 달려드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서쪽 하늘로부터 몰려온 세찬 돌풍이 로켓을 장난감처럼 들어올려 언덕 가장자리로 내팽개쳤다. 로켓은 굉음과 함께 두어 차례 뒤집히며 눈과 얼음 위로 굴러갔다.

 

 

커튼 띠로 허리를 묶었어.

너하고 타니까 별 일 없을 거야.

 

 

트로이는 공포로 비명을 지르며 두 팔과 다리를 거미처럼 구부려 미샤를 감쌌다. 뭔가가 산산조각나며 어깨를 때렸다. 이상하게도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고함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머리를 부딪치기 전에 트로이는 사방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하얀 눈보라 사이로 보라색 반점을 남기며 날아가는 작은 새를 보았다. 물론 그건 새가 아니었다. 터번처럼 늘어진 보라색 모자였다. 그는 입을 벌려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단단한 뭔가에 머리를 부딪쳤고 정신을 잃었다.

 

 

 

 

*   *   *

 

 

 

 

 

깨어났을 때 트로이는 차갑고 푹신한 눈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친구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우렁우렁 울렸다. 조율이 되지 않은 나팔을 한꺼번에 불어대는 것 같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온 몸이 부서지는 듯 쑤셨다.

 

 

“ 트로이, 정신 들어? 나 보여? ”

 

 

나팔 소음 가운데 알리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눈을 떴고 오래된 흑백 필름처럼 희뿌옇게 번져 있는 알리사의 얼굴을 바로 앞에서 보았다. 눈이 비로 바뀐 모양인지 뺨 위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렇게 추운데 비가 올 리가 없었다. 알리사가 엉엉 울고 있는 거였다.

 

 

“ 왜 울어? ”

 

“ 어떻게 안 울어! ”

 

 

이고리와 료카가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트로이는 지독한 현기증을 느꼈다. 두 팔이 나사 빠진 기계처럼 철컥거리며 축 늘어졌다. 팔 안이 텅 비어 있었다. 한순간 그는 무시무시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 왜, 왜 나만 있어? 미샤는? ”

 

 

다친 거야. 다리가 부러졌을 거야.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가 펄펄 뛰겠지. 썰매 바깥으로 튀어나갔을 거야, 걘 나만큼 크고 무겁지 않으니까. 온통 팔과 다리와 공기 뿐인 애야. 띠로 묶었어야 해. 목도리를 풀지 않았어야 했어. 나 때문이야. 내가 그런 거야, 다리를 부러뜨렸어. 무대에 못 올라갈지도 몰라.

 

 

모스크바로 가지 못할지도 몰라. 여기 남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 마지막 생각이 너무나 끔찍하고 두려워서 트로이는 신음하며 고개를 돌리고 눈 위에 왈칵 토하기 시작했다. 료카가 그의 등과 어깨를 문지르며 구토를 도와주었다.

 

 

“ 그냥 다 토해. 이제 괜찮아질 거야. ”

 

“ 미샤는? ”

 

“ 너보다 훨씬 나아. 걱정하지 마. ”

 

 

 

트로이는 눈을 한 움큼 떠 입을 닦고 일어나려고 했다. 료카가 부축해주려는데 어디선가 미샤가 나타나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 아직 일어나지 마.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 ”

 

 

 

언제나처럼 침착하고 나직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트로이는 마음이 놓이면서 정신을 차렸다. 눈앞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미샤가 손가락을 흔들고 있었다.

 

 

“ 몇 개로 보여? ”

 

“ 세 개. 아니, 흔들지 말아봐. 두 개. ”

 

 

등 뒤에서 레나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이는 게 들려왔다.

 

 

“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뇌진탕이면 어떻게 해. ”

 

“ 조용히 해. ”

 

 

트로이는 미샤가 그렇게 단호한 어조로 얘기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레나는 움츠러들며 입을 다물었다.

 

 

미샤가 그의 곁에 어깨를 대고 앉았다.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뒤통수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면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조용히 말했다.

 

 

잠깐만 기대 있어. 코스챠가 차를 가지러 갔으니까. 며칠 정도는 어지러울 거야. ”

 

“ 넌 괜찮아? ”

 

“ 입술 터졌어. ”

 

 

미샤는 손가락으로 자기 아랫입술을 가리켰다. 피가 고여 있었지만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스키 점퍼 한쪽 칼라와 지퍼는 크게 뜯겨 달아나 있었고 목덜미와 턱에 불분명한 형체의 커다란 멍이 들어 있었다. 하얀 피부 때문인지 자신의 뇌진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멍이 점점 더 진한 보라색으로 바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는 길길이 날뛸 것이다, 무대에 올라가는 애의 얼굴이 망가졌으니까. 흉터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제발 아니어야 했다.

 

 

“ 아파? ”

 

 

미샤는 트로이의 시선이 목덜미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 안 아파. 그냥 멍만 들었어. ”

 

 

‘ 칼라를 뜯은 건 나였어. 잡아주려고 그랬던 거야. 다행이야, 튀어나가지 않았어. ’

 

 

트로이는 미샤의 목에 나 있는 일그러진 아메바 모양의 커다란 보라색 멍 위로 자기 손을 뻗어 손가락 모양을 맞춰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헛구역질을 했다. 알리사가 손수건을 눈에 적셔 그의 이마와 얼굴을 닦아주었다.

 

 

“ 바보 멍청이. 그렇게 돌풍이 부는데 내려오는 얼간이가 어디 있어. ”

 

“ 내가 그랬어. 구름이 도착하기 전에 내려갈 수 있을 줄 알았어. ”

 

 

미샤가 무심하게 말했다. 알리사가 잠깐 눈물이 가득한 갈색 눈으로 미샤를 노려보았다.

 

 

“ 너 미쳤어? 몸이 재산인 애가 바람에 휩쓸릴 걸 알면서 그런 짓을 해? ”

 

“ 미안해. ”

 

 

트로이는 알리사의 책망하는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미샤가 사과하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섯 살 이후 썰매를 타본 적이 없는 애였다. 퇴근 시간에는 버스를 타지도 않고 주말 축구 시합에도 한 번 끼지 않는 애였다. 언덕으로 그를 데리고 올라온 것도, 썰매에 태운 것도 트로이 자신이었다.

 

 

어쩌면 그가 그런 게 아닐까? 그는 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보았고 돌풍이 올 거라는 것도 알았다. 추락할 걸 알았던 사람은 미샤가 아니라 트로이 자신이었을지도 몰랐다.

 

 

‘ 다리가 부러졌다 해도 결국은 모스크바로 떠나게 될 거야. ’

 

 

미샤가 그의 왼쪽 손목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추위 때문인지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반대편 옆에 와서 웅크리고 앉은 레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 왜 그렇게 흐느적거려? 부러진 거야? ”

 

 

미샤가 다시 레나에게 돌처럼 굳은 시선을 던졌다.

 

 

“ 울지 마, 부러지지 않았으니까. 좀 어긋난 거야. ”

 

 

트로이는 자기 손목의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샤가 레나에게 싸늘하게 구는 게 기뻤다.

 

 

“ 좀 아플지도 몰라. ”

 

 

손목은 별로 아프지 않은데 왜 그런 말을 할까 하고 의문하는 순간 트로이는 자기도 모르게 날카로운 숨을 들이쉬었다. 미샤가 그의 손목을 몇 번 만지더니 세게 비틀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비튼 게 아니라 살짝 옆으로 움직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아파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현기증도 구역질도 단숨에 사라졌다.

 

 

“ 움직여봐. ”

 

 

그는 왼손을 움직였다. 아팠지만 더 이상 흐느적거리지는 않았다. 조금 부어올랐을 뿐이었다. 미샤가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목을 묶었다. 그리고 목도리로는 머리와 이마를 동여맸다.

 

 

“ 응급 처치까진 아니지만 심리적으로는 도움이 될 걸. ”

 

 

그때 코스챠가 어디선가 차를 몰고 왔다. 친구들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고 트로이는 경미한 뇌진탕과 3주 정도의 타박상 진단을 받았다. 왼쪽 손목은 부러지지 않았고 어긋났던 부위도 제대로 돌아와 있었다. 미샤는 터진 입술과 목덜미의 멍 외에는 멀쩡했다.

 

 

 

 

 

*   *   *

 

 

 

 

 

“ 썰매 바깥으로 튀어나갔었어. ”

 

 

이틀 후 아파트로 병문안을 온 알리사가 트로이에게 오렌지를 까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 무슨 소리야? ”

 

“ 로미오 말야. 썰매 바깥으로 튀어나갔다구. 그래서 우린 전부 다 걔한테 먼저 뛰어갔었어. 호숫가까지 떨어졌어. 구르지도 않고 순식간에 추락하길래 죽은 줄 알았어. 그거 보고 레노츠카는 기절했었어. ”

 

“ 호수라니, 우리 썰매는 꼭대기에서 뒤집혔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떨어질 수가 있어? 어떻게 안 다쳤지? ”

 

“ 몰라. 정말 큰일 날 뻔 했어. 걔 눈더미에 처박혀서 한쪽 팔 밖에 나와 있지 않았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혹시라도 어떻게 됐을까봐.... ”

 

 

알리사는 부르르 떨다가 생각난 듯이 트로이의 입에 오렌지를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 근데 멀쩡하더라구. 걘 너처럼 기절하지도 않았어. 혼자서 일어나길래 깜짝 놀랐어. 걔가 아니었으면 난 널 찾으러 올라가지도 못했을 거야, 넋이 빠져서. 로미오가 널 썰매 아래에서 끌어냈어. ”

 

“ 아, 난 썰매랑 같이 뒤집혔었구나. ”

 

“ 기억 안 나? ”

 

“ 잘 안 나. ”

 

너 썰매랑 울타리 사이에 끼어 있었어. 다리가 너무 꽉 끼어 있어서 다른 남자애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는데 걔가 혼자 끌어냈어. 어떻게 했는지 알아? 썰매 날을 떼어내서 그걸로 울타리를 쪼갰어. 난 로미오가 그렇게 힘이 센 줄 몰랐어.

 

“ 어딜 쳐야 하는지 아는 거야. ”

 

“ 그럴지도 모르지. 몸을 쓰는 애니까. 그래서 안 다쳤을지도 몰라. 넘어지는 방법을 배운 애잖아. ”

 

 

그가 잡아준 게 아니었다. 기껏해야 칼라를 잡아 뜯고 목에 상처를 남겼을 뿐이다. 그 애가 바깥으로 튀어나가 추락하는 동안 트로이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썰매와 나뒹굴며 천치처럼 울타리 사이에 끼어 기절했을 뿐이었다. 조금만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푹신한 눈더미가 아니라 호수의 얼음 위로 떨어졌다면 온몸의 뼈가 부러졌을 것이다, 얼음을 부수고 차가운 물 속으로 곤두박질쳤을지도 모른다. 익사했을 것이다.

 

 

트로이는 몸을 떨었다. 알리사는 그가 추워서 그러는 줄 알고 담요를 두 겹으로 덮어준 후 하루종일 함께 있어주었다. 저녁에 돌아온 트로이의 어머니는 그 광경을 보고 마침내 아들과 알리사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희망을 품고 미소를 지었다.

 

 

 

트로이는 열흘 정도 집에 누워 있었다. 미샤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전화 한 번 없었다. 타냐의 말에 따르면 키로프에서 밤 공연 무대의 꽤 비중 있는 배역을 맡겨서 새해 휴가도 반납하고 연습을 하러 극장에 가 있다는 것이었다. 공연 당일에는 눈이 많이 왔기 때문에 다리가 불편한 트로이는 극장에 가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 몇몇은 보러 갔다. 돌아온 타냐와 레나가 눈을 반짝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 잠자는 미녀였어, 파랑새를 췄어! 졸업도 안 한 애한테 그 역을 줬다구. 키로프에서 정말 걜 잡고 싶은가봐. 분명히 여기 남을 거야. ”

 

 

트로이는 잠자는 미녀가 어떻다는 건지, 동화에서나 어울릴 법한 파랑새를 춘다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미샤를 레닌그라드에 남게 할 만큼 괜찮은 대우이기를 간절히 빌었다.

 

 

공연이 끝나고 며칠 후 미샤가 말도 없이 들렀다. 언제나처럼 몸에 잘 맞는 옷을 입고 따뜻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입술과 목덜미는 깨끗했다. 흉터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 천사처럼 완전한 모습이었다. 하긴 검은 머리 때문에 천사라기보다는 브루벨 그림의 악마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트로이는 오래된 화집에서 그 그림을 오려 논문 원고 사이에 감춰놓고 있었다.

 

 

“ 많이 좋아진 것 같네. 이거 들어봐. 노래가 좋아. ”

 

 

미샤는 무척 바쁜 모양인지 그 말과 함께 레코드 한 장을 놓고 가버렸다. 뉴욕에서 나온 레코드였다. 재킷에는 예쁘장한 젊은 로커가 몸에서 피를 흘리며 악마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악을 쓰는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클래식 무용수답지 않게 미샤에게는 언제나 극단적인 미국 락 음악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트로이는 그 무시무시한 커버가 보이지 않도록 재킷을 엎어놓고 레코드를 들었다. 나중에는 아랫집에서 항의할까봐 소리를 줄여야 했다. 노래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는 1월 내내 그 레코드를 들으며 논문 작업을 했다.

 

 

 

...

 

 

서무 시리즈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http://tveye.tistory.com/3785) 에서 왕재수가 탑에서 눈더미로 뛰어내린 후 어릴 때 썰매 타다 떨어진 적 있다고 하는데 그때 그는 이때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비행과 추락은 미샤가 등장하는 소설들에서 자주 반복되는 모티프 중 하나이다. 서무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 별장' (http://tveye.tistory.com/3785)의 결말도 본편의 이 모티프와 연결된다.

 

마지막에 미샤가 트로이에게 가져다주는 음반은 내가 예전에 썼던 소설들에 등장했던 미국인 펑크 로커의 음반이다. 내가 미샤라는 인물을 처음 글로 형상화했던 것도 그 캐릭터가 등장하는 어느 단편에서였다. 그 글에서 미샤는 뉴욕에 가서 현지 발레단과의 협업을 통해 발레 불새를 무대에 올렸고 공연 당일 저 가수와 짧은 만남을 갖게 된다. 여기 발췌한 썰매 에피소드로부터 8년 후, 그리고 가브릴로프 우주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의 배경이 되는 시기이다. 그때는 미샤가 가브릴로프로 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지만...

 

 

** 썰매 에피소드이므로, 눈에 덮여 얼어붙은 페테르부르크 바다와 거기 썰매 타러 가는 사람들 사진을 올려봤다. 여기 : http://tveye.tistory.com/4052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2015. 9. 17. 21:09

눈에 덮인 바다, 썰매 타러 가는 사람들 russia2015. 9. 17. 21:09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해 올린 미샤와 트로이의 썰매 에피소드(http://tveye.tistory.com/4050) 관련해서. 한겨울에 썰매 타러 가는 페테르부르크 사람들 사진 몇 장.

 

이건 2010년 겨울에 갔을 때 찍은 사진. 이곳은 바로...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바닷가.

이 사람들은 꽁꽁 얼어붙은 바다 위에서 썰매를 타러 가는 것이다~

 

'얼어붙은 바다 위에서'란 제목의 글을 예전에 petersburg diary 폴더에 올린 적이 있고(http://tveye.tistory.com/716) 여기 사진들 중 몇 장은 이미 올린 적도 있다만... 한꺼번에 쭈루룩 다 올려본다.

 

오랜 옛날 처음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살았던 기숙사가 바로 이 바닷가에 있었다. 그래서 이 바닷가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겨울엔 진짜 추웠다. 그때 바다가 언다는 것도 처음 봤고, 그 얼어붙은 바다 위로도 처음 나가봤다.

 

그런데 이 바닷가에 2012년인가 2013년에 다시 가봤더니 가림막으로 전부 가려놓고 공사 중이었다. 교각 공사를 하는 것 같았는데.. 하여튼 섭섭했다. 지금은 다시 터 놨으려나...

 

발췌한 본편 에피소드에서 미샤가 어릴 때 아빠랑 네바 강에 썰매 타러 갔다는 얘길 하는데, 어린 미샤는 위의 사진처럼 아빠 뒤를 졸졸 따라갔을 것이다.

 

 

 

 

 

이 바닷가에는 구 '쁘리발찌스까야' 호텔, 지금은 파크 인에서 인수한 파크 인 쁘리발찌스까야 호텔이 있다. 4성이라지만 딱히 4성 같지 않은 호텔. 그러나 배고픈 유학생 시절엔 그 호텔이 너무너무 좋아보여서 가끔 러시아 기준으론 훌륭한 화장실도 이용하고 로비 카페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차도 한 잔 마시러 들르곤 했었다...

 

나이들고 직장인이 된 후 다시 그 호텔에 가봤는데 어둑어둑한 그냥 호텔이어서 기분이 묘했다. 그 옛날엔 그 호텔 들어가는 순간 훅 끼쳐오는 목욕탕 냄새가 참 좋았었지.. (이것과 관련된 추억과 호텔 로비에 대한 갈망, 당시 로망의 호텔에 대해 몇년 전 썼던 글이 있는데 나중에 한번 올려보겠다)

 

 

 

 

 

 

 

 

탱크가 보인다고요?

 

이곳은 2차 대전때 수많은 희생자를 냈던 봉쇄와 기아의 도시, 전란의 도시, 결국은 독일에 굴복하지 않았기에 '영웅 도시'란 칭호를 받은 구 레닌그라드이다. 페테르부르크 구석구석에는 2차 대전과 봉쇄에 대한 역사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이 해변에도 기념비와 포신 등등 그 자취가 남아 있다. 근데 저 포신은 모형인지 진짠지 잘 모르겠다. 옛날에 저 부근 지나다니고 사진도 찍었는데 그때도 잘 몰랐음..

 

 

 

 

 

 

 

 

 

 

 

 

 

 

 

 

 

어디부터가 바다이고 어디부터가 해변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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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9. 15. 19:54

러시아 박물관 창 밖 풍경 russia2015. 9. 15. 19:54

 

 

지난 7월. 페테르부르크. 루스끼 무제이 (러시아 박물관, 혹은 러시아 미술관)

 

옛날엔 에르미타주를 더 좋아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러시아 박물관이 더 좋다. 그래서 페테르부르크에 갈 때마다 여긴 꼭 들르고, 에르미타주는 이제 2번 가면 1번 정도 들른다.

 

2층의 어느 전시실 창문 너머로 바라본 바깥 풍경. 울타리 안쪽은 미하일로프스키 공원. 건너편으로 보이는 곳은 예술 광장.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연한 녹색의 돔은 네프스키 대로에 있는 카톨릭 성당이다. 그곳은 나의 비밀 장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페테르부르크에 갈 때마다 꼭 그곳에 들러 초를 켠다. 일종의 의식이기도 하다.

 

다녀온 지 두달밖에 안됐지만 다시 가고 싶네. 이 박물관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브루벨 그림과 천사 이콘이 있다. 이 박물관은 해가 갈 수록 내게 매우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그래서 몇년전 썼던 미샤와 트로이가 나오는 장편의 결말을 이곳, 러시아 박물관의 전시실에서 맺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시실에서 저 바깥으로, 예술광장으로, 그리고 네프스키 거리로 이동하면서 끝난다. 눈 내리는 2월. 러시아. 표트르의 도시. 한때 레닌그라드로 불렸던 도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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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