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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금요일마다 서무 시리즈를 올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아직 33편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우수한 단추 시리즈가 생각보다 길어지기도 했고... 그래서 이번주에는 서무 대신 예전에 쓴 본편 중 에피소드 하나를 발췌해 올려본다.

 

예전에도 몇번 트로이와 미샤가 나오는 본편을 조금씩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 이번 에피소드는 그 장편의 전반부에서 통째로 발췌했다. 그 소설은 총 4부 2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는 미샤가 발레학교에 다니던 소년 시절을 잠깐 다루고 있고 2부부터는 그가 키로프에 입단해 무용수로서 활동했던 초기 몇 년을 다뤘다.

 

배경은 1973년 1월, 소련의 레닌그라드(현재의 페테르부르크). 심리적 화자인 트로이는 레닌그라드 국립대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미샤는 바가노바 발레학교 졸업반이다. 함께 등장하는 알리사, 갈랴, 료카, 이고리, 코스챠 등은 트로이의 비밀 문학 서클 멤버들이다. (이전에 이들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몇 개 발췌한 적이 있다. 표절에 대한 에피소드, 메밀죽 에피소드 등. about writing 폴더에 있음)

 

알리사는 트로이의 소꿉친구이자 대학교 동기이다. 그녀는 이후 런던 대사관에서 KGB 요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서무 시리즈에서 우수한 단추 드미트리 베르닌이 왕재수가 런던에서 사고친 것을 선배 누나가 수습해줬다고 언급했는데 그게 바로 알리사임. 그 이야기도 전에 발췌한 적 있다. 런던에 투어를 갔던 미샤가 사라져서 알리사가 찾으러 다닌 에피소드임 : http://tveye.tistory.com/2390

 

여기 발췌한 에피소드는 1부 4장. 상당히 전반부에 해당된다. 미샤는 아직 17살이다. 트로이와는 문학 서클에서 만나 매우 친하게 지내고 있다. 트로이는 자신의 정체성과 미샤에 대한 갈망을 꼭꼭 숨기고 있다.

 

이 에피소드에서 서무 시리즈 중 한 가지 에피소드가 나왔다. 읽어보면 금방 아실듯~ 그 외에도 조금 연결된 에피소드가 두어 개 있다.

 

** 초반에 친구들이 미샤에게 '키로프야, 볼쇼이야? 스파스 나 크로비야, 바실리야? 에르미타주야, 트레치야코프야?'라고 추궁하는 것과 관련해. 전자는 레닌그라드, 후자는 모스크바의 명소들이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3일째 계속된 지긋지긋한 폭설이 그치고 잠시 해가 났을 때 알리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 뭐해? ”

 

“ 뭘 하겠어, 논문 붙잡고 있지. ”

 

“ 오늘은 그만 해, 날씨가 아깝잖아. 썰매나 타러 가자. 이고리랑 코스챠랑 레나도 올 거야. 갈랴랑 료카도 시간 되면 온대. ”

 

“ 어디로 갈 건데? ”

 

“ 우리 다차 ”

 

 

트로이는 알리사네 집 별장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전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만 가면 되는 거리였고 아담한 별장 앞에는 호수가 있었다. 썰매 타기에는 최고의 장소였다.

 

 

“ 로미오도 데려와. 걔도 새해라 휴가잖아. ”

 

“ 아, 물어보고. 걘 워낙 바빠서. ”

 

“ 네가 오라고 하면 올 거야. 걔도 졸업하기 전에 좀 놀아야 돼. ”

 

 

연말에 미샤의 발레학교 갈라 콘서트 무대를 보러 갔다 온 후로 알리사를 비롯한 친구들은 미샤를 로미오라고 불렀다. 동기 여학생과 함께 로미오와 줄리엣 2인무를 췄기 때문이다. 배역에 따라 별명이 바뀌었기 때문에 지난번 백조의 호수 갈라 때는 왕자님이라고 불렀고 백야 축제 발표회 때는 투우사라고 불렀다. 그들은 모두 미샤가 이번 여름에 졸업하면 키로프에 들어갈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오직 트로이만이 그가 모스크바로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도 친구들의 믿음이 강력했기 때문에 어느 날 트로이가 진지하게 ‘근데 볼쇼이에서 이전부터 걜 찍었다던데. 같은 조건이면 모스크바로 가지 않을까?’ 라고 운을 떼어 보았다. 그러자 타냐를 비롯해 발레에 대해서는 오직 타이츠 차림의 몸매 좋은 남녀가 나와서 떼를 이루어 춤춘다는 것 밖에 모르는 코스챠까지도 한목소리로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로미오는 우리 거야! 우리 레닌그라드에서 낳아 기른 애라구! 감히 모스크바 따위가 어떻게 걔를 넘봐! 근본도 없는 볼쇼이 따위! ”

 

 

그들은 정색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다음 모임에 미샤가 왔을 때 그를 둘러싸고 강력하게 추궁하기까지 했다.

 

 

너 똑바로 대답해. 레닌그라드야, 모스크바야? 키로프야, 볼쇼이야? 스파스 나 크로비야, 바실리야? 에르미타주야, 트레치야코프야?”

 

 

미샤는 망설이지도 않고 빠르게 대답했다.

 

 

“ 레닌그라드, 키로프, 스파스 나 크로비, 에르미타주. 당연하잖아. ”

 

 

친구들은 모두 환호하며 술잔을 돌렸지만 트로이는 여전히 그가 모스크바로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프리모르스카야 역 근처에 사는 미샤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마침 휴가라 집에 와 있었던 미샤가 전화를 받았고 트로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샤의 어머니는 아직 젊은 편이었고 미인이었지만 말도 별로 없고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에 트로이는 항상 위축되곤 했다.

 

미샤는 그날 약속도 없고 할 일도 없다며 같이 가겠다고 했다.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트로이는 서랍을 뒤져 여분의 모자와 장갑을 챙겼다.

 

 

 

*   *   *

 

 

 

 

호수는 꽁꽁 얼어 있었고 여기저기 눈더미가 봉긋하게 솟아 있었다. 그들은 알리사네 별장에서 2인용 썰매를 몇 대 끌어냈다. 얼어붙은 호수는 이미 어린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썰매와 스케이트를 타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면적이 넓었기 때문에 그렇게 혼잡하지는 않았다. 더욱 근사한 것은 호수 뒤편으로부터 경사를 그리며 뻗어 내려온 눈 덮인 언덕이었다.

 

 

날씨는 여전히 코끝이 시릴 정도로 추웠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랬고 오랜만에 나온 태양이 차가운 황금빛을 발하며 하얀 눈과 얼음 위로 광채를 흩뿌리고 있었다. 다들 좋은 날씨 때문에 즐겁게 흥분했다. 한참 호수 위에서 썰매를 타고 놀다가 이고리가 신나게 외쳤다.

 

 

“ 우리 언덕에 올라가자! 꼭대기부터 타고 내려오자! ”

 

“ 그래, 그러자! ”

 

 

그들은 썰매를 끌고 언덕 뒷길을 따라 우우 올라갔다. 트로이는 가장 큰 썰매를 끌고 가다가 그루터기에 걸려 하마터면 나자빠질 뻔 했다. 눈 위에서 절대로 미끄러지는 법이 없는 미샤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를 잡아 주었다.

 

 

“ 고마워. ”

 

“ 부츠를 그렇게 끌지 말고 이렇게 걸어봐. ”

 

 

미샤가 얼어붙은 눈길 위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시범을 보여주었다. 트로이는 그렇게 걸을 수만 있다면 자기도 지금쯤 로미오라고 불리고 있을 거라고 대꾸할 수도 있었지만 두툼한 스키 점퍼를 입고도 새처럼 가볍게 움직이는 그의 몸놀림에 시선을 빼앗겨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트로이가 챙겨준 보라색 니트 모자 아래로 검은 머리칼이 빠져나와 춤을 추듯 솟아오르기 직전이었다. 치수가 큰 모자를 이마까지 푹 눌러쓰고 있는데도 어떻게 그 머리카락들이 제멋대로 빠져나올 수 있는지 트로이처럼 짧은 금발 머리로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꼭대기에 올라왔을 때는 이미 알리사와 코스챠, 갈랴와 료카가 먼저 짝을 지어 썰매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이고리와 레나가 함께 썰매에 올라앉으면서 그들에게 혀를 끌끌 찼다.

 

 

“ 안됐다, 늦게 올라온 팀은 아가씨들이 없네. 그냥 둘이 타. ”

 

 

트로이는 이고리의 농담을 가볍게 무시했지만 미샤는 어린애처럼 궁금해 하며 물었다.

 

 

“ 썰매는 꼭 아가씨와 타야 하는 거야? 왜? ”

 

“ 썰렁하게 무슨 소리야, 꼭 한 번도 안 타 본 것처럼. 이거 여자 꼬시려고 타는 거잖아. 넌 로미오가 돼갖고 그것도 모르냐? ”

 

 

농담과 함께 윙크를 던지며 이고리와 레나의 썰매가 휙 미끄러져 내려갔다. 트로이는 썰매를 눈 위에 똑바로 고정시키면서 미샤에게 물었다.

 

 

“ 너 진짜 썰매 한 번도 안 타 봤어? ”

 

“ 어릴 땐 타 봤지. 여섯 살 때까지 아버지랑 네바 강에 타러 갔었어. ”

 

“ 그럼 그 다음엔 안 탔어? ”

 

“ 응, 춤추기 시작하고부터는 못 탔지. 지금도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가 알면 길길이 날뛸걸. ”

 

 

알렉산드르 클리모프는 미샤의 은사였다. 발레학교 최고의 교사이자 옛 키로프 스타였는데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온순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 왜? 그분 진짜 성인군자라며. ”

 

“ 다리 다칠까봐. ”

 

“ 아... 그렇구나. ”

 

 

트로이는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미샤는 출퇴근 시간처럼 사람이 붐빌 때에는 지하철이나 버스도 타지 않았다. 눈이나 비가 많이 오지 않을 때면 거리가 멀어도 걸어 다니는 것을 선호했다. 이제껏 트로이는 그게 단순히 미샤가 산책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언제 어디에서나 틈이 날 때마다 스트레칭을 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떠밀려 넘어질 위험이 따르는 장소를 피하는 것도 습관이 되어 있었다.

 

 

“ 그럼 우리 그냥 내려가자. 경사가 생각보다 가파른데. ”

 

“ 괜찮아, 너하고 타니까 별 일 없을 거야. ”

 

 

두터운 점퍼와 스웨터를 껴입고 부츠와 모자로 무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트로이는 몸을 떨었다. 견딜 수 없는 애정과 뜨거운 갈망이 내부에서 치솟아 사방으로 넘쳐흐를 것 같았다. 그는 열기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미샤에게 들킬까봐 고개를 돌렸다.

 

 

썰매가 꽤 커서 남자 두 명이 앉을 수는 있었지만 트로이는 팔과 다리가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힘겹게 몸을 구겨 넣어야 했다. 미샤가 그의 팔과 무릎을 앞으로 잡아당겼고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 네 자리가 없잖아. ”

 

“ 앞에 앉으면 돼. ”

 

 

미샤는 앞쪽의 좁은 공간에 몸을 밀어넣고 무릎을 세우더니 트로이의 어깨와 가슴에 바짝 기댔다. 아무리 조그맣고 날씬한 여자애들이라도 그렇게 유연하게 몸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터번처럼 뒤로 늘어지는 보라색 모자에 감싸인 미샤의 머리가 그의 어깨와 턱 사이에 와 닿았을 때 트로이는 도저히 썰매를 탈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깃털로 부풀려진 스키 점퍼 사이로도 그 아이의 단단한 견갑골과 미끈한 등의 윤곽을 느낄 수 있었다. 미샤는 거미처럼 길게 구부러진 트로이의 다리와 허벅지 안쪽에 자기 다리를 밀착시키고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인양 앉아 휘파람을 불었다.

 

 

“ 그땐 띠로 묶었어. ”

 

“ 언제? ”

 

“ 네바 강에 갔을 때 말야. 우리 아버지도 너처럼 컸거든. 내가 떨어질까봐 커튼 띠로 허리를 묶었어. ”

 

 

미샤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적이 별로 없었다. 어릴 때 얘기는 더욱 더. 다른 상황이었다면 트로이는 궁금해서 이것저것 더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미샤의 몸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지기 위해 뻣뻣한 등과 허리를 억지로 젖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천둥치듯 울려대는 심장 소리를 그 애가 눈치챌까봐 너무나 두려웠다.

 

 

트로이가 꼼짝도 하지 않자 빨리 내달리고 싶어 안달이 났던 미샤가 몸을 홱 틀며 썰매를 출발시켰다. 썰매는 미끄러진다기보다는 반쯤 허공을 날아 언덕 아래로 쇳소리를 내며 달려 내려갔다. 넘어져서 중간에 멈췄다가 다시 내려가고 있던 갈랴와 료카가 자신들의 곁을 바람처럼 스쳐 내려가는 썰매를 보며 경이롭게 소리쳤다.

 

 

“ 와, 너희 건 로켓 같아! ”

 

 

로켓은 길고 경사진 언덕을 단숨에 달려 내려와 호수 언저리까지 미끄러져 와서야 멈춰섰다. 눈과 얼음 가루가 분수처럼 튀었다. 트로이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고 머리가 멍멍했다. 온 몸이 불덩어리가 된 것 같았다. 어렴풋이 귓가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샤가 머리를 그의 어깨 위에 내려놓고 소파에 기댄 것처럼 편안하게 앉아 웃고 있었다.

 

 

“ 들었어? 로켓이래. ”

 

 

트로이는 미샤가 그렇게 어린애처럼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추위와 흥분 때문에 뺨과 콧날과 입술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썹 언저리까지 늘어진 털실 모자 아래로 까만 눈이 폭죽처럼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 일어날 수만 있다면 트로이는 눈 속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일리야 드보르킨이 내뻗은 손으로부터 물 속으로 도망쳤듯이.

 

 

미샤가 훌쩍 일어나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 다시 올라가자. ”

 

 

그들은 다시 썰매를 끌고 언덕을 올라갔다. 반쯤 올라갔을 때 미샤가 트로이의 손에서 썰매를 빼앗았다. 끌어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투박하고 커다란 나무 썰매를 발레리나 파트너를 들어올리듯 가볍게 끌었다. 잠깐이었지만 트로이는 그가 눈 위에서 춤을 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로미오처럼, 황금빛과 광택 나는 검정색으로 무늬를 놓은 흰 옷을 입고 백조를 사냥하러 갔던 왕자처럼, 거대한 붉은 천을 휘두르며 허세를 부리던 투우사처럼.

 

 

그들은 여러 차례 썰매를 더 탔다. 한번은 레나가 끼어들어 트로이를 이고리 쪽으로 내쫓았다. 미샤는 레나를 앞에 앉히고 능숙하게 썰매를 몰았다. 비좁은 썰매를 거의 자신만큼 뻣뻣한 이고리와 함께 타고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눈더미에 처박힐 뻔한 트로이는 언덕 중턱에 앉아 레나가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며 미샤의 팔에 안겨 썰매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구경했다.

 

 

“ 로미오와 줄리엣이네. ”

 

 

알리사가 트로이 뒤로 다가와 모자에서 눈을 털어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 둘이 사귀면 좋겠어, 레노츠카는 쟤 때문에 우리한테 오는 건데. ”

 

 

트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모임에 오는 여자애들의 대부분이 미샤에게 반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레나라고 다를 이유가 없었다. 그는 대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로켓 같지 않은데. 느려졌어. ”

 

“ 무게가 확 줄어들었잖아. 레노츠카 얼마나 날씬하다구. ”

 

 

알리사가 옳았다. 미샤는 레나를 허공으로 들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파트너 발레리나를 손쉽게 띄워 올리고 빙글빙글 돌리듯이. 조그맣고 아름다운 금발머리 인형 같은 레나를 끌어당겨 키스를 하며 포옹할 것이다. 심장을 짓누르는 듯 산란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밀어를 속삭이며 뜨겁게 사랑을 나눌 것이다. 레나는 봇물처럼 흘러넘치는 욕망으로 온몸을 적시고 정신을 잃을 것이다.

 

 

해가 지고 있었다. 멀리서 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목격한 트로이는 돌아가자고 했다.

 

 

“ 다시 눈이 올 것 같아. 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아. ”

 

“ 딱 한 번만 더 타고 가자. 그냥 가면 자다가 아쉬워서 울 거야. ”

 

 

내키지 않았지만 트로이는 알리사와 함께 썰매를 끌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결혼한지 3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신혼부부처럼 사이가 좋은 갈랴와 료카가 서로를 꼭 껴안고 키스를 하다가 그들을 보고는 멋쩍은 듯 웃더니 잽싸게 썰매를 타고 휙 내려갔다. 트로이는 알리사와 함께 타려고 했지만 까다로운 알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 난 너랑 안 탈래. 내 썰매는 너하고 타기엔 너무 좁아. ”

 

“ 나 아까 이고리랑 같이 탔다가 넘어질 뻔 했단 말이야. ”

 

“ 그건 이고리 탓이 아니지. 네가 커서 그런 거잖아. 볼래? ”

 

 

그러더니 알리사는 마침 올라온 이고리에게 손짓을 해 자기 썰매에 태우고는 방울 소리를 짤랑이며 바람처럼 미끄러져 내려갔다. 트로이는 그냥 걸어서 내려갈까 하고 망설였다. 더 이상 썰매를 타고 싶지 않았다. 레나와 미샤가 함께 날아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코스챠가 빨간 칠이 되어 있는 썰매를 끌고 터덜터덜 올라왔다. 전부터 흠모하던 알리사가 파트너인 자기를 버리고 이고리와 가버린 것에 상심하고 말았다며 투덜대고 있었다.

 

 

나도 아가씨를 뺏아야지. 로미오는 여자들이 줄을 섰으니까 좀 뺏겨도 괜찮아. ”

 

 

레나와 미샤가 마지막으로 올라왔다. 코스챠는 신부를 강탈하는 카자크 전사처럼 레나의 가냘픈 손목을 낚아채 자기 썰매에 태웠다. 그리고는 웃음과 짜증이 반쯤 섞인 레나의 비명과 함께 의기양양하게 언덕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 아가씨를 뺏겼어. 썰매로 여자 꼬드기는 건 대실패야. ”

 

 

코스챠의 썰매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미샤가 노래하듯 말했다. 화가 난 기색은커녕 밝게 웃고 있었다.

 

 

“ 썰매로 여자를 낚을 수 있었으면 난 벌써 열두 번은 결혼했겠다. ”

 

“ 위안이 좀 되는군. ”

 

 

미샤는 썰매에 올라탔다. 모자가 반쯤 벗겨져 흘러내리고 있는데다 목도리의 매듭도 풀려 있었다. 트로이는 미샤의 뒤에 타면서 모자를 제대로 씌워주었다. 목도리도 묶어주려고 하는데 미샤가 고개를 저었다.

 

 

“ 더워, 답답해. ”

 

 

그리고는 목도리를 훌훌 풀어 무릎 아래로 내던졌다. 스키 점퍼 칼라 사이로 우아하게 뻗어 내린 목과 어깨가 힐끗 보였다. 트로이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 해가 반쯤 넘어가고 있었다. 거대한 구름이 밀려오고 있었고 차디찬 바람이 불어와 언덕에 쌓인 눈을 안개처럼 날려대고 있었다. 그는 몸을 가능한 한 뒤로 젖히고 두 손으로는 썰매 가장자리를 꽉 움켜쥐었다.

 

 

“ 어두워졌어, 빨리 내려가자. ”

 

 

썰매가 쉭쉭 소리를 내며 솟아올랐다. 맹렬한 기세로 날아올랐다. 귀를 찢는 듯한 바람이 일었다. 트로이는 정말 로켓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떻게 엔진조차 없는 썰매가 이런 기계음과 폭발음을 내며 허공으로 튀어나가는 걸까 하고 경이로움에 사로잡혔다. 한순간 그는 거대하고 끈적거리는 검은 덩어리가 번개처럼 눈앞으로 달려드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서쪽 하늘로부터 몰려온 세찬 돌풍이 로켓을 장난감처럼 들어올려 언덕 가장자리로 내팽개쳤다. 로켓은 굉음과 함께 두어 차례 뒤집히며 눈과 얼음 위로 굴러갔다.

 

 

커튼 띠로 허리를 묶었어.

너하고 타니까 별 일 없을 거야.

 

 

트로이는 공포로 비명을 지르며 두 팔과 다리를 거미처럼 구부려 미샤를 감쌌다. 뭔가가 산산조각나며 어깨를 때렸다. 이상하게도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고함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머리를 부딪치기 전에 트로이는 사방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하얀 눈보라 사이로 보라색 반점을 남기며 날아가는 작은 새를 보았다. 물론 그건 새가 아니었다. 터번처럼 늘어진 보라색 모자였다. 그는 입을 벌려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단단한 뭔가에 머리를 부딪쳤고 정신을 잃었다.

 

 

 

 

*   *   *

 

 

 

 

 

깨어났을 때 트로이는 차갑고 푹신한 눈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친구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우렁우렁 울렸다. 조율이 되지 않은 나팔을 한꺼번에 불어대는 것 같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온 몸이 부서지는 듯 쑤셨다.

 

 

“ 트로이, 정신 들어? 나 보여? ”

 

 

나팔 소음 가운데 알리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눈을 떴고 오래된 흑백 필름처럼 희뿌옇게 번져 있는 알리사의 얼굴을 바로 앞에서 보았다. 눈이 비로 바뀐 모양인지 뺨 위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렇게 추운데 비가 올 리가 없었다. 알리사가 엉엉 울고 있는 거였다.

 

 

“ 왜 울어? ”

 

“ 어떻게 안 울어! ”

 

 

이고리와 료카가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트로이는 지독한 현기증을 느꼈다. 두 팔이 나사 빠진 기계처럼 철컥거리며 축 늘어졌다. 팔 안이 텅 비어 있었다. 한순간 그는 무시무시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 왜, 왜 나만 있어? 미샤는? ”

 

 

다친 거야. 다리가 부러졌을 거야.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가 펄펄 뛰겠지. 썰매 바깥으로 튀어나갔을 거야, 걘 나만큼 크고 무겁지 않으니까. 온통 팔과 다리와 공기 뿐인 애야. 띠로 묶었어야 해. 목도리를 풀지 않았어야 했어. 나 때문이야. 내가 그런 거야, 다리를 부러뜨렸어. 무대에 못 올라갈지도 몰라.

 

 

모스크바로 가지 못할지도 몰라. 여기 남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 마지막 생각이 너무나 끔찍하고 두려워서 트로이는 신음하며 고개를 돌리고 눈 위에 왈칵 토하기 시작했다. 료카가 그의 등과 어깨를 문지르며 구토를 도와주었다.

 

 

“ 그냥 다 토해. 이제 괜찮아질 거야. ”

 

“ 미샤는? ”

 

“ 너보다 훨씬 나아. 걱정하지 마. ”

 

 

 

트로이는 눈을 한 움큼 떠 입을 닦고 일어나려고 했다. 료카가 부축해주려는데 어디선가 미샤가 나타나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 아직 일어나지 마.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 ”

 

 

 

언제나처럼 침착하고 나직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트로이는 마음이 놓이면서 정신을 차렸다. 눈앞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미샤가 손가락을 흔들고 있었다.

 

 

“ 몇 개로 보여? ”

 

“ 세 개. 아니, 흔들지 말아봐. 두 개. ”

 

 

등 뒤에서 레나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이는 게 들려왔다.

 

 

“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뇌진탕이면 어떻게 해. ”

 

“ 조용히 해. ”

 

 

트로이는 미샤가 그렇게 단호한 어조로 얘기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레나는 움츠러들며 입을 다물었다.

 

 

미샤가 그의 곁에 어깨를 대고 앉았다.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뒤통수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면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조용히 말했다.

 

 

잠깐만 기대 있어. 코스챠가 차를 가지러 갔으니까. 며칠 정도는 어지러울 거야. ”

 

“ 넌 괜찮아? ”

 

“ 입술 터졌어. ”

 

 

미샤는 손가락으로 자기 아랫입술을 가리켰다. 피가 고여 있었지만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스키 점퍼 한쪽 칼라와 지퍼는 크게 뜯겨 달아나 있었고 목덜미와 턱에 불분명한 형체의 커다란 멍이 들어 있었다. 하얀 피부 때문인지 자신의 뇌진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멍이 점점 더 진한 보라색으로 바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는 길길이 날뛸 것이다, 무대에 올라가는 애의 얼굴이 망가졌으니까. 흉터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제발 아니어야 했다.

 

 

“ 아파? ”

 

 

미샤는 트로이의 시선이 목덜미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 안 아파. 그냥 멍만 들었어. ”

 

 

‘ 칼라를 뜯은 건 나였어. 잡아주려고 그랬던 거야. 다행이야, 튀어나가지 않았어. ’

 

 

트로이는 미샤의 목에 나 있는 일그러진 아메바 모양의 커다란 보라색 멍 위로 자기 손을 뻗어 손가락 모양을 맞춰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헛구역질을 했다. 알리사가 손수건을 눈에 적셔 그의 이마와 얼굴을 닦아주었다.

 

 

“ 바보 멍청이. 그렇게 돌풍이 부는데 내려오는 얼간이가 어디 있어. ”

 

“ 내가 그랬어. 구름이 도착하기 전에 내려갈 수 있을 줄 알았어. ”

 

 

미샤가 무심하게 말했다. 알리사가 잠깐 눈물이 가득한 갈색 눈으로 미샤를 노려보았다.

 

 

“ 너 미쳤어? 몸이 재산인 애가 바람에 휩쓸릴 걸 알면서 그런 짓을 해? ”

 

“ 미안해. ”

 

 

트로이는 알리사의 책망하는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미샤가 사과하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섯 살 이후 썰매를 타본 적이 없는 애였다. 퇴근 시간에는 버스를 타지도 않고 주말 축구 시합에도 한 번 끼지 않는 애였다. 언덕으로 그를 데리고 올라온 것도, 썰매에 태운 것도 트로이 자신이었다.

 

 

어쩌면 그가 그런 게 아닐까? 그는 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보았고 돌풍이 올 거라는 것도 알았다. 추락할 걸 알았던 사람은 미샤가 아니라 트로이 자신이었을지도 몰랐다.

 

 

‘ 다리가 부러졌다 해도 결국은 모스크바로 떠나게 될 거야. ’

 

 

미샤가 그의 왼쪽 손목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추위 때문인지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반대편 옆에 와서 웅크리고 앉은 레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 왜 그렇게 흐느적거려? 부러진 거야? ”

 

 

미샤가 다시 레나에게 돌처럼 굳은 시선을 던졌다.

 

 

“ 울지 마, 부러지지 않았으니까. 좀 어긋난 거야. ”

 

 

트로이는 자기 손목의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샤가 레나에게 싸늘하게 구는 게 기뻤다.

 

 

“ 좀 아플지도 몰라. ”

 

 

손목은 별로 아프지 않은데 왜 그런 말을 할까 하고 의문하는 순간 트로이는 자기도 모르게 날카로운 숨을 들이쉬었다. 미샤가 그의 손목을 몇 번 만지더니 세게 비틀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비튼 게 아니라 살짝 옆으로 움직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아파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현기증도 구역질도 단숨에 사라졌다.

 

 

“ 움직여봐. ”

 

 

그는 왼손을 움직였다. 아팠지만 더 이상 흐느적거리지는 않았다. 조금 부어올랐을 뿐이었다. 미샤가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목을 묶었다. 그리고 목도리로는 머리와 이마를 동여맸다.

 

 

“ 응급 처치까진 아니지만 심리적으로는 도움이 될 걸. ”

 

 

그때 코스챠가 어디선가 차를 몰고 왔다. 친구들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고 트로이는 경미한 뇌진탕과 3주 정도의 타박상 진단을 받았다. 왼쪽 손목은 부러지지 않았고 어긋났던 부위도 제대로 돌아와 있었다. 미샤는 터진 입술과 목덜미의 멍 외에는 멀쩡했다.

 

 

 

 

 

*   *   *

 

 

 

 

 

“ 썰매 바깥으로 튀어나갔었어. ”

 

 

이틀 후 아파트로 병문안을 온 알리사가 트로이에게 오렌지를 까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 무슨 소리야? ”

 

“ 로미오 말야. 썰매 바깥으로 튀어나갔다구. 그래서 우린 전부 다 걔한테 먼저 뛰어갔었어. 호숫가까지 떨어졌어. 구르지도 않고 순식간에 추락하길래 죽은 줄 알았어. 그거 보고 레노츠카는 기절했었어. ”

 

“ 호수라니, 우리 썰매는 꼭대기에서 뒤집혔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떨어질 수가 있어? 어떻게 안 다쳤지? ”

 

“ 몰라. 정말 큰일 날 뻔 했어. 걔 눈더미에 처박혀서 한쪽 팔 밖에 나와 있지 않았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혹시라도 어떻게 됐을까봐.... ”

 

 

알리사는 부르르 떨다가 생각난 듯이 트로이의 입에 오렌지를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 근데 멀쩡하더라구. 걘 너처럼 기절하지도 않았어. 혼자서 일어나길래 깜짝 놀랐어. 걔가 아니었으면 난 널 찾으러 올라가지도 못했을 거야, 넋이 빠져서. 로미오가 널 썰매 아래에서 끌어냈어. ”

 

“ 아, 난 썰매랑 같이 뒤집혔었구나. ”

 

“ 기억 안 나? ”

 

“ 잘 안 나. ”

 

너 썰매랑 울타리 사이에 끼어 있었어. 다리가 너무 꽉 끼어 있어서 다른 남자애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는데 걔가 혼자 끌어냈어. 어떻게 했는지 알아? 썰매 날을 떼어내서 그걸로 울타리를 쪼갰어. 난 로미오가 그렇게 힘이 센 줄 몰랐어.

 

“ 어딜 쳐야 하는지 아는 거야. ”

 

“ 그럴지도 모르지. 몸을 쓰는 애니까. 그래서 안 다쳤을지도 몰라. 넘어지는 방법을 배운 애잖아. ”

 

 

그가 잡아준 게 아니었다. 기껏해야 칼라를 잡아 뜯고 목에 상처를 남겼을 뿐이다. 그 애가 바깥으로 튀어나가 추락하는 동안 트로이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썰매와 나뒹굴며 천치처럼 울타리 사이에 끼어 기절했을 뿐이었다. 조금만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푹신한 눈더미가 아니라 호수의 얼음 위로 떨어졌다면 온몸의 뼈가 부러졌을 것이다, 얼음을 부수고 차가운 물 속으로 곤두박질쳤을지도 모른다. 익사했을 것이다.

 

 

트로이는 몸을 떨었다. 알리사는 그가 추워서 그러는 줄 알고 담요를 두 겹으로 덮어준 후 하루종일 함께 있어주었다. 저녁에 돌아온 트로이의 어머니는 그 광경을 보고 마침내 아들과 알리사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희망을 품고 미소를 지었다.

 

 

 

트로이는 열흘 정도 집에 누워 있었다. 미샤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전화 한 번 없었다. 타냐의 말에 따르면 키로프에서 밤 공연 무대의 꽤 비중 있는 배역을 맡겨서 새해 휴가도 반납하고 연습을 하러 극장에 가 있다는 것이었다. 공연 당일에는 눈이 많이 왔기 때문에 다리가 불편한 트로이는 극장에 가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 몇몇은 보러 갔다. 돌아온 타냐와 레나가 눈을 반짝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 잠자는 미녀였어, 파랑새를 췄어! 졸업도 안 한 애한테 그 역을 줬다구. 키로프에서 정말 걜 잡고 싶은가봐. 분명히 여기 남을 거야. ”

 

 

트로이는 잠자는 미녀가 어떻다는 건지, 동화에서나 어울릴 법한 파랑새를 춘다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미샤를 레닌그라드에 남게 할 만큼 괜찮은 대우이기를 간절히 빌었다.

 

 

공연이 끝나고 며칠 후 미샤가 말도 없이 들렀다. 언제나처럼 몸에 잘 맞는 옷을 입고 따뜻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입술과 목덜미는 깨끗했다. 흉터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 천사처럼 완전한 모습이었다. 하긴 검은 머리 때문에 천사라기보다는 브루벨 그림의 악마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트로이는 오래된 화집에서 그 그림을 오려 논문 원고 사이에 감춰놓고 있었다.

 

 

“ 많이 좋아진 것 같네. 이거 들어봐. 노래가 좋아. ”

 

 

미샤는 무척 바쁜 모양인지 그 말과 함께 레코드 한 장을 놓고 가버렸다. 뉴욕에서 나온 레코드였다. 재킷에는 예쁘장한 젊은 로커가 몸에서 피를 흘리며 악마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악을 쓰는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클래식 무용수답지 않게 미샤에게는 언제나 극단적인 미국 락 음악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트로이는 그 무시무시한 커버가 보이지 않도록 재킷을 엎어놓고 레코드를 들었다. 나중에는 아랫집에서 항의할까봐 소리를 줄여야 했다. 노래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는 1월 내내 그 레코드를 들으며 논문 작업을 했다.

 

 

 

...

 

 

서무 시리즈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http://tveye.tistory.com/3785) 에서 왕재수가 탑에서 눈더미로 뛰어내린 후 어릴 때 썰매 타다 떨어진 적 있다고 하는데 그때 그는 이때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비행과 추락은 미샤가 등장하는 소설들에서 자주 반복되는 모티프 중 하나이다. 서무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 별장' (http://tveye.tistory.com/3785)의 결말도 본편의 이 모티프와 연결된다.

 

마지막에 미샤가 트로이에게 가져다주는 음반은 내가 예전에 썼던 소설들에 등장했던 미국인 펑크 로커의 음반이다. 내가 미샤라는 인물을 처음 글로 형상화했던 것도 그 캐릭터가 등장하는 어느 단편에서였다. 그 글에서 미샤는 뉴욕에 가서 현지 발레단과의 협업을 통해 발레 불새를 무대에 올렸고 공연 당일 저 가수와 짧은 만남을 갖게 된다. 여기 발췌한 썰매 에피소드로부터 8년 후, 그리고 가브릴로프 우주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의 배경이 되는 시기이다. 그때는 미샤가 가브릴로프로 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지만...

 

 

** 썰매 에피소드이므로, 눈에 덮여 얼어붙은 페테르부르크 바다와 거기 썰매 타러 가는 사람들 사진을 올려봤다. 여기 : http://tveye.tistory.com/4052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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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