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2

« 2025/2 »

  • 23
  • 24
  • 25
  • 26
  • 27
  • 28

'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5396

  1. 2015.06.25 손님도 없을텐데 얼마나 추울까.. 6
  2. 2015.06.24 힘든 수요일, 비슈네바와 슈클랴로프 화보 몇 장
  3. 2015.06.24 같은 곳, 다른 느낌 - 백야와 겨울
  4. 2015.06.23 빛 바랜 말라야 코뉴셴나야 거리 풍경, 조금 레닌그라드처럼 8
  5. 2015.06.21 잠시 : 표절에 대해, 춤추는 푸쉬킨에 대해 트로이와 이고리가 나눈 대화 49
  6. 2015.06.19 서무의 슬픔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결선 진출 요리 사진들 몇 장 71
  7. 2015.06.18 knights of dance 나머지 모두 보고 또 짧은 메모 2
  8. 2015.06.18 백야의 페테르부르크, 네바 강 4
  9. 2015.06.17 knights of dance 중 코르순체프와 이반첸코 영상 보고, 아주 짧게 2
  10. 2015.06.17 눈밭 산책하다가, 색채가 마음에 들어서
  11. 2015.06.14 더우니까 꽁꽁 얼어붙은 페테르부르크 사진들 2
  12. 2015.06.12 서무의 슬픔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78
  13. 2015.06.11 모스크바 공항 메도빅, 페테르부르크 공항 쁘띠치예 말라꼬 케익 2
  14. 2015.06.10 더위 쫓기 위해, 겨울의 러시아 사진 세 장 4
  15. 2015.06.09 간만에 루지마토프, 슈클랴로프 화보 몇 장(+ 자하로바, 로파트키나, 쉬린키나, 소모바) 2
  16. 2015.06.08 마트료슈카 넘어져 버렸네 2
  17. 2015.06.05 서무의 슬픔 # 24 : 시계탑 전망대에서 65
  18. 2015.06.04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의 황금빛 돔 2
  19. 2015.06.03 한겨울의 빛
  20. 2015.06.02 Knights of dance, 이반첸코/콜브/코르순체프 관련 마린스키 뉴스레터 기사(약간 번역)
  21. 2015.06.01 나도 보트 타고 운하 유람하고 싶다.. 2
  22. 2015.05.31 눈밭 위에서 더욱 환한 색채들 + 레냐에겐 아주 옛날 2
  23. 2015.05.29 다리 아래 오리들 옹기종기 2
  24. 2015.05.28 맑은 겨울날, 얼어붙은 네바 강 사진 몇 장 더 2
  25. 2015.05.27 서무의 슬픔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47
2015. 6. 25. 20:28

손님도 없을텐데 얼마나 추울까.. russia2015. 6. 25. 20:28

 

 

지난 2월, 페테르부르크.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맞은편의 미하일로프스키 공원 앞. 커피 트럭...

날씨도 춥고 진눈깨비까지 날려서 그나마도 드물게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들 발 동동 구르며 급하게 걸어가기 바빴다 ㅠㅠ 추워 보이는 카페 주인..

 

 

 

옆에 있는 기념품 키오스크... 여기서 길을 하나 건너면 기념품 시장이 있다. 관광 시즌에는 바글바글하지만 사실 겨울에는 손님도 없고 엄청 춥고 ㅠㅠ

꽁꽁 싸매고 앉아 손님 기다리고는 있지만 별 기대 안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인들.. 엄청 추웠죠?

 

 

:
Posted by liontamer

 

 

먼저 디아나 비슈네바.

 

이 사람 이름 쓸 때마다 비슈네바와 비슈뇨바 사이에서 심히 갈등함... 비슈뇨바가 맞는데.. 노어 전공까지 했으니 비슈뇨바로 표기해야 한다고 머리는 그렇게 말하고 내 손은 '그래도 비슈네바가 어감이 더 이쁘다...'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비슈네바로 쓰고 있음.. 영문 표기할때는 e에 역점을 표기하지 않아서 해외에서는 그냥 비슈네바라고 통하고 있다만.. 다음부터는 비슈뇨바로 써야지.

 

하여튼.. 지젤.

 

 

 

이건 백조의 호수.

사진사는 캡션에 나와있듯 Gene Schiavone

 

사진사 이름을 병기하지 않은 사진은 웹에서 얻은 거라서 ㅠ

 

 

 

줄리엣.

 

 

 

이제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꽃돌이 :)

이건 svetlana avvakum의 사진. 잠자는 미녀의 데지레 왕자.

누가 봐도 '나 왕자요~' 하는 자태.

 

최근 알리나 소모바와 함께 마린스키 3d로 잠자는 미녀 dvd 촬영을 했다. 요즘 마린스키 남성 무용수들 중 가장 '왕자'다운 무용수란 평을 듣는 사람이라 어울리긴 한다만... 전적으로 내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이 사람이 머리 빗어넘기고 고전 테크닉을 보여주며 왕자님을 추는 것보다는 솔로르나 알브레히트, 로미오 같은 역을 추는 게 더 좋다. 뭐 이건 내 발레 취향이 그런 쪽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발레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반듯한 고전발레들은 별로 재미가 없으니 그런 걸 생각하면 난 제대로 된 애호가는 아닌 것 같다)

 

 

 

해적의 알리. 상대역은 빅토리야 테료쉬키나.

 

그러니까... 데지레 왕자보다는 알리나 솔로르가 더 좋은 거지... 으음, 이것은 타이츠 대 아랍 팬츠! 아랍 팬츠가 더 좋아서인가 ㅠㅠ

 

 

 

이건 조지 발란신의 아폴로.

이 사람의 아폴로 화보는 마린스키 샵에서 사진도 두 장 사왔다. 화보로 보면 굉장히 아름답기는 한데 아무래도 내 개인적으로는 이 사람은 아폴로와는 살짝 안 어울리는 듯. 외모야 깎아놓은 듯 아름다우니 어울린다만...

아폴로 자체가 굉장히 딱딱하고 조형적인 발레인데 슈클랴로프는 일단 키도 별로 크지 않아서 세 명의 발레리나들을 줄줄이 엮어 파트너링을 하는 것도 어딘가 힘들어 보이고, 발란신의 차갑고 건조한 안무와 이 사람은 조금 거리가 있다. (오히려 이반첸코의 아폴로는 생각보다 근사했었다)

뭐 이건 그저 내가 발란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인지도... 그래도 이 사람이 춘 돌아온 탕자는 좀 보고 싶다.

 

:
Posted by liontamer
2015. 6. 24. 09:35

같은 곳, 다른 느낌 - 백야와 겨울 russia2015. 6. 24. 09:35

 

 

페테르부르크. 모이카 운하.

에르미타주가 있는 궁전광장에서 돌아나오면 곧장 나타나는 길목이다.

이건 2014년 여름. 백야 시즌.

비둘기 몇 마리 종종종..

 

 

 

햇살이 아주 눈부시고 뜨거운 전형적인 여름 페테르부르크 날씨였다. 그래도 이쪽은 그늘이라 선선...

 

 

그리고 이건 지난 2월... 같은 장소..

얼음 꽁꽁! 이건 운하가 아니라 인도!!! 내린 눈이 얼어서 스케이트장처럼 변했다 ㅠ

여기도 비둘기들 종종종.. 그런데 여름과 비교해보면 비둘기들이 불쌍해보인다 ㅠ

 

 

 

엉엉... 다시 가서 저기 산책하고 싶어.. 백야도 겨울도 다 그립구나

 

:
Posted by liontamer

 

 

지난 2월. 페테르부르크.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러시아 박물관 갔다가 나오면서 정신이 없어서 그랬는지 자주 갔던 로모노소프 가게를 못 찾아서 헤맸던 날이었다. 아주 습하고 싸늘한 날이었음. 길거리는 진창... 하여튼 말라야 코뉴셴나야 거리 풍경 한 장. 날씨가 안 좋아서 후지X 디카를 들고 갔었다. 날씨도 꿀꿀하고 흐려서 딱 옛날 레닌그라드 느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톤 다운해서 찍어봤다.

 

가운데 멀리 보이는 건 바로 카잔 성당. 이 거리에서 보면 절반만 보인다 :)

 

.. 이날 헤매다가 고생은 했지만 카페 두셰브나야 꾸흐냐를 발견했었다. 그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35, http://tveye.tistory.com/3509

 

 

:
Posted by liontamer

 

 

요즘 신경숙 표절 얘기로 시끌시끌하다. 부끄러운 일이다. 수치심을 알아야 한다. 당사자도, 출판사도, 문학계도 모두.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 경험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다른 작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문체가 닮아갈 수도 있다. 의도적으로 패러디를 하거나 인용을 하거나 오마쥬를 바칠 수도 있다. 후자와 표절의 영역은 어쩌면 아주 미묘하게 겹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런 미묘함의 영역도 아니다.

 

표절은 도둑질이고 수치스러운 행위이다. 작가로서의 양심을 저버리는 행위이다. 그런 짓을 하고 나면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못 견뎌야 한다. 그런데 안 그런 경우도 참 많은 것 같다.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타인의 텍스트를 해체하고 조립해 재축조할 수도 있다. 그것도 일종의 창작 행위이다. 중요한 것은 그때 그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누구에게서, 어떤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어느어느 부분을 인용했다. 누구에게 바치는 글이다 등등... 그 최소한의 행위조차 없이 타인의 창작물을 떼내고 가져가는 것은 범죄 행위이며 수치스럽고 더러운 짓이다. 경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작가는 진정한 작가가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래에 발췌한 글은 몇 년 전 쓴 장편의 중반부에서 가져왔다. 이전에 몇번 발췌한 적이 있는 미샤와 그의 친구 트로이의 장편이다. 배경은 1970년대 소련 레닌그라드. 심리적 화자인 트로이는 레닌그라드 대학의 영문학과 강사인데 학생 시절부터 친구들과 비밀 문학 서클 활동을 하고 있다. (미샤와 처음 만난 것도 이 서클에서였음) 발췌한 부분은 트로이가 그 문학 서클 친구들과 정례 모임을 갖던 중 생긴 일이다. 표절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그래서 생각나서 발췌해본다.

 

 

처음에 나오는 막심 쥬진스키란 인물은 이들의 서클 멤버이며 작가로 데뷔한지 몇 년 정도 된 사람이다. 갈랴, 료카, 이고리, 스베타, 코스챠(애칭은 코스칙)는 모두 트로이의 친구들이며 미샤의 친구들이기도 하다.

 

이 사람들의 대화에서 언급만 되는 알리사(애칭 : 알랴)는 트로이의 단짝 친구로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점에서는 영국의 소련 대사관에 파견을 나가 있다. (알리사의 이야기도 전에 한번 발췌한 적이 있다. 런던에서 사라져버린 미샤를 찾으러 갔다가 젊은이와 죽음을 추는 걸 봤다는 얘기이다 : http://tveye.tistory.com/2390 )

 

중간에 나오는 '미슈카'와 '미셴카'는 모두 미샤의 애칭이다. 트로이의 친구인 이고리는 영화학교 출신으로 레닌그라드의 영화사인 렌필름에서 촬영기사로 일하고 있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점은 1975년 10월이다. 미샤가 키로프 극장 3년차에 접어들었을 때이다.

 

쥬진스키가 표절한 작가인 부닌은 '그' 이반 부닌이다. 러시아 출신 작가로 혁명 후 망명했고 1933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여린 숨결,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 안토노프 사과 등의 작품이 있다. 여기서 쥬진스키가 표절한 작품은 그의 유명한 단편 '정결한 월요일'이다. 나 역시 미샤와 비슷한 문학적 취향을 갖고 있어 부닌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취향과는 별개로 부닌의 문학적 재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훌륭한 작가였다.

 

인용된 부닌의 문장은 파란색 궁서체로 표시했다. 내가 직접 번역한 것은 아니고, '행복한 책읽기'에서 번역출간한 '러시아 단편소설 걸작선', '양장선'님 번역본 인용. 325페이지. 

 

 

사실 발췌한 부분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표절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미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쥬진스키는 이 장편에서 이 부분 외에는 등장 비중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나름대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 장편을 쓸 때 나는 줄곧 재능과 욕망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10월에 갈랴 부부의 집에서 쥬진스키와 이고리가 대판 싸웠다. 발단은 쥬진스키의 새 소설이었다. 네프스키 거리에서 만난 남녀의 사랑과 일상을 다룬 소설이었는데 이미 두 권의 책을 출간해 의기양양해진 쥬진스키가 제 1장을 소리 높여 낭독하는 동안 이고리가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 시끄럽게 휘파람을 불어댔다. 쥬진스키는 30초 정도 참다가 원고를 내려놓으며 이고리에게 대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이고리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 부닌이잖아. 똑같잖아. ”

 

“ 뭐가! 어디가 부닌이야! ”

 

“ 첫 문장부터. 모스크바를 레닌그라드로 바꾼 거 밖에 뭐가 있어. ”

 

“ 웬 헛소리야! 난 부닌 좋아하지도 않아! 그 부르주아 나부랭이. ”

 

“ 난 아까 그 부분 외어줄 수도 있는데? 거리의 가스등에 차가운 불빛이 점화되고 상점 진열창에 따뜻한 조명이 들어오자 일과에서 해방된 모스크바는 새롭게 밤의 활기로 되살아났다.

 

 

쥬진스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고리가 말을 이었다.

 

“ 더 해줘?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 전차의 전깃줄이 치지직 소리를 내며 푸른 별을 수없이 뿌려대고 있었다. 넌 노란 별로 바꿨지. ”

 

“ 말도 안돼, 우연일 뿐이야. ”

 

“ 세상 어떤 놈도 우연히 부닌처럼 쓸 수는 없어. 망명 부르주아든 귀족 나부랭이든 부닌은 부닌이야. ”

 

“ 그래서 지금 내가 부닌을 베꼈다는 거야? ”

 

“ 그럼 아냐? ‘정결한 월요일’이잖아. 지금 교육받은 독자들 무시해? 하긴 네 독자들은 모를 수도 있겠다. 집단농장하고 콤비나트, 우주비행사 밖에 모를 테니까. ”

 

 

 

작가로서의 자존심에 엄청나게 타격을 입은 쥬진스키가 고함을 지르며 이고리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지만 빗나갔다. 곰처럼 떡 벌어진 체구의 이고리는 벌떡 일어나 쥬진스키의 멱살을 휘어잡더니 유도선수처럼 그를 바닥에 메쳤다. 운 나쁘게도 료카와 트로이는 그 지루한 낭독이 시작되었을 때 안주를 가지러 간다는 핑계로 부엌에 숨었고 코스챠는 술에 떡이 되어 ‘잘한다 잘한다’ 하고 소리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그들을 떼어놓으려고 달려든 사람들은 여자들 뿐이었다. 스베타가 부엌으로 달려와서 소리쳤다.

 

 

“ 이봐 사나이들, 빨리 와줘! 이고리가 막심을 깔아뭉개고 있어! ”

 

 

료카와 트로이가 달려가 간신히 둘을 떼어놓았다. 눈에 커다랗게 멍이 들고 입술이 터진 쥬진스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고리와 나머지들을 싸잡아 욕했다. 너희들은 모두 실패자들이며 성공한 작가인 날 질투해서 트집을 잡는 것 뿐이라고 악을 썼다. 타냐에게서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트로이는 원고뭉치를 집어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 그만해, 막심. 부닌 맞잖아. ”

 

“ 너까지 헛소리야! ”

 

“ 뒷장은 나보코프한테서도 따왔네. ”

 

 

다시 폭발한 쥬진스키가 트로이에게 달려들어 머리로 들이받으려는 것을 료카가 말렸다. 집 주인이자 평화주의자답게 상처받은 작가를 어르고 달랬다.

 

 

“ 쟤네 취해서 그런 거야, 네가 참아. 네 문장이 좋아서 그렇게 보였나보다 하고 생각해. ”

 

“ 문장이 좋긴! 부닌하고 나보코프 빼면 프라브다 선동 칼럼이야! ”

 

 

이고리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분노한 쥬진스키는 료카를 거칠게 밀치고 재킷을 주워 입더니 원고뭉치를 소중하게 한 팔로 끼고 집을 뛰쳐나갔다. 당황한 료카가 그를 잡으러 나가려는 것을 갈랴가 말렸다.

 

 

“ 놔둬,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

 

“ 다시 안 오면 어떻게 해. ”

 

“ 안와도 돼, 표절해놓고 잘난 척이라니. 속이 다 시원하네. “

 

 

료카는 난처한 얼굴로 아내와 친구들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 음, 사실 파스테르나크도 있었던 것 같아. ”

 

“ 그래, 네 번째 문장. ”

 

 

그들은 다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씁쓸하고 우울한 웃음이었다. 만취해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 코스챠만이 투덜댔다.

 

 

“ 뭐야, 자기들끼리 놀다가 웃고. 막심은 어디 갔어. ”

 

“ 그냥 잠이나 자. ”

 

“ 알랴가 보고 싶어. 알랴 불러와. ”

 

“ 알리사는 런던에 있잖아. 불쌍한 코스칙, 이제 그만 잊어. ”

 

“ 내가, 내가 알랴 보러 런던 갈 거야. 밀, 밀항해서라도 가야지. 아니면 그래, 미슈카, 우리 미슈카 트렁크에 숨어서 갈 거야. ”

 

“ 걔도 런던은 못 갔잖아. ”

 

“ 조만간 갈 거 아냐, 우리 중 제일 잘난 앤데. 잘 보였다가 따라가야지. ”

 

뭐 제일 잘나긴 했지. 그나마 오늘 걔가 없어서 다행이다. 이 꼴을 안 봐도 돼서. ”

 

“ 미샤는 부닌 별로 안 좋아해. 나보코프도. ”

 

 

트로이의 말에 이고리가 픽 웃었다.

 

 

아, 그래. 걘 도스토예프스키, 안드레예프, 바벨, 아흐마토바 뭐 그런 취향이지. 젊은 녀석이 칙칙해가지고. 근데 난 그 얘기 한 거 아냐. 걘 진짜 천재잖아, 걔한테는 쥬진스키가 저런 짓을 하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아. 우리 춤추는 푸쉬킨은 재능 없는 놈들이 몸부림치는 걸 이해 못할 거야. 그거 좀 슬프잖아. ”

 

 

트로이는 친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네가 그런 생각도 하는 줄 몰랐는데. ”

 

“ 한때는 나도 에이젠슈테인처럼 될 줄 알았지. 근데 재능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걸 알고 얼마나 절망했는지 알아? 난 기껏해야 촬영 기사밖에 안돼. 좀 더 가면 편집자까진 되겠지. 근데 그게 전부야. 쥬진스키가 능력도 없는 주제에 동맹에 빌붙어서 책을 내고 있는 건 그 새끼한테 자존심이란 게 아예 없기 때문이야. 병신 같은 놈. 그런 놈들이 책을 내고 있어, 버젓하게 작가동맹에 등록되어 있다고. 그러니까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그래서 난 우리 미셴카를 좋아하지. 아니, 사랑해. 숭배한다고. 걘 타고났어. 하늘이 내려준 애야. 온통 반짝거리는 놈이라구. 그 자식 성격은 뭐, 아주 많이 문제가 있지만. 그런 재능을 갖고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냐, 그것도 이 나라에선. 그러니까 우리가 잘해줘야 돼. ”

 

 

트로이는 이고리에게도 그런 고민이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고리는 언제나 단순하고 쾌활한 친구였고 도량이 넓었다. 자기 일에 열심이었고 동료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았다. 재능에 대해 고민할 것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정말로 우중충하고 미지근하기 짝이 없는 자신에게나 어울릴 고민이었다. 하지만 트로이는 그에게 다른 것을 물었다.

 

 

“ 너도 알리사처럼 얘기하네. 걔 문제가 대체 뭔데? ”

 

“ 아, 문제가 많지. 원래 그런 애들은 전부 문제가 있어. ”

 

 

한순간 트로이는 이고리가 미샤의 성 정체성에 대해 눈치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이고리도 그와 자는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망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고리는 한숨을 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 너도 걔 좀 잘 봐. 안 그러면 정말 언제 다리에서 뛰어내릴지 몰라. ”

 

“ 앞날이 창창한 애를 놓고 왜 그런 말을 해. ”

 

“ 정말 몰라서 그래? 요원들이 따라다녀, 그것도 대낮에. 차라리 그게 전부였으면 좋겠다. ”

 

“ 또 뭐가 있는데? 다 터놓고 말해. ”

 

 

차가운 공포를 느끼며 트로이가 이고리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이제 이고리가 얘기할 것이다. '걔는 정상이 아냐. 남자를 좋아하거든. 차이코프스키처럼. 그 데이빗 보위처럼. 그런데 너도 마찬가지 아냐? 다 알고 있었어. 친구라서 입 다물고 있었을 뿐이야, 알리사처럼. 우린 다 알아.'

 

 

담배 연기를 훅 내뿜고 나서 이고리가 화난 목소리로 불쑥 말했다.

 

 

“ 우리 소품 창고에서 밧줄로 목을 맸어. 밤에. 편집실에서 영화 보다가 내가 조는 사이에 나가서. ”

 

 

충격으로 입을 벌린 트로이를 우울하게 응시하며 이고리가 말을 이었다.

 

 

“ 걱정 마, 내가 빨리 발견했으니까. 어쩐지 그날 기분이 이상했어. ”

 

“ 언제? ”

 

“ 작년에. 12월에. ”

 

“ 로미오와 줄리엣 때? ”

 

“ 그래, 그맘때. ”

 

“ 왜... 다 잘되고 있을 때였잖아. 뭐가 문제였는데... 아무 말 안해? ”

 

너도 걔 알잖아. 말 안해, 절대로. 나도 모른 척 했어. ”

 

“ 내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런 기색 없었어. ”

 

“ 그렇겠지. 우리 같은 놈들이 걔한테 대체 뭐라고. ”

 

 

트로이는 이고리에게서 담배를 빼앗아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평소에는 거의 피우지 않았지만 견딜 수가 없었다. 12월, 거의 1년 전이었다. 그때 미샤는 그의 집에서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한 침대를 쓰고 있었다. 지금이나 다름없이.

 

 

“ 그때 한 번도 아냐. 난 그런 애들 알아. 영화학교에서도 본 적 있어. 제일 뛰어난 애들이 가장 못 견뎌. 걔 손목엔 칼로 자른 자국이 있지. 눈에 잘 띄지 않을 뿐이야. ”

 

“ 아니, 그럴 리 없어. 춤추다 다쳤을 거야. 무대에서 떨어진 적이 있으니까. 팔이 부러졌었어. ”

 

“ 미샤한테 너무 환상을 갖지 마. 그래봤자 무대에 올라가지 않을 땐 아직 애니까. 스무 살이 됐어도 애야. 걘 보기만큼 강하지 않아. 그래도 네 말은 들을지도 몰라. “

 

“ 누구 말도 안 들을 걸. ”

 

“ 그래도 그때 딱 한 마디밖에 안했어. 너한테 얘기하지 말라던데. ”

 

 

트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어쩌면 걔는 떠나야 할지도 몰라. 때가 되면 가야 할 거야.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아무 위험 없이 잘 건너갔으면 좋겠어. 미국이든 어디든. ”

 

“ 조용히 해. 그런 말 다른 데선 절대로 하지 마. ”

 

“ 안하지, 내가 미쳤냐? ”

 

“ 여기서도 하지 마. 다시는. ”

 

 

이고리는 놀란 눈으로 트로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그만두고 담배를 창틀에 비벼 껐다. 그때 트로이가 주먹으로 유리창을 깼다. 박살난 파편이 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 세 번 쳤다. 이고리는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소파로 데리고 가서 술을 먹여 재웠다. 다음날 트로이는 직접 유리창을 갈아 끼우고 갈랴와 료카에게 사과했다. 마음 좋은 부부는 신경 쓰지 말라고 그를 위로했다. 어차피 모임에 오는 친구들은 다들 고주망태가 되기 일쑤였고 일 년에 두어 번은 꼭 창문을 깼으니까.

 

..

 

 

글 남겨주시면 많은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서무의 슬픔 25편은 분량이 길어서 두 토막으로 자른 후 지난주에 1부를 올리고 이번에 2부를 올리게 되었다. 쓸 때는 이렇게 파트를 나눌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에 잘린 느낌이 들긴 하지만 ㅠㅠ

 

메르스 불안증은 갈수록 확산되고 있고, 기쁜 뉴스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시기이다. 요리대회에 나가 좌충우돌하는 단추와 맛있는 음식들로 기분 전환하세요~

 

 

**  음식 이름 두어 가지

 

- 샤실릭은 중앙아시아 쪽에서 유래된 꼬치구이로 양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등을 이용한다.

 

- 피로그는 러시아의 커다란 파이이다. 껍데기가 덮여 있고 안에는 다양한 속을 넣을 수 있다. 복수형은 피로기. 조그만 파이는 지소형으로 피로슈카라고 한다. 러시아 피로그는 참 맛있다. 솜씨좋은 주부들은 피로그 안에 여러겹의 속을 넣기도 한다.

 

 

** 이번 편은 1부에서 이어지는 내용이기 때문에 1부를 먼저 보셔야 합니다~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가브릴로프 천하일미 요리대회에 등떠밀려 출전한 베르닌... 어찌어찌 엉망인 요리를 완성은 했으나... 과연 심사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5

 

 

 

 

 

서무의 슬픔

-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사회자는 예쁘게 손질한 머리를 찰랑대면서 능숙하게 카메라 앞으로 나섰다. 역시 방송계에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 자, 그럼 이제부터 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심사에 공정을 기하기 위해 참가자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야 하며 누구도 자기 요리에 대한 설명이나 변명은 할 수 없습니다. 요리는 요리로 말하는 법이니까요. 참가자가 많기 때문에 먼저 심사위원 세 분이 돌아가면서 요리를 시식한 후 논의를 통해 결선 진출자 6명을 결정하고 그 중에서 3위까지 시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심사위원 세 분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드미트리 블리즈네초프 의회 의장님, 미하일 야스민 가브릴로프 극장 감독님, 그리고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편집장님입니다. 심사위원장은 연배 순으로 블리즈네초프 의장님이 맡게 되겠습니다. ”

 

 

베르닌은 블리즈네초프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체육대회가 생각나면서 흙먼지와 땀범벅과 벌목공 협박이 절로 떠올랐다. 의장이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스페호프와는 찰떡궁합이라고들 했다. 스페호프의 승부욕이 요리대회까지는 미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렐랴는 이미 조리대 위의 음식들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우아한 손놀림과 함께 어떤 식으로 시식을 할지 나머지 두 명에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왕재수는 이미 너무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조리대 위에 늘어선 음식들 태반이 가브릴로프 특유의 기름진 고기 요리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참가자는 모두 30명이었다. 공정성을 위해 각자 30개의 요리를 모두 시식해 봐야 한다는 렐랴의 주장에 대해 블리즈네초프는 시간도 없고 요리도 너무 많으니 한 사람당 10개씩의 요리를 맛보고 그 중 2개씩 추천을 하여 결선 진출자를 가리자고 했다. 둘 중 어느 쪽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자가 끼어들었다.

 

 

“ 어머나, 시간이 없는데 아직 심사 방식을 결정하지 못하셨군요. 그러면 다수결로 해야죠. 미샤가 두 가지 중 하나로 결정을 해주시죠. ”

 

 

왕재수는 렐랴에게 사과하는 시선을 던지면서 대꾸했다.

 

 

“ 심사위원장 의견대로 하죠. 그게 더 효율적일 것 같네요. ”

 

 

렐랴는 좀 실망한 것 같았지만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블리즈네초프 쪽을 선택한 이유는 효율성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오로지 기름기 뚝뚝 흐르는 음식을 어떻게든 덜 먹어보려는 심산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세 명의 심사위원들은 각 10개씩의 조리대를 돌며 시식을 시작했다. 베르닌도 고개를 쭉 빼고 다른 사람들의 근사한 요리를 구경했다. 의장은 짭짭 냠냠 후룩후룩 소리를 내며 음식을 크게 덜어서 먹었고 렐랴는 요리마다 우아하게 접시에 덜어서 냄새를 먼저 맡은 후 여러 군데를 조금씩 다 먹어 보았다. 그리고 왕재수는 음식의 외양을 먼저 힐끗 살핀 후 나이프와 포크로 딱 한 군데만 썰어내서 천천히 먹었다.

 

 

운 나쁘게도 왕재수는 자리를 잘못 잡았는지 아르카지의 보르쉬를 시식하게 되었다. 사발 앞에 멈춰선 왕재수는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국자로 국물을 한번 휘저었고 건더기 약간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걸 보자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더니 아주 극소량만을 접시에 덜어서 꼭 고양이처럼 혀끝으로 국물을 축여보더니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접시를 내려놓았다. 물을 몇 모금이나 꿀꺽꿀꺽 마시고 입을 흔들었다. 그때부터는 엄청나게 심기가 상한 듯 남아 있는 조리대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세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심사위원들은 조리대에 붙어 있는 이름표도 꼼꼼하게 보면서 수첩에 열심히 적고 있었지만 왕재수는 이름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블리즈네초프 의장의 속도가 제일 빨랐다. 순식간에 열 개의 음식을 모두 맛보더니 다른 쪽 조리대들을 서성거리며 한 바퀴 돌고 이름표를 살피고 렐랴와 왕재수에게 참가자 이름표를 가리키며 뭐라뭐라 속닥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건 뭐지? 음식도 엉망인데 심지어 이름표도 없네. 이런 건 실격 처리해야 하지 않나?

 

 

심사위원들과 사회자뿐만 아니라 참가자들도 모두 의자에서 일어나 대체 뭔가 하고 시선을 던졌다.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의장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자신의 오믈렛 접시였기 때문이다. 렐랴도 다가오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 어머나, 요리는 둘째 치고 정말 이름표가 없네요. 어떻게 된 거지? ”

 

 

베르닌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쭉 빼고 보니 정말 조리대 앞에 매달려 있던 자신의 이름표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재료를 구하러 뛰어다닐 때나 막판에 우왕좌왕했을 때 떨어져버린 것 같았다. 자기 거라고 손을 들어야 하나 망설이는데 블리즈네초프 의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건 실격입니다! 어디 이런 망측한 외양의 달걀쌈 따위를 올려놓지를 않나, 이름표도 없고!

 

 

렐랴도 곰곰 생각하는 듯하더니 의장의 말에 덧붙였다.

 

 

“ 이름표가 없는 걸 보니 아마 이건 참가자들 중 하나가 망친 요리를 빈 조리대에 올려놓은 모양이에요. 어제 받은 참가자 명단을 보면 이 30번 조리대는 비어 있었거든요. 당신 생각은 어떠세요, 미샤? 21번에서 30번은 당신 심사 담당이잖아요. ”

 

 

다른 음식들을 맛보느라 떨어져 있었던 왕재수가 귀찮다는 듯 다가오더니 오믈렛 접시를 힐끗 보았다.

 

 

“ 난 이름표 없어도 상관없는데. 그게 꼭 실격 사유까지 되는 건지... 하여튼 음식이 있으니 만든 사람도 있을 거 아니에요. ”

 

아니, 미하일, 그게 무슨 소리요! 당연히 실격이지! 소속기관과 이름이 없는 출품작은 자격 요건 미달이라 이겁니다! 웬만하면 이건 제외하고 결정하는 게 좋겠어요. ”

 

 

블리즈네초프가 훈계하는 어조로 말했다. 남에게 훈계 듣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게 분명한 왕재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 뭐 그럼 그러시든가요. 어차피 맛도 없겠지 뭐. 다른 것도 다 엉망인데. 그래도 진짜 맛있는 거 하나 찾았어요. 그나마 먹을 만한 거 하나쯤 더 있고. 그게 전부더라고요. 이거라고 맛있을 리가... ”

 

 

그래서 오믈렛은 실격되는 것으로 결론이 나는가 싶었지만 가장 열성적인 렐랴가 참가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 잠깐만요, 그래도 마지막으로 확인해봐야겠어요. 이거 만든 분 있으면 손 좀 들어보세요! ”

 

 

베르닌은 보안위원회 대표의 명예를 걸고 손을 들어야 하나 10분의 1초쯤 고민했지만 곧 깔끔하게 포기했다. 심사위원들이 모두 이게 요리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망측한 외양의 달걀쌈’이란 소리까지 들은 판국에 자기가 만든 거라고 나서기가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특히 왕재수에게 발각되면 며칠 내내 얼마나 들들 볶을지 눈에 선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기 때문에 렐랴도 포기했다.

 

 

“ 좋아요, 그럼 이건 일단 심사 대상에서 제외해 주세요, 미셴카. 다 고르셨나요? ”

 

“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더라고요. ”

 

“ 네, 저도 다 골랐어요. 의장님도 다 고르셨나요? ”

 

“ 난 이미 마음의 결정을 했죠. 다른 음식들을 먹어볼 필요도 없을 겁니다. 두 분도 내가 고른 걸 맛본다면 이견 없이 우승이라고 할 테니까요. ”

 

 

별로 하는 일도 없었던 사회자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 자, 그럼 세 분 모두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 같으니 요리를 두 개씩 선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맨 앞의 심사 테이블로 각각 선택하신 요리 접시를 가지고 나와 주십시오. ”

 

 

참가자들 모두가 숨을 죽였다. 과연 어떤 요리들이 결선에 진출하게 될지 두 손을 부여잡고 가슴을 졸였다. 베르닌도 이미 실격은 했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고개를 뽑았다. 예상 외로 왕재수가 제일 먼저 접시 두 개를 들고 나와서 심사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곧이어 블리즈네초프가 한가운데에 자기가 고른 접시들을 놓았다. 마지막으로 렐랴가 나왔다. 테이블 위에 여섯 개의 접시가 가지런히 놓였다.

 

 

“ 자, 그러면 의장님부터 선정 요리를 소개해 주시고 심사위원들 모두가 맛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

 

“ 에, 그러죠. 먼저 이 키예프식 커틀릿! 바로 예산국 대표 조야 브릴료바의 요리입니다. 조야의 음식 솜씨는 가브릴로프 공공기관 내에서는 워낙 유명한 터라 굳이 소개가 필요 없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키예프식 커틀릿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닭고기 안에 넣는 버터와 기름이 얼마나 촉촉하고 부드러운지, 그리고 튀김옷이 얼마나 공처럼 잘 부풀어 올랐는지, 그리고 그 맛이 얼마나 고소한지 아니겠습니까! 자, 렐랴, 미하일. 내가 직접 썰어드리죠. 한 번 맛을 보면 내가 왜 이 커틀릿을 골랐는지 대번에 이해가 될 겁니다. ”

 

 

블리즈네초프는 얼굴까지 붉혀가며 열성적으로 브릴료바의 커틀릿을 칭찬했다. 모양새를 보니 근사했다. 황금빛으로 튀겨진 타원의 공 모양은 완벽했고 나이프로 가운데를 슥 하고 썰자 하얗게 익은 닭고기와 그 안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버터와 허브와 치즈가 참으로 부드러워 보였다. 채를 썬 후 달달 볶아서 기름에 버무려 놓은 당근과 양배추도 맛있을 것 같았다. 렐랴는 속이 가장 꽉 차 있는 가운데 토막을 접시에 덜어서 포크로 우아하게 먹어 보았다. 왕재수는 렐랴처럼 적극적으로 굴지 않았기 때문에 의장이 직접 접시에 고기를 얹어 주었다. 당근 볶음도 잔뜩 곁들여 주었다. 왕재수가 포크질을 하는 것을 보면서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저 녀석 튀긴 커틀릿 안 먹는데... 심지어 안에 버터랑 치즈까지 잔뜩 들어 있으니... 근데 진짜 맛있겠다... ’

 

 

접시와 포크를 내려놓은 후 렐랴가 고개를 끄덕였다.

 

 

“ 음, 맛있네요. 키예프 커틀릿은 잘못 튀기면 닭고기가 너무 익어서 퍽퍽하거나 질겨지기 마련인데 버터에 기름을 섞고 거기에 치즈를 가미해서 촉촉함을 유지했어요. 버터 덕분에 풍미도 살았고요. 자칫 느끼해질 수 있는 것을 파슬리를 비롯한 허브들을 넣어서 괜찮았어요. 곁들인 당근도 설탕과 기름으로 마리네이드해서 볶은 것 같군요. 우리 가브릴로프 입맛에 잘 맞는 맛있는 요리였어요. ”

 

 

의장은 껄껄 웃었다. 류드밀라의 말대로 브릴료바를 아주 밀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렐랴의 심사평에 대만족했는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왕재수를 채근했다.

 

 

“ 그래, 우리 감독님은 이 훌륭한 요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왕재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 고기가 퍽퍽하지 않은 건 장점일지 모르겠지만 이건 과유불급이에요. 버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풍미를 살릴 수 있고 촉촉함도 유지할 수 있는데 해바라기유를 이렇게 많이 섞다니. 원재료인 닭고기의 맛보다 기름과 버터 맛이 더 강해요. 아직도 입안이 미끌미끌한 것 같다고요. 게다가 이렇게 기름진 요리에 가니쉬마저 기름에 볶은 당근을 곁들이다니... 최소한 당근과 양배추를 마리네이드할 때 식초라도 좀 섞었으면 느끼함이 덜했을 것 같군요. ”

 

 

의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왕재수를 쳐다보더니 잽싸게 자기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 흠, 역시 미하일은 대도시 출신이라서 그런지 이렇게 풍부한 맛의 요리는 많이 드셔보지 않은 것 같군요. 이것은 정통 가브릴로프식 요리지요. 우리의 전통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훌륭한 요리입니다. 자고로 기름과 버터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튀김옷을 보면 알맞은 황금빛에 얼마나 겉이 바삭하면서도 안이 부드러운지 모릅니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온다 이겁니다. 정말이지 이런 요리를 매일 얻어먹고 있는 조야의 남편이 부러울 지경입니다. 다른 요리들도 훌륭하겠지만 사실 이 커틀릿이야말로 최강의 우승 후보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남은 커틀릿을 제가 다 먹어도 되겠지요, 렐랴? ”

 

“ 네, 그건 상관없는데 다른 요리도 맛을 보셔야 하니 조금 있다가 드시는 게 어떨까요? ”

 

 

여전히 공정성을 최우선시하는 렐랴가 조바심을 내며 의장을 저지했다. 그리고는 블리즈네초프가 고른 두 번째 요리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아까보다는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기세 좋게 의장이 두 번째 접시를 가리켰다.

 

 

“ 이것은 삼림국 대표 클라우디야 풀코바의 양고기 샤실릭입니다. 샤실릭이야 뭘로 만들어도 맛있지만 그래도 역시 최고는 양고기가 아니겠습니까. 숯도 없이 이런 실내의 가스렌지와 오븐만으로 샤실릭을 구워낼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가상하고 또 맛도 진짜 야외에서 구운 샤실릭 같다 이겁니다. 붉은 양파를 사이사이 끼워서 양고기의 누린내도 감쪽같이 잡았고 특히 익힌 정도가 예술이죠. 아주 부드럽고 촉촉한 것이 일품입니다. 역시 샤실릭은 이렇게 꼬치를 들고 손으로 먹어야 제 맛이죠. 자, 한 꼬치씩 드셔보시죠. ”

 

 

베르닌은 왕재수의 ‘한 조각도 아니고 한 꼬치라니, 미쳤냐!’ 하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을 보고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렐랴는 의장이 권하기 전에 이미 모범적으로 꼬치를 손에 들고 먹음직스러운 갈색으로 그을린 양고기와 붉은 양파를 먹어보고 있었다. 손으로 꼬치를 들고 먹는데도, 심지어 도톰한 입술 근처에 양고기 육즙이 흘러내려 살짝 묻었는데도 렐랴는 너무너무 매력적이고 예뻐서 베르닌은 잠깐 심장이 두근거렸다. 주위를 보니 다른 남자 참가자들도 입을 헤 벌리고 렐랴를 쳐다보고 있었다. 렐랴는 주의 깊게 맛을 보면서 먹었지만 꼬치 하나를 전부 해치우지는 않았다. 반쯤 먹고 난 후 손수건으로 입을 닦고 물을 좀 마셨다.

 

 

그러는 동안 왕재수는 포크로 양고기 한 점과 양파 한 점을 빼내서 천천히 먹었다. 베르닌은 항상 왕재수가 양고기를 먹는지 안 먹는지 궁금했었다. 양고기는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었고 까탈스러운 왕재수의 식성을 두고 모험을 하기 싫어서 사본 적이 없었다. 잠시 후 왕재수는 접시에 꼬치와 포크를 내려놓고 렐랴처럼 물로 입을 헹궜다. 그리고 짤막하게 평을 했다.

 

 

“ 누린내를 다 잡은 건 아니에요. 민트 젤리나 고수를 썼으면 더 좋았을 걸 그랬어요. 익힌 정도는 나쁘지 않고요. 하지만 샤실릭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숯불에서 오는 맛인데 그게 없는 게 아쉽군요. ”

 

 

렐랴가 곧장 동의했다.

 

 

“ 미샤 말이 맞아요. 우리 가브릴로프에서는 양고기 샤실릭에 고수 대신 보통 황금손가락 버섯을 쓰는데 그 버섯은 여름에 나서 지금은 구하기 힘드니 양파를 대신 쓴 것 같네요. 미샤 얘기대로 민트를 썼으면 더 좋았을 거예요. 육즙은 풍부하네요. 숯불이었다면 훨씬 맛있었을 것 같아요. 오븐이나 가스 렌지를 써야 했으니 샤실릭보다는 스테이크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그래도 전반적으로 맛은 좋았어요. 좋은 양고기를 쓴 것 같네요. ”

 

 

베르닌의 옆에서 류드밀라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좋은 양고기를 쓰셨겠지, 남편이 양떼 농장 지배인에 의장의 친구니까. ”

 

 

아무래도 류드밀라는 심혈을 기울인 파프리카가 결선에 진출하지 못해 속이 상한 것 같았다. 일찌감치 실격을 당한데다 그 전부터 아무런 수상 기대도 없었던 베르닌은 풀코바의 양고기 샤실릭도 너무너무 먹어보고 싶었다. 요리를 하느라 너무 진을 뺐는지 배가 고파서 꼬로록 소리가 났다. 결선 진출 요리들이야 심사위원들이 맛본다 치고, 나머지 조리대 위에 있는 음식들은 자기들에게 나눠주면 안 되나 싶었다.

 

 

이번에는 렐랴가 자신이 고른 요리를 소개할 차례였다. 그녀가 먼저 소개한 요리는 초록빛 풀과 검은색이 도는 자줏빛의 토마토 비슷한 알맹이들이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윤기 나는 갈색 고기 요리였다. 모양만 봐서는 무엇인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 이건 벨르이 오스트로프의 시립공원 관리자인 소피야 마츠케바의 요리예요. 소피야는 요리 솜씨가 뛰어나기로 유명해서 가끔 주부들을 모아놓고 강습도 해요. 공교롭게도 이번 요리도 앞선 클라우디야처럼 양고기를 주재료로 썼네요. 하지만 조리 방식은 완전히 달라요. 일단 향신료가 많이 들어갔고, 제일 중요한 건 검은 숲에서 나는 자두를 넣었다는 점이에요. 저도 양고기 요리를 즐겨 하지만 자두를 써본 적은 없었는데 새로 하나 배웠어요. 탁월한 선택이에요. 말린 자두의 달콤하면서도 살짝 쌉쌀한 맛이 양고기와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맛이 나요. 그리고 큼직한 호두 알갱이들을 사이사이 박아 넣고 허브를 가미해서 누린내도 나지 않아요. 오븐을 쓰지 않고 직접 팬에 구웠기 때문에 껍질도 바삭바삭하고 맛있어요. 두 분도 드셔 보세요. ”

 

 

블리즈네초프가 나이프로 고기를 크게 한 토막 썰더니 덥석 입에 쑤셔 넣었다. 잠시 후 자두도 한 알 밀어 넣었다. 우물우물 씹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흠, 이것은 꽤 이국적인 맛이군요. 뭔가 허브와 향신료가 잔뜩 들어가서 더운 나라 음식 맛이 나는군. 자두를 넣다니 좀 신기한데... 내 취향으로는 양고기는 역시 샤실릭 쪽이 더 마음에 들긴 합니다. 하여튼 특이한 맛이로군요. 창의적이에요. ”

 

 

자기가 미는 요리들의 순서가 끝나서 그런지 블리즈네초프의 평은 생각보다 짧았고 건조했다. 렐랴는 왕재수가 고기를 작게 썰어서 자두와 호두, 초록색 풀 등속을 곁들여 먹어보는 동안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잠시 후 왕재수가 말했다.

 

 

“ 나쁘지 않아요. 자두와 양고기가 잘 어울리는 편이고 불 조절을 잘 했는지 육즙도 살아 있어요. 난 처음 두 가지보다 이게 더 나은 것 같아요. 여기서는 잘 쓰지 않는 향신료를 많이 넣었네요. 카다몬, 고수, 그리고 사프란이 조금 들어간 것 같군요.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허브는 로즈마리와 타임, 그리고 잘 모르는 풀이 하나 더 들어간 것 같아요. 살짝 습한 향을 생각하면 풀이 아니라 버섯 같기도 하고. ”

 

 

렐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그게 제가 아까 얘기한 황금손가락 버섯이에요. 가브릴로프 토종 버섯이에요. 그런데 정말 대단하네요, 미셴카. 한 입밖에 안 먹었는데 향신료와 허브를 모두 맞추셨어요. ”

 

 

왕재수는 별로 으쓱하지도 않았다. 베르닌은 마츠케바가 분명 투레츠키에게서 향신료를 조달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두와 각종 향신료를 곁들인 양고기 구이라니 베르닌으로서는 생소했지만 까탈스러운 왕재수가 처음으로 ‘나쁘지 않다’고 했으니 분명 맛있을 것 같았다. 더더욱 꼬로록 소리가 커졌다.

 

 

자두 양고기 요리에 이어 렐랴가 뽑은 것은 갈색과 황금빛, 그리고 크림색이 겹겹이 어우러진 근사한 메도빅이었다. 보자마자 베르닌은 보랴의 솜씨라는 것을 깨달았다. 왕재수 쪽을 보니 ‘크림과 당분!’ 하고 소리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는 표정이었다! 블리즈네초프마저도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 아니, 이건 메인 요리가 아닌데. 의외로군요, 렐랴. 디저트를 뽑다니. ”

 

“ 저도 처음에는 왜 하고많은 요리들을 놔두고 케익을 만들었을까 했지만... 이건 정말 대단해요. 말이 필요 없어요. 구시가지에 있는 식당 스베촉의 보리스 도브로류보프의 솜씨인데요, 스베촉이야 그쪽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워낙 맛있는 식당이라고 소문이 나 있으니 메인 요리야 의심할 필요도 없지만 설마 케익까지 이렇게 잘 만드는 줄은 몰랐어요. 다들 아시겠지만 전 제과제빵에 아주 강점을 가지고 있어요. 메도빅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이건... 이 메도빅을 한 입 먹는 순간 전 무릎을 꿇고 말았어요. 진짜 달콤하고 맛있어요. 게다가 이렇게 겹겹이 층을 쌓다니... 열두 겹은 되는 것 같아요! 한 시간 동안 이렇게 완성도 높은 케익을 만들어 내다니 정말 대단해요. 한 입 먹는 순간 우승감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

 

 

의장과 왕재수가 동시에 케익을 잘라서 입에 넣었다. 베르닌은 12겹으로 층층이 쌓여 있는 꿀케익 메도빅 사이사이에 들어 있는 크림의 단면을 보고 반쯤 기절할 것 같았다. 먹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음식 투정이나 부리는 왕재수 대신 자기가 심사위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주위를 보니 다른 사람들도 군침을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딱 차 한 잔 마시기 좋은 오후 시간이었다!

 

블리즈네초프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아, 맛있군요. 음... 상급의 메도빅이야. 모스크바에서 먹었던 것 같은 맛이군. 이런 솜씨라면 메인 요리를 만들어줬으면 좋았을 것을. ”

 

“ 전부 메인 요리니까 케익도 하나쯤 있는 게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정말 맛있잖아요. ”

 

 

렐랴가 열성적으로 변호했다. 그때 케익을 삼킨 왕재수가 휘파람을 불었다. 베르닌은 그가 뭘 먹고 휘파람을 부는 것을 처음 봤다. 렐랴와 블리즈네초프도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왕재수가 활짝 웃었다.

 

 

이거 맛있어요. 난 원래 단 거 잘 안 먹는데... 분명히 많이 달콤한데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아요. 꿀 크림도 많이 들어 있는데 느끼하지도 않고, 겹겹이 쌓여서 이렇게 층이 높은데도 입에 들어가는 순간 삭 녹아버리는 게 가볍고 부드러워요. 위에 뿌린 아몬드와 호두도 너무 고소하고. 어릴 때 먹어본 것 같은 맛이야. ”

 

“ 그렇죠? 메도빅은 흔하니까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메도빅이라면 서기장 식탁에라도 올라가겠어요. ”

 

 

렐랴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조했다. 베르닌은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가 메도빅을 손으로 마구 움켜서 와구와구 먹고 싶은 것을 혼신의 힘을 다해 참고 또 참았다.

 

 

‘ 아아 먹고 싶다! 먹고 싶다! 먹고 싶다! ’

 

 

꿀케익의 고문도 모자라 이제 왕재수의 차례가 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까다로운 왕재수가 맛있다고 하는 음식은 대체 얼마나 맛있을지 베르닌은 머리가 띵했다. 이것은 대회라는 이름을 빙자해 선량한 인민들의 뱃속과 침샘을 고문하는 악독한 짓이었다!

 

 

왕재수가 별 말 없이 테이블에 놓여 있는 황갈색의 커다란 피로그 파이를 가리키자 블리즈네초프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 자, 미하일. 설명이 필요합니다. 누가 만든 음식인지... ”

 

“ 글쎄요, 난 이름표를 안 봐서... ”

 

“ 아니, 어떻게 이름표를 안 보고 뽑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건 대회인데! 누가 만들었는지가 제일 중요한데. ”

 

“ 누가 만들었는지는 나중에 번호 보면 알잖아요. 제일 맛있는 거 고르는 거라고 해서 그렇게 한 건데. 여기서 먹어본 것 중에 이게 제일 맛있었어요. 두 분이 고른 것들보다 더 맛있어요. 생선을 넣은 파이는 잘못 구우면 엄청 질척해지는데 이건 완벽해요. 맛을 보면 연어와 농어를 섞은 것 같아요, 시금치와 마늘, 견과를 넣어서 풍미가 살아 있어요. 소스는 스메타나를 썼는데 굉장히 부드럽고 생선과도 잘 어울려요. 비린 맛도 전혀 없고 촉촉하면서도 전혀 과하지 않고 담백해요. ”

 

“ 어머나, 생선 파이로군요. 맛있겠어요. 처음으로 생선 요리가 나왔네요! ”

 

 

아직도 이름표 타령을 하고 있는 의장을 밀치고 렐랴가 앞으로 나왔다. 기대에 찬 표정으로 생선 파이를 나이프로 썰었다. 단면이 나타나자 렐랴를 비롯해 홀 안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와...’ 하고 군침을 삼켰다. 생선 파이는 한 마디로 아름다웠다! 아주 두툼한데다 황금빛 파이 시트 위로 붉은 연어 살이 깔려 있고 그 위에 녹색 시금치와 노르스름한 견과가 한 겹 덮여 있고 또 그 위에 하얀 농어 살이 두툼하게 얹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시금치와 견과가 한 층 얹혀 있고 이것을 바삭하게 구워진 황갈색 파이 껍질이 완벽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줄줄 흘렀다.

 

렐랴는 잘라낸 파이를 한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서서히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아름다운 회색 눈에 황홀감이 어렸다. 파이를 삼킨 후 렐랴가 나직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아, 미셴카. 이건 정말 맛있네요. 다른 말이 필요 없어요... 아...

 

 

렐랴는 나이프로 파이를 아까보다 더 크게 썰었다. 잘라낸 파이 조각을 이제껏 늘어놓았던 미사여구 같은 것도 없이 급하게 다시 먹었다. 너무 맛있게 먹다가 목이 막혀서 잠깐 기침까지 했다. 왕재수가 컵을 건네주자 렐랴는 물을 마신 후 한숨을 쉬었다.

 

 

“ 아아... 이제껏 제가 요리를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런 파이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겠어요.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보다 뛰어난 요리는 안 나올 것 같아요. 의장님, 한번 드셔보세요. 오늘의 우승 요리가 여기 있네요. ”

 

 

조리대 쪽을 돌았던 블리즈네초프가 다가왔다. 아주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지도 않았다. 한 손에 이름표를 들고 있었다. 왕재수를 쳐다보며 딱딱한 음성으로 물었다.

 

 

“ 이거 말인데, 미하일. 혹시 24번이었나요? ”

 

“ 그런가... 잠깐만요. ”

 

 

왕재수가 테이블 한쪽에 놔뒀던 수첩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맞을 걸요, 24번하고 27번. 27번은 저 쇠고기 요리니까 24번 맞아요. ”

 

 

의장이 혀를 찼다.

 

 

“ 으음... 그렇군... 안타깝지만 이건 안 됩니다. 이건 실격이에요. ”

 

 

렐랴와 왕재수 뿐만 아니라 참가자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렐랴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 아니 왜요, 아까 30번처럼 이름표가 없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인가요? 이렇게 맛있는 요리가 왜 실격이란 거죠? ”

 

“ 거참, 렐랴. 대회 지침 기억 안 납니까? ”

 

“ 왜 기억이 안 나겠어요, 제가 대회 추진위원이고 매뉴얼과 심사 원칙도 다 손봤는데. 어디에도 생선 파이가 안 된다는 규정은 없어요. ”

 

“ 생선은 여기서 중요한 게 아니지요, 파이도 그렇고. 중요한 것은 제1조 1항입니다. 천하일미 요리대회에 출품되는 요리는 소비에트 연방과 가브릴로프의 이념과 미풍양속을 해치면 안 된다.

 

“ 그래요, 그건 어느 대회 어느 행사 지침에나 1번으로 들어가는 거잖아요. 형식적인 거죠. 대체 생선 파이가 우리 소비에트 연방과 가브릴로프의 이념과 미풍양속을 해칠 구석이 어디 있다고... ”

 

허참... 이거 안 보입니까? 이 십자가 표시! 이건 정교 십자가라고요! 파이 껍질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지 않소! 이건 수도원 파이라고요! 알다시피 하느님인지 뭔지를 숭배하는 정교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레닌주의의 적이며 소비에트 연방의 뿌리를 갉아먹는 미신이자 백해무익한 반동 세력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달리 수도원이 폐쇄된 게 아니지! 그런데 어떻게 감히 그것도 혁명의 요람이었던 우리 가브릴로프에서 당과 의회가 예산을 댄 요리대회에 반동적인 수도원 음식이 나온 것도 모자라 껍데기에 십자 표시까지 그려져 있을 수가! ”

 

 

렐랴가 고개를 저었다.

 

 

“ 그게 무슨 얘긴가요, 의장님. 이게 수도원 음식이라고요? 누가 만든 건데요? 이름표를 보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긴 종교 박물관이라고 씌어 있는데요, 아말리야 루카셴코... 아, 아말리야였군요! 어쩐지...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저희 대회에 나와 주시다니 이건 진짜 영광이에요! ”

 

 

렐랴의 열광에도 불구하고 의장은 냉랭했다.

 

 

영광이고 뭐고 이건 실격이에요! 아무리 맛있어도 제1 지침을 위반했으니 절대 안 됩니다.

 

“ 의장님,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는 수도원이 아니라 종교 박물관 대표잖아요! 박물관도 공공기관인데 어째서 안 된다는 건가요! 물론 생선 파이는 수도원의 대표적인 음식 중 하나죠. 하지만 그렇게 치면 우리 러시아 전통 음식 중 교회와 한번이라도 연을 맺지 않았던 음식이 어디 있나요! ”

 

“ 다른 걸 다 떠나서 파이 위의 십자 표시 때문에 실격 처리를 할 수밖에 없어요! ”

 

 

가만히 있던 왕재수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 아 정말 가지가지 하네요. 십자 표시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난 눈 씻고 찾아봐도 못 찾겠는데! ”

 

“ 여기, 여기 이 십자 표시가 안 보인단 말입니까! ”

 

 

의장이 파이 껍질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베르닌도 류드밀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쭉 빼고 파이 껍데기를 바라보았다. 가운데에 십자 표시로 금이 가 있었다. 왕재수가 코웃음을 쳤다.

 

 

이건 파이가 터질까봐 수증기가 빠져나가도록 가볍게 금을 낸 거잖아요! 이렇게 속이 꽉꽉 차 있는 두툼한 파이는 잘못하면 부풀어 터질 수도 있고 야채의 수분 때문에 안이 질척해지기 때문에 공기구멍을 조그맣게 내준 거라고요! 껍데기에 금 그은 걸 갖고 십자가라니! 이렇게 돌려서 보면 십자가가 아니고 X 표시인데! ”

 

“ X도 문제지 뭐란 말이오! 그리스도(Христос)의 X 아니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이건 반동적인 음식이오! 실격이오! ”

 

“ 무슨 낱말 맞추기도 아니고, 맛있는 음식을 뽑는 대회라더니 무슨 그리스도가 어떻고 수도원에 반동이 어떻고... 그럼 애초에 종교 박물관은 참가하지 말라고 접수를 막든가. 왜 이제 와서 트집인지 이해가 안 가네요! ”

 

 

왕재수가 화를 내며 따졌다. 평소에 자기 일이 아닌 모든 것을 귀찮아하는 성격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진짜 단단히 열 받은 것 같았다. 의장은 왕재수가 조목조목 따지자 말문이 막혔는지 잠깐 어버버 하다가 공격 방향을 잽싸게 돌렸다.

 

 

“ 아니, 참 이상하군요. 하고많은 요리 중에 하필 종교적 반동 색채가 뚜렷한 생선 파이를 고르고. 그것도 모자라 명확히 드러난 십자 표시를 놓고도 이 음식을 변호하니... 이봐요, 미하일. 내가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지만 가뜩이나 당신은 이념적으로도 불확실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는데. 자꾸 이렇게 우기면 당신이 아직도 반체제주의와 불순한 이념을 버리지 못했다고 의심을 받게 된단 말입니다.

 

맛있는 걸 맛있다고 하는데 뭐가 불순하다는 거예요!

 

 

왕재수가 굽히지 않고 화를 냈다. 베르닌은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진다고 생각했다. 저 녀석의 입을 막아야 하나 하고 걱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오른편 구석에 앉아 있던 백발의 노부인이 일어나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이제 그만들 하시죠. 그 생선 파이는 내가 수도원에서 전해져 오는 정통 레시피로 만들었으니 정교 쪽 요리라는 것은 의장님 얘기가 맞습니다. 대회 지침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몰랐군요. 몰라서 수도원 레시피로 파이를 만든 것이니 지침에 따라 실격 처리를 해주시면 되겠네요. 그러니 다들 진정하세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에게는 내 파이를 맛있게 드셔주신데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껍데기의 십자 모양 금은 미하일 얘기가 맞아요. 공기구멍을 미세하게 내서 수증기를 빼내기 위한 거였답니다. 여러분 중 누구라도 파이 맛이 궁금하면 나중에 따로 나에게 놀러오세요. 그럼 난 이만 나가보겠어요. ”

 

 

아말리야가 꼿꼿하고 우아하게 홀을 나간 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머쓱해진 의장이 헛기침을 한 후 왕재수에게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뒤늦게 왕재수의 후원자 아저씨들 생각이 난 것 같았다.

 

 

“ 자, 이렇게 해결이 됐군요. 아까는 내가 실수한 것 같은데. 고의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니 잊어줘요, 미하일. 아무래도 나는 의회를 이끌고 있어 법령과 지침에 민감하다 보니 당신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예술가라는 것을 깜박했단 말이지요. 하여튼 다음 요리를 소개해 주시죠. 냄새가 아주 맛있게 나는데. ”

 

“ 그래요, 미셴카. 생선 파이는 진짜 맛있었지만 지침에 위배된다니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마지막 요리를 소개해 주세요. ”

 

 

왕재수가 소리 없이 휘파람을 불었다. 표정은 다시 평온해졌지만 몇 달 동안 왕재수를 봐온 베르닌은 그가 잔뜩 열 받아서 전부 뒤집어엎고 나가버리고 싶지만 렐랴를 봐서 참고 있는 상태라는 것쯤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럴 때는 왕재수가 여자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성격이란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의장을 적으로 돌려봐야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가뜩이나 이런 자리에서, 심지어 방송 취재까지 와 있는 자리에서 반동분자니 이념이 불순한 인간이니 하고 몰리기 시작하면 더욱 큰일이었다. 국장이야 아주 좋아하겠지만...

 

 

왕재수는 마지막 접시를 가리키며 김이 다 빠졌다는 듯 건조하게 말했다.

 

 

“ 아까 게 제일 맛있긴 했는데. 나머지는 다 고만고만했어요. 딱 하나 빼놓고는. 그건 정말 입에 댈 수도 없는 고약한 요리였어요. 보르쉬 냄새만 풍기는 구정물 같은 게 하나 있더라고요. 하여튼 다른 것들 중엔 그나마 이게 제일 나았어요. 비프 스트로가노프네요. 소스는 제대로 만들었어요. 고기는 너무 익혔고요. ”

 

 

의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이름표를 확인했다.

 

 

“ 27번이라고 했으니... 안드레이 오로빈스키, 아, ‘비슈네브이 사드’ 잡지 대표로군요. 여기 대표라면 렐랴가 나와야 했을 텐데 심사위원이라 못 나와서 다른 사람이 나왔나 보군요. 아깝네요, 렐랴. 당신이야말로 강력한 우승 후보였는데. ”

 

“ 저야 추진위원에 심사위원까지 겸하고 있으니 당연히 나오면 안 되죠. 안드레이는 원래 요리 솜씨가 있는 편이었어요. 이 비프 스트로가노프는 저희 집안 레시피로 만든 것 같군요. 저는 맛만 보고 평은 하지 않겠어요, 어쨌든 저희 잡지 쪽 참가자니까요. ”

 

 

안드레이의 비프 스트로가노프도 근사해 보였다. 상아빛의 풍성한 감자 퓌레 위에 먹음직스러운 갈색 소스로 잘 버무려진 쇠고기와 양송이가 예쁘게 올라가 있었다. 베르닌은 안드레이의 ‘이건 경쟁이에요!’가 떠올라서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먹어보고 싶기는 했다. 블리즈네초프는 조금 전에 아말리야의 요리를 실격시키고 나자 왕재수의 눈치가 보였는지 고기를 거의 한 국자 가깝게 떠서는 쩝쩝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배를 쓸며 만족스럽게 껄껄 웃었다.

 

 

“ 어험, 역시 레닌그라드에서 오셔서 그런지 귀족적인 요리를 고르셨군요, 미하일. 그리고 렐랴, 자랑스러워해도 되겠군요. 이건 훌륭한 비프 스트로가노프입니다. 고기도 맛있고 특히 소스가 부드러운 크림 맛과 고기 육즙이 조화되어 일품이에요! 이것 참... 조야의 키예프 커틀릿만 아니었어도 우승감이라고 단언할 수 있으련만... 참 맛있군요. ”

 

 

렐랴는 고기와 양송이를 포크로 떠서 천천히 먹었고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힐끗 보니 저편에 앉아 있는 안드레이의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갰다. 분명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렐랴는 아까 했던 말대로 음식에 평을 하지는 않았다. 베르닌은 그녀의 공정한 태도에 감명을 받았고 역시 렐랴는 최고라고 생각했다.

 

 

블리즈네초프가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 자, 그럼 이제 다 먹어봤으니 수상자를 가려야 할 때가... ”

 

잠깐만요.

 

 

왕재수가 의장의 말을 끊었다.

 

 

“ 다 먹은 거 아니에요. 아직 하나 남았어요. ”

 

“ 그게 무슨 소립니까, 미하일. 한 사람당 10개씩 맡아서 모두 맛을 봤는데. 각자 뽑은 요리도 서로 다 맛을 봤고. ”

 

“ 아니에요, 아직 하나 남았어요. 30번. 이름표 떨어졌다고 아까 실격시키자고 한 거 말예요. 난 저거 먹어보고 싶어요. ”

 

“ 아니, 그 망측한 달걀쌈 말입니까? 그건 이름표도 없는데... ”

 

“ 벌써 하나 실격시켰잖아요! 내가 맡은 건 10개인데 그 중 심사 대상이 8개밖에 안 된다는 건 공정하지 않아요. 그리고 분명히 아까 심사 원칙을 정할 때 심사위원별로 두 개씩 추천을 해서 총 여섯 가지 요리를 맛보고 고르자고 했잖아요. 내가 고른 건 하나 뿐이니까 하나 더 채워야 해요! ”

 

 

렐랴가 고개를 끄덕였다.

 

 

“ 미샤 말에 일리가 있네요. 애초에 모두가 1번부터 30번까지를 모두 맛봤다면 모르겠지만 심사위원 하나 당 10개를 맛보고 두 개씩 추천하기로 했는데 미샤는 본의 아니게 하나밖에 추천하지 못했잖아요. ”

 

“ 하지만... 그러면 아까 맛본 다른 요리들 중에서 추가로 하나를 더... ”

 

“ 전부 별로였단 말이에요! 비슷비슷했어요. 군계일학으로 맛있었던 생선 파이를 십자빵이니 뭐니 해서 떨어뜨렸잖아요. 저 비프 스트로가노프도 다른 것들보다 약간 나은 정도였고 나머지는 다 그냥 그랬어요. 그러니까 마지막 하나 남은 걸 먹어봐야겠어요. ”

 

“ 하지만 저건 망측한 달걀쌈... 심지어 이름표도 없고... ”

 

“ 이름표 없어도 분명 누가 만들었으니까 저기 있는 거잖아요. 나도 알아요, 분명 맛없을 거. 그래도 심사의 공정성을 위해서 먹어는 봐야겠어요. 별로면 난 그냥 저 비프 스트로가노프 하나만 추천할게요. ”

 

 

블리즈네초프는 좀 짜증이 난 것 같았지만 조야 브릴료바를 밀어주기 위해 최대의 경쟁자인 아말리야를 실격시킨 것이 좀 찔렸는지, 아니면 왕재수가 대드는 게 골치 아팠는지 결국 동의했다. 베르닌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 저 자식, 왜 갑자기 내 걸 먹어보겠다는 거야. 그냥 아까 그렇게 실격시키는 걸로 끝냈으면 그만이지. 안 그래도 엉망인데 또 무슨 말을 늘어놓으려고. 다 식어빠져서 더더욱 맛도 없겠구만. 시간 없어서 야채도 다 안 익은 거 쑤셔 넣은 건데. 에이 참... 나 여기 온 거 비밀로 하고 있어야지. 내 거라는 거 알면 얼마나 구박을 하려고... ’

 

 

베르닌의 속마음 따위는 물론 아랑곳하지 않고 왕재수가 조리대로 갔다. 의장과 렐랴는 따라오지 않았다. 렐랴는 왕재수의 편을 들어주긴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역시 ‘망측한 달걀’이란 의장의 말에 동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왕재수는 나이프로 오믈렛을 자르더니 주르르 쏟아져 나오는 야채와 식어버린 치즈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포크로 달걀지단과 야채 속을 쓸어 모아 한 입 먹었다. 이제 곧 까칠한 조롱이 쏟아져 나오겠거니 하고 베르닌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꼭꼭 눌렀다.

 

 

왕재수가 갑자기 ‘어?’ 하더니 오믈렛을 조금 더 잘랐다. 그리고는 한 입 더 먹었다. 그리고는 달걀지단 안쪽을 헤쳐보기도 하고 토마토 때문에 질척하게 뒤섞인 야채속도 따로 먹어 보았다.

 

 

“ 어, 이거 이상해... 맛있어!

 

 

왕재수는 오믈렛을 더 자르더니 또 먹었다. 예상외의 반응에 놀란 렐랴가 다가왔다.

 

 

“ 맛있다고요? 그게요? 정말이에요, 미셴카? 대체 무슨 맛인데요? ”

 

그냥 맛있어요. 다른 건 전부 고기에 생선 일색이고 기름도 많이 들어가서 무겁고 느끼했는데 이건 굉장히 가벼워요. 그냥 편하게 먹을 수 있고 맛이 소박하고 담백해요. 야채가 많이 들어 있어서 좋아요. 어떻게 이런 게 맛있을 수가 있지? 다 먹어도 되나?

 

“ 잠깐만요, 저도 먹어볼래요. ”

 

 

왕재수는 렐랴에게 직접 오믈렛을 잘라 주었다. 렐랴는 포크로 달걀지단을 돌돌 말아서 야채와 함께 입 안에 밀어 넣고는 오물오물 씹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 어, 그러고 보니 꽤 맛있네요. 생긴 게 너무 엉망이어서 기대 안 했는데. 메인 요리도 아니고 디저트도 아니지만 가볍고 맛있어요. 야채도 사각사각 씹혀서 좋네요. 식감을 위해 일부러 덜 익힌 건가 봐요. 어떻게 이런 게 맛있을 수가 있느냐고 하셨는데, 끝 맛에서 오는 은은한 풍미가 있어요. 기름을 두르고 부친 게 아닌 것 같아요. 버터를 쓴 것 같은데... 꼭 아까 보랴의 메도빅에서 풍겼던 그 은은한 맛이 나네요. 좋은 버터인가 봐요. 미셴카, 이걸 여섯 번째 결선 진출 요리로 추가하실 건가요? ”

 

“ 네. ”

 

 

렐랴가 접시를 들고 중앙 테이블로 갔다. 블리즈네초프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별 수 없이 오믈렛 가장자리를 조금 잘라서 먹었다.

 

 

“ 두 분이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 이해가 잘 안 가는군요. 이건 천하일미 요리대회인데, 이런 전채나 안주 같은 달걀쌈을 결선에 진출시키다니요. 뭐 맛은 그럭저럭 나쁘진 않지만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평범한 맛인데. 그냥 계란 부쳐서 야채랑 치즈 조금 넣고 둘둘 말아놓은 거 아닙니까. 그나마도 옆구리도 다 터뜨리고... 오죽 창피했으면 이름표도 떼어버렸겠어요."

 

“ 그래도 난 이거 고를 거예요. 맛있어요. 이제 더 안 드실 거죠? ”

 

 

왕재수가 의장의 손에서 접시를 빼앗았다. 남은 오믈렛을 반으로 자르더니 두 입 만에 전부 먹어버렸다. 그리고는 두 눈을 반달 모양으로 뜨더니 까맣고 기다란 속눈썹을 나비처럼 파닥거리면서 좋아했다.

 

 

“ 아, 맛있어. ”

 

 

류드밀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베르닌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 저거 진짜 맛있나 봐요. 우리 미셴카는 맛없는 건 절대 안 먹는데. 저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봐요. 심지어 다 먹었어요. 대체 누가 만든 거지? ”

 

“ 그, 글쎄요... 신기하네요. 맛없어 보이는데... ”

 

 

베르닌은 멍해져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왕재수가 너무 기름진 음식들을 많이 먹어본 나머지 미각이 어떻게 됐나 싶었다. 렐랴야 왕재수를 좋아하니 그의 기분을 맞춰주고 싶어서 둘러댄 게 분명했다.

 

 

렐랴가 말했다.

 

 

“ 이제 여섯 개의 요리를 모두 맛보았네요. 순서대로 조야 브릴료바의 키예프식 커틀릿, 클라우디야 풀코바의 양고기 샤실릭, 소피야 마츠케바의 자두를 곁들인 양고기 구이, 보리스 도브로류보프의 메도빅, 안드레이 오로빈스키의 비프 스트로가노프, 익명 참가자의 야채 오믈렛입니다. 그럼 수상자 결정을 위해 잠시 논의를 해야겠네요. ”

 

 

심사위원석에서 블리즈네초프와 렐랴, 왕재수가 목소리를 낮추어 열심히 토론을 하는 동안 사회자는 잠시 휴식시간을 선언했다. 그리고는 참가자들에게 결선 진출에 실패하고 조리대에 남아 있는 음식들을 맛보라고 해주었다. 모두들 이 순간만을 기다렸는지 우르르 나가서 이 음식 저 음식을 먹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베르닌도 급하게 뛰쳐나갔다. 나와 있는 모든 음식들을 먹어보고 싶었다. 아르카지의 보르쉬만 빼고. 다들 진짜 맛있었다. 류드밀라의 생선을 채운 파프리카도 꿀맛이었다.

 

 

“ 우와, 류다. 이거 진짜 맛있네요. 담백하고. ”

 

“ 그렇죠! 이게 우리 감독님 쪽에 배정이 됐어야 뽑아줬을 텐데. 하필 의장 쪽 조리대라서 떨어진 거예요! 30개를 다 먹어봐야 공정한데... 이건 전부 의장의 음모라고요. 아까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떨어뜨리는 것 좀 봐요! 뻔할 뻔자 조야 브릴료바가 우승이고 렐랴가 추천한 두 개 중 하나, 감독님이 추천한 것 중 하나가 각각 2~3위로 배정될 게 분명해요. 렐랴도 집안이 워낙 좋아서 의장이 눈치를 보고 있고, 우리 감독님도 일단 심사위원으로 불러놨으니 아말리야 실격시킨 것도 있고 해서 체면치레 상 분명 하나쯤은 붙여줄 거라고요. ”

 

“ 으잉, 되게 복잡하네요. 그냥 제일 맛있는 걸로 세 개 뽑으면 될 텐데 렐랴와 저 녀석과 의장이 추천한 걸 하나하나씩 배정까지 해야 한다고요? 공정하지 않네요. ”

 

“ 원래 이런 심사는 다 나눠 먹기 식이라고요! 당연히 1등이야 권력 구조상 의장이 미는 쪽이겠지만... 과연 렐랴와 우리 감독님 중 누구를 의장이 더 신경 쓸지가 관건이군요. 그것에 따라 2, 3위가 결정되겠죠! 우리 귀염둥이 감독님이야 정치적으로 의회와는 상극이니 아마 렐랴가 추천한 쪽에서 2등이 나오겠죠. 근데 딱 하나, 감독님이 추천한 안드레이는 렐랴 비서니까 그런 걸 안배해서 걔가 2등이 될 수도 있겠네요. ”

 

 

베르닌은 머리가 아팠다. 기껏 요리대회인데 맛있는 게 우선이 아니라 여기서도 정치싸움을 해야 하다니 짜증이 났다.

 

 

‘ 뭐 나랑 무슨 상관이야. 맛있는 거나 먹어야지. 우와, 이것도 진짜 맛있다! 안 뽑힌 것들도 이렇게 맛있는데 저 앞에 있는 건 얼마나 맛있을까! ’

 

 

그러다가 베르닌은 자신의 오믈렛도 앞 테이블에 나가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결선 진출한 요리라고 무조건 맛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    *

 

 

 

 

20분 쯤 후 심사위원들이 나왔다. 블리즈네초프 의장은 화색이 완연한 얼굴이었고 렐랴는 불만스러운 듯 도톰한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었으며 왕재수는 다 귀찮다는 듯 졸린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 대체 왜 나와 있는지 이해가 안 가는 예쁜 사회자가 방긋 웃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 자, 의장님. 이제 결과가 나왔나요? ”

 

“ 네, 열띤 토론 끝에 1위부터 3위까지의 수상자가 결정되었습니다. 3위부터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

 

 

홀이 조용해졌다. 의장은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우렁차게 외쳤다.

 

 

3위는 문예지 비슈네브이 사드 대표 안드레이 오로빈스키의 비프 스트로가노프입니다!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

 

 

안드레이가 펄쩍 뛰며 일어났다. 너무나도 좋아했다. 렐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우승해야 한다더니 3위만 해도 너무 좋은 모양이었다. 뛰어나가다가 하마터면 의자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의장은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2위는 스베촉 식당 대표 보리스 도브로류보프의 메도빅입니다!

 

 

보랴가 느릿느릿 일어났다. 안드레이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아서 혹시 우승을 노리고 있었나 싶었지만 앞으로 나가면서 보랴도 활짝 웃었다. 베르닌은 꼭 자기가 상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의장은 헛기침을 했고 더욱 우렁차게 외쳤다.

 

 

대망의 1위, 우승자는 예산국 대표 조야 브릴료바의 키예프식 치킨 커틀릿입니다! 축하합니다!

 

 

꽃무늬 원피스와 털조끼를 걸친 우람한 체구의 중년 여인이 환호성을 지르며 일어났다. 우당탕쿵탕 뛰어나가더니 블리즈네초프 의장을 와락 껴안고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의장 곁에 있던 렐랴가 그 기세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는데 다행히 왕재수가 잽싸게 그녀의 팔을 붙잡아 주었다. 렐랴는 균형을 잡았는데도 한동안 왕재수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황홀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류드밀라가 한숨을 쉬면서 어디 감히 금쪽같은 자기들 감독님을 넘보느냐고 투덜댔다.

 

 

의장이 시상을 했다. 상장과 포크 모양의 트로피 외의 부상으로 1위인 브릴료바에게는 검은 숲 온천 요양소 2인용의 2주일치 휴양권이 수여되었다. 2위인 보랴는 온천 요양소 1주일 휴양권, 3위인 안드레이는 3일 휴양권을 받았다. 참가자들은 열심히 박수를 쳤지만 사실 1위인 브릴료바보다는 보랴가 훨씬 환호를 많이 받았다. 베르닌도 그 세 가지 요리 중에서는 메도빅이 제일 맛있어 보였고 또 보랴도 좋았기 때문에 손바닥이 떨어져라 박수를 쳤다.

 

 

수상자들이 인사를 하고 들어간 후 이제 다 끝났나 싶었는데 의장이 에헴 하며 말을 이었다.

 

 

“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의 결선 진출자들에게는 부상으로 레닌 선집과 역대 서기장 명언집을 수여하도록 하겠습니다. 클라우디야 풀코바, 소피야 마츠케바, 그리고 달걀쌈을 만든 익명의 참가자는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

 

 

사람들이 웅성웅성했다. 다들 그 망측한 달걀쌈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나 궁금한 듯했다. 베르닌은 잠시 나갈까 말까 망설였지만 부끄럽기도 했고 내내 아닌 척 하고 있다가 이제야 나가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생각해서 가만히 있었다. 풀코바와 마츠케바가 나가자 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음, 역시 달걀쌈을 만든 참가자는 자리에 없는 모양이군요. 아마 중도 포기를 했거나 급한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운 모양이지요. 그러면 두 분께만 시상하도록 하겠습니다. ”

 

 

두툼한 레닌 선집과 서기장 명언집을 받아든 풀코바와 마츠케바가 인사를 한 후 자리로 돌아왔다. 모두의 박수가 이어진 후 의장이 대회 종료를 선언했다.

 

 

 

*    *    *

 

 

 

 

바깥 복도에서 왕재수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보랴가 나왔다. 베르닌은 보랴의 손을 꼭 잡고 축하를 했다.

 

 

“ 진짜 축하해요. 그 메도빅 정말 맛있어 보였어요. 먹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네요. 스베촉에서는 메도빅 안 팔아요? ”

 

“ 우리 식당은 밥집이라 디저트는 아이스크림이랑 초콜릿 무스밖에 없어. 먹고 싶으면 주말에 예쁜이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 와라. 메도빅 그거 한판 굽는 게 뭐 어렵냐. 아까 애기가 케익 맛있게 먹는 거 보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

 

“ 그러게요, 걔 춤추던 애라서 원래 단 거 안 먹는데. 그 메도빅이 진짜 맛있었나 봐요. ”

 

“ 사람이 살면서 때로는 단 것도 먹고 즐거움도 누려야지. 하여튼 애 데리고 놀러 와라. 난 이제 식당 가봐야겠다. ”

 

 

보랴가 돌아간 후에도 왕재수는 한참 나오지 않았다. 의장도 아까 나갔는데 대체 뭘 하나 궁금해서 홀로 다시 들어가 보니 왕재수는 렐랴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를 보더니 턱짓으로 테이블 위에 있는 접시를 가리켰다. 보랴의 메도빅이 조금 남아 있었다. 렐랴도 그를 보더니 눈부신 미소를 띠며 상냥하게 말했다.

 

 

“ 어머, 다냐. 어쩐 일이에요. 이리 와서 차 한 잔 마셔요. 이 메도빅 좀 먹어봐요. 진짜 맛있어요. ”

 

“ 어, 네. 감사합니다. ”

 

 

당일 접수를 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대회에 참가했다는 걸 렐랴와 왕재수가 모르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창피해서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을 것 같았다. 그는 렐랴가 건네준 찻잔을 받기는 했지만 차를 마시기도 전에 아까부터 너무나 먹고 싶었던 메도빅을 덥석 포크로 잘라서 먹었다. 먹는 순간 혀와 입술과 목구멍 전체가 사르르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 우와, 이거 진짜 맛있어요. 진짜진짜 맛있어요. ”

 

“ 그렇죠? 보랴가 저보다 훨씬 잘 만드는 것 같아요. 비법이 뭘까? 내일 가서 물어봐야겠어요. 그건 그렇고 전 그만 가봐야겠네요, 미셴카. 원고 마감이 걸려 있어서요. 모레 잠자는 미녀는 꼭 보러 갈게요. 취재도 해야 하니까. 그럼 그때 봐요. 다냐, 안녕. ”

 

 

렐랴가 그를 가볍게 포옹하며 뺨에 뽀뽀를 했다. 그리고는 베르닌이 황홀함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왕재수와도 포옹을 했다. 물론 왕재수와의 포옹과 뽀뽀는 훨씬 길었다. 왕재수는 렐랴와 다정하게 인사를 한 후 그녀가 나가자 베르닌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 다 먹었으면 우리도 가자. 나 속도 울렁거리고 멀미 나. 기름기 너무 많이 먹었나봐. 나가서 맑은 공기 쐬면서 걸어야겠어. 집까지 걸어갈래. ”

 

“ 엥, 나 차 가져왔는데. 걸어가려면 한참 걸리잖아. 난 배고픈데. ”

 

 

왕재수가 냅킨으로 뭔가를 주섬주섬 싸더니 그에게 내밀었다.

 

 

“ 이거 먹으면서 가면 되잖아. ”

 

“ 이게 뭐야? ”

 

“ 아, 이거. 진짜 맛있는 거. 수도원 할머니가 만든 생선 파이. 들고 먹을 수 있을 거야. ”

 

“ 와! 나 이거 아까부터 진짜 먹고 싶었는데! ”

 

“ 뭐? ”

 

 

베르닌은 뜨끔해서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며칠 전부터 생선 파이가 너무 먹고 싶더라고. 그래, 집까지 걸어가지 뭐. 가자. ”

 

 

둘은 출판문화국을 나왔다. 찬바람을 쐬자 왕재수가 살 것 같다는 듯 심호흡을 했다.

 

 

“ 어휴, 느끼해서 죽는 줄 알았네. 다시는 이런 거 안 해! 렐랴가 부탁해도 안 할 거야! 우욱... 계속 그 기름 케익 먹는 기분이었어. ”

 

“ 네가 입맛이 유별나서 그래! 이쪽 지방 사람들은 원래 기름지고 풍부한 요리를 좋아한다고! 얼마나 맛있는데... ”

 

“ 그렇겠지, 돼지기름이나 펑펑 들이붓고. ”

 

 

베르닌은 걸어가면서 생선 파이를 베어 물었다. 먹는 순간 머리가 백지가 되는 것 같았다. 담백하고 고소하면서도 촉촉하고 부드럽고 신선했다. 시금치와 견과와 생선, 버터와 마늘의 맛이 오감을 자극했다. 세상에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또 있을까 싶었다. 수도원에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말도 하지 않고 거의 숨도 안 쉬고 파이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너무 급하게 먹어치우느라 마지막 한 입이 목에 걸려서 캑캑 기침까지 했다. 왕재수가 혀를 차더니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물을 마시고 숨을 고른 후 베르닌이 중얼거렸다.

 

 

“ 진짜 맛있다. 정말 맛있어. ”

 

“ 응. 오늘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었어. 하긴 진짜 맛있었던 건 세 개밖에 없었어. 이거랑 보랴가 만든 메도빅이랑 그 오믈렛. ”

 

“ 너 있잖아, 그 오믈렛 말이야. 진짜 맛있었어? ”

 

“ ‘그’ 오믈렛이라고? ”

 

“ 아니, 그게... 있잖아... 저... 사실 나도 아까 그 대회 참가했었어. 국장이 우리도 나가야 된다고 등 떠밀어서 급하게 왔었거든... 저기... 근데 재료를 준비해야 되는 줄 몰랐어. 그래서 막판에 여기저기서 빌려서... 류다가 토마토랑 치즈 빌려주고 아르카지가 야채 좀 주고... 보랴가 계란이랑 버터랑 소금 후추 같은 거 줘서 내가... 저... 그 오믈렛 사실은 내가... ”

 

알아. 네가 만든 거.

 

 

베르닌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게다가 왕재수가 너무나 무심하게 대꾸해서 더욱 놀랐다.

 

 

“ 뭐? 안다고? 어, 어떻게? 이름표도 떨어져 버렸는데... 너 아까 내가 요리하는 거 본 거야? ”

 

“ 아니. 나 조리 시간 동안 자고 있었어. 자꾸 옆에서 블리즈네초프가 누굴 뽑아야 한다느니 당이 어떻다느니 하고 개소리를 하잖아. 너무 듣기 싫어서 피곤하다고 자버렸어. 네가 온 줄은 몰랐어. ”

 

“ 근데 어떻게 알았어? 내가 만든 건줄? ”

 

“ 한 입 먹으니 알겠던데. ”

 

“ 어떻게? 어떻게 알아? ”

 

“ 그럼 모르냐? 맨날 저녁밥 해주는데. 그리고 자세히 보니 안 먹어봐도 알겠더라! 계란 옆구리도 다 터지고 플레이팅도 엉망이고 접시 완전 더럽혀놓고. 너 말고 누가 그렇게 지저분하게 음식을 담냐!

 

“ 어... 그건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재료 구하느라 막판 10분도 안돼서 만든 거란 말이야! 원래 펠메니 만들려고 했는데... ”

 

“ 아, 펠메니 만들었으면 좋았을 걸. 그때 새해에 만든 펠메니 맛있었는데. 바보, 왜 재료는 안 가져와서. ”

 

“ 나 진짜 아무 것도 모르고 온 거였단 말이야! ”

 

뭐 알았다고 달라졌겠냐. 그래봤자 망측한 달걀쌈이지. 어휴, 야채도 절반 밖에 안 익고 치즈는 한쪽으로 다 뭉치고.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왕재수의 독설에 베르닌은 조금 마음이 상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으니 뭐라고 할 말도 없었다. 풀이 죽어 있는데 왕재수가 덧붙였다.

 

 

“ 근데 진짜 맛있었어. 아까 심사 토론할 때 나 사실 그거 밀었거든. 근데 블리즈네초프가 메인 요리나 디저트는 되지만 그런 건 안 된다는 거야. 렐랴는 맛있긴 한데 플레이팅이 너무 부족해서 감점 요인이라고 하고. 그래서 그냥 그 스트로가노프로 낙착된 거야. 그거 고기 너무 익혀서 난 별로였는데. 그나마 다른 것보단 나은 정도였어. ”

 

“ 아... 나 감동할 것 같아. 너 내 거라는 거 알고 그렇게 편 들어줬구나. 고마워. ”

 

아니야! 웬 헛소리야! 대회는 경쟁인데 무슨 친분 관계가 소용이 있어! 공정하게 해야지! 로만이 나왔어도 절대 안 뽑아줘! 로만은 요리 실력 형편없으니까! 오믈렛이 맛있었어! 맛있으니까 뽑았던 거야. 나도 그거 왜 맛있었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하여튼 맛있었어! 그리고 엄청 감질났어! 태운 데가 많아서 먹을 수 있는 게 너무 적었단 말이야. ”

 

 

베르닌은 왕재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왕재수가 왈칵 신경질을 냈다.

 

 

“ 왜! 왜 그렇게 쳐다봐! ”

 

“ 진짜 맛있었어? ”

 

“ 그래! 내가 언제 음식 가지고 거짓말한 적 있냐! ”

 

“ 하긴... 그렇구나... 저... 그럼 나중에 만들어줄까? ”

 

“ 나중 말고! 오늘! 오늘 저녁으로 만들어줘! ”

 

“ 응, 알았어. 집에 계란 다 떨어졌는데 가게 들러서 사 가자. ”

 

“ 가게 가면 줄 서야 되잖아! 우리 집 냉장고에 계란 몇 알 있어! 그걸로 해줘! 많이많이 해줘! ”

 

“ 그래. 크고 둥그렇게 말아줄게. 시간에 안 쫓기니까 옆구리도 안 터뜨리고 태우지도 않을 수 있을 거야. ”

 

“ 야채도 절반만 익혀줘. ”

 

“ 어, 그래... 근데 안 익은 야채가 좋니? ”

 

“ 응, 난 너무 푹 익은 야채 싫어. 그래서 맛있었나. 스메타나 뿌려 먹으면 더 맛있을 거 같더라. 우리 빨리 가자. 먹고 싶다. ”

 

“ 그래, 빨리 가자. 고마워. ”

 

“ 뭐가? ”

 

“ 내가 해준 거 맛있다고 해줘서. 너 맨날 내가 해주는 밥이 맛없지는 않은 거지 맛있는 건 아니라고 했잖아. ”

 

어... 그래! 맛없지는 않은 정도였어! 그냥 그런 거야! 착각하지 마! 아까는 너무 느끼한 걸 많이 먹어서 맛있게 느껴진 거였어! ”

 

“ 그럼 그냥 보랴네 식당 가서 저녁 먹고 갈래? 오믈렛은 나중에... ”

 

안 돼! 너 왜 말 바꿔! 빨리 집에 가서 해줘! 망측한 달걀쌈 해줘!

 

 

베르닌은 자꾸 웃음이 났지만 왕재수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를 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꾹꾹 참았다. 그리고 잰걸음으로 다리를 건너는 왕재수를 따라잡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FIN

- 2015. 5. 15 ~ 6. 3 -

 

 

..

 

 

이렇게 하여 천하일미 요리대회가 끝났습니다~

 

 

..

 

보랴의 본명인 보리스 도브로류보프에 대해.

도브로류보프라는 성은 '착한, 선한'이란 뜻의 러시아어 '도브르이'와 '사랑'이란 뜻의 '류보피'를 합성해서 만들었다. 실지로 있는 성이기도 하다. 우락부락하지만 마음 착한 보랴를 위해 :)

 

 

..

 

 

여기 나오는 요리들은 대부분 러시아에서 먹어볼 수 있는 것들이다 :) 자두를 넣은 양고기라든가 샤실릭이야 원래는 좀 더운 동네에서 나온 거긴 하지만..

 

결선 진출한 요리들 사진을 몇 개 올려보자면... (어떤 건 내가 직접 먹고 찍은 것, 어떤 건 구글링.... 내가 찍은 사진에는 서명이 붙어 있음)

 

 

 

1. 키예프식 치킨 커틀릿

 

이건 내가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음식점 '고골'에서 먹었던 것이다. 유명한 음식점이고 음식 또한 풍미가 좋은데 단점은 진짜 러시아 스타일이라서 가끔 내겐 너무 기름지다는 것이다... 이 커틀릿도 내겐 많이 기름진 편이었음.

(내 식성은 단추나 렐랴보다는 왕재수와 비슷한 편이어서 ㅎㅎ)

 

 

 

커틀릿을 자르면 단면은 이렇게..

접시 아래를 보면 기름이 주르르...

 

맛있긴 했지만 기름져서 다 못 먹었음..

개인적으로 고골에서 제일 맛있었던 음식은 보르쉬였다~

이 레스토랑에 대한 이전 포스팅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2815 (보르쉬와 생선완자)

 

 

 

2. 메도빅

 

이미 여러번 포스팅한 적이 있는 러시아 꿀케익 메도빅. 러시아에서는 메도빅이라고 하고 체코에선 메도브닉이라 한다. 체코 쪽이 좀 더 진한 맛이었다. (프라하에 머무는 내내 여기저기서 메도브닉을 많이도 먹었는데 거기서 먹었던 메도브닉들은 praha fragments 2013 폴더를 보면 종종 나온다)

 

이것은 페테르부르크의 베이커리 겸 카페 겸 레스토랑인 '고스찌'의 메도빅. 여기는 음식도 디저트도 모두 맛있다. 페테르부르크에 가면 꼭 들르는 곳이다. 크림이 정말 풍부하고 달콤하다.

 

 

 

이건 프라하의 메도브닉.

때깔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건 프라하의 유명한 카페인 그랜드 카페 오리엔트에서 먹었던 것이다. 여기 메도브닉 참 맛있다!

 

 

 

 

3. 비프 스트로가노프

 

스트로가노프 백작(공작이었나.. 맨날 헷갈림.. 서무 25에서는 공작이라고 썼는데)의 레시피로 태어난 러시아 귀족 요리. 이게 미국과 유럽으로 건너오면서 이상한 에그 누들이나 곁들여 먹고, 또 그냥 갈색 국물에 비벼진 고기스튜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정통 스트로가노프는 보통 이런 식이다. 감자 퓌레 위에 양송이와 쇠고기, 크림소스로 요리한 게 올라간다..

 

이것은 고스찌의 비프 스트로가노프. 전에 내가 올린 적 있다. 맛있긴 했는데 크림 소스가 너무 농후하여 내게는 다 먹기가 버거웠다..

 

 

이것은 페테르부르크의 유서깊은 호텔인 그랜드 호텔 유럽(옛 이름 유럽 호텔)의 비프 스트로가노프. 지난 2월에... 여기서는 스트로가노프 공작(백작 ㅠ)의 오리지널 레시피를 쓴다고 했는데 이거 진짜 맛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먹은 스트로가노프가 제일 맛있었다.

 

맨 위에 양파 튀김이 올라간다... 안드레이가 렐랴에게서 전수받아 만든 비프 스트로가노프도 이런 식이다. 그러나 왕재수의 말대로.. 안드레이는 고기를 너무 바싹 익히고 말았음

 

 

 

 

 

 

4. 샤실릭

 

샤실릭은 워낙 유명하니 많이들 아실 듯.. 고기는 양고기, 소.돼지, 닭 등을 모두 쓸 수 있고 때로 생선을 쓸 때도 있음. 제대로 구운 샤실릭은 진짜 맛있다. 양고기 샤실릭도 잘 구우면 누린내가 안 난다.

 

 

 

보통 이렇게 야외에서 숯불에 굽는다. 일종의 바베큐 요리인데 러시아 사람들은 야외로 놀러가면 샤실릭 구워먹는 걸 좋아한다.

 

그건 그렇고 이 사진의 샤실릭은 엄청 기다랗고 고기도 진짜 많이 꽂았네 ㅎㅎ

 

 

 

 

 

 

5. 자두를 곁들인 양고기 구이

 

이 사진은 러시아에서 요리 방송과 책자 등으로 요즘 잘 나가는 율리야 브이소츠카야의 요리. 나도 이건 안 먹어봤고 지난 2월에 페테르부르크 갔을 때 이 사람 요리책을 한권 사왔는데 거기서 봤다. 맛있어 보인다!!

 

 

 

6. 이것이 피로그. 생선 파이.

 

에피소드 시작 전에 잠깐 썼듯 피로그는 들어가는 속에 따라 아주 다양해진다. 여기서는 아말리야처럼 연어를 넣은 연어 피로그 사진들 몇 장. 아말리야는 연어에 농어, 시금치와 견과로 층을 여러 겹 넣었기 때문에 사진의 파이들보다 훨씬 풍성하게 만들었다.

 

잘 구워낸 러시아의 피로그는 참 맛있다!! 옛날엔 러시아 주부의 살림솜씨를 피로그 속을 몇겹 넣어 굽느냐로도 평가했다고 한다.

 

 

 

이렇게 동그란 모양도 있고, 직사각형으로 굽는 경우도 많다. 구워서는 잘라서 먹는다~

 

 

 

연어 피로그는 이런 모양으로 속을 넣기도 하고..

 

 

 

보통은 이런 모양으로 속을 넣는다~

 

 

 

 

 

이건 연어 피로그는 아니고. 쌀과 고기, 허브 등을 층별로 넣어 겹겹이 속을 만들어낸 보야르스키 피로그.

 

 

 

마지막은 그냥 가면 섭섭하니 오믈렛 ㅎㅎ

 

야채 오믈렛 사진 두 장.

 

러시아어로 계란 부침 요리는 야이츠니짜 라고 하는데 그 이름 쓸까 하다가 너무 어렵게 들릴 것 같아 그냥 오믈렛이라고 썼다. 단추가 만든 건 이런 오믈렛과 우리 나라 계란말이의 중간쯤 되는 건데 옆구리가 터졌다 ㅋㅋ

 

 

 

 

너무 음식 테러인가 ㅠㅠ

 

..

 

하여튼 다음 이야기는 26편에서!!

 

..

 

 

댓글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몇 시간 후면 마린스키 티비에서도 오늘 다른 공연을 중계하기 때문에 다시보기 서비스가 곧 종료될 것 같아서 knights of dance 무대 중 어제 보지 못한 이고르 콜브의 '왕의 디베르티스망'과 마지막 커튼 콜 영상을 마저 보았다.

 

콜브는 뛰어난 무용수이자 배우이다. 이런 베네피스 공연을 할 때 1인 공연일 경우는 보통 3개 정도의 작품을 보여줘서 고전, 모던(혹은 신작), 대표작 등을 고루 섞지만 이렇게 3인이 나와서 각각 하나를 공연할 경우에는 보통 자기가 제일 자신있거나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작품을 추게 되는데 콜브는 자신을 위해 안무된 신작을, 그것도 꽤나 까다롭고 이렇다 할 플롯도 없는 작품을 췄다. 용기 있는 남자다. 멋지다.

 

사실 코르순체프의 '아가씨와 건달'이나 이반첸코의 '세헤라자데'처럼 드라마틱하거나 화려한 작품들이 아니어서 그만큼 볼거리는 풍성하지 않았지만 콜브의 무용수/배우로서의 역량이 제대로 드러난 무대였다. 그리고.. 안무가의 의도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이고르 콜브는 언제나 약간 캠피한 느낌이 있는 무용수라서(비록 그가 스트레이트에 아내와 아이 등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는 있지만) 이번 무대도 살짝 퀴어 캠프 느낌이 들었다. (이건 그냥 내 시선이 그래서일지도)

 

세 남자의 마지막 앙코르도 근사했고.. 제일 찡했던 건 커튼 콜 때 겐나디 셀류츠키가 나와서 제자들을 안아주고 흥에 겨워 스텝을 밟고 특히 코르순체프를 포옹하며 눈시울을 적시던 모습이다... 셀류츠키도 참 많이 늙었더라.. 존경합니다..

 

코르순체프의 아가씨와 건달, 이반첸코의 세헤라자데에 대한 리뷰도 조금 더 써보도록 하겠다. 내일이나 모레..

 

하여튼 멋진 남자들이다!

 

** 코르순체프와 이반첸코 무대에 대한 아주 짧은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815

 

:
Posted by liontamer
2015. 6. 18. 16:25

백야의 페테르부르크, 네바 강 russia2015. 6. 18. 16:25

 

 

작년 7월 중순.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

밤 11시에서 12시 사이에 네바 강변 산책하며 찍은 사진들 몇 장.

 

아아... 지금 저 동네 가면 얼마나 좋을까...

 

전에 올렸던 사진도 한두 장 끼어 있을 수 있다.

 

페테르부르크의 하늘은 언제나 변화무쌍하고 아름답지만 특히 백야의 한밤중이면 희미한 어스름과 다양한 색채가 어우러져 너무나도 근사하고 신비롭다.

 

위에서 아래로 갈 수록 점점 시간이 자정으로 다가가는 중..

 

이때는 백야 절정이 지난 후라서 새벽 1시 쯤이면 많이 어두워졌다.

 

 

 

 

 

 

 

 

 

 

 

 

 

 

 

 

 

 

:
Posted by liontamer

 

지난 일요일에 마린스키에서 있었던 코르순체프, 콜브, 이반첸코의 knights of dance(http://tveye.tistory.com/3779, http://tveye.tistory.com/3764)) 중 코르순체프의 '아가씨와 건달'과 이반첸코의 '세헤라자데'를 먼저 다시보기로 봄... 아아... 비록 이들이 나이를 먹어서 예전과 같은 날렵함은 떨어진다 할지라도.. 이것은 정말이지 원숙한 남자들의 향기가 물씬 느껴지는 무대였다.. 가서 봤으면 참 좋았을텐데...

 

이반첸코의 황금노예는 사실 큰 기대를 안했는데 역시 육체적 매력이 뛰어난 무용수라 그런지 근사했고(상대역이 조바이다 데뷔라 많이 딸려서 이 사람이 많이 리드해줘야 했지만), 생각보다 코르순체프의 건달이 가슴에 많이 와 닿았다... 이반첸코도 상대역이 좀 베테랑 발레리나였다면 더 좋았을텐데... 콜브의 '왕의 디베르티스망'도 봐야 하는데... 하여튼 이 공연은 비록 영상이지만 나중에 짧은 메모나마 리뷰를 남겨보겠다.

 

** 콜브의 '왕의 디베르티스망'에 대한 짧은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818

:
Posted by liontamer
2015. 6. 17. 15:23

눈밭 산책하다가, 색채가 마음에 들어서 russia2015. 6. 17. 15:23

 

 

지난 2월 17일.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산책하다가.

날씨 좋았던 날. (추웠지만...)

 

눈밭과 헐벗은 관목, 빨강 노랑 건물들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와 빛이 마음에 들어서 찍어봤다.

 

:
Posted by liontamer

 

 

아직 6월인데 왜 이렇고 덥고 끈적한지.. 비라도 좀 퍼부어주면 좋을텐데 비가 안 오니 더 끈적한가보다.

메르스 바이러스는 습도가 높으면 생존 시간이 줄어든다니까 그걸 생각하면 습한 게 나은데... 난 원래 덥고 습한 걸 못 견뎌서 참 힘든 하루다. 에어컨까지 켜고 ㅠ

 

자기 전에. 더위 달래보려고 추웠던 날 찍은 사진 몇 장. 지난 2월 14일, 페테르부르크. 이날은 흐렸고 진눈깨비가 펄펄 내렸다. 추운 날이었다.

 

주로 그리보예도프 운하와 모이카 운하 사진들이다. 운하는 꽁꽁. 그 위로 눈이 쌓여 있다. 더위 달래세요!

 

 

 

 

 

 

 

 

 

이건 운하가 아니고.. 마르스 광장 갔다가 다시 그리보예도프 운하 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도 보이고 보기엔 근사하지만 이때 진짜 최악이었다. 진눈깨비는 눈보라 수준으로 몰아쳤고 바닥이 진짜 끔찍할 정도로 얼어 있어서 너무 미끄러웠다. 콧물이 줄줄 나왔다...

그래도 지금 사진을 보니 다시 가고 싶고 저때가 그립네.

 

 

 

꽁꽁!

 

:
Posted by liontamer

 

메르스 공포로 뒤숭숭한 나날이다.

서무 25편으로 조금이라도 불안증도 잊고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를 덜어내 보세요~

 

이번 편은 분량이 길어서 1부와 2부로 나누어 올린다. 2부는 다음 주에~

 

원래 서무 시리즈 중반 즈음부터 번외편으로 등장인물들의 요리와 레시피를 소개하는 걸 하나 써볼 생각이었는데 그러다가 요즘 냉장고를 부탁해도 재밌게 보고 해서 요리대회 형태로 써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서 이번 편이 나왔다~

 

재밌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독사과와 화재 소동도 가라앉고 베르닌과 왕재수는 일상 생활로 돌아온다. 그런데 어느날 오전 스페호프가 베르닌을 호출해 생각지도 않은 지시를 내리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5

 

 

 

 

서무의 슬픔

-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간만에 공연이 없는 목요일 저녁이었다. 왕재수는 신작 준비 때문에 극장에 나와 있었고 베르닌도 국장의 지령 덕분에 최근에는 오후를 극장에서 보내고 있었다. 왕재수가 5시에 무용수들과 신작 연습을 마치고 나왔을 때 베르닌은 그를 복도에서 낚아챘다.

 

 

“ 집에 가자! ”

 

“ 어, 나 할 거 아직 남았는데. ”

 

“ 오늘 공연 없잖아! 내일도 발레 아니고 오페라잖아. ”

 

“ 아까 연습할 때 보니까 음악이 미묘하게 비는 데가 있어. 안무를 좀 바꿔야 할 것 같아. ”

 

“ 그건 내일 해. 바이올린 아저씨가 아까 신신당부하고 갔어, 너 저녁 챙겨 먹이고 일찍 재우라고. 어제도 밤 새다시피 했다며! ”

 

“ 칫, 어젯밤은 일하다 그런 거 아니야! 전부 로만 책임인데! 자기 전에 스트레칭하고 있는데 갑자기 뒷모습이 너무 섹시하다면서 확 덮치더니 밤새 해줘놓고!

 

“ 으아, 난 그런 거 알고 싶지 않아. 차라리 그냥 일하다 그랬다고 해줘! ”

 

“ 일하다 밤 샜다고 하면 맨날 혼내면서. ”

 

“ 하여튼, 작작 하란 말이야! 일이든 응응이든! 넌 대체 왜 중간이란 게 없는 거야! ”

 

“ 난 그런 거 몰라! 중간쯤 하느니 안 하는 게 낫지! ”

 

 

 

어쨌든 베르닌은 왕재수를 차에 태워서 집으로 돌아왔다. 양파와 감자를 넣은 수프를 끓이고 닭가슴살을 구워서 스메타나를 얹었다. 비트 샐러드도 만들어서 곁들였다.

 

 

“ 야, 다 됐어. 밥 먹어! ”

 

 

소파에 누워 졸고 있던 왕재수가 부스스 일어나 부엌으로 왔다. 식탁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 이게 뭐야? ”

 

“ 양파 감자 수프. ”

 

“ 이건? ”

 

“ 너 좋아하는 거. 스메타나 얹은 닭가슴살. 보랴네 식당에서 좋아했잖아. 나도 따라서 해봤어. ”

 

어휴... 그릇이 이게 뭐니. 이도 다 나가고... 수프도 옆에 다 흘렸네. 전부터 보니까 넌 국자를 참 거칠게 쓰더라. 스메타나도 너무 왕창 부었고. ”

 

야! 맛있기만 하면 되지! 기껏 저녁밥 해줬더니 이젠 별 걸 다 트집이냐!

 

“ 요리의 기본은 맛이지만 플레이팅도 중요하다고! ”

 

“ 플레이팅이 뭐야? ”

 

“ 예쁘게 담는 거! ”

 

으윽, 여긴 시골이야! 그런 거 없어! 빨랑 먹어!

 

“ 보랴는 예쁘게 담아주던데. ”

 

“ 보랴는 요리사고 난 공무원이잖아! 책상물림! 난 시간에 쫓기며 허기 채우려고 요리하는 건데 그깟 플레이팅인지 뭔지까지 어떻게 챙기냐. 오늘따라 왜 이렇게 투정이람. 빨랑 먹어. ”

 

 

왕재수는 툴툴거리더니 숟가락을 들었다. 양파 감자 수프를 떠먹었다. 그러더니 별 말 없이 수프를 먹고 이따금 흑빵을 국물에 담갔다 먹기도 했다. 그리고는 잘 안 드는 나이프로 닭가슴살을 자르면서 다시 한 마디 했다.

 

 

“ 저온에 오랫동안 익히면 고기가 부드러워지는데... 이거 너무 퍽퍽해. ”

 

“ 배고파 죽겠는데 언제 저온에 익히고 있냐! 그냥 먹어! 원래 닭가슴살은 고기 중에서도 제일 맛없는 부위잖아. 네가 좋아하는 거니까 일부러 한 거야. 난 닭가슴살 안 좋아한단 말이야. ”

 

“ 닭가슴살도 촉촉하고 부드럽게 구울 수 있단 말이야. 보랴네 식당에서 나온 건... ”

 

“ 어휴, 그럼 이제 보랴 식당 가서 먹어, 나한테 해 달라 하지 말고! ”

 

“ 그래도 집에서 먹는 건 좋아. 스메타나에 찍어먹으니까 좀 낫다. ”

 

 

베르닌이 먹어봐도 닭가슴살이 질기고 퍽퍽하긴 했다. 하지만 왕재수의 음식투정은 정말 싫었다. 한동안 해주는 대로 잘 먹더니 오늘은 극장에서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이었다. 몇 달 동안 관찰한 결과 왕재수는 극장에서 심기가 불편한 일이 생기면 음식투정이나 시골타령 지수가 높아지곤 했다.

 

 

그래도 왕재수는 비트 샐러드에 대해서는 별 불평을 하지 않았다. 비트를 썰어서 스메타나에 버무린 게 전부니까. 차를 우려주자 한 모금 마신 후 칭찬까지 했다.

 

 

“ 싸구려 티백인데 그래도 잘 우린단 말이야. 내가 우리면 시꺼메지고 티백도 다 터지는데. ”

 

“ 그렇겠지, 무슨 영국산이니 프랑스산이니 스리랑카산이니 고급 잎차에 세상에서 제일 얇은 로모노소프 찻잔에만 마셨던 몸이라 티백으로 홍차 우리는 건 못하시겠지. ”

 

“ 그래! 이렇게 이 빠진 사금파리 같은 찻잔에 화약가루 같은 티백 차를 마시게 될 줄이야. 에휴, 내 팔자야. 시골에 온 것도 모자라 돼먹지 못한 시골 행사에까지 끌려가게 생겼으니. ”

 

“ 무슨 행사? 너 또 어디 가? ”

 

“ 나 툭하면 초청장 날아와. 어휴,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때만 그럴 줄 알았는데 웬 시골에도 이렇게 행사가 많은지. 무슨 현판 개막식에 오라고 하질 않나, 누구 취임식에 오라고 하지를 않나 심지어 콤소몰 체육대회에 오라고까지! 그런 건 다 안 간다고 거절했는데 내일 건 빼도 박도 못하고 가야 돼. 무슨 요리대회인지 뭔지를 하는데 심사위원이라고 이름을 올려놓고는 꼭 와야 한다잖아. ”

 

“ 엥, 넌 극장 사람인데 요리대회 심사위원은 또 뭐야. ”

 

“ 그러니까! 안 가려 했는데 렐랴가 너무 간곡하게 부탁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 나는 대도시 출신이고 해외에도 많이 가봤고 미식가니까 꼭 필요하다는 거야. 어휴. ”

 

“ 으잉, 렐랴? 그 행사 렐랴가 주최하는 거야? ”

 

“ 그런가봐. 렐랴네 잡지하고 또 의회에 무슨 기관이 모여서 하는 건데 되게 할 일도 없나봐. 그런 허접한 행사엔 원래 안 가는데 렐랴가 지난주에 극장까지 찾아와서 부탁하잖아. ”

 

“ 어... 넌 렐랴한테 관심 없으면서.... 사실 관심 있었던 거야? ”

 

“ 나 아플 때 바나나 줬다며. 심지어 지난주에 진짜 파인애플까지 들고 왔더라고. 그걸 어디서 구했을까. 미안해서 어쩔 수 없었어. ”

 

“ 야, 너 사람 됐구나! 미안하고 고마운 걸 다 알고! ”

 

“ 쳇, 나도 예의란 건 안다고! 하여튼 그러니까 내일은 저녁밥 안 해줘도 돼, 거기서 뭐든 집어먹겠지. 시골에서 요리대회라니, 아 촌스러워. ”

 

 

베르닌은 심사평으로 왕재수의 음식투정을 듣게 될 대회 참가자들이 불쌍했지만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왕재수가 차를 마시고 무가당 초콜릿을 먹은 후 기분이 좋아져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괜히 툴툴댔다가 왕재수가 다시 짜증을 내기 시작하면 안 되니까. 그리고 베르닌은 내심 왕재수가 부르는 노래 듣기를 좋아했으므로 꼭꼭 입을 다물었다.

 

 

 

*    *    *

 

 

 

다음날이었다. 매일 오후를 극장에서 감시 업무로 보내느라 일이 많이 밀려 있었기 때문에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그를 호출했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베르닌은 터덜터덜 국장실로 갔다. 그랬더니 스페호프가 못마땅한 얼굴로 얄팍한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 국장님, 부르셨습니까. ”

 

“ 자네 지금 당장 출판문화국으로 가보게. ”

 

“ 예? 출판문화국에는 무슨 일로... ”

 

“ 방금 제1회 가브릴로프 천하일미 요리대회 추진위원회로부터 전화를 받았네. 오늘이 대회 당일이라는군. 공문 보낸 게 언제인데 왜 아직까지도 참가자 명단을 보내지 않았느냐면서 대회 시작 30분 전까지 와서 현장 접수를 하라는 것이 아닌가! ”

 

“ 예? 가브릴로프 천하일미... 공문... 저는 그런 공문을 접수한 적이 없는데... 그런 명단 요구가 있었다면 제가 알았을 텐데... ”

 

 

베르닌은 공문을 꼼꼼히 살피지 않았다면서 국장의 불벼락이 내릴 거라고 생각하며 움츠러들었다.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한숨을 쉬었다.

 

 

“ 아닐세. 자네는 오후마다 극장으로 파견을 가 있지 않았나. 자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 외부 문서 수신을 스멜로프에게 맡겨놨더니만 그 녀석이 덜렁거리다가 첨부 서류를 누락시켰지 뭔가. 좀 전에 불러다 족쳤더니만 기억도 못하더니 책상을 뒤져서 이제야 이걸 찾아왔단 말일세! 아주 혼쭐을 내놨지.

 

 

스페호프가 방금까지 뒤적이고 있던 얇은 서류를 툭 던졌다. ‘붙임 1. 제1회 가브릴로프 천하일미 요리대회 참여 대상 기관 현황’, ‘붙임 2. 기관별 참가자 명단 양식’ 두 가지로 되어 있었다. 붙임 1을 보니 시의 각종 공공기관 명단이 쭉 나열되어 있었는데 두 번째 줄에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가 떡하니 들어 있었다.

 

 

“ 어, 우리도 들어 있었네요. ”

 

“ 그러게 말이야! 이게 알고 보니 의회 특별예산을 배정받아 개최되는 거라는군! 공공기관들은 전부 참석 대상이야. 에잇, 돈이 썩어나나... 이따위 허접한 행사에 시의 예산을 낭비하다니. 그래서 말인데, 다닐. 자네가 가보게. ”

 

“ 네? 제가요? 아니 왜... 저는 요리를 배운 적도 없고... ”

 

“ 그냥 가서 보안위원회 참가자 이름만 채워주란 말이야! 체육대회도 아니고 이깟 쓰잘데없는 행사에서 우승할 필요도 없고... 하지만 의회 의장이 추진위원장이라니까 우리도 얼굴은 내밀어야 한단 말이야. 이런 건 서무가 맡는 것이야. 어서 다녀오게. 게다가 거기 심사위원에 그 불여우도 들어 있다지 않나. 머릿수도 채우고 그 자식 감시도 계속하고. 2시에 시작한다니까 어서 준비하고 가보게나. ”

 

 

베르닌은 어이가 없었지만 어쨌든 국장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으므로 업무를 대충 정리하고는 출판문화국으로 향했다.

 

 

 

*    *    *

 

 

 

 

출판문화국은 구시가지의 레닌 대로변에 있었다. 렐랴의 문예지인 비슈네브이 사드 사무실도 같은 건물에 있었기 때문에 지난번에 가본 적이 있었다. 건물 앞에 ‘제1회 가브릴로프 천하일미 요리대회’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잘 읽어보니 주최는 시 의회였고 주관은 가브릴로프 천하일미 요리대회 추진위원회였다. 그 아래 씌어 있는 내용을 또 읽어보니 추진위원회는 가브릴로프 방송 제1채널과 식품위생국, 그리고 비슈네브이 사드가 협력해 구성한 단체였다.

 

 

‘ 아, 그 녀석 말이 맞구나. 렐랴가 추진위원회에 들어 있었네. 어휴, 웬 요리대회...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만 올 텐데... 난 그냥 옆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야지. “

 

 

베르닌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요리대회니까 지하 구내식당에서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경비원에게 물어보니 2층 대강당으로 안내해주었다. 출판문화국 강당은 가끔 공연이나 전시가 이루어지는 곳이었기 때문에 꽤 넓었다. 강당으로 가보니 조리대가 죽 늘어서 있었다! 대회를 위해 준비한 모양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조리대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어떤 건 소속기관명과 이름이 붙어 있었고 어떤 건 이름만 있었다. 잘 보니 공공기관 대표들과 일반 시민들이 함께 참가하는 모양이었다.

 

 

둘러보다가 그는 뒤에 있는 등록 데스크로 갔다. 중년 남자 하나가 서류철을 놓고 앉아 있었다. 기관명과 성명을 말하니 남자가 종잇조각을 하나 뽑아들고는 베르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 당신 그러고 왔어요? ”

 

“ 네, 사무실에서 곧장 오느라. ”

 

“ 앞치마랑 머릿수건은요? ”

 

“ 엥, 그런 것까지 준비해야 하나요? ”

 

“ 요리대회인데 당연한 거 아닙니까! 가뜩이나 보안위원회는 명단도 안 내고 뺀질거리더니... 앞치마 안 매면 실격이에요! 머릿수건도 마찬가지고. 아예 머리를 빡빡 깎든지 아니면 머릿수건 둘러야 한다고요! ”

 

“ 어, 예... 구해올게요.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그런데 저는 어디에서 조리를 해야 하나요? 조리대들에 전부 이름이 붙어 있던데. ”

 

“ 저쪽 귀퉁이에 하나 남겨놨으니까 그리로 가면 되겠네. ”

 

“ 빈 조리대를 못 찾았는데... ”

 

 

남자는 툴툴대더니 베르닌을 맨 뒤 가장자리에 있는 조리대로 안내했다. 30번이라는 번호가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조리대를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것 같았다. 옆 조리대와 큰 차이가 났다. 싱크도 작았고 도마도 홈이 움푹 패여 있는데다 조리대 크기 자체도 작았다. 남자는 조리대에 ‘다닐 베르닌, 보안위원회’라고 휘갈겨 쓴 종잇조각을 철썩 붙이고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자, 이제 가서 앞치마나 구해와요. 대회는 1시간 후에 시작이지만 참가자들은 10분 전까지는 자기 조리대 앞에 정렬해야 해요. ”

 

 

베르닌은 밖으로 나왔다. 부엌용품 파는 가게로 가서 줄을 섰다. 앞치마 하나와 머릿수건을 산 후 눈에 띄는 카페에 가서 샌드위치 한쪽과 커피 한 잔으로 점심을 때웠다. 샌드위치를 입 안에 우겨넣고 있는데 누가 그의 어깨를 탁 치면서 맞은편에 앉았다. 고개를 드니 왕재수의 비서 류드밀라였다.

 

 

“ 어머, 다냐.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

 

“ 어, 안녕하세요, 류다. 무슨 요리대회가 있다고 해서요. 국장이 가라고 해서 왔어요. ”

 

“ 아, 천하일미 요리대회? 나도 극장 대표로 나가는데. ”

 

“ 어, 정말요? 당신 요리 잘 해요? ”

 

“ 좀 하는 편이죠. 나간다고 했더니 감독님이 짜증내긴 했지만. ”

 

“ 엥, 그 자식이 왜 짜증내요? ”

 

“ 뻔할 뻔자 기름이 줄줄 흐르는 생선완자 만들 거 아니냐면서. 가뜩이나 심사 때문에 온갖 기름진 걸 다 먹어야 할 텐데 나까지 거드는 거냐고 툴툴대더라고요. ”

 

“ 와, 생선완자 맛있겠다... ”

 

“ 그쵸! 나 생선완자 진짜 잘 만드는데! 전에도 잔뜩 구워서 발레단에 돌렸더니 다 좋아했거든요. 맛있다면서. 미샤 빼곤 다 좋아했다고요. 근데 우리 감독님이 심사위원이라니까 생선완자 대신 딴 거 만들기로 했어요. 생선을 다져서 토마토랑 치즈를 넣고 파프리카 안에 넣고 구워낼 거예요. 전부 까다로운 우리 감독님이 좋아하는 재료니까 분명히 상을 받을 수 있겠지! ”

 

“ 아... 그것도 진짜 맛있겠어요. 근데 상품은 뭐예요? ”

 

“ 1등은 온천 요양소 2주일 휴양권이래요! 2등, 3등도 휴양권 주는데 날짜만 좀 짧은 것 같더라고요. 다냐, 알잖아요. 검은 숲 그 온천 요양소. 높은 분들만 가잖아요. 진짜 가고 싶은데... 그리고 의회에서 가브릴로프 대표 요리사라고 표창장도 준대요. 꼭 상 타고 싶어요. 근데 세상에, 내가 나간다니까 망할 놈의 아르카지가 갑자기 자기도 가겠다고 나서지 뭐예요. 내참, 주제를 알아야지. ”

 

“ 아르카지? 당신네 차이카 카페의 그 아르카지요? 거기 되게 맛없는데. ”

 

“ 그러니까 말이에요! 심지어 그 작자는 매니저이지 요리사도 아니라고요. 맨날 보드카에 물만 타는 인간인데. 우리 극장 망신이지 뭐겠어요. 근데 당신은 뭐 만들 거예요? 미셴카가 그러던데, 당신 요리 잘 한다고. 어휴, 생각지 않은 실력자가 나타났네. 미식가인 우리 감독님이 인정한 사람이 떡하니 출전하다니. 불공평해요. ”

 

“ 어, 저... 저 요리 잘 못해요. 걔한테 해주는 것도 그냥 보르쉬에 펠메니 같은 거라서... 오늘은 머릿수 채우러 온 거예요. ”

 

“ 하긴, 우리가 아무리 잘해봤자 벌써 우승은 예산국의 조야 브릴료바로 낙착돼 있대요. 의장이 밀어주고 있거든요. 지금 의회랑 예산국이랑 밀고 당기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조야가 그쪽 책임자라지 뭐예요. 그리고 조야는 중앙당이랑도 연줄이 있으니... 보나마나 우승이죠 뭐. 2등이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그나마 렐랴가 주최측이라서 참가를 안 하는 게 진짜 다행이에요. 그 아가씨가 출전했어 봐요... 대번에 우승이지. 하여튼 불공평하다니까, 누구는 집안 좋아, 얼굴 예뻐, 능력 있어, 심지어 요리까지 잘하니... 우리 감독님한테 흑심 품어서 이번에도 심사위원으로 끌어들이고... 이러다 렐랴랑 우리 미셴카랑 결혼하는 거 아닐지... 그 여자 언감생심 우리 금쪽같은 감독님 넘보기만 해봐. ”

 

“ 어, 렐랴도 굉장히 예쁜데... ”

 

그래도 우리 미셴카가 훨씬 아깝단 말이에요! 렐랴가 아무리 잘 나가도 그게 우리 동네에서나 그렇지! 우리 감독님은 연방을 뒤흔든 톱스타였고 외국에서도 다 아는 사람인데! 렐랴는 안돼요! 그리고 아무리 발레에 대해 아는 척해도 우리처럼 극장 쪽 사람도 아니고! 미셴카는 우리 발레단 아가씨랑 결혼하면 참 좋을 텐데. 토냐가 참 귀엽고 착한데. 레나도 예쁘고... 타마라가 제일 예쁘긴 한데 걘 옛날부터 데니스랑 사귀니까 차마 안 되겠고... 이번에 스네고로드에서 데려온 애, 나쟈라는 애도 귀엽더군요. 벌써부터 감독님이 걔한테 반해서 데려온 거 아니냐, 조만간 동거하거나 결혼할 거 같다고 여자애들이 얼마나 상심하고 있는지. ”

 

“ 어... 무용수들이 연습만 하는 게 아니고 별의별 가십을 다 나누는군요. 근데 미샤는 나쟈한테 그런 감정 있어서 데려온 거 아니에요. 재능이 뛰어나서 데려왔다고 했어요. 미샤는 발레단 사람들이랑은 안 사귀는 게 철칙이랬어요. ”

 

“ 흥, 그걸 어떻게 믿어요. 옛날에 키로프 있을 때도 파트너 발레리나랑 얼마나 알콩달콩 잘 살았는데. 지나이다 세도바 몰라요? 둘이 공식 커플이었잖아요. 같은 아파트에서 3년이나 동거하고. 여자가 배신하고 딴 남자랑 결혼해서 그렇지. 참 그 여자도 대단하지, 어떻게 우리 미셴카 같은 남자를 버리고... ”

 

 

베르닌은 그 지나이다라는 여자도 자기처럼 밥이나 차려주고 청소나 해주는 불쌍한 집사 노릇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대회 시작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함께 출판문화국으로 갔다.

 

 

 

 

*    *    *

 

 

 

 

대회는 생각보다 거창한 개막식으로 시작되었다. 꼭 작년 가을의 체육대회 같았다. 의회 의장은 청산유수처럼 연설을 했다. 가브릴로프의 광활한 자연과 풍부한 식재료를 찬양하고 각종 영양소를 고루고루 살려 만들어내는 천하일미로 가브릴로프 인민들의 미감을 충족시키고 건강을 증진함으로써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을 배양하고 궁극적으로는 연방에 이바지하는 훌륭한 소련 시민을 만들어내는데 이바지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베르닌은 생전 처음으로 어설프게 머릿수건을 동여매고 앞치마를 질끈 묶은 채 좁은 조리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키가 큰 편이었지만 앞에 죽 늘어선 참가자들도 모자라 바로 앞과 대각선 방향에 세워진 기둥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보일 지경이었다. 뭐 차라리 나았다. 어차피 대충대충 하고 끝낼 테니까 눈에 안 띄는 편이 훨씬 나았다.

 

 

어쨌든 의장이 인사말을 마친 후 방송에서 본 적이 있는 여자가 사회를 보면서 심사위원 소개를 했다. 심사위원은 총 세 명이었다. 의장이 심사위원장이었고 렐랴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베르닌은 어떻게든 렐랴를 보려고 조리대 옆으로 나와서 고개를 쭉 뺐다. 긴 머리를 말끔하게 틀어 올리고 검은색 투피스를 차려입은 렐랴는 눈부시게 예뻤다. 왕재수는 의장의 인사말이 끝날 무렵에야 들어와서 렐랴의 옆에 앉았다. 정장을 입은 두 심사위원과는 달리 평소처럼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검정 셔츠에 청회색 스카프를 두르고 빛바랜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의장이 못마땅한 듯 실눈을 떴지만 마침 방송사 카메라가 심사위원석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그저 눈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그에 비해 렐랴는 환한 얼굴로 방긋 웃으며 왕재수를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왕재수도 렐랴에게는 상냥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주기까지 했다.

 

 

그때 사회자가 말했다.

 

 

“ 그럼 지금부터 조리를 시작하겠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60분입니다. 그때까지 모든 조리와 플레이팅을 마치지 못하면 실격입니다. 종이 울리고 나면 모든 참가자는 조리대를 떠나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가 조그만 종을 땡 하고 울렸다. 그 즉시 참가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촤라라락 하면서 바구니에서 각종 야채와 고기를 쏟아내 손질을 하지 않나, 렌지를 켜고 팬을 달구지를 않나, 물을 끓이지를 않나, 척척척척 서걱서걱서걱 통통통통 칼질을 하지를 않나 각종 소음들이 난무했다. 여기저기서 치지지짓 하는 소리가 들리고 기름 냄새가 나는가 하면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올라오기도 했다. 벌써부터 맛있는 냄새도 났다.

 

베르닌은 한동안 멍하게 서 있다가 자기도 어쨌든 참가자니까 뭐든 하긴 해야 할 것 같았다. 뭘 만들지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래도 명색이 대회니까 조금이라도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펠메니를 빚자! 열댓 개만 빚으면 금방 할 수 있고 찌는 것도 금방 하니까 한 시간 내에 할 수 있겠지. ’

 

 

사실 펠메니는 새해 전야에 왕재수가 졸라대서 딱 한번 빚어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전혀 어렵지 않았었다. 자꾸 사고를 치던 왕재수도 곁에 없으니 더욱 쉬울 것이다. 베르닌은 책상물림답게 요리를 하기 전에 먼저 머릿속으로 필요한 내용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았다.

 

 

재료는 그러니까... 만두피에는 밀가루. 계란 노른자. 기름 조금. 만두소는 고기, 다져야겠지. 소랑 돼지를 섞으면 더 좋을 거고. 양파, 후추, 소금. 재료도 참 간단하네. 일단 고기 다져서 속부터 만들어놓고 반죽을 해야겠다. ’

 

 

모든 것을 정리한 후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기 위해 베르닌은 먼저 손을 씻었다. 자꾸만 풀어지는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꽁꽁 동여맸다. 그리고 조리대 위에 있는 도마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칼이 어디 있나 헤매다가 간신히 서랍에서 날이 무뎌 보이는 칼을 한 자루 꺼냈다. 이제 다 됐다! 요리만 하면 된다!! 그런데...

 

 

어? 근데 고기는 어디 있지? 밀가루는? 양파는?

 

 

베르닌은 멍해졌다. 조리대 위에 있는 거라고는 도마와 가스렌지, 채반과 프라이팬과 냄비, 그릇 몇 개가 전부였다. 서랍을 뒤져봐도 칼과 숟가락, 포크 따위밖에 없었다. 최소한의 조리도구는 있었지만 식재료가 전혀 없었다!!!

 

 

당황한 베르닌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참가자들은 미친 듯이 요리를 하고 있었다. 야채와 고기와 과일, 밀가루와 각종 향신료가 난무했다. 그는 통로 쪽으로 나가보았다. 식재료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누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 다냐, 뭐하는 거예요. 가뜩이나 시간도 모자라는데 왜 이렇게 왔다갔다 해요? ”

 

 

류드밀라였다. 커다란 그릇에 토마토와 흰 살 생선을 다져서 기름으로 버무리다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베르닌은 그녀의 렌지 화구 위에서 파프리카가 불꽃을 내뿜으며 타들어가고 있는 것에 기겁을 했다.

 

 

으아, 류다! 파프리카요! 팬에 올렸어야죠! 새까맣게 타고 있어요! ”

 

“ 어휴, 당신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군요. 이건 원래 이렇게 하는 거라고요! 껍데기가 시커멓게 다 타야 쉽게 벗겨지는 건데. 하여튼 총각이라 아무 것도 모른다니까. ”

 

“ 비싼 파프리카 껍데기를 왜 다 태워요? ”

 

“ 그래야 속살이 더 달고 쫄깃해지죠! 어머어머, 이거 영업비밀인데 내가 왜 경쟁자에게... 근데 당신 왜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어요? ”

 

“ 어... 저... 아무리 찾아도 식재료가 안 보여서요. 당신은 어디서 가져왔어요? 냉장고가 안 보여요. ”

 

“ 어머, 웬 냉장고! 다냐, 당신 대회 규칙 안 읽었어요? 요리 재료는 직접 준비해오는 거잖아요. 설마 하나도 안 가져온 거예요? 몸만 왔어요? ”

 

“ 어, 네... 전혀 몰랐어요. 당연히 여기 오면 다 주는 건줄 알았어요. ”

 

“ 바보, 그런 대회가 어디 있어요. 그럴 거였으면 애초부터 뭐 만들 건지 적어서 내라고 했을 거 아니에요. 어쩌나. 나도 여분이 없긴 한데. 뭐 만들려고 했는데요? ”

 

“ 저... 펠메니요... ”

 

“ 엥, 펠메니... 그럼 밀가루랑 고기가 필요하잖아요. 난 속 채운 파프리카라서 그런 거 없는데... 토마토 한 개 남는데 이거라도 가져가요. ”

 

 

류드밀라는 불그스름하고 조그만 토마토 한 알을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자르고 남은 치즈도 떼어주었다.

 

 

“ 펠메니엔 별 도움 안 되겠네. 빨리 돌아다니면서 재료 구해 봐요. ”

 

“ 어, 예... 고마워요, 류다. 파프리카 다 탔네요. ”

 

“ 어머, 잘도 탔네. 이제 껍데기 벗겨야지. ”

 

 

류드밀라가 파프리카를 집어 시커멓게 탄 껍질을 벗기는 동안 베르닌은 토마토 한 알과 치즈 조각을 들고 털레털레 조리대 앞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것으로 만들 수 있는 요리는 전혀 없었다. 목을 쭉 빼고 보니 아는 얼굴이 또 보였다. 극장 카페 차이카의 매니저 아르카지였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르카지에게 갔다.

 

 

“ 안녕하세요, 아르카샤. ”

 

“ 어, 그래. 너도 왔구나. ”

 

 

아르카지는 냄비에 뭔가를 계속 퐁당퐁당 던져 넣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핏 보니 흐릿한 붉은빛을 띠는 국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 뭐 만드시는 거예요? ”

 

“ 보르쉬! ”

 

“ 네? 정말요? 보르쉬라고요? ”

 

“ 너 지금 내가 기껏 보르쉬 만든다고 무시하냐! 보르쉬가 아무리 흔해빠진 음식이라도 수프의 기본이야! 가정식에 충실해야지! 나만의 특별 레시피로 만든 보르쉬라고! ”

 

“ 어, 아니... 그게 아니고요. 보르쉬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근데 국물이 너무 많은 거 같은데... 건더기는 거의 없고 물만 흥건... ”

 

시끄러워! 나만의 특별 레시피라고 했잖아! 보르쉬라고 무조건 비트랑 고기랑 양배추가 잔뜩 들어있으란 법 있냐! 내 보르쉬는 주스처럼 훌훌 마시는 간편 보르쉬란 말이야! 병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빨대로 조로록 마실 수 있게 만드는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

 

“ 엥... 그럼 그건 그냥 야채 주스... ”

 

시끄러워! 너 지금 내 요리 훼방 놓으려고 그러는 거지? 역시 KGB 놈팽이였어! 어떻게든 우리 극장에서 우승자가 나오는 걸 방해하려고!

 

“ 저, 아니에요. 죄송해요, 아르카샤. 당신 요리 맛있을 것 같아요. 저어... 전 오늘 갑자기 대회 나가라고 해서 몸만 왔거든요. 재료가 하나도 없어서요... 저는 펠메니를 만들어야 하는데... 보르쉬엔 고기랑 양파가 들어가지 않나요? 남는 고기랑 양파 있으면 저 좀 빌려주시면 안 되나요? ”

 

 

마침 양파를 숭덩숭덩 썰어서 냄비에 부어넣고 있던 아르카지는 한숨을 쉬면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이런 미련퉁아, 그럼 빨리 말을 했어야지. 보르쉬가 어떻고 국물이 어떻고 하고 있냐! 먼저 얘길 했으면 내가 지금 양파를 다 안 넣었을 거 아냐! 이미 늦었어, 양파 다 썰어서 넣어버렸단 말이야! ”

 

“ 어, 저어... 그럼 고기라도... ”

 

“ 고기는 당연히 맨 처음에 넣었지! 육수 내려고! 어휴, 가뜩이나 시간도 없는데... 잠깐만 기다려봐. 잘 찾아보면 자투리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금만 기다려, 수프 간 좀 보고. ”

 

 

아르카지는 숟가락도 아니고 국자를 냄비에 왈칵 담그더니 엷은 붉은빛이 도는 국물을 잔뜩 펐다. 후후 불더니 후루룩 마시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 음, 아직 맛이 안 우러났어. 한참 끓여야겠어. ”

 

“ 아니, 그게요... 아무리 봐도 국물이 너무 한강... ”

 

“ 시끄러워! 주스처럼 마시는 보르쉬라 했잖아! ”

 

“ 아참 그렇지... 수프는 그냥 불 위에 올려놓으면 졸아들 테니 그 사이에 자투리 좀... ”

 

무슨 소리야! 수프는 손맛과 정성이라고! 계속계속 이렇게 떠먹으면서 간을 봐야지! 좀만 기다려.

 

 

베르닌은 너무 답답했지만 그래도 고기와 양파를 얻을 수 있는 기회라 잠시 기다렸다. 아르카지는 쉴 새 없이 국자를 담갔다 뺐다 하며 간을 보았다. 국자를 자꾸 넣으면 수프의 온도가 계속 내려가서 잘 끓지 않고 그나마 적은 건더기의 맛도 빨리 우러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베르닌은 더 이상 지적을 하지 않으려고 꾹 참았다. 그러다 문득 차이카의 보르쉬가 생각나서 자기도 모르게 한 마디 해버렸다.

 

 

“ 근데 차이카에서는 맨날 깡통 보르쉬만 데워주잖아요. 혹시 그게 아쉬워서 이번에 보르쉬로 승부하시는 거예요? ”

 

 

아르카지가 펄쩍 뛰었다.

 

 

뭐야? 깡통 보르쉬라니!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그거 다 내가 하나하나 계량해서 내 정통 레시피로 만들게 하는 건데!!! 그건 정통 보르쉬, 지금 만드는 건 대회용으로 특별히 개발한 주스 식 보르쉬라고! 어디서 깡통 보르쉬 얘길... 물론 차이카 메뉴는 깡통 보르쉬가 주재료긴 하지만 난 물을 두 배로 타서 만들게 한단 말이야! 그게 정통이야! 옛날에 없이 살던 시절에 무슨 능력이 있어서 고기랑 비트랑 야채 펑펑 넣어서 진한 수프를 끓였겠어! 난 우리들의 어머니 러시아의 전통을 살린 진짜 옛 맛 그대로의 보르쉬를 차이카에서 선보이게 한 거라고! 에잇, 감히 내 전통 옛 보르쉬를 모독하다니... 자투리 안 줄까보다! ”

 

 

베르닌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지만 꾹 참고 애걸했다.

 

 

“ 잘못했어요, 아르카샤. 제가 잘못 알고 있었네요. 저는 근본 없는 책상물림이라 전통의 옛 맛을 잘 몰랐어요. 제발 자투리 좀 주세요. 시간도 벌써 많이 갔는데 이러다 저 펠메니 못 만들지도 몰라요. ”

 

 

아르카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째려보았지만 심사위원석을 힐끗 쳐다보았다. 의회 의장과 렐랴는 뭔가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왕재수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르카지가 한숨을 쉬었다.

 

 

“ 너 예뻐서 주는 거 아니야. 저번에 우리 감독님 아플 때 도와줬다 해서 주는 거야. 에이 짜증나. 내 요리에 깃든 정성을 모독하다니. ”

 

 

그리고는 국자를 잠깐 내려놓더니 도마를 뒤집고 그릇을 이것저것 달그락거리더니 손뼉을 딱 쳤다.

 

 

“ 여기 좀 남았네! 이거 가져가. ”

 

 

베르닌은 매우 실망했다. 아르카지가 내민 것은 양파 반쪽과 양배추 귀퉁이, 당근 4분의 1토막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 어, 고마워요... 근데 혹시 고기는 남은 거 없나요? ”

 

“ 고기는 없어. 처음에 다 넣어버려서. 이거라도 가져가. 나 이제 수프 간 맞춰야 돼. 빨랑 가! ”

 

 

베르닌은 하는 수 없이 야채 자투리를 들고 자리를 떴다. 도저히 이것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또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렐랴의 사무실에서 만났던 잘생긴 비서 안드레이가 양손에 각각 냄비와 팬을 든 채 요리에 여념이 없었다. 굉장히 맛있는 냄새가 확 풍겨왔다. 의심의 여지없는 쇠고기 냄새였다. 그는 머뭇거리며 다가갔다. 안드레이와는 한번밖에 보지 않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인사를 했다.

 

 

“ 저, 안드레이.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 다닐 베르닌이에요. 왜 얼마 전에 릴리아나 페트로브나를 뵈러 찾아갔었던. ”

 

 

안드레이는 그를 곁눈으로 힐끗 보더니 귀찮은 듯 대꾸했다.

 

 

“ 아, 그 KGB... 미샤 감시요원인 주제에 엄청 친한 척 하는 사람이군요. ”

 

“ 저... 전 걔랑 친한 척 한 적은 없는데... ”

 

“ 흥, 안 그랬으면 당신 주제에 우리 편집장님 사무실에 발을 들여놓을 수나 있었을 것 같아요? 렐랴가 미샤에게 가진 호감을 악용하다니 정말 당신은 박쥐같은 인간이에요! 어디 언감생심 우리 편집장님한테 흑심을 품고. 툭하면 우리 잡지 검열해서 트집 잡는 KGB 주제에. ”

 

“ 아니에요, 안드레이. 저는 그런 쪽 관여 안 해요. 그건 우리 국장이... ”

 

시끄러워요, 요리에 방해되니까 빨리 돌아가요! 아니면 이것까지 감시하려는 거예요? ”

 

 

아무래도 안드레이는 가브릴로프의 수많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렐랴에게 속절없이 반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렐랴가 베르닌에게 상냥하게 대해준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듯했다.

 

 

“ 그렇지 않아요, 저... 근데 당신이 만드는 요리는 굉장히 근사해보이네요. 쇠고기 요리 같은데... 냄새도 너무너무 맛있게 나요. 렐랴만 요리 잘하는 줄 알았는데 당신도 굉장히 잘하나 보네요. ”

 

 

요리를 칭찬하자 안드레이의 얼굴이 한결 펴졌다.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흥, 그래도 요리 보는 눈은 있네. 이건 말이죠, 렐랴에게서 직접 전수받은 레시피로 만드는 비프 스트로가노프라고요!

 

“ 우와, 비프 스트로가노프요? 그거 고급 요리잖아요. 대단하다... ”

 

“ 그렇죠! 게다가 이건 렐랴가 대대손손 전해져 내려오는 테레슈킨 공작 가문의 레시피를 그대로 재현한 거라고요! 알죠? 렐랴 외가는 제정 시절 공작 가문이었던 거. 이건 원조인 스트로가노프 공작에게서 테레슈킨 공작이 직접 받아낸 레시피라고 했어요! 이 쇠고기로 말할 것 같으면 마블링이 끝내주는 진짜 고급 등심과 안심을 잘 배합한 것이고 크림은...

 

“ 크림도 부드럽게 잘 엉기는 것이 수입산인가 보네요. ”

 

당연하죠! 외제 아니면 이렇게 향긋한 풍미가 돌지 않는다고요! 버터는 렐랴가 직접 만든 거고! 이런 재료와 이런 레시피로 만드는 요리 본 적 있어요? 당연히 내가 우승이죠! ”

 

“ 진짜 그렇겠다... 이렇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요리는 처음 봐요. 우와... 렐랴도 대단하지만 이걸 배워서 만들 수 있는 당신도 대단하네요. 전 비프 스트로가노프는 모스크바에서 공부할 때 몇 번 먹어본 적밖에 없는데 그때도 이렇게 때깔이 근사한 건 한 번도 못 봤어요. 고기랑 소스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네요. ”

 

 

베르닌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안드레이는 굉장히 좋아했다.

 

 

“ 역시 그렇죠? 내가 우승하겠죠? 나 반드시 우승해야 돼요. 그럼 렐랴가 내 실력도 인정해 주고 내 마음도 알아주겠지... 렐랴는 날 그냥 비서 취급만 하고 남자로는 안 봐준다니까요. 내가 왜 거기 입사했는데... ”

 

“ 아, 그렇구나... 렐랴 때문에 들어간 거구나... ”

 

 

얘기를 하면서 안드레이는 고기 냄비에 크림소스를 붓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볶기 시작했다. 두 배로 고소하고 부드럽고 그윽해진 냄새가 났다. 베르닌은 넋을 놓고 있다가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 그런데요, 사실은 저는 갑자기 이 대회에 출전하게 돼서... 펠메니를 만들려고 하는데 재료가 없어서요. 혹시 쇠고기 자투리 남는 거 있으면 조금만 빌려주시면 안 되나요?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

 

 

안드레이가 갑자기 정색을 했다.

 

 

뭐가 어째요? 고기를 빌려달라고요? 당신 미쳤어요? 이 고기가 얼마나 고급 쇠고기인데! 그리고 그걸 다 떠나서, 어떻게 감히 대회에서 식재료를 빌려달라고 할 수 있어요! 이건 경쟁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릴! 당장 꺼져요! 내참, 별 소릴 다 듣겠네!

 

“ 아니, 저... 어차피 전 순위권에는 못 들 거고요... 그래도 참가는 했으니까 펠메니 몇 개만 빚으려고... ”

 

시끄러워요! 이건 경쟁이라고 했잖아요! 꺼져요!

 

 

베르닌은 풀이 팍 죽어서 안드레이의 조리대를 떠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안드레이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 어쩌지... 재료가 없네. 그냥 실격 당하려나... ”

 

 

그때 어딘가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너 다닐이냐? 난 또 누가 이렇게 정신 사납게 왔다 갔다 하나 했네. ”

 

 

베르닌은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았다. 대각선 방향의 반대편 구석 조리대 앞에서 보랴가 한 손을 흔들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그쪽으로 갔다.

 

 

“ 아, 당신도 나오는 줄 몰랐어요. 아까 이쪽 이름표 봤었는데... 당신 성이 도브로류보프였군요. 기관명이 없는 걸 보니 개인 출전인가 보네요. ”

 

“ 응, 귀찮아서 안 나오려 했는데 우리 식당에서 나가라고 어찌나 등을 떠미는지. 그런데 넌 뭐냐, KGB 대표가 너야? ”

 

“ 예, 아침에 갑자기 국장이 부르더니 대회 나가라잖아요. 아무 것도 모르고 왔거든요. 근데 뭐 만들어요? 양파 수프랑 사과소스 돼지구이 만들지... 난 당신 요리 중에 그게 제일 맛있었어요. ”

 

“ 에이, 그건 맨날 식당에서 만드니까 재미없잖아. 난 오늘 케익 만들어. 다들 메인 요리만 만드는 것 같더라고. 디저트도 있어야 덜 지겹지. ”

 

“ 뭔데요? 아무 것도 없는데요? ”

 

 

아무리 봐도 조리대에 있는 거라곤 커다란 사발에 가득 들어 있는 호두와 아몬드뿐이었으므로 베르닌은 고개를 갸웃했다. 보랴가 웃었다.

 

 

“ 반죽은 벌써 오븐에 들어갔지. ”

 

“ 오븐이 어디 있어요? ”

 

“ 저 뒤에 공용 오븐 있잖니. 너 진짜 아무 것도 모르고 왔구나. ”

 

“ 아, 그렇구나... 하긴 굽는 요리들은 오븐이 필요하니... 근데 호두랑 아몬드 들어가는 케익도 여러 가지잖아요. 뭐 만드는 거예요? ”

 

“ 메도빅. ”

 

“ 아, 맛있겠다! 근데 너무 흔하지 않아요? ”

 

“ 흔하면 어때. 진짜 맛있으면 되지. 옛날에 우리 아들내미가 좋아했던 거야. 한 판 구워서 잘라주면 순식간에 해치우고는 ‘아빠 아빠 더 주세요’ 하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

 

 

보랴는 눈시울을 잠깐 붉혔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 근데 너는 왜 아까부터 요리는 안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냐? 벌써 다 만들었어? ”

 

“ 아니요. 전 진짜 아무 것도 모르고 등 떠밀려서 와서요... 재료를 하나도 안 가져왔어요. 여기서 다 주는 줄 알았거든요. 혹시 재료 남는 거 빌려줄 수 있어요? ”

 

 

베르닌은 안드레이의 ‘이건 경쟁이에요!’란 말이 생각나서 한 대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쭈뼛쭈뼛 물어보았다. 그리고 보랴는 그의 등짝을 정말 한 대 쳤다.

 

 

“ 이런 바보 같으니. 요리대회에 나오면서 식재료를 안 가져왔다고? 하긴 모르고 왔으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뭐가 필요하니? 나한테 있는 거야 다 줄 수 있지. ”

 

 

베르닌은 뛸 듯이 기뻤다.

 

 

“ 고마워요, 보랴! 난 펠메니 빚으려고 하는데... 밀가루하고 고기, 계란, 기름, 소금, 후추가 필요해요. 야채는 조금 얻었거든요. ”

 

“ 엥, 펠메니? 하필 그거냐... 난 케익이라서 고기랑 기름, 후추는 없는데. 가만있자, 밀가루가... 이런... 계량을 정확히 해서 가져왔거든. 밀가루는 전부 반죽해서 지금 오븐 안에 들어가 있으니... ”

 

 

보랴가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조리대 위와 아래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계란 세 알과 버터 한 토막을 건네주었다.

 

 

“ 어쩌냐. 이것밖에 없구나. 참, 소금도 좀 줄 수 있겠다. 잠깐만 기다려. ”

 

 

보랴가 작은 병을 꺼내더니 접시에 소금을 두어 숟가락 정도 쏟아주었다.

 

 

“ 펠메니... 음... 이걸로는 안 되겠구나. 제일 중요한 밀가루와 고기가 없으니... 근데 너 어차피 지금 재료 다 구해도 펠메니는 못 빚을 거다. 시간도 다 돼 가는데 언제 반죽하고 빚어서 찌겠냐. 차라리 있는 거 가지고 다른 걸 만들렴. 빨리 가라, 시간 없다. ”

 

“ 고마워요, 보랴. 진짜 고마워요. ”

 

 

베르닌은 진심으로 고마워서 보랴를 와락 껴안았다. 보랴는 다시 한 번 그의 등짝을 철썩 때렸다.

 

 

“ 황소만한 사내놈이 뭐하는 거야. 우리 예쁜이라면 몰라도. 빨리 가! ”

 

 

베르닌은 계란과 버터와 소금을 들고 조리대로 돌아왔다. 그때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 이제 15분 남았습니다!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15분 남았다니! 언제 45분이 흘렀단 말인가! 류드밀라와 아르카지, 안드레이와 보랴에게 가서 재료를 구하는데 시간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메인인 밀가루와 고기는 구하지도 못했다. 대충 하고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시간은 다 돼 가고 펠메니는 수포로 돌아가고 아무 것도 못하고 있자 머리가 핑 돌았고 눈앞이 캄캄했다.

 

 

‘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래도 우리 회사 대표로 나왔는데 아무 것도 못 만들면 안 되는데... 큰 일 났네... 뭐 만들지... 메인이 될만한 건 하나도 없으니... 어떡해... ’

 

 

베르닌은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신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바보, 재료를 주는 대회가 어디 있어.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걸... 여기가 미국도 아닌데. 아까 앞치마 사러 갔을 때 식재료도 샀어야지...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매사가 이런 식이야. 책상물림... 멍충이... 현실에선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흑... 이런 식으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나가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 이거 아무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막막한 거야, 엉엉... ’

 

 

눈물이 어른어른해서 조리대도 제대로 안 보였다. 막막하고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무정한 사회자가 또 소리를 쳤다.

 

 

자, 10분 남았습니다! 참가자들은 이제 마무리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베르닌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기계적으로 벽시계를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심사위원석에 있는 왕재수가 눈에 들어왔다. 왕재수는 애초부터 대회에 관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조리대와 참가자들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왕재수는 한 손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들기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아주 작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돈키호테 무대에 올라갔던 덕분에 베르닌은 그게 마임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무슨 동작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발레 마임인 건 분명했다.

 

 

‘ 저 자식, 말로는 은퇴했다 하면서 잠시도 가만히 못 있는구나. 몸에 배서 그런가, 신작 안무인가? 아니면 계속 연습하는 건지도 몰라. ’

 

 

갑자기 베르닌은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해왔다.

 

 

‘ 자기 천재라고 엄청 으스대더니 사실은 죽어라고 저렇게 연습했겠구나. 그러고 보니 저 녀석 나랑 있을 때도 맨날 발로 박자 세고 손가락도 꼭 예쁜 모양으로 폈지. 그때 바질 출 때도 보니까 힘들어서 허덕거리면서도 끝까지 연습하고... ’

 

 

그러자 베르닌은 어쩐지 막막함과 자책감이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 그래, 아무 거나 만들어보자. 10분 동안 뭐든 못 만들겠어. 있는 걸로 해보지 뭐. 뭐든 내놓기는 해야 할 거 아냐. 음, 그러니까... 토마토. 치즈 조금. 양파랑 양배추랑 당근 쪼가리 조금. 계란. 버터. 소금... 그래, 오믈렛을 만들어야겠다. 그건 금방 만드니까. ’

 

 

베르닌은 급하게 그릇에 계란 세 알을 깨어 넣었다. 소금을 넣고 휘휘 저었다. 그리고 토마토와 양파, 양배추와 당근을 잘게 썰었다. 시간이 없었으므로 화구 두 개를 모두 써야 할 것 같았다. 양쪽에 팬을 올려놓았다. 버터를 둘렀다. 화력이 더 센 쪽 프라이팬에 야채를 볶고 불이 좀 약한 쪽 팬에는 달걀물을 조심스럽게 부어서 블린처럼 얄팍하게 부치기 시작했다.

 

 

3분 남았습니다!

 

 

이미 다른 참가자들은 부산스럽게 접시에 요리를 담아내고 있었다. 베르닌은 도저히 야채를 다 익힐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반쯤 익어가는 계란 위로 야채 볶던 것을 그대로 투하하고 잘게 썬 치즈를 얹었다. 그리고는 숟가락과 뒤집개로 조심스럽게 계란을 둘둘 말았다. 하지만 그는 손놀림도 둔했고 마음이 너무 급했기 때문에 그만 계란 옆구리가 터지고 말았다.

 

 

“ 으아, 망했다. ”

 

 

어쨌든 그는 살살 오믈렛을 굴려서 옆 부분을 익혔다. 잘못해서 한쪽 귀퉁이는 새까맣게 타고 말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회자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1분 남았습니다! 정확히 1분 후면 모두 손을 떼고 조리대를 떠나 뒤에 정렬된 의자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베르닌은 우왕좌왕하면서 뒤집개와 숟가락으로 오믈렛을 집어서 접시 위에 얹어놓았다. 그 와중에 옆구리가 더 터져서 안에 있는 야채들이 좌르르 삐져나왔다. 한마디로 재앙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남은 토마토와 양배추로 장식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때 땡 하는 종소리가 났다.

 

 

자, 그만! 다들 자리로 돌아가세요!

 

 

베르닌은 땀에 흠뻑 젖은 채 터덜터덜 맨 뒷자리로 가서 앉았다. 류드밀라가 그의 곁으로 와 앉으면서 중얼거렸다.

 

 

“ 어휴, 시간이 왜 이렇게 모자라는지. 오븐 화력이 생각보다 안 좋아서 파프리카 속 익히는 데 너무 오래 걸렸어요. 막판에 간을 한번 봤어야 했는데... 망했네. 당신은 어떻게 됐어요, 펠메니 만들었어요? ”

 

“ 아니요. 재료를 못 구해서 그냥 아무 거나 대충 만들었어요. ”

 

“ 엥, 그래도 요리 대횐데 아깝네... 뭐 할 수 없죠.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두는 수밖에. 근데 어차피 나도 오늘 입상은 포기했어요. 저쪽에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 있는 거 봤어요? 설마 아말리야가 올 줄이야... 우리 가브릴로프에서 제일 요리 잘하는 분이잖아요. 아무리 렐랴가 요즘 날고 긴다지만 아말리야 그리고리예브나에 비하면 갓난아기죠. ”

 

“ 엥, 그게 누구예요? ”

 

“ 아, 당신 KGB라서 교회엔 가지도 않겠네요. 저쪽에 앉아 계신 흰머리 할머니요. 수도원 요리사. 아, 수도원이라고 하면 잡혀가려나. 종교박물관 식당 요리사요. 예고르 신부님이랑 소꿉친구인데 어릴 때부터 거기서 요리를 하셨죠. 진짜 맛있어요. 수도원 요리사만 아니었어도 요리로 벌써 훈장을 몇십 개는 받아야 하는데. ”

 

“ 어, 그 수도원 식당... 버섯 감자 블린이랑 열매즙 진짜 맛있었어요. 그게 저 분 솜씨였구나. ”

 

“ 볼 것도 없이 아말리야가 우승이에요. 아무리 의장이 조야 브릴료바를 밀어준다 해도. 요리 명인이 왔는데 양심이 있다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저 분을 두고 조야를 뽑아주겠어요. ”

 

“ 그렇구나... 보랴도 엄청 요리 잘 하는데... ”

 

“ 뭐라고요? 스베촉의 보랴 말이에요? 그 사람도 왔어요? ”

 

“ 네, 저쪽에 있잖아요. 아까 계란이랑 버터도 빌려줬어요. ”

 

“ 망했네. 저 사람 진짜 손맛 좋은데... 3등도 못하겠네... 에휴... ”

 

 

베르닌은 어쨌든 엉망이긴 했지만 뭔가를 만들어서 내긴 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to be continued..

 

..

 

 

 

여기 언급된 요리들은 대부분 러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리들이다 :)

 

류드밀라의 파프리카 요리는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미카엘이 만든 파프리콘이랑 약간 비슷한데, 사실 파프리카 껍데기를 직화로 태운 후 조리하거나 속을 채워 요리하는 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라서 :) 류드밀라는 생선살과 토마토, 치즈를 넣었으니 파프리콘과는 좀 다르지만. 하여튼 이거 쓸 당시 냉장고~를 한창 재밌게 보던 때라 아이디어를 좀 얻었다.

 

메도빅이나 비프 스트로가노프, 보르쉬에 대해서는 블로그에서도 전에 몇번 올린 적이 있으니 검색해 보시면 사진 나옴~

 

..

 

중간에 류드밀라가 왕재수랑 옛날에 같이 동거했다고 언급하는 '지나이다 세도바'는 본편 우주에서 미샤의 발레학교 동창이자 키로프 극장 시절 파트너 발레리나이다. 미샤의 동료이자 친구이며 류드밀라의 말대로, 키로프 초창기 3년 정도는 한 아파트에서 같이 살기도 했다. (물론 둘이 같이 살자고 해서 산 건 아니고, 신진 스타 커플을 만들어내기 위해 극장 측에서 이들에게 새 아파트를 내주면서 같이 거주등록을 시켰음)

 

지나이다에 대한 이야기들은 나중에 본편에서 발췌해 보겠다.

 

 

..

 

 

과연 천하일미 요리대회에 출품된 요리들은 어떤 것들일까! 단추의 오믈렛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심사 결과는! 이 모든 것은 다음주 2부에서~~

 

 

..

 

 

25편을 쓸 때는 몸도 안 좋고 심리적으로도 불안하고 힘들어서 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음식도 제대로 못 먹던 때라서 맛있는 거 묘사하면서 대리만족을..

 

..

 

 

댓글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지난 2월 설 연휴 당시 페테르부르크 갔을 때.

 

겨울에는 페테르부르크 직항이 없어서 모스크바에서 경유를 해야 되기 때문에 참으로 불편하다.. 이때도 모스크바 공항에서 4시간쯤 기다렸다가 페테르부르크로 갔고,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업무 때문에 해외 출장을 갈때도 경유가 너무 힘들었다. 뭐 비행기 자체를 무서워하니 다 힘들지만 거기 경유까지 겹치면.. 으윽..

 

어쨌든 설레는 마음으로 페테르부르크 들어가던 날, 모스크바 공항에서 아에로플롯 뜨기를 기다리며 잠시 카페에 앉아 먹었던 메도빅. 당시 여기 앉아서 와이파이 잡아서 핸드폰으로 올리긴 했지만.. (http://tveye.tistory.com/3498)

 

이건 카메라로 찍은 것. 그러나 dslr은 트렁크에 넣어 부쳐버렸으므로 역시나 똑딱이 디카라 화질은 별로다..

 

여기 메도빅은 크림이 많이 시큼한 편이었다. 모스크바까지 9시간 가까이 날아온 후 입국심사를 하고 짐을 찾아서 도로 페테르부르크로 부치느라 땀 빼고(국내선으로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짐도 다시 부쳐야 했음) 미로처럼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서 환승하러 온 후... 가뜩이나 전날 잠을 한숨도 못 자서 머리도 아프고 눈도 붙는 것 같고 온몸이 무겁고 뜨끈뜨끈하고.. 목도 너무 마르고... 작년에 왔을 때 쓰고 남은 루블이 좀 있어서 그걸로 자판기에서 물 한병 뽑고 카페에 앉아 차 한잔, 메도빅 하나 시켰었다.

 

문제는 저 물병!!! 아무리 해도 마개가 안 열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ㅠㅠ 젖먹던 힘을 다 짜내도 안 열렸다. 결국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착해보이고 힘세보이는 남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근데 왜 찾으면 없는지.. 다들 우악스런 외모의 아주머니들과 아예 하늘하늘한 아가씨들 뿐 ㅠㅠ 결국 남자에게 부탁하는 것을 포기하고 물을 하나 새로 살까 고민하다가(극소심..) 막판에 어떻게어떻게 간신히 열었다...

 

하여튼 저기 앉아서 메도빅을 먹고 당분을 섭취하여 힘을 조금 충전한 후, 9시인가 좀 넘어 출발하는 페테르부르크행 아에로플롯을 탔다...

 

아에로플롯이야 뭐.. ㅠㅠ

 

그래도 페테르부르크 들어갈땐 비행기가 안 흔들렸는데, 나중에 돌아올 때 모스크바로 나오는 비행기가 어마어마하게 흔들려서 나는 비행공포증 발작으로 정말 아주아주 힘들었다.

 

 

 

이것은 돌아오는 날. 페테르부르크 풀코보 공항의 카페 쇼콜라드니짜.

풀코보 공항은 옛날엔 무지무지 작고 후진 시외버스 터미널 같았으나 작년에 신청사가 개관해서 아주 깔끔해졌다.

 

이상하게 이날도 밤에 잠을 못 자고 나와서 무지 피곤...

모스크바행 아에로플롯 탈때까지 시간이 남아서 국내선 구역의 카페에 왔다. 국제선 구역엔 스타벅스가 있는데 국내선 타는 쪽엔 러시아 브랜드인 쇼콜라드니짜가 있었다. 사실 먹을 건 이쪽이 더 많다. 핫 초콜릿도 맛있고 차 종류도 더 많고 케익을 비롯 배 채울 것들도 더 많다. 그리고 여기는 점원이 주문을 받으러 옴.

 

 

 

카운터는 이렇게 생겼음.

 

 

 

돌아가는 날이라 매우 우울했다.

홍차 한 잔. 그리고 메뉴판을 뒤적이다 첨 보는 케익이 있어 주문. 쁘띠치예 말라꼬(직역하면 새의 우유, 새의 젖)란 케익인데 아마 소련 시절부터 있었던 케익인 듯. 먹어보니 많이 달긴 했지만 우유 맛이 강해서 맛있었다. 달아서 다 먹진 못했다.

 

여기서도 이전에 이 구도로 사진 한 장 올렸던 기억이.. : http://tveye.tistory.com/3518

 

 

 

 

 

 

 

귀여운 설탕 봉지!!

설탕 안넣는데 이거 귀여워서 두어개 챙겨옴~ 친구한테도 기념으로 하나 주고.

 

 

 

양띠 해라고 양이 그려져 있는 냅킨! 옆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씌어 있음

(러시아는 연말-새해-정교 성탄절의 12월~1월에 저렇게 트리 장식을 한다)

 

그건 그렇고 러시아 양 그림은 뭔가 기다랗다 ㅎㅎㅎ

 

:
Posted by liontamer

 

 

지난 2월 16일. 페테르부르크.

네바 강

그래도 얼음은 많이 녹아서 중간중간 드러난 수면 위로 오리가 동동동~

왼편에 비친 그림자는 궁전 교각 난간과 가로등.

 

 

 

그리보예도프 운하변 따라 걷다가 찍은 사진.

운하도 꽁꽁..

 

 

 

이건 2월 15일, 알렉산드로프스키 공원.

 

:
Posted by liontamer

 

 

피곤하기도 하고... 메르스 때문에 공연히 불안한 나날이다.

마음의 위안을 위해 오랜만에 좋아하는 무용수 사진. 파루흐 루지마토프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사진 몇 장.

 

먼저 루지마토프. 그의 최고 배역 중 하나인 세헤라자데의 황금노예.

사진 속 상대는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사진사는 캡션에 나와있듯 Natasha Razina

 

 

루지마토프의 황금노예 사진 하나 더. 상대는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그냥 가면 아쉬우니.. 화질은 안 좋지만 하나 더... 의상을 보니 탱고 안무로 춤출 때인가 싶은데..

 

 

 

그리고 역시 빠질 수 없는 (꽃돌이)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몇 장.

이건 최근 그의 instagram에서... 

라트만스키 안무 신데렐라에서 왕자를 추는 중. 이 왕자 역에 정말 잘 어울린단 말이지..

신데렐라와 그의 왕자 역할에 대해서는 전에 몇번 짧게 얘기한 적이 있다. 태그의 '발레 신데렐라'나 '라트만스키 신데렐라'를 클릭하면 나옴.

사진사는 alex gouliaev

 

 

이건 유리 스메칼로프가 작년에 안무했던 카메라 옵스쿠라의 한 장면. 나보코프의 원작을 각색했다.

영상으로 봤는데 아주 맘에 드는 작품이었다.

마그다 역의 발레리나는 슈클랴로프의 아내인 마리야 쉬린키나, 가운데가 슈클랴로프, 오른쪽의 늘씬한 남자는 안무가이자 무용수인 유리 스메칼로프.

이 발레는 중년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에 슈클랴로프가 그 미모와 육체적 아름다움을 모두 가리고 콧수염과 초라한 외모, 통 넓고 우중충한 의상을 입고 나온다.. (ㅠㅠ 그래서 팬의 마음으로는 이 사람이 반라에 황금빛 타이트한 바지를 입고 나왔던 올해의 오르페우스가 더 맘에 들었지...) 하지만 이 카메라 옵스쿠라에서 그의 드라마틱한 연기는 아주 좋았다.

카메라 옵스쿠라에 대해 작년에 쓴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2740

 

 

 

이제부터는 alex gouliaev의 사진 세장.

지젤.

지젤 역은 아내인 마리야 쉬린키나.

 

 

역시 지젤의 알브레히트. 상대역도 역시 쉬린키나.

이건 영상만 봤는데 쉬린키나야 아직 여러 가지로 부족한 면들이 있어서... 슈클랴로프는 언제나 자기 아내와 사랑의 듀엣을 추고 싶어하지만 나로서는 이 사람이 다른 탁월한 발레리나들과 파트너로 출 때가 더 좋다. 하지만 둘이 아무래도 서로 진짜 사랑하는 부부라서 그런지 듀엣의 감정선은 좋았다.

 

 

 

마지막으로 백조의 호수. 상대는 알리나 소모바.

둘이 동갑내기 바가노바 동창이다 :) 최근 마린스키 잠자는 미녀 3D를 찍기도 했다. DVD 빨리 나왔으면...

 

 

:
Posted by liontamer
2015. 6. 8. 17:05

마트료슈카 넘어져 버렸네 russia2015. 6. 8. 17:05

 

 

 

지난 2월, 페테르부르크.

궁전광장에서 네프스키 대로로 나가는 길.

진눈깨비에 바람도 심한 날이라 기념품 가게 앞에 세워둔 마트료슈카 조형물이 이렇게 비스듬하게 넘어져 있었다.

 

 

:
Posted by liontamer

 

서무 시리즈가 엄청 길어졌다. 벌써 24편이다!

 

전에는 미리 써둔 게 많아서 일주일에 하나씩 올렸는데 이제 남은 게 25편 하나 뿐이라 올리는 간격이 좀 길어질 것 같기도 하다. 바쁘기도 했고 5월에 몸이 아파서 심신이 불안정하여 그런 것도 있고, 또 20편 이후로는 각 에피소드마다 분량이 꽤 길어져서 더 그런 것도 있다. 25편은 분량 때문에 두편으로 쪼개서 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여튼 24편!

 

폭설의 도시 스네고로드에서 돌아온 단추와 왕재수. 드디어 가브릴로프에도 3월이 오고...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아 눈도 녹지 않았지만 그래도 3월이다. 그리고 단추는 다시 극장으로 향하는데...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어느덧 3월로 접어들고, 스페호프는 베르닌에게 왕재수의 신작 발표 전까지 특별 감시 업무를 부여한다. 베르닌은 극장으로 향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4

 

 

 

서무의 슬픔

- 시계탑 전망대에서 -

 

 

 

 

스네고로드에서 돌아온 후 베르닌은 굉장히 바빴다. 계속 사무실을 비웠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도 그의 업무를 대신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며칠째 야근을 했다.

 

그 와중에 국장이 스네고로드 자원봉사 보고서를 요구했고 거기 더해 왕재수와 청년단원의 충돌에 대해서도 보고서를 쓰라고 했다. 아마 스네고로드에 심어놓은 정보원이 미리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있었던 일만 간략하게 보고했다. 왕재수가 아르투르와 당에 대해 퍼부었던 비난은 빼버렸지만 국장은 이미 그 내용도 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독사과 사건 이후 베르닌은 스페호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뱃속에서 분노가 들끓었고 동시에 서늘한 공포도 스멀거렸다. 물론 베르닌은 불순분자를 감시하고 체포하는 것이 KGB의 임무이며 자신이 속한 감시분석부의 주무도 그쪽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신체적 위해를 입히거나 암살을 시도하는 것은 해외 스파이들이나 하는 짓, 스탈린 공포정치 시절에나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에서는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가브릴로프였다. 평화롭고 지루한 동네였다. 도시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왕재수가 닳도록 얘기하는 대로 시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무서운 일들은 어울리지 않았다.

 

 

책상물림에 고지식하기 짝이 없지만 어릴 적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고 입사 시험 때도 연역 논술 점수가 제일 좋았던 베르닌은 논리적으로 분석을 해 보았다. 스페호프도 정말로 왕재수를 죽일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국장 자신의 입으로 혼만 내주겠다고 했으니까. 아마도 그건 매수된 레베진스키가 사과 세 알에 약을 고루 바르는 대신 한 알에만 왕창 발라놨기 때문일 것이다. 레베진스키라고 그렇게 끔찍한 목적으로 약을 많이 바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레베진스키를 잘 몰랐지만 극장 내의 평으로는 조금 무능하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그저 시골 극장의 감독직 하나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고 할 만큼 용의주도하고 사악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무용수 출신의 안무가라는 사람이 KGB에서 쓰는 독약에 대해 뭘 알겠는가. 심지어 베르닌 자신조차 전혀 몰랐던 약물인데. 그리고 국장은 왕재수의 크레믈린 아저씨를 비롯한 중앙의 후원자들을 아주 경계하고 있었으니 고의적인 암살을 시도할 만큼 무모한 인물은 아니었다.

 

 

문제는 전처럼 ‘혼만 내주려다’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결국 베르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국장에게 신뢰를 얻어서 계속해서 왕재수의 감시요원으로 남아 있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행히 국장은 그의 속마음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그가 왕재수를 도와주는 것도 현장요원으로서 연기력을 발휘하는 거라고 착각을 해 주었다. 분명 얼음을 깨고 강물에 빠졌던 것이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그러니 그가 왕재수를 위험에서 지키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국장의 불신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서무 업무와 야근이었다!

 

 

그 날은 월요일이었다. 주간회의부터 시작해 아주 바쁜 날이었다. 베르닌은 주말에도 나왔지만 쌓여 있는 일을 보니 오늘도 야근 예약이라는 생각에 우울해져 있었다. 오후에는 밀려 있던 직원 외출부와 출장기록부에 사인을 받기 위해 국장실에 올라갔다. 그가 너무나도 싫어하는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국장은 후딱 사인을 해주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연번을 매기는 방식부터 시작해 서류철 노끈의 위치, 같은 날짜 내에서는 해당 직원의 성을 알파벳순으로 기재해야 한다는 문서 작성 매뉴얼 따위에 대해 ‘행정의 기본’이라는 명목 하에 족히 30분 동안 설교를 늘어놓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스페호프는 약 10분 간 설교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베르닌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열심히 듣고 있다는 표시를 하자 만족해서 그랬는지 갑자기 주루룩 사인을 해주더니만 서류철들을 탁 하고 덮었다.

 

 

“ 자, 됐네. 그건 그렇고 지난 주 내내 야근을 하더군. 어제도 나왔고. ”

 

“ 어, 예. 월초에 야스민을 병원에서 감시하고 또 며칠 전엔 스네고로드에 다녀오느라 일이 많아서요. 저... 열심히 해서 밀린 일은 이번 주 중에 모두 마무리하겠습니다. ”

 

 

베르닌은 쌓아둔 일 때문에 혼이 날까봐 더듬거리며 변명과 의지를 섞어 중얼댔다. 하지만 스페호프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닐세. 물론 서무 업무는 중요하지. 행정의 기본이고. 하지만 자네의 또 다른 주무는 그 불여우 감시야. 그런데 스네고로드에서 복귀한 후 그 녀석 감시는 소홀히 하고 있는 것 같군, 물론 극장 쪽에도 정보원을 두엇 붙여 놓긴 했고 자네 얘기대로 자리를 계속 비웠으니 지난주에는 어쩔 수 없었다 치지만, 그래도 정식 훈련을 받지 않은 민간인 정보원과 내가 키우고 있는 요원은 하늘과 땅 차이지. 게다가 자네는 그 불여우에게 몸까지 던져서 아침부터 저녁, 밤에 해주면서 신뢰까지 얻어냈으니 자네를 대신할 수 있는 감시요원은 지금 구하기도 힘들어.

그 자식이 4월에 신작 공연을 앞두고 있다지. 당초 나는 검열국을 방패로 그 신작인지 뭔지의 이념성을 지적해 끌어내리려 했지. 그러나 그 영악한 불여우가 지난번 돈키호테인지 나발인지 무대에서 직접 춤까지 추고 그때 왔었던 모스크바 의원님들에게 자기 신작을 홍보해버린 바람에 이제 내용이나 이념으로 걸기에는 어렵게 됐어. 그 신작 공연에는 높은 인간들이 많이 올 거야. 심지어 스비제르스키에 마로조프까지 온단 말일세! 그 두 작자들이야말로 불여우를 끼고 돌았던 실세 중의 실세지! 더러운 불여우 녀석이 지금이야 끈이 떨어져서 헌신짝 신세가 됐지만 4월에 그 나리님들이 와서 공연을 보고 혹시라도 그 자식을 다시 귀엽게 보기라도 한다면 만사가 엉망이 되는 거야!

그러니 자네는 오늘부터 당분간 오후부터는 극장으로 가서 그 녀석을 감시하게. 행여 그 자식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면 서무 업무를 제대로 못 해서 나에게 징계를 받아 근신 중이라고 하게. 어차피 자네는 녀석과 잠자리도 같이 하고 살림을 해주는 사이이니 충분히 믿을 걸세. 그럼 어서 가보게! ”

 

 

 

*   *   *

 

 

 

그날은 월요일이라 극장은 휴일이었다. 하지만 왕재수가 집에서 쉬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스네고로드에서 돌아와 둘 다 녹초가 되어 뻗어버린 일요일에 저녁밥을 해먹인 이후 베르닌은 왕재수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왕재수도 신작 준비와 무용수들 지도 때문에 굉장히 바빴을 게 분명했다. 베르닌은 스타브로프에게도 전화를 해보았다. 의사는 왕재수가 독사과 후유증에서는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먹고 자는 것만 잘 챙겨주면 될 거라고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공연이 없는 날이라 극장이 한산할 줄 알았지만 뒤로 돌아가니 신관 공사 때문에 꽤 시끌시끌했다. 극장 10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시에서는 여러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특히 가브릴로프 출신이자 요즘 크레믈린 정치국에서 꽤 잘 나가고 있는 의원인 게오르기 벨스키가 특별예산을 많이 편성해 주고 있었다. 어머니가 옛날에 가브릴로프 발레단에서 춤을 췄었기 때문에 극장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고 했다. 왕재수가 춤추던 시절에는 아주 강력한 후원자였고 수용소에서 빼내서 이곳으로 보내는 데 가장 힘을 써준 사람이라고도 했다. 베르닌은 다른 데서 그 얘기를 듣고는 너무 궁금해서 왕재수에게 물어보기까지 했다.

 

 

“ 너 있잖아, 그 크레믈린 아저씨. 벨스키가 그 사람이야? ”

 

“ 아니야, 그 사람. ”

 

“ 엥, 너 엄청 후원해 줬다며. 가브릴로프에선 그 사람이 제일 유명해. 서기장 다음으로 유명한 정치인이야. 우리 시 출신으로 그렇게 출세한 건 그 사람뿐인데. ”

 

“ 내가 알게 뭐야, 정치하는 사람들. ”

 

“ 그래도 너 후원자라며. 우리 극장에 보내준 것도... ”

 

그래, 그 사람이 나 꽂았다! 나 낙하산인 거 다 알면서 그러니. 쳇... 그래도 그 사람이랑은 안 잤어. 아저씨들이 다 사내애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

 

“ 그럼 크레믈린 아저씨는 누구야? 정말 그 사람이야? 스비제르스키... ”

 

“ 몰라, 네가 무슨 상관이니. ”

 

 

베르닌은 차라리 게오르기 벨스키가 크레믈린 아저씨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온건한 이미지인데다 어쨌든 가브릴로프 출신이었으니까. 하지만 돌아가는 걸 보니 왕재수의 크레믈린 아저씨는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맞는 것 같았다. 그는 KGB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던 인물로 정치국의 진짜 실세 중 하나였다. 원체 무자비하다고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고 이전에는 스페호프를 불러 호되게 질책을 한 적도 있었다. 신작 공연 때 그 사람이 온다고 하니 스페호프가 그전에 무슨 음모를 꾸밀지 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무서운 크레믈린 아저씨에 대해 생각하며 베르닌은 공사장 쪽으로 갔다. 신관은 이미 1~2년 전에 공사를 시작해서 지금은 마무리 작업 중이었다. 신관에는 중규모의 공연장 하나와 연주 홀, 카페, 연습실들이 들어온다고 했다. 왕재수의 말에 따르면 신관 무대는 어린이용 공연을 비롯해 발레와 오페라 갈라 공연용으로 쓸 예정이었다. 연주 홀도 음향 시설을 보강해 오케스트라가 따로 연주회를 자주 열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는 거였다. 베르닌은 극장이나 무대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돈키호테를 해보고 나니 신관 공사가 잘 끝나서 관객들이 더 많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재수는 신관과 구관 사이에 세워진 시계탑 입구에 있었다. 얼핏 보면 오래된 건물처럼 보였지만 사실 옛날 건축양식을 본 따 급조한 건축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속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완공이 된 모양이었다. 토냐와 가릭의 뒤로 극장의 스타 커플인 타마라와 데니스, 그리고 나쟈가 보였다. 베르닌이 다가가자 나쟈가 제일 먼저 인사를 했다.

 

 

“ 안녕하세요, 다닐. ”

 

“ 어, 안녕하세요! 언제 온 거예요? ”

 

“ 사흘 전에요. 지금은 타마라 언니네에 있고요, 수요일부터는 발레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기로 했어요. ”

 

 

반갑게 인사를 한 후 베르닌은 왕재수 쪽을 보았다. 왕재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너 웬일이야? 일하고 있을 시간 아냐, 여긴 왜 왔어? ”

 

어, 그게... 외근 갔다가 근처라 들렀어. 넌 왜 휴일인데 나와 있는 거야? ”

 

“ 공사 마무리되는 것도 좀 보고, 나쟈 학교 수업은 다음 주부터니까 그전에 기본 좀 가르쳐주느라고. ”

 

“ 어, 그랬구나... ”

 

 

베르닌은 어쩐지 어색해졌다. 무용수들이 곁에 있는데다 왕재수는 일하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가 딱히 있을만한 구실이 없었다. 그는 돈키호테 무대에 함께 올라갔던 토냐와 가릭이 너무 반가웠지만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아닌 다닐 베르닌은 무용수들에게 있어 KGB 감시요원일 뿐이었다.

 

 

쭈뼛거리고 있는데 타마라와 데니스는 나쟈에게 시내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곧 자리를 떴고 가릭과 토냐는 시계탑에 올라가서 왕재수만 남았다.

 

 

“ 너 주말에 안 들어왔지. 설마 또 극장에서 잔 거야? ”

 

아니야, 로만한테 가 있었어. 나 지난주에 극장 이틀밖에 못 나왔어. 로만이 나 무조건 쉬어야 한다면서 자기 집에 가둬놓고 문도 다 잠가버리고... 극장 가면 두들겨 팰 거라고 얼마나 협박을 했다고. ”

 

“ 그 아저씨 웬일로 기특한 짓을 했네. ”

 

뭐가 기특해! 감옥이냐? 사람을 막 가두고... 너무 열 받아서 로만이랑 한바탕 싸웠어. 확 나가버리려다 말았어. ”

 

“ 문도 다 잠갔다면서 어떻게 나가. 바이올린 아저씨 5층인가 살지 않아? ”

 

“ 흥, 그깟 잠긴 문 누가 못 여니! 정 안되면 창문 깨고 파이프 타고 내려가면 그만이지. 맘만 먹으면 나갈 수 있었는데 내가 져준 거야. ”

 

“ 네가 웬일로? 너 완전 고집쟁이에 하고 싶은 대로만 하잖아.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의사 선생님이 사흘만 출근하라는 것도 안 들었잖아. 근데 어떻게 바이올린 아저씨 말은 듣는 거야? ”

 

아휴, 이 바보 멍충이. 로만은 내가 성질내고 있으면 갑자기 꼭 안아준단 말이야! 너랑 의사 선생님은 그게 안 되잖아! 그리고 로만이 얼마나 잠자리를 잘하는데... 그러니까 그냥 못 이기는 척 하고 있었... ”

 

“ 으윽, 그만 해. 알았어. 나 있잖아, 오늘부터 당분간 오후에 사무실 안 들어가도 되는데 극장 가끔 와도 돼? ”

 

“ 4월까지? ”

 

“ 어, 글쎄... 모르겠어. 근데 넌 왜 4월까지라고 생각하는 거야? ”

 

“ 너네 국장이 명령한 거 아니야? 나 4월에 신작 올리는 거 때문에? 옆에 가서 감시하라고. ”

 

 

베르닌은 멍해졌다. 가끔 그는 왕재수가 춤 말고 머리도 천재인가 싶었다.

 

 

“ 저... 맞아. 지난번 돈키호테 때도 그렇고... 미안해. 근데 나 정말 그런 거 아니야. 나 국장한테 진짜 최소한만 보고하고... ”

 

“ 누가 뭐래. 맘대로 하렴. 언제는 뭐 안 했냐. ”

 

 

메마르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에 왕재수가 코트 단추를 채우고 스카프를 꼭 여몄다. 이제 3월이었지만 아직도 추웠다. 지난주에는 폭설까지 와서 시계탑 주변으로는 청소부들이 한쪽으로 밀어놓은 눈이 산처럼 높이 쌓여 있을 정도였다. 왕재수는 부츠에서 눈을 털어내다가 시계탑을 올려다보면서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 진짜 흉물스러워.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했담. ”

 

“ 어, 난 괜찮은데. 이거 꼭 수도원 쪽에 있는 시계탑 같잖아. ”

 

“ 예산 퍼부어주니까 그걸로 여기다 세워놓은 거잖아. 전시용으로... 잘 보면 엄청 조잡해. 색깔 칠한 것부터 시작해서 저 시계 꼴 좀 봐. 자재도 싸구려에 꼴 보기 싫어. 옛날 거 흉내 내서 만든 가짜 티 엄청 나. 이거 왜 만들었는지 알아? 예전에 벨스키가 고향 도시라고 시찰 왔을 때 시 의원들이랑 우리 극장장하고 간담회를 하다가 자기는 수도원에 있는 시계탑이 참 맘에 든다고, 극장 뒤에도 그런 걸 지었다면 풍경이 근사했을 것 같다고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했다는 거야. 그 말에 여기다 저걸 짓자고 한 거래! 저런 흉물스러운 거 만들 돈 있으면 우리 극장 무대랑 음향 쪽에나 더 투자해 주지... 아니면 무용수들 기숙사나 더 지어주든가. 하긴 정치하는 인간들에게야 예술이 무슨 가치가 있겠니. 그저 선전용에 전시용이지. ”

 

“ 어... 저게 그렇게 엉망이고 조잡한 거구나. 난 건축이나 미술이랑 담 쌓아서 그런지 잘 모르겠어. 나처럼 잘 모르는 주민들은 그냥 괜찮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근데 저거 엄청 높다. 구시가지에 이 정도로 높은 거 없지 않나? ”

 

“ 8층 높이쯤 될 거야. 우리 아파트 정도. 구시가지 랜드 마크로 만들려고 일부러 높게 만들었대. 전망대도 만들고. 근데 저 전망대 진짜 잘못 만들었어. 올라가봤는데 너무 좁아. 사람들 많이 들어갈 수도 없고 창문도 양쪽으로 두 개 밖에 없는데 그나마 하나는 시계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아. 그냥 눈 가리고 아웅인 거야. 하긴 언제 소련에서 안 그런 적 있었나. ”

 

너 제발 소련, 당, 공산주의, 레닌 이런 말 하지 마... 불안해 죽겠어. 나야 보고 안한다지만 국장이 여기저기 정보원 심어놨다고 했단 말이야. 감옥 그렇게 싫다면서 또 꼬투리 잡혀 끌려가면 어쩌려고 그러냐. ”

 

“ 아 지겨워... 악마들... ”

 

 

왕재수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 뭐 딱 하나 건질 건 있어. 전망대 창문에서 보는 석양은 예쁘더라고. 구시가지랑 강이랑 검은 숲이 보여서. 나 석양 보는 거 좋아하거든. 그래서 완공되기 전부터 가끔 올라가서 해 지는 거 구경했어. ”

 

“ 아, 하긴. 우리 사무실이랑 집은 신시가지에 있으니... 이쪽 석양이 멋있긴 하지. 위에서 보면 근사하겠다. 여기는 높은 건물이 없잖아. ”

 

“ 5시쯤 올라가면 괜찮을 거야. 같이 보러 올라가자. 나 지금 무대 쪽 체크하러 가봐야 돼. 넌 산책이나 하렴. ”

 

“ 어, 그래. ”

 

 

왕재수는 신관으로 들어가고 베르닌은 잠시 극장 주변을 산책했다. 월요일 오후에 사무실이 아니라 구시가지에 와서 차갑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전에는 왕재수를 감시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오던 곳이었지만 돈키호테 이후 그는 극장이 좋아졌고 자꾸만 연습실과 분장실과 백스테이지가 생각났다. 심지어 맛없기 그지없는 극장 카페 차이카조차도 가끔 생각났다.

 

 

생각난 김에 그는 극장 1층으로 가보았다. 월요일이라 닫았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차이카는 문을 열었고 공사 인부들이 앉아서 요기를 하고 있었다. 베르닌이 오렌지 주스를 한 잔 시켜서 테이블로 걸어오는데 인부 하나가 그에게 아는 체를 했다. 예전에 KGB 창고 부설 공사를 할 때 안면을 텄던 그리고리였다. 햄 치즈 샌드위치를 착착 접어서 몇 입 만에 해치운 후 그리고리가 탄산수를 한 모금 꿀꺽 마셨다. 그리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맛있다. 이맘때가 제일 배고프거든. ”

 

“ 그러게요, 공사하다 보면 진짜 배고플 텐데. 그래도 카페라도 열어서 다행이네요. ”

 

“ 전에는 월요일엔 안 열었어. 열어도 우리는 이런 데서 못 먹고 그냥 공사장에 쭈그리고 앉아서 통조림이나 까먹고 말았거든. 근데 꼬마 감독님이 지난번에 그거 보더니 우리한테 카페 열어주라고 하더라고. 극장장이 안 된다고 했는데 미셴카가 어차피 공연 있는 날은 우리도 5시엔 일 끝내니까 관객들 자리 뺏을 일도 없는데 왜 멀쩡한 사람들을 땅바닥에 앉아서 먹게 하느냐고 화냈어. 말로만 노동자의 권익 운운하지 말라고 따지니까 극장장이랑 시설팀장이 뭐라 할 말이 없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 여기 와서 배 채울 수 있게 됐어. 반값 할인 식권도 받았어. ”

 

“ 아... 그랬구나. 의외네요, 걔가 그런 생각도 할 줄 알고... ”

 

“ 고맙다고 했더니 그 앙증맞은 감독님이 뭐라는 줄 알아? 우리가 예뻐서 그런 게 아니고 반대라고, 공사장에서 퍼질러 앉아 청어 통조림이나 까먹고 햄이나 우물거리니까 자꾸 보드카 퍼마시고 일도 엉망인 거 아니냐고, 그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거니까 착각하지 말래. 카페에도 얘기해서 우리한테는 보드카 못 주게 해놨다면서. 얼마나 귀여운지. 여기서 안 주면 어때, 보드카야 우리가 다 따로 챙겨오는데. 하여튼 좋은 애야. 무대 공사할 때도 자기가 궁금한 거 있으면 옆에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감투 과시도 안 하고 젠 체도 하나도 안 한다니까. ”

 

“ 이상하다... 걔 엄청 잘난 척하는데. 무용수들도 막 쥐 잡듯 하고. ”

 

“ 우리한테는 안 그래. 뭐 갈구긴 하지. 아까도 우리 십장한테 오더니 시계탑 전망대에 쌓아놓은 자재 언제 치울 거냐고 막 성질내더라고. 그거 다 쓰려고 놔둔 거라고 했더니 공사 끝났다면서 어디에 쓸 거냐고, 그러면 공사가 끝난 게 아니지 않느냐고 또 화내고. 젊은 애가 눈썰미가 엄청 좋다니까. 그거 십장이 일부러 자재 남겨먹은 거거든. 철수할 때 슬며시 자기가 챙기려고. 딱 걸렸지. ”

 

아니, 뭐라고요? 자재 챙겨 가면 안 되죠! 그건 횡령인데.

 

“ 에이, 물정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정색해. 다른 공사장에서도 다 그렇게 하는데. ”

 

 

베르닌은 나중에 왕재수에게 귀띔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카페를 나왔다.

 

 

 

*   *   *

 

 

 

베르닌은 한동안 로비를 돌아다니다가 시계를 보니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어서 시계탑 쪽으로 다시 가려고 극장을 나왔다. 그런데 현관 계단에 가릭이 쭈그리고 앉아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은 표정으로 보드카를 병나발 불고 있었고 옆에 왕재수가 앉아 있었다. 맨 처음에 베르닌은 왕재수가 무용수는 술 마시면 안 된다며 가릭을 쥐 잡듯 잡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옆으로 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가릭은 울먹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하며 두 손으로 가슴을 쾅쾅 쳤고 왕재수는 얘기를 들어주고 있는 거였다. 잘 들어보니 연애상담이었다.

 

 

“ 흑흑,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다니. 저 정말 용기내서 고백한 거였는데... ”

 

“ 그래서 오늘 나온 거구나! 난 또 연습하려고 나온 줄 알고 기특하다 생각했었네. 스네고로드도 그래서 따라가겠다고 자원한 거였지? ”

 

“ 네. 근데 다 망했어요. 흑... 일부러 분위기 좋은 데서 고백하려고 시계탑까지 데리고 올라갔는데... ”

 

“ 이 멍충아, 그 안이 지금 얼마나 어수선한데. 자재도 막 쌓여 있고 먼지구덩이에... 누가 여자를 그런 데로 데려가서 고백을 하니! ”

 

“ 그치만 감독님은 매일 저녁에 거기 올라가시잖아요. 전망대에서 보는 풍경 좋다면서. ”

 

“ 어휴, 내 말을 제대로 들었어야지! 석양 보는 게 좋다고 했잖아! 해 질 때 올라갔어야지. 타이밍이 너무 빨랐잖아. 먼지 풀풀 피어오르고 전기도 제대로 안 들어오는데 자재들 사이에서 무슨 분위기를 찾고 무슨 고백을 하니! ”

 

“ 어흑... 문제는 먼지구덩이도 자재도 아니란 말이에요. 분위기가 아무리 좋았어도 안됐을 거예요. 토냐가 저한테 미안하다면서 자기는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너무 좋아해서 도저히 저한테 마음을 줄 수 없다는 거예요. 엉엉... ”

 

“ 아, 그래? 그 남자랑 토냐 지금 사귄대? ”

 

“ 아니요... ”

 

“ 그럼 뭘 걱정이야. 잘해주면서 마음을 뺏으면 되지. ”

 

“ 흑... 그게 안 되니까 그렇죠! ”

 

“ 왜 안 돼? 왜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니? ”

 

“ 그건, 그건... 토냐가 좋아하는 사람이 당신이니까 그렇죠! ”

 

 

가릭이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술병을 와락 넘어뜨렸다.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엉엉, 정말 너무해... 그렇게 인기 많으면서 왜 토냐까지... 흑... ”

 

 

왕재수는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 아 뭐... 여자들은 다 나 좋아해. 토냐라고 예외겠니. 그거 그냥 팬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그러는 거야. 그러다 말 거야. ”

 

“ 아니에요! 토냐는 진짜 진심으로 감독님 좋아한단 말이에요! 맨날 당신 얘기밖에 안 해요. 밤이고 낮이고 감독님 생각만 한다고... 그래서 난 남자로 안 보인대요. 흑... ”

 

“ 뭘 그렇게 절망하니. 난 토냐한테 그런 감정 없는데. 난 극장 여자들이랑 절대 안 사귄단 말이야. 그러니까 진정 좀 해라. ”

 

그건 감독님 사정이고요! 토냐는 진짜로 사랑에 빠졌단 말이에요. 엉엉, 내가 옛날부터 좋아했는데. 흐흑... 용기 없어서 고백 못하고 있었는데... 내가 바보야. 너무 늦었어. ”

 

“ 뭘 늦냐. 너랑 사귀고 있었다 해도 어차피 토냐는 나한테 반하게 되어 있었어. 나 보면 여자들 다 그래. 그러다가 금방 포기한다니까. 그러니까 질질 짜지 말고 연습이나 열심히 해. 여자들은 노력하는 남자를 좋아해. ”

 

“ 하지만 노력하는 남자보다 이미 성공한 남자를 더 좋아한단 말이에요! ”

 

“ 누구, 나 말이야? 여자들이 날 좋아하는 건 성공이랑 별로 관계없어. 내가 우주 최고 꽃미남이라서 그렇지.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잖아. 혹시라도 토냐가 고백이라도 하면 내가 잘 거절할게. ”

 

“ 그럼 토냐가 상처받을 텐데... ”

 

“ 상처받아도 할 수 없잖아. 난 토냐한테 털끝만큼도 그런 마음이 없는데. 그러면서 받아주면 그게 더 나쁘지. ”

 

“ 그럼 정말 나쟈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때 스네고로드에서 한 번 보고 데려오셨잖아요... 학교에도 넣어주고 기숙사까지 잡아주고... ”

 

“ 으윽, 너 내 말 안 들었냐! 난 극장 여자들하고 절대 안 사귄다고! 하여튼 이런 거 안 좋아! 동료들이랑 좋아하고 사귀고... 에잇... 지금 네가 연애할 때냐? 어디서 얻어걸려서 투우사 한번 추고 나더니만... 연습 많이 해서 더 잘해야 할 거 아냐! ”

 

 

왕재수가 다시 쥐 잡는 모드로 돌아오는 것 같아서 베르닌은 말리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가릭이 코를 킁킁댔다.

 

 

“ 이게 무슨 냄새지? 어디서 이렇게 타는 냄새가 나지? ”

 

 

베르닌도 뭔가 매캐하게 타는 냄새를 맡았다. 어디서 샤실릭이라도 굽나 싶어서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왕재수가 벌떡 일어나더니 계단 위로 뛰어올라갔다. 그리고는 몸을 한 바퀴 돌려 주위를 살피더니 다급하게 소리쳤다.

 

 

시계탑에서 불 난 것 같아! 소방서에 전화 좀 해줘!

 

 

베르닌은 급한 마음에 차이카로 뛰어 들어갔다. 매니저 아르카지에게 화재 신고를 해달라고 했다. 아르카지가 소방서에 전화를 하는 동안 베르닌은 급하게 뛰쳐나와 신관 쪽으로 달려갔다. 왕재수의 말이 맞았다. 시계탑의 높은 창문 사이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퍼지고 있었다. 타는 냄새가 나면서 창문 너머로 조그만 불꽃이 이글거리는 것이 보였다. 왕재수가 주변에 있던 청소부들과 인부들에게 빨리 피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신관에서 뛰쳐나온 그리고리에게 왕재수가 소리쳐 물었다.

 

 

“ 다 나왔어요? 남아 있는 사람 없어요? ”

 

“ 다 나왔어요! 인부 몇 명 없었어요. 이름 다 확인했어요! ”

 

“ 청소부 아주머니들은요? ”

 

“ 여기, 여기, 여기! 우리 다 여기 있어요! ”

 

 

청소원들이 손을 들어가며 목청껏 소리쳤다. 왕재수는 그리고리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 시계탑은요? 거긴 아무도 없어요? ”

 

“ 없어요, 공사 끝났잖아요. 우린 다 나왔어요. ”

 

“ 그나마 다행... ”

 

 

그때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가릭이었다. 얼굴이 새파래진 채 가릭이 울부짖었다.

 

 

토냐! 토냐가 저 위에 있어요! 아까 나 혼자 내려왔어요... 토냐는 안 내려왔어요... 토냐!

 

 

왕재수가 가릭을 잡아 흔들었다.

 

 

“ 무슨 소리야! 너 내려온지 한참 된 거 아냐? 토냐도 벌써 내려왔겠지! ”

 

“ 아니에요... 저 방금 내려오자마자 감독님이랑 마주친 거였어요... 토냐는 위에 남았어요. 주변 다 찾아봤어요, 토냐가 없어요... 저 위에 토냐가... ”

 

 

베르닌은 고개를 저었다. 토냐는 이미 내려와서 집에 갔을 거라고 대답해주려고 했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희미하지만 날카로운 여자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위쪽이었다. 시계탑 쪽이었다. 가릭이 소스라쳤다.

 

 

토냐! 토냐 목소리예요! 오 하느님, 토냐가 정말 저 위에... ”

 

 

가릭이 거품을 물고 비명을 질러대며 미친 듯이 시계탑 입구로 돌진하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달려들더니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주먹으로 가릭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베르닌은 저지할 겨를도 없었다. 가릭은 비틀거리더니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사람들이 웅성거릴 틈도 주지 않고 왕재수가 소리쳤다.

 

 

“ 누가 얘 좀 옮겨요! 다닐, 소방서에 전화했어? ”

 

“ 해, 했어... 아르카지가 했어... ”

 

“ 소방서 어디 있어? 소방차 오는 데 얼마나 걸려? ”

 

“ 신, 신시가지... 우리 동네 근처... 강 건너서 와야 돼... ”

 

안 돼, 시간 없어! 그 장갑 좀 내놔요!

 

 

왕재수가 몸을 홱 돌리며 그리고리의 손에 끼워져 있던 목장갑을 벗겼다. 급하게 장갑을 끼더니 코트를 벗어서 내던졌다. 그리고는 단거리 주자처럼 급하게 시계탑 입구로 뛰어 들어갔다.

 

 

“ 안돼요, 감독님! 큰일 나요! 거기 좁아서 연기도 안 빠진다고요! 소방차 올 때까지 기다려요! ”

 

 

청소원들과 인부들이 고함을 질렀지만 왕재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멍하게 굳어져 있었던 베르닌은 왕재수의 모습이 입구의 암흑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을 때 감전된 듯이 펄쩍 뛰었다.

 

 

미하일! 기다려! 기다려!

 

 

물론 왕재수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베르닌은 욕을 퍼부었고 정신없이 왕재수를 따라 시계탑으로 뛰어 들어갔다.

 

 

 

*   *   *

 

 

 

시계탑 안은 밖에서 볼 때와 완전히 달랐다. 나선 계단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었고 몇 개의 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층마다 방이 한두 개씩 있었다. 불은 위에서 난 것 같았다. 구조 때문인지 연기와 불길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왕재수는 수사슴처럼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올라갔다. 층마다 멈춰서 토냐의 이름을 목청껏 불렀다. 어디선가 가냘픈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한참 뛰어올라간 끝에 베르닌은 간신히 왕재수를 따라잡았다. 이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왕재수는 연기가 밀려 내려오는 층계와 벽에 난 창문 사이에 선 채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냄새를 맡기도 하고 고개를 휘휘 젓기도 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등짝을 철썩 때렸다.

 

 

“ 너 미쳤어? 소방차 올 때까지 기다렸어야지! 금방 올 텐데! ”

 

토냐가 위에 있어. 못 내려온 거야. 소리만 지르고 있잖아... 다치거나 갇힌 거야. 안 그랬으면 벌써 내려왔을 거라고. ”

 

“ 하지만... ”

 

한 층 더 올라가야 돼. 그쪽에 있는 것 같아. 너 빨리 내려가. 위험하니까. ”

 

“ 이 미친놈아! 위험하다면서 너는 올라가도 되냐! ”

 

“ 넌 덩치도 크고 둔해서 안 돼! 빨랑 내려가! 위험하다고 했잖아! ”

 

“ 그럼 너는! 죽었다 살아난지 며칠이나 됐다고! ”

 

저리 가! 토냐 구해야 돼! 토냐는 내 책임이야! 우리 무용수들 다 내 책임이란 말이야! 내가 구해야 돼! 빨리 가!

 

안 가! 너 혼자 못 보내! 나도 갈 거야! 갈 거면 빨리 올라가!

 

 

왕재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왕재수의 눈에 스쳐간 파란 불꽃에 베르닌은 움찔했다. 가릭의 관자놀이를 후려쳤을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급하게 그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 너 나 패기만 해봐! 나 KGB잖아, 공무원 폭행... ”

 

“ 시끄러워! 맘대로 해, 바보 멍충이... 거추장스럽게... ”

 

 

왕재수는 홱 돌아서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토냐의 이름을 부르면서 순식간에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베르닌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재킷 칼라를 세워 코와 입을 감싼 채 왕재수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전망대 층에 도달했다. 불꽃이 이리 튀고 저리 튀었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는데 안쪽에서 연기와 불길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베르닌은 화재 현장에 들어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시무시했다. 왕재수는 정신없이 주변을 뒤졌다. 불길이 올라오는 것도 무섭지 않은지 연기 사이를 마구 헤치고 다니며 소리를 쳤다.

 

 

“ 토냐! 어디 있어? 전망대야! 토냐! ”

 

“ 살려줘요! 아래... 바닥.... ”

 

 

가냘픈 비명 소리가 연기 속에서 들려왔다. 베르닌은 방향을 잡을 수가 없어 갈팡질팡했다. 하지만 왕재수는 곧장 몸을 틀더니 왼쪽으로 달려갔다. 기둥처럼 거대하게 세워져 있는 나무와 콘크리트, 철골 자재들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가더니 자욱한 연기 속에서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다친 줄 알고 소름이 돋아서 쫓아갔다. 하지만 왕재수는 다친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토냐를 발견한 거였다. 토냐는 쓰러진 자재에 다리가 깔려 있었다. 그렇게 자그마하고 날씬한 여자로서는 아무리 버둥거려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토냐를 덮어 누르고 있는 나무 자재는 이미 불길이 옮겨 붙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 미셴카... 못 움직이겠어요... 무서워요... ”

 

 

토냐가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조그만 얼굴이 눈물과 검댕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 뭐가 무서워! 꺼내줄 거야, 울지 마! 산소 낭비하지 마! ”

 

 

왕재수가 두 손으로 자재를 붙잡고 마구 밀어댔다. 그 와중에 불꽃이 튀면서 소매에 옮겨 붙을 뻔 했지만 왕재수는 침착하게 불티를 털어냈다. 베르닌이 급하게 합류했다. 무슨 기둥인지 들보인지 엄청나게 무거웠다. 자재가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왕재수가 베르닌에게 소리쳤다.

 

 

“ 내가 밀게, 넌 토냐 끌어내! 쟤 지금 못 움직여, 끌어내줘야 돼! ”

 

“ 네가 끌어내! 내가 더 힘세잖아! ”

 

“ 아니야, 내가 하는 게 더 나아! 빨리 해! ”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복종했다. 왕재수가 두 팔로 자재 기둥을 끌어안았다.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옆으로 비틀면서 자재를 한순간 들어올렸다. 그 무거운 자재 기둥이 정말로 움직였다. 올라갔다. 순간 베르닌은 토냐의 어깨와 팔을 붙잡아 앞으로 홱 끌어당겼다. 자그마한 인형 같은 토냐가 주르륵 하고 끌려나왔다. 왕재수는 있는 힘을 다해 자재를 들어 올린 채 버티고 있었다. 이마와 목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베르닌이 소리쳤다.

 

 

“ 됐어! 놔도 돼! ”

 

 

왕재수가 자재를 놓았다. 쿵 소리와 함께 연기와 불꽃이 일었다. 왕재수는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토냐를 껴안고 일어섰다.

 

 

“ 토냐, 정신 차려! 너 내 말 들려? ”

 

“ 미셴카... 어흑... 다리... 내 다리... ”

 

 

토냐가 흐느껴 울었다. 왕재수가 토냐를 안고 뛰면서 소리쳤다.

 

 

“ 다리 괜찮아! 걱정 마! 괜찮아! ”

 

“ 뼈 으스러진 것 같아요... 아... 이제 어떻게 해요... ”

 

“ 아니야! 그냥 금만 간 거야! 만져봤어. 괜찮아! 몇 달 있으면 다 나아! 춤 다시 출 수 있어! 괜찮아! ”

 

 

그 절박한 와중에도 어떻게 왕재수와 토냐가 다리 얘기를 할 수 있는지 베르닌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불길이 너무 거세져서 온몸이 후끈거렸고 숨이 턱턱 막혔다. 빨리 빠져나가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그때 불어온 바람 때문에 불이 옆으로 옮겨 붙으면서 뭔가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자재가 우르르 무너졌다. 순식간에 계단으로 내려가는 출구가 막혀버렸다. 토냐가 비명을 질렀다. 뒤에서는 불길이 소용돌이치듯 다가오고 있었고 계단으로 가는 길은 비스듬하게 무너져 벽처럼 변해버린 자재에 완전히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 아, 아... 미셴카... 이제 우리 못 나가요... 엄마... 엄마... ”

 

 

토냐가 부들부들 떨며 울부짖었다. 너무나 애처롭게 울어서 베르닌도 끔찍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왕재수는 울지 않았다. 비명도 안 질렀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도 주변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베르닌에게 토냐를 좀 안고 있으라고 하고는 옆으로 쓰러져 있는 철골 자재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 자재랑 천정 사이에 틈이 있어. 꽤 넓어. 저기 보이지? 토냐, 내가 지금 너 저기로 던질 거야. 저 틈새 사이로 던질 거니까 준비해. 너 다리 하나도 못 움직이는 거 아니야. 움직일 수 있어. 내 말 잘 들어, 아파도 무조건 뛰어야 돼. 못 뛰면 걷고, 그것도 안 될 것 같으면 기어. 그것도 안 되면 굴러. 춤 같은 거 생각하지 마! 무조건 내려가는 거야! 바람이 위로 불고 있어. 아래에는 불 안 번졌어. 연기도 없어. 내가 지금 던져주면 무조건 굴러. 한 층만 내려가면 돼. 그 아래는 괜찮아. 내 말 알아들어? ”

 

“ 하, 하지만... ”

 

하지만이고 뭐고 없어! 지금 던질 거야! 너 무용수야 아니야! 안 다치게 떨어지는 거 알아 몰라! 내가 가르쳐줬잖아! ”

 

 

베르닌은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벽처럼 서 있는 자재와 천정 사이에 정말 큰 틈새가 있었다. 토냐 정도 체구의 여자라면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왕재수라도 가능할 것이다. 기어 올라간다면 체격이 큰 베르닌조차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오르는 연기와 불꽃 때문에 기어 올라갈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사람을 번쩍 들어서 그 위로 던진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가 절망에 차서 안 된다고 중얼거리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그에게 토냐를 올려달라고 했다. 그는 토냐의 몸을 밀어서 왕재수가 서 있는 자재 위로 올렸다.

 

 

“ 너도 올라와, 다닐. 네 도움이 필요해. ”

 

“ 어떻게... ”

 

높이가 모자라. 엎드려줘. 너 밟고 올라갈 거야. 무거워도 조금만 참아줘. ”

 

 

베르닌은 수평으로 쌓여 있는 자재 위로 기어 올라갔다. 왕재수가 시키는 대로 엎드렸다. 왕재수가 토냐를 안고 그의 등 위로 올라갔다. 둘 다 자작나무처럼 날씬한 애들이었지만 두 명의 무게가 얹히자 무거웠다. 숨이 턱 막혔다. 어쩌면 자욱한 연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무서웠다. 아무리 왕재수가 무용수로 잔뼈가 굵고 여자를 들어 올리는 데 도가 텄다고 하지만 천정의 틈새로 여자를 들어서 던져 넣는 것을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토냐는 다리도 다쳤는데... 그때 왕재수가 펄쩍 뛰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베르닌은 등과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었다.

 

 

왕재수는 정말로 토냐를 투포환처럼 집어던졌다. 토냐는 몸을 옆으로 비틀며 자재와 천정 사이의 틈새로 거의 새처럼 날아갔다. 잠시 후 자재 너머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무 것도 안 보였기 때문에 왕재수가 소리를 질렀다.

 

 

“ 토냐! 괜찮아? ”

 

“ 네... ”

 

“ 빨리 일어나! 일어날 수 있어? ”

 

“ 아... 아악... ”

 

 

토냐는 괴롭게 비명을 토해냈지만 잠시 후 훌쩍이며 소리쳤다.

 

 

“ 일어났어요. 걸을 수 있어요... ”

 

“ 빨리 가! 빨리 내려가! ”

 

“ 하지만... ”

 

“ 빨리 가! ”

 

“ 당신들은 어떡하고요... 저 틈새로 못 나오잖아요... 나 혼자 어떻게... ”

 

“ 우린 올라갈 거야! 옥상으로 올라갈 거니까 괜찮아! 소방차 이제 다 왔어! 그러니까 걱정 말고 가! 너 감독 말 안 들어? 빨리 가! ”

 

“ 미셴카! 미셴카! ”

 

빨리 가! 말 안 들으면 너 자를 거야!

 

 

흐느낌과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점차 멀어졌다. 왕재수는 처음으로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벽처럼 비스듬하게 무너져 출구를 가리고 있는 그 무시무시하고 불꽃이 퍽퍽 튀고 있는 거대한 자재들을 밀어보았다. 꿈쩍도 안 했다. 몇 초도 안 되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이쪽으로는 못 나가. ”

 

“ 내가 너 던져줄게. 아까 토냐한테 한 것처럼... ”

 

“ 그건 나랑 토냐니까 된 거야. 너하고 나는 안 돼. 올라가야 돼. ”

 

“ 어디로... 여기가 제일 꼭대기잖아... ”

 

“ 옥상. 지붕 위! 뚜껑 열고 올라가야 돼! 사다리 있어! ”

 

“ 하지만... ”

 

 

왕재수는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두 눈에 파랗고 빨간 불빛이 번쩍번쩍했다. 그러더니 창가로 달려갔다. 허드렛물이 들어 있는 양동이를 본 것 같았다. 그 물로 불을 끄려는 거냐고 베르닌이 절망적으로 투덜대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스카프를 풀었다. 순식간에 두 토막으로 쫙 찢더니 양동이에 철썩 담갔다. 베르닌에게 달려오더니 그의 코와 입을 물에 흠뻑 적신 스카프 조각으로 한 바퀴 감싸 묶었다. 나머지 한 조각으로는 자기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쪽을 가리켰다.

 

 

“ 다닐. 옥상은 저쪽 방으로 가야 올라갈 수 있어. ”

 

“ 뭐? 저쪽에도 방이 있단 말이야? ”

 

“ 이쪽은 전망대랑 시계가 있는 쪽이고, 뒤쪽에 작은 창고가 있어. 거기 사다리랑 옥상 입구가 있어. 올라가려면 저 방으로 들어가야 돼. ”

 

“ 하지만... 저쪽은 불이... ”

 

“ 이쪽도 금방 옮겨 붙어. 내가 먼저 갈 거야. 연기 때문에 소리 못 지를 수도 있어. 내가 들어가면 20까지 세. 그리고 들어와. 불길이 퍼져 나오면 들어오지 마. 도로 나와. 알았어? ”

 

“ 무슨 개소리야! 네가 뭔데 먼저 들어가! ”

 

“ 구조를 아니까! 내가 먼저 가서 사다리로 갈 거야. 20 세는 동안 뚜껑까지 열 거야. 그때 네가 들어오는 거야. 심호흡해야 돼. 연기 마시면 질식하니까. 무조건 사다리 타고 올라와서 옥상으로 가는 거야. 뚜껑 닫으면 불 올라오는 거 막을 수 있을 거야. ”

 

“ 안 돼! 너 혼자 못 들어가! 난 화생방도 해봤어! 군대도 갔다 왔고 요원 훈련도 받... ”

 

시끄러워! 잘못하면 둘 다 죽어! 여긴 극장이야! 내가 아는 곳이야! 지금 들어간다. 숫자 세! ”

 

 

왕재수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총알처럼 연기 속으로 튀어 들어갔다.

 

 

그때 베르닌은 왜 자신이 왕재수를 말리거나 주먹을 휘두르거나 따라 들어가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1부터 숫자를 세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점점 불길이 몰려들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숨 쉬기가 버거웠다. 그나마 왕재수가 물에 적신 스카프를 둘러주지 않았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았다. 베르닌은 화재가 났을 때 여기저기서 불꽃이 퍽퍽 소리를 내며 터진다는 것도, 갑작스럽게 소용돌이치는 불길이 솟아오른다는 것도 전혀 몰랐었다. 눈물콧물이 줄줄 흘렀다. 시커먼 연기가 갈수록 짙어졌고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솟았다.

 

 

“ 20! ”

 

 

그는 심호흡을 했다.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모을 수 있는 숨을 다 끌어모아 들이쉰 후 왕재수가 사라졌던 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연기 때문에 앞이 거의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마터면 자재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쿠당탕 소리를 내며 달려 들어가자 전망대 쪽에서 퍼지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맵고 짙은 연기가 폭풍처럼 밀어닥쳤다.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은 느낌이었다. 뺨이 따끔따끔하면서 굉장히 아팠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돌진했다. 시커먼 연기 안개 사이로 짙은 초록색이 잠깐 아른거렸다. 왕재수의 스웨터 색깔이었다. 그는 그쪽으로 뛰었다. 왕재수는 사다리 위에 있었다. 두 손으로 미친 듯이 천정을 쾅쾅 치고 있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너무 뜨거워서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왕재수는 스카프로 칭칭 감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안 열려. 잠겼어. ”

 

“ 열쇠... 열쇠 있을 거야! ”

 

“ 찾아봤어. 안 보여. 가지고 내려갔나 봐. ”

 

 

웅얼거리던 왕재수가 입을 다물었다. 스카프로 감싸여 눈과 이마밖에 안 보이는데다 검댕으로 더럽혀져 있었지만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알아볼 수는 있었다. 베르닌은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왕재수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왕재수가 머리를 젖힌 채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하마터면 함께 사다리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지만 베르닌은 한 손으로 사다리를 붙잡고 버텼다. 그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숨이 막혔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사다리에 몸을 부딪치며 간신히 내려왔다. 왕재수를 안고 정신없이 연기를 헤치며 뛰었다. 갈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전망대 방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베르닌은 그나마 가장 불길에서 멀고 공기 상태가 나은 창가로 달려갔다. 왕재수를 창가 안쪽에 기대어 앉히고 스카프를 푼 후 양동이에 남아 있는 물을 손으로 떠서 얼굴에 뿌렸다. 물을 맞아서인지, 아니면 열린 창문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바람과 산소 때문인지 왕재수가 곧 기침을 하며 눈을 떴다. 눈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 너 괜찮아? 숨 쉴 수 있는 거지? ”

 

“ 으응... 잠깐 질식했나봐. ”

 

“ 그것 봐! 혼자 들어가지 말랬잖아! ”

 

“ 열쇠만 있었어도... 옥상으로는 못 가겠다. ”

 

 

왕재수는 심호흡을 하며 잠시 멍해진 채 앉아 있었다. 스카프를 다시 물에 적셔서 얼굴을 감쌌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정신이 아득했다. 자재들이 끔찍할 정도로 매운 냄새를 풍기며 타오르고 있었다. 여기저기 불기둥이 솟았다. 점점 불길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서웠다. 동시에 무섭지 않았다. 현실 같지가 않았다. 곧 소방수들이 올라와서 자재를 모두 치워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구해낼 것이고...

 

 

갑자기 왕재수가 창가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연기와 불꽃이 넘실대는 오른쪽으로 뛰어갔다.

 

 

“ 야, 너 미쳤어? 뭐하는 짓이야! ”

 

 

왕재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더니 연기 속에서 정신없이 뭔가를 뒤졌다. 불꽃이 마구 튀는 것도, 타들어가는 자재가 쾅 하고 옆으로 쓰러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 분명히 여기 있었어... 여기... ”

 

 

베르닌은 왕재수가 연기를 마셔서 돌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왕재수가 벌떡 일어나 다시 창가 쪽으로 달려왔다. 품에 지저분한 회색의 밧줄 뭉치를 껴안고 있었다.

 

 

“ 어제 봤었어. 공사할 때 쓰던 거야. 이거 풀어봐. 길이 좀 보게. ”

 

 

왕재수는 밧줄 뭉치를 베르닌에게 내던졌다. 베르닌은 급하게 줄을 풀었다.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풀려나오는 밧줄이 꽤 길어 보였다. 마침내 다 풀었을 때 왕재수는 팔을 펼치더니 밧줄에 대 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밧줄을 착착 접었다가 폈다. 그리고는 창가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다닐, 이것 좀 잡고 있어. ”

 

 

베르닌이 밧줄 뭉치를 잡자 왕재수가 줄 끝을 잡고 거세게 잡아당겼다. 고개를 갸웃했다. 계속해서 당겨보면서 줄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더니 불쑥 물었다.

 

 

“ 너 몇 킬로야? ”

 

“ 지금 몸무게 묻게 됐냐? ”

 

“ 솔직하게 말해! 지금 몇 킬로야? 제일 최근에 쟀을 때 몇 킬로였어? ”

 

 

베르닌은 멍해졌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분명히 스타브로프의 병원에서 체중을 쟀었다. 왕재수에게 수혈을 해주려고... 그때...

 

 

“ 파, 팔십 킬로 정도... ”

 

 

왕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에 새까만 막이 내리덮이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연기 때문에 숨이 막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심장과 폐가 터질 것 같았다. 그때 왕재수가 장갑을 벗었다. 온통 시커메지고 해진 목장갑을 베르닌에게 건넸다.

 

 

“ 장갑 껴, 다닐. ”

 

“ 왜! 네 거잖아! ”

 

“ 여기서 몇 분 못 버틸 거야. 저기 불이랑 연기 보이지? 저거 다 타고 나면 금방 이리로 옮겨 붙을 거야. 옥상으로는 못 가. 계단 쪽도 막혔어. 창문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어. 밧줄 묶을 거야. 줄 타고 내려가는 거야. ”

 

“ 뭐라고! 너 미쳤어? 이거, 이거 10층은 될 텐데... ”

 

“ 아니, 10층까진 안 돼. 8층 정도야. 할 수 있어. 밧줄 길이 재봤어. 거의 바닥까지 닿아. 파이프 쪽으로 밧줄 내리면 돼. 옛날 시계탑 흉내 내서 만들었잖아. 중간중간 장식돌이 있어. 발 디딜 수 있다고. 할 수 있어. 너 군대 갔다 왔잖아. 유격인지 뭔지 훈련 같은 거 했을 거 아냐. 줄타기 훈련 안 했어? ”

 

“ 했어. 그래... ”

 

“ 그러니까! 지금 그 방법밖에 없어. ”

 

 

왕재수는 밧줄 뭉치를 껴안고 창가로 갔다. 창가 쪽에 고정되어 있는 튼튼한 철골 파이프에 밧줄을 칭칭 감고 꽉 묶었다. 밧줄을 팽팽하게 당겨보았다. 그리고는 창밖으로 밧줄을 내려뜨리고 풀었다. 밧줄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베르닌은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정말 높았다. 아득했다. 그는 고소공포증이 없었지만 그래도 무서웠다. 줄을 타고 내려갈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까마득한 아래로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지만 불길이 펑펑 터지는 소리 때문인지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소방차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양동이와 바가지를 나르고 있는 게 보였다. 고무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는 것도 보였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오는 건 불가능했다. 방화복을 입은 소방수들이 아니라면 자살행위였다.

 

 

마침내 밧줄이 모두 풀렸다. 땅바닥까지 닿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왕재수의 말대로 거의 근접한 것 같았다.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다가와서 패딩을 벗으라고 했다.

 

 

“ 몸이 가벼워야 해. 공기 저항도 줄여야 되고. ”

 

 

베르닌은 패딩 재킷을 벗었다. 왕재수가 장갑을 다시 한 번 건넸다.

 

 

“ 너는! 네 걸 나한테 주면 넌 어쩌려고! ”

 

난 너처럼 둔하지 않아. 너 지금 손에 화상 입어서 맨손으로 밧줄 못 타. ”

 

웃기지 마! 네 거 절대 안 껴! 빨랑 도로 껴!

 

 

왕재수가 스웨터를 벗었다. 그러더니 안에 입었던 셔츠 소매를 북 찢어서 양쪽 손바닥을 붕대 감듯 칭칭 동여맸다. 어쩌면 그렇게 손놀림이 빠른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 됐지? 장갑 껴. ”

 

 

베르닌은 할 수 없이 목장갑을 끼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밧줄이 던져진 것을 보자 갑작스럽게 진짜 공포가 밀려들었다. 어지러워서 비틀거리는데 왕재수가 그의 등짝을 철썩 때렸다.

 

 

“ 야, 정신 차려! 무서워할 시간 없어! 맨날 군대 갔다 온 거 자랑하더니... 너 먼저 내려가는 거야. 지금 가! ”

 

안 돼! 너 먼저 내려가! 아까도 질식해서 기절했잖아... 계속 아팠었잖아. 너보단 내가 더 폐활량도 좋고 잘 버틸 수 있어. 너 먼저 내려가! ”

 

 

베르닌이 고함을 지르며 왕재수를 확 잡아서 창가 쪽으로 밀었다. 왕재수는 벌컥 화를 냈다.

 

 

이 바보 멍충아! 넌 둔하잖아! 네가 뒤에 내려오면 내 위에 네가 있게 되잖아! 그러다 네가 미끄러지면 나까지 떨어지잖아! 그러니까 너 먼저 가!

 

뭐야! 그러니까 너 지금 떨어질 거면 나 혼자 떨어지라는 거야?

 

그래! 위험 요소를 최소화해야지! 알아들었으면 빨리 가! ”

 

 

베르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렇게 절박한 와중에도 어떻게 섭섭한 마음이 드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어쨌든 화가 났다. 왕재수를 때려주고 싶었지만 어쨌든 그 말이 맞았다. 그는 왕재수보다 몸놀림도 둔한데다 덩치도 컸다. 자칫 잘못해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왕재수를 덮치며 함께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가 먼저 내려가는 게 나았다.

 

 

그는 창턱에 몸을 기대고 다시 한 번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너무 아찔했다.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이렇게 절박한 순간인데도 어떻게든 내려가는 순간을 늦춰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그때 왕재수가 그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으며 세게 포옹을 했다. 뺨이 마주 닿았다. 연기 때문에 거칠어지고 목쉰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 아래 보지 마. 줄만 잡고 하나 둘 세면서 내려가. 천천히. ”

 

“ 너 금방 내려올 거지? ”

 

“ 그래. 그러니까 이제 가. 그래야 내가 따라가지. ”

 

“ 알았어, 갈게. ”

 

 

왕재수가 팔을 풀고 물러섰다. 까만 눈에 소용돌이치는 불길이 반사되어 붉은 불빛이 일렁거렸다. 한순간 베르닌은 솟구치는 공포와 강렬한 보호심을 동시에 느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 아래에서 봐, 다닐. ”

 

“ 그래. 조심해. ”

 

 

베르닌은 창가로 기어 올라갔다. 더 이상 우물쭈물할 수는 없었다. 불길이 이제 창가까지 덮쳐오고 있었다. 그가 먼저 내려가야 왕재수도 따라 내려올 수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빨리 가야 했다.

 

 

“ 너 언제 내려올 거야? 나 한 층만 내려가면 따라올 거지? ”

 

“ 응. 그럴 거야. 자, 가! ”

 

 

베르닌은 밧줄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생각보다 밧줄의 두께가 얄팍했다. 그가 매달리자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줄이 끊어지면 어쩌지 하고 겁이 더럭 나려고 하는데 왕재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 안 끊어져. 매듭도 안 풀려. 뱃사람 매듭으로 묶었어. 가. ”

 

 

그래서 베르닌은 심호흡을 하고는 창밖으로 몸을 완전히 빼냈다. 천천히 밧줄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계탑의 벽면과 파이프를 디디며 한 발 한 발 내려갔다. 벽이 생각보다 미끄러웠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여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정신없는 순간에도 그는 토냐를 떠올렸다.

 

 

‘ 다행이야, 무사히 내려갔구나... ’

 

 

어쩐지 토냐가 무사하다는 생각이 들자 쿵쾅거리던 가슴도 조금 가라앉고 호흡도 규칙적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왕재수의 말이 옳았다. 줄만 잡고, 아래를 보지 말고, 하나 둘 세면서 오직 한 발 두 발 내딛는 것만 생각해야 했다. 팔이 마비되는 것처럼 아파왔다.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밧줄이 흔들렸다. 그는 밧줄을 더욱 꽉 움켜잡았다. 발이 바깥으로 튀어나온 턱에 닿았다. 창턱이었다. 한 층 아래로 내려온 것이다. 왕재수가 토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바로 그 층이었다. 매캐하고 뜨거운 연기가 확 밀려나와서 얼굴을 델 것 같았다. 불이 아래로 번지기 시작한 것 같았다. 바람 방향이 바뀐 것인지, 내부의 뭔가가 허물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연기 때문에 하마터면 그는 밧줄을 놓칠 뻔 했다. 간신히 창턱을 두 발로 꽉 밟으면서 밧줄을 꼭 쥐었다. 그리고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기억이 희미해졌다. 어떻게 밧줄을 타고 벽과 파이프를 밟으며 내려왔는지 어렴풋한 꿈처럼 느껴졌다. 세찬 바람과 매운 연기, 마비되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팔과 어깨, 후들거리는 무릎, 이 모든 것이 으깬 죽처럼 뒤섞였지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기계처럼 숫자를 셌다. 하나 둘, 하나 둘, 그리고 숫자에 맞춰 줄을 잡았다 놨다 했고 발을 떼었다 디뎠다 했다. 귓가에는 계속 왕재수의 목소리만 윙윙거리고 있었다. '아래 보지 마. 줄만 잡고 하나 둘 세면서 내려가. 천천히.'

 

 

그때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려왔다. 뭐라고 하는지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땀방울이 흘러내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는 밧줄에 대고 눈을 비볐다. 쓰라렸다. 눈을 떴다. 순간 그는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줄을 놓칠 뻔 했다. 하지만 놓쳤어도 별다를 건 없었을 것이다. 줄이 끝나 있었다. 겨우 한 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차가운 공포에 휩싸인 채 그는 처음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이 보였다! 가까웠다! 1층 높이였다. 그는 숨을 몰아쉬었고 밧줄을 놓았다. 아래로 뛰어내렸다. 두 발과 무릎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아팠다. 하지만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둘러쌌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튼처럼 그를 휩쌌다. 베르닌은 멍하게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고개를 저었다. 한 손으로 뺨을 찰싹 때려보았다. 그러자 어지러웠고 속이 울렁거렸다. 기침을 해보았다. 아마도 조금 토한 것 같았다. 누군가가 입에 물병을 대 주었다. 물을 마시자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그제야 베르닌은 퍼뜩 놀라 소리쳤다.

 

 

“ 소방차! 소방차 왔어요? ”

 

“ 추돌사고가 나서 막혔다가 이제 뚫렸대요, 금방 도착할 거예요. ”

 

 

중요하지 않았다.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온몸이 칼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왕재수가 생각났다. 왕재수는 거의 다 내려왔어야 했다. 분명히 베르닌이 한 층 내려가면 따라 내려온다고 했었다. 그보다 훨씬 가볍고 민첩한 애니까 이제 내려와야 했다. 그런데...

 

 

베르닌은 두 손으로 가슴을 부여안은 채 고개를 쭉 빼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왕재수는 아직 전망대 창가에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왕재수의 검은 머리칼이 마구 흩날리는 게 보였다. 그는 상체를 쭉 뺀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르닌이 무사히 내려갔는지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베르닌이 막 고함을 지르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창밖으로 나왔다. 밧줄을 잡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베르닌에게 하나 둘 세라고 했던 것과는 천지차이의 몸놀림이었다.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왕재수는 밧줄을 타면서 내려오고 있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밧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파이프를 잡고 있었다. 너무나 불편해 보였다. 대체 왜 저러나 싶어 속이 터질 것 같았는데 그 순간 밧줄이 툭 하고 끊어졌다.

 

 

어느 새 그의 곁에 와 있었던 토냐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아악, 미셴카!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도 너나할 것 없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베르닌은 눈앞이 아찔했다. 끊어진 밧줄이 길고 거대한 채찍처럼 휘리릭 돌더니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행히 왕재수는 밧줄이 끊어진 순간 두 손으로 파이프를 꽉 잡고 매달렸다. 두 발로 파이프와 장식돌을 디뎠다. 베르닌은 바로 옆에 툭 떨어진 밧줄을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들었다. 군데군데 올이 풀리고 해져 있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너무나 무서웠다. 두 손을 부여잡은 채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 괜찮아, 괜찮을 거야. 쟨 운동천재잖아... 문도 잘 따고... 파이프 타고 내려올 수 있어... 할 수 있어... 오 하느님... ”

 

 

그의 곁에는 토냐와 가릭이 바짝 붙어 있었다. 토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흐느껴 울고만 있었다. 차마 위를 올려다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가릭은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숫자를 세는 것 같았다. 아마도... 왕재수가 그에게 해줬던 말처럼. '아래 보지 마. 줄만 잡고 하나 둘 세면서 내려가. 천천히.'  하지만 이제 밧줄은 없었다.

 

 

베르닌은 숨이 막혔지만 그래도 정신없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왕재수는 전혀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파이프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파이프는 밧줄과 달랐다. 미끄러웠다. 왕재수는 장갑도 없었다. 손바닥을 천 조각으로 대충 동여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낮은 철봉을 잡고 움직이는 것처럼 편안하고 침착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몸놀림 하나하나가 정확했다. 베르닌처럼 헛디디거나 우왕좌왕하거나 중간중간 멈추지도 않았다. 그 명료하고 침착한 움직임에 베르닌의 공포가 가라앉았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왕재수는 전망대에서 2층이나 내려왔다. 지상에서 3분의 2 정도 높이였다. 저런 속도라면 금방 내려올 것 같았다.

 

 

왕재수가 창턱에 도달했을 때 갑작스럽게 안쪽에서 펑 소리가 났다. 시커먼 연기와 불꽃이 펑펑 소리를 내더니 거대한 구름기둥처럼 창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해일처럼 왕재수를 덮쳤다. 거대한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충격파를 정면으로 받은 왕재수가 휘청했다. 머리와 몸이 완전히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고 파이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양손 모두.

 

 

안 돼! 미하일! 안 돼!!!!!!!!!!

 

 

베르닌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솟구쳐 일어났다. 시커먼 연기와 세찬 바람 속에서 왕재수가 추락했다. 토냐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모두가 비명을 질렀다. 적어도 5층 높이였다. 그리고...

 

 

왕재수는 공처럼 동그랗게 몸을 만 채 그대로 떨어지더니 높이 쌓여 있던 눈더미 속으로 포탄처럼 처박혔다. 철썩 소리와 함께 눈보라가 거세게 일었다. 정신없이 달려갔던 베르닌은 발을 헛디뎠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을 뒤집어쓴 채 엉덩방아를 찧었다.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 미하일, 미하일... 안 돼... 안 돼... ”

 

 

흐느끼고 울부짖으며 베르닌은 두 손으로 눈을 마구 파냈다. 머릿속이 완전히 하얗게 되었다. 심장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고함치고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눈을 파내는데 옆에서 갑자기 왕재수가 머리를 불쑥 내밀며 부르르 하고 눈을 떨어냈다. 자꾸자꾸 눈을 떨어내더니 기침을 하고는 ‘어휴...’ 하고 탄식을 내뱉으며 다시 눈더미 위에 드러누웠다.

 

 

미처 베르닌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가릭이 달려들었다. 두 팔로 왕재수의 어깨를 껴안고 이마와 얼굴에서 눈을 떨어내며 소리쳤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괜찮으세요? 정신 들어요?

 

“ 아유,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누르지 마, 무거워. ”

 

 

왕재수가 목쉰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한 손으로 눈을 움켜서 정신없이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누군가가 달려와 물병을 건네주었다. 왕재수는 물을 반병쯤 마시고 나서 계속 기침을 했다. 검댕으로 더럽혀진 뺨 위로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눈을 움켜서 얼굴을 닦아내며 왕재수가 투덜댔다.

 

 

“ 아, 진짜 싫어. 시골... 소화기 하나 없고... 시설팀장 가만 안 둘 거야... ”

 

 

그제야 베르닌이 정신을 차렸다. 가릭을 밀쳐내고 왕재수를 부둥켜안았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횡설수설 중얼거렸다.

 

 

“ 너 괜찮아? 괜찮아? 다리... 근육... 부러지고... 높은 데서 떨어져... 장갑도 없고... 줄... 끊어지... ”

 

“ 뭐래는 거야. 나 괜찮아. ”

 

“ 정말? 정말 괜찮은 거야? 저렇게 높은 데서 떨어졌는데... 어떻게... 다리 부러졌을 텐데... ”

 

“ 안 부러졌어. 괜찮아. 눈 위로 떨어졌잖아. 아, 소방차 왔다. 참 빨리도 오네. 에잇, 진짜 시골이라니까. ”

 

 

왕재수가 눈더미에서 기어 나왔다. 일어서려고 하는데 가릭이 그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서 못 일어나게 했다.

 

 

“ 안 돼요, 감독님. 움직이지 마세요. 의사가 봐야 돼요! 금 갔을 수도 있어요, 근육 잘못됐을 수도 있다고요! 가만히 있어요! ”

 

“ 나 괜찮... ”

 

 

그때 소방차가 도착했다. 구급차와 의료요원들도 함께 왔다. 소방대원들이 호스로 물을 뿌리고 불을 끄는 동안 의료요원들이 토냐와 왕재수와 베르닌을 안전한 쪽으로 옮겼다. 토냐는 얌전하게 들것에 누웠지만 왕재수는 매우 싫어하며 자기는 괜찮다고 버티려고 했다. 하지만 가릭이 그를 번쩍 들어서 들것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베르닌에게 고개를 돌렸다.

 

 

“ 당신도 빨리 가서 진찰받아요! ”

 

“ 어, 나... 난 안 다쳤어요... ”

 

“ 뭐가 안 다쳐요! 얼굴이랑 손에 물집 좀 봐요... 흑... ”

 

 

그러더니 갑자기 가릭이 울면서 베르닌을 와락 껴안았다.

 

 

고마워요, 다닐. 고마워요... 토냐 구해줘서 고마워요, 엉엉...

 

“ 저... 내가 구한 거 아니에요... 저 자식이... ”

 

“ 같이 올라갔잖아요... 토냐한테 들었어요... 자재에 깔린 것도 꺼내주고 빠져나올 수 있게 등까지 받쳐줬다고... 어흑... 우리 감독님 감시하는 KGB라고 욕했던 거 미안해요... 당신 아니었으면... 엉엉... ”

 

 

가릭은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훌쩍거리면서 베르닌을 구급차 쪽으로 데리고 갔다. 토냐가 치료를 받고 있었다. 양쪽 다리에 피와 진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겁에 질린 토냐는 계속해서 ‘다리 부러진 거예요? 금 갔어요? 근육 다친 거예요?’ 하고 묻고 있었다. 의료요원은 다리를 만져보면서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 부러졌으면 일어나지도 못해요. 금 갔는지는 엑스레이 찍어봐야 할 것 같아요. 일단 병원으로 가보는 게 좋겠어요. 그래도 이만하기 다행이네요. 목이 많이 쉬었네. 연기 많이 마셨어요? ”

 

“ 네, 조금... 근데 목쉰 건 소리 지르고 울어서 그래요... 너무 무서워서... ”

 

“ 이제 괜찮으니 마음 놔요. ”

 

 

토냐의 다리 상처를 드레싱하고 붕대를 감아준 후 의료요원이 왕재수 쪽으로 갔다. 그 사이에 다른 요원이 베르닌을 진찰했다. 청진기를 대고 폐 소리를 듣고 상의를 벗게 한 후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 연기 마셔서 기관지에 염증이 생겼을 거예요. 병원에 가야 해요. 일단 화상만 먼저... ”

 

 

베르닌은 아픈 것도 모르고 있었다. 거울을 보니 뺨 양쪽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손바닥은 좀 더 심했다. 물집에 진물에 껍질이 다 벗겨져 있었다. 드레싱을 하자 너무나도 쓰라려서 비명이 절로 나왔다. 잠시 후 그와 토냐는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걱정이 된 토냐가 의료요원에게 왜 왕재수는 함께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 구급차가 두 대 왔어요. 다른 차로 가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

 

“ 그 높은 데서 떨어졌는데... ”

 

 

토냐가 부르르 떨었다. 베르닌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 동안 울었다. 자기 때문에 둘 다 죽을 뻔했다고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베르닌은 그녀를 달래주면서도 왕재수에 대한 걱정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 멀쩡할 리가 없어... 아무리 눈 위로 떨어졌다 해도 그렇지... 연기도 엄청 마셨는데... 폐렴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독사과도 먹었고... ’

 

 

그때 구급차가 멈췄다. 스타브로프의 병원은 아니었다. 신시가지까지 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제일 가까운 병원으로 온 것 같았다. 토냐는 들것에 실려 가고 베르닌은 안내해주는 대로 걸어서 병실로 들어갔다.

 

 

 

*   *   *

 

 

 

베르닌은 생각보다 오래 진찰을 받았다. 엑스레이도 찍고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화상 치료를 꼼꼼하게 받았다. 몸 여기저기에 나 있는 타박상 치료도 받았다. 긴장이 풀리자 온몸이 쑤셨다. 의사는 그래도 이만하기 다행이라면서 연기 들이마신 것 때문에 며칠 동안 병원에 다녀야 한다고 했다. 어느 새 뒤따라온 가릭이 자기 옷을 한 뭉치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검댕 투성이에 연기로 푹 절은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가릭은 그보다도 키가 컸기 때문에 소매를 조금 접어야 했다. 가릭은 심지어 그의 패딩 재킷도 주워다 주었다. 그가 밧줄을 타고 내려간 후 왕재수가 창밖으로 집어던졌는지 눈더미 근처에 떨어져 있었다고 했다.

 

 

“ 토냐는 어떻대요? ”

 

“ 다행이에요... 오른쪽 발목에 살짝 금만 갔대요. 토냐가 워낙 날씬해서 완전히 짓눌린 게 아니라 자재 틈새에 끼어 있었나 봐요.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많이 나서 토냐가 너무 놀랐던 거였어요. 조금만 늦었어도... 우린 다리 다치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거라서...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오늘은 입원하기로 했어요. 토냐 어머니도 곧 오실 거예요. ”

 

“ 다행이다... 미하일은요? ”

 

“ 감독님도 큰 이상은 없대요. 당신보다 화상도 덜 입었대요. 근데 연기 마신 것 때문에 아직 치료 중인 것 같아요. ”

 

“ 부러지거나 금 간 데도 없대요? ”

 

“ 네, 괜찮대요. 떨어지느라 타박상만 좀 입었다고... 눈더미 덕분이에요. 정말 하늘이 도왔죠. 볼 때마다 눈 대충 치워놨다고 짜증냈었는데 그게 없었다면... ”

 

 

베르닌은 복도로 나왔다. 의자에 주저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20분쯤 후 왕재수가 나왔다. 역시 가릭이 가져다 준 옷을 입은 건지 자루처럼 헐렁한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다. 코트는 없었다. 창밖으로 던질 거라면 값비싼 자기 코트나 던질 것이지 왜 베르닌 자신의 패딩 재킷만 챙겼는지 불쑥 짜증이 났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왕재수는 시계탑에 들어갈 때 이미 코트를 벗어버렸던 것 같기도 했다. 머리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데다 군데군데 재가 묻어 있고 마구 솟구쳐 있었지만 얼굴은 깨끗하게 닦아낸 후였다. 가릭의 말 대로였다. 뺨과 입술 언저리의 조그만 물집을 제외하면 왕재수의 예쁘장한 얼굴과 하얀 피부는 별로 손상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다행이다 싶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었다. 버럭 소리를 쳤다.

 

 

야! 너 왜 그렇게 늦게 내려왔어! 분명히 나 한 층만 내려가면 따라 내려온다 했잖아! 꾸물거리다가 줄 끊어지고! ”

 

“ 바보, 그 줄 엄청 낡고 해져 있었는데 거기 어떻게 두 명이 매달리냐. 대번에 끊어지지. 그나마 네가 먼저 내려가서 망정이지. ”

 

“ 뭐야? 너... 너 그 줄 끊어질 줄 알고 있었단 말이야? ”

 

“ 당연하잖아. 그러니까 너 먼저 가라고 했지. 너랑 나랑 몸무게 합치면 아무리 적어도 140킬로야. 둘이 매달리는 즉시 밧줄 끊어졌다고. 어제 인부들이 그걸로 시멘트 포대 옮기는 거 봤었어. 40킬로짜리 두 개. 그러니까 잠깐 동안 네 몸무게쯤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봤어. 문제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거니까 중력이 작용해서 무게가 더 쏠린다는 건데... 그래도 어찌어찌 1층까지는 내려가겠더라고. ”

 

 

베르닌은 숨이 턱 막혀왔다. 눈을 깜박였다. 입을 다물었다 벌렸다. 왕재수의 침착한 얼굴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억누르며 물었다.

 

 

“ 너 그래서 내 몸무게 물었던 거야? ”

 

“ 응. 대충 그 정도 될 거 같긴 했어. 내가 하던 일이 뭐야, 파트너 들어 올리고 지탱해주던 거잖아. 무게와 중력에 대해 모르면 안무도 못해. 밧줄이 지탱할 수 있는 하중 계산을... ”

 

“ 이 개자식아! 그럼 너 먼저 내려갔어야지! 네가 나보다 훨씬 가볍잖아! 너 내려가고 나서 내가 따라가는 게 순서잖아! 왜 거꾸로... 내가 먼저 가서 밧줄 끊어진 거잖아! 너는... ”

 

 

왕재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 나라도 마찬가지야. 밧줄이 많이 약했어. 끊어지게 돼 있었어. 내가 먼저 내려갔어도 너 내려올 때 중간에 끊어졌을 거야. 기껏 1~2분 차이였을걸. 어차피 두 명이 내려올 만큼 튼튼하지 않았... ”

 

 

베르닌은 견딜 수가 없었다. 왕재수의 따귀를 철썩 후려치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이 바보 멍청아! 너 먼저 내려갔어야지! 죽고 싶어 안달이 났냐! 목숨이 두 개라도 돼? 너 살 궁리를 해야지 그 상황에서 그런 병신 짓을 하면 어쩌란 말야!

 

 

왕재수가 두 눈이 둥그레졌다. 맞아서 새빨개진 뺨을 한 손으로 꼭 쥔 채 몹시 당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 아니, 그게... 너는 둔하니까... 중간에 줄 끊어지면 넌 떨어졌을 거고... 어차피 나는 파이프 타고 내려올 생각이었어. 여차하면 뛰어내리려고 했었어. 눈더미 봐놨다고... 전에도 그렇게 눈 위로 떨어져서 멀쩡한 적 있... ”

 

 

시끄러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야! 이 얼간이 새끼야! 가만 안 둘 거야! 네까짓 게 뭔데 성인군자 노릇이야! 하던 대로 싸가지 없게 자기 몸 하나만 챙길 것이지 왜 그 상황에서 잘난 척하면서 영웅 노릇이냐고! 이 미친 자식아, 정말 너는! ”

 

“ 어... 다닐, 소리 지르지 마... 제발... ”

 

 

왕재수가 두 손으로 귀를 감싸며 부탁했다. 휘둥그렇게 뜬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하지만 베르닌은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대며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귓가에 대고 망치를 쾅쾅 두들기는 것 같았다. 화가 났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자신조차 알 수가 없었다. 계속 고함을 지르고 왕재수를 다그쳤다. 멱살을 잡고 마구 잡아 흔들었다.

 

 

너 또 그럴 거야? 또 이런 식으로 할 거냐고! 나 정말 너 때문에 미쳐버릴 거 같아! 넌 정말....

 

 

너무 시끄러웠는지 복도로 사람들이 몇 명 달려 나왔다. 가릭이 깜짝 놀라서 베르닌을 왕재수에게서 떼어놓으며 소리쳤다.

 

 

“ 왜 이래요, 다닐! 제발 진정해요! ”

 

“ 시끄러워요! 지금 진정하게 됐냐고! 저 바보 같은 자식이... 가만 안 둘 거야!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

 

 

왕재수가 울먹거렸다.

 

 

“ 왜 화내... 소리 지르는 거 싫어... 화내는 거 싫어... 엉엉... 미워... ”

 

 

그러더니 왕재수가 베르닌을 밀치고 일어났다. 서럽게 울면서 사람들을 헤치고 휘청휘청 걸어서 복도를 빠져나갔다.

 

 

베르닌은 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한동안 씩씩거리며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두르고 욕을 하다가 조금씩 제정신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떠나고 가릭만 남아 있었다. 가릭은 측은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 진정해요, 다닐. ”

 

“ 바보 같은 자식... 끊어질 거 뻔히 알았으면서... 따라 내려올 거라고 거짓말하고... 나 안심시키고는... 내가 뒤에 내려간다니까 자기 위로 떨어질 거라고 겁주고... 거짓말쟁이... 애초부터 다 알았으면서... ”

 

 

베르닌은 몸을 떨었다. 타는 듯한 분노가 누그러들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꼭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울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연기와 불꽃과 온몸을 태워버릴 듯한 열기, 펑펑 터지는 소리, 바람, 밧줄, 통증, 그리고 공포가 되살아났다. 가릭은 어쩔 줄 모르며 서 있다가 베르닌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그리고는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 저 있잖아요... 토냐가 아까 탑에서 혼자 내려왔을 때, 걔도 화냈어요. 얼마나 울고 화냈는지 몰라요. 당신이랑 똑같았어요, 감독님 보고 바보 멍청이라고 그랬어요. 자기 구하러 왔다고... 소리 지르고 울었어요. 그러니까 이해해요. 그래도 그 분한테 화내지 마세요. 지난번에도 톱니장치 고장 났을 때 애들 다칠까봐 막아줬어요. 미샤는 좋은 사람이에요. ”

 

“ 나도, 나도 안다고요! 개자식이... 생긴 대로 재수 없게 놀 것이지 왜 안 어울리게 좋은 놈이냐고요... 어흑... ”

 

 

베르닌은 손등으로 눈물콧물을 문지르며 끅끅 울었다. 가릭은 한동안 기다렸다가 그에게 물을 한 잔 가져다주었다. 물을 마신 후 베르닌은 딸꾹질을 했고 숨을 골랐고 서서히 진정되었다. 잠시 후 그는 가릭에게 고맙다고 한 후 병원을 나섰다.

 

 

 

*    *    *

 

 

 

 

병원 밖으로 나와 보니 레닌 대로 근처였다. 이미 해는 져버린 후였고 도로 위로는 차들이 씽씽 달리고 있었다. 차를 가져오려면 극장으로 다시 가야 했지만 시계탑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극장 쪽에서 연기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불은 다 끈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주변을 헤매 다녔지만 왕재수는 눈에 띄지 않았다.

 

 

‘ 이 바보... 설마 다시 극장에 간 거 아니야? ’

 

 

그는 눈에 띄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서 극장 당직실에 전화를 해보았다. 왕재수는 구급차에 실려 간 후 극장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화재는 다 진압되었다고 했다. 집으로 전화를 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코즐로프에게 전화를 하려다 ‘우리 귀염둥이 아기가 사지에 들어가도록 놔두다니 제정신이냐! 크아아!’ 하고 폭주할 게 뻔했기 때문에 포기했다.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바이올린 깡패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 이 자식... 코트도 버리고... 아까도 스웨터 한 장밖에 안 입고 있었는데... 바람 불고 추운데 어디로 간 거야... ’

 

 

베르닌은 한참 주변을 헤매다가 공원을 가로질러 시느이 교각까지 갔다. 왕재수가 가끔 이용하는 길이었다. 왕재수는 베르닌이 차로 출근시켜주지 않을 때면 보통 배나무 거리의 아파트에서부터 레스나야 거리를 지난 후 시느이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의 극장까지 걸어가곤 했다. 도보로는 한 시간 이상 걸렸지만 운전 실력이 형편없으니 그 쪽이 낫다고 했다.

 

 

 

베르닌은 푸른색으로 칠해진 아담한 시느이 다리로 갔다. 가로등 램프가 줄줄이 켜져 있었다. 다리 위로 올라가 한 바퀴 둘러보다가 그는 건너편 강가에 앉아 있는 왕재수를 발견했다.

 

 

그는 급하게 다리를 건너갔다.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강가로 내려갔다. 왕재수는 판판한 돌멩이 위에 걸터앉아 출렁이는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 위로 뭔가를 집어던지고 있었다. 잘 보니 오리들에게 빵부스러기를 던져주고 있었다. 짙은 색의 청둥오리들이 삼삼오오 유빙을 헤치고 미끄러져 와서 먹이를 받아먹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맥이 다 풀리는 느낌이었다. 얼굴도 보지 않고 그는 혼잣말처럼 투덜댔다.

 

 

“ 동물 싫다더니 추운데 앉아서 뭐하는 거야... ”

 

“ 동물은 싫지만 새는 좋아. ”

 

“ 새도 동물인데! ”

 

“ 아니야, 새는 새야! 새는 날아다니잖아! 특히 오리는 날기도 하고 헤엄도 칠 줄 알고... ”

 

“ 곧 죽어도 자기 말이 맞다고... ”

 

 

베르닌은 가릭이 빌려줬던 패딩 재킷을 벗어서 왕재수의 어깨에 덮어씌웠다. 왕재수는 고개를 들어서 그를 쳐다보았다. 어두웠기 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두 눈은 말라 있었다. 이따금 반짝거렸지만 그건 가로등 불빛과 수면에 비친 달빛 때문이었다. 눈물이 고여 있는 건 아니었다. 베르닌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말했다.

 

 

“ 미안해, 화내서. 너 소리 지르는 거 싫어하는 거 알면서... ”

 

“ 그래, 소리 지르는 거 싫어. 앞으로는 그러지 마. ”

 

“ 구해줘서 고마워. 그 말을 먼저 했어야 됐는데. ”

 

“ 구해준 것까지야. 자기 힘으로 줄 타고 내려갔으면서. 나 없었어도 그렇게 했을 걸. 하긴 애초부터 쫓아온 네가 바보지. ”

 

“ 다시는 그러지 마. 위험한 짓... ”

 

“ 그거 위험한 짓 아니었어. 그 상황에서 제일 합리적인 결정이었다고. ”

 

“ 아니야, 그렇지 않아.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리면 합리적인 결정을 하면 안 돼. 자기가 살아날 짓을 해야 돼. 알아들어? 약속해, 앞으로는 안 그럴 거라고. ”

 

뭘? 불났을 때 뛰어들지 말라고? 토냐가 갇혀서 죽게 놔두라고? ”

 

“ 아니... 토냐 구한 건 맞아. 잘했어. 그거 말고... 아까 나랑 있었을 때... ”

 

“ 토냐는 구해야 되고 너는 놔둬야 해? 그런 게 어디 있어? ”

 

“ 토냐는 약자고 나는 아니니까. ”

 

“ 아니야, 불 속에서는 모두 약자야. ”

 

 

왕재수가 손에 쥐고 있던 흑빵 짜투리를 부숴서 전부 수면 위로 뿌렸다. 오리들이 잽싸게 부스러기를 낚아채는 것을 보면서 왕재수가 덧붙였다.

 

 

“ 그리고 나 목숨 여러 개야. 많이 살아났어. 두 개보다 더 많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

 

“ 뭐가 여러 개야! 네가 고양이냐! ”

 

“ 옛날에도 여러 번 죽을 뻔 했었는데 다 살아났어. 작년에 감옥도 가고... 여기 와서도... 얼음물에 빠지고... 독사과 먹고... 그래도 지금 멀쩡하잖아. 그리고 어릴 때 썰매 타러 갔다가 아까처럼 눈더미로 떨어진 적 있는데 그때도 괜찮았는걸. 진짜야. ”

 

“ 그래도 이제 그 목숨 몇 개 안 남았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절대 위험한 짓 하지 마. 알았지? ”

 

“ 위험하고 안 위험한 걸 어떻게 알아? ”

 

“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위험한 거야. ”

 

“ 칫, 넌 책상물림인데 그걸 어떻게 믿니. ”

 

“ 하여튼 약속해! 안 그러면 이제 저녁밥 안 해 줄 거야. ”

 

“ 알았어. 치사하긴. ”

 

 

왕재수는 패딩을 입었고 지퍼를 올렸다. 그리고는 생각난 듯 베르닌을 훑어보았다.

 

 

“ 넌 안 추워? ”

 

“ 80킬로니까 괜찮아. 너보다 지방질이 많아서. ”

 

“ 하긴. ”

 

 

그래도 바람이 불어오자 왕재수는 베르닌의 곁에 몸을 딱 붙였다. 오랫동안 스웨터 한 장만 걸친 채 앉아 있었을 텐데도 몸이 따뜻했다. 베르닌도 몸이 녹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한동안 그렇게 앉아서 오리들을 구경했다. 어두운 강물 위로 미처 녹지 않은 얼음이 둥둥 떠다녔고 불그스름한 가로등 램프 불빛과 하얀 달빛이 겹쳐져 부드럽게 반짝거렸다. 잠시 후 오리들이 하나둘 날아가기 시작했다. 왕재수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 여기 오리들은 꼭 갈매기처럼 높이 나네. ”

 

“ 레닌그라드 오리들이랑 종류가 좀 틀릴 걸. ”

 

“ 시골이라 그런 거지 뭐. 근데 예쁘다. ”

 

“ 거봐, 시골이라도 좋은 거 있잖아. ”

 

“ 아니야! 누가 좋대? 예쁘다고 한 거지! ”

 

“ 그게 그거 아니야? ”

 

“ 아니야! 좋은 건 좋은 거고 예쁜 건 예쁜 거야! ”

 

“ 그랬다 하자. ”

 

 

마지막 오리가 날아간 후 그들은 일어섰고 레스나야 거리를 지나 배나무 거리의 집으로 돌아갔다. 왕재수는 배가 고프다면서 저녁을 달라고 했다. 연이은 야근으로 부엌에 남아 있는 거라곤 냉동 펠메니와 인스턴트 보르쉬가 전부였지만 베르닌은 그렇게 맛있는 저녁은 난생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았다. 왕재수는 별 말 하지 않았지만 보르쉬 접시에 거의 코를 박고 먹었고 펠메니에도 평소보다 스메타나를 훨씬 많이 찍어서 먹었다. 그리고는 베르닌이 홍차에 설탕을 두 숟가락이나 넣었는데도 투정하지 않고 홀짝 마셨다. 사실은 달착지근한 차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고 베르닌은 내심 생각했지만 물론 입 밖에 내서 말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또 시골이 어떻고 무용수의 식단이 어떻고 근육이 미워지는 게 어떻고 하며 투정을 부릴 테니까. 하긴 그런 투정쯤은 받아줄 수 있는 날이었지만 어쨌든 베르닌은 입을 다물었다.

     

 

 

 

 

 

FIN

- 2015. 5. 3 ~ 5. 12 -

 

  ...

 

 

초반부에 언급되는 가브릴로프 출신 국회의원인 게오르기 벨스키는 본편에도 등장한다. 본편에서도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미샤를 끌어내 가브릴로프로 보내준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왕재수의 말대로 이 사람은 '그' 크레믈린 아저씨는 아니지만, 어쨌든 본편에서도 미샤를 많이 후원해준 사람이다.

'그' 크레믈린 아저씨는 베르닌의 의심대로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를 가리키고, 스페호프가 높은 분들 얘기하면서 언급한 '마로조프' 역시 레닌그라드 출신의 유력한 국회의원으로 미샤의 후원자이다. 이 사람이 화자로 나오는 단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 올린 적이 있다 : http://tveye.tistory.com/2877

 

..

 

24편도 사건들이나 미샤의 성격, 행동 패턴 등 상당히 본편 색채가 짙은데 25편으로 가면 다시 서무 느낌으로 돌아온다 :)

 

..

 

왕재수가 어릴 때 썰매 타다가 눈더미 위로 떨어진 적 있다고 얘기하는 내용은 사실 이전에 쓴 본편 우주의 트로이가 등장하는 장편 초반부에 나온다. 나중에 발췌해 보겠다.

 

..

 

이야기는 25편으로 이어진다~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
Posted by liontamer
2015. 6. 4. 21:08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의 황금빛 돔 russia2015. 6. 4. 21:08

 

 

지난 2월 17일. 페테르부르크.

 

:
Posted by liontamer
2015. 6. 3. 15:53

한겨울의 빛 russia2015. 6. 3. 15:53

 

 

2월, 페테르부르크. 모이카 운하.

 

많이 추운 날이었지만 그래도 햇살은 찬란했다. 이렇게 빛이 스며들고 일견 창백하게 보이는 날씨가 좋다.

 

 

 

:
Posted by liontamer

오늘 수신한 마린스키 뉴스레터 메인 사진...

 

 

 

지난번에 한번 얘기한 적 있는(http://tveye.tistory.com/3764) 마린스키 남성 수석무용수 3인의 공연 'Рыцари танца'(Knights of dance)

 

6월 14일, 일요일. 사진은 순서대로 예브게니 이반첸코, 이고르 콜브, 다닐라 코르순체프.

사진사는 얀 오멜린스키(Yan Omelnitsky)

 

너무너무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공연이라 슬펐는데 다행히 온라인 방송을 해준다고 한다!!! 그런데 시차 때문에 볼 수가 있을지.. ㅠㅠ 정 안되면 다시보기로 봐야지..

 

뉴스레터에 이 공연과 3명의 무용수에 대한 메인 기사가 떠서 흥미롭게 읽었다. 전문은 아래에.. 영문으로도 나와있으면 올려보겠는데 뉴스레터는 노어로만 발행되는 모양이다.

 

나의 첫사랑 무용수 예브게니 이반첸코에 대한 부분만 발췌해 대충 번역하자면...(생각보다 문장이 매끄럽지 않아서 의역을 좀 했다)

 

 

지난 20년 동안 예브게니 이반첸코는 레닌그라드 전통을 이어받은 이상적인 왕자(prince)를 구현해 왔다. 그는 완벽하고 자연스러운 귀족적 우아함을 타고 난 무용수이다. 섬세하고 잘 계산된 무대를 통해 배역에 대한 그의 관심과 집중력이 그대로 드러난다. 무대 위에서든 실생활에서든 그가 보여주는 원칙과 언어들은 일견 견고하고 믿음직스럽다. 동시에 그의 내부에는 크나큰 부드러움이 공존한다. 베네피스 공연에서 그는 이러한 감수성의 소유자로서, 심지어 유혹자라기보다는 정복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헤라자데의 황금노예이다.

 

 

표현이 좀 어렵긴 하지만... 뭐 발레 관련 칼럼이나 기사들은 보통 저런 식이니.. 하여튼 이반첸코가 이상적인 왕자님이자 파트너 스타일의 무용수라는 것은 나도 언제나 동의해 왔다 :) (그래서 갈라 공연 땐 맨날 아다지오만 추고.. 엉엉)

 

그 아래에는 코르순체프와 콜브에 대한 흥미로운 얘기들도 있다. 기사에서 이반첸코와 코르순체프는 완벽한 '당쇠르 노블', 발레리나의 이상적인 파트너이자 기사도의 구현인 무용수들로 묘사되고 콜브는 조금 더 예리한 성격 배우로서의 측면이 강조되어 있다. 이 부분은 나도 동의!!!

 

 

Рыцари танца: Евгений Иванченко, Игорь Колб, Данила Корсунцев
Мариинский театр
Воскресенье, 14 июня, 19:30
В воскресенье, 14 июня в Мариинском театре состоится вечер балета «Рыцари танца», в котором на сцену выйдут премьеры балетной труппы Мариинского театра: Евгений Иванченко, Игорь Колб и Данила Корсунцев. Евгений Иванченко выступит в балете Михаила Фокина «Шехеразада» (1910 г.) на музыку Римского-Корсакова. Игорь Колб будет солировать в балете «Дивертисмент короля», специально поставленном для него хореографом Мариинского театра Максимом Петровым на музыку Рамо. Данила Корсунцев выступит в балете Константина Боярского «Барышня и хулиган» (1962 г.) на музыку Шостаковича.

Мариинский театр всегда был театром балерин par excellence. Но чтобы чудо состоялось и звезда раскрылась, нужен дуэт и нужен партнёр. Одно из важнейших балетных амплуа — умение быть партнёром, и все трое героев вечера ими являются в превосходной степени. Им важно, чтобы балерине на сцене было легко. Очень важно и то, как они танцуют, ведь они её избранники. Иногда рыцарственное служение даже мешало им себя показать, но зато все, кто предан балету, никогда не волновались, знали, сколько в них надежности и стиля, и в чём состоит своего рода жертва.

За последние двадцать лет Евгений Иванченко стал воплощением ленинградского идеала принца. Его благородство абсолютно естественно, его внимание и включенность в роль кажутся запрограммированными манерами, он словно так и живёт этими балетными — и человеческими — надёжными правилами и словами. И при этом в нём много мягкости. В бенефисе же он выйдет на сцену чувственным обладателем, даже не соблазнителем, но покорителем, и это будет в «Шехеразаде».

Данила Корсунцев пришёл в Мариинку чуть позже, в 1998 году, после нескольких лет у Касаткиной и Василёва. И внес в амплуа danseur noble ту меру мужественности, что всегда была редкой на сцене театра. В классической ленинградской традиции танцовщики были обычно чуть манернее, а исторически даже «слаще». А он — твёрдый, надёжный, мощный, он — скала. В бенефисе он проявит себя в неожиданном качестве — в «Барышне и хулигане» ему придётся забыть все правила хорошего тона и стать отвязней и даже наглей.

Евгений Иванченко и Данила Корсунцев — ярчайшие представители того, что называется danseur noble: они самые что ни на есть благородные танцовщики. Роли принцев, прекрасных возлюбленных им идеально под стать. И оба подчинили свою сольную карьеру этому служению.

Игорь Колб несколько иной. Многие годы и он оставался, прежде всего, партнёром, но в нём всегда был виден талант танцовщика характерного склада. Он перетанцевал все партии амплуа danseur noble, но его природная склонность к остроте сделала его самым запоминающимся принцем в «Золушке» Ратманского. Там была сдержанность, мечта, но и открытость к преодолению, слому, самому невероятному поиску. Особенно повезло ему с «Шурале» — старый якобсоновский текст позволил стать сказочно хитрым, даже злобным, таинственно лесным. В последние годы он вдруг освоил Фею Карабос. Переход к открытому характеру состоялся. А в бенефис — новая хореография, сделанная для него совсем юным Максимом Петровым. Но показательно, что музыка — Рамо — словно бы возвращение к балетным истокам.

 

 

:
Posted by liontamer
2015. 6. 1. 16:21

나도 보트 타고 운하 유람하고 싶다.. russia2015. 6. 1. 16:21

 

 

작년 7월, 페테르부르크.

백야 시즌. 찬란한 여름. 그리보예도프 운하 따라 유람 중인 보트들...

물론 보트를 보면 손을 흔들어주며 지나간다 :)

 

 

 

 

 

 

 

운하 따라 쭉 걷다가 이제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도 나오고...

 

 

 

이야 신나겠다..

 

현실은 업무에 찌들어 월요일과 사투 중...

 

:
Posted by liontamer

 

 

지난 2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산책 갔을 때.

워낙 추워서 눈이 쌓인 길은 온통 꽁꽁 얼어붙어 있었지만 그래도 러시아 엄마들은 한겨울에도 꿋꿋하게 유모차 밀고 산책을 나온다. 이래야 아기 때부터 추위에 익숙해지고 면역력도 키울 수 있단다.

사진의 유모차 미는 분은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였던 것 같다.. 하여튼 하얀 눈밭 위로 파랑 노랑 유모차를 밀고 가는 빨간 패딩 하얀 모자 할머니의 모습이 선명하고 예뻐서 살짝 찍었다. 멀리서 찍어서 얼굴 전혀 알아볼 수 없으니 살짝 올려본다.

 

.. 이때 내 옆에는 료샤와 레냐가 있었다. 레냐가 유모차를 가리키면서...

 

레냐 : 아가는 유모차 타!

료샤 : 너도 몇 년 전까진 저렇게 유모차를 탔단다. 아빠가 밀고 다녔단다.

레냐 : 아니야! 유모차는 아가만 타는 거야! 나는 아가가 아닌데!

료샤 : 그러니까 몇 년 전이라 했잖니.

레냐 : 아니야, 아주아주 옛날이야!

 

웃다가 카메라 떨어뜨릴 뻔 했다 :)

 

:
Posted by liontamer
2015. 5. 29. 21:01

다리 아래 오리들 옹기종기 russia2015. 5. 29. 21:01

 

 

지난 2월 14일, 페테르부르크.

 

춥고 흐렸던 날이다. 궁전광장 쪽 다녀왔다가 모이카 운하 따라 걸어서 미하일로프스키 공원과 마르스 광장 쪽으로 산책하러 갔다. 운하변의 다리 아래에서 발견한 오리들.. 운하는 꽁꽁 얼었지만 그래도 다리 아래는 얼지 않아서 그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 사진은 찍었던 날 러시아 현지에서 한번 올렸던 것 같다.

 

 

 

오리들아, 추웠지?

 

:
Posted by liontamer

 

 

지난 2월 15일. 페테르부르크 네바 강변에서 찍은 사진 몇 장 더.

강이 얼어붙고 그 위로 눈이 쌓이고 하늘이 파랗게 빛나면 정말 아름답다.

 

 

 

 

 

 

 

가운데로는 얼음이 녹아서 코발트색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가장자리로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왼편의 사람 형체는 내 그림자. 지난번 프라하의 거울 샷에 이어 두번째로 내 모습(..이라기보단 실루엣) 공개 ㅎㅎ 패딩코트와 거기 달린 커다란 털모자를 쓰고 있어서 형체가 저렇다 :) 한쪽으로 튀어나온 건 아마도 카메라 때문일 듯... (그렇겠지? 설마 내 어깨가 한쪽만 저렇게 톡 튀어나와 있진 않겠지???)

 

 

:
Posted by liontamer

 

심적으로 많이 힘든 며칠을 보내고 있어서 이번 23편은 주말 지나서 올릴까 하다가, 서무 시리즈는 내 마음에도 위안을 주는 글이라서 평소처럼 주중에 올려본다.

 

22편에서 왕재수는 베르닌이 캐온 약초와 투레츠키가 구해준 파인애플 통조림,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독사과 후유증에서 서서히 회복되었다. 23편은 그 이후, 느닷없이 또 다른 명령을 받은 베르닌과 나름대로의 미션을 지닌 왕재수의 이야기이다.

 

여기 등장하는 스네고로드는 지난 19~20편에서 등장했던 그 폭설 많이 오는 동네이다. (스네그는 눈, 고로드는 도시란 뜻이라 내가 조합해 만든 도시 이름이다)

 

언급되는 스네고로드 '청년단'은 소련 시절 있었던 공산주의 청년단 콤소몰을 가리킨다. 소년단은 피오네르, 청년단은 콤소몰이다. 콤소몰에 해당되는 나이는 보통 26세까지이다.

 

여기 등장하는 데니스와 타마라는 가브릴로프 본편에서도 등장한다. 가브릴로프 발레단에서 가장 인기많은 스타 커플 무용수들이다. (지난번 트로이가 나오는 본편에서 언급된 키로프 발레단 코디네이터 타마라와는 다른 인물이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스페호프는 자매도시의 폭설 복구를 위해 직원 대표를 파견하기로 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3

 

 

 

 

서무의 슬픔

-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주말에 개에게 물려 3일 동안 병원 신세를 진 스페호프 국장은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원래 스페호프는 월요일 아침에 제일 저기압이 되곤 했다. 그 이유는 주말 동안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으니 그들을 들들 볶고 훈계를 할 수 없어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월요일 아침에 극에 이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개에게 물린 탓에 월요일에 출근을 못했기 때문에 화요일 아침이 되자 그의 기분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는 9시부터 줄줄이 간부들과 직원들을 호출했다. 사소한 트집을 잡아 엄청난 질책이 이어졌다. 주간 회의에서도 직원들을 계속 박살냈다. 물론 베르닌도 예외는 아니었다. 총괄 서무이자 막내였으므로 언제나 1번 타자였다. 등사기에 튀어 있는 얼룩부터 시작해 빛이 바래고 살짝 비뚤어지게 걸려 있는 부서 명패에 이르기까지 족히 10가지 항목으로 질책을 당했다. 그리고는 간부들의 부서 운영이 엉망인데다 조직의 성과가 곤두박질치고 있다고 분노를 터뜨린 후 모두가 공부하는 조직, 스스로를 연마하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설교가 계속되는 동안 머릿속으로 좀 전에 지적받은 10가지 항목 중 지금 해결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리고 대충 얼버무리고 해결한 것처럼 꾸밀 수 있는 것들을 분류하고 있었다. 옆에서는 발따예프가 초점 없는 눈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수첩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가고 모든 분노를 발산한 후 기분이 좀 나아진 스페호프가 헛기침을 했다.

 

 

“ 좋아. 그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네. 아, 그렇지. 잊을 뻔했군. 얼마 전에 우리 자매도시인 스네고로드에 폭설이 내려서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다들 알고 있겠지? 의회에서 정식으로 피해 복구 봉사단을 파견하기로 했네. 이번 봉사단에는 의회와 우리를 비롯해 공공기관 모두가 참여하네. 의회에서 차출 원칙도 보내왔네. 기관별로 두 명, 그리고 남녀평등을 위해 남자 하나 여자 하나일세. 다닐, 자네는 오전 중 의회에 우리 보안위원회 참가자 명단을 유선과 문서로 동시 통보하도록 하게. ”

 

“ 어, 예. 알겠습니다, 국장님. 그런데 우리 참가자는 누구인가요? ”

 

“ 음, 그렇지. 뭐 어려울 것 있나. 지금 이 자리에서 정하도록 하지. 음, 누구로 할까. ”

 

 

스페호프가 드넓은 회의실에 앉아 있는 수많은 직원들의 얼굴을 한 바퀴 훑었다. 직원들은 모두들 고개를 푹 숙이고 ‘제발 나만은 안 돼...’ 하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번쩍 손을 들었다.

 

 

“ 국장님, 건의사항이 있습니다. ”

 

“ 건의사항이라니? ”

 

 

웬 건방진 놈이 국장의 의사결정을 방해하는가 하는 표정으로 스페호프가 따가운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손을 든 것이 평소 총애하던 대외협력부의 세묜 모브린이라는 것을 알자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 아, 세묜. 그래, 말해보게. ”

 

“ 집단농장 자원봉사는 저도 지난번에 가봐서 아는데 힘을 써야 하는 일이 많아서 젊은이들이 필요합니다. 특히 이번엔 폭설까지 왔다고 하니 더욱 그렇죠. 그러니 연차가 가장 젊은 직원을 파견하는 것이 어떨지 국장님의 의견을 여쭙고자 합니다.

 

 

베르닌은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예전부터 모브린의 매끄러운 처세술이 부럽기도 했지만 어딘지 얄미운 선배라고 생각해왔는데 지난번에 알렉산드라의 일이 있고부터는 더욱 보기 싫었다. 저 짧은 몇 마디를 통해 모브린은 자신이 이미 자원봉사에 다녀왔으니 이번에는 제외되어야 한다는 점과 막내 직원들을 파견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옳기 때문에 자신은 더더욱 이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동시에 어필하고 있었다! 그 인간이 자기 살 길만 개척했다면 그건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그 건의사항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스페호프가 껄껄 웃으며 손바닥을 탁 쳤다.

 

 

“ 허허, 세묜. 자네 어떻게 내 생각을 그렇게 딱 짚었나. 나도 동감일세. 이런 건 당연히 젊은 직원들이 가야지. 막내들이 가는 게 맞네. 그래야 가서 힘도 쓰고 게으름도 안 부리고 다른 기관들 보기에도 체면도 서지. 가뜩이나 우리 KGB는 이름값이 있으니 더더욱 젊은 직원이 가야 하네. 좋아, 우리 막내가 누구더라... 그렇지. 남자는 다닐. 여자는... 으음... ”

 

 

여직원에게 별 관심이 없는 스페호프는 한참 기억을 더듬었다. 모브린이 친절하게 그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 등록부서의 리자베타 칸페트나야입니다. ”

 

“ 그런가? 등록부서에는 여직원이 많아 헷갈리는군. 맞나? ”

 

 

등록부장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예, 칸페트나야가 맞습니다. 이제 스물한 살인가 그렇습니다. ”

 

“ 좋아, 됐군. 서무는 명단을 적게. 우리 봉사요원은 감시분석부의 다닐 베르닌, 그리고 등록부서의 리자베타 칸페트나야일세. 알다시피 스네고로드는 꽤 멀지. 삼림국에서 버스를 준비했다는군. 출발은 내일 밤에 한다고 하네. 그러면 목요일 오전에 도착하겠지. 이틀 동안 봉사를 하고 토요일 아침에 그곳에서 나오는 일정일세. 자세한 건 의회 쪽 담당자에게 문의하도록. 이상! ”

 

 

베르닌은 체념한 채 수첩을 주섬주섬 정리해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리자가 울상이 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 다냐, 이게 웬 날벼락이에요. 세묜 선배는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우리랑 무슨 원한을 졌다고... 스네고로드면 버스로 열다섯 시간이에요! 기차로 가는 것도 아니고... 맙소사, 게다가 토요일에 나오면 여기 도착하면 일요일이 다 될 텐데... 주말도 반납하라는 거잖아요. 막내라고 항상 궂은 일만 도맡아 하는데 봉사요원으로까지 차출되다니 정말 너무해요. ”

 

“ 그러게요. 나야 뭐 세묜이 추천하지 않았더라도 국장이 분명 가라고 했을 테지만 당신은 정말 운이 없네요. 안 갈 수도 없고... 일단 따뜻한 옷을 꼭 챙기세요. 거기 엄청 춥대요. ”

 

“ 휴... 일도 힘들어죽겠는데 집단농장 봉사까지 가라니. 그런 건 학생 때로 족한 줄 알았는데. 토요일엔 친구들이랑 영화도 보고 놀려고 했는데 완전히 망했네요. ”

 

 

리자는 한숨을 폭 쉬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베르닌도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스네고로드라면 스페호프가 왕재수의 공연을 망치기 위해 무용수들을 보내서 폭설에 갇히게 만들었던 그 동네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기 싫었다.

 

 

어쨌든 그는 퇴근 직전에 리자와 함께 준비물 리스트를 체크했고 따뜻한 옷 챙겨 입으라고 다시 한 번 신신당부를 했다.

 

 

“ 무조건 패딩 입어야 돼요. 모자도 챙겨야 하고. 코트는 안돼요! ”

 

어머, 당연하죠. 패딩 입어야죠, 거기 추운데. 당연한 소릴 왜 자꾸 해요? ”

 

어, 그게... 왕재수, 아니 미샤는 귀가 닳도록 얘기해도 패딩을 안 입어서. ”

 

“ 어휴, 당신은 맨날 그 꽃돌이 감독님 얘기만 하고. 하여튼 내일 봐요. ”

 

 

그는 정시에 퇴근했다. 다음날 밤에 출장을 가야 하니 몰아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긴 했지만 의욕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왕재수를 데리러 가야 했다. 독사과를 먹고 심하게 앓았던 왕재수는 일요일 밤에 퇴원했다. 다행히 월요일은 극장 휴일이라 집에서 쉬었지만 화요일이 되자 베르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근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 너 왜 그래, 이번 주는 무대 점검 때문에 주말까지 공연 없잖아. 이 기회에 금요일까지 그냥 쉬어. ”

 

“ 안 돼. 지난 주 내내 병원에 있느라 자리를 너무 비웠어. 애들 신작 연습도 시켜야 하고... ”

 

 

물론 베르닌은 왕재수가 고집을 꺾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딱 한 가지만 약속하게 했다.

 

 

“ 6시 전에는 무조건 집에 가야 돼! 극장에서 자는 것도 안 되고 늦게까지 남아서 일하는 것도 절대 안 돼! 내가 저녁에 데리러 갈 거야! ”

 

“ 아니, 그게... ”

 

뱀 껍질!

 

“ 악마. ”

 

 

그래서 그는 정시에 퇴근해 곧장 극장으로 갔다. 왕재수는 자기 사무실에 있었다. 티무르 이즈마일로프와 뭔가 열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즈마일로프는 나이가 많았지만 왕재수에게는 감독님이라고 존대를 하며 아주 깍듯하게 대했다.

 

그는 돈키호테 연기 지도를 해준 이즈마일로프가 무척 반가웠지만 물론 노교사는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아닌 다닐 베르닌을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들의 감독님을 괴롭히는 KGB 감시요원이라면서 흘겨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왕재수의 손을 꼭 잡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 거긴 제가 갔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고집을 부리며 꼭 가겠다고 하시니. ”

 

“ 지난번에 애들만 보내서 그 난리가 났는데 이번에도 또 그럴 수는 없어요. 그리고 거기 괜찮은 애가 하나 있다고 했는데 농장에서 일하느라 여기까지 와서 오디션을 볼 여력이 없대요. 그러니까 내가 가서 볼 거예요. 괜찮으면 데리고 와야지. ”

 

“ 지난주 내내 입원해 계셨잖아요. 이렇게 야위었는데 그 먼 데까지 어떻게 가시려고 그럽니까. 게다가 그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골수 공산주의자들인지 아세요? 성정도 거칠고 조금만 이념적으로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시비를 거는데 공연히 꼬투리라도 잡히면... ”

 

“ 그러니까 내가 반동분자라서 꼬투리 잡힐 거란 얘기에요? ”

 

“ 아니, 그런 뜻은 아니지만 스페호프가 그쪽 관료들하고 결탁해 있으니 또 해코지 음모라도 꾸미면... ”

 

“ 아 지겨워, 그런 거 하나하나 따지면 일을 어떻게 해요! 이건 감독의 결정이에요! 난 내일 애들이랑 갈 거고 일요일에 돌아올 거니까 그동안 남은 애들 연습 부탁해요. 토요일 백조의 호수는 빅토르 대신 막심 올리기로 한 거 알죠? 레나랑 호흡 잘 좀 봐주세요. 그럼 난 이제 들어가겠어요. 내일 가기 전에 극장 들를 테니까 그때 얘기 더 해요. ”

 

 

이즈마일로프는 혀를 차며 감독실을 나갔다. 베르닌을 노려보면서 ‘더러운 KGB 앞잡이’ 하고 혼잣말로 욕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지만 곧장 왕재수를 붙들었다.

 

 

“ 야,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너 내일 어디 가는데! ”

 

“ 어, 들었구나. 우리 애들 데리고 위문 공연 가기로 했어. ”

 

“ 어디에! ”

 

“ 스네고로드. ”

 

뭐야? 네가 왜! 왜 가는데! ”

 

“ 어휴, 방금 전까지 티무르 보리소비치랑 했던 얘기 되풀이해야 되냐. 거기 그때 폭설 와서 우리 애들 갇혀 있었잖아. 근데 공연 반응은 의외로 좋았대. 그래서 그쪽에서 우리 애들 한번만 더 와달라고 사정하더라고. 그리고 타마라가 거기 농장에서 춤추는 여자애를 하나 봤는데 진짜 원석이더래. 그래서 우리 극장으로 데려왔으면 좋겠다면서 내가 한번 꼭 봤으면 하더라고. ”

 

“ 그럼 걜 여기로 부르면 되지 왜 네가 가! ”

 

“ 아유, 아까 얘기한 거 못 들었니? 걔가 농장 노동자라잖아. 여기랑은 워낙 머니까 휴가를 내서 나올 수가 없대. 게다가 지금 거기 폭설 복구 때문에 휴가는 엄두도 못 내고 주말에도 일해야 한다잖아. 몇 번이나 말하니, 우리 발레단 애들 열심히는 하지만 진짜 재능 있는 애들은 거의 없어. 타고난 애가 있으면 무조건 끌어들여야 한단 말이야. 그걸 누가 하겠니! 내가 해야지. 그런 거 볼 줄 아는 사람이 여기 또 있을 것 같아? ”

 

“ 그래, 너 잘났다. 너 천재인 건 아는데... 너 일요일까지 누워 있었잖아! 지금 출근하는 것도 무리하는 건데 어떻게 거기까지 가냐! ”

 

“ 버스로 갈 건데. 무슨 자원봉사 때문에 버스 준비한대. 그래서 우리 애들이랑 내 자리도 준비해 달라고 했어. 자리 빼준대. ”

 

“ 내일 밤에 출발하는 그 버스 말야? 심지어 기차도 아니고 버스로 간다고? 너 정말 정신이 있는 거야? 나도 그거 타고 간다고! 열다섯 시간 걸려! ”

 

“ 어, 너도 가? 잘됐다! 덜 심심하겠다. ”

 

잘되고 뭐고, 넌 못 가! 의사 선생님한테 이를 거야!

 

네가 뭔데 못 가게 하는 거야! 이건 예술감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가뜩이나 시골에 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엉망인 극장 조금이라도 괜찮게 바꾸는 것뿐인데. 그것조차 못하게 하면 난 어떻게 살라는 거야! 정말 너무해. 숨 막혀서 죽을 것 같단 말이야! ”

 

 

왕재수가 갑자기 왈칵 감정을 쏟아내더니 그런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지 컵을 집어 물을 두어 모금 꿀꺽꿀꺽 마셨다. 베르닌은 컵을 뺏었다.

 

 

“ 야, 독사과 때문에 그렇게 고생해놓고 물도 막 마시고... ”

 

“ 그 놈 이제 그런 짓 안 해. 그런 놈들은 한번 써먹은 짓은 의심 살까봐 안 하거든. 해도 다른 식으로 하지. 그러니까 이제 독은 안 탈 거야. ”

 

“ 너 정말 거기 가서 공연 지휘만 하고 그 여자애 오디션만 볼 거지? ”

 

“ 그럼 내가 다른 거 할 게 있냐? 설마 나보고 눈 치우라고? 그런 짓 절대 안 해! ”

 

“ 하긴, 시켜도 안 하겠지. 일단 집에 가자. 나도 그거 봉사요원으로 차출됐어. 짜증났었는데 지금 보니 차라리 다행이다. 어린애 물가에 내보내는 것도 아니고. 에휴. ”

 

“ 쳇. 난 내 앞가림 잘 하거든! 너나 잘 해! 근데 오늘 저녁은 뭐야? ”

 

“ 뭐 먹고 싶은데? 너 거기 가면 농장 구내식당에서 주는 거 먹어야 되니까 오늘 맛있는 거 먹자. 보랴네 식당에 갈까? ”

 

“ 점심때 갔었어. 보랴가 그때 그 닭고기 수프 비슷한 거 만들어줬어. 저녁은 집에 가서 먹을래. ”

 

“ 그럼 대게 쪄줄게. 생선가게 특별 이용권 물고기 말고 게도 된다 해서 어제 한 마리 바꿔왔거든. 근데 대게는 비싼 거라고 두 마리로 치더라. ”

 

우와, 맛있겠다! 아이 좋아!

 

 

그래서 베르닌은 왕재수와 함께 집에 갔다. 대게를 쪄서 가위로 껍데기를 자르고 살을 잘 발라냈다. 왕재수는 식탁 앞에 앉아 턱을 괸 채 그가 게살을 발라내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긴 왕재수는 그가 먹을 것을 줄 때는 항상 그랬다.

 

 

“ 그거 손 많이 가는구나. ”

 

“ 손에 들고 뜯어먹으면 편한데. 네가 그런 거 안 좋아하잖아. ”

 

“ 국물 흐르고 손에 냄새 배니까. ”

 

“ 내 손에 냄새 배는 건 상관없냐? ”

 

“ 응, 글쎄. 손 깨끗이 씻어라. 그 냄새 오래 가더라. ”

 

 

발라낸 게살을 접시에 담아주자 왕재수는 레몬즙을 뿌려서 맛있게 먹었다. 베르닌도 오랜만에 비싼 게살을 먹자 너무 맛있어서 정신없이 흡입했다. 왕재수가 자기 접시에서 게살을 크게 덜어서 베르닌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 야, 너 다 먹어! 왜 나한테 더는 거야! ”

 

넌 조금밖에 안 담았잖아. 그것도 다 짜투리살. 난 이제 배부르단 말이야. ”

 

“ 내 것도 많았어. 내가 빨리 먹어서 그런 거야. 너 이거 다 먹어. 그래야 몸도 나아지지. ”

 

“ 나 이제 괜찮은데. 파인애플 먹고 다 나았어. ”

 

 

왕재수는 결국 그에게 게살을 덜어주었다. 식사를 마친 후 베르닌은 왕재수의 집으로 따라가서 짐 챙기는 것을 옆에서 확인했다.

 

 

패딩 입고 부츠 신고 모자 쓰고 가야 돼!

 

“ 하지만 난 감독인데! 무대 위에 올라가서 소개도 해야 되고... ”

 

“ 양복 한 벌, 구두 한 켤레만 챙기면 되잖아. 입고 가는 건 패딩! ”

 

“ 아... 정말 싫다. 이제 3월인데 너무하잖아. ”

 

“ 거긴 추워. 여기보다 훨씬 춥단 말이야. 또 눈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

 

 

마침내 베르닌은 목적을 달성했고 왕재수는 매우 부루퉁해져서 가방을 현관으로 걷어찼다. 베르닌은 개의치 않았다. 왕재수에게 패딩 입히기라는 힘든 과제를 성공했으므로 뿌듯했다. 봉사요원으로 차출된 게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랬으면 왕재수를 보내놓고 계속 걱정을 할 판이었으니까.

 

 

 

*    *    *

 

 

 

 

수요일 밤에 그들은 버스를 타고 스네고로드로 출발했다. 산을 네 개나 넘어야 하는 여정이었다. 열다섯 시간이나 걸리니 밤에 출발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베르닌은 리자와 함께 앞자리에 앉았다. 왕재수는 무용수들과 함께 뒤에 앉아 있었는데 다른 공공기관에서 차출되어 온 젊은 여직원들이 넋을 빼고 그쪽만 쳐다보며 까르르 웃고 속닥거렸다. 리자도 큰 관심을 보였다.

 

 

“ 어머, 꽃돌이 감독님도 같이 가네. 버스 같은 거 안 탈 줄 알았는데. ”

 

“ 그러게요. 기차 타고 갈 것이지... ”

 

“ 아, 다냐. 그때 폭설 때문에 철로 휘어지고 망가져서 아직 공사 중이잖아요. 몰랐어요? 그래서 우리도 버스로 가잖아요. ”

 

“ 그렇구나. ”

 

 

리자는 주머니에서 사탕 봉지를 꺼냈다. 부스럭거리면서 껍데기를 까더니 사탕 한 알을 베르닌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베르닌은 당황했지만 리자는 방긋 웃었다.

 

 

“ 이거 딸기 사탕인데 맛있어요. 멀미 방지용이에요. ”

 

“ 예, 고마워요. 난 멀미는 안 하는데. ”

 

“ 다냐, 이럴 땐 ‘고마워요’에서 끝내는 거예요! ”

 

“ 어, 네. ”

 

 

리자는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계속 깔깔 웃었다. 베르닌도 그녀의 명랑한 기분에 감염되어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눴다. 힐끗 돌아보니 왕재수는 주위에 앉아 있는 무용수들과 뭔가 진지하게 토론을 하고 있었다.

 

 

‘ 저 녀석 장시간 버스 타는 거 힘들 텐데. 빨리 휴게소가 나왔으면... ’

 

 

세 시간 쯤 후 버스가 휴게소에 도착했다. 왕재수는 뒤에 앉아 있었는데도 차가 멈추자 제일 먼저 내렸다.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리자가 버스 계단을 내려오는 데 손을 잡아 주었다.

 

 

“ 조심해요, 바닥이 얼어서 미끄러워요. ”

 

“ 어머... 고마워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

 

“ 그냥 미샤라고 부르세요. ”

 

 

리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왕재수는 리자의 손을 잡아서 얼음이 없는 쪽으로 안내해 주었다. 베르닌은 그걸 보면서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미끄러져 넘어질 뻔 했다. 왕재수가 혀를 찼다.

 

 

“ 바닥 얼었다고 했잖아. ”

 

“ 그러게. 너 괜찮아? ”

 

“ 그럼 괜찮지 뭐 어때서. 근데 답답하긴 해. ”

 

“ 우리 뭐 좀 먹고 따뜻한 거 마시자. 20분쯤 쉰대. ”

 

“ 난 그냥 바람 쐬면서 좀 걸을래. 너희끼리 먹어. ”

 

“ 미샤, 우리 저기 가서 감자튀김 먹어요. 여기 휴게소 감자튀김이랑 코코아 맛있어요. ”

 

 

왕재수는 ‘지방질과 당분이라니!’ 하고 불을 뿜기는커녕 리자에게 아주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 그래요. 그럼 같이 가요. ”

 

 

베르닌은 여전히 왕재수가 여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할 때마다 닭살이 돋았고 ‘제발 평소대로 해!’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들은 휴게소 카페에 갔다. 왕재수는 리자에게 감자튀김과 코코아를 사주었다. 리자는 황홀해했다.

 

 

“ 어머, 왜 저한테 감자랑 코코아를 사주시는 거예요? 저도 돈 있는데. ”

 

“ 지난번에 강에 빠졌을 때 도와주셔서요. 다닐한테서 들었어요. ”

 

“ 아이 참, 그거야 당연한 일인데. 근데 당신은 안 드세요? 이거 엄청 많은데. 나눠먹어요. ”

 

“ 전 밤에는 잘 안 먹어요. 다닐이 좋아하니까 같이 드세요. ”

 

 

베르닌은 감자튀김을 한 움큼 집어서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 야, 조금만 먹어봐. 진짜 맛있어. ”

 

“ 싫어. 기름기... ”

 

“ 먹어야 멀미 안 하고 계속 타고 가지! ”

 

“ 에이... ”

 

 

왕재수는 툴툴대면서도 감자튀김을 몇 개 집어서 먹었다. 베르닌이 주는 대로 코코아도 조금 마셨다. 그리고는 바람 쐰다고 밖으로 나갔다. 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꽃돌이 감독님은 의외로 당신 말을 잘 듣네요. 신기해라. ”

 

“ 뭐가 신기해요, 내가 맞는 말을 하니까 당연히 들어야지! ”

 

“ 국장이 맨날 반동분자니 불여우니 건방지고 싸가지 없다느니 해서 저 사람 얼굴만 잘나고 성격은 나쁜 줄 알았는데 매너도 좋고 싹싹하네요. 멋있다... 당신 정말 그런 사이 아니에요? ”

 

아니에요!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하는 사이 절대 아니에요! 전에 얘기했잖아요. 난 진짜 그런 취향 아니라고요! 전부 오해...

 

“ 알았어요, 흥분하지 말아요. 하긴 억울하긴 하겠네요. ”

 

 

리자는 쿡쿡 웃으며 남은 감자튀김을 먹고 코코아를 홀짝 마셨다. 베르닌은 흥분한 게 좀 멋쩍어서 컵과 접시를 치우고 리자와 함께 버스에 탔다. 왕재수는 제일 늦게 탔다. 타자마자 창가에 머리를 대고 자기 시작했다. 옆에 앉아 있던 토냐가 살며시 일어나 맨 뒤에 있는 빈자리로 옮겼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라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 돈키호테 때부터 토냐는 왕재수에게 완전히 반해 있는 게 분명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렐랴부터 시작해 왕재수에게 반하는 여자들이 불쌍했다. 리자도 자꾸 왕재수 쪽을 훔쳐보았기 때문에 마음이 쓰였지만 그렇다고 ‘쟨 아저씨들을 좋아해요’ 라고 말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기사는 등을 모두 껐다. 여기저기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닌은 원래 어디에서나 잘 자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금방 졸음이 쏟아졌다. 리자와 말동무를 해줘야 할 텐데 하고 꾹 참으려고 했지만 옆을 보니 리자도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도 단잠에 빠졌다.

 

 

한참 자고 일어나니 이미 마지막 산을 넘고 있었다. 리자가 그에게 귤을 까주면서 방긋 웃었다.

 

 

“ 진짜 잘 자네요, 다냐. 휴게소도 세 번이나 갔는데 한 번도 안 깨고. ”

 

“ 어, 그러게요. 잠이 모자랐나 봐요. 당신은 좀 잤어요? ”

 

“ 휴게소 내릴 때만 깨고 계속 잤어요. 좀 전에 마지막 휴게소였거든요. 극장 사람들이랑 같이 아침 먹었어요. 토냐 진짜 예쁘더라고요. 근데 그 언닌 진짜 조금밖에 안 먹어요. 흑빵에 버터도 안 바르고 토마토랑 우유만 곁들여 먹더라고요. 발레리나 몸무게 유지하려면 힘들겠어요. ”

 

“ 왕재수, 아니 미샤는요? 걔 뭐 먹었어요? ”

 

“ 어, 미샤요? 글쎄요... 모르겠네. 먹긴 먹었나? 차는 마시는 것 같던데. ”

 

“ 어휴, 분명히 아침 잘 챙겨먹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잠깐만요. ”

 

 

베르닌은 뒷좌석 쪽으로 갔다. 왕재수는 멀미도 안 나는지 조그만 책을 읽고 있었다. 베르닌을 보더니 호주머니에서 초코바를 꺼내 주었다. 베르닌은 엉겁결에 받았다.

 

 

“ 이게 뭐야? ”

 

너 단 거 좋아하잖아. 아까 휴게소에서 샀어. 자느라 아침도 안 먹었잖아. ”

 

“ 어, 그래. 고마워. 근데 너 아침 왜 안 먹었어! 리자가 그러는데 차 밖에 안 마셨다고! “

 

“ 자기도 안 먹어놓고. ”

 

“ 난 자느라 놓친 거지만 넌 안 먹은 거잖아! ”

 

“ 버스 타고 내내 앉아서 잠만 자고 배가 안 고팠는걸. 그리고 먹었어. 토냐가 토마토 한 개 줬어. ”

 

너 스네고로드 가서 삼시세끼 꼬박꼬박 안 먹으면 뱀 잔뜩 잡아와서 목에 걸어줄 거야. 거기도 숲이랑 강 있어서 뱀 많아. 알아서 해.

 

“ 먹으면 되잖아. 어휴, 시어머니. ”

 

 

목적을 달성한 후 베르닌은 자리로 돌아왔다. 초코바를 쪼개서 리자에게 반 토막을 내밀었다.

 

 

“ 난 아까 먹었어요. 아까 미샤가 여러 개 사서 무용수들이랑 나한테 한 개씩 나눠줬어요. 당신 건 따로 챙기더라고요. 의외로 세심하다니까요. ”

 

“ 그러네. 자기밖에 모르는 놈인데. ”

 

“ 아니던데. 토냐 언니가 그러는데 미샤가 무용수들 엄청 챙겨준다던데요. 자기가 선물 받은 초콜릿이랑 사탕도 연습실에 전부 갖다놓는대요. 무용수들은 연습하느라 끼니도 잘 거르고 또 중간중간에 기력도 떨어지니까 초콜릿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

 

 

베르닌은 자기가 아는 왕재수와 토냐가 아는 왕재수는 서로 다른 인간인가 싶었다. 그러나 돈키호테 때문에 극장에서 보냈던 며칠을 떠올려보니 감독으로서의 왕재수는 매일 음식 투정이나 하고 시골 타령을 하는 왕재수와는 좀 다른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피곤했다! 감독 노릇하는 왕재수는 너무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아서 문제였고 평소의 왕재수는 너무 그를 가정부 취급해서 문제였다!

 

 

 

*   *   *

 

 

 

 

아침에 스네고로드에 도착한 후 봉사단은 청년회관으로 끌려갔다. 차 한 잔과 비스킷 한 개를 얻어먹은 후 곧장 여러 개의 조로 찢어져서 폭설 복구 작업에 투입되었다. 베르닌은 키 크고 체격이 좋다는 이유로 철로 복구 조에 배정되었다. 도서관 쪽에 배정된 리자가 걱정을 했다.

 

 

“ 다냐, 제일 힘든 조로 갔네요. 눈만 치우는 것도 아니고... 조심조심해서 해요. 또 고지식하게 있는 힘 없는 힘 다 쓰지 말고. ”

 

“ 그래도 눈 다 치우고 철로 고치면 집에 갈 때는 기차 타고 갈 수도 있잖아요. ”

 

“ 어휴, 벌써 저 의욕에 가득 찬 것 좀 봐... 살살 하란 말이에요. 그깟 이틀 일해서 어떻게 기차가 다녀요. 전문가도 아닌데. ”

 

“ 그런가... 하여튼 당신도 조심해서 해요. 책 옮기는 거 무거울 텐데. ”

 

“ 책은 남자들이 옮긴대요. 난 페인트 벗겨진 거 칠하는 거랑 화단 정리하는 쪽이에요. 점심 때 식당에서 봐요. ”

 

 

리자가 같은 조원들과 함께 도서관 쪽으로 걸어간 후 베르닌은 철로 쪽으로 이동하기 위해 트럭을 탔다. 자리가 없어서 지붕도 없는 짐칸에 타야 했다. 이미 덩치 좋은 남자들 여럿이 올라타 있었다. 동네 남자들도 있고 가브릴로프 봉사단원들도 있었다. 다른 조원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트럭 곁으로 무용수들과 왕재수가 지나갔다. 저녁 공연 연습을 하러 가는 것 같았다. 동네 남자들이 토냐와 타마라 등 예쁜 발레리나들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때 왕재수가 베르닌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 너 어디 가? ”

 

“ 철로 복구하러. 눈도 치우고. ”

 

“ 그럼 집에 갈 때는 기차 타고 갈 수 있는 거야? ”

 

“ 어, 글쎄... 해봐야 알아. ”

 

“ 알았어. ”

 

 

그러더니 왕재수가 트럭 옆으로 오더니 가방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서 베르닌에게 건네주었다.

 

 

“ 이게 뭐야? ”

 

“ 너한테 맞을지는 잘 모르겠다. 작으면 다리 좀 휘어서 쓰렴. ”

 

 

왕재수는 베르닌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홱 몸을 돌려 무용수들을 다시 따라잡았다. 베르닌은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날렵하고 근사한 디자인의 선글라스가 들어 있었다. 왕재수가 가끔 끼던 것 같았다. 분명히 이것도 무슨 아르마나인지 에르미인지 프로도인지 하는 비싼 것이 분명했다.

 

 

‘ 엥, 이걸 왜 주고 가지? 저 녀석 얼굴 조막만해서 이거 진짜 나한텐 맞지도 않을 텐데. ’

 

잠시 후 철로 복구 현장에 와서 눈을 치우기 시작했을 때 베르닌은 왕재수의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그 날은 춥긴 했지만 날씨가 맑았고 햇살이 굉장히 밝았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새하얀 눈에 햇살이 반사되어 굉장히 눈이 부시고 따가웠다. 그는 선글라스를 껴보았다. 작아서 다리를 휘어야 했지만 그럭저럭 낄 수 있었다. 한결 나았다. 동네에서 온 남자들도 삼삼오오 선글라스를 끼기 시작했다. 가브릴로프에서 차출된 운 나쁜 봉사요원들만 한숨을 쉬었다.

 

 

“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선글라스 가져올걸. 왜 이런 얘긴 안 해 준거야. 다냐, 자넨 진짜 준비성이 좋군. 역시 KGB라 달라. 부럽네. ”

 

 

선글라스는 정말 도움이 되었다. 맨눈으로 일하던 사람들은 곧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보다 못한 주민 하나가 청년회관으로 가서 챙 있는 모자들을 여러 개 가져와 나눠주었다. 베르닌은 선글라스 덕에 눈은 아프지 않았지만 얼굴도 따끔거렸고 눈을 치우고 유실된 자갈들을 레일 사이사이에 다시 깔아놓는 작업 때문에 허리가 휠 것 같았다. 봉사단원들은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망가진 레일 연결은 불가능했으므로 오로지 힘을 쓰는 단순작업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르닌은 다시 군대에 온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 철로가 빨리 복구돼야 이 동네 사람들도 기차를 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일했다.

 

 

금세 시간이 흘러 점심때가 되었다. 청년회관으로 돌아가 점심을 먹고 조금이나마 쉬려나 했던 봉사단원들의 기대는 스네고로드 공산청년단 대표인 아르투르가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기 시작했을 때 산산조각 났다. 샌드위치 한 개와 사과 한 알, 주스 한 병씩을 나눠주고는 딱 30분의 휴식 시간만 주는 거였다. 의회에서 온 바실리가 참을 수 없는 듯 투덜거렸다.

 

 

“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는데 샌드위치 한 조각 주면서 30분만 쉬라니,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야? ”

 

“ 우리도 한 시간쯤 쉬면서 맛있는 거 먹었으면 좋겠지만 해가 있을 때밖에 일을 못하니까 어쩔 수 없어요. 5시에 철수할 거니까 그때까지만 힘 좀 내라고요. 당과 인민을 위해 이 정도도 못합니까?

 

 

청년단 대표인 아르투르는 근육이 울룩불룩한 상남자인데다 이 마을 사람들답게 골수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에 바실리는 곧 입을 다물었다. 베르닌은 묵묵히 샌드위치를 먹었다. 힘든 일을 하고 나서 그런지 흑빵 사이에 치즈와 햄, 양배추만 들어 있는데도 꿀맛이었다. 사과도 단숨에 해치우고 주스도 꿀꺽 마셨다. 아르투르가 옆으로 오더니 그를 칭찬했다.

 

 

“ 다른 사람들은 요령 피우면서 중간중간 쉬던데 넌 하나도 안 쉬고 우리처럼 열심히 하더라. 선글라스까지 챙겨 오고 정말 제대로 일할 준비가 됐더라고. 어느 기관에서 왔어? ”

 

“ 어, 난 보안위원회. ”

 

“ 역시. KGB는 달라. 나도 농장 일만 아니었으면 너네 가브릴로프로 가서 KGB 지원하고 싶었는데 여기서 내가 빠지면 일이 안 돌아가니 포기했지. 전에 너네 국장인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도 본 적 있는데 진짜 사나이 중의 사나이더라고. 이념적으로도 완벽하고. 요즘은 너도 알다시피 워낙 해이해져서 대놓고 반동 짓하는 놈들도 많잖아. 당보다 개인을 앞세우고. 그런데 너네 국장은 진짜 멋지더라고. 완전 내 롤 모델이야. 넌 좋겠다, 그렇게 훌륭한 분을 모시고 일해서. ”

 

“ 어... 우리 국장 말이야? 어, 그래... 네 롤 모델이구나. 으응... ”

 

“ 우리 친하게 지내자. 너네랑 우린 자매 도시잖아. 여름엔 여기도 되게 좋거든, 휴가 받으면 놀러와. 우리 집에서 재워줄게. 너 애인 있니? 우리 농장에 예쁜 여자들 진짜 많아. 새침 떠는 도시 여자들이랑 완전 달라. 얼굴도 예쁘고 일도 얼마나 잘하는데. 이념도 반듯해서 당원도 많아. 우린 원래 외지에서 온 남자들이 우리 여자들한테 집적대는 거 싫어하지만 넌 KGB에 엄청 성실해보이니까 괜찮아. ”

 

“ 어, 날 그렇게 신뢰해주니 고맙다... ”

 

“ 있다가 청년회관에서 너네 환영 겸 같이 저녁 먹고 공연 보고 파티도 하고 그럴 거야. 너 우리 테이블에 앉아. 너처럼 성실하고 또 KGB이기까지 한 애는 당연히 상석에 앉아야지. 예쁜 애들도 소개시켜줄게. 그럼 이제 일하자. 있다 봐. ”

 

 

베르닌은 좀 얼떨떨했다. 친절하게 대해주니 좋기는 한데 스페호프를 롤 모델로 삼고 있다니 어딘지 좀 찜찜한 녀석이었다. 그는 공산주의 수업도 제대로 들었고 콤소몰 행사에도 그럭저럭 출석을 빼먹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진짜 열렬하게 공산주의와 레닌을 신봉해 본 적은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공부할 때도 친구들 대부분은 대놓고 레닌을 욕하곤 했다. 가브릴로프야 촌 도시니까 훨씬 보수적이어서 그런 사람들은 별로 없었는데 스네고로드는 그보다도 더 보수적인 것 같았다.

 

 

그러다 30분이 후딱 흘러갔기 때문에 베르닌은 다시 눈을 치우고 자갈을 깔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허리가 펴지지 않을 정도였다. 5시가 되었을 때 아르투르가 손뼉을 딱딱 치면서 모두들 수고했으니 이제 트럭에 타라고 했다. 그러더니 베르닌에게 다가와서 등을 툭툭 쳤다.

 

 

“ 너 아까도 진짜 열심히 하더라. 앞에 타. 내 옆자리 하나 비어. 너처럼 열심히 하는 애는 좌석에 앉아서 가야지. ”

 

“ 어, 난 괜찮은데. 저쪽에 바실리 선배가 엄청 힘들어하던데 나이도 많으니 그 선배 앉혀줘. 난 뒤에 앉아서 갈게. ”

 

“ 그 사람 계속 게으름피우던데 뭘. 제일 노동 열심히 한 사람이 따뜻하고 편한 자리 앉아야지! 이리 와. ”

 

 

그래서 베르닌은 트럭 문을 열고 앞자리에 탔다. 가운데 자리에 끼어 앉아야 해서 오히려 더 불편했지만 아르투르가 아주 큰 혜택을 베풀어주고 있다는 표정으로 빙긋 웃고 있었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돌아가는 내내 아르투르는 스페호프와 공산주의자들의 모범에 대해, 그리고 스네고로드 집단농장의 훌륭한 생산성에 대해 계속 떠들었다. 자부심이 대단했다.

 

 

“ 외진 데 있고 기후도 악조건이지만 우리 농장이 얼마나 훌륭하다고. 십년 째 우리 주에서 생산성으로는 5위 안에 들었어. 다들 진짜 열심히 일한다고. 스네고로드가 너네 가브릴로프보다야 훨씬 작지만 당원은 훨씬 많이 배출했는걸. 옛날 혁명 때도 여기가 적위군 아지트였잖아. 우리 노동영웅도 여러 명 나왔어. 스무 살 때 노동영웅 된 여자애도 있는데 걔가 진짜 최고야. 이름이 나쟈인데 양계장 닭들 사료랑 온도를 잘 맞춰줘서 알을 두 배로 낳았다고. 얼굴도 얼마나 귀여운지, 나쟈랑 결혼하고 싶어서 우리 농장 남자들 다 줄섰어. 너네는 스무 살짜리 노동영웅 없잖아. 그치? ”

 

“ 응, 없어. 대단하네. ”

 

“ 있다가 나쟈 소개시켜줄게. 걔도 노동영웅이니까 우리 테이블에 앉거든. 근데 너 걔는 눈독들이면 안 돼. 무슨 얘긴지 알지? 아무리 네가 괜찮아도 나쟈는 우리 농장 남자랑 결혼해야 되거든. ”

 

“ 어, 으응... ”

 

 

베르닌은 뭔가 매우 불편했지만 아르투르의 호의와 환대에 대고 그런 기색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끄덕끄덕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마침내 청년회관에 도착해 트럭에서 내렸을 때 그는 숨통이 트이는 기분으로 차가운 저녁 공기를 들이마셨다.

 

 

 

*   *   *

 

 

 

 

봉사단원들은 청년회관 구내식당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아르투르의 말대로 맛있는 음식들이 많이 나왔다.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들과 샤실릭이 일품이었다. 먹기 전에 아르투르가 일어나 자매 도시에서 봉사를 와준 형제자매들에게 감사한다며 한바탕 연설을 했다. 청년단원들이 모두 와~ 하고 박수를 쳤다.

 

 

아르투르는 정말 베르닌을 자기들 공산청년단 임원들이 앉는 테이블로 안내해 주었다. 베르닌은 머뭇거렸다.

 

 

“ 어, 저... 난 일행이 있는데... ”

 

“ 아, 리자 말이야? 그 아가씨도 이 자리로 불렀어. 어쨌든 KGB니까 의전 챙겨주는 거야. 우린 말이야, KGB가 최고거든. 원래는 의회를 제일 쳐줬는데 요즘 폭설 복구하고 그러는 거 보니까 너무 시원찮아서. 저기 오네. 근데 리자 예쁘다. 뭐 우리 나쟈보단 덜 귀엽지만. ”

 

 

언제나 명랑하고 구김살 없는 리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불편하지도 않은 듯 방긋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거리낌 없이 상석 테이블에 앉아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는 베르닌을 보면서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 나 있잖아요, 화단에 꽃 심었어요. 따뜻해지면 분홍색 꽃 필 거예요. 글쎄 맨날 노란 꽃만 심었다잖아요. 페인트도 분홍색이랑 하늘색으로 칠했어요. 철로는 많이 복구됐어요? 어쩜, 그새 얼굴이 다 탔네. 여름도 아닌데... 안경 자국도 나고. 근데 당신 안경 안 끼잖아요. 웬 자국이에요? ”

 

“ 어, 이거 미샤가 선글라스 빌려줘서요. 덕분에 눈이 안 아팠어요. ”

 

“ 아, 역시 미샤는 센스가 좋네요. 아까 강당 쪽에서 무용수들 데리고 저녁 공연 연습시키는데 벌써부터 소문을 듣고 여자들이 막 구경 왔더라고요. 진짜 웃겼어요. 잘생겼다고 꺅꺅거리고 사인 받고 싶다고 동동 구르고. 있다가 공연할 때 장난 아닐 것 같아요. 좀 전에 데니스랑 마주쳤는데 자기 지난번에도 왔었는데 그때 자기가 춤추고 받은 관심의 열 배는 되는 것 같다고 툴툴대더라고요. 데니스도 멋있지만 우리 꽃돌이 감독님이랑은 비교가 안 되죠. ”

 

근데 어떤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는 거예요? 데니스는 원래부터 우리 극장에서 제일 인기 많은 무용수였잖아요. 완전 아폴로처럼 생겼는데, 키도 크고 근육질에... 여자들은 왜 데니스보다 미샤를 더 멋있다고 하는데요? ”

 

데니스는 그냥 잘생긴 남자고요, 미샤는 보기만 해도 온몸에 전류가 찌잉 하고 오는 것 같아요. 그냥 잘생긴 게 아니고 엄청 섹시해요. 눈빛도 그윽하고 몸가짐도 세련되고... ”

 

“ 난 데니스가 더 훤칠하고 멋있는 거 같은데... ”

 

“ 그러니까 그건 남자들 생각이라니까요! ”

 

 

그때 아르투르가 리자에게 샤실릭을 한 접시 덜어다 주더니 베르닌에게 양계장의 노동영웅 나쟈를 소개해주었다. 정말 귀여웠다. 노동영웅이라더니 키도 자그마하고 체구도 아담한데다 앳된 외모라 꼭 소녀처럼 보였다. 청년단원들이 농담을 할 때마다 수줍게 웃었지만 말수는 거의 없었다. 상냥한 리자가 말을 걸자 곧잘 대답은 했지만 그럴 때마다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7시가 가까워지자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공연 보러 가자고 동료들을 잡아끌었다. 아르투르는 껄껄 웃었다.

 

 

“ 우리 나쟈는 정말 춤을 좋아한다니까. 지난번에도 너네 극장 무용수들 와서 춤 보여주니까 밥도 먹다 말고 보러 가더라고. 얘 완전 부끄럼타는데 가서 사인까지 받더라니까. 난 발레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던데. 발레리나들은 예쁜 것 같은데, 남자들이 왜 그 타이츠 있잖아, 그거 입고 폴짝거리면 되게 민망하더라고. 하여튼 우리도 가자. 일곱 시부터 강당에서 한다며. 주민들 벌써 다 와서 앉아 있더라. 우린 앞자리 앉아야 돼.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감시해야 되거든. ”

 

“ 신경 쓰이는 일이 뭔데? 그냥 공연이잖아. 규모 큰 작품 가져온 것도 아니고 그냥 무용수들 몇 명 와서 갈라 공연만 보여주는 거 아니야? 음악도 그냥 레코드 틀고? ”

 

“ 아, 공연이야 뭐든 상관없지. 규모고 음악이고 난 그런 건 잘 모르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고, 이번에 너네 극장에서 그 골치 아픈 놈이 직접 왔잖아. 너도 KGB니까 잘 알지? 그 자식, 반동분자! 왜 크레믈린 낙하산으로 너네 극장 감독 앉힌 놈 있잖아. 지난번에 너네 국장도 그 자식 얘기하면서 진짜 화내더라고. 완전 반역자에 스파이에 반체제주의자인데 강제노동 수용소에 처넣어도 모자랄 판에 너네 극장에 자리 만들어서 앉혀줬다며. 그 자식이 순진한 애들 물들일까봐 걱정이라고 하더라고. 우리 농장 애들은 진짜 순도 100프로인데 괜히 그런 반동분자 와가지고 나쁜 물이라도 들면 어떡하니.

그놈이 무용수들 데리고 온다고 해서 나랑 우리 임원들이 무지 반대했는데 의회 쪽에서 다 찬성하고 앞장서고 우리보고 물정 모른다고 하는 거야! 어휴, 우리 농장에 웬 흙탕물 튀길 일 있냐. 너 이게 너네 가브릴로프 욕하는 거 아닌 거 알지? 너네 극장 무용수들은 괜찮았어. 저번에 눈 치우는 것도 얼마나 잘 도와줬는데. 그냥 그놈 하나 때문에 신경 쓰인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

 

“ 아, 저... 걔 극장 감독으로서는 굉장히 호평이야. 그리고 지난번에 여기서 무용수들 공연 반응 좋았다고 일부러 자기가 인솔해서 온 거래.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

 

“ 흥, 무용수들만 와서 춤만 추고 가면 되지 제깟 게 뭐하러 와. 아까 보니까 생긴 것도 완전히 계집애 같은데다 우리 임원들이랑 의회 쪽 간부들한테 인사도 안 하던데. 싸가지 없는 놈. 하여튼 예의주시할 거야. 너도 그놈 감시해야 하지 않아? 그때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가 그러던데, 그 자식한테 밀착 감시요원 붙여놨다고. ”

 

“ 어, 그, 그래. 여기서는 내가 감시하면 돼. 공연 보러 가자. ”

 

 

그들은 강당으로 갔다. 청년단원들 외에도 집단농장 주민들과 어린이들, 학생들도 많이 와서 좌석이 꽉 차 있었다. 특히 젊은 여자들이 어떻게든 앞쪽 자리를 차지해보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나쟈는 자리가 없을까봐 발을 동동 굴렀고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아르투르가 웃으며 농을 걸었다.

 

 

“ 뭘 그렇게 걱정하니, 나젠카. 다른 사람 자리 다 없어도 네 자리는 내가 만들어줄 텐데. 이리 와, 맨 앞줄은 의회랑 당 쪽 윗분들, 그리고 나하고 우리 임원 몇 명 앉을 거고 너는 여기 다닐하고 리자랑 두 번째 줄 가운데 앉아. ”

 

“ 고마워요, 아르투르. ”

 

“ 고맙긴. 넌 노동영웅이잖아. 우리 농장의 자랑인데. ”

 

 

사교적이고 싹싹한 리자는 또래인 나쟈를 제일 가운데 자리로 안내하고는 목도리를 풀더니 주섬주섬 몇 겹으로 개켜서 의자에 방석처럼 깔아주었다.

 

 

“ 이거 깔고 앉아. 너 키 작은데 앞자리에 덩치 큰 남자라도 앉으면 안 보이잖아. ”

 

“ 고마워, 리자. 나 오늘만 기다렸어. 발레 구경하는 거 너무 좋아하는데 여기는 극장도 없고 일 년에 두어 번 너네 극장에서 이렇게 공연 와주는 것밖에 없어서 너무 아쉬워. 그래도 이번에는 2주 만에 또 와줘서 너무 좋아. 지난번에 눈 왔을 때 무용수들이 집에 못 가고 여기 남아서 눈도 치워주고 일 도와주는데 정말 너무 착하고 멋있었어. 그때 타마라랑 친해졌는데 막 울더라고, 토요일에 무대 올라가야 하는데 못 가게 됐다면서 감독님 실망시키게 됐다고 얼마나 슬퍼하는지 나도 너무 미안했어. ”

 

“ 아, 돈키호테 얘기군요. 그때 다른 무용수들이 무대 올라갔어요. 미안해할 거 없어요. 폭설 때문이었잖아요. ”

 

 

베르닌이 끼어들었다. 나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 네, 그래도 여기 오지만 않았으면 타마라랑 데니스가 무대 올라갔을 텐데 괜히 미안하더라고요. 그리고 미샤 야스민이 감독으로 왔다고 해서 휴가라도 내고 가브릴로프에 가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직접 와줘서 너무 기뻐요. 진짜 유명한 사람이잖아요. 아까도 너무 궁금해서 무용수들 연습할 때 살짝 엿봤는데 사람들에게 가려져서 잘 안 보이더라고요. ”

 

“ 어, 나쟈. 발레 진짜 좋아하나보네요. 난 맨 처음에 걔가 우리 동네 왔을 때 뭐하는 앤지도 몰랐는데... ”

 

 

나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교양 없는 인간이 다 있다니 하는 눈빛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어떻게 몰라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데. 신문잡지에도 자주 나오고 문화 채널에서도 예전에 공연 실황이랑 영상 밥 먹듯이 보여줬는데. ”

 

“ 어, 그러니까... 전 발레는 관심이 별로 없어서. ”

 

“ 하긴 아르투르도 그렇고 우리 농장 사람들도 많이들 그렇더라고요. 근데 지지난주 공연 때 반응이 진짜 좋았거든요. 작년 재작년보다 훨씬 잘 추는 것 같더라고요, 눈 때문에 갇혀 있는 김에 무용수들도 매일 공연 보여줬고요. 그래서 발레 관심 있는 사람들도 많아졌어요. 오늘 미샤도 무대 올라오면 좋겠는데... 그럼 얼마나 좋을까요. ”

 

“ 저, 나쟈. 걔는 춤 안 출 거예요. 은퇴했거든요. 대신 걔가 연습시킨 무용수들이니까 무대는 좋을 거예요. ”

 

“ 아쉬워라... ”

 

 

잠시 후 7시가 되자 강당의 불이 꺼지고 무대 위에 조명이 들어왔다. 사실 제대로 된 무대도 아니고 그냥 연단에 무대용 패널을 덧대서 임시로 만든 것에 불과했다. 극장용 막 대신 펄럭거리는 커튼이 봉에 매달려 있는 정도였고 임시 무대는 가브릴로프 극장 무대의 절반도 안 되는 크기였다. 오케스트라 핏은 당연히 없었다. 음악은 찌직거리는 잡음이 섞이는 레코드였다. 그래도 관객들은 기대에 차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무대 위로 왕재수가 나왔다. 사람들은 타이츠 입은 무용수들이 아니라 수트를 입은 젊은 청년이 나온 것에 놀랐고 그의 미모에 두 번째로 놀랐다. 여자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왕재수는 지금껏 베르닌이 들어본 적도 없을 만큼 근사하고 세련된 태도로 인사를 했고 곧이어 오늘 무대에서 보여줄 작품들을 소개해주었다. 특히 발레를 처음 보러 온 사람들이나 어린이들을 위해서 발레에 나오는 마임과 몇 가지 동작을 간단하게 선보여 주기까지 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그렇게 친절하고 쉬운 말투로 뭔가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무대 위의 왕재수는 지난번 춤을 췄을 때와 마찬가지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관객들은 아무도 떠들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왕재수의 동작 하나하나에 굉장히 집중했다.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했다. 설명을 마친 후 왕재수는 다시 인사를 하고 퇴장했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베르닌은 굉장히 즐겁게 공연을 봤다. 돈키호테 역을 해보고 나니 발레가 어떤 것인지 조금씩 감도 잡혔고 또 저 동작이 어떤 건지도 대충 알게 돼서 그런지 진짜 재미있었다. 그리고 왕재수는 초보 관객들을 위해서 아주 유명한 작품과 신나는 작품들의 하이라이트만 모아서 갈라 무대를 짰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백조의 호수 2인무로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쯤이면 코믹한 네 마리 백조의 춤이 나오는 식이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돈키호테의 바질과 키트리 결혼식 장면을 넣어서 관객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베르닌은 관객들이 환호하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왕재수가 추는 바질을 봤다면 기절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약 80분가량의 공연이 모두 끝난 후 무용수들이 나와서 인사를 하자 관객들이 모두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왕재수가 나와서 인사를 하자 더욱 갈채와 환호가 커졌다. 여자들이 꺅꺅 소리를 질렀다. 옆을 보니 나쟈는 거의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강당을 나가면서 아르투르가 베르닌과 리자에게 환영 파티가 있으니 구내식당으로 오라고 했다.

 

 

스네고로드 공산당 지부랑 우리 청년단에서 개최하는 거야. 아까 저녁 먹은 거랑 달라. 술도 많고 엄청 재밌을 거야. 특별히 너네 봉사단이랑 무용수들 위해서 하는 거야. 쟤들 지난번에 눈 치우는 것도 도와주고 해서. ”

 

“ 어, 그래. 고맙다. 그러면 방에 짐만 풀고 금방 갈게. ”

 

 

봉사단원들과 무용수들은 청년회관 맞은편에 있는 작은 호텔에 묵게 되어 있었다. 말이 호텔이지 그냥 허름한 기숙사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눈은 다 치워져 있었고 청소도 잘 되어 있었다. 베르닌은 삼림국의 보리스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보리스와는 체육대회 때 친해졌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은 사이였다.

 

 

짐을 내려놓고 막 나가다가 그는 복도에서 왕재수와 마주쳤다. 아직 수트 차림인 것을 보니 강당에서 막 들어온 참인 것 같았다.

 

 

“ 야, 오늘 공연 재미있었어. 관객 반응도 좋더라. ”

 

“ 당연하잖아, 내가 지휘한 건데. ”

 

“ 근데 넌 어쩌면 무대 위에 있을 때랑 지금이랑 말투가 그렇게 다르냐. ”

 

 

왕재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 너 얼굴 탔구나. 선크림 바르고 갔어야지, 바보. 내일도 철로 눈 치우러 가는 거야? ”

 

“ 응. 오늘 눈 많이 치웠는데 우리 갈 때까지 기차는 못 들어올 것 같아. ”

 

 

왕재수는 가방에 손을 쑥 집어넣더니 조그만 화장품 튜브를 꺼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 내일 나갈 때 이거 바르고 가. ”

 

“ 이게 뭐야? ”

 

“ 선크림! 이런 날씨에 얼굴 엄청 탄단 말이야. 잘못하면 화상 입어. 선글라스 껴서 눈은 괜찮을지 몰라도. ”

 

“ 겨울에 누가 선크림을 발라. 헤엄치러 온 것도 아닌데. ”

 

“ 거울 좀 봐라, 너 얼굴 지금 시커매. ”

 

“ 어, 하여튼 고마워. 선글라스도. 덕분에 눈 안 아팠어. 넌 방 어디야? ”

 

“ 복도 끝 방. ”

 

“ 응, 너도 가방 놓고 나올 거지? 복도에서 기다릴까? ”

 

“ 왜 기다려? ”

 

“ 여기서 환영파티 해준다고 오랬잖아. ”

 

“ 아, 그거. 꼭 가야 하나? 아까 당 간부인지 뭔가가 오라고 하긴 했는데. 거기 청년단원들 애들 다 와? ”

 

“ 응, 여기 공산당하고 청년단원들이 여는 파티랬으니까. ”

 

“ 얘기 할 게 있어서 가보긴 해야 하는데 너무 졸려. ”

 

 

왕재수가 하품을 했다. 베르닌은 슬며시 걱정이 되어서 왕재수를 램프가 켜진 쪽으로 데리고 갔다. 밝은 데서 보니까 안색도 창백하고 아침보다 야위어 보였다.

 

 

“ 너 파티 안 가는 게 좋겠다. 퇴원한지 며칠 되지도 않았잖아. 버스에서 새우잠 자고 온종일 애들 연습시키고. 저녁은 먹었어? ”

 

“ 아니, 무용수들 원래 공연 직전엔 뭐 안 먹거든. ”

 

“ 넌 무대에도 안 올라갔는데 왜 안 먹어! ”

 

그럼 애들이 공복에 공연 준비하는데 감독이 돼가지고 나만 뭐 먹니? 중간중간에 초콜릿이랑 우유랑 먹어서 배는 안 고파. 애들은 그 파티 가서 먹겠지 뭐. 술 마시지 말라고 옆에서 얘기 좀 해 줘. 내일도 공연 있으니까. ”

 

 

베르닌은 이 골치 아픈 녀석에게 뭘 먹이는 것과 재우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필요한지 재 보았다. 자꾸 하품을 하는 왕재수의 야윈 얼굴을 보니 곧 답이 나왔다.

 

 

“ 알았어. 너 지금 빨리 들어가서 자. 내일도 애들 연습시키고 공연 올릴 거라면서. 빨리 누워야지 안 그러면 또 코피 쏟고 아프겠다. ”

 

“ 나 그때 코피 난 거 힘들어서 그런 거 아냐. 갑자기 바질 춰야 돼서 연습하다 넘어진 거라 했잖아. ”

 

“ 거짓말하지 마! 토냐가 그러던데, 너 안 다치게 넘어지는 방법 안다고! 야, 이거 봐! 지금 또 코피 나잖아! ”

 

“ 아니야! 콧물 나오는 거야! ”

 

 

왕재수는 손등으로 코와 입을 가리면서 아닌 척 했다. 베르닌은 주머니를 뒤졌지만 손수건이 없었다. 그래서 왕재수를 방으로 데려다 주고 욕실에서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왕재수가 코피를 닦으면서 속상해했다.

 

 

“ 아이, 이게 뭐야. 나 안 그랬었는데. 며칠씩 밤새고 춤추고 아저씨들이랑 여럿이 응응응 하고 놀아도 끄떡없었는데. 흑... 짜증나. ”

 

“ 많이 아팠었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푹 쉬면 좋아질 거야. 불 꺼줄게 빨리 자. ”

 

“ 싫어, 씻고 잘 거야. ”

 

“ 알았어. 그러면 씻고 나서 곧장 자. 무용수들한테는 내가 얘기해놓을게. ”

 

“ 우리 애들 내가 챙겨줘야 되는데. ”

 

“ 걔들 지난번 폭설 때 갇힌 동안 여기 사람들이랑 많이 친해졌대. 걱정하지 말고 자. ”

 

“ 응, 알았어. 내일 봐. ”

 

 

 

베르닌은 청년회관으로 갔다. 파티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청년단원들과 당 간부들, 당원들이 봉사단원들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스네고로드 사람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농장을 꾸려가고 있어서 그런지 술도 잘 마셨다. 리자가 어디 있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데니스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 다닐, 우리 감독님은 왜 안 내려와요? ”

 

“ 어, 미샤요? 먼저 잔대요. 많이 피곤한 것 같았어요. ”

 

“ 오늘 무대가 지난번보다 몇 배로 더 반응 좋았어요. 그래서 감독님한테 고맙다고 술잔이라도 쨍 하고 싶었는데. ”

 

“ 아... 그냥 내일 아침에 얘기해요. 근데 미샤가 신신당부하던데... 내일도 무대 올라가야 하니까 당신들 술 마시지 말래요. ”

 

“ 샴페인 한 잔 마시는 정도는 괜찮지 않나. 나 원래 술 세거든요. 보드카 한 병은 기본인데. ”

 

“ 몰라요, 난 분명히 전해줬어요. ”

 

“ 알았어요. 안 마실게요. 애들 전부 마시지 말라고 해야지. ”

 

 

데니스는 정말로 옆에 앉아 있는 동료 무용수들에게 술 마시지 말라고 당부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처음에는 ‘한두 잔만 마시면 안 돼?’ 하고 툴툴댔다가 데니스가 ‘감독님이 마시지 말래, 내일 공연에 지장 있대’라고 하자 ‘알았어’ 하고 수긍했다. 베르닌은 조금 감명을 받았다.

 

 

“ 어, 정말 다들 한 잔도 안 마시는 거예요? ”

 

“ 미샤가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감독님 지시니까 따라야죠.

 

“ 아... 나 좀 놀랐어요. ”

 

“ 왜요? ”

 

“ 데니스 당신은 우리 극장에서 제일 유명한 무용수잖아요. 십년 넘게 추지 않았어요? 미샤는 당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외부에서 왔는데도 깍듯하게 감독님으로 대하네요. 안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

 

“ 안 그런 사람들이 이상한 거죠! 감독과 무용수는 엄연히 달라요. 그리고 미샤는 진짜 실력 있는 감독이에요. 무용수로서도 난 미샤 발끝도 못 따라가요. 감독님 욕하고 헐뜯는 건 정치하는 사람들이랑 실력도 없이 출세하고 싶어 하는 극장 사람들이에요, 무용수들은 안 그래요! 우리 조금이라도 더 잘 추게 해주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거 많이 알려주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어떻게 깍듯하게 안 대해요! 지난번에 우리 여기로 보낸 것도 정치하는 사람들이 감독님 괴롭히려고 그랬던 거 다 알아요! 지난주에 감독님 무지 아팠는데 그것도 석연치 않은 이유가 있다는 얘기 돌고 있다고요. 당신도 잘 들어둬요, 미샤랑 친한 것 같지만 어쨌든 KGB에서 왔으니까. 당신네 국장이고 당이고 뭐고 감독님 한번만 더 건드리면 우리 진짜 가만 안 있을 거예요!

 

 

베르닌은 데니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쩐지 가슴이 뭉클했다. 데니스는 그의 시선을 오해하고는 짜증을 냈다.

 

 

“ 왜요! 나보고도 반동분자라고 하려고요? ”

 

“ 아니요. 난 걔가 그냥 싸가지 없고 자기만 아는 철없는 놈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극장에서 보니까 아닌 것 같더라고요. 다행이에요. ”

 

“ 뭐가 다행인데요, 미샤가 철없는 반동분자가 아니라서요? ”

 

“ 어, 그것도 그렇지만... 그냥... 당신들하고 잘 지내서요. ”

 

 

데니스는 누그러졌고 그에게 술을 한 잔 따라 주었다. 베르닌은 보드카를 한 잔 마신 후 리자가 있는 쪽 테이블로 갔다. 리자는 청년단원들과 아르투르, 나쟈와 함께 앉아 있었다. 원체 귀엽고 발랄했기 때문에 스네고로드 농장 청년들이 모두 호감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베르닌은 그들과 뒤섞여 술도 마시고 농장 이야기도 들었다. 피곤하기는 했지만 간만에 또래 젊은이들과 섞이니 재미도 있었다. 그러다가 리자가 나쟈를 데리고 무용수들이 있는 쪽 테이블로 옮겨갔다. 아르투르가 베르닌에게 보드카를 한 잔 주면서 기분 좋게 물었다.

 

 

“ 너 리자랑 사귀니? ”

 

“ 어, 아니. 우리 그냥 동료야. ”

 

“ 그래? 리자 귀엽다. 철은 좀 없는 것 같은데 뭐 아직 어리니까. 그래도 KGB에서 일하는 애니까 신붓감으로는 괜찮지 않니? 잘 해보렴. ”

 

“ 어... 리자는 눈이 높아... 꽃미남 좋아해. 그리고 우리는 진짜 동료야. ”

 

“ 흥, 꽃미남이 밥 먹여 주냐? 나도 매일 우리 나쟈한테 해주는 말이 있지. 남자 얼굴 다 필요 없어. 이념 반듯하고 일 잘하고 성실하면 되는 거지. 그런 남자 만나서 결혼해야 돼. 내 마누라도 나 같은 남자 만나서 행운이라고 매일 그러는데. ”

 

“ 아, 너 결혼했구나. 몰랐어. ”

 

“ 그럼, 농장 일이랑 청년단 일이랑 얼마나 많은데. 결혼을 해야 안정이 되지. 우리 마누라는 지금 우수 청년단원으로 뽑혀서 페름 쪽 농장에 작업반 교환 가 있어. 일주일 후에 돌아올 거야. 나쟈도 빨리 나 같은 남자를 만나야 되는데. 우리 청년단 쪽 괜찮은 애들 몇 명 내가 이어주려고 했는데 나쟈가 너무 부끄럼이 많아서 자꾸 빼더라고.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안주를 집어먹었다. 갑자기 너무 졸렸다. 언제 일어나야 하나 하고 눈치를 보고 있는데 아르투르가 갑자기 술잔을 쨍 하고 내려놓으며 볼멘소리를 했다.

 

 

“ 근데 그 자식, 역시 스페호프 국장님 얘기가 맞더라. ”

 

“ 어, 미샤 말이야? 왜? ”

 

완전 싸가지 없고 발랑 까진 반동분자야! 개자식.

 

“ 아니, 왜? 오늘 별 일 없었잖아. 공연 잘 끝내고 반응도 좋았잖아. ”

 

“ 너 아까 그 자식 인사하는 거 안 들었어? 그 재수 없는 자식이 관객들한테만 인사하고 당과 우리 청년단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잖아. 그 자리를 누가 마련해준 건데! 이건 건방진 것도 모자라서 당을 무시하는 거지 뭐야. ”

 

“ 아... 저... 걔는 별로 그런 생각 안 했을 거야. 극장에서는 원래 관객이 우선이라... ”

 

“ 그런 게 어디 있냐! 극장이고 관객이고 전부 당 덕분에 있는 거지! 그리고 이거 봐, 파티에도 안 왔잖아! 심지어 우리 당 간부가 아까 악수까지 하면서 파티 오라고 했는데! 일부러 안 오고 우리 무시하는 거지 뭐야! 건방진 자식, 반동분자 주제에... ”

 

“ 아... 그게 아니야. 걔 지금 몸이 안 좋아. 지난주에도 많이 아팠어. 아까도 너무 피곤해보여서 그냥 쉬라고 한 거야. 너희를 무시한 게 아니야. ”

 

“ 일행이라고 애써 감싸줄 필요 없어. 그런 놈은 한 번 보기만 해도 어떤 인간인지 다 보이니까. 너처럼 성실한 애랑은 천지차이야. 얼굴만 반반해가지고 아까도 우리 농장 여자들한테 눈웃음 치고. 반동분자 주제에 어디서 감히 우리 여자들한테 꼬리를 치는 거야. 가뜩이나 완전 바람둥이에 더러운 놈이라고 소문이 파다한 자식이...

 

 

베르닌은 왕재수가 여자에게 꼬리를 칠 일은 전혀 없고 오히려 반대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르투르와는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술을 한 잔 더 마신 후 졸려서 먼저 일어나겠다고 하고는 자리를 떴다.

 

 

 

*    *    *

  

 

 

 

다음날 베르닌은 다시 철로 복구조에 투입되어 눈을 치우고 자갈을 깔았다. 허리를 펼 시간도 없이 열심히 일했다. 그래도 왕재수가 준 선글라스를 끼고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랐더니 눈도 안 아프고 피부도 따끔거리지 않았다. 자갈을 깔면서도 그는 왕재수가 걱정이 됐다. 아침에 밥 먹으러 내려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방을 같이 쓰는 데니스에게 물어보니 너무 깊게 자고 있어서 안 깨웠다고 했다. 대신 빵과 우유, 과일을 챙겨다 주겠다고 했다.

 

 

‘ 아침이라도 잘 먹어야 하는데... 무용수들 연습시키다 보면 또 초콜릿 몇 개 집어먹고 굶을 텐데. 어휴, 고집쟁이. 다 낫지도 않았으면서 이 먼 곳까지 왜 부득부득 따라와 가지고. 괜히 아르투르 같은 애들한테 욕이나 먹고. 이 철로는 왜 이렇게 긴 거야... 오늘 복구돼서 내일 기차 들어오면 좋을 텐데. 그럼 돌아갈 때 걔가 조금이라도 덜 힘들 텐데. ’

 

 

그는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열심히 눈을 치우고 자갈을 깔았지만 결국 철로 복구는 마무리되지 못했다. 5시가 되자 아르투르가 박수를 쳤고 트럭을 타고 청년회관 쪽으로 돌아왔다.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었고 전날처럼 강당에 공연을 보러 갔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데려온 무용수들이 딱 이틀밖에 머무르지 않는데도 연일 공연을 보여주고 심지어 전날과 작품 구성도 다르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래도 가장 큰 갈채를 받았던 돈키호테 결혼식 춤은 다시 나왔다. 공연이 끝나고 무용수들이 인사를 하는데 관객들이 마른 꽃과 나무열매로 장식한 화환들을 무대로 가져다주었다. 심지어 마지막에 왕재수가 나와서 인사를 하자 젊은 여자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생화로 만든 꽃다발을 안겨주고는 ‘고마워요!’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왕재수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고 장미 꽃다발과 함께 퇴장했다.

 

 

아르투르가 간단하게나마 환송 파티를 할 테니 와달라고 했다. 베르닌은 잠시 후 가겠다고 하고는 무대 뒤로 뛰어갔다. 무용수들은 옷을 갈아입으러 갔지만 왕재수는 얼마 안 되는 무대 장비와 음악 테이프를 챙기고 있었다.

 

 

“ 야, 그걸 네가 직접 하는 거야? ”

 

“ 우리 스태프들이 못 왔잖아. ”

 

“ 그래도... 너는 감독이잖아. ”

 

“ 어제 여기 사람들한테 맡겨놨더니 레코드도 하나 부서지고 장비도 부품이 빠졌더라고. ”

 

“ 너 몸은 좀 어때? ”

 

“ 푹 잤더니 개운해졌어. 근데 여기 진짜 시골이야. 가브릴로프보다 더 심해. 아까 숙소에서 나오다가 똥개들끼리 막 싸우는 것도 봤어. 그리고는 말린 쇠똥 같은 걸 물고 달아나는 거야. 우웩. ”

 

“ 야! 농사지을 땐 그런 거 다 필요하단 말이야. 행여 여기서 그런 말 꺼내지도 마, 너 맞아죽어! ”

 

“ 칫. ”

 

 

왕재수는 큰 가방에 주섬주섬 장비와 테이프와 레코드를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가방을 들고 한 손으로는 장미 꽃다발을 들었다. 베르닌은 그에게서 가방을 빼앗았다.

 

 

“ 야, 이거 엄청 무겁잖아! ”

 

“ 별로 안 무거운데. 괜찮아, 내가 들고 갈게. ”

 

“ 무거운 거 들면 근육 미워진다며! 넌 그 꽃이나 챙겨. 근데 너 의외다. 원래 꽃 받으면 발레리나들한테 다 주더니. ”

 

“ 극장에서는 그러는데... 여기는 지금 생화 구하기 힘든 데잖아. 이런 데서 나 위해서 어렵게 구해서 갖다 준 꽃을 눈앞에서 발레리나한테 주면 관객들 막 열 받아 하더라고. 옛날에 키로프에 있을 때도 이런 집단농장 투어 여러 번 갔었거든. 처음엔 멋모르고 파트너한테 꽃 바쳤는데 여자들이 나중에 걔 지나갈 때 계란 던졌어. 나한테 꼬리쳐서 재수 없다고... ”

 

“ 헉, 살벌하네. 근데 몰랐어, 난 네가 진짜 화려한 무대에만 올라간 줄 알았거든. 이런 열악한 데에서도 많이 공연했었구나. ”

 

“ 키로프나 볼쇼이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냐. 위에서 가라고 하면 끌려가는 거지. 집단농장에 무슨 공장지대에... 그래도 그런 게 훨씬 나아, 높은 인간들 파티에 끌려가서 춤추는 것보다는. ”

 

“ 너 시골 싫어하고 파티 좋아하잖아. ”

 

“ 그거야 노는 파티지! 파티는 놀려고 가는 거지 높은 인간들 비위맞추고 꼬리치려고 가는 게 아니잖아! 에이, 생각하기 싫어. 나 지금 빨리 가봐야 돼. 중요한 일이 하나 있어서. 내일 우리 몇 시에 출발하는 거야? ”

 

“ 6시. 혹시 너랑 데니스 늦잠 잘지도 모르니까 내가 나가면서 너네 방에 들를게. ”

 

 

베르닌은 가방을 가져다준 후 식당으로 갔다. 환송 파티는 생각보다 짧았다. 전날만큼 북적거리지도 않았다. 아르투르는 여전히 살갑게 굴었지만 어딘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듯했다. 베르닌은 오히려 좋았다. 이틀 내내 농장 사람들과 부대끼다 보니 친해지기도 했지만 아르투르가 너무 국장을 신봉하는 타입이라 그런지 어딘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내색은 안 했지만 리자도 비슷했는지 아르투르가 잠깐 다른 테이블로 갔을 때 베르닌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 다냐, 우리 이제 자러 간다고 하고 일어나요. 계속 앉아 있었더니 너무 답답해요. ”

 

“ 어, 그래요. 여기 공기가 좀 탁하긴 하네요. ”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투르와 청년단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환대해줘서 고맙다고 하고 기회가 되면 다시 오겠다고 하자 아르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그래. 봄에 농사일 바쁘니까 그때 또 와서 도와주렴. 스페호프 국장님께 인사 전해드리고. 국장님 뵈러 가브릴로프 한번 가야 되는데... 하여튼 고마웠어. 잘 자고 내일 조심해서 돌아가. ”

 

 

 

*    *    *

 

 

 

 

베르닌은 리자와 함께 회관을 나왔다. 숙소로 가려는데 리자가 답답하니 바람이라도 좀 쐬고 들어가자고 했다. 베르닌도 탁한 공기 탓에 머리가 아팠기 때문에 그러자고 했다.

 

 

둘은 얼어붙은 저수지를 따라 천천히 산책을 했다. 추위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걷다가 리자가 두 팔을 벌려 기지개를 켜고는 투덜댔다.

 

 

“ 아르투르는 했던 얘기만 계속하고... 어쩐지 국장 생각나서 별로예요. ”

 

“ 국장을 존경한대요. ”

 

“ 세상에 어떻게 우리 국장 같은 사람을 존경할 수가 있담. 어제부터 공연 보는 내내 옆에 앉은 자기네 동료들이랑 속닥대고. 공연 예의도 없고, 심지어 계속 미샤를 욕하잖아요. 웃겨, 정말. 자기들한테 공연 보여주려고 그 먼 길을 왔는데. 꽃돌이 감독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볼쇼이에 있을 때는 그 사람 공연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대요. 어제부터 계속 당이니 임원이니 하는 얘기만 하는데, 미샤는 십대 때부터 크레믈린에 가서 공연해서 엄청 유명했다고요. 자기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당 간부들이랑 심지어 서기장하고도 아는 사이인데! 알지도 못하면서 계속 욕하고... 못돼먹었다고 하고... 진짜 열 받아서 한 대 때려주고 싶었어요. 미샤는 못돼먹지 않았어요! 미끄러질까봐 손도 잡아주고... 감자랑 코코아도 사주고... 나쟈한테도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줬는데요. ”

 

“ 어... 나쟈요? 어제 파티 때 미샤는 안 왔었는데. ”

 

“ 아, 아까 오후에요. 난 도서관 쪽 작업 일찍 끝나서 무용수들 연습하는 거 구경 갔었거든요. 근데 나쟈도 왔더라고요. 내가 미샤한테 나쟈 소개시켜주려고 했는데 미샤가 벌써 누군지 알더라고요. 인사도 하고 나쟈랑 따로 얘기도 하더라고요. 나쟈 오늘 설레서 잠도 못 잘 걸요. 무슨 얘기하는지 들어보고 싶었는데 그때 밥 먹으러 오라 해서 먼저 나왔어요. ”

 

“ 그랬구나... 오늘 일은 어땠어요? 힘들지 않았어요? ”

 

“ 오늘은 좀 피곤했어요. 벽화 복구를 하는데 청년단에서 자꾸 빨간색만 쓰라는 거예요. 근데 너무 빨간색이 많아서 눈도 아프고 윤곽도 하나도 구분이 안 갈 정도인데도 그러는 거예요. 원래 그림 보니까 여러 가지 색이 섞여 있는 거였거든요. 근데 작년에 바뀐 자기네 당 간부들이 빨간색을 좋아하니까 전부 빨갛게 하라는 거예요. 진짜 융통성도 없고... 여기 청년단원들은 청년 같지도 않고 스탈린 시대에나 어울리겠어요. ”

 

“ 좀 그런 면이 있긴 하더라고요. 그래도 내색은 하지 마세요. 여기 사람들 엄청 다혈질이래요. 자부심도 대단하고요. ”

 

“ 하긴... 툭하면 폭설 오고 폭우 쏟아지는데 이 정도로 농장 꾸리려면 보통 성정으로는 안 될 거예요. 아르투르가 자꾸 당신 농장으로 끌어오고 싶어 하던데. 그 사람 아직 당신이 얼마나 순한지 모르나 봐요. ”

 

“ 어, 나 별로 안 순해요. ”

 

“ 다냐, 당신 순해요. 어머나, 혹시 내가 당신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예요? 그런 뜻 아니에요. 남자들은 진짜 바보 같아요, 여자들이 성질 욱하고 힘센 남자 좋아하는 줄만 알고. 순하고 착한 게 훨씬 좋아요. 상냥하고. ”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리자를 쳐다보았다. 얼어붙은 수면과 달빛에 반사되어 그런지 리자의 파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불어오는 바람 탓인지 뺨이 발그레했다. 리자가 갑자기 입술을 실룩거리며 까르르 웃었다.

 

 

“ 아이 참,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예요. 얼굴에 뭐라도 묻은 것처럼. ”

 

“ 아, 아니요. 저, 그냥... ”

 

“ 뭐가 그냥이에요, 바보. ”

 

나 바보 아니에요. 당신도 그렇고 미샤도 그렇고 다들 나보고 바보라고... ”

 

“ 바보 맞아요! ”

 

“ 나 책상물림은 맞지만 바보는 아니란 말이에요. ”

 

“ 자꾸 미샤 얘기만 하고. 지금도... ”

 

“ 어, 그건요, 미샤가 맨날 나보고 바보 멍충이라고 하니까... ”

 

“ 아휴... ”

 

 

리자가 베르닌의 팔을 꼬집었다. 살짝 꼬집어서 아프지는 않았다. 리자에게서는 달콤한 딸기 사탕 냄새가 났다. 베르닌은 당황했고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때 오솔길 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와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어?’ 하고 낮게 외쳤다. 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팔에서 손을 떼었다.

 

 

“ 뭐예요, 아프게 꼬집지도 않았는데. 그게 아파요? ”

 

“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쪽에... 잠깐만요. ”

 

 

베르닌은 몇 발짝 나아갔다. 수풀 쪽으로 가자 달빛이 비춰져서 잘 보였다. 저수지와 숲을 잇는 오솔길 입구에 덩치 큰 남자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아르투르의 목소리도 들렸다. 함께 눈을 치웠던 젊은이들도 있고 강당 앞자리에 앉았던 청년단 임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베르닌의 귓가에 들어와 박혔던 건 그들이 아니라 왕재수의 목소리였다. 그는 왕재수가 그런 목소리로 얘기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아주 낮은데다 가슴과 목을 울려서 나오는 소리였다. 꼭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았다.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베르닌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청년단원들과 아르투르가 왕재수를 둘러싸고 있었고 욕설을 하면서 삿대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재수는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그 오싹한 저음으로 뭐라뭐라 대꾸를 하고 있었다.

 

 

“ 다냐, 왜 그래요? 어머, 미샤 아니에요? 무슨 일이지? ”

 

“ 잘 모르겠어요. 아르투르가 시비를 거는 거 같아요, 어제부터 계속 미샤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거든요. ”

 

 

베르닌은 오솔길 쪽으로 갔다. 가까이 가자 아르투르와 청년단원들이 퍼붓는 욕설과 비난이 똑똑하게 들렸다.

 

 

“ 이 반동분자 개자식아, 나라 팔아먹고 당 배신한 것도 모자라서 우리 애들까지 건드리게 놔둘 줄 알아? 그래놓고 멀쩡하게 여기서 나갈 수 있을 줄 알았어? 가만 안 둬! ”

 

“ 어디서 더러운 짓만 배워가지고! 너 같은 건 모가지를 부러뜨려서 매달아야 돼! 아까도 레닌 동상에 인사도 안 하고 지나가고! 우리가 유심히 봤어! 어제 오늘 강당에서도 한 번도 당에 감사 인사도 안 했어! ”

 

“ 감히 우리 여자를 집적대? 조국의 반역자 주제에 어디서 그 더러운 손을 대려는 거야! 이런 개자식은 맛을 보여줘야 돼! 여기가 그 잘난 모스크바인 줄 알아!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

 

 

왕재수는 별로 무서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덩치 큰 남자들이 아홉 명이나 둘러싸고 있는데도 물러설 생각도 안 했다. 아르투르 쪽을 뚫어지게 노려보면서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아까처럼 가슴을 울려서 내는 저음으로 말했다.

 

 

“ 너무 자기들을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 난 웃긴 사람들 좋아하는데, 너희는 우스운 게 아니라 그냥 저질이야. ”

 

 

아르투르는 순간 멍해졌다가 곧 욕을 하면서 왕재수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뭐야! 이 쬐끄만 게 입만 살아가지고! 범죄자에 반역자 주제에! 어디서 감히 당원들한테 욕을 하는 거야!

 

당원이면 뭐! 당이 밥 먹여 주냐? 하긴 너희는 당이 밥 먹여주겠구나. 아무 것도 안 해도 당 간부들 꽁무니 쫓아다니며 아부해서 자리 얻고 으스대고 완장 차고 애들 위에 군림하고. 그러니까 내가 그랬잖아, 너네는 웃긴 게 아니라 저질이라고. 그만 좀 꺼져주면 좋겠네. 난 바쁜 사람이야. ”

 

“ 이 개자식이! ”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아르투르가 왕재수를 거칠게 떠밀더니 곧장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베르닌이 단원들을 헤치고 뛰어들어 왕재수를 뒤에서 낚아챈 후였다. 베르닌은 두 팔로 아르투르의 주먹을 막으면서 급하게 소리쳤다.

 

 

“ 아르투르, 왜 그러는 거야! 이러면 안 되지! ”

 

“ 넌 저리 비켜! 저 쬐끄만 반동분자 새끼 죽여 버릴 거야! ”

 

“ 진정해! 오해가 있었던 거 같은데 그래도 폭력을 쓰면 안 돼! 비겁하잖아, 얜 혼잔데 너희는 이렇게 여럿이서 애를 둘러싸고... ”

 

“ 저 개새끼가 지금 뭐라고 하는지 못 들었어? 우릴 모욕하고 당을 모욕했잖아! 게다가 우리 여자들을 건드리고 희롱하고! ”

 

“ 말도 안 돼! 얜 그런 애 아니야. 여자들한테 비신사적인 행동 같은 거 안 한단 말이야. 야, 너 오해 산 거 있으면 빨리 사과해! ”

 

 

베르닌은 근육질의 아르투르를 간신히 두 팔로 밀어붙이며 왕재수에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왕재수도 굉장히 화가 났는지 꼼짝도 안 했다. 까만 눈을 번쩍번쩍 불태우며 으르렁거렸다.

 

 

“ 내가 왜! 난 아무 잘못도 안 했어. 내 할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저 얼간이들이 와서 시비 걸고 개소리를 하잖아. ”

 

“ 저 더러운 자식이 어디서 누굴 얼간이라고! ”

 

 

다른 남자 하나가 벌컥 화를 내면서 왕재수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리자가 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베르닌은 심장이 철렁했다. 하지만 왕재수는 워낙 민첩했기 때문에 잽싸게 옆으로 피해서 다행히 맞지는 않았다. 더욱 화가 난 남자들이 덤벼들려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제발 그만 좀 해요! 미샤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전부 오해란 말이에요! ”

 

 

나쟈였다. 얼굴이 빨개져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정신없이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와 왕재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르투르가 나쟈의 팔을 덥석 잡더니 마구 잡아 흔들었다.

 

 

“ 나젠카! 어떻게 저 더러운 자식 편을 드니! 넌 노동영웅이야! 다른 여자애들이 다 저 기생오라비 같은 반동분자한테 홀려서 헤롱거려도 너만은 그러면 안 되지! 절대 용서 못해! 감히 너한테 손을 대다니! 저 자식 우리가 죽여 버릴 거야! ”

 

“ 손 댄 적 없어요! 그런 거 아니란 말이에요! ”

 

“ 뭐가 아니야! 저 자식이랑 문 걸어 잠그고 한 방에 있었잖아! 계속 저 놈이랑 따로 속닥거리고... 아까 파티에도 안 오고 저 자식 방에 들어가는 거 티모페이가 다 봤어! 너 지금 저 새끼한테 홀려서 제정신이 아니야! 제발 정신 차려! 넌 우리 자랑이야, 노동영웅이고 우리 농장에서 제일 예쁜 애란 말이야! 어떻게 저런 더러운 반역자랑... ”

 

“ 그런 거 아니라고요! 나는, 나는... 그러니까 미샤 방에 갔던 건 맞아요. 하지만 얘기하러 갔던 거란 말이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

 

 

나쟈가 바들바들 떨었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르투르는 더욱 화를 냈다.

 

 

“ 뭐가 아니야! 울기까지 하고! 이 새끼가 진짜 나쁜 짓 한 거네! 그러니까 말도 못하지! 죽여 버릴 거야, 감히 우리 나쟈를! ”

 

“ 어휴, 진짜 시끄럽네. 침도 엄청 튀기고. 우린 그런 사이 아니야. 근데 그런 사이면 뭐, 어쩔 건데! 네깟 것들이 뭔데 성인 여자의 사생활을 이래라저래라 간섭이야! 나쟈가 노동영웅인 게 뭐! 그게 나쟈가 잘해서 된 거지 너네가 해준 거냐? 꼭 못난 놈들이 잘난 여자 앞에서 수탉 노릇하며 으스대지. 나쟈가 누구랑 놀든 말든, 어디서 뭘 하든 너희가 무슨 상관이야! 나쟈 좋을 대로 하면 되는 거지! ”

 

 

베르닌은 겁이 나서 왕재수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르투르가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려는 순간 나쟈가 결심한 듯 단호하게 외쳤다.

 

 

나 농장 떠날 거예요! 다들 그렇게 아세요! 그리고 미샤한테 시비 걸지 말아요!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 부끄러운 줄 아세요! ”

 

 

순간 모두가 멍해졌다. 아르투르가 더듬거렸다.

 

 

“ 나젠카... 그게 무슨, 무슨 소리야... 농장을 왜 떠나... 너 설마... 설마 진짜 이 자식이 너랑 결혼이라도 해줄 거라고 믿는 거야? 이런 반동분자 개자식이? 이런 자식은 바람둥이야... 여자를 후리고 그 자리에서 버린단 말이야... 이 자식이 얼마나 더러운 놈인지 넌 상상도 못 해! 아무 데나 꼬리치고 다니고... 넌 순진해서 아무 것도 몰라! ”

 

“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나, 나 가브릴로프로 갈 거예요! 거기 극장 들어가서 무용수 될 거예요! 아까, 아까 오디션 봤어요. 미샤가 나한테 재능 있다고 했어요, 발레단에 들어오라고 했단 말이에요. 나 춤추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발레리나 되고 싶었는데 우리 동네는 시골이니까 방법이 없었다고요... 항상 텔레비전 보면서 혼자 연습했어요. 미샤가 그랬어요, 정규 교육 안 받았는데 이렇게 추는 건 재능이라고... 나한테 타고 났다고 했어요. 아무도 나한테 그런 말 해준 적 없었어요. 양계장 온도만 잘 맞추고 닭들 잘 돌보라고, 계란 몇 개 낳았냐고만 물어보고... 툭하면 노동영웅 타령만 하고. 그깟 노동영웅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그건 어쩌다 운이 좋아서 닭들이 계란을 많이 낳은 것뿐이에요! 닭이랑 계란은 신물이 나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좀 해요, 미샤한테 시비 걸지 말라고요! ”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르투르는 얼굴이 하얘져서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나쟈! 너 미쳤어? 그런 헛소리를 정말 믿는 거야? 저 자식은 너 꼬시려고 거짓말하는 거란 말이야! 넌 순진해서 남자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재능은 무슨! 너 벌써 스무 살도 넘었잖아! 이제 와서 무슨 발레를 시작해! 그런 건 어릴 때부터 배워야 하는 거야! 저 자식 말 믿으면 안 돼! 너 끌고 가서 갖고 놀다가 싫증나면 버릴 거라고!

 

 

그때 왕재수가 나쟈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서 자기 뒤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아르투르에게 똑바로 걸어갔다. 거의 코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다가갔다. 두 눈에서 빨간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아르투르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왕재수는 딱 두 마디만 했다.

 

 

나쟈는 발레리나가 될 거야. 그만 꺼져.

 

 

베르닌은 아르투르가 왕재수의 목을 비틀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에 띄는 작대기를 하나 집어 들고 여차하면 휘두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투르는 그러지 않았다. 이를 갈며 왕재수를 확 쏘아보았지만 갑자기 얼굴이 파래지면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청년단원들이 부르르 떨면서 왕재수에게 덤벼들려고 했지만 아르투르는 한 손으로 그들을 저지하더니 나쟈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너 정말 농장 떠날 거야? 부모님이랑 동생들도 다 버리고? 우리랑 친구들도 다 소용없어? 이 자식 말 한 마디만 믿고 가겠다는 거야? ”

 

“ 네. 믿어요. ”

 

 

아르투르는 멍하게 나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쩐지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 야, 가자. ”

 

“ 하지만... 저 새끼 손 안 봐줘? 우리 나쟈를 꼬드겨서 지금... ”

 

“ 알아서 하라고 해! 나쟈 쟤 지금 정신 나갔어. 나중에 피눈물 나보면 정신 차리고 돌아오고 싶겠지. 너 생각 잘해, 나쟈. 그 때 가서 우리가 안 받아주면 정말 갈 곳 없을 거야. ”

 

 

나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그만 두 주먹을 꼭 쥔 채 왕재수의 곁에 서서 파들파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아르투르는 입안으로 욕을 하더니 청년단원들과 함께 오솔길로 가버렸다. 베르닌은 그가 끝까지 왕재수 쪽에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아르투르 일당이 사라지고 나자 나쟈가 심호흡을 하더니 왕재수를 보면서 얼굴을 확 붉힌 채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죄송해요. 내일 떠나신 후에 조용히 얘기하고 정리하려고 했는데. 괜히 봉변당하게 만들고... 괜찮으세요? ”

 

“ 네가 왜 미안해. 별 일 없었는데. 근데 내일 우리랑 같이 안 가도 괜찮아? 쟤들이 너 못 가게 하고 괴롭히면... ”

 

“ 안 그럴 거예요. 전 아르투르를 잘 알아요. 우리 사촌 오빠거든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어요. 저렇게 나오면 포기한 거예요. 앞으로는 절대 감독님한테 못되게 안 굴 거예요. 겁먹었어요. ”

 

 

리자가 끼어들었다.

 

 

설마 그 깡패 같은 아르투르가 미샤한테 겁먹어서 그랬을라고. 나쟈, 네가 단호하게 얘기하니까 그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 거야. ”

 

“ 아니야, 리자. 아르투르는 여자의 의지 같은 건 안 믿어. 그 사람은 감독님 때문에 포기한 거야. 주눅 들었어요. 완장 차고 난 후에 저러는 거 정말 처음 봤어요. 고마워요, 미샤. ”

 

 

왕재수는 나쟈의 손을 꼭 잡아주더니 어쩐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 늦어도 다음 주 토요일까지는 와야 돼. 발레학교에 얘기해놓을 거야. 기숙사도 잡아 놓을게. 넌 기초가 없으니까 적어도 일 년은 배워야 돼. 재능이 있다고 다 되는 건 아니야. 진짜 열심히 배우고 연습해야 돼. 발 다 까지고 물집 나고 찢어질 거야. 일단 오면 놀지도 못하고 데이트 같은 것도 못해. 시작이 늦었으니까 그만큼 죽어라고 노력해야 돼. ”

 

 

나쟈의 커다란 눈망울에 근심이 어렸다.

 

 

“ 저 진짜 죽어라고 할 거예요. 근데 정말 할 수 있을까요? 열 살 때부터 시작한다면서요. 전 벌써 스물한 살인데... ”

 

“ 왜 못해. 노동영웅이라며. 닭이랑 달걀 신물 난다면서도 노동영웅인지 뭔지 됐는데 좋아하는 춤추려고 노력하는 건데 왜 못하겠어. 너 내 말 잘 들어, 나쟈. 할 수 있을까, 못할 거야라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못해. 춤은 생각으로 추는 거 아냐. 좋아서 추는 거고 하고 싶어서 추는 거고 몸에서 우러나서 추는 거야. 너한테 세 개 다 있어. 그러니까 극장으로 와.

 

 

나쟈가 왕재수를 와락 포옹했다. 뺨에 뽀뽀를 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 고마워요, 미셴카. 다음 주에 봐요! 전 이제 타마라에게 가볼게요. 아까부터 궁금해 하더라고요. 토냐랑도 친해졌어요. ”

 

“ 나도 같이 가, 나쟈. 타마라 언니 나랑 같은 방이거든. 잘 자요, 미셴카. 잘 자요, 다냐. 내일 봐요. ”

 

 

리자가 나쟈의 팔짱을 끼고 뛰어갔다. 베르닌은 여자들을 바래다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마침 저편에서 무용수들이 산책을 나와서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기 때문에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는 그제야 왕재수 쪽으로 돌아서서 폭풍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야! 너 정신이 있냐 없냐!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했던 말 잊었어? 여기 사람들 성정 진짜 거칠단 말이야! 골수 공산주의자에... 가만히 있어도 너한테 시비 걸 판에! 나쟈도 그렇지, 몰래 오디션 보고 몰래 진행했어야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잖아! 왜 방으로 데려가고 문을 걸어 잠가! ”

 

“ 연습실에도 그 망할 청년단원들이 와 있었단 말이야.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수첩에 적고 있었어. 타마라랑 데니스가 잠깐 막아줘서 간신히 나쟈 오디션은 봤는데 인터뷰까지 할 여유가 없었다고. 그래서 방으로 데려간 거야. 내 방도 아니었어, 내 방에 도청장치 있었다고. 그래서 네 방으로 갔었어. ”

 

“ 엥, 그랬구나. 너 그때 얘기한 애가 나쟈였던 거야? 오디션 봐야 한다던. 나쟈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온 거야? " 

 

“ 응. ”

 

“ 그렇게 많이 아파놓고. 힘들어서 코피까지 흘리면서... 여자애 하나 데려가려고... ”

 

“ 내가 그랬잖아, 타고 난 애는 정말 찾기 힘들다고. 나쟈는 보물이야. 꼭 데려가야 돼. ”

 

“ 그치만, 기초도 하나도 없다며. 일 년 이상 발레학교에 넣을 거라며... ”

 

“ 현대무용이 아니고 발레니까. 기본 동작도 모르고 토슈즈 한번 안 신어봤으니까 어쩔 수 없어. 안타깝다... 빨리 찾아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좋아. 정말 좋아. 시골 와서 처음이야, 이렇게 좋은 거. ”

 

 

왕재수가 환하게 웃었다. 베르닌은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아프게 당겨왔다.

 

 

“ 숨겨진 원석을 찾아낸 게 그렇게 좋아? ”

 

“ 당연하잖아! ”

 

“ 그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거야? 여기 와서 좋았던 게? ”

 

“ 바보, 좋을 게 뭐가 있어! 시골인데! ”

 

“ 어... 하긴 그렇지. 넌 어마어마하게 잘 나가던 애였으니까. 대도시... ”

 

아, 있어. 로만. 꼭 안아주면 참 좋아. 보고 싶다... ”

 

 

베르닌은 이상하게 조금 섭섭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르투르가 멱살을 잡는 통에 떨어져 나뒹굴던 모자를 주워 왕재수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자. 내일 새벽에 출발하는데. ”

 

“ 응. ”

 

 

그들은 별 말 없이 저수지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하얗게 떠오른 보름달이 굉장히 환했다. 갑자기 차가워진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왕재수가 패딩 지퍼를 올리고 턱 언저리까지 칼라를 세웠다. 그 전에는 훨씬 추울 때도 코트 단추를 채우지 않던 애였다. 옆에서 보니 광대뼈가 도드라져 있었고 두툼한 패딩 코트 사이로도 자작나무처럼 야윈 몸의 윤곽이 드러났다. 베르닌은 독사과와 스페호프, 그리고 아르투르의 욕설을 생각했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분노를 느꼈다.

 

 

그때 왕재수가 말했다.

 

 

“ 아, 하나 더 있다. ”

 

“ 뭐가? ”

 

“ 좋은 거. 저녁밥. 네가 해주는 거. ”

 

“ 뻥치지 마. 툭하면 투정하면서. 레닌그라드에서 엄청 좋은 것만 먹고 다녔다면서. ”

 

“ 그래도 집에서 저녁은 못 먹었단 말이야. 옛날엔 파트너 발레리나랑 같이 살았는데 걔나 나나 춤추느라 바빠서 요리는 못했으니까. ”

 

“ 너 사귀는 남자들 많았잖아. 이집 저집에서 저녁밥 안 해줬냐? ”

 

“ 바보. 잠자리만 하고 나오는 거지. 저녁밥 얻어먹고 같이 살면 눈에 띄잖아. 잡혀가라고. 나 학교 다닐 때부터 감시요원들 붙어 있었는걸. 가끔 친구들 집에 가서 먹긴 했지만 그래도 그거랑 달라. 지금은 집에 오면 네가 밥 주잖아. 그거 좋아. ”

 

“ 그러니까 우리 동네 와서 좋은 건 잠자는 사람하고 밥 주는 사람인 거네!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

 

“ 뭐가 너무해. 시골인데 뭘 더 바라니. 그나마 있는 게 어디야. ”

 

 

왕재수가 기침을 했다. 베르닌은 자기 목도리를 풀어서 왕재수의 목에 한 바퀴 둘러 주었다. 숙소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왕재수가 목도리를 돌려주었다. 칼라 지퍼도 내렸다. 흐릿한 전구 불빛 아래에서 야윈 얼굴이 더 창백하게 보였다. 눈만 새까맣게 반짝거렸다. 불빛이 반사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까맣고 깊은 눈동자 저 너머에서 조그맣고 새빨간 불꽃이 이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베르닌은 아르투르가 왜 고개를 돌렸는지, 왜 더 이상 왕재수 쪽을 바라볼 수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복도로 나왔을 때 베르닌이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 너 그런 거 아니야. ”

 

“ 뭐가? ”

 

“ 아르투르가 말한 거. ”

 

“ 뭐, 반동분자? 반역자? 한두 번 듣는 소리도 아닌데 뭐. ”

 

“ 너는 더러운 놈이 아니야. 절대 아니야. ”

 

“ 너한테는 그게 중요하냐? 그냥 욕인데. ”

 

“ 하여튼! 국장도 그렇고 다들... 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

 

“ 그런가. 근데 다 맞을지도 몰라. 아무 것도 모르는 건 너지. 넌 책상물림이고 순진하니까. 나 반동분자 맞을 걸. 반역이 뭔진 모르겠는데, 난 공산주의 싫어하니까 맞나보지 뭐. 더러운 놈인 건, 뭐 그것도 맞겠지. 나는 놀아나는 아저씨들이 많잖아. ”

 

 

베르닌은 말문이 막혔다. 잠시 왕재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막 그가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라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방문 앞에 멈춰 섰다. 열쇠로 문을 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 나 잔다. 아침에 깨워줘. ”

 

“ 어, 그래. 잘 자. ”

 

“ 내일 집에 가면 몇 시 정도 될 거 같아? ”

 

“ 글쎄. 빨라도 밤 아홉시? ”

 

“ 바보, 눈 좀 잘 치우지. 그럼 기차가 왔을 텐데. ”

 

“ 나 진짜 열심히 치웠는데. 자갈도 얼마나 많이 깔았다고. ”

 

“ 하긴 그랬겠지. 잘 자. ”

 

 

왕재수가 문을 닫았다. 베르닌은 잠시 복도에 서 있다가 한숨을 쉬고는 자기 방으로 갔다. 룸메이트인 보리스는 다른 봉사단원들과 술을 마시는 모양인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패딩을 벗고 주머니에서 왕재수가 준 선글라스와 선크림 튜브를 꺼냈다. 샤워를 하고 나서 거울을 보니 얼굴은 전날보다 더 타지는 않았다. 여전히 안경 자국만 나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그는 보드카를 마시고 싶어졌지만 밖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무척 피곤했지만 그날 밤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아마도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달빛 때문인 것 같았다. 아니면 바람 소리. 그는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다.

   

 

 

 

 

 

FIN

- 2015. 4. 25 ~ 5. 2 -

 

..

 

 

리자의 본명 리자베타 칸페트나야는 '칸페트이', 즉 사탕, 캔디에서 따왔다 :)

 

리자가 왕재수를 처음에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라고 부르는 것은 존칭 표현이다. 러시아 이름은 이름 + 부칭(아버지 이름에서 파생됨) + 성으로 구성되는데 이름과 부칭을 함께 부르면 존대 표현이 된다. 왕재수의 본명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야스민으로, 친한 사이에서는 애칭인 미샤, 미셴카, 미셰츠카, 미슈카 등으로 부르지만 격식을 갖춰 부를 때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가 된다.

(본편이든 서무 시리즈에서든 주인공 미샤는 자기 이름을 미샤라고 불러주기를 원하는 편이고 저렇게 격식 갖춰서 부칭까지 부르면 싫어한다)

 

..

 

노동영웅은 내가 지어낸 게 아니고 원래 소련 시절에 있었던 서훈이다. 무슨무슨 영웅이 참 많았다. 모성영웅 이런것도 있었다.

 

..

 

이번 편은 후반부는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이나 왕재수에 대한 접근이 본편과 좀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이거 쓰고 나서는 진짜 본편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24편을 쓰고.. 지금은 25편 후반부를 쓰다가 막혀 있음..)

 

..

 

어쨌든 이렇게 하여 우리의 (바보 멍충이) 단추는 리자랑 아무 일도 없이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가고... 이야기는 24편으로..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주시면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