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무 시리즈 대신 : 리가에 간 미샤와 트로이 about writing2015. 10. 31. 15:24
지난주에는 서무 34편 '딸기 아가씨들과 자선 바자회'(http://tveye.tistory.com/4140)를 올렸지만 35편은 반쯤 쓰다가 너무너무 바쁘고 정신도 없고 심적으로 매우 심란해서 이번주는 거의 글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주에는 2주 전에 코즐로프와 미샤의 얘기를 발췌했던 것처럼(http://tveye.tistory.com/4118) 서무 대신 본편 일부를 발췌해 본다.
전에 몇번 발췌했던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나오는 장편의 중반부이다. 아주 작은 에피소드라 2부 첫장의 일부로 삽입되었다.
1975년 여름, 미샤는 키로프 발레단에서 두번의 시즌을 보내고 이제 세번째 시즌을 맞이하기 직전이다. 그의 친구인 트로이는 레닌그라드 국립대에서 박사후보 논문을 준비하며 강사 노릇을 하는 중이다. 그리고 미샤와 깊은 관계로 접어든지 1년쯤 되어 여러 가지로 모호함과 고통을 겪고 있는 상태이다.
여름에 트로이는 아버지가 교수로 일하고 있는 라트비아의 리가로 간다. 그리고 미샤도 그를 따라간다. 이것은 리가에서 있었던 아주 짧은 에피소드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쓸때 내게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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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여름에 미샤는 트로이와 함께 리가와 탈린에 갔다. 트로이의 아버지가 리가 현지 대학에서 만난 여자와 재혼했기 때문이다. 보통 미샤는 여름에도 휴가를 제대로 쓰지 못할 만큼 바빴지만 그 해에는 베를린 무단이탈 건 때문에 여름 해외 투어에서 일찌감치 제외되었고 트로이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다닐로프에게서 또 다른 징계를 받아 백야 축제와 8월에 잡혀 있던 한두 차례의 외부 공연에서도 하차한 상태였다. 그래도 꾸준히 극장 연습실에 나가고는 있었지만 8월에 트로이가 리가에 간다고 하자 미샤는 가릭의 밴드가 에스토니아 투어 중이라며 자기도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잠깐 트로이는 크세니야를 떠올렸다.
“ 그럼 탈린에서 만날까? 어차피 리가엔 이틀 밖에 안 있을 거야. ”
“ 리가에도 갈래. ”
미샤는 별다른 이유를 대지 않았다. 리가까지는 기차를 타고 갔다. 그리 멀지도 않았고 트로이가 요금도 비싸고 멀미만 나는 비행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차 안에서 미샤는 몰래 입수한 브로드스키의 시집을 읽느라 여념이 없었다. 트로이는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그를 창가로 밀어넣은 후 몸을 옆으로 틀어 책을 가렸다. 미샤는 어차피 표지도 없는데다 흐릿하게 인쇄된 내용은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않을 거라며 투덜댔지만 그는 아직도 그 시집에 서문을 써줬다는 이유로 작년에 체포된 작가를 잊을 수가 없었다. 다 읽은 후 미샤는 만족해하며 책을 트로이에게 건네주었지만 그는 리가의 숙소에 도착해서야 첫 장을 펼 수 있었다.
트로이는 아버지의 재혼 상대인 라리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보다 젊었다. 통통한 체구의 평범한 여인이었는데 화장이 지나치게 진한 편이었다. 그리고 너무 큰 소리로 웃었다. 아버지가 그녀에게서 어떤 매력을 발견했는지 궁금했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라리사가 한참 연상인데다 자기처럼 구부러진 거미를 닮은 아버지와 사랑에 빠진 이유가 더 궁금한 일이었다. 라리사는 트로이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자 리가의 예쁜 아가씨들을 소개시켜주겠다고 수선을 피웠다. 그동안 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띠며 새 아내와 아들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늦은 오후였고 그들은 호텔에 딸려 있는 작은 카페에서 만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미샤는 트로이가 일어나기도 전에 해변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목을 축이러 카페에 들렀다. 미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버지 부부에게 소개를 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트로이가 고민할 겨를도 없이 라리사가 호들갑을 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어머, 저 사람 나 알아! 볼쇼이 댄서야! 작년에 여기 와서 백조의 호수 췄어! 나 사인도 받았었어! ”
아마 라리사에게는 볼쇼이나 키로프나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며 트로이는 미샤를 불러 그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볼쇼이에서 온 유명한 무용수가 남편 아들의 친구라는 사실에 더욱 흥분한 라리사는 그 자리에서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트로이는 가능하면 카페에서의 만남으로 끝내고 싶었지만 이제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미샤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초대를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집으로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면서 트로이가 미안함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 너 꼭 가지 않아도 돼. 나도 라리사는 오늘 처음 봤어. ”
“ 왜, 난 가고 싶어. ”
“ 라리사가 '볼쇼이' 무용수한테 사인받았다고 좋아하는 팬이라서? ”
“ 라리사는 네 생각처럼 나쁘지 않아. ”
자꾸 치솟는 머리를 어떻게든 가라앉혀 보려고 물을 묻혀 빗질을 하면서 미샤가 말을 이었다.
“ 넌 아버지를 닮았더라. ”
“ 아... 그래. 비극이지, 엄마를 닮았으면 좀 나았을 텐데. ”
“ 그럼 교회 첨탑이 될 수 없었을 거 아냐. 그랬으면 난 너하고 그때 버스 타러 안 나갔을 거야. ”
트로이는 단추를 채우다 멈춘 채 미샤를 빤히 응시했다. 미샤는 언제나 그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편이었지만 그건 고양이의 상냥함에 가까웠다. 그런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애써 농담조로 물었다.
“ 왜, 눈보라를 막아주는데 도움이 안됐을까봐? ”
미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포기하고 빗을 집어던지더니 그의 곁으로 와서 잘못 꿴 단추를 풀고 다시 채워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천천히 키스를 하고는 신발을 신으러 가버렸다.
* * *
아버지와 라리사의 새 아파트는 좁은 편이었지만 레닌그라드의 집보다 훨씬 아늑하고 화사했다. 라리사는 구슬 공예와 수예 공방에 다녔기 때문에 집 안 전체에 쿠션과 레이스와 구슬 장식품들이 가득했다. 트로이는 아버지가 수학자 특유의 정연하고 고리타분한 분위기와 자신만의 질서로 배열된 물건들을 그대로 보유한 채 라리사의 한없이 여성적이고 지나칠 정도로 달콤하며 부드러운 그 공간 속으로 불쑥 들어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의 아버지는 조그마한 분홍색 방석이 놓여 있는 의자와 레이스 보가 깔려 있는 식탁 사이를 뻣뻣하고 거대한 거미처럼 마구 부딪치며 다녔지만 기묘하게도 그 모습이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키가 비슷한 트로이는 가구들이 늘어서 있는 좁은 공간에 그만큼 익숙해져 있지 않아서 하마터면 의자 다리에 걸려서 넘어질 뻔 했지만 언제나처럼 뒤에 있던 미샤가 잡아주었다. 미샤는 소파와 쿠션과 티 테이블과 식탁과 의자, 인형과 찻잔들이 줄지어 있는 진열장들 사이의 좁은 통로를 편하게 오갔고 그 어느 귀퉁이에도 몸이 걸리지 않았다.
준비할 시간이 별로 없었을 텐데도 라리사는 푸짐하고 근사한 저녁 식사를 차려냈다. 음식 맛은 매우 뛰어났고 트로이는 아버지가 이것 때문에 그녀와 결혼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의 어머니는 요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리사는 연신 그들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면서 둘 다 대도시 분위기가 난다는 둥 같은 공방에 있는 참한 아가씨들을 소개시켜주고 싶다는 둥 계속해서 수다를 떨었는데 그 아가씨들의 이름만 해도 사샤, 아니타, 류하, 발랴, 다슐랴 등 끝없이 이어졌다. 특히 그녀는 ‘볼쇼이 댄서’인 미샤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서 비쩍 마른 근육질의 발레리나들하고만 시간을 보내는 건 슬픈 일이며 남자란 풍만한 몸매의 가정적이고 착한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어머니처럼 충고를 늘어놓았다.
미샤는 불편한 기색도 없이 라리사의 수다를 잘 받아 넘겼고 그녀가 덜어주는 커틀릿이나 생선 완자, 크림을 넣은 오믈렛, 너무 달콤해서 혀가 녹아버릴 것 같은 산딸기 파이 따위도 거부하지 않고 먹었다. 트로이는 그가 너무 기름지거나 단 음식은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좀 놀랐다. 예의 때문에 입을 다문 트로이 대신 아버지가 라리사에게 무용수의 몸매 관리를 위해 당신의 맛있는 음식들을 너무 권하지 말라고 농담을 했다. 그러자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하루쯤은 그런 것들을 물리도록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무대에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말라서 하루아침에 키만 커버린 학생처럼 보인다, 발레리나들을 번쩍번쩍 들어올리려면 스메타나에 적신 커틀릿과 펠메니와 절인 돼지비계를 많이 먹어야 한다 등등의 말을 열성적으로 쏟아냈다. 트로이는 미샤가 겉보기처럼 깡마른 애가 아니며 아니치코프 교각의 청동조각상에서나 볼 수 있는 단단하고 강한 허벅지와 활시위처럼 당겨진 어깨를 가졌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갑작스럽게 얼굴이 달아올랐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미샤가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모임에서도 미샤는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 외에는 별로 말이 없었다. 트로이와 책을 읽고 영어 강습을 받을 때는 예외였지만 그건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경우였다. 그는 미샤가 원하기만 한다면 아주 사교적으로 굴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라리사와 트로이의 아버지는 그 싹싹한 청년에게 반했고 트로이는 자기들 둘 중 누가 진짜 아들인지 모르겠다고 농담을 해야 했다.
숙소는 버스로 두세 정거장 거리에 있었지만 그들은 걸어서 돌아왔다. 미샤는 라리사의 음식들을 거절하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라도 치르듯 계속해서 뛰었다. 숙소에 거의 다 와 갈 무렵 트로이는 그의 뒤를 쫓아가는 데 너무 지쳐서 길가의 벤치에 주저앉았다.
“ 라리사 말이 맞아, 하루쯤은 그런 거 물리도록 먹어도 괜찮을 거야. ”
“ 알아, 그것 때문이 아냐. 저녁은 맛있었어. ”
“ 그럼 왜 육상선수처럼 뛰는 거야, 직업을 바꾸려고? ”
“ 아, 난 기분이 좋으면 뛰어. ”
“ 여태껏 그런 거 본 적이 별로 없는데. ”
“ 보통은 춤을 추니까 그렇지. 근데 뛰고 싶을 때가 있어. ”
“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데? 너무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저녁을 먹어서? 아니면 라리사 때문에? ”
“ 음, 라리사 때문에. 그리고 네 아버지 때문에. ”
“ 그래? ”
“ 응, 난 사랑에 빠진 부부와 같이 있는 게 좋아.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 ”
미샤는 트로이가 숨을 돌릴 때까지 기다려주었지만 친구가 벤치에서 일어나기가 무섭게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날 밤 불을 껐을 때 미샤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 난 네 아버지를 보고 싶었어. ”
“ 왜? ”
“ 몰라. 그냥. ”
그 말과 함께 미샤가 그의 좁은 침대로 건너왔다. 파자마 하나만 걸친 따스한 몸을 그의 등 뒤에 찰싹 밀착시키며 뒷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두 팔을 감은 채 피오네르 캠프에 온 아이처럼 금세 잠이 들었다. 트로이는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초반부에 미샤가 읽고 있는 시집을 쓴 브로드스키는 '이오시프 브로드스키'(1940~ 1996)라는 소련 출신 망명 시인이다. 영어식으로는 조지프 브로드스키. 사회 기생충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된 후 1972년 소련에서 추방되었고, 1980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198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트로이가 브로드스키 시집에 서문을 써줬다고 체포된 작가 얘기를 하는 것은 미하일 헤이페츠라는 작가의 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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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는 라트비아, 탈린은 에스토니아의 도시이다. 탈린은 특히 페테르부르크와 가깝다. 발트 3국은 당시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연방 동맹국가니 딱히 '외국'은 아니지만 그래도 '러시아'는 아닌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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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는 당시 키로프(지금의 마린스키) 무용수였다. 라리사가 볼쇼이 무용수라고 하는 건 발레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볼쇼이와 키로프를 구분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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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많은 힘이 됩니다.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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