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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8.25 비록 작지만 이름은 원대하다! 2
  2. 2015.08.24 파란 신호등에 길 건너던 놀라운 비둘기 2
  3. 2015.08.23 러시아에서 사온 것들 2 : 초콜릿, 냉장고 자석, 에코백, 요리책과 여행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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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5.08.19 연못의 비둘기 한 마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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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2015.08.17 흐린 날, 이삭 성당과 청동기사상, 공원 따라 산책 2
  12. 2015.08.17 코류슈카, 페테르부르크 명물 생선 튀김 얘기 4
  13. 2015.08.16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화보 몇 장
  14. 2015.08.16 페테르부르크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
  15. 2015.08.15 눈과 얼음의 나라 러시아 사진 몇 장 더 2
  16. 2015.08.14 얼어붙은 페테르부르크 사진들로 더위 달래는 중 4
  17. 2015.08.14 서무의 슬픔 #29. 보랴의 생일 파티 50
  18. 2015.08.12 백야 황혼녘에 운하를 따라 걷다가.. 2
  19. 2015.08.12 비오는 날, 얼음에 비친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과 마린스키 극장 2
  20. 2015.08.11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라 바야데르(15.7.20) 커튼 콜 사진 세 장
  21. 2015.08.11 내 속이랑 똑같네..
  22. 2015.08.10 백야 막바지, 석양에 잠긴 페테르부르크 풍경 6
  23. 2015.08.09 마린스키 극장 카페에서 차 한 잔, 라 바야데르 보러 갔을 때 2
  24. 2015.08.08 페테르부르크의 다양한 가로등 램프들 4
  25. 2015.08.07 운하 따라 마린스키 극장 가는 길에 찍은 사진 몇 장, 운하 도시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짧은 메모 6
2015. 8. 25. 17:09

비록 작지만 이름은 원대하다! russia2015. 8. 25. 17:09

 

 

페테르부르크, 지난 7월 20일. 모이카 운하 따라 걷다가..

페테르부르크 운하를 따라 걷다 보면 유람 보트들이 참 많이 지나간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는데 이렇게 아담하고 귀엽고 어딘가 허술해보이는 배는 또 처음이라 귀여워서 찍어봤다.

그런데 이 깡통보트처럼 보이는 배의 이름은 무려 '코스모스'!!! 우주!!!! 진짜 맘에 든다 :)

 

나중에 페테르부르크 유람보트들과 이들의 이름들에 대해서도 시간 나면 한번 줄줄이 올려보겠다~

 

 

:
Posted by liontamer
2015. 8. 24. 16:07

파란 신호등에 길 건너던 놀라운 비둘기 russia2015. 8. 24. 16:07

 

 

지난 7월, 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산책 갔다가 숙소로 돌아오는 길. 이삭 성당에서 포취탐스카야 거리로 이어지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비둘기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오더니 내 곁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더니 파란 불로 바뀌자 비둘기가 먼저 아장아장 걸어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이었다!

 

몰려드는 차들이 멈추기를 기다린 거겠지???

 

하여튼, 파란 불에 횡단보도 아장아장 걸어서 무사히 맞은 편으로 건너온 비둘기 :)

 

마지막 몇 발짝 남기고 의기양양하게 걸어오는 모습을 찍었다. 비둘기야, 길 잘 건넜구나~ (왜 내가 뿌듯하지 ㅎㅎ)

 

:
Posted by liontamer

 

 

일전에 러시아 수퍼마켓에서 사온 먹거리들 사진(http://tveye.tistory.com/3931)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 외에 서점이나 다른 가게에서 샀던 것들 몇 개. 이번에는 머문 기간도 짧은데다 요즘은 일년에 두어번은 가다 보니 이것저것 많이 사오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번 여름에는 너무 정신도 없고 여유도 없어서 책도 두권밖에 안 샀음.

 

 

 

이건 사무실 동료들에게 나눠주려고 샀던 러시아 초콜릿 캔디. 사실 나는 러시아 초콜릿 캔디는 입맛에 잘 맞지 않아서... 러시아 초콜릿은 특유의 달고 씁쓸한 맛이 있는데 옛날부터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초콜릿이 들어가는 디저트인 까르또슈까는 매우 좋아한다) 사무실 사람들이 많아서 기념품을 하나하나 사다주는 것도 힘들고 가방 싸기도 귀찮아서 요즘은 그냥 이렇게 사탕 몇 봉지 사가서 나눠주고 끝낸다.

 

 

 

이건 전에 한번 얘기한 적 있는 피크닉 초코바. 예전에 러시아에서 지낼 때 좋아했던 초코바인데 요즘은 러시아 수퍼에서도 이거 구하기가 쉽지 않다... 크기가 다양해서 좋다. 극장에 공연 보러 갈때 한개씩 챙겨가서 막간에 먹으면 딱 좋은데..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의 가게에서 이 피크닉을 팔기 때문에 들러서 여러 개 샀음. 친구(쥬인)도 이걸 좋아하기 때문에 친구 것까지 사느라 좀 많다. 그런데 돌아와서 아직도 친구를 못 만나서 저 초코바들이 냉장고에 들어 있음.

 

옆에 있는 분홍색 초코바는 핀란드 브랜드인 파제르의 게이샤. 파제르 초콜릿은 맛있다 :)

 

 

 

 

예전엔 어디든 여행을 가면 냉장고 자석을 한두개씩 모았는데 이게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귀찮아서 그런지 지금은 자석을 거의 사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갔을 때 어느 서점에서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재기넘치는 자석이 있어서 두개 골라서 사왔다.

 

왼편의 자석은 페테르부르크를 상징하는 것들을 알파벳에 따라 나열한 것인데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나는 알파벳 'Г'(게)에 해당되는 자석을 골랐다. 상징파 시인 지나이다 기피우스, 가스찌니 드보르, 그리고 고골!! 사실 고골이 너무 귀엽게 그려져 있어서 ㅎㅎ

 

오른편의 자석은 페테르부르크에서 쓰는 단어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이건 노어를 좀 알아야 재밌는 거라서.. 영어에서도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가 다르듯이, 모스크바 사람들이 쓰는 단어와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이 쓰는 단어가 좀 다른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저 자석의 왼쪽 맨 아래의 러시아식 도넛. 모스크바에서는 뽄치크라고 부르지만 페테르부르크에선 쁘이슈까라고 부른다 :) 그리고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자기들이 쓰는 단어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페테르부르크 시민처럼 말하기' 뭐 이런 광고 간판도 가끔 세우고... 책들 읽다보면 저런 얘기가 종종 나와서 나 같은 외국인으로서는 참 재밌다.

 

사족을 붙이자면,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의 도시 사랑은 유명해서 모스크바랑 비교하면 짜증내는 경우도 많다 :) 어쨌든 문화와 예술과 교양의 도시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모스크바 사람들은 돈 버는 데 눈이 멀어 예의없고 인정머리 없다고 여기기도 하고...

 

 

 

자석 샀던 서점에서 사온 에코백. 하나는 선물용, 하나는 내가 쓰려고 샀다. 이것도 페테르부르크의 상징물들을 그려놓은 것이다 :) 고양이도 있고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도 있고 네바 강물도 있고, 잘 보면 수면 위로 퐁당 하고 물방울이 두 방울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전에 얘기했던 네바 강의 물고기 코류슈카..(가 물 속으로 들어갔다고 씌어 있다 ㅠㅎㅎ), 그리고 비!! 워낙 비가 자주 오는 동네라서... 그리고 페테르부르크의 지붕들에 대한 얘기도 있고, 쁘이슈까 도넛도 있고... 책 두권이 보이시는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 너무 귀엽다 :)

 

이거 말고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문구가 씌어져 있는 에코백도 있었는데 그것도 갖고팠지만 그래도 그림이 그려져 있는 이걸 택했다.

 

 

이번에 사온 책 두 권.

 

왼편은 '루스까야 꾸흐냐 버전 2.0', 우리 말로 번역하면 러시아 요리 버전 2.0 정도 되겠다. 이것은 긴자 프로젝트라는 유명한 러시아 레스토랑 브랜드의 젊은 셰프인 알렉산드르 벨코비치가 쓴 러시아 요리책이다. 소박하면서도 빠르게 만들 수 있는 러시아 가정식 레시피들이 담겨 있다. 심심할 때 넘겨보고 있음.

 

오른편은 '비정형화된 페테르부르크 여행서' 시리즈 중 하나. 이 시리즈 두 권을 먼저 샀는데 이번에 가니 이게 새로 나와서. 이 책들 참 재밌다. 이번에 사온 건 페테르부르크의 수많은 골목과 거리들에 붙어 있는 애칭과 특징들에 대한 얘기를 담고 있다. 이것도 심심할 때 조금씩 보고 있다.

 

 

 

요리책~

이것은 보드카를 넣고 끓인 우하 수프.

 

 

 

오늘 차를 마시면서..

 

 

위의 페테르부르크 여행서 읽음

 

 

안은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

 

 

이건 얼마 전 주말.

 

 

이건 보르쉬와 오크로슈카 수프.

 

오크로슈카는 약한 알콜 음료인 크바스에 오이 등 야채를 넣어 만드는 냉수프이다.

 

 

 

이건 러시아식 감자팬케익. 그때 이거 보면서 감자호박전 만들었다 :)

 

:
Posted by liontamer

 

 

내내 더워서 지치는 날씨다. 2월에 갔을 때 찍은 추운 페테르부르크 사진 세 장.

모두 2월 21일에 찍은 것. 이날은 진눈깨비가 내렸고 나중에는 겨울비로 바뀌었다.

 

먼저 예술광장의 푸쉬킨 동상. 푸쉬킨의 뒤로 보이는 건물은 루스끼 무제이, 즉 러시아 박물관.

 

 

 

이건 이탈리얀스카야 거리에 있는 '오네긴'이라는 기념품 가게. 머물던 호텔과 가깝기도 하고 여기 물건들 중 내 맘에 드는 예쁜 것들이 좀 있어서 몇번 갔다. 푸쉬킨 동상이랑 가까운 곳에 있고 이름도 오네긴 :)

 

 

 

이날 저녁, 발레 안나 카레니나 보러 갔다가 입장까지 시간이 남아서 산책하다 찍은 사진. 마린스키 신관.

 

아아, 추위가 그리워! 페테르부르크는 더!

 

:
Posted by liontamer

 

작년 가을에 일하다 화딱지나서 서무의 슬픔 1편을 장난치며 쓴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편이다!

 

30편은 이전에 올렸던 에피소드에 단추팬클럽 회원분들이 달아주신 외전 관련 댓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탄생했다 :) 제목을 보고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하여튼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어느새 왕재수의 신작 발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고, 그날 아침 스페호프는 베르닌을 국장실로 호출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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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0

 

 

 

 

서무의 슬픔

-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목요일 오전답게 베르닌은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과 더욱 무거운 머리로 출근해 책상 앞에 앉아 밀린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다음 주 수요일로 다가온 신작 발표 때문에 왕재수는 극장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고 있었고 베르닌은 그걸 옆에서 지켜보랴, 자정이 넘어가면 ‘제발 들어가서 잠 좀 자라!’하고 소리를 지르랴, 새벽 두 시에는 우격다짐으로 왕재수를 끌어내서 차에 처넣고 억지로 집으로 데려가 재우랴, 아침에는 또 왕재수를 극장에 데려다주고 출근하랴 정신이 쏙 빠졌고 정말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무용수들을 지도하느라 머리뿐만 아니라 몸까지 쓰고 있는 왕재수가 대체 어떻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그 망할 놈의 신작을 이유로 국장이 부여한 왕재수 감시 특근 때문에 그의 서무 업무는 쌓여만 갔다. 물론 스페호프도 베르닌에게 오전 근무만 한 후 극장에서 감시를 진행하라고 명령을 내린 만큼 다른 직원 하나에게 서무 업무를 분담해주기는 했지만 제대로 처리된 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아침마다 베르닌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일들과 엉망이라 다시 해야 하는 일들을 마주해야 했다.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지치고 화가 난 베르닌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빨리 수요일이 되어 왕재수의 신작이 무대에 올라가기만을 빌었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이중고도 한결 누그러질 테고 왕재수도 자기 몸을 좀 추스를 수 있을 테니까.

 

 

일찍 출근해서 밀려 있는 문서 접수 대장과 발송 대장을 작성하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전화로 그를 호출했다. 당장 국장실로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베르닌은 ‘내 팔자야’ 하고 중얼거리며 국장실로 갔다.

 

 

스페호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지난주의 밀서 사건 실패 때문에 내내 저기압이었고 직원들을 들들 볶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잔뜩 찌푸리고 있었던 미간도 펴져 있었고 안경도 똑바로 쓰고 있었으며 입가에는 미소까지 번져 있었다. 베르닌은 이것이 웬일인가 싶어서 국장을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문득 접견실로 통하는 옆문이 반쯤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국장님, 부르셨습니까. ”

 

“ 음, 어서 오게. 자네가 해줘야 할 일이 하나 있네. ”

 

“ 예? 혹시 서무 업무인가요? ”

 

“ 글쎄, 서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인사 관리 업무일세. 월요일 주간 회의에서 공지한 바 있지만 루뱐카 본부에서 우리 지국으로 행정 연수요원을 파견했네. 알다시피 본부에서 승진 요건을 채우기 위해서는 총 5개의 지국에서 돌아가면서 연수를 받아야 하는데 이번에는 우리 가브릴로프 지국 차례가 들어있더군. 연수 기간은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일세. 자네가 이 친구를 맡아 줘야겠어.

 

 

베르닌은 눈앞이 아득했다. 미약하게 항의했다.

 

 

“ 저, 국장님. 저는 지금 서무 업무도 굉장히 많이 밀려있고 아시다시피 야스민의 감시 업무가 매우 과중합니다. 그의 신작 공연이 다음 주 수요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 주는 주말도 반납하고 극장에 가야 하고 다음 주는 아예 사무실 출근도 못하고 내내 그의 곁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도저히 연수요원을 돌봐줄 여력이 없습니다만... ”

 

“ 나도 자네가 지금 바쁘다는 건 잘 아네. 물론 망할 놈의 그 불여우 감시가 제일 중요하지! 서무 업무는 지금처럼 스멜로프가 분담해 줄 테니 필수적인 것만 하면 되지만 그렇다고 무시해서도 안 되네! 연수요원에게 자네의 업무를 설명해 줘야 할 테니까.

다른 지국에서는 서무 업무를 등한시하지만 적어도 내가 이끄는 우리 가브릴로프 위원회에서만큼은 이것이 행정의 기본이야! 그러니 반드시 그에게도 내용을 잘 설명해줘야 하네. 여기서가 아니라면 그가 기본 중의 기본인 서무 업무에 대한 이해도를 쌓을 기회가 없게 될 테니.

그리고 감시 업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자네는 지금 우리 가브릴로프에서 가장 이념적으로 문제가 심각한 반동분자, 최악의 정치범을 감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 불여우를 감시하는 현장에 연수요원을 데려가는 거야. 도청분석도 같이 하게. 그럼으로써 우리 지국의 감시분석 업무에 대한 연수도 자동으로 끝나는 셈이지. ”

 

“ 어, 저... 하지만 말씀대로 이것은 인사 관리 업무인데 왜 제가... ”

 

 

베르닌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막내에 서무라는 이유로 매일같이 골치 아픈 일만 잔뜩 떠맡는 게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스페호프는 껄껄 웃었다.

 

 

“ 하하, 다닐. 나도 다른 사람 같았다면 인사부서에 맡겼을 걸세. 하지만 이 친구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 자네도 이 친구를 보면 내 말뜻을 알게 될 걸세. 들어오게, 드미트리. ”

 

 

접견실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리더니 젊은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자신 넘치는 발걸음이었다. 키도 훤칠했고 어깨도 널찍했다.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스페호프가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 인사하게, 드미트리. 이쪽이 다닐 베르닌일세. 일주일 동안 자네를 담당할 감시분석부 요원이자 우리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총괄서무라네. 다닐, 모스크바 본부에서 온 드미트리 베르닌일세. ”

 

 

베르닌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너무 놀라서 딸꾹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온 연수요원의 성이 자신과 똑같다는 것은 그럴 수도 있었다. 어차피 그의 성은 흔한 편이었으니까. 문제는 드미트리 베르닌의 외모가 그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부터 시작해 이목구비와 체격, 심지어 손의 모양까지 닮아 있었다. 물론 자세히 보면 눈매나 표정이 좀 달랐고 베르닌과는 달리 질 좋은 정장을 걸친 데다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말 많이 닮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드미트리 베르닌 역시 깜짝 놀란 듯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스페호프가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 내가 뭐라고 했나, 드미트리! 자네와 판박이라고 하지 않았나! 같이 있으니 꼭 형제 같구먼! 심지어 성까지 같지 않나! 자네 알고 있나, 다닐? 드미트리는 자네와 동갑일세. 7월에 태어났다는군. 자네도 그렇지 않나? ”

 

“ 아... 어, 예... 7월 5일... ”

 

“ 아쉽게도 드미트리는 7월 14일이더군. 그러니 다행히 출생의 비밀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네만. 서류를 보면 친척 관계는 아니던데. 신기하게 닮았단 말이야. 성도 같고... 그러니 이게 인연이 아니면 뭐겠나! 다닐, 이제 내가 왜 드미트리 담당 업무를 자네에게 맡겼는지 알겠지? 잘해보게. 여기 인사부서에서 짜 놓은 연수 일정표가 있네. 기관 전체 소개는 내가 이미 마쳤으니 각 부서를 데리고 돌게. 직원들 인사를 마치면 부서별 업무를 개괄해주고 자네의 서무 업무에 대해 설명해주게나. 밀려 있는 일이 많다고 했으니 일부는 같이 진행해도 상관없네. ”

 

“ 아니, 저... 그러면 오늘 오후에는 극장에 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

 

 

“ 무슨 소리인가! 당연히 극장에 가야지. 일정표를 잘 보게. 오후에는 감시분석 업무 연수일세. 드미트리와 함께 극장에 가서 그 불여우를 감시하게!

서류를 보면 알겠지만 드미트리는 대단한 엘리트 요원이야.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 법학과 출신으로 이미 학창시절에 레닌그라드 KGB에서 특채했지. 영어와 프랑스어에도 능통해서 졸업하자마자 런던과 파리에서 대사관에 근무하며 우리 첩보원들에게 보급품을 지원하고 각종 행정 업무를 도맡았네. 비록 행정요원이지만 해외 근무를 위해서 현장요원 연수도 받았고 사격솜씨와 삼보와 복싱, 유도도 수준급인데다 업무를 우수하게 수행해서 표창도 두 번이나 받았지. 파리에서는 유능한 이 친구를 놔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드미트리가 자진해서 국내 활동에 도움이 되고 싶어 했기 때문에 본부로 돌아와서 지금 연수 코스를 밟고 있는 걸세. 그러니 그 불여우 감시에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연수 보고서는 드미트리가 작성해 제출할 테니 자네는 신경 쓸 것 없네. 그럼 가보게. ”

 

 

 

 

*    *    *

 

 

 

 

 

베르닌은 드미트리와 함께 1층으로 내려왔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지만 어쨌든 국장의 명령대로 각 부서를 돌면서 본부에서 온 연수요원을 소개했다. 다들 둘이 닮았다며 깜짝 놀랐다.

 

 

등록부서로 들어가자 알렉산드라는 서류철을 떨어뜨렸고 리자는 후다닥 달려오더니 ‘어머나! 다냐, 쌍둥이였어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드미트리는 마치 무대 위의 왕재수를 연상시키는 듯한 자세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유감스럽게도 저희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습니다만 우연의 일치란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지요. 그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고 대꾸했다.

 

리자는 두 눈이 동그래진 채 드미트리와 베르닌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고 갑자기 뺨을 붉히더니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어머, 웬일이야! 얼굴만 닮았어, 다냐랑 완전 틀려!’하면서 책상들 사이로 달아났다.

 

 

소개를 모두 마친 후 베르닌은 드미트리를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기관 소개 책자를 꺼내서 각 부서들의 업무를 개괄해주었다.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지만 필기를 하지는 않았다. 베르닌이 가브릴로프 KGB에서만 쓰는 고유용어와 암호에 대해 설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슬며시 걱정이 된 베르닌이 충고했다.

 

 

“ 이건 우리 쪽에서만 쓰는 암호라 메모해 놓는 게 좋을 거야. 연수 보고서 써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

 

“ 흠, 별로 어렵지 않은데 메모까지 할 필요 있어? 다 외웠어. 그리고 굳이 외우지 않아도 본부의 메인 패턴과 동일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알파벳 순서만 바꿔서 대입하면 금방 풀릴 것 같아. 나 런던에서 스파이들 암호문 수신도 담당했거든. ”

 

“ 아, 그랬구나. 그러면 이제 대외교류부 쪽 업무... ”

 

“ 다닐, 나 아까 접견실에서 기다릴 때 이 책자 다 읽었거든. 대충 여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파악이 됐어.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난 기억력과 암기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거든. 여기는 조직이 별로 크지 않고 지역 소도시라 중요한 작전이나 임무가 거의 없잖아. 지금 너희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에서 가장 중요한 미션은 아까 국장이 얘기한대로 미하일 야스민 감시 건 하나 정도야. 어쨌든 진짜 중요한 인물이잖아. 그래서 내가 국장에게 직접 요청했어, 그 업무에 배정해달라고. 잘 부탁해. ”

 

“ 아, 어... 근데 걔 말인데, 야스민... 네가 생각하는 거랑 좀 다를 거야. 그렇게 무시무시한 인물이 아니라서... 정치범이라고 하기에도 좀 그래. 걘 그냥 딱 예술가야. 극장이랑 춤밖에 모르더라고. 수요일에 신작을 올리기로 되어 있어서 지금은 거기만 매달려 있어. ”

 

“ 야스민에 대해서는 나도 알아. 나 레닌그라드 출신이잖아. 내가 문화예술에도 조예가 깊거든. 그 친구 데뷔했을 때부터 무대 많이 봤어. 예전에 유럽 투어 왔을 때 파리랑 런던에서도 봤고. 런던 대사관에 있는 선배 요원 하나가 야스민이랑 친분이 있거든. 그때도 그 친구가 사고 칠 뻔한 거 그 누나가 수습해줬었어. 결국 파리에선 해결 안됐지만.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긴. 극장 들어가기 전부터 유명했었어, 비밀 서클 활동도 하고 하여튼 말썽꾸러기였지. 하여튼 되게 궁금했어. 극장엔 언제 가는 거야? ”

 

“ 오후에 갈 거야. 그럼 부서 업무는 파악했다고 했으니까 지금부터는 서무 업무에 대해 알려줄게. ”

 

“ 음... 그래. 근데 그 전에... 넌 원래 여기 출신이야? 나랑 너무 닮아서 깜짝 놀랐어. 국장 말로는 너 모스크바 국립대 법학과라면서. 전공도 나랑 똑같고. ”

 

“ 응. 여기서 태어났어. 모스크바에서는 공부만 했고. ”

 

“ 그렇구나. 그럼 해외 파견 경험은 없어? ”

 

“ 없어. 난 그냥 군대 갔다 왔다가 졸업하고 곧장 행정요원 시험 보고 여기로 발령받았어. ”

 

“ 음, 그건 나랑 다르구나. 그러면 외국어는? 난 영어랑 불어는 유창하고 독일어는 조금 하는 정도야. ”

 

“ 난 외국어는 모르는데... 독일어만 조금... 법학 공부할 때 약간... ”

 

“ 여기도 사격이나 호신술 시험 정기적으로 보니? ”

 

“ 아, 아니... 현장요원들은 보지만 나 같은 행정요원들은 해당 안 돼. 나 사실 총도 잘 못 쏴. ”

 

“ 흐음... 그건 좀 아쉽다. 행정직이라도 기본적인 건 갖추고 있어야 할 텐데. 내가 좀 가르쳐줄까? 나 총 잘 쏘거든. 9밀리 마카로프는 눈감고도 다뤄. ”

 

“ 아, 으응... 그래. 근데 오늘은 일이 너무 밀려 있으니까 나중에 시간 나면 알려줘.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좀 많거든. 너 서무 업무 해봤니? ”

 

“ 아니. 해외 지국이랑 본부에서는 서무는 진짜 말단 후배가 맡는 업무라서 나 같은 엘리트한테야 당연히 안 주지. 그래서 네가 서무라고 돼 있는 거 보고 좀 놀랐어. 너도 학벌도 좋고 들어온 지는 3년밖에 안됐어도 공채라서 너보다 직급 낮은 직원도 좀 있잖아. 근데 서무라니... ”

 

어, 그게... 우리 국장은 서무 업무가 행정의 기본이라고 생각해서... 문서 작성부터 각종 행정 절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 ”

 

“ 그래? 그렇게 중요한 업무란 말이야? 하긴 나도 안 해봤으니까... 그럼 지금 네 자리로 같이 가서 해보자. ”

 

 

베르닌은 대체 누가 누구에게 업무를 가르쳐주고 있는지 헷갈렸지만 어쨌든 드미트리를 데리고 자기 자리로 갔다. 약 한 시간 동안 베르닌은 서무의 주요 업무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드미트리는 입을 벌린 채 가만히 그의 설명을 들었다. 문서 수발과 각종 업무추진비 정산, 근태기록부와 초과근무, 외출부 기록에 이어 마침내 각종 자료 수합 업무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을 때 발따예프가 휘적휘적 다가와 베르닌의 책상에 종이 한 장을 철썩 하고 내려놓았다.

 

 

“ 이봐, 다닐. 이것 좀 처리하게. 최근 2년간의 절도범과 알콜 중독자 감시 대상자 명단과 처벌 내역을 오늘 5시까지 감사부에 제출하라는군. ”

 

“ 예, 5시요? 전 점심 식사 후에는 극장에 가야 하는데요. ”

 

“ 아주 자네 요즘 호강에 겨웠군! 그 불여우 감시 업무를 핑계로 오후마다 극장에서 놀고 있으니! 별 것도 아닌 자료잖아. 서류철 좀 뒤지면 다 나올 것을. ”

 

“ 어, 예. 일단 거기 놓고 가세요. 감사부에는 제가 전화해 볼게요. ”

 

 

발따예프가 자기 자리로 돌아간 후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 잠깐만 여기서 기다릴래? 급한 자료 제출 건이 있어서... 서류철을 좀 뒤져야 할 것 같아. 아, 그동안 네가 이 문서 접수 대장을 기입하고 시행문에 직인을 받아오면 되겠다. ”

 

“ 잠깐, 다닐. 절도범과 알콜 중독자에 대한 감시 업무는 네 담당이 아니잖아. 너는 서무하고 야스민 감시 담당이라며. ”

 

“ 응, 근데 자료 수합 업무가 있다고 했잖아... 내외부에서 자료 요구가 오면 그걸 만들어서 제출하는 것도 서무 업무야. ”

 

“ 아니지, 수합과 작성은 다른 의미잖아. 수합이라는 것은 각 업무 담당자가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주면 그걸 합쳐서 제출한다는 것이고, 작성은 네가 직접 만드는 거잖아.

 

“ 그게... 문자 하나하나의 뜻은 그렇지만 우리는 그냥 서무가 다 하게 되어 있어. 알다시피 다 선배들이고... ”

 

“ 흐음. ”

 

 

드미트리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베르닌은 감사부에 전화를 했고 자료 제출 기한을 연장할 수 없다는 냉혹한 답변을 받았다. 할 수 없이 문서고에 갔다. 먼지를 들이마시며 최근 2년간의 절도범과 알콜 중독자 관련 서류철을 찾아내 자리로 돌아왔는데 발따예프가 책 한 권과 종이를 한 장 움켜쥔 채 씩씩 거친 숨을 내뱉으며 쿵쾅쿵쾅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 어, 발따예프 선배 왜 저러지? 무슨 일 있나? 하여튼 이것 좀 같이 보자, 드미트리. 절도범과 알콜 중독자 관련 서류철이야. ”

 

“ 그럴 필요 없어, 다닐. 그건 발따예프가 처리할 거야. ”

 

“ 엥? 그게 무슨 소리야? ”

 

“ 아까 네가 부서 업무 소개해주면서 업무분장표 보여줬잖아. 그거 보니까 그 업무는 발따예프 담당이던데. 그거랑 규정집 보여줬어. 제9조 3항. 중대한 사유 없이 자신의 업무를 기피할 경우 그 직원은 징계에 처할 수 있다 는 규정 말이야. 그리고 너는 지금 일도 밀려 있고 연수요원인 나를 관리하고 있고 오후에는 가브릴로프 최대의 요주의 인물인 야스민 감시를 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다른 직원의 업무를 도맡아줄 수 없다고 말해줬어. 자료는 발따예프가 처리할 테니까 넌 신경 안 써도 돼. ”

 

 

베르닌은 눈을 깜박였다.

 

 

“ 어... 그래. 고, 고마워. 그런데 그게... 나도 규정은 아는데, 이게 선후배 관계라는 게 있어서... ”

 

“ 인간관계도 중요하지만 업무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담당자들이 일을 떠넘기면 안 되지! 그러면 조직의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이 문서 접수와 발송 대장도 그래. 이것도 업무 담당자들이 각각 처리하면 훨씬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데 서무가 한꺼번에 모아서 정리하고 무슨 일인지 하나하나 물어보면서 처리하고 있으니 일이 진전도 안 되고 야근만 하게 되지. 업무추진비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좋아, 다닐. 난 항상 어떤 업무를 맡게 되면 단계별로 주요 성과목표를 설정하거든. 알다시피 이번 가브릴로프 연수에서 너희 국장은 내게 두 가지의 목표를 부여했지. 하나는 ‘서무 업무 파악과 행정 능력 배양’, 다른 하나는 ‘정치범 야스민 감시를 통한 실무 전문성 강화’야. 야스민은 아직 못 만났으니까 오후로 미뤄야 할 거고. 전자에 대해서는 지금 세부 목표를 설정했어. ‘서무 업무의 효율성 제고’!!! 이제 점심시간이니 일단 오늘은 현황 파악만 하고 본격적인 개선 방안은 내일 수립하겠어. 그럼 우리 점심 먹자. 너희는 점심을 구내식당에서 먹니? ”

 

 

베르닌은 정신이 몽롱해져 왔지만 마지막 말은 제대로 알아들었다.

 

 

“ 으, 으응. 그러네, 벌써 열두 시구나. 구내식당 가자. 오늘 메뉴는 양배추 수프에 돼지비계 절임, 삶은 마카로니야. ”

 

“ 응, 역시 지역 특색이 반영됐구나. 아까 예산서 보니까 여기는 아무래도 소규모 지국이라 그런지 급량비 예산액이 적더라. 그러니 분명 구내식당 음식은 질이 나쁘고 맛도 없겠지. 나는 꼬박꼬박 운동을 하고 몸을 관리하기 때문에 영양 균형 잡힌 식사에 관심이 많아. 그래서 요리도 직접 하거든. 사실은 도시락을 싸왔는데 구내식당 음식보다는 훨씬 맛있을 거야. 괜찮으면 같이 먹을래? 2인분이야, 넉넉해. ”

 

“ 그, 그래. 근데 실내에선 먹을 데가 마땅치 않은데... 뒤뜰로 가면 괜찮을 거야. 이제 별로 안 추우니까. ”

 

 

베르닌은 드미트리와 함께 뒤뜰로 갔다. 배추밭 쪽으로 가서 예의 그 넓적한 돌멩이 위에 걸터앉았다. 배추밭이 어떻고 시골이 어떻고 하며 트집을 잡을까봐 불안했지만 의외로 드미트리는 빙긋 웃었다.

 

 

“ 여기 좋구나, 공기도 맑고 사람들도 안 오고. 저기는 텃밭 같은 건가보구나. 배추 키우면 잘 자라겠다. 물그릇이 있는 걸 보니 고양이한테 밥을 주나보네. ”

 

“ 으응... 매일 오는 놈이 하나 있어서... ”

 

“ 나도 파리에 있을 때 고양이 키웠거든. 새하얀 페르시아 고양이였는데 정말 귀여웠어. 난 고양이가 좋더라고. 도시락 좀 남겨서 줘야겠다. ”

 

 

베르닌은 드미트리가 배추밭도 알아보는데다 무엇보다도 고양이를 아끼는 모습에 감복했다. 잘난 척 하는 놈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자책했다.

 

 

‘ 알고 보면 좋은 앤데 내가 괜히 자격지심에 그랬네. 진짜 똑똑하기도 한 것 같아. 아까 했던 얘기도 사실 다 맞잖아. 결국 감사 자료도 발따예프가 처리하게 해줬고. 나도 얘한테 잘해줘야지. 얼굴도 닮았는데. ’

 

 

그때 드미트리가 꾸러미를 싸고 있던 신문지를 풀고는 네모반듯한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칸막이가 쳐져 있었고 각 칸막이마다 정갈해 보이는 음식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한입 크기로 자른 샌드위치들과 삶은 달걀, 훈제연어와 치즈, 오이와 토마토 샐러드, 예쁘게 자른 오렌지가 들어 있었다. 상자 옆에는 우유 한 팩과 탄산수 한 병이 놓여 있었다.

 

 

“ 먹어, 다닐. 이건 게살 샌드위치, 이건 칼바사 샌드위치야. 재료가 신선하니까 맛있을 거야. 훈제연어는 이 크림치즈랑 케이퍼 얹어서 같이 먹으면 잘 어울리더라. ”

 

 

베르닌은 샌드위치를 먹었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맛있었다.

 

 

“ 와, 맛있다. 이거 네가 만든 거야? 짜지도 않고 그렇다고 밋밋하지도 않은 게 진짜 신선하고 맛있어. 소스도 담백하고. ”

 

“ 응, 나 요리하는 거 좋아해. 파리에 있을 때는 요리 강습도 받았어. 대사관 요리사들이랑 친하게 지냈거든. 오이랑 토마토 샐러드도 먹어봐. 드레싱이 상큼할 거야. 레몬즙에 꿀을 섞고 견과를 가미했거든. ”

 

“ 진짜 맛있다. 완전 프로 요리사 같아. 너 대단하구나. 일하느라 바빴을 텐데 요리까지 이렇게! 나도 요리는 좀 하지만 그냥 매일매일 끼니 때우기 바빠서 이렇게 제대로 만들지는 못하는데. 샐러드도 너무 맛있어. 우와, 연어도 정말 맛있다. 재료도 신선하고 진짜 건강식이네. 이거 걔가 진짜 좋아하겠다. ”

 

“ 걔가 누구야? ”

 

“ 어? 아, 미셴카... 아니, 야스민. 걔가 엄청 까탈스럽거든. 기름기 있는 것도 안 먹고 단 것도 안 먹고 음식을 좀 가려. 건강식 타령만 하고. 밥 챙겨 먹이는 거 힘들어 죽겠다니까. ”

 

“ 그럴 만도 하겠다. 무용수 출신이잖아. 전에 무대 올라오는 거 보니까 춤추는 것도 그렇고 몸매도 그렇고 자기 관리가 장난 아닐 것 같긴 했어. 근데 야스민한테 네가 밥까지 챙겨줘야 돼? 극장 식당에서 먹으면 되지 않아? 아, 하긴. 수용소 후유증 때문에 아직 식이 조절해야 되겠구나. 그러면 요리사나 가정부 딸려주지 않아? 지난번에 크라스노야르스크 쪽 지부에 갔더니 거기 유배된 정치범 과학자한테는 가정부가 딸려 있던데. 너는 감시 요원이잖아. ”

 

“ 처음에 나도 국장한테 그렇게 건의했는데 예산도 없고 인력도 없으니까 나보고 다 하라는 거야... 나 진짜 별의별 거 다 해. 저녁밥 해먹이고 차도 우려주고 가끔 집 청소도 해주고 바퀴벌레도 잡아줘. 애가 벌레를 너무 무서워해서 손톱만한 바퀴벌레 나와도 호들갑 떨면서 울고불고 난리거든.

우리 동네 음식은 너무 기름져서 싫다고 하도 투정을 해서 고기는 맨날 닭가슴살 아니면 생선이고 그것도 기름 써서 구워야 맛있는데 하도 지방질 운운하고 찡찡대니까 쪄줘야 돼. 그리고 그 나이 먹도록 홍차 우리는 법도 모르는 거야! 맨날 남이 해줬다면서. 그래서 차도 우려 줘야 되고 또 달콤한 잼이나 과자는 안 먹으니 무가당 초콜릿 챙겨줘야 되고.

그뿐이냐. 걔 또 운전은 얼마나 서툰데. 몇 번이나 나무에 차 박았어. 운전 연습 좀 하라 해도 자기는 운전을 하면 팔 근육 미워진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출퇴근시켜준다니까. 우리 사무실은 신시가지라서 집에서도 가까운데 그 녀석 극장은 구시가지에 있으니까 아침에 강 건너서 그 녀석 내려주고 난 다시 신시가지로 돌아와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는 직장인이니까 5시에 끝나잖아. 물론 난 야근을 많이 하니까 더 늦게 끝나지만. 근데 극장은 공연 있으면 10시 넘어서 끝나고 그 녀석은 공연 끝나고도 남아서 일을 하니까 밤늦게 데리러 가야 한다고.

게다가 말도 얼마나 안 듣는데. 너도 서류 읽었나본데, 걔 수용소 후유증 때문에 과로해도 안 되고 끼니도 거르면 안 되거든. 고기 같은 거 많이 먹어야 되고. 근데 맨날 늦게까지 일하고 휴일에도 극장 나가. 귀찮고 바쁘다고 사과 한 알 우유 한 컵 이 따위라고. 아파서 병원에 데려다 놓으면 금세 도로 기어 나오고. 내 말은 듣지도 않아. 사고는 또 얼마나 잘 치는데. 툭하면 구르고 다치고 피나고. 폐렴도 두 번이나 걸렸으니까 따뜻하게 입으라 해도 영하 20도 날씨에도 무슨 패션이 어떻고 하면서 패딩을 안 입는 거야! 도대체 자기 몸을 아낄 줄을 모른다니까. 얼마나 골치 아픈데.

어휴, 이건 감시요원이 아니라 완전히 그 녀석 유모나 집사라고. 맨날 시골이라고 불평불만에 날 얼마나 들들 볶는지. 서무만으로도 벅찬데 그 녀석 감시 때문에 피곤하기도 하고 언제 어디서 그 녀석이 또 사고 칠까 봐 잠도 잘 안와. 아, 내 팔자야...

 

 

베르닌은 그간 쌓여 있었던 하소연을 쏟아놓은 후 한숨을 푹 쉬었다. 드미트리는 그의 폭발에 깜짝 놀란 듯했지만 중간 중간 고개를 끄덕였고 심지어 수첩을 꺼내더니 암호문 설명 때도 하지 않았던 필기를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서러움에 목이 멘 베르닌의 어깨를 토닥이며 플라스틱 컵에 우유를 따라주었다.

 

 

“ 좀 마셔. 그러다 체하겠다. 너 일이 진짜 많이 몰려 있었나 보다. 그 신작인가 뭔가 끝나면 너도 휴가라도 좀 내고 쉬어. ”

 

“ 고마워, 딤카. 너 참 좋은 녀석이구나. 근데 나는 휴가를 못 내. 국장이 싫어하거든, 서무가 휴가 내는 거. 서무는 한 기관의 기반이자 엄마 같은 거라서 함부로 휴가 내면 안 된대. ”

 

그런 게 어디 있냐. 기계도 이따금 기름칠도 해주고 정비를 해줘야 잘 돌아가는 건데 사람은 더 그렇지. 내가 그랬잖아, 효율성이 중요하다고. 미련하게 계속 움직이면서 소처럼 일한다고 조직이 발전하지는 않아. 너희 국장은 구세대적인 발상의 소유자라니까. 하여튼 너무 실망하지 마. 네 서무 업무에 들어가는 노력을 절반으로 줄이고 성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도출하면 되니까.

근데 야스민은 진짜 생각 외네. 레닌그라드에서도 그렇고 모스크바 있을 때도 엄청 톱스타였거든. 발레 모르는 사람들도 그 친구 이름은 다 알았어. 무대에서야 카리스마가 원체 대단했고, 평소에 방송이나 신문 인터뷰 나올 때도 굉장히 도도하고 시크한 타입이었거든. 인터뷰 할 때도 보니까 말도 잘하고 똑똑한 것 같더라고. 그때 파리랑 런던에 투어 왔을 때도 불어랑 영어로 직접 인터뷰한 적도 있어. 안무한 작품들도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편이고. 그래서 난 되게 교양 있고 조용하고 어른스럽고 차가운 스타일일 거라고 생각했어. ”

 

 

베르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딱 그 반대야!! 완전 여섯 살짜리 애기야!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나고 예쁜 놈이라고! 하루라도 예쁘다는 소리 안 들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아! 도도하고 시크하긴! 바퀴벌레 곱등이 쥐 보면 울고불고 매달리고... 뱀껍질 같은 거 맞닥뜨리면 움직이지도 못해. 업어줘야 된다고! 그리고 술도 한 방울도 못 마시는 게 툭하면 목마르다고 샴페인 홀랑 마시고 기절하고... 그럼 또 업어줘야 된단 말이야! 무서운 꿈 꾸면 애기처럼 울면서 찾아와서 재워달라고 하고. 으으... 도도하고 시크한 놈들 다 얼어 죽었네! ”

 

“ 아아, 진짜 충격이다... 나 나름대로 진짜 팬이었는데... 옛날에 키로프에서 팸플릿에 사인도 받은 적 있는데. ”

 

 

드미트리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베르닌은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 그래도 걔 나쁜 녀석은 아냐. 심성은 고와. 자기 몸은 안 챙겨도 데리고 있는 무용수들은 또 끔찍하게 챙겨. 바쁜데도 발레학교에 꼬박꼬박 가서 애들한테 춤도 가르쳐주고. 난 예술은 잘 모르지만 하여튼 천재는 천재인 것 같아. 극장도 예전엔 파리 날렸다는데 요즘은 공연마다 매진이야. 그러니까 정치범이라고 너무 선입견 갖지 마. ”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베르닌에게 음식을 더 권했다. 오렌지로 입가심을 한 후 드미트리는 남은 샌드위치에서 게살과 햄을 발라내고 연어조각도 모아서 물그릇 옆에 깔아놓은 신문지에 예쁘게 올려놓았다.

 

 

“ 고양이가 먹으러 오겠지? ”

 

“ 응, 오후에 올 거야. 완전 특식이네. 좋아하겠다. 나랑 알렉산드라는 소시지 쪼가리나 사료밖에 안 줬는데. ”

 

“ 알렉산드라가 누구야? ”

 

“ 아, 등록부서에 있는 선배. 굉장히 친절하고 착해. 나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많이 도와줬어. 아까 우리 보고 서류철 떨어뜨린 선배 있잖아. ”

 

“ 아, 흑백 스트라이프 블라우스 입고 갈색 곱슬머리에 눈 큰 아가씨. 너랑 사귀는 사이야? ”

 

“ 어, 아니야... ”

 

“ 그러면 내가 데이트 신청해도 되나? 귀엽던데. ”

 

“ 뭐? 인사밖에 안 해놓고... ”

 

“ 뭐 어때. 원래 그렇게 인사 한번 튼 다음에 데이트 시작하는 거지. 나 사실 여자들한테 인기 되게 많아. 데이트 신청 거절당한 적 한 번도 없어. 데이트 첫날 진도도 되게 잘 나가. ”

 

“ 아, 아니... 근데 알렉산드라는 남자친구가 있어... 사귄지 며칠 안 됐거든. 그러니까 저... 알렉산드라는 그냥 놔둬... ”

 

“ 흠, 아쉽네. 그러면 아까 우리 보고 쌍둥이 아니냐고 소리 지른 아가씨는? 금발 머리 있잖아, 걔도 되게 귀엽던데.

 

“ 뭐? 리자? 아, 아니... 리자는 많이 어려. 스무 살 막 넘었단 말이야. 철도 없고... ”

 

“ 스무 살이 뭐가 어리냐. 결혼도 많이 하는데. 애교도 많아 보이고 맘에 들더라. 알렉산드라가 안 되면 리자한테 오늘 데이트하자고 해볼까? 난 발랄한 애들이 또 좋더라고. ”

 

 

베르닌은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 저기... 여자들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물론 네 자유지만... 너는 일주일만 있다가 갈 거잖아. 예를 들어 리자가 너랑 데이트하고 호감이라도 가지면... 그랬다가 네가 일주일 만에 가버리면 리자는 뭐가 되냐. 여기는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가 아니야. 가브릴로프는 좀 보수적인 동네란 말이야. 여자한테 그런 식으로 굴면 나쁜 남자 취급받아. ”

 

“ 어휴, 너 되게 보수적이구나. 아니면 혹시 너 리자하고 좀 그런 관계야? ”

 

아니야! 우리는 그냥 동료 직원이야. 근데 나 리자랑 친하단 말이야. ”

 

“ 으응. ”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더니 눈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 더 없어? ”

 

“ 뭐가? ”

 

“ 너랑 특별히 친한 여직원들. 알렉산드라하고 리자 말고. ”

 

“ 어, 글쎄... 어, 없는데. ”

 

“ 응, 알았어. 그러면 그 둘 빼고 다른 여자들하고는 데이트해도 되지? ”

 

“ 아니, 그게... ”

 

“ 사실 아까 회계부서의 카체리나라는 아가씨가 나한테 관심을 보이더라고. 그래서 오늘 근무 끝나면 잠깐 보자고 했어. 근데 야스민 감시 때문에 늦게 끝나겠지? 오늘 공연 있니? ”

 

“ 있긴 한데 오늘은 발레가 아니고 오페라니까 너는 그냥 5시나 6시에 들어가도 될 거 같아. ”

 

“ 그럼 너는? ”

 

“ 난 걔가 극장에서 나올 때까지 옆에 있어야 돼. 그 녀석은 예술감독이랍시고 오페라도 끝까지 남아서 볼 때가 많아. ”

 

“ 음, 그러면 나도 같이 있을게. 극장에는 언제 가? ”

 

“ 1시 반쯤 가려고. 아까 하던 일 마무리만 좀 해 놓고. ”

 

“ 그래. 그럼 카체리나하고는 지금 차나 한 잔 마셔야겠다. 구내식당에 가면 있겠지? 1시 반에 주차장으로 갈게. ”

 

“ 으, 으응... ”

 

 

드미트리가 구내식당 쪽으로 내려간 후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분명 괜찮은 녀석 같은데 왜 이렇게 뒷골이 당겨오고 피곤한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피했지만 먹이도 주고 잘해주는 베르닌과 알렉산드라에게는 그래도 가까이 다가오는 편이었다. 기분 좋을 때는 살짝 쓸어줘도 가만히 있었다.

 

 

“ 미셴카, 이리 와. 오늘은 맛있는 거 있어. 너 좋아하는 생선도 있네. 얼른 먹어. ”

 

 

고양이가 다가오더니 발로 신문지를 툭툭 쳤다. 수염을 쫑긋거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홱 돌리고 옆으로 물러났다.

 

 

어, 왜 그러니? 맨날 게눈 감추듯 먹더니... 이거 맛있는 거야. 어서 먹어. ”

 

 

혹시 자신이 보고 있어서 그런가 싶어서 베르닌은 잠깐 자리를 피했다. 보통 그런 경우에는 5분쯤 있다 돌아와 보면 미셴카가 음식을 먹은 후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잠시 후 돌아왔더니 햄과 게살, 연어가 신문지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고 검정고양이 미셴카는 돌멩이 옆에 동그마니 앉아서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베르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네 녀석이 잘못했다!’ 하는 표정으로 보여서 베르닌은 이유 없는 가책이 느껴졌다. ‘어, 내가 뭘 잘못했지?’ 하며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되었다.

 

 

“ 미셴카, 왜 그러니? 배가 안 고프니? 다른 데서 맛있는 거 먹고 왔어? ”

 

야아옹!

 

 

뱃가죽도 홀쭉하고 분명히 배가 많이 고파 보이는데 왜 저러나 싶었다. 혹시나 싶어서 베르닌은 주머니를 뒤져서 소시지를 꺼냈다. 껍데기를 벗긴 후 조심스럽게 신문지 옆에 내려놓았다. 그랬더니 고양이가 갑자기 사뿐사뿐 다가왔다. 그리고는 소시지에서 조금 떨어진 쪽에 자리를 잡더니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베르닌이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척 하자 슬금슬금 소시지를 입에 물었다. 곁눈으로 보니 고양이는 배추밭으로 들어가자마자 순식간에 소시지를 먹어치우는 게 아닌가!

 

 

“ 엥, 저 녀석 뭐야. 배고팠던 거 맞잖아. 어휴... 불쌍한 녀석, 맨날 쓰레기나 뒤지고 싸구려 소시지나 받아먹어서 진짜 맛있는 걸 못 알아보는구나... 고양이가 어떻게 생선이랑 게살을 안 먹냐... ”

 

 

베르닌은 자리를 피해주면 미셴카가 와서 남은 연어와 게살을 먹지 않을까 싶어서 사무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문서 대장 정리를 끝내고 다시 뒤뜰로 와보니 신문지 위의 음식은 그대로 남아 있고 물그릇은 비어 있었다. 고양이라는 짐승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베르닌은 주차장으로 갔다.

 

 

 

 

*    *    *

 

 

 

 

 

극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베르닌은 드미트리에게 왕재수 감시 업무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 도청장치는 극장 감독실하고 분장실, 백스테이지에 하나씩 있어. 감독실 전화에도 붙어 있고. 물론 자택에도 있지. 녹음테이프는 내가 듣고 주요 내용을 요약 정리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국장에게 대면 보고를 해. 그런데 요즘은 오후부터는 내가 계속 옆에 붙어 있으니까 오전 녹음본만 들어도 돼. ”

 

“ 뭐라고? 도청 녹음테이프도 네가 듣고 기록하고 심지어 보고까지 한다고? 너 대체 몸이 몇 개냐. 그런 건 원래 엔지니어들이 하는 거잖아. ”

 

“ 너 자꾸 본부랑 해외 지국 생각만 하는데, 여기는 가브릴로프라고. 예산과 인력이 모자란다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도 녹음테이프 매일매일 정리하지는 못해. 몰아서 할 때도 좀 있어. 그래도 극장 내부에 정보원이 있으니까 중요한 내용을 놓치는 적은 없어. 정보원의 보고내용은 내가 받아서 정리하거든. ”

 

“ 그럼 나도 그 지루한 녹음테이프 듣고 보고서 써야 하는 거야? 으윽, 난 해외에 근무할 때도 도청실에서 당직 서는 게 제일 싫었는데... 너무 지겹잖아. 기계적이고... 창의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고. ”

 

“ 어... 넌 안 해도 돼. 사실 자격 요건이 안 돼. 도청이랑 녹음테이프 분석은 인가를 받은 요원만 할 수 있는데 너는 연수요원이라서 승인 떨어지는데 일주일 이상 걸릴 거야. 그냥 내가 할 테니까 이런 업무가 있다는 것만 파악하면 돼. ”

 

“ 다행이다. ”

 

 

베르닌 역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드미트리는 좋은 친구인 것 같았지만 어쨌든 표창을 받은 우수 직원인데다 왕재수를 요주의 정치범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도청 내용을 들었다가 왕재수의 단골 레퍼토리인 공산주의니 레닌이니 스탈린이니 운운하는 얘기라도 튀어나오면 낭패였다.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왕재수와 코즐로프가 딱 붙어서 사랑을 불태우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아무래도 왕재수에게 미리 경고를 해놔야 할 것 같았다.

 

 

드미트리는 감시 업무에 대해 궁금한 듯 이것저것 물었다. 베르닌은 대충 대답해주었다. 서무 업무에 대해서야 자세하게 설명해주었지만 유능한 드미트리가 너무 열을 내어 왕재수에 대한 감시를 시작하면 좋을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드미트리는 왕재수의 신작에 대해서도 꼬치꼬치 물었다.

 

 

“ 저, 나는 예술은 별로 아는 게 없어서... 고전 발레는 아니고... 뭔가 새로운 움직임을 추구하는 거래. 내용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이야기처럼 흘러가는 건 아닌가봐. 남녀가 만나서 좋아하고 헤어지고 뭐 그런 거랬어. 여기 무용수들이 너무 틀에 박혀 있으니까 춤도 재미있게 출 수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만들었대. 나도 그 정도밖에 모르겠어. 근데 연습하는 거 보니까 막 쿵쾅거리고 뛰고 들고 구르고 재미있어 보였어. 코믹하고. 그래서 무용수들이 연습하면서 자기들끼리 많이 웃더라고. 춤추다가 박수도 치고 고함도 지르고 떠들라고 시키기도 해. 근데 그게 다 작품의 요소래. 무슨 말인지 이해는 잘 안 가지만. ”

 

“ 어, 의외네. ”

 

“ 뭐가? ”

 

“ 야스민 말이야. 나 팬이었다고 했잖아. 그 사람이 안무한 건 다 봤거든. 작품 스타일 원래 안 그래. 움직임은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거 많이 쓰지만 주제나 분위기는 딱 러시아 정통 문학 느낌이거든. 엄청 드라마틱하고 무겁고 철학적이고. 결말도 주로 비극이거나 풍자야. 무대 위에서 막 장난치고 그러는 타입 아니거든. 놀랍네. 그 신작 되게 궁금하다. ”

 

“ 엥... 러시아 정통 문학... 드라마틱, 무겁고 철학적... 비극... 진짜 걔랑 안 어울린다... 너 혹시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는 거 아니야? ”

 

“ 착각이라니. 어떻게 야스민이랑 다른 사람을 착각하냐. 그렇게 유명한 스타를. ”

 

 

베르닌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아는 왕재수와 드미트리가 아는 야스민은 다른 인물 같았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으므로 똑똑한 드미트리에게 더 이상 무식쟁이 취급당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극장에 도착한 베르닌은 언제나처럼 감독실 쪽으로 가서 비서인 류드밀라를 찾았다.

 

 

“ 안녕하세요, 류다. ”

 

“ 어서 와요, 다냐. 아앗!

 

 

뒤따라온 드미트리를 보고 류드밀라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두 눈이 둥그레진 채 드미트리와 베르닌을 이리 보고 저리 보았다. 그리고는 회사 사람들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 쌍둥이예요? 아니면 형제? ”

 

“ 저, 아니에요. 그냥 좀 닮은 거예요. 이쪽은 드미트리예요. 모스크바에서 왔는데 업무 연수 때문에 같이 온 거예요. ”

 

“ 어머나, 정말 너무 닮았네! 세상에, 단추 눈이 두 명이야! 근데 이쪽은 되게 세련됐네. 모스크바에서 왔다고요? ”

 

“ 네. 저, 미하일은 연습실에 있나요? ”

 

“ 아뇨, 지금 검열국장이랑 접견실에서 얘기 중이에요. ”

 

“ 네? 검열국에서는 벌써 몇 번이나 왔다 갔잖아요. 왜 국장까지 직접 온 건데요? ”

 

“ 왜 그러겠어요! 다음 주가 공연이니까 재 뿌리려고 그런 거죠! 못된 인간들 같으니! ”

 

“ 또 싸우면 어떡하지... 그냥 검열요원도 아니고 국장이라면서요, 싸우면 안 될 텐데... ”

 

“ 그러게요. 당신이 좀 들어가 봐요. 분위기 봐서 감독님이 흥분하면 좀 말려요. ”

 

 

 

그래서 베르닌은 접견실로 갔다. 살며시 노크를 하고 들어가려는데 드미트리가 따라왔다.

 

 

“ 어, 저기... 너도 들어가려고? ”

 

“ 나 연수 보고서 써야 하잖아. 이거 감시 업무잖아. ”

 

“ 그, 그래... 근데 너랑 나랑 닮아서 자꾸 사람들이 놀라니까 내 뒤에 있어야 돼. 알았지? ”

 

“ 응. ”

 

 

접견실 문은 약간 열려 있었다.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는 걸 보니 역시나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하나마나한 노크를 한 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검열국장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떠들고 있었고 그 옆에는 베르닌도 낯이 익은 검열요원 하나가 수첩에 계속 뭔가를 적고 있었다. 왕재수는 의자도 아니고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찌푸린 미간과 꽉 다문 입술을 보니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누가 봐도 폭발 직전의 표정이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귀를 기울여보니 역시 검열국장은 신작의 이념성을 문제 삼고 있었다.

 

 

“ 그러니까 그게 문제란 말이오! 멀쩡한 음악을 왜 조각조각내고 중간에 휴지부를 넣는단 말이냐 이거야! 그건 쇼스타코비치잖소! 그것도 레닌그라드 심포니! 그 애국적인 음악을 잘라내고 마음대로 편집해서 쓰다니! 이것은 조국에 대한 모독이고 당에 대한 모욕이야! 크레믈린 의원들이 보러 오는 무대에서 그런 불충한 시도를 할 수는 없... ”

 

 

왕재수가 국장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심지어 반말로 쏘아붙였다.

 

 

“ 첫째. 의원들인지 뭔지 그 사람들은 당신 보러 오는 거 아니고 내 작품 보러 오는 거니까 신경 끄시지. 둘째. 쇼스타코비치에 대해서는 당신보다 내가 백배는 더 잘 알고. 셋째. 마음대로 편집한 게 아니라 작품의 흐름에 맞게 편집했어. 넷째. 이번 신작에는 총 6가지 음악을 쓰는데 그 중 쇼스타코비치는 5분밖에 안 들어가. 메인은 쇼팽이고. 당신 쇼팽이 누군지나 알아? 다섯째. 제일 바보 같은 짓이 뭔지 말해줄까? 내가 쓴 쇼스타코비치 심포니는 1번이야. 레닌그라드 심포니는 7번이고. 7번은 벌써 볼쇼이에 있을 때 다른 작품에 썼어! 무용이고 음악이고 담 쌓은 얼간이 주제에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

 

 

검열국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뭐가 어쩌고 어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내가 누군지 알아? 난 국장이야! 검열국 기관장이라고! ”

 

누군지 왜 몰라! 예술 탄압자! 일자무식! 얼간이 천치!

 

“ 이 자식이 감히 누구에게 얼간이라는 거야! ”

 

“ 아, 얼간이가 아니라 이거야? 그럼 대봐, 레닌그라드 심포니가 몇 번인지. 그거라도 맞추면 얼간이 천치에서 천치는 빼 줄게. 그리고 내가 쓴 여섯 가지 음악이 누구누구의 작품인지 대면 얼간이도 취소해줄게. 힌트라도 줄까? 다 유명한 음악가들이야. 쇼스타코비치 빼고는 모두 20세기 이전 사람들이고. 대봐. 레코드 다 압수해갔잖아. 저 얼간이 자식이 리허설 내내 들락거리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도 다 들었고. ”

 

 

검열국장이 멈칫했다. 1번과 7번 구분이 안 되는 것은 베르닌과 마찬가지인 데다 6명의 작곡가가 누구인지는 더욱 모르는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국장이 ‘쇼팽...’ 하고 중얼거리다가 흠칫하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 반동분자 녀석! 스페호프 국장 말이 다 맞았어! 불여우 같으니! 그런 반동적인 작태를 우리 극장 무대에 올릴 수는 없어!

 

네깟 게 뭔데! 공연은 정부와 시 의회에서 승인한 거야! 크레믈린 지역문화예산특위에서 편성해준 예산으로 하는 거고! 너 같은 얼간이들이 죽고 못 살면서 설설 기는 높으신 작자들이 해달라고 한 거라고! ”

 

감히 그 분들에게 높으신 ‘작자들’이란 표현을 쓰다니! 넌 이제 끝장났어! 그대로 다 보고할 거야! 그 잘난 공연이 아니라 네 모가지 걱정이나 해! ”

 

맘대로 해! 이제 좀 나가! 너 때문에 애들 연습을 못 시키고 있잖아! 바보 천치 개소리를 들었더니 귀가 다 썩는 것 같네. 어휴, 귀 좀 씻어야지 안 되겠어. 류다! 비누 좀 가져와요!

 

 

 

베르닌은 창가로 달려갔다. 왕재수의 입을 틀어막았다.

 

 

“ 야, 너 왜 그래! 국장님, 진정하세요. 이 녀석이 요즘 공연 준비 때문에 너무 과로를 해서 제정신이 아니에요. 음악 건은 다시 협의하시면... ”

 

“ 협의 같은 소리! 가만 두지 않겠어, 애송이 불여우 자식 같으니! ”

 

시끄러워, 이 천치야! 빨랑 나가!

 

 

왕재수가 베르닌의 손을 뿌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검열국장이 펄펄 뛰고 있는데 드미트리가 곁으로 다가가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노여움을 좀 가라앉히시지요. 검열국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모스크바 검열본부에서 이런 경우를 대비해 2주 전에 작성한 지침이 있습니다만. 괜찮으시면 제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며칠 전 모스크바에서 지역문화예산특위 조사관을 만난 적이 있어서요. ”

 

 

‘뭐 이런 놈이 있나’ 하고 더욱 화를 내려던 검열국장은 ‘모스크바’, ‘본부’, ‘지역문화예산특위’ 등의 단어를 듣자 좀 누그러지더니 드미트리와 함께 복도로 나갔다. 수행하던 검열요원도 따라 나갔다. 그 틈을 타서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물을 한 잔 건네주었다.

 

 

“ 야, 물 먹고 진정 좀 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열국장인데 그렇게 이성을 잃고 대들면 어떡하니. 가뜩이나 넌 요주의 인물인데. 그러다 또 감옥 갈 수도 있단 말이야. ”

 

보내라고 해!

 

“ 너 감옥 무서웠다면서. 때리고 주사 놓고 못살게 굴었다며. 그리고 너 감옥 가면 공연도 못 올리게 되잖아. 너만 바라보고 있는 무용수 애들 다 어쩌라고. 게다가 바이올린 아저씨는... ”

 

“ 저 바보 천치가 진짜 개소리만 하잖아... ”

 

“ 그게 하루 이틀이니. 여기 정치인들이랑 공공기관 사람들치고 예술 잘 알고 교양 있는 사람들 거의 없어. 심지어 검열국인데 뭘 바라니. 너 볼쇼이랑 키로프에서도 안무했었다며. 해외에서도 공연하고. 그때도 검열 다 받았을 거 아니야. ”

 

그래, 받았어! 그때도 하도 거지같은 짓을 많이 당해서 다 때려치우려고 했던 거란 말이야! 근데 저놈은 여태 만난 검열꾼 중에서도 최악으로 멍청하니까 더 열 받잖아!

 

 

왕재수는 생각할수록 분한 듯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평소에는 웬만하면 하지도 않던 욕지거리를 줄줄이 쏟아냈다. 그것도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놀라운 욕설들이라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 으아, 그만 좀 해. 무용수들이 와서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여자애들 기절초풍하겠다! ”

 

앗, 맞다... 리허설...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어. 애들 다 기다리고 있을 텐데! ”

 

 

왕재수가 퍼뜩 놀라더니 창가에서 뛰어내렸다. 당장 복도로 달려 나가려는 왕재수의 어깨를 잡아 세우며 베르닌이 엄격하게 물었다.

 

 

“ 너 점심 먹었어, 안 먹었어? ”

 

먹었어! 먹었어!

 

“ 두 번이나 그렇게 빨리 대답하는 걸 보니 수상해! 너 점심 안 먹었지? ”

 

“ 먹었어! ”

 

“ 언제, 어디서, 뭐 먹었는데! ”

 

“ 점심시간에, 차이카에서! 어, 저... 보르쉬랑 펠메니... ”

 

“ 뻥치지 마! 차이카에서 펠메니 안 팔잖아! 그리고 너 아르카지가 내주는 보르쉬 죽어도 안 먹잖아! ”

 

에이씨... 그래, 안 먹었다! 무대 의상이 도착했는데 색깔을 반대로 해서 왔잖아! 상의는 빨강, 하의는 하양이어야 되는데 거꾸로 오고... 그거 해결하고 먹으려고 했는데 그러고 나니까 저 얼간이들이 들이닥쳤단 말이야. ”

 

“ 그럼 지금 나랑 차이카 가. 가서 뭐든 먹어야 돼! ”

 

“ 안 돼, 애들 리허설 시켜야 돼. 벌써 한 시간 동안 티무르 보리소비치 혼자서 봐주고 있단 말이야. ”

 

“ 너 어차피 오늘도 늦게까지 애들 갈구면서 연습시킬 거잖아! 그러려면 뭐든 먹어야 돼! 가뜩이나 검열국장한테 소리 지르느라 그나마 남아 있던 칼로리도 다 소모됐겠다. ”

 

 

왕재수는 항의하려고 했지만 베르닌의 엄한 눈초리를 보고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차이카 갔다 올게. ”

 

“ 나랑 같이 가. ”

 

“ 너 지금 나 의심하냐! 간다 하고 안 갈까봐! ”

 

“ 아니야, 의심해서 그런 거! 너 혼자 보내놓으면 보나마나 요구르트 한 개 사과 한 개 사먹고 끝낼 게 뻔할 뻔자니까 그래! ”

 

“ 차이카에서 사과 안 팔아! 요구르트도 지금 가면 다 떨어지고 없단 말이야. 기껏해야 불어터진 마카로니랑 보르쉬 국물만 있겠지. 어휴... ”

 

“ 하여튼 같이 가! ”

 

 

그때 접견실로 드미트리가 들어오면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검열국장은 대충 해결했어. 예술 쪽에 대해서는 정말 하나도 모르더라고. 화가 났던 것도 충분히 이해해요, 미하일. 아참,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안녕하세요, 드미트리 베르닌입니다. ”

 

 

베르닌은 예의 휘둥그레진 눈과 ‘아앗!’과 ‘쌍둥이야?’를 기다렸다. 하지만 왕재수는 눈썹을 약간 치켜 올리며 드미트리가 내민 손을 무시한 채 딱딱한 어조로 물었을 뿐이었다.

 

 

“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

 

“ 어, 저... 모스크바에서 우리 사무실로 연수받으러 온 친구야. 저, 내가 담당하게 돼서 같이 왔어. 네 일에 방해는 안 될 테니까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

 

 

베르닌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드미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힘차게 손을 내밀었지만 왕재수는 금세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그러니까 KGB 나부랭이가 하나 더 온 거네! 꺼져!

 

 

베르닌은 당황했다. 왕재수의 성격을 잘 아니 놀라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예의를 차리고 있었던 드미트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드미트리가 환하게 웃으며 싹싹하게 말했다.

 

 

“ 제가 KGB 본부에서 온 건 맞지만 당신의 감시요원 자격으로 온 건 아니에요. 전 레닌그라드 출신이고 키로프 시절부터 당신 팬이었거든요. 당신이 나온 작품은 다 봤어요. 안무작들은 뉴욕에서 올렸던 것 빼고는 모두 초연으로 봤고요. 제일 첫 작품을 보러 갔던 날이 생각나네요. 루슬란과 류드밀라. 거기서 당신이 춘 로그다이는 정말 잊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청년 극장 무대에서 올렸던 브이소츠키와 마야코프스키 콜라주였어요. 그런 식으로 마야코프스키 시를 해체해서 춤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던 왕재수는 드미트리의 말에 잠깐 멈칫했다. 좀 놀란 것 같았다.

 

 

그건 연극대학 페스티벌 때 올린 소품이라서 아는 사람 별로 없는 건데... ”

 

“ 아까도 얘기했듯이, 팬이었답니다. 그래서 이번 신작도 굉장히 궁금해요. 검열국장 얘기는 너무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크레믈린 지역문화예산특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더군요. 더불어 게오르기 벨스키 의원의 특별 지시에 대해서도 상기시켜주었더니 납득하고 돌아갔습니다. 아마 이제 작품에 대해 트집을 잡지는 않을 겁니다. 음악이든 뭐든 전부요. ”

 

 

베르닌은 매우 감탄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손을 마주잡고 기뻐했다.

 

 

“ 우와, 엘리트 요원이란 건 알았지만 그래도 너 진짜 대단하구나, 드미트리. 그렇지 않아도 이번 신작 때문에 검열국에서 계속 얘 괴롭히고 있었는데. 해결이 돼서 다행이다. 이제 한시름 놨네, 그치? ”

 

 

왕재수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베르닌을 째려보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무조건 잘못했다!’란 표정을 짓고 있던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생각나는 눈초리였다. 어쩐지 억울해진 베르닌이 ‘너 왜 그러냐!’ 하고 물어보려는데 왕재수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 도와준 건 좋은데, 다시는 내 일에 끼어들지 마. 난 바빠서 이만. ”

 

 

드미트리는 왕재수의 무례한 태도에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굉장히 상냥하게 대꾸했다.

 

 

“ 주제넘게 나섰다면 미안합니다. 앞으로는 조심하죠. 실례가 안 된다면 리허설을 구경하고 싶습니다만. ”

 

외부인은 안 돼!

 

 

다시 왕재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드미트리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왕재수를 데리고 구석으로 갔다. 그리고는 화난 왕재수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 미안해, 내가 먼저 얘기해줬어야 하는데. 너 이런 거 싫어하는 거 알긴 아는데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본부에서 행정 연수 온 친구야. 레닌그라드 법대 나왔고 해외에서도 근무했대. 진짜 엘리트야. 네 팬인 것도 맞고 아는 것도 많더라. 아침부터 얘기해보니까 나쁜 애는 아니야. 착해. 내 서무 업무도 많이 도와줬고. 일주일 동안 내가 데리고 다녀야 해. 국장 명령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 저... 극장에도 와 있어야 하고... ”

 

“ 그러니까 내 감시 요원이 하나 더 생긴 게 맞는 거잖아. ”

 

 

왕재수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표정이 더욱 어두컴컴해졌기 때문에 베르닌은 가슴이 철렁했다.

 

 

“ 아, 으응... 저... 너무 화내지 마... 내가 잘 커버할게. 너 방해 안 하게 할게. 그냥 쟤가 네 팬이라서... 알고 보면 괜찮은 애야. 요리도 잘 하고 일도 잘해... 발따예프가 나한테 떠넘긴 일도 다 처리해줬어. 있지... 가뜩이나 감시받는 거 싫을 텐데 연수요원까지 와서 속상하겠지만... ”

 

“ 내가 저 재수 없는 녀석 내쫓으면 너 국장한테 혼나? ”

 

“ 어... 아마도... 국장 명령으로 데려온 거니까... ”

 

“ 너 잘려? 벌목공도 못하게 되는 거야? ”

 

“ 아, 아니야... 설마 그 정도까지야... 근데.. 저... 벌목공... 아... ”

 

“ 알았어, 그럼. 맘대로 하라고 해. ”

 

“ 어,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연습실에 같이 가도 되니? ”

 

“ 맘대로 하라고. ”

 

 

왕재수는 다시 ‘네가 잘못했다’ 표정을 지었지만 아까처럼 버럭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휙 돌아서더니 베르닌과 드미트리의 곁을 지나쳐 복도로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불편한 표정으로 서 있는 드미트리에게 갔다.

 

 

“ 대충 상황 얘기해서 납득했으니까 아까처럼 화내지는 않을 거야. 연습실 같이 들어가서 봐도 돼. 너무 기분 상해하지 마. 쟤 원래 그래. 자기 일 방해받는 거 굉장히 싫어해. 감시받는 것도 그렇고. ”

 

“ 나 기분 안 상했어. 미하일 입장에선 당연하잖아. 감시꾼이 하나 더 생긴 건데. 검열 때문에 그 고생을 하고 결국 수용소까지 갔으니 기분 나쁘겠지 뭐. 나 저 친구가 파리에서 체포됐을 때 그쪽 대사관에 있었거든. 거기 진짜 난리도 아니었어. 우리 대사관 앞에서 피켓 시위에 무슨 퍼포먼스에... 두 달 동안 진짜 매일매일 모여들었어. ”

 

“ 무슨 시위? 우리 대사관 앞에서? 프랑스 사람들이? ”

 

“ 아, 너 몰랐구나. 저 친구 파리에서 망명할 뻔 했잖아. 그거 실패해서 잡힌 거고. 인권 운동가들에 예술가들에 일반 시민들에 하여튼 엄청 많이 모였어. 수용소 수감됐다는 정보까지 새어나가서 더 난리였거든. 풀려날 때까지 계속 시위했어. 파리에서만 그런 거 아니야. 런던이랑 뉴욕에서도 그랬고. ”

 

“ 아... 그랬구나. 근데 쟨 망명하려던 거 아니라던데. 친구들 만나 놀려고 기어나갔다가 잡혔다고 억울해하던데... ”

 

“ 그게 그냥 친구들이 아니니까 그렇지. 국제적으로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에 자유주의자들에... 그 사람들이 저 친구를 몇 년 전부터 자기들 쪽으로 빼오고 싶어서 얼마나 애를 태웠는데. 뭐 미하일 입장에선 억울했을 거야. 망명하려고 했으면 벌써 몇 번은 그냥 빠져나가고도 남았거든. 이건 그냥 친구끼리니까 하는 말이니까 너 한 귀로 듣고 흘려라. 나 솔직히 그때 능력만 됐으면 쟤 빼돌려주고 싶었어. ”

 

뭐? 넌 엘리트 요원이잖아... 표창도 받았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단 말야? ”

 

“ 잡혀가면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아니까 그렇지. 너무 안타깝더라고. 팬이었다고 했잖아. 예술은 예술이고 정치는 정치지. 하여튼 죽거나 다시는 춤 못 추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풀려나서 다행이야. 여기 와 있는 걸 보니까 재능이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후원자들이 남아 있으니까 좀 버티면 언젠가는 복권되겠지. 근데 쟤 성질은 좀 죽여야겠더라... 아까처럼 검열국장에게 대들고 화내면 이로울 거 하나도 없는데... 전에는 곁에서 본 적이 없으니까 이런 스타일인줄은 몰랐어. ”

 

“ 아, 으응... 극장이랑 춤에 대해 간섭하는 거 제일 싫어해... 일단 연습실 가자. 너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보기만 해야 돼. 알았지? ”

 

“ 응. ”

 

 

 

베르닌은 드미트리와 함께 연습실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왕재수는 차이카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겠다던 약속은 헌신짝처럼 걷어찬 채 연습실에서 무용수들을 마구 굴리고 있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고 드미트리에게 귓속말을 했다.

 

 

“ 1층에 가면 차이카라고 카페 하나 있거든. 거기 가서 간단하게 먹을 만한 것 좀 사올래? 저 녀석 너무 바빠서 점심도 걸렀거든. 있다가 쉬는 시간에 좀 먹여야겠어. ”

 

“ 아, 아까 너희가 얘기하는 거 들었어. 내가 혹시나 해서 아까 도시락 바구니에서 초코바하고 닭가슴살 스틱 따로 빼놨거든. 무용수들은 연습하면 먹을 틈이 없으니까 손쉽게 당분과 단백질 보충할 수 있는 간식이 필요하대. 이 가방 안에 넣어놨으니까 좀 있다 주면 될 거야. ”

 

 

베르닌은 정말로 감탄했다.

 

 

“ 와, 너 진짜 대단하다. 근데 미하일은 초코바 안 먹어. 닭가슴살 스틱만 줘야겠다. ”

 

“ 다크 초콜릿 70%니까 아마 먹을 거야. 아까 화 많이 냈으니까 조금 달콤한 거 줘도 모르고 먹을 걸. ”

 

 

쉬는 시간에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초코바와 닭가슴살 스틱을 건네주었다. 왕재수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답답해진 베르닌이 꾸짖었다.

 

 

“ 너 왜 그래. 이거 몸에 좋은 거란 말이야. 초코바도 단 거 아니야. 아까 차이카도 안 갔잖아. ”

 

“ 안 먹어, 감시꾼이 주는 건. ”

 

“ 엥? 너 어떻게 알았어, 이거 드미트리가 챙겨줬는데. ”

 

“ 내가 바보냐! ”

 

 

베르닌은 논쟁을 포기했다. 할 수 없이 차이카에 다녀왔다. 역시 진열대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거라곤 싸구려 초콜릿으로 코팅된 딱딱한 비스킷뿐이었다. 비스킷과 우유를 사서 올라갔다.

 

 

“ 야, 이거라도 먹어. 초콜릿 싫으면 벗겨내고 먹든지. ”

 

 

왕재수는 말없이 비스킷을 먹었다. 설탕 맛만 나는 싸구려 초콜릿을 벗겨낼 생각도 하지 않고 부스러기를 흘리면서 전부 먹었다. 우유도 다 마셨다.

 

 

“ 너 엄청 배고팠구나. 그 비스킷 되게 달던데... 그냥 이 초코바랑 닭가슴살 스틱 먹지... 네 입맛엔 이게 훨씬 맞았을 텐데. ”

 

“ 우리 극장 카페에서 파는 거니까 매상 올려주려고 그런 거야! ”

 

“ 내 주머니 털어서 매상 올리냐! ”

 

“ 그래! KGB 주머니 좀 털면 안 되냐!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 힘든 놈이었다.

 

 

 

 

*   *   *

 

 

 

 

왕재수는 오페라 공연 쪽은 부감독에게 맡겨둔 채 9시까지 남아 있었다. 무용수들을 지도하는 건 8시쯤 끝냈지만 의욕에 찬 주역과 조역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남아서 연습을 계속했다. 왕재수는 그들에게 연습하는 건 좋은데 9시에는 들어가서 자라고 했다.

 

 

“ 우리 그냥 새벽까지 연습하면 안 되나요? 이제 감독님 얘기가 뭔지 알 것 같아요. 박자를 맞추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음악을 타면서 놀라는 거요. 그 느낌을 잊기 전에 계속 연습해보고 싶어요. ”

 

“ 한 번 놀 줄 알게 되면 계속 놀 수 있어. 이제 며칠 안 남았으니까 다들 컨디션 관리해야 돼. 안 그러면 당일에 몸살 나서 못 올라가. 밥 잘 챙겨먹고 잠도 잘 자야 돼. 그리고 오늘부터는 다들 술 마시지 마. 맥주 한 잔, 샴페인 한 모금도 안 돼. 연습 때 아무리 잘해도 무대 위에서 컨디션 별로면 다 소용없어. 나 아홉시에 다시 와서 문 잠글 거야. 그러니까 그 전에 들어가라. ”

 

 

왕재수는 연습실에서 나오더니 의상실과 소품실을 오가며 이것저것 확인을 하고 막판에는 결국 오페라 공연을 체크하러 백스테이지에도 들렀다. 드미트리는 베르닌과 함께 왕재수의 뒤를 따라다녔다. 이따금 수첩에 뭔가를 적기도 하고 왕재수에게 공연이나 준비 과정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왕재수는 드미트리의 질문을 모조리 무시했다. 너무 쌀쌀맞게 굴어서 베르닌이 다 민망할 정도였다.

 

 

마침내 9시가 되었다. 왕재수는 연습실로 갔고 아직 남아 있던 가릭과 데니스를 호통을 치며 내쫓았다. 복도에서 타마라를 발견하고는 여자 무용수에 대한 평소의 상냥함도 잊고 야단을 치려는데 타마라가 잽싸게 선수를 쳤다.

 

 

“ 전 아까 나왔어요. 실은 집에 갔다 온 거예요. ”

 

“ 집에 갔으면 쉬어야지 왜 다시 나와! ”

 

“ 오늘 식사도 제대로 안 하셨잖아요. 이거 가져가서 좀 드세요. 오늘 데니스 어머니가 오셨거든요. 맛있는 거 많이 해놓으셨는데 감독님 생각나서 조금 가져왔어요. 생선수프 좋아하시잖아요. ”

 

 

타마라가 둥그런 보온통과 조그만 꾸러미를 내밀었다.

 

 

“ 연어랑 농어로 끓인 우하예요, 맛있어요. 이건 양배추 파이예요. 같이 드시면 몸도 따뜻해지고 기력도 보충되고 좋아요. ”

 

 

왕재수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야단치는 대신 수프와 파이를 받았고 타마라에게 고맙다고 했다. 타마라는 왕재수를 꼭 껴안고 뺨에 뽀뽀를 했다.

 

 

“ 끼니 거르지 마세요, 미셴카. 우리 실력이 별로라서 많이 힘든 거 알아요. 그래도 진짜 열심히 해서 좋은 무대 보여줄 테니까 감독님도 자기 몸 잘 챙기세요. ”

 

“ 고맙긴 한데 너네 실력 이제 별로 아냐. 전에는 별로였지만 많이 나아졌어. 내가 가르쳤는데 아직까지 별로일 리가 없잖아! 하여튼 너 자꾸 나 껴안지 마! 네가 이러니까 다른 여자애들도 와서 다 껴안잖아! ”

 

우리 꽃미남 감독님 이럴 때나 껴안아보죠!

 

“ 저, 타마라... 저기 당신 남자친구... 데니스가 째려보고 있는데요... ”

 

 

베르닌이 나름대로는 농담을 섞어서 말했다. 타마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 괜찮아요. 이제 데니스가 와서 껴안아줄 거예요. ”

 

 

그러자 정말로 데니스가 와서 왕재수를 와락 껴안았다.

 

 

“ 벌써 한참 전부터 안아주고 싶었어요! 진짜 고마워서요! ”

 

“ 야! 아직 신작 발표 전이거든! 누가 보면 다 끝낸 줄 알겠네! ”

 

“ 나도, 나도! 나도 우리 감독님 안아줘야지! ”

 

 

가릭도 달려들더니 뒤에서 왕재수를 부둥켜안았다. 왕재수는 덩치 큰 두 무용수의 포옹에 붙들린 채 ‘뭐하는 거냐, 이 멍충이들아! 춤이나 좀 잘 춰보란 말이야!’ 하고 투덜댔지만 눈으로는 웃고 있었다.

 

 

어쩐지 뭉클해진 베르닌은 자기도 가서 왕재수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드미트리 쪽을 보았다. 드미트리는 한 손에는 수첩을 든 채 왕재수와 무용수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베르닌은 자신과 아주 닮은 그 까만 눈에서 그런 강렬한 시선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드미트리가 왜 그런 시선을 던지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 기분이 살짝 찝찝했다. 혹시 자기가 이제까지 그냥 넘어가줬던 왕재수의 문제 발언들을 하나하나 적어서 스페호프에게 보고하려는 건가 싶어서 걱정도 됐다.

 

 

‘ 아니야, 괜한 걱정이야. 쟨 좋은 앤데. 미하일의 팬이고 발레도 좋아하니까 관심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 ’

 

 

그때 드미트리가 베르닌을 보더니 빙긋 웃으며 여전히 싹싹한 음성으로 말했다.

 

 

“ 무용수들이 미하일을 잘 따르는구나. 하긴 레닌그라드에서도 후배들하고는 사이좋았다고 했어. 이제 오늘 일과는 다 끝난 건가? ”

 

“ 아, 으응... 이제 집에 갈 거야. 저 녀석이 남는다고 해도 협박해서 집에 데려갈 거야. 계속 과로하고 있거든. ”

 

“ 그럼 너는 미하일 데려다 주고 나서 너희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

 

“ 아, 나 같은 아파트에 있어. 국장이 감시 업무 맡기면서 나 이사시켰거든. 층만 다르고 같은 건물이야. 너는 어디에 있어? ”

 

“ 요원 숙소. ”

 

“ 아, 사무실 뒷길에 있는 거기... 그러면 내가 가면서 내려줄까? ”

 

“ 아니야, 괜찮아. 사실 끝나고 카체리나랑 요 앞에서 한 잔 하고 산책하기로 했거든. ”

 

“ 어, 그랬구나... 그럼 빨리 가봐. 내일 사무실에서 보자. ”

 

“ 그래, 다냐. 오늘 덕분에 많이 배웠다. 내일 아침에 봐. ”

 

 

 

드미트리는 왕재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먼저 나갔다. 왕재수는 인사를 받아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무용수들이 인사를 하고는 베르닌에게 달려와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으앗, 다닐! 난 저 사람이 당신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왜 뜬금없이 감독님에게 저렇게 존댓말을 쓰며 인사하지 하고 깜짝 놀랐어요! ”

 

“ 당신 쌍둥이였어요? 아니면 형제예요? ”

 

“ 아니에요, 그냥 좀 닮은 거예요. 모스크바에서 온 연수요원이에요. ”

 

“ 와, 진짜 똑같이 생겼다... 구분 못할 것 같아요! ”

 

“ 그러게, 목소리도 똑같아요! 그리고 키도 똑같고 체격까지! ”

 

“ 알고 보면 쌍둥이 아니에요? ”

 

“ 감독님은 안 놀라셨어요? 아까 그 사람이랑 다닐 진짜 똑같던데! ”

 

 

왕재수는 고개를 저으며 짜증을 냈다.

 

 

“ 다들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똑같긴 뭐가 똑같아. 완전 다른데. ”

 

“ 어, 그치만 얼굴부터 시작해서 진짜 닮았는데... ”

 

안 닮았어! 하나도 안 닮았다고! 이제 그만 들어가! ”

 

 

타마라와 데니스, 가릭은 ‘진짜 닮았는데’ 하고 중얼거리다가 또 왕재수를 와락 껴안고는 밤 인사를 한 후 우르르 복도를 달려 나갔다. 베르닌도 왕재수의 어깨에 재킷을 뒤집어씌우며 엄하게 말했다.

 

 

“ 너도 이제 가자! ”

 

“ 아, 나 조금만 더... ”

 

“ 너 아까 쟤들한테 뭐라고 했어. 며칠 안 남았으니까 컨디션 관리하라고 했잖아. 지금 아무리 잘해도 당일에 아프면 다 도루묵이라고. 너도 마찬가지야! ”

 

“ 어휴, 내가 한 말 이상하게 해석하지 말란 말이야! 공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

 

그래, 나 문외한이야. 그래도 나 세 번째 주역 맡았던 거 기억 안 나냐?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그때도 네가 나한테 똑같이 얘기했어. 쉬어야 된다고. 그러니까 너도 가서 쉬어야 돼. 오늘 먹은 것도 별로 없잖아. 타마라가 가져다 준 거 맛있겠네. 집에 가서 우하랑 양배추 파이 좀 먹고 자자. ”

 

“ 아휴, 너 갈수록 왜 이렇게 시어머니 노릇을 하냐... 알았어. 가자. ”

 

 

 

 

*   *   *

 

 

 

 

 

왕재수는 차를 타자마자 꾸벅꾸벅 졸았다. 하지만 다리를 건널 때쯤 되자 깨어났고 배가 많이 고팠는지 꾸러미를 풀어서 양배추 파이를 두 개 꺼냈다. 하나는 자기가 먹고 하나는 운전하는 베르닌의 입에 쑤셔 넣어 주었다.

 

 

“ 와, 이거 맛있네. 양배추도 많이 들어 있고 촉촉하고. 근데 아까 그 닭가슴살 스틱도 맛있었는데... 집에 가서 그것도 좀 먹어봐. 내가 챙겨왔어. ”

 

“ 싫어. 감시꾼 나부랭이가 가져온 거 먹기 싫어. ”

 

너무 그러지 마. 네 팬이잖아. 파리에도 있었대. 불어도 잘하고 영어도 잘 한대. 무용이랑 예술도 많이 알고. 그런 거 보면 너랑 잘 통할지도 몰라. ”

 

“ 그래봤자 KGB 끄나풀... 스파이! ”

 

“ 야, 나도 KGB인데... 너무 매도하지 마. ”

 

“ 넌 그 자식처럼 잘난 체 안하잖아. 바보니까. ”

 

“ 야! 너 자꾸 나한테 바보라 할래! 나도 법학 전공하고 나름대로 우등생이었단 말이야! 외국어랑 예술만 모르는 거지... ”

 

“ 하여튼 차라리 그게 낫단 말이야! 바보가 훨씬 나아. ”

 

“ 엥... 그건 또 무슨 논리람... 근데 너 진짜 드미트리 처음 봤을 때 안 놀랐어? ”

 

“ 왜 놀라? ”

 

“ 걔랑 나랑 많이 닮았잖아. 나도 진짜 놀랐는데, 꼭 거울 보는 것처럼. 아침에 걔 보고 나서 나 엄마한테 전화까지 해봤어. 혹시 레닌그라드에 나 모르는 사촌 있었냐고. 근데 아니더라고. 너무 신기하지 않아? 아무 관계도 아닌데 나랑 너무 똑같이 생겼어. ”

 

“ 똑같이 생기긴. 완전히 다른데. ”

 

“ 야, 당사자 눈에도 똑같아 보이는데 웬 고집이냐! 그건 네가 KGB를 너무 싫어하니까 그러는 거지! 아니면 옷차림이 달라서 그런가... 넌 패션인지 뭔지 중시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걔 양복 외제인 것 같더라고. 구두도 완전 반짝거리고. 나도 그렇게 잘 차려입으면 좀 나아보이려나... ”

 

“ 그래, 제발 좀 차려입어라. 오늘도 아가일 무늬 셔츠에 손목토시... 변함이 없네. 근데 옷차림이랑 상관없어. 너랑 걔랑 딱 보면 완전히 다른데 왜 자꾸 닮았다고 다들 난리인지 이해가 안 가. ”

 

“ 참 이상하네... 내가 보기엔 진짜 비슷한데. 어디가 달라? 다른 사람들은 걔랑 나랑 있는 거 보자마자 다 소리 지르고 쌍둥이 아니냐고 물었거든. 네 눈엔 뭐가 다른데? ”

 

“ 어휴, 그런 걸 어떻게 하나하나 말로 설명하니. 그냥 다른 거지. ”

 

“ 그래도... 얼굴이랑 키랑 체격이랑 목소리까지... ”

 

 

왕재수는 베르닌의 얼굴을 힐끗 훑어보더니 귀찮은 듯 중얼거렸다.

 

 

“ 머리 가르마도 너는 오른쪽으로 탔는데 걔는 왼쪽으로 탔고. 너는 관자놀이에 새치가 많은데 걔는 정수리에 몰려 있어. 그리고 너는 눈매가 살짝 처졌는데 걔는 안 처졌고 왼쪽 눈매는 오히려 살짝 위로 올라가 있어. 콧방울도 네가 더 넓고 걔는 약간 위로 올라붙었고. 웃을 때도 너는 양쪽 입가가 똑같이 실룩거리는데 걔는 왼쪽만 더 올라간단 말이야. 어깨도 걔가 좀 더 넓게 각진 편이고. 몸매랑 걸음걸이 보면 그 자식은 운동하는 놈이야. 체격은 비슷해도 너는 살이고 걔는 근육이라고. 걷는 것도 그 녀석이 좀 더 보폭도 넓고 팔도 많이 흔들어.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그 자식은 재수 없게 쳐다본단 말이야! 사람 훑어보는 게 무슨 그림이나 정육점 고기 감정하는 것 같았다고! 그런 자식 딱 보면 알아, 완전 앞잡이! 잘난 체하는 놈이란 말이야. 너랑 완전 달라. ”

 

 

베르닌은 멍해졌다. 머릿속으로 드미트리의 모습을 다시 그려보았다. 하지만 금세 뒤죽박죽이 되었고 뭐가 다른 건지 전혀 분간이 안 갔다.

 

 

“ 어... 그러냐? 난 모르겠는데... 근데 너 진짜 대단하다. 잠깐 쳐다본 거였잖아. 근데 그렇게 여러 가지를 구분했단 말이야? ”

 

“ 그걸 못 보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

 

“ 그런가... 근데 다른 사람들도 다 모르던데... 신기하네. 아, 넌 무용수라서 그런가보다. 안무도 하니까 관찰력이 뛰어난가봐. ”

 

“ 그런 건 안무 안 해도 다 보이는데... ”

 

“ 그래? 근데 난 옛날부터 워낙 평범하게 생겨서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구별하기 어렵다는 얘기 많이 들었거든. 넌 미남이니까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없겠다, ”

 

“ 내가 우주 최강 꽃미남이긴 하지. 어디 갖다놔도 눈에 띄고. 근데 난 너 알아보기 쉽던데. ”

 

“ 그래? ”

 

“ 응. 사람 많이 있어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

 

“ 어, 나 좀 감동할 거 같아... ”

 

제일 책상물림 같은 애 찾으면 되는 거잖아! 아니면 손목토시랑 아가일 무늬만 찾아도... ”

 

“ 어휴, 어쩐지... ”

 

 

 

도착한 후 베르닌은 왕재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우하와 양배추파이를 먹였다. 왕재수는 밤늦은 시각이라느니 나트륨 조절을 해야 한다느니 하는 얘기는 까맣게 잊은 듯 열심히 수프와 파이를 먹었다. 하지만 스트레칭을 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베르닌이 씻고 나오니 왕재수는 자기 집으로 올라가는 대신 소파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피곤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 어휴, 이 녀석... 씻지도 않고... 근데 이 자식 요즘 왜 자꾸 우리 집에서 잠드는 거야. 아휴 귀찮아... ”

 

 

위층까지 업어다주기가 너무 귀찮아진 베르닌은 할 수 없이 왕재수를 안아서 자기 침대로 데려가 뉘었다. 그리고는 ‘요즘 왜 자꾸 주객전도가 되는 걸까’ 하고 투덜대며 소파로 기어 올라가 허리를 꼬부리고 잠이 들었다.

 

 

 

 

 

 

 

- FIN -

2015. 8. 5 ~ 8. 15

 

 

 

..

 

 

눈치채셨겠지만 이번 편은 단추팬클럽 분들이 말씀하신 단추 평행우주, 즉 '우수한 단추'에 대한 얘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는 평행우주의 분신으로 설정하는 대신 단추와 쌍둥이처럼 매우 닮은 드미트리 베르닌으로 바꿨다 :) 아이디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치즈홍차님, 가엾은 리자님, sylf님!!

 

 

..

 

 

우수한 단추, 아니 드미트리가 왕재수의 레닌그라드와 해외 시절에 대해, 그리고 그의 작품에 대해 하는 이야기들은 거의가 본편 우주의 미샤에게 해당되는 얘기들이다. 파리 망명 실패와 수용소 체포의 뒷배경은 좀더 복잡하지만.. 어쨌든 체포당한 후 서방세계의 인권운동가들과 예술가들, 시민들이 그를 위해 구명 시위를 전개했다는 것은 본편과 동일하다.

 

 

 

..

 

드미트리가 지방 KGB 지국에 연수를 오고 다섯번 연수를 받아야 승진 요건을 채울 수 있다는 얘기들은 내가 이야기 전개를 위해 가상으로 설정한 것이다. 연수 제도야 있겠지만 자세한 사항은 나도 조사 안 해봤다 ㅎㅎ

 

 

...

 

 

왕재수의 신작에 대한 얘기는 지난번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가브릴로프 본편에서 미샤가 준비하는 신작과는 내용과 형식이 전혀 다르다 :)

 

 

..

 

 

이야기는 31편으로 이어지는데... 사실 아직 쓰고 있는 중이라서.. 헥헥... 과연 우수한 단추의 운명은~ 그는 왕재수의 호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
Posted by liontamer
2015. 8. 20. 22:07

그때 그 추워보였던 곳~ russia2015. 8. 20. 22:07

 

 

지난번에 올렸던 겨울 사진을 기억하시는지... 그리보예도프 운하변의 기념품 좌판과 그 옆에 앉아 추위를 달래던 상인들 사진... 엄청 추워보였는데..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834)

 

7월 한낮, 햇살 쨍한 날의 똑같은 장소는 이렇다. 이제 하나도 안 춥다~!!

 

 

 

쨍쨍~~

손님들도 지나가다 들르고..

 

사실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내려가면 기념품 시장이 나온다 :) 관광객들 상대로 하는 시장이라 가격은 비싼 편이지만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나야 페테르부르크에 자주 갔으니 이제 그런 시장에는 더 이상 가지 않지만 예전엔 가끔 갔었다. 이 동네 처음 가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들러봐도 재미있는 곳이다.

 

그 시장에서 내 마트료슈카 중 하나인 로조치카를 데려왔었지..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8 

나중에 두번째 마트료슈카인 타마라도 데리고 왔다. 위 링크의 글은 이미지가 잘려서.. 로조치카랑 타마라, 내 다른 마트료슈카 사진들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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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20. 08:49

늦은 아침식사 된대요 russia2015. 8. 20. 08:49

 

 

길 가다가 간판과 메뉴판 구경하는 것을 꽤 좋아해서 사진도 종종 찍는다.

이건 7월 26일. 떠나는 날 오후, 러시아 미술관 갔다가 운하 따라 걸어오던 길에 발견한 어느 카페-바의 간판. Leica라는 곳이다. 여기는 영어로 되어 있고...

 

 

옆으로 가면 러시아어로~

피자, 샌드위치, 파스타, 웍. 디저트. 레모네이드. (러시아에서 레모네이드라고 하는 것은 레몬 뿐만 아니라 탄산과 과일즙이 들어간 에이드류를 총칭한다)

늦은 아침식사(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이거 좋네, ㅎㅎ

김이 폴폴 나는 커피 그림도 어쩐지 정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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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19. 21:07

황금빛 푸른빛 러시아 사원 쿠폴들 russia2015. 8. 19. 21:07

 

 

페테르부르크를 거닐다 보면 아름다운 사원들이 참 많다.

 

이번에 갔을 때 찍어온 내가 좋아하는 사원 쿠폴 사진들 몇 장. 쿠폴은 정교 사원의 동그란 돔을 가리키는 단어다. 양파 모양으로 동그랗다고 해서 쿠폴이란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위의 사진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

 

 

 

이건 카잔 성당.

 

 

 

페테르부르크에서 제일 유명한 사원이라면 이삭 성당을 드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풍경 엽서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건 역시 이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피의 구세주 사원)

 

이거랑 모스크바의 바실리 사원이랑 헷갈려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크레믈린의 바실리 사원(테트리스에 나온다)은 붉은색 계열이고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은 금색과 푸른색 계열이다.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를 나타내는 색깔도 거의 그렇다)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사진은 전에도 전경을 여러번 올렸으니 태그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그럼 이 사원 쿠폴들 사진 몇 장~

 

 

 

 

 

 

 

 

 

마지막으로는 이삭 성당 :)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는데 요즘은 하도 도시 개발을 해대서 더 높은 게 생겼는지 모르겠다. 예전만 해도 이삭 성당보다 높은 건물은 못 짓게 했는데...) 저 황금빛 돔은 실제 황금을 녹여 만든 지붕이다. 엄청 많이 들어갔다고 함. 정확한 숫자는 지금 기억이 안 나네.. 찾아보려니 귀찮다. 하여튼 황금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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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19. 08:51

연못의 비둘기 한 마리 russia2015. 8. 19. 08:51

 

 

레트니 사드 후문으로 들어가면 연못이 나온다. 백조도 한 쌍 있고 오리도 있고 갈매기들도 날아오는 곳이다. 거기 혼자 분위기 잡고 있던 비둘기~

 

이제 오늘 하루도 힘을 내서 일하자... 아침부터 후덥지근하네 헥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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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18. 20:49

하얗고 거대한 구름 아래 부유하는 도시 russia2015. 8. 18. 20:49

 

 

이건 지난 7월 24일.

 

구름이 많이 낀 날씨였다. 네바 강변 따라 산책하면서 찍은 사진 몇 장. 페테르부르크는 바람도 많이 불고 구름도 워낙 많은데다 하늘이 낮아서 걷다보면 구름이 정말 가깝게 느껴진다.

 

거대한 구름. 네바 강. 궁전 다리. 건너편의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 첨탑.

 

 

 

 

 

 

 

 

 

네바 강변의 유명한 청동 사자상.

 

사자야, 구름 보고 있니?

 

 

 

보너스로 카잔 성당과 분수 사진.

 

저 카잔 성당 분수는 내가 쓰고 있는 미샤에 대한 이야기들 중 가장 첫번째 단편이었던 illuminated wall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저 분수 앞 벤치는 주인공 미샤의 비밀 장소 중 하나이다. 그 글과 카잔 성당 분수 이미지들은 이전에 writing 폴더에 올린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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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0일.

 

도착 바로 다음날. 아침 먹고 산책하러 나갔다. 이번에 묵었던 호텔은 이삭 성당 근방인 포취탐스카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산책 코스는 자연스럽게 이삭 성당 - 해군성 공원 - 청동기사상 - 네바 강변 - 에르미타주와 궁전광장 - 네프스키 대로 쪽이 되었다.

 

운이 좋아서 좀 저렴한 비용으로 좋은 호텔에 묵게 될 때면 네프스키 대로 중간쯤인 미하일로프스카야 거리 쪽에 묵게 되기 때문에 이때는 예술광장과 푸쉬킨 동상에서 미하일로프스키 공원, 스파스 나 크로비와 그리보예도프 운하, 그리고 궁전광장 코스가 된다.

 

그러니 어디에 묵느냐에 따라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인사하러 가는 것이 시인이냐 황제냐로 갈린다.. 보통 나는 시인을 선호하기 때문에 예술광장의 푸쉬킨에게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숙소가 황제에게 가까우므로 이번에는 청동기사상, 즉 표트르 1세에게 먼저 인사하러 갔다. 저질체력이니 가까운 데로 먼저 갈 수밖에 없음 ㅠㅠ 미안해요,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그래도 제 마음 속에선 언제나 시인이 황제보다 먼저랍니다!

 

이번에 갔을 때는 페테르부르크에 예상 외의 7월 이상 저온 현상이 나타났고 꽤 춥고 쌀쌀했다.. 매일 15도 안팎의 날씨에 바람도 세게 불고 비도 자주 왔다... 이날도 많이 흐렸다. 중간에는 비도 조금 왔다.

 

밀려드는 먹구름 사이로 황금빛 돔을 드러낸 이삭 성당.

 

 

 

 

잔디밭이 이토록 눈 시린 연두색이다.

 

이삭 성당은 아직 수리가 덜 끝난 상태였다.

 

 

 

지나가다가 예쁜 꽃도 보고..

 

 

 

무성해진 나뭇잎들 사이로 천사에게 다시 인사도 하고..

 

 

 

안녕하세요, 황제. 표트르.

 

이렇게 보면 날씨가 좋은 것 같네 :) 페테르부르크의 하늘과 날씨는 워낙 변화무쌍해서.. 구름도 엄청 빨리빨리 지나간다. 그리고 손을 뻗으면 구름을 만질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네바 강변을 걷다가..

빗물 웅덩이..

 

 

그리고는 쭈욱 걸어서 네프스키 대로로 돌아 들어왔다. 여기는 카잔 성당 뒤편의 공원.

 

 

 

 

 

 

 

흐렸지만 이렇게 군데군데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렇게 산책을 한 후 돔 크니기 2층의 singer 카페에 가서 블린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돌아와 숙소에서 좀 쉬다가 공연 보러 나갔었다.

 

아아, 이게 벌써 근 한 달 전이야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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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의 도시 페테르부르크는 여러 가지 상징물들이 있는데, 청동기사상, 이삭성당, 네프스키 대로, 반으로 갈라지는 궁전 다리, 붉은 등대, 정오마다 빵 하고 쏘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의 대포, 에르미타주, 마린스키, 도스토예프스키 등등 다양하지만 이런 거창한 것들 빼고~ 먹거리로 이 동네 사람들이 또 하나 내세우는 게 있으니 그것은 바로 '코류슈카'라는 것이다.

 

예전엔 지나가면서 간판이나 광고에 코류슈카라고 씌어 있거나 물고기 그림이 있으면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알고보니 이것은 네바 강에서 나는 물고기라는 것이다. 최근 재미있게 읽었던 '비정형화된 여행자들을 위한 페테르부르크 여행서' 시리즈를 보니 늦은 봄부터 코류슈카가 등장하면 주민들은 여름의 향기를 느낀다고 한다. 원체 겨울도 길고 햇빛 보기 힘든 곳에 사는 사람들이라 여름에 대한 이들의 갈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기 때문에 왜 그렇게 코류슈카를 좋아하는지 이해도 된다.

 

하여튼 맛있다고 해서 나도 엄청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번에 갔을 때 료샤에게 물어봤다.

 

나 : 코류슈카 맛있니?

료샤 : 앗, 너 그거 안먹어봤어?

나 : 응.

료샤 : 어휴, 뻬쩨르에 살아보기까지 한 애가 코류슈카를 안 먹어봤단 말이냐!

나 : 나는 여름 시즌에는 살아본 적이 없어. 여행이나 왔지...

료샤 : 가자! 내가 오늘 코류슈카 사주마!

 

그리하여 우리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갔다. 이 날은 간만에 날씨가 아주 좋아서 진짜 여름날씨였다. 해가 쨍쨍했다.

 

료샤 : 여기 이번에 새로 생긴 레스토랑인데 이름이 무려 '코류슈카'다!!

나 : 우와~~

 

페테르부르크에는 유명한 음식점 브랜드가 있는데 '긴자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고급 레스토랑들과 비스트로 등을 내고 있다. 이 코류슈카도 긴자 프로젝트에서 낸 식당이라고 한다.

 

 

 

생긴지 얼마 안돼서 반짝반짝~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로 들어가면 입구 쪽 강변에 있다. 간판에 코류슈카 생선들이 즐비~~

 

료샤 : 원래 코류슈카는 다차(별장) 쪽에 가서 직접 낚아서 불에 구워먹는게 제일 맛있긴 한데, 여기도 나쁘진 않더라고. 너 생선 좋아하니까 괜찮을 거야.

나 : 우왕~~

 

 

 

그래서 이렇게 코류슈카 튀김을 주문..

메뉴판에는 음식 종류도 굉장히 많고 코류슈카도 튀김, 구이, 절임 등등 다양했는데 이게 제일 앞에 나와 있어서 음, 시그니처 메뉴구나 하고 생각해서 이거 시킴.. 1인분에 다섯 마리 들어있음.

 

 

 

레스토랑 내부는 이렇다.

창 너머로는 강변도 보이고 네바 강도 보이고 그 너머 에르미타주와 이삭 성당 등등도 보인다~

 

 

 

이때는 평일 낮이어서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매주 목, 금, 토 9시에는 뮤지컬 위크엔드라고 해서 음악 연주도 있는 모양이다.

 

 

 

목이 마르니 먼저 음료수를..

이것은 딸기 모르스 :) 진하고 맛있었다!

 

 

 

와, 나왔다~~ 코류슈카 튀김~

소스는 나무열매와 버터 등을 섞어서 만든 것 같았는데 내 입맛엔 살짝 느끼해서 소스 안 찍어먹는 게 더 맛있었다.

 

생선이 딱 다섯 마리 밖에 안 들어있음.

이건 원래 머리부터 꼬리까지 뼈까지 다 씹어서 먹는 건데 난 처음엔 다 씹어먹다가 나중엔 귀찮아서 머리는 안 먹었다. 그랬더니 료샤가 나보고 '쳇, 넌 역시 진정한 뻬쩨르인이 아니야~! 머리까지 다 먹는 건데!' 라고 했다 ㅠㅠ

 

코류슈카 튀김은 짭짤하고 맛있었다. 예전에 헬싱키 시장에서 먹었던 생선 튀김도 좀 생각났는데 그것보다는 더 촉촉하고 덜 짰다. 맛있었다~

 

 

 

사진 보니 다시 먹고 싶네..

 

 

 

생선 한 마리 꺼내놓고..

이거 진짜 금방 먹는다 ㅠ

료샤는 이거 술안주라서 잔뜩 쌓아놓고 맥주랑 먹으면 계속 먹게 된다고 했다.

 

 

 

하여튼 친구 덕분에 맛있게 먹고 기분 좋게 나왔다.

하늘도 맑았고.. 창문에 비친 구름이 보이시는지~ 구름도 뭉게뭉게..

그리고 지붕의 저 코류슈카 그림은 참으로 앙증맞았다~

 

다시 보니 먹고 싶다, 코류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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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16. 22:47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화보 몇 장 dance2015. 8. 16. 22:47

 

 

월요병을 달래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화보 몇 장

 

장미의 정령 리허설 중인 슈클랴로프와 크리스티나 샤프란.

출처는 vladimir shklyarov의 instagram. 사진사는 (아마도) svetlana avvakum.

이 사람이 추는 장미의 정령이 굉장히 궁금한데 영상이라도 좀 봤으면 좋겠다..

 

 

 

역시 출처는 vladimir shklyarov의 instagram. 사진사는 svetlana avvakum.

유리 스메칼로프가 안무한 지하왕국의 오르페우스 중. 님프들에게 살해당하기 직전의 오르페우스. 공포와 고통이 뒤섞여 일그러진 표정 연기도 좋았고 이때의 감정선과 춤도 좋았다. 이 사람은 역시 드라마틱한 게 어울린다.

 

 

 

이건 2013년. 자신의 베네피스 갈라 공연을 위해 도로테 질베르와 라 바야데르 망령의 왕국 리허설 중. (그래서 스카프가...)

별로 화질 좋지 않은 영상으로 이 무대 둘의 춤을 봤는데 슈클랴로프는 괜찮았고 질베르는 여독이 안 풀렸던 건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는 니키야가 별로였다. 그냥 테료쉬키나랑 췄으면 더 근사했을 것 같다만... 그래도 일부러 파리에서 스타 발레리나를 데려와 같이 춘 거라서 나름대로 의미도 있고 보러 간 사람들도 좋았을지도... 둘이 같이 추니까 예쁘기는 했다만...

 

 

 

이건 작년 라 바야데르. 아마 내가 갔을 때 본 무대인 것 같다.

사진사는 philippe jordan.

감자티 역의 아나스타시야 마트비옌코와 함께 2막 그랑 파 추는 중.

(저 때 나는 앞자리에 앉아 저 흰색 의상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었음...)

 

 

 

역시 philippe jordan이 찍은 사진. 위와 같은 라 바야데르. 3막. 테료쉬키나와 아다지오 추는 중.

다음 사진과 이어짐. 발레리나를 열심히 돌려주는 것은 남자 무용수의 숙명(ㅠㅠ)

 

 

사진사는 philippe jordan. 열심히 돌려주고 있음~~~ 잘한다 발로쟈~~

 

 

 

이건 jack devant의 사진.

빅토리야 테료쉬키나의 올해 베네피스 갈라 공연에서 마지막 무대(앙코르 빼고)인 파키타를 같이 췄다.

 

 

jack devant 사진 한 장 더. 파키타에서 남성 솔로 마치고 짠~ 하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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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16. 19:38

페테르부르크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 russia2015. 8. 16. 19:38

 

 

 

 

 

 

 

 

 

 

 

 

이건 어떤 건물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의 일부. 이때 이상저온으로 너무 추워서 혹시나 하고 챙겨갔던 저 긴 치마를 꺼내입었는데 치마가 길이만 길 뿐 천은 얇아서 보온에는 별 도움이 안됐음 ㅠ 사진에서도 바람 때문에 치맛자락이 감기면서 펄럭거리고 있음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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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15. 20:49

눈과 얼음의 나라 러시아 사진 몇 장 더 russia2015. 8. 15. 20:49

 

 

오늘은 사우나처럼 덥고 답답한 날씨였다.

어제에 이어 더위 퇴치용으로 지난 2월에 페테르부르크에서 찍었던 추웠던 날 사진들 몇 장. 대부분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갔을 때 찍은 것.

 

먼저 갈매기~

 

 

 

 

 

 

네바 강은 꽁꽁..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산책하다가.. 담장 너머로 보이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의 황금 첨탑.. 추웠지만 맑고 화창한 날씨라서 사원이 더욱 아름다웠다.

 

 

 

요새에서 나와서 스뜨렐까 쪽으로 걸어올라옴, 공원 너머로 저 멀리 에르미타주가 보인다.

 

 

 

이제 그리보예도프 운하 쪽으로 걸어올라가는 중... 운하는 꽁꽁.. 새들도 옹기종기..

 

 

 

운하 저 너머로 미하일로프스키 성이 보인다.

 

여름아 빨리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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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여전히 덥다.. 쉬는 날이라 참 좋긴 한데 통창문 오피스텔이라 집이 온실처럼 더움.. 에어컨을 계속 틀어놓자니 춥기도 하고 전기세도 걱정되고 해서 잠깐 끄고 선풍기만 켰는데 너무너무 덥다.. 다시 켜야겠다..

 

그래서 지난 2월의 추웠던 페테르부르크 사진 몇 장으로 더위를 쫓아보는 중이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운하와 네바 강, 공원을 보면서 더위 쫓아보세요~

 

위의 사진은 얼어붙은 모이카 운하 위로 눈이 쌓인 것.

여름날이면 운하 여기저기 있는 저 오목한 계단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병나발을 분다 :)

 

 

 

역시 모이카 운하.

가끔 올린 적 있는 마린스키에서 이삭 성당 쪽 가는 그 길이다. 여름날의 이 운하는 물결이 넘실거리고 유람보트가 거품을 내뿜으며 흘러가지만.. 겨울엔 이렇다 :)

 

 

 

알렉산드로프스키 공원. 맞은편으로 이삭 성당이 보인다~

 

 

 

알렉산드로프스키 공원에서 청동기사상이 있는 원로원 광장 가는 길.

저 눈 위에서 뒹굴고 싶어라.. 아이 더워라..

 

 

 

 

광장 너머로는 네바 강과 인류학 박물관 쿤스트카메라 건물이 보이고..

 

 

꽁꽁 얼어붙은 네바 강과 그 위로 쌓인 눈~~

아, 빙수 먹고프다..

 

 

 

쿤스트카메라 건물. 등대. 궁전 다리. 오른편 저멀리 보이는 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 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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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28편에서 우리의 단추가 본의아니게 현장요원 노릇을 하고 고생고생을 했는데(왕재수도 물론 언제나처럼 매우 고생) 이에 대한 참회의 의미에서(ㅎㅎ) 29편은 한결 가벼운 분위기의 서무 에피소드로 돌아왔다. 이전에 나왔던 인물들도 여럿 다시 등장한다.

 

오랜만에 보랴 등장~ 4월에 태어난 보랴가 생일 파티를 열고 단추와 왕재수를 초대하는데~~

 

** 초반에 등장하는 올리비에 샐러드는 러시아의 감자 샐러드이다. 전에 내가 만들었던 올리비에 샐러드 사진 올린 적이 있다. 그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927

 

** 중간에 언급되는 브이소츠키는 러시아의 유명한 가수이자 음유시인인 블라지미르 브이소츠키이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4월의 어느 날, 베르닌은 신작 준비에 여념이 없는 왕재수를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가고, 거기서 파티 초대를 받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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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9

 

 

 

 

 

서무의 슬픔

- 보랴의 생일 파티 -

 

 

 

 

 

일요일 저녁이었다. 공연 일정표를 보니 오페라가 올라가는 날이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신작 연습이 끝나는 오후 5시에 맞춰서 극장으로 갔다. 물론 왕재수는 퇴근할 기미가 전혀 없었다. 타마라와 데니스, 가릭을 남겨놓고 개인 지도를 하고 있었다.

 

 

신작 공연이 겨우 열흘 앞으로 다가왔으니 이해는 갔지만 베르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골치 아픈 녀석을 집으로 데려가 쉬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귀염둥이 우리 아기’니까 잘 돌봐주겠거니 하고 코즐로프에게 맡겨놨더니 망할 놈의 바이올린 깡패는 밤마다 얼마나 사랑을 불태우는지 도대체 애를 재우는 것 같지가 않았다. 토요일에도 베르닌은 리허설 휴식 시간에 왕재수가 눈이 빨개지고 퀭해진 채 꾸벅꾸벅 조는 것을 보았는데 반주를 도와주러 온 코즐로프도 똑같이 그러고 있었던 것이다!!

 

 

‘ 어휴! 저 인간은 낫살도 먹어가지고 자제 좀 하지 왜 저 녀석 장단에 맞춰서 밤새 노는 거야... 가뜩이나 저 자식 모스크바 끌려갔다 와서 힘들 텐데. 약까지 맞고... 내색 안 해서 그렇지 많이 아팠을 텐데. 오늘은 내가 꼭 데려가야지! 저거 야윈 것 좀 봐! 밥이나 제대로 먹은 건지! 분명히 저 녀석이 그랬어, 로만은 요리 못 한다고. 그러니까 저 모양이지. 뻔할 뻔자 샌드위치 쪼가리나 집어먹고 우유나 마시고 나왔겠지! ’

 

 

베르닌은 구석에서 30분 정도 기다렸다. 데니스와 타마라가 먼저 끝났는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타월로 어깨를 감싸고 문가로 걸어갔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베르닌이 있는 것도 모르고 헉헉거리며 나갔다. 가릭은 아직도 왕재수에게 붙들려 있었다. 왕재수는 숫자를 세기도 하고 이따금 불어를 섞어서 동작 설명을 하다가 답답하면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가릭은 죽어라 돌고 뛰고 뻗고 뒹굴었다. 마침내 왕재수가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 됐어, 오늘은 그만 해. ”

 

“ 아니에요, 감독님. 저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아요. 조금만 더... ”

 

“ 아니야, 그만 해. 더 하면 더 나빠져. ”

 

“ 하지만... ”

 

“ 너 왜 자꾸 거기서 막히는 줄 알아? ”

 

“ 오른쪽 골반이 안 열려서요... ”

 

아니야! 골반은 다 열렸어! 자꾸 틀린다고 의식하니까 몸이 뻣뻣해지잖아. 지금 동작은 틀리는 데 없어. 동작을 하나하나 해낸다고만 생각하니까 자꾸 막히는 거란 말이야. 이게 무슨 올림픽인 줄 아니? 동작 하나하나에 점수 매기는 게 아니라고. 네가 자꾸 고전 발레만 생각하면서 움직이니까 더 그래. 음악을 타야지. 편해져야 돼. 자꾸 음악을 박자 하나둘에 맞춰서 동작 하나둘을 하려고만 하니까 그러는 거라고. 그러니까 오늘은 그만 들어가서 쉬어. 그냥 노래 들으면서 논다고 생각하란 말이야. ”

 

“ 어려워요... 그런 식으로 해본 적 한 번도 없는데... ”

 

“ 그러니까 배우는 거지. 어렵지만 재밌잖아. ”

 

“ 재밌긴 한데 자꾸 막히니까 힘들어요. 감독님. 저 내일 연습실 쓰면 안돼요? 열쇠 주고 가시면 혼자서라도 연습해 볼게요. ”

 

“ 맘대로 하렴. 열쇠는 굳이 가져갈 필요 없어. 나도 나올 거야. 먼저 오면 경비실에서 받아가, 얘기해 놓을 테니까. ”

 

 

가릭이 나오면서 베르닌에게 손을 흔들었다. 데니스 못지않게 땀범벅이 되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아 보였다. 베르닌은 가릭과 짧게 인사를 나눈 후 왕재수에게 갔다.

 

 

“ 가자! ”

 

“ 오페라 보고 가려고 했는데... 오늘 카르멘이야. ”

 

“ 오페라는 부감독이 따로 있잖아! 카르멘 그거 지난달부터 벌써 다섯 번도 넘게 올라갔고. 너 그 중 세 번 봤어! ”

 

 

왕재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너 진짜 나 감시 열심히 하고 있구나! 나도 횟수는 기억 안 나는데. 그래도 오늘은 다른 가수가 부른단 말이야. 그리고 나는 극장 전체를 총괄하는 예술감독이니까 오페라도 틈나는 대로 꼬박꼬박 확인해봐야 한다고. ”

 

아니야, 너 오늘 공연 안 봐. 확인도 안 해. 너 지금 나랑 집에 갈 거야. 저녁 왕창 먹고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푹 잘 거야! 너 내일 월요일인데도 극장 나올 거잖아. 아까 가릭한테 하는 말 다 들었어! 그러니까 오늘은 무조건 집에서 쉬어야 돼. ”

 

“ 하지만 로만도 오페라 때문에 연주하러 갔고... 끝나면 같이 로만 집에 가서 밤을 불태우려고... ”

 

넌 맨날맨날 불태우잖아! 오늘은 안 돼! ”

 

“ 왜 안 돼! 난 성인인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데! ”

 

“ 성인이라도 하는 짓은 여섯 살짜리잖아!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분명히 밥 많이 먹고 많이 쉬어야 한댔잖아! ”

 

“ 많이 먹고 많이 쉬고 있단 말이야! ”

 

“ 좋아. 그러면 너 이리 와봐. ”

 

 

베르닌은 왕재수의 손목을 잡아끌고 연습실에 딸려 있는 탈의실로 갔다. 체중계를 가리키면서 근엄하게 말했다.

 

 

“ 올라가! ”

 

“ 왜! ”

 

“ 지금 몸무게 재봐서 65킬로 넘으면 맘대로 하게 해 줄 거야! 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 밥 많이 먹고 최소 그 정도까지는 찌우라고! ”

 

“ 넘어! 넘는다고! ”

 

“ 그러니까 올라가보라고! ”

 

 

왕재수는 체중계를 힐끗 째려보더니 입술을 삐죽거리며 홱 돌아섰다.

 

 

“ 악마! 사람의 자유를 그깟 숫자를 내세워서 탄압하다니! 난 한참 춤추고 근육질일 때나 그 정도였는데... 너무하잖아. ”

 

“ 좋아, 그러면 2킬로 빼줄게. 63킬로 되면 네 맘대로 해. ”

 

 

왕재수는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저 체중계 원래 몸무게보다 적게 나온단 말이야. 발레리나 여자애들 가뜩이나 숫자에 민감해서 지난번에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바늘 손댔어. ”

 

“ 뭐가 그렇게 구구절절 말이 많아. 일단 재봐! ”

 

싫어! 그런 건 수용소에서나 하는 거야! 키 재고 몸무게 재고 피 뽑고 맨날 차트 적고... 알았어! 오페라 안 보면 되잖아. 흑... ”

 

 

갑자기 왕재수가 훌쩍거렸기 때문에 베르닌은 당황했다.

 

 

“ 야, 왜 또 그런 거 가지고 울어! 알았어, 몸무게 재라고 안 할게. ”

 

“ 엉엉... 나도 다시 예전처럼 되고 싶단 말이야... 로만도 다이어트 하지 말라고 했어, 많이 먹고 몸무게랑 근육이랑 다시 늘리랬는데 잘 안된단 말이야. 흑... 이제 옛날처럼 못 돌아갈 거 같아. 다시는 예전처럼 못 출 거야. 예쁜 것도 한순간이지 금방 미워질 거야. 망했어. 다 끝났어, 엉엉...

 

 

베르닌은 어쩔 줄 몰랐다. 왕재수가 왜 갑자기 슬퍼하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일단 애가 우는 건 괴로웠으므로 열심히 달랬다.

 

 

“ 아니야, 뭐가 망해. 너 요즘 과로해서 살이 안 붙는 거야. 많이 먹어도 그것보다 더 많이 움직이니까 에너지가 다 소모돼서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일 그만하고 맛있는 거 먹고 집에 가서 쉬자. 신작 끝나고 나면 숨 좀 돌리잖아, 그러면 금방 몸도 옛날처럼 돌아올 거야. ”

 

“ 흑, 감옥에서 나온지 벌써 일곱 달도 넘었는데... 아까도 애들 지도해주는데 내가 만든 동작도 힘들었어... 예전엔 열 번 연속으로도 출 수 있었는데. 나 이제 춤 못 출 건가봐. ”

 

“ 에이, 무슨 소리야. 지난번에 바질도 잘 췄잖아. 매일매일 연습하면서 살다가 여기 와서는 안 그러니까 몸이 좀 굳어서 그렇겠지. 근데 너 무용수 은퇴했다면서 아직도 춤은 다시 추고 싶은가보구나? ”

 

“ 은퇴한 거는 무대에 안 올라가는 거고... 춤은 그거랑 다르단 말이야... ”

 

“ 웅... 뭐가 다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끝난 거 하나도 없어. 몸이 나아지고 연습도 꾸준히 하면 전처럼 될 거야. 걱정하지 마. ”

 

“ 춤도 못 추게 되고 시들시들해지면 미워질 거야... ”

 

“ 뭐가 미워지냐! 맨날 우주 최강 꽃미남이라면서 자랑하더니. 어제도 예쁘고 오늘도 예쁘고 내일도 예쁠 테니까 그런 생각하지 마! ”

 

 

왕재수가 여전히 눈물이 주렁주렁 달린 까만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맞아, 나 우주 최강 꽃미남인데. 어제도 예쁘고 오늘도 예쁘고 내일도 예뻐야 되는데... 엄마가 나보고 말랐다고, 눈이 왜 그렇게 퀭해졌냐고 걱정하잖아... 별처럼 반짝반짝하던 내 눈, 엉엉... ”

 

“ 아... 어... 그건 그때 네가 주사를 맞아서 눈이 몽롱해서 그랬을 거야. 그래서 어머니가 착각하셨을 거야. 다음에 보면 안 그러실 거야. ”

 

 

베르닌은 말을 내뱉은 순간 실언했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모스크바에 갔던 일에 대해서도, 눈이 가려진 채 끌려가던 왕재수를 본 것도, 스비제르스키와 만난 일도 왕재수에게는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네가 어떻게 그걸 알아?’ 라고 묻지 않았다. 스비제르스키에게서 들었나 싶기도 했다. 그저 손등으로 눈물을 쓱쓱 닦으면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 나빠... 아픈 건 엄마였는데 엄마가 나 걱정하고. 흑... 그러니까 나 빨리 다시 예뻐져야 되는데. 지금도 예쁘지만 전에는 어마어마하게 예뻤으니까 그때처럼 돌아가야 돼. ”

 

“ 어휴, 지금도 예쁘다고 난리인데 지금보다 어마어마하게 더 예뻐지면 그걸 누가 다 감당하냐! 그러니까 넌 진짜 왕재수야! 자기 잘난 것밖에 모르고! 하여튼 가자! 밥부터 먹어야지! 냉장고에 아무 것도 없어서 장 좀 봐가야 되는데... 뭐 먹고 싶니? ”

 

“ 우리 그냥 스베촉 가서 먹자. 나 갑자기 엄청 배고파. 장 봐서 요리하면 한참 걸리잖아. ”

 

“ 그래, 나도 먹고 싶다, 양파수프랑 사과소스 돼지구이. ”

 

 

그래서 베르닌은 왕재수와 함께 스베촉에 갔다. 저녁 식사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미 꽉 들어차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점원이 왕재수를 보더니 ‘이쪽으로 오세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하면서 구석 창가 자리를 내주었다. 베르닌은 양파수프와 사과소스 돼지구이를 주문했고 왕재수는 대구 커틀릿과 올리비에 샐러드를 주문했다.

 

 

“ 나 네가 올리비에 샐러드 주문하는 거 처음 봐. ”

 

“ 그런가? 나 그거 좋아하는데. ”

 

“ 너무 흔한 거라서 안 먹는 줄 알았어. 아니면 감자랑 마요네즈 때문에 칼로리 생각해서 안 먹나 했지.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

 

“ 레닌그라드에 있을 땐 자주 먹었는데. 하긴 이건 기본 샐러드라서 오히려 제대로 못 만들면 진짜 맛없어, 느끼하고 질척거리고. 보랴는 잘 만들더라고. ”

 

“ 웅, 그러면 난 안되겠구나. 만들어줄 수 있는 메뉴 하나 더 늘었다고 좋아했더니만. ”

 

왜, 만들어줘. 쉽잖아. 감자 삶아서 양파랑 당근이랑 마요네즈랑 식초랑... ”

 

“ 뻔할 뻔자 느끼하고 질척거린다 할 거 아냐! 우리 동네 음식 다 기름지다며. 내가 한 것도 그렇겠지 뭐. ”

 

“ 일단 한번 만들어 줘봐! 먹어보고 판단할 테니까. ”

 

“ 뼈 빠지게 만들었는데 맛없다느니 기름기 많다느니 하면 진 빠진단 말이야. ”

 

“ 감자 샐러드에 기름기 많을 이유가 어디 있어! 아 맞다. 내가 왜 여기 와서 그거 안 먹었는지 생각났어. 너네는 아무래도 돼지기름으로 버무릴 것 같더라고! 너 그럴 거야? ”

 

“ 아니야! 아무리 우리 가브릴로프 사람들이 돼지기름을 많이 먹어도 그렇지, 아무데나 다 넣는 줄 아냐! ”

 

그래! 그때 그 나폴레옹... 렐랴가 준 거... 기름케익. 우웩!

 

“ 야! 그건 렐랴가 감기 걸려서 버터랑 헷갈려서 그랬던 거지! 너 자꾸 렐랴 모욕할 거야? 그래도 너 생각해서 그렇게 만들어다 준 건데! 렐랴처럼 예쁘고 상냥한 여자한테... ”

 

“ 으윽, 또 나왔어. 렐랴 타령. 그렇게 상사병 앓지 말고 한번 들이대보기라도 하라고! ”

 

“ 그게 아니고... ”

 

 

그때 음식이 나왔다. 베르닌이 양파수프를 흡입하는 동안 왕재수는 올리비에 샐러드 접시를 끌어당기더니 3분의 1쯤을 덜어주었다. 베르닌은 호기심으로 샐러드를 먹어보았다. 소스가 별로 질척하지 않았고 감자의 포슬포슬한 식감과 달걀의 풍부한 맛, 상큼한 오이와 고소한 마요네즈, 식초의 조화가 일품이었다. 평범한 감자 샐러드인데도 입맛이 확 돌았다.

 

 

“ 아, 이거 맛있다. ”

 

“ 그치? 잘 먹어보고 집에 가서 이렇게 해줘. ”

 

“ 내가 요리사냐, 먹어본다고 그대로 만들 수 있게! ”

 

“ 보랴는 다른 데서 뭐 먹어보면 그대로 만들던데. 심지어 더 맛있게. ”

 

보랴는 요리사잖아! 나는 서무고! 나도 다른 데서 문서 읽어보면 그대로 만들 수 있어! 서류철도 그대로 할 수 있고! ”

 

“ 칫, 맨날 서무 타령. ”

 

 

베르닌은 배가 고팠기 때문에 수프에 사과소스 돼지구이를 금세 해치웠고 왕재수가 덜어준 감자 샐러드도 다 먹었다. 왕재수는 샐러드는 다 비웠지만 대구 커틀릿은 절반쯤 먹고 나더니 슬금슬금 포크를 내려놓았다. 베르닌은 엄하게 말했다.

 

 

좋은 말 할 때 다 먹어라.

 

“ 먹을 거야! 조금 있다가... ”

 

“ 냅킨으로 입도 닦았잖아! ”

 

“ 샐러드를 너무 열심히 먹었나봐. 배가 너무 불러서 못 먹겠어. 포장해 가서 있다가 먹을게. ”

 

 

베르닌은 몹시 야단을 치고 싶었지만 그나마 가져가서 먹겠다고 하는 게 어디냐 싶어서 점원에게 남은 음식 포장을 부탁했다. 점원은 베르닌을 째려봤다가 왕재수의 부탁이라는 것을 알고는 누그러져서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종이 봉지를 들고 보랴가 직접 나타났다. 왕재수에게 봉지를 건네주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우리 아기 또 어디가 아프니, 왜 조금밖에 못 먹니? ”

 

아니야, 안 아파. 감자 샐러드 먹느라 배가 금방 찼어. 가져가서 먹을게. ”

 

“ 팬에 한번 데워서 먹어야 되는데 너 불도 쓸 줄 모르잖니. ”

 

“ 괜찮아, 다닐이 해 줄 거야. ”

 

 

‘또 나야!’ 라고 야단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면서 베르닌은 보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랴는 만족한 표정을 짓더니 생각난 듯 베르닌에게 말했다.

 

 

“ 참, 그렇지. 너도 내일 와라. 7시까지 오면 돼. ”

 

“ 어디를요? ”

 

“ 우리 집. 내 생일이라 집에서 모여서 놀기로 했거든. 얘도 오고 로만도 올 거야. 근데 내 생일 파티에는 절대 혼자 오면 안 되거든. 꼭 짝꿍을 하나 데려와야 해. 그럼 내일 보자. 난 주문이 밀려서 이만. ”

 

 

보랴가 주방으로 사라진 후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물었다.

 

 

“ 너도 가? ”

 

“ 응, 보랴가 지난주에 얘기했어. 너한테도 말해준다는 걸 까먹었네, 너무 정신이 없어서. ”

 

“ 잘됐다. 둘이 오라고 했으니까 우리 같이 가면 되겠네. 아... 넌 바이올린 아저씨랑 가겠구나. 난 누구랑 가지? ”

 

“ 에이, 그거 아니야. 보랴 얘긴 여자 데려오라는 거야. 남녀 짝 맞추는 걸 좋아하더라고. ”

 

“ 그래도 너는 로만이랑 사귀잖아. 보랴도 알지 않아? ”

 

“ 보랴는 알지만 거기 오는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거 모르잖아. 건전한 소련 시민들이 모이는 파티에서 남자끼리 왔다고 하면 돌 맞으라고. 극장에서도 나랑 로만이랑 그런 거 모르는데. 그리고 보랴 얘긴 꼭 사귀는 상대랑 오라는 게 아니고 그냥 남녀 짝만 맞춰 오라는 거야. ”

 

“ 그럼 넌 누구랑 가? 로만은? ”

 

“ 로만은 오케스트라 동료랑 오기로 했어. 보랴랑도 알거든. 난 나쟈랑 갈 거야. ”

 

“ 아... ”

 

 

베르닌은 누구와 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왕재수가 대구 커틀릿을 먹나 안 먹나 감시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보랴의 파티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   *   *

 

 

 

 

월요일이라 베르닌은 정신없이 바빴다. 주간 회의에서는 매우 심기가 불편한 스페호프가 직원들을 하나하나 질책해 가며 마구 괴롭혀댔다. 지난주의 밀서 작전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 분명했다. 물론 국장은 스비제르스키에게 보기 좋게 한방 먹었다는 것과 작전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베르닌에게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베르닌도 밀서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것과 스비제르스키에게 잡혀가 이야기를 나눴던 사실을 전혀 보고하지 않았다. 금요일에 출근했을 때 그저 밀서를 넣은 흑빵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내용만 간략하게 보고했을 뿐이었다. 스페호프는 다른 것은 묻지도 않았고 알겠다는 단 한 마디와 함께 나가보라고 했을 뿐이었다.

 

월요일은 극장 휴일이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퇴근 시간까지 사무실에 남아서 일을 했다. 굳이 왕재수가 출근했다는 사실을 스페호프에게 보고하고 극장에 갈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일이 너무 많이 밀려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호프는 그에게 서류철 제목에 오타가 있다며 몹시 질책을 했고 회의실 라디에이터 파이프가 하나 구부러져 있다면서 서무의 기본이 안 돼 있다고 야단을 쳤다.

 

베르닌은 서류철 표지들을 일일이 검토해서 오타 두 개를 잡아내고 흰 종이에 제목을 새로 써서 붙여 놓았다. 시설 관리 담당자에게 라디에이터 파이프 수리를 부탁하려고 했으나 담당자는 차를 마신다고 자리를 비운 후 도통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르닌은 망치와 펜치를 들고 가서 직접 파이프를 고쳤다. 그리고는 3월 업무추진비를 정산하고 부서원들의 근태기록부를 정리했다. 주간회의에서 국장이 쏟아냈던 지적사항들을 모조리 타이프로 쳐서 해당 직원들에게 한 부씩 배부했다.

 

 

베르닌은 자잘한 서무 업무들을 대충 정리한 후 마지막으로 지난주의 왕재수 감시보고서와 도청 보고서를 작성해 스페호프에게 제출했다. 모스크바에 다녀오느라 며칠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지난주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스페호프는 별다른 것을 묻지도 않았다. 단지 베르닌이 나가려고 할 때 그를 불러 세우더니 음울한 표정으로 말했을 뿐이었다.

 

 

“ 자네 앞으로 조심하게. ”

 

“ 예? 무엇을요? ”

 

“ 그냥 조심하란 말일세. 모스크바 임무 관련해서. 별 일이야 당연히 없겠지만 어쨌든 그 불여우의 뒤를 봐주는 놈들이 자네를 의심하게 될지도 모르니 앞으로는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는 게 좋겠네. ”

 

“ 저, 저를 의심한다고요? 하지만 저는... ”

 

“ 물론 자네를 의심하거나 해를 끼칠 이유야 별로 없지만 어쨌든 조심하는 게 좋겠어. 저 불여우 녀석이 내 생각보다 더 깜찍하게 머리를 굴리는 것 같단 말이지. 그 녀석이 아침 저녁 밤으로 자네와 잠자리를 하고 저녁밥도 꼭꼭 얻어먹으려고 엉겨 붙는 걸 보니 아직 자네를 꽤 좋아하고 신뢰하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만의 하나 그놈이 자네의 본심을 알아채고 우리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면 골치 아파지는 거야. 그러니 자네도 호신용 권총을 반드시 소지하게. 글리셰프에게 얘기해서 9밀리 마카로프를 하나 내주도록 하겠네. ”

 

 

베르닌은 국장이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는 이유란 밀서 음모가 완전히 스비제르스키에게 발각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장은 스비제르스키가 베르닌이 밀서 전달책으로 파견됐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거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나름대로는 베르닌이 그 무시무시한 크레믈린 아저씨의 손에 처단될 것을 염려하여 현장요원용 권총을 소지하게 해주겠다고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베르닌은 그런 배려가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국장은 애초부터 왕재수와 크레믈린 아저씨를 엿 먹이려고 음모를 꾸며서 그를 사지에 몰아넣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끝내 그에게는 밀서의 내용이나 자초지종에 대해서는 한 톨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피장파장이었다. 그도 스비제르스키와의 조우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으니까. 권총은 그냥 받아서 침대 서랍장에 처박아놓으면 되니까 상관없었다.

 

 

“ 저, 그럼 권총을 지금 수령할까요? ”

 

“ 아닐세, 장부 기재 절차가 좀 복잡하니 내일 9시에 5호실로 가서 글리셰프에게서 인수하게. 그럼 가보게. ”

 

 

베르닌은 국장실을 나왔다. 극장에 가볼까 하다가 퍼뜩 보랴의 파티 생각이 났다.

 

 

‘ 아 맞다, 보랴네 집에 가야 하는데. 누구랑 가지? 여자랑 오랬는데... ’

 

 

베르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일 파티에 같이 갈 여자를 지금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니 아무리 생각해도 방도가 없었다. 그는 보랴를 좋아했으므로 파티에는 꼭 가고 싶었지만 대체 누구와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왕재수와 가면 편할 텐데 어째서 보랴는 남녀 짝을 맞춰 오라 하는 건지 슬며시 부아도 치밀었다. 고민하고 있는데 무거운 장부를 한 아름 안고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알렉산드라와 마주쳤다.

 

 

“ 어, 선배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

 

아... 국장이 3년 이상 지난 서류철들을 전부 문서고로 옮기라고 해서... 아까 들이닥치더니 왜 이렇게 사무실이 지저분하냐고 불벼락을 내리더라고. ”

 

 

베르닌은 알렉산드라의 팔에서 장부들을 모조리 끌어 모았다. 꽤 묵직했다.

 

 

“ 근데 이걸 왜 선배님 혼자 다 옮기고 있는 거예요? 등록부서에는 다른 직원들도 많잖아요. 후배들도 있고. ”

 

“ 걔들은 또 다른 서류 옮기고 있어. 아까부터 다들 난리였어. 괜찮아, 이게 마지막이야. 이리 줘, 다냐. 내가 할게. ”

 

“ 저 내려가던 길이었어요, 문서고 같이 가요. ”

 

“ 그럼 반만 들어주렴. 반은 내가 들게. ”

 

 

베르닌은 머리핀이 거의 머리채 끝까지 내려와 대롱거리고 있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된 데다 장부를 껴안고 나르느라 블라우스 앞섶과 소매가 온통 다 구겨져 있는 알렉산드라의 몰골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 됐어요, 전 안 무거워요. 대체 몇 번이나 문서고에 왔다 갔다 하신 거예요? 그 부서에도 등록 관련 서류랑 장부 엄청 많았을 텐데. ”

 

“ 모르겠네. 오후 내내 서류 분류하고 한두 시간 정도 옮기러 왔다갔다 했나봐. ”

 

“ 저라도 부르지 그러셨어요. 선배님 팔 힘으로는 한 번에 몇 권 옮기지도 못하시면서. 벌써 수십 번은 왕복했겠네요. 아니면 수레라도 찾아달라고 하실 것이지. ”

 

“ 수레는 벌써 대외교류부에서 다 가져갔어. 거기도 서류랑 자료 옮기고 있거든. 감시분석부는 그나마 운이 좋았네, 서류 정리 폭탄 안 맞아서. ”

 

“ 저희 건 이미 감사 받을 때 제가 다 옮겼었어요... 그때도 한참 걸렸어요. 하여튼 앞으로는 이런 거 혼자 다 하지 마세요. 무슨 힘이 있다고. ”

 

“ 그래도 내 업무랑 관련 있는 거잖아. 그리고 네가 무슨 머슴이니, 안 그래도 가뜩이나 국장부터 시작해서 윗사람들도 툭하면 너 불러서 무거운 거 나르게 하고 일 시켜먹는데 왜 나까지 그래야 되니. 하여튼 고마워, 문서고 다 왔다. 여기 놓으면 돼. 고마워, 다냐. ”

 

 

베르닌은 캐비닛에 장부들을 분류해 꽂는 것을 도와준 후 알렉산드라와 함께 문서고를 나왔다. 무거운 장부들을 계속 옮기느라 지쳤는지 알렉산드라가 너무 힘들어보였기 때문에 뒤뜰의 배추밭 쪽으로 데리고 나가서 바람을 좀 쐬게 했다. 알렉산드라는 납작한 돌멩이 위에 주저앉더니 숨을 몰아쉬며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반쯤 풀어진 머리채가 바람을 맞아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생각난 듯 알렉산드라가 주머니에서 작은 꾸러미를 꺼내더니 부스럭거리면서 종이를 펼쳐 소시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물이 든 깡통 옆에 소시지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 고양이 한두 시간 전에 제가 밥 줬어요. 지금쯤 밖에서 다른 놈들 갈구고 있을 걸요. ”

 

“ 아니야, 그래도 5시에서 6시 정도 되면 어슬렁어슬렁 이쪽으로 다시 와. 내가 맨날 퇴근 전에 이거 주고 가거든. 걔 얼마나 똑똑한데. 지난번에는 그 녀석이 은혜 갚는다고 사무실 내 자리에 쥐랑 바퀴벌레 물어다놓고 가서 나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어. ”

 

“ 아, 선배님한테도 그랬구나... 저한테도 그랬어요. ”

 

 

베르닌은 왕재수가 바퀴벌레 곱등이 쥐 시체를 보고 기절했던 때를 떠올리고 쿡쿡 웃었다. 알렉산드라는 깡통 언저리에 묻어 있는 먼지와 흙을 탈탈 털면서 방긋 웃었다.

 

 

“ 그래도 고양이가 추운 겨울을 잘 버텨내서 다행이야. 창고 구석의 나무상자 네가 갖다 놓은 거지? 잘했어. ”

 

“ 예. 근데 전 담요 깔아줄 생각은 못했어요. 그 무릎담요는 선배님이 갖다놓으신 거죠? 미셴카가 그 담요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잘 자더라고요. ”

 

“ 어차피 낡은 담요였는걸. 근데 너 그 고양이한테 이름도 붙여줬구나. 고양이한테 사람 이름 붙여줬네. ”

 

“ 어, 예... 그게... ”

 

“ 어머, 그거 혹시 너랑 같이 사는 그 꽃돌이 이름 아냐? 걔 이름이 미하일이었던 것 같은데. ”

 

엇, 아, 아니에요! 우연의 일치예요! 예, 옛날에 키우던 고양이 이름이 미셴카... 진짜 아니에요! 그 자식 이름 붙인 거 아니에요! ”

 

 

베르닌은 매우 당황했다. 망할 놈의 검정고양이 때문에 왕재수와의 관계에 대해 더 오해를 사는 건 정말 질색이었다. 알렉산드라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베르닌은 알렉산드라가 웃는 걸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퍼뜩 그는 보랴의 파티 생각이 났다.

 

 

“ 선배님, 오늘 저녁에 뭐하세요? ”

 

“ 별 거 없는데. 집에 가려고 했어. 저녁이나 차려먹고 쉬겠지 뭐. 왜? ”

 

“ 아, 저... 아는 사람 생일인데 친구랑 같이 오라고 했거든요. 보랴라는 사람인데 스베촉이라는 식당 요리사고요, 굉장히 착하고 재밌어요. ”

 

“ 어머, 나 스베촉 가끔 가는데. 거기 음식 맛있어. ”

 

“ 아, 그렇구나. 같이 가실래요? 극장 쪽 사람들도 올 거예요. 왕재수, 아니 미하일도 올 거고요. 보랴가 요리를 잘 하니까 맛있는 것도 많이 나올 거고. 저, 낯선 사람들만 있어서 아무래도 좀 그런가요? ”

 

 

베르닌은 알렉산드라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낯을 가리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의 생일 파티에 가려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잠시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곧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응, 가지 뭐. 매일 회사랑 집만 오가니까 정말 질렸어. 네 친구들이면 다 착하고 좋을 것 같아. 같이 가. ”

 

 

 

 

*   *   *

 

 

 

 

보랴의 집은 구시가지의 극장 거리 뒷골목에 있었다. 들어가는 골목도 꼬불꼬불한데다 옛날 건물이라 주차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으므로 왕재수가 알려준 대로 극장 주차장에 댔다. 막 차에서 내리는데 왕재수가 나쟈와 함께 나오는 게 보였다. 나쟈는 베르닌을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했다. 연습이 힘든지 얼마 전에 봤을 때보다 살이 쭉 빠져 있었지만 표정은 아주 밝았다. 베르닌은 알렉산드라를 그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알렉산드라는 왕재수가 여자를 만날 때마다 어김없이 보여주는 그 황홀한 미소와 상냥한 인사에 잠깐 얼굴을 붉혔다. 베르닌은 ‘제발 저놈의 서비스 매너에 속지 마세요!’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왕재수는 앞장서서 능숙하게 좁은 골목들을 이리저리 돌며 그들을 안내했다. 보랴의 집에는 이미 여러 차례 가본 것 같았다. 보랴가 사는 아파트는 옛날 건물이라 제정 시대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겉보기는 고풍스럽고 아름다웠지만 역시나 안뜰로 들어서니 어둑어둑한데다 여기저기 페인트가 벗겨지고 파이프가 휘어진 것이 낡은 건물 티가 났다.

 

 

“ 이쪽으로 와. 여기 엘리베이터 없거든. 계단으로 올라가야 돼. ”

 

“ 역시 옛날 건물은 불편하다니까. 신시가지가 살기는 편하지. ”

 

 

베르닌이 투덜대자 왕재수가 고개를 저었다.

 

 

“ 난 여기가 더 좋은데. 우리 아파트는 촌스러워. 여기는 좋아. 레닌그라드에도 이런 건물 많거든. ”

 

“ 겉모습만 번드르르하면 뭐하냐. 여기 쥐랑 바퀴벌레 엄청 많을 거야! 너 거기 발 조심해! 그쪽에도 구멍 잔뜩 있네! 그런데서 벌레 나온다고! ”

 

 

왕재수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금세 눈이 둥그렇게 커지면서 겁에 질려 눈물을 글썽거릴 기세였지만 나쟈와 알렉산드라 때문인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면서 계단으로 후다닥 뛰어올라갔다. 알렉산드라가 베르닌의 손목을 살짝 꼬집었다.

 

 

“ 너 왜 그러니, 미샤는 레닌그라드에서 살다 왔잖아. 고향 생각나서 이 건물이 좋다는 건데 안됐잖니. ”

 

“ 아아, 선배님도 이미 걸려들었군요. ”

 

“ 뭘 걸려들어? ”

 

“ 아니에요... 리자도 그렇고... 렐랴도... 다들 저 녀석만 보면 편을 들고... ”

 

 

나쟈가 수줍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 전 다냐 얘기 이해해요. 스네고로드도 옛날 건물들이 많은데 이렇게 근사한 스타일도 아니고 목재로 만들어서 진짜 벌레랑 쥐가 많거든요. 발레학교 기숙사는 신축 건물이라 그런지 진짜 깨끗하고 편하더라고요. 전부 미샤 덕분이에요. 여기로 데려와준 것도 그렇고 기숙사도 원래 방이 안 나는 건데 교장 선생님에게 얘기해서 넣어줬어요. ”

 

 

잘 나가다가 결국은 왕재수 칭찬이라니 역시 여자들은 다 똑같은 게 분명했다. 뭔가 섭섭했지만 하여튼 베르닌은 나쟈와 알렉산드라를 데리고 왕재수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보랴의 집은 3층에 있었다. 막 3층에 다 올라왔는데 복도에서 낯익은 금발 머리가 나타났다. 바냐 투레츠키가 이번에는 형광 오렌지색 재킷을 입고 역시 배지를 주렁주렁 단 채 복도로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투레츠키는 왕재수를 발견하고는 휘파람을 불면서 뽀뽀를 하고는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오우, 우리 이쁜이. 꽃미남, 프리티, 미인 중의 미인. 반갑기도 해라. ”

 

“ 안녕, 바냐. ”

 

“ 오랜만이네. 요즘 왜 안 왔냐, 너 보라고 좋은 거 많이 갖다놨는데. ”

 

“ 좀 바빴어. ”

 

“ 너 아프기라도 했냐? 살 빠졌구나. 허리가 한줌이네. 그래도 워낙 예쁘니까 괜찮아. 우리 이쁜이 오랜만에 보니까 기분이 좋네. ”

 

 

베르닌은 투레츠키가 왕재수의 허리와 허벅지에서 손을 떼지 않았기 때문에 점점 기분이 나빠져서 저놈을 한 대 갈길까 말까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때 투레츠키가 왕재수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삐쭉 내밀더니 갑자기 안경을 벗고는 눈부시게 화사한 미소를 마구 방출하며 달려갔다.

 

 

“ 아니, 사셴카! 이게 얼마만인지! 그때 전화만 하고 얼굴 한번 보자고만 하더니. 여기서 보는군요! 잘 있었어요? ”

 

 

그러더니 투레츠키가 왕재수에 이어 알렉산드라를 와락 껴안고는 뺨과 입술에 뽀뽀를 했다. 알렉산드라는 또다시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활짝 웃었다.

 

 

“ 바냐, 진짜 오랜만이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 너무 반갑다. 다냐랑은 전에 본 적 있지? ”

 

“ 그럼요, 소개해주신 덕분에 나랑 친구 먹었죠. 우리 동갑이더라고요. 그건 그렇고 사셴카 요즘 좋은 일 있나보네요. 어쩌면 이렇게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지! 다냐, 너 모르지? 내가 옛날에 사셴카 짝사랑했던 거. 내가 얼마나 쫓아다녔는데. ”

 

“ 그만해, 바냐! 그렇게 얘기하면 다냐가 진짠줄 알잖아. ”

 

“ 이런, 섭섭한데요. 저 진짜 좋아했었다고요. 어떻게 안 좋아합니까, 국장에게 쪼일 때마다 이렇게 귀엽고 상냥한 선배님이 옆에서 도와주고 다정하게 위로해주는데. 엇, 그러고 보니 다냐와 함께 오신 건가요? 설마 둘이? 흠, 축하드립니다. 다른 녀석이면 한 대 팼을 텐데 다냐는 소중한 벗이니 제가 양보해야겠군요. ”

 

 

알렉산드라는 다시 얼굴을 빨갛게 붉히더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바냐.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오늘 다냐 친구가 생일이라고 해서 같이 온 거야. ”

 

“ 아 그래요? 보랴 말씀이군요. 좋은 녀석이죠. 하여튼 다냐랑 사귀는 게 아니라 이거죠. 그럼 조만간 우리 사무실에 놀러오세요. 그간 쌓였던 얘기도 하고 좋은 것도 한 잔 드릴 테니. 다냐, 너도 와. 아 그렇지. 그때 그 파인애플은 어땠냐? 여자가 좋다고 하든? 그거 먹고 뜨거운 밤을 보내는 데 성공했어? ”

 

“ 앗, 어... 파인애플, 그 통조림... 으응... ”

 

 

베르닌은 뜨끔하며 왕재수 쪽을 쳐다보았다. 왕재수는 여자니 뜨거운 밤이니 하는 소리에도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투레츠키와 그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 어, 저... 근데 넌 왜 안 들어가는 거야? 너도 보랴 생일 파티에 온 거 아니야? ”

 

“ 아, 생일 파티. 우린 공적인 사이라서. 난 일하는 관계에서 사생활로 얽히는 건 안 좋아하거든. 그래서 손님들 오기 전에 선물만 주고 가는 거야. 잘 놀다 가라. 사셴카, 그럼 전 이만. 꼭 놀러 와요. ”

 

 

투레츠키는 알렉산드라의 손등에 뽀뽀를 한 후 계단으로 내려가려다 말고 왕재수를 다시 한 번 꼭 껴안으며 뺨을 비볐다.

 

이쁜이 토요일에는 올 거지? 토요일 지나면 프랑스 잡지들은 다른 데로 넘길 거야. 그러니까 꼭 보러 와. ”

 

 

왕재수는 고개를 까딱거렸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투레츠키가 발걸음도 가볍게 계단을 내려간 후 베르닌은 왕재수의 팔을 낚아채 복도 구석으로 데려가서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 너 행여나 토요일에 거기 갈 생각 꿈에도 하지 마. ”

 

“ 잡지 보고 싶은데... ”

 

안 돼! 신작 며칠 남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저 자식이랑 엮이지 마! ”

 

“ 파인애플도 구해주고 괜찮은 녀석인데. ”

 

안 돼! 안된다고 했다! 너 진짜... 방금도 저 자식이 집적대고... ”

 

 “ 바냐는 그런 거 아니야. 장난치는 거야. ”

 

“ 누가 장난을 그런 식으로 쳐! 저 자식은 위험하단 말이야. 전에도 대놓고 너한테 지저분한 말 하고... ”

 

“ 어휴 지겨워. 알았어. 근데 여자들 저렇게 세워놓을 거야? ”

 

 

베르닌은 아차 싶어서 얼른 돌아섰다. 다행히 알렉산드라와 나쟈는 둘이 금방 친해졌는지 복도에 서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워들어보니 투레츠키가 미남이란 얘기인 것 같아서 베르닌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   *   *

 

 

 

 

파티는 아주 즐거웠다. 보랴는 험상궂은 인상과는 달리 친구들이 많았다. 여기저기 손님들이 북적거렸는데 다들 편하게 드나드는 사람들인지 의자가 모자라면 그냥 바닥에도 앉고 창턱에도 걸터앉았다. 식당 동료들이 종이로 고깔모자를 만들어서 씌워주자 보랴는 화도 내지 않고 벙긋벙긋 웃으면서 모자를 내내 쓰고 있었다. 베르닌 일행이 들어가자 굉장히 반갑게 맞아주었다. 알렉산드라를 소개해주자 꼭 왕재수에게 하듯이 친절하고 살가운 말투로 인사를 하고는 안쪽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남자 하나에게 일어나라고 윽박질러서 의자를 내주었다. 알렉산드라가 머뭇거렸다.

 

 

“ 아니, 저... 전 괜찮은데... 저 분이 먼저 와서 앉아 있었... ”

 

“ 저 녀석은 괜찮아요. 사내들은 아무 데나 앉아도 상관없어요. 야, 파블릭! 너도 일어나! 아가씨한테 자리 양보해! ”

 

 

옆자리에 있던 다른 남자도 여지없이 의자를 뺏겼다. 보랴는 알렉산드라와 나쟈를 앉혀 주고는 매의 눈으로 옆을 또 훑어보더니 더 이상 자리를 내줄 남자들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잡동사니들이 잔뜩 쌓여 있던 1인용 소파를 질질 끌고 왔다. 그리고는 한방에 물건들을 쓸어버린 후 왕재수를 끌어다 앉혔다. 왕재수가 항의했다.

 

 

“ 난 앉기 싫어! 그리고 여자들 또 올 거잖아. 걔들 앉혀! ”

 

“ 아니야, 이제 손님들 다 왔어. 너는 아기니까 여기 앉아야 돼. 그리고 여자들이 다 너만 보고 있으니까 여기 있어줘야 되는 거야. ”

 

“ 그게 미남의 자리란 거지. ”

 

 

한쪽에서 오케스트라 여자 동료와 샴페인을 마시고 있던 코즐로프가 눈을 찡긋하며 농담을 했다. 왕재수는 툴툴거리면서도 그대로 앉았다. 베르닌은 알렉산드라에게 자기가 아는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래봤자 코즐로프 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토냐와 가릭도 와 있었다. 왕재수가 데리고 왔다고 했다. 토냐는 베르닌을 보고는 뛸 듯이 반가워했다.

 

 

“ 다냐! 오랜만이에요! ”

 

“ 어, 정말이네요! 이제 다리는 괜찮아요? ”

 

“ 네. 내일부터 연습 시작하려고요. 정말 고마웠어요. ”

 

“ 여긴 저랑 같이 일하는 알렉산드라예요. 이 친구들은 토냐랑 가릭인데요, 발레단 무용수들이에요. ”

 

 

알렉산드라는 토냐와 가릭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다가와서 알렉산드라와 나쟈에게 인사를 하고 말을 걸었다. 베르닌이 굳이 이 사람 저 사람 소개를 시켜줄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다들 소탈했고 유머가 넘쳤다. 너도나도 새로 온 손님들인 토냐와 나쟈, 알렉산드라 곁으로 다가와서 잘해주었다. 게다가 여자들은 코즐로프와 보랴의 말대로 왕재수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렸다. 보기만 하면 얼굴을 붉히며 까르르 웃고 음료수를 따라주고 난리였다.

 

 

보랴는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역시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가브릴로프 남자였다. 모여든 손님들은 다같이 우렁차게 생일 축하 노래를 합창했고 보랴가 초를 끄자 박수를 치고 환성을 지르고 ‘만세 만세 보랴 만세!’ 하고 제창을 하고는 생일 노래를 두 번이나 더 불렀다. 샴페인도 땄고 케익도 잘랐다. 베르닌은 내심 그 굉장한 메도빅이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스메타나 크림과 자두, 딸기가 겹겹이 올라간 거대한 생일 케익을 보자 정신이 혼미했다. 엄청나게 맛있어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는데 왕재수가 손등을 탁 쳤다.

 

 

“ 야! 이건 디저트잖아. 다른 거 다 먹고! ”

 

“ 어... 하지만 저런 케익을 어떻게 보고만 있냐! ”

 

“ 괜찮아, 먹어 먹어. 우리 집에선 순서 같은 거 지킬 필요 없어. 먹고 싶은 거 먹으면 돼. 우리 아가, 너도 이거 한 조각 먹어보렴. 이거 그렇게 단 거 아니야.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가 직접 구워준 거야. ”

 

 

왕재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정말?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오셨어? ”

 

“ 생일 맞은 사람이 직접 요리를 하는 건 안 될 말이니까요. ”

 

 

백발의 노부인이 주방으로부터 나오며 왕재수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양 손에 푸짐한 쇠고기찜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통닭구이 접시를 들고 있는 그 우아한 노부인은 바로 종교박물관의 아말리야 루카셴코였다. 베르닌은 요리 대회 때 맛봤던 그 엄청난 생선파이를 떠올렸고 자기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켰다. 왕재수는 아말리야로부터 접시를 받아들어 너무나 당연한 듯 베르닌에게 넘겨주고는 그녀를 자기가 앉아 있던 소파로 인도했다.

 

 

모두가 아말리야를 보더니 반가워했다. 보랴와는 막역한 사이라고 했다. 생일 파티 음식은 모두 아말리야의 솜씨였다! 소박하면서도 아주 맛있는 요리들이 줄줄이 나왔다. 비트 완두콩 샐러드부터 시작해 청어 절임, 쇠고기찜, 통닭구이, 생선수프, 허브 감자구이, 진하고 달콤한 열매즙 음료와 직접 담근 크바스 등등 끝이 없었다. 입에 닿는 순간 살살 녹는 것 같았다. 다들 이렇게 맛있는 파티 요리는 처음이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베르닌은 정신없이 먹다가 뒤늦게 왕재수를 좀 챙겨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 새 코즐로프가 왕재수의 옆에 와서 접시에 각종 요리를 덜어주고 있었다. 보는 눈만 없었다면 하나하나 입에 넣어줄 기세였다. 나쟈는 보랴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방글방글 웃으며 스네고로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알렉산드라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수프와 버섯파이를 먹고 있었다.

 

 

“ 다냐, 파이 진짜 맛있어. 좀 먹어봐. ”

 

“ 저 벌써 그거 두 개나 먹었어요. 이 열매즙 좀 드셔보세요. 진짜 달고 진해요. 선배님 감기 기운 있다고 하셨잖아요. ”

 

 

알렉산드라는 열매즙을 한 모금 마시더니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아말리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우와, 이거 진짜 맛있다.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이 열매즙은 어떻게 담그셨어요? 이렇게 진하고 달콤한 열매즙은 처음 마셔 봐요. ”

 

“ 크랜베리와 산딸기, 블랙베리로 만드는 거예요. 레시피 적어줄 테니 한번 해봐요, 어렵지 않거든. ”

 

“ 근데 저는 요리 솜씨가 형편없거든요. 심지어 커피도 맛없게 끓여요. ”

 

“ 그건 요리 솜씨가 형편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매일 일하느라 바빠서 그럴 거예요. 시간 날 때 수도원으로 놀러 와요, 열매즙 많이 있으니까 몇 병 줄게요. ”

 

“ 감사해요,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

 

 

그때 보랴가 알렉산드라에게 윤기가 흐르는 황금빛 납작한 사탕 같은 것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는 조그만 유리병을 하나 건네주면서 말했다.

 

 

“ 이거 먹어봐요, 알렉산드라. 레몬생강절임인데 감기에 아주 좋아요. 수도원 약초즙하고 꿀로 절여놓은 거라서 소화도 잘 되고 기관지에도 좋아서 감기 기운 같은 건 금방 다 날아갈 거예요. ”

 

“ 보랴의 레몬생강절임은 유명하지. ”

 

 

아말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드라는 환하게 웃었다.

 

 

어머나, 고마워요 보랴. 어릴 땐 엄마가 생강차 끓여주셨는데 지금은 아파도 그냥 홍차에 설탕이나 타먹고 말거든요. 고마워요. 옛날 생각나네요. ”

 

“ 에이, 설탕은 안돼요. 꿀이어야지. 가뜩이나 일하면서 사는 거 힘든데 잘 먹고 자기 몸 잘 챙겨야지. 주변 친구들도 보면 다들 바빠서 그런지 대충 먹고 툭하면 아프다니까요. 아 그렇지, 미셴카! 우리 아기도 이것 좀 먹자. 기관지에 좋은 거야. ”

 

“ 보랴, 나 단 거 안 먹는 거 알면서 그래. ”

 

“ 약이다 생각하고 먹는 거야. 넌 이런 거 많이 먹어야 돼. ”

 

 

내키지 않아 하는 왕재수에게 알렉산드라가 레몬생강절임을 하나 포크로 찍어서 권했다.

 

 

“ 먹어봐요, 미셴카. 많이 달지 않아요. 굉장히 맛있어요, 상큼하고. ”

 

 

여자에게 투정을 하거나 짜증을 내는 법이 없는 왕재수가 할 수 없이 알렉산드라가 건네준 레몬생강절임을 먹더니 눈을 반짝 빛냈다.

 

 

“ 어, 정말 맛있네. 별로 달지도 않고! 맵지도 않아. ”

 

“ 그렇지? 너도 한 병 싸 줄 테니까 매일 점심 때 한 숟갈씩 먹어라. ”

 

“ 생일인 사람이 왜 거꾸로 선물을 주는 거야! ”

 

“ 뭐 어떠냐, 난 내가 만든 거 맛있게 먹어주는 게 제일 좋은 선물이야. ”

 

 

왕재수는 활짝 웃었다. 베르닌은 알렉산드라와 왕재수가 둘 다 그렇게 밝게 웃는 모습을 보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왕재수는 레몬생강절임을 두어 개 접시에 덜더니 나쟈에게 가서 먹어보라고 권해주었다. 스네고로드에서 직접 데려와서 그런지 살뜰하게 잘 챙겨주는 것 같았다. 나쟈도 생강절임을 먹어보더니 맛있다면서 감탄했다.

 

 

 

 

*   *   *

 

 

 

 

어느 정도 음식을 먹고 난 후 배도 부르고 기분도 좋아진 손님들은 거실로 나왔다. 카드놀이를 하고 수수께끼 놀이도 했다. 베르닌과 알렉산드라도 어울려서 재미있게 놀았다. 알렉산드라는 스무고개를 제일 먼저 맞춰서 예쁜 목도리까지 받았다. 그러다 보랴가 브이소츠키 노래를 틀어놔서 다들 합창을 하기 시작했는데 카세트 플레이어가 낡아서 그런지 지지직거리다 꺼져버리고 말았다. 아쉬워하자 코즐로프가 구석에 굴러다니던 기타를 가져오더니 딩딩딩거리며 연주를 시작했다. 나쟈가 꺅 하고 박수를 쳤다.

 

 

“ 어머, 로만 오시포비치! 바이올린만 켜는 줄 알았어요! 기타도 칠 줄 아시네요! 그것도 브이소츠키라니 멋있어요! ”

 

“ 바이올린은 밥줄이고 기타는 재미로 하는 거지. 우리 미셴카가 피아노를 잘 치는데 여긴 피아노가 없으니까 좀 아쉽네. ”

 

나 바이올린도 켤 줄 알아! 노래도 얼마나 잘하는데! 나 절대음감이야! 음악 천재야!

 

 

신이 난 왕재수가 소파 위로 뛰어올라갔다.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부추기자 흥에 겨워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노래를 잘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브이소츠키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르는 줄은 몰랐다. 사람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치자 더욱 신이 난 왕재수는 음유시인의 우울한 노래에 이어 대중가요도 부르고 심지어 옛날 노래까지 줄줄이 불러댔다. 모두가 손뼉을 치고 박자를 맞추며 따라 불렀다. 얌전한 줄만 알았던 나쟈도 숨은 끼가 발동했는지 소파로 올라가 왕재수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서로 팔짱을 낀 채 발레가 아니라 재즈 스텝까지 밟으며 춤을 췄다.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다들 발을 구르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베르닌은 성인이 된 후 이렇게 재미있고 신나는 파티는 정말 처음이었다.

 

 

‘ 저 녀석 진짜 잘 노는구나. 분위기도 잘 띄우고. 저래서 파티를 좋아한다고 했구나. ’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부르다가 베르닌은 술기운이 올라와서 조금 어지럽기도 하고 덥기도 해서 잠깐 바람이라도 쐴까 하고 베란다 쪽으로 갔다. 창문을 열고 나가니 밤공기가 시원했다. 두 팔을 쭉 뻗으며 찬 공기를 들이마시다가 베르닌은 구석에 있는 누군가에게 걸려 넘어질 뻔 했다.

 

 

“ 죄송해요. 어두워서 못 봤어요. ”

 

“ 아니에요, 괜찮아요. ”

 

 

목소리를 들으니 토냐 같았다.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다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은 안 보였지만 빨간 곱슬머리를 보니 토냐 맞았다. 그런데 토냐가 어깨를 들먹이며 조그맣게 흐느끼고 있었다!

 

 

“ 어, 토냐. 지금 우는 거예요? ”

 

“ 아니에요, 다닐.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저 그냥 여기 좀 있을게요. ”

 

“ 무슨 일이에요, 토냐. 혹시 다리 아픈 거예요? 그럼 추운 데 있으면 안 되는데... 저랑 같이 들어가요. 다리 찜질해드릴게요. 보랴한테 습포 같은 거 있을 거예요. ”

 

“ 아녜요, 안 아파요. 흑... 안 아파도 다 소용없어요... ”

 

 

베르닌은 걱정이 되어서 토냐의 곁으로 다가가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았다. 토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베르닌이 손수건을 꺼내주자 눈과 코를 닦았지만 눈물이 계속 나왔다.

 

 

“ 왜 그래요, 토냐. 이제 다리도 다 나았고 무대에도 다시 올라갈 수 있잖아요. 혹시 기분 상한 일이라도 있었어요? 손님들 중에 무례하게 대한 사람이라도 있었던 거예요? ”

 

“ 아녜요, 다냐. 아... 다 소용없어요. 흑... 나쟈... 귀여운 앤데... 착한 것도 알고 다 아는데 너무 속상해요. ”

 

“ 어... 나쟈랑 싸운 거예요? 친한 줄 알았는데... ”

 

“ 아니요, 싸우긴요... 나쟈는 저랑 타마라 언니를 엄청 따라요. 그게 아니고... 저... 저... 미샤가... 미샤가 나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엉엉... 저 정말 처음부터 미샤 좋아했는데... 말 못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나쟈랑... 흑... 다닐, 너무 속상해요. 전 미샤가 되게 눈 높아서 우리 같은 시골 무용수들한테는 관심 없을 줄 알고 고백도 못 했는데 나쟈랑... 어흑... ”

 

 

베르닌은 당황했다. 어리둥절해지기까지 했다.

 

 

“ 어, 토냐. 그게요... 걔는 그냥 나쟈가 적응 잘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예요. 재능 있는 무용수라고 했어요, 그래서... ”

 

“ 여기도 저한테는 그냥 가릭이랑 가라고 하더니 나쟈는 자기 파트너로 데리고 오고... 와서도 계속 나쟈랑 얘기하고. 옆에 딱 붙어서 챙겨주고 그렇게 상냥하게 쳐다보고 웃고... 신작 때문에 그렇게 바쁜데도 일주일에 두 번씩 꼭 발레학교 가서 나쟈 연습 봐주고. 전 알아요, 다닐. 미샤는 나쟈한테 반한 거예요. 그러니까 스네고로드에서 그 무지막지한 남자들이 위협하는데도 나쟈 데려오고... 너무 슬퍼요. 저 정말 미샤 좋아하는데...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자식은 바이올린 깡패랑 사귄다고요! 나쟈고 렐랴고 당신이고 다 소용없어요! 걘 아저씨들을 좋아한단 말이에요!’ 라고 소리쳐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토냐를 살살 달랬다.

 

 

“ 그렇지 않아요, 토냐. 제가 미샤랑 시간을 많이 보내잖아요. 걔는 나쟈를 여자로 생각 안 해요. 그냥 뒤늦게 재능을 발견한 친구라서 도와주고 싶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걔는 나쟈 뿐만이 아니고 여자한테 별로 관심이 없어요. 알잖아요, 신작도 준비해야 되고... 예술가인지 뭔지잖아요. 그래서 누굴 사귈 여력이 없는 것 같아요. ”

 

“ 정말요? 나쟈랑 그런 사이 아닌 거예요? 나쟈 좋아하는 거 아닌 거예요? 남자들은 맘에 드는 여자 있으면 친절하게 해주잖아요... 가릭이 저한테 그러는 것처럼... ”

 

“ 쟨 여자들한테는 다 친절해요. 남자들한테는 싸가지 없게 굴고! 나쟈랑은 진짜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근데 가릭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솔직히 말해서 전 가릭이 훨씬 나은 거 같아요. 착하고... 당신을 엄청 좋아하잖아요. 옛날부터 많이 좋아했대요. 가릭 괜찮지 않나요? 당신한테 아주 잘해줄 거예요. 미하일 쟤는 자기 잘난 게 최우선인 애라고요. 가릭 같은 남자가 훨씬 낫죠. ”

 

 

토냐는 고개를 저었다.

 

 

“ 가릭이랑은 안돼요. 우리는 발레학교 동기라서 어릴 때부터 그냥 소꿉친구였어요. 가릭은 귀엽고 착하긴 한데 도무지 남자로 안 보이는걸요. 미샤는 처음 보자마자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그때 돈키호테 때도 너무 멋있었고... 저한테 너무 잘해줘서 잠깐 기대까지 했어요... 혹시 저한테 관심 있나 하고요. 흑... 너무 바보 같아... ”

 

“ 어... 아니에요, 토냐. 바보 같은 거 아니에요. 울지 마세요. ”

 

“ 있잖아요, 다냐. 나쟈한테 재능 있다고 했잖아요, 맞아요. 저도 알아요. 미샤가 걜 특별하게 생각하는 거요. 여자로서 좋아하는 거 아니라 해도 질투 나요. 저 너무 못됐나 봐요. 흑... 저도 알아요, 전 재능도 별로 없고 그냥 평범한 무용수인걸요. 그 돈키호테 때도 1군 애들이 스네고로드에 갇히지 않았으면 키트리 역은 평생 꿈도 못 꿨을 거예요. 그래도 미샤 덕분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 같았어요. 저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근데 시계탑에서 다쳤잖아요. 쉬는 동안 몸도 무거워지고... 다시 퇴보한 것 같아요. 쉬운 스텝도 잘 안 되더라고요. 미샤가 절 여자로 안 봐주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무용수로는 인정받고 싶은데 그것도 안 될 것 같아서 너무 속상해요. 미샤는 천재니까 저 같은 평범한 무용수 마음을 모를 거예요. 이러다 금방 저 같은 건 잊어버릴 거 같아요. 그럼 전 다시 군무진으로 내려가겠죠. 다시는 기회를 얻지 못할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면 잠도 안 오고 마음이 아파요. ”

 

 

베르닌은 토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재수를 향한 짝사랑 때문에 울 때는 답답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어쩐지 토냐의 마음이 이해도 되고 조금 이입도 되는 것 같았다. 32회전을 못해서 동동거리다가 왕재수의 지도를 받고 성공하자 기뻐하던 토냐의 모습이 생각났다.

 

 

“ 아니에요, 토냐. 그때 키트리 잘 췄어요. 왕재수, 아니 미샤도 알아요. 당신이 열심히 하는 거. 지금은 다쳐서 쉬었기 때문에 몸이 잘 안 움직이는 거예요. 연습하면 다시 좋아질 거예요. 저기, 토냐... 미하일도, 걔도 그때 힘들어 했어요. 막심이 아파서 갑자기 바질 춰야 했을 때요. 일 년이나 쉬어서 몸이 안 움직인다고 했어요. 진짜 괴로워했어요. ”

 

“ 저랑 돈키호테 췄을 때요? 말도 안돼요. 그때 미샤 진짜 엄청났어요. 전 그렇게 잘 추는 사람 처음 봤어요. 발이 땅에 닿지도 않았는걸요... ”

 

“ 제 눈에도 그렇게 보였는데 걘 아니래요. 몸도 무거워지고 뜻대로 안된다고, 관객들에게 이런 모습 보여줄 수 없다고 정말 속상해했어요. 그러니까, 토냐. 제 얘긴요. 자기한테 만족하는 사람은 없는 거 같아요. 미하일 보세요, 그렇게 천재라고 하는데도 자기 탓을 하고 실력 떨어졌다고 괴로워하고... 사람은 원래 그런 것 같아요. 근데 어떻게 자신한테 100퍼센트 만족하고 살아요.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고 사는 거죠. 그러니까 자꾸 자책하지 말고 힘내요. ”

 

“ 고마워요, 다냐. 진짜 고마워요. 있잖아요, 좀 힘이 되는 것 같아요. ”

 

 

토냐가 베르닌의 손을 꼭 잡더니 뺨에 뽀뽀를 했다. 창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가면서 토냐가 물었다.

 

 

“ 근데 진짜예요? ”

 

“ 뭐가요? ”

 

“ 미샤요. 나쟈 좋아하는 게 아니고 그냥 돌봐준다는 거. 여자 사귈 여력이 없다는 거. ”

 

“ 네. 진짜예요. ”

 

“ 그렇구나. 그래도 좀 희망이 생겼어요. ”

 

 

토냐가 처음으로 방긋 웃었다. 베르닌은 도대체 왕재수가 여자 사귈 여력이 없다는 게 웃을 일인지, 무슨 희망이 있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차라리 나쟈와 사귀는 거라면 마음이 돌아서서 토냐 같은 다른 여자와 사귈 가능성이라도 있지 실지로는 여자에게는 한 톨도 관심이 없는 녀석이 아닌가. 토냐도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거실로 돌아왔더니 다들 여전히 신나게 놀고 있었다. 합창과 춤을 추는 시간은 끝났지만 코즐로프는 여전히 기타를 치고 있었고 보랴도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아말리야는 알렉산드라와 다른 여자들 몇몇에게 요리 레시피를 적어주고 있었고 다른 손님들도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이따금 왁자지껄 웃기도 했다. 왕재수와 나쟈가 같이 있으면 또 토냐가 속상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지만 다행히 그는 보랴와 코즐로프 사이에 끼어 있었다. 열심히 뭐라뭐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보랴는 그런 왕재수가 마냥 귀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토닥거리고 있었다.

 

 

베르닌은 토냐에게 시원한 주스를 한 잔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토냐는 컵에는 눈도 주지 않고 한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베르닌이 시선을 돌리니 가릭과 나쟈가 생일 케익 남은 것을 잘라서 접시에 담으면서 뭔가 재미있는 얘기라도 나누는지 친근하게 웃고 있었다. 토냐가 조그맣게 투덜댔다.

 

 

“ 뭐야, 무용수들이 케익 먹고... ”

 

“ 어... 저거 달지 않아요.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가 직접 구워서 달지 않고 맛있어요. 미하일도 먹었는걸요. 당신도 가서 맛 좀 보세요. 가릭한테 좀 잘라달라고 하면... ”

 

“ 됐어요. 가릭 지금 바쁘네요 뭐. 나쟈랑 신났네. 몸매 관리한다고 케익 같은 거 입에도 안 대더니... ”

 

 

토냐가 가만히 입술을 삐죽거렸다. 금세 표정이 샐쭉해지더니 가릭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말리야와 여자들이 있는 쪽으로 휙 가버렸다. 베르닌은 도대체 여자의 마음이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알렉산드라가 오랜만에 즐겁게 웃고 명랑하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같이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알렉산드라의 눈이 그렇게 밝은 하늘색인지 전에는 전혀 몰랐었다. 뺨이 상기된 채 소리 내어 웃으니 소녀처럼 보였다.

 

베란다 공기를 쐬고서 술에서 깬 베르닌은 다른 손님들과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눴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는 생일 케익도 한 조각 더 가져다 먹었다. 아말리야에게서 흰머리천사날개풀을 말려서 달이는 방법에 대해서도 배웠다. 한참 즐겁게 얘기하고 있는데 코즐로프가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거실 한쪽으로 끌고 가서 속닥거렸다.

 

 

“ 야, 잘 좀 해봐라. ”

 

“ 예? 뭐를요? ”

 

“ 여기 여자들 많잖아. 언제까지 그렇게 죽어라 야근만 하고 독수공방할래. 소피야는 어때? 나랑 같이 온 애 말야. 걔 은근히 괜찮아. 너 엮어주려고 내가 일부러 데리고 온 거란 말이다. 아까 소개시켜줬잖아. ”

 

“ 어, 아... 소피야... 저 금발 머리 아가씨 말이죠? 근데 보랴네 식당 동료랑 지금 완전 불꽃 튀기고 있는데요... ”

 

 

코즐로프는 소파 구석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는 두 남녀 쪽을 힐끗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 넌 어째 멍석을 깔아줘도 이 모양이냐. 아니면 나쟈를 공략해봐. 성격도 좋고 귀엽던데. 스네고로드에서 친해진 거 아니었냐? 토냐도 예쁜데. ”

 

“ 아니, 난 나쟈랑 토냐한테 관심 없거든요. 그냥 친구... ”

 

“ 아, 그렇지. 같이 온 여자가 있었지. 저 아가씨 괜찮구만. 더러운 KGB라서 웬만하면 말리려고 했다만 뭐 너도 같은 밥그릇이니까. 알렉산드라라고 했나? 재치도 있고 볼수록 귀엽네. 많이 조그맣긴 하지만 그게 또 매력일 수도 있으니까. 우리 아기도 조그만 것이 내 품에 쏙...

 

그건 당신이 너무 크니까 그런 거고요! 나 당신이 그런 말 할 때마다 진짜 적응 안 돼요. 미하일은 전혀 조그맣지 않다고요. 180에 가까운 애를!

 

그거랑 상관없어! 우리 아기는 비둘기처럼 조그맣다고! 품에 쏙 들어와서 솜사탕처럼 녹는 것이... ”

 

“ 으윽... 보랴도 그 자식한테 우리 아기라고 하고 당신도 우리 아기라고 하니 나 정말 닭살 돋아 미치겠어요. ”

 

“ 하여튼! 너 왜 우리 아기 얘길 하고 있냐. 내 말의 요지는 알렉산드라인지 하는 쟤랑 잘 해보란 거야. 쟤도 너한테 호감이 있으니까 알지도 못하는 사람 생일 파티에 따라온 거 아니겠냐! 여자는 싫은 남자와 파티에 가지 않는다고! 같이 있는 거 보니까 나름대로 잘 어울리던데. ”

 

“ 아니, 저... 알렉산드라는 그냥 회사 동료예요. 저한테 굉장히 잘해주는 선배라고요. 요즘 일 때문에 힘들어해서, 그래서... ”

 

너 그렇게 친구니 동료니 하고 선 긋다가 주변에 있는 좋은 여자들 다 놓친다! 답답해 죽겠네. 피 끓는 사내놈이 여자 하나 못 안아보고... ”

 

“ 아휴, 여자란 있다가 없다가 하는 거잖아요! 당신이라고 뭐 매일같이 여자가 있었던 건 아닐 거 아녜요! 당신이 무슨 저 녀석처럼 우주 최고 꽃미남도 아니고... ”

 

흥, 난 여자가 없을 땐 남자가 있었다고. 내 침대가 식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

 

 

베르닌은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해야 이 어색하면서도 화끈거리는 대화에서 벗어날까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보랴의 무릎에 반쯤 엎드려 있는 왕재수를 발견하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어, 쟤 왜 저러지? 아픈 거 아니야? ”

 

 

그 말에 코즐로프가 깜짝 놀라며 그쪽으로 뛰어갔다. 베르닌도 급하게 따라갔다. 가까이 가 보니 왕재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보랴의 무릎에 머리와 한쪽 어깨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보랴는 손바람으로 부채질을 해주면서 난감해 하고 있었다. 코즐로프가 왕재수의 어깨를 안아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 보르카, 얘 왜 이러는 거야. 아프다고 했어? ”

 

“ 아니, 그게 아니고... 나도 이럴 줄 몰랐네. 갑자기... ”

 

 

베르닌은 소파 아래 놓여 있는 유리잔을 보고 상황을 깨달았다.

 

 

“ 보랴, 얘한테 술 줬어요? ”

 

“ 어, 노느라 목마르다 해서 샴페인 좀 줬더니만 홀짝 마시더니 갑자기 내 무릎에 얼굴을 박네. ”

 

“ 아... 당신 몰랐군요, 얜 술 못 마시는데... 조금이라도 입에 대면 그 자리에서 기절이에요. 많이 줬어요? ”

 

“ 아니, 반 잔도 안 될 거야. 도수도 되게 약한 건데.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나랑 같이 있을 때 술 마신 적이 없어서 몰랐구나. 크바스 같은 것도 안 마셨거든. 아이고, 우리 아기는 진짜 아기였구나. 잘 돌봐줘야 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서 어쩌지. 술 때문에 아프면 큰일인데. ”

 

 

보랴가 굉장히 미안해했다. 코즐로프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샴페인 반 잔 정도면 괜찮아. 전에도 그냥 필름 끊겨서 한참 자고 나니까 괜찮더라고. 요즘 얘 잠도 못 자고 고생했으니까 차라리 이 기회에 푹 자는 게 나아. ”

 

“ 그래그래, 그럼 내 방에서 재울까. ”

 

 

보랴는 침실로 쓱 들어갔다가 투덜대면서 나왔다.

 

 

“ 젠장, 저 망할 녀석들이 내 침대까지 장악하고 술 퍼마시고 있네. 로만, 너 차 안 가져왔지? ”

 

“ 당연하잖아, 생일 파티니까 술 마시려고 안 가져왔지! ”

 

“ 아, 나 차 가져왔어요. 어차피 같은 아파트에 사니까 내가 데려갈게요. ”

 

 

베르닌이 나섰다. 잠시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코즐로프와 보랴 둘 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는 아빠, 하나는 애인인데 둘 중 누가 더 극성인지 구분이 안 가네요!’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베르닌은 보랴와 코즐로프가 왕재수에게 재킷을 입혀주는 동안 알렉산드라에게 갔다. 그녀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선배님. 저는 미하일이 많이 취해서 데려다 줘야 할 것 같아요. 더 계시다 가시겠어요? ”

 

 

알렉산드라가 퍼뜩 시계를 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어머나, 벌써 자정이 다 됐네!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나도 가야겠어. ”

 

“ 그럼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선배님 댁은 여기서 별로 안 멀잖아요. 내려드리고 갈게요. ”

 

“ 응, 잠깐만. 인사 좀 하고. ”

 

 

알렉산드라는 새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보랴가 알렉산드라에게 재킷과 상품으로 받은 목도리를 가져다주었다.

 

 

“ 정말 즐거웠어요, 보랴. 생일 축하해요. ”

 

“ 이제 몇 분 안 남았어요. 생일은 정말 빨리 지나간다니까. ”

 

“ 전 이렇게 즐거운 파티는 처음이었어요. 좋은 친구들이 많아서 행복하시겠어요. ”

 

“ 이제 내 친구들이 다 당신 친구들이니까 언제라도 놀러 와요. ”

 

“ 고마워요, 보랴. 레몬생강절임도 잘 먹을게요. ”

 

 

알렉산드라가 보랴의 뺨에 뽀뽀를 하고는 코즐로프 쪽으로 고개를 돌려 인사를 했다. 코즐로프는 왕재수를 들쳐 업느라 그렇게까지 다정한 인사를 나누지는 못하고 미소와 함께 짓궂은 농담을 했을 뿐이었다.

 

 

그냥 다닐이랑 둘이 들어가요. 이 녀석은 내가 집까지 업어다 줄 테니까. ”

 

“ 어머, 로만 오시포비치. 다리를 두 개나 건너시겠다고요? ”

 

 

알렉산드라는 다시 뺨을 붉히면서 활짝 웃었다. 베르닌은 입사 이후 몇 년을 통틀어 봐도 오늘 하루만큼 알렉산드라가 자주 웃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   *   *

 

 

 

 

 

코즐로프는 극장 주차장까지 왕재수를 업어다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기 집으로 데려가고 싶은 게 분명했지만 베르닌은 무언의 딱딱한 시선으로 안 된다는 신호를 분명히 전달했다. 만의 하나 왕재수가 밤중에 술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면 저 둘은 또다시 밤을 불태울 것이고, 그러면 왕재수는 또 눈이 퀭해지고 꾸벅꾸벅 졸고 계속 피곤해 할 것이 뻔했다!

 

코즐로프와 왕재수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알렉산드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 굉장히 자상하시네요, 로만 오시포비치. 취한 미샤를 여기까지 업어다 주시고. 엘리베이터도 없었고 여기까지 꽤 걸어야 했는데... 저는 극장 예술가들은 모두 굉장히 까칠한 줄 알았어요. 오늘 만난 분들 보니까 안 그렇네요. 다들 상냥하고 착해요. ”

 

“ 아,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여태 만난 KGB 중에 괜찮은 사람이 딱 두 명 있는데 하나는 저 녀석이고 하나는 당신이군요. 다른 놈들은 다 개자식들이었고. ”

 

로만!

 

 

베르닌이 확 째려보자 알렉산드라가 웃었다.

 

 

괜찮아, 다냐. 맞는 말인데 뭐. 그래도 우리를 괜찮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

 

 

베르닌은 차 문을 열었다. 코즐로프가 뒷좌석에 왕재수를 조심스럽게 태웠다. 그리고는 알렉산드라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왕재수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가볍게 키스를 했다.

 

 

“ 그럼 이만, KGB에서 온 미녀 스파이와 감시꾼 양반. 난 보랴랑 한 잔 더 하고 들어가지. ”

 

“ 나 보고 감시꾼이라고 하는 건 그러려니 하는데요, 알렉산드라는 스파이가 아니거든요! 등록부서 행정요원이라고요. ”

 

“ 다냐, 넌 농담도 이해 못하니. 미녀라고 해줘서 고마워요, 로만 오시포비치. 다음에 또 봐요! ”

 

 

베르닌은 대체 여자들의 마음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다시 한 번 되뇌었다. 차를 출발시켰을 때도 알렉산드라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조그맣게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알렉산드라의 집은 차로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베르닌은 지난번에 그녀를 바래다 준 적이 있어서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상품으로 받은 목도리를 펼쳐보기도 하고 목에 둘러보기도 하면서 좋아했다.

 

 

“ 이거 너무 예쁘지 않아, 다냐? 색깔도 근사해. ”

 

“ 어, 예... 외제인 것 같아요... ”

 

 

분명 투레츠키의 소굴에서 흘러나온 밀수품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해서 차를 세우고 문을 열어주자 알렉산드라가 내렸다. 그리고는 까치발로 서서 두 팔로 베르닌을 살짝 포옹하며 뺨에 뽀뽀를 했다.

 

 

“ 고마워, 다냐. 오늘 정말 즐거웠어. ”

 

“ 저도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스베촉에 같이 가요. 보랴한테 맛있는 거 해달라고 해요. ”

 

알렉산드라는 눈을 반달로 만들면서 웃었다. 가로등 램프 불빛 때문인지 엷은 푸른 눈이 에메랄드 녹색으로 보였다. 베르닌은 언제나 그녀를 동안의 귀여운 외모라고 생각했지만 눈으로 웃으면 정말 예쁘다는 것을, 얼굴 전체로 방긋 웃으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울지 않는 알렉산드라를 보는 것이 기뻤다.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조여 오듯이 기뻤다.

 

 

“ 다냐, 오늘은 모든 게 다 너무 좋아. 이렇게 좋았던 적이 별로 없어서 잠도 안 올 것 같아. ”

 

“ 엥, 그래도 꼭 주무셔야 돼요. 내일도 국장이 들들 볶을 텐데. 레몬생강절임 드시고 푹 주무세요. ”

 

“ 응, 너도 잘 자. 미하일도 잘 돌봐주고. 내일 봐! ”

 

 

알렉산드라는 목도리를 꼭 동여매고는 구두 굽 소리를 내면서 아파트로 뛰어 들어갔다. 베르닌은 잠시 그녀의 자그마한 실루엣이 현관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다시 차에 탔다.

 

 

왕재수는 집에 도착했을 때도 깨어나지 않았다. 베르닌은 혀를 찼다.

 

 

“ 어휴, 이 자식은 정말. 술이라면 냄새만 맡아도 정신 못 차리는 녀석이 어째서 샴페인을 넙죽 받아 마신 거야! 아무리 보랴가 줘도 그렇지! 이렇게 자기 몸을 안 챙기니까 이 모양 이 꼴이지! 내 팔자야. ”

 

 

베르닌은 왕재수를 업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왕재수네 열쇠를 찾기가 귀찮아서 그냥 자신의 집으로 갔다. 재킷과 신발을 벗겨주고 침대에 뉘어주자 왕재수가 몸을 뒤척이더니 끙끙거렸다.

 

 

“ 응... 목말라. ”

 

“ 알았어, 잠깐만. ”

 

 

베르닌은 물을 떠왔다. 왕재수의 어깨를 잡고 반쯤 일으킨 후 입술에 컵을 대주었다. 왕재수는 비몽사몽 상태로 물을 조금 마신 후 다시 베개에 머리를 던졌다. 그리고는 두 팔을 뻗어서 베르닌의 목을 껴안고 뺨에 입술과 코를 비볐다. 베르닌은 화들짝 놀랐다.

 

 

엇, 야! 나 바이올린 아저씨 아니거든!! 나 다닐이야!

 

“ 으응... 잘 자. ”

 

 

왕재수는 마주대고 있던 얼굴을 돌리기는 했지만 베르닌의 목을 두른 두 팔은 풀지 않았다. 울 때나 잠들었을 때는 언제나 그렇듯 몸이 사모바르처럼 따끈따끈했다. 그리고 좋은 냄새가 났다. 다 같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밥을 먹고 땀 흘리고 놀았는데 어째서 이 녀석은 이렇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나는지 이해가 안 갔다. 하긴 우주 최고 꽃미남이라는 놈이니 베르닌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게 당연했다.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왕재수의 팔을 풀어서 시트 위로 내려놓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왕재수는 잠결에도 보살핌을 받는 게 좋은 듯 가만히 미소를 띠었다.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조그맣게 종알거렸다.

 

 

“ 파티... 좋아. ”

 

“ 그래, 잘 놀더라. 그렇게 놀고 싶은 걸 여태 어떻게 참고 살았니. ”

 

“ 안아 줄 거지? 술 깨면... ”

 

 

반쯤 발음이 뭉개진 목소리로 왕재수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베르닌은 더욱 화들짝 놀랐다. 아무래도 그를 코즐로프라고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급하게 담요를 왕재수의 턱 아래까지 끌어올린 후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왕재수는 다시 조그만 한숨을 쉬더니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베르닌은 이상하게 가슴이 쿵쾅거려서 한동안 심호흡을 하고서야 샤워를 하러 갈 수 있었다. 비좁고 불편한 소파로 기어 올라가 잠을 청하면서 베르닌은 이제 취한 왕재수는 자기 집에서 재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   *   *

 

 

 

 

다음날 오후에 베르닌은 언제나처럼 극장에 갔다. 왕재수는 저녁 발레 공연 리허설에 신작 연습이 겹쳐서 굉장히 바빴다. 저녁 식사도 극장 카페인 차이카에서 대충 해결했다. 그날의 발레 공연은 백조의 호수였다. 워낙 자주 올라가는 공연이니 티무르 이즈마일로프에게 맡겨둬도 될 텐데 왕재수의 사전에 ‘공연을 맡긴다’ 란 표현은 없는 게 분명했다. 여전히 백스테이지를 오가며 무대 전체를 조망하고 무용수 몇몇의 동작을 교정하고 관객석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동시에 해내는지 신기했다. 심지어 호들갑을 떨거나 우왕좌왕하지도 않았다. 공연이 끝난 후 베르닌이 그 얘기를 하자 왕재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 그거야 난 천재니까. ”

 

“ 아, 그러시겠지. 물어본 내가 바보지. ”

 

“ 근데 너도 동시에 다 하잖아. ”

 

“ 뭐를? ”

 

“ 서무인지 뭔지. 별의별 쓰잘데 없는 일을 다 하잖아. 무슨 중요한 종이도 막 만들어내고. 도장도 찍어오고. 이거 하고 저거 하고. 국장이 시키는 거 다 하잖아. ”

 

“ 그건 내 업무니까 그렇지! 행정 업무! 서무! ”

 

“ 그러니까 너는 서무라서 동시다발적으로 종이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고, 난 극장 사람이니까 무대를 다룰 줄 아는 거지. ”

 

“ 그런가... 근데 넌 무용수였잖아. 감독이랑은 다른 거잖아. 용케 감독직도 잘 해내고 있네. ”

 

“ 그게 바로 내가 천재라는 증거 아니겠니. ”

 

 

왕재수는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으쓱거리지는 않았다. 무심한 말투로 덧붙였을 뿐이었다.

 

 

“ 나 예전에도 공연 많이 올렸어. 안무도 많이 하고. 그러니까 감독 같은 거 처음 하는 거 아니야. ”

 

“ 아, 그렇구나. 춤만 춘 거 아니었구나. ”

 

“ 응. 극장을 통째로 맡은 건 처음이지만. ”

 

“ 그래봤자 시골 극장이라며. ”

 

“ 그렇지, 그래봤자 시골 극장이지. 그래도 극장은 극장이니까. 관객은 다 같아. 모스크바든 레닌그라드든 여기든. ”

 

“ 정말? ”

 

“ 응. ”

 

 

베르닌은 잘난 척 하는 왕재수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굉장히 의외였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때로 왕재수는 그를 놀라게 만들곤 했다.

 

 

이미 밤늦은 시각이었다. 코즐로프는 전날 밤새 보랴와 술을 퍼마신 결과 숙취가 너무 심해져서 공연 연주를 마치자마자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왕재수는 그나마 연주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했다. 베르닌은 코즐로프가 술병이 나서 오늘도 왕재수와 밤을 불태우지 않게 됐으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 우리도 집에 가자. 너 빨리 들어가서 자야지. 그래야 내일도 이렇게 강행군할 거 아냐. ”

 

“ 응, 근데 잠깐만 스베촉에 들렀다 가자. ”

 

“ 왜? ”

 

“ 보랴한테 선물 줘야 돼. 어제 타이밍을 놓쳤어. 집에 가기 전에 주려고 했는데 샴페인 때문에 망했어. ”

 

 

왕재수가 재킷 주머니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구겨져서 귀퉁이가 찢어진 빨간 크레이프 포장지를 벗겨내면서 투덜댔다.

 

 

“ 주머니에 넣어놨더니 포장지가 다 찢어졌네. 에이... ”

 

“ 와, 그거 뭐야? ”

 

“ 별 거 아냐. 그냥 라이터 같은 거야. 보랴는 담배 피우니까. ”

 

 

베르닌이 궁금해하자 왕재수는 상자를 열어서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베르닌은 그렇게 화려하고 예쁜 라이터는 난생 처음이었다. 짙은 녹색에 금장 테두리를 두른 데다 금빛으로 작은 사자가 새겨져 있고 조그만 파란색 보석이 세 알 박혀 있었다.

 

 

“ 와, 이거 정말 근사하다. 진짜 보석이야? ”

 

응. 근데 알이 굉장히 작으니까 그렇게까지 부르주아 냄새 나는 건 아냐. ”

 

“ 화려한 걸 보니 외제인가 보네. 투레츠키도 이런 건 못 가져오겠다! ”

 

“ 외제 아니야. 레닌그라드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보석 디자이너가 만들어 준 거야. ”

 

“ 넌 담배 안 피우잖아. ”

 

“ 옛날엔 좀 피웠어. 하루에 딱 세 개비. ”

 

“ 세 개비는 또 뭐냐. ”

 

“ 그게... 술도 그런데 담배도 원래 몸에 안 받거든. 그래도 피우고 싶어서 세 개비까지는 어찌어찌... ”

 

몸에 안 받는 걸 왜 억지로 해! 몸 다 버리라고!

 

“ 몸에 좋은 것만 어떻게 하고 사니, 재미없게. 근데 지금은 담배 손도 못 대. 연기 마시면 기침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의사 선생님이 평생 담배는 꿈도 꾸지 말래. 아 진짜 싫다. ”

 

 

베르닌은 시계탑에서 연기를 들이마셨던 것이 떠올라서 문득 걱정이 되었지만 왕재수는 그의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보랴가 좋아할까? 너무 반동분자 같나? ”

 

“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

 

나야 신경 안 쓰는데... 그래도 보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으니까 그렇지. ”

 

“ 네가 준 거니까 좋아할 거야. 네가 주는 거라면 분홍색 슬리퍼를 줘도 좋아라 신고 다닐 걸. ”

 

 

왕재수가 안심하며 미소를 지었다. 베르닌은 맨손으로 청어를 퍼먹고 보드카를 병째 들이마시는 보랴가 군복 조끼 주머니에서 파란 보석이 박힌 화려한 라이터를 꺼내는 것을 상상하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둘은 극장을 나와 스베촉으로 갔다. 이미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라 영업이 끝나 문이 닫혀 있었다.

 

 

“ 어, 보랴네 집으로 가야 하나? ”

 

“ 아니야, 오늘 화요일이잖아. 식재료 들어오는 날이라서 보랴 그거 다듬느라 늦게까지 남아 있어. 나 뒷문 알거든. 그쪽으로 가자. ”

 

 

건물 뒤로 돌아가니 정말 조그만 문이 하나 있었다. 약간 열려 있어서 노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베르닌은 노크를 해야 하나 망설였지만 왕재수는 곧장 문을 밀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자주 와본 모양이었다. 베르닌도 따라 들어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왕재수가 두어 발짝 물러서더니 한 손으로 스카프를 매만지며 조용하게 말했다.

 

 

“ 그냥 가자. ”

 

“ 왜? 보랴 없어? 선물 줘야지. ”

 

“ 내일 점심 때 주지 뭐. 가자. ”

 

 

왕재수는 왔던 길로 다시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어찌나 조용하고 부드러운 몸놀림인지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베르닌은 의아해서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좁은 주방에 보랴가 서 있었다. 바닥에는 양배추와 당근, 감자가 가득 들어 있는 대야가 여러 개 널려 있었다. 대야들 사이에 등받이 없는 조그만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조그만 의자에 알렉산드라가 앉아 있었다. 둘이서 나직한 목소리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란 불빛 속에서 알렉산드라의 푸른 눈은 이제 더욱 부드러운 녹색으로 보였다. 보랴가 뭐라고 말하자 알렉산드라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자 보랴가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다정한 눈빛을 던졌고 알렉산드라가 그의 가슴에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쳐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왕재수는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함께 극장 주차장으로 갔다. 차를 타면서 베르닌이 중얼거렸다.

 

 

“ 우와... 난 상상도 못했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에야 차에서 내리면서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 제일 좋은 생일 선물이네. ”

 

“ 보랴 생일은 어제였는데. ”

 

“ 그러게. 근데 생일 다음날 선물 받는 게 더 좋지 않나? 난 다음날에도 선물 받고 싶어서 엄마한테 또 달라고 했는데. ”

 

“ 어휴, 눈에 선하다. 어리광쟁이. ”

 

아니야! 나 어리광 같은 거 안 부렸어! 그냥 당당하게 선물 달라고 했어! 그리고 커서는 워낙 추종자들이 많아서 맨날맨날 선물 가져다줬어! 무대 올라갈 땐 저것보다 열 배는 더 받았다고. ”

 

“ 어련하시겠어. ”

 

 

베르닌은 차 뒷좌석에 쌓여 있는 꽃다발과 선물 상자들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왕재수의 생일이 한참 남아서 참 다행이었다. 그는 꽃과 상자들을 끌어안고 왕재수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어쨌든 왕재수는 무거운 것을 들면 근육이 미워지니까.

   

 

 

 

 

 

- FIN -

2015. 7. 12 ~ 8. 4

 

 

 

...

 

 

왕재수의 신작에 대한 얘기는 사실 본편의 가브릴로프 우주에서 주축이 되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예전에 이미 구상은 다 해놨는데 서무 시리즈 쓰느라 이 본편을 못 쓰고 있다만.... 본편에서 미샤가 안무하는 신작은 물론 서무 시리즈에 나오는 왕재수의 신작과는 내용이나 형식이 많이 다르다. (본편 언제 쓰나 ㅠ)

 

..

 

블라지미르 브이소츠키는 소련에서는 굉장히 상징적인 문화예술 아이콘이다. 8~90년대가 빅토르 초이라면 60~70년대는 브이소츠키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본편 우주에서도 미샤는 브이소츠키를 매우 좋아하고 이따금 그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이전에 트로이가 나오는 본편을 쓰면서 미샤가 브이소츠키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넣은 적이 있다. 그때는 절친한 친구 일린의 생일파티에서였다. 사실 이번 29편에서 왕재수에게 브이소츠키 노래를 시킨 건 그 본편을 서무 식으로 재변주한 것이다. 하여튼 당시 그 글 쓰면서 그 노래 번역 일부와 영상을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735

물론 미샤는 브이소츠키와는 발성이나 목소리, 노래하는 방식 자체가 많이 다르기 때문에 브이소츠키처럼 부른 것은 아니고 자기 식으로 부드럽고 낮게 긁듯이 불렀다.

 

..

 

왕재수가 왕년에 담배 하루에 세 개비 운운하는 얘기 역시 본편 우주에서 따왔다. 본편에서 미샤가 하루에 딱 세 개비만 피우는데 이 사람은 체질상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못 피우지만 꿋꿋하게 술도 세잔, 담배도 세 개비까지는 피우고 논다...(ㅜㅜ 너 왜 그래...)

 

..

 

이야기는 30편으로 이어진다~~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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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12. 20:38

백야 황혼녘에 운하를 따라 걷다가.. russia2015. 8. 12. 20:38

 

 

해가 다 지고 캄캄해지고 있었던 때라 플래쉬 안 터뜨렸더니 사진이 세 장 다 조금 흔들렸지만 내 마음에 들어서 지우지 않고 남겨두었다. 사실 나는 흔들린 사진도 색감이 마음에 들면 좋아하는 편이다.

 

7월 25일. 마린스키에서 발레 해적 보고 숙소로 돌아가던 길이다. 다음날 떠나야 했기 때문에 참 아쉬웠다..

삐쭉 보이는 황금빛 돔은 역시 이삭 성당의 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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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오늘이면 더위가 꺾인다고 했는데 여전히 덥고 해도 쨍쨍..

더위 달래려고 오늘은 이번 7월 사진이 아닌 2월 페테르부르크 사진.

눈 대신 비...

날씨 좋을 때와는 너무 다른 분위기..(사실 페테르부르크에 살게 되면 이런 날씨가 너무 잦다...)

 

얼어붙은 운하 위로 고인 빗물과 그 위로 비친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피의 구세주 사원)

 

 

 

그리고 이건 같은 날 저녁에 찍은 마린스키 극장(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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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0일, 마린스키 극장. 라 바야데르 커튼 콜.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상대역은 아나스타시야 마트비옌코.

오늘 힘든 하루였기 때문에 마음의 위안을 위해 이 친구 사진 세 장 올려본다. 이땐 참 좋았지 ㅠㅠ

 

 

 

 

 

이건 2막 끝나고.

감자티 역 상대역은 옐레나 옙세예바.

 

내가 좋아하는 흰색 솔로르 의상 입고 있는 슈클랴로프~ 솔로르는 역시 3막의 푸른색이 최고지만 2막의 이 흰색 의상도 실제로 보면 참 예쁘다. 마린스키의 솔로르 의상은 다 예쁘다. (뭔들 안 예쁘리, 슈클랴로프가 입었는데..)

 

** 이때 커튼 콜 사진 다른 포스팅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912

이때 찍은 사진은 여러 장 더 있는데 그건 나중에 더 올려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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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11. 20:57

내 속이랑 똑같네.. russia2015. 8. 11. 20:57

 

 

오늘 너무 힘든 하루였다...

그래서 오늘 페테르부르크 사진은 내 속처럼 타들어간 담배 꽁초들 사진..

운하 따라 걷다가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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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4일.

해지는 시각에 맞춰서 석양 보러 네바 강변으로 나갔다. 구름이 워낙 많이 끼어 있어서 완벽한 석양은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황금빛과 희미한 붉은빛이 아름다웠다.

 

밤 9시 40분~10시 즈음.

 

6월에 갔으면 새벽에 이 풍경을 봤을텐데 마냥 아쉬웠다.

 

알렉산드로프스키 공원을 가로질러 원로원 광장으로 나간 후 청동기사상을 지나 네바 강변으로 갔다. 그 길에 찍은 사진 몇 장. 본격적인 네바 강의 석양 사진은 나중에 모아서 올려보겠다.

 

 

 

 

 

 

 

청동기사상이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고...

 

 

페테르부르크는 빛과 물과 돌의 도시라고 불리는데, 하나 더 추가하자면 구름의 도시이기도 하다. 변화무쌍하고 근사한 구름들이 손에 잡힐 것처럼 낮게 깔린다.

 

 

청동기사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아침 점심 저녁 밤의 모습이 전부 다르다. 구름이 몰려드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청동기사상 앞으로 나아가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왜 이 도시를 환상으로 축조된 도시라고 했는지, 왜 이 기사상이 하늘로 날아올라 사라질 것 같다고 했는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논리적인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가슴의 영역이다.

 

 

 

석양의 황금빛 빛이 반사되어 건물들도 놀라운 색깔로 변한다. 가로등 램프의 실루엣은 더욱 우아하게 느껴지고...

 

 

 

네바 강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 귀가하는 사람들로 네바 강변도 붐빈다.

 

네바 강의 석양 사진들은 다음에 모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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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7월에 갔을 때는 머무는 일정이 짧아서 공연을 4개밖에 못 봤는데(4개도 많이 빡빡했다), 모두 마린스키에서 봤다. 그중 3개는 신관에서 봤고 오리지널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슈클랴로프의 라 바야데르 하나밖에 못 봐서 아쉬웠다. 물론 공연 보는 거야 신관 쪽이 더 편하지만 그래도 구 극장의 아우라는 대체 불가능한 것이라서..

 

도착한 바로 다음날 라 바야데르 공연이 있어서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돼 피곤한 몸으로 마린스키에 갔다. 한시간 전부터 입장 가능해서 딱 맞춰서 갔다. 카페에 가려고 :) 카페에 사람들이 많아서 자리 잡으려면 빨리 가야 하기 때문이다.

 

전에 한번 쓴 적이 있는데, 구 극장은 미로처럼 되어 있어서 여기저기 복도에 카페들이 난립해 있는데 사실 카페라기보다는 그냥 카운터가 있고 복도에 의자와 테이블이 있는 수준이다. (근데 이게 또 매력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2야루스(4층) 왼편(앗 갑자기 헷갈리네.. 아마 왼편 맞을듯) 복도 귀퉁이에 있는 카페이다.

 

 

 

여기.

 

늦게 오면 저렇게 입식 테이블에서 먹어야 하고...

 

 

계단을 올라오면 바로 보인다. 이 카페는 전에도 포스팅한 적 있다.

 

 

 

나는 일찍 가서 자리가 있었으므로 차 한 잔과 티라미수 주문.

근데 지난번까진 구 극장은 티백은 그린필드, 티라미수도 컵에 직접 퍼담아 줬는데 이번에 가니 신관이랑 똑같게 바뀌어서 차도 다망, 티라미수도 저렇게 정형화된 모습으로 나온다.. 차야 그린필드보다 다망이 더 좋지만.. 티라미수는 지난번처럼 퍼주는 게 더 좋은데..

 

찻잔 뒤로 보이는 건 슈클랴로프와 마트비옌코, 옙세예바 등 이날의 배역이 적힌 프로그램. 전까진 30루블이었는데 이번에 가니 이것도 50루블로 올랐다!! 이게 백야축제 때만 50루블로 오른 건지 아니면 이제부턴 내내 50루블인 건지 모르겠네 ㅠㅠ

 

 

 

지난 2월에 왔을 때 질렀던 오페라 글라스 가지고 옴. 슈클랴로프 미모를 조금 더 잘 감상해보겠다는 몸부림!!

 

 

 

카페 옆으로는 이렇게 복도로 통하는 아치가 있고, 조그만 가르제로브(코트 보관소)도 있고.. 옛날 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취와 아름다움이다.

 

 

 

카운터에는 이렇게... 케익과 음료수들, 샌드위치들이 늘어서 있다. 이땐 아직 공연 시작까지 시간이 꽤 남아서 한적하지만 곧 여기도 바글바글..

 

 

 

차도 다 마시고 케익도 다 먹었으니 이제 일어나려는 중..

 

 

 

 

 

 

 

그래서 이렇게 공연 보러 자리로 갔다. 이날 내 자리는 1층 파르테르 두번째 열이었는데 늦게 끊어서 좀 사이드였다 ㅠㅠ 그리고 두번째 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사가 없기 때문에 앞자리 사람에게 가려서 매우 괴로워서 결국 또 책깔고 앉기를 시전했음 ㅠㅠ 오케스트라 핏 바로 앞이라 지휘자 머리가 무대를 좀 가리기도 하고..

 

그래도 열심히 슈클랴로프의 아름다운 솔로르를 감상했다 :) 이때 찍은 커튼콜 사진 몇 장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912

 

** 전에 올렸던 마린스키 극장 카페(이곳) 사진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248

 

** 마린스키 극장 다른 카페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686

 

** 마린스키 신관 카페 사진도 올린 줄 알았더니 현장에서 아이폰으로 올렸던 것들밖에 없네. 신관 카페 사진들도 조만간 올려보겠다. 마린스키 신관으로 검색하면 화질은 안 좋지만 폰으로 올렸던 게 몇개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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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8. 8. 16:43

페테르부르크의 다양한 가로등 램프들 russia2015. 8. 8. 16:43

 

 

어제 올렸던 마린스키 가는 길 포스팅(http://tveye.tistory.com/3942)에서 치즈홍차님과 가엾은 리자님이 가로등 램프가 예쁘다고 하셔서. 페테르부르크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가로등 램프 사진들을 좀 올려본다. 잘 보면 다들 디자인이 다르다!!

 

이건 레트니 사드 입구의 교각에 설치된 가로등 램프.

 

 

 

램프등 클로즈업.

 

 

 

이건 페스텔랴 거리에서..

 

 

 

역시 페스텔랴 거리

.. 아닌가, 리체이느이 대로일 수도.. 헷갈리네 :)

 

 

 

이건 궁전광장. 알렉산드르 원주 앞의 유명한 가로등 램프

 

 

 

이건 그리보예도프 운하의 가로등 램프. 이 램프 사진은 전에도 몇 번 올렸다

 

 

 

하지만 건물 벽에 설치된 램프는 이렇게 심플한 디자인인 경우도 많다

 

 

 

청동기사상이 있는 의회 광장에 있는 가로등. 네바 강변에 늘어선 이 가로등 램프들의 실루엣은 페테르부르크의 상징적 실루엣 중 하나이다.

 

 

 

석양이 내리면 이렇게 아름답다!

 

 

 

물론 이렇게 투박한 가로등 램프들도 있다. 이건 궁전 다리(드보르초브이 모스트)에 설치된 가로등.

 

 

 

마지막으로 그리보예도프 운하의 가로등 램프 하나 더...

 

여기 올린 사진들 말고도 페테르부르크에는 아름다운 램프들이 참 많다~ 그래서 산책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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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7월 25일. 이번 마지막 공연인 마린스키 발레 '해적' 보러 가는 길에 찍었던 사진 몇 장.

날씨가 매우 좋았던 날이다. 오전에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갔었고 숙소로 돌아와 잠깐 쉬다가 공연 보러 나갔었다. 숙소가 있는 포취탐스카야 거리에서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 쪽으로 가서 모이카 운하로 나온 후 운하를 따라 쭈욱 걸어가면 데카브리스트 거리에 있는 마린스키 극장에 이를 수 있다.

 

가운데의 곡선 램프가 보이시는지. 저 거대한 가로등 램프가 양쪽에 서 있는 저 다리의 이름은 '포나르느이 모스트', 즉 가로등 램프 다리이다.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1세가 베네치아를 염두에 두고 디자인한 도시이기 때문에 운하와 다리가 굉장히 많다. 그래서 이 도시는 옛날부터 북방의 베네치아라고 불렸다. 나는 업무 때문에 베네치아에도 여러번 가봤고 그곳 운하와 다리들도 많이 걸어본 편인데 페테르부르크는 확실히 운하 도시이긴 하지만 '북방의'가 중요한 것 같다. 베네치아는 훨씬 손때묻고 아기자기하고 전통적이고 뜨끈뜨끈하고 화사하다. 페테르부르크는 보다 인공적이고 차갑고 환상적이고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도시이다. 그리고 황제의 뜻에 따라 인위적으로 계획되어 지어진 도시, 러시아라는 국가의 특성, 기후 등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페테르부르크의 운하는 베네치아보다 더 넓고 반듯하다. (그러나 역시 운하도시인 암스테르담과 비교하면 이쪽이 더 좁고 무질서해보였는데, 그건 서구 유럽과 러시아의 특성이 또 달라서일지도..)

 

하여튼 나는 베네치아보다도, 암스테르담보다도 페테르부르크가 제일 좋다 :)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이게 바로 어떤 도시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다.

 

 

 

어딜 가나 새나 짐승이 보이면 꼭꼭 사진을 찍어봄 :)

 

 

 

다리마다 이렇게 표지판이 붙어 있다. 이 다리는 포취탐스키 다리.

 

 

 

전날까지 비오고 춥다가 드디어 찬란한 백야 시즌의 여름 날씨.. 이날 유람 보트 탄 사람들은 행운!!

 

 

 

 

 

페테르부르크는 운하와 다리가 많아서 이렇게 난간 문양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실제로 러시아 사람들이 페테르부르크를 만화로 표현하면 꼭 강물과 다리 난간이 나온다!

 

 

 

 

 

언제나 그렇듯 수면에 부딪치며 자잘하게 부서지는 찬란한 햇살은 너무나 아름답다.

 

 

 

그래서 이렇게 마린스키 극장 도착. 해적은 신관에서 공연했기 때문에 신관으로 건너가고 있음. 신관의 유리창에 맞은편 마린스키 극장 구관이 그대로 비치고 있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실제로 마린스키 극장과 신관 사이에 서게 되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묘한 풍경에 매혹된다. 여전히 내게, 그리고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에게 진짜 '극장'은 오리지널 마린스키 극장, 구관이지만 그래도 나는 이 도시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 여러 차례 공연 보러 가보니 신관에도 이미 애정이 생겼음(일단 공연 보기가 좋다)

 

다시 가고 싶다!! (항상 결론은 똑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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