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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9.15 가을 아침,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와 네바 강의 오리 4
  2. 2015.09.14 이삭 성당이 보이는 창가에서 차 한 잔 2
  3. 2015.09.14 월요일엔 언제나 한가롭게 쉬고 싶다..
  4. 2015.09.13 여름날 겨울 운하
  5. 2015.09.11 서무의 슬픔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91
  6. 2015.09.10 루지마토프 & 비슈뇨바 '라 바야데르' 파이널 클립 2
  7. 2015.09.10 초봄의 네바 강, 부드럽고 환한 아침 빛살 2
  8. 2015.09.09 하얀 새, 까만 새, 얼룩 새 다 모여라~ 3
  9. 2015.09.08 마린스키 신데렐라 DVD 트레일러(비슈뇨바&슈클랴로프) 6
  10. 2015.09.07 흐린 날, 모이카 운하 따라서
  11. 2015.09.06 페테르부르크 골목과 거리 풍경들 4
  12. 2015.09.04 서무의 슬픔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71
  13. 2015.09.03 그리보예도프 운하, 2013년 가을 2
  14. 2015.09.03 눈과 얼음의 나라, 푸른색과 흰색의 도시
  15. 2015.09.02 백야, 붉은 장미
  16. 2015.09.02 짙은 푸른색의 여름 밤, 페테르부르크 포취탐스카야 거리 2
  17. 2015.09.01 마린스키 신관 내부의 계단들 + 크리스탈 장식들 2
  18. 2015.09.01 알렉산드로프스키 공원의 녹음과 빛 2
  19. 2015.08.31 흐린 겨울날, 미하일로프스키 공원과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주변 2
  20. 2015.08.30 여름날 판탄카 운하 사진들 몇 장 6
  21. 2015.08.28 서무의 슬픔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80
  22. 2015.08.27 빗물 웅덩이에 비친 에르미타주 지붕
  23. 2015.08.26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화보 몇 장 : 젊은이와 죽음, 백조의 호수, Infinita Frida, 로미오와 줄리엣, 라 바야데르 4
  24. 2015.08.26 러시아 기념품 3 : 러시아 음식 컵받침들 + 러시아 요리 몇 가지 + 쿠마와 딸기 케익은 보너스 8
  25. 2015.08.25 한겨울의 청동기사상, 나의 비밀 장소 6

 

 

2012년 가을.

아침에 네바 강 산책하면서 찍은 사진. 날씨가 좋았다. 바람이 불었고 맑은 날씨였다. 햇살은 아직 뜨겁고 찬란해지기 전. 그맘때 빛은 이렇다.

 

 

 

 

 

 

 

 

:
Posted by liontamer
2015. 9. 14. 21:03

이삭 성당이 보이는 창가에서 차 한 잔 russia2015. 9. 14. 21:03

 

 

이건 몇 년 전 사진이다. 2012년 9월.

페테르부르크.

앙글레테르 호텔 창가.

이때 앙글레테르 호텔에 처음 묵었는데 빨간색 쿠션과 나무 바닥, 그리고 이삭 성당이 보이는 창가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무료 와이파이도 안 되고 불편한 점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삭 성당이 그대로 보이는 전망만큼은 정말 근사한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예세닌이 자살했던 곳이다. 지금이야 외국계 체인에서 인수해서 싹 리노베이션했지만...

 

찻잔이 눈에 익은 것 같다고 하신다면.. 맞습니다. 집에서 종종 차 마실 때 쓰는 로모노소프 찻잔이다. 이때 네프스키 대로의 가게에 가서 샀던 것이다. 호텔 근처의 맛있는 빵집 부셰에서 사온 삐로즈노예(조각케익)인 '률류 끌류끄벤노예'라는 나무열매 무스 케익 곁들여 차 우려마신다고 이때 처음 개봉... 그래서 받침접시엔 케익이 올라갔기에 찻잔은 방에 있던 종이 컵받침으로 받쳐놓음...

 

 

 

그래서 이삭 성당이 보이는 창가에서 차를 마셨었다.

 

 

 

이렇게... 왼편으로 보이는 것이 이삭 성당이다.

 

.. 나도 이런 집에서 살고 싶구나 ㅠㅠ

 

** 태그의 앙글레테르 호텔을 클릭하면 이 호텔 방과 창문 등에 대한 이전 포스팅과 사진들을 볼 수 있다.

 

 

:
Posted by liontamer
2015. 9. 14. 12:50

월요일엔 언제나 한가롭게 쉬고 싶다.. russia2015. 9. 14. 12:50

 

 

바쁘고 피곤한 월요일.

점심 먹고 잠깐 쉬는 중이다.

월요일엔 언제나.. 이렇게 한가롭게 쉬고 싶어진다.

지난 7월, 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강변 풍경. 계속 비오고 춥다가 간만에 햇살 쨍하고 날씨 좋은 날이라 다들 일광욕하러 나왔다.

 

 이때 나는 료샤 부자와 같이 산책을 했다. 나는 피부 탈까봐 열심히 선크림 바르고 선글라스 쓰고 그늘로 걸었는데 페테르부르크 토박이인 료샤와 레냐는 좋다고 햇살 아래로 뛰어나가는 걸 보니 역시 일조량 부족한 곳에 사는 사람들이라 그렇구나 싶었다.

 

하여튼... 월요일의 괴로움 속에서... 부러운 풍경 몇 장.

 

 

 

 

 

 

 

 

 

:
Posted by liontamer
2015. 9. 13. 18:33

여름날 겨울 운하 russia2015. 9. 13. 18:33

 

 

페테르부르크.

이전에 몇번 올린 적 있는 '겨울 운하'. 겨울궁전인 에르미타주 박물관 사이를 잇는 운하라서 겨울 운하라고 불린다. 노어로는 짐냐야 까나브까.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에르미타주 극장 건물을 이어주고 있다. 이 운하는 모이카 운하와 네바 강을 이어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3개의 조그만 다리로 이어져 있고 마지막 다리 너머로는 네바 강이 펼쳐져 있다. 맞은편 멀리 보이는 것이 네바 강이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운하이다. 특히 겨울에 이곳을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페테르부르크의 명소 중 하나이다.

이번 7월에 갔을 때 찍은 사진 몇 장.

 

 

 

 

 

 

 

 

 

 

 

 

 

 

태그의 겨울 운하를 클릭하면 이전에 올린 이곳의 여름, 가을, 겨울 사진들을 볼 수 있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운하가 좀 그립네.

 

:
Posted by liontamer

 

금요일이라 언제나처럼 서무 시리즈.

이번 편도 이른바 우수한 단추 시리즈에 속한다. 단추와 똑같이 생긴 드미트리 베르닌이 활약한다 :)

지난 31편에서 협박편지와 죽은 비둘기를 받고 공포에 휩싸인 왕재수와 단추!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러 달려온 드미트리. 과연 왕재수는 수요일 신작을 무사히 올릴 수 있을 것인가!

 

..

 

후반부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다차'는 러시아어로 '별장'이란 뜻이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다차란 각별한 공간이다.  여름 휴가를 보내기도 하고 주말에 잠깐씩 가서 텃밭도 가꾸는 곳인데 소련 시절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다차는 우리가 '별장' 하면 떠올리는 호화로운 부자들의 전유물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물론 노멘클라투라 특권층의 별장이야 근사하고 호화로웠지만 일반 인민들의 오두막 같은 다차들도 많았다.

 

..

 

그럼 재미있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밤, 몇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신작 공연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순간, 왕재수는 침실에서 협박편지와 새의 사체를 발견하고... 베르닌은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와 함께 그를 경호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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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2

 

 

 

 

 

 

서무의 슬픔

-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드미트리가 방울을 달고 돌아온 후 그들은 잠시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드미트리는 스페호프가 전에도 왕재수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했던 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베르닌은 돈키호테 공연 방해와 독사과, 시계탑 화재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에는 담담하게 듣던 드미트리도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일단 아침에 협박범이 다시 나타나리라는 예상에는 둘 다 동의했다.

 

 

밤이 늦었기 때문에 그들은 교대로 눈을 붙이며 보초를 서기로 했다. 드미트리는 베르닌에게 피곤해 보이니 먼저 자라고 했다. 베르닌은 평소 같으면 사양했겠지만 며칠간의 피로가 쌓여 너무 졸렸던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소파로 기어 올라갔다. 드미트리는 침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침실과 거실 양쪽을 모두 볼 수 있는 위치였다. 편안한 자세로 서 있었지만 왕재수와 베르닌 모두를 지켜보면서 창문이나 현관문, 혹은 위층에서 수상한 소리가 나면 즉시 움직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무거운 잠에 빠지면서 베르닌은 ‘나도 현장요원 연수 제대로 받아놓을걸...’ 하고 아쉬워했다.

 

 

베르닌이 눈을 떴을 때 드미트리는 여전히 침실 문 앞에 있었다. 부엌에 있던 식탁 의자를 갖다놓고 거기 앉아 있었다. 왕재수는 침대 가장자리에 붙어서 한쪽 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6시 반이었다.

 

 

“ 왜 안 깨웠니. 너 졸리겠다. 이제 내가 보초 설게. ”

 

“ 아, 괜찮아. 나 원래 적게 자는 편이라서. 어제 커피랑 차를 좀 많이 마셨더니 잠이 안 와. 너 더 자. ”

 

“ 아니야, 난 이제 다 깼어. 저, 미샤는 잘 자던? 중간에 안 깨고? ”

 

“ 응. 많이 피곤했나봐. 좀 더 자게 놔두자. ”

 

 

베르닌은 세수를 한 후 찻물을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잠깐 위층에 가서 상황을 살피고 오기로 했다. 드미트리가 주의를 주었다.

 

 

“ 현관문 아래에도 방울 달아놨거든. 소리 날 거야. 놀라지 말고 그냥 끈 살짝 들어 올리고 들어가. ”

 

 

드미트리의 말대로 문 아래에 방울이 달려 있었다. 문과 똑같은 색깔의 어두운 실에 달려 있어서 의식하고 찾지 않는 한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았다. 자물쇠를 열고 문을 밀자 딸랑딸랑 하고 소리가 났다. 아래층에서도 들릴까 하고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요란한 소리였다. 실을 들어 올리자 소리가 멈추었다.

 

 

카드는 와 있지 않았다. 창문은 안에서 잘 잠겨 있었고 역시 방울이 설치되어 있었다. 수상한 기색은 없었다. 베르닌은 집안을 한 바퀴 돈 후 냉장고에서 사과와 오렌지를 꺼내고 침실로 가서 나이트 테이블 위에 있는 수첩을 집었다. 왕재수가 매일 극장이나 공연과 관련해 떠오른 아이디어를 메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옷장에서 왕재수가 입을 옷을 꺼냈다. 그는 패션이라면 아무 것도 몰랐으므로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스웨터와 셔츠, 바지와 양말을 끌어 모았다. 그러다가 왕재수가 스카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스스로 뿌듯해하며 제일 먼저 보이는 붉은색 스카프도 한 장 집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드미트리가 부엌에서 부체르브로드를 만들고 있었다. 가지런하게 자른 흑빵 위에 햄과 치즈, 오이, 토마토 따위를 각각 올려놓았는데 평범한 부체르브로드도 드미트리가 만들자 굉장히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베르닌이 가져온 사과와 오렌지를 보자 반가워했다.

 

 

“ 어, 과일 잘 가져왔구나. 네 냉장고에 먹을 게 별로 없어서... 인스턴트 보르쉬하고 냉동 펠메니밖에 없더라고. 참, 닭도 한 마리 있더라. 평소 같았으면 그걸로 항아리 닭고기라도 만들면 좋을 텐데 지금은 요리에 신경 쓸 여유는 없지. 그렇다고 몸 관리하는 애한테 인스턴트 데워주고 냉동 펠메니 삶아주긴 좀 그러니까. ”

 

“ 응, 요즘 저 녀석이 계속 늦게까지 일하니까 지켜보느라고 나도 장 볼 시간이 없었어. 근데... 쟤 그 보르쉬랑 펠메니 잘 먹어. 아침이야 가볍게 먹으니까 좀 그렇지만. 있다가 저녁에 그거나 해줘야겠다. ”

 

“ 엥, 그 인스턴트 보르쉬를 먹는단 말이야? 진짜 의외네. ”

 

 

드미트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마카롱과 프랑스 홍차도 마다하던 녀석이 인스턴트라니!’ 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거실로 나와서 부체르브로드와 커피, 사과로 이른 아침을 먹었다. 둘 다 홍차를 더 좋아하기는 했지만 잠이 모자라니 강한 카페인이 필요했다. 샌드위치와 사과를 다 먹고 남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왕재수가 뒤척이더니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베르닌은 얼른 곁으로 갔다.

 

 

“ 더 자, 아직 일곱 시밖에 안 됐어. ”

 

“ 극장 가야 되는데. ”

 

“ 오늘 극장 문 닫았잖아. 소독한다고. ”

 

“ 왜 이렇게 사방에 불을 다 켜놨어... 눈 아파. 누구랑 얘기하고 있었어? ”

 

 

베르닌은 왕재수가 아침잠도 많고 자다가 깨면 정신을 차리는데 한참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옆에 앉아서 아이를 어르듯이 상냥하게 말했다.

 

 

“ 너 아직 잠 다 안 깨서 생각 안 나는구나. 어젯밤에 드미트리 왔잖아. ”

 

“ 드미트리가 누구야? ”

 

 

왕재수가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베르닌의 어깨 너머로 거실을 보더니 금세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막 욕을 하려다가 갑자기 생각에 잠긴 눈이 되더니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 맞다. ”

 

“ 밤엔 별 일 없었어. 너네 집에도 갔다 왔는데 아직 아무 기색도 없고. 그러니까 더 자렴. 극장 쉬는데 오늘이라도 많이 자야지. ”

 

“ 싫어. 기분 나쁜 꿈만 꿨어. 바퀴벌레 쥐 곱등이 나오고... 뱀 껍질도 나오고 엄청 무서웠어. 일어날래. ”

 

 

침대에서 내려온 왕재수는 드미트리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고 곧장 욕실로 갔다. 베르닌이 뒤따라가 셔츠와 바지, 새 칫솔을 가져다주자 귀찮아하면서 받아들더니 잠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으악, 너 왜 그래!

 

“ 뭐가? 씻으려고 그러는데. ”

 

“ 여기가 너네 집이냐!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

 

 

왕재수는 거실을 힐끗 보더니 입안으로 욕을 하면서 욕실로 쏙 들어갔다. 문도 탕 닫았다. 그때 드미트리가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 문 다 닫으면 안 돼! 좀 열어놓고 씻으라고 해! ”

 

“ 어, 왜? ”

 

“ 욕실에도 창문 있단 말이야. 잠가놓긴 했지만 그래도 조심해야지! ”

 

 

베르닌은 할 수 없이 욕실 문을 살짝 밀었다. 금세 열렸다. 왕재수는 수용소에서 고생을 해서 그런지 좁은 곳에 처박히는 것이나 문을 잠그는 것을 꺼렸다. 더운 물을 받아놓고 욕조에 들어가 있던 왕재수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 왜? ”

 

“ 창문으로 누가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문 잠그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조금만 삥긋 열어놓을게. ”

 

“ 어휴, 진짜 피곤하게 구네. 난 또 너도 씻으려고 그러는 줄 알았지. ”

 

“ 으악, 내가 왜! 난 사내자식이랑 같이 목욕하는 습관 없거든! ”

 

“ 그럼 여자랑은 있어? ”

 

“ 어... 으악, 없어! 나 변태 아니야! 그런 버릇 없어! ”

 

“ 웬 변태 타령이람. 침대가 부서지게 뒹굴고 나면 잠들거나 씻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고, 상대가 맘에 들었으면 같이 욕조에 들어가는 건 인지상정인데. 네가 그러니까 여자가 안 생기지. 불쌍한 녀석. ”

 

“ 헉... 제발 그런 말은 바이올린 아저씨하고만 하란 말이야! ”

 

“ 근데 이 비누 왜 이렇게 거품이 안 나? 엄청 싸구려 비누구나. 스폰지도 얼마나 오래 썼는지 다 해졌네. ”

 

“ 야, 다 너처럼 외제 비누 쓰는 줄 아냐! 여기 사람들 90%는 그 비누 쓰거든. 그리고 목욕 스펀지는 가게 갈 시간이 없어서 못 샀어. 찜찜하면 그냥 손으로 씻어. ”

 

“ 가뜩이나 거품도 안 나는데... 근데 너 샴푸 안 써? 왜 안 보이지? ”

 

“ 어, 난 그냥 비누로 감아. ”

 

“ 으윽... ”

 

 

갑자기 베르닌은 자기가 왜 욕조에 앉아 있는 왕재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가뜩이나 드미트리에게도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란 얘기를 정색하며 부정해놓았는데 괜히 의심을 살 것 같아서 급하게 돌아 나왔다.

 

 

다행히 드미트리는 왕재수가 먹을 아침을 차리느라 그들의 말을 못 들은 것 같았다. 드미트리는 사과와 치즈를 얹은 부체르브로드 두 개와 가지런히 자른 오렌지, 우유가 담긴 컵을 쟁반에 예쁘게 담아 놓고는 베르닌에게 가스렌지를 가리켰다.

 

 

“ 찻물 다시 올려놨어. 지금 우리면 차 식어 버릴까봐. 나 이제 위층에 가볼게. 새벽은 지났고. 네가 좀 전에 갔을 때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고 했지? 그 사이에 왔다 가지 않았다면 잠복해 있다가 어떤 놈인지 붙잡을 수도 있을 거야. ”

 

“ 어... 혼자 가도 괜찮겠어? 나랑 같이... 아, 안되겠다. 미샤랑 같이 있어야 하니까. ”

 

“ 그래. 너 절대로 미하일 곁을 떠나면 안 돼. 만의 하나 그놈이 여기로 올 수도 있잖아. 기억하지? 무슨 일 생기면 크게 소리 지르는 거. ”

 

“ 그래. 참, 내 전화번호 줄게.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쟤네 집 번호도 적어주는 게 좋겠지? ”

 

“ 아, 괜찮아. 둘 다 외웠어. 나 암기력 뛰어나잖아. 그럼 갔다 올게. 적어도 10시까지는 있어볼게. 카드에서는 ‘아침’이라고 했는데 되게 애매한 시간이란 말이야. ”

 

 

드미트리가 나간 후 베르닌은 다시 한 번 문과 창문을 확인했다. 커튼을 열어젖히고 바깥도 샅샅이 살폈다. 안뜰과 바깥 도로 쪽으로 조깅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하지만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같은 아파트 주민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아침이 되니 밝아서 그런지 간밤의 불안감과 공포도 많이 가라앉았고 왕재수의 말대로 별 것 아닌 장난에 과민 반응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왕재수는 생각보다 금방 씻고 나왔다. 바지만 입고 나오더니 셔츠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투덜댔다.

 

 

“ 이거 여름 셔츠잖아. ”

 

“ 어, 그런가? 긴 소매라서 몰랐어. 스웨터도 가져왔으니까 그거 껴입어. 내가 스카프도 챙겨왔어. 너 맨날 그런 걸로 멋 부리잖아. ”

 

“ 셔츠는 하늘색인데 스웨터는 오렌지색이고 스카프는 빨간색이잖아! 심지어 바지는 회색... ”

 

“ 으응... 그러고 보니 색깔이 다 다르구나. 손에 잡히는 거 가져왔더니. ”

 

“ 야, 사람을 무지개로 만들어놓고 ‘색깔이 다르구나’로 끝날 문제냐 이게! 너 진짜 심각하다. 이 정도로 패션 감각이 엉망인줄은 몰랐어. ”

 

“ 으윽, 지금 패션 타령할 때가 아니잖아. 그래봤자 전부 프로도 아르마나 에르미일 거 아냐! 추우니까 빨리 입어. 요즘 난방도 조금밖에 안 틀어줘서 추운데. 이맘때 감기 많이 걸린단 말이야. 넌 폐렴 때문에 기관지도 약해졌잖아. ”

 

 

왕재수는 툴툴거리면서도 춥긴 했는지 알록달록한 옷을 모두 주워 입었다. 그래도 오렌지 스웨터에 빨간 스카프만은 도저히 맬 수 없다면서 집어던졌다. 베르닌은 그를 소파에 앉힌 후 쟁반을 가져다주고 차를 우려다 주었다.

 

 

먹어. 어제도 저녁 거르고 다 뭉개진 양배추 롤 하나 먹었잖아. ”

 

“ 안 먹어, 그 자식이 만든 거. ”

 

“ 너 다시는 드미트리에 대해 불평하지 마. 걘 한숨도 안 잤어, 계속 너 지키고 있었단 말이야. 이 샌드위치도... 너 몸 관리한다고 일부러 가벼운 재료만 올렸잖아, 저지방 흰 치즈에 사과에. 이거 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잖아. 오렌지랑 우유도 아침에 곧잘 먹으면서. 당장 먹어. 한번만 더 내 앞에서 드미트리 헐뜯고 트집 잡으면 나 정말 화낼 거야.

 

 

베르닌은 왕재수가 짜증을 내며 ‘네깟 게 화내든 말든!’ 하고 소리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재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말없이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샌드위치 한 쪽을 먹고 나서 오렌지도 반 개 먹고 차도 마셨다. 우유도 훌쩍 다 마셨다. 베르닌은 남은 샌드위치 한 개와 오렌지 조각도 먹으라고 하려다 왕재수가 몹시 풀 죽은 표정이었기 때문에 어쩐지 또 마음이 약해져서 한숨을 쉬었다.

 

 

“ 그래도 많이 먹었네. 잘했어. 맛있지? ”

 

“ 맛없어. ”

 

“ 엄청 맛있던데. 걔 요리 정식으로 배웠대. 차도 향 좋더라. 파리에서 가져온 거래. 너 원래 프랑스랑 스리랑카랑 영국산 차만 마셨다고 했잖아. ”

 

“ 향 하나도 안 좋아. 구정물 같아. ”

 

“ 어휴, 너네 어머니 진짜 너 키우느라 고생하셨겠다! 청개구리! ”

 

 

왕재수는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어쨌든 우유도 다 마셨다. 뭘 좀 먹였더니 뺨에도 혈색이 돌고 눈도 반짝거렸다. 오렌지색 스웨터와 하늘색 셔츠 탓인지 얼굴이 더 뽀얗고 어려 보였다. 십대 소년처럼 보였다. 아무리 봐도 괜찮아 보이는데 왕재수가 왜 무지개 타령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무대에 올라갈 때는 레이스랑 금단추 달린 블라우스에 타이츠 따위를 입었던 주제에’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왕재수는 타이츠에 대해 조금이라도 모독을 하면 발칵 화를 냈으므로 베르닌은 입안으로만 투덜거렸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문과 창문을 급하게 훑어본 후 수화기를 들었다.

 

 

“ 여보세요. ”

 

“ 다닐, 나야. ”

 

 

드미트리였다.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 어, 무슨 일 있어? ”

 

“ 세 번째 카드가 왔어. 지금 내려갈게. 미하일 옆에 딱 붙어 있어. ”

 

 

 

 

*    *    *

 

 

 

 

세 번째 카드는 내용이 짧았다. 그리고 하얀색 카드가 아니라 붉은 색지에 검정 글씨로 타이프 쳐져 있었다.

 

 

친애하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그 소중한 공연은 올리지 못할 거야.

파랑새도, 천사도, 검은 기사도 소용없을걸.

말을 잘 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입을 연 것은 베르닌이 아니었다. 왕재수였다.

 

 

“ 이게 전부야? ”

 

“ 아니. ”

 

 

드미트리가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종이 봉지를 찢어서 안에 있던 내용물을 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왕재수는 순간 전날 밤의 악몽이 되살아났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베르닌은 협박범의 두 번째 선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 도자기 인형이잖아. ”

 

“ 그냥 도자기 인형이 아니야. ”

 

 

드미트리가 딱딱하게 굳어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목이 잘린 인형이지. ”

 

 

작은 천사 인형이었다. 기껏해야 베르닌의 약지 길이밖에 되지 않는 장식용 도자기 인형이었다. 흰색 몸체에 날개와 망토는 푸른색과 금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인형이었다. 머리가 완전히 잘려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천사의 목 부분은 들쭉날쭉하게 깨져 있었다.

 

 

희미한 오한을 느끼며 베르닌이 물었다.

 

 

“ 머리는? ”

 

“ 없었어. 이것뿐이었어. 카드 옆에 놓여 있었어. ”

 

“ 어디에? ”

 

“ 나이트 테이블. 어제랑 반대쪽. ”

 

“ 언제, 언제 들어왔다 간 거야? 마주쳤어? ”

 

“ 아니. 그랬으면 붙잡았든지 아니면 몸싸움이라도 했겠지... 네가 돌아오고 내가 올라가기 전에 아침 먹느라 30분쯤 시간이 있었잖아. 그때 왔다 간 것 같아. ”

 

“ 하지만... 그럼 방울이 울렸을 텐데... 그 소리 꽤 크던데... 대체 어디로 들어온 거야! ”

 

“ 현관문을 따고 들어왔을 거야. 너희 쪽 요원들 무시한 거 취소할게. 내 생각이 짧았어. 면밀한 놈이야. 조심성이 뛰어난 것 같아. 아니면 새벽에 내가 올라간 걸 숨어서 봤든지. 문에 설치해뒀던 줄을 잘라버렸더라. 게다가 그 줄하고 방울을 보란 듯이 침대 위에 올려두고 갔더라고. 개새끼. ”

 

 

드미트리가 욕설을 내뱉으며 이를 갈았다. 엘리트 요원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린 것 같았다. 베르닌은 분노보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서 목 잘린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살펴보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왕재수의 손을 꼭 쥐었다. 손이 굉장히 차가웠다. 평소에는 몸이 뜨거운 편이었다. 그렇게 차디찼던 것은 예전에 얼음이 깨져서 강에 빠졌을 때뿐이었다. 얼마나 놀랐으면 이럴까 하고 걱정이 된 베르닌은 왕재수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의외로 왕재수의 표정은 담담했다. 간밤처럼 겁에 질린 것 같지도 않았고 흥분한 기색도 없었다. 심지어 베르닌의 손에서 깨진 도자기 인형을 빼앗아 찬찬히 살피기까지 했다.

 

 

“ 딤카, 이제 어떻게 하지? ”

 

 

베르닌은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왕재수를 코즐로프에게 피신시킨 후 드미트리와 함께 위층에 숨어서 범인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답답한 듯 냉장고로 가서 주스 팩을 꺼냈다. 컵에 오렌지 주스를 따라서 단숨에 들이켰다. 베르닌도 갑자기 속이 타고 목이 바짝 말랐다.

 

 

“ 주스 남았니? ”

 

“ 좀 남았어. 줄까? ”

 

“ 응. ”

 

 

드미트리가 빈 컵을 가져와서 남은 주스를 따라주었다. 시원한 주스를 마시고 나니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드미트리는 어느 새 권총을 꺼내 쥐고 있었다. 왕재수와 베르닌을 쳐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 세 번째 카드에서는 협박이 훨씬 노골적으로 변했어. 다음 카드는 안 올 것 같아. 온다 해도 다른 방식이 될 거고. ”

 

“ 그게, 그게 무슨 뜻이야? ”

 

“ 다닐, 나 본부에 있을 때 이런 사건 몇 번 봤어. 전형적인 겁주기 수법이지만 특정 목적이 결부되면 물리적인 폭력이 수반되는 경우가 대다수야. 게다가 저 인형. 처음엔 카드만 왔고 두 번째엔 죽은 새가 왔어, 그리고 이번엔 목 잘린 인형이야.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어. ”

 

“ 난 새가 더 끔찍했던 것 같은데... 진짜 시체였잖아... 잔인했고. ”

 

 

베르닌이 날개가 짓이겨진 피투성이 비둘기를 떠올리며 내뱉었다. 드미트리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다닐. 그건 그냥 겉보기만 그런 거야. 상징적인 걸 생각해야지. 비둘기는 그냥 새야. 그런데 이번에는 인형이잖아. 사람 모습을 하고 있어. 게다가 머리가 아예 없잖아. 이제 정말 위험해졌어. 미하일을 더 이상 여기 놔두면 안 될 것 같아. 공연도 마찬가지야. 최악의 경우 정말 공연을 미뤄야 할 수도 있어. ”

 

안 돼, 공연은 미룰 수 없어. 얘가 그 공연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데. ”

 

“ 나도 알아. 나도 그 공연 보고 싶어. 난 미하일의 팬이잖아. 하지만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돼. ”

 

“ 하지만... ”

 

 

베르닌은 왕재수 쪽을 쳐다보았다. 공연 취소라니 미쳤느냐고 길길이 날뛸 게 뻔하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장의 카드를 번갈아가며 읽어보고 있었다. 한 손으로 인형을 들었다 놨다를 두어 번 반복했다.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베르닌은 걱정이 되어서 그에게 다가갔다.

 

 

“ 너 괜찮아? ”

 

“ 다닐. 이거 말인데... ”

 

 

왕재수가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 몇 초 사이에도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면서 동공이 비정상적으로 크게 확장되고 있었다. 더럭 겁이 난 베르닌이 왕재수의 어깨를 끌어당기려고 했을 때 갑자기 드미트리가 뒷걸음질쳤다. 비틀거리다 마카로프 권총을 떨어뜨릴 뻔 했다.

 

 

딤카, 왜 그래!

 

“ 어... ”

 

 

드미트리의 눈동자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술 취한 사람처럼 고개를 마구 젓더니 권총을 꽉 쥔 채 쿵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충격에 사로잡힌 베르닌은 드미트리에게 달려가 그를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엄청난 현기증과 멀미가 몰려왔다. 뱃속이 뒤집히는 것처럼 울렁거리더니 걷잡을 수 없이 무거운 졸음이 쏟아지면서 손발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면서 베르닌은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다. 왕재수가 두 팔로 그를 꽉 껴안고 소파로 밀어붙이는 것을 느꼈지만 어쩌면 그건 왕재수가 그의 품으로 넘어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정신이 점점 흐려지는 가운데 베르닌은 ‘다닐! 다닐!’ 하는 낮고 처절한 비명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소리는 곧 뭉개지면서 사라졌고 베르닌도 의식을 잃었다.

 

 

 

 

 

*   *   *

 

 

 

 

 

베르닌은 씁쓸하면서도 시큼한 맛을 느끼며 깨어났다. 머리가 쿵쿵 울렸고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점차 정신이 들었을 때 베르닌은 머리가 울리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그의 뺨을 철썩철썩 때리고 있으며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던 이유는 그 누군가가 실지로 그의 귓가에 대고 낯익은 목소리로 고함을 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냐! 일어나! 정신 차려! 다냐!

 

 

베르닌은 간신히 눈을 떴다. 드미트리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고개를 흔들었다. 눈을 깜박거려 보았다. 그때 드미트리가 그의 입에 물을 흘려 넣었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정신이 들었다.

 

 

“ 정신 드니? ”

 

“ 어... 으응... “

 

 

갑자기 베르닌은 불에 덴 듯 놀랐다.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펄쩍 뛰어 일어나려고 했지만 머리가 너무 무겁고 팔다리에 힘이 없어서 옆으로 쓰러졌다. 드미트리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드미트리의 손에도 별다른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뒤엉켜서 함께 카펫 위로 넘어졌다. 베르닌은 엎드린 채 정신없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미하일! 미하일! 너 괜찮아? 대답 좀 해봐! 미셴카!

 

 

아무런 답이 없었다. 드미트리가 목쉰 음성으로 속삭였다.

 

 

“ 없어, 다냐... 미하일은 사라졌어. 그놈이 왔다 갔어. 아, 빌어먹을... 보기 좋게 당했어... ”

 

 

너무나도 분한 나머지 드미트리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주먹으로 카펫을 내리쳤다.

 

 

“ 다 나 때문이야... 얼간이 천치... 예상했어야 했는데... 아... ”

 

“ 대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우리가... ”

 

“ 약을 탔어! 그 자식은 미하일 집에만 갔었던 게 아니야. 여기도 왔었던 거야. 어제 이미 왔다 간 게 분명해. ”

 

“ 하지만... 어디에? ”

 

그 주스... 다닐, 오렌지 주스! 그거 마시고 나서 어지러웠어. 너하고 내가 같이 마셨잖아. 그 주스 팩, 주둥이가 개봉되어 있었어. 진작 알아챘어야 하는데. 난 네가 마시고 남겨둔 거라고 생각했어. ”

 

“ 아니야, 나 오렌지 주스 산 적 없어. 난 네가 미샤 냉장고에서 가져온 거라고 생각했어. 미샤가 주스를 좋아하거든, 술을 안 마시니까. 그럼, 그럼 범인이 그 주스 팩을 넣어두고 갔단 말이야? 약을 타서? 그래서 우리가... ”

 

“ 그런 것 같아. ”

 

“ 하지만, 미샤는 안 마셨어. 기억 안 나? 걘 네가 만들어준 아침만 먹었어. 차랑 우유만 마셨고. 근데 아까, 아까 걔도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손이 엄청 차가워졌어. 그러니까 주스가 아닐지도 몰라. ”

 

 

드미트리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냉장고로 가더니 우유 팩을 꺼냈다.

 

 

“ 우유... 이거였어. 이것도 열려 있었어. ”

 

 

베르닌은 빨간 색의 우유 팩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머리가 핑 돌았다.

 

 

“ 그거 아니야... 딤카, 나 그거 산 적 없어. 그건 3.5% 우유잖아. 미샤는 저지방 우유만 먹어. 나 그래서 0.5% 아니면 1.8% 우유만 산다고. 오, 하느님... 내가 왜 못 봤을까... 주스도 우유도 다 그놈이 넣어둔 거란 말이야? 수면제를 타서? 우리 집에 왔다 갔다고? 그놈이... 미샤를... ”

 

 

베르닌은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무릎 아래가 물로 변하는 것 같았지만 억지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난 드미트리가 그의 팔을 부축해 주었다.

 

 

“ 안되겠다. 우리 잠깐 앉자. 정신을 차려야 돼. 잠깐만... ”

 

 

드미트리가 비틀거리면서 거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찬 공기가 들어오자 두통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일단 소파에 주저앉았다. 드미트리도 앉았다. 심호흡을 하고 또 했다. 그러다가 드미트리가 화장실로 가서 토했다. 베르닌도 잠시 후 속이 뒤틀려 와서 뒤따라가 토했다.

 

 

실컷 토한 후 세수를 하고 나자 그래도 뱃속이 가라앉았다. 드미트리는 아무래도 꾸준히 자기 관리를 해 와서 그런지 베르닌보다 먼저 정신을 수습한 것 같았다. 아직 다리가 후들거리는 베르닌을 부축해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베르닌이 일어나려고 하자 드미트리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잠깐만 누워 있어. 너 아직 안색이 안 좋아. 아무래도 네가 나보다 약을 더 많이 먹은 것 같아. 수면제가 주스 아래 가라앉아 있었을지도 몰라. 조금만 누워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난 이제 훨씬 나아졌거든. ”

 

“ 딤카, 미하일... 아... 그 자식 어떡하지? 어떻게 하지... 그 협박 편지... 비둘기, 인형... 걔한테 무슨 일이 생겼으면... ”

 

 

베르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너무나 무서웠다. 하얘진 왕재수의 얼굴이 아른거렸고 ‘다닐, 다닐!’ 하고 귓가에 메아리치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끝없이 반복되는 것 같았다.

 

 

‘ 내 탓이야... 싫다고 해도 로만에게 보냈어야 했어. 공연 같은 거 그만두게 했어야 해... 우리 집에도 그놈이 왔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걜 부득부득 여기다 잡아놓고... 내 옆에 있었는데... 그렇게 내 이름 부르고 비명 질렀는데... 그놈이 끌고 가게 놔뒀어... 다 나 때문이야... ’

 

 

현실적인 드미트리는 그를 달래는 대신 거실로 나가더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5분쯤 누워 있었다. 드미트리의 말대로 점점 현기증이 가시면서 기력이 돌아왔다. 문득 모스크바에서 일류샤가 썼던 약이 생각났다. 그 정도로 후유증이 강력한 약은 아닌 것 같았다. 문제는 왕재수였다.

 

 

‘ 그 자식, 술도 못 마시고 약도 아무 거나 못 먹는데... 그때도 약한 진정제 놨는데 하루종일 뻗었다고 일류샤가 그랬어.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손이 차가웠던 거야. ’

 

 

코가 시큰거리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마구 흔들면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혹시라도 왕재수가 집안 어딘가에 자기들처럼 쓰러져 있는데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거실로 나갔다. 그때 드미트리가 부엌에서 그를 불렀다.

 

 

“ 다닐, 이제 좀 괜찮아졌어? ”

 

“ 응. ”

 

“ 이리 좀 와봐. ”

 

 

 

베르닌은 부엌으로 갔다. 드미트리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바위처럼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찌푸린 미간 너머로 분노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의 손에는 구겨진 종잇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 그건... ”

 

“ 그래, 다닐. 네 번째 카드야. ”

 

“ 하지만, 그건... ”

 

 

베르닌은 다시 한 번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건 앞서 왔던 하얀 카드도, 붉은 색지도 아니었다. 옆이 거칠게 찢겨진 푸른색 모눈종이였다. 너무나 눈에 익었다. 왕재수의 수첩에서 뜯어낸 것이 분명했다. 과연 식탁 구석에는 베르닌이 아침에 챙겨왔던 왕재수의 수첩이 놓여 있었다. 베르닌은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서 종이에 마구 휘갈겨 쓴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등줄기를 쿡쿡 쑤시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잠깐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드미트리에게 읽어달라고 했다. 드미트리가 낮고 빠르게 읽었다.

 

 

호위 기사들에게 고함

입 다물고 있으면 왕자님은 무사할 거야.

모스크바에는 아프다고 통보해. 물론 공연은 취소야.

수요일이 지나면 곱게 돌려보내주지. 

추신. ‘곱게’는 물론 조건부야.

 

 

베르닌이 미처 심호흡을 하기도 전에 드미트리가 카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반대편 손바닥을 펼쳤다. 하얀색과 금색의 조그만 물체가 놓여 있었다.

 

 

“ 그건... ”

 

“ 그래, 다닐. 머리야. 그 인형, 잘려나갔던 머리. 식탁 위에 있었어. 이 편지와 함께. 그게 전부야. ”

 

 

드미트리가 아침에 왔던 도자기 인형을 올려놓았다. 잘린 머리는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베르닌은 뱃속이 다시 뒤틀리는 것 같았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더러운 자식! 죽여 버릴 거야! 우리 나가자! 나가서 찾아보자! 멀리 못 갔을지도 몰라!

 

 

드미트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흥분 단계는 지난 것 같았다. 그는 잠자코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 다닐, 벌써 정오가 지났어. 우린 세 시간도 넘게 뻗어 있었어. 그자는 치밀하게 모든 걸 준비했어. 우리의 관심을 미하일의 집으로 돌려놓고 이미 어제 여기 와서 음료수에 약을 타놓고 인형까지 준비했어. 분명히 이 근처에 숨어 있었을 거야. 우리가 약을 먹고 쓰러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입해서 미하일을 끌고 간 거야. 너 나보다 늦게 쓰러지지 않았어? ”

 

“ 응, 네가 쓰러질 때만 해도 왜 그러는지 몰랐어. 그러다가 금방... ”

 

“ 혹시 기척 못 느꼈어? 네가 나보다 늦게 정신을 잃었으니까... 혹시 그때 무슨 단서라도... ”

 

“ 아니... 미샤가 소리를 질렀어. 그건 기억나. 내 이름을 막 불렀는데 겁에 질린 것 같았어. 그리고 걔가 날 붙잡았어. 아니, 붙잡은 것 같기도 하고 나한테 쓰러진 것 같기도 해. ”

 

“ 음... 그렇구나. 그럼 그때 이미 그놈이 들어왔던 걸지도 몰라. 미하일이 끌려가면서 널 불렀던 걸지도... 그때가 여덟시 전이었잖아... 걔가 사라진지 네 시간이 지났어. 납치범에겐 여기서 벗어나기 충분한 시간이지. 그러니까 지금 무턱대고 나간다 해도 미하일을 찾아내기는 어려워. 일단 단서를 끌어 모아서 계획을 짜야 해. ”

 

하지만... 미샤가 위험하단 말이야!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걘 사이코 납치범의 손아귀에 있어... 무슨 나쁜 짓을 당할지 몰라... 딤카, 너는 예전 미샤만 생각해서 그래. 걔 감옥에서 진짜 고생했어. 고문 때문에 몸도 망가졌단 말이야. 여기 와서도 계속 아프고... 폐렴 걸리고 독약 먹고... 의사 선생님이 얼마나 걱정하는데. 아까 그 수면제도... 우린 몇 시간 자고 깨어났지만 걔한테는 치명적일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그냥 이러고 있어! 나 극장에 전화할 거야. 공연 취소라고 얘기할 거야. 모스크바에도 전화해서 공연 취소됐으니까 수요일에 오지 말라고 하면 되잖아. 국장한테 그렇게 보고하면, 그러면 풀어줄지도 모르잖아! 걔 많이 아프단 말이야... 지난주에도 모스크바 끌려가서 그렇게 고생했는데... 더 괴롭힐 데도 없는 애란 말이야! ”

 

 

 

베르닌은 괴롭게 울부짖었다. 스페호프의 하수인에게 끌려가서 협박을 당하고 있는 왕재수를 상상하니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았다. 너무나 걱정이 되어서 미칠 것 같았다. 드미트리는 훌쩍훌쩍 우는 베르닌을 탓하거나 바보 취급하는 대신 그의 어깨를 한 팔로 포옹하며 등을 툭툭 두들겨 주었다.

 

 

“ 진정해, 다냐. 미하일은 괜찮을 거야. 스페호프가 둔하긴 하지만 진짜 바보는 아니잖아. 걔가 누구 후원을 받는지 뻔히 아는데 정말로 해치지는 않을 거야. ”

 

“ 아니야... 독사과 먹였어... 그때, 그때 정말 죽을 뻔했어. 시, 시계탑에 불도 지르고... 그때도, 그때도 죽이려던 건 아니라고 했지만 정말 죽을 뻔했어. 그러니까 지금도... 잘못하면... 그때는 내가 옆에 있었단 말이야. 근데 지금은, 지금은 걔 혼자... 아무도 없이 혼자... ”

 

 

베르닌은 북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흑흑 흐느껴 울었다. 드미트리는 그가 울도록 잠시 내버려두었다. 잠시 후 베르닌이 좀 진정되자 손수건을 건네주고는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 다닐, 목요일 아침에 스페호프가 나 불러서 지령 줬다고 했잖아. 그때 국장이 나에게도 당부했어. 지난주에 뭔가 일이 꼬인 게 있어서 섣불리 일을 벌였다간 역효과라고. 그러니까 공연을 방해하되 미하일한테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면 안 된다고 했어. 행여 잘못해서 걔 몸에 문제가 생기면 공연 취소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가브릴로프 KGB에 악영향이 올 수 있다고. 그러니까 지난번처럼 독약을 쓰거나 다치게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럴 거였다면 어째서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썼겠어. 연쇄 협박편지에, 비둘기 시체에 도자기 인형에... 자동차를 손보거나 밤길에 급습해서 폭행하거나, 아니면 아까 그 우유에 치사량의 수면제를 넣었을 수도 있잖아. 근데 그렇게 안 했어. 심지어 이 편지를 봐. 이건 앞선 카드들처럼 미리 준비한 게 아니야. 타이프를 치지도 않았고 종이를 준비한 것도 아니야. 미하일의 수첩에서 뜯어낸 거잖아. 손으로 썼어. 글씨가 엉망인 걸 보니까 왼손으로 써서 필체를 감춘 것 같아. 우리에게 미하일의 안전을 확신시키고 싶었던 거야. 단순히 공연 취소를 종용하려는 거였다면 굳이 편지를 남길 필요가 뭐가 있겠어. 미하일이 없어지면 당연히 공연도 취소되는 건데.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방법을 찾아보자.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미트리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신체적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왕재수가 낯선 곳에 갇혀 공포에 질려 있는 것을 상상하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 갇히는 거 제일 싫어하는 앤데... 아직도 감옥 갔던 꿈 꾸면 울면서 베개 들고 찾아오는데. ’

 

 

그때 드미트리가 덧붙였다.

 

 

“ 그리고 또 있어, 다닐. ”

 

“ 뭐가? ”

 

“ 우리 총 말이야. 그대로 놔뒀어. ”

 

“ 아... ”

 

 

베르닌은 마카로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드미트리가 주머니에서 권총을 두 자루 꺼냈다. 베르닌은 자신의 권총을 돌려받았다. 총알도 그대로 들어 있었다.

 

 

“ 일반적인 납치범이라면 권총을 가져갔을 거야. 최소한 탄창이라도 제거했겠지. 근데 그대로 놔두고 갔어. ”

 

“ 못 본 게 아닐까? ”

 

“ 아냐, 난 쓰러질 때 총을 손에 쥐고 있었어. 너도 주머니에 넣어놨었잖아. 근데 둘 다 소파 위에 있었어. 그자가 빼내서 올려놨겠지. 진짜 위해를 가하려고 했다면 우릴 쐈을 수도 있잖아. 근데 안 그랬어. 우리 몸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어. ”

 

“ 그럼... 그건 역시 범인이 우리 쪽 사람이란 거네. 우리 국장은 공공기물을 굉장히 중시해. 무기는 말할 것도 없지. 현장요원들에게만 지급하고 그것도 기밀 장부로 관리해. 총알 하나 쓰는 것도 다 적게 하고 권총 관리 제대로 해야 한다고 매뉴얼도 매년 수정보완해서 요원들에게 나눠줘. 권총 분실은 굉장한 징계 사유야. 최소한 정직, 보통은 해고야. 그러니까 국장이라면 권총을 그대로 놔두게 했을 것 같아. ”

 

“ 아, 스페호프가 그런 타입이구나. 설득력 있다. 난 다른 쪽을 생각했거든. 국장은 널 믿지만 너한테 작전을 맡기면 모스크바에서 금세 의심할 거라고 했거든. 그래서 나한테 지령을 준 거고. 그 말은, 어쨌든 우리는 KGB의 울타리 안에 있는 ‘우리’ 사람들인 거야. 그래서 우릴 다치게 하지 않은 거지. 네가 말한 권총 관리도 분명 이유였을 거고. ”

 

“ 응. 국장은 날 신뢰해. 현장요원으로 키우고 싶다고 했어. 근데 우리가 멀쩡한 건 좋지만 미샤를 찾아내는 데는 도움이 안 되잖아. ”

 

“ 아니야, 다닐. 너 내 말 제대로 안 들었구나. 국장이 나한테 지령을 주면서 그랬다고 했잖아. 작전이 진행되면 나도 알게 될 테니까 옆에서 자연스럽게 도우라고 했다고. 그 말은, 협박범이 나에게 접촉을 해올 수도 있다는 뜻이야. 혹여 그자가 조심하느라 안 그런다 해도, 나에게는 스페호프에게 작전 진행에 대해 물어볼 구실이 있는 거야. ”

 

“ 아, 그렇구나!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 그러면, 나도 마찬가지겠네. 어차피 난 걔 감시요원이니까 이 일에 대해 보고를 해야 하잖아. 이런 건 기밀사항에 속하는 거니까 유선 보고는 금지고... 우리 국장 보통 주말에도 출근하거든. 차라리 내가 사무실에 지금 가볼까? 그러면 국장이 정보를 공유해줄 수도 있잖아. ”

 

“ 그렇지. 운이 좋으면 그럴 가능성도 있지. 근데 딱 하나가 걸려. ”

 

“ 뭐가? ”

 

“ 지령에 대해 너한테 말하지 말라고 한 거. 네가 외부의 의심을 받을까봐 그런다고 하긴 했는데... 만의 하나 국장이 널 의심해서 그런 거라면 너에게 일부러 거짓 정보를 줄 수도 있어. 너는 미하일과 굉장히 사이가 좋잖아. 여기 처음 온 나도 첫눈에 알아챘는데... 국장이 언제까지 그걸 위장으로 믿어줄지 모르겠어. ”

 

 

베르닌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스페호프는 단 한 번도 그를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모스크바에 전달할 밀서까지 맡겼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자 의심스러운 구석이 몇 가지 있었다. 독사과 사건 때도 스페호프는 레베진스키에게 약을 맡겼고 베르닌에게는 사과에 독을 바를 거란 정보는 주지 않았다. 시계탑 방화의 경우에는 인부를 매수했으면서도 그에게는 말 한 마디 벙긋하지 않았다. 베르닌의 서무 업무를 면제해주면서 왕재수 곁에서 감시를 하라고 극장에 보냈으니 그가 시계탑에 따라 올라갈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리고 지난주에 모스크바에 다녀온 후 스페호프는 그에게 그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스비제르스키와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드미트리를 그에게 붙여 주면서 왕재수의 공연을 함께 방해하라는 지시를 내렸어야 했다. 그런데 스페호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그리고 하나 더 있어. ”

 

“ 뭔데? ”

 

“ 수요일 공연. 미하일은 그거 올리고 싶어 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근데 지금 스페호프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면 그는 즉시 공연 개최가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크레믈린에 올릴 거야. 물론 미하일이 납치됐다고 하지는 않겠지, 자기 무덤을 파는 꼴이니까. 협박 편지에 쓴 것처럼, 아파서 입원했다고 할 가능성이 제일 크지. 윗분들도 미하일이 고문 후유증으로 계속 고생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을 테니 별로 의심하지 않을 거고. 입원 차트는 조작하면 되는 거잖아. 일단 문서로 보고되면 모든 게 끝나. 미하일이 수요일 전에 무사히 돌아온다 해도 공연은 완전히 물 건너가는 거라고. 걔 정말 그 공연 올리고 싶어 했잖아. 연습실에서 보니까 무용수들도 진짜 열성적이었는데... 어떻게든 그 공연 올리게 해주고 싶어.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재수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그도 잘 알았다.

 

 

“ 하지만... 미샤는 납치됐고 행방도 몰라. 범인은 우리에게 입 다물고 기다리라고 협박했고. 공연 취소하라고. 우리가 말을 안 들으면 미샤를 곱게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했잖아. ”

 

“ 듣는 척 하는 거야. 일단 극장은 오늘 쉬잖아. 내일은 일요일이고. 내일 공연 있니? ”

 

“ 아니, 없어. 오페라도 없고 오전에 어린이 대상 오케스트라 연주회만 하나 있어. 수요일 신작 준비 때문에 화요일까지는 발레 공연이 없어. ”

 

“ 그래, 잘됐다. 그러면 일단 극장 쪽에는 미하일이 아파서 일요일에는 못 나간다고 통보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겉으로는 협박범의 요구에 응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모스크바에 연락하는 건 월요일로 미루는 거야. 어쨌든 지금은 주말이니까 공공기관은 모두 쉬잖아. 일단 그렇게 내일 밤까지 시간을 버는 거야. 그동안 우리가 미하일을 찾아낸다면... ”

 

“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국장에게서 정보를 캐낼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

 

 

드미트리는 세 장의 카드와 마지막 종이쪽지를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생각에 잠긴 눈으로 협박 편지들을 몇 번이나 읽었다.

 

 

“ 있잖아, 다닐. 너희 국장 말이야, 발레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했지? ”

 

응. 나보다 더 몰라. 클래식 음악도 모르고, 오페라도 마찬가지야. 극장엔 관심이 전혀 없어. 국장한테는 무대 올라가는 것들은 그냥 다 딴따라야. ”

 

“ 너희 현장요원들 중에는 그쪽 취미 가진 사람들 있어? ”

 

“ 글쎄, 나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 우리는 현장요원들하고는 가깝게 지내지 않거든. 근데 적어도 내가 미샤 감시요원으로 배정된 후에 극장에서 마주친 요원들은 없었어. 우리 지국에서 발레 관심 있어 하는 직원은 내가 알기로는 리자 밖에 없었어. 리자는 어머니 모시고 가끔 공연도 보러 오거든. 처음에 나한테 미샤 사인도 받아 달라 하고 그랬어. ”

 

“ 아, 리자... ”

 

 

드미트리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드미트리가 물었다.

 

 

“ 너 말이야, 리자랑 친하다고 했지? ”

 

“ 어, 으응. 그렇다고 막 가까이 지내는 건 아니고. 여직원들 중에서는 그래도 인사도 잘 하고 이따금 밥도 같이 먹고. ”

 

“ 리자는 언제 들어왔어? 걘 공채 아니지? 어리니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곧장 들어왔을 것 같은데. ”

 

“ 응, 리자는 공채 요원이 아니야. 등록부서 여직원들은 기능직이라서 따로 채용하거든. 그 부서에서 공채에 사무직은 알렉산드라밖에 없어. 리자는 나보다 몇 달 먼저 들어왔으니까... 걔도 3년쯤 됐겠다. ”

 

“ 그래... ”

 

 

베르닌은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정색을 하며 드미트리를 쳐다보았다.

 

 

“ 야, 너 설마 지금 리자를 의심하는 거야? 말도 안 되잖아! ”

 

“ 난 그냥 모든 가능성을 다 짚어보는 것뿐이야, 다닐. 네 장의 협박편지가 왔는데 그 중 적어도 세 장에는 극장이나 발레와 관계된 얘기가 있어. 첫 번째 편지에는 6가지 음악에 대한 얘기가 있지. 두 번째 편지에서는 파랑새와 검은 기사 얘기가 있어. ”

 

“ 어, 그래. 나 그게 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갔어. 왜 뜬금없이 파랑새가 나오고 기사가 나온 걸까? 죽은 건 비둘기였잖아. 천사는 아마 그 인형 때문인 것 같은데... ”

 

“ 파랑새는 잠자는 미녀에 나오는 배역이야. 검은 기사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기사들의 춤 얘기인 것 같아. 발레 무대를 빗대서 빈정거리고 있는 거야. 미하일을 겨냥한 거라고. 최대한 심기를 건드리려고 했던 거겠지. 무대에 올라가던 애니까 아마 제대로 기분 상했을 거야. 그리고 마지막 편지에도 호위 기사와 왕자 얘기가 있잖아. 전부 고전 발레에 나오는 배역들이라고. 다닐, 이걸 보낸 사람은 극장과 발레에 대해 아는 사람이야. 스페호프와 현장요원들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고. 그러니까 리자가 됐든 발따예프가 됐든 경비 아저씨가 됐든 발레에 관심 있는 너희 직원이라면 일단 의심해 보려고 했던 거야. ”

 

“ 그치만... 말도 안 돼! 리자는 아직 어려! 순진한 여자애란 말이야. 그리고 미샤에 대해서도 얼마나 호감을 갖고 있는데. 이런 끔찍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게다가 비둘기까지 죽였잖아! 리자가 강아지를 얼마나 예뻐하는데. ”

 

“ 진정해, 다닐. 리자가 범인이라고 하지는 않았어. 그냥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는 것뿐이라니까. 리자도 어제 나한테 왔었단 말이야. 나 사실 어제 온 여자들 중 하나쯤은 국장이 보냈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그 지령 때문에 접촉하게 하려고. 카체리나, 갈리나, 그리고 리자였는데 얘기 나눠보니까 극장에 대해 관심 있는 건 리자 뿐이었어. ”

 

아니야, 리자는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냐!

 

 

베르닌은 왕재수에 대한 걱정도 잠시 잊고 열심히 리자를 변호했다. 드미트리는 미심쩍은 느낌을 버리지 못한 것 같았지만 어쨌든 한 발 물러섰다.

 

 

“ 알았어. 하긴 리자가 연루되어 있다면 어젯밤에 나한테 얘기를 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꼭 너희 쪽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

 

“ 맞아, 극장 쪽 사람일 수도 있어. 독사과 때도 레베진스키가, 그러니까 거기 수석안무가인데 국장이 그 사람을 매수했거든. 돈키호테 때도 그렇고. 레베진스키라면 신작의 음악이 뭔지도 다 알고 있을 거야. 연습실에 뻔질나게 드나들었어. 게다가 미샤를 정말 싫어해. 원래 감독 자리에 내정되어 있었는데 미샤가 와서 물먹었거든. ”

 

“ 음... 그렇구나. 스페호프가 이미 극장 쪽에 자기 사람을 심어놨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다닐, 이렇게 하자. 일단 너는 극장 쪽을 맡아. 난 온지 얼마 안돼서 아무래도 이쪽 극장은 잘 모르잖아. 난 지령을 받은 것을 빌미로 너희 국장에게 가서 분위기를 떠볼게. 그 전에 일단 밖으로 나가보자. 미하일도 약을 먹었다면 우리처럼 뻗었겠지. 의식을 잃은 성인 남자를 업어서 옮겼다면 여기 주변 사람들 눈에 띄었을 수도 있어. 오늘 토요일이라서 아침에 사람들 산책도 많이 하던데. 혹시라도 흔적을 남겼을 수도 있으니까.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요일 밤까지 왕재수를 찾아내고 말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마카로프 권총의 탄창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   *   *

 

 

 

 

 

밖으로 나가기 전에 그들은 집안에서 열심히 단서를 수집했다. 베르닌의 집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납치범이 문을 따고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왕재수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범인에게는 열쇠가 있든지 왕재수처럼 핀으로도 문을 잘 따는 재주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현관에 가까운 쪽 카펫 바닥에는 길게 긁힌 자국이 나 있었다. 드미트리는 범인의 신발이 어딘가에 걸려서 긁혔을 거라고 가정했고 카펫에 난 자국과 현관에 남은 금박 흔적을 볼 때 범인은 금박 버클 달린 구두를 신었을 거라고 추리했다. 베르닌과 드미트리 둘 다 그런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던 데다 왕재수는 간밤에 너무 놀란 나머지 슬리퍼를 신은 채 업혀 왔기 때문이다.

 

 

소파 근처에서 베르닌은 10센티미터 정도 길이의 붉은색 천 조각을 발견했고 다시금 가슴을 철사로 죄는 듯 괴로워졌다. 아침에 그가 챙겨온 빨간 스카프에서 찢겨 나온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스카프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왕재수는 옷 색깔과 안 어울린다고 그 스카프를 매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범인이 그것으로 왕재수를 묶었거나 눈이나 입을 막았던 것이다. 드미트리는 붉은색 천 조각을 내려다보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 찢어진 걸 보니 미하일이 저항했나봐. 다치지 않았어야 할 텐데. 그래도 크게 저항하지는 못했을 거야. 이거 말고는 몸싸움의 흔적이 전혀 없거든. 버둥거리다가 약기운이 돌아서 우리처럼 쓰러졌나봐. ”

 

“ 죽여 버릴 거야... ”

 

 

베르닌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버둥거리며 반항하고 자신의 이름을 절망적으로 부르는 왕재수의 모습을 상상하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스비제르스키의 부하들에게 끌려가던 왕재수를 일류샤에게 짓눌린 채 무력하게 지켜보던 때가 떠올랐다. 동시에 너무 걱정이 됐다.

 

 

‘ 바보...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성깔은 또 장난 아닌 녀석이니 막 반항하고 대들면 해코지 당할지도 모르는데... 제깟 게 무슨 힘으로 무장한 납치범을 이겨낸다고... ’

 

 

카펫의 자국과 스카프 조각, 열린 문, 드미트리가 소중하게 챙긴 세 장의 카드와 마지막 쪽지, 그리고 죽은 비둘기와 깨진 도자기 인형 외에는 더 이상의 단서가 없었다. 드미트리는 마지막 쪽지가 타이프라이터 대신 수기로 씌어 있었다는 것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 왼손으로 흘려쓰긴 했지만 그래도 의심 가는 사람들의 필체를 대조해보면 혹시라도 얻는 게 있을지도 몰라. ”

 

 

베르닌은 그리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필체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궁금해서 자기도 왼손으로 글씨를 써봤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자신의 원래 글씨체와는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쪽지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이상한 기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비뚤비뚤 흘려쓰긴 했지만 어디서 본 것 같은 글씨였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본 것 같기도 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 얼마 안 되는 단서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추적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공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 둘이서 주변을 뒤져 왕재수를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같았다. 일단 그들은 경비실에 갔다. 수위에게 낯선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 혹시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남자를 옮긴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수위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가브릴로프에서도 고급 아파트에 속했고 현관과 주차장에 각각 수위가 한 명씩 있었지만 둘 다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울화가 터진 베르닌이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드미트리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 다냐, 저 사람 주머니를 봐... 기대하지 말자. ”

 

 

보드카 병이 삐죽 솟아나와 있었다. 주차장 쪽 수위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닌은 너무나 화가 나서 모두 직무 유기로 인민재판에 회부하고 말겠다고 씩씩거렸지만 물론 수위들은 콧방귀를 뀌었다.

 

 

“ 이상한 사람 하나도 안 내려왔어요! 내가 아침부터 술 마시면서 다 보고 있었는데! 여기 주민들은 내가 다 아는데! ”

 

“ 지금 얘기하는 게 7층의 그 반동분자라면 내가 왜 못 알아봤겠어요! 내가 이렇게 시력이 나빠졌어도 그 녀석이라면 100미터 밖에서도 알아보는데! 근처에 오기만 해도 후광이 나는 꽃미남인데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요! ”

 

 

화가 머리끝까지 난 베르닌 대신 드미트리가 두 번째 수위에게 주차장에 낯선 차가 들어오지 않았느냐고 꼬치꼬치 물었다.

 

 

“ 그거야 모르죠. ”

 

“ 장부에 차 번호 전부 적게 되어 있지 않나요? 이 아파트는 고급 호텔 겸용이잖아요. ”

 

“ 바로 그래서죠! 여기는 위층은 주거 공간이지만 4층까지는 호텔로 쓰고 있잖아요. 윗분들도 자주 이용하는 곳이라서 관용차도 종종 들어오는데 그분들 보는 앞에서 차 번호를 적으란 말입니까? 나도 먹고 살아야지! ”

 

“ 하지만... 그래도 평소에 못 보던 차량이 들어왔다면 기억이... ”

 

“ 글쎄요. 다 비슷비슷한 차들이라. 저 친구 차 하나만 기억나네. 여기는 웬만하면 다 볼가 급의 고급차량인데 저 사람 혼자 낡고 후진 지굴리를 몰고 다니니. ”

 

으윽, 누가 내 차 봤냐고 물어봤어요? ”

 

 

곁에 있던 베르닌이 결국 폭발했다. 드미트리는 간신히 베르닌을 달래서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둘은 건물을 돌면서 주민들과 호텔 투숙객들에게 KGB 신분증을 제시하고는 혹시 오전에 수상한 사람을 보지 못했는지, 인사불성이 된 취객을 옮기는 사람은 없었는지를 물었다.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주변 가게와 공원 쪽에도 가보았다. 목격자는 전혀 없었다.

 

 

“ 엘리베이터로 주차장까지 내려가서 차에 태우고 빠져나갔나봐. 저 망할 인간들은 술 퍼마시느라 하나도 못 봤을 거고.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드미트리는 일단 KGB 사무실로 가서 정보를 수집하고 베르닌은 극장에 가보기로 했다. 혹시라도 스페호프에게 의심받을까봐 베르닌은 드미트리를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준 후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차를 몰았다. 3시간 후 공원의 천사상 앞에서 만나서 정보를 공유하기로 했다.

 

 

 

 

 

*    *    *

 

 

 

 

 

극장 정문은 닫혀 있었다. 후문으로 가자 청소부들과 인부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소독약과 페인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신관 쪽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닌은 수위에게 오늘 출근한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 오늘은 소독 때문에 사무국 쪽에서는 시설관리팀장과 담당자만 나왔고요, 나머지는 전부 임시휴일이죠. 사무직도 그렇고 단원들도 안 나왔어요. ”

 

“ 미하일도 못 봤죠? ”

 

“ 아, 감독님. 오늘은 안 나오셨어요. 어젯밤에 공연 끝나고 나가시면서 보브카에게 모레 보자고 했다던데요. 감독실 커튼이랑 카펫도 싹 벗겨냈고 아침 내내 페인트칠도 다시 해서 오늘은 오셔봤자 허탕이에요. 그나마도 연습실은 지금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감독님이 거긴 소독만 하고 다른 건 손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거든요. 냄새는 좀 나겠지만. ”

 

“ 오케스트라 쪽도 안 나왔죠? ”

 

“ 아무도 안 나왔어요. 아참, 그러고 보니... 아까 니콜라이 안토노비치가 왔다 갔군요. ”

 

“ 니콜라이 안토노비치라면... 어, 레베진스키 말인가요? ”

 

“ 네. 아까 열 시 쯤에 들렀어요. 뭘 놓고 간 게 있다고 안으로 들어가던데. 30분쯤 후에 도로 나왔죠. ”

 

“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

 

“ 글쎄요. 사무실에 간 게 아닐까요? 아니면 연습실에 갔겠죠 뭐. 저는 현관만 지키니까 잘 모르겠네요. 들어가서 물어보시죠. ”

 

 

베르닌은 급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가 풀풀 피어올랐다. 페인트칠 때문인지 사무집기가 복도에 다 나와 있었고 인부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아는 얼굴을 찾다가 감독실 앞에서 그리고리를 발견했다. 인사를 한 후 레베진스키를 혹시 봤느냐고 묻자 그리고리가 짜증을 냈다.

 

 

“ 어휴, 레베진스키인지 뭔지 그 인간 정말 너무 싫어. 얼마나 갑질을 하는지. 그 인간은 툭하면 목에 힘주고 돌아다니면서 우리한테 일 제대로 하라는 둥, 뭐가 비뚤어졌다는 둥 먼지 좀 피우지 말라는 둥 잘난 척이 하늘을 찌른다니까. 제가 무슨 극장장이야 감독이야. 꼬마 감독님은 얼마나 우리한테 잘해주는데. 아까도 자기 방도 아닌데 감독실에 들어가서 책상을 뒤지지를 않나... 기가 막혀서. ”

 

 

현기증을 억누르며 베르닌은 애써 차분하게 물었다.

 

 

“ 감독실이요? 레베진스키가 책상을 뒤졌다고요? ”

 

“ 어... 이거 얘기했다가 나 괜히 잘리는 거 아닌가... 자넨 극장 사람도 아닌데. 레베진스키 귀에 들어가면... ”

 

“ 아니에요, 그 사람한테 절대 말 안 해요. 감독실에 들어갔다면서요. 미하일이 그런 거 허락해준 적 없단 말이에요. 그건 감독의 권한을 침해하는 거니까 얘기해줘야 돼요. ”

 

“ 그게... 사실은 그 인간이 계속 그러더라고. 여기 새로 칠하는 거랑 수리 준비하느라고 우리가 며칠 전부터 여기 와 있었거든. 낮에는 무대 쪽 체크하고, 저녁에 공연 있을 때는 사무공간이랑 연습실 쪽 사전작업을 했는데 레베진스키가 저녁만 되면 여기로 오는 거야. 그것도 꼭 감독님이 공연 때문에 백스테이지에 가 있는 시간만 골라서. ”

 

“ 근데 그걸 보고도 아무도 말 안했단 말이에요? 레베진스키가 남의 시선을 신경 안 쓰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

 

“ 류드밀라도 그 시간에는 퇴근하니까 아무도 없었지. 우리뿐인데 그런 자식은 우리 같은 인부들을 사람 취급 안하니까 아마 의식도 안했을걸. 처음에는 슬며시 노크도 하고 살금살금 들어가더니 2~3일 지나니까 아주 당당하게 들어가더라고. ”

 

“ 뭐 들고 나오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

 

“ 글쎄. 아, 그저께였나. 무슨 수첩을 들고 가더니 감독님 책장에서 레코드들을 막 뒤지면서 뭘 열심히 적더라고. 왜 기억나느냐면, 자네도 자주 들어가서 알겠지만 그 책장이 상당히 크잖아. 레코드가 맨 아래 칸하고 맨 위 칸에 꽂혀 있거든. 위에 있는 거 꺼내다가 몇 장을 와르르 떨어뜨렸어. 이마에 맞았는지 어쨌는지 욕을 하면서 뭘 적더니 도로 꽂아놓더라고. 그 썩을 자식이 의자 놓고 올라갔는데 신발도 안 벗고! 흙투성이 자국 내놔서 나중에 내가 닦아줬어. 귀염둥이 감독님이 모르고 앉았다가 옷 버릴까봐! 우리 감독님 대도시에서 와서 근사한 옷만 입고 다니는데 진흙 묻으면 안 되잖아! ”

 

“ 혹시 레베진스키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이 방에 드나들지는 않았나요? ”

 

“ 글쎄. 원래 감독님은 문을 안 잠그잖아. 자기 있을 때는 아무나 들어올 수 있게 하고. 예전에 있던 늙다리 감독은 비서한테 예약 안 하면 못 들어오게 했거든. 지금은 무용수고 연주자고 나 같은 인부고 노크만 하면 그냥 들어갈 수 있으니까. 그래도 자리 비웠을 때는 류드밀라가 웬만하면 못 들어가게 하더라고. 저녁에 감독님 없었을 때 드나든 건 레베진스키 밖에 없었던 것 같아. ”

 

“ 그렇군요. 고마워요, 그리고리. 감독실에 들어가 봐야겠어요. 그 사람이 뭘 손댔는지 알아내야겠어요. ”

 

“ 어, 그래. 벽 조심해. 페인트칠 아직 다 안 말랐을 거야. ”

 

 

베르닌은 감독실로 들어갔다. 벽에 붙어 있던 가구들은 모두 가운데로 옮겨져 있었다. 책장부터 보았다. 베르닌은 클래식 음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발레에 대해서도 잘 모르기 때문에 여태껏 책장을 유심히 본 적이 없었다. 맨 위와 아래에는 그리고리의 말대로 레코드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매일 음악을 듣는 녀석이 왜 불편하게 맨 위에 꽂아뒀을까 했는데 잘 보니 그 두 칸의 높이가 제일 높아서 레코드를 차곡차곡 꽂기가 편해서인 것 같았다. 아래 칸에 꽂힌 것은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 베르닌도 아는 고전발레 음악들과 러시아 작곡가들의 레코드였다. 위 칸에는 쇼팽을 비롯한 외국 작곡가들의 레코드들이 꽂혀 있었다.

 

 

‘ 레베진스키는 왜 미셴카의 방에 몰래 들어와서 레코드를 살폈을까? ’

 

 

그는 다른 칸들도 훑어보았다. 무용 관련 서적들을 비롯해 무슨 해부학 서적도 있었고 화집, 악보, 도스토예프스키와 푸쉬킨을 비롯한 오래된 문학선집들과 심지어 외국어 서적들도 어지럽게 꽂혀 있었다. 영어와 불어로 되어 있는 책들이었는데 대부분이 무용과 미술에 대한 책이었다. 하긴 그 외의 책들이라면 검열 때문에 감독실에 버젓하게 꽂아놓지도 못했을 게 분명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책상으로 갔다. 서랍도 잠겨 있지 않았다. 들어 있는 것은 모두 공연과 관계된 도면이나 서류뿐이었다. 왕재수는 워낙 검열에 시달려서 그런지 비교적 안전한 것으로 판명된 책과 음반 외에는 감독실에 개인적인 물건들을 가져다놓지 않는 편이었다. 책상과 티 테이블 위에는 관객들과 팬들이 가져다준 꽃다발과 사탕 바구니, 인형 따위가 널려 있었다. 보통은 무용수들이나 직원들에게 고루 나눠주는데 요 며칠 동안은 바빠서 그럴 여유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소독과 페인트칠 때문에 선물들은 매우 어지럽게 널려 있었지만 수상쩍은 건 없어 보였다. 혹시라도 협박 편지가 있을까 했지만 눈에 띄는 카드들은 모두 열렬한 연애편지에 가까웠다.

 

 

돌아서서 나가려다 베르닌은 문득 창가에 시선이 쏠렸다. 화분 두어 개에 조그만 노란색 꽃이 피어 있었다. 물론 왕재수는 식물을 키우는 데는 아무런 재능이 없었으므로 류다가 물을 주고 잘 돌보고 있었다. 하지만 베르닌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화분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도자기 장식품이었다.

 

 

흰색과 푸른색으로 채색된 도자기 종이 두 개 있었다. 그 옆에는 도자기 백조 한 쌍, 한 발로 서 있는 발레리나 인형 한 쌍, 그리고 천사 인형 한 개가 있었다. 베르닌은 순간 머리에서 피가 다 빠져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천사 인형을 집어 들었다.

 

 

‘ 똑같아... 아침에 왔던 그 인형하고... ’

 

 

흰색 몸체에 날개와 망토가 푸른색과 금색으로 채색되어 있는 자그마한 인형이었다. 다른 점이라고는 머리가 제대로 붙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인형이 두 개였던 거야. 여기 와서 천사를 하나 집어갔던 거야. 다른 건 모두 한 쌍이잖아. 천사만 하나일 리가 없어. 그러니까 범인은 극장 쪽 사람이야. 이 방에 드나들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사람. 그리고 레베진스키는 이 방에 왔었어. 레코드를 뒤졌어. 그 자식이 없을 때만 골라서 며칠 동안 계속 밤마다 왔었어. ’

 

 

그는 인형을 휴지로 둘둘 말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복도로 나와서 곧장 레베진스키의 사무실로 갔다. 안무가들은 발레 지도자들과 하나의 사무실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류다의 말에 따르면 레베진스키는 자신이 수석안무가인데 후배들과 한 사무실을 쓴다는 것은 급에 맞지 않는다고 공식적인 항의를 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보통은 레베진스키와 사이가 좋았던 극장장도 짜증이 났는지 가장 나이도 많고 연차와 경험도 오래됐으며 단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티무르 이즈마일로프도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지 않느냐며 그 항의를 묵살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극장장은 당시까지만 해도 유력한 예술감독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었던 레베진스키의 기를 차마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는지 사무실 구석에 칸막이를 쳐서 수석안무가용 공간을 별도로 만들어 주었다.

 

 

안무가 사무실은 감독실보다 더 엉망이었다. 책상과 의자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칸막이도 반쯤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벽의 페인트를 조심하면서 베르닌은 레베진스키의 책상으로 갔다. 공연 팸플릿과 서류, 액자 따위로 폭격을 맞은 듯 어지러웠다. 액자도 굉장히 많았는데 본인의 젊은 시절 무대 사진과 가브릴로프 무용협회, 콤소몰 등에서 받은 표창장, 가브릴로프 지역신문에 실렸던 옛 기사 스크랩 따위였다. 궁금해서 훑어보니 60년대에 가브릴로프 의회 의장과 아르한겔스크 지부 공산당 서기장이 참석한 연찬회에서 레베진스키와 파트너 발레리나가 아다지오 무대를 보여주고 박수를 받았다는 단신이었다.

 

 

‘ 레베진스키는 자기 경력에 대해 자부심이 굉장한가봐. 기껏 우리 동네 신문에서 나온 기사랑 상장인데... 미셴카는 맨날 자기 천재라고 으스대고 애들 쥐 잡듯 해도 자기 사진이나 이런 기사들은 하나도 안 걸어놓던데. 지난번에 류다가 잡지에 나온 기사 스크랩해서 액자에 걸려고 하니까 그런 거 다 걸어놓으면 건물이 몇 개는 있어야 한다면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렇게 대단한 놈이었는데도. 걘 그냥 극장이 좋아서 노력하는데 레베진스키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게 제일 중요한가봐. ’

 

 

그러자 베르닌은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어떻게든 왕재수를 찾아내고 싶었다. 수요일 신작을 제대로 올리게 해 주고 싶었다. 땀범벅에 녹초가 되어서도 눈을 반짝거리며 왕재수만 바라보고 있던 무용수들이 생각났다. 돈키호테 무대도 생각났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남의 서랍을 뒤지는 것이 나쁜 행위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추호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두 번째 서랍에서 그는 누런색의 서류 봉투를 발견했다. 봉투는 반절로 접혀 있었는데 꽤 두툼했다. 밀봉되어 있지는 않았다.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꺼냈을 때 베르닌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엽서 크기의 흑백 사진이 줄을 이어 쏟아졌다. 아무리 적어도 30장은 되는 것 같았다. 하나같이 날짜와 시간이 인쇄되어 있었는데 최근 일주일 사이에 찍은 것들이었다. 모두가 왕재수의 사진이었다. 극장 내의 다양한 장소에서 찍혀 있었다. 백스테이지나 의상실, 소품 창고, 극장 도서실 쪽 사진이 줄줄이 이어졌다. 주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손동작을 하고 있는 사진이 많았다. 감독실에서 검열국장과 검열요원을 상대로 화를 내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심지어 베르닌도 한 장 찍혀 있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고 지난 일주일 동안 왕재수가 이야기를 나눴거나 인사를 하고 지나간 사람들 대부분이 사진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진을 하나하나 뒤집자 파란색 잉크로 사람 이름과 소속이 씌어 있었다. 몇몇 사진에는 이름 대신 ‘?’ 라고만 적어 놓았다. 레베진스키도 그들의 신원을 몰랐던 모양이었다. 어떤 사진들에는 ‘의회 언급’, ‘공산주의에 대한 반동적 언사 - 그 망할 놈의 당으로 꺼져버려’ 등의 구절이 적혀 있었다. 왕재수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반체제적 표현들을 요약해 적은 게 분명했다.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을 억누르며 베르닌은 봉투를 챙겼다. 세 번째 서랍을 열어보았다. 노끈으로 묶어놓은 얄팍한 종이 뭉치가 눈에 띄었다. 서무답게 베르닌은 그 종이가 등록번호에 따라 분류된 자료 목록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극장 보유 음반 목록이었다. 맨 앞장에 파란색 동그라미가 하나 있었다. 무슨 숫자가 딸려 있는 외국어 제목이 적혀 있었고 옆에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 바흐... ”

 

 

그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넘겼다. 목록은 러시아어 알파벳순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두어 장 넘기자 또 파란색 동그라미가 있었다. 민쿠스였다. 그리고 조금 더 아래, 모차르트의 무슨 왈츠에도 동그라미가 있었다. 그리고 쇼팽, 쇼스타코비치... 마지막 동그라미는 슈트라우스였다.

 

 

친애하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쇼스타코비치, 쇼팽, 슈트라우스, 민쿠스, 바흐

마지막은 물론 모차르트겠지.

 

 

여섯 개의 이름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다른 것이라곤 나열된 순서뿐이었다.

 

 

‘ 하나는 알파벳, 하나는 곡의 순서일 거야. ’

 

 

베르닌은 머리가 멍했다. 서랍을 마저 뒤졌지만 더 이상 의심스러운 것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전화 앞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지만 신호가 울리지 않았다. 페인트칠 때문에 코드를 모두 뽑아놓은 것 같았다. 급하게 복도로 뛰쳐나갔다. 여기저기 뒤지다가 결국 로비로 내려가서 수위에게 전화를 쓰게 해달라고 했다.

 

 

다행히 코즐로프는 집에 있었다. 자고 있었는지 꽉 잠긴 목소리였다.

 

 

“ 잘못 걸었어요! ”

 

“ 로만, 나예요. 다닐. ”

 

“ 잘못 걸었어! ”

 

“ 하나만 대답해줘요. 제발. ”

 

“ 뭔데? ”

 

“ 수요일 공연 있잖아요, 그 자식 신작. 거기 음악 여섯 개를 쓰잖아요. ”

 

“ 너 웬일이냐, 그런 것도 알고. 음악은 하나도 모르고 완전 막귀인 줄 알았는데. 기특하구나. ”

 

“ 그 여섯 개... 작곡가가 누구누구인지 기억해요? 순서대로면 더 좋고요. ”

 

“ 당연하지. 쇼스타코비치 1번 교향곡으로 시작해서 쇼팽, 슈트라우스, 민쿠스, 바흐, 마지막은 모차르트지. 근데 바흐는 좀 편곡했어. 미셴카는 그대로 쓰려고 했는데 무용수들이 음악을 너무 버거워하더라고. 근데 왜? ”

 

“ 아, 아니에요. ”

 

“ 야! 너 혹시 스페호프한테 찰싹 붙어서 우리 아기 공연 방해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지? ”

 

“ 으윽, 아직도 날 그렇게 못 믿어요? ”

 

“ 하긴... 우리 아기 보고 싶어 죽겠네. 오늘 같이 있으려고 했는데 무슨 감시꾼인지 뭔지가 더 붙었다고 수요일까지는 아는 체도 하지 말라니... 우리 아기 지금 뭐하냐? 옆에 있냐? ”

 

“ 어, 아, 아니요... 난 밖에 나와 있고요... 미, 미하일은 자고 있어요. 많이 피곤했는지... ”

 

“ 그래, 그 녀석 많이 자야 돼. 신작 공연만 무사히 치르고 나면 일주일쯤 휴가 내고 온천에라도 가라 해야지 안 되겠다. 너도 쉬어라. 내가 같이 못 있어주니 너 혼자 우리 아기 돌보느라 힘들겠구나. ”

 

“ 아니에요. 그럼 이만... ”

 

 

밀려오는 엄청난 가책을 느끼며 베르닌은 전화를 끊었다. 사랑하는 왕재수가 협박을 받고 납치되어 행방이 묘연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코즐로프가 얼마나 상심하고 충격을 받을지 생각만 해도 막막했다.

 

 

그는 수위에게 KGB 신분증을 내세우고 공무임을 강조하며 직원 주소록을 요구했다. 예전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지금은 윤리의식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수위는 툴툴대면서 주소록을 꺼내 주었다.

 

 

‘ 레베진스키, 레베진스키... 여기 있다. ’

 

 

전화번호와 주소를 옮겨 적은 후 그는 극장을 나섰다. 공중전화 부스로 가서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만 울릴 뿐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레베진스키의 집으로 가보기로 했다.

 

 

니콜라이 레베진스키는 극장 사람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구시가지에 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꽤 좋은 동네였다. 제국주의 시절에는 귀족들의 주거 지역이었다. 건물은 낡았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멀끔하게 수리되어 있었다. 예전에 류드밀라가 지나가는 말로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 콜랴 그 사람 집안이 엄청 좋잖아요. 제국 시절엔 상업 쪽으로 돈 많이 벌었고, 부모님도 발 빠르게 볼셰비키에게 붙어서 재산 몰수도 당하지 않고 좋은 자리 차지하고. 물려받은 것도 많다죠. 집에 가면 으리으리하대요. 그래서 전임 감독하고도 사이좋게 지냈죠. 돈도 잘 꿔주고. 여기저기 뇌물도 많이 바쳤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우리 미셴카가 오면서 완전히 물 먹은 거지 뭐겠어요. ’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문을 두들겨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없는 것 같았다. 이때 베르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범법 행위를 했다. 밖으로 나가서 주변을 살폈다. 레베진스키의 집은 건물 2층에 있었는데 베란다 쪽이 마침 커다란 나무로 가려져 있어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았다. 파이프와 1층 창틀을 딛고 기어 올라갔다. 옛날 건물이라 장식용으로 튀어나와 있는 디딤돌이 몇 개 있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올라갔지만 막상 2층에 올라오니 베란다 창문은 꽉 잠겨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깨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베르닌은 차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하고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안을 엿보았다. 베란다 너머 거실에는 발레 의상과 무슨 조잡한 트로피, 사진과 그림들, 그릇과 파베르제 비슷하게 생긴 장식 달걀들이 늘어선 진열장이 보였고 텅 빈 소파도 보였다. 인기척은 없었다. 그는 파이프와 베란다 모서리에 딱 붙은 채 창문을 쾅쾅쾅 두들겨 보았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지만 마지막 희망을 갖고 목청껏 왕재수의 이름을 소리쳐 불러보았다.

 

 

미하일! 거기 있어? 미하일!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최소한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왕재수가 이 집에 갇혀 있다면 아마 입이 막힌 채 묶여 있거나 아직도 수면제에 취해 인사불성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레베진스키가 왕재수를 납치한 장본인이라 해도 자기 집에 그를 가둘 것 같지는 않았다. 왕재수는 레베진스키의 얼굴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레베진스키가 왕재수를 완전히 제거하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닌 한 그런 위험을 무릅쓸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정말 그렇다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순간 치밀었고 베르닌은 하마터면 창문을 두들겨 부술 뻔했다.

 

 

팔과 어깨가 너무 저리고 아픈데다 발소리가 들려왔으므로 그는 결국 아래로 내려왔다. 다행히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주민이었고 베르닌에게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베르닌은 수위에게 가서 레베진스키가 나오는 것을 봤는지, 혹시 취한 남자를 업고 들어가지는 않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곳은 수위가 아예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구시가지의 주택들은 대부분 그랬다.

 

 

이대로 그냥 떠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베르닌은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수첩을 뒤져 류드밀라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류드밀라는 깜짝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어머, 다냐. 웬일이에요? 혹시 우리 감독님이 출근이라도? ”

 

“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저, 혹시 레베진스키가 일요일에 출근한다고 하던가요? ”

 

“ 콜랴요?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요? ”

 

“ 그 사람에게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연락이 안 돼서요. 어, 저... 미하일이 극장 때문에 궁금한 게 있는 모양이에요. ”

 

“ 어휴, 드디어 우리 미셴카도 그 인간의 비리와 뒷공작에 신물이 난 모양이군요. 우리 감독님이 같은 극장 사람 험담하지 말라고 해서 지금까지 말 못하고 꾹 참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요청하기만 하면 그 인간의 지저분한 행태에 대해 하루종일 얘기해줄 수 있어요! 뭐가 궁금해요, 다냐! 내가 다 얘기해줄 수 있으니까 다 물어봐요! 차기 감독이라고 사방에서 추어주니까 전임 감독이랑 찰싹 붙어서 얼마나 위세를 떨면서 애들 괴롭히고 비리 저지르며 권력을 남용했는데! ”

 

“ 어... 아니... 그게... 저, 일단 레베진스키가 내일 극장에 나오는지부터... ”

 

안 나와요! 어제 오전에 감독님한테 와서 휴가원 들이밀면서 사인해달라고 했어요. 그것도 연습실로 와서! 내가 그때 감독님 차라도 한 잔 챙겨주려고 연습실에 갔었는데 무용수들 다 땀 흘리며 연습하고 있는 와중에 그 인간이 뻔뻔스럽게 쑤시고 들어와서 사인해달라고... 그런 건 감독실로 가지고 오든가 나한테 서류 맡기고 가면 어련히 내가 사인 받아주지 않겠느냐고요! 일부러 애들 연습시키는 미셴카 주의를 흐트러뜨리려고! ”

 

“ 그럼 레베진스키는 내일만 휴가인 거예요? ”

 

“ 아뇨! 그 인간 심지어 수요일까지 휴가 냈어요! 말이 되냐고요! 아무리 감독님이 그 인간한테 신작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어도 그렇지! 수요일 초연은 이번 시즌 우리 극장의 제일 크고 중요한 행사인데! 수석안무가란 인간이 물심양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당일에도 휴가를 내다뇨! 자기 열 받았다고 유치하게 시위하는 거지 뭐냐고요! 근데 우리 미셴카도 이럴 땐 감독의 권위를 좀 내세우면서 그 인간한테 수요일 휴가는 안 된다고 했어야 하는데, 저 꼴 보기 싫은 놈 쉰다니까 잘됐다는 표정을 너무 적나라하게 지으면서 너무 흔쾌히 사인을 해주잖아요! 에휴... 하여튼 우리 귀염둥이 감독님은 천재긴 한데 그런 거 보면 아직 어리다니까요. 정치질도 못하고... ”

 

“ 수요일까지 휴가... ”

 

 

베르닌은 침을 삼켰다.

 

 

“ 저, 류다. 레베진스키는 결혼 안했죠? ”

 

“ 했었죠, 두 번이나. 지금은 혼자예요. 바람둥이라서 이 여자 저 여자 엄청 건드리고 다녀요. ”

 

“ 그러면 지금 같이 지내는 사람도 없는 거예요? ”

 

“ 아, 당신 몰랐군요. 우리 사무국장 잔나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요. 그래서 미셴카가 더 고생하는 거죠! 잔나가 레베진스키 밀어주느라고 행정 협조를 제대로 안 해주잖아요! ”

 

“ 어... 잔나 르이조바 말인가요? 혹시 잔나는 어디 사는지 아세요? ”

 

“ 잔나요? 포나르나야 거리 쪽에 사는데 주소는 정확히 모르겠네. 전화번호는 있는데. 근데 왜요? ”

 

“ 레베진스키에게 뭘 물어봐야 하는데 연락이 닿지를 않아서요. ”

 

“ 잔나랑 별장에 놀러갔나 보네. 콜랴는 검은 숲에 다차가 있거든요. ”

 

“ 다차... 검은 숲 어느 쪽이요? 검은 숲 엄청 넓잖아요. ”

 

“ 온천 요양소 가는 쪽에 있어요. 가다 보면 왜 연못 나오고 별장들 몇 채 몰려 있잖아요, 옛날 교회 건물 하나 있고. ”

 

“ 아, 기억나요... ”

 

“ 거기서 제일 큰 게 콜랴네 별장이에요. 부모님이 물려줬대요. 그 집만 지붕이 하얀색이니까 찾기 쉬워요. ”

 

“ 고마워요, 류다. 그럼 잘 쉬어요. ”

 

 

베르닌은 전화를 끊었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곧장 검은 숲으로 가려다가 퍼뜩 생각이 나서 시계를 보았다. 이미 5시 반이 넘어 있었다.

 

 

“ 앗, 맞다! 드미트리하고 5시 반에 만나기로 했는데! ”

 

 

그는 급하게 차를 몰았다.

 

  

 

 

 

 

 

FIN

- 2015. 8. 26 ~ 9. 5 -

 

 

 

...

 

 

 

3.5%, 1.8%, 0.5% 우유는 유지방 함유율에 따른 분류이다. 나도 러시아에 있을 땐 왕재수처럼 1.8이나 0.5를 먹었다. (사실 내 식성이 서무 시리즈의 왕재수랑 좀 많이 비슷한 편이다 ㅎㅎ)

당시 내가 먹었던 우유는 삐뜨몰, 빠르말라뜨 같은 브랜드였다. 3.5%는 빨간색, 1.8%와 0.5%는 파란색과 노란색이었다. (근데 좀 헷갈린다 뭐가 파랑 뭐가 노랑이었는지) 0.5%는 정말 묽다. 3.5%는 묘하게 우리나라 우유보다 훨씬 진하고 고소하게 느껴졌다. (근데 우리 나라 우유도 보통은 3.4%~3.5%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

 

 

..

 

 

아파트 경비원이 고급차 후진차 운운하면서 얘기하는 단추의 차 '지굴리'에 대해 잠깐.

지굴리와 라다는 소련 시절 러시아 국민차종인데 좋아서라기보단 값싸고 투박한 딱 러시아 자동차다. 워낙 많이들 타고 다닌 차인데 나중에는 후진 차라는 이미지가... 간부들이나 노멘클라투라가 타고 다니던 것은 볼가로 대표되는 윗급의 차였다.

서무 시리즈에서도 물론 왕재수는 극장 감독이므로 관용차인 볼가를 타고 다니고 단추는 말단 서무이므로 중고 지굴리를 끌고 다닌다.

지굴리 이미지 두 장. 일부러 먼지투성이에 좀 찌그러진 차 사진을 골라봤다.

 

 

 

 

맨처음 러시아에 갔을땐 소련 붕괴되고 몇년 후라 원체 경제 사정도 안 좋고, 사람들이 돈벌이를 위해 투잡 쓰리잡을 할 때라서.. 택시도 별로 없고 길거리에서 아무 자가용이나 불러서 흥정을 해서 택시처럼 타고 다니곤 했다. 그때 종종 차를 잡아타면 그게 바로 이런 지굴리인 경우가 거의 90%였다. 아직도 그때 탔던 지굴리의 좁은 내부와 먼지투성이의 시트를 잊을 수가 없다. 딱 이 두번째 사진 같은 차를 많이 탔었다 :)

 

..

 

 

원래는 32편으로 끝내서 우수한 단추 3부작으로 하려 했는데 쓰다 보니 좀 길어져서 4부작이 될 예정.. 근데 33편은 아직 쓰는 중이다. 과연 단추와 드미트리는 힘을 합쳐 왕재수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인지!! 33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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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가져가시거나 베끼거나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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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영상 하나. 이전에 디아나 비슈뇨바가 페이스북에서 공유했던 클립이다. 바로 파루흐 루지마토프와 함께 춘 마린스키 라 바야데르의 파이널 영상!

 

한때 부부였고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였던 루지마토프와 비슈뇨바가 춘 솔로르와 니키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직 30대의 젊은 루지마토프와 20대 초반의 앳된 비슈뇨바를 볼 수 있다. 아마도 90년대 후반인 듯.

 

개인적으로 나는 비슈뇨바보다는 마할리나나 아실무라토바의 니키야가 더 취향이라.. 아무래도 이 영상에서의 비슈뇨바는 아직 연륜이 부족해서 그런지 니키야의 춤이 그렇게 눈에 들어오지는 않고... 루지마토프야 워낙 수퍼스타였기 때문에 이 사람의 존재감이 더 크다. 원체 솔로르가 그의 대표 배역 중 하나이기도 했고.

 

조금 아쉬운 건 비슈뇨바도 중간에 살짝 삐끗하고, 루지마토프도 좀처럼 안 그러는데 여기서는 마지막 포즈에서 팔을 좀 삐끗... 그래도 희귀한 영상이니 볼 수 있는 게 어딘지.. 화질은 안 좋지만.. 그래도 커튼 콜과 꽃 받는 장면도 나오고.. 러시아 관객들이 브라보 외치는 소리도 들리고.. 잘 들으면 거의 끝 부분에선 관객들이 '이제 집에 가자'라고 하는 말도 들린다 :)

 

 

 

 

파루흐 루지마토프의 사진이나 춤 클립은 이전에도 여러번 올린 적이 있고 그의 춤에 대한 메모도 여러번 남겼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무용수이다. 사실 다시 글을 쓰면서 주인공인 미샤를 무용수로서 재구성할 때 루지마토프의 야수 같으면서도 우아한 움직임도 모델 중 하나로 포함시켰다. (미샤의 육체적 특성이라든지 춤추는 방식, 무대 위에서의 존재감 등에 대해서는 루지마토프를 비롯해서 모델 무용수가 몇 명 있다)

 

** 루지마토프가 류보프 쿠나코바와 춘 라 바야데르 클립 다른 버전은 여기. 옛날 필름이라 화질이 매우매우 나쁘지만.. http://tveye.tistory.com/2276

 

**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와 빅토리야 테료쉬키나가 춘 파이널은 여기. 위의 영상과 비교해보면 느낌이 다르다.

http://tveye.tistory.com/3099

 

 

** 태그의 라 바야데르를 클릭하면 이 발레의 다른 영상 클립들이나 리뷰, 사진들을 볼 수 있다. 파루흐 루지마토프를 클릭하면 이 사람에 대한 예전 포스팅들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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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4월 초. 네바 강.

 

네바 강은 여름에는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하고 겨울에는 꽁꽁 얼어붙어 순백색으로 빛난다. 저녁에는 석양에 잠겨 변화무쌍한 붉은 빛으로 물든다. 모두 아름답다.

 

그리고 이렇게, 아직 춥고 메마른 4월 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지만 강의 얼음은 전부 녹아서 봄을 맞이하고 있는 시점, 아침에 네바 강변을 따라 산책하는 것도 기분 좋다. 이 즈음의 네바 강은 훨씬 부드럽고 차분하고 조용한 느낌이다. 수면 위로 부서지는 햇빛도 더욱 자잘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이날 찍은 네바 강과 맞은편 강변 사진들 몇 장. 맞은편에 보이는 건물로는 이삭 성당, 해군성, 에르미타주 등이 나온다. 맞은편의 우니베르시쩻 강변(대학교 강변)에서 찍었기 때문이다. (이 강변에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가 있어서 우니베르시쩻 강변이라 불림)

 

 

 

 

 

 

 

왼편이 에르미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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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9. 21:16

하얀 새, 까만 새, 얼룩 새 다 모여라~ russia2015. 9. 9. 21:16

 

 

다리 많은 것들과 다리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무한공포증이 있지만.. 이와는 반대로 지나가다가 새나 고양이, 강아지 보는 것은 좋아한다 :) 그래서 가끔 사진도 찍는다.

 

(비둘기는 박테리아를 흩뿌릴까봐 그냥 옹기종기 모여 있거나 걸어다닐 때만 괜찮긴 하지만...)

 

이번 여름에 페테르부르크 갔을 때 여기저기서 마주쳤던 새 사진들 우르르~ (이전에도 몇번 한마리 두마리 올리긴 했지만)

 

이놈은 비둘기인가... 비둘기치고는 참으로 하얗고 예쁘구나.

 

(새 종류 구분 잘 못함 ㅎㅎ)

 

 

 

눈을 크게 떠야 숨어 있는 새를 찾을 수 있어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의 강변에서 :)

 

 

 

 

 

얘들은 햇볕 받으며 자다가..

 

 

 

 

 

여기부터는 레트니 사드의 연못가에서..

 

이 연못가에서는 새들 모이도 주고 물통도 설치해놔서 새들이 많이 온다. 갈매기, 까마귀, 청둥오리, 비둘기, 참새 등이 모여들고... 연못에 풀어놓고 키우는 백조도 한 쌍 있음.

 

 

 

청둥오리 친구 두 마리 동동동..

이를 부러워하며 지켜보는 하얀 갈매기..

갈매기 : 아이 부러워...

 

 

 

그때 친구 갈매기 멋있게 등장

 

새로 온 갈매기 : 친구야~ 너는 외롭지 않다~

갈매기 : 이야~~

 

 

오리들은 이쪽에 옹기종기..

한겨울에 얼음 사이로 모여 있던 걸 생각하니 참 다행이다..

(난 청둥오리를 좋아함~)

 

 

 

레트니 사드 연못의 백조 한 쌍~

도도하게 둥둥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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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10월에 마린스키에서 알렉세이 라트만스키가 안무한 프로코피예프의 신데렐라를 dvd로 출시한다. 기다리고 있던 dvd!!

주역은 디아나 비슈뇨바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라트만스키의 신데렐라는 무대로 꼭 한번쯤 볼만한 작품이다. 나도 슈클랴로프가 추는 버전으로 다시 무대를 보고프다..

 

dvd에서는 마린스키 톱스타인 비슈뇨바와 슈클랴로프를 페어로 내세웠는데 요즘 이 작품 실제 무대에서는 비슈뇨바는 콘스탄틴 즈베레프와, 슈클랴로프는 나제즈다 바토예바와 추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슈뇨바가 즈베레프를 파트너로 선호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보기에는 비슈뇨바와 슈클랴로프는 너무 예쁘고 잘 어울리는 페어이긴 하지만 사실 즈베레프가 키도 더 크고 좀더 듬직한 '남자' 파트너의 느낌이 강하다. 슈클랴로프는 열심히 아다지오도 하고 파트너링도 하지만 일단 외모부터 '내가 너무 예쁘다~' 느낌이 좀 강해서... 슈클랴로프가 원체 동안이다 보니 비슈뇨바와 같이 췄을때 나이차가 많이 나 보인다는 기사도 있었고... (그런데 실제로는 즈베레프가 더 어린데 ㅠㅠ) 어쨌든 남녀 무용수의 합이란 건 미묘한 거라서... 나는 즈베레프가 왕자를 추는 버전으로 신데렐라 무대를 봤는데, 즈베레프의 왕자는 좀더 믿음직하면서도 성숙해보였고 동영상으로 본 슈클랴로프의 왕자는 좀더 소년답고 생기발랄해 보였다.

 

하여튼 dvd는 미남미녀에 톱스타 조합인 비슈뇨바와 슈클랴로프 페어로 나온다 :) 영상으로 보긴 했지만 그게 화질이 좀 떨어지는 편이라.. dvd 매우 기다린다...

 

그럼 트레일러 발췌. 출처는 mariinsky.tv, 그리고 mariinsky.ru

 

.. 떠들썩하고 화려한 앞부분을 보면서 '이건 내가 생각한 발레랑 좀 다른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래도 무도회에서 신데렐라와 왕자가 만나는 장면과 마지막 재회의 두 무용수 클로즈업을 보시면 심장이 두근거리실지도...

 

 

 

 

.. 사실 내 개인적으로 느꼈던 이 발레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파이널에 있다. 파이널에서는 라트만스키 특유의 살짝 그로테스크한 유머가 사라지고 진짜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춤'이 나온다. 라트만스키 신데렐라의 결말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발레 엔딩 중 하나이다. 궁금하신 분은 dvd 나오면 꼭 보세요~

 

.. 이전에 내가 발췌해 올렸던 신데렐라 클립(슈클랴로프 왕자가 신데렐라를 찾아 동분서주하며 춤추는 장면)과 이 발레에 대한 내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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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7. 08:00

흐린 날, 모이카 운하 따라서 russia2015. 9. 7. 08:00

 

 

지난 7월. 페테르부르크 마지막 날.

 

루스끼 무제이(러시아 박물관) 갔다가 모이카 운하를 따라 쭈욱 걸어서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의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고 공항으로 떠났다.

 

흐린 날이었다. 이따금 비도 흩뿌렸다.

 

난 햇살 찬란하고 하늘 파란 날을 좋아하지만 사실 페테르부르크는 백야 시즌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흐린 날이 더 많다. 사진 찍어놓으면 나름대로 운치는 있지만 그래도 산책하기에는 찬란한 날씨가 더 좋긴 하다.

 

모이카 운하 따라 걸어가며 찍은 사진 몇 장.

 

난간에 앉아서 한 잔 하며 얘기하고 있는 사람들... 여름엔 특히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초점이 좀 안 맞아서 비둘기가 흐리게 나왔지만..

페테르부르크에는 갈매기도 많고 비둘기도 많고 까마귀도 많다. 오리도 종종 보이고.. (물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청둥오리~~)

 

 

 

 

저 멀리 크라스느이 모스트, 붉은 다리가 보인다 :)

 

 

 

 

 

 

 

 

 

빛바랜 파스텔톤 건물들도 페테르부르크의 매력 중 하나이다.

그리고 물론 저 창문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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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6. 19:50

페테르부르크 골목과 거리 풍경들 russia2015. 9. 6. 19:50

 

 

 

월요병을 달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 거리와 골목 곳곳 풍경 사진 몇 장.

 

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처럼 많이 오래된 도시도 아니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도시이지만 그래도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기껏 3백년을 조금 넘긴 도시치고는 그 역사의 무게도 상당하다... 혁명의 도시. 전란과 기아, 죽음의 도시. 그리고 문화와 예술의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 레닌그라드. 페트로그라드. 러시아어 발음대로 하자면 상뜨 뻬쩨르부르그. 시민들이 부르는 애칭 삐쩨르. 베드로의 도시. 표트르 대제의 도시.

 

산책하면서 찍었던 건물이나 골목 구석 사진들 올려본다. 주로 귀퉁이들... :)

 

위의 사진은 말라야 코뉴셴나야 거리.

 

 

 

이건 이삭 성당의 거대한 기둥.

 

 

 

이건 겨울 운하에서 그리보예도프 운하 쪽으로 접어드는 길.

 

 

 

카잔스카야 거리에서 네프스키 대로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 오른편의 검은 기둥이 카잔 성당 열주, 왼편으로 보이는 근사한 건물이 돔 크니기 건물.

 

 

 

이건 아마 모이카 운하 쪽으로 빠지는 길이거나 카잔스카야 거리 쪽에 있던 건물 같은데... 긴가민가..

 

 

 

페스텔랴 거리.

 

 

 

이건 아마도 리체이느이 대로를 따라 걷다가 발견한 표지판인 것 같다. '벨린스키 거리' 표지판이다.

 

 

 

여기는 루빈슈테인 거리. 네프스키 대로에서 뻗어나온 조그만 거리인데 요즘 맛집들과 카페들로 인기 많은 곳이다.

 

 

 

그리고 여기는 내가 머물렀던 숙소가 있는 포취탐스카야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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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9월이다.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간다..  

 

본편도 잘 안 풀리고 일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서무 시리즈를 쓰기 시작한 것이 작년 9월이므로 이 시리즈도 거의 일 년이 되었다. 그동안 본편은 100페이지밖에 못 썼는데 서무 시리즈는 0편부터 31편까지 32개 에피소드에, 번외편도 두 개나 써서 그야말로 주객전도 현상 발생! 본편은 언제 쓰지 싶다가도.. 확실히 사람이란 편한 게 좋고 스트레스 푸는 게 좋은지 서무는 잘 써지고 본편은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며 써야 하다 보니 답보 상태. 그러다 보니 서무 시리즈는 점점 각종 장르의 잡탕으로 변해 가고!!! 

 

지난주에 31편 1부(http://tveye.tistory.com/3994)를 올렸고 이번 주는 2부이다. 이어지는 내용이기 때문에 1부를 먼저 읽어야만 한다. 분량 때문에 끊어서 올리게 되었음. 역시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가 등장하는 우수한 단추 시리즈~   

 

그럼 31편 2부~ 재미있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모스크바 본부에서 파견되어 온 드미트리 베르닌. 베르닌과 똑같은 외모의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는 왕재수의 오랜 팬으로서 반가움을 표시하지만 왕재수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데... 금요일 밤에 집으로 돌아온 베르닌은 모처럼 토요일에 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푹 쉬려고 하지만...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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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1

 

 

 

 

서무의 슬픔

-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 (2부) -

 

 

 

 

 

 

 

 

왕재수는 베르닌의 집에 들르지 않고 곧장 자기 집으로 가서 자겠다고 했다. 베르닌은 뭐라도 먹이고 싶었지만 왕재수가 계속 하품을 하고 있었으므로 포기했다.

 

 

“ 알았어, 그러면 내일 일어나면 내려와. 너 계속 제대로 못 먹었으니까 아침이라도 뜨끈한 국물이랑 좀 먹어야지. 냉동실에 닭 한 마리 넣어놓은 거 있으니까 그걸로 수프 끓여줄게. ”

 

“ 아침부터 고기 수프라니... 그거 항아리 닭고기처럼 기름 둥둥 뜨는 거 아니야? ”

 

“ 아니야! 껍질 다 벗겨서 냉동해놨어! 너 기름기 있으면 안 먹잖아! 어휴, 그 맛있는 거 다 떼어내느라 아까워 죽는 줄 알았네.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딴 데 기어나가지 말고 일어나면 내려와! ”

 

“ 알았어. 어차피 극장도 못 가. 내일 소독하고 페인트칠한댔어. ”

 

“ 그래! 너 내일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서 쉬어! 그래야 수요일 공연도 잘 올리지. 얼른 올라가서 씻고 자라. 너 어제도 그냥 뻗어서 씻지도 않고 잤잖아. 지저분하게. ”

 

“ 뭐가 지저분해! 나 오늘 아침에 샤워했단 말이야! 아휴, 진짜 시어머니처럼... 그리고 내일 바냐한테 갈 거야. 월요일에 그랬잖아, 프랑스 잡지... 토요일까지만 놔둔다고. ”

 

앗, 웃기지 마! 투레츠키 그 자식한텐 절대 못 가! 그 자식 추행범이잖아! 망할 놈의 프랑스 잡지가 밥 먹여 주냐! 잡지 꼭 보고 싶으면 내가 보랴한테 전화해서 갖다 달라 할 테니까 거기 가지 마! ”

 

“ 쳇, 왜 그렇게 바냐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람. 쓸 만한 녀석인데. 잡지 말고도 괜찮은 거 들어왔을지도 모르는데. ”

 

하여튼 안 돼! 정 가고 싶으면 나하고 같이 가!

 

“ 맘대로 해라. 너랑 같이 가든 말든 난 상관없으니까. 하여튼 나 이제 올라가서 잘래. 잘 자. ”

 

“ 그래, 잘 자. ”

 

 

왕재수가 위층으로 올라간 후 베르닌은 샤워를 하려다가 문득 드미트리 생각이 났다.

 

 

‘ 아 맞다, 내일 극장에서 10시에 보자고 했는데. 내일 극장 안 여니까 알려줘야겠다. ’

 

 

그는 요원 숙소에 전화를 했다. 그곳은 기숙사였기 때문에 전화는 각 층별 수위실에 하나씩밖에 없었다. 드미트리 베르닌을 바꿔달라고 하자 수위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다냐? 무슨 일이에요? ”

 

엇, 리자? 어... 어... 왜 당신이 전화를... ”

 

“ 아, 지금 카체리나 언니랑 갈리나 언니하고 같이 드미트리 방에 놀러와 있어요. 언니들이랑 드미트리가 너무 재미있게 놀고 있어서 내가 전화 받으러 나온 거예요. ”

 

“ 어... 그래요...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서... ”

 

“ 드미트리가 모스크바에서 유행하는 카드 게임을 알려줬는데 엄청 웃겨요. 지면 뽀뽀하거나 벌칙을 받아야 돼요. 근데 언니들이 서로 드미트리한테 뽀뽀하고 싶어서 일부러 져주고 분위기가 장난 아니에요. 당신도 올래요? 남자가 모자라는데. 되게 웃길 거 같아요, 얼굴 똑같은 남자 둘이! ”

 

“ 아, 아니에요... 뽀뽀... 벌칙... 난 오늘 너무 피곤해서... 그런데 드미트리가 당신도 오라고 했단 말이에요? ”

 

“ 왜요? 난 오면 안돼요? 드미트리 재밌는데. ”

 

“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저... 드미트리... 걔 진짜 괜찮은 놈이긴 한데... 걔 다음 주 목요일에 모스크바 돌아가니까... 난 그러니까... 괜히 당신이... 아, 그게... ”

 

“ 뭐예요, 다냐! 내가 드미트리한테 반하기라도 할까 봐요? 어머, 당신 진짜 웃겨요. 언제 그런 거 신경 썼다고. 별일이네. ”

 

 

수화기 너머로 리자가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닌은 그저 전화로만 얘기하는 중인데도 얼굴이 갑자기 화끈거렸다.

 

 

“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어, 저... 드미트리 그럼 전화 못 받아요? ”

 

“ 어, 잠깐만요. 여기 왔네요. 바꿔줄게요. ”

 

 

리자의 웃음소리가 멀어지면서 드미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다닐. 집에 들어갔니? ”

 

“ 으, 으응. 방금. ”

 

“ 미하일은? ”

 

“ 자러 올라갔어. ”

 

“ 아, 그럼 너 오늘 업무는 다 끝난 거네. 놀러 올래? 여기 지금 카챠랑 갈린카, 리자랑 있는데. 한 잔하면서 피로도 풀고 어때? ”

 

“ 아, 아니야. 난 오늘 좀 피곤해서... 있잖아, 내일 극장 문 안 연대. 소독하고 페인트칠한다고... 그래서 미하일도 안 나갈 거야. 그러니까 10시까지 안 와도 돼. ”

 

“ 아, 그래? 미하일한테는 잘 된 거네. 계속 쉬지도 않고 일했다면서. ”

 

“ 응, 그나마 다행이야. ”

 

“ 너한테도 다행이다, 너도 주말도 없이 계속 일했잖아. 그럼 내일은 어떻게 할까? 내가 그쪽으로 갈까? ”

 

“ 아, 아니야. 내일은 미하일도 하루 종일 집에서 쉬게 할 거니까 별 일 없을 거야. 너도 쉬어. 어차피 일요일 되면 또 극장 나갈 거니까 거기서 보면 될 것 같아. ”

 

“ 너도 집에서 쉬는 거니? ”

 

“ 어, 난 아직 잘 모르겠어. 저 녀석 하는 짓 좀 봐서. 괜찮을 것 같으면 잠깐 사무실 나갈 수도 있고. 다음 주는 그 신작 때문에 옆에서 계속 봐야 하니까 사무실에 못 나가거든. 일을 좀 해놔야 할 것 같아서. ”

 

“ 음... 그래. 혹시 사무실 가게 되면 나 불러. 도와줄게. ”

 

“ 고마워! ”

 

근데 너 정말 안 올 거니? 리자 진짜 귀엽다. 너 혹시 걔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야? 그런 거면 내가 살짝 도와줄 수 있는데. 나 다리 잘 놓거든. ”

 

아니야! 절대! 그런 거 아니야! 하여튼 잘 쉬어. 나 이제 씻어야겠다. ”

 

“ 그래, 잘 자! ”

 

 

베르닌은 어쩐지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드미트리는 좋은 친구였고 생각보다 예의도 바르고 그의 말을 귀담아 듣는 편이었으므로 리자에게 비신사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것 같긴 했다. 게다가 카체리나와 갈리나도 함께 있다고 했으니까. 사실 드미트리가 리자와 뜨거운 사이가 된다 해도 자신이 간섭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리자가 나이도 어린 편이고 원체 구김살 없이 밝은 성격이다 보니 괜히 드미트리에게 빠져들었다가 상처 입을까봐 걱정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아휴, 내가 왜 이러지. 이게 다 저 녀석 때문이야! 저 녀석 뒤치다꺼리하면서 맨날 속 썩다 보니까 걱정이 습관이 됐어. 공연히 리자까지 걱정하고... 알아서 잘 하겠지 뭐. 그리고 잘 되면 더 좋을 수도 있지 뭐. 요즘은 장거리 연애도 하는데. 뜨거운 물로 샤워나 하고 자야겠다. ’

 

 

샤워를 하니 뭉쳐 있던 근육이 좀 풀리면서 노곤해졌다. 막 파자마를 걸치고 침대로 기어 올라갔는데 갑자기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비명 소리였다. 위층이었다. 비명이 한 차례 더 터져 나왔다가 뚝 끊겼다. 베르닌은 급하게 튀어나갔다.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올라 왕재수의 집으로 달려갔다.

 

 

미하일! 야! 무슨 일이야! 문 좀 열어봐!

 

 

기척이 없었다. 더 이상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베르닌은 갑작스럽게 치솟는 공포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간신히 열쇠를 꺼냈지만 손이 떨려서 잘 돌아가지 않았다. 두어 번 실패한 끝에야 문을 열었다.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베르닌이 목청껏 소리쳤다.

 

 

미하일! 나야! 나 왔어! 괜찮은 거야?

 

다, 다닐...

 

 

가냘픈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침실 쪽이었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침실로 달려갔다. 왕재수가 어두컴컴한 침실 벽에 등을 딱 붙이고 몸을 웅크린 채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방 안은 비어 있었고 창문도 닫혀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 미셴카! 괜찮아? ”

 

“ 어... 아, 안 괜찮아... ”

 

 

왕재수는 고개도 못 들었다. 머리를 무릎 사이에 처박고 두 손으로 발목을 꼭 껴안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베르닌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누가 왔었어? 무서운 거라도 봤어? 꿈꿨니? ”

 

“ 나 나갈래... 다닐, 너네 집 갈래... 무서워... ”

 

 

왕재수가 여전히 고개를 아래로 처박은 채 베르닌을 쿵쿵 들이받았다. 얼마나 몸을 떠는지 발작을 일으킨 병자 같았다. 베르닌은 일단 왕재수를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일으켜서 거실로 데리고 나왔다. 소파로 데려가서 거실과 부엌과 욕실, 서재 불을 모두 켜주었다. 담요로 어깨를 감싸주고 가능한 한 제일 부드러운 목소리를 짜내서 달랬다.

 

 

“ 이제 괜찮아, 나랑 같이 있잖아. 고개 들어도 돼. 불도 다 켰어. 무서운 거 다 갔어. ”

 

“ 아니야... 저 안에 있어. ”

 

“ 뭐가 있었는데? 방에 들어가니까 무서운 게 있었어? ”

 

“ 지, 지금도 있어. ”

 

“ 누가 왔었던 거야? 사람이야? ”

 

“ 몰라... 왔었나봐. 누군지 몰라. 아무도 없었어. ”

 

“ 근데 어떻게 누가 왔었다고 생각해? ”

 

“ 테, 테이블 위에... ”

 

“ 테이블? 나이트 테이블 말이야? ”

 

“ 으, 으응... ”

 

“ 그 위에 뭐가 있었어? 내가 가서 잠깐만 보고 와도 돼? 너 1분만 여기서 기다릴 수 있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혼자 남는 게 너무 무서운 것 같았다. 그래서 베르닌은 침실로 가지 않고 다시 왕재수 곁에 앉았다. 왕재수가 진정될 때까지 옆에 앉아서 기다렸다. 조심스럽게 어깨에 팔을 둘러주었다.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조금 안심이 된 듯 고개를 들더니 뻣뻣하게 몸을 기대왔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얬다. 겁에 질려서 그런지 눈이 평소의 두 배로 커져 있었다. 갑자기 베르닌은 그 표정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검은 숲. 온천 갔을 때, 그루터기 위에서... ’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 저... 혹시 뱀 껍질 같은 거 있었어? 아니면 쥐? 바퀴벌레?

 

 

왕재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가 다시 끄덕였다. 베르닌은 긴가민가했지만 어쨌든 왕재수가 반응을 보였으므로 희망을 얻고 다시 물어보았다.

 

 

“ 그런 거 내가 잘 치우잖아. 내가 저번에도 뱀 껍질 치워줬잖아. 들어가서 금방 치워버리고 올게. 1분만 여기서 기다릴 수 있어? ”

 

 

왕재수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베르닌은 왕재수의 품에 쿠션을 안겨주고는 급하게 침실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고양이가 또 쥐나 벌레를 물어다 놓은 모양이었다.

 

 

‘ 어휴, 다 큰 사내자식이 왜 저렇게 벌레랑 쥐 같은 걸 무서워할까. 귀신도 안 무서워하는 녀석이... 미셴카가 여기까지 쫓아왔나? 어제 소시지 줘서 물어다 준 건가? 그럼 우리 집으로 갖다 줘야지 왜 하필이면... ’

 

 

침실은 어두컴컴했다. 나이트 스탠드에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아마 왕재수가 자러 들어가면서 램프 불을 켰던 것 같았다. 베르닌은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금세 방 안이 환해졌다. 나이트 테이블은 침대 양쪽에 하나씩 있었는데 바깥쪽 테이블 위에는 책 한권과 수첩만 놓여 있었다. 그래서 베르닌은 안쪽으로 가보았다.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막상 테이블 위에 있는 것을 보자 기절초풍했다.

 

 

으악, 이게 뭐야!

 

 

깨진 유리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죽은 새가 한 마리 놓여 있었다. 흰색인데다 체구가 큰 편이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한순간 갈매기인가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가브릴로프에는 갈매기가 없었다. 구역질이 나는 것을 꾹 참고 자세히 보니 하얀 비둘기였다. 피범벅이 되어 있는데다 목이 부러지고 날개가 꺾여서 처참한 몰골이었다.

 

 

“ 고양이가 창문을 깨고 들어왔나 봐... 그래서 유리가 깨져 있나보네... ”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동시에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은 꼭 닫혀 있었고 유리도 멀쩡했다. 게다가 검정고양이 미셴카는 지금까지 이쪽 집으로는 온 적이 없었다. 먹이를 주는 것도 베르닌이지 왕재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베르닌이 알기로 고양이는 새를 사냥할 때 이런 식으로 끔찍하게 죽이지 않았다.

 

 

베르닌은 빗자루와 쓰레받기, 종이봉지를 가져왔다. 죽은 새를 종이봉지에 넣고 쓰레받기에 유리조각들을 쓸어 넣었다. 밖에 갖다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돌아섰는데 슬리퍼 끝에 뭔가가 채이며 바스락거렸다. 하얀색의 작은 카드였다. 몸을 굽혀서 카드를 주웠다. 짧은 글귀가 씌어 있었다. 손으로 쓴 것이 아니라 타이프로 친 것이었다.

 

 

 

친애하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선물이 마음에 드시는지.
그래도 당신은 공연을 포기하지 않겠지.
금요일이 몇 시간 남지 않았어.
그럼 내일 아침을 기대해.
좋은 꿈 꾸시길.

 

 

 

맨 아래에는 서명 대신 붉은 얼룩이 한 방울 번져 있었다. 핏자국 같았다. 베르닌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속이 뒤틀리면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공포와 충격으로 멍해져 있다가 문득 밖에 있는 왕재수 생각이 났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종이봉지와 쓰레받기를 나이트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 끔찍한 카드를 발견한 이상 함부로 그것들을 버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카드를 쥔 채 거실로 나왔다. 왕재수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소파에 웅크린 채였다. 쿠션을 얼마나 꼭 껴안고 있었는지 끄트머리가 다 구겨져 있었다. 베르닌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냈다. 병째로 들고 가서 마개를 열고 왕재수에게 물을 좀 마시라고 했다. 왕재수는 고분고분 물을 마셨다. 아까보다는 덜 창백했고 숨소리도 한결 나았다.

 

 

“ 이제 좀 괜찮아? ”

 

“ 아니... ”

 

“ 그래, 진짜 놀랐겠다. 나라도 그랬을 거야.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

 

“ 으응... ”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일어나지는 못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뱀이나 쥐, 벌레 따위를 보면 몸이 굳어져서 못 움직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죽은 새와 협박 카드를 보고 나니 한심하다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카드를 파자마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왕재수를 들쳐 업었다. 왕재수는 그래도 정신이 좀 돌아왔는지 그의 어깨에 찰싹 매달렸다.

 

 

 

 

*    *    *

 

 

 

 

 

베르닌의 집으로 들어오자 왕재수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침실로 데려가려는데 왕재수가 고개를 저었다.

 

 

“ 방에 들어가기 싫어. 거실에 있을래. ”

 

어... 우리 집은 괜찮아. 이상한 거 없었어. 내가 방금 자려고 들어갔었어. ”

 

“ 그래도 싫어. ”

 

“ 그래, 그러면 소파에 앉아 있자. ”

 

 

베르닌은 왕재수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왕재수는 심호흡을 반복하더니 천천히 머리와 어깨와 팔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발목과 무릎도 돌리듯 움직였다. 나중에는 바닥으로 내려와서 다리를 뻗고 스트레칭을 했다. 베르닌은 잠자코 기다렸다. 왕재수는 놀라거나 흥분했을 때 말을 하기보다는 몸을 움직여야 진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참 후 왕재수가 일어나서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베르닌이 건네준 컵을 쥐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 진정 좀 됐니? ”

 

“ 응. ”

 

“ 그러면 이제 내가 물어보는 거 대답할 수 있어? ”

 

“ 아마도. ”

 

 

베르닌은 그의 곁에 앉았다. 막상 물어보려니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 헷갈렸다. 그는 행정요원이었기 때문에 범죄자는커녕 목격자나 증인 심문 실습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법학과 시절과 요원 연수 때 배웠던 이론을 떠올리면서 일단 시간 순서대로 물었다.

 

 

“ 집에 들어갔을 때 아무도 없었어? ”

 

“ 없었어. ”

 

“ 인기척도 없고? 누가 들어왔었던 것 같은 흔적이라든지. ”

 

“ 내 신발. 항상 가지런히 정돈해 놓는데 부츠 한 짝이 삐뚤어져 있었어. 그리고 침실 문도 난 항상 열어놓고 다니는데 반쯤 닫혀 있었고. ”

 

“ 그럼 누가 들어왔다 나간 거네. 근데 왜 그때 나 안 불렀어? ”

 

“ 우리 집엔 너네 KGB 끄나풀들이 맘대로 드나들잖아. 도청 장치 같은 거 다시 설치하러 왔다 갔나보다 했어. ”

 

“ 어...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다. 그러면 곧장 침실로 들어갔던 거야? ”

 

“ 아니, 스트레칭 좀 하고 욕실로 가서 샤워했어. 그때도 밖에서 이상한 소리 같은 건 안 났어. 내가 들어간 후에는 누구 안 들어왔어. 나 그런 거 잘 알아차리거든. 다 씻고 나서 자려고 침실로 갔는데... 램프 켰는데 테이블 위에 그게 있었어... ”

 

 

왕재수가 다시 창백해졌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뭐였어, 다닐? 그거 뭐였어? 진짜 새였어? ”

 

“ 응. ”

 

“ 갈매기? ”

 

“ 아니. 가브릴로프에는 갈매기 없잖아. 비둘기였어. ”

 

“ 하얬어. 피투성이라서 자세히는 못 봤어. 날개도 다 짓이겨지고... ”

 

 

왕재수가 몸을 떨었다.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로 가더니 심하게 토했다. 끔찍한 광경에 몹시 놀랐으니 그럴 만도 했다. 왕재수가 입을 헹구고 세수를 하고 나왔다. 안색은 안 좋았지만 그래도 눈에는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베르닌은 그제야 왕재수의 손바닥에 피가 배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너 손 다쳤구나. 유리에 베었나 보네. 다른 데는 안 다쳤어? 발은 괜찮아? ”

 

“ 으, 으응... 슬리퍼 신고 있었어. ”

 

 

그래도 불안해서 베르닌은 왕재수를 앉혀놓고 유리에 벤 자국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다행히 왼쪽 손바닥과 손목 외에는 벤 곳이 없었다.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바른 후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 그거 보고서 놀라서 소리 지른 거야? ”

 

“ 응. 진짜 놀랐어. 무서워. ”

 

“ 이제 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 거니까. 그럼 다른 건 못 봤어? ”

 

“ 유리 깨진 거. ”

 

“ 카드는? ”

 

“ 카드? 그게 또 왔어? ”

 

 

베르닌은 ‘또’라는 단어 때문에 심장이 다시 팽팽하게 죄어오는 것 같았다.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왕재수에게 보여주었다. 왕재수는 카드를 받아서 글귀를 눈으로 훑어본 후 조그맣게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는 낮게 욕을 하면서 카드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 미친 놈. 변태. ”

 

 

두 눈에 파랗게 이글거리는 불꽃이 램프처럼 켜지는 것을 보니 공포보다는 분노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지도 몰랐다.

 

 

“ 이건 아까 못 본 거야? ”

 

“ 응, 새 때문에 너무 놀라서 이게 있는지도 몰랐어. ”

 

“ 그러면 ‘또’ 왔느냔 건 무슨 뜻이야? 이런 거 전에도 받았어? ”

 

“ 어. 오늘 아침에. ”

 

“ 뭐야? 근데 왜 아무 말 안 한 거야! ”

 

“ 아침엔 그렇게 끔찍한 게 없었어. 카드만 있었단 말이야. ”

 

“ 이건 협박 편지잖아! 그리고 아침에 발견한 거면 너 자는 동안 들어와서 놓고 간 거 아냐! 근데도 말 안 하고! ”

 

“ 어젯밤에 두고 갔던 건지도 몰라. 나 어제 너네 집에서 잤잖아. 그리고 나 이런 거 예전에도 많이 받았단 말이야. 나 싫어하는 사람들 많았어. 반동분자라고. 그래서 신작 올릴 때마다 욕하고 협박하는 편지들 많이 왔거든. 그냥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 ”

 

“ 아침에는 어디서 발견했어? ”

 

“ 베개 위에 있었어. ”

 

“ 뭐라고 씌어 있었는데? 이거랑 같은 내용이었어? ”

 

“ 아니, 같은 내용은 아니었어. 근데 기억 잘 안 나. 나 원래 재수 없는 얘기나 욕은 잊어버리거든. ”

 

“ 그거 지금 어디 있어? ”

 

“ 휴지통에 버렸어, 기분 나빠서. ”

 

“ 휴지통 오늘 안 비웠잖아. 청소 안 했으니까. 너 잠깐만 여기 있어. 그 카드 찾아올게. ”

 

 

왕재수는 이제 완전히 진정했는지 가지 말라고 매달리지 않았다.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의 집으로 갔다. 침실 휴지통을 뒤집어엎었다. 나이트 테이블 위에 있던 것과 똑같은 모양의 하얀 카드가 굴러 나왔다. 잽싸게 훑어본 후 미지의 협박자가 혼자 있는 왕재수를 공격할까봐 걱정이 되어서 카드를 쥐고 후다닥 뛰어 내려갔다.

 

 

 

왕재수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동댕이쳤던 카드를 다시 손에 쥐고 있었다. 베르닌이 휴지통에서 찾아온 카드를 내밀자 왕재수가 읽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베르닌은 내키지 않았지만 소리 내어 읽었다.

 

 

 

친애하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쇼스타코비치, 쇼팽, 슈트라우스, 민쿠스, 바흐
마지막은 물론 모차르트겠지.
하지만 수요일 공연은 올릴 수 없을 거야.
사랑하는 나리님들께 전화해, 공연은 취소됐다고.
다시 감옥에 가면 이제 살아서 나오지 못할 거야.
금요일. 하루를 줄게. 윗분들께 전화해. 

추신. 굳이 감옥에 넣을 필요도 없을 거야.
 

 

 

 

왕재수는 손에 쥐고 있던 카드를 구겨서 내던졌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 맞아, 저랬지. 하도 싸가지 없는 개소리라서 다 지워버렸는데. 그것만 보고 그냥 재수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완전 사이코에 변태였어. 비둘기 불쌍해. ”

 

 

베르닌은 기가 찼다.

 

 

“ 야, 지금 비둘기 불쌍하다는 말이 나오냐. 네 걱정을 해야지. 이건 진짜 협박이란 말이야. 수요일 공연 올리지 말라고 너 협박하는 거잖아. 죽은 새에 유리 파편까지... 지금 열한 시 반이야. 30분 남았어. 금요일이 지나면 그 자식이 너한테 위해를 끼치겠다고 협박한 거란 말이야. ”

 

“ 그게 뭐. 난 안 무서워. 이깟 얼간이 같은 사이코 자식 때문에 몇 달이나 준비한 공연을 포기하란 말이야? ”

 

“ 아깐 무서워서 움직이지도 못해놓고! ”

 

“ 그건 죽은 새가 있었으니까 그런 거고! 이런 협박은 안 무섭단 말이야. 한두 번 받아본 것도 아닌데! 극장 동료들한테서도 받아봤어! ”

 

“ 그래서, 그때도 이런 거 받았어? ”

 

“ 아니, 이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별거 다 받아봤단 말이야. 분장 상자에 칼이랑 유리도 박혀 있었고... 의상 난도질도 당해봤어. 열성팬한테 가위로 찔릴 뻔한 적도 있고. 피 묻은 편지 따위 수도 없이 받았어. 그래도 공연은 한 번도 취소한 적 없어. 그러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웬 미친놈이 기어 들어와서 쇼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나도 안 무서워. 공연은 그대로 올릴 거야. ”

 

 

베르닌은 고개를 저었다. 극장과 무대에 관해서라면 왕재수를 논리로 설득할 수 없다는 건 자명했다. 그래서 그는 전화기 앞으로 갔다.

 

 

“ 일단 난 상부에 보고해야겠어.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야. ”

 

보고는 무슨 보고! 네 상사는 스페호프잖아! 그래서, 스페호프한테 감시 요원을 더 붙여달라고 하라고? 돌았냐! 그 얼간이 천치는 수요일 공연 망치기만 기도하고 있는 놈인데! 이때다 싶어서 위험하다는 이유로 극장 폐쇄하고 공연도 취소시킬 게 뻔하잖아! ”

 

 

왕재수는 정색을 하면서 그를 막아섰다. 언제 그렇게 비명을 지르고 덜덜 떨었나 싶었다. 하지만 베르닌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왕재수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소리쳤다.

 

 

이 바보야! 얼간이는 너야! 뭐라고 씌어 있는지 다시 읽어봐! 처음에는 공연을 취소하라고 했어. 금요일 하루를 준다고 했지. 이번 카드에는 몇 시간 안 남았다고 했어. 협박범은 네가 어떻게 나올지도 예상하고 있어. 공연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씌어 있잖아. 내일 아침을 기대하라고. 이 말은 내일 아침에 그 자식이 다시 온다는 거잖아. 그게 카드가 될지 저런 짐승 시체가 될지 살아있는 뱀이 될지, 아니면 더 끔찍한 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감옥에 가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거라고 해놓고 추신으로는 굳이 감옥에 보낼 필요도 없다고 했어. 너한테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겠다는 협박이란 말이야. 네 말대로 그냥 미친놈의 개수작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최악의 상황도 예측해야지! 나는, 나는 네 감시요원이고... 그러니까, 국장은 널 감시하라고 붙여놓은 거지만 그것만으로 끝나는 건 아니란 말이야! 너한테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키는 것도 내 임무란 말이야! 그러니까 난 이거 그냥 못 넘어가! 가만히 못 있는단 말이야!

 

 

왕재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문득 베르닌은 왕재수가 소리 지르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자기는 화나면 발칵 소리 지르고 무용수들도 쥐 잡듯 하는 주제에 남이 소리 지르면 못 견디다니 정말 웃기는 녀석이었지만 어쨌든 베르닌은 간신히 진정하고 입을 다물었다. 왕재수는 한 손으로 오른쪽 귀를 감쌌다가 뗐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바보, 네가 말하는 건 경호원이잖아. 멍충이, 우리말도 잘 모르고. 넌 감시요원이지 경호원이 아니라고. ”

 

“ 어쨌든! 나 단어 구분 같은 거 몰라! 나한테는 같아! ”

 

“ 어, 그래. 고맙긴 한데 하여튼 스페호프한테는 말하지 마! 이거 분명히 그 자식 수작이란 말이야. 그때 돈키호테처럼... 겁줘서 공연 취소시키려는 건데 바보같이 그 자식한테 나 협박받았다고 보고해서 빌미를 줄 수는 없어. 너한테는 상부라는 게 있을지 몰라도 나에겐 없어. 수요일 공연에 대해서는 내가 최종 책임자고 결정권자야. 방해받고 싶지 않아. ”

 

“ 어휴, 고집쟁이. 알았어. 나도 국장이 그 망할 신작인지 뭔지 못하게 하는 건 바라지 않아. 국장한테는 말 안 할 거야. 그래도 그냥은 못 넘어가. 너 잠깐 여기 있어. 너네 집 가서 옷 좀 챙겨올 테니까. ”

 

“ 옷은 왜? ”

 

너 여기 있으면 위험해서 안 돼. 로만한테 가 있어. 내가 전화할 테니까. ”

 

안 돼! 로만 끌어들이지 마! 절대 안 돼!

 

 

왕재수가 금세 표정이 달라지면서 단호하게 소리쳤다.

 

 

“ 로만한테 이런 얘기 하지 마. 그 사람 진짜 다혈질이란 말이야. 앞뒤 안 가리고 흥분하다가 분명히 걸려들 거야. 스페호프가 나랑 친한 사람 낚으려고 기회만 보고 있는데... 게다가 그 감시꾼까지 하나 더 붙었는데. 죽어도 안 돼! ”

 

“ 하지만... 그럼 의사 선생님한테 가자. 병원에 있자. 입원한 척 하고 있다가 수요일에 극장 가서 공연 올리면 되잖아. ”

 

“ 일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준비할게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그러냐. 아직 무용수들도 그렇고 오케스트라도 그렇고 부족한 점 많은데. 그리고 의사 선생님을 왜 끌어들이니. 가뜩이나 나이 드신 양반을. 난 여기 있을 거야. 너네 집에 있으면 되잖아! ”

 

“ 너네 집이나 우리 집이나... 한 층 차이인데. ”

 

“ 그래도 너랑 같이 있잖아. ”

 

어휴, 난 행정직이잖아. 책상물림이고. 총도 제대로 못 쏜단 말이야. 좋아, 알았어. 국장한테는 연락 안 할 거야. 너 여기서 자. 대신 한 사람 더 부를 거야. 로만도 아니고 의사 선생님도 아니야. 더 이상 꼬투리 잡지 마. ”

 

 

베르닌은 요원 숙소에 전화했다. 수위에게 드미트리를 바꿔달라고 했다. 다시 리자가 받을까봐 슬며시 걱정이 되었지만 이번에는 드미트리가 곧장 받았다.

 

 

“ 어, 다닐이구나. 여자들 아직 있는데, 맘 바뀌었으면 놀러와. ”

 

“ 아니야, 그게 아니고. 너 우리 집으로 좀 와줄 수 있어? 같이 있는 여직원들한테는 비밀로 해주고. ”

 

“ 응? 왜,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

 

“ 전화로 얘기하긴 좀 그래. 지금 좀 와줄래? ”

 

“ 그래, 알았어. 지금 갈게. 숙소에서 너희 집 가까우니까 금방 가겠다. ”

 

 

드미트리가 이것저것 묻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서자 왕재수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또다시 ‘네가 잘못했다’ 표정이었지만 이제 베르닌은 개의치 않았다.

 

 

“ 드미트리가 올 거야. 걘 현장요원 훈련도 받았고 총도 잘 쏘고 호신술도 뛰어나니까 도움이 될 거야. 감시꾼이니 재수 없다느니 해도 소용없어. 국장 보고도 안 되고, 로만도 안 된다고 했고 의사 선생님한테 가는 것도 싫다고 했으니까 지금 도움 청할 수 있는 건 걔밖에 없어. 그러니까 불평하지 마. 안 통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베르닌의 곁을 지나쳐 침실로 들어가더니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방 안에 들어가는 게 무섭다더니 이제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뒤따라갔다. 창문을 모두 안에서 잠그고 커튼을 쳤다. 그리고 전등을 켰다. 왕재수가 짜증을 냈다.

 

 

“ 왜 그래! 잘 건데. ”

 

“ 오늘은 불편해도 불 켜고 자야 돼. ”

 

“ 눈부신데...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야. 아무 것도 아닌 걸 가지고. ”

 

“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협박범이 또 이상한 거 갖다놓으면 너 놀랄 거잖아. 뱀 껍질이라도 갖다 놓으면 더 무서울 거잖아. 그러니까 예방하려고 그러는 거야. 이불 뒤집어쓰고 자면 괜찮을 거야. 평소엔 밝아도 잠만 잘 자면서. ”

 

“ 아니야! 나 원래 밝으면 잠 못 자! ”

 

“ 웃기시네. 어제도 우리 집에 왔을 때 불 다 켜놨는데 잘만 자더구만. ”

 

“ 그건 너네 집이니까... ”

 

“ 우리 집이면 잠 잘 와? ”

 

“ 응, 너네 집에서는 잠이 더 잘 와. 우리 집에선 로만이 옆에 없으면 잘 못 자거든. 옛날부터 그랬어, 누가 꼭 안아줘야 푹 잤어. 근데 너네 집에선 신기하게 잠이 잘 오더라고. ”

 

“ 어... 그렇구나. 그래서 우리 집 오면 그렇게 금방금방 자는구나. 하여튼 지금도 우리 집이잖아. 그러니까 불 켜놔도 잠 잘 올 거야. 졸리니? ”

 

“ 응, 졸려. 갑자기 너무 졸려. 아까 놀라서 너무 진이 빠졌나봐. ”

 

“ 그래, 얼른 자라. 걱정하지 말고. 드미트리 금방 올 거니까 걔랑 나랑 여기 있을 거야. 무서워할 거 없어. ”

 

“ 안 무서워. 그 자식 오는 건 짜증나지만... 내 옆에 오지 말라고 해. ”

 

“ 알았어, 이 방에는 내가 있을게. 피곤할 텐데 이제 자자. ”

 

 

왕재수는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끌어올렸지만 얼굴을 완전히 가리지는 않았다. 눈을 빼꼼히 내놓은 채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베르닌은 그 눈에 어려 있는 한없이 부드럽고 신뢰로 가득 찬 표정에 충격을 받았다. 주인을 따라다니는 조그만 강아지 같은 눈빛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왕재수에게서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순간 베르닌은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치는 책임감을 느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보호심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던 시계탑 창가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왕재수가 하품을 하더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금세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    *    *

 

 

 

 

 

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깰까봐 급하게 뛰쳐나갔다. 열쇠구멍으로 바깥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 드미트리가 근무 중과 다름없이 말쑥한 차림으로 들어왔다. 베르닌은 주변을 확인한 후 문을 잠갔고 걸쇠도 걸었다. 그리고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큰 소리를 내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드미트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활짝 열린 침실 문 너머로 왕재수가 자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베르닌의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왔다.

 

 

베르닌은 가능한 한 평온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일단 스페호프에게 보고하는 것은 미뤘다는 얘기도 해주고 두 장의 카드를 보여주었다. 드미트리는 놀란 표정이었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이따금 ‘응’이나 ‘그래서?’ 등의 추임새만 넣으며 베르닌의 이야기를 끝까지 침착하게 들었다. 그리고는 카드를 넘겨받아 꼼꼼하게 살핀 후 비둘기 시체를 버렸느냐고 물었다.

 

 

“ 아니, 종이봉지에 싸서 쟤 침실에 그냥 놔뒀어. 혹시나 해서. ”

 

“ 그냥 두면 부패할 거야. 일단 냉장고에 넣어두자. 스페호프에게 보고하지 않는다 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증거물은 제대로 간수해야 돼. 여기로 가져올 수 있어? ”

 

“ 으, 으응. 근데 우리 집 냉장고에 넣는 건 안 돼. 쟤가 그거 다시 보면 심장마비 걸릴 거야. ”

 

“ 그래, 그럼 일단 가져와서 좀 본 후에 도로 쟤네 집 냉장고에 넣어두자. 갔다 올래? 둘이 가는 게 좋긴 한데 미하일을 여기 혼자 놔두면 안 되니까... 사실은 내가 현장을 좀 봤으면 좋겠는데. ”

 

“ 그럼 네가 올라갔다 와. 열쇠 줄 테니까. ”

 

 

드미트리는 머뭇거렸다. 침실 쪽을 힐끗 쳐다본 후 중얼거렸다.

 

 

“ 미하일이 알면 화낼 것 같은데... 나 엄청 싫어하잖아. 자기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갔다고... ”

 

“ 자니까 괜찮아. 그리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

 

“ 그래. 미안하긴 하지만... 심각한 일일 수도 있으니까. 나 금방 다녀올게. 근데 너 총 있어? ”

 

“ 아, 어... 있긴 한데... ”

 

“ 다행이네. 안 그러면 내 거 빌려주려고 했더니. ”

 

“ 너 총 가지고 왔어? ”

 

“ 응. 나 총기 소지 허가받았어. 현장요원 연수도 받았거든. ”

 

“ 어, 그건 아는데... 내가 아무 얘기 안 했는데 어떻게 총을 챙겨올 생각을 다 했네. ”

 

“ 다닐, 나 여기 이틀밖에 안 있었지만 네가 밤중에 함부로 사람 불러낼 성격 아니란 건 파악했어. 목소리도 다급했고.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어. 그리고 다른 이유도 하나 있고. ”

 

“ 그게 뭔데? ”

 

“ 음, 일단 현장 보고 와서 얘기해줄게. 총부터 꺼내라. 쓸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

 

 

베르닌은 며칠 전 스페호프의 지시로 5호실에서 다시 수령한 9밀리 마카로프를 옷장 서랍에서 꺼냈다. 하지만 권총을 쥐고 있자니 다시 불안해졌다.

 

 

“ 저기... 나 총 잘 못 쏘는데... ”

 

“ 걱정 마, 내가 좀 있다 가르쳐줄게. 그리고 그놈 지금은 안 올 거야. 카드에 그렇게 썼잖아. 내일 아침을 기대하라고. 밤에는 안 올 거야. 이런 협박범에겐 패턴이 있어. 강박 관념이 있어서 자신이 예고한 내용을 따르려고 하고. 그래도 위험을 최소화해야 하니까 총은 꼭 가지고 있어. 나 금방 다녀올게. 현장 사진도 좀 찍어놔야겠다. ”

 

 

드미트리가 주머니에서 조그만 로모 카메라를 꺼냈다. 그리고는 재킷 안쪽에 손을 넣어 권총을 확인하더니 잽싸게 밖으로 나갔다.

 

 

베르닌은 9밀리 마카로프를 꼭 쥔 채 침실 문가에 서 있었다. 창문은 모두 잠가 놨지만 그래도 혹시나 누군가가 침입할까봐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이 와중에 왕재수가 저렇게도 곤하게 잠들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드미트리가 와줘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혹시라도 혼자 올라간 드미트리가 협박범에게 공격이라도 당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어 심장이 쿵쿵거렸다.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협박범이 제시한 시한은 금요일 하루였다. 시한이 지났다. 왕재수는 공연을 취소하지 않았다. 그 말은 아침에 뭔가가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머릿속에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쳐지나갔다. 드미트리가 왜 안 오나 싶어 점점 걱정이 됐다. 올라가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열쇠구멍으로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자 드미트리가 들어왔다.

 

 

“ 봤니? ”

 

“ 응. 끔찍하더라. 미하일이 진짜 놀랐겠는데... 일단 잘 싸서 냉장실에 넣어놨어. 유리조각들도 그렇고. 네가 과민반응한 게 아니야, 다닐. 시한이 금요일 하루였다고 했지? ”

 

“ 첫 번째 카드엔 그렇게 돼 있었지. 근데 두 번째 카드에선 쟤가 공연 포기 안 할 거라고 비아냥거리고 있었어. ”

 

“ 그래. 미하일이 어떻게 나올지 다 알면서 일부러 시한을 준 것 같아. 전형적인 겁주기 수법이야. 저러다 끝나면 다행이긴 한데 아무래도 명확한 목적을 가진 놈인 것 같아. ”

 

“ 미샤는 사이코일 거라고 하던데. 예전에도 이런 거 많이 받았다고. ”

 

“ 아니야. 뭐 사이코 기질이 있는 놈일 수야 있지. 근데 계속 공연 얘기를 하고 있잖아. 게다가 첫 번째 카드에는 네가 간과한 아주 중요한 단서가 있어. 작곡가들 얘기를 하고 있잖아. 기억 안 나? 어제 미하일이 검열국장이랑 싸우면서 여섯 명의 작곡가 얘길 했잖아. 누군지 대보라고. 근데 여기 나열한 이름이 여섯 개야. 미하일 신작에 쓰는 음악들 아닐까? 나야 연습하는 걸 못 봤으니 모르지만... 너 알지 않아? ”

 

“ 어, 글쎄... 나 음악은 잘 몰라서... 음악은 들었는데 그게 여섯 가지가 섞인 건지도 몰랐어. 근데 네 말 들으니 그럴 것 같아... 이게 무슨 뜻일까? 왜 중요한 단서가 되는 거야? ”

 

“ 중요한 단서야. 범인은 미하일의 신작에 대해 잘 알고 있어. 그 음악들을 쓴다는 걸 아는 거야. 연습하는 걸 봤거나 압수한 레코드 리스트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 게다가 여섯 명의 이름을, 그것도 미하일이 검열국장에게 이름 대보라고 도발했던 그날 밤에 보낸 카드에 적었잖아. 검열국장이랑 미하일이 싸운 걸 아는 사람이야. ”

 

“ 그러면, 그러면 극장에 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

 

“ 그럴 가능성이 크지. 근데 꼭 극장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 정보원을 통해서 얘기를 전해 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

 

 

드미트리는 카드 두 장을 티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낮게 휘파람을 불더니 소파에 뒹굴고 있던 잡지를 집어 들었다. 이 상황에 팔자 편하게 웬 잡지인가 싶었는데 드미트리가 잡지 표지 귀퉁이의 여백에 볼펜으로 빠르게 문장 하나를 휘갈겨 썼다.

 

 

‘ 너희 집에는 도청 장치 없어?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응, 내가 알기로는 없어. 그 업무는 내가 총괄하잖아. 적어도 우리 쪽에서 붙인 건 없어. ”

 

 

불현듯 머릿속에 스비제르스키가 스쳐 지나갔지만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 S가 널 신뢰하긴 하더라. 아마 이 집엔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

 

 

베르닌은 대체 S가 누구인가 하다가 스페호프이겠거니 하고 혼자 깨달았다. 왜 갑자기 도청이니 S니 하는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드미트리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 다닐. 스페호프가 내게 지령을 줬어. 미하일의 공연을 막으라고. 너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네가 감시요원이란 건 너무 잘 알려져 있으니 위험해서 안 된다고 했어. 그러니까 이건 극장 동료나 일반 열성 팬이 꾸민 짓이 아니야. 이건 보안위원회와 연관된 짓이야. 미리 계획된 협박이라고. 그러니까 절대로 이 문제를 공식화해서는 안 돼. 그러면 스페호프의 계획에 넘어가게 되는 거야. 지금까지의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그는 두 가지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어. 첫째, 협박을 공론화함으로써 미하일에게 관객의 위험을 빌미로 공연을 취소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것. 둘째, 미하일이 입을 다물 경우 그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해서 공연을 막는 것. 내가 보기에 미하일의 성격상 절대 이 일을 KGB에 알릴 것 같지는 않아. 그 말은, 자동으로 두 번째 시나리오가 진행된다는 얘기야. ”

 

 

베르닌은 눈을 깜박였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 국장이, 국장이 너한테 지령을 줬다고? 언제? ”

 

“ 어제 아침에. 너 올라오기 직전에. 작전이 진행될 거라고 했어. 그러면 옆에서 도우라고. 걔가 불여우 짓을 해서 빠져나가서 이것도 저것도 안 될지 모르니 곁에서 감시하는 척하면서 도와주라고 했어. ”

 

“ 그러면... 카드, 죽은 새, 유리... 너는 다 알고 있었던 거야? ”

 

“ 아니, 전혀. 자세한 얘기는 하나도 안 해줬어. 기밀이 새어나가면 안 된다고. 작전이 진행되면 나도 알게 될 거라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도와주면 된다고 했어. 아까 오후에 지방 분권 특성 강의 끝나고 나서 국장이 다시 한 번 얘기했어. 스페호프는 정말로 쟤를 미워하더라. 발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쟤가 올린다는 이유만으로 그 신작을 망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아예 공연을 못 올리게 하든지 무대 위에서 엉망으로 만들든지 둘 중 하나를 노리고 있더라고. ”

 

“ 그래서... 그래서 너 나 따라온 거야? 쟤 감시하는 척하면서 방해하려고? 국장 명령에 따라서 공연 망치려고? 그랬던 거야? ”

 

 

베르닌은 배신감과 충격에 젖어서 부들부들 떨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때 드미트리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다닐. 그런 거 아냐. 내가 그랬잖아, 기억 안 나? 나 저 친구 팬이었어. 무대 다 챙겨봤어. 인터뷰 실린 신문이랑 잡지도 다 구했어. 정말 좋아했다고. 그런데 나보고 미하일 야스민의 공연을 방해하라고? 무대를 망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스페호프는 내가 쟤 팬이라는 걸 전혀 몰랐어. 발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니까. 나는 레닌그라드에서 왔어. 레닌그라드 사람에게 키로프가 어떤 의미인지, 그 극장의 주역 무용수가, 그것도 그 무대에서 제일 빛나던 스타가 어떤 의미인지 너희 국장은 결코 알 수 없을 거야. 아마 너도 모를걸. 그건 레닌그라드 팬이 아니면 절대 이해 못해. 그런데 나보고 쟤 공연을 망치라니, 그런 짓은 절대 못해.

나도 알아, 미하일이 나 싫어하는 거. 곁에 있는 것 자체로도 못 견디는 것도. 하지만 스페호프가 그런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계속 옆에 있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누군가는 미하일을 옆에서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뻔뻔스럽게 계속 극장에 간 거야. 중간에서 널 힘들게 만들긴 했지만... 너한테도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미안하지만 솔직히 널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어. 국장이 그렇게도 널 신뢰하고 있으니까. 괜히 어설프게 얘기했다가 미하일한테 더 안 좋게 돌아갈까봐 입 다물고 있었어. 미안하다, 널 못 믿어서. ”

 

 

베르닌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대신 드미트리가 내민 손을 세게 쥐고 흔들었다. 드미트리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지만 곧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 너 총 잘 못 쏜다고 했지? ”

 

“ 응, 사격 시험도 간신히 통과했어. 군대 있을 때도 총 제대로 못 다룬다고 맨날 깨졌어. ”

 

“ 협박범은 분명히 다시 올 거야. 패턴을 놓고 판단한다면 내일 새벽에서 아침 사이에 나타날 것 같아. 미하일의 집으로 올 가능성이 크지만 밖에서 지켜보고 있다면 여기로 올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너랑 내가 나눠서 감시해야 돼.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그 동안 너한테 마카로프 다루는 거 가르쳐줄게. ”

 

 

드미트리는 탄창을 뺀 9밀리 마카로프를 꺼내서 베르닌에게 총 다루는 법을 속성으로 가르쳐 주었다. 베르닌은 드미트리가 지금껏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더 뛰어난 교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0분 만에 베르닌은 그럭저럭 마카로프를 다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 고마워, 이제 좀 알 것 같아. 내가 너무 힘을 줘서 총을 잡았던 거구나. ”

 

“ 응, 이제 그 느낌만 알면 적어도 오발은 안 할 거야. 탄창 채워놔, 안전장치는 걸어놓더라도. 아참, 근데 우리 아침엔 나눠서 보초 서야 하잖아. 누가 위층으로 올라갈지 정하는 게 좋겠다. ”

 

 

베르닌은 망설이지 않고 대꾸했다.

 

 

“ 네가 올라가는 게 낫겠어. 내가 여기 있을게. ”

 

하긴, 너는 현장 경험이 없으니까 위험하겠다. 아무래도 미하일의 집에서 범인과 마주쳐 몸싸움이 일어날 확률이 더 높으니 내가 가는 게 나을지도... ”

 

“ 어, 저... 그게 아니고... 나는 위험한 게 문제가 아니라... 저... 미샤가 아까 그랬거든. 걔가 너 감시꾼이라고 아직 경계하잖아. 그래서... 너 온다니까 자기 자는 동안 옆으로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 저 자식 완전 철딱서니 없어서... 한번 자기 맘에 안 들면 계속 저러거든. 그래도 아까 너무 놀라기도 했고 안 그런 척해도 많이 무서울 거야. 근데 기분까지 상하게 하면 좀 그러니까... 저, 미안해... ”

 

 

드미트리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 그래. 할 수 없지 뭐. 어쩌겠니. 내가 너처럼 인상이 좋은 것도 아니고 착한 것도 아니니... 게다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으니... 괜찮아. 지금 중요한 건 내 우상한테 잘 보이는 게 아니라 그 친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도와주는 거니까. 그럼 나 지금 잠깐 올라갔다 올게. 아까 문단속 다 해놓고 오긴 했는데, 범인이 혹시라도 아침 전에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미리 가서 장치를 좀 해놓고 와야겠어. ”

 

“ 어떤 장치? 지문 남기게 하는 거? ”

 

“ 아니, 그런 건 나도 없어. 근데 거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창문이나 현관문, 옥상 뭐 그런 쪽에 작은 방울 같은 걸 달아놓는 거야. 좀 웃기지만 혹시라도 효과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까 보니까 미하일 서재에 그런 거 있더라고. ”

 

“ 아, 있어. 무대 소품 몇 개 가져왔더라고. 무대 효과 연구해본다고. 얼마나 걸릴 것 같아? ”

 

“ 20분? 걱정하지 마. 금방 다녀올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크게 소리 지르기로 하자. 이 건물은 방음이 잘 안되니까 위에서 소리치면 여기서도 잘 들릴 거야. 정 안되면 공중에 대고 총 쏴. ”

 

“ 알았어, 너도 무슨 일 생기면 총 쏴. 그러면 내가 도와주러 갈게. ”

 

“ 넌 미하일 옆에 있어야 돼. 절대로 쟤 혼자 놔두면 안 돼. 내 걱정은 하지 마. 너희 지부를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여기 현장요원들 중에 그렇게 실력 좋은 사람들은 없는 걸로 알고 있어. 다들 나이도 많고. 그럼 갔다 올게. ”

 

 

드미트리가 다시 위층으로 올라간 후 베르닌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한 손에 권총을 꼭 쥔 채 거실과 부엌 쪽 창문들을 다시 체크했다. 그리고 침실로 갔다. 왕재수는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린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미동도 없이 누워 있어서 깊이 잠든 줄 알고 구겨진 이불을 바로 해주려는데 왕재수가 목쉰 음성으로 속삭였다.

 

 

“ 총 쏘지 마, 다닐. ”

 

“ 어, 너 깼구나. 피곤하다더니. ”

 

“ 그럼 어떻게 자냐, 밖에서 그렇게 두런두런 얘기를 계속 하는데. ”

 

“ 어, 미안해. 문 닫아주고 싶었는데 협박범이 나타날까봐 걱정돼서 그랬어. 이제 조용히 할 테니까 얼른 자. ”

 

“ 총 쏘지 마. ”

 

“ 아, 이거... 그냥 혹시나 해서 가지고 있는 거야. 만약을 대비해서... 너 총 본 적 없겠구나. 괜찮아, 이거 안전장치도 걸어놨어. 무서워하지 마. ”

 

“ 누가 그래, 내가 총 본 적 없다고. ”

 

“ 어, 너 군대 안 갔다 왔잖아. ”

 

“ 그렇다고 본 적 없는 건 아니야. 그리고 여기서 총 쏘면 안 돼. ”

 

“ 만약을 대비한 거라고 했잖아. 그 나쁜 놈이 들어와서 혹시라도 해코지하려고 하면... ”

 

“ 총소리가 얼마나 큰데... 그 소리 나면 경찰이고 너네 KGB고 다 몰려올 거야. 그 즉시 난 보호 대상이 될 거고 너희 국장은 범인 수색을 한답시고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시간을 끌겠지. 그럼 수요일 공연은 물 건너가는 거야. 총 쏘지 마. ”

 

“ 에휴... 너는 이 와중에도 공연 걱정을 하는구나. 지금 상황이 심각하단 말이야. 드미트리가 그러는데 스페호프가... ”

 

“ 나도 들었어. ”

 

“ 아... 들었구나... 그래도 드미트리가 와줘서 다행이야. 우리 둘이 있을 거니까 이제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

 

“ 당연히 아무 일도 없지! 없던 걱정을 네가 만들고 있잖아! 총이나 들고 다니고! 총도 못 쏘면서. ”

 

“ 어, 아니야. 나 그래도 군대랑 요원 연수 때 사격 배웠어. 그리고 방금 드미트리가 가르쳐줘서 이제 잘 쏠 수 있을 것 같아. ”

 

“ 그래봤자... 하여튼 총 치워. 보기 싫어. ”

 

야! 다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건데! 네가 싫어도 할 수 없어! 그리고 드미트리한테도 너무 심하게 대하지 마. 국장 명령도 무시하고 너 도와주러 왔잖아. 지금도 위험을 무릅쓰고 너네 집에 올라가 있단 말이야. ”

 

 

드미트리 얘기를 하자 왕재수의 눈빛이 딱딱하게 변했다.

 

 

“ 그 자식 얘기 하지 마. ”

 

“ 너 정말 왜 그러니. 아까 우리가 얘기하는 것도 들었다면서. 동향 출신에 옛날부터 네 팬이었다잖아. 네 신작 망치지 않게 하려고 저렇게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데. 조금만 잘 해주면 안 돼? 너 팬들한테 친절하잖아. 여자들에게도... 그것처럼 드미트리한테도... ”

 

“ 그 자식이 여자도 아니고... 그리고 나 팬들에게 다 친절하게 군 거 아냐! 맘에 안 드는 놈은 무시했단 말이야! 그 자식은 맘에 안 들어. ”

 

“ 그치만... ”

 

“ 어디서 굴러먹은 놈인지 단추 눈은 또 닮아가지고... 에이... ”

 

 

왕재수는 불만과 짜증을 잔뜩 쏟아낼 기세였지만 베르닌의 표정을 보고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베르닌은 너무나 안타까웠지만 왕재수의 창백하고 갸름한 얼굴을 보니 다시금 심장이 당겨오는 것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 바보. 운도 지지리도 없는 자식. 온갖 잘난 건 다 가지고 태어난 주제에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들어서 맨날 대들고 성깔 부리다가 감옥 가고 혼나고 여기까지 오고. 이상한 협박까지 받고... ’

 

 

침대에 걸터앉자 왕재수는 그가 졸려서 그런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안쪽으로 몸을 움직여 자리를 내주면서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 졸리면 좀 자. ”

 

“ 나 안 졸려. 그리고 네가 누워 있는데 내가 어떻게 여기서 자냐! ”

 

“ 왜 안 돼? 침대도 넓은데. 어차피 할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꼭 안고 잘 것도 아니고. ”

 

어휴, 너란 놈은 정말!

 

“ 지난번에는 안아서 재워줘 놓고. ”

 

“ 야! 그때는 네가 무서운 꿈 꿨다고 하도 울고불고 해서 그런 거 아냐! ”

 

“ 지금도 잠 안 온단 말이야. 너 때문에 깼어. 총 들고 설쳐서. ”

 

“ 그래서 지금 안아서 재워달란 거야? ”

 

아니야! 내가 언제 그랬어! 졸리면 좀 자라는 거야! 안 그래도 너 면도도 안 해서 꾀죄죄해졌는데 잠까지 못 자면 더 형편없어질 거 아니야! ”

 

“ 알았어, 졸리면 나도 잠깐 잘게. 드미트리 오면 교대로 눈 붙이면 되지 뭐. 그러니까 내 걱정하지 말고 어서 자. 그래야 힘내서 공연도 잘 치러내지. ”

 

 

왕재수는 잠이 안 온다던 말과는 달리 이미 눈꺼풀이 반쯤 감겨 있었다.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 있던 손이 탁 소리를 내며 베개 위로 떨어졌다. 그렇게 자면 나중에 팔이 저릴 것 같아서 손목을 잡아 이불 속으로 집어넣어주려는데 왕재수가 눈을 감은 채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 그 비둘기... 버렸어? ”

 

“ 어... 아니. 드미트리가 그거 증거물이라고 함부로 두면 안 된다고 해서 너희 집 냉장고에 넣어놨어. 저... 내가 나중에 다 치워줄게. 소독약으로 깨끗하게 닦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

 

“ 비둘기 불쌍해... 날개도 막 부러뜨리고... 나쁜 놈. ”

 

 

왕재수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베르닌에게 잡혀 있는 손 대신 반대편 손을 들어 올려 눈을 문질렀다 뗐다. 그리고는 잘 들리지도 않는 딸꾹질을 한 번 하더니 머뭇거리며 속삭였다.

 

 

“ 다닐... 그 비둘기... 나 때문에 죽은 거야? ”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왕재수의 손목을 꽉 쥐었다. 어쩐지 떨려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

 

“ 나 보여주려고... 그래서 새 잡아서 죽이고, 날개 부러뜨리고... 비둘기 잘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나 때문에... ”

 

 

왕재수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베개와 머리칼에 가려져서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숨소리가 불규칙해지면서 빨라졌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권총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왼손으로는 여전히 왕재수의 손을 쥔 채 오른손으로 그의 어깨를 가만히 쓸었다.

 

 

“ 아니야, 미셴카. 너 때문에 죽은 거 아니야. 그냥 그놈이 나쁜 놈인 거야. 그리고 원래부터 죽은 비둘기였을 거야. 사고로 죽은 새를 주워서 가져다 놓은 거야. 그러니까 잊어버려. 다른 생각해. ”

 

“ 다른 생각이 안 들어. ”

 

“ 그러면 좋은 거 생각해봐. 로만. 꼭 안아주면 좋다면서. 아니면, 음... 파인애플이라든가. ”

 

“ 바보, 파인애플은 아플 때 생각나는 건데. ”

 

 

왕재수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속눈썹 끝이 약간 젖어 있었지만 숨소리는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동안 침묵한 끝에 왕재수가 졸음에 취해 무거워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비둘기... 묻어줘. ”

 

“ 그래, 알았어. ”

 

“ 깊이 묻어줘야 돼. 안 그러면 개가 와서 파헤치니까. ”

 

“ 짐승 싫다면서 어떻게 그런 건 또 아니? ”

 

“ 다 알아... 그때 읽었어, 네가 빌려온 책. 멍멍이 와 있었을 때. ”

 

“ 아, 벨라 말이구나. 아니, 뜨보록. 그 녀석 잘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네. 보고 싶다. 너도 보고 싶지? ”

 

“ 내가 왜... 아무짝에 쓸모없는 멍멍이... ”

 

 

왕재수가 잠꼬대하듯 투덜대더니 곧 조용해졌다. 다시 잠든 것 같았다. 베르닌은 무릎에 권총을 얹어 놓은 채로 왕재수의 손을 꼭 잡고 밝은 형광등 불빛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방울을 달러 간 드미트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FIN

- 2015. 8. 16 ~ 8. 25 -

 

 ...

 

과연 세번째 협박 카드가 날아올 것인가~~ 그건 다음주 32편에서~

 

..

 

맨끝에서 벨라, 뜨보록으로 불리는 멍멍이는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코트', '10. 벨라 등장!',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에 등장한 하얀 강아지이다 :)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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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3. 22:08

그리보예도프 운하, 2013년 가을 russia2015. 9. 3. 22:08

 

 

지난 2013년 9월에 갔을 때 찍은 그리보예도프 운하 사진 세 장

 

 

 

왼편에 조금 보이는 사원은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이다.

 

 

 

유람 보트도 둥둥둥~

 

그리보예도프 운하는 페테르부르크에 갈 때마다 제일 먼저 산책하는 코스 중 하나라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같은 곳이지만 매년 사진 느낌이 조금씩 다르다(물론 이건 나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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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로프스키 공원

 

 

 

네바 강변 따라 궁전 교각까지 걸어가는 길

 

 

 

얼음 꽁꽁.

 

 

 

흰 눈과 파란 하늘 때문에 에르미타주가 더욱 선명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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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2. 22:03

백야, 붉은 장미 russia2015. 9. 2. 22:03

  

 

7월의 여름 밤, 이삭 성당과 광장의 장미꽃들

공연 보고 돌아오는 길. 비온 직후라 장미꽃들에서 스며나오는 향기가 너무나 좋았다.

장미는 정말 아름다운 꽃이다. 그 중에서도 붉은 장미는 존재 자체로 완벽하다!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은 아스토리야 호텔. 왼편은 앙글레테르 호텔.

 

이삭 성당의 천사가 보인다.

 

* 전에 올렸던 이때 사진 몇 장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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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5일.

다음날 떠나야 했기 때문에 엄청난 아쉬움을 안고, 마린스키 신관에서 발레 '해적'을 본 후 모이카 운하를 따라 숙소까지 걸어왔다.

 

이번 여름에 묵었던 숙소는 이삭 성당 맞은편의 포취탐스카야 거리에 있는 르네상스 발틱 호텔이었다. 시설은 그럭저럭... 혼자 지내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위치가 좋아서 마린스키 갈때는 항상 걸어다녔다.

 

포취탐스카야 거리로 접어들기 직전, 모이카 운하와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 교차로에서 한 장. 밤 11시 되기 좀 전이었던 듯하다. 7월말이 다 되어서 이제 백야는 거의 끝난 시점이었다.

 

 

 

포취탐스카야 거리로 접어들었다.

 

파란색의 러시아어 간판. 이게 중앙우체국 건물이다. 옛날에 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잠깐 공부할 땐 집에 짐 부치러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추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여기까지 왔었는데 무지 힘들었다. (돌아갈때 가방 무게 줄여보려고 책들은 전부 소포로 부치고 갔다) 그땐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있는 기숙사에 살았기에 여기 오려면 버스 타고 와야 했고, 내려서도 이삭 성당 앞에서 이 길을 찾아들어와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때 아무리 지도를 봐도 방향이 헷갈려서 엄청 헤맴. 지금 보면 엄청 쉬운 길인데 ㅠㅠ

 

 

 

건물 너머로 이삭 성당의 돔이 보인다. 밤에 걷다가 이렇게 황금 지붕이 건물 지붕 위로 떠오르면 굉장히 환상적인 느낌이 든다.

 

 

 

포취탐스카야 거리 전경. 역시 이삭 성당 돔이 보인다. 내가 머물렀던 호텔은 오른편에 있는데 이 사진에선 안 보인다. 조금 더 내려가야 있어서. 호텔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한번 올려보겠다.

 

 

 

거리를 따라 점점 내려와서... 점점 작아지는 이삭 성당 지붕. 성당에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건물에 가려서 잘 안 보이게 됨 :)

 

항상 이렇게 다녀온 사진 몇 장 올리다보면.. 기승전 '다시 가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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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키 신관은 황금빛 호박색 대리석과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탈이 화려하게 어우러진 곳인데, 물론 오리지널 마린스키 극장의 아우라는 아직 갖추지 못했지만 공연장으로서는 꽤 훌륭하다. 무대 보기도 좋고.

 

이곳 내부 사진을 한두번 조금씩 올린 적은 있지만 전체를 다 소개한 적은 거의 없는데, 갈때마다 사진은 많이 찍어놔서 언제 한번 전체를 조망해봐야지.. 하다가도 귀찮아서...

(근데 다시 찾아보니 한번쯤 내부와 외부 사진 대충 훑어 올린 적이 있긴 하네...)

 

태그의 마린스키 신관을 클릭하면 전에 올렸던 이 극장 사진들을 볼 수 있다~ 혹은 공연 보러 가서 막간에 올린 메모도.

 

오늘은 이 신관 내부의 계단 사진만 몇 장 :)

 

이건 2층과 3층. 천정에는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탈들이 보인다.

 

 

 

이건 사이드 계단.

 

 

 

1층에서 3층(1야루스)까지 곧장 연결되어 있는 기나긴 계단 :)

막간이 되면 여기서 포즈 잡고 사진 찍는 드레스 차림 미녀들이 많다.

 

 

 

이것도 2층에서 3층 가는 계단. 이건 2층에 있는 카페에서 찍었다.

 

 

** 보너스로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탈 장식 사진 세 장. 마린스키 신관의 상징적 풍경 중 하나. 이 크리스탈 장식들은 전에도 다른 사진 올린 적 있음.

 

 

 

 

 

 

 

* 크리스탈 장식 다른 사진들은 여기(좀 더 밝게 찍은 버전이다) : http://tveye.tistory.com/2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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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1. 11:23

알렉산드로프스키 공원의 녹음과 빛 russia2015. 9. 1. 11:23

 

 

간밤에는 많이 잤는데도 아직 피로도 덜 풀렸고 머리도 지끈거린다.

심신의 안정을 위해, 지난 7월. 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로프스키 공원의 짙은 녹음과 사이사이로 스며들던 빛 사진 몇 장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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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미하일로프스키 공원과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주변 산책하다가.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진눈깨비가 몰아치면서 음습하고 추운 날이었다. 이때 산책하는데 엄청 힘들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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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30. 15:27

여름날 판탄카 운하 사진들 몇 장 russia2015. 8. 30. 15:27

 

 

지난 7월 23일.

날씨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원래는 블라지미르스카야 역 근처의 수퍼마켓에 가려다가 막상 나오니 날씨가 좋은 것 같아서 판탄카 운하를 따라 레트니 사드에 산책을 하러 가기로 했다.

이렇게 구름이 흘러다니고 하늘이 파래서 날씨 좋은 줄 알고..

(결국 레트니 사드 들어가자 비왔음^^; 역시 페테르부르크..)

 

레트니 사드로 이어지는 판탄카 운하 따라 걸어가면서 찍은 사진 몇장.

 

네프스키 대로 쪽을 지나가다 보면 세 개의 메인 운하가 있는데, 판탄카 운하, 그리보예도프 운하, 모이카 운하이다. 그리보예도프 운하 쪽에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도 있고 돔 크니기도 있고, 모이카 운하는 궁전광장이랑 가까워서 관광객들이 더 많이 가는 곳인데 판탄카 운하는 살짝 더 한적하고 산책하는 묘미도 더 좋다. 러시아 문학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판탄카란 이름과 함께 안나 아흐마토바를 떠올리실듯...

 

하여튼, 판탄카 운하 풍경 몇 장.

 

 

 

 

 

 

 

 

 

 

 

 

 

 

 

 

 

 

이제 레트니 사드 앞까지 왔다. 맞은편 너머로는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이 보인다.

레트니 사드에 걸어서 가려면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에서 마르스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방법도 있고, 네바 강변 따라 쭉 걸어가서 정문으로 들어오는 방법도 있고, 나처럼 아니치코프 다리 쪽에서 판탄카 운하를 따라 쭉 걸어내려오는 방법도 있다.

 

사진 보니 다시 가고 싶구나,,

 

* 태그의 판탄카 운하를 클릭하면 전에 올린 이 운하 사진들을 좀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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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참 빨리도 지나간다. 어느덧 금요일. 서무의 슬픔 31편이다.

 

31편은 지난주에 올렸던 30편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이 친구가 나오는 이야기는 조금 길어져서 아마 32편까지 3부작으로 진행될 것 같다. 일명 우수한 단추 3부작(ㅋㅋ)이라 해야 하나. 지금은 32편을 쓰고 있는데 분량상 이게 33편까지 이어지면 4부작이 될지도...

 

원래 서무 시리즈는 1개 에피소드로 완결되는 구조가 대부분이고 뜨보록이 등장했을 때나 하를람피 에피소드, 독사과 에피소드 등 몇가지만 2~3개로 구성되었다. 가능하면 1개로 완결되는 구조를 선호하는데 이번 우수한 단추 얘기는 애초 설정 자체가 짧게는 안 끝나서..

 

31편은 원래는 한번에 올리려고 했으나 쓰다 보니 분량이 꽤 길어서 1부와 2부로 나누어 올리게 되었다. 내용이나 분위기 상으로도 좀 구분되는 편이라서 나눠 올리는 건 문제가 없고..

그냥 이걸 31, 32편으로 나눌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구조상 1,2부가 이어져 있어 편을 나누기에는 어려울 것 같아 그냥 1,2부로 올린다. 2부는 다음주에~ 하긴 차라리 다행이네. 아직 32편은 앞부분만 쓰고 있어서 ㅎㅎ

 

하여튼 31편, 1부~ 재밌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왕재수의 신작 발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목요일, 베르닌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왕재수는 드미트리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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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1

 

 

 

 

서무의 슬픔

-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 (1부) -

 

 

 

 

 

 

 

 

아침 일찍 왕재수를 극장에 데려다주고 사무실에 출근했을 때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드미트리가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타이프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어, 너 일찍 왔구나. 아직 여덟시 밖에 안 됐는데. ”

 

“ 응, 나 원래 일찍 일어나거든. 강변 따라 조깅했는데도 시간이 남아서 그냥 출근했어. 오늘도 오후에 극장 가야 하니까 서류 작업할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아서. ”

 

“ 엥? 너는 서류 작업 할 거 없는데... ”

 

“ 네 서무 업무 말이야. 내가 어제 세부 목표를 설정했잖아. 서무 업무의 효율성 제고! 내가 정리 좀 해봤어. 이제껏 너한테 부당하게 몰려 있던 작업들을 업무분장표에 의거해서 너희 감시분석부 사람들에게 분담했어.

일단 어제 발따예프가 너에게 떠넘기려고 했던 것과 같은 내외부 요구자료 제출 건인데, 이것은 각 업무별 담당자가 1차로 작성한 후 너에게 제출하면 너는 수합한 후 오타나 제출 형식만 점검해서 최종 제출만 하면 되는 거야. 네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자료를 찾고 만들어내는 건 한 마디로 시간 낭비지.

그리고 어제 보니까 직원들의 출근기록부부터 시작해서 휴가원 제출, 출장명령서와 보고서 작성 제출, 심지어 초과근무 기록부까지 네가 다 쓰고 있더라. 그거 인사규정 위반이야. 이것들도 다 당사자가 적고 너는 관리만 하는 것으로 바꿨어.

같은 맥락으로 업무추진비 정산도 마찬가지야. 부서 전체 업무추진비야 서무가 관리한다고 쳐. 하지만 부서장 업무추진비까지 네가 정산해줘서는 안되지! 그건 당연히 감시분석부장이 직접 해야 돼. 그리고 사업별 업무추진비까지 네가 다 정산을 하더라! 그러니까 네 일이 그렇게 많지. 사업별로 쓰는 돈은 당연히 개별 담당자가 내역을 적고 정산을 하는 게 맞아.

그리고 당직실 시계 건전지 교체, 공유지 배추 관리, 표지판 페인트칠 따위를 왜 서무가 하냐. 시설 관리책임자가 있고 수위도 있잖아. 그 업무를 하면서 월급을 받는 건데 왜 그걸 다 서무에게 떠넘겨.

하여튼 내가 다 추려봤어. 이 자료의 1번을 보렴. 이것은 현재 너에게 업무가 집중됨으로써 나타나는 문제점 분석이야. 현황 분석만 있는 게 아니라 아까 얘기한대로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하나하나 다 지적되어 있지. 2번은 개선 방향이야. 요지는 실제 담당자들에게 개별 업무를 분담함으로써 효율성을 도모하자는 것이지. 3번이 개선 후 적용방안이야. 각 업무가 누구누구에게 재분배되는지 적었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으니 누가 봐도 이해가 쉬울 거야. ”

 

 

베르닌은 다섯 장짜리 자료를 뒤적거렸다. 완벽한 논리와 형식으로 구성된 보고서였다. 용어와 문장 등 어느 하나 부족한 점이 없었다. 스페호프가 항상 강조하는 행정의 기본이 훌륭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베르닌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면서 뱃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 저, 드미트리... 이거 진짜 훌륭한 보고서야. 개선방안도 좋고. 근데 있잖아... 나도 이 내용에는 100퍼센트 동의하거든. 근데 문제는... 내가 우리 부서 막내야. 회사 전체에서도 공채 중에는 막내거든... 그래서 말인데... 이거 보면 우리 부장이랑 선배들이 화낼 거야. 그리고 국장도 야단을... ”

 

“ 에이,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하는 거야. 누가 봐도 이 보고서 내용이 사실인데 어떻게 반박하니. 그리고 설령 선배들이 화를 낸다 해도 그런 게 두려워서 잘못된 걸 그대로 방치하면 안 되지. 이건 네가 격무에 시달리는 개인적 문제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야. 조직 발전에 엄청나게 저해되는 일이라고. 효율성을 모두 갉아먹고 직원들의 책임감과 윤리의식도 하락시켜서 결국은 조직이 쇠퇴하게 돼. 여기는 본부도 아니고 지역 소도시잖아. 작지만 강한 조직이 되지 않으면 도태되고 말 거야. 국장에게도 그런 식으로 어필을 하면 이해할 거야. ”

 

“ 아니, 그게... 너는 아직 우리 국장을 잘 몰라서 그래... ”

 

“ 괜찮아, 너는 그냥 있어. 내가 다 설명할게. ”

 

“ 어... 그게... 이거 있잖아, 그러면 나 줘. 내가 분위기 봐서... ”

 

 

베르닌은 일단 드미트리가 만든 보고서를 책상 한쪽에 치워두었다. 드미트리는 고집을 부리는 대신 또 다른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 참, 이것도 봐줄래? ”

 

“ 이건 뭐야? ”

 

“ 아, 야스민 감시 보고서. 어제 너 늦게까지 걔 집에 데려다주느라 시간 없었을 것 같아서 내가 예전 보고서들 보면서 얼추 비슷한 형식으로 정리했어. 수정 보완할 거 있는지 좀 봐줘. ”

 

“ 어, 으응... 너 진짜 손이 빠르구나. 아침에 와서 이걸 다 했단 말이야? ”

 

“ 뭘, 이쯤이야. 해외에 있을 땐 외국어로 된 거 번역까지 해서 올렸는걸. ”

 

 

베르닌은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적당하게 요약되어 있었다. 검열국장과 왕재수의 충돌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내용은 모두 들어가 있었지만 거친 언사들은 순화되어 있었고 예산 및 상부 지침에 대한 설명에 따라 검열국장이 지적을 철회했다는 결론으로 끝났다. 베르닌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아, 굉장히 간결하고 보기 쉽게 작성했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 ”

 

“ 응. 극장에서야 같이 있었으니까 괜찮은데, 도청 테이프는 접근불가라고 해서 귀가 후의 일은 못 적었어. 뭐 네가 같이 있었으니까 그것까지야 내가 안 적어도 되겠지. 근데 밤에는 별 일 없었니? ”

 

“ 뭐가? ”

 

“ 아, 어제 말이야. 네가 야스민 데려다줬잖아. 그 친구 어제 심기가 안 좋았잖니. 아참, 그리고... ”

 

“ 응? 그리고 뭐? ”

 

“ 카체리나한테 들었는데 너 걔랑 그런 관계라고... 미처 몰랐네. 혹시라도 내가 어제 실수한 거 있으면 용서해. ”

 

“ 앗, 뭐가 그런 관계라는 거야! 국장이 나한테 걔 감시하라고 같은 아파트로 이사하게 시킨 거라니까! ”

 

“ 그러니까... 집은 아래층이지만 실은 한집에 살고 있고... 아침 저녁 밤으로 해주고... 나 너 다시 봤어. 진짜 감탄했어! 제 아무리 나라도 하루에 세 번을 그것도 매일은 불가능할 것 같은데... 와, 너 진짜 대단해. ”

 

으악! 아니야! 그거 아니야! 아악...

 

 

베르닌은 펄쩍 뛰었다.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거 다 오해야! 아니란 말이야!

 

“ 하지만 야스민이 직접 국장에게 그렇게 얘기했다고... 그리고 너하고 그 친구가 당직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걸 다른 부서 직원이 목격했다고... ”

 

“ 아니야! 그건 다 오해야. 당직실에서는 걔가 바퀴벌레 곱등이를 보고 기절해서 인공호흡해준 거라고! 국장한테 그렇게 얘기한 건... 그 자식이 내가 너무 일 많다고 힘들어하니까 제 딴에 도와준다고 가서 뻥친 거란 말이야! 진짜 아니야! ”

 

“ 정말? ”

 

“ 진짜 아니야... 제발 너라도 믿어줘. 나 진짜 못살겠다. 장가도 안 갔는데 이게 뭐야... ”

 

“ 흐음... 그럼 다행이고. ”

 

“ 다행이고 뭐고 진짜 아니야. ”

 

“ 그렇구나. 어제 보니까 너랑 야스민이 굉장히 친해 보여서 난 카체리나가 그 얘기했을 때 금방 믿었는데. 아니었구나. 미안하다, 오해해서. ”

 

“ 아니야, 다들 그렇게 믿고 있는데 뭐. 에휴, 내 팔자야... ”

 

“ 그러면 야스민은 애인이 없어? 내가 알기로는 그 친구는 여자랑은 안 사귀는 취향이라서... ”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 너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아? ”

 

“ 나 본부에 있었다니까. 파리랑 런던에도 있었다고 했잖아. 몇 년 전에 런던 페스티벌 때도 스비제르스키 의원이 직접 데리고 왔었는걸. ”

 

 

베르닌은 눈 색깔 다른 남자가 떠올라서 자기도 모르게 등줄기가 오싹했지만 고개를 휘휘 저어 무서운 기억을 떨쳐냈다.

 

 

“ 아, 그, 그렇구나... 그래도 여기는 보수적인 동네니까 그런 얘긴 가급적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

 

“ 흠, 하긴 그렇지.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에서도 그런 거 발각되면 큰 문제니까... 가브릴로프는 더 보수적이니 여기서는 그 친구도 함부로 애인 같은 건 안 만들었겠구나. 보고서에도 그런 건 없더라고. ”

 

“ 으, 으응... 여기서는 극장 일이 너무 바쁘니까 그런 거 신경 쓸 여력이 전혀 없는 것 같더라고. 수용소 후유증 때문에 자주 아프기도 하니까... ”

 

 

베르닌은 코즐로프에 대한 정보까지 드미트리가 알고 있을까봐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드미트리는 왕재수에게 적대적인 것 같지도 않았고 그의 성향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비판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왕재수가 항상 코즐로프가 잡혀갈까봐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끝까지 비밀로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일을 시작하려니 머리도 무겁고 졸음이 가시지 않아서 베르닌은 탕비실로 갔다. 찻물을 올려놓고 티백을 찾고 있는데 뒤따라온 드미트리가 꼬부랑글씨가 씌어 있는 예쁜 티백을 내밀었다.

 

 

“ 이거 마셔봐. 향도 좋고 잠도 잘 깨고 괜찮아. 파리에서 사온 거야. ”

 

“ 어, 그래. 고맙다. 저, 나는 그냥 잠만 깨면 되니까 아무 거나 마셔도 되거든. 이건 그 녀석 갖다 줘야겠어. 차를 좋아하더라고... ”

 

 

티백을 호주머니에 넣으려는데 드미트리가 웃었다.

 

 

“ 아, 야스민 말이야? 나 이거 많아. 한 통 챙겨 줄 테니까 이건 너 마셔. ”

 

“ 하지만 이거 비싸고 좋은 거잖아. ”

 

“ 에이, 아니야. 파리에서는 아침마다 마시던 거야. 이 마카롱이랑 먹으면 잘 어울리더라. ”

 

 

베르닌은 드미트리가 종이 접시에 올려놓은 분홍색연두색의 동그랗고 통통한 과자를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이게 뭐야? ”

 

“ 마카롱. 프랑스 과자야. 계란 흰자와 아몬드 가루로 굽는 건데 가운데에는 맛있는 크림이 있어. ”

 

“ 아... 되게 예쁘다. ”

 

“ 먹어봐, 맛도 좋아. ”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분홍색 과자를 한 개 집어서 입에 넣었다. 혀에 닿는 순간 사르르 녹았다.

 

 

와, 진짜 맛있다! 나 이런 거 처음 먹어봐. ”

 

“ 응, 우리 나라에서는 이렇게 섬세한 과자는 잘 안 만드니까. 차랑 먹으면 더 맛있어. 자리에 가서 먹자. ”

 

“ 아... ”

 

 

베르닌은 다시금 왕재수 생각이 났다. 접시를 든 채 멈칫했다.

 

 

걔도 파리에 갔었는데. 외국 음식도 잘 먹고. 불어 잡지도 읽고. 이건 너무 달아서 안 먹으려나... 그래도 잘 나가던 시절 생각나서 좋아하지 않을까? ’

 

 

그의 마음을 읽은 듯 드미트리가 납작하고 예쁜 깡통을 보여주었다.

 

 

“ 다닐, 이거 열두 개짜리 세트야. 지금 먹고 남은 건 극장 가져가서 티타임 때 같이 먹으면 될 것 같아. ”

 

“ 으, 으응. 배려해줘서 고마워. ”

 

“ 너 야스민이랑 그런 관계 아니라더니 많이 챙기는구나. ”

 

“ 아니, 그게... 그 녀석이 너무 입맛도 까다로운 데다 여기 와서는 계속 아프기만 하니까 좀 신경이 쓰여서... 저, 걔가 어제 검열 때문에 열 받아서 너한테 많이 틱틱거리긴 했지만 나쁜 애는 아니야. 철은 없지만 마음씨도 착하고, 가만 보면 진짜 애기 같아. 잘 나가다가 여기 와서 조그만 극장 살려보겠다고 무진장 애쓰는 거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

 

“ 흠. 근데 걔도 너를 엄청 따르는 것 같던데. ”

 

“ 그게 아니고 날 집사 취급하는 거야! 살림도 다 해주니까... ”

 

“ 어제도 네가 주는 건 잘 먹던데. 다른 사람 말은 잘 안 듣는데 네가 한 마디 하니까 듣고. 재킷 걸치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

 

“ 아니야, 그 자식 남의 말 절대 안 들어. 아휴, 걔 때문에 내가 못 살아... 고집불통. ”

 

 

드미트리는 쿡쿡 웃었고 베르닌과 함께 자리로 돌아와서 마카롱을 곁들여 차를 마셨다. 그리고는 밀려 있던 서류철 정리를 도와주었다. 드미트리는 손이 굉장히 빠르고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도 능해서 금방 끝났다. 그 후에도 자질구레한 업무들을 도와서 순식간에 해치웠다. 한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 붙어있는 기분이었다. 베르닌은 너무 행복했다. 드미트리가 모스크바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오후에 베르닌은 먼저 극장으로 갔다. 드미트리는 스페호프에게 ‘보안위원회 지방 분권의 특성에 대한 강의를 듣고 따라오기로 했다. 베르닌도 입사 후 3개월 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 국장에게서 각종 행정 이론과 이념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나마 드미트리는 오후 2시부터 한 시간만 듣는다니 다행이었다. 베르닌은 퇴근 시간 후인 오후 7시부터 3시간씩 연강을 들었고 숙제도 잔뜩 받았었으니까.

 

 

왕재수는 전날보다는 기분이 괜찮은 것 같았다. 문외한인 베르닌의 눈에도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훨씬 자연스러워진 것처럼 보였다. 왕재수는 연습실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연이 겨우 5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준비할 것이 굉장히 많은 듯했다. 돈키호테 때와는 다르게 관계자들과 미팅도 많은 듯 접견실에도 여러 번 들락거렸다. 극장장과도 30분 정도 열띤 이야기를 나눴고 지휘자에게도 6개의 음악을 어떤 식으로 연결해야 하는지를 놓고 그답지 않게 굉장히 참을성 있는 태도로 설명을 계속했다. 나이든 지휘자가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생기면 즉각 코즐로프에게 부가 설명을 부탁하기까지 했다.

 

 

지휘자와의 미팅을 마친 왕재수가 감독실로 돌아오더니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서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 류다, 차 좀 줄 수 있어요? ”

 

“ 류다 조금 전에 의상 디자이너랑 얘기할 거 있다고 내려갔어. 네가 시킨 거라면서. ”

 

“ 아, 맞다. 빨강 하양 바뀐 거... 에이... 머리 아파서 차 한 잔만 마시고 가려고 했더니... 차이카 가기 싫은데. ”

 

“ 내가 우려 줄게. 좀 쉬어라. 오늘도 일찍 나오고. 점심은 먹었냐? ”

 

“ 먹었어. 류다가 생선완자 가져다 줬어. 기름기 줄줄... 느끼하고 짜고... ”

 

“ 넌 기름기 좀 먹어야 돼! ”

 

 

베르닌은 찻물을 끓였다. 드미트리가 준 티백을 담가서 차를 우렸다. 향긋한 냄새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깡통을 열어서 분홍색 연두색 하늘색의 동그랗고 예쁜 마카롱을 다섯 개 꺼내 접시에 얹었다. 찻잔에 차를 따른 후 쟁반을 들고 소파로 가서 테이블에 놓아 주었다.

 

 

“ 자, 차 마시고 기운 좀 차려. ”

 

“ 아, 이거 무슨 차야? 향 진짜 좋다. 옛날 생각나는 냄새야. ”

 

 

눈을 감고 누워 있던 왕재수가 나른한 음성으로 종알거렸다.

 

 

“ 옛날 생각? ”

 

“ 응, 레닌그라드에 있을 때 나 후원해주던 엄청 잘 나가는 누님이 있었는데, 인민영웅 미망인에 완전 대단한 노멘클라투라였거든. 나한테 어울리는 향수도 주문 제작해주고 프랑스 홍차랑 근사한 옷도 자주 갖다 줬어. 그래서 아침마다 그 차 마셨거든. 근데 그 향이랑 너무 비슷해. ”

 

“ 아, 그렇구나. 차 마셔봐. ”

 

 

왕재수는 몸을 일으켰다. 찻잔을 들고 향을 음미한 후 차를 마시려다 접시에 놓여 있는 예쁜 과자들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마카롱이잖아. 어떻게 이 동네에 마카롱이 있지? 렐랴가 주고 갔나? ”

 

“ 아, 넌 이거 뭔지 아는구나! ”

 

“ 당연히 알지. 이것도 그 누님이 가끔 갖다 줬었어. 파리에서 공연할 때도 가끔 먹었고. ”

 

“ 너 단 걸 다 안 먹는 건 아니었구나. 고급 과자는 먹는구나! ”

 

“ 응, 이건 맛있으니까. 그래도 꾹 참고 딱 한 개씩만 먹었어. 진짜 옛날 생각나네. ”

 

 

왕재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가만히 눈을 감더니 방긋 웃었다. 이따금 왕재수는 차를 마시고 무가당 초콜릿 캔디를 먹고 기분이 좋아지면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므로 베르닌은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왕재수가 조그맣게 흥얼대는 노래 듣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때 왕재수가 하늘색 마카롱에 손을 뻗다가 멈칫하며 물었다.

 

 

“ 근데 이거 어디서 난 거야? ”

 

“ 아, 이거. 드미트리가 가져온 거야. 파리에 있는 우리 대사관에서 근무했다고. 차도 프랑스 거 맞아. 너 주라고 아까 챙겨줬어. ”

 

“ 뭐? 그 자식 아직도 안 갔어? ”

 

“ 응, 일주일 연수라고 했잖아. ”

 

“ 쳇. ”

 

 

왕재수는 마카롱 접시에서 손을 뗐다. 찻잔도 테이블 위에 탁 소리를 내며 내려놓더니 벌떡 일어섰다.

 

 

“ 나 연습실 갈 거야. ”

 

“ 어, 왜 차 안 마셔? 마카롱도 좋아한다면서. 먹고 가. ”

 

“ 안 먹어, 그 재수 없는 자식이 가져온 거라며! ”

 

“ 너 왜 그래. 드미트리 착해. 오늘도 나 엄청 도와줬어. 서무 업무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보고서도 써 주고, 서류철도 다 정리해주고 밀려 있던 일도 같이 다 해치웠어. 너 외국물 먹었다고 일부러 이것들도 챙겨다 준건데 왜 그렇게 걔를 미워하고 그러니. ”

 

“ 그냥 싫어. 보기만 해도 구역질나. ”

 

“ 야! 너무하잖아! 걔랑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 걔 보고 구역질나면 나 보고도 그렇다는 거 아니야! ”

 

“ 아니야! 너랑 다르다고 했잖아! 그리고 너랑 똑같이 생겨도 마찬가지야! 그 자식은 구역질난단 말이야! 더러운 KGB 나부랭이에 재수 없는 놈이야! 잘난척하는 말투부터 시작해서 쳐다보는 눈초리까지 다 싫다고! ”

 

“ 너 어쩌면 그러냐. 잘난 척이라니, 네 말투는 생각 안하냐! 너에 비하면 드미트리는 엄청 겸손한데. 너한테도 엄청 예의바르게 대하던데. 나 같으면 너 벌써 한 대 쥐어박았어! ”

 

“ 어휴, 사람 볼 줄 모르는 녀석... 그러니까 책상물림이지! 바보 멍충이! ”

 

“ 여기서 왜 바보 멍충이가 나오는데! 그래, 나 바보 멍충이야. 근데 걘 아니란 말이야! 완전 똑똑하고 엘리트에... ”

 

누가 뭐래! 난 완전 똑똑하고 엘리트인 놈 싫다고! 재수 없다고! 바보 멍충이가 낫다고 했잖아!

 

 

왕재수가 발칵 화를 냈다. 얼굴이 빨개지더니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감독실을 뛰쳐나가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왜 그러나 싶어서 뒤따라간 베르닌은 문 앞에 서 있는 드미트리를 발견하고 크게 당황했다. 아무래도 전부 다 들은 것 같았다. 어떡하지 하고 베르닌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드미트리가 왕재수에게 굉장히 상냥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제가 아무래도 어제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한 적이 있나 보군요. 기분 나쁘게 해드린 점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존경하는 예술가를 실제로 만나게 되니 흥분해서 그랬나봅니다. ”

 

 

왕재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완전히 무시하고 휙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그 돼먹지 못한 태도에 큰 충격을 받았다. 쫓아나가 피가 나도록 두들겨 패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대신 드미트리에게 사과했다.

 

 

“ 저, 미안해. 많이 기분 나빴겠다. 나도 쟤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싸가지 없긴 해도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저러지는 않았는데. 신작 준비 때문에 너무 예민해져 있어서 그런가봐. ”

 

“ 아니야, 다닐. 왜 네가 사과하니.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나 변호해주는 거 들었어.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괜히 나 때문에 불편하게 됐잖아. 너는 미하일이랑 친한데... ”

 

아니야! 그 싸가지 없는 꼬맹이 자식! 너는 이렇게 좋은 친군데 왜 사람을 몰라보고 그 난리를 치는지 이해가 안 가! 게다가, 게다가 너랑 나랑 이렇게 얼굴까지 닮았는데 그렇게 못되게 굴다니! 내 일도 많이 도와줬다고까지 했는데! 하여튼 자기밖에 모르는 놈에 변덕이 죽 끓는 자식이라니까! 어휴, 어디서 저런 성깔을 얻어왔는지... 너도 저 자식한테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 그냥 멀찍이 떨어져 있어라. 아니면 있다가 공연이나 보고 다른 거 하고 놀아. 국장한테는 내가 대충 보고서 써서 올려줄게. 저 자식 비위맞추다가 너 심장마비 걸리겠다. ”

 

 

드미트리는 소리 내어 웃었다.

 

 

“ 하하, 괜찮아. 우린 KGB니까 어쩔 수 없잖아. 앞잡이 취급받는 거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닌데 뭐. 특히 예술가들은 우리 엄청 싫어하잖아. 게다가 미하일은 어릴 때부터 KGB 감시를 많이 받았고 체포돼서 죽을 뻔 했으니까 그럴 만도 하겠지. 난 오히려 미하일이 너한테는 살갑게 구는 게 신기한걸. 널 진짜 좋아하나봐. ”

 

“ 아까 나보고 하는 소리 안 들었냐! 책상물림에 바보 멍충이라고... 아, 진짜 성질 더러운 녀석이라니까. ”

 

 

베르닌은 한숨을 푹 쉬었다.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왕재수가 드미트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다지만 저렇게 대놓고 적대감을 표시하니 너무나 난감했다. 그리고 드미트리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왕재수가 그럴만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고 더욱더 감복했다. 동갑내기 친구이지만 업무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배울 게 많다고 생각했다.

 

 

 

그날 드미트리는 그냥 다른 데 가서 놀라는 베르닌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왕재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연습실에서도 베르닌의 뒤에 선 채 가능한 한 왕재수의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리허설을 지켜보았다. 그날은 발레 공연이 있어서 왕재수는 언제나처럼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슬며시 밖에 나갔다가 가볍게 집어먹을 수 있는 조그만 샌드위치들과 초코바, 과일들이 가득한 바구니를 가져왔고 베르닌의 손에 쥐어주었다.

 

 

“ 이거 네가 갖다 줘. 내가 가져왔다는 말 하지 말고. ”

 

“ 어, 하지만... 이거 또 비싸고 좋은 거 아니야? ”

 

“ 아니야. 사실은 내가 어제처럼 맛있는 거 싸오긴 했는데 미하일이 내가 가져온 건 싫어하니까... 이건 그냥 학교 앞 카페에서 사온 거야. 네가 가져온 것처럼 하면 먹겠지. 무용수들이야 무대 올라가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 치지만 쟨 정말 조금이라도 먹여야겠더라. 네가 왜 그렇게 쟤 밥을 챙기는지 좀 알겠어. 레닌그라드에서 봤을 때는 안 그랬는데, 몸매도 훨씬 근육질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말랐네, 그래도 멋있긴 하지만 인형처럼 야윈 걸 보니까 어쩐지 마음이 안 좋아. ”

 

“ 아, 어... 너 정말 착하다. 저 자식이 그렇게까지 못되게 구는데도 안쓰러워하고... 먹을 것까지 챙겨오고. ”

 

“ 그게, 감시 대상으로 알기 전부터 팬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나봐. 네가 부럽다. 나도 미하일하고 그렇게 친하면 좋을 텐데. 하긴 일주일밖에 안 있으면서 그런 걸 바란 게 잘못이지 뭐. 얼른 그거 갖다 주렴. 조금 있으면 그나마도 시간 없어서 못 먹겠다. 난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오늘 백조의 호수라며. 기대되네. 난 백스테이지 말고 그냥 관객석에서 볼게. 그러면 미하일 눈에도 안 띄겠지. 공연 끝나면 먼저 들어갈게. 너 설마 내일도 출근하니? ”

 

“ 아, 아니... 출근은 안 하는데 극장에는 나올 거야. 신작 발표 때까지는 저 녀석 옆에 계속 있어야 하거든. 토요일에도 쟤는 10시면 나와. ”

 

“ 응, 그래. 그럼 나도 10시까지 올게. 내일 보자. ”

 

 

 

드미트리가 나가고 나서 베르닌은 바구니를 들고 왕재수에게 갔다.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무용수들은 모두 분장실로 이동한 후였다. 왕재수는 연습실의 마룻바닥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요즘 그는 중간 중간 틈만 나면 소파든 어디든 누워서 잠깐씩 눈을 붙이곤 했다. 하긴 밤늦게 들어오는데다 아침에도 일찍 나가니 잠이 모자랄 법도 했다.

 

 

베르닌은 바구니를 내려놓고 왕재수 곁에 쭈그려 앉았다. 드미트리에게 못되게 군 것 때문에 화가 나 있었지만 딱딱한 마룻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서 금세 잠들어버린 왕재수의 해쓱하고 어린애 같은 얼굴을 보니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면서 마음이 약해졌다.

 

 

“ 어휴, 고집쟁이. 굳이 이렇게까지 아등바등 노력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다고. 어차피 대단한 놈이니까 조금만 보여줘도 다들 천재라고 감탄하는데 왜 이렇게 죽어라고 하는 거야... 진짜 예술가인지 뭔지 하는 놈들 이해 안가... 미련하게 자기 몸 다 축나는 것도 모르고... 나보고 바보 멍충이라고 하면서 알고 보면 자기가 백배 더 바보 멍충이라니까. ”

 

 

왕재수가 몸을 뒤척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혹시 자기 넋두리를 들었나 싶어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몸을 살짝 웅크리더니 쌕쌕 소리를 내며 더욱 곤하게 잠들었다. 이따금 움찔거리는 것을 보니 꿈까지 꾸는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뭐라도 먹여야 할 것 같긴 했지만 잠깐이라도 단잠을 자게 해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대신 이마와 뺨 언저리로 흘러내린 머리카락만 쓸어 올려 주었다. 바닥이 딱딱해서 나중에 몸이 쑤시겠다 싶어서 재킷도 둘둘 말아 왕재수의 어깨와 등 아래에 밀어 넣어 주었다. 그러다가 또 춥겠다 싶어서 구석에 굴러다니던 커다란 타월을 가져와서 몸을 반쯤 덮어 주었다.

 

 

왕재수는 15분쯤 후 깨어났다. 무의식적으로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이 진짜 고양이처럼 보였다. 눈을 깜박이며 잠시 멍해져 있다가 주섬주섬 타월과 재킷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일어나 앉았다. 옆에 앉아 있는 베르닌을 쳐다보더니 깜짝 놀라며 물었다.

 

 

“ 지금 몇 시야? ”

 

“ 6시 40분이야. 아직 시간 있어. 조금 더 자라. ”

 

“ 아니야, 작은 백조 춤 때문에 오케스트라 쪽이랑 얘기할 거 있어. 10분만 앉아 있다 가야겠다. 잠 좀 깨고. 너무 졸려. ”

 

“ 이것 좀 먹어. ”

 

 

베르닌이 바구니를 내밀었다. 왕재수는 바구니를 힐끗 보았지만 손을 뻗지는 않았다.

 

 

“ 왜 안 먹니, 생선완자 먹은 지가 언젠데. 배도 다 꺼졌을 텐데. 오늘도 공연 끝나면 늦을 텐데. ”

 

“ 이것도 그 자식이 가져온 거잖아! ”

 

“ 아, 아니야. 이거 내가 사온 거야. 대학교 앞 카페에서 사왔어. ”

 

“ 어쨌든 안 먹을래. 별로 먹고 싶지 않아.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짐승 같은 감각을 가진 놈이니 냄새를 맡았든지 어쨌든지 드미트리가 사온 음식이란 걸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가방을 뒤져보니 갱지로 둘둘 말려서 납작해지고 속이 다 삐져나온 양배추 롤이 하나 나왔다. 아침에 왕재수를 데려다 준 후 시장에서 사먹었던 게 생각났다.

 

 

“ 이거라도 먹어, 그럼. 먹던 거 아니야. 세 개짜리였는데 두 개 먹고 하나 남은 거야. ”

 

 

왕재수는 잠자코 양배추 롤을 받아들었다. 다 식어빠지고 곤죽이 된 양배추 롤을 세 입 만에 먹어치웠다. 그리고는 오케스트라 연습실로 갔다. 베르닌도 뒤따라갔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백스테이지에 함께 있었다.

 

 

 

 

 

*  *  *

 

 

 

 

 

 

공연이 끝난 후 베르닌은 극장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드미트리는 보이지 않았다. 커튼 콜 때 나간 것 같았다. 카체리나와 데이트를 하러 갔을지도 몰랐다. 왕재수는 무대에 올라갔던 무용수들을 격려하면서도 몇 가지 지적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는 모두에게 토요일 휴가를 주었다.

 

 

“ 어, 그치만 내일도 나와서 연습하고 싶어요... ”

 

“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수요일에 제대로 된 무대 보여주려면 하루쯤은 휴식을 취하는 편이 나아. 그리고 내일 극장 전체 소독하고 페인트칠 다시 한다니까 어차피 연습실도 못 쓰고 아무 것도 못해. 그러니까 내일은 다들 푹 쉬어. 쉰다고 술 퍼마시면 절대 안 돼! ”

 

“ 그래서 내일 공연이 없는 거였구나... ”

 

 

베르닌은 혼잣말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참 다행이었다.

 

 

 

왕재수는 무용수들이 모두 돌아갈 때까지 남아 있었다. 발레 배경 철수와 청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텅 빈 무대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았다. 신작 공연의 동선을 체크하는 것 같아서 베르닌은 묵묵히 기다렸다. 하지만 왕재수는 무대 한가운데로 걸어 나가더니 멈춰선 채 불 꺼진 관객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족히 5분 가까이 그러고 있었다. 베르닌은 돈키호테 무대가 생각났다. 멈출 줄 모르던 함성과 갈채도. 휘파람과 비명과 꽃다발도. 다시 춤을 추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용소 후유증 때문에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 어려운건가 싶다가도 바질을 추던 모습이나 이따금 코즐로프의 연주에 맞춰 혼자서 춤을 추는 것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드미트리의 말에 따르면 체포되기 전에 이미 무용수로서 은퇴 의사를 밝혔다고 했다.

 

 

바보, 괜히 고집 피우고... 그냥 계속 추지. 저렇게 무대를 그리워하면서... ’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쿡쿡 쑤셔왔다. 바이올린이라도 켜면 전처럼 왕재수가 혼자 춤추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을 텐데 싶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근데 로만은 어디 갔어?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공연 끝나니까 그냥 나가버리네. 싸운 건 아니지? ”

 

“ 내가 집에 가라고 했어. 수요일까지는 따로 만나지 말자고 했어. ”

 

“ 왜? 신작 발표 때문에 정신없어서? ”

 

“ 아니. 감시꾼이 하나 더 붙었잖아. 의심받을 짓을 뭐하러 하냐. 그러다 로만 잡혀가면 어떡하라고.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그래, 뭐 걱정된다면 조심하는 게 낫겠지. 근데 너 정말 왜 그렇게 드미트리를 싫어해? 나 없는 동안 걔가 너한테 정말 무례하게라도 굴었어? ”

 

“ 여기 얼쩡거리면서 나 쳐다보는 거 자체가 무례한 짓이야! ”

 

“ 너 처음에 나한테도 못되게 굴었잖아. 그럼 KGB라서 그런 거야? ”

 

“ KGB야 다 재수 없지! ”

 

“ 너무해... 그럼 나 아직도 재수 없는 거야? ”

 

“ 유치하게 왜 이래! 그리고, 그리고 내가 언제 너한테 못되게 굴었어! ”

 

“ 그럼 아니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

 

 

왕재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댔다.

 

 

“ 하여튼 그 자식은 너랑 다르단 말이야. 진짜 재수 없어. 지금도 재수 없고 나중에도 재수 없을 거야. 절대 안 변해! ”

 

“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 친절하고 예의도 바르고... 네 팬이고... 너 원래 팬들 소중하게 생각했잖아. 관객들 중요하다고 그러고. 근데 왜 드미트리한테는 그렇게 굴어? ”

 

“ 몰라. 그렇게 물어봤자... 그냥 싫어. 너 벌목공 될지도 모른다 해서 그냥 참고 있는 거란 말이야. ”

 

“ 그게 참는 거라고? 이왕 참을 거면 그렇게 대놓고 구박은 안 했으면 좋겠어. ”

 

“ 넌 그 자식이 좋냐? ”

 

“ 응, 좋아. ”

 

“ 왜? 그 뺀질거리는 놈이 왜 좋은데? 너랑 얼굴 비슷해서? ”

 

“ 어... 그것도 좀 있고... 그러니까, 있잖아. 나는 형제가 없거든. 외동아들이란 말이야. 사촌은 여러 명 있지만 그래도 또래 남자애는 없어. 그래서 항상 형이나 동생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단 말이야. 근데 드미트리는 진짜 나랑 닮았고... 너무 반가웠어. 어른스럽고 잘 챙겨주고 자상하니까 정말 쌍둥이 형이 생긴 기분이야.

그리고 나 솔직히 학교 다닐 때도 그렇고 친구 많은 편 아니었거든. 여기 입사하고 나서는 바쁘니까 그나마 있던 친구도 다 떨어져 나가고... 회사 사람들은 다들 자기 앞가림하느라 바쁘고 나한테 업무 떠넘기는데 급급하니까... 드미트리처럼 아무 것도 안 바라고 나한테 잘해준 사람은 없었단 말이야. 걔가 오자마자 발따예프가 나한테 일 떠넘긴 것도 차단해 주고... 자기도 바쁠 텐데도 나한테 너무 서무 업무가 부당하게 몰려 있다고 화내면서 서무 업무의 효율성 제고라는 세부 목표도 세우고... 오늘 아침에 나와서 내 업무 덜어주기 위해 굉장한 보고서도 써줬어. 그리고 밀린 일도 다 해치워주고... 나 솔직히 정말 걔한테 고마웠어. 미처 말은 못했지만 친구가 돼줘서 너무 기뻤단 말이야.

너는 워낙 잘 나가는 애였으니까, 주변에 떠받드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으니까 내 기분이 어떤지는 아마 잘 모를 거야... 근데 나한테는 드문 일이란 말이야. 뭐 안 바라고 나한테 상냥하게 대해주는 형 같은 친구 생긴 거 소중하다고. 걔 어차피 일주일밖에 안 있잖아... 그 동안만이라도 좋으니까 나도 걔한테 잘해주고 싶은데 걔는 옛날부터 네 팬이었다고 하고. 네가 그렇게 싸가지 없게 구는데도 화도 안 내고 도리어 너 감싸주고... 그러니까 너도 걔한테 조금만 잘해주면 안되니? ”

 

 

 

왕재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표정은 처음에 드미트리와 마주쳤을 때처럼 어두컴컴했지만 그래도 ‘네가 잘못했다’ 눈초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너무 주절주절 떠들었나 싶어 베르닌이 풀죽은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왕재수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낮게 쏘아붙였다.

 

 

“ 바보 멍충이. ”

 

“ 어휴... 말한 내가 잘못이지... 맨날 나한테는 바보 멍충이라고 그러고... 내 말은 다 무시하고... ”

 

“ 안 무시해. 그 재수 없는 놈한테 성질 안 내고 소리 안 지르면 되는 거잖아. 알았어. 그렇게 할게. 바보 멍충이. 사람 보는 눈도 지지리도 없어가지고. 에휴... ”

 

“ 보는 눈 없는 건 너잖아... 자기 천재라고 맨날 다른 사람들 무시하고... ”

 

 

왕재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재킷 단추를 잠그고 스카프를 매더니 무대에서 내려갔다. 불을 모두 끄고 복도로 나왔을 때 베르닌은 문득 왕재수의 머리가 가을에 기차역에서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많이 자랐다고 생각했다. 짧고 들쭉날쭉하게 흐트러진 머리 때문에 더욱 어려 보였기 때문에 학생이라고 착각했던 것이기도 했다. 류다가 보여준 무용수 시절의 화보나 잡지 사진 속의 왕재수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짧은 머리를 한 적이 없었다. 배우나 가수처럼 목덜미 언저리까지 머리칼을 길렀다. 왕자 역을 추느라 단정하게 빗어 넘겼을 때를 제외한다면 항상 그 머리칼은 바람에 휘날리는 듯 치솟고 월계관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작년 여름에 수용소에서 아무렇게나 잘렸던 게 분명했다. 촌스러운 것은 죽어도 못 견디는 성격이니까 자기가 그렇게 잘랐을 리가 없었다.

 

 

그러자 베르닌은 가슴 한구석이 쿡쿡 쑤시는 듯 아팠다. 그리고 왕재수의 머리가 많이 길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머리칼이 자랐으니 다시 살도 붙을 것이고 드미트리가 기억하는 근사한 무용수의 근육질 몸매로도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 KGB를 그렇게 싫어하는 게 당연해... ’

 

 

어쩐지 마음이 많이 불편해진 베르닌은 드미트리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왕재수는 차에 타서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바깥만 보고 있었다.

 

 

‘ 어쩌지... 화난 건가? ’

 

 

베르닌이 눈치를 보고 있는데 왕재수가 창문에 이마를 살짝 부딪치고는 깜짝 놀란 듯 어깨를 세우더니 곧 다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거였다.

 

 

“ 에휴, 얼마나 피곤했으면... 내일 극장 안 열어서 다행이네. ”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베르닌은 배나무 거리로 접어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병원에 들러 스타브로프에게 잠깐 진료라도 받고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왕재수가 길길이 날뛰며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꾸짖을 게 뻔할 뻔자라 그냥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차를 세웠는데도 왕재수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5분쯤 기다리다가 할 수 없이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 저기... 다 왔으니까 일어나. ”

 

“ 어, 나 안 잤어. ”

 

 

왕재수가 눈을 깜박거리며 차 문을 열었다. 잠이 덜 깼는지 안전벨트 푸는 것을 잊어서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 했다. 베르닌이 혀를 차며 벨트를 풀어 주었다.

 

 

“ 어휴, 안 자긴 뭘 안 자냐. ”

 

“ 나 이거 안 맸는데... 답답해서 원래 벨트 안 매는데... ”

 

“ 내가 아까 너 자는 동안 매준 거야. 저녁에 비와서 길 미끄러워서. ”

 

“ 별 걱정을 다 하네. ”

 

야, 뭐가 별 걱정이야! 당연히 안전벨트 해야지! 사고 나서 다치면 네 몸 누가 건사해준다고! ”

 

“ 안 다쳐! 사고 안 나! ”

 

“ 그걸 어떻게 장담하냐! 사람 일은 모른다고! ”

 

너는 운전 잘 하니까 사고 안 나!

 

“ 엥... ”

 

 

왕재수는 하품을 하면서 엘리베이터로 갔다. 막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왕재수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나도 없어. ”

 

“ 응? 뭐가? ”

 

“ 형제. 사촌. 친척. 다 없다고. ”

 

“ 어떻게 그래, 친척 한둘은 있겠지. ”

 

“ 몰라, 하여튼 없어. 본 적 없어. ”

 

“ 어... 그래. 어릴 때 쓸쓸했겠다. ”

 

“ 뭘 쓸쓸해. 안 쓸쓸해. 난 천잰데. 우주 최고 꽃미남인데. 바보 멍충이. ”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 to be continued

 

 

 

 

..

 

 

이야기는 2부에서 계속된다. 2부는 내용이나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

 

 

..

 

 

중간에 드미트리가 말하는 '당직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을 목격' 얘기는 에피소드 2의 '당직실의 귀신'에 나오는 얘기다~

 

 

..

 

 

왕재수가 회상하는 '레닌그라드의 노멘클라투라, 인민영웅 미망인 누님'은 사실 본편 우주에서 무용수 미샤를 후원하던 레닌그라드의 여성 유력인사 얘기다. 미샤는 키로프 데뷔 직후부터 열성팬들이 많았고 공공연하게 후원과 지지를 표명하는 유력인사들도 많았다. (그게 꼭 크레믈린 아저씨 같은 불순한 인물들만 있는 건 물론 아님!)

 

미샤의 유력한 후원자들과 관련해서... 트로이가 나오는 장편에서는 미샤가 21번째 생일에 후원자이자 연방에서 위세를 떨치는 어느 군 장성으로부터 고급 자동차와 오디오를 선물받고는 이 과분한 선물을 돌려주러 갔다가 장성의 조카딸까지 소개받는 에피소드도 넣었다. (물론 그 장성의 진짜 목적은 후자였음~) 그러니 마카롱 정도야 뭐 :)

 

위의 유력인사 누님은 본편에서도 실지로 미샤에게 고급 초콜릿과 향수, 옷가지 등을 자주 선물해주곤 했는데 미샤는 본편에서도 단 것을 먹지 않기 때문에 그 초콜릿은 파트너 발레리나에게로 모조리.... (나 줘 ㅠㅠ)

 

 

..

 

그럼 2부에서~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2015. 8. 27. 21:59

빗물 웅덩이에 비친 에르미타주 지붕 russia2015. 8. 27. 21:59

 

 

이번에 갔을 땐 날씨가 안 좋아서 워낙 비가 자주 왔던 관계로.. 빗물 웅덩이에 비친 광경들을 여러 장 찍었다(원래 그런 거 좋아하긴 한다만..)

 

이번엔 에르미타주 박물관...

 

조그만 빗물 웅덩이에 에르미타주의 지붕과 조각상들이 비치고 있다.

 

 

 

 

 

바로 이것~

 

.. 아휴 다시 가고 싶어라~~ 아무리 가도 가도 돌아오면 다시 가고 싶네.

 

:
Posted by liontamer

 

 

모처럼의 휴일도 다 가고.. 힘을 내기 위해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의 화보 몇 장 올려본다.

먼저 젊은이와 죽음. 상대역은 예카테리나 콘다우로바.

 

 

 

역시 젊은이와 죽음.

사진사는 Irina Tuminene

 

 

 

이건 얼마전 유리 스메칼로프가 안무했던 Infinita Frida.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프리다 칼로에 대한 발레이다. 초연은 멕시코에서 했고 최근 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공연. 역시 사진사는 Irina Tuminene.

 

슈클랴로프는 트로츠키 역을 맡았다. 초연에서는 블라지미르 말라호프가 트로츠키를 췄고 페테르부르크 공연에서는 슈클랴로프가 췄다고 한다. 스메칼로프의 말에 따르면 드라마틱한 연기력을 요하는 배역이라 말라호프의 빈 자리를 슈클랴로프로 캐스팅했다고 함.

 

 

 

백조의 호수.

상대역은 빅토리야 테료쉬키나.

 

 

 

로미오와 줄리엣. 상대역은 디아나 비슈뇨바.

 

뒷모습만 나왔지만 좋아하는 캡처 화보이고 실지로 이 2인무에서 이 장면도 좋아한다. 슈클랴로프는 바닥 없는 사랑에 빠진 연인 역에 굉장히 잘 어울린다. 간절함과 애끓는 사랑이 그대로 배어나는 포옹이다.

 

 

 

그리고 이 세 장은 내가 라 바야데르 필름에서 캡처한 것 :) 니키야가 죽고 나서 회한에 몸부림치며 아편 피우다 환각에 빠져들고 있는 솔로르 :) 이 장면 음악도 좋고 몸부림치는 솔로르-슈클랴로프를 보는 것도 좋다. 이 사람이 추는 라 바야데르 무대는 이번 7월까지 치면 세번 봤는데 솔로르 역에 참 잘 어울린다.

 

그건 그렇고.. 원래 솔로르가 이렇게 아편을 피우는 것은 망령의 왕국 씬을 위한 준비과정에 지나지 않는데... 이때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슈클랴로프 솔로르는 너무나 근사한 나머지... 무대를 보면서도 '그냥 계속 아편만 피우고 있지... 망령 안 나와도 되는데...'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
Posted by liontamer

 

 

예전에는 러시아에 가면 가끔 러시아 음식이 그려진 달력을 사왔었다. 이런 달력의 포인트는 음식 사진이 촌스럽다는 데 있다 :) 요즘은 그래도 좀 세련된 요리책도 나오고 괜찮은 레스토랑에 가면 플레이팅도 많이 근사해졌다만 원래 러시아 음식은 좀 촌스러운 게 특색.. (그래도 맛있으면 되지 ㅋㅋ)

 

지난 7월에 페테르부르크 갔을때, 떠나는 날 루스끼 무제이(러시아 박물관) 가서 그림 보고 놀다가 박물관 샵에서 사온 러시아 음식 컵받침 시리즈. 찻잔이야 받침접시가 있으니 그걸 쓰지만 물컵 등 머그를 쓸 땐 컵받침을 매일 쓴다. 이전에 프라하에서 사온 무하 시리즈를 잘 썼는데 그것들도 오래돼서 낡아서 겸사겸사 사옴. 코르크에 사진이 코팅된 재질이다.

 

 

 

블린과 홍차 :)

 

 

 

이게 사진만 봐서는 좀 헷갈리는데 양배추 수프처럼 보인다.. 그리고 옆에는 피로슈카들... 속을 채워넣은 조그만 파이들이다. 이걸 크게 구워내면 피로그. 조그맣게 구워내면 피로슈카. 여러개 모여있음으면 보통 복수형으로 피로슈키라고 한다.

 

왜 뜬금없이 마늘이 옆에 있느냐고 하신다면.. 이것이 러시아 음식들의 정통 플레이팅 방식인지 옛날부터 러시아 요리책이나 음식 사진들을 보면 이렇게 마늘이나 양파 등 야채 등속이 옆에 널려 있는 경우가 많다 :)

 

 

 

양배추 샐러드... 빨간 것들은 아마도 나무열매나 마리네이드한 비트인 듯..

여기도 양파와 마늘이 :)

 

 

 

펠메니 :)

 

 

 

간만에 호화스럽게.. 이끄라! 즉 캐비아이다. 새까만 것은 보통 생각하는 캐비아, 즉 철갑상어알. 하지만 저 빨간 연어알도 이끄라라고 부른다. 까만 건 비싸기 때문에 저 빨간 게 많이 나옴.. 크리스탈 잔에 담긴 건 아마도 보드카일듯.

 

그런데 나는 싸구려 입맛인지.. 비린 걸 못참는 편이라 그런지 캐비아는 아무리 먹어봐도 입맛에 안 맞다 ㅠㅠ

 

 

 

러시아 빵들~ 그리고 홍차.

 

 

 

오늘은 쉬는 날이라 엄청 늦게까지 자고... 늦게 아점(..이라기보다 그냥 점심) 만들어 먹고.. 차 한 잔 마시는 중.

 

 

 

쿠마야, 또 딸기 케익 사왔어. 나 착하지?

 

 

쿠마 : 토끼야 드디어 네가 개과천선했구나!!

 

 

:
Posted by liontamer
2015. 8. 25. 21:33

한겨울의 청동기사상, 나의 비밀 장소 russia2015. 8. 25. 21:33

 

 

내가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 나의 오래된 비밀 장소.

페테르부르크의 상징.

늪지대를 갈아엎어 물과 돌의 도시, 환상의 도시를 축조한 황제 표트르 대제에게 바쳐진 조각상. 그리고 푸쉬킨의 시로 불멸의 문학적 상징을 획득한 청동기사상이다.

 

지난 2월. 이 날은 추웠지만 날씨가 좋았다.

 

청동기사상에 대해서는 예전에 따로 쓴 글도 있고 사진들도 여러 차례 올린 적이 있다. 태그의 청동기사상이나 청동기마상을 클릭하면 볼 수 있다. 따로 썼던 글은 아래...

 

* 페테르부르크의 비밀 장소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1233

* 페테르부르크 홍수 신화와 청동기사상 : http://tveye.tistory.com/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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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