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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을 소개하겠다. 네프스키 대로 근방에 있는 슈베드스키 페레울록에 위치해 있는 '두셰브나야 꾸흐냐'(Душевная кухня)라는 카페이다. 이 이름의 뜻은 영혼의 부엌, 소울 키친 정도 된다.

 

이 날은 눈도 오고 길은 진창이고 무척 음습하고 힘든 날이었다. 러시아 박물관 갔다가 로모노소프 찻잔 사러 갔는데 평소 잘만 찾아다녔던 코뉴셴나야 거리의 그 가게가 이날따라 아무리 찾아도 눈에 띄지 않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궂은 날씨 때문인지 길도 잃어서 운하변을 따라 뺑뺑이를 돌고 무척 고생을 했다.

 

이미 찻잔은 포기. 너무너무 피곤하고 춥고 정신이 없고 배도 고프고 멍해서 일단 어디 들어가 몸을 녹이고 밥이라도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길 잃고 헤맬 때 눈에 띄었던 카페가 있어 그곳에 갔다. 스웨덴 대사관 근처에 있는 카페인데 간판도 예쁘지만 대문에 붙어 있는 메모가 어쩐지 마음에 들었던 곳이었다.

 

대문에 씌어 있는 메모는 찍진 않았는데... 이렇게 씌어 있었다.

 

' 우리 가게 문이 좀 무거워요, 잘 안 열릴 때도 있으니 겁먹지 마시고 용기를 내어 세게 밀어 보세요!~'

 

어쩐지 그 메모가 위안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살짝 웃게 만들기도 하는 거였다. 아무리 여행을 많이 다녀도 문이 닫혀 있는 카페에 혼자서 쑥 들어가는 게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이렇게 가로등 램프 아래 카페 간판이 걸려 있다.

 

 

 

카페 두셰브나야 꾸흐냐 라고 적혀 있음. 아래 그림들도 아기자기 귀엽다.

 

 

 

이 칠판에는 '두셰브노 이 베셀로', 마음 따뜻하고 즐거운 곳이란 메모가 적혀 있다.

 

 

 

 

 

슈베드스키 페레울록은 말라야 코뉴셴나야 거리와 발샤야 코뉴셴나야 거리를 잇는 조그만 뒷길이다. 스웨덴 대사관이 있는 곳이다. 이 골목으로 꺾어들면 저 안쪽에 있다.

 

문은 정말 무거웠다. 용기를 내어(ㅋㅋ) 밀고 들어갔다.

 

 

안은 따스했다. 카운터에는 젊은 남자 직원 하나가 앉아 있었다. 내가 멍해 하자 방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안내해주었다. 이때 난 눈도 맞고 바람도 맞고 춥고 길도 잃고 하여튼 반쯤 유체이탈 상태라 노어도 잘 안 들리고 정신이 없었다. 점원은 내가 외국인이라는 걸 알자 약간 당황했으나 아주 친절했다. 손님이 전혀 없었다. 맨 앞 테이블(이 사진에서 왼편에 보이는 주황색 소파 테이블)에 앉을까 했으나 앉아보니 테이블이 내겐 너무 높아서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청년이 코트를 받아주러 왔다.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이후 알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데니스였다)

 

데니스 : 너무 추워서 얼었군요?

나 : 어... 네. 얼었어요. 밖이 추워요.

데니스 : 그럼 몸 녹이도록 차나 커피를 먼저 드릴까요?

나 : 아, 네.

 

 

 

데니스가 차를 한잔 먼저 가져다 주었다. 그냥 그린필드 티백이었다. 하지만 따뜻해서 정말 몸이 녹았다.

 

메뉴판을 보고 주문을 했다. 이때 너무 추워서 일단 뜨거운 수프가 절실했다. 핀란드식 우하(생선수프)가 있어 그것을 골랐다. 우하는 원래 좋아하지만 여기 우하가 연어로 끓인 거라고 되어 있어 잠시 망설였으나 그냥 주문. 그리고 메인으로는 야채 가니쉬를 곁들인 치킨 필레를 주문했다. 수비드로 쪄서 기름에 살짝 볶고 사과소스를 쓴다고 되어 있었다.

 

데니스는 매우 친절했다. 차를 마시고 나니 몸도 살짝 녹았고 정신도 좀 돌아왔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카페 내부를 좀 구경했다. 아주 아늑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타입의 카페였다. 즉, 서재 스타일의 인테리어에 아늑하고 살짝 어둡고 살짝 인텔리겐치야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내가 앉았던 창가 자리. 외국어 서적들을 비롯해 러시아 서적들, 사진 관련 도서들이 있었다.

 

책을 저렇게 무심한 듯 근사하게 흩어 놓는 것도 기술이다. 나 같은 정리벽 있는 성격은 절대 저걸 못한다. (결국은 똑바로 정렬하고 있으니 ㅠㅠ)

 

 

 

 

 

이렇게 가장 안쪽에는 책상과 책꽂이, 책들이 있고 근사한 사진들도 많다.

 

그리고 먼저 수프인 핀란드식 우하가 나왔다. 

 

 

핀스까야 우하. 따끈하게 데운 흑빵 한 조각과 함께.

 

나는 러시아에서 우하를 여러 번 먹어봤다. 가끔은 내가 직접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리고 농담 안 하고, 이 우하는 여태껏 내가 먹었던 우하 중 최고였다. 정말이다.

연어는 자잘하게 조각나 있었고.. 아마도 크림이 섞인듯한 수프로 허브가 들어 있었고... 난 평소 우하에 크림을 넣지 않고 맑게 끓이는 편이고 평소에는 크림 들어간 수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우하는... 정말 맛있었다. 난 이렇게 맛있는 우하를 처음 먹어봤다. 몸이 사르르 녹았다. 살짝 간간했지만 짜지도 않았고.. 비린내 전혀 없고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나 담백하고 구수하고 맛있었다. 저 우하 한 그릇을 끝까지 다먹었다. 흑빵도 따스하고 살짝 시큼하고 구수한 것이 정말 맛있었다. 두셰브나야 꾸흐냐가 맞았다. 정말 맛있는 수프였다. 두고두고 생각날 음식이었다.

 

 

사진 보니 생각난다. 다시 먹고 싶다. 정말 맛있었다.

 

 

 

이어 수비드로 요리한 치킨 필레 등장.

 

보통 러시아에서 닭요리를 시키면 기름에 튀겨진 커틀릿이 많이 나온다. 그렇지 않더라도 하여튼 기름기가 많다. 그러나 이 치킨 요리는 전혀 기름기가 없었다. 일단 닭가슴살을 수증기로 찐 후 기름에 구운 거라서 안은 촉촉했고 전혀 느끼하지 않았다. 소스는 식초가 들어간 듯 살짝 새콤하면서도 달콤하고 조금 묵직한데 홀머스터드가 섞여 있어 느끼하지 않고.

 

거기에 가니쉬로 곁들인 저 파프리카가 진짜 맛있었다. 언젠가부터 소화가 잘 안되는 느낌이라 파프리카를 안먹은지 꽤 됐는데 이것은 소스가 어찌나 달콤한지.. 사과와 꿀이 들어간 것 같았다.. 진짜 달콤하고 맛있고 파프리카는 부들부들하고 물컹한게 정말 맛있었다!! 전부 다 먹었다. 

 

이날 이 카페에서 먹은 이 늦은 점심은 이번 페테르부르크 여행에서 먹은 음식 중 최고였다. 고골의 보르쉬도, 징게르 카페의 근사한 치킨감자 블린도, 심지어 그랜드 호텔 유럽의 비프 스트로가노프보다 더 훌륭했다. 

 

 

 

다 먹고 나니 데니스가 그릇 치우러 왔다. 음식이 입에 맞느냐고 물었다. 아주 맛있었다고 대답.

 

데니스 : 어디서 오셨어요?

나 : 한국이요.

데니스 : 거기 날씨는 어떤가요? 여기처럼 추워요?

나 : 한국도 춥지만 여기가 더 추워요.

데니스 : 거기도 여기처럼 눈 오나요?

나 : 그럼요. 근데 여기가 더 많이 와요. 오늘 날씨 너무 안 좋아요.

데니스 : 여기 춥지만 그래도 지금은 많이 안 추워요. 제 친구는 ㅇㅇ에서 왔는데(못 알아들은 지명) 거긴 영하 30도거든요!

나 : 아, 저 옛날에 여기 살았었는데 그때 한번 영하 30도 내려갔었어요. 뜨람바이 타고 가다 엔진 얼어서 내린 적 있어요.

 

우리는 웃었다.

 

계산을 한 후 나오면서 코트를 찾자 데니스는 오해를 하고 화장실을 가르쳐 주었다. 아니요, 코트요~ 하니까 자기도 잊었다면서 웃으며 코트를 가져다 주었다. 아마 내가 외국인이라 그도 살짝 긴장했던 듯 ㅋ

 

나 : 이 카페가 너무 우유뜨나하고 예뻐요. (우유뜨나는 아늑하고 따스하다는 뜻의 노어이다) 정말 우연하게 찾았는데...

데니스 : 우리 카페에 오는 사람들이 거의 다 그렇게 우연히 들어와요 :)

나 : 너무 좋았어요.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어요.

데니스 : 친구들 꼭 데려오세요~

 

이 날 길 잃고 헤매서 너무 힘들고 짜증났는데 맛있는 음식에 친절한 사람, 좋은 분위기 카페 덕에 기분이 완전히 전환되었다. 역시 맛있는 음식과 따스한 분위기만으로도 사람은 행복해진다.

 

.. 그래서 페테르부르크 떠나기 전날, 카페에 다시 갔다!

 

 

나 : 저 다시 왔어요.

데니스 : 다시 왔네요~ 물론이죠!!

 

 

 

 

 

이번엔 멋진 새 조각품이 있는 창가에 앉았다 :)

 

메뉴를 보고 이번에는 보르쉬와 생선 크넬리(우리 나라의 전과 좀 비슷한 음식) 주문.

 

 

음식 나오기 기다리면서 귀여운 램프 발견~

 

 

여기저기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다 :)

 

 

 

이번엔 티포트로 차 주문. 첨에 마셨던 차 한 잔은 50루블, 이렇게 포트로 나오는 건 100루블. 환율이 떨어져서 지금 100루블이면 약 1800원 정도이다.

 

 

보르쉬가 나왔다.

 

사실 우하 다시 먹고 싶었는데 이곳 음식이 맛있었으니 보르쉬도 먹어보고 싶어서. 다만 어떤 곳은 쇠고기 대신 돼지고기를 쓰기 때문에 물어봤더니 우리는 특이하게 오리고기를 써요~ 라는 대답. 신선한 허브와 스메타나가 같이 나왔다.

 

 

스메타나와 허브 얹어서 보르쉬를 먹었다.

보르쉬도 맛있었다. 내가 스메타나를 좀 많이 넣어서 내 입맛엔 살짝 짠 편이었지만 그것 빼곤 만족!

(그래도 역시 그 우하가 최고였다)

 

 

 

그리고 농어 크넬리가 나왔다. 아마 체코의 크네들리키랑 비슷한 요리가 아닐까 싶은데. 밀가루 반죽 같은 것으로 생선 완자를 감싸서 기름에 구워낸 요리이다. 아래에는 감자 팬케익이 깔려 있다. 이게 양이 상당히 많았다. 맛은 좋았는데 양이 많아서 팬케익은 좀 남겼다. 소스도 그렇지만 감자 팬케익 반죽에는 마늘과 고추가 들어가 살짝 매콤하고 톡 쏘는 맛이 났다. 술을 부르는 맛!!! (하지만 난 차를 마셨지..)

 

맛있게 먹은 후..

 

나오기 전에 데니스와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 카페 여기저기에 17-19 라는 메모가 붙어 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묻자 이 카페가 예전에는 17-19라는 이름으로 다른 곳에 있다가 작년에 이쪽으로 이사오면서 이름이 바뀌었다고 했다.

 

나 : 저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요. 오늘이 삐쩨르(페테르부르크의 애칭) 마지막 날이라 이번 여행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왔어요 :)

데니스 : 영광이에요! 다시 오실 거죠?

나 : 네, 언젠가는. 백야 때 오고 싶은데 아직은 희망사항이에요 :)

데니스 : 꼭 백야 때 오세요!

나 :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데 사진 찍어도 돼요?

데니스 : 그럼요! 우리 약속해요. 백야 때 당신은 친구들을 한 패거리(ㅋㅋ) 데리고 오고 전 차와 커피를 서비스로 드리겠어요~!!

나 : 약속한 거예요 :)

 

그래서 데니스 사진을 두 장 찍었다. 카페 명함도 받았다. 주소와 사이트, 인스타그램 주소 등이 적혀 있었다. 데니스가 자기 이름도 써 주었다. 나도 내 이름을 알려주었다. 페이스북 대신 이 블로그 주소를 알려주었다.

 

나 : 근데 제 블로그는 한국어로 되어 있어요 ㅎㅎ

데니스 : 괜찮아요, 이 참에 외국어 공부 좀 하죠. 공부는 좋은 거예요 ㅋㅋ

 

그리하여 우리는 행복하게 웃었고, 나는 그의 따스한 환송 인사를 받으며 카페를 나왔다. 그리하여 나의 페테르부르크 마지막 날은 행복한 하루가 되었다.

 

그럼 우리의 훈남 청년 데니스(Denys) 사진 두 장. 블로그에 올려도 된다고 허락받음 :)

노어로는 '제니스'에 가깝게 발음된다.

 

 

 

정말 친절한 청년이고 미소가 해사했다. 데니스 덕분에 이 카페가 더욱 더 두셰브나야 꾸흐냐가 된 것 같았다 :)

 

그러니 혹시라도 페테르부르크 여행을 가실 분들은, 시간을 내서 이 카페 'Душевная кухня' (두셰브나야 꾸흐냐)에 꼭 한번 가보세요. 영어 메뉴판도 있음! 그리고 문이 무거워도 겁먹지 마시고 세게 밀고 들어가세요. 혼자 가셔도 겁낼 필요 없어요. 친절한 데니스가 있으니까요.

 

이 카페 지도를 올리고 싶은데 내가 구글 맵 첨부하는 방법을 모르는 컴맹이라.. 카페 사이트 주소들을 아래 첨부한다. 노어 아시는 분들은 아래 주소를 보세요.

 

'Душевная кухня' (Dushevnaya kukhnya)

ШВЕДСКИЙ ПЕРЕУЛОК, 2
(между Малой и Большой Конюшенными, метро «Невский проспект»

전화번호 : 8 911 009 55 48


<인터넷 주소들>

http://17-19.ru/

http://vk.com/club17188019

instagram soul.kitchen

혹은 페이스북에서 'Душевная кухня бывшее 17-19'를 검색해도 나온다. 근데 이게 다 노어로 되어 있다는 함정이 있네..

 

백야 시즌에 꼭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고마웠어요 데니스!

 

Спасибо, Денис!

 

** 이 카페 처음 갔던 날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09

** 치즈홍차님 요청으로 크림 넣은 핀란드식 우하 레시피 찾아내 번역해 올림 : http://tveye.tistory.com/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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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