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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시리즈도 이제 20편이 넘어갔다. 0편부터 시작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숫자보다 하나가 더 많다. 여기에 외전으로 들어갔던 등장인물 20문답이 있다.

 

본편이 답보 상태에 접어든 대신 서무 시리즈는 꼬박꼬박 잘 써져서 24편까지 완료가 된 상태이다. 그 뒤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계속 쓸 것 같긴 하다. 문제는 자꾸 본편이랑 섞인다는 것이 ㅠㅠ

 

하여튼 그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고. 어느덧 21편.

 

지난 20편에서 왕재수는 스페호프의 갖은 방해공작을 무릅쓰고 돈키호테 공연을 잘 올렸다. 물론 하를람피 푸고비체프의 도움을 받아서 :) 21편은 여기서 이어지는 얘기다.

 

* 전에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루뱐카는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를 가리키는 속어이다. 모스크바의 루뱐카 지역에 있어서 그렇게 불린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높은 사람들 앞에서 왕재수의 공연을 망치려고 했던 방해공작이 실패로 돌아간 후 스페호프 국장은 복수심에 불타고...새로운 음모를 짜낸다. 과연 베르닌은 그 음모를 분쇄하고 왕재수를 위험에서 지켜낼 수 있을 것인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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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1

 

 

 

 

서무의 슬픔

- 스페호프의 복수 -

 

 

 

 

 

 

월요일 아침부터 가브릴로프 KGB 지국의 모든 직원들은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다. 국장실로부터 공산당 찬가와 콤소몰 행진곡이 꽝꽝거리며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국장은 예술과는 담을 쌓았지만 당이 인정한 음악에 대해서는 굉장한 애호가였다. 국장실 벽 삼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에는 레닌과 스탈린을 비롯한 서기장들의 연설 모음집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주해 등을 비롯한 가지각색의 공산당 관련 서적과 각종 레코드, 테이프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특히 프로파간다 음악들을 매우 좋아했다. 그러니 국장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공산당 찬가와 콤소몰 행진곡이 나온다는 것은 일급 경고였다! 최악의 저기압일 때만 틀어놓는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전날의 돈키호테 공연 때문에 국장의 심기가 매우 나쁘리라고 예상하며 출근했기 때문이다. 분명 주간 회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를 호출해 극장에서의 일을 추궁할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9시가 되자 스페호프가 직접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국장실로 올라오라고 했다.

 

 

베르닌은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머리를 짜내며 계단을 올라갔다. 자기도 모르게 돈키호테처럼 다리를 높이 들고 휘적휘적 걷고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공연을 방해하기는커녕 출연까지 했다는 사실을 국장이 알게 된다면 큰일이었다.

 

 

국장실 문은 열려 있었고 여전히 콤소몰 행진곡이 우렁차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베르닌은 심호흡을 한 후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스페호프가 서류를 뒤적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눈이 번쩍 빛났다.

 

 

“ 국장님, 안녕하십니까. ”

 

“ 그놈이 주인공인지 뭔지를 출 거라는 걸 끝까지 몰랐나? ”

 

“ 어, 예... 철저히 비밀로 해서요... 그 나이 많은 선생이 출 거라고 생각했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공연이랑 극장은 잘 몰라서 그만... ”

 

“ 하긴 발레단 내부에 있는 놈도 몰랐는데 자네가 무슨 수로 알았겠나. 그 여우같은 놈이 우리 모두를 속였어, 보기 좋게 갖고 놀았어! 망할 자식. 의원들이 얼마나 넋을 빼고 보던지. 내참 구역질이 나서. 사내자식들이 민망한 타이츠를 입고 펄쩍펄쩍 뛰지를 않나, 얼굴에 분칠을 하고 속눈썹을 붙이지 않나, 계집애들이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지를 않나. 연방과 당을 이끄는 인물들이 그딴 지저분한 짓거리를 보면서 천재가 어쩌고 뮤즈가 어쩌고 하고 있으니... 아주 그 더러운 불여우 꼬마한테 제대로 홀렸다니까. 그 자식이 무대에 올라간다는 건 나도 3시에야 알았네, 레베진스키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알려주더군. 의원님들이 공항에서 들이닥치는 시간이라 도저히 그 자식을 손봐 줄 수는 없었어. 시간도 그렇고 잘못하면 의심받기 쉬우니... 그래서 그 풍차인지 뭔지를 건드려놨는데 망할 놈의 키다리 놈팽이 대가리가 박살날 줄 알았더니만 돌머리인지 멀쩡하게 나오지 뭔가! 그 자식은 대체 어디서 굴러온 건달 녀석인지! 무슨 푸고비체프인지 뭔지. 서류에도 그런 이름은 없더군! 그 불여우 꼬마가 분명 어딘가에서 끌어온 악당일 거야! 자네도 잘 찾아보도록 하게! 이상하게 그놈이 아주 꼴 보기 싫더군! 제일 먼저 제거한 배역이었는데 어디서 그런 녀석이 굴러 들어와서... ”

 

“ 어, 예... 그 푸고비체프란 사람은 무슨 벌목공 출신인데 다른 지역에서 잠깐 놀러왔다가 어젯밤에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

 

 

베르닌은 자기보호 본능이 발동해 무의식적으로 급하게 둘러댔다. 스페호프는 족히 5분도 넘게 욕설을 퍼붓더니 물을 한 컵 꿀꺽꿀꺽 마셨다.

 

 

“ 알았네. 하여튼 호락호락하지 않은 놈이야. 막판에 그렇게 받아치다니. 그 깜찍한 녀석이 전에 내 인사말도 40초 만에 끊어버렸지. 그거야말로 정말 용서할 수 없어! 그래도 하나 알게 된 사실이 있지. 그때 내가 VIP석에 앉았지 않나, 의원들 옆에. 그 인간들이 나누는 얘길 들었지. 애송이가 아프긴 정말 아픈 모양이더군. 그 망할 놈의 의사 영감탱이가 우리에겐 조작된 차트를 제출하고 있었어. 모스크바 의원들은 그 영감이 크레믈린 쪽으로 보낸 차트 원본을 본 모양이야. 조금만 삐끗하면 수용소 후유증이 도지니까 조심조심해야 한다지. 그래서 윗분들이 그놈을 우리 동네로 보냈다는 거야! 공기 맑은 곳에서 요양하라고! 흥, 아주 잘됐어! 대놓고 암살하는 건 그 불여우 녀석한테 혹한 윗분들이 많으니 아직은 위험하지. 이미 극장 쪽에 얘길 해뒀네. 제깟 게 펑크 난 배역은 땜빵할 수 있을지 몰라도 L-950은 못 버티지!

 

“ 어, 저... 국장님. L-950이 뭔가요? ”

 

“ 아참, 그렇지. 자넨 현장요원이 아니지. 자세히 알 것 없네. 루뱐카 본부에서 쓰는 거라서. 뭐 조금만 쓰니까 검출도 안 될 거고, 일반인한테는 별 문제도 안 되는 분량이지만 그 꼴 보기 싫은 애송이는 알콜을 분해 못 시키니까 제대로 작용할 것이야! 자넨 오늘부터 그 자식을 면밀하게 관찰하게. 열이 나고 아프기 시작하면 제대로 걸려든 거지! 당장 죽이진 못해도 혼쭐을 좀 내줘야겠어! ”

 

“ 저...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설마 그건 약물 얘긴가요? 극장에 심어놓은 내부 스파이에게 전달하셨다는 건가요? 그래서 그걸 몰래 야스민에게 먹여서 아프게 한다고요? ”

 

“ 음, 다닐. 자네 많이 늘었군. 역시 그 불여우 감시 업무를 분장해 줬던 보람이 있다니까. 이제야 감시분석부의 어엿한 일원이 되어 가는군. 잘해 보게. 그 망할 불여우 때문에 힘들겠지만 이 경험을 토대로 행정의 기본뿐만 아니라 현장요원으로서의 역량도 서서히 배양할 수 있을 것이네. ”

 

“ 저, 국장님. 그럼 차라리 그 약물, 무슨 L이 어쩌고 하는 걸 저에게 주시면 제가 직접... ”

 

“ 아니, 안 되네. 불여우를 직접 처치하고자 하는 자네의 열정과 공명심은 높이 사네만 그건 위험하지. 이미 자네가 감시요원인 걸 온 천하가 다 아는데 약물까지 맡기면 즉시 크레믈린에서 의심대상이 될 걸세. 발레단 쪽에 있는 친구가 몰래 먹이는 게 낫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말게, 나중에 진짜 기회가 올 테니까. 이번 것은 죽이려는 것까지는 아니거든. 그저 그 싸가지 없는 개자식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야! 가만 안 두겠어! 버릇없는 반동분자 녀석!!!! 자, 그렇게 알고 오늘 저녁부터 그놈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살펴주게! 이상! 주간 회의에서 보세! ”

 

 

베르닌은 묵묵히 자리로 돌아왔다. 주위를 살폈다. 주간 회의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배나무 거리 교차로 앞 공중전화로 갔다. 극장 감독실로 다이얼을 돌렸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왜 비서도 전화를 안 받는지 불안해하며 동동 구르다가 문득 깨달았다.

 

 

‘ 아 맞다, 오늘 월요일이지. 극장 노는 날. ’

 

 

왕재수는 보통 월요일에도 출근하곤 했지만 전날까지 돈키호테 때문에 그렇게 과로를 했으니 못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았다. 그래도 오후에 기어 나올지도 모르니 걱정이 되었다. 왕재수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그 집 전화에는 도청장치가 부착되어 있었지만 어차피 그 내용을 정리하는 건 자신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왕재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 아직 자나... 하긴 아침잠이 엄청 많은 애니까. 어제 집에 들어오긴 했나 모르겠네... 국회의원들한테 인사하고 같이 저녁 먹으러 간다고 했었는데. ’

 

 

걱정이 된 베르닌은 잠시 우왕좌왕하다가 수첩을 뒤져서 코즐로프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다이얼을 돌리니 한참 후에 코즐로프의 까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걸었어요!

 

“ 어, 나 다닐인데요. ”

 

“ 왜 뜬새벽부터 전화야! ”

 

“ 9시 넘었는데... ”

 

“ 9시면 뜬새벽이지! 월요일이라 밀린 잠 자고 있는데! 무슨 일이야? ”

 

“ 어, 저... 미샤 거기 있어요? ”

 

“ 우리 아기는 왜! ”

 

“ 할 얘기가 있어서요. 당신이랑 같이 있어요? ”

 

“ 있긴 한데 지금 자. ”

 

“ 잠깐만 깨워 주면 안 돼요? 진짜 중요한 얘기가... ”

 

안 돼. 우리 아기 잘 때는 절대 못 깨워! 가뜩이나 동 다 텄을 때 들어와서 잠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도 알잖아, 우리 비둘기가 요 며칠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 망할 놈의 공연인지 뭔지 때문에! ”

 

“ 어... 왜 그렇게 늦게 들어온 거예요? ”

 

“ 높은 분들한테 인사하고 저녁 먹고 술자리에도 끌려갔으니까 그렇지. ”

 

“ 엥, 술 마신 거 아니죠? 걔 술 마시면 안 되는데. ”

 

“ 술 마셨으면 제 발로 걸어 들어왔겠냐. 그놈들이 옆에 끼고 노느라 늦었겠지. 에이, 개자식들. 우리 아기 감옥 끌려갈 때 나 몰라라 했던 건 언제고 이제 와서... 중요한 얘기가 뭔데? 내가 전해주면 안 되냐? ”

 

“ 아니, 저... 걔 오늘 극장 안 가죠? ”

 

“ 안 가! 간다 해도 내가 못 가게 할 거야. 사람 몸이 무슨 무쇠도 아니고. 오늘은 우리 집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 ”

 

“ 다행이다... 그럼 내일은 나가요? 내일 공연 없는 거 같았는데. ”

 

“ 나는 오케스트라 연습 때문에 나가고, 얘도 나가겠지 뭐. 신작 때문에 할 거 많으니까. ”

 

“ 저, 공연 없으면 내일까지 쉬게 하면 안 되나요? 의사 선생님도 일주일에 3일만 나가라고 했잖아요. 가뜩이나 과로했는데. ”

 

“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 녀석 성깔에 내 말 듣겠냐. ”

 

 

베르닌은 시계를 보았다. 주간 회의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 어, 그럼 있잖아요, 이거 중요한 얘기니까 꼭 전해주세요. 당분간 극장에서는 물이나 음료수 절대 마시지 말라고. ”

 

“ 왜? 스페호프 그 자식이 독이라도 탄다든? ”

 

“ 엇... 어... 당신 정말 예리하네요. 어떻게 알았지? ”

 

“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 ”

 

“ 어, 그래요. 국장이 어제 공연 때문에 엄청 열 받았어요. 이상한 약물 써서 아프게 만들 거랬어요. 알콜 약물이라 했으니까 분명히 음료수에 탈 거예요. 걔 목마른 거 못 참잖아요, 보이는 대로 물이랑 주스랑 막 마시잖아요. 집에서 물이랑 주스 싸가라고 해요. 절대, 절대 극장에서 뭐 받아 마시면 안 돼요. 차도 마시면 안 돼요. 내일까지 쉬게 하고요. ”

 

“ 알았다. 내가 그 더러운 놈 죽여 버릴 거야. 밤길 조심하라 해라, 등짝에 칼을...

 

 

코즐로프가 점차 잠이 깨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미는 것 같은 눈치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주간 회의에 늦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뛰었다.

 

 

 

*    *    *

 

 

 

베르닌은 바쁜 와중에도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화요일 오전에 그는 다시 극장에 전화를 해보았다. 류드밀라가 받았다.

 

 

“ 감독님은 오늘 안 나오세요. ”

 

“ 어, 그래요? 휴가예요? ”

 

“ 네, 대휴예요. 2주일 동안 하루도 안 쉬고 계속 나왔었거든요. ”

 

 

다행이라 생각하며 베르닌은 전화를 끊었다. 밤에 코즐로프의 집에 들러서 왕재수에게 직접 위험을 알려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긴 바이올린 깡패가 어련히 옆에서 잘 막아주려나 싶기도 했다.

 

 

오후 늦게 그는 구시가지에 갈 일이 생겼다. 얼마 전 다녀온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의 발표 자료로 만들었던 ‘레닌과 스탈린,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경제 모델에 따른 가브릴로프의 공산당원 교육 정책’ 원고가 필요하다는 교육국의 공문 때문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발송 대장에 적고 우편으로 보냈겠지만 직접 가져다주겠다고 자청했다. 극장이 교육국에서 10분 거리였기 때문이다. 외출부에 적고 사인을 받으러 갔더니 스페호프는 칭찬을 했다.

 

 

“ 그렇지, 바로 이거야. 드디어 자네가 서무 업무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KGB 직원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정보 공유의 범위를 확대했구먼! 교육국에 가면 담당자에게 전해주지 말고 반드시 이 공문의 전결권자인 본부장에게 직접 가서 원고를 건네주게! 그래야 우리 KGB가 이 정도로 공부하는 조직이라는 것을 어필할 수 있는 것이네! 어서 다녀오게. ”

 

 

베르닌은 차를 몰고 다리를 건넜다. 교육국에 갔다. 본부장인 우니보프에게 가서 원고를 전해 주었다. 우니보프는 고개를 갸웃했다.

 

 

“ 아니,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건가? 이건 우리 부서 플레타노프가 요청한 자료일 텐데. ”

 

“ 예, 본부장님이 공문에 사인을 하셨기 때문에 직접 전해드리라고 우리 국장님이 지시했습니다. ”

 

“ 허참, 하여튼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는 꼼꼼하다니까. 책상 위에 놓고 가게. 그냥 플레타노프에게 갖다 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여튼 잘 가게. ”

 

 

 

귀찮아하는 우니보프의 책상 위에 원고를 내려놓은 후 베르닌은 극장으로 갔다. 스페호프가 정확히 누구를 매수했는지, 그리고 음료수가 투입될만한 루트가 무엇인지 파악해 볼 생각이었다. 내심 그는 안무가인 레베진스키를 의심하고 있었다. 왕재수 때문에 감독직도 빼앗긴데다 신작이 반동적이라고 검열국에 찌른 적도 있고 스페호프에게 공연에 대한 정보도 제공했으니까.

 

 

마침 그는 분장사인 타치야나와 마주쳤다. 타치야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눈을 찡긋하며 인사를 했다.

 

 

“ 안녕, 하를람피. ”

 

“ 안녕하세요, 타치야나 이바노브나. 혹시 레베진스키가 지금 어디 있는지 보셨나요? ”

 

“ 콜랴? 오후 반차 내고 나갔대. 내일도 휴가야, 집에 일이 있다고. ”

 

“ 아, 그래요? ”

 

 

다행이다 싶어서 그는 1층 카페 차이카로 내려가 보았다. 맛없고 질 나쁜 음식만 내놓는 곳이니 음료수에 약을 타도 티가 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런데 차이카는 문이 닫혀 있었고 ‘기술적인 문제로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영업을 중단함’이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그나마 나쁜 가능성 하나가 사라진 셈이니 다행이었다. 극장 2층에서 5층까지 작은 카페가 하나씩 있었지만 그건 공연을 할 때만 열고 관객을 대상으로 하니까 왕재수가 가서 뭘 마실 일은 거의 없었다.

 

조금 마음이 놓인 그는 복도로 나왔다. 그러다가 왕재수와 마주쳤다.

 

 

“ 어, 너 웬일이야? ”

 

“ 앗, 너 왜 여기 있어! 오늘 대휴라고 했잖아! 안 나온다며! ”

 

어, 그건 어떻게 알아? 대휴 내긴 했는데, 할 게 많아서 점심 먹고 나왔어. ”

 

“ 너 미쳤냐, 그렇게 무리해놓고. 쉴 때 푹 쉬어야지, 어제도 아침에 들어갔다면서 기껏 하루 쉬고 나오면 어떻게 해. ”

 

“ 괜찮은데. 푹 자서 피로 다 풀렸어. 어젯밤에 우리 애들 스네고로드에서 다 돌아왔거든. 자기들 없이 돈키호테 올라갔다고 얼마나 상심하는지. 그거 토요일에 한 번 더 있잖아. 걔들 올려야 해서 연습도 봐줘야 하고. ”

 

 

베르닌은 급하게 주변을 둘러본 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 너 얘기 들었지? 절대 뭐 마시면 안 돼. ”

 

“ 어휴, 어떻게 하루종일 아무 것도 안 마시니. ”

 

“ 집에서 가져오란 말이야. 여기서 주는 건 안 돼. 국장 진짜 화났어. 너 가만 안 둔대. ”

 

“ 그 자식 하나도 안 무서워, 얼간이 앞잡이. 애들 괴롭히고 공연 망치려 들고 풍차도 고장 내고. 예술 탄압자! 두고 봐! ”

 

“ 두고 보는 건 좋은데, 너 진짜 내 말 들어야 돼. 오늘 극장 와서 뭐 마신 거 있어? ”

 

“ 안 마셨어! 주스 마시고 싶은데 안 된다 하고... 아까도 류다가 차 우려 주고 토냐가 오렌지 주스 갖다 주고 가릭이 우유 갖다 줬는데 하나도 못 마셨어. 우리 애들이 주는 건 마셔도 되는 거 아니야? ”

 

“ 안 돼, 누가 걔들 몰래 약 탈 수도 있잖아. 입에 대지 마. ”

 

“ 칫, 시어머니. 맘먹으면 무슨 짓으로든 못 먹이겠니. 그런 거 하나하나 신경 쓰다가는 아무 것도 못해. 아프면 할 수 없지 뭐. ”

 

“ 야! 뭐가 할 수 없어! 약속해, 음료수 입에 안 댄다고! 안 그러면 뱀 껍질, 바퀴벌레, 곱등이... ”

 

“ 어휴, 또 시작이야! 맨날 너는 그렇게 협박... ”

 

 

왕재수가 갑자기 말을 뚝 그쳤다. 베르닌은 누가 있나 싶어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 왜? 무슨 소리라도 들었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베르닌의 팔을 움켜쥐었다. 어찌나 꽉 잡았는지 팔이 부러지는 것 같았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면서 입을 벌렸다. 그러더니 베르닌의 팔을 놓치고 심하게 비틀거렸다. 베르닌은 너무 놀라서 급하게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야! 너 왜 그래!

 

“ 어... ”

 

 

왕재수가 머리를 뒤로 젖히더니 춤을 추듯이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숨을 헐떡이며 두 손으로 귀를 감쌌다. 무릎으로 허공을 찼다. 베르닌은 공포에 질렸다. 급하게 왕재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이마와 목에 손을 대 보았다.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왕재수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괴롭게 헐떡거렸다. 순식간에 얼굴이 파래지면서 숨소리가 약해졌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스웨터를 벗기고 셔츠 단추를 두 개 풀었다. 정신없이 가슴을 압박하고 인공호흡을 했다. 반응이 거의 없었다. 베르닌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미친 듯이 심폐소생술을 반복했다.

 

다행히 왕재수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열이 펄펄 끓었다. 베르닌은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 미하일, 너 내 목소리 들려? ”

 

“ 왜 때려... 아파... ”

 

“ 너 솔직히 말해! 뭐 마셨어! 극장 와서 뭐 마셨냐고! ”

 

“ 아무 것도... 마시지 말랬잖아. ”

 

“ 하지만... 너 분명히 뭔가를 입에 댔어! 그래서 아픈 거야! 열 나잖아! ”

 

“ 아니야, 안 마셨어... 나 자고 싶어. 추워. 집에 갈래. ”

 

 

베르닌은 왕재수를 들쳐 업고 감독실로 갔다. 류드밀라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 것을 손사래를 치며 막았다.

 

 

“ 류다, 의사 선생님한테 전화 좀 해줘요. 빨리. ”

 

 

류드밀라가 전화를 거는 사이에 그는 소파에 왕재수를 눕혀 주었다. 왕재수는 거의 의식을 잃고 있었다. 눈꺼풀까지 새빨갰다. 베르닌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류드밀라가 불렀다.

 

 

“ 의사 선생님이 바꿔 달래요, 다냐. ”

 

 

베르닌은 급하게 수화기를 낚아챘다. 의사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목소리를 낮추려고 애쓰며 생각나는 대로 전부 말했다.

 

 

“ 미하일, 갑자기 열이 펄펄 끓고 숨을 못 쉬고 쓰러졌어요. 약을 탄 것 같아요. 국장... 혼내 줄 거라고 했어요. 루뱐카, 약물... 음료수에 탄 것 같은데 얜 마신 게 없대요. 빨리 와주세요. ”

 

 

횡설수설하는 베르닌과는 달리 수화기 너머로 노의사의 침착한 음성이 들려왔다.

 

 

“ 이름. 약물 이름 들었나? ”

 

“ 어, 저... 기억이 안 나요. 무슨 L 어쩌고였어요, 뒤에 숫자가 있고... 루뱐카에서 쓰는 거랬어요. 알콜... 열 나고 아프게 만드는 거라고 국장이 그랬어요. 숨도 못 쉬어서 인공호흡 했어요. 근데 아무 것도 안 마셨다고... 물도 주스도 차도 안 마셨다고... ”

 

“ 담요로 싸주고 아무 것도 먹이지 마. 애 의식은 있나? ”

 

“ 있다가 없다가 해요. ”

 

“ 마신 거 말고, 먹은 게 있는지 물어봐. 지금. ”

 

 

베르닌은 소파로 갔다. 류드밀라가 이미 무릎담요로 왕재수의 몸을 덮어주고 있었다. 베르닌은 손으로 왕재수의 뺨을 쓸어보았다. 아주 뜨거웠다. 왕재수가 눈을 깜박였기 때문에 급하게 물었다.

 

 

“ 너 여기 와서 먹은 거 있어? 마신 거 말고, 먹은 거. 음식이든 뭐든. ”

 

“ 안 먹었어. ”

 

“ 아무 것도? ”

 

“ 으응... ”

 

 

그때 류드밀라가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하나 있어요! 감독님, 기억 안 나세요? 사과! 아까 그 사과!

 

“ 아... 사과 먹었어. ”

 

“ 사과라니! 무슨 사과! 어디서 난 건데! ”

 

“ 방에 있어서... 맛있었어. ”

 

 

류드밀라가 잠자코 티 테이블을 가리켰다. 사과 두 알이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빨갛고 반질거리는 예쁜 사과였다.

 

 

“ 류다, 저 사과 누가 가져온 거예요? ”

 

“ 모르겠어요. 와보니까 사과가 있었어요. 우리 감독님은 워낙 인기가 많으니까 너도나도 꽃이니 과일이니 케익이니 갖다 바치거든요. ”

 

 

베르닌은 전화기로 달려갔다. 의사에게 사과 얘기를 했다.

 

 

“ 남은 거 잘 보관하고 있어. 지금 갈 테니까. ”

 

 

류드밀라가 훌쩍훌쩍 울었다.

 

 

“ 내 잘못이에요, 누가 들어오는지 봤어야 했는데 오늘 감독님 휴가라고 해서 타치야나 이바노브나 방에 가서 차 마시느라 자리를 비웠었어요. 대체 누가 그랬을까요, 흐흑... ”

 

“ 당신 잘못 아니에요. 일단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

 

 

울고 있는 류드밀라를 뒤로 하고 베르닌은 왕재수의 손을 꼭 잡았다. 갑작스럽게 분통이 치밀어서 꾸짖었다.

 

 

이 바보야! 어디서 난 건지도 모르는 사과를 왜 먹어!

 

“ 네가 아무 것도 마시지 말라며. 목말랐어... 사과 좋아해. 맛있었어. 흑... 너 왜 자꾸 왔다갔다 해, 아이 어지러워. ”

 

“ 뭐가 왔다갔다 해, 나 가만히 있는데. ”

 

“ 막 빙글빙글 돌고, 왔다갔다 하고... 아유 이제 세 명 네 명 되네. 어, 이제 열 명 됐다. 자꾸 늘어나. ”

 

열 나서 그래. 눈 감고 있어. 의사 선생님 금방 올 거니까 조금만 참아. ”

 

“ 나 안 아파. 애들한테 갈래. 연습시켜야 되는데. ”

 

“ 시끄러워, 이 바보야! 내가 열 명으로 보인다며! 근데 어떻게 안 아파! ”

 

“ 아니야! 이제 안 보여! 하나도 없어! 소리만 들... ”

 

 

왕재수가 마취 주사라도 맞은 듯 다시 조용해졌다. 류드밀라가 엉엉 울면서 베르닌의 뺨을 찰싹 때렸다.

 

 

“ 이 악마! 금쪽같은 우리 감독님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

 

“ 저, 류다. 제가 안 그랬어요. ”

 

“ 당신네 KGB가 한 짓이잖아! 누가 모를 줄 알고! 그저께 돈키호테도 못 올리게 하려고 갖은 해코지를 다 하더니! 어흑, 난 왜 자리를 비웠을까... 왜 사과 먹게 놔뒀을까, 엉엉... ”

 

“ 아니에요, 당신은 아무 것도 몰랐잖아요. 의사 선생님 오시면 괜찮아질 거예요. 근데 알콜 약물이면 액체일 텐데 어떻게 사과에 들어 있을까... 주사기로 주입했을까? ”

 

아아, 이 살인자들 같으니!

 

 

류드밀라가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왕재수가 꿈틀거리더니 눈도 뜨지 않고 그녀를 꾸짖었다.

 

 

“ 류다, 조용히 좀 해요! 애들 놀라서 내일 공연 망친단 말이에요! ”

 

“ 지금 공연이 중요하냐고요! 사람이 이렇게 됐는데... ”

 

“ 지난번에도 팔 찢어졌을 때 애들이 울고불고 난리치다가 공연 말아먹었는데! 나 지금 피도 안 나고 아프지도 않으니까 애들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

 

“ 너 진짜 안 아파? ”

 

“ 안 아파! ”

 

 

왕재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깜짝 놀라며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 어, 아파... 너무 아파... ”

 

“ 안 아프다며! ”

 

“ 너무 아파, 엉엉. 여기, 여기, 여기 너무 아파. ”

 

 

왕재수가 몸부림치면서 목과 가슴과 다리를 쾅쾅 때렸다. 베르닌의 손을 끌어당겨서 자기 가슴 위에 올려놓고 마구 비벼댔다. 베르닌의 손등 위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끓는 물을 엎지른 것 같았다. 베르닌은 어쩔 줄을 몰랐다. 무섭기도 했고 괴롭기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왕재수는 다시 정신을 잃어버렸다.

 

 

잠시 후 스타브로프가 도착했다. 소파에 누워 있는 왕재수의 눈꺼풀을 벌려보고 맥박과 체온을 재고 입을 벌려서 목구멍 안쪽을 살폈다. 셔츠 단추를 모두 풀어서 피부 상태를 확인했다. 

 

의사는 베르닌에게 남은 사과가 있으면 달라고 했다. 베르닌은 떨리는 손으로 접시를 가져다주었다. 의사는 사과를 쥐고 꼼꼼하게 살폈다. 새빨갛게 반질거리는 표면을 쓸어보았다. 그리고는 굳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뭔지는 모르겠지만 껍질에 바른 것 같군. 그냥 알콜 계열이었으면 애가 먹기 전에 휘발돼 버렸을 테니 다른 약물과 섞었을 거야. 이 바보 같은 녀석, 도시에서 왔으니 이쪽 동네 사과치곤 색깔이 너무 빨갛다는 생각 같은 건 못했겠지. 여기 애였으면 의심했을 텐데. 이건 내가 가져가겠네. 무슨 약인지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 ”

 

“ 저, 선생님. 얜 괜찮을까요? 이렇게 아파하는 거 처음 봤어요. 헛소리도 하고 정신도 오락가락해요. 멀쩡했다가 헛소리했다가... ”

 

“ 스페호프가 약물 이름을 말했나? ”

 

“ 네. 근데 기억이 안 나요. L... 숫자... 0이 들어간 것 같아요. ”

 

“ 알아내. 당장. 그거 알아내서 병원으로 튀어와. 전화는 하지 말고. ”

 

“ 이러다 괜찮아지는 거죠? 국장이 그랬어요, 죽이진 않을 거라고. 그냥 좀 아프게만 할 거라고. 어흑... 나쁜 국장... ”

 

뭘 잘했다고 울어, 이 앞잡이 녀석아! 빨리 가서 약 이름 알아와! 뭔지 알기 전까진 주사도 못 놓고 약도 못 써. 난 얘 데리고 갈 테니까!

 

 

 

 

*    *    *

 

 

 

 

베르닌은 눈물콧물을 쏟으며 극장을 나왔다. 모든 신호와 속도를 위반하며 다리를 건너 순식간에 사무실까지 왔다. 국장실로 허겁지겁 달려가려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 맞아, 이러고 들어가면 국장이 분명 의심할 거야. 정신 차려야 돼. 국장한테 가면 안 돼! ’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사무실들은 거의가 텅 비어 있었다. 등록 부서 앞을 지나가는데 알렉산드라가 나왔다.

 

 

“ 어머, 다냐. 왜 그렇게 안색이 안 좋니? 무슨 일 있어? ”

 

“ 아... 아니에요. 앗, 선배님! 저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저... ”

 

 

베르닌은 급하게 주위를 살핀 후 물었다.

 

 

“ 선배님, 새로 맡으신 업무 중에 현장요원 물품 관리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맞아요? ”

 

“ 응, 맞아. 지난주에도 엄청 들어왔어. 오자마자 그거 장부 적고 대금 요청하느라 혼났어. ”

 

“ 약품도 있어요? ”

 

“ 응, 있어. 근데 약품이랑 무기 같은 건 장부를 따로 관리해. 기밀사항이라서. 왜? ”

 

“ 국장이 저한테 약품 이름을 하나 말해줬는데 까먹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요. 잊어버리면 혼날 텐데... ”

 

 

알렉산드라는 금세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장부 보면 생각나지 않을까? ”

 

“ 예,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근데 기밀사항이라면서 저 보여줘도 돼요? ”

 

“ 뭐 어때. 너 안 혼나는 게 더 중요해! 이깟 놈의 회사 내가 뭐하러 충성하니. 이리 와. ”

 

 

알렉산드라는 베르닌을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쪽 캐비닛을 열더니 장부를 한 권 꺼냈다. 최근 페이지를 펼쳤다.

 

 

“ 들어온 게 언제래? ”

 

“ 어,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오래 되진 않았을 것 같아요. 본부에서 쓰는 거라고 했거든요. ”

 

“ 응, 그럼 여기부터 봐. 나 약속 때문에 나가봐야 하는데, 다 보면 캐비닛 안에 넣어놓고 잠가놔. 열쇠는 여기 컵 아래 두고. ”

 

“ 고마워요, 선배님. ”

 

“ 고맙긴, 내일 보자. ”

 

 

알렉산드라가 나간 후 베르닌은 급하게 장부의 약품 목록을 살폈다. 지난주 목록에는 L로 시작하는 이름이 없었다. 조급해진 그는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어지러웠고 식은땀이 났다.

 

 

‘ 어떡하지... 빨리 찾아내야 되는데. 그냥 아픈 것도 아니고... 의사 선생님도 약이 뭔지 모르면 애를 치료할 수도 없다고 했는데. 혹시 새로 들여온 약이 아니고 우리 비품 관리실에 원래 있었던 게 아닐까? 현장요원용으로... 그치만 여긴 시골이라 현장요원이나마나 다들 그냥 땡땡이치는 분위기인데 그런 약을 쟁여둘 필요가 없었을 텐데... ’

 

 

베르닌은 미칠 것 같았다. 장부는 작년 가을부터 기록되어 있었다. 9월치까지 모두 뒤졌지만 L로 시작하는 약물은 없었다. 그때 갑자기 베르닌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L은 약품 이름이 아니었어! 그건 루뱐카(Lubyanka)를 가리키는 거야! 그건 분류목록 번호였어! 이름은 그냥 숫자로만 되어 있는 거야!

 

 

그는 장부를 다시 넘겼다. 1주일 전 목록에서 L-약품 카테고리를 찾아냈다. 루뱐카에서 반입한 약품이란 뜻이었다. 놀랍게도 숫자가 있었다. 세 자리 숫자가 있었고 오로지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0이 들어 있었다.

 

 

950. 맞아, L-950이라고 했어!

 

 

베르닌은 급하게 장부를 집어넣고 캐비닛 문을 잠갔다. 열쇠를 알렉산드라의 컵 아래에 쑤셔 넣었다. 정신없이 전화 다이얼을 돌리려다가 의사가 전화하지 말고 직접 오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는 급하게 뛰어나갔다.

 

 

 

*    *    *

 

 

 

 

왕재수는 얼굴과 목덜미와 팔에 새빨갛게 두드러기가 돋은 채 알아들을 수 도 없는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간호사가 주머니 같은 것을 몸에 대 주면서 열을 식혀주고 있었는데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옆에서는 스타브로프가 스포이트로 핏방울을 톡톡 떨어뜨리며 무슨 시약 검사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베르닌이 뛰어 들어오자 의사는 실험을 멈추고 거칠게 물었다.

 

 

“ 뭔지 알아냈나? ”

 

“ 950! 국장은 L-950이라고 했어요. L은 루뱐카의 머리글자였어요. 이제 된 거죠? 무슨 약인지 알았으니까 해독제 찾을 수 있는 거죠? ”

 

“ 950... L-950... ”

 

 

노의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몇 번이나 숫자를 입안으로 뇌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며 욕설을 내뱉었다. 얼굴에 패인 주름이 더 깊어졌다.

 

 

“ 저, 선생님. 왜 그러시나요? 그렇게 나쁜 약인가요? 국장이 그랬어요, 그 정도 분량이면 보통 사람들한테는 별 문제 안 된다고... ”

 

의심 가는 것들이 있긴 한데 정확하게 뭔지 모르겠군. 그 숫자는 별로 도움이 안 돼. KGB 살인마들이 쓰는 기호는 나도 몰라. 이름을 알아내야 해. 피 검사를 하고 있는데 알콜 계열이라는 것 외엔 너무 정보가 없어. ”

 

“ 저, 해열제 놔주면 안 되나요? 두드러기 완화해주는 약이랑... ”

 

“ 무슨 약을 먹었는지 모르니 아무 거나 놔주면 안 돼. 잘못하면 큰일 나. 죽이려고 작정한 거지. 더러운 놈 같으니. ”

 

 

베르닌은 겁에 질렸다.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에요, 국장이 그랬어요. 죽이려는 건 아니라고... 조금 아프게만 할 거라고 했어요. 겨우 사과 한 알 먹었는데 왜 죽어요? 선생님은 우리 시에서 제일 훌륭한 의사잖아요. 그런데 왜 무슨 약인지 못 알아내요? 얘 차트도 다 있잖아요, 무슨 약 써야 괜찮은지 다 아시잖아요. 엉엉, 제발 어떻게 좀 해보세요. ”

 

“ 그놈이 쓴 약물 이름! 그거 알아내야 돼! 그거 모르면 다른 약은 아무 것도 못 써! 그냥 계속 이렇게 놔두면서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단 말이야! 이 얼간이 천치야, 너 모스크바에 아는 놈 없어? 정보 얻어낼 놈 없냔 말이야! ”

 

 

베르닌은 하마터면 왕재수의 크레믈린 아저씨에 대해 얘기할 뻔 했다. KGB 출신인데다 지금도 본부를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했으니 연락만 하면 금세 모든 정보가 흘러들어올 게 뻔했다. 하지만 그렇게 높은 사람에게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 무서운 아저씨가 자기부터 죽여 버릴 것 같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워한다는 왕재수조차 말을 안 들으면 뼈도 부러뜨리고 마구 괴롭혔다고 했으니 자기처럼 하찮은 감시요원은 그 자리에서 없애버릴 게 뻔했다. ‘눈앞에서 내 귀염둥이가 약을 먹고 쓰러지게 놔두다니, 너 따위 천치는 모가지를 베어버리겠다!’ 하면서 정말 그의 목을 자를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베르닌은 자신을 호되게 질책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어떻게 이 상황에서 나 혼자 살자고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크레믈린 아저씨한테 연락을 해야 돼! 그 방법뿐이야! ’

 

 

순간 베르닌의 머릿속에 밝은 빛이 번쩍했다.

 

 

나타샤!

 

“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이 와중에 웬 여자를 찾아! ”

 

 

스타브로프가 화를 버럭 냈다.

 

 

“ 나타샤! 제 동기예요! 지난번 파티에 왔었어요. 루뱐카 본부에 있어요! 전화번호가... 그래! 전화번호 받았어! 잠깐만요! ”

 

 

베르닌은 호주머니를 뒤집어 수첩을 꺼냈다. 전화번호를 뒤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나타샤가 그에게 번호를 적어줬었다. 그 파티에서. 아르마니와 에르메스에 감탄하면서.

 

 

“ 여기 있다! 선생님, 잠깐만요. 전화 좀 쓸게요! 아, 안 돼... 선생님은 반동분자 리스트에 들어 있으니까 전화 도청될지도 몰라요. 저 밖에서 전화 좀 하고 올게요! ”

 

 

그는 병원에서 달려 나왔다. 근처 빵집까지 갔다. 빵집 앞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외전화가 가능한 부스였다. 토큰을 집어넣고 급하게 다이얼을 돌렸다. 나타샤가 과연 집에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나타샤는 미인이니 추종자와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동동 구르는 순간 나타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

 

“ 나타샤. 안녕, 저... 나 다닐이야. 다닐 베르닌. 기억나? 우리 지난 가을에 잠깐 봤잖아, 여기 가브릴로프 파티에서... ”

 

“ 어머, 다냐! 안녕! 오랜만이야! 어쩜 너 그때 나랑 커피 마시기로 해놓고 그냥 가버리고! 내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아니? ”

 

“ 아, 그때... 미안해. 그때 갑자기 급한 일이 터져서 그랬어. 미안해. ”

 

“ 그 동안 잘 지냈니? 너 모스크바 안 와? 보고 싶다, 다냐~ ”

 

“ 아... 그러게. 모스크바 가게 되면 꼭 한번 보자. 저, 있잖아, 나타샤.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

 

“ 뭔데? ”

 

“ 본부에서 쓰는 약물들 있잖아. 내가 지금 비품 정리를 하고 있거든. 근데 번호만 있고 이름이 없어서 너무 헷갈려서... 혹시 네가 알까 해서. ”

 

“ 아, 요원들이랑 실험실에서 쓰는 거? 맞아, 우린 번호로 기재하니까 다른 기관들에서는 못 알아듣더라. 근데 너는 같은 KGB인데 왜 몰라? ”

 

“ 어... 나는 그쪽 담당이 아니라서 몰랐어. 근데 이번에 분장이 좀 바뀌어서... 950번인데 혹시 알아? ”

 

“ 950? 글쎄, 나도 그렇게 말하니까 잘 모르겠네. 장부를 봐야 아는데 나 지금 퇴근해서... 내일 사무실 가야 알 수 있을 거 같아. 내일 아침에 내 자리로 전화할래? ”

 

“ 아... 내일 아침이면 늦을 것 같아. 어쩌지... ”

 

 

온몸이 새빨개져서 열이 펄펄 끓고 있는 왕재수를 떠올리며 베르닌은 쏟아지는 눈물을 억눌렀다. 그때 나타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근데 너네 지국에는 약물 색인 없어? 그거 본부에서 다 배포해줬을 텐데. 1월에도 수정본 인쇄해서 지부별로 다 보냈는데? 그거 보면 번호랑 이름 다 적혀 있잖아. ”

 

“ 색인... 1월... 아!!!

 

 

베르닌이 탄성을 질렀다. 나타샤가 뭐라고 하는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마터면 수화기를 그대로 내던지고 뛰쳐나갈 뻔 했다.

 

 

고마워, 나타샤. 정말 고마워. 우리 모스크바에서 꼭 보자! 저녁 잘 보내! ”

 

 

 

그는 급하게 차를 몰고 다시 사무실로 갔다. 자신의 자리로 달려갔다. 등 뒤의 캐비닛을 열었다. 온갖 책자들이 어지럽게 꽂혀 있었다. 나타샤의 말이 맞았다. 약물 색인이 있었다. 1월에 본부에서 보내온 자료였다. 그가 수령해서 접수 대장에 기록까지 했었다. 검정 표지에 ‘1982년 소비에트 연방 보안위원회 업무용 화학약품 색인’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책자를 찾아냈다. 갱지에 빽빽하게 약품 목록이 인쇄되어 있었다. 번호 순이었다. 그는 급하게 페이지를 넘겼다. 950번을 찾아냈다. 있었다. 이름이 있었다. 러시아어가 아니었다. 영어도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되어 있었다. 생긴 걸 보니 독일어 같았다. 일단 수첩에 옮겨 적었다. 혹시 몰라서 손바닥에도 적었다.

 

 

‘ 제발, 제발 조금만 더 버텨봐 이 바보야. 금방 갈게. 아프지 마. 제발... ’

 

 

베르닌은 의자를 쿠당탕 넘어뜨리며 정신없이 사무실을 달려 나갔다.

 

 

 

 

*   *   *

 

 

 

 

베르닌이 약물의 이름을 휘갈겨 적은 수첩을 내밀었을 때 스타브로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이 굳어졌을 뿐이었다. 곧장 왕재수의 침대로 다가가더니 팔목에 주사 바늘을 찔러 넣었다. 피를 뽑아냈다. 피가 계속 빨려나왔다. 베르닌은 공포에 질렸다.

 

 

“ 선생님, 왜 그러시는 거예요? 가뜩이나 아픈 애한테서 피를 그렇게 많이 뽑으면 어떻게 하나요! 빈혈이라도 오면... ”

 

“ 시끄러워. ”

 

 

노의사는 한결 냉정해져 있었다. 피를 잔뜩 뽑아낸 후 베르닌을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 너 O형이지? ”

 

“ 어, 예. 어떻게 아세요? ”

 

“ 내가 받아준 놈인데 왜 몰라! ”

 

“ 어... 진짜 대단하시네요. 선생님이 받아주신 애들 진짜 많잖아요. 근데 그 많은 사람들 혈액형을 다 기억하신단 말이에요? ”

 

“ 아니, 다는 기억 못해. 근데 네 녀석은 기억하지. 아기 때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다가 코가 깨져서 피 철철 나고 네 어머니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안고 왔었거든. ”

 

“ 어, 맞아요. 그랬다고 했어요. 그래서 콧대가 죽었다고 엄마가 안타까워하셨어요. 그것 때문에 장가를 못 가나 하고 자책하시고... ”

 

“ 시끄러워. 지난 일주일 동안 음주한 적 있어 없어! ”

 

“ 어... 없어요. 바빠서... ”

 

“ 아팠던 적은? 다른 질환은 없는 거 알고. ”

 

“ 저기... 지난번 출장 갔을 때 후두염. 그리고 레닌그라드에서 본 의사 얘기론 위염이랑 역류성 식도염... ”

 

“ 그건 됐고. 작년 검진 차트 보니까 간 질환이나 그런 건 없었고. 저쪽 가서 키랑 체중 좀 재봐. ”

 

“ 아니 왜요? ”

 

“ 빨리 재! 제냐, 이 녀석 좀 봐줘! ”

 

 

스타브로프의 병원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젊은 의사 예브게니가 다가와서 베르닌을 체중계로 인도했다. 베르닌은 몸무게를 쟀고 깜짝 놀랐다. 작년보다 3킬로나 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충격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브게니가 명확한 음성으로 말했다.

 

 

“ 선생님, 183.4센티미터, 81.2킬로그램입니다. ”

 

“ 흠, 좋아. 알았어. 너 저리 가서 준비해. 수혈 좀 해야겠어. ”

 

“ 수혈이요? 얘 O형이에요? ”

 

“ 앞잡이 감시꾼 주제에 그것도 몰라? ”

 

“ 다행이다... ”

 

 

베르닌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혈액형이 같아서, 수혈을 해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예브게니가 그를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다. 피를 약간 뽑는 것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심지어 소변 검사도 했다. 그리고는 또 무슨 실험을 했다. 1시간 쯤 후 고개를 끄덕였다.

 

 

“ 괜찮을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지금 병원에 O형 혈액이 없거든요. 저 정도 환자는 원래는 대도시로 데리고 나가야 하는데 레프 사벨리예비치가 절대로 다른 데로 내보내면 안 된다고 해서. 저 상태면 수혈도 그렇게 안전한 건 아니거든요. ”

 

“ 저, 제냐. 쟤는, 그러니까 미하일은 많이 위험한 거예요? 약을 많이 쓰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냥 아프기만 할 거라고 들었는데... ”

 

“ 굉장히 위험했어요. 맨 처음에 심폐소생 안 해주셨으면 그때 못 깨어났을지도 몰라요. 레프 사벨리예비치 얘기로는 저 분이 알콜 분해를 못하는 체질이라고 하시더군요. 수용소에서 안 좋은 약을 많이 맞아서 조금만 잘못하면 쇼크 일으킨다고. 아까 같은 약물은 소량만 먹어도 치명적이에요. 술도 입에 대면 절대 안 되는데 독물이라니요, 정말 위험하죠. ”

 

“ 그럼... 그럼 이제 괜찮은 거예요? 무슨 약인 줄 알았으니까 레프 사벨리예비치가 해독제도 뭔지 알겠네요? 이제 안 위험한 거죠? ”

 

“ 저, 잘 모르겠어요. 저도 그쪽은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요. 근데 어쨌든 열이 빨리 내려야 해요. 피도 일부러 뽑으신 것 같아요. 독소가 퍼지는 것도 막고 열도 내리려고요. 이쪽으로 오세요, 수혈 준비해야 하니까.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수혈을 했다. 왕재수의 팔로 자신의 피가 흘러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왕재수는 하얘진 얼굴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나마 두드러기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눈꺼풀이 푹 꺼진데다 입술이 부르터 있었고 가슴팍에는 심폐소생술 때문에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전혀 나아보이지 않았다.

 

 

수혈을 하고 난 후 예브게니가 그에게 초콜릿과 빵, 우유를 주었다. 베르닌은 그제야 허기를 느꼈다. 점심 이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정신없이 뛰어다녔으니까. 허겁지겁 빵을 먹고 우유를 마시고 초콜릿을 먹는데 스타브로프가 들어왔다. 왕재수의 체온을 재고 피를 약간 뽑더니 또 무슨 검사를 했다. 그리고는 왕재수의 코에 가느다란 튜브를 꽂아 넣었다. 튜브를 타고 짙은 녹색 액체가 흘러들어가자 왕재수가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괴로운지 얼굴을 찌푸리며 ‘응...응...’ 하고 가냘픈 소리를 냈다. 베르닌은 속이 뒤집힐 듯 구역질이 났지만 꾹 참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그게 뭔가요, 선생님? 해독제인가요? 왜 혈관에 안 놓고 코로 주입하나요? 진짜 괴로울 것 같은데... ”

 

“ 약물이 아니라서. 원래는 먹여야 하는데 지금 자기 힘으로 삼키지를 못하니 어쩔 수 없어. ”

 

“ 뭔데요? 그게 뭔데요? ”

 

“ 약초 달인 거. 넌 설명해줘도 모를 거야. ”

 

“ 왜 해독제를 안 놔주고 그런 걸 먹이는데요? ”

 

“ 왜 그러겠나, 이 앞잡아... 생각이란 걸 좀 해봐라. 해독제가 있으면 뭘 하나, 얘한테는 못 쓰는 약인데. 네 녀석은 그래, 그 망할 놈의 스페호프가 죽이진 않을 거라고 한 말을 그렇게 철석같이 믿는 거냐? 그 약은 수용소에서 얘한테 놨던 거야. 하긴 그땐 다른 것들도 잔뜩 섞었지. 거기서 그거 맞고 죽을 뻔 했어! 해독제에도 부작용 일으켜서 모스크바로 옮겼다고! 그걸 그 더러운 놈이 몰랐을 것 같나? 다 알고서 한 짓이야! 조금 아프고 말다니, 개소리 하지 마! 해독제 따윈 못 놔. 방금 준 게 전부야. 화학물질은 절대 못 써. 이걸로 열이 내리면 다행인데 안 내려가면... ”

 

 

의사가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욕을 했다. 굉장히 늙어 보였다. 베르닌은 스타브로프가 두 번이나 수용소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너무나 무서웠다. 더 이상 초콜릿을 먹을 수가 없었다. 두 손을 부여잡은 채 훌쩍훌쩍 울었다.

 

 

‘ 어떡하지? 열이 안 내려가면 어떡하지? 정말 잘못되면 어떡하지... 나 때문이야. 난 어제부터 알았는데. 국장 얘기 다 들었는데... 내가 못 막았어. 극장 가게 놔뒀어. 사과 먹게 놔뒀어. 다 나 때문이야. ’

 

 

베르닌이 울자 의사가 혀를 찼다. 분노가 좀 진정된 것 같았다.

 

 

“ 울긴 왜 울어, 못난 놈아. 좀 기다려볼 수밖에. ”

 

“ 열이 안 내리면... 그럼 얜 주, 죽나요? ”

 

“ 죽긴 왜 죽어! 안 죽어! ”

 

“ 그치만... 약도 못 쓰고... 흑... ”

 

“ 그때도 해독제 안 쓰고 다른 약 아무 것도 안 주고 오래오래 돌봐줬더니 혼자 일어났다고 했어. 그때보다 훨씬 적게 썼고 약 섞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여기 와서 맑은 공기 쐬고 몸도 나아졌으니까 괜찮아질 거야. 열만 좀 내리면... ”

 

“ 아까보다 열 내린 거 아니에요? 두드러기도 없어지고... ”

 

“ 그건 피 뽑아서 내린 거야. 그래도 아직 40도야. 적어도 2도는 더 떨어져야 돼. ”

 

“ 안 내리면... ”

 

“ 시끄러워! 내릴 거야. 안 내려가도 내리게 할 거니까 네놈은 이제 입 닥치고 꺼져! ”

 

“ 싫어요, 여기 있을래요. 흐흑, 얘 괜찮아질 때까지 있을래요. ”

 

“ 에잇, 망할 놈의 KGB 스파이 자식. 다닐 네놈은 신동이라고 소문났던 놈이 대체 왜 거긴 들어가 가지고! ”

 

엉엉... 저 그만 둘 거예요. 이런 나쁜 짓 하는 데인 줄 몰랐어요... 아무 잘못 없는 애한테 해코지하고 죽이려고 하는 곳인 줄 몰랐어요. 어헝... 으앙... 미하일, 제발 일어나. 엉엉... 잘못했어, 엉엉...

 

 

그때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시끄러워... 뭐라는 거야...

 

 

베르닌은 불에 덴 듯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 왕재수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시끄러워.

 

“ 너, 너 괜찮은 거야? 정신이 들어? 이제 안 아파? ”

 

너 왜 울어? 또 국장이 자른대? 벌목공... ”

 

“ 아니야, 안 잘라. 흑... ”

 

 

베르닌이 울음보를 터뜨리려는데 스타브로프가 그를 밀쳤다. 왕재수에게 바짝 다가가서 뺨을 살며시 토닥거리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 아가야, 추운지 더운지 말해보렴. ”

 

더워요.

 

“ 기분은 어떠냐? ”

 

쟤가 너무 시끄럽게 해요.

 

“ 그건 기분이 아니잖니. ”

 

둥둥 뜨는 것 같아요. 몸이 막 갈라져서 풍선들 되는 거 같아요. 풍선이 엄청 많아요. 점점 더 많아져요.

 

 

스타브로프가 왕재수의 맥박과 체온을 쟀다. 머리를 쓸어주더니 손을 꼭 잡아주었다. 왕재수가 좋아했다. 포르르 한숨을 쉬더니 도로 눈을 감았다.

 

 

“ 이제 푹 자렴. ”

 

쟤 왜 울어요?

 

“ 아니야, 안 울어. 나 안 울었어. 너 빨리 자. 자고 빨리 열 내려야 돼. ”

 

 

베르닌이 눈물콧물을 삼키면서 왕재수의 다른 쪽 손을 꼭 쥐었다. 여전히 불처럼 뜨거웠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조금 덜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

 

 

왕재수는 곧 다시 잠들었다. 스타브로프는 한숨을 쉬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베르닌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저, 이제 괜찮은 거예요? 깨고, 저도 알아보고, 말도 하고... ”

 

“ 안 괜찮아도 헛소리는 할 수 있어. ”

 

“ 그럼... ”

 

“ 열은 좀 내렸어. 30분만 더 기다려 보자. ”

 

 

그건 베르닌의 인생에서 가장 긴 30분이었다. 마침내 30분 후 의사가 왕재수의 체온과 맥박을 다시 쟀다. 그리고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 아주 위험한 상황은 넘겼구나. 고생은 많이 하겠지만 며칠 여기서 데리고 돌봐주면 천천히 나아질 거야. ”

 

“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

 

“ 너도 이제 그만 들어가거라. ”

 

“ 아니에요, 저 여기 있을 거예요. 제가 얘 보호자예요. 흑... 나을 때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

 

“ 이런 철없는 녀석 같으니. 출근은 안 하겠다는 말이냐? ”

 

“ 출근은 무슨 출근이에요! 사람 죽이려드는 나쁜 놈들하고는 일 안해요! 그만 둘 거예요! 국장... 내가 가만 안 둘 거예요!! ”

 

“ 이 멍충아. 네가 뭘 가만 안 둬. 무슨 힘이 있다고. 그냥 모른 척하고 출근해! 그래야 스페호프 그 개자식이 안심을 하지. 네놈이 그만둔다고 끝날 것 같아? 다른 놈을 붙이겠지. 진짜 악질적인 놈으로. 그러느니 네 녀석이 붙어 있는 게 낫지! ”

 

“ 그래요, 그건 맞는데요... 저 너무 괴로워서... 흑... ”

 

 

베르닌이 훌쩍훌쩍 울자 의사는 더 이상 그를 야단치지 않았다. 등짝을 두어 번 쓸어주더니 팔을 잡아당겼다.

 

 

“ 알았다. 오늘은 여기서 자렴. 그래도 너 보호자로는 등록 못시켜. 스페호프가 알면 의심받으니까. 일단 저녁 먹으러 올라가자. 얜 어차피 계속 잘 거고 제냐가 옆에서 봐줄 거야. ”

 

“ 전 저녁 안 먹을래요. 우유랑 빵 먹었어요. 여기 있을래요. ”

 

“ 이런 등신아, 그건 피 뽑아서 먹은 거고! 저녁 제대로 안 먹으면 너도 몸살 나고 그럼 옆에서 돌봐줄 수도 없잖아! 잔말 말고 따라와, 마누라가 저녁 해놨다니까 가서 같이 먹게. ”

 

 

그래서 베르닌은 스타브로프의 사택으로 갔다. 노의사의 아내인 마르가리타가 차려준 뜨끈한 수프와 고기파이를 먹었다. 마르가리타는 음식 솜씨가 아주 뛰어났지만 베르닌은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안 먹어서 몸살이 나면 왕재수를 돌봐줄 수 없다는 생각에 열심히 꾸역꾸역 먹었을 뿐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 베르닌은 의사를 따라 다시 병실로 내려왔다. 왕재수는 쇳소리가 섞인 숨결을 내뱉으면서 자고 있었다. 전혀 편해 보이지 않았다. 베르닌은 침대 곁에 의자를 바짝 붙이고 거기 앉았다. 왕재수의 손목을 잡고 자기도 모르게 투덜댔다.

 

 

“ 바보, 무슨 백설공주라도 되냐? 사과 예쁘다고 덥석 받아먹고. 하여튼 말도 더럽게 안 듣고. 분명히 내가 극장 가지 말고 쉬라 했는데! 씨... 너 두고 봐. 고양이 시켜서 쥐랑 바퀴벌레랑 곱등이 다 물어오라 할 거야! 검은 숲에 가서 뱀 껍질 주워 올 거야. 땅 속에서 잠자는 뱀들도 전부 파내서 잡아 올 거야. 많이많이 파올 거야! 진짜 혼내줄 거야! ”

 

 

발갛게 달아올라 있던 왕재수의 얼굴에 잠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베르닌은 혹시나 해서 물었다.

 

 

“ 미셴카. 너 깼어?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

 

 

왕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다. 손으로 뺨을 쓰다듬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깊이 잠들어 있었다. 베르닌은 투덜댔다.

 

 

“ 바보 멍충이. 백설공주 얘기만 들었구나. 그러니까 좋다고 웃지. 어휴... 하여튼 너란 놈은 정말... 에잇... ”

 

 

그는 왕재수의 손을 꼭 쥔 채 계속 투덜거렸고 그러다가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예브게니와 간호사가 와서 그를 옆쪽 침대에 뉘어 주었다. 밤중에 그는 여러 차례 깨어났고 그럴 때마다 스타브로프가 곁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안심하고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왕재수가 한 손에는 과일접시를, 다른 한 손에는 새빨간 사과를 들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춤이 너무 멋져서 그는 박수를 짝짝짝 쳤다. 그런데 왕재수가 춤을 추면서 사과를 먹으려고 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후다닥 달려갔다. 사과를 빼앗아서 바닥에 내팽개치고 마구 밟았다. 과일접시도 낚아채서 멀리멀리 던져버렸다. 왕재수는 짜증을 내면서 그를 꾸짖었다.

 

 

“ 아유, 왜 사과 못 먹게 하니! 나 얼마나 목말랐는데! ”

 

안 돼! 사과 먹으면 안 돼! 독 있어서 안 돼!

 

“ 그럼 나 뭐 먹어! 너 빨리 나 맛있는 거 해줘! 많이많이 해줘! ”

 

“ 알았어, 뭐 해줄까?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다 해줄게. ”

 

“ 보르쉬랑 펠메니! ”

 

“ 왜 하필 그거야! 깡통이랑 공장에서 나온 냉동 만두인데. ”

 

“ 그래도 우리 엄마가 해준 것만큼 맛있어. 빨리 해줘. ”

 

“ 그래그래. 우리 같이 보르쉬랑 펠메니 먹자. ”

 

 

그래서 베르닌은 꿈속에서 깡통을 따서 보르쉬를 데우고 냉동실에서 펠메니를 꺼내 삶았다. 그리고 왕재수와 마주앉아 맛있게 먹었다. 꿈속에서도 맛있는 걸 느낄 수 있다니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떻게 꿈에서 꿈인 줄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또 신기해하면서 계속 먹었다. 다음날 아침에 깨어날 때까지 그는 꿈속에서 왕재수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

 

 

   

 

 

 

FIN

- 2015. 4. 12 ~ 16 -

 

....

 

 

이야기는 22편으로 이어진다.

 

..

 

L-950은 내가 여러가지 특징을 조합해서 설정한 가상의 약물이다. 그러나 루뱐카를 비롯하여 소련의 정신교화 수용소 등지에서는 정치범의 교화를 위해 약물치료나 고문이 자행되곤 했다.

이번 21편은 사실 본편 우주와 연관이 있다. 미샤가 가브릴로프로 유배되기 전에 정신교화 수용소에서 재교화를 받고 또 L-950을 비롯한 약물 칵테일 요법으로 심신에 큰 타격을 받는 이야기를 전에 쓴 적이 있다. 가브릴로프 본편의 프리퀄이다. 상당히 우울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 중 두어 군데는 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한 적이 있다. 주로 그의 친구 일린의 시점에서 전개된 3부에서 발췌한 부분들이었다.

그 발췌문은 여기..

http://tveye.tistory.com/3613,
http://tveye.tistory.com/3221

 

..

 

중반부에서 베르닌이 전화하는 모스크바 동기 나타샤는 5편 '무도회에 간 베르닌'(http://tveye.tistory.com/3458)에서 등장한 적이 있다. 베르닌이 모스크바 대학 시절 짝사랑했던 상대이다 :)

 

 

..

 

서무 시리즈답지 않게 웃을 일이 없었던 에피소드이지만... 하여튼 22편으로~ 과연 왕재수가 나아질지... 그건 다음주에..

 

..

 

댓글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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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