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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보시비르스크 극장장 해임 소식과 관련 기사들(http://tveye.tistory.com/3612) 때문에 간밤에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좀 복잡했다. 아마도 예술과 창작의 자유, 권력의 개입과 탄압에 대한 주제는 언제나 내게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좋든 싫든 우리 사회에서 나도 창작자의 위치는 아니지만 그쪽과 연관된 바닥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가면 갈수록 이쪽 상황도 갑갑해지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몇 년 전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고 종종 about writing 폴더에 약간씩 발췌하고 있는 일련의 미샤 야스민과 레닌그라드 우주에 대한 시리즈(이게 본편이고 서무의 슬픔 시리즈는 이걸 웃기게 변형한 패러디 장난..)에서도 이러한 주제는 계속 변주된다. 지금 쓰는 가브릴로프 본편의 배경 자체도 그렇다. 주인공인 미샤가 뉴욕 측과 협업해 올린 신작이 체제 도전과 금기 위반 요소로 공격당하고 기존 작품들도 체제 풍자 요소를 지적받는 와중에 이런저런 문제들이 얽혀 체포당한 후 일련의 고난을 거쳐 지방 소도시로 좌천되었기 때문이다. (그 소도시가 서무 시리즈에 나오는 베르닌의 도시... 왕재수식으로 말하면 ‘시골’...) 

 

노보시비르스크 기사들을 읽고 생각나서 이전에 썼던 글에서 잠깐 발췌해 본다. 이건 가브릴로프 본편의 프리퀄로 썼던 글이다. 프라하에서 쓴 글인데 총 3부로 이루어져 있고 심리적 화자가 모두 다르다. 발췌 부분은 3부의 중반. 3부의 화자는 미샤의 친구이자 볼쇼이 극장 안무가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이다. 일린과 그의 딸 라라가 등장하는 단편 Jewels는 전에 여기 전편을 올린 적이 있다. 

 

여기서 일린은 수용소에 갇혔다가 고문 쇼크로 모스크바 비밀 클리닉으로 옮겨진 미샤를 면회하며 짧은 대화를 나눈다. 일린은 더 이상 춤을 추지 않겠다는 미샤를 회유하고자 한다.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미샤는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 요즘 새로 작업하는 거 있어? 마지막 거 올린지 일 년 다 돼 가잖아. ”

 

“ 있었지. 누가 뜬금없이 춤을 안 추겠다고 해서 정말인지 확인해보려고 재미있는 거 만들고 있었는데. ”

 

“ 어떻게 재미있는 건데? ”

 

“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어. ”

 

“ 그럼 좀 보여줘 봐. ”

 

“ 안 출 거라면서. 무대에 이제 안 올라간다더니. ”

 

“ 그래도 보여줘. 궁금하니까. ”

 

“ 사실은 계속 추고 싶은 거지? 홧김에 그랬던 거지? ”

 

“ 그런 거였으면 좋겠는데. ”

 

 

미샤는 조그맣게 휘파람을 불었다. 제대로 불지 못해서 쌕쌕거리며 바람이 빠져 달아나는 소리가 났다.

 

 

“ 추든 안 추든 상관없어. 네 작업은 항상 궁금해. 그러니까 보여줘. ”

 

“ 눈도 잘 안 보이면서. ”

 

“ 움직임은 보여.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가운데로 갔다. 카펫이 깔린 바닥 위에서 구두를 신고 출 수 있는 동작 몇 개를 골라내 보여주었다. 마지막 동작을 보자 미샤의 표정이 변했다. 이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그 애의 얼굴에 아주 진지하고 강렬한 기운이 돌았다. 물감을 왈칵 쏟아놓은 듯 초점 없이 옆으로 길게 퍼져 있던 검은 눈동자에 예리한 광채가 떠올랐다. 그는 등을 똑바로 펴면서 살짝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 방금 그거 다시 해봐. ”

 

 

나는 다시 그 동작을 보여주었다.

 

 

“ 원래는 허리를 뒤로 더 젖혀야 해. 다음은 푸에테. 모렐 식으로 변형해서. 신발 때문에 그건 못 보여주겠다, 너무 좁고. ”

 

“ 뻣뻣해져서 그런 거 아니고? ”

 

“ 그것도 있지. 좀 봐줘. 난 무대 안 올라간지 10년 넘었잖아. ”

 

“ 그거 하고 나서 푸에테까지 추면 다시 체포되겠는데. 침대로 직행하는 키트리처럼 보일 거야. ”

 

“ 그러니까 모렐 식으로 변형하는 거지. 너 키트리 춰보고 싶어 했잖아. ”

 

“ 췄어. 뉴욕에서. ”

 

“ 뉴욕 어디? 언제? ”

 

“ 불새 작업할 때. 그쪽 무대 잡아놓고 비공개로 공연했었어. 한 시간짜리로 축소해서. 관객은 스무 명 정도밖에 안됐지만. ”

 

“ 바질은 누가 췄어? ”

 

“ 주드. 그 친구도 무릎 때문에 힘들어해서 스텝을 좀 바꿨지. ”

 

“ 의상도 입었어? ”

 

“ 왜, 키트리 의상 입은 거 보고 싶어? 아깝지만 전부 레오타드에 스카프만 둘렀어. 불새랑 비슷한 스타일이었지. 사실은 뉴욕 쪽 애들이 처음에 불새 안무를 따라오기 힘들어해서 그거 춰보게 한 거야. 바질 빼고 남녀 역할 다 바꿔서 췄어. 진짜 재미있었어, 주드가 날 두 번 떨어뜨린 거 빼면. ”

 

“ 야쿠쉬킨은 물론 몰랐겠지? ”

 

“ 응, 우리 쪽 애들도 몰랐으니까. 발각됐으면 공연 못 올리고 곧장 소환됐을걸. ”

 

“ 그래도 이 푸에테는 달라. 45회 연속 회전이니까. ”

 

“ 누가 출지 모르겠지만 사람 하나 잡겠군. 돌다가 피 토하겠어. 박자는 어떻게 맞춘담. ”

 

“ 아키모프가 편곡해줄 거니까 괜찮아. 마흔 다섯 번 도는 거 자신 없어? ”

 

“ 그걸 누가 자신 있다고 해. ”

 

“ 너. 전에 그랬잖아. 50번 돌 수 있다고. 연습실에서 도는 거 봤는데. 숫자도 세 봤어. 55번 돌았지. ”

 

“ 기억력이 정말 좋네. 그게 몇 년 전인데. ”

 

“ 작년이었어. 빼지 마. ”

 

“ 이젠 그렇게 못 돌 거야. ”

 

“ 헛소리야. 회복되면 전처럼 출 수 있어. ”

 

“ 항상 이렇다니까. 네 말 듣다 보면 자꾸 휘말려. 거의 넘어갈 뻔 했어. 무대 다시 올라가지 않기로 했는데. ”

 

“ 그냥 넘어와. 내 말은 항상 옳았으니까. 반대 못할걸. ”

 

“ 너무 과장된 거 아냐? 10분의 1 정도는 틀린 적 있잖아. ”

 

“ 그건 일부러 틀려준 거야. 그래야 네가 기분 상하지 않지. ”

 

“ 어쩐지 그것도 진짜처럼 들리는군. ”

 

“ 그래. 그러니까 빨리 낫기나 해. 나오면 45번 돌게 해줄 테니까. ”

 

“ 고마워. 그런데 나는 무대에 안 올라갈 거야. ”

 

 

나는 그 창백한 얼굴과 이제 희미한 불꽃이 살아난 검은 눈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 애가 지난 2월 뉴욕에서 돌아온 후 우리는 딱 한 번 만났을 뿐이었다. 6월 백야 축제에 그 불새를 올렸을 때였다. 아사예프가 안무와 엔딩을 모두 뜯어고쳤기 때문에 작품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나는 뉴욕에서 그 공연을 보지 못했지만 마르가리타가 입수해 온 필름으로는 봤다. 미샤가 작년에 니진스키 트리뷰트를 작업하기 전부터 그 작품을 준비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공연이나 행사 때문에 모스크바에 올 일이 생기면 그는 시간을 쪼개서 나를 보러 오곤 했는데 한 번은 내게 몇몇 동작을 가르쳐 주고 이반 왕자 부분을 조금 춰보게 한 적도 있었다.

 

 

“ 이거 어려운데. 2인무지? 이런 식이면 파트너가 아주 힘들겠어. 여기서 이반을 들어서 돌려야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 그 동작을 제대로 할 만한 여자애가 있을까? 이반 왕자를 거의 나만큼 작은 친구가 추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 같은데 염두에 둔 무용수라도 있어? ”

 

2인무 맞아, 들어서 돌리는 것도 맞는데 상대는 내가 출 거니까 괜찮아. ”

 

“ 옐레나를 출 거라고? 아사예프가 혈압으로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는군. 이거 무대에는 못 올리겠네. ”

 

“ 이반과 불새가 추는 거야. 옐레나 파트는 아직 작업 중이야. ”

 

 

그러면서 미샤는 내 앞으로 와서 그 부분을 추기 시작했다. 내 예상대로 아주 어려운 동작이었지만 그 애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췄다. 제대로 된 파트너 역할을 하기에 난 이미 나이도 들고 몸도 굳었지만 미샤는 별로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는 나를 40킬로도 안 나가는 가냘픈 발레리나 다루듯 쉽게 들어 올려 허공에서 돌렸고 내가 한창 무대에 올라가던 시절에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동작들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마치 그 애가 자신과 나, 두 개의 육체를 자유롭게 오가는 것 같았다.

 

 

“ 대역은 어떻게 쓰려고 이런 걸 연속으로 집어넣지? 이걸 너 말고 누가 소화할 수 있다고. ”

 

“ 대역은 안 쓸 거야. 내가 추려고 만든 거라서. ”

 

 

그건 아다지오였다, 격정적인 사랑의 춤이었다. 그 2인무는 그 애가 옐레나를 추는 것보다도 더 문제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얘기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애가 그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싶었다, 무대 위에서. 그 어느 곳에도 미샤처럼 추는 무용수는 없었다. 이전에 미샤의 그 영문학자 친구와 이야기하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저렇게 출 수 있었다면 목숨이라도 내놨을 걸요.

 

그건 지금도 유효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 애처럼 출 수만 있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목숨이라도 내놨을 것이다. 나는 안무가였지만 그 이전에 무용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출 수 있었다면 결코 안무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애에게 그때 뉴욕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왜 춤을 그만 두겠다고 선언했던 것인지 묻고 싶었다. 6월에 레닌그라드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우리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이미 그에게는 보안 요원들이 여럿 딸려 있었다. 아파트는 두 번이나 수색당한 후였고 전화도 도청되고 있었다. 게다가 그 불새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무대를 보는 것이 괴로울 정도였다. 물론 전후사정을 무시한다면 공연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안무를 대폭 수정해서 지나가 췄던 불새는 나름대로 매력적이었고 관객들은 백조의 호수를 연상시키는 해피엔딩에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건 미샤가 원래 만들었던 작품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 화려하고 생기 넘치는 불새는 원본에 대한 조롱이자 끔찍한 패러디처럼 보였다.

 

 

 

..

 

 

 

 

일린이 안무해서 보여주는 작품, 미샤가 안무한 돈키호테, 불새, 니진스키 트리뷰트 등은 모두 실존하지 않으며 이 글을 위해 내가 만들어낸 것들이다. 후자의 두 작품은 미샤가 반대파들에게 공격을 받고 추락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이 두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전에 쓴 다른 소설에 자세히 묘사한 적이 있다. 나중에 올려보도록 하겠다.

 

위의 발췌문 화자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등장하는 부활절 단편 Jewels는 아래 링크에.. 그러고보니 이제 부활절이네..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 : http://tveye.tistory.com/3394

5장 : http://tveye.tistory.com/3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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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